구자룡

구자룡 기자

동아일보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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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자룡 기자입니다.

bonhong@donga.com

취재분야

2024-10-23~2024-11-22
남북한 관계14%
국방13%
국제일반7%
대통령3%
정치일반3%
기타60%
  • ‘닭강정 30인분’ 소동[횡설수설/구자룡]

    ‘졸업 후까지 학교폭력이 계속되다니!’라는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가 불법 대출 사기단의 괴롭힘 사건으로 반전된 ‘닭강정 30인분’ 파동은 ‘학폭’ ‘작업 대출’, 그리고 인터넷 시대 여론 형성의 ‘깃털 같은 가벼움’까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사건은 분당의 닭강정 점주 A 씨가 가정집에 30인분 배달을 갔다가 “졸업 후에도 아들을 괴롭히는 아이들이 주문한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악마 같은 학폭 가해자를 처벌하자’는 취지의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누리꾼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학폭 피해가 계속되는 것’이라는 분노의 댓글을 쏟아냈으나 사실은 불법 대출 사기에 연루된 피해자에게 사기단이 보복을 한 ‘허위 주문’ 소동이었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30마리나 배달된 닭강정을 보고 아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닭강정 점주는 이 말을 듣고 의분으로 인터넷에 올려 고발했다. 그의 글을 본 누리꾼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일부 인터넷 언론은 ‘닭강정 학폭 사건’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모든 일은 불과 하루 남짓 만에 빠른 속도로 전개됐다. 누리꾼들의 뜨거운 반응은 ‘학폭’이 얼마나 대중적인 공분을 사는 예민한 사회 문제인지 유감없이 보여준다. ▷‘허위 주문’은 피해자 어머니의 아들에게 ‘작업 대출’ 교육을 시켰으나 그 청년이 실행에 옮기지 않아 ‘고리(高利) 수수료’를 못 받게 된 사기단의 소행이었다. ‘작업 대출’은 신용불량이나 연체 등으로 대출이 어려운 사람의 신용 정보를 ‘전산 작업’ 해서 진행한다. 엄연한 불법이고 수수료를 대출금의 30∼80%나 뜯어가지만 취업준비생 무직자 대학생 주부 등 상대를 가리지 않고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다. ▷‘닭강정 30인분’ 사건이 팩트와 추측이 혼합되면서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에서 특별한 악의는 개입되지는 않았다. 초스피드로 이루어지는 온라인 여론 형성이 양날의 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순식간에 과장된 미담과 영웅을 만들 수도, 방향이 틀리면 누군가에게는 억울한 ‘주홍글씨’를 새길 수도 있다. ▷온라인상에서 진실과 거짓, 미담과 악행, 선악 판정이 진위를 확인할 시간 여유 없이 순식간에 내려진 뒤 일단 퍼져나가면 사마난추(駟馬難追·한 번 뱉은 말은 말 네 필이 끄는 수레로도 따라갈 수 없다)가 되어 쉽게 주워 담을 수가 없게 된다. 옛말에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했는데, 온라인 시대에는 확산 범위는 물론 속도마저 번갯불보다 빠르니 참으로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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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 5년 생존 100만 명[횡설수설/구자룡]

    에이즈로 불리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 1981년 미국에서 처음 발견된 뒤 상당 기간 백약이 무효여서 ‘치료제도 없는 질병’으로 불렸다. 하지만 에이즈는 처음 등장할 때의 공포에 비해선 그 후 위세가 수그러들었고, 현대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의 위치는 변함없이 ‘암(癌)’이 차지하고 있다. 에이즈는 아프리카 원숭이에서 유래된 바이러스(HIV1, HIV2)를 차단하거나 물리치는 방법으로 대처하지만, 암은 맞서서 싸울 적의 실체도 모르고 동원할 무기도 없기 때문이다. ▷암은 정상 세포가 이상 증식하고 퍼져 나간다. 10∼15%는 유전이라지만 나머지는 원인 불명으로 주모자도 없이 반란이 일어나 (세포 증식) 지휘 계통이 망가진 것이다. 정상 세포가 암세포로 바뀌는 것은 유전자(DNA) 차원의 ‘신호전달 체계’ 이상이라는 점은 밝혀졌지만 최초에 왜 이상이 생기는지는 ‘unknown(확인 안 됨)’이 더 많다. ▷최근 보건복지부와 중앙암등록본부 집계 결과 국내에서 암 진단 후 5년 생존자가 100만 명을 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숙적 암과의 투쟁에서 우보(牛步)지만 진전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암 환자 5년 상대생존율’은 70.4%로 10년 전의 54.1%에 비해 크게 높아졌다. ▷‘상대생존율’은 같은 성(性)과 연령에서 암에 걸리지 않은 일반인과 비교해 암 진단을 받은 환자의 생존율을 나타낸다. 전립샘암과 유방암은 각각 94%와 93%로 암 진단을 받지 않은 사람에 비해 5년 후 살아있을 비율이 조금 떨어질 뿐이다. 갑상샘암의 상대생존율은 100.1%다. 갑상샘암 진단을 받은 후 식습관 개선 등 노력 덕분에 5년 후 살아있는 비율이 일반인보다 오히려 0.1%포인트 높은 것이다(연세대 의대 박은철 교수).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전염병이나 세균 질환이 암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지만 인류가 거의 극복했다. 암은 기원전 1600년경 고대 이집트의 의료 문서인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에도 48가지 증상 중 하나로 언급된다. ‘Cancer’란 단어는 히포크라테스가 종양의 모습이 게(crab) 등딱지 같다며 게를 뜻하는 그리스어 ‘카르키노스(Karkinos)’를 사용해 묘사한 데서 유래됐다. 암은 아마도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시달려온 질병이면서도 여전히 발생 메커니즘을 규명하지 못한 난적이다. 그럼에도 조기 진단과 수술을 통한 제거, 흡연 비만 동물성 단백질 섭취 등 위험 요소 관리를 통해 조금씩 이겨내고 있다. 불치병이라는 지긋지긋한 수식어가 암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그날을 고대해본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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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아가는 北 해외 노동자[횡설수설/구자룡]

    카타르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 2명이 3년 전 가혹한 상납 요구를 못 견뎌 현지 경찰서로 탈출하는 일이 있었다. 카타르 건설 현장의 북한 노동자 수천 명이 급여의 10∼15%만 받는 ‘노예 노동’을 하고 있다는 고발이 나온 뒤의 일이다. 시베리아의 북한 벌목공도 열악한 노동조건을 견디다 못해 한국 등으로 ‘탈북’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데 2017년 12월 채택된 유엔 대북제재 결의 2397호에 따라 북한 해외 노동자들의 외화벌이가 금지되고, 22일까지 이들을 북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하지만 북한 노동자 전원 송환 시한이 다가오면서 온갖 꼼수들이 나타나고 있다. 단둥에 진출한 북한 무역회사는 노동자에게 3개월 관광비자를 받게 하거나, 비자 없이 한 달간 체류할 수 있는 도강증(渡江證)을 들고 압록강 다리를 오가며 근무를 계속하게 한다. 북한 노동자들은 보통 몇 명씩 조를 짜서 외출하거나 휴일에 쇼핑하러 나가는데 비자 없이 들어온 탓인지,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공장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중국의 묵인과 방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러시아 모스크바는 평양으로 돌아가려는 노동자가 몰려 편도 97달러(약 11만 원)의 국제열차표가 연말까지 매진됐다는 소식도 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 등에는 여행비자로 바꿔 눌러앉는 북한 노동자도 적지 않다. 제재 이행 의무가 없는 소공화국 압하지야로 북한 노동자를 이주시키기도 한다. 네팔이 북한 국적자 33명을 돌려보내고 친북(親北) 캄보디아도 북한 노동자 전원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중국과 러시아는 아예 북한 노동자 송환 철폐를 요구하는 제재 완화 초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해 몰래 하던 짓을 대놓고 하려고 한다. ▷김정은이 올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찾아간 목적에 해외 노동자 송환 방지도 있다는 분석이 많다. 북한 해외 노동자는 중국과 러시아에 8만 명 등 40여 개국에 10만 명가량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 해 3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김정은의 돈줄이다. 지난해 북한 수출액은 17억7000만 달러 정도다. ▷12차례의 유엔 대북제재 결의 중 2017년 11월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후 채택된 2397호는 해외 노동자 송환 조치가 포함돼 역대 최강이었다. 제대로 시행되면 비핵화로 유도할 좋은 채찍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중국과 러시아가 어깃장을 놓으려 한다. 두 나라는 해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외화가 김정은의 배를 불리고 북한을 핵무장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모는 데 쓰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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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펭수[횡설수설/구자룡]

    턱시도를 입은 남극의 신사 ‘황제펭귄’은 천적들도 추워서 떠나는 영화 50도 혹한의 계절을 골라 알을 낳아 수컷 발등에 올려놓고 발을 동동거리며 두 달 이상 품어 부화시킨다. 암컷이 챙겨온 먹이를 수컷의 위벽에 보관했다가 ‘펭귄 밀크’로 먹여 기르는 지극정성도 유명하다. 남극이 고향이라는 요즘 대세 펭귄 캐릭터 펭수(Peng秀)도 이렇게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펭수는 ‘꼬마 펭귄’ 뽀로로나 방탄소년단(BTS) 같은 스타가 되겠다며 헤엄쳐 한국에 와 오디션을 거쳐 EBS 연습생이 된 뒤 맹활약 중이다. ▷4월 초 EBS ‘자이언트 펭 TV’에 처음 등장한 키 210cm의 펭수는 최근 한 조사에서 월드 스타 BTS를 제치고 ‘올해의 인물’ 1위에 선정됐다. 펭수도 데뷔 후 첫 한 달은 구독자가 3000여 명으로 무명 시절을 보내다가 9월 EBS의 캐릭터가 모두 출연하는 육상대회인 ‘이육대’에 출연한 뒤 인기가 급상승했다. 16일 구독자가 136만 명을 넘었다. 인사혁신처의 ‘펑수’와 고양시의 ‘괭수’ 같은 ‘펭수 짝퉁’도 등장해 저작권 논란까지 일고 있다. 입사 신상명세서에 꿈을 ‘우주대스타’로 적은 것처럼 펭수가 미키 마우스, 디즈니의 공주, 바비 인형 같은 월드 클래스 캐릭터로 성공할지 두고 볼 일이다. ▷펭수의 폭발적인 인기는 1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고르게 퍼져 있지만 특히 하고 싶은 말 다 못 하고 눌려 사는 직장인들을 대리 만족시키고 있다.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아라. 눈치 챙겨!” “어쩌라고!” “왜 해야 합니까 이걸”에 이르면 ‘반(反)꼰대’의 선봉장이다. 소속 EBS 사장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고 한 영화 오디션에 가서는 “저 여기 충무로 접수하러 왔습니다”라고 자신감을 나타낸다. 회사 들어올 때 ‘근로계약서’ 썼냐고 물으니 “나 그런 거 없다. 내가 하기 싫으면 안 한다”고 한다.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거침없이 “나 자신”이라고 쓴다. 요즘 같은 시기에 로망과 같은 장면들이다. ▷펭수는 훈계하기보다 위로한다. “힘이 들 때 힘내라고 하면 위로가 되느냐”며 “저는 사랑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해 지친 이들을 찡하게 만든다. 튀어야 하는 유튜브 생태계에서도 비속어나 비하 발언, 혐오 표현은 없다. ‘B급 병맛 코드’라는 당초 방송사 기획처럼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 나이 열 살로 설정된 펭수를 세대를 가리지 않고 찾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잃어버린 것, 다시 찾고 싶은 것을 그의 말과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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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마아파트[횡설수설/구자룡]

    2011년 7월 27일. 서울 강남에 시간당 최고 100mm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을 때 대치동 은마사거리 주변에서 은마아파트만 정전으로 암흑이 됐다. ‘강남의 대표적인 부유층 아파트라는 은마가 왜?’ 하는 의문이 나왔지만 은마에 살거나 은마를 아는 사람들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주인이 살지 않으면서 재건축만 바라보고 있는 아파트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입소문을 통해 다 퍼졌기 때문이다. ▷‘승강기 선택 버튼을 5곳 이상 누르면 불이 모두 꺼져 버리고 다시 누르면 1층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안쪽 문은 열렸는데 바깥쪽 문이 안 열린다’. 1979년 지어진 은마는 최근까지도 잦은 엘리베이터 고장이 큰 골칫거리였다. 폭염 폭우에는 정전도 잦았다. “녹물이 나와요” “바퀴벌레가 무더기로 다녀요”. 로고의 우아한 모습과는 달리 속앓이가 심했다. 최근에는 주변에 숲 하천도 없는데 모기 등 벌레가 많다는 주민들 민원이 많아 알고 보니 28개 동 지하실마다 생활쓰레기 등 폐기물이 2300t이나 쌓여 있었다. ▷1979년 4000가구 이상이 입주한 뒤 40년이 된 은마는 사용 연한도 차고 건물도 낡아 집주인들은 떠나고 실거주자의 65% 정도는 세입자다. 주변 학군이 좋다고 하고 대치동 학원가가 있어 ‘대전(대치동 전세)행’을 택하는 세입자 수요가 넘친다. 더욱이 2003년 재건축 추진위가 승인을 받은 이후 줄곧 대단지 재건축 후보지로 거론되며 ‘은마(銀馬)’가 아닌 ‘금마(金馬)’로도 불렸다. 강남을 대표한다는 명성이 있지만 이곳에 사는 학생들 가운데는 선뜻 사는 곳을 밝히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주위 신축 아파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때문이다. ▷재건축을 위해 국제설계공모까지 했지만 서울시에서 4번이나 퇴짜를 맞은 은마는 9월부터 내부 공용공간 페인트칠과 오래된 수도관 교체 작업을 하고 있다. 분양가상한제 대상 지역에 포함된 데다 안전기준 강화,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등으로 당분간 재건축이 어렵다고 보고 ‘장기전’에 들어간 듯하다. ▷물이 고이는 저지대에 세워진 은마는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중소 건설 및 광산업을 하던 정태수 회장을 재계 14위 재벌 회장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디딤돌이 되었다. 풍수를 중시했던 정 씨는 지하음식점 냄새가 올라오고 주위가 소란해도 ‘명당’이라며 한보 본사를 은마종합상가 3층에 뒀다. 실제 거주 여건은 갈수록 악화되는데도 매매 가격으론 최고급 거주지 자리를 굳힌 은마는 집이 거주가 아니라 보유, 투자의 대상이 되어 버린 기형적 한국 부동산 시장의 상징물 같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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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범 나타나도 재심으로 뒤집기 어려워… 억울한 사법피해 없어야”[논설위원 파워 인터뷰]

    《이춘재가 화성 8차 사건을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고 자백해 이미 이 사건의 범인으로 20년을 복역한 윤모 씨가 재심을 청구했다. 결과가 뒤집혀 억울한 옥살이의 한이 풀릴까. 민주화운동이나 시국 사건 관련자가 시대가 바뀌어 재심으로 무죄를 선고받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 형사 사건에서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써도 형이 확정된 뒤 뒤집기는 쉽지 않다. 새로운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기도 어렵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 ○ 진범이 자백해도 안 된다고? 2000년 8월 10일 새벽 전북 익산시 영등동 약촌오거리에서 최모 군(당시 15세)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택시기사가 승객에게 피살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런데 출동한 경찰은 엉뚱하게 최 군을 범인으로 몰아 구타와 고문 끝에 자백을 받아내 15년 형을 살게 했다. 감형을 받기 위해 거짓 반성문을 쓰고 10년 수감됐다 나온 최 군은 2016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쓴 지 16년 만이었다. “20년 전이라면 윤 씨 사건이 재심 신청까지 갈 수나 있었을까요? 기적입니다.” 영화 ‘재심’의 소재였던 약촌오거리 사건에서 무죄를 이끌어내 ‘재심 전문’ 변호사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화성 8차 사건의 윤 씨 재심을 맡아 주목받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45). 그는 지난달 13일 윤 씨 재심을 신청한 며칠 후 서울 서초동의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 이춘재의 자백이 있었고 경찰이 유전자(DNA) 검사 등으로 이춘재를 진범이라고 잠정 결론 냈는데도 재심 신청을 ‘기적’이라고까지 해야 하나. “약촌오거리 사건은 발생한 지 3년가량 지난 뒤 진범이 경찰에 체포됐고 자백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검찰에서 ‘무혐의’로 영장이 기각됐어요. 최 씨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직후에야 진범이 뒤늦게 구속 기소돼 복역 중입니다.” 윤 씨 사건 역시 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화성 연쇄살인범의 자백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진범이 자백해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다시 묻힐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윤 씨 스스로 재심을 진행할 형편도 아니었다. 1999년 2월 6일 전북 완주군 삼례읍 나라슈퍼에서 발생한 10대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전주지검은 죄를 자백 받은 3명을 기소했고 3∼6년 형이 최종 선고됐다. 그런데 부산지검이 진범 3명을 붙잡아 전주지검에 넘겼다. 하지만 이미 다른 ‘범인’을 기소한 전주지검은 ‘무혐의’로 묵살했다. 사건 발생 17년 만에 처음 기소한 3명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진범’들에 대한 수사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진범 3명 중 한 명이 자백했으나 한 명은 자살했고, 한 명은 은둔 도피 중이다. 진범이 자수하거나 자백을 해도 왜 사건이 뒤집히지 않는 것일까. 무고한 범인의 수사, 기소에 참여한 누군가는 법적 도의적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인권의 보루가 오히려 침해의 주체가 되는 기막힌 현실을 보여준다. 화성 8차 사건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는데 이춘재에게서 “집에 들어가서 범행했다”는 진술이 나왔을 때 윤 씨를 범인으로 몰았던 경찰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박 변호사는 말했다. ○ 명백한 물증도 때로는 무력 “소아마비 장애로 한쪽 다리를 저는 윤 씨가 키보다 높은 담장을 넘어갔다면 손과 발을 다 써야 합니다. 그런데 담장에 손발을 쓴 아무런 흔적이 없어요. 더욱이 그날 피해자 집 대문은 열려 있었는데 다리도 불편한 윤 씨가 담장을 넘었다는 겁니다. 불러준 대로 썼다고 윤 씨가 말하는 자술서에는 장갑 얘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피해자 목의 상처는 맨손으로는 내기 어렵습니다.” 박 변호사는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법원의 재판, 변호인의 조력, 그리고 언론의 합리적 의심,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제대로 작동됐더라면 윤 씨의 억울한 옥살이에 제동이 걸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변호사의 재심 사건 중에는 수사기관에 의한 가혹행위로 자백을 받은 것이 드러나도 쉽게 뒤집히지 않고 있는 것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부산 엄궁동 낙동강변 2인조 살인 사건’이다. 1990년 1월 30대 여성 살인 사건의 ‘범인’인 장모 씨와 친구 최모 씨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된 뒤 모범수로 감형돼 21년을 복역하고 나왔다. 두 사람은 2017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올해 4월 법무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는 수사 과정에 인권 침해와 고문 등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빠르면 올해 중 법원에서 재심 여부가 결정된다. ○ 허위 자백 ‘범인’에 가출 청소년, 장애인 많은 이유 가혹행위 끝에 허위 자백을 하는 등 ‘사법적 피해’를 당하는 사람 중에는 빈곤층, 가출 청소년, 장애인 등 이른바 ‘사법적 약자’가 많다. 화성 8차 사건의 윤 씨도 3세 때 소아마비를 앓은 지체장애인이었다. 나라슈퍼 사건의 ‘범인’ 3명은 모두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었고 2명은 10대 청소년이었다. 박 변호사가 국선 변호인으로 처음 재심 사건을 맡았던 ‘수원 노숙소녀 살인 사건’에서 경찰의 가혹행위로 범행을 자백했다가 후에 무죄로 풀려난 2명은 노숙자 장애인이었다. 이 사건에서는 검찰도 5명의 가출 청소년을 강압적 수사로 범인으로 몰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엄궁동 살인사건의 장 씨도 1급 시각장애인이었다. 박 변호사는 “수사기관에서 일부 증거나 증언을 토대로 범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충분히 방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들의 특징을 반영하고 배려하는 조사가 이뤄지기보다 오히려 약점으로 삼아 범인 검거 실적을 올리기에 급급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인 권일용 동국대 겸임교수도 신동아 12월호 인터뷰에서 “윤 씨가 범인이 아닌 것으로 확실해질 경우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밝히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 수임 안돼 국선 변호인하다 재심 변호사 길로 박 변호사의 사무실은 8m² 남짓한 월 임차료 70만 원의 ‘단칸방 사무실’이었다. 사무장이나 비서도 없다. 5층 한 층의 각자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변호사 10여 명을 도와주는 프런트 데스크 직원 한 명이 전부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공익활동을 한다며 3년째 무료 제공해주고 있는 사무실이다. 그는 수임료를 받는 사건은 일절 수임하지 않는다고 했다. 재심이 필요하거나 억울한 사건의 무료 변론만 한다고 했다. ‘영업’이 필요 없으니 명함도 없다. 그는 “무료 변론을 하다 2016년 ‘나는 망한 변호사다’라고 공개 파산을 선언했는데 시민 1만8000여 명이 후원금을 보내주어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주로 강연으로 활동비를 마련하는데 각급 학교, 관공서 기업 단체 특히 검찰과 법원에서도 강연 요청을 받는다고 한다. 그가 ‘무료 재심 전문’ 변호사가 된 것은 ‘거룩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절박한 이유에서 시작됐다. 전남 완도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목포대를 중퇴한 뒤 고졸로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지연 학연 무슨 연(緣)도 부족해 도무지 수임이 안 됐다. 궁여지책으로 건당 20만∼30만 원 받는 국선 변호에 매달리다 보니 역시 돈이 없어 제대로 변호사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법 약자’들을 만나게 됐다. 그러던 중 재심으로라도 억울한 사정을 풀어야 할 사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박 변호사가 요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사형수 오휘웅 사건’이다. 1974년 내연녀와 함께 내연녀의 남편과 두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오 씨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1979년 9월 사형이 집행됐다. 언론인 조갑제 씨는 당시 수사 및 재판 과정의 기록,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 등을 통해 오 씨가 진범인지 의혹을 제기하는 책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1986년)를 썼다. 박 변호사는 “책에 소개된 조서 등 공식 기록만으로도 재심에서 무죄가 충분하다”며 오 씨 유족이나 친지 등 관련자를 찾고 있다. 사형이 집행된 사건에 대한 재심은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다. “사법 개혁이 화두인데 무고한 사법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 아닐까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던진 그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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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이 中 외교부장[횡설수설/구자룡]

    “한국은 (한중) 양국 신뢰의 기초를 해쳤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직후인 2016년 7월 말 라오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을 만나 이렇게 직격탄을 날렸다. 하지만 잠시 후 취재진이 물러가자 왕 부장은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라며 윤 장관에게 친근감을 표시했다. 공식석상에선 직설적이고 거친 화법을 구사하면서도 사석에선 넉살 좋게 친밀감을 앞세우는 것이다. ▷시진핑 시대 외교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대만 갈등, 한국에 대한 사드 보복, 미국과의 무역전쟁 등 ‘탈(脫)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의 ‘근육질 외교’다. 왕 부장은 2017년 3월 사드 배치 부지 발표가 나온 뒤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정신을 차려 사드 배치를 중단하고 잘못된 길을 가지 말라”고 했다. 국익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고 보복도 불사하는 힘의 외교 선봉장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왕 부장은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는 팔을 툭툭 치는 인사를 건네 외교적 결례 논란이 일기도 했다. 4일 이틀 일정으로 5년여 만에 한국을 찾은 왕 부장은 방한에 임박해 오찬에 손님을 ‘호출’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에 대해서만 그런 게 아니다. 2016년 한 캐나다 기자가 중국 인권에 의문을 제기하자 “중국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고 거만하다”고 쏘아붙인 일도 있었다. ▷미국은 국무장관이 각료 서열 1위이고 한국도 대통령 대행 순위 5위로 높지만 중국에서 외교부장은 27명의 장관 중 그다지 앞서는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왕 부장은 지난해 3월 시진핑 2기 정부에서 유임되면서 국무위원으로 승진했다. 5명의 국무위원 중 부장(장관)은 국방 외교 공안부장 3명뿐이다. ▷왕 부장은 국장 시절 제1차 북핵 6자회담의 중국 측 수석대표를 맡았다. 중국의 비핵화 구상인 쌍중단, 쌍궤병행도 그가 처음 제기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뒤 주일 대사관에서 7년 반을 근무한 일본통인 그가 2004년 일본 대사로 부임한 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동중국해 가스전 분쟁 등 악재가 터졌다. 하지만 2006년 일본 총리로서는 5년 만에 아베가 방중하는 등 밀월기를 만들어냈다. 대만 담당일 때도 양안관계에 훈풍을 일으켰다. 이제는 동북아 이웃 국가 중 한국과의 ‘사드 결빙’을 푸는 일만이 남았다. 이번 방한 기간 ‘파빙지려(破氷之旅·얼음을 깨는 여행)’의 단초를 만드는 결실이 있기를 바란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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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민등록증[횡설수설/구자룡]

    만 17세가 되면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다. 주민증 발급은 어른이 되는 중요한 절차이며, 항상 지니고 다녀야 하는, 우리네 인생에서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술 담배 부탄가스 본드를 구입하거나,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나 오후 10시 이후 PC방 18세 게임 등등 여전히 주민증을 제시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지구상엔 주민증 없이 사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주민증이 발급된 것은 1968년부터였다. ▷1968년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등으로 긴장이 높았던 한 해였다. 주민증 도입을 놓고 “전 국민을 범죄 용의자로 보느냐”며 반발도 많았지만 그해 11월 21일 처음 발급되며 도입이 강행된 것은 북한 간첩의 식별 등 안보상 이유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과거 주민증 앞면에 병종 계급 군번 제대일자 등을 자세히 적은 것은 한국적인 주민증 탄생 배경을 반영한다. ▷우리의 주민증과 비슷한 국민 신분증을 공식 발급해주는 나라 가운데는 사회주의 국가가 많다. 중국은 신분증 번호가 무려 18자리로 우리 주민번호 13자리보다 훨씬 길다. 56개 민족인 중국은 민족을 표기하고 문자도 병기한다. 북한 ‘공민증’의 ‘민족별: 조선사람’은 민족이 아닌 국적 표시다. 구소련 시절 표기했던 민족을 없앤 러시아는 카드형 신분증 한 장이 아니라 여권처럼 20쪽에 이름도 ‘패스포트’여서 ‘국내 여권’으로도 불린다. 터키는 부모 이름, 결혼 이전의 성, 결혼, 종교 등이 들어간다. 동서독 분단 이후 줄곧 신분증을 발급해온 독일은 고향과 키, 눈 색깔을 넣고 박사학위도 밝힐 수 있다. ▷미국은 주 단위 운전면허증이 사실상 주민증 역할을 하고 주민번호 대신 사회보장번호가 있다. 사회보장번호는 연 3회, 평생 10회 바꿀 수 있어 평생 번호인 우리와 다르다. 독일은 일정 주기로 갱신해야 하는데 번호가 바뀐다. 일본은 일부 지자체가 자체적인 ‘주민기본대장카드’를 발급하는데 다른 지자체에 가면 정보 검색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전국용은 아니다. ▷위·변조 방지 기능을 한층 높인 주민등록증이 내년 1월부터 발급된다는데 미래 추세는 모바일 앱이나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소지할 필요가 없고 보안성도 높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미국 일부 주에서 모바일 앱으로 운전면허증을 대신하거나 시범 운영 중이고 네덜란드는 블록체인 기반 모바일 신분증을 개발 중이다. 우리도 운전면허증과 별도로 국민임을 증명하는 오프라인 신분증이 언제까지 살아남을까 궁금하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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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요일 학원 휴무[횡설수설/구자룡]

    ‘공직자 등 사회지도급 인사가 자녀에게 과외를 시키면 사회 정화 차원에서 공직에서 추방한다.’ 신군부 집권 직후인 1980년 8월 단행한 ‘과외 금지’ 조치는 서슬이 퍼렜다. 10여 일 후 대구에서 주택가뿐 아니라 사찰 암자까지 뒤지는 일제단속에서 12건이 처음 적발됐다. 과외 시킬 돈이 없는 서민들을 위한다는 명분도 내건 과외금지는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자녀 성적을 올리려는 부모 욕심과 학비를 마련하려는 가난한 대학생들의 필요가 만나 ‘몰래 바이트(불법 과외)’가 생겨나고 점차 고액 비밀과외도 성행하게 됐다. 결국 개인의 교육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받아 20년 만에 폐지됐다. ▷‘학원 일요 휴무제’가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서울시교육청 공론화추진위가 시민참여단 논의 결과 학원 일요일 휴무에 찬성 62.6%, 반대 32.7%로 나타났다며 26일 도입을 권고했다. 서울시가 2007년부터 시행한 ‘학원 야간 10시 제한’ 조치를 놓고 벌어진 ‘학습권과 휴식권’ 논란이 재연될 양상이다. 학생 휴식권과 학습권, 학원의 영업권 등이 복잡하게 얽혀 일요 휴무제는 법을 바꿔야 하는 사항이다. ▷심야 시내버스에서 졸고 있는 학생에게 건강 음료를 주는 제약회사 광고가 학부모들의 마음을 찡하게 할 만큼 한국 청소년의 생활은 학원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중학교 때부터 일요일에 학원을 다니는 학생 비율이 30%를 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배를 웃돌고 서울 강남구 조사에서 학업 스트레스를 겪는 중고등학생이 43%를 넘었다. 일요 휴무제는 평일 밤늦게까지 별 보기를 하는 학생들에게 휴일 하루라도 쉬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서울의 학원과 교습소만 줄잡아 2만5000여 개로 위반해도 단속이 쉽지 않다. 심야 학원 제한 이후 스터디카페나 프리미엄독서실 등 변종 수업도 등장했다. 서울을 막으면 주변 신도시 학원가로 쏠릴 수 있다. 학원 대신 그보다 비싼 개인과외 수요가 늘 수 있다. 상대적으로 경제력과 정보력이 부족한 학부모들의 선택권이 줄어들 수 있다. ▷일요휴무제는 공급을 줄이면 수요도 줄 것이라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공교육이 신뢰를 받지 못하며 입시 전쟁이 지속돼 필사적인 수요가 있는 한 어디를 틀어막아도 수요 자체를 줄이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20조 원에 이른 사교육 시장이 계속 커져 가고 있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 청소년들이 ‘학원 뺑뺑이’에서 빠져나오려면 학벌 위주 사회를 바꾸는 더 큰 변화가 없이는 힘든 일이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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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발 초미세먼지[횡설수설/구자룡]

    매년 겨울 빙등(氷燈)축제로 유명한 중국 하얼빈은 2016년 11월 20일 공공 난방 공급 첫날 초미세먼지(PM 2.5) 농도가 m³당 500μg, 일부 지역은 1000μg을 넘어 ‘최악의 오염 도시’라는 오명도 얻었다. 가시거리가 10m 미만으로 신호등이 안 보여 사고가 속출하고 초중고교는 휴교했다. 방독면을 쓴 시민도 있었다. ▷한국의 초미세먼지 기준 농도는 나쁨이 36∼75, 매우 나쁨이 76 이상이다. 베이징, 선양, 톈진 등은 겨울철에 200 혹은 300을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진작부터 ‘우마이(霧매·미세먼지)’와 전쟁을 벌여온 중국은 도시별 발생원과 이동 경로에 초점을 맞춘다. 노하우도 많다. 그런데도 한국으로 넘어가는 미세먼지 조사는 뭉그적댔다. 20여 년 전부터 이 문제가 논란이 됐지만 중국발 먼지가 한국에 간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초국가적 대응이 필요한 사안에 무책임하고 피해를 입는 이웃 국가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국립환경과학원은 20일 2017년 연평균 중국발 초미세먼지의 한국 내 3개 도시(서울 대전 부산)에 대한 영향이 32%라는 한중일 공동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일 연구자들은 35%, 중국은 26%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중국이 구체적인 숫자로 ‘오염 기여’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의미가 있지만 한국이 오랜 기간 공동 조사를 요구한 것을 감안하면 이런 ‘만만디’가 없다. ▷대기오염 물질은 국경을 넘어 흘러 다닌다. ‘아시아 먼지(Asian dust)’라고 불리는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의 황사가 지상 8∼10km 상공에서 13일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지구 곳곳에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오래전 국제 과학잡지에 게재됐다. 중국발 미세먼지도 예외가 아니다. 편서풍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 해안에 도달해 악명 높은 ‘LA 스모그’에도 기여한다는 미국 내 보도가 수두룩하다. 베이징대와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UC어바인) 등은 중국 대기오염 물질이 미 서부에 얼마나 유입되는지 계량화하는 연구도 진행했다. ▷올 3월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국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왔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답이 곤란하면 ‘다른 부서에 물어보라’며 피해 가는 게 중국 대변인들의 습성인데, 이렇게 자신 있게 부인한 것은 태평양도 건너는 미세먼지가 한국만 건너뛴다는 확신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이번 조사에선 관심이 높은 고농도 시기(통상 12∼3월)도 산출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반대로 뺐다고 한다. 환경부는 이 시기 국외 영향을 60∼80%로 보고 있다. 미흡하나 시작이 반이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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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최장수 총리 아베[횡설수설/구자룡]

    “대동아전쟁을 일본의 침략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 A급 전범으로 3년 옥살이를 한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가 옥중 ‘단상록’에 썼던 구절이다. 외조부인 기시 전 총리의 정치 신념을 이어받은 아베 신조 총리는 “도쿄 전범재판은 승자의 논리”라며 일본이 ‘평화 헌법’의 족쇄에서 벗어날 것을 외치고 있다. 아베가 20일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됐지만 마냥 축하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아베 총리의 총 재임 일수는 20일로 2887일. 이토 히로부미가 1885년 초대 총리에 취임한 이래 역대 최장수 총리 기록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장본인인 가쓰라 다로 전 총리의 2886일이었다. 2012년 12월 다시 총리가 된 아베는 내년 8월이면 작은외조부 격인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의 7년 8개월 연속 재임 기록을 깰 수도 있다. 2006년 ‘전후 세대 첫 총리, 51세 최연소 총리’에 이어 여러 기록을 추가해가고 있는 것이다. ‘취업률 120%’라는 말이 나오는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바탕으로 참의원과 중의원 6차례 선거에서 7년째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2021년 9월이 임기 만료지만 당 규칙을 바꿔 4연임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장기 집권의 그림자도 짙어져 간다. ‘스트롱 총리’ 말에 토를 달지 못하고 공무원들이 지시대로 움직이는 ‘손타쿠(忖度·알아서 헤아림)’, 내각을 제치고 총리 관저가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 등 주요 정책을 주도하는 등 권력집중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각료와 자민당 주요 인사들의 망언과 기강해이도 잇따르고 있다. 총리 자신도 도쿄 신주쿠교엔(新宿御苑)에서 여는 ‘벚꽃을 보는 모임’에 지역구민을 대거 초청해 전야제 비용까지 지불한 ‘사쿠라 스캔들’로 시달리고 있다. 누적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소비는 살아나지 않는 ‘재정발(發) 거품’ 지적도 나온다. 아베피로증이다. ▷아베 총리는 2006년 10월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는 등 친한(親韓) 행보를 보였으나 2차 내각 때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보수 우익의 실체를 드러냈다. 최대 극우 단체 ‘일본회의’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아베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자 정한론의 원조인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고 해왔다.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이 모두 요시다 쇼인의 정치적 후계자들이며, 아베의 현 지역구인 야마구치(옛 조슈)현 출신들이다. 근대 일본을 한반도와 동남아 침략으로 이끌었던 ‘우익 DNA’가 아베를 통해 어떻게 발현될지 주변국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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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흥민의 기도[횡설수설/구자룡]

    영국 토트넘의 손흥민이 7일 세르비아에서 열린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유럽 통산 122, 123호 골을 넣었을 때 많은 팬들이 특히 열광한 것은 단지 그 두 골이 차범근 전 국가대표팀 감독의 기록 121골을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흥민이 지난 며칠간 부상당한 상대팀 선수를 걱정하며 보여준 눈물과 기도는 스포츠의 진정한 감동은 치열한 승패를 넘어서는 훈훈한 스포츠맨십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한 명장면이었다. ▷손흥민은 4일 리버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상대팀 에버턴의 안드레 고메스에게 백태클을 했다. 고메스는 넘어지면서 다른 선수와 부딪쳐 수술을 해야 할 정도의 발목 부상을 당했다. 고통스러워하는 고메스를 보며 손흥민은 경기장에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괴로워했고,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한 뒤 라커룸에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악의 없이 벌어진 일이라며 에버턴의 선수들이 찾아와 오히려 손흥민을 위로했다. ▷손흥민이 7일 유럽 진출 한국 선수의 최다골 기록을 넘어선 것은 2010년 10월 30일 유럽 데뷔 3일 만에 당시 함부르크 소속으로 쾰른전에서 첫 골을 넣은 지 9년 여드레 만이다. 당시 18세 손흥민의 첫 골에 대해 “펠레를 연상시키는 골”이라는 찬사가 쏟아졌었다. 자신과 한국 축구의 새 역사를 쓴 122, 123골을 넣은 직후 손흥민은 화려한 세리머니 대신 고메스의 쾌유를 빌며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백태클로 받은 레드카드와 3게임 출장정지 징계는 이미 취소됐지만 마음의 빚은 떨치지 못한 것이었다.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는 손흥민의 ‘월드 클래스 매너’는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해 인도네시아 아시아경기 8강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한국에 패배한 우즈베키스탄팀 선수들이 경기장을 떠날 때 손흥민은 버스에 올라 한 명 한 명 포옹하며 위로 인사를 했다. 이란과의 16강 경기가 끝난 뒤에는 지쳐 앉아있는 이란 선수의 두 팔을 잡고 일으키는 장면이 널리 보도됐다. 2015년 1월 시드니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호주팀에 패했지만 경기 종료 후에는 경기 중 부상으로 들것에 실려 나갔던 상대팀 선수를 찾아가 위로해 유럽 축구계에서도 “그레이트(대단하다)!”라는 찬사가 나왔다. ▷손흥민은 프로축구 K리그 선수 출신 아버지에게 기본이 튼튼해야 한다는 ‘대나무 축구 철학’을 어려서부터 익혔다고 한다. 그가 배운 것에는 배려도 포함된 걸까. 손흥민의 눈물이 더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은 우리 사회가 승패를 떠나 서로를 포용하는 모습을 그리워하기 때문 아닐까.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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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고립주의에 FTA 요동[횡설수설/구자룡]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된 2010년,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논의에 뛰어들었다. 중국 견제 포석이었다. 2005년 뉴질랜드 싱가포르 칠레 브루나이 등 4개국이 ‘경제 협력 마이너리그’로 시작한 TPP가 ‘중국 대항마’로 바뀐 것이다. 그러자 중국은 2012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구축에 나섰다. TPP의 포위망을 뚫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집권 이후 탈퇴하면서 TPP는 유명무실해졌다. 반면 후발주자인 RCEP는 4일 한국 일본 등 15개국이 참가해 타결을 선언했다.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 주도 경쟁에서 중국이 ‘반판승’을 거둔 것이다. ▷미 국무부는 RCEP 타결 소식이 나온 직후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해 중국의 역내 항행 제한 등을 비판하며 견제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이 같은 날 발표한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선언으로 고립주의 이미지는 더 강해졌다. 세계 탄소 배출국 2위인 미국이 친환경 규제 강화로 일자리가 40만 개 줄어든다는 등의 주장을 펴며 기후협약에서 빠지겠다고 나선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파리협약은 불가역적인 것”이라는 문서에 서명한 것과 대비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작은 이익을 위해 큰 명분을 버리는 현장은 기후협약뿐이 아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고질적 편견을 갖고 있다”며 지난해 3월 유엔인권이사회를 탈퇴하고 분담금 불만으로 올해 1월 유네스코도 뛰쳐나왔다. 경제 2위국인 중국이 개도국 할인 우편요금을 적용받는다며 192개국이 가입한 145년 역사의 만국우편연합(UPU)도 탈퇴하겠다고 위협한다. 미국은 유엔 분담금도 수십억 달러 줄이고 심지어 세계무역기구(WTO) 탈퇴도 들먹이는 등 2차 대전 이후 자신들이 깔아놓은 질서를 부인하고 있다. ▷2017년 1월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자유무역 수호자를 자처한 시 주석은 RCEP 타결 이튿날도 상하이 국제수입박람회 연설에서 “경제 세계화는 역사적 흐름”이라고 했다. 중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의 32%, 인구 48%인 세계 최대 FTA인 RCEP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하지만 실제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빌미로 무역보복을 하고, 중국 진출 외국 기업에 굴복을 강요하는 자유무역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나라다. 그럼에도 미국이 고립주의로 가면서 중국이 ‘호랑이 없는 골짜기에 토끼가 선생’인 듯 행세하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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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리콘밸리 추월한 中 유니콘… 뒤엔 정글같은 창업 생태계[논설위원 이슈 칼럼]

    초소형 드론에 카메라를 장착한 ‘팬덤 시리즈’로 세계 민간용 드론 시장의 70%를 석권한 DJI의 대표 왕타오(汪滔). 그는 고액 연봉을 제시한 미국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돌아와 광둥(廣東)성 선전(深(수,천))의 한 잡지사 창고에서 친구 2명과 함께 회사를 세워 ‘중국의 스티브 잡스’로 불린다. 다이웨이(戴維)는 베이징(北京)대 재학 시절 넓은 캠퍼스에 많은 자전거가 놀려지고 있는 것을 보고 2015년 동아리 친구들과 초기 자본금 2만2000달러로 공유 자전거 벤처 ‘오포(ofo)’를 창업했다. 오포는 1년여 만에 전국 50여 개 도시로 확대되는 등 선풍적 인기로 세계 최대 자전거 공유업체가 됐다. ‘중국판 포브스’로 불리는 후룬바이푸(胡潤百富)가 최근 전 세계 유니콘 494개 중 중국이 206개로 미국 203개를 처음으로 앞질렀다고 발표했는데 한국은 6개였다. 유니콘은 이마에 뿔이 하나 달린 전설상의 말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비상장 기업’을 의미한다. 2013년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유니콘은 경제의 역동성과 미래의 경쟁력을 가늠하게 하는 지표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DJI나 오포 같은 유니콘 벤처 스토리가 끝이 없다. 더욱이 창업자 대부분은 1980년 이후 태어난 자수성가형 흙수저들이다. 중국을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던 벤처 1세대인 알리바바의 마윈(馬雲), 바이두의 리옌훙(李彦宏), 샤오미의 레이쥔(雷軍) 등이 1960년대생인 것에 비하면 한 세대 이상 젊다. 레이쥔이 “태풍이 부는 길목에 서면 돼지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타고 기회를 잡은 사람들이다. 삼성전자의 반도체나 LG디스플레이의 올레드(OLED) 등 한국이 중국보다 한두 발짝 앞선 기술을 가진 분야도 있다. 하지만 미국을 제칠 정도로 치고 올라온 중국 유니콘의 질주는 우리의 미래 산업경쟁력을 어떻게 키워가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중국 경제가 미중 무역 전쟁의 역풍을 맞고 있지만 ‘중국판 스티브 잡스나 마이클 델(델 컴퓨터 창업자)’ 같은 창업자가 넘쳐나 미중 경제 및 패권 전쟁을 쉽게 판가름하기 점점 어렵게 만든다.○ ‘창의 창신 창업’ 키우는 네트워크 후룬 발표에서 베이징의 유니콘 기업은 82개로 ‘실리콘밸리’의 본고장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55개를 앞질렀다. 1∼3위는 알리바바의 금융 계열사 마이진푸(마蟻金服·Ant Financial·‘개미금융서비스’), 영상 공유 앱 틱톡을 만든 바이트댄스, 차량 공유 업체 디디추싱 등 중국 업체가 차지했다. 중국에서는 하루에 1만6000개 이상의 기업이 생겨난다. 중국 대학 졸업생의 창업률은 8%로 한국의 10배가 넘는다. 다이웨이처럼 유니콘 중에는 대학 재학생이나 졸업한 지 수년 만에 창업한 기업이 많다. 한 해 대학 졸업생이 600만 명이 넘어 치열한 구직경쟁에서 창업으로 눈을 돌리기도 하지만 두껍게 형성된 창업 친화적 생태계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공무원 등 안정적인 일자리로 몰리는 경향이 높아지는 국내 현실과 대비된다. 중국 이공계 최고 명문인 칭화(淸華)대의 베이징(北京)캠퍼스에는 석박사 과정 학생들의 창업 지원을 위한 ‘X-LAB’이 있다. 베이징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의 벤처 열기를 취재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각 프로젝트팀의 구성원들이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누군가가 올린 아이디어를 보고 전국에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한 인터넷 쇼핑몰 개발팀은 칭화대 학생이 올린 아이템에 관심 있는 대학 4학년생과 졸업생 등이 헤이룽장(黑龍江) 허난(河南) 푸젠(福建)성 등 그야말로 전국에서 모였다. 중국 이공계 대학은 재학생이나 졸업생 지원을 위한 공간과 전문 부서, 산하기관, 전문 컨설팅 업체 등을 운영하며 창업을 지원하고 있다. X-LAB의 별명은 ‘창의 창신 창업 키우는 싼촹(三創) 공간’이다. ‘개혁 개방의 1번지’ 선전은 이제 ‘창업 용광로’다. 이곳의 화창베이(華强北)는 용산 전자상가의 20배가량 되는 초대형 전자상가로 모든 전자제품에 필요한 재료와 부품이 다 있어 자석처럼 벤처 기업들을 주변으로 끌어 모으고 있다. 구글과 애플이 연구개발센터를 이곳에 설치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진시황 병마용’의 도시 시안(西安)을 비롯해 전국 주요 도시에는 ‘커지촹신강(科技創新港)’이 설치돼 있다. 대학과 사회가 혁신을 위해 뭉친 ‘첨단 과학 클러스터’다. 중국 이공계 대학은 ‘응용성’을 주요 지침으로 삼는다. 커지촹신강은 대학이 상아탑에 갇히지 않고 지역, 기업 등과 활발한 교류 속에 연구와 창업의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산학연 네트워크다. ‘교우(校友) 경제’도 있다. 동문회 격인 교우회가 졸업생들의 창업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준다. 지난해 찾아갔던 시안자오퉁(交通)대는 ‘시자오(西交) 1896 인큐베이터’ 등 취업 지원 교우회가 150여 개나 된다. 전국 주요 대학들은 선배 기업인이 대학에서 기업가 싹이 보이는 후배를 발굴하고 키우는 ‘교우 경쟁’을 벌인다. 특히 중국 유니콘 급성장의 가장 큰 견인차는 1세대 벤처 기업인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다. 알리바바가 마이진푸나 디디추싱에 투자하고 있고, 최대 벤처캐피털인 ‘레전드 캐피털’은 컴퓨터 제조 대기업 레노버그룹의 자회사다. 유니콘 기업의 절반가량은 BAT가 직간접적으로 투자한 기업이다.○ “미래 예측하지 않고 만든다” ‘대중창업 만중혁신(大衆創業 萬衆革新·‘모든 대중이 혁신으로 창업하게 하자’는 슬로건)’ 기치하에 ‘규제 없으면 허용한다’는 정부와 사회의 분위기는 대담한 도전자들을 잇따라 탄생시켰다. 전자상거래 업체 핀둬둬(평多多)의 황정(黃쟁) 대표는 알리바바, 징둥(京東) 같은 강적들이 버티고 있는데도 ‘산에 호랑이가 있는 줄 알아도 기어이 산에 오른다’며 창업했다. 기존 업체가 대도시 젊은 여성을 주 타깃으로 했다면 그는 농촌 주부와 저가품 시장에 집중했다.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전략이 21세기 벤처 전쟁 시대에도 통했다. 삼성에 며칠 앞서 접는 스마트폰을 처음 발표한 중국 유니콘 로율의 창업자 류즈훙(劉自鴻)의 캐치프레이즈는 ‘미래를 예측하지 말고, 미래를 창조하라’다. 15초 동영상 공유 사이트 ‘틱톡’ 광풍을 일으킨 ‘바이트댄스’의 장이밍(張一鳴)은 개인에 따라 헤드라인이 다르게 보이는 진르터우탸오(今日頭條)를 개발했다. ‘차(茶) 업계의 하워드 슐츠(스타벅스 창업자)’라고 불리는 녜윈천((섭,접)雲辰)은 기존 밀크티가 분말 형태인데 이는 진짜 밀크티가 아니라고 생각해 치즈밀크티 시차(憙茶)로 새로운 붐을 일으켰다.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로 경직되어 창의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죽의 장막 너머의 거대한 변화를 모르는 것이다.○ 한국, ‘206 대 6’ 경고 새겨야 우후죽순처럼 많은 기업이 나오면서 참신한 아이디어에 비해 실적이 부진해 사업을 접거나 투자를 받지 못하는 곳도 나타나고 있다. ‘오포’가 경영 위기를 맞고 디디추싱은 해외 시장 진출 실패로 상장을 연기했다. 올해 2분기 중국 유니콘 기업이 받은 투자액은 94억 달러로 지난해 동기에 비해 5분의 1로 줄었다. 투자에 참가하는 벤처캐피털 수가 487곳에서 45곳으로 줄었다는 등의 보도도 나오고 있다. 미중 갈등의 역풍도 맞고 있다. 세계 최대 폐쇄회로(CC)TV 제조회사인 하이크비전은 신장위구르지역 인권 탄압에 관여됐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의 제재 리스트에 올랐다. 바이트댄스도 틱톡 앱을 통해 미국 청소년들의 개인 정보를 탈취한다는 의혹으로 미국 연방거래위원회로부터 570만 달러의 벌금을 받았다. 하지만 국내적으로 ‘적자생존’의 생태계 속에 성장하는 중국 벤처업체들은 역경의 찬바람을 맞으면 보다 강한 체질로 무장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최근 한국 벤처업계는 ‘타다’ 기소 이후 “정부 국회 검찰이 한 방향으로 스타트업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고 호소했다. 벤처를 키우는 생태계를 조성하기는커녕 정부의 규제와 정책이 예비 벤처 기업인들을 ‘미래 산업 화전민’으로 내몰지는 않는지 우려된다. 한중 간 ‘206 대 6’이라는 유니콘 숫자가 주는 경고를 새겨야 할 것이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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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삐삐의 추억[횡설수설/구자룡]

    미국 모토로라가 1958년 처음 속칭 ‘삐삐’라고 부르는 무선호출기를 개발했을 때는 신호음만 울렸다. 수신자는 미리 정해진 곳으로 전화를 걸어 호출에 답했다. 1982년 한국에 모토로라 삐삐가 처음 수입돼 들어올 때는 화면에 자신을 호출하는 전화번호가 표시됐다. 삐삐는 ‘단방향’이기는 하지만 많은 이에게 무선통신 시대를 경험하게 해준 첫 기기로 사랑을 받았다. 시판 초기엔 30만∼40만 원으로 고가품이었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95%를 넘어서는 요즘 젊은 세대 중에는 “삐삐가 뭐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삐삐 가입자 수가 휴대전화 가입자에게 추월당한 것은 1998년 9월로 21년 전 일이다. ▷영어로는 ‘페이저’ ‘비퍼’ 등으로 불린 삐삐는 신호를 받을 때 나는 ‘삐삐 삐삐’ 소리가 반복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삐삐∼’ 소리는 외근사원들에겐 사무실 윗사람의 불호령을 예고하는 호출이고, 연인들에겐 사랑의 호출이었다. ‘8282’(술 마시는 남편 호출), ‘1004’(연인 사이의 천사), ‘0404’(영원히 사랑해) 같은 호출 번호만 봐도 뜻을 알았다. 스마트폰의 영상통화 기능만큼 감시가 가능한 ‘빅 브러더’는 아니지만 삐삐로 어디서든 불러내 ‘×목걸이’ ‘족쇄’라는 악명도 얻었다. 처음에는 전화번호나 간단한 문자메시지만 표시됐으나 스톱워치, 자동차 원격제어, 날씨 안내, 프로야구 속보 등 기능이 다양해졌다. 매일 짧은 글을 호출기로 보내는 ‘삐삐 소설가’도 등장했고 전 세계 어디서든 호출이 가능할 정도로 진화했다. ▷하지만 삐삐가 온갖 부가 기능을 추가하며 생존의 몸부림을 쳤음에도 그 끝은 사실상의 멸종이었다. 휴대전화가 급속도로 보급되는 ‘IT 세계의 기후 변화’를 이겨내지 못해 마치 봄눈 녹듯 사라졌다. 1997년 5월 국내 삐삐 사용자가 약 1360만 명으로 보급률 30%를 차지하며 보급률 기준 세계 1, 2위를 차지한 것을 정점으로 급격히 줄어들어 1998년 상반기에만 200만 명 이상이 삐삐를 없앴다. ▷1990년대 후반 국내 삐삐 시장의 90% 이상을 석권해 ‘삐삐왕’으로도 불렸던 텔슨전자의 김동연 전 대표(61)가 2005년 회사 파산 후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옛 사옥 지하에 꾸려온 헬스클럽마저 월세 분쟁으로 29일 강제 철거를 당했다. 김 전 대표는 “몇 가지 요인이 겹쳤지만 사업 부진 배경에는 삐삐 시대, 아날로그 시대의 종언도 한 이유”라고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다 급속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삐삐의 추억에서 무선통신 시대의 냉혹하고 치열한 경쟁과 급속한 세대교체를 절감한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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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인 정자의 친생자’[횡설수설/구자룡]

    영국 케임브리지대 생리학자 로버트 에드워즈 박사팀은 1978년 7월 세계 첫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켰다. 7년 후 서울대병원 산부인과에서도 국내 첫 시험관 아기가 태어났고 지금은 일정 규모의 불임치료 병원에서 두루 시술할 정도로 보편화됐다. 인공 수정은 ‘신의 섭리에 도전’하는 획기적인 기술인 만큼 새로운 고민도 낳았다. 제3자의 정자로 태어난 아이와 아버지 간의 부자 관계가 법적으로 종결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결코 끊을 수 없는 천륜(天倫)인지 여부다. 인류 시작 이래 이어진 불륜에 의한 출생 문제에 고민거리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부부 사이인데 남편이 아닌 남자의 정자에서 비롯된 아이가 있는 경우는 세 가지가 있다.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이미 아이를 낳은 여자와 결혼했거나, 부부 합의로 다른 남자의 정자를 공여받아 인공 수정했거나, 아내가 외도로 아이를 낳은 경우다. ‘타인의 정자’라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태어난 아이의 ‘신분’은 다를 수 있다. 첫 번째 경우는 부부가 이혼하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시 결혼해 호적에 입적시키면 부자 관계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된다. 갑론을박이 불가피한 것은 두 번째, 세 번째 경우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3일 그 두 경우 모두에 대해 남편의 친자로 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 판결의 당사자인 A 씨(남)는 무정자증으로 첫째를 타인의 정자를 기증받아 인공 수정으로 낳았고, 둘째는 인공 수정 없이 자연 임신했다. 무정자증이 저절로 치유돼 아이가 생겼다고 여겼던 A 씨는 부부 사이가 틀어진 뒤 둘째가 부인의 외도로 생긴 아이임을 알게 됐다. 대법원이 첫째 아이에 대해 친생자로 판결한 것은 널리 인공수정 출산이 이뤄지는 시대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생물학적 관계가 없다 해도 인공 수정에 동의해 생명을 탄생시켰으므로 천륜처럼 끊을 수 없는 친자 관계라고 확인한 것이다. ▷대법원이 두 번째 아이, 즉 부인의 외도로 생긴 아이에 대해서도 친자로 인정한 데 대해선 갸우뚱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대법원은 ‘부부가 동거하지 않는 기간에 생긴 게 아니라면 친자로 추정한다’는 36년 전의 판례를 유지했는데 이는 ‘가족제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다만 민법은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날로부터 2년 이내에 소송을 내 번복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A 씨가 소송을 일찍 냈다면 결론은 달랐을지 모른다. 유전자 검사로 과학적 친자 감정이 가능해진 세상이지만 여전히 부자 관계라는 천륜은 반드시 생물학적인 차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닌 것이다.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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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140배’ 새만금에 입주기업 달랑 7곳… 30년째 희망 고문[논설위원 현장 칼럼]

    ‘동북아 경제허브, 창조 경제의 메카’ ‘세계 경제가 모여드는 곳, 미래 경제가 시작되는 곳. 여기는 대한민국의 희망 지구’ 17일 찾아간 전북 군산시 새만금북로에 세워진 새만금 안내 입간판의 홍보 문구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 간척 사업, 세계 최장의 방조제(33.9km)’ 타이틀을 가진 만큼 꿈은 크지만 현실은 초라하다. 입간판 우측 끝에 소개된 입주 기업은 불과 7곳이고 그중 한국가스공사와 군산도시가스 등 2곳이 공기업이다. 올해 11월로 개발 시작 30년을 맞는 ‘아리울’(물 울타리라는 뜻의 새만금의 순 우리말 이름)’. 아직 매립도 안 된 수면이거나 허허벌판 갯벌로 남아있는 새만금은 대한민국이 이곳을 살릴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엄중히 묻고 있다.○ 푸둥과 새만금의 다른 운명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실시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나선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그해 12월 10일 전주신역에서 가지려던 선거 유세는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 시위로 무산됐다. 숙소인 코어호텔로 황급히 돌아온 노 후보는 “전북도민의 염원인 새만금 사업을 임기 내에 완공하겠다”고 발표했다. 노 후보는 당선 후 1989년 11월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새만금 간척지 개발의 대역사(大役事)가 급작스럽게 시작되다보니 1991년 첫 삽을 뜬 지 19년 만에야 방조제가 준공됐다. 시화호 오염 사태에 따른 대규모 물막이에 대한 거부감과 ‘삼보일배’로 상경 투쟁을 하는 등 환경단체 반발 등도 있었지만 대규모 간척지를 어디에 쓸지에 대한 비전도 없었다. 식량 안보를 위한다며 농지비율 100% 조성을 목표로 출발한 뒤 노무현 대통령 72%, 이명박 대통령 30%로 줄어들더니 박근혜 정부에서는 ‘농생명 용지’가 6가지 용도 지역 중 하나가 됐다. 개발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칠 방조제 해수 유통 문제도 이르면 내년 말 결정된다. 그동안 ‘한국의 두바이’(해양 개발 및 글로벌 허브), ‘한국판 라 그랑드 모트’(해양형 레저관광 도시), ‘제2의 라스베이거스’(카지노 및 컨벤션), ‘국내 유일 한중산업 협력단지’ 등 구호만 요란했지 어느 것 하나 진척이 없다. 중국 국무원이 불모지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신구 개발을 발표한 것은 1990년 4월로 새만금보다 5개월가량 늦었다. 상하이는 푸둥을 견인차로 금융과 첨단산업에서 홍콩과 싱가포르를 앞질렀다. 푸둥과 새만금 두 지역의 운명을 가른 것은 지리적 여건 등 요인이 많지만 비전과 추진력, 정치적 리더십의 영향도 크다. 두바이가 세계 항공의 허브가 되고, 월드컵 개최지가 된 것도 확고한 비전이 빚어낸 산물이다. ○ 놓친 ‘중국 찬스’ 새만금 개발이 부진한 데는 현실성 없이 중국만 바라본 것도 한 요인이다. 2010년 방조제를 완공한 뒤 중국 동부 연안 도시와의 협력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다. 중국은 산둥(山東)성에서 광둥(廣東)성에 이르는 해안에 대규모 해안풍력벨트를 조성할 계획이어서 새만금을 풍력 발전소의 부품과 설비 기지로 키울 계획을 세웠다. 한국은 전 세계와 맺은 자유무역협정(FTA)의 이점을 살리는 ‘FTA 허브론’을 이용한 중국 기업 투자 유치에도 적극 나섰다. 2014년 7월에는 한중 정상이 양국 전용 공단을 조성키로 합의했는데 새만금이 국내 유일의 한중 경제협력특구로 지정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3개 업체가 양해각서만 맺었다가 감감무소식이다. 중국 옌타이(煙臺), 옌청(鹽城), 후이저우(惠州) 등 중국 내 중한 산업단지에 한국 기업이 600개 이상 진출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최근에는 미중 무역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중국 기업이 ‘한국산’으로 바꾸기 위해 새만금에 투자하려는 기업이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적이 전무하다. 중국 기업의 기술력이 높아지고 자국내 임금이 싼 것 등이 큰 요인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새만금으로 중국 기업을 끌어들일 여건이 안 되어 있고 국내 다른 지자체에 비해 경쟁력 요소도 많지 않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보낸 서복이 새만금 앞바다를 지나다 경치에 반해 선유도라는 이름을 붙였다거나, 고려 말 원나라와 합작해 개발한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함께 무찌른 ‘진포대첩’이 군산 앞바다 진포라는 등의 오랜 인연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투자 결정은 냉정했다. ○ 새만금과 군산의 상생 새만금북로 북측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에는 스웨덴 ‘말뫼의 눈물’을 상징하는 세계 최대(1650t)의 골리앗 ‘코쿰스 크레인’이 덩그러니 서있다. 2002년 1달러의 헐값으로 한국에 팔려 올 때 말뫼는 조선 산업의 쇠락에 눈물을 흘렸다. 이제 군산조선소가 2017년 7월 문을 닫은 뒤 이 골리앗도 갈 곳을 찾고 있다. 한 해 26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던 인근 군산국가공단의 한국GM 공장도 지난해 2월 가동을 중단했다. 현대중공업과 한국GM이 군산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8%로 두 기업 가동이 중단되면서 군산 인구의 3%인 7000명가량이 줄었다고 군산시는 설명했다. 지역 경제에 기관차와 같은 두 대기업을 잃어 직격탄을 맞은 군산 공단과 아직 휭하니 비어있거나 매립도 되지 않은 새만금은 상호 보완적 발전이 더욱 절박한 상황이다. ‘새만금 없이 군산에 희망이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24일 16개 전기차 관련 업체가 참가해 선포되는 ‘군산 상생형 일자리’는 군산과 새만금 두 지역 회생의 실마리를 제공할지 관심을 모은다. 특히 한국GM 군산공장을 인수한 자동차 부품업체 명신은 ‘중국의 테슬라’로 불리는 전기차 생산 전문업체 퓨처모빌리티의 ‘바이튼’ 브랜드 전기차를 주문 제작 생산할 계획이다.○ 문 정부의 삼지창(三枝槍) 문재인 정부의 새만금 정책 3대 키워드는 공공 개발, 태양광 발전 그리고 새만금 국제공항. 새로운 돌파구를 열 것이라는 기대만큼 논란도 많다. 새만금 간척지는 2010년 방조제가 준공된 후 민간 자본이 방조제 안쪽의 필요한 용지를 매립해 개발하도록 했다. 하지만 불확실한 수익성으로 매립이 계획 대비 36%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지지부진하다. 전북연구원의 김재구 연구원은 “여의도 면적의 140배를 마치 신도시 개발하듯 민간 주도에 맡겨 오랜 세월을 허비했다”고 했다. 지난해 9월 새만금개발공사를 출범시킨 것은 그 때문이다. 공사는 ‘성공적인 선도 사업’으로 2024년 목표로 1조2000억 원가량을 들여 2만 명이 입주하는 ‘스마트 수변 도시’를 세울 계획이다. 하지만 누가 왜 와서 거주하는 도시가 될지는 확신이 없다. 새만금에는 세계 최대의 수상 태양광발전소 등 태양광 4곳과 풍력발전소가 들어설 계획이다. 신재생에너지는 ‘RE100(100% 재생에너지 사용)’ 기업인 구글이나 아마존 등의 데이터 센터를 유치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지만 경관 훼손, 환경오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1월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받은 새만금 국제공항 건설도 뜨거운 감자다. 예산 8000억 원을 들여 2028년 개항할 예정이지만 이용률이 극히 낮을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새만금 개발이 늦어 자체 수요가 없는 데다 주변으로 KTX와 고속도로가 잇따라 건설돼 제주도를 빼면 국내 여객 수요는 없다. 일본 중국 동남아 등 국제 여객은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무안공항과 나눠먹기를 해야 한다. 무안공항은 과거 비어있는 활주로에서 고추를 말려 화제가 됐지만 지금도 활주로 이용률이 1.7%에 불과하다. 김제에 공항을 지으려다 접은 것이 불과 수년 전이다. 새만금 국제공항이 세금 잡아먹는 유휴 공항이 될 수 있다는 근거들이 널려 있다.○ ‘판타지가 다큐가 되려면’ 새만금 방조제 남단 한국농어촌공사 새만금홍보관 구내에는 방탄소년단(BTS) 포토존이 있다. 아시아 가수 최초로 정규 앨범 3집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는데 그 앨범 사진과 2016년 ‘SAVE ME’ 뮤직 비디오를 촬영한 곳이 새만금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BTS 촬영지에서는 2023년 169개국 5만여 명이 참가하는 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행사도 열릴 예정이어서 행사 안내 문구가 곳곳에 걸려 있다. 세계 최장 새만금 방조제 건립 공법과 건설 과정 및 국내외 간척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새만금 박물관’도 지어진다. 김현숙 새만금개발청장은 2월 취임 직후 “판타지를 다큐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서는 새만금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광활한 새만금에 무엇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전략이 더 시급하다. 30년간 7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한 채 두 곳 배수갑문을 통해 바닷물이나 넣었다 뺐다 하고 있는 ‘새만금 오디세이’를 끝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새만금=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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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끼 돼지까지 모조리 도살처분… 재기 걱정에 잠 못드는 농가[논설위원 현장 칼럼]

    7일 오전 11시 경기 파주시 운정1동의 돼지 사육 S농장. 정문 앞 주변 도로가 온통 하얀 생석회로 덮여 멀리서도 돼지 사육 농장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입구에는 군부대에서 지원 나온 2명과 공무원 1명, 방역 용역업체 직원 1명 등 4명이 한 조로 하루 3교대 8시간씩 ‘방역 초소’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축사의 분뇨 악취도 심한 곳에서 눈 부위만 빼고 손과 발까지 밀봉하다시피 방역복을 입은 모습이 보기에도 불편하고 갑갑했지만 근무자들 얼굴에서는 ‘보이지 않는 적’을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지난달 17일 파주시 연다산동에서 국내 첫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양성 판정이 나온 뒤 경기 파주 김포 연천, 인천 강화 등에서 3주 이상 계속되고 있는 비상 상황이다. 구제역으로 소와 돼지 등 우제류(발굽이 짝수인 동물) 340여만 마리가 무참히 도살 처분된 파동 이후 8년 만에 찾아온 대형 가축 전염병 ASF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경기 북부 방역 전선이 뚫릴지가 초미의 국민적 관심사다. 충남 보령에서 3일과 6일 잇따라 의심 사례가 신고됐으나 음성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강원 철원 인제, 경기 포천 등에서 주요 매개체인 멧돼지의 폐사체가 잇따라 발견돼 ASF의 확산 방지 비상은 진행형이다. 최근 찾아가 본 ASF 방역 전선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적과의 소리 없는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초유의 “지역 내 모든 돼지 처리” 8일까지 ASF 확진 지역은 파주(5곳) 강화(5곳) 김포(2곳) 연천(1곳) 등 13곳. 4일 찾아간 강화군청 4층 비상대책상황실 현황판에는 ‘10.4 살처분 종료 선언’이라는 붉은 글씨가 눈에 띄었다. 군내 39개 농장의 4만3600여 마리에 대해 ‘선제적 도살 처분’을 마쳐 강화도에 살아있는 돼지는 한 마리도 없다는 뜻이다. 정부는 3일 파주와 김포에서 모든 돼지를 도살 처분하거나 수매하겠다고 발표했다. 수매한 돼지는 모두 도축할 계획이어서 파주와 김포도 모든 농장에서 돼지가 없어진다. 통상 감염 농장의 3km 이내 가축을 도살 처분하는 것과 달리 특정 지역 대상 가축을 모두 처리하기는 방역 사상 처음이다. 연천은 도살 처분 혹은 수매 대상 지역을 양성 판정 농가의 10km 이내로 잡았다. 이처럼 특단의 조치가 내려진 것은 ASF 발생 3주가 지났지만 뚜렷한 감염 경로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ASF 바이러스를 처음 신고한 파주의 농장은 멧돼지 침입 방지 울타리가 있어 사료를 먹기 위해 들어온 쥐나 사람과의 접촉이 원인일 수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감염 전파 경로가 종잡을 수 없다 보니 돼지와 농가의 피해도 커지는 형국이다. ○ 특단의 도살 처분에 걸맞은 ‘적절한 보상’이 과제 ASF는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전파돼 공기 감염보다는 속도가 느리지만 치료약과 백신이 없다. 급성인 경우 사망률이 100%에 가깝다. 이런 치명적인 전염병이 전국으로 확산되면 양돈 산업은 물론이고 사료 관련 업체나 삼겹살 돈가스 외식업계 등 전후방으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ASF로 타격을 받은 후 회복하는 데 36년이 걸렸다고 한다. 방역은 0.001%만 뚫려도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 수 있다. 양돈 농장주들은 평소 남의 농장에 발을 들이지 않을 만큼 철저한 방역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방역 비상조치’가 내려진 만큼 상응하는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도살 처분이나 수매를 하는 경우 시장 가격의 80%(양성 판정) 혹은 100%(음성 판정) 등으로 보상한다. 일부에서는 “돼지 값 물어주면 피해는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지만 이는 돼지 사육산업의 특성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피해는 돼지 값에 그치지 않는다. 구제역 당시 약 4만 마리, 이번에는 4600마리가량이 도살 처분된 강화군의 농장주 한모 씨(63)는 “돼지 농장은 많은 시설과 투자가 들어가는 장치 산업”이라며 “대량 도살 처분은 한순간에 사업 기반인 돼지가 없어지는 데다 새끼 돼지를 들여와 다시 키우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 투자 경영 손실도 크다”고 말했다. 처음 ASF 신고를 한 농장주 채모 씨는 주변 토양까지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어 다시 돼지를 키우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투자비도 못 건지고 폐업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가축 전염병 창궐은 천재지변 못지않은 피해를 줄 수 있다. 파주시가 ‘방역 재난 특별지구’ 지정을 정부에 요청해 ‘방역 재난’에 걸맞은 보상이 이뤄지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처럼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 같다.○ “2주 이상 돼지 울음소리 환청” 도살 처분 현장의 비극 대규모 가축 감염 사건의 피해는 경제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파주시의 농장주 A 씨는 지난달 25일 자신의 농장에 90명가량이 투입돼 도살 처분하는 현장을 지켜보다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돼지를 가두는 펜스를 만들 대형 철판과 가스통, 굴착기, 매몰용 섬유강화플라스틱(FRP) 등을 갖춘 도살 처분 대원들이 들이닥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돼지를 몰아넣고 비닐을 덮은 뒤 이산화탄소 가스를 주입하자 모돈(母豚), 자돈(子豚) 가리지 않고 애지중지 키우던 돼지 수천 마리가 30, 40분 만에 질식사하는 것을 망연히 지켜봤다. A 씨는 시 보건소에 수면 및 불안장애를 호소해 약물 처방을 받으며 악몽 같은 도살 처분 현장을 잊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시청 공무원 B 씨는 도살 처분이 이뤄지는 농장의 정문 초소에 근무했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돼지들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2주 이상 환청으로 들려 보건소에서 상담을 받았다. 경기도는 파주 연천 김포 등에서 도살 처분 트라우마로 인한 상담이 549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도살 처분에 참가한 연인원은 2450여 명에 이른다. 최근 5년간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AI) 등의 도살 처분에 투입된 공무원 중 4명이 과로 등으로 사망하고 5명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었다.○ 남북 공조 실종으로 ‘임진강 수계 전파’ 위험에 무방비 이번에 ASF 양성 확진 판정을 받은 13곳 농장의 상당수는 비무장지대를 거쳐 흐르는 임진강 수계를 따라 퍼져 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바이러스가 유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많다. 지난해 8월 중국 동북 지방에 이어 올해 5월 30일 북한에서 처음 발견된 뒤 3개월여 만에 임진강 주변에서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이다. 건국대 축산학과 정승헌 교수는 9월 7, 8일 한반도를 종단한 태풍 링링이 북한에 많은 비를 뿌린 것이 한 요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ASF가 창궐해 죽거나 도살한 돼지를 주민들이 잡아먹으면서 노천에 버리거나 깊게 묻지 않은 피와 내장 등에 묻은 바이러스가 빗물을 타고 임진강으로 흘러들었을 수 있다고 정 교수는 추론했다. 임진강을 매개로 한 ASF 전파 가능성은 임진강 수계 남북 공동 관리 실종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어진다. 북한에서 ASF 사태가 터진 후 남북 간에 공동 조사나 대응을 위한 어떤 접촉도 없었다고 한다. 군사분계선 인근에라도 공동 방역 조치를 했다면 ASF가 넘어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남쪽 비무장지대에 대해서만 헬기로 방역을 하는 것은 반쪽 처방에 그칠 수 있다. 과거에는 임진강 상하류 물 관리 공조가 안 돼 물난리 피해도 있었다. 2009년 9월 6일 북한은 임진강 상류 황강댐의 수문을 사전 통보 없이 개방해 하류 수위가 평소 2m에서 4m로 높아져 야영객 6명이 목숨을 잃었다. ASF 월남(越南)이 이번 사태의 한 요인이라면 남북 공조 실종의 대가를 방역에서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에서 1700년대에 처음 나타난 ASF는 21세기 들어 갑자기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3개 대륙 50여 개국에서 발생했다. 인류의 생활권 밖에 있던 바이러스들이 직접 혹은 가축 등을 통해 인류를 공격하고 변종이 나타나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그 처참한 전선(戰線)이 지금 경기 북부에 형성되어 있다. 힘겨운 ASF 바이러스 방역 전쟁에 보다 많은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 파주·강화·김포=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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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꼰대(KKONDAE)’[횡설수설/구자룡]

    자랑스럽지 않은 한국말 한마디가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영국 BBC방송이 23일 페이스북에 ‘오늘의 단어’로 ‘꼰대’를 소개했다.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이란 뜻이라며 ‘다른 사람은 늘 잘못됐다고 여긴다’는 해설까지 달았다. 각국의 누리꾼이 자기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며 공감을 나타내는 댓글을 줄줄이 달고 있다. ‘꼰대질’ 하는 사람은 어느 나라에나 있나 보다. 중국어에도 나이로 누른다는 뜻의 ‘이라오마이라오(倚老賣老)’, 영어에도 ‘adultism’ 같은 유사 표현이 있다. ▷국립국어원은 ‘꼰대스럽다’를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데가 있다’고 풀이한다. 유래가 확실치 않은 ‘꼰대’는 잔소리 많은 부모 세대나 선생님을 주로 지칭하다 지금은 꼴불견 직장 상사가 주요 타깃이다. 최신 해석으로는 나이, 성별, 계급 구분 없이 하는 말과 행동에 따라 적용돼 누구나 한순간에 꼰대가 될 수 있다. ▷전통적인 꼰대 감별법에 공통 체크 리스트가 있다. 상대가 나이가 적다 싶으면 명령조다. 과거 고생한 얘기하다 ‘요즘 젊은 애들은 편해졌어’로 마무리한다. 아랫사람이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하면 심기가 불편하고, 주말 휴일 근무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어와 축약어를 사용하면 언어를 파괴한다고 지적질한다. 자유롭게 말하라 해놓고 자신이 먼저 답을 제시하고, 의견에 반대한 후배는 두고두고 잊지 않는다. 경험과 지혜가 담긴 말도 없지 않으나 충고가 간섭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쉽지 않은 듯하다.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꼰대’라는 말이 1960년대 초부터 등장한다. 1964년 ‘중고등학생들이 부모를 가리키는 은어로 쓰는 좋지 않은 말이 있는데 암꼰대와 수꼰대가 있다’고 보도했다. 1972년 초등학생이 쓰는 안 좋은 속어 특집에 ‘꼰대’는 5, 6학년 용어로 등장한다. 1978년 연재소설 ‘옛날의 금잔디’에서는 어른이 꼬마를 꾸짖으며 “너 이런 짓 하는 거 엄마 아빠도 알고 계시니?” 하니까 “싫으면 그만두지 우리 꼰대는 왜 찾아”라고 한다. 사용 연령이 점차 내려간다. ▷‘구들(gudle)’ ‘온돌(ondol)’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등재됐고 ‘태권도’는 구령까지도 한국어가 만국 공통이다. 꼰대나 갑질 같은 말 말고 ‘케이팝’ ‘한류’ ‘한글’ ‘강남스타일’ ‘BTS’처럼 한국의 역동성과 창의성을 보여주는 새 단어들이 더 많이 등장해 세계무대에서 회자됐으면 좋겠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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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우면 쇠하고 교류하면 흥한다”… ‘관광 절벽’ 대마도의 호소[논설위원 현장칼럼/구자룡]

    ‘대마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히 쓰시마를 즐겨 주십시오.’ 일본 대마도(對馬島·쓰시마섬) 남부 이즈하라(嚴原) 중심부의 종합쇼핑몰 티아라 주변 광장. 한국어 안내판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광장은 텅 비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길 건너 우체국 간판에는 일본어 뒤에 ‘이즈하라 우체국’이라는 한글 표기도 보였다. 시외버스 한글 시간표와 상점 간판, 안내문 등 대마도 곳곳에 한국어가 나란히 적혀 있다.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에 중국어와 한글을 병기한 것을 연상시켰다. 일본 우익 성향 누리꾼들이 “쓰시마가 한국에 점령당한다”고 경고를 날릴 정도로 한국인 관광객들이 북적였던 일본 대마도의 요즘 풍경이다. 지난달 28일 티아라 종합쇼핑물은 평소 한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인적이 끊겨 마치 철시(撤市)한 듯했다. 1층 ‘레드 캐비지’ 슈퍼에는 일본인 노인 고객 한두 명이 전부였고, 2층 특산품 가게는 아예 종업원도 자리를 비웠다. 일본이 7월 1일 대한(對韓) 무역 보복을 시작한 이후 한국인 관광객이 발길을 끊자 대마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대마도 외국인 관광객의 99%를 차지하는 한국인의 ‘여행 보이콧’이 2개월가량 이어지면서 감소 비율이 90%를 넘었다. 지난해 한국인 관광객은 사상 최대인 약 41만 명으로 주민 3만2000여 명의 12배가 넘었다. 면세점 ‘구라(藏)’의 출입문에는 ‘한국 돈 사용 가능’ ‘한국어 응대 가능합니다’라는 문구가 내걸려 있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태극기와 일장기가 나란히 걸려 있던 면세점 앞 8개 깃대 중 6개는 비어 있었다. 광장 여행안내소 여직원은 “성수기인데 한국인 관광객이 끊겨 구라도 임시로 문을 닫은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제외한 날 대마도에 간 것은 관광객 감소의 여파를 보려고 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 본토보다 한국에 더 가깝고 부산에서 배로 1시간 10분이면 닿는 곳, 한반도와는 오랜 악연과 교류의 역사를 쌓아온 곳에서 갈등의 회오리로 빠져드는 한일 관계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었다.○ 곳곳에 녹아 있는 한반도 관련 역사 부산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북단에 있는 히타카쓰(比田勝) ‘한국전망소(대)’에는 ‘부산 49.5km, 하카타(博多) 145.0km’라는 글귀가 큰 지도 위에 표시돼 있다. 한국 휴대전화 전파나 라디오 신호도 잡힌다. 부산을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일본이 서울 탑골공원 팔각정을 그대로 본뜬 전망대를 세워 놓은 것은 관광객 유치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일제강점기 숯을 굽거나 군사시설 건설 등을 위해 강제노역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명절 때 찾아와 고국을 바라보며 눈물짓던 곳이다. 요즘은 한국인의 발길이 끊겨 정자만 홀로 서 있다. 대마도에서 기울어가는 국운의 비애와 ‘망국의 한’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 면암 최익현의 순국비와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다. 을사늑약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킨 면암은 체포돼 유배 올 때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며 양쪽 짚신 바닥에 고국의 흙을 한 줌씩 담아 왔다고 한다. 구치소에서 상투를 자르려 하자 단식으로 맞서다 아사해 순국했다(황백현 ‘대마도 역사 기행’). 구치소가 있던 터 주변에 티아라 쇼핑몰이 들어섰고 면암의 장례가 치러졌던 사찰 슈센지(修善寺)에는 순국비가 세워져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찾는다. 덕혜옹주가 1931년 강제로 대마도주의 세손과 정략결혼을 한 뒤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동포들이 결혼 봉축 기념비를 세웠다.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던 기념비를 찾아 한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닿는 곳에 세워 놓았다. 한반도의 아픈 역사가 관광상품화되고, 몰려오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이 경계심을 갖는 곳, 일본을 응징하자고 관광을 중단하자 일본 우익들이 속으로 반가워하는 곳, 대마도의 의미는 한국과 일본 모두에 복잡하기만 하다.○ 조선통신사 황윤길 현창비의 교훈 부품·소재 산업에 대한 높은 대일 의존도를 악용해 경제 보복을 가하는 일본을 대하며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것은 이즈하라에 있는 ‘통신사 황윤길 현창비(顯彰碑)’다. 도로를 지나는 운전자에게 물으니 잘 안다는 듯 바로 위치를 알려주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대아호텔 뒤편 산 중턱에 있는 현창비는 2011년 한일 양국 인사들이 함께 세우고 비 옆에 설명문도 세웠다. 일본어 설명문이 가슴을 때린다. “정사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만하고 험악한 풍모로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돌아가서 상신했다. 당시 정권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부사의 말만 듣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바다를 뒤집는 대군이 내습했을 때 아무런 방책이 없는 국가의 참상을 보게 되었다.” 황윤길은 교토(京都)에 갔다 돌아가는 길에 대마도주 소요시토시(宗義智)로부터 조총 2정을 받아 조정에 바치면서 침입 대비를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요시토시는 도요토미가 1만8000여 명의 병력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킬 때 5000여 명을 동원해 참가한 자다.○ ‘관광 보복의 역설’ “3개월 전 50% 특가로 돈을 지불했는데 취소해도 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왔어요!” “딸이 오래전 예약해서 바꾸거나 취소하지도 못한다고 해서….” 대마도 단체 관광객과 가족 관광객이 누가 굳이 묻지 않아도 하는 말이다. ‘일본 가지 맙시다’에 동참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리라. 대마도를 오간 한국인 관광객은 8월 29일 272명, 9월 2일 246명 등으로 예년 이맘때 하루 3000여 명에 비해 뚝 끊겼다. 일본 언론은 “수도꼭지가 잠겨 대마도가 마르고 있다” “재해에 준하는 사태”라며 위기감을 나타냈다. 갈등이 장기화하면 관광 관련 종사자들이 본토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등으로 빠져 나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관광 중단은 주로 숙박 식당 렌터카 등 관광과 낚시 분야로 대마도에 진출한 200여 명의 한국인이나 부산의 대마도 전문 여행사, 여객선 선사들에게도 큰 피해를 안기고 있다. 대마도 관광업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은 관광 중단 사태를 계기로 일본에서 ‘한국 편중’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진 것이 관광 산업 피해보다 아픈 점이라고 했다. 대마도의 관광산업 타격 소식을 전하는 일본 언론 기사에는 “국익을 위해 잘됐다”는 댓글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인의 땅 매입 비율이 0.26%가 넘었다며 “한국이 쓰시마를 다 사간다”는 경고도 수년 전부터 나오고 있다. 대마도에서 10년 넘게 거주했다는 A 씨는 “관광산업 등을 통해 대마도가 자연스럽게 한국 경제의 영향권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제동이 걸리게 됐다”고 말했다.○ 조선과 왜의 국서를 위조해 살아남았던 대마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대마도주 소요시토시는 선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국서와 국새를 위조하는 ‘간지(奸智)’를 부려 양측의 교린을 유도했다. 200년 이상에 걸쳐 12차례 오간 조선통신사의 물꼬를 텄다. 이즈하라의 시내버스 앞과 옆면에까지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티아라 쇼핑몰 주변에는 1811년 마지막 통신사 일행을 접대했던 장소라는 표지석이 3개나 세워져 있다. 대마도가 한반도와 우호 교류할 당시 경제와 문화가 번성했음을 섬 곳곳에 새겨 놓은 통신사 행렬도와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반면 왜구의 근거지일 때는 토벌의 대상이었고 전쟁이 나면 장정이 징발돼 나갔다. 이번에는 과거사 갈등으로 ‘관광 중단’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한일은 불구대천의 전란을 겪고도 통신사 교류를 했고, 천추에 못 잊을 강점기를 거친 후에도 동아시아 번영의 역사를 함께 썼다. 대마도 곳곳에 남은 역사의 흔적과 텅 빈 쇼핑몰, 국제선여객터미널 등은 양국이 빨리 진정한 과거사 청산을 통해 ‘역사의 굴레’를 벗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충고하는 듯했다. 대마도=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 20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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