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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천광암 논설주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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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5~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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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말년 없다”는 文정부의 임기말 캠코더 내리꽂기

    문재인 대통령은 3일 국회의장단 및 상임위원장 초청 간담회에서 “우리 정부는 말년이라는 게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협치하기에 좋은 시기라는 말”이라는 부연설명도 있었다. 하지만 여야 협치가 작동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여당이 독소조항투성이 언론중재법을 상임위에서 꼼수로 밀어붙인 것이 불과 한 달도 안 지난 일인 데다, 여당이 본회의에서 법안을 강행 처리할 가능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 정부에는 ‘말년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공공기관이나 관련 공기업 등에 대한 캠코더(대선캠프, 코드인사, 더불어민주당 출신이라는 뜻) 알박기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임기 초반 낙하산은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1년도 안 남은 ‘말년’까지 무리하게 낙하산을 내리꽂는 일은 드물었다. 문 정부가 유별나다. 국민의힘 서일준 의원이 공공기관 공시내용 등을 통해 취합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임명된 39개 부처 산하 370개 공공기관의 임원 728명(당연직 제외) 중 99명이 캠코더 인사라고 한다. 금융권 등 연봉이 센 곳을 집중 공략한다는 점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전문성과 업무 경험이 없는 문외한들을 앉히려다 보니 탈이 나는 경우도 많다. 일례로 한국예탁결제원은 최근 한유진 전 노무현재단 본부장을 상임이사로 선임하려 했으나, 거센 비판 여론에 부딪혀 브레이크가 걸렸다. 2012,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서 특보로 활동한 한 전 본부장은 금융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없다. 주택금융공사는 이달 초 공석이 된 상임이사 자리에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 캠프에 참여한 장도중 전 기획재정부장관 정책보좌관을 내정해 인사검증을 하고 있다. 지난해 연봉만 2억1440만 원에 이르는 자리다. 노조는 그가 주택금융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인물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20조 원 규모 한국형 뉴딜펀드 운용을 맡고 있는 한국성장금융은 투자운용2본부장으로 현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한 황현선 연합자산관리 상임감사를 내정했다. 그가 2019년 지금 자리로 옮길 때도 금융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도 문 정부는 이들을 감싸는 데 급급하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6일 국회에서 황 감사의 전문성에 대한 질의가 나오자 “그분이 당에서도 오랫동안 일을 해서 전연 이 흐름을 모르지는 않는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2017년 현재 민주당(중앙당)의 회계자료를 보면 재산은 토지·건물·비품이 202억 원, 현금·예금이 16억 원으로, 주식·유가증권은 한 푼도 없다. 적어도 그가 당에서 일하면서 구멍가게 수준의 펀드라도 운영해 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임기 말 캠코더 알박기 인사가 판을 치게 된 데는, 역설적이게도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문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두 달 뒤, 김은경 당시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은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에 대해 조직적이고 은밀한 물갈이 작업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온갖 편법이 동원됐다. 심지어 꽂아 넣으려는 인사에게 환경부 직원이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주고 예상 면접 질문지까지 미리 건넸다. 그 결과 김 전 장관은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으며, 신 전 비서관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이 이들을 준엄하게 단죄한 것은 낙하산 인사라는 그릇된 관행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낙하산을 염두에 둔 캠코더들은 ‘이 판결 덕분에 다음 정권이 임기 도중에 바꿀 일은 없어졌다’고 내심 환호하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임기 말 낙하산 러시가 벌어질 일이 없다. 그래도 같은 진보 계열에 속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성과를 차치하더라도, 낙하산 인사를 바로잡아 보려는 노력은 했다. 김대중 정부는 공공기관장 임명에 외부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추천제를 처음 도입했다. 노무현 정부는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공정성 담보를 위한 절차적 틀을 만들었다. 문 정부에서는 이런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임기 말까지 억대 연봉으로 가는 막차에 올라타려는 사욕만 남아 판을 친다. 차기 대통령 선거까지는 이제 6개월이 남았다. 문 정부의 사실상 말년도 딱 이만큼 남은 셈이다.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정책의 실패로 ‘민생 낙제점’을 받은 이 정부가 염치나 부끄러움마저 잊으면, 반년 뒤 뭐가 남을지 궁금하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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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진짜 ‘징벌적 손배’감은 국민 뒤통수 때리는 부동산정책

    더불어민주당이 5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언론중재법 개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악의적인 명예훼손에 대해 손배 책임 부과는 물론이고 형사처벌까지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 미국 등 영미법 계통 국가에서만 징벌적 손배를 판례로 인정한다. 실제 적용도 아주 제한적이어서, 보도에 현실적 악의가 있었다는 점을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당은 고의·중과실 ‘추정’이라는 황당한 조항까지 만들어 언론에 징벌적 손배 책임을 물으려 한다. 국내외 언론단체뿐 아니라 대한변호사협회 같은 법률단체까지 나서서 우려를 표명할 정도로,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내용은 비상식적이다. 만약 징벌적 손배가 우리 법체계를 무시하고 아무 데나 마구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시급하게 적용해야 할 곳이 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가 급기야 실수요자 뒤통수 때리기로 전락한 부동산정책이다. 여당은 언론중재법 개정을 강행하는 이유로 가짜 뉴스에 대한 피해 구제가 급하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수천만 국민의 삶과 직결된 부동산 문제처럼 훨씬 더 시급한 일에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공급 쇼크”라고 호언했던 2·4대책이 줄줄이 제동이 걸리고 있는 가운데 정부·여당이 내놓는 것이라곤 사전청약 확대처럼 ‘무늬만 공급’인 대책뿐이다. 사전청약제는 이 정부의 정책 뼈대 중 하나였던 후분양제와 상반되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정부·여당이 정책 실패에 대한 반성이나 충분한 설명 없이 정책기조를 슬그머니 뒤집는 일은 이게 다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0일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실수요자가 집을 사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하거나 더 큰 부담이 되는 부분은 조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대출규제 완화를 시사했다. 보름 뒤에는 여당이 서민·실수요자에게 주택담보대출을 완화해주는 방안까지 내놨다. 그러나 이로부터 불과 석 달 만에 금융당국은 정책기조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고 무차별적인 대출 조이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 바람에 정부 정책을 믿고 매매계약을 한 실수요자들은 중도금과 잔금 치를 걱정으로 패닉에 빠진 상태다. 재건축 거주 의무를 둘러싼 혼란도 양상이 비슷하다. 정부는 지난해 6·17대책에서 재건축 조합원은 2년간 실거주를 해야만 분양권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전세난을 부를 것이 뻔한 근시안적 대책이었다. 실제로 집주인들이 의무 거주 기간을 채우려고 세입자를 내보내는 현상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이 정책은 1년 만에 백지화됐다. 결국 정부를 믿고 따른 사람만 ‘바보’가 되고 재산상 손실까지 입었다. 다음과 같은 경우다. 작은 재건축 아파트 1채를 보유한 A 씨는 자신의 집을 전세 주고, 직장 가까운 곳에 빌라를 빌려 살고 있었다. 하지만 6·17대책 때문에 멀쩡한 세입자를 내보내고 자신이 직접 들어가야 했다. 자신도, 세입자도 원치 않는 이사를 해야 했고 이사서비스 인테리어 중개료 비용으로 수천만 원이 깨졌다. 정부가 정책을 백지화했지만 세입자는 이미 이사를 떠난 다음이었다. 이와 유사한 피해 사례가 넘쳐나서 재건축 단지 인근의 인테리어 업체들이 때아닌 호황을 누릴 정도라고 한다. 이처럼 정책 무능과 변덕 때문에 불의의 피해를 입은 실수요자들 사이에서는 “방법만 있다면 정책당국자들에게 징벌적 손배 책임을 묻고 싶은 심정”이라는 원성이 나온다. 사실 일반적인 정책 실패에 대해 손배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발상이긴 하다. 그러나 이중삼중의 규제로 기본권에 해당하는 언론의 자유에 족쇄를 채우겠다는 것과 비교하면 오십보백보일 뿐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징벌적 손배의 전제가 되는 고의·중과실의 추정 조항의 하나로 ‘반복적인 허위·조작 보도를 한 경우’를 두고 있다. ‘반복’이 관건이라면 25전 25패의 부동산정책은 고의·중과실이 아니고 뭐겠는가. 여당이 ‘언론징벌법’을 밀어붙이는 독주의 배경은 180석에 이르는 압도적 의석이다. 지금의 의석 구조를 만들어준 지난해 4·15총선이 끝났을 때 당시 여당 지도부는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와 “국민 통합”을 강조했다. 이것이 진심이었다면 여당은 반민주적인 ‘언론징벌법’ 폭주를 멈추고 이때의 초심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의·중과실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부동산정책을 원상회복시키는 일 하나만으로도,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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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日 추월 기회 걷어차고 ‘잃어버린 30년’ 뒤쫓는 文정부

    일본 정부가 지고 있는 빚을 1만 엔짜리 지폐로 쌓아 올리면 후지산 2620개 높이라고 한다. 990조 엔에 이르는 거액이다 보니, 빚을 갚기 위해 더 많은 빚을 내는 돌려 막기가 매년 되풀이된다. 일본의 올해 예산을 한 달 지출 1000만 원 규모의 가계에 비유하면 빚 원리금 224만 원을 갚고 살림을 꾸리기 위해 411만 원을 새로 빚냈다. 인구의 고령화로 복지 수요도 매년 커지기 때문에 교육과 국방, 사회필수시설 확충 등에 써야 할 예산은 심한 압박을 받는다. 이에 따라 과거 최고 등급을 자랑했던 일본의 신용등급(무디스 기준)은 한국보다 2계단 낮고, 에스토니아 체코 등과 같은 등급까지 떨어졌다. 그나마 일본 정부가 파산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세계 3위 경제 규모, 내수와 수출의 조화, 기축통화인 엔화의 지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외순자산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일본이 심각한 ‘빚 중독’에 빠지게 된 것은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피해, 재정과 공공(公共)의 힘으로 경제를 떠받치는 손쉬운 선택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외환위기로 파산 문턱까지 갔지만 피눈물 나는 구조조정을 하고, 재정건전성 유지를 최우선 정책 기조로 삼는 등 일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 결과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한일 역전론’이다. 기초과학 및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전체 경제 규모 면에서는 일본이 크게 앞서지만 일부 질적인 면에서 한국의 추월을 보여주는 지표도 적지 않다. 물가 수준을 감안한 1인당 국민소득에서 한국은 2018년 일본을 넘어섰다. 한국 국민이 평균적으로 누리는 생활이 더 풍요롭다는 뜻이다. 이는 경제 분야를 넘어 안보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2000년만 해도 일본의 28%에 불과했던 한국의 국방비는 앞으로 1, 2년 안에 일본을 앞지를 것으로 전망된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최근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1% 이하로 유지해온 오랜 관행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도 한일 군사비 역전과 아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게 경제 성장의 힘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추월차선을 마다하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본의 뒤를 따르려 한다. ‘재정과 공공 중독’으로 가는 행렬을 앞에서 이끄는 리더는 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2019년 5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40% 선을 유지하겠다”고 보고하자 “근거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이것이 신호탄이었다. 퍼주기 재정으로 가는 문이 활짝 열렸다. 홍 부총리는 오랜 불문율이었던 ‘40% 룰’을 버리고 ‘60% 룰’을 새롭게 만들어 준칙이라고 내놨다. 그나마도 각종 예외 조항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데다, 적용은 다음 정부부터 하겠다는 것이어서 노골적인 면죄부나 다름없다. 문 정부 특유의 내로남불 논리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이던 2015년 9월 국가채무비율이 40%를 넘는 2016년 예산안이 제출되자 “새누리당 정권 8년, 박근혜 정부 3년 만에 나라 곳간이 바닥나서 GDP 대비 40%(결산 기준 실제 수치는 36%)에 달하는 국가채무를 국민과 다음 정부에 떠넘기게 되었다”고 비판했었다. 그런데 이 정부는 더 심한 부담 떠넘기기를 진행하고 있다. 2019년 37%였던 국가채무비율은 내년 50%를 돌파해 2024년 60%에 육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비어가는 것은 나라 곳간뿐만이 아니다. ‘그림자 나랏빚’이라 불리는 공공기관 부채도 이 정부 들어 50조 원이 증가했다. 선심성 일자리 정책으로 고용보험기금은 바닥을 드러냈고, 보장성을 강화한 ‘문재인 케어’로 건강보험기금은 3년 후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여권과 정부는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낮다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가파른 상승 속도와 재정 확장의 강한 중독성이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의 전례를 보면 국가채무비율이 40%에서 각각 100%와 152%로 급등하는 데는 3년과 6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음 대통령에 ‘인기 없는 재정 건전화 정책’을 뚝심 있게 밀어붙일 수 있는 후보가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현재로선 그 반대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 중에는 국가 재정을 빚더미에 올려놓을 위험한 것들이 적지 않다.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지, 아니면 잃어버린 30년을 뒤따르게 될지 여부는 포퓰리즘을 가려내는 국민의 안목에 달려 있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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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부동산정책의 막장, 홍남기의 공포 마케팅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지난달 28일 국토교통부 장관, 금융위원장, 경찰청장과 함께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는 반성도, 대책도, 비전도 없었다. 한마디로 뜬금없었다. 주택시장을 “공유지의 비극”에 비유한 것도 실소를 자아냈다. 형법에 주거침입죄까지 둬서 보호하는, 중요한 사유재산인 주택을 놓고 공유지 운운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굳이 공감 포인트를 찾자면 현 주택시장 상황이 ‘비극’이라는 점 정도다. 이마저도 비극을 낳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대목에 이르면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다. 홍 부총리는 부동산시장을 움직이는 힘으로 주택수급, 기대심리, 투기수요, 정부정책을 꼽았다. 그러면서 주택수급과 정부정책은 문제가 없고 기대심리와 투기수요가 문제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과연 그런가. 정부의 무능은 숱한 통계는 차치하고, 고위 정책당국자들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말에서도 확인이 된다. “아파트가 빵이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겠다”는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의 발언이 전부가 아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지난달 23일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야당 의원들의 부동산정책 관련 질책에 “방법이 있다면 정책을 훔쳐오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홍 부총리도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전세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한 추가 대책이 있느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특출한 대책이 있으면 정부가 다 했겠죠”라고 말했다. 무능에는 약도 없다고 하니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투기 탓은 과장이 심하다. 투기는 당연히 엄단해야 할 대상이지만,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정부가 ‘실거래가 띄우기’를 근절하겠다며 지난해 2월부터 올 1월까지 전국의 아파트 거래 79만 건을 뒤져 찾아낸 사례는 겨우 12건에 불과했다. 마치 미꾸라지 몇 마리가 전체 시장을 혼탁하게 하는 것처럼 침소봉대해서는 안 된다. 기대심리에 관한 한 정부는 거론할 자격조차 없다. 현재의 집값 상승 기대심리를 부추긴 주요인 중 하나가 ‘호언장담→정책 실패’의 반복으로 인한 학습효과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김현미 전 장관은 지난해 8월 26일 국회에서 “30대의 ‘영끌’에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의 발언이 나올 무렵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전국 아파트 값(KB국민은행 기준)은 18.4%나 올랐다. 이러니 ‘정부 말만 듣고 있다가는 벼락거지 아니면 바보 된다’는 불신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빈약한 밑천만 드러내 보일 게 뻔한 대국민 담화를 홍 부총리가 무슨 자신감으로 자처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홍 부총리의 최근 행보와 담화의 앞뒤 맥락을 보면 집값 거품론 또는 상투론 띄우기에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담화에서 자신이 최근 여러 차례 주택 가격 조정 가능성을 경고한 사실로 운을 뗀 뒤 “과거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서울 아파트 등 주택 가격이 9∼18%의 큰 폭 조정을 받은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공포에는 공포로, ‘패닉 바잉’을 ‘폭락 공포’로 잠재우겠다는 심산인 셈이다. 홍 부총리의 집값 상투론이 설득력과 파급력을 가지려면, 가까이에 있는 고위 공직자나 여당 의원들이 솔선해서 갖고 있는 집을 처분해야 한다. 정말 집값이 떨어질 것으로 믿는다면 무거운 종부세·재산세를 물어가면서 집을 끌어안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홍 부총리 설명대로라면 집을 처분한다고 해서 전세난·월세난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임대차3법 시행 이후 임대차 갱신율도 크게 높아지고 임차료 인상률도 안정돼서 “다수가 혜택을 누리는 중”이다. 그런데도 선뜻 집을 팔겠다고 나서는 이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은 왜 그런가. 문재인 정부는 민간 재개발·재건축에 융단폭격식 규제를 가하고, 1주택자에 대해서도 징벌적 세금을 부과하는 등 25번이나 고강도 부동산대책을 쏟아냈다. 그런데도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은 2017년 5월 6억635만 원에서, 지난달 10억2500만 원으로 69% 폭등했다. 하물며 말뿐인 내로남불식 상투론이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부총리가 나서서 ‘공포 마케팅’을 하는 구차스러운 모습은, 부동산정책이 더 이상 갈 데 없는 막장까지 왔다는 인상만 줄 뿐이다. 망가진 수급 기능을 복구시키는 데만도 정부가 할 일이 태산이다. 다주택자 탓, 투기 탓도 더는 식상하다. 지지지지(知止止止).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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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진보정권 자영업 잔혹사, 文 대통령의 잊혀진 약속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다.” 4단계 고강도 거리 두기가 시작된 가운데 내년 최저임금 5.1% 인상 결정이 나온 지난주, 수많은 자영업자들로부터 터져 나온 비명이다. 자영업자들은 가게 문을 닫은 심야에 차를 몰고 도심을 도는 1인 차량 시위를 벌이거나, 온라인을 통한 항의를 이어갔다.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바쁜 자영업자들이 이런 집단행동에 나서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 2004년 11월 서울 여의도 한강둔치에 음식점 주인 3만여 명이 모여 “못 살겠다”며 솥단지를 내던지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 효시에 가깝다. 김대중 정부가 무분별한 신용카드 장려 정책으로 싹을 뿌렸고, 카드대란 발발과 급격한 내수 위축으로 시작된 자영업 불황에 노무현 정부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에 비해 자영업자들의 이번 시위는 정부가 훨씬 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거리 두기의 경우 재난 극복을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지만 방역정책 혼선과 미흡한 손실 보상은 자영업자들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숱한 반대에도 현 정부가 아집과 독선으로 밀어붙인 최저임금의 무리한 인상에 관해서는 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면 인건비 감당이 어려운 자영업자들이 직원을 내보낼 것이라는 점은 누구라도 쉽게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2018년 8월 장하성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은 “최저임금을 지불해야 하는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가 늘었다”면서 “고용 악화를 최저임금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며 이를 부인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불과 4개월 뒤를 못 본 근시안이었다. 그해 12월부터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 수는 감소세로 돌아서, 지난달까지 31개월 연속 줄었다. 반면 고용원 없는 1인 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자는 꾸준히 증가하는 중이다. 자영업자들 중에는 2∼4명이 하던 일을 혼자 감당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대 구직자들 사이에선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 3개월간 이력서를 돌렸지만 한 곳도 연락이 안 온다”는 하소연이 줄을 잇는다. 최저임금은 고사하고 무일푼 처지가 된 것이다. 이 정부는 무리한 최저임금 인상을 강행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적반하장으로 자영업자들의 ‘헝그리 정신 부족’을 탓하기까지 했다. 2019년 1월 김현철 당시 대통령경제보좌관이 한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영업자들이 힘들다고 하는데, 세계 7대 경제대국(한국)에 있는 식당들이 왜 국내에서만 경쟁하려 하냐”고 책망했다. 온 가족이 이민 짐을 싸서 인생 2막에 도전하라는 주문이었던 셈이다. 이것이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 정책 등 실패를 거듭해 온 현 정부 경제팀의 인식 수준이다. 그러니 세금 내기 싫으면 집 팔고 먼 데로 이사 가라는 식의 황당한 정책이 나온다. 최저임금은 꼭 있어야 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인상도 해야 한다. 하지만 생산성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인상은 사람의 몸을 침대에 맞춰 늘이거나 잘라서 죽이는 그리스 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 침대’가 될 위험성이 크다. 노동생산성이 한국보다 높은 일본과 비교해 보면 결코 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을 2017년 6470원에서 2022년 9160원으로 41.6% 올렸다. 이에 비해 일본은 같은 기간 848엔(8777원)에서 930엔(9626원)으로 평균 9.7% 인상하는 데 그쳤다. 터키와 한국에만 있는 법정(法定) 주휴수당(주당 15시간 이상 일한 근로자에 대해 하루 치 임금을 추가로 주는 제도)을 감안하면 이미 한국의 실질 최저임금은 일본을 넘어선 상태다. 제도의 유연성에서도 차이가 난다. 일본은 물가나 생산성에 맞춰 지역·산업별로 최저임금이 다르다. 예컨대 올해 도쿄의 최저시급은 1013엔이지만 아키타 등 7개 현(縣)은 792엔으로 221엔이나 차이가 난다. 코로나와 최저임금 이중고에 대출 돌려 막기로 겨우 버티고 있는 자영업자들이 정부에 주휴수당 제도의 개선과 최저임금의 차등화를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2019년 2월 자영업자들과의 대화에서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의견도 충분히 대변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스스로를 “골목상인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자영업에 대한 애정도 내비쳤다. 최소한 주휴수당 개선과 최저임금 차등화를 위한 ‘물꼬’라도 터주는 게, 생존의 벼랑 끝에 선 자영업자들에 대한 도리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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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두파혈류’ 미-중 신냉전에서 한국경제가 살아남는 길

    2019년 말부터 최근까지 중국 누리꾼 사이에서 ‘입관학(入關學)’이 유행했다. ‘관(關)’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산해관을 가리킨다. 만주에서 건국한 청나라가 산해관을 깨고 들어가 명나라를 무너뜨린 역사에서 가져온 비유다. 여기에는 미국이 중국을 ‘변방’ 다루듯 하는 데 대한 불만이 담겨 있다. 중국이 제대로 대접 받으려면, 청나라가 산해관을 돌파했듯이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입관학은 중국 정부의 입장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1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한 연설을 들어보면, 이 둘은 정서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시 주석은 ‘두파혈류(頭破血流·머리가 깨져 피가 흐른다는 뜻)’라는 표현으로 더 이상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세계 2위인 중국의 경제력과 첨단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현재 중국이 최대교역국인 나라는 100개국에 이른다. 57개국인 미국을 압도한다. 중국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의 70%를 넘어섰다. 이 추세라면 2028년경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이 크다. 질적인 면에서도 별로 밀리지 않는다. 중국은 첨단 산업에서도 미국의 맞수로 올라섰다. 이는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이 2000∼2019년 10개 하이테크 산업의 특허를 분석한 결과에 잘 나타난다. 10개 분야 중 인공지능, 재생의료, 자율주행, 블록체인, 사이버보안, 가상현실, 전도성 고분자, 리튬이온전지 등 9개 분야의 특허 출원에서 중국은 1위를 휩쓸었다. 양자컴퓨터만 미국에 이어 2위였다. 그러나 중국에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 있다. 반도체다. 중국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쏟아부은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중국 정부는 2014년 기금 170조 원을 조성해 기업을 지원했고, 미국 일본 등에서 거액의 돈 보따리를 안겨가며 전문경영인과 기술자들을 닥치는 대로 스카우트했다. 그런데도 성과는 지지부진하다. 자급률이 낮은 탓에 지난 한 해 동안에만 반도체 수입에 430조 원을 써야 했다. 여기에 미국의 수출규제까지 받게 된 중국이 단기간에 돌파구를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영원한 강자도 약자도 없는 것이 반도체 산업의 역사다. 삼성전자와 TSMC도 긴 무명 시절과 시련기를 거쳤다. 현재 중국에는 5만 개의 반도체 기업이 있다. 이 중에서 삼성전자나 TSMC 같은 기업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시 주석도 최근 최측근인 류허(劉鶴) 국무원 부총리를 반도체 사령탑으로 낙점해 ‘반도체 굴기’에 가속도를 내려는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과거 시 주석이 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적이 있다. 당시 중국은 이를 딱 부러지게 부인하지 않았다. 이런 속마음을 가진 중국이 반도체 자립의 숙원을 이뤘을 때, 한국경제에 닥칠 시련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과거 사드 배치를 빌미로 롯데를 사실상 중국시장에서 쫓아내고 한한령(限韓令)으로 한류를 말살한 경제적 횡포가 수시로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대국굴기’에 한국경제가 머리가 깨지는 수난을 겪지 않으려면 유일한 지렛대인 반도체 분야의 우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한다. 지금 삼성전자가 메모리 1위라고 해서 안심해선 안 된다. ‘반도체 제국’ 인텔의 전설적 최고경영자(CEO) 앤드루 그로브는 “사업의 성공은 필연적으로 파멸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메모리 시장을 만들다시피 한 인텔조차도 한창 잘나가던 도중에 일본 기업들의 도전을 만나 메모리 사업을 접었다. 반도체처럼 변화가 극심한 산업에서 살아남으려면 미세한 변화의 조짐에도 민감하게 대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반도체 사업의 이 같은 속성 때문에 경제계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조속한 사면을 여러 차례 건의해 왔다. 더구나 지금 반도체 시장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은 미세한 조짐 정도가 아니다. 미국 중국 대만 일본 등이 공급망의 완전한 ‘새판 짜기’에 들어간 상황이다. 특히 미중 간의 신냉전은 반도체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경제 질서를 통째로 바꿔 놓을 공산이 크다. 우리에게는 한순간의 실기가 파멸로도 직결될 수 있다. 한국 반도체의 미래를 좌우할, 문재인 대통령의 결정이 늦어져선 안 되는 이유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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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생태탕 시즌2’와 이준석號 제1야당의 길

    현명한 사람은 흔들리는 나무에서 바람을 본다. 동남풍인지, 북서풍인지, 비를 머금은 바람인지…. 그런데 세상에는 바람이 싫다고 나무를 베어내려 덤비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국민의힘 대표 경선 이후 강경 친문들의 모습이 딱 그런 짝이다. 이준석이란 나무만 찍어내면, ‘이준석 현상’으로 나타난 세대교체·정권교체 바람이 잠잠해질 것이라 믿는 모양이다. 이들의 이준석 ‘때리기’는 취임 첫날 따릉이 출근 장면에서 막이 올랐다.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인데 쇼를 했다”, “헬멧을 안 썼다” 등 시답잖은 트집이었다. 멀쩡한 국산 구두를 놓고 “대표 되더니 페라가모 신고 다닌다”는 마타도어도 나왔다. 18일에는 더불어민주당 김용민 최고위원과 김남국 의원이 나서서 “산업요원으로 복무하던 중 지원 자격이 없는 국가 사업에 참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대표는 “이미 10년 전에 끝난 일로 전혀 문제가 없다”며 당시 제출한 지원서 등도 공개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시간이 가려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준석 현상’에서 확인된 민심을 변화의 계기로 삼기보다 ‘이준석 때리기’에 몰두하는 행태가 여당에 마이너스라는 점이다. ‘내곡동 생태탕’을 떠올려 보면 결과가 뻔히 보인다. 주거 등 서울시민들의 절박한 민생 문제 해결보다는 오세훈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에 치중한 결과는 여당의 기록적인 참패였다. 여권 일각에서조차 “이준석 대표에 대해 감정적 대응을 하는 걸 유권자들이 좋게 봐주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실정이다. ‘이준석 현상’에는 보수층의 정권교체 바람도 힘을 실었지만 1차적인 기폭제가 된 것은 2030의 세대교체 요구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요구는 4·7 재·보선에서 이미 확인됐다. 그런데도 여당은 ‘사탕발림’식 청년 대책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임기 1년도 안 남은 문재인 내각에 청년특임장관 자리를 만들고, 게임 하고, 가죽재킷 입고, 뮤직비디오 찍어서 떠난 청년들의 마음을 되돌려보겠다는 것이 여당의 현주소다. 그렇다고 야당이 여당보다 크게 잘했던 것도 아니다. 국민의힘은 쪼그라든 기득권이라도 서로 차지하겠다며 사분오열 다투는 모습만 보여줬다. ‘이준석 현상’은 거대 여당이 의석수만 믿고 변화에 둔감한 공룡이 됐으니 야당 너희들이 먼저 바꿔 보라는 채찍질이다. 한국갤럽의 지난주 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이 국정농단 탄핵 후 처음 30%를 찍었다고 하지만 이는 언제든지 거둬질 수 있는 것이다. 야당이 여당의 퇴행적인 행태만 믿고 안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민심이라는 바다가 정당이라는 배를 얼마나 쉽게 뒤집는지는, 1945년 영국 총선이 잘 보여준다. 보수당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을 전면에 세우고도 노동당에 213 대 393으로 참패했다. 당 개혁을 방치하고 복지정책 등 내정 주도권을 노동당에 내준 것이 원인이었다. 힘겨운 전쟁을 치르느라 여력이 없었던 것인데도 민심의 선택은 냉정했다. 영국의 보수당은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6년간 뼈를 깎는 자기 혁신을 한 끝에 정권을 되찾았다. 데이비드 윌레츠 전 의원에 따르면 보수당은 당 조직과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돌파구를 청년과 여성에서 찾았다. 1946년 ‘젊은보수당’을 창설해 청년들을 대거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또 ‘남성 노동자’ 색채가 강한 노동당과의 차별화를 위해 ‘여성 소비자’를 전략적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환경이 있었기에 25세의 마거릿 대처가 총선 출마를 위해 보수당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보수당은 또 당 재정을 돈 많은 출마자에게 의존하던 방식에서 광범위한 소액 모금 방식으로 바꿨다. 이를 통해 ‘부자당’ 낙인을 지웠고 청년 등 비(非)기득권 계층의 출마 문턱을 낮췄다. 경제 정책에서도 탈(脫)규제와 반(反)국영화 등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확고히 하는 한편으로 고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케인스주의를 받아들이는 실용(實用) 노선을 취했다. 국민의힘이 가야 할 길은 350년 역사를 성공적으로 써 내려온 영국 보수당이 걸었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영웅’ 처칠조차도 보수당을 구하지 못했듯이, 내부 혁신을 게을리하는 야당에는 ‘이준석 효과’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여당도 마찬가지다. ‘생태탕식 네거티브’와 같은 낡은 정치와는 선을 긋고 180석에 걸맞은 책임정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호된 심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36세의 ‘0선’을 제1야당 대표로 끌어올린 민심의 참뜻이 뭐겠는가. 내년 3월 9일까지 누가 더 뼛속까지 바꾸는지를 지켜보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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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이재명 vs 유승민·윤희숙·정세균 기본소득 난타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교수와 에스테르 뒤플로 교수는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부부이자 사제 사이로 개발도상국 빈곤 문제에 정통한 두 사람은 2019년 말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이라는 공동 저서를 내놨다. 이 책을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읽었는지 여부를 놓고 정치권에서 때아닌 설전이 벌어졌다. 발단은 이 지사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을 겨냥해 4일 오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 이 지사는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배너지(이하 바네르지로 표기) 교수와 사기성 포퓰리즘이라는 유승민 의원 모두 경제학자라는데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까요?”라고 질문을 던진 뒤 “배너지 교수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세계적 석학이고, 유승민 의원님은 뭘 하셨는지 몰라도…”라며 유 전 의원을 공격했다. 그러자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책은 읽어 보셨나요? 아전인수도 정도껏 하십시오”라고 응수하고 나선 것이다. 바네르지 교수 부부가 자신들의 저서에서 주장한 것은 ‘울트라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모든 국민을 한 명도 빠짐없이 지원 대상으로 하지만 이들이 예시한 울트라 기본소득은 소득 상위계층(25%)을 제외한다. 또한 지원금액 규모에서도 기본소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지사의 인용이 무리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은 이뿐만이 아니다. 바네르지 교수 부부는 ‘부유한 나라’에서 기본소득이 “(로봇 등의 발달로 인한 실업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취지로 주장하면서 기본소득의 유용성을 가르는 두 개의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복잡한 복지 프로그램을 운용할 관리 역량이 있는지 여부다. 둘째, 직업의 의미다. 직업이 삶의 보람과 자존감을 확인하는 수단인가, 그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궁여지책인가에서 기본소득의 유용성이 갈린다는 것이다. 한국이 이 중 어디에 속하는지는 책에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뒤플로 교수가 작년 11월 한 기자회견의 답변에서 충분한 유추가 가능하다. 그는 한국을 “경제 규모가 크고 많이 발전한 나라”라고 하면서 “(한국은) 어떤 사람을 언제 지원해줄지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즉 부유한 나라이고 복잡한 복지 프로그램을 운용할 관리 역량을 갖춘 나라로 본 셈이다. 이런 점들을 윤 의원과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나서서 지적했지만 이 지사는 명확한 해명을 하지 않았다. 대신 5일 오전 SNS를 통해 한국은 ‘전체적으로 선진국이지만 복지는 후진국이어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추가로 내놨다. 그러면서 이 지사는 2016년 기본소득 법제화가 국민투표에 부쳐졌으나 76.9%의 압도적인 반대로 부결된 스위스의 사례도 거론했다. 이런 내용이다. “복지선진국은 사회안전망과 복지체계가 잘 갖춰져 있고 조세부담률이 높아 기본소득 도입 필요가 크지 않고, 쉽지도 않습니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려면 이미 높은 조세부담률을 무리하게 더 끌어올리거나 기존 복지를 통폐합해 기본소득으로 전환시키는 부담이 크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같은 복지선진국에서 기본소득 제안 국민투표가 부결된 이유가 이해되시지요?” 그러나 이는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다. 스위스는 과도한 공공복지를 지양하고, 일관되게 가벼운 세금 정책을 펴온 나라다. 일명 ‘복지 느림보’다. 이 지사는 한국이 복지후진국이라는 근거 중 하나로 “OECD 평균에 한참 미달하는” 국민부담률(국민이 낸 세금과 사회보장성 기금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들었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9년 스위스의 국민부담률은 28.5%로 37개국 중 30위다. 한 순위 낮은 한국에 비해서는 불과 1.1% 높은 수준이다. 1.1%가 복지선진국과 복지후진국을 가르고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재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 지사의 기본소득은 단기 연간 25조 원, 중기 연간 50조 원, 장기 연간 300조 원의 재원 투입을 염두에 둔 대형 복지 구상이다. 또한 핀란드 등에서 소규모로 실험이 진행된 적은 있지만 미국 알래스카 외에는 본격 시행된 곳이 없는, 급진적이고 모험적인 제도다. 여권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이 지사는 기본소득을 간판정책으로 삼은 이상, 세세한 내용에 대해서도 정확한 인용과 통계 해석, 객관적인 해외사례 제시를 통해 국민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사기성 포퓰리즘”이라는 유형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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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44조 원 투자 선물과 55만 명 백신 지원

    2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의 풍경은 지난달 16일 미일 정상회담과는 사뭇 달랐다. 오찬 메뉴가 햄버거에서 크랩 케이크로 ‘격상’됐고 식탁 배치도 바뀌었다. 미일 정상회담에서는 두 정상이 2m 정도의 긴 직사각형 테이블 양 끝에 멀찍이 떨어져 앉았으나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두 대통령이 서로 팔을 뻗으면 손끝이 닿을 수 있는 작은 원탁을 놓고 마주했다. 공동회견도 대조적이었다. 미일 정상의 회견은 시종 딱딱했던 반면, 한미 정상의 회견은 부드러운 분위기에 유머가 넘쳤다. 여기에는 4대 그룹이 준비한 44조 투자 패키지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공동회견에 참석한 한국 기업인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청한 뒤 박수갈채와 함께 “생큐”를 3번이나 연발한 대목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이런 장면은 과거 다른 한국 대통령의 회담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다. 역대 정상회담에서 한국 대통령은 늘 ‘을’이었고, 미국 대통령은 ‘갑’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는 원조와 차관을 한 푼이라도 더 받는 것이 한국 대통령의 숙제였다.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때는 시장 개방 압력을 버텨내는 것이 우선과제였다. 미국의 날 선 공세에 귀를 막은 채 “덜 익은 사과(한국 시장)를 따 먹으면 배탈이 날 것”이라며 막무가내로 버틸 때도 있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투자를 애걸해야 하는 처지였다. 노무현 대통령 때도 국가신용등급 악화 때문에 방미길이 편하지 않았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는 큰 부담도 없었고, 기업들이 대통령을 위해 별도의 ‘선물’을 준비해야 할 일도 없었다. 대형 선물 보따리가 등장한 것은 2017년 6월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에서다. 당시 방미에 동행한 경제사절단은 ‘15조 원 투자+26조 원 제품구매’를 약속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의 2017년 11월 방한 때는 ‘19조 원 투자+63조 원 제품구매’ 패키지를 안겼다. 문 대통령은 한국 기업들이 피땀으로 일군 자본과 기술의 결실을 외교무대에서 ‘마이너스통장’처럼 빼 쓰는 행운을 누린 첫 한국 대통령인 셈이다. 물론 44조 원을 순전한 비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 기업들로서는 투자액보다 훨씬 큰 수익을 기대하고 내린 결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 가능성이 큰 미국 시장을 선점한다는 의미가 적지 않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 기업인들에게 “생큐 생큐 생큐”를 외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 등에서 미국 중심의 공급망을 구축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자력만으로는 달성할 길이 없다. 미국으로선 반도체 분야의 강자인 삼성전자의 현지 투자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배터리는 중국이 이미 시장을 석권한 상태다. 중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한국 배터리 기업의 참여가 없으면 미국의 전기차 육성은 허무한 구호로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 기업의 투자에 대한 미국의 절절함이라는 강력한 지렛대를 문재인 정부가 협상에 제대로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큰 의문이 남는다. 이번 회담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던 코로나19 백신과 관련해서 양국은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을 구축하기로 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모더나와 백신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했고, SK바이오사이언스는 노바백스와 연구개발 양해각서를 맺었다. 긴 안목에서 안정적인 백신 공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은 당장 눈앞의 백신 가뭄 해소가 급한 처지다. 백신 물량 부족으로 지난 3주간 신규 접종을 거의 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접종률도 아직 1차 7.4%, 2차 3.4%에 불과해 갈 길이 멀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타개해 줄 수 있는 해법으로 기대를 모았던 백신 스와프는 결국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직접 지원을 확약받은 백신은 국군 장병들에게 접종할 55만 명분이 전부라고 한다. 미국이 지금까지 해외에 지원하겠다고 밝힌 8000만 회분의 물량과 그동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부풀었던 기대치에 비춰보면 실망스러운 결과다. 문 대통령은 “회담의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면서 “기대 이상”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세 번의 “생큐”와 박수갈채, 그리고 크랩 케이크 오찬으로 달래기에는 44조 원짜리 선물 보따리에 대한 손실감이 너무 큰 제72차 한미 정상회담이었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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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피 말리는 반도체전쟁, 文 대통령이 나서야 하는 이유

    인간의 머리카락은 1초에 약 3∼4나노미터씩 자란다고 한다. 현재 최첨단 반도체는 5나노 공정으로 제조한다. 머리카락이 1초 동안 자라는 길이 정도의 굵기를 가진 얇은 펜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 위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고난도 기술이다. 반도체 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해온 인텔조차도 5나노는 고사하고 7나노의 벽을 넘지 못했다.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만이 이 극한의 세계로 진입하는 길을 확보했다. 최근 대만 타이난시 외곽에서는 TSMC의 3나노 생산라인 내부 공사가 한창이다. 반도체는 기술력 싸움인 동시에 돈의 전쟁이다. 나노 숫자가 내려갈수록 들어가는 돈은 급격히 늘어난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축구장 22개 크기인 이 공장은 전 세계 건축물을 통틀어 세 번째로 비싸다. 모두 22조 원이 투자됐다. TSMC는 이 밖에도 천문학적인 투자 계획을 줄줄이 내놓고 있다. 올해부터 3년간 투자하기로 한 금액만 148조 원에 이른다. TSMC가 이처럼 투자 계획을 공격적으로 쏟아내는 것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 삼성의 추격을 확실히 뿌리치기 위해서다. 삼성은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133조 원을 투자해 2030년까지 파운드리 분야 세계 1위에 올라서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삼성이 만년 2위의 자리를 박차고 부동의 1위인 TSMC를 상대로 본격적인 추격을 다짐한 순간이었다. 삼성은 명운을 건 승부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첫째, 기술력. 삼성은 5나노는 물론 3나노 이하 미세공정에서 TSMC와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적수다. “미국 중국은 우리 상대가 아니다”라고 일축하는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도 “삼성은 강력한 경쟁자”라고 평가한다. 둘째, 자금력은 파운드리만 놓고 보면, 삼성이 열세다. TSMC가 ‘3년간 148조 원 투자’ 카드를 꺼낸 것은 삼성의 ‘10년간 133조 원 투자’ 청사진에 대한 기죽이기이자 몸집 과시라고 봐야 한다. 셋째, 마케팅도 삼성이 불리하다. TSMC는 파운드리만 한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이 모토다. 반면 삼성은 스마트폰에서는 애플과, 시스템반도체에서는 인텔과 경쟁하는 처지다. 이들의 경계심을 뚫고 이들로부터 물량을 따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스마트폰용 고성능 반도체의 오랜 고객이었던 애플이 특허분쟁을 전후해 삼성과 결별하고 TSMC와 손을 잡은 것이 냉엄한 현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파상적인 물량전과 속도전을 벌이고 있는 TSMC에 맞서 투자와 기술 개발, 마케팅을 지휘해야 할 사령탑인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가 삼성으로선 뼈아픈 대목이다. 파운드리에 133조 원을 쏟아붓고도 패한다면 아무리 삼성이라고 해도 그 충격파를 감당하기 어렵다. 비단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전자가 코스피에서 차지하는 시가총액 비중은 25%, 삼성 제품을 포함한 반도체가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가깝다. 반도체 전쟁에서 삼성의 승패는 한국 경제의 흥망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런데도 지난 몇 년간 정부는 반도체 산업 전반에 걸쳐 무(無)전략으로 일관해 왔다. 흔한 연구개발 지원도 하지 않았고 심각한 인력난도 방치했다. 정부 문서에 ‘2017∼2018년 반도체 분야의 정부 신규 사업이 전무하다’는 표현이 들어 있을 정도다. 각종 규제입법으로 발목을 잡는 일도 많았다. 삼성의 미국 공장이나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사례를 보면 부지 계약에서 가동까지 2년이 안 걸린다. 반면 한국에서는 각종 규제와 ‘떼법’, 민원에 붙들려 6년을 넘기기 예사다. 삼성전자 평택공장은 송전선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5년이 걸렸다. 정부와 여당은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자동차 공장이 멈춰 서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웨이퍼를 들고나와 흔든 이후에야 “K반도체 벨트 전략을 만든다”, “반도체 특위를 만든다”며 뒤늦은 부산을 떨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이 격해지면서 반도체는 산업의 쌀인 동시에 안보의 칼이 됐다. 한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본이 한국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 위해 골랐던 ‘비수’가 반도체 소재 수출 금지였다. 현재 전 세계적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으려면 당정과 경제·외교안보·교육 관련 전 부처가 총력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문 대통령뿐이다. 1나노를 다투는 반도체 산업에서 1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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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바이든 때린 시진핑, 시진핑 띄운 文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0일 열린 보아오포럼 기조연설에서 미국을 향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대국은 대국답게 행동해야 한다”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보스처럼 군다” 등 직설적이고 날 선 언어였다. 이날 포럼에는 문재인 대통령도 영상을 통해 축사를 했다. 문 대통령의 축사는 시 주석이 미국을 작심하고 비판하는 자리에서 이뤄졌다는 점, 지금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한 달가량 앞두고 백신 지원 등 민감한 이슈를 조율해야 하는 시기라는 점만으로도 적절치 않았다. 이 포럼의 부제가 ‘글로벌 거버넌스와 일대일로 협력의 강화’였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과연 축사를 해야 했는지 의문이 든다. ‘일대일로’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광대한 지역에 중국 주도로 철도 도로 통신망 등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명목은 인프라 개발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패권을 확장하려는 시도다. 미국으로선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다. 한 달 전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일대일로에 대한 본격적인 견제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한 터다. 문 대통령이 ‘신냉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민감한 미중 관계를 다루면서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이 아닌지 우려가 되는 대목은 또 있다. 문 대통령은 “신기술 분야에서 아시아 국가 간 협력이 강화된다면 미래 선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는데, 최근 신기술 분야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미국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이 중국 편에 선 듯한 인상을 받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의 최근 행보는 문 대통령의 발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스가 총리는 16일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5G와 차세대 모바일 네트워크 분야 협력을 위해 45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합의했다. 또 반도체 등 민감한 공급사슬에 대해 상호협력을 약속했다. 모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의 미중 경제 관계는 ‘디커플링(Decoupling)’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쉽게 말하면 커플처럼 함께 돌아가던 미중 경제가 남남처럼 따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디커플링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첫째, 공급사슬(Supply Chain)의 분리다. 중국이 전 세계 제조업의 공급사슬을 잠식하다시피 했는데 반도체와 차세대 통신 등 몇몇 분야는 중국과 분리된 공급사슬을 미국 주도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특히 군사적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큰 첨단기술에 대해서는 중국으로의 유입을 철저하게 막겠다는 것이다. 둘째, 공급사슬의 원활한 작동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미국 기업들과 첨단 분야 해외 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적극 장려한다는 것이다. 이날 시 주석 연설의 진짜 의도는 미국 주도의 ‘디커플링’을 공격하는 데 있었다. 시 주석은 디커플링이 경제법칙과 시장원리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디커플링은 상당 부분 중국이 자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2015년 발표한 ‘제조 2025’ 청사진도 원인 중 하나다. 기존 제조업에 대한 독식으로 모자라 반도체 통신 인공지능 등 첨단 산업분야도 중국의 ‘붉은’ 공급사슬로 옭아매겠다는 것이 이 계획의 골자였다. 추진하는 과정 또한 중국 정부가 민간 기업에 천문학적인 보조금과 저리의 융자금을 지원하는 등 불공정으로 얼룩졌다. 중국 내 외국투자기업에 대한 기술 이전 강요, 중국 시장에 대한 장벽 세우기, 지식재산권 도용 등의 ‘반칙’도 서슴지 않았다. 중국의 이런 움직임을 방치할 경우 경제와 안보를 모두 위협할 것이라는 인식은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정부와 의회가 모두 공유하고 있다. 디커플링은 한번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의 지각변동을 의미한다. 미국의 디커플링은 우리 정부와 기업이 서둘러 적응하지 않으면 생존의 문제와 맞닥뜨릴 수 있는 변화다. 특히 한국 수출의 18%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은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한국은 메모리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주요 장비와 소재도 미국과 일본 등으로부터의 수입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미국 일본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경쟁력을 잃을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의 지나친 친중 행보가 가뜩이나 갈 길 바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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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20대의 문재인 정권 4년 경험치

    세대와 정치적 성향 간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앤드루 겔먼과 예어 기차가 미국 백인들의 투표 행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세운 이론이다. 이들에 따르면 사람들이 평생 간직하는 정치성향의 가장 큰 부분은 14∼24세 때 겪은 정치적 사건과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이번 4·7 보선의 최대 이변으로는 20대 남자(만 18세 이상 포함)가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에게 몰표를 던진 것이 꼽힌다. 하지만 이들의 분노 투표는 선거 과정에서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20대의 “역사적 경험치”를 거론하면서 설훈 민주당 의원 등 여권 인사들의 20대 비하 발언들도 줄줄이 소환됐다. 친여 성향의 한 시인은 “돌대가리”라는 막말까지 쏟아내며 성난 표심에 기름을 부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그래도 72.5(오세훈) 대 22.2(박영선)의 격차는 충격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강경론이 판치는 친문 커뮤니티에서도 20대 남자와의 소통 부족에 대한 진지한 자성론이 나온다. 이대로 가다가는 1년 뒤 대통령 선거가 위험하다는 계산 때문일 것이다. 20대 남자들의 분노 투표에 대한 원인 분석과 응급처방 아이디어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중에는 문재인 정부의 페미니즘적 젠더 정책이 20대 남자의 표심이 떠나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해석의 뿌리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2018년 말 한국갤럽은 문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집단이 20대 남자, 가장 긍정적으로 보는 집단이 20대 여자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유 이사장은 당시 “젠더 이슈”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욕망이 욕망을 제어하는 시스템이다. 옳은 것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다. 20대 남녀 간의 지지율 격차는 문 대통령이 여성 장관 할당제 같은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본다고 생각하는 20대 남자의 지지율이 떨어진다면 그냥 감수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이었다. 보선 이후 갑론을박이 한창인 친문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심지어 20대 남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페미니즘 정책을 ‘손절’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온다. 이번 보선은 민주당 소속 서울·부산시장의 성폭력으로 인해 치러진 선거다. 이들의 성추행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박원순 재평가론 등을 띄우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면 유 이사장이 말한 페미니즘이 애초부터 여당 안에 있기나 했는지 의문이다. 20대 남자 대 20대 여자. 매사 이런 식으로 편을 갈라 보면 정작 중요한 본질을 놓치게 된다. 2018년 말 한국갤럽 조사에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에 대한 20대 여성의 지지율은 겨우 1%였다. 그런데 이번 서울시장 보선에서는 40.9%가 오세훈 후보에게 표를 줬다. 야당이 잘해서가 아니다. 여당이 잘못해서다. 이번 4·7 보선에서 나타난 20대 남녀의 표심은 문 정권의 지난 4년 경험치, 즉 무능 위선 내로남불의 결과물이다. 정권의 무능에 20대는 미래를 빼앗겼다. 현 정권은 어설픈 소득주도성장론을 앞세워 알바 일자리의 씨를 말렸고, 25전 25패의 부동산대책으로 평생 넘을 수 없는 집값 장벽을 세웠다. 직장이 있는 30대는 ‘영끌’이라도 해보지만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취업난에 처해 있는 20대는 한 세대 전체가 ‘벼락거지’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국 김의겸 김상조 박주민 등 문 정권 인사들의 끝없는 위선과 내로남불 행진은 20대가 중시하는 가치인 공정(公正)에 가장 반하는 것이다. 더구나 군 복무를 한 20대 남자들은 보편적인 인권을 중시한다는 진보정권이 북한 인권에는 말 한마디 못 하는 이중성과 모순에 대해 생각하면서 긴긴 초병(哨兵)의 밤을 보냈을 터다. 여당에 대한 평가에서 남녀의 차이가 있었다면 이런 것들이 요인이 됐을 수 있다. 20대 남녀의 표차를 놓고 세대 내 갈등에서 원인을 찾아서는 안 된다. 취업이나 주거 같은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면 세대 내의 견해 차이는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 말한 겔먼 등의 분석을 한국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20대의 문 정권 4년 경험치는 이들의 투표 DNA 안에 깊숙이 각인돼 앞으로 두고두고 영향을 끼칠 것이다. 20대는 최소한 앞으로 60년은 투표장을 찾을 세대다. 여권이 어느 세대보다 20대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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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보유세 수탈과 징수 사이

    문재인 정부가 무리한 공시가격 밀어 올리기를 강행하는 명분 중의 하나는 ‘공시가 현실화율 100%’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실패한 집값 잡기에 대한 책임을 1주택자에게까지 떠안기는 징벌적 보유세를 정당화하는 근거는 더더욱 될 수 없다. 지난해 10월 27일 국토연구원이 주관한 공시가 현실화 공청회에서 발표된 ‘현실화 계획(안)’을 보면 “외국의 경우, 공시가격은 실거래가 기준으로 현실화율이 100% 수준에 근접”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덴버)은 101.3%, 캐나다(온타리오주)는 100%, 호주는 90∼100% 수준”이라고 예시했다. 또 “대만은 토지에 대한 공시지가 현실화율 90%를 목표로 2005년부터 제고하고 있다”면서 2017년 기준 현실화율이 90%를 넘었다는 자료를 덧붙였다. 정말 그럴까. 첫째, 덴버 온타리오 호주 대만 사례를 가지고 ‘외국은 이렇게 한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다. 영국은 재산세 공시가 조사를 수십 년에 한 번씩 한다. 프랑스는 주택 임대 가치의 50% 정도로 과세표준을 정한다. 미국은 주마다 제각각인데, 덴버시가 어떻게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를 제치고 미국의 대표 사례가 됐는지 모르겠다. 둘째, 대만 사례 인용은 생략이 지나쳐서 왜곡에 가깝다. 대만 정부가 올해 발표한 토지의 ‘공고지가’ 현실화율은 19.79%, ‘공고토지현치’ 현실화율은 92.21%다. 이 중 한국의 재산세(토지) 공시가에 해당하는 것은 공고지가다. 대만의 공고지가 현실화율은 10년 넘게 20% 선에서 맴돌고 있다. 계획(안)은 공고토지현치를 가지고 대만 공시지가가 90%를 넘었다고 했는데, 공고토지현치는 재산세가 아닌 양도세 산정 기준이다. 셋째, 캐나다 온타리오주(州)와 호주의 공시가 산정 및 재산세 부과 체계는 한국과 크게 다르다. 호주와 온타리오주는 치안 소방 대중교통 등 주민서비스를 위해 필요한 예산을 먼저 결정한 뒤, 여기에 맞춰 매년 세율을 새로 정한다. 공시가는 재산세를 납세자별로 할당하기 위한 상대적 기준이다. 공시가가 재산세를 전체적으로 밀어 올리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는 지자체가 주민들로부터 거둘 수 있는 연간 재산세 총액에 상한선까지 두고 있다. 인상률 상한선은 연간 2%대 수준으로 극히 낮은 수준이다. 넷째, 온타리오주의 현실화율이 100%라는 점은 짚어볼 점이 많다. 온타리오주의 공시가 산정은 MPAC라는 기관이 맡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은 매년 조사를 해서 공시가를 갱신하지만 MPAC는 4년에 한 번씩 한다. 2012, 2016, 2020년 이런 식이다. 이 때문에 2017∼2020년 재산세 산정에는 2016년 공시가가 적용된다. 인상분은 조금씩 반영된다. 공시가가 2012년 6억 원에서 2016년 10억 원으로 올랐으면 2017년 7억 원, 2018년 8억 원, 2019년 9억 원, 2020년 10억 원이 재산세 산정 기준이 된다. 반면 공시가격이 2012년 6억 원에서 2016년 3억 원으로 떨어졌다면 감액분은 전액이 다음 해에 바로 반영된다. 즉 2017∼2020년 공시가는 3억 원이 된다. 요컨대 공시가 현실화율이 몇 %인지는 보편적인 기준도 없고 보유(재산)세제의 본질도 아니다. 재산세제에 글로벌 스탠더드가 있다면 그것은 공정성, 안정성, 예측 가능성이다. 양도세 같은 경우는 실제 거래 금액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거래가의 100%를 기준으로 해도 공정성에 시비가 붙을 소지가 적다. 이와 달리 보유세 공시가는 거래되지 않은 재산에도 가공의 가치를 매기기 때문에 시비 소지가 많다. 이처럼 태생적으로 고무줄일 수밖에 없는 잣대를 기준으로 공시가를 한 해 19%씩(공동주택)이나 폭등시키면 반발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재산세는 지방자치단체가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세금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진국은 온타리오주처럼 세금 징수가 주민들의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협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보유세 정책에서는 납세자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이래도 안 팔래”라는 식의 악의까지 느껴진다. 정부는 보유세 정책이 징수와 징벌, 징벌과 수탈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지 냉정하게 자문(自問)해 봐야 한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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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광암 칼럼]기는 ‘문재인보유국’ 뛰는 ‘차이잉원보유국’

    ‘국가는 크지 않아도 되지만 의지는 커야 한다.’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의 지론이다. 4년 전쯤이라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서 이무기로 전락한 국가 지도자의 자기 위안 정도로 치부됐을 것이다. 차이 총통이 처음 당선된 2016년과 집권 초기만 해도 대만 경제는 그만그만한 중소기업의 집합체, 중국의 하청공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최근의 대만은 ‘용의 귀환’을 선언한 듯하다. 지난해 한국 미국 일본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와중에도 대만은 2.98% 성장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9.9%나 증가해 조만간 한국을 추월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다. 국제사회의 시선도 달라졌다. 영국의 정치·경제 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은 지난달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 보고서에서 대만을 ‘아시아 민주주의의 등불’이라고 극찬했다. 프랑스의 주간지 르푸앵은 지난해 12월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커버스토리의 표지 그래픽으로 5명의 정치지도자가 육상트랙을 도는 모습을 실었다.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차이 총통이었다. 대만의 약진에는 두 개의 원동력이 있다. 하나는 익히 알려진 ‘T방역’이다. 대만은 코로나19 누적 확진자가 985명에 그칠 정도로 방역에 성공했다. 다른 하나는 차이노믹스다. 차이 총통은 문재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진보정당 후보로 출마해 집권했다. 탈(脫)원전, 최저임금 인상 등을 공약으로 내건 점도 비슷하다. 그런데 어디에서 J노믹스와 차이노믹스의 길이 갈린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이 ‘민간’을 보는 관점이다. 차이 총통은 “정치 분야에서는 함께 힘을 모아 큰일을 이루기가 어렵지만, 민간 부문은 많은 사람의 참여를 끌어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에 비해 문 대통령은 ‘민간 기업=개혁 대상’이라는 운동권적 시각에 발목이 잡혀 있는 모습이다. 기업계가 여당에 여러 차례 읍소하면서 입법 재고를 요청한 상법 개정안 등 3법에 대해 문 대통령은 “기업을 건강하게 하여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 길”이라며 기업계와는 극명한 시각 차이를 보인 바 있다. 민간에 대한 인식 차이가 성과 차이로 이어지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해외진출 자국 기업의 유턴 정책이다. 차이잉원 정부는 2019년 초부터 금융 세제 용수 전력 인력 지원을 묶은 패키지를 만들어, 해외에 나가 있는 대만 기업들에 유턴을 제안했다. 2년여 기간 동안 209개 기업이 제안에 응했다. 총 투자금액은 31조9139억 원, 창출되는 일자리는 6만5552개에 이른다. 한국에도 유턴을 지원하는 제도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실적은 한심하다. 문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 이후 작년 5월까지 총 실적은 36건. 반면 2018년 한 해에만 한국 기업이 해외에 세운 신설법인 수는 3540개에 이른다. 유턴은 고사하고 한국을 떠나려는 탈출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이다. 차이 총통은 진보정당 지도자이면서도 신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한 정책을 추진하는 데 거침이 없다. ‘2언어 국가’ 정책이 대표적이다. 2030년까지 대만을 중국어와 영어가 모두 통하는 나라로 바꿔 놓겠다는 계획이다. 영어 장벽이 없어지면 글로벌 기업 유치가 쉬워지고, 대만 기업들의 글로벌 비즈니스도 활발해져 좋은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는 복안이 엿보인다. 경제정책의 요체는 ‘사다리’와 ‘그물(안전망)’의 조화라고 한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튼튼한 그물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하려면 ‘소기업은 중기업으로, 다시 중기업은 대기업으로’, ‘하류층은 중류층으로, 중류층은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많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노믹스는 균형을 잡아 왔다. 하지만 J노믹스는 세금알바 같은 ‘그물’에만 매몰돼서 성장 사다리에 별 관심이 없다. 한술 더 떠서 한국의 정부·여당은 세금폭탄으로 사다리 위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 사회 내부의 성장 사다리가 하나둘씩 허물어져 내릴 때의 결과를 예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국이 1인당 소득 4만, 5만 달러대의 선진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자체가 치워질 것이다. 이대로 가면 대만의 발뒤꿈치만 하릴없이 올려다볼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 202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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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천광암]‘0’을 꿈꾸며 ‘90’을 선택할 자유

    ‘90 HRS/WK’는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를 상징하는 문구 중 하나다. 주당 90시간 근로를 뜻하는 이 말은 잡스의 야심작 매킨토시의 발표 예정일인 1984년 초를 몇 달 앞두고 등장했다. 당시 매킨토시팀은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오후 11시까지 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잡스는 매킨토시팀이 주 90시간씩 일한다는 사실을 외부에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고, 애플의 재무부서는 ‘90 HRS/WK…AND LOVING IT!(주 90시간 일하니 좋아요)’라는 문구를 넣은 회색 후드티를 제작해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주당 90시간을 넘어 ‘주당 100시간’ 근로가 화제로 떠올랐다. 전기차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선도기업으로 통하는 테슬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테슬라는 첫 대중형 전기차인 ‘모델 3’이 생산차질을 빚으면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섰다. 창업주 일론 머스크를 비롯한 테슬라의 모든 직원은 9월부터 주당 100시간씩 일한 끝에 겨우 내부 생산 목표를 맞추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본격 시행되는 내년부터 한국에서는 매킨토시의 성공담이나 테슬라의 위기탈출 스토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질 것 같다. 탄력근로 확대를 위한 연내 입법이 청와대의 노동계 눈치 보기 때문에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현행법의 테두리에서 탄력근로를 하기 위해서는 2주 안에서(노사 합의가 있을 때는 3개월) 주당 평균 52시간을 맞춰야 한다. 일감이 없을 때 덜 일하고 일감이 많을 때 더 일하는 작업방식이 2주∼3개월 단위로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매킨토시나 테슬라와 유사한 성공신화의 연출은 사치라고 치자. 4차 산업혁명과 정보기술(IT) 관련 산업, 게임 등 소프트웨어 연관 산업은 생존조차 쉽게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전 세계를 무대로 치열한 신제품 출시경쟁이 벌어지는 이 분야는 일이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것이 특징이고, 한 달이나 하루가 사활을 갈라놓기도 한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모텐 한센 교수(경영학)가 5000명을 대상으로 5년간 자료를 수집해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생산적인 근로가 가능한 최적의 시간은 주당 50∼55시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주 52시간 근로는 장시간 근로와 낮은 생산성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기업문화를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만 생산성의 문제는 생사(生死)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의 일이다. 4차 산업혁명과 IT 분야에서 한국의 강력한 경쟁자인 중국의 기술기업들 사이에서는 ‘996’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인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일한다는 뜻이다. 엔지니어들의 세계에서는 오전 10시쯤 출근해서 한밤중에 들어가는 것이 상식이라고 한다. 밤낮을 잊고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일하는 미국이나 중국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기회가 오거나 위기가 닥쳤을 때 더 평소보다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탄력근로제를 확대하는 것이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매킨토시의 본체를 설계한 엔지니어 버렐 스미스는 매킨토시의 성공으로 두둑한 보너스를 챙기자마자 애플을 사직했다. 사직 후 그는 후드티에서 ‘9’자를 지워버리고 ‘0 HRS/WK…AND LOVING IT!(0시간 일하니 좋아요)’라는 문구만 남긴 채 입고 다녔다고 한다. 진정한 혁신은, ‘0’을 꿈꾸면서 ‘90’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싹튼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 20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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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천광암]세상에 나쁜 규제는 없다

    “영국은 마차업자를 보호하려고 ‘붉은 깃발법’을 만들었는데 결국 자동차산업에서 뒤처지고 말았다.” 올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이후 붉은 깃발은 현 정부의 규제개혁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됐다. 문재인 정부는 이전의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와 이념적 성향은 크게 다르지만 규제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규제를 경제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보는 기본 인식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관료들을 질책하는 모습도 닮았다. 3개의 정권에 걸쳐 대통령이 나서서 진두지휘하면서 규제와 전쟁을 벌여 오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기업 현장에서는 그 성과를 전혀 체감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0세기 초반 자동차 보급이 급증하면서 자동차산업의 본거지인 디트로이트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는 마차와 자동차가 뒤엉켜 마비되기 일쑤였다. 면허제도나 음주운전 규제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술에 만취한 초보 운전자들이 보행자를 덮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자동차에 대한 일반인의 반감도 컸다. 대중의 분노 앞에서 위기에 처한 자동차산업을 구해낸 것은 규제였다. 정지신호 횡단보도 일방통행 운전면허제도 등 규제 수단이 등장하면서 도로는 질서를 찾았고 자동차산업은 고속성장을 이어갔다. 규제 중에는 이처럼 유익한 것도 많다. 규제가 전봇대와 손톱 밑 가시, 붉은 깃발처럼 흉물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규제개혁보다 손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규제는 국민건강 증진, 빈곤층 보호, 환경 보전, 회계 투명성 강화 등 그 나름의 공익적 명분을 갖고 있다는 데서 규제개혁의 어려움이 비롯된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애완견의 이상행동은 주인의 잘못된 훈육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규제 또한 문구 자체보다는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한국은 개별 규제를 등록 심사 관리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현재 정부가 운영하는 규제정보 포털에는 ‘규제혁신으로 달라지는 생활, 바로바로 알려드립니다’라는 설명이 붙은 ‘규제혁신톡(Talk)’ 코너가 있다. 이 코너에는 현재 시행 예정인 사안으로 16건이 올라와 있는데 이 중 6건이 카지노 전산시설 검사의 행정절차 변경에 관한 내용이다. 이 내용이 과연 생활을 바꿔 놓을 혁신 사례로 홍보할 내용인지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가 안 된다. 좋은 시스템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에게 진정성이 없으면 이렇게 내용 없는 건수 채우기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기업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은 공무원 한 명 한 명이 살아있는 규제라고 한다. 법으로 조문화된 규제는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많을 때도 2만 건이 넘지 않는다. 이에 비해 공무원 수는 106만 명에 이른다. 현 정부가 규제개혁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려면 이들에게 정책의 우선순위에 대한 일관되고 지속적인 메시지를 주고, 경제 살리기에 전력투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규제개혁 회의를 통해 부처별 계획이나 실적을 점검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이다. 문 대통령은 9일 공정거래위원회 등 6개 부처가 참여한 가운데 공정경제전략회의를 주재했다. 겉포장은 공정경제지만 실상은 대기업 때리기로 변질되기 쉬운 내용들이다. 106만 규제 본능에 “더 모질게 깨어나라”는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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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천광암]혁신은 ‘개똥’이다

    2007년 사회 초년생이던 브라이언 체스키는 샌프란시스코의 임대주택에서 친구와 함께 생활하면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던 시절인데, 하루는 집주인이 체스키에게 집세를 대폭 올리겠다는 통지를 해왔다. 체스키는 한 달분 집세라도 벌어보자는 생각으로 콘퍼런스에 참석한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이 사는 집 한구석과 간단한 침구,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서비스의 전부였다. 현재 기업 가치가 43조 원이 넘는 에어비앤비의 출발점은 사소한 아이디어였다. 아마존도 비슷하다. 시작은 제프 베이조스의 차고에 차려진 초라한 온라인 서점이었다. 베이조스가 주문받은 책을 우체국으로 직접 부치러 갔을 정도였다. 세계적인 혁신기업의 대명사로 통하는 곳들의 혁신이라는 것도 뜯어보면 사실 별것 아니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개똥만큼이나 흔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혁신” 하면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기술과 공상과학, 엄청난 연구개발 투자 등을 떠올리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그 잘못된 생각의 범주 안에는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도 포함된다. 지금까지 발표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현 정부의 혁신성장이란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등 플랫폼 분야와, 미래자동차 드론 에너지신산업 바이오헬스 스마트공장 스마트시티 스마트팜 핀테크 등 선도 산업을 집중 육성하겠다는 계획으로 보인다. 사람보다는 기술, 현재보다는 미래에 치우쳐 있다. 그러다 보니 쉽게 피부에 와 닿지 않고 공허한 말잔치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혁신적인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과잉인 세상이다. 2015년을 기준으로 한국에서만 한 해 동안 21만3694건의 특허가 출원됐다. 세계적으로는 288만8800건에 이른다. 매년 수백만 건씩 쌓이는 혁신 중 극히 일부만이 비즈니스에 활용된다. 개똥처럼 흔한 혁신을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은 기업가정신이라는 촉매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혁신성장과 관련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성과가 없다”며 답답함을 토로한다. 혁신성장의 성과가 나지 않는 이유는 혁신적인 기술에 대한 정부 지원이나 투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혁신성장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은 반기업 정서와 각종 규제에 짓눌려 기업가정신이 숨쉴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현 정부가 규제 완화 노력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다. 산업자본이 인터넷은행에 출자할 수 있는 길을 넓혔고, 특정 지역 안에서 특정 산업의 새로운 서비스에 대해 각종 규제의 적용을 일부 유예해 주는 규제샌드박스 제도의 입법 작업도 마무리했다. 벤처기업 창업자의 경영권 안정을 위한 차등의결권 도입도 추진하고 있다. 그 나름대로 애는 쓰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경쟁에는 상대방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미국이나 중국은 제쳐두고 동남아시아와 비교해도 한국의 규제완화 노력은 아주 감질나는 수준이다. 혁신성장의 성과를 측정하는 지표의 하나로 유니콘기업(기업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벤처기업)의 수가 있다. 중국에서는 일주일에 2개꼴로 유니콘기업이 탄생한다. 이에 비해 한국은 2015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 곳도 나오지 않았다. 스포츠와 비즈니스의 세계에는 공통되는 철칙이 하나 있다. ‘남과 같이 해서는 남보다 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일 선상에서 달리는 주자(走者)도 그럴 텐데, 하물며 후행(後行) 주자는 어떻겠는가.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이 걱정스러운 이유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 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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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천광암]도요타는 나쁜 기업인가?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지난 한 해 동안 세계시장에 1040만 대의 자동차를 팔아 296조 원의 매출을 올렸고 25조 원을 순이익으로 남겼다. 일본 전체 기업을 통틀어 압도적으로 돋보이는 경영실적이다. 일본 주간지 슈칸겐다이가 지난해 10월 ‘만약 도요타가 망한다면, 일본 경제에 이처럼 가혹한 일이 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기사에 따르면 자회사를 포함해 도요타자동차는 36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3만5000개가 넘는 협력업체를 포함하면 일본 노동인구의 3%에 해당하는 140만 명이 도요타 관련 일자리 덕분에 먹고산다. 만약 도요타가 망하면 직원 가족들을 포함해 500만 명의 생계가 끊기고,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4%가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잡지는 추산했다. 이처럼 일본 경제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있고, 깐깐한 품질 관리와 효율적인 생산 관리 분야에서 ‘교과서’로 꼽히는 도요타자동차그룹의 지배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오너 4세로 도요타자동차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는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 사장의 지분은 0.15%에 불과하다. 도요다 일가의 지분을 모두 합해도 2% 안팎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도요타의 경영권이 위협받지 않는 이유는 도요타자동차, 도요타자동직기, 덴소, 아이신정기, 도와부동산 등 핵심 계열사 간 상호출자에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자동차는 자동직기의 1대 주주이고, 자동직기는 자동차의 2대 주주(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금융회사를 제외하면 사실상 1대 주주)다. 또 자동차는 덴소의 1대 주주이고, 덴소는 자동차의 6대 주주다. 자동직기는 덴소와 아이신정기의 2대 주주이고, 덴소와 아이신정기는 각각 자동직기의 2대, 7대 주주다. 덴소는 아이신정기의 3대 주주, 아이신정기는 덴소의 7대 주주다. 이런 방식으로 도와부동산은 자동직기 덴소 아이신정기 3사와 모두 상호출자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밖에 도요타통상 도요타방직 등도 핵심 계열사들과 상호출자 또는 순환출자 관계를 맺고 있어 지분 관계가 거미줄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도요타의 지배구조에 대해 지금까지 일본 안에서는 큰 시비가 없었다. 인위적으로 뜯어고치려는 시도도 없었다. 하지만 도요타가 만일 한국기업이었다면 사정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우리나라 공정거래위원회 기준으로 보면 도요타는 지구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업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자산총액이 10조 원이 넘는 기업에 대해서는 계열사 간 상호출자가 전면 금지돼 있다. 순환출자(A기업이 B기업의 주주가 되고, B기업은 C기업의 주주가 되며, C기업은 A기업의 주주가 되는 방식)는 일정한 한도 안에서 허용돼 왔지만 공정위가 서슬 퍼런 경제검찰의 권력으로 자발적인 해소를 압박하고 있다. 한국의 공정위는 상호출자나 순환출자가 마치 절대악이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런 지배구조를 갖고도 얼마든지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이 될 수 있고,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데 공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요타의 사례는 잘 보여준다. 물론 우리가 시계를 거꾸로 돌려 상호출자를 다시 허용한다거나 기업들이 순환출자를 늘리도록 유도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기업의 지배구조에 유일한 모범답안이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대기업에 대해 정부의 입맛에 맞는 획일적인 지배구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강요된 공정위 장단에 대기업은 마지못해 춤추고, 실속은 엘리엇과 같은 해외투기자본이 챙기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 201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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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와 車협상, 당장 닥칠 피해 막고 불확실한 미래이익 양보”

    《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통상 분야는 평시체제에서 전시체제로 바뀌었다. 자유무역시대가 가고 관리무역시대가 온 것이다.” 올해 1월 이후 9개월 동안 진행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한국 측 대표로 협상을 총괄해온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금 통상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는 국지적인 파도가 아니고 광범위한 조류”라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 주력 산업을 업그레이드하는 것만이 변화의 격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당시 진행된 한미 FTA 협상에서도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참여하는 등 FTA와 인연이 깊은 김 본부장을 3일 만나 이번 협상 타결의 의의와 한국을 둘러싼 국제통상질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  ―이번 한미 FTA 개정 협상을 시작할 당시 미국 측의 요구사항이 상당히 많았다고 들었다. “초기에는 미국 측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바에는 차라리 한미 FTA를 깨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강하게 나갔다. 지난해 9월 4일경 미국으로부터 한미 FTA 폐기 통보가 올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했는데 협상을 시작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협상이라는 것은 항상 끝까지, 벼랑 끝까지 가봐야 하는 것이다.” ―협상 안건에 대해서는 어떤 전략으로 나갔나. “소규모의 실행 가능한 안건만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미국에서 의회 비준 절차 없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안건을 압축했다. 나중에 미국이 요청한 내용을 보니 우리의 레드라인(농축수산물 분야는 재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 협상을 시작했다.” ―이번 협상의 득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크게 보면 한국과 미국 모두 3가지씩을 얻었다. 먼저 한국은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ISDS) 소송 남발을 막을 수 있게 됐고, 반덤핑 관세 계산 방법을 미국이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했으며, 철강에 대한 무역확장법 232조의 적용을 면제받았다. 미국이 얻은 것은 한국산 픽업트럭에 대한 관세 철폐 시기를 2021년에서 2041년으로 늦춘 것, 미국 자동차 업체가 자국 안전기준에 따라 한국에 수출할 수 있는 차량 대수를 업체당 2만5000대에서 5만 대로 늘린 것, 한국이 자동차 환경기준을 2021년 다시 만들 때 국제적인 추세를 고려하기로 한 것 등이다.” ―이번 합의로, 한국이 앞으로 픽업트럭을 개발해 미국 시장을 공략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지적도 있는데… “픽업트럭은 현재 한국 자동차 업체들이 제조와 수출을 하지 않는다. 협상에 앞서 우리 자동차 업계로부터 임박한 피해를 없애는 것과 불확실한 미래의 이익을 얻는 것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는 전자를 선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임박한 피해라는 것은 자동차에 대한 관세가 부활한다거나 미국산 부품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해야 한다는 등의 규정이 도입되는 것 등을 말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자동차와 관련해서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 문제가 남아있다. 미국은 이 조항을 근거로 국가 안보를 위해 수입 자동차에 대해 고율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의 자동차에 대한 관세 면제를 요청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실무진에 “검토해보라”고 지시해서 낙관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러나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이 타결되면서 다시 비관론이 커지고 있다. “캐나다와 멕시코가 대미 자동차 수출 쿼터를 각각 260만 대씩 받았다. 그렇다면 한국도 그렇게 되느냐는 건데, 우리는 한미 FTA 개정 협상으로 이미 자동차 문제는 해결됐다는 입장이다. 7월 여야 원내대표들이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을 만나서 이런 뜻을 전달했고, 최근 정의선 현대자동차 총괄수석부회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미국 측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번 USMCA에는 아주 주목할 만한 조항이 한 가지 있다. 시장경제를 하지 않는 국가와는 FTA를 맺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다. 더구나 USMCA는 16년의 일몰조항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조항이 없다. (미국이) 북핵 문제, 방위비 분담금 등 안보 이슈가 한미 간에 얽혀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라고 본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 서명식 당시에 미국 농수산물 수출도 확대될 거라는 말을 했는데 이건 무슨 뜻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농수산물 추가 개방은 없다. 농수산물에 대해서는 협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은 개정 협상이 마무리돼 양국 간 교역량이 늘어나면 농업도 늘어날 거다, 그런 수준의 언급이다. 11월 중간선거를 의식한 말이라고 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에서 미중 무역갈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분야가 대두(大豆), 축산물 등 농축수산물이다.” ―김 본부장이 한미 FTA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일 때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수석 변호사로 일할 때였다. 1년에 2, 3개월 정도는 판결문 작성 때문에 새벽 4시에 출근을 했는데 어느 날 새벽 4시 반쯤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당선인이 통상 분야에 대해서만 보고를 못 받았는데, 브리핑 해줄 수 있느냐’는 거였다. 바로 서울로 와서 2시간 동안 보고했다. 동북아시아의 통상 환경은 구한말 신미양요, 병인양요가 일어났던 것과 같은 전시 상황이며, 우리가 먼저 개방과 개혁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김 본부장은 당시 외교통상부 산하 통상교섭본부의 통상교섭조정관(1급)으로 발탁됐고 1년 만에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승진했다. 당시만 해도 WTO 회원국 약 150개국 가운데 한국은 몽골과 함께 FTA가 전혀 없는 나라였다. 김 본부장이 동시다발적 FTA 전략을 추진하며 한국은 미국, 유럽, 중국 등과 협정을 체결하고 FTA의 허브로 거듭났다. ―한미 FTA는 2012년 3월 15일 처음으로 발효됐다. 약 6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긴 안목에서 봤을 때 한미 FTA가 우리나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가. “한미 FTA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본다. 2011년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가 116억 달러였다. 5년 뒤인 2016년에 233억 달러를 기록했다. 흑자뿐 아니라 한미 간 교역량 자체가 늘었다. 간접적으로는 전 세계를 상대로 우리가 교역을 하고 투자를 유치하는 데 많은 긍정적 요인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캐나다 멕시코뿐만 아니라,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등에 대해서도 파상적인 통상 공세를 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세상 물정 모르고 좌충우돌하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많았는데, 지금은 타고난 협상가라는 평가가 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수한 협상가이자 전략가다. 더구나 미국에는 트럼프 대통령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통상정책을 좌우하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그의 조상이 조지 워싱턴과 함께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인물로, 자부심이 대단하고 애국심도 강하다. 어렵고 까다로운 인물이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 USTR 부대표로 있으면서 당시 급부상하던 일본을 상대로 관리무역을 성공시킨 노하우가 있는 인물이다.”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갈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중 간 무역갈등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하는가. “미국과 중국은 서로 오판(誤判)을 하고 있다. 그 위에 상호 전략적 불신마저 깔려 있다. 각자가 자신만이 유일한 체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략적 불신의 원인 중 하나다. 미중 간의 무역 분쟁은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 “무역갈등에 美도 中수출 막혀… 우리 고급 소비재 팔 기회” ▼ ―미국의 계산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미국은 중국에서 연간 5056억 달러어치를 수입하기 때문에 ‘실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정책은 여야를 떠나 미국에서 폭 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는 백인 중산층의 몰락에서 오는 절실함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 파도에 올라탄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상 압박을 미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발(發) 보호주의 물결은 국지적 파도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조류이다. 우리도 이 점을 잘 이해해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무역 분쟁이 본격화하기 전 중국 측의 생각은 무엇이었다고 보는가. “대미 무역흑자만 줄이면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중국은 미국의 공세가 자신들의 부상에 대한 견제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 기반만을 배경으로는 중국을 견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 ―중국은 수치로 봤을 때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고, 미국은 교역 규모나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교역 상대국이다. 미-중 무역갈등을 둘러싸고 산업계에서는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미중 무역갈등의 여파를 쉽게 설명하면, 중국이 미국에 수출하는 상품이 비싸진다는 얘기다. 글로벌 공급망을 바꾸는 데는 1년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사이 우리가 중국 대신 수출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우리의 대중 무역 수출 중 70∼80%가 부품과 소재 등 중간재다. 중국의 대미 수출이 줄어들면 우리나라 중간재의 대중 수출이 타격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해 대중 수출 품목을 소비재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무역갈등으로 미국이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된 고급 소비재 중 우리가 대신 중국으로 수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리고 중국이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해외 기술을 획득하기 위한 인수합병(M&A)을 하기가 어렵지 않겠나. 이 또한 우리에게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일본도 미국과 양자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친구라고 부르는 등 개인적인 호감을 보이는 데 대해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 가장 큰 관심사다. 여기에 미국을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미국은 이제 더 이상 다자(多者)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 결국 일본이 이런 미국의 뜻에 양보를 한 것이고, 미국은 양자협상을 해야 일본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보고 임하는 것이다.” CPTPP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관세 철폐와 경제통합을 목표로 한 경제체제로 일본, 호주 등 11개국이 가입돼 있다. TPP라는 이름으로 2015년 타결됐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탈퇴를 선언하면서 일본이 주도해 CPTPP로 이름을 바꿨다. ―CPTPP에 한국도 가입하나. “업종별, 품목별 간담회를 해서 모든 분야에서 CPTPP 가입이 미칠 영향에 대한 검토를 마쳤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이 가입하지 않은 CPTPP를 얼마의 입장료를 내고 가입할 건지 신중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를 둘러싼 통상환경이 뿌리부터 바뀌는 것 같다. “우리나라 주력 산업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신기술, 신산업을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의 경우 메모리 분야는 한국이 선도하지만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아직 점유율이 3%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율주행차에 필요한 센서가 1000개가 넘는다. 이 센서를 다 조정할 수 있는 시스템 반도체가 필요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 퀄컴이 네덜란드 반도체 업체인 NXP를 인수하려 나서지 않았는가. 그래핀(흑연을 원료로 한 소재로 강하면서도 유연하고, 열전도성이 좋아 꿈의 신소재로 불린다)도 신기술 차원에서 검토해야 할 것 중 하나다. 탄소섬유도 우리 기업들이 추격할 수 있는 유망한 분야다.” ―주력 산업의 업그레이드를 강조했는데, 신기술과 신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특별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 기술 인수합병(M&A)이다. 기술을 갖고 있는 기업을 사거나 합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기업투자펀드가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우리 돈으로 100조 원에 상당하는 규모의 비전펀드를 조성했다. 한국도 이런 펀드를 여러 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실리콘밸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필요한 기술을 획득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둘째, 규제 완화다. 스마트헬스를 가정해보자. 지금은 스마트워치가 시계로 분류되지만 맥박이나 혈압, 당뇨 수치 등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의료기기로 분류된다면 새로운 규제 이슈가 생기게 된다. 우리나라가 이런 분야를 선도할 수 있도록 규제를 잘 풀어나가야 한다.” 인터뷰=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정리=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 201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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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천광암]공정위, 누구를 위해 기업경영권 흔드나

    마윈(馬雲)이 2013년 알리바바를 상장시킨 곳은 사업 본거지인 중국 본토나 한 차례 상장 경험이 있는 홍콩이 아니었다. 뉴욕 증시였다. 당시 주가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했는데도 그가 굳이 뉴욕을 택한 이유는 차등의결권(일부 주식에 대해 주당 1개가 아닌 다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 때문이었다. 알리바바의 창업주이지만 지분은 7%에 불과한 마윈으로서는 다른 대주주를 제치고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할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에 상장기업의 차등의결권을 허용하지 않는 중국 본토나 홍콩을 버리고 뉴욕으로 갔던 것이다. 알리바바를 놓친 홍콩 증시는 30년 전통을 바꿔 올해 7월 차등의결권을 허용했고, 이 덕분에 시가총액이 100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샤오미라는 또 다른 대어(大魚)를 낚았다. 그러자 중국 정부도 마침내 백기를 들고, 지난달 27일 기술기업에 대해 차등의결권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은 기업들이 안정된 경영권의 토대 위에서 투자와 생산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오래전부터 차등의결권 등 다양한 경영권 방어수단을 허용하고 있다. 이제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마저도 이 같은 국제적인 흐름에 발을 맞추고 있는데, 유독 한국 정부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아니, 나 몰라라 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달 28일 공청회에 내놓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보면 1, 2위 대기업들조차 엘리엇 등 해외 투기자본의 공세 앞에서 흔들리는 현실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개정안은 금융·보험사와 공익법인의 의결권을 제한하고, 기존 순환출자에 대해서도 의결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황금주 등 경영권 방어 장치를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공정위가 추진하는 의결권 제한이 추가로 더해질 경우 우리 대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에 천문학적인 거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것이다. 개정안에는 심지어 공정위가 지금까지 순환출자식 지배구조의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제시해온 지주회사에 대해서조차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 문제는 둘째로 치자. 한국의 대기업들은 2003년경부터 정부의 유도에 따라 하나둘씩 지배구조 체제로 전환해 왔다. 31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중 12개가 과도한 비용 등의 문제로 아직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못한 상태다. 한국경제연구원 계산에 따르면 이들 12개 그룹이 지주회사로 전환한다고 할 경우, 규제 강화로 인해 상장회사 지분 매입에 12조9000억 원의 추가 비용이 든다고 한다. 생산적으로 투자할 경우 27만8000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돈이다. 국회는 지난달 21일 본회의를 열어 은산분리완화법(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은산분리완화법은 문재인 대통령이 핵심 지지세력의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국회 통과에 힘을 실어준, 일명 ‘혁신성장의 1호 법안’이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이 법의 시행으로 창출되는 일자리는 간접효과를 포함해 중장기적으로 약 5000개라고 한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혁신성장 1호 법안이 어렵게 만들어내려는 일자리의 55배를 허공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법안인 셈이다. 지금까지 여러 정권이 규제 완화를 야심 차게 추진하고도 성과가 미흡했던 이유는 사라진 작은 규제의 빈자리를 더 크고 더 고약한 규제가 채워 왔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규제 권력을 틀어쥐고 내놓지 않으려는 관료집단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공정위가 내놓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보면, 혁신성장의 적(敵)은 세종시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천광암 편집국 부국장 iam@donga.com}

    • 2018-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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