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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1. 259개 상품 어떻게 정했나2. 직장인의 상품 선택 기준3. 세대별 맞춤 구성 전략 상품 고르는 5대 기준● 현재 가입한 연금형태 확인● 위험등급-구성 펀드 수 파악● 투자성향에 맞춰 목록 작성 ● TDF-BF 등 편입펀드 특성● 해당 사업자 과거 운용 실적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알아둬야 할 제도가 됐다. 올 하반기부터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이나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자는 상품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만기가 끝난 금융상품에 대해 가입자가 깜빡하고 별도로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운용사는 가입자가 미리 지정해 둔 방식(디폴트옵션)으로 연금을 굴리게 된다. 그런데도 아직 낯설어하는 직장인이 많다. 지난해 10월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에서 30∼59세 직장인 1200명을 대상으로 디폴트옵션 인식 조사를 한 결과, ‘잘 알고 있다’는 응답자는 31.3%에 그쳤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잘 모른다’(41.8%)와 ‘전혀 모른다’(26.9%)로 부정적인 답이 68.7%였다.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사전에 정해둔 방식대로 운용되기 때문에 상품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지난해 말 고용노동부가 최종 승인한 디폴트옵션 상품에 가장 많은 펀드를 편입시킨 미래에셋자산운용으로부터 상품을 고르는 5가지 기준을 들어봤다.① 현재 가입한 퇴직연금을 확인하라직장인 중에는 자신이 어떤 퇴직연금을 갖고 있는지, 퇴직연금 계좌에 보유한 금융상품이 뭔지 모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단 자신의 퇴직연금이 확정급여형(DB)인지 DC인지 등을 알아봐야 한다. 이는 금융감독원에서 운용하는 ‘통합연금포털’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DB 퇴직연금은 회사에서 직접 운용하기 때문에 디폴트옵션 적용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DC나 IRP 가입자라면 다음 단계로 보유 중인 상품을 확인해야 한다. 만기가 있는 예금 등에 가입됐다면 만기 뒤 운용지시가 없는 경우 대기성 자금으로 남았다가 6주 뒤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바뀌니 확인이 필요하다. 만기가 없는 펀드이거나 ETF(상장지수펀드·주가지수의 움직임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되는 펀드) 등은 디폴트옵션으로 자동 전환되지 않는다.② 디폴트옵션 상품 특성을 파악하라디폴트옵션은 상품명을 보면 대략적인 특징을 가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증권 디폴트옵션 중위험 포트폴리오 1’이란 상품이 있다고 치자. 여기서 중요한 건 ‘중위험’으로 상품의 위험등급을 가리킨다. 디폴트옵션 상품은 △초저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 △초고위험 5가지로 구분된다. 초저위험은 원리금보장형이라 볼 수 있고, 저위험 등급 이상은 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이 일정 비율로 포함된다. 다만 국내에서 승인된 디폴트옵션 상품에는 초고위험은 없다. 포트폴리오는 해당 상품이 여러 펀드 등으로 구성됐다는 걸 뜻한다. 디폴트옵션은 대부분 이런 방식이지만, 하나의 금융상품으로 이뤄진 것도 있다. ③ 시점·성향에 맞는 상품목록을 만들라먼저 투자 기간을 고려해야 한다. 은퇴까지 20∼30년이 남았다면, 주식 등에 장기 투자를 통해 긍정적인 수익률을 거둘 수 있으니 중위험 이상의 상품을 적극 고려해보는 게 좋다. 반면 투자 기간이 짧다면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변동성이 심한 상품은 피하길 권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가입자의 투자 성향이다. 원금 보장과 수익 추구 중 어느 걸 더 선호하는지, 자신이 적극 탐색형인지 소극 관리형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후 운용사와의 상담 등을 통해 적절한 상품들을 추려내면 좋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의 인식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4%는 고위험, 40%는 중위험, 33.6%는 저위험 디폴트옵션 상품을 고려한다고 답했다. 원리금보장 상품인 초저위험은 18.0%가 선택했다.④ 상품에 편입된 펀드를 살펴보라성향과 투자 기간을 고려한 뒤, ‘A증권 디폴트옵션 고위험 포트폴리오 1’과 ‘A증권 디폴트옵션 고위험 포트폴리오 2’를 선택 후보로 골랐다고 가정해 보자. 같은 위험등급이라도 해당 상품을 구성한 펀드는 다를 수 있다. 이는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사업자에 문의하면 알 수 있는데, 향후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이나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서도 해당 정보를 공시할 예정이다. 국내에서 승인된 상품들은 ‘타깃데이트펀드(TDF)’와 ‘밸런스펀드(BF)’가 주를 이룬다. TDF는 은퇴 시점에 맞춰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의 투자 비율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자산배분펀드이며, BF는 주식과 공사채 보유 비율을 일정하게 유지해 투자하는 펀드다. 편의성을 중시한다면 TDF가 유리하다. 은퇴까지 남은 기간에 따라 위험자산 비중을 조정하고, 경기에 따라서도 자산 배분 비율을 바꾸는 등의 활동을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⑤ 운용사의 실적도 체크하라같은 유형의 TDF라 해도 사업자에 따라 성과는 차이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더 나은 실적을 거둔 사업자 펀드에 가입하는 게 좋다. 하지만 가입자가 세부적인 내용까지 챙겨 분석하긴 쉽지 않다. 이럴 때는 각 사업자가 어떤 펀드를 디폴트옵션 상품에 많이 넣었는지를 챙겨보자. 해당 펀드가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알아보면 선택에 도움이 된다. 현재 가입자의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사업자가 원하는 상품을 제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IRP 가입자라면 금융기관을 옮길 수 있다. DC형이라면 회사의 퇴직연금 담당 부서에 문의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글 싣는 순서〉 1. 259개 상품 어떻게 정했나2. 직장인의 상품 선택 기준3. 세대별 맞춤 구성 전략 《2023년 계묘년(癸卯年). 직장인들은 연초부터 토끼처럼 힘차게 뛰고 싶지만 자꾸만 간이 콩알만 해진다. 대출금리는 높은데, ‘난방비 폭탄’에 공공요금 인상 등 우울한 소식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이 든든하면 노후 불안이라도 덜어내련만, 국내 퇴직연금 수익률은 1∼2%(최근 5년 기준)에 그치는 실정이다. 미래가 걱정되는 직장인이라면 올해 퇴직연금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수익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때문이다. 디폴트옵션이란 말 그대로 ‘자동 선택’된다는 뜻. 확정기여형(DC)이나 개인형퇴직연금(IRP)을 든 가입자가 해당 적립금을 운용할 방법을 따로 지시하지 않으면, 사전에 정해둔 방식대로 사업자(운용사)가 대신 운용해주는 제도다. 해외에서는 ‘연금 부자의 비결’로 불리는 디폴트옵션을 3회에 걸쳐 알아봤다.》●퇴직연금 수익률 높일 절호의 기회디폴트옵션은 2021년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뒤 지난해 주요 내용을 규정하는 시행령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새 법에 따라 퇴직연금 사업자는 사용자와 가입자에게 제시할 사전지정운용방법을 마련해 고용노동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지난해 12월 고용부와 금융감독원,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디폴트옵션 포트폴리오 승인 작업이 마무리됐다. 국내에 디폴트옵션이 도입된 이유는 간명하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수익률은 저조하기 때문이다. 2021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전년 말(255조5000억 원) 대비 15.7%가 늘어난 295조6000억 원에 이른다. 하지만 여전히 89%가 원리금보장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으며, DC형의 원리금보장 상품의 수익률은 지난해 1.34∼2.70%였다. 미국이나 영국, 호주 등은 퇴직연금 연평균 수익률이 6∼8%인데, 일찌감치 도입한 디폴트옵션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 DC형 퇴직연금인 401k의 2010∼2020년 수익률은 연평균 8.6%에 이른다. ●승인된 상품 절반 가까이가 미래에셋모두 39개 퇴직연금사업자가 총 318개의 디폴트옵션 상품을 신청한 결과, 최종적으로 259개의 상품이 승인받았다. 최종 승인된 상품들은 예금과 같은 윈리금보장형 상품 또는 펀드와 같은 실적배당형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220개 상품에는 1∼3개의 펀드가 포함돼 있다. 아무래도 예금이나 적금으론 수익률을 높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사업자는 1개의 원금보장형과 저·중·고위험으로 구분되는 각 3개의 원금비보장형까지 모두 10개의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다. 전체 연금 상품을 사업자별로 보면 미래에셋자산운용이 눈에 띈다. 원리금보장형을 제외한 220개 상품에 편입된 회사별 펀드 개수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130개로 가장 많다. 이어 삼성자산운용이 41개, 한화자산운용이 37개, 키움투자자산운용이 27개 순이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편입된 펀드 종류 중에는 ‘타깃데이트펀드(TDF)’가 크게 눈에 띈다. TDF는 투자자가 미리 정한 은퇴시점에 맞춰 위험 자산과 안전 자산의 투자 비율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자산배분 펀드를 일컫는다. 현재 미래에셋자산운용이 TDF 시장에서 43%로 시장점유율(설정액 기준) 1위다. 또 220개의 실적배당형 디폴트옵션 상품 가운데 165개에 TDF가 편입됐는데, 개수 기준으로 미래에셋(43%)이 가장 많으며 한화(12%) 삼성(10%)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기업체 규약 반영한 뒤 가입자가 선택고용부는 디폴트옵션 상품 승인 뒤 올해 1분기 기준 적립금액과 운용성과 등 상품에 대한 주요 정보를 반영해 4월에 공시할 예정이다. 이후 기업체는 퇴직연금사업자가 제시한 디폴트옵션을 근로자(가입자) 대표의 동의를 거쳐 퇴직연금 규약에 반영한다. 그런 다음 가입자는 자신의 퇴직연금 계좌가 있는 금융사로부터 디폴트옵션 상품 운용구조 등을 포함한 정보를 제공받아 금융사가 제시한 디폴트옵션 상품 1개를 지정하면 된다. 기업마다 규약 반영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대략 올해 하반기부터 가입이 가능하다. 디폴트옵션 상품은 구체적으로 원리금보장형 외에도 TDF와 밸런스펀드(BF·주식과 공사채 보유 비율을 일정하게 유지해 투자하는 증권투자신탁), 사회간접자본(SOC)펀드 등이 포함돼 있다. 일반적으로 포트폴리오는 고위험의 경우 TDF와 BF 위주로 구성하고, 중·저위험은 여기에 정기예금 등을 혼합한다. 가입자는 이를 두루 살핀 뒤 자신의 투자 성향을 고려해 적절한 상품을 지정해 둘 수 있다.“전략배분TDF 등 설계 차별화… 해외투자 역량 지속강화 결실” 130개 최다 상품 편입 미래에셋운용류경식 연금마케팅부문대표 인터뷰고용노동부가 259개로 최종 승인한 디폴트옵션 상품 리스트를 살펴보면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약진이 인상적이다. 원리금보장형을 제외한 220개 상품 가운데 130개에 이 회사가 운용하는 펀드가 편입돼 경쟁사를 압도하고 있다. 류경식 미래에셋자산운용 연금마케팅부문 대표에게 디폴트옵션 시대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들어봤다. ―최종 승인 결과에서 미래에셋의 실적이 월등하다.“TDF의 초기 설계 단계부터 차별화된 관점으로 상품을 개발한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대표적 사례가 미래에셋전략배분TDF다. 기존 리스크-리턴 관점에서의 자산 배분이 아니라, 투자자산의 수익 관점에서 전략별 분산투자를 실시한 상품이다. 이는 우수한 위험조정수익률(수익 과정에 포함된 모든 위험을 고려하는 수익률)로 가치를 증명했다고 본다. 고객 친화적 마케팅을 지속해온 마케터들의 활동이 성과를 내는 데 힘이 됐다.” ―오랜 기간 퇴직연금 상품을 준비했다고 들었다.“미래에셋은 2005년 국내 처음으로 해외투자펀드를 출시했다. 해외투자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지속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미래에셋TDF는 국내 투자자를 위한 글로벌 자산 배분 역량을 하나로 모은 연금펀드라 할 수 있다. 자체 개발한 운용 모델을 바탕으로 전국 지방 지점까지 아우르는 연금펀드 교육도 실시했다.” ―승인 과정에서 미래에셋만의 공략법이 있었나.“고용노동부 승인 과정에서 장기적 성과나 손실 가능성 등 정량적인 평가와 함께, 자료의 적시성 및 회사 운용 시스템에 대한 평가도 이뤄진 걸로 알고 있다. 차별화된 상품 설계는 물론이고 전략적인 마케팅, 우수한 위험 조정 성과가 어우러지며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디폴트옵션 이후 국내 퇴직연금 시장은 어떻게 바뀔까.“그간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해외운용사의 상품을 들여와 단순하게 재판매 혹은 위탁 운용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앞으로 전체적인 틀 자체가 변해야 한다. 국내 금융 산업계도 고용 및 자산운용 환경에 부합하는 역량 강화를 위해 장기적인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에셋도 변동성 높은 시장 환경에서도 펀드 운용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지구에서 아니 우주에서 제일 강해졌건만, 바뀐 게 없다. 여전히 수중엔 소고기 한번 실컷 사먹을 돈도 없다.20대로 짐작되는 주인공 사이타마. 그는 ‘원펀맨’이 되기 전까진 보잘 것 없는 처지였다. 줄기차게 취업에 실패하는 백수. 좁디좁은 원룸 월세도 버겁다. 끼니는 컵라면으로 때우기 일쑤. 그러다 우연히 괴물로부터 아이를 구한 뒤 영웅(히어로)이 되기로 결심한다. 뭐,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으니까.3년의 고행 끝에 무소불위의 초인이 된 사이타마. 도대체 적수가 없다. 괴물이건 외계인이건 순식간에 때려 부순다. ‘북두신권’ 켄시로의 “넌 이미 죽어있다”처럼 멋진 대사도 읊고 싶고, 마블 히어로처럼 신나게 싸우며 기예도 뽐내고 싶건만. 그냥 다 원 펀치다. 영웅의 길이란 게…, 원래 이리 시금털털한 거였나.2009년 온라인 연재로 출발한 만화 ‘원펀맨’은 슈퍼히어로(초인) 장르에서 가장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작품이다. 주인공 사이타마를 지칭하는 원펀맨은 ‘원 펀치 맨(one punch man)’의 준말. 이름 그대로 상대가 누구든 한방에 끝내는 절대적 힘을 가졌다. 어떤 무공이나 초능력도 없다. 그저 주먹만 휘두르면 모두 ‘산산이 부서진다.’ 국내에선 지난해 26번째 종이책이 출간됐으며, 애니메이션도 넷플릭스에서 시즌2까지 볼 수 있다.원펀맨은 그냥 누구보다 센 게 아니다. 비교할 대상조차 없을 만큼 강하다. 그럼 얼른 악당 다 물리치면 세계평화는 금방 도래할 터. 근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만화도 김샌다). 사이타마의 진가를 알아주는 이들은 일부일 뿐. 히어로나 괴인이나 다 지들 잘 났다고 떠들어대고. 무심한 주인공은 오늘도 악당 퇴치 뒤 마트 세일 반찬을 사들고 퇴근한다.곤궁한 살림살이와 안티히어로 운명. 스파이더맨과 배트맨의 설정이 살짝 묻어나는 원펀맨의 미학은 이 어이없을 정도로 엉켜 있는 ‘부조리’에 있다. 누구보다 강한 초인이 대중에게 외면 받으며 가난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 ‘대인배’ 사이타마는 부와 명예에 초연하지만, 얄궂게도 삶의 숨겨진 속살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다들 정의니 진실이니 그럴 듯한 말로 떠들어대지만, 우리 앞엔 사필귀정만 기다리지 않는다는 걸. 도시가 궤멸됐는데도 과거 사이타마를 내쫓았던 악덕 집주인의 빌라는 멀쩡한 것처럼.그래서일까. ‘원펀맨’은 화려한 전투장면과 허무개그가 가득한 신나는 만화지만, 다른 대목에서도 매력이 물씬하다. 그건 바로 드라마에서 ‘행인1’마냥 스쳐지나가는 우리네 일상들이다. 아이들 흔적이 배어있는 놀이터, 저녁 강변을 수놓은 가로등 불빛, 빗방울 소리를 머금은 공원 쉼터…. 애니메이션 시즌1의 엔딩 크레딧에서 보여주는 잔잔한 풍경을 꼭 챙겨보시길. 이거야말로 놓치지 말아야할 소중한 뭔가가 아닐지. 우리가 함께 시간을 공유한 삶의 공간이니까.실은 요즘 ‘원펀맨’이 흘러가는 모양새는 다소 아쉽다. 온갖 등장인물에 죄다 스토리와 캐릭터를 부가해, 이삼 일치 에피소드로 연재를 장장 3, 4년을 끌고 있다. 그게 ‘원피스’처럼 서사의 설득력을 갖췄다고 보기도 2% 부족하다. 다루는 얘기가 많다보니 사이타마는 주변인물로 전락한 느낌. 오히려 ‘드래곤볼’ 베지터를 똑 닮은 악인 가로우가 훨씬 돋보인다. 원펀맨은 언제나 한방에 끝내니 싸움이 뻔해지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겠으나…. 갈수록 배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다.하지만 원펀맨은 원래부터 그런 모순이 가득하기에 더 흥미진진했다. 겨우 ‘대머리 망토’란 활동명이나 지으려고 2시간씩 탁상공론 하는 히어로협회(라 쓰고 ‘정부’라 읽는다), 약해빠진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인데 외모와 우연 탓에 최강자로 대접받는 가짜 초인, 협회 돈줄의 아들을 구하려 다른 이들 희생은 당연시 여기는 풍조. 이게 어디 만화에서만 일어나는 걸까. 진짜 말 안 되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곳. 그건 다름 아닌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현실세계다. 단지 그걸 한방에 없애줄 영웅만 존재하지 않을 뿐.[추신] 사아타마가 힘을 얻은 ‘3년의 고행’은 뭘까. 바로 매일 운동이다.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 스쿼트(squat) 각각 100회. 그리고 달리기 10㎞. 다른 히어로들은 따진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다. 그게 뭔 비결이냐”고. 정말? 그럼 2023년, 딱 1년만 이렇게 해보자. 그럼 우리도 영웅 언저리쯤 갈 수 있지 않을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재난은 결코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지금 이상기후에 따른 기후재난이 더욱 빈번하고 강하게 발생하고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 주변의 취약계층을 위해 사회적 관심과 민관의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합니다.” 국내 대표적인 재난·재해 구호모금 단체인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의 송필호 회장(73)은 24일 서면 인터뷰를 통해 “노인과 아동, 저소득층 등 사회 취약계층은 재난에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어 더욱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995년 7월 미국 시카고의 폭염 사태를 상기시키며 “당시 숨진 시민 800여 명 대부분이 홀몸노인이나 노숙자 등 빈곤층이었다”고 했다. 사단법인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는 1959년 태풍 ‘사라’ 피해 돕기 모금운동을 계기로 1961년 설립됐다. 민간 모금을 체계적으로 이끌기 위해 전국 언론사와 사회단체가 힘을 모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동일 피해, 동일 지원’을 원칙으로 지금까지 1조6000억 원이 넘는 성금을 모아 지원했다. 정부로부터 국내 자연재해 피해 구호금을 지원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법정구호단체이기도 하다. 송 회장은 “희망브리지와 같은 민간단체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볼 수 있다”며 “빈곤과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를 민간단체도 항상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대엔지니어링과 8년째 진행하고 있는 ‘기프트 하우스 캠페인’을 예로 들었다. 붕괴 직전의 집과 같이 열악한 곳에서 지내는 재난 위기 가정에 현대엔지니어링이 개발한 모듈러 주택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집 안에 전봇대가 세워져 있던 곳에서 살던 이웃, 단열이 안 돼 여름과 겨울에는 집에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이웃 등이 전보다 쾌적하게 지내고 있다. 지난해 희망브리지는 태풍 ‘힌남노’ 등 여러 재난의 피해 이웃에게 57만4000여 점의 구호물품을 전달했다. 자연재난을 입은 3만여 가구에 300억 원가량, 산불 등 사회적 재난 피해자들에게도 157억 원의 국민성금을 지원했다.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클럽인 ‘희망브리지 아너스클럽’을 본격화해 41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송 회장은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지역공동체 강화도 중요하다”며 “여러 연구에서 마을 주민이 서로 안부만 물어도 고독사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게 증명된 만큼 지역공동체를 활성화할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희망브리지는 실제로 2019년 산불 피해를 입은 강원 고성 주민들을 위한 지역공동체 회복에 중장기적 지원을 하고 있다. 올해 희망브리지의 목표는 삶의 전반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재난에 대한 ‘맞춤형 지원 대응’이다. 임시거주시설인 ‘희망하우스’는 올해 100동을 추가로 제작할 방침이다. 아울러 현재 경기 파주와 경남 함양에 있는 물류센터에 이어 제3권역에 세 번째 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물품 보관뿐 아니라 전문적 교육도 제공하는 ‘복합형 재해구호센터’가 목표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 ‘환난상휼(患難相恤)’ 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했어요. 재난 피해가 갈수록 커지고 국가가 모두 책임질 수 없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지만, 이럴수록 환난상휼의 정신을 가진 시민들의 힘이 빛을 발할 겁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 최고의 팬 미팅이었다. 허나 무조건 ‘엄지 척’할 짜임새는 아니었다. 팬들이 애타게 기다렸던 작품. 일본 애니메이션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4일 국내 개봉했다. 1996년 만화 연재를 마쳤으니 장장 26년만. 12일 기준 누적 관객 54만 명을 넘어섰다. 좌석판매율은 ‘아바타: 물의 길’을 제치고 1위에 오르다니. 기대보다 더 화끈한 반응. 우리가 이렇게나 슬램덩크를 사랑하는지 적잖이 놀란다. 실제로 원작만화는 팬층이 두텁기로 유명하다. ‘슬램덩크’는 일본에서 1억7000만 부 이상 팔리며 역대 스포츠만화 판매순위 1위에 올라있다. 국내 역시 지금껏 1450만 부 이상 판매됐다. 1993~96년 일본 아사히TV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시리즈는 “원작을 망쳤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평균시청률 15.3%의 성공을 거뒀다. 그런 추억의 힘은 가공할 정도다. 스크린 앞에 앉아보면 안다. 불 꺼지는 순간 무장해제다. 연필로 스케치하듯 북산고 농구부를 등장시키는 오프닝. 여기서 이미 게임 끝이다. 가슴이 뻐근하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만화에서도 압도적 연출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산왕 전. 그 질감을 제대로 살려낸 영상미는 뭘 더 바랄 게 없다. 숱한 명대사와 명장면의 재림. 살아 움직이는 강백호와 서태웅의 하이파이브로도 포만감은 차고 넘친다. 포인트 가드 송태섭의 주인공 등극도 탁월한 선택. 슬램덩크 ‘정신’에 딱 들어맞는다. 비주류의 뒤를 돌아보지 않는 도전에 누군들 이만큼 어울릴까. 참고로 영화는 그가 오키나와 출신임을 밝히는데, 현지에선 만화 연재 때부터 짐작됐던 설정이라 한다. 원작에서 태섭의 일본 이름은 ‘미야기 료타.’ 미야기는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성씨(姓氏)다. 조선이 나라를 뺏긴 을사늑약 30년 전. 1875년 일제에 함락된 류큐(琉球)왕국이 오키나와다. 지금도 독립을 외치는 이들이 존재하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 보수 성향으로 알려진 원작 만화가이자 영화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의도한 게 아닐지라도. 료타가 중심인물인 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완성도‘란 측면에서 보자면 얘기가 달라진다. 화려한 비주얼과 감격적인 해후에 속으면 안 된다. 이 작품의 리듬과 템포는 퍼석퍼석하다. 재래시장 ‘아이스께끼’를 좋아한다고, 그걸 고급아이스크림이라 우길 순 없다. 이노우에의 감독 데뷔작임을 감안해도 그렇다. “네가 감히…”라는 부라림이 벌써부터 귀청을 때리지만, 내지르고 도망가련다. 일단 영화의 전개가 들쑥날쑥하다. 힘줄 때 힘주지 못하고, 쳐낼 대목을 쳐내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극적 흐름이 바뀌는 변곡점이 전혀 드라마틱하질 않다. 특히 강백호의 리바운드 각성과 서태웅의 완전체 변신이란 이야기의 핵심포인트가 무게감을 잃어버렸다. ‘송태섭의 시점’이란 시도에 불가피한 희생이겠으나… 그 어정쩡함은 본질이 흐려지는 결과를 낳았다. 태섭의 과거 씬도 아쉽다. 자꾸 어물어물 늘어진다. 원작 팬에게 새로운 에피소드는 감사하다. 한데 현재와 회상의 전환이 군데군데 성기다. 묵직한 가족사(史)를 담기엔 태섭의 캐릭터가 다소 일차원인 점도 한몫했다. 복합적 심정이 그런대로 묻어나는 태섭 엄마가 차라리 입체적이다. 어쩌면 이건 감독보단 제작사를 탓해야 한다. 이노우에는 만화야 대가지만 스크린은 초보다. 만화를 읽는 속도와 영화를 보는 타이밍은 다르다. 그럼 영화를 좀더 아는 타짜들이 적극 ‘영화의 문법’을 어필했어야 한다. 원작 몰라도 재미있단 말 역시 허언에 가깝다. 각자 즐기는 맥락은 다를 수 있다. 그래도 책을 읽은 이의 감흥엔 반의반도 못 따라온다. 왜 서태웅이 정우성에 쳐 발리고도 씩 웃는지, 왜 강백호에게 ‘영광의 시대’가 지금인지 만화책을 안 보면 어찌 알까. 그건 다스 베이더가 누구 아빤지도 모르고 스타워즈의 요즘 에피소드를 보는 ‘앙꼬 빠진 찐빵‘과 진배없다. 물론 이런 지적, 쓰잘머리 없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아바타를 이긴 일본만큼은 아닐지언정 한국도 반향이 클 게 자명하다. 그저 다시 만난 게 고마울 따름이니. 아사코처럼 3번 이상 만나도 후회하지 않을 터. 다만 그건 작품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그건 당신, 그 시절 파릇했던 우리의 힘이다. 영화의 헐거운 만듦새를 우리네 소중한 추억이 옴팡지게 메워준 거다. 이 영화의 진짜 숨은 미덕은 작품 자체에 있지 않다. 가슴 속 불씨를 그리도 오래토록 간직해온, 바로 ‘당신들’이 주인공이다.“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슬램덩크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강백호의 대사. 그 되알진 고백은 실은 우리의 진심이니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울 송파구에 있는 ‘롯데호텔 월드’가 여러 해 동안의 대대적인 리뉴얼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고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롯데호텔 측은 “두 차례에 걸친 객실 리뉴얼과 함께 DT(디지털 전환) 서비스 확대, 원더 도어 설치, 식음업장 재개장 등을 통해 ‘5스타 트렌디 레저 호텔’로 거듭나겠다”고 3일 밝혔다. 1988년 개관한 롯데호텔 월드는 2021년 6월경 고층(19∼31층) 객실과 클럽 라운지 등을 재단장하는 ‘1차 리노베이션’을 시작했다. 총 255실에 이르는 객실을 19가지 스타일로 바꿔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 지난해 5월 저층(18층 이하)을 리뉴얼하는 2차 리노베이션을 했다. 일반 객실을 포함해 △캐릭터 룸 △레지덴셜 룸 △온돌스위트 룸 등 고객의 기호에 맞는 244실의 신규 객실로 눈길을 끌었다. 아이들이 좋아해 가족 단위 투숙객들이 선호하는 캐릭터 룸이 30실에서 52실로 대폭 늘어났다. 1차 리노베이션 때 만든 브레드이발소 룸(22실)에 이어 로티로리 룸(10실)과 카카오프렌즈 룸(20실)이 추가됐다. 롯데호텔 관계자는 “캐릭터 룸은 7개월 동안 투숙 비율이 90%를 넘어섰다”며 “특히 롯데월드 조망이 가능한 카카오프렌즈 룸은 가장 먼저 마감된다”고 했다. 다양한 추가 시설과 소프트웨어 구축으로 편의성도 개선했다. 객실에선 KT 인공지능 스피커 ‘기가지니’를 통해 음성으로 냉·난방과 조명 제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컨시어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로비에선 맞춤 컨시어지 서비스 안내로봇 ‘LG 클로이 가이드봇’이 고객들을 맞이한다. 가이드봇은 주요 시설과 주변 관광지 안내는 물론이고, 로비 내 목적지는 함께 이동하며 길을 알려준다. 호텔에 전시된 예술 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 서비스도 제공한다. 1일부터는 롯데월드로 바로 갈 수 있는 ‘원더 도어’의 이용이 가능해졌고 중식당 ‘도림 더 칸톤 테이블’도 즐길 수 있게 됐다. 원더 도어는 롯데호텔 월드와 롯데월드를 이어주는 통로. 그간 호텔에서 롯데월드로 가려면 외부로 나가 10분 이상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원더 도어를 이용하면 몇 걸음만 걸어도 바로 입장할 수 있다. 호텔 패키지나 호텔 현장 구매를 통해 제공되는 전용 티켓을 이용하는 투숙객에겐 ‘원더 찬스’ 특전도 선사한다. 투숙객이 롯데월드를 이용할 때 재입장이 1회 허용되는 특전이다. 롯데호텔 월드를 대표해온 중식당 도림은 ‘도림 더 칸톤 테이블’로 업그레이드됐다. 모던하고 세련된 분위기에 광둥(廣東)식 요리를 기본으로 쓰촨(四川)식과 한국의 제철 식재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메뉴도 전면 개편해 베이징(北京)오리와 딤섬 등 다채로운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좌석 수는 약 1.5배 늘어나 4∼12인용 ‘프라이빗 다이닝 룸’ 8개를 포함해 146석을 마련했다. 홀 가운데에선 티 소믈리에가 엄선한 15종의 차를 판매하며, 차를 주문하면 소믈리에가 직접 우려내 준다. 권정근 롯데호텔 월드 총지배인은 “올해 1월부터 뷔페 레스토랑 ‘라세느’와 ‘라운지’도 리뉴얼을 시작한다”며 “40년 노하우와 서비스 마인드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 드리며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5스타 트렌디 레저 호텔로 자리 잡겠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70년대 도시빈민의 처참한 현실을 정면으로 고발한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쓴 소설가 조세희 씨가 25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경기 가평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와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10년 가까이 작품을 쓰지 않았던 조 작가는 1975년 ‘칼날’을 발표한 뒤 1978년 ‘뫼비우스의 띠’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등 단편 12편을 묶은 소설집 ‘난쏘공’을 출간했다. 난장이네 가족을 통해 산업화의 이면에 가린 삶을 그려낸 난쏘공은 올해 7월까지 320쇄를 돌파했다. 누적 발행 부수는 약 148만 부에 이른다. 대학가에선 신입생들의 필독서로 사랑받았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출제되며 남녀노소에게 친근한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고인은 2017년 난쏘공 300쇄 출간을 맞아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난쏘공’을 쓴 건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맡아 한 것으로 생각했다”며 “우리 역사의 진행을 가만히 보면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다”고 말했다. 고인은 2000년 소설집에 쓴 ’작가의 말’에서는 “이 작품은 그동안 이어져 온 독자들에 의해 완성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 점만 생각하면 나는 행복한 작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나는 아직도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고 전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영애 씨와 아들 중협, 중헌 씨가 있다. 빈소는 강동경희대병원. 발인은 28일.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분해란 부수는 행위로되, 각 요소들을 다른 개체의 식사 행위나 다음 단계의 어떤 생성을 위해 과도하게 부서지지 않는 상태로 보류하여 그 개체에게 맡기는 일이며, 그런 까닭에 분해는 각 요소들의 합성인 창조에 필수적인 전제 기반이다.” 인류사에서 분해나 부패는 그다지 주목받는 영역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역사를 생산하고 발전하는 관점에서 볼 땐 더더욱 그렇다. 특히 ‘타락’ ‘썩는다’ 등의 의미를 지닌 부패를 떠올리면 오히려 피하고 싶거나 마주하기 불편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일본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인 저자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분해나 부패가 얼마나 중요한 과정인지를 떠올려 보길 당부한다. 농업사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뭔가가 썩어야 거름이 되고, 거름이 있어야 토양이 살아나는 건 자연의 순리라고 일깨운다. 그리고 그런 순환은 인간의 역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이 책을 한때 인연을 맺었던 동네 ‘청소 아저씨’에게 헌정했다. 나이가 지긋했던 환경미화원이 하는 일이 바로 분해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 쓰레기를 치우고, 또 그걸 재활용하거나 없애지 않으면 당연히 세상은 망한다. 세상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환경미화원의 존재가 소중한 가치를 지녔듯, 생산이나 소비만큼 관심 받지 못한 분해와 부패도 관심 받아 마땅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분해의 철학’은 독특한 책이다. 분해라는 착점(着點)을 갖고 자신의 논거를 짚어내는 탁월함은 의심할 바 없다. “가장 위험한 세계는 아무것도 썩지 않는 세계”라는 인식 아래 교육철학과 문학, 역사 등을 오가며 펼쳐내는 지적 향연도 감탄이 나온다. 다만 현학적인 문장들이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대목도 없지 않다. 그간 한쪽으로 치우쳤던 시각을 바꾸려는 의도는 좋은데, 또 그게 너무 다른 한쪽으로 경도되는 건 아닌지도 생각해 보게 만든다. 2019년 제41회 산토리 학예상 수상작.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잠깐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를 떠올려 보자. 당시 신문에 실린 숱한 사진 가운데 한 장에선 젊은 흑인 남성이 겨드랑이에 물건을 끼고 물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사진에선 한 백인 커플이 빵 봉지를 쥐고 물속에 서 있었다. 이 닮은꼴 사진들엔 뭐라고 설명이 달렸을까. “한 청년이 채소 가게를 ‘약탈한 뒤’ 가슴까지 오는 물을 헤치고 걷고 있다.” “주민 2명이 빵과 소다수를 ‘찾아낸 뒤’ 가슴까지 오는 물을 헤치고 걸어 나온다.” 편향은 무섭다.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범죄자란 오해까지 받는다. 성별이나 종교, 장애, 계층 등으로 인한 편향 역시 심각하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편향은 혐오와 차별을 불러일으킨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위스콘신대에서 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저자도 그랬다. 언론계에 진출하려 여러 매체에 아이디어를 넣었는데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한데 남성처럼 여겨지게 ‘J. D.’라 이름을 써서 e메일을 보냈더니 하루도 안 돼 답변이 왔다고 한다. 대놓고 차별주의자가 아니어도, “혐오는 나쁜 것”이라고 믿는 사람조차도 이런 편향으로부터 당당하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기 역시 마찬가지라면서. 해법은 무척 힘겨운 길이지만 분명하다. ‘틀’을 깨야 한다. 개개인이 하나씩 각성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학교의 수업을 바꾸고, 법률과 제도를 개정하고, 조직과 사회가 재편돼야 한다. 다행히 저자는 이런 편향을 없애려는 노력들이 조금씩 결실을 맺는 현장을 보며 희망을 품는다. 다만 이 역시 인간이 하는 일이니, 우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현실을 기꺼이 마주하려는 태도, 자신이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계속 바라보겠다는 맹세, 모든 인간의 성장에 필요한 불편함을 감당하고 뚫고 나아갈 수 있는 감정적 기량, 그리고 행동할 용기가 그것이다.” ‘편향의 종말’은 묵직한 주제를 다뤘지만 상당히 뭉클한 책이다. 갈수록 골이 깊어지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다독이는 저자의 의지가 짠하면서도 고맙다. 저자 말마따나 편향은 본능의 산물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걸 깨려는 노력마저 포기해선 안 된다. 그의 작은 발걸음이 더 큰 울림으로 퍼질 수 있길 기원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나의 내면에는 진여자성(眞如自性·마음의 본래 성품) 또는 자기(自己)라고 할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내 가슴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순수함과 부동의 용기, 먼 조상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겸양과 배려 그리고 예의염치의 정신이 그것이었다.” 2007∼2009년 제44대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저자가 3년에 걸쳐 쓰고 다듬었다는 자서전은 참으로 담박하다. 1943년 태어나 한반도에 휘몰아친 갖은 풍파를 겪은 세대건만 문장이 어느 한 구석 흐트러짐이 없다. 평생 법조인답게 적확한 언어를 구사할 것이야 예상됐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글이 이리 올곧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책은 제목처럼 한결같던 저자의 생애를 자분자분 짚어 나간다. 어린 시절 기억부터 1965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23년간 서울지방검찰청과 대검찰청 등에 몸담았던 검사 생활. 이후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 등 평생 사회에 봉직한 삶은 걸어온 여정 자체가 울림이 크다. 이와 별개로 인상 깊은 대목이 2가지 있다. 먼저 저자는 책에서 한 번도 ‘남 탓’ 하는 경우가 없다. 살면서 모든 관계가 좋게 흘러가진 않았을 텐데, 딱히 힐난하거나 깎아내리지 않는다. 이는 누군가 “서운해하거나 마음에 상처 입는 일이 없도록” 배려한 저자의 성정에서 기인했겠으나, 자녀 대학 입시 때 “우리 아이 합격만 빌지 말고 모든 수험생의 합격을 기원하자”던 부인의 품격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저자가 일을 도모할 땐 항상 가족과 상의한다는 점이다. 책에서 이를 자세히 다루진 않으나, 어떤 제안을 받으면 꼭 ‘집에서 의논하니 가족이 찬성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자서전 집필 역시 큰아들의 간곡한 권유로 시작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 시절, 마음을 열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던 자세도 이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에서 이뤄진 게 아닌가 싶다. 공정을 중시하는 요즘 청년들에게도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주민들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걷습니다. 걸을수록, 누군가를 만날수록 결국 사람과 사람이 통하는 건 진심을 다할 때라는 걸 배우죠.” ‘현직 구청장이 자기 구를 소개하는 책을 냈다.’ 이런 소릴 들으면 아무래도 뻔한 홍보용일 거란 짐작이 앞선다. 하지만 15일 출간된 ‘동대문을 걷다’(사진)는 다소 색다르다. 올해 7월 1일 취임한 이필형 동대문구청장(63)이 직접 동대문 구석구석을 누비고, 글과 사진도 직접 쓰고 찍었다. 이 구청장은 21일 전화 인터뷰에서 “취임 뒤 매일 오전 3시에 일어나 7시까지 썼다”고 했다. “동대문구를 위해 책을 썼지만 업무시간은 1분도 할애하지 않았어요. 글을 쓰며 제 결의도 다잡고, 주민들 제언도 한 번 더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동대문을 걷다’는 평균 서너 쪽 분량의 글 50편을 엮은 에세이집. 동대문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던 시절과 28년간 몸담았던 이문동 국가정보원 생활, 구청장 선거 전후 과정, 주민들과 길에서 만나며 얻은 교훈 등을 정리했다. 문장은 짧고 담백해 편안함이 묻어난다. “책을 처음 쓴 건 2016년 출간한 ‘숨결이 나를 이끌고 갔다’였어요. 작가를 꿈꿨던 건 아니고, 언제나 어려운 이들을 도우셨던 아버지 얘기를 자식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펜을 든 게 일이 커져버렸습니다. 첫 책에서 백두대간 도보여행을 다뤘는데, 다섯 번째인 이번 책도 걷는 얘기가 돼버렸네요.(웃음)” 이 구청장이 책을 통해 전하고픈 건 딱 하나다. 동대문이 얼마나 근사한 동네인지다. 그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면도 있지만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며 “뭣보다 주민들이 정감이 넘치고 열린 마음을 가졌다. 이 책이 동대문의 매력을 느끼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자유시장 경제학이 거둔 승리는 밤에 촬영한 한반도 위성사진으로 설명되곤 한다.…인상 깊은 모습이지만 그 의미가 종종 잘못 해석된다. 다른 부유한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경제를 신중하게 조종하며 번영을 일궈냈다. 이 이야기는 국가가 운전대에서 두 손을 모두 떼기로 결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준다.” 제목만 보면 위대한 경제학자들을 향한 찬사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다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경제 주필인 저자가 말하고 싶은 건 부제에 명확히 담겼다. ‘그들은 성공한 혁명가인가, 거짓 예언자인가.’ 혁명엔 성공했지만 잘못된 예측으로 미래를 망쳤다는 힐난이다. 저자가 ‘경제학자의 시대(Economists‘ hour)’라고 일컫는 시기는 1969∼2008년. 1969년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1913∼1994)이 당대 ‘경제학자의 상징’이던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의 권고를 받아들여 징병제 폐지 자문위원회를 꾸렸던 해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저자는 이때를 “시장의 힘과 영광을 믿는 경제학자가 영향력을 발휘해 정부 사업과 운영 방침에 변화를 꾀하고, 그 결과 일상생활도 모습을 바꾼” 시기였다고 본다. 재밌는 건, 그전까지 경제학자는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1950년대 연방준비은행 수뇌부엔 양돈업자도 있었지만 경제학자들은 지하사무실에서 ‘참고 서류’나 작성했다고 한다. 그마저도 “쓸모없다”는 취급을 받았다. 경제학자가 정책을 좌지우지하게 된 건 혁명이나 다름없는 변화였다. 하지만 자유시장주의는 이후 불변의 진리로 여겨지며 세계적 대세가 됐지만 끝이 좋질 못했다. 금융위기 이후 드러났듯 경제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정부 재정을 악화시켰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의견에 동의하건 안 하건, 딱딱한 경제 용어와 생경한 미국 상황이 적지 않은데도 역사소설처럼 술술 넘어가는 대단한 책이다. “시장경제는 가장 놀라운 인간의 발명품이다. 부를 낳는 강력한 기계다. 하지만 한 사회를 평가하는 척도는…가장 아랫단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질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의도적으로 번영의 분배를 외면해왔다. 이 때문에 지금 자유민주주의가 선동을 일삼는 국수주의 정치가한테 그 생존을 시험당하고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죽음을 마주하여 인간이 상심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인지 모른다. … 슬퍼하기를 멈추고 거역하기 어려운 거대한 힘에 순응하는 것이 상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겸허한 태도로 거대한 힘에 순응하는 데도 각별한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 삶이 이다지도 지난하단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리 애쓰지 않았을지도. 불현듯 찾아오는 햇살의 따스함만 바라보기엔 아픔이 너무 두껍고 묵직하다. 더구나 지금처럼 국민적 상실감이 휘몰아칠 때면 옷깃을 여미기도 버겁다. ‘인생의 허무를…’은 이럴 때 처방용 조제약 같은 책이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다양한 집필을 통해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한 저자는 이번 에세이집에서 허무(虛無)를 들여다봤다. 덧없고 덧없는 세상살이에 축처진 어깨를 우린 정말 어떻게 다독여야 할까. 다소 맥없어 보일지라도 결론은 ‘내려놓기’이다. 뻔한, 욕심을 버려라가 아니다. 희망도 선의도 의미도 찾지 말라고 조언한다. 희망 없이도, 선의에 기대지 않아도, 의미를 얻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니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께 공명하되 치우치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게 필요하다. 전공이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인 저자는 진작부터 “허무와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책을 내리라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칼럼 ‘김영민의 본다는 것은’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이런 주제를 고민해 왔다. 그래서인지 에세이집에 실린 글들은 각자의 방향대로 흘러가면서도 하나의 바다로 모여드는 기분이 든다. “인생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균형을 잡는 건 언제나 어렵다. 안타깝고 부아 치밀 땐 더 그렇다. 갈기갈기 마음 찢긴 이에게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란 말은 쉽사리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쩌랴. 우린 또 보듬어야 한다. 이 시간을, 이 세월을. 잊지는 말되 조금씩 아물어 가길.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라면서. 그래야 숨을 쉴 수가 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핑할 줄 알아요? 서핑할 줄 알겠네.” 주인공인 ‘나’에게 이런 말들은 이제 대수롭지도 않다. 미국 하와이에서 나고 자랐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하지만 난 서핑을 해본 적 없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랬다. 서울에서 글로벌 기업을 다니는 내게 어느 날 변호사가 연락했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며 강원 양양에 있는 작은 아파트를 유산으로 남겼단다. 팔아치울 생각으로 간 아파트 앞엔 넓디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그곳은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서핑의 성지였다. ‘서핑하는 정신’은 묘한 소설이다. 왠지 예상 가능한 흐름 속에서 기시감이 잔뜩 묻어나는데, 막상 읽으면 생경한 그림이 펼쳐진다. 제대로 된 총격신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데 여기저기 을씨년스러운 살풍경이 꼬리를 무는 스릴러 소설. 딱히 거창하게 분위기를 잡진 않는데 왠지 처연하고 아련하다. 일단 나라는 인물이 주는 먹먹함부터 독특하다.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고 홀로 사는 여성이라면 있을 법한 ‘비련의 여주인공’ 냄새는 없다. 그렇다고 캔디처럼 생기가 넘치지도, 똑순이처럼 야무지지도 않다. 지하철에서 쓱 지나쳐 가면 기억에도 남지 않을, 거울에 비친 우리네 모습처럼. 하지만 그 내면엔 어딘가로 외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아파요”라고. 세계에서 제일 서핑하기 좋은 섬에서도 서핑하지 않았던 나는, 겨울철 검은 서핑슈트를 입어야 하는 동해안에서 서핑을 배우기 시작한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짓일지 모르지만 뭔 상관인가. 어쩌면 내겐, 꼭 서핑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자기를 다독일 뭔가를 만난다면 타인이 어떻게 볼지는 딱히 중요치 않으니. 그럼 이제, 우리도 우리만의 서핑보드를 찾아야 할 때다. 거기에 바다가 있는 한. “파도는 한 번 더 밀려올 것이고, 이제 내가 타야 할 타이밍이었다. 파도가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다. 희미하지만 저 물결은 파도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콜 집권 16년 후 나라는 마비됐다. 여당은 피를 철철 흘리며 스캔들로 휘청거렸고 경제와 노동시장, 사회보장 시스템은 깊은 위기에 빠졌다. 당시 독일은 ‘유럽의 병자’였다. 그때 동독 출신의 한 여성 정치인이 나타나 서독에 전환점이 됐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68). 16년 동안 총리로 재임하며 독일은 물론 서구 사회를 이끈 지도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리더’란 찬사가 잘 어울렸던 그는 지난해 스스로 총리직을 내려놓으며 한 시대를 매조지었다. 책의 부제처럼 ‘독일을 바꾼 16년의 기록’이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독일의 유명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볼 때, 메르켈은 여타 정치인과는 너무나 결이 다르다. 화려한 연설도 강력한 리더십도 없지만, 굳건한 인내와 누구라도 타협할 수 있는 융통성을 바탕으로 나라를 운영했다. 어떤 정책을 다룰 때면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끊임없이 경청하고 반영하는 자세는 특히나 돋보였다. 운도 따르긴 했다. 상상해 보라. 만약 남북이 통일된 뒤 무명의 북한 여성 과학자가 남한 주도 사회에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당시 독일 정치계는 동독 출신 여성이란 비주류 신인을 ‘마스코트’ 삼고자 메르켈을 과감히 등용했다. 단지 그들은 몰랐을 뿐이다. 메르켈은 토사구팽 될 이가 아니었다. 온화한 미소 뒤로 숱한 정적을 제거하는 결단력, 정치적 토대가 없는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우위를 잡는 영민함까지 갖췄다. 물론 저자는 호평에만 머물진 않는다. 너무 심사숙고해 결정은 언제나 뒤늦은 편이었다. 원칙이 없는 듯 상황 따라 입장을 자주 바꿨다. “직선제였다면 재선도 불가능했을 것”이란 지적처럼 비전을 보여주는 카리스마도 부족했다. 하지만 우린 안다. 섣부른 선택과 꽉 막힌 옹고집과 현란한 언변이 그간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또 다른 앙겔라 메르켈이 세상에 계속 나와 줘야 하는 이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참으로 ‘슴슴한’ 수필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창한 사건은 없다. ‘곰삭은 동네에서 집을 구하고, 잔잔히 살면서 이런저런 인연을 맺는다.’ 이걸로 내용은 웬만큼 설명된다. 물론 가족이던 반려견 ‘봉봉’이 세상을 떠난 건 큰일이었으나…. 담백하다 못해 밍밍하다고 해도 될 정도다. 한데 그런 맛에 반해 평양냉면을 찾는 이가 어디 한둘이랴. 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현대문학) 등을 통해 켜켜이 팬층을 쌓아온 작가는 에세이 역시 노포 맛집처럼 찐득한 문장으로 휘감는다. 가끔 얼기설기 엉키는 느낌도 없진 않으나, 그게 또 희한하게 중독성 있다. 뭣보다 글들이 사부작사부작 흘러가는데, 어느새 책을 놓지 못하고 젖어든다. “근래 만난 가장 아름다운 책”(안희연 시인)인진 모르겠으나, 사소한 것에서도 그 질감과 무게를 찾아내는 안목이 놀랍다. 하긴, 살구 파는 좌판을 펼쳐놓고 “못생겨도 달다”는 어르신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오, 알아요. 알고말고요”라 응해주는 이라면 뭐든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다. 뜬금없지만, 책장을 넘기며 문득문득 천문학자 칼 세이건(1934∼1996)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사과파이를 만들려면, 먼저 우주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가. 마을 어귀에 핀 이름 모를 잡초들에도 하나의 삶과 공존과 세상이 깃들어 있는 것을. 시간이 멈춰 서진 않겠지만, 정든 동네 오래오래 머물길. 올겨울 난방비는 무탈하게 지나가길.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목만 봐도 어느 분야인지, 뭘 얘기할지 대충 느낌이 온다. 그만큼 이제 진화생물학은 일반 독자에게도 친숙한 과학 분야. 리처드 도킨스 영국 옥스퍼드대 명예교수(81)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등 워낙 성공한 대중과학서가 많기도 했다. 도킨스가 “매우 잘 쓰인, 읽기 쉬운 필독서”라 추천사까지 달았으니 게임 끝. 실제로도 문장이 편안하고 논지도 일목요연하다. 영국 런던대 생물학과 교수인 저자는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지명도를 쌓은 여성 행동생태학자.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오지에서 다양한 생명체를 연구해온 경력도 훌륭하다. 얼핏 이기적 유전자와 협력의 유전자는 상반된 개념처럼 들리지만, 쉽게 생각하면 된다. 알다시피 도킨스가 유전자를 이기적이라 부른 건 유전자는 진화 과정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유지하고 남기려는 목적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협력도 마찬가지다. “협력하지 않았다면, 지구에는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저자는 단언한다. 유전자가 살아남으려면 서로 힘을 모아야 했단 뜻이다. 실제로 인간은 “끈끈하게 이어진 가족을 이루고 협력하며 번식”했다. 정당한 협력을 위해 “사기꾼을 벌하고 평판에 신경 쓰며” 후대에게 이를 가르쳤다. 다른 생명체도 협력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책에는 벌거숭이두더지쥐와 청줄청소놀래기 같은 생판 처음 듣는 동물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들도 협력을 통해 생존하고 진화해왔다. ‘협력의 유전자’는 인간 입장에선 흐뭇한 책이다. 우리 유전자에 이런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니 기분 나쁠 게 없다. 특히 4장에서 협력이 결국 ‘공정’을 낳아 인류가 어느 생명체보다도 큰 발전을 이뤘다는 주장은 뿌듯하기도 하다. 다만 읽을수록 신선함은 다소 떨어진다. 워낙 비슷한 책들이 이미 많이 나온 탓이겠으나…, 이젠 ‘넥스트 스텝’이 궁금하다면 과한 욕심일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엘리트 미디어는 막대한 힘을 잃어버렸지요. 폭스뉴스는 계속해서 잘나가고 있고요.” 2010년 이 말을 할 때, 폭스뉴스 진행자 빌 오라일리(73)는 떵떵거릴 만했다. 당시 그들의 시청률은 경쟁사 CNN과 MSNBC를 합친 것보다 높았다고 한다. 물론 시청률이 프로그램의 질을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폭스뉴스는 품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은 관심도 없었고. 폭스뉴스는 다양한 매체가 그득한 미 방송계에서도 무척 특이한 존재다. ‘미디어 황제’ 루버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91)이 만든 극우 성향의 TV라는 건 웬만큼 알려진 사실. 초기엔 대다수 언론의 비웃음을 샀던 폭스뉴스가 어떻게 이런 역전 만루홈런을 칠 수 있었을까. 답은 뉴욕시립대 미디어문화학과 교수인 저자가 붙인 부제에 그대로 나와 있다. ‘보수를 노동계급의 브랜드로 연출하기.’ 영국 타블로이드 ‘스타’ 등에서 황색저널리즘을 갈고닦은 머독은 일단 화제몰이에 집중했다. 자극적인 사건, 더 자극적인 성적 메시지…. 지금이야 걸작으로 인정받지만 사고뭉치 가장과 아들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이 폭스뉴스에서 나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미 TV에서 모범적이지 않은 가족을 묘사하는 건 금기에 가까웠다. 노이즈 마케팅 전략의 또 다른 공격 대상은 주류 언론들. 공정과 양심을 내세우는 뉴욕타임스(NYT) 등을 진보의 탈을 쓴 엘리트 기득권자로 묘사했다. 그들은 ‘서민을 위한 방송’을 한다며 대놓고 이죽거린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권한을 갖고 있고, 대부분의 미디어는 그를 지지합니다. 서민들에겐 서민들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 이기나 두고 봅시다.”(2009년 방송에서) 저자가 볼 때 폭스뉴스의 성공은 이런 일련의 ‘정교한 프레이밍’ 전략 덕분이었다. “뉴스 방송이란 공익사업 이미지가 아닌,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에 바탕을 둔 텔레비전 자체를 브랜드”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기존 보수의 구도에서 기업가와 노동자는 가까워지기 힘든 관계다. 하지만 폭스뉴스는 기업가들을 ‘일자리 창출자’라고 부른다. 친부유층 공화당이 노동자의 친구란 인식 전환을 꾀했다. 일부 진행자가 유난히 고졸인 걸 강조한 것도 ‘우리 친구 아이가’ 전술이었다. 미 뉴스에서 공식처럼 쓰던 ‘대중 여러분(general public)’ 대신 시청자를 ‘서민(folk)’이라고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숱한 비난에도 꿋꿋하던 폭스뉴스의 위기는 의외의 틈바구니에서 터져 나왔다. 잘나가던 제작자와 진행자들이 성 스캔들에 휘말리며 스스로 무너졌다. 또한 더 ‘막가파’가 등장하며 질질 끌려다닌다. 바로 폭스뉴스가 처음엔 대선 후보 ‘깜’도 안 된다고 여겼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이 책은 놀라운 통찰력이 가득하다. 미 언론계의 이면을 여지없이 까발린다. 세계 곳곳에서 좌우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상황에 대입해 봐도 좋은 해설서가 되어 준다. 다만 원문 탓인지 번역 탓인지 모르겠으나, 10년 전 대학 전공서적 같은 문장들이 집중을 가로막는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흥미로운데 한참 무슨 말인지 고민해야 했다. 폭스뉴스와 비교하며 식자층의 어리석음을 비판한 책이 ‘엘리트’스러운 글이란 건 좀 그렇지 않나.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올해 마주한 책들 가운데 ‘제목’이 제일 부담스럽다. 모르는 이가 말을 걸어도 불편한데, 되레 얘길 건네 보라니. 지금껏 애한테도 그렇게 안 가르쳤다. 책을 읽고 주억거리고, 백번 옳은 말이라 공감한들 실천하진 못하리란 확신이 온몸을 파고든다. 이만한 거부감은 저자도 대충 예상했을 터. 미국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낯선 이와의 대화는 단순히 살아가는 방편이 아니라 살아남는 전략”이라며 살살 꼬드긴다. 인류는 원래 이방인을 환대하고 소통하고 관계 맺으며 진화해 왔다며. 아, 진짜… 조상까지 거론하니 안 넘어갈 수 없다. 물론 다들 스마트폰에 고개를 파묻은 지하철 풍경이 익숙한 현대사회에서 생판 남에게 말 건다는 건 웬만한 각오론 하기 어렵다. 자칫 치한이나 정신이상자로 오해받을까 겁도 난다. 한데 눈을 마주치고 사소한 공통점을 찾아내 대화를 성사시키면, ‘A Whole New World’(완전히 새로운 세상·영화 ‘알라딘’ 주제곡)가 펼쳐진단다. 실은 다들 누군가 말 걸어주길 내심 바란다고 저자는 믿는다. 출판사에선 싫어하겠으나, 이 책은 바쁘면 1, 2부 건너뛰고 3부만 봐도 ‘앙꼬’는 맛볼 수 있다. 문장은 윤기가 넘치나 앞쪽은 다소 ‘공자 왈 맹자 왈’이라 “그래서 뭐(So What)” 싶다. 하지만 3부에선 낯선 이에게 말을 걸었던 경험담을 야무지게 풀어낸다. 본격적으로 대화의 ‘스킬’을 공유하는데 매우 참조할 만하다. 낄낄거리다가도 무릎을 딱 치게 만드는 재주가 보통 아니다. 미리 예고했듯, 책에 감화돼도 곧장 행동으로 옮기긴 마뜩잖다. 그리 쉬우면 세상이 왜 이 모양일까. 하지만 다 읽고 나면 버스나 길가에서 무심히 지나치던 이들을 문득 돌아보게 된다. 그들도 나처럼, 우린 모두 외로운 섬인 것을. 언젠간 꼭, 낯선 이에게 말을 걸어보리라. 일단 우황청심환부터 한 알 먹고.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에두를 필요 없다. 사회학이라… 교과서도 아니고. 제목만 봐선 흠칫 움츠러든다. 반면 그래도 게임이라니 살짝 안심. 표지에 보기만 해도 신나는 컨트롤러도 떡하니 실려 있고. 과연 이 책, 딱딱할까 말랑할까. 결론부터 말하자. 이 책, 무척 흥미로운 내용을 ‘있는 힘껏’ 건조하게 썼다. 메시지는 간명하다. 요즘 게임은 대부분 온라인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다. 당연히 이용자들은 게임 속에서 관계 맺고 소통하고 거래도 한다. 현실 사회랑 닮은 구석이 무진장이다. 그럼 게임월드를 연구하면 사람 사는 세상도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한번 제대로 들여다볼 때가 됐다. 뭐 이런 얘기다. 꽤나 설득력 있다. 사실 사회과학에선 연구가 난망한 주제들이 많다. 저자도 얘기했지만, 질병이나 폭력 등의 상관관계 같은 걸 어디서 함부로 실험하겠나. 하지만 비현실세계인 게임에선 이런저런 테스트도 가능하고, 뭣보다 명확한 데이터가 풍부하게 남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런 분야를 살펴봐 줄 최고의 카드다. 전산학 보안학을 전공했고 유명 게임회사에서 데이터 분석 및 엔지니어링을 맡고 있으니 ‘게임 끝’이다. 실제로 책을 펴보면, 관련된 다양한 연구와 사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배울 게 넘쳐난다. 사회과학자들이 이렇게 게임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다만 게임이 현실을 반영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다음은 뭘까 싶긴 하다. 두 세상이 비슷하다 이상의 뭔가가 부족하다. 게임에서 획기적인 사회 통찰을 찾아내긴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이해는 가지만 아무래도 ‘친(親)게임회사’적 멘트들이 적지 않다. 진지한 내용이긴 해도 좀 더 가볍게 정리했더라면 더 반가웠겠다. 물론 그런 아쉬움이 이 책의 매력을 반감시키진 않는다. 마약범죄 조직과 유사한 게임재화 불법 거래를 잡아내는 데 네트워크 연구가 효과적이라거나 게임 이용자끼리 선한 마음을 퍼뜨리는 호혜행위 전파 등은 매우 인상적이다. 현실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세계를 다룬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년) 세상이 언제 올진 몰라도, 게임은 이미 우리와 떼놓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지 않나. 이제 게임한다고 뭐라 그러지도 못하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