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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누누’는 사실 비밀이 있어요. 바로 엄마가 인어, 자신도 인어랍니다. 물에 들어가면 다리가 꼬리지느러미로 바뀌어요. 하지만 학교 친구들도, 선생님도 이 사실을 모른답니다. 물 밖에서 ‘누누’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아이거든요.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어요. 체육 시간에 수영장에 가게 됐거든요. ‘누누’는 친구들과 함께 물속에서 놀고 싶었지만 물 밖에서 꾹 참았어요. 그런데 하윤이가 물속에 빠진 게 보인 거예요. ‘누누’는 자기도 모르게 물속으로 들어가 하윤이를 구해냈어요. 그런데 아차! 다리가 꼬리지느러미로 변해 있었네요. 이것을 친구들도, 선생님도 봐 버린 거죠. ‘누누’는 어떻게 될까요. ‘인어공주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독특한 상상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흥미롭다. 책을 읽고 난 뒤, 친구의 모습이 나와 다르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이와 함께 얘기해보면 좋겠다. 우리 주변에 ‘인어공주’들은 생각보다 많을 수 있으니까.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연극용 물감과 BB탄으로 만든 자작극.”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암살 미수사건 직후 미 소셜미디어에선 이런 음모론이 확산됐다. 근거 없는 주장이 사실처럼 퍼지는 데는 수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뉴스피드를 통해 내가 신뢰하는 인플루언서의 의견만 보는 세상에서 음모론과 가짜뉴스는 활개를 치기 쉽다.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사회에서 진실을 가려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리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저자는 신간에서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비논리의 흑역사를 보여주며, 어떤 논리적 오류가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인간이 비합리적으로 사고하는 패턴을 설명하고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방안을 제시한다. 897년 교황으로 선출된 스테파노 6세는 전임 교황 포르모소의 부패를 맹렬히 비난했다. “죄 없는 자만이 자신을 변호할 수 있다. 포르모소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따라서 포르모소는 유죄”라는 게 그의 논리였다. 스테파노 6세는 포르모소가 다시는 축복을 내릴 수 없게 오른쪽 손가락 세 개를 잘라버렸다. 황당하게도 포르모소는 재판이 시작되기 8개월 전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미 시체가 됐는데 변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죄로 몬 것. “죄 없는 자만이 자신을 변호할 수 있다(전제 1), 포르모소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전제 2), 따라서 포르모소는 유죄다(결론).”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삼단논법에 사람들은 속았다. 문제는 이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선동적인 미사여구 속에 숨어 진실을 판별하기 어려운 주장이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인간의 기억은 타인의 의견에 의해 곧잘 왜곡된다. 2003년 스웨덴 외교부 장관 안나 린드 살인사건 당시 목격자들은 증언 전 차례를 기다리며 한방에 모여 있었다. 각자 목격한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의 기억에 과도한 선입견을 심어줬다. 목격자들의 진술은 일치했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해자인 미야일로 미야일로비치가 마침내 체포됐을 때 그의 모습은 목격자들의 증언과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지식의 보고에 곧장 접속할 수 있는 지금은 논리적 함정에 더 취약하다. 이런 환경이 허위 사실을 어느 때보다 더 널리, 더 빠르게 퍼뜨리는 역설을 낳고 있다. 2014년 사이언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TV나 신문으로 볼 때보다 온라인에서 부도덕한 사건을 접할 때 더욱 분노한다. 콘텐츠 크리에이터와 플랫폼이 이윤을 얻기 위해 뉴스를 자극적으로 소비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의 기본 태도인 비판적 사고 방식을 인류의 자산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계에서는 설령 고교생이 학계를 대표하는 과학자의 주장에 반기를 들어도 증거만 충실하다면, 과학자는 자신의 주장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 과학으로 소통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편견 때문인 경우가 많다. 개인의 정치 성향과 편견이 기후변화, 원자력, 총기 규제, 예방접종 등 첨예한 사안을 판단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에 따라 거짓과 정치 선동, 사기꾼들의 속임수에 당하지 않기 위해선 분석적 사고 훈련을 통해 통념을 깨부숴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적어도 “다른 방법으로 확인할 때까지 특정한 주장의 수용을 유보하는 방법만 배워도 매우 유익한 습관이 된다”는 조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희디흰 뺨에 검댕을 묻힌 아이가 눈을 뜬다. 눈엔 분홍빛 선율이 어려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볼레로 선율. 아이는 춤을 추며 사마귀, 물고기, 나비와 만나고 이 모두와 친구가 된다. 그러다 쾅. 느닷없이 전쟁이 터진다. 익숙한 풍경이 속수무책으로 바스러진다. 아이는 살아남지만 상흔이 남았다. 그림책이 아니라 짧은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본 것 같다. 이수지 그림책 작가(50)의 신작 ‘춤을 추었어’(안그라픽스) 얘기다. 24일 서울 광진구의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건축된 지 30년 가까이 된 아파트 상가 건물 4층에 있는 공간에는 그림책 등이 빼곡했다. 신간의 착상은 어떻게 나왔을까. 지난해 10월 평소처럼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던 작가는 눈이 번뜩 뜨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전날 서울 여의도에선 불꽃축제가 열렸다. 어떤 오류에선지 인터넷 기사의 사진에 불꽃축제가 들어갔는데 아래 사진설명 제목엔 ‘이스라엘 하마스 대대적 포격 시작’이 달렸다. 이 작가는 “아이언돔이 밤하늘에 그리는 궤적이 불꽃놀이와 기가 막히게 흡사하다”며 “한 곳에선 사람이 죽어가는데 다른 곳에선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구나 싶었다”고 했다. 전쟁과 축제의 공존이라는 모순적 현실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 전작 ‘여름이 온다’에서 비발디의 음악을 입힌 그는 이번엔 모리스 라벨의 춤곡 ‘볼레로’를 갖고 왔다. 드럼 소리가 거의 들리지도 않게 시작해 점점 고조되다가 마지막에 ‘쾅’ 하는 대목에서 폭죽이 터지고 잔해가 떨어지는 듯한 시각적 환상을 느꼈다고. QR코드로 음악을 들으며 책장을 넘기면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부산행’ 등을 맡은 장영규 음악감독이 편곡을 맡았다. 여기에 1분 내외의 애니메이션 18개를 대체불가능토큰(NFT)으로 제작해 그림책의 외연을 넓혔다. 배경음악에 맞춰 폭죽이 터지고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등 그림책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이 작가는 “손에 쥐는 아날로그 매체인 그림책을 디지털화한다는 아이디어가 새로웠다”며 “지금도 서로 다른 장르가 만날 때 걱정보다 ‘재밌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해외에서 K그림책에 대한 호응을 체감하고 있다고도 했다. 최근 해외출판 관계자가 농담처럼 ‘혹시 파주라는 곳에 그림책 학교가 있냐?’고 물었다고. 한국 그림책들의 서지정보에 들어간 ‘Paju’라는 단어를 보고,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파주출판도시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 이 작가는 “그림책 선진국들은 이미 정점을 찍고 유지되는 분위기라면, 한국은 막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날것’의 좋은 기운이 있다”며 “처음 보는 그림책들이 많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2022년 아동문학계 노벨 문학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작가는 그림책, 음악, NFT를 아우르는 새로운 작업을 통해 이번 신간을 냈다. 새 책이 방금 나왔지만 그는 벌써 차기작 구상이 한창이었다. 어린이 그림책을 주로 그려 왔는데 이제는 청소년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 “딸이 중학교 3학년인데 농구부 주장이기도 해요. 딸이 농구 하는 모습을 봤는데 굉장히 역동적이었죠. 다음엔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가수 김민기가 운영하다 폐관한 대학로 소극장 ‘학전’은 17일 어린이·청소년 공연장 ‘아르코꿈밭극장’(사진)으로 이름을 바꿔 재개관했다. 고인은 세상을 떴지만 그의 뜻을 이어받는 공간은 새로 마련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는 올 3월 15일 폐관한 학전 건물을 임차해 리모델링한 뒤 ‘아르코꿈밭극장’으로 문을 열었다. 새 이름에는 어린이들의 꿈이 움트고 자라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았다.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등 어린이 공연과 ‘모스키토’ ‘굿모닝 학교’ ‘복서와 소년’ 등 청소년 공연을 선보인 학전의 토대 위에 어린이극 중심 공연장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기존 극단 사무실이 있던 2층은 관객을 위한 임시 라운지로, 3층 연습실은 관객과 창작진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바뀌었다. 다만, 4층 고인의 생전 집무실 공간은 아직 활용 방안이 정해지지 않았다. 김민기의 조카딸인 김성민 학전 총무팀장은 22일 기자간담회에서 “그 공간만큼은 비워둔 상태인데 어떻게 할지에 대해선 아직 정해진 게 없다”며 “공간을 관리할 수 있는 게 학전 사람들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일단은 그대로 남겨 두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대중음악과 공연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학전인 만큼 그동안 펼친 공연들을 아카이브로 남기는 작업도 추진된다. 김 팀장은 “눈에 보이는 자료들은 아르코예술기록원이 가져가 2∼3년 뒤 소장 자료로 확인하게 될 것”이라며 “학전은 김민기의 공연과 대중음악, 작품 대본집 모두를 아우르는 아카이브를 학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이 남긴 마지막 소설 ‘동해’(1937년)에서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는 영화 ‘만춘’의 원본 영상이 확인됐다. 그동안 작품 속 허구의 영화로 치부된 ‘만춘’의 실제 영상이 확보된 것으로, 이상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이상 연구에 천착해 온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는 동아일보 1936년 신문에 게재된 영화 ‘만춘’ 광고를 통해 영화가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22일 밝혔다. 권 명예교수는 “이상을 연구하며 수십 년간 이 영화를 찾아다녔는데 결국 호주의 한 영화사에서 보유 중인 영상 파일을 받을 수 있었다”며 “이상은 자신이 경험한 일이나 관람한 영화 등을 얽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메타픽션’ 방식을 잘 활용했는데, 그 사실을 그대로 입증해주는 영화가 발견된 것”이라고 말했다. 동해는 이상의 3대 소설(‘동해’, ‘날개’, ‘종생기’) 중 하나로 ‘임(姙)’이라는 여성을 둘러싸고 주인공과 친구의 삼각관계를 그렸다. 작품에서 어느 날 ‘임’이 ‘나’에게 불쑥 찾아온다. 나의 친구 ‘윤’과 헤어졌다며, 혼자 사는 집에 옷가방까지 싸 들고 찾아온 것. 다음 날 나는 임이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헤어졌다던 남편에게 다가서는 모습을 보고 질린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어정쩡하게 끼어들게 된 것. 이때 주인공이 친구 T 군과 보는 영화가 ‘만춘’이다. 권 명예교수에 따르면 ‘만춘’은 1936년 6월 23일부터 일주일 동안 서울 종로구의 단성사에서 상영됐다. 원제는 ‘The Flame Within’(정염·情炎)이다. 미국 MGM사가 1935년 제작하고, 에드먼드 골딩이 감독을 맡았다. 소설 ‘동해’처럼 남녀 간 삼각관계를 그린 영화 ‘만춘’은 정신과 의사 메리가 여성 환자 린다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린다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약혼자 잭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자살까지 시도한다. 메리의 적극적인 치료 덕에 잭은 8개월 만에 건강해지고, 린다와 잭은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내 잭은 자신을 치료해준 메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메리는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메리가 잭에게 린다와의 결혼에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끝난다. 권 명예교수는 이상이 시 ‘오감도’를 발표한 지 90주년이 되는 24일 서울 종로구 ‘유심’ 사무실에서 영화 상영회를 열 예정이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선장님! 방금 타이타닉호로부터 긴급 구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배가 빙산과 충돌해서 즉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타이타닉호 사고 지역 인근에서 운항하던 여객선 카르파티아호의 선장인 아서 로스트론은 이런 보고를 받자마자 배를 돌려 구조에 나서라고 전격 지시한다. 타이타닉호와 107km 떨어져 있어 가는 데만 최소 4시간은 걸리지만 ‘희망’을 놓지 않기로 한 것.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 난방을 중단하면서 속력을 올렸다. 너무 늦었을까. 사고 해역에 타이타닉호는 흔적조차 없이 가라앉은 것. 하지만 구명 보트가 보였다. 한 척, 두 척…. 모두 18척의 구명보트에서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카르파티아호가 구조한 인원만 706명. “가봐야 늦을 것”이라며 구조를 포기했다면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타이타닉호와 카르파티아호의 상황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당시 사고와 구조 상황을 생생히 전한다. 해상 사고의 위험성, 타인을 위한 숭고한 희생 등을 배울 수 있는 책이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여름 휴가철이 돌아왔습니다. 더위를 피해 산으로, 바다로 떠난 휴가지에 좋은 책이 함께라면 금상첨화겠죠. 이번 휴가엔 인근 책방을 찾으면 어떨까요. 고즈넉한 서가 사이로 내 마음에 쉼을 줄 소중한 책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주요 휴가지 인근의 서점 6곳과 이곳 주인장으로부터 추천받은 책, 독서 명소 등을 정리해 소개합니다. 그럼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떠나볼까요.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학술팀》① 경주 ‘어서어서’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지음·김춘미 옮김/431쪽·1만6800원·비채경북 경주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양상규 씨가 요즘 핫플레이스로 각광받는 황리단길에 2017년 세운 책방이다.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이란 의미를 담았다. 이곳에서 책을 사면 약 봉투에 책을 담아준다. 마음의 병을 책으로 치유한다는 의미란다. 약국처럼 봉투에 손님의 이름을 적어 준다. 최근에는 경주 성건동에 지역민을 위한 2호점 ‘이어서’도 만들었다. 작가 북토크, 게릴라 사인회, 독서 모임을 정기적으로 연다. 특히 잡지 편집장 출신의 작가를 초청해 한 편의 에세이를 함께 완성하는 ‘글쓰기 원데이 클래스’도 진행한다. 그가 추천하는 책은 마쓰이에 마사시가 쓴 장편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비채)다. 198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노 건축가와, 그의 건축 철학을 존경하는 청년의 여름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는 “읽는 내내 소설 배경이 된 시골 마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름 향기가 물씬 풍기는 느낌을 공유해 보고 싶다”고 했다. 책 읽기 좋은 근처 명소로는 황리단길 건너편 ‘노서리 고분군’을 추천했다. “푸른 잔디가 깔린 고분들 사이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책을 읽으면 최고의 피서가 될 겁니다. 단, 고분 위로 막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서점 주소=경북 경주시 포석로 1083 ② 속초 ‘동아서점’가장 짧은 낮◇츠쯔젠 지음·김태성 옮김/568쪽·2만3000원·글항아리할아버지가 1956년 문을 열었고 이젠 손자인 김영건 씨가 3대째 운영 중인 서점. 어릴 때부터 서점에서 자란 그는 책에 진심이다. 수만 권에 이르는 책들을 아내와 함께 직접 선별해 서가를 꾸민다.주인장의 취향이 담긴 컬렉션이 입소문을 타면서 서울에서 단골로 찾아오는 손님도 있다.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이 주지 못하는 독특한 분위기와 감성에 반한 이도 많다. 서울 등 대도시에 독립서점들이 많지만, 이곳처럼 330㎡가 넘는 널찍한 규모를 갖춘 곳은 드물다.주인장의 추천도서는 츠쯔젠의 단편소설 16편을 모은 ‘가장 짧은 낮’(글항아리). 중국 북방을 배경으로 거친 자연에 적응해 살아가는 이들을 그렸다.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점이 오히려 장점이다. 그는 “멀리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돼 읽으면서도 피로감이 별로 없다. 휴가지에서 읽기 좋은 책”이라고 했다.추천 독서 명소는 서점에서 차로 17분 거리의 정자 ‘학무정’이다. 설악산 자락에 있어 선선해 책 읽기에 그만이다. 조선 후기 학자들이 공부하던 교육 장소였다고.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세속에서 벗어난 기분도 들고, 당시 공부에 정진하던 선비들의 마음가짐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거예요.”서점 주소=강원 속초시 수복로 108③ 제주 ‘소리소문’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조승리 지음/240쪽·1만6800원·달‘작은 마을의 작은 글(小里小文)’이란 뜻을 가진 서점이다. 정도선, 박진희 부부가 오손도손 함께 운영하고 있다. 매달 관심 작가를 한 명씩 선정해 그의 책들과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관련 도서를 비치한다. 손님들이 작가를 깊숙이 이해하고, 교감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이달에는 이수연 작가의 ‘어쩌다 보니 가구를 팝니다’를 소개한다. 책을 필사할 수 있는 별도 공간을 마련해 작품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이곳에선 책 제목과 작가, 출판사명, 표지를 모두 가린 ‘블라인드 북’을 만날 수 있다. 대신 ‘#위로가 필요할 때’, ‘#연인에게 주고 싶은 책’ 같은 키워드만 포장지에 적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 모른 채 자신의 느낌에 따라 책을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주인장이 추천하는 책은 조승리 작가의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달)다. 2023년 샘터 에세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시각장애인 저자의 첫 번째 단행본이다. 장애인이자 마사지사로 살면서 느낀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에세이로, 영화 ‘여인의 향기’를 보고 탱고를 배우게 된 일화 등이 담겼다. 정 씨는 “점점 잃어가는 시력에 마음이 무너지기보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에 닥치는 대로 책을 펼쳐 보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삶의 태도를 가진 작가”라며 “장애에 굴하지 않고 즐거운 삶을 꾸려 나가는 유쾌한 분투기”라고 했다. 책은 출간 석 달 만에 6쇄에 들어갔다.추천 독서 명소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이국적인 풍차가 어우러진 월령해변이다.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제주도민들의 숨겨진 물놀이 스폿이라고. ‘월령포구’라고 검색하면 월령해변 인근으로 검색된다. “주변 협재해변이나 금능해변이 관광객으로 밀릴 때 조용히 책을 읽으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서점 주소=제주 제주시 한경면 저지동길 8-31④ 제주 ‘북타임’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정지아 지음/320쪽·1만7000원·마이디어북스“기존 서점 스타일을 따르지 않겠다”는 포부로 임기수 씨가 2015년에 문을 열었다. 본래 서귀포시 중심가에 있었지만, 주인장이 나고 자란 위미리 본가를 개조해 2019년 다시 오픈했다. 소를 키우던 바깥채, 안채, 밀감 창고를 이용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임 씨는 “공간이 나뉘어 있어 책을 볼 때 주인장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다”며 “떠들어도 좋고, 사진 촬영도 환영”이라고 말했다. 저녁이 되면 동네 주민들이 먹거리를 들고 옹기종기 모여 곡주를 나누는 ‘북살롱’으로 변신한다. 꼭 차만 마시며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술 한 잔을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북살롱은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을 자랑한다.임 씨는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마이디어북스)’를 추천했다. 1990년 ‘빨치산의 딸’로 등단한 정지아 작가의 술에 대한 에세이다. 애주가로 유명한 저자가 그동안 만났던 술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풀어냈다. 즐거운 휴가,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 아니겠는가. 임 씨는 “머리 아픈 벽돌책은 걷어차고 깔깔거릴 수 있는 책을 권하고 싶다”며 “술과 함께한 저자의 진한 인생 이야기는 애주가뿐 아 니라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추천하는 독서 명소는 서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푸른 바다가 빛나는 위미항. 책 한 권을 들고 방파제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한적하게 독서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인근 갤러리 카페 ‘어리석은 물고기’에서는 베트남풍의 커피와 호떡을 맛볼 수 있다. 실로 팔찌를 만드는 공방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나만의 팔찌’를 만들 수도 있다.서점 주소=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중앙로 160⑤ 통영 ‘봄날의책방’숲의 언어◇남영화 지음/252쪽·1만8000원·남해의봄날출판사 남해의봄날이 2014년 문을 연 서점으로 일부 회원들에 한해 북스테이 서비스를 제공한다. 처음에는 13㎡ 규모의 방 한 곳에서만 책방을 운영했지만, 차츰 손님이 늘면서 2017년부터 내부 공간을 서점으로 전면 개조했다. 통영의 다채로운 문화예술 감성을 담은 책들과,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싶은 책까지 다양한 책을 골라 서가를 채웠다.회원으로 가입하면 2층의 비밀스러운 독서 공간 ‘책 읽은 다락방’을 예약해 이용할 수 있다. 자개상 등 통영 장인들의 예술품이 가득한 고즈넉한 방에서 차를 마시며 독서를 즐길 수 있다. 회원 마일리지를 활용해 숙박도 가능하다. 통영 전통 누비로 만든 포근한 이불이 지친 몸을 감싸준다.주인장 정은영 씨는 ‘숲의 언어(남해의봄날)’를 추천했다. 16년째 숲해설가로 일하고 있는 남영화 작가가 쓴 자연 에세이다. 짙은 녹음과 비에 촉촉히 젖은 흙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여름에 읽기 좋다. 숲이 낯설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지만 친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는 책이라고. 그는 “나무와 열매, 잎과 꽃이 교감하는 이야기가 담겨 저자와 함께 숲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생생하다”며 “휴가지에서 숲의 사랑과 위로를 듬뿍 충전한 뒤 일상으로 돌아가시길 바란다”고 했다.추천하는 독서 명소는 카페 ‘내성적싸롱 호심’. 책방과 100m 거리로,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 오래된 주택을 고쳐 운영하는 카페다. 주인장이 직접 굽는 르뱅쿠키가 명물이라고. 감성 사진관 ‘모노드라마’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좋다. 촬영 후 원하는 문구를 캘리그라피로 장식할 수 있어 여행의 추억을 담아가기 좋다. 책방 바로 옆 전혁림미술관에서는 전혁림 화백과 아들 전영근 화백이 그린 시원하고 푸르른 통영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서점 주소=경남 통영시 봉수1길 6-1⑥ 단양 ‘새한서점’설화탐정AR 단양◇주렁주렁스튜디오 지음/191쪽·2만4000원·주렁주렁스튜디오운무가 가득한 산속에 틀어박혀 독서에 매진하고 싶다면 충북 단양군의 헌책방 ‘새한서점’을 가볼 만하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꼬불거리는 시골길을 운전하면 새한서점 입간판을 만날 수 있다. 차를 세운 뒤 좁은 길을 걸어 내려가면 오래된 목조 건물이 등장한다. 푸르른 녹음과 시냇물 소리가 청명하게 들리는 곳에 오래된 헌책방이 있다. 영화 ‘내부자들’(2015년)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영화 속 우장훈 검사(조승우)의 아버지 집으로 촬영된 곳이라 눈에 익을 터다.서점엔 약 13만 권의 헌책이 가득하다. 곳곳엔 헌책방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난다. 바닥도 흙바닥이라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피어 오른다.주인장 이금석 씨는 1978년 서울 고려대 앞에서 20년 이상 헌책방을 운영했다. 2000년대 들어 온라인 서점이 등장하자 택배로 헌책을 판매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2002년 고향인 제천시와 가까운 단양군으로 서점을 옮겼다. 처음엔 폐교된 초등학교에서 서점을 운영하다 201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스스로 모든 건물을 지었는데 나무 널빤지로 된 건물의 면적은 900㎡에 달한다. 현재는 아들 승준 씨가 아버지를 도와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승준 씨는 ‘설화탐정AR 단양’(주렁주렁스튜디오)을 추천했다. ‘온달산성’, ‘도담삼봉’, ‘사인암’ 같은 단양 명소에 대한 설명과, 이에 얽힌 설화를 담아 지역을 여행하며 읽기에 좋은 책이라고. 승준 씨는 “‘온달과 평강공주’ 같은 이야깃거리가 책에 풍성히 담겨 단양을 이해하기 좋다”고 했다.독서 명소로는 월악산 제비봉 전망대 코앞에 있는 ‘구담카페’, 노출 콘크리트로 건축돼 청풍호 전망을 가득 담은 ‘콘크리트월’을 추천했다.서점 주소=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본길 46-106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광장’을 쓴 최인훈 작가의 6주기(23일)를 앞두고 18일 오후 2시 반 토론회가 열린다. 서울 마포구 서강대 가브리엘관에서 열리는 ‘20세기의 기억과 21세기의 화두’가 그것. 이 자리에서는 작가의 추모 다큐멘터리 ‘시대의 서기, 최인훈’이 처음 상영될 예정이다. 최 작가의 아들 윤구 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작가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면모를 한발 앞서 전한다. 최인훈 작가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특히 ‘플랜더스의 개’를 애청했다. 1980년대 TV에서 방영되던 이 애니메이션의 최종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서울예대 강의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고 한다. 중년의 작가는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과 TV 앞에 나란히 앉았다. 남자 주인공 네로가 안타깝게 죽을 때 작가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고 한다. 말년의 작가는 대장암으로 투병한다. 그 와중에도 ‘광장’을 다시 손보는 것을 고민했다고 한다. 기력이 떨어져 눈빛 교환이나 짧은 말 정도만 가능했지만 ‘광장’의 완성도를 마지막까지 높이고 싶었던 것. 주인공 이명준이 친구 태식을 고문하는 장면이 ‘꿈’으로 돼 있는데 이를 ‘현실’로 고칠지 고민했다고. 그러나 한참 고심하던 작가는 고치지 않기로 했단다. 그는 집필할 때는 자고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집중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운동하듯 글을 쓰기보다는 계속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쓸 때가 됐다’ 싶으면 펜을 들고 몰아서 쓰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광장’과 더불어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화두’를 쓸 때는 1년 가까이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인훈은 일반 독자들의 소감을 궁금해했다. 인터넷 서점이 생긴 뒤에는 아들에게 부탁해 독자 리뷰를 프린트해 꼼꼼히 읽고는 했단다. 작가는 ‘광장’이 6·25전쟁을 다룬 옛날 소설로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젊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성장소설로 재해석돼 읽힌다는 소식을 들을 때 특히 반가워했다고. 18일 토론회에서 공개되는 다큐멘터리에는 최 작가의 ‘광장’ 집필 계기와 ‘새벽’지 발표 당시 상황 및 뒷이야기 등이 담겼다. 우찬제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사회로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연남경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이 강연 및 토론에 나선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광장’을 쓴 최인훈 작가의 6주기(23일)를 앞두고 18일 오후 2시 반 토론회가 열린다. 서울 마포구 서강대 가브리엘관에서 열리는 ‘20세기의 기억과 21세기의 화두’가 그것. 이 자리에서는 작가의 추모 다큐멘터리 ‘시대의 서기, 최인훈’이 처음 상영될 예정이다. 최 작가의 아들 윤구 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작가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면모를 한발 앞서 전한다.최인훈 작가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특히 ‘플랜더스의 개’를 애청했다. 1980년대 TV에서 방영되던 이 애니메이션의 최종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서울예대 강의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고 한다. 중년의 작가는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과 TV 앞에 나란히 앉았다. 남자 주인공 네로가 안타깝게 죽을 때 작가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고 한다.대장암으로 투병하던 작가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도 ‘광장’을 다시 손 보는 것을 고민했다고 한다. 기력이 떨어져 눈빛 교환이나 짧은 말 정도만 가능했지만 ‘광장’의 완성도를 마지막까지 높이고 싶었던 것. 주인공 이명준이 친구 태식을 고문하는 장면이 ‘꿈’으로 돼 있는데 이를 ‘현실’로 고칠지 고민했다고. 아들에게 두 가지 판본을 가져와 읽게 한 다음에야 고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에게 이명준은 단순한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라 평생 친구였다. 새벽에 물 마시러 일어난 아들에게 ‘그때 내가 이명준을 죽이는 게 맞았을까?’라고 문득 물어볼 정도였다.집필할 때는 자고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집중했다고 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운동하듯 글을 쓰기보다는 계속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쓸 때가 됐다’ 싶으면 펜을 들고 몰아서 쓰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광장’과 더불어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화두’를 쓸 때는 1년 가까이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최인훈은 일반 독자들의 소감을 궁금해했다. 인터넷 서점이 생긴 뒤 아들에게 부탁해 독자 리뷰를 프린트해 읽고선 무척 기뻐하고 신기해했단다. 그는 ‘광장’이 6.25 전쟁을 다룬 옛날 소설로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젊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성장소설로 재해석돼 읽힌다는 소식을 들을 때 특히 반가워했다. 영원한 20대 청년 이명준과 평생지기였던 그는 “젊은이의 마음은 항상 궁금하다”고 했다.18일 토론회에서 공개되는 다큐멘터리에는 최 작가의 ‘광장’ 집필 계기와 ‘새벽’지 발표 당시 뒷이야기 등이 담겼다. 우찬제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사회로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연남경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이 강연 및 토론에 나선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24세에 서울로 올라와 첫 음반을 냈지만 시원치 않았다. 데뷔 5년 만에 짐 싸서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을 외면할 순 없었다. 이후로도 무명 생활은 길었다. 하지만 그는 견뎠다. “노래는 숙성이 돼야 한다. 아무리 급해도 돌아간다.” 그의 신조였다. ‘손대면 톡 하고…’로 시작하는 ‘봉선화 연정’으로 1989년 ‘KBS 가요대상’ 대상을 받으며 가요계 정상에 섰을 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대기만성형 가수였다. “60세가 넘어 신곡을 검토할 때도 ‘이 곡은 한 5, 6년 후에 내자’고 할 정도였다. 다들 빨리빨리를 얘기할 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작곡가 정원수 씨) 특유의 구성진 꺾기 창법과 부드러운 보이스로 1980, 9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던 가수 현철(본명 강상수)이 15일 밤 서울 광진구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인은 4년 전 디스크 수술을 받을 때 신경이 손상돼 건강이 악화됐고, 최근 폐렴까지 겹쳐 두 달간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었다고 한다. 아끼던 손주를 비롯해 가족들이 모인 마지막 배웅 길에 가족은 고인이 가장 아끼던 곡인 ‘내 마음 별과 같이’를 틀어서 귀 가까이에 대고 들려줬다고 한다. ‘내 마음 별과 같이/저 하늘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리.’ 현철의 첫 히트곡은 데뷔 14년 만에 나왔다.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그가 고생하던 아내를 떠올리며 만든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1982년)으로 이름을 알린 것. 그의 나이 40세 때였다. 이어 ‘사랑은 나비인가 봐’, ‘내 마음 별과 같이’에 이어 1988년 발표한 ‘봉선화 연정’으로 그는 ‘국민 트로트 가수’ 반열에 오른다. 송대관 설운도 태진아와 함께 ‘4대 천왕’으로 불리며 트로트 전성기를 이끌었다. 유명인이 된 후에도 그는 소탈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후배들 술 사주고, 밥 사주는 큰형이었다. 동네에서 장사하는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안부를 묻고, 전철 등 대중교통도 자주 이용했다. 가수 태진아 씨는 “현철 선배는 무엇보다도 정이 많았다. 내가 상을 타면 내 손 잡고 울어줬고 나도 그렇게 했다”며 “대한민국 트로트계 최고의 가수인데 가요계의 큰 별이 지셔서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고인은 선행 연예인으로 국무총리 표창,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대통령 표창), 옥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 배우자 송애경 씨, 아들 복동 씨, 딸 정숙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18일 오전 8시 40분.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내 마음 별과 같이 저 하늘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리!”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던 사람, 가수 현철이 15일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인이 서울 광진구의 한 병원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본인의 노래 ‘내 마음 별과 같이’를 들었다고 한다. 아끼던 손자 등 가족들이 함께한 자리였다. 고인은 수년 전 경추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신경 손상으로 건강이 악화됐고, 최근 폐렴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난 현철은 1966년 ‘태현철’이라는 이름으로 첫 음반을 내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무명 시절엔 아내와 함께 셋방살이를 전전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가요계를 떠나려고 마지막 곡으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만든 것이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1982년)이었다. 이 노래가 출세 곡이 됐다. 40세 때다. 이후 ‘사랑은 나비인가봐’, ‘내 마음 별과 같이’를 연이어 히트시켰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은 현철의 전성기였다. 구수한 목소리, 사투리가 짙게 묻어나는 입담, 독특한 꺾기 창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이후 1988년 발표한 ‘봉선화 연정’의 폭발적 인기로 날개를 단다. 이 곡으로 KBS가요대상을 수상할 당시 10여 년 무명 시절을 떠올린 듯 눈물을 펑펑 쏟아내 시청자들까지 울렸다. 당시 현철은 송대관·설운도·태진아와 함께 ‘4대 천왕’으로 불리며 트로트 시장을 호령했다. 마지막 방송은 2020년 9월 KBS 가요무대다. 현철을 아는 사람은 그가 대기만성의 인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전 매니저이자 작곡가인 정원수 씨는 “고생을 너무 오래 해본 사람이라 견디는 데는 도가 텄다. 60세가 넘어서 신곡을 발표해야 하는데도 밑에 깔아놓고 ‘5, 6년 있다 보내자. 노래는 숙성이 돼야 한다’고 하더라. 다른 사람 같으면 ‘빨리빨리’할 텐데 아무리 급해도 돌아간다는 자세였다”며 “그래서 늦게 떴고, 그래서 늦게까지 활동한 것 같다. 대단한 양반이셨다”고 회상했다. 가요계 동료 후배들의 애도도 이어졌다. 현철과 같이 공연을 하고 활동했던 가수 태진아 씨는 “현철 선배는 무엇보다도 정이 많았다. 그분이 상을 타면 내 손 잡고 울어줬고 나도 그렇게 했다”며 “대한민국 트로트계 최고의 가수인데 가요계의 큰 별이 지셔서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고인은 동네에서도 장사하는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고 전철을 타고 다니며 한결같은 모습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16일 오후부터 조문을 받고, 18일 발인한다. 02-3010-2000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봉선화 연정’ 가수 현철이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6일 가요계에 따르면 현철은 전날 밤에 서울 구의동 혜민병원에서 별세했다. 시신은 16일 오전 1시 서울 아산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조문은 낮 12시부터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27세 때인 1969년 ‘무정한 그대’로 데뷔했다. 오랜 무명 생활을 보내다 1980년대 들어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사랑은 나비인가 봐’ 등의 히트곡을 냈다. 1988년 발표한 ‘봉선화 연정’은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라는 신선한 가사로 큰 이기를 얻었다. 현철은 ‘봉선화 연정’으로 1989년 KBS 가요대상을 받았다. 이듬해인 1990년에도 ‘싫다 싫어’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했다. 2010년대 후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던 현철은 2018년 KBS1 ‘가요무대’에 출연한 후 건강상 이유로 가수 활동을 중단했다. 현철은 수년 전 경추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신경 손상으로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말 자신의 이름을 단 가요제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현철은 손 편지로 마음을 전했다. 그는 “자식 같은 후배들이 ‘현철 가요제’에서 한바탕 놀아준다니 가슴이 벅차다. 함께하지 못해 너무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이라며 “잊혀가는 현철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정말 행복하고, 사랑한다”고 밝혔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붓다는 혁명가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붓다의 혁명적 아우라가 필요합니다.” 최근 불교 경전 ‘반야심경’을 현대적 시선으로 풀어낸 ‘건너가는 자’(쌤앤파커스)를 펴낸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사진)의 얘기다. 반야심경은 600권에 이르는 반야경의 핵심 사상을 압축적으로 요약한 경전. 단 260자에 공(空) 사상의 정수를 담아 “가장 짧지만 가장 깊은 지혜가 담긴 경전”이라 불린다. 최 명예교수는 13일 전화 인터뷰에서 반야심경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건너가기’를 꼽았다. 건너가기란 기존의 법칙을 의심하고, 깨부수고, 자기만의 ‘고삐’를 쥔 채 나아가는 태도를 일컫는다. 그가 보기에 붓다의 삶이야말로 건너가기 그 자체였다. 왕자였던 붓다는 29세에 속세의 부귀영화를 모두 내려놓고 출가했다. 무한한 건너가기와 무한한 부정의 과정에서 붓다는 참된 지혜를 얻었다. 하지만 익숙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가는’ 일이 말처럼 쉬울 리 없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지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 최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남이 만든 틀에 본인 삶의 주도권을 넘겨주기 쉽다는 것. 최 명예교수는 “자신에게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부과한 것을 숙제처럼 하는 삶은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최 명예교수는 이런 문제에 봉착한 것은 비단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핵심은 ‘교육 개혁’이다. 자녀나 학생들에게 무엇을 알게 해주려 애쓰다가,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를 없애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 이에 이를테면 유치원 단계에서는 글자 교육보다 놀이를 강화해 아이들이 세상에 반응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가게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최 명예교수는 “한 사람 한 사람 자기만의 고삐를 쥔 사회가 행복하다”고도 했다. 이런 생각은 인재론으로 확대됐다. 그는 “대한민국 인재들은 시킨 것은 세계에서 제일 잘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모른다”며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한테 물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정해져 있다. 그게 지금 우리 사회가 빠진 ‘중진국 함정’”이라고 말했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삶의 철학이 있어야 국가의 철학과 비전도 생긴다는 게 그가 강조한 ‘반야심경의 지혜’였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붓다는 혁명가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붓다의 혁명적 아우라가 필요합니다.” 최근 불교 경전 ‘반야심경’을 현대적 시선으로 풀어낸 ‘건너가는 자’(쌤앤파커스)를 펴낸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얘기다. 반야심경은 600권에 이르는 반야경의 핵심 사상을 압축적으로 요약한 경전. 단 260자에 공(空) 사상의 정수를 담아 “가장 짧지만 가장 깊은 지혜가 담긴 경전”이라 불린다. 최 명예교수는 13일 전화 인터뷰에서 반야심경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건너가기’를 꼽았다. 건너가기란 기존의 법칙을 의심하고, 깨부수고, 자기만의 ‘고삐’를 쥔 채 나아가는 태도를 일컫는다. 그가 보기에 붓다의 삶이야말로 건너가기 그 자체였다. 왕자였던 붓다는 29세에 속세의 부귀영화를 모두 내려놓고 출가했다. 무한한 건너가기와 무한한 부정의 과정에서 붓다는 참된 지혜를 얻었다. 하지만 익숙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가는’ 일이 말처럼 쉬울 리 없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지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 최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남이 만든 틀에 본인 삶의 주도권을 넘겨주기 쉽다는 것. 최 명예교수는 “자신에게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부과한 것을 숙제처럼 하는 삶은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최 명예교수는 이런 문제에 봉착한 것은 비단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핵심은 ‘교육 개혁’이다. 자녀나 학생들에게 무엇을 알게 해주려 애쓰다가, 알고 싶어하는 마음 자체를 없애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 이에 이를테면 유치원 단계에서는 글자 교육보다 놀이를 강화해 아이들이 세상에 반응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가게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최 명예교수는 “한 사람 한 사람 자기만의 고삐를 쥔 사회가 행복하다”고도 했다. 이런 생각은 인재론으로 확대됐다. 그는 “대한민국 인재들은 시킨 것은 세계에서 제일 잘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모른다”며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한테 물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정해져 있다. 그게 지금 우리 사회가 빠진 ‘중진국 함정’”이라고 말했다. 사회 구성원 각자 삶의 철학이 있어야 국가의 철학과 비전도 생긴다는 게 그가 강조한 ‘반야심경의 지혜’였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하늘 아래 내가 받은/가장 커다란 선물은/오늘입니다’를 읽는 부분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시를 훨씬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겠죠.” 나태주 시인의 말이다. 그는 지난해 말 향기가 나는 시집 ‘잠시향’(존경과행복)을 냈고, 올 9월에는 사랑, 소망, 감사, 행복 각각의 주제와 향을 짝맞춘 향기시집 시리즈를 낼 예정이다. 나태주 시인은 “독서가 주는 즐거움을 오감을 통해 극대화하고 싶었다”면서 “‘향기시집’에 이어 이후에는 ‘만져지는 시집’, 촉각시집 등을 통해 또 다른 감각을 일깨워 보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출판계에서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 촉각, 청각 등을 활용한 이른바 ‘오감 마케팅’이 뜨고 있다. 출판계 불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좀 더 새로운 경험을 독자들에게 선사해 눈길을 끌려고 하는 것. 체험형, 참여형 콘텐츠를 중시하는 MZ세대들의 ‘경험 소비’ 트렌드를 적극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트렌드는 대하소설 ‘토지’도 외면할 수 없었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 완간 30주년을 기념해 이달 말 ‘반고흐 에디션’(다산북스)을 선보이는 것. 토지 20권 표지를 고흐 작품 20점으로 각각 감쌌다. 이른바 ‘박경리×반고흐’ 콜라보 작품인 셈이다. 두 예술인이 언뜻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고흐가 그린 19세기 말 남부 프랑스의 드넓은 가을 정경에서 최참판댁에서 내려다본 평사리 평야가 연상된다는 평들도 나오며 관심을 끌고 있다. 민음사는 최근 K팝에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과 협업해 ‘세계문학 일러스트 에디션’을 16면 화폭의 ‘병풍 책’ 형태로 고안했다. 책을 펼치면 일러스트가 풍경처럼 펼쳐진다. 그림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고, 글은 하단 6분의 1 지점에만 담았다. 모파상의 ‘달빛’을 작업한 권서영 일러스트레이터는 “문장을 그대로 재현하는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를 견인해 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촉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책도 있다. 반려동물 백과사전 ‘개와 고양이 의학 사전’(열린책들)은 손끝에 닿는 질감이 포근하고 따뜻한 천 양장을 택했다. 종이는 잘 찢어지고 물에 젖으면 손상되지만 천(직물) 표지는 오래 소장할 수 있고 유행을 덜 탄다. 8만 원(704쪽)에 이르는 가격에도 출간 사흘 만에 재판을 찍었다. ‘오디오북’ 형태는 진화하고 있다. 문학동네는 특정 번호로 전화하면 시를 읽어주는 ‘전화 시집’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앞서 창비가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선보인 ‘시와 어울리는 음악 듣기’ 부스에는 헤드셋을 낀 젊은 독자들이 몰렸다. 마치 음반 사듯이 시집을 고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오감 만족 마케팅은 급기야 미각까지 확장했다. 교보문고가 올 4월 광화문점에 마련한 ‘북다이닝’ 부스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선 테이블 위에 음식 대신 책이 손님을 맞고 있다. 책 취향을 미각에 빗대, ‘극강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코스’에선 로맨스 소설 ‘말하고 싶은 비밀’을 소개하고, ‘정신이 번쩍 드는 매콤한 코스’에선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를 추천하는 식이다. 각각의 부스를 돌며 도장을 찍는 ‘스탬프 이벤트’에는 한 달 만에 9000명 넘는 고객이 참여했다. 한기호 출판평론가는 “책이 정보만 담아내는 그릇이 아니라 인간의 감성을 끌어내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게 출판계 내 전반적인 공감대”라며 “일본에선 300여 개 악기를 최고의 음원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도감이 나오는 등 공감각과 오감을 자극하려는 흐름은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를 딱 읽으면서 냄새가 코에 들어간다고 상상해보세요. 시가 훨씬 감각적으로 와닿겠죠.” 12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시인의 목소리는 들에 나와 풀꽃 향기를 음미하는 사람처럼 생생했다. 종이와 잉크에 천연향을 입힌 향기시집 ‘잠시향’(존경과행복)을 낸 나태주 시인 얘기다. 시인은 국내 1호 향기 작가 한서형 씨와 협업해 ‘향기시집’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데 이어 오는 9월 사랑, 소망, 감사, 행복 각각의 주제와 향을 짝맞춘 향기시집 시리즈를 낼 예정이다. 시인은 독서의 본질이라 할 이 경험을 오감으로 극대화하고 싶어했다. “그동안 시를 시각, 청각과 연합하려는 노력은 아주 많았다”며 “‘만져지는 시집’, 촉각시집 등 또 다른 감각을 일깨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출판계에서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 촉각, 청각 등을 활용한 이른바 ‘오감 마케팅’이 뜨고 있다. 출판계 불황에 출판사와 서점들이 독자에게 적극 다가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대표적인 감각이 시각이다. 다산북스는 박경리 작가의 ‘토지’ 완간 30주년을 기념해 ‘반 고흐 에디션’을 선뵀다. 토지 20권을 고흐 작품 20점으로 각각 감쌌다. 고흐가 그린 19세기 말 남부 프랑스의 드넓은 가을 정경이 그 시절 최참판댁에서 내려다본 평사리 평야와 닮았다. 반 고흐 에디션은 서울국제도서전 선공개 당시 최고 화제작 가운데 하나였다. 어느새 서른 살이 된 토지가 고루한 대하소설에 머물지 않고 젊은 독자와 새로운 접점을 만들고 있는 것. 민음사는 최근 K-팝 씬에서 주목받는 일러스트레이터들과 협업해 ‘세계문학 일러스트 에디션’을 16면 화폭의 ‘병풍 책’ 형태로 고안했다. 책을 펼치면 일러스트가 풍경처럼 펼쳐진다. 그림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고, 글은 하단 6분의1 지점에만 담았다. 모파상의 ‘달빛’을 작업한 권서영 일러스트레이터는 “문장을 그대로 재현하는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를 견인해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열린 책들은 반려동물 백과사전 ‘개와 고양이 의학 사전’(열린책들)을 만들면서 손끝에 닿는 질감이 포근하고 따뜻한 천 양장을 택했다. 종이는 잘 찢어지고 물에 젖으면 손상되지만 천(직물) 표지는 오래 소장할 수 있고 유행을 덜 탄다. 704쪽, 8만 원에 이르는 가격에도 3일 만에 재판을 찍었다. 도서전 당시에도 독자들이 만져보고 책의 만듦새에 관심을 가졌다. 문학동네는 특정 번호로 전화하면 시를 읽어주는 ‘전화 시집’ 서비스를 운영 중이고, 창비가 도서전에서 선보인 ‘시와 어울리는 음악 듣기’ 부스에는 헤드셋을 낀 젊은 독자들이 몰렸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책 취향을 미각에 빗댄 ‘북다이닝’ 부스를 운영 중이다. ‘극강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코스’에선 로맨스 소설 ‘말하고 싶은 비밀’을 소개하고, ‘정신이 번쩍 드는 매콤한 코스’에선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를 추천하는 식이다. 교보문고 강남점은 칸타타와 협업해 각 원두에 어울리는 도서를 추천한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책을 ‘읽다, 보다’ 1차원적인 감각에서 벗어나 책을 ‘맛보다, 음미하다’ 등 다른 감각으로 접근해 독자에게 새로운 재미를 주고자 했다”고 말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언론에 대서특필된 범죄자 가운데 10년이 지나 그 뒷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일단 범인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교정시설에 수용되면 “그걸로 해결됐다”고 여기고 금세 잊어버린다. 하지만 범죄자 상당수는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친 뒤 사회로 복귀한다. 그렇다면 처벌 못지않게 담장 안 교정시설의 운영 행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맞지 않을까. 일본 니혼의과대 명예교수였던 저자는 20년 넘게 여러 교정시설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했다. 그는 2020년 의대 의료심리학교실 교수로 정년퇴직한 후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펴낸 뒤 별세했다. 극한의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섭식장애가 절도로 이어진 소녀, 좀도둑질을 반복하며 교도소와 바깥세상을 수시로 오가는 노인, 중증 정신질환으로 대화를 할 수 없어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구치소에 구금된 남성 등 저자는 교정시설에서 온갖 인생들을 만났다. 담장 안 세상을 살피며 저자는 일부 범죄자에게는 훈계나 형벌이 아닌, 시간을 들인 치료와 상담이 필요하다는 점을 뚜렷하게 깨닫는다. 가령 약물 의존은 형벌을 가하거나 나쁜 짓이라고 가르치고 몸에 나쁘다고 겁을 주는 방법만으로는 큰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대신 알코올 의존과 마찬가지로 병을 치료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교도소의 정신과 의사로 20년을 근무한 이유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가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정신과 의사로서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 그에게 ‘범죄자를 치료하는 것에 갈등을 느끼지는 않느냐’라고 질문한 적도 있단다. 그는 “소년원이나 교도소에 수용돼 있는 사람들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피해자의 권리가 보호되는 것과 가해자에 대한 지원과 치료가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모순되고 대립되는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노노(老老) 간병’이라는 시급한 화두도 던진다. 아픈 배우자를 수십 년간 돌보다가 더는 여력이 없어 이들을 죽이고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거나, 치매를 앓고 인지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대표적이다. 평생 범법 행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처음 중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대부분 오랜 간병 끝에 가족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빈곤에 따른 노인 범죄 검거자와 수감자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들에 대해 교도소 수감으로 그치지 말고, 사전 예방 및 사후 교정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노노 간병’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간병 지원 등 복지, 의료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는 것. 또 가족 구조 변화로 부양 책임을 질 수 있는 보호자가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에서 범법자의 재범을 막고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한 정신질환 치료 및 관리 대책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어느새 ‘간병 지옥’, ‘간병 파산’이란 말이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게 됐다. “의료나 복지로부터도 ‘밀려난 사람들’이 교도소 같은 교정시설을 자신이 있을 곳으로 여긴다면, 누가 이 사회를 살기 좋고 풍요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저자의 지적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과 복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1918년 잡지 ‘여자계(女子界)’에 실린 나혜석의 소설 ‘경희’ 중 한 구절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까지 가서 공부했지만 “계집애를 가르치면 건방져서 못쓴다”는 차별에 시달리던 경희. 소설은 경희가 여자이기 전에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으로 끝난다. 106년 전 글 쓰는 여성의 등장을 알린 근대 문학 작품이다. 나혜석부터 한강까지, 근대 개화기 조선부터 1990년대 민주화까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여성 작가와 작품을 선별해 엮은 ‘한국 여성문학 선집’(민음사·총 7권)이 나왔다. 9일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편저자 중 한 명인 김양선 한림대 일송자유교양대 교수는 “우리에겐 왜 ‘노턴 여성문학 앤솔로지’ 같은 여성문학 선집이 없을까 하는 질문에서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1985년 미국에서 출간된 ‘노턴 여성문학 앤솔로지’는 여성 작가들의 영문 작품을 모은 선집으로, 영미권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된다. 기존 국내 여성문학 선집의 장르가 소설에 한정된 것과 달리 신간은 소설, 시, 희곡뿐만 아니라 잡지 창간사, 선언문, 편지, 독자 투고, 노동 수기 등 다양한 글을 망라했다. 모든 작품은 당대 원문과 더불어 읽기 쉽게 현대어 표기도 함께 실었다. 김은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군소 작가로 취급돼 온 여성 작가들 가운데 난민, 이방인, 여성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본 작가들을 소개하고자 했다”고 했다. 신간은 여성 글쓰기의 원류를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으로 보고 있다. 나혜석의 ‘경희’가 여성 교양지 여자계에 발표된 1918년을 여성문학의 원류로 보는 기존 견해보다 20년이나 앞서는 것. 여학교설시통문은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고 일할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한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내용의 신문 투고문이다. 이선옥 숙명여대 기초교양대 교수는 “해외에서 K문화가 유행하고 있지만 사실 대학에서 문학은 점점 더 주변부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번 선집이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해외에도 번역이 돼서 활용되는 기반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국가유산청이 경북 포항시의 정자인 ‘용계정(龍溪亭)’과 ‘분옥정(噴玉亭)’을 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5일 밝혔다. 두 정자는 조선 후기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용계정’은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덕동마을 여강이씨 향단파 집성촌에 있는 정자로 1696년에 세워졌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一’자형 팔작지붕 건축물이다. 창건 당시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었다가 1778년 증축했다. 이듬해 용계정 뒤편에 서원의 사당이 들어서면서 서원의 문루(門樓) 역할을 하기도 했고, 1871년 ‘서원 철폐령’ 때는 주변에 담장을 쌓고 다시 옛 현판을 달아 화를 면했다고 한다. ‘분옥정’은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경주김씨 돈옹공파 문중의 정자로 1820년 건립됐다. 정면 3칸의 누마루와 그 뒷면에 2칸의 온돌방을 이어 배치한 정(丁)자형 평면 형태다.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폭포가 보이는 정자’라는 뜻의 이름처럼 용계천 계곡 등 주변 경관과의 조화가 뛰어나다. 국가유산청은 30일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이번에는 누가 발표를 해볼까.”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이 움츠러듭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은 떨리는 일이거든요.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어떨까요. 혼자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아무도 내 머릿속 생각을 알 수가 없어요. 이렇게 생각해봐요.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내 ‘생각’에 ‘날개’를 달아 상대에게 날아가게 한다는 것이란 걸요. 그렇게 되면 발표 시간은 두려운 시간이 아니라 설레는 시간으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이건 어떨까요. 횡단보도 앞에 다다랐는데 바로 빨간불이 켜져서 건너지를 못했어요. 운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죠. 그런데 생각을 바꿔봐요. 잠시 서서 주변 풍경을 보면서, 그냥 건넜으면 지나쳤던 모습들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고 말이에요. 새로 생긴 가게나 간판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같은 상황도 생각하기에 따라, 말하기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책. 우리 주변의 일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아이의 불평도, 부모의 짜증도 줄어들 것 같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