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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일본 등 적성국 출신 거주자들을 강제 수용할 수 있는 행정명령에 서명한다. 이에 따라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 혹은 일본인 체류자들이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 애리조나 등에 건설된 수용소로 이주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 중이던 저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미국을 속속들이 잘 알던 그는 자신의 조국이 패전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전쟁의 명분도 옳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일본으로 귀환선 탑승과 종전까지 안전한 미국 수용소에서의 거주”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그는 주저없이 귀국을 결정했다. 일본의 가족과 친구가 자신의 ‘나라’이기에 그 나라가 패배한다면 자신도 그쪽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 이 책은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반전 운동가였던 저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본 회고록이다. 그는 종전 후 마루야마 마사오 등과 함께 1946년 ‘사상의 과학’을 창간하고 반전 운동을 벌였다. 평화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9조 모임’에 이어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도 나섰다. 그랬던 그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으로 귀국하자마자 징집돼 해군 군속으로 신문을 제작해야 했다. 그는 “62년이 지난 지금 돌아봐도 (귀국을) 후회하지 않는다. 희미하지만 그 자체로 흔들림 없는 사상이란 것도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미일 양국이 중국의 안보위협에 맞서 주일미군 사령부를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주일미군 사령관을 4성 장군으로 격상하고, 주일미군의 작전지휘 기능을 강화해 일본 자위대와의 일체화를 가속화하겠다는 겁니다. 얼핏 보면 한미 연합사령부를 지휘하면서 전시 작전통제권을 쥔 주한미군사령부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주한·주일미군이 동아시아에 주둔한 미국 군사력의 양대 축임을 감안할 때 주일미군 지휘체계의 변동은 주한미군에도 직접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주한·주일미군의 변화는 한반도 안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죠. 한국전쟁 이후 약 70년에 걸친 주한·주일미군의 역사를 통해 미일 안보조약 업그레이드의 파장을 짚어보겠습니다.주한미군 철수 둘러싼 한미갈등의 역사한국전쟁을 계기로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제4조(‘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에서 주한미군 주둔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원치 않는 전쟁에 연루될 걸 우려한 미국은 당초 동맹조약 체결에 극히 부정적이었지만, 미소 냉전 국면에서 첫 열전으로 발화한 한국전쟁이 이런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었죠.이승만 대통령이 집요하게 요구한 북한 침략시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이 조약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전방에 배치된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가 인계철선(引繫鐵線·수류탄 등을 폭발시키는 철선) 기능을 발휘했습니다(이는 노무현 정부에서 동두천 등 전방의 주한미군 기지를 후방으로 이전하면서 약화되기는 했습니다)주한미군은 1950년대에 32만5000명에 달했지만, 미중 데탕트와 탈냉전 등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규모가 줄었습니다(2020년 기준 약 2만8500명) 중국과의 데탕트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가 가능해졌다는 판단과 더불어 막대한 재정적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죠. 문제는 1960~70년대 북한의 안보위협을 둘러싼 한미 간 인식이 서로 달라 주한미군 감축을 놓고 양측이 적지 않은 갈등을 벌였다는 겁니다.예컨대 1960년대 초 존슨 행정부는 주한미군을 9000명가량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한국 정부와 협의에 들어갔습니다. 안보불안에 휩싸인 박정희 정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다했는데, 1965년 예기치 않은 베트남전 확전이 숨통을 틔워주게 됩니다. 존슨 행정부가 지상군 증원을 위해 한국군 파병을 요청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막을 수 있는 지렛대가 한국에 생긴 거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5월 열흘간 미국을 방문해 베트남 파병을 조건으로 주한미군 병력 유지와 1억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낳은 중요한 경제적 토대가 마련된 겁니다.미국의 주한미군 감축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특히 중국과 데탕트를 추진한 닉슨 행정부는 한국의 강한 반발에도 1970년 5월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철수는 점진적으로 추진될 것이고, 1개 사단 이하 병력부터 철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6월 말까지 주한미군 1만8000명이 감축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절치부심 끝에 핵개발을 포함한 자주국방의 길을 걷게 됩니다.소련 붕괴에 따른 탈냉전도 주한미군 감축의 요인이 됩니다. 1990년 4월 미 국방부는 10년에 걸쳐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미군을 점진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의 ‘동아시아 전략구상(EASI)’을 의회에 제출합니다. 13만5000명의 아시아 주둔 미군 중 1단계로 3년간 최대 1만5000명을 줄이기로 했는데,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주한미군 6987명, 주일미군 4773명이 각각 본토로 철수했습니다.‘주일미군-자위대 일체화’ 추구한 일본노무현 정부 들어 ‘자주파’의 득세와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략 변화가 맞물리면서 한반도 방위에 주력하던 주한미군의 성격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한미동맹에서 한국의 자율성을 높이겠다는 자주파의 주도로 주한미군의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을 추진하는 동시에 의정부, 동두천 등에 있던 전방 미군부대를 평택, 대구 등 후방으로 이전하면서 미군의 인계철선 기능이 약화된 겁니다이는 주한미군을 한반도 붙박이에서 벗어나게 해 동아시아 전역에서 ‘작전 기동군’으로 활용하고자 한 미국의 국방전략에 부합했죠. 미국의 가려운 등을 한국이 알아서 긁어준 셈입니다.이 과정에서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미군 훈련 과정에서 여중생 2명이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팽배하진 반미감정이 전작권 전환 논의에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미국은 2004년 주한미군 전력의 3분의 1과 주독미군 2개 사단을 철수한 결정에 한국과 독일 내 반미정서가 한 요인이었음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주한미군의 성격이 동아시아 역내의 작전 기동군으로 바뀌면서 2011년부터 해외 연합훈련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그해 3월엔 동일본 대지진 지원을 위해 U2 정찰기를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이어 2015년부터는 다연장 로켓(MLRS) 대대와 미 2사단 여단전투단, AH-64 공격헬기 대대 등 주한미군 주요 전력이 순환배치 형태로 한반도와 미국 본토를 드나들기 시작하죠.반면 일본의 대응은 한국과는 반대였습니다.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일체성(통합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 겁니다. 한국과 달리 자율성보다는 안보를 택한 것이죠. 이는 ‘글로벌 전략 기동군’으로서 주일미군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미국의 군사전략과 맞물리게 됩니다.사실 전후 평화헌법에 따라 오로지 방어에만 치중하도록 규정한 자위대의 전수방위 원칙이 오랫동안 주일미군과의 일체화에 걸림돌이 됐습니다. 실제로 1978년 제정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에선 소련의 군사위협에 맞서 자위대와 주일미군 간 역할 분담에 중점을 뒀죠.그러다 소련이 무너지고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면서 하나의 전환점이 마련됩니다. 1997년 미일이 ‘신(新)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발표하고 양국의 작전 영역을 한반도, 대만 등 주변지역으로 확대한 겁니다.2000년대 들어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자, 미일은 2006년 ‘주일미군 재편을 위한 로드맵’에 합의합니다. 이에 따라 미 워싱턴주에 있던 육군 1군단사령부를 일본 자마기지로 옮겨 유사시 아태지역에서 미일 육군의 공동 작전사령부로 임무를 수행토록 합니다. 이어 미일 공군의 통합작전 능력을 높이기 위해 일본 항공자위대를 주일미군 5공군사령부가 있는 요코다 기지로 이동시키죠.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미일 통합 미사일방어사령부 격인 ‘공동통합운용조정소’도 새로 만듭니다. 이는 주일미군을 중앙아시아부터 동해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는 광역사령부로 격상시키고자 한 미국 국방전략의 일환이었죠.미국과의 안보동맹에서 자율성을 추구하며 전시작전권 반환을 추구한 한국과는 반대로 일본이 주일미군과의 일체화를 추진한 차이는 왜 발생했을까. 여기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자주파 득세 등 한국 특유의 민족주의 정서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이와 함께 한국전쟁 발발로 미군 주둔이 이뤄진 한국과,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해 전수방위에 국한된 일본의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한일은 역사적으로 국방정책의 논리적 근거가 서로 달랐다”며 “애초부터 한미연합사 체계를 갖춘 한국은 자주파가 등장해 주한미군과의 분리를 고민한 반면, 일본은 보수파가 집권할 때 주일미군과의 통합을 고민했다”고 분석했습니다.미일 안보조약 업그레이드 향후 파장은주일미군사령부 강화 방침은 주한·주일미군의 ‘상호 보완성’이란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군 병력 위주로 구성된 주한미군(2만8500명)과 해·공군 위주의 주일미군(5만5600명)을 결합하면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모두 갖춘 완전체가 되기 때문입니다.이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에서 중복에 따른 비효율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편제라고 봐야합니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역내에서 군사위협이 발생할 때 주한·주일미군이 함께 운용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실제로 미국은 탈냉전 이후 주한·주일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대하기 위해 작전지역을 확장하며 연합훈련의 강도를 높여왔습니다. 육해공 합동훈련부터 인도주의 지원, 재난재해 및 테러 대응, 국제평화유지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훈련을 망라하고 있죠. 미국의 전통 우방인 호주, 캐나다까지 끌어들여 중국을 포위하는 형국입니다.이와 관련해 미국의 관점에서 주일미군의 역할 내지 전략적 위상이 주한미군보다 사실상 상위에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해외 미군기지는 ‘전력 투사력’ 기준으로 ▲대규모 전력을 원거리로 보낼 수 있는 1급 전력투사 근거지(PPH·Power Projection Hub) ▲장기 주둔 사령부가 있는 2급 주작전기지(MOB) ▲소규모 부대나 순환부대를 위한 시설이 있는 3급 전진작전기지(FOS·Forward Operating Sites) ▲상주시설은 없고 유사시 병력 배치의 법적 근거만 있는 4급 협력적 안보지역(CSL·Cooperative Security Locations)으로 나뉘는데 주일미군은 1급 PPH로 주한미군은 2급 MOB로 각각 분류됩니다.이에 따라 중국의 대만 침공과 같은 역내 안보 위기가 발생할 때 주일미군이 전투부대로, 주한미군은 지원 혹은 증원 부대나 병참기지로 활용될 거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일미군 사령부 강화는 한반도나 대만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미군과 자위대의 일체성을 강화해 신속히 전력을 이동 배치하는 등 대응력을 높이려는 포석으로 보입니다. 일각에선 동맹에 비용 전가를 앞세운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주일미군 강화를 주한미군 감축의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대만 위기 등과 맞물려 미일의 주일미군 강화 움직임을 우리가 면밀히 살펴봐야하는 이유입니다.[참고 문헌]-임기훈 〈탈냉전기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역할 변화〉 (2021년, 한국과 국제정치 37권 4호)-마상윤 〈미완의 계획: 1960년대 전반기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논의〉 (2003년, 한국과 국제정치 19권 2호)-FT 〈US and Japan plan biggest upgrade to security pact in over 60 years〉 (2024. 3. 24)“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수련의를 갓 마친 영국 청년이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멀리 떠난다. 그는 유럽대륙과 중동을 거쳐 남아프리카로 향하더니 이내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한다. 그러곤 호주와 동남아시아, 인도를 찍고 중국으로 향한다. 장장 6년에 걸쳐 75개국, 8만6000여 km를 자전거로 내달린 저자의 장구한 여정이다. 그 사이 자전거는 타이어 26개, 체인 14개, 페달 12세트를 갈아치워야 했다. 이 책은 런던 세인트토머스병원 응급의인 저자가 쓴 여행 에세이이자 의학 에세이다. 단순히 여행지에 대한 감상이나 고생기만 나열한 게 아니라, 의사로서 바라본 세상의 풍경이 그득 담겼다. 세계 각처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만난 병자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치안이 불안하다며 초라한 행색의 그에게 다가와 에스코트를 자청한 경찰관, 아무 조건 없이 음식과 방을 내준 주민 등 풍경만큼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영국인으로서 서구의 제3세계 착취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1990년대 후반 탈레반이 하자라족을 고문하고 강간한 데 대해 서방 평론가들이 ‘부족 간 갈등’으로 간단히 정리하는 건 비겁하다는 것. 저자는 “그런 해석은 강대국들이 아프가니스탄 내 일부 세력만을 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증오를 부추기고 분쟁을 격화한 문제를 슬쩍 피해 간다”고 썼다. 여행을 끝내고 병원에 돌아온 그가 의사의 역할은 단지 질병을 진단하는 게 아니라, 환자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다고 언급하는 대목은 최근 의대 정원 갈등과 맞물려 곱씹게 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세기 중후반 미국 캘리포니아와 호주 멜버른, 남아공 트란스발에서는 골드러시가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금광 개발의 이면에는 앵글로색슨 백인들의 중국인 노동자 착취가 있었다. 중화를 자처한 청나라가 갑자기 반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서구 열강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 시장 질서에 중국인들이 급속도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인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인 저자는 신간에서 19세기 골드러시에 동원된 중국인 이주자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당시 앵글로색슨 백인들은 중국인 이주자들을 ‘쿨리’라고 부르며 낮은 임금으로 혹독하게 부렸다. 그러면서 호주 정부가 이른바 ‘중국인 보호지’를 지정한 것처럼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분리주의 정책을 폈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유색인종을 분리해야 불필요한 갈등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초대 주지사를 지낸 존 비글러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중국인들이 백인 광부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며 선동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 같은 시노포비아(sinophobia·중국 혐오)가 최근 미중 갈등과 맞물려 새로운 형태로 부활했다고 말한다. 단, 19세기 중국이 반식민지 상태였다면 21세기 중국은 주요 2개국(G2)로 부상하며 서구의 우려를 자아냈다는 차이점이 있다. 서구와 다른 문명의 부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는 19세기 ‘중국인 문제’를 다룬 서구인들의 차별적 인식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본이 과거를 사과하지 않는다는 기성세대의 인식을 젊은 세대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 12일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이 기자간담회에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박 이사장은 “50대 이상 기성세대는 살아온 길이 굉장히 험악했기 때문에 자기 연민, 한(恨)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인 영국과 아일랜드를 거론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모든 걸 영국 탓을 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는 것. 그는 “그런데 아일랜드가 경제 발전을 하더니 2000년대 초반 여론조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잘 통하는 나라가 영국’이라고 답할 정도로 인식이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아일랜드의 경제가 발전하고 민도(民度)가 성숙하면서 영국과 화해했듯, 10대 경제대국이 된 한국도 일본에 사과를 강요하지 말고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역사학계는 박 이사장의 발언에 대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해 이를 반박할 수 있는 학술자료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기관의 수장이 “일본에 사과를 그만 강요하자”는 식의 역사 인식을 공개적으로 밝힌 건 재단 설립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단 설치의 근거법인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조는 ‘이 법은 동북아역사재단을 설립하여 동북아시아의 역사 문제 및 독도 관련 사항에 대한 장기적·종합적인 연구 분석과 체계적·전략적 정책 개발을 수행함으로써 바른 역사를 정립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 및 번영의 기반을 마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박 이사장은 간담회에서 자기주장의 근거로 이 조문 뒷부분의 ‘평화 및 번영’만 내세웠을 뿐, 앞부분의 ‘동북아 역사 문제 및 독도 사항에 대한 정책 개발’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22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종군위안부’ 표현을 없애고 ‘강제징용’ 피해를 희석시키는 내용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최근 국내에 번역된 회고록에서 “일본은 과거 몇 번이나 사과해왔다. ‘여러 차례 사과를 시켰으면 이제 됐지’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썼다. 일본 주류의 과거사 인식은 여전히 사과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학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학문의 자유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장으로 장관급 예우를 받는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공적인 발언은 다르다. 사실 이번 논란은 석 달 전 뉴라이트 성향이 강한 박 이사장이 임명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앞서 박근혜 정부 때도 뉴라이트 학자가, 문재인 정부에선 국정교과서 집필 거부 선언을 한 진보계열 학자가 각각 재단 이사장으로 임명돼 ‘코드 인사’ 논란이 일었다. 미중 갈등, 북핵 위기와 맞물려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서 한미일 3각축이 중요하다는 현 정부의 방침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 인식은 국제 정세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역사나 인권 등의 이슈에서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가 갈릴 수 없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김정은이 남·북한을 ‘동족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한 데 이어 최근 대남기구 폐지 등 후속 조치를 연이어 내놓고 있습니다. 심지어 각종 기록영화 배경에 찍힌 한반도 이미지를 북한 영토로 수정하는 디테일까지 발휘하고 있죠. 이제 정말 북한이 민족통일을 포기한 것일까.그런데 이보다 더 주의를 끄는 건 김정일 집권 당시 3년의 유훈통치 기간을 둘 정도로 선대 수령의 교시를 절대시하는 북한에서 수령이 앞장서 민족통일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김일성-김정일은 생전에 마르고 닳도록 ‘자주적 민족통일’을 강조했죠.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이른바 NL(민족해방) 계열의 학생운동권이 북한에 밀착된 것도 북한 통일관의 영향이 컸습니다. 한반도 통일에서 ‘민족 담론’의 포기가 남북한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얼까요.김일성 민족통일론 폐기한 김정은“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개의 제도, 두개의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현 실정에 맞는 조국통일 방도의 대원칙입니다.”김일성은 1991년 신년사를 통해 ‘느슨한 연방제’를 제안하면서 민족을 앞세웠습니다. 북한은 1993년 김일성이 직접 제기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발표하면서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공산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무산자이건 유산자이건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해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해야 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 나가야한다”고 역설했죠. 김정은의 적대적 2국가론이 할아버지이자 초대 수령인 김일성의 교시를 정면으로 어긴 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사실 김일성이 제기한 북한의 민족 통일론은 단순한 정치 전술에 국한된 게 아닙니다. 북한에서 민족주의는 1960년대 후반 유일 지배체제를 구축하면서 제기된 주체사상과 직결되죠. 1960년대 첨예한 중소 갈등 와중에 김일성이 친중파(연안파)와 친소련파를 제거한 핵심 명분이 ‘민족 자주’였기 때문입니다.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겠다는 김일성의 명분론이 북한에서 먹힌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 덕분입니다. 엄혹한 일본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이른바 ‘저항적 민족주의’가 남북한을 가리지 않고 민중들의 심장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외세=악의 세력’이라는 흑백논리가 김일성이 친중, 친소파를 제거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었죠.1인 지배체제 구축을 계기로 주체사상이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규율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극하면서 주체사상과 결합된 ‘북한판 민족주의’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게 됩니다. 예컨대 김일성은 1983년 연설에서 “오늘 신흥세력 나라들이 건설하여야 할 참다운 민족문화는 주체가 선 문화, 주체적인 문화입니다. 주체적인 문화란 자기 민족의 특성과 자기 나라 혁명의 이익에 맞는 문화이며 인민대중이 그 창조자로 되고 향유자로 되는 문화입니다”라며 문화영역에서도 ‘주체적 민족 문화’를 강조합니다.그런데 흥미로운 건 주체사상이 확립되기 전에는 북한에서 민족주의는 일종의 금기어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국제 공산주의’를 신조로 여기는 정통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서 민족주의는 일종의 ‘독소’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레닌은 전 세계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맞서는 계급투쟁에서 승리하려면 민족을 뛰어 넘어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죠.실제로 민족주의에 대해 1985년판 북한 철학사전에선 “전 민족적 이익을 내세우면서 자기 민족 내의 부르죠아지의 이해관계를 합리화하는 사상”이라는 의미만 담았습니다. 하지만 1992년판 ‘조선말 대사전’에서는 민족주의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보적 사상.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부르죠아 민족운동시기에는 인민대중의 이익과 함께 신흥 부르조아지의 이익까지 포괄하는 민족공동의 이익을 반영한다. 단일 민족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민족주의는 곧 애국주의로 된다”며 긍정적 의미를 살리고 있습니다. 북한이 정통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서 이탈해 주체사상으로 이행하는 모습을 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남북한 통일담론의 적대적 의존성‘1972년 공포된 남북한의 헌법은 시기뿐 아니라 1인지배 강화 등 내용상에도 공통점이 많다.’1972년 말 작성된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 내부 보고서는 그해 발표된 남한 유신헌법과 북한 사회주의 헌법의 유사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면서 남북한 당국 간 정보 공유 가능성을 내비쳤습니다. 두 헌법 모두 그해 남북한 정부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합의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발표됐죠.박정희가 1972년 10월 발표한 ‘10월 유신’은 미중데탕트로 초래된 미군 철수 등 안보 위기에 대응한다는 명분 하에 장기집권의 길을 연 초헌법적 조치입니다. 그런데 같은 해 김일성도 주체사상을 헌법조문에 규정함으로서 1인 지배체제에 쐐기를 박습니다. 민족통일을 남북한의 국내정치에 활용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이를 두고 학계 일각에선 당시 남북한이 ‘적대적 의존관계’였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7.4 남북공동성명에 이어 유신체제가 등장했을 때 남북한의 대응이 이런 맥락에서 특히 눈길을 끕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유신 발표에 앞서 북한 고위층 접촉을 통해 이해를 구하는 등 남북대화 유지에 공을 들입니다. 유신 선포의 명분 중 하나가 평화통일 추구였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북한 역시 남북대화 중단을 우려해 유신체제 출범 직후 남한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김일성은 1974년 우쓰노미야 도쿠마 자민당 의원과의 대담에서 “남북대화가 이제 막 시작되었기 때문에 남한에 대한 비판이 남북대화 중단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인내심을 발휘해 남북대화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죠.하지만 북한의 진의는 평화공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1972년 11월 8일 북한 외교부 부부장 이만석은 평양 주재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대사에게 “북한이 남한의 유신 조치를 비판하면 야당이 더 탄압받는 결과를 초래해 ‘남조선 혁명’을 전개할 수 있는 입지와 공간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정부 세력을 통해 남한 정부를 흔들려는 목적으로 남북 대화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유신에 대한 비난을 삼갔다는 얘기입니다.이처럼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한의 민족통일 담론은 국내정치적 목적과 체제 경쟁 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물론 남한 민주화 이후의 통일 논의는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라졌지만, 남북한 모두 국내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한 측면을 부인하긴 힘듭니다. 반민족, 반통일로 돌아선 북한을 대신해 민족통일의 비전을 세워야하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요. [참고 문헌]-전미영 〈통일 담론에 나타난 남북한 민족주의 비교연구〉(국제정치논총 43집 1호, 2003년)-신종대 〈유신체제 수립을 보는 북한과 미국의시각과 대응〉 (아세아연구, 2012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1960년대 베트남 정글의 전장(戰場)에서, 뜨거운 지하의 독일 탄광에서 반복적으로 울려 퍼졌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1964년)는 가사처럼 서글펐던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65년 왜색(倭色)이 짙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방송금지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이 시대 한국인들의 대표 애창곡이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사석에서 이 곡을 즐겨 부르곤 했다. 올해로 ‘동백 아가씨’가 예순을 맞은 가운데 국내 최초로 음반 100만 장 판매기록을 세운 이 곡의 작곡가 백영호(1920∼2003)의 삶을 다룬 평전이 나왔다. 내과의사인 그의 장남이 부친이 남긴 육성 녹음테이프와 유품을 바탕으로 주변 인물들을 두루 인터뷰해 책을 썼다. 이미자, 배호, 나훈아, 남진 등 스타 가수들을 비롯해 박춘석, 박시춘 등 전설적인 작곡가들과 얽힌 인연도 다뤄 1960, 7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백영호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을 탈영해 만주 등지에서 연주자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 고향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신인이던 이미자를 발굴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 ‘동백 아가씨’를 녹음했다. 1963년 동아방송의 라디오 드라마 ‘동백 아가씨’를 이듬해 리메이크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동명 영화 주제가로 작곡된 것이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탕기 영감의 초상’(1887년)은 주인공인 탕기 영감보다 그의 뒷배경에 더 눈길이 간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벽면을 가득 채운 우키요에(浮世繪·목판화)들은 원색의 화려함을 한껏 뽐낸다. 고흐는 우키요에광(狂)이었다. 없는 살림에도 틈틈이 우키요에를 수집해 감상하고 따라 그렸다. 원근법 따위는 과감히 무시하는 평면적 구도와 원색의 색채는 고흐 등 인상파 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우키요에의 연원과 발전 과정, 중국 및 서양미술에 미친 영향 등을 다각도로 짚고 있다. 일본 에도시대(1603∼1868년)에 유행한 우키요에는 한자어의 의미(들뜨고 허허로운 세상의 회화)가 담고 있는 것처럼 목욕하는 여인부터 무사, 배우, 풍경에 이르기까지 세속의 삶을 관조하듯 그려낸 작품이다. 우리로 치면 일종의 ‘민화’에 가까운 개념이다. 우키요에에는 일본의 변화하는 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컨대 경제적 풍요가 찾아온 에도시대 후기 평민들 사이에서 여행 열풍이 불자, 지역 명소들을 담아낸 우키요에 풍경화가 인기를 끌었다. 이때 음영법 등 서양 풍경화의 각종 기법이 우키요에 제작에 반영됐다. 역으로 우키요에는 유럽 회화에 일본 열풍(자포니즘)을 불러일으켜 인상파를 넘어 입체파 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며칠 전 동네 교회에서 주일예배 때 겪은 일이다. 팔순을 넘긴 한 노인이 강대상 아래로 내려오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순간 잠잠해진 청중 사이로 무거운 침묵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노인은 세월의 무게로 힘에 겨운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강대상 뒤에 서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고 온몸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여러분께 고통을 드린 점 사죄드립니다. 일본인 목사가 거룩한 한국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는 한국에 파송된 지 43년 된 서울일본인교회의 요시다 고조 목사였다. 그가 한국에 처음 부임한 1981년은 이미 한국의 기독교인 수가 일본보다 월등히 많을 때였다. 요시다 목사는 이날 설교에서 자신의 파송 이유를 “한국인들께 사죄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마태복음 말씀을 강론하며 가장 가까운 이웃을 침략한 일본의 죄를 회개했다. 이달 1일로 3·1운동 105주년을 맞았지만 일본 정부와 유력 정치인들의 과거사 반성은 아직 요원하다. 일본 역대 총리 중 최장기 집권에 성공한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최근 한글로 번역 출간된 ‘아베 신조 회고록’에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실수로 치부했다. 일본 총리 중 처음으로 한국 식민지배를 사과한 정부의 공식 입장을 사실상 부인한 것이다. 한일 양국 간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기로 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무라야마 담화를 토대로 나올 수 있었다. 이러고도 일본이 한국의 ‘위안부 배상 판결’을 놓고 정부 간 신의를 운운할 수 있나. 아베는 회고록에서 “일본은 과거 몇 번이나 사과해왔다. ‘여러 차례 사과를 시켰으면 이제 됐지’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썼다. 사실 일본 극우 정치인들뿐 아니라 최근 국내 일각에서도 “그만 사과해도 되지 않냐”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역사 반성에는 시효가 없다. 침략의 역사를 한시라도 잊으면 1차 대전 발발 25년 만에 2차 대전이 터진 것처럼 역사의 비극이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베가 회고록에서 “(무라야마 담화는) 마치 일본만 식민지배를 한 것처럼 쓰였다.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관점이 빠졌다”며 “전쟁 전에는 유럽과 미국도 식민지배를 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한 것은 특히 우려스럽다. ‘서구 열강들도 다 했는데 왜 우리한테만 이러느냐’는 그의 태도는 1차 대전에 이어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인들의 인식 체계와 흡사하다. 1919년 6월 독일의 전쟁 배상 책임을 규정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독일인들은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에도 전쟁의 책임이 있다며 억울해했다. 그러면서 알자스로렌 반환 등에 대해 과도한 징벌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독일은 그 1년 전 내란으로 취약해진 소련을 압박해(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발트 3국과 조지아 등의 영토를 강제로 뺏은 바 있었다. 일본은 독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화해는 과정이며, 한 번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가 아픔을 잊을 때까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요시다 목사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최근 한국과 쿠바의 수교가 전격 발표되자 북한이 일본과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난 달 1일 김정은이 쿠바 혁명 65주년 축하전문을 보내고 2주일도 되지 않아 한-쿠바 수교가 발표된 데 대해 북한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쿠바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하던 북한 언론이 수교 이후 쿠바 관련 동정을 일체 다루지 않고 있는데서 북한이 받은 충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뉴욕의 주유엔대표부를 통한 한-쿠바 양국간 접촉은 비밀리에 급속도로 이뤄졌는데 수교 기념사진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양국이 각각 최대 동맹국인 미국과 북한의 심기를 살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번 수교는 70여년에 걸친 남북한 외교전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남북한 체제경쟁이 치열한 외교전으로 비화했던 1960, 70년대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북방외교의 효시, 박정희 ‘6.23 선언’“남한과 북한의 외교전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이 모든 재외공관에 보낸 친서 중 일부입니다.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는 북한과 절차적 문제를 놓고 외교전을 벌였으나, 앞으로는 본질적인 문제로 외교전을 벌여야 하기에 몇 갑절 더 치열한 외교전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죠. 비장한 어조의 대통령 친서에 당시 외교관들이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으리라 생각됩니다.아이러니하게도 이날은 박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통해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발표한 날이었습니다. 발표 제목만 봐서는 남북화해를 언급한 것 같은데, 재외공관에는 ‘치열한 대북(對北) 외교전’이라니? 이게 무슨 조화일까요. 이 기묘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미중 데탕트로 대표되는 이 시기 국제정세가 한반도에 미친 파급효과를 짚어야 합니다. 일단 그 전에 6.23 선언의 내용부터 훑어보죠.‘6.23 선언’의 골자는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남북통일은 평화적 방법으로 달성돼야 한다. 둘째, 남북한 긴장완화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유엔 등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셋째, 남한은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북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넷째, 한국은 호혜평등의 원칙 아래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공산권 국가들에 문호 개방을 촉구한다.내용만 봐서는 남북한 체제경쟁이 극심했던 당시로선 매우 이례적인 조치로,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의 효시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6.23 선언의 진의는 북한과의 진정한 화해협력 추구가 아니었습니다. 이보다는 새로운 차원의 대북 외교전에 가까웠죠.실제로 당시 외무부는 박 대통령의 6.23 선언 직후 내부 보고서에서 ‘외교면에서 남북전쟁의 상황이 전개될 것임에 대비해 우리가 항시 북한에 비해 외교적 우위를 견지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적시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중소 간 적대관계를 활용, 공산권 내에서 북한의 지위를 약화시키고 국익에 유익한 방향으로 대공산권 정책을 추진한다’는 계획도 포함됐죠.북한도 6.23 선언의 이면에 있는 진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선언 바로 다음 달인 그해 7월 남한은 공산권 국가 중 소련의 영향권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던 유고슬라비아에 통상사절단을 보냅니다. 북방정책의 닻을 올린 겁니다. 앞서 한국은 1971년 9월 KOTRA 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경제사절단을 보내는 등 유고와의 경제교류에 공을 들였죠.하지만 유고에 무역대표부를 개설해 교역을 시작하려고 한 시도는 결국 실패합니다. 북한의 부탁을 받은 중국의 방해 공작으로 유고 정부가 사소한 사항을 갖고 트집을 잡아 협상을 좌초시켰기 때문입니다. 남북한이 상대방의 외교적 입지가 넓어지는 걸 막기 위해 끊임없이 견제하는 일이 계속 벌어진 겁니다.사실 6.23 선언이 발표된 1973년은 한국 외교사에서 ‘좌절의 해’로 기록돼 있습니다. 정부의 온갖 외교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그해 4월 28일 비정부간 국제기구인 국제의회연맹(IPU)에 이어 5월 18일 세계보건기구(WHO) 가입에 연이어 성공했기 때문입니다.특히 북한의 WHO 가입은 북한이 건국 이후 처음으로 유엔체계에 편입됐다는 점에서 남한에 뼈아픈 것이었죠. 한국전쟁 발발 이래 미국의 입김으로 남한만이 특권적으로 누려온 유엔 옵서버(observer) 지위를 상실하게 된 겁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73년 이후부터는 유엔에서 남한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이 같은 당시 정황으로 볼 때 6.23 선언이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을 봉쇄할 수 없었던 현실을 감안한 수세적 정책 전환이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정부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전격적으로 제안해 북한에 역공을 가하는 동시에, 북방외교로 외교공간을 넓히려고 했다는 겁니다.미중 데탕트와 한국의 안보위기이제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한국에 안보위기를 가져온 미중 화해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6.23 선언과 동시에 북한에 대한 외교전에 나선 건 미중 데탕트라는 국제정세 변화가 시발점이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면 한반도에 안정이 찾아오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국과의 화해 무드로 나아간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보고,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1960, 70년대 북한의 각종 무력도발은 끊이지 않았죠. 1968년 1월 북한군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침투한 1.21 사태가 대표적입니다. 남북한 체제경쟁이 극심하던 당시 최고 권력을 제거하려는 이른바 ‘참수 작전’에 나설 정도로 남북관계가 험악했던 겁니다.게다가 박정희 정부는 소련제 탱크와 순항미사일, 미그21 전투기 등을 보유한 북한의 당시 군사력이 남한을 압도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북한에 대한 위협인식에 있어 미국과 한국이 서로 큰 차이를 보였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겠다는 미국의 정책방향을 한국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이는 결국 대북한 외교전과 더불어 자주국방 강화로 이어지게 됩니다.한미동맹의 균열은 1.21 사태 이틀 뒤 터진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1.21 사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보복 공격 주장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미국이 자국 해군 병사들이 납치되자 영해 침입을 사과하는 등 신속한 대응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당시 박정희는 푸에블로호 사건을 1.21 사태와 연계해 대응하고자 했지만, 미국은 남한을 배제한 채 북한과 단독협상을 벌였죠. 미국의 이런 일방적인 행동은 박정희의 자주국방 의지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습니다.무엇보다 한국 정부에 큰 충격을 안긴 건 닉슨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이었습니다. 한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970년 5월 29일 멜빈 레어드 미 국방장관은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철수는 점진적으로 추진될 것이고, 1개 사단 이하 병력부터 철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6월 말까지 주한미군 1만8000명이 감축되면서 극도의 안보불안을 느낀 박정희는 절치부심 끝에 핵개발을 비롯한 자주국방의 길을 걷게 됩니다.닉슨 행정부는 주한미군 감축에 그치지 않고 북한이 극도의 무력도발을 일삼는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에 북한과의 대화를 압박합니다. 중국과의 화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status quo)를 실현하고자 한 겁니다. 이에 박정희는 197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하며 의미 심장한 메시지를 발신합니다.“민주주의와 공산독재 중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를 (북측에) 묻고 싶은 것입니다.”매우 단도직입적인 어조의 이 발언 속에는 북한과 대화를 추구하되, 남북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강한 확신이 담겨있습니다. 닉슨의 대화 압박에도 박정희는 무력통일을 포기하지 않은 북한을 진정한 화해협력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봤죠. 이것이 3년 뒤 6.23 선언을 발표하면서 박 대통령이 대북 외교전에서 승리를 재외공관에 주문한 배경입니다.사실 박 대통령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 건 닉슨 행정부의 압력과는 별도로 전략적인 이유도 있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1970년대 고도 경제성장이 본격화됐지만, 자주국방 강화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시간을 벌고 북한의 침략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박 대통령이 남북대화를 추진했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은 1971년 남북대화에 나서면서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아무리 적의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의 한쪽 손을 붙들고 있으면 그가 나를 칠지, 안 칠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박정희 시대 안보위기를 가져온 미중 화해 구도는 최근 미중갈등으로 돌아섰습니다. 미중갈등이 북한의 핵위협과 맞물려 한국의 안보불안을 키우고 있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북중에 대한 위협인식을 매개로 한미동맹이 굳건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입니다.다만, 올 11월 미국 대선에서 동맹체제를 경시하는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셈법이 복잡해질 수 있는 것이 우려됩니다. 이 경우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해 자주국방 강화를 결단한 박 대통령 사례에서 보듯, 특단의 안보대책을 준비해야하지 않을까요.[참고 문헌]-장덕준 <박정희 시기 대륙지향 외교의 배경과 특징> (2019년·중소연구 43권 2호)-신종대 <남북한 외교경쟁과 ‘6.23 선언’> (2019년·현대북한연구)-마상윤 <미중관계와 한반도- 1970년대 이후의 역사적 흐름> (2014년·역사비평)-마상윤·박원곤 <데탕트기의 한미 갈등: 닉슨, 카터와 박정희> (2009년·역사비평)-마상윤 <미완의 계획: 1960년대 전반기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논의> (2003년·한국과 국제정치)“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동부전선. 1942년 6월 휴가를 나온 독일군 병사 발터 카슬러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 매형과 대화하며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건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문제”라고 말했다. 이를 듣고 있던 매형이 “하지만 그건 살인이다”라고 반박하자, 발터는 한마디로 모든 대화를 종결했다. “확실한 건 우리가 패배하면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행했던 바로 그걸 우리에게 행할 거라는 사실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사학과 교수이자 나치 연구 권위자인 저자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인들이 교환한 편지 약 2만5000통과 각종 일기, 공문서 등 광범위한 자료를 들여다보며 히틀러를 지지했던 평범한 독일인들의 심리를 파헤쳤다. 이들에게 2차 대전은 침략전쟁이 아닌 독일 민족을 방어하기 위한 종말론적 전쟁으로 여겨졌다는 것. 흥미로운 건 전쟁 당시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쉬쉬했을 거라는 통념과는 달리 많은 이들이 이를 알고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다. 이는 선전 선동의 대가였던 요제프 괴벨스가 유대인 학살 정보를 언론을 통해 넌지시 내비친 데 따른 것이었다. 대중매체를 통해 주입된 정보가 다수의 견해와 배치되면 결국 침묵하게 된다는 ‘침묵의 나선 효과’가 작용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Keeping at it(긴축 지속으로 버티기).’ 대표적인 인플레이션 파이터인 폴 볼커 전 미 연방준비제도(FRB) 의장의 회고록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주가와 집값을 결정하는 기준금리 인상을 밀어붙이는 건 지난한 일이다. 금리가 오르면 주가와 집값이 떨어지고, 이는 선거에서 집권 여당의 패배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세계 주요국이 중앙은행의 정부로부터 독립을 규정한 이유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늘 존재한다. 일본의 경제 전문 언론인인 저자는 1990년대 이래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장기 침체) 동안 일본은행(일은)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했다. 대규모 양적 완화와 재정 지출로 경기를 부양하려고 한 아베노믹스의 핵심에 일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은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펼치기 위해 대량의 국채는 물론이고 상장지수펀드(ETF)까지 매입했다. 문제는 아베노믹스의 경기 부양이 단기에 그친 가운데 막대한 공공부채라는 시한폭탄을 남겨 놓았다는 것. 저자는 일은이 양적 완화의 첨병이 된 과정을 설명하며 중앙은행의 독립적인 금리 결정을 보장한 1998년 일은법 개정 과정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세히 그리고 있다. 당시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와 자민당 정치인, 일은 부총재의 행적을 시시각각 쫓으며 정치권이 비대해진 대장성의 권한을 축소하는 과정에서 일은법 개정이 추진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본질이 전도된 중앙은행 독립은 아베노믹스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됐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지난달 대만 총통 선거에서 반중, 친미 성향의 민진당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되면서 중국의 대만 침공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달 들어 최대 명절인 춘절에도 항공기와 해군 함정, 감시 풍선 등을 대만 영토 쪽으로 보내는 등 군사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미국은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양안전쟁이 터지면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옵니다.이는 그저 남의 일이 아닌 한반도 안보 위기와 직결되는 요인입니다. 대만을 둘러싼 미중전쟁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증원 전력인 주일·주한미군 재배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두 개의 전선(two-front war)을 노리는 중국이 북한에 남침을 요청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거론됩니다.그렇다면 미국이 대만을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인 이유는 무엇이고, 양안전쟁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까요(Oriana Skylar Mastro 미국 스탠포드대 교수 논문 등 국내외 문헌을 참고했습니다.)한국전쟁 이후 운명공동체로 엮인 한국과 대만우선 한국전쟁을 계기로 대만이 한반도와 일종의 운명공동체로 엮이게 된 과정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950년대 전후로 시계를 돌려보죠. 1940년대 후반 2차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국은 대만의 전략적 가치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1948년 11월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점령할 경우 미국의 안보이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검토하는 내용의 보고서(NSC-37)를 작성합니다. 중공이 대만을 점령하면 미국 안보에 불리하다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었습니다. 반면 미 군부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지켜야할 정도로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다고 봤죠.정부 내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초까지 트루먼 행정부는 ‘무개입 원칙’을 고수합니다.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또 대만으로 쫓겨간 국민당 정부에 대해서도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거였죠. 이는 마오쩌둥의 승리가 대세로 굳어진 가운데 혈맹인 영국이 중공을 승인하면서 미 의회와 경제계, 학계, 언론에서 중공 정권 승인론이 힘을 얻은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1950년 2월 미국 정보기관은 대만 국민당 정권이 그해 12월을 넘기지 못하고 중공에 점령될 거라는 비관적인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트루먼 정부는 중공과의 관계 개선을 준비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단절하는 방안을 검토했죠.하지만 그해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을 계기로 상황은 180도 바뀌게 됩니다.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전쟁이 터지고 한 달 뒤 대만 국민당 정부에 긴급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원조계획을 수립할 조사단 파견을 제안합니다. 미국 입장에서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갑자기 높아진 거죠.그런데 그해 10월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계기로 전황이 뒤집히면서 미국의 대만 보호 의지도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딘 러스크 당시 국무장관은 “만약 중공이 한국전쟁 해결을 위한 교섭과정에서 대만 문제를 논의한다면 미국은 티베트와 인도차이나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 이어 국무부 중국과는 중공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대만을 중공에 넘길 수 있다는 의견을 내기까지 합니다.그러나 결국 미국은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5월 대만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고문단을 보내는 등 군사원조 계획을 수립합니다. 단,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외교 방침을 유지하기로 합니다. 이에 따라 당시 미 국무부는 국민당 정부에게 명확한 안보공약을 제시하는 걸 거부하죠. 대만 외교부 장관이었던 예궁차오(葉公超)가 미국이 결국 국민당 정부를 포기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한 이유입니다.中, 대만 점령하면 美 본토 위협 ↑한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소국 개방경제’인 만큼 해상교통로(SLOC)의 경제, 안보적 가치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 무역 물동량의 43%가 대만해협을 통과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죠. 중국의 대만 점령이 동아시아 각국의 경제, 안보에 큰 위기가 될 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특히 일부 군사전략가들은 대만의 군사적 가치가 상상 이상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미국이 미소 냉전 당시 유용하게 활용한 SOSUS(수중음향감시체계)로 현재도 중국군의 필리핀해 및 태평양해 진출을 효율적으로 막고 있는데,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면 이것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겁니다.SOSUS는 잠수함을 추적하기 위해 해저에 일렬로 깔아놓은 무수한 음파탐지기(소나)들을 말합니다. 미국은 SOSUS를 유럽의 북해와 대서양, 대만해협 등에 매설했는데 소련 핵잠수함이 기지를 떠난 직후부터 소음을 탐지하는데 성공할 정도로 높은 성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SOSUS로 위치가 드러난 잠수함은 대잠초계기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돼 그야말로 먹잇감에 불과하게 됩니다(잠수함의 최대 강점인 잠항성을 무력화시키는 무기인 셈입니다.)그런데 중국이 대만을 점령한 뒤 소음을 획기적으로 낮춘 핵잠수함을 대거 운용하면 SOSUS에 탐지되지 않고 필리핀해에 접근할 수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특히 일본은 오키나와 등이 대만과 가까워 중국의 이 같은 군사전략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죠.중국이 대만해협을 가로질러 태평양까지 진출하면 미국도 산 넘어 불구경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중국이 대만 점령 후 저소음의 전략핵잠수함(SSBN)을 대만 기지에 전진 배치하면 미국의 대잠 전력에 노출되지 않고 미국 전역으로 핵미사일을 쏠 수 있는 해역(태평양)까지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와 함께 필리핀에 기지를 두고 해·공군을 운용하는 미국의 작전능력을 직접 견제할 수 있게 됩니다.그런데 이보다 더 뼈아픈 것은 중국의 대만 점령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강력한 동맹체제를 흔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 일본 등 주변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 안보공약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각국의 생명줄과도 같은 해상교통로가 중국에 의해 결정적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들은 미국 핵 자산의 전진 배치나 핵공유 등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냉전시기 핵 군비 경쟁을 벌인 유럽처럼 동아시아에서 안보 위협이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미국의 안보 공약이 신뢰성을 잃으면 동맹국 간 ‘방기(abandonment)와 연루(entrapment)의 딜레마’에 빠지기 쉽습니다. 동맹을 맺고도 안보위기 시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이 방기라면, 연루는 동맹으로 인해 원치 않는 갈등(전쟁 등)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양자 동맹에서 상대적 약소국이 방기의 위험을 두려워한다면, 상대적 강대국은 연루의 위험을 두려워하죠. 이는 미국이 한국, 일본, 호주 등과 맺은 동맹에 균열을 일으켜 중국의 도발 가능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미국의 대만 점령이 군사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찰스 글레이저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대만 점령이 중국의 군사력이나 전력투사 능력을 크게 증가시킬 거라는 근거가 없다”며 대만 포기를 주장했습니다.병참기지로서 한반도의 역사양안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은 동맹조약을 맺고 있는 한국, 일본에 어떤 식으로든 군사 지원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사시 중국이 주한미군 기지만 국한해 공격하더라도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군이 주한미군과 연계 대응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이미 미국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양안전쟁 시 주한미군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를 놓고 다양한 논의를 벌이고 있습니다. 미국 학계 일각에선 한국이 중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이 정보수집이나 탄약 공급, 비전투원 소개와 같은 후방지원에 나서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합니다.사실 병참기지로서 한반도의 역할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목이자 병참기지로 조선을 활용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현대사로 좁혀 보면 국공 내전이 대표적입니다. 1940년대 후반 2차 국공 내전 당시 북한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군의 든든한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했죠. 마오쩌둥이 대만 수복을 사실상 포기하면서까지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데에는 국공 내전 당시 깨달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이와 관련해 양안 위기와 맞물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전을 한미 양국이 재검토해야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양안전쟁시 주한미군 재배치로 인해 생기는 대북 억지력의 공백을 한국이 더 많이 메우는 방향으로 작전통제권 이전을 추진해야한다는 겁니다. 이는 한국의 자체 국방력이 강화되면 중국의 대만 침공을 틈탄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다는 논리죠.단, 이 같은 조치가 북한의 핵무장과 일본의 군비 확장이 본격화 된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군비경쟁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건 우려스럽습니다. 미중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이 같은 움직임이 양안전쟁의 가능성을 오히려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그동안 한국은 국력에 비해 소극적인 외교 행태를 보여왔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 일본, EU 등이 추진한 러시아 원유상한제에 적극 동참하지 못한 게 대표적입니다. 최근 미중갈등과 더불어 일본이 전수방위를 폐기하는 등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한국도 양안전쟁에 적극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참고 문헌]-Brendan Rittenhouse Green, 〈Then What? : Assessing the Military Implications of Chinese Control of Taiwan〉 (2022, International Security)-Oriana Skylar Mastro, 〈How South Korea Can Contribute to the Defense of Taiwan〉 (2022, The Washington quarterly)-장수야, 〈한국전쟁은 타이완을 구했는가〉 (2022년, 경인문화사)“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렇게 독특한 고려 사리구는 국내외를 통틀어 전례가 거의 없습니다.” 약 10년 전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소장된 14세기 고려시대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구(舍利具·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를 직접 조사한 금속유물 전문가는 “미술관이 돌려주지 않으면 돈을 주고서라도 가져와야 할 국보급 문화유산”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고려 거란전쟁과 몽골 침략을 거치며 현존하는 고려 금속공예품은 손에 꼽힐 정도로 희귀하다. 그런데 보스턴미술관 소장 고려 사리구는 라마교 불탑 모양의 사리구 안에 팔각지붕 형태의 소형 사리구 5기가 들어 있는 독특한 양식에 금속 세공 기법도 정교해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런데 최근 정부는 사리만 환수해 조계종에 기증하고, 사리구는 환수가 아닌 임시 대여하기로 보스턴미술관과 합의했다. 10년 넘게 사리구와 사리의 일괄 환수를 추진해 온 문화재청이 돌연 방침을 바꾼 것이다. 앞서 2009년 보스턴미술관은 계속된 한국의 환수 요구에 사리만 반환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당시 문화재청은 “사리와 사리구는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유물이기에 사리만 받을 순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문화재청의 이런 일괄 환수 방침이 갑자기 바뀐 건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 방미 이후다. 당시 동행했던 김건희 여사가 보스턴미술관장을 만나 사리구 반환 논의 재개를 요청하면서 문화재청과 조계종이 분리 환수를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사리구 대신 사리만 가져가라는 미술관의 제안을 정부가 받아들인 형국이어서 향후 사리구 반환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각에선 도난품이라는 물증이 없는 한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환수보다는 현지에서 전시가 국위 선양을 위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고려 사리구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국외 유출 문화재의 상당수가 도굴품 혹은 도난품이라는 점에서 국위 선양을 운운하는 건 너무 한가한 소리라는 지적도 있다. 이와 관련해 보스턴미술관이 1939년 사리구를 사들인 일본 골동품상 야마나카 상회는 조선에서 수많은 도굴·도난품을 사들여 미국, 영국, 프랑스 등으로 거래한 전력을 갖고 있다. 실제로 2014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미국 허미티지 박물관에서 환수한 조선 불화 ‘석가삼존도’는 일제강점기 국내 사찰에서 무참히 뜯겨 나간 뒤 야마나카 상회를 통해 미국으로 팔려 나갔다. 일본의 도자기 전문가 고야마 후지오는 자신의 책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 취임한 후 발굴된 고려 자기 총수는 몇십만이라고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썼다. 말이 발굴이지, 임자 없는 무덤에서 도굴해 불법으로 반출한 것이다. 고려 사리구의 분리 환수가 바람직한지에 대해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대통령실과 문화재청이 보스턴미술관과 협상하기에 앞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는지 의문이다. 과거 정치가 문화재 영역에 개입한 사례들은 결과가 좋지 못했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 당시 박 대통령이 경북 경주시 월성 발굴 현장을 이례적으로 방문한 직후 발굴이 속도전으로 이뤄져 고고학계의 반발을 샀다. 문재인 정부 때는 문 대통령의 강한 의지로 ‘가야사 복원 사업’이 추진됐지만, 지자체 간 예산 따먹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문화재 영역만큼은 전문가 주도로 일이 추진돼야 뒤탈이 없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지난해 11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별세를 계기로 그의 대표작 ‘헨리 키신저의 외교’(원제 ‘Diplomacy’·김앤김북스)가 발간 5개월여 만인 지난달 3쇄를 찍으며 국내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약 900쪽에 이르는 이 책은 까다로운 문체와 방대한 분량으로 1994년 원서 발간 이후 30년 가까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다 현직 외교관인 김성훈 주유엔대표부 참사관에 의해 지난해 8월 번역 출간됐다. 미국 현실주의 외교의 대가로 현실 외교와 학계를 두루 섭렵한 키신저답게 세계 외교 통사(通史)를 그만의 통찰력으로 집대성한 대작이다. 지난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에 이어 이달 24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주년을 맞는 등 지정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며 현실주의 외교 고전인 이 책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21년간 외교 현장을 지키며 이 책을 번역한 김 참사관은 “한반도 분단은 세계적 흐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며 “20세기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이를 깊이 있게 분석한 키신저의 책은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2년 전 유엔총회에서 북한의 전술핵 사용 위협을 규탄하며 북한 외교관과 공개 설전을 벌여 주목을 받은 그는 바쁜 업무로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다 일과를 마친 오후 9시(미국 현지 시간 기준)가 넘어서야 뉴욕 자택에서 동아일보와 통화했다. 그는 “30년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처럼 ‘힘의 공백기’에는 항상 전쟁이 터진다는 걸 키신저는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호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미국의 조약동맹국(treaty ally)들은 동맹조약 체결 이후 침략을 당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리처드 하스 전 미국외교협회장의 ‘혼돈의 세계’를 포함해 이번이 여섯 번째 번역서라고 들었다. “외교관은 협상이나 의전에만 치중한다는 외부 시각이 있는데 실상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다. 책을 번역하다 보면 자연스레 공부가 되는 데다 문서 번역이 평소 업무이기도 하다.” ─키신저의 웬만한 저작들이 국내에 거의 번역됐는데 유독 ‘Diplomacy’만 30년 가까이 번역이 안 된 이유가 뭔가. “이 책은 수백 년에 걸쳐 유럽, 중동, 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의 외교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외교 이념을 이해하려면 국제정치 사상도 봐야 한다.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 등 국제정치 이론도 다룬다. 다양한 지식이 씨줄, 날줄로 이어지는 높은 난도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번역에 3년이 걸렸는데 어떤 부분이 특히 까다로웠나. “키신저가 독일 태생이라 그런지 문장을 길게 쓰면서 주어와 동사를 도치시키고, 긴 명사구를 즐겨 쓰는 독일어식 표현이 많아 읽기가 까다롭다. 초벌 번역에는 10개월이 걸렸지만 국제정치학 용어 등을 꼼꼼히 검토하고 역주를 다는 데 2년이 더 걸렸다. 특히 나온 지 30년이 된 고전이기에 독자들이 시의적절하게 읽을 수 있도록 역주를 최대한 많이 달았다. 책 분량상 많이 잘렸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등 최근 사건도 디테일하게 역주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키신저는 서문에 미국 외교관을 위한 책임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외교계와 학계에서 필독서처럼 읽히는 이유가 뭔가. “한국 입장에서만 국제정치를 보면 일종의 ‘한반도 천동설’로 흐를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 분단 과정만 봐도 냉전이라는 세계적 흐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 책 19장이 6·25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전쟁이 일어난 배경이 18장부터 20장까지 쭉 이어진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이 영국 런던에 있던 폴란드 임시정부를 무시한 채 (공산주의자 중심의) 루블린 임시정부를 세우고, 체코에서 공산주의 쿠데타를 지원하는 등 공산주의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20세기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이 만든 것으로, 미국이 정원사(gardener)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이 만든 큰 틀의 구조에서 세계가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시각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최근 지정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면서 현실주의 외교를 대변하는 이 책도 주목받는 것 같다. “키신저는 철저히 현실주의로 접근하면서도 윌슨주의가 상징하는 미국의 이상이나 가치도 같이 가야 한다고 봤다. 사실 국제정치에서 지정학은 항상 있어 왔는데, 탈냉전 시기에는 러시아가 붕괴하고 중국이 크지 않아 지정학이 숨겨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국 주도로 진행된 세계화가 역풍을 맞으면서 지정학적 대립이 부각된 측면이 있다.” ─현직 외교관으로서 이 책이 남다르게 다가온 점이 있다면…. “외교관이 되기 전에도 봤는데 지금 읽으니 더욱 현실감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키신저가 상상하는 세계를 추종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통찰력이 있었던 분이라고 생각한다. 베르사유 체제를 설명하는 12, 13장은 힘의 공백기에 항상 전쟁이 터진다는 걸 보여준다. 예컨대 1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독일 주변 동유럽 지역에 취약한 신생 독립국들이 생겨 (2차대전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씨앗을 남겼다. 싫건 좋건 국제정치에서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이 있고, 힘의 공백을 누가 채우느냐가 관건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 호주, NATO와 같은 미국의 조약동맹국들을 한번 보자. 이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를 잘 따르는 선진국으로, 상호 간 비자를 요구하지 않고 자유무역을 하면서 (미국) 핵우산의 보장을 받는다. 그런데 이들은 미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전면전’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다. 반면 힘의 공백 상태에 놓였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남중국해의 경우에도 필리핀이 미국의 동맹이지만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해 줄지는 의문이다. 이런 지역은 갈등이 생길 여지가 있다. 이처럼 키신저가 말하는 세력권은 현재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저자는 트루먼을 만난 일화를 특유의 냉소적 유머로 서술했다. 번역자로서 특히 재밌게 본 대목은…. “의미심장한 게 외교사에서 격변을 겪을 때마다 세상이 크게 변화됐다는 거다. 예컨대 1차대전을 겪고 나니 다민족 제국이 사라졌다. 2차대전 후에는 식민주의 제국들이 사라졌다. 이어 냉전이 끝나니까 공산주의 제국이 사라졌다. 탈냉전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는 국가 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 냉전의 형성과 더불어 건국이 이뤄진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신생국인데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양차 대전의 격변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남았는지 그 스테이트크래프트(statecraft·국정운영술)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키신저는 6·25전쟁에서 청천강과 함흥만을 잇는 선에서 미군의 진격이 멈췄다면 중국의 개입을 막으면서도 남북한 인구의 90%를 흡수하는 성과를 거뒀을 거라고 주장했다. 국토 완정을 바라는 한국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인데…. “키신저의 강대국 중심의 사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마치 19세기 유럽의 빈 체제에서 열강들이 주변국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아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 시각과 유사하다. 사실 민족 문제는 차가운 머리로만 접근하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위상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미국이 조약동맹국인 한국을 포기하면 국제사회에서 신뢰도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요도가 매우 크다.” ─키신저의 세력 균형 관점에서 러시아의 부상은 미중 갈등을 완화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중국과 러시아가 갈등을 벌여야 하는데 아직은 공동의 적(미국)이 있지 않나. 그런데 러-중이 미묘한 관계인 것은 맞다. 19세기부터 러시아가 중국과 네르친스크, 아이훈 조약 등을 맺으면서 극동 지역에서 영토를 넓혔다. 과거 중국 영토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면적이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비슷하다. 극동 지역에 사는 러시아 인구는 800만 명이지만, 중국은 동북 3성의 인구만 9000만 명에 이른다. 러시아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부담을 느낄 것이다.” ─키신저는 냉전 시기 조지 케넌의 대(對)소련 봉쇄 정책이 너무 긴 시간을 끌었고, 타협의 여지를 없앴다고 비판했다. 이는 중국을 경제·기술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최근 정책과 관련해 어떤 함의를 갖는가. “현재는 냉전 당시 미소 관계와 달리 미중이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결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때처럼 봉쇄 정책을 중국에 적용할 수 있을까. 바이든 행정부도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과 협력할 것은 하겠다는 것이다. 강대국들이 각만 세우면 양차 대전처럼 파국에 이를 수 있다. 생전에 키신저는 미중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사전에 막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김성훈 주유엔대표부 참사관△2002년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2007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공공정책학 석사(풀브라이트 장학생)△2003년 제37회 외무고시 합격△외교부 주미 대사관, 주수단 대사관, 국가안보실, 중동 2과장 등 근무△‘미국 길들이기’ ‘혼돈의 세계’ ‘피크 재팬’ ‘미국 외교의 대전략’ 등 번역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아람코, 네옴 프로젝트, 하마스, 가자지구 전쟁, 에듀케이션시티, 2030 리야드 엑스포….신간은 최근 국제뉴스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중동 이슈들을 현장감 있게 분석했다. 책에는 ‘새벽 어시장의 활어’처럼 살아 있는 정보와 이야기가 넘친다. 심각하고 진지한 이슈와 말랑말랑하고 재미있는 주제가 고르게 담겨 있다. 중동에서 새로운 사건과 변화가 생길 때마다 ‘참고서’로 활용하기에도 좋은 책이다.책에서는 중동의 오랜 갈등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패권 경쟁’을 분석할 때도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았다. 여전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가자지구 전쟁’도 비중 있게 다룬다. 인명을 경시하고, 대안 없는 무력 투쟁을 펼치는 하마스에 비판적이지만,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분노를 가진 아랍 사람들의 정서를 자세히 설명한다. 동시에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겪은 충격과 집요한 보복의 배경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했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수니파 아랍 왕정 산유국들이 신정 공화정 체제의 시아파 종주국 이란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녹여냈다.‘분쟁’보다 중동의 더 현실적인 고민인 ‘포스트 석유 시대’와 관련된 내용이 풍부하다는 것도 책의 매력 포인트.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4차 산업혁명 기술에 대한 파격적인 투자, 이집트가 전통과 문화의 도시 카이로를 대신할 신행정수도 건설에 나선 이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살아난 두바이 경제, 이스라엘의 첨단 과학기술 산업, 국부펀드를 통한 중동 산유국들의 영향력 키우기 전략, 사우디 왕세자의 ‘피라미드 만들기’로 여겨지는 네옴 프로젝트 등 한국 경제와 기업에 현실적으로 와 닿는 이야기가 담겼다.저자는 동아일보·채널A 카이로특파원과 국제부 차장을 지냈고, 카타르의 싱크탱크인 아랍조사정책연구원(Arab Center for Research and Policy Studies‧ACRPS)의 방문연구원으로도 활동했다. 한국 기자 중 유일하게 ‘사우디 관광개방’, ‘아람코의 4차 산업혁명 기술 연구개발(R&D)센터’, ‘사우디 미래투자이니셔티브포럼(일명 사막의 다보스 포럼)’ 등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또 ‘두바이 경제위기’, ‘카타르 단교 사태’, ‘중동의 코로나19 팬데믹’, ‘미국과 탈레반 간의 평화협상’ 같은 대형 이슈도 현장에서 취재했다.저자는 “중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게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글로벌 마인드’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같이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나라들이 모두 중동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이른바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나라들 가운데 중동에 관심이 없는 나라는 없다.저자는 단행본 ‘중동 라이벌리즘’과 ‘있는 그대로 카타르’를 펴냈고, 동아일보 디지털콘텐츠와 신동아에 ‘이세형의 더 가까이 중동’을 연재 중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주인공이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던 영화 ‘블랙팬서’가 구약성경과 이어져있다? 언뜻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이 책 저자의 주장이다. 마치 ‘다빈치코드’처럼 온갖 문화 요소를 종횡무진 잇는 미국 하버드대 영문학과 교수 출신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우선 영화 ‘블랙팬서’의 모티브가 된 흑인 인권운동 단체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은 ‘케브라 나가스트’라는 14세기 에티오피아 서사시의 영향을 받았다. 백인들의 서구 기독교 문명이 형성되기 전에 유대왕 다윗의 계보를 잇는 아프리카 기독교 문명이 존재했음을 흑인 운동가들이 주목한 것. 케브라 나가스트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경 유대 왕국을 방문한 에티오피아 여왕(시바)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관계를 맺고 아이(메넬리크)를 임신한다. 메넬리크는 훗날 예루살렘에서 모세의 언약궤를 훔쳐 어머니의 땅 에티오피아로 가져온다. 유대교의 핵심 상징인 언약궤의 권위를 끌어와 에티오피아의 문화 요소로 재창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입한 원형문화에 대한 존중과 부정의 상반된 행태가 동반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형문화의 정통성과 더불어 자신의 고유문화에 대한 독창성을 모두 획득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케브라 나가스트는 솔로몬 왕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면서도 솔로몬을 시바 여왕을 꼬드겨 성관계를 맺은 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4세기 고려 금속공예의 정수로 꼽히는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구(舍利具·사리를 보관하는 용기)’가 환수가 아닌 임시 대여로 국내에 들어온다. 다만, 사리구 안에 든 사리는 조계종으로의 기증이 결정됐다. 사리와 사리구의 일괄 환수를 추진하던 정부의 당초 방침에서 후퇴한 것으로, ‘반쪽짜리 환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보스턴미술관이 소장한 라마탑형 사리구를 일정 기간 대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이와 별개로 사리는 조계종에 기증하기로 미술관과 합의했다”고 6일 밝혔다. 고승(高僧) 등의 유골인 사리의 경우 불교에서 성물(聖物)로 여겨진다는 점을 감안해 미술관이 올해 부처님오신날(5월 15일) 이전에 조계종에 기증하기로 했다. 그러나 2009년부터 정부가 환수를 추진한 국보급 유물인 사리구는 임시 대여로 합의됐다. 미술관이 “사리구가 불법으로 유출됐다는 증거가 없는 한 환수에 동의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임시 대여 기간에 전시와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다. 앞서 2009년 미술관은 계속된 반환 요청에 사리만 반환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문화재청은 사리와 사리구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유물이기에 사리만 반환받을 수 없다는 방침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 방미를 계기로 김건희 여사가 보스턴미술관장을 만나 사리구 반환 논의 재개를 요청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후 조계종 주도로 미술관과의 반환 협상이 이뤄졌다. 문화재계에서는 사리구가 80여 년 만에 국내에서 공개되는 의미는 크지만, 향후 사리구 반환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리구 대신 사리만 가져가라는 미술관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인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사리구는 본래 양주 회암사나 개성 화장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됐다. 보스턴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미술관은 1939년 일본의 유명 골동품상인 야마나카 상회로부터 사리구를 구입했다. 문화재계에서는 사리구가 불법으로 밀반출된 증거가 발견되면 보스턴미술관으로부터 반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문정왕후 어보의 경우 6·25전쟁 때 미군 병사에 의해 약탈된 사실이 확인돼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 박물관으로부터 2017년 환수받았다. 문제는 사리구가 야마나카 상회의 손으로 들어간 경위를 밝히는 자료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 이에 따라 추후 관련 자료가 발견될 때까지 사리구 반환 협상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라마탑형 사리구는 14세기 금속공예품으로 당시 원나라의 강한 영향을 반영해 라마교의 탑 모양을 본떠 제작됐다. 사리구 안에는 팔각지붕 형태의 소형 사리구 5기가 들어 있다. 사리구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석가모니와 지공 스님(?∼1363), 나옹 스님(1320∼1376) 등의 사리 19과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4과다. 2013년경 사리구를 직접 조사한 주경미 충남대 강사는 “독특한 양식의 국보급 유물로 이런 양식의 고려 금속공예품은 다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한에 핵 위협을 노골화하는 가운데 딸 주애와 주요 현장을 순시하는 장면이 올해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애가 후계자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논란이 벌어진 데 이어 지난달 국가정보원은 “현재로선 주애가 유력한 후계자로 보인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남성 중심의 북한 사회 속성상 주애를 후계자로 판단하는 건 성급하다고 한 기존 분석을 사실상 수정한 겁니다.11살짜리 아이의 등장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기에 학계와 정부까지 나서 의미 분석에 여념이 없을까요. 북한의 수령제와 세습통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1990년대 중반 김정일이 주석직 승계를 3년간 미룬 것을 놓고 ‘북한 붕괴론’으로 잘못 해석한 것 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3대 세습통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보려면 김일성 집권기로 시계를 돌려봐야 합니다(정치학자 후안 린츠의 저서를 비롯한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세습제 단초 제공한 ‘갑산파 숙청’오래전 월남한 북한 출신 인사들의 공통된 증언 중 하나는 “196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도 그럭저럭 살만했다”는 겁니다. 이른바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가 확립되기 전이어서 사회적 다양성이 티끌이라도 남아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죠.하지만 1967년 갑산파 숙청으로 김일성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정파가 모조리 제거되면서 정치·사회적 다양성은 사라지고, 경제는 침체일로를 걷게 됩니다. 갑산파 숙청은 주체사상 태동으로 이어져 세습제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죠.1960년대 후반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의 다양성 말살은 역사해석에서도 확인됩니다. 1967년 조선로동당 제15차 전원회의 무렵 김일성이 조선시대 실학파에 대한 갑산파의 해석을 강하게 비판한 게 대표적입니다.당시 갑산파는 조선 실학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목민심서를 당 간부들의 필독서로 지정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정체되기 시작한 북한의 사회, 경제체제를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조선 성리학의 폐쇄성을 극복하려고 시도한 실학자들의 업적에 주목한 겁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갑산파가 사회주의 애국주의를 왜곡해 봉건 유교사상을 부활시켰다고 비판했죠.그런데 김일성 일파가 비판에 나선 진의는 갑산파가 실학자들의 업적을 김일성의 혁명전통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항일 무장투쟁의 빛나는 전통을 김일성만의 것으로 독점하기 위해 연안파 등 기타 사회주의 세력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운 김일성 일파는 실학자들의 업적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조선로동당이 줄곧 비판해온 조선성리학의 폐단을 개선하고자 한 실학자들의 노력마저 ‘반혁명’으로 몰아붙일 정도로 유일 지배체제의 독단성 내지 폐쇄성은 이미 1960년대부터 극에 달했던 셈입니다.술탄주의 국가로서 북한의 특성1960년대 후반 유일 지배체제로 변질된 북한은 술탄주의 국가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정치학자 후안 린츠는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통치자의 이데올로기 구속성과 독자적인 시민사회 영역의 존재 여부에 따라 ‘전체주의’(totalitarianism)와 ‘술탄주의’(sultanism)로 구분합니다. 즉, 술탄주의에서는 전체주의와 달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정치 지도자가 얽매이지 않으며(집권자의 이데올로기 조작 가능), 그의 강력한 단일적 지배로 인해 최소한의 시민사회 영역조차 존재할 수 없게 되죠. 린츠는 술탄주의 국가는 민주국가로 자발적인 체제전환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북한은 ▲건국 초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 레닌주의 및 스탈린주의를 유일 지배체제에 합당하도록 수정, 변형해 ‘주체사상’을 내놓은 점 ▲1967년 조선로동당 제15차 전원회의 이후 당 안팎에 독자적인 정치·사회영역이 말살된 점 등을 미뤄볼 때 술탄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북한 세습통치의 뼈대를 이루는 주체사상은 수령을 당과 국가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로 규정합니다. 학계에선 주체사상을 중국 마오쩌둥주의 혹은 소련 스탈린주의의 ‘북한판 변형’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이는 김일성이 1956년 8월 종파투쟁을 벌이며 개인숭배를 강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 스탈린 개인숭배가 결정적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됩니다.그런데 스탈린 사후에 열린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하자, 김일성은 일대 혼란에 빠지죠. 노동신문에 연일 스탈린의 동정을 보도하는 등 소련에서 개인독재의 정당성을 찾아온 김일성 일파로서는 일종의 ‘통치 모순’에 맞닥뜨린 겁니다. 1950년대만 해도 말끝마다 민족주체를 내세우는 지금의 북한과는 달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소련에 의존적인 행태를 보였었죠.결국 김일성은 종파투쟁을 계기로 갑산파 숙청을 거치며 유일 지배체제로 나아가게 됩니다. 소련의 탈(脫) 스탈린주의로 인해 수령 우위 당국가 체제를 유지하는데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죠. 정리하면 해방 직후 김일성과 조선로동당이 통치체제의 정당성을 스탈린주의에서 찾았으나, 유일 지배체제가 형성된 후에는 ‘변형된 스탈린주의’랄 수 있는 주체사상을 내세운 겁니다.술탄주의에서 통치자의 이데올로기 조작은 김정일 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김정일은 김일성과 16년간 북한을 공동 통치하며 주체사상의 설계와 실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김일성 사후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통치 질서가 흔들리자, 군대를 앞세운 ‘선군사상’을 내놓습니다. 이는 ‘주체사상’에 대한 보조 통치담론으로, 수령-당-인민대중의 3대축을 기반으로 한 주체사상에 어느 정도 수정을 가한 겁니다.김정일보다 승계기간이 훨씬 짧았던 김정은에 이르러서는 김정일이 키운 군부의 권력이 도리어 부담이 됐죠. 이에 ‘인민대중 제일주의’를 내걸고 당의 권한과 지도를 강화해 군부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이처럼 북한에서 수령과 그의 후계자는 주체사상에 대한 독점적 해석권을 갖고 있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새로운 통치담론을 내놓습니다. 김정은의 딸 주애가 성인이 돼 후계자로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또 다른 ‘주애 사상’이 나올 수 있단 얘깁니다.술탄주의의 또 다른 특성인 독자 시민사회 영역의 부재는 북한에서 해방 직후 사회주의 전환이 동구 유럽보다 빠른 속도로 이뤄진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북한의 경우 폴란드와 같은 무장투쟁 세력이나 조직화된 반공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6.25전쟁 이전에 지주, 종교인, 지식인 등이 대거 월남해 공산화가 큰 저항 없이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권력세습기 엘리트간 갈등 주목술탄주의 국가 북한에서도 권력 투쟁이 벌어집니다. 단, 다른 나라처럼 최고 권력에 대한 도전이 아닌 권력세습기 관료집단 간 충성경쟁이 이뤄집니다( 참고). 독재국가에서 권력승계는 기존 통치연합 내 엘리트 간 권력과 이권이 대규모로 재편되는 과정으로 이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집니다. 북한의 경우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 세습될 당시 군부에 속한 막대한 이권, 특히 와크(무역특권)를 놓고 장성택 세력과 군부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죠.시계를 김정일 생전인 2008년으로 돌려볼까요. 그해 8월 김정일은 뇌경색에 빠져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전에 군부에서 제기했으나 김정일에 의해 중단된 후계 논의가 재개되고, 이듬해 1월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됩니다.김정일은 자신이 죽고 나서 후계체제를 안착시킬 측근으로 매제인 장성택을 선택하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 선군체제로 위기를 돌파하면서 몸집이 커진 군부를 장성택을 앞세워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후 선군시대를 이끈 3인방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총참모장이 배제되고 리영호 총참모장, 김영철 총정치국장 등으로 대체됩니다. 이어 군부의 대표적인 외화벌이 업체인 승리무역합영회사를 장성택 휘하의 조선로동당 행정부로 편입합니다. 그 외에도 군부의 각종 이권사업을 빼앗죠.하지만 군부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습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수령에 오른 김정은은 크게 확대된 장성택 세력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지배연합 내 엘리트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끊임없이 유지해야하는 수령 독재체제의 기본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 거죠.이런 흐름을 군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군부와 당 조직지도부 인사들이 연합한 반(反) 장성택 세력이 2013년 12월 8일 조선로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자’로 낙인찍고 닷새 뒤 그를 처형합니다. 장성택 처형 이후 행정부는 조직지도부에 흡수되고, 군부의 무역사업 제한조치는 폐기됩니다.북한 세습통치의 미래는주애로 4대 권력승계가 이뤄진다면 장성택 숙청과 같은 엘리트 간 암투가 재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쳇바퀴 같은 북한의 권력세습은 언제까지 유지될까요.린츠에 따르면 민주주의로 체제전환이 가능하려면 지배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세력, 즉 독자적인 시민사회 영역이 필수입니다. 문제는 이런 세력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라 공산화 직전의 헝가리나 폴란드, 체코 등에서 볼 수 있듯 일정한 민주주의 경험 내지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그러나 식민지배 체제에서 곧바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한 북한의 경우 이 단계를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죠. 이처럼 식민지배 체제에서 곧장 근대화로 이행한 술탄주의 체제는 마치 조선왕조와 같이 자생적 체제전환이 사실상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일제의 침략으로 무너진 조선왕조처럼 불가항력의 외생변수가 작용하지 않는 이상 자생적으로 체제전환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얘깁니다.특히 다원주의가 확보되지 않는 술탄주의 체제에서는 정책실패에 대한 오류를 자체적으로 수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술탄(수령)에 대한 무오류성을 근거로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이죠. 이에 따라 지도자의 정책 방향에 대해 체제 내부에서 이의를 제기하기가 극도로 힘든 구조가 됩니다.실제로 1960년대 갑산파의 박금철, 이효순 등이 물질적 자극으로 노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과, 생산은 사회주의로 하되 관리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하는 경제정책을 제안했지만 갑산파 숙청과 더불어 폐기됩니다. 이는 1950, 60년대 성장일로를 걷던 북한경제가 점차 쇠퇴하는 분기점이 됐죠. 만약 갑산파의 경제개선 조치가 일정 부분 정책으로 수용됐다면 중공업 우선의 동원형 경제체제(스탈린식 경제체제)가 낳은 다양한 부작용(만성적인 ‘부족경제’ 등)이 어느 정도 완화됐을 겁니다.북한의 술탄주의 체제에서 경제 시스템은 시장화와 복고주의(反 시장화) 노선의 반복을 겪고 있습니다. 과도한 시장화가 자칫 사회주의 당국가 체제의 이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기간 생존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시장화’가 진행된 이후 북한 당국은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로 나아갔지만, 결국 2009년 화폐개혁으로 과도한 시장화에 제동을 걸었죠.특히 고난의 행군 당시 노동신문에는 차관 등 외부 지원에 의한 경제성장이나 시장 활성화 정책에 대해 ‘소극주의’ ‘패배주의’ ‘사대주의’로 비판하는 논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에 김정일은 1998년 ‘강계 정신’을 내세우며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복고적인 대안으로 회귀하는 한계를 보였습니다.결국 지배집단 안팎의 견제 세력이 말살된 술탄주의 북한 체제에서 자생적인 체제전환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심각한 체제위기를 맞아 어느 정도의 변화(예컨대 7.1 경제개선 조치)를 시도하더라도 ‘국가 안보’보다 ‘정권 안보’를 우선하는 체제에서는 보수적인 조치로 회귀하는 패턴이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북한의 체제 변화는 외생변수에 의해 촉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안보 위협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최근 북한의 행태를 더욱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참고 문헌]-Juan J. Linz & Alfred Stephan <Problems of Democratic Transition and Consolidation>(1996·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장달중 등 <현대 북한학 강의>(2013년·사회평론)-김일평 등 <북한체제의 수립과정>(1991년·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북한연구학회 <북한의 정치>(2006년·경인문화사)-북한연구학회 <김정은 시대의 정치와 외교>(2014년·한울아카데미)“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대전(大戰)에는 두 가지 유형의 장수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입한다면 천재적이지만 다혈질의 야전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야전 능력은 부족하지만 인내심으로 주변 장수들을 묶어낼 수 있는 조지 마셜 같은 부류다. 다이묘들이 맞서며 난세가 펼쳐진 15∼16세기 일본 전국시대(센코쿠시대)에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후자에 해당하지 않을까. 저자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일본 역사소설가로,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그린 대하소설을 쓰면서 탐구한 내용을 이 책에 압축적으로 정리했다. 전국시대에 관한 일본 역사학계의 최신 이론을 담아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당시 일본 열도에 미친 영향을 다각도로 풀어냈다. 예컨대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화승총은 다이묘들의 전투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특히 화승총 제작에 필요한 납을 태국의 송토 광산에서 수입해 오는 등 글로벌 공급망을 활용하기에 이른다. 화승총을 도입해 연전연승한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 이에야스는 지략이 떨어져 여러 전투에서 패했고, 영지를 몰수당하는 위기에 처한다. 그럼에도 이에야스가 최후 승자가 된 것은 일본에 정토(淨土)를 세우겠다는 비전을 세우고, 끊임없이 인내하며 신중히 처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적장 다케다 신겐의 전투법을 배우며 와신상담한 모습도 인상적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