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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국민의 수명이 빠르게 늘어난 나라도 드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 기준으로 1970년 한국인들의 기대수명은 62.3세에 불과했다. 현재 OECD 가입국 기준으로는 밑에서 다섯 번째로 수명이 짧은 국가였다. 반세기가 흐른 2020년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 한국은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수명이 긴 나라가 됐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신체적 건강이 눈에 띄게 나아진 것과 달리 마음의 질병은 심각하다. ▷기대수명에는 의료 접근성, 보건 수준, 영양 상태 등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이런 분야가 개선되면서 한국의 기대수명이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한국인들의 1인당 외래 진료 횟수는 OECD 평균의 2배를 넘고, 인구 1000명당 병원 병상 수도 한국이 OECD 국가 중 가장 많다. 안정된 건강보험 제도와 세계적 수준의 의료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이와 함께 건강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 높아졌다. 해마다 흡연율은 줄고, 술은 덜 마시는 추세다. ▷그래서 기대수명이 긴 국가들을 보면 일본, 노르웨이, 호주, 스위스 등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선진국들이 많다. 한국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으로 들린다. 한국이 머지않아 세계 최장수 국가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이제 한국이 건강한 선진사회가 됐다’고 말하기는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25.4명으로 OECD 국가 중 눈에 띄는 1위다. 다른 장수 국가들의 자살률이 10명대 초반인 것과 대비된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낮은 편이었지만 외환위기를 겪은 1990년대 말부터 급격히 높아졌다. 이제 고혈압으로 숨지는 사람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다. 자살에 이르게 된 동기를 살펴보니 10명 가운데 4명이 ‘정신적 문제’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분석됐다. ▷전문가들은 취업과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경제적 궁핍, 신체적 고통 등으로 마음이 병든 사람은 늘어나는데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높은 자살률의 주요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우울증을 가진 국민의 비율이 가장 높은 편이지만 치료율은 미국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부터 사라져야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마음속에 지옥을 안고 사는 국민이 많다면 장수 국가가 된들 마냥 축복만 할 일은 아닐 것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2014년 말 미국 포틀랜드 시내에서 교통국 직원 에릭 잉글랜드는 우버 차량을 부르려고 여러 차례 호출 버튼을 눌렀지만 결국 실패했다. 사실 그는 당국의 허가 없이 영업을 시작한 우버를 단속하기 위해 함정수사를 벌이던 중이었다. 그가 허탕을 친 이유는 나중에야 밝혀졌다. 우버 운영진은 미리 교통국 직원이나 경찰 등의 신원을 파악해 놨다가 이들이 호출하면 운행 가능 차량이 없는 것처럼 가짜 화면을 보여주는 그레이볼(greyball)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했던 것이다.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우리는 점점 해적이 돼 가고 있어.” “맞아. 법을 어기고 있는 중이지.” 우버 창업자 트래비스 캘러닉이 2013∼2017년 주고받은 이메일과 문자메시지에 등장하는 우버 임원들의 대화다. 영국 가디언이 입수한 이 자료들을 보면 우버는 각국 정부의 규제에 부딪힐 때 편법으로 피해 나가면서 성장했다. 수사를 피하려고 회사 컴퓨터들을 먹통으로 만드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는가 하면, “수사관들이 들이닥치면 일단 텅 빈 회의실로 안내하라”는 등 압수수색 대응 매뉴얼까지 만들었다. ▷정치권에 대한 로비도 빠질 수 없다. 캘러닉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베냐민 네타냐후 전 이스라엘 총리, 조지 오즈번 전 영국 재무장관 등과 접촉해 우버 진출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특히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경제장관 재직 당시 “내각에서 (우버를 위해) 비밀 거래를 중개해 줬다”고 우버 측에 말하는 등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야당에서 “국가적 스캔들”이라며 조사를 요구하고 있어 마크롱의 처지가 난감하게 됐다. ▷캘러닉에 대해 지인들은 “뭔가에 한번 꽂히면 무조건 얻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평가한다. 그렇다 보니 합법과 불법을 오가기 일쑤였다. 그는 1998년 대학을 중퇴하고 음악파일 공유 업체를 만들었다가 저작권 침해로 2500억 달러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이후 대용량 파일 전송 시스템 업체를 운영할 때에는 직원들이 내야 할 세금을 빼돌려 회사에 재투자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한다.” 우버가 승승장구하던 2016년 3월 캘러닉은 인터뷰에서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불과 1년여 뒤 그는 다른 회사의 기술을 훔쳐 제소됐다는 등의 이유로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쫓겨났다. 우버의 문제점을 파헤친 책 ‘슈퍼펌프드’는 “성공적인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규정이나 원칙을 어길 때조차 플라톤의 철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썼다. 하지만 그것도 용인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 선을 넘어서면 추락을 피할 수 없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시행령을 통해 행정안전부와 법무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을 놓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행안부는 시행령을 고쳐 이른바 ‘경찰국’을 만들고 경찰청장에 대한 지휘규칙을 신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법무부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개정해 공직 후보자 인사 검증을 담당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을 설치했다. 정부는 ‘정부조직법 등 법률에 근거한 조치’라고 주장하지만 ‘법에서 위임한 범위를 벗어난 시행령 개정은 위법’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헌법 전문가인 이석연 전 법제처장을 만나 시행령 논란 등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尹, 법치 후퇴에 지지율 하락” ―행안부가 시행령을 통해 경찰을 통제하는 것이 법적으로 합당한가. “행안부가 제시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정부조직법에 ‘치안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행정안전부 장관 소속으로 경찰청을 둔다’는 조항, ‘장관이 소속청에 대하여는 중요 정책수립에 관하여 그 청의 장을 직접 지휘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이를 근거로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으로 이른바 ‘경찰국’을 신설하고 경찰청 관리 규칙을 제정한다는 것이다. 법무부가 검찰을 통제하는 것과 비슷한 구조여서 행안부는 ‘그러니까 우리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검찰, 경찰에 대한 통제 방식의 차이점이 뭔가. “정부조직법에 ‘법무부 장관은 검찰, 행형 등 사무를 관장한다’고 명시돼 있다. 당연히 검찰국을 둘 수 있다. 반면 법상 행안부 장관이 관장하는 사무 중에 경찰 또는 치안에 관한 것이 일절 없다. 또 정부조직법에 ‘경찰청의 조직이나 직무 등에 관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고 돼 있다. 그래서 행안부에 경찰을 통제하기 위한 조직을 둔다는 것은 법률을 고치지 않는 한 명백한 법체계 위반으로 헌법 위반이다. 행안부가 경찰을 통제하고 싶다면 야당을 설득하고 여론의 지지를 얻어서 치안을 행안부 장관의 업무 중 하나로 넣도록 법을 고쳐야 한다. 이는 경찰을 통제해야 할 당위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행안부가 경찰청장 지휘규칙을 만드는 것은 왜 문제가 되나. “정부조직법 전체를 체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가령 기획재정부 장관 소속인 조달청 국세청 등에 대해선 정부조직법에 별도의 조항이 없으므로 장관이 규칙을 만들어 지휘할 수 있다. 그런데 법에는 검찰청과 경찰청에 대해서만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고 돼 있다. 다른 부처 소속의 청들과는 다르다. 따라서 행안부가 정부조직법을 근거로 규칙을 만들어 경찰청장을 직접 지휘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행안부가 경찰을 맡으면 외압을 막아줄 수 있겠나.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격이다. 역사적으로 검찰보다도 더 권력의 첨병 역할을 한 것이 경찰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경찰의 독립성, 중립성을 보장할까 하는 것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법무부 검찰국, 행안부 경찰국을 마치 양 날개처럼 쓰겠다는 것이다.” ―법무부에 인사정보관리단을 둔 것은 어떤가. “새 정부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없앴으면 인사검증 기능이 인사혁신처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적이다. 인사혁신처가 검찰의 협조는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정부조직법 어디에 봐도 법무부에 공무원 인사 관련 권한은 없고 법무부에 갈 성질도 아니다. 권한이 없는데 빼앗아 온 것이다. 또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인사에 대해서도 법무부가 검증하겠다는 것은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 대통령이 묵인한 것이다. 하지 말라고 했으면 안 했을 것이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이런 사안들은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장관 탄핵 사유가 될 수도 있다.” ―장관 탄핵까지 갈 수 있는 사안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이런 문제가 쌓이다 보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나. 대통령과 장관을 포함해 고위공직자가 직무 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하면 탄핵 사유가 되는 것인데, 법률의 취지를 벗어나서 시행령으로 통제를 한다는 것은 명백히 법률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흔들린다. 정권 교체를 바라고 박수를 쳤던 많은 국민들도 지지를 철회하고 있는 상황이다.” “野, 반성 없이 편 가르기 입법” ―윤 대통령은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해왔는데 현실은 어떤가. “윤 대통령은 그동안 헌법정신, 법치주의, 상식을 강조해왔고 나는 이를 지지했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세 가지 다 실망을 하고 있다. 벌써부터 이런 원칙들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헌법정신이 뭔지는 대통령이 한 번도 제대로 얘기한 적이 없고, 법치주의도 시행령 논란 측면에서는 후퇴하고 있다. 상식이라는 건 국민의 건전한 판단이고 여론이다. 그걸 존중해야 하는데 밀어붙인다.” ―어떤 점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하나. “대표적인 것이 인사다. 국민 여론이 안 된다고 하면 대통령이 ‘이 정도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국민 눈높이는 더 엄격했다. 내정 철회하고 더 좋은 사람을 찾겠다’ 이렇게 하면 지지율이 5%는 오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고 국정 동력이 상실된다는 식이라면 국민을 상대로 전쟁하자는 것이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의 성 상납 의혹도 아직 사실관계가 규명이 안 됐으니까 당 윤리위원회의 결정이 미뤄져야 한다. 토사구팽하는 것처럼 밀어내는 식으로 간다면 젊은층에 대해 악수를 두는 것을 넘어 당과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질까 염려된다. 이 대표도 당 대표로서 좀 더 무게감 있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에서 검찰 출신이 지나치게 중용된다는 지적도 있다. “법조인 출신이 개인적 능력은 뛰어나더라도 정책을 조정하는 능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 정책 수행에 있어서 판단력도 떨어진다. 법조인들은 ‘내가 하는 것이 법치이고 적법 절차’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일사천리로 밀고 나가면 오히려 독선이 된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다른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 ―이른바 ‘검수완박’법 위헌 논란에 대한 견해를 밝혀 달라. “헌법상 영장 신청권은 검사의 전속적 권한이다. 영장 신청권이 없는 수사권은 공허한 것이다. 그래서 검사의 영장 신청권을 무력하게 하는 수사권 독립이나 조정은 헌법 위반이라고 본다. 나는 경찰이 수사권을 확대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그 전제는 개헌이다. 일각에서는 지금도 영장 신청권 자체는 검사에게 주기 때문에 위헌이 아니라고 하는데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개헌을 해서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헌법에 영장 신청, 기타 수사에 관해서는 법률에서 정한다는 식으로 하면 된다.” ―이 외에도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한 법 중에 위헌 소지의 법이 있나. “대표적으로 임대차 3법은 명백한 위헌이고 많은 사람들이 정말 고통받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법을 안 고치고 있다. 야당이 제대로 견제를 해야 여당인 집권당이 정신을 차린다. 그래서 민주당이 제대로 가기를 바라는데, 선거에 왜 졌는지에 대해 전혀 반성이 없다. 부동산 정책 실패로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졌으면 ‘우리가 이런 점은 반성하고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책을 하자’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없고 아직도 국민 편 가르기 식으로 법안을 만들고 있다.” “바른말은 반대처럼 들려” ―현 정부의 정책을 헌법적 측면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나. “법인세를 낮추고 종합부동산세를 완화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도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지금 지나치게 경제적 강자 쪽으로 많이 기운다는 인상을 주는데 헌법에 경제민주화 규정도 있으니까 균형을 맞춰야 한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인상률이 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했는데 이런 분야에서는 균형을 맞춰서 정책이 같이 가야 한다.” ―법치와 관련해 윤 대통령에게 조언할 말이 있다면…. “정언약반(正言若反)이라는 말이 있다. 바른말은 반대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뜻이다. 또 ‘자치통감’에는 군인즉신직(君仁則臣直)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직언을 하는 그룹이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기’를 보면 처음에는 터럭만큼의 잘못이 나중에는 천 리의 차이가 나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다는 구절이 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이석연 전 법제처장은…행정고시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89∼1994년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근무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공동대표 등 시민사회와 법조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고, 2008∼2010년에는 법제처장을 지냈다. 현재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출근길에 취재진과 다양한 문답을 주고받는 윤석열 대통령이 유독 말을 아끼는 분야가 있다. 국민의힘 당내 문제에 관한 질문이 나오면 “대통령은 국가의 대통령이지 무슨 당의 수장도 아니고” “당무에 대해선 대통령이 언급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입을 닫는다. 당내에서 벌어지는 ‘윤심(尹心)’ 논란을 피하고 싶다는 취지일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여당에서는 ‘당정대(여당·정부·대통령실)’라는 명칭에서 ‘대’를 빼달라고 부탁하고 나섰다. ▷지난달 30일 국민의힘 출입 기자단에 당에서 보낸 단체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올바른 용어는 ‘당정대’가 아닌 ‘당정’ 협의회이므로 협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에는 총리실에서 한덕수 총리의 일정을 소개하면서 “‘당정’으로 사용해 주시기 바란다(당정대X)”라고 썼다. 한 총리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 등이 참석하는 6일 회의의 명칭을 놓고 당과 정부가 언론에 잇달아 ‘협조 요청’을 한 것이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당정협의’는 1963년 12월 민주공화당 김종필 당의장이 박정희 대통령 겸 총재에게 건의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당정협조에 관한 처리지침’이라는 국무총리 훈령을 통해 당정협의가 공식화됐다. 현재는 ‘당정협의업무 운영규정’이라는 총리령에 따라 행정 각부의 장이 법률안이나 예산안 등과 관련해 여당과 협의를 하고 있다. 지금도 특정 현안을 놓고 정부 부처와 여당이 만나는 회의는 당정협의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당정청’ 또는 ‘당정대’가 갑자기 나온 표현은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하던 2001년경부터 ‘당정청’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그 전까지는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하면서 청와대 정부 여당이 사실상 한 몸이었지만, 여당의 내분으로 당정청이 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는 ‘11인회’, 이명박 정부에서는 ‘9인 모임’ 등 당정청 수뇌부 모임이 진행됐고 문재인 정부까지 당정청 회의가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지난달 안보점검 회의를 열면서 ‘당정대 협의회’라고 불렀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대통령실 이름을 새로 짓겠다면서 위원회를 만들고 공모를 진행했다. 하지만 5개의 후보를 정해 온라인 선호도를 조사하고 심의를 진행한 끝에 대통령실이라는 이름을 그냥 쓰기로 했다. 당과 정부 간의 회의 명칭도 마찬가지다. 인위적으로 이름을 정할 것이 아니라 참석자와 의제의 성격 등에 따라 ‘당정협의’든, ‘당정대 회의’든 자연스럽게 쓰면 된다. 대통령실이 당과 정부에 간섭하거나 개입하는 것을 줄이면 명칭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할 일도 없을 것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마음만 먹으면 즉시 홍콩으로 진격해 하루 만에 점령할 수 있다.”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를 만난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이런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홍콩 반환을 꺼렸지만 덩샤오핑은 군사력 동원까지 언급하며 강경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2년 뒤 양국은 홍콩반환협정을 체결했다. 1997년 7월 반환 이후 50년간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유지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하지만 25년이 흐른 지금 홍콩은 반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도시로 변했다. ▷7월 1일 홍콩 반환 25주년을 앞두고 중국과 홍콩 정부는 축하 분위기 띄우기에 한창이다. 홍콩 시내 곳곳에는 중국 오성홍기와 홍콩특별행정구 깃발이 내걸렸고, 도심 공원들에서는 꽃 축제가 열리고 있다. TV에서는 중국과 홍콩 정부가 힘을 합쳐 사스(SARS) 등 위기를 이겨냈다는 애국주의 드라마가 연일 방영되고 있다. 25주년 기념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문이 될 것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반환 이전의 홍콩은 아시아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국제 금융 허브이자 쇼핑과 관광의 중심지였고,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자유로운 도시였다. 하지만 중국의 일부가 된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중국식 권위주의 체제가 도입되면서 시민의 권리와 자유는 위축돼 갔다. ‘우산혁명’을 비롯한 시민들의 저항에 힘입어 제한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유지됐지만, 2020년 홍콩보안법 제정 이후 남아 있던 빛마저 사라졌다. ▷현재 홍콩 입법회에는 반중파 의원이 한 명도 없다. 당국의 심사를 거치고 충성맹세를 해야 출마가 가능하도록 선거법이 바뀌면서 민주 진영 출신은 씨가 마른 것이다. 지난달 90세의 조지프 젠 추기경을 외세결탁 혐의로 체포하는 등 홍콩보안법을 적용해 야권 인사들이 줄줄이 갇혔고, 핑궈일보 등 반중 성향 언론은 문을 닫았다. 지난해 1월 이후 12만 명이 넘는 홍콩인들이 영국으로 출국하는 등 탈출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시 주석과 중국 지도부가 홍콩이 상징하는 바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홍콩의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의 평가다. 시 주석은 장기 집권을 결정할 10월 당 대회를 앞두고 부패 척결을 외치며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이런 시점에 시 주석으로서는 민주화의 불씨가 살아나지 못하도록 홍콩을 확실히 장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홍콩의 명물이던 해상 식당 ‘점보’가 최근 침몰한 것을 놓고도 “홍콩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암울한 시기를 겪고 있는 홍콩인들에게 더 많은 응원이 필요해 보인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 설치,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폭탄 등 민감한 현안들을 행정명령(executive order)으로 밀어붙였다. 행정명령은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령(시행령)과 비슷한데, 트럼프는 재임 기간 중 1년에 55건꼴로 행정명령을 쏟아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한 해 평균 35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37건의 행정명령을 내린 것에 비해 훨씬 많다. 이는 트럼프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벌어진 일만은 아니다. 하원을 야당 민주당이 장악한 상황에서 본인이 원하는 입법이 여의치 않자 행정명령을 남발한 것이다. 일부 이슬람 국가 출신 시민들의 입국을 제한하는 반(反)이민 정책이 대표적 사례다. 민주당이 이민법 개정에 반대하자 트럼프는 수차례 행정명령을 통해 강행했다. 이에 민주당에서는 입국 제한과 관련해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까지 발의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특히 국회가 여소야대일 때 행정부와 입법부가 충돌할 지점이 많아진다. 국회가 입법권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정부를 견제하려 하면 정부는 시행령 제정으로 맞선다. 법의 체계상으로는 시행령이 법률의 하위 개념이지만 실질적 효력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데다 제정 절차가 간단해 더 신속하게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도 윤석열 정부 들어 시행령을 둘러싼 정부와 국회 간의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정부가 시행령을 고쳐 법무부 산하에 인사정보관리단을 설치한 것을 놓고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법에서 위임한 범위를 벗어났다”며 강력 비판하고 있다. 경찰을 행정안전부가 통제하는 방안도 시행령을 통해 추진한다면 야당의 반발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에 민주당에서는 국회가 행정부에 시행령의 수정·변경을 요청하면 행정부는 그 결과를 국회에 보고하도록 하는 법안을 내놨다. 시행령까지 국회가 좌지우지하겠다는 취지인데,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수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시행령에 대한 심사권은 대법원에 있다’는 헌법 조항에 위배된다는 주장도 있다. 국회가 세부적인 내용들까지 모두 법률에 넣음으로써 아예 시행령을 만들 여지를 주지 않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행정적인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까지 일일이 법률에 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법원 판결로 시행령을 무효화시킬 수도 있지만 ‘명령·규칙 또는 처분이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지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에만 심사하도록 돼 있다. 국회와 법원을 통한 견제에 한계가 있는 이상 정부 스스로 위법 소지가 있는 시행령을 걸러내야 한다. 헌법과 법률에서는 그 핵심 역할을 국무회의에 맡기고 있지만 지금까지 국무회의는 사실상 통과의례에 그쳤다. 장관들이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의중에 반하는 의견을 내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면 굳이 매주 모여 회의를 할 필요가 있나. 국무회의에서 원칙대로 ‘심의’를 해서 시행령안이 부결되는 사례가 종종 나와야 한다. 정부가 비판에 귀를 닫은 채 무리하게 시행령을 제정하면 두고두고 논란의 불씨가 될 수밖에 없다. 소모적인 정쟁이 이어지고, 시행령의 적용 대상이 된 사람들은 효력을 놓고 소송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이를 모를 리 없음에도 눈을 감는 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다. ‘법 위의 시행령’이 낳은 부작용은 훗날 여론 악화, 국정 동력 약화라는 부메랑으로 정부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3월 초 러시아의 보스토크 남극 기지에서 잰 기온이 평년보다 15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을 때만 해도 과학자들은 “측정이 잘못됐을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북극의 기온도 평년에 비해 3도가량 올라갔다는 조사결과가 나오더니 5월에는 인도 델리의 최고기온이 49도, 파키스탄 자코바바드는 51도를 찍었다. 이제 불볕더위는 서유럽과 북미 등으로 번졌다. “불타는 지구”(영국 가디언)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만큼 지구촌이 펄펄 끓고 있다. ▷록 음악 축제 ‘헬페스트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프랑스 서부 낭트의 광장에선 18일 곳곳에서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공연장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줄이 아니라 몇 개밖에 없는 그늘 지대를 차지하려는 인파였다. 이날 낭트의 최고기온이 40도를 넘었고, 프랑스 남서부에선 최고 43.4도까지 올라갔다. 1947년 이후 가장 일찍 찾아온 폭염이었다. 40도가 넘는 더위가 덮친 스페인에서는 대형 산불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고, 독일과 스위스 등지에서도 연일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미국 기상당국은 지난주 미국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하는 광범위한 지역이 폭염 영향권에 있다고 밝혔다. 고기압이 한 지역에 정체돼 뜨거운 공기가 갇히면서 기온이 급상승하는 열돔(heat dome) 현상 때문이다. 열돔 주변의 대기가 불안정해지면서 폭우, 토네이도 등 기상이변이 겹치고 있어 주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번 주에는 더위가 더 심해진다. 북부 평원 지역에 머물던 열돔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중부와 동부 일부 지역의 기온이 40도 가까이 오르는 가마솥더위가 예고됐다. ▷폭염은 동물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뉴질랜드에서는 영양실조로 숨진 펭귄 수백 마리의 사체가 떠밀려 왔다. 주변 해역의 수온이 올라감에 따라 펭귄의 먹이인 크릴, 멸치 등이 자취를 감추면서 벌어진 일이다. 스페인 남부에서는 칼새가 둥지를 튼 고층 건물 틈이나 지붕이 너무 뜨거워져 어린 칼새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미국 캔자스주에서는 2000여 마리의 소가 고온으로 폐사했다. ▷더 큰 문제는 폭염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영국 임피리얼칼리지런던의 기후전문가 프리데리케 오토가 “기후 변화는 폭염의 게임체인저”라고 지적한 것처럼 기온 상승을 막으려면 온실가스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하는데, 2019년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은 1990년 대비 54%나 늘었다. “지금의 더위는 미래를 미리 맛보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세계기상기구(WMO)의 암울한 경고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호주인들은 2019년 말∼2020년 초를 ‘검은 여름’이라고 부른다. 호주 전역을 휩쓴 대형 산불로 짙은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 면적의 400배에 해당하는 산림이 불탔고, 호주인들에게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산불이 급속도로 번지던 시점에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비밀리에 가족들과 함께 하와이로 휴가를 떠나버렸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 그는 두고두고 기후변화와 민생에 무관심한 총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21일 실시된 호주 총선을 앞두고 모리슨 총리가 이끄는 보수 성향의 자유국민연합은 중국과 안보에 캠페인의 초점을 맞췄다. 모리슨 총리는 야당 노동당의 앤서니 앨버니즈 대표를 ‘중국의 꼭두각시’라고 비판하며 색깔론을 제기했다. 한 보수단체는 트럭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을 걸고 다니며 ‘중국은 노동당을 원한다’고 선전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군사·경제적으로 강경한 반중 노선을 걸었던 모리슨 정부의 정책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호주 ABC방송이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가장 큰 관심사로 기후변화(29%)를 꼽았고 이어 생계비 문제(13%) 등 순이었다. 국방·안보라고 답한 국민은 4%에 불과했다. 기후변화 문제는 호주인들에게 미래가 아닌 현실이었고, 치솟는 물가와 경제적 어려움이 주 관심사였다는 얘기다. 결국 온실가스 43% 감축 등을 내세운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앨버니즈 대표가 새 총리로 내정됐다. 2013년 이후 8년여 만에 이뤄진 정권 교체다. ▷호주 언론들은 이번 총선 결과를 ‘다문화사회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788년 영국인들이 호주에 정착한 이후 줄곧 영국계가 호주 사회의 주류였고, 역대 30명의 총리 역시 모두 영국계였다. 하지만 호주는 이제 인구의 49%가 해외에서 태어났거나 부모 중 한 명이라도 해외 출신인 다문화사회가 됐다. 이런 변화 속에서 이탈리아계인 앨버니즈 대표가 121년 만에 첫 비영국계 총리에 오르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모리슨 총리가 사회 통합을 외면하고 우경화 정책을 고집한 것이 결정적 패인이라고 분석했다. 스스로 “나는 불도저 같은 측면이 있다”고 말하는 모리슨 총리의 권위적 통치 스타일도 유권자들의 반감을 샀다. 반면 앨버니즈 대표는 “혁명이 아닌 개선”을 외치며 안정적 변화를 원하는 표심에 호응했다. 빈민촌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역경을 극복하며 정치인으로 성장한 그의 인간 스토리도 승리에 한몫했다. 민심을 이기는 정치는 없다는 사실을 호주 총선이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안녕하세요”라며 주문을 받는 직원 대신 ‘Self Order’라고 쓰인 키오스크가 서 있는 식당들. 노인들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위축된다. 글씨도 작은 화면을 더듬더듬 누르다 보면 실수하기 일쑤다.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소셜미디어에는 “엄마가 키오스크 사용할 줄 몰라서 한 시간 만에 주문했다는 얘기를 듣고 울었다” “아빠가 햄버거 좋아하시는데 키오스크로 바뀐 뒤 한 번도 못 드셨다”는 글이 올라온다. ▷식당이나 마트, 영화관, 병원, 관공서까지 키오스크가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키오스크는 원래 음료나 신문을 파는 간이매점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정보통신에서는 터치스크린 방식의 무인단말기를 뜻하는 ‘일렉트로닉(Electronic) 키오스크’나 ‘디지털(Digital) 키오스크’를 줄여서 키오스크로 부른다. 특히 요식업계에 도입된 키오스크 숫자는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에 비해 지난해에 4배가량 늘었다. 업주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디지털재단의 설문조사 결과 서울에 거주하는 55세 이상 시민 가운데 키오스크를 이용해 봤다는 응답자는 절반이 되지 않았다. 사용하지 않는 이유로는 ‘사용 방법을 모르거나 어려워서’라는 답이 약 3분의 1로 가장 많았고, ‘뒷사람 눈치가 보여서’(18%)라는 응답도 상당했다. 노인이 직원이나 다른 손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것도 모르느냐’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대해서 포기했다는 얘기도 종종 들린다. 이러니 키오스크에 대한 노인들의 공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고령층에게는 프로그램이나 앱을 설치하는 것부터 인터넷을 연결하고 쇼핑을 하는 것까지, 디지털 문화 전반이 낯설고 어렵다. 고령층의 디지털 사용 능력은 전체 평균의 3분의 2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연령에 따른 디지털 디바이드 현상이다. 젊은이들이 인터넷으로 손쉽게 출력하는 주민등록등·초본을 떼기 위해 고령층은 주민센터를 방문해야 하고, 아파트 청약도 대부분 인터넷으로 이뤄져 난감하다. 고령층이 많은 지역에서 한 은행이 유인 지점을 폐쇄한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반대 시위를 여는 일까지 벌어졌다. ▷요즘 중시되는 웰에이징(well-aging)의 주요 요소로 건강, 직업 등과 함께 디지털 능력이 꼽힌다. 디지털과 현실이 융합돼 가는 세상에서 노인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정부와 시민단체의 적극적인 교육과 함께 세대 간의 공존을 위한 젊은층의 노력이 필요하다. 키오스크 앞에서 진땀을 흘리는 노인들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작은 호의가 그 첫걸음이 될 수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마크 에스퍼 전 미국 국방장관은 “예스퍼(Yes와 Esper의 합성어)”라고 불릴 정도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충직했다. 하지만 인종차별 항의 시위 당시 연방군을 투입하려 했던 트럼프에 맞서면서 미운털이 박혔고, 결국 옷을 벗었다. 그는 최근 출간한 회고록 ‘성스러운 맹세’에서 트럼프에 대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 ‘분노의 포로’라고 혹평했다. 퇴임 이후 회고록을 통해 트럼프의 등에 비수를 꽂은 전직 참모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에스퍼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미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진행되던 2020년 트럼프는 참모들에게 여러 차례 주한미군 철수 필요성을 언급했다. 북핵 위기가 고조됐던 2018년에는 주한미군 가족 전원 철수를 결정했다가 막판에 번복했다. 트럼프는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을 미사일로 공격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검토했다. 에스퍼는 “군사력 사용에 대한 트럼프의 생각은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했다”고 썼다. 다른 국가의 안보를 뒤흔들 사안을 이처럼 가볍게 여기는 미국 대통령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새삼 오싹해진다. ▷트럼프에게 가장 골치 아픈 회고록을 쓴 사람은 한때 ‘트럼프의 책사’로 불렸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다. 그는 트럼프가 2019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내가 반드시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썼다. 트럼프의 겉과 속이 다르다는 얘기다. 또 트럼프는 영국이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무식했다는 사실 등도 전했다. 훗날 트럼프는 “코로나가 볼턴을 데려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분노했다고 한다. ▷이들 외에도 스테퍼니 그리셤 전 백악관 대변인, 클리프 심스 전 백악관 보좌관, 오마로사 매니골트 뉴먼 전 백악관 대외협력국장,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 등이 줄줄이 회고록을 냈다. 트럼프의 경박한 성품, 사람을 경시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그리셤은 트럼프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그리셤과의 잠자리는 어떤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고 폭로했다. 트럼프가 대통령 전용 태닝 침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원을 해고한 적도 있다고 뉴먼은 전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4년 동안 장관을 14명 바꿨고, 백악관 핵심 참모의 92%를 교체했다. 첫 임기에 장관을 3명만 바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과 비교된다. 충성심이 의심되는 참모는 가차 없이 경질하는 트럼프의 인사 스타일이 반영된 결과다. 코미 전 국장은 회고록에 “트럼프에게 충성을 거부하자 해임됐다”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지도자를 끝까지 따를 참모는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트럼프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논란이 마무리되고 있다. 국회에서 오늘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표결해 통과시키고, 이후 국무회의에서 검찰청법 개정안과 함께 의결하면 입법 과정은 일단락된다. 그동안 검수완박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검찰이 갖고 있던 6대 범죄 수사권 중에서도 특히 공직자·선거 범죄 수사권을 폐지하는 것을 놓고 격렬한 비판을 쏟아냈다. 국민의힘은 “권력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수사 자체를 막아버리겠다는 의도”라며 비난했고, 검찰에서는 “정치적 야합의 산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거범죄 수사는 그동안 검찰이 중추적 역할을 해왔고 이를 대체할 기관도 마땅치 않기 때문에 검수완박에 따른 수사력 약화를 걱정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 그런데 공직자 범죄는 사정이 다르다. 이미 고위 공직자들의 범죄를 전담 수사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국무총리, 장차관, 국회의원,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을 비롯한 3급 이상 고위 공무원들이 저지른 직권남용, 직무유기, 정치자금 부정수수 등 범죄가 공수처의 수사 대상이다. 대부분의 ‘권력형 비리’에 대해 공수처가 수사할 권한이 있는 것이다. 5급 이하 공무원은 경찰이 수사하도록 돼 있어서 원칙적으로는 검찰이 수사할 수 있는 공직자 범죄는 4급 공무원으로 제한돼 있었다. 공수처가 탄생한 지난해 1월부터 공직자 범죄 수사의 주무 기관은 검찰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검찰이 공직자 범죄를 수사하지 못하게 되면 큰 공백이 생긴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동안 공수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초 공수처 설립의 명분은 성역 없는 권력 수사, 검찰권의 분산과 견제였다. 하지만 출범 이후 1년 4개월 동안 공수처가 보여준 모습은 ‘살아있는 권력’ 수사와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의 성과는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뇌물수수 의혹 사건 기소,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특채 의혹 사건 송치밖에 없다. 공수처가 전력을 쏟아붓다시피 했던 ‘고발 사주’ 사건도 아직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검사가 연루된 사건들을 공수처가 수사함으로써 검찰 견제라는 측면에서는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검수완박 없이 윤석열 정부에서 오히려 검찰권이 강화됐다면 공수처의 이런 역할에 더 무게가 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검수완박이 현실화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검찰의 직접수사권은 단계적으로 축소돼 내년부터는 부패·경제 범죄에 대한 수사만 가능하고,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이 설립되면 이마저 폐지된다. 수사권이 없는 검찰을 견제하기 위해 연 2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가면서 공수처를 존치해야 하나. 더욱이 공직자의 직급과 범죄의 종류에 따라 검찰, 공수처, 경찰로 나눠서 수사를 하는 체계는 복잡하게 얽힌 비리 사건을 수사하는 데 효율적이지 않다. 어떤 사건을 어디서 수사할지를 놓고 혼선이 빚어지면서 중복 수사 또는 수사 공백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검찰의 힘이 너무 세다는 이유에서 분리해 놨던 것인데, 검찰 수사권이 폐지된 뒤에도 이런 시스템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찾기 어렵다. 공수처의 존재 이유는 검수완박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중수청 설립을 논의할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가 출범하면 공수처를 중수청에 통합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돼야 할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경찰 단계에서 끝내야 합니다.” 한 중소규모 로펌이 홈페이지 첫 화면에 내건 문구다. 로펌들이 성공 사례를 홍보하는 글에서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 상대방의 증거를 적극 반박했다” “경찰 단계에서 수사기관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며 논증을 펼쳐 나갔다” 같은 내용이 종종 눈에 띈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부쩍 커진 경찰의 권한에 맞춰 변호사업계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 것. 이렇다 보니 경찰 출신을 찾는 로펌들이 많아졌고, 전직 경찰관들의 몸값도 올라가고 있다. ▷올해 들어 3월까지 로펌에 채용된 전직 경찰은 총 16명이다. 김앤장, 태평양, 세종 같은 대형 로펌들도 전직 경찰 영입에 동참했다. 로펌에 취업한 전직 경찰이 2020년 5명에서 지난해에는 48명으로 확 늘었는데, 지금 추세대로라면 올해는 더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 한 중견 변호사는 “로펌에 사건을 문의할 때 ‘경찰과 연락이 닿을 만한 변호사가 있느냐’고 묻는 의뢰인들이 제법 있다”고 전했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 경찰 출신들의 전관예우를 활용하는 ‘전경(前警)예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1월 이뤄진 검경 수사권 조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이전까지는 경찰이 수사를 하더라도 어떻게 처분할지는 검찰이 결정했다. 그래서 경찰 단계에서는 변호사를 쓰지 않고 검찰로 넘어갔을 때 선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경찰은 ‘수사종결권’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 경찰이 수사한 뒤 불송치(혐의 없음) 결정을 하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사건은 그대로 끝난다. 경찰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찰 출신들이 활약할 공간이 대폭 넓어진 셈이다. ▷로펌에 취업하는 전직 경찰들의 직급은 다양하지만 보통 총경, 경정급을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일선 경찰서의 서장, 과장에 해당하는데, 법률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은 물론 실무 경험과 인맥도 풍부하다. 또 일부 로펌에선 변호사 자격이 없는 고위직 출신 경찰을 고문으로, 초급 간부 출신을 전문위원이나 위원으로 영입하고 있다. 이들이 직접 변호를 맡을 수는 없지만 경력을 활용해 간접적으로라도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기를 바랄 것이다. ▷앞으로 ‘검수완박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일반 사건에서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제한되는 등 경찰의 권한은 더 커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전관예우의 주무대가 검찰에서 경찰로 옮겨가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 경찰 출신 변호사와 현직 경찰관의 사적 접촉 시 사전 신고 의무를 강화하는 등의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전경예우가 현장에서 뿌리를 내리기 전에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학계에는 “교수 집 강아지나 고양이도 논문 저자로 등재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누구를 저자로 올릴지는 전적으로 지도교수에게 달렸다는 얘기다. 그렇다 보니 논문에 적힌 저자가 적절한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고등학생이 저자로 이름을 올린 논문들을 놓고는 ‘이 학생이 정말 연구에 기여한 것이 맞느냐’는 의문이 많았다. 실제 교육부가 조사해 보니 저자 자격이 없는 미성년자들이 논문에 등재된 경우가 다수 적발됐다. ▷교육부가 2007∼2018년 발표된 논문 가운데 대학 교원과 고등학생 이하의 미성년자가 공저자로 등재된 사례를 조사한 결과 미성년자 82명이 부당하게 저자로 등재된 사실이 확인됐다. 하지만 입학이 취소된 학생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 등 5명뿐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논문 실적을 대입에 활용하지 않았거나 입시 자료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학적을 유지했다. 이들의 이름을 논문에 올려준 교원 69명 중에서도 징계를 받은 사람은 10명에 불과했다. 대부분 징계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학문적 동기로 논문 작성에 참여한 고교생들도 있지만 ‘스펙’을 위해 이름을 올린 학생도 많았던 게 현실이다. 최근 발표된 한 연구물에 따르면 영어로 논문을 쓴 한국 고교생들을 조사해 보니 이들 중 3분의 2가 논문을 딱 1편만 쓴 것으로 나타났다. 입시를 위해 단발성으로 쓴 경우가 많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학생생활기록부에 논문 기재를 금지한 2014년 이후 고교생 논문 건수가 급감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심지어 학원 강사에게 돈을 주고 대필한 논문을 입시에 이용한 학생들이 재판에 넘겨진 사례도 있다. ▷더욱이 교수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논문 저자의 이름을 바꿔치거나 가로채는 사례까지 벌어지고 있다. 서울의 한 약대 교수는 연구실 대학원생들을 동원해 동물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도록 하고서는 이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자신의 딸을 단독저자로 올렸다가 구속됐다. 제자가 쓴 논문을 교수가 표절하거나 아예 본인이 쓴 것처럼 저자를 바꿔서 발표했다가 물의를 빚은 경우도 있다. ▷국제의학학술지편집인위원회(ICMJE)는 학술적 개념과 계획 또는 자료의 수집·분석·해석에 상당한 공헌을 할 것 등 저자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굳이 이런 기준을 따지지 않더라도 누가 저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는 지도하고 심사하는 교수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사실대로 적어주기만 하면 연구자들은 피땀 흘려 연구한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다. 다른 욕심 때문에 그것조차 지키지 않는 교수들은 강력하게 처벌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세계적인 쇠고기 수출국 호주에서 소는 외화를 벌어주는 소중한 동물이지만 한때는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소 배설물이 고스란히 땅에 쌓여 굳으면서 매년 서울 면적의 3배가 넘는 초지가 쓸모없는 땅으로 변해갔다. 소는 18세기 말 남아프리카에서 호주로 들어온 외래종이어서 호주에는 소의 배설물을 분해할 수 있는 곤충이 없었기 때문. 과학자들이 연구 끝에 쇠똥구리를 대량으로 풀어놓으면서 이 문제가 해결됐다. ▷사람들은 흔히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곤충학자들은 ‘지구는 곤충의 행성’이라고 부른다. 곤충은 지구에 존재한 지가 4억 년이 넘었고 알려진 종류만 100만 종가량에 이른다. 곤충을 ‘벌레’라고 비하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인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식물의 80% 이상이 곤충의 수분(受粉) 활동 덕분에 열매를 맺는다. 쓰레기를 분해하고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것도 곤충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데 곤충의 숫자가 최근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고강도 농업으로 서식지가 줄고, 급격한 기후변화가 일어난 지역에서는 최근 20년 새 곤충 개체 수가 49% 감소했다. 곤충 종류 가운데 40%가량은 개체 수가 줄고 있고, 이 중 3분의 1은 멸종위기라는 연구도 있다. 곤충의 감소가 지구에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뜻에서 곤충과 아마겟돈을 합성한 곤충겟돈(Insectageddon)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한국에선 ‘꿀벌 실종 사건’이 벌어지면서 곤충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국내에서 약 100억 마리의 꿀벌이 죽거나 사라졌다. 초겨울 고온현상으로 꿀벌들이 겨울잠에서 일찍 깨어나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추워지면서 벌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폐사한 것, 과다한 살충제 사용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꿀벌은 곤충 중에서도 수분에 기여하는 바가 압도적으로 크다. 전국의 양봉농가와 과수농가에 비상이 걸렸고, 식량안보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곤충 연구자들은 ‘걱정된다’는 표현 대신 ‘공포스럽다’고 말한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해충인 모기도 새와 민물고기에게는 소중한 먹이가 되듯이 생태계에선 모든 곤충이 꼭 필요한 존재다. 노르웨이 곤충학자 안네 스베르드루프튀게손은 책 ‘세상에 나쁜 곤충은 없다’에서 “곤충은 이 세계가 돌아가게 해주는 자연의 작은 톱니바퀴”라고 했다. 그 톱니바퀴가 빠지면 생태계가 흔들리고, 인간의 삶도 위협받게 된다. 곤충 감소가 인류에 보내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2019년 말 초등학교 5학년 A 양이 동급생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A 양은 법원에서 시설 위탁 처분을 받았다. 교도소 대신 복지시설이나 병원으로 보내는 것이다. A 양이 형사 처벌을 면한 것은 촉법(觸法)소년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인 소년은 범죄를 저질러도 보호 처분을 받는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 촉법소년 연령 상한을 만 14세 미만에서 만 12세 미만으로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만 12, 13세도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11일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 교수,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를 만나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는 방안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는 방안에 대해 여론은 찬반양론으로 나뉘고 있다. 이웅혁 교수=촉법소년에 해당하는 나이의 아이들은 자신이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악용한다. 실제로 현장에 가 보면 13세 소년들이 형사에게 ‘나 촉법이니까 빨리빨리 끝내자’고 한다. 또 14세라는 기준은 1953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때의 14세와 지금의 14세는 다르다. 범죄를 저질러도 교도소에 가지 않으면 정의의 관념에 반한다는 문제도 있다. 피해자는 몸도 마음도 다쳤는데 가해자는 일종의 ‘소년법 찬스’를 써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다니는 게 공정한가. 곽대경 교수=촉법소년 연령을 낮춘다고 해서 이 아이들의 재범을 예방하고 우리 사회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나. 우선순위가 틀렸다. 형사 처벌 연령부터 낮추는 것은 정치권이나 공직자들이 뭔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인기 영합적인 쇼맨십이다. 이 문제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와 자료를 바탕으로 논의돼야 하는데 지금은 여론몰이 형태로 진행되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결정될까 우려스럽다.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는 것이 소년범들의 교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나. 이 교수=촉법소년 나이를 낮춘다고 해서 무조건 교도소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형사 처분 가능성을 열어두고 법관이 판단해야 하는데, 지금은 아예 형사 처분을 할 기회 자체가 봉쇄돼 있지 않나. 그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일정한 악행을 하면 분명한 불이익이 있다’는 신호를 주자는 것이고, 결국은 그게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냥 넘어가다 보면 만성적 범죄자의 길로 가게 된다. 곽 교수=어린 나이에 교도소에 갔다 오면 아이들이 오히려 엇나가게 되고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이 굉장히 부정적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촉법소년 연령을 만 14세에서 12세로 낮추면 그만큼 형사 처분을 받는 숫자가 늘어나고, 어려서부터 전과를 쌓아 나가는 아이들도 늘 것이다. 소년범들이 상습적인 성인 범죄자로 전이되는 걸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조건 강하게 처벌하는 게 능사인가. ―촉법소년들의 강력 범죄가 사회 이슈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는 연령이 낮아지고 흉악 범죄가 늘어나는 것인가. 이 교수=경찰 자료로는 촉법소년에 의한 강력 범죄가 5년 새 35% 정도 늘었다. 아이들 인구는 줄고 있는데 촉법소년의 강력 범죄가 늘어난다는 것은 범죄가 저연령화되고 있다는 증거다. 곽 교수=촉법소년 범죄 중에 살인, 성폭행, 강도 등 중범죄가 차지하는 비중은 5% 정도라는 통계가 있다.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중범죄를 일반화해서 처벌을 확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아이들에게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가 관건일 텐데 어떻게 봐야 하나. 이 교수=소년들이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법망을 피해 나갈 수 있는지 하는 범죄지능은 예전보다 상당히 높아졌다. 이른바 행위 조정 능력, 사고 통제 능력은 70년 전에 비해서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민등록상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면벌부(免罰符)를 주는 게 바람직한가. 곽 교수=소년들은 여전히 판단 능력이 미성숙하다. 자신의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고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이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100% 그 아이에게만 책임을 묻는 게 적절한가. 또 아이들은 성인들보다는 변화의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교육과 선도에 자원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해외 국가들은 우리나라에 비해 형사 처벌이 가능한 연령이 낮나. 이 교수=일본에선 1997년 고베에서 14세 중학생이 초등학생을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엔 형사미성년자 나이가 16세였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14세로 낮아졌다. 영국은 10세부터 형사 처벌이 가능한데 지난해 소년 살인범의 형량을 징역 12년에서 27년으로 높였다. 미국 일부 주에선 7세부터 처벌이 가능하다. 곽 교수=우리나라가 받아들인 법 체계는 독일, 프랑스 같은 대륙법 체계다. 독일에서는 형사미성년자가 14세로 돼 있는데 이를 낮출지 말지를 놓고 30년 이상 학계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아직 독일에서 이 나이를 유지하고 있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은 소년원으로 보내고 있는데 실태가 어떤가. 이 교수=소년원에 들어가면 대장 역할을 하는 아이가 군기 잡기 식으로 관리하고 나머지는 그 문화에 복속되는 게 문제다. 안 좋은 의미의 네트워크가 형성돼 소년원에서 나온 뒤에 함께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교육도 아니고 처벌도 아닌 중간 형태인데, 오히려 범죄소년(만 14세 이상∼19세 미만의 범죄자)으로 가게 되는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 곽 교수=소년원에서 학과 교육과 직업 교육을 하고 있다. 직업 교육은 노동시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그런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많이 부족하다. 컴퓨터 교육도 옛날 프로그램으로 하고 있더라. 이런 부분부터 인력과 예산을 먼저 투입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찾고 보람도 가질 수 있다. ―소년범죄의 가해자들에 대해선 논의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 반면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 교수=예를 들어 스토킹 범죄 피해자에 대해선 보호를 해주는 조치가 있다. 그런데 소년법상에는 피해 회복, 피해자 보호에 대한 내용이 없다. 법의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다. 소년범죄 피해자를 구조하고 지원하도록 법을 개정하거나 새로운 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곽 교수=가해자가 진정 어린 반성을 하고 다시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피해자도 용서의 감정이 드는 것이다. 이를 회복적 사법이라고 한다. 가해자에게 개선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사회에 돌아올 수 있게 해야 가능한 일이다. ―연령 문제 외에도 촉법소년과 관련해서 논의해야 할 점이 많을 텐데 어떤 것이 시급하다고 보나. 이 교수=법원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 법관들은 보직이 자주 바뀌는데 소년사건 담당 판사는 이 아이가 정말 개선과 교화의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더 강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를 심층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전문화돼야 한다. 보호관찰관 수도 부족하다. 보호관찰관 1명이 담당하는 소년이 선진국은 25명 정도인데 우리나라는 130명이다. 곽 교수=보호시설에 가서 심층면접과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주로 종교시설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담당하는 형태다. 아이들이 학교에 안 가는 주말에는 식사 챙겨주는 것만 해도 버거운 일이다. 운영비가 한 달에 2000만 원 이상 들어가는데 법원에서는 1년에 300만 원 지원해준다고 하더라. 후원금에 의존하고 있는데 국가가 책임을 유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서 맞춤형으로 교육, 상담,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경찰대를 졸업한 뒤 8년간 경찰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형사정의 분야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 털리도대 교수, 경찰대 교수를 지냈다. 법무부 형사사법통합정보체계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실종아동전문기관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고려대 사회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미 하와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범죄학회 회장, 한국범죄심리학회 부회장, 동국대 홍보처장, 경찰청 과학수사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청소년비행론’ ‘현대사회와 범죄’ 등이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김정은은 진성(true) 파시스트의 전형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2018년 발간한 책 ‘파시즘’에서 내놓은 평가다. 북한을 “세속적인 IS(이슬람국가)”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신격화된 김씨 일가가 독재정권을 세습하며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지는 것을 비판하는 취지다. 그런데 그는 2000년 미 장관으로선 처음 북한을 방문했고, 김정일을 “지적인 인물”이라고 호평했었다. 그 사이에 북한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진 것일까. ▷북-미 간에 화해무드가 무르익던 시기에 찾아온 올브라이트에게 김정일은 적극적이었다. 함께 집단체조를 관람하던 중 미사일 발사 장면이 등장하자 김정일은 “첫 번째 쏘는 것이자 마지막으로 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민감하게 여기는 올브라이트를 배려한 발언이었다. 그도 김일성의 묘를 참배하며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서전에서 “외교상으로 필수적인 듯했으므로 묘를 찾았지만 어떤 경의도 바칠 수 없었다”고 썼다. 내심까지 북한을 존중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23일 타계한 올브라이트는 뼛속까지 외교관이었다. 1978년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일한 것을 시작으로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미국 외교의 핵심인 유엔대사와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의 양심”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해외 인권침해 문제에 적극 개입하면서도 국익 중심의 외교에 무게를 뒀다. 올브라이트는 브로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는 ‘브로치 외교’로도 유명하다. 김정일을 만날 때에는 성조기,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할 때는 햇살 모양 브로치를 달았다. ▷체코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힘겨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조부모를 비롯한 친인척 26명이 목숨을 잃었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영국으로 피신했다 돌아오니 이번엔 체코에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외교관이던 아버지가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되자 가족 모두 미국으로 도피했다. 이후 스스로의 힘으로 유리천장을 깨고 여성 최초로 미 행정부의 3인자인 국무장관까지 올랐다. ▷“나는 ‘은퇴’라는 단어를 혐오한다”고 그는 말하곤 했다. 64세에 장관에서 물러난 뒤 학계와 싱크탱크에서 활동했고, 숨지기 전까지 국제문제 컨설팅업체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의 회장을 지냈다. 2020년에는 책 ‘지옥과 다른 목적지들’을 펴냈다. 방북 당시 그를 수행했던 웬디 셔먼은 국무부 부장관이 됐고, 조지타운대에서 그에게 배운 네드 프라이스는 국무부 대변인으로 활동 중이다. 거장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과 인맥은 미 외교가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법조계에는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사건 당사자가 제일 많이 알고, 그다음은 변호사이며, 가장 사건을 잘 모르는 판사가 결론을 내린다”는 말이 있다. 판사가 사건의 전모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법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호할 때도 많다. 판사들로서는 판례와 이론, 양심을 나침반 삼아 사건의 퍼즐을 맞춰 가면서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재판 제도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법시스템이 유지되려면 시민이 판결에 승복을 해야 한다. 최소한 법원이 일부러 한쪽 편을 들거나 외부의 압력으로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를 위해선 모든 법원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판결을 최종 확정하고 사법행정을 이끄는 대법원이 그 핵심에 서 있다. 그런데 근래 대법원은 바람 잘 날이 없다. 전·현직 대법원장이나 대법관들이 재판에 회부되거나 여론의 도마에 오르는 일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다. 정치적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을 확립하면서 법원의 안정을 이끌어야 할 대법원이 오히려 사법부의 리스크가 돼 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이 시발점이었다. 검찰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에 개입한 혐의 등으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박영대 전 대법관을 기소했다. 상고법원 도입 등에 대해 박근혜 정부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법원의 이익을 위해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재판에 관여하려 한 것이 판결을 통해 확인된다면 법원사(史)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해 2월 임성근 판사 탄핵과 관련한 정치권 눈치 보기와 거짓말로 또 한 번 파문을 일으켰다. 김 대법원장은 당초 “(임 판사에게) ‘탄핵 문제로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여당에서) 지금 뭐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 수리했다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느냐”고 말한 녹취록이 공개돼 거센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9월부터 불거진 대장동 개발 사건에도 전·현직 대법관이 등장했다. 권순일 전 대법관은 퇴임 직후 화천대유에서 월 1500만 원을 받으면서 고문을 맡았고, 재임 시절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 선거법 위반 사건을 놓고 ‘재판 거래’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수사 결과에 따라선 메가톤급 파장이 벌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최근에는 정치권에서 이른바 ‘정영학 녹취록’에 나오는 ‘그분’이 조재연 대법관이라는 주장이 나오자 조 대법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부인하는 일이 있었다. 조직이 위기 상황을 맞으면 스스로 문제점과 해법을 찾아보려고 하는 게 일반적이다. 사법농단 때에는 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열리고 대법원이 진상조사를 하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 그런데 김 대법원장 취임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선 법원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리지 않는다. 위기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법관의 표상으로 존경받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은 “법관은 세상 사람으로부터 의심을 받아선 안 된다”고 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법관은 사법권 독립을 위하여 책임이 큰 것이며, 그러므로 질 수 없는 책임이라도 져야 된다”는 말도 남겼다. 60여 년 전 발언이지만 지금도 울림이 있다. 모든 법관이, 특히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기를 바란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나는 시대를 체르노빌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고 싶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했던 말이다. 그는 이 사고를 돌이켜보면서 “5년 뒤 소련이 붕괴하는 주된 원인이 됐다”고도 했다. 그만큼 당시 소련에 정치적·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고, 전 세계에 핵의 무서움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36년이 지난 지금, 이번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마자 체르노빌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1986년 4월 26일 오전. 당시 소련에 속했던 우크라이나 북부의 체르노빌 원전 4호기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관료제에 빠진 소련 당국은 사건을 축소하는 데 급급했고 대응은 느슨했다. 결국 히로시마 원자폭탄보다 400배나 많은 방사능이 누출되면서 유럽까지 퍼져 나갔다. 이 사고의 여파로 최대 15만 명이 희생됐다는 분석도 있다. 사고 이후 원전 주변 30km는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됐고,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한 방호벽도 세웠지만 여전히 시설 안에 방사성물질이 남아 있는 상태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첫날인 24일 체르노빌을 점령한 이유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로이터통신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에 파병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는 러시아군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러시아군이 원전 관리 직원을 억류하자 미국 백악관에서 “인질을 석방하라”고 비난하는 등 러시아와 서방 간의 갈등도 커지고 있다. 소련의 잘못으로 벌어진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해 악몽을 겪었던 유럽국들을 향해 방사능 누출 가능성을 운운하며 협박한 것이라면 비열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반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방사능을 누출시키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는 관측도 나온다. 우크라이나가 체르노빌을 악용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쳤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원전이 중요하다기보다는 러시아군이 벨라루스를 통해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로 진격하기 위해 중간 지점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체르노빌을 접수했다고 본다. 어떤 이유에서든 러시아군 입장에서 체르노빌은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지역이었던 셈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공격 개시를 알리는 연설에서 소련 붕괴 이후 “세상 힘의 균형이 깨졌다”고 주장했다. 세계 양대 강국으로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냉전시대의 소련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국을 짓밟는 것만으론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체르노빌 사건을 ‘역사상 최악의 인재(人災)’로 키웠던 러시아 내부의 문제점부터 돌아보는 게 푸틴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코로나19가 미국에 상륙한 2020년 이후 ‘초과 사망’한 사람의 수가 지난주 100만 명을 넘어섰다. 2019년 이전의 사망자 규모와 비교해 볼 때 100만 명 이상이 더 숨졌다는 의미다. 코로나 사망자가 대거 발생한 것이 주원인이지만 심장질환, 고혈압, 치매 등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예전보다 크게 늘었다. 코로나 대처에 힘을 쏟는 사이에 고령자와 기저질환자 등에 대한 의료의 질이 떨어지면서 빚어진 일로 분석됐다. ▷각국에서 작성하는 코로나19 사망자 통계에는 코로나가 직접 사망의 원인이 된 사례만 포함된다. 의료 역량이 코로나 대응에 집중되는 바람에 다른 질병을 앓던 환자가 충분히 치료를 받지 못해 숨진 경우, 코로나 후유증으로 사망한 경우 등 코로나로 인한 ‘간접 사망’은 반영되지 않는다. 코로나 사태 이후 사망자 수가 예년 수준에 비해 얼마나 늘었는지를 보여주는 초과 사망(excess death)을 분석해야 코로나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숨진 사람의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계청에서 주간 단위로 초과 사망을 집계하고 있다. 지난해 전체로는 7000여 명의 초과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중 4000여 명은 ‘병상 대란’이 심각했던 11월 말부터 5주 동안에 집중적으로 나왔는데, 절반가량은 코로나 사망자였고 다른 절반은 코로나가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었다. 의료 역량이 한계에 이르면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비코로나 응급 환자들의 피해가 크게 늘어났던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당시 충분한 준비 없이 위드 코로나 정책이 시작된 이후 델타 변이 환자가 폭증하면서 각 병원 응급실은 기능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심정지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코로나 환자를 받느라 일반 중환자용 병상이 부족해 암, 장기이식 등 수술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의료 현장에선 “코로나 환자 때문에 응급환자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절박한 목소리가 나왔다. ▷현재 우세종인 오미크론은 델타보다 증상이 가볍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전파력이 워낙 강해 다음 달에는 하루 확진자가 최대 27만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방역당국은 전망한다. 이에 따라 위중증 환자가 늘어나고 의료 역량이 버텨내지 못하면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는 환자들이 늘어날 수 있다. 소방, 치안 등 사회 필수기능을 담당하는 인력이 대거 격리되면서 구멍이 뚫려 안타까운 희생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민관이 바짝 긴장하면서 방역에 총력을 기울여야 오미크론의 직간접 피해를 줄일 수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종신 집권을 꿈꾸며 ‘21세기 술탄’으로 불리고 있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공략에 나섰다. 튀르크어족으로 분류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튀르크어 사용국가 기구(Organization of Turkic States·OTS)’를 결성한 것. 그런데 최근 반(反)서방 노선을 걷는 에르도안과 호흡을 맞춰온 중국이 OTS에 대해선 아주 불편한 심사를 내비치고 있다. 중국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히는 신장위구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달 12일 이스탄불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공식 출범한 OTS는 터키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이 회원국으로 참가했고, 투르크메니스탄이 참관국 자격으로 참여했다. OTS는 장기적으로는 외교안보 측면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경제 분야에서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2003년부터 집권하고 있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무슬림 강경파가 핵심 지지 기반이다. 이슬람권의 맹주를 자처하며 중동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해왔고, 튀르크계라는 연결고리를 활용해 중앙아시아까지 넘보고 있는 것이다. ▷튀르크라는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 돌궐이다. 돌궐족은 4세기 말부터 중국 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해 552년에는 왕조를 세웠다. 당시 중국인들은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가진 돌궐을 철노(鐵奴·철을 만드는 야만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돌궐은 당나라에 패배한 뒤 서쪽으로 이동했고 10세기에 투르키스탄 지역까지 진출했다. OTS 회원국 대부분은 이 지역 국가들로서 민족의 뿌리가 같고 모두 이슬람권에 속해 있다. 돌궐족의 후예들이 다시 뭉치면서 돌궐제국의 부활을 떠올리게 한다. ▷OTS 출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국가는 중국이다.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튀르크주의와 이슬람의 확대를 경계해야 한다. 이는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분리주의자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신장위구르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거세질까 봐 우려하는 것이다. 신장위구르는 18세기 청나라에 점령된 이후 중국의 일부가 됐지만 주민의 다수는 튀르크계로 분류되는 위구르족이다. 2009년 민족 간 갈등으로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등 화약고처럼 불안한 곳이다. ▷다른 강대국들도 중앙아시아에 부는 바람을 눈여겨보고 있다. 중국 견제를 위해 신장위구르 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해온 미국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이 절실하다. 전통적으로 중앙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러시아도 이 지역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돌궐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튀르크계 국가들의 움직임이 국제 정세에 또 하나의 변수가 돼 가고 있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