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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경기도지사 재직 당시 경기도청 공무원이 이 후보 부인 김혜경 씨의 사적 용무에 동원됐다는 논란에 김 씨는 3일 “공과 사를 명료하게 가려야 했는데 배 씨(경기도청 총무과 소속 5급 사무관)와 친분이 있어 도움을 받았다”며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지난해 3월부터 10월까지 경기도청 비서실 7급 공무원으로 일했던 A 씨는 2일 동아일보에 자신이 부인 김 씨와 이 후보 가족의 사적인 용무를 맡아 처리했으며, 김 씨가 자신의 약을 도청 공무원 이름으로 ‘대리 처방’ 받았다는 의혹 등을 제기했다. 김 씨의 사과 이후에도 A 씨는 경기도청 비서실 법인카드로 이 후보 가족을 위한 식료품을 구입했다고 주장을 내놨다. ● A 씨 “법인카드로 먹거리 사 배달”A 씨는 경기도청 비서실에서 일할 때 당시 도청 총무과 소속 5급 사무관 배모 씨 지시를 받고 이 후보 가족과 김 씨에 대한 사적 활동 의전 업무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배 씨는 이 후보가 변호사로 일할 당시 인연을 맺고 성남시청에 이어 경기도청에서 최근까지 근무한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A 씨 측에 따르면 지난해 4월 A 씨는 배 씨 지시를 받아 자신의 카드로 구매한 소고기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있는 이 후보의 자택에 전달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결제를 취소한 후 경기도청 비서실 법인카드로 재결제했다. A 씨 측은 “도정 업무에 쓰인 것처럼 시간을 맞춰 경기도 법인카드로 바꿔 다시 결제한 것”이라며 “김 씨 측에 소고기와 식사 등을 포함해 지난해 3월부터 10월까지 카드를 바꿔 결제한 사례가 열 번이 넘었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경기도지사 공관이 아니라 자택에 전달된 것을 두고 “경기도민의 혈세가 김 씨의 소고기 안심과 회덮밥 심부름에 이용됐다”며 “명백한 국고손실죄”라고 비판했다.● A 씨 “김 씨 약 공무원 이름으로 대리 처방”김 씨가 자신의 약을 도청 공무원 이름으로 ‘대리 처방’ 받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날 A 씨가 공개한 지난해 3월 텔레그램 대화에 따르면 배 씨가 “사모님 약 알아봐주세요”라고 하자 A 씨는 “도청 의무실에서 다른 비서 이름으로 처방전을 받았다”며 약 사진을 배 씨에게 보냈다. A 씨가 이 후보 자택 앞에 세탁물과 종이봉투를 뒀다고 보고하자, 배 씨는 “사모님 약 넣으신 거 맞지요?”라고 확인하기도 했다.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에게 직접 진찰을 받은 환자가 아니면 처방전을 수령하지 못한다. 어길 시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A 씨에 따르면 지난해 4월에는 김 씨가 성남시 자택 인근 종합병원에 방문하기 전 배 씨가 A 씨에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문진표를 작성하면 출입증을 줄 것”이라며 문진표를 대신 작성해 김 씨의 출입허가증을 받도록 했다. 당시 해당 병원은 원내 방역을 위해 문진표를 작성한 방문객에게만 출입허가증을 내줬다. A 씨는 같은 달 김 씨 대신 모두 네 차례 문진표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A 씨는 김 씨의 병원 진료비 수납과 약 수령도 대신 했다고 했다. A 씨는 지난해 6월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또 다른 종합병원에서 자신이 이 후보 장남의 퇴원 수속을 대신 하고 복약지도서 등을 챙겼다고도 주장했다. A 씨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장남 병원 서류에 적힌 보호자 김 씨 이름 옆에는 배 씨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A 씨에 따르면 A 씨는 김 씨가 자주 찾는다는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 자택에 가져다주는 과정을 배 씨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A 씨가 공개한 자료 중에는 김 씨가 탄 차량 앞을 A 씨가 지나갔다는 이유로 배 씨가 “충성심이 없다”고 질책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김 씨 “저의 불찰” 사과…배 씨 “내가 복용하려 약 구한 것” 이 후보 부인 김 씨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배 씨와 친분이 있어 도움을 받았지만 상시 조력을 받은 건 아니다”며 “있어서는 안될 일이 있었다.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다.”고 고개를 숙였다. A 씨에 대해서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린다”고 했다. 배 씨도 이날 입장문을 내고 “이 후보를 오래 알았다는 것이 벼슬이라 착각했고, 이 후보 부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상식선을 넘는 요구를 했다”며 “A 씨와 국민 여러분, 경기도청 공무원 여러분께 사과드린다”고 했다. 대리 처방 논란에 대해서는 “제가 복용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 처방받은 약을 구하려 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대리 처방에 대한 해명에 대해 A 씨 측은 “김 씨 집 앞에 직접 약을 걸어놓고 왔는데 배 씨가 몰래 가서 훔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라며 반박했다. 국민의힘도 “과잉 충성이 아니고 명백한 불법”이라며 공세를 쏟아냈다. 민주당은 당 차원에서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남건우 기자 wo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경기도지사로 재직할 당시 도청 공무원이 이 후보 부인 김혜경 씨의 사적인 용무에 동원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 씨는 “저의 불찰”이라면서도 “상시 조력을 받은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내놨다.●A 씨 “코로나19 문진표 대신 써주고, 아들 퇴원수속도”2일 경기도청 7급 공무원 출신 A 씨는 지난해 3월부터 10월까지 도청 비서실에서 일하면서 당시 도청 총무과 소속 5급 사무관 배모 씨 지시를 받아 이 후보 가족의 사적 활동 의전 업무를 맡았다고 주장했다. 배 씨는 이 후보가 변호사로 일할 당시 인연을 맺고 성남시청에 이어 경기도청에서 최근까지 근무한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A 씨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김 씨가 경기 성남시 자택 인근 종합병원에 방문하기 전 배 씨는 A 씨에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문진표를 작성하면 출입증을 줄 것”이라며 문진표를 대신 작성해 김 씨 출입허가증을 받도록 했다. 당시 해당 병원은 원내 방역을 위해 문진표를 작성한 방문객에게만 출입허가증을 내줬다. A 씨는 같은 달 김 씨 대신 모두 네 차례 문진표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A 씨는 김 씨의 병원 진료비 수납과 약 수령도 대신했다고 했다. A 씨는 지난해 6월 경기 고양시에 위치한 또 다른 종합병원에서 자신이 이 후보 장남의 퇴원수속을 대신하고 복약지도서 등을 챙겼다고도 주장했다. A 씨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장남의 병원 서류에 적힌 보호자 김 씨 이름 옆에는 배 씨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있었다.●대리 처방 의혹…배 씨 “내가 복용하려 약 구한 것”김 씨가 자신의 약을 도청 공무원 이름으로 ‘대리 처방’ 받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날 A 씨가 공개한 지난해 3월 텔레그램 대화에 따르면 배 씨가 “사모님 약 알아봐주세요”라고 하자 A 씨는 “도청 의무실에서 다른 비서 이름으로 처방전을 받았다”며 약 사진을 배 씨에게 보냈다.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에게 직접 진찰을 받은 환자가 아니면 처방전을 수령하지 못한다. 어길 시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A 씨에 따르면 A 씨는 김 씨가 자주 찾는다는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 자택에 가져다주는 과정을 배 씨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A 씨가 공개한 자료 중에는 배 씨가 A 씨가 김 씨가 탄 차량 앞을 지나갔다는 이유로 “충성심이 없다”고 질책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에 대해 배 씨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이 후보를 오래 알았다는 것이 벼슬이라 착각했고, 이 후보 부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상식 선을 넘는 요구를 했다”며 “A 씨와 국민 여러 분, 경기도청 공무원 여러분께 사과드린다”고 했다. 대리처방 논란에 대해서는 “제가 복용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 처방받은 약을 구하려 했다”고 해명했다. 이 후보 부인 김 씨도 이날 입장문을 내고 “공과 사를 명료하게 가려야 했는데 배 씨와 친분이 있어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상시 조력을 받은 건 아니다”라며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A 씨에 대해서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린다”고 했다. 하지만 대리처방에 대한 배 씨의 해명에 A 씨 측은 “김 씨 집 앞에 직접 약을 걸어놓고 왔는데 배 씨가 몰래 가서 훔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라며 반박했다. 국민의힘도 “과잉 충성이 아니고 명백한 불법”이라며 공세를 쏟아냈다. 민주당은 “사실 관계를 확인 중”이라며 당 차원에서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남건우 기자 wo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번 주 들어 일거리를 못 구한 건 오늘이 처음이네요.” 27일 오전 5시 반.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인근 인력시장을 찾은 박모 씨(66)는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날 인력시장을 찾은 인부 대부분이 상황은 비슷했다. 오전 4시부터 길거리에 수백 명이 줄지어 일거리를 기다렸지만 기자가 세어본 결과 4명 중 1명 정도만 일을 구해 자리를 떴다. 남은 이들은 서로 “왜 집에 안 가느냐”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배를 입에 문 채 한참 거리를 서성였다. 한 시간 반 동안 대기하다가 끝내 집으로 돌아가던 박 씨는 못내 아쉬운지 사무소를 돌아보며 “이거 참 어떡하나…”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첫날인 27일 상당수의 건설사들이 ‘1호 처벌 대상만은 피하겠다’며 공사 현장을 멈추면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들이 대거 일감을 잃었다. 남구로역 인근의 한 인력사무소 직원은 “어제보다 일거리가 절반 이상 줄었다”며 “지난주부터 대형 건설사 사이에 ‘시범 케이스가 되지 말자’는 말이 돌았다”고 했다. 이날 남구로역 인력사무소를 방문한 이모 씨(60)는 설명을 들은 후 “설 연휴 지나면 나아지려나 싶다”면서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실제로 서울 시내 곳곳에서 작업이 ‘일시 중지’된 건설 현장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역 인근 신축 공사 현장에서는 일부 근로자들이 공구를 정리하거나 청소만 할 뿐 여느 때처럼 벽돌을 쌓는 등의 작업은 일절 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만난 한 노동자는 “갑자기 오늘은 건물 올리는 작업을 안 한다고 하더라”고 했다. 중대재해법이 나이가 많은 근로자들을 노동시장에서 몰아낼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인력시장에서 일거리를 구하던 성모 씨(49)는 “요즘에는 현장에서 60세 이상은 잘 안 쓰려고 하는 탓에 나이 든 분들은 인테리어 같은 작은 현장만 가는 것 같다”고 했다. 다만 현장의 안전 관리 인력은 다소 보강되는 분위기다. 이날 만난 문래역 인근 공사 현장 노동자는 “안전 관리 인력이 최근 현장에 10명 넘게 새로 배치됐다”고 전했다. 건설 조경 분야의 한 중소기업 대표 김모 씨(64)도 “설 연휴가 끝날 때까지 안전 관리 인력을 최우선으로 보강할 계획”이라고 했다.남건우 기자 woo@donga.com최미송 기자 cms@donga.com}
“유전자증폭(PCR) 검사소로 가라고요? 추운 날 한 시간 동안 줄 서서 기다렸는데…. 진작 말했어야죠.” 26일 오전 11시 40분경 경기 평택시보건소 ‘신속항원 선별검사소’에서는 자신을 해외입국자라고 밝힌 20대 이모 씨가 보건소 직원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 씨는 “자가격리 해제 전 신속항원검사를 받으러 왔는데 기껏 차례가 되니까 ‘줄을 잘못 섰다’고 한다. 처음부터 안내를 제대로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 어이없고 화가 난다”고 했다. 이날부터 오미크론 우세 지역인 광주, 전남, 경기 평택과 안성 지역에서는 60세 이상과 밀접접촉자 등 고위험군은 PCR 검사를 받고, 일반 의심환자는 자가검사키트를 이용해 신속항원검사를 받는 ‘투 트랙 방식’의 새 검사 시스템이 도입됐다. 오미크론 대응체계가 도입된 첫날이다 보니 곳곳에서 적잖은 혼선이 빚어졌다.○ 하루 종일 혼선 혼란이날 광주 북구보건소 선별진료소는 코로나19 진단검사를 받으려는 시민들로 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기존 효죽공영주차장 4층에 있던 선별진료소에서는 신속항원검사를, 새로 설치된 보건소 1층 선별진료소에서는 PCR 검사를 했는데 검사방법을 제대로 안내받지 못한 시민들이 두 장소를 쉴 새 없이 오가는 모습이었다. 북구 선별진료소는 당초 오전 9시부터 검사를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20분가량 늦게 검사를 시작했다. 새로 바뀐 방역체계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의료진이 허둥대기도 했다. 한 40대 남성은 “두 곳에서 검사를 받게 하니 더 헷갈리고 검사가 늦어지는 것 같다”며 “예전처럼 한 곳에서 다 검사받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평택시보건소에서는 오전에 음성확인증을 뽑아주는 프린트가 고장 나 오후까지 확인증을 받지 못한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 평택시가 지정한 호흡기전담클리닉 2곳 중 한 곳인 A의원은 새 검사 시스템이 도입된 첫날인데 ‘정기휴무’라며 문을 닫아 적잖은 사람들이 발길을 돌렸다. 신속항원검사를 받은 후 PCR 검사를 다시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모 씨(24·평택시)는 “자가검사키트에서 음성이 나왔다고 안심할 수 없기 때문에 병원에 다시 PCR 검사를 받으러 간다”고 했다. 거리 두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불안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안성시보건소를 찾은 직장인 김모 씨(21)는 “PCR 검사를 위해 신속항원검사에서 양성이 나온 사람과 좁은 장소에 같이 대기했다. 혹시 감염되지 않을까 걱정돼 최대한 구석에서 혼자 결과를 기다렸다”고 전했다. 신속항원검사 결과도 방역패스로 인정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영업자들도 적지 않았다. 안성시장에서 식당을 하는 안모 씨(62)는 “아침 뉴스를 보고 자가검사키트 음성도 방역패스로 쓸 수 있단 걸 알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방역지침에 혼란스럽다”고 했다.○ 자가검사키트 수급 우려도신속항원검사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자가검사키트 수급이 어려울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평택시가 확보한 자가검사키트는 정부에서 지원한 6000개. 평택 하루평균 진단 검사자가 최대 1만 명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하루 분량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평택시는 급한 대로 자가검사키트 5000개를 자체 주문했다. 인력난을 호소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적지 않았다. PCR 검사의 경우 안내 담당자로 한 곳당 3명 정도만 배치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방문자가 스스로 검사를 해야 하는 신속항원검사장에는 안내 인력만 최소 5명 이상 필요하다는 것이다. 광주시는 인력이 당장 준비가 안 돼 행정직원 12명을 임시 투입했다. 평택시 송탄보건소는 이날 인근 오산 공군부대 군인 10명을 지원받아 31명을 투입했다. 평택=이경진 기자 lkj@donga.com안성=남건우 기자 woo@donga.com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아빠. 여기는 총소리가 안 들려서 너무 행복해요.” 201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총성의 공포는 일상이었다. 하셰미 낭얄라이 씨(33)는 공원을 걷던 중 딸의 말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다. “인천은 월미도가 유명하대. 이번 휴가(설) 때 월미도로 놀러가자!” 하셰미 씨는 지난해 8월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을 극적으로 탈출해 한국으로 왔다. 충북 진천과 전남 여수 임시생활시설에서 정착 교육을 받은 그의 가족은 이달 12일 퇴소해 인천 서구에 터를 잡고 제2의 삶을 시작했다. 23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하셰미 씨는 “가족들과 공원에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한국 덕분에 소중한 사람 잃지 않았다”현재 하셰미 씨는 정부 지원으로 임차한 인천 서구의 방 2개짜리 빌라에서 아내와 다섯 살 아들, 네 살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집 내부는 별다른 가구가 없어 휑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드디어 가족만의 보금자리가 생겼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인천 정착 후 하셰미 씨는 대중교통을 익히며 직장을 다녔고, 아내는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두 아이도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섞여 놀며 한국 사회와의 접점을 늘리고 있다. 하셰미 씨는 “아프간에 있었다면 탈레반이 우리를 체포해 ‘왜 외국인과 함께 일했냐’고 추궁했을 것”이라며 “우리는 지금 희망에 차 있다. 아이들이 한국 사회에 유용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19년 지기인 자마니 타이브 씨(31) 가족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이들은 아프간 한국직업훈련원에서 근무하며 한국과 연을 맺었다. 직업훈련원은 한국이 아프간 재건을 돕기 위해 현지인들을 교육하던 곳. 하셰미 씨는 4년간 전기 분야를, 자마니 씨는 3년 동안 영어를 가르쳤다. 아내, 세 딸과 한국에 온 자마니 씨는 생계를 위해 가족보다 2주 먼저 임시생활시설을 나왔다. 이들은 17일부터 인천의 한 제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하루 9시간 이상 제품을 포장하는 일이다. 이들은 “육체적으로 고되지만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자마니 씨는 “당장 가진 돈이 많지 않은 만큼 가족을 위해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한국 덕분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았고 새 삶이 시작됐다. 감사하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첫 설을 맞아 두 가족은 인천 월미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아프간에 남은 가족들, 안전하기만 바랄 뿐”한국 생활이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아프간에 남은 가족만 생각하면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진다. 하셰미 씨는 형제자매 셋을, 자마니 씨는 어머니와 네 형제자매를 두고 한국에 왔다. 자마니 씨는 “정부군과 정보당국에서 일했던 두 형제는 탈레반을 피해 숨어 지내고 있다. 그저 안전하기만을 빌고 있다”고 말했다. 하셰미 씨도 “아프간에선 일을 해도 돈이 다 탈레반으로 간다”며 “돈을 벌면 월급의 반은 아프간 가족들에게 송금하고 싶다”고 했다. 중동과 이슬람교에 대한 한국 사회 일각의 편견과 부정적인 여론도 두렵다. 자마니 씨는 “아프간에서 종종 테러가 일어나긴 하지만 모든 이슬람 사람이 그런 건 아니다”라며 “1, 2년 정도 함께 지내면서 우리도 가족이 있는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편견이 있는 분들도) 점차 마음을 열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날 법무부는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내용이 담긴 재한외국인 처우기본법 개정안을 25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은 난민인정자와 동일하게 한국 국민 수준의 사회보장급여와 초중등의무교육혜택 등을 받을 수 있게 됐다.인천=공승배 기자 ksb@donga.com인천=남건우 기자 woo@donga.com}
해병대 전역 이후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온 한 농부가 신장을 기증해 두 명에게 새 삶을 선물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김인영 씨(74·사진)가 이달 19일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좌우 신장을 기증했다고 21일 밝혔다. 김 씨는 이달 10일 고양시 자택 거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곧바로 병원에 이송됐으나 뇌출혈로 뇌사상태에 빠졌다. 해병대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던 김 씨는 생전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해병전우회 동료들과 급식 봉사, 야간 순찰 등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해 왔다. 가족들은 평소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던 김 씨의 성품으로 미루어 고인도 기뻐할 것이라고 보고 장기 기증을 결정했다. 아들 현진 씨(48)는 “마지막까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김 씨의 무덤에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비문이 새겨질 예정이다.남건우 기자 woo@donga.com}
법원이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 부인 김건희 씨의 ‘7시간 통화 녹음’ 미공개분 방송을 준비 중인 인터넷 매체 ‘서울의소리’에 대해 “사생활에만 관련된 발언을 빼고는 방송해도 된다”는 내용의 가처분 결정을 21일 내렸다.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수석부장판사 김태업)는 김 씨가 ‘서울의소리’를 상대로 낸 방영금지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이날 대부분 기각했다. 재판부는 녹음파일 중 이른바 ‘쥴리’ 의혹과 관련된 부분 등의 방송이 가능하다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이에 관해 “각종 의혹 등과 얽혀 언론에 수차례 보도되는 등 이미 국민적 관심사가 된 사안”이라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김 씨와 인터넷 매체 직원 이모 씨의 통화 녹음 중 공적 내용과 무관한 김 씨와 윤 후보 등 가족들의 사생활에만 관련된 발언 등은 방송할 수 없다”고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했다. 앞선 19일 서울중앙지법도 김 씨가 유튜브 채널 ‘열린공감TV’를 상대로 낸 방영 및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비슷한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국민의힘 선대본부 이양수 수석대변인은 21일 논평을 내고 “헌법상 인격권, 사생활보호권의 본질을 침해한 아쉬운 결정”이라며 “악의적 편집을 통해 대화 맥락과 취지가 달라질 경우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윤석열 후보는 공개된 일부 녹음에서 부인 김 씨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을 언급한 것이 ‘2차 가해’라는 비판에 대해 이날 “상처 입으신 분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고,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남건우 기자 wo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법원이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 부인 김건희 씨의 ‘7시간 통화 녹음’ 미공개분 방송을 준비 중인 인터넷 매체 ‘서울의소리’에 대해 “사생활에만 관련된 발언을 빼고는 방송해도 된다”는 내용의 가처분 결정을 21일 내렸다.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수석부장판사 김태업)는 김 씨가 ‘서울의소리’를 상대로 낸 방영금지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이날 대부분 기각했다. 재판부는 녹음파일 중 이른바 ‘쥴리’ 의혹과 관련된 부분 등의 방송이 가능하다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이에 관해 “사생활에 연관된 사항이 일부 포함돼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각종 의혹 등과 얽혀 언론에 수차례 보도되는 등 이미 국민적 관심사가 된 사안”이라고 밝혔다. 또 주가 조작 의혹 등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도 “녹취록이 공개돼도 진행 중인 수사와 재판에 부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방송을 허용했다. 다만 재판부는 “김 씨와 인터넷 매체 직원 이모 씨와의 통화 녹음 중 공적 내용과 무관한 김 씨와 윤 후보 등 가족들의 사생활에만 관련된 발언, 이 씨가 포함되지 않은 비공개 타인과의 대화는 방송할 수 없다”고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했다. 앞선 19일 서울중앙지법도 김 씨가 유튜브 채널 ‘열린공감TV’를 상대로 낸 방영 및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비슷한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국민의힘 선대본부 이양수 수석대변인은 21일 논평을 내고 “헌법상 인격권, 사생활보호권의 본질을 침해한 아쉬운 결정”이라며 “악의적 편집을 통해 대화 맥락과 취지가 달라질 경우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와 배우자의 패륜 욕설 녹음 파일 등 여러 의혹에 대해서도 동일한 기준으로 방송해 달라”고 주장했다. 남건우 기자 woo@donga.com장관석 기자 jks@donga.com}
해병대 전역 이후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온 한 농부가 신장을 기증해 두 명에게 새 삶을 선물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김인영 씨(74·사진)가 이달 19일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좌우 신장을 기증했다고 21일 밝혔다. 김 씨는 이달 10일 고양시 자택 거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곧바로 병원에 이송됐으나, 뇌출혈로 뇌사상태에 빠졌다. 해병대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던 김 씨는 생전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해병전우회 동료들과 급식 봉사, 야간 순찰 등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해 왔다. 가족들은 평소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던 김 씨의 성품으로 미루어 고인도 기뻐할 것이라고 보고 장기기증을 결정했다. 아들 현진 씨(48)는 “마지막까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김 씨의 무덤에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비문이 새겨질 예정이다. 남건우 기자 woo@donga.com}
“한국어를 배워서 아이와 소통하려 했던 ‘그랜마 비(Granma B)’가 없었다면, 우리 아이는 미국 어린이집에 적응하지 못했을 겁니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 ‘공존: 그들과 우리가 되려면’ 시리즈가 보도되자 권석준 성균관대 공대 교수는 17일 페이스북에 해당 기사를 공유하며 미국 유학 경험을 소개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이에게 영어를 강요하지 않고 직접 한국어를 배워 보살폈다는 얘기다. 이에 이모 씨도 미국에서의 육아 경험을 떠올리며 “아이를 돌봐주는 곳에서 ‘WATER=MOOL(물)’이란 식으로 중요한 단어를 적어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독자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포털 사이트 등에서 ‘공존’ 기사를 공유하며 해외에서 이방인으로서 겪은 어려움과 현지인의 따뜻한 도움을 소개했다. 우리가 이방인으로서 도움을 받았듯 이주민들을 돕자는 취지다. 해외 한인교포나 유학생 독자들은 현지 이민정책을 알리며 ‘공존 정책’을 제안했다.○ “대선 주자, 이민정책 마련하라”1회 ‘한 동네, 두 세계’(17일자 A1·2·3면), 2회 ‘이주민들 떠나지 못하는 섬’(18일자 A1·2·3면)에서 지적된 언어교육 문제에 공감하는 독자가 많았다. 네덜란드에 사는 한국인 장모 씨는 “네덜란드처럼 취학 전 현지어 교육을 지원하면서, 아이의 언어치료 비용까지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3회 ‘사다리 없는 이주민 아이들’(19일자 A1·2·3면)에 보도된 이주민 비자 제도에 대한 대안도 나왔다. 이민 인재를 국내에서 육성하도록 비자를 개편하자는 얘기다. 벤처캐피털 TBT의 임정욱 대표는 미국 실리콘밸리 체류 경험을 소개하며 “미국은 비자제도가 유연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이민 변호사도 많았다”며 “능력 있는 이주민을 채용하는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선 주자들이 이민 정책을 적극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를 나온 송주영 씨는 “인구절벽은 가장 시급히 다뤄야 하는 문제인데, 양당 대선주자들의 공약에서 인구 문제 및 이민자 정책에 대한 제대로 된 긴 문장 하나 찾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원희룡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정책본부장은 2회 기사를 언급하며 “엄마 아빠가 어느 나라 사람이건, 비자가 있건 없건 아이는 학교에 가고 예방주사를 맞고 아프면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좋은 나라”라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고 밝혔다.○ 열띤 토론 촉발‘공존’ 시리즈는 포털 사이트와 SNS에서 이주민에 대한 열띤 토론을 촉발시켰다. 1회에 알려진 ‘백운동 신축 아파트 입주민’이라고 밝힌 한 독자는 “피자집, 네일아트 사장님 등이 모두 외국인인데 다 좋은 분들이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했다. 반면 한 누리꾼(ohyu****)은 “불법 체류자 아이들보다 자국민 아이가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지 말고 국내 노동자 임금을 향상시켜야 한다’(k1m4****), ‘미등록 아동의 체류 자격을 인정하면 이를 악용하는 외국인들이 폭증한다’(enef****)는 댓글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공존을 위한 상호이해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동관 이민정책연구원장은 “막연한 적개심을 없앨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상호 이해와 소통이 필요하다”며 “다문화는 갈등의 씨앗이 아니라 발전시켜야 할 자원이라는 점을 알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구절벽 시대, 공존 위한 이민정책 마련을”미등록 이주아동 체류자격 완화, 2025년 3월까지만 시행 ‘미봉책’외국인 아동 취학전 보육지원… 미등록 아동 방치 문제도 논의를 법무부가 20일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의 체류자격을 완화했지만 여전히 한시적으로 시행되는 ‘미봉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구절벽 시대, 이주민과의 공존을 위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민 정책의 큰 틀을 다시 짜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날 발표된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자격 완화 방안은 2025년 3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시행된다. 이때까지 국내 거주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대상이 될 수 없다. 초중고교에 재학 중이거나 고교를 졸업한 아동만 대상으로 한 점도 문제다. 한국어가 서투르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교에 늦게 들어가거나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이주아동도 많기 때문이다. 취학 전 아동을 위한 보육 지원책이 마련되지 않은 점도 한계다. 지금은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등록 외국인도 한국 국적이 아니면 보육료를 지원받지 못한다. 보건복지부는 보육비 지원 대상을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 제한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대상을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영아 경기이주아동보육네트워크 간사는 “세금을 내는 등록 이주민의 영·유아 자녀에게 보육비를 지원하지 않는 건 차별”이라며 “미등록 아동은 방치해도 되는지도 논의해야 할 때”라고 했다. 고영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7월 외국인 영·유아에게도 보육비를 지원하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이 안은 국회에 계류됐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출생등록제 시행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등록 이주아동을 출생등록하면 신분이 증명돼 어린이집 입소나 학교 입학, 예방접종 등 복지혜택을 수월하게 받을 수 있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출생등록제 도입 방침을 공식화했지만 법 제정, 시스템 마련 등을 거쳐 2024년 이후에나 시행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민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일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는 “이주민을 어떻게 차단하고 통제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주민과 어떻게 같이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QR코드를 스캔하면 ‘공존’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together_intro)로 연결됩니다. 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해안가의 칼바람을 호루라기 소리가 꿰뚫었다. 지난해 10월 25일, 해병대 교육훈련단 앞은 입소자 가족들로 가득했다. 윤대성 씨(20)는 스마트폰을 붙들고 있었다. 영상통화 화면엔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있었다. 영상통화가 끝나자 엄마 에코디르미야띠(에코·50) 씨는 아들 대성 씨를 꼭 안았다. ‘이런 날이 현실이 될 줄이야.’ 대성 씨는 한국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마치고 엄마의 나라인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인도네시아에선 지원자들만 군대를 간다. 대성 씨에게 군대는 필수 코스가 아니었다. 대성 씨는 한국인 아버지, 인도네시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인도네시아 국적을 취득하면 인도네시아에 정착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군대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 가는 군대, 멋있게 가자고 생각했죠.”(대성 씨) “다녀올게요!” 대성 씨는 교육훈련단 입구 속으로 훌쩍 사라졌다. 새빨간 바탕에 샛노란 글씨가 새겨진 간판 아래로. 간판의 문구는 ‘해병대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대성 씨는 속으로 외치지 않았을까. ‘진짜 한국인’은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 우리는 다중정체성 세대2000년대 초반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증가 등으로 국내 이주민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이 낳은 자녀들이 성인으로 자랐다. 군대를 가고, 취업을 준비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이민자 2세(한국인으로, 부모 중 1명 이상이 귀화자이거나 외국인)는 2020년 28만 명이었다. 2040년엔 2.5배로 뛸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을 한국계, 중국계 미국인이 이끌듯 한국을 인도네시아계, 스리랑카계 한국인들이 이끄는 날이 올까. 대성 씨는 2002년 경기 광명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광명시, 필리핀, 경기 안산시 등을 오갔다. 초등학교 때부터는 쭉 안산에서 자랐다. “대성이 어머니가 인도네시아분인 건 초등학교 2학년 운동회 때 알았어요. 어떤 애들은 놀랐는데요. 덤덤한 애들이 더 많았어요.” 초등학교 동창 이윤재 씨(20)가 말했다. 대성 씨가 손꼽는 ‘절친’이다. “다문화 아이라도 좋은 점이 있으면 그걸 보고 사귀어요. 대성이는 성격 좋고 분위기도 잘 띄워서 친해졌어요.” 대성 씨에게 변곡점은 중학교 3학년, 2017년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났다. 아버지는 아내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새 기회를 찾고 싶었다. 우선 대성 씨를 2018년 인도네시아로 보냈다. “대성이가 운동만 좋아하고 공부를 안 했어요. 한국은 경쟁이 너무 치열하니까 외국어라도 배우라고 먼저 보냈죠. 근데 대성이 누나 송이가 한국에서 대학을 가겠다고 해서 저랑 남편은 한국에 남게 됐어요.”(에코 씨) 대성 씨는 홀로 인도네시아 자와틍아주 스마랑으로 갔다. 인도네시아의 대표 무역도시 스마랑. 대성 씨는 무역도시의 국제학교를 택했다.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를 동시에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제 ‘안산 원일중 3학년 윤대성’은 ‘서머스타고 1학년 윤대성’이 되었다. “이슬람교인 애들도 있었어요. 처음 갔을 땐 새벽 5시 반에 기도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깬 적도 많아요. 라마단(이슬람 금식성월) 기간에 같이 금식도 해봤는데 재밌었어요. 케이팝이나 드라마를 아는 친구들이 한국을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덕분에 저도 인기 많았죠.” 선생님들은 대부분 터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기숙사엔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온갖 국적의 친구들이 있었다. 대성 씨는 이렇게 3년을 보내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소화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결합한 사업을 구상하는 청년이 됐다. 이른바 ‘다중정체성’ 세대다. 여러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고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잘 받아들이는 세대. “한국 친구들을 불러서 같이 사업할 거예요. 인도네시아에 케이팝 틀어주고 한국 연예인 사진을 걸어놓은 인기 음식점이 있거든요. 근데 사장이 중국인이에요. 한국인인 제가 떡볶이처럼 유명한 한국 음식으로 장사하면 더 잘되지 않을까요?”● 남다른 연애“화장품 원료의 성분까지 알아야 마케팅에서도 경쟁력이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대성 씨 누나 윤송이 씨(22)는 ‘K뷰티’ 전문가를 꿈꾼다. 피부가 나빠졌을 때 한국 화장품으로 나아진 경험 덕분이다. 지금은 한 대학 바이오화장품과에 다닌다. “우선 한국 화장품 회사에서 경험을 쌓을 거예요. 그 후에 한국 화장품 시장과 인도네시아 화장품 시장을 연결해 보고 싶어요.” 꿈을 이야기할 땐 똑 부러지지만, 연애를 할 땐 말 못 할 고민으로 끙끙 앓기도 한다. 4년 전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했을 때가 그랬다. 송이 씨는 외모나 말투 모두 평범한 한국인. 남자친구는 송이 씨가 이주민 2세란 걸 몰랐다.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추억을 더 많이 쌓기 전에…. 남자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우연히 고백의 기회가 왔다. “나 엄마랑 이모 결혼식에 참석하러 인도네시아에 가.” 송이 씨의 말에 남자친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가 인도네시아인이냐고. “응.” 이후 4년째 사랑을 키우고 있다. 송이 씨가 고민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같은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친구가 이주민 2세란 사실 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친구의 남자친구가 ‘우리 가족한테 네 엄마 한국 사람이라고 하라’고 했대요.” 송이 씨의 고민은 어릴 때부터 뿌리를 키웠다. 초등학생 때 한 또래 아이는 송이 씨를 놀렸다. “너 다문화잖아.”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다문화 가정 이야기가 나올 때 물었다. “송이 학생이 다문화 가정이죠?” 반 친구들의 시선이 쏠렸다. 송이 씨는 그 선생님이 미웠다. ‘굳이 내 이름을 언급해야 하나.’ 학교에서 비슷한 이주배경 친구들은 종종 이름을 잃었다. 선생님들은 이름 대신 이렇게 부르곤 했다. “야, 인도네시아!” “야, 중국!” 상처가 쌓이며 입은 닫혔다. “상처가 없었다면 저도 당당하게 말을 했겠죠. 움츠러드니까 바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하려 하고. 제가 그런 성격이에요.” 엄마 에코 씨는 송이 씨에게 고맙다. 아픔을 딛고 잘 자라줘서. 고등학생 때 용돈을 스스로 벌던 딸이다. 알아서 진로도, 대학도 정했다. 상처를 받은 적도 있지만 송이 씨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살아갈 생각이다. 친구들에겐 당연하지만 송이 씨에겐 당연하지 않은 일이다. 가족들이 인도네시아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송이 씨는 혼자서라도 한국에 남을 생각이다. “인도네시아는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고향으로 느껴지진 않아요. 저는 한국에서 사는 게 너무 좋아요.” 송이 씨와 대성 씨처럼 이주민 2세들은 이제 한국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아픔이 있지만 희망을 얘기한다. 한국 사회는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20년 뒤, 과연 70만 명의 ‘다중정체성 세대’는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 세계를 어떻게 바꿀까.한국 택한 이주배경 청년들2000년대 초반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증가 등으로 국내 이주민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이 낳은 자녀들이 성인으로 자랐다. 군대를 가고, 취업을 준비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이민자 2세(한국인으로, 부모 중 1명 이상이 귀화자이거나 외국인)는 2020년 28만 명이었다. 2040년엔 2.5배로 뛸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을 한국계, 중국계 미국인이 이끌듯 한국을 인도네시아계, 스리랑카계 한국인들이 이끄는 날이 올까. ● ‘다름’은 나의 힘이주민 2, 3세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며 자란다. ‘다름’은 이주민 2세가 성장하는 힘이 된다.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고 돕는다. 스리랑카계 한국인 서현식 씨(29)는 2016년 경기 안양 YMCA에 입사했다. 현재 시민사업부 팀장으로,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강연을 주관한다. 화상회의 플랫폼인 ‘줌(zoom)’ 활용법 강의는 직접 한다. 안양 YMCA의 이현주 아기스포츠단 원장은 현식 씨의 소통 능력을 칭찬했다. “유아부터 어머니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일하면서 모든 세대와 소통하는 유연함을 키웠더라고요.” 한 학부모는 현식 씨를 ‘까만콩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먼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어요. 자기소개도, 프로그램 설명도 선생님들 중 가장 똑 부러지게 해서 놀랐어요.” 현식 씨는 1993년 스리랑카 중남부 웰리마다시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스리랑카인이다. 2002년 아버지가 다니던 스리랑카의 한국 기업이 철수하며 가족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현지 국제학교를 다니던 현식 씨는 순식간에 ‘안산시 와동초 3학년’이 됐다. 당시 현식 씨가 다니던 학교엔 이주배경 학생이 거의 없었다. 지금의 안산과는 너무도 달랐다. “우리를 외계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아주 신기하게 쳐다봤어요. 쉬는 시간에 저를 보려고 교실 창문에 굉장히 많은 친구가 몰려들었죠.” 2002년 월드컵으로 생긴 ‘축구 붐’ 덕분에 현식 씨는 축구를 하며 친구를 사귀었다. 중학교 때 시작한 춤은 그를 ‘인사이더’로 만들었다. 현식 씨는 전문 크루에서 활동하며 지역, 학교 축제에 나가기도 했다. 현식 씨는 자신의 색다른 배경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살렸다. 고등학교 때는 경기차세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청소년 정책, 다문화 정책을 제안했다. “이주배경 학생도 한국 사회의 일원일 뿐이고,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 안 되잖아요.” 현식 씨는 2012년 신안산대에 입학해 전자정보통신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 때 다녀온 해외 봉사활동이 진로를 바꾼 계기가 됐다. 필리핀의 빈곤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6개월간 어울렸다. 본인도 선입견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쌍하니까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평등한 사람’으로 대하는 게 더 중요했어요. 돈을 많이 벌기보단 다양한 사람을 편견 없이 만나 소통하는 일을 하고 싶어졌어요.” 현식 씨의 동생 샤니 씨(26)도 편견을 씩씩하게 딛고 성장했다. 샤니 씨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건 일곱 살 때. 그때를 어렴풋하게 기억한다. 한국인 아버지와 할머니는 샤니 씨 손을 잡고 유치원을 찾았다. “외국인 아이는 안 돼요.” “한국인이에요. 내가 아빠고, 이분이 할머니예요.” “외국인 아이는 무조건 안 된다고 했대요. 길게 얘기도 못 했대요. ‘안 되니까 돌아가시라’고 했대요.”(샤니 씨) 결국 동네 한 어린이집만 샤니 씨를 안쓰럽게 여겨 받아줬다. “일곱 살이었는데 4~6세만 다니던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어요. 갈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죠.” 학창 시절 유쾌하지 않은 경험도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역사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샤니 씨를 갑자기 일으켜 세웠다. “한국사를 몰라도 되는 샤니가 98점을 받았어요. 본받아야 해요.” 샤니 씨는 수업 내내 기분이 나빴다. 수업 후 선생님을 붙잡았다. “저희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전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서 살았어요. 제가 왜 한국사를 몰라도 돼요?” 샤니 씨는 더욱 단단해졌다. 고교 졸업 뒤엔 바로 취업에 뛰어들었다. 제약회사, 물류회사를 거쳐 비영리 단체에서 일했다. 저소득층 한국인, 난민, 다문화 가정 등에 기업이 후원한 물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최근엔 경기 안양시의 한 병원에 취직했다. ‘싱글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해서다. 20대이지만 이미 개인연금에 가입했다. 월급의 절반은 저축하려 아낀다. “거실 하나, 방 하나 있는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 싶어요. 아파트 청약을 넣어서 독립할 생각이에요.” 남을 돕는 일은 계속하고 싶다. 스리랑카 이주민 상담을 하는 어머니처럼 신할리즈어(스리랑카 제1언어)를 더 배워 같은 일을 해볼 생각도 있다.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며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혹시 도와줄 수 있냐’고 하는 이주민들을 많이 봤어요. 스리랑카어를 배워두면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것 같아요.”● 그래도, 한국한국 사회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떠나는 이주 청년들도 있다. 이주민 2세 부디(가명·26) 씨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모두 안산에서 다녔다. 언어도, 문화도 한국이 익숙하다. 한국에서 평생 살 생각으로 한국 이름도 지었다. 부디 씨가 고교 1학년이 됐을 때 삶에 균열이 생겼다. 부모님이 갑자기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야 한다고 통보했다. 인도네시아에 계신 할아버지 지병이 악화돼 부양을 해야 했다. 미성년자였던 부디 씨는 부모님을 따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부디 씨에게 인도네시아는 외딴 세계였다. 인도네시아어를 부지런히 배웠지만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한국이 늘 그리웠다. 혼란스러운 고교 생활 끝에 결심했다. ‘한국 대학으로 가자.’ 부디 씨는 2019년 서울의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꿈에 그리던 한국이었지만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원룸을 겨우 구했다. 대학 등록금 외에도 월세, 생활비 등으로 매달 70만 원가량이 나간다. 하지만 부디 씨는 학생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규정상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 없다. 미래를 생각하면 더 힘들다. 취업에 성공해야만 취업비자를 받아 한국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취업의 길은 한국인 청년에 비해 더 좁다.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를 모두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임용시험은 외국인이 응시할 수 없어요. 계약직 교사도 한국인을 선호하더라고요. 안 되면 통역 일을 하려고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알아보고 있어요.” 특기를 살려 정보기술(IT) 기업에서도 일하고 싶다. 부디 씨는 초등학생 때 이미 간단한 게임을 만들었을 정도로 IT 실력이 뛰어나다. 부디 씨는 한국이 재능 있는 이주민 청년과 더불어 일할 방법을 찾아주길 고대한다. 정부와 기업이 채용의 문턱을 낮추면 다양한 끼와 자질로 기여할 준비가 돼 있다. 이주민 2세들은 이제 한국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이들은 학교의 울타리에선 몰랐던 사회를 알아간다. 현실을 더 날것으로 접한다. 아픔이 있지만 희망을 얘기한다. 한국 사회는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노력해야 해요. 지원만 바라고 있으면 안 돼요. 이런 노력을 제도가 뒷받침해 주면 더 좋고요.”(샤니 씨) “안산 밖에서도 이주민 2세들을 지원하는 센터나 기관이 늘고, 프로그램 질도 높아지면 좋겠습니다.”(현식 씨) 이들은 말한다. 공존은 존중에서 시작된다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20년 뒤, 70만 명의 국내 이주민 2세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 ▽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QR코드를 스캔하면 ‘공존’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로 연결됩니다.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해병대에 입대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남다른 연애와 결혼에 고민한다.성인이 된 한국 이주민 2세, ‘다중정체성 세대’가 공존으로 향한다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다양한 사진과 영상,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기사로 공존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인도네시아에서 대한민국 해병대로2021년 10월 25일. 해안가의 칼바람을 호루라기 소리가 꿰뚫었다. 해병대 교육훈련단 앞은 입소하는 이들과 가족들로 꽉 찼다. 아들과 부모들은 마스크를 쓴 채 서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윤대성 씨(20)는 그 순간까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스타그램 라이브 화면 건너엔 인도네시아의 풍경과 친구들이 있었다.드디어 인도네시아 친구들과의 이별 인사가 끝났다. 그제야 대성 씨 어머니 에코디르미야띠(에코) 씨(50)가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이런 날이 현실이 될 줄이야.’에코 씨가 그리지 못한 오늘이었다. 대성 씨는 몇 년 전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인도네시아에선 지원자들만 군대를 간다. 떠났던 아들은 해병대를 가겠다며 다시 한국으로 왔다.“대성이가 고등학교 때 인도네시아로 간 뒤엔 계속 거기서 살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군대는 가야 한다’ ‘나이 들어서 가면 힘드니 대학 전에 해병대를 가겠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대성 씨에겐 군대는 필수 코스가 아니었다. 대성 씨는 한국인 아버지, 인도네시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계 한국인이다.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면 인도네시아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는 왜 굳이 해병대를 택했을까.“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군대는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 가는 군대, 멋있게 가자고 생각했죠.” (대성 씨)“대성이는 진짜 사나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되고 싶어 했어요.” (에코 씨)“대성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군대 간다고 했어요. 항상 남자로서 인정받고 싶어했죠.” (누나 송이 씨)대한민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진짜 사나이가 되려고. 대성 씨가 해병대를 가는 이유다. 인도네시아에서 바삐 살면서도 잊지 않았다. ‘난 한국인이다. 군대에 가야 한다.’“다녀올게요!”대성 씨는 교육훈련단 입구 속으로 훌쩍 사라졌다. 새빨간 바탕에 샛노란 글씨가 새겨진 간판 아래로. 간판의 문구는 ‘해병대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대성 씨는 속으로 외치지 않았을까. ‘진짜 한국인’은 이곳에서 시작된다고.내 고향은 안산, 그리고 스마랑대성 씨는 2002년 경기 광명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광명시, 필리핀, 안산시 등을 오갔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때부터는 쭉 안산시에서 있었다. 안산이 그의 첫 고향이다.“대성이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분인 건 초등학교 2학년 운동회 때 알았어요. 어떤 애들은 놀라서 대성이한테 어머니가 외국인이었냐고 물었죠. 하지만 덤덤한 애들이 더 많았어요.”초등학교 동창 이윤재 씨는 대성 씨가 손꼽는 ‘절친’이다. 안산 친구들은 대성 씨가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도 수시로 연락했다. “어릴 때부터 ‘다문화 아이’라고 일부러 멀리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좋은 점이 있으면 그걸 보고 사귀죠. 대성이도 그래서 친해졌어요.”대성 씨에게 변곡점은 중학교 3학년, 2017년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났다. 아버지는 아내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새 기회를 찾고 싶었다. 우선 대성 씨를 2018년 인도네시아로 보냈다.“대성이가 운동만 좋아하고 공부를 안 했어요. 한국은 경쟁이 너무 치열하니까 외국어라도 배우라고 먼저 보냈죠. 근데 대성이 누나 송이가 한국에서 대학을 가겠다고 해서 저랑 남편은 한국에 남게 됐어요.” (에코 씨)대성 씨는 홀로 인도네시아 자와틍아주 스마랑으로 왔다. 인도네시아의 대표 무역도시다. 대성 씨는 무역도시의 국제학교를 택했다.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를 동시에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제 ‘안산 원일중 3학년 윤대성’은 ‘서머스타고 1학년 윤대성’이 되었다.“이슬람교인 애들도 있었어요. 처음 갔을 땐 새벽 5시 반에 기도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깬 적도 많아요. 라마단(이슬람 금식성월) 기간에 같이 금식도 해봤는데 재밌었어요. K팝이나 드라마를 아는 친구들이 한국을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덕분에 저도 인기 많았죠.”서머스타고 선생님들은 대부분 터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기숙사엔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온갖 국적의 친구들이 있었다. 대성 씨는 이렇게 3년을 보내며 인도네시아어와 영어에 능숙해졌다. 다양한 문화를 배웠다.“원래 인도네시아 말은 거의 못해서 맨 땅에 헤딩했어요. 매일 애들이랑 인도네시아어랑 영어로 말하니까 빨리 늘더라고요.”대성 씨는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 영어에 능통한 인재로 돌아왔다. 이른바 ‘다중정체성’ 세대다. 여러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다.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잘 받아들이는 세대다.다중정체성은 꿈을 위한 ‘스펙’이다.“돈을 모으면 한국 친구들을 불러서 같이 사업할 거예요. 인도네시아에 K팝 틀어주고 한국 연예인 사진을 걸어놓은 인기 음식점이 있거든요. 근데 사장이 중국인이에요. 한국인인 제가 떡볶이나 불닭 볶음면처럼 유튜브에서 유명한 한국 음식으로 장사하면 더 잘 되지 않을까요?”‘다중정체성’ 세대한국다문화교육연구학회에 따르면 다중정체성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인종과 문화가 만들어낸 여러 요소들을 수용하면서 형성된 정체성이다.2000년대 초반,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증가 등으로 국내 이주민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이 낳은 자녀들이 성인으로 훌쩍 자랐다. ‘이주민 2세’가 학교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나온다.이민자 2세(부모 중 1명 이상이 귀화자이거나 외국인)는 2020년 28만 명이었다. 2040년엔 2.5배로 뛴다. 미국을 한국계, 중국계 미국인이 이끌 듯, 한국을 인도네시아계, 스리랑카계 한국인들이 이끄는 날이 올까.독백과 고백 사이“화장품 원료의 성분과 제조과정을 알아야 기획이나 마케팅에서도 경쟁력이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대기업에 당연히 가고 싶지만 중소기업부터 취업해서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대성 씨 누나 윤송이 씨(22)는 인도네시아에 한국 화장품을 알리는 ‘K뷰티’ 전문가를 꿈꾼다. 피부가 나빠졌을 때 한국 화장품으로 치료하며 K뷰티의 꿈을 키웠다. 그래서 한 대학 바이오화장품과에 다닌다.“우선 한국 화장품 회사에서 경험을 쌓을 거예요. 그 후에 한국 화장품 시장과 인도네시아 화장품 시장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송이 씨의 또 다른 꿈은 한국에서 계속 살기. 친구들에겐 당연하지만 송이 씨에겐 당연하지 않은 일이다. 가족들이 어머니의 고향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 홀로서기가 힘들지라도 송이 씨는 혼자라도 남을 생각이다.“인도네시아는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고향이라고 느껴지진 않아요. 제가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한국에서 안 태어났으면 슬펐을 정도로 한국에서 사는 게 너무 좋아요.”꿈을 이야기할 땐 똑 부러진다. 하지만 연애할 땐 말 못할 고민으로 끙끙 앓기도 한다. 4년 전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했을 때가 그랬다. 송이 씨는 외모나 말투 모두 평범한 한국인. 남자친구는 송이 씨가 이주민 2세란 걸 몰랐다. ‘우리 엄마, 인도네시아 사람이야.’ 이 말은 계속 독백으로만 머물렀다.“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추억을 더 많이 쌓기 전에…. 남자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우연히 고백의 기회가 왔다. “나 엄마랑 이모 결혼식에 참석하러 인도네시아에 가.” 송이 씨의 말에 남자친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가 인도네시아인이냐고. 송이 씨는 맞다고 했다. 그렇게 송이 씨는 4년 간 사랑을 키우고 있다.송이 씨가 고민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같은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친구가 이주민 2세란 사실 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3년이나 사귄 사이었는데도 그렇게 남이 됐다. “남자친구가 자기 가족한테 ‘네 엄마 한국 사람이라고 하라’고 강요했대요.” 그래서 더욱 송이 씨는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다. 독백과 고백 사이를 수없이 오갔다.송이 씨의 고민은 어릴 때부터 뿌리를 키웠다. 학교 반 친구들에게 당부할 때도 있었다. “우리 엄마 외국인인 거 비밀로 해줘.”송이 씨는 자라며 자꾸 그렇게 비밀이 생겼다. 아픈 경험이 알알이 마음에 박혔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다문화 가정 이야기가 나올 때 물었다. “송이 학생이 다문화 가정이죠?” 반 친구들의 시선이 송이 씨에게 쏠렸다. 송이 씨는 그 선생님이 너무 미웠다. ‘그냥 넘어가면 좋겠는데 굳이 내 이름을 언급해야 하나.’ ‘다문화라고 각인시켜야 하나.’학교에서 비슷한 이주배경 친구들은 종종 이름을 잃었다. 선생님들은 이름 대신 이렇게 부르곤 했다. “야, 인도네시아!” “야, 중국!”상처가 쌓이며 입은 닫혔다. “상처가 없었다면 저도 당당하게 말을 했겠죠. 움츠러드니까 바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하려 하고. 제가 그런 성격이에요.”엄마 에코 씨는 송이 씨에게 고맙다. 아픔을 딛고 잘 자라줘서. 고등학생 때 용돈을 스스로 벌던 딸이다. 알아서 진로도, 대학도 정했다.딸에게 비밀인 엄마,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학부모. 쉽지 않은 길이었다. 냉대의 시선이 많았다. 한국인 남편과 사랑에 빠져 합법적으로 한국에 왔을 뿐인데 말이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지금까지 송이의 초, 중,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학교를 자주 찾아갔어요. 친구들을 수시로 집으로 불러 맛있는 걸 해줬어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 말이 이해가 안 되면 남편에게 바로 전화해 선생님에게 바꿔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 선생님은 ‘인도네시아 음식을 싸 와 달라’고 했다. 에코 씨는 부지런히 볶음면을 만들어 송이 씨를 통해 보냈다. 송이 씨에겐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다.아빠 형관 씨(58)는 아내를 더 아끼고 존중하려 했다. 그게 최고의 교육이라고 여겼다.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기 시작할 땐 엄마 이름을 아빠 이름보다 먼저 외우게 했다.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집 사람이 애들을 정감 있게 잘 키워줘서 항상 고마워요.”다름은 나의 힘‘다름’을 받아들이는 경험은 이주민 2세가 성장하는 힘이 된다. 다른 사람, 다른 사회를 잘 이해한다. 공감한다. 그리고 돕는다.‘2016년 신안산대 전자정보통신학과 졸업, 2016년 안양 YMCA 입사. 현 시민사업부 팀장.’ 스리랑카계 한국인 서현식 씨(29)의 스펙이다. 안양시민에게 기후, 환경, 생태 관련 강연과 소모임을 마련해준다. 줌(ZOOM) 활용법, 사진 동영상 편집 강의는 직접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거리두기 시대, 사람 사이 거리를 좁히는 기술을 가르친다. 그의 지향은 ‘마을 공동체 회복’. 시민들이 공동체 가치에 주목하고 그 가치를 지키는 삶을 꿈꾼다. 지금 당장의 목표는 ‘내적 성장’이다.“우선 30대 중반까지는 경험으로 내적 성장을 하고 싶어요. 어차피 80, 90대까지 살 텐데 내적으로 성장한다면 30대 중반 이후부턴 알아서 필요한 돈을 벌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은 ‘집 사야 한다’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현식 씨는 안양 YMCA의 핵심 인재다. 관리자급 중에선 가장 젊다. 안양 YMCA의 이현주 아기스포츠단 원장은 현식 씨의 소통 능력을 칭찬했다. “유아부터 어머니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일하면서 모든 세대와 소통하는 유연함을 키웠더라고요.”현식 씨가 가르치던 한 학생의 학부모는 현식 씨를 ‘까만콩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먼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자기소개도, 프로그램 설명도 선생님들 중 가장 똑 부러지게 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한국인 아버지와 스리랑카인 어머니는 현식 씨를 1993년 스리랑카 중남부 지역 웰리마다(WELIMADA) 시의 한 산간 마을에서 낳았다. 2002년 아버지가 다니던 스리랑카의 한국 기업이 철수하며 가족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현식 씨 나이 9세 때였다. 현지 국제학교를 다니던 현식 씨는 순식간에 ‘안산시 와동초등학교 3학년’이 됐다. 당시 현식 씨가 다니던 학교엔 이주배경 학생이 거의 없었다. 지금의 안산과는 너무도 달랐다.“우리가 외계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아주 신기하게 쳐다봤어요. 쉬는 시간에 교실 창문과 문에 저를 보려고 굉장히 많은 친구가 몰려들었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저도 그런 상황이 신기했죠.”2002년 월드컵 이후 분 ‘축구 붐’ 덕분에 현식 씨는 몸으로 부딪히며 친구를 사귀었다. 중학교부터 시작한 춤은 그를 ‘인사이더’로 만들었다. 현식 씨는 전문 크루로 활동하며 지역, 학교 축제에 나가기도 했다.현식 씨는 자신의 배경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살렸다. 고등학교 때는 경기차세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청소년 정책, 다문화 정책을 제안했다. “이주배경 학생도 한국 사회의 일원일 뿐이고,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 안 되잖아요.”현식 씨는 2012년 신안산대에 입학해 전자정보통신학을 전공했다. 정보기술(IT)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IT 기업에 취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학 때 참여한 해외 봉사활동이 진로를 바꾼 계기가 됐다. 필리핀의 빈곤 지역에서 6개월간 봉사하며 어려운 사람들과 어울렸다. 대화하며 그들의 상처에 다가갔다. 아픔을 공감하게 됐다. “돈을 많이 벌기 보단 다양한 사람을 편견 없이 만나 소통하는 일을 하고 싶어졌어요.”현식 씨가 한국 사회를 돕는 봉사자로 성장한 건 어머니 서아이라 씨(50) 영향도 있었다. 서 씨는 안산 외국인주민상담지원센터에서 스리랑카 이주민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서 씨는 이주민들을 돕고 있지만, 이주민들이나 아이들에게 늘 얘기한다. 남들이 우릴 도와주길 바라지 말라고. 스스로 열심히 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늘 ‘해봐’ ‘안 해보고 포기하지마’라고 말해요. 현식이가 힘들었을텐데 노력을 많이 했죠.”현식 씨의 동생 샤니 씨(25)도 어릴 적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 있다. 샤니 씨가 한국에 첫 발을 디딘 건 일곱 살 때. 그 때를 어렴풋하게 기억한다. 한국인 아버지와 할머니는 샤니 씨 손을 잡고 유치원을 찾았다. “외국인 아이는 안 돼요.” “한국인이에요. 내가 아빠고, 이 분이 할머니에요.”“외국인 아이는 무조건 안 된다고 했대요. 길게 얘기도 못했대요. ‘안 되니까 돌아가시라’고 했대요.”(샤니 씨)결국 동네 한 어린이집만 샤니 씨를 안쓰럽게 여겨 받아줬다. “일곱 살이었는데 4~6세만 다니던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어요. 갈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죠. 아직도 이주 아동을 거부하는 어린이집들이 많다니 신기하네요.”한국에서의 출발부터 장애물이 있었지만 샤니 씨는 상처만 받고 있지 않았다. 당당하게 맞섰다.고등학교 2학년 때 역사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샤니 씨를 갑자기 일으켜 세웠다. “한국사를 몰라도 되는 샤니가 98점을 받았어요. 본받아야 해요.” 샤니 씨는 당황했다. 수업 내내 기분이 나빴다.수업 종료 종이 울리자마자 교실을 나가는 선생님을 붙잡았다. “저희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저 어렸을 때부터 한국 살았어요. 제가 왜 한국사 몰라도 돼요?”샤니 씨는 고교 졸업 후 바로 취업했다. 제약회사, 물류회사를 거쳐 비영리 단체에서 일했다. 저소득층 한국인, 난민, 다문화 가정 등에 기업이 후원한 물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주배경 청소년의 ‘꿈 찾기’를 돕는 강연을 열기도 했다.최근엔 경기 안양시의 한 병원에 취직했다. ‘싱글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해서다. 독립 준비도 시작했다. 20대이지만 이미 개인연금에 가입했다. 월급의 절반은 저축하려 아낀다. 수익이 안정적인 종목 중심으로 주식 투자도 한다. “거실 하나, 방 하나 있는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 싶어요. 지금은 부모님이랑 살지만 아파트 청약을 넣어서 독립할 생각이에요.”그래도 앞으로 남을 돕는 일은 계속 하고 싶다. 스리랑카 이주민 대상 통역과 상담을 하는 어머니처럼 싱할라어(스리랑카 제 1언어)를 더 배워 같은 일을 해볼 생각도 있다.“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며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혹시 도와줄 수 있냐’고 하는 이주민들을 많이 봤어요. 저절로 마음이 움직이더라고요. 스리랑카 말은 내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단… 엄마 보니까 통역 요청이 너무 많아 거절할 때가 있을 정도더라고요. 배워두면 전망이 좋을 거 같아요.”샤니 씨의 이름은 ‘아름답다’는 싱할라어 ‘프샤니’에서 따왔다. 외가에서 지어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덕분에 ‘샤니빵’이란 별명도 있지만 그래도 전 제 이름이 좋아요.”그래도, 한국한국 사회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떠나는 이주 청년들도 있다. 이주민 2세 부디 씨(가명·26)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안산에서 모두 다녔다. 언어도, 문화도 한국이 익숙하다. 한국에서 평생 살 생각으로 한국 이름도 지었다. 부디 씨가 고교 1학년이 됐을 때 삶에 갑자기 균열이 생겼다. 부모님이 갑자기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야 한다고 통보했다. 인도네시아에 계신 할아버지 지병이 악화돼 부양을 해야 했다. 미성년자였던 부디 씨는 부모님을 따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등학생 부디 씨에게 인도네시아는 외딴 세계였다. 인도네시아어를 부지런히 배웠지만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한국이 늘 그리웠다.혼란스런 고교 생활 끝에 결심했다. ‘한국 대학에 돌아가자.’ 부디 씨는 2019년 서울의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꿈에 그리던 한국이었지만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원룸을 겨우 구했다. 대학등록금 외에도 월세, 생활비 등으로 매달 70만 원가량이 나간다. 하지만 부디 씨는 학생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규정상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없다. 미래를 생각하면 더 힘들다. 취업에 성공해야만 취업비자를 받아 한국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취업의 길은 한국인 청년에 비해 더 비좁다.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를 모두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임용고시는 외국인이 응시할 수 없어요. 계약직 교사도 한국인을 선호하더라고요. 안 되면 통역 일을 하려고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알아보고 있어요.” 특기를 살려 정보기술(IT) 기업에서도 일하고 싶다. 부디 씨는 초등학생 때 이미 간단한 게임을 만들었을 정도로 IT 실력이 뛰어나다. 부디 씨는 한국이 재능 있는 이주민 청년과 더불어 일할 방법을 찾아주길 고대한다. 정부와 기업이 채용의 문턱을 낮추면 다양한 끼와 자질로 기여할 준비가 돼 있다. 이주민 2세들은 이제 한국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이들은 학교의 울타리에선 몰랐던 사회를 알아간다. 현실을 더 날 것으로 접한다. 아픔이 있지만 희망을 얘기한다. 한국 사회는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노력해야 해요. 지원만 바라고 있으면 안 돼요. 이런 노력을 제도가 뒷받침 해주면 더 좋구요.”(샤니 씨)“안산 밖에서도 이주민 2세들을 지원하는 센터나 기관이 늘고, 프로그램 질도 높아지면 좋겠습니다.” (현식 씨) 이들은 말한다. 공존은 존중에서 시작된다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20년 뒤, 70만 명의 국내 이주민 2세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동행: 그렇게 같이 살기로 했다’는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남건우 기자▽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어엿한 한국인이 될래요”… 고려인 4세 이고리의 꿈“저는 잘할 것 같아요. 저 자신을 믿어요.” 지난해 12월, 경기 안산시 선일중학교의 한 교실. 선생님과 고등학교 진학 상담을 마친 허가이 이고리(16)가 당차게 말했다. 이고리는 특성화고가 아니라 일반계고를 지망했다. 이고리가 1지망으로 정한 학교는 성적이 중상위권인 학생들이 많이 진학한다. 이고리의 목표는 한국외국어대나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합격. 이고리는 러시아어 통역사로 활약할 꿈을 꾼다. 이고리는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고려인 4세다. 세 살이 되던 2009년, 엄마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왔다. 해외동포 자녀는 특성화고를 선호하는 편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취업을 빨리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고리는 애초부터 일반계고에 가기로 마음먹었다.담임 선생님은 이고리에게 경쟁이 덜한 다른 학교를 추천했었다. 이고리가 한국인 아이들에게 밀려 내신에서 불리할 수 있어서다. 이고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학습 분위기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 원하는 대학에 꼭 합격하고 싶었다. 이고리는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을까. 일감 끊길 걱정 없는 직장을 찾을 수 있을까. 할아버지와 엄마가 그토록 원하는 ‘코리안 드림’을 이뤄 더 나은 삶을 향한 ‘사다리’에 오를 수 있을까.○ 한국인의 조건이고리는 꿈에 부풀다가도 외삼촌을 생각하면 멈칫한다. 외삼촌은 우즈베키스탄 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나와 한국에서 러시아어 통역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외국인 입국이 줄어 일감이 끊겼다. ‘대학을 나온 삼촌도 힘든데, 대학조차 안 나오면 더 힘들겠구나.’ 불안정한 체류 자격도 ‘이방인’이란 꼬리표였다. 지난해까지 이고리 같은 중앙아시아 국적 고려인 동포는 한국 고교나 대학을 졸업해야 재외동포(F4)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고리는 아직 고교 졸업 전이라 엄마의 가족으로서 방문동거(F1) 비자를 받아 지냈다. 이 비자로는 체류 기간을 1년마다 연장받아야 했다. 이고리에게 올해 선물같이 체류 자격이 주어졌다. 법무부가 이달 3일부터 국내 초중고교에 다니는 미성년 고려인 동포에게 F4 비자를 부여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고리는 여러 편견과 싸워야 한다. “넌 지금 군대 안 가도 되는데 왜 비자 바꾸려고 하냐.” “외국인 전형으로 대학 쉽게 가서 좋겠다.” 친구들은 질투 반, 부러움 반이 담긴 농담을 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이고리는 굳게 결심한다. ‘반드시 어엿한 한국인이 돼야지.’ 이고리는 F4 비자를 받아 병역의무가 생기면 꼭 해병대에 가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가족 소망 짊어진 이고리세살때 엄마따라 한국으로… 미성년 고려인 동포에게올해부터 F4비자 체류자격, 주변 우려에도 일반고 진학대학졸업하고 반듯한 직장… 미래의 땅에 자리잡고 싶어○ 차가운 ‘할아버지의 땅’이고리의 할아버지인 고려인 2세 김게오르기 씨(65)도 손자의 고민을 알고 있다. 평범한 한국인으로 좋은 직장을 가지려는 손자의 분투를 이해한다. 게오르기 씨도 고향에선 ‘엘리트’였지만 한국에선 바닥부터 시작했다.게오르기 씨는 이고리가 한국에 오기 1년 전인 2008년 한국 땅을 밟았다. 51세, 남들은 은퇴를 꿈꿀 나이였다. 하지만 아내 이로자 씨(62)가 당뇨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치료가 어려웠다. 게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주민에게 배타적으로 변해 갔다. 이고리 가족은 이방인처럼 소외됐다. 그는 ‘할아버지의 땅’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더 고향 같은 한국으로. 타슈켄트국립사범대 역사학과 졸업장, 교장까지 지낸 교육자로서의 커리어, 방 4개짜리 아파트, 자동차, 별장까지 모두 가족을 위해 버렸다. 첫 일터는 부산의 조선소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3시간, 20kg에 가까운 장비를 들고 일했다. 매일 밤 손이 저렸다. 끙끙 앓다 몇 달 만에 일을 그만뒀다. 부족한 한국어 실력으로는 변변한 일을 구하기 힘들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선 펜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기 와선 돌과 쇳덩이를 들었어요. 식용 개 축사에서 일하던 시절은 죽을 때까지 못 잊습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든 건 무너진 자존심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이주노동자 김 씨’가 됐다. 조선소를 그만두고 일했던 총각무 농장에서 농장 주인이 퍼붓는 욕설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할아버지의 땅’이라는 가족들 말을 듣고 자랐다.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국이 우리의 미래다.” 딸 옥사나(42) 씨에게도 ‘미래의 땅’ 한국은 녹록지 않았다. 옥사나 씨는 우즈베키스탄 현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그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처럼 몸이 고된 일뿐이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옥사나 씨는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F4 비자를 받았다. 취업은 가능하지만 청소 등 단순노무는 할 수 없었다. 방문취업(H2) 비자를 받으면 이런 일을 구할 수 있지만 본국의 가족을 데려올 수 없다. F4 비자로 이고리와 함께 한국에 온 옥사나 씨는 인력사무소 수십 곳을 돌아야 했다. 사정을 딱히 여긴 안산의 한 공장 대표가 몰래 일을 줬다. 단순작업에 임금도 낮아 한국인들은 기피하는 일이었지만 감사했다. 옥사나 씨는 출입국사무소에서 미등록 노동자 단속을 나왔을 땐 다른 외국인 동료들과 창고에 숨었다. 적발되면 비자가 취소돼 출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다. 어느 날 상사가 그의 엉덩이를 쓱 만지고 지나갔다. 그는 당장 쫓아가 서툰 한국어로 소리 질렀다. “나도 열심히 일해요. 내가 외국에서 왔다고 이렇게 해요? 나도 아빠 있어요. 경찰에 신고해요?”‘한국인의 조건’을 갖출 기회가 없진 않았다. 옥사나 씨는 법무부의 ‘사회통합프로그램(KIIP)’을 이수하면 영주(F5)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456시간 동안 교육을 받고 시험에서 일정 점수를 따면 된다. 낮엔 공부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며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장 생계가 급했다. “일하고, 이고리 밥 주면 주말에 공부할 시간이 딱 4시간 있었어요. 밤에 일하고 집에 와서 밤새 공부해서 이고리가 어렸을 때 혼자 컸어요.” 네 가족은 입국한 뒤 5년이 넘도록 원룸살이를 했다. 옥사나 씨가 공장 동료였던 한국인 남편과 2013년 재혼한 뒤 분가했지만 지금도 월세로 산다. 이고리 방에 있는 가구는 이고리 무릎에도 닿지 않는 작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다. 그래도 이고리는 긍정한다. “바닥에서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 ‘진짜 책상’에 앉게 됐을 때 얼마나 더 감사하겠어요.”○ 26년을 이방인으로 살다26년째 한국에서 이방인처럼 살고 있는 치메도르치 어티겅도야 씨(60) 가족도 비슷하다. 모국에서 좋은 학벌과 직업을 가졌어도 한국에선 저소득층을 못 벗어난다. 어티겅도야 씨는 1996년 세 살, 열세 살이던 두 딸을 두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몽골에서 사범대를 졸업하고 대학 강사로 일했지만 월급만으로는 두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가 힘들었다. 어티겅도야 씨는 가난을 탈출하려고 관광비자로 한국에 왔다. 산업연수생 제도는 있는 줄도 몰랐다. 그는 서울 광진구 미싱 공장에 취업했다. 월급은 몽골로 부치는 생활비와 월세로 다 나갔다. 관광비자 연장을 위해선 3개월마다 몽골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비행기표 살 여유가 없었다. 결국 미등록 신분이 됐다. 매일 머리를 맞으며 일했다. 공장 앞 공중전화에서 두 딸과 통화하는 시간이 유일한 낙이었다.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시비를 거는 한국인 동료들의 텃세가 심했다. 그는 6개월 만에 공장을 나왔다. 도움을 찾던 그를 구원한 건 역설적이게도 남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월 40만 원을 받으며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에서 통역을 시작했다. 2년간 전국을 돌며 임금 체불을 겪는 외국인 노동자, 남편에게 맞은 결혼이주 여성들의 통역을 맡았다. 1999년 선교회가 재한몽골인학교를 세우면서 그도 선생님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안정적으로 일할 곳이 생기자 비행기표 살 돈을 모아 몽골로 떠났다. 관광비자를 재발급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관광비자 연장을 위해 3개월마다 입국과 출국을 반복했다. 그러다 2005년 특정활동(E7) 비자를 받게 됐다. 재한몽골인학교가 공식 학교로 인가받으면서 그도 외국인 전문인력으로 인정받게 됐다. 한국에 산 지 10년 만에야 안정적으로 머물게 됐다. 미등록 대물림 위기 어티겅도야26년전 지하방 미등록자로 시작, 교사된 어티겅도야이번엔 딸-손자-손녀가 ‘불법체류자’ 될 위기에미싱공장-통역-교사 거쳐 전문인력인정 E7비자 받아美서 석사 받고 한국에 온 딸, 신고없이 알바했단 이유로직장 잃고 비자까지 만료… 불안정-저소득 신분 악순환어티겅도야 씨는 F5 비자를 취득할 생각도 했지만 소득이 발목을 잡았다. F5 비자를 취득하려면 연 소득이 전년도 1인당 국민총소득(GNI) 이상이어야 한다. 지난해 기준 약 3788만 원이다.○ 3대째 대물림되는 미등록 굴레지난해 12월 어티겅도야 씨는 서울 광진구의 한 지하철역 근처 골목을 굽이돌아 걸었다. 15분가량을 걷자 그의 옥탑방이 나타났다. 계단은 난간을 잡지 않고서는 오르기 힘겨울 정도로 가팔랐다. 옥탑방 천장은 바람이 많이 불면 깨질 듯 흔들린다. 그래도 어티겅도야 씨에게 이 집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살게 된 ‘집다운 집’이다. “옛날엔 지하방 원룸 살았어. 냄새도 엄청 났고 벌레들이 기어 다녔어. 어떨 때는 벌레가 귀로 들어가기도 했어.”‘미등록에서 E7 비자’로, ‘지하방에서 옥탑방’으로, ‘미싱 공장에서 몽골학교’로…. 어티겅도야 씨는 피나는 노력으로 체류 자격을 얻어냈다. 집도, 직장도 치열하게 지켰다. 하지만 어티겅도야 씨의 얼굴에 진 그늘은 여전하다. 26년간 겪은 불안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첫째 딸 자야(가명·39) 씨와 손자손녀 때문이다. 자야 씨는 몽골 현지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CALMUS)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정착한 엄마와 여동생을 따라 2016년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제대로 공부해 세계에 알리겠다는 꿈이 컸다.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미국 유학까지 마친 자야 씨는 예원예술대 석사 졸업 뒤 2년간 한국에서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하루에 세 곳씩 지원서를 넣었다. 직군도 가리지 않았다. 자야 씨는 몽골어, 중국어, 영어, 한국어까지 4개 언어에 능통하다. 하지만 외국인인 그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올해 초에야 스마트폰을 수출하는 무역회사가 그를 채용했다. 그도 외국인 전문인력이 받는 E7 비자를 받게 됐다. ‘안정적으로 국내에 머물 수 있게 되나.’꿈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자야 씨가 E7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출입국사무소에 과거 소득 자료를 제출할 때였다. 사무소 직원은 자야 씨가 과거 유학(D2) 비자를 받은 채 아르바이트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 자야 씨는 D2 비자로 아르바이트를 하면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는 걸 몰랐다. 결국 자야 씨는 첫 출근도 못 한 채 직장을 잃었다. 그의 비자가 만료되면서 남편과 두 아이의 동반(F3) 비자까지 잃었다. 자야 씨 부부와 아이들 모두 미등록 위기에 처했다. 그는 체류 자격을 얻으려 행정소송 중이다. 어티겅도야 씨의 시름도 깊어졌다. 손자 유루티츠(‘우주’라는 뜻의 몽골어)는 세 살 때 한국에 와 어느덧 아홉 살이다. 손녀는 2020년 한국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 “애들은 한국이 자기 나라나 다름없어. ‘나는 몽골 안 가고 싶어요. 한국에 있고 싶어요’라고 해. 매일 밤 하나님한테 기도해. ‘욕심 안 부릴 테니까 우리 딸이랑 손주 한국에 있게 해 주세요.’”○ ‘저수지 아이들’을 벗어날 수 있을까안산에서 다문화교회를 운영하는 박천응 목사는 이고리, 유루티츠 같은 이주민 자녀들을 ‘저수지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물려받아 한국 사회의 저층에 고인다는 의미다. “부모 세대는 본국에서 유능해도 한국어나 체류 자격 문제로 대부분 단순 노동에 종사합니다. 경제적 문제로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죠. 공단 지역 노동자 자녀는 공단 인력의 ‘저수지’에 고여요. 부모에 이어 공단 노동자가 되죠.” 안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도 저임금 일자리만 바라보며 ‘사다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걱정했다. “고려인 아이들에게 ‘뭐 하며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공장에서 일하며 돈 벌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들은 부모를 보며 꿈을 키우는데, 마땅한 롤 모델이 없는 거죠.” 이주배경 아동들이 저수지 아이들로 남지 않으려면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무부는 중앙아시아 출신 미성년자 고려인 동포들에게 F4 비자를 주기로 하면서 국내 초중고교에 재학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미취학 아동, 경제·언어적 문제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은 제외됐다. 중앙아시아와 달리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 동포에게는 조건 없이 F4 비자가 발급된다.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의 김준태 서울상담소장은 “국내 고용 상황이나 행정 편의 때문에 국적에 따라 동포 비자를 달리 주는 것은 차별”이라고 했다.자녀들만큼은 저수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애쓴 게오르기 씨와 어티겅도야 씨의 바람은 이뤄질까. 지난해 11월 안산의 한 식당에서 가족들과 모인 게오르기 씨는 담담히 말했다. “자식들 편히 살면 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내 딸이 잘살기 위해서는 이고리가 공부 잘하고 좋은 직장을 가져야 돼.” 이고리만은 원하는 일을 하며 꿈을 이루기를. 그게 이고리 가족이 ‘사다리’를 오를 마지막 기회다. 이고리는 일반고 진학을 시작으로 통역사의 꿈을 향해 간다. 미국 유학까지 했지만 취업이 좌절된 자야 씨처럼 ‘사다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이고리는 마음이 흔들릴 때 자기 이름의 뜻을 떠올린다. ‘이고리’는 그리스어로 ‘지킨다’는 의미다. “제 가족을 지키는 강한 사람이 될 거예요.” 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QR코드를 스캔하면 ‘공존’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3)로 연결됩니다. 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할아버지-엄마에겐 차가웠던 ‘기회의 땅’16세 소년은 꿈꾼다… 한국서 따듯한 일상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다양한 사진과 영상,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기사로 공존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저에게 맞는 과를 찾고 싶어요. 그렇다고 제가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지난해 12월 어느 날, 경기 안산시 선일중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원서를 쓴 뒤 진로 상담을 하던 허가이 이고리(16)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아졌다. 평소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달랐다.이고리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4세다.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장점을 살려 통역가를 꿈꾼다. 목표 대학도 정했다. 한국외대나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러시아어를 잊지 않으려 집에선 엄마와 러시아어로 대화한다.하지만 이런 꿈도 외삼촌을 생각하면 사그라진다. 외삼촌은 우즈베키스탄 현지 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나와 한국에서 러시아어 통역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외국인 입국이 급감하며 일감이 끊겼다. 지금 택배 배송을 하고 있다.‘대학을 나와도 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는 게 어려운데 졸업장조차 없으면… 나도 삼촌처럼 될 수 있겠구나.’이고리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꼭 한국의 좋은 대학에 가리라고 마음먹는다.“할 수 있어.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하잖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구의 6분의 1을 네 땅으로 만들 수 있어.”상담을 해주던 임미은 선생님은 이고리를 격려했다. 하지만 이고리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이고리가 과연 좋은 대학에 가 일감 끊길 걱정 없는 직장에 취직할 수 있을까.이고리 같은 해외동포 자녀는 특성화고 진학을 선호하는 편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다. 특성화고 졸업 뒤엔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 수 있다.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실습 중심인 특성화고를 택하는 아이들도 있다.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주로 그렇다.선일중에서도 지난해 이주배경 학생 52명 중 24명은 특성화고를 지망했다. 특성화고 지망생은 예년보다 줄긴 했다. 경기도 내 일반고도 학비가 무상이 됐기 때문이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망설이던 이주배경 학생들도 일반고에 지원하게 됐다.“이주배경 아이들은 고등학교 등하교 교통비조차 부담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죠. 일단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외국인전형으로 대학 가긴 비교적 수월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해요.”(임미은 선생님)이고리는 그럼에도 일반고에 가기로 일찌감치 결심을 굳혔다. 이고리가 1지망으로 쓴 고등학교는 중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이 지망하는 학교다. 사실 담임선생님은 다른 학교를 추천했었다. 이고리가 내신에서 불리해질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고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학습 분위기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다.이고리는 꼭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 엄마 김 옥사나 씨(42)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다. 엄마는 이고리에게 늘 말한다.“너는 힘든 일 하며 살지 말아라.”담임인 장군휘 선생님은 이고리의 타고난 언어 감각과 승부욕을 칭찬했다. 언젠가 그 자질이 빛을 발할 것으로 믿는다.“한국도 단일민족국가에서 다인종국가로 변화하고 있어요. 앞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게 되겠죠. 이고리의 이중언어 능력, 활발한 성격은 선입견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14년에 걸친 ‘한국인 되기’이고리는 세 살 되던 해인 2009년 엄마를 따라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올해 13년째를 맞는다. 가족들과는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한국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러시아어가 어색하다. 가족들이 놀릴 정도다.“이고리, 러시아 발음 어색해졌네.”이고리는 겉보기엔 한국인이지만 법적 한국인은 아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엄마는 해외동포가 받을 수 있는 F4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뒤 한국인 아버지와 재혼했다. 엄마가 재혼한 뒤 한국에서 낳은 동생도 한국인이다.“전 우리 집에서 돌 같은 존재였어요. 아버지와 동생은 한국인이죠. 엄마도 동포비자가 있어 한국인이나 마찬가지고요. 저만 외국인이었죠.”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고리 같은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 4세는 체류 자격이 불안정했다.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F4비자를 받으려면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나와야 했다. 이고리는 이 조건을 채우지 못해 10년 넘게 어머니의 동반 가족 자격(F1비자)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F1비자는 취업 등 경제 활동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고리는 1년 마다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비자를 갱신해야 했다.그러던 그에게 올해 선물같이 체류 자격이 주어졌다. 법무부가 이달 3일부터 국내 초·중·고교를 다니는 중국 및 고려인 동포의 미성년 자녀들에게도 F4비자를 부여하기로 했다. F4 비자로는 이고리가 원하던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다. 체류 기간도 3년마다 연장할 수 있다. 기존에는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에게만 나이와 상관없이 F4가 주어졌다. 이고리와 같은 중앙아시아 국적의 미성년 고려인은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F4비자가 나왔다. 법무부는 러시아 국적 동포에게는 러시아의 경제규모가 크고 신규 불법체류자 발생 비율이 낮다는 이유로 F4비자를 주고 있다.이고리는 다행히 체류 자격을 얻었지만 운이 좋은 경우다. 미취학 아동이나 언어 또는 경제적 문제로 학교 밖으로 밀려난 이주 아동들은 이 혜택을 못 받는다. 법무부는 체류 자격을 주며 조건을 달았다. ‘국내 초·중·고교에 재학해야 F4비자를 받는다.’안산시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의 김영숙 센터장도 이 점을 안타까워한다.“한국어 실력 부족으로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교를 그만둔 학교 밖 고려인 청소년들이 정말 많아요. 똑같은 동포인데 국적에 따라 체류 자격을 달리 주는 것은 차별이에요.”법무부는 F4비자를 부여할 중앙아시아 국적 고려인 범위를 점차 넓혀 나가겠다고 밝혔다.이고리는 간신히 체류 자격을 얻었지만 여러 편견과 싸워야 한다. 법적 한국인은 아니기 때문이다.“야, 넌 군대 안 가도 되는데 왜 비자 바꾸려고 하냐.”친구들은 질투 반, 부러움 반이 담긴 농담을 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이고리 마음에는 다짐이 생긴다.‘반드시 떳떳한 한국인이 되고 말아야지.’이고리는 F4비자를 받아 병역의무가 생기면 꼭 해병대에 갈 생각이다.이고리의 외할아버지인 고려인 2세 김 게오르기 씨(65)도 손자의 고민을 알고 있다. 평범한 한국인으로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을 꾸리려는 손자의 분투를 이해한다. 게오르기 씨도 고향에선 ‘엘리트’였지만 한국에 온 뒤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게오르기 씨는 이고리가 한국에 오기 1년 전인 2008년 한국 땅을 밟았다. 51세, 남들은 은퇴를 꿈꿀 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아내 이 로자 씨(62)가 당뇨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제대로 치료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오르기 씨는 먼저 한국으로 유학 간 아들의 생계도 돕고 싶었다.결국 큰 결심을 했다. 타슈켄트 국립사범대 역사학과 졸업장, 교장까지 지낸 교육자로서의 커리어, 방 4개짜리 아파트, 자동차, 별장까지 모두 가족을 위해 버렸다. 그렇게 한국으로 떠나왔다.‘할아버지의 땅’에서 그의 첫 일터는 부산의 한 조선소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3시간 동안 20kg 가까운 장비를 들고 일했다. 매일 밤 손이 저렸다. 게오르기 씨는 끙끙 앓다 몇 달 만에 일을 그만 뒀다. 하지만 부족한 한국어로는 변변한 일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쌀 농장, 간장 공장, 건설 현장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우즈베키스탄에선 펜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와선 돌과 쇳덩이를 들었어요. 식용 개 축사에서 일하던 시절은 죽을 때까지 못 잊습니다.”육체적 고통보다 더 그를 힘들게 한 건 무너진 자존심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이주노동자 김 씨’가 됐다. 조선소 일자리를 그만두고 일했던 총각무 농장에서는 농장 주인이 퍼붓는 욕설을 견뎌야 했다.“한국어를 못 하니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한국에 오기 전엔 내가 고려인,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고 나니 아니었어요.”막상 한국에 오니 철저한 이방인임을 실감한 게오르기 씨. 그래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한국에서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어.’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할아버지의 땅’이라는 가족들의 말을 듣고 자랐다.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가르치곤 했다. “한국이 우리의 미래다.”딸 옥사나 씨에게도 ‘미래의 땅’ 한국은 녹록지 않았다. 옥사나 씨는 우즈베키스탄 현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한국어가 능숙지 않은 그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처럼 험한 일뿐이었다.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F4비자 소지자는 경제 활동은 가능하지만 청소, 포장, 주방보조 같은 단순 노무에는 종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력사무소를 수십 군데 돌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혼자 아이를 키우는 그의 사정을 딱히 여긴 안산의 한 공장 대표가 몰래 일을 줬다. 옥사나 씨는 3년간 제품에 필름 부착하는 단순 작업을 하며 지냈다. 출입국사무소에서 미등록 노동자 단속을 나왔을 땐 창고에 숨어야 했다. 적발되면 비자가 취소돼 출국해야 했기 때문이다.그 시절은 아직도 그에게 상처로 남아 있다. 어느 날 공장에서 상사가 그의 엉덩이를 쓱 만지고 지나갔다. 당장 쫓아가 소리를 질렀다.“나도 열심히 일해요. 내가 외국에서 살았다고 이렇게 해요? 나도 아빠 있어요. 경찰에 신고해요.”게오르기 씨와 옥사나 씨 부녀는 있는 힘을 다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어린 이고리를 먹이고 입히고, 로자 씨 병원비를 대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네 가족은 입국한 뒤 5년이 넘도록 원룸살이를 했다. 옥사나 씨가 공장 동료였던 한국인 남편과 2013년 재혼한 뒤로는 분가를 했지만 월세로 산다.이고리는 집에서 공부할 공간도 변변찮다. 이고리의 방엔 책상과 침대를 놓을 공간이 없다. 이고리의 무릎 높이에도 미치지 않는 작고 낮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다. 집에서 공부할 공간이 없어 이고리는 시험 기간에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한다. 그래도 이고리는 긍정한다.“오히려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요. 매일 바닥에서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 ‘진짜 책상’에 앉게 됐을 때 얼마나 더 감사하겠어요.”#1. 한국어가 서툴러 출신국 경력을 살리지 못한 채 단순 노무에 종사한다.#2. 열악한 노동 환경에 지쳐 한국어를 배우지 못한다.#3. 한국어가 부족하니 더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이런 악순환을 이고리 가족은 충분히 경험했다. 열심히 노력해도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날 ‘사다리’가 없었다.기회가 없진 않았다. 옥사나 씨는 법무부의 ‘사회통합프로그램(KIIP)’을 이수하면 영주비자(F5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어, 한국문화, 한국사회 이해 교육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이수하기엔 버거웠다. 465시간가량 교육을 받고 시험에서 일정 점수를 취득해야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낮엔 공부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며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장 생계가 너무 급했다.“일하고, 이고리 밥 주고, 그러면 주말에 공부할 시간 딱 4시간 있었어요. 그래서 공부 잘 못 했어요. 4단계까지는 합격했는데 5단계에서 떨어졌어요. 5단계 붙으려고 야간에 일하고 집에 와서 밤새 공부했는데…. 그래서 이고리가 어렸을 때 혼자 컸어요.”(옥사나 씨)김영숙 센터장은 이주민들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고려인들은 현지 동화 정책으로 한국어가 서투르고 한국문화에 익숙지가 않아요. 좋은 일자리를 잡기가 힘들죠. F5비자를 받으려면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는 고려인이 대부분입니다.”고려인 비중이 높은 안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도 사다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걱정했다.“고려인 아이들에게 앞으로 ‘뭐 하며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일을 보며 꿈을 키우는데, 마땅한 롤 모델이 없는 것이죠.”지난해 11월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 동생 수빈이까지 온 가족이 모여 외식을 했다.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져 목소리를 높였다.“난 결국 성공했어요. 아들도 잘 살고 있고, 딸도 한국인 남편이랑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있잖아.”게오르기 씨에게 성공은 그런 것이다. 자식들이 ‘온전한 한국인’이 돼 한국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그가 13년 동안 부드럽던 교사의 손을 굳은살이 알알이 박인 노동자의 손과 바꿔 얻어낸 성공이다. 그에게 손자 이고리는 성공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다.“아들, 딸이 편히 살면 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내 딸이 잘 살기 위해서는 이고리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직장을 가져야 돼.”(게오르기 씨)“이고리는 대학교를 꼭 한 개는 가야 해. 하나라도 붙어서 공부해야 해. 그래야 힘든 일 안해.”(로자 씨)“나중에 우리 아들 통역 일 같은 거 하면 얼마나 좋아요. 제가 회사 다니면서 얼마나 힘들었어요. 우리 아들 대학 공부해서 나중에 성공하면 좋잖아요.”(옥사나 씨)이고리만은 단순 육체노동이 아닌 ‘편한 일’을 하기를. 성공하기를. 그게 이고리 가족이 ‘사다리’를 오를 유일한 기회다. 가족들 말을 듣던 이고리가 말했다.“제가 우리 가족의 마지막 남은 희망인 거죠.”26년을 이방인으로 살다26년간 3대가 한국에서 살았다여전히 딸과 손자, 손녀는 추방 위기이고리의 가족처럼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3대가 한국에서 성실하게 살아도 불안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저소득층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국에서는 학사, 석사를 취득한 엘리트여도. 한국에서 20년 넘게 사고 없이 열심히 일해도….26년째 이방인처럼 한국에 살고 있는 치메도르치 어티겅도야 씨(60) 가족이 그렇다. 1996년 몽골에서 한국에 와 가정을 이뤘다. 그는 다행히 체류 자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딸, 손주들은 모두 미등록(불법체류) 신분이 될 위기다.어티겅도야 씨는 지난해 10월 28일에도 어김없이 출입국사무소를 찾았다. E7비자 연장을 위해서다. 매년 찾는 곳이지만 사무소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부터 손이 떨린다.“10월 30일이 지나면 내가 불법 되는 거야. 출입국사무소는 너무너무 무서운 곳이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갈 때마다 벌벌 떨면서 가.”(어티겅도야 씨)함께 온 몽골학교 선생님 2명까지 무사히 비자 기간 연장을 마쳤다. 이들은 출입국사무소 밖으로 빠져나와 비로소 손을 마주 잡고 환하게 웃었다.어티겅도야 씨는 1996년 세 살, 열세 살이던 두 딸을 두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몽골에서 사범대를 졸업하고 대학 강사로 일했다. 하지만 월급만으로는 두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가 힘들었다. 산업연수생 제도도 있었지만 문이 좁았다. 어티겅도야 씨는 가난을 탈출하려 무작정 관광비자만 믿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미싱공장에 취업했다. 번 돈은 월세와 두 딸을 위해 몽골로 부친 생활비로 다 나갔다. 관광비자 연장을 위해선 3개월마다 몽골로 돌아가야 했지만 비행기표 살 여유가 없었다. 결국 관광비자를 연장 못 해 미등록 신분이 됐다. 매일 머리를 맞으며 일해야 했다. 공장 앞 공중전화에서 두 딸과 통화하는 시간이 유일한 낙이었다. 어티겅도야 씨는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시비를 거는 한국인 동료들의 텃세를 버티지 못하고 6개월 만에 공장을 나왔다.일할 곳을 찾던 그를 구원한 건 역설적이게도 남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월 40만 원을 받으며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에서 통역 봉사를 시작했다. 2년 동안 선교회의 권성희 목사와 전국을 돌았다. 임금체불을 겪는 외국인 노동자, 남편에게 맞은 결혼이주 여성들의 통역을 맡았다.“당시 이주노동자 10명 중 9명은 임금체불을 겪었어요. 어티겅도야 본인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주민 신분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도왔죠. 한국어를 못 하는 이주노동자를 대신해 공장까지 찾아갔어요. 임금을 주지 않는 공장주와 싸웠어요.”(권 목사)정의감 강한 그에게 미등록이란 신분은 늘 목에 걸린 가시였다. 1999년 선교회가 재한몽골인학교를 세우면서 그도 선생님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안정적으로 일할 곳이 생기자 몽골로 떠나 관광비자를 재발급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그렇게 3개월마다 입국과 출국을 반복하다 2005년 E7비자를 받게 됐다. 재한몽골인학교에서 외국인 선생님으로 일하며 비자 발급 대상인 외국인 전문인력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산 지 10년 만에 어렵사리 미등록 신분을 벗어났다.어티겅도야 씨는 F4비자는 받았지만 이보다 더 안정적인 영주권을 취득할 생각도 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소득이다. F5(영주)비자를 취득하려면 연 소득이 전년도 1인당 국민총소득(GNI) 이상이어야 한다. 2021년 F5비자를 신청할 경우 연 소득은 3만1881달러(약 3788만 원)를 넘어야 한다.이주민들은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단순 노무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영주비자 발급에 필요한 소득 요건을 갖추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몽골학교를 세운 서울 광진구 나섬교회의 유해근 목사는 어티겅도야 씨가 안정적인 신분을 갖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몽골학교 선생님 중 한국에 들어온 지 가장 오래됐고, 한국어가 유창해 가장 영주권을 딸 가능성이 높은 분이에요. 하지만 교사 월급으로 영주비자가 요구하는 소득 요건을 맞출 수 없죠.”대물림되는 미등록 굴레지난해 12월, 비자 갱신 이후 한 달여 만에 만난 어티겅도야 씨는 왼쪽 발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넘어져 왼쪽 네 번째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했다.서울 지하철역 광나루역에서 대로 사이 골목으로 굽이돌아 15분 정도 걸어 그의 옥탑방에 도착했다. 계단은 난간을 잡지 않고서는 오르기 힘겨울 정도로 가팔랐다.어티겅도야 씨는 학교에 출근을 했다가 손녀까지 어린이집에서 하원시켜 오는 길이었다. 그는 깁스한 발을 절뚝이며 옥탑방 계단을 힘겹게 올랐다.옥탑방 외벽은 초겨울 찬바람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헐거운 틈 사이로 바람이 새고, 파이프가 얼어 따뜻한 물이 잘 안 나올 때도 있다. 바람이 많이 불면 천장이 깨질 듯 흔들린다. 그래도 어티겅도야 씨에게 이 집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살게 된 ‘집 같은 집’이다.“16평 정도 될까. 그래도 남편이랑 살기에 넓어. 방도 세 개야. 저쪽 방은 손주 놀이방이야. 옛날엔 지하방 원룸 살았어. 냄새도 엄청 났고 벌레들이 기어 다녔어. 어떨 때는 벌레가 귀로 들어가기도 했어.”미등록에서 E7비자로, 지하방에서 옥탑방으로, 미싱공장에서 몽골학교로. 어티겅도야 씨는 피나는 노력과 인내로 체류 자격을 얻어냈다. 하지만 어티겅도야 씨의 얼굴에 진 그늘은 여전하다. 자신이 26년간 겪은 불안과 고통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첫째 딸 자야(가명·39)와 손자, 손녀 때문이다.자야 씨는 몽골 현지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CALMUS)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한국에 정착한 엄마와 여동생을 따라 2016년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제대로 공부해 보겠다는 꿈이 컸다.“K팝, K스타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잖아요.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공부해서 나중에 몽골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그대로 접목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죠.”미국 유학까지 마친 자야 씨는 석사 졸업 뒤 2년간 한국에서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하루에 세 곳씩 지원서를 넣었다. 무역, 마케팅, 통역 등 직군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인인 그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올해 초에야 스마트폰을 수출하는 무역회사가 그를 채용했다. 이제 외국인 전문인력이 받는 E7비자를 받을 자격이 됐다. 안정적으로 국내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야 씨는 이제야 몽골, 미국,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두루 섭렵한 인재로 인정받는 순간이 오나 싶었다.하지만 꿈은 순간 물거품이 됐다. 자야 씨가 E7비자를 발급 받으려고 출입국사무소에 과거 소득 자료를 제출할 때였다. 사무소 직원은 자야 씨가 D2비자를 소지한 채 아르바이트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 D2비자 소지자는 단순 아르바이트도 당국에 신고해야 하는데 신고 없이 일한 점이 불법이란 설명이었다.결국 자야 씨는 첫 출근도 못한 채 직장을 그만뒀다. 그의 비자가 만료되면서 남편과 두 아이의 동반비자(F3)까지 박탈됐다. 자야 씨 부부와 아이들 모두 미등록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는 현재 체류 자격을 얻으려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이 나라에 해 안 끼치고 합법적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미등록이 안 되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는데….”딸에 이어 손자와 손녀까지 미등록 위기에 처하며 어티겅도야 씨의 시름도 더 깊어졌다. 자야 씨가 행정소송에서 패하면 비자를 연장 받지 못한다. 손주들도 몽골로 가야 한다.손자 유루티츠(우주라는 뜻의 몽골어)가 특히 걱정이다. 유루티츠는 세 살 때 한국에 와 어느덧 아홉 살이 됐다. 손녀는 2020년 한국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애들은 한국이 자기 나라나 다름없어. 자기 엄마랑 얘기할 때 ‘나는 몽골 안 가고 싶어요. 한국에 있고 싶어요’라고 한대. 그래서 매일 밤 제가 하나님한테 기도해요. ‘하나님, 너무 욕심 안 부릴 테니까 우리 딸이랑 손주 2, 3년 만이라도 한국에 있게 해 주세요’라고.”저수지를 벗어나 헤엄칠 수 있을까국내 이주배경 아동들이 한국 사회의 ‘하류’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한국 정부도 미등록 아동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해 미등록 이주아동이 일정 요건을 갖추면 특별 체류를 허가하겠다고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20년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강제퇴거를 중단하고 구제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뒤다.하지만 유루티츠는 미등록 신분이 되더라도 구제받을 수 없다. 구제책은 한국에서 태어나 15년 이상을 국내에서 체류하며 초등학교를 졸업해야 적용된다. 게다가 2025년 2월까지만 한시적으로 시행된다.국가인권위원회는 이 구제책에 대해 “2만 명으로 추산되는 미등록 이주아동 중 500명 이하 소수의 이주아동만 구제할 뿐”이라고 평가했다.시민단체와 법조계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안산 원곡법률사무소의 최정규 변호사는 정부가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국내에서 출생했든 중도입국 아동이든 본인 의지와는 관계없이 미등록 신분이 됐다는 점은 같습니다. 이는 출생지로 차별을 하는 셈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며 받는 상처와 혼란을 생각해야 합니다.”안산에서 다문화교회를 운영하는 박천응 목사는 이고리, 어티겅도야 씨의 손주들 같은 이주가정 자녀들을 ‘저수지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부모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사회의 저층에 고인다는 의미다.“이주배경 아이들의 부모님 세대는 본국에서 유능했어도 한국어나 체류 자격 문제로 대부분 단순 노동에 종사합니다. 경제적 문제로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죠. 공단 지역 노동자들의 자녀는 공단 인력의 저수지예요. 부모에 이어 공단 노동자가 되는 악순환에 빠지는 거죠.”이고리의 고등학교 진학, 자야 씨의 대학원 석사 취득. 이 모두 저수지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셈이다.이고리는 이제 꿈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하고 있다. 일반고 진학을 시작으로 대학을 나오고 통역사가 될 것이다.석사학위가 두 개나 있고 미국 유학까지 했지만 취업이 어려웠던 자야 씨처럼 사다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고리는 자기 이름의 뜻을 생각한다. ‘이고리’는 그리스어로 ‘지킨다’는 의미다. 엄마와 가족들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해지고 싶다.“뭔가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전 제 가족을 지키는 강함을 가진 사람이 될 거예요.”공존 - 네번째 이야기 : 나는 인도네시아계 한국인입니다 1월 19일 공개이고리처럼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군대는 가야지”라고 말하며 해병대에 간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청년이 있다. 갓 스무 살, 남들은 피하지 못해 안달인 군대를, 그것도 해병대를 왜 자원해서 가려고 했을까.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동행: 그렇게 같이 살기로 했다’는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남건우 기자▽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미등록 아이가 있는데 받아줄 수 있나요?” “미등록이 뭐예요?” “부모님이 불법 체류하는 분의 아이요.” “어휴, 저희는 안 돼요.” 인도네시아인 부부가 한국에서 낳은 조나단(가명·6)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어린이집을 가지 못했다. 국내에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미등록 이주아동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비자 갱신에 실패하면서 영문도 모른채 미등록 신분을 물려받았다.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증명하기 어려운 ‘투명인간’이 된 셈이다. 조나단은 미등록 신분 탓에 어린이집도, 문화센터도, 그 어디에도 가기 힘들었다. 조나단에겐 경기 수원시의 두 평(약 7m²) 남짓한 원룸이 거의 유일한 세계였다. 조나단이 자라며 집은 점점 좁게 느껴졌다. 조나단이 돌이 지났을 무렵 엄마 와티(가명·39) 씨는 어쩔 수 없이 조나단을 데리고 뒷산으로, 시장으로 외출을 시작했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웠다. 미등록 아동은 병원 치료조차 거부당할 수 있어 걱정이 컸다. “어디를 데리고 가든 다칠까 봐 겁이 났어요. 비자 만료 후엔 보건소에서 예방 접종조차 거부당했거든요.”○ 조나단의 두 평 세계 와티 씨는 아이를 언제까지 방치할 순 없었다. 아이가 만 세 살이 지난 2019년 말 와티 씨 부부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내년 봄에 돌아가 애를 적응시켜 2학기부터 어린이집에 보내야지.’ 비행기편을 알아보고 짐도 쌌다. 그런데 이듬해 초 돌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었다. 부부는 방역이 불안한 모국으로 아들을 보내기가 두려웠다. 코로나19가 야속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생계까지 어려워졌다. 일용직 노동자인 남편은 월급이 일정치 않았다. 와티 씨도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조나단을 맡길 어린이집이 없으니 난감했다. 2019년 겨울, 식당 청소 일을 구한 적은 있다. 근무시간은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식당이 문을 열기 전이라 조나단을 데려가 일할 수 있었다. 새벽부터 겨울옷으로 꽁꽁 싸맨 조나단을 유모차에 태우고 일터로 향했다. 걸어서 30분 거리를 찬바람 맞으며 오가면서도 일감이 있어 행복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세가 심해져 이마저도 그만둬야 했다. 생계를 이으려면 조나단을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집에서 인도네시아 음식을 만들어 이주민들에게 팔기 시작했지만 생활비는 여전히 부족하다. 어린이집이 조나단을 받아줄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한국인 아동이 많은 어린이집은 여지를 안 주는 편이다. 학부모들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다. 더군다나 경기 수원시 이주아동은 비자가 있든 없든 보육비를 전혀 지원받지 못한다. 부모가 보육료 전액을 내야 한다. 어린이집은 이주노동자 부모들의 일자리가 불안정하다는 점을 안다. 보육료가 밀릴까 봐 걱정돼 입소를 거부하는 것이다. 수원어린이집협의회 측은 “수원시청이 외국인 아동을 전산에 등록해야 입소할 수 있다. 미등록 아동은 단체 상해보험 가입도 안 돼 혹시라도 다치면 보상을 못 받는 점도 부담”이라고 했다.돌고 돌아 안산 밖엔 답이 없다미등록 이주아동, 어린이집-학교서 받고 진학-비자 상담 선생님들도 있어 돌아와○ 이주 속의 이주 “미등록 이주아동을 받아주는 어린이집이 안산에 있대요.” 조나단을 거부한 어린이집이 10곳이 넘었을까. 조나단을 안타깝게 여긴 수원의 한 교회 교사가 지난해 와티 씨에게 안산행을 제안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원으로 이주해 겨우 정착했는데….’ 이주에 이은 이주는 버거웠다. 와티 씨는 수원에서 쌓아온 걸 모두 버려야 했다. 미등록인 조나단을 선뜻 받아준 병원, 육아용품을 물려주던 집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그래도 와티 씨는 5년째 살던 수원을 떠날 용기를 냈다. 조나단을 위해서. 다행히 안산의 한 어린이집이 그해 5월 조나단을 받아주기로 결정했다. 조나단 부모의 여권과 조나단의 병원 출생증명서만 확인하고 입소를 허락했다. 어린이집 전체 아동의 90% 이상이 이주 배경 아동이어서 별다른 선입견이 없었다. 보육료를 미납한 외국인 부모들을 독려해 본 경험도 있었다. 안산의 이러한 보육 환경 뒤엔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있었다. 안산시는 2018년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자체 예산으로 등록 외국인에게 보육비를 주기 시작했다. 보육비 지원 덕에 안산 어린이집들은 이주아동들을 수월하게 받게 됐다. 경험이 쌓이면서 이주민 학부모들의 자녀 보육료가 밀릴 것이란 선입견도 깨졌다. 와티 씨는 이사까지 열흘이 남았는데도 일단 등원을 시작했다. 조나단 손을 잡고 수원에서 안산까지 지하철과 도보로 1시간씩, 왕복 2시간을 오갔다. 조나단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곤 근처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제가 좀 길치거든요. 새로운 집과 어린이집 근처 길을 영상으로 찍어서 외웠어요.” 와티 씨는 등원과 하원을 매일 반복하기 힘겨웠지만 뿌듯했다. 조나단은 새로운 한국어 단어와 표현을 금방 배워오곤 했다. 엄마와 헤어질 때도 떼쓰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네시아어로 이렇게 힘줘 말했다. “엄마, 나 너무 빨리 데리러 오지 마. 나 7시간 정도는 있어야 해.” 안산에 정착하는가 싶었다. 조나단이 어린이집을 한 달 다녔을 무렵, 또 위기가 찾아왔다. 지난해 여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안산 어린이집마저 등원이 중단됐다. 맞벌이 부모 등 특수한 경우에만 아이를 돌봐주는 긴급 보육이 시작됐다. 어린이집에선 긴급 보육을 신청하려면 부모의 재직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비자가 만료돼 일용직으로 일하는 조나단 아빠는 재직증명서를 낼 수 없었다. 매월 소득이 일정치 않으니 월급 명세서도 내질 못했다. 게다가 와티 씨는 둘째를 임신했다. 입덧이 심해졌다. 병원 진단서까지 받아 어린이집에 냈다. ‘제발, 잠시만이라도 아이를 받아주세요.’ 간절한 마음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 매뉴얼을 따라야 했어요. 여긴 코로나 확진자가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 (시 측에) 저희만 봐달라며 (입소를 허용)할 수가 없었어요.”(안산 어린이집 원장)여섯살 조나단-열여섯 아딜벡한국이 자신의 집이라는 조나단어린이집 찾아 수원서 안산으로 이주청주로 이사갔던 아딜벡, 다시 유턴 ○ 언어를 잃다조나단은 수원에 이어 안산의 원룸에 다시 고립됐다. 성인 네 명이 앉으면 꽉 차는 공간. 조나단은 먹고 자는 건 물론이고 공부와 놀이까지 이곳에서 다 해결해야 한다. 친구는 결국 엄마뿐이다. 와티 씨는 조나단이 수원에서보다 더 걱정됐다. 한국어 실력이 제자리걸음도 아닌, 뒷걸음질이기 때문이다. 원래 조나단은 인도네시아어로는 말이 많은 아이다. 주변 이웃들이 ‘짹짹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다. 하지만 놀이터에서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면 섣불리 다가가질 못한다. 조나단 가족을 돕고 있는 수원 교회의 인도네시아인 목사 아구스(가명) 씨도 이 점을 심각하게 여긴다. 한국어는 한국에서 살기 위한 기본 중 기본이기 때문이다. “조나단이 여섯 살인데 한국어 수준은 두 살 정도로 보여요. 단어들만 말해요.” 엄마마저 한국어를 거의 못해 악순환이다. 조나단은 엄마의 서툰 한국어를 듣고 자랄 수밖에 없다. 갈 곳이 없다 보니 사회성도 떨어진다. 조나단은 때때로 화를 못 참고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애들은 화가 나면 울거나 떼를 쓰기 마련이지만 조나단은 어른들의 화난 표정을 따라 한다. 조나단이 한국을 떠나 인도네시아로 가면 모든 게 해결될까. 조나단은 단 한 번도 인도네시아를 가본 적이 없다. “조나단,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로 와.”(조나단 할아버지) “제 집은 한국이에요. 인도네시아 안 가요.”(조나단) 조나단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영상으로만 만나봤다. 많게는 이틀에 한 번 인도네시아어로 통화한다.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조나단은 분명히 선을 긋는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와티 씨는 굴레를 언제 벗어날지 알 수 없다. 방역 여건을 생각하면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기도 어렵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말을 배우고 친구를 사귈 시간을 놓쳐버린다. 미등록 아동을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법무부는 지난해 4월 “국내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거주하고 국내 중·고교를 다닌 아동에게 체류를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2025년 2월까지만 시행된다. 조나단은 여섯 살. 9년을 채우고 나면 2031년이 된다. 제도가 종료된 지 한참 뒤일 것이다. 조나단은 지난해 11월 말 간신히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했다. 부모가 코로나19 백신 접종 증명서를 제출해 등원 허가를 받았다. 잠시 구제는 받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임시로 허가를 받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보육을 보장하는 제도는 여전히 없다.○ 안산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안산으로 모여드는 이주민은 조나단 같은 영유아만이 아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누르가셰프 아딜벡(16)은 카자흐스탄에서 왔다. 아홉 살 때인 2015년, 고려인 3세인 어머니를 따라 안산에 왔다. 카자흐스탄 경제가 악화돼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딜벡 가족은 4년 만에 아버지 직장을 따라 안산시에서 충북 청주시로 이사했다. 아딜벡은 안산에 남으려면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주민이 많은 안산을 떠나 한국인이 많은 곳에서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딜벡이 다니던 안산 선일중은 이주배경 학생이 전체의 50%를 넘는다. 하지만 청주의 학교에선 한 학년에 서너 명 정도뿐이다. “처음에 애들이 엉덩이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거는 거예요. 카자흐스탄에선 절대 남자들끼리 밀접 접촉을 안 하거든요. 안산에선 한국 애들도 그런 장난 안 쳐요. 우리가 싫어하는 걸 아니까요.” 아딜벡은 문화적 차이에 당황했다. 성적도 갑자기 떨어졌다. 청주 학교에서 본 첫 중간고사 점수는 평균 60점대였다. ‘원래 반에서 3등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는데….’ 아딜벡은 정신이 번쩍 들어 공부에 매달렸다. 다행히 이듬해에는 평균 80점대 후반까지 점수를 끌어올렸다. 이번엔 고등학교 진학이 문제였다. 아딜벡은 카자흐스탄에서 증권사 애널리스트였던 아버지처럼 금융계 진출을 꿈꾸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식 공부를 시작할 정도로 금융에 관심이 많다. 경영과 금융에 특화된 특성화고 진학이 목표다. 하지만 청주에선 이런 특성화고를 찾을 수 없었다. 진로나 비자 문제를 상담할 곳이 없는 점도 난관이었다. 안산의 선일중엔 다문화부가 따로 있었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선생님이 비자 문제를 상세히 안내해줬다. 다른 선생님들도 이주배경 학생들 처지를 워낙 잘 이해해 ‘맞춤형 진로 상담’을 해주곤 했다. 동네엔 고교 진학을 조언해줄 고교생 이주배경 선배들도 많았다. 하지만 청주에선 이 모든 걸 아딜벡이 알아서 해야 했다. ‘안산밖에 답이 없다.’ 아딜벡 가족은 결국 1년도 채 되지 않아 안산으로 돌아왔다. 여전한 냉대에 좌절하는 ‘그들’안산, 이주민 가족의 보육 환경 월등 경기도 차원 지원 늘리려하자 거센 반발 日-獨은 국적 상관없이 아동 복지 혜택 ○ 섬을 징검다리로안산의 이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수월하게 건너가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시도도 있었다. 2019년 경기도의회에서는 ‘경기도 이주아동 조례안’이 발의됐다. 조례안은 이주아동을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18세 미만의 사람’으로 규정해 혜택을 보장했다. 조례안이 통과됐다면 조나단도 수원 어린이집에 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례안을 주도한 김현삼 의원은 물론이고 100명이 넘는 경기도의원들에게 ‘문자 폭탄’이 쏟아졌다. 외국인 반대 단체들이었다. 안산에서는 10차례가 넘는 반대집회가 열렸다. 김 의원 집 앞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반대 단체분들은 이주민들이 아이를 앞세워 한국에 들어오고, 한국인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더라고요.” 김 의원은 ‘실패한 조례안’을 씁쓸하게 회상했다. 1980, 90년대 반월공단에서 일했던 그는 공단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주노동자가 부족해 주문량을 생산해 내질 못한다고 사장님들이 하소연합니다. 내국인은 채용하고 싶어도 오질 않고요. 그런데도 이주민에 대한 인식은 바뀌지 않아요.” 특히 영유아 보육은 이주민 지원의 사각지대다. 초등학교 때부터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따라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공교육을 받을 수 있다. 보육은 다르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도 외국인에겐 보육비 지원 혜택이 없다. 지난해 경기도의회는 등록 외국인주민 자녀에게 보육비를 직접 지원하도록 명시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경기도 내에서 이주아동에게 보육비를 별도로 지원하는 지자체는 안산, 부천, 시흥, 군포시 등에 그친다. 그마저도 시 자체 예산으로 해결한다. 경기도는 조례 통과 뒤에도 지원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 경기도 측은 “외국인 보육비 지원은 예산이 많이 들고, 중앙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국가들은 어떨까. 일본은 2019년부터 국적을 묻지 않고 만 3∼5세 어린이에게 무상보육과 부모 대상 육아교육을 시작했다. 독일은 자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에게 출생증명서를 발급한다. 출생등록이 되면 보육 지원이나 예방접종 등 복지 혜택을 받기 수월해진다. 조나단처럼 ‘보육 차별’을 받는 아이들이 많다. 조나단의 수원 친구인 미카엘(가명·3)과 안나(가명·2)도 미등록 이주아동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린이집에 갈 수가 없다. 아이 부모는 조나단처럼 어린이집을 찾아 수원에서 안산으로 이사할지 고민 중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은 약 2만 명 규모로 추산된다. 인권단체는 규모가 이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한다. 외국 국적 아동은 출생 등록을 하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아동들이 있을 수 있다. 와티 씨는 아이들이 부모 탓에 불행으로 삶을 시작하질 않길 간절히 바란다. “아이는 신이 주신 축복이잖아요. 아이의 미래에 부모가 걸림돌이 되는 안타까움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해요.” 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양회성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QR코드를 스캔하면 ‘공존’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로 연결됩니다. 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외국인 비율 13%. 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한국 다문화의 메카. 이주민들의 강남. 경기 안산. 안산 이주민들은 말한다. ‘내 국적은 안산’이라고. 안산의 토양에서 이주배경의 다양한 한국인이 자란다. 누군가는 ‘진짜 사나이’가 되겠다며 해병대에 가고, ‘한국인의 조건’을 채우려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을 꿈꾼다. 어린이집들의 거부에 단칸방에 갇혀 살다 언어를 잊고 26년을 이방인처럼 살며 삼대 가족을 이룬다.외국인 비중이 5% 이상이면 ‘다문화사회’로 불린다. 안산은 이 비중을 2008년 넘겼다. 2008년 한국에서 다문화 지역은 12곳뿐이었다. 이제는 70곳에 가깝다. 제 2, 제 3의 안산이 생겨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에 국내 외국인이 사상 처음 줄었다. 중소기업 10곳 중 6곳은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농가 일손 부족에 농산물 값이 치솟았다. 이주민과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과연 한국은 공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취재팀은 지난해 8~12월 ‘안산인’ 100여 명을 만났다.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다양한 사진과 영상,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기사로 공존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구십칠, 구십팔, 구십구, 백!”2021년 12월 6일 경기 안산시의 한 어린이집 인근 놀이터. 그네 타기에 한창인 조나단(가명·6)은 한국어로 크게 숫자를 외쳤다. 엄마 와티(가명·39) 씨가 등을 밀어줄 때마다 박자 맞춰서. 조나단은 인도네시아인 부부가 낳은 아이다.“스낭 다탕 크 테카(어린이집 오니까 좋아)? 푸냐 트만 바냑 디 테카(어린이집에 친구 많아)?”(와티 씨)“이야 스낭(응 좋아). 바냑(많아요).”(조나단)어린이집은 조나단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조나단은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짹짹이’가 된다. 짹짹이는 어른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조나단이 호기심도, 말도 많아서다. 한국어가 서툰 엄마, 아빠에게 한국어도 가르쳐준다.“나 화장실 가요.”(와티 씨)“‘갔다 올게요’라고 해야지.”(조나단)“간지러워.”(아빠)“‘가려워’가 맞아.”(조나단)“어린이집에서 실컷 놀며 에너지를 쏟고 와서 그런지 집에서 잠도 잘 자요. 짜증도 덜 내고요.”(와티 씨)어린아이를 가진 부모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조나단과 와티 씨는 어렵게 얻어낸 행복이다. 이들에게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인도네시아를 떠난 부부는 경기 수원시에 정착했다. 수원은 ‘제2의 고향’이 됐다. 하지만 안산시로 다시 떠나야 했다. ‘이주 속 이주’를 감행해야 했다. 조나단은 인도네시아인 부부 구스티(가명·41) 씨와 와티 씨의 아들이다. 부부가 결혼한 지 13년 만인 2016년 5월 수원시에서 낳았다. 조나단이 미등록 이주아동이 된 건 부부의 국내 비자가 만료돼서다. 부모가 비자 갱신에 실패하면서 ‘한국밖에 모르는’ 조나단은 한국에 체류할 수 없는 신분이 됐다. 투명인간처럼 살게 됐다.수원시의 두 평 남짓한 원룸방.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8만 원짜리인 조나단 가족의 보금자리. 조나단에겐 이곳이 세계의 전부였다. 미등록 신분 탓에 어린이집도, 문화센터도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조나단이 만 1세가 될 때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걷기 시작하니 집이 점점 좁게 느껴졌다. 와티 씨는 조나단을 조심스럽게 데리고 다녔다. 조나단은 다치면 병원조차 가기 힘들기 때문이다.“동네 놀이터, 전통 시장, 어디를 데리고 가든 다칠까 봐 겁이 났어요. 비자가 만료되고 나서는 보건소에서 예방 접종조차 거부당했거든요.”인도네시아에서 온 신도들이 다니는 수원의 한 교회가 그나마 안전한 공간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미등록 외국인들이 있었고, 인도네시아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이젠 교회마저 자주 가기 어려워졌다. 2020년 초부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출입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아이가 자라며 원룸은 더욱 비좁게 느껴졌다. 아이의 활동 폭이 넓어졌다. 조나단이 말하고 뛰어다니는 데 익숙해진 세 살 무렵이었을까. 와티 씨의 몸과 마음도 지쳐버렸다.생계까지 어려웠다. 일용직 노동자인 구스티 씨의 소득은 일정치 않았다. 한 달에 80만 원밖에 못 벌 때도 있었다. 와티 씨도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조나단을 맡길 어린이집이 없었다.식당에서 문 열기 전 청소하는 일을 구한 적은 있다. 오전 7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청소를 했다. 조나단을 유모차에 태워 놓고서.이마저도 코로나19로 3개월 만에 일자리를 잃었다. 집에서 인도네시아 음식을 만들어 팔아보려 했지만 놀아 달라고 떼를 쓰는 조나단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계속 밖에 나가자고 해요. 집에선 TV와 스마트폰만 보려 하고요. 저는 책이라도 보여주려다가 싸우죠.”조나단은 인도네시아어로는 말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데 동네 놀이터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에게는 다가가지 못했다.“같이 놀고 싶어 하면서도 어려워하더라고요. 말이 안 통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수원 교회의 선생님 김모 씨는 어린이집을 해결책으로 제안했다. 한국어를 배우고 친구들도 사귈 수 있는 공간.“미등록 이주아동이지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야말로 꿈이었죠.” 와티 씨 대신 어린이집을 알아봐 준 김 씨가 당시를 회상했다.“세 살짜리 미등록 아이가 있는데 받아줄 수 있나요?”“미등록이 뭐예요?”“부모님이 불법 체류하는 분의 아이요.”“어휴 저희는 안 돼요.”단칼에 거절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돈을 잘 낼 수 있다’는 말은 입가에만 맴돌았다.“대화가 돈 얘기까지 가지도 않아요. 순화시켜서 ‘미등록’ 아이라고 하면 어린이집에선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러다 ‘불법 체류자’라고 하면 기겁하며 전화를 끊는 패턴이 반복됐죠.”(김 씨)그렇게 거절당한 어린이집이 10여 곳에 달했다. 어느새 3년이 흘렀다.와티 씨도 조나단이 계속 투명인간처럼 지내는 게 싫었다. 2019년 말부터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계획도 세웠다. 비행기 편을 알아보고 짐까지 다 쌌다. 그런데 돌연 코로나19가 터졌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고 있었다.“조나단에게 한국이 더 안전할 것 같았어요. 더 머물 수밖에 없었어요.”(와티 씨)“미등록 이주아동을 받아주는 어린이집이 안산에 있대요.”조나단의 안타까운 사정을 보던 교우 김모 씨가 대안을 내놨다. 안산시로 아예 이사를 하는 것이다.“안산에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을 받아주는 어린이집이 많았어요. 보육료를 아예 안 내도 되는 곳도 있고, 조금 싼 곳도 있었어요.”(김 씨)안산시에는 외국인주민상담지원센터, 글로벌청소년센터 등 외국인 부모들이 정보를 얻기 쉬운 곳들이 많다. 보육과 교육 여건이 좋은 편이다. 안산은 이주민 학부모들의 ‘대치동’인 셈이다.‘인도네시아에서 수원으로 이주해 겨우 정착했건만 수원에서 안산으로 또 이주해야 하다니.’이주에 이어 이주를 하긴 정말 쉽지 않았다. 수원에서 쌓아온 걸 모두 버려야 했다. 보건소에서 미등록이란 이유로 예방 접종을 거부당한 조나단을 받아준 병원, 육아용품이 모자란 조나단에게 용품을 물려주던 집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와티 씨는 용기를 냈다. 이미 5년째 살아 ‘제2의 고향’이 된 수원이지만, 조나단의 어린이집 입소가 가장 중요했다. 안산의 한 어린이집이 2021년 5월 28일부터 조나단을 받아주기로 했다.안산에서 구한 집에 입주할 수 있는 날짜는 2021년 6월 8일. 조나단의 어린이집 입소일보다 10일가량 뒤였다. 와티 씨는 조나단을 데리고 수원 집에서 안산 어린이집까지 지하철로 왕복했다. 지하철과 도보로 1시간씩, 왕복 2시간이 걸렸다. 조나단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근처에서 기다려야 했다.“‘안산 적응’을 연습했어요. 제가 좀 길치거든요. 새로운 집과 어린이집 근처 길을 영상으로 찍어서 외웠어요. 아직 안산에는 친구가 없어요. 주말에 수원 교회를 가서 교인들을 만나요.”(와티 씨)수원의 일부 어린이집들이 조나단을 거부한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한국인 자녀들이 많은 어린이집은 굳이 이주아동을 받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 한국 학부모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수원시에서 이주아동은 한국인 아동과 달리 보육비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다. 부모가 보육료 전액을 내야 한다. 미납하면 어린이집 재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주노동자인 부모는 일자리가 불안정한 편이라 보육료를 밀린 채 달아날 수 있단 시각이 있다.수원시 어린이집 200여 곳을 회원으로 둔 수원어린이집협의회 측은 미등록 아동에 난색을 표했다.“외국인 아동은 수원시청이 전산시스템에 직접 등록해 줘야 입소할 수 있어요. 어린이집이 마음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미등록 아동은 단체 상해보험에 가입도 안 됩니다. 혹시라도 다치면 보상을 못 받는 점도 부담입니다.”안산의 상황은 달랐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입소를 허용하는 곳이 여럿 있었다. 비정부기구(NGO)가 운영하는 일부 어린이집은 아예 보육료를 받지 않았다.“아이는 등록이든 미등록이든 차별받지 않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어요. 안산시도 미등록 아동은 보육료를 지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부모가 돈을 낼 수 있다고 하면 똑같이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안산의 한 어린이집 원장)이 어린이집은 조나단 부모의 여권과 조나단의 출생증명서만 확인하고 입소를 허락했다. 전체 아동의 90% 이상은 이주배경 아동이어서 선입견이 없었다. 보육료를 미납한 외국인 부모들을 독려해 본 경험도 있었다.행복했던 기간은 한 달에 불과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같은 해 7월 초 어린이집 등원이 전면 중단됐다. 맞벌이 부모 등 특수한 경우에만 아이들을 돌봐주는 긴급 보육이 시작됐다.조나단은 어린이집에 갈 수 없었다. 어린이집이 부모님의 재직증명서를 요구했지만, 비자가 만료된 구스티 씨는 재직증명서를 제출할 수 없었다. 매월 소득이 일정치 않아 재직증명서를 대신할 만한 월급 명세서도 내지 못했다.“조나단 아빠가 고용됐던 기업이 부도났고, 이후 새로 옮긴 회사에서도 일감이 없어서 계속 회사를 옮겨 다녔어요.”(목사 아구스 씨(가명))이 와중에 와티 씨에게 둘째가 생겼다. 와티 씨는 입덧이 심해지자 병원 진단서까지 받아 어린이집에 냈다. ‘제발, 아이를 받아주세요.’ 간절한 마음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시 매뉴얼을 따라야 했어요. 코로나 확진자가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 (시 측에) 저희만 봐달라며 (입소를 허용)할 수가 없었어요.”(안산 어린이집 원장)2021년 11월 12일. 공사 중인 어린이집을 찾은 조나단은 와티 씨의 손을 잡고 정문 근처에서만 서성였다.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조나단, 어린이집이네. 어린이집 다시 가고 싶어?”와티 씨가 말을 걸었지만, 조나단은 어린이집을 쳐다보기만 했다.어린이집은 낯선 모습이었다. 시멘트 외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공사 폐기물이 자루에 담겨 입구에 잔뜩 쌓여 있었다.조나단이 없는 사이 전면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긴급 보육 대상인 어린이들은 임시로 마련된 다른 어린이집에 다니게 됐다. 조나단은 어린이집 친구들을 보고 싶지만 어린이집이 어딘지 알 수도 없다.두 평 원룸에 다시 갇히다조나단은 안산의 방 한 칸짜리 원룸에 다시 고립됐다. 어른 네 명이 앉으면 꽉 차는 공간. 조나단은 이곳에서 먹고 자는 것은 물론이고 공부와 놀이까지 다 해결해야 한다. 친구는 결국 엄마뿐이다.집에서 500m 거리에 있는 공원이 조나단의 유일한 놀이터다.“공원에 나가자.”와티 씨의 말에 조나단은 재빨리 일어섰다. 모래놀이용 삽과 통을 들고서. 날씨가 좋을 땐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을 찾는다. 하지만 겨울엔 이마저도 어렵다.와티 씨는 미등록 신분으로, 낯선 안산이란 도시에서 더욱 움츠러든다. 어느 날 조나단이 열이 많이 났다. 수원에서라면 자주 가던 병원을 찾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와티 씨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어느 병원이 미등록인 우리를 받아줄까.’다른 곳도 함부로 갈 수가 없다. 조나단은 책을 좋아하지만 지역 도서관을 아쉽게 지나치기만 한다.와티 씨 모자는 둘 다 한국어가 서투르다.“쉬 안 가? 쉬 안 갈래?”와티 씨가 한국어로 묻자 조나단은 “응”이라고만 했다.서툰 한국어를 듣고 자란 조나단의 한국어도 더디다.“조나단이 여섯 살인데 한국어 수준은 두 살 정도로 보여요. 놀 때 단어들만 말해요. 문장을 만들어서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건 아직 안 돼요. 인도네시아 말은 되게 잘해서 ‘짹짹이’라고 별명을 붙여 줬을 정도인데 말이죠.”조나단 가족을 돕고 있는 인도네시아인 목사 아구스 씨는 조나단의 언어 능력이 걱정이다.사회성도 떨어지고 있다. 조나단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점점 애 같지 않아졌어요. 애들은 울거나 떼를 쓰는데 조나단은 어른들처럼 화를 내더라고요. ‘너 가만히 안 둘 거야’ 같은 험악한 말을 해요. 표정도 어른들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하는 것을 따라 해요.”(와티 씨)조나단이 한국을 떠나 인도네시아로 가면 모든 게 해결될까. 조나단은 단 한 번도 인도네시아를 가본 적이 없다.“조나단,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로 와.”“제 집은 한국이에요. 인도네시아 안 가요.”조나단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영상으로만 만나봤다. 그럴 때마다 조나단은 분명히 선을 긋는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조나단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은 많다. 조나단이 다니는 교회만 해도 미등록 이주아동 미카엘(가명·3)과 안나(가명·2)가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다. 미카엘과 안나의 부모들도 어린이집에서 계속 거부를 당했다. 이제 수원에서 안산으로 이사를 고민 중이다.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은 약 2만 명 규모로 추산된다. 인권단체는 규모가 이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한다. 외국 국적 아동은 출생 등록을 하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아동들이 있을 수 있다.이 아이들이 갈 곳은 안산뿐이다. 안산시는 2018년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시 예산으로 등록 외국인 주민 자녀에게 보육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2020년에는 전액 지원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부터 누리과정 보육비 24만 원을 전액 지원하고 있다. 어린이집들이 보육비 지원을 받으니 이주아동들도 입소하기 수월해졌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주민 가족들은 안산으로 수렴한다. 안산은 이주민이 모이는 섬 같은 곳이 됐다.경기도의 이주아동 보육 실태를 조사한 이영아 아시아의창 상임이사는 이주민 보육 정책이 안산 외의 지역에서도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한다.“외국인 아동이 늘어난다는 건 한국에서 가족을 형성해 살아가는 이주민들이 많아진다는 얘기입니다. 보육 정책은 가족 전체를 도울 수 있어요. 보육비를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늘어나야 합니다.”결국 돌고 돌아 안산으로안산의 ‘이주민 인프라’를 찾아 또 다른 이주를 하는 이주민들은 조나단뿐만이 아니다.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누르가셰프 아딜벡(16)은 카자흐스탄에서 온 소년이다. 열 살 때인 2015년, 고려인 3세인 어머니를 따라 안산에 왔다. 카자흐스탄 경제가 악화돼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아딜벡 가족은 4년 만에 안산에서 충북 청주로 이사하게 됐다. 아버지가 직장을 청주로 옮겨서였지만 사실 안산에 남으려면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딜벡은 이주민이 많은 안산 밖 다른 지역에서 스스로 실력을 알아보고 싶었다.“공부도 열심히 하고 한국어도 잘하고, 적응을 잘했어요. 그래서인지 ‘한국 아이들과 제 실력으로 경쟁하고 싶다’는 말도 했었죠.”(임미은 선일중 교사)아딜벡이 다니던 안산 선일중은 이주배경 학생이 전체의 50%를 넘는다. 하지만 청주의 학교에선 이주배경 학생이 한 학년에 서너 명 정도뿐이었다. 아딜벡이 처음 겪어보는 환경이었다.“처음에 애들이 엉덩이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거는 거예요. 카자흐스탄에선 절대 남자들끼리 밀접한 접촉을 안 하거든요. 안산에선 한국 애들도 중앙아시아 출신 애들이 싫어하는 걸 잘 아니까 그런 장난 안 쳐요.”아딜벡은 문화적 차이에 당황했다. 이른바 ‘일진’ 같은 친구들은 적나라하게 대했다.“너희 나라로 돌아가.”아딜벡은 갑작스러운 성적 하락에도 당황했다. 전학 온 청주 학교에서 본 중간고사 점수는 평균 60점대였다. ‘원래 반에서 3등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는데….’시험 난도가 높아지며 취약한 한국어 실력이 발목을 잡았다.“2학년 되고 나서 놀긴 했지만…. 사회 같은 과목에선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서술형이 정말 많이 나오더라고요.”아딜벡은 정신이 번쩍 들어 공부에 매달렸다. 다행히 이듬해에는 평균 80점 후반까지 점수를 끌어올렸다. 이번엔 고등학교 진학이 문제였다. 아딜벡은 경영 분야에 특화된 특성화고에 가고 싶었다. 카자흐스탄 증권업계에서 일했던 아버지처럼 금융계 진출을 꿈꾸고 있다. 이미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식 공부를 시작할 정도로 관심이 많다. 특성화고를 가면 의류 사업도 시도해 보고 싶다. 하지만 청주 근처에는 그런 특성화고가 없었다.진로 선택을 상담하고 비자 문제를 상의할 곳이 없는 점도 문제였다. 안산의 선일중엔 다문화부가 따로 있었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선생님이 비자 문제를 상세히 안내해줬다. 일반 선생님들도 이주배경 학생에게 익숙해 ‘맞춤형 진로상담’을 해주곤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주배경 선배들도 있어 쉽게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청주에선 이 모든 걸 아딜벡이 알아서 해야 했다.아딜벡 가족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안산으로 돌아왔다. 결국 안산밖에 답이 없다. 이렇게 이주민들은 안산으로 수렴된다. 안산은 이주민의 섬이다.섬이 징검다리가 되려면안산 아이들이 다른 지역으로도 건너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려는 시도도 있었다.2019년 경기도의회에서는 ‘경기도 이주아동 조례’가 발의됐다. 조례안은 이주아동을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18세 미만의 사람’으로 규정했다. 미등록이든 등록이든 관계없이 지원 대상으로 본 셈이다.‘이주아동은 출생등록 될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출생등록은 이주아동의 규모를 파악하고 최소한의 복지 지원을 하기 위한 첫 단추다. 조례안이 통과되면 조나단도 수원에서 어린이집에 갈 가능성이 높다.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문자 폭탄’이 쏟아졌다. 조례안을 주도한 김현삼 의원은 물론 다른 경기도의원에게 문자메시지가 쏟아졌다. ‘난민 반대’ ‘다문화 반대’를 외치는 외국인 혐오 단체들이었다. 안산시에서는 10차례가 넘는 집회가 벌어졌다. 김 의원 집 앞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단체들과 따로 면담까지 했지만 설득할 수가 없었어요. 반대 단체 분들은 이주민들이 아이를 앞세워 한국에 들어오고, 결국은 한국인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더라고요.”김 의원은 이 ‘실패한 조례안’을 씁쓸하게 회상한다. 1980, 90년대 반월공단에서 일했던 그는 공단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안다.“요즘 사장님들이 이주노동자가 더 필요하다고 하소연합니다. 일할 사람이 없어 주문량을 못 댄다는 거예요. 내국인은 채용하고 싶어도 오질 않고요. 그런데도 이주민에 대한 인식은 바뀌지 않고 있죠.”독일 정부는 자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에게 출생증명서를 발급한다. 태국이나 베트남 같은 개발도상국도 대부분 국적과 관계없이 출생등록을 해준다. 정부가 아동들을 출생등록 하면 아동의 인권침해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예방 접종 같은 기본적인 복지 지원도 할 수 있다. 일본은 2019년부터 국적을 묻지 않고 만 3~5세 어린이에게 무상보육 및 유아교육을 해준다.보육 측면에서 지원을 강화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지난해 경기도의회는 등록 외국인주민 자녀에게 보육비를 직접 지원하도록 명시한 조례를 통과시켰다. 흔히 외국인 주민이 늘어나면 복지 부담도 늘어날 거라는 예상이 많다. 이민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한국 전체의 소득세수에 기여하는 액수는 2017년 1조 원을 넘어섰다. 주민 관련 정책 예산은 2018년 기준 8500억 원 규모에 그친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도 보육에선 차별을 받는 것이다.조례는 통과됐지만 그뿐이었다. 현재 경기도 내에서 이주아동에게 보육비를 별도로 지원하는 지자체는 안산, 부천, 시흥, 군포 등에 그친다. 그마저도 시 자체 예산으로 해결하고 있다. 경기도에서는 조례 통과 뒤에도 지원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외국인 보육비 지원은 예산 규모가 크고, 지자체가 아닌 중앙 정부가 해야 할 일입니다.”현재 보건복지부는 지침을 통해 보육비 지원 대상을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서 주민등록법에 의해 주민번호를 정상적으로 부여받은 만 0~5세 아동’으로 제한한다. 이 지침의 근거가 되는 영유아보육법을 살펴보면 국적에 따른 차별이 용인되고 있다. ‘영유아는 자신이나 보호자의 성, 연령, 종교, 사회적 신분, 재산, 장애, 인종 및 출생지역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받지 아니하고 보육되어야 한다.’ ‘국적’이 문구에서 빠져 있다.이 조항에 국적을 포함시키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이 지난해 7월 국회에 발의됐다. 하지만 현안에 밀려 본격적인 논의는 시작되지 못했다. 게다가 복지부는 국적 중심으로 설계된 다른 사회보장 제도와 연계해 논의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표류가 끝나는 그날까지와티 씨에게 안산은 여전히 낯선 땅이다. 하지만 조나단을 위해 적응해야 하는 곳이다.“아직 적응 기간이라 조금 낯선 땅이에요. 실은 아직도 수원을 그리워해요. 언젠가는 가족들이 있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거예요. 조나단이 한국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와티 씨는 조나단 같은 아이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아이는 신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이의 미래에 부모가 걸림돌이 되는 안타까움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해요.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위해 사는 곳을 옮기지 않고 본인이 사는 곳에서 어린이집을 보낼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어요.”공존 - 세 번째 이야기 : 이주민을 위한 사다리는 없다 1월 18일 공개어린이집뿐만이 아니다. 조나단 같은 이주배경 아동들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국어를 잘하는지, 체류 자격이 있는지 끊임없이 시험받는다. 이런 조건을 갖춰도 아이들은 한국 사회의 ‘하류’에 고일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이방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에 더욱 매달린다. 2009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에 온 소년에겐 고등학교 진학조차 절실하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 ‘공존’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양회성 남건우 기자▽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안산인’ 100명에게 듣다매년 꾸준히 늘던 국내 외국인 수가 2020년 통계 작성 이래 처음으로 줄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비행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들의 빈자리는 컸다. 일손 부족에 중소기업 10곳 중 6곳은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농가는 농산물을 수확하지 못해 아우성이었다. 이듬해엔 국내 총인구도 처음으로 감소했다. 인구절벽 시대, 감소한 인구를 대체하는 이주민과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다문화사회(주민 중 5% 이상이 외국인)로 분류되는 시군구는 이미 전국에 70여 곳.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살 수 있을까. 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은 도시 경기 안산시를 중심으로 답을 찾아본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지난해 8월부터 4개월간 안산에서 100여 명을 만났다. 이주민의 삶을 유아기부터 중장년기까지 생애단계별로 밀착 취재했다. 한국의 척박한 현실에 힘겹게 뿌리 내리는 고려인, 몽골인 삼대 이민가족의 역사를 추적했다. 한국인들의 솔직한 속내도 들어봤다. 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다양한 사진과 영상,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기사로 공존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너, 한국인이었어?” 지난해 12월 17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안산원곡초등학교 근처 분식집. 원곡초 5학년 양주원(12)에게 같은 반 친구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었다. 주원이는 입안 가득한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주원이와 알게 된 지 3년 만에 주원이의 국적을 처음 알았다. 친구가 놀란 이유는 원곡초에 워낙 한국인이 없어서다. 원곡초 학생 449명 가운데 조부모 때부터 한국에서 산 한국인은 6명뿐이다. 나머지는 외국인이거나 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얻었다. 주원이는 1학년 때부터 원곡초에 다녔지만 3학년 때서야 깨달았다. ‘아, 우리 학교엔 한국인이 별로 없구나.’ 2년 전 어느 날, 다른 학교 근처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봤다. 아이들은 한국어만 쓰고 있었다. 주원이에겐 이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원곡초에선 러시아어, 중국어가 많이 들리기 때문이다. 난 외국인 친구 좋은데”…주변선 “그 학교 왜 다녀”아파트촌-빌라촌 두 개의 세계애초엔 한동네였던 안산 원곡동-백운동… 이주민 늘어나며 2개의 동으로 나뉘어한국인 외국인 사이 보이지 않는 큰 벽안산시에서도 원곡동은 외국인 비율이 70%나 된다. 원곡동엔 빌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바로 옆 백운동엔 신축 아파트가 즐비해 대조를 이룬다. 원곡동과 백운동 경계에 원곡초가 있다. 원곡초를 중심으로 원곡동과 백운동은 다른 세계처럼 나뉜다.○ 높아지는 ‘국경’이날 오후 1시 반경 원곡초 정문을 나온 아이 50여 명 대부분은 원곡동 빌라촌으로 향했다. 주원이를 비롯한 5명가량만 빌라촌 반대편에 있는 신축 아파트로 갔다. 신축 아파트는 원곡초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원곡동이 아닌 백운동에 속한다. 주원이 가족은 지난해 8월 백운동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다. 주원이는 이 아파트에서 원곡초 친구를 보질 못했다. “엄마, 우리 반에 한국인이 나랑 선생님밖에 없어.” 주원이 어머니 최지윤(가명·46) 씨는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 아이가 별로 없으니 괜히 주원이만 소외되는 거 아닌가.’ 불안감에 주원이를 전학 보낼까 고민도 했다. 주변에서도 걱정을 키웠다. “주원 엄마, 왜 그 학교엘 보내?” “다른 학교에 안 보내?” 하지만 주원이는 원곡초가 좋다. 주원이가 5년째 잘 다니는 모습을 보며 지윤 씨도 생각을 바꿨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김지민(가명·39) 씨는 생각이 좀 다르다. 원곡초보다 조금 더 먼 관산초로 딸을 6년째 보내고 있다. 딸을 관산초에 보내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일찍이 주소지를 친정으로 옮겼다. 원곡초 배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원곡초 교육과정이 너무 다문화 아이들 위주로 돌아간다고 들었어요. 다문화 아이들이 오히려 한국 애들을 왕따시킨다는 얘기도 있었죠….” 다른 한국인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관산초로 배정받을 방법을 찾았다. 가족이 다 같이 관산초 근처로 잠깐 이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원곡초 배정을 피하는 ‘꿀팁’이 공유됐다. 아파트 입주민들은 입주 6개월 전인 지난해 초부터 “원곡초 배정 반대”를 외치기 시작했다. 안산교육지원청에 100건이 넘는 민원을 넣었다. 통학구역을 관산초까지 넓혀 달라는 요구였다. 이런 움직임에 원곡초도 행동에 나섰다. 안복현 원곡초 교장은 학부모 설명회까지 열었다. 이주배경 학생은 ‘한국어 실력에 따라 수준별 수업을 한다’, ‘한국인 학생에게 피해가 없다’고 알리려 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언성을 높였다. “왜 그런 학교에 다녀야 합니까?” “학교 성적이 전국 몇 등인 거예요?” 교육지원청은 결국 지난해 7월 아파트 통학구역을 관산초까지 넓혔다. 입주민들은 두 학교 가운데 선택해 지원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통학구역 변경 뒤 원곡초를 선택한 입주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난해 10월 기준 원곡초 학생 중 이주배경 학생은 98.6%다. 기피 대상은 학교만이 아니다. 주민들은 원곡초 인근 지역을 지나치지도 않으려 한다. 한국인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일러두곤 한다. “원곡초 뒤쪽은 가지 말아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지민 씨가 원곡동에 간 건 2년 전 지인 식당을 방문한 게 마지막이었다. “식당 가는 것도 무서워요. 외국인이랑 눈 마주치면 괜히 해코지할 것 같고…. 혼자서는 절대 못 가요.” 하지만 주민들의 두려움은 부풀려진 면이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원곡동 범죄율은 높지 않다. 한국 어느 동네를 가든 벌어지는 술 먹고 다투는 사건이 있는 정도다. 치안은 안정된 편이다”라고 했다. 원곡동과 백운동 사이의 벽이 높지만 두 동은 5년 전까진 하나의 원곡동이었다. 백운동은 원곡1·2동, 원곡동은 원곡본동으로 불렸다. 2017년에서야 지금처럼 나뉘었다. 백운동 주민 수가 크게 늘었고, 숫자로 나뉜 동명을 정비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송바우나 안산시의원은 “외국인이 많다는 원곡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명칭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원곡동이 처음부터 ‘이주민 동네’였던 것은 아니다. 원곡동은 1970년대 후반 반월공단 배후도시로 성장했다. 도금, 염색 공장에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전통 제조업이 점차 기울며 산업단지가 위축됐다. 사람들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원곡초 앞에서 20년가량 문방구를 운영하는 홍모 씨(66)는 원곡동의 변화를 몸소 체감했다. “15년 전쯤부터 한국인들은 점점 고잔동 같은 동네로 빠져나갔어요. 새 아파트가 올라오는 곳들이죠. 원곡동 빈자리는 외국인들이 채웠어요.” 2012년 35%였던 원곡동 외국인 주민 비중은 지난해 2배로 늘었다. 일손이 부족했던 공단의 중소기업 사장들은 이주민들을 반겼다. 빈 교실이 늘던 학교들도 다시 붐비기 시작했다. 한때는 중국인들이 늘었지만 최근엔 러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주민들이 모여든다.언어장벽탓 잘 못 어울려… 친한 친구는 다 러시아계”안산, 우리 모두의 이야기전국 곳곳 초중고 이주배경 학생들 늘어한국 알리고 뿌리 존중하며 거리 좁혀야한국인 학생 인식 바꿀 ‘공존 교육’도 필요○ ‘국경’ 너머의 아이들어른들이 세운 벽 때문에 원곡초 아이들은 학교 밖을 나올 때 비로소 낯선 세계를 만난다. 우즈베키스탄 국적 고려인 피브키나 이리나(15·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왔다. 줄곧 원곡초를 다니다 2020년 졸업했다. 원곡초에선 적응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러시아어를 하는 이중언어 선생님이 공부를 도와줬다. 러시아어로 얘기할 친구들도 많았다. 이리나는 원곡초에서 한국어를 못하는 친구들의 통역을 맡을 정도였다. 매일 2시간씩 꾸준히 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들은 결과였다. 이리나는 정든 원곡초를 졸업하며 한국 학생이 더 많은 원곡중을 선택했다. 지난해 3월 기준 원곡중의 이주배경 학생 비율은 17.8%다. “러시아 애들이 많은 중학교가 있지만 거긴 가기 싫었어요.” 이리나는 한국인이 많은 학교에서 한국어를 더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오히려 중학교에 오고 나서 말수가 더 줄었다. 친한 중학교 친구는 러시아계 아이들 4명뿐이다. “같은 반 한국인 친구들하고 더 얘기하고 싶어요. 놀고 싶고…. 근데 한국인 친구들은 다른 반 애들이랑 친해요.” 한국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한국어가 늘기 힘들다. “선생님과 반 애들이 다 같이 있는 단체 채팅방이 있어요. 애들이 ‘레알’(진짜의 속어) 같은 말이나 줄임말을 쓰면 전 잘 못 알아들어요. 다른 애들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채팅방에서 얘기하죠. 근데 저는 글을 읽기만 해요.” 학교 공부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선행학습을 한 수학은 그나마 낫다. 어려운 단어가 많은 국어, 역사가 큰 문제다. “국어, 역사는 머릿속에서 번역이 잘 안 돼요. 문제를 못 풀겠어요. 집에 가서 다시 해석해봐야 해요.” 이리나는 요즘 갓 태어난 조카를 돌보며 틈틈이 미술학원에 다닌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안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미술대학을 나올 생각이다. ‘대학을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와 디자인 회사에 취업하리라.’ 하지만 이런 꿈은 아득하기만 하다. “한국 사람이 아니니 회사를 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절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죠?” 이리나처럼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학교엔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자신에 혼란스러워하다 본국으로 돌아간 아이도 있다.○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원곡초는 아이들이 벽을 넘어서도록 애쓰고 있다. 경기도교육청이 지정한 다문화국제혁신학교답게 러시아어, 중국어 강사가 주요 교과를 통역해준다. 출신 국가 언어를 가르치는 수업도 마련했다. 이주배경 아이들이 한국에 정착하면서도 ‘뿌리’를 잊지 않게 하려는 취지다. 사물놀이와 민요, 태권도와 테니스 수업도 한다. 밴드부를 따로 운영하며 예체능 교육에 공들인다. 이런 활동이 아이들 간 거리감을 좁힐 것이란 믿음에서다. 원곡초는 이주민 교육 역사가 쌓이며 이주민 학부모들의 ‘8학군’처럼 성장했다. 이주민 학부모들은 통학권에서 벗어난 안산 상록구, 경기 시흥시 등에서도 ‘원정 통학’을 시킨다. 원곡초에도 어려움은 있다. 한국인이 워낙 없다 보니 중국계, 러시아계 아이들은 모국어로 대화하며 끼리끼리 어울린다. 안 교장은 “한국 아이들이 일정 비율 이상이어야 외국인 아이들도 한국어를 배울 의지를 가진다”고 말했다.○ 안산, 우리 모두의 이야기원곡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이주배경 학생들이 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초등학생 중 4.2%가 이주배경 학생이다. 비중이 9년 전(1.1%)에 비해 4배가량으로 늘었다. 이런 학교들은 원곡초에 ‘공존 노하우’를 묻는다. 대구의 신당초등학교도 그중 한 곳이다. 2018년 이주배경 학생이 전체의 절반에 조금 못 미쳤지만, 지금은 65%에 이른다. 대구 신당초에는 인근 성서공단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이 다닌다. 원곡초처럼 원거리 통학을 하는 학생도 있다. 이주배경 학생 맞춤형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다. 학교는 급격히 늘고 있는 이주배경 학생을 받아들이느라 분주하다. 교육 현장에서는 ‘언어’가 공존의 첫 단추라고 말한다. 이중언어 강사를 늘리고 한국어 특강을 두루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이주배경 학생들이 특정 학교로 몰리지 않기 때문이다. 안상규 안산서초 교감은 한국어 예비학교를 제안했다. “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학생은 예비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운 뒤 일반 학교에서 수업을 듣도록 지원했으면 좋겠어요.” 안복현 원곡초 교장은 한국인 학생의 인식을 바꿀 ‘공존 교육’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주민이 많은 독일이나 아일랜드는 상호문화 교육을 모든 학교에서 실시한다. “힘든 일은 이주민들이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혜택이 가면 ‘역차별’이라고 해요. 내 자식이 외국에 갔다면 그런 대우를 받길 원하지 않을 텐데 말이죠.” ○ ‘국경’은 여전히 견고하다원곡초 바로 앞엔 또 다른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원곡초에선 이 단지 한국인 학생들이 원곡초에 입학하리라고 기대한다. 2023년 입주가 시작되면 원곡초에 한국 학생이 늘고, 공존이 더 가능하리라고.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달리 생각하고 있다. 공인중개업소에선 벌써부터 통학구역 변경 얘기가 나온다. “입주 시점에 주민들이 민원을 넣으면 아파트 통학구역이 관산초로 확대될 거예요. 아파트 가격이 좀 더 올라갈 수 있죠.” 이 단지 재개발조합 관계자는 원곡초 이주민 아이들이 오히려 전학 갈 거라고 장담했다. “학교에 한국 아이들이 많아지면 이주민 아이들이 전학을 가게 될 거예요. 1, 2년만 있으면 학교 분위기가 (한국인 중심으로) 바뀔 겁니다. 지켜보세요.” 한국인과 이주민이 어울려 산다는 선택지는 어른들 입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국경은 여전히 견고하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공존: 그들과 우리가 되려면’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양회성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 ▽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외국인 비율 13%. 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한국 다문화의 메카. 이주민들의 강남. 경기 안산. 안산 이주민들은 말한다. ‘내 국적은 안산’이라고. 안산의 토양에서 이주배경의 다양한 한국인이 자란다. 누군가는 ‘진짜 사나이’가 되겠다며 해병대에 가고, ‘한국인의 조건’을 채우려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을 꿈꾼다. 어린이집들의 거부에 단칸방에 갇혀 살다 언어를 잊고 26년을 이방인처럼 살며 삼대 가족을 이룬다.외국인 비중이 5% 이상이면 ‘다문화사회’로 불린다. 안산은 이 비중을 2008년 넘겼다. 2008년 한국에서 다문화 지역은 12곳뿐이었다. 이제는 70곳에 가깝다. 제 2, 제 3의 안산이 생겨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에 국내 외국인이 사상 처음 줄었다. 중소기업 10곳 중 6곳은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농가 일손 부족에 농산물 값이 치솟았다. 이주민과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과연 한국은 공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취재팀은 지난해 8~12월 ‘안산인’ 100여 명을 만났다.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다양한 사진과 영상,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기사로 공존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안산. 그중에서도 유독 외국인이 많은 동네가 있다. 바로 원곡동이다.외국인 비율 70%(1만4139명). 10명 중 7명이 외국인이다. 반월공단과 가까원 원곡동 빌라촌, 재개발이 마무리되고 있는 백운동 신축 아파트단지. 그 경계에 국경을 그리듯, 안산원곡초등학교가 있다. “너 한국인이었어?”하교길 분식집에서 안산원곡초 5학년 양주원(12)을 같은 반 친구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주원이는 입안 가득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12월 칼바람에 두 볼이 발갰다. 친구는 3년 만에 주원이의 국적을 처음 알았다.“주원이도 다른 나라에서 왔을 거라고 생각했어요.”이런 착각엔 이유가 있다. 원곡초 학생 중 한국인은 단 여섯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학년 때부터 원곡초에 다닌 주원이는 3학년 때서야 원곡초의 특별함을 깨달았다. 2년 전 어느 날, 하교하며 다른 학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봤다. 아이들은 한국어만 쓰고 있었다. 주원이에게는 이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원곡초 근처에선 하교 시간에 러시아어, 중국어가 많이 들리기 때문이다.‘아, 우리 학교엔 한국인이 별로 없는 거구나….’주원이네 반 수학 시간엔 한국인 선생님과 러시아어 선생님 두 분이 들어온다. 러시아어 선생님은 러시아에서 온 친구들에게 러시아어로 수학을 알려준다. 점심 급식 메뉴는 ‘비프 스트로가노프’(러시아 소고기 음식), 탄두리 치킨에 라씨(인도 음식). 원곡초 근처엔 러시아에서 온 학생들에게 러시아어로 수학과 국어를 가르쳐 주는 학원도 있다.이날 오후 1시 반경 원곡초 정문을 나온 아이 50여 명 중 대부분은 원곡동 빌라촌으로 향했다. 주원이를 비롯한 5명가량만 빌라촌 반대편인 신축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신축 아파트 단지는 원곡초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원곡동이 아닌 백운동에 속한다. 인도가 좁은 빌라촌과 달리 인도도 도로도 넓은 아파트 단지. 원곡초에 다니는 대다수 아이들에겐 낯선 곳이다.주원이 가족은 지난해 8월 백운동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다.“아파트에 원곡초 다니는 애가 한 명도 없어요. 원래 6학년 형 한 명이 원곡초 다녔는데 관산초로 전학 갔어요.”주원이가 다니는 아파트 근처 태권도 학원이나 논술 학원에도 원곡초 친구는 없다. 학교와 달리 학원엔 친구들이 전부 한국인이다. 주원이에겐 외국인이 대다수인 학교와 한국인이 전부인 학원이 너무도 다르다.“엄마, 우리 반에 한국인이 나랑 선생님밖에 없어.”주원이 어머니 최지윤 씨(가명·46)는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한국 아이가 별로 없으니 괜히 주원이만 소외되는 거 아닌가.’지윤 씨는 불안감에 주원이를 전학 보낼까 고민도 했다. 주변에서도 걱정을 키웠다.“주원 엄마, 왜 그 학교엘 보내?”“다른 학교에 안 보내?”하지만 주원이는 싫다고 했다. 주원이는 원곡초가 좋다. 좋은 친구, 좋은 선생님이 있는 우리 학교니까. 지윤 씨도 주원이가 5년째 잘 다니는 모습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학교에서 중국어나 러시아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도 있고, 앞으로 외국인이 더 많은 세상에서 살 테니 미리 적응하면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김지민 씨(가명·39)는 6학년인 딸을 관산초에 보낸다. 원곡초보다 조금 더 멀다. 이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2016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의 주소지를 친정으로 옮겼다.“원곡초 교육과정이 너무 다문화 아이들 위주로 돌아간다고 들었어요. 다문화 아이들이 오히려 한국 애들을 왕따시킨다는 얘기도 있었죠….”주변 한국인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관산초 배정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아이 주소지만 옮기거나, 아예 가족이 다 같이 잠깐 그쪽으로 이사 다녀오기도 했다. ‘위장전입’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모 마음은 대개 그랬다.‘한국 애라서 소외되면 어쩌지?’ ‘이러다 국어 성적 떨어지면 안 되는데….’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원곡초 배정을 피하는 ‘꿀팁’이 공유됐다.“원곡초 배정인데 어떡해요.”“빨리 주소를 옮기세요. 입학하고 난 뒤 전학시키긴 어려워요.”한국인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일러두곤 한다.“원곡초 쪽으로는 가지도 말아야 해.”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지민 씨가 원곡동에 간 건 2년 전 지인 식당을 방문한 게 마지막이었다.“식당가는 것도 무서워요. 외국인이랑 눈 마주치면 괜히 해코지 할 것 같고…. 혼자는 절대 못 가요.”높아지는 장벽원곡동과 백운동은 국경으로 갈린 것 같지만 5년 전까진 하나의 원곡동이었다. 백운동은 과거 원곡 1, 2동이었다. 원곡동은 원곡본동으로 불렸다. 2017년에서야 지금처럼 나뉘어졌다.백운동 지역 주민 수가 크게 늘었고, 숫자로 나뉜 동명을 정비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여기에 원곡동에 선을 그으려는 여론도 작용했다.“외국인이 많다는 원곡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명칭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죠.”(송바우나 안산시의원)장벽은 더 높아졌다.“원곡초에 아이들을 보낼 수 없어요.”백운동 신축 아파트 입주민들은 입주 6개월 전부터 원곡초 배정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경기도안산교육지원청에 100건이 넘는 민원을 제기했다. 통학구역을 관산초까지 넓혀달라는 내용이었다.안복현 원곡초 교장은 학부모 설명회를 열었다. 이주배경 학생들은 한국어 실력에 따라 수준별 수업을 하니 한국 학생들 피해가 없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한국인 학생들이 혜택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홍보하려 했다.하지만 안 교장은 그 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해진다. 학부모들이 언성을 높였다.“왜 그런 학교에 다녀야 합니까?”“학교 성적이 전국 몇 등인 거예요?”안 교장은 애써 준비한 설명 자료를 다 소개하지도 못했다.교육지원청은 결국 지난해 7월 결단을 내렸다. 신축 아파트 통학구역을 원곡초, 관산초로 지정했다. 학부모들은 둘 중 한 곳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 신축단지 일부 동에선 관산초가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관산초는 빈 교실이 많지만, 원곡초는 인근 재개발이 끝나면 과밀학교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신축 아파트 학부모들에겐 선택지가 두 곳이 됐다. 하지만 원곡초에 입학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원곡초 기피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원곡초 1, 2학년엔 주원이처럼 조부모 때부터 한국인인 학생이 단 한 명도 없다. 지난해 10월 기준 원곡초 학생 수는 총 449명. 이 중 이주배경 학생은 지난해 기준 98.6%, 443명이다.원곡동은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 원곡초 앞에서 20년가량 문방구를 하는 홍모 씨(66)는 원곡동의 변화를 몸소 체감했다.“15년 전쯤부터 한국인들은 점점 고잔동 같은 동네로 빠져나갔어요. 새 아파트가 올라오는 곳들이죠. 원곡동 빈자리는 이주노동자들이 채웠죠. 그러면서 외국 아이들이 늘었어요.”사람들이 애들을 점점 적게 낳은 탓도 있었다. 인근 공단 때문에 공기가 나빠져 사람들이 떠난다는 얘기도 들렸다. 원곡동 외국인 주민 비중은 2012년만 해도 35%였다. 2021년엔 70%나 됐다.주민 이명자 씨(41)도 원곡동과 함께 컸다. 조부모 때부터 원곡동에 산 토박이다. 자신은 물론이고 딸, 아들까지 같은 원곡초를 나왔다. 명자 씨가 원곡초를 졸업한 시기는 1994년. 당시만 해도 원곡동은 안산의 중심이었다. 활기차게 돌아가는 반월공단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원곡동 중에서도 원곡초는 인기 학군이었다.20년 뒤 큰딸이 입학할 때는 원곡초의 위상이 달라져 있었다. 아이를 원곡초에 보낸다고 하면 다른 학부모들은 명자 씨를 ‘특이하다’고 했다.“거기 외국인 다니는 학교잖아요.”“수준 떨어지는 학교에 왜 굳이 아이를 보내요?”명자 씨는 2018년 원곡초의 마지막 한국인 학부모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중국인 학부모가 회장을 맡고 있다. 명자 씨가 회장을 맡는 동안 한국 학생들은 한 명, 두 명씩 전학을 갔다. 반면 이주배경 학생들은 경기 안산시 상록구, 경기 시흥시에서 애써 전학을 왔다.국경 너머의 아이들 어른들이 만든 원곡의 국경. 이 너머의 세계를 원곡초 학생들은 졸업 후에야 접한다. 원곡초에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주배경 학생들만 주로 만나기 때문이다. 졸업하면 학교 때와는 온도가 다른, 차가운 현실과 마주한다.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고려인 피브키나 이리나(15·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와 줄곧 원곡초를 다니다 2020년 졸업했다.초등학교 때는 적응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원곡초에는 러시아어를 하는 이중언어 강사가 있었다. 러시아어로 얘기할 친구들도 많았다.“처음에는 한국 애들이랑 놀았어요. 점점 러시아에서 온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나중에는 거의 러시아어 할 줄 아는 친구들이랑 놀았죠.”이리나는 원곡초에서 한국어를 못하는 친구들에게 통역사였다. 매일 두 시간씩 꾸준히 한국어를 배운 결과였다. 6학년 때부터는 밴드부에 들어가 학교에서 공연을 했다. 방탄소년단의 ‘봄날’,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를 기타로 쳤다. 밴드부 활동을 한 뒤부터는 학교에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졌다. 친구들과 기타를 치고 싶었다.이리나는 정든 원곡초를 졸업하며 한국 학생이 더 많은 원곡중을 선택했다. 지난해 3월 기준 원곡중의 이주배경 학생 비율은 17.8%다.“러시아 애들이 많은 중학교가 있지만 거긴 가기 싫었어요.” 이리나는 한국인이 많은 학교에서 한국어를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하지만 이리나는 오히려 중학교에 오고 나서 말수가 더 줄었다. 한국인 친구와 친해지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나의 중학교 친구는 러시아계 아이들 네 명뿐이다.“같은 반 한국인 친구들하고 더 얘기하고 싶어요. 놀고 싶고…. 근데 한국인 친구들은 다른 반 애들이랑 친해요.”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한국어가 늘기 힘들다.“선생님과 반 애들이 다 같이 있는 단체 채팅방이 있어요. 애들이 ‘레알’(진짜의 속어) 같은 말이나 줄임말을 쓰면 전 잘 못 알아들어요. 다른 애들은 학교에서 있던 일을 채팅방에서 얘기하죠. 근데 저는 그냥 글을 읽기만 해요.”공부도 점점 어려워졌다. 수학은 그나마 낫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선행학습을 한 터였다. 하지만 어려운 단어가 많은 국어, 국사가 큰 문제다.“국어, 역사는 머릿속에서 번역이 잘 안 돼요. 문제를 못 풀겠어요. 집에 가서 다시 해석해봐야 해요.”이리나는 요즘 갓 태어난 조카를 돌보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 미술학원에 다닌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안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뒤 프랑스로 유학을 가 미술대학을 나오고 싶다. 대학을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와 디자인 회사에 취업하고 싶다. 한국에서 자랐으니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꿈이 막막하게 느껴진다.“제가 한국 사람이 아니니 회사를 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죠?”공존을 시도하는 사람들원곡초는 국경을 지우려 애쓰고 있다. 이리나 같은 아이들이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원곡초 수학시간엔 한국어와 러시아어, 중국어가 들린다. 각 언어 강사가 해당 언어권에서 온 학생들을 돕는다. 러시아어 담당 김율리아 선생님(29)은 나눗셈 기호 등 중앙아시아권과 다른 한국의 부호와 표기법 등을 가르친다.“한국어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는 학생이라도 수학문제를 이해하고 푸는 데는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런 학생들을 돕기 위해 협력수업을 진행합니다.”원곡초는 경기도교육청이 지정한 다문화국제혁신학교다. 이주배경 학생에게 한국어와 모국어를 같이 가르친다. 한국 정착을 도우면서 뿌리를 잊지 않게 하려는 취지다.정서적 융합도 돕는다. 사물놀이와 민요, 태권도와 테니스 수업을 한다. 밴드부를 따로 운영하며 예체능 교육에도 공들인다. 원곡초 안 교장은 예체능 활동이 아이들 간 거리감을 좁힐 것으로 믿는다.“음악이나 운동은 말이 안 통해도 아이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계기가 됩니다.”‘세계 음식 체험의 날’도 한달에 한번 운영된다. 급식 때 다양한 국가 음식이 나오는 날이다. 감혜은 원곡초 영양사는 아이들이 급식을 패밀리 레스토랑 외식처럼 반길 때마다 뿌듯하다.“친환경 식자재로 무상 급식을 한다고 얘기하면 아이들이 ‘왜 비싸고 좋은 걸 우리에게 주나요’라고 물어요. ‘여러분이 자라서 이 나라 국민으로 같이 건강하게 살라고 지원하는 거예요’라고 설명해주죠. 그러면 아이들이 ‘감동이에요’라고 해요.”원곡초 덕에 5학년 제임스(가명·12)는 빠르게 한국에 적응했다. 2019년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하지만 제임스는 2년 만에 유성과 나로호 발사에 대해 한국어로 설명하는 ‘우주 소년’이 됐다.“과학자가 돼 우주를 연구하고 싶어요. 학교에서도 과학 시간이 제일 좋아요. 중력이나 가속도 같은 어려운 표현은 유튜브로 예습하고 있어요.”제임스의 동생 3학년 주디(가명·9)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학교 도서관이다. 주디 역시 수준별 한국어 수업의 도움을 받았다. 아직 한국어 발음은 서툴지만 야무지게 표현한다.“음악 시간에는 아름다운 기분이 들고, 체육시간에는 신나는 기분이 들어요.”주디는 작년까지 친구들이 ‘놀자’고 말할 때 친구들을 노려보기만 했다.“‘놀자’는 말을 ‘놀리자’로 알았어요. 날 놀리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이젠 그 차이를 알아요. 그래서 친구들이 많아졌어요.”원곡초에서도 어려움은 있다. 중국과 러시아계 아이들이 대다수를 이루며 다른 나라 아이들은 소수자가 됐다. 아이들은 끼리끼리 어울리게 된다. 제임스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중국계 친구에게 놀림 받았다.모국어로만 말하는 아이들은 한국어를 배울 기회를 놓친다. 한국인과 이주배경 학생이 골고루 섞인 학교에서 일하다 지난해 원곡초에 온 한 선생님은 이 점이 우려스럽다.“한국 아이들이 일정 비율 이상이어야 외국 아이들도 한국어를 배울 의지를 가져요.”교사들의 부담도 가중된다. 러시아계 학생이 최근 급증해 164명이나 된다. 인근에 러시아어로 한국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겨날 정도다. 하지만 원곡초의 러시아어 이중언어 강사는 둘 뿐이다.안산,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런 현상은 원곡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주배경 학생이 곳곳에서 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1년 전국 초등학교 학생 중 4.2%가 이주배경 학생이다. 비중이 9년 전(1.1%)에 비해 4배가량으로 늘었다. 실제로 원곡초 인근의 안산서초등학교 역시 지난해 기준 이주배경 학생이 전체의 절반 수준이다.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안산 선일중학교도 이주배경 학생 비율이 50%를 넘었다. 안산국제비즈니스고등학교도 19%가량이 이주배경 학생이다.전국에서 비슷한 환경의 학교들이 원곡초에 ‘공존 노하우’를 묻는다. 대구의 신당초등학교도 그 중 한 곳이다. 2018년 이주배경학생이 전체 학생의 절반에 조금 못 미쳤지만, 지금은 65%에 이른다.대구 신당초에는 인근 성서공단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이 다닌다. 다른 동네에서 신당초로 원거리 통학을 하기도 한다. 이주배경학생 학생들을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다.학교는 급격히 늘고 있는 이주배경 학생에 분주하다. 시의적절하게 대응하기 어려울까 우려가 나온다.“언젠가 선생님들이 한국어로 수업하기 어려워질까 봐 걱정이네요.”앞으로 인구가 줄며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건 불가피하다. 지금 늘고 있는 이주배경 아이들은 그들의 2세, 3세를 낳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공존 정책’이 필요할 때다.교육현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학교에 이주배경 학생을 위한 제도를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이주배경 학생들이 특정 학교로 몰리지 않기 때문이다.“자꾸 한 학교에만 이주배경학생들이 몰리다보면 한국인 학부모들이 해당 학교를 기피하게 됩니다.”(안복현 원곡초 교장)“우리학교는 베트남 출신 학생들이 많아 자기들끼리 어울리며 베트남어를 주로 써요. 한국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다 보니 한국어를 배우는 속도가 느려요.”(김진성 신당초 교감)안상규 안산서초 교감은 한국어 예비학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외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 학생은 한국어 예비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뒤 일반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지원했으면 좋겠어요.”다문화 교육 초점이 이주배경 학생들에게만 맞춰져 있다는 점도 문제다. 기존 한국인 학생도 달라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공존하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지역사회가 국경을 긋지 않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인구의 27%가 이주배경 출신인 독일에선 일반 학교에 상호문화 교육을 권한다. 이주민에겐 독일 문화를 가르친다. 이민자가 늘어난 아일랜드도 2005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수준별 상호문화 교육 과정을 마련했다.국경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원곡초 마지막 한국인 학부모회장’ 명자 씨는 원곡초 인근에 공사 중인 신축 아파트 단지에 2023년 입주한다. 원곡초 바로 코앞에 있는 단지다. 원곡초에서는 기대도 나온다. 이 단지의 통학구역만큼은 원곡초에만 배정될 것이라고. 원곡초에 한국 학생이 늘면 공존이 더 가능하리라고.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근 공인중개업소에선 벌써부터 통학구역 변경 얘기가 나온다.“입주 시점에 주민들이 민원을 넣으면 아파트 통학구역이 관산초로 확대될 거예요. 아파트 가격이 좀더 올라갈 수 있죠.”이 단지 재개발조합 관계자는 이주민 아이들이 오히려 전학 갈 거라고 장담했다.“통학구역이 바뀌지 않더라도 한국 아이들이 많아지면 그 학교의 이주민 아이들이 전학을 나가게 될 거예요. 1, 2년만 있으면 학교 분위기가 (한국인 중심으로) 바뀔 겁니다. 지켜보세요.”한국인과 이주민이 어울려 산다는 선택지는 좀처럼 어른들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국경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공존 - 두 번째 이야기 : 경기 안산도, 이주민의 섬 1월 17일 공개원곡초 선생님들은 이주배경 학생들에게 적응의 ‘첫 단추’로 한국어를 꼽는다. 하지만 이주배경 아이들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도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기 어렵다.조나단은 2016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인도네시아인이지만 조나단은 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다. 5년 동안 ‘조나단의 세계’는 팔 뻗으면 세간이 손에 닿는 수원의 원룸이 전부였다.조나단은 어린이집에 가고 싶지만 계속 거절당했다.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안산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원으로, 수원에서 안산으로. 조나단의 부모님은 아들을 위해 ‘이주 속의 이주’를 감행한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 ‘공존’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양회성 남건우 기자▽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외국인 비율 13%. 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한국 다문화의 메카. 이주민들의 강남. 경기 안산. 안산 이주민들은 말한다. ‘내 국적은 안산’이라고. 안산의 토양에서 이주배경의 다양한 한국인이 자란다. 누군가는 ‘진짜 사나이’가 되겠다며 해병대에 가고, ‘한국인의 조건’을 채우려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을 꿈꾼다. 어린이집들의 거부에 단칸방에 갇혀 살다 언어를 잊고 26년을 이방인처럼 살며 삼대 가족을 이룬다.외국인 비중이 5% 이상이면 ‘다문화사회’로 불린다. 안산은 이 비중을 2008년 넘겼다. 2008년 한국에서 다문화 지역은 12곳뿐이었다. 이제는 70곳에 가깝다. 제 2, 제 3의 안산이 생겨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에 국내 외국인이 사상 처음 줄었다. 중소기업 10곳 중 6곳은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농가 일손 부족에 농산물 값이 치솟았다. 이주민과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과연 한국은 공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취재팀은 지난해 8~12월 ‘안산인’ 100여 명을 만났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 ‘공존’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양회성 남건우 기자▽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디지털콜라팀장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서울 강서구에서 4년째 중식당을 운영하는 최모 씨(62·여)는 얼마 전 직원 1명을 내보냈다. 지난달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가 시행된 뒤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최 씨가 해고한 직원만 4명이다. 그는 “4차 대유행 이후 저녁에 짜장면 한 그릇만 팔린다”며 “1년째 임대료가 밀렸는데 이 상황이 계속되면 장사를 접어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19 여파로 문을 닫는 자영업자가 늘면서 지난달 취업자 가운데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20.1%로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다. 직원을 둔 자영업자도 31년 만에 최저로 줄었다. 4차 대유행과 방역 강화에 따른 고용 충격이 8월부터 본격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자영업자 비중 사상 최저 11일 통계청의 ‘7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취업자는 2764만8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54만2000명 늘었다. 백신 보급으로 인한 경기 회복과 지난해 취업자가 크게 감소한 데 따른 기저효과 영향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월별 증가 폭은 4월(65만2000명) 이후 석 달째 줄었다. 4차 대유행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자영업자의 충격이 컸다. 지난달 자영업자(무급 가족 종사자 제외)는 556만4000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20.1%를 차지했다. 이 비중은 관련 통계가 집계된 1982년 이후 가장 적다. 최저임금 인상 영향이 겹치면서 아르바이트생 등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는 127만4000명으로 7만1000명 감소했다. 1990년 7월(119만5000명) 이후 7월 기준으로 가장 적은 규모다.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는 2018년 12월 이후 역대 최장 기간인 32개월 연속 줄었다.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가 직원을 해고하거나 1인 창업을 많이 하면서 오히려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는 8만7000명 늘었다. 서울 강동구에서 2년째 한식당을 운영하는 A 씨(66)는 “이제 오후 5시만 넘으면 손님이 아예 오지 않는다”며 “거리 두기 4단계 이전에는 그래도 손해는 안 봤는데 요즘은 한 달 고정지출 800만 원을 내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통계청 관계자는 “거리 두기 강화로 대면 활동이 제한되면서 자영업자들이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대표적 대면 서비스 업종인 음식·숙박업의 취업자도 214만 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1만2000명 감소했다. 음식·숙박업종은 최근 3개월 연속 취업자가 늘었다가 거리 두기 4단계로 저녁 영업이 어려워지자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도·소매업 취업자도 18만6000명 줄었다.○ 4차 대유행으로 고용 충격 더 커질 듯 정부는 최근 거리 두기 강화에 따른 고용 충격이 8월부터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페이스북에서 “최근 방역 강화 조치 등으로 8월 고용부터는 시차를 두고 충격 여파가 반영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영업자는 물론이고 이들이 고용한 직원도 줄면서 최근 회복세를 보이던 청년 고용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서울 마포구에서 홀로 일식당을 운영하는 손모 씨(43)는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얼마 전 서빙 직원을 뽑으려다 관뒀다”며 “방역 조치가 풀릴 때까지는 혼자 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직 프로그램 등 자영업의 고용 충격을 완화하는 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자영업자들에게 취업 재교육을 지원해 다른 일자리를 구하게 해야 한다”며 “자영업자 고용 감소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도 당분간 공공 일자리 등으로 충격을 완화시켜 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세종=남건우 기자 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