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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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4-10-23~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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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흑연 전극도 못 만들면서 정찰위성을 쏘겠다니…

    김일성은 70세 이후 잇따른 헛발질로 북한을 거하게 말아먹고 죽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60억 달러의 거금을 투입해 1986년 완공한 서해갑문 건설이다. 1970년대 소련 기술자들이 “안 짓는 게 낫다”고 결론 낸 것을 김일성이 밀어붙였다고 한다. 담수자원이 늘고 남포와 황해도가 연결됐지만 부작용은 훨씬 심각하다. 얼지 않던 앞바다가 매년 수십 일씩 결빙돼 남포항이 마비된다. 평소에도 선박이 갑문을 통과하느라 지체돼 남포항 물류 능력은 확 줄었다. 서해갑문은 한강 하구를 갑문으로 막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었다. 김일성은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와 사리원카리비료공장 건설도 밀어붙였다. 1980년대 북한 사람들은 두 공장만 건설되면 부자가 되는 줄 알았다. 연간 비날론 10만 t, 카바이트 100만 t, 메탄올 25만 t, 질소비료 90만 t, 염화비닐 25만 t, 가성소다 25만 t, 탄산소다 40만 t, 단백질 사료 30만 t, 카리비료 50만 t 등을 생산할 수 있어 이제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고 쉼없이 선전했기 때문이다. 건설비만 100억 달러 이상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공장 모두 한 차례도 가동되지 못했다. ‘산소열법’이라는 카바이드 핵심 생산 기술은 무용지물이었다. 우수환이라는 박사가 실험실에서 석탄과 석회석으로 카바이드를 만들었는데, 과학기술에 무지한 김일성이 대규모 생산은 힘들다는 다른 과학자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추진한 탓이다. 두 공장 모두 지금은 폐허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항해 이듬해 유치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60억 달러짜리 이벤트 행사로 끝났다. 당시 북한의 한 해 예산은 40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렇게 막대한 돈을 어리석게 탕진하다 보니 몇 년 뒤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 사태를 겪어야 했다. 아직도 완공되지 못한 채 솟아 있는 105층 유경호텔은 1980년대의 실패 사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위의 사례들은 김일성의 탓만은 아니다. 김정일에게도 공동 책임이 있다. 김정일은 핵 개발에 몰두하느라 경제를 방치했다. 김정일 사망 1년 전에 노동신문이 ‘새로운 원자탄을 쏜 것 같은 특대형 사변’ ‘인공위성이 단번에 몇 개나 날아오른 것 같은 놀라운 소식’이라며 찬양하던 공장이 있었다. 함흥시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재가동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김정일이 시찰했을 때만 비날론 몇 t 생산하고 다시 가동이 중단됐다고 한다. 이런 어리석은 탕진은 김정은 집권 후에도 계속됐다. 짓다가 방치한 원산갈마해양관광단지나 평양종합병원이 대표 사례가 되겠지만, 더 치명적인 실패 사례는 순천인비료공장이 아닐까 싶다. 2020년 5월 1일 김정은은 당시 떠돌았던 자신의 사망설을 종식시키며 공장 준공식을 화려하게 열었다. 그런데 이 준공식은 사기 그 자체였다. 공장은 이후 3년 동안 가동된 적이 없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 원인은 황린전기로용 천연 흑연전극이 계속 부러지기 때문이다. 북한은 3년째 이 문제를 풀지 못해 인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화학공장은 특성상 배관들이 엄청 많다. 가동이 수년간 중단되면 배관 부식이 심각해져 사실상 다시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순천인비료공장도 김일성 시대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의 운명을 따라갈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정은은 최근 정찰위성을 여러 개 쏘아올리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지난해 12월 북한은 올해 4월까지 군사정찰위성 1호기 발사 준비를 끝내겠다고 발표했다. 김여정도 합세해 한국을 향해 “개나발들을 작작하라”며 욕설을 퍼붓고 “우리가 하겠다고 한 것을 못한 것이 있었는가를 보라”며 큰소리쳤다. 지난달 18일 김정은은 국가우주개발국을 시찰해 “완성된 군사정찰위성을 계획된 시일 안에 발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아직 소식이 없다. 흑연전극 하나 못 만들면서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정찰위성은 제대로 만들지 의문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한숨이 나오는 것은 과학기술 분야를 시간을 정한 내기처럼 호언장담하며 접근하는 태도다. 김정은은 선대의 실패 사례를 다시 펼쳐보며 과학기술은 때려죽여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것, 한 번 실패하면 결과는 치명적이라는 교훈부터 배우길 바란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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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졸업식 다음날 서울로 유학형 탈북을 했어요”[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고등중학교 졸업식 다음날 점심 무렵, 18세 전주옥은 3살 터울의 오빠와 함께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렸다. 졸업장까지 받았으니 이젠 서울로 ‘유학’을 떠날 때가 온 것이다. 부모님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꼭 무사히 한국까지 잘 도착해야 한다. 걱정 말아. 너희는 중앙당 간부 자식도 못 가는 서울 유학을 가는 거야.” 남매는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원래 압록강을 넘기로 한 시간은 밤 9시였다. 하지만 저녁에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오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아 오후에 집을 나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는 남매를 보고 물었다. “너희 어디 가니?” “함흥 고모네 집에 가요.” 오후에 동네를 돌아다니던 남매는 8시가 지나자 슬슬 압록강변으로 접근했다. 나서 자란 고향마을인지라 어둠 속에서도 지형은 훤했다. 그날은 2013년 3월 18일. 계절상 봄이지만, 양강도에선 이때까지 압록강 얼음이 녹지 않는다. 하지만 낮에 얼음 위가 녹았다가 밤에 다시 살짝 얼기 때문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까지 물에 빠진다. 부석부석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선 크게 들렸다. 강을 건너기 전 오빠가 주옥에게 자기 가방을 넘겨주었다. ‘아니, 지금이 제일 위험한 순간인데, 오빠가 왜 자기 짐을 내게 넘겨주지?’ 원망이 살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오빠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주옥아, 네가 먼저 건너가. 내가 뒤따라서 갈게.” “아니, 여기까지 왔으면 같이 가야지. 내가 왜 먼저 가.” “혹시 소리를 듣고 경비대가 추격해 오면 내가 뒤에서 유인할 거야. 걱정 말고 먼저 가.” “안 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난 그렇게 못해.” “아니야, 주옥아. 난 너만 살아서 간다 해도 하나도 후회가 없어. 빨리 가.” 둘은 압록강을 건너기도 전에 5분 넘게 실랑이를 벌였다. 속삭이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가장 비장한 표정들이었다. 결국 둘은 함께 강을 건넜다. 다행히 추격은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 부모님이 가방에 넣어준 휴대전화를 꺼내 마중 나오기로 한 중국 브로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4시간째 브로커가 나타나지 않았다. 강을 건널 때 젖은 발부터 꽁꽁 얼기 시작했다. 마침내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지만 몸이 너무 얼어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이렇게 얼어 죽는구나’하는 순간 차량 불빛이 나타났다. ● 완벽한 장마당 세대 전주옥 씨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5년 양강도 김정숙군에서 태어났다. 혜산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김정숙군은 과거 신파군으로 불렸다. 대한민국 이북5도 행정구역 기준으로 삼수군 신파면 일대에 해당된다. 북한은 김일성의 아내이자, 김정일의 모친인 김정숙이 해방 전에 이곳에서 지하공작을 했다고 해서 1981년 신파의 지명을 김정숙군으로 고쳤다. 이 지역은 과거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먹고 보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척박한 지역이다. 추운 데다 경작지도 적어 이곳에 유배를 간 사람들은 살아나오지 못한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이곳은 김일성 시대에도 대표적인 유배지로 활용됐다. 전 씨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과거 외교관으로 평양에서 살았지만 외할아버지의 남동생이 월남한 사실이 밝혀져 이곳으로 쫓겨났다. 아무리 북한 체제를 위해 목숨 걸고 큰 공을 세워도 출신성분이 걸리는 순간 반동계급이 되는 것이다. 평양에서 추방을 당한 외교관의 딸과, 신파 토박이의 아들이 결혼해 전 씨를 낳았다. 전 씨 부친의 조상은 먼 옛날 신파에 최초로 정착한 다섯 집 중 한 집이었다고 한다. 전 씨는 태어난 순간부터 완벽한 ‘장마당 세대’였다. 장마당 세대는 태어난 이후 국가에서 배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부모가 장마당에서 장사를 통해 먹여 키운 세대를 말한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에서 수많은 아사자를 초래한 비극이었지만, 김정숙군은 비극의 시절이 잉태한 장마당 시대에 가장 혜택을 본 지역이 됐다. 먹고 살기 위해 너도나도 밀수에 나서면서 사람 못 살 유배지였던 김정숙군은 밀수의 중심지가 됐다. 전국에서 중국으로 넘기려고 몰려온 밀수품들은 경계가 삼엄한 혜산을 에돌아 김정숙군으로 왔다. 김정숙군은 장진강과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발원해 자강도 랑림군으로 거쳐 흘러오는 261㎞ 길이의 장진강을 통해 북한 중부 내륙에서 나는 각종 농수산물이 뗏목에 실려 김정숙군으로 몰려왔다. 전 씨의 부친은 뗏목을 운영하는 유벌사업소 검척원이었다. 뗏목이 내려오면 목재 부피를 재서 보고하는 일이었는데, 밀수품을 나르려면 검척원이 눈감아주어야 할 일이 많았다. 유벌공들은 뗏목에 잣이나 약초, 버섯 따위를 마대에 잔뜩 싣고 왔다. 가끔 검열단이 들이닥치면 밧줄에 마대를 묶어 뗏목 밑에 숨겼다. 유벌공은 과거 천하고 위험한 직업이었지만, 밀수가 보편화되면서 갑자기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됐다. 전 씨의 부친도 이렇게 돈을 벌어 집안을 먹여 살렸고, 집에 LG TV를 놓을 정도로 돈도 벌었다.● 소년단원 밀수꾼 밀수의 중심지에 살다 보니 전 씨도 학교에 입학한 8살 때부터 밀수에 가담하게 됐다. 매일 아침 단정한 교복에 빨간 넥타이를 휘날리며 학교에 갔지만, 가방 안에는 늘 밀수품이 차 있었다. 어떤 때는 잣이, 어떤 때는 폐철이나 동 또는 약초가 담겨 있었다. 장마당 옆 밀수품을 수집하는 집에 먼저 가서 가방 안의 짐을 넘겨주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하교 때도 장마당에 들러 뭔가를 나르고 집에 갔다. 전 씨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살았다. 그게 부모를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밀수에 가담했다. 그렇지 않으면 먹고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 번은 학교에서 공개재판이 열려 다들 모이라고 해서 가보니 평소 말수가 없고, 어질다고 평가받던 물리 선생님이 심판대에 올라왔다. 알고 보니 물리 선생님의 부인이 학생들을 시켜 밀수품을 걷었는데, 그중에 케이블 동선이 포함돼 있었다. 북한에선 동으로 된 전화선을 밀수하는 행위는 매우 엄중하게 처벌한다. 밀수 장본인인 부인은 8년, 선생님은 남편이 모를 리가 없다는 이유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것도 매우 관대하게 처벌받은 것이라고 다들 수군거렸다. 지명에 김정일 모친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이 지역에 특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정숙의 사적지를 보존한다면서 읍내 곳곳에 테마파크처럼 일제강점기 때 낡은 집들을 그대로 보존해 수리도 못 하게 했다. 밀수를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은 통제와 규제가 엄격한 시내와 약간 거리가 있는 변두리에 큰 집을 짓고 살았다. 돈 많은 부잣집의 특징은 담장이 너무 높아 밖에서 안을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가까이에 다가갔을 때 군견의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전 씨도 한 번 ‘돈주’라고 불리는 부잣집 친구의 집에 들어가 봤다. 주요 가전제품은 모두 한국산이었다. TV는 로고를 떼버린 LG 제품이었는데, 전기가 없어 그냥 장식품이었다. 부잣집은 휘발유로 가동되는 발전기를 갖고 있었지만, 조명이나 노트북이나 볼 정도이지 TV를 볼 정도의 전기는 생산하지 못했다. 냉장고 역시 로고를 뗀 한국산이었지만 책장으로 쓰고 있었다. 친구는 “전기가 없어서 그렇지 냉장고는 잘 가동되는 새것”이라고 자랑했다. 한국산 쿠쿠 밥솥도 있었지만, 이 역시도 장식품에 불과했다. 삼성이나 LG 노트북만이 부잣집에서 유일하게 많이 쓰는 전자제품이었다. 노트북을 이용하면 발전기 전기로도 충전이 가능해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위부가 공급한 한국 드라마 전 씨는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군마다 하나씩 존재하던 1중학교에 입학했다. 1중학교는 군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수재들을 뽑아 공부시키는 학교인데, 대학에 가려면 1중학교를 다녀야 했다. 일반 중학교에는 대학시험 자격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워낙 공부를 잘했던 전 씨는 인민학교 때부터 1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분단위원장과 사로청위원장을 도맡았다. 1중학교에 가니 학생들은 공부를 잘해서 온 소위 ‘자연수재’와 힘을 써서 들어온 고위 간부들의 자녀인 ‘인공수재’ 두 부류로 갈라졌다. 1중학교를 다녀야 대학에 갈 수 있으니 고위 간부들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녀를 이 학교에 진학시켰다. 문제는 학교에 입학해도 머리가 나쁘면 공부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루는 같은 반, 군 보위부 최고위직 간부의 딸인 ‘인공수재’ 여학생이 말을 걸었다. “주옥아, 너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엄마가 너 데려오면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주겠대.” 집에 갔더니 그녀의 엄마가 안색이 환해지며 반갑게 맞이했다. “네가 그 공부 잘한다는 주옥이구나.” 맛있는 음식들이 진짜로 한 상 가득 올라왔다. 밥을 먹을 때 엄마가 말했다. “우리 딸 수학 참 어려워하는데 온 김에 몇 문제만 풀어주면 정말 고맙겠어.” 나중에 알았지만, 딸의 수학 점수가 나오지 않자 엄마는 공부 잘하는 주옥이랑 친해져서 공부를 같이하라고 닦달했던 것이다. 둘을 방에 공부하라고 들여보낸 뒤 엄마는 어디론가 외출했다. 엄마가 사라지자 친구가 말했다. “수학은 무슨. 우리 영화나 볼까?” 친구가 집안의 한 장롱을 열었을 때 주옥은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장롱 안에는 온갖 한국 영화 CD가 꽉 차 있었다. 친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거 다 단속돼 압수한 거야. 우리가 봐야 저 CD가 집에서 나가. 걱정 마. 우리 집은 단속 올 일 없으니까.” 그날 주옥은 처음으로 한국 영화를 봤다. 너무 재미가 있었다. 돌아가기 전 주옥이 “하나만 좀 빌려볼 수 있을까”라고 묻자 친구가 고민하더니 “그럼 내일 무조건 갖다 놔. 없어진 거 알면 아버지한테 혼나”라며 승인했다. 그날부터 주옥은 뻔질나게 그 집으로 드나들었다. 친구의 엄마가 너무 좋아 입이 벌어진 것은 당연지사. 주옥의 가족은 매일 밤 창문에 담요를 두껍게 치고, 딸이 갖고 오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 CD를 보느라 밤을 샜다. 그런 생활은 그가 탈북할 때까지 이어졌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는 ‘찬란한 유산’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들어오는 드라마는 항상 마지막 회가 없다. 드라마 유통업자들의 상술 때문이었다. 마지막 회는 꼭 다른 CD에 담겼는데, 마지막 회를 보려고 그 CD를 사면 뒷부분에는 또 다른 드라마 첫 회가 있었다. 결국 결말을 보기 위해 계속 CD를 사야 하는 것이었다. 주옥이 나중에 한국에 도착한 뒤 하나원을 졸업해 집과 첫 통화를 할 때였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딸의 전화에 아버지의 첫 말이 “어, 잘 도착한 건 이미 들었어. 그런데 주옥아. 찬란한 유산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니”였다. 전 씨도 하나원을 졸업하자마자 그 드라마를 찾아서 봤다. “아버지, 한효주랑 이승기랑 키스를 했어.”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좀 자세하게 설명해봐.” 한국에 도착한 딸과 북한 아버지의 첫 통화는 그랬다. 그렇게 한국 드라마에 빠져 누구보다 한국에 오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전 씨가 한국에 온 이듬해인 2014년 병으로 사망했다. 서울에 도착한 뒤 부모를 모셔 온다던 남매의 꿈은 3년 뒤 어머니만 서울로 오는 것으로 끝났다. 나이 50세에 한국에 온 어머니는 새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거의 환갑을 앞두고 있는데, 요즘 엄마는 ‘빠순이’ 삶을 즐기고 있어요.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에 빠지지 않고 피켓을 들고 찾아가 응원하고 있거든요.” ● 서울로 떠나는 ‘탈북 유학’ 김정숙군에선 많은 사람들이 전 씨 가족처럼 몰래 한국 드라마를 봤다. 그가 학교에 다니던 2010년 무렵 학교에서 가장 유행했던 말은 ‘니가 가라 하와이’였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니 김정숙군 사람들은 타 지역 사람들보다 정보가 빨랐다. 김정은 집권 후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한라산 줄기가 최고지”라고 말하고 다녔다. 한라산 줄기는 가족 중에 한국에 간 사람이 있어 돈을 보내오는 집을 의미했다. 한라산 줄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우리 원수님이야 말로 한라산 줄기 원조가 아닌가”라는 말도 했다. 김정은의 모친인 고용희가 제주도 출신 집안의 재일교포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전 씨도 어쩌다 보니 한라산 줄기가 됐다. 외삼촌 가족이 탈북해 서울에 왔던 것이다. 전 씨 남매가 한국으로 오는 데는 외삼촌의 역할도 컸다. 부모가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김정숙군 임산사업소 간부로 사실상 추방돼 오자 외삼촌은 체제에 대한 반감을 갖고 컸다. 혜산농림대학을 졸업한 외삼촌 역시 수재로 소문났지만 부모 탓에 크게 승진하지 못했다. 외삼촌은 1980년대에 몰래 라디오를 조립해 한국 극동방송을 매일 빠짐없이 들었다. 탈북 출연자들을 통해 혹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대규모 탈북의 시대가 열리자 먼저 탈북한 뒤 2년 뒤 가족까지 한국으로 데리고 갔다. 한국에 온 뒤 외삼촌은 전 씨 부모에게 “똑똑한 자식을 희망이 없는 곳에서 키우지 말고 남쪽에 보내라”고 독촉했다. 김정숙군에서 전 씨 남매는 유명했다. 공부를 잘해 오빠와 누이동생 모두가 1중학교에 간 집이 흔치 않았다. 오빠는 제17차 전국학과경연대회에서 2등을 한 수재였다. 전 씨의 오빠는 1중학교를 졸업한 뒤 물리전문학교에 진학해 동생이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다. 전 씨 역시 학교에서 학생 간부를 도맡아 했으니 마을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런 남매를 보면서 부모들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김정숙군은 북한에서도 가장 외진 곳 중의 하나였는데,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간부집 자식들처럼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잘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신성분이 걸린 남편 때문에 함께 추방을 온 외교관 출신의 외할머니도 거들었다. “나는 우리 손자들이 비행기 타고 다니는 게 소원이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겠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전 씨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서울에 보내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마음을 일찍이 굳혔다. 그래서 전 씨도 1중학교를 졸업하기 몇 년 전부터 “네가 졸업하기만 하면 오빠랑 서울에 보내서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할 거야. 우리는 그 뒤에 따라갈게”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중학교 졸업식 다음날 탈북은 오래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그래서 부모들도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담담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이 태국에 도착할 때까지 부모들은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탈북 시점을 졸업식 다음날로 정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얼음이 두꺼운 겨울은 밀수 시즌이라 압록강 경비가 너무 살벌했다. 잘못하면 총에 맞을 수도 있었다. 얼음이 없을 때엔 물살이 너무 세서 수영을 잘하지 못하면 익사할 위험도 컸다. 졸업식이 열린 3월 말에는 얼음이 얇아져 밀수도 거의 이뤄지지 않는데, 이때는 경비대 경비도 가장 느슨해진다. 이런 날이 1년에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전 씨 남매는 졸업장을 받자마자 길을 떠났던 것이다.● “비행기 탄 줄도 몰랐어요” 외삼촌이 한국으로 오는 길을 잘 준비한 덕분에 남매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불과 일주일 만에 태국까지 도착했다. 전 씨는 나흘 동안 네 개의 계절을 모두 경험하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떠날 때는 겨울옷을 입고 떠났는데, 하루 동안 차를 타고 달리니 개나리가 보이고 사람들이 봄옷을 입고 있었다. 전 씨는 외투를 벗어버렸다. 다시 하루를 달리니 이번엔 짧은 여름옷 차림이었다. 그래서 옷을 다시 한 꺼풀 벗었다. 동남아에 오니 이번엔 처음 경험하는 무더위가 찾아왔다. 전 씨는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폭이 좁은 나룻배를 타고 태국에 도착해 첫발을 내디디던 때를 꼽았다. 그 첫발의 촉감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외삼촌을 통해 메콩강만 건너면 절대 잡혀갈 일이 없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태국 땅에 도착했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습니다. ‘이제는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됐다. 나는 겨우 18살이니 미래가 창창하다. 2400만 북한 동포들이 그토록 염원하지만, 극소수만 성공한 그 탈북을 나는 드디어 해냈구나.’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서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황홀함이나 가슴 벅차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전 씨에게 있어 태국에 도착한 것은 탈북에 성공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외할머니의 소원인 비행기도 드디어 타봤다. 그런데 그때는 큰 감흥이 들지 않았다. “비행기 타는 줄도 몰랐어요. 밤에 외국 공항에서 이리저리 안내하는 대로 정신없이 끌려다니다가 어디로 들어가더니 앉으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게 비행기 좌석인 줄 몰랐어요. 하늘에 뜨니까 이게 말로만 듣던 비행기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밤이라 밖은 내다보이지 않아서 비행기 타는 게 그렇게 좋은 건가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전 씨 남매처럼 탈북해 일주일 만에 태국까지 온 경우는 대단히 빠른,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매우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한다. 이들의 운은 하나원을 나올 때도 이어졌다. 한국에 온 탈북민들은 대다수가 서울에 집을 배정받길 원하지만, 서울에 나온 임대주택 숫자는 늘 부족해 제비뽑기로 결정한다. 전 씨가 하나원을 졸업할 때도 서울에 할당된 주택은 딱 2개였는데, 오빠가 수십 대 일의 경쟁 속에서 그 어려운 미션을 성공한 것이다. 이런 경험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 씨는 한국에 와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됐다. “외삼촌이 극동방송을 수십 년 몰래 듣다 보니 탈북하기 전에 이미 비밀교인이 돼 있었어요. 우리가 탈북할 때도 외삼촌은 ‘압록강에선 내가 지켜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고 와라’고 했어요. 그래서인가 압록강 넘을 때부터 ‘하나님 무사히 살려 주세요’ 이러면서 내내 왔습니다. 태국에 도착했을 때도 ‘하나님, 감사합니다’고 했고요. 그래서인지 한국에 와서 교회에 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더라고요.”● 한동대에서 이룬 유학의 꿈 드라마로 보던 서울과 직접 와서 보는 서울은 어떤 차이일까. 전 씨는 “보이는 것은 똑같은데, 삶은 완전히 달랐다”고 말했다. 자신들은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애기에 불과했다. 한국에 도착한 뒤 이들의 첫 미션은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우선 한국에 도착했을 때 21세인 오빠부터 진학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아무리 북한에서 이름을 알린 수재라고 해도 한국에서 대학에 붙기는 쉽지 않았다. 수학이나 물리학은 자신이 있었지만 영어나 국어를 따라갈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빠는 한양대에 입학해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은 전업 투자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북한에서 전국대회 2등을 한 수재가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찾은 길은 투자자인 셈이다. “그게 맞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정말 열심히 공부하면서 하는 것 같고, 돈도 버는 것 같아요. 자기 인생이니 자기가 책임져야죠.” 오빠를 대학에 입학시키고 나서 전 씨는 자신이 갈 대학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대학에 지원서를 내기 전 컴퓨터 학원이나 영어학원을 다니며 대학 과정을 따라갈 준비도 했다. 서울대가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공부하는 것이 뭔가 의미가 있고 가치관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한 대학이 한동대였고, 2016년에 국제관계학과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입학은 했지만 과정을 따라가긴 너무 벅찼다. 특히 한동대는 영어 수업이 많아 따라가기 힘들었다. 북한 1중학교에선 영어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영어로 전공과목을 이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전 씨는 죽기 살기로 영어에 매달렸다. 첫 학기 성적은 예상했던 것보다 만족스럽게 나왔다. 전 씨는 대학에 입학하는 다른 탈북민 학생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첫 학기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고 했다. 첫 학기 성적이 좋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장학금을 받으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다음 학기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첫 학기 성적이 나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없고, 그러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하다 보니 공부와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선순환, 악순환의 고리가 1학기에 만들어진다는 이론이다. 그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대학 기간 각종 공모전이나 대회에도 빠지지 않고 나가 상금도 많이 받았다. 이렇게 받은 상금을 모았다가 방학이면 영어를 배우러 외국에 나갔다. 그는 국제관계학뿐만 아니라 사회복지까지 복수 전공을 택해 모두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한 학기도 쉬지 않고 공부에 몰두한 끝에 2020년에 학사 과정을 끝냈다.● 전주옥의 해피엔딩 전 씨는 재작년 결혼해 지난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최근 웹툰 회사 대표가 됐다. 한국에 유학 오는 심정으로 탈북해 웹툰 회사를 차린 까닭은 뭘까. “2019년에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어떤 분이 연락을 해오셨어요. 며느리 삼고 싶다고요. 그래서 소개팅 삼아 나갔는데, 남자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가 지금의 남편이고요. 남편의 직업이 웹툰 작가랍니다.” 웹툰 작가 남편을 만나자 전 씨는 욕심이 생겼다. 평소 전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해 돈을 벌며 사는 평범한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북한에서 신음하는 동포를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것이 자신이 한국에 온 사명이기도 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웹툰이라는 세계를 접하면서 이것이 또 자신에게 불현듯 찾아온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 인권이란 이슈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올드한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웹툰을 많이 보잖아요. 그러니까 웹툰을 통해 북한 실상을 알리는 게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그림은 국경이 없잖아요. 한국 웹툰은 미국에서도 인기가 많습니다. 최근 한류가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고, K-컬처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 분위기를 타고 북한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직 그의 회사는 정식 작품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시나리오는 완성돼 가고 있다. 전 씨는 첫 작품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날 한 탈북민 대안학교에서 낯이 익은 얼굴을 만났다. 분명 같은 동네에서 살던 인민학교 동창생인 듯싶어 말을 걸려는 찰나 귀신을 본 것처럼 얼이 나가 있던 상대방이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래서 쫓아가 물어봤더니 “어떻게 죽은 사람이 여기에 와 있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연은 이랬다. 그와 오빠가 한국에 간 뒤 몇 달쯤 지나 보위부가 슬슬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자식 둘이 몇 달째 사라진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부모는 결국 이들이 함흥에서 집에 돌아오다가 장마를 만나 물에 휩쓸려 죽은 것으로 이들을 사망 처리했다. 마을에선 그렇게 화제를 몰고 다니던 남매가 죽었다고 난리가 났다. 한국에 먼저 왔던 동창은 어느 날 고향집에 통화를 하다가 “야, 너랑 인민학교 같이 다녔던 주옥이 있지. 걔가 오빠랑 함흥에서 돌아오다가 홍수에 휩쓸려 죽었대”라는 말을 들었다. 너무 슬펐던 동창생은 교회에 가서 “목사님, 주옥이라는 예쁘고 똑똑한 친구가 있었는데 물에 빠져 죽었대요. 명복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랬던 주옥이 살아서 나타났으니 그가 넋을 잃은 것이다. 전 씨의 첫 웹툰 작품은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아이들이 빠져 떠내려가고 있소”라는 고함소리가 터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 씨의 고민은 북한 관련 웹툰이 과연 젊은 세대에게 얼마나 먹힐지 여부다. 아무리 의미 있는 작품이라도 조회수가 오르지 않으면 회사는 생존하기 어렵다. “아마 내년쯤 물에 빠진 북한 아이들이 떠내려가는 웹툰을 우연히 접하게 된다면, 끝까지 봐주시고 북한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서울에 유학 온 전주옥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게 빌어주세요.”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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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무역보험공사, 기재부 운영평가 단독 ‘최우수’ 선정

    한국무역보험공사(K-SURE)가 지난달 26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2년도 직무 중심 보수체계 개편 실적 점검 결과’에서 직무 다양성 및 업무 성과와 연계한 인사 및 보수체계 운영 실적 ‘최우수’ 기관으로 평가됐다. 점검 대상 공공기관 130곳 중 ‘최우수’로 평가된 기관은 무역보험공사가 유일하다. 무역보험공사는 직무 특성을 반영한 보수체계를 확립하고, 연공서열보다 업무 성과를 우선 고려해 승진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직무급 체계 도입을 바탕으로 조직문화 혁신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지난달까지 고객 만족, 동반성장, 청렴 등 다양한 분야에서 ‘A급’, ‘최우수’ 등의 결과를 거두며 신뢰받는 정책금융기관으로서의 밑바탕을 탄탄하게 다지고 있다. 직무 다양성과 업무 성과를 반영한 체계적인 보수·인사 시스템이 연공서열 중심 조직문화의 틀을 깨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노사가 합심해 직무평가의 공정성과 구성원의 제도 수용성 확보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무역보험공사는 ‘노사 공동 직무급 협의체’를 소통과 의사 결정의 컨트롤타워로 마련해 노조가 경영진과 동등한 파트너로서 참여하며 협의를 진행했다. 보수체계에서는 노사 양방향 소통을 기반으로 한 조직 수용성을 확보하며 제도의 실효성을 확대했다. 인사 제도에서는 능력과 자질 평가 비중을 높이고 성과 우수자에 대한 ‘승진 패스트 트랙’도 도입했다. 무역보험공사는 2010년부터 일찍이 직무급제를 정식 도입하며 조직문화 혁신을 본격화했다. 체계적인 직무분류체계 수립이나 다각적 직무기술서 기반 직무 평가 절차 도입 등에 있어서 다양한 채널을 통한 노사 간 소통이 밑바탕이 됐다. 무역보험공사는 청렴, 동반성장 등의 분야에서도 속속 우수한 성과를 거두며 혁신 선도 기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난해 3월 유엔 산하 글로벌콤팩트로부터 정책금융기관 최초 2년 연속 ‘반부패 어워드’를 수상했다. 올해에는 ‘공공기관 청렴 체감도 평가 1등급’(국민권익위원회), ‘데이터 기반 행정 점검 우수’(행정안전부), ‘공공기관 동반성장 평가 2년 연속 최우수’(중소벤처기업부) 기관으로 잇따라 선정됐다. 또 지난달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2년 공공기관 고객만족도 조사 결과에서는 4년 연속으로 ‘우수’ 등급을 받았다. 이인호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은 “신뢰받는 우리나라 대표 공적 수출 신용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다방면의 혁신 노력이 점차 결실을 맺고 있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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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핵우산 명문화와 김정은의 공포

    지난달 말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의 핵우산을 명문화한 ‘워싱턴 선언’을 가장 중요한 외교 업적으로 내세웠다. 이 선언은 미국이 동맹국의 핵 억제를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 계획을 담아서 선언하고, 이를 미국 대통령이 약속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북한이 핵으로 한국을 공격하면 정권의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척에 실린 핵 자산만으로 80개의 북한 도시를 동시에 파괴할 수 있는 전략핵잠수함(SSBN)이 한반도에 빈번하게 전개된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번 워싱턴 선언은 과거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예전에도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 보호 아래에 있긴 했지만 이번엔 미국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한국이 핵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국이 대응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변신한 세계적인 성공 사례인 한국이 핵무기에 속절없이 무너지는데 미국 대통령이 약속을 저버린다면 초강대국 미국의 체면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세계의 핵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는 핵 개발에 매달리게 될 것이고, 직접 만들지 못한다면 암시장에서 사오기라도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구에 핵무기가 광범위하게 퍼지면 가장 위기를 맞을 국가는 적이 제일 많은 미국이나 중국 등 핵 보유 강대국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이번 선언이 김정은에게 실제로 얼마나 공포감을 줄까를 따져봐야 한다.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한미 양국의 핵우산 명문화나 우리의 핵 보유가 김정은의 핵 개발을 멈추게 할지는 미지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민주 국가와 독재 국가의 차이 때문이다. 민주 국가는 대통령이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책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국민에게 투표로 심판을 받게 된다. 반면 북한은 어떤가. 그곳은 김정은 하나만을 위해 존재한다. 북한 땅에 핵무기가 80기가 아닌, 8만 기가 떨어진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김정은을 심판하지 못한다. 북한군은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군대가 아닌 김정은의 집안만 지키는 가병이다. 북한이 핵 개발에 대한 김정일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발언이라고 선전하는 것이 “조선이 없는 지구는 없다”이다. 그런데 그 조선이 북한 인민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량 아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눈 깜짝하지 않고, 국경을 꽁꽁 막고 처형과 연좌제로 온 강토를 수용소처럼 운영하는 것이 북한 지도부다. 그들에게 조선은 김씨 일가만을 의미하며, 인민은 노예에 불과하다. 그래서 북한의 구호는 온통 ‘수령결사옹위정신’ ‘자폭정신’ ‘육탄정신’ ‘총폭탄정신’과 같은 섬뜩한 말로 도배돼 있다. 한마디로 김씨 일가를 위해 너희들은 목숨 따윈 서슴없이 내놓으란 뜻이다. 이런 북한에 가장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는 말은 “북한이 종말을 맞게 될 것”이 아니라 “핵 장난을 치면 김정은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경고이다. 북한은 ‘핵에는 핵’이라는 ‘공포의 균형’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오히려 김정은의 공포는 스텔스기에서 투하한 스마트 폭탄 한 발이나, 내부에서 쏘는 한 발의 저격용 탄알에서 극대화된다. 따라서 북한의 핵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던지는 메시지는 좀 더 정교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북한을 지도상에서 지운다거나 석기 시대로 돌리겠다는 말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북한 수뇌부를 제거할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김정은에겐 수십 척의 핵잠수함이 오는 것보다, 근거리 휴대용 미사일을 가진 몇 개의 반체제 그룹이 북한 내에 존재하는 것이 더 위협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김정은의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의 목숨이 강대국의 저울대에 오르는 일일 것이다. 북한을 상대로는 그런 위협을 극대화해야만 진정한 공포의 균형이 만들어진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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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년 전 TV로 방영된 ‘탈북 꽃제비’가 바로 접니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1999년 9월 2일. 한국 관광객들을 태우고 백두산으로 향하던 버스를 향해 남루한 행색의 북한 꽃제비 꼬마 3명이 손을 흔들었다. 중국 연변 화룡현 근처 어디쯤이었다.버스가 서고 몇몇 관광객이 내려 관심을 표하자 아이들은 “우린 북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린 남에서 왔단다. 서울을 아니?” 등의 질문을 던지며 물과 사탕을 주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이름과 고향을 스스럼없이 말했다.이 버스에는 마침 한국 모 방송사 취재팀도 타고 있었다. 꽃제비들의 모습은 북중 국경에서 구걸하는 북한 어린 꽃제비들이라는 주제로 방영됐고, 북한 보위부에서도 방송을 모니터링해 이들의 신상을 파악했다.버스가 떠난 뒤 아이들은 태어나 처음 들은 서울말을 흉내 내며 가던 길을 즐겁게 갔지만, 다음날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3명 중 한 명은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까지 나왔고, 다른 한 명은 한국으로 와 미디어 관련 회사를 차렸다.한국 방송사 카메라에 잡힐 당시 키 125㎝의 13세 꼬마 전충일 씨가 한국에 온 한 명이다. 그는 한국에 오기까지 두만강을 일곱 번 넘었고, 북송과 감옥 생활을 거듭 겪어야 했다.●가족과 생이별전 씨는 1986년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25호 관리소’, 일명 수성교화소가 전 씨의 집 근처에 있었다.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지질탐사대에 다녔고, 어머니는 전 씨와 네 살 아래 남동생을 돌보며 집에서 부양가족으로 지냈다. 전 씨가 인민학교 1학년에 막 입학하고 몇 달 되지 않았던 때에 김일성이 사망했다. 그리고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전 씨는 연이어 닥치는 비극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그가 인민학교 3학년이던 1997년 아버지는 청진 외곽 석막이란 곳에 부업지 농사 담당으로 파견됐다. 전 씨의 가족도 아버지를 따라 ‘금채동 골안’으로 불리는 외진 산골로 옮겨왔다. 농사를 지으면 굶어죽지 않을 거란 희망은 얼마 안돼 무너졌다. 배고파 종자도 훔쳐 먹는 때에 농사라고 잘 될 리가 없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날이 많아지고, 급기야 이듬해 어머니가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겠다며 동생을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사실상 부모가 이혼한 것이다.전 씨는 아버지와 함께 산골에 남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더니 이듬해 2월 간 경화와 복수로 세상을 떠났다. 13세 전충일은 집에 혼자 남게 됐다.● 꽃제비가 되다1999년은 전 씨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해였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하루는 산에 가서 나무를 모으고, 다음날은 시내에 가서 나무를 파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당시 그의 키는 125㎝였다. 이런 꼬마가 손수레에 나뭇단을 싣고 20리길을 2시간 넘게 걸어가 시내 장마당에서 나무를 팔고 돌아오는 일을 쉬지 않고 한 것이다. 당시 석막에서 청진으로 가는 도로에는 나무 실은 손수레를 끌고 가는 아이들이 줄을 이었다.손수레 하나를 팔면 당시 북한돈 20~30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손 쉽게 먹을 수 있는 ‘펑펑이 가루’나 콩비지를 사서 끼니를 때우고 또 산으로 향했다.그런데 몇 달쯤 지나자 집에 동생이 불쑥 나타났다. 사연을 들으니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장사를 하러 무산에 갔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거리를 떠돌며 빌어먹다가 우연히 마을 사람을 만났고, 그가 형에게 데리고 온 것이었다. 자기 혼자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충일은 9살 동생도 책임져야 했다.아이들의 어려움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지 어느 날 인근에 살던 삼촌이 와서 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충일은 삼촌 집에서도 나무를 팔아야 했다. 다행히 삼촌이 밑천을 조금 대주어 이번엔 산에 가서 나무를 캐는 대신, 산 아래에서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그들이 갖고 온 나뭇단을 샀다. 그걸 보기 좋게 다시 묶어 장마당에 가서 팔면 두 형제가 먹고 살 만큼의 돈은 벌 수 있었다. 삼촌은 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밭에 가서 돼지에게 줄 풀을 뜯어오게 했다.새벽 5시에 일어나 산으로 가는 일과가 반복됐다. 그런데 몇 달 뒤 사고가 터졌다. 8월 어느 날 무더위 속에서 장마당에 갔는데 그날따라 나무가 잘 팔리지 않았다. 피곤했던 충일은 손수레에 기대 잠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깨어나 보니 손수레만 있고 나무가 모두 사라졌다.이제 돌아가면 삼촌에게 엄청 매를 맞아야 했다. 삼촌은 두 형제를 수시로 때렸는데, 나무를 잃어버리기 며칠 전에도 죽도록 때렸다. 돼지풀을 뜯어야 할 동생을 몰래 시내로 데려가 그가 좋아하는 ‘까까오(북한식 얼음과자)’를 사먹였다가 들켰다. 동생에게 까까오를 들고 가면 녹아 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갔던 것인데, 삼촌에겐 배은망덕한 행위로 비춰진 것이다.나무를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가면 삼촌이 어떻게 할지 눈에 선했다. 충일은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꽃제비 무리에 합류했다.그러나 청진역에서 시작한 꽃제비 생활도 며칠 가지 못했다. 단속원들에게 걸려 청진시 해안여관을 개조해 만든 ‘꽃제비 구호소’에 끌려가 수감된 것이다. 먼저 잡혀온 꽃제비들은 “여기에 있다간 굶어죽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저녁이라고 나온 것을 보니 영양가루로 만든 떡국이었는데, 건더기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잡혀간 날 밤에 충일은 다른 꽃제비 3명과 함께 구호소를 탈출했다. 청진역에 가면 또 잡힐 것 같아 이번엔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났는데, 종점에 도착하니 북중 국경인 무산이었다. 꽃제비 생활을 갓 시작한 충일은 구걸도 잘 못하고 훔치는 것도 잘 못했다. 이렇게 살다가는 굶어죽을 것 같았다.그때 인민학교 때 봤던 영화 ‘대홍단책임비서’가 떠올랐다. 영화 속에서 당 비서는 지역 내 부모 잃은 고아들을 데려다 돌봐주는 훌륭한 간부로 묘사됐다. 무산에서 대홍단까지는 이틀 길이었다. 돈이 없는 그는 이틀을 내리 걸어 대홍단까지 갔다.가보니 영화처럼 고아를 키우는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그때는 감자철이었다. 무연하게 펼쳐진 감자밭 주변에 경비움막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움막 중 한 곳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했다. 작은 아이가 불쌍했던지 아니면 심심해서였던지는 모르겠지만, 경비원은 그를 움막에서 자게 승인했다. 그때부터 충일은 감자만 구워 먹었다. 일주일 내내 감자만 먹으니 입술이 갈라지고 힘이 없었다. 1998년 10월 대홍단을 시찰한 김정일은 “감자는 곧 흰쌀”이라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충일이 직접 감자를 먹어보니 일주일도 먹기 어려웠다.● 두만강을 건넌 꽃제비들이곳을 떠나 딴 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무산 쪽으로 가다가 비슷한 연령대의 꽃제비 두 명을 만났다. 한 명은 충일처럼 꽃제비 경력이 별로 없었는데, 한 명은 베테랑 꽃제비로 훔치는 것도 잘했고, 중국에 건너갔다 온 경력도 있었다. 베테랑 꽃제비가 중국에 건너갈 것을 제안했다. 중국에 가서 빌면 돈도 주고 밥도 준다는데, 이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당시는 백두산 아래 대홍단은 국경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두만강도 물살은 좀 세도 폭이 넓지 않아 건너기 쉬웠다. 세 꼬마는 대낮에 강을 건너 중국에 넘어갔다. 민둥산을 오르며 이들은 하루에 한 마을만 돈다는 원칙을 세웠다.첫 번째 마을에 들어가서 “조선에서 왔습니다”라고 하니 저마다 혀를 끌끌 차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소고기까지 먹였다. 북한에선 아무리 빌어도 밥 한 숟가락 얻어먹기 힘들었는데, 강 하나를 두고 이런 별천지가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시내에 가면 교회란 곳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너희들을 먹여주고 재워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다음날 이들은 화룡 시내를 향해 걸어갔다. 첫 마을에서 동정의 온기를 느꼈던 터라 겁도 사라졌다. 이들은 길을 지나가는 차를 세우기 시작했다.그러다가 선 것이 한국 관광객들이 탄 버스였고, 이들의 모습은 한국에서 방영됐다. 버스와 헤어진 다음날 이들은 어느 한족 마을에 가서 다시 “조선에서 왔습니다”고 외쳤다. 밖에서 밥을 먹던 한족 하나가 이들을 불러 밥을 주었다.이때 주변을 지나가던 공안 한 명이 다가와 “고기만두 먹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먹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안은 화룡 공안국으로 이들을 데려갔다. 공안국에 가니 정말 고기만두를 사주었다. 아이들은 중국은 안전원도 친절하다고 놀랐다.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좀 기다리면 교회에 데려다 준다는 말을 믿고 방에 가만히 있었다.그런데 시간이 좀 흘러 나타난 다른 공안은 태도가 험악했다. “네 놈들 때문에 명절에 쉬지도 못하고 나왔다”며 욕을 엄청 퍼붓더니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우릴 어디로 보내나요”라고 묻자 “어딜 보내긴, 조선에 보내야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서야 아이들은 자기들이 잡혔다는 것을 알았다. 변방 구류장에 끌려가 닷새를 보내고, 9월 8일 이들은 북한에 송환됐다. 하도 어린애들이라서 그런지 보위부에선 이들을 때리지도 않고 곧바로 ‘무산구호소’로 보냈다.도망칠까봐 팬티만 입혀놓은 채 방에 가두어 두었는데, 이들은 팬티만 입고 다시 밤에 도망을 쳤다. 마침 다음날이 북한 국경절인 9월 9일이라 감시가 심하지 않았다. 이번엔 한 명이 더 합세해 4명이 됐다.이들이 갈 곳은 뻔했다. 중국을 한 번 경험하면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아이들은 잡히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을 넘었다. 두만강을 넘은 뒤 베테랑 꽃제비가 제안했다. 4명이 몰려다니면 체포되기 쉬우니 둘씩 갈라지자는 것이다.베테랑은 새로 합세한 애와 함께 갔다. 충일은 나중에 미국에 간 친구와 한 팀이 됐다. 그렇게 갈라진 베테랑의 삶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 충일은 알지 못한다. 지금 살아있으면 그도 37세가 됐을 것이다.●인신매매 브로커친구들과 헤어져 둘만 남은 충일의 팀은 길에서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마침내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조선족 남자는 이들을 산에 있는 움막에 데려가 밥도 주고 옷도 사주었다. 며칠 그렇게 살았는데 조선족이 속내를 드러냈다.“너네 조선에 나가 여자를 데리고 올 수 있나. 그럼 내가 돈을 줄게.”충일이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는 여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대홍단에서 만난, 충일이보다 더 어린 아들딸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던 한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식 또래의 충일이 불쌍했던지 밥도 나눠주고 자기 집 주소도 알려주면서 “나중에 잘 되면 찾아오라”고 했다.그녀가 알려준 집은 아오지 탄광으로 잘 알려준 은덕군이었다. 조선족에게 “그 아줌마에게 한번 찾아가면 어떨까”라고 말하니, 안색이 밝아졌다. 이들은 조선족의 차를 타고 국경을 따라 올라가다가 회령 근처에서 두만강을 넘었다.조선족은 여비를 하라며 두 아이에게 각각 인민폐 100위안씩 건네주었다. 북한에 건너가 돈을 바꾸니 2700원이 됐다. 과거 충일이 나무를 한 달 내내 팔아 모아도 만질 수 없는 액수였다. 조선족의 통 큰 씀씀이에 감동한 꼬마들은 반드시 그의 임무를 관철하겠다고 생각했다.며칠 뒤 이들은 은덕에 도착했고, 아줌마를 만나는데 성공했다. 중국에 가면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줌마는 선뜻 따라가겠다고 했다. 주변에 더 갈 여자가 없냐고 하자 중국에서 살다가 북송된 경력이 있는 동네 여성 3명이 합류했다. 충일과 친구는 은덕 아줌마와 두 자녀, 합세한 여성 3명 등을 데리고 무사히 중국으로 다시 넘어왔다.조선족은 차를 타고 마중 나와 이들을 움막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며칠을 지냈는데, 어느 날 충일과 친구가 몰래 마을로 나가 밥을 빌어먹고 돌아오니 여인들은 모두 도망가고, 아줌마와 자녀만 남아 있었다. 어차피 팔려가는 길임을 알고 따라온 이들인지라 먼저 살던 곳과 연락해 사라진 것이다. 아줌마도 이들과 함께 도망칠 수가 있었지만, 아이들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교회로 보내준다는 조선족을 믿어보기로 하고 남았다. 조선족 남자는 돌아와서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그는 충일과 친구, 그리고 은덕 아줌마의 두 자녀를 차에 싣고 시내 어느 작은 교회로 데리고 갔다. 혼자 움막에 남은 아줌마의 운명은 이후 알 수가 없었다.작은 교회에선 아이들 넷을 다시 연길의 큰 교회로 데리고 갔다. 큰 교회에선 다시 어느 30대 중반의 조선족 집으로 보냈다. 이 집은 한국에서 온 이광식 목사가 운영하는 여러 피난 처소 중 한 곳이었다. 조선족 부부는 6명의 탈북 고아들을 키웠다. 고아들은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며 자랐다.나중에 은덕 아줌마의 두 자매 역시 한국에 왔고,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해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어머니 소식을 모른다.충일은 그때 일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저 때문에 두 자매가 어머니와 헤어진 것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든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은덕 아줌마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그렇지만 그때 충일은 13살이었다. 은덕 아줌마도 자신이 중국에 팔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두 아이라도 살리기 위해 결단했을 것이다. 당시 아오지에선 무리로 사람들이 굶어죽을 때였다. 살 수만 있다면 팔려가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던 시절이었다.● 보위부에 체포1999년 한 해 동안 충일에겐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촌집에서 살다가 꽃제비가 됐고, 탈북과 북송을 반복한 끝에 연길의 한 조선족 집에 양자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온 이 목사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컸다. 가정교사를 불러 여러 처소에서 공부하는 탈북 고아들에게 국어와 중국어, 수학, 영어, 성경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후 국경에서 단속이 심해지자 처소를 청도로 옮겨갔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충일은 17살 청년이 됐다. 처음 넘어왔을 때 키가 또래보다 훨씬 작았지만, 그동안 키도 쑥쑥 커서 167㎝가 됐다.철이 들면서 충일은 늘 고향에 있는 동생이 떠올랐다. 삼촌집에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돼지 풀을 뜯으러 다닐 것이란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2003년 충일은 함께 넘어온 친구와 함께 고향의 가족을 찾아보기로 하고 청도를 떠났다. 이번에도 몰래 두만강을 넘는데 성공했고, 삼촌집이 있는 동네까지 도착했다. 삼촌 어머니가 운영하는 매점에 들려 먹을 것을 샀는데, 삼촌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니 삼촌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 충일입니다”고 하자 삼촌이 엉엉 울었다. 다음날 인근 고모의 집에 갔는데 고모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고모부가 “네가 없어진 얼마 뒤 보위원들이 찾아왔다. 네가 중국 가서 빌어먹는 장면이 남조선 텔레비에 나왔다고 말해주더라. 우린 너를 사망 처리하고 지냈다”고 말했다.동생은 삼촌집에 없었다. 그가 탈북한 후 어머니가 나타나 동생을 데리고 다시 수성의 고향집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는 걸어서 집으로 갔다.북한에서 유일하게 엄마만은 한 눈에 아들을 알아봤다. 충일은 엄마에게 4년 전 무산에서 왜 남동생을 버렸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 아마 그때 엄마는 중국에 갔다 온 것 같다는 것이 충일의 짐작이다.가족과 재회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보위부에서 그를 찾아와 끌고 갔다. 알고 보니 함께 나온 친구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마을에 와서 충일을 찾았는데,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이 보위부에 신고했던 것이다. 조선족의 집에서 4년을 크다보니 어느새 이들의 말투는 고향에서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변했던 것이다. 충일의 말투도 친구와 똑같다보니 그도 덩달아 체포됐다.보위부에선 이들에게 한국 사람을 만났는지, 교회에 갔는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둘은 중국에서 농사를 했다고 버텼다. 한 달 쯤 지났을 때 조사하던 보위원이 두툼한 서류를 이들 앞에 내밀었다. 그걸 보고 충일은 경악했다. 청도에서 함께 살던 사람들의 신상이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한국 목사가 운영하던 처소에서 4년을 살았다는 것이 드러나자 이들은 평양 국가보위부 본부가 직접 수사하는 죄인이 됐다. 6월에 체포돼 12월까지 6개월 간 보위부 구류장에서 조서를 쓰는 일을 반복하며 보냈다.12월 31일에 갑자기 보위부장이 불렀다. 갔더니 “장군님의 은덕으로 너희는 당시 너무 어렸다는 것을 참작해 석방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2004년 설날은 집에서 보내게 됐다.● 동생을 데리고 다시 탈북중국을 경험했던 충일은 북한에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그는 동생에게 중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동생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이밥에 고기를 실컷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천국이었다. 어머니에겐 차마 남동생을 데리고 간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형제는 3월초 집을 나서 눈보라 치는 3월 8일 국제부녀절(세계 여성의 날) 밤에 두만강을 건넜다. 강을 넘어 조선족 양부모에게 전화를 하자 이들이 마중 나왔다. 충일이 북한에 있던 사이 청도에 있던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청도 팀 중 한 명이 신분증을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처소를 떠나 떠돌다가 공안에 체포됐는데, 그가 모두 불어버린 것이다.충일은 연길에 다시 머물게 됐다. 5개월쯤 지나자 이번엔 엄마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갑자기 두 아들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고통이 클까에 생각이 미치니 마냥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두만강을 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까지 데리고 중국에 나오는 것이 목표였다. 2004년 8월 그는 북한에서 팔 수 있는 옷가지들을 한 짐 쥐고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이번엔 운이 나빴다. 국경경비대에 체포돼 여단 구류장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무슨 방침이 하달됐는지 군인들이 함부로 옷을 빼앗지 못했다. 구류장에 들어갈 때 옷과 신발 숫자까지 다 장부에 기록하고, 출소할 때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침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그래도 그들에겐 방법이 있었다. 조사할 때 군관이 어디선가 가져 온 낡은 옷들을 꺼내들며 “이거 네 것이 맞지”라고 물었다. 맞다고 하면 때리지 않았다. 대신 충일이 갖고 온 새 옷은 낡은 옷으로 바뀐 숫자만큼 사라졌다. 이런 바꿔치기를 두세 번 정도 당하고 나니, 그가 갖고 온 옷 가방은 모두 헌옷으로 차게 됐다. 옷 개수만 맞을 뿐이었다.옷 때문인지, 아니면 제 발로 강을 넘어온 것이 참작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보위부에 넘겨지진 않았다. 대신 청진에 있는 ‘도 집결소’에 끌려가 4개월 동안 강제노동을 하고 석방됐다. 석방돼 나와 보니 중국에 살고 있어야 할 동생도 집에 와있었다.● 북한에서 3년 직장생활2004년 충일은 18살이 됐다. 그 나이면 북한에선 군에 입대하든가, 직장에 들어가야 했다. 탈북했다가 두 번이나 체포돼 수감생활을 했던 충일은 군에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청진뜨락또르(트랙터) 부속품 공장 노동자로 임명됐다.당시 공장은 거의 가동을 못하고 있었다. 충일은 CD녹화기 수리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뭔가 뜯고 수리하는 일을 즐겼다. 중국에 있을 때도 전자제품만 보이면 무조건 뜯어 분해해보곤 했다. 2003년경부터 북한에는 한류 열풍을 타고 CD녹화기를 장만하는 붐이 불었다. 그런데 고장 나면 중국제 부품들이라 수리를 잘 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중국에서 공부했고, 전자회로판을 수없이 만졌던 충일은 중국 부품 설명서를 척척 읽어가며 고칠 수 있었다.고장 난 일본제 TV를 컬러TV로 바꾸는 것도 꽤 짭짤한 수입원이 됐다. 일본제 TV는 수상관은 좋았지만, 110볼트를 쓰게 만들었기 때문에 북한에 가면 흑백으로만 볼 수 있었다. 그는 농촌을 돌며 고장 난 TV를 사서 내부는 중국산 부품들로 바꾸어 컬러TV로 변신시켰다. 북한에서 약전 기술자는 꽤 돈을 버는 부업이었다. 그도 수리를 해주면서 녹화기도 사고, 자전거도 사는 등 나름 돈을 꽤 벌었다.그렇게 충일은 3년 반 동안 북한에서 살았다. 항상 중국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돈을 잘 버니 다시 한 번 목숨을 걸 엄두가 쉽게 나지 않았다.● 일곱 번째 탈북과 한국행하지만 2007년이 되자 두 가지 견딜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첫 번째는 엄마가 재혼하려 했던 일이다. 충일은 “우리와 같이 살면 되지 왜 딴 남자 만나서 살려 하냐”고 극렬히 반대하다가 집을 나와 버렸다.이제 30대 후반이 된 충일은 그때를 떠올리면 너무 후회가 된다.“지금 같아선 엄마가 누구와 만난다 해도 무조건 찬성할 텐데, 그때 왜 그리 그게 싫었는지 모르겠어요.”집을 나와 사촌누나의 집에서 살았는데, 친척들이 가만두지 않았다. “쟤가 마음잡고 살게 하려면 장가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친척들의 의견이었다. 어떤 처녀와 일사천리로 혼담이 오가고 강제로 결혼까지 하게 될 판이었다. 그때 그는 겨우 21살이었다.결혼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부모가 이혼하는 것을 보고 결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난 탓도 있지만, 다시 중국에 갈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도 컸다. 결국 그는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두만강을 일곱 번째로 넘었다.3년 만에 와서 연길의 양부모를 찾았는데 없었다. 그동안 한국에 갔다고 들었다. 강을 넘자마자 국경 마을에 들어가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동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조선에서 왔다고 하면 밥을 주며 동정하던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었다. 탈북민들이 중국에서 일으킨 각종 사건사고 소식이 퍼지면서 조선족들은 탈북자란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고 문전박대했다. 그래도 동정심이 남아 있는 집이 하나는 있었다. 그 집에서 준 30위안의 차비를 갖고 충일은 연길 시내로 들어왔다.변두리에 있는 어느 조선족 교회를 찾아갔더니 목사가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라서 헌금이 들어온 것이 없다”고 미안해하면서 자기 지갑에 있던 돈을 모두 꺼내주었다. 그래도 300위안의 거금이었다. 그는 그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대련까지 갔다. 대련에 가서 다시 어느 교회에 들어갔는데 마침 어느 선교사가 “너 이광식 목사님 밑에서 공부하던 애가 아니냐”며 알아봤다. 그렇게 이 목사와 연락이 됐고, 그는 다시 이 목사가 심양에서 운영하던 기독교 처소에 들어갔다. 이 목사는 그에게 신분증을 만들어주었고, 그의 적성에 맞게 단둥에 있는 컴퓨터전문학교에 입학시켜주었다. 학교에 입학해 몇 달쯤 지났을 때 한국에 간 양부모님들과도 연락이 됐다. 양어머니는 그에게 한국에 오라며 선까지 연결해 주었다.2007년 11월 그는 중국을 떠났다. 7명이 한 팀을 이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2008년 4월 한국에 도착했다. 8월 하나원을 나온 그는 경기도 안성에 정착했다.한국에 와보니, 그가 북한에서 살던 사이 과거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꽃제비 친구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 오지 않고 3국에서 곧바로 미국행을 신청했던 것이다. ● “안 해본 일이 없어요”충일은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면서 “한국에 가면 모든 일을 다 해보자”고 굳게 결심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어떤 일이 자신에게 맞을지 너무 궁금했다. 학교는 인민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으니 대학에 가서 따라가는 것은 힘들 것 같다고 판단했다.한국에 와서 그는 실제로 그 결심대로 살았다. 첫 직장은 유리공장이었는데, 분위기가 좋았다. 안성에 사는 젊은 탈북민들이 신변 담당 경찰의 추천으로 우르르 몰려가 일했던 것이다. 하지만 1년쯤 지나니 어느새 다 사라져버렸다. 충일도 온갖 일을 다 해보겠다는 다짐을 했던지라 유리공장을 나와 다른 일을 찾았다.이후 그는 스스로 표현대로라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일했다. 수십 가지 직업을 가져봤다. 그에게 일은 경험이었다. 각종 생산직과 건설 일용직, 식당, 나이트클럽, 노래방 심지어 유흥주점까지 겪어보지 않은 일이 거의 없었다. 로프를 타고 고층빌딩의 유리를 닦는 일도 3개월 했다.경험했던 중 가장 힘든 일은 가방 장식에 도금을 하는 생산직이었다. 가장 적성에 맞는 일은 사무용기기 대여업체에서 했던 프린터 A/S 관리였다.그러다가 2014년 모 통신 대기업 엔지니어로 입사하면서, 이 직업이 제일 잘 맞아 정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수리를 하는 일이 자신에겐 제일 잘 맞았다. 출장을 가서 고장을 고치지 못한 날엔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고, 밤을 새면서 공부를 해서 완벽히 해결할 수 있게 준비했다. 입사 2년 뒤엔 우수 사원 표창도 받았다.그렇게 4년을 일했다. 하지만 인생이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평온한 삶에 만족하던 어느 날 뜻밖의 교통사고에 연루된 것이다. 지루한 재판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판결은 금고 6개월형.그는 “음주 운전했던 것도 아니고, 제가 잘못이 없다는 조사결과도 있어서 끝까지 재판을 하려 했는데, 피해자가 보험이 없어 제가 무죄가 선고되면 한 푼도 못 받게 되더라고요. 그게 마음에 걸려 제가 재판을 포기했던 점도 있다”고 했다.이미 북한과 중국에서 수감생활을 경험했던 그는 한국 구치소는 그에 비하면 여관 같았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평생 다닐 생각이던 직장도 그만두어야 했다.그는 과거엔 자기 또래들이 대학에 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후회도 한다. “수많은 일들을 해보며 내린 결론은 평생 먹고 살 자신의 직업을 갖는 것이 최고더군요. 그러자면 대학에서 배워야 했습니다.”자신만의 평생 직업을 찾다가 정착한 곳은 영상 촬영 및 편집 일이었다. 해보니 프로그램 작업이 적성에 맞았고, 촬영하는 것도 너무 즐거웠다. 스스로 공부해 지금은 홈페이지 정도는 척척 만들 수 있고 컴퓨터 수리도 자신이 있다.그는 2022년 8월 자신의 이름을 딴 ‘전일미디어’라는 사업체를 만들었다. 각종 영상 및 홈페이지 제작이 주업이다. 6개월 남짓 됐지만 먹고 살 정도의 수입은 된다.그는 돈을 많이 벌면 “내 손으로 직접 집을 지어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는 흰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젠 이뤘으니 다음 목표는 직접 짓고 인테리어까지 제 손으로 한 나만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인테리어 관련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서 건축도 자신이 있다고 했다.통일이 되면 뭘 하고 싶냐고 묻자 그는 “어릴 적 아픈 기억들이 가득한 금채동 골안에 내 손으로 펜션을 짓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꽃제비로 내몰렸던 그곳에 금의환향해 멋진 집을 짓고 달라진 인생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을 것이다.24년 전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125㎝의 꼬마 꽃제비는 지금 서울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꿈을 꾸며 살고 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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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센터장이 된 함흥 놀새[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조선족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중국 다롄(대련)의 한 식당에서 일하던 탈북 여성은 한국 대기업 직원으로 중국에 파견된 남자와 우연히 알게 됐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연애 시절 남자가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돈 열심히 벌어 지구 한 바퀴를 돌아보는 거예요. 세계 많은 나라들을 구경하고 싶고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너무 궁금해요.” 그러자 남자가 “내가 그 꿈을 이뤄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엔 여자가 “당신의 꿈은 뭐냐”고 물었다. 남자는 “어머니와 함께 목욕탕에 가주는 며느리를 만나고 싶고, 그 며느리와 전국 곳곳을 여행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나도 그거 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2003년 2월 여자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왔고, 5월 하나원을 졸업한 뒤 보름 만에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둘은 서로의 약속을 지켰고, 또 지금도 지키고 있다. 아내는 지금까지 30여개의 나라와 해외 유명 도시를 다녀왔다. 그가 결혼했을 때 시어머니는 84세였다. 남편은 40세가 훌쩍 넘어 낳은 막내아들이었다. 결혼 5년 뒤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97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8년 동안 요양원에 모신 어머니를 매주 찾았다. 요양원에 모시기 전엔 항상 씻겨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극진히 모셨다. 부부는 지금도 주말이면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그동안 여자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탈북민의 지역적응교육과 심리 및 진로상담, 취업지원 등을 종합적으로 실시하는 통일부 지정 지역적응센터의 책임자가 됐다. 경기서부하나센터 김성남 센터장의 이야기다. 그의 센터에서 담당한 탈북민만 1600여 명이다. 북한에서 함흥의 놀새라고 불렸던 그가 탈북민 최초의 하나센터장이 돼 다른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는 오늘까지 걸어온 길은 당연히 순탄치는 않았다.● 남자 이름으로 태어난 여자 김성남 씨는 1975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6녀 1남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70년에 맏언니가 태어나고, 1985년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줄줄이 딸들이 태어나면 부모들이 실망할 법도 하지만, 그의 부모는 항상 기뻐했고 축복했다. 그를 임신했을 때 어머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호랑이가 나무에서 노는 것을 보며 박수를 치는 태몽을 꾸었다. 이번엔 분명히 남자 아이일 것이라고 생각한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이룰 성(成)에 사내 남(男)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또 딸이었다. 지어놓은 이름을 바꾸면 좋지 않다고 해서 그는 김성남이란 남자 이름으로 살게 됐다. 7명의 자녀가 북적이는 집안이었지만, 집안 형편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는 흥남비료연합기업소 후방부 노동보호물자공급소 지도원이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소속된 큰 공장의 물자를 담당하다보니 먹고 사는 것은 지장이 없었다. 김 씨의 학창 시절도 큰 시련은 없었다. 공부도 잘해 학교에서 학급반장, 사로청 부위원장 등을 도맡았고 하도 잘 놀아 ‘함흥 놀새’라고 불리기도 했다. 6명의 자매가 같은 학교를 다니다보니 시비 거는 애들도 없었다. 하지만 김 씨는 졸업반이던 6학년 때 높은 곳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반년 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쌍지팡이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대학은 물 건너갔다. 학교에서는 유급을 해 1년 더 다니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북한에서는 1년 유급한 학생은 ‘묵은 돼지’라고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졸업장을 받고 몇 달 뒤 그는 6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을 받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수술을 받고 회복하면서 집에서 보내던 때, 속도전청년돌격대 간부로 있던 고향 오빠가 신입대원 모집차 출장길에 집에 들렀다가 자기 부대에 가자고 하였다. 김 씨는 학창 시절 클라리넷을 잘 불었는데, 그 오빠는 김 씨도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자신의 친구가 부대장으로 있는 여단 예술선전대에 입대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노력파견장을 개인적으로 소지하고 있었기에 김 씨는 18세 때인 1993년 속도전청년돌격대 8여단에 개별 입대했다. 속도전청년돌격대는 북한에서 도로, 발전소, 철도, 아파트 등 중요 시설을 도맡아 건설하는 청년조직이다. 건설부대지만 군 편제와 똑같이 운영되며 제복과 군사칭호까지 부여받는다. 복무기간도 군과 똑같다. 여성들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만 16~17세에 입대하면 23세까지 복무해야 한다. 속도전청년돌격대의 입대 자격은 군에 입대하는 것보다 비교적 덜 까다롭다. 출신 성분이 나쁘거나 키가 작은 등 신체 기준에 미달돼 군에 가지 못한 청년들이 주로 돌격대에 입대한다. 비록 입대 기준은 떨어져도 어렵고 힘든 곳에서 고생했다고 제대할 때는 가산점을 많이 주기 때문에 일반 사회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노동당에 입당하거나 대학에 추천받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다. 가난한 집에선 ‘입을 덜기 위해’ 자식을 돌격대에 보내는 경우도 많다.● 속도전청년돌격대의 여성들 김 씨가 입대했을 때 8여단은 평북 구장~구성 사이 철도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8여단의 전신은 옛 함경남도 여단이었다. 그래서 신입대원들을 제외한 지휘관들과 베테랑 대원들은 모두 함남 출신이었다. 김 씨는 선전대로 가는 줄 알았지만, 막상 입대하니 명령에 따르는 신입이었을 뿐이다. 여단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잠시 머물게 된 5대대 지휘부에서 갑자기 공석이 된 5대대 통계원 자리를 맡게 됐다. 통계원이 하는 일은 각 중대의 통계원들로부터 작업일보를 받아 정리하고, 월급을 계산해주고, 환자나 휴가자 등을 파악해 일지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통계원은 대대 간부들의 심복이 돼야 했다. 휴가나 사적 용무로 부대에 없는 사람도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야 위에서 물자 공급을 그대로 받을 수 있고, 그렇게 받은 물자는 간부들이 빼돌렸다. 통계원 생활 중 가장 고달픈 일은 여단에 보고하러 가는 일이었다. 전화로 보고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때는 전화가 없었다. 여행증 등 서류도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에 통계원이 연락병 역할도 했다. 대대 지휘부에서 여단 지휘부까지 왕복 110리가 됐는데 보통 이틀에 한 번, 어떤 때는 매일 지휘부에 가서 보고해야 했다. 통계원 전용 자전거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가 갔을 때는 누군가 팔아먹어 없었다.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새벽에 떠나 산길을 꼬박 걸어 여단에 가서 보고한 뒤 다시 밤길을 타고 돌아와야 했다. 저녁까지 대대 지휘부에 도착할 것 같지 못하면 어깨까지 잠기는 강을 건너 물주머니가 돼서 돌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워도 중대에 소속된 여성들보다는 통계원 생활이 나았다. 그의 대대는 250여명으로 구성됐는데, 이중 90명 정도가 여성이었다. 돌격대에선 여성도 남자와 똑같은 강도로 일을 해야 했는데, 보통 남성 2명에 여성 1명으로 작업조가 구성된다. 김 씨가 근무할 때는 철길 공사를 하느라 산에서 통나무를 찍어 메고 나르는 일, 발파를 하고 나온 돌을 등짐으로 나르는 일을 주로 했다. 김 씨는 “돌격대에 나간 여성 대다수가 너무 힘들어 몇 개월씩 생리가 끊긴다”고 회상했다. 여성들에게 가장 힘들 때는 여름이었다. 선풍기도 없는 임시숙소에서 30여명이 함께 생활했는데, 너무 더워 숨이 막힐 지경인데다 밤새 산골 모기에게 뜯겨야 했다. 작업복 여분도 기껏 해야 한 벌뿐이라 장마철이면 늘 젖은 옷을 입고 일하러 나가야 했다. 하루 세끼 밥은 주었지만 늘 배가 고팠다. 영양실조 환자도 종종 나왔다. 통계원으로 일했던 김 씨는 그럴 때마다 대대 비상용 쌀을 빼내 이들에게 밥을 해먹이기도 했다. 대원들에게서 가장 큰 박수를 받았던 때는 출장 나가는 이웃 군부대 차량을 빌려 수백 명이 산에다 채벌해놓은, 작업현장까지 내려오려면 며칠간 해야 할 목재운반 작업을 몇 시간 만에 끝냈을 때였다. 그는 워낙 열심히 일했던데다 여단 간부지도원의 추천으로 입대 2년 만에 청년동맹 간부들을 양성하는 금성정치대학 추천장을 받아 조기 제대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왜가리떼’를 벗어나 탈북하다 김 씨가 대학 추천을 받고 2년 만인 1995년 집에 돌아왔더니 그새 집이 너무나 가난해져 있었다. 그가 입대한 이듬해에 아버지가 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던 것. 맏언니는 결혼을 했지만, 병에 걸린 아버지와 둘째 언니를 포함해 온 식구가 여전히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침 그때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맞아 도처에서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대학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김 씨가 대학 추천을 받은 것도 돌격대에서 제대하기 위한 목적이 컸지 청년간부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결국 집에 눌러앉았다. 그렇지만 북한에선 누구나 취직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 직장이었던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촉매 직장에 들어갔다. 당시 북한의 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가동을 멈추었지만 비료공장은 간간히 돌아갔다. 당장 굶어죽게 된 사람들은 공장에서 닥치는 대로 훔쳐 팔았다. 비료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산했다고 보고한 양과 실제 출고되는 양은 차이가 컸다. 어떤 날은 한 교대가 생산했다고 기록한 수백㎏의 질안비료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지기도 했다. 공장 보위대가 노동자들의 출입을 단속하긴 하지만 사실 이들도 뇌물을 받고 눈을 감아주는 것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김 씨가 들어간 합성촉매 직장에서는 연, 아연, 순철(순도 100% 철)과 니켈, 바나듐, 크롬 등 희귀금속을 주원료로 다루었는데 이것도 남아나지 않았다. 당시 니켈 1㎏은 450원이었는데 이걸 빼돌려 시장에 팔면 한 달은 먹고 살 수 있는 옥수수 18㎏을 살 수 있었다. 공장에서 3년쯤 일했던 때에 직장에서 니켈 150㎏이 갑자기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정도 양이면 분명 간부들이 빼돌렸을 법도 한데, 당 비서가 김 씨를 도둑으로 몰아가며 희생양을 삼으려 했다. 그는 당 비서와 대판 싸우고 직장을 그만둔 뒤 함경남도 간호학교에 입학했다. 허리를 다쳤을 때 입원했던 병원이 그를 좋게 봐줘 추천 서류를 써준 것이다. 간호학교에 입학했지만 정작 가보니 학교에선 학업을 가르치는 시간보다 부업 밭으로 데리고 가서 농사일을 시키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개학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은 때 학교에서 각종 ‘과제’를 줘 집으로 보냈다. 과제란 식량, 휘발유, 경유, 약초를 구해오라는 따위였다. 방학 한 달을 주며 과제를 받고 집으로 왔지만 준비하기 만만치 않은 큰 부담이었다. 고민을 하던 어느 날 거리에서 중학교 선생 딸인 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를 보자 동창은 자기 집이 얼마 전에 중국의 친척 도움을 받았다며 “너도 엄마 친척이 중국에 있지 않냐”고 묻는 것이었다. 김 씨 모친은 중국 연고자였다. 옌지(연길)에 친척들이 살았다. 동창을 만난 뒤 김 씨는 중국 친척들에게 도와달라고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언니와 함께 여행증을 떼서 북중 세관이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으로 향했다. 남양에 가니 숱한 사람들이 북중 다리 주변에 모여 있었다. 이들을 북한에서 ‘왜가리’라고 불렸다. 하루 종일 목을 빼고 중국에서 친척이 오나 바라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김 씨도 왜가리떼에 합류했다. 어렵게 연길에 사는 친척과 연락이 됐다. 그런데 그들은 여권에 한국에 다녀 온 기록이 있어 북한 세관에서 입국을 허용하지 않으니 지원물자를 갖고 올 수가 없다고 했다. 막연하게 기다리다가 갖고 온 돈도 다 떨어지게 되자 김 씨는 직접 강을 건너가 친척을 만나고 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한 달 가까이 남양 세관 주변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기작업에 동원 다녀오면서 국경경비대 잠복초소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하나 기억해두었다. 1998년 6월 26일 새벽 3시, 그는 언니에게 “내가 열흘 안에 오지 못하면 다시 함흥에 돌아가라”고 말하고 다짜고짜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그때만 해도 김 씨는 자신이 다섯 번이나 두만강을 넘게 될 줄 생각도 못했다.● 돈만 밝히는 국경경비대 남양 맞은편은 중국 도문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첫 번째 만난 사람에게 친척을 찾도록 도와주면 후하게 사례를 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했고, 오후 1시경 연길의 친척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믿고 찾아온 친척집은 그를 데리고 온 사람에게 차비만 겨우 줘서 돌려보냈다. 친척들이 모여 의논을 하고 북한으로 보낼 준비를 하느라 시일이 걸리다보니 언니와 약속한 열흘이 훌쩍 넘었다. 7월 중순까지 친척들이 모아준 것은 인민폐 400위안과 100리터 정도 부피의 중고 옷들, 사카린과 미원 등 조미료들이었다. 짐 보따리를 들고 그는 밤에 다시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강이 생각보다 깊었다. 한 번 넘어지니 보따리가 물에 둥둥 떠내려갔는데 그걸 놓치지 않겠다고 사투를 벌였다. 죽을 힘을 다해 북한 쪽에 도착하긴 했지만 보따리가 물에 푹 젖어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됐다. 그는 강기슭에 기진맥진해 쓰러졌다. 어느새 국경경비대 군인 두 명이 나타나 총을 겨누었다. 군인들은 그를 잡자마자 돈부터 내놓으라고 했다. 김 씨는 여비 중에 남겼던 북한돈 250원을 주었다. 당시 장마당에서 빵 1개가 5원, 옥수수 국수 한 그릇이 10원을 했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 돈을 받고도 군인들은 그를 중대 막사로 끌고 갔다. 이번엔 중대장이 돈이 있느냐부터 물었다. 없다고 하자 그를 비 내리는 부대 마당 한쪽에 세워두고 그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 뒤 다시 끌려 들어가니 갖고 온 짐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돈 되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빼돌린 것이다. 이후 그는 몸수색을 당했는데 속옷 혼솔까지 샅샅이 뒤지며 돈을 찾아내려 하는 모습을 보며 23년 동안 살면서 최대의 수치심을 느꼈다. 그 과정을 끝내고 그는 대대로 이송됐다.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이번에도 짐이 대거 사라져 3분의 1 정도만 남았다. 대대 본부로 가니 밤새 강을 넘다 걸린 사람이 그를 포함해 3명이었다. 국경경비대에서는 이들을 온성 보위부로 이송했다. 남양에서 온성군 보위부로 가는 길은 수십 리나 됐는데 군인 두 명이 이들의 호송을 담당했다. 가는 길에 한 군인이 이들에게 말했다. “돈 꽁꽁 숨겨둔 것 있으면 이제라도 꺼내놓는 게 좋아요. 어차피 보위부에 가면 다 뺏기게 돼 있어요.” 김 씨도 그의 말이 맞다고 판단했다. 그가 갖고 온 인민폐 400위안은 아직 3분의 1만 남은 짐 속에 기적적으로 숨겨져 있었다. 중국에서 떠나기 전 그는 돈을 어떻게 숨길까를 고민하다가 중고 옷 중에서 가장 빼앗기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옷 속에 교묘하게 숨기고 바느질을 했던 것이다. 그는 호송 군인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내가 인민폐 400위안이 있는데 이걸 보관해주면 절반을 드릴게요. 어차피 나는 중국에 며칠 있지도 않았고, 스스로 돌아왔기에 크게 처벌을 받지 않을 거예요.” 군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어차피 400위안을 그가 혼자 가질 수는 없었다. 김 씨가 고발하면 그도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공모자가 되는 것이 가장 이득이었다. 200위안만 가져도 군인은 빵 1000개는 넘게 사먹을 수 있었다. 군인은 “보위부에서 나오면 남양 아무개 집에 와서 나를 찾으라”고 하고는 동행한 일행들이 모르게 옷을 뜯어 돈을 감추었다. 보위부에 들어가니 몽둥이부터 날아왔다. 돈도 없이 왔다니 보위원이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매를 맞아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김 씨는 남은 짐을 뒤지는 보위원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국경경비대 중대에서 빼먹고, 대대에서 빼먹고 남은 제일 한심한 옷이 보위원 차지가 됐기 때문이었다. 보위부에선 남은 짐까지 몽땅 빼앗았다. 마침 김 씨에겐 운도 따랐다. 며칠 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있어 보위부에선 중죄라고 판단되지 않으면 투표를 하라고 내보냈던 것이다. 김 씨는 중국에 친척 도움을 받으러 갔던 것이 확실하고, 며칠 머물지도 않았다. 자기 발로 북한에 다시 돌아왔으니 보위부에선 감옥에 보낼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보위부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군인이 알려준 집을 찾아갔다. 군인은 약속을 지켰다. 200위안을 넘겨주더니 자기 몫은 장마당에 가서 북한돈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군인이 중국돈을 바꾸면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돈을 바꾸어 넘겨주자 군인은 싱긋 웃으며 “앞으로 중국 넘어갈 일이 있으면 나를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악어와 임팔라의 추격전 김 씨는 보위부에 끌려들어간 순간부터 석방되면 꼭 중국에 다시 가겠다고 결심했다. “힘들게 갖고 간 짐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저는 탈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먹을 것도 주지도 않으면서, 힘들게 중국에서 도움을 받아 자기 발로 조국이라고 돌아갔는데 강도떼처럼 달라붙어 뜯어내고 때리고 수치심을 주니 사람이 눈이 돌아가더군요. 이런 나라를 위해 내가 지금까지 충성을 바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한국에 온 탈북민 중에는 김 씨처럼 안전부나 보위부 때문에 원한을 품고 북한을 뜬 사람이 정말 많다. 그런 측면에서 북한 보위부는 체제를 보위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등을 돌리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씨는 다시 무작정 강을 넘었다. 남양 세관 쪽에 왜가리들이 머물러 있다면, 두만강 건너편엔 먹이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악어처럼 인신매매범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두만강 옆을 순찰하듯 돌아다니기도 하고, 밤중에 누가 건너오나 쌍안경으로 감시하기도 한다. 여성이 넘어오는 것이 보이면 접근해 강제로, 또는 유혹해서 내륙에 팔아먹는다. 중국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이런 인신매매범을 통해서라도 팔려가려는 탈북여성들이 많았다. 그게 북한에서 굶어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도강 때는 첫 번째보다는 요령이 생겼다. 갈아입을 옷까지 준비해 강을 넘었다. 밤에 강을 건너 옷을 갈아입고 도문 시내로 접근하는데 한 중년 남자가 “어이, 처녀. 조선에서 넘어왔지”라며 불렀다. 둘 사이 거리를 따져보니 도망치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냅다 뛰었는데, 중년 남자가 죽을힘을 다해 따라왔다. 북한 여성 한 명을 팔면 최소 수천 위안이고, 젊은 여성은 더 비쌌다. 남자에겐 1년 공장에서 벌 돈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속도전청년돌격대에서 하루에 110리씩 걸어 다니던 통계원이었다. 새벽 도문 거리에선 악어와 임팔라의 추격전을 연상케 하는 질주가 벌어졌다. 추격전은 김 씨의 예상대로 끝났다. 2~3㎞쯤 헐레벌떡 따라오던 중년 남자는 마침내 포기했다. 김 씨는 도문 시내 시장 골목 사이를 달려 처음 왔을 때 강을 넘는데 도움을 줬던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당간부의 지시로 집을 뺏기다 중국에 살기로 마음먹은 김 씨는 친척집에 머물며 재봉기로 바지 오버로크를 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바지 하나를 완성하면 인민폐 2위안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돈이 벌리지 않았다. 그는 식당에 나가 일했다. 그런데 한 식당에서 몇 달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북조선 여자인 것 같다는 의심을 받으면 깡패들이 나타나 떠보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 역시 팔아먹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도망을 쳤다. 양꼬치집, 순두부집 등등을 전전하다가 연길에선 도무지 살 수 없다고 판단해 2000년 대련으로 옮겨갔다. 2년 동안 번 돈으로 그는 중국 호구를 얻었다. 당시 중국에선 사망한 사람의 호구를 파는 일이 빈번했는데, 탈북자들은 그런 호구를 사서 신분을 세탁했다. 대련에서 그는 조선족으로 위장하고 식당에서 일했다. 이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대기업 직원인 남편은 중국에 현장소장으로 파견돼 일했는데 조선족 통역이 한국말이 통하는 여성이 있는 식당이라며 그를 데리고 왔다. 남편은 그를 한참동안 조선족 여성으로 알았다. 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남자가 한국에 가서 나랑 결혼하자고 말하자 그는 그제야 자신이 탈북여성임을 고백했다. 그러자 남자는 며칠간 침묵하다가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따로 생각이 있었지만, 김 씨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탈북 여성이라서 도망간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이때 북한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김 씨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가서 살 생각은 없지만 아버지 묘는 꼭 가보고 싶었고, 아버지 장례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사례를 하고 싶었다. 그는 중국에서 모은 돈과 애인이 돌아가기 전에 한국행 준비에 쓰라고 준 돈을 포함해 5000달러를 갖고 연길을 거쳐 다시 밤에 두만강을 넘었다. 이번엔 돈이 있으니 군인을 매수할 능력이 됐다. 함흥에 나타나니 당장 보위부와 안전부 등에서 그를 찾아와 조사를 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이번에도 체포되진 않았다. 당시 김정일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먹고 살기 어려워 탈북했다가 제 발로 돌아온 사람은 처벌하지 마라”는 지시를 하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시의 유효기간은 몇 년밖에 되진 않았다. 김 씨의 경우엔 두만강을 넘어와 체포된 것도 아니고, 제 발로 함흥까지 돌아왔으니 더 처벌할 근거가 없었다. 보위부나 안전부는 그가 돈을 얼마 갖고 왔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김 씨는 고향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 원래 그렇게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는데, 그가 없어진 뒤 가족들이 사망신고를 해 공민증이 말소됐다. 공민증이 없으니 여행증을 뗄 수 없었고, 여행증이 없으면 북중 국경 쪽으로 다시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3개월이 지루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떠나면 다시 돌아올 것 같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가족과 있는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있는 동안 그는 큰 집을 사서 이사했다. 기존에 살던 집은 결혼한 언니에게 주고, 자신이 떠난 뒤에 가족이 살 집을 따로 산 것이다. 집을 사는데 든 돈은 북한돈 10만 원인데 달러로는 300달러 정도였다. 그가 갖고 간 5000달러는 함흥에서 괜찮은 집 20채를 살 돈이었다. 이사를 한 다음날 그가 어디에 갔다가 돌아오니 온 가족이 집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시당 간부의 지시로 딴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 김 씨는 그 집을 사서 입사증 명의까지 변경했지만, 당 간부의 지시 하나로 집 산 돈도 찾지 못하고 빼앗긴 것이었다. 항의를 해봤지만 시당 간부부에선 “당의 방침에 따라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건데, 어디 중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감히 까부냐”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김 씨는 중앙당 조직부 신소과(민원 담당 부서)에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낸 뒤 바로 중국으로 떠났다. 그 땅에 더욱 환멸이 났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 국경경비대는 돈만 주면 지옥까지도 데려다 줄 기세였다.● 정착 보름 만에 올린 결혼식 중국에 도착한 날 그는 한국에 돌아간 애인에게 전화를 했다. 이러이런 고생을 겪었고 지금 국경을 넘었다는 말과 함께 당신이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남자도 심경을 고백했다. “사실 처음에 너무 겁이 났다. 나는 북한 여자가 내 아내가 될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결국 내가 이 여자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당신을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그런데 이내 연락이 끊겼다. 못 만나는 줄 알았다. 어디서든 살아있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연락이 되지 않을 때 나는 당신의 본명도, 어디 출신인지도 묻지 않았던 것이 너무 후회가 됐다. 이제 왔으니 됐다. 내가 내일 중국에 들어가겠다.” 약속대로 남자는 다음날 대련에 날아왔다. 요즘은 한국에 사는 탈북민이 적지 않고, 관련 프로그램도 많아 탈북여성은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지만, 2002년만 해도 한국 사람이 북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중국에서 만난 탈북 여성을 아내로 삼기로 결심한 김 씨의 남편은 탈북여성과 결혼한 수많은 한국 남성들의 원조쯤 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으로 갈 방법을 찾고 있던 중 김 씨는 공안에 체포됐다. 누군가 그를 북한에서 온 여자라고 신고한 것이다. 그는 공안 구류장에 50일이나 잡혀 있었다. 하지만 애인과 친척, 친구들의 노력으로 북송은 되지 않았다. 공안국에서 풀려난 그는 위조여권을 사서 베이징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태국으로 갔다. 한국으로 가는 것보다는 태국으로 가는 것이 검사가 많이 느슨했기 때문이다. 태국에 도착한 그는 한국대사관을 찾아갔고, 2003년 2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을 나오니 5월이 됐다. 그는 남자와 결혼식부터 올렸다. 하나원을 나와 보름 만에 결혼식을 한 사람은 김 씨가 유일할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한국 정착 초기 그는 간호조무사학원을 다닌 뒤 병원에 취직했다. 한편으론 남편과 약속한 시어머니와 목욕탕을 다니는 며느리 역할도 충실히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도 생겼다. 가장 큰 고민은 애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병원에 가 보니 둘 다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몇 년이 돼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는 아내에게 남편은 늘 이렇게 말하며 달랬다. “나는 당신을 한국에 데려온 걸로 꿈을 이뤘으니 이제 더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다. 애는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니 순리대로 따르자.” 결혼 초기 남편이 물었다. “이제 열심히 돈을 모아 집 사고 빚 갚으며 살거냐, 아니면 집이 없어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거냐.” 김 씨는 서슴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는 임대주택에서 사는 지금도 집 욕심은 없다. 그렇다고 번 돈을 혼자만 다 쓰는 것도 아니다. 부부가 매년 500만 원 넘게 기부를 해온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남편은 북한 인권이나 유엔 아동에 관심이 있어 그곳에 기부하고, 김 씨는 여성 인권과 다문화 가정, 학교 장학재단에 기부한다. 남편의 소원인 부부 동반 여행도 꾸준히 하는데, 금요일 저녁이면 남편과 함께 국내 여행을 떠나는 게 일상이 됐다.● “손이 떨리는 날까지 봉사할게요” 김 씨가 사회복지학으로 박사까지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원에 있을 때 자원봉사자로 만난 두 살 위의 한 여성 때문이었다. “저는 그 언니를 만나 사랑한다는 것, 배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어요. 자기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고,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들을 꿈꾸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그래서 나도 저 언니를 롤모델로 삼아 사회복지 전문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김 씨가 만난 여인은 이민영 고려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인데, 지금도 친자매처럼 지내고 있다. 어느 날 이 교수는 김 씨에게 자기 모교인 이화여대를 구경시켜주었다. 그때 김 씨는 이 대학에 입학해 배우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이화여대에는 학부 과정에 사회복지과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2008년 그리스도신학대(현 강서대)에 입학해 학부 과정을 마쳤다. 김 씨는 북한에서 학교를 다닐 때부터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학부 과정을 4년 만에 마치고 2012년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에 입학하여 2015년 석사를 마쳤다. 2016년 석사과정 양옥경 지도교수의 권유로 박사과정에 등록해 2019년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박사 논문 제목은 ‘북한 이탈주민의 영국 이주생활 경험’이다. “2013년에 영국에 갔던 적이 있어요. 그곳에 수백 명의 탈북민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만나 왜 한국을 떠나 다시 제3국에서 살아가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그런데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어요. 그때 결심했죠. 내가 꼭 영국에 다시 와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요.” 그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박사 논문으로 풀어냈다. 이번에는 영국에 날아가 30~40명의 탈북민을 심층 인터뷰했는데, 이는 탈북민의 시각으로 탈북민들의 ‘탈남’ 이후를 들여다본 최초의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사학위 취득 후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연구위원으로 일하면서 탈북민의 북한과 제3국에서의 인권침해 실태 조사 분석 및 기록, 대한민국에서의 경제활동 실태 조사 연구 등의 활동을 계속 진행했다. 그러다가 2021년 1월 경기서부하나센터 사무국장으로 취직했다. 그는 담당 지역인 경기도 부천, 광명, 시흥, 안양, 과천 등지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탈북민의 고충을 듣고 도왔다. 그리고 그해 8월 센터장으로 임명됐다. 한국에는 25개의 하나센터가 있는데 탈북민이 센터장이 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의 센터에는 9명이 근무하는데, 이중 4명이 탈북민이다. 김씨는 일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잘 살려고 한국까지 와서는 알코올, 마약, 도박에 빠지거나, 각종 범죄에 연루되어 정착을 포기한 탈북민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들을 수렁에서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 그의 당면 목표다. 꿈꾸는 미래는 어떤 것이냐고 묻자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간단해요. 일단 매일 최선을 다하고, 손이 떨리는 때까지 다른 사람을 도우며 모두 함께 미소 지으며 행복한 삶을 사는 게 인생 목표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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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 쇼핑 혜택 중심의 ‘삼성 iD NOMAD 카드’ 출시

    삼성카드가 알뜰한 여가 생활을 하려는 고객을 위해 ‘삼성 iD NOMAD 카드’를 출시했다. 여행과 쇼핑을 즐기는 고객들을 주로 겨냥해 설계했지만, 일상 곳곳에서도 실속 있는 적립 및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삼성 iD NOMAD 카드’는 여행, 여가, 면세점에서 건별 10만 원 이상 결제 시 2만 원 할인 기프트 서비스를 영역별로 1회씩 제공한다. 넉넉한 포인트 적립 혜택도 있다. 해외직구를 포함한 해외 가맹점 이용 건에는 2% 적립 혜택을 제공하며 항공, 여행, 골프, 백화점, 프리미엄아웃렛, 온라인쇼핑몰, 할인점, 면세점을 이용할 때는 1% 적립 혜택을, 그외 가맹점 이용 건에는 0.5%의 적립 혜택을 제공한다. 포인트 적립 혜택은 전월 실적과 상관없다. 넷플릭스, 유튜브 프리미엄, 티빙, 왓챠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네이버 플러스 멤버십 정기 결제 시 50% 할인 혜택을 월 5000원까지 제공한다. 또 쉐이크쉑과 써브웨이 30% 할인 혜택을 월 1만 원까지 제공하며, 영화관에서 1만2000원 이상 결제 시 할인 혜택을 월 5000원까지 제공한다. 일상 할인 혜택은 전월 실적 50만 원 이상을 충족할 경우 제공된다. ‘삼성 iD NOMAD 카드’의 연회비는 국내 전용 4만7000원, 해외 겸용(마스터) 4만9000원이다. 삼성카드 관계자는 “새로 출시한 ‘삼성 iD NOMAD 카드’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삼성 iD 카드’ 라인업을 지속적으로 추가해 고객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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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파가 창작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대북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돈줄이 말라버린 김정은이 북한 사정이 어려워진 원인을 간부들의 정신력 탓으로 돌리며 채찍질하자, 문화예술 관련 간부들도 고민이 깊었던 듯하다. 이럴 때는 모범적인 간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만 지금은 영화 한 편 찍을 능력도 없다. 그래서 찾은 답이 과거의 인기 영화를 재방영하는 것이다. 문제는 김정은이 수시로 사람들을 처형하다 보니 영화에서 지워야 할 얼굴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마침내 답을 찾은 듯 보인다. 올해 초 방영된 6부작 예술영화 ‘대홍단 책임비서’를 보니 주연배우 얼굴이 컴퓨터그래픽으로 수정돼 다른 배우로 바뀌었다. 1997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대홍단군 당책임비서가 어려운 고난들을 연이어 극복하면서 충성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는 장성택의 조카사위인 공훈배우 최웅철이 출연했다. 장성택보다 먼저 처형된 최웅철은 1990년대 가장 유명한 배우였다. 1년에 영화 몇 편 만들지 못하던 시기에 최웅철은 무려 2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최웅철의 얼굴을 지우지 못하면 옛날 선전영화의 상당수를 사장시켜야 한다. 노동당 선전선동부에는 기록영화에서 얼굴을 지우는 작업을 하는 기술팀만 1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앞으로 영화까지 재작업하려면 훨씬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컴퓨터그래픽이라도 쓰니 다행이지, 과거엔 배우가 처형되면 영화를 아예 다시 찍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를 대표하는 미녀배우였던 우인희가 1980년 김정일의 지시로 공개 처형된 이후 그가 출연한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 ‘적후의 진달래’ 등 많은 영화가 여주인공이 바뀌어 다시 촬영됐다. ‘반동’의 얼굴을 바꾸는 데 성공한 문화예술 담당 간부들은 지난주 ‘영화예술론’이라는 김정일의 노작(勞作) 발표 50주년 기념보고회를 크게 열었다. 김정일이 31세 때 썼다는 이 저서는 지금까지도 북한에서 인류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저서라고 추앙받고 있다. 영화예술론이 발표된 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북한의 영화는 이 책에서 지시한 대로 제작해야 한다. 참고로 김정일은 각종 노작이란 것을 수없이 남겼는데, 예술분야만 봐도 ‘연극예술에 대하여’ ‘무용예술론’ ‘음악예술론’ ‘건축예술론’ ‘미술론’ ‘주체문학론’ 등 참견하지 않은 곳이 없다. 영화예술론이 발표됐던 시기는 김정일이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 5대 혁명가극과 5대 혁명연극을 창작한다며 바빴던 때였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가극들의 실제 창작 책임자는 친일인사로 알려진 조명암이었다. ‘낙화유수’ ‘꿈꾸는 백마강’ 등 광복 전에만 700여 곡의 가사를 쓴 조명암은 천재적인 작사가이자 극작가, 연출가였지만 1940년대 들어 ‘아들의 혈서’ ‘지원병의 어머니’ ‘결사대의 처’ 등 군국가요를 대거 창작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노골적인 군국가요 중 3분의 2가 조명암의 가사라고 하니 그는 진심으로 친일을 했던 듯싶다. 이랬던 조명암은 1948년 월북해 조령출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에서 숱한 작품을 남겼다. 항일 빨치산이 나오는 북한의 대표적 혁명가극이나 영화들이 알고 보면 일본군을 칭송하던 친일인사 조명암이 제작한 것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명암은 공로를 인정받아 김일성 상과 각종 고위 관직을 받았고 1993년 사망한 이후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주체사상 관련 저서들을 사실상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써줬음을 감안할 때 김정일이 썼다는 영화나 연극, 무용 등의 저서도 누군가 대신 써줬을 것인데 조명암이 써줬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김정일은 영화예술론에서 주체니 혁명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 놓았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그에 맞지 않게 살았던 위선자였다. 서울에서 성장한 성혜림과 일본에서 온 고용희에게 빠졌던 이유도 북한에서 사상 교육을 받고 성장한 여인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김정일이 열심히 가르쳤다는 북한의 예술은 지금 영화도 제대로 못 만드는 처지에 빠졌고, 설사 만들어도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맛본 인민에게 재미가 없어 외면 받는다. 이런 처지에서도 반세기 전 발표된 케케묵은 책을 추앙하고 교본으로 삼으니, 마치 거세된 환관이 다산(多産)의 기쁨을 노래하는 광경을 보는 듯한 괴이한 기분이 든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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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투성이로 두만강 넘었던 소년, 36세에 미국 박사가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김성렬 씨의 10대 시절은 배고픔과 탈북, 북송, 노동의 반복이었다. 20살 되던 2005년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의 학력은 북한에서 중학교 1학년 중퇴로 검정고시 기준 초등학교 5학년 수준이었다. 한글도 새롭게 배워야 했고, 영어는 ABCD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랬던 그는 16년 뒤 미국에서 사회과학계열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최초의 탈북민이 됐다. 그가 박사 학위를 받은 시라큐스대 맥스웰스쿨은 행정학 및 공공정치학 분야에서 미국 랭킹 1위로 꼽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맥스웰스쿨 박사 출신이다. 소년공 출신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동문 박사가 되기까지 북한과 중국, 한국, 미국에서 걸어온 김 씨의 삶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였다.● 북한-소년 밀가루 장사 김 씨는 1985년 북한의 북방 도시 청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일찍 이혼하는 바람에 상점판매원인 어머니와 2살 터울 누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던 동네는 청진에서도 가난한 지역으로 꼽히는 나남 구역이었다. 청진은 1990년대 초반부터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배고픈 기억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10살 되던 때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어머니는 식료품상점 판매원이었지만, 상점에는 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집에 하나밖에 없던 재산인 TV를 팔고, 그 돈을 밑천 삼아 밀가루 장사를 시작했다. 청진의 유명 장마당인 수남장마당에 가서 화교나 외화벌이 업체가 중국에서 들여온 밀가루를 도매가격으로 넘겨받아 나남장마당에서 팔았다. 어린 성렬이도 어머니의 장사를 열심히 도왔다. 그렇게 살았지만, 하루 세끼 다 챙겨먹기는 너무 힘들었다. 풀을 넣고 끓이다가 국수를 넣은 뒤 푹 삶아 죽처럼 먹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풀국수죽을 먹고 살았다. 하지만 밀가루 장사도 2년이 지나선 어렵게 됐다. 외화벌이 업체들이 직접 나남장마당까지 와서 밀가루를 팔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그와 누나를 앉혀놓고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마침 어머니의 먼 친척들이 중국에 살고 있었다. 성렬이는 중국이 어딘지도 몰랐다. 다만 그곳에 가면 허기진 배를 채을 수 있다는 말만 기억에 남았다. 어린 그에겐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다 남은 돈 3000원을 들고 탈북 길에 올랐다. 당시 쌀 50㎏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 돈에 가족 세 명의 운명을 맡겼다. 그렇게 이들은 1997년 3월 국경 옆 무산에 와서 경비대원에게 돈을 주고 강을 넘었다. 두만강은 3월이면 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얼음장이 깨져 목까지 차는 물에서 허우적대던 일, 떠내려가는 아들과 딸을 꽉 부둥켜안은 어머니가 강물 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일, 강을 넘었을 때 어머니의 온 몸이 얼음장에 긁혀 피투성이가 됐던 일, 맞은 편 중국 땅에 도착했을 때 옷이 금방 얼어붙던 일. 그 모든 기억들을 그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중국-15세 소년공 성렬의 가족은 연길에 있는 친척집에 연락해 그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다. 어린 성렬에게 중국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TV였다. 이렇게 많은 채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물론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어 더 좋았다. 연길은 북중 국경 옆 도시인지라 검문검색이 심했다. 이들은 헤이룽장(黑龙江)성에 사는 다른 친척들을 찾아 떠났다. 친척들은 북한에서 건너온 성렬이 가족을 놓고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도와주기로 결론을 냈다. 우선 이들에게 가짜 호적이라도 만들어주고, 두 번째는 성렬의 모친을 재혼시키기로 했다. 1998년 성렬은 한족 남성과 재혼한 엄마를 따라 내륙의 허베이(河北)성으로 이사 갔다. 가짜 호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한족학교에 들어가 1년 정도 다녔지만, 중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그가 또래들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학교에서 적응을 못한 그는 15살에 집을 나와 안테나를 만드는 어느 공장에 취직해 기숙사에서 살았다. 누나 역시 근처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렇지만 소년공 생활도 오래가진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기숙사에 공안들이 찾아오더니 그를 잡아 공안국으로 끌고 갔다. 가보니 어머니와 누나도 이미 잡혀와 있었다. 알고 보니 엄마와 살던 한족이 그들이 탈북자라고 공안에 고발했던 것이다. 이들은 단둥을 거쳐 신의주로 북송됐다. 보위부에선 이들에게 한국행을 시도했는지, 교회에 갔는지, 탈북 동기는 무엇인지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15세 미성년자인 성렬은 그리 심하게 조사를 받지는 않았다. 마침 2000년 6·15 정상회담을 앞둔 김정일이 “고난의 행군 시기 배고파서 도강한 사람은 용서해주라”는 지시도 내렸다. 성렬의 가족은 보위부에서 한 달, 강제노동을 하는 집결소에서 석 달을 고생하고 석방됐다. 3년 만에 원래 살던 집으로 가보니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갈 곳은 외삼촌 집밖에 없는데, 다 같이 먹고 살기 어려운 와중에 세 식구가 함께 얹혀살 수는 없었다. 성렬은 어머니에게 혼자라도 중국에 다시 가겠다고 말했다. 2년 뒤면 군대에 입대해야 하는데, 중국의 풍족한 삶을 경험한 그는 허약환자들이 속출하는 군에 끌려가긴 싫었다. 그는 집을 나와 신의주 집결소에서 알게 된 무산 형님을 찾아갔고, 그와 함께 2000년 8월 다시 탈북했다. 중국에 와서도 갑자기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일하던 안테나 공장에 다시 찾아갔다. 그 사장은 그가 탈북자인 것을 알고서도 기숙사에 머물게 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공장에서 두 달쯤 일을 했을 때 어머니와 누나도 그의 뒤를 따라 탈북해 연길에 왔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베이징의 어느 민박에서 식모 일자리를 얻었다. 누나도 텐진(天津)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성렬은 2001년 어머니가 알게 된 조선족 전도사가 텐진에서 운영하던 국수공장으로 옮겨갔다. 중국에 다시 나왔지만 온 가족은 함께 살 수가 없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이들은 중국에서 전화로 그리움을 나누면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성렬은 국수공장에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연락이 왔다. 민박집에서 한국으로 탈북자들을 보내주는 브로커를 만났다는 것이다. “한국에 가면 네가 공부를 할 수 있대.” 성렬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또래 애들이 학교를 다닐 때 그는 기숙사에 숨어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빴다. 북송되지 않은 것만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부를 할 수 있다니. 그는 전도사를 찾아가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브로커 비용 3000위안만 빌려달라고 사정했다. 그 돈을 가지고 한국으로 오는 일행과 함께 몽골 사막을 넘어 2004년 9월 마침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아들이 무사히 한국에 가자 뒤따라 어머니와 누나도 몇 달씩 사이를 두고 한국에 왔다.● 한국-꿈을 향해 달리다성렬은 하나원을 거쳐 2005년 1월 말 마침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게 됐다. 그의 나이 20세. 아직은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겐 오직 하나의 목표밖에 없었다. “이제 발편잠을 잘 수 있는 곳에 왔으니 이제부터 오직 공부만 열심히 해보자.” 하지만 그는 북한에서 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까지 과정에 불과한 인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영어는 알파벳도 몰랐고, 한글과 수학은 다시 배워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너무나 간절히 대학에 가고 싶었다.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천안하늘꿈학교’에 입학한 그는 초중고 검정고시를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1년 남짓한 기간에 모두 통과해 2007년 한동대 국제어문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검정고시와는 또 달랐다. 아무리 열심히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고 해도 대학에서 배우는 영어는 너무 어려웠다. 특히 한동대는 미국 교수가 직접 수업을 하고, 학생들은 영어로 대화하는 과목이 많았다. 교재도 영어 원서 그대로 사용했다.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아 1년 동안 최선을 다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는 1년 만에 휴학을 했다. 아무래도 공부는 아닌가 싶을 때도 많았고, 남들처럼 회사에 취직해 돈을 벌고 싶은 유혹도 늘 따라다녔다. 그때마다 그는 북한과 중국을 떠올렸다. “이 좋은 나라에 와서도 주저앉으면 나는 인생을 포기한 것이 된다. 공부에 맺혔던 한을 무조건 풀고야 말겠다.” 휴학 기간 그는 학원에서 열심히 영어를 배우고 복학했다. 그러나 여전히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는 현지에 가서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기독교 단체들의 도움으로 그는 1년 8개월 동안 미국에 갈 수 있었고, 영어에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그는 7년 만인 2015년에야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1년 늦게 동생을 따라 한동대에 입학한 누나는 그보다 1년 빠른 2014년에 졸업했다. 누나는 대학 졸업 이후 캐나다로 유학을 가 현지에서 석사를 딴 뒤 지금은 영주권을 받아 캐나다 정부 공무원으로 취직해 살고 있다. 셩렬의 꿈은 대학 졸업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박사 학위로 세웠다. 박사도 한국에서가 아니라 최강대국인 미국에 가서 받고 싶었다. 강대국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소도시에 공부하러 왔을 때 느낌도 좋았다. 나무로 둘러싸인 목재 주택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온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 졸업장을 받고 나서 유학길을 찾았지만 미국으로 가기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여러 영어권 국가 대학에도 지원서를 냈는데 스코틀랜드의 한 대학이 그에게 석사 입학 허가를 내주었다. 이제부터는 유학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겐 우연히 기회도 찾아오는 법이다. 탈북대학생들을 지원하던 사단복지법인 ‘따뜻한동행’이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따뜻한동행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한미글로벌 김종훈 회장은 늦깎이 공부를 시작해 열심히 노력하는 그를 지켜보다가 초기 유학에 드는 비용 일부를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유학은 결국 비자 문제가 잘 해결이 되지 않아 물거품이 됐다. 그는 김 회장에게 찾아가 유학비를 돌려줬다. 김 씨의 성실함과 정직에 감동한 김 회장은 나중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다시 지원해줬다. 유학길은 막혔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국내 대학원에도 열심히 지원서를 넣었다. 마침내 2016년 연세대 대학원 통일학 협동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외국인의 미국 대학원 유학을 지원하는 미국 정부 장학금인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 2018년부터 탈북민도 대학원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성렬은 이 프로그램에 선정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했고 마침내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이 1기로 선정한 탈북민 장학생 5명 중 한 명이 됐다. 드디어 꿈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공부도 신이 났다. 그는 보통 5학기 과정이 필요한 석사 학위를 4학기 만에 끝내고 2018년 1월 미국으로 떠났다. ● 미국-꿈을 이루다 미국에 도착한 성렬은 프로그램이 지원하는 6개월의 선행 어학연수 기간에 시라큐스대 맥스웰스쿨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평소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성렬은 맥스웰스쿨이 관련 분야에서 미국 대학원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을 알고 지원서를 넣었는데 합격이 된 것이다. 2018년 가을부터 그는 죽으라고 공부만 했다. 그 결과 2020년 5월 박사 과정 코스워크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방학 때 한국에 잠깐 왔는데 미국에서 코로나가 대유행을 하는 바람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 기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고용노동부 소속 코로나 재난 지원금 지원팀에서 2개월 동안 방역 관련 알바도 했다. 이때 학교에서 종합시험과 논문 제안서를 내라는 연락이 왔다. 논문 예비 심사에는 3명의 교수가 필요했다. 그는 대학원 코스워크를 수강했던 교수들에게 열심히 이메일을 보냈다. 처음 이메일을 보낸 교수 10명은 모두 거절했다. 그가 논문 주제로 삼고 싶었던 북미관계는 자신들이 모르기 때문에 심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른 교수를 찾고 이메일과 전화로 설득했다. 마침내 한국의 동학운동을 연구했던 교수와 중국을 연구했던 교수가 그의 논문을 봐주겠다고 허락했다. 화상으로 오후 7시에 시작한 예비 논문 심사는 새벽 1시가 넘어 끝났다. 성렬은 이때가 살면서 몇 안 되는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교수들은 마침내 조건부로 논문 허가를 내주었다. 2020년 11월부터 성렬은 논문을 쓰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와 다시 도서관에 들어박혀 논문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논문 초고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중간 점검에서 다시 지적을 엄청 받고 대폭 수정을 해야 했다. 학위에 대한 미국의 심사는 정말 까다로웠고, 대충 넘어가는 법이 절대 없었다. 그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논문을 완성시켜 나갔다. 10월에 드디어 최종심사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도 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와 화상으로 4시간 가까이 진행했다. 교수들은 “한국과 미국의 시각에 많이 편중된 것 같으니 중국과 일본 시각도 넣으라, 중국어와 일본어 논문도 찾아서 넣으라”는 등 주문을 다시 내렸다. 다시 수정을 거듭한 끝에 그는 마침내 ‘동아시아 국제정치변화가 북한의 대미정책에 미친 요인’이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2021년 12월 22일은 그에게 절대 잊지 못할 날이었다. 맥스웰스쿨에서 박사 학위 증서를 받았던 것이다. 2005년 20살에 한국에 도착해 16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미국 박사 학위까지 수여받게 된 것이다. 영어 철자부터 배우며 시작해 마침내 36세에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에 흐르며 눈물이 절로 났다. 그는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이 배출한 탈북민 1호 박사가 됐다. 동시에 사회과학 분야에서 미국 박사 학위를 받은 1호 탈북민이기도 하다. 미국 대학에서 탈북민이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2016년 미국 남부 텍사스 A&M 대학원에서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셉 한 씨가 있다.● 성렬의 꿈 성렬은 태어나서 북한에서 12년, 중국에서 7년, 한국에서 14년, 미국에서 4년을 살았다. 북한은 태어난 고향이고 언젠가 돌아가야 할 땅이지만, 고통의 추억이 너무 컸던 곳이었다. 중국은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그곳에서 공안의 단속을 피해 다니며 소년공으로 사는 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성렬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인천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오며 도로가 너무 밝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 생활은 밝지만 않았다. 그는 정착 성공 여부를 대학을 포기하느냐 마냐에 두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지금 돌아보면 그는 정착에 성공한 셈이다. 미국은 처음 갔을 때는 너무나 평온한 느낌을 받았지만, 살다보니 그 땅도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아카데미 영역에선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성렬은 인생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순간으로 풀브라이트 장학생에 선정돼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던 때를 꼽았다. 두 번째 기억이 남는 순간은 지난해 학술지에 자신의 영문 논문이 실렸을 때였다. 최근에도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등 연구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얼음장을 헤치며 탈북하던 때나 북송돼 감옥에 있을 때를 떠올릴 법도 하지만, 그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고, 그런 태도가 지금까지 그를 달려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36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 그리 늦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는 지금이 인생 1막을 마치고 2막을 시작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학위를 받고 계속해서 연구직, 또는 대학교 강사 등의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들어가 남북한과 국제관계 관련해 계속해서 연구를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특히 최근 남북한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면서 이 분야를 연구하면서 살 수 있는 자리는 급격히 사라졌다. 그래서 성렬은 박사 학위를 받고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연구 용역과 학술지 논문을 쓰며 취직 준비를 하고 있다. 최종 목표는 연구기관 연구원 또는 대학교 교수를 꿈꾸고 있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그래도 그는 비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어려운 삶을 잘 살아왔기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잘 헤쳐갈 수 있다는 신심에 가득 차 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길은 닫혀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지금까지 증명했다. 그는 이미 삶의 종착지도 멀리 내다보고 있다. “저는 통일이 되면 고향 청진에 돌아가 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습니다. 북한에는 인재들이 많아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교육의 빈부격차가 심한 북한에서 저는 누구보다 공부에 한이 맺혔던 사람입니다. 결국 인재 양성이 나중에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고 나중에 북한에서 많은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는 대학교를 설립할 것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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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탈북 기자가 본 북한인권보고서 유감

    통일부가 작성한 ‘2023 북한인권보고서’가 지난달 31일 공개됐다. 이번 보고서는 지난 정부가 숨겨왔던 북한 인권 문제를 다시 정부 차원에서 공론화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솔직히 이것만 빼고는 칭찬할 게 별로 없다. 통일부에 북한인권기록센터가 생긴 지 벌써 7년째다. 기존에 북한 인권 실태를 조사하던 민간단체들의 하나원 접근 권한까지 박탈하면서 그동안 독점적으로 조사한 것이 고작 이게 다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아무런 통계도, 실명도 없는 단순 나열식의 보고서를 읽어보면서 수십 명의 공무원과 최소 수십억 원 이상의 예산을 쓰며 존재한 북한인권기록센터가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지 의문만 든다. 다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원에서 설문조사할 권한만 부여받는다면 나 혼자서도 매년 이것보단 몇 배로 더 잘 쓸 수 있다”였다. 통일부가 북한 인권 문제를 직접 조사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기 전 이미 국내에선 여러 버전의 북한인권백서가 발간되고 있었다. 통일교육원,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대한변호사협회 등이 백서를 매년 발간했다. 북한 인권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에겐 통일부의 북한인권백서는 추천하지 않는다. 이번 보고서는 통일교육원 버전을 그대로 베낀 것이란 의심도 든다. 정부는 “그래도 숨겨 오던 기록을 공개한 것이 어디냐”고 변명을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만들려면 앞으로 정부는 손을 떼고 민간단체에 맡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통일부의 북한인권보고서는 내용의 부실함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걸 왜 만드는지에 대한 목적 의식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북한인권보고서 발행의 목표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데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북한의 참혹한 인권 상황을 널리 알리는 것과 동시에 인권 범죄의 가해자들을 위축시켜야 한다. 그런데 통계가 전혀 없고, 증언의 구체성과 정황이 사라진 이런 보고서는 국제사회에 내놓기에도 창피한 수준이다. 단순하게 누가 죽었다더라가 아니라 “누가 무엇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하게 적시해야 한다. 물론 증언자의 신상 노출 우려 때문에 모든 것을 공개할 순 없겠지만 가능한 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름을 적시하는 노력은 해야 한다. 그래야 보고서가 힘을 갖게 된다. 비유한다면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납북자 김성학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몽둥이 구타와 물고문은 물론이고 전기고문을 가해 척추 디스크가 녹아내렸다”고 써야 증언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고서는 “납북자를 간첩으로 만들려고 전기 고문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는 식으로 적는 데 그쳤다. 북한에는 수많은 이근안이 존재한다. 중국과 북한에서 참혹한 인권 유린 감옥을 6개나 경험하며 고문을 받았던 필자가 그 산증인이다. 난 지금도 감옥에서 심심하다는 이유로 수시로 구금자들을 불러내 구타와 성희롱을 일삼던 자들, 새로 끌려온 여성을 끌고 나가 잔혹하게 짓밟고 성폭행을 일삼던 자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20, 30대 중반이던 그자들은 어쩌면 지금도 현직에서 저승사자로 군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엇이 두려워 희생자와 가해자의 실명을 숨겨줘야 하는가. 북한은 소문이 빠른 사회다.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가해자들에게 누군가 “당신의 악행이 남조선 보고서에 올라 있고, 당신에게 당한 사람들이 자손대대로 꼭 복수하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전해준다면 그들은 어떤 충격을 받을 것인가. 우리가 북한의 참혹한 인권 현장을 손바닥처럼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좌시하지 않고 꼭 책임을 묻기 위해 낱낱이 기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북한 인권을 기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중에 김정은 체제가 붕괴된 뒤 북한인권보고서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구체성이 결여되고 시늉 내기에 그친 지금의 통일부 보고서에 기초한다면 그때 가서 재조사가 불가피할 것이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라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공개된 통일부의 북한인권보고서는 북한의 참혹한 인권 실상에 분노할 줄 모르고 공감하지 못하는 복지부동, 무사안일주의의 공무원들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북한 인권 기록 작업을 지금처럼 계속 맡겨야 하는지 의문만 들게 할 뿐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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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무역보험공사 탄소 배출권 투자보험 출시

    한국무역보험공사(K-SURE)가 지구촌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범정부 차원의 온실가스 국제 감축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공적수출신용기관 최초로 탄소배출권 투자보험을 출시한다. 다음 달 출시될 이 상품은 국제 감축 사업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책 변경, 협약 불이행 등의 비상 위험을 보장해 참여 기업이 감축 사업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국제 감축 사업 전용 보험 상품이다. 2015년 체결된 ‘파리기후협약’은 기존 선진국에만 부과했던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개발도상국으로까지 확대했다. 협약 체결 이후 개발도상국이 탄소 감축 사업을 통해 획득한 탄소배출권을 우리 기업에 분배하겠다고 약속한 뒤 이를 지키지 않을 위험도 커졌다. K-SURE가 출시한 탄소배출권 투자보험은 이런 위험으로부터 기업들을 보호해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K-SURE는 정부가 추진하는 ‘2050년 탄소 중립 달성’ 목표를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빠르게 전개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2030년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에는 국외 탄소 감축목표가 3350만 t으로 정해져 우리 기업의 해외 탄소배출권 투자가 필수적이다. K-SURE가 공적수출신용기관 중 유일하게 전용 보험 상품을 내놓으면서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서 기업들을 든든하게 지원할 수 있게 됐다. K-SURE는 또 지난해 국제 감축 사업 지원 시 사업성 검토 기준을 완화하거나 보험료 할인 혜택 제공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 지원지침’을 수립해 감축 사업 지원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와 함께 88개국 약 2300개 기관이 가입돼 있는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 공개 협의체(TCFD)’에도 참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환경회의’를 개최하는 등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사회 간 공조에도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1월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첫날 파리기후협약 재가입을 공식화하고 기후특사를 임명한 이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사회 움직임은 크게 활발해졌다. 유럽연합(EU)도 14일 녹색산업 기업이 유럽에 투자하면 각종 혜택을 주는 ‘탄소중립산업법’과 ‘핵심원자재법’ 초안을 공개하며 글로벌 탄소 감축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이인호 K-SURE 사장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지구촌의 연대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자 공적수출신용기관의 시대적 사명이다”라며 “앞으로도 대내외 공조와 정책 지원을 통해 우리 기업이 친환경 신산업 시장을 슬기롭게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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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이 자초한 북한의 식량위기[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지난달 말 통일부에 북한에서 보냈다는 서신이 왔다고 한다. 내용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협의에 나올 테니 중국 다롄(大連)항을 통해 우선 쌀 2만 t을 보내달라는 것. 북한이 보낸 것이 맞다면 남북 관계가 급진전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통일부는 서신의 진위가 의심된다고 판단해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전문성을 가진 통일부가 그렇게 판단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신을 장난이라고 판단하기엔 북한의 식량 사정이 심각한 것도 사실이다. “북한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은 대통령실과 통일부가 직접 지난달에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물론 아사자 통계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때에도 북한에선 굶어 죽은 사람들이 앓아 죽은 사람들로 보고가 됐다. 자기 관할 지역에서 아사자가 발생하면 책임 추궁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급 간부들부터 아사자 발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김정은이 화를 내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니 같은 일이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요즘은 북한에서 코로나까지 돌기 때문에 아파서 죽었다고 핑계를 대기도 더 좋다. 그러니 아사자가 얼마나 발생했는지는 김정은도 정확히 모를 가능성이 높다. 북한 내부 소식통들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은 암담하기만 하다. 시장에 식량이 없어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는 것. 시장에 쌀이 없다면 아사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김정은의 참석하에 지난달 26일부터 나흘이나 식량 생산을 주제로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 확대회의를 연 것도 내부 식량 사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다시 아사 위기로 몰렸을까.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까닭이다. 코로나로 국경을 3년 넘게 봉쇄하다 보니 식량이나 비료가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또 지난해 봄에 곡창지대가 심각한 가뭄 피해를 본 데다 장마철에 집중호우로 많은 논밭이 유실됐다. 그러나 북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제일 큰 원인은 밀 농사를 망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정은은 2021년 9월 ‘옥수수에서 밀과 보리 농사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을 새로운 농업 정책으로 제시했다. 이후 지난해 전국 곳곳에서 벼나 옥수수를 심던 논밭에 밀을 심기 시작했다. 어떤 곳에선 개인들의 텃밭에도 밀을 심으라고 강제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작년 전체적으로 밀과 보리 재배지가 30% 정도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밀 농사를 시작했던 거의 모든 농장이 계획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밀을 심지 않았으면 벼나 옥수수를 심어 수확을 했을 텐데, 대신 심은 밀 농사가 망한 만큼 북한 전체의 식량 생산이 줄어든 결과로 나타난다. 밀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비료가 없고, 기상 조건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북한 농토가 너무 산성화돼서 밀 재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밀은 산성화된 토지에 취약하다. 식량난이 현실로 다가오자 북한은 6월까지 중국을 통해 60만 t의 식량을 수입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지금까지 약 10만 t이 선박과 열차로 북한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4월까지는 식량 위기가 존재하지만 60만 t이 다 들어가면 아사자 발생은 제한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올해는 그렇다 쳐도 내년이라고 농사가 잘된다는 보장은 없다. 앞으로 밥 대신에 빵을 먹이겠다는 김정은의 구상이 옳은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농업의 방향을 확 바꾸는 일은 충분한 검토와 시험 단계를 거치며 점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북한은 그럴 수가 없는 구조다. 김정은이 지시하면 온 나라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지난해 흉작에도 불구하고 올해 북한의 밀 재배지는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농민들이 밀 농사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도 불만을 말하면 반동으로 몰린다. 실제로 북한은 밀 농사 확대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자는 반당·반혁명 분자로 처벌하겠다는 공문도 하달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집권한 지 벌써 12년이 지났다. 그런데 김정은이 농가를 방문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농촌을 시찰한 것도 몇 년 전인지 가물가물하다. 이런 김정은이 농업의 총사령관이 돼서 “이거 심으라, 저거 심으라”라고 지시하고, 농민들은 불만도 말하지 못한다면 그런 북한 농업엔 미래가 있을 수가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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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습 타도야말로 백두의 혁명정신[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이달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군인들은 주석단에 오른 김주애를 향해 ‘백두혈통 결사보위’라는 구호를 열심히 외쳤다. 열병식에서 백두혈통을 결사보위하겠다는 구호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습 체제의 노예로 전락한 청년들이 10세 어린애를 향해 충성을 맹세하는 씁쓸한 장면을 보면서 북한 땅을 인질처럼 타고 앉아 4대째 향락을 누리고 있는 지긋지긋한 ‘백두혈통’에 저주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만민 평등의 사회주의를 만든다는 사기에 속아 반세기 넘게 살았더니 혈통을 결사보위하라는 노골적인 협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백두혈통이란 것은 알고 보면 순전히 운발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연변에 김일성의 부대였던 항일연군 2군 6사 출신의 여영준이라는 사람이 1990년대 초반까지 살았다. 광복 후 북에 나가지 않고 고향인 연변에 남았던 항일연군 출신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생전에 회고록도 남겼는데, 자신을 찾아온 작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번은 김일성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김 정위(정치위원의 줄임말), 우리가 이렇게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으면서 일제와 싸우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언젠가 왜놈을 다 몰아내고 해방이 되면 공산당에서 우리한테 무엇을 시킬까요?’ 그랬더니 김일성이 이렇게 대답하더라. ‘나는 안도(중국 연변 백두산 인근의 현) 사람이고 안도에서 많이 활동해 왔는데 최소한 안도현장쯤이야 시켜주겠지.’ 그래서 우리 몇은 김일성의 주변에 모여 앉아 ‘너는 김 정위 밑에서 안도현의 공안국장을 하고, 나는 안도현의 위수사령관을 하마’ 하고 말장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까지 김일성도 북조선에 돌아가 이렇게 한 나라를 세울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복 후 안도현장이 되는 게 꿈이었던 김일성은 상관들이 전사하거나 투항하는 바람에, 또 싸우라는 지휘부의 명령을 묵살하고 맨 먼저 소련으로 도망간 덕분에 끝까지 살아남아 북한을 타고 앉았다. 광복 후 78년 동안 북한은 왕이 된 김일성과 그의 부하들, 그들의 자손들을 위한 나라였다. 운 없이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출신성분이라는 55개의 씨실과 사회성분이라는 4개의 날실로 구성된 계급 사회에서 꼼짝달싹 못 하고 살아야 했다. ‘혁명가 가족’으로 태어나면 바보라도 간부가 됐지만 ‘지주, 자본가, 종파, 종교인’ 등의 출신성분으로 태어나면 아무리 똑똑해도 힘든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농민이라는 사회성분이면 평생 농촌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백두혈통 결사보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운명이 성분이라는 바둑판 위에서 결정되는 이런 사회를 대대손손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뜻이다. 지키라는 것이 어디 백두혈통뿐인가. 김정은은 집권 이후 백두의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라며 겨울마다 사람들을 백두산에 내몰았다. 백두의 혁명정신을 내세워 수혜 본 자들은 뜨뜻한 곳에 앉아 채찍질을 하고, 노예가 된 자들이 칼바람 속에서 백두산에 오르고 또 올랐다. 영하 40도의 기록적 한파가 찾아온 지난달에도 수천 명이 깃발을 들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며칠 동안 백두산에 오르다가 동상을 입었다. 어린애를 새 주인으로 내세운 지금 북한 사람들은 백두 혁명정신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백두의 혁명정신은 노예의 정신이 아니다. 그 본질은 ‘혈통 뒤집기’ 정신이다. 백두혈통이란 것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묘지기 혈통이 나온다. 묘지기의 증손자 김일성과, 비슷한 처지의 까막눈 소작농들은 총을 잡고 타고난 팔자를 바꾸었다. 그들은 권력을 잡은 뒤 자신들이 섬기던 부자들을 죽이고, 그 자손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부자가 돼서 80년 가까이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백두산에서 그런 정신을 배워 가야 한다. 콘크리트처럼 굳은 신분 세습, 계급 사회를 목숨 걸고 뒤집어 버리고 운명을 바꾸는 것이 바로 혁명이고, 백두의 혁명정신이다. 백두혈통에게 반항하면 일족을 멸족시키는 연좌제 속에서 무장투쟁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탈북하는 것도 백두의 혁명정신이다. 목숨 걸고 남쪽에 온 보상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노예의 굴레를 벗고 행복하게 살게 할 수 있다. 혈통이란 것을 섬기지 않고, 내가 주인이 돼 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북한 인민이 따라 배워야 할 백두의 혁명정신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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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크로싱’의 실제 인물 유상준 씨의 삶[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유상준 씨는 생일이 가장 슬픈 날이다. 7월 6일. 그날 마지막 혈육이던 어린 아들이 한국으로 아버지를 찾아오다 2001년 몽골 사막에서 굶주림과 탈진으로 숨졌다. 어머니와 아내, 작은 아들은 1997년 북한의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었다.유 씨는 차인표가 열연한 탈북 영화 ‘크로싱’(2008년)의 실제 인물이다. 유 씨는 그 자신이 또한 군 복무 중에 방사능으로 피폭돼 지금까지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북한 체제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홀로 찾아온 따뜻한 남쪽 땅에서 그는 여름에도 서늘한 추위를 느끼며 살고 있다.# 조치원 의형제들유 씨는 1963년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근동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둘 다 충남 조치원 사람이다. 해방전 고향에서 결혼한 부부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자리를 찾아 청진에 와 김책제철소에서 일했다.해방이 돼 집을 팔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38선이 생겼다는 말에 주저앉았다. 이듬해 첫 아들이 태어났다. 1950년 전쟁 시기 국군이 청진까지 올라갔을 때는 부친이 아픈 데다 둘째 아들이 4월에 태어나는 바람에 또 떠나지 못했다.어머니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아침에 국군이 와서 밥을 해달라고 해서 밥을 하고 그걸 메고 부령(청진 위의 도시)까지 따라 갔는데, 오후에 다시 가야 한다면서 돌아가더라”고 했다. 실제 전쟁 때 국군은 청진에 들어가자마자 하루도 안돼 후퇴했다.청진에 눌러앉아 살게 된 부부는 남쪽 출신이란 이유로 노동 계급에서 농민 계급으로 강등돼 청진에 채소를 공급하는 농장에서 일하게 됐다. 자식도 계속 낳았는데, 유 씨는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보니 맏형과 나이 차이가 17살이나 됐는데, 아래에 여동생이 하나 또 태어났다.유 씨가 크면서 보니 고향인 근동에 조치원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조치원 사람들은 북한 체제 아래서도 의형제를 맺고 교류하며 지냈다.추석날에는 딴 곳에 이사 갔던 사람들도 근동으로 왔다. 근동엔 조치원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유 씨가 탈북하기 전까지도 산소에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 난다.유 씨의 어린 시절은 남들과 별 다를 것이 없이 평범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1979년 북한군에 입대했는데 해군에 가게 됐다.#방사선 피폭그의 군 복무는 남들과는 좀 달랐다. 그가 소속된 부대는 원산 해군사령부 소속으로 군수선박을 감독하는 일을 했다. 대다수가 군관이고, 일반병은 6명에 불과했다.부대의 임무는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군함이 설계도면대로 만들어지는지를 감독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군검제도’라고 하는데, 하도 민간에서 대충 만들어 군에 인계하자 김일성이 군 장비는 군이 직접 검사한 뒤 인계하라고 지시해 유 씨가 복무한 부대가 생겨났다.조선소에서 군함이 건조되면 유 씨 등 일반 병사들은 현장에 나가 감마선 단층 촬영을 보조했다. 배의 블록이 제대로 연결됐는지 보기 위해선 둥근 납덩이 안에 뚫은 연필심 굵기의 구멍에 세슘이라는 방사선 물질을 넣고 이를 검사할 위치에 붙인 필름에 쏘는데, 이를 통해 불량을 알 수 있었다. 세슘은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할 때 나오는 초강력 방사능 물질이다. 1984년 작업 중 세슘 유출 사건이 터졌다. 작업하던 군관은 몇 달 만에 얼굴이 까맣게 변해 제대했다. 옆에 있던 유씨는 동해함대사령부 병원인 ‘31호병원’에 실려 갔다. 방사선 피폭을 당했지만 뾰족히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한 군의관이 소련에서 배운 방법이라면서 기뢰를 만들 때 들어가는 은을 구해와 미세한 조각을 만든 뒤 유 씨의 온 몸에 심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유 씨는 목숨은 건졌다. 지금도 유 씨 몸에는 까만 작은 점들이 잔뜩 박혀있는데, 그때 이식한 은이 변색한 것이다.7~8개월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했는데, 제대 시켜주지 않고 다시 부대로 보냈다. 이 곳에서 유씨는 1989년까지 10년 6개월 동안 근무했다. 당시는 남쪽 연고자라고 해도 군 복무를 10년 하면 노동당에 입당시켜 줬다. 그러나 농민의 자녀는 농민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 성분이라는 굴레는 넘을 수가 없었다.제대한 유 씨는 고향인 근동으로 돌아와 농장원으로 일하게 됐다. 제대 후 몇 달 만에 군 복무 중에 알게 됐던 여성과 결혼해 1990년 맏아들 철민이가 태어났다. 농장에서 일하는 와중에도 피폭 후유증 때문인지 몸은 시름시름 계속 아팠다. # 고기 먹는 옆집유 씨는 고향에서 몇 년 동안 농민으로 일하다가 고난의 행군을 맞게 됐다. 고난의 행군은 실질적으로 1994년부터 시작됐는데, 이때 직접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도 많이 굶어죽었다.유 씨 가족은 1997년의 고비를 넘지 못했다. 이 해가 특히 어려웠다. 유 씨의 어머니, 아내, 작은 아들도 먹지 못해 굶어서 사망했다.유 씨가 일하던 근동 농장에는 농민이 600여명이 소속돼 있었는데 1997년에 이중 67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그 중 공식적으로 굶어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농장에서는 아파서 앓다가 죽었다고 보고했다.고지식한 유 씨는 “노동당원이 남들처럼 밭에서 작물을 훔쳐서야 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살다가 가족을 다 잃고, 하나 남은 철민이까지 굶겨 죽일 지경에 몰렸다. 풀중독으로 쓰러진 맏아들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생겨났다.그는 도끼를 메고 산에 올랐다. 새벽부터 깊은 산골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보기 좋게 팬 뒤 수남장마당으로 메고 날랐다. 30㎏짜리 나무짐을 메고 30리가 넘는 장마당에 갔다 오면 하루가 지나갔다. 그렇게 일하니 굶어죽지 않을 수가 있었다.유 씨는 이 때부터 달라졌다. 당에서 시키는 대로 하니 죽음 밖에 없었지만, 하지 말라는 장사를 하니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과거 노동당원임을 의식해 농장에서 여는 회의에 100% 출석했지만, 그 때부터 나가지 않았다. 당시 근동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유 씨가 살던 집은 긴 주택에 칸막이를 하고 여러 세대가 거주하는 일명 ‘하모니카주택’이었다. 옆집에는 철도안전원이 살았다. 철도안전원은 북에서 잘 사는 직업에 속한다. 장사를 다니는 사람들을 단속해 뇌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제대로 된 여행증명서를 갖고 장사하려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단속하면 돈이 들어왔다.덕분에 안전원 가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살았다. 하지만 사방에서 굶어죽는 와중에 고기 냄새를 풍길 수는 없어 주변 눈치를 보면서 뼈도 멀리 내다 묻어야 했다. 옆집에선 사람이 굶어 죽어 가는데,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집은 고기를 먹고 산 것이다. 물론 안전원도 “다 굶어죽는데 누굴 도와주고 누굴 도와주지 말아야 하냐. 우리도 몰래 숨어 먹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할 말은 있을 것이다.# 탈북어느 날, 그 날도 여느 때처럼 나무를 팔고 집에 돌아왔다. 같은 하모니카주택 할머니가 그를 보더니 푸념을 했다.“왜정 때도 이리 살지 않았는데, 이게 뭐요. 젊은 양반이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중국이나 가보게나. 내 조카도 중국에 갔는데, 들어보니 젊은 애들은 요새 다 거기에 간대. 중국에 가면 굶어죽을 걱정은 없대.”유 씨는 그 날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기서 더 버텨봐야 철민이를 굶겨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결국 그는 아들의 손목을 잡고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더 이상 팔 재산도 없으니 미련도 남지 않았다.1998년 4월 그는 국경경비대의 눈을 피해 중국 화룡현 대동마을이란 곳으로 넘어갔다. 강을 건너 걸어가는데, 일하던 한 농부가 그를 손짓으로 불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조선에서 왔느냐”고 묻더니 일을 그만두고 부자를 달구지에 태워 집으로 데려갔다. 농부는 모친을 찾아 밥을 차려달라고 했는데, 쌀밥에 생선이 반찬으로 나왔다. 유 씨는 “오늘이 누구 생일인가”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 농부는 한족이었는데, 모친이 조선족이어서 한국말을 좀 할 줄 알았다. 밥을 먹고 나자 그는 “당신은 여기 오래 있지 못하니 깊이 들어가야 살 수 있다”며 임산노동자들의 차를 불러 태워주었다. 갈 때는 아이의 옷과 도중식사까지 싸주었다.유 씨는 아직도 아무 사심도 없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북중 국경의 그 농부를 잊지 못한다. 사실 대량 탈북 초기에만 해도 연변에는 “불쌍한 조선 사람들이 왔다”며 동정하고 아낌없이 도와준 한족과 조선족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순수한 사람 못지 않게 탈북자를 이용해먹는 나쁜 인간들도 많았다. 유 씨는 중국에 좀 더 체류하면서 그걸 알게 됐다.부자를 태운 차는 “여기부턴 더 같이 가지 못한다”며 어느 초막에서 그들을 내려주었다. 그 초막에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도 이들 부자를 며칠 동안 먹여주고 약도 갖다 주며 돌봐주었다. 나중엔 화룡 어느 농촌에 일자리를 소개해주었다.# 상갓집 개유 씨가 간 집은 주인 남자가 한국에서 돈을 벌고 온 집이었다. 그는 중국에선 아무리 애를 써도 1년에 6천 위안을 벌지 못하는데, 한국에 가면 매달 1만 위안을 벌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고향에 돌아와 소도 20마리를 샀는데 키울 사람이 없다고 했다. 유 씨는 그의 소를 대신 키워주기로 했다.그는 나름 제 딴에는 깊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좀 지나서 보니 그 마을에는 온통 탈북민들이었다. 밤에 마을로 들어오는 차량 불빛이 보이면 공안 단속이 오는 줄 알고 집집마다 사람들이 뛰쳐 나와 산으로 올랐다. 산에 올라가 보니 수십 명의 탈북민이 모였다.산에서 모인 이들은 어디에 가면 잘 숨어있을 수 있는지 정보도 교환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도 촌장집에서 일하던 부부가 얼마 전 잡혀 갔는데, 돈 주기 싫어 밀고한 것이라거나, 어느 집에서 일하던 부부는 남자가 북송되다 탈출해 발이 부러진 채 돌아와 보니 그새 아내를 팔았다거나 등등 흉흉한 소문들이 많았다.한 달쯤 지내는 사이 유 씨도 위기를 넘겼다. 하루는 공안이 들어와 신고가 들어왔다며 모든 집을 수색했는데, 유 씨가 있는 집만 들어오지 않았다. 그 집은 동네에서 제일 낡은 집이라 공안이 설마 이곳에 사람이 있을까 싶어 지나친 것이다.유 씨는 다시 길을 떠났다. 어느 집에서 몇 달 동안 새 집을 지어주며 얻어먹기도 하고 또 어디 가선 나무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농촌을 전전해서는 돈을 벌 수는 없었다. 농촌에서 탈북민은 먹여주고 재워주면 되는 공짜 노동력이었다. 또 잡혀가도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기도 했다.어느 정도 버티며 살다보니 한국 선교사도 만났다. 선교사는 아이는 자기가 맡아 공부도 시켜줄 테니 안전한 곳으로 옮겨가 자리 잡으라고 설득했다. 유 씨는 선교사 말대로 아이를 맡기고 1999년 연길로 옮겨갔다. 대도시는 좀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이 곳에서 그는 건축 공사장에서 일을 했는데, 사장은 몇 달 동안 돈을 주지 않았다. 하루는 용기를 내 돈을 달라고 하자 몽둥이를 든 남자들을 끌고 와 그를 마구 팼다. “조선놈이 신고하지 않은 것도 다행이지 돈까지 받을 생각을 한다”는 이유였다. 그때 갈비뼈가 금이 갔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당시 탈북민들 사이에 악명이 자자했던 사람은 화룡 용소촌이라는 곳의 담배농장에 탈북민 30여명을 데리고 일 시키던 김명주라는 자였다. 그는 돈을 달라는 탈북민을 마구 구타하고, 신고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렇게 학대를 해도 먹여만 달라며 북한에서 탈북민이 끊임없이 밀려왔기 때문이다.도시에 나가니 성과도 있었다. 탈북민 사역을 하려고 온 미국과 한국 선교사들이 도시에 많아 이들을 접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곳에서 두리하나 천기원 선교사를 만나 한국행을 제안 받았다.#한국에 도착하다2000년 12월 1일 그는 다른 탈북민 20명과 함께 몽골 국경으로 향했다.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사막에서 몽골 군인들에게 체포됐는데, 이들은 탈북민을 다시 중국에 넘기려 했다. 남성들이 나서서 안가겠다며 몽골 군인들과 싸우니 기진맥진해진 이들은 탈북민들을 싣고 어느 군부대 목욕탕에 수감시켰다. 나중에 보니 여인과 아이들, 노인들만 사라졌다. 저항하지 못하는 힘 없는 사람들만 골라 끝내 중국에 다시 보낸 것이다. 중국으로 돌려 보낸 이들은 얼마 안 돼 모두 한국으로 다 왔다. 알고 보니 노약자들만 받은 중국 군인들은 귀찮다고 이들을 가고 싶은 데로 가라며 풀어준 것이다.유 씨는 몽골을 거쳐 2000년 12월 15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에 온 탈북민이 1000명 좀 넘을 때였다. 유 씨는 매우 빨리 온 경우에 해당한다. 이듬해 5월 그는 포항 북구에 정착했다. 어느 공장에 취직도 했는데 얼마쯤 일한 뒤 공장에 불이나 월급도 못받고 그만둬야 했다. 한국에 온 유 씨의 마음에는 온통 아들을 데려올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돈을 마련해 아들을 찾아 자신이 왔던 선을 이용해 데리려 오려 했다. 그런데 오던 중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아들 일행이 길을 잃고 사막을 헤맸는데, 끝내 어린 철민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그는 방황했고, 다시 일어났다. 2017년 1월 기자는 유상준 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래 내용이 아들을 잃은 이후 유 씨의 16년 동안 한국 정착 스토리다. 당시 썼던 ‘서울과 평양사이’ 칼럼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바보’ 탈북자 유상준(2017년 1월 26자 동아일보 칼럼)탈북민 유상준(54)의 첫인상은 어수룩해 보인다. 말주변도 없다. 느릿느릿 말하다 “저처럼 북에서 농사나 짓던 놈이 뭘 알겠습니까”라며 자주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알고 보면 그는 아주 빨랐던 사람이다. 남한으로 오는 게 아주 어려웠던 2000년 12월 남한으로 왔다. 한국 입국 탈북민 3만여 명 중 선착순 1000명 안에 들어간다.남한에서 상상했던 그의 꿈은 2001년 7월 부서졌다. 아버지를 찾아 탈북했던 하나밖에 없는 12세 아들 철민이가 몽골 국경을 넘다 굶주림과 탈진으로 숨졌다. 차인표가 열연한 탈북 영화 ‘크로싱’(2008년)의 실제 인물이 유상준이다. 아들을 잃고 1년 넘게 우울증, 자살 충동과 싸우던 그는 2003년 훌쩍 중국으로 건너갔다.“중국엔 한국으로 오는 길을 모르는 탈북민이 너무 많았고, 한국엔 혈육을 데려오지 못한 탈북민이 너무 많았습니다. 먼저 온 내가 이들을 데려와야겠다 생각했죠.”2004년 그가 첫 번째로 구출한 사람은 철민이 또래인 14세 탈북 소녀였다. 그 소녀는 지금 성균관대를 졸업한 27세 여성으로 성장했다.이듬해엔 직접 새 탈북 루트를 개척했다. 당시만 해도 탈북 브로커들은 한국으로 보내주는 대가로 수백만 원씩 받았다. 유상준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한국에서 7만∼8만 원씩 일당을 받으며 몇 달 일해 돈을 벌어선 중국으로 건너가 탈북민을 구출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한국에 와서 막노동을 했다. 구출한 사람 중 몇 명이 고맙다고 자발적으로 돈 봉투를 건넬 때도 있었지만 100만 원을 주면 50만 원은 다시 돌려줬다. 그 이상은 받아본 일이 없다.유상준의 도움을 받아 한국까지 온 탈북민은 500명이 넘는다. 이 중 90여 명은 그가 직접 인솔해 몽골 국경을 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7월 중국 공안에 체포돼 5개월 동안 수감 생활도 했다. 내몽골 감옥에서 여름 옷을 입고 영하 40도를 견디느라 이가 다 빠질 정도로 골병이 들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그는 1년 넘게 병치레를 하면서도 세탁소 운영과 아파트 경비 일로 돈을 모았다. 그 돈을 들고 2009년 중국에 건너갔다. 다시 탈북민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한국에서 대북전단(삐라) 풍선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중국에서 대북전단을 날리면 북한 깊숙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유상준은 중국에서 풍선 가스 구매처를 찾아다녔고, 인쇄물을 찍었다. 그러다 2011년 5월 중국 국가안전국에 잡혔다. 그를 신고한 것은 다름 아닌 탈북 여성이었다.“눈을 가리고 팬티만 입은 채 24시간 동안 내내 맞았습니다. 2명씩 교대로 들어와 때렸는데 너무 맞아서 지금도 기억력이 성치 못합니다.”그는 다행히 북송되지 않고 한국으로 추방됐다. 몇 년 뒤 자신을 신고했던 여성이 서울에서 탈북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상담사로 일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며 복수를 하지 않았다.다시 중국에 갈 수 없게 된 유상준은 한국에 와서도 대북전단을 날려 보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원통하게 숨진 아들의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대북전단을 보내는 곳을 몇 개월 따라다녔지만, 핵심 ‘영업 비밀’은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탈북 루트를 혼자 개척했던 10년 전처럼 그는 이번에도 혼자 시작했다.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 풍선 타이머를 연구했고, 퇴근해서도 연구에 매달렸다. 동네 재활용장에 사정을 해서 선풍기 타이머들을 모두 뜯어오기도 했다. 0.01mm 니크롬선(발열체의 일종)을 꿰느라 목 디스크가 걸렸다. 잠을 못 자며 4개월 꼬박 고생해 수천m 상공 영하의 온도에서도 작동하는 타이머를 만들어냈다.유상준은 요즘 지하철 전동차 청소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한다. 월급은 150만 원 남짓. 주거비와 교통비, 통신비, 쌀값 등을 다 합쳐 자기를 위해 쓰는 돈은 30만 원도 안 된다. 그는 임대 및 관리비가 13만 원인 임대주택에 홀로 살면서 돈이 아까워 난방도 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탈북 고아 2명을 후원했고, 지금도 탈북자 구출 후원금을 보낸다. 아들 둘을 군에서 잃고 홀로 사는 옆집 할머니를 위해선 TV와 전화기를 사주고, 눈 수술비까지 보탰다. 몇 달 월급이 모이면 남의 차를 빌려 대북전단을 조용히 북에 날린다. 그러곤 또 돈을 모은다. 필요한 사람에겐 자기가 연구한 노하우를 전부 가르쳐준다.유상준의 한국 생활 16년은 이렇게 흘렀다. 그의 인생사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컥해진다. 그는 자랑할 줄 모른다. 위에 쓴 유상준의 일대기는 그의 지인들에게 듣고 본인에게 확인한 것이다. 하나를 하고 열을 했다고 자랑하기 급급한 이 세상에서, 이런 ‘바보’가 탈북자 중에 소문 없이 숨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이후 이야기위의 칼럼이 나가고 다시 6년이 흘렀다. 유 씨는 이후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6년 만에 다시 만난 유 씨는 그 때보다 더 수척해 있었다. 달라진 것은 지하철 전동차 청소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정규직으로 전환됐다는 것이다.이제는 난방도 틀고 살아 한달 생활비가 30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올랐다. 과거엔 없어도 탈북 고아 6~7명에게 후원금부터 보내고 살았지만, 이제는 쓰고 남은 돈을 후원한다고 했다.그는 올해 은퇴할 연령이 됐는데 모아둔 돈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전혀 걱정은 없다고 했다.“노인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합치면 은퇴해도 매달 60만 씩은 나올 것 같은데, 지금 50만 원으로 충분히 사는데 그거면 충분하죠. 은퇴 이후에도 걱정은 없습니다.”그가 그렇게 적은 돈으로 살수 있는 이유는 그의 눈높이가 여전히 북한에서 살던 시절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북한에서 살 때 물을 길으러 500m씩 걸어갔는데 지금은 수도만 틀면 물이 나오니 얼마나 좋습니까.”유 씨는 지금까지 국내외 어느 휴양지에도 놀러 가본 적이 없다. 회사에서 2년에 한번씩 리조트 사용권이 나오지만 그것도 사용해 본 일이 없다. 놀러갈 일이 없으니 사진도 거의 찍지 않았다. 인터뷰 후에 과거 사진들을 요청하자 하나도 없다고 난감해 하더니 스스로 셀카를 찍어 보내왔다.그는 죽을 때 남은 재산이 있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몸도 재산에 속했다. 그는 지갑에 늘 ‘장기기증서약서’를 갖고 다닌다. 어디에서 혹시 사고가 나도 남은 자신의 신체조차 사회에 돌려주고 가겠다는 의지 때문이다.그러나 점점 나빠지는 건강은 여전히 고민이다. 그래서 요즘은 쉬는 날이면 무조건 산에 오른다. 나무도 보고, 새가 우는 지저귐도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매달렸던 대북 전단 살포는 2000년 8월 ‘대북전단금지법’이 통과된 이후 “아무리 악법이라도 법은 지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사실상 손을 뗐다.그럼에도 유 씨의 유일한 희망은 하루 빨리 통일이 되는 것이다. “고향에 갈 수 있다면 부모 자식 다 잃고 혼자 독하게 살아온 놈의 죄를 속죄하고, 그때 가진 재산이 있다면 고향 사람들에게 다 나눠줄 겁니다. 지금 제가 가진 것들은 제 것이 아니라고 늘 생각하며 살고 있죠.”유 씨의 마음에는 늘 잊지 못할 두 명의 은인이 자리 잡고 있다.“한 명은 두만강을 넘자마자 만났던 중국 한족 농부입니다. 몇 년 뒤에 찾아갔더니 없더군요. 은혜는 못 갚았지만 저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또 한 명은 북한에서 살 때 만났던 20대 아가씨입니다. 하루는 아들이 풀 중독이 와서 병원에 갔는데 약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축 처진 아들을 업고 나오는데, 어떤 처녀가 나를 부르더니 손에 5원을 쥐어주더군요. 당시 페니실린 한 병이 5원이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고마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 조용히 탈북 고아들을 후원하는 것도 어쩌면 그 처녀에게 진 빚을 갚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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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군 위생병 9년, 한국에선 간호사로 7년[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원산항에 한국 쌀이 들어오면 며칠 동안 항구 정문 앞에 화물차량들이 길게 늘어섰다. 대다수가 군용 트럭들이지만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군용 차량 번호를 대충 뻑뻑 지우고 그 위에 민간 번호를 썼다.그렇게 눈속임을 해도 쌀을 접수하러 온 사람들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비록 사복 차림이긴 했지만 운전사도, 호송원도 머리를 빡빡 깎은 20대 청년들이었다.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엔 쌀이 참 많이도 들어왔다. 원산 갈마역전 앞에 주둔해 있던 강해룡 씨의 운수대대는 대북 지원 쌀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출동하는 부대였다.강 씨는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는 40㎏ 포대에서 처음 쌀을 꺼내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건 쌀이 아니라 하얀 눈덩이였다. 그렇게 하얀 쌀은 처음 봤다.도정이 잘 안돼 누런 북한 쌀은 쌀함박(이남박)으로 일고 또 일어도 꼭 돌이 남았다. 그래서 북한 쌀밥은 조심스럽게 씹어야 한다. 잘못 씹었다가 이가 부서진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 쌀은 돌이 전혀 없었다. 밥을 안심하고 씹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일 수가 없었다. 한국 쌀밥을 먹을 때마다 강 씨는 생각했다.“아, 한국은 정말 발전했구나.”# 잘사는 부대강 씨가 군 복무를 한 부대는 원산에 주둔한 1지구사령부(군단급)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였다. 군단으로 공급되는 거의 모든 물자가 그의 부대 차량에 싣고 오갔다. 떡 주무르는 놈이 콩고물도 많이 먹게 되는 법이다. 그의 대대는 북한군 전체에서도 상위 1% 안에 들어갈 만큼 복무 환경이 좋았다.원래 강원도는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이 가장 기피하는 곳이다. 북한에선 강원도에 가장 많은 세 가지가 ‘돌, 바람, 군대’라는 말이 있다. 돌을 열개 던지면 일곱 개가 군인 머리에 떨어진다는 말도 있다. 험한 산들이 많아 환경은 척박한데 군인들만 많다는 뜻이다. 훔쳐 먹으려고 해도 민가가 많지 않아 훔칠 곳도 없다. 그래서 강원도는 가장 가난한 집 자식들이 군 복무하려 가는 곳이자 군에 갔다가 영양실조로 제대되는 병사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하지만 강 씨의 운수대대는 훈련도 별로 세지 않고, 먹을 것도 풍족했다. 주변에는 삐쩍 마른 군인들이 많지만 그의 부대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쌀 지원이 오면 쌀을 싣고 오다가 슬쩍 ‘조절’할 수 있었다. 북한에선 훔쳐온다는 말을 듣기 좋게 ‘조절해온다’고 표현한다.쌀 뿐만 아니라 유엔에서 들여오는 각종 약도 그의 운수대대가 날랐다. 대다수 탈북민이 북에 살 때 구경도 못했던 소고기도 실컷 먹은 기억이 있다. 2001년 유럽에서 광우병 파동이 벌어졌을 때 북한은 독일에 도살된 40만 마리를 무료로 줄 것을 요구했고, 독일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2만t 정도 실제로 북에 보냈다. 그 소고기를 군단에 싣고 올 때 강 씨는 질릴 정도로 많이 먹었다.이렇게 좋은 부대인지라 북한에서 힘깨나 좀 쓴다는 간부들은 자식들이나 친척들을 운수부대에 보내지 못해 안달이다. 강 씨가 부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중대장의 첫 질문이 “넌 누구 부탁자냐”였다. “누구의 빽이냐”는 질문이었다.그런데 부탁을 한다고 해서 또 누구나 이 부대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곳에 오려면 군 운전사양성소에서 2년 동안 차량 관련 각종 교육을 이수한 뒤에야 올 수 있었다. 운전사양성소를 졸업해도 일선 부대 포차 운전병으로 간다면 힘들게 군 복무를 해야 했다.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는 운전병 훈련생 중에서도 빽 좋은 사람만 골라 오는 곳이었다.하지만 강 씨는 운전 교육을 받지 않고 신병으로 입대해 바로 온 몇 안 되는 사례였다. 운수대대이긴 하지만 모두가 운전병일 수는 없는 법이다. 경비나 통신병 등은 일반 신병 중에서 뽑았다. 이쯤 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엔 강 씨가 북한에서 엄청나게 힘 있는 간부집 자식처럼 보일 수가 있지만 실은 아니었다.# 행운의 병사강 씨는 1982년 함북 청진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평범한 철도 건설 노동자였는데, 그가 15세였던 1997년에 사고로 사망했다. 군에 가기 전 그의 삶은 남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대다수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인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군에 가야 하는 정해진 수순대로 살았다. 집안 형편이 썩 좋지 않아 대학에 갈 꿈도 꾸지 못했다.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닥쳐오자 그의 집도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엄마는 배낭에 공업품을 메고 황해도로 나가 쌀과 바꾸어왔다. 이렇게 지역을 오가며 물건을 바꾸어 차익을 버는 사람을 북한에선 ‘달리기’ 또는 ‘행방’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죽도 먹기 힘든 때도 있었다.중학교를 졸업해 군대에 갈 때쯤 되니 학급 동창들의 운명도 갈렸다. 제일 살이 찐 간부집 자식들은 대학에 가겠다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영양실조 오기 전의 삐쩍 마른 가난한 집 아이들은 군에 가야 했다. 강 씨가 졸업해 군에 가던 2000년에만 해도 군에 가면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말이 만연해 있던 때였다.그 중에서도 강원도는 모든 학생들에게 기피 지역이었다. 강 씨도 실제로 강원도에 갔다가 실조차 없어 쇠줄로 군복을 꿰매 입고 집으로 돌아온 영양실조 환자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강원도로 갈 운명을 피할 길은 없었다.그런데 그에게 결정적인 ‘빽’은 있었다. 군사동원부(병무청)에서 일하는 친척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자기가 많이 힘을 썼다고 했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는 강원도로 배치됐다. 하지만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최전방 1군단이나 5군단은 피하고 원산에 주둔하고 있는 1지구사령부 신병연대로 가게 된 것이다.군에 입대했을 때부터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으로 변했다. 원래 신병훈련소에 들어가면서부터 배고픈 고생이 뭔지 알게 되는 것이 정상인데, 그가 2000년 8월 강원도 덕원에 위치한 신병훈련소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배고프지 않게 먹여주었다. 알고 보니 바로 한 달 전인 7월 4일에 김정일이 부대를 시찰했다. 그 덕분에 현지시찰 ‘뽕’으로 적어도 몇 달은 부대에 대한 공급이 좋아졌다.신병훈련 기간에 그는 또 훈련소 정치부장(상좌)의 눈에 들었다. 학교에 다닐 때 강 씨는 아코디언을 배웠다.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아들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때 예술학원에 입학하려고도 했지만 예술을 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어 그만둬야 했다. 그렇게 배웠던 아코디언이 신병훈련소에서 준비하는 예술소조 공연 때 빛을 발휘한 것이다. 정치부장은 아코디언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강 씨를 눈여겨 보았다. 그가 힘을 써주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는 신병훈련소를 마치고 영문도 모르고 부탁자들만 간다는 후방사령부 직속 운수대대로 배치됐다.# 배부른 병사운수대대는 일반 부대와 구성이 좀 달랐다. 대대 전체 인원이라고 해봐야 초기복무(부사관) 군인까지 포함해 120명 정도로 대다수가 운전병이었다. 차량은 러시아제 신형 지르와 중국제 둥팡(東方) 트럭이 대부분이었다.운수중대는 지구사령부 각 부대에 후방 물자를 전달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지만 물자 이송 명령이 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운전병들은 쉬는 날이면 부대 간부들의 묵인 아래 차를 끌고 나가 돈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사 물건이나 건설 자재를 날라주고 돈을 받은 뒤 간부들과 나누었다. 그러니 잘 살지 못할 리가 없었다.강 씨가 부대에 갔을 때 마침 2중대의 위생지도원(위생병)이 제대돼 자리가 비었다. 그는 신병에서 바로 위생지도원으로 발탁됐다. 위생지도원을 하려면 위생지도원 강습소를 6개월 마쳐야 했다. 주사를 놓는 법, 붕대를 감는 법 등 응급 치료에 관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특별 직종에 대한 강습을 6개월 받게 되면 나름 ‘전문직 군인’으로 대접 받을 수 있었다.강 씨는 2009년 제대할 때까지 부대 위생지도원으로 있었다. 위생지도원은 알고 보니 매우 편한 자리였다. 훈련병은 정기 훈련에도 잘 참가하지 않았다. 또 젊은 군인들인 데다 잘 먹는 부대라 환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가끔 군관 또는 부사관 가족들이 밤중에 아프면 달려가 주사를 놔주는 일 정도가 약간 번거로운 일이긴 했다. 운수부대 약품 창고도 유엔약 등으로 빵빵하게 차있었다. 운수대대는 산골짜기가 아니라 나름 번화가인 갈마역 앞 소도시 가운데 주둔해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부대 주변에 ‘사택’이라고 부르는 가족처럼 다니는 민가 하나씩은 꼭 끼고 있었다. 식량 등을 가져다주는 대신 밥을 얻어 먹거나 휴식을 취한다.하도 군인들이 계속 민가에 몰래 드나드니 부대 간부들은 담장을 2m 높이로 쌓고 그 위에 유리를 박거나 인분을 뿌리는 등 외출 방지 대책을 세웠다. 그런데 이런 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젊은 군인들은 2m 높이 담장 쯤은 쉽게 타고 넘어갔다. 강 씨 역시 짬만 나면 자신의 ‘아지트’로 갔다. 배불리 먹고 필터 담배를 피우며 한국 드라마를 봤다. 당시 ‘줄리엣의 남자’ 등이 원산에 많이 퍼졌다.한국 드라마를 보았지만 화면 속 세상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희한한 세상이구나 싶었지 자신이 그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란 상상은 해보지 못했다. 병사들이 흥얼거리는 노래도 한국 노래들이었다. 대개는 그것이 한국 노래인지도 모르고 불렀는데, 나중에 서울에 오고 나서야 그게 한국 노래인줄 알았다.강 씨는 약을 민가에 갖다 주어 편의를 제공받긴 했지만 제일 많이 가져다 준 것은 식량이었다. 가을이면 편한 보직인 위생병은 후배 5명 정도를 거느리고 정기적으로 안변에 있는 오리목장에 옥수수밭 경비로 차출됐다. 37정보(1정보=0.99헥타르)의 대규모 옥수수밭이었는데, 이때가 대목이었다. 밤에 옥수수를 따 자신이 다니는 사택에 수백㎏씩 날라줬다. 도둑을 막으라고 보냈는데, 경비병이 사실상 도둑인 셈이다. 간부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무지막지한 타 부대 도둑들보단 자기 부대 병사들이 몰래 가져가는 것을 묵인했다. 경비를 나가 옥수수를 따다 날라주면 그 대가로 1년은 언제든지 그 집에 가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옥수수 경비를 나가라는 명령을 받으면 제일 행복했다. 배불리 먹고, 옥수수를 팔아 필요한 것도 살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군대에 나오길 참 잘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남들은 군에 나오면 집에 있을 때보다 먹지 못해 늘 굶주림으로 고생했다. 이웃에 주둔한 정예부대라는 ‘108훈련소(군단급)’만 해도 ‘배고파훈련소’라고 무시를 당했다. 하도 병사들이 먹지 못해 구걸을 다닌다고 해서 ‘백공팔’을 ‘배고파’로 바꿔서 부른 것이다.하지만 강 씨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집에 있을 때는 죽을 먹으며 배고프게 지냈는데, 군에 나와 배부르게 살 수 있었다. 같은 북한군 내에서도 빈부격차가 이렇게 심했다.강 씨는 경비에 차출돼 나갔다가 본 후방사령부 오리목장 지배인의 집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집에는 투명한 고강도 유리로 덮은 큰 수족관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안변 산골에 있는 후방사령부 소속 지배인조차 오리고기와 식량을 물 쓰듯이 뿌리며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돈만 잘 벌면 된다”어느덧 군 복무 7년쯤 지나자 그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당 입당 문제로 고민하게 됐다. 북한에서 군에 가서 남자들이 받아올 수 있는 가장 큰 포상이 노동당 입당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도 입당도 하지 못하고 오면 사회에 나와서도 모자란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입당 추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대장과 정치지도원 등 부대 간부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위생지도원이라 수시로 호출할 때마다 달려가 성심성의껏 돌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비슷한 또래는 입당하는데 그는 부르는 데가 없었다. 친한 간부가 그에게 가만히 귀띔해주었다.“너는 엄마와 남동생이 행방불명이 돼서 입당이 어려워.”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군에 나온 지 4년차인 2004년에 집에 갔던 적이 있었다. 당시 김정일이 인민군대도 두부콩 농사를 지어 병사들이 허약에 걸리는 것을 방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부대에선 콩 종자 30㎏을 가져오면 집에 보내주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그는 자원해서 집에 갔다. 그 때만 해도 엄마와 동생이 집에 있었다. 친척집을 다니다가 작은 고모가 없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그에게 가만히 이야기했다.“고모는 남조선에 갔다.”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냥 고모의 일이니 자신과 크게 상관없는 줄 알았다. 2005년에 다시 핑계를 대고 집에 갔는데 이번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없었다. 친척 한 명이 그의 귀에 대고 이야기했다.“지금 엄마가 중국에 갔는데 돈을 벌어 돌아올 거야. 기다려봐.”부대로 돌아오면서 엄마는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2007년이 돼도 엄마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고향에선 엄마를 행방불명자로 문서에 등록했다. 이것이 신원조회 과정을 거치며 부대까지 통보된 것이다.가족 문제로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밀고했는지 가끔 부대 간부들이 찾아왔다. 군단 보위부장은 그를 불러 “장군님은 네 부모가 미국이나 중국에 가도 상관없이 너를 품어주실 것이니 딴 생각하지 말고 부대 생활 열심히 하라. 너만 잘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다독여주기까지 했다. 어느새 그는 고민하다 사고를 칠 수 있는 요시찰 인물로 등록된 것이다.제대를 몇 달 앞둔 2009년 집에 갔을 때 예전의 그 친척이 또 귀띔해주었다.“해룡아, 네 엄마와 동생은 지금 남조선에 갔다.”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입당을 하지 못할 것이 명백해졌다. 그렇게 되자 그는 스스로 위안을 했다. 노동당에 입당하는 사람들은 두꺼운 당규약집을 다 외워야 입당 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 그는 “나는 외우기를 죽어라 싫어하니 그 두꺼운 당규약을 어차피 다 외우지도 못할 건데 차라리 잘 됐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제대 후 진로도 어렵지 않게 결정됐다. 사회에 나가서 손가락질 받을 바에는 엄마를 따라 남조선에 가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당시를 돌아보며 강 씨는 “입당을 했었다면 한국에 오길 망설였을 것인데, 노동당에도 받아주지 않으니 ‘여기 남아 뭐해’라는 오기가 생겨 쉽게 결심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부대에서 친하게 지내던 고위 당간부 자식이 그에게 위안이랍시고 건넨 말도 진짜로 위안이 됐다.“입당은 무슨 입당이냐. 해룡아, 사회에 나가선 돈만 잘 벌면 네가 인생 승리자야.”# 탈북2009년 5월 마침내 그는 제대명령서를 받았다. 그는 ‘무리배치자’에 포함됐다. 무리배치란 당국이 딱 정해준 힘든 탄광이나 농촌 등에 제대군인들을 집단적으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노동당은 그를 어랑천발전소 건설장에 갈 것을 명령했다. 어랑은 그의 고향인 함경북도에 있는 곳이다.어랑천발전소란 말을 듣자 그는 놀랐다. 분명 인민학교 때부터 어랑에 발전소를 짓는다고 돈을 걷어가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가 제대될 때까지 마무리하지 못했다니 기가 막혔다. 그는 한국에 와서야 어랑천발전소가 1981년에 건설이 시작됐고, 그가 한국에 온지 13년 뒤인 2022년 8월에 완공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발전소를 하나 짓는데 무려 41년이나 걸린 것이다. 거기에 갔으면 젊음이 증발될 뻔 했다.제대된 뒤 그는 어랑에는 가지도 않았다. 집에서 좀 쉬다가 직장에 간다는 핑계를 내걸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얻어먹었다. 어차피 이 땅을 떠날 건데 눈치 볼 것이 뭐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쭉 돌아보니 놀랍게도 많은 친척들이 그새 한국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은 고모와 엄마는 물론이고, 외삼촌 가족, 이모 가족 등이 다 슬금슬금 사라져 줄을 타고 남쪽으로 이주했다.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모부는 첫째 아들만 한국으로 오는 데 성공했고, 이모와 둘째 아들은 탈북 과정에 체포돼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한국으로 간 친척이 많으니 엄마와 연락하는 선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국경까지 와서 산에 올라가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의 이야기가 뜻밖이었다.“엄마는 돈을 지금 벌지 못해 동사무소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 산다. 네게 보내줄 돈이 없으니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여기 와라.”“엥? 거긴 나라에서 먹고 살라고 돈도 준다고? 정말 좋은 나라네.”2009년 11월 마침내 그는 한국을 향해 떠났다. 국경 도시인 무산까지 와서 밤에 강을 넘겨줄 선을 찾아 대기하고 있는데 ,그가 도강하기로 한 날 이틀 전에 현지에서 12명을 한꺼번에 공개 총살하는 일이 있었다. 대개가 불법 월경 연관자들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가다가 잡히면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싶어 오금이 저렸다. 그래도 엄마를 찾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공포를 눌렀다. 마침내 강을 건너기로 한 날이 왔다. 브로커가 그를 찾아와 집에 데리고 갔다. 그날 그와 함께 강을 건널 사람 6명이 그곳에 모였다.브로커의 집에는 김일성과 함께 찍은 소위 ‘1호 사진’이 5~6장이나 벽에 걸려있었다. 지방에서 김일성과 그렇게 많이 사진 찍을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그가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브로커는 먼저 “내가 무슨 사람인지 묻지 마”라고 선수를 쳐 입을 막았다. 브로커는 얼음(필로폰)을 뻐끔뻐끔 빨아대며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 이렇게 위험한 도강을 주선해 번 돈으로 마약을 사서 탕진하는 것 같았다.일행은 그날 밤 무사히 강을 넘었다. 여러 명이 함께 강을 건너니 어차피 잡혀 죽어도 혼자 죽지 않을 거란 생각에 조금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다. 강을 건너 캄캄한 북한 땅을 건네다 보니 마음이 아팠다“총을 들고 9년을 지킨 저 땅에 살아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연길에 들어오니 무서웠던 마음도 싹 가라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밝은 도시가 있을 수가 있구나.”음식들도 너무 맛이 있었다. TV를 보니 채널이 너무 많아 끝도 없어 넘겨야 했다. 점점 북한을 떠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엄마가 탈북할 루트를 잘 연결해준 덕에 그는 11월 7일 두만강을 건너 한 달 만인 12월 10일 한국에 도착했다. 탈북민 사이엔 이런 경우를 ‘초고속 직행’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다.오는 내내 마음이 들떴다. 보는 모든 게 새롭고 황홀했다. 동남아 국가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땐 “내 생애에 비행기를 다 타보는구나”싶어 너무 기뻤다.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화장실에 들어가려다 반들거리는 대리석을 보고 “여기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야 하나, 벗고 들어가야 하냐”며 고민하기도 했다.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그는 “내가 여기에 오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뿌듯했다.# 다시 시작된 간호사의 삶2010년 5월 마침내 하나원을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 그는 김포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지역을 배정받았다. 6년 만에 마침내 어머니를 만났다. 동생은 소년단 넥타이를 메고 있을 때 본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사회에 나왔지만 여기는 북한처럼 국가가 직장을 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한국 사회를 더 많이 체험해보겠다는 욕심으로 인력사무소에 나가 건설판도 다니고, 각종 아르바이트도 전전했다. 한국에 와서 기뻤던 마음이 힘든 일을 하면서 점점 지쳐갔다.“여긴 왜 이렇게 치열하게 살지? 여긴 왜 일이 이렇게 힘들지?”1년 정도 그렇게 살다보니 피곤에 찌든 몸으로 버스에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느 날, 그날도 피곤한 몰골과 무표정한 눈빛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데, 밖에 눈이 번쩍 뜨이는 광고판이 보였다. 간호조무사학원 간판이었다.“아, 내가 6개월 양성소를 졸업한 인민군 위생지도원이었지. 간호사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광고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하자 학원에선 국비로 학비의 80%까지 지원된다고 설명해줬다.“그래, 여기서도 한번 간호사를 해보자.”한국에 와서 바로 생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더 오랜 시간 허둥대며 더 높은 곳을 보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힘든 육체 노동을 1년 동안 하니 그제야 간호사라는 직업도 대단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그는 즉시 학원에 등록해 1년 동안 다녔다. 조무사학원을 다니다보니 그제야 간호대학이 있다는 것도, 간호사와 조무사가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왕 시작했던 바에야 간호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간호조무학원을 다니면서 대학을 준비해 2012년 가천대 간호학과에 입학해 4년제 정규과정을 밟게 됐다.처음엔 나이 30세가 넘어 대학에 과연 잘 다닐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지만 정작 가보니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 40세 후반 학생들도 있었다. 또 “남자가 간호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 우려도 대학을 다니며 떨쳐냈다. 알고 보니 응급실 등 특수파트에는 남자 간호사가 태반이었다.간호학과 공부는 쉽지 않았다. 공부하면서 “이렇게 공부했으면 북한에선 의사가 되고도 남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입학했다는 생각 때문에 4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를 따라갔다. 각고의 노력 결과 한 번의 휴학도 없이 4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졸업한 뒤 김포의 한 종합병원에 취직도 쉽게 됐다. 그 곳에서 4년 동안 일하다가 결혼 직후엔 2020년에 신혼집과 출퇴근 등을 감안해 양지병원으로 옮겼다. 김포에서 처음 들어간 것이 수술실 간호사였는데, 지금도 수술실에서 일한다.“수술실은 남자 간호사가 많아서 편해요. 그리고 말투를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어 좋고요. 다른 간호사들은 환자들과 많이 해야 하지만, 수술 환자들은 마취를 하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돼요.”2019년 그는 9살 연하의 탈북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부인의 직업도 간호사다. 각자 병원도 다르고, 통근거리도 멀며, 교대 시간도 어긋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지난해엔 신축 아파트를 사 입주했다.“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간호사를 택한 것은 잘한 결정 같아요. 너무 만족합니다. 북한에 있었으면 지금 어랑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오늘은 뭘 훔쳐올까’ 고민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제가 통일되면 뭘 할지 이런 거창한 고민을 할 나이는 아니지만, 지금은 어쨌든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지난해 강 씨는 통일부가 주최하고 남북하나재단이 후원한 ‘제9회 정착경험사례 발표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북한군 위생병으로 9년, 한국에선 종합병원 간호사로 7년을 산 그는 시상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지금은 7년차 간호사로 모든 수술실의 방장을 하고 있지만, 제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저를 끌어안고 함께 가려 했던 팀장님들과 수술실 동료들의 관심과 도움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지만, 그걸 통해 간절함과 절실함은 어떤 벽도 가로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통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체제가 다른 삶을 살다가 와서 이 땅에 잘 정착하는 것이야 말로 작지만 큰 의미가 있는 진정한 통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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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이란 노래를 북한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 김정일이 5대 혁명가극을 창작하면서 1971년에 직접 지었다고 한다. 호칭도 3대째 세습됐으니, 지금은 김정은이 장군님이다. 김정은을 자주 보면 좋을지 나쁠지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요즘 김정은을 보기가 진짜 힘들다. 1월 1일 소년단 행사에 잠깐 얼굴 비치고 지금까지 자취를 감췄다. 한 달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지도자가 한 달이나 사라져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 북한은 참 기이한 곳이긴 하다. 김정은이 사라지면 남쪽 전문가들은 “중요한 결단을 두고 숙고 중”이란 판에 박힌 대답을 내놓는다. 노는지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한 달은 좀 너무한 감이 있다. 그런데 1월엔 김정은이 사라질 만한 중요한 이유가 두 가지나 생겼다. 하나는 평양의 코로나 재확산이다. 평양에 발열 환자가 급증해 25일부터 닷새간 봉쇄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관이 공개한 북한 외무성 공지문을 통해 이미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도 현재 평양엔 발열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전해 왔다. 주변에 온통 열이 나는 환자들인데, 코로나인지 독감인지 평양 사람들도 알 방법이 없다고 한다. 검사 키트가 없기 때문이다. 또 진단을 받는다고 해도 방법도 없다. 병원에 약이 없다. 그나마 있던 약은 작년 5∼6월의 대유행 때 탈탈 털어 다 썼는데, 이후 보충했을 리도 만무하다. 가동되는 의약품 공장도 거의 없는 데다 국경 봉쇄로 수입도 못 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처지에서 보면 이번 코로나를 특별히 무서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8월 전국비상방역총화회의 토론에서 김여정은 “방역 전쟁의 나날 고열 속에 심히 앓으시면서도 자신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인민들 생각으로 한순간도 자리에 누우실 수 없었던 원수님”이라고 했다. 오빠가 발열자였다는 사실을 공식 석상에서 언급한 것인데, 5∼6월의 발열자는 사실상 모두 코로나 환자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김여정의 말대로라면 김정은은 코로나에 걸렸다 회복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정은처럼 초고도 비만 환자는 회복했어도 위험하다. 지난달 19일 유럽심장학회(ESC) 잡지에는 코로나 감염자 7584명과 비감염자 7만5790명을 대상으로 후유증이 얼마나 가는지 평균 18개월간 추적 관찰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코로나에 감염됐을 경우 완치 이후 약 3주간 심혈관 질환 발생 위험이 4.3배나 높아지고, 모든 원인으로 인한 사망률은 무려 81배나 높아졌다는 게 요지다. 코로나 감염 후 18개월이 지난 뒤에도 심혈관 질환 발생 위험은 1.4배, 모든 원인으로 인한 사망률은 5배나 높은 상태가 유지됐다. 완치된 지 6개월가량밖에 되지 않은 김정은은 지금 후유증이 강한 위험 구간에 있는 셈이다. 지난달 18일 발표된 중앙방역대책본부의 조사 결과도 주목할 만하다. 확진자 847만 명을 조사해보니 재감염자는 1회 감염자보다 치명률이 1.79배나 더 높았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김정은은 이미 충분히 건강이 좋지 않다. 특히 코로나가 큰 후유증을 남기는 심혈관 질환은 김씨 집안의 치명적 약점이자 가족력이다. 김일성과 김정일 모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심근경색의 4대 위험인자는 흡연과 당뇨, 고지혈증, 고혈압이다. 김정은은 오래전부터 4대 인자 모두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은 심근경색 발생 위험성이 6배나 높은데 가족력까지 있으면 훨씬 더 위험하다. 여기에 코로나 재감염까지 된다면 말할 나위가 없다. 김정은이 외부 노출을 자제할 만한 두 번째 이유는 올해 북한에 23년 내 가장 심한 추위가 닥친 것이다. 심혈관 환자는 가장 더운 날과 가장 추운 날을 조심해야 한다. 김일성은 폭염 기록을 연이어 세우던 1994년 7월에 사망했다. 김정일은 매서운 한파가 들이닥쳤던 2011년 12월에 숨졌다. 심혈관 환자에게 미치는 코로나의 악영향과 후유증, 재감염자의 치명률 증가, 기록적 한파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 가족력을 가진 초고도 비만환자 김정은에게 있어 1월은 참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다. 나 같아도 밖에 쉽게 나가진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너무 오래 사라지면 북한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 같다. 모두 이렇게 생각할지 않을까.‘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 안녕하십니까?’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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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판 ‘김빠’와 ‘개딸’들이 만든 세상[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북한에서 연초마다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이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북한 매체들은 지난해 말에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 보고문헌 학습 열풍이 전국적으로 불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다. 학습뿐만 아니라 각 지역과 직장에서 연일 전원회의 결정 관철 궐기대회와 군중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내가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던 1990년대엔 방학을 일주일 앞당겨 학생들을 대학에 소환한 뒤 신년사를 달달 외우게 하고, 학부별로 토너먼트 경연을 진행했다. 답변을 못 해 학부 탈락의 원인을 제공하면 졸업 때까지 찍혀 고생한다. 이것이 북한에서 반세기 동안 벌어져 온 일이다. 노동력이 얼마나 낭비되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이렇게 모두에게 작년의 자랑 찬 성과와 올해의 위대한 목표를 외우게 해 만들어진 것이 오늘의 북한이다. 신년사의 성과만 종합해도 북한은 이미 공산주의는 물론이고 세계 최강국이 돼 있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그동안 북한은 가난한 시궁창으로 열심히 달려갔을 뿐이다. 김정은은 신년사도 읽기 귀찮은지 4년째 전원회의 보고라는 문서를 만들어 전국에 하달하고 있다. 올해 보고에서도 “지난해에 괄목할 만한 성과와 진전이 이룩되었다”고 했지만 도대체 미사일 열심히 쏜 것 말고 괄목할 성과는 무엇이고 어디로 전진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올해에도 “12개 중요 고지들을 기본 과녁으로 정하고 점령 방도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면서도 그게 뭔지 밝히진 않았다. 들으나 마나다. 방도는 늘 있었다. 다만 실천을 못 했을 뿐이다. 가령 “철도는 나라의 동맥”이라며 매년 방도를 내놓지만 현실은 기차가 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동맥경화가 심각해졌다. 올해 김정은은 “다시 한번 1960, 70년대의 투쟁 정신과 기치를 높이 들고 혁명의 난국을 우리 힘으로 타개해 나가자”고 했다.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김일성 만세를 부르던 케케묵은 과거가 소환된다. 그런데 북한은 그 과거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시작부터 잘사는 방향과 정반대의 길을 택했는데, 다시 처음처럼 기운을 내 뛰어봐야 가난에만 더 가까워질 뿐이다. 북한이 과거에 잘못된 길을 택해 열심히 달린 것에 대한 책임을 김씨 3대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1950, 60년대를 살았던 북한판 ‘김빠’ ‘개딸’들의 업보를 지금 그 자손들이 뒤집어쓰고 있다. 북한에서 1인 수령 체제를 강화하며 충성을 강요할 때마다 등장하는 표본 인물인 ‘태성할머니’가 대표적 개딸이다. 1950년대 후반 김일성의 독재가 저항에 직면했을 때 남포시 태성리의 할머니가 김일성에게 “종파놈들이 인민 생활에 대해 떠들어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조건 수상님을 지지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 말에 힘을 얻고 반대파들을 단호하게 숙청했다고 한다. 북한판 “우리 성이 하고 싶은 거 다 해”였던 셈이다. 그런 ’묻지 마’ 지지자들을 업고 김일성은 하고 싶은 것 다 했다. 독재 체제도 만들고 자자손손 권력을 세습해도 반항도 못 하게 만들었다. 돌아보면 그때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라고 처형된 사람들이 진짜 애국자들이었다. 김정은이 바라는 1960년대의 투쟁 정신이란 무슨 짓을 해도 “우리 으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를 외치며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굶어 죽어도 반항하지 않는 맹목적 충성심일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엔 배급이라도 주고 일을 시켰지만, 지금은 무보수 충성을 강요하니 그런 호소가 얼마나 먹혀들진 미지수다. 이젠 북한 인민도 깨달아야 한다. 설날부터 고지 점령 방도라는 의미 없는 헛소리나 외우지 말고, 시키는 대로 다 해서 어떤 사회가 됐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자신들이 어디에서 떠나 어디로 가는지, 왜 북한이 이렇게 됐는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과거에서 찾을 것은 투쟁 정신이 아니라 맹목적 지지가 어떤 지옥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교훈이다. 올해 북한의 상황은 매우 어렵고, 굶어 죽는 사람도 많이 나올지 모른다. 그래도 김정은은 내년 전원회의 보고에서 또 어김없이 “괄목할 만한 성과와 진전이 이룩된 2023년이었다”고 할 것이다. 죽는 날까지 반복될 이 저주의 굴레를 자손들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다면, 북한 주민들도 이젠 노예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김정은이 외우라는 것을 외우지 않고,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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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득 증가로 깨끗한 스테인리스스틸 대세 직감”

    국내 스테인리스스틸 생산 대표 기업인 길산그룹이 이달 7일 ‘매출 1조 클럽’ 고지를 밟았다. 매출액 1조 원 이상을 기록한 기업은 지난해 기준 229개로 집계된다. 길산그룹 정길영 회장(73·사진)은 1991년 충남 논산의 허허벌판에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 공장을 세운 지 31년 만에 매출 1조 원을 달성했다. 정 회장은 “도전정신으로 모든 비전을 현실화시킨다”는 태도로 일에 매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일 충남 계룡시 본사에서 만난 정 회장은 “국민소득이 늘어날수록 부식이 없고 깨끗한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보고 시작해 한길만 묵묵히 걸어온 결과 오늘의 길산그룹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아파트를 짓다가 처음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를 봤다. 당시엔 한국에서 스테인리스스틸 생산이 원활하지 못했는데 그걸 보자마자 이것이 앞으로 대세가 되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정 회장은 26세 때부터 운송업, 건축업 등 다양한 사업을 하다 42세에 스테인리스스틸 사업에 뛰어들었다. 결코 빨리 시작했다고 볼 수 없는 나이였지만 여러 사업을 통해 익힌 시장에 대한 장기적 안목은 정확했다. 스테인리스스틸 시장은 예상대로 꾸준히 성장했고, 길산그룹도 창립 이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한 해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이익의 대다수를 생산 설비와 우수 인력 확보에 투자했다. 현재 길산그룹은 길산파이프와 길산스틸 등 8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고, 국내 최고 수준의 파이프 제조 능력을 갖춘 기술자를 다수 확보하고 있다. 또 직경이 작은 세관 파이프부터 대구경 파이프에 이르기까지 수십 종류의 파이프를 고객의 요구에 맞게 제작할 수 있는 능력도 보유했다. 매년 길산그룹이 생산하는 스테인리스스틸 구조용 강관 제품은 건축자재나 선박, 차량에 쓰이고, 판매량은 국내 시장 수요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꾸준히 길산그룹을 성장시킨 정 회장이지만 경기 침체로 인해 내년 실적에 대해서는 걱정이 적지 않다. 그는 “앞으로 2년 동안의 위기는 전례 없이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마음의 각오를 정말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출 1조 원을 달성했지만 다음 목표를 잡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려 한다”고 했다. 길산그룹은 올해 하반기에 재고를 최대한 줄이고 주문생산체제를 도입하며 닥쳐오는 경제 침체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아울러 반도체와 2차전지 산업의 성장에 대비해 관련 파이프 설비의 투자를 늘리고 있다. 정 회장은 우리 사회에 대한 염려도 털어놨다. 그는 “앞으로 금융 비용 부담이 늘게 되면 많은 기업이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실업자도 많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이 위기를 이겨내려면 노사가 힘을 합치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했다.계룡=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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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에 군사정찰위성이 왜 필요한지 모를 일[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김여정이 북한의 첫 군사정찰위성 시험용 사진 공개에 대한 남쪽의 보도에 발끈해 노동당 부부장 명의로 20일 담화를 발표했다. ‘주둥이에서 풍기는 구린내’를 운운한 담화문의 수준이 조악하다. 굳이 구린내가 어디서 나는지를 따지고 들고 싶진 않다. “누가 일회성 시험에 값비싼 고분해능촬영기를 설치하고 시험을 하겠는가”라는 설명도 나름의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년 4월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한다니 그때 가서 선명한 사진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북한은 19일에 서울과 인천을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하루 뒤에 바로 담화가 나온 것을 보니 김여정이 북한의 기술력을 깎아내리는 ‘몹쓸 버릇 남조선괴뢰들(?)’에게 단단히 화가 난 것 같다. 하루 종일 한국 포털을 검색해 ‘동네 전문가’들의 발언까지 다 조사한 뒤 장문의 담화를 준비했으니 말이다. 2014년에 일본제 보급형 DSLR 카메라를 달고 날아왔다가 기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쪽 곳곳에 추락한 북한의 조악한 무인기들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 북한이 8년 뒤 정찰위성까지 쏘겠다는데 별것 아니라고 폄훼하니 김여정이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제재 와중에 각종 첨단 부품을 힘들게 구해 만든 노력은 설명 없이도 눈물겨울 것이다. 김여정은 담화에서 “우리가 하겠다고 한 것을 못한 것이 있었는가를 돌이켜보라”고 큰소리를 쳐댔다. 그런데 이것이 북한의 문제다. 왜 북한이 기어이 지키겠다고 이를 악무는 것이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밖에 없는가. 군사정찰위성을 쏜다는 북한의 곳곳에선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시계 배터리 하나 자체적으로 못 만드는 북한이다. 코로나로 수입까지 중단하니 가정과 손목에서 시계가 멈춰 섰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멈춰 선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성냥공장도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다. 라이터돌을 수입해 오지 못하니 사람들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담배를 피우기도 힘들다. 불이 없고, 해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면 원시시대나 다름없다고 할 것이다. 원시시대는 그나마 산과 들에 먹을 것이라도 풍족했지만, 지금 북한에선 주민들이 굶주림과 싸워야 한다. 농촌진흥청은 기상 악화와 비료 부족 등의 원인으로 올해 북한 식량 수확량이 수요에 비해 100만 t가량 부족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500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이런 열악한 처지에도 아랑곳 않고 군사정찰위성을 쏜다고 자랑하니 이 무슨 기괴한 부조화인지 할 말을 잃게 된다. 솔직히 북한에 왜 군사정찰위성이 필요한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구글어스, 항공뷰, 거리뷰 서비스로 특정 건물 간판까지 다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군부대의 이동을 감시할 목적이라면 이렇게 묻고 싶다. “알면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 북한군은 육해공 모두 반세기 전에 생산된, 뜨고 굴러가는 것조차 신기한 고물 장비로 무장하고 있다. 남북의 군사력 격차는 알고도 막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여기에 미군까지 합세하면 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김여정은 “우리가 하겠다고 한 것을 못한 것이 있었는가를 돌이켜보라”라고 말했다. 굳이 그런 사례들을 일일이 설명해줘야 아는지 궁금하다. 다른 것 다 떠나 김정은이 집권 첫 연설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했던 다짐은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김여정은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인민들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 김정은 빼고 허리띠를 풀고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김여정은 북한에 대한 한국의 여론만 보지 말고 다른 것도 많이 검색해 봤으면 좋겠다. 가령 이달 초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국가주석의 방한도 북한에 주는 시사점이 많다. 어제의 적이었던 한국과 베트남은 지금 상생의 전략적 동반자이다. 지난 10년 동안 베트남 국민총생산액은 3배 이상, 1인당 소득은 2010년 1690달러에서 2021년 3716달러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베트남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다름 아닌 한국이다. 1988년부터 작년 말까지 외국 누적투자액 1위가 한국이다. 삼성이 215억 달러를 투자하는 등 한국 기업의 누적 투자액은 비공식 포함 900억 달러가 넘는다. 한국이 인구 1억 명의 베트남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금하다. 김여정은 악담만 퍼붓지 말고 남쪽을 향해 한번 손 내밀어 보길 바란다. 북핵만 포기한다면, 대한민국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지 않는다면 한국은 북한을 언제든 도와줄 의지와 능력이 있다.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는 첫 약속부터 지켜야 인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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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병원성 AI 급속 확산 비상… 농식품부, 농가 방역 팔걷었다

    최근 세계적으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AI)가 급속히 확산되는 데 대비해 농림축산식품부가 방역 조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은 올해 처음 가금농장에서 AI가 발생해 지금까지 47개 주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5054만 마리의 가금류를 살처분했다. 유럽에서도 올해 37개국 이상에서 2467건의 고병원성 AI가 발생해 약 5000만 마리의 가금이 살처분됐다고 밝혔다. 특히 영국의 경우 지난 1년간 방목 농가의 칠면조 40%가 폐사하는 등 200건 이상의 감염 사례가 보고됐고, 모든 가금류의 방사 사육이 금지됐다. 고병원성 AI는 국내에서도 심상찮게 퍼지고 있다. 10월 17일 경북 예천군 소재 종오리 농장에서 고병원성 AI가 처음 발생한 이후 이달 14일 기준 가금농장에서 총 46건이 발생했다. 올해 12월에 우리나라에서 관측된 철새 수는 지난해와 비슷한 156만 마리였지만 야생조류 고병원성 AI 검출 건수는 83건으로 작년(17건) 대비 항원 검출이 4.9배다. 올해 고병원성 AI 바이러스는 예년에 비해 병원성이 강하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특히 오리 폐사율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농식품부는 과거 사례를 고려할 때 12월은 고병원성 AI 발생 위험도가 높아 지자체와 축산농가에서 소독 조치를 예년의 2배 이상으로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영산강 유역 4개 시군(나주·영암·무안·함평)과 안성 지역에서의 지역적 위험도를 고려해 추가 발생 및 확산 방지를 위해 강화된 방역 조치를 취하고 있다. 농장별 알 반출 동선 등을 파악해 관리하고 가금농장 출입 최소화 조치 및 농장별 내·외부 소독과 점검 등을 통해 산란계 농장의 차단 방역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또 고위험 10개 하천 인근에 소독 자원을 확대 투입하는 한편 소독차량 31대를 동원해 산란계 농장 진입로 등의 소독을 기존보다 2배로 강화했다. 농식품부는 생필품인 계란 가격이 급격히 상승할 경우에 대비해 계란 수급 상황이 악화될 경우 신선란을 직접 수입 공급할 계획이다. 한편 가금류를 대량 살처분하는 상황이 와도 계란 생산 기반이 조기에 회복될 수 있도록 산란용 병아리와 종란을 수입해 살처분 농장에 우선 공급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예방적 살처분 농가에만 지원되던 긴급 경영안정자금에 고병원성 AI 발생 농가도 포함하고, 휴업 등 사유로 현재 비어 있는 산란계 농장에 새로 들어오는 농가도 지원하는 방안 등 가능한 조치를 모두 준비하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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