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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하서(下書)를 봉독하오니 훈계하신 말씀, 전신에 소름이 끼치고 뼈끝까지 아르르해지며 이놈의 눈에도 때 아닌 낙숫물이 뚝뚝 (흐릅니다.) … 저는 우로(雨露)와 강산과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말씀대로 지금 귀성한다면 이 불초 봉길이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1930년 10월 중국 칭다오에서 보낸 편지에서) 아들은 조국산천 어머니의 근심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허나 “장구한 시일을 두고 과거사도 묵상했고 미래사도 암료(暗料·깊이 헤아리다)한” 결심을 어찌 바꾸겠는가. 이역만리 객지에서 피눈물을 쏟으면서도 스스로 택한 애국의 길을 의연히 걸어갔다. 1932년 4월 29일 일제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져 한민족 기개를 만방에 떨친 의사 매헌 윤봉길. 그에게 1931년 상하이로 가기 전 칭다오에서 1년은 그냥 흘려보낸 세월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를 다시금 다지고, 거리낌 없이 독립운동에 나서려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이번에 처음 정확한 이름이 밝혀진 일본인 나카하라 겐지로(中原兼次郞)가 운영하는 세탁소에 매헌이 취직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녔다. 1930년 3월 처음 집을 나섰을 땐 곧장 만주로 가 독립단에 뛰어들려 했으나, 망명길에 만난 김태식(金泰植)의 설득으로 이곳에서 일단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한시준 교수는 “일단 중국은 물론이고 국외 체류 자체가 생경한 윤 의사가 생전 처음 직장에 취직해 현지 분위기를 익히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설명했다. 돈을 모아야 할 이유도 있었다. 마음을 무겁게 했던 빚을 탕감해야 했다. 훗날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에게 전한 자필 이력서를 보면, 세탁소 월급을 모아 ‘월진회(月進會)’ 자금 50원을 갚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윤 의사는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농촌 계몽 운동 조직인 월진회 활동을 벌였는데, 망명 당시 이 회비를 무단으로 가져왔던 것. 독립운동이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음에도 어떻게든 매조지 하는 의사의 맑은 성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칭다오에서 윤 의사는 가족에게 편지 2통을 보냈다. 1930년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 뒤 이듬해 상하이로 떠나기 직전 맏아들 종(淙)에게 서신을 부쳤다. 의사는 “종아! 너는 아비가 없음이 아니다. 너의 아비가 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해 잠시적 역행이지 하년(何年) 세월로 영구적 전전이 아니다”며 “후일에 따뜻한 악수와 따뜻한 키스로 만나자”고 다독였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가 쓴 ‘자유의 불꽃을 목숨으로 피운 윤봉길’(역사공간)엔 의사의 인정어린 면모도 드러난다. 칭다오에서 알고 지낸 한일진(韓一眞)이란 친구가 미국행을 결심하자 수중에 있던 돈을 털어 여비로 건넸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으나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뒷날 한일진은 미국에서 의거 소식을 듣고 “평생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다”며 의사의 고향집에 돈을 보냈다고 한다. 뭣보다 나카하라 세탁소의 실존이 확인되며 그간 미스터리였던 ‘어떻게 일제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훙커우 공원에 들어갔는가’의 해답을 찾는 일도 큰 진전을 이뤘다. 그간 윤 의사의 행사장 입장을 놓고 △중국 경비 회유 △비밀출구 잠입 △일본인 위장 △강행 돌파 등 여러 설이 분분했다. 하지만 이규창 선생은 회고록 ‘운명의 여진’에서 “(의사는) 세탁소 노부부를 부축하고 일본 국기를 들고 입장해 축하대 앞자리에 앉았다”며 “일본인 세탁소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거사하기가 쉬웠던 것”이라고 전했다. 김광만 PD는 그간 연구가 미진했던 윤 의사의 칭다오 흔적을 찾으려 중국과 일본을 수차례 오갔다. 오랜 추적 끝에 지난해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윤 의사가 이력서에서 언급한 나카하라 세탁소를 칭다오 업체명이 실린 1931년 ‘중국상공지도집성’에서 마침내 찾았다. 이를 기반으로 역시 처음 발굴한, 같은 해 찍은 일본 지도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서 위치를 확인했다. 김 PD는 “칭다오 현지에 갔더니 이미 다른 건축물이 들어섰지만 당시 도로가 그대로 남아 정확한 지점 확인이 가능했다”며 “우리 역사의 잔향이 밴 장소인 만큼 중국 정부와 협의해 표지석을 세우는 사업을 추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먼 옛날도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별자리를 보고 길흉화복을 점쳤다. 그저 민간에서 유행하는 풍습도 아니었다. 조선 말기까지도 버젓이 관상감(觀象監)이란 관청이 존속했다. 주 업무야 천문 관측과 책력 작성 같은 과학적 분야였으나, 이를 바탕으로 풍수를 살피고 점괘를 내놓는 일도 맡았다. 그런 선인들에게 이따금 나타나는 혜성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인 저자는 이공계 과학자면서도 역사와 한문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사료를 활용해 당대의 우주 현상을 과학적으로 풀이하는 ‘역사 천문학’에 오랫동안 매료됐다. 2005년 전작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별자리’를 통해 개밥바라기나 좀생이별을 비롯한 우리 별 이야기를 풀어내더니, 이번엔 혜성에 초점을 맞췄다. 한국사에서 혜성과 관련된 첫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한나라가 옛 조선을 침범했을 때였다. “조선을 공격할 때 혜성이 나타났다. … 점괘가 ‘남수(南戍·남쪽을 지키는 별자리)는 월문(越門)이고, 북수(北戍)는 호문(胡門)이다’라고 했다. 조선은 바다 건너 있으니 넘는(越) 형세이고, 북방에 있으니 호(胡·오랑캐)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혜성은 워낙 이질적인지라 불길하게 읽히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 진평왕 때 나타난 혜성은 왜구 침략을 알리는 전조라 했고, 조선 순조 11년(1811년) 홍경래가 이끈 반란군은 혜성 출현에 반역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남이 장군(1441∼1468)도 혜성을 언급했다가 역모 혐의를 뒤집어썼다. 저자는 이 같은 한국사와 함께 당시 서양 과학사도 솜씨 좋게 버무려 역사와 과학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풀어낸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도가 ‘욕망한다’라…. 개인적으로 어떤 책이건 국내에 번역되며 제목이 바뀌는 게 싫다. 작가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진의 파악이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도 원제는 ‘12개 지도의 세계사’다. 하지만 이 책만큼은 지도에 인간의 욕망이 투영됐다는 논지를 부각시켰다는 면에서 가점을 주련다. 여전히 ‘제목 바꿔달기’엔 동의 못 하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영국 퀸메리대 교수인 저자가 역사적인 세계지도 12개를 콕 집어 분석했다. 이를 통해 당대의 세계관(혹은 우주관)과 시대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간 지도를 다룬 책이 꽤 나왔던지라, 솔직히 이 책도 처음엔 시큰둥했다. 하지만 고리타분한 표현이긴 하지만 “읽다 보면 끝없이 빠져들게 된다”(파이낸셜타임스)는 평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뭣보다 지도마다 맞춤하게 부여한 주제의식이 꽤나 맛깔스럽다. 12세기 시칠리아의 지도가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를 아우른 문명적 융합 아래 태어났다는 2장 ‘교류’. 1662년 네덜란드 지도 ‘대 아틀라스’를 통해 부의 축적에 끝없이 목말라했던 시기를 반영한 8장 ‘돈’. 어느 챕터 하나 처지지 않고 재밌다. 아, 21세기 최신 지도 구글 어스를 다룬 마지막 장 ‘정보’도 빼놓으면 아쉽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역시 1402년에 제작됐다는 조선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혼일강리도)’를 다룬 4장 ‘제국’이 가장 흥미로웠다. 해외학자가 이만큼이나 한국사에 해박한 것에 일단 놀랐다. 또한 그 지도에 당시 중국이란 강국과 상대하며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려가며 독자적 노선을 걸은 조선의 웅지가 배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참고로 혼일강리도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럽이 등장하는 현존 최고의 지도이기도 하단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런던 패딩턴 역에서 발견한 한 낙서를 소개한다. “멀리 떨어진 곳도 다른 곳에서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세상에 완벽한 지도란 없다. 그만큼 상대적이고 다양한 가치관이 지도에 담겨 있다. 지도는 단지 길을 찾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열쇠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추정되는 청동상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토됐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배병선)는 20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충남 부여군에 있는 왕흥사(王興寺) 터에서 지난해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소형 청동 인물상을 찾았다”고 밝혔다. 6세기 백제시대 사찰인 왕흥사 터는 2007년에 위덕왕(威德王·554∼598)이 577년 죽은 왕자를 위해 봉안했다는 명문이 있는 사리기(舍利器)가 나와 큰 화제를 모았다. 출토된 인물상은 높이 6cm의 소형 유물이나, 지금까지 국내에선 발견된 적이 없는 자세와 복식이 눈길을 끈다.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발밑까지 내려오는 주름치마를 입었는데, 마야부인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배 소장은 “마야부인 상이 맞을 경우 네팔과 파키스탄, 일본엔 부조상이나 불상이 여럿 전해지나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문화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청동상을 마야부인으로 보기는 다소 무리라는 견해도 있다. 마야부인은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無憂樹) 가지를 붙잡고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석가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해외 마야부인 상은 나뭇가지를 붙잡았거나 애기(부처)가 함께 등장한다. 이번에 나온 청동상은 자세는 엇비슷하지만 나무와 부처는 찾지 못했다. 다만 이 청동상은 두상이 몸체에 비해 큰 데다 옷차림을 표현한 기법으로 미뤄볼 때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강순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출토된 지층의 깊이를 감안하면 왕흥사 창건 시절 제작된 인물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그 착취와 압정에 가담한 측의 인간이 과연 그리워하거나, 옛날 그대로 기뻐하거나… (해도 용인되는 것인가).”(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의 소설 ‘잘 있거라, 경성’ 중에서) 그들에게 이 산천은 고향이었다. 나고 자랐고 뛰어놀았던 땅. 하지만 한순간 영문도 모른 채 쫓기듯 떠나야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깨달았다. 우리는 한국인에게 몹쓸 존재였구나. 어린애였노라 변명한들 그 죄의식은 씻기질 않았다. 일본 문단에는 ‘식민자(植民者) 2세’라 불리는 작가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태어나 주로 10대에 패망을 맞고 귀환해, 1950년대 이후 등단한 이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어린 시절 추억과 이후 알게 된 실상 속에서 겪은 모순과 갈등을 작품에 녹여냈다. 신승모 동국대 교수는 최근 학술지 ‘일본학’에 게재한 논문 ‘식민자 2세의 문학과 조선’에서 이들의 작품을 조명했다. 경남 진주 태생의 소설가 고바야시 마사루(小林勝·1927∼1971)의 ‘눈 없는 머리’(1967년)는 식민자 2세의 어린 시절이 투영된 작품이다. 주인공 소년 사와키는 ‘언제나 상냥한’ 조선인 이경인을 따랐다. 하지만 이경인은 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를 걱정해 면회를 간 사와키는 이전 모습은 사라지고 ‘괴물’처럼 변한 이경인을 발견한다. 사와키는 “아이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것에 부닥친” 느낌을 토로한다. 함경남도 출생인 고토 메이세이(後藤明生·1932∼1999)의 소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1972년)’는 좀더 직접적이다. 주인공은 독백처럼 “전쟁이 끝났을 때 소년시절은 끝났다”고 되뇐다. 철없던 유년의 추억조차 원죄로 떠올려야 하는 운명을 되새김질한다. “저는 ‘태어난 고향’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요컨대 저희들은 고향에서 추방돼서, ‘조국 일본’으로 귀환해온 셈입니다. … 식민지로서 그곳을 지배하던 일본인 자손의 한 사람인 제가 그곳에서 추방된 것에 이의는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추방됐다고는 생각해도 결코 그곳을 빼앗겼다, 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1967년 신상옥 감독이 영화화한 소설 ‘이조잔영’의 원작자 가지야마 도시유키(1930∼1975)도 빼놓을 수 없다. 이조잔영은 1919년 3·1운동 때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가지야마는 1961년 ‘사상계’를 이끌던 장준하 선생(1918∼1975)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귀국을 식민지로 삼던 시대의 죄를 도려내서 일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신 교수는 식민자 2세 작가들의 공통점으로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꼽았다. 이미 성인으로 한반도에 살았던 기성 작가들은 거리낌 없이 그 시절을 그립다 말하는데, 이들은 그마저도 조심스러워했다. 고바야시는 생전 마지막 에세이 ‘그립다고 해서는 안 된다’에서 안일하게 고향을 추억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신 교수는 “그들이 식민지 체험을 소재 삼아 작가적 입지 확립에 ‘이용’한 사실은 비판할 대목이나 작품에서 드러나는 진정성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1950년대부터 한국 문화재에 빠져 평생 세계를 돌며 고미술품을 모아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에서 불법 반출된 작품이 있다면 언제든 돌려줄 용의가 있습니다.” 18일 오전 서울 중구 신세계갤러리에서 만난 로버트 무어 씨(84)는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다. 다음 달 19일 크리스티 뉴욕에서 개최하는 ‘십장생-로버트 무어 컬렉션’ 경매를 앞두고 작품 소개차 방한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고미술 수집가이자 거래상. 하지만 지난해 소장하던 현종 어보와 그가 로스앤젤레스카운티박물관(LACMA)에 넘긴 문정왕후 어보를 미 국토안보부 수사국(HSI)이 밀반출품으로 압수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정식 거래 절차를 밟아 구입했을 뿐 이전 해외 반출 과정은 몰랐다”며 “현종 어보도 (압수가 아니라) 자의로 협조해 내놓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전쟁을 겪으며 문화재가 밀반출되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한국도 그런 아픔을 겪으며 해외에 수많은 고미술품이 산재해 있어요. 이를 돌려받으려면 명백하게 불법 유출을 증명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국인들이 국외 소재 문화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어 씨는 1955년 주한미군으로 1년간 머물며 한국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귀국 후 1957년 고려시대 청동 수저를 15달러에 구입하며 본격적으로 수집에 나섰다. 한때 1000점이 넘는 한국 고미술품을 모았다. 이미 1986년과 2006년 두 차례 경매에 도합 350여 점을 출품했고, 이번에 19세기 민속품 위주로 135점을 내놓았다. 무어 씨는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 문화재는 자연스럽고 인간미가 넘쳐 정이 간다”고 말했다. “2000년 LACMA와 한국 문화재 200여 점을 거래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명감을 갖고 세상 곳곳에 흩어졌던 작품들을 찾아내 박물관이나 전문가들이 제대로 보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한국 고미술품을 모을 당시엔 주목도가 떨어졌는데, 요즘은 세계적 관심을 모으고 있어 무척 기쁩니다.” 신세계갤러리의 크리스티 경매 출품작 전시는 19일까지 이틀만 열릴 예정. 일정이 빠듯했으나 “꼭 한국에 먼저 소개하고 싶다”는 그의 소망이 강해 성사됐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어보와 관련한 HSI의 조사가 아직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팝아트 계열 작품을 보다 보면 애매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창의적 발상에 놀라다가도, 어디까지가 예술의 범주인지 궁금해진다. 영국 작가 줄리언 오피(56) 역시 그런 의미에서 여러 문제의식을 던지지만, 일단 ‘산뜻해서’ 보기 좋다는 점만은 부정하기 힘들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2009년 이후 두 번째로 국내에서 열리는 오피의 개인전은 작품 수는 21점뿐이지만 상당히 매력적이다. 발광다이오드(LED) 패널에 애니메이션으로 움직임을 구현하거나 비닐 소재를 이용해 만화 같은 이미지를 표출한 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모두 사람을 주제로 삼았다. 마치 대도시를 배경으로 찍은 흑백 혹은 컬러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든다. 역시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작품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사당동에서 빗속을 걷는 사람들’과 ‘신사동에서 걷는 사람들’ 1∼3. 지한파로 통하는 오피가 한국 사진가가 찍은 사진 3000여 점을 선별해 작품화했는데, 도시의 화려함과 익명성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오피는 “서울 사람들은 옷을 너무 잘 입고 분위기도 밝아 놀라움을 준다”고 말했다. 무료. 3월 23일까지. 02-735-8449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일제강점기 공장에는) 경비가 많았어요. 서너 군데 초소를 만들어놓고 수용소 철망까지 해놓고. … 고되게 일시키고. 잘 먹지도 못해 고단하니깐. 밤중에 담 넘어서 도망가고 그랬어. 여공들은 감옥소야. 외출 안 해줘요. 아예 안 해줘요.”(90세 민석기 씨의 구술 중에서) 서울 영등포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유명한 공장지대였다. 전쟁 물자를 만드는 군수공장부터 면방직 철강 고무신 맥주 공장까지 다양한 산업 현장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많은 조선 노동자들이 자신의 청춘과 눈물을 쏟아부었으나 이제는 이름도 기억되지 않는 잊혀진 역사로 남았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는 이러한 당대의 생활사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이 지역에서 일했던 이들의 구술을 모은 ‘영등포 공장지대의 25시’를 최근 펴냈다. 김현숙 전임연구원은 “공장에서 불철주야 고된 노동을 묵묵히 담당했던 노동자와 기술자의 피와 땀으로 오늘의 서울을 일궈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배경을 밝혔다. 당시 이 일대 공장의 조선인 수는 명확하진 않다. 시기별로 차이는 있으나 평균 1만 명 넘게 공장에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남 홍성 출신인 김영환 씨(88)는 1941년 대일본방적회사에 취직했다. 말이 입사였지 마을 이장을 동원한 반강제적 모집이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부모 허락도 필요 없었다. 덜컥 따라갔더니 15, 16명이 한방을 쓰는 기숙사에서 지내며 하루 12∼15시간을 일했다. 생활 여건은 상상을 초월했다. 배고파 서울에 왔는데 “애들 주먹만 한 보리빵”으로 저녁을 때울 때도 잦았다. 감자가루로 만든 풀을 얻어다 보일러실 수증기에 데워 먹기도 했다. 하루 종일 햇빛을 못 볼 때가 흔했고, 말썽이 없어야 한 달에 4시간 외출이 허락됐다. 김 씨는 “(1945년 8월 15일에) 경비가 없어 다들 그냥 밖으로 나와 흩어졌다. 영등포역에서 누군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기에 그제야 해방된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앞서 민석기 씨는 1938년 당시 명문이던 경성공업학교에 입학했는데 학생 때부터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방학이면 애국봉사란 미명 아래 조선 학생을 노동현장에 내몰았다. 당연히 일본 학생은 제외됐다. 그는 “김포비행장 닦을 땐 아예 인근 집에서 재우며 한 달씩 일을 시켰다”며 “일본 감독한테 삽으로 맞아 가며 소금만 찍은 주먹밥을 먹고 버텼다”고 말했다. 그에게 가장 안타까웠던 기억으로 남은 이들은 여공들이었다. 겨우 열일곱 안팎의 꽃다운 나이였지만 감옥 같은 기숙사 수용소에서 지냈다. 3년 넘게 바깥에 나가보질 못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여공들이 식당 바깥에 내버린 쓰레기통 잔반을 주워 먹던 광경은 잊혀지질 않는다. 당시 열악한 여건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냈던 이들을 빗대어 ‘방직공장 사람이면(사람이 다가서면), 전봇대에 꽃이 핀다(피게 한다)’는 말도 유행했다. 영등포 공장에서 일하다 징용됐던 전을원 씨(90)는 당시 군수공장 용접기술공이던 친형의 고초를 잊지 못한다. 남들은 벌이가 낫다며 부러워했지만 일본 헌병대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전 씨는 “뭔 의심만 생기면 한국 기술자를 끌고 가 사나흘씩 취조하는 일이 일상처럼 벌어졌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쩌면 다른 뭔가를 볼 틈이 없는지도 모른다. 1820년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윗대쯤 되는 선조는 영국인이었으나 남아프리카에 정착했다. 이후 케냐를 지배하고픈 영국 정부 시책에 혹해 중앙 동부아프리카로 떠난 그들은, 갖은 고생 끝에 농장을 운영하는 ‘하얀 부족’(흑인 원주민은 백인 이주민들을 이렇게 불렀다)으로 자리 잡았다.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 자식과 손자를 키운 여인. 대자연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었다. 대프니 셸드릭, 그는 아프리카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1934년생으로 올해 팔순인 저자에게 어린 시절 케냐는 신나는 모험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급자족에 가까운 노동에 벌이가 시원찮아 시름이 깊었다. 허나 물정 모르는 아이가 가족 생계를 고민했겠나. 농작물을 초토화시키는 메뚜기 떼가 휩쓸고 지나가면 그 뒤에 남은 메뚜기볶음 먹을 일에 신이 났다. 행여 짐승이 맞으면 생명까지 앗아가는 우박이 내려도 얼른 모아다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그에겐 가축도 초식동물도 심지어 맹수도 함께 뛰노는 친구였다. 그리도 애정이 넘쳤던 탓일까. 열다섯 살에 20대 빌 우들리란 나이로비국립공원 관리원과 첫사랑에 빠져 곧장 결혼을 선언했다. 물론 부모들이야 반길 리가 없었다.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자 약혼부터 시켰으나, 19세가 되자마자 홀랑 식을 올려 버렸다. 그러고 이듬해 큰딸을 출산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동화라면 그랬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2, 3년도 안돼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성급했는지 깨달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대프니의 심장이 딴 데서 콩닥대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스무 살 가까이 위인 이혼남 데이비드 셸드릭. 게다가 남편의 직장상사였다. 그런데도 빌이 출장 중일 때 그의 품에 안겨 춤이라도 추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이거 뭐, 자유부인이야 뭐야. 운(?)이 좋았던 걸까. 마음이 떠난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합의이혼을 거쳐 잘 헤어졌다. 그리고 서양인답게 평생 좋은 친구로 지냈다. 대프니의 성이 셸드릭인 것에서 짐작했겠지만, 데이비드와 재혼했다. 이후 차보국립공원의 초대소장이 된 남편과 함께 그는 아프리카 동물보호에 온몸을 투신하기 시작한다. 솔직히 이 책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표지 소개 글을 봤을 땐 ‘침팬지의 어머니’ 동물학자 제인 구달의 또 다른 버전을 상상했는데, 정말 제목 그대로 사랑 이야기였다. 나이팅게일 위인전인 줄 알고 펼쳤는데 스칼릿 오하라(‘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를 맞닥뜨린 기분이랄까. 그런데 어어 하다가 뒷장이 궁금해 손에서 책을 놓질 못한다. 신상에 초점을 맞춰 소개했으나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또 다른 사랑, 자연과 동물이 가벼운 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야생동물과 친숙했던 그는 밀렵으로 고아가 된 동물(주로 코끼리)을 양육해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주력했다. 특히 남편이 50대에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이름을 딴 ‘데이비드 셸드릭 야생동물 트러스트’를 세워 평생 헌신한 공로는 엄청나다. 이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남성의 기사(knight)에 해당하는 데임(dame) 작위를 받았다. 광활한 아프리카에서 워낙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일까. 책은 뻔한 회고록을 뛰어넘어 웬만한 문학작품보다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저자의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케냐 독립운동 같은 시대적 회오리도 상당해 대하역사소설을 읽은 감흥이 밀려든다. 케냐판 ‘토지’라 하면 너무 극찬이긴 한데…. 어쨌든 동물이나 아프리카, 역사 어느 방면에 관심 있는 독자라도 만족할 만하다. 역시 사랑 얘기는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오늘은 정월대보름. 지금이야 설날 한가위나 휴일이지만, 예전엔 어느 때 못지않은 큰 명절이었다. 달집태우기와 쥐불놀이, 부럼 깨물기나 더위팔기는 요즘도 익숙하다. 국립민속박물관에 따르면 조상들은 대보름엔 숫자 9와 연관돼야 길하다고 여겼다. 아홉 가지 나물을 먹고 마당도 아홉 번 쓸고, 심지어 밥도 아홉 차례 먹어야 건강하고 부지런히 산다고 믿었다. 선조들은 부럼 말고도 이날 꼭 챙겨먹는 음식이 있었다. 올해 밸런타인데이와 겹쳤다고 초콜릿은 아니다. 오곡밥에 원소병(圓小餠)과 진채식(陳菜食), 복쌈이 대표적이다.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의 전순주 호텔조리과 교수는 “이런 전통음식에는 오랜 세월 경험으로 축적된 조상들의 혜안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도움을 얻어 그 뜻을 되새겨봤다. 먼저 복쌈은 배춧잎이나 아주까리 잎, 김으로 밥을 싸 먹는 음식. 말 그대로 복을 싸서 먹는다는 의미다. 조선 순조 때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열량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복쌈을 ‘박점(縛占)’이라 부르며 김에 싸먹되 많이 먹어야 좋다고 소개했다. 경기 일부 지역은 김으로 싼 복쌈을 볏섬이라 부르기도 했다. 충남에서도 복쌈을 먹을 때마다 볏섬도 함께 쌓인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생김새도 닮았거니와 풍년을 바라는 농경사회의 소망이 담긴 것이다. 원소병은 소를 넣은 찹쌀반죽 떡을 꿀물이나 오미자 물에 띄워 먹는 일종의 디저트. 이름의 유래는 여럿인데, 한자 그대로 둥글고 작은 떡(圓小餠)이란 설과 중국에서 대보름을 지칭하는 원소(元宵)에서 비롯됐다는 얘기가 있다. 위관 이용기(1870∼1933)가 1924년 펴낸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삼국지연의에도 나오는 중국 원소(袁紹)가 좋아한 음식이라고 나온다. 이 요리를 대보름에 즐기게 된 배경에는 생김새가 닮은 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음력에 바탕을 둔 세시풍속에서 보름달은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소에는 견과류와 대추 유자청 계핏가루를 넣어 맛과 영양을 함께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진채식은 일종의 나물무침인데 조선 학자 홍석모(1781∼1850)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등장한다. “박나물 버섯 따위를 말린 것과 콩나물순 순무 무를 묵혀 먹는 것을 이른다. 먹으면 그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대체로 지난해 가을 손질해 말려뒀던 나물을 재료로 쓰는데, 겨울철 채소 섭취가 쉽지 않던 시절을 견디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전 교수는 “겨울철엔 생체의 활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진채식은 비타민이나 무기질을 공급하는 생활의 지혜였다”고 평가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공청회(公聽會). 사전적으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기관이 공개적으로 국민 의견을 듣는 자리다. 주로 민감한 정부 정책을 결정하고자 할 때 여론을 반영하려는 좋은 취지가 담겼다. 그런 뜻에서 12일 오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화재 수리체계 제도개선을 위한 공청회’는 시의적절했다. 최근 숭례문과 문화재 수리자격증 대여 논란 등 문화재 분야에서 관련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때 문화재청이 학계와 업계를 아우른 외부 의견에 귀를 기울이려는 자세는 반가운 일이다. 실제로 공청회장에는 200여 명이 몰려 열기가 뜨거웠다. 앉을 자리도 없어 상당수가 몇 시간을 선 채로 지켜봤다. 하지만 세 시간 넘게 이어진 이 자리를 공청회라 불러야 할지는 머뭇거려진다. 교수들의 주제 발표에 패널들이 마이크를 ‘한 번씩만’ 잡았더니 예정시간을 넘겨버렸다. 사안이 엄중하니 성심성의껏 논의하려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온갖 장황한 부연 설명이 이어지는 건 자제했어야 옳다. 참다못한 한 참석자는 갑자기 “여기가 무슨 수업 받는 교실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발언 방식엔 동의할 수 없지만 분통 터진 속내는 짐작할 만했다. 겨우 발언권이 넘어간 방청석도 어수선했다. 목소리만 높인 채 상대를 비난하며 자기 입장 전달에 급급했다. 이마저 서로 고성과 험한 말이 오고 가며 부산스러웠다. 결국 토론 좌장을 맡은 김동욱 문화재위원회 건축분과위원장은 “여건상 한계가 있으니 나머지 하고픈 말은 서면으로 직원들에게 제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웃지 못할 분위기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공청회 주제는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제도 △보수·정비사업 입찰제도 △수리품셈제도 세 가지였다. 김 위원장이 말했듯 ‘한 가지만으로도 며칠씩 밤을 새워 토론해도 모자랄’ 사안들이었다. 그걸 겨우 반나절 만에, 그것도 방청객 질의응답은 40분만 잡아놓고 ‘민의를 듣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발표자와 패널 구성도 아쉬웠다. 발표진과 패널은 모두 건축학과 교수 아니면 문화재수리 관련 협회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 분야 전문가들인 건 틀림없다. 하지만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게 목적인 자리가 한쪽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양새가 역력했다. 게다가 몇몇은 “평생 고생했는데 비난만 받는다”며 신세 한탄에 가까운 얘기를 늘어놓았다. 서로 다른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발언자들은 하나같이 ‘문화재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강조했다. 당연한 말이다. 문화재는 매우 특수한 분야이고, 어느 영역보다 전문성이 중요시돼야 한다. 그런데 이날 공청회가 과연 전문적이고 특수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망설여진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중국엔 시험 합격을 관장하는 별자리 신이 있다? ‘공부의 신’이라 하면 드라마나 만화를 떠올릴 사람이 많겠다. 하지만 중국이나 대만은 다르다. 요즘도 수험생 책상 앞에 얼핏 요괴처럼 보이는 그림을 붙여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신(神)이 바로 도교에서 유래한 ‘수험의 신’ 괴성(魁星)이다. 배원정 월전미술문화재단 초빙연구원(33)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학술지 ‘미술자료’ 제84호에 게재한 논문 ‘괴성 도상의 기원과 전개’를 통해 중국 문화에서 혁혁한 위상을 차지하는 괴성을 분석했다. 현재 국내에선 괴성이 다소 생소하지만, 조선회화에 그림 소재로 등장하곤 해 한국과도 인연이 얕지 않다. 으뜸 혹은 우두머리 별로 해석되는 괴성은 본래 북두칠성의 첫째 별로 딱히 학문과 관련이 없었다. 그러다 네 번째 별인 규성(奎星)과 혼동을 일으키게 됐다. 奎도 한나라 땐 으뜸이란 의미로 통용된 데다, 魁와 奎 두 글자의 중국어 발음이 ‘쿠이’로 같다. 도교에서 규성은 ‘문창제군(文昌帝君)’으로 신격화됐다. 이 신은 본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나, 이름에 글월 문(文)이 들어 있다 보니 학업 운도 다스린다는 믿음이 더해졌다. 흐르는 세월 속에 혼용되다 괴성이 문창제군, 즉 학문의 신이자 수험의 신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면서 괴성이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부터 네 번째 별을 아우른다는 풀이도 생겼다. 괴성이 ‘전국구 스타’가 된 건 명나라 때였다. 명태조 주원장(1328∼1398)이 “과거(科擧)를 거치지 않으면 관리가 될 수 없다”며 6세기 수나라 때 생긴 과거를 전면 확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시험만 잘 보면 벼슬에 중용했다. 괴성의 인기도 함께 치솟았다. 명대의 문집 ‘엄산외집(儼山外集)’에는 “시험장 앞에서 점토로 만든 괴성 인형을 팔았다”고 나온다. 감독관이 미신에 기대지 말라고 타박해도 소용이 없었단다. 지방 고을마다 문창각(文昌閣)이나 괴성루(魁星樓)가 들어서 제사 지내는 이들로 성황을 이뤘다. 배 연구원은 “괴성신앙은 청대로 이어져 문창제군 탄생일(음력 2월 3일) 제사엔 황제가 보낸 대신이 참석했다”고 설명했다. 괴성의 도상(圖像)도 흥미롭다. 한 손에 붓을 든 이유는 짐작되나, 꼭 한 발을 꺾어 들었고 ‘됫박’이 등장한다. 이는 한자 괴(魁)를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괴 자에서 왼쪽 변인 ‘귀신 귀(鬼)’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모양새처럼 보인다. 됫박은 오른쪽의 ‘말 두(斗)’를 형상화한 것으로 됫박 모양의 북두칠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괴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화가 조석진(1853∼1920)과 안중식(1861∼1919)이 함께 그린 ‘해상군선도’(한양대 박물관 소장)에서 왼편에 입맞춤하는 여인네처럼 한 다리를 구부린 괴성을 만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김덕성(1729∼1797)의 ‘뇌공도(雷公圖·천둥의 신)’도 도상을 따져 보면 괴성도로 봐야 옳다. 배 연구원은 “중국처럼 폭발력은 없었으나 한반도에도 괴성신앙이 전파됐음을 증명하는 사료가 많다”고 말했다. 조선도 과거를 치렀는데 왜 확산되진 않았을까. 괴성이 유행한 명엔 ‘삼교합일(三敎合一)’ 풍조가 만연했다. 유교와 불교, 도교를 아우르며 서로 배척하지 않았다. 반면 조선은 유교이상사회 건설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국가다. 도교나 불교가 자연스레 공존했지만, 엄격한 유학자가 대놓고 도교 신을 모시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했을 가능성이 높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에 국립자연사박물관을 만드는 데 필요한 조언요? 호호, 20년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는데…. 일단 ‘저질러라(Do it)’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만난 미국 뉴욕자연사박물관의 로럴 켄들 박사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한국통’ 인류학자다. 1960년대 말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파견됐던 인연으로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한국 무속신앙을 다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한국말로 대화하는 데 거의 불편이 없다. 켄들 박사는 7일 국립생태원과 민속박물관이 공동 주최한 국제융합학술대회 ‘인간 동물 관계의 이미지와 재현’에 참석차, 같은 박물관 동료인 동물학자 로스 맥피 박사와 함께 방한했다. 세계적 자연사박물관 학자들로서 이 학술대회에서 논의하는 자연과 문화의 융합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나누기 위해서다. 특히 국내에서 20년간 지지부진했던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 재추진 목소리가 최근 다시 나오고 있어 이들의 발언에 상당한 관심이 쏠렸다. “전 세계 자연사박물관이 요즘 추구하는 지향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생태학이나 동물사(史)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거죠. 인류학자인 제가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에요. 자연사박물관은 자연과 인간, 예술이 총체적으로 녹아들어야 합니다.” 두 박사는 뭣보다 ‘흥미로운 전시(exciting exhibition)의 지속적인 개최’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힘을 합쳐 자연사 전시의 가치를 국민에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 켄들 박사는 “작아도 내실 있는 전시를 열면 관객들이 스스로 ‘이래서 자연사박물관이 필요하구나’ 하고 깨닫는다”며 “정부의 정책추진보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뉴욕자연사박물관에서 기획한 특별전 ‘말(The Horse)’은 상당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 전시는 6000년 전부터 말이란 동물을 가축화한 과정과 함께 인류 문화 형성에 말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되짚은 전시였다. 맥피 박사는 “몽골의 경마대회나 서양의 승마치료처럼 자연과 인류의 역사가 현대에 어떤 자산을 남기고 있는지 주목했다”고 말했다. “뉴욕자연사박물관은 요즘 자연사에서 학문 영역 파괴는 물론이고 지정학적 구분도 지워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과 중국, 일본으로 갈라졌던 상설전시관을 아시아관으로 통합하는 거죠. 크게 보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잖아요. 국경도, 학문 경계도 인간이 만든 잣대죠. 그 틀을 깨는 게 자연사박물관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김시영 작가(56)와 제자인 두 딸이 선보이는 흑자(黑磁) 도예전 ‘흑유명가 가평요-검은 달 항아리와 그 이후’가 17일까지 서울 중구 롯데갤러리에서 열린다. 흑자란 검은빛을 머금은 도자기로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때까지 성행했으나 조선 시대부터 차츰 사라졌다. 김 작가는 1980년대 초반부터 흑자 되살리기에 투신해 “검은 대지에 잔잔히 피어나는 꽃”(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란 극찬을 받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이화여대 조소과를 졸업한 큰딸 자인 씨(28)와 서울대 조소과 학생인 경인 씨(24)도 참여해 총 7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김 작가가 달 항아리나 다완(茶碗·찻그릇)처럼 전통적 분위기가 짙은 작품에 초점을 맞췄다면, 두 딸은 사과 모양 자기나 흑자 하이힐 등 신세대다운 창의적인 시도가 눈길을 끈다. 무료. 02-726-443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시복시성(諡福諡聖)은 가톨릭에 익숙지 않은 이에겐 낯선 용어다. 한자 그대로 풀자면 ‘복자(福者·Blessed)와 성인(聖人·Saint) 칭호를 올린다(諡)’라고 직역할 수 있다. 시복시성은 가톨릭에서 순교했거나 덕행이 뛰어났던 인물을 사후에 신앙의 모범으로 삼아 공경하도록 특별 지위에 추대하는 것을 일컫는다. 먼저 복자에 올라야 다음에 성인(혹은 성녀)으로 추대할 수 있다. 복자로 추대하려면 엄정한 조사를 거친 신청서류를 로마 교황청의 시성성(省)에 제출해야 한다. 여기서 기적심사가 이뤄지는데 일반적으로 두 가지 기적이 입증돼야 하나 순교자는 순교 사실만으로 심사가 면제된다. 단, 사망 5년 이내에는 요청할 수 없다. 후보자는 복자나 성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따지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한다. 성자는 복자 가운데 성성의 장관이 교황에게 윤허를 요청하는데, 최종심사위원회에 자문을 한 뒤 추대한다. 한국 가톨릭은 현재까지 성인 103위를 배출했다. 1925년 기해박해(1839년)부터 병오박해(1846년) 사이에 희생된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이 열렸고, 1968년에는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 24위의 시복식이 거행됐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에서 시성식을 갖고 103위를 모두 성인으로 추대했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와 다산 정약용의 조카였던 정하상 바오로(1795∼1839)가 대표적이다. 가톨릭에서 시복시성은 1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졌는데, 성인으로 대접하는 성서 속 인물이나 기록이 사라진 초기 교회 성인까지 포함하면 성인은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51번과 시복식 147번을 거쳐 성인 482명과 복자 1342명을 배출했다. 자신도 선종 6년 만인 2011년 복자로 추대됐다. 가톨릭 역사상 가장 빨리 시복된 경우다. 당시 가톨릭계의 염원에 따라 5년의 유예 기간 없이 선종 후 바로 시복 절차에 들어갔고 한 프랑스 수녀의 기적 증언이 이어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변호사가 욕(辱)을 미화한다? 좀 헷갈린다. ‘변호사가 욕먹는다’는 얘긴 들어 봤다. 그런데 욕을 종합 연구했단다. 그 결과 우리 모두 ‘욕해야 사는 인간’, 호모욕쿠스라 결론 내린다. 다섯 문장 쓰는 데 거의 욕이 들어가니 덜컥 욕지기가 치민다. 에라이, 연수차 미국에 가 있다는 이병주 변호사(50)에게 욕먹을 각오로 한밤에 전화를 넣어 봤다. ―욕 찬양 및 고무는 국가보안법은 아니어도 풍기문란죄에 안 걸리나. “어찌 알았나. 서울대 물리학과 다니다 1986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개월 투옥됐다. 그때 가슴에 울분 많이 쌓였다. 욕 안 하곤 못 살겠더라. 변호사란 직업도 그렇다. 서로 욕하면서 옳네 그르네 따지는 일이다. 욕 없이 사는 인생이 없더라. 그럼 차라리 제대로 파헤치고 싶었다. 아참, 당연히 욕이 지나치면 법에 걸릴 수 있다.” ―연구해 보니 욕에 좋은 점이 있던가. “소통과 정화 작용을 한다. 촛불시위를 보라. 답답한 현실에서 욕은 하나의 출구를 찾는 방법이다. ‘싸워야 정 든다’는 말도 있다. 내 속내를 털어놓고 다른 이를 읽는 도구로서 욕은 거칠지만 효과를 발휘한다. 다만 실컷 하되 상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지는 말길. 내게 욕할 자유가 있다면 상대 역시 권리가 있다.” ―저자의 욕은 상욕하곤 개념이 다른 것 같다. “그렇다고 수준이 높지도 않다. 한국인에게 욕은 독특한 의미를 지녔다. 영어나 라틴어에선 똑 떨어지는 말이 없다. 비판(criticize)보단 강하고 저주(curse)보단 약하다. 그런데 보통 욕한다고 해석하는 ‘swear’엔 맹세한단 뜻도 있다. 맹세란 자기 말이 진심임을 약조하는 거 아닌가. 욕에 내포된 진실을 볼 필요가 있다.” ―욕에도 철학이 있단 소린가. 애들 들을까 겁난다. “하나 묻자. 어릴 때 적당한 욕은 친밀감의 표시였다. 그리고 말린다고 안 하나. 다 누구한테 배웠겠나. 욕 나올 현실도 어른들이 만든 거다. 물론 긍정적 방향으로 분출하도록 만들어야지. 욕이 가진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사회의 몫이다.” ―물리학도가 데모하다 감방 가고, 노동운동하다 변호사 되고…. ‘욕보신’ 인생이더라. “좋은 자세다. 살아 보니 그리 남 신경 긁어야 할 때가 있다. 이건 선택의 문제다. 욕 안 먹겠다고 움츠린 삶과 다소 생채기 나도 부대끼는 인생. 난 후자가 더 건강하다고 본다. 욕에는 죄가 없다. 점잖게 정답만 따지면 개인도 사회도 경직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1908년 제작된 최초의 근대식 궁궐측량도인 ‘창덕궁 창경궁 수도철관배관도’가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조선왕실 건축도면’(42건 60장)에 포함된 이 도면은 대한제국상수도회사 기술고문을 지낸 영국인 토목공학자 포스터 바함이 만들었다. ■ 2·8독립선언 95주년 기념식이 7일 오전 10시 반 서울 종로 서울YMCA 2층 강당에서 열린다. 2·8독립선언문 낭독과 기념사에 이어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기념강연 ‘2·8독립선언 역사적 의미와 한국사회’도 열린다. 참가 문의 02-732-2941}
“정말 난처해졌습니다. 이러려고 이 책을 쓴 게 아닌데….” 평소 점잖은 학자풍이란 소릴 듣는 최종덕 문화재청 정책국장. 하지만 5일 오후 직위 해제가 알려지자 전화로 전해지는 목소리에 가느다란 떨림이 역력했다. 전날 서울 광화문에서 만나 “시기가 민감하다고 책 출간을 말리는 이도 많았지만 정확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며 책을 펴낸 이유를 설명할 때의 차분함은 이미 사라졌다. 최 국장의 뜻과 달리 최근 출간한 ‘숭례문 세우기’(돌베개)는 후폭풍이 일어날 여지가 컸다. 숭례문은 최근 논란이 지속되며 어느 때보다 예민한 이슈였다. 게다가 책을 통해 상당한 혼선과 잡음이 있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내에 준공 행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당한 진통도 있었다. 그는 “공사 기간을 앞당겨 2012년 8월 15일로 맞추라는 주문이 있었다.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박범훈)도 현장을 방문해 ‘금년 내에 준공식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고 썼다. 윗선의 주문은 관계 기관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새 대통령 취임 후인) 2013년 4월 말 이후라야 준공이 가능하다는 보고에 청장(김찬)은 난감해하며 ‘정무적인 차원’의 걱정을 했다”거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최광식)은 준공 행사가 현 정부 문화행사의 대미를 장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의 (준공 지연) 보고에 늦추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때는 개막 열흘을 앞두고 준비단 측이 공사 중인 숭례문 앞에 가설 덧집(문화재를 덮어씌우는 가설물) 설치를 요구했다. 각국 정상이 지나가는데 공사판이 보기 싫다는 이유였다. 바로 허물 가건물에 돈 들일 필요 없다는 청장(이건무)의 결정에도 결국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듯이” 가설 덧집을 만들어야 했다. 전통 방식으로 숭례문을 복원하지 못한 점과 현장의 시행착오도 밝혔다. 전통 철을 사용하겠다고 대장간까지 차렸는데 제철 작업으로 생산된 양이 너무 적었고 품질도 나빴다. 1998년 경회루 수리 때 나온 전통 철이 있어 이를 제련해 재사용하고, 일부 부족분은 현대 철로 대체했다. 최 국장은 “대장간에서 전통 철을 생산한 것처럼 국민을 오해하게 만든 점은 죄송하다”며 “대장간을 철수할 때도 전문가에게 자문해 실행했고 전통 철을 최대한 재활용했다”고 설명했다. “전통 방식으로 치목(治木·나무를 다듬고 손질함)하겠다”던 약속을 못 지킨 과정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통나무를 들여와 탕개톱으로 켜는 방식을 시도했으나 이를 처음해 보는 목수들로선 공사 기일을 맞출 수 없었다. 결국 용도에 맞게 현대식 톱으로 자른 제재목을 사용했다. 최 국장은 숭례문 논란의 단초가 된 단청 균열에 대해선 “우리도 모두 단청장(홍창원)을 믿었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숭례문 복구 전체가 부실과 비리로 물들었다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최 국장은 “잃어버린 전통 기법을 단 한 번의 시도로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해 이해를 구하려고 책을 펴냈지만 파문만 더 키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부실 논란이 끊이지 않던 숭례문 복구공사를 책임졌던 최종덕 문화재청 정책국장(사진)이 직위 해제됐다. 문화재청은 5일 국가공무원법에 따른 인사발령으로 최 국장의 현 직위를 해제하고 별도 조치가 있을 때까지 대기 근무할 것을 지시했다. 최 국장은 2008년부터 숭례문복구단 부단장과 단장을 역임하며 숭례문 복구공사를 지휘했다. 문화재청은 따로 입장을 밝히진 않았으나 그가 최근 숭례문 복구 과정을 담은 책 ‘숭례문 세우기’를 출간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숭례문 부실 복구 논란으로 인해 감사원 감사를 받고 있는 시점에 논란이 될 수 있는 책을 펴낸 것이 적절치 않고 ‘조직에 분란을 끼쳤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최 국장은 인사 발령 후 본보와의 통화에서 “본뜻이 왜곡되고 일이 의도치 않게 흘러갔다”며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니시진오리(西陣織)는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京都)에서 발흥한 수제품 가운데서도 가장 명성이 높다. 5세기 말 바다를 건너 간 도래인(渡來人)에서 유래해 한반도와도 인연이 깊은 비단직조산업으로, 주로 기모노 제작에 쓰이는 일본의 대표적 문화자산이다. 하지만 이 1500년 전통의 일본 전통 비단산업의 불씨가 사그라지고 있다.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최근 국립민속박물관 학술지 ‘국제저널 무형유산’에 게재한 논문 ‘일본 교토 니시진 비단직조산업이 직면한 과제’에서 “현재 니시진 가족기업이 속속 문을 닫아 해당 기술과 노하우가 영구히 사라질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2008년 총 판매량이 1990년의 20% 수준으로 떨어졌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200여 개가 성업하던 염색공장은 20여 년 만에 60군데로 줄었다. 그나마 남은 곳도 사업을 계승할 이가 있는 공장이라고는 10%가 채 되지 않는다. 니시진오리의 몰락은 비싼 가격과 취향 변화, 경기 불황처럼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나 가장 큰 문제는 그동안 일본이 자랑해 왔던 장인의 대물림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이다. 박봉에 시달리며 오야카타(親方·우두머리 장인) 밑에서 몇 년씩 고생해야 하는 도제시스템을 견뎌낼 청년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문 교수는 “일본 비단직조산업이 처한 실정은 바다 건너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한국은 전통무형유산을 박물관 전시품처럼 ‘과거의 잔존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것. 전통기술과 문화산업 활성화를 모색하지 않고 특정 기술을 지닌 몇몇 인물만 무형문화재로 대우하고 마는 현재의 정책부터 재고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 의미에서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니시진오리의 부활을 활발히 모색하고 있는 최근 일본의 노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직조기술로 만든 비단을 유럽의 유명 패션업체에 공급하거나 소비자가 가지고 온 옷감을 병풍이나 핸드백 등 원하는 소품으로 다시 만들어주는 사업을 벌이며 난국을 타개하려고 노력한다. 문 교수는 “현대적 감각이나 유행을 읽어냄으로써 전통산업의 활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한국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