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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1900년 무렵만 해도 ‘어린이’라는 말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아동기(兒童期)가 인생의 특별한 시기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다. 근대 이전만 해도 인간은 태어나서 그저 귀여움의 대상이었다가 어느 순간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존재였다. 유교사회에서는 소학(小學)의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말에서 보듯 아이는 7세 이후 갑자기 성인에게 적용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윤리의 세계로 들어갔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른에게서 젊은이가 떨어져 나오고 다시 젊은이에게서 어린이가 떨어져 나왔다.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은 1920년대에 일찍이 “젊은 사람은 젊은이라고 하듯이 나이가 어린 사람은 어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해 젊은이와 어린이를 구별했다. 어린이란 말은 17세기 ‘가례언해(家禮諺解)’ 등에서 간혹 보이긴 하지만 이를 널리 보급한 것은 소파의 공(功)이다. 소파는 1923년 ‘어린이’란 이름의 월간지를 만들었고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색동회를 창립했다. ▷국제 어린이날은 6월 1일이다. 1926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아동복지를 위한 세계회의’가 제정한 날이다. 옛 공산권 국가가 대체로 이날을 어린이날로 기념한다. 중국에서도 6월 1일이 어린이날이다. 한국과 일본은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삼았다. 어린이를 각별히 대우하는 대부분의 서유럽국가와 미국에는 따로 정해진 어린이날이 없다. 그 나라 부모들에게는 모든 날이 어린이날이다. 한국 일본 중국은 어린이날을 단순히 기념일이 아니라 국가적 휴일로 삼은 몇 안 되는 나라에 속한다. 유교사회에서 ‘어린 것’이라고 부당하게 취급했던 어린이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인지 모른다. ▷어린이는 대체로 7∼13세를 말하며 7세 미만의 유아와 구별한다. 형법상 미성년자는 14세 미만이다. 정보통신법도 14세 미만의 개인정보를 수집하려면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도록 했다. 부모들은 대개 자식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청소년으로 대우해 어린이날 선물을 주지 않는다. 아동학자들은 중학교 1학년 혹은 2학년까지는 어린이로 대하면서 청소년기로 서서히 넘어가도록 하는 것이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검정 권한이 국사편찬위원회(국편위)로 환원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 근현대사는 2002년 국사 과목에서 독립해 국편위의 손을 떠나 교육과정평가원의 검정 체제로 들어갔다. 사회적 논란이 분분한 교과서 파동에서 드러났듯이 교육과정평가원의 검정은 친북 좌(左)편향 역사 기술을 거의 걸러내지 못했다. 이 기관이 워낙 다양한 과목의 교과서를 검정하다 보니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따라 한국사 검정이 모두 국편위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그제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역사 교과서가 남북 정권을 같은 비율로 다루면서 편향성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이 위원장은 “현행 고교 한국사가 지나치게 근현대사 중심으로 기술된 것도 편향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라고 말했다. 근현대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근접해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국사 교과서가 친북 좌편향으로 흐른 근본적인 이유는 집필진에 전교조 교사를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에 전문성이 깊은 국편위이니만큼 검정위원을 선정하는 데서부터 균형감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한국사가 중학교에서 전(前)근대사를, 고등학교에서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체제로 변한 것은 노무현 정권 말기다. 당시 고등학생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좌편향이 심한데도 필수 과목이어서 반드시 배워야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고교 한국사를 선택 과목으로 바꿨으나 내년부터 다시 고교 필수 과목으로 지정한다. 이와 함께 중고교 구별 없이 한국사 전체를 가르치되 중학교에서는 정치사 문화사 중심으로 가르치고, 고등학교에서는 사회경제사와 대외관계사를 추가해 가르치는 식으로 변화한다. 내년 필수화 시기에 맞춰 새 교과서가 나오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새로운 집필 기준에 따른 교과서는 빨라도 2013년에나 나온다. 고교에서의 한국사 필수화를 서두르지 말고 연기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 교과서가 좌편향으로 기술돼 있는 마당에 성급한 필수화는 잘못된 역사인식을 확산시킬 뿐이다. 한국사의 편제와 내용을 바로잡은 뒤로 필수화를 늦추는 게 옳다. 집필 기준을 만들 때도 한국사 전공 이외 다른 전공 학자들을 참여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기 바란다. 국사학계는 필수화를 너무 서두르지 말고, 국편위는 교과서 바로잡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경기 성남 분당을(乙)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대표인 손학규 후보가 한나라당 강재섭 후보를 이겼다. 한나라당의 전통적 강세지역이었던 곳에서 예상 밖 결과가 나와 민심(民心)이 손 대표에게 새로운 정치적 기회를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원도지사 보궐선거에서도 민주당 최문순 후보가 한나라당 엄기영 후보를 꺾었다. 경남 김해을(乙)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가 야권 단일의 국민참여당 이봉수 후보를 이겨 체면을 살리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한나라당의 참패다. 손 대표는 이번 승리로 향후 정치적 행보에 상당한 탄력이 붙게 됐다. 제1 야당의 대표로서 당내는 물론이고 야권 내 입지를 굳혔다. 무엇보다 원외(院外) 대표의 한계를 극복하고 당 장악력을 높여 나가면서 내년 대통령선거의 야권후보 단일화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됐다. 반면에 참여당과 유시민 대표의 기세는 추락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는 심각한 경고등이 켜졌다. 국정운영에 실망한 수도권과 강원도 민심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수도권과 강원도의 민심 역전은 작년 6·2지방선거 때부터 나타났다. 수도권 유권자는 전체의 49%, 강원도는 약 3%로 두 곳을 합치면 50%를 넘는다. 수도권과 강원도의 민심이 전국 선거의 향방을 좌우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한나라당은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재·보선에서도 김해을을 제외하고는 야권연대가 위력을 발휘했다. 여권은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안상수 대표는 잦은 말실수와 리더십 부족으로 적지 않은 실망을 줬다. 조기 전당대회로 변화와 쇄신을 이끌 새 지도부를 선출해야 회생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도 과감한 인적 개편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여권의 고질적인 웰빙 보수(保守)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한나라당 의원 중에는 스스로를 희생해 당을 살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나만 살고보자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 판을 친다. 친이(親李)-친박(親朴)은 물론이고 친이 진영 내부에서도 계파 간 신경전이 계속 불거져 국민이 눈살을 찌푸린다. 집안에서 자중지란(自中之亂)이 빚어지는데 민심이 모아질 리 없다. 집권 4년차에 접어든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 방식도 일대 전환이 요구된다. 동남권 신공항 공약 파기에 이어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선정을 둘러싼 갈등으로 도처에서 민심의 이반이 심각하다. 치솟는 생활 물가와 전세 대란을 수습하지 못해 경제만은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감도 허물어졌다. 재·보선 참패로 이 대통령의 레임덕이 조기에 나타날 수도 있다. 국정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서도 이 대통령은 광폭의 소통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민심이라는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 한쪽으로 쏠리면 언제든지 균형추를 잡는 게 민심이다. 여권(與圈)이 의도적으로 재·보선 결과를 폄훼하거나 야권(野圈)이 작은 승리에 도취돼 일방통행으로 나간다면 여론의 역풍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혼소송에는 보통 위자료, 재산분할, 양육비 등 금전적 분쟁이 따른다. 위자료는 불륜 등으로 이혼 원인을 제공한 남편이나 아내가 배우자의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주는 돈이다. 재산분할은 부부가 혼인 기간에 공동으로 형성한 재산을 나눠 갖는 것으로 위자료와는 달리 잘못한 사람이라도 청구할 수 있다. 자녀가 있다면 양육권자를 결정하고 양육하지 않는 사람이 양육비를 지불해야 한다. 이 중 액수가 가장 큰 것이 대체로 재산분할이다. ▷단독으로 집을 소유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혼 후 구입한 집을 공동명의로 해둘 필요는 없다. 상속 등의 사유가 없으면 남편이나 아내 단독 명의로 돼 있어도 공동재산으로 추정된다. 부부가 따로 통장을 써도 결혼 후 불어난 돈은 공동재산이다. 다만 결혼 전까지 저축한 돈은 결혼 후에도 각자 재산이다. 공동재산은 그 형성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나눈다. 기여도 산정에는 혼인기간, 나이, 경제활동 여부 등이 고려된다. 직장인 남편과 전업주부라면 결혼 3년차보다는 결혼 10년차가 주부의 기여도가 크다. 가사노동의 경우 평균 30% 정도의 기여도를 인정받는다. ▷탤런트 이지아 씨가 1월 가수 서태지 씨를 상대로 5억 원의 위자료와 50억 원의 재산분할 청구소송을 낸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양육에 관한 청구는 없었다. 이혼에 따른 금전 청구는 이혼 청구와 동시에 하는 게 보통이다.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으나 재산 나누기에는 합의에 이르지 못해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위자료는 이혼 후 3년 내에, 재산분할은 2년 내에 청구해야 한다. 이 씨는 2009년 이혼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서 씨는 2006년 이혼해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맞서 법원의 판단이 주목된다. ▷유명인은 이목을 끄는 것을 싫어해 대체로 판결까지 가지 않고 합의하거나 조정을 받아들인다. 조정에서는 위자료 재산분할 구별 없이 합의금으로 일괄 처리하고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지난해 가수 박진영 씨는 전부인 서모 씨에게 약 30억 원에 월 2000만 원씩 주기로 해 법원 내에서 “달라는 대로 다 줬다”는 평을 들었다. 지난해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은 장은영 전 KBS 아나운서와 이혼하면서 “역시 남자답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거금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랑이 식으면 재산 분쟁만 남는 것이 남녀의 만남이런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조선시대 퇴계 이황(退溪 李滉) 하면 서원(書院)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사립학교인 서당에 국가 보조를 끌어와 서원으로발전시킨 교육 개혁가였다. 경북 풍기(현 영주)의 백운동서당을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격상시키는 데 공헌한 이가 바로퇴계다. 자신의 고향인 경북 예안(현 안동)에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지었다. 도산서당은 퇴계 사후 나라의 지원을 받아 도산서원이됐다. 성균관이 국립대라면 서원은 국가 보조의 사립대다. 퇴계는 국립학교는 나라의 법령에 얽매여 서원만큼교육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봤다. 그 자신 젊은 시절 성균관에 공부하러 올라갔다가 실망이 커 곧 낙향했다. 서원은 교과목과학칙을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서원 진흥 운동이었다. 오늘날 KAIST는 옛 성균관처럼전액 장학금을 지원하는 국립대다. 전액 장학금으로 우수한 학생을 끌어모을 수 있는 것은 강점이다. 문제는 입학 이후의 경쟁력을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있다. 교수 정년 심사 강화, 학점과 장학금의 연계 등 ‘서남표 총장식 개혁’은 이런 문제의식에서나왔다. 퇴계와 서 총장은 출발점은 달랐지만 관학(官學)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시대를 뛰어넘어 일맥상통하는 면이있다. 도산서원이나 KAIST나 모두 한 시대의 최고 명문학교다. 평가와 그에 따른 상벌 없이는 경쟁력도없다는 것은 고금(古今)의 진리다. 서원에도 성적표가 있고 성적이 나빠 퇴출당하는 학생이 있었다. 과목마다 시험을 봐서 합격을하면 순(純)이라는 평가를 얻었고 불합격하면 불(不)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한번 불합격은 일불(一不), 두 번 불합격은이불(二不)이었다. 보통 서원에서는 팔불(八不), 명문 서원에서는 오불(五不)이면 퇴출시켰다. 올해 KAIST에서4명의 학생이 자살했고 그중 1명은 학점 미달로 인한 장학금 삭감에 고민했던 경우다. 경쟁력 제고는 멈출 수 없다. 다만 경쟁의강화는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에 대한 배려와 함께 가야 한다. KAIST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주로 하는학교지만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리를 들으며 경쟁에만 내몰려온 학생들이 많은 만큼 인성(人性)교육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든다. 옛 도산서원은 수신(修身)을 주로 하는 학교였다. 그제 마침 ‘신(新)도산서원’이라고 할 만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이 옛 도산서원 뒷산 너머 퇴계 종택 인근에 현대적 시설을 갖추고 새로 문을 열었다. 이참에 KAIST 학생들에게며칠간이라도 수련원 입원(入院)을 권해보고 싶다. 멘터니 뭐니 해서 상담을 강화하는 것도 좋겠지만 공부하는 자세 역시 퇴계에게배울 게 많다. 무엇보다 성적에 실망하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퇴계가 아들 준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말을 들려주고싶다. “나의 재능이 우월함에도 남의 밑에 놓이는 대우를 받는 것은 해로울 게 없다. 그러나 만에 하나 나의 재능이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요행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이는 기뻐할 일이 아니다.” “옛 사람은 비록 자신을 꾸짖는 것을 귀하게 여겼지만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거나 절박하게 하지는 않았다”는 인간성 넘치는 퇴계의 말도 귀 기울여 봄 직하다.―안동 도산서원에서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지난해 국내 연구기관이 세계적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낸 논문을 모두 합해도 일본 도쿄대 한 곳에 못 미친다. 아시아권에서는 도쿄대가 1위에 올랐고 서울대는 10위, KAIST 11위였다. 개별 저자의 부분적 참여도까지 감안한 점수는 도쿄대가 34.33점, 서울대 4.87점, KAIST는 4.59점이었다. 한국의 대학, 공공연구기관, 기업연구소 등 모든 연구기관을 합친 점수도 24.57점으로 도쿄대 하나에 못 미쳤다. 도쿄대는 세계 전체에선 6위였다. 72.72점으로 1위인 미국 하버드대와 비교하면 절반 이하다. 한국 과학교육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짐작할 만하다. KAIST의 서남표 총장이 경쟁 상대로 정한 미국 MIT는 5위로 도쿄대보다 한 단계 앞서 있다. KAIST가 MIT를 따라잡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교수와 학생의 분발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한국은 국토가 작고 자연자원도 별로 없다. 내세울 만한 것은 인적자원뿐이다. 한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빈국에서 경제규모 13위의 국가로 성장한 것은 뜨거운 교육열과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10년 후 이 나라를 먹여 살릴 힘이 교육과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인적 경쟁력 말고 다른 데서 나오리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지난해 가까스로 1인당 국민총소득(GNI) 2만 달러에 턱걸이한 한국이 3만 달러를 달성하는 것도 과학기술 강국이 돼야 가능하다. 서 총장은 2006년 취임 이후 교수 정년보장 심사 강화, 학부 전 과목 100% 영어 강의, 학점 부진 학생 장학금 삭감 같은 개혁을 추진했다. 최근 학생 4명이 자살했다고 하지만 학점 부진과 관련된 자살은 1명밖에 없다. 이번 위기가 개혁의 후퇴로 이어진다면 과학적이어야 할 KAIST가 가장 비과학적인 대응을 하는 셈이 된다. 정치사회 일각에서 KAIST의 개혁 후퇴를 부추기는 것은 국가사회의 장래를 도외시한 인기영합이다. 학생들은 최근 총회에서 ‘서남표식 개혁’을 실패로 규정한 안건을 부결시켰다. 한국 최고의 과학도들다운 성숙한 대응이다. 어제 열린 이사회도 서 총장의 거취와 그의 개혁조치에 대한 결정을 유보했다. 개혁의 부작용을 줄일 지혜는 필요하지만 개혁 자체를 포기하면 ‘세계적인 대학’으로 가는 길에서 멀어질 뿐이다. KAIST는 거의 100% 국민 세금과 기부금으로 유지되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형태의 대학이다. 이런 KAIST조차 세계 유수 대학들과 어깨를 겨룰 수 없다면 우리 과학기술의 장래와 국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서울대 등 다른 대학들도 한국의 네이처 논문 실적을 보면서 각성하기 바란다.}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척도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신용 관련 정보가 얼마나 잘 관리되느냐를 보는 것이다. 소비자 금융이 발달한 서유럽 국가에서 인터넷뱅킹 비밀번호는 우편으로 1차 번호가 고지되고 고객이 이를 입력한 뒤 수정하는 방법으로 발급된다. 은행 직원이 고객의 비밀번호를 원천적으로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다. 현대캐피탈의 전산시스템이 해킹을 당해 42만 명의 고객정보가 유출됐다. 고객 4명 중 1명꼴이다. 유출된 정보에는 고객 이름 주민번호 e메일주소 휴대전화번호가 포함돼 있다. 고객 1만3000명은 비밀번호까지 유출됐다. 회사 측은 나머지 고객에게도 유출 가능성에 대비해 비밀번호를 바꿔 달라고 부랴부랴 부탁했다. 현대캐피탈 측은 금융사고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이중 삼중의 보안망이 가동되는 금융회사의 전산시스템이 대량으로 해킹당한 사실 자체가 심각한 사태다. 게다가 이 회사는 두 달간이나 해킹됐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캐피털 업계에서 시장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는 1위 업체가 해커에게 협박을 받은 뒤에야 해킹 사실을 알았다니 그 무신경이 놀랍다. 신용사회에서 계좌번호 비밀번호 등 신용 관련 정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개인정보 유출사고는 가끔 있었지만 금융권의 정보 유출은 그냥 넘길 수 없다. 2008년에도 일부 저축은행의 고객정보가 유출되는 해킹 사고가 있었다. 당시 제2금융권이 보안시스템 미비, 정보기술(IT) 전문인력 부족 등으로 보안에 취약한 것으로 지적됐는데 다시 문제가 터졌으니 금융당국의 책임이 작지 않다.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비교할 때 금융회사의 보안이 전반적으로 취약하다. 외부로부터의 해킹은 아니더라도 금융회사 내부 직원에 의한 고객정보 유출 사건도 가끔 있었다. 금융회사는 내부 직원이라도 비밀번호 등 고객의 정보를 알아내 외부로 빼돌릴 수 없도록 계좌를 여는 단계에서부터 다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금융감독원은 비슷한 금융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한 근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남미 아르헨티나 군사정권 시절 실종자들의 가족 모임인 ‘5월 어머니회’는 강령으로 금전적 보상을 거부한다. 생명은 생명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 금전으로 대체할 수 없으며, 금전적 보상은 인간 생명을 금전으로 격하시키는 일이라는 이유다. 이들은 기념물 건립도 거부한다. 기념물이 민주화 투쟁 정신을 돌 속에 가둬 희석시키는 것을 우려해서다. 이들은 자식의 희생정신이 현재의 투쟁을 통해 기념되기를 원한다. ‘5월 어머니회’의 높은 기준이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일각에서 통하지 않았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교육부 장관이던 1998년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피해를 인정받아 억대의 보상금을 받았다. 이 전 총리가 나중에 이 돈을 자신이 만든 ‘오월정의상’을 위한 기금으로 내놓기는 했지만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국회의원을 거쳐 장관까지 된 사람이 보상금까지 신청해 받았다고 해서 말이 많았다. 비단 이 전 총리의 일만은 아니다. 당시 정치인 35명이 비슷한 보상을 받았다.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어제 “국민은 민주화운동에 대해 보상해줄 만큼 다 해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떤 보상을 가리키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권력 장악과 명예회복,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금전적 보상도 있었다”고 답했다.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주도하며 평생 운동권으로 살아온 그의 말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그의 눈에는 끊임없이 민주화 경력을 들먹이며 뭔가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 ▷2000년 8월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지금까지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 혹은 부상자 752명에게 400억 원의 보상이 이뤄졌고 4012명에게 생활지원금 명목으로 682억 원이 지원됐다. 민주화보상심의위는 내년쯤 활동을 종료할 계획이다. 민주화운동으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을 위한 금전적 보상은 필요하다. 그러나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한국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글에서 “광주항쟁 등의 덕으로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이 거액의 보상까지 받아낸 것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경력을 팔아 돈을 챙기려는 탐욕의 화신’으로 보이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생태는 얼리지 않은 명태를 말한다. 명태는 먹는 방법에 따라 이름이 다양하다. 얼린 명태는 동태, 말린 명태는 건태로 부른다. 건태도 계절에 상관없이 말린 것은 북어라고 하지만 특히 동해안에서 겨울철에 얼리고 녹이기를 반복해서 말린 것은 색깔이 누르스름하다고 해서 황태라고 부른다. 코다리는 내장을 제거하고 반쯤 건조한 명태를 말하고 노가리는 2, 3년 된 새끼 명태를 이르는데 주로 말려서 먹는다. 명란은 명태의 알, 창난은 명태의 창자인데 각각 명란젓 창난젓 등 젓갈로 담가 먹는다. ▷명태는 세계에서 유독 한국 사람이 좋아하고 많이 먹는 생선이다. 명태의 한자 明太는 중국에서 온 말이 아니고 우리말이다. 일본은 명태를 ‘스케토다라’ 또는 ‘스케소다라’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한국의 명태를 외래어로 받아들여 ‘멘타이’라고 많이 부른다. 일본에는 생태탕도 동태전도 북엇국도 없다. 명태를 어묵 등의 원료로 쓸 정도다. 서양에서도 명태를 대구과로 분류하긴 하지만 알래스카 폴럭(Alaska Pollack)이라고 해서 대구(Cod)와 구별하고 잘 먹지는 않는다. 영국의 전통 음식 ‘피시 앤드 칩스’에는 대구가 주로 쓰이고 명태는 값싼 대안으로나 쓰인다. 프랑스에서도 대구 요리는 많지만 명태 요리는 없다. ▷명태는 과거 동해에서도 많이 잡혔지만 지금은 해양환경 변화로 국내 연근해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다. 오늘날 명태는 주로 일본 홋카이도 인근 바다, 러시아 인근 오호츠크 해와 베링 해 등에서 잡힌다. 국내에서 소비하는 명태는 거의가 러시아와 일본에서 수입한다. 대부분 러시아산인 동태는 원양에서 잡아 냉동한 상태로 운반된다. 짧은 수송기간이 생명인 생태는 연근해에서 잡아 냉장상태로 운반하기 때문에 100% 일본에서 들여온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따른 방사능 오염 우려 때문에 서울 가락동과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일본산 생태를 찾는 손님이 사라졌다고 한다. 일본산 갈치나 고등어도 마찬가지지만 갈치나 고등어와 달리 생태는 일본 말고는 수입해올 수 있는 나라도 없다. 이대로라면 생태탕을 전문으로 파는 식당도 줄줄이 문을 닫을 판이다. 언제부턴가 한국산 생태가 사라져 아쉽더니 수입 생태도 구경하기 어려운 날이 오는 건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I heard you slept with Alex. Did you really?(알렉스랑 잤다면서, 정말?)” “lol no(웃기네, 아니야)” LOL은 (I'm) laughing out loud의 축약어. ‘(나는) 크게 소리 내 웃다’는 말로 ‘정말 웃긴다’는 뜻으로 쓰인다. 놀랄 때 OMG란 말도 자주 쓴다. oh! my god의 준말이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 최근 휴대전화 메시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터넷 채팅에서 많이 쓰이는 온라인 축약어가 다수 포함됐다. FYI(for your information·참고해)도 들어갔다. ▷오늘날 어느 언어권에서나 온라인에서 이런 축약어가 널리 쓰인다. 프랑스에서는 ‘안녕 잘 지내?(bonjour, ¤a va?)’는 ‘bjr, sava?’로 줄여 쓴다. 독일에서는 bgwd라고 하면 ‘(Ich) bin gleich wieder da’를 줄인 말로 ‘금방 돌아올게’라는 뜻이다. 스페인에서는 고마워(gracias)를 acias로 축약한다. 한국도 이 분야에서 최고 수준이다. ‘급질’은 급한 질문의 약자다. ㅋㅋ(키득키득)처럼 글자의 첫 음소만 따서 쓴 말이나 넘(너무)처럼 소리를 줄여 쓴 말도 있다. ▷미국의 회사 보고서에 FYI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10, 20년 전만 하더라도 회사원이 이런 말을 쓰면 상사에게 비속하다는 느낌을 줘 혼이 났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사실 FYI는 1941년부터 메모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OMG는 1912년부터 편지에 등장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고 옥스퍼드 측은 밝혔다. 옥스퍼드가 이번에 받아들인 인터넷 축약어는 모두 머리글자를 딴 약자다. 다른 종류의 축약어, 즉 b4(before, 전에), U(You, 너), thx(thanks, 고마워) 같은 영어의 조어(造語) 구조를 파괴하는 용어는 포함되지 않았다. ▷온라인 축약어는 쓰는 사람에게 시간을 절약해주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고 꼭 빠른 의사소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청소년 자녀가 쓴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한글은 머리글자를 딴 약자가 발전하기 힘든 구조다. 많은 온라인 축약어가 국어의 조어 구조를 훼손한다. 국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세대에 통용되는 보편성을 가진 축약어가 다수 출현하길 기대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2007년 미국 예일대 박사학위 위조 사건으로 세상을 소란하게 했던 신정아 씨가 출간한 자전에세이 ‘4001’에는 실명이 다수 등장해 진실공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신 씨와 뜨거운 관계에 있던 변양균 전 대통령정책실장은 재임 시절 정운찬 당시 서울대 총장을 싫어하는 티를 냈다. 정 총장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일도 있었다. 변 실장은 신 씨에게서 정 총장이 치근거린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던 모양이다. 신 씨가 그제 출간한 자전에세이 ‘4001’에서 폭로한 내용이다. ▷‘4001’에는 정 전 총리가 서울대 총장 재임 시 서울대 미술관 운영에 대해 신 씨에게 수시로 연락해 자문하고, 미술관 운영에 젊고 추진력 있는 신 씨가 적격자라고 치켜세우면서 교수로 임용하겠다는 제의를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박사학위 위조 사건이 터진 직후 정 전 총리는 검찰에서 서울대 교수직을 제의한 적도, 미술관장직을 제의한 적도 없다고 진술했다. 신 씨는 검찰 조사를 받던 중 그 얘기를 듣고 “실소가 나왔다”고 책에 썼다. ▷신 씨는 “정 총장이 나를 단순히 일 때문에 만나는 것 같지 않았다”며 “나를 만나자는 때는 늘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고 썼다. 그는 또 “한번 팔래스 호텔에서 만났을 때는 자주 만나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여자라는 얘기까지 했다”며 “그날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정 총장은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돌발 행동을 보여줬다”고 썼다. 이에 대해 정 전 총리는 “거짓말이기 때문에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가짜박사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신 씨와 정 총장이 만나는 자리에 동석한 이들도 여럿이다. ▷검찰은 신 씨와 정 총장 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다. 신 씨는 “그중에는 정 총장이 잇달아 여러 통의 전화를 했는데 내가 전혀 받지 않은 기록들도 나왔다”고 썼다. 신 씨는 “나를 조사하던 검사들은 통화 기록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 다음부터 서울대와 관련된 이야기는 묻지도 듣지도 않고 그냥 덮으려고만 했다”고 회고했다. 통화 기록이 교수나 미술관장직 제의에 관한 진실을 밝혀주지는 못하겠지만 밤 10시 전후의 통화가 있었다면 둘 사이의 정황을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인도 타지마할이나 페루 마추픽추 상공에는 역사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비행금지구역(No-fly zone)이 설정돼 있다.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건물 상공, 영국 런던의 버킹엄궁과 관청가 화이트홀 상공도 국가 안보를 위해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에도 청와대를 중심으로 일정한 반경으로 그어진 수도권 비행금지구역이 있다. 그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리비아 영공을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했다. 자국민 민주화 시위대를 전투기로 폭격하는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만행을 중단시키기 위한 조치다. ▷냉전 종식 이후 국가의 주권을 제한하는 최초의 비행금지구역은 1991년 이라크 영공에 만들어졌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북부 쿠르드족에 전투기로 폭격을 가하자 미국 영국 프랑스 터키가 나서 이라크 북부를 비행금지구역으로 묶어 놓았다. 그러나 이 조치가 유엔 안보리의 명시적 결의 없이 이뤄지는 바람에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안보리의 결의에 따른 최초의 비행금지구역은 1993년 세르비아인의 코소보인 학살을 막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영공에 설정됐다. ▷이번 리비아 영공의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시위군이 먼저 요구하고 아랍연맹이 지지한 것이다.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가진 중국과 러시아가 당초 반대에서 기권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은 아랍연맹의 압박 때문이다. 비행금지구역은 비무장지대와 비슷한 면이 있다.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한쪽 당사자가 금지구역을 침범하면 다른 쪽 당사자의 군사적 보복에 직면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한 문제가 없다. 본격적인 군사 개입이 어려울 때 주로 쓰이는 방법이다. ▷유엔 측 군대는 앞으로 미사일을 장착한 무인정찰기를 이용해 리비아 공군기가 날아다니는지 감시하게 된다. 사전정지작업으로 리비아 공군기가 이용하는 활주로를 파괴하고 유엔 측 정찰기에 위협이 되는 리비아 방공망을 부수기 위한 작전이 개시될 수 있다. 미 해군이 보유한 항공모함이 리비아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도 가세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반군의 최후 보루인 벵가지마저 함락되고 나면 무자비한 보복이 시작돼 카다피의 공언대로 피의 강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리비아 영공의 비행금지구역 설정이 꺼져가는 리비아의 민주화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에서 아이돌(idol)은 ‘우상’이란 뜻으로 본래 종교 용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대신하는 형상을 말한다. 신은 추상(抽象)이고 우상은 구상(具象)이다. 성경에서 모세 시대의 유대인은 ‘보이지 않는 신’인 여호와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는 속성이 있다. 모세는 초월자로서의 신은 그런 금송아지 안에 잡아둘 수 없다는 뜻에서 우상숭배를 금지했다. ▷한국 개신교에는 불교의 불상과 유교나 신도(神道)의 신주를 향해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최근 일본 지진과 관련해 “일본 국민이 신앙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길자연 대표회장 목사는 얼마 전 국가조찬기도회에서 “(한민족은) 지난 반만년 동안 우상숭배의 죄 속에 있었으나 하나님이 구원해주셨다”고 기도했다. ▷일본인은 신사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결혼하고 절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신교(多神敎)’의 삶을 산다. 어린이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기원하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하고 사망하면 절에서 고인의 명복을 비는 식이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로 나간다’는 조 목사의 말은 이런 종교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상숭배 금지의 정신은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에 상관없이 거짓과 탐욕을 버리는 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이웃나라 일본이 사상 최악의 재난과 씨름하고 있다. 성경에서 구약 시대의 신은 ‘진노의 신’일지 모르겠으나 신약 시대의 신은 ‘사랑의 신’으로 해석된다. 그런 신이 강력한 지진을 일으켜 그토록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이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맞는지 의문이다. 일본인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지는 못할망정 ‘하나님의 경고’ 운운하는 발언은 많은 기독교인을 부끄럽게 했다. 자신이 믿는 종교만 절대진리라고 생각하고 타 종교의 교리와 신앙체계를 경멸하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할 수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봄이 오는 경남 양산시 천성산 자연습지에서 도롱뇽 알들이 예년과 마찬가지로 부화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11월 KTX 천성산 터널이 완공돼 하루 50차례가량 고속열차가 드나들고 있지만 천성산 습지 군데군데 도롱뇽 알이 눈에 띈다는 양산시 관계자의 전언이다. 터널 공사가 끝난 지는 이미 3년이 지났고 고속열차가 다닌 지도 5개월째로 접어들었다. 현재로서는 늪의 수량이 줄거나 열차 왕래로 진동이 심해 도롱뇽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몇 해 전 천성산 내원사에 거처하던 지율 스님이 터널 공사에 반대해 도롱뇽 살리기를 내걸고 오래 단식을 했다. 2003년 단식 때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공사가 중단됐다. 2004년 그는 환경단체와 함께 낸 이른바 ‘도롱뇽 소송’ 1심에서 지자 다시 단식에 들어갔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수석이 찾아가 무릎 꿇고 사정해 겨우 단식을 풀었고 공사가 또 중단됐다. 2005년에는 100일간 단식을 벌여 장관 의원들이 줄줄이 찾아가 만류했다. 그 후 다시 한번 공사가 중단됐다. 공사가 중단될 때마다 환경영향평가가 새로 실시됐고 그때마다 천성산 자연습지는 터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나왔다. 잦은 공사 중단으로 6개월간 공사가 지연됐다. KTX의 개통이 늦어짐으로써 부산 시민이 입은 사회경제적 손실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개발지상주의도 금물(禁物)이지만 환경근본주의도 위험하다. 지율 스님은 “산(천성산)이 울고 있다고 느꼈고, 산이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래서 당연히 뭇 생명에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고 글을 썼다. 감성의 언어로 호소하는 것도 좋지만 과학적인 환경평가를 통해 내려진 결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도롱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번 봄에 천성산 습지를 찾아가 보기 바란다. 환경근본주의 같은 독선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과 불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천성산 환경논쟁이 남긴 교훈이다.}
‘페니 대학(Penny University)’은 18세기 영국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커피하우스는 커피 값을 안 받는 대신 입장료로 1페니를 받았다. 런던의 시민들이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고 토론을 벌이며 여론을 형성했다. 몽테스키외가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썼듯이 커피하우스를 나올 때면 들어갈 때보다 더 똑똑해진 느낌을 갖는다고 해서 ‘대학’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는 ‘페니 대학’을 상호로 쓰는 커피숍이 많다. ▷당시 1페니가 현재 가치로 얼마쯤 되는지는 따지기 어렵지만 저렴한 가격이었음이 틀림없다. 요즘으로 치면 유로 통화권에서는 1유로, 달러권에서는 1달러, 한국에서는 1000원 정도였을 것이다. 현재 유럽에서 커피 값은 18세기의 1페니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파리의 카페에서 프랑스인이 즐겨 마시는 에스프레소의 한 잔 가격은 1유로에서 1.5유로 정도다. 반면 서울의 커피전문점에서 대체로 가장 싸다는 아메리카노 한 잔의 가격은 3500∼4000원이다. 카페라테만 돼도 4500원 안팎이다. 프랑스보다 2∼3배 비싸다. ▷관세청이 최근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의 원두 수입원가가 123원(세전 기준) 정도라고 밝혔다. 커피전문점의 아메리카노 한 잔 판매가격이 3500∼4000원이니까 원두 수입원가의 30배 안팎이다. 커피전문점이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한국에서 한 끼 밥값은 5000∼7000원이다. 서구에서는 보통 밥값이 커피 값보다 10배 정도 비싸다. 외국인의 눈에 한국은 커피 값이 밥값을 거의 따라잡고 있는 이상한 나라로 비친다. ▷한국에서 커피 값이 유독 비싼 것은 유통구조와 관련이 있다. 다방이 사라지면서 커피전문점이 아니면 커피를 마실 곳이 마땅치 않다. 그 시장을 스타벅스 커피빈 등 외국계 브랜드가 점령해 커피 값을 높였다. 최근에는 카페베네라는 토종브랜드가 약진하고 있지만 토종이라고 값이 싸지는 않다. 늘 마시는 커피는 맛과 함께 값도 중요하다. 생활 물가가 하루가 달리 치솟는 요즘, 호주머니 가벼운 회사원의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맛있고 저렴한 커피를 파는 한국식 커피하우스라도 생겼으면 좋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통성(通聲)기도는 외국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Korean Pray(한국식 기도)’라고 부를 정도로 한국 개신교회의 특징적인 기도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통성기도는 1907년 길선주 목사의 평양 대부흥운동 때 시작됐다. 통성기도는 묵상기도와 달리 소리를 내서 각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통성기도에는 울며 부르짖는다는 느낌이 있다. 당시 교회사를 보면 ‘통성기도 소리가 마치 상가의 곡성(哭聲) 같았다’는 표현도 남아 있다.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그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무릎 꿇고 통성기도를 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길자연 대표회장 목사가 기도회를 인도하던 중 갑자기 제안한 것이라 피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윤옥 여사가 먼저 무릎을 꿇으면서 이 대통령의 허벅지를 찔렀고 이 대통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무릎을 꿇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 등 많은 참석자도 식탁 옆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1968년 첫 모임 이래 박정희 등 모든 역대 대통령이 거의 매년 참석한 국가조찬기도회이지만 무릎 꿇고 기도한 것은 이 대통령이 처음이다. ▷개신교회 중에는 통성기도를 공식 예배에서 허용하지 않는 곳도 적지 않다. 통성기도를 받아들이는 교회라도 보통 앉아서 한다. 국가조찬기도회는 개신교가 주도하는 행사지만 순수한 예배와 달리 공식 의전의 성격이 강하다. 이런 자리에서 길 목사가 대통령 등 주요 정치인을 상대로 무릎을 꿇는 통성기도를 유도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온다. 기독교 신자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혹은 다니던 교회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신중했어야 한다. 이 대통령의 기도 사진이 나간 후 불교단체들이 즉각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국가조찬기도회는 본래 개신교 전통이 내려오는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다. 그런 미국에서 신앙심이 각별하다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무릎 꿇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우리나라는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다(多)종교 국가다. 그렇지 않아도 이 정부 들어 불교계에서 ‘종교 편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최근에는 이슬람채권법(수쿠크법)으로 개신교계 일각에서 반발이 일었다. 다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나라의 전통을 살려가기 위해 모든 종교인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어제 라디오 연설에서 “사유화한 공권력으로 시민을 유린하던 바로 그 세력이 중동의 민주화 물결을 빙자해 북한의 민주주의를 거론한다면 이는 낡은 이념의 질곡으로, 민주주의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말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민주화 시위 소식을 들으면서 지척에 있는 북한의 민주화를 떠올리는 것은 우리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의 염원 속에는 북에도 민주화가 찾아와 동포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소박한 꿈이 담겨 있다. 이를 두고 ‘사유화된 공권력으로 시민을 유린하던 세력’의 ‘나쁜 생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국민 모욕이다. ‘북한 민주화 거론은 낡은 이념’이라는 말도 이해하기 어렵다. 자유를 향한 갈망이 낡은 것인가.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민주화를 보면서 “세계사는 한 사람(왕이나 독재자)의 자유로부터 모든 사람의 자유로 나가는 것”이라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떠올린다. 입만 떼면 ‘진보’ 운운하면서 그 장엄한 역사의 진보가 북녘 땅에서 이뤄지기를 바라는데 대해 ‘낡은’이란 낙인을 찍는 손 대표가 바로 수구(守舊)다. 누구도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민주화를 예상하지 못했지만 역사는 예상을 뛰어넘어 전진하고 있다. 북한 민주화를 거론하는 것은 자유를 향한 갈망이 인류 보편의 것이고 북한도 예외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손 대표는 ‘풍선에 전단이나 날려 보내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북한 주민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면, 독재정권이 억압하지 못하는 자유 언론을 갖고 있다면, 그래서 중동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안다면 누가 힘들게 전단을 날려 보낼 것인가. 가정에 인터넷이 깔려 있지 않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북한이다. 북한은 전역이 소련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명명한 수용소 군도(群島)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동토와 암흑의 땅에 풍선에 실은 전단으로나마 소식을 전하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손 대표는 논리에도 닿지 않는 비난을 하고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하야 직후 ‘물러날 독재자’를 꼽았을 때 김정일이 1위였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는 2위로 밀렸다. 이런 국제사회의 상식이 손 대표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북한은 최근 입만 열면 ‘핵 참화’ 운운하며 협박을 한다. 북한의 민주화를 위한 열망의 결집이야말로 김정일이 가장 두려워하는 강력한 우리의 무기다. 그런데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북한 민주화 운동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재를 뿌리고 있다.}
서울대는 어제 징계위원회를 열어 제자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의혹을 받고 있는 김인혜 음대 교수를 파면하기로 결정했다. 김 교수는 결정에 불복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교수가 폭행 의혹에 휘말려 파면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서울대는 김 교수가 학생을 자주 구타해 왔다는 진정서를 지난해 말 접수하고 자체적으로 진상 조사를 벌여 왔다.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 교수는 할당된 연주회 티켓을 반밖에 팔지 못했거나 자신이 출연한 공연의 박수소리가 작았다는 이유 등으로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학기당 16회 이상 해야 하는 개인 지도를 한두 번만 하고 모두 이수했다고 기록부에 쓰도록 학생들에게 강요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수업 도중에 김 교수의 입에서 “반주자 나가, 커튼 쳐”라는 말만 나와도 학생들은 공포에 떨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김 교수는 음악계의 엄격한 도제식 교육을 외부에서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오해이며 그 자신도 학창시절 지도교수에게 무섭게 혼나 울었던 기억이 많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김 교수와 같은 지도교수 아래서 공부한 다른 제자 교수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반박했다. 서울대 징계위원회는 “김 교수의 상습적이고 심각한 폭력, 직무 태만, 금품 수수 의혹에 대한 피해 학생들의 주장이 일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서울대는 사회적인 관심이 컸던 김 교수 의혹의 진상 전달을 위해 징계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음대에서 지도교수의 힘은 막강하다. 지도교수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학교 측에 진정서를 내는 것은 음악계를 떠날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이뤄지기 어렵다. 서울대가 진상 조사를 하면서 학생들의 진술을 받을 때도 후환이 두려워 나서지 않으려 했던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른 예술계 대학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당국은 예술계 대학 전반에 비리가 없는지 철저히 점검해 봐야 한다. 대학 캠퍼스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용납할 수 없는 폭력 행위에 대해서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그제 리비아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안보리는 언론발표문을 통해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를 규탄한 지 4일 만에 강도 높은 결의안을 채택했다. 카다피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고 있는 반(反)카다피 시위세력에 국제사회가 정당성을 실어주는 데 의미가 있다. 결의안에는 리비아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와 카다피 일가 및 측근에 대한 해외자산 동결 조치가 포함됐다. 특히 안보리는 카다피의 무자비한 시위진압 행위가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한다고 보고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조사 착수를 요구했다. 유엔 안보리가 특정 국가를 ICC에 회부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만장일치 통과는 처음이다. 리비아의 ICC 회부는 중국 등 일부 이사국이 장차 자국에 영향을 미치는 선례(先例)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시할 정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거부권을 갖고 있는 중국이 막판까지 불분명한 태도를 취했으나 카디피의 40년 친구였던 압둘라흐만 무함마드 샬감 유엔 주재 리비아대사가 나서 제재를 호소하자 결국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은 2005년 수단 다르푸르 분쟁과 관련해 수단을 ICC에 회부해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이 기소됐다. 카다피는 ICC가 조사에 나서면 기소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카다피는 전투기와 미사일을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하고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으로부터 지원받거나 인근 아프리카 나라에서 끌어온 용병들을 풀어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지지자에게는 무기고를 열고 총을 나눠줘 내전으로 몰고 가고 있다. 북한에서도 언젠가 김정일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 김정일이 카다피 못지않게 잔인한 진압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인물임을 고려하면 유엔 안보리의 이번 결의는 북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리비아의 민심은 이미 카다피를 떠났다. 반정부 세력이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를 비롯해 국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무력 시위진압에 항의해 사임한 무스타파 압델 잘릴 전 법무장관은 과도 정부 구성에 나섰다. 일부 군 장성은 수도 트리폴리 공격 계획을 세우고 있다. 리비아 인구 650만 명 가운데 200만 명이 살고 있는 트리폴리는 여전히 카다피의 수중에 있다. 카다피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상황은 전면적 내전으로 치달아 대규모 유혈 사태가 불가피해 보인다. 국제사회가 카다피를 압박하는 공조(共助)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최근 리비아 사태를 보면서 김정일의 일생을 뮤지컬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영국에서 본현대 오페라 ‘카다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려한 전통의상에 여성 보디가드들을 거느리며 유목민 텐트 생활을 즐기는 카다피의기행은 흥미로운 소재였다. 그는 무솔리니와 마이클 잭슨의 캐릭터를 섞어놓은 듯한 래퍼(rapper)로 등장해 북아프리카의 선율로1969년 쿠데타 이후 집권기의 사건들을 노래했다. 나의 상상 뮤지컬 ‘김정일’에서 그는 늘 인민복을 입고다닌다. 의상이 단순하긴 하지만 개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정찰위성을 피해 심야에서 새벽에 걸쳐 활동하는 야행성 생활습관,어릴 적 생모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자란 애정결핍과 이로 인한 여성 집착, 수령의 후계자로 성장한 사람의 무모함과 잔인함….여러모로 극적인 캐릭터의 소유자다. 1막은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1인자의 자리에 올라 건강이 나빠지기전까지의 김정일을 다룬다. ‘친애하는 김정일 지도자 동지’를 위한 북한 여군들의 칼춤 공연으로 막이 오른다. 칼춤은 집체극아리랑에 나오는 안무를 그대로 가져와도 인상적일 것이다. 운동권 통일 가요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정상회담을 갖는다. 두 사람 뒤로 노벨평화상 수상과 은밀한 지하핵실험의 장면이 각자의 숨겨진 마음을 상징하듯 프로젝트 화면으로투사돼 펼쳐진다. 2막은 1994년 이전으로 돌아가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가 직접 만들어김일성 등 혁명 1세대를 감동시켰다는 혁명가극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의 제작 장면이 들어간다. 김정일이 3대 혁명소조를통해 세대교체를 이뤄가는 과정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젊은 부하들이 노동당 군대 행정부를 장악해가는 과정이 랩 음악으로표현된다. 김정일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에 대해 무대 뒤에 숨어 실루엣으로만 비치며 ‘난 모르는 일’이라고 노래한다.3막에서는 2005년 이후의 무절제한 생활과 지병으로 핼쑥해진 노인 김정일이 등장한다.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위해선군정치로 나아가는 과정이 북한 군가의 엄숙한 선율에 실려 묘사된다. 군부와 측근을 향한 통 큰 선물 공세 장면도 들어간다.클라이맥스는 기쁨조를 동원한 심야 파티다. 뇌출혈로 쓰러진 뒤 김정일이 느끼는 초조함이 반라(半裸)에 가까운 옷을 입은 미희들의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술에 취한 김정일의 ‘옷 벗어’라는 외침이 들리고 갑자기 조명이 꺼진다. 그다음은 3대 세습을 허가받기 위해 창춘(長春)으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러 가는 장면이다. 김정일은 관객을등지고 서서 전용열차의 차창 밖으로 펼쳐진 만주벌판을 바라본다. 온갖 상념이 그의 머리를 스쳐간다. 자신은 20년이 넘는 오랜준비 과정을 거쳐 지도자 자리에 올랐는데 아들 정은에게 그런 준비 시간을 주지 못했다. 어설픈 정은을 대형(大兄) 중국이지켜주길 바랄 뿐이다. 김정일의 최후를 다루게 될 마지막 장면은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독재에 저항한봉기가 일어나 김씨 일가는 망명하고 뮤지컬 ‘레미제라블’ 같은 승리의 합창으로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3대 세습의 안착으로 끝난다면최악의 시나리오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처럼 악한이 징벌을 받지 않고 극이 끝나버리는 뮤지컬을 어떤 관객이 보러 올 것인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