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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경남 양산시 천성산 자연습지에서 도롱뇽 알들이 예년과 마찬가지로 부화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11월 KTX 천성산 터널이 완공돼 하루 50차례가량 고속열차가 드나들고 있지만 천성산 습지 군데군데 도롱뇽 알이 눈에 띈다는 양산시 관계자의 전언이다. 터널 공사가 끝난 지는 이미 3년이 지났고 고속열차가 다닌 지도 5개월째로 접어들었다. 현재로서는 늪의 수량이 줄거나 열차 왕래로 진동이 심해 도롱뇽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몇 해 전 천성산 내원사에 거처하던 지율 스님이 터널 공사에 반대해 도롱뇽 살리기를 내걸고 오래 단식을 했다. 2003년 단식 때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공사가 중단됐다. 2004년 그는 환경단체와 함께 낸 이른바 ‘도롱뇽 소송’ 1심에서 지자 다시 단식에 들어갔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수석이 찾아가 무릎 꿇고 사정해 겨우 단식을 풀었고 공사가 또 중단됐다. 2005년에는 100일간 단식을 벌여 장관 의원들이 줄줄이 찾아가 만류했다. 그 후 다시 한번 공사가 중단됐다. 공사가 중단될 때마다 환경영향평가가 새로 실시됐고 그때마다 천성산 자연습지는 터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나왔다. 잦은 공사 중단으로 6개월간 공사가 지연됐다. KTX의 개통이 늦어짐으로써 부산 시민이 입은 사회경제적 손실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개발지상주의도 금물(禁物)이지만 환경근본주의도 위험하다. 지율 스님은 “산(천성산)이 울고 있다고 느꼈고, 산이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래서 당연히 뭇 생명에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고 글을 썼다. 감성의 언어로 호소하는 것도 좋지만 과학적인 환경평가를 통해 내려진 결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도롱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번 봄에 천성산 습지를 찾아가 보기 바란다. 환경근본주의 같은 독선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과 불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천성산 환경논쟁이 남긴 교훈이다.}
‘페니 대학(Penny University)’은 18세기 영국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커피하우스는 커피 값을 안 받는 대신 입장료로 1페니를 받았다. 런던의 시민들이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고 토론을 벌이며 여론을 형성했다. 몽테스키외가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썼듯이 커피하우스를 나올 때면 들어갈 때보다 더 똑똑해진 느낌을 갖는다고 해서 ‘대학’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는 ‘페니 대학’을 상호로 쓰는 커피숍이 많다. ▷당시 1페니가 현재 가치로 얼마쯤 되는지는 따지기 어렵지만 저렴한 가격이었음이 틀림없다. 요즘으로 치면 유로 통화권에서는 1유로, 달러권에서는 1달러, 한국에서는 1000원 정도였을 것이다. 현재 유럽에서 커피 값은 18세기의 1페니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파리의 카페에서 프랑스인이 즐겨 마시는 에스프레소의 한 잔 가격은 1유로에서 1.5유로 정도다. 반면 서울의 커피전문점에서 대체로 가장 싸다는 아메리카노 한 잔의 가격은 3500∼4000원이다. 카페라테만 돼도 4500원 안팎이다. 프랑스보다 2∼3배 비싸다. ▷관세청이 최근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의 원두 수입원가가 123원(세전 기준) 정도라고 밝혔다. 커피전문점의 아메리카노 한 잔 판매가격이 3500∼4000원이니까 원두 수입원가의 30배 안팎이다. 커피전문점이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한국에서 한 끼 밥값은 5000∼7000원이다. 서구에서는 보통 밥값이 커피 값보다 10배 정도 비싸다. 외국인의 눈에 한국은 커피 값이 밥값을 거의 따라잡고 있는 이상한 나라로 비친다. ▷한국에서 커피 값이 유독 비싼 것은 유통구조와 관련이 있다. 다방이 사라지면서 커피전문점이 아니면 커피를 마실 곳이 마땅치 않다. 그 시장을 스타벅스 커피빈 등 외국계 브랜드가 점령해 커피 값을 높였다. 최근에는 카페베네라는 토종브랜드가 약진하고 있지만 토종이라고 값이 싸지는 않다. 늘 마시는 커피는 맛과 함께 값도 중요하다. 생활 물가가 하루가 달리 치솟는 요즘, 호주머니 가벼운 회사원의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맛있고 저렴한 커피를 파는 한국식 커피하우스라도 생겼으면 좋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통성(通聲)기도는 외국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Korean Pray(한국식 기도)’라고 부를 정도로 한국 개신교회의 특징적인 기도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통성기도는 1907년 길선주 목사의 평양 대부흥운동 때 시작됐다. 통성기도는 묵상기도와 달리 소리를 내서 각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통성기도에는 울며 부르짖는다는 느낌이 있다. 당시 교회사를 보면 ‘통성기도 소리가 마치 상가의 곡성(哭聲) 같았다’는 표현도 남아 있다.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그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무릎 꿇고 통성기도를 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길자연 대표회장 목사가 기도회를 인도하던 중 갑자기 제안한 것이라 피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윤옥 여사가 먼저 무릎을 꿇으면서 이 대통령의 허벅지를 찔렀고 이 대통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무릎을 꿇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 등 많은 참석자도 식탁 옆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1968년 첫 모임 이래 박정희 등 모든 역대 대통령이 거의 매년 참석한 국가조찬기도회이지만 무릎 꿇고 기도한 것은 이 대통령이 처음이다. ▷개신교회 중에는 통성기도를 공식 예배에서 허용하지 않는 곳도 적지 않다. 통성기도를 받아들이는 교회라도 보통 앉아서 한다. 국가조찬기도회는 개신교가 주도하는 행사지만 순수한 예배와 달리 공식 의전의 성격이 강하다. 이런 자리에서 길 목사가 대통령 등 주요 정치인을 상대로 무릎을 꿇는 통성기도를 유도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온다. 기독교 신자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혹은 다니던 교회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신중했어야 한다. 이 대통령의 기도 사진이 나간 후 불교단체들이 즉각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국가조찬기도회는 본래 개신교 전통이 내려오는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다. 그런 미국에서 신앙심이 각별하다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무릎 꿇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우리나라는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다(多)종교 국가다. 그렇지 않아도 이 정부 들어 불교계에서 ‘종교 편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최근에는 이슬람채권법(수쿠크법)으로 개신교계 일각에서 반발이 일었다. 다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나라의 전통을 살려가기 위해 모든 종교인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어제 라디오 연설에서 “사유화한 공권력으로 시민을 유린하던 바로 그 세력이 중동의 민주화 물결을 빙자해 북한의 민주주의를 거론한다면 이는 낡은 이념의 질곡으로, 민주주의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말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민주화 시위 소식을 들으면서 지척에 있는 북한의 민주화를 떠올리는 것은 우리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의 염원 속에는 북에도 민주화가 찾아와 동포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소박한 꿈이 담겨 있다. 이를 두고 ‘사유화된 공권력으로 시민을 유린하던 세력’의 ‘나쁜 생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국민 모욕이다. ‘북한 민주화 거론은 낡은 이념’이라는 말도 이해하기 어렵다. 자유를 향한 갈망이 낡은 것인가.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민주화를 보면서 “세계사는 한 사람(왕이나 독재자)의 자유로부터 모든 사람의 자유로 나가는 것”이라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떠올린다. 입만 떼면 ‘진보’ 운운하면서 그 장엄한 역사의 진보가 북녘 땅에서 이뤄지기를 바라는데 대해 ‘낡은’이란 낙인을 찍는 손 대표가 바로 수구(守舊)다. 누구도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민주화를 예상하지 못했지만 역사는 예상을 뛰어넘어 전진하고 있다. 북한 민주화를 거론하는 것은 자유를 향한 갈망이 인류 보편의 것이고 북한도 예외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손 대표는 ‘풍선에 전단이나 날려 보내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북한 주민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면, 독재정권이 억압하지 못하는 자유 언론을 갖고 있다면, 그래서 중동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안다면 누가 힘들게 전단을 날려 보낼 것인가. 가정에 인터넷이 깔려 있지 않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북한이다. 북한은 전역이 소련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명명한 수용소 군도(群島)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동토와 암흑의 땅에 풍선에 실은 전단으로나마 소식을 전하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손 대표는 논리에도 닿지 않는 비난을 하고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하야 직후 ‘물러날 독재자’를 꼽았을 때 김정일이 1위였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는 2위로 밀렸다. 이런 국제사회의 상식이 손 대표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북한은 최근 입만 열면 ‘핵 참화’ 운운하며 협박을 한다. 북한의 민주화를 위한 열망의 결집이야말로 김정일이 가장 두려워하는 강력한 우리의 무기다. 그런데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북한 민주화 운동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재를 뿌리고 있다.}
서울대는 어제 징계위원회를 열어 제자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의혹을 받고 있는 김인혜 음대 교수를 파면하기로 결정했다. 김 교수는 결정에 불복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교수가 폭행 의혹에 휘말려 파면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서울대는 김 교수가 학생을 자주 구타해 왔다는 진정서를 지난해 말 접수하고 자체적으로 진상 조사를 벌여 왔다.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 교수는 할당된 연주회 티켓을 반밖에 팔지 못했거나 자신이 출연한 공연의 박수소리가 작았다는 이유 등으로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학기당 16회 이상 해야 하는 개인 지도를 한두 번만 하고 모두 이수했다고 기록부에 쓰도록 학생들에게 강요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수업 도중에 김 교수의 입에서 “반주자 나가, 커튼 쳐”라는 말만 나와도 학생들은 공포에 떨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김 교수는 음악계의 엄격한 도제식 교육을 외부에서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오해이며 그 자신도 학창시절 지도교수에게 무섭게 혼나 울었던 기억이 많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김 교수와 같은 지도교수 아래서 공부한 다른 제자 교수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반박했다. 서울대 징계위원회는 “김 교수의 상습적이고 심각한 폭력, 직무 태만, 금품 수수 의혹에 대한 피해 학생들의 주장이 일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서울대는 사회적인 관심이 컸던 김 교수 의혹의 진상 전달을 위해 징계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음대에서 지도교수의 힘은 막강하다. 지도교수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학교 측에 진정서를 내는 것은 음악계를 떠날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이뤄지기 어렵다. 서울대가 진상 조사를 하면서 학생들의 진술을 받을 때도 후환이 두려워 나서지 않으려 했던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른 예술계 대학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당국은 예술계 대학 전반에 비리가 없는지 철저히 점검해 봐야 한다. 대학 캠퍼스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용납할 수 없는 폭력 행위에 대해서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그제 리비아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안보리는 언론발표문을 통해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를 규탄한 지 4일 만에 강도 높은 결의안을 채택했다. 카다피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고 있는 반(反)카다피 시위세력에 국제사회가 정당성을 실어주는 데 의미가 있다. 결의안에는 리비아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와 카다피 일가 및 측근에 대한 해외자산 동결 조치가 포함됐다. 특히 안보리는 카다피의 무자비한 시위진압 행위가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한다고 보고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조사 착수를 요구했다. 유엔 안보리가 특정 국가를 ICC에 회부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만장일치 통과는 처음이다. 리비아의 ICC 회부는 중국 등 일부 이사국이 장차 자국에 영향을 미치는 선례(先例)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시할 정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거부권을 갖고 있는 중국이 막판까지 불분명한 태도를 취했으나 카디피의 40년 친구였던 압둘라흐만 무함마드 샬감 유엔 주재 리비아대사가 나서 제재를 호소하자 결국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은 2005년 수단 다르푸르 분쟁과 관련해 수단을 ICC에 회부해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이 기소됐다. 카다피는 ICC가 조사에 나서면 기소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카다피는 전투기와 미사일을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하고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으로부터 지원받거나 인근 아프리카 나라에서 끌어온 용병들을 풀어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지지자에게는 무기고를 열고 총을 나눠줘 내전으로 몰고 가고 있다. 북한에서도 언젠가 김정일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 김정일이 카다피 못지않게 잔인한 진압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인물임을 고려하면 유엔 안보리의 이번 결의는 북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리비아의 민심은 이미 카다피를 떠났다. 반정부 세력이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를 비롯해 국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무력 시위진압에 항의해 사임한 무스타파 압델 잘릴 전 법무장관은 과도 정부 구성에 나섰다. 일부 군 장성은 수도 트리폴리 공격 계획을 세우고 있다. 리비아 인구 650만 명 가운데 200만 명이 살고 있는 트리폴리는 여전히 카다피의 수중에 있다. 카다피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상황은 전면적 내전으로 치달아 대규모 유혈 사태가 불가피해 보인다. 국제사회가 카다피를 압박하는 공조(共助)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최근 리비아 사태를 보면서 김정일의 일생을 뮤지컬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영국에서 본현대 오페라 ‘카다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려한 전통의상에 여성 보디가드들을 거느리며 유목민 텐트 생활을 즐기는 카다피의기행은 흥미로운 소재였다. 그는 무솔리니와 마이클 잭슨의 캐릭터를 섞어놓은 듯한 래퍼(rapper)로 등장해 북아프리카의 선율로1969년 쿠데타 이후 집권기의 사건들을 노래했다. 나의 상상 뮤지컬 ‘김정일’에서 그는 늘 인민복을 입고다닌다. 의상이 단순하긴 하지만 개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정찰위성을 피해 심야에서 새벽에 걸쳐 활동하는 야행성 생활습관,어릴 적 생모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자란 애정결핍과 이로 인한 여성 집착, 수령의 후계자로 성장한 사람의 무모함과 잔인함….여러모로 극적인 캐릭터의 소유자다. 1막은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1인자의 자리에 올라 건강이 나빠지기전까지의 김정일을 다룬다. ‘친애하는 김정일 지도자 동지’를 위한 북한 여군들의 칼춤 공연으로 막이 오른다. 칼춤은 집체극아리랑에 나오는 안무를 그대로 가져와도 인상적일 것이다. 운동권 통일 가요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정상회담을 갖는다. 두 사람 뒤로 노벨평화상 수상과 은밀한 지하핵실험의 장면이 각자의 숨겨진 마음을 상징하듯 프로젝트 화면으로투사돼 펼쳐진다. 2막은 1994년 이전으로 돌아가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가 직접 만들어김일성 등 혁명 1세대를 감동시켰다는 혁명가극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의 제작 장면이 들어간다. 김정일이 3대 혁명소조를통해 세대교체를 이뤄가는 과정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젊은 부하들이 노동당 군대 행정부를 장악해가는 과정이 랩 음악으로표현된다. 김정일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에 대해 무대 뒤에 숨어 실루엣으로만 비치며 ‘난 모르는 일’이라고 노래한다.3막에서는 2005년 이후의 무절제한 생활과 지병으로 핼쑥해진 노인 김정일이 등장한다.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위해선군정치로 나아가는 과정이 북한 군가의 엄숙한 선율에 실려 묘사된다. 군부와 측근을 향한 통 큰 선물 공세 장면도 들어간다.클라이맥스는 기쁨조를 동원한 심야 파티다. 뇌출혈로 쓰러진 뒤 김정일이 느끼는 초조함이 반라(半裸)에 가까운 옷을 입은 미희들의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술에 취한 김정일의 ‘옷 벗어’라는 외침이 들리고 갑자기 조명이 꺼진다. 그다음은 3대 세습을 허가받기 위해 창춘(長春)으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러 가는 장면이다. 김정일은 관객을등지고 서서 전용열차의 차창 밖으로 펼쳐진 만주벌판을 바라본다. 온갖 상념이 그의 머리를 스쳐간다. 자신은 20년이 넘는 오랜준비 과정을 거쳐 지도자 자리에 올랐는데 아들 정은에게 그런 준비 시간을 주지 못했다. 어설픈 정은을 대형(大兄) 중국이지켜주길 바랄 뿐이다. 김정일의 최후를 다루게 될 마지막 장면은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독재에 저항한봉기가 일어나 김씨 일가는 망명하고 뮤지컬 ‘레미제라블’ 같은 승리의 합창으로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3대 세습의 안착으로 끝난다면최악의 시나리오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처럼 악한이 징벌을 받지 않고 극이 끝나버리는 뮤지컬을 어떤 관객이 보러 올 것인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튀니지 이집트에 이어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독재정권이 벼랑 끝에 몰렸다. 북아프리카·중동에서 리비아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예상이 깨지기 일보 직전이다. 기대를 뛰어넘는 역사의 진행을 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의 민주화 물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전후(戰後) 식민지의 독립 물결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휩쓸었고 1989년과 1990년 동유럽 공산정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그리고 오늘날 민주화 무풍(無風)지대로 불리던 북아프리카·중동의 독재국가들이 재스민 혁명에 나가떨어지고 있다. 민주화의 파장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공산당 일당(一黨)독재국가 중국에도 몰려왔다. 그제 베이징과 상하이 도심에서 돌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몇몇이 흰 재스민 꽃을 뿌리며 민주화를 외쳤다. 혁명의 꽃이 된 재스민은 튀니지의 국화(國花)로 북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유라시아 벌판을 가로질러 핀다. 중국에서는 모리화(茉莉花)로 불리며 사랑받는다. 지난해 류샤오보(劉曉波)의 노벨 평화상 궐석 수상식에서 중국의 전통가요 ‘모리화’가 바이올린으로 연주됐다. 리비아는 카다피 국가원수에 대한 우상화로 악명이 높다. 어딜 가나 카다피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반정부 시위를 벌이다가는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민주화의 풍토가 튀니지 이집트보다 더 척박한 나라다. 카다피가 42년간 집권한 리비아가 무너진다면 세계의 눈은 가장 악질적인 형태의 수령독재 국가 북한에 쏠릴 것이다. 리비아도 우상화나 압제 수준에서 북한에는 비할 바 못된다. 리비아에서는 많은 주민이 인터넷에 접속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활발하다. 북한에는 인터넷이 철저히 통제되고 SNS도 없다. 그러나 북한도 정보화가 촉발하는 혁명의 물결을 보며 긴장했는지 최근 관영 매체들이 때 아닌 인터넷 비판에 나서고 있다. 극우 군사독재 정권이든, 공산독재 정권이든 외견상 견고해보이던 독재체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세계인은 수없이 지켜봤다. 독재정권이 총칼로 국민의 입을 틀어막고 있지만 정보화로 연결된 민의(民意)가 공포와 침묵을 깨뜨린다. 카다피 정권의 유혈진압에도 불구하고 리비아 국민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모든 정치 체제의 종착역은 민주주의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사의 흐름은 김정일 독재도 결국 시한부임을 일깨워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등 일부 개신교계 대표가 그제 한나라당을 방문해 이슬람채권법 반대 의사를 전했다. 한기총은 찬성 의원에 대한 낙선운동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슬람채권(수쿠크)에 대한 한기총의 반응은 지나치다. 수쿠크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문제다. 수쿠크는 이자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자 대신 배당금을 받으니 결국 마찬가지다. 투자를 유치하려는 한국으로서는 여러 금융 조달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한기총은 수쿠크 수입의 2.5%가 자카트라는 이름으로 자선단체에 기부되고 그 돈이 테러단체에 흘러갈 가능성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러나 자카트는 석유수출 등 다른 경제행위에도 똑같이 부과된다. 자카트가 겁나면 아예 중동 국가와 거래를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외화채권과 비교하면 수쿠크에 과도한 면세 혜택을 준다는 주장도 과장됐다. 영국과 비교해보면 영국은 외화표시 채권에 과세하는 나라여서 외화표시 채권에 비과세하는 우리보다 혜택을 적게 주는 것처럼 보일뿐 면세 범위는 비슷하다. 수쿠크가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와 관련이 있다는 관측도 있다. 정부가 2월 국회에서 시급히 처리해달라고 요청한 입법순위 1위가 이슬람채권 법안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 말이 맞다면 정부는 떳떳이 밝히고 양해를 구하라. 원전 수출은 원자로만 파는 것이 아니라 금융을 포함한 패키지(package) 수출이다. 은행 규모에서 일본에 뒤지는 한국으로서는 원전 수입국에 제시하는 금융지원에서 경쟁력을 높일 다양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물론 수쿠크에 전혀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쿠크에는 국내법보다 샤리아가 우선한다. 이슬람 율법학자로 구성된 위원회의 회수결정이라는 경제외적 변수에 의해 계약이 파기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는 감수해야 할 투자 위험이다. 수쿠크 발행은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의 관점에서 예상되는 손익을 비교해 결정할 일이다. 기독교 전통이 강한 서구 국가에서도 수쿠크가 종교적 이유로 거부됐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일부 개신교회와 선교단체는 이슬람 국가에서 무모한 선교로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어떤 종교든 이슬람 근본주의처럼 타 종교를 무조건 배척하는 신앙은 옳지 않다. 매사 정도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과 같다.}
소설가 김영하가 그제 블로그와 트위터에서의 글쓰기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모 신문이 지난달 28일 사망한 32세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굶어죽은 것처럼 보도한 것이 발단이었다. ‘지금이 어느 땐데 젊은 사람이 굶어죽나’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보도였으나 기정사실화하면서 예술인의 생활고를 동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예술가의 밥은 누가 책임질 것이냐는 논쟁도 일었다. 김영하는 ‘당분간’이라는 전제하에 예술가 자신의 책임을 주장했다가 논란이 되자 인터넷 절필(絶筆)을 선언했다. ▷최 씨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던 시절 이 학교 교수였던 김영하는 최 씨의 죽음이 아사(餓死)가 아니었다는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최 씨가 굶어죽었다고 믿고 있는데 놀랐다”면서 “직접 사인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갑상샘기능항진증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발작이었다고 고인의 마지막을 수습한 친구들로부터 들었다”고 썼다. 그는 “최 씨는 재능 있는 작가였으며 어리석고 무책임하게 자존심 하나만으로 버티다 간 무능한 작가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최 씨의 죽음을 ‘아사’로 키우고 싶은 매체들은 야단이 났다. 일부 정치인 장관들도 이런 분위기에 영합했다.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예술인 복지법’ 제정을 운운하며 과잉 반응했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최 씨가 죽어가면서 남겼다는 글을 인용해 “그곳에선 남은 밥과 김치가 부족하진 않나요”라는 애도의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그러나 애초 보도와 달리 뒤늦게 공개된 최 씨의 쪽지에는 ‘남은 밥’이란 표현은 없었다. 경찰은 최 씨의 사인은 부검 결과 아사가 아니라고 밝혔다. ▷김영하는 “최 씨를 예술의 순교자로 만드는 것도, 아르바이트 하나도 안 한 무책임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도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 할 양극단이다”라고 말했다. 작가는 거짓과 싸우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쉽게 진실이라고 혹은 올바르다고 믿어버리는 것까지 의심할 때 작가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한도 아닐진대 ‘아사’라는 표현을 쓰려면 신중해야 한다. 어쨌거나 최 씨는 직접적인 사인과 관계없이 곤궁한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일깨우고 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제2의 마돈나로 불리는 레이디 가가(25)가 어제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팝 보컬 앨범상과 최우수 여성 팝 보컬 퍼포먼스상을 받았다. 음악과 공연 모두에서 최고라는 평가다. 그는 2009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신인상을 받은 뒤 지난해 빌보드가 선정하는 올해의 아티스트가 됐다. 이번 수상으로 일약 세계 최고의 여가수로 떠오른 느낌이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가 올해부터 ‘레이디 가가와 명성(名聲)의 사회학’이란 정규 강의를 개설한다고 보도했다. ▷그는 지난해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 정육점 생고기를 덕지덕지 붙인 엽기적인 의상을 입고 나왔다. 동물보호협회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은 이 의상은 현대 미술의 한 조류를 형성한 ‘YBA(Young British Artists·영국의 젊은 미술가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레이디 가가는 뉴욕대 티시예술학교에 다닐 때 YBA의 대표주자인 데미안 허스트와 스펜서 튜닉을 주제로 한 80쪽짜리 논문을 썼다. 그는 작곡 솜씨도 뛰어나 직접 쓴 곡이 많다. ▷레이디 가가의 본명은 스테파니 조안 저마노타. 그는 미국의 평범한 이탈리아계 가정에서 자랐고 얼굴이 예쁜 것도, 몸매가 매력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중고교 때 남자 아이들을 쫓아다녔지만 “항상 남자 아이들 주변에서 루저(loser)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레이디 가가는 자신의 본명을 딴 ‘스테파니 저마노타 밴드’라는 이름으로 처음 가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검은 머리칼, 두꺼운 눈 화장, 꽉 끼는 의상’을 한 전형적인 3류 가수의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 노란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심한 노출 의상을 즐겨 입는다. 그에게는 남성 팬보다 여성 팬이 많다. 팬들은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변신한 그를 좋아한다. ‘나도 레이디 가가처럼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레이디 가가는 심한 노출을 할 때도 요염하기보다는 파격적이다. 그는 댄스 가수가 아니라 행위예술가가 되고자 한다. 가수가 공연을 한다기보다 행위예술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가 음악에 가져온 변화다. 그는 “음악을 만들 때 내가 무대에서 입을 옷을 먼저 떠올린다”고 말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30년 독재의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결국 하야했다. 전 세계가 무바라크의 퇴진을 이집트 국민과 함께 반기는 동안 자국민의 눈과 귀를 막으려는 독재국가들도 있다. 예멘 알제리 등 아랍 국가와 동북아의 두 나라 중국과 북한이다. 중국을 일당(一黨) 지배하고 있는 공산당과 정부는 이집트 시민혁명에 관한 보도를 철저히 통제한다. 인터넷에서 튀니지나 이집트라는 국가 이름만 나오면 정보가 뜨지 않는다. 북한 김정일 정권은 중동의 민주화 상황을 2400만 주민이 알지 못하게 보도와 통신을 봉쇄하고 있다. 이집트 민주화는 정권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넘어가지 않는 한 일대 문명사적 성취로 기록될 것이다. 18일간 평화시위가 처음 시작됐을 때만 해도 이집트는 1989년과 1990년의 동유럽 공산독재정권 붕괴 도미노 상황과 다르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다. 동유럽에는 그래도 공산화 이전에 시민사회가 형성됐던 전통이 있었지만 코란을 외우고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무슬림 국가가 민주화 혁명에 성공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많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유로부터 모든 사람의 자유로 나아가는 세계사의 도도한 진전은 아랍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20여 년 전 민주화운동은 동유럽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 전체에 동요를 몰고 왔다. 1989년 중국에서 발생한 6·4톈안먼(天安門) 사태도 민주화 시위였다. 중국 공산당은 총과 탱크로 톈안먼 사태를 진압한 이후 민주화의 싹을 자르면서 일당지배의 영속화를 꾀했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중국이 언제까지나 현재의 정치체제를 지속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중국 지배세력은 중동 민주화 같은 변화에 주목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북한에 대한 일방적 비호를 끝내는 것이 세계 문명사의 흐름을 따르는 길이며 자국의 미래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한은 모레 김정일의 69회 생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김정일의 생일은 김일성 생일(4월 15일)과 함께 북한의 최대 명절이다. 죽은 아버지와 그 아들의 생일이 국가 명절이고 또 그 손자에게 권력을 이양하려는 황당무계한 세습왕조가 21세기 한반도 한편에 존재한다는 것은 한민족의 수치다. 프랑스혁명을 거쳐 최초의 민주화 파고가 유럽을 휩쓴 이후 자유는 늘 예상을 뛰어넘어 전진했다. 1989년 철의 장막 붕괴도 예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2011년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건재하던 튀니지와 이집트의 독재정권이 불과 한 달 새 무너졌다. 민주화는 인류사(史)의 필연이다.}
이집트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독재가 저물고 있다. 그가 하야를 계속 거부해도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할 처지다. 이집트는 독재 국가이긴 했지만 국민은 위성 TV, 휴대전화,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웃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 자극받은 이집트 국민은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통해 시위를 효과적으로 조직했다. 북한 주민은 외국 미디어에 접근할 수 없다. 북한에서 대중이 사용하는 컴퓨터는 인터넷에 연결돼 있지 않다. 휴대전화는 당성이 확실한 사람들에게만 보급돼 있다. 이집트는 독재 치하임에도 무슬림형제단이라는 반정부 세력이 존재한다. 북한에선 우발적 봉기가 일어나도 저항을 끌어갈 세력이 없다. 반공세력은 광복과 6·25전쟁 전후로 거의 월남했다. 김일성 김정일은 잔인한 숙청으로 저항의 싹을 잘랐다. 그렇다고 북한에서 봉기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1990년 동유럽을 휩쓴 민주화 도미노는 휴대전화나 인터넷과는 관련 없다. 북한에는 장마당 소식이라는 게 있다. 김정일 정권은 2009년 1월 장마당을 폐쇄했다가 5개월 만에 다시 허용했다. 배급체계가 붕괴된 상황에서 장마당을 없앨 수는 없었다. 휴대전화도 보급률이 1%에 불과하지만 30만 대나 된다. 최근 이집트 반정부 시위 소식도 휴대전화를 통해 엘리트 집단에 퍼졌다고 한다. 국가안전보위부의 통제 속에서도 주민은 중국을 통해 반입된 한국 DVD나 비디오테이프를 시청한다. 이집트와 북한 정권은 모두 군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군 출신이지만 민심이 대통령을 떠나자 군은 중립으로 돌아서 시위 군중이 탱크에 올라도 저지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외치고 북한 군부는 체제를 지키는 강성 세력이지만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는 시점에서 들려온 이집트 소식에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북한 군부가 언제까지나 김정일 김정은 부자에게 충성하란 법은 없다. 북한은 자기개혁에 실패한 나라다. 소련에는 개혁 개방에 나선 고르바초프가 있었다. 중국에도 실용주의 개혁을 선도한 덩샤오핑(鄧小平)이 있었다. 북한은 개혁은커녕 군사모험주의로 나간다. 이런 체제는 오래 지속될 수도 없고 오래 가게 해서도 안 된다. 휴대전화 인터넷이 없으면 단파 라디오를 쏘고 전단을 날려서라도 자유세계의 소식을 퍼뜨려야 한다. 헤겔의 말을 빌리면 세계사는 자유 확산의 역사다. 이집트처럼 북한도 자유의 전진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지는 날이 올 것이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은 이라크와 테러리스트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고 “내가 안다는 걸 아는 것(known knowns)이 있고 내가 모른다는 걸 아는 것(known unknowns)이 있다. 또 내가 모른다는 것도 모르는 것(unknown unknowns)이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철학자의 말처럼 꼬여있지만 복잡한 사안을 명쾌하게 정리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가 그제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Known and Unknown)’이란 회고록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그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한국인의 ‘역사적 기억상실증’을 꼬집었다. 2003년 방한 때 한 한국 여기자로부터 “왜 한국 젊은이들이 지구 반대편 이라크로 가서 죽고 다쳐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50여 년 전 미국이 자기 나라의 젊은이들을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한국은 어떻게 됐을까”라고 되물었다고 했다. 그의 국방부 집무실 책상에는 한반도 야간 위성사진이 놓여 있었다. 남한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북한은 암흑천지인 사진이다. ▷그는 2002년 12월 당시 노 대통령 당선자가 한미 관계를 재검토하기를 원한다고 언급하자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미 국방부에 지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이 국방비를 더 많이 분담하기를 원하던 그는 뒷날 노 대통령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을 넘기라는 요구를 받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미제(美帝)’의 고리를 끊는다고 한 일이 그쪽에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청하지는 못하나 바라는 바)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노 대통령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이제 고인이라 물어볼 수도 없다. ▷럼즈펠드는 중국이 포함된 6자회담은 실패할 것으로 보고 대북 압박을 통한 김정일 체제의 전복을 구상했다. 조지 W 부시 정권 말기로 접어들면서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국방부가 관여할 통로가 봉쇄되고 국무부 협상론자가 주도권을 잡은 것이 아쉽다고 회고했다. 럼즈펠드의 분류에 ‘모른다고 했지만 실제로 아는 것(unknown knowns)’을 보탤 수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크리스토퍼 힐 등 협상론자 역시 중국이 북한 편을 들어 6자회담이 실패할 걸 알았겠지만 애써 모른 척해버린 것인지 모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는 1908년 둔황 석굴 고문서에서 책명도 저자도 알 수 없는 필사본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신라 고승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펠리오 자신은 “법현의 ‘불국기’ 같은 문학적 가치도 없고 현장의 ‘대당서역기’ 같은 정밀한 서술도 없다”며 이 책의 가치를 폄하했다지만 많은 학자는 8세기 인도의 사정을 전한 이 책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설 연휴 첫날인 2일 ‘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유물을 관람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 불교 역사에 혜초 스님 같은 분이 계셨다는 것은 대단하고 위대한 일”이라며 “자랑스럽고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바쁜 대통령이 전시장을 직접 찾은 것은 부처님 오신 날에 축하 글 하나 보내는 것과는 다른 정성이 들어있다. 혜초에 대한 발언에서는 불교를 향한 친근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이명박 대통령처럼 개신교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머니가 다녔던 삼각산 문수사를 자주 찾았다. 비구승 중심으로 불교를 재편한 정화운동도 그의 지원이 없었으면 생각하기 힘들다. 해인사에 걸린 ‘해인대도량(海印大道場)’이란 현판을 써 준 것도 그였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서울 봉헌’ 발언이 반발을 일으켰고 대통령 취임 후 소망교회 교인이 포함된 이른바 ‘고소영’ 인사로 구설에 올랐다. 그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정부 교통정보시스템의 사찰 정보 누락, 여당의 ‘템플스테이’ 예산 삭감 등도 불교계의 불만을 샀다. 이 대통령의 ‘왕오천축국전 친견(親見)’은 그래서 눈길을 끈다. ▷한국 불교의 유산은 종교이기 이전에 전통문화의 한 부분이다. 신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유학하고 인도를 다녀온 혜초는 불교 승려이기 이전에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 불릴 만하다. ‘왕오천축국전’에는 고향을 그리는 혜초의 시가 나온다.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이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일남(日南·중국의 남쪽)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경주)으로 날아가리.’ 고향이 그토록 그리웠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혜초의 ‘1300년 만의 귀향’을 우리 대통령이 찾아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960년 4월 19일, 이날 하루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했다.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한 건 경찰이었다. 시위대가 경무대로 향해오자 다급해진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을 동원했다. 계엄사령관이던 송요찬 장군은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시민은 이런 군을 환영하고 진주한 탱크에 올라타 구호를 외쳤다. 어느 나라에서나 진압군 탱크에 시민이 올라가 만세를 부르는 상황이 오면 아무리 강한 독재정권도 유지될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1주일 뒤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집트에서 장기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통행금지가 선포되고 군대가 배치됐는데도 시위대의 성난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시위대가 탱크를 앞에 두고 기도를 올리고 탱크에 올라 정부를 비판하는 글씨를 써도 군인들은 저지하지 않았다. 한 군인은 시위대를 향해 “우리 역시 여러분처럼 사랑하는 나라를 위해 복무한다”라고 소리쳤다. 시위대가 탱크에 올라서면서 이집트의 민주화는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옛 소련과 중국의 민주화는 탱크 앞에서 갈렸다. 1991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연방의사당 건물 앞에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 탱크 위에 올라가 공산당 강경보수파의 쿠데타가 무효임을 선언했다. 러시아의 공산주의로의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1989년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국가주석은 6·4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의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광장에 진입하는 탱크 앞을 한 청년이 홀로 막아섰지만 무력했고, 중국의 민주화는 좌절됐다. ▷근대 국가의 군대는 국민의 군대다. 과거 왕국의 군대는 돈벌이가 목적인 용병이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왕궁으로 폭도들이 난입했을 때 끝까지 자리를 지킨 위병은 스위스 용병이었다. 혁명 이후에야 시민의 의무로서 군인이 되는 시민군이 만들어졌고 왕국(royaume)은 국민국가(nation)가 됐다. 국민국가의 군대는 적국을 향해 총을 쏠지언정 국민을 향해 안으로 총을 겨누지 않는다. 군심(軍心)이 민심(民心)이 될 때 독재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영국 역사학자 E H 카의 유명한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말이다. 올해는 이 책이 나온 지 50년이 되는 해다. 카는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행한 강연을 엮어 그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한국에는 1966년 처음 번역됐고 1970, 80년대 대학생에게는 필독서였다. ▷카는 외교관 출신으로 1941∼46년 영국의 일간지 더타임스의 부편집인을 지냈다. 지금은 보수신문인 더타임스가 당시는 카의 친(親)소련적인 사설 덕분에 큰 인기를 누렸다. 그의 생각은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전체주의로 향하는 것은 당연하며 마르크시즘은 소련의 경제 성장에서 증명됐듯 전체주의의 가장 성공적인 형태”인 것으로 요약된다. 제2차 세계대전 전 대독(對獨) 유화정책의 지지자였던 그는 히틀러를 베르사유조약에 희생된 독일을 구하려는 정치인으로 보기도 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카가 충성의 대상을 히틀러에서 스탈린으로 바꿨다”고 비꼰 바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사실 그 자체로’로 요약되는 레오폴트 폰 랑케의 실증사관을 반박하고 미래에의 전망을 가지고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보는 것이 역사라고 가르친다. 방점은 과거보다 미래와 현재에 찍혀 있다. 그가 가르친 전망과 관점은 책에서 ‘진보’라는 훌륭하지만 막연한 말로 표현되는데, 그의 생애에서 이 ‘진보’는 한때는 히틀러였고 한때는 스탈린이었다. 문제는 이 책만 읽고 있으면 그의 구체적 역사 인식이 그랬다는 것을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1980년대 ‘역사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많이 읽힌 책이 한국사의 인식을 친(親)북한 반(反)남한으로 바꿔놓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다. 카에게 역사의 인물은 ‘진보(progressive)’ 아니면 ‘반동(reactionary)’으로 분류된다. 좌우라는 개념조차 그에게 너무 중립적이다. 그런 점에서 정신의 결도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많이 닮았다. 그러나 카의 사례처럼 진보가 역사에서는 반동으로 드러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 한국 사회도 카에게 ‘굿바이’를 고할 때가 됐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진보당 당수였던 죽산 조봉암(1898∼1959)이 최근 대법원 판결로 52년 전의 간첩 누명을 벗었다는 소식에 본사 자료실에보관된 옛 동아일보를 뒤져봤다. 1959년 8월 1일자 사회면 머리기사는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상황을 안타깝게 전했다.“조봉암은 머리를 산듯하게 가다듬고는 평소에 입던 바지저고리에 흰고무신을 신고 가슴에 ‘2010’이란 번호를 붙인 채 11시45분 형장에 도착! 태연한 모습으로 묵묵히 다음 순간이면 이 세상과는 아주 영영 이별해야만 되는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 양 손은묶인 채 창백해진 얼굴로… 이윽고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는 유언 권유에 ‘별로 할 말은 없고 다만 이 세상에서 고루잘살려고 한 짓인데…’ 차츰차츰 자신의 운명의 시간이 닥쳐오는 것을 그래도 초조하게 여긴 조봉암은 집행관에게 최후의 한마디로‘술 한 잔과 담배 한 대만 주시오.’ 떨리지 않은 음성, 그리고 거친 숨소리도 아닌 사형수의 요청이었으나 규정에 의해 술 한잔과 담배 한 대는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유족 표정’을 다룬 기사에는 “아버지의 사형집행을 전해들은 딸 호정씨가 놀라면서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에 싸인 채 기자에게 ‘그게 정말이냐’고 한 번 두 번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던 것이었다”는내용도 있었다. 수백 명의 군중이 그날 조봉암의 시신을 보기 위해 서대문형무소 앞으로 몰려들었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런 보도에 민감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장은 다음 날 신문사 보도국장 앞으로 편지를 보내 사형수에 대한 기사는법에 저촉되고 민심을 자극한다며 쓰지 말 것을 주문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언론 자유의 침해라고 비판하며 맞섰다.사형집행 5개월 전인 1959년 2월 27일자 동아일보는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 대법원 최종판결을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을통해 ‘판결이 자본주의체제의 지양(止揚)과 사회주의체제의 확립을 주장하는 진보당이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평가했다. 조봉암이 북한 돈을 받은 혐의로 간첩죄가 적용된 데 대해 비판이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오늘의 대법원은 그증거가 강압에 의해 수집됐다고 봤다. 판결의 근거가 되는 증거 수집 과정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신문의 한계다. 다시 시계를 그 8개월 전으로 돌려 1958년 7월 3일자. 1심 판결 기사가 나왔다.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이선고됐으나 간첩죄는 인정되지 않았다. 판결의 파장은 컸다. 이른바 반공청년들은 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법원청사에 난입해“친공(親共)판사 없애라”며 난동을 부렸다. 당시 동아일보 사설은 두 차례에 걸쳐 ‘판결반대 데모 주모자를 엄단하라’ ‘비호받는불법’이라는 제목으로 반공청년과 이들을 비호하는 경찰을 비판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동아일보는조봉암에게 유리했던 1심 판결이나, 불리했던 최종 판결에 구애받지 않고 선입견 없이 실체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사법부는 인권의최후 보루다. 그런데 그 ‘성소(聖所)’에서 독재자의 정적 제거를 용인해주었다. 그게 50년 전 대법원이건, 오늘의 대법원이건국민 앞에 법원은 하나인데 오늘날 대법원은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자랑할 뿐 누구 하나 역사 앞에 진실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않는다. 또 50년쯤 후 많은 북한의 자료가 공개되고, 그래서 오늘날의 어떤 대법원 판결들이 다시 조롱받는 일은 없어야겠다.나는 대법원을 믿고 싶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고참들의 기수와 이름을 제한시간 안에 외워야 한다고 명령해놓고 지키지 못하면 구타를 했다.” “이름 대신 욕설로 부르면서 관등성명을 대도록 했다.” 강원지방경찰청 소속 307전경대를 집단 이탈한 신참 동기생 6명이 이런 가혹행위를 폭로한 뒤 복귀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청이 10일 ‘가혹행위 근절 고강도 대책’을 밝힌 지 2주 만에 일어난 일이다. 307전경대 신참 6명은 전경버스 안에서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붙이지 못한 채 정면만 바라보는 일명 ‘잠깨스’라는 부당한 얼차려도 수시로 받았다. 그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또 매를 맞았다. 이 전경대는 2005년 6월 알몸신고식 사진 인터넷 유포와 같은 해 7월 전경 3명의 잇단 탈영으로 물의를 빚어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조사를 받고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이니 경찰 지휘부는 도대체 근절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해에는 충남지방경찰청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의무경찰이 숨지기 전 암기사항을 외우지 못했다거나 병 때문에 죽을 먹게 해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폭행당한 사건도 있었다. 전·의경 사이에 왜 이런 고질적인 가혹행위가 잔존하는지 근본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전경조직에서 그 정도는 약과라고 할지 모르지만, 매타작을 예사로 하던 과거의 군대문화를 답습할 수는 없다. 신세대의 의식은 과거와 크게 다르다. 엄한 기율은 필요하지만 구타 폭행은 범죄에 해당한다. 신세대에 걸맞은 통솔법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307전경대 해체, 지휘관 문책 등 대책을 내놓았지만 사고가 터질 때마다 나왔다가 흐지부지되는 구닥다리 대책 같아 신뢰가 가지 않는다. 군대에서는 분대장 외에 병사 간 명령 지시가 금지된 지 오래다. 경찰 지휘관은 자기 좀 편하겠다고 고참에게 내무생활을 맡겨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가혹행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자식을 경찰과 군에 보낸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해보기 바란다.}
해수욕장이란 말은 일본에서 왔다. 일본인은 ‘가이스이요쿠조’라고 발음하지만 우리와 똑같이 ‘海水浴場’이라고 쓴다. 중국에서는 해욕장(海浴場·하이위창)이라고 부른다. 수(水)가 빠지긴 했지만 글자 그대로 보면 바다에서 멱을 감는 곳이라는 의미가 비슷하다. 영어의 beach에는 물놀이한다는 의미가 없다. beach는 해변으로 번역된다. 일본어에도 해변(海邊)이라는 말이 있고 우미베라고 읽는다. 왜 굳이 해수욕장이란 말을 사용하게 됐을까. 해수욕장에는 그냥 해변이란 말에 담을 수 없는 요양이나 놀이의 개념이 들어 있다. ▷어부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바닷가가 아니라 요양이나 놀이공간으로서의 바닷가의 발견은 근대 문화의 산물이다. 18세기 중반 부르주아가 사회를 주도하면서 비로소 요양이나 놀이 목적으로 해변을 찾기 시작했다. 유럽 최초의 해수욕장은 1740년 영국 북해 연안 스카버러에 생겼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외제니 황후는 남서부 비아리츠 해안에 궁전을 짓고 해변 휴양문화를 선도했다. 19세기 일본 에도(江戶)시대에 요코하마 인근 가마쿠라(鎌倉)와 에노시마(江の島)는 외국인 거류지 내에 포함돼 있었다. 외국인들이 바다에서 노는 모습은 일본인의 시선을 끌었다. ▷한려해상 다도해 태안해안 변산반도 등 국립공원 내에 있는 ○○ 해수욕장이란 명칭이 ○○ 해변으로 바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그제 “국립공원 해변은 생태 관광자원으로 가치가 높지만 해수욕장이라는 명칭 때문에 여름철 물놀이를 위한 장소라는 인식이 강했다”며 “사계절 내내 국립공원을 보고 즐기는 공간임을 강조하기 위해 올 7월 이전에 해변으로 이름을 바꿀 것”이라고 밝혔다. 만리포 해수욕장은 만리포 해변, 변산 해수욕장은 변산 해변이 되는 것이다. ▷국립공원 내 해수욕장 주변에는 해수욕을 할 수는 없어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많다. 해변의 일부로서 해수욕장을 보는 것이 해변의 의미에 다양성을 보태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해수욕장’에는 해변으로 바꾸면 살리기 어려운 뉘앙스가 있다. 영어의 beach는 그냥 seaside가 아니라 모래가 있는 seaside다. 해변이라는 말 속에 묻어버리면 아름다운 바닷가 모래사장의 의미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아쉽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