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환

정양환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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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양환 기자입니다.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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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202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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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첨단과학 발달해도 문화재 감정엔 ‘전문가의 눈’이 최고”

    “전통적인 비취색이 은은한 데다 두께가 얇고 예리합니다. 11세기 초 순청자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요.” “반면 백자는 굽(도자기 바닥 부분)도 이상하고 흙이 어색하게 묻어있네요.” “맞습니다. 입구가 깨진 것도 옛것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훼손한 게 역력합니다.” 2일 오전 인천 중구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도떼기시장이 이럴까. 출국장 3층은 왁자지껄 혼을 쏙 빼놓았다. 보따리 짐을 가득 진 중국인들의 목청 데시벨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구석에 자리한 서너 평 사무실이 바깥 고성에 흔들리는 착각도 들었다. 사무실 입구에 달린 문패는 ‘문화재감정관실’. 이런 환경에서 감정이란 게 과연 가능할까. 하지만 박도화(57) 김현권(45) 감정위원은 일상인 듯 무덤덤했다. 오히려 컴퓨터 모니터에 뜬 타 지역 감정위원들의 대화를 하나라도 놓칠까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날 김포공항과 속초항 여객터미널 감정위원을 연결해 화상 감정까지 벌인 대상은 청자 완(완·사발)과 백자 호(壺·항아리). 한국 여행객이 해외 반출 심사를 의뢰한 유물로 언뜻 보기엔 옛 정취가 가득했다. 하지만 한참 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청자는 진짜, 백자는 가짜로 판정 내렸다. 백자는 상관없지만, 청자는 내보낼 수 없다는 결론이다. “고려청자라고 다 보물급은 아닙니다. 이 정도면 시중에서 몇십만 원에 구할 수 있어요. 하지만 가격을 떠나 우리 문화재를 함부로 해외로 내보낼 수는 없는 거잖아요? 엄정한 절차를 거치도록 이중삼중 방어벽을 치는 겁니다.”(박 위원) 국내에 문화재감정관실이 생긴 것은 1968년. 공항과 항구를 통한 문화재 밀반출을 막고자 현재 전국에 19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예전에는 일본 루트가 중요했지만 요즘은 중국 쪽이 가장 신경 쓰인다. 드나드는 사람이 늘다 보니 반출 시도가 부쩍 늘었다. 인천항의 경우 하루 유동인구가 평균 3000명인데, 비상근 3명을 포함해 6명이 모든 걸 관리한다. 최근 중국에서 오는 크루즈 선박이 늘어 밤샘 야근도 부지기수다. 요즘 문화재 감정엔 첨단과학이 많이 쓰인다. 엑스레이 보안검색에서 유물은 상당수가 걸러진다. 꽁꽁 숨겨도 문화재에 따라 색깔별로 드러난다. 도자기는 주로 녹색, 금속유물은 청색 계열로 표시된다. 회화나 고서적은 주황색 톤인데 현대서적과 밀도가 달라 확연히 구분된다. 앞서 실시했던 화상 감정도 2006년 도입돼 오차를 줄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감정위원들은 시대가 흐를수록 ‘육안 감정’이 더 중요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전체 감정관실을 총괄하는 최태희 실장(61)은 “기계적으로 과학적 증거에 의존하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게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이다. “재료가 오래된 것은 진품이란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요즘 짝퉁 제조업자들 기술이 얼마나 정교한데요. 중국에선 수천 년 된 폐사지 돌을 조각하거나 옛날 종이와 먹을 구해 그림을 모사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도자기 감정에는 굽이 제일 중요한데, 출토됐다 버려진 굽 파편만 구해다 위는 새로 만들어 붙인 물건도 봤어요.” 여기서 궁금증 하나. 도자기는 왜 굽을 살피는 게 중요할까. 시대와 제조 장소, 자기 형태에 따라 굽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물관 전시를 관람하거나 도록 사진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도자기 바닥을 보여주지는 않으니까. 직접 유물을 보고 연구한 학자들만 구별이 가능하다. 굽 파편을 구해다 붙여도 가짜인 게 들통 나는 것도 이런 연유다. 재밌는 것은 문화재 판정을 대하는 태도가 입출국 때 다르다는 점이다. 나갈 때야 진품이면 반출이 안 되니 진품 판정을 꺼리는 게 당연지사. 그런데 들어올 땐 어떻게든 진짜라는 얘길 듣고 싶어 한다. 반입 때 100년이 넘은 유물로 판정받아야 관세를 물지 않기 때문이다. “1억 원이 넘는 중국 고대 유물”이라고 큰소리 떵떵 치다가 가짜로 밝혀져 수천만 원의 세금을 문 여행객도 있다. 사실 올해 초 일본 쓰시마 섬 도난 불상이 부산항에서 ‘무사통과’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절도범들이 들여오며 복제품으로 신고했으니 감정관실이 나설 근거가 없었던 것. 하지만 논란이 일자 비난은 이들에게 쏟아졌다. 감정위원들은 “대부분 박사학위를 지닌 학자들이지만 모두 계약직 신분”이라며 “자긍심 하나로 버티고 있는데 무책임한 비난은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인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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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블랙스완 잡는 법 들고 돌아왔다”

    일본 만화 ‘드래곤볼’을 기억하는가. 서유기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공상과학(SF) 무협지쯤 되는 이 만화에서 손오공은 사이어라는 외계 행성 출신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손오공을 비롯한 이 별 사람들은 독특한 공통점을 지녔다. 싸움에서 거의 사망 직전에 이르렀다가 회복되면 전보다 훨씬 급상승한 전투력을 얻는다. 나심 탈레브가 말하는 ’안티프래질(Antifragile)’이 딱 사이어인이다. 오케이! 이게 끝이냐고? 솔직히 그렇다. 길게 얘기할 것도 없다. 안티프래질이 무슨 소리인지 알고 싶다면 이 정도면 된다. 하지만 2007년 화제작 ‘블랙 스완’ 이후 “미국 월스트리트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불리는 저자는 이 간단한 얘기를 왜 이리도 두꺼운 책에 길게 설명해 놓았을까. 위에서 설명했지만 안티프래질은 ‘연약한, 부서지기 쉬운’을 뜻하는 영어 단어 프래질(fragile)의 반대 선상에서 설정한 개념이다. 단순히 단단하거나 강인하다는 뜻이 아니다. 충격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를 회복하면서 더욱 강력하게 성장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저자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 히드라가 이 개념에 가장 적합하다고 얘기한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이 뱀은 머리 하나를 자르면 2개의 머리가 솟아난다. 위기가 기회를 넘어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바람은 촛불 하나를 꺼뜨리지만 모닥불은 살린다. 무작위성 불확실성 카오스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이런 것들을 피하지 않고 활용하기를 원한다. 불이 되어 바람을 맞이하라. … 우리는 불확실성을 다루면서 겨우 살아남기만을 원하지는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불투명하고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길들이고, 심지어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저자는 용어의 정의보다 굳이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를 왜 만들어 냈는지, 그 의도에 초점을 맞춘다. 얼핏 말장난 혹은 뻔한 소리처럼 들리는 안티프래질을 통해 시대의 난국을 극복할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현재의 경기침체 역시 헤쳐 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저자가 볼 때, 안티프래질은 이미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고 능력을 검증받았다. 바로 정·재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권력자’들이다. 안티프래질의 또 다른 특징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안티프래질은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다. 연약함이 모여 깨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이득을 얻는 이들은 따로 있다. 경제가 불황에 빠졌을 때 오락가락 숨통이 트였다 조였다하는 것은 대부분의 ‘연약한’ 사회 구성원들이다. 진짜배기들은 ‘위협’과 ‘우려’로 긴장의 끈을 조일 뿐, 지나고 보면 그들의 주머니는 더욱 두둑해져 있다. “시스템 내부의 일부 구성 요소는 시스템 전체를 안티프래질하게 만들기 위해 프래질해야 한다. … 슬프지만 실패로부터 나오는 혜택은 다른 사람과 집단에 넘어간다. 마치 개인은 자신이 아니라 더 큰 이익을 위해 실패하기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런 계층화와 프래질의 이전을 고려하지 않고 실패를 논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전작 ‘블랙 스완’과 닮은 점이 많다. 똑같진 않아도 이란성 쌍둥이라고나 할까. 과거의 경험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검은 백조와 같은 사건이나 존재가 세상을 뒤바꾼다는 인식이 줄기차게 이어진다. 안티프래질은 바로 이런 면을 예측할 수 있기에 존재적 가치가 커진다. ‘블랙 스완’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에서 말하려는 바가 꽤 혼란스러울 것 같다. 하지만 ‘블랙 스완’에서 보여 준 예측력이 너무 잘 맞아떨어졌던 탓일까. 이 책은 자신감이 다소 과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저자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부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해리 마코위츠와 조지프 스티글리츠까지 실명을 거론하며 맹비난한다. 심지어 장 폴 사르트르마저 “비겁한 겁쟁이”로 부르는 대목은 옳고 그름을 떠나 상당히 거슬린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매력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주장도 문장도 시원시원하다. 동의하건 안 하건 색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다만 심신이 허약해서 그런가. 깨어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쩝, 안티프래질 되기는 영 글렀나 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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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떠나는 중공군을 보는 그늘진 북녘의 노인들

    사진 속 평안북도 만포 기차역은 중공군을 떠나보내는 인파로 가득했다. 학생들은 열심히 깃발을 흔들어 댔지만 뒤편에 선 노인네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억지로 동원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공군을 보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이 최근 학술총서 ‘체코슬로바키아 중립국감독위원단이 본 정전 후 남과 북’을 펴냈다. 1953∼1956년 체코 중감위원단이 찍은 사진 240여 장과 관련 논문 세 편을 실었다. 당시 한반도의 정황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당시 체코는 1953년 1차 중감위원단 파견 때 300명이나 요원을 보낼 정도로 중립국 감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공산국가였던 체코와 폴란드는 ‘모스크바의 하수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가브리엘 욘손 스웨덴 스톡홀름대 교수도 “실제로도 두 나라 대표단은 공공연히 북한과 중공 측을 지원하고, 남한에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였다”고 전했다. 책에 실린 사진에서도 그런 경향은 뚜렷하다. 북한에서 벌어진 다양한 정치행사를 담은 사진이 월등히 많다. 하지만 이를 통해 당시 북한이 얼마나 체제 선전에 열성적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중공군을 떠나보내는 노인의 미묘한 표정이 담긴 사진처럼 이념에 휘둘린 민초의 비감이 느껴지는 사진도 상당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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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문화체육관광부 外

    ◇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장 노태강 △10·27법난피해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사무처장 도재경 △감사관실 서광철 △기획조정실 강지은 △문화콘텐츠산업실 최진 △문화정책국 강은아 김미라 △예술국 강성태 △관광국 김동욱 △미디어정책국 김파중 △체육국 이승훈 ◇농림축산식품부 △농림축산검역본부 동식물위생연구부장 백종호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장 이길배 ◇중소기업청 ▽서기관 △기획조정관실 김광재 ◇기초과학연구원(IBS) ▽그룹리더 △원자제어 저차원전자계 연구단 조문호 최희철 △식물 노화·수명 연구단 황대희 ◇SBS △부장급 편집2부장 김용철 △부장급 경제부장 차병준 △차장급 보도제작부장 노흥석 △부국장급 논설위원 김영환 ◇MTN△편집국 경제금융부장 여한구 △증권부장 유일한 △건설부동산부장 겸 산업2부장 박호진 △마케팅본부 방송사업팀 부장 정익 ◇서울경제 △편집국장 고진갑 △한국아이닷컴 대표이사 조상현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김진한 ◇건국대 △대외협력처장 이철규 △공과대학 부학장 김형섭 △성관 기숙사 관장 최승철 △연구윤리센터장 정기웅 △문과대학 행정실장 고해웅 △예술디자인대학 행정실장 유송실 ◇상명대 ▽서울캠퍼스 △총장실 정책실장 순희자 △총장실장 권찬호 △평생교육원장 박재근}

    • 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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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바늘귀 들어가기 비유는 낙타가 아니라 밧줄?

    성서(바이블)는 종교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텍스트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렸고, 팔리는 책이다. 성서에 바탕을 둔 많은 문장과 에피소드가 문학과 철학 역사 곳곳에서 끊임없이 인용되고 재생산된다. 하지만 또 그만큼 자주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경전도 드물다. 예를 들어 동성애나 낙태 논쟁을 보자. 찬반 진영은 물과 기름처럼 극단적으로 갈리는 마당에,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말이 옳다는 주장의 근거로 양쪽 다 성경을 제시한다. 그만큼 시각과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여지가 많다. 더 놀라운 것은 성서를 제대로 다 읽은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미국 버지니아 커먼웰스대 종교학과 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전문가들도 완독을 버거워한단다. 성서 읽기가 어려운 이유는 워낙 복잡하고 버전도 다양한 탓이다. 첫 출발은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유대교의 성서였으나 이후 그리스어와 라틴어, 독일어와 영어로 여러 언어를 거치며 시대마다 성서는 조금씩 바뀌어 왔다. 게다가 성서는 신이나 천재적 작가 한 명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책이 아니다.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헤밍웨이가 어느 저녁 모히토(칵테일의 일종)를 마시고 단숨에 써버린 단편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를 살아간 이들 여럿이 함께 작업한 ‘위키피디아’인 셈이다.” 이렇다 보니 성서에 오류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가능성보다 작다”에서 낙타는 사실 ‘밧줄’을 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어 낙타(kamelos)와 밧줄(kamilos)을 혼동했다는 얘기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예루살렘에 ‘바늘귀’라는 이름을 지닌 좁은 문이 있었는데 여길 통과하려면 낙타가 짐을 다 내려놓고 무릎으로 기어야 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단어 하나를 놓고도 헷갈리는 일이 벌어지는 게 성경이다. 모순도 없지 않다. 대표적 사례가 이혼이다. 성서의 말라기에는 이혼을 금한다고 나오는데, 에스라에는 오히려 조장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각자 시대에 따라 집필한 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말라기에는 이혼당하고 사회적 경제적 약자로 추락하는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그런데 에스라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강제 이주를 당해 타 문화권 아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 때문에 안타깝지만 민족 혈통을 지키기 위해 이민족 아내와 이혼하라는 뜻이었다. “성서의 역사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보도로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기자나 역사가들의 기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성서는 신앙의 책으로서, 삶의 모든 경험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한 신앙인들이 쓰고 베끼고 편집한 것이다.” 성서를 둘러싼 오해도 흥미로운 게 많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추방 때문에 뱀을 악마(사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짙은데, 성경은 단 한 줄도 뱀을 악마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세가 장대에 매달았던 뱀은 치유의 능력을 지닌 이로운 존재였다. 악마의 상징이 된 숫자 ‘666’은 네로 황제를 그리스어를 이용해 암호로 표시한 것이다. 그런데 초기 성서 필사본은 라틴어로 만든 탓에 ‘616’으로 표시했다. ‘가장 오래된 교양’은 제목처럼 교양 정보가 넘치는 책이다. 교인이 아니어도 배우는 게 꽤 많다. 무엇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애쓰는 저자의 균형감이 탄복할 만하다. 다만 성경 입문자를 위한 안내서라고 보기에는 생각보다 수준이 높다. 종교에 대한 지식이 얕아서인지 지도를 손에 쥐고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그렇지, 신의 말씀에 다가가는 일이 쉬울 리가 있나.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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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사쿠라 교수 “출신배경 다른 사할린 한인들 김치로 통했다”

    “서로 다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지녔고 심지어 말도 잘 안 통하는 사할린 한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김치였다.” 아사쿠라 도시오(朝倉敏夫·63·사진)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교수가 러시아 사할린 지방의 한인사회 음식문화를 연구한 논문 ‘사할린의 김치에 대한 고찰’에서 김치가 이 지역 한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나아가 이들을 한민족으로 융합하게 만드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아사쿠라 교수는 이런 내용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최로 26일 열리는 유네스코 무형유산자문기구 국제심포지엄 ‘김치와 김장문화’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논문에 따르면 사할린 지방 전체 한인동포는 약 3만 명으로, 그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일제강점기에 끌려와 이 땅에 뿌리내린 ‘화태치’(약 60%)가 가장 많고, 옛 소련 스탈린 시절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가 돌아온 ‘큰땅뱅이’와 북한에서 벌목장이나 광산에 일하러 왔다 눌러앉은 ‘북선치’가 나머지를 이룬다. 여기에 일부 남한과 북한 국적 거주자, 중국 조선족까지 일부 뒤섞여 있다. 아사쿠라 교수가 보기에 이곳 한인들은 생김새 외엔 공통점이 많지 않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중국과 한반도에서 몇 대를 거치면서 각기 다른 생활방식을 형성한 탓이다. 하지만 음식문화만큼은 같은 핏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식탁에 김치를 빼놓지 않고, 함께 김장을 담그며, 나물을 즐기는 전통은 같은 틀로 찍어낸 듯 닮았다. 재밌는 것은 사할린 김치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지역 문화가 함께 버무려져 현재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일제 패망 직후 이 지역 김치는 러시아식 샐러드에 가까웠다. 양배추를 주재료로 양념을 약하게 해 맛이 밍밍했다. 경상도 출신이 많아 김장에 생선을 넣는 풍습은 이어졌는데 현지에서 조달하기 쉬운 연어를 많이 썼다. 그러다 1960년대 이후엔 북한 사람이 대거 유입되며 북한식 백김치를 많이 담갔다. 소련이 무너진 뒤에는 한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고춧가루도 듬뿍 넣고 소도 제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사할린 한인 가정에서 50% 이상이 김치냉장고를 쓰는 것도 한국에서 전파된 유행이다. 한국에서 들여오는 고춧가루나 양념은 현지에서 최상품으로 치지만 고가여서 중국산을 많이 이용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한국식 김치가 현재 사할린 시장에서 현지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잘 팔리는 음식으로 대접받는다는 점이다. 과거 ‘마늘냄새 난다’며 인종 비하의 대상이 됐던 김치가 이제는 러시아인들의 선호식품으로 바뀌었다. 아사쿠라 교수는 “한국의 경제력이 급상승하고 한류문화가 확산되면서 김치나 나물이 수준 높은 고급 요리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문화적 변화는 사할린 동포들에게 자긍심으로 이어졌다. 아사쿠라 교수의 인터뷰에 응한 많은 한인들은 출신과 상관없이 김치를 ‘민족의 피’라며 자랑스러워했다. A 씨는 “이름도 바뀌고 한글도 잊었지만 김치 맛은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과거 김치라면 눈살을 찌푸리던 러시아인들이 김장을 배우려 하는 걸 보면 매우 뿌듯하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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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승길 길동무 꼭두, 유럽 4개국 나들이

    ‘저승 가는 우리네 넋의 길동무, 꼭두가 유럽인과 조우하다.’ 꼭두는 한국의 전통 상례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장식품이다. 망자를 모시는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꼭두에는 세상을 떠나는 이를 위로하고 지켜 주며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엄격한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편안하면서도 해학적인 분위기가 물씬하다. 한국적 정서가 오롯한 꼭두가 27일부터 유럽 4개국 순회 전시에 나선다. 동숭아트센터 꼭두박물관(관장 김옥랑)은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그라시 박물관에서 조선 후기 상여와 꼭두 유물 76점을 소개하는 기획전 ‘꼭두, 영혼의 동반자’가 개최된다고 22일 밝혔다. 독일 전시회는 11월 15일까지 열리며, 이후 △헝가리 부다페스트(주헝가리 한국문화원·11월 22일∼12월 20일) △벨기에 브뤼셀(주벨기에 한국문화원·내년 1월 17일∼2월 28일) △프랑스 파리(유네스코본부 전시장·내년 4월 14∼18일)로 이어진다. 이번 순회전은 지난해 7∼9월 영국 런던의 주영 한국문화원에서 런던 올림픽을 기념해 열렸던 특별전 ‘꼭두, 또 다른 여행길의 동반자’가 현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대영박물관의 존 스튜어트 아시아 담당 큐레이터는 “한국의 전통 문화유산인 꼭두를 소개한 놀랍고도 짜임새 있는 전시”라며 “대영박물관에서도 조만간 기획 전시로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유럽 여러 곳에서 전시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유럽에서는 꼭두라는 목공예품 자체의 조형적 아름다움은 물론 꼭두가 지닌 영성(靈性)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꼭두에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라는 의미가 내재돼 있다. 망자를 현세에서 저승으로 이어 주는 매개체에 담긴 해학과 여유가 강렬한 인상을 전해 준 것이다. 김옥랑 관장은 “우리 조상의 전통적 평민문화에 밴 독특한 세계관과 미적 감수성을 유럽에 선보일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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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화내는 것도 소통의 기술

    살다 보면 명언까진 아니어도 은근히 실생활과 잘 맞아떨어지는 말이 있다. ‘입이 보살’이라든가 ‘패션의 완성은 외모’처럼.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도 그중 하나일 성싶다. 현실에서는 갈등이 생겼을 때 강하게 반응해야 해결되는 경우가 잦다. 민원창구나 소비자센터에 가면 이런 경우를 꽤 본다. 하지만 이 명제(?)에는 두 가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일단 자신의 대화 능력을 반성해야 한다. 성질을 내지 않고서는 그만큼 의견 전달을 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 있으니까. 반대로 상대방 역시 일관성 없는 태도를 고민해 봐야 한다. 화낸다고 들어줄 거면 그냥 해줬어도 되지 않을까. 원칙이 흐릿한 대응은 상대의 불신만 키울 뿐이다. 일본 도쿠야마(德山) 공업고등전문학교 철학과 교수인 저자가 볼 때 이런 상황이 자주 목도되는 이유는 현대인들이 ‘화(怒)’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잘 모르거니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할지도 익숙하지 않다. 화라고 하면 부정적인 느낌이 강해서, 참거나 삭이거나 표현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받아들인다.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특히 그런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다. 동양도 본디 화를 나쁘게 본 것은 아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화 역시 인간의 감정 가운데 하나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 불공정한 일이 벌어졌을 때 분명하게 항의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당연하게 여겨지고 또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화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에너지”로 “적절하게 표출해야 육체도 정신도 사회도 건강해진다”고 조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적절함’이다. 무작정 언성 높이고 성질부리는 건 제대로 화내는 게 아니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이성을 잃는 하책(下策)이다. 진짜 분노할 줄 아는 이는 그럴 때일수록 목소리를 낮추고 냉정해진다. 핵심을 명료하게 전달하되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 진짜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대목은 화의 명분과 정당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분노의 최고수’였던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엄격한 자기절제로 비폭력을 지켰기에 주장하는 바를 관철시켰다. 화내지 않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현재의 일본이 그렇다. 대표적인 사례가 후쿠시마 원전과 신사 참배 문제다. 원전의 경우 정부가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고 무책임한 대응을 일삼는데 어찌 이리 차분할 수 있나. 신사 참배 역시 극우세력이 A급 전범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국민이 좌시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 “몇십 년이 넘도록 미해결인 상태로 이 문제를 방치하는 정치가들은 나태하고 태만할 뿐만 아니라 책임의식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70년이 지나도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을 만든 주범, 이른바 A급 전범이라고 해야 하는 우유부단한 정치가에게는 단호히 화를 낼 필요가 있다.” 사실 저자와는 올해 초 인터뷰를 했던 인연이 있다. ‘인생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가 국내에 번역 출간된 게 계기였는데, 오가와 교수는 종합상사 직원, 시청 공무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다. 그래서일까. 확실히 공자 왈 맹자 왈만 읊는 ‘먹물’과는 다르다. 너무 단정 짓는 대목도 있지만, 이렇게 통쾌한 철학책 만나기도 쉽지 않다. 주위에 자주 ‘버럭’ 하는 이가 있다면 꼭 권하시길. 뻔한 화 다스리는 법보다 100배 낫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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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의 시대에도 경주는 살아 있었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 아닌 조선시대 경주에 초점을 맞춘 특별전 ‘조선시대의 경주’를 연다. 천년고도 경주는 불국사 석굴암처럼 곳곳에 세계적인 역사 유적이 즐비하지만 신라 시기만 주목받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경주, 고려 성종 6년(987년)에 동경(東京)이란 명칭이 붙여진 이후에도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던 공간이다. 박물관은 특히 조선 500년 동안 사상과 문화가 꽃을 피웠던 대목에 주목했다. 1465년 ‘금오신화’를 경주에서 썼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과 경주 김씨로 신라 금석문을 연구했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관련 자료를 소개한다. 1672년 창건한 경주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에 모셔진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의 저술과 친필도 볼 수 있다. 임진왜란도 빼놓을 수 없는 역사다. 1592년부터 2년에 걸쳐 왜적과 네 차례나 공방을 주고받은 ‘경주성 전투’가 대표적이다. 임진왜란 전후 시절 경주 부윤의 갑옷과 투구, 보물 제884호인 ‘삼안총(三眼銃)’, 신무기 포탄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전시한다.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문화재도 적지 않다. 조선시대 경주를 오가는 사신의 관사인 ‘동경관(東京館)’의 현판과 이곳에 모셔졌던 ‘전패(殿牌·왕의 위패)’, 경주 김씨 사당 ‘숭혜전(崇惠殿)’에 보관됐던 의례용 가마를 만날 수 있다.11월 10일까지. 무료. 054-740-7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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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첨성대 일부 균열… 정밀 안전진단 실시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인 경주 첨성대(慶州 瞻星臺·국보 제31호)가 정밀구조 안전진단에 들어간다. 문화재청은 17일 “올해 정기점검 결과 발견된 첨성대의 일부 균열과 지대석(址臺石) 침하 현상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정밀구조 안전진단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전문가 자문 및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수 보강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신라 7세기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첨성대는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겪으며 일부 균열이 생기고 몸통의 돌들 사이가 벌어지는 현상이 발견돼 왔다. 이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첨성대의 안전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관계자는 “2008년부터 상시 계측을 진행했으나 구조변동을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면서도 “최근 일각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확실하게 점검하는 차원에서 안전진단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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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즐거운 추석]박물관-궁궐 체험 공짜 ‘절씨구’

    한가위 하면 고향에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즐기는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지만, 막상 여유가 생기면 음주나 고스톱으로 시간을 보내기 십상이다. 아이들이야 어디든 놀러가자 아우성이지만, 사람도 많고 명절이랍시고 비싸기만 해 갈 곳이 마땅찮다. 하지만 눈 밝은 사람들은 안다. 국립박물관이나 궁궐을 찾으면 공짜로 즐길 거리가 꽤 푸짐하다. TV 앞에 늘어져 핀잔 듣지 말고 100점짜리 추석을 보낼 계획을 짜 보자.○ 박물관으로 오세요! 서울 경복궁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명절 때 최고의 ‘핫 플레이스(hot place)’다. 해마다 다양한 민속행사를 준비해 많은 인파가 몰린다. 올해도 18일부터 22일까지 특집프로그램 ‘추석 명절-풍요로움을 이웃과 함께 나눠요’로 관람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19일부터 3일간 오후 2시 박물관 앞마당에서는 노래자랑대회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아리랑을 불러요’가 열린다. 3대 가족 4인이거나 다문화가정 가족 4인에게 참가 자격을 주는데, 아리랑이나 아리랑에 상응하는 각국 전통민요를 부르면 된다. 순위를 가려 전통시장 상품권 같은 선물을 준다. 다채로운 공연도 많다. 18일 국악그룹 ‘호연’의 타악기 공연을 시작으로 19일에는 페루음악단 ‘잉카엠파이어’의 민속음악 공연과 양주 소놀이굿, 강강술래 및 달맞이 민요 공연이 펼쳐진다. 강강술래와 비슷한 여성 군무인 ‘영덕 월월이청청’(20일)과 무언극 퍼포먼스 ‘광대들의 수다’(21일), 고성오광대 탈춤공연(22일)이 차례로 이어진다. 아이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북청 사자탈 만들기’는 야외 놀이마당에서 아이들이 직접 사자탈을 만드는 데 참가할 수 있고, 탈을 쓰고 탈춤도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 ‘거북놀이’는 경기 이천지역에서 전해지는 전통놀이로 대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수수 잎을 덮어 거북을 만든 다음 지신밟기를 한다. 이 밖에 승경도놀이와 제기차기 팽이치기 윷놀이 굴렁쇠놀이도 아이들을 기다린다. 외국의 추석 문화도 경험할 수 있다. 21, 22일 볕들재 온누리방에서는 베트남의 추석 ‘쭝투’를 배우는 시간을 갖는다. 20, 21일 다문화 음식 판매 부스에서는 중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다. 02-3704-3114 국립중앙박물관은 추석 다음 날인 20일 오후 3시부터 박물관문화재단 주최로 무료 야외공연 ‘2013 한가위한마당’을 개최한다. 올해는 김승일무용단이 전통무용 특집 ‘월야청청-풍류’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민속춤을 소개한다. 강강술래와 부채춤은 물론이고 살풀이춤과 진도북춤도 만날 수 있다. 진도북춤은 양손에 북채를 쥐고 장구를 치듯 잔가락을 많이 활용해 신명나면서도 섬세한 맛이 있다. 1544-5955○ 궁릉으로 가세요! 문화재청은 올해 역시 궁궐과 종묘, 조선 왕릉을 추석(19일) 하루 무료로 개방한다. 18일과 20일에는 한복을 입은 관람객에 한하여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은 예외다. 서울 덕수궁에서는 19, 20일 오후 3시부터 경기민요 공연이 열린다. ‘덕수궁 가무별감, 얼씨구! 좋다! 잘한다!’라는 제목의 이번 공연은 1시간 동안 즉조당 앞뜰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02-751-0740 경기 구리시 동구릉(031-563-2909)과 남양주시 광릉(031-257-7105), 홍유릉(031-591-7043)에서는 18∼20일 추석을 맞이해 민속놀이 체험 행사가 준비됐다. 투호나 윷놀이를 즐길 수 있고, 방문객들에게 전통차도 나눠 준다. 경기 여주군 세종대왕릉과 충남 금산군 칠백의총, 충남 아산시 현충사도 오전 9시부터 전통민속놀이를 펼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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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경진 교수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 7세기말 아닌 나말여초 건립”

    7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충북 유형문화재 제134호)가 이보다 200여 년 후인 나말여초 시기에 건립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사적비는 신라가 통일전쟁을 벌일 당시 이미 ‘삼한일통(三韓一統)’ 의식이 형성돼 있었다는 시각을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로 간주돼 왔기 때문에 이 주장은 학계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윤경진 경상대 사학과 교수(48)는 최근 수선사학회 학술지 ‘사림’에 발표한 논문 ‘청주 운천동 사적비의 건립 시기에 대한 재검토’에서 “비문에 실린 글들을 분석한 결과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692) 때보다는 태조 왕건(877∼943)이 고려를 창건할 무렵에 비가 세워졌다고 보는 게 훨씬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가 사적비의 건립 시기를 나말여초로 보는 이유는 크게 3가지다. 먼저 비문에 제작 관계자로 등장하는 ‘천인아간(天仁阿干)’의 표기 방식이다. 천인은 사람 이름이고, 아간은 신라 관등제도 17등급 가운데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직위를 뜻한다. 그런데 7세기 신라의 인명 기재 방식은 ‘관직+관등+이름’의 순이었다. 천인아간처럼 ‘이름+관등’을 적는 것은 신라 말기 지방사회에서 쓰던 스타일이다. 비문에 나오는 ‘사해(四海)’도 7세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사해는 중국 황제가 천하를 거론할 때 쓰는 용어다. 비에는 ‘천덕(天德·왕의 덕)이 사해로 펼쳐졌다’고 나오는데, 이는 당나라와 사대 외교관계였던 신라에서 기피하던 표현이다. 당시 신라는 ‘사해’ 대신 ‘사방(四方)’이나 ‘사변(四邊)’을 썼다. 윤 교수는 “반면 독립적 세계관을 펼쳤던 고려가 세운 ‘광조사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85호)나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보물 제507호)에는 사해가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하도낙서(河圖洛書)’에 관한 언급도 마찬가지다. 하도는 중국 고대 전설의 제왕 복희(伏羲)가 황하에서 얻은 그림, 낙서는 중국의 성인(聖人)인 하우(夏禹)가 낙수에서 얻은 글을 일컫는다. 모두 새로운 천하가 탄생할 때 건국의 상징으로 쓴다. 그런데 신문왕은 둘째 치고 문무왕도 통일은 했어도 나라를 세운 건 아니다. 창업군주인 고려 태조로 봐야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윤 교수는 비문의 ‘수공(垂拱) 2년’이란 중국 연호만으로 해당 연도인 686년(신문왕 6년) 즈음에 사적비가 세워졌다고 보는 기존 학설은 틀렸다고 본다. 보통 이런 비에는 관련 건물을 중창하며 내력을 적는 경우가 많다.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는 어떤 건물이 처음 세워진 시기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다. 최연식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47)는 “논란이 컸던 사적비 제작 시기에 대한 의미 있는 문제 제기”라며 “다만 비문 판독이 완전치 않아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건립 시점의 조정이 불가피한 만큼 삼한일통의식도 다시금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게 윤 교수의 지적이다. 삼한일통의식이란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전쟁을 벌일 때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지녔다는 인식을 말한다. 이런 의식이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는지, 통일신라시대가 무르익은 후대에 만들어졌는지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사적비는 전자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결정적 근거로 자주 거론해 왔다. 이유는 비에 나오는 ‘민합삼한이광지(民合三韓而廣地·삼한의 백성이 하나로 합쳐지고 땅은 넓어지다)’라는 문장 때문이다. 통일 직후인 신문왕 때 이처럼 통일의지가 명확한 글을 새길 정도라면, 이런 세계관이 이전부터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는 게 주류의 시각이었다. 하지만 사적비의 건립 시기가 달라지면 이 같은 논리는 설득력을 잃게 된다. 고려 역시 후삼국을 통일하며 삼한일통을 표방했다. 윤선태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48)는 “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논문”이라며 “다만 한 가지 증거만으로 삼한일통의식 전체를 뒤집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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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수학 난제가 풀릴 때마다… 알게 모르게 덕 보는 우리들

    수학은 어렵다. 머리로야 과학이나 금융의 근간이 되는 중요 학문이란 것을 알지만, 막상 수학문제 앞에 서면 까막눈이 되는 심정은 참 처참하다. 그런데 세계적인 수학 난제들이라…. 그냥 전문가들이 알아서 고민해주면 고맙겠다. 그런데 이 책은 당신도 이 수학 난제들과 무관치 않다고 소매를 잡아끈다. 영국 워릭대 수학과 교수인 저자는 난제 자체를 일반인이 이해할 필요야 없지만 이를 둘러싼 과정이나 정황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푸리에 분석’이란 수학적 아이디어가 어떤 개념인지는 몰라도 괜찮다. 하지만 이 분석이 현대 전기통신의 근거이자 디지털카메라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아두면 좋지 않은가. 심지어 경찰이 지문을 보존하는 기술에도 푸리에 분석이 이용된단다. 위대한 수학 난제 중에는 중학교 교과서에서 이미 마주쳤지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것도 있다. ‘골드바흐 추측’이라는 것인데 바로 소수와 관련된 문제다. 정의를 옮겨 쓰자면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다”이다. 책은 이런 난제를 통해 소수를 연구함으로써 정수론이나 인수분해 같은 분야가 확장됐으며, 이런 결과물이 바탕이 돼 알고리즘과 컴퓨터 운영체계, 인터넷통신의 프로토콜이 성장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만하면 골드바흐 추측이 우리와 상관없다고 말하긴 힘들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이 책은 무지 어렵다.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다’는 뻔한 소개는 도무지 못하겠다. 물론 난제를 둘러싼 뒷이야기들은 흥미롭다. 하지만 책의 비중이 그쪽보단 수학 개념 설명에 치중돼 머리가 팽팽 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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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글로벌 부양책 약발 다해… 아우성 없는 대공황 진행중”

    요즘 경제가 어렵다. 언제는 좋았냐고 시큰둥한 이도 있겠지만 확실히 불안한 것은 맞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대공황’이라고? 설마 그 정도까지이겠나 싶긴 한데 일단 저자의 주장부터 들어보자. 일본 시가대 경제학부 교수인 저자가 볼 때 현 세계 경제의 흐름은 20세기 초 대공황과 너무나 닮았다. 미국의 거대한 버블 붕괴로 인해 세계적 경제위기가 찾아왔고, 그 여파가 유럽으로 확산됐다. 단기 자금의 이동에 따라 경제가 요동치는 것도 엇비슷하다. 당시에도 과도한 세계화로 국가 간 대립이 심각했는데, 요즘 아시아 중동에서 알력이 벌어지는 모습도 영 심상치 않다. 청년실업이 정치 변동으로 연결되는 양상도 마찬가지다. 다만, 현재가 대공황이라는 진단이 어색한 것은 ‘조용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30년대처럼 국내총생산(GDP)이 곤두박질치고 시민들이 패닉에 빠지는 현상은 감지되지 않는다. 2008년 리먼 사태가 벌어지며 줄곧 상황이 나빠졌으나 대공황이라 부르긴 애매하다. 저자가 보기에 이는 각국 정부가 온갖 구제책을 적극 동원했기 때문이다. 전례 없이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강력한 금융 및 재정 조치를 취한 덕에 가파른 추락은 면했다. 하지만 정부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저자는 이미 그 붕괴의 단초가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고 말한다. ‘조용한 대공황’은 간결해서 좋다. 어렵지 않은 문장을 사용하고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경제용어에 익숙하지 않아도 이해하기 편하다. 다만,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적어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는 대목도 있다. 게다가 대공황이라면서 공동체와 인관관계를 중시하자는 식의 결론은 너무 나이브한 것 아닐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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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문화재 되찾고 눈감은 황수영 조창수 박병선…

    ‘직지의 대모’ 박병선 박사(1923∼2011)는 환수문화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프랑스 유학 후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냈고, 외규장각 의궤가 고국 땅을 밟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해외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 15만여 점 가운데 약 1만 점이라도 되찾은 데는 박 박사 같은 이들의 공이 컸다. 환수된 지정문화재에서도 반가운 이름을 만날 수 있다. 28건의 지정문화재 목록을 살펴보면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나 정조가 직접 그린 쌍폭(雙幅·한 쌍의 글이나 그림)으로 알려진 ‘정조필 파초도’(제743호) ‘정조필 국화도’(제744호)처럼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한 유물이 6건이나 된다. 이 가운데 5건이 1970년에 환수됐는데 바로 초우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1918∼2011)이 이룬 업적이다. 초우는 서산마애삼존불상과 문무대왕 수중릉, 울산 반구대 암각화 발굴에 관여했고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동국대 총장을 지냈다. 한일 국교정상화회담 당시 문화재 반환협상의 실무대표로 활동하며 우리 문화재를 되찾는 데 관심이 컸다. 가장 대표적인 성과가 파초도 국화도를 포함한 유물 10여 점의 환수였다. 초우는 이를 소장하던 재일교포 장석 씨를 오랫동안 설득해 기증받았다. 이를 가지고 귀국하던 도중 밀수품으로 오인받아 압수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정우택 동국대 박물관장은 “미술품 기증이란 인식조차 부족했던 시절에 어렵게 해외를 넘나들며 문화재 환수를 성사시킨 열정과 혜안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문화재 93점의 반환을 성사시킨 고 조창수 전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학예관(1925∼2009)도 잊어서는 안 될 공로자다. 1994년 북한에서 43년 만에 생환했던 국군포로 조창호 중위(1930∼2006)의 친누나인 조 학예관은 44년 동안 아시아담당 큐레이터로 일하며 한국문화를 해외에 알린 민속학자였다. 스미스소니언에 아시아 최초로 나라 이름을 사용한 ‘한국실’을 설치한 주역이기도 했다. 그가 환수한 대표적 문화재는 고종과 순종, 명성황후 옥보. 옥을 깎아 손잡이를 용 모양으로 만든 고종옥보(高宗玉寶)는 ‘황제’라고 새겨져 고종이 황제에 오른 1897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87년 미국 경매에 나온 옥보를 발견한 그는 오랜 기간 소장자를 설득하고 모금운동을 펼쳐 유물을 되찾은 뒤엔 국립중앙박물관에 조건 없이 기증했다. 떠나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암 선고를 받은 뒤 4억 원 상당의 미국 자택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화발전에 써 달라”며 스미스소니언에 기증했다. 그가 타계한 뒤인 2012년 유족은 평생 모은 연구자료 300여 점을 서강대에 기증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최근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동영상을 제작해 재단 홈페이지(www.overseaschf.or.kr)에 공개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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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적보존회’ 만든 뒤 신라유물 도굴… 희대의 문화재 악당

    《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제공한 환수문화재 목록을 보면 유독 자주 등장해 눈길을 끄는 이름이 하나 있다.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1954·사진)라는 일본인이다. 환수문화재 중 지정문화재로 등록된 28건 가운데 6건이 모로가에게서 환수됐다. 국보 제124호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제125호 ‘녹유골호’를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도기 녹유 탁잔’(보물 제453호) ‘경주 노서동 금팔찌’(제454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제455호) ‘경주 노서동 금목걸이’(제456호)는 모두 그가 소장했던 유물이다. 얼핏 보면 한국에 문화재를 돌려준 고마운 은인처럼 여겨질 정도다. 》        하지만 모로가 히데오는 한국 문화재에 해를 끼치고 도굴을 일삼은 희대의 악당이다. 환수된 문화재도 그가 일본 검찰에 압수당한 것들로, 자칫 딴 곳에 팔거나 숨겼다면 고국 땅을 밟지 못할 뻔했다. 다행히 일본 제실박물관(일본 국립박물관의 전신)이 압수품들을 사들였고, 이를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돌려받았다. 국내에는 그간 모로가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초대 주임(관장·1926∼1930)을 지냈고 금관총 발굴에 관여했다는 정도만 전해졌다. 하지만 최근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44)가 학술지 ‘대구사학’에 게재한 논문 ‘일제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와 모로가 히데오’를 보면 모로가가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 모로가는 원래 문화재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였다. 일본에서 서생으로 지내다 1908년 조선으로 넘어와 무역업, 대서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사교성이 좋았던 그는 정관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1910년대 경주로 와서 고고학 전문가인양 행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경주의 조선인 유지들을 회유해 만든 것이 ‘경주고적보존회’였다. 보존회란 그럴듯한 이름을 달았지만, 실상 모로가의 막후 조종 아래 도굴과 문화재 강탈을 자행했다. 사천왕사지 서편 목탑을 비롯해 수많은 유적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그가 착복한 유물은 엄청났고, 석기 토기 금속제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금관총 출토품은 경주에 별도로 보존했다고 하나, 일부는 모로가가 보존회 차원에서 관리하던 시절 도난당해 사라졌다. 하지만 죄는 조선인들이 뒤집어쓰고 고문까지 당했다. 심지어 모로가는 혹시나 있을 매장 유물을 차지할 욕심에 멀쩡한 첨성대를 해체 보수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너무 많이 착복한 탓일까. 1933년 모로가는 대구에서 파견된 일본 검찰에 전격 체포됐다. 신라 지역에 잇따른 도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 고위층과 인맥이 두터웠던 그였으나 일본 측이 봐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던 모양이다.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이 연일 이 사건을 보도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소장품을 빼앗긴 뒤 그해 말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경북 포항 수산시험장 주임으로 지내다 광복 직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압수된 모로가의 장물이 돌아왔다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는 남아 있다. 많은 유물을 환수하긴 했으나 당초 그가 빼돌렸던 유물이 제대로 다 돌아왔는지 확실치 않다. 정 교수는 “일본은 지금도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의 고고학 연구가 훌륭한 문화정책이었다고 주장한다”며 “하지만 모로가 같은 악질적인 문화 권력자와 유착해 벌인 활동이었음을 (그들은)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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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난의 상징 131건 9756점… 국보 4건 모두 일본서 환수

    《 최근 한국 최초의 근대 지폐인 호조태환권(戶曹兌換券) 원판이 국내로 돌아온 데 이어 문정왕후 어보(御寶·의례용 인장) 환수도 진전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지며 환수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대략 15만 점. 이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고국 땅을 밟은 환수문화재는 131건(9756점)에 이른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의 도움을 얻어 환수된 뒤 국보나 보물처럼 지정문화재에 오른 유물 중심으로 환수문화재의 역사를 3회에 걸쳐 짚어본다. 》2010년 4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영친왕(1897∼1970) 일가 복식’은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몰려 화제였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 이은 일가가 가례(嘉禮·혼례) 때 착용했던 의례복과 장신구다.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가 유독 관심을 끈 데는 이 문화재가 어렵사리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상징성이 크게 작용했다. 이들 문화재는 광복 뒤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소장하다 1957년 도쿄국립박물관으로 넘겼다. 지속적인 협상 끝에 1991년 한일 정상회담 합의로 되찾았고, 2009년 중요민속문화재 제265호로 지정됐다. 환수된 지정문화재 가운데 수량으론 가장 많은 333점이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최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영친왕 유물처럼 환수문화재 131건 가운데 지정문화재가 된 경우는 모두 28건에 이른다. 건수로만 보면 전체 환수문화재의 약 21%다. 국보로 지정된 유물은 4건. 모두 일본에서 환수됐다. 1965년 한일협정이 맺어진 이듬해 들어온 국보 제124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제125호 ‘녹유골호’, 1971년 환수된 제185호 ‘상지은니묘법연화경’, 2006년 큰 관심을 모았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제151-3호)이다. 1912년 일본으로 갔다 돌아온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고려 초인 10세기경 제작됐다. 한국의 석불상은 재료가 대부분 화강암인데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몸체와 뚜껑에 녹색유약을 입혀 통일신라시대 때 제작된 녹유골호는 현재 전해지는 골호(骨壺·불교에서 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을 매장하는 데 사용하는 뼈항아리)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상지은니묘법연화경은 고려 공민왕 22년(1373년)에 제작된 법화경. 최영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활용홍보실장은 “상지(橡紙·상수리 열매로 물들인 종이)에 은니(銀泥·은가루)로 옮겨 쓴 불경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해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보물은 모두 18점. 이 중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문화재는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다. 외국 유물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경우이기도 하다. 한국 스포츠의 영웅 손기정(1912∼2002)이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받았으나 전달되지 못하다가 1986년에야 한국 땅을 밟았다. 고대 그리스 코린트에서 제작된 것으로 1875년에 발굴됐다. 안중근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은 2점이 포함됐다.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과 ‘용공난용 연포기재(庸工難用 連抱奇材·서투른 솜씨는 쓰기 어려우나 아름되는 나무는 뛰어난 재목이다)’는 지금도 그 뜻이 인구에 회자되는 서예작품이다. 등록문화재 제383호로 지정된 ‘미국 해병대원 버스비어 기증 태극기’는 6·25전쟁 참전용사인 A W 버스비어가 2005년 한국에 돌려준 문화재. 버스비어는 서울 수복 당시 한 시민이 건네준 것을 전쟁 기간 내내 군용트럭에 꽂고 다니다 미국에 가져갔다. 문화재청은 “일장기를 개조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 근현대사의 고난이 깃든 소중한 사료”라고 설명했다. 최소한 보물급은 되지만 임대·대여 방식으로 환수된 탓에 지정문화재에 오르지 못한 문화재도 여럿이다. 2011년 프랑스에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당시 145년 만의 귀환으로 국민적 환대를 받았으나 5년마다 갱신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 2005년 독일에서 환수한 ‘겸재 정선 화첩’은 영구 임대, 2007년 미국에서 온 ‘어재연 장군 수(帥)자기’도 10년 임대 신분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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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물-사료로 만나는 제주도와 한라산

    제주도 한라산을 다양한 유물과 사료를 통해 조명하는 특별전 ‘한라산(漢拏山)’이 10일부터 국립제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국립제주박물관은 “한라산은 곧 제주 문화라고 할 정도로 제주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며 “한라산과 관련된 문화재를 중심으로 제주도의 역사를 되짚어 보려 한다”고 설명했다. 전시품 가운데 17∼18세기 한라산과 제주도의 모습이 오롯이 담긴 보물 제652-6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제652-5호인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가 눈에 띈다. 두 문화재 모두 조선 숙종 때 국학자이자 실학자였던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1653∼1733)이 제주목사 시절 직접 그리거나 쓴 유물이다. ‘최익현 초상(崔益鉉 肖像·보물 제1510호)’과 ‘팔준도첩(八駿圖帖)’도 볼만하다. 구한말 우국지사였던 면암 최익현(1833∼1906)은 1875년 한라산을 등반하고 ‘한라산기’를 남긴 인연이 있다. 팔준도첩은 조선 태조의 여덟 마리 명마를 그린 그림을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첩. 그 가운데 ‘응상백(凝霜白)’은 1388년 위화도 회군 당시 탔던 말로 한라산 자락에서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월 3일까지. 무료. 064-720-80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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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별 예쁜 책]금빛 물든 부석사 설경사진 한 장에 불교의 美 오롯이

    예쁜 책의 기준은 뭘까. 표지부터 휘황찬란한 책을 일컫는 거라면 ‘불교의 미를 찾아서’는 거리가 멀다. 디자인에 들인 공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첫눈에 눈길을 사로잡았노라고 말하긴 솔직히 힘들다. 큼지막한 손 글씨체의 ‘미(美)’자가 나름 인상적이긴 해도. 내용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보건대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인 저자는 불교에 상당히 심취한 이다. 최대한 간결하게 불교문화를 설명하려고 애쓴 티가 역력한데, 아쉽지만 교과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하지만 이 책의 ‘어여쁨’은 책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마주하는 사진들에서 빛을 발한다. 10여 년 동안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사찰들을 찾았다는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은 놀라울 정도다. 전문 사진작가도 아닌 이가 어떻게 이런 작품을 찍었지 싶어 여러 번 출처를 확인했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 사진은 특히 인상적이다. 절 자체가 워낙 아름답기로 소문났지만 어찌 이리도 근사할까. 일찍이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극찬했던 이유가 다시금 떠오를 정도다. 그 가운데서도 가을날 저녁 위쪽에서 부석사를 끼고 내려다본 산세를 담은 사진과 밤새 내린 눈에 덮인 부석사가 새벽 햇살에 황금빛으로 변모한 사진은 놓치지 마시길. 이 사진 두 장을 만난 것만으로도 ‘불교의 미를 찾아서’는 정말 예쁜 책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우고 싶다. 교과서 분위기가 난다고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책은 초심자에게 입문서로 꽤 추천할 만하다. 전국의 사찰을 꼼꼼히 살펴 부처와 보살에 따라 매력적인 장소를 정리해놓은 것도 여행객에게는 도움이 될 듯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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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사회]욕망 권하는 사회에 맞설 무기는?

    우리도 안다. 넘치는 건 모자람만 못하다. 세상만사 안 그런 게 없다. 다만 알긴 아는데 뜻대로 안 된다. 살짝 부족할 때 숟가락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부지불식간에 감정을 터뜨리고 후회하는 일도 숱하게 많다. 자기 절제, 자신을 다스리는 일은 말처럼 녹록지가 않다. 저자가 볼 때 현대사회는 이런 자기 절제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하긴 주위를 둘러보라. 군침 도는 먹거리부터 근사한 옷과 가방, 날렵하고 매끈한 자동차….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이 하루 종일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술은 줄여야겠고, 담배는 끊어야겠고, 살은 빼야겠는데…. 물론 이런 절제에 성공하는 이들도 꽤 된다. 하지만 옛날, 아니 바로 인터넷이 흔하지 않던 십수 년 전만 떠올려보자. 지금의 인터넷 중독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예 존재조차 하질 않았으니. 세상이 발전할수록 유혹은 점점 늘어나고 강력해진다. 미국 뉴욕타임스 저널리스트로 여러 소설과 논픽션을 쓴 저자는 이런 뜻에서 현 시대를 ‘과잉의 시대’로 명명한다. 사실 이 책의 원제는 ‘자기 절제 사회’가 아니라 ‘과잉 시대의 자기 절제(Self-control in an Age of Excess)’다. 자기 절제를 무너뜨리는 유혹은 넘쳐나고 그로 인해 인간의 욕망도 흥청거리는데, 어떻게 해야 이를 조절하고 관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자는 취지다. 책은 전반부 상당량을 할애해 21세기가 얼마나 자기 절제가 힘든 시대인지 갈파한다. 하지만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인간의 본성 자체가 쉽게 통제력을 잃는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는 게 ‘시간적 비일관성’이라는 심리학적 요인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때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자기 합리화에 도가 텄다는 얘기다. 정신이 말짱한 낮에는 금주를 결심했다가도, 업무에 지친 저녁에는 열심히 일했으니 술 한 잔은 작은 보상이 아니겠느냐며 스스로를 다독거리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물론 이런 비일관성이 삶을 적절히 버텨내는 윤활유로도 작용하지만, 절제라는 측면만 놓고 보면 고약한 악마인 셈이다. ‘자기 절제 사회’는 참 요상한 책이다. 일단 범주를 규정하기가 힘들다. 온갖 분야의 다양한 지식이 버무려져, 철학서적도 문예비평서도 과학책도 아닌 책이 등장했다. 그러다보니 작가의 현란한 드리블은 멋들어지지만 정작 어느 골대를 노리고 있는 건지는 아리송하다.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장의 제목도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에 충실하라)’이라니. 하지만 전제했듯 이 빼어난 드리블 솜씨를 보는 맛은 놓치기 아깝다. 다소 현학적이나 클래식 문학과 현대 대중예술, 진화생물학과 고대 그리스철학까지 넘나드는 재미가 꽤나 근사하다. 소설가여서 그런지 문장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 코트를 휘젓고 끝내주는 패스를 해줬으면 됐지 더이상 뭘 바랄까. 슛을 쏠지 말지, 결정은 독자가 스스로 해야지.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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