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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청주박물관(관장 윤성용)이 10일부터 청명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 ‘정병, 염원을 담다’를 개최한다. 박물관은 9월 11일∼10월 20일 열리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를 맞아 고려시대의 수준 높은 공예 기술이 오롯한 정병(淨甁·사진)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정병은 원래 인도에서 여행자가 지니고 다니던 물병이었으나 한반도에 불교 공양구의 하나로 전해진 뒤 일반 민가에서 물병으로도 많이 썼다. 이번 전시에는 12세기에 제작된 ‘청자 물가 풍경 무늬 정병’(보물 제344호)을 비롯한 고려시대 정병과 관련 작품 40여 점을 선보인다. 특별전은 정병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물가 풍경 무늬를 소개하는 데 역점을 뒀다. 특히 청동으로 만든 정병은 한두 점을 제외하고 모두 이 무늬가 새겨져 있다. 무늬를 쫙 펼치면 물가에 어우러진 버드나무와 물풀, 물새가 한 폭의 그림처럼 구성된 것도 특징이다. 10월 27일까지. 무료. 043-229-63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에 따라 2025년까지 이전해야 한다. 전시자료 이전과 건물 공사를 고려하면 올해 안에 이전 장소를 선정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여러 지역이 거론되고 있으나 맞춤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사실 민속박물관은 내심 서울 용산가족공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에 사용하던 근대 건축물이 여럿 남아있어 이를 활용할 수 있다는 복안이다. 3일 민속박물관에서 열린 국제학술세미나 ‘박물관을 위한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활용’이 열린 것도 민속박물관을 가족공원과 연계해 새로운 문화 명소로 키워보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자리였다. 이 때문에 이날 세미나에는 근대 건축물을 활용해 성공을 거둔 해외 박물관의 사례가 집중적으로 조명됐다. 특히 일본에서 1965년 개관해 가장 사랑받는 근대 건축물 박물관으로 잡은 메이지무라(明治村)는 스즈키 히로유키(鈴木博之) 관장이 직접 소개해 관심을 모았다. 일본 아이치(愛知) 현 이누야마(犬山) 시에 면적 100만 m² 규모로 자리 잡은 메이지무라는 67동의 메이지시대 건물을 옮겨와 복원하고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1923년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가 설계한 데이코쿠 호텔 중앙현관을 비롯해 국가지정 중요문화재가 12건에 이른다. 스즈키 관장은 “근대 건축물은 도시화 현대화에 휩쓸려 소멸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박물관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며 “다만 근대건축물은 시간이 갈수록 보수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면밀하게 유지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국의 다산쯔(大山子) 798은 베이징에 폐허로 방치되던 군수공장 6개를 박물관 작품전시와 예술가의 전시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곳. 2003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문화 상징성을 가진 세계 22개 도시예술센터’로 꼽기도 했다. 황루이(黃銳) 다산쯔 798 예술감독은 근대건축물 활용에서 ‘개방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냉전시대 유물인 공장건물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역사성을 부여했으며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분야와 상관없이 최소 비용이 드는 작업공간을 제공하고 △중국 중심에서 벗어나 해외 예술단체의 입주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다산쯔 798의 성공 요인이었다는 것. 하지만 최근 다산쯔 798에도 대형 자본이 유입돼 상업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황 감독은 “개방성을 유지하되 근대 문화재 보존의 철학을 유지하는 일이 관건”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가수 이효리(34)와 기타리스트 이상순(39)이 1일 제주도에서 화촉을 밝혔다. 두 사람은 이날 오후 1시경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 있는 별장에서 양가 가족과 몇몇 지인들만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이효리의 소속사 비투엠엔터테인먼트는 “가족과 지인들의 축하 속에 화기애애하게 식이 진행됐다”며 “주례 없이 조촐하게 치러졌으나 두 사람은 무척 행복해했다”고 전했다. 일부 언론에 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신부는 흰색 드레스에 들꽃으로 엮어 만든 화관을 썼고, 신랑은 하늘색 정장 차림으로 식을 올렸다. 이효리는 1998년 걸그룹 핑클로 데뷔한 뒤 2003년부터 솔로로 전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상순은 1999년 밴드 롤러코스터 출신으로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해 왔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인도 뭄바이 빈민촌 하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꽤 있다. 인도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의 소설 ‘Q&A’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가난해도 꿈을 잃지 않는 하층민 젊은이의 삶을 맛깔 나게 풀어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그런 흥취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뜬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를 내려치는 듯한 책이다. 웃기지 마라. 낭만? 희망? 노숙이나 다름없는 움막에 살면서 밤이면 쥐한테 물어뜯기고, 또 그 쥐를 잡아먹으며 쓰레기를 줍는 인생에 과연 그런 여유가 끼어들 틈이 있을까. 11세 어린애가 당장 내일의 끼니는 고사하고 오늘의 생존도 장담하지 못하는 땅. 그곳이 인도 빈민촌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를 거쳐 현재 뉴요커 기자로 재직하는 저자가 4년 동안 밀착 취재했다는 뭄바이 빈민촌 안나와디의 실상은 충격적이다 못해 두렵다. 안나와디는 뭄바이의 수많은 빈민촌 가운데 사하르 공항(공식 명칭은 차트라파티시바지 국제공항) 인근에 형성된 곳. 1991년 공항도로 건설에 동원됐던 지방 노동자들이 터를 닦아 현재 3000명 정도가 산다. 그 가운데 정규 직장을 가진 이는 겨우 6명. 대다수는 공항에서 배출하는 폐품을 수거하거나 오염된 폐수에서 건진 물고기를 잡아 삶을 연명한다.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소년 압둘과 수닐에게 인생의 즐거움이란 ‘오늘 하루 얼마나 근사한 쓰레기를 건졌는가’이다. 동네 아이들이 가져온 쓰레기를 매입해 넘기는 중개상쯤에 해당하는 압둘은 새벽부터 밤까지 허리 한 번 펼 새 없이 일한다. 자신의 노동이 철모르는 동생들은 물론이고 무능력한 부모의 밥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압둘은 푼돈이나마 저축할 수 있으니 그나마 사정이 낫다. 경찰과 공항 관리요원에게 매를 맞는 건 다반사이고, 쓰레기를 차지하려 칼부림까지 벌이는 경쟁을 매일 겪어야 하는 수닐에게 삶은 지옥과 같은 말이다. 다행히 둘은 예외라지만, 또래들이 그 참혹과 허기를 잊으려고 버려진 수정액으로 만든 화학찌꺼기를 마약처럼 흡입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이게 진실일까 자꾸만 의심하게 만든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참혹할 수 있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엔 꿈과 희망이 존재한다는 식의 긍정적인 요소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저자가 오랫동안 공들인 취재기를 르포 형식이 아닌 소설처럼 썼기 때문에 더 감정이입이 큰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꾸며진 얘기였으면 좋겠다는 바람마저 생긴다. 저자는 흔히 ‘달동네’ 하면 가난해도 서로 돕고 의지하는 인정 넘치는 풍경을 떠올리는 고정관념마저 깨부순다. 가난의 극에 다다른 이들에게 그건 사치고 낭비다. 오늘 좁쌀만 한 여유가 생겼다고 내일도 그럴 거란 보장이 없으니까. 끊임없는 악다구니를 건네며 서로를 물어뜯고 생채기내는 건 벽을 맞댄 이웃들이다. 빈민촌 주민들은 보잘것없는 이권이라도 생기면 그걸 절대 허투루 쓰지 않는다. 수십 년을 보아온 이웃사촌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악착같이 뜯어낸다. 그래야 이 지옥에서 상대를 밟고 짓이긴 뒤 자기라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착각하면서. 더 암울한 건 딱히 빈민촌과는 상관없어 보이던 ‘세계화’나 ‘서구 경기침체’가 이들에게 직격탄을 먹였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불황은 인도의 성장둔화로 이어졌고, 고철이나 폐품 가격의 폭락을 불러왔다. 또 돈벌이가 시급해진 대기업마저 재활용사업에 뛰어들며 그들의 먹고살 양식을 앗아갔다. 게다가 인도 경제를 책임져야 할 뭄바이는 해외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도시정비사업에 나서 빈민촌을 밀어버리려 한다. 세상은 그들에게 그 거지같은 잠자리마저 허락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자꾸만 한숨이 흘러나온다. 초반엔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돕지는 못할망정 그저 지켜만 보는 저자가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느낄 수 있다. 아, 이게 한두 사람 챙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이걸 도대체 어떡해야 할까. 왠지 이 무력감, 오래갈 것 같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흔히 서화를 족자나 병풍으로 꾸미는 일을 ‘표구(表具)’라고 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풍이 들어오며 생긴 말로 원래 조선에서는 ‘장황(粧O)’이라고 불렀다. 장황이 표구로 바뀐 것처럼 이 땅의 서화 보존처리는 전통 기법이 상당 부분 유실됐다. 21세기 한국의 문화재 보존처리는 현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이런 전통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29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 ‘유기질문화재 보존처리의 현황과 전망’은 큰 의의를 갖는다. 유기질문화재란 서화에 쓰이는 종이나 가죽, 목재로 이뤄진 문화재를 말한다. 이날 심포지엄은 이런 섬세한 유기질 유물의 국내 보존처리 성과를 공유하고 해외 연구사례를 배워 개선점을 찾는 자리였다. 심포지엄에서는 박지선 용인대 문화재학과 교수(53)가 보물 제1564호 ‘이순신 선무공신교서’를 보존처리했던 과정을 전해 눈길을 끌었다. 2008년까지 교서는 제작 당시의 두루마리가 아닌 서첩으로 보관돼 있었다. 명확하지는 않으나 20세기 초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유행을 좇아 변질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존처리팀은 배접지(褙接紙·전통 장황 방식으로 여러 겹 겹쳐 붙이는 종이)를 일일이 떼어내고 재처리해 지금 일반인들이 마주하는 두루마리 형태로 되살렸다. 박 교수는 “단순히 원형 복원이 능사가 아니라 유물의 보존에 무엇이 최선의 방식인가를 고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근대문화재도 보존처리는 중요하다. 배순화 서울여대 강사(47)는 성철 스님(1912∼1993)의 두루마기를 보존처리한 경험을 사례로 들었다. 성철 스님은 평생 옷을 손수 기워가며 입어 의복은 누더기처럼 낡았으며 잦은 푸새(옷에 풀을 먹이는 일)로 뻣뻣했다. 일견 낡은 게 문제처럼 보이지만 시급한 것은 푸새였다. 입을 때는 풀을 먹인 게 옷의 형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장기간 보관할 경우 푸새는 곰팡이나 해충의 피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배 강사는 효소와 활성제를 이용해 여러 번에 걸쳐 풀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해외 보존처리 사례도 다양하게 소개됐다. 덴마크국립박물관은 중세 바이킹 시대 목재선박을 진공 상태에서 동결 건조시키는 방식을 소개해 주목을 받았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6·25전쟁 때 해외에 무단으로 유출됐던 한국 최초의 근대 지폐 호조태환권(戶曹兌換券) 인쇄 동판(원판)이 60여 년 만에 국내로 환수된다. 문화재청은 27일 “미국에서 불법 거래되다가 미 정부가 압수한 호조태환권 10냥의 앞면 원판이 한미 당국 간 협상이 마무리돼 30일경 국내로 들어온다”고 밝혔다. 그간 미국 측과 공조를 취해온 문화재청과 대검찰청은 다음 달 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청사에서 미국 국토안보부와 주한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원판을 공식적으로 전달받을 예정이다. 호조태환권은 구한말인 1892년 고종이 신식화폐조례를 공포하고 호조 산하에 태환서(兌換署)를 설치해 기존에 쓰이던 옛 화폐를 회수하려고 만든 일종의 교환화폐다. 조국의 경제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하는 데 쓸 목적이었다. 그러나 지폐를 찍어낼 원판을 제작했던 조폐기관인 전환국(典(원,환)局)이 일본의 방해로 운영에 차질을 빚으며 호조태환권은 발행되지 못했다. 이후 일본 제일은행권과 옛 한국은행권이 유통 화폐로 쓰이며 과거에 묻혔으나, 학계에서는 호조태환권을 한국 근대기에 나온 최초의 지폐로 평가한다. 이번에 미국에서 환수되는 호조태환권은 크기 15.875×9.525cm에 무게 0.56kg인 청동 재질 10냥 원판. 가운데 ‘십냥(拾兩)’이라고 크게 보이고, 아래에 대한제국 이전에 채택하려 했던 ‘대조선국(大朝鮮國)’의 국호를 써서 ‘대조선국전환국제조’라고 적혀 있다. 양옆으로는 호조와 태환서가, 가운데 10냥 표기 아래에는 ‘이 환표ㅱ 통용ㅱㅱ 돈으로 교환ㅱㅱ 것시라’고 새겨져 있다. 당시 전환국은 모두 4종(50냥, 20냥, 10냥, 5냥)의 원판을 제작했으며, 현재 국내에서는 국립고궁박물관이 50냥, 10냥, 5냥 동판을 소장하고 있다. 원판으로 찍은 호조태환권 지폐는 당시 대부분 소각되고 거의 남아있지 않다. 2010년 희귀화폐를 취급하는 풍산 화동양행에서 10냥 지폐 1장이 9250만 원에 거래된 바 있다. 화동양행 관계자는 “원판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국보급에 해당하는 보물”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미국으로 유출됐던 이 원판은 6·25전쟁 직전까지 서울 덕수궁에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1951년 한 미군이 혼란을 틈타 불법 유출하며 종적을 감췄다가 2010년 그의 유족이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경매회사 ‘미드웨스트 옥션 갤러리’에 처분을 의뢰하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미국 국무부가 이를 감지하고 주미 한국대사관에 통보해 한국 대검찰청 검찰국제협력단과 미국 국토안보부 이민관세집행청이 수사 공조를 진행했다. 하지만 경매회사 측은 협조 요구를 거절하고 경매를 강행해 원판은 한국계 고미술수집가 S 씨(54)에게 3만5000달러(약 3900만 원)에 넘어갔다. 다시 사라질 뻔했던 동판은 같은 해 양국 수사기관들이 상호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환수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올해 초 미국 사법당국이 연방장물거래금지법을 적용해 S 씨와 경매회사 대표를 체포하면서 원판을 되찾았다. 문화재청은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해외 수사기관과 공조해 형사절차를 밟아 되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향후 미국으로 유출된 또 다른 문화재들의 국내 환수 작업에도 좋은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편집기자협회(회장 박문홍)는 제143회 이달의 편집상 수상작으로 동아일보 조승업 차장(사진)의 ‘이 티켓 동났다’(문화·스포츠부문) 등 5편을 선정해 27일 발표했다. 종합부문은 충청투데이 하정호 기자(촛불잔치·촛불눈치), 경제·사회부문은 서울신문 신혜원 기자(삼척까지 ‘빨간물’…일주일째 ‘빨간눈’), 피처부문은 아시아경제 권수연 차장(초록 에어컨), 특별상부문은 한국일보 이직 차장(언론의 바른 길,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이 수상했다.}
올해 파독 광원·간호사 50주년이 주목받고 있지만 또 다른 반세기를 맞은 해외동포 역사가 있다. 바로 ‘남미 이민 50주년’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과 섞여 남미로 떠난 한인도 일부 있었지만, 1963년 2월 12일 한국 정부가 농업이민자 103명을 브라질로 보낸 것을 공식적인 첫 남미 이민으로 본다. 고향 떠난 이들의 삶이 누군들 쉬울 리 없겠지만 남미에 정착한 한인들의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층민으로 설움도 많이 겪었고, 다른 나라로 재이민을 간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브라질을 중심으로 한인 의류사업이 번성하고 뜨거운 교육열로 2, 3세대를 잘 키워 내며 이제 한국계 이민자의 현지 위상도 높아졌다. 남미 이민 50주년을 맞아 최근 의미 있는 연구 성과가 나왔다. 김환기 동국대 일어일문학과 교수(49)가 4년간 현지조사를 벌인 노작 ‘브라질·아르헨티나 코리안 문학 선집’(보고사)을 출간했다. 김 교수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이민사회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양산된 문학작품을 모으고, 그 디아스포라 문학에 담긴 사회적 역사적 함의를 짚었다. 김 교수는 일본계 이민사회를 연구하는 일본 호세이대와 공동프로젝트로 이 연구를 진행해 왔다. 한국어로 쓰인 362편의 문학작품을 분석한 김 교수는 남미 이민문학의 특징으로 ‘초국가적 열린 세계관’에 주목했다.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진 남미 혼종문화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경향이다. 남미 문화에서 한국과 비슷한 점을 찾으며 동질감을 보이거나 현지에서 겪는 문화적 갈등도 융합을 통해 해소하려는 주제를 다룬 작품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드러낼 때도 엇비슷했다. 박종하의 시 ‘남미로 오는 기상에서’를 보면 “비행기에 몸을 실어 하늘을 나니/구름이 가로 막혀 지구마저 이별인가”라는 대목이 나온다. 고향을 떠난 안타까움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관조자의 시각으로 풀어냈다. 김 교수는 “이민 초기 소수민족으로 냉대를 받았으나 결국 폐쇄적 민족성보다는 다원주의적 태도로 공존공생을 이뤄낸 역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남미 대자연에 대한 찬양을 담거나 종교적 휴머니즘을 다룬 작품이 많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일본계 이민사회에 우호적 태도를 보인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여러 작품에 일본인들이 등장하는데, 긍정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김 교수의 연구를 도운 최금좌 한국외국어대 포르투갈어과 교수에 따르면, 이는 한인들의 현지 정착에 일본 이민자의 공이 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일본인들은 한인보다 60년 정도 앞선 1900년대부터 남미에 터전을 마련했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일본말에 능숙한 이가 많았는데, 일본인 이민자들이 말이 통하는 한인들을 적극 도와줬다. 김 교수는 “굴곡진 역사를 공유한 양국이지만 머나먼 지구 반대쪽에서는 서로가 동질감을 느끼는 존재였다”고 말했다. 작품 소재로 의류사업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남미 이민사회는 브라질 상파울루의 코리아타운 봉헤치루를 중심으로 의류를 만들어 팔며 경제적 번영을 이뤘다. 초기에는 저가제품을 대량 생산하며 기반을 마련했지만 현재는 대형 백화점 명품매장에 입점할 정도로 고급화됐다. 최승재의 ‘얼씨구 절씨구’나 안경자의 ‘쌍파울로의 겨울’ 같은 소설은 벤데(외판원) 생활을 하던 초기 이민자의 모습을 담아 현지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김 교수는 남미 이민문학이 번성한 이유로 현지 한글문학회의 활발한 활동을 꼽았다. 브라질은 1970년 브라질한인회의 전신인 한국문화협회가 창간한 ‘백조’를 시작으로 ‘무궁화’ ‘열대문화’ 같은 종합문예지가 이어졌다. 아르헨티나도 1994년 재아(재아르헨티나)문인협회가 조직된 뒤 동인지 ‘로스안데스문학’을 발간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한국 이민사회의 정체성을 문학을 통해 지키려는 노력이 남미 이민문학이란 독특한 역사적 산물을 낳았다”고 평가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조선왕조 당대의 화가들이 오백 년 도읍지 한양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고미술 특별전 ‘한양유흔(漢陽留痕)’이 서울 종로구 관훈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다. 1983년 문을 연 공화랑이 공아트스페이스로 재개관한 지 3주년을 맞아 여는 이번 전시는 고려대박물관과 협력해 조선 회화의 진수라 부를 만한 고미술 작품 100여 점을 소개했다. 1부 ‘한양, 꿈을 펼친 화가들’에서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호생관 최북, 현재 심사정과 같은 시대를 호령했던 화가들이 그린 한양의 흔적을 모았다. 2부 ‘왕실, 그 속을 거닐다’는 도화서(圖畵署) 화원들이 그린 궁중기록화와 궁중 의물(儀物), 사대부 초상화를 전시한다. 1부에 소개된 겸재의 ‘장동팔경도(壯洞八景圖)’는 개인 소장품으로 일반인에게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서울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의 명소 8곳을 담은 이 작품은 백악산 자락에서 나고 자라 인왕산 계곡에서 말년을 보낸 겸재의 작품이라 더욱 애정이 묻어난다. 겸재의 작품 중에서 표암 강세황의 발문이 적힌 8폭 병풍 ‘백납병풍(百納屛風)’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도 놓치면 아까운 작품이다. 2부에서는 1743년(영조 19년)에 거행된 대사례(大射禮)의 광경을 그린 ‘대사례도’가 인상적이다. 대사례는 임금이 성균관에서 석전례(공자에게 올리는 제사)를 지낸 뒤 신하들과 행하는 활쏘기 의식을 말한다. 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한 이 작품은 보존을 위해 앞으로 더이상 전시하지 않을 예정이어서 실물로 보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9월 15일까지. 3000∼5000원. 02-735-9938정양환 기자 ray@donga.com}
2011년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당시 ‘145년 만의 귀환’이란 헤드라인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반환이냐 대여냐를 놓고 지금도 말이 많지만, 1991년 한국 정부가 프랑스에 반환을 공식 요청한 지 20년 만에 어렵사리 거둔 성과였다. 외교통상부 프랑스 담당관과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정무참사관을 지낸 저자는 거의 모든 양국 간 의궤 협상에 참여하며 겪은 일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엮었다. 외부에서야 돌아온 보물의 가치에 더 주목했겠지만, 저자에게 의궤는 ‘긴장과 불안의 외줄타기 외교’와 동의어였다. 1999년 4월 처음 열렸던 민간전문가 협상 이래 한번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 양국 협상단은 처음부터 자기 주장만 내세우며 공세적 태도를 취했다. 2000년 7월 협상 때는 자크 살루아 프랑스 감사원 최고위원이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치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프랑스는 의궤 대신 그에 상응하는 문화재를 제공하길 요구했고, 한국은 한국대로 여론에 휘청거리며 협상을 진전시킬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과도한 업무로 유산까지 겪었다. 오죽했으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의궤 문제라면 지긋지긋해 신물이 난다”고까지 말했을까. ‘터널 속에 갇혀버렸던’ 협상은 2009년 박흥신 주프랑스 대사가 부임하며 전환점을 맞았다. 박 대사는 여전히 자국 입장만 견지하는 프랑스 관계자들에게 “한국 국민은 맞교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궤를 돌려주고 한국인의 영원한 사의를 선물로 받으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 프랑스의 높은 벽을 무너뜨리는 돌파구로 작용했다. 이후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결국 대여라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저자는 한번도 외국에 문화재를 돌려준 적 없던 프랑스 문화재법을 뛰어넘었다는 데 큰 의의를 뒀다. 현재 미국 애틀랜타 부총영사로 재직 중인 저자는 여전히 외교무대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이제 이 책을 통해 의궤를 둘러싼 너무나 길고 혼신을 다했던 줄다리기의 줄을 그만 놓고 싶다는 심정을 조심스레 피력한다. 맡은 바에 최선을 다했기에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본 샹스(Bonne chance·행운을 빕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해안에서 어선 한 척이 실종됐다고 치자. 사람 목숨이 걸렸으니 쓸 수 있는 방법은 총동원해야 할 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연안 앞바다를 모조리 훑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선박, 인력이 투입돼야 할까. 그때까지 배에 탄 선원들이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확실하진 않더라도 ‘가능성 높은’ 지역부터 찾는 게 현실적이다. 일종의 도박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 ‘가능성 높은’에는 복잡한 함의가 숨어 있다. 짐작건대 배를 구출하기 위해 정부와 과학자들은 그간의 경험과 실종 어선을 둘러싼 다양한 변수를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정답을 구하려 애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누구도 배의 위치를 장담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판단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베이즈의 정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탄생한 이론이다. 1740년대 영국의 토머스 베이즈 목사(1701∼1761)는 자신도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할 수 없었던 엄청난 정리를 발견했다. 그는 ‘세상의 증거에 기초해 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결론을 도출할 방법 하나를 착안해 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 대상에 대해 가진 초기의 믿음을 객관적이고 새로운 정보로 업데이트할 때 보다 개선된 새로운 믿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골자다. 무슨 소리인가 갸우뚱거려진다면 베이즈 목사가 직접 했던 실험을 사례로 들어보자. 당구대에 공을 굴리고 멈춰 선 위치를 찾는 게임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게임 도구는 다른 공들이다. 첫 공은 치운 뒤 두 번째 공을 굴려 보여주고 이 공이 ‘첫 공과 비교하면 오른쪽 아래에 섰다’ 정도의 정보를 알려준다. 그러면 정답은 몰라도 첫 공이 섰을 것이라 추측할 범위가 다소 줄어든다. 세 번째, 네 번째 공을 굴리고 나면 그 범위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베이즈의 정리란 이것이다. 새로운 정보가 추가로 투입될수록 정답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 바로 ‘확률’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지금 시대라면 이런 확률 이론이 익숙하지만 베이즈의 정리는 그 후 오랫동안 멸시를 당했다. 당대 지식인들은 전혀 과학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고 봤다. 왜냐하면 이 논리엔 주관적 요소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출발부터가 그렇다. 처음 굴린 공이 당구대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누가 보장하나. 당구대에 있다는 전제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든 셈이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공을 굴려도 결코 정답은 구할 수 없다. 99% 확실해도 1%의 오차는 존재한다. 그런데 이를 따른다면 이 역시 주관이 개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듯이 베이즈의 정리, 즉 확률은 현재 지구상에서 너무나 폭넓게, 그리고 유용하게 쓰인다. 저자에 따르면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군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암호를 풀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군이 쏜 대포가 어디를 맞힐지 예측하거나 전투에 내보낸 비행기가 추락할 위험도를 찾는 데도 도움이 됐다. 객관적 수치만으로 이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당장 전쟁에서 이길지 질지 모르는데 100% 확실한 것을 언제 기다리겠나. 이처럼 확률은 효율성을 무기로 기존 과학의 입장을 무너뜨렸다. 솔직히 이 책은 상당히 어렵다. 이 분야에 관심이 없는 이라면 용어도 낯설고 등장인물도 생소하겠다. 분량 역시 만만찮다. 하지만 다행히 저자도 저널리스트이지 과학자는 아니라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일종의 역사서적을 읽는 느낌이랄까. 최소한 수학책 들여다볼 때처럼 머리가 핑핑 돌지는 않으니 너무 걱정 마시길.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진 속 태극기는 건물에 비해 너무나 컸다. 휘날리는 모습도 어색하다. 그려 넣은 티가 역력했다. 20세기 초 별다른 보정기술도 없으면서 사진에 투박하게 태극기를 넣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속에는 민족의 독립을 소망하는 재외동포의 애달픈 염원이 담겨 있었다. 지난해 102년 만에 되찾은 옛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미국 내 한인들 사이에서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1910년대 우편엽서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14일 “독립운동가 김호(1884∼1968)의 외손자인 안형주 선생(76)이 보관하던 기록물에서 ‘미국 와싱톤 대한뎨국 공사관’ 엽서를 찾았다”고 밝혔다. 그간 태극기가 그려진 주미공사관 사진은 당시 공사관의 모습을 담은 대표적 유물로 꼽히면서도 그 출처와 의도가 명확하지 않았다. 왜 이런 합성사진을 만들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후대에 누가 장난삼아 태극기를 그려 넣은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돌았다. 하지만 이번에 사진이 실린 엽서 원본이 발견되며 미스터리는 단박에 풀렸다. 발견된 엽서에는 마영준이란 사람이 허승원에게 보내는 새해인사가 적혀 있다. 수신 주소는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본부였다. 이 단체는 1909년 조직된 해외 한인 독립운동단체로 독립자금을 모으고 기관지 ‘신한민보’를 발간해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조사한 결과 허승원은 도산 안창호와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국민회 간부였다. 마영준도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한글을 가르치며 민족의식 고양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이 엽서가 일회성으로 만든 게 아니라는 사실도 추가로 확인됐다.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안창호와 서재필 유물에서도 같은 엽서가 나온 것. 그런데 똑같이 태극기가 합성된 앞면 사진과 달리 뒷면 디자인은 엽서마다 조금씩 달랐다. 여러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제작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도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독립운동가들이 공사관 사진이 담긴 우편엽서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처음 알려진 사실”이라며 “당시 재미 독립운동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어색해 보이는 합성 태극기는 당시로서는 뜨거운 결의를 담은 강력한 메시지였다. 엽서를 만든 시점은 이미 일제가 나라를 빼앗고 공사관도 강제로 단돈 5달러에 팔아넘긴 뒤였다. 태극기를 게양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재미동포에게 공사관은 조국이 자주독립 외교를 떨치던 상징이었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활용홍보팀장은 “서투른 솜씨지만 큼지막한 태극기를 새겨 다시 공사관과 조국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단은 홈페이지(www.overseaschf.or.kr)를 통해 신청하는 일반인 1000명에게 엽서 복제품을 무료로 배포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서얼 출신. 그러나 능력으로 극복하고 대한제국 정1품 대신에 올랐다. 한일강제병합 뒤에는 비밀결사조직을 이끌었고,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백범 김구의 비서로 일했으며, 며느리는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 독립운동을 도왔다. 일제강점기에 나라 잃은 슬픔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비탄에 그치지 않고 조국을 되찾으려 싸운 경우는 흔치 않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13일 개막한 8·15 광복절 특별전 ‘조국으로 가는 길-한 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 며느리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1846∼1922) 일가의 숭고하고도 치열했던 삶을 조명했다. 6부로 구성된 전시회는 특히 김가진과 며느리 수당 정정화(修堂 鄭靖和·1900∼1991)의 생애에 초점을 맞췄다. 일제가 남작 직위를 내렸으나 거부하고 칩거했던 동농은 1919년 결성된 항일단체 조선민족대동단 초대 총재로 활동했다. 대동단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해외독립운동을 고취하려다 실패했다. 김가진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고문으로 활동하며 무장투쟁을 준비하다 1922년 사망했다.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인 성엄 김의한(省俺 金毅漢·1900∼1964)이 망명한 이듬해인 1920년 무작정 상하이로 찾아가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김구 이동녕 윤봉길과 같은 임정 요인들을 뒷바라지했다. ‘임정의 잔 다르크’로 불렸던 수당은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넘나들며 국내에서 독립자금을 마련해 임정 살림을 꾸리기도 했다. 이번 특별전은 동농 일가의 유물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극 연출 기법을 동원해 관객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꾸몄다. 망명길에 몸을 실었던 열차나 압록강을 건너던 나룻배를 세트로 만들고 성우가 주인공처럼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하이에 거처로 마련했던 살림집도 꾸미고, 일제의 폭격을 피해 숨었던 방공호도 재현했다. 정명아 전시과장은 “독립운동사나 정치활동 같은 거시적 담론보다는 망명의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고달팠던 한 시대와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10월 13일까지. 무료. 02-724-0154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학창 시절 국사시간에 으레 배우는 조선 국왕의 이름. 27대 왕들을 외우다 보니 왕 이름은 무조건 ○조 ○종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이는 왕이 승하한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지어 올리는 묘호(廟號)다. 당사자인 왕은 살았을 때 이런 호칭을 들어본 적도 없다. 정종수 전 국립고궁박물관장(58)이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동원학술논문집’ 제14집에 게재한 ‘조선시대 국왕의 호칭과 묘호’에 따르면 조선 왕의 이름은 수십 개에 이른다. 태어날 때 불리는 호칭부터 세상을 떠난 뒤 불리는 시호(諡號)까지 상황과 시점마다 각양각색이었다.○ 아기씨(阿只氏)의 이름(諱)은 외자로 조선시대 왕의 자녀는 태어나면 일단 ‘아기씨’라고 불렀다. 아기(阿只)에 존칭인 씨(氏)를 붙인 것이다. 원자(元子)면 원자아기씨, 세손은 세손아기씨였다. 웃어른들은 원자나 원량(元良), 충자(沖子·어린아이)라 불렀다. 영조는 세손이던 정조를 20세가 되도록 충자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왕도 따로 이름이 있었다. 2011년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이 세종대왕에게 일갈하던 “이도(李L)”. 이는 왕의 본명인 휘(諱·생전 이름)를 부른 것이다. 그런데 조선 왕들은 세종처럼 대체로 이름이 외자였다. 27명 역대 왕 가운데 두 자로 된 이름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선조 인조 철종 고종뿐이다. 그러나 이들도 단종과 태종을 제외하면 모두 이후에 외자로 개명했다. 고려의 신하였던 태조나 평민처럼 살았던 철종은 왕이 될 줄 몰라 이름을 두 자로 썼다가 후에 바꿨다. 외자를 선호한 것은 ‘기휘제도(忌諱制度)’ 때문이다. 유교문화권은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거니와 글자로 쓰는 것도 금기시했다. 이러니 한 자라도 줄여주는 게 신하와 백성을 돕는 길이었다. 왕의 이름은 육조 참판과 당상관 이상이 모여 지었는데, 최대한 잘 쓰지 않는 글자를 선택했다. 심지어 자전에 없는 글자를 집자(集字)하기도 했다. 후대로 갈수록 기휘제도는 더욱 엄격해졌다. 왕 이름과 음만 같아도 쓰기를 꺼렸을 정도였단다. 이에 영조는 이 제도의 폭넓은 적용을 금하라는 명까지 내렸다. 왕의 이름에 쓰인 부수는 모두 13종류인데, 일(日·7번)과 왕(王·4번)을 가장 많이 썼다. 귀하고 좋은 글자를 넣으려는 신하들의 충심이었다.○ 종(宗)보다는 조(祖)가 낫다?…각하(閣下)는 장관급 호칭 실학자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보면 왕은 살았을 때 흔히 전하(殿下)라고 불렸다. 이는 중국 황제의 폐하(陛下)보다 한 단계 낮은 호칭이다. 폐하는 궁전 뜰 저편 섬돌(陛) 아래서, 전하는 계단(殿) 아래서 부른다는 의미다. 높을수록 멀리 떨어져서 아뢴다는 뜻이 담겼다. 왕세자는 더 낮춰 ‘저하(邸下)’라고 했다. 각하(閣下)는 대신, 즉 장관급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대통령 각하’란 말은 무지의 소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묘호는 이래저래 말도 탈도 많았다. 사실 조종(祖宗)을 먼저 쓴 중국은 건국시조만 조를 붙이고, 이후 왕에게는 종을 썼다. 조선도 문종 때까지는 이를 지켰는데, 세조부터 원칙이 깨지기 시작했다. 아들인 예종이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는 나라를 새로이 세운 공덕이 크다”며 조를 쓸 것을 고집했다. 계유정란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한 그늘을 애써 지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후 조종을 둘러싼 논쟁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인종은 아버지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낸 공로가 크다 하여 조를 쓰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선조와 인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했다 하여 조를 썼으나 당시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영조와 정조는 첫 묘호는 영종과 정종이었는데, 고종이 재위 26년과 36년에 조로 바꿨다. 정 전 관장은 “조선 왕들은 종보다 조가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생전에 자신이 원하던 묘호를 얻은 왕들도 있다. 예종(睿宗)은 스스로 묘호를 짓고 “죽어서 이를 얻으면 만족하겠다”고 수시로 말했다. 생전에 각각 ‘명(明)’과 ‘영(英)’을 은근히 기대했던 명종과 영조도 뜻한 바를 이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솔직히 제목만 봤을 땐 시큰둥했다. 요즘 관계니 신뢰니 설득 같은, 인간관계 함양에 대한 책이 너무 쏟아진다. 타인을 대할 때면 진심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닌가. 사람 마음 얻는데도 권모술수를 써야 하나 싶어 영 내키질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일단 저자가 독일 정보부 비밀요원으로 10년 동안 일했다지 않은가. 온갖 범죄조직 내에 ‘파우만(정보원 혹은 끄나풀)’을 발굴해 고급정보를 얻어내는 게 주 업무였단다. 적이었던 인물을 자칫하면 목숨도 잃을 일을 돕게 만드는 동지로 만드는 노하우를 들려준다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일단 책은 흥미진진하다. 러시아 마피아에서 꽤 높은 지위에 있는 티코프라는 인물을 어떻게 저자가 둘도 없는 핵심 파우만으로 만드는지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우연을 가장해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안면을 트기 시작해, 나중엔 병을 앓는 아들의 치료까지 도와주며 인간적 유대까지 쌓는 과정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실제로 책 말미에 보면 저자가 비밀요원을 그만둔 뒤 우연히 거리에서 티코프를 마주치는데, 이젠 각자의 길을 가지만 서로의 눈빛에서 묘한 신뢰를 발견하는 대목도 나온다. 저자는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드는 기술은 크게 3가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첫째, 타깃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사전정보는 뭐든지 긁어모아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준비하고 덤비는 놈은 당할 수가 없다. 둘째, 서둘지 말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진심을 다해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셋째, 확실한 보상과 인간적 대우로 마음을 열되 맺고 끊음을 확실하게 해 신뢰를 쌓는다. 사실 이렇게만 말하면 여느 인간관계 비법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을 직접 겪으며 쌓은 공력이 담겨 있다. 현장 체험이 물씬하다는 소리다. 그러니 어찌 귀 기울이지 않겠는가. 다만 비밀업무에 종사했던 탓에 이름은 가명을 쓴다는데, 얼굴 사진은 버젓이 띠지에 실려 있다. 흠, 살짝 어설퍼야 상대의 마음도 열리는 걸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수석 연설문 담당자로 일했던 저자는 최근 미국에서 미래학자로 주목받는 인물. 21세기 비즈니스 환경을 예측했던 전작 ‘새로운 미래가 온다’ ‘드라이브’의 연장선에서 비즈니스의 본질인 뭔가를 파는 행위, 즉 ‘세일즈’에 대해 탐구했다. 저자는 디지털 세상이건 아니건 파는 대상이 물건이건 생각이건, 세일즈는 도처에서 이뤄진다고 봤다. 그리고 그 판매에 성공하려면 ABC, 공감을 이끄는 동조(attunement)와 굴하지 않는 회복력(buoyancy), 문제를 발견하는 명확성(clarity)을 키우라고 조언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논란이 컸던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사진)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메트) 전시가 성사됐다. 지난달 해외 반출 불허를 결정했던 문화재청이 11일 만에 기존 입장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진룡)는 9일 “문화재청이 국립중앙박물관과 메트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국외 전시를 위해 반가사유상의 국외 반출을 추가로 허가했다”고 밝혔다. 문체부는 또 “두 박물관이 포장 운송 과정에서 전시품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조건으로 간곡히 재요청해 문체부가 적극 중재했다”며 “문화재청은 문화재 보존관리가 가장 중요하나 특별전이 문화유산을 알리는 좋은 기회임을 감안해 대승적 차원에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변영섭 문화재청장은 10월 29일부터 메트에서 열릴 예정인 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에 반가사유상이 포함된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의 뜻을 표명해왔다. 지금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약 3000일을 해외로 나가 전시된 바 있어 훼손 우려가 크다는 이유였다. 앞서 문화재청 자문기관인 문화재위원회가 4월 서류 보완 등을 조건부로 가결했으나 문화재청은 이를 청장이 목록을 조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지난달 29일 반가사유상 등 국보 3점의 해외 반출을 불허하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문화재계에서는 문화재위원회 결정을 문화재청이 처음으로 뒤집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여기에 토머스 캠벨 메트 관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고 공식 성명까지 발표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분위기가 급변했다. 메트 관장은 최종 결정 이전에 전시 허용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청와대와 문체부가 재고를 요청했으나 문화재청은 기존 입장을 고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캠벨 장관은 1일(현지 시간) “매우 실망스럽다. 전시를 진행할지 재검토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파가 거세지자 문화재청은 두 박물관의 재요청을 수용한다는 모양새로 한 발짝 물러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이번 결정을 환영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2008년부터 기획 준비해왔던 특별전의 ‘얼굴’이었던 반가사유상을 전시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며 “모든 문화재의 안전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문화재청이 반가사유상과 함께 전시 목록에서 제외됐던 국보 제91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와 제195호 토우장식장경호는 기존 결정대로 반출하지 않기로 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경기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수길원(綏吉園)은 한여름에도 쓸쓸함이 묻어나요. 영조의 후궁이던 정빈 이씨의 묘인데요. 묘 앞 전각도 터만 남고, 주위 땅은 푹푹 꺼져 있습니다. 열 살 때 숨진 친아들 효장세자(사도세자의 이복형)는 정조의 양아버지가 되는 바람에 진종(眞宗)에 추존됐지만, 친할머니는 아니라서 그럴까요. 왕의 할머니로 위패는 칠궁(七宮)에 모셔졌건만, 정작 묘는 허름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번 얘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홍미숙 수필가(54)는 입이 마를 새가 없었다. 최근 출간된 ‘왕 곁에 잠들지 못한 왕의 여인들’(문예춘추사)은 조선 왕비의 무덤인 능(陵)과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인 원(園), 다른 후궁들의 무덤인 묘(墓) 등 도합 49곳에 얽힌 흥미진진한 사연을 소개했다. 1995년 수필 ‘어머니의 손’으로 등단해 수필집 6권을 내놓은 중견 수필가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역사유적답사기에 도전했다.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창작기금 2000만 원을 받았습니다. 과분한 일이었죠. 그런데 당시에 그간 수필로 독자들에게 위안은 줬지만, 정보를 주진 않았다는 고민이 컸어요. 그때 머리나 식힐 겸 서오릉에 갔는데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와 후궁인 희빈 장씨의 묘가 함께 있잖아요. 왠지 모를 처연함이 느껴져 자료를 뒤지다가 제대로 공부해보자 싶어 뛰어들었죠.” 막상 시작은 했지만 작업은 쉽지 않았다. 여성작가로서 왕비와 후궁에게 초점을 맞춘 것까진 좋았는데, 글을 써내려 갈수록 깊이 있는 분석이나 적확한 감상을 짚어내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그럴 때면 무조건 다시 능을 찾았다. 서오릉은 10번 이상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 올해 봄 경기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에 갔을 때였다. 지난해 겨울에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 무덤이 그리도 애잔해 보이더니, 별꽃 봄맞이꽃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참으로 아름다웠다. 홍 작가는 “자연도 능도 그대로인데 조석으로 바뀌는 건 내 눈과 마음이란 걸 깨달았다”며 “큰 욕심 내지 말고 머리나 식히려던 초심 그대로 편안한 ‘길 안내서’를 내기로 했다”고 했다. 요즘 홍 작가는 기분이 상쾌하다. 힘든 경험이었지만 수필을 쓸 땐 몰랐던 충만감이 가득하다. 다음 책도 조선 왕비를 다룰 예정이란다. 왜 유독 왕비에게 꽂힌 걸까. “TV드라마 때문인가 봐요. 농담이 아니라 워낙 사극에서 왕실을 많이 다루잖습니까. 친숙하고 흥미 가는 것부터 찾아보는 게 진짜 공부 아닐까요.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면 수필도 더 풍성해지리라 확신합니다. 그 속엔 사람 사는 얘기가 무궁무진하니까요.”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삼청첩(三淸帖)’은 탄은 이정(灘隱 李霆·1554∼1626)이 1594년 불혹(40세)의 나이에 엮은 시화첩이다. 세종대왕의 현손(玄孫·고손)인 이정은 감각적이면서도 절제된 서화를 그려 서예와 회화가 적절히 어우러진 조선 묵죽화의 전형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1564∼1635)는 “소동파의 신기와 문동의 사실성을 갖췄다”고 극찬했다. 이렇게 삼청첩이 조선 중기의 걸작으로 대접받는 데 비해 그간 이 서첩에 얽힌 역사적 뒷이야기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세 가지 맑음을 담은 책’이란 단아한 이름과 달리 삼청첩은 수차례 국란에 휘말리며 자칫 후대에 전해지지 못할 뻔했다. 최근 백인산 동국대 강사(44)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학술지 ‘문화재’에 실은 논문 ‘간송미술관 소장 삼청첩의 역사성에 대한 고찰’에서 이런 상황에 주목하고 서첩의 제작 배경과 전래 과정을 소개했다. 삼청첩은 제작연도에서 보듯 임진왜란(1592∼1598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얄궂게도 왜란이 서첩의 탄생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탄은은 전쟁 발발 직후 왜군에게 칼을 맞아 오른팔을 크게 다쳤다. 자칫 목숨을 잃거나 작품 활동을 접어야 할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왕족으로서 한양 사람이던 그가 이후 충남 공주로 내려가 평생 머문 것도 이때 입은 상처의 영향으로 알려졌다. 백 강사는 “삼청첩은 탄은이 그런 개인적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고 심기일전해 내놓은 필생의 역작”이라고 평했다. 이 때문에 삼청첩에는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려는 탄은의 심정이 오롯하다. 그림에서 풍기는 청량하고 엄정한 미감은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조선 문인의 결기와 기상이 배어난다. 제작 기법도 전란으로 물자가 부족했을 시기임에도 엄청난 고가인 ‘흑견금니(黑絹金泥·검은 비단에 금을 물들여 그리는 방식)’ 화법을 사용했다. 그가 들인 정성을 짐작하게 한다. 탄은이 세상을 떠난 뒤 삼청첩은 선조의 부마인 무하당 홍주원(無何堂 洪柱元·1606∼1672)에게 넘겨진다. 탄은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던 까닭인데, 경제력이 탄탄했던 홍주원은 탄은을 높이 샀던 이정구의 외손이기도 했다. 홍주원은 이 서첩을 끔찍이 여겼지만 곧바로 화마에 휩쓸려 소실될 위기를 겪는다. 바로 병자호란(1636∼1637년)이었다. 정혜옹주의 남편인 윤신지(尹新之·1582∼1657)가 서첩에 남긴 글에 따르면 당시 홍주원은 어가를 따라 피신했는데, 청나라에 함락돼 가재가 모두 불탔다.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해 남은 게 없었지만 천우신조로 단 하나 건진 게 삼청첩이었다. 실제로 남아있는 서첩을 보면 곳곳에서 불에 그슬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어렵사리 살아남은 삼청첩은 홍주원 후손의 가보로 전해졌으나, 구한말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다. 정확한 과정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임오군란(1882년)을 틈타 인천에 상륙한 일본 순양함 닛신(日進)함의 쓰보이 고조(坪井航三) 함장 손에 떨어진 것. 서책 한쪽에도 쓰보이가 구입했노라 직접 쓴 글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를 간송 전형필(1906∼1962)이 다시 사들여 겨우 국내에 남았다. 백 강사는 “삼청첩은 조선시대 대표적 환란을 두루 겪으며 그 사료적 가치가 드높아진 독특한 문화재”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강원 지역에 뿌리내린 신라시대 역사를 살펴보는 특별전 ‘흙에서 깨어난 강원의 신라 문화’가 13일부터 개최된다. 국립춘천박물관(관장 최선주)은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강원 고대 문화를 조명하는 특별전을 마련했다. 모두 6부로 구성한 이번 특별전은 신라가 강원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5세기 후반을 조명하는 1부 ‘흙에서 황금으로’를 필두로 신라의 불교문화와 매장 풍습, 발굴 현황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강원도에서 처음 발견된 토성(土城) 유적인 강릉시 강문동 토성의 토기와 금제품이 처음으로 전시된다. 지난해 발굴된 강문동 토성은 5∼6세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각에서는 우산국(于山國·울릉도와 독도)을 복속한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세웠다는 주장이 나와 화제를 모았다. 또한 한반도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인골(人骨)로는 최대 규모인 57개체가 한꺼번에 발굴된 동해시 추암동 유적 사람 뼈도 첫선을 보인다.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는 강릉시 초당동 고분군 유물도 만날 수 있다. 초당동 고분군은 100여 개의 무덤이 함께 모여 있어 강릉 지역 최대이자 최고의 신라 유적지로 손꼽힌다. 고분에서 출토된 대표 토기 50점과 금제관식(金製冠飾)이 전시된다. 신라 고위 관리가 썼던 관모에 달려 있던 금제관식은 0.5mm의 가는 다각형 금동실로 엮어 당시의 수준 높은 제작기술을 엿볼 수 있다. 10월 6일까지. 무료. 033-260-15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