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올해 10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일대 건물들이 보라색 천으로 뒤덮인 적이 있었다. 영국 브랜드 버버리가 성수동에서 메인 스트리트로 꼽히는 연무장길 일대 3곳에 각각 다른 팝업스토어를 동시에 열고, 인근 건물까지도 보라색 천을 덮어놨다. 버버리를 상징하는 ‘잉글리시 로즈’ 문양이 들어간 천을 씌워서 연무장길 일대를 버버리 거리로 만든 것.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까지 1시간은 족히 넘는데도 사람들은 줄 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온라인 팝업창처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다 해서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한두 달 운영되는 팝업스토어가 성수동에선 한 달에 200개씩 열린다. 성수동 자체가 ‘거대한 쇼룸’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라인 쇼핑 침투율이 높아졌다고 해도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성수동에서 어떻게 자사 브랜드를 알릴지 고민하는 마케팅 담당자들이 적지 않다. 럭셔리뿐 아니라 신진 K패션 브랜드, 일명 K컨템(K-Contemporary)부터 생활용품 게임 식품 주류 금융 가전 등 업종을 막론하고 비슷한 고민을 한다. 이는 오프라인만의 물성(物性)을 무시하지 못한 데에 따른 것이다. 직접 만져보고 입어보고 맡아보는 등의 체험은 오프라인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쿠팡과 마켓컬리마저도 온라인 쇼핑 플랫폼임에도 성수동에서 각각 ‘메가뷰티쇼’(화장품)와 ‘오프컬리’(식재료)라는 팝업스토어를 열었고, 무신사는 아예 성수동에서 건물들을 사들인 ‘부동산 큰손’이 되어 본사를 옮기고 일부 건물에선 자사 제품을 선보인다. 채용 홍보도 온라인이 일반화됐다지만 현대자동차는 ‘채용 팝업’을 열고 취업 준비생들을 직접 만난다. 성수동이 왜 오프라인 플랫폼으로 인기일까. 도시계획 전문가들 사이에서 성수동은 ‘서울스러움’, 특히 ‘성수스러움’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경우로 꼽힌다. 성수동은 서울 유일의 준공업지역으로 1960년대 염색·도금 공장, 1970년대 가발 공장, 1980년대 봉제 공장을 거쳐 이후 수제화 공방과 인쇄업체들이 들어섰지만 2000년대 퇴락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도심 공동화가 빚어졌을 이곳을 파고든 것은 간간이 생기는 카페들이었다. 도심 접근성이 좋은 데다 임대료가 비교적 쌌다. 그러다 2015년, 정미소로 쓰였던 낡은 창고인 대림창고에서 샤넬이 패션쇼를 열며 기업들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의외의 장소’에서 열린 소위 힙한 행사에 셀럽들이 열광했고 송지오나 앤디앤뎁 슈콤마보니 등 1세대 K컨템 브랜드들이 들어왔다. 여기에 성동구는 프랜차이즈 입점을 일부 제한하고, 기존의 ‘붉은 벽돌’ 건물엔 건축비를 지원하는 등 급속한 상업화에 제동을 걸었다. 물론 성수동도 임대료가 치솟았고 3.3㎡당 토지 매매가는 1억 원을 돌파해 2억 원에 근접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대기업 본사들이 이전하고 과거 아파트형 공장이었던 지식산업센터에 스타트업들이 들어차면서 성수동은 주 7일 내내 활기가 이어지며 ‘지역 노화’가 비교적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요새 온라인이 사방을 휩쓸고 있다지만, 오프라인 플랫폼이 주는 진귀하고 희귀한 매력은 온라인이 대체할 수 없다. 저마다의 특색을 강조하고 싶은 기업들이 고객들에게 소구하고 싶은 이미지와도 일치할 것이다. 성수동은 지역을 과거와 현재의 접점이 맞닿은 공간으로 재해석해 도시 매력을 높인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기업이건 지역이건 결국은 오랜 기간 쌓아온 자기만의 정체성(identity)과 그 본질(essence)에 대한 고민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걸, 21세기 새로운 오프라인 플랫폼이 된 성수동이 보여준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우리 국회는 평소엔 자기들 싸움하다가 나중에 법안을 몰아서 왕창 통과시키잖아요. 한 번에 50개 통과는 예사고…. 오죽하면 일본에서 한국은 어떻게 그렇게 법안을 많이 통과시키느냐며 벤치마킹하러 오겠어요.” 최근 만난 한 재계 인사는 대한민국 국회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한탄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표심 잡기에만 골몰했지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혁신산업을 키울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유전자 염기서열을 자르거나 제거하는 ‘유전자가위’ 기술을 사용한 치료제나 종자 개발을 위한 법안이 대표적이다. 영국 정부가 16일(현지 시간) 유전자가위 기술을 이용한 질병 치료법을 승인하는 등 각국은 바이오 혁명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상용화 자체가 사실상 막혀 있다. 지난해 7월 정부가 유전자교정 식품에 유해성 심사 등 규제를 일부 완화하는 법안(유전자변형생물체의 국가 간 이동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1년 넘게 국회 상임위에 계류된 상태다. 유전자가위 작물은 유전자변형식품(GMO)과 구조적으로 다른데도 국내에선 GMO로 간주되는 등 시민단체 반대가 거센 영향이 크다. 국회 상임위에서 야당 의원이 관련 부처에 시민단체와 환경단체 입장을 모두 적어서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끝난 뒤 관련 논의가 끊겼다. 법안이 잠자는 사이 ‘갈변되지 않는 감자’를 개발해 미국에서 GMO 규제 면제 승인을 받은 툴젠, 돼지 신장을 원숭이에게 이식해 221일간 생존시킨 옵티팜 등 국내 유전자가위 기업들은 손발이 묶이게 됐다. 공유차가 공영주차장에 차고지(주차장)를 둘 수 있도록 하는 주차법 개정안은 쏘카 등 특정 업체에 특혜를 준다는 이유로 국회에 1년 넘게 계류되어 있다. 미국 호주 등 각국이 도심 교통난 완화와 탄소 배출 억제 등을 위해 모바일 스트리밍(mobile streaming·차를 소유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쓰는 것) 활성화 차원에서 공유차 주차장을 지원하는 글로벌 추세와도 역행한다. 로블록스나 제페토 등 급성장한 메타버스 산업을 키우기 위한 메타버스 진흥법 제정안도 마찬가지다. 관련 법안이 마련됐지만, 정작 국회 상임위에선 메타버스 산업을 어떻게 키울지보다는 메타버스라는 용어를 미국 특정 업체가 최초로 썼는데 이를 보통명사화할 수 없는지, 법안명을 가상융합산업법으로 바꿀 순 없는지, 이 경우 메타버스 자산이 가상자산처럼 되지 않을지 등 본질과 겉도는 논의만 오가다 끝나 버렸다. 정부가 킬러 규제 혁파를 아무리 외쳐도 그 시작 단계인 국회에서부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산업 혁신을 위한 국회 노력은 낙제점에 가깝다. 동아일보가 규제 개혁 혁신 법안 146개를 분석한 결과 단 6개 법안만 국회를 통과했다. 국무총리실이 별도 관리하는 법안인데도 이렇다. 총선을 앞두고 경기 김포시를 서울로 편입시켜 주겠다느니, 재건축이 지지부진한 신도시 정비사업을 빨리 하게 해주겠다느니 유권자 표심을 당장 얻을 수 있는 개발 공약을 여야가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 경제의 저성장이 고착화되며 일자리 창출을 위한 혁신산업 규제 완화가 절실한데 국회가 발목을 잡아선 안 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규제 전문가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국회의원이 규제 완화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응답이 60%를 넘어섰다. 각국은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기업 유치에 혈안인데 우리는 반대로 기업들을 내몰고 있다. 21대 마지막 정기국회가 다음 달 9일까지로 보름 남짓 남았다. 일하는 방식을 확 바꾼 국회를 이제라도 보고 싶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미국에서 아이 키우는 친구들은 한국에 오면 놀란다. 한국은 출산휴가는 물론 육아휴직이 보장됐고, 정부 지원이 많다는 이유다. 미국은 베이비시터를 쓰려면 월 400만 원은 들고 유치원(주 5일 기준) 역시 월 100만∼200만 원은 거뜬히 내야 한다. 육아휴직이란 것도 없다. 반면 한국의 경우 올해 출산 가구는 최대 4300만 원에 육박하는 영유아 지원금을 받는다. 보육료와 가정양육수당, 아동수당, 부모급여 등이다. 2012년(최고 2500만 원)보다 약 1.7배로 늘었다. 내년부턴 맞벌이 부부가 육아휴직을 쓰면 반년간 최대 월 900만 원을 받는다. 그런데도 출산율은 추락을 거듭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다. 이대로라면 30∼40년 뒤 경제활동인구보다 부양인구가 더 많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저출산 고령화가 연금 고갈 시기를 당기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경제성장률까지 갉아먹고 있다. 돈을 퍼붓다시피 하는데도 아이를 낳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주거비. 국토연구원 조사 결과 자녀가 있는 집의 3분의 1 정도는 결혼 전 이미 자가를 보유했다. 이들은 주택 선정 기준 1위로 학군을 들었다. 집값이 치솟아 주택 보유 자체가 어려워졌는데, 이 주택도 좋은 동네에 있어야 하므로, 출산 전부터 장벽이 높다. 내 아이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는 의식도 한몫한다. 일본 가족사회학 석학인 야마다 마사히로가 일본과 한국의 저출산 이유로 지적한 체면의식이기도 하다. 임신 사실 인지 때부터 웬만한 직장인 월급에 해당하는 산후조리원에 예약하고 엑셀표로 100열 넘는 출산 준비물 리스트를 준비하는 걸 시작으로 ‘초등 의대반’ 이전에 영어유치원이든 사고력 수학학원이든 보낼 기로에 놓인다. 보육에서 교육 단계로 넘어간 뒤 사교육 경쟁의 강도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육아기 부모의 ‘시간 빈곤’도 만만치 않다. 한국은 OECD 최장 근로시간 국가라는 오명답게 퇴근 후 아이 돌볼 시간이 적다. 아이와 커리어 모두 시간을 필요로 하기에 둘은 상충된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로디아 골딘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전문적 직군일수록, 지체 없이 대응하는 온콜(on-call) 상태를 얼마나 잘 유지하는지에 따라서 커리어 성취도, 나아가 연봉까지 달라진다고 했다. 전문직 맞벌이 부부의 경우 출발선이 같아도 아이가 커 나가며 부부 중 1명은 회사에, 또 다른 1명은 집에 온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일하다 아이가 열나니 집에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고 뛰쳐나가는 이 1명은 조직에서 나가든지 올라가든지(up-or-out)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출산이 사치재에 가깝게 되며 Z세대들에게 출산은 거대한 도전이 됐다. 오죽하면 ‘출산이 무책임하다’는 자조가 나온다. 아이에게 잘해줄 자신이 없으니, 낳지 않는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해 ‘절망의 나라, 행복한 딩크족’이 되겠다는 것. 정부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에 따라 예산을 편성한 2006년부터 300조 원 넘게 투입했다지만, 개인으로선 출산으로 감당할 직간접 비용이 지원금보다 많으니 출산을 하지 않는 합리적 선택을 한다. 일회성 현금 살포보다는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비출산’을 택하는 Z세대 정서를 읽어내 출산-육아-교육의 보틀넥을 세심하게 뚫어줘야 한다. 좋은 일자리로 젊은 층 기반도 탄탄히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산은 예산대로 펑크 나면서 대한민국 인구 증발도 막을 수 없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 설계자로 알려진 김수현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은 최근 ‘부동산과 정치’라는 저서에서 “문재인 정부는 집값을 못 잡았다. 그냥 못 잡은 정도가 아니라, 두 배 넘게 뛰어버린 아파트 단지가 허다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초반 2년을 함께한 자신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며 반성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부동산 실패의 핵심 원인으로 그는 저금리와 유동성 폭증을 꼽았다. 대출 규제를 더 강하게 더 일찍 못 하는 등 가계부채 관리를 못해 집값이 올랐다는 것. 코로나19로 유례없는 돈 풀기가 벌어졌다고도 했다. 그는 “집값이 (자신의 청와대 재임 기간인) 2019년까지 선방했지만 이후 폭등은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고 한탄했다. 과연 돈이 많이 풀리기만 해서 서울 아파트값이 폭등했고 청와대에서 나온 뒤 집값이 올랐다고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이쯤에서 그가 깊숙이 관여해 대출 세제 청약 규제를 노무현 정부 수준으로 때려박은 2017년 8·2대책을 복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실수요자까지 잠재 투기자로 보고 서울 전역을 투기과열지구로 묶어 주택담보대출을 크게 조였고 서울서 국민평형(전용면적 85㎡) 이하 아파트는 청약 점수 순으로만 공급해 2030세대를 좌절시켰다. 이들은 훗날 청약포기자가 되어 구축 아파트로 몰려가 패닉바잉을 주도했다. 서울 아파트 공급은 여전히 부족했지만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를 부활해 서울 도심 재건축을 틀어막았다. 이듬해인 2018년 그가 관여한 9·13대책은 또 어떠한가. ‘주택 수’에 집착해 다주택자에게 종합부동산세를 중과, ‘똘똘한 한 채’ 선호를 강화해 강남 집값을 밀어올렸다. 임대사업자에게 전년에 줬던 세제 혜택을 거둬들여 정책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그의 말마따나 청와대 재임 기간 선방했지만, 고강도 규제로 공포에 빠져 숨죽였던 것일 뿐 그 효과는 시차를 두고 났다. 이듬해 자사고 폐지 등으로 강남 등 학군지 수요가 높아지며 집값이 꿈틀대기 시작해 패닉바잉이 현실화됐으며 임대차법 시행 등으로 집값은 무방비가 됐다. 코로나19로 각국이 금리를 낮췄다지만 서울처럼 특정 도시 아파트값이 단기간 무섭게 오르며 ‘보통 사람들’을 화나게 한 나라는 없다. 그 집값이 오른 토대를 만든 사람이 “공직을 떠난 시기 일이라 짐작만 할 뿐이지만, 경제 전체에 대한 고려가 부동산 금융 규제를 주저하게 만들었을 것…안타깝다”고 유체 이탈 화법을 쓸 일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도 규제로 집값 상승을 주도한 그를 문재인 정부가 중용한 데엔 “더불어민주당 주류에겐 ‘참여정부는 성공한 정부인데, 보수가 발목 잡아 잘못 평가됐다. 노무현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김수현이 적임자로 보인 거다”(금태섭 전 민주당 의원)라는 해석도 나온다. 결국 김 전 실장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니 집값이 올라갔다기보다 집값 상승기에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게 된 것”이라고 실패를 두둔했다. 통렬한 반성을 가장한 졸렬한 변명이다. 더 좋은 동네, 더 좋은 집에 살고픈 보통 사람들 욕구를 공급으로 채워주기보다 규제로 짓누른 것은 자신은 강남 아파트 살면서 “모든 국민이 강남 가서 살 필요 없다”는 문재인 정부 어느 인사의 발언과 다르지 않다. ‘평산책방’ 주인 문 전 대통령은 ‘부동산과 정치’를 추천하며 “나의 소회와 같다”고 했다. 자기반성이 없다면 같은 실책을 되풀이한다. 과연 부동산을 누가 정치화한 건지, 그 책임은 어떻게 질지, 보통 사람들에게 자산 축적의 희망을 어떻게 찾아줄지 되묻고 싶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요새 부동산 시장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지만 지방 사람들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다. 지방 부동산 시장은 광역시 단위의 대단지 아파트가 아니고서야 초토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구가 줄면서 대부분 집 사려는 수요가 적은 데다 매매가 끊긴 곳이 적지 않다. 특히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이나 연립 등이라면 수년째 안 팔리는 주택들이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지방 주택 1채와 서울 핵심 지역 주택 1채를 등가로 볼 것인지는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다주택자 규제는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 등 3저 호황으로 집값이 크게 오른 1988년 처음 등장했지만, 200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10월 2주택 이상에는 양도소득세를 중과한 데에 이어 다주택자 주택담보대출 규제가 강화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취득세와 종합부동산세, 양도세가 한층 중과되면서 징벌적 과세를 했다. 다주택자가 집값을 폭등시키는 주범이라는 이념에서였다. 현재까지 다주택자 관련 규제는 22차례 바뀌면서 전문가조차 헷갈릴 정도로 복잡해졌다. 예컨대 취득세와 양도소득세는 가구가 보유한 주택을 모두 합산해서 계산하고, 종합부동산세는 개인이 보유한 주택 수를 기준으로 한다. 부모와 자녀가 각각 주택 1채씩 보유할 경우 취득세는 2주택, 종부세는 1주택으로 본다. 양도세는 생계를 달리하는 것을 입증하면 1주택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다주택자 중과세율 적용 배제 여부와 주택 수 제외 항목은 지역과 공시 가격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 차례 손본 다주택 관련 규제의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다. 사람들은 지방 주택 여러 채를 보유하며 세금 폭탄을 맞느니, 똘똘한 1채 보유로 정리했다. 투기를 억누르려 했던 정책 효과는 달성 못 하고 서울 강남 집값은 폭등한 반면 ‘똘똘하지 못한’ 지방 주택 보유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했다. 다주택자들은 집값이 더 오를 걸로 보고 집을 처분하기보다는 자녀에게 증여하기를 택했다. 과거에 ‘별장 중과세’라는 게 있었다. 유신헌법 공포 직후인 1973년 별장은 사치재라는 취지에서 별장에는 취득세와 재산세를 중과했었다. 하지만 인구 소멸에 시달리는 일부 지자체가 ‘별장에 세금을 중과할 게 아니라 별장을 유치해서 지역의 활력을 높여야 하는 게 아니냐’며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올 들어서야 별장 중과세가 폐지됐다. 여가가 일상화되면서 별장이 더 이상 소수가 누리던 특권이 아니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다주택자에 대한 개념 역시 시대 흐름을 반영해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국토연구원 설문에 따르면 국민 2명 중 1명(48.3%)꼴로 다주택자 기준을 ‘3주택 보유자’라고 봤다. ‘다주택자 기준을 모든 지역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56.7%가 그럴 필요 없다고 답했다. 지방 인구가 줄고 활력이 떨어지면서 꼭 정주하지 않아도 여행 통학 통근 등으로 해당 지역과 관계 맺는 관계인구나 생활인구 개념이 떠오르고 있다. 대도시 거주자가 주말에 쉬는 시골의 세컨드하우스든 지방에 떨어져 있는 회사 때문에 머물 집이든 또 다른 집이 필요할 수 있다. 모든 다주택자를 투기 세력으로 볼 수도 없고 다주택자가 민간 임대 공급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주택 기준을 일률적으로 주택 수로만 따진다면 조세형평성에도 맞지 않다. 투기는 철저히 차단해야겠지만 다주택자 개념을 해당 지역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주택 수로만 따지는 기계적인 잣대를 유지한다면 언제든 시장이 왜곡될 수 있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또 고추나 말리겠죠.” 정부가 부산 가덕도신공항 기본계획과 대구경북(TK)통합신공항 사전타당성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인 25일 한 지방공항 임원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보안지역인 공항서 고추 말릴 일은 없지만, 이용도가 워낙 낮으니 활주로를 고추 말리는 용도로 쓴다는 우스갯소리다. 실제 전남 무안공항의 활주로 이용률은 평균 0.1%. 순손실이 지난해 200억 원 등 최근 10년간 1300억 원을 넘는다. 전국에 공항이 15곳이지만, 인천 김포 김해 제주공항을 제외한 11곳은 만성 적자에 시달린다. 국토교통부가 추진 중인 공항이 가덕도공항, TK신공항, 새만금공항, 서산공항, 백령공항, 울릉공항, 흑산공항 등 8곳이다. 여기에 경기도와 포천시도 경기남부국제공항(수원)과 경기북부공항(포천)을 만들겠다고 나선다. 기존 대구공항이 TK신공항으로 이전하는 걸 감안해도 신공항 9곳이 추진되거나 논의 중이다. 모두 건설하면 공항이 24개 된다. 신공항이 모두 필요한 것일까. 공항 개발이 타당한지 따져보는 예비타당성(예타) 조사가 있는데 예타에서 탈락해도 당정이 끼워 넣는다. 충남 서산공항이 올해 5월 예타에서 경제성 부족으로 탈락했지만, 23일 당정 협의를 거치며 부활했다. 서산공항은 인천공항이나 청주공항과도 멀지 않아 제 역할을 하겠느냐는 걱정이 벌써 나온다. 특별법으로 예타를 면제하는 경우도 많다. TK신공항은 지역 숙원 사업이었지만 더불어민주당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광주 군공항 이전과 TK신공항 추진을 원샷으로 처리하는 법을 검토하겠다”고 하며 급물살을 탔다. 광주 군공항 이전은 광주시가 10년간 추진했던 숙원 사업. 올해 4월 여야가 모처럼 손잡고 TK신공항 특별법과 광주 군공항 이전 특별법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여야 빅딜’로 20조 원이 넘는 초거대 국책사업을 결정했다. 잼버리 사태에도 발주돼 여전히 추진 중인 새만금공항도 2019년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예타가 면제됐다. 차로 10분 거리인 군산공항이 서울과 제주 운항을 목표로 했다가 서울 운항을 중단한 상황에서 새만금공항 수요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사업비 15조4000억 원이 투입되는 가덕도 공항도 특별법으로 추진돼 이쯤 되면 특별법은 ‘예타 면제법’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싶다. 특히 대구와 부산에 ‘메가 공항’이 생기는데, 여객이든 화물이든 수요 분산으로 상충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일본도 과거 정치권 주도로 공항이 건설돼 지방공항이 100곳에 육박한다. 하지만 대부분 적자일 정도로 애물단지가 됐고 국가 부채 증가의 원인이 됐다. 우리도 나랏빚이 여전히 1000조 원을 넘는다. 이미 경북 예천공항은 승객이 없어 문 닫았고, 울진공항은 비행훈련원으로 용도를 바꿨다. 공항 유무는 지역 위상을 드러내는 징표여서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 공약이 쏟아진다. 공항이 생겼다고 없던 수요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항공사가 무조건 취항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단 유치하면 나랏돈으로 지어주니, 지자체도 정치인도 공항에 혈안이다. 한번 지으면 돌이키기도 힘들고 유지 관리 비용도 꽤 되는 게 공항이다. 공항 연결성을 강화해 네트워크 효과를 높이고 국제 환승도 유치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의 97%가 공항 반경 100km 안에 살고, 전국이 KTX 등으로 반나절 생활권이 됐다. 인구 소멸 시대에 24개 공항이 모두 필요한 것인지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한국토지주택공사(LH) 아파트가 보강 철근이 대거 빠진 채로 지어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건설업계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올 들어 이미 이번 조사의 계기가 된 인천 검단신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 사고가 있었고,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정자교를 걷던 40대 여성은 다리 바닥이 내려앉으며 숨졌으며, 충북 청주시 오송에서 제방 공사 부실로 범람한 물에 지하차도가 잠기며 이곳을 통과하는 차량에 있던 14명이 사망했다. 어쩌다 우리는 ‘건설 재난’에 취약한 사회가 됐는가. 부실 공사는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 사고까지 갈 것도 없다. 불과 1년 반 전 건설 근로자 6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사고만 봐도 그렇다. 최상층 슬래브(콘크리트판)가 무너지며 아래층까지 도미노로 붕괴된 건, 설계대로 시공되지 않았고 당연히 있어야 할 동바리(지지대)가 조기 철거되면서 위층 하중을 못 버틴 데다 콘크리트 불량에 부실 감리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 대책이 나왔지만 올해 4월 검단신도시 주차장 공사에서 비슷한 사고가 되풀이됐다. 이곳 역시 설계와 다르게 시공됐고 불량 콘크리트를 썼고 있어야 할 철근이 없었다. 주차장 위는 놀이터였다. 입주 전 인부가 없는 주말이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지 입주 후였다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참사를 겪을 수도 있었다. 이번 철근 누락 아파트를 두고 윤석열 대통령은 “건설 이권 카르텔을 깨부숴야 한다”고 했다. LH 출신 퇴직자들이 LH 공사를 발주하는 설계회사나 감리회사 곳곳에 포진하면서 결탁한 것 등을 염두에 둔 발언이고, 실제로 LH의 전관 특혜는 심각하다. 하지만 이걸 카르텔의 문제로만 볼 것인진 또 다른 문제다. 건설 현장에서는 촉박한 공기(공사 기간)와 인력난을 건설 안전 위협 요인으로 꼽는다. 일례로 건축사가 그린 도면을 ‘건축구조기술사’가 검토해야 하지만 관련 인력은 태부족하고 검증 기간도 촉박하다. 인허가를 하는 지자체도 건축구조기술사를 확보해서 관할지 공사가 제대로 되는지 따져봐야 하지만 2년 가까이 직원을 못 뽑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장 인력 역시 고령화된 데다 내국인은 부족하다. 현장 경험이 부족해 숙련도가 떨어지고 의사소통까지 힘든 외국인을 쓴다. 감리라도 제대로 작동하면 다행이지만, 봐주기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역을 뛰다 퇴직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껄끄러운 일을 만들기 싫어 육안으로 보고 넘어가며 자리 보전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간이 돈이어서 공사를 재촉하는 문화도 문제다. 아파트는 대개 공기를 3년 잡는데 기상 악화나 하청업체 부도 등으로 공사가 늦어지면 손실이 막대하다. 대부분 선분양이어서 지체보상금을 부담해야 한다. 인력 전문성과 숙련도가 떨어진 상태에서 시간에 쫓겨 공사하면 부실의 여지도 더 커진다. 건설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은 수십 년째 얼기설기 얽혀 있어 한 번에 풀기 쉽지 않다. 건설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카르텔로 가둬 버리고, 부실이 발생한 것은 이전 정부의 일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문제의 원인이 명쾌해지는 착시 효과는 있을지언정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된다. 국민 안전을 위한 문제는 정치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정권이든 안전은 최우선시돼야 한다. 건설 현장에 수십 년간 복합적으로 묵은 관행과 악습을 꼼꼼히 해부해서 그 원인을 들여다보고 수술하지 않으면 사고는 언제든 날 수 있다. 카르텔 그 너머까지 봐야 한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최근 부동산 시장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올 초만 해도 가파른 집값 하락에 부동산 경착륙 우려가 컸지만, 불과 반년 사이 분위기가 급변했다. 부동산 규제가 대폭 완화되면서 그동안 금지됐던 15억 원 초과 주택에 대출이 가능해졌고, 서울 상당 지역이 규제지역에서 대거 풀리며 대출 가능 금액도 늘었다. 여기에 특례보금자리론까지 나와 9억 원 이하 주택은 최대 5억 원까지 대출이 가능해졌다. 정부가 ‘가급적 대출을 많이 해줄 테니 집 살 사람은 집 사라’는 신호를 보냈다. 문제는 시장이 반응하는 속도가 엄청 빨랐다는 것. 핵심 지역 집값, 정확히는 아파트 가격은 떨어지다 말았다. 서울 강남권에서 30평대 아파트는 저점 대비 2억∼3억 원 올라 팔리고 있다. 분양권 거래도 많아졌다. 바닥을 쳤다는 전망도 조심스레 나온다. 특히 한강 변이나 여의도, 압구정 등 재건축 추진 계획까지 잇달아 나오며 일부 단지는 최고가 기록을 다시 쓰고 있다. 대출받아 집 사는 사람들이 늘면서 가계대출은 6월 말 기준으로 역대 최대 규모로 급증하면서 한국 경제에 부담이 됐다. 부동산 경착륙은 피했지만 엄밀히는 인기 지역 아파트에 한해 경착륙을 피했다. 전국적인 규제 완화로 지방 주택이나 비(非)아파트 경착륙 상황은 여전하면서 오히려 양극화가 커졌다. 지방 분양 단지 청약 성적표는 처참해졌고, 지방 아파트값에 최소 10억 원을 더해야 서울 외곽의 아파트를 살 수 있게 됐다. 아파트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만큼 단독주택이나 빌라는 서울이라도 재개발 추진과 같은 웬만한 이슈가 없는 한 거래 자체가 사실상 끊기며 역대 최저 수준의 매매량을 보이고 있다. 서울의 규제가 풀렸으니, 기왕이면 대출을 더 받거나 무리해서라도 수도권, 수도권에서도 서울, 서울에서도 핵심지를 찾는다. 실제로 상반기 서울에서 팔린 아파트 4채 중 1채는 외지인, 지방에서 산 수요였다. ‘빚내서 집 사라’고 했던 박근혜 정부 때는 인구 감소로 집값이 장기적으로 떨어질 것이란 가설이 힘을 얻으며 매매를 하지 않으려는 수요가 높아 전세 찾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며 전세가가 치솟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지난 정부 때 ‘부동산 불장’을 경험한 이들이 대출 규제와 고금리 등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던 뿐이지, 언제든 시장 환경이 바뀌면 집에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많다. 지난달 줍줍(무순위청약)으로 나온 서울 흑석자이 2채에 무려 90만 명 넘게 몰렸다. 물론 앞으로 아파트값이 떨어질 여지는 얼마든 있다. 아파트 매매량이 본격 회복되지 못한 점, 매매가를 떠받치는 전세가가 쉽게 오르지 못하는 점, 급매 이후 추격 매수세가 바로 붙지 못하는 점 등을 감안하면 본격 상승세로 보긴 힘들고 금리도 변수다. 그럼에도 시장이 과거보다 더 빠르고 더 민감하게 움직인다는 점을 새삼 기억해야 한다. 과도한 규제에 억눌렸던 시장 정상화는 필요하지만, 완급 조절은 할 필요가 있다. 가계대출 관리도 시급한 시점에 부동산 규제 완화로 정책 엇박자가 벌어지기도 했다. 정부는 부동산 경착륙 우려가 해소되고 있다고 판단하지만, 사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두는 일부 지역에 한해서라고 보는 게 옳다. 무주택자가 내 집 마련하기에 집값은 여전히 높다. 부동산 규제 완화에도 ‘질서 있는 정상화’가 필요한 이유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라면값이 요새 화두다. 최근 정부가 라면 가격 인하를 압박하면서부터다. 경제부총리는 “(국제) 밀 가격이 1년 새 약 50% 내렸다. 제조업체도 가격을 좀 내리든지 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여기에 국무총리까지 가세해 “원료(밀) 가격은 많이 내렸는데 제품 값이 높은 것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 가능성을 좀 더 열심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밝혔다. 라면 제조사들이 라면 가격을 안 내리면 정부는 공정위 담합 조사까지 불사할 태세다. 서민음식의 대표주자이자 한국인의 ‘솔푸드’인 라면 가격 인하야 반길 일이지만, 라면 가격 잡는다고 물가가 잡힐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이명박 정부 때도 고물가로 시름을 앓자 라면과 빵 가격을 먼저 잡았었다. 2010년 당시 정부는 라면 빵 과자 등 식품업체들에 담합 조사를 언급했고, 공정위는 조사 의사를 밝혔다. 빵이 주력인 SPC그룹을 필두로 라면, 제과업체가 가격 인하 대열에 합류했다. 물론 이번에도 라면 가격 인하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 라면 제조사들은 밀 가격이 올라도 제분회사들이 밀가루값을 안 떨어뜨려 가격을 못 내린다고 버텼지만, 제분회사들이 3분기에는 밀가루 가격을 인하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기업 가격 책정 구조는 복잡해서 라면은 밀가루만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 전분 팜유 등 원재료 가격은 여전히 높고 인건비, 포장비, 물류비, 에너지 비용까지 오름세다. 속설로 보수정권이 집권하면 기업을 잘 아는 만큼 기업을 잘 길들일 것이란 말도 나온다. 실제 2012년 공정위는 농심 오뚜기 등 4개사에 과징금을 총 1362억 원 부과했고, 미국선 이를 근거로 국내 라면 제조사들이 수천억 원대 집단소송을 당했다. 하지만 2015년 대법원은 라면 담합 무효 판결을 내렸고 2018년 미국에서 원고가 항소를 포기해 ‘7년간의 담합 소송 대장정’은 끝났다. 하지만 라면 제조사들은 그 7년간 막대한 소송 비용과 기업 활동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경제학적으로 소비자 물가에서 라면 비중은 비교적 낮다. 통계청 소비자 물가지수의 총합을 1000으로 볼 때 라면은 2.7로 돼지고기(10.6), 쇠고기(8.8), 우유(4.1)보다 낮을뿐더러 전기료(15.5), 도시가스료(12.7), 휴대전화료(31.2)보다 확연하게 낮다. 특히 인건비와 임차료 전기료 등의 총합인 외식물가는 총 126.7에 달한다. 소비자뿐 아니라 자영업자 체감 물가를 위해서라면 당국이 뭘 해야 할지 보여준다. 현재 전기료와 가스료 등 추가 인상 요인이 있는 데다 하반기 대중교통 등 공공요금 인상, 유류세 인하 폭 축소, 승용차 개별소비세 인하 종료, 최저임금 인상 등 물가 관련 현안이 산적해 있다. 세수 펑크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당국이 물가 충격을 흡수할 여력이 많지는 않다. 환율 인상에 원자재값 상승 등으로 전방위적으로 물가가 오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특정 품목 대상의 인위적이고 반시장적인 가격 통제로 전체 물가가 잡히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서민생활 밀접 52개 품목으로 구성한 ‘MB 물가지수’도 5년간 전체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1.6배에 이르는 것으로 끝났다. 정부의 라면 가격 인하 압박에 대해 물가 안정이 기관 목표인 한국은행 총재는 “정치적으로 해석할 문제”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지금은 정부가 특정 품목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것보다는 경제 체력을 강화하고 실질적인 국민 부담을 줄여주는 방안에 힘쓸 때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아이 키우는 사람들은 병원 응급실에 간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모두 잠든 밤에, 그러니까 일반 병원이나 약국이 문 닫은 시간에 아이가 고열에 시달리면 눈 빠지게 포털 사이트를 뒤져보다가 결국 응급실로 향한다. 하지만 더 응급인 환자가 많아 대기실 의자에서 열 오른 아이를 한참을 끌어안고 기다리다 겨우 진찰받고 동 틀 무렵 약 받아 귀가한다.의료서비스 중개 스타트업 ‘닥터나우’는 이 같은 사각지대를 해결하려 생겨났다. 당초 ‘배달약국’을 표방했지만 약사회 반발에 의료 중개로 방향을 틀었다. 1990년부터 시범 실시된 원격의료도 의료계 반대로 번번이 좌절됐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2020년 한시 허용되며 30년 만에 물꼬가 터졌다. 맥킨지 출신 2명이 창업한 메라키플레이스(나만의닥터), 솔닥, 똑닥 등의 스타트업들로 관련 생태계도 두꺼워졌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최근 3년여 간 비대면 진료는 1419만 명, 3786만 건에 이른다. 규제를 걷어내자 국민 편익이 높아지고 시장이 성장했다.방식은 이렇다. 앱은 증상에 맞는 제휴 병원(1차 의료기관)을 보여준다. 고객은 병원을 선택해 증상을 설명하는 사진이나 글을 올린다. 조금 기다리면 의사 전화가 오고 화상 진료도 받는다. 의사가 처방전을 발행하면 GPS로 가까운 제휴 약국에 처방전이 가고, 약사는 환자에게 전화로 복약 지도를 한다. 대부분 2시간 안팎이면 약이 조제돼 환자에게 배송된다. 다음달부터 이 같은 비대면 진료가 엄밀히는 불법이 된다. 코로나19 종식으로 감염병 위기 경보 단계가 낮아지며 법적 근거도 사라지게 됐다. 의료법을 개정해야 하지만, 의사와 약사 출신 의원들 반대에 국회 법안심사 소위 문턱조차 못 넘었다. “정확하지 않은 화면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건 국민 건강에 위해”(전혜숙 의원), “제대로 된 진료 없이 약만 처방하면 부작용”(신현영 의원) 등 의사와 약사 출신 의원들은 반대했다. 결국 정부는 ‘시범사업’ 형태로 재진 환자 위주로 8월 말까지 허용하기로 했다. 당초 영유아와 청소년 초진을 야간과 휴일에 허용하려 했지만, 당정 협의를 거치며 무산됐다. 재진 환자는 30일 이내, 동일 병원에서, 동일 질환으로, 1회 이상 대면 진료 받은 이력이 있어야 한다. 약 배달은 원천 금지됐다.스타트업들은 비대면 진료 환자 상당수가 초진이고, 재진 기준이 복잡한 데다 초진과 재진을 가르기 힘든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을 들어 사실상 사업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반발한다. 경증 위주의 이용자들도 불편을 우려한다. 실제 ‘공공 심야약국’이 20억 원 넘는 예산을 들여 운영되지만, 대부분 오전 1시면 문 닫는다. 오전 6시까지 이용할 수 있는 공공약국은 서울에서 단 1곳이다. 독감 유행기 소아청소년과를 가면 1시간 안팎 대기해야 하거나 아예 문열기 전에 가는 ‘오픈런’을 각오해야 한다. 비대면 진료 초진은 격오지에 한해 허용되지만 야근에 시달리는 직장인이나 맞벌이 부부, 가게를 비우기 힘든 자영업자 등 도심 생활자에게도 요긴하다. 미국에서는 원격의료기업 ‘텔라닥’이 2021년부터 미국 대형보험사와 함께 1차 진료를 이미 시작했고, 아마존이 약국 체인인 ‘필팩(Pill Pack)’을 인수해 ‘아마존파머시’를 만든 데에 이어 1월부터는 월 5달러만 내면 처방전에 따라 약을 무료 배송해준다. 약사가 24시간 연중무휴로 비대면 상담까지 해준다. 처음엔 월그린과 CVS 등 기존 약국 체인에 위협이 될 거란 우려가 컸지만 오히려 이들은 온라인 사업을 강화해 소비자 편의성이 높아지고 약국 산업 경쟁력도 강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규제 혁신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겠다고 하지만, 의료 법률 회계 세무 등 직역단체 갈등이더 큰 규제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비대면 진료는 피할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혁신적인 제도와 최첨단 기술의 혜택을 국민 모두가 누”려야 한다는 말을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했다. 하지만 내년 4월 총선 때까지 의료법 개정이 힘들 것이란 전망이 벌써 나온다. 환자 안전이 제1의 원칙인 만큼, 중증은 대면 진료를 권하고 위험 약품은 금지하는 방식으로 보완점을 찾아갈 수 있다. 하루빨리 합의점을 찾아 의료 소비자 후생을 높이고 혁신의 싹을 잘라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한다. 전세 사는 사람들은 ‘(집주인이 아닌) 은행에 월세 낸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만큼 전세자금 대출이 일반화됐다는 뜻이다. 이전 정부 때에도 주택담보대출부터 신용대출까지 조이면서도 전세대출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가 없어 소득이 적어도, 다른 대출이 있어도 전세대출은 나왔다. ‘세입자 주거 안정’이라는 명목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세입자를 위한 ‘관대한 전세대출’이 세입자를 보호했는지를 돌이켜 보면 그렇다고 답하기 힘들다. 서울 강서구와 인천 미추홀구 등 전세사기에서 전세대출은 필연처럼 등장한다. 공인중개사든 집주인이든 세입자에게 전세대출을 권한다. 전세금의 최대 90%까지 대출된다. 전세금의 10%만 내면 입주하는, 혹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전세대출의) 이자 지원금을 준다’고 꼬드기기도 한다. 문제는 임대차법 시행으로 전셋값이 치솟으면서 벌어졌다. 아파트 전세를 감당키 어려운 사람들은 빌라나 오피스텔 전세를 구했는데, 시장에서 소외된 주택 유형이어서 전세가가 매매가의 80∼90%를 웃도는 ‘깡통전세’가 적지 않았다. 집주인이 작정하면 수천 채의 빌라를 사들일 수 있는 구조다. 세입자가 전세대출로 받은 전세금을, 집주인은 매매대금으로 치렀다. 외환위기 때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깡통전세가 있었지만 당시엔 매매가가 떨어졌지 전세 수요는 높아 전세가가 높았다. 하지만 최근처럼 전세가가 매매가보다 가파르게 떨어지면 집주인은 지급 불능에 이른다. 2년 전 비싸게 전세시장에 진입한 세입자들이 대거 그 피해를 떠안고 있다. 전세대출이 전세사기 땔감으로 쓰인 것이다. 전세대출은 집값 상승기에 아파트 등 갭투자 수요와 맞물려 집값을 밀어 올리기도 했다. 전세대출이 잘 나와 세입자는 치솟은 전세가를 감당할 수 있게 됐고 ‘비싼 전세 구하느니, 내 집 마련하겠다’는 수요가 생기며 매매가가 다시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저금리 시대엔 전세대출을 받은 뒤 여유 자금으로 다른 자산에 투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세대출이 세입자 주거 안정에 기여했다는 순기능을 무시할 순 없지만, 최근 5년 새 비정상적으로 폭증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권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지난해 10월 말 기준 171조 원으로 전체 가계부채의 20%에 육박한다. 2017년 말(48조 원)보다 3배 넘게 늘었다. 전세가 급등기에 전세대출 수요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급등한 기현상이 나타난 건 은행과 정부의 합작품으로 봐야 한다. 은행 전세대출은 한국주택금융공사나 주택도시보증공사 등 보증기관이 보증 서주는 것이어서 세입자가 전세대출을 못 갚으면 보증기관에서 대신 갚아준다. 은행은 ‘땅 짚고 헤엄치는’ 이자 장사를 했다. 정부도 전셋값이 급등하는 와중에 전세대출까지 줄일 수 없었기에 전세대출의 부작용은 묵인한 것으로 짐작한다. 전세대출은 집 사고 싶은데 자기 돈은 없는 집주인도, 목돈이 없는 세입자도 만족시켰다. 하지만 전세사기단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재료로 쓰였고 매매시장에선 집값을 끌어올리며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을 더 어렵게 했다. 지금이라도 전세대출 축소의 연착륙을 안 하면 주택 자산 거품은 언제라도 생길 수 있다. 전세대출을 갑자기 줄일 수도 없겠지만 점진적으로 전세대출 보증 등을 줄이는 방법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고금리로 전세대출 선호도가 낮아지고 전세가도 떨어지는 지금이 전세대출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적기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최근 학교 앞에서 멀쩡히 인도를 걸어가던 초등학생 넷을 차량이 덮쳤다. 그중 한 명은 뇌사 판정을 받고 하루를 버티다가 끝내 사망했다. 소주 반병을 마셨다는 60대 운전자가 가해자였다.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취소 수준이었다. ‘아이가 힘들어하니 놓아 줄 준비를 하라’는 의사 말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유족이 사망 선고를 받아들었을 때 그 심정이 어땠을지 가늠조차 안 된다. 지난해 12월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 하교하던 어린이가 만취자 차량에 받혀 사망한 지 4개월 만이다. 초등학교나 유치원, 어린이집 인근을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으로 묶어 차량 속도를 제한하는 등 각종 보호책을 펴고 있지만, 스쿨존 교통사고는 2020년 483건, 2021년 523건, 지난해 481건 등 꾸준하고 여전하다. 어린이들은 학교 앞에서 길을 건너다 불법으로 유턴하는 차에 치여 죽었고, 인도를 걷다가 굴착기에 깔려 죽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화물차 바퀴에 휘말려 들어가 죽기도 했다. 상당한 사고가 음주운전에서 연유됐다. 음주운전은 재범 비율이 유독 높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김회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2회 이상 적발된 음주운전자(16만2102명)의 74%는 음주운전으로 최초 적발된 뒤 10년 내 다시 적발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음주운전 재발을 막기 위해 음주운전 전력이 있는 사람은 아예 운전을 못 하게 하는 ‘시동 잠금장치(IID·Ignition Interlock Device)’를 도입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 장치는 음주운전 적발 이력이 2차례 이상인 운전자는 일정 기간 차량에 음주운전 방지장치를 장착하도록 하는 것이다. 운전자가 차에 탄 뒤 장치에 입김을 불어 알코올이 검출되지 않을 때만 차에 시동이 걸리게 되어 있다. 미국에서 1986년 처음 도입된 뒤 캐나다, 호주, 스웨덴, 영국 등에서 쓰이고 있다. 국내에선 오비맥주가 책임 있는 음주(responsible drinking)를 실천하겠다며 일부 화물차 기사와 직원 차량에 시범 도입했다. 이 장치를 단 운전자들은 ‘술 마셔도 다음 날 시동이 잠길까 봐 과음을 자제한다’고 했다. 국회에 이 장치를 의무화하는 법안 5개가 올라와 있지만 상임위 문턱도 못 넘으면서 처리가 지지부진하다. 장치가 개당 200만 원 안팎으로 지난해 말 화물차 기사와 택시 기사 등 직업 운전자들이 국토교통부에 관련 장치 도입에 신중을 기해 달라는 건의서를 보내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음주운전 재범자의 경우엔 반드시 도입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폭행 재범을 막기 위한 ‘전자발찌’도 2008년 도입 후 재범률이 90% 감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각지대는 있지만 효과가 어느 정도는 있음을 보여준다. 그간 우리 사회가 음주운전에 다소 관대했음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가해자가 초범이다, 반성한다, 생계가 어렵다 등 다양한 이유로 실형은 극히 예외적으로 내려졌다. 연예인이 음주운전에 적발돼도 일정 기간 자숙한 뒤 다시 복귀하는 게 공식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만취 운전자가 모는 차량은 ‘도로 위 흉기’와 다름없다. 설령 사고가 안 나도 천만다행으로 사고가 안 났을 뿐 흉기를 휘두르고 다닌 범죄자로 보고 무(無)관용으로 대해야 한다. 취약한 어린이들을 흉기에서 보호해야 함은 물론이다. 지난해에만 음주운전으로 171명이 세상을 떠났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최근 종합병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할머니가 버스 입구에서 기사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버스카드 없으세요?”라고 연거푸 묻는 기사에게 할머니는 “현금밖에 없는데…”라며 말끝을 흐리기만 했다. 결국 기사가 종이 안내문을 주며 ‘여기 적힌 계좌번호에 송금하고 타라’고 하자 할머니는 “아이고, 이걸 어떻게…”라며 바로 내려버렸다. 할머니 얼굴엔 난감함과 난처함을 넘어선, 어떤 복잡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버스카드도 안 쓰는 사람에게 모바일 송금을 요구하는 건 무리로 보였다. 이달 1일부터 서울에서 현금을 안 받는 버스가 기존 400여 대에서 1800여 대로 본격 늘면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현금 결제가 어렵다면 계좌 송금을 안내하고,그래도 현금 결제를 고수하면 미납 승객처럼 하차 요구도 할 수 있게끔 했다. 현금 수입은 연간 100억 원 남짓한데 현금 거래 유지관리비가 20억 원 든다는 등의 버스업계 고충을 감안한 조치다. 실제로 우리 사회가 현금 없는 사회(cashless society)를 표방하며 현금 결제 비중이 급속도로 낮아졌다. 코로나19를 거치며 비대면 경제가 확산되면서 이젠 현금을 안 갖고 다녀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문제는 신용카드를 못 쓰거나 안 쓰거나 모바일 결제 수단도 없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한국은행에 따르면 70대 이상 노인의 1개월 내 현금 이용률(2021년 기준)이 98.8%인 반면 신용카드 이용률은 57.3%였다. 심지어 모바일카드 이용률은 1.3%에 그쳤다. 현금을 압도적으로 많이 쓰지만 신용카드 쓰는 이는 절반을 겨우 넘고 모바일 결제 수단은 거의 안 쓴다 해도 무방하다. 현금 없는 사회에서 고령층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미국에서 로컬 농장 채소로 샐러드를 만들어 ‘샐러드계의 블루보틀’로 통하는 스위트그린(Sweet Green)은 한때 전국 100여 개 매장에서 현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수납 시간이 길어지고 위생상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이곳은 결제 혁신까지 이루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하지만 곧 소비자 반발에 부딪혔고 2년여 만에 철회했다. ‘현금 거부는 고객 접근성을 낮춰 누구나 진짜 음식(real food)을 먹을 수 있다는 회사 가치(value)와 안 맞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미국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은 고령층이나 청소년, 이민자 등 ‘지급 약자’를 배제하지 않으려 ‘현금 결제권’을 보장하는 추세다. 미국 뉴욕시는 현금 거부 매장에 처음엔 벌금 1000달러를, 이후엔 1500달러를 물린다. 9가구 중 1가구가 신용카드나 은행 계좌가 없다는 점을 감안했다.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뉴저지, 매사추세츠 등이 현금 거부를 금하고 있다. 한국은 스타벅스를 필두로 커피전문점, 멀티플렉스 극장, 프랜차이즈 식당 등에 현금 없는 매장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공공 인프라인 버스에서 현금을 안 받는다면 이런 추세가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버스 현금 결제 비중이 1%도 안 된다지만 1% 안 되는 이들도 다양한 권리를 누려야 하는 시민이다. 한국은행법 제48조는 ‘한국은행이 발행한 한국은행권은 법화로서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라고 써 있다. 어떤 사회학자는 현금 거부는 인간 존엄성을 해친다고까지 했다. 버스에서 내릴 수밖에 없던 할머니에게서 딱 그 말을 떠올렸다. 현금 없는 거래가 혁신적이고 편리하지만 지급 약자를 배려해야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기술이 발달해도 약자를 배제한다면 그 사회는 미성숙하다. 현금 결제를 권리로 보장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참고해야 한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타워크레인은 ‘건설 현장의 꽃’으로 불린다. 타워크레인이 건축 자재를 들어올려 구조물 뼈대를 세워야만 전기 설비 마감 등 다른 공사를 할 수 있다. 높이가 100m 넘기도 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이 타워크레인 노조가 최근 ‘건폭’(건설폭력)의 대명사가 됐다. 이들이 전체 현장을 좌지우지하며 위력을 행사하는 민낯을 최근 ‘타워크레인 노조, 그들만의 리그’ 시리즈를 준비하며 접할 수 있었다. 타워크레인 기사 대부분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에 속해 있다. 노조원 4000여 명이 전국 타워크레인 4000여 대 일감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취업난에 매년 700∼800명이 합격하며 타워크레인 자격증 소지자가 2만2000명에 이르지만 대다수는 ‘노조 장벽’에 가로막혀 일자리를 못 얻고 있었다. 한 30대 청년은 4년 전 자격증을 땄지만 타워크레인에 오른 건 노조 파업 때 5일간 ‘땜빵 기사’로 일한 게 전부다. 일자리를 구하려 하니 타워크레인 업체는 ‘노조에 가입하고 오라’고 했고 노조에 문의하니 ‘경력이 있어야 한다’고 할 뿐 감감무소식이었다. 일자리가 나도 노조가 ‘버리는’ 현장, 즉 월급이 적은 무인(無人) 타워크레인 자리만 드물게 나 경력 쌓을 기회는 없었다. 노조에 가입하려면 3000만∼4000만 원을 내야 한다는 얘기도 돌았다. 설령 노조에 가입해도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힌다. 가입 후 최대 1년은 거의 무보수로 현장 장악 집회에 나가야 했다. 안 그러면 점수가 깎여 일감을 못 받는다는 것. 돈벌이 없는 게 부담인 가장들은 자격증을 따고도 퀵서비스 기사나 택배 알바 등 일용직을 지금도 전전한다. 현장에서 비노조원이 타워크레인에 오를라 치면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노조원이 타워크레인 밑부분을 망치로 두들기거나 흔들어대며 고공 위 기사를 위협하고, 해당 공사 현장이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했다며 지방 노동청과 지자체 등에 무더기 고발을 했다. 인부들이 휴식시간에 안전모 벗고 담배 피우는 걸 찍어 ‘작업 중 안전모를 안 썼다’고 신고하며 건설사 앞에서 시위했다. 목수 등 다른 영역 노조원 20∼30명까지 가세해 비노조원 1명을 에워싸고 몸으로 맞서고, 심지어 노조원이어도 상대 노조 소속 기사가 타워크레인에 오르면 끌어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더 기이한 점은 타워크레인 기사 계약 주체는 타워크레인 임대업체이지만 노조가 길목에 서서 완장 차고 인력을 통제한다는 것. 업체는 기사를 택할 수 없다. 노조가 서열화되어 순번이나 투쟁 경력 위주로 좋은 현장에 보내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위해 노조 간부를 했다는 전직 타워크레인 기사는 “파업하면 최소 한 달 수입이 끊긴다. 파업을 왜 이렇게 많이 하느냐”고 따졌더니 그 길로 제명당했다. 다들 파업해도 일부 노조 간부는 파업 안 하고 돈 버는 행태에 환멸이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현장 관계자들은 타워크레인 인력 시장이 노조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바뀐 건 약 5년 전부터라고 증언한다. 노조가 집회를 해도 경찰이 전 정부의 친(親)노조 성향에 ‘나 몰라라’식의 태도를 보였다는 것. 건설 현장 관련 집회도 이 기간 급증했다. 불법을 엄단해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이를 방치했다. 원청업체인 건설사도 이를 묵인한 책임이 있다. 노조라는 완장을 찼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신규 취업 기회를 임의로 박탈하며 기득권을 집요하게 지키는 행위는 공정하지 못하다. 산업 현장의 법치를 이제라도 세워 일상의 민주주의를 회복할 때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전국 각지에서 ‘빌라왕’, ‘빌라의 신’, ‘건축왕’ 등을 앞세운 빌라사기단 행태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집값 하락세가 가팔라지며 빌라 위주로 깡통전세 문제가 불거지면서다. 많게는 3000여 채의 주택을 굴리며 세입자에게 전 재산일 수 있는 전세금을 떼먹는 이들이다. 경찰과 검찰은 전세사기단을 대대적으로 수사해 처벌하고 정부는 세입자 전세금을 상습적으로 떼먹는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과연 전세사기가 집주인이 악하면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이들을 엄벌하면 전세사기가 박멸될까. 꼭 그렇진 않다. 빌라 분양업자와 브로커, 중개업소까지 가담해 조직적으로 이뤄진 전세사기는 잘못된 부동산 정책이 맞물리며 나타난 결과로 보는 게 맞다. 전 정부 들어 시장을 거스르는 대출 및 세금 규제와 임대차법의 무리한 시행으로 아파트 매매가뿐 아니라 아파트 전세가까지 폭등했다. 그 결과는 익히 아는 바다. ‘영끌’마저 못 한 사람들은 빌라 전세로 쏠리며 도심 빌라 전세 수요가 급증했다. 이들을 등치는 전세사기에 빌미를 준 건 역설적으로 등록 임대사업자 제도였다. 2017년 정부는 다주택자에게 종합부동산세 합산 배제와 양도소득세 중과 배제 혜택을 줬다. 민간 임대주택을 늘리려는 취지였지만 문제는 과도한 투기 방지 장치는 제대로 마련 못 한 채 주택을 많이 보유해도 세금과 대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끔 판을 깔아준 것. 나중에 아파트에 한해 임대사업자 혜택을 사실상 없앴지만 빌라는 유지했다. 물론 이게 전부라면 전세사기는 곪아 터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빌라 전세 수요가 높아지는 시기 전세자금대출이 전세사기의 땔감이 되어 줬다. 주택도시보증공사 등의 보증 덕에 대체로 집값의 80%, 많게는 90%까지 전세대출이 나왔다. 당시 주택담보대출을 조인 것과 달리 전세대출은 규제의 무풍지대에 있었다. 특히 빌라는 가격이 표준화되어 시세 책정이 비교적 쉬운 아파트와 달리 시세 책정조차 쉽지 않을 때가 많다. 매매 호가를 부풀려 부르는 게 값(감정가)인 경우가 적지 않아 전세대출이 매매가보다 많이 나오는, 태초부터 깡통전세인 경우가 허다했다. 전세사기단은 세입자에게 “이자 지원금을 주겠다”며 전세대출을 받으라 꼬드겼고 물정 모르는 세입자들은 이를 큰 혜택인 양 계약했다가 뒤늦게 가슴을 치고 있다. 전세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다. 제도권 금융으로 신용 공급이 쉽지 않던 시절 생겨나 집주인에겐 내 집 마련의 사다리가 되고 세입자에겐 강제 저축의 수단으로 목돈을 모으게끔 하는 사금융이었다. 전세대출도 그래서 생겨났다. 하지만 전세대출 틈새를 악용한 전세사기가 불거졌고 세입자의 전세대출이 집값을 밀어올리는 게 현실이다. 실제 2017년만 해도 66조 원이었던 전세대출 잔액은 매년 급증해 지난해 190조 원을 넘어섰다. 전세가 자체도 올랐을뿐더러 높은 전세가와 심지어 매매가까지 전세대출이 떠받쳐 주는 기이한 구조가 됐다.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전세금 반환 시기를 앞당기고 전세사기에 가담한 공인중개사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등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전세대출을 근본적으로 손보지 않으면 변죽만 울릴 가능성이 높다. 전세대출은 서민 주거 안정의 명목으로 그간 손대기 힘들었지만 전세가가 떨어지는 지금이야말로 실수요자나 주거 취약층은 보호하되 전세사기 등의 부작용은 걷어낼 장치를 만들 적기다. 그렇지 않으면 현 정부도 전세사기의 공범이 될 수 있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이달 15일 밤 서울 지하철 1호선이 한강철교에서 두 시간 멈췄다. 한파 속 지하철에 몸을 실은 승객 500명은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열차 난방이 제대로 안 돼 추위에 떨어야 했고 한강철교 위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이전 역에서 출입문이 열리면 멈춰 서는 등 이상 징후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운행한 결과였다. 올 들어 열차 사고가 유난히 많았다. 1월에는 KTX가 충북 영동터널 주변을 지나다 열차 바퀴가 빠져나가 탈선했다. 7월엔 대전조차장역 인근에서 수서발 고속열차(SRT)가 탈선했다. 앞서 달리던 열차가 사고 지점을 지나며 “철로가 이상하다”고 신고했지만 관제 당국은 아무런 조치를 안 했다. 11월엔 무궁화호가 영등포역 인근에서 선로를 이탈했다. 선로가 이미 부서진 상태였지만 선로 점검에선 이를 몰랐다.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사고들이 왜 잇따랐을까. 기강 해이의 문제로만 단순하게 보기 힘들다. 현재 철도 시설 유지·보수·관제는 모두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맡고 있다. SRT도 마찬가지다. 법(철도산업발전기본법)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철도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이 민영화를 권고했지만 철도노조 반발로 노무현 정부 때 공사화로 틀었다. 2004년과 2005년 국가철도공단과 코레일이 각각 출범했다. 철도 건설은 철도공단이, 운영은 코레일이 맡는 구조였다. 철도청이 모든 걸 다 했던 체제가 처음 깨졌다. 노동계는 공공성 강화를 이유로 코레일과 철도공단의 재통합을 주장했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당시 철도 시설 유지·보수는 코레일이 하도록 했다. 철도공단 재위탁을 받아 하는 형태다. 철도 조직 개편은 정권 때마다 화두가 됐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3년 SR를 설립하고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SRT가 운행을 시작하며 코레일의 철도 운영 독점이 깨졌다. 노동계는 철도공단과 코레일 통합에 이어 SR와 코레일 통합을 요구했다. 이후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노동계에 코레일과 철도공단을 통합하고 코레일과 SR도 통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미션을 수행할 코레일 사장으로는 3선 의원이자 전대협 의장 출신의 ‘힘센 인사’가 왔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운동권 선배였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해직자 농성장을 찾아 이들을 복직시켰고 남북대륙철도를 준비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코레일 노조는 근로시간 단축을 내걸며 3조 2교대 근무를 4조 2교대로 바꿔 달라 했고 사측은 이를 전격 수용했다. 3개 조가 하던 일을 4개 조가 하니 당장의 근무 강도는 낮아졌지만 인원이 확충되지 않았다. 소요 인력·예산 검토도 안 하고 무작정 노조와 합의한 것. 코레일은 뒤늦게 1800여 명 충원을 요청했지만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가 반대했다. 인원 확충이 안 됐지만 올해 4조 2교대를 본격 확대하며 인력난이 심해지고 숙련도도 떨어졌다. 정부 승인이 없어 ‘시범 사업’이라곤 하지만 현장 도입률이 90%가 넘는다. 올해 열차 사고가 유난히 많아진 것도 이런 구조적 문제와 무관치 않다. 정부는 최근 코레일에 근무 체계를 이전처럼 바꾸라고 뒤늦게 통보했지만, 사고를 막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코레일이 틀어쥔 철도 유지·보수·관제를 다른 곳도 할 수 있게 개방하고 관련 인력 재배치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철도 운영 주체가 다양해지고 있는 만큼 바뀐 철도 환경에 따라서, 무엇보다 국민 안전을 우선해 철도 혁신을 일관되게 추진해야 할 때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최근 우유 가격이 잇달아 오르고 있다. 우유 원료인 원유(原乳) 가격이 올해도 올랐기 때문이다. 한국 우유는 안 그래도 비쌌다. 국내 대형마트에서 우유 1L 가격은 약 2800원. 미국 우유는 11월 농무부 가격을 기준으로 1갤런에 평균 4.24달러다. L로 환산하면 1514원으로 한국 우유가 2배 가까이 비싸다. 우유가 남아돈다는데 우유 가격은 왜 오르는 걸까. 수요와 공급에 관계없이 원유 가격이 낙농가 생산비에 따라 움직이는 ‘생산비 연동제’에 따른 것. 생산비에 따라 원유 가격이 책정돼 수요가 줄어도 생산비가 오르면 원유 가격도 덩달아 오르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올해 10년째를 맞이한 생산비 연동제가 시장을 왜곡시켰다고 본다. 제도 도입 이전엔 우유업계와 낙농가가 2, 3년 만에 한 번씩 원유 가격을 정했다. 매년 가격 협상을 벌이는 게 아니다 보니 낙농가는 한 번 올릴 때 작정하고 많이 올리려 했고 우유업계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일이 반복됐다. 낙농가는 인상안이 관철되지 못할 것 같으면 원유를 도로에 쏟아붓거나 집유(集乳)를 거부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그래서 나온 게 생산비 연동제였다. 객관적으로 원유 생산비를 조사해 가격에 반영하자는 취지다. 낙농업자는 납품가가 보장됐고 우유업체도 협상 갈등을 피할 수 있으니 서로 나쁠 게 없었다. 시행 첫해인 2013년 원유 가격 조정은 모처럼 순탄하게 진행됐다. 문제는 소비자가 그 부담을 떠안게 됐다는 것. 시행 첫해 원유는 L당 106원 오르면서 2300원 안팎이었던 1L 우유가 2500원을 돌파했다. 더 난관은 이듬해부터 벌어졌다.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며 젖소들의 생산량이 많아졌다. 원유 공급량은 늘었는데 생산비 연동제로 원유 가격이 떨어지진 않았다. 우유업체들은 낙농가에서 일정 규모의 원유를 사들여야 하는 특성상 원유를 분유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분유 재고량은 넘쳐났다. 아이가 줄면서 우유 소비량은 줄고 있는 상황에서 우유 가격이 오르는 기현상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낙농업계 경쟁력이 높아진 것도 아니었다. 국내에서 치즈 버터 유제품 소비량은 급증했다. 낙농강국에서 유제품은 저지(Jersey)종 젖소의 원유로 만든다. 유지방과 유단백 함유량이 많아 풍미가 깊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젖소는 홀스타인 품종이 압도적으로 많다. 어차피 원유 가격이 보장되고 홀스타인 원유량이 심지어 많으니 유제품 소비 트렌드가 바뀌어도 굳이 품종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결국 국내 업체들은 유제품은 외국산 원유를 들여와 만들었다. 외국산 가격은 국산의 3분의 1이기 때문이다. 2026년부터는 유럽연합(EU) 등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수입 치즈와 우유에 대한 관세가 없어져 보호막도 걷힌다. 10년간 생산비 연동제를 시행한 결과는 처참하다. 한국 우유는 국제적으로 비싸졌고 소비자들은 오히려 값싼 수입 멸균우유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유업체들도 원유를 비싸게 사오니 영업이익률이 2% 안팎에 그칠 정도로 다른 업체 대비 수익이 낮아졌다. 결국 낙농가도, 우유업체도 어려움을 겪게 됐고 소비자들은 비싼 우유 가격을 감당해야 했다. 사실 생산비 연동제는 우리 사회에서 인위적으로 가격에 개입한 수많은 사례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가격을 건드리려는 유혹이 많아질 수 있지만 원유 생산비 연동제가 주는 이 같은 단순한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지난달 중순 느닷없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검색하는 사람이 많아진 적이 있다. 두어 달 남은 크리스마스를 미리 준비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매출이 상당하다는, 국내 최대 제빵 프랜차이즈 공장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 때문이었다. 샌드위치 소스를 섞는 기계에 근로자가 상반신이 빨려 들어가면서 숨졌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지역 빵집이나 경쟁사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추천하고 나섰다. 근로자 사망 사고에 맞서는 일종의 불매 운동이었다. 안전사고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제는 이 사고가 숱한 사고의 일부라는 것. 오피스텔 신축 현장에서 승강기 통로 바닥을 청소하던 60대 근로자는 승강기에 깔려 숨졌고, 물류창고 공사 현장에서 시멘트 작업을 하던 근로자 3명은 거푸집이 무너지며 5, 6m 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전선 케이블을 까는 작업을 하던 근로자는 전선이 감긴 드럼에 맞아서 숨졌고, 화물열차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던 근로자는 다른 열차에 치어서 숨졌다. 모두 최근 한 달 새 일어난 사고다. 현장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본 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벌어진 경우가 대다수다. 납품 단가를 맞추거나 납품 기일을 맞추기 위해 여럿이 할 일을 혼자 했다거나, 당연히 있어야 할 안전 고리나 지지대 등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거나, 아무도 없는 주말에 나와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했다거나…. 언젠가는 짜놨을 안전 시스템이 현장에서 구현되기만 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였다. 중대재해처벌법으로 경영자 처벌이 강화됐지만 그렇다고 사고가 줄어들진 않았다. 이 법이 시행된 1월부터 9월까지 산업재해 사망자는 510명으로 전년 동기(502명)보다 오히려 늘었다. 그것도 추락, 끼임, 부딪힘, 깔림 등 후진적 사고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처벌 수위가 높아졌다고 하루아침에 사고가 줄지 않는 만큼 우리 일상에서의 안전문화 고취가 더 중요한 이유다. ‘이것쯤이야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안전의식을 높이지 않고 처벌만 강화하는 것 역시 단기 처방에 그칠 수 있다. 미국 내 글로벌 엘리베이터 회사에서 일하는 한 지인은 전 세계 어느 현장이든 사망자가 발생하면 팀 단위로 안전 경보(safety alert)를 울려 회의를 소집하는데, 한국 사망자가 유독 많아 부끄럽다고 했다. 팀원들이 모이면 모두 묵념한 뒤 어떤 현장에서 사망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 공유하고 ‘어떤 것도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Nothing matters than your life)’는 말을 지겹도록 듣는다고 했다. 일례로 회의나 행사를 하더라도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항상 출입구 위치를 먼저 알리는 식이다. 지독하리만치 미련하게 안전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는 고속성장을 이루고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을 보여줬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응당 해야 할 무언가를 때로는 생략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싸게, 더 빨리’를 강요하는 관행 이면엔 생명이 담보 될 때도 있다. 너무 싸고 너무 빨리 되면서 너무 좋은 건 세상에 없다. 적정 속도와 적정 가격이 보장되어야 안전도 보장된다. 성숙사회로 가려면 ‘조금 느리고 조금 비싸도 괜찮다’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일 근로자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사고 날 때 반짝 문책하기보다는 일상에서 이들의 안전에 기업도 소비자도 유난을 떨어야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최근 1년 사이 집값 판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억대 하락 거래가 나오고 주간 아파트값 통계에서도 ‘10년여 만에 최대폭 하락’이라는 수식어가 이젠 익숙해졌다.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 공무원들조차 “집값이 이렇게 빨리 떨어질 줄 몰랐다”고 말할 정도다. 집값 급등 피로감이 컸으니 이제라도 조정되어야 마땅하긴 하다. 규제 부작용으로 치솟은 집값이 마냥 오를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금리 인상이 계기가 됐을 뿐이다. 노무현 정부 때에도 분양가상한제 도입과 대출규제 강화 등 겹겹의 규제로 ‘버블세븐’과 같은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집값이 급등했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리며 집값이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현재는 문재인 정부 때 세금과 대출 등 전방위적인 규제로 튀어 올랐던 집값이 정상화되는 과정의 초입에 겨우 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실제 서울 잠실 대단지 30평대 아파트(전용 84m²)는 지난해 27억 원에 팔렸다가 최근 20억 원을 밑도는 가격에 거래돼 화제가 됐지만, 5∼6년 전 시세가 14억 원 안팎이던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높다. 집값이 조금 떨어졌을 뿐, 안정화에 접어들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집값은 더 떨어져야 하지만, 문제는 속도다. 이번 집값 하락을 촉발시킨 금리 인상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과거 집값 하락기 이후 하우스 푸어가 문제 됐지만 그땐 그나마 금리 인상이 시차를 두고 이뤄졌다. 이번엔 국내외로 빅스텝을 밟아대고 있어 변동금리 대출이 압도적으로 많은 한국 특성상 과거보다 더 고통받는 하우스 푸어가 나올 여지가 크다. 주택 거래가 동결되다시피 한 것도 문제다. 팔려는 사람은 본전 생각에 선뜻 호가를 못 내리고 사려는 사람은 더 떨어질 것 같으니 일단 지켜보자는 심리다. 이 같은 상황이 고착화되면 새집을 계약했는데 기존 집이 안 팔려 입주를 못 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진다. 일부 금융권이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중단한 상황에서 미입주나 미분양 등으로 부도 어음을 못 막는 건설사들이 나오면 금융시장 불안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 집값이 이렇게 빨리 떨어질 줄 모르고 졸지에 집값 걱정을 떨쳐버린 정부가 현재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절대적인 집값 자체가 높아진 만큼, 과거 집값 안정기에 펼쳤던 규제나 집값 상승을 전제로 내놨던 규제를 현 상황에 맞게 선별적으로 실수요자를 위해 푸는 것이다. 일례로 변동금리대출을 고정금리대출로 전환해주는 안심전환대출이 있지만 집값이 4억 원을 넘으면 안 된다. 서울 등 수도권 아파트 보유자는 언감생심인 이 요건을 완화하는 것이다. 중도금대출 기준도 현재 분양가 9억 원 초과 주택은 원천 봉쇄됐지만, 이는 과거 고가주택 기준이 9억 원이었을 때 만들어진 규제다. 현재 9억 원을 고가주택 기준으로 보긴 힘든 만큼 규제를 현실화해서 거래 물꼬를 터줘야 한다. 아울러 빌라 깡통전세나 공시가와 시세 역전 가능성 등을 막고, 외곽에 물량 폭탄 계획만 쏟아낼 게 아니라 실수요자가 선호하는 도심 공급이 가시적으로 늘게 해야 한다. 집값이 너무 높으면 결혼 출산 연애 등 삶의 중요한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개인 선택이지만 집값 상승기이든 하락기이든 집값이 그 선택의 장애물이 되어선 안 된다. 집값 급등기에 펼친 규제를 집값 하락기에도 구사해 현실과 동떨어지게 된 규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시장 불안, 나아가 서민 불안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
서울 남산 자락에 위치한 ‘고호재(古好齋)’. 옛것을 좋아하는 이들의 집이라는 뜻의 궁중다과점은 MZ세대 위주로 각광받고 있다. 이달 16일 온라인 예약창이 열리기가 무섭게 11월분까지 예약이 꽉 차버렸다. 경복궁 생과방(生果房)은 나인과 차비 역할을 맡은 직원이 조선 임금이 즐기던 궁중병과와 약차를 갖다주는데, 이곳도 5분 내 예약 마감을 각오해야 한다. 한국 전통문화가 최근 재조명받고 있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주되며 새롭게 체험하고 즐기면 좋을, 멋진 것(Korean coolness)의 대명사가 됐다. 후대까지 지켜야 할 것이라는 의무감에 고리타분하고 재미없게 여겨졌던 과거와 달라졌다. 럭셔리 하우스 움직임이 우선 눈에 띈다. 루이비통 앰배서더인 오징어게임 배우 정호연이 올해 3월 미국 한 시상식에서 한국 자개를 상징하는 드레스에 댕기머리를 선보인 데 이어 최근 에미상 시상식에선 ‘첩지’를 쪽 찐 머리 가르마에 얹고 나왔다. 첩지는 조선시대 왕비 등이 썼던 장신구로 한국 고유의 미를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연아는 한복 모티브의 디올 의상을 입고 패션쇼에 나섰다. 고궁 근처에서 한복 인증샷 찍는 문화를 만든 주축인 MZ세대는 한복 자체에 열광한다. 중국이 한복을 한푸(漢服)로 칭하며 동북공정을 시도할 때 소극적 태도를 취했던 정부와 달리 MZ세대는 소셜미디어에 ‘#한복챌린지’라는 태그를 걸고 자발적으로 한복을 알렸다. 한복 명맥을 잇겠다고 황토색의 생활한복을 입던 시절과 달라졌다. 전통문화 콘셉트의 상품도 인기다. 야간 연회를 밝히는 ‘조선왕실 사각유리등’은 온라인에서 품절대란이 일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도 바라만 봐도 차분해진다며 입고 즉시 품절된다. 서울 성수동이나 가로수길 일대엔 볶음된장을 넣은 샌드쿠키, 고추장을 넣은 도넛, 간장을 넣은 초콜릿 등 전통 맛을 차용한 디저트집이 생겨나고, 전통주 보틀숍이나 브루어리(양조장)도 곳곳에 들어서는 등 전통주도 제2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새롭게 쓰이는 한국 문화 바람을 타고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V&A)에서 한국 문화 전시회가 이달 말부터 내년 1월까지 대대적으로 열리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V&A는 초창기 크리스천디올부터 데이비드 보위, 알렉산더 매퀸 등 당대 문화 아이콘을 선보이기로 유명하다. 이는 영국 옥스퍼드사전이 ‘한국 스타일은 쿨함의 전형’이라 평하며 한류(hallyu), 한복(hanbok)을 등재한 것처럼 한국 문화사에 상징적 사건이 될 듯하다.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기업인들은 국가 브랜드 경쟁력이 낮아 사업하기 힘들다고 호소했지만 요새는 달라졌다. 삼성 현대차 등이 글로벌 기업이 되며 한국 인지도가 높아지기도 했지만 최근엔 한국 문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친근해졌다는 평가다. 문화 확산의 주역인 젊은 세대도 달라졌다. 서양 문물이 선진적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이전 세대와 달리 MZ세대는 각국 고유의 문화를 수평적으로 본다. 오징어게임이나 방탄소년단 등이 이름을 떨칠 때 ‘국뽕 차오른다’고 표현하는 이들에게 ‘국뽕’은 우월주의보다는 자부심 혹은 자긍심에 가깝다. 대내외적인 복합위기로 경제는 어렵지만 소프트파워 경쟁력은 한순간에 쌓이는 게 아니다. 새삼 조명되는 한국의 멋짐이 한국을 리브랜딩(re-branding)하고 기업 경쟁력, 나아가 국가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유영 산업2부장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