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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L은 여자 아이돌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장원영의 비율과 곡선을 쏙 빼닮았었다. 심지어 음악을 좋아하고 춤도 꽤 잘 춰서 MT를 가면 늘 원더걸스나 소녀시대의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드는 L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마음씨가 곱고 세심했던지 고민 상담을 하면 2시간이 뚝딱이었다. 스타가 되기에 딱이었건만, L이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보기엔 딱 두 가지다. 아이돌을 하기엔 코가 좀 컸다는 점, 그리고 남자라는 점 때문이다. 당시 또래 남자애들이 L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흰 피부에 마르고 취향이 확고했던, 남들이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L에 대해, 여자애들은 다른 남자애들에겐 느껴지지 않는 무해함을 감지했지만, 해로움으로 L의 다정함을 훼손하려는 애들이 있었다. 우리가 한쪽에서 아무리 L을 아껴도 상쇄될 수 없는 상처들이었다. 그들은 아마 L을 유약하다 여겼겠지만 L의 다정함은 끝끝내 보존됐다. 대학에 들어가선 원하던 광고 공부를 하더니 손 글씨를 다듬어 아끼는 사람들에게 귀한 문장들을 선물하곤 했다. 누군가를 만나고부터는 타인을 향한 신실함을 배워 갔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고선 그 깡말랐던 L도 음주량이 늘며 제법 그럴듯한 체격이 됐다. 1년에 서너번 씩 만나는 L이 자꾸만 멋져질 때마다 우리 여자애들은 속삭였다. “그때 동아리 선생님이 L 같은 애가 진짜 괜찮은 남자라고 했었는데” “그러게. 좀 새겨들을걸.”그랬던 L이 지난주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런저런 기구하다면 기구한 사연 끝에 열린 작은 결혼식이었다. 내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결혼식에는 처음 가 봤다. L에게 “같은 테이블을 훈훈한 싱글남으로 가득 채워달라”는 은밀한 사주를 넣고 참석했던 자리였다. L은 헐거운 정장에 어색한 가르마를 타고 우리를 반겨 줬다. 곁에선 머리에 베일 대신 리본을 올린 신부가 함께 사진 찍자며 손짓했다. 신부는 L과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긴 출장을 다녀온 자신의 휴식을 위해 몰래 그녀의 집을 청소해 두는 사람이라고, 감자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어떤 식당에 가도 감자는 모조리 양보한다고 했다. 수많은 성혼 선언을 들었지만 그날은 진정으로 어떤 결혼의 증인이 된 기분이었다. L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으리라는 것을 하객들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어떤 결혼식을 하게 될지 늘 궁금했다. 난 딱히 로망이 없었다. 식장은 형편 맞춰 잡으면 그만이고, 성대하길 바란 적도, “친구들만 모아서 진짜 결혼식을 할래요” 같은 마음도 없었다. 내 결혼에 부모의 지인을 충분히 초대하는 게 진정 효도가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규모를 줄여서 살림에 보태길 바라신다면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이 결혼을 겪고 나니 조금 달라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형식이야 어떻든 중요한 것은 깊은 축복의 나눔인 것 같다. 하객들로부터 그걸 끌어내는 지혜가 L에게는 있었다. L의 긴장한 표정과, 그래서 더 투명하게 내비치는 신부를 향한 애틋함은 우리를 한없이 동요하게 했다. 이들의 사랑을 축하해주러 온 하객들이 오히려 사랑을 한 줌씩 얻어가는 기분이었다.하객들에게는 또 어떤가. 남들은 돈 때문에 결혼을 못 한다는데, 이 커플은 부담 속에서 ‘스드메’를 포기하고 하객들에게 극진한 음식을 대접했다. 모두가 익히 아는 L의 오래된 다정함이 식장 곳곳을 떠다니고 있었다. 유독 외진 곳에 있던 우리 테이블은 코스 요리에 곁들여 나오는 와인을 무람없이 마셔댔다. 나중엔 다른 테이블에서 먹다 남기고 간 와인까지 주워 와 탈탈 털어 마셨다. 이따금 들른 L이나 신부의 얼굴에 아연한 표정이 스쳤지만, 테이블에는 그 커플에게 앞으로 사는 내내 와인보다 더한 것을 갚아줄 자신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누구 하나가 “축의를 두둑이 했으니 좀 마셔도 된다”고 하자 또 다른 한 명은 “난 양쪽에 했다”며 뿌듯해했다. 그들 각자가 처음 L을 만났을 때처럼, 우리도 말없이 스쳐 지나가려면 그럴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에 미안할 정도로 그곳은 안온했다. 이 온기는 아마도 꽤 오래갈 것 같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H와 알고 지내게 된 건 고3때였다. 건너건너 누군진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진 서로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어떤 분야에도 재능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H는 공부에 재능이 있는 친구였다. 모의고사건 내신이건 국어를 제외하곤 H가 미끄러진 과목이라야 1등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수학은 H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H에게는 내게 없는 것들이 있었다. H는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얬다. 나는 작고 까맸다. 톡 튀어나온 하얀 이마가 그 애의 새침한 눈매와 입매를 무게감 있게 받쳐 줬다. 까만 머릿결을 이마에서부터 뒤통수까지 쓸어 넘기는 H의 습관은 어렸던 내 마음 속 정체 모를 동경을 매번 일렁이게 했다. 난 안 그래도 체구가 작은데 이마까지 좁고 납작해서 누구보다 소심하고 옹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금은 노화로 인해 눈썹이 쳐지며 그나마 봐 줄 만한 인상이 되었다. 세월이 우리에게 똥만 주지는 않는다. 난 지금도 무엇이든 게임이라면 잘 못하는데, H는 게임을 참 좋아하고 잘했다. 당시 우리 반에서는 복잡한 주차장에 갇힌 차량을 요리조리 움직여 빼내는 모바일 게임이 유행했었다. 아무리 어려운 스테이지라도 H가 에어팟 위에서 손가락을 몇 번 튕기면 구석에 처박혀 있던 차량이 용케도 빠져나오곤 했다. ‘앵그리버드’를 하면 H의 새가 언제나 가장 멀리, 오래 날았다. 테트리스로 치면 H는 은밀한 단정함으로 기반을 다지다 결정적인 순간 한쪽 구석에 ‘I’ 블록을 꽂아 넣어 판을 뒤집는 ‘교실 구석 페이커’였다. 당연히 나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갈 거라 생각했던 H는 이름도 처음 듣는 지방대에 갔다. 자기는 항공관제사가 되고 싶은데, 그걸 하려면 그 대학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난 그때 관제사가 뭔지도 몰랐다. 똑똑한 친구라 대학 졸업도 전에 시험에 붙었다. 내가 언론사에 들어가려고 한창 공부할 때 H는 인천을 오가는 전 세계의 비행기를 하나 둘 지휘하기 시작했다. 주차장에 갇힌 차량을 빼내듯, 혼탁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자기가 걸을 가장 분명한 길을 짚어냈던 용기로, H의 손가락은 어김없이 각자가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기자 공부를 할 때도, 기자가 되고 나서도 종종 이 생활에 대한 번뇌가 찾아왔다. 지친 하루를 보낸 날이면 H 생각이 났다. 돌이켜 보면 살면서 내가 서 있는 곳이 내 자리라고 느껴졌던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 자리를 알아보는 듯한 H의 초능력이 탐났다. 한번은 술에 취해 H에게 다 말했다. 나는 네가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안 간 게 못내 이상했는데 지금은 네가 꿈도 이루고 너무 잘살고 있는 것 같다고. H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채은아, 나라고 고민이 왜 없겠어. 나는 네가 부러워”학창 시절 강동원을 좋아했던 H는 일견 꿈을 이뤘다. 우사인 볼트의 속도로 스쳐 지나가며 보면 강동원을 아주 약간 닮은 것 같기도 한 외모의 신랑을 얻었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그때나 나는 H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10명 정도 안에는 들어서 H의 결혼식 때 다른 애들 몇몇이랑 축가를 불렀다. 우습게도 내가 제일 먼저 울었다. 첫 번째는 20대의 신부가 좀처럼 선택하지 않는 상체를 모두 가리는 웨딩드레스가 H에게는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곁에서 말똥거리는 강동원의 눈빛이 미치도록 순진무구했던 탓이었다. ‘그’ 강동원은 H의 속눈썹의 길이, 새벽의 체온, 낮잠의 호흡 같은 건 알지 몰라도 앵그리 버드를 날려 보내는 어떤 춤사위에 대해선 알 리가 없었다. 최근에 축가 멤버들과 만난 H는 배가 불러 나타났다. 살은 별로 안 쪘는데 하얀 이마에 트러블이 오돌토돌 올라와 있었다. 우리는 만삭의 배에 손을 얹은 상태로 “한번 만져봐도 돼?”하고 예의상 물었다. H는 이미 배를 내맡긴 채로 웃으며 그래그래 만져봐 했다. “태명이 뭐야?” “튼튼이” “진짜 너처럼 범생이 같이도 지었다” “ㅋㅋㅋ왜” “나 아는 사람 애기는 태명이 ‘한방이’래. 이유는 묻지 않았어….” “H야, 너도 겨드랑이 까매졌어?” “응응 까매지더라” “에이 애기 낳으면 원래대로 돌아온대” “근데… 그거는 진짜야? 빅파이….” “ㅋㅋㅋㅋ난 빅파이까진 안 됐어” “그럼 중파이네” “ㅋㅋㅋ빅 아니고 미디엄 파이구나” “임신하면 무조건 엄청 커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야? 울 엄만 빅파인데 난 건포도거든” “그건 너네 엄마가 원래 큰 거야”…….아들 배 치고는 작았다. 나는 그게 꼭 테트리스의 판을 뒤집는 I의 부피처럼, 아이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정확히 찾았기 때문으로 느껴졌다. H는 옛날보다는 머리를 덜 쓸어 넘기고, 그만큼 자주 자신의 부푼 배를 쓸어 담았다. 그러면 어떤 때는 아기의 발이 만져진다고 했다. 우리가 실없는 농담을 할때, 철없이 맥주잔을 부딪칠 때도 H는 아기를 더듬고 있었다. “우리 오늘 먹은 거 H 아기까지 N빵하자” “좋다 좋다. H야, 너 아기 낳아도 맨날 데리고 나와라. N빵하게” “무슨 소리야, 절대 떼어 놓고 나올 거야” 하얀 이마건, 공부 머리건, 0.001초 강동원이건 닮지 않아도 좋으니 어떤 복잡한 상황에서도 가장 정확한 항로를 그려내는 그 유려함만은 아이가 H를 닮았으면 좋겠다. 엄마의 지혜가, 세상에 태어나 맞닥뜨릴 무수한 번민으로부터 그 아이를 지킬 것이다.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제목에서 따 왔다. 그녀의 조밀하고 애틋한 문체는 따 오는 데 실패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동네에서 엄하기로 소문난 여중에 다녔다. 두발 제한 교칙은 ‘귀밑 15cm’였지만 어깨에 머리카락이 닿는 날엔 여지없이 불호령이었다. 안 그래도 교복이 워낙 촌스러웠던 탓에 우리 학교 학생들의 별명은 ‘바둑판’이었다. 그 치마에 대고 바둑을 두어도 판정시비가 없을 정도로 체크무늬가 촘촘했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바보 같은 머리에 바보 같은 교복을 입고 바보 같은 짓들을 해대며 서로의 커가는 모습을 우스워하는 것이 그곳만의 재미였다. 1학년 국어를 가르치던 B 선생이 있었다. 지긋한 나이에 퉁퉁한 풍채까지 갖춘 덕에 큰아버지의 자애로움을 기대하게 되는 인상이었다. 요즘과 같은 기껏해야 나른한 날이었을까. 졸음의 끝자락을 붙들고 우는 어렸던 우리에게 그는 말했다. “엎드려 자지 마라. 여기에서 너희의 A컵, B컵, C컵이 결정된다. 너희는 아직 못 알아듣겠지만” 우리는 그 말을 다 알아들었다. 식민지 시절의 아픈 유산이라며 시험지를 걷을 때 ‘손 머리’를 시키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레 여기던 교사였다. 또 다른 교사가 복사뼈를 드러내놓고 다니지 말라고 했을 때, 학교 앞 싸구려 발목 양말조차 부끄러워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당시 우리의 전교 회장이었던 R 양은 후보 시절 “속옷이 비치지 않는 하복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했었다. 블라우스가 속이 훤히 비치는 원단으로 제작된 탓에 ‘브래지어가 비치지 않게 민소매를 겹쳐 입어라’는 교사들의 잔소리로 들들 볶이고 있던 참이었다. 몇몇 교사가 “학생이 교복을 어떻게 바꾸냐”며 말을 보탰고 실제로 공약은 이행되지 못했다. 가끔 짙은 남색 생활복을 입고 지나가는 여중생들을 보면 난 그때의 R 양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는 어느 언덕에 살았다. 왕복 2차로가 간신히 지나다니는 언덕이었다. 하루는 독서실에서 밤늦게 귀가하는데 내 앞에 승용차 한 대가 섰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 바로 앞이었다. 운전자가 가까운 지하철역이 어디냐, 병원이 어디냐 묻기에 아는 대로 가르쳐 주었다. 마침내 가까운 학교가 어디냐 물었을 때 그 남자가 운전대를 잡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는 수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는 도망쳤다. 다음 날 학교에 가 이 얘기를 했더니 동네에 사는 웬만한 여학생들은 다들 그를 알고 있었다. “나한테도 차 안에서 그랬어.” “파란색 모자 쓰고. 맞지?” “얼굴은 잘생겼던데 왜 그럴까.” “맞아 운동선수 닮았더라. 그 얼굴로 그런 짓 왜 하지?”커서는 성당에 좀 열심히 다녔다. 청년단체를 살뜰히 챙기던 보좌신부와 회식을 하는데, 다른 테이블에 남성 신자들과 앉아 있던 그 사제의 목소리가 갑자기 귓가에 내리꽂혔다. 여기 앉힐까? 저 체크무늬? 그 체크무늬는 마치 술집 여자를 불러내는 듯한 태도에 얼어붙었고 말았고, 그 말을 그냥 못 들은 척했다.알고 보니 그 사제는 다른 날에 다른 여성 신자를 성추행했었고 결국 우리 본당에서 임기를 다 못 채우고 잘렸다. 체크무늬는 피해 여성이 진술 자료를 모을 때 충실하게 협조하는 것으로 자신의 찜찜함을 털기로 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술자리에 함께 있던 남자 차장이 갑자기 러브샷을 하자며 내게 팔을 뻗어왔다.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딴은 내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눈 깜빡할 사이에 그의 팔이 내 오른팔을 감아 들어왔고 이어서 머리 뒤로 술 삼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론계에 몇 년간 몸을 담고 나니 그날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이 업계에서 러브샷은 반가움, 혹은 미안함이나 애틋함의 표시였다. 이후로도 별의별 술자리에서 러브샷은 이어졌고 나는 그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당시의 일을 문제 삼지 않았던 스스로가 대견했다. 타사 동료들 몇몇과 함께 나름 높으신 취재원을 만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귀갓길이 비슷해 그와 같은 택시를 탔다. 집에 가는 30여 분간 그 50대 남성 취재원은 당시 20대였던 내게 수차례 ‘기자님 젊고 너무 좋다’ ‘기자님 예쁜 거 아시죠’ 류의 개소리를 반복했다. 나는 잠시 ‘이거 경찰에 신고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 취재원이 바로 경찰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뭘 겪을 때마다,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똑바로 살아서 이 다음 세대의 여자들은 다른 세상에 살게 하겠노라 막연한 다짐을 했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피로했다. 나도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철 없고 치사한 청년들처럼 그냥 알량하게 살고 싶었다. 왜 여자들은 똑바로 살아야 하나. 왜 자꾸 뭘 당해서 갈등 끝에 이내 억울함을 삼켜야 하나. 뭘 증명하거나 자기 합리화해야 하나. 끊임없이 바로잡아야 하나. 왜 이렇게 못살게 구나. 나도 그냥 일하고 돈 벌며 살고 싶다. 일상을 좀 안온하게 누리고 싶다. 늘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익숙한 공간에서 상처받으며 살았던 우리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투쟁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나. 그러는 동안 강남역에서 여자가 죽고, 유명한 여자들이 목숨을 끊고, 누군지 모를 여자들이 N개의 채팅방에서 벗거나 피 흘리는 채로 나뒹굴다 발견됐다. 그리고 이제는 딥페이크다. 세상에 묻고 싶다. 정말 텔레그램이 문제인가. 나는 텔레그램이나 딥페이크 기술이 디지털 성폭력의 확산에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 하등 관심이 없다. 내 선명하고도 해묵은 관심은 어째서 학생이건 교사건 군인이건 여자들이 훨씬 더 많이 당했느냐에 있다. 나는 남자들이 정말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인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단 하나의 절대 새삼스럽지 않은 진실은, 실질적 피해자로 살아가는 여자들이다. 큰 조카가 내년에 고등학교에 간다. 나는 요새 그 아이의 얼굴이 가상의 몸에 합성된 장면이 문득 상상되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안 해서 그 애들이 이런 일들을 당하고 있는 걸까 봐 무엇보다 두렵다. 우리 세대의 여성들이 삶의 궤적에서 겪어 왔던 크고 작은 성폭력들을 모두 바로잡아 왔다면 오늘날의 풍경이 조금이나마 달라졌을까. 내가 그 차 안의 성폭력범을 신고했더라면, 이 업계의 관습이 실은 악습이다 목소리 냈더라면 뭐라도 달랐을까. 나는 이제 그 아이들이 제발 바바리맨만 만났으면, 어른들한테만 뭘 당했으면 하고 바랄 지경이다. 난 적어도 한 교실을 쓰는 남학생들이 무섭지는 않았다. 우리 시절 접했던 ‘디지털 성폭력’이란 남자친구에게 성관계 장면을 불법 촬영 당한 뒤 남성 친구나 형제로부터 피해 사실을 알게 되는 식이었다. 수많은 여자가 목숨을 끊었다. 가상의 사진물이라고 해서 부디 딥페이크 피해 여성들의 모욕감이 축소 해석되지 않기를 바란다. 영문도 모른 채 복사뼈를 간수하며 사는 여중생들의 오래될 울분에 대해 이 사회는 아는 바가 너무 없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여름방학이면 방바닥에 철썩 눌어붙어 시간을 보내는 수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손님도 없는 집에 에어컨을 튼다는 건 당시의 엄마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덜 더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결국엔 방바닥 부침개였다. “가만히 있으면 안 더워.” 당신은 부지런히 쌓이는 방학의 밥그릇이나 여름 빨래들과 씨름하느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으면서 나한테는 고생도 덥지도 말라고 그랬었다. 그때 엄마는 알뜰한 가정주부가 되기 위해 티슈 한 장도 조각내 세 번에 걸쳐 쓰기(모기 잡았다고 티슈 한장을 통째로 뽑는 날엔 바로 등짝 스매시), 집안의 온갖 전기 코드 뽑고 다니기(설령 하루에 10번도 넘게 쓰는 전자레인지라 할지라도), 퇴근한 남편 들어오기 전까진 거실 불 안 켜기(자녀 공부 시엔 예외) 등을 실천했는데, 이는 당시 그녀가 선보였던 기행 중 아주 평범한 축에 속하는 것들이다. 내 부모는 아마도 세상살이가 좀 무서웠던 것 같다. 둘 다 지방의 대단치 못한 집안에서 막내아들, 막내딸로 자라 별다른 도움 없이 덜렁 시작한 결혼생활이었다. 상경해 아이 둘 달고 10년 만에 내 집 장만이면 좀 누릴 만도 한데 몇 년 안 살고 그 집을 던져버렸다. 지금 살만한 작은 집 말고, 나이 들어서도 자식들 도움 없이 영영 살다가 죽으면 되는 집을 40대의 내 젊은 부모는 원했다. 외벌이 가장이었던 아빠의 어깨에 도대체 자식들 인생 어디까지가 걸쳐져 있었던 것일지 아득하다. 25평짜리 깨끗한 집을 적당한 가격에 팔고, 다 쓰러져가는 22평 주공아파트를 그보다 훨씬 비싼 값에 샀다. ‘재개발이 되네, 안 되네’ 연기가 피어오르는 와중에 건 베팅이었다. 아빠가 손이 떨려 못 찍고 있는 도장을 엄마가 호통을 쳐 겨우 찍었더라는, 계약일과 잔금일 사이 재개발이 결정돼 집주인이 계약을 무르려 별의별 짓을 다 하다 중개인의 역정에 겨우 나타났더라는 얘기는 이제 와서 나누는 우리 가족끼리의 술자리 안줏거리다. 이것이 당시 행해졌던 그녀의 다채로운 기행의 연유다. 무리해 들어간 집이라 좀 아낄 필요가 있었다. 독자들의 비위를 생각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한때 유행했던 문구인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를 내 식대로 바꿔보자면 “난 크면 오줌 한번 쌀 때 물 두 번, 세 번씩 내리면서 살 거야!”다. 그 모든 노력을 합쳐도 어차피 한 달에 만 원도 못 아낀다. 그러나 이 구질구질함이 나의 똑똑하되 수줍었던 아버지로 하여금 외로운 돈벌이를 버티게 했다. 어찌저찌 계약에 성공하긴 했지만, 우리도 나름대로 급하게 구한 집이라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1층인 데다 모서리 집이어서 여름이면 이마에 땀 맺히는 속도 따라 집안 곳곳에 곰팡이가 송골송골 피었다. 겨울엔 믿을 수 없도록 추웠다. 물론 알뜰살벌한 그녀는 빵빵한 보일러 대신 폭신한 극세사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줄 뿐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극세사 이불을 죽도록 싫어하고 겨울에도 방이 차야 잠을 잘 잔다. 아무리 싫어도 부모는 자식에게 무언갈 심는다. 나는 그 공간이 집이 아니라 땅처럼 느껴졌었다. 곰팡이나 벌레 추위 더위 이런 것들이 아마 분명 싫었을 텐데 그런 기억은 별로 나지 않는다. 어떤 계절, 시간이 곧 당도할 예정임을 늘 미리 알려줬었던 그 땅의 깊은 냄새가 가끔씩 그리울 뿐이다. 그 집에선 봄을, 비를, 새벽을, 방학을 냄새로 먼저 알았다. 거의 대부분의 생을 시간에 쫓기며 지냈지만 그곳에서만큼은 시간을 기다리며 살았다. 단지 곳곳엔 플라타너스와 단풍나무 길이 펼쳐져 있었다. 큰 나무는 다 뽑아버린 지금의 서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키의 나무들이었다. 가을이면 늘 단풍 명소로 꼽히곤 했던 그 아름다운 숲길이 내 통학길이었다. 그 길엔 비가 내릴 땐 비가 안 오고 비가 그치면 비로소 잎에 맺혀있던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늦게 당도하는 터널이었다. 머리에 뭐가 톡 하고 떨어져 빗물이겠거니 하고 집에 가서 보면 송충이였다. 한여름에도 햇볕을 허락하지 않는 구간, 겨울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온도가 낮았던 그 숲길에서 나는 사람도 어둠도 말고 오로지 그 나무들만 무서웠었다. 지금과 같은 계절엔 나무마다 잔뜩 매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참매미는 정말로 “맴맴”하고 운다는 것을, 참매미의 울음이 그 동네 모든 매미 떼창의 시작이라는 것을, 교복 입은 아이들이 자기들도 매미만큼이나 할 말이 많아 나무 기둥을 발로 걷어차면 30초 정도는 매미들도 기다려 준다는 점을 그 나무 아래서 배웠다. 안타깝게도 재개발은 생각보다 더뎠다. 엄마는 처음엔 “너 대학 가면 방을 이렇게 저렇게 꾸며보자” 하다가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엔 “취직하면 방에 무엇무엇이 필요할 거야” 했지만, 내가 취직하고 독립 자금을 모을 때까지도 새집은 지어지지 않아 나는 끝내 그 집에 못 살았다. 반짝이는 새 집에서 지금 내 부모는 아주 잘 지낸다. 아빠는 자주 술에 취하고 그 많은 날 중 정말 가끔씩만 길었던 기다림을 얕게 후회 한다. 무엇을 기약하고, 기대하고, 오래 기다리면서 가족의 행복을 유지하는 게 부모로서는 꽤 고단했을 것 같다. 잘 짜여진 생은 틀림없이 비틀린다. 우리는 그때 누가 크게 아파서도 안 됐고, 돈 사고를 쳐서도 안 됐고, 뭘 당해서도 안 됐고, 비싼 취미를 만난다거나 꽃 피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재능이 발견 되어서도 안 됐다. 이중 대부분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몇몇은 실제로 벌어졌다. 굽이굽이 아찔했으나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새로 올라간 아파트는 말하면 누구나 알 법한 대단지인 데다 커뮤니티 시설도 훌륭하다. 부모가 안온한 곳에 살아 주어 고맙다. 단지의 나무들은 다 키가 작다. 플라타너스 길이 무서웠지만 나무들이 지나치게 착해져서 약간은 무안하다. 그 많던 나무들은 누가 다 베었을까. 미련 없이 떠나온 동네인데도 내 유년의 풍경들이 전부 사라지고 없어 솔직히 속상할 때도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 살고 있지만 고향은 상실한 기분이다. 떠나올 때의 산뜻함이 조금 후회스럽다. 아마도 나는 이제 땅 냄새가 나는 곳에서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걸 그때는 몰랐다. 당연히 엄마도 빨래나 설거지보단 가만히 있는 게 좋고, 더운 걸 싫어한다. 그리고 깜빡하지만 않는다면 한 번에 한 번씩(?) 꼬박꼬박 물을 내린다…. 엄만 종종 내게 전화해 “딸램아 에어컨 필터 잘 청소해서 틀어야 돼” 한다. 나는 “엄마 비 온다고 내내 창문 열어두지 말고 에어컨 한 시간이라도 틀어요. 습하면 힘들어” 한다. 이런 집에선 가만히 있으면 춥다. 설거지하던 당신과 방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내가, 각자의 거실에 추워하며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좀 이상하다. 플라타너스의 그늘을 진작에 잃은 데다 여름은 해가 갈수록 맹렬해진다. 나는 고향도 여름도 빼앗겼다는 생각에 가끔 짜증이 난다. 그래도 세월이 내 부모 앞에 반짝이는 땅 하나를 남겨줬으니 회한은 참아진다. 내가 잠시 빌려 살았던 그 땅에서 그들이 창밖의 땡볕을 지루해할 생각을 하면, 늘 무언가를 무서워하며 살았던 젊은 내 부모가 떠올라 나는 한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생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죽음 앞에서야 새삼스레 생을 더듬어 보는 산 자들의 만용조차 너무나 죄스럽게 느껴진다. 세상 사람들은 정말이지 계속 죽는다. 젊은 채로, 행복 또는 불행의 한가운데서, 자식을 남기고, 부모를 뒤로하고 죽어버린다. 수습기자 때 참사 현장과 빈소를 쏘다니며 이런저런 죽음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기자 생활 8년 차에 접어든 지금도 믿을 수 없이 기만적인 죽음의 얼굴 앞에선 맥없이 무참해진다. 2017년 늦은 겨울엔 유독 화재와 참사가 잦았다. 가을에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하며 장만했던 파란 롱패딩엔 늘 분향 냄새가 축축하게 배 있었다. 당시 나를 훑고 지나갔던 죽음 중 몇몇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들이 그렇게 죽어있는 동안 나는 자랐고, 세상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기자를 피하는 유족들에게 다가가며 했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한 것 같다. 12월 중순 즈음인 내 생일에도 난 누군가의 빈소에 앉아 죽음을 취재해야 했다. 79세 남성이었다. 영등포구의 한 허름한 흙집에서 불이 나 소방관들이 출동했는데 불길을 다 잡고 보니 빈집인 줄 알았던 그곳에 한 노인이 죽어 있었다. 군에서 퇴역 후 직업이 없었고, 병을 앓느라 가난해졌으며, 연금은 부족했고, 그래서 가스를 끊어버리고 휴대용 버너로 라면도 끓여 먹고 언 몸도 녹였더라는, 그 불이 어느 날은 다른 걸 태우기 시작해 급기야 집을 다 집어삼켜 버리고 말았다는 게 대략의 사연이었다. 한바탕 불난리 뒤 물난리까지 겪은 그 집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불길을 잡느라 쓰인 어마어마한 양의 소방용수를 타고 일정한 크기로 적당히 봉해진 검은 봉지들이 흙더미와 함께 집 바깥으로 한가득 쏟아져 나와 있었다. 그 봉지들이 좁은 골목을 점령해 그걸 밟고 화재 현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반소된 집에 남은 미납 고지서에서 노인의 이름을 찾았다. 그 이름을 가지고 빈소를 찾았다. 텅 빈 빈소를 아들 내외가 지키고 있었다. 내가 누구고 무엇하러 왔는지 설명했더니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들이 날 한켠에 앉혔다. 아들은 페인트칠해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월급을 아무리 쪼개도 아버지 드릴 여윳돈이 안 생겨 몰래 아르바이트를 해 매달 20만 원 정도 되는 돈을 드렸지만 몇 년 전부터 그마저도 못 드릴 정도로 생활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1년 전부터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아버지는 하루에도 수차례 씩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목포에 있는 땅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2, 3시간씩 이어지곤 했던 그 역정을 아들은 묵묵히 받아냈다. 어떤 날은 하루만 더 기다리시라고 달래뒀다가 그 다음날엔 동사무소 직원이 보름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고, 이후엔 은행 직원이 일주일만 더 기다리라고 했다고 매번 다른 거짓말로 아버지를 다독였다. 그 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였다. 노인은 17년 전 직장암 수술을 받으며 장을 잘라냈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별도의 장치에 봉지를 달아 수시로 흘러나오는 변을 받아내야 했다. 불에 탄 집 앞에서 내가 밟았던 흙더미 속 검은 봉지는 노인의 변이었다. 신발에 아비의 분뇨를 묻히고 온 어린 기자에게 그는 고해하듯 말했다. 매일매일 쌓이는 그 봉지들을 치워주는 것도 십수 년간 자신의 몫이었다고. 그런데 요샌 통 가지 못했다고. 겨울 공기에 말라 갈라진 그의 얼굴이 조용히 젖어갔다. 미숙한 수습기자였던 나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죽음을 두고 무슨 기사를 써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가족들의 방치가 낳은 고독사가 아니었다. 열악한 주택구조로 인한 화재사도 아니었다. 불이 잘못 붙으면 아파트라도 도리가 없다. 나는 아직도 이들 부자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은 가난, 지독한 가난이었다고 믿는다. 당시 기사는 28년간 군에 복무하며 베트남전에 참전도 했던 노병이 안타깝게 숨졌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나갔지만, 참전한 적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생을 살다 죽어도 되는 건 아니었다. 또 다른 기억 하나. 크리스마스를 나흘 앞둔 2017년의 끝자락에 충북 제천의 한 스포츠센터에서 큰불이 나 29명이 숨졌다. 그날 나는 이대 목동 병원에서 숨진 신생아들의 부모를 만나고 오는 길에 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신문사 수습기자들은 모조리 제천으로 보내졌다. 각자 소방서와 경찰서, 화재 현장, 장례식장으로 흩어졌는데 난 서울병원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다. 이번 화재로 숨진 이들의 빈소가 가장 많이 차려진 곳이었다. 조문객들은 장례식장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몇 층을 눌러야 할지 모르고 헤맸다. 층마다 알고 지내던 사람의 빈소가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천은 그렇게 작은 도시였다. 다른 층에 가서 또 울어야 하니 이웃들은 조금씩 아껴서 울었을 텐데도 빈소에선 통곡 소리가 계속 났다. 서울병원 장례식장은 보도가 많이 됐던 세 모녀와 두 목사의 빈소가 차려진 곳이기도 했다. 나는 이 중 한 목사의 빈소에 자주 들어갔는데, 참사 현장이 주는 위압감에 압도돼 뭘 묻지도 못하고 하릴없이 앉아있기만 했었다. 빈소에서 예배가 있을 땐 기도도 하고 성가도 불렀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이 밥도 주고 얘기도 해 주고, 어느새 망자의 가족들도 울거나 술을 마시다가 내게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풀어놨다. 이들 목사의 발인 날이 성탄절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취재 목적은 아니었고 참사 현장에 며칠간 있다 보니 나도 마음이 힘들어 돌아가신 목사들의 교회에서 성탄 예배를 드렸다.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납셨네.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노래를 성가대는 울면서 불렀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건지, 무엇으로 자신을 설득해 밀려오는 배신감에도 신앙을 지켜내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나도 많이 울었다. 많은 사람이 한날한시에 죽어 발인이 하루에도 수 건씩 겹쳤다. 나는 이승에 남은 이들의 표정과 울음을 끊임없이 옮겨 적어야 했는데 그게 참 괴로웠다. 아내와 딸, 장모를 한꺼번에 잃은 남자에겐 마지막까지 도저히 시선을 오래 둘 수 없었다. 그러면 그의 표정을 읽어낸 뒤 감히 공감하려는 시도를 하게 될 것 같았고, 그래도 저 집은 자식이 셋이라서, 딸이 둘이나 남아서 다행이라는 생각 같은 것을 하게 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열 명이 넘는 망자가 모두 발인을 치른 뒤에야 나는 그 장례식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부턴 제천소방서를 취재하게 됐지만,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다시 누군가의 빈소로 향해야 했다. 외할머니였다. 하루 서너시간 눈 붙이고 다시 일하는 수습기자 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할머니 빈소에서 밀린 잠을 실컷 잤다. 잠깐씩 정신이 들 때마다 이곳은 기자가 없는 빈소여서 다행이라고, 억울한 사람 없이 온통 슬프기만 한 사람들뿐이라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호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 꿈결에 알았다. 그때의 안도감을 떠올리면 나는 또 기만에 속아 죽어간 사람들 생각에 하염없이 미안해지고 만다. ※‘잊혀지다’는 ‘잊히다’의 비표준어다.[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토끼 꿈을 꾸었다. 토끼 세 마리가 있고 그 중 한 마리는 새끼를 낳고 있는 꿈이었다. 해몽을 찾아보니 토끼가 새끼를 낳는 꿈은 재물이나 인연이 들어오는 길몽이라 했다. 로또를 한번 사 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토끼 꿈을 꾸고 로또를 샀더니 앞 숫자 두 개만 맞고 나머지는 다 틀렸다는 어느 블로그를 보고 이번엔 그냥 운을 모으기로 했다. 하긴 토끼 하면 떠오르는 큰 귀나 커다란 앞니, 귀여운 앞발은 모두 두 개다. 실은 몇 달 전 꽤 오래 만난 연인과 헤어졌다. 이별 자체도 괴로웠지만, 엄마 생각을 하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겪었던 모든 이별의 끝에 엄마가 있었다. 어떤 때에는 밤새 나를 끌어안고 주무셨고, 어떤 때에는 차인 걸 찼다고 하는 거짓말에 말을 보태지 않으셨다. 당신한텐 한없이 무심한 딸이면서 이별에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엄마는 어떤 문장으로 이해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하루는 엄마의 휴대전화를 뒤적이다 몇 년 전 만났던 사람과 헤어진 날을 ‘우리 모두 슬픈 날’이라 메모해두신 걸 발견했다. 기어이 또 하나의 슬픈 날을 만들어 버린 나는 “이제 정말 아무 남자나 갖다 바치겠다”며 한 선배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사랑은 햇볕을 만난 4월의 화분 같은 것 아닐까. 우리 집에는 악독한 주인을 만나고도 여러 해 숨을 붙들고 있는 화분들이 있다. 냉해를 피해 겨우내 집안에서 키우는 동안 한없이 웃자라다가, 봄이 오면 베란다에서 햇볕을 만나 그 웃자란 몸으로 자꾸만 새 줄기를 내며 균형을 잃어가는 꼴이 참 우스우면서도 사랑스럽다. 그렇게 주렁주렁 잎을 달아버리면 결국 무거워서 꺾이고 말 텐데 그리도 좋을까. 지지대 없이 서 있기 어려운 내 화분은 ‘망한 수형(樹形) 대회’ 같은 걸 나가면 분명히 1등을 할 테고, 나는 그 상패를 평생 간직할 거다. 화분의 만개한 부분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보다 웃자란 부분을 가여워하는 마음이 사랑에 더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시절에 왜 내가 없어서 너를 안아주지 못했을까, 시간마저 거스르는 분노야말로 사랑과 가장 닮아 있다고 믿는다. 생각해 보면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받는 마음의 8할은 가여움인 것 같다. 나도 당연히 못나고 삐딱한 구석들이 있다. 그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그것을 잘 감춘 날이 아니라 들켜버린 날 깊어졌다. 내게는 손톱을 망치는 오래된 버릇이 있는데, 이걸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걱정했지만 한 사람은 ‘내가 옆에 있는데도 여전하구나’ 하고 자신을 책망했다. 나는 이 말을 들은 날 정말이지 똑바로 살고 싶어졌었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도 8할은 가여움이다. 그의 약한 모습을 발견할 때면 누가 그걸 나보다 먼저 볼까봐 불안해지고, 그 결핍이 이 사람을 이만큼 살게 했다고 허공에 대고라도 변호하고 싶어진다. 이 마음이 동정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볼 때 나는 비로소 외사랑 중임을 안다. 당신보다 내가 더 가여워지는 어느 날 사랑은 끝난다. 관계가 쉽게 풀리지 않는 사람들과 만날 때 나는 몹시 어려운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사람은 책과 달라서 독해하려는 내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끝내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 또한 오만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잘 읽히는 책들을 여러번씩 읽고 싶다. 비 내리는 여름날 선풍기 앞에서도 읽고, 느릿느릿 밝아오는 크리스마스의 아침에도 읽고 싶다. 내가 당신을 마음껏 읽도록 내버려 둔다면, 당신이 아팠던 굽이굽이마다 4월에 피는 꽃을 심겠다.[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딸은 카네이션을 만들어야 하는 5월이 싫었다어느 해부턴가 카네이션은 소파 뒤에 숨겨졌지만이제 카네이션은 묻는다, 내가 아직도 거짓말이냐고숙경 씨는 전남 목포에서 2남 5녀 중 6녀로 태어났다. 평범한 집안이어서 5녀 중 3녀까지는 대학을 못 갔고, 그 3녀들이 벌어온 돈으로 딸 중엔 아래의 2녀만이 대학에 갔다. 대학을 포기한 형제의 돈으로 공부하면 뭔가 다 열심히 할 것만 같지만, 숙경 씨의 사례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학력고사를 치른 겨울, 지역의 대학에 다니게 된 숙경 씨는 동현 씨를 만났다. 아버지 돈으로 공부해 서울의 좋은 대학에 붙은 사람.동현 씨는 결코 숙경 씨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았다. 그는 기나긴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날을 두 번째 데이트로 꼽는다. 부끄러워 서로 눈도 잘 못 마주치던 그때, 숙경 씨는 별안간 뽕하고 방귀를 뀌었다. 동현 씨는 고막을 찢고 내리꽂힌 그 굉음을 못 들은 체함으로써 신사다움을 뽐내려 하였으나 숙경 씨는 그리 쉽게 종 잡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메, 나와부렀으야!” 32년 전 결혼 후에도 몇 년간 ‘방귀를 트지’ 못했다는 우리의 젠틀한 동현 씨는 그날 숙경 씨의 당당함에 홀딱 반해버렸다. 동현 씨와 숙경 씨는 서울과 목포를 오가는 10년의 연애 끝에 결혼해 1년 만에 딸을, 3년 뒤엔 아들을 낳았다. 고향에서 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온 숙경 씨는 가정에서도 노동하듯 성실했다. 동현 씨가 출근하고 나면 매일 집안 전체를 비질하고 양 무릎을 쿵쿵거리며 물걸레질했다. 아이들에게 말과 글과 수를 가르치고, 밥과 사랑을 떠먹였다. 그런 나날이 흐르는 동안 13평짜리 전셋집이 18평이 됐고, 이내 23평짜리 내 집이 됐다. 딸은 9살 무렵 부모가 마련한 첫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풍경을 선명히 기억한다. 숙경 씨가 그 어느 때보다 해사한 얼굴로 어김없이 양 무릎을 쿵쿵거리며 마룻바닥에 물걸레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경 씨의 딸은 어릴 적부터 다소 별난 면이 있었다. 딸은 엄마를 볼 때면 왜 애정과 혐오, 존경과 무시, 인정욕구와 해방되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이 뒤섞이고 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 자주 절망했다. 그러나 숙경 씨가 경험했던 모녀 관계는 그다지 복잡해질 기회가 없었던 엄마와 ‘6녀’ 사이의 찰나들일 뿐이어서, 그 방면으로는 지혜가 모자랐던 것 같다. 딸은 5월이 정말 싫었다. 카네이션을 만들자는 학교의 소동이, 그걸 부모의 가슴에 달고 오라는 숙제가 싫었다. 엄마의 가슴에 꽃을 다는 행위는 딸에겐 일종의 거짓말이었다. 어느 해부턴가 카네이션은 부모의 가슴이 아닌 소파 뒤 먼지 구덩이 속에 숨겨졌고, 스승의날 즈음 몰래 버려졌다. 언젠가 숙경 씨가 그 카네이션을 발견했다 무언가 상실한 표정을 하고 가만히 제자리에 돌려놨을지는, 모를 일이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숙경 씨는 생리 현상에 관한 것만 빼고는 다소 내성적인 면이 있어서 학기 초면 아이들에게 반장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그러나 딸은 말을 잘 안 들어 기어이 반장을 맡아 왔고, 아들은 말귀를 잘 못 알아들어 부반장 임명장을 펄럭이며 기뻐했다. 담임 교사 소풍 도시락을 몇 번 싸다 바치고, 몇 개의 교내 행사를 치르다 보면 어느새 한 해가 갔다. 아이들은 차례차례 교복을 입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멀어져 갔다. 학습지의 거의 유일한 순기능은 아이에게 공부를 시킬지 다른 걸 시킬지 비교적 이른 시기에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숙경 씨는 진작부터 딸에겐 국영수를 좀 더 가르치고, 아들과는 다른 걸 찾아보기로 한 바 있었다. 딸이 수능을 치는 날 숙경 씨, 그러니까 ‘유리아 자매님’은 성당으로 달려가 딸 ‘요안나’를 위해 과목별 수험 시간에 맞춰 실시간으로 주님께 기도를 쐈다. 국영수 순서대로…. 2교시를 마친 후 점심을 먹다 문득 수능은 국영수가 아니라 언수외 순임을 깨달았지만, ‘주님’은 그날 접수된 기도가 너무 많아 한 자녀만 다른 과목 시험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셨던 모양이다. 딸 요안나는 완전히 망한 수리와 지나치게 잘 본 외국어 점수를 받아들고, 그다지 치밀하지 못 한 사람에게 달란트로 기도발을 주시는 건 주님이 좀 치사했다고 생각했다. 숙경 씨에겐 꿈이 있었다. 챙길 자식이 너무 많았던 자신의 어머니와는 꿀 수 없던 꿈이었다. 유리아는 어릴 적부터 영 살갑지 못했던 요안나와 언젠가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이제는 그게 가능해질까 싶었던 딸의 나이 20살엔 딸에게 애인이 생겼고, 지금은 직장을 얻은 딸이 집을 나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요안나는 제때 대학 가서 제때 취직해 제때 독립하겠다는 게 뭐가 문제냐고 따졌다. 유리아는 그런 게 중요한 적 없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둘은 서로의 오랜 바람을 모른 체 하느라고 울었다. 숙경 씨는 사는 내내 딸이 무엇으로부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딸은 그 기다림이 사는 내내 버거웠다. 요안나가 집을 나가는 날 아들만이 누나의 이사를 도왔다. 아들은 사회 초년생이 간신히 마련한 단칸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겨우 이런 데 살려고 엄마한테 그 난리를 쳤냐?” 딸은 그 방의, 그다음 방의 비밀번호도 유리아의 집과 똑같이 유지했으나 유리아는 한 번도 딸의 방에 찾아가지 않았으므로 그걸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전해지지 않은 먼지 구덩이 속 카네이션 같은 것이었다. 요안나는 그로부터 약 3년 뒤 걸려 온 유리아의 전화를 잊지 못한다. “요새 드라마에 보니 독립한 여자들이 참 멋지게 혼자 잘 살더라. 너도 어디 한번 그렇게 살아봐.” 요안나는 그동안 유리아가 겪었을 번뇌조차 외면하고 싶은 자신이 역겨웠다. 사랑은 미안해하지 않는 것이라 했던가. 요안나는 어째서 자신이 유리아를 생각하는 마음은 이토록 죄책감을 닮았는지 궁금했다. 요안나는 여전히 5월이 싫었다. 방귀도 못 참던 열아홉의 숙경 씨가 꿈조차 폐기하는 어른이 되기까지, 자신은 무엇을 저질렀을지 자꾸만 헤아려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참으로 웃기는 것이다. 이제는 숙경 씨가 다 키웠다 싶은 아들을 내보내겠다 하고, 아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서운해한다. 아들이 이사하기 전날 밤 숙경 씨는 3년을 먹어도 다 못 먹을 양의 김치를 쌌다. 동현 씨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아들의 짐을 차에 옮겼다. 동생이 구한 방 사진을 보고 요안나는 잊지 않고 말해주었다. “방이 참 아늑하고 좋네.” 숙경 씨는 조용히 아들의 살냄새를 맡았다. 그날 밤 이 가족의 어느 한 시절이 저물고 있음을 네 사람 모두가 알았다. 여기, 숙경 씨의 무릎이 있다. 기도와 번뇌와 체념이 있다. 저기엔 비워진 자식들의 방이, 땅에는 누군가 소파 뒤에서 건져 온 카네이션이 있다. 카네이션이 묻는다. 내가 아직도 거짓말이냐고. 다시 5월이다. 숙경淑景 봄, 자연의 맑은 경치肅敬 삼가 존경함[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밥 짓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평범한 저녁 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딸의 환호성에 온 가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신춘문예 문을 두드려 온 딸이 꼭 10년 만에 당선 소식을 받아든 것. 취업준비생 딸이 투고 사실을 알리지 않아 부모님의 놀라움과 기쁨은 더 컸다. 오랜 세월 고군분투한 딸을 부둥켜안은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채윤희 씨(27) 이야기다. 이번 신춘문예에서는 중편소설, 단편소설, 시, 시조, 희곡, 동화, 시나리오, 문학평론, 영화평론의 9개 부문에서 이안리(본명 이상훈·36) 김기태(37) 채윤희 김성애(59) 구지수(26) 김란(58) 이슬기(37) 최선교(26) 최철훈 씨(31)가 각각 당선됐다. 작가를 꿈꾸며 오랫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이들이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 모였다. 직업도, 나이도 각양각색이라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지만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로 금세 이야기꽃을 피웠다. 중편소설 당선자 이안리 씨에게 소설은 마치 고백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첫사랑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글쓰기를 동경하던 그는 2018년부터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 기본 생계를 위해 외국어 강사, 통역사 등 부업을 병행하는 ‘N잡러’의 삶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간 이 씨의 고충을 아는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등단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주변에서 진심으로 축하해줘 살짝 눈물도 났습니다.”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 김기태 씨는 직장에서 당선 소식을 들었다. 마음은 뛸 듯이 기뻤지만 당장 주변에 전하지 못하고 숨죽여 ‘소리 없는 환호’를 내질렀다. 직장생활과 병행하며 성실히 습작한 4년의 세월과 3번의 낙방 경험, 이 과정에서 힘이 돼 준 문우(文友)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떨어질 때마다 ‘예순 살 전에는 당선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여유를 찾고 다음 해를, 또 다음 해를 준비했어요.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시조 부문 당선자 김성애 씨는 전통문학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다.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목욕탕 카운터에 앉아 짬짬이 습작을 하던 중 2019년 4월 암 발병으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어려운 와중에 날아든 당선 소식은 그와 가족 모두에게 큰 힘이 됐다. 김 씨는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딸이 자신에게 건넨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고 했다. “딸이 ‘나도 엄마처럼 자랑스러운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만큼 제가 누군가의 엄마이고 할머니인 게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달랐던 만큼 준비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수년간 투고 끝에 당선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첫 도전에 당선된 이도 있다. 문학평론 당선자 최선교 씨는 ‘초심자의 행운’을 붙잡은 사례.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지난해 3월부터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첫 신춘문예 도전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는 “큰 기대 없이 원고를 보낸 거라 부모님께도 투고했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대학원 과제로 쓴 평론 형식의 글들이 많았고, 동료 학생들과 꾸린 평론 스터디 모임도 당선에 한몫했다. 최 씨는 “같이 공부해 온 문우들 중에는 수차례 신춘문예에 도전한 이도 있어 등단 소식을 알리기가 민망하다”고 말했다. 2017년부터 꾸준히 투고해 온 구지수 씨(희곡)는 지난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본심까지 올랐으나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4년의 노력이 결실의 문턱에서 좌절됐지만, 그에게 희곡은 등단 여부로 흔들릴 수준의 소명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연극 동아리 때부터 희곡을 썼어요. 대학에서도 문예창작학과에서 희곡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도 계속 쓰고 있었습니다.” 인간 중심적인 작품보다는 ‘비인간 동물’에 초점을 맞춘,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쓰는 게 그의 목표다. 동화 부문 당선자 김란 씨는 2005년 한 동화 모임에 참석한 후 그 매력에 흠뻑 빠져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짓기 시작했다. 김 씨는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신춘문예에 투고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아마 이번에 등단하지 못했더라도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원고를 보냈을 것”이라며 웃었다. 이번 등단으로 당선자들은 글쓰기에 날개를 달았다. 이들은 이 날개로 어디를 향해 날아가고 싶을까. 영화평론 당선자 최철훈 씨는 “그냥 책상 앞에 앉아 스스로의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 쓰는 평론이 아닌 현실적으로 좀 더 힘을 갖는 평론을 쓰고 싶다”고 했다. 대학 시절부터 철학과 문학, 영화를 공부하며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게 습관이 됐다는 최 씨에게 등단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보다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고 더 성장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8년의 습작기를 보내고 시나리오 부문에서 당선된 이슬기 씨의 각오는 오래 기다린 기회를 잡은 이답게 담백하고도 묵직했다. “사람들이 보고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그뿐입니다. 제 이야기에 매몰되기보다 읽는 이를 즐겁게 하는 글이 더 좋다고 생각하거든요.”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둠이 빛을 피해 어린이의 속옷이 들어 있는 서랍장으로 숨어든다. 해가 지고 나서야 서랍장을 빠져나와 슬그머니 외출한 어둠은 집 안의 텔레비전 불빛까지 모두 꺼진 뒤에야 조용히 돌아온다. 어둠은 밤새 깨어 어린이가 푹 잘 수 있도록 돕고, 가끔씩은 몸집을 불려 하늘의 별이 더욱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게 한다. 어둠을 좋아하지 않던 아이는 잠들기 전 불을 끄고 어둠에게 말을 건넨다. “안녕!” 어린이들이 무서워하는 어둠을 귀여운 눈동자와 푸근한 몸집, 우스꽝스러운 더벅머리를 가진 인형을 통해 표현했다. 어린이가 어둠이 무서워 도망 다니는 보통의 상황을 전복해 어둠을 어린이를 무서워하는 존재, 빛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 아름다운 별빛을 지켜주는 존재로 그렸다는 점이 신선하다. 친구를 사귀지 못해 혼자 나무에 매달려 외로이 놀고 있는 어둠이 보인다. 어린이는 이제 어둠에게 먼저 다가가 친구도 돼 줄 수 있을 것 같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미국 텍사스주가 시행한 낙태 제한법은 시대를 역행하는, 위험하고 잘못된 법입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여성들이 의학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무허가 시술을 받게 될 겁니다.” 장편소설 ‘위험한 관계’(2011년)와 ‘빅 픽처’(2012년) 등 10여 권의 작품을 국내에 번역 출간한 미국 소설가 더글러스 케네디(66)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표적인 영미권 베스트셀러 작가로 국내에서도 두터운 독자층을 거느린 그가 14일 장편소설 ‘빛을 두려워하는’(밝은세상)을 펴냈다. 그는 신간에 56세 우버 기사 ‘브렌던’이 임신중절을 원하는 여성들을 돕는 ‘엘리스’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브렌던은 임신중절 시술을 하려는 여성들을 병원으로 실어주는 일을 하며 이들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는다. 올 7월 미국에서 영문판이 출간되고 두 달 후 텍사스주에서 낙태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법안이 시행됐다. 이 법에 따르면 여성은 임신한 지 6주가 지나면 성폭행 피해로 인한 임신을 포함해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중절 시술을 받을 수 없다. 임신 6주차가 되면 심장박동을 감지할 수 있어 이 법은 ‘심장 박동법’으로 불리기도 한다. 임신 중기(28주)까지는 산모의 낙태권을 보장한 기존 규제가 한층 강화된 것이다. 케네디는 “스스로 임신중절을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건 자유지만 다른 여성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임신중절을 할 권리까지 빼앗으려고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일랜드와 멕시코 등의 국가들에서도 임신중절을 더 엄격히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모든 상황이 모순투성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임신중절 시술을 받은 여성을 비롯해 이들을 돕거나 혹은 반대하는 이들을 두루두루 인터뷰했다. 케네디는 “인터뷰를 해보니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형제도에는 찬성하는 모순이 발견됐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소설 속 한 여성의 말에 녹여냈다고 한다. “임신중절이 필요한 상황이라도 이를 가볍게 여길 여성은 아무도 없어요. 어떤 경우라도 아주 중대한 일이에요.” 케네디는 새 소설을 발표하는 족족 참신한 소재와 흡입력 있는 전개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소설이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물었다. “제 작품관은 19세기 소설가의 그것과 같습니다. ‘소설은 재밌으면서도 진지할 수 있다.’ 앞으로도 쉽게 읽히는 책은 심오할 수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제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아무리 험한 오지라도 날아가고 싶었어요.” 폴 김 미국 스탠퍼드대 교육대학원 부학장 겸 최고기술경영자(51)는 동아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어느 순간 대중교통으로 닿지 않는 곳까지 방문하려면 스스로 경비행기를 조종해 이동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교육 전문가인 그는 지천명에 가까운 나이에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야기를 엮어 최근 ‘다시, 배우다’(한빛비즈·사진)를 펴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하늘을 날고 싶어진 걸까. 폴 김은 오랫동안 교육 소외지역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비영리 국제교육재단 ‘시즈 오브 임파워먼트(Seeds of Empowerment)’를 설립하고 르완다, 콜롬비아 등 저소득국 아이들의 성공 스토리를 책으로 엮는 ‘1001 스토리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가 개발한 모바일 기반 학습모델 ‘스마일 프로젝트’는 2016년 유엔 미래교육혁신기술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오지의 아이들에게 직접 찾아가 교육봉사를 하기 위해 2018년부터 본격적인 조종사 훈련에 들어갔다. 지형과 대기상황을 육안으로 확인하며 항공기를 조종하는 시계비행 자격증을 이듬해 11월 따냈다. 이것만 있어도 부시 파일럿(bush pilot·북미 관목지대 등 오지를 비행하는 조종사)이 될 수 있지만 올 4월 계기판만 보고 조종할 수 있는 계기비행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그는 “무조건 칭찬으로 용기를 불어넣어준 23세 교관부터 따끔한 질책으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한 ‘네거티브 교관’까지 다양한 선생님들을 만났다. 나이가 들어 학생 역할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며 웃었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야간 비행 훈련에 나선 첫날 공중에서 갑자기 기내 전원이 나가버린 것. 무전기마저 작동하지 않아 ‘메이데이’를 요청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착륙했지만 그는 “인생은 교과서나 매뉴얼에 없는 일들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고 말했다. 천신만고 끝에 부시 파일럿이 된 그는 올해 직접 경비행기를 몰고 멕시코 오지를 다녀와 2021년을 ‘부시 파일럿 인생의 원년’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에게 지난 3년은 경비행기 조종술을 배우는 시간인 동시에 인생을 성찰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훈련 과정에서 ‘나는 과연 올바른 곳에 있는가’라는 자문을 하게 됐다는 것. “경비행기 중 ‘세스나’라는 모델이 있어요.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영 힘을 못 쓰지만 고도가 적당한 곳에서는 충분한 성능을 발휘하기에 파일럿들이 가장 애용하는 모델이죠. 사람도 타고난 역량이 모두 다르지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가기만 한다면 모두가 큰일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앞으로도 저와 학생들의 ‘올바른 곳(right place)’을 찾기 위해 계속 나아갈 생각입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지난달 개봉한 마블 스튜디오의 신작 영화 ‘이터널스’에서 히어로로 등장한 마동석의 역할은 ‘길가메시’였다. 이터널스 멤버들 중 물리적 힘이 가장 강한 전사로 묘사되는 길가메시는 다른 히어로들이 창과 방패, 초능력을 쓸 때 강력한 주먹으로 적들을 쓰러뜨린다. 과연 마동석에게 딱 어울리는 역할이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의 ‘아트박스 사장님’(영화 ‘베테랑’에 카메오로 출연한 마동석의 역할)이 할리우드에서 화려하게 데뷔해 반갑기는 한데 도대체 길가메시는 어디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일까. 길가메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수메르의 도시 ‘우루크’를 다스린 전설의 왕이다. 그의 존재를 모티브로 한 신화들을 엮은 ‘길가메시 서사시’가 유명하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현존 서사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6500년∼기원전 2004년에 존재한 수메르 문명은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꼽히지만 국내에는 관련 연구자가 별로 없다. 이 책은 영어 등으로 쓰인 해외 연구서를 번역한 게 아니라 수메르어를 한글로 직역한 연구서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저자는 신화와 인류학을 전공하고 30년 넘게 수메르 역사 연구에 매달렸다. 13년간 세계 18개 박물관에 보관된 수백 장의 수메르어 점토판에서 설형문자 기록을 일일이 발췌해 수메르 역사를 짜임새 있게 복원해냈다.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5000여 년 전 작성된 1차 사료에 철저히 근거했다. 저자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점토판 원전을 국내에서 처음 한글로 번역했다. 그가 건져 올린 역사적 진실은 놀랍다. 수메르 연구자들 사이에서 교과서처럼 쓰이는 사료인 ‘수메르 왕명록’에서 중대한 역사 왜곡이 이뤄진 사실을 발견한 것. 저자가 해독한 점토판에서 왕명록에 없는 에덴전쟁과 여기 참가한 수메르 최대 도시 ‘라가쉬’에 대한 기록들이 확인됐다. 기록으로 남겨진 인류 최초의 전쟁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수메르 왕명록을 쓴 이가 정당성 없는 왕조인 ‘이씬’의 사람이었으며 그가 라가쉬 관련 기록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고 주장한다. 왕명록이 기록될 당시는 이씬이 라가쉬로 인해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라가쉬가 일군 통일국가와 태평성대, 노예해방, 사회개혁 등 중요한 역사적 성과들이 모두 지워졌다. 저자는 “최초의 역사 왜곡으로 상실된 모든 ‘최초’는 총 57가지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수메르인의 경제-생활-문화로 나뉘어 이야기 흐름이 툭툭 끊기던 기존의 주제별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역사 맥락을 반영한 전개 방식을 택한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8500년 전에도 인류는 도시를 세우고 문명을 발달시켰으며 자연재해를 입고 쓰러진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때로 전쟁을 벌였고 권력 다툼과 부정부패가 이어졌으며 왕조는 계속 바뀌었다.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반복되는 걸까. 세상 모든 역사의 ‘최초’가 궁금한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이 문장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소설 ‘변신’의 첫 문장이 아니다. 여기에서 ‘짐 샘스’는 인간이 아니라 바퀴벌레이며 ‘거대 생물체’가 오히려 인간이다. 대문호의 유명한 첫 문장을 100여 년 만에 오마주한 작가는 바로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73·사진). 지난달 출간된 ‘바퀴벌레’(문학동네)에서 그는 어느 날 인간의 몸, 그것도 영국의 총리로 살게 된 주인공 짐 샘스를 통해 국민투표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영국의 정치 현실을 비판, 풍자했다. 그를 서면 인터뷰로 만나봤다. “2016년 6월 브렉시트를 두고 벌인 국민투표를 지켜보며 추악한 분열의 정신이 영국 정치에 들어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절망 속에서 이 상황을 보았고, 절망 너머에는 풍자와 해학이 있었습니다.” 매큐언은 참신하고 때로는 기괴하기까지 한 발상으로 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 후보에 8차례나 올랐다. 1987년에 ‘차일드 인 타임’으로 영국의 문학상인 휘트브레드상을, 이듬해에는 ‘암스테르담’으로 부커상을 수상했다. ‘속죄’(2003년·문학동네)와 ‘체실비치에서’(2008년·문학동네) 등 국내에 출간된 그의 소설들도 10만 부가량 팔릴 정도로 독자층이 탄탄하다. 그가 이번 작품에서는 하루아침에 사람이 벌레가 되는 이야기인 ‘변신’을 뒤집어, 바퀴벌레가 사람의 탈을 쓴 세상을 상상했다. 영국 의회 각료들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바퀴벌레들은 갖은 술수와 책략을 동원해 의회의 의사결정권을 장악한다. 그러고는 노동자가 일을 하려면 돈을 내게 만들고, 물건을 거래할 때 소비자가 돈을 받게 만드는 기이한 행정으로 영국을 서서히 망가뜨린다. 사회의 엘리트층이 고안한 기만적인 정책에 빈곤층이 가장 열렬히 호응하는 모순적인 모습이 소설에 생생히 그려진다. 이 같은 전개는 자연스레 브렉시트 국면을 맞이한 영국 의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브렉시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소설에 과감하게 드러낸 매큐언은 인터뷰에서 “정치, 정치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정치와 도덕이 만나는 지점들에 언제나 관심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국이 무역이나 과학, 문화적 친밀감을 보호하면서 EU를 떠날 수 있었음에도 이 방법들은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버려졌다”며 “영국 정치는 분별없는 민족주의의 열정에 휩싸였다”고 지적했다. 암담한 정치 현실을 담고 있다고 해서 소설이 시종일관 무거운 사회비평서처럼 읽히지는 않는다. 이따금씩 튀어나오는 유머가 실소를 유발한다. 이를테면 트위터를 즐겨 활용하는 미국 대통령을 등장시켜 ‘미국 대통령도 어쩌면 우리 바퀴벌레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는 장면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절로 떠오르며 웃음이 터진다. 영국은 지난해 12월 탈퇴 유예 기간도 모두 소진하고 최종적으로 EU를 탈퇴했다. 브렉시트를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소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소설은 단합과 분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류는 앞으로도 팬데믹 대유행과 같은 새로운 문제들이 불러온 분열과 단합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해야 할 겁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코로나에 부동산 급등까지 모두의 어려움이 큰 한 해였습니다. 그래선지 출판인, 학자, 의료인 등 35명이 꼽은 ‘2021년 동아일보 올해의 책’은 유독 공동체나 연대를 다룬 양서들이 많습니다. 선정위원별로 3권씩 추천을 받은 결과, 1표 이상 얻은 책은 총 92권. 이 중 상위 10권을 추려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작은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학술팀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 등 지음·이민아 옮김·396쪽·디플롯각계 전문가들은 올해 ‘최고의 책’으로 소통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2권을 택했다. 각 4표로 공동 1위. 팬데믹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혐오를 넘어 연대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집단 무의식이 책 선정에도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진화인류학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을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육체, 정신적 힘이 아닌 친화력이 인류 생존과 진화의 열쇠라고 강조한다. 호모사피엔스가 자신들보다 몸집이 크고 힘이 셌던 고인류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키고 살아남은 게 대표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100명 이상이 함께 모여 산 호모사피엔스와 달리 네안데르탈인은 기껏해야 10∼15명이 한 무리를 이뤄 수적 열세를 보였다. 이는 호모사피엔스가 같은 집단의 동료들과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사람들 사이가 막힌 지금, 소통과 연대의 능력은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추천한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북방고고학)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은 논리와 이성 대신 감성과 친화력으로 향한다. 이 책은 나의 ‘논리’가 아닌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평했다. “최악의 상황에도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꿈꾼다. 이 책은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 기꺼이 다정한 마음 품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북돋운다”(주연선 은행나무 대표)는 평도 있었다.작별하지 않는다한강 지음·332쪽·문학동네 2016년 영국 맨부커상 수상 작가이자 2019년 인촌상 수상자인 한강이 5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연대와 사랑을 말한다. 주인공 경하가 제주도에서 태어난 친구를 환영처럼 만나 1948년 4·3사건의 고통을 공유하는 이야기다. 한강은 올 9월 출간 후 인터뷰에서 “사랑이든 애도든 끝까지 끌어안고 나아가겠다는 결의를 제목에 담았다”고 말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소설 속 세 여성은 역사 속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하는 사랑을 잊지 말자고 말한다. ‘내가 올해 잊고 산 것은 무엇일까. 작별할 수 없는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는 평을 남겼다. 작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악몽에 시달리는 경하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실제로 한강은 5·18 소재의 소설 ‘소년이 온다’(창비·2014년)를 쓰고 악몽을 꿨다고 밝혔다. 비극적 현대사가 남긴 상처는 작가 자신을 뛰어넘어 독자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어둠에 묻힌 상처를 기억하는 자는 폭력에 길들지 않는다. 그들처럼 우리 또한 한순간 어이없이 거기 누울 수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장은수 출판평론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마이클 셸런버거 지음·노정태 옮김·664쪽·부키 “지구 환경과 기후위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뒤엎는다. 책을 읽고 나면 환경 문제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환경운동에 30년간 투신한 저자가 기술과 경제발전이 오히려 환경을 지켜줄 수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환경운동이 오히려 지구를 망치고 있다는 것. 권은희 까치글방 편집팀장은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자연보호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집는다. 환경을 위한다고 생각한 재생에너지와 생활 속 실천이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책”이라고 평했다. ■일본의 굴레태가트 머피 지음·윤영수 등 옮김·660쪽·글항아리“일본에 대해 안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이 책을 읽으며 해체되고 재조립됐다.”(김형보 어크로스 대표) 40년간 일본에서 산 미국인 저자가 외부자로서의 시각과 내부자로서의 이해 사이를 절묘하게 줄타기하며 일본 사회를 연구한다. 굴욕적일 만큼 친절한 서비스, 불평할 만한 일이 생겨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본인의 모습 뒤에 숨겨진 참모습을 깊게 파고들었다.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포괄적이면서도 전문적인 내용의 충실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며 “한국과 일본의 상황이 너무도 유사해 책 속에서 우리 사회의 거울을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지구의 짧은 역사앤드루 H 놀 지음·이한음 옮김·304쪽·다산사이언스“지구 역사를 짧고 쉽게 압축해 설명하는 훌륭한 입문서다. 현재의 지구를 살아가는 인간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남긴다.”(권은희 까치글방 편집팀장) 미국 하버드대 자연사 교수가 장구한 지구 역사를 보기 쉽게 압축한 교양 과학서. 최신 연구 성과를 담고 있으면서도 어려운 개념을 유머로 쉽게 풀어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지구과학자들이 어떻게 조사, 연구하는지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올해 이보다 읽기 쉬운 자연사 책이 있었나 싶을 정도. ■한국의 능력주의박권일 지음·344쪽·이데아“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능력주의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 정치, 경제, 젠더 등 양극화하는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조성웅 유유출판사 대표) 능력주의에 열광하는 한국인의 심리를 파고든 사회과학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시험에 합격하지 않거나 일정 조건에 부합하지 않은 사람이 보상을 받는 데 대해 유독 분개한다.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에 대한 심층 보고서다. ■전국축제자랑김혼비 등 지음·320쪽·민음사충남 예산부터 경남 산청까지 전국 방방곡곡 지역축제들의 이모저모를 한 권에 담았다. “아무도 관심 없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지자체 축제들임에도 하루 빨리 일상이 회복돼 가보고 싶게 만든다.”(조재은 양철북 대표) 전작들을 통해 독자층이 탄탄한 저자들인 만큼 말맛이 좋다. 황혜숙 창비 출판1본부장은 “쏟아져 나오는 에세이 중 절반 이상 읽지 못하는 책이 적지 않은데 이 책만큼 공들여 낄낄대며 읽은 경험이 드물다”고 했다. 현장을 답사한 뒤 쓴 여행기라 생생하다. “유쾌하고 정감 넘치며, 때로 우악스럽기도 했던 축제의 현장으로 우리를 옮겨 놓는 책”(박성열 사이드웨이 대표)이라는 평이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조던 스콧 글·시드니 스미스 그림·김지은 옮김·52쪽·책읽는곰이례적으로 그림책이 선정됐다. 캐나다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말을 더듬는 아이가 쉼 없이 흐르는 강물과 마주하며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렸다. 선정위원들은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선물하고 싶은 책이라고 평했다. “타인과의 다름이 틀림이나 나쁨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함이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는 책”(최은영 소설가)이기 때문.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나는 무엇에 갇혀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자신만의 숨겨진 단단한 내면을 발견하게 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 호평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임지현 지음·640쪽·휴머니스트거의 모든 민족들이 스스로를 희생자로 규정하는 시대다. 예컨대 폴란드인들이 2차대전 당시 예드바브네에서 벌어진 자국민들의 유대인 학살을 외면한 채 자신들이 나치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식. 박윤우 부키 대표는 “자신을 희생자로 포장하는 피해자 간 기억의 전쟁은 21세기 민족주의가 어떤 리스크를 짊어지게 할지 경고한다”고 말했다. “이론과 실례를 잘 버무린 책을 요즘 만나기 힘든 탓에 더 귀한 책”(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이라는 평이다.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지음·268쪽·나무옆의자서울 용산구 청파동 골목의 작은 편의점을 무대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희로애락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담았다.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남자가 70대 할머니의 지갑을 주워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후 남자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뛴다. 이구용 KL매니지먼트 대표는 “평범한 이웃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애환을 다정한 시선으로 다룬 작품이다. 팬데믹으로 힘겨운 나날을 견디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책”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일상… 아픔이 새로운 길이 되길팬데믹 시대, 마음을 위로하는 한 권의 책 장기화된 팬데믹에 대처할 혜안과 위로를 책에서 구할 방법은 없을까. 이와 관련해 동아일보는 감염병 전문의를 포함한 전문가들로부터 유용한 책들을 별도로 추천받았다. 감염병 전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병원의 밥’(세미콜론)을 추천했다. 흉부외과 의사인 저자가 의사와 환자들이 먹는 밥을 소재로 긴박한 의료현장을 생생히 그린 에세이다. 이 이사장은 “미음에서 죽으로, 죽에서 밥으로 회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환자들의 이야기가 팬데믹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고 평했다. ‘바이러스를 이기는 새로운 습관’(프리뷰)은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코로나 시대의 대처법을 담았다. 미국 의학전문기자인 저자는 감염병에 대해 불필요한 공포를 가져오는 가짜뉴스를 구별하는 방법과 운동량이 줄어든 상황에서 당분과 탄수화물 섭취량을 줄이는 식습관을 전한다. 질병관리본부장을 지낸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식이, 운동, 수면 등 신체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유용한 정보를 담았다”고 말했다. 인간 본성의 따뜻함을 통해 팬데믹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책도 선정됐다. 네덜란드 언론인이 쓴 ‘휴먼카인드’(인플루엔셜)는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건 오해라고 주장하며 타이타닉 침몰, 9·11테러 등 과거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서로 도운 증거들을 제시한다.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저자의 믿음을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뒷받침한 이 책은 독자에게 희망을 준다”고 평했다. 팬데믹 이후 바뀔 일상공간에 대한 예측을 담은 책도 포함됐다. 건축가 유현준이 쓴 ‘공간의 미래’(을유문화사)는 온라인 수업, 재택근무 등으로 공간의 의미가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마당 같은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나 회사로 나가지 않고도 업무를 볼 수 있는 ‘거점 오피스’ 등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책은 “미래 우리 사회가 시민 다수를 행복하게 할 공간을 어떻게 기획해야 할 것인지 새로운 담론거리를 제시했다”(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평을 받았다.선정위원(35명·가나다순) 강성민(글항아리 대표) 강인욱(경희대 사학과 교수) 권은희(까치글방 편집팀장) 김민정(난다 대표) 김영민(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형보(어크로스 대표)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김효형(눌와 대표) 박상준(민음사 대표) 박성열(사이드웨이 대표) 박윤우(부키 대표) 박정재(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설혜심(연세대 사학과 교수) 심채경(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안병현(교보문고 대표) 윤범모(국립현대미술관장) 이구용(KL매니지먼트 대표) 이기진(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병훈(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이왕준(명지병원 이사장) 이종화(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임형주(팝페라 테너) 장강명(소설가) 장은수(출판평론가) 정기석(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조성웅(유유출판사 대표) 조재은(양철북 대표) 주연선(은행나무 대표) 최은영(소설가) 표정훈(출판평론가) 한성봉(동아시아 대표) 황서현(휴머니스트 주간) 황혜숙(창비 출판1본부장)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피카소는 아흔이 넘어서도/젊은 여인의 숨소리에 맞춰 붓을 놀렸다/아무나 할 수 있는 손놀림이 아닌데/사람들은 함부로 피카소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시 ‘나도 피카소처럼’ 중)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90대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90대의 시선을 갖출 때까지 뭉근히 기다린 시인이 있다. 이생진 시인(92)은 수십 년간 피카소의 그림과 시를 읽고 그 감상을 기록하면서도 그가 사망한 나이 92세가 돼서야 이를 엮어냈다. 그가 최근 출간한 마흔 번째 시집 ‘나도 피카소처럼’(우리글)에는 이 시인이 피카소를 주제로 써 온 시들이 수록됐다. 13일 만난 시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아흔 넘어 보니 도덕이니 윤리니 내 몸을 색칠한 모든 것을 벗겨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듭니다.” 이 시인은 등단 이후 5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말년까지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펼친 피카소는 나이가 들수록 더 궁금해지는 예술가였다고 한다. 그는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나이를 먹어가며 피카소의 의중에 더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 시인은 “젊을 때는 피카소의 그림 속 여인들만 옷을 벗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보니 피카소도 하나씩 옷을 벗고 점점 더 솔직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는 손과 뇌가 굳지 않도록 매일 몸을 쓴다. 오전 3시에 기상해 시를 한 편 쓴 뒤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서 인근 도봉산 자락을 1만5000보씩 걷는다. 매일 5분씩 물구나무를 서고 팔굽혀펴기와 철봉 운동도 한다. 이 시인은 “피카소의 인생이 더 길었다면 그만큼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것 같다. 나도 가능하면 오래 시를 쓰고 싶어서 운동을 철저히 한다”고 했다. ‘이생진’ 하면 섬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그의 많은 시가 울릉도를 비롯한 섬에서 탄생했기 때문. 제주도 성산포에서 일출의 감동을 표현한 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1978년)는 그의 대표작이다. ‘섬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아낀다는 그는 “평생을 시는 발로 쓰는 것이라 믿고 살아왔다. 섬에서 아침 바람 쐬고 시 쓰다 쓰러져 세상을 떠나는 게 마지막 바람”이라는 말을 남겼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공동체의 위기를 파고든 진중한 응모작이 많았다. 가상현실(VR)이나 유튜브, 넷플릭스 등을 소재로 한 참신한 작품이 늘었다.” 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열린 ‘2022 동아일보 신춘문예’ 예심에 참여한 심사위원들의 총평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2년 가까이 이어진 가운데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이 많았다. 비대면이 일상화된 영향을 반영하듯 온라인 콘텐츠 관련 내용을 담은 작품도 적지 않았다. 올해 9개 모집 부문에 걸쳐 응모작은 총 6154편. 세부적으로는 중편소설 287편, 단편소설 546편, 시 4491편, 시조 440편, 희곡 57편, 동화 232편, 시나리오 53편, 문학평론 20편, 영화평론 28편이었다. 예심 심사위원은 △중편소설 백가흠 정용준 정한아 소설가 △단편소설 손홍규 김성중 김금희 소설가, 강동호 문학평론가 △시 서효인 박준 시인 △시나리오 정윤수 영화감독, 조정준 영화사 불 대표로 구성됐다. 중편소설 부문에서는 집, 자녀, 부모에 대한 걱정처럼 일상의 고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았다. 표현 방식에서도 은유적 문장보다는 일상에서 쓰이는 날것 그대로의 직설적 언어를 쓰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정한아 소설가는 “가족 간 불화가 벌어지거나 친구 사이가 무너지는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며 “가상현실에 머무르는 등장인물을 통해 과연 진실한 인간관계를 찾을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 작품도 있었다”고 했다. 단편소설 부문에서는 개인정보를 인터넷에 무차별 공개하는 이른바 ‘신상 털기’나 타인을 혐오하는 ‘낙인찍기’ 등 최근 논란이 된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늘었다. 학교, 군대,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다룬 작품도 많았다. 김성중 소설가는 “아기, 치매노인, 고양이 등을 잃은 뒤 찾으러 가는 이야기들이 눈에 띄었다”며 “대부분 상실한 것을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 세태에 대한 은유처럼 읽힌다”고 설명했다. 시 부문에서는 공동체의 고통을 다룬 작품들이 유난히 많았다. 시인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보다 주거불안, 정치 양극화, 환경위기 등 우리 사회에 닥친 어려움을 고찰하는 작품이 늘어난 것.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는 내용을 담은 시들도 눈에 띄었다. 서효인 시인은 “코로나19라는 재앙을 맞아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내몰리게 됐는지를 고민하는 작품들이 늘었다”며 “우리에게 다가온 난해한 현실의 문제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 응모작이 많았다”고 말했다. 시나리오 부문에서는 여성 중심의 서사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위기에 처한 여성들이 연대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있었다. 정윤수 영화감독은 “젠더 문제에 대한 고민을 다룰 때 관객들의 공감을 얻는다는 확신이 창작자들 사이에서 퍼진 것 같다”며 “결혼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난 영향인지 로맨스 작품은 확 줄었다”고 말했다. 예심 결과 중편소설 9편(9명)을 비롯해 단편소설 11편(11명), 시 65편(13명), 시나리오 10편(9명)이 본심에 올랐다. 시조 희곡 동화 문학평론 영화평론은 예심 없이 본심으로 당선작을 정한다. 당선자에게는 이달 말 개별 통보하며, 당선작은 동아일보 내년 1월 1일자 지면에 소개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생태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제대로 기록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영국 생태작가 헬렌 맥도널드(51)는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불행히도 우리는 환경문제에 있어 끔찍한 시대에 살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2014년 발간한 ‘메이블 이야기’로 논픽션계 아카데미상으로 통하는 새뮤얼존슨상과 영국 문학상 코스타상을 동시 수상한 그는 최근 에세이 ‘저녁의 비행’(판미동)을 출간했다. ‘메이블 이야기’는 작가가 야생 참매 메이블을 길들이며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에세이로, 국내에서 2만 부 이상 팔렸다. 그는 신간에서도 우연히 자연과 맺은 교감의 순간들을 섬세한 필치로 담았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구하기 위해 싸우지도 않습니다.” 그는 얼마 전 집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작은 소나무 숲이 도시와 이어지는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파괴됐다고 전했다. 최근에 본인이 겪은 일들 가운데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도시에서도 자연이 주는 경이와 통찰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데 관심이 많다고 했다. 아무래도 도시인들은 자연과 교감할 기회가 드물어서다. 그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야생의 풍경만이 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직장에서 일을 하다 창밖으로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를 보고도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 새의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거나, 인간이 모두 새가 된 세상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세속적 삶의 무게를 덜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건 일종의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합니다.” 가끔 도시를 벗어나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싶다면 무얼 준비해야할까. 작은 야생동물 도감과 중고 쌍안경이면 충분하다는 게 그의 조언. “쌍안경을 다루는 게 처음에는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이를 들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수줍음이 많아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생명체들이 특별한 접근을 허락해 줄 겁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불운하게도 우리는 환경 문제에 있어서는 끔찍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생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잘 기록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2014년 저서 ‘메이블 이야기’로 논픽션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새뮤얼존슨상과 영국 문학상 코스타상을 수상한 있는 영국의 생태 작가 헬렌 맥도널드(51)가 신간 에세이 ‘저녁의 비행’(판미동) 한국어판을 최근 출간했다. ‘메이블 이야기’는 그가 야생 참매 ‘메이블’을 길들이며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에세이로 국내에서도 2만 부 이상 판매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번 신간에서도 그는 자신과 자연 사이의 우연적인 교감의 순간들을 섬세한 문장들로 담아냈다. 그의 이야기를 서면 인터뷰를 통해 들어 봤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지도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도시 속에서도 자연이 주는 경이와 통찰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자연 파괴에 나서는 이들은 대부분 도시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에도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작은 소나무 숲이 도시와 이어지는 도로 확장 공사로 파괴됐다. 이것이 최근에 겪은 일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야생의 풍경만이 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일을 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새 한 마리를 통해서도 자연과의 교감을 할 수 있다. 세상을 인간이 아닌 새의 시선으로 내려다 보고, 인간이 모두 새가 된 세상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새삼 세속적인 걱정의 무게가 줄어듦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 그는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한다”고 했다. 가끔씩은 도시를 벗어나 야생 동물을 관찰하고 싶다면 어떤 것부터 준비하면 좋을까? 작은 야생 동물 도감과 중고 쌍안경이면 충분하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쌍안경 다루는 게 처음에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면 수줍음이 많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생명체에게 특별한 접근을 허락해 줄 거예요.”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이상한 밤이었다. 2012년 11월 12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소도시 애커맥 카운티. 주택가 빈집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2층 높이에서 시작된 화염은 이내 마당까지 번졌다. 하룻밤에 불이 여러 건 나는 일이 몹시 드문 작은 도시였지만, 애커맥의 소방대원들은 이날 밤 두 차례 더 출동했다. 그 후 5개월 동안 이들은 총 86번의 출동 명령을 받는다. 책은 이 연쇄 방화를 예사롭지 않게 여긴 워싱턴포스트(WP) 기자의 심층 취재기다. 저자는 몇 달씩 애커맥에 머무르며 주민과 수사관, 의용소방대원들을 인터뷰했다. 이런 사건들은 흥미진진한 소설의 모티프가 되거나 범죄 수사물로 재구성되기 마련이지만 저자는 이 같은 방식을 쓰지 않았다. 그저 그가 총 2년간 수집한 경찰 조사 결과와 재판 기록, 방화에 대한 전문가의 정신분석학적 견해 등을 건조한 어조로 나열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이 정밀하게 직조된 한 권의 책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건조하지 않다. 연쇄 방화의 범인은 애커맥의 주민인 찰리 스미스와 토냐 번딕. 이들은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혼 경험이 있는 데다 최근 어머니를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어 깊이 사랑에 빠졌다. 마약 중독자였던 찰리는 토냐를 만나 마약을 끊었다. 토냐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처음 불을 지른 건 토냐였지만 그가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때부터는 찰리가 불을 질렀다. 저자는 이들 방화범의 정체를 첫 번째 챕터에서 밝힌다. 범인의 뒤를 쫓는 게 이 책의 목적은 아니라는 뜻이다. 대신 그는 선량한 시민이던 두 사람이 왜 ‘불 지르는 사람’이 됐는지 과거를 추적한다. 토냐는 지독한 가정 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싱글맘으로 두 아들을 홀로 키우다 찰리를 만나 새로운 삶을 꿈꿨지만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활활 타는 불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고 희열에 빠졌다. 토냐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처한 곤경을 들키고 싶지 않아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녔다. 마약 중독에서 갓 벗어난 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들은 낮에는 호화로운 결혼식을 상상했지만 밤에는 드라이브를 나가 빈 건물에 불을 질렀다. 저자는 여기에서 시야를 한 번 더 확장한다. 연쇄 방화가 발생한 곳이 왜 애커맥이었을까? 그는 ‘자본 집중화가 낳은 지방 고유 개성의 박탈’을 근본적인 문제로 꼽는다. 지방의 소도시는 한때 낭만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자본이 대도시로 몰리며 소도시의 주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애커맥에 빈집이 그토록 많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소도시에 남은 주민들은 폐허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국이자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조차 지방 소멸의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이 책은 실감나게 보여준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지옥’부터 ‘Dr. 브레인’ ‘유미의 세포들’ ‘D.P.’에 이르기까지 웹툰 원작의 국내 드라마들이 세계 시장을 점령하고 있다. 웹툰과 웹소설이 글로벌 콘텐츠 시장을 공략할 원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이들의 인기 비결을 알아봤다. 》K콘텐츠의 힘 ‘K웹툰’프랑스, 인도, 일본, 말레이시아, 멕시코, 필리핀, 폴란드, 태국, 베트남, 대만…. 지난달 19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이 1위를 차지한 36개국(지난달 23일 기준) 중 일부다. 지옥은 공개 하루 만에 전 세계 종합순위 1위에 올랐다. 지난달 28일까지 총 시청 시간만 1억1100만 시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옥은 10년 이상 회자될 만큼 진심으로 예외적인 드라마”라고 극찬했다. 미국 CNN은 “올해 한국 드라마들은 끝내 준다. 지옥은 새로운 ‘오징어게임’”이라고 호평했다. ‘지옥’의 세계적인 성공 요인 중 하나는 탄탄한 원작 웹툰이다. 2019∼2020년 네이버웹툰에 연재된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데, 드라마를 연출한 연상호 감독이 직접 스토리를 짰다. 드라마의 서사가 대부분 웹툰에 바탕을 두고 있어 드라마 못지않게 웹툰의 작품성도 덩달아 주목받고 있다. 웹툰을 만든 감독이 직접 연출한 만큼 웹툰의 기획의도와 주제의식이 드라마에 잘 녹아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세계적으로 유행한 웹툰 원작 드라마는 지옥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14일 공개된 드라마 ‘Dr.브레인’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TV를 통해 100개국 이상에 선보였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충격적 반전과 더불어 고급스러우면서도 흡인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올 9월 티빙을 통해 공개된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은 해외 플랫폼사와의 콘텐츠 유통 계약을 통해 유럽, 북미, 동남아시아 등 세계 160여 개국에 방영됐다. 올 8월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D.P.’는 국내에서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태국, 베트남에서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그간 축적된 웹툰, 웹소설 기반의 지식재산권(IP)이 뛰어난 드라마로 재탄생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웹툰, 웹소설이 ‘원소스 멀티유스(OSMU)’의 콘텐츠 소비 방식과 맞물려 한국 드라마의 세계적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OTT와 함께 세계로웹툰 원작의 영상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게 최근 일은 아니다. 2014년 웹툰 원작의 tvN 드라마 ‘미생’이 최고 시청률 8.2%를 달성하면서 국내에 웹툰 드라마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카카오TV ‘며느라기’(2020년)도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화제가 된 드라마다. 1, 2편을 합쳐 국내에서 관객 2700만 명 가까이를 동원한 영화 ‘신과 함께’(2017년)도 웹툰을 원작으로 제작됐다. 최근 웹툰 원작 드라마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흥행하는 배경에는 글로벌 OTT의 성장세가 자리 잡고 있다. 넷플릭스, 애플TV, 디즈니플러스 등 세계 각국에 서비스되는 OTT를 통해 작품이 동시에 공개돼 해외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희윤 네이버웹툰 IP비즈니스팀 리더는 “과거에는 웹툰 원작 영상 작품이 해외에 진출하려면 해외 제작사나 투자사와 협의하는 게 필수였지만 이제는 복수의 글로벌 OTT들이 있어 상황이 달라졌다”며 “국내에서 영상 작품을 제작한 뒤 곧바로 해외를 공략할 기회가 많아진 만큼 세계적 흥행 가능성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한국 드라마들의 성공은 웹툰의 세계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지옥’의 원작 웹툰이 연재되고 있는 네이버웹툰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등 10개 언어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웹툰을 종이 만화책으로 만들 수 있는 판권이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등 11개국으로 팔려 나가기도 했다. 넷플릭스 관계자는 “넷플릭스 콘텐츠를 시청한 후 웹툰 등 관련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청자가 전체의 42%에 달한다”며 “영상 콘텐츠의 인기는 연계된 콘텐츠 산업에까지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왜 웹툰 원작인가드라마 시장에서 웹툰이 각광받는 이유는 무얼까. 무엇보다 웹툰의 어마어마한 성장세가 직접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교보증권이 올 2월 발간한 ‘웹툰이 곧 글로벌 흥행 IP’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210억 원에 불과했던 국내 웹툰 시장 규모는 지난해 1조 원으로 급성장했다. 6년 만에 50배 가까이 성장한 덕에 많은 콘텐츠 창작자가 웹툰 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그만큼 탄탄한 이야기가 웹툰 시장에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한송이 카카오웹툰스튜디오 센터장은 “웹툰 플랫폼에서 소비자가 돈을 주고 웹툰을 봤다는 건 작품성과 흥행성이 보장된 작품이라는 뜻”이라며 “인기 웹툰이 드라마 등으로 제작되면 원작 팬을 시청자로 확보할 수 있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했다. 웹툰만의 독특한 상상력이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드라마 시청자를 만족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예를 들어 ‘유미의 세포들’의 원작 웹툰은 주인공 유미의 감정을 세포들로 표현하는 참신한 발상으로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제작진도 이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에 도전해 호평을 받았다. 황혜정 티빙 콘텐츠사업국장은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은 3차원(3D)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세포의 모습을 실사와 결합해 기존 드라마와 차별화했다”며 “처음 시도하는 형식에 대한 시청자 반응이 좋았던 게 성공 원인”이라고 말했다. 국내 영상 제작 기술이 최근 급속도로 발전한 것도 이유로 꼽힌다. 올 2월 공개된 웹툰 원작 넷플릭스 영화 ‘승리호’처럼 만화로만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2092년 우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컴퓨터그래픽(CG) 역량을 확보했다는 것.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국내 콘텐츠 산업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제작비와 인력이 확충되고 CG 수준도 향상됐다”며 “미국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대작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영상 수준 덕에 해외 시청자들도 한국 영상 작품에 빠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웹툰이 지닌 시의성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오늘날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이야기를 만들어내 드라마나 영화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희윤 리더는 “우리가 지금 고민하거나 좋아하는 것들을 가장 잘 반영한 콘텐츠가 웹툰”이라며 “트렌드가 잘 반영돼 있어 웹툰이 영상 작품의 원작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웹툰 IP 전쟁에 웹소설도 가세 웹툰 원작의 영상 작품이 연달아 성공을 거두면서 콘텐츠 업계에서는 웹툰의 IP를 확보하려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드라마의 부가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다. 웹툰 IP 확보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드라마나 영화 제작사들. 스튜디오드래곤은 올 3월 웹툰 스튜디오 와이랩과 협력계약을 체결했다. 와이랩이 보유한 웹툰 IP를 이용할 수 있는 우선 협상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 스튜디오드래곤은 영상화에 적합한 웹툰을 발굴하기 위해 콘텐츠전략팀을 운영하고 있다. 이기혁 스튜디오드래곤 사업전략담당 및 기획개발 담당은 “내년에 공개되는 웹툰 원작 드라마 ‘아일랜드’도 다양한 웹툰 IP를 발굴하려는 노력의 성과”라며 “원작 웹툰의 매력을 살리면서 영상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차별화 포인트를 만들어야 영상화에 성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웹툰 플랫폼이 자체적으로 영상화에 나서기도 한다. 네이버웹툰은 자회사인 스튜디오N을 통해 영상화에 적합한 웹툰을 고르고, 다른 영상 제작사에 이를 소개한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자체 웹툰 플랫폼인 카카오웹툰에 연재된 작품들을 카카오TV를 통해 영상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웹소설도 영상화에 적합한 IP로 주목받고 있다. 웹툰만큼 참신하고 작품성이 탄탄한 웹소설이 잇달아 발굴되고 있기 때문. 웹소설 시장 규모가 지난해 6000억 원에 달할 정도로 커질 만큼 이야기꾼들이 웹소설에 몰리고 있다. 글로만 구성된 웹소설은 그림까지 그려야 하는 웹툰보다 제작 속도가 평균 20배 정도 빠른 만큼 시의성을 갖춘 작품이 많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북미 웹소설 플랫폼 래디시를 인수한 데 이어 네이버웹툰이 세계 1위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를 사들이며 웹소설 IP 사냥에 나서고 있는 이유다. 올 4월 공개된 웹소설 원작 드라마 ‘그래서 나는 안티팬과 결혼했다’는 아마존 프라임 저팬 등 해외 OTT를 통해 세계 190개국에 소개됐다. 누적 조회수 1억5000만 회를 달성한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 역시 영상화가 진행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융희 청강문화산업대 교수(웹소설 창작 전공)는 “웹툰이 영상 작품으로 많이 만들어지면서 이미 IP를 다양한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국내 산업 기반이 갖춰진 상태”라며 “최근 웹소설이 양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성장하고 있어 영상화를 통한 성공 가능성도 높아졌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