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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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4-10-22~2024-11-21
칼럼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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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17%
산업7%
경제일반6%
  • 국내외 식품 종합 전시회 ‘2024 코엑스 푸드위크’ 23일까지

    2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4 농식품부×코엑스 푸드위크(제19회 서울국제식품산업전)’에서 방송인 타일러 씨(오른쪽) 등 모델들이 다양한 비건푸드를 소개하고 있다. 국내외 프리미엄 식품과 대체식품을 선보이고 식품 산업의 미래를 조망하는 이번 전시회는 23일까지 이어진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7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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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마스 케이크 사세요”

    19일 서울 중구 뚜레쥬르 제일제당센터점에서 어린이 모델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한정 판매하는 ‘2024 윈터 홀리데이 시즌 케이크’를 선보이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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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뚝 떨어진 기온, 오늘도 전국 아침 곳곳 영하권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올가을 들어 처음 영하권으로 떨어진 18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시민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걸어가고 있다. 이날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0.7도를 기록하는 등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최저기온이 영하였다. 기상청은 “19일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은 0도, 전국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4도에서 영상 7도 사이로 쌀쌀할 것”이라고 예보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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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종로 효제동 가정집에 모인 독립단원들[청계천 옆 사진관]

    ● 서울 효제동 13번지의 비밀 아지트에서 독립자금 모금과 암살 계획 세워동아일보 1924년 11월 13일자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가정집 사진이 신문에 실렸는데 설명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기사 제목은 ‘군자금, 암살, 파괴계획 – 경성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활동하던 중대사건 진상’ 입니다. 신문 지면 왼쪽은 찢어져 있어서 원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기사가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어 전체 맥락을 읽는 데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기사의 본문에서는 경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서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경성이라는 표현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는데 서울이라는 표현을 써도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일제는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단이 국내로 잠입하여 음모를 계획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한통의부 수령 김동삼이 서울을 비롯해 각도의 부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들 독립단을 최근 검거하게 된 사건을 신문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대한통의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1922년 8월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독립군 연합단체. 줄여서 통의부라고도 한다. 간도참변과 자유시 사건으로 독립군 세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결성된 무장 단체 중 하나. 만주 내 한인사회 통치행정과 무기 및 군자금 조달, 일제 밀정 응징, 일본 영사관과 경찰서 등 기관을 공격하는 무장활동. 광동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기관지 〈경종보〉와 〈대한통의부 공보〉를 발행해 교육 계몽활동도 하였다. 총장 김동삼, 부총장 채상덕, 비서과장 고할신, 민사부장 이웅해, 교섭부장 김승만, 군사부장 양규열, 법무부장 현정경, 재무부장 이병기, 학무부장 신언갑, 실업부장 변창근, 교통부장 오동진, 참모부장 이천민 등. 나중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갔다.● 사건 수령 홍경식은 홍참판의 아들사건의 주역인 홍경식(경성부 효제동 13, 36세)은 대한제국 시대 참판 홍승헌의 아들이었습니다.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그의 가족은 만주 봉천성 환인현으로 이주했습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에 홍경식은 그곳의 광한단(光韓團이)라는 독립단체에 가입하게 됩니다. 1921년에는 이병욱(경성부 와룡동 106, 28세)과 함께 육혈포 15정과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 잠입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신의주지청에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1924년 가을, 중국의 동란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대한통의부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수령 김동삼은 홍경식을 특파원으로 임명하고, 서울에 지부 설치를 지시했습니다. 홍경식은 이병욱, 유한기(충남 천안군 천안면 읍내리 174, 30세), 박정양(충남 아산군 배방면 장재리 89, 30세)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협박 전화 또는 직접 가서 모금이들의 활동 방식은 체계적이었으며 주로 귀족이나 부호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처음에는 신사적인 태도로 접근해 조국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거절할 경우 육혈포로 위협하는 방식을 써서 백원이고 오백원이고 현금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 부호들이 시골로 도망가거나 경찰을 증원하는 등 큰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한 집을 서너 차례 찾아가 여러 번 돈을 가져갔으며 때로는 전화로도 독촉했습니다. 확인된 사례만 보면, 효자동의 김교신 남작에게서 115원, 창성동 안도에게서 750여 원, 적선동 이경세에게서 300원, 청진동 민용호에게서 200원 등을 모금했습니다.모금된 자금은 본부로 보내져 무기 구입에 사용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들의 계획은 단순한 군자금 모집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상당한 자금과 인원이 확보되면 조선 내 고위 관리와 귀족들을 암살하고, 총독부를 비롯한 주요 관공서를 파괴할 계획이었습니다.● 4명은 체포, 2명은 본부로 안전하게 돌아가경기도 경찰부는 김동삼의 밀사 침입 정보를 입수한 후, 각 지방 경찰과 연계하여 수사망을 좁혀갔습니다. 11월 11일 새벽, 효제동의 아지트를 포위한 고등형사들과 동대문서 경찰들은 홍경식(36), 이병욱(28), 유한기(30), 박정양(30) 등을 체포합니다. 현장에서 육혈포 1정, 탄환 30발, 통의부 지부장 도장, 불온문서 수십 매가 압수되었습니다.김장식과 현익철은 대구, 안동, 밀양 지방으로 군자금 모집을 떠났다가 체포를 면했는데이들은 상당한 금액을 모금해 본부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건 발생 며칠 후인 11월 17일, 동대문서는 또 다른 혐의자 2명을 체포했습니다. 경찰은 추가로 체포한 이들 두 명의 사건에 대해서는 극도로 비밀에 부침으로써 아직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어떤 방면으로 들은 바에 따르면, 이는 고양군 용강면 창천리의 이덕규 집에서 육혈포로 위협해 군자금 400원을 강탈한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 독립운동의 양상을 알 수 있는 이야기 오늘은 1924년 일제강점기 서울 효제동에서 독립군들이 아지트로 활용한 가정집 사진을 통해 당시 독립운동의 한 단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만주에 근거지를 둔 대한통의부가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국내 진출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1920년대 중반,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국내 진출 시도와 그에 대한 일제의 탄압, 그리고 군자금 모집이라는 독립운동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이 부호층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집 활동은, 당시 계층 간 갈등과 민족운동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좋은 댓글 많이 남겨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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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나무와 전선의 ‘공생’

    전선이 지나가는 데 문제없을 뿐 아니라 이토록 완벽한 원형 조형미라니. 은행나무를 누가 다듬었는지 그는 달인이 분명합니다. ―경기 수원시 남수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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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메라의 비약적 진화: 100년 전 카메라와 현대의 고속 촬영 기술 비교[청계천 옆 사진관]

    머리에 흰 띠 등을 두른 4명의 학생들이 운동장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어딘가에서 단거리 육상 경기가 열린 모양입니다. 1924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설명을 보시겠습니다. 의기 충천의 용자각 학교 대표선수 일백이십명성황 중에 개막한 중등교 경기연희 전문학교 주최와 보사 후원의 제 2회 중등학교 육상경기 대회는 예정대로 작일 오전부터 그 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입동 추위를 하노라고 그 전날에 온 비로 말미암아 날은 좀 쌀쌀하였으나 피끓는 선수의 기세를 더욱 날카롭게 할 만 하였다. 은은한 송림이 우거진 사이에서 소슬한 송풍을 들으며 정각보다 약 한 시간이 늦어 아홉시 반부터 쇠같이 단련된 일백 이십여명이 유량한 경성악대의 주악에 보무 당당히 입장식을 거행한 후 즉시 회장 ‘백아덕’씨로부터 간단한 개회사가 있었다.● 1920년대 카메라 기술 100년 전만 해도 사진은 소수만이 다룰 수 있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아일보에서 사진찍는 사람들의 월급이 꽤 높았습니다. 1920년 창간 당시 월급 체계를 보면, 편집주간 120원, 국장 100원, 기자 80원~60원인데 사진반원은 100원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리고 그들에게는 당시에 나온 카메라 중 가장 성능이 뛰어난 제품을 회사가 제공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카메라는 요즘처럼 연속 촬영이 되지 않는 1초에 겨우겨우 1장 찍히는 카메라였습니다. 1920년대 동아일보 사진반원들의 취재 장비는 삼각대가 달린 영업용 암상 사진기 한 대와 ‘앙고’ 라고 불리던 휴대용 사진기 한 대였습니다. 필름이 보편화되기 이전 시대가 유리 원판을 사용했고 이 시기 사진기자들은 두루마기 속에 앙고 카메라를 숨긴 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사진을 찍었고 그러다 발각이 되면 촬영되지 않은 유리 원판을 촬영된 유리 원판과 바꿔치기해서 내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동아일보 서영수 기자. 1958년생. 석사학위 논문 참고). 참고로 1920년대 동아일보 사진반원에는 경성일보 사진반 출신이었던 일본인 야마하나(1920년 입사), 역시 경성일보에서 스카우트된 사진제판기술자 한우식(1921년 입사), 그리고 당시 민간지를 두루 섭렵한 문치장(1923년 입사) 이렇게 3명이었습니다. 사진기자 이름이 신문에 제대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입니다. 그래서 저 사진이 정확히 누가 찍은 사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기술의 발전과 기자들의 기동성 향상세계사진사(까치 출판사, 2003년)의 기록에 따르면, “1923년에 베츨라 사에서 오스카 바르나크는 영화용 두루마리 필름을 적용시킨 사진기를 발명했습니다. 이것은 35밀리미터 폭의 필름 띠에 24X36밀리미터 크기의 이미지가 새겨지는 라이카 카메라입니다. 그것은 1924년부터 시판되기 시작하여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혁신적인 카메라가 당시 한반도까지는 보급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위에 소개드린 사진은 이 세 사람 중 한명이 ‘앙고’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했을 것입니다. 1923년에 독일 베츨라 사의 오스카 바르나크는 35mm 필름을 적용한 라이카 카메라를 개발했다. 이 카메라는 사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나, 당시 한반도에 보급되지 못했고, 한국에서는 주로 앙고 카메라가 사용되었다. 앙고 카메라는 삼각대를 이용해야 했으며, 야간 촬영 시에는 마그네슘 분말을 터트려 촬영해야 했다.이후 1937년에는 섬광전구를 장착해 셔터와 동조되는 오토 프레스 카메라가 개발되면서, 사진기자들의 기동성은 점차 향상되었다. 굳이 카메라의 발전 순서를 도식화하면 앙고 카메라 → 스피드 그래픽 →35mm카메라→ DSLR → 미러리스 이렇게 되겠습니다. ● 현대의 고속 촬영 기술지금의 고속 촬영 기술은 어느 정도일까요? 1초에 1장을 찍을 수 있었던 100년 전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트럼프 후보가 괴한의 총격을 받는 순간을 찍었던 AP 사진기자의 카메라 셔터 속도는 1/8000초였습니다. 1초를 8000개로 나눈 숫자입니다. 날아가는 총알도 그래서 사진으로 포착됩니다. 2024년 10월 현재 가장 빠르게 촬영할 수 있는 순간은 1/64000(현재 동아일보 사진기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캐논 R3 미러리스 카메라 기준)물론 그렇다고 1초에 8000장의 사진이 만들어 지지는 않습니다. 최대 1초 기준으로 30장의 사진이 찍힙니다. 그렇더라도 1초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진이 찍히는 것입니다. 100년 전, 카메라 한 대로 한 장의 스포츠 순간을 어렵게 어렵게 포착했던 사진기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기술의 발전을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해 봅니다. 다음 주에 다른 사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멋진 가을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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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나팔 부는 노인

    피리 부는 사나이는 쥐를 끌고 왔지만, 어르신의 멋진 트럼펫 소리는 눈길을 끄네요. 그저 취미라기엔 멋진 솜씨입니다. ―서울 양천구 안양천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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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내 안에 열쇠 있다

    자물쇠로 문을 잠그는 게 아니라 열쇠를 잠가놨네요. 비밀번호를 걸어둔 자물쇠 모양의 열쇠보관함이라고 합니다. 들고 들어가면 안 돼요∼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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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이 철학보다 중요한 현실”… 100년 전 대학생의 외침[청계천 옆 사진관]

    ● 청년들의 웅변대회가 처음 열리다1924년 가을, 조선의 하늘은 납빛으로 흐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당은 젊은 이들의 열기로 무거운 구름을 헤치고 있었습니다. 신문사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현상학생웅변대회, 그날의 청중이 만들어낸 열기는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조선의 내일을 고민하는 동지이자 희망의 불씨였습니다.저녁 일곱 시. 행사장에 들어오지 못한 시민들은 건물 밖 창문을 통해서라도 조선에서 처음 열리는 청년들의 웅변대회를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천도교당에 들어 온 청중들은 강단을 꽉 둘러싸고 있었고 , 서로 어깨를 맞댄 채 시작을 기다리던 그들 앞에 첫 연사가 올랐습니다. 그 순간, 숨소리마저 멈춘 듯 고요가 감돌았습니다.“우리의 각오!” 세브란스 의학전문의 이영준이 단에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전했습니다. 관중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가 내려오자 이어서 연희전문의 박희성이 “종교와 인류와의 관계”를 주제로 연설을 이어갔습니다. 연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시대를 고민하는 자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웅변이 이어지는 중간중간, 때로는 일본 경찰이 연설을 제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사회자는 간청했습니다. “동아일보를 사랑하거든 참아달라!” 그 말에 청중들은 흥분을 억누르며, 다시 한 번 강당 안은 진정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조선의 젊은 기개가 그렇게 하나로 모였습니다.이튿날, 중등학교 학생들의 웅변이 이어졌습니다. 배재학당의 장치모는 “사회교육화하라”는 연설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육을 노예화하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침없었고, 청중들은 그의 외침에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밤늦도록 청중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청운동 골목을 메웠습니다.● 철학보다 자연과학, 연애 소설보다 물리학 공부를 주장한 청년의 연설 원고1등을 한 평양숭실대학 이성락 군의 웅변 내용을 함께 들어보시죠. 이성락군은 1925년 3월 대학을 졸업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연설에 나섰을 때 나이는 23, 24살 쯤 되었을 것입니다.당시 신문사 기자들은,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 그리고 연사의 말투 하나하나를 그대로 지면에 옮겨 놓았더군요.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의 절절한 연설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조금 알기 쉽도록 띄워쓰기와 조사 등은 필자인 제가 손을 봤습니다. 라마(羅馬)는 로마의 음차 표현입니다. ◇평양 숭실대 이성락 등단 (박수)하취하사호(何取何捨乎)먼저 여러분에게 미안한 말씀을 드릴 것은, 제가 평양 사람이라 방언이 섞여 여러분에게 불편될 점이 있을 듯하니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그말은 그만 두라고 청중들이 본론을 제촉).자공이 공자께 정사를 물으니 공자는 “족식족병(足食足兵)”이라 안으로는 백성이 굶주림 없고 밖으로 외환이 없으면 나라에 근심이 없으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자공도 현인이라 다시금 무엇을 제일 먼저 하릴까 하고 물었습니다. 공자같은 성인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에 영광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먼저 하겠습니까? 역사도 없고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고 상공업도 없고 농업도 없으며 산에 나무와 강에 물이 없고 만가지 시설이 하나도 없고 천가지 만가지 모두다 남에게 뒤떨어졌습니다(박수).그러니 우리는 이 여러 가지를 만들어 놓아야 되겠습니다만은 일시에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라마(羅馬)의 문명은 이조일석(一朝一夕)에 이룬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우리에게 취할 바와 버릴 바가 있습니다(박수).우리에게 그 숭고한 문학과 철학과 예술을 매워 이상을 높이하는 것이 필요하나 식산(殖產)과 공예(工藝)에 비할 바가 아니니, 가령 굶주린 사람이 길에 누었다 하면 그에게 철학이나 문학 같은 것을 가르쳐주겠습니까? 밥을 먼저 주겠습니까? 또 돈은 한가지를 살 것 밖에 가지지 않은 사람이 담배를 사겠습니까, 밥을 사겠습니까? 모든 것이 밥을 먹은 후에 주머니가 튼튼하여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박수).증자(曾子)의 양지(養志)도 양구체(養口體)를 먼저 하여야 할 것이오, “윌손”이 부르짓는 정의 인도(正義人道)도 제 주머니가 차고 남은 후의 일입니다(박수. 청중 열광).지금 우리 조선이 어떻습니까? 조상이 피와 땀으로 남겨준 땅을 버리고 압록강이나 두만강에 뜨거운 피눈물을 뿌리며 만주와 시베리아에 유리표방(流離漂放)하는 동포가 무엇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무엇을 먼저 주어야 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빵을 주고 옷을 입혀야 되지 않겠습니까?(박수. 청중 열열광)그 뿐입니까? 당장 기근으로 인하여 방금 나뭇잎과 풀잎을 먹다가 그도 못하여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습니까?(박수).그들에게 철학을 주어야되겠습니까, 문학을 주어야되겠습니까? 무엇보다 빵을 주어라(박수).초유본말(初有本末)하고 사유시종(事有終始)이라고 대학에도 있는 말과 같이 모든 사물의 본말을 잘 알고 그리고 선무취사(先務取捨)를 잘 알 것 같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문학과 철학과 예술을 배워 정신의 위안을 얻고 농공상을 일으키어 물질의 위안을 얻고자 하나 사람이 있어야 하고 경제가 허락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1천만원이 없어서 민립대학 하나를 못 세우지 않습니까? 이것은 물론 자산가의 책임도 없지 않지만 우리가 돈이 없는 까닭입니다(박수).사람들은 말하기를 외국에 유학하는 사람이 많으니 차차 사람이 많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합니다마는 그들에게 돈이 없어서 밥 얻어먹기에 공부할 겨를이 없습니다. 학생보다 노동자라고 부르는게 적당할 줄 압니다(박수).경제계가 이래갖고야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정신과학인 철학문학보다 자연과학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실제를 배우고 물질적 현상을 배워야되겠습니다. 연애에 실패하고 한강수 깊은 물에 어쩌고 어쩐다는 연애소설을 쓸 여유가 있거든 질소와 수소가 물이 되는 법을 알아야겠습니다(박수. 열열광).녹음이 우거진 밑에 서늘하게 누워서 우주의 현상을 생각하기보다 들과 산에 나가 동식물표본을 채집하여 배우는 공부에 열열열열심할 것입니다(만장 환희 박수 연발).우리의 처지가 이같으니 먼저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두가지 다 완성되는 때에는 삼천리강산에 무궁화가 되고 이천만 민중이 그 밑에서 춤을 출 것입니다 (열열열열열광 박수)(9시38분).● 오늘은 격정적인 분위기 속에 치러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웅변대회 모습을 사진과 기사로 살펴보았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의 울분과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이 전해오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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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 앞두고 청량리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청계천 옆 사진관]

    ● 앙상한 나무 아래 흐르는 개울물개울가에서 빨래를 마친 아낙네가 머리에 빨래 바구니를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있습니다. 아직 마무리를 못한 한 사람은 흐르는 물에 여전히 옷을 헹구고 있습니다. 수도가 보편화되고 세탁기가 빨래를 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풍경입니다. 성큼 다가온 겨울 날씨 탓에 꽤 차가운 물이었을 텐데 손에 동상을 입지는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는 따듯한 온수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추운 날씨에도 개울가에서 빨래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지금은 농촌 풍경을 찾아볼 수 없지만 100년 전 청량리는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드러내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계절이 변하는 시기가 되면 청량리로 가서 풍경 사진을 찍어 신문을 통해 보도했습니다. 따스한 봄볕도, 추운 겨울을 알리는 서리도 시내에서 가까운 농촌인 청량리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이 사진도 마찬가지구요. 서울에 첫 얼음과 첫 서리가 내렸다는 기사입니다. 기사를 보시겠습니다. 첫 번째 문단은 기사라기 보다는 한 편의 시같은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시 기자들은 사실 전달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표현도 자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경성에 첫 얼음과 첫 서리첫 얼음 4일, 첫 서리 9일 늦어어제 이른 아침 최저 온도 영하 1.5도◇앉아 있는 사람이나 길가는 사람이나 내려 쪼이는 여름 더위에 쫓기고 부대끼어 하루를 열흘 같이 성화로 보내며 이마 위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뚝뚝 떨어지던 여름철도 어느덧 자취 없이 가버리고 또다시 그 뒤를 이어 가을조차 몇 날이 못되어 마지막을 고하고 이제야말로 아침저녁 으로도 방안에서 손발이 선듯선듯한 겨울철을 확실히 당한 모양 같다. 더욱이 그저께 아침부터 불어오는 경성 시내의 초겨울 쌀쌀한 바람은 마친매 어제 아침에 이르러 금년에 이르러서는 첫번째 되는 서리(霜)가 오고 물이 얼었다는데 얼음(氷)의 부피는 팔분(八分)이나 되며 작년의 첫 번째 얼음보다는 매우 두터웠으며 금년의 첫 서리와 첫 얼음을 작년에 비하면 얼음은 나흘 동안이 이르고(빠르고)서리는 아흐레 동안이나 늦었다는데 어제 아침의 최저 온도는 영하 일도반이었으며 갑자기 이렇게 추워진 것은 중국 북부에 고기압이 일어나서 조선 안으로 발전된 까닭이더라.〈1924년 10월 21일 동아일보〉● 1953년까지도 농촌이었던 청량리기사에 따르면 이틀 전 아침부터 서울 시내에 찬바람이 불더니 어제 아침에는 겨울 들어 첫 서리가 내리고 얼음도 발견되었다는 군요. 한 해 전이었던 1923년에 비하면 얼음은 4일 빠르고 서리는 9일 늦었습니다. 중국에서 발달한 고기압이 한반도로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싣고 있습니다. 지금도 기상청에서는 이와 비슷한 분석을 하고 있는데, 100년이 지났지만 날씨를 분석해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기본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청량리는 언제까지 농촌이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동아일보 DB를 검색해보니 1970년대 말에는 청량리역을 통해 외곽으로 나가려는 많은 여행객들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학생이던 1990년대 초에도 청량리역에서 강원도쪽으로 엠티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의 청량리역 주변은 대형 상가들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당시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서울의 중심은 아니고 동쪽으로 나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청량리는 언제쯤 농촌에서 도시로 변모한 것일까요?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서울 도시계획을 담당하는 공무원이었던 손정목 선생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 (도서출판 한울) 제 1권 131쪽에서 청량리 개발의 흔적을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던 당시의 서울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던가. 우선 서울 시내, 또는 서울 시가지라는 것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였을까. 사대문 안은 일단 시가였다. 동대문을 나가면 신설동까지 큰길가에는 집이 들어차 있었지만 그 밖은 논과 밭이었다. 신설동 남쪽에는 경마장이 있었으니 인가는 별로 없었다. 신당동에는 집이 들어서 있었지만 지금의 금호동·옥수동 일대는 산이었다. 왕십리에도 큰길을 따라 양쪽에 는 집이 연이어 있었지만 지금 한양대학교가 있는 일대에는 주택보다는 미나리팡이 더 많았다. 성동교도 나무다리였고 그 동쪽에는 논과 밭뿐이었다.”1950년대에 서울 신설동도 논과 밭이었으니 그보다 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청량리 역시 농촌 마을이었던 것입니다. ● 도시가 시작되던 중 수해로 물에 잠긴 청량리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집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청량리의 60년 남짓 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이 한 장 있어 소개합니다. 1966년 수해를 입은 청량리와 이문동 일대 항공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가 보유하고 있던 경비행기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촌 지역과 산비탈을 개간하고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 사진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청량리는 홍수에 취약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겨울을 알리는 기사와 함께 청량리 개울가의 풍경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장의 사진이 담고 있는 시대상과 도시의 변화, 그리고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백년사진에서 소개한 ‘소년군’은 지금의 ‘보이스카우트’라는 댓글이 있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을 살면서,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한 장씩 살펴봅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통해 우리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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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모델은 나 대신 인형

    주인 대신 주인과 닮은 여행자 인형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찰칵∼. 기념사진 이렇게 찍으면 외모 신경 쓸 필요 없어 편하겠어요. ―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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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반듯한 재능기부

    요새 보기 힘든 반듯한 붓글씨에 괜히 옷매무시를 고치게 되네요. 법원 직원이 직접 쓰신 거라고 합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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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의 엠블럼 [청계천 옆 사진관]

    북한이 경의선과 동해선까지 한국과 연결되는 도로를 끊고 있다. 남북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폭파 세리모니까지 하며 국제 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다. 미국 선거를 앞두고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한 행보라는 해석이 많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은 북한 내부에서 꾸준히 인민들을 만나고 군사 시설과 군인들을 접촉하며 일련의 활동을 북한 내부 매체를 통해 북한 인민들에게도 알리고 있다. 23일에는 전략 미사일 기지를 시찰하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초음속 미사일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켰다. 최근 김정은 사진에서는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활용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예전과는 다른 요소들이 등장함으로써 그가 ‘안전’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는 추론을 하게 한다. 첫째, 여기저기 국방위원장 엠블럼을 만들어 붙이고 있다. 김정은의 전용 승용차 뿐만 아니라 마이크 앞에도 붙이고 이제는 옷에도 붙이고 나타나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 시대 뿐만 아니라 김정은 집권 초기에는 없던 현상이다. 전 세계 지도자 중 자신의 집무실이 아닌 야외 현장에서 탁자와 마이크에 신분을 표시하는 엠블럼을 단 경우가 있는지 궁금하다. 둘째, 영상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기록하는 ‘1호 사진가’의 카메라에는 일반 사진 뿐만 아니라 동영상을 동시에 촬영할 수 있는 미니 카메라가 추가로 장착되어 있어 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또한 흔히 유튜브 방송에서 활용되는, 스마트폰 촬영을 하는 실무자의 모습도 포착된다. 세 번째 특징은 강화된 경호 체계이다. 경호팀의 강화다. 무장 경호원들이 방아쇠에 손을 넣고 있는 장면은 인간병기라고 할만한 특수부대원들의 훈련 참관 현장이라고 하더라도 평범한 모습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재밍 카도 등장해 행사장 주변에 대한 전파를 통제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김정은 행사장 주변에 전파 차단을 목적으로 하는, 재밍 카가 등장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북한 내부의 잠재적 위협으로부터의 방어인지 국제 사회의 감시에 대한 두려움인지 알 수 없지만 행사장에 등장했다는 것은 과거와는 다른 징후로 볼 수 있다. 행사장에는 김정은의 전용차를 알아볼 수 없도록 엘블럼을 장착한 2대의 차량이 등장하고 있다. 넷째, 모자이크도 많고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노동신문을 통해 나오는 신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북한에서 기념사진은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소원’처럼 김정은과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최근 김정은이 찍는 단체사진에는 한 장에 너무 많은 사람이 포함됨으로써 신문이나 액자 상태로 보더라도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행사 참가자들에게는 사진이 더 이상 중요한 증명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지만 북한 정권입장에서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외부 세계에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지역으로 파견된 북한 미사일부대 기술자의 모습을 확인한, 국정원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는 AI 안면인식기술에 대한 두려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보안에 신경을 쓰는 장치들이 현재 북한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작은 힌트가 아닐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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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토에세이]꽃길만 걷자

    색색의 꽃들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네요. 여기 가면 어딜 걸어도 꽃길만 걸을 수 있겠어요. ―강원 인제군 용대관광지에서 스마트폰 카메라로 QR코드를 찍으면 포토에세이 동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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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풍 물든 대관령, 첫눈 덮인 설악산

    20일 주말을 맞아 단풍을 즐기려는 등산객들이 전국의 단풍 명소를 찾았다. 강원 평창군 대관령 일대가 울긋불긋 단풍으로 곱게 물든 모습. 수도권 기준으로 낮 최고기온이 20도에 육박했지만 아침저녁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며 19일 밤∼20일 오전 강원 북부 산지에는 올가을 들어 첫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설악산국립공원 대청봉 인근에는 첫눈도 내렸다. 평창=변영욱 기자 cut@donga.com뉴스1}

    • 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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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난파선?

    망망대해에 뜬 작은 배 뒤에서 물이 짓쳐 들어와요. 이러다 곧 가라앉고 말겠어요! ―서울 종로구의 어느 건물 외벽 배전함 자리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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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의 제목을 맞춰보세요! – 100년 전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신문의 노력[청계천 옆 사진관]

    ● 사진 퀴즈 - 100년 전 독자의 시선을 끌려는 노력 1924년 10월 13일 자 동아일보 지면에는 파인(巴人) 김동환의 시 “북청 물장수”가 발표됩니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만큼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가 신문 지면을 통해 세상에 발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묵직한 코너 옆에 신문에 실리기에는 좀 가벼운 사진 하나가 실려 있습니다. 군복을 입은 소년이 두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 옆에 설명에는 “상 타는 사진 풀이” 시리즈가 이날부터 지면을 통해 시작된다고 써 있습니다. 그 옆에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1924년 10월 13일 (월요일) 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신문사는 이 두 사진이 어떤 건지 독자들에게 정답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먼저 신문사에서 원했던 정답을 말씀드리자면 눈을 가리고 있는 사진의 정답은 ‘소년군’이라고 합니다. 100년 전 신문에서 있었던, 독자 참여 이벤트를 소개합니다. ◇ 상타는 사진 풀이첫째 여기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어른을 세상에서 무엇이라 부르며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주 간단하게 아는 대로 적어서 알려주십시오.둘째여기에 서로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간단하게 적어 보내주십시오.쓰기는 엽서로 주소 성명과 동아일보 소년소녀계라고 분명하게기한은 오는 토요일 안으로 도착되여야 합니다.상품은 ‘사진풀이’ 두 가지를 다 맞힌 이로 20명을 추첨함.● 독자의 시선을 뺏기 위한 신문의 노력독자들의 시선과 시간을 빼앗아 신문사의 콘텐츠에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신문사 구성원들의 오래된 숙제입니다. 그래서 미국 유력지 뉴욕타임즈는 구독자를 유치하기 위해 음식 레서피를 제공하거나 가로세로낱말퍼즐을 싣습니다. 그리고 꽤나 많은 독자들이 그 코너를 기다립니다. 깊이 있는 기사와 중요한 기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1920년대의 노력은 조선일보에서도 발견됩니다. 비슷한 시기 조선일보는, 기자가 변장을 하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겠다면서, 기자의 평소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거리에서 사진 속 기자를 제일 먼저 알아채고 ‘당신이 변장한 기자다’라고 말하는 첫 사람에게 상품을 주겠다는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그게 1924년 10월입니다. 조선일보 기자는 인력거꾼이 되어보기도 하고 고학생이 되어보기도 하고 아이를 엎은 채 누추한 행랑어멈 차림으로도 변장합니다. 그렇게 서민들의 실생활을 들여다보고 경험한 애환을 지면에 털어놓습니다. ● 사진 퀴즈의 정답은 소년꾼… 독자의 오답(誤答)은?동아일보 지면에 사진 퀴즈가 나간 1주일 후인 1924년 10월 20일(월요일)자에 다시 ‘상타는 사진 풀이’ 다음 차례 사진이 나갑니다. 세 번째 사진은 “어여쁜 아가씨 한 분이 서 있고 그 옆에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아가씨는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는 걸까요“라는 질문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진 퀴즈에 대한 답이 공개됩니다. 아울러 독자들의 창의적인 오답도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기사를 보시죠.요전 사진풀이는 이러합니다.◊첫째는 소년군입니다. 소년군은 지금부터 열일곱해 전에 영국 어느 늙은 군인이 시작한 것인데 지금은 전 세계에 없는 곳이 없고 수효가 사오백만이나 됩니다. 소년군의 목적은 남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활동할 훌륭한 인물을 양성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답안 중에 맞지 않은 것이 적지 않습니다. 몇 가지 전례를 들어 보오리다.중국 동란에 불간섭 주의를 주장하는 일본정치의 곤경을 당한 조선 총독등이 있는데 이런 것은 아마 어른의훈수를 받아서 쓴것이요 단순한 소년소녀의 답안이 아닌가 합니다. 재미있는 것으로는눈가리고 아옹엄청스럽게 틀린 것은은행 나무 잎사귀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우는 사람이라거나 학교 운동꾼이라거나 장님이라 한 것은 여간 많지 않습니다.◊둘째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마주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마주 앉아 무엇하느냐 우리는 소년소녀 여러분이 두 짐승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시고 대답하시려니 생각하였더니 생각 20의 7,8 분은 맞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개와 고양이는 앙숙이라 만나면 싸우는 것으로 생각하셔서 싸울려고 하는 것이다, 노리고 있는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해석하신 답안이 4백 여장이나 됩니다. 그리하고 연칭부린 대답으로일본과 미국봉천과 직예라는 것이 많은 중에 일본 아이가 ‘일본과 미국’이라고 답안을 써 보내 것이 있습니다. 잘못 본 대답으로 호랑이 새끼라는 것 갈가지라는 것이 가장 많고 시퉁그러진 대답으로 천하 개자식이라는 뜻이라고 한 것도 있고 또 이야기꾼 대답으로 주인 보배를 차지하려고 개와 고양이가 공론하는 것이라는 것이 있습니다.우리 생각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모두가 오십 여자 밖에 아니 되니 오십여장을 가지고 사백여장을 없이하면 우리의 잘잘못은 고사하고 여러분께 미안하여 이야기한다는 것과 싸우려고 한다는 것을 반반씩 뽑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 한다고 보신 것을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 어떤 사람들이 퀴즈에 응모했을까신문사가 낸 사진 퀴즈에 응모한 사람은 826명이었습니다. 그 중 20명을 선정해 상품으로 책을 한권 주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응모했는지 궁금합니다. 기사를 보겠습니다. 소년소녀들을 대상으로 퀴즈를 낸 것인데 부모가 답안 작성에 도움을 준 것 같다는 아쉬움과 경제난이라는 시대 상황도 반영된 답도 있어 가슴이 아프다는 신문사의 입장도 함께 기사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상품과 상 탈 여러분상품은 ‘사랑의 선물’이란 이야기 책 한권씩을 드리기로 하였는데 상 탈 여러분은 826분 중에서 20분을 공평하게 추리였습니다.경성 필운동 90 이정희평양 상유리 75 김동석경성 관훈동 141 김정희경성 평동 27 이해록(?)경성 숭인동 61의 5 정학모포천 소흘면 송우공보 이복순개성 송도면 정화여교 김정순안악군 안악면 신장리 506 이용혜신천공보 홍보표경성 종로 4정목 28 김순옥진남포 신흥리 43 박춘명개성북본정 492 박일찬괴산군 괴산면 제동리 유?익수원공보 이희찬평양 리문리 79 황명복경성 원정 713 심대식경성 관훈동 197의ㅣ 4 이경자경성수은동 88 석린균논산군 강경공보 방은주노량진 흑석리 176 이해영◇답안을 보고◇이번 사진풀이는 단순한 소년 소녀를 위하여 생각해 낸 것이라 어른의 눈으로 보면 싱겁기가 짝이 없을 터인데 어른의 필적이 분명한 것이 답안 중에 많으니 우리는 의외로 여기는 동시에 여간 섭섭히 생각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금년이 흉악한 흉년인 것을 알 수가 있었으니 시골서 온 답안 중에 소년군을 먹을 것 없어서 우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 일백장이 넘습니다. 먹을 것 없어 굶주리는 것이 어린 머리에 얼마나 깊이 인상이 되었기에 이러한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또 답안의 글씨와 의사로 그 소년 소녀의 가정을 대개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의 감독이 어떠한 저도까지 미치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가 있는 것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 오늘 ‘백년사진’에서는 사진풀이라는 이벤트를 살펴보았습니다. 100년 전 신문사가 진행했던 독자와의 소통 이벤트 어떠셨나요? 요즘 세대에게 다가가려면 어떤 이벤트가 좋을까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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