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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의 지난해 매출액은 67조7000억 원으로 전년 71조8000억 원보다 4조1000억 원(5.7%)이 줄었다. 신세계그룹 역시 작년 매출액이 35조8000억 원으로 전해의 37조1000억 원에서 1조3000억 원(3.5%) 뒷걸음질 쳤다. 설령 올해 실적이 다소 반등한다 하더라도 과거에 누렸던 성장세를 기대하긴 힘들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두 기업 스스로도 위기의식이 크다. 롯데지주는 8월부터 비상경영 체제에 들어갔다. 실적 부진 계열사인 롯데면세점과 롯데케미칼은 앞서 6월, 7월 연이어 비상경영을 선언했다. 롯데지주와 화학부문 계열사 임원들은 이번 달부터 급여까지 일부 반납하기로 했다. 신세계라고 다르지 않다. 신세계그룹은 이미 지난해 9월 정기 인사에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25명 중 9명을 바꿨다. 올해 3월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승진한 뒤엔 수시 인사를 통해 신세계건설, G마켓, 쓱닷컴의 CEO가 교체됐다. 그리고 지난달 말 정기 인사에서 신세계푸드, 신세계인터내셔날, 신세계야구단 등 몇 곳의 수장이 추가로 바뀌었다.활력 떨어진 유통 대기업들재계 6위, 11위에 올라 있는 두 거대 그룹이 부진한 이유는 다양하다. 롯데는 중국발 석유화학 공급 과잉으로 인한 화학계열사 실적 추락이, 신세계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확산의 직격탄을 맞은 신세계건설 유동성 위기가 우선 꼽힌다.하지만 가장 뼈아픈 건 그룹 근간인 유통 부문에서 성장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비 환경부터가 녹록지 않다. 한동안 이어져 온 고금리 기조로 얼어붙었던 내수 시장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으니 유통 기업들은 딱히 손쓸 방법이 없다. 소비자들이 쿠팡과 같은 온라인 플랫폼으로 급격히 쏠리는 사이 오프라인 유통 채널의 영향력이 예전같지 않아진 것도 부담이다.두 기업이라고 새로운 모멘텀을 찾기 위한 도전이 없었을까.롯데는 2022년 1월 한국미니스톱을 사들여 편의점 체인 세븐일레븐의 덩치를 키웠다. 이듬해 12월에는 바이오사업 진출에 속도를 내기 위해 미국 제약사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큅의 시러큐스 공장을 인수했다. 작년 3월 전지소재 업체 일진머티리얼즈(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를 2조7000억 원에 인수하면서 전기자동차 생태계에도 뛰어들었다. 신세계는 2021년 4월 여성의류 플랫폼 W컨셉을, 그해 6월에는 3조 원대에 이베이코리아를 그룹에 편입시켰다. 2022년 3월엔 플랫폼 구축 전문기업 플그림을 샀다. 올해 10월엔 뷰티 전문회사 어뮤즈까지 품었다. 문제는 신사업 진출(롯데)이나 디지털 경쟁력 강화(신세계) 어느 것도 아직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업태의 본질’에서 답 찾아내야유통업계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속출하는 가운데 그나마 활기가 도는 전장이 있긴 하다. ‘물건을 판다’는 개념을 넘어 ‘경험을 제공한다’는 콘셉트를 내세운 복합쇼핑몰이다.부동산 개발 회사인 신세계프라퍼티의 스타필드는 하남점, 고양점, 서울 코엑스점, 안성점에 이어 올 1월 MZ세대들의 놀이터를 자처한 수원점을 오픈했다. 광주와 인천 청라, 경남 창원에도 신규 점포를 계획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롯데도 타임빌라스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꺼내들었다. 지난 달 롯데백화점 수원점을 리뉴얼한 타임빌라스 1호점을 낸 것을 시작으로 국내에만 13곳에 점포를 내겠다고 한다.미국에서 아마존이라는 강력한 시장 파괴자의 등장에 잠시 흔들렸던 월마트는 지금도 ‘글로벌 넘버 원 유통기업’이라는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오프라인 채널이 가진 ‘업태의 본질’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면서도 물류, 배송, 상품 구성 등을 끊임없이 혁신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국내 유통산업의 역사를 함께 써온 두 기업이 찾아야 할 답도 결국 여기에 있지 않을까.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올 초 민생토론회에서 ‘1·10 주택공급 대책’을 발표할 때 “재개발·재건축 규제를 아주 확 풀어버리겠다”고 했다. 당시 대책의 핵심은 30년 이상 아파트 재건축 시 안전진단 절차를 사실상 건너뛰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6월 기업구조조정(CR) 리츠를 10년 만에 부활시키겠다고 했다. 8월 들어서는 ‘재건축·재개발 특례법’ 추진을 포함한 ‘8·8 주택공급 대책’과 기업이 운영하는 20년 이상 장기임대주택 카드를 연이어 꺼내들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도심 지역을 중심으로 집값이 심상치 않게 뛰자 공급 속도를 높여 이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서였다.시멘트 수입해 공사비 안정화하겠다는 정부 그런데 이런 대책들이 나올 때마다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공사비 문제였다. 정부가 아무리 드라이브를 걸어도 민간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공허한 대책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민간의 움직임을 막고 있는 게 치솟은 공사비였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발표하는 공사비 지수는 2020년 연간 평균을 100으로 놓았을 때 작년 127.90까지 올랐다. 올해는 2월부터 6월까지 5개월 연속 130을 웃돌기도 했다. 8월 역시 129.71이다. 전국 재개발 및 재건축 현장 곳곳에선 조합과 시공사 간 공사비 증액 갈등으로 시끄럽다. 정부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거다. 이달 초 나온 공사비 대책이 그 결과물이었다. 눈에 띄는 내용은 시멘트 수입 지원이다. 국내 시멘트 가격은 2021년 t당 7만8800원에서 지난해 11만2000원까지 40% 넘게 올랐다. 수입 시멘트를 들여오도록 유도하면 이 상승세가 멈출 것이란 논리다. 다시 한번 꺼낸 ‘공급’ 카드다. 그런데 건설사들은 왜 이제까지 시멘트를 수입하지 않았을까. 간단히는 이로울 게 별로 없어서다. 시멘트는 반도체와 다르다. 부피가 커서 수입이나 수출을 하려면 운송비가 너무 많이 든다. 그나마 가까운 중국이 유일한 수입처가 될 텐데, 그마저도 계산이 맞지 않았다. 정부가 시멘트 저장시설과 유통설비 인허가를 지원해 준다 한들 해결될지 의문이다. 결국 둘 중 하나다. 우선 정부 의도와 달리 수입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나머지는 비싼 운송 비용을 감안하고도 공사비를 낮출 수 있을 만큼 아주 값싼(저질) 시멘트를 들여오는 것이다. 정부는 수입 시멘트 품질인증을 강화해 안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국내 시멘트 시장에 영향을 줄 만큼 의미 있는 규모를 수입하려면 쉽지 않은 과제다. 정부 대책은 타깃 설정이 중요하다. 이미 오른 공사비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걸 목표로 삼는 게 맞을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조류인플루엔자(AI)가 유행할 때 스페인산 계란을, 배추값 잡으러 중국산 배추를 수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시멘트를 수입해서도 공사비가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때 가선 이동통신사에 ‘통신비 인하’를 요구하듯 할 순 없지 않은가.현장 갈등의 중재자 역할 나서 주길 차라리 현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주택공급 속도를 높일 방안을 찾는 데 정부의 힘을 모아줬으면 한다. 이를테면 시공사와 조합 간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에 설치해 뒀지만 현재 유명무실해진 도시분쟁조정위원회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공사비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시공사와 아파트를 싸게 지어 수익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조합이 이견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지금처럼 공사비 부담이 클 때 양측 의견은 더 첨예하게 갈리기 마련이다. 정부가, 또는 정부의 위임을 받은 이가 적절한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도심 주택공급이라는 목적지에는 의외로 빨리 도달할 수 있다.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1994년 10월 어느 날 밤. LG유통 영업담당 정재형 사원의 신혼집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누구일지 단박에 감이 왔다. 전화기 너머의 한껏 풀 죽은 목소리, 역시나 ‘그’였다. 주섬주섬 옷을 꺼내 입는 정 사원에게 아내가 한마디 쏘아붙였다.“대기업 다닌다더니.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주말이고 밤이고 불려 나가?”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아내에겐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정 사원이 투덜거리며 10여 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LG25 편의점이었다. 유리문 안쪽으로 넋이 나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가 보였다. 본사에서 도착한 물건들은 박스째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짤랑짤랑’ 출입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는 구세주를 만난 양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주 내용을 시스템에 넣는 게 너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불렀다고 했다. 이대로면 5시간이고 6시간이고 해뜰 때까지 못 끝낼 거라면서.내가 맡은 점포인 걸 어쩌겠는가. 게다가 형,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기로 한 ‘그’의 부탁인데…. 세 살 형인 ‘그’도 신혼 5개월 차였고, 형수는 임신 중이라고 했다. 문을 연 지 한 달도 안 돼 아직은 버벅대는 거라고, ‘그’도 언젠가 익숙해질 거라고 정 사원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그’, 최형규 씨(61)는 2024년 9월 11일 GS25(옛 LG25) 30주년 경영 기념패를 받았다. 이젠 GS리테일(옛 LG유통) 편의점사업부 대표가 된 정 사원이 직접 패를 건넸다.》LG유통은 1990년 12월 LG25 경희점을 시작으로 편의점 사업에 뛰어들었다. 2004년 LG와 GS가 분리되면서 LG유통은 GS리테일로, LG25는 GS25로 간판을 바꿨다. 현재 GS25 점포 수는 약 1만8000개. 최 씨의 서울 구로구 신도림점은 328호다. 30주년 기념패는 최 씨가 11번째, 한자리에서 편의점을 꾸려 온 건 그보다 적다. “바로 옆 유리 가게 말고는 우리 편의점이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됐죠. 예전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니까요.” 신도림점은 대로변이 아닌 주택가 안쪽에 있다. 처음엔 거의 단독주택뿐이었다. 1985년 입주한 구로우성아파트 3개 동이 유일한 고층 건물이었다. 신도림역으로 이어지는 여관 거리의 투숙객들, 나중에 자리를 옮긴 제약회사와 철강공장 직원들도 종종 찾아오긴 했다. 그래도 손님 대부분은 동네 주민들이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줄줄이 들어섰고, 먹자골목도 생겼다. 최 씨의 편의점은 동네가 자라는 모습을 1만1000일 동안 고스란히 목격해 왔다. ● 낙(樂)최 씨 동네도 2002년 여름은 뜨거웠다. 그는 월드컵이 시작하기 전 40인치 액정표시장치(LCD) TV부터 샀다. 그러곤 편의점 외부에 내걸었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편의점 앞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학생들이나 젊은 직장인들은 죄다 시청역, 강남역 같은 핫 플레이스로 몰려들었지만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모일 곳이 별로 없었다. 술집이나 호프집에 자리를 잡지 못한, 그러나 마음만은 청춘이었던 40, 50대들은 캔맥주 하나씩을 손에 쥔 채 편의점 앞 테이블 4개에 옹기종기 앉았다. 많으면 30명까지도 모였다. 붉은악마 공식 티셔츠가 없으면 목이 늘어난 빨간색 티셔츠를 아무거나 주워 입고 나왔다. 자녀들에게 부탁했는지 얼굴에 응원 문구 스티커를 붙인 이도 있었다. 동네에서 유일한 ‘실외’ 응원 장소다 보니 지나가던 행인과 차량이 모두 하나가 됐다. “대∼한 민! 국! 짝짝짝 짝! 짝!” 최 씨는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안정환 선수가 연장전 골든골을 넣는 순간에 대해 “까무러쳐 쓰러졌을 정도”라고 기억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야 뭐, 다 친구가 됐지.” 가게 문을 연 지 8년. 동네 주민들과 안면을 트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경기 파주시에서 온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해 여름 대한민국의 모든 언어는 축구로 통했다. 구로동도 예외일 리 없었다. ‘응원 맛집’ 편의점은 그렇게 동네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 애(哀)늘 좋았던 때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1997년 11월 22일 아침, 편의점으로 배달된 조간신문(동아일보)에는 ‘IMF에 200억 달러 요청’이라는 헤드라인이 대문짝만하게 걸렸다. 그 전에도 국제통화기금(IMF)이란 단어는 여러 번 들어는 봤었다. “IMF? 그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한 몇 달 지나니까 급격하게 변하더라고요. 담배나 술, 생필품 같은 걸 사람들이 사가질 않는 거예요. 매출이 뚝 떨어지니 낮에 일하던 아르바이트생부터 내보내야 했죠.” 편의점 맞은편 구로우성아파트는 은행원들이 모여 지은 ‘조합원 아파트’였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이 금융권이라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구로우성아파트 주민 역시 기업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최 씨는 “그저께까지 은행 지점장 하던 분이 평일 낮인데도 슬리퍼를 끌고 편의점에 와 담배를 사가더라”면서 “편의점 사업이 어떤지 물어오는 손님도 꽤 많았다”고 했다. 인근 거리공원에서 지내는 노숙인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편의점을 찾아왔다. 문 앞에 서서 손님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일도 허다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한참 떨어진 곳에 데려다 놓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술 한 병을 쥐여줘야 노숙인은 발길을 돌렸다. 이후에도 경기는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다.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팬데믹 등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때다. 30년 경력의 편의점 경영주인 최 씨에겐 경기를 감별하는 그만의 잣대가 만들어졌다. “경기가 좋으면 알바를 아무리 뽑으려 해도 전화 한 통이 안 와요. 그런데 경기가 별로 안 좋을 땐 구인 광고 한 번에 전화가 쏟아집니다. 애들이 직장 구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거죠.” 최 씨는 거기에 한마디 덧붙였다. “경기가 안 좋으면 취업이 어려운지 알바생이 몰려요. 요즘이 딱 그래서 씁쓸해요.” ● 노(怒) 최 씨의 편의점도 굴곡이 있었다. 처음 1년은 좋았다. 월 매출액이 초기 120만 원 언저리에서 180만 원까지 올랐다. 첫아들을 출산한 아내도 식품 대기업을 그만두고 육아를 하면서 편의점 일을 도왔다. 그래도 충분히 먹고살 만한 벌이가 됐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1995년 가을, 건물주였던 와이셔츠 제조 업체가 어려워지면서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다. 한 번 유찰될 때만 하더라도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유찰이 되니 목이 타들어갔다. 한 번만 더 유찰되면 채권 우선순위상 보증금 1억2000만 원을 그대로 날릴 판이었다. 거리에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골프웨어 업체가 세 번째 만에 건물을 낙찰받았다. 하지만 회사 오너는 1층에 쇼룸을 꾸미겠다고 통보해 왔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찾아가 설득했다. “빚을 지고 시작했는데 지금 나가면 정말 거지가 된다고 간곡히 사정했습니다. 딱해 보였는지 회장님이 ‘그럼 그냥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그 건물주와 20년을 함께했어요.” 또 다른 고비는 6년 전쯤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부터 3년간 최저임금을 30%나 올리면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함께 일하던 아르바이트생 3명 중 1명을 내보내고, 빈자리는 자신과 아내가 몇 시간씩 더 일하며 메웠다. 그것도 힘들어지자 나머지 아르바이트생도 주 15시간 미만씩 일하는 단기 아르바이트 여러 명으로 대체했다. 너무 급격한 인건비 상승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최 씨는 “다른 자영업자들도 다 마찬가지일 텐데, 당시엔 정말 그만둬야 하나 여러 번 생각했다”면서 “인건비를 조금씩 올리면서 알바를 여러 명 쓰는 것과 빨리 올려서 알바를 줄이는 것 중 뭐가 애들을 위한 건지 한번 고민해봤으면 어땠을까”라고 했다.● 희(喜) 최 씨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모두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건 결국 사람 덕분이라고 했다. 정재형 사원은 초기에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달려와 줬던 동생 덕에 시골뜨기의 서울 적응기는 몇 달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처음 같이 일했던 아르바이트생도 똑똑했다. 바로 앞 구로우성아파트에 살던 그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 앞 편의점에 이력서를 냈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면서 대학수학능력시험도 치르지 않고 편의점에 출근했던 아이였다. 부모님께 미안하기도 했지만 내심 고맙기도 했었다. 3년 가까이 일한 그 아인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친구들과 몇 번을 찾아왔었다. 며칠 전 추석 연휴 때는 5년 전쯤 일했던 친구가 다녀갔다. 데려온 아기는 곧 돌을 앞두고 있다 했다. 캐나다인과 결혼해서인지 이름은 ‘올리비아’라고 지었다고 했다. 남편 직장이 있는 대전에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명절 때 부모님을 뵈러 왔다가 편의점 사장님이 생각나더란다. 최 씨와 아내는 그 친구가 가져온 작은 선물 보따리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자주 오던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들이 다 커선 군대 다녀왔다고, 취직했다고, 또 결혼했다고 가끔 찾아와요. 알바로 일했던 친구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럴 때 정말 힘이 나죠.” 최 씨 아들은 이제 스물아홉,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에 다닌다. 미대를 나온 스물일곱 딸은 노무사 자격증을 준비 중이다. 서른이 된 최 씨 부부의 편의점은 큰아들인 셈이다. 언제까지 하실 거냐는 물음에 “칠십? 아니 몸이 허락할 때까지”란 답이 돌아온다. “30년을 내리 한자리에서 장사를 한 것 아닙니까. 여기 동네분들이 편의점이나 제 아들, 딸을 다 키워주신 거나 다름없죠. 그러니 제가 어떻게 여길 떠나나요. 하하.” 인터뷰를 마치겠다고 하자 최 씨는 서둘러 편의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좀 전에 아르바이트생이 받아둔 물건들을 정리해야 할 바쁜 시간대다. 그래야 직장인들이 퇴근하기 전에 새 물건을 진열해 놓을 수 있다고 했다. 구로동 주택가 편의점은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지난 30년간 그랬던 것처럼.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역사를 팔고 있습니다.”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회장은 아이폰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25년 후 ‘아이폰’이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1921년 탄생한 프랑스산 샴페인 ‘돔 페리뇽’은 여전히 팔리고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이유였다. 아르노 회장의 이 한마디에는 기업이 헤리티지(유산)를 어떻게 경영에 활용해야 하는지 단순 명료하게 담겨 있다.모든 기업에는 스토리가 있다 헤리티지는 무형의 자산이다. 월트디즈니가 1957년 지식재산권(IP) 기반의 사업 확장 계획을 종이에 그린 ‘디즈니 시너지 맵’은 기업 정체성을 상징한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1998년 구글 검색엔진을 만든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허름한 차고는 스타트업 정신 그 자체가 됐다. 1960년대 후반 플로리다대 풋볼팀 ‘게이터스’가 게토레이를 마시고 승승장구해 우승까지 차지했다는 스토리는 과학적 증거를 떠나 제품에 긍정적 이미지를 더했다. 기업은 본래 자기 자본은 물론 남에게 빚을 지면서까지 재화를 확보해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결국 기업이 고유의 헤리티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것은 주머니 속 비즈니스 자산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30대 그룹의 마케팅·전략 담당 임원들에게 한국 기업이 실제 가치에 비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묻자 ‘저평가’라고 답한 비율이 80%에 가까웠다(30명 중 23명). 글로벌 기업들과 치열하게 맞붙는 세계 무대에서 기업 스스로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 이유를 적은 답변 중 하나는 이랬다.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조직문화와 브랜드 이미지가 별개인 경우가 많다. ‘역사에 대한 존중’과 ‘미래를 위한 혁신’을 동시에 좇으면서, 그 둘을 잇는 ‘헤리티지의 끈끈함’은 무시하는 편이라고 느낀다.” 헤리티지 활용이 서툴다고 기업 및 브랜드 가치가 낮아진다고 단언하긴 힘들다. 기업 가치라는 게 많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매겨지기 때문이다. 다만, 헤리티지가 기업 가치를 올릴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도구’가 될 수는 있다. 기업 경쟁력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려면 헤리티지가 필수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글로벌 1위 브랜드 애플이 ‘단순함’이라는 잡스의 디자인 철학을 고집스럽게 계승하는 게 바로 그런 배경에서가 아닐까. 독일 메르세데스벤츠가 자체 박물관에 130여 년간 만들어온 차량을 모두 전시하고, 현대자동차가 1970년대 첫선을 보인 포니를 50년 만에 복원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장수 기업일수록 써먹을 재료가 많은 건 사실이다. 오랜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깊고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이 축적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헤리티지를 100년 기업만의 전유물로 여겨선 곤란하다. 1921년생 디즈니에 시너지 맵이 있는 것처럼 갓 서른이 된 1994년생 아마존 역시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휴지에 휘갈긴 ‘플라이 휠’을 떠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헤리티지도 잘 써야 가치가 빛난다 헤리티지의 실질적 가치는 결국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보단 ‘어떻게 잘 쓰느냐’에 달려 있다. 사사(社史) 속에 꽁꽁 숨겨둔 유산은 ‘기록’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 테다.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최근 10년간 빠르게 세대 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어느덧 3세 경영자가 그룹을 대표하는 곳이 많아졌고, 일부 기업은 4세 경영으로까지 넘어가는 단계다. 충분한 업력과 그에 따른 유산들이 쌓였다는 얘기다. 이제 그 유산들을 세계 무대에 꺼내 놓을 때가 됐다. 한국만의 정체성, 그리고 거기에 뿌리를 둔 한국 기업만의 독특한 이야기들이 또 하나의 글로벌 스타를 만들어낼지 누가 알겠는가.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온라인 플랫폼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대동소이하다. 그럴듯한 콘셉트의 홈페이지 또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을 만든 뒤 상품이나 서비스, 콘텐츠를 올려둔다. 그러고는 고객들을 끌어모은다. 무료 쿠폰, 할인 판매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다만 쌓이는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서버를 늘리고, 사용자환경(UI)도 수시로 바꿔야 한다. 관건은 자금 수혈이다. 대규모 투자를 받아낸 곳은 버티고, 그렇지 못하면 문을 닫게 된다.이커머스 업체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 충성고객 수와 객단가가 일정 수준을 넘기면 플랫폼의 태도는 달라진다. 광고비를 받기 시작하고 수수료나 구독료를 올린다. 구글과 유튜브, 메타(옛 페이스북)가 그랬다. 한국의 네이버, 카카오, 쿠팡, 배달의민족도 다르지 않다. 1990년대부터 바이블처럼 여겨져 온 성공 방식이었다. 미국 아마존과 중국 알리바바의 엄청난 성공은 국내 유통업계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지마켓, 11번가, 티몬, 위메프 같은 전자상거래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들의 가파른 성장에 대형마트와 동네슈퍼, 전통시장은 직격타를 맞았다. 결국 오프라인 유통기업들도 온라인으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신세계는 2018년 ‘SSG닷컴’을 론칭한 데 이어 2021년에는 지마켓을 3조5000억 원이라는 거금에 인수했다. 롯데도 2020년 롯데백화점, 롯데마트, 롯데슈퍼, 롯데홈쇼핑 등 7개 계열사의 온·오프라인 데이터를 통합해 ‘롯데온’을 출범시켰다. 사실 지금까지는 실적이 신통치 않았다. 유통업계의 한 인사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사업은 언어 자체가 다르다”는 말로 유통 대기업의 온라인 사업 부진을 설명했다. 대기업 진출로 이커머스 시장 내 경쟁만 더 치열해지게 됐다. 그러다 미정산 사태가 터졌다. 6월 활성이용자(MAU)가 합계 870만 명에 육박했던 티몬과 위메프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본사 앞에는 환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정산금을 받지 못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들은 거리로 나섰다. 제2의 티몬·위메프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본보가 국내 주요 이커머스 업체 10곳의 재무 상태를 조사했더니 완전자본잠식에 빠진 기업이 4곳이나 됐다. 함께 분석한 회계사는 나머지 기업 중에도 현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곳들이 있다고 했다. 이커머스 시장은 소비자가 동시에 여러 플랫폼을 쓰는 ‘멀티호밍’이 특히 심하다. 무한 가격 경쟁이 벌어지면서 누구도 이익을 낼 수 없는 구조가 됐다. 이를 두고 “이커머스 플랫폼의 숙명”(임일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이라고도 한다. 그나마 시장이 성장할 때는 괜찮았다. 이익을 내지 못해도 파이가 커지다 보니 생존은 가능했다. 하지만 성장세가 꺾인 데다 중국 이커머스 기업들마저 국내 시장을 넘보는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오프라인 유통업계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빅3’ 외에는 살아남기 힘들 수도 있다”(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적자기업, 투자 못받으면 곧바로 위기 이커머스 시장에선 ‘계획된 적자’란 표현을 흔히들 쓴다. 공격적으로 고객을 모으려면 적자경영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투자를 따박따박 받아낼 때의 얘기다. 시장 환경이 달라지면 투자 유치 계획은 언제든 삐걱댈 수 있다. 적자 기업들에 이는 곧 유동성 문제를 의미한다. 티몬·위메프 사태에서 보듯 대형 이커머스 업체가 무너지면 수십만 명의 피해자가 양산된다. 재무건전성은 뒤로한 채 덩치 키우기에만 집중해 온 기업들은 이제 방향타를 조정할 시점이 왔다. 30년 묵은 비즈니스 성공 방식이 앞으로도 유효할 거란 기대는 버려야 한다.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경기 파주·운정 주상복합 3블록은 2022년 6월 사전청약 당시 45 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2021년 말까지 지속된 집값 폭등세가 다소 진정되던 시기였지만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A노선 운정역에 인접한 단지라는 이름값을 한 것. 2년이 흐른 지난달 28일 시행사인 DS네트웍스는 사전청약 당첨자에게 “불가피한 사유로 사업 취소를 안내드린다”고 통보했다.불확실성에 불확실성을 더한 사전청약 사전청약 당첨자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결혼 6년 차였던 한 사전청약 당첨자는 신혼부부 특별공급에 지원해 내 집 마련에 성공한 듯했지만 물거품이 됐다. 게다가 2년 허송세월을 하고 나니 결혼 8년 차가 됐다. ‘7년 이하’ 기준을 넘겨 더 이상 특공 혜택을 받기 어려워졌다. 당첨자들 중에는 본청약을 위해 치밀한 자금계획을 세웠다 모든 게 꼬여버린 이들도 있다. 사전청약 당시 예고된 입주 시기에 맞추느라 웃돈을 줘가며 전세계약 기간을 조정했던 이들도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고 한다. 한국 아파트 분양시장에는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이 깔려 있다. 만들어진 물건을 확인하고 구매하는 게 아니라 물건을 만들겠다는 계획만 보고 계약을 맺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짓는 2년여 동안 시공사나 시행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사전청약은 이 불확실성이 한층 더 큰 제도다. 물건을 만들겠다는 계약인 본청약조차 확정되기 전 구매자부터 모집한다. 물론 부동산 시장이 기대대로 흘러갈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금리가 오르고 공사비가 치솟는 등의 악재가 겹치면 본청약은 뒤로 밀리기 마련이고 급기야 사업이 취소되기도 한다. 정부는 이런 리스크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미 10여 년 전 똑같은 부작용을 겪었으니까. 사전청약이 처음 도입된 건 2009년인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운영이 중단됐다. 이유는 지금과 똑같은 본청약 지연에 따른 부작용 때문이었다. 이미 ‘실패 낙인’이 찍힌 제도가 다시 부활한 건 2021년이었다.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고 분양 시장이 끓어오르자 추후 분양할 단지들을 미리 당겨 수요를 분산시킨 것이다. 그 결과는 또다시 실패. 기업들은 새로운 전략을 짜거나 상품을 내놓을 때 ‘A/B 테스트’라는 걸 한다. 가설이 아무리 훌륭해도 시장이 A에 반응할지, B에 반응할지는 시장만 알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정부가 매번 새로운 정책을 펼 때마다 A/B 테스트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번 실패했던 정책을 급한 마음에 다시 꺼내 쓴다는 건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정부는 5월 사전청약 제도를 사실상 폐지했다. 또 시행규칙을 고쳐 9월부터는 민간 건설사가 진행한 사전청약 당첨자들도 다른 아파트 분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풀어주겠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3년 만에 다시 폐지될 정책을 괜히 끄집어내 애꿎은 잠재적 피해자들만 양산한 꼴이 됐다. 부동산 정책은 땜질식 처방이어선 안 된다 “강남 집값을 잡겠다”와 같은 정치적 슬로건이 부동산 시장을 어떻게 교란시켰는지 우리는 지난 정부에서 충분히 목격했다. 강남 집값이 잡히기는커녕 다른 지역에까지 거품이 잔뜩 끼었고, 금리 인상으로 집값이 추락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역전세’ 피해자가 나타났다. 시장의 기본인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사라진 결과였다. 두 번이나 실패한 사전청약 제도는 단기 효과를 목적으로 한 땜질식 처방이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하나라도 더 제거하는 것이지, 더하는 게 아니다.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신반포15차를 재건축해 다음 달 공급될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원펜타스’ 일반 분양가가 최근 결정됐다. 3.3㎡당 6737만 원. 1월 서초구 잠원동에서 분양한 ‘메이플자이’(6705만 원)를 넘어 사실상 역대 최고가라고 한다. 같은 달 주인을 찾은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포제스한강’이 1억 원대였지만 아파트라기보단 초고급 빌라에 가까운 단지다. 원펜타스는 높은 분양가 이상으로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어마어마한 기대 수익이다. 원펜타스 분양가는 가장 작은 전용면적 59㎡가 16억 원대, 84㎡는 23억 원가량이다. 작년 8월 입주한 인근 ‘래미안 원베일리’의 비슷한 평형대 매매가격은 각각 32억 원과 43억 원 안팎. 원펜타스 30평형대에 당첨되면 당장 20억 원 가까운 시세차익을 얻는다는 얘기다.‘복권 제조기’ 전락한 분양가상한제 원펜타스가 ‘로또 분양’이라 불리는 이유다. 청약시장은 벌써부터 들썩인다. 몇 년간 전매가 제한되고, 비록 3년 유예된 상태지만 실거주 의무도 있어 단기 차익 실현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닌데도 말이다. 액수가 20억 원이라면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시장에선 보는 모양이다. 이런 기현상은 집값을 억누르기 위해 고안된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고 있기에 벌어진 일이다. 2005년 3월 도입된 이 제도는 천정부지로 솟은 아파트 분양가를 인위적으로라도 끌어내리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투기과열지구 중에 분양가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의 2배가 넘는다든지, 거래량이 갑자기 늘면 적용 대상으로 지정된다. 분상제는 도입 후 폐지와 부활을 거듭했다. 최근에는 2020년 7월 민간 택지까지 확대 시행됐다가 지난해 1월부터 다시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아직까지 분상제가 적용되고 있는 지역은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와 용산구뿐이다. 분상제 적용 아파트가 복권으로 둔갑한 것은, 바꿔 말해 정책 효과가 작았다는 말과 같다. 분양가를 낮춰 주변 시세까지 안정시키길 바랐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결국 분상제는 청약 당첨자들에게 인근 단지와의 시세차익을 선물로 안겨주는 장치로 전락했다. 물론 분양가 상한선이 없었다면 재건축조합이나 시공사가 더 챙길 수 있었던 몫을 일반 분양자가 일부 나눠 갖게 된 셈이라는 주장도 있다. 제3자가 보기에는 ‘도긴개긴’일 뿐이지만. 원펜타스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수많은 청약 대기자들이 있지만 대부분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일반 분양자가 시세차익을 챙기려면 본인 수중에 적어도 20억 원의 현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거주 의무가 3년 유예돼 당장은 전세를 놓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들도 있는데, 3년 후 실거주 의무제가 폐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목돈을 쥔 사람들에게만 입장권이 교부된 ‘그들만의 리그’라는 곱지 않은 시선이 나오는 배경이다. 일부에선 편법과 탈법이 횡행할 수 있다. 시장에선 “자금이 한 푼도 없더라도 청약을 넣지 않으면 바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고 있다. 일단 당첨만 되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긴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금융기관 대출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외부 자금이 법망을 피해 들어오는 과정에서 시장이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부작용 컸던 정책들 과감하게 걷어내야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고 내놓은 수많은 정책들은 ‘실패’의 멍에를 쓰고 수정되거나 사라졌다. 연명 중인 분상제가 바로 그런 정책의 한 사례다. 이미 많은 부분 완화돼 효력이 줄어든 종합부동산세도 정치권에서 폐지 얘기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아파트값은 무리한 정책으로 수요를 찍어 누르면 누를수록 오히려 팽창하는 힘이 커지곤 했다. 제 몫을 다하지 못한 규제나 세제는 이제라도 과감하게 걷어낼 필요가 있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라는 기본 중의 기본에 시장을 한번 맡겨 보는 건 어떨까.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정부는 작년 초 한국토지주택공사(LH) 매입임대 사업에 대해 주택을 사들이는 가격을 ‘원가 이하’로 정했다가 올 2월 ‘합리적 시장가격’으로 바꿨다. 매입임대는 LH가 주택을 직접 사들여 청년, 신혼부부, 고령자, 저소득층 등에게 저렴하게 임대하는 사업이다. 1년 만에 기준을 되돌린 건 지난해 매입 실적이 목표치의 23%에 그쳤기 때문이다. 사실 이 수치는 2020년 100%에서 2021년 67%, 2022년 46%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조건에 맞는 매물 찾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단 얘기다. 그런 사정을 무시하고 원가도 쳐줄 수 없다고 하니 매물이 나올 리 없었다. 시장을 외면한 정책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모든 정책에는 저마다의 고객이 있다 3월에는 아파트 공시가격을 층(7개 등급)과 향(8개 방향), 조망(도시·숲·강), 소음(강·중·약) 등에도 등급을 매겨 전면 공개하겠다던 기존 방침을 철회했다. 이런 요소들에 따라 아파트 가격 차이가 나는 게 사실이더라도 정부가 등급을 매겨 공표까지 하면 개인 자산에 ‘낙인’을 찍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깜깜이 공시’라는 비판을 피하겠다는 목적만 그럴듯했지, 시장 반응에 대한 고민은 얕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주택 정책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최근 정부는 국가통합인증마크(KC)를 받지 않은 80개 품목의 해외 직접구매(직구)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사흘 만에 거둬들였다. 위해 제품 수입을 차단해 소비자들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대책인데, 그 소비자들이 정작 뭘 원하는지는 읽지 못한 결과다. 정부도 오판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기업 총수들이 내는 메시지 중 가장 많이 언급하는 단어가 ‘고객’이다. 기업의 생존이 고객에게 달려 있어서다. 기업이 이해하려는 대상은 시장에서 타깃 고객층으로, 그리고 개인으로 점차 좁혀졌다. 이젠 인공지능(AI)을 접목하면서 개인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에 반응할지까지 들여다본다. 모든 정책도 마찬가지로 고객이 있다. 매입임대 사업은 우선 집을 갖고 있거나 지으려는 이들부터 해당 정책에 호응해야 한다. 그래야 집을 최대한 확보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싸게 빌려줄 수 있다. 아파트 공시가격은 현재 집을 가진 이들은 물론이고 미래에 집을 사려는 잠재 구매자들까지도 해당 정책에 영향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이 고객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해외 직구 논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정책 입안자들에게 기업 수준의 고객 분석을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특정 고객들만 잡으면 되는 기업과 달리 국가는 특정 계층에게만 이로운 정책을 설계해선 안 된다는 논리에서다. 그러나 기업 전략이나 국가 정책 모두 고객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고 본다.쉽게 만든 정책일수록 부작용도 큰 법 요즘은 국민들의 행태가 예전보다 훨씬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공무원들도 정책 결과를 예측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장이나 이해당사자들의 상황을 더 치밀하게 분석해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시각이 많다. 책상에 앉아 쉽게 만든 공급자 위주 정책은 어떤 후폭풍을 낳을지 가늠하기 힘들다. 반면 고객 관점의 정책은 만들기는 어려워도 시행은 오히려 쉽다. 작은 것부터라도 변화를 시도해 봤으면 한다. 이를테면 장관 사진 한 컷을 얻기 위한 현장 방문이나 기업 다그치기 용도의 업계 간담회를 ‘각계 의견 수렴’으로 포장하는 일부터 중단하면 어떨까.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Material Description: Euvichol, Inactivated Oral Cholera Vaccine Order qty: 1,000,000 Price per unit: 1.70 USD’2016년 10월 17일 밤. 유니세프로부터 납품요청서가 날아들었다. 불활성화 콜레라 백신 ‘유비콜’을 100만 도스(1도스는 1회 접종분) 주문한 것이었다. 카리브해 최빈국 아이티에 긴급하게 보낼 물량이라고 했다. 계약 금액은 170만 달러. 당시 환율로 약 19억3000만 원 수준이었다. 규모는 중요치 않았다. “공식 주문이 아직 한 건도 없는데 어떻게 믿나”라는 반대에 막혀 상장예비심사 통과 가능성이 거의 사라지던 무렵이었다. 극적으로 유니세프 주문서가 도착한 건 3차 전문가 회의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였다. 상장예비심사 승인 통보를 받은 그해 11월 7일 백영옥 유바이오로직스 대표(62)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백신을 개발해 공급한다는 것은 어느 날 나에게 뚝 떨어진 운명 같았다. 멈추면 더 힘드니 달렸다. 그래서 오늘이 왔다.”유바이오로직스는 이듬해 1월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한국에 있는 세계 유일의 콜레라 백신 생산기지 현재 세계에서 콜레라 백신을 생산하는 기업은 딱 한 곳, 한국의 유바이오로직스다. 샨타바이오테크닉스라는 인도 기업이 있었지만 지난해 말 생산을 중단했다. 콜레라처럼 저개발국에서 많이 발생하는 공공 백신의 경우 이른바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생산업체를 찾는 것조차 힘들다.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콜레라가 다시 유행하자 한국 백신이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른 셈이다. 유니세프가 올해 유바이오로직스에 약속한 연간 주문량은 4933만 도스로 약 1240억 원어치에 해당한다. 2016∼2023년 8년간 누적 납품량 1억3000만 도스의 40%에 육박하는 규모다. 현재 콜레라 유행 심각성으로 볼 때 연간 매출액 첫 1000억 원 돌파는 거의 확정적인 셈이다. 백 대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보니 납기나 품질을 더 철저히 맞춰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다”더니 “그래도 대량 오더를 받은 직후엔 안도감부터 들었던 게 사실”이라며 웃었다. 유바이오로직스는 국제백신연구소(IVI)의 기술 이전을 받아 콜레라 백신을 생산할 목적으로 2010년 창업한 회사다. 한국에 본부를 둔 첫 국제기구인 IVI는 ‘가능하면’ 한국 기업이 샨타바이오테크닉스에 이은 제2의 백신 생산기지가 돼 주길 바랐다. 공동 창업자 3명이 그 기회를 잡았다. 백 대표는 전문경영인으로 회사 초기에 합류했다. 공동 창업자들이 말 그대로 삼고초려를 했다고 한다. 수의대 출신에 CJ제일제당 바이오제약본부에서 18년,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바이오공정실장으로 4년을 지낸 최고의 현장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가 제안에 솔깃했던 이유는 이랬다. “비록 스타트업이지만 개인과 국가를 넘어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게다가 ‘부를 가진 자’에게서 기부받은 돈으로 ‘부를 갖지 못한 자’에게 나누는 일이잖아요.” 백 대표는 지금도 임직원들에게 “우리는 좋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회사니까 보람을 가져도 된다”고 말한다고 한다. 또 주변 지인들이 유바이오로직스 주가 전망을 물어보면 “당신이 한 주 사면 아프리카 애들이 백신 한 번 더 맞을 수는 있다”고 답한다. 그는 “어릴 때 맞았던 백신들이 모두 해외 원조로 받은 것들이었는데, 이젠 한국 기업 유바이오로직스가 없으면 전 세계가 콜레라 백신을 맞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유바이오로직스가 한국이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이 된 2010년 설립된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고 했다.● 월급 밀린 직원들 감동시킨 ‘20만 원짜리 우동’ 스타트업이, 그것도 IVI라는 국제기구와 함께 처음 백신을 만들어 본다는 게 당연히 쉽진 않았다. 우선 투자 유치가 문제였다. 자본금은 3억 원으로 시작해 유상증자를 거듭하면서 20억 원까지 늘렸지만 연구개발(R&D) 비용을 대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국내 대기업이나 대표 제약사들의 문을 무작정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관심을 보이는 곳들이 꽤 있었음에도 투자는 번번이 무산됐다. 백 대표는 “직접 가방을 싸 짊어지고 70∼80곳은 다녔다”며 “몇몇 회사는 투자를 약속하고 실사까지 했는데 마지막에 틀어지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실제 한 회사는 공탁금 50억 원을 걸겠다는 적극성까지 보이다 중도에 포기했다. 다른 회사는 기업 오너의 투자 승인까지 받았는데, 주금을 납입해 주기로 한 날 결정을 뒤집었다. 창업자 중에서도 이탈자가 생겼다. 3년차에 접어들던 2012년 가을부터 직원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스타트업들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한 번은 건너가야 한다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였다. 그해 말 백 대표는 회계 담당 직원에게 통장에 남은 잔액이 얼마인지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400여만 원. 그는 전 직원 20명에게 20만 원씩을 이체하라고 했다. 그러곤 단체 메시지를 보냈다. ‘많지는 않지만 20만 원을 급여계좌에 이체했으니 크리스마스에 가족들과 따뜻한 우동이라도 사드세요. 밀린 급여는 곧 마련해 지급하겠습니다.’ 백 대표에게도 그날의 일은 너무나 생생하다. 본인도 직장 생활 20여 년간 모아온 적금, 보험 가릴 것 없이 모두 깬 것도 모자라 빚까지 지면서 회사 자금으로 넣은 상태였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한다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그때 우동이 떠오르더란다. “우리가 어릴 때 경부선 타고 다니면 대전역에서 2, 3분 정차할 때 꼭 우동을 먹었잖아요. 시골(백 대표 고향은 경남 거창군이다)이니 장날에 읍내에 나가 우동 한 그릇 먹고 오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거든요.” 백 대표의 진심은 직원들에게도 닿았다. 춘천 공장에 출장을 갔던 박영신 국제업무 담당 전무(53·당시 생산2본부장)는 서울행 ITX를 기다리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그 문자를 받았다. 그는 2020년 발간한 창립 10주년 사사(社史)에 이렇게 썼다. ‘태연한 척 감정을 숨기고 지내왔던 기억들이 일순간에 스치며 눈물이 솟아올랐다. 가족들과 우동을 사 먹지는 않았지만, 20만 원짜리 근사한 우동을 먹은 것처럼 뿌듯했다.’ 그해 ‘20만 원짜리 우동’ 선물을 받은 직원 대부분은 여전히 회사를 지키고 있다. 현재 320명까지 늘어난 임직원들 중 그때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없다. 백 대표는 “그 시절을 함께 겪어낸 이들이 지금까지도 회사에 남아 중추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게 이 사업을 하면서 가장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2013년 5월 드디어 첫 투자 유치의 결실이 맺어졌다. IVI와 오랜 협업 관계인 빌&멀린다게이츠재단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서울시바이오펀드가 움직였고, 녹십자와 한국투자파트너스까지 참여하면서 50억 원이 통장으로 들어왔다. 이듬해 콜레라 백신 ‘유비콜’의 임상 3상과 공장 증설이 진행됐고, 2015년 12월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사전적격성평가(PQ) 인증을 획득했다.● 선진국에서 돈 벌어 개발도상국에 베푸는 게 목표 유바이오로직스는 추가적인 백신 개발에도 한창이다. 매년 2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는 장티푸스 백신은 필리핀에서 임상 3상을 마치고 2026년 출시를 앞두고 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을 대상으로 한 수막구균염 백신도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라이트펀드), 빌&멀린다게이츠재단과 3자 공동으로 개발 중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공공 백신만 가지고 기업을 꾸려갈 수는 없다는 게 백 대표 생각이다. 공공 백신은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지만, 저개발 국가에 지원되는 용도이다 보니 가격대가 낮다. 기업의 지속 성장을 위해 다른 ‘캐시카우’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준비 중인 다음 스텝은 바이러스 백신이다. 콜레라, 장티푸스, 수막구균염 같은 세균 백신은 주로 공공 부문에서 수요가 많지만, 바이러스 백신은 주로 선진국 시장이 크다.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나 수두-대상포진바이러스(VZV) 등이 대표적이다. 공공 백신이 한 번 접종에 1, 2달러라면 의무 접종이 아닌 ‘프라이빗 백신’은 200∼300달러를 내야 한다. 유바이오로직스는 이미 미국 팝바이오테크놀로지와 함께 ‘유팝라이프사이언스’라는 조인트벤처(JV)도 세웠다. 유바이오로직스가 62.5%, 팝바이오테크놀로지가 32.5% 지분을 갖는다. 이 JV는 지난주 세계 최대 바이오클러스터인 미 보스턴 케임브리지이노베이션센터(CIC)에 입주했다. 인터뷰 말미 백 대표는 “먹어 봐야 맛을 알고 산에 가야 범을 잡는다”면서 “백신을 하는 사람으로서 미국 같은 선진국에 우리가 개발한 백신을 등록하는 게 남은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공공과 프라이빗 비중을 딱 절반씩 가져가려 해요. 선진국에서 번 돈으로 아프리카 같은 저개발 국가에 백신을 계속 싸게 공급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처음 유바이오로직스 대표로 부임할 때 들었다던 생각과 닮아 있었다.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치킨집이나 빵집, 편의점 같은 가맹점들은 전국에 몇 개나 될까.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2023년도 가맹사업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등록 가맹본부는 8759개, 가맹점은 35만2866개다. 2022년 전국 가맹점(33만5298개)의 평균 매출액은 점포당 약 3억3700만 원 수준이었다. 가맹점 매출만 산술적으로 113조 원이다. 그해 한국 국내총생산(GDP) 2162조 원의 5.2%다. 가맹본부까지 합하면 이 비중은 더 높아진다. 프랜차이즈 산업의 존재감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소수의 강성 점주들만의 방패 될 수도 모든 비즈니스가 그러하듯 프랜차이즈 산업도 ‘계약’을 기본으로 한다. 가맹본부는 해당 분야에 전문성이 부족한 가맹점주들에게 판매할 물건, 조리법, 포장용기 등을 제공하고 브랜드까지 공유한다. 가맹점주들은 그 대가를 본부에 지불한다. 가맹본부로서는 효율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고, 가맹점주들로서는 원가비용이 다소 들더라도 미숙함으로 인한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 불협화음이 적잖이 생기곤 하지만, 어쨌든 둘은 한몸처럼 성장해 왔다. 더불어민주당이 22일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한 ‘가맹사업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가맹사업법)’은 가맹점 사업자들에게 단체행동권을 주는 게 핵심이다. 약자(가맹점)가 강자(가맹본부)에 맞설 수 있도록 최소한의 권리를 부여한다는 취지다. 현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국내 외식업체의 한 고위 임원은 “한국에선 프랜차이즈 산업이 더 이상 미래가 없을 수도 있다”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업자와 사업자 간에는 계약의 이행과 불이행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쪽에 단체행동권, 이른바 파업권을 준다면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권리’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 가맹본부 하나가 많게는 수만 개 가맹점과 계약하기에 점주 단체는 수십 또는 수백 개도 만들어질 수 있다. 가맹본부는 이들과 일일이 교섭하는 것도 어렵지만, 원활하게 합의하지 못할 경우 점주들의 단체행동권 발동에도 대응해야 한다. 심지어 가맹점주들도 시큰둥하다. 계상혁 전국편의점가맹점협회장은 “이번 법이 통과돼 단체행동권을 갖게 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사실 정상적인 점주들 중 누가 가게를 닫고 시위하러 나가겠냐는 얘기다. 계 회장은 “개정안 내용은 2010년대 중반 가맹본부와의 교섭 자체가 어려웠을 때 주장했던 사안”이라며 “지금은 이미 가맹점사업자단체를 구성해 본사와 협상하고 있기에 별로 달라질 게 없다”고 부연했다. 한편으로는 ‘정상적인 대다수 점주’가 아닌 ‘소수의 강성 점주’들만을 위한 방패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명백한 잘못을 저질러 계약 해지를 당했거나, 당할 위기에 놓인 점주들이 일단 가게 문을 걸어 잠근 채 시위에 나서도 본사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런 부담은 다른 정상적인 점주들에게 돌아가게 된다.프랜차이즈 산업 투자도 위축된다 프랜차이즈 기업의 90% 이상이 중소기업이다. 대기업은 1%가 채 되지 않는다. 가맹점에 대한 가맹본부의 관리 부담이 커지면 당연히 가맹점 확장을 주저하게 된다. 꾸준히 늘고 있던 가맹본부 설립도 감소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은퇴 후 창업을 준비하는 중장년층과 취업 전 단기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도 타격을 입게 된다. 가맹본부도, 가맹점주도 반기지 않는 법안을 ‘본회의 직회부’까지 하면서 요란하게 통과시키려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혹시 양대 노총이 미래의 조합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가맹점주 단체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의 ‘노조’로 인정받진 못한다. 하지만 법적 노조가 아니면서도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산하에 있는 화물연대본부처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국내 유명 공대의 A 교수는 틈만 나면 하는 얘기가 있다. “대학원생 뽑기가 너무 힘들어요.” 우선은 본교 졸업생들의 대학원 지원자가 너무 적다고 한다. 해외 유학, 대기업 취업, 벤처 창업 등 다른 선택지에 비해 국내 대학원은 매력이 떨어져서다. 본교 졸업반 학생을 두고 교수들 간 쟁탈전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다른 학교에서라도 우수 인재들이 와주면 좋겠지만 이마저도 예전 같지 않다. 어렵게 선발한 뒤엔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주며 붙잡아야 겨우 과정을 마친다. A 교수는 “대학원생 기근은 매년 더 심해지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요즘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에 따르면 이공계 쏠림 현상이 점점 심화하는 추세라고 한다. 이공계 쪽 인재풀이 그만큼 풍부해졌다는 뜻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LG전자 등 전통적인 대기업은 물론이고 네이버, 카카오, 우아한형제 같은 새로운 강자들도 이공계 전공자들을 집중 선발하니 그럴 만도 하다. 과학계에서 볼 때 고민거리는 최상위급 인재들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 공학자로 성장해야 할 이들까지도 모조리 의대에 진학하고 있어서다. 전국 40개 의과대학(정원 3058명)이 매년 3000여 명을 먼저 뽑고, 그 후순위부터 서울대 KAIST 등의 비(非)의대가 선발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게다가 대학 진학 후 의대에 재도전하는 반(半)수생들도 적지 않다. 의사라는 직업이 과학자를 이른바 ‘고사(枯死)’시키고 있는 셈이다. 한국연구재단의 10월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피인용 상위 1% 논문’은 2021년 14위였다. 2011년 13위에서 오히려 한 계단 후퇴했다. 중국은 2020년 미국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고, 인도도 2011년 17위에서 2021년 9위로 8계단이나 올라섰다.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동하겠지만, A 교수의 푸념대로라면 한국의 순위는 점차 떨어질 게 뻔하다. KAIST가 내년 시행할 ‘패스트트랙 박사’ 제도가 유독 눈에 띄는 까닭이 여기 있다. 학부를 3년 만에 마치되 3학년 때 대학원(석·박사 통합 과정) 수업까지 듣게 해 박사 학위를 최대한 빠르게 취득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과학고 2학년을 마치고 KAIST에 조기 진학한 학생이라면 만 24세에 박사가 될 수 있다. 의사는 20, 30년 전에도 많은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꿈꾸던 직업이다. 하지만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아이들도 제법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아이들에겐 의사라는 직업의 매력이 과학자를 압도하고도 남게 됐다. 진학률은 거기에서 결정된다. ‘24세 박사’를 키우겠다는 건 쉽게 말해 스타 과학자를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스타는 관심을 부른다. 2년이든, 3년이든 ‘남들보다 먼저’라는 유혹은 과학 영재들의 승부근성을 의외로 강하게 자극한다. 이런 제도 하나가 영재들을 ‘유인’할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작년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필즈상’ 수상은 한국 과학계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골프의 박세리, 야구의 박찬호처럼 ‘허준이 키즈’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더 많은 ‘허준이’를 키워내기 위한 이런 시도들이 반드시 성공해야 한국 과학에도 미래가 있다. 김창덕 산업1부 차장 drake007@donga.com}
지난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2’에서 가장 화제가 된 순간은 로봇개 ‘스팟’의 등장이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뒤를 따라 무대에 오른 노란색의 사족보행 로봇 스팟은 수많은 카메라 셔터에도 긴장한 내색 없이 임무를 마쳤다. 스팟은 그해 4월 경기 화성시의 현대차 남양연구소를 방문한 안철수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에스코트했다. 올해 4월 방한한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단 역시 환영오찬 장소인 서울 신라호텔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게 스팟이었다. 현대차그룹은 2021년 6월 11억 달러(약 1조4300억 원)를 들여 스팟을 개발한 미국 로봇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했다. 2020년 10월 정 회장 취임 후 이뤄진 가장 큰 인수합병(M&A)이다. 스팟은 등장할 때마다 화제를 불러왔지만, 정작 로보틱스 산업에서 진일보한 성과가 나왔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일각에선 “1조 원짜리 안내견”, “로봇사업 주 수입원은 유튜브”(보스턴다이내믹스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319만 명) 등의 우스갯소리마저 나왔다. 스팟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달 싱가포르에서였다. 현대차그룹의 싱가포르글로벌혁신센터(HMGICS)는 스팟을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정식 직원으로 쓴다. 스팟 2대는 각각 방처럼 생긴 작업장인 ‘셀’에서 작업자 1명을 졸졸 따라다녔다. 사람이 작업을 마치면 15장의 사진을 찍고, 곧바로 38개 부품이 제대로 조립됐는지 검사한다. 스팟이 촬영한 이미지가 PC로 옮겨져 인공지능(AI)이 실시간으로 불량을 확인한다고 했다. 정 회장이 “로보틱스는 인간을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던 그대로를 구현하게 된 것이다. HMGICS의 생산혁신은 스팟만이 아니다. 각 셀에서 조립한 차체를 옮기는 건 자율주행로봇(AMR)이다. 공장 전체를 디지털로 복사한 ‘디지털 트윈’을 활용해 생산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실시간으로 찾아 수정한다. 무엇보다 지금의 자동차 산업을 있게 한 컨베이어벨트 방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미래 모빌리티에 대한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도록 셀 방식으로 설계했다. 현대차뿐만 아니라 삼성, LG 등 한국 기업들이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성공 스토리를 써온 건 생산 효율성이 뒷받침돼서였다. 1970∼1980년대는 지금의 동남아시아처럼 저렴하면서도 성실한 노동력이 비결이었다. 1990∼2000년대는 치밀한 공급망관리(SCM)가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국내 인건비는 비싸졌고 각종 노동규제가 발목을 잡았다. SCM은 개별 기업 경쟁력보다 ‘나라의 힘’이 더 중요해졌다. 글로벌 제조업 시장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바이 코리아’의 매력은 점차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 스팟을 제대로 쓰고 있는 HMGICS 출현이 반가운 이유다. 현대차는 HMGICS를 생산혁신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한다고 했다. 여기서 성공하면 국내외 신규 공장들에 적극 도입하겠다는 거다. 컨베이어벨트로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을 집어삼켰던 포드의 성공 스토리를, 한국 기업이 다시 쓰지 말란 법은 없다. 스팟이 그 ‘혁명’의 상징이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김창덕 산업1부 차장 drake007@donga.com}
9일 일명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 3조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경영계가 강력히 반발했고 노동계는 하루라도 빨리 통과되길 촉구했던 법이다. 경제단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반대 성명을 낸 까닭은 무엇일까. 수학 문제처럼 정해진 답을 찾긴 어렵겠지만, 굳이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불확실성’이 아닌가 한다. 합법적 파업의 테두리를 넓히는 것도 두렵지만 ‘모호한’ 조항들 탓에 그 범위가 어디까지 확대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직 ‘대통령의 거부권’이라는 마지막 절차가 남아 있으니 쟁점별로 한번 따져볼 필요는 있겠다. 핵심 쟁점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합법 파업의 조건이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불일치로 인한 분쟁’에서 ‘근로조건에 관한 불일치로 인한 분쟁’으로 바뀐 것이다. ‘근로조건의 결정’은 급여나 근로시간 등에 대한 임금협상과 임금 및 단체협상을 말한다. 이것만으로도 대기업 강성 노조들은 매년 파업을 해왔다. 파업을 하지 않더라도 협상용으로 최소한 파업권은 획득해 왔다. 그런데 ‘결정’이란 단어가 빠지면서 경영적 판단 범위인 채용, 해고, 사업장 이전 등을 놓고도 노조가 파업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법원에서 흔히 쓰는 말로 ‘다툼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노조가 생업을 내팽개치고 거리로 나서는 데 월급만 이유가 되겠나. 나 자신 또는 내 동료가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단체의 이름으로 회사에 목소리를 내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파업이라는 극단적 방법도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기업들은 노조의 경영권 간섭을 우려하지만, 시행령을 통해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두 번째부터다. 노란봉투법은 사용자 범위를 기존 ‘사업주 등’에서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로 확대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은 그야말로 실질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은 단어다. 결국은 재판을 통해 가리겠다는 얘기다. 수년간 많은 판례들이 쌓여야 대략적인 기준이 나올 것이다. 그때까지 산업계는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하청업체 노조원들이 자신과 근로계약을 맺은 회사 대신 원청업체와 임금 교섭을 요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진다. 내게 월급을 주는 사장은 따로 있는데, 그 사장의 고객에게 임금을 올려 달라고 한다는 얘기다. 적게는 수십 곳, 많게는 수천 곳에 달하는 협력업체와 일하는 대기업은 일 년 내내 임금협상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게 된다. 화룡점정은 노조에 손해배상 책임의 ‘면죄부’를 주는 세 번째 쟁점이다. 노란봉투법은 노조의 불법 파업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 사용자 측이 노조원 개인별로 책임의 범위를 일일이 입증하도록 했다. 노조 파업으로 수백억 원의 피해를 입었는데 노조원 A 씨 10억 원, B 씨 30억 원, C 씨 5억 원처럼 개인당 손해액을 발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말라는 거나 다름없다.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불법 행위는 처벌을 받는 게 법치국가의 기본이다. 불법 파업도 마찬가지로 관용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 그 누구도 약자라는 이유로 법을 어길 권리를 준 적은 없다. 김창덕 산업1부 차장 drake007@donga.com}
30일 아시아나항공 이사회가 열린다. 예정대로라면 아시아나항공의 화물 사업을 분리 매각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다. 유럽연합(EU) 경쟁 당국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통합할 경우 일부 여객노선은 물론 화물 사업에서도 경쟁 제한 우려가 있다면서 승인을 보류하고 있다. 한국에서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바르셀로나를 오가는 여객노선은 대한항공이 티웨이항공에 운수권을 넘겨주는 방안이 해결책으로 거론된다. 세부적으로는 EU집행위원회(EC)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있어도 어쨌든 방향성만큼은 정리가 되는 분위기다. 골칫거리는 화물이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우리는 통합에 100%를 걸었다”고 했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배수진을 쳤다는 뜻이다. 그런데 EC는 그냥 도장을 찍어주진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다. 두 항공사가 통합할 경우 화물 고객사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다. 대한항공은 결국 EC 설득을 위해 아시아나항공의 화물 사업 분리 매각이라는 사실상 ‘자해 행위’에 가까운 방안까지 내놨다. 여객, 화물 두 날개 중 하나를 버리고 반쪽만 인수하겠다는 거다. EC는 대한항공에 독점 해소 방안을 이달 말까지 제출하라고 통보한 상태다. 아시아나항공 이사회로서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화물 사업 매각에 반대하자니 2년여를 끌고 온 두 회사 간 통합을 사실상 실패로 몰아갔다는 비판이 두렵다. KDB산업은행은 통합이 무산되면 아시아나항공에 추가적인 자금 지원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홀로 남겨진 아시아나항공이 결국 재기하지 못하면 이사회 멤버들에게 두고두고 ‘책임’이란 꼬리표가 붙을 수 있다. 그렇다고 과감하게 찬성표를 던지기도 어렵다. 화물 사업까지 팔아 회사를 반쪽으로 만들었는데 EC가 또 다른 이유를 들어 승인을 거부한다면 어쩔 텐가. 게다가 EC의 벽을 넘는다 한들 미국 경쟁 당국이란 거대한 산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사회가 이번엔 결론을 내지 않고 결정을 ‘연기’하거나 사실상 ‘기권’할 거란 얘기도 들린다. 아시아나항공은 지난 수년간 정상적인 기업으로서의 활동을 하지 못했다. 미래를 위한 투자는 중단된 채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왔을 뿐이다. 이번 이사회 결정은 아시아나항공의 드라마틱한 반등을 이끌어낼 순 없겠지만, 아주 조금이나마 불확실성을 걷어낼 수 있다. 반면 결정을 미루거나 다른 곳에 공을 넘긴다면 아시아나항공은 그만큼 더 오랫동안 ‘시계(視界)제로’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EU든 미국이든 경쟁 당국은 결국 통합 당사자들보다는 자국의 고객사들을 먼저 고려하기 마련이다. 때에 따라서는 경쟁 관계에 놓인 자국 기업을 노골적으로 보호하려 든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통합이 처음 추진됐던 2020년 정부와 업계에선 세계 7위권 ‘메가 항공사’ 탄생을 기대했다. 3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런 장밋빛 전망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세계 항공업계는 그사이 팬데믹을 통해 얻은 교훈을 발판 삼아 저마다 체질을 개선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이사회가 어느 쪽이든 담대한 결론을 내야 하는 이유다.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김창덕 산업1부 차장 drake007@donga.com}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의 주바일항 인근 킹살만 조선산업단지에는 연간 40척 이상의 선박을 만들 수 있는 사우디 합작조선소(IMI)가 막바지 공사 중이다. 독 3개짜리인 이 조선소의 부지 규모는 약 500만 ㎡(약 150만 평)로 축구장 700개 크기다. 2016년 12월 사우디 국가사업으로 확정된 후 내년 완공 때까지 투입되는 자금만 5조 원에 이른다. IMI는 세계 최대 석유기업 아람코를 포함한 사우디 기업 3곳과 HD현대가 합작해 만든 회사다. HD현대 지분은 20%. 울산에서 세계 최대 조선소를 운영하고 있는 HD현대의 노하우가 중동으로 건너간 것이다. 게다가 2019년 맺은 ‘설계기술 판매계약’에 따라 IMI에서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한 척이 건조될 때마다 HD현대는 기술 라이선스 비용을 챙기게 된다. 1971년 영국 조선업체 스콧리스고로부터 설계도면을 임차해 첫 선박 건조에 나선 지 50여 년 만에 거꾸로 설계기술을 수출하게 됐다. HD현대는 또 2020년 아람코 자회사인 사우디아람코개발회사, 사우디 산업투자공사인 두수르와 3자 합작으로 선박엔진 제조사 마킨(MAKEEN)을 설립했다. HD현대의 독자개발 중형 선박엔진 ‘힘센엔진’의 첫 라이선싱 사업이다. 마킨은 올 6월 IMI 인근 부지에서 착공식을 가졌고, 2025년 양산에 들어간다. 사우디는 1970년대 건설 역군들의 첫 땀이 서린 곳이다. 1976년 현대그룹이 수주한 주바일 산업항 공사는 9억4000만 달러 규모로, 당시 한국 국가예산의 4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한다. 많은 아버지들이 중동으로 건너가 외화를 벌었고, 경제 고속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이제 그 사우디에 건너가는 사람들은 짐을 이고 나르는 대신에 첨단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른바 ‘두뇌 수출’이다. 한국 조선업은 여전히 잘나가고 있다. 수주 호황에 힘입어 ‘빅3’ 모두 3년 치 일감을 확보해 뒀다. 현장 생산인력 부족으로 오히려 수주 속도를 조절할 정도다. 문제는 현재가 아닌 미래다. 국내 생산가능 인력은 나날이 감소하고 있다. 외국인으로 메우는 데도 한계가 있다. IMI와 마킨은 이런 한계를 벗어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른 제조업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대규모 노동력을 투입하는 생산중심 제조업은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1등 공신이지만, 미래 한국까지 책임져주진 못한다. 한 제조업체 임원은 “이제는 완제품이나 반제품을 배에 실어 보내는 대신 그동안 축적해온 기술력을 자산으로 활용할 때가 됐다”고 했다. 이달 중순 삼성 현대자동차 한화 HD현대 등 대기업 총수들이 일제히 사우디를 방문할 예정이다. 사우디 최대 프로젝트 ‘네옴시티’가 가장 큰 관심사다. 단순히 도로를 깔고 건물을 짓는 걸 넘어 대규모 도시를 ‘창조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매력적인 만큼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 수준을 제대로 가늠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제2의 IMI 사례들도 함께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이러한 기술수출이 중동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할 때 한국도 지긋지긋한 저성장 기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김창덕 산업1부 차장 drake007@donga.com}
한국 월별 수출액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8월까지 11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주요 수출 품목들이 일제히 부진을 겪고 있는 탓이다. 반도체 경기 추락으로 ‘대한민국 투톱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그간 보기 힘들었던 성적표를 받아들고 있다. 조선업계 빅3인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은 최근 2년간 수주 호황을 누렸지만, 재무제표에 완전히 반영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정유사와 석유화학회사들은 국제유가 등락에 따라 실적이 들쭉날쭉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한국을 나락에서 구해낸 ‘1등 공신’은 자동차산업이다. 8월만 보더라도 자동차 수출액은 52억9000만 달러(약 7조 원)로 작년 8월보다 28.7%가 늘었다. 14개월 연속 성장세다. 반도체(―20.6%), 석유화학(―12.0%), 석유(―35.3%), 무선통신(―7.8%) 등이 까먹은 걸 그나마 만회해줬다. 기업 실적도 좋다. 현대차의 2분기(4∼6월) 매출은 42조2497억 원으로 작년 동기보다 17.4%가 늘었다. 영업이익은 4조2379억 원으로 42.2%나 뛰었다. 기아의 성장세는 더 가파르다. 매출 26조2442억 원, 영업이익 3조4030억 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각각 20.0%, 52.3% 증가했다. 두 회사 모두 분기 기준 최고 실적을 달성했다. 지난해 상반기(1∼6월)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 반도체마저 없었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라는 자조가 많았다. 지금은 “자동차마저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이 더 자주 들릴 정도다. 그런 자동차의 질주가 잠시 멈출 위기를 맞았다. 브레이크를 잡은 이는 글로벌 경쟁사도, 외부 경영 환경도 아닌 내부의 노동조합이다. 현대차와 기아 노사는 지난해까지 각각 4년 연속, 2년 연속 무분규로 임금 및 단체협상을 타결했다. 그런데 올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산하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자동차지부(현대차 노조)와 기아자동차지부(기아 노조)는 각각 7월과 5월 민노총 총파업에 동참하기 위해 부분파업을 강행했다. ‘정치파업’이 끝난 뒤 이어진 임단협에서도 노사 협상은 삐걱대고 있다. 지난달 말 파업권을 획득한 현대차 노조는 13, 14일 부분파업까지 예고 했었다. 기아 노조도 11일 파업권을 얻자마자 12일 곧바로 쟁의대책위원회를 열어 파업 여부를 논의했다. 매년 임단협에서 파업권을 통해 사측을 압박하는 건 정해진 수순과 같다지만, 올해는 예년과 분위기가 다르다는 얘기가 많다. 두 회사 노조는 특히 ‘정년 64세’를 협상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현재 만 60세인 것을 4년을 더 연장해 달라는 것이다. 사측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다. 무리한 정년 연장은 곧 신규 채용 중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현대차가 올 3월 10년 만의 생산직 신규 채용에 나서자 700명 모집에 수만 명의 지원서가 몰려들었다. 작년 생산직 100명을 뽑은 기아도 그랬다. 현대차의 경우 12일 노사가 잠정 합의했기에 분규 없이 협상을 타결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노조로서도 오랜만에 찾아온 ‘호시절’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는 악수를 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 김창덕 산업1부 차장 drake007@donga.com}
전기전자 소재인 커패시터필름을 생산하는 ㈜삼영이 신규 생산라인에서 전기차 콘덴서용 3.5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 필름을 시험 생산했다고 29일 밝혔다. 전기에너지를 저장하는 데 사용되는 커패시터필름은 가전제품, 재생에너지(풍력, 태양력), 전기차 등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특히 3.5μm 이하 극초박막 필름은 전동화가 진행 중인 전기자전거, 드론, 소형 비행기, 방산용 장비 등에 사용되고 있다. 전기차용 커패시터필름 시장은 일본과 독일 업체가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삼영은 세계 3위 커패시터필름 생산업체로 월 1000t을 생산할 수 있다. 삼영화학공업이 모태였으나 주력 생산품이 포장용 소재에서 커패시터필름으로 바뀌면서 법인명을 4월 ㈜삼영으로 바꿨다.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 소속인 손흥민 선수(사진)가 지난해 한국 경제에 약 5900억 원의 생산 유발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됐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일 발표한 ‘빅리그 스포츠 스타의 경제적 효과’ 보고서에서 이같이 분석했다. 연구원은 지난해 국가 이미지 조사에서 ‘한국’ 하면 연상되는 인물로 3.5%가 ‘손흥민’을 꼽았고, 2015년 영국에 진출한 점을 감안해 연간 인지도 상승률을 0.5%포인트로 봤다. 여기에 국가 인지도가 제품 이용으로 전환되는 비율 48.7%를 곱해 손흥민의 소비재 수출 기여도를 약 0.24%포인트로 추산했다. 지난해 한국의 소비재 수출액은 약 860억 달러(111조 원·2022년 평균 환율 적용)로, 손흥민이 기여한 규모는 약 2700억 원으로 추정됐다. 이는 승용차 약 9800대를 수출한 것과 맞먹는 것이다. 현경연은 이 수출액 증가의 생산 유발 효과는 약 5900억 원, 부가가치 유발 효과는 약 1840억 원 수준으로 산출했다. 현재 손흥민 외에도 영국, 스페인, 독일, 프랑스 등 빅리그를 포함해 유럽에서 뛰는 한국 축구 선수는 17명이다. 현경연 측은 “스포츠를 포함한 한류 성장이 소비재 수출 확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국내 수출 구조의 안정성이 확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공급망은 기업 경영의 기본이다. 가장 적절한 시기에 원자재, 장비, 부품, 인력 등을 확보해 가장 효율이 높은 생산기지에서 제품을 만들고, 고객이 필요로 할 때 적기 공급하는 일련의 과정 하나하나가 기업 경쟁력을 좌우한다. 공급망 관리를 잘하는 기업은 승승장구했고, 그러지 못한 곳은 재고자산과 생산비용 증가에 힘겨워했다. 최근 경제 부문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단어를 꼽으라면 ‘공급망’이 후보에서 빠질 리 없을 것 같다. 개별 기업의 경쟁력이 아닌 국가 간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어서다. 화살의 시위를 당긴 건 미국이다. 첨단기술 부문에서 중국에 대한 견제를 노골화한 게 시발점이다. 미국은 중국을 주요 공급망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한편 자국 내 기업을 유치하고 나섰다. 우호적인 국가들과는 경제동맹체 구성에도 속도를 냈다. 지난해 초 발발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은 이런 미국 중심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한국은 일본, 대만 등과 함께 미국의 행보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한 나라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 때나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시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대기업들은 적게는 수조 원, 많게는 수십조 원의 대(對)미 투자를 발표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해 8월 미 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 시행 후 1년 동안 1억 달러 이상의 관련 분야 대미 투자 발표를 분석한 결과 전체 110건 중 한국 기업이 20건(18%)이었다고 한다. 해외 기업(66건) 중 단연 1위였다. 유럽연합(EU·19건)보다 많고 일본(9건)의 두 배가 넘는다. 그렇다면 한국은 재편 중인 공급망 속에서 영향력이 확대됐을까. 최근 대한상공회의소와 유엔 무역통계를 살펴보니 지난해 반도체 장비 3대 강국(미국, 일본, 네덜란드)의 대한국 수출액은 166억4000만 달러로 전년의 186억9000만 달러보다 20억5000만 달러 줄었다. 그만큼 한국 내 반도체 산업 투자가 줄었다는 의미다. 반도체 경쟁국이자 동맹국으로 엮인 미국(25%), 일본(18%), 대만(13%)이 나란히 증가하는 동안, 한국은(―11%) 집중 견제 대상인 중국(―19%)과 같은 처지로 내몰렸다. 전기차 배터리라고 다르지 않다. 최근 SK온이 1조5000억 원 수준의 국내 설비투자를 발표하긴 했지만,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등 배터리 3사 투자 발표는 대부분 미국 또는 캐나다였다. 한국 기업은 모두 미국으로 몰려가는데, 한국에 투자하겠다는 해외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정책 지원이 이 같은 차이를 만들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에 의거해 527억 달러를 내놓았고, 일본은 대만 TSMC의 반도체 공장 투자액의 40% 이상을 지원하기로 했다. 한미일 정상은 이번 공동성명을 통해 국제질서를 저해하는 주체로 중국을 직접 지목했다. 안보뿐 아니라 경제 측면에서 ‘탈중국’의 시계가 보다 빨라질 수밖에 없게 됐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국 경제가 실익을 챙기려면 지금보다는 훨씬 과감한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 남은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 수 있다.김창덕 산업1부 차장 drake007@donga.com}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훗스퍼 소속인 손흥민 선수가 지난해 한국경제에 약 5900억 원가량의 생산유발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됐다.현대경제연구원은 20일 발표한 ‘빅리그 스포츠 스타의 경제적 효과’ 보고서에서 이같이 분석했다. 연구원은 지난해 국가이미지 조사에서 ‘한국’ 하면 연상되는 인물로 3.5%가 ‘손흥민’을 꼽았고, 2015년 영국에 진출한 점을 감안해 연간 인지도 상승률을 0.5%포인트로 봤다. 여기에 국가 인지도가 제품 이용으로 전환되는 비율 48.7%를 곱해 손흥민의 소비재 수출 기여도는 약 0.24%포인트로 추산했다.지난해 한국의 소비재 수출액은 약 860억 달러(111조 원·2022년 평균 환율 적용)로, 손흥민이 기여한 규모는 약 2700억 원으로 추정됐다. 이는 승용차 약 9800대를 수출한 것과 맞먹는 것이다. 현경연은 이 수출액 증가의 생산유발효과는 약 5900억 원, 부가가치유발효과는 약 1840억 원 수준으로 산출했다. 현재 손흥민 외에도 영국, 스페인, 독일, 프랑스 등 빅리그를 포함해 유럽에서 뛰는 한국 축구 선수는 17명이다. 현경연 측은 “스포츠를 포함한 한류 성장이 소비재 수출 확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국내 수출 구조의 안정성이 확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