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이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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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뮤지컬, 무용 등 공연업계를 취재합니다.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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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2~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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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 투병 10년간 5권의 베스트셀러…첫 로맨스 도전한 ‘스릴러 여제’ 소설가 정유정 [BreakFirst]

    소설가 정유정(58)은 자타공인 범죄스릴러의 대가입니다. 대중에게 페이지 터너(page turner·책장이 술술 넘어갈 정도로 재미있는 책)로 인정받은 악(惡)의 3부작(‘7년의 밤’ ‘28’ ‘종의 기원’) 모두 범죄스릴러 장르고요. ‘고유정 사건’을 모티브로 한 ‘완전한 행복’도 범죄스릴러죠. 적어도 이 장르만큼은 당분간 한국에서 정유정을 넘어설 작가는 없을 만큼 ‘정유정 스타일’은 곧 살벌한 스릴러로 통합니다.그런데 그가 올해 발표한 여덟 번째 장편소설은 전작과는 사뭇 다릅니다. 신작 ‘영원한 천국’에서 처음으로 SF 로맨스에 도전한 겁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합니다.”신작에서 정유정은 자신의 주된 장기를 잠시 내려놨습니다. 흥행이 보증된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이죠. 탄탄한 팬덤을 가진 베스트셀러 작가가 ‘정유정 스타일’에 매료된 독자를 대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건, 어쩌면 신인 작가가 첫 작품을 선보이는 것 이상으로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특정 장르에 천착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맞는 방식을 찾아갈 뿐”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탄탄하게 구축해 온 익숙한 관성을 따르지 않고 낯설지만 새로운 길을 내고 있는 17년 차 소설가 정유정을 〈브렉퍼스트〉팀이 만났습니다. ※소설 ‘영원한 천국’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SF 로맨스에 도전한 스릴러 여제“로맨스를 아주 짤막하게 한 문단으로 써본 적은 있지만 소설의 한 장을 할애해서 길게 써본 것은 처음이고 되게 힘들었어요.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웃음)” 서걱서걱 시신을 토막 내는 과정과 익사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묘사하는 일에도 좀처럼 지치는 법이 없었던(?) 정유정을 녹다운시킨 문제의 로맨스는 어떤 내용일까요. 죽음도 고통도 없는 완벽한 가상 세계 ‘롤라’와 ‘드림시어터’ 그리고 현실 세계 등 여러 차원에서 펼쳐지는 소설 ‘영원한 천국’에는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등장합니다. 경주와 지은, 그리고 해상과 제이인데요. 두 연인은 직업도 나이도 살아온 배경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했던 연인이 사망함으로써 이별과 상실을 맞는다는 것. 네 남녀의 로맨스를 ‘사랑의 상실’이란 주제로 그려낸 겁니다. “(아내 지은의 죽음은) 주인공 경주에게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어요. 주인공이라면 적어도 3번의 시험대에 서야 한다는 것이 평소 제 생각이거든요. 주인공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한 번의 시험으로는 부족하고요. 두 번, 세 번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시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주인공의 자격이 생긴다고 믿어요. 칼에 맞는 것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상실하는 게 더 큰 공포이자 고통이라 생각했고요.”칼 맞는 것보다 ‘사랑의 상실’을 더욱 가혹하다고 여긴 데에는 작가 개인의 경험이 작용했습니다. 간호사로 일했던 20대 초반, 일하던 중환자실에서 간암 투병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겁니다. “주인공이 아내를 잃는 장면을 쓸 때 엄마 기억에 많이 울었어요. ‘엄마를 잃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 ‘그 몇 년을 어떻게 견뎠나’ 생각하며 썼어요. 어떤 상처는 일생을 걸쳐서 무슨 짓을 해도 치료가 안 돼요. 그런 상처는 그냥 상처로 남게 되죠.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고 슬퍼요. 그런데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상실의 상처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게 우리 삶이란 걸요.”정유정의 전작들, 특히 범죄스릴러 소설들은 시공간의 교차나 반전 같은 입체적 구성보다 직선으로 곧게 뻗어가는 전개가 많습니다. 대신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을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에게 소설 속 세계를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한 듯한 즐거움을 선사하죠. 하지만 이번 작품은 결말에 이르러 충격적인 반전이 숨어있을 뿐 아니라, SF 답게 여러 차원의 시공간이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소설의 끝에 심긴 반전까지 읽고 나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1장을 읽고 싶어지는데요. 이야기 군데군데 작가가 심어놓은 퍼즐 조각들을 한데 합쳐 다시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다시 1장을 읽은 후에야 비로소 소설을 완독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계를 확장해 보고 싶었어요. 항상 우리 주변 내지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차원의 이야기를 해왔거든요. 그렇다고 다른 차원의 이야기만 하면 독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죠. 현실과 가상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해 가상 세계에 서사를 만들어 현실과 연결했어요. 그 과정에서 ‘드림시어터’(가상세계로 연결하는 시스템) 같은 장치가 불려 온 것이고요.”“나를 쓰게 만드는 건 욕망”‘영원한 천국’은 정유정의 욕망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2021년 발표한 ‘완전한 행복’에서 자기 행복을 위해 모든 불운의 싹을 제거하려는 나르시시스트의 파괴적 욕망을 다룬 데 이어 ‘영원한 천국’은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지막 욕망에 대한 이야기’(작가의 말)입니다. 욕망은 사회적 통념을 반영하는 단어입니다. 개인주의적 사고를 하는 서구권에서는 욕망을 개인의 자유의지 혹은 열정으로 여기고 이를 독려하는 반면, 관계주의적 사고를 하는 우리나라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타인과의 연대, 예의, 공감을 중요시하죠. 욕망을 불편하고 부정적으로 여기는 시선을 느낀 그에겐 의문이 생겼습니다. “전직이 간호사라 그런지 제 인생사가 작가가 되기엔 느닷없게 보였나 봐요. ‘당신 인생을 여기까지 끌고 온 동력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럴 때마다 제가 ‘욕망’이라고 답하거든요. 그러면 다들 놀라는 표정을 지어요. 욕망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놀랄 만한 뉘앙스를 가진 걸까. 반복해 겪다 보니 ‘욕망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졌어요.”정유정이 17년간 8편의 장편소설을 쓰게 만든 원동력이 바로 ‘욕망’이라는 건데요. 이번 신작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야성’과 유사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욕망의 다른 말이죠. “야성을 다르게 표현하면 개인의 자유의지 또는 공격성이라고 하는데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누구나 자기 삶에선 공격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은 공격성이 사라지는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자기 삶에서의 공격성조차 나쁘게 여기거나 조롱하는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공격성이 필요하다고) 환기하는 게 가치 있는 일이겠구나 싶었습니다.”암 투병 10년, 5권의 베스트셀러커트 머리는 정유정의 시그니처입니다. 신작 발표 때마다 공개석상에 등장한 그의 머리는 언제나 짧았죠. 그런데 이번엔 긴 웨이브 머리를 늘어뜨리고 나타났습니다. 오랫동안 커트 머리를 고수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10년 전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느라 머리를 짧게 잘랐다”고요. “(암 진단을 받고) 처음엔 화가 났어요. 왜냐하면 ‘28’ 초고를 써놓고 이제 막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할 때였거든요.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해야 했어요. 날마다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 6개월 이상이더라고요.”‘암 환자가 됐다’는 현실보다 암 투병으로 집필 활동을 방해받을 것이 염려됐습니다. 치료받으면서 글 쓸 힘이 빠지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이 앞선 거죠. ‘써야 한다’는 욕망이 병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한 겁니다. 10년 동안 방사선 치료 38차례, 추적검사 20여 회, 주사 치료 2년, 약 복용 5년…. 고된 치료 과정에서도 ‘글 쓰는 일상’을 흩트리지 않는 데에 온 힘을 썼습니다.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글을 썼고 오후엔 체육관에서 ‘쇠질’을 했습니다. 날마다 땀 흘린 탓에 방사선 치료를 위해 신체에 그려둔 표식은 매번 지워졌고요. 처음엔 걱정하던 주치의도 결국 두 손 두 발 들었습니다. “오실 때마다 그려드릴 테니 지금처럼 사는 게 환자에게는 좋겠다”면서요. 그래도 암은 죽음을 동반하는 질병인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예 없진 않았습니다. “추적 검사를 앞두고는 불안했죠. 근데 오래가지 않았어요. 결과 듣기 직전에만 불안했어요. 검사에서 ‘괜찮다’고 하면 1년의 시간이 주어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난 1년 동안 안 아플 거니까 괜찮아’ 하면서 (암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어요.”암 투병 10년 동안 무려 5편의 장편소설을 썼습니다. 5권 모두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됐고요. 무시무시하다는 암도, 소설 쓰기를 갈망한 그의 욕망에 완패한 겁니다.3년 후엔 ‘무서운 언니’로 돌아온다정유정은 독자에게 두 개의 애칭으로 불립니다. ‘무서운 언니’와 ‘다정한 그녀’. 작가로서 두 개의 자아가 있다는 의미인데요. 인간의 파괴적 욕망을 다룬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완전한 행복’이 ‘무서운 언니’가 쓴 것이라면, 성취적 욕망을 다룬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내 심장을 쏴라’와 ‘진이, 지니’ ‘영원한 천국’은 다정한 그녀가 쓴 겁니다. 무섭고도 다정한 그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이냐고요. “‘내 심장을 쏴라’예요. 전 20대가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동생 두 명을 건사하기 위해 가장으로 살면서 제 인생을 살지 못했어요. 영영 탈출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살았고요. 힘들었던 청춘에 대한 은유가 ‘내 심장을 쏴라’예요. 분투하는 20대 청춘 그리고 지나간 제 청춘에게 바치는 소설입니다.”흔히들 작가의 전성기는 50, 60대라고 말합니다. 3년에 한 권씩 신작을 발표하는 그의 패턴으로 미루어봤을 때 올해 58세인 그의 차기작은 전성기의 한가운데 발표할 작품일 겁니다. “‘영원한 천국’ 마지막 문장에 낯선 이름이 나오는데, 차기작의 주인공 이름이고요. 이번엔 ‘다정한 그녀’였으니 다음엔 ‘무서운 언니’로 돌아와 공포 스릴러 소설에 처음 도전해 보려 합니다. 앞자리가 바뀌는 만큼 40, 50대 때 썼던 소설보다는 조금 더 성숙하고 깊은 의미,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렇게 된다면 너무 감사한 일이고, 아니라면 반성하고 들어가서 더 잘하겠습니다.(꾸벅)”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아침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뉴스레터에서는 인터뷰 영상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다른 영상도 보기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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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이 情 많은 이유는 밥 때문?[교양의 재발견]

    지난 한 주간 동아일보 신문 지면에 나온 전문가들의 지식 교양 콘텐츠를 소개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한 주간의 지식 교양 콘텐츠를 뉴스레터()로 받아보세요.1. 🍚 정 많은 한국인, 이유가 밥 때문?한국인들이 유독 정(情)이 많은 이유가 뭘까요. 권대영 한식 인문학자는 밥을 주식(主食)으로 먹는 식문화가 한국인의 정서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오래 저장할 수 있어서 시장화되기 쉬운 빵과 달리, 밥은 쉽게 상하고 따뜻하게 먹어야 맛있기 때문에 즉석에서 나누고 대접하는 문화가 발달했다는 겁니다.▶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기사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2. 🤴 김영민 교수가 묻습니다. 승리란 무엇인가승리(勝利)란 무엇인가.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널리 알려진 김영민 서울대 교수가 이번에는 다양한 관점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인가’에 관해 탐구합니다. 승리자를 직관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강력한 통치자였던 티베리우스 황제를 떠올려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영광을 누리던 황제도 죽은 뒤엔 무엇이 남았을까요. 어쩌면 월계관을 쓴 황제를 집어삼킨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가 아닐까요.▶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기사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3. 🐟 잉어와 가물치, 임산부에겐 최고의 음식한의학에서 잉어와 가물치는 임산부에게 도움이 되는 약식(藥食)입니다. 하늘로 뛰어오른 기운과 죽어서도 번쩍거리는 비늘은 잉어의 양기(陽氣)를 상징하고, 물 아래 진흙탕을 향해 파고 들어가는 가물치는 대표적인 음(陰)의 식재료입니다. 양극의 기운 가진 두 물고기가 인고의 출산을 거친 임산부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분석했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기사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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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장장이가 되겠다는 11살 아들,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BreakFirst]

    초등학교 졸업하면 중학교에 가고, 중학교 졸업하면 고등학교, 고3 그리고 수능, 대학 입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아이가 당연하게 밟는 경로입니다. 의무교육을 포함한 이런 과정은 모든 이에게 두루 맞도록 설계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에겐 맞지 않을 수도 있죠. 가령 대장장이가 꿈인 아이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학교에서 수학의 정석을 펼쳐 놓고 앉아 있는 시간만큼, 대장간에서 망치질과 담금질 배우는 시간도 충분히 필요할 겁니다.대장간을 학교 다니듯 ‘통학’해온 용감한 청년이 있습니다. 올해 스무 살이 된 대장장이 이평화 씨입니다. 전북 진안군 선암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유튜브에서 처음 대장장이란 직업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고는 “대장장이가 되겠다”며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가 아닌 대장간으로 향했습니다.또래 친구들은 학교에 다닐 때 이평화는 집에서 한참 떨어진 충청남도 부여의 ‘보은대장간’에서 기술을 배웠습니다. 집에서 통학하기엔 먼 거리였죠. 시외버스로 왕복 10시간이 넘게 걸렸거든요. 대장간 근처에 자취방을 구해 혼자 살았습니다. 당시 그는 15살이었습니다.대장장이가 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멋있네. 잘 선택했다’ 하셨어요―기술을 배우기 위해 타지에 혼자 살겠다는 결정은 본인 스스로 내린 건가요?“대장간이 제겐 학교나 다름없었어요. 학교는 매일 가야 하는 곳이고, 집에서 머니까 기숙사 생활하듯 자취하게 됐어요.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어요. 부모님께서 자취방도 구해주셨고요.”―어린 나이에 그런 결정을 내린 평화 씨도 대단하지만 아들의 결정을 믿고 지지해준 부모님도 범상치 않으신데요.“11살에 처음 부모님께 ‘대장장이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해주셨어요. ‘멋있네, 좋은 직업 같다. 평화 너는 만드는 걸 좋아하니 직업을 잘 선택했다’고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년 정도 지나니까 아버지께서 ‘대장장이가 되려면 기술을 배워야 하지 않겠냐’고 하셨어요. 직접 지인을 통해서 대장간을 알아봐 주셨어요.”―보통 ‘대학 가면 다 할 수 있으니 대학부터 가라’고 하는 부모님이 많을 것 같은데요.“제 부모님은 무조건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공부에 흥미가 있고 잘하는 게 아닌 이상 무작정 학교만 갈 필요는 없다. 기술을 배울 거면 지금부터 시작하라고 하셨어요. 만약 제가 공부해서 대학에 간다고 했어도 지지해주셨을 거예요.”―‘관성을 깨는 교육관’을 가지신 분들이네요.“저도 가끔 이 사람들(부모님)이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요.(웃음)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이것저것 여러 직업을 가졌던 분이에요. 책도 엄청나게 읽으시고요. 붕어빵 장사, 벌목, 목수… 여러 일을 하면서 갖게 된 교육관이 있으세요. 아버지는 ‘너 알아서 해라’ ‘간섭하지 않겠다’ 하시고 뒤에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거든요.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게 해주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게 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의 교육관이 저한테 딱 들어맞았고요. 운이 좋은 편이죠.”―나중에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다면 부모님 같은 교육관을 본받고 싶으신가요?“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피앙세와 대화를 많이 나눠야겠죠?(웃음) 피앙세도 동의한다면 저 역시 부모님이 제게 해주셨던 대로 하고 싶어요. 전 부모님을 존경하거든요.”나를 믿는다는 건 자부심, 약간의 오만함, 그리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낙관입니다.‘남들만큼 하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남들과 다르게 사는 건 중간도 못 갈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규격에서 벗어난 삶’을 실천에 옮기려면 그만큼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익숙한 관성을 깬다는 건 안정을 버리고, 미지의 불안을 끌어안는 일이니까요. 20년 남짓이지만 그가 살아온 길도 그랬습니다.―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텐데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이 궁금합니다. “쇠를 다루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쇠의 물성을 터득한다고 할까요? 쇠마다 특징이 다르거든요. 탄소 함량에 따라 강한 쇠가 있으면 무른 쇠가 있고요. 달군 상태에서 물에 넣었을 때 깨지는 쇠가 있고 휘는 쇠가 있어요. 쇠는 그 성질에 따라 다루는 기술이 다 다르고… 정말 신기하고 재밌어요.”―‘이렇게 살다가 망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종종 하는 생각이에요.(웃음) ‘뭐 먹고 살지?’ 이런 생각을 하긴 하는데…. 결국 ‘어떻게든 먹고 살지 않을까’로 귀결되더라고요. 부모님도 저와 제 선택을 지지해주시고요. 그리고 저는 저를 믿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 깊게 빠지진 않아요.”―나를 믿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나는 뭘 해도 되겠지’라는 약간의 오만함, ‘뭘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입니다. 15살 때 대장간 일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정도의 확신은 없었어요. 근데 몇 년 지나면서 실력이 쌓였고 이젠 이 정도 기술이면 뭘 하든 먹고 살 순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죠. 그렇다고 해서 전 아직 대장장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에요. 스승님들에 비하면 한참 멀었어요.”―‘먹고 살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법니까?“지금은 수입이 있다고 하기 민망한 수준이에요. 전문적으로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도 아니고 기초부터 배우는 단계거든요. 아, 얼마 전 제가 ‘유퀴즈’에 출연했는데요, 그 방송 보시고 연락해 와서 이런저런 물건 만들어줄 수 있냐고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칼이나 호미, 망치 같은 것들요. 용돈벌이 수준이에요.”스무 살 대장장이의 하루는 단조롭습니다. 해가 중천으로 향해갈 오전 11시쯤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오후가 되면 마당으로 향합니다. 마당엔 닭장을 개조해 만든 그의 작업장이 있거든요. 화덕에 불을 피우고 쇠를 녹이고 망치로 열심히 두들깁니다. 그러다 보면 뭉툭한 쇳덩어리에서 이런저런 모양이 모습을 드러내죠. 보통은 오후 7시에 ‘칼퇴’하지만 작업이 조금 길어진다 싶으면 저녁 9시, 10시까지 머무릅니다.―이제 막 대학 신입생이 된 또래 친구들과는 사뭇 다른 일상이네요.“다를 거 없어요. 친구들이 학교 가는 대신 저는 대장간에서 공부하는 거예요.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쉬는 날을 제가 정할 수 있어요. 쉬고 싶으면 그냥 쉬거든요.(웃음) 방학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여행 가고 싶으면 여행도 하러 가고요. 주말엔 친구 만나러 시내도 가요.”―초등학교 졸업 후 홈스쿨링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고 들었어요. 친구들이 학교 이야기하면 소외감을 느끼진 않나요?“사실 친구가 별로 없긴 해요.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그런 걸 수 있지만 제가 나고 자란 곳이 시골이라 애초에 또래가 많지 않아요. 가끔 친구들이 학교 이야기를 할 때가 있어요.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라 그런지 신기하고 재밌더라고요. 친구들 덕분에 ‘학교가 이런 곳이구나’ 알게 되는 게 많아요.”―후회한 적은 없으세요?“어릴 때부터 학교 다니는 걸 싫어했거든요.(웃음)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후회한 적은 거의 한 번도 없었어요. 대장간 일을 배우는 게 너무 재밌거든요. 하고 싶은 일에만 완전히 집중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내가 하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되니까요.”쇠는 여자친구 같아요. 너무 좋다가도 권태로울 때도 있고. 지루할 틈이 없어요.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만, 지금 그의 마음에는 온통 ‘쇠질’ 뿐입니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대장간에 출근해, 쇠를 녹이고 모양을 내고 망치질하는 일에 빠져 있습니다. “쇠가 여자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할 정도로요.―쇠가 여자친구 같다니 표현이 재밌네요. 어떤 의미인가요?“평소엔 작업하는 게 너무 좋은데 (작업 과정이) 틀어지면 완전 하기 싫어질 때가 있어요. 너무 좋다가도 권태가 찾아올 때도 있고, 저를 정말 화나게 할 때도 있고요. 제가 이 일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작업의 상태에 따라 제 감정을 쥐락펴락해요.”―대장장이의 일이란,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일이잖아요. 지겨울 땐 없나요?“밖에서 보면 반복적인 작업 같아 보여도 망치칠마다 정말 달라요. 망치질 할 때 쇠가 어떻게 변하는지 계속 느낄 수 있거든요. 망치를 잘못 때려서 실수하면 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다른 곳을 때려야 하고, 이런 걸 계속 생각하면서 일하다 보면 어느새 모양이 완성돼있어요. 질감과 색깔, 온도도 다 달라요. 쇠의 물성이 달라지는 과정이거든요. 지루할 틈이 없어요.”제품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이평화는 자신의 SNS와 유튜브 채널에 자신을 ‘제품보단 작품을 만들고 싶은 대장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술자, 장인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예술가가 되는 것이 그의 목표입니다. 대장장이 이평화는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13호 유동렬 야장전수자에게 대장간 기술을 사사했습니다. 지난해 문화재수리기능 양성과정을 수료했습니다.―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나요?“기술을 배워서 제품만 만들면 기술자가 돼요. 하지만 저는 생각과 가치관을 담아낸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기술자라기보단 예술가로 사는 게 꿈이에요. 그러려면 지금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책도 많이 읽어야겠고요. 근데 기술이 없인 작품을 만들 수 없잖아요. 머릿속으로 만들고 싶은 것들을 만들려면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기술 배우는 데에 집중하고 싶어요. ‘좋은 대장장이’가 먼저 되어야죠.”―‘좋은 대장장이’는 어떤 사람인가요? “일단 제가 ‘좋은 대장장이’라고 아직은! 말씀 못 드립니다. 제 스승님들이야말로 좋은 대장장이예요. 그분들 이야기를 해보자면, 일단 일에 대한 자부심이 커야 하고요. 일을 무척 사랑해야 해요. 실패했을 때 바로 주저앉지 말고 의연하게 넘어갈 수 있어야 하고요.”―어린 나이에 적성과 꿈을 찾았다고 부러워할 것 같아요.“저는 되게 운이 좋았어요. 만약 유튜브에서 대장장이란 직업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냥 학교에 다녔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농사짓는 농부가 될 수 있었던 거죠. 잘 맞는 직업을 어린 나이에 찾았고, 지지해주는 부모님이 계셨고,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네요.”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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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의 60년 전통 전구회사, 뉴욕에 진출하다 [BreakFirst]

    ‘인류가 발견한 두 번째 불.’ 100년 넘게 인류의 밤낮을 밝혀온 백열전구는 2000년대 이르러 명맥이 끊깁니다. LED(발광 다이오드) 조명 보편화로 수요가 급감했고, 2007년 주요 8개국(G8) 정상이 에너지 효율이 낮다는 이유로 가정용 백열전구의 생산 중단을 결의했습니다. 2008년 우리 정부도 ‘2014년부터 가정용 백열전구의 생산과 수입을 금지한다’고 발표합니다. 60년 가까이 백열전구를 만들던 대구의 작은 공장 일광전구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습니다. 매출 대부분이 정부 규제로 날아갈 판이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전구 회사처럼 LED 제품 생산으로 사업을 전환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김홍도 일광전구 대표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공산품이 아닌 예술품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전구 회사가 하루아침에 ‘조명 기구 회사’로의 전환을 선언한 겁니다. 물론 단순 작업에 익숙했던 회사와 직원들을 바꿔 가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일까요. 인스타그램에서 일광전구 제품은 ‘예쁜 조명’으로 유명합니다. 올해는 미국 뉴욕의 유명 디자인 편집숍에도 갑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일광전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느리지만 완전한 혁신’을 이뤄내는 중이라고 평가합니다. “질풍노도를 겪고 있는 거죠.” 긴 세월 공장을 지켰던 직원들과 함께.우물에 빠지면, 바닥을 쳐야 올라간다―만드는 물건이 달라지면 생산, 유통 방식뿐 아니라 직원들의 사고방식, 조직 문화까지 바뀌어야 할 텐데요. 어떤 것이 가장 크게 변했습니까?일광전구의 ‘코어’를 다시 정립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의 미션과 비전, 핵심 가치를 재정의했습니다. 광원(光源·빛을 내는 물체)을 만드는 것이 아닌 빛 그 자체를 구현해야겠다는 거죠. 변화는 단계적으로 진행됐습니다. 처음엔 장식용 전구 판매는 허용된다는 점에 착안해서 주력 제품을 장식용 전구로 전환했습니다. 1879년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전구를 본뜬 클래식 전구를 내놨습니다. 처음 시장의 반응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클래식 전구 특성상 저작권이 없었기 때문에 비슷한 디자인의 값싼 중국산 제품과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시장의 외면을 받았습니다.결국 2014년은 다가왔습니다. 클래식 전구를 포함한 여러 장식용 전구가 팔렸지만, 대량으로 판매하던 가정용 백열전구의 매출을 대체하지 못했습니다. 80억 원을 웃돌던 연 매출이 2020년 그야말로 바닥을 쳤습니다. ―LED 전구 생산으로 전환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나요.아닙니다. LED 시장은 원가 싸움이 될 거라 예상했습니다. LED 전구는 축적된 노하우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부품을 가져와 조립하는 단순 작업이죠. 자재만 있으면 가정집에서도 만들 수 있습니다. 원가 싸움에서 중국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지금 상황을 보면 국내에서 LED 전구를 생산하는 업체는 거의 없습니다.―매출 하락으로 직원들이 불안해하진 않았습니까? 내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물에 빠지면 바닥을 쳐야 올라간다’는 겁니다. 직원들에게는 ‘우리 곧 치고 올라가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동안 벌어놓은 게 있기 때문에 까먹어도 이 정도는 버틴다’라고 했습니다. 업의 종류는 달라도, 원리를 파고 들어가면 비슷한 영역이 많습니다.―직원들은 익숙한 업무를 중단하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데요. 시행착오는 없었습니까.한동안 과거의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더군요. 그럴 땐 기다려야 합니다. 나는 그걸 ‘가랑비 작전’이라 불렀습니다. 회사의 골격을 바꾸는 10년 동안 반복해 이야기했죠. ‘일광전구는 새로운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저 길로 가야만 회사가 산다. 여러분도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 조금씩 스스로 해봐라. 모르면 자료를 보고 공부해라. 스스로 습득하자’라고요. 직원들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끔 유도했습니다.―업종을 바꿔야 하는 회사의 사정과 직원들이 새로운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는 다른 문제 같기도 합니다. 두 업종 간 연관성을 찾아 인력을 재배치했습니다. 예를 들어 꼼꼼함이 ‘억수로’ 중요한 품질관리를 담당했던 직원은 조명 개발을 총괄하는 개발팀장이 됐고요. 자재 수급을 담당하던 총무팀장은 고객관리와 고객서비스(CS)부서의 관리팀장이, 생산과 조립을 담당하던 생산과장은 자재관리팀장이 됐습니다. 업의 종류는 달라도 일의 원리를 파고 들어가면 비슷한 영역이 많습니다.한쪽에서 가랑비에 옷 젖을 듯한 조용한 혁신이 이뤄지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내부의 변화를 촉진할 ‘메기’가 투입됩니다. 회사에 디자인팀을 신설하고 외부 인력인 권순만 제로식스포 디자인 스튜디오(zerosixfour design studio) 대표를 팀장으로 영입해 전권을 부여한 겁니다.―‘굴러들어온 돌’의 주도로 회사를 바꿔나가니 직원들 반발이 컸을 것 같습니다.무척 많이 싸웠습니다.(웃음) 내가 머리가 아플 정도였으니까요. 30년 동안 함께 일했던 저 친구가 그만둬야 하나, 아니면 이 친구(권순만)가 새로운 일광전구를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판단을 포기해야 하나.―신구 인력의 협업을 이끌어낸 방법이 궁금합니다. 권 팀장에게는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한 가지 일만 해왔다. 소품종의 품목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했던 직원들은 결재 내려가는 대로 일했다. 그러니 대표인 나를 통해 직원들에게 일을 지시해주면 좋겠다’고요. 처음엔 삐걱댔지만, 시간이 지나니 돌이 마모되듯 둥글둥글해지더라고요. 이제는 양측 모두 서로의 역할을 이해합니다. 큰 다툼 없이도 손발이 척척 맞게 됐죠.대립이 그뿐이었을까요. 2016년에는 권 팀장과 김 대표가 대립합니다. 당시 일광전구는 권 팀장 주도로 조명 기구 시리즈 IK를 출범했는데, 당장 큰 폭의 매출 증가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권 팀장은 회사가 상승세로 접어들었다며 “탄력이 붙을 수 있게 투자와 인력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그때 투자를 지연했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하시나요.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2세고요. 아버님 어머님이 물려주신 기업을 잘 다듬어 후대에 물려주는 것도 제 의무입니다. 내겐 일광전구의 ‘생존’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기업의 생존에 관해 나름의 경험칙이 있었습니다. ‘사업은 흐름을 타야 한다’는 겁니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넘쳐흐를 때 말은 강물에서 빠져나가려 물을 역류하다가 죽습니다. 하지만 소는 흐름을 타고 하류의 육지로 내려가 살아남거든요. 일광전구를 살려줄 흐름이 곧 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흐름. 인류의 단절과 고립을 일으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일광전구엔 기회가 됐습니다. ‘집콕’ 시대에 사람들은 집을 한층 따뜻하게 만들어줄 조명을 찾았습니다. 일광전구가 7년간 생산해온 제품들이 빛을 보게 된 겁니다. 연간 2만 개 이상의 판매량을 올리는 일광전구의 스테디셀러 ‘스노우맨’이 대중의 주목을 받은 것도 그때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흐름을 기다린 대표님의 결정이 맞아떨어졌습니다.당시의 결정이 꼭 맞았다고 볼 수는 없죠. 그때 과감한 투자 결단을 내렸다면 (일광전구가 빛을 보는) 때가 더 당겨질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효율적인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다른 업종으로 전환한 일광전구가 과거와 현재의 교집합으로 삼은 건 ‘빛’입니다. 디자인 조명 기구를 팔기 시작한 일광전구가 새롭게 정한 슬로건은 이렇습니다. ‘We make Light(우리는 빛을 만듭니다).’ 일광전구는 2016년부터는 매년 개발한 신제품으로 리빙 디자인 페어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미국 뉴욕의 유명 디자인 편집숍에서도 일광전구의 조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존에 가보지 않은 길을 매일 같이 가야 하는데, 자신감의 근거가 궁금합니다. ‘광원’을 만들던 회사가 조명 기구를 만든 사례가 없잖아요. 조명 강국인 이탈리아, 북유럽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두 디자인에서 시작했지, 빛을 다뤘던 회사는 없어요. 일광전구는 60년 동안 빛을 만들고 연구해온 업력이 있습니다. 빛을 구현하는 일에는 자신이 있을 수밖에요. 지난해 매출이 2014년과 엇비슷해졌어요. 미국, 일본 등으로 본격적으로 수출하는 올해는 그보다 훨씬 상승할 것으로 자신합니다. ―25년 전 선대 회장께 물려받은 일광전구와 지금의 일광전구는 완전히 다른 회사입니다. 미래의 일광전구를 그려보신 적 있습니까. 영원히 백열전구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이 세우신 회사에서 오랫동안 전구를 만드셨고 저 또한 20년간 전구를 만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전구의 시대는 저물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일광전구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전구를 만들든 조명 기구를 만들든 내 업의 본질은 빛입니다. 인류의 시야를 밝혀주고 온기를 전해주는 모닥불 같은 빛. 일광전구의 처음과 끝은 빛으로 통할 겁니다.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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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기 결혼, 10억 원의 빚… 그럼에도 낸시 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 [복수자들]

    고양이 인형을 어깨에 얹고 ‘키티 섹시 낸시 앙’을 외치는 발랄한 여성이 있습니다. 이 문장만 보고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팝 아티스트 낸시 랭입니다. 20년 전부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온 그를 방송인으로 아는 이도 많지만 낸시 랭의 본업은 ‘팝 아티스트’입니다. 7년 전 사기 결혼 피해를 겪고 인생의 위기에 봉착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팝아트’라고 합니다. 가정 폭력, 불법 촬영물 협박 등 누구보다 가혹한 고통을 겪은 그가 전 세계 여성을 위로하는 ‘스칼렛’ 시리즈를 선보인 데에 이어 올여름엔 ‘스페이스 아트’를 주제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삶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해 살아갈 힘을 얻게 된 낸시 랭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2023년은 ‘팝아티스트’로서 바쁜 한 해였습니다. “올여름 ‘스페이스 아트’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백남준 선생님이 비디오 아트를 창시했다면 낸시랭은 스페이스 아트를 창시하겠다는 목표로 야심차게 준비한 전시입니다. 누리호에 탑재된 큐브 위성을 개발한 연구팀을 이끈 한국항공대 오현웅 교수(항공우주 및 기계공학부)와 ‘나라 스페이스’ 박재필 대표와 협업한 전시였어요.”―‘스페이스 아트’는 낯선 장르인데요, 처음 착안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말 그대로 우주와 팝아트를 결합한 예술의 한 장르라고 생각해주심 돼요. 우주와 팝아트를 접목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2년 전 누리호 1차 발사 실패 때였어요. 우주 산업은 과거엔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잖아요. 하지만 최근엔 우주 산업이 점점 민간으로 넘어오고 있어요. 일론 머스크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죠. 국가라는 소수 권력이 점유했던 우주 기술을 점점 민간으로 넘어오는 현상이, 대중적 이미지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오는 ‘팝아트’ 정신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했어요.”대중적으로 널리 소비된 이미지를 차용해 예술 작품으로 승화하는 ‘팝아트’는 미국의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으로 국내에 알려진 현대미술의 한 장르입니다.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낸시랭이 전공과 무관한 팝아트를 선택한 건 그것이 대중적이고 상업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술과 대중, 상업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 팝아트에 매료된 이유는요? “우리가 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대중적인 오브제를 활용해, 자신의 생각을 담아 작품으로 표현한 게 ‘팝아트’라는 장르예요. 이미 대중들의 눈에 익은 어떤 이미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상업적이고 가장 대중적이죠.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어요. 팝 아트는 예술 앞에서 계급과 계층, 성별과 나이 등의 경계를 허물어 줍니다. ‘그들만의 예술’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예술’을 지향하죠.”낸시랭이 팝아티스트로서 첫발을 뗀 건 2003년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당시 한국 대표로 선정되지 못하자, 산 마르코 대성당 앞에서 빨간 속옷을 입고 바이올린을 켜는 퍼포먼스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2006년 8월 KBS ‘인간극장’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병행하는데요, 당시엔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방송에 출연한 건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지금이야 연예인 아닌 일반인들도 방송에 많이 나오지만 2000년대 초반 낸시랭이 처음 방송에 나왔을 때는 파격적이었어요. “그때 욕을 엄청 많이 먹었어요. 당시만 해도 가수, 배우, 앵커, 개그맨 같은 사람만 텔레비전에 나왔거든요. 사람들은 연예인도 아닌데 왜 방송에 나오냐면서 엄청난 욕과 악플에 시달렸어요. 근데 지금은 보세요. 의사, 변호사, 심지어 일반인들도 다 TV에 나오잖아요. 선구자적인 무언가를 시도했다고 생각해요. 처음이었기에 욕을 많이 먹었던 거죠.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생계 문제도 있었어요. 돈을 벌지 않으면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죠. 방송을 한 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어요.”―20여년간 26회의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셨어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낸시 랭을 예술가 보다는 방송인, 구설수로 알고 있어요.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그땐 아날로그, 흑백TV의 시대였는데요,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1968년 전시 브로셔에 직접 쓴 문구) 앤디 워홀은 그 시대에 그런 혜안을 가졌을 정도로 시대를 앞선 아티스트였어요. 근데 앤디 워홀의 인생을 보면 할리우드 스타급으로 파파라치, 스캔들, 구설수, 화제를 몰고 다녔단 말이에요. 지나고 보면 저의 인생 궤적도 비슷한 평가를 받을 거라 생각해요.”―보통 작품 활동하실 때 영감은 어디에서 받나요. “삶의 특정한 순간, 저의 내면 깊숙이 꽂힌 아이디어에 충실한 편이에요. 팝아트 작가라고 해서 팔릴 만한 작품만 하진 않아요. 저의 꿈, 상상력, 시대의 문제, 철학…. 모든 게 영감이 될 수 있어요. 최근의 제가 ‘우주’에 꽂혀있는 것처럼요.”팝 아티스트로 승승장구하던 낸시랭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온 적도 있습니다. 2017년 사기 결혼 피해를 당한 것인데요. 당시 낸시랭이 당한 사기 결혼 사건은 세간을 뜨겁게 달궜고 하루에도 100건 이상의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이 일로 그에겐 마음의 상처뿐 아니라 10억 원의 빚까지 생겼습니다다.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할 정도로 괴로웠다는 그가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팝아트 덕분이었습니다. 가정 폭력, 불법 촬영물 유포 협박 등의 피해를 겪은 낸시 랭이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스칼렛’ 시리즈를 2020년 선보인 겁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터키 이스탄불, 미국 마이애미, 싱가포르 등에서 전시를 열었습니다. ―‘스칼렛’ 시리즈에 담긴 의미가 궁금합니다. “스칼렛은 채도가 굉장히 높은 빨간색을 뜻하는 말인데, 데미 무어가 주인공인 영화 ‘스칼렛’이 있어요.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상영할 때 ‘주홍글씨’로 번역됐어요. ‘낙인찍히다’는 의미죠. 영화 속 주인공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여성인데 마녀사냥을 당하고 낙인이 찍힌단 말이에요. 제가 사기결혼과 여러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몰아쳐 왔었어요. 그때의 전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했을 정도로 암담한 고통 속에 있었거든요. 그때 처음 진지하게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당한 일들, 저 혼자 당한 게 아니더라고요. 같은 고통을 겪은 전 세계 여성들을 떠올리며 작업했어요.”―‘스칼렛’을 전 세계에 선보인 이유는요? “각 나라의 문화와 법이 다르잖아요. 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떤 나라에선 가해자를 처벌하지만 어떤 나라에선 피해 여성에게 더 큰 벌을 주곤 해요. 각 나라의 문화, 관습, 법이 달라서 옳다 그르다 말할 순 없지만 예술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른 인종, 관습, 문화를 가졌음에도 ‘이건 잘못된 것이다’라는 양심이란 게 있지 않을까. 그걸 건드리는 게 예술의 역할일 거예요. 사람들이 저의 작품과 퍼포먼스를 통해 본인 스스로의 양심을 들여다보고 판단하고 생각하게 하고 싶었어요. ‘스칼렛’은 제게 정말 중요한 작업이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예술이 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어요.”―작품을 통해 회복, 치유를 경험하신 거네요.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가 너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만 매몰된단 말이에요. 주변에서는 가만 놔두질 않죠. 끝없는 고통 속에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어요. 다행히 옆에서 절 붙잡아주고 도와준 고마운 지인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죠. 1초가 100년처럼 너무 길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어요.”―10억원의 빚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계시거든요.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데 원금은 1원도 못 갚았어요. 매달 천만 원 넘게 나가는 이자를 갚고 있어요. 제가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고, 고정 수입이 없는 예술가가 감당하기 너무 버겁죠. 전시회에서 작품이 모두 팔려도, 그 돈을 제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다 이자 갚는 데만 다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의욕이 꺾이는 시기가 있었어요.”―지금은 극복하셨나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가 쓰지도 않은 사채 이자 갚느라 6년, 7년을 살았는데 원금은 하나도 못 갚았잖아요. 작품이 잘 팔려도 행복하지 않고 저는 써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빼앗기니까…. 한동안은 너무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적이었어요. 이게 언제 끝날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해요. 원금은 한 푼도 못 갚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난 6년간 매달 1000만 원 이상의 돈을 벌었다는 뜻이잖아요. ‘낸시랭 정말 열심히 살았다’ 이렇게 다독여주고 싶어요. 앞으로도 씩씩하게 살아갈 거예요.“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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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만의 ‘원 픽’ 브라이언이 청소에 미친 이유[복수자들]

    “더러우면 싸가지 없는 거예요.” 다소 과격한 소신 발언으로 인기몰이 중인 이가 있습니다. 그는 청소 하나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브라이언(42)입니다. 그는 브레이브걸스 유정의 더러워진 자동차 창문 틈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희열을 느끼고, ‘옷 무덤’이 된 걸그룹의 숙소를 보고는 두 눈을 희번덕이며 “What the hell”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청소가 취미이자 특기인 브라이언은 ‘청소광 브라이언’이라는 유튜브 콘텐츠로 그야말로 ‘떡상’했습니다. 브라이언이 집에서 청소기를 밀고 세탁기를 돌리는, 그야말로 청소‘만’ 하는 모습을 담은 청소광 1화는 한 달 만에 조회수 320만 회를 넘었습니다. ‘청소 하나로 이렇게 웃긴 사람은 브라이언밖에 없다’ ‘첫 방송 보고 화장실 청소했다’는 댓글이 쏟아집니다. ‘청소 예능’이라는 전무후무한 장르를 개척한 브라이언은 한 때 소녀팬을 몰고 다니던 실력파 아이돌이었습니다. 1999년 환희와 함께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데뷔한 그는 ‘Sea of love’ ‘Missing You’ ‘중력’ ‘습관’ ‘남자답게’ ‘가슴 아파도’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사랑받았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이면도 있었습니다. 예민한 성격인 그는 무대에 오르고 예능에 출연하는 매 순간 긴장과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멤버 환희와는 ‘친하면 열애설, 안 친하면 불화설’이 났습니다. 안티팬들의 스토킹과 협박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달고도 썼던 가수 시절을 지나, 그는 ‘미국 청소 아저씨’로 인생 2막을 시작했습니다. ‘찐광기’를 뽐내며 예능 블루칩으로 떠오른 그에게 방송, 유튜브 할 것 없이 섭외 연락이 쏟아집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가 넘어서까지 촬영 3~4개가 잡혀 있는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그가 에너지를 잃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청소에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전 국민이 청소하는 그날까지” 청소의 이로움을 전파하겠다는 브라이언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청소광’에 이어 ‘키스광’도 노린다는 그의 속셈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소로 제2의 전성기를 맞으셨어요. 첫 화 ‘청소광 브라이언’ 첫 화는 조회수 320만 회가 넘었습니다. 청소 콘텐츠로 이렇게 큰 인기를 끌 거라고 예상하셨나요?전 그냥 청소를 좋아할 뿐이었어요. 청소를 콘텐츠로 만들고, 심지어 그걸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죠. ‘청소광’ 유튜브를 처음 기획할 때도 걱정이 많았어요. 회의 때 작가님들에게 “이걸 누가 볼까요? 청소에 관심이 있을까요?”라는 말도 했었고요. 별 기대 없이 평소와 똑같이 청소를 한 건데 너무 재밌게 편집이 잘 된 거예요. 첫 화를 보고 ‘아, 이거 되겠구나’ 싶었죠. 청소를 귀찮아하거나 게을렀던 분들이 청소광을 보고 자극 받아서 청소 시작했다는 반응이 제일 기분 좋아요. ―‘더러우면 싸가지 없는 거예요’라는 명언을 남기셨는데, 평소 신조인가요?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농담이 아니었어요. 더럽다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를 안 지키는 거예요. 누군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청소가 안 되어 있다면 싸가지 없게 느껴지잖아요. 깔끔하고 깨끗한 건 타인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청소로 사업을 할 계획은 없나요?예전엔 ‘내가 좋아하는 걸 비즈니스로 하자’는 생각이 강했어요. 운동을 좋아해서 크로스핏 체육관을 열었고, 꽃꽂이를 좋아해서 꽃집을 열었죠. 그런데 일이 되면 힘든 순간이 와요. 스트레스를 받으니 그 일을 못 즐기겠더라고요. 청소를 너무 좋아하는데 비즈니스로 하면 청소하는 게 싫어질까 봐 사업은 하지 않으려고요. 그 대신 청소 제품 PPL이 엄청 들어와요. 저희 집에 설거지 세제가 100병 있어요. 평생 다 써도 남을 거예요. 그래서 청소용품을 매니저, 친척,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있어요. ―청소광에서 브레이브걸스 유정님의 차를 세차해 주시고, 걸그룹 숙소를 청소해주는 등 청소 하나로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어요.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으시나요? 다른 예능을 할 때는 작가님들이 대부분 구성을 하시고 저에게 어떤 콘셉트인지 전달해주셨는데, 청소광에서는 제가 아이디어를 많이 내요. 무엇보다 제가 청소를 정말 좋아하고, 청소에 대해선 제작진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니까요. 그래서 회의를 할 때도 재밌어요. 브라이언은 SM엔터테인먼트를 세운 이수만 전 대표의 눈에 단번에 든 ‘확신의 SM상’이었습니다. 이 전 대표는 오디션장에서 브라이언을 보자마자 “쌍꺼풀 없는 눈이 H.O.T.의 장우혁과 비슷해 마음에 든다”며 그를 뽑았고, 연습생 생활 5개월 만에 그를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초고속 데뷔시켰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실력도 출중했습니다. 브라이언의 맑은 미성은 그룹 인기를 견인했습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는 매년 시상식에서 R&B 부문 상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탄탄대로 같았던 그의 가수 생활에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매니저의 죽음, 안티팬들의 괴롭힘 등이 이어져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큰 인기를 얻으셨어요. 그런데 힘든 순간도 정말 많으셨다고요.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있어요. 2002년에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터졌어요.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사고였죠. 당시 저와 환희가 라디오 DJ였어요. 생방송 중에 게스트가 이 사건에 대한 제 생각을 물어서 ‘운전을 하던 미군들이 확실히 잘못한 일이지만,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미워하는 건 이상한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요. 그 뒤에 댓글창에 ‘네 나라로 떠나라’ ‘브라이언 죽어라’ 이런 댓글이 쏟아졌어요. 케이크 안에 칼날을 숨겨서 집으로 보낸 사람도 있었어요. 어떤 분이 편지를 주셔서 팬레터인 줄 알고 열어 봤는데 사고 현장에 있던 여중생 얼굴에 저와 환희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 들어있던 적도 있어요. 환희한테도 너무 미안했고, 저 스스로도 괴로웠어요. 소주를 매일 마시고 매니저 형한테 ‘저 그냥 죽을래요’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당시엔 ‘절대 말실수하면 안 돼’라고 스스로를 괴롭혔는데, 시간이 지나니 내가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인 것 같아요. 인간은 실수할 수밖에 없잖아요. 너무 스스로를 탓하지 말고 즐겁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한때는 ‘국민가수’로 불렸을 정도로 플라이 투 더 스카이가 큰 사랑을 받았어요. 가수 활동을 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예전에는 노래하는 게 정말 즐거웠거든요. 그런데 반복된 성대결절로 목이 안 좋아진 뒤로 노래를 하는 게 부담스럽고 두려워졌어요. 제가 다시 음악을 하길 기다려주는 팬들에게는 미안해요. 한때 정말 사랑했던 노래를 못 하게 된 게 스스로도 정말 아쉽고요. 목 상태가 돌아온다면 다시 노래하고 싶어요. 지금은 내가 불편하고 두려우니까 못 하고 있지만요. 노래를 언젠가 다시 잘하게 된다면 그때는 컴백할 수 있겠죠? ―가수활동을 하지 않는 지금의 삶이 행복하신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만의 이미지가 구축되고, 그걸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 삼박자가 맞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그게 되고 있어서 너무 즐겁죠. 가수를 할 때는 항상 부담이 컸어요. 나만 생각하면 안 되고 팀 멤버도 생각해야 하니까요. 내 말실수 때문에 멤버가 피해 보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요. 또 저는 방송에 나가면 긴장이 심했어요. 안 그래 보여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엑스맨’ ‘연애편지’를 찍을 때 출연 전날부터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걱정이 심했어요. 지금은 오롯이 나 자신만 신경 써도 되고,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어서 자유로워요. 일을 하면서도 내 삶을 충분히 즐기는 행복에 빠졌어요. 어떤 분들은 좋은 것만 하려는 게 욕심이라고 하세요. ‘왜 남들 생각은 안 하냐?’고 하시는데, 남을 지나치게 생각하면 내 인생은 포기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 마음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맑은 미성으로 노래하던 ‘꽃미모’의 열여덟 소년은 청소의 이로움을 전파하는 유쾌한 마흔 둘 ‘미국 청소아저씨’가 됐습니다. 그의 데뷔무대인 1999년 ‘데이 바이 데이’ 유튜브 영상에는 요즘 들어 ‘청소광 아저씨 데뷔 무대다’라는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아와 행복을 찾아나가는 브라이언에게 ‘전성기’라는 단어는 무색합니다. ‘꽃미남 아이돌 듀오’ 수식어가 ‘미국 청소 아저씨’로 바뀌었을 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의 긍정 에너지는 빛을 잃지 않습니다. ―‘미국 청소 아저씨’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으세요?워낙 깔끔하고 냄새에 민감한 이미지다 보니 저를 처음 만난 사람들이나 길에서 만난 팬들이 ‘저한테 혹시 냄새나나요?’라며 조심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죄송하더라고요. 그래도 청소는 늘 하는 것이고, 전 청소를 하면 즐거워요. 그걸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 부담이라기보다 행운인 거죠.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온 국민들이 다 청소할 때까지 계속할 거예요.―채널A ‘금쪽상담소’에 출연하셔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고, 지나치게 예민해서 힘들다고 고백하셨잖아요. 요즘에는 좀 나아지셨나요? 어제도 3시간밖에 못 잤어요. 아침 일찍 촬영이 있어서 어제는 일찍 잠들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불면증이 더 심하게 오는 것 같아요. 불안감 때문에 잠에 못 드는 거죠. 평소에도 푹 못 자고 1시간에 한 번씩은 깨요. 깨서 물 먹고, 화장실 가고, 강아지들 잘 자나 보고…. 푹 자 본 적이 없어요. 해외 나갔다가 한국 돌아와서 시차 때문에 푹 자본 적은 있는데, 그 외엔 늘 수면 패턴이 불안정했어요. 제 성격인 것 같아요. ―방송에서 13년 째 솔로라고 하셨는데… 연애나 결혼에 대한 생각도 궁금해요. 친형이 21살에 결혼해서 조카가 20살이 넘었어요. 형을 보면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나이 들어가며 혼자 있는 행복에 빠졌어요. 연예인은 매니저, 스태프, 작가, PD 등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삶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복처럼 느껴져요. 비혼주의자까진 아니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소중해졌어요. 만약 누군가를 만난다면요? 인생을 심각하지 않게, 재밌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유머가 있는 사람이 좋아요. 아, 그리고 무엇보다 입냄새 나면 안 돼요. 저랑 방귀는 안 텄으면 좋겠고요. 하하. ―언제 행복함을 느끼세요?일 끝나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애쉬, 로미랑 소파에 누워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아무것도 안 하고 편하게 있을 때, 스트레스나 두려움 없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이들한테 키스해주고 포옹해주는 순간이 요즘의 저에겐 제일 큰 행복입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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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마머리를 잘라서 수세미로 썼다고?… 일상이 코미디인 이 두 남자들[복수자들]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을 외치는 29살 동갑내기 두 청년이 있습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그들은 대전의 작은 개그 극단에서 무료 공연을 올리며 공채 개그맨의 꿈을 꿨습니다. 당시 대학을 중퇴한 두 청년은 아르바이트해 번 돈을 모조리 개그 공연에 썼습니다. 단돈 천 원짜리 티켓이 단 한 장도 안 팔렸지만 계속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나란히 입대한 후에도 매일 연락을 주고받으며 개그 콩트를 짰을 정도로, 두 사람은 코미디에 진심이었습니다.2020년 초 코로나 한파가 스탠드업 코미디 업계에 불어 닥치면서 방송국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개그맨 공채 시험도 중단됐습니다. ‘제2의 옹달샘’을 꿈꾸던 두 남자의 꿈도 사라지나 했습니다. 한 길만 보고 달렸는데 그 길이 송두리째 사라진 겁니다. 하지만 두 남자는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했습니다. ‘길이 사라졌다면 직접 길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개그 극단, 아프리카tv를 거쳐 유튜브까지 뛰어들었습니다. 그랬던 두 남자, 지금은 누적 조회수 4억 회를 기록한 유튜브 채널 4개를 운영하는 핫한 ‘코미디 크리에이터’가 됐습니다. ‘매콤한 두 남자의 매콤한 일상’을 다룬 유튜브 채널 ‘핫소스’의 두 코미디언 송형주, 김선응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https://youtu.be/T5WCnbWVb84)에서 볼 수 있습니다.―대학 중퇴까지 하며 준비했던 개그맨 공채 시험이 중단됐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일반인으로 따지면 오랫동안 공무원을 준비했는데 공무원 시험 자체가 사라진 거예요. 공채 개그맨이 되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위해서 몇 년을 노력했잖아요. 심지어 저희는 군대 있을 때도 서로 연락 주고받으면서 개그 이야기만 했어요. 군대에서도 하루에 개그 콩트 2개씩 짜면서 공채 시험을 준비했어요.”(형주)―군대에서 개그를 짰을 정도면 정말 열심이었네요. “제대한 후에는 더 열심히 했어요. 그때는 정말 돈이 정말 없었는데 같이 회의하면서 개그 짤 공간이 없는 거예요. 카페에 가도 커피값이 드니까요. 밖에서 하자니 밤에는 춥고…. 늦게까지 머물 수 있는 실내를 찾다 보니 영화관 로비에서 회의 많이 했어요. 영화도 안 먹고 팝콘도 안 먹었는데 진상이었죠.(웃음) 심야 영화가 늦게까지 하면 영화관이 새벽 3시까지 열 때도 있거든요.”(선응) “개그를 보여줄 무대가 없으니까 홍대에서 개그 버스킹도 시도해봤어요. 길거리 나가서 무작정 준비해간 개그 콩트를 선보이는 거예요. 근데 개그는 기승전결이 있다 보니, 아무리 짧은 개그여도 길거리에선 사람들이 안 보시더라고요.”(형주)대전 출신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대학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동아방송예술대학교 13학번 동기였던 둘은 ‘제2의 옹달샘’이 되겠다며 학교를 중퇴하고 코미디 공연 무대에 섰습니다. 대전의 개그 극단 ‘건전지’에서 활동할 때는 직접 티켓도 팔았습니다. ―극단 활동할 때 연봉이 5000원(?)이었다면서요. “그거 잘못된 팩트입니다. 마이너스였어요. 저희가 다른 데서 아르바이트해서 그 돈을 공연하는 데에 쏟아 부었거든요. 5000원도 못 벌었고 사실상 마이너스, 적자였어요.”(형주) “티켓 한 장이 천 원이었는데 그것도 안 팔리더라고요. 무료 공연만 했던 거죠”(선응)―극단 활동을 6개월이나 했습니다.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땐 정말 돈이 없었고 정말 가난했어요. 하루에 저한테 쓸 수 있는 돈이 1000원 정도였는데, 식당에 가면 밥이 전부 6000원인 거예요. 연애도 못했어요. 연애하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셔야 하는데 그럴 돈이 아예 없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제가 책임질 수 없고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어요. 돈이 아예 없었거든요.”(선응)개그맨 공채 시험을 준비하며 활동했던 극단 생활을 접은 두 사람은 아프리카tv에서 사람들을 웃겨보겠다고 나섰습니다. 라이브 방송을 켜면 입장하는 사람들은 한두 명, 많아야 대여섯 명에 불과했습니다. 개그 극단에서 무료 공연하던 시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tv에서의 반응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주로 라이브 방송을 하다보니까 상황극 코미디를 선호하는 저희와 잘 안 맞았어요. 또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도 찝찝했고요. 아프리카tv는 후원을 받는 시스템이잖아요. 돈 많은 사람들이 저희 라이브방송을 보시고 후원해주시면 괜찮은데, 저희 방송을 보는 분들이 주로 중·고등학생들인 거예요. 간식 먹을 거 안 사 먹고 저희 후원해주고…. 그런 것들 때문에 죄책감이 심했어요.”(선응)개그 극단, 공채 시험, 아프리카tv까지…. 연달아 실패했지만 ‘건전지’ 같은 두 남자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유튜브 채널 ‘핫소스’를 개설한 겁니다. ‘매콤한 두 남자의 매콤한 일상’의 ‘핫소스’, 지금은 잘 나가지만 처음부터 빵 떴던 것은 아닙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 패러디, 연애 시뮬레이션 등 여러 종류의 콘텐츠를 시도했지만 조회수는 처참했습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했습니다. ―어쩌다 하게 된 ‘짓궂은 장난’ 콘텐츠가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선응이가 되게 비싼 돈을 주고 파마를 했어요. 엄청 뽀글뽀글, 풍성한 파마였는데, 선응이가 잘 때 그 머리를 밀어버린 거예요. 밀어버린 머리를 수세미로 쓰면서 설거지하는 영상을 올렸어요. 저희끼리 하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장난이었는데, 그게 대박이 난 거예요. 조회수가 100만이 넘었어요.”(형주) “다른 사람들은 ‘심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저희가 정말 친한 사이라 그런 장난은 매일 매일 하거든요.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일상을 그대로 올린 거였는데, 좋아해주시니까 ‘이거다!’ 싶었어요.”(선응)‘100톤 곡식 창고에 친구 차 숨기기’ ‘잠든 친구 오지에 버리기’ ‘친구 앞에서 뒷담화 하기’ ‘친구 방 구석구석에 초인종 설치하기’….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성인이라면 더더욱 하지 않을 것 같은 유치하면서도 창의적이고 신박한 콘텐츠에 구독자들은 열광했습니다.―‘초등학생 취향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히려 좋아요. 저희 개그가 초등학생도 보고 웃을 정도로 어렵지 않다는 거잖아요. 가볍게, 누구나, 나이에 상관없이 전 국민이 다 볼 수 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해요.”(선응) “실제 구독자들 보면 10대 후반에서 20대, 30대 초반까지 다양합니다.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전 국민이 소비할 수 있는 웃긴 콘텐츠 많이 만들어보겠습니다!”(형주)‘핫소스’에서 시작한 두 사람의 ‘코미디 유니버스’는 점점 영토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구독자 참여형 콘텐츠를 올리는 ‘핫챌린지’, 먹방과 토크쇼가 공존하는 ‘핫식당’, 숏폼 콘텐츠 전용 ‘핫쇼츠’까지. 4개 채널을 합친 구독자는 219만 명에 달합니다. ―유튜브 채널을 4개 운영 중입니다. 일을 너무 많이 벌린 건 아닌가요? “후회할 때도 있어요. 너무 바쁠 때는요. 너무 바빠서 살면서 놓치고 사는 것이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런데 다른 걸 놓치는 만큼 유튜브는 놓치지 않으려고요. 예전의 저희처럼 기회가 간절한 사람들한테는 부러운 후회일 수도 있으니까요.”(선응)―한 채널에 집중하지 않고 채널을 여러 개로 나눈 이유가 궁금합니다. “구독자 맞춤형이라고 보시면 돼요. 메인 채널인 ‘핫소스’는 친구끼리 짓궂은 장난치는 콘텐츠잖아요. 저희가 장난치고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핫소스’만 구독하면 되고요. 혹시 저희가 먹방하면서 대화하는 걸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핫식당’을 보면 되거든요.”(선응)“유튜브 알고리즘 때문이기도 합니다.(웃음) 하나의 채널에 특정 장르 콘텐츠만 쭉 올리는 것이 구독자, 조회수 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형주)―어떤 콘텐츠를 촬영할 때 가장 즐거우신가요? “‘핫챌린지’ 찍을 때 재밌어요. 구독자들이랑 함께 만들어가는 콘텐츠거든요. 구독자분들, 팬분들 만나서 대화하는 게 좋아요.”(선응) “형주팀 선응팀 나눠서 밥 사주는 콘텐츠를 촬영한 적 있었어요. ‘정총무가 쏜다’를 모티브 삼아서 촬영한 건데, 그때 구독자분이 운영하는 식당에 갔거든요. 거기서 우리 콘텐츠 사랑해주시는 구독자분들 배불리 먹이는 게 너무 뿌듯했어요. 팬들과 함께한 티키타카도 좋았고요.”(형주)―구독자는 많지만 조회수가 낮은 채널도 있습니다. ‘핫소스’는 평균 조회수 50~100만 회를 유지하는데요. 비결이 있나요?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입니다.(웃음) 묘수가 따로 없어요. 될 때까지 하는 거예요. 조회수가 나올 때까지, 사람들이 웃어줄 때까지.”(형주)―방송이 아닌 유튜브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쉬울 때는 없으신가요? “저희가 방송을 하다가 유튜브로 넘어온 케이스면 모르겠는데, 아예 유튜브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그런 아쉬움은 없어요. 저희가 개그맨이 되고 싶었던 이유도 사람들을 웃기고, 저희를 보고 웃어주는 팬들을 만나고, 그런 거였어요. 방송에 나가지 않아도 유튜브를 통해 충분히 코미디를 하고 있고 팬들과 소통하고 있어요.”(선응) “오히려 유튜브에서 시작한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이젠 저희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잖아요. 누군가의 선택을 받거나 오디션에 합격할 필요도 없고요.”(형주)―‘코미디 크리에이터’로서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회사를 차리는 겁니다. 코스피에 상장할 수 있는 유튜브 콘텐츠 제작사요. 꿈이 원대하죠? 아직 시작도 못 했습니다.(웃음)”(형주) “저희는 유튜브로 팬들을 만나고 있지만 직업은 코미디언이에요. 공채 개그맨 지망 시절 가졌던 꿈과 같아요. 최고의 코미디언이 되는 겁니다.”(선응)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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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마가 편집했나 악마를 편집했나… ‘나는 솔로’ PD가 입을 열었다[복수자들]

    “‘나는 솔로’를 안 보면 대화에 못 낀다.” 과장이나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현커’(현실커플) 세 커플 탄생시킨 6기, “손 선풍기 안 가져왔어?” 한 마디로 숱한 패러디를 양산한 10기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더니, 최근 방영된 16기에서 정점을 찍었습니다. 가족과의 식사자리에서도, 직장인들의 ‘커피 타임’ 때도 ‘나는 솔로’는 가장 ‘핫’한 대화 소재였습니다. 한밤의 발레로 사랑을 고백한 영숙, 올해의 유행어 “테이프 깔까?”의 주인공 광수, 카메라와의 아이컨택을 선보인 상철 등 독보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에 이효리, NCT 도영 등 연예인들까지 ‘나는 솔로’ 팬을 자처했습니다. 16기 출연진이 방송 후일담을 전하는 유튜브 라이브 방송 시청자는 25만 명까지 치솟았습니다. ‘본방사수’라는 단어가 무색해진 시대에 “수요일 밤 10시 30분만 기다린다”는 골수팬들을 양산해낸 ‘나는 솔로’의 중심에는 남규홍 PD가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인기와 함께 남 PD도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습니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배우도 아닌 일반인과 만들어가고 있는 그에게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어디서 그런 인물들을 섭외하는 것이냐’부터 ‘악마의 편집이 사실인지’, ‘인기를 견인한 출연진에 인센티브를 얼마나 지급하는지’까지 방송과 관련된 사소한 정보들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회자됩니다. 도파민 폭발시키는 출연진을 끌어모으는 남규홍 PD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복 많은 남자.’ 놀랍게도 남 PD는 “실제로 만나보면 그들 모두 평범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 하나에만 집중해 농축된 감정을 터뜨리다 보면 누구나 ‘빌런’이 될 수도, ‘어쩌다 보니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평범한 남녀가 짝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남 PD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2011년 ‘짝’에 이어 일반인의 짝짓기 프로그램을 연이어 만드는 이유, 출연진 ‘빌런 논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https://youtu.be/BQFoQrj_Gxg)에서 볼 수 있습니다.―최근 방영된 16기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결혼 커플 두 팀 탄생한 6기, 온갖 패러디 양산한 10기, ‘빌런’ 총집합했다는 16기 중 PD님의 ‘원픽’이 궁금합니다.제 마음속 원픽 기수는 9기라고 늘 이야기 했었는데요. 세 기수 중 고르자면 6기를 고르고 싶네요. 프로그램이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이기도 하고, 출연자들도 굉장히 열심히 임해주셔서 애정이 큽니다. 같이 삽질하던 시기거든요. 어려울 때 고생을 같이 한 분들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16기도 화제가 많이 돼서 굉장히 고맙죠. ―기수 화제성에 따라 인센티브를 지급하시잖아요. 역대급 인기를 누린 16기 인센티브에 관심도 지대해요. 200만 원 이상은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는 300만 원을 가져가기도 했고요. 웬만하면 동등하게 가는 게 맞지만, 특별한 케이스에는 더 받게 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요, 원칙은 없습니다. 출연료와 인센티브를 다들 궁금해하시는데, 돈에만 관심이 너무 치중되는 건 좀 아쉽죠.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출연료가 점점 올라가다 보면 프로그램이 망해요. 출연료를 노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진정성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돈을 안 줘도 나오겠다는 각오가 있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는 케이스를 훨씬 더 많이 봤어요. 돈이 계기가 되는 순간 순수한 마음이 훼손될 수 있어요. ―이번 16기 ‘돌싱 특집’이 큰 인기를 끌었잖아요. 노년층, 성소수자, 외국인, 연예인 특집 등을 만들어달라는 시청자들 의견도 있는데, 특집 계획이 있으신가요?모솔, 돌싱 특집 외에 다른 특집편 계획은 없습니다. 일반인 출연자들도 너무 많이 밀려있어요. 특집은 ‘방송을 위한 특집’으로 끝날 것 같아서 자제하려고 합니다. 언론이나 방송계 종사자들은 웬만하면 커트하려고 해요. 진정성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방송인들은 마이크를 잡고 진행하려는 습성이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 나올 수 있어요. 그분들만 모은 특별편을 만들 순 있겠지만 현재로선 일반인을 우대하고 있습니다. 나는 솔로에는 ‘빌런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출연자 빌런 논란은 매 기수마다 불거집니다. 시청자들은 ‘이번 기수의 빌런은 누구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합니다. 출연진이 아닌 남 PD가 ‘최종 빌런’이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출연진의 경악할만한 행동들을 제작진이 유도한다는 지적입니다. 이에 대해 남 PD는 “출연진이 빌런도 아니고, 제작진이 빌런의 모습을 유도하지도 않는다”고 선을 긋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오롯이 집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출연진 섭외에도 그리 안달하지 않는답니다. “누가 나와도 그 정도는 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편집을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어요. 악마가 편집했다 VS 악마를 편집했다, 어느 쪽이 맞습니까?착한 악마가 편집한 거죠. 출연진 빌런 논란이 계속 있는데요, 악마는 저 하나로 족합니다. 출연진들은 실제로 만나보면 평범해요. 감정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들이 시청자에게 빌런처럼 보여지는 거죠. 저희가 그런 행동과 상황을 유도했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솔로나라에 가면 누구나 다 그 정도 모습은 나온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캐스팅에 그렇게 안달복달 하지 않아요. 누구를 뽑아 놔도 적어도 망하지는 않거든요. ―‘빌런’이 합격 기준이 아니라면 출연진을 뽑을 때 어떤 점을 중요하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합격 팁은 뭔가요?합격과 불합격이 있는 건 아닙니다. 1, 2년 전에 인터뷰했던 분들도 출연하는 경우가 있죠. 기준선에만 통과됐다 싶은 분들은 때에 따라 이후 기수에 출연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선에는 어떻게 통과하나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분이 좋고요, 사람을 서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니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갖추면 좋아요. ‘내 자녀가 저 프로그램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게요. 매력도 중요해요. 조금만 대화를 해 봐도 즐겁고 재밌는 분들은 굉장히 좋은 출연자죠. 마음을 동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인터뷰 20~30분 안에 시시콜콜 그 사람의 모든 걸 예상하거나 기대하면 안 돼요. 그냥 하늘에 맡깁니다. ―한 인터뷰에서 ‘혁명을 일으킬 만한 인물을 원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남 PD님이 생각하는 ‘혁명가’란 어떤 사람인가요? 혁명가에게는 자기희생이 필요해요. 조직이나 단체를 여러 측면에서 좋게 바꾸려는 따뜻한 마음과, 그걸 실천할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혁명가거든요. 그런 분들이 솔로나라에 오면 분명 새로운 기운이 돌죠. (16기의 혁명가는 누구였나요?) 광수님이요. 그분이 스토리에 많은 파란을 일으켰어요. 모든 사건들에 다 관여를 하면서 판을 뒤집어놓았기 때문에 혁명가 역할을 한 거죠. 광수님 소개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어쩌다 보니 주인공’. ―외모도 보시나요?외모가 뛰어난 분들이 훨씬 유리한 건 사실이에요. 그분들은 판을 흔들어놓거든요. 혁명사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제작진 입장에서 예쁘고 잘생긴 분들을 환영하는 건 당연합니다. (외모적으로 가장 혁명적이었던 출연자를 꼽는다면?) 11기 영철, 17기 옥순. ‘달걀 속 노른자위 같은 사람 마음, 기름 두르고 후라이를 해 보면 안다.’ 남 PD가 직접 적은 방송 속 글귀입니다. 달걀을 깼을 때 노른자위의 경계는 흐리멍덩하지만 후라이를 하면 노른자의 경계가 점점 선명해집니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남 PD는 말합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인간 본성은, ‘솔로 나라’라는 기름이 부어지는 순간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솔로나라의 촌장으로서 기름 붓는 역할을 계속 하겠다고 남 PD는 말합니다. ―세 딸의 아버지이십니다. 딸이 이 중 하나의 프로그램 출연해야 한다면요? 하트시그널 vs 나는 솔로 vs 환승연애.나는 솔로에 나오는 게 좋죠. 기왕 경험할 거면 진하게 경험하는 게 좋아요. 본인들은 더 많은 걸 가져갈 수 있어요. 감정이 고농도로 농축되면 짧은 시간 안에 터질 때도 있어요. 출연진들이 전부 하는 말이 ‘솔로 나라 와서 울 줄 몰랐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번 출연해보면 알아요. 농축된 감정들이 낯선 환경에서 폭발하는 경험을 하시게 됩니다. 감정을 터뜨리지 않으면 병이 납니다. 울고 싶으면 울어버리고 시원하게 해소해야 돼요. 감정을 그때그때 터뜨려버리면 다 해소되게 돼 있고, 그게 또 다른 에너지가 돼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어요. ―기존 연출작 짝과 나는 솔로가 일반인 매칭 프로그램이잖아요. 유사한 포맷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유가 있나요? 의도한 겁니다. 짝의 경우 굉장히 훌륭한 프로그램이 뜻하지 않게 사라진 측면도 있어요. 짝의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살려보자고 의도해서 만든 게 나는 솔로에요. 죽은 자식은 정말로 눈물나거든요. 제 죽은 자식인 짝을,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영리하게 살려 놓은 게 나는 솔로에요. 짝과 나는 솔로 모두 우리 시대의 사랑에 대한 자화상 역할을 합니다. 남녀가 짝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거라고 기대합니다. 짝 제작진이었던 나상원 PD, 백정훈 PD와 저, 이렇게 세 사람이 닷 다시 뭉쳐 짝의 정신을 이어 받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갈 겁니다. ―남규홍에게 ‘달걀 속 노른자 위 같은 사람 마음’이란 뭔가요?제 마음이죠. 달걀 속 노른자위는 흐리멍덩해요. 구별도 안 되고 선도 애매하고 색도 애매한데 기름을 두르고 튀김을 해보면 선명하게 노란색으로 쫙 드러나거든요. ‘보통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라는 의미로 쓴 겁니다. 제 마음도 그런 마음이고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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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의 의리’ 실천하는 김보성 “의리 전파 위해 배우가 됐다”[복수자들]

    으리! 으리! 으리!두툼한 두 팔을 타이트하게 휘감은 검은 가죽점퍼,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구레나룻을 길게 늘어뜨린 이 남자. 인터뷰 시작하자마자 난데없이 ‘의리 삼창’을 외칩니다. 눈 감고 들어도 ‘으리!’를 외치는 그 남자, 누군지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자칭타칭 ‘의리의 사나이’ 김보성(57)입니다.과거엔 ‘콘셉트 아니냐’며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1989년 데뷔 후, 35년간 한결같은 태도로 의리를 외치고 있으니까요. 설사 콘셉트로 시작했다 할지라도 이토록 오랫동안 진지하다면 이젠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김보성 하면 의리, 의리 하면 김보성입니다. 김보성이 의리를 사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체 김보성에게 의리가 무엇이기에!〈복수자들〉이 ‘의리의 사나이’ 김보성을 직접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김보성의 의리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의리를 전파하기 위해 배우가 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의리를 인생의 신념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20대 초반이었어요. 어릴 때 죽을 고비를 많이 겪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러다 얻게 된 결론이 바로 의리였습니다. 짧은 인생, 후회 없이 의리를 지키며 살기로 결심했습니다.”―‘의리를 지킨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20대 초반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봤습니다. 영화에서 독일 장교가 ‘한 명 더 살릴 수 있었는데’ 하면서 오열하잖아요. 그 장면이 제게 큰 깨달음을 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그래서 데뷔하자마자 의리를 외치신 건가요? “배우 활동할 때도 꾸준히 방송에서 의리를 말했습니다만 진지한 어투로 의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모조리 편집이 되더라고요. 재미가 없었나 봐요. 그래서 작전을 바꿨죠. 다소 희화화되더라도 재밌게 의리를 외치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의리에 대한 나의 의지와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더욱 효과적이지 않을까.”의리를 전파하기 위한 그의 계산(?)은 통했습니다. 김보성이 묵직한 주먹을 불끈 쥐고 ‘으리!’를 외치자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 러브콜에 쏟아지는 광고까지. 오랜 신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좋아해주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김보성이 ‘입’으로 의리를 외치는 데에서 끝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보성은 ‘나눔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기부, 봉사 같은 공공을 위한 선행에 적극적으로 투신해왔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생활비 명목으로 대출받은 금액의 일부인 1000만 원을 떼어 기부했습니다. 당시 그는 세월호 합동 분향소에 찾아가 “성금을 많이 못 내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게 원망스럽다”며 탄식했습니다. ―‘고작 1000만 원’이라고 하셨지만 대출받아 기부한다는 건 아무나 못 하는 일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몇 날 며칠 밤낮을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없어서 대출 받아 생활하던 때였어요. 너무 적은 액수라 부끄러웠고 더 많이 하고 싶었습니다. 소외되고 힘들고 아픈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김보성의 마음엔 능력이 부족해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하지 못한 게 한(恨)으로 남았습니다. 이후로 그는 당시의 한풀이라도 하듯 ‘나눔의 의리’를 지키는 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과 기아 아동을 위해 2000만 원을 기부하고,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을 통해 미얀마 아동들에게 다달이 후원금을 보냈습니다.쉰 살이 되던 해에는 새로운 도전도 했습니다. 2016년 소아암 환아를 돕기 위해 종합 격투기 데뷔전을 치룬 겁니다. 경기에선 석패했지만 대전료와 입장료 전액 8000만 원을 소아암 환아를 위해 기부합니다. 뜻깊은 일을 했지만 김보성 개인에겐 시련이 닥쳤습니다. 경기 도중 안구가 함몰돼 실명 위기를 겪은 겁니다.―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소아암 환아 기부에 매진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봉사활동으로 만난 소아암 환아가 있었어요. 그때 그 아이와 약속했거든요. ‘우리 아기 빨리 나아서 아저씨랑 밥 같이 먹자’고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경기를 치른 후에 병원을 몇 번 찾아갔어요. 근데 아이가 끝까지 저를 안 만나주는 거예요.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는데, 저한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러다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아이가 하늘나라로 떠나기 전날에도 엄마에게 ‘김보성 아저씨랑 약속 못 지켜서 어떡하냐’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가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고, 장례식장에 가서 입관하는 모습도 지켜봤어요.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기부금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봉사활동도 하시는 거네요. “진심 어린 행동이 따르는 것, 그게 진정한 ‘나눔의 의리’입니다. 보여주기 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거예요. 기부나 봉사를 특정 집단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기들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건 숭고한 일입니다. 대출도, 부상도 두렵지 않았던 김보성. 감염병 앞에서도 그는 용감했습니다. 2020년 2월, 대구·경북 지역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다수 발생한 시기에 직접 트럭을 몰고 가서 마스크 1만4000장을 시민들에게 직접 나눠준 겁니다.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하며 위로와 격려를 건넸습니다. ―그때도 기부만 하신 게 아니라 직접 트럭을 몰고 대구로 내려가셨습니다. “당시 대구 공기가 오염됐다는 루머까지 돌았어요. 마스크도 부족했고 대구를 격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어요. 대구 시민들이 정신이 피폐해질 정도로 너무 힘들었던 상황이었죠. 한 분 한 분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때 마스크 나눠드리면서 ‘힘내시라’고 시민들과 포옹을 했어요. 많은 시민들이 좋아해 주셨어요. 어떤 분은 편지 써서 주시고 ‘감사하다’고 꽃도 주셨고요.”―‘나눔의 의리’를 지키려 대출도 받고 부상도 입으셨습니다. 가족들 반응은 어떤가요? “제 아내도 저처럼 대한민국 최고 의리녀입니다.(웃음) 소아암 환아 도울 땐 저 따라 직접 머리카락 잘라서 기부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든든하게 가정을 지켜주고 아이들 잘 키워주고 있고요. 제가 기부하는 것, 봉사활동 하는 것도 다 이해해줍니다. 봉사활동은 아내도 함께 나간 적도 많았어요. 한 번도 반대한 적 없고 지지해줬습니다.”이쯤 되면 김보성의 직업이 마치 ‘의리계몽운동가’인 것으로 착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배우입니다. 액션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충무로에 입문해 수년간 연출부, 엑스트라, 극단 생활 등을 전전하다가 1989년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데뷔했습니다. 이미연의 상대역이자 주연급인 봉구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오릅니다. 1990년대만 해도 영화 ‘투캅스’ 시리즈, 드라마 ‘모래시계’ 등에 출연했지만 언제부턴가 영화, 드라마에서 ‘배우 김보성’을 보긴 어려웠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의리’를 외치는 김보성에게 예능인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배우보다 예능인 이미지가 강해졌습니다.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예전에 한창 활동할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배우다.’ 사실 저는 예능에서 웃기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가 말하는 스타일이 웃긴 건지, 상황이 웃긴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웃음을 준다면 저로선 감사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목마름은 아직도 많습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도 있습니다. 연기와의 의리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길! 으리! 으리!”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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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혐오하던 나를 넘어섰다”… 美 런웨이 선 한국인 최초 ‘플러스사이즈’ 모델[복수자들]

    키 160cm의 NBA 역사상 최단신 선수 먹시 보그스.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설립 이래 최초의 흑인 수석 무용수 미스티 코플랜드. 양손 대신 의수로 붓을 든 화가 석창우…. 이들의 공통점은 특정 직업에 대한 선입견을 깼다는 것입니다. 단신의 농구선수, 흑인 발레리나, 양손 없는 화가처럼 김지양 씨(37)도 ‘모델’이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깬 인물입니다. 그는 키 165cm에 70kg, 39-32-38의 신체 사이즈로 한국인 최초 미국 런웨이에 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입니다. 플러스 사이즈는 77사이즈(남성 기준 100사이즈) 이상을 뜻합니다. 여성 77사이즈, 남성 100사이즈 이상을 생산하는 기성복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의 등장은 잔잔한 호수 표면에 던져진 돌멩이와 같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생소했던 2010년, 그는 미국 최대 플러스 사이즈 패션위크인 ‘풀 피겨드 패션위크 LA’에서 한국인 최초로 데뷔했습니다. 살집이 있는 몸으로 런웨이를 당당하게 걷는 그의 모습은 ‘모델은 말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는 동양인 최초로 플러스 사이즈 모델 패션쇼 ‘캐리비안 패션위크’ 공식 홈페이지를 장식했고, 패션브랜드 ‘아메리칸어패럴’에 보낸 콘셉트 사진이 전 세계 온라인 투표에서 991명 중 8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부터 플러스 사이즈 잡지 ‘66100’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같은 이름의 플러스 사이즈 의류 및 속옷을 판매하는 쇼핑몰을 창업했습니다. 수면 위 파동은 컸지만 후폭풍도 뒤따랐습니다. 잡지사들은 그에게 화보 촬영을 제안하면서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 했고, 인터뷰 기사에는 그의 외모를 비하하는 수많은 악플들이 매일같이, 아무렇지 않게 달렸습니다. 근거 없는 비방 속에서도 그가 자존감을 지킨 방법은 나 자신을 바라보고,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중턱이 평생의 콤플렉스였고, 화보 촬영 후 턱을 깎는 포토샵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운 적도 있다고 고백합니다. 겹겹이 존재했던 자기혐오와 마주한 뒤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그의 이야기를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https://youtu.be/0Kr9gt3byXg)―2010년 165cm에 70kg의 몸매로 미국 런웨이에 선 최초의 한국인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주목을 받으셨어요. 지금도 같은 스펙을 유지하고 계신가요?그때보다 14kg이 더 늘었어요. 지금은 99사이즈를 입고 있습니다. ―데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생소했어요. 어떻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되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대학교에서 외식조리학을 전공하고 요식업 관련 회사에서 일하다가 여러 가지 일들이 얽혀 권고사직을 당하게 됐어요. 퇴사 후 뭘 할지 몰라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제 길이라 생각하고 대학에서 전공한 일이 저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당황스러웠어요. 마침 그때 포털 사이트에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시즌1 지원자 모집 공고가 떴어요. 공고를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어요. 그동안 제가 살아오면서 실패하지 않을 법한 일들에만 도전해서 성취가 당연하게 주어졌는데, 모델은 실패할 것 같아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모델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셨던 건가요?‘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에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프로필 사진 촬영을 하는데 저를 향해 터지는 조명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삶에서 내가 오롯이 주인공인 순간이 별로 없는데, 카메라 앞에 서는 그 순간만큼은 제가 주인공이었어요. ‘이 순간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서 모델에 제대로 도전해보게 됐어요. ―‘죄책감 없이 먹는 게 소원이야’라는 에세이를 내셨을 정도로 음식에 진심이세요. 먹는 것과 모델일, 두 가지가 양립하는 건 어렵다는 시선도 있어요. ‘자기관리가 귀찮아서 플러스 모델 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이죠.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건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고 마음껏 먹는다는 거예요. 저희도 먹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니에요. 사이즈나 외형을 제가 에이전시나 계약한 업체에 제출한 프로필에 맞게 유지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빨간 머리를 한 프로필 사진을 제출했으면 빨간 머리인 상태로 있어야 하고, 검게 태닝을 한 모습이면 그대로여야 하죠. 몸무게가 프로필 기준 더 쪄서도 안 되지만, 더 빠져서도 안 되고요. 모델이란 직업이 가지는 특수성은 플러스 사이즈 모델에게도 그대로 적용돼요. 또 우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처음 등장한 이유는 기성복 사이즈 이상을 입는 사람들도 모델이 착용한 옷을 보고 제대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게 해주자는 것이었어요. 모델이 무조건 마르기만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선입견인 거죠. 모델은 엄청 소식을 하거나, 아예 먹지 않는데 그런 극단적인 식단이 맞는지,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어요. 베르사체는 2020년 베르사체 역사상 처음으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세 명이나 런웨이에 올려 화제가 됐습니다. 2021년 샤넬 런웨이 쇼에는 네덜란드 출신 플러스 사이즈 모델 질 코틀레브가 당당한 워킹으로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포용과 평등, 신체적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은 조금 더딥니다. 여전히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하는 브랜드는 거의 없고, 런웨이에도 마른 모델이 대부분 섭니다. 일감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때론 부당한 처우도 참아내야 합니다. ―남성 잡지 맥심에서 2021년부터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를 열고 있어요. 기존에 열던 ‘미스 맥심 콘테스트’보다 의상의 노출 수위가 훨씬 높아 뚱뚱한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적 시선도 있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문제는 오랜 시간 설전을 펼쳐왔던 주제잖아요. 몸집이 큰 여성을 대상화하는 건 여성에 대한 혐오, 뚱뚱한 사람에 대한 혐오 등 다양한 혐오들이 중첩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맥심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는 미디어가 뚱뚱한 여성을 어떻게 소비하고자 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에요. 하지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일감이 정말 적기 때문에 어떤 기회라도 있다면 잡아야 하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콘테스트에 나가는 분들을 제가 비난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맥심과 같은 남성 잡지의 화보 제안을 받은 적이 있나요?플레이보이코리아에서 제안했지만 거절했어요. 당시엔 돈을 준단 말을 안 한 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 이건 제가 굉장히 오랫동안 겪어온 일이에요. 절 모델로 쓰고는 싶은데 돈을 주긴 싫은 거죠. 그런 경우 인터뷰 명목으로 절 부르고, 풀 메이크업을 시켜서 촬영을 해요. 결과물은 두 페이지짜리 화보고, 인터뷰는 아주 작게 나가죠. 일에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10년 넘게 겪어왔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대부분 쇼핑몰을 열어서 모델을 하거나, 수요가 비교적 많은 해외에서 활동하려는 분들도 있어요.―플러스 사이즈 모델에게도 요구되는 기준이 궁금해요.‘누가 더 예쁘게 살쪘는가’에 대한 소리 없는 경쟁이 있긴 해요. 허리가 가늘고 가슴과 엉덩이가 큰, ‘커비(Curvy)’한 몸매를 선호하죠. 결국 마른 모델을 뻥튀기해 놓은 체형이에요. 그래서 볼륨감을 키우기 위해 가슴과 엉덩이 확대 수술을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 자체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기성복보다 더 큰 체형의 사람들도 자신의 신체와 잘 맞는 옷을 이미지로 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해야 하는데, 플러스 사이즈 모델조차 현실에 없는 몸매의 기준에 또 다시 맞춰지는 거죠.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향한 혐오의 시선과 악플들, 적은 일감으로 인한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우울증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도 얼굴은 갸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변 권유에 보톡스를 맞을까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주변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한 결과 그는 영원하지 않을 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최근에 조울증 약을 먹고 있어요. 너무 오랜 기간 일에만 매몰돼 지냈던 것 같아요. 독립출판물 출간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아니다보니 5년 정도 잡지를 끌어오면서 많이 지쳤어요. 쇼핑몰을 운영하게 된 것도 힘들었어요. 주변에서 ‘너 모델 된 것도 쇼핑몰 해서 돈 벌려고 그러는 거지?’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죽어도 쇼핑몰만은 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했는데, (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내몰리듯 시작했거든요. 악플에도 많이 시달렸어요.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조울증이 찾아온 것 같아요. ―가장 상처가 됐던 악플은 뭔가요? ‘김지양은 허언증 환자’라는 악플이요. 길거리에서 헌팅을 당한 적이 있는데 너무 불쾌했어요. 싫다고 분명하게 거절했는데 계속 따라왔거든요. ‘싫다면 싫은 것이다’라고 SNS에 글을 올렸는데, ‘김지양은 허언증 환자다, 저렇게 뚱뚱한 여자를 누가 헌팅하느냐’라는 악플이 달렸어요. 가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있지도 않은 남편을 있다고 거짓말한다’는 악플도 정말 황당했죠.―모델을 꿈꿨지만 자금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쇼핑몰을 창업하셨어요. 지금도 쇼핑몰을 운영하는 게 힘드신가요? 지금은 굉장히 만족해요. 쇼핑몰 ‘66100’은 여성 66사이즈, 남성 100사이즈를 의미해요. 기성복에서 ‘라지’에 해당하는 사이즈죠. 그 이상의 사이즈를 영캐주얼이라 보통 부르는 브랜드들에서 제작하지 않아요. 그래서 66100은 ‘66 사이즈, 100사이즈 사이즈를 넘어서는 당신의 무한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저희 쇼핑몰을 이용해본 고객들은 “여기 절대 망하면 안 돼요. 여기 말고는 바지 살 곳이 없어요”라고 말씀하세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힘이 나요. 속옷도 마찬가지예요. 패드와 와이어를 없앤 속옷 상의 ‘브라렛’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허리 40인치 이상인 분들도 입을 수 있는 팬티를 만들고 있어요. 기성복 사이즈 기준으로 105, 110까지만 나오는데 저희는 130까지 커버합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나요?이중턱에 굉장히 큰 콤플렉스를 오랫동안 갖고 있었어요.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준 지 얼마 안 됐어요. 자신의 몸에 대한 콤플렉스에 대해 곰곰이 따져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자기혐오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올해 초 발간된 ‘엉엉 우는 법을 잊은 나에게’를 쓰면서 많이 생각을 정리했어요.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5년 간 원고를 못 보냈어요. 출판사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이야기를 바랐는데 저는 나 자신조차 건사하기 힘들어서 휘청대고 있었거든요. 그 때 자기혐오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고, 고민의 시간을 지나 작년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굴은 갸름해야 하지 않겠냐’라며 보톡스를 맞아 보라고 제안한 분도 있었어요. 보톡스는 영원하지 않아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에 중독됐을 때 문제가 되는 거죠. 내가 평생을 유지할 수 없는 것에 일시적인 만족감을 가지면서 살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스스로 사랑해 줄지는 개인의 선택이겠죠. ‘누군가의 말 때문에 이중턱을 이렇게 까지나 미워하고 싫어했다면, 이제 그걸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열심히 이중턱과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지양에게 ‘사이즈’란 어떤 의미인가요?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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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자 키 158은 말이 안된다”는 말에 마음 굳혔다…작은 키의 광대 일오팔[복수자들]

    ‘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까지어느 유튜버 소개글에 나온 문구입니다. 이 유튜버 이름은 ‘일오팔’. ‘성은 일, 이름이 오팔’은 당연히 아닙니다. ‘일오팔’의 본명은 이명재(27·남).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한 그는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입니다. 그가 ‘일오팔’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키가 158cm이기 때문입니다.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작았던 그는 중학교 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의사에게 “더는 못 큰다”는 진단을 받은 겁니다. 갓 중학생이 된 아들의 키가 더 크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미안하다”며 울먹였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은 어린 아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져 스스로 초라한 인간이 되지 말고 보란 듯이 살아 보겠다”고 독하게 마음 먹는 계기가 됩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키는 여전히 158cm입니다. 하지만 ‘작은 키’를 개성으로 내세워 47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됐습니다. ‘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유튜브 크리에이터 일오팔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그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유튜브 채널 슬로건(‘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까지)이 인상적입니다.“그런 날이 오겠냐며 어떤 사람은 비웃을지 몰라도 적어도 저는 진심입니다.(웃음) 사실 연예계에도 작은 키로 활동하는 분들이 저 말고도 굉장히 많잖아요. 그분들 활동을 보면서 저도 응원을 받았던 것처럼, 저도 누군가에겐 그런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165cm, 170cm 정도만 됐어도’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신가요?“거짓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어중간하게 작을 바에 아예 확 작은 게 낫다고 생각해요. 시장 논리로 따져보면 희소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키 작은 남자들 사이에서 저처럼 확 작은 사람이 오히려 경쟁력이 있지 않나.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일오팔은 스스로 ‘광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일까 개그맨, 연예인, 유튜버 보다는 ‘광대’라는 단어가 일오팔에게 더욱 맞는 옷처럼 느껴집니다. 일오팔의 콘텐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탕후루, 마라탕 등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김한강 시리즈’와 키작남(키 작은 남자)이 겪는 생활 속 애환을 담은 ‘일오팔 시리즈’. 2~3분 남짓 짧은 콩트에서 다양한 상황에 처한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영상에서 일오팔은 화려하고 잘난 사람이기보다는 조금은 부족하고 찌질한 사람이 됩니다. ―일오팔을 두고 ‘찌질 미(美)’가 있다고들 합니다. “처음 유튜브 시작할 땐 다양한 시도를 해봤어요. 근데 팬들이 저의 불쌍하고 우울해하는 표정을 특히 좋아해주시더라고요. 우울한 표정 연기를 하려면 어떤 캐릭터가 좋을까 고민한 끝에 ‘김한강’ 캐릭터가 탄생한 거예요.”―리얼리티 보다는 연기 콘텐츠가 많은 편입니다. “원래는 정통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셰익스피어 희곡도 다 읽고 연구를 많이 했거든요. 유튜브 시작하면서도 연기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러다 ‘김한강’ 캐릭터를 만들었고 다양한 상황극을 보여줄 수 있게 됐죠. 언젠가 정극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찌질하고 처량하고 불쌍한 캐릭터, 저한테 익숙한 역할이요.”―광대가 되고 나서 가장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면요?“제 영상을 보고 팬들이 응원을 많이 보내주세요. 그 중에서도 키가 작은 친구들이 저를 보면서 힘을 많이 얻는다고 메시지를 보내실 때가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광대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저도 그 친구들 메시지가 진심으로 와닿고 감사하고 또 힘을 얻게 되거든요.한 번은 길거리에서 저보다 작은 남자 분(154cm)이 오셔서 ‘작은 키 때문에 힘들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제 영상을 보던 분이셨어요.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진심을 터놓고 대화했어요. 표정이 밝아지시는 걸 보고 저도 한참동안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작은 키’는 누군가에겐 콤플렉스일 수 있습니다. 일오팔도 처음부터 ‘키 작다’는 말이 듣기 편했던 건 아닙니다. 악의 없이 던지는 말에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때 놀림을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어요.“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도 정말 많이 놀렸고요. 누군가 악의를 갖고 심하게 괴롭혔다기보다는 ‘키 작다’며 일상적으로 놀림을 받다보니까 지속적인 데미지가 오는 거예요. 별 생각 없이 던지는 말들이 축적되다보니 상처가 되더라고요.”―지금은 오히려 ‘작은 키’를 전면에 드러내는 콘텐츠를 만들잖아요. 계기가 있었나요?“중학교 때 친구들은 저를 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쟤 진짜 웃긴 애다’ ‘쟤 키는 작은데 웃기긴 진짜 웃기다’ 친구들 사이에서 ‘웃긴 애’로 통하는 게 자연스러워지면서 중학교 졸업할 때쯤 스스로 결심했어요. ‘나는 광대해야겠다’고요.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유튜브도 고등학교 친구가 먼저 제안한 건데, 그 친구가 지금은 채널 ‘일오팔’의 PD를 하고 있어요. 친구가 유튜브하자면서 해준 말이 저한테 엄청 꽂혔거든요. 대놓고 이랬어요.” 남자 키 158cm은 진짜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너 유튜브 해야 된다.―얼핏 들으면 기분이 나쁠 만한 말인데요.“물론 기분 나쁘게 들을 수 있는데 전 아니었어요. 그 한 마디에 제가 완전 설득이 되어버린 거예요. 솔직히 제 키가 어중간하게 작은 것도 아니고 아주 확 작잖아요. 그게 약점이 아니라 개성이자 캐릭터, 강점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한국 여성 평균(161cm)보다 키가 작은 건데 연애할 때 고충은 없나요?“남들 하는 만큼 해왔습니다.(웃음) 연애 경험은 10회 정도 되는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모습을 멀리서 실루엣으로 보면 키도 몸집도 작아서 왜소하잖아요. 근데 가까이에서 앉아서 대화하면 ‘작아 보이지 않는다’면서 반전 매력이 있다고 해주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자신감이 작은 키를 보정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감을 갖게 되면 성격도 좋아집니다.”―주눅 들거나 위축되는 법 없이 항상 이성 앞에선 당당한 편인가요?“물론 저보다 5cm 이상 크신 분들은 조금 부담스럽긴 합니다. 비 오면 우산을 같이 쓸 때가 있는데, 제가 우산을 들면 (저보다 키 큰) 여자분들 눈을 자꾸 찌른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멀어지는 것 말고는 연애에 있어서 키는 전혀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유튜브 채널 ‘일오팔’은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채널 개설 2년여 만에 구독자 45만 7000명을 달성했습니다. 주력 콘텐츠인 쇼츠(60초 이하 유튜브 영상) 최고 조회수는 7045만 회를 찍었습니다. 최근엔 곽튜브, 빠니보틀 등 인기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다수 소속된 샌드박스로 소속사를 옮기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입니다.―부모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 것 같습니다.“저번 명절 때 부모님 뵀는데 너무 기뻐하시더라고요. 최근엔 할머니랑 손잡고 걸어가는데 저를 거리에서 알아봐주시는 분이 계셨어요. 사실 할머니께 제 직업(유튜브 크리에이터)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거든요. 근데 길거리에서 팬들이 알아봐주시니까 할머니도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저도 무척 기뻤습니다.”―꿈이 있다면요? “거창한 꿈은 없어요. ‘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까지. 지금처럼 열심히, 잘 살아보겠습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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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플, 조롱 보란 듯이 나만의 길을 갈 것” 13년 만에 타이푼 컴백한 솔비[복수자들]

    ‘작가 권지안’이 ‘가수 솔비’로 돌아왔습니다. 201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2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국제 아트페어에서 대상을 수상하기까지. 지난 10여년 간 화가로 살았고 인정받은 그가 타이푼(TYPHOON)의 두 멤버와 13년 만에 신곡을 발표한 겁니다. 노래 제목은 ‘왜 이러는 걸까’. 최근 ‘복면가왕’에 출연해 화제가 된 타이푼 멤버 우재와 함께 부른 듀엣곡입니다. 2006년 결성된 3인조 혼성그룹 ‘타이푼’은 활동 4년여 만인 2010년 1월 해체된 그룹입니다. 타이푼이 해체됐을 무렵 그는 활동명 솔비를 잠시 접어두고 자신의 본명인 권지안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악성 루머와 댓글로 우울증을 앓던 그가 치료 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겁니다. 치료를 넘어 창작의 세계로 넘어온 그는 2012년 첫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전업 화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를 두고 일각에선 가수 활동을 아예 접는 게 아니냐는 추측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작가 권지안만큼이나 가수 솔비도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나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음악과 미술을 결합한 ‘셀프 컬래버레이션’ 같이, 가수와 화가를 모두 경험한 그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 권지안’ 그리고 ‘가수 솔비’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2006년 타이푼의 리더이자 메인보컬로 데뷔해 연예계에서 겪은 경험담과 “사과는 그릴 줄 아냐”며 질투 섞인 비난 세례에도 불구하고 작품 하나로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이야기까지.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그의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채널 ‘기웃기웃’은 여기로 접속하면 됩니다. https://youtu.be/qkzYPq9J9Uk 네이버에선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으면 됩니다.)―13년 만의 타이푼 신곡으로 컴백 소감이 궁금합니다. “2010년 타이푼 해체되고 한참 뒤인 2017년에 ‘그래서…’와 ‘우하하’라는 곡으로 리메이크 앨범을 낸 적이 있어요. 그걸 듣고 거북이 선배님의 ‘비행기’를 제작하신 분이 저희한테 제안해주셨죠. 타이푼이 거북이의 노래 ‘비행기’를 불렀으면 좋겠다고요. 흔쾌히 제안에 응했어요. 거북이 선배님들에 대한 저희 기억이 엄청 좋았고요. ‘비행기’는 터틀맨(故 임성훈) 선배님의 훌륭한 업적이기도 해서 타이푼 스타일로 밝게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비행기’ 리메이크 작업을 계기로 멤버들이 다시 뭉치게 됐어요. 우리 이렇게 끝내지 말고 신곡도 내보자고요. 13년 만에 나온 신곡이에요. 제목은 ‘왜 이러는 걸까’입니다.”―이전의 타이푼 곡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신곡 작업할 때 멤버들끼리 한 이야기가 있어요. 원래 우리가 했던 신나는 댄스곡 말고 다른 스타일의 노래를 해보자고요. 따뜻한 가을에 어울리는, 사랑이 넘치는 설레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우재(타이푼 리드보컬)씨가 ‘복면가왕’에 출연해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컴백 타이밍도 좋았어요. 우재 씨가 가창력이 굉장히 좋거든요. ‘복면가왕’을 통해서 우재 씨의 가창력이 널리 알려진 것 같아 너무 기뻤어요.”―올해는 ‘작가 권지안’이 아닌 ‘가수 솔비’로만 활동하시는 건가요? “올해는 미술 분야에선 안식년을 갖고 있어요. 10년 동안 작가로서 그림을 그려오면서 한 번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고 느꼈거든요. 새로운 작업을 위해선 다른 에너지도 필요하잖아요. 올해는 특히 음악에만 집중해보고 싶어서 ‘왜 이러는 걸까’ 다음으로 준비하는 음반도 있어요.”―솔로 음반인가요? “가수 알리 씨랑 함께 작업한 곡이에요. 최근 알리 씨랑 이탈리아, 스위스 여행을 다녀왔거든요. 그곳에서 영감을 받아서 제가 작사하고 알리 씨가 음악을 만들었어요. 11월 공개 예정이에요. 제목은 ‘에스프레소 마티니’입니다. 제가 ‘에스프레소 마티니’라는 칵테일을 되게 좋아하는데,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가사를 썼어요.”솔비는 가수 타이푼의 메인 보컬로 2006년 연예계 데뷔했습니다. 우재, 지환과 함께 3인조 혼성그룹으로 데뷔했지만 대중의 주목을 받은 건 솔비였습니다. 엉뚱하고 솔직한 캐릭터로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치며 솔비는 단박에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다보니 타이푼의 다른 멤버들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게 됩니다. 활동 스케줄, 수익 등 멤버들 간 격차는 자연스럽게 그룹 해체로 이어졌습니다.―타이푼 활동 시절 다른 멤버들보다 큰 인기를 누렸어요. “활동할 당시 제가 너무 바빴어요. 솔로 활동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타이푼 활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제가 자발적으로 팀을 나온 건 아니었어요. 개인 활동이 많아지고 수익이 커지니까 회사에서 자연스럽게 분리한 거였죠.”―타이푼 해체 후 멤버들과는 어떻게 지냈나요? “가족 같았던 사이였어요. 팀이라는 게 비즈니스 관계라고 하지만 멤버들은 나의 모든 걸 다 알고, 그 사람의 모든 걸 다 알잖아요. 어쩌면 가족보다 가깝기 때문에 서운한 게 많을 수 있고요. 가족처럼 느끼기 때문에 험한 말이 오갈 수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사이가 좋았어요. 우재, 지환 모두 저보다 동생인데 누나누나 하면서 잘 따랐고요.”―불화는 없었나요? “싸운 적도 많았죠.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멤버들의 문제라기보단 당시 매니저의 문제였죠. 그땐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이었잖아요. 한창 예쁠 때였고 연애도 하고 싶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매니저가 멤버들한테 ‘솔비 누나를 감시해라’고 시킨 거예요. 제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매니저는 걱정되니까 그랬던 건데…. 제 입장에선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기분이 나빴어요. 그걸 시킨다고 또 하냐면서(웃음).”‘가수 솔비’는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화면 속 솔비의 이미지는 이랬습니다. 엉뚱하고 솔직하지만 백치미를 지닌 미녀. 솔비의 이런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방송에선 그런 이미지로만 그를 다뤘습니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많은 연예인이 그렇듯, 솔비 역시 악성 댓글과 루머에 시달리게 됩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위기였습니다.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의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타이푼 해체 후 방송활동을 줄인 그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미술을 접하게 됩니다. 처음엔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미술이 지금은 그의 일부이자 전부가 됐습니다. 10년 만에 ‘가수 솔비’는 ‘작가 권지안’이란 호칭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됐습니다. ―‘가수 솔비’와 ‘작가 권지안’. 본인과 더 닮은 자아는요? “솔비는 입혀지고 포장된 캐릭터에 가까워요. 사회에서 생성되는 인격이 있고 원래의 내가 가진 천성이 있잖아요. 실제의 저는 내성적이고 진지할 때도 많아요. 하지만 ‘방송인 솔비’는 어쨌든 시청자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줘야 하잖아요. ‘가수 솔비’는 무대에서 화려해야 하고요. 그런 의무감 때문에 특정 이미지가 강조되어서 가끔 지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작가 권지안’은 원래의 제 모습을 전부 포용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내성적이고 진지하지만 재밌거나 화려할 때도 있고요. ‘본래의 나’라는 편안함이 ‘작가 권지안’일 때 더 느껴지는 것 같아요.”‘미술계 완판녀’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작가 권지안’의 작품은 컬렉터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작품의 낙찰가는 수백만 원부터 수천만 원대를 호가합니다. 최고가를 기록한 것은 ‘플라워 프롬 해븐’(Flower From Heaven)입니다. 2022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71회 경합 끝에 2010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추정가였던 400만 원의 5배 수준이었습니다. ―‘플라워 프롬 해븐’은 어떤 작품인가요? “개인적인 의미가 큰 작품이에요.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를 추모하려고 ‘플라워 프롬 헤븐’이라는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쓰려고 했어요. 근데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없는 거예요. 가사를 다 지우고 허밍으로 노래를 했어요. 허밍으로 부른 ‘플라워 프롬 헤븐’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에요. 이 그림에 스피커를 심어뒀는데, 그 안에 허밍 음악을 담았어요. 그림 낙찰받은 사람만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거죠.”―어떤 음악인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낙찰 받은 분께 음악 공개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있어요. 근데 그분께서 결국 음악을 공개하지 않으셨어요. 그분이 공개하지 않는 한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웃음)”―그림을 사는 분들을 위해 늘 기도하신다면서요. “저는 힘들고 우울하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때 미술을 선물처럼 만났거든요. 제가 그림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고 잘 극복했듯이 제 그림을 보는 분들도 치유의 에너지가 전달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림을 구입해서 집에 걸어둔다는 건 마치 가족이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내 공간에 누군가 들어와서 같이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누군가의 공간에 걸리든 제 그림이 행운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죠.”―‘작가 권지안’의 창작 동력은 긍정적 에너지인가요? “제 작품들 중 상처에 대한 표현을 담아낸 작업도 있지만 그럼에도 전 항상 긍정을 담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내가 미술을 통해서 극복했고 희망을 갖게 됐기 때문이에요. 미술뿐 아니라 삶도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갖기 위해 살아가는 거잖아요.”긍정과 희망을 그리고 싶다는 ‘작가 권지안’에겐 그의 작품세계를 폄하하는 말이 뒤따랐습니다. “사과는 그릴 줄 아냐”부터 시작해 ‘고등학교 입시 미술 같다’ ‘미대 신입생 수준이다’ ‘연예인 프리미엄 아니냐’ 같은 자극적인 말들이 쏟아집니다. 대부분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받는다는 주장들이었습니다. 202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국제 아트페어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두고도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가수 솔비’에게 쏟아졌던 악성 댓글이 이젠 ‘작가 권지안’을 향한 비난으로 바뀐 것입니다.―‘작가 권지안’을 향한 조롱과 폄하가 ‘가수 솔비’에 대한 악성 댓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평이라는 건, 작가를 분석하고 그 작가에 대해 작가의 세계를 정확하게 안 다음에라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저에 대해 분석도 않고 시류에 한두 마디 보태는 건 농담 따먹기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엔 화가 났다기보다는 평론하시는 분이 방송에 나와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계실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평론가는 평론할 때, 방송인은 방송할 때, 화가는 그림 그릴 때 멋있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일 가치가 있나요?”―본인 작품에 대한 비평 중에 와 닿았던 것도 있나요? “웬만한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선 정말 흥미롭게 봐요. 왜냐하면 작가가 자기 세계에 빠져서 깊은 골로 들어갈 때가 더 문제거든요. 이걸 객관적인 눈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해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 비평은 작가에게 좋은 재료이고 좋은 자극이에요.”―‘연예인 프리미엄’이라는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연예인이니까 프리미엄 붙는다’ ‘연예인 작품이니까 사는 거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실제로 돈을 주고 그림을 사 갈 때는 연예인이라서 사는 분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의 가수,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와 저의 작품 가치는 별개라고 생각해요.”‘직업화가’가 된 후부터 그에겐 스스로 세운 원칙이 있습니다. 작품 판매 수익금의 10%를 기부하겠다는 것. 특히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영·유아 양육 보호시설 경동원과는 2014년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도 봉사활동과 기부를 해오고 있습니다. ―미술을 통해 다른 이를 돕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저는 미술을 통해서 치유를 받았잖아요. 제가 받은 긍정, 치유의 에너지를 나누고 싶은 거죠. 제게 있어 미술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에요. 저는 미술로 인생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인내력이나 다양한 생각과 시야. 미술의 재료를 찾기 위해 자전적인 탐구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미술을 통해서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고 있어요.”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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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추행 누명 쓰고 아이돌 떠난 이 사람, 해병대서 ‘무적’이 되어 돌아왔다[복수자들]

    아이돌에게 ‘연애’와 ‘결혼’은 금기 중 하나입니다. 성인 간의 사랑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건 가혹하다는 시선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돌에게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미지입니다. 열애설은 아이돌이 구축해 온 판타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립니다. 나이가 서른 살에 가까운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결혼 소식을 알릴 때 팬들에게 장문의 손편지를 통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결혼을 하거나 열애설이 터진 멤버의 탈퇴를 팬들이 나서서 요구하기도 합니다. 엑소의 첸, 하이라이트의 손동운, 아이콘의 바비 모두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아이돌 밴드 ‘엔플라잉’ 멤버였던 권광진(31)도 금기를 깬 아이돌 중 한 명입니다. FT아일랜드, 씨엔블루를 배출하며 아이돌 밴드 명가로 불렸던 FNC엔터테인먼트의 기대주 엔플라잉으로 2015년 데뷔한 그는 2018년 팬과의 교제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가 팬미팅에서 팬을 성추행했다는 루머가 SNS에 퍼졌습니다. 당시 소속사는 “팬과의 교제가 사실로 확인돼 권광진의 탈퇴를 결정”했고, “성추행 의혹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추문에 휩싸인 채 팀을 떠났던 권광진이 탈퇴 5년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당시엔 여자친구의 존재를 떳떳하게 인정하지 못했다”는 그는 열애설 상대였던 팬과 지난해 결혼했습니다. 성추행 루머를 퍼뜨렸던 이들은 2021년 허위사실 유포로 민·형사상 처분을 받았습니다. 탈퇴 후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제대한 뒤 해병대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브 ‘무적권’을 만들어 ‘군튜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구독자 11만 명을 넘기며 인기를 끌고 있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아이돌의 연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8년 9월 엔플라잉 탈퇴 후 첫 인터뷰에요. 팬과의 교제로 소속사에서 퇴출당하신건데, 그 팬과 지난해 결혼을 하셨다고요.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 아내가 버스 정류장에 제 생일 축하 광고판을 걸었어요. 저도 그걸 보려고 갔다가 현장에 있던 아내와 우연히 마주쳤어요. 광고를 걸고 현장에 와서 챙기는 게 고마워서 제가 번호를 물어봤어요. 예뻐서 반한 것도 있고요(웃음). 연락을 주고받다가 사귀게 됐죠. 교제가 발단이 돼 팀은 탈퇴했지만, 이 친구는 제가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지난해 결혼을 했거든요. 처음 팬과 사귄다는 소문이 퍼져서 소속사가 맞느냐고 확인을 했을 때는 “안 사귄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아이돌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사상교육을 연습생 때부터 받아서 저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발동했어요. 결국 교제 사실이 드러나서 소속사가 탈퇴를 결정했죠. 거짓말을 한 건 아직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성추행 의혹도 있었어요. 허위사실 유포자들을 고소했고, 2021년 유포자들이 형사상 처벌, 민사상 배상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 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아이돌 시절을 통틀어 성추행 루머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요. 제가 하지도 않은 짓으로 비난의 대상이 됐으니까요. 제가 성추행했다는 글을 SNS에 올린 사람이 제 아내와 같이 엔플라잉 팬 활동을 하던 친구였어요. 여자친구가 저와 사귄다고 하니 질투가 났는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어내서 글을 올렸더라고요. 허위사실이었기 때문에 저는 경찰에 입건조차 되지 않았고요, 저는 처음 글을 올린 사람과 악플러들을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했습니다. 형법상 유죄 판결을 받았고, 민사상 손해배상을 물었어요. 4년여 만에 제가 무고하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2006년 15살의 어린 나이에 FNC에 입사해 10년 가까이 연습생 생활을 했습니다. 정용화, 강민혁, 이종현과 함께 씨엔블루의 데뷔 멤버로 확정돼 일본에서 앨범을 내고 활동했지만, 한국 데뷔 직전 팀 색깔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자리를 이정신이 대체했습니다. 한 차례 데뷔의 고배를 마신 뒤 2015년 엔플라잉으로 데뷔했지만 2018년 성추문으로 퇴출당했습니다. 10대와 20대를 바친 10여 년의 연습생 기간에 비해 아이돌로 활동한 기간은 턱 없이 짧았습니다. ―탈퇴 후 멤버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멤버들과 종종 연락을 하고 지내다가 3년 전부터는 연락이 두절됐어요. 회사에서는 저와 멤버들이 교류를 한다는 게 사업적으로 안 좋을 거고, 팬들도 저와 멤버들이 연락하는 것을 싫어해서 자연스럽게 끊겼어요. 제가 탈퇴한 직후에 엔플라잉이 ‘옥탑방’으로 음원차트와 가요 프로그램에서 데뷔 후 처음으로 1위를 해서 정말 기뻤어요. 축하글을 제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팬들에게 항의 메시지가 오더라고요. 안 좋은 이유로 탈퇴했으니 더 이상 멤버들과 엮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죠. 그래서 글을 바로 내렸어요. ―멤버들과 오랜 기간 연습생 생활을 같이 한 가족 같은 관계였을 텐데요. 초반엔 가족 같은 관계이다가 점점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사내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가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저는 옳고 그름이 확실한 스타일이고 그걸 가감없이 표현하는 성격이거든요. 어느 순간 제 생각을 드러냈을 때 멤버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어요. 그게 팀에게는 좋은 길이니 그랬을 거예요. 그러다보니 저도 제 생각을 숨기고, 멤버들에게도 솔직하게 터놓질 못했어요. 그런 게 쌓이다보니 점점 비즈니스 관계가 돼 갔어요. ―10년 넘게 연습생 생활을 했는데, 팬과 사귄다는 이유로 탈퇴를 해야 했어요. 억울하거나 아쉽지는 않나요? 너무 어린 나이에 소속사에 들어오다 보니 10년이 넘는 연습생 기간 동안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명확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밴드음악을 좋아해서 막연히 밴드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연습생이 됐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아이돌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윙크를 하고 하트를 만드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아이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걸 못하는 제 모습도 만족스럽지 못했죠. 그러다보니 방송에 나오는 제 모습도 모니터링하지 않았어요. ‘뜨거운 감자’ 때 무대를 보면 카메라도 안 쳐다보고 혼자 무대에서 뱅뱅 돌아요. 그래서인지 아이돌에 아무 미련도 안 남은 것 같아요. 권광진은 엔플라잉 탈퇴 9개월만인 2019년 9월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입대한 해병대는 그에게 인생 2막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는 7주간의 신병교육 과정에서 1000여 명의 기수 동기 중 1등에 해당하는 ‘무적해병상’을 받았습니다. 제대 후에는 해병대 관련 콘텐츠로 유튜브 ‘무적권’을 만들어 구독자 11만 명을 넘겼습니다. ―제대 후 해병대 유튜브 채널 ‘무적권’을 개설했어요. 최근 구독자 11만 명을 넘겼는데, 수익활동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해병대 관련 굿즈를 판매하는 ‘해병대 스토어’도 운영하고, 유튜브 활동도 하면서 감사하게도 아이돌 때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이 돈을 벌고 있어요. 제가 엔플라잉 활동 정산이 되기 전에 탈퇴를 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일을 하면 돈을 받는 구조를 이해한지가 얼마 안 됐어요.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은 어렸을 때부터 연습생으로 들어가서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교육이 무의식에 흘러들어가 있어요. 그러다보니 오늘 스케줄을 가면서도 얼마를 받는지도 모르고, 콘서트를 해도 수익이 정확하게 얼마인지 모르는 거예요. 너무 어리다보니 돈에 대해 민감하지 않았던 것도 있고요. ―기수 동기 중 1등에 해당하는 ‘무적해병상’을 받았어요. 해병대가 왜 그렇게 좋으셨나요?엔플라잉에서 탈퇴했을 때 그 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이 박살난 상황이었어요. 입대 당시 제 머릿속엔 ‘생존’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어요.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다보니 예전에 추구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빈손에서 시작하니 해병대 생활에 더 절실하고 열심히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오롯이 쏟았죠. 군대 생활이 체질에 맞아서 직업군인도 고려했어요. 헬기조종 쪽으로 가려고 교재도 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새벽에 제 머리맡에 편지를 두고 나가시더라고요. 헬기 조종은 사고가 나면 무조건 즉사거든요. 위험한 일에 도전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셨는지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군인이 되는 대신 군대 콘텐츠를 만드는 일로 만족하고 있어요. ―병역기피로 논란이 된 남자 연예인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례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굉장히 안타까워요. 논란이 일었던 분들 대부분 잘 나가다가 한 순간 병역기피로 활동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군대가 사실 그렇게 안 빡세거든요. 연예계가 훨씬 더 힘듭니다. 제가 해병대 입대 첫날 느낀 게, ‘잠은 재워주네?’였어요. 저는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잠을 많이 자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전 군대에서 오전 5시 반이면 눈이 떠져서 제일 먼저 씻고 자리를 정리했어요. 육체적으로는 해병대가 아이돌보다 더 힘들 순 있지만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하면 돼요. 아무리 무거운 걸 메고 훈련을 받아도 정신적으로 힘든 것만 못해요. 팬과의 교제는 사실이었지만,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성추행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평생을 약속할 정도로 끌렸던 상대와 연애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퇴출당해야 했던 당시 상황이 억울할 법도 하지만 권광진은 “누구의 탓을 할 것도 없다. 오로지 내 부주의였다”고 말합니다. ―해병대가 여러 모로 삶의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은데요,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탈퇴 직후에는 성추행 루머를 퍼뜨린 팬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을 탓했어요. 군대에서 저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됐어요. 제 부주의로 팀을 탈퇴하게 됐기에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더라고요. 연습을 열심히 안했거나, 누군가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던 제 잘못들이 많이 떠올랐어요. 요즘엔 온라인에 성추행 루머를 올렸던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까지 들어요. 처음엔 제가 좋아서 팬 활동을 시작했던 분들이잖아요. 제가 성실하게 활동했다면 그 분들이 그러지도 않았을 텐데…. 한때 제 팬이었던 사람들에게 피해보상까지 받고 ‘나도 참 악랄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다 제 잘못이라는 반성을 많이 하게 됐어요.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제 별명이 ‘권하마’에요. 방송 중에 물을 많이 마셔서 구독자 분들이 붙여 주신 별명인데요. 물을 많이 먹는 이유가 혼자서 쉴 새 없이 말을 해서 그래요. 처음 라이브 방송을 할 때는 시청자가 2, 3명밖에 없었는데, 그 사람들을 위해서 몇 시간동안 열심히 떠들던 게 습관이 돼서요. 그런데 전혀 힘들지 않아요. 아이돌 때는 제가 생각했던 것들을 마음대로 발언할 수 없고, 항상 조심해야 했어요. 만들어진 이미지에 갇혀서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갔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원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제가 원하는 스케줄을 잡잖아요. 무적권 채널도 스스로의 힘으로 키워가고 있고요. 그래서 어떤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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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년 차 개그맨 ‘아싸 최우선’, “호응 없어도 끝까지 ‘웃기는 사람’ 되고 싶다”[복수자들]

    뭘 올려도 사람들이 안 봐요. 길거리 다니면 가끔 절 알아보긴 하시는데 구독자, 조회수는 더 떨어지고 있어요. 이제 저 어떡하죠?개그맨 최우선(35)이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며 짠내 나는 읍소 영상을 올렸습니다. 아무리 봐도 누군지 잘 모르시겠다고요? 맞습니다. 척 보면 알 법한 유명 개그맨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우선은 데뷔한 지 7년이나 된, 꽤 오래 활동해온 개그맨입니다.‘윤형빈 소극장’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로 희극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17년 tvN ‘코미디빅리그’의 한 코너 ‘잠입수사’로 데뷔했습니다. 지난해 ‘코미디빅리그’를 그만두고 여러 유튜브 웹예능에서 활약했지만 아싸 티는 벗지 못했는데요. 최근엔 SNL 코리아 시즌4에도 출연하는 등 천천히 ‘인싸’들의 세계로 넘어오는 중입니다.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아싸 개그맨 최우선을 만났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랫동안 꿈 꿨던 개그맨의 길을 7년째 걷고 있지만 최우선의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고 합니다. 기대 만큼 호응을 받진 못해도 끝까지 ‘웃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7년차 개그맨, 슬럼프에 빠졌다고요?“거리에 나가면 알아봐주시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유튜브 콘텐츠는) 뭘 올려도 조회수가 잘 나오지 않아서 걱정이 큽니다. 2021년 2월 채널을 개설했는데 1년 만에 구독자 수 10만 명이 넘었거든요. 100만 뷰가 넘는 콘텐츠도 꽤 있었고요. 근데 최근 1년 간 구독자 수가 2만 명도 안 들었어요. 상승세가 확 꺾여서 고민이에요.”―읍소 영상을 올리셨는데요.“유튜브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건 사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이걸 제 고민이라고 오픈한 적은 없어요. 다른 유튜버들과 달리 구독자와 소통하거나 그런 타입은 아니었거든요. 혼자 꽁해 있는 것보다 오픈주방처럼 구독자들의 조언, 직언을 듣고 싶은 마음에서 올렸습니다.”―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아싸 대학생’이라는 부캐 하나만 계속 연기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요. 조회수가 오르지 않는다는 건, 보는 사람만 보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요즘 가장 큰 고민입니다. 저 역시 정답은 잘 모르지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동안은 부캐를 활용한 콩트만 했다면 이젠 부캐를 활용한 여러 기획 콘텐츠에 도전해보려고요.”―아싸 대학생 부캐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실제 인물을 보고 영감 받은 캐릭터는 아니에요. ‘코미디빅리그’에서 연기했던 한 코너의 캐릭터였어요. 녹화는 했는데 방송엔 못 나왔거든요. 최근 개그맨들 사이에서 부캐가 한창 인기였을 때 저도 부캐를 해봐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코미디빅리그’에서 연기했지만 방송에 나오지 못한 ‘아싸 대학생’을 떠올렸죠. 제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재밌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실제의 저라는 사람과 결이 가장 비슷하기도 했고요.”―원래 ‘아싸’ 같은 성격인가요?“그냥 평범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조용한 편이었고요. 학교에서 떠들고 웃기고 그런 타입은 전혀 아니었어요. 대부분 조용히 있는 편이었는데 친해지고 나면 재밌어지는 친구였어요. 새학기가 시작되면 1학기 때는 데면데면하다가 2학기 되면 웃겨지는 친구 있잖아요. 그게 저였어요. 다시 반 바뀌면 조용해졌고요.(웃음)”최우선이 본격적으로 ‘부캐’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22년 2월. ‘코미디빅리그’에 함께 출연하며 동고동락했던 개그맨 김해준이 부캐로 큰 인기를 끌면서부터였습니다. 최우선과 김해준은 무명 시절 한 집에 동고동락할 정도로 친한 사이입니다.―절친 김해준 씨가 일약 스타가 됐는데요. “형이 너무 잘 돼서 놀랐어요. 제 주변 사람 중에 이렇게 유명해진 사람은 해준 형이 처음이었거든요. 스타들은 제게서 되게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바로 제 옆에서 같이 코미디 하던 형이 잘 되는 걸 보게 되니 많은 자극이 됐어요. 그것 때문에 ‘아싸 최우선’ 유튜브를 시작한 것도 있어요. 머리로만 새로운 도전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해준이 형 덕분에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계기가 됐죠.”―‘아싸 최우선’은 소수에게 컬트적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떡상’은 되지 않았지만 몇몇 팬들이 좋아해주시는거 보면 소수에게 어필하고 있진 않나 생각합니다.(웃음) 너무 소수여서 민망하긴 한데요. 그래도 저를 좋아해주시는 팬들이 있으니까 정말 괜찮을 때도 있습니다.”―‘아싸 대학생’은 어딘가 모르게 부족한, 모자란 느낌의 캐릭터인데요. “제가 하고 싶어하는 ‘페이소스’식 개그랑 잘 맞는 캐릭터예요. 저의 단점이나 결함, 슬프거나 짜증나는 일을 개그로 승화시키는 거죠. 나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타인에게 웃음이 될 수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이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윤형빈 소극장’ 시절부터 크게 의지했던 박휘순 선배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가장 닮고 싶은 개그맨으로 박휘순 씨를 꼽으셨더라고요.“박휘순 선배는 개그맨 지망생 때 ‘윤형빈 소극장’에서 처음 알게 된 사이예요. 잘 모르는 사이였는데 되게 잘해주시는 거예요. 밥도 사주시고 술도 사주시면서. 모든 후배들에게 다 잘해주는 서글서글한 성격인줄 알았는데, 저한테만 잘해주셨던 거였어요. 이유를 여쭤보니 ‘널 보면 내 지망생 시절이 생각난다’고 하시더라고요.”―두 분이 약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박휘순 선배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항상 웃어야 해. 안 웃으면 집에 우환이 있는 사람 같고,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 떠날 것처럼 보이니까. 우리의 무표정은 무표정이 아니다. 항상 웃어라.’ 어쩌면 개그맨으로서 제게 팁을 주신 거죠. 사실 개그맨들이 대부분 외향적이고 표정도 밝잖아요. 저처럼 우울하고 축 처지는 분위기의 개그맨은 항상 웃어야 호감처럼 보일 수 있다고 진심으로 조언해주신 거였어요.”최우선은 ‘고학력 개그맨’으로도 유명합니다.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세무사가 되려고 고시원에서 지낸 적도 있습니다. 처음 개그맨이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왜 반대하신 건가요? “대학 졸업했으니 멀쩡한 회사 취직해서 평범하게 살지 왜 그런 험한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요. 처음엔 엄청 반대하시다가 동생이 취업하면서부터 (부모님) 마음이 누그러지시더라고요.(웃음) 아들 둘 다 밥벌이 못 하고 살면 어떡하냐 걱정하신 거죠. 동생에게 고마워요. 덕분에 부모님 걱정을 덜었으니까요.”―부모님께 들은 칭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원래 주변 사람들한테 자식 자랑 잘 안 하시는데, 저 개그맨 되고 나서 SNS 프로필 사진도 바꾸시더라고요. ‘코미디빅리그’에 출연한 영상 캡처한 사진으로요.(웃음) 동생은 취직해서 나가 사는데 저는 반백수처럼 부모님이랑 함께 살거든요. 집안일도 잘 하고 부모님이랑 대화도 자주 하니까 내심 저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튜브에 올리는 영상마다 낮은 조회수에 화제성도 떨어지니, 얼굴이 알려진 개그맨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요. 그만두거나 숨기보다는 정면돌파를 택했습니다. 100만 뷰, 수십만 구독자를 바라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1년 내 작은 성과라도 만들어서 채널삭제하지 않는 것’이 그의 목표입니다.―목표가 너무 소박한 거 아닌가요?“옛날부터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재밌어하는 걸 좋아했어요. 팬은 많지 않고 유명세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역할이 계속 주어지잖아요. 그것만으로 만족해요. 타인과 비교만 하지 않으면, 제 상황은 정말 만족스러워요. 잘 나가는 동료들과 비교를 아예 안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크게 신경 쓰는 편도 아니거든요.”―개그맨이 본인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나요?“데뷔 전까진 후회할 때도 많았어요. 개그맨 되겠다고 학원도 다니고 공연도 열심히 했는데 잘 풀리지 않았으니까요. 서른 살이 되던 해 ‘코미디빅리그’에 데뷔하고 여러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작지만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어요. 느리지만 천천히 제 길을 가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개그맨만 힘든 건 아니잖아요.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나요? 그래도 하나뿐인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불안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재밌고 즐거울 때가 더 많습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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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돌은 당신의 연애상대가 아니다… 前 아이돌 작심발언[복수자들]

    “아이돌은 무대에서 춤 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이지 적어도 팬들과 ‘유사연애’하는 직업은 아닙니다.”‘유사연애’는 가상의 인물에게 연애 감정을 갖고 상상으로 연애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아이돌 업계에서 유독 많이 언급되는 말이죠. 아이돌 그룹 틴탑의 전 멤버 방민수 씨는 K팝 아이돌 팬덤이 ‘유사연애’를 강요하는 문화 때문에 병들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그는 19살에 아이돌 그룹 틴탑의 리더 ‘캡’으로 데뷔해 14년간 아이돌 멤버로 활동하다가 올 5월 그룹에서 탈퇴했습니다. 아이돌 탈퇴 후 화가로 활동하는 그는 틈틈이 예초(刈草·풀 베는 일)도 하는 등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연예기획사의 유사연애 비즈니스, 사생팬과 유사연애로 대표되는 팬덤의 실체 등에 대해 가감 없는 비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복수자들〉이 그를 만나 ‘아이돌 14년의 삶’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이돌과 팬의 유사연애를 조장하는 연예 기획사의 상술, 아이돌에겐 공포 그 자체라는 사생팬 문화, 아이돌 내 비인기 멤버의 설움 등을 다뤘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방민수는 2010년 데뷔한 이후부터 14년간 줄곧 ‘아이돌 부적응자’였습니다. 19살에 데뷔한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자유롭게 자기 표현을 못하는 억압적 분위기가 싫었습니다. 신체에 타투를 한다고 욕을 먹고 팬을 보고 웃지 않는다고 비난을 당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공공의 적대감이 커질수록 그는 점점 엇나가게 됩니다. SNS 라이브 방송에서 자신에게 악플을 다는 팬들에게 욕설을 하고 흡연을 했습니다. 틴탑 내에서 ‘밉상’으로 통하던 그는 결국 팀을 탈퇴하게 됩니다.아이돌 활동 시절 그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팬들과의 ‘유사연애’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이돌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팬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위해 연예 기획사에서는 유사연애를 유도하는 서비스나 행사를 기획합니다. 팬이 스타에게 느끼는 연애 감정을 이용하는 건 연예 산업의 고전적인 비즈니스라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이돌 업계에선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팬들은 아이돌과 연애하는 것 같은 환상을 구입하기 위해 기꺼이 거액을 지불합니다. 스킨십이 허용되는 아이돌 팬 사인회, 실시간 영상을 통한 아이돌의 사생활 공개, 아이돌 멤버와의 가상 온라인 채팅 등이 대표적입니다.―아이돌 산업은 ‘팬덤 비즈니스’로 유지됩니다. 팬덤 덕분에 아이돌 산업이 운영되고 아이돌 멤버들도 돈을 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팬덤 덕분에 아이돌이 돈을 버는 게 맞지만 아이돌은 극성 팬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극성 팬덤을 조장하고 이를 방조하는 회사의 태도가 제일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음반에 멤버별 포토카드를 넣어서 판매하는 게 대표적인데요. 팬 한 명에게 CD 여러 장을 팔려고 하는 수법이에요. 일부 극성 팬들은 원하는 멤버의 포토카드를 갖기 위해 음반 구입에만 수십, 수백만 원을 쓰게 됩니다. 돈을 많이 쓴 일부 팬들은 ‘나는 이만큼 소비를 했으니까 (아이돌 멤버에게 유사연애를 강요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BTS 같이 유명한 아이돌한테는 별로 해가 되진 않아요. 전체 팬덤이 많으니 극성 팬들의 영향력이 약할 수밖에 없거든요. 문제는 인기가 정점에 있는 아이돌이 아니라 하락세에 접어든 아이돌입니다.”―아이돌의 인기가 떨어질 때 ‘유사연애’ 폐해가 심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팬이 1만 명 있을 때랑 100명 남았을 때를 가정해보세요. 100명의 극성 팬들은 전체 팬덤이 1만 명이었을 때나 100명만 남았을 때나 쓰는 돈의 액수는 같거든요. 1만 명 있을 때는 소수였기에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면 자신들이 다수가 된 후에는 목소리를 점점 키우는 거죠. 인기가 떨어진 아이돌에게 ‘너희 나 없으면 안 되잖아. 나 너희한테 이렇게 돈 많이 썼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너희들은 나 없으면 뭐가 되겠냐’고 권리를 주장하는 거예요.”유사연애로 시작한 팬덤이 어느 순간 선을 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사생팬(연예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극성팬을 이르는 말)의 스토킹 범죄가 대표적입니다. 사생팬에게 스토킹을 당해도 가벼운 대응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돌이 많습니다. 범행 강도가 웬만큼 심하지 않고서야 팬들을 고소·고발한다는 것이 아이돌에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사생팬에게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으신가요? “데뷔 초반부터 사생팬들이 있었어요. 집 앞에서 새벽 3~4시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새벽이라 얼굴도 안 보이는데 불쑥 찾아와선 편지랑 선물을 건네는 거죠. 소름 끼치게 놀랐어요. 저는 처음부터 사생팬들을 보면 제발 오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욕도 하고 그랬어요. 당하는 입장에서 스토킹은 정말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에요. 휴대전화번호는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는 번호로 전화, 문자 오는 건 일상이고요.”―집 주소, 휴대전화번호는 개인정보잖아요. 어떻게 알고 접근하는 걸까요? “아이돌 개인정보를 거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아이돌이 해외 공연 간다고 공항에 가잖아요. 스케줄을 공개하지 않으면 비행시간을 알 수가 없거든요. 근데 저희가 해외 나갈 때마다 소수의 팬들은 항상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팬들에게 아이돌 비행 정보를 돈 받고 파는 공항 관계자들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연예 기획사에는 직원이 많잖아요. 매니저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직군의 직원들. 그 사람들도 팬들한테 돈 받고 집 주소나 휴대전화번호를 넘긴다고 하더라고요. 비공개 스케줄을 통째로 판매하는 분도 있고요. 아이돌 개인정보를 사고파는 것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범죄나 다름 없죠.”14년간 아이돌로 살면서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졌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틴탑에서 ‘비인기멤’이었다고 합니다. 미인기 멤버를 칭하는 ‘비인기멤’은 아이돌 그룹 내에서 인기가 없는 멤버를 의미합니다. 여러 명의 다양한 멤버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에선 멤버별로 팬덤의 차등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비인기멤이 된 아이돌은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상처를 받는다고 합니다. 방민수는 활동 당시 주로 선글라스를 착용했는데, 아이돌 활동에 적응하지 못한 그가 카메라 렌즈나 타인의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틴탑 활동 시절 비인기멤이셨나요? “다른 멤버들에 비해 인기가 없었어요. 다른 멤버들이 저보다 훨씬 잘 하기도 했지만 저는 처음부터 유사연애 못 하겠다면서 행동도 ‘아이돌 답지 않게’ 한 거죠. 팬이 없는 것까진 괜찮은데 다른 멤버를 좋아하는 팬들이 저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게 힘들었어요. ‘너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멤버가 잘 나가지 못한다’ ‘너 때문에 틴탑이 뜨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면서요. 팬 사인회 같은 데서는 대놓고 싫은 티를 내요.”―비인기 멤버면 어떤 게 가장 힘든가요? “팬 사인회 같이 팬들이 참여하는 행사죠. 팬 사인회에서는 원하는 멤버들을 골라서 사인을 받을 수 있거든요. 팬 사인회 때 대부분의 팬들이 저는 보통 건너뛰고 싶어했어요. 팬들 표정에서도 저를 싫어하는 게 다 보이잖아요. 그러다보니 팬 사인회 같이 팬 만나는 행사는 아예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한테 속없이 웃어주고 싶지도 않았고요. 같이 활동하던 시기 친하게 지냈던 걸그룹 멤버가 한 명 있었어요. 그 친구도 그룹에서 비인기멤이었거든요. 군부대 행사를 갔는데 사인회를 했대요. 사인 받고 싶은 멤버한테 줄 서라고 했는데 그 친구한테는 1명도 안 선 거예요. 뒤에서 군 간부들이 군인들한테 ‘야, 저기 가서도 사인 받아, 인마’ 그랬는데 그게 더 상처였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 하면서 엄청 울더라고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상황인데도 (팬들 앞이기 때문에) 웃고 있어야 해서 너무 괴로웠다고요.”―자격지심을 느껴서 틴탑을 탈퇴했다고 개인 방송에서 고백하셨는데요. “비인기멤으로 계속 살다보면 설움의 연장선으로 자격지심이 따라와요.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아를 찾아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래도 저는 주변 멤버들과 저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어요. 틴탑에서 저는 항상 꼴찌였어요. 자격지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정신적으로도 많이 취약해졌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돌은 ‘보여지는 나’와 ‘진짜 나’의 괴리를 느낄 거예요. 우울증이나 조울증에 걸리는 아이돌도 많고요. 저 같은 경우는 스스로 싫어하는 행동을 억지로 해야 했잖아요.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컸어요. 집에 혼자 있을 때 빼고는 전부 불행했어요. 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싫어하는 행동을 ‘아이돌이기 때문에’ 억지로 해야 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어요. 스스로를 잘 모르는 어린 나이에, 아이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일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데뷔한 제 잘못이 컸죠. 참고 또 참다가 결국 그만두게 된 거예요.”아이돌을 그만둔 그는 화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미술을 배웠던 그는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즐겁다고 합니다. 2019년 첫 전시회를 연 그는 아이돌 활동 중에도 그림을 그려왔으며 개인 SNS를 통해 그림 판매도 하고 있습니다. 아이돌을 그만둔 후에는 일용직으로 예초 작업을 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예초 작업을 통해 그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금액은 100만 원 남짓입니다. ―아이돌을 그만둔 지금은 행복하신가요? “돈은 훨씬 못 벌지만 행복합니다. 아이돌 때 공연 10여 분 하고 내려왔을 때 벌 수 있는 돈이 몇백만 원이었다면 예초는 2~3시간에 30만 원 벌거든요. 근데 저는 그 돈이 훨씬 가치 있고 괜찮다고 느껴질 수 정도로 아이돌 활동이 힘들었어요. 그런 상황이 왔기에 포기할 수 있었던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포기하지 못했을 거예요.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행복해요. 저는 아이돌 문화와 생활을 견디지 못해서 나왔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었던 건 14년 동안 열심히 일해 온 덕분이기도 하잖아요. 과거의 불행했던 일로 후회하지 말고 지금 행복에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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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열 대통령, BTS 멤버는 외계인이다? 36년 째 UFO ‘덕질’하는 천재 공학자[복수자들]

    윤석열 대통령과 BTS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황당무계해 보이는 주장을 한 이는 가설과 검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과학자입니다. 그는 서울대 물리학과 학사, 카이스트 신소재공학과 석사, 영국 케임브리지대 공학박사 과정을 밟은 맹성렬 우석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59)입니다. 세계 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스 후’에 2년 연속 등재된 공학자, 2006년 특허청이 수여하는 특허 부문 최고상 ‘세종대왕상’ 수상자, ‘나노물질 합성과 실리콘계 및 비실리콘계 나노 트랜지스터’ 등에 대한 연구로 38편의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급 논문을 발표한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입에서 ‘대통령과 BTS는 외계인일 것’이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요? 맹 교수는 천재 공학자임과 동시에 36년간 UFO를 연구해온 국내 최고 권위의 UFO 연구자이기 때문입니다. 맹 교수는 세계 최대 UFO 단체 뮤폰의 한국 대표이자, 한국UFO연구협회 회장입니다. 세계적인 팝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 미국 전 대통령 조지 부시도 외계인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었죠. UFO 연구자들 사이에서 비범한 사람들은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왔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맹 교수도 윤석열 대통령과 BTS 멤버들이 외계인일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UFO는 실재한다는 증거들은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정부가 100년 간 UFO에 대한 정황을 숨겼고, 외계인의 유해를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이 의회 청문회에서 제기됐습니다. “UFO의 존재는 안보 위협 요인이기 때문에 미국이 모든 증거들을 은폐해왔다”는 맹 교수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낮에는 전기전자공학을, 밤에는 UFO를 파헤치는 맹 교수를 지난달 13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옥에서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BTS와 윤석열 대통령이 외계인인 이유를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근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미국 정부가 미확인비행현상(UAP)의 연구 결과에 대해 은폐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미국은 194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적극적으로 UFO를 연구하다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연구를 중단시켜버렸어요. 최근 들어 다시 연구를 하고 있지만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외계인이 미국과 중국, 러시아보다 뛰어난 군사력을 갖추고 지구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이는 세계 안보에 엄청난 위협이기 때문이겠죠. 우리나라 역시 UFO 연구에 소극적인 편인데 최근 들어 조금씩 희망이 보이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 공약 중 하나로 항공우주청 신설을 내세웠고, 당선 후에도 2023년 말 항공우주청이 출범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UAP에 대한 증거들이 밝혀지고 있는 만큼, 항공우주청 안에 UFO 관련 연구 팀을 만들어야 합니다. ―UFO의 실재와 함께 많이 대두되는 주장은 유명인들의 ‘외계인설’입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조지 부시, 루퍼트 머독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렙틸리언’(인간형 파충류 괴물)설에 휩싸였었는데요. 교수님도 이를 믿으시나요? ‘주변에 외계인이 있다면 누가 외계인인 것 같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유명인들은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계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세요. 지구를 점령하고 싶다면 외계인을 어느 자리에 둘까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심어 놓겠죠. 그래서 한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이 가장 외계인일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BTS도 마찬가지고요. ―유명인의 렙틸리언 설을 두고 ‘음모론’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은데요,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나요?외계인에게 납치된 경험이 있는 ‘피랍자’들의 진술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요, 진술 증거는 힘이 약합니다. 보통 역행 최면 기술을 써서 피랍자들의 납치 경험을 듣는데, 최면 상태의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어요. 그 내용이 얼마든 왜곡될 수 있다는 거죠. 진술보다 더 신빙성이 있는 증거는 북미에서 발생해 온 가축 도살 사례입니다. 1960~1970년대 미국 뉴멕시코주를 중심으로 남미, 캐나다 등지에서 소들이 예리한 칼에 사지, 귀, 생식기 등이 잘린 채 발견됐고, 더 놀라운 건 사체에 피가 한 방울도 없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는 겁니다. 2009년에도 미국 콜로라도주 한 목장에서도 4마리의 소가 이 같은 상태로 발견됐습니다. 눈, 귀, 혀, 생식기 등이 사라졌고, 피와 상처도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야생동물에 물린 흔적도 없었고, 절단 도구도 밝혀내지 못했어요. 이런 정황들 때문에 가축 도살의 범인이 외계인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외계인에게 납치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외계인 피랍 경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 납치된 순간엔 공포스러웠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즐거워진다고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공포를 잠재우기 위한 방어기재가 작동해 즐거움을 가짜로 느낀다는 주장도 있고, 외계인이 텔레파시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실 뚜렷한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즐겨야죠. 별수 있나요. UFO와 외계인 이야기를 할 때 맹 교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납니다. UFO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서울대 물리학과 3학년 재학 시절 ‘과학과 종교’라는 수업을 들은 후부터였습니다. 이후 UFO를 주제로 레포트를 썼고, 서울대 최초로 UFO 탐구 동아리를 만들었지만 가입자가 없어서 외부 인원을 영입해 한국UFO연구협회를 열었습니다. 28살이었던 1995년에는 UFO에 대해 탐구한 자료를 모아 600쪽에 달하는 책 ‘UFO 신드롬’을 발간해 과학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유사 과학 아니냐”는 동료 학자들의 무시도 받았지만, 그는 주변에서 뭐라 하던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걸 좇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습니다. 그 고집으로 36년을 공학자이자 외계인 연구자로 살았습니다. ―외계인 연구는 언제부터 하시게 된 건가요? 대학 시절 수업을 들었다가 UFO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 후 제 전공과는 별개로 UFO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원래 의대도 갈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물리학과에 진학했어요. 돈 벌기 힘들 때 ‘의대에 가고 물리학, UFO 연구는 취미로 할 걸’이라 후회가 찾아오기도 하는데, 잠깐 그러고 말아요. 의대를 갔다면 제 젊은 시절이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대신 물질적인 부분에서의 손해는 감내해야죠. ―‘검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무조건 과학이 아니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검증돼야 과학 아닌가요? UFO를 ‘유사과학’(주창자와 연구자가 과학이라 주장하지만, 과학의 요건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과 맞지 않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습니다. 입증 방법론이 비과학적이라면 과학이 아닙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해낸다면 그건 과학이죠. UFO 목격담이나 외계인 피랍에 대한 주장을 과학적 방법으로 입증하고 규명해낸다면 UFO와 외계인의 실재도 과학적인 것이 되는 거예요. 일반인들이 올리는 UFO 사진을 갖고 ‘UFO는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비과학적인 것이죠. ―UFO가 존재한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무엇이 있나요? 가장 결정적인 UFO 증거로 언급되는 건 항공모함 니미츠호 조종사들이 UFO를 목격했고, 그 물체가 실제 레이더에도 감지됐던 사례입니다. 2004년 니미츠호 항공모함 훈련 도중 2대의 조종기에 탑승해있던 4명의 조종사들이 일제히 UFO를 목격했다고 증언했고, 그 모습이 조종기의 레이더와 잠수함의 소나(음파에 의해 수중목표의 방위 및 거리를 알아내는 장비)에도 잡혔습니다. UFO 추정 물체가 우주에서 대기로 진입하는 모습, 대기를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로 진입하는 모습, 진입 후 해수면 위에서 머물러 있는 모습이 레이더에 잡혔죠. 당시 레이더로 이 물체를 감지한 조종사들이 해당 위치로 가서 이 물체와 추격전을 벌였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추격전을 벌이던 물체가 바다 밑으로 사라졌는데, 바닷속에서의 움직임은 소나로도 감지됐습니다. 구체적인 증거들을 미국 정부가 갖고 있지만 민간에 공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해당 자료가 민간 과학자들에게 넘어가서 모든 퍼즐이 맞춰지면 지구상의 기술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쉬쉬하는 것이죠. ―UFO와 외계인이 있다고 주장했던 존 맥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미국 주류학계에서 외면받기도 했는데, 교수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학자들 앞에서 UFO 얘기를 하면 저를 이상하게 보곤 했어요. “먹고 살기 힘들구나”라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죠. 저를 공학자이기 전에 UFO를 파헤치는 사람으로만 바라보고, 속된 말로 ‘또라이’로 치부하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그런 시선이 불편했지만 요즘엔 UFO 이야기를 방송에 나와 사람들에게 공유할 수 있어서 즐거워요. 이제는 자신 있게 ‘UFO는 과학이다’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미국 주류 과학자들 중 UFO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전문 잡지에 UFO와 외계인을 다루는 추세도 이어지고 있고요. UFO가 비주류에서 주류로 편입되는 것 같아 행복합니다. 김재희기자 jetti@donga.com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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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네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이 꿈”… 넷플릭스 ‘사이렌’의 정민선[복수자들]

    “‘여자 치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출연자들은 여성경찰, 여성군인, 여성소방관이 아니라 직업군을 대표해서 나온 겁니다.”올 상반기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을 연출한 이은경PD는 제작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선 경찰, 소방관, 군인, 스턴트맨, 운동선수, 경호원 등 6개 직업군의 여성들이 각자 직업의 명예를 걸고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입니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땀범벅 되고 부상을 입어도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편견을 먹고 사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지독한 승부를 벌이는 모습에 대리 쾌감을 느꼈다는 시청자의 응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속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강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센 놈이랑 붙자, 그게 멋있지” “나보다 센 놈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서 왔다”고 선전포고한 용감한 소방관입니다. 짧은 시간에 혼자 장작 30개를 패서 팀을 승리로 이끌고, 불 끄는 경기에선 전문성을 발휘해 활활 타오르는 불을 신속하게 제압했습니다. 경북 상주소방서 소속 정민선 소방사(30)가 그 주인공입니다. 최근 이 만난 그는 지난해 제1호 여성 소방차량 운전요원으로 임명된 소방관이기도 합니다. 소방차 운전은 오랫동안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분야입니다. 정민선 소방사 인터뷰는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기개 넘치는 선전포고가 매력적이었습니다. “ 1화 나오는 날, 소방학교 훈련 중이었어요. 텔레비전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는데 훈련 중이라 그럴 수 없었어요. 너무 궁금해서 휴식시간에 근처 카페로 가서 휴대전화로 봤는데 첫 화에서 제가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웃음) ‘내가 저런 말을 했었나’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말만 그런 게 아니라 경기에서 ‘센 놈’ 역할을 톡톡히 하셨습니다. 특히 장작 패기의 달인이 되셨어요. 다른 팀은 나눠서 했는데 정 소방사님 혼자 장작 30개를 팼어요. “그때 소방팀 리더였던 김현아 언니가 부상을 입으면서 저희팀 분위기가 안 좋았어요. 누구 하나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툭 흐를 정도로 암울했어요. 팀별 아레나전을 하러 현장에 도착했는데 운동장에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거예요. 진행자가 ‘의리 게임입니다. 순서를 정하십시오’라고 했을 때 떠오른 생각이 ‘최대한 혼자 해봐야 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순서를 정하는 게 저한테는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책임지고 다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다른 팀원들도 있는데 왜 혼자 장작 30개를 다 패야 한다고 생각했나요? “암울해진 팀 분위기를 다시 띄우고 싶었어요. 저도 언니들도 다시 힘을 내려면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잖아요. 소방관들이 매일 겪는 화재, 재난 현장이랑 똑같아요. 팀원이 부상을 입고 뒤처지고 있으면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팀워크라고 생각해요. 아마 장작이 2배 더 많았어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체력보다 정신력으로 해내는 거니까요.”부상 입은 동료를 대신해 한계에 도전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타인을 해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소방팀. 자기를 희생하고 타인을 구하는 ‘소방관’이라는 직업적 특성이 잘 드러났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을 통해 소방관이라는 직업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습니다. “저희 4명이 소방관을 대표해서 출연했을 뿐입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소방관의 평소 모습이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 소방관들이 땀으로, 피로 일궈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출연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근무 중에 소방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보겠냐고요. 처음엔 방송 출연 엄두가 나지 않아 거절했어요. 근데 일주일 뒤에 또 연락이 와서 죄송한 마음에 제작진 미팅을 하게 됐어요. 대화를 한참 나눈 후에 프로그램 취지에 대해 여쭤봤죠. PD, 작가님들이 정말 오랫동안 의 기획의도를 설명해주셨어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귀담아 들었어요. 제작진 말씀이 끝나자마자 ‘출연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연출을 맡은 이은경PD는 프로그램 기획 의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포츠 만화의 세 가지 키워드는 우정, 노력, 승리다. 이 키워드들은 가슴을 뛰게 한다. 자기 분야에 진심이고, 조금 모자라도 뛰어들고, 무언가를 욕망하고, 그것을 쟁취하는 데에 거리낌 없는 이야기 속에서 늘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런데 여성이 주인공인 스포츠 만화가 많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정, 노력, 승리가 담긴 진한 여성 서사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우정과 노력, 승리. 소방팀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세 가지 키워드는 유독 빛이 났습니다. 소방팀은 반칙보다 정공법으로 경기에 임하며, 피 튀는 싸움보단 땀 흘리는 경쟁을 택했습니다. 생사를 함께 한 소방팀뿐 아니라 결승전에 오르기까지 ‘원팀’으로 협력했던 운동팀과도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습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출연자들과 우정을 나누고 계시다고요. “소방팀 언니들과는 단체카톡방에서 하루 종일 떠들고요. 사이렌에 대한 좋은 기사, 댓글 나오면 꼭 공유해요. 결승전에서 맞붙은 운동팀과는 촬영 끝나고 회식도 했어요. 운동팀 김성연 선수와는 여행도 다녀오기로 했고요.”―소방팀 리더 김현아 소방장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현아 언니의 말이 소방팀의 방향이었어요. 현아 언니는 힘도 세고 성격도 불같아요. 누구보다 의리 있고 리더로서 희생 정신도 강해요. 언니는 자기가 독재자처럼 굴었다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해왔어요. ‘행복한 독재’ ‘멋있는 독재’였다고요. 그래서 결승전 때 소방팀 리더인 현아 언니가 ‘우리답게 공격하고 멋지게 전사하자’고 이야기했잖아요. 저희 모두 질 거라 예감했지만 마지막이니까 우리다운 것을 하자는 언니 말에 다들 설득됐던 것 같아요. 너무 허망하게 운동팀에 패배하긴 했지만요.(웃음)”―‘사이렌’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소방관이란 존재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화재, 재난 현장은 남녀 소방관을 가리지 않아요. 똑같은 압력의 호스를 들고 똑같은 무게의 장비를 차고 요구조자(구조가 필요한 사람)를 구해야 해요. 저희가 성별을 떠나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에요. 현아 언니 인터뷰를 봤는데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우리는 항상 증명하고 입증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여자 소방관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시선 끝에 무시, 짜증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선입견을 갖고 보시는 거예요.”―그럴 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저는 그런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긴 해요. 머리가 짧고 덩치가 크니까 제가 여잔지 남잔지 모르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인생 모토 중 하나가 ‘진짜는 모두가 알아본다’는 거예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성장하고 배우려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그냥 웃고 말아요. 날마다 출동해야 하는 사고, 재난 현장이 있는데, 그런 편견들에 속상해할 시간이 없는 거죠.” ―재난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보통 사람들은 대피하지만 소방관은 안전한 데 있다가도 위험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일단 출동벨이 울리고 나서부터는 위험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어요. 뉴스에는 큰 사고, 큰 사건만 나오잖아요. 소방관 고립, 사망 이런 큰 뉴스만 나오죠. 근데 현장에서는 작은 사건, 사고도 정말 많이 일어나요. 예를 들면 저희가 타는 소방차는 되게 높거든요. 착용 장비가 굉장히 무겁기 때문에 차에서 내리다가 넘어지기도 해요. 공기호흡기 착용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에 옆에 장애물을 보지 못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방화복이 찢어질 때도 있어요. 화재 현장에서는 불덩이들이 제 머리 위에서 굴러다니고요. 개방된 창문 틈으로 화염이 용암처럼 분출되는 경우도 많고요.”―화재 현장에서 방화복을 입어도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나요? “저희가 입는 방화복은 만능이 아닙니다. 순간의 열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요. 방화복의 소재가 밖에서 오는 열기, 수분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제 몸에서 나오는 열을 밖으로 나가는 걸 막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화복 안에 있는 열기를 고스란히 다 견뎌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소방관들이 교대로 현장에 진입하는 거예요.”―화재 현장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 있다면요? “화재 현장은 농연(濃煙·짙은 연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안 되거든요. ‘중성대’라고 해서 시야 확보가 되는 공간으로 진입, 대피해야 해요. 여기에 놓인 물이 가득 찬 수건을 잡고 이동하는데 그 수건이 소방관들에겐 목숨 줄 같은 거거든요. 이걸 놓치면 정말 무서워요. 소방관도 사람이지 않습니까? 소방관들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건 두려움과 무서움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원래부터 소방관인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을 많이 받아야 해요.”―모든 소방관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하더라고요. 트라우마가 심했던 사고가 있었나요? “몇 년 전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산사태, 낙석 방지 구조물에 들이받았는데 차량 정면, 오른쪽 유리가 다 깨져서 파편이 얼굴로 튀었어요.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뒷목 부분이 되게 뜨거운 거예요. 머리에서 피가 콸콸 나오고 있더라고요. 그때의 뜨거운 느낌이 아직도 완전 선명해요. 찢어진 부위에 아홉 바늘 정도 꿰매고 후유증으로 이석증도 생겼어요. 정말 큰 사고였어요.”―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실 것 같아요. “사고 났을 때 응급실에서 급한 조치를 받고 붕대를 감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11시 정도 됐더라고요. 타지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니까 고향에 계신 엄마한테 전화를 드렸죠. 사고 났다고 말씀드리니 엄마가 덤덤하게 ‘내일 갈게’ 하시고는 바로 오셨어요. 생각보다 엄마 목소리가 차분해서 괜찮으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에 엄마가 보고 싶어서 저녁 늦게 전화를 했는데 엄마가 엄청 긴장하는 목소리로 받으시는 거예요. 늦은 시간 딸에게 전화가 오니까 저번 사고 때처럼 또 다친 게 아닐까 염려하신 거죠. 그때 마음이 정말 아팠어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민선 소방사는 소방관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방송 출연으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가 스스로에게 붙인 별칭은 ‘동네를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입니다. ―‘동네를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구조가 간절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특이하게도, 제가 직접 119 신고하는 일이 많았어요. 제 눈앞에서 누가 다치거나 교통사고가 난다거나, 산불이 난다거나…. 한 번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날씨가 어떤가 보고 있는데 공사장에서 불이 나는 거예요. 다른 누가 먼저 신고를 할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제가 최초 신고자였어요. 아무도 손대지 않았고,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날것의 현장에 소방관들이 사람들을 구하고 조치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걸 보면서 막연하게 ‘타인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정말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제가 소방관이 된 후부터는 사건, 사고를 목격한 적이 없어요. 이젠 제가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하는 사람이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웃음)”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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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랙퀸은 죄다 트랜스젠더냐고? 어쩌라구~” 18년차 드랙 아티스트 나나영롱킴[복수자들]

    ‘드랙퀸은 전부 트랜스젠더’라는 혐오의 시선도, 여성들의 ‘탈코르셋’ 움직임에 역행한다는 편견도 옛말입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이태원 지하의 클럽에서 비밀스럽게 향유되던 ‘드랙’은 젠더의 구분을 넘어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인기 댄스 크루 프라우드먼은 드랙 아티스트 ‘캼’과 협동 무대를 선보이며 드랙에 대한 편견을 깼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인기 유튜버 랄랄의 ‘드랙퀸 분장실 기싸움’ 콘텐츠로 드랙 아티스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드랙이 양지로 올라오는데 기여한 아티스트 중 하나는 현시점 드랙신(Scene)의 슈퍼스타, 나나영롱킴(본명 김영롱·36)입니다. 브라운아이드걸스와 마마무의 뮤직비디오, 박효신 콘서트 티저영상에 출연하는 등 K팝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드랙은 성소수자들만의 문화’라는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화장품 브랜드 ‘헤라’ 캠페인 모델로도 활약했습니다. 캠페인 광고 끝 무렵 금색 가발을 벗어던지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유튜브 영상에는 ‘백화점 브랜드 광고에서 드랙을 볼 날이 오다니, 감격을 넘어 존경스럽다’는 댓글이 달렸습니다.커밍아웃을 한 동성애자이자 드랙퀸. 소수자 중 소수자인 그는 손쉽게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편견의 끝에는 도리어 자신의 삶에 대한 끝없는 긍정이 있었습니다. 헤라 캠페인 광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살잖아요. 자기가 주인공이라면 화려해도 되지 않을까. 새드보다는 해피엔딩.’ 해피엔딩을 향해 매순간 나아가는 나나영롱킴을 지난달 10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옥에서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국민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던 그가 드랙에 빠져 자퇴한 사연부터, ‘드랙퀸은 잠재적 트랜스젠더’라는 편견에 대한 일침까지 동아일보 유튜브 ()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드랙이 좋아서 대학교를 그만 두셨다고요. 배우가 되고 싶어서 국민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제가 LGBTQ+(성소수자)에 속한 사람이다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서정적인 로맨스 연기를 못하겠더라고요. 남녀의 획일적인 성역할과 사랑 연기를 풀어낼 수가 없었어요. ‘연기는 내 길이 아니구나’ 싶었죠. 자퇴를 하고 5, 6년 동안은 연극이나 뮤지컬을 하나도 안 봤어요. 무대를 보면 제가 연기를 다시 하고 싶어질 것 같았어요. 드랙퀸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밥벌이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젠 동기들 연극도 보러가도 아무렇지 않아요. ―‘드랙’의 어원은 무엇인가요?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여성들이 연극과 오페라 무대에 올라갈 수 없어서 여성의 역할을 남성이 했어요. 남성이 여성 분장을 했을 때 드레스가 무대 바닥에 질질 끌리는 모습에서 ‘드래그’(Drag)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어원에 대한 가설은 워낙 많아서 뭐가 정확한 건진 저도 몰라요. 각자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면 돼요. 예전엔 드랙이 무엇인지 이해시키려고 했거든요. 살다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더라고요. ―드랙은 여성성을 강조하는 ‘여장남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무당벌레, 겨털(?)을 연상케 하는 특이한 분장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빨간색 바탕에 흰색 점박이 수트를 입은 드랙 분장을 보고 무당벌레라고 하는 분도 있고 일본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어떻게 봐도 좋아요. 해석은 자유죠. 드랙 아티스트가 반드시 여장만 하는 게 아니에요. 무당벌레 같은 곤충이나, TV, 거품 등 사물이 되기도 해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제3의 캐릭터를 만드는 친구들도 있어요.―드랙퀸은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남성들, 즉 잠재적 트랜스젠더라는 일부 시각도 있습니다. 사실인가요?아닙니다. 드랙을 단순히 진한 화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 ‘여장’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성애자인 여성 드랙퀸도 있고, 남성성을 강조하는 ‘드랙킹’도 있어요. 드랙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걸 마구마구 표현하는 예술 장르예요. 요즘엔 ‘드랙퀸’ 대신 ‘드랙 아티스트’ ‘드랙 퍼포머’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여요. ‘드랙퀸=여장’이라는 틀이 깨졌으면 좋겠어요.―드랙이 대중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매니악한 장르예요. ‘풀타임 드랙’으로 생계유지를 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지도 궁금해요. 프리랜서다 보니 수입이 고정적이진 않아요. 지난해 10월까지는 투잡을 뛰었어요. 낮에는 욕실용품 브랜드 ‘러쉬’를 다녔고, 저녁에는 촬영이나 드랙 공연을 했죠. 러쉬는 LGBTQ+를 응원하는 브랜드 중 하나죠. 입사 면접에서 “우리 브랜드는 LGBTQ+를 지지하는데 성소수자에 대한 불쾌감이나 혐오감이 있느냐”고 직접적으로 질문해요. 그래서 러쉬는 LGBTQ+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사람들로 구성이 돼 있죠. 그 덕에 러쉬에서 7년 동안 재밌게 일했어요.―최근 들어 드랙이 급격히 대중화돼가고 있는 분위기예요. 킹키부츠, 헤드윅, 프리실라 등 드랙 아티스트를 소재로 한 뮤지컬이 인기이고, 최근엔 드랙 아티스트와 K팝 가수들과의 협업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고요.해외에선 드랙 문화가 자리 잡은 지 오래 됐는데, 한국에서는 드랙이 TV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콘텐츠 소재가 된지 5, 6년 밖에 안 됐어요. 드랙이 마니아층만 즐기는 음지의 문화였다면, 요즘엔 한층 더 밖으로 나온 건 확실하죠. 남녀 커플이 데이트 코스로 드랙쇼를 보러 오기도 하고, 얼마 전엔 제 공연에 단골 고객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기도 했어요. ‘드랙 아티스트’라는 화려한 외피를 벗은, 사람 ‘김영롱’은 불특정 다수의 혐오 섞인 손가락질로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한창이던 2020년 집단감염이 발발한 곳이 성소수자들이 즐겨 찾는 이태원 클럽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면서 커밍아웃한 게이인 나나영롱킴에게도 하루에 100개 이상의 혐오 메시지가 왔습니다. 당시 그는 강박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렸습니다. “성격이 어두웠으면 자살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혐오의 강도는 심각했습니다. 퀴어 퍼레이드에서는 그에게 설사약을 탄 생수병을 건넨 행인도 있었습니다. ―숱한 악플에 시달려 오셨다고요. 입에 담기에도 어려운 인신공격적인 악플이 너무나 많았어요. 변호사가 악플을 추리니 101개더라고요. 한 사람이 여러 악플을 단 경우도 있어서 사람 수로 따지면 69명이었고, 그들에 대한 고소를 진행했죠. LGBTQ+ 친구들이 악플에 시달리면서 “전부 고소할거야. 가만 안 둘 거야”라고 말은 하지만 실천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다 착하고 여리다보니 그 과정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들을 대신해서라도 매운맛을 제대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다인원을 고소한거고, 아직 진행 중에 있습니다. ―2021년 대부업체 광고모델이 되신 뒤 인지도가 높아졌어요. 세상의 편견에 “어쩌라구!”라고 반격하는 앙칼진 멘트가 통쾌했는데요. 일각에선 비난도 있었다고요. ‘대부업체 광고를 왜 하느냐. 제 정신이냐’는 욕을 엄청 먹었어요. ‘트랜지션(성전환)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당신(나나영롱킴)을 보고 성전환 수술을 하기 위해 돈을 빌렸다가 못 갚고 자살하면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극단적인 비판까지 들었어요. 저를 트랜스젠더로 보셨던 거죠. 주변에 트랜지션을 준비하는 친구들한테 “광고를 보고 돈 빌려서 수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라고 물어보니 “언니는 트랜스젠더도 아니고 드랙퀸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느냐”고 의아해하더라고요. ―퀴어 퍼레이드에서 행인으로부터 설사약을 탄 생수통을 받으신 적도 있다고요. 맞아요. 퀴어 퍼레이드를 응원하는 척 하면서 물병을 건넸는데 알고 보니 설사약이 타져 있었던 거죠. 혐오의 감정에 빠진 사람들은 죄책감이 없어요. 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는 목적 하나에만 빠져있어서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얼마나 심각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지 생각하지 못하죠. 단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만이 아니에요.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혐오의 공통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어떤 아티스트가 되고 싶나요?얼마 전 제 드랙쇼에 대만 남녀 관광객들이 오셨어요. K팝, K드라마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한국의 LGBTQ+ 문화에도 흥미를 갖게 되셨대요. 제 공연을 보기 위해 휴가를 내 한국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정말 감동을 받았어요. 원래 ‘나나’라는 이름으로만 활동하다가 ‘영롱킴’을 붙이게 된 이유도 해외에 한국의 드랙을 더 알리고 싶기 때문이에요. 아직은 생소한 한국의 드랙이, 제 한국 이름 ‘영롱킴’을 타고 더 날개를 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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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 돌아이’ 들을 때까지 계속 할 거예요” 무한도전 콘테스트 출신 1세대 크리에이터 채희선[복수자들]

    “크리에이터? 네가 무슨 창조주냐?” 2015년 ‘크리에이터’가 적힌 명함을 건네자 친구들이 던진 말입니다. 2009년 무한도전 ‘코리안 돌+아이’에 참가해 얼굴을 알리고 2014년 유튜브를 시작해 인기를 끈 1세대 크리에이터 ‘채채’, 채희선 씨(31)의 이야깁니다. 지금은 초등학생 장래 희망 1순위 직업이 됐지만 9년 전만 해도 크리에이터는 생소한 직업이었습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겠다는 채 씨에게 친구들은 “창조주냐”며 웃었고, 부모님은 “탤런트와 다른 거냐”고 물었습니다. 지난달 16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난 채 씨는 “유튜브를 시작한 2014년에는 페이스북의 시대가 영원할 줄 알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꿈틀거리는 끼를 발산할 통로를 찾던 중 유튜브를 알게 됐습니다. 지상파 개그맨 공채 시험 최종 단계에서 고배를 마셨던 그는 2014년 구독자 47만 명 채널 ‘쉐어하우스’의 연기자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구독자 79만 명을 보유한 코미디 채널 ‘쿠쿠크루’의 객원멤버로 활동을 넓히면서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데이트할 때 몰래 방귀 뀌는 방법’, ‘도를 아십니까 만났을 때 대처법’ 등 콩트 콘텐츠 조회수는 수백만 회에 달합니다. 이후 본인의 유튜브 채널 ‘채채’에서 ‘가슴 작으면 좋은 점’ ‘마르면 나쁜 점’ 등 고정관념을 뒤집는 ‘채고점’ 콘텐츠, 121만 구독자를 보유한 ‘딕헌터’(본명 신동훈)와 커플로 분한 ‘신채커플’ 콘텐츠를 선보이며 50만여 명의 구독자를 모았습니다. 아이돌 그룹에게 ‘마의 7년’이 있듯 크리에이터에게도 전성기가 영원하진 않습니다. 2015년부터 5년 넘게 인기를 누렸지만 2021년 자율신경실조증, 기립성 빈맥을 앓아 유튜브 제작을 쉬어야 했습니다. 53만 명이었던 구독자는 43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섣불리 주저앉지는 않습니다. 지난해부터 결혼 후 일상을 담는 유튜브 채널 ‘채새댁’을 개설했고,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순간을 극복한 과정을 적은 에세이 ‘오히려 좋아’도 발간했습니다. 사람들을 웃길 때의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한물간 유튜버가 살아남는 방법’()을 <복수자들>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3일 오후 4시 공개되는 2부에서는 ‘결혼전도사’가 된 그가 말하는 ‘배우자 고르는 방법’도 공개됩니다. ―무한도전의 코리안 돌+아이 특집에서 최종 선발된 24명의 돌아이 중 한 분이셨어요. 당시 고등학생이셨는데, 프로그램 출연 계기가 궁금해요. 어렸을 때 꿈이 코미디언, 리포터, 연극배우, 쇼호스트, 레크리에이션 강사였어요. 1순위인 코미디언이 안 됐을 경우 이후 직업들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저를 표현하고 사람들을 웃기는 직업을 갖고 싶었어요. 대학에서 예체능을 전공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무한도전 코리안 돌+아이 콘테스트는 부모님께 저를 증명할 방법이었어요. ‘우리 애한테 말도 안 되는 똘끼가 있구나’를 보여드리면 제가 예체능 전공을 하는 걸 지원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돌+아이 콘테스트에 나가기 위해 ‘이 사람은 돌아이가 맞습니다’라고 적힌 서류를 만들어서 교감선생님을 비롯해 100명의 선생님, 친구들 사인을 받아 제출했어요. ―유튜브는 어떻게 처음 시작하게 됐나요? 코미디언이 꿈이었기 때문에 지상파 공채 개그맨 시험을 봤어요. SBS는 최종까지 가서 떨어졌어요. 계속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고 있던 중에 코미디 유튜브 채널 ‘쉐어하우스’에서 연기자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당시 2014년은 대부분 페이스북만 하던 시대였어요. 시급 4500원을 받고 연기자 알바를 시작했죠. 이후 돌+아이 콘테스트에 함께 출연했던 딕헌터 님의 제안으로 유튜브 채널 ‘쿠쿠크루’ 객원멤버로 들어가게 됐어요. 2015년엔 제 채널 ‘채채’를 개설하면서 본격적으로 크리에이터 활동을 시작했죠. ―본격적으로 크리에이터 활동을 시작한 2015년만 해도 유튜브라는 플랫폼은 생소했어요.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다이아TV와 계약을 맺은 뒤에 지인들 모임에 나가서 ‘크리에이터’가 적힌 명함을 줬더니 다들 의아한 표정이었어요. 지금은 유명한 PD가 된 한 오빠는 “크리에이터? 너 직업이 창조주야?”라며 웃었어요. 그 정도로 생소한 직업이었던 거죠. 부모님도 처음엔 제 직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어요. 제가 크리에이터를 한다고 하니 “탤런트 비슷한 거냐”고 물으셨어요. 부모님이 친구들에게 제 직업을 설명하려고 해도 휴대폰에 유튜브가 안 깔려 있어서 소개 못 하신 적도 많았대요. ―인기를 끌었던 ‘채고점’ 콘텐츠에서는 ‘가슴 작으면 좋은 법’ ‘키 작으면 좋은 법’처럼 콤플렉스일 수도 있는 점을 유쾌하게 콘텐츠화했고, 치질수술 과정까지 자세하게 공개했어요. 본인을 내려놔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나요? 전 제가 웃길 때가 가장 예쁜 것 같아요. 스스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가 망가지고 웃기는 순간이라 ‘현타’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올리는 족족 100만 조회수는 거뜬하게 넘기는 인기 유튜버가 됐지만 그는 2021년 돌연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건강 악화 때문이었습니다. 온종일 어지럼증이 지속되는 기립성 빈맥증후군과 자율신경실조증을 함께 앓으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이었지만 책의 문장 한 줄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몰입과 집요함의 힘으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이겨낸 그는 지난해부터 새로운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에세이집도 냈습니다. 인기가 예전만 하지 않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크리에이터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구독자가 53만 명까지 늘면서 가장 인기 있는 1세대 유튜버로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 2021년부터 활동이 뜸해졌어요. 작년에는 영상이 10개밖에 안 올라왔더라고요.2021년부터 건강이 악화됐어요. 기립성 빈맥증후군, 자율신경실조증 두 가지가 한 번에 왔어요. 병명을 몰라서 병원도 많이 다녔고요. 그 병의 증상은 어지럽고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하루 종일 지속되는 거예요. 그 증상이 1년 반 동안 지속돼서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였어요. 그때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논문 한 줄을 읽고 쉰 뒤에 다시 한 줄을 읽어야 했어요. 라이브 커머스 쇼호스트 활동도 하고 있었는데 멘트를 외울 수가 없어서 진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두 가지 병이 동시에 찾아온 건가요?살다 보면 감당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감당을 할 수 없는 일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토익점수를 400점에서 750점으로 올리겠다거나, 구독자 수를 40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올리겠다는 건 제가 감당할 수 있고, 노력으로 극복이 가능한 문제예요. 당시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이 닥쳤어요. 내 노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몸이 아프더라고요. 그때 받았던 스트레스가 병의 원인이 된 것 같아요. ―감당할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린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내 능력 밖의 문제라면 그와 관련된 걱정과 생각을 바로 끊어내세요. 스트레스를 최대한 안 받으려고 하는 거죠. 저는 다른 일에 집중을 정말 많이 하려고 노력해요.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루를 진이 빠지게 사는 거죠. 예를 들어 방송을 할 때 ‘오늘 하루 진짜 이 악물고 이 사람들 다 웃겨주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요. 대학원 공부를 할 때는 타이머를 재요. ‘오늘 하루 13시간 앉아있는다’ 라고 스스로와 약속을 하고요. 남들 눈에는 스스로를 혹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제게는 그게 집중의 방법입니다. 제가 어떤 일에 몰입하고 집중을 하면 제 뒤에 있는 그림자들이 안 보이더라고요. ―지난해 출간한 에세이 ‘오히려 좋아’에서 ‘나는 슬픔을 갈고 닦아 웃음을 만드는 감정연금술사’라고 묘사하셨어요.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긍정의 힘을 어떻게 기른 것인지 궁금해요.혼잣말을 많이 해요. 매일 어떤 생각들을 하는데 그 생각을 10번 이상 스스로한테 외쳐요. 예를 들어 오늘은 길을 걸어가면서 ‘도태되지 말자’를 열 번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제가 블로그에도 쓴 말인데요, ‘결국 끝까지 남아 성공한 사람들은 오래 버틴 사람이다’라는 말을 요즘 계속 새기려 해요. 현실이 버거울 때마다 생각해요. ―작년부터 유튜브 채널 ‘채새댁’을 시작하셨고, 여전히 43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채채’에도 본격적으로 영상을 올리시고 있어요. 반응이 예전만 하진 못한데 크리에이터로서의 고민은 없으신가요? 트렌드를 만들 수 없다면 트렌드를 따라가기라도 해야 해요. 요즘 ‘렉카’ 콘텐츠가 인기잖아요. 그래서 2개월 전 ‘채채, 당신이 몰랐던 10가지 사실’이라는 렉카 컨셉의 영상을 올렸던 거예요. 트렌드를 따라가야 조금이라도 대중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겠죠. 근데 전 저만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욕구가 커요. 남들과 똑같은 걸 만들고 싶진 않아요. 남들이 안 했는데 진짜 웃긴 걸 만들고 싶어요. ‘진짜 미쳤다’, ‘진짜 또라이다’ 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분들 정말 많잖아요. 요즘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순위가 유튜버일 정도예요. 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한 방에 훅 갈 수 있다’, 이 말을 꼭 기억해야 돼요. 새로운 캐릭터와 콘셉트의 유튜버들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유튜브가 밀어주는 특정 알고리즘에서 벗어나면 뜻하지 않게 인기가 식을 수도 있어요. 결국 개인의 브랜드를 탄탄히 다져놔야 합니다. 그래야 유튜브의 트렌드에서 좀 뒤처지게 되더라도 개인 브랜드를 지지하는 팬들의 힘으로 계속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요.―크리에이터는 인기와 수익이 불안정한 직업이잖아요. 2015년으로 돌아가더라도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을 택하실 건가요? 수익과 인기는 필연적으로 등락이 있어요. 월수입 격차가 크게는 10배까지 나요. 수익이 적은 달에는 의기소침해지고, 많이 번 달에는 ‘장난 아닌데?’ 싶을 때도 있죠.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제가 이 일에 갖는 애정이에요. 사람들마다 가장 잘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고등학교 때부터 느꼈는데 저는 수학이나 과학을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거든요. 근데 말하는 것이나, 친구들 웃기는 건 전교 1등이었어요. 저는 이 일을 선택한 걸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전 제가 웃길 때보다 남들이 절 보고 웃을 때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그 행복을 추구해 나갈 겁니다. 복수자들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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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기인생 50년, 두리랜드 33년 배우 임채무 “여생은 의료봉사 다니며 살고 싶다”[복수자들]

    일일연속극, 주말드라마 안방극장의 ‘탤런트’로 50년, 운영할수록 손해가 더 큰 놀이공원 ‘사장님’으로 33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나이는 칠순을 넘었습니다. 인생 후반부 여생은 40년 전 품었던 숙원을 이루며 살아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배우 임채무(75)의 이야기입니다.40년 전, 전국을 돌아다니며 드라마 촬영을 다녔던 10년 차 배우 임채무에겐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이 모여 사는 산간벽지에 의료봉사를 다니는 것.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도시로부터 한참 떨어진 시골의 의료 인프라는 열악합니다. 한평생 농사짓느라 몸을 쟁기처럼 써왔던 어르신들 대부분 무릎과 허리에 골병이 들었지만 제때 치료를 받기란 어려웠습니다. 시골엔 큰 병원이 없었던 탓에, 진료라도 받으려면 대도시로 나와야 하지만 교통편도 여의치 않은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을 지켜볼 시간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가 이 나이가 됐다”는 임채무. 칠순이 넘은 나이, 자식이 자식을 낳아 손주를 둔 할아버지가 된 후에야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4월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예능 ENA ‘임채무의 낭만닥터’를 진행하게 된 겁니다. ‘임채무의 낭만닥터’는 이동치료소 차를 타고 다니며 전국 각지를 찾아 의료봉사를 하는 프로그램으로, 조만간 시즌2 촬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임채무는 이번 시즌에서도 출연료를 받지 않습니다. “늘그막에 봉사한답시고 시작했지만 결국 내가 얻는 게 더 많더라”는 그를 최근 경기 양주의 두리랜드에서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임채무의 낭만닥터’ 시즌2 촬영을 앞두고 계십니다. “(시즌1 촬영 때) 7개월 동안 20개 넘는 읍면리 시골을 다녔어요. 가서 보니까 어르신의 99.9%가 무릎, 허리는 기본으로 고장이 나 있는데 병원을 안 가시는 거예요. 왜 안 가시느냐 물으면, 마을 교통편이 아무리 좋아도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아니곤 버스가 오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시골엔 병원이 없잖아요. 병원 가려면 대도시로 나와야 하고 겨우 예약을 하면 환자가 워낙 몰리니 진료도 미뤄지고…. 그러다 보면 버스가 끊겨서 집에 오기 힘들고. ‘에라 모르겠다, 귀찮다’ 하면서 병원을 안 가는 거죠.”―의료봉사 하겠다 마음 먹으신 게 40년 전이시라고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드라마 촬영을 하고 야간 업소나 지역 축제에서 행사 뛰던 시절이에요. (시골의 의료시설이)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어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나이 들면 시골로 의료봉사를 다니며 살아야겠다고요. 어르신들 치료도 해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먹여드리고 싶다. 진료 의자, 의료기구, 침대, 냉장고 같은 게 다 들어갈 수 있는 버스가 한 대 있으면 참 좋겠다. 구상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해보려고도 했어요. 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님이 도와주려고 하셨어요.”―김우중 회장과는 어떤 인연이었나요. “당시 연예인들로 이뤄진 ‘무궁화 축구단’이 있었어요. 그때 김우중 회장이 우리 축구단을 지원해주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대한민국 공무원들, 특히 경찰, 시청, 구청 공무원들이 운동할 시간이 없어서 운동을 못 한다고 하더라. 억지로라도 운동을 해야 몸도 정신도 건강해진다. 유명한 연예인들이 친선 축구대회 하자고 하면 운동하러 나올 것이니 공무원들 불러내서 같이 운동하라.’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신 분이었어요. 참 존경하고 좋아했죠. 사석에서 회장님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의료봉사 이야기를 잠깐 꺼냈었어요. 당시만 해도 (제가) 인기가 좋았을 때니 팬클럽 회원들이랑 봉사활동 다니고 싶은데 의료 차량 한 대만 기부해줄 수 있냐고 여쭤봤죠.”―뭐라고 하시던가요. “너무나 흔쾌히 알겠다고 하시더니 바로 비서실장을 불러서 이것저것 지시를 하시더라고요. 계획도 다 세우고 이런저런 계산도 끝내고 기다리는데, 나중에 비서실에서 연락에 왔어요. 당시 금액으로 의료 차량 제작에만 2억 원이 넘게 들어가는 거예요. 법인 회사에서 개인에게 무상으로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던 거였죠.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배우 생활을 하며, 두리랜드를 운영하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꺼내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었습니다. ‘9988 정형외과의원’ 이태훈 원장과 독특한 인연이 시작되면서부터입니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이태훈 원장은 ‘임채무의 낭만닥터’ 시즌1 때부터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태훈 원장과는 어떤 인연이었나요? “이태훈 원장이 운영하는 ‘9988 정형외과의원’을 보고 누가 나한테 제보를 했어요. 제 노래 ‘9988 내 인생’ 제목을 베껴서 병원 이름을 지은 게 아니냐는 거예요. ‘9988 내 인생’은 2018년에 제가 직접 만든 곡이에요.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아서 자식 속 썩이지 말자’는 뜻을 담은 곡인데, 이태훈 원장이 허락도 없이 ‘9988’을 갖다 썼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매니저한테 ‘잘됐다. 저작권 엄청 뜯어내자’ 해놓고 잊어버렸어요.(웃음) 그러고 한참 있는데, 몸이 너무 아픈 거예요. 치료를 받아야 해서 어느 병원을 갈까 했는데, 매니저가 9988 병원에 가자고 했죠. 당시 상황이 위급해서 바로 수술하고 치료도 잘 받았어요. 그러고 이태훈 원장이랑 식사를 했는데 슬쩍 저작권 이야기를 꺼냈죠. 이태훈 원장은 ‘9988’은 자기가 2017년부터 썼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러더니 ‘선생님이랑 가족분들 평생 정형외과 진료는 제가 무료로 해드리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건 됐고 나랑 의료봉사하러 다니자’고요.”―촬영이긴 하지만 7개월 동안 매주 봉사를 다니셨습니다. 힘들진 않으셨나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매주 전국 각지를 다니다 보니 피곤하고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도 솔직히 있어요. 근데 이걸 하면서 새롭게 느낀 건, 남의 인생을 들여다본다는 게 참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80세, 90세, 100세까지 건강하게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아요. 술 담배 적게 하고 음식 잘 챙겨 먹는 것보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사는 게 가장 중요하더라고요. 경북 의성에 사는 87세 할아버지가 있는데, 그분은 아침 10시에 막걸리 반병, 오후 4시에 막걸리 반병을 매일같이 마셔요. 막걸리가 거의 주식이야. 근데도 나보다 기운이 훨씬 더 좋아요. 낙천적인 마음으로 즐겁게 사니까.”시골 노인들의 낙천적인 삶을 동경한다고 했지만, 사실 임채무는 누구보다 ‘낙천적인 몽상가’에 가깝습니다. 30년 넘게 경기 양주에서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원 ‘두리랜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아닌 개인이 놀이공원을 운영하는 건 임채무가 유일합니다. ‘두리랜드’를 만들어야겠다 결심한 건 1973년 경기 양주의 사극 촬영 현장. 단역을 전전하던 무명 배우 임채무는 자신의 촬영 순서를 기다리다 인근 계곡에서 놀던 가족을 발견합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엔 깨진 술병이 흩어져 있고 고성방가를 하는 어른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날 문득 이런 다짐을 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자!” 10여 년이 지난 1989년 그때 그곳에 짓기 시작한 ‘두리랜드’는 1990년 5월 문을 열었습니다.―30년 가까이 두리랜드엔 담도 없고 입장료도 없었다고요.“원래부터 입장료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00원씩 받았어요. 문 연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들을 데려온 부모가 문 앞에 서있는 거예요. 아이는 들어가겠다고 울고, 모자를 푹 눌러쓴 아버지의 주머니에선 동전 소리만 들렸죠. 입장료 때문에 난처한 것 같았어요. 다음 날 직원 불러서 입장료 없애자고 했죠.”1990년대는 그가 CF, 드라마, 야간 업소에 출연해서 돈을 벌었을 때입니다. 방송에 나가 번 돈이 놀이동산 매출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사비를 털고 사재를 팔아 직원들 월급을 줬습니다. 하지만 IMF를 겪으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놀이동산을 찾아오지 않았고, 그를 불러주는 방송도 많이 줄었습니다. 경영 위기로 두리랜드는 2000년대 초 폐장했다 2009년 재개장했습니다. 이후에도 ‘입장료 0원’을 고수하던 두리랜드는 2020년부터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입장료를 받으시면서 욕을 많이 먹었다고요. “여태 안 받다가 다 늙어 돈독이 올랐냐고 욕하는 분도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해요. ‘돈 받지 말고 다음 달에 문 닫을까요?’라고요. 제가 예전에는 야간 업소도 다니고 CF, 드라마 촬영도 많았으니까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는데 지금은 불러주는 데가 없으니 돈을 못 벌잖아요. 근데 전기세나 세금, 인건비에 매달 이자만 7천만 원이 넘어요. 두리랜드가 망하면 안 되잖아요. 망하는 거 막기 위해 입장료를 받게 됐어요.”―두리랜드 운영하느라 생긴 빚이 160억 원이라고 들었어요. “IMF 외환위기 때는 정말 어려웠는데 그래도 입장료 안 받고 운영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했어요. 근데 90년대만 해도 인기 있었던 회전목마, 바이킹, 범퍼카 같은 아날로그 놀이기구는 아이들이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요즘엔 미세 먼지와 황사 때문에 엄마들이 바깥에서 아이들을 놀게 하는 걸 꺼리잖아요. 그래서 롯데월드처럼 실내 시설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2017년 말에 두리랜드를 닫고 2018년부터 신축 공사를 시작했죠.”VR 같은 새로운 놀이기구를 들여오고 실내 시설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지만, 연예인 임채무의 수입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의도에 있는 아파트 두 채를 팔았고 자녀들 마이너스 통장까지 끌어 썼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두리랜드는 재개장했지만 정작 그와 부인이 잘 곳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두리랜드 안 화장실을 개조해 일 년 넘게 먹고 자고 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제일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라며 “두리랜드는 돈 벌려고 운영하는 게 아니다. 빌린 돈 갚으려고 이제 와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벌었던 돈도 다 쏟아부으시고 빚도 많으신데,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이제 이게 내 삶이에요.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대체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어요.(웃음) 어른들을 만나면 이 사람은 나한테 뭘 원할까, 뭘 바랄까를 고민하게 돼요. 근데 아이들은 달라요. 아무 계산 없이 웃고 울고 나한테 안겨서 인사도 해주고요. 그런 아이들 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죠. 가끔 놀이공원에서 만나면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시켜요. ‘여기 만들어주신 분이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정말 감사하고 또 보람을 느낍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기자 jetti@donga.com}

    • 20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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