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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통수권자가 군 시설인 체력단련장에서 운동하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골프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14일 대통령실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잘못된 논리다. 골프 인구가 600만 명이 넘는 나라에서 사인의 골프를 놓고 시시비비를 따질 일은 드물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정서상 공인은 다르다. 누구와 하는지, 빈도가 얼마나 잦은지에 따라 큰 문제가 될 수가 있다. 설령 단 한 번을 하는 경우라도 삼가야 할 ‘때-장소-상황’이란 게 있다. 작년 7월 전국에 폭우가 내린 가운데 ‘주말 골프’를 해 물의를 빚은 홍준표 대구시장에 대해 국민의힘이 어떤 처분을 했는지 떠올려 보자. 당시 국민의힘 윤리위원회는 “국민의 윤리 감정과 정서에 반하는 행위”라며 홍 시장에게 ‘당원권 정지 10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홍 시장은 당 대표와 대통령 후보를 지내는 등 국민의힘 정치지도자로서 더 엄격한 윤리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당원이고, 홍 시장보다 더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윤 대통령의 골프가 적절했는지 논하는 것은 여당의 잣대로도 괜한 시비가 아니다. 대통령실이 확인을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나온 야당의 주장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8월 24일부터 11월 9일까지 7차례 골프를 했다. 8월 24일의 경우는 한미연합 군사훈련으로 군 골프가 금지돼 있던 기간이고, 19명이나 사상자가 나온 부천호텔 화재에 대한 추모 기간이었다고 한다. 또 10월 12일은 북한이 쓰레기 풍선 도발을 감행해 군 장성과 장교들이 줄줄이 골프를 취소하던 때라고 한다. 이 시기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대통령이 골프를 한 것이 사실이라면, 부적절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거짓 해명 논란은 더 심각한 문제다. 윤 대통령의 골프와 관련한 의혹은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의를 통해 지난 9월부터 제기돼 왔다. 하지만 경호처장 출신의 김용현 국방장관은 “모른다”로 일관했고, 여당 의원이 나서서 “윤 대통령은 골프를 안 친다”며 ‘역공세’를 펴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을 대통령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윤 대통령의 골프가 한 언론사의 취재망에 걸려들고 보도가 확실해진 시점이 돼서야 “윤 대통령이 트럼프 당선인과의 외교를 위해 최근 골프 연습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윤 대통령이 트럼프 당선 이전부터 골프를 해 온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골프가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트럼프 외교를 핑계로 댔다’는 의심을 대통령실이 자초한 셈이다. 미필적이라도 고의에서 나온 거짓말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대통령실이 선택적 침묵과 석연찮은 해명으로 문제를 키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명태균 게이트에서도 익히 본 패턴이다. 대통령실은 쏟아지는 보도에도 한 달 이상 침묵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폭로들이 나오자 등 떠밀리듯 ‘(윤 대통령이) 두 번 만났고,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막바지 이후로는 통화 사실이 없다고 기억한다’는 해명을 내놨다. 하지만 만난 횟수도 최소 4차례였고, 취임식 전날 직접 통화까지 한 사실이 얼마 안 가 드러났다. 부적절한 골프 라운딩과 거짓 해명 논란은 용산이 감당해야 할 자업자득 ‘업보’라 치자. 어찌 됐든 국내에서 ‘지지고 볶으면’ 될 일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외신까지 너도나도 보도하는 바람에 기정사실이 돼 버린 골프 외교가 자칫 국익에 부메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골프 외교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트럼프 1기에 ‘완결판’을 보여준 아이템이다. 어설프게 해선 괜히 비교만 될 뿐이다. 아베 전 총리는 트럼프 당선에 앞서 골프 스윙에 관한 그의 개인적인 고민에 대해서까지 정보 수집을 했다고 한다. 아베 전 총리가 2016년 11월 트럼프 당선 9일 만에 ‘고탄도에 슬라이스 방지’ 기능을 어필하는 50만 엔짜리 금장 드라이버를 선물로 싸 들고 미국까지 직접 날아간 것도 이런 치밀한 사전 준비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끈끈한 브로맨스’를 연출해 보였는데도, 그의 골프 외교가 얼마나 실리를 챙겼는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트럼프 당선인은 아주 거칠고 노련한 협상가다. 외교적 무례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멘털’을 흔드는 것은 기본이다. 즉흥적이고 어설픈 ‘아베 따라 하기’로 그를 상대하겠다는 것은 맨몸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용산이 보여주는 게 이런 모습 같아서 걱정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높은 지지도가 물론 아니겠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서방 국가를 보더라도… 직전의 (일본) 기시다 총리도 뭐 계속 15%, 13% 내외였고… 유럽의 정상들도 20%를 넘기는 정상들이 많지 않습니다.”한국갤럽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가 처음 10%대로 떨어진 1일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이 국회운영위원회에서 한 말이다. 앞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더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겠다” 등의 상투어가 따라붙기는 했지만, 낮은 지지율 때문에 퇴진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 사례까지 끌어다 대며 ‘나보다 못한 애도 있어요’라고 강조한 것을 보면 어느 쪽이 진짜 하려는 이야기였는지는 쉬 짐작이 간다.‘뭐가 문제인데…’는 비단 정 실장 한 명만의 속내는 아닌 것 같다. 또 다른 대통령실 관계자는 “지난주의 20%와 사실 한 끗 차이 아닌가”라고 동아일보에 말했다고 한다. 이만저만한 ‘집단 정신승리’가 아니다.우선 “20%를 넘기는 유럽 정상이 많지 않다”는 정 실장의 말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미국의 모닝컨설트는 한국 미국 유럽 남미 등 세계 25개국 정상의 지지율을 매달 조사해서 발표하고 있는데, 가장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9월 25일∼10월 1일 조사’에 따르면 유럽 정상 14명 중 20% 미만이 1명, 20%가 2명, 29%가 1명이었고 나머지 10명은 31∼59%였다. 오차를 감안해 20% 2명을 10%대 그룹에 넣더라도 20%를 넘는 정상이 11 대 3으로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유럽을 쳐다보면서 ‘위안거리’를 찾을 일이 아니다. 참고로 이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16%, 25명 중 최하위였다.10%대 지지율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알려면, 올해 6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의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는 G7 정상회의에 맞춰 내보낸 기사에 ‘레임덕 6명과 조르자 멜로니’라는 제목을 달았다. 당시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만 지지율이 40%를 넘고 나머지는 그 미만이라고 해서 붙은 제목이다. 당시 모닝컨설트 기준으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30%대,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은 20%대, 기시다 일본 총리는 10%대 지지율이었다. ‘레임덕 잣대’로 40%는 너무 높은 허들이 아닐까. 이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바이든 대통령은 선거 전 도중 연임 도전 포기를 선언했고, 수낵과 기시다 총리는 이미 퇴진했다. 각각 내년 9월과 10월 총선을 앞둔 숄츠 총리와 트뤼도 총리는 국정 주도권을 상실한 채 퇴임 압력을 받고 있고, 재선 임기가 2027년 5월까지인 마크롱 대통령은 ‘내년 봄 조기 퇴진론’이 나오는 중이다. 서방의 어느 잣대를 빌려오더라도 윤 대통령 10%대 지지율은 심각한 레임덕 수준인 셈이다.문제는 이대로 레임덕을 맞기에는 윤 대통령이 해놓은 일이 너무 없다는 점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교육·의료·연금 4대 개혁 및 저출생 극복을 강조해 왔지만, 손에 쥘 수 있는 구체적인 성과는 거의 없다. 남은 절반의 임기 중에라도 개혁 성과를 내려면 내부 결속과 국민의 안정적 지지 확보가 필수적인데, 여당은 ‘여사 리스크’를 둘러싼 갈등과 윤 대통령의 고집으로 이미 두 동강이 났고 중도층은 지지를 접은 지 오래다.그런데도 용산의 위기의식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 규명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갈수록 높아지는데 특검은 고사하고, 특별감찰관 도입마저 싫다고 버티는 중이다. 대통령 부부의 진솔한 사과는 감감무소식이다. 대통령 참석이 관행인 국회 시정연설에도 총리를 대신 보낸다고 한다. 야당이 뭐라건 중도층 민심이 어떻건,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핵심 지지층만 단단히 붙잡고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산(誤算)이다.이번 갤럽 조사를 보면 여당 지지층에서도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와 부정 평가가 44 대 44로 갈렸고, 핵심 지지기반 중의 하나인 대구·경북의 긍정 평가는 전국 평균보다 오히려 1%포인트가 낮았다. 스포츠 경기를 떠올려 보면, 잘하는 상대편 선수보다 느슨한 플레이로 실수를 연발하는 우리 편 선수에게 더 많은 비난이 쏟아진다. 정치에서도 기대나 희망이 포기나 절망으로 변하는 순간 ‘못하는 우리 편이 가장 미운 법’이다. 이번 조사를 보면 이미 임계점을 넘었는지도 모른다. 한가한 정신승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검찰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김건희 여사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한 가지 점에서만큼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사법시스템이 통째로 희화화되는 사태를 ‘일단’ 면했다는 점에서다. 검찰이 마지못해 기소를 했다면, 지금까지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법정에서 검찰과 변호인이 경쟁적으로 피고인을 변호하는 전무후무한 코미디가 펼쳐질 뻔했다. 검찰은 17일 불기소 결정을 하면서 11쪽짜리 보도참고자료를 내고, 수사 결과를 4시간에 걸쳐 브리핑했다. 김 여사를 왜 주가조작 공범이나 방조범으로 볼 수 없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보도참고자료 서술과 브리핑의 주체를 검찰이 아닌 변호인으로 바꿔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었다. 우리 검찰이 ‘억울한 피의자’를 막기 위해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었던 게 한 번이라도 있었나. 그건 그렇다 치자. 정말 고약한 것은 추리소설 등에서 독자가 최종 순간까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낚시성 복선, 가짜 암시와 같은 ‘트릭’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한두 개가 아니지만 개중 가장 대표적인 게, 보도참고자료 7쪽에 등장하는 주가조작범들의 진술과 통화기록이다. ‘김 여사는 주가조작을 몰랐을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주가조작범들의 어록은 죽 이어지다가, 다음 대목에서 하이라이트를 맞는다. ▼2차 주포 김○○=“(김건희) 걔? 뭐 먹은 것도 없을걸, 괜히 뭐 하고 뭐 하고 권오수가 사라고 그래 갖고, 샀다가 뭐 하고 팔았지.” ▼1차 주포 이○○=“아이 김건희만 괜히 피해자고.” 소설로 치면, ‘독자’는 여기서 김 여사는 피의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강력한 인상을 ‘주입’ 당하게 된다. 그런데 보도참고자료 어디에도 김 여사가 도이치모터스 주식으로 23억 원(모친 포함)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23억 차익’과 ‘피해자’라는 단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모순과 인지부조화를 해소할 방법이 없어서일 것이다.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소설가라도 ‘주가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결과적으로 23억 원을 벌었다’는 비현실적인 반전 플롯을 짜낼 수 있겠는가. 애초에 ‘김 여사=피해자’라는 암시에 1, 2차 주포의 대화를 동원한 것부터가 온당치 않은 설정이다. 이 사건을 경기 조작 스포츠단에 비유한다면 권오수 도이치모터스 전 회장은 구단주, 이종호 블랙펄인베스트 전 대표는 총감독(후반), 이○○은 전반전 주장, 김○○은 후반전 주장이다.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가 2심에서 주가조작 방조로 유죄를 선고받은 ‘전주’ 손○○ 씨는 후반 주장 김○○과의 인연으로 ‘크게 한판 벌어진다’는 정보를 귀동냥해 판에 끼었다가 손해를 본 인물이다. 이에 비해 김 여사는 ‘로열박스’ 유리창에 그림자만 비치는 ‘구단주의 VIP 손님’이다. 장기판 말에 불과한 이○○과 김○○이 찧고 까불 대상이 아니다. 14억 원(모친 제외)을 챙긴 김 여사를 놓고 “피해자” 운운하는 것부터가 뭘 모른다는 반증이다. 추리소설에서 작가의 트릭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핵심 팩트’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다. 주가조작 게임의 가장 중요한 장치와 도구는 계좌와 실탄(돈)이다. 주장이 무능해서 실패한 전반전은 논외로 치고, 후반전에서 김 여사의 통장 3개가 통정매매에 동원됐다. 전체 통정매매 98건 가운데 김 여사 계좌를 통해 이뤄진 거래가 47건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김 여사가 주가조작을 알고 있었다는 관련 진술이나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자발적인 진술이 없으면 통화나 문자, 메모를 압수수색해 증거를 찾아 나서는 것이 수사의 ‘기본’일 텐데, 검찰은 단 한 차례도 압수수색을 하지 않았다. 김 여사의 유무죄를 떠나 ‘수사가 부실하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런 데다 브리핑에서 코바나컨텐츠 협찬 의혹과 관련 사실을 교묘히 뒤섞어 마치 ‘압수수색을 하려고 했으나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당했다’는 것처럼 ‘트릭’을 부렸다가 들통이 나기까지 했다. 해마다 노벨상 시즌이 끝나면 ‘이그노벨상’이 화제에 오른다. 미국 하버드대 유머 과학잡지인 ‘황당무계 리서치 연보’가 매년 황당하거나 욕먹어 마땅한 과학연구 등을 선정해서 시상하는데, ‘먼저 웃게 만들고 이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수상 요건이다. 검찰의 도이치모터스 수사 발표를 보면 먼저 황당함에 웃지 않을 수 없고, 이어 특검의 필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이그노벨상에 문학작품 분야가 없지만, 만약 만들어진다면 이보다 적합한 수상감이 또 있을까.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과 구설이 어지러울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 마치 저수지 둑이 터진 것 같다. 여당 공천 개입, 주가조작 의혹, 관저 공사 특혜 등 분야도 가지가지다. 인터넷 매체 등에서는 김 여사가 2022년 6·1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올 4·10총선의 공천에 개입했다는 의혹과 관련된 녹음파일과 주장들이 연이어 공개되고 있다. ‘정치 브로커’로 알려진 명태균 씨가 김 여사와 윤석열 대통령을 통해 김영선 전 의원의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행사하려 했다는 의혹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명 씨는 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대선 당시 윤 대통령 부부 자택을 수시로 방문하며 국무총리 후보를 추천했다는 주장까지 내놓으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과 관련한 추가 의혹도 쏟아지는 중이다. JTBC 보도 등에 따르면 도이치모터스 2차 주가조작의 ‘선수’ 김모 씨는 2021년 10월 검찰 조사에서 “자기들 말로는 BP(블랙펄인베스트의 영문 약칭으로 추정됨) 패밀리가 있는데 권오수, 이종호, 김모 씨, 김건희, 이모 씨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권오수 씨는 ‘선수’ 김 씨에게 주가조작을 의뢰한 도이치모터스의 오너, 이종호 씨는 주가조작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 블랙펄인베스트 전 대표다. 김 씨와 이종호 씨는 주가조작 사건이 시작되기 전부터 김 여사와 함께 도이치모터스 주요 주주로 참여해 온 인물들이다. ‘선수’ 김 씨의 “BP 패밀리” 운운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긴밀한 관계였을 수 있다. 또 이들 중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도 받고 있는 이종호 씨는 2012년 이후에는 김 여사와 연락한 적이 없다고 주장해 왔으나, 도이치모터스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 시작된 2020년 9, 10월경 김 여사 번호로 40차례나 통화와 문자를 주고받은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관저 공사는 지난달 감사원 감사 결과 발표로 불신과 의혹이 오히려 커진 경우다. 감사원은 관저 공사를 총괄한 업체인 ‘21그램’이 계약도 하기 전에 공사에 착수했고, 15개 무자격 업체에 하도급업체 공사를 맡겨 건설산업기본법을 위반했다는 등의 지적 사항을 발표했다. 하지만 종합건설업 면허도 없는 영세업체에 국가 최고 보안시설인 관저의 확장과 보수공사를 수의계약으로 맡기도록 결정한 이가 누구인지, 가장 핵심적인 특혜 의혹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맹탕 감사 결과를 내놨다. ‘21그램’은 김 여사가 경영해 온 코바나컨텐츠에서 오래전부터 일감을 받아온 사실이 익히 알려진 업체다. 이러니 누가 감사 결과를 믿겠는가. 이상 언급한 세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관련자들이 모두 윤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는 점이다. ‘정치 브로커’ 명 씨, ‘BP 패밀리’로 언급된 김 씨와 이 씨, ‘21그램의 대표’ 김모 씨가 초청장을 받거나 취임식 당일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1심 재판 중이었던 권오수 이종호 씨는 취임식에 가지 않았지만, 그 대신 권 씨의 아들과 부인이 참석했다. 이들 외에 김 여사와 서울대 EMBA 과정을 함께 다닌 인연으로 김 여사의 어머니 최은순 씨의 잔액증명서를 위조해 준 김모 씨, 김 여사와 공동 작성 논문으로 위조 및 표절 논란에 휩싸인 김모 교수, 무속인 천공의 측근 등도 취임식에 참석한 사실이 언론의 취재를 통해 밝혀졌다. 모두가 김 여사와 인연을 빼고 나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될 만한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지만, 취임식은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철학과 비전, 주요 정책 등을 전 국민에게 밝히는 엄숙한 자리다. 당연히 참석자 한 명 한 명이 5000만 국민에 대한 대표성을 가져야 하며, 선정 과정은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주가조작 패밀리, 문서위조범, ‘업자’, 무속인, 정치 브로커 등이 무더기로 섞여 들어 있었던 것이다. 취임식이 ‘여사 의혹의 중간 저수지’였다고 해도 할 말이 없고, 뒤탈이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면면이다.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윤 대통령 취임식 직후 참석자 명단을 놓고 논란이 일자 당시 대통령비서실장과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나서 “전부 파기했다” “일부 남아 있다” 등 오락가락 해명 끝에 명단의 일부를 공개했다. 하지만 정작 의혹과 관심의 대상이었던 대통령 부부의 초청 명단은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 이 ‘저수지’에서 얼마나 많은 ‘오물’이 쏟아질지 모른다. 지금 그 전조를 보는 것 같아 걱정스러울 따름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체코 정부가 향후 원전 건설을 추진하기로 결정할 경우 우수한 기술력과 운영·관리 경험을 보유한 한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달라.” 2018년 11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원전 세일즈차’ 체코를 방문해 안드레이 바비시 체코 총리에게 한 말이다. ‘탈원전 선언’으로 국내 원전산업 생태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문 대통령의 ‘원전 세일즈’에 얼마나 진심이 담겼겠으며, 또 상대국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느냐는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뭐 하나 틀린 지적이 아니었다. 다만 일부에서는 ‘원전 건설이 확정되지도 않은 나라에 가서 무슨 원전 세일즈냐’는 비판도 있었는데, 이것만큼은 ‘원전 수주전(戰)’의 세계를 잘 몰라서 나온 소리다.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에너지 안보의 영역이자 1기당 10조 원이 넘는 건설비용이 드는 원전은 기술과 가격 경쟁력이 있다고 해서 수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식 계획이 확정되기 전부터 해당국 정부는 물론이고 국회, 산업계와 학계 등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체코 원전만 하더라도 이미 10년 전 박근혜 정권 때부터 우리 업체들이 입찰 참여 의사를 체코 정부에 공식 표명하고 꾸준한 수주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도 사실 4년쯤 전까진 한국의 체코 원전 수주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이미 체코가 운영 중인 원전 6기 모두를 건설한 실적이 있고, 압도적 세계 1위 경쟁력을 가진 러시아 국영 원자력기업 로사톰의 수주가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에 갑작스러운 ‘천운’이 찾아든 것은 2021년 4월. 과거 체코에서 발생한 탄약고 폭발 사고의 배후에 러시아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양국 관계가 사상 최악의 상태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체코 정부는 러시아 로사톰을 퇴출시켜 버렸다. 이로써 수주전은 한국수력원자력, 프랑스전력공사(EDF), 미국 웨스팅하우스 간 3파전이 됐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는 2017년 파산 이후 지식재산권을 무기로 ‘삥’이나 뜯는 존재로 전락했고, EDF는 방만한 경영 탓에 기술·가격 경쟁력 없이 덩치만 큰 공룡으로 추락한 상태였다. ‘프랑스의 정치력’이란 변수 하나만 빼면 승부가 이때 이미 결정됐다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럽게 체코 원전 수주전의 경과를 되짚어본 것은, 이 과정을 모르면 최근 더불어민주당 등 일부 야당 의원들의 ‘무리한 체코 원전 수출 전면 재검토’ 주장에 현혹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판을 엎자’고 주장하는 핵심 논거는 ‘덤핑 입찰’과 ‘공사비 증가 가능성’이다. 먼저 이들은 “체코 언론들은 윤석열 정부가 ‘덤핑 가격을 제시했다’고 지적했다”고 주장한다. 국익이 걸린 수주전에서 우리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주장을 펴려면 어느 언론사의 어떤 기사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 기사를 믿는 근거는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텐데, 밑도 끝도 없는 외마디 주장뿐이다. 행여라도 경제 포털인 ‘에코노미츠키 데니크’의 올해 5월 16일자 58행짜리 장문의 기사에서 딱 두 문장 언급된 “정통한 소식통은 한수원의 가능성을 더 높게 보고 있다. 덤핑에 가까운 가격으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를 침소봉대한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또 의원들은 공기가 예정보다 길어지고 공사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요 근거로 영국 힝클리 원전과 핀란드 올킬루오토 원전의 사례를 들었는데, 황당할 따름이다. 힝클리 원전은 프랑스 EDF의 대표적 실패 사례 중 하나고, 올킬루오토 원전은 EDF에 원자로를 납품하던 회사가 떨어져 나와 공사를 맡았다가 회사를 통째로 말아먹고 다시 EDF에 흡수 통합된 사연이 있는 프로젝트다. EDF가 탈락한 가장 큰 이유는 형편없는 가격 경쟁력과 함께 이들 프로젝트의 실패로 ‘시공능력’에 의문부호가 찍혔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수원이 선택된 가장 큰 이유가 ‘예정된 공기(工期) 안에 주어진 공사비’로 시공을 해온 그간의 ‘검증된 능력’ 덕분이다. 경쟁력이 한참 떨어지는 EDF의 실패를 한수원이 답습할 것이라고 보는 근거가 대체 뭔가. 한수원은 아직 체코 원전의 ‘우선협상 대상자’다. 내년 3월로 예상되는 최종 계약까지 갈 길이 멀다. 넘어야 할 고비도 많다. 웨스팅하우스는 계속 몽니를 부리고 있고, EDF도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중이다. 10년 동안 노심초사하며 갖은 공을 들여온 우리 기업들의 인수전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아예 판을 깨자’는 의원들의 마음속에도 국적이나 국익이라는 게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5년 단임제인 한국 대통령의 ‘하산길’은 험하고 가파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봉우리가 높은 만큼 레임덕의 골짜기는 더 깊고, 추락은 더 아득하다. “영광은 짧았고 고뇌는 길었다.” 표현은 달랐을지언정, 권력을 내려놓는 순간 이렇게 탄식한 이가 비단 김영삼 전 대통령(YS) 한 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지 2년 반이 되는 날이다. 윤 대통령이 공식 취임한 것은 2022년 5월 10일이지만, 현실적으로 당선인에게 실리는 권력과 관심의 무게를 생각하면 윤 대통령의 임기는 사실상 당선과 함께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로써 반환점을 도는 셈이다. 유감스럽게도 윤 대통령의 중간 성적은 낙제점에 가깝다. 한국갤럽의 ‘역대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에 따르면, 지난주 조사를 포함한 ‘집권 3년차 1분기 평균’ 윤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는 24%에 그쳤다. 부정 평가는 3배 가까운 67%에 이른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당선된 8명의 대통령 중 최악이다. 윤 대통령을 빼고 긍정 평가 비율이 28%로 가장 낮은 노태우 전 대통령도 부정 평가는 40%에 불과했다. 부정 평가 비율이 높은 축에 속하는 박근혜, 노무현 전 대통령도 각각 56%와 55%로 윤 대통령보다는 10%포인트 이상 낮았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에게 ‘블록버스터급’ 반전의 기회가 찾아올까. 전례를 보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역대 대통령의 경우 굵직굵직한 성과는 대부분 ‘힘이 센’ 임기 초반에 달성했다. 금융실명제 실시, 하나회 해체, 공직자 재산공개제 도입 등 YS의 개혁은 당선 후 1년 이내에 단행한 조치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국제통화기금(IMF) 조기 탈출’은 임기 시작에 앞서 당선인 시절부터 주도권을 잡고 제때 추진했기에 가능했다. 이런 YS와 DJ도 반환점을 돌기가 무섭게 레임덕에 접어들었고 ‘아들·측근 비리’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불행한 퇴임을 맞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반환점을 돌 무렵이던 2010년 6월 여당인 한나라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는데도,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이 당시 박근혜 의원과의 불협화음으로 국회에서 부결되는 ‘쓴맛’을 봤다. 권력의 내리막길에서는 여당의 다수 의석도 안전판이 되지 못하는 법이다. 하물며 역대급으로 낮은 지지율에, 108석 소수 의석으로 180석이 넘는 거야(巨野)까지 상대해야 하는 윤 대통령의 하산길은 어떻겠는가. 한 발만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다. 하지만 윤 대통령에게 이런 현실에 대한 자각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국정브리핑에서 연금 의료 교육 노동 등 4대 개혁과 ‘저출생 위기 극복’을 “반드시 이뤄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다짐과 각오 자체는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우호적인 민심과 여의도 지형에서도, 역대 대통령들이 임기 후반기에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지난(至難)한 개혁 과제를 이뤄낼 정도로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느냐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국정브리핑에서 4대 개혁 등에 대해 국회의 협조를 당부한 것을 보면, 입법 뒷받침 없이는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나흘 뒤 열린 22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개원식 첫 불참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까지 국회를 외면했다. 대통령실은 “대통령을 향해 언어폭력과 피켓 시위가 예상되는 상황”을 이유로 들었는데, 이런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가 걸린 4대 개혁을 제 궤도에 올리는 것보다 중요한가. 윤 대통령은 앞서 국정브리핑에서 “의대 증원이 마무리됐다”는 말도 했다. 의료 현장의 위기가 응급실을 넘어 중환자실로까지 번지고 있고, 의대 강의실이 6개월 넘게 텅텅 비어 있는 현실이다. 의대 증원은,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둘째 치고, 최소한 파행을 겪고 있는 의료 현장이 의정 갈등 이전의 정상을 회복하고 대학들이 늘어난 정원을 제대로 교육하는 것을 확인했을 때 비로소 마무리되는 것이다. 지금의 윤 대통령을 보고 있으면 ‘개혁은 법안이나 숫자를 던지면 끝’이라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이래서는 의료개혁도, 연금개혁도, 교육개혁도, 노동개혁도 단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지금 이대로라면 윤 대통령이 퇴임 무렵 ‘긴 고뇌’와 함께 언급할 ‘짧은 영광’이 존재할지 의문이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이원석 검찰총장이 23일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의혹 사건’을 직권으로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 회부했다. 이 총장이 5월 본격적인 수사 의지를 내비치기가 무섭게 대통령실과 법무부가 서울중앙지검 지휘부를 ‘친윤 라인’으로 교체하고, 이어 교체된 지휘부가 총장을 ‘패싱’하고 ‘비공개 출장 조사’를 벌인 뒤 무혐의 결론을 내기까지 용산의 의중대로 수순을 밟아온 듯한 검찰 수사가 마지막 변수를 만났다. 이 총장은 앞서 올 1월 핼러윈 참사에 부실하게 대응한 혐의를 받은 김광호 당시 서울경찰청장에 대해 수사팀이 불기소 의견을 내자, 직권으로 수사심의위에 회부한 적이 있다. 수사심의위는 기소를 권고했고, 검찰은 이에 따라 김 청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 총장이 이 사례를 얼마나 깊이 염두에 뒀는지는 알 수 없다. 일단 공개된 발언만 보면 김 여사에 대한 수사팀의 불기소 결정을 뒤집겠다는 의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대검에 따르면 “이 총장은 서울중앙지검의 수사 결과를 보고받고 증거 판단과 법리 해석이 충실히 이뤄졌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공정성을 제고하고 더 이상의 논란이 남지 않도록 매듭짓는 것”이 수사심의위 회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총장의 의중이 무엇이든 ‘증거 판단과 법리 해석이 충실히 이뤄졌다’는 발언 자체는 부적절해 보인다. 수사심의위 위원들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면죄부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요식 절차”라는 야당의 비판은 이 총장이 자초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더 이상의 논란이 남지 않도록 매듭지어질’ 가능성을 스스로 깎아내렸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왕설래에도 수사심의위 회부는 필요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우선 법조계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민간 분야의 인사들로 구성된 수사심의위 위원들이 물러가는 총장의 ‘가이드라인’을 따를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 또한 ‘총장 패싱’에서 ‘특혜 조사’ 논란까지 신뢰를 잃을 대로 잃은 검찰 수사의 무혐의 결론이 그대로 확정되는 것보다는 수사심의위라도 한 번 거치는 것이 공정성 측면에서 조금이라도 나을 것이다. 제도의 연원을 되짚어 봐도 수사심의위 회부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수사심의위 제도는 2017년 검경 수사권 조정 이슈가 제기되자 검찰이 내놓은 ‘셀프 개혁안’이다. 검찰은 이에 앞서 2010년 현직 검사들이 건설업자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받은 사건으로 큰 파문이 일자, “기소권에 대한 국민의 통제를 강화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수사심의위의 ‘이전 버전’에 해당하는 검찰시민위원회 제도를 도입했었다. 수사심의위를 도입하면서 검찰은 일반 시민들로 구성되는 미국의 대배심과 일본의 검찰심사회를 모델로 삼았다고 밝혔는데, 두 제도와 비교해 보면 수사심의위는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배심이 의무화된 주에서는 중요 사건 기소의 대부분을 검사가 아닌 대배심이 결정한다. 단순 자문기구인 한국의 수사심의위와 달리 독자적인 수사권도 갖고 있다. 일본의 검찰심사회도 법적인 구속력을 갖고 검찰의 불기소 결정을 걸러주는 실질적인 기능을 한다. 특히 제도의 활용 면에서 한국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수사심의위가 소집된 횟수는 7년간 통틀어 15차례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일본 검찰심사회의 심사 건수는 매년 평균 2500건에 이른다. 미국과 일본의 일반시민에 의한 검찰 권력 통제 사례를 보거나, 당초 검찰이 제도를 도입하면서 국민 앞에 한 다짐을 돌이켜 봐도 ‘디올백’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큰 사건을 수사심의위에 올리는 것은 망설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도 마찬가지다. 현행 대검찰청 예규는 수사심의위 대상을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작년 말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의혹 관련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했을 무렵 실시된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60∼70%에 이르렀다. 그만큼 국민적 의혹이 집중된 사건이라는 뜻이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의 경우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 등의 항소심 선고가 열리는 다음 달 12일 이후 사건을 처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총장은 다음 달 13일 퇴임식을 할 예정이어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심의위 소집 여부에 대한 결정권이 후임 총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후임 총장이 ‘국민의 눈높이’를 존중한다면 길은 외길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김건희 여사에 앵글을 맞춰 보면,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올해 여름휴가는 1년 전, 2년 전과는 많이 달랐다. 작년에는 경남 거제시 저도로 휴가를 떠나는 길에 새만금에서 열린 세계 잼버리 개영식에 윤 대통령과 함께 들른 것이 김 여사 관련 공개 일정의 전부였다. 재작년에도 서울에서 부부가 함께 연극을 봤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는 부산에서 이틀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적극적인 단독 일정을 소화했다. 6일에는 동구에 있는 명란브랜드연구소에 이어 중구에 있는 깡통시장을 방문했고, 수영구 광안리에 있는 카페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7일에는 영도구 흰여울문화마을, 사하구 감천문화마을, 중구 근현대역사관을 줄줄이 찾았다. 당초 비공개라고 했지만, 대통령실이 이틀간 뜸을 들인 뒤 8일 해당 사진들을 뿌리면서 화제성 면에서 어떤 공개 행사보다 화려한 나들이가 됐다. 통상의 경우라면 대통령 부인이 휴가를 맞아 전통시장이나 지역 명소를 찾는 것은 크게 관심 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제2부속실 부활을 코앞에 둔 시점에, 김 여사가 명품백 사건 이후 이어져 온 ‘잠행 모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공공연히 연출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제2부속실 부활과 함께 시작될 적극 행보를 염두에 둔 ‘몸풀기’라는 해석이 많은데, 만약 그렇다면 걱정과 불안이 앞선다. 제2부속실 폐지는 대선 국면에서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김건희 리스크’에 대한 국민적 우려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나온 윤 대통령의 주요 공약이다. 김 여사가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국민 앞에 맹세한 것도 그 연장선에서 나왔다. 내조에 전념하겠다는 영부인에게, 더구나 경호처의 경호까지 제공되는 마당에, 공약까지 뒤집어 가면서 제2부속실을 설치해 보좌하는 것은 어디를 봐도 적절치 않다. 그럼에도 제2부속실 설치를 주문하는 여론이 비등하게 된 것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줄곧 커져온 ‘김건희 리스크’가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제2부속실을 설치하면, 정체조차 불분명한 인물이 관저로 찾아가 명품백을 건네는 황당한 불상사는 최소한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울며 겨자 먹기이자 고육지책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 여사는 제2부속실 부활에 앞서 자신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난맥상이 펼쳐지고 있는지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현직 대통령이 ‘거부권’을 자신의 배우자 특검을 막기 위해 행사하는 것부터 듣도 보도 못한 기막힌 풍경이다. 검찰청사 밖 제3의 장소에서 휴대전화까지 제출하고 비공개 ‘출장 조사’를 벌인 검찰은 더는 “법 앞의 평등”을 운운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반부패 청렴기관이라는 국민권익위원회는 명품백 사건을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 논리로 ‘무혐의 종결’해 국민적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마침내 이 사건을 맡았던 권익위 핵심 간부가 8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안타까운 일까지 벌어졌다. 고인은 명품백 사건 무혐의 종결로 “20년 가까이 부패 방지를 해온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것 같다”는 괴로움을 주위에 토로했다고 하니, 김 여사와 결코 무관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김 여사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김건희 리스크’ 해소에 대한 어떤 보장도 없이 제2부속실 보좌를 받겠다고 한다면 곤란한 일이다. 제2부속실 가동에 앞서 김 여사는 적어도 두 가지를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먼저 그동안의 잘못된 처신과 잡음에 대한 분명한 사과다. 올 1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게 보낸 문자에 비치는 ‘정무적 저울질’이나 ‘간보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출장 조사’ 나온 검사 앞에서 비공개 사과를 하고, 그것을 다시 변호인이 유튜브 방송에 나와 전하는 식의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국민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해야 한다. 또 하나는 다짐이다. 김 여사가 대선 전에 했던 ‘내조 전념’ 서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동안의 국정 간여 및 비선 인사 논란으로 색이 바랜 만큼 다시 한번 분명한 단어로 국민 앞에 약속해야 한다. 영부인으로서의 활동은 정상외교 등 필요 최소한에 그칠 것이고, 모든 것을 비선이 아닌 제2부속실을 통해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진행할 것을 다짐해야 한다. 이런 사과와 다짐이 없다면, 제2부속실 부활 방침을 차라리 철회하는 것이 그나마 ‘공약 파기’라는 짐 하나라도 더는 길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참 별일이 다 있다. 4·10총선 승리로 압도적 다수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최근 ‘자멸 전당대회’로 온갖 진상 행태를 보인 국민의힘에 뒤진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18∼25일 중 실시된 전국 단위 정당 지지율 조사는 모두 8건. 이 가운데 한국갤럽 조사,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사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전국지표조사, 리얼미터 조사, 미디어리서치 조사 등 4개 조사에서 국민의힘이 오차범위를 넘어 민주당을 앞섰다. 앞의 3개 조사의 경우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가 ‘먹사니즘’ 선언을 한 10일을 전후해 실시된 조사에서는 두 당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안에 있었다. 즉, 1∼3주 사이에 민주당이 열세로 밀리고 국민의힘이 치고 올라왔다는 이야기다. 미디어리서치 조사는 두 시기 모두 국민의힘이 오차범위 밖에서 민주당을 앞섰다. 8개 조사 중 민주당이 오차범위를 넘어 앞선 것은 여론조사꽃의 무선전화 면접 조사뿐이었다. 8개 중 나머지 3개 조사는 두 시기 모두 오차범위 내였다. 이 전 대표의 ‘먹사니즘 선언’부터 최근까지의 기간은 여당에서 전무후무한 ‘진흙탕 전대’가 한창이던 때다. ‘명품백 사과 의사’를 밝힌 문자를 한동훈 후보가 ‘읽씹’했다는 논란으로 모자라 댓글팀 의혹 공방, 지지자 간 물리적 충돌, 공소 취소 청탁 폭로 등 온갖 ‘막장극’이 쏟아지고 그 후폭풍이 이어지던 때다. 그런데도 이런 지지율이 나왔다는 것은, 자중지란에 빠진 무기력한 여당보다 민주당의 행태가 국민 눈에 더 한심하게 비쳤다는 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이재명이 곧 민주당이고 민주당이 곧 이재명인 일극체제’란 걸 고려하면, 최소한 이 전 대표의 ‘먹사니즘’ 행보가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는 해석을 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전 대표가 표방한 ‘먹사니즘’의 내용 중에서 고장 난 축음기처럼 반복되는 ‘기본○○ 타령’을 빼고 나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성장’이다. 이 전 대표는 출마선언문에서 “성장의 회복과 지속 성장이 곧 민생이자 먹사니즘의 핵심”이라며 ‘성장’을 14차례나 언급했다. 방향은 옳다. 문제는 그 방법론과 실천이다. 시장경제에서 성장을 견인하는 기본 주체는 기업이다. 성장엔진을 점화하려면 기업의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고, 국가는 건전한 재정·금융정책을 통해 안정적인 경제 환경과 ‘위기 안전판’을 만들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과도한 규제를 혁파하고, 과격한 노사분규 문화를 개선하며, 국가 재정을 축내는 선심성 포퓰리즘을 과감히 배척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전 대표가 먹사니즘 선언 이후 보여준 행보는 이와는 정반대다. 가뜩이나 과격한 노동쟁의를 더 과격하게 끌고 갈 ‘노란봉투법’, 포퓰리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전 국민 25만 원 지원법’은 해당 상임위에서 여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의결을 강행토록 했다. 조만간 본회의 통과까지 해치울 기세다. 이 중 기업 활동에 즉각적인 부담을 안기게 될 노란봉투법은 21대 국회에서 밀어붙였다가 대통령 거부권에 부딪혀 무산된 ‘이전 버전’보다 훨씬 개악된 내용이다. 이뿐 아니다. 이 전 대표가 먹사니즘 선언과 함께 신성장 전략의 키워드로 제시한 것이 ‘전력망’과 ‘인공지능(AI)’이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21대 국회에 상정됐다가 흐지부지된 ‘전력망특별법’과 ‘AI 기본법’의 제정이 필수적이다. 전력망특별법이 늦어지면 민간에서 480조 원이 투입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상당 부분이 전기 부족으로 무용지물이 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는데, 이 법안의 처리는 까마득한 후순위로 밀려 있다. AI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필수적인 ‘AI 기본법’은 방송통신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여야 간의 정쟁에 밀려 제대로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오죽 답답했으면 경제계에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과학기술과 방송통신으로 분리해 달라”는 하소연이 나올까. 도대체 ‘MBC 사장’이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길래 시급한 ‘경제·민생법안’ 논의는 제쳐두고 국회 과방위와 본회의를 온통 ‘MBC 판’으로 만드나. 국무총리도 아니고 경제부총리도 아닌, ‘MBC 사장 선임을 위한 일회용 방통위원장’ 저질 청문회를 국민이 사흘씩이나 봐야 하나. 이 전 대표의 먹사니즘 행보는 차기 대선을 겨냥해 지지세를 중도로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 따로 행동 따로, 겉 다르고 속 다른 빈껍데기 ‘먹사니즘’에 현혹될 중도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참 딱한 노릇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저주는 병아리와 같아서 항상 제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사람에게 원한을 품으면 무덤이 두 개(하나는 상대방, 하나는 자기 것).’ 앞은 영국 시인 로버트 사우디의 장편 서사시에서 유래한 말이고, 뒤는 오래된 일본 속담이다. 사람을 향한 원한과 저주는 그 화(禍)가 상대방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신에게도 미친다는 뜻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다. 총선 참패로 인한 혼란과 무기력을 수습하고 윤석열 대통령 집권 후반기 당정 관계의 틀을 짜야 할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집단 자해극’을 보면서 떠오르는 말들이다. 공식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한동훈(가나다순) 후보 간의 경선극은 ‘김건희 여사 문자 무시’ 논란에 밀려나 전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김건희 대 한동훈’의 구도만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작년 3·8 전당대회에서도 윤심(尹心)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 국민 상대 여론조사에서 5등을 할 정도로 약체였던 김기현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당심 70%, 민심 30%’ 룰을 ‘당심 100%’로 바꿨고, ‘친윤’ 초선 의원들에게 연판장을 돌리게 해 선두 나경원 후보를 주저앉혔으며, 대통령실이 나서 안철수 후보를 ‘저격’하는 등의 반칙과 무리수들이 총동원됐다. 하지만 ‘너 죽고 나 죽자’ 식 ‘살기(殺氣)’가 감지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전당대회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당내 경선이라고 해도 총선 패배를 둘러싼 책임론 공방, 자질이나 도덕성 검증, 네거티브 공세가 어느 정도까지는 오갈 수 있지만, 이번 전당대회는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상대방을 망쳐놓을 수만 있다면 내 한 몸 망가져도 괜찮다는 원한과 저주의 기운이 느껴진다. ‘여사 문자’의 최초 유포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다만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타격 효과’가 누구를 향했는지를 생각하면 친윤 진영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정황이나 보도도 적지 않다. 당장 문자가 공개되자마자 한 후보는 “정치적 판단 미숙”, “수십 년간 모셔 왔던 형님이고 형수님이고 넥타이 받고, 반찬 받고 했는데 정치 이전에 인간의 감수성 문제”, “혹시 총선을 고의로 패배로 이끌려고 한 게 아닌지…” 등의 집중 공세를 다른 후보들로부터 받았다. 이번 전당대회 승부가 어떻게 결론 나건 ‘배신자’ ‘정무 감각 미숙’과 같은 프레임이 두고두고 한 후보를 따라다니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김 여사와 친윤 진영이 반사이익만 챙긴 것은 아니다. ‘여사 문자 무시’ 공방 이후 한 후보의 지지율이 되레 올라간 결과는 둘째 치고, ‘당무·국정 개입 논란’이라는 더 무거운 짐을 안게 됐다.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국민 앞에 다짐했던 영부인이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내밀하게 보낸 텔레그램 문자를, 누군가 전당대회 한복판에 이슈로 내던지거나 내던져지게 했을 때는 이 정도 후폭풍쯤은 스스로 예상하거나 각오했을 터다. 정치적 공세와 같은 평범한 언어가 아니라 저주, 원한, 악의와 같은 극단의 언어가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여사 문자’의 최초 유포자가 누구인지와는 무관하게, 한 후보가 ‘이판사판식의 악의’를 드러내는 장면도 있었다. TV 토론에서 “제가 이걸 다 공개했었을 경우에 위험해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꺼낸 이상, 한 점 의문이 남지 않도록 구체적인 내용을 상세하게 공개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해서도 당당하고 공정한 태도다. 살짝 냄새만 피우고 중간에 말을 끊는 것은 오직 상대방에게 ‘의혹의 오물’을 뿌리는 데만 목적이 있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디를 봐도 여당 안에서는 이번 진흙탕 싸움의 승자가 보이지 않는다. 쾌재를 부르는 것은 오직 야당뿐이다. 윤 대통령 탄핵 청원 청문회를 밀어붙이면서 역풍을 걱정했던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여당 아니면 어쩔 뻔했냐”는 말까지 나온다. 당 대표가 정해지기까지는 아직 1주일 이상 남았지만 여당은 벌써부터 전당대회 이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김건희 댓글팀’이나 ‘한동훈 여론조성팀’은 양측의 공방 과정에서 심각한 국민적 의혹으로 떠오른 상황이어서 진실을 규명하지 않고 그냥 묻어두기는 힘들 것이다. 한 후보가 말한 “위험해지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제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저주 병아리들’의 발걸음이 더없이 총총해 보인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이재명 대표를 아버지처럼 모시자.’ ‘이재명 대표를 임금님처럼 모시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부적절한 표현이고, 더 심한 아부가 될까. ‘군사부일체(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이니 거기서 거기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차이가 있을까. 엄밀한 유교적 잣대로 보면 전자(前者)가 아닐까 싶다. 유교 경전인 ‘예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아버지의 잘못을 감추는 것은 괜찮지만 들춰내고 지적해서는 안 된다. 설령 지적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낯빛이 바뀌지 않을 정도의 선까지만 부드럽게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다(유은무범·有隱無犯). 반면 왕의 잘못은 왕이 싫은 표정을 짓건 말건 굽히지 말고 직언(直言)해야 한다. 왕의 허물을 못 본 척해서는 안 된다(유범무은·有犯無隱).” 요컨대 아버지는 직언이 허용되지 않는 존재, 왕은 허용되는 것을 넘어 의무적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전근대적인 왕정 체제조차도 맹목적인 복종과 아부가 아닌,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비판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는 함의도 담겨 있다. 하물며 민주국가의 민주적 정당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은 어떨까. “민주당의 아버지는 이재명”이라는 강민구 최고위원의 발언은 민주당이 나가고 있는 방향이나 전체적인 당내 분위기와는 무관한 돌출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강 위원의 발언은 민주당 안에 이미 존재하는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최고위의 다른 멤버들만 봐도 그렇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최고위원이 되기 전인 2021년 12월 ‘인간 이재명’이라는 책에 대한 독후감이라며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인간 이재명과 심리적 일체감을 느끼며 아니 흐느끼며 읽었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최고위원이 된 뒤인 올 2월에는 “당의 시대정신이자 상징”이라며 이 대표를 축구 스타 손흥민에 비유하기도 했다. 정 의원이 최고위원이라는 당의 요직과 ‘국회 내 상원’이라는 법제사법위원회의 위원장을 동시에 꿰찰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봐야 쉽게 이해가 될 것 같다. ‘명심(明心)’과 ‘개딸’의 지지를 얻고 단독 입후보 끝에 사실상 추대된 박찬대 원내대표(당연직 최고위원)도 부쩍 피치를 올리는 중이다. “대표가 너무 착하다. 나보다 더 착하다. 이 대표가 너무 반대를 많이 해서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민주당 당무위가 당 대표의 사퇴 시한을 ‘대선 1년 전’으로 규정한 당헌의 예외 조항을 둘지 여부를 논의한 지난달 12일 회의가 길어진 이유를 설명하며 박 원내대표가 한 말이다. 당헌 개정은 대선 직전까지 ‘이재명 일극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고 2026년 지방선거의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까지 열어주는 내용이다. 민주당의 오랜 전통인 ‘대권-당권 분리 원칙’을 허무는 중요 현안을 설명하는 와중에도 틈을 놓치지 않고 아부성 발언을 잊지 않는 게 놀랍다. 다가오는 8·18 전당대회에서 선출될 최고위원직 5자리의 면면도 지금보다 못할 것 같지 않다. 가장 먼저 출마 의사를 밝힌 강선우 의원은 “이재명을 지키는 일이 민주당을 지키는 일”이라며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어대명(어차피 대표는 이재명)이 아니라 당대명(당연히 대표는 이재명)”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대표의 연임을 ‘대세론’을 넘어 누구도 의견을 개진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당위(當爲)’로 격상시킨 것이다. 추가로 출마 의사를 밝혔거나 밝힐 예정인 10여 명도 ‘친명’ 일색으로, 벌써부터 낯 뜨거운 ‘명심 마케팅’만 난무하는 중이다. 민주당이 이렇게 된 데는 이 대표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고 보이거나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당내 인사들에 대해 ‘벌떼’처럼 달려들어 집단항의를 하고 ‘문자폭탄’을 날려대는 개딸의 존재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도 이 대표와 지도부는 여기에 브레이크를 걸기는커녕 개딸의 입김을 점점 더 키우고 있다. 최고위원 선출 본투표에서 권리당원의 비율을 올리는 것으로 부족했던지 예비경선까지 권리당원이 좌우할 수 있게 하는 길을 텄다. 이렇게 되면 개딸은 갈수록 폭주하고 이 대표에 대한 ‘직언’이나 ‘비판’은 더욱더 질식될 것이다. 비판 너머의 존재인 ‘아버지 이재명’에게 개딸은 박수를 보낼지 모르지만, 다수 국민이 참아줄지는 의문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델라웨어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크기가 작은 주다. 인구는 100만 명에 불과하다. 미국인들조차 어디에 붙어 있는지 잘 모른다는 델라웨어의 ‘회사법’이 한국 재계와 법조계의 뜨거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일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지난 21대 국회에서 델라웨어 회사법을 모델로 상법 개정을 추진하면서부터다. 민주당이 22대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법 개정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됐는데, 최근 윤석열 정부의 실세로 통하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까지 더불어 ‘총대’를 메고 나서면서 법 개정의 영향권에 들게 된 기업들의 ‘불안 지수’는 급격히 치솟고 있다. 상법 개정안의 내용은 이사가 ‘충실(loyalty) 의무’를 지켜야 할 대상을 기존의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한 단어가 추가되는 것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사와 회사, 이사와 주주, 회사와 주주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는 ‘대지진급 변화’이다 보니 기업계에서는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예컨대 주주 중에는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이야 어찌 되건 단기적인 배당과 시세차익 확대에만 관심을 두는 주주들도 있는데, ‘주주’라는 이름으로 이들에 대한 충실 의무까지 상법에 명문화된다면 ‘리스크’를 동반한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은 할 엄두를 못 내게 된다는 것이 기업계의 우려다. 특히 해외 투기자본들이 적은 지분만으로도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지렛대 삼아 한국 대기업을 상대로 무더기 소송전을 하는 데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의문은 기업 환경과 토양이 다른 델라웨어의 회사법을 베끼다시피 한국으로 ‘이식’하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델라웨어는 기업에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곳이다. 정해진 양식만 채워 넣으면 1시간 안에 법인 설립이 가능하다. 증빙자료는 전혀 필요 없다. 실명(實名)도 필요 없고, 사무실도 필요 없다. 그러다 보니 조그만 2층짜리 건물에 30만 개가 넘는 기업이 주소지를 두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국의 기업인들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식 배임죄로 처벌당할 일을 걱정할 일도 없다. 포이즌 필(적대적 M&A에 대항해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으로 지분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처럼 강력한 경영권 방어장치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 같은 것 하나쯤 회사법에 명시돼 있다고 해서 기업 활동에 짐이 될 일은 없다. 하지만 이중삼중의 처벌과 규제에 변변한 경영권 방어장치 하나 없는 한국은 다르다. 이 원장은 상법 개정에 대한 자신의 발언으로 재계 반발이 거세지자 14일 ‘배임죄 폐지 병행론’을 들고나왔다. 배임죄는 주요 선진국 어디에도 없는 제도이고, 배임죄로 인해 이사의 의사결정이 과도하게 형사처벌 대상이 되고 있다는 취지다. 이것만 놓고 보면 일리 있는 이야기다. 배임죄는 폐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의적인 구성요건과 과도한 형량에 대해서는 시급한 개선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배임죄 폐지와 상법 개정이 등가(等價)로 맞바꿀 사안인가. 배임죄만 없애면 상법 개정에 따른 부작용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인가. 입법권을 장악한 민주당을 설득해 배임죄 폐지를 실현할 전략과 능력은 있나. 배임죄는 상법 개정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폐지 또는 개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 꼬리를 무는 의문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게 소관도 아닌 ‘차관급’ 금감원장이 책임 있게 답할 수 있는 문제인가. 현행법에 금융감독원은 ‘금융위원회나 증권선물위원회의 지도·감독을 받아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감독 업무 등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규정돼 있다. 금감원장의 역할을 아무리 확대 해석해 봐도 상법 및 형법 개정과 같은 중대 현안에 대해 정부를 대표해서 발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기업 경영 패러다임을 바꾸는, 이 정도 사안이라면 주무 장관인 법무부 장관이나 경제 운용을 총괄하는 경제부총리가 설명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야 불필요한 혼선과 동요, 국정 난맥을 막을 수 있다. 이 원장은 최근 “세제가 됐건 회사법 이슈가 됐건 상류에 있는 공장에서 폐수가 흘러들어서, 발생은 거기에서 하지만 하류를 거쳐 가면서 저희가 경작하는 들판에 영향을 강하게 미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인식이면 앞으로도 부총리나 주무 장관들을 제쳐두고 자신이 앞장서 나서겠다는 신호로 읽히는데, 여야 합의로 만든 법안을 폐수에 비유하는 것이 공직자로서 합당한 태도인지, ‘상류’에는 나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기본적인 질문부터 스스로 던져 보기 바란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2010년 8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초청한 적이 있다. 오찬 테이블에서 전 전 대통령은 “와인 더 없느냐”고 했다가,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에 술 먹으러 왔나”라고 된통 면박을 당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술에 취해 격분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재임 중이던 1969년 4월 미 해군 정찰기가 북한을 정찰하다가 공격을 받고 격추됐다. 닉슨 대통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에 전술핵 공격을 하라는 명령을 미군에 내렸는데, 이때도 술에 취해 ‘분노지수’가 치솟은 상태였다. 다행히 ‘실세’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술 깰 때까지 기다리자”고 해서 한반도에 핵폭탄이 투하되는 비극이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전직 대통령쯤 되고 보면 술이 작게는 ‘개인적인 망신’에서, 크게는 ‘초대형 리스크’의 뿌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또 술과 관련한 구설에 올랐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국민의힘 당선인 워크숍 만찬에 참석해서 테이블을 돌며 맥주를 따랐다가 야당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얼차려 훈련병 영결식 날 술타령… 진정한 보수라면 이럴 수 있나?”는 글을 올렸고,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맥주 한 잔을 들이켜신 겁니다”라고 꼬집었다. 윤 대통령이 축하주를 돌린 날은 22대 국회가 임기를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108 대 192. 집권여당의 기록으로는 사상 유례가 없는 참패를 하는 바람에 거대 야당의 ‘재가’ 없이는 웬만한 법안 하나 들이밀 수 없는 게 지금 윤 대통령과 여당의 처지다. 국민에게 약속한 수많은 공약과 개혁 다짐의 무거움을 조금만 생각했다면 “오늘은 제가 욕 좀 먹겠습니다”를 외치며 호기롭게 맥주캔을 들어 올리지는 못 했을 터다. 4월 말 국민의힘 내부 토론회에서 이 당의 김종혁 조직부총장은 총선 참패 원인과 관련해서 “국가지도자인 대통령의 PI(President Identity·최고경영자 이미지)가 2년간 속된 말로 망했다. 대통령이 ‘격노한다’는 보도가 나가면 그걸 보는 국민이 행복하겠나. 격노해야 하는 사람이 대통령인가, 국민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다만 한마디 첨언을 하자면, 망가진 윤 대통령의 PI에서 부정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격노’만 있는 게 아니다. 윤 대통령은 엑스포 개최지 결정을 눈앞에 둔 지난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 술을 마셨다가 ‘폭탄주 회식’ 논란에 휩싸였다. 또 지난달 10일에는 서울의 한 전통시장을 방문해서 수산물 판매대에 놓인 멍게를 보고 “소주만 한 병 딱 있으면 되겠네”라고 말했다가, 야당으로부터 “민생은 술안주 쇼핑이 아니다”는 뼈 아픈 일침을 맞았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제정신이었다면 진즉에 대통령의 PI에서 ‘술’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관리에 들어갔어야 했고, 연찬회장 테이블 위의 맥주는 윤 대통령이 뭐라 하든 사전에 치워졌어야 정상이다.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의 지지율을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미국 ‘모닝 컨설트’의 홈페이지에는 5월 1∼7일 사이 조사된 24개국 국가지도자의 지지율이 올라와 있다. 꼴찌는 15%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다. 윤 대통령은 19%로 23위다. ‘그래도 기시다보단 낫네’ 이렇게 위안거리로 삼을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 기시다 총리의 경우 비록 지지율은 낮지만,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합해 중의원과 참의원 양원에서 모두 탄탄한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인기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정책을 입법으로 뒷받침할 힘은 있다. 이에 비해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인기도, 힘도 없는 ‘역대급 약체’ 집권 여당이다. 지지율 회복과 외연 확장, 협치가 절실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국민의힘 워크숍에서는 믿기 힘든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윤 대통령은 그간의 ‘오답 노트’에서 교훈을 찾고 또 찾아도 지지율 반등이 쉽지 않을 판에 “지나간 건 다 잊어버리자”고 외쳤고,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은 “우리가 소수정당이라고 하는데 사실 108이 굉장히 큰 숫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쇄신’과 ‘반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똘똘’과 ‘단결’ 구호만 난무했다. 차라리 술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기라도 한다. 그보다 더한 미몽(迷夢)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듯한 윤 대통령과 여당은 언제나 깨어날까.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의회민주주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한국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하원의장 자리가 처음 생긴 것은 647년 전이다. 초기에는 무척 위험한 자리였다. 하원의 요구를 왕에게 전하는 등의 과정에서 분노를 사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394∼1535년 사이 참수를 당한 이가 7명이나 된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의장 맡기를 꺼렸다. 이런 이유로 신임 하원의장 취임식 때는 동료 의원들이 양손과 팔을 끌고 나오다시피 해서 의장석에 앉히는 전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린지 호일 현 하원의장의 취임식에서도 이런 의식(儀式)이 예외 없이 재연됐는데, 그가 의장석에 ‘끌려 나와’ 가장 먼저 한 말은 “중립”이다. 비단 호일 의장뿐이 아니다. 의장직 재임 중에는 물론이고 물러난 뒤에도 기존 소속 정당과의 관계를 끊고 철저한 중립을 지키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영국 하원의 확고한 전통이다. 물론 모든 나라가 영국처럼 하원의장(국회의장)에게 중립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도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회의장이 행정부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2002년 국회의장이 되면 당적을 버리도록 법을 개정하면서 영국과 같은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갈등과 대결의 낡은 정치를 지양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바람직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다소간의 굴곡, 진퇴는 있었지만 작은 노력들이 쌓여 이제 ‘중립의 전통’을 쌓아올리기 위한 초석 정도는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2대 전반기 국회의장을 사실상 결정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의장 후보 경선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의회민주주의 시계가 단번에 20년을 거슬러 퇴보하려 하고 있다. 강성 팬덤의 지지와 ‘찐명’ 원내대표의 물밑 지원사격을 한 몸에 받은 추미애 국회의원 당선인은 “(국회의장이) 중립은 아니다”라고 공개선언을 하고, 낯 뜨거운 ‘명심(明心) 마케팅’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는 “당심이 명심, 명심이 민심”이라는 말까지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을 자멸의 늪으로 이끈 “윤심(尹心)이 당심이고, 당심이 민심”이라는 말과 엎치나 메치나인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추 당선인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하는가. 최종 승자가 된 우원식 의원도 추 당선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튜브 방송에 나와 “제가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이 대표가) 우원식 형님이 딱 적격이죠. 그래서 잘해 주세요’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며 ‘명심 장사’를 했다. 당선 직후에는 “민주당의 법안이 반드시 국회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겠다. 중립은 몰가치가 아니다”라면서 사실상 중립과는 거리가 먼 길을 가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그런데도 국회의장 후보 선거 결과를 놓고 민주당 안에서는 또 한 번 홍위병식 ‘수박 색출’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 당원 게시판에는 “수박들 색출해 내자” “우원식에게 투표한 89명을 찾아내자” “의원들은 자신이 우원식을 안 뽑았다는 걸 인증해 보이라”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우 의원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추정되는 의원들에게는 문자폭탄이 쏟아지고 있다. 더 가관인 것은 민주당 지도부 일각의 반응이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당원이 주인인 정당,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며 “상처받은 당원과 지지자들께 미안하고, 당원과 지지자분들을 위로한다”고 했다. 국회의장은 국회의원 재적 과반으로 선출토록 한 국회법에 비춰 볼 때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를 민주당 의원 당선인들의 자유로운 투표를 통해 뽑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무기명 비밀투표는 민주당의 당규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의원들의 선택이 일부 강성 당원들의 생각과 달랐다고 해서 명색이 최고위원이 나서서 사과할 일인가. 민주주의 전통과 원리에 뿌리를 둔 대의기구를 전부 무력화하고 강성 팬덤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이재명 대표가 강조하는 ‘당원중심주의’란 말인가. 폭주하는 팬덤 정치는 의회정치를 황폐화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대표가 이번 총선에서 시스템 공천이라는 허울을 앞세워 비명(非明)계를 다 쓸어내 버리는 바람에 민주당은 이젠 ‘이재명 일극(一極)’ ‘친명 일색’의 당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강성 팬덤이 미는 후보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잔존 수박 제거’와 같은 증오와 배척의 깃발이 다시 오르고 있다. 주위에 적이나 먹잇감이 없어지자 마침내 자기 살을 파먹기 시작하는 괴물의 모습이 민주당의 요즘 ‘꼬라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민정수석실 폐지는 2022년 3월 당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당선인 집무실에 첫 출근을 해서 첫마디로 던진 화두이자 대국민 약속이었다.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꾸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다짐이었다. 윤 대통령 집권 청사진의 ‘첫 페이지’에 해당하는 민정수석실 폐지 공약을 뒤집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번 주 중으로 민정수석실 부활을 포함한 대통령실 직제개편안이 발표될 것이라고 한다. 민정수석실을 부활하는 공식 명분은 “민심 청취”다. 지난주 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차담회에서 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정 운영을 하다 보니 민심 정보, 정책이 현장에서 이뤄질 때 어떤 문제점과 개선점이 있을지 정보가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에서도 민정수석을 없앴다 2년 후 다시 만들었는데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우선 DJ 정부가 ‘옷 로비 의혹’ 사건으로 홍역을 치르고 나서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가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수 출신 김성재 씨가 첫 6개월을 맡았고, 이후 검찰 출신들이 줄줄이 민정수석 자리를 꿰찼는데 DJ 정권 후반부는 수많은 ‘게이트’와 ‘의혹 사건’의 연속이었다. DJ의 아들들이 직접 비리 사건에 연루돼 사법 처리되는 일까지 있었다. 특히 신광옥 씨는 본인이 해양수산부 공무원으로부터 5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민정수석을 둘러싼 ‘흑역사’는 비단 DJ 정권만의 일이 아니다. 박정규 전 민정수석(노무현 정부)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9400만 원어치 상품권을 받은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박근혜 정부)은 이석수 특별감찰관에 대해 사찰을 지시한 혐의로, 조국 전 민정수석(문재인 정부)은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감찰을 무마해 준 혐의로 각각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대법원 확정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민정수석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업무 경계가 불분명하다 보니 빚어지는 일이라는 게 대체적인 해석이다. 민정수석실 부활은 윤 대통령의 또 다른 주요 대선 공약 중 하나인 ‘슬림한 대통령실’에도 위배된다. 윤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 중심제라는 헌법정신에 충실하게 정부를 운영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실은 국가적 문제 해결에 효과적인 기능 중심의 슬림한 조직으로 개편하고 각 부처 장관에게 실질적인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는 ‘분권형 책임장관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이 공약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그 결과가 의대 2000명 증원 갈등, R&D 예산 삭감 파문, 수능 킬러문항 배제 혼선 등이다. 모두 대통령실이 너무 앞에 나서는 바람에 꼬여버린 일들이다. 정국 블랙홀로 떠오른 채 상병 사건도 크게 다를 게 없다. 관련자 진술이 엇갈리는 ‘VIP 격노’는 일단 논외로 치자. 국방부 검찰단이 경찰에서 수사 기록을 되찾아간 날 이시원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과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간, 임종득 국가안보실 2차장과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사이의 전화 통화 등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졌겠는가. 이런 식이면 민정수석실을 부활해 봐야 괜한 정치적 시빗거리와 리스크만 양산하게 될 공산이 크다. 민정수석실 부활과 관련해서 더욱 황당한 것은 신임 수석으로 검찰 출신인 김주현 전 법무부 차관이 내정됐다는 대목이다. 상명하복이 체질화된 검찰 출신을 민정수석 자리에 앉혀서 어떤 민심 정보를 듣겠다는 것인가. ‘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사정기관 장악 의도라는 지적이 안 나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민심 청취가 진정한 목적이라면, 윤 대통령의 말마따나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인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 윤 대통령이 눈과 귀만 열면 될 일이다. 정부 기관이 못 미덥다면 유권자의 바닥 민심에 늘 촉수를 세우고 있는 여당도 있다. “윤심이 당심이고, 당심이 민심이다”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 같은 주문(呪文)만 “민심이 당심이고, 당심이 윤심이다”라는 상식의 언어로 바로잡아도, 최소한 “윤 대통령이 민심을 모른다”는 말을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수회담이 이번 주 열린다. 현 정부 출범 후 1년 11개월 만에 처음 보게 될 장면이다. 이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윤 대통령의 회담 제안이 총선 참패와 지지율 폭락에 떠밀려서 하는 ‘액션’인지, 그간의 독선과 불통을 걷어내고 협치에 나서려는 ‘진심의 일보(一步)’인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대통령실이 무슨 의제를 내놓을지도 아직은 명확지 않다. 먼저 의제를 밝힌 쪽은 이 대표다. 이 대표는 전화로 초청을 받은 19일 당일 유튜브를 통해 “(민생회복)지원금 문제 등 이런 얘기를 주로 해야 한다”면서 “개헌 문제 이런 것들도 여야 간에 대화가 가능하면 최대한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민주당 안에서는 “채 상병·김건희·이태원 특검법 수용을 촉구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개헌이든, 동시다발 특검이든 회담 테이블에 올리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민생회복지원금만큼은 이 대표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경제와 민생을 위하는 길이라고 본다. 민생회복지원금은 이 대표가 이번 총선 과정에서 내놓은 공약이다. 이 대표의 주장대로 1인당 25만 원, 가구당 100만 원씩을 지급하려면 13조 원이 필요하다. 기존 예산을 조정해서 마련할 수 있는 ‘쌈짓돈’이 아니다. 국채를 발행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데, 결국은 또 만만한 미래세대의 주머니를 털자는 얘기다. 이 대표의 민생회복지원금은 문재인 정부가 2020년 4·15총선을 앞두고 추진했던 1차 재난지원금과 일견 흡사해 보인다. 소득 수준을 가리지 않고 전 국민에게 현금을 살포한다는 점이 그렇고, 4인 가구 기준 지원금을 100만 원으로 잡았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실질적으론 전혀 다르다. 4년 전에는 나름의 불가피성과 정책적 정합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시곗바늘을 잠시만 돌려보자.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2020년 2월부터 공급망 쇼크가 글로벌 경제를 강타했다. 팬데믹 공포가 금융으로 파급되면서 3월 9일에는 전 세계 증시가 ‘검은 월요일’을 맞았다. 유가도 폭락을 거듭해 4월에는 석유 선물가격이 마이너스까지 떨어지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2월부터 자영업 점포들이 줄줄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가계가 지갑을 닫으면서 1분기 민간소비는 환란 이후 최악의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나마 물가가 안정돼 있다는 것이 천행이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19년 0.4%로 54년 만에 최저치를 찍은 데 이어 2020년에도 0.5%에 그쳤다. 현금을 아무리 뿌려도 당장은 물가 걱정을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팬데믹 기간 중 살포된 현금이 불붙인 인플레이션과 전 세계가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한국의 올해 2,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두 달 연속 3%대를 찍었다. 2022년 5%대에 이어 작년 3%대 중반의 고물가를 버티면서 대응 여력을 소진한 상태에서 질질질 이어지는, 숨차고 끈적끈적한 인플레이션 국면이다. 한쪽에서는 고물가 처방약인 고금리가 숨통을 조여온다. 농산물의 경우는 사과와 배가 1년 전보다 80%가 넘게 올랐다. 이달 총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킨·햄버거 업체들은 ‘이젠 눈치 볼 게 없다’는 식으로 앞다퉈 인상된 가격표를 내다 붙이고 있다. 조미김 값이 오르면서 구내식당이나 백반집에서는 김 반찬이 사라지는 중이다. 앞으로도 문제다. 천재지변과도 같은 두 ‘고물가 변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국제유가의 경우 이스라엘-이란 간의 확전 움직임으로 19일 WTI 기준 배럴당 86달러까지 치솟았다. 4년 전 1200원대 초반이던 원-달러 환율은 1400원을 위협하고 있다. 단순한 환율 변동 효과만으로도 해외에서 들여오는 물건과 서비스 값이 4년 전보다 11.6% 비싸졌다. 지금 가장 시급한 민생 현안은 성장도, 고용도, 부동산도 아닌 물가라는 데 이견의 여지가 거의 없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그렇다. 선거가 있는 나라에서는 예외 없이 ‘바보야, 문제는 물가야’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민생이 곧 물가고, 물가가 곧 민생이다. 이 대표가 주장하는 민생회복지원금의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양보해서 소비 진작 효과가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일회성 반짝 효과가 사라지면 고물가에 기름을 부어 인플레이션 탈출을 더디게 만드는 부작용만 남게 될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민생회복‘지원금’이 아니라 민생회복‘지연금’이 맞는 이름일 것이다. 민생 협치를 하자는 영수회담 테이블에 올릴 ‘메뉴’가 아니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Green Onion(대파)’. 미국 최대 통신사인 AP가 5일 한국 총선 이슈를 다루는 기사에서 3대 키워드를 꼽으면서 가장 첫머리에 올린 단어다. “대파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달 18일 발언을 둘러싼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투표소 안에 대파를 들고 들어갈 수 없도록 한 것을 계기로 오히려 공방이 격해지는 추세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선관위 조치에 대해 5일 “기가 차다”는 반응을 내놓은 데 이어 6일에는 “‘칼틀막’ ‘입틀막’도 부족해 이제는 ‘파틀막’까지 한다”며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대표와 함께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까지 싸잡아 겨냥해 “일제 샴푸, 위조된 표창장, 법인카드, 여배우 사진을 들고 투표장에 가도 되겠나”라고 맞받았다. “대파값도 모르는 대통령”이라는 야당 공세에 대해 윤 대통령과 여당으로선 억울한 점도 있을 것이다. 18일 발언이 나올 당시 영상을 보면 농협 측 관계자가 직전 판매 가격과 당시 할인 가격에 대해 설명하자, 윤 대통령이 “여기 지금 하나로마트는 이렇게 하는데 다른 데는 이렇게 싸게 사기 어려울 거 아니야”라고 되묻는 장면이 있다. 야당이 대파를 앞세워 ‘민생실패’ 공세를 하기에 앞서 자신의 과거를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하는 것도 맞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1년 상반기 기준 파 가격은 전년 동기보다 156%나 급등해 1994년 이후 27년 만에 최고상승률을 보였다. 가격이 급등한 먹거리는 파뿐만이 아니었다. 사과 배 복숭아 등이 나란히 고공행진을 하면서 농축수산물 전체의 물가지수 상승률은 12.6%로 30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어찌 됐든 대파 공방에 대한 국민의 판단과 심판은 불과 이틀 뒤면 내려질 것이다. 다만 선거 결과가 어떻든 윤 대통령과 정부는 ‘대파 논란’을 그간의 물가정책을 되돌아보는 뼈아픈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의석수가 어떻게 바뀌어도 물가는 발등의 불이고, 그것을 꺼야 할 1차 책임이 윤 대통령과 정부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첫 번째로 곱씹어 봐야 할 것은 정책의 우선순위다. 윤 대통령은 1월 4일부터 지난달 26일까지 전국 각지를 돌며 24차례에 걸쳐 민생토론회를 열었다. 1회부터 22회까지만 계산해도 총 4970km를 이동해 국민 1671명을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도 한국갤럽의 3월 넷째 주 정기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해 “잘못하고 있다”고 한 응답자들이 부정평가 이유로 ‘경제·민생·물가’(23%)를 압도적 1위로 꼽은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광역급행철도 노선 확대, 철도·도로 지하화, 신공항 건설 등 하루하루 서민들의 삶과는 무관한 중장기 ‘토건 이슈’가 주를 이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메시지 관리다. 물가는 심리적 요인이 강하기 때문에 정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국민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도 중요하다. 지난달 18일 윤 대통령이 하나로마트를 방문한 취지는 ‘장바구니 물가 현장 점검’이다. 그런 현장으로 정부의 납품단가 지원액, 농협 자체 할인, 정부 할인쿠폰을 다 갖다 붙인 가격으로 서울 시내 최저가 수준으로 할인판매를 하는 하나로마트 양재점이 적절한가. 여기에 “875원이면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대통령의 영상과 육성이 방송을 탔으니, 전후에 어떤 맥락이 있어도 ‘실패를 자초한 메시지’다. 현장 민심을 가까이서 접하는 여당 총선 후보들 사이에서 “할인에 또 할인을 거듭하고 쿠폰까지 끼워서 만들어 낸 가격이라면 결코 합리적 가격일 수 없다”거나 “보좌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대통령실이 서민들이 느끼는 물가 고통에 대한 진지한 반성 없이 “전 정부보다는 낫다”는 식의 해명을 내놓은 것도 국민 눈으로 보자면 책임 회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근 경제 각료들의 입에서 “3월이 물가 정점”이라거나 “현장에서 뵙는 소비자는 체감물가가 낮아지고 있다고들 하신다”와 같은 말이 쉽게 나오는 것도 불안불안하다. 동서양을 할 것 없이 과거 실패한 ‘물가와의 전쟁’을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섣부른 낙관론이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일정을 바꿔가면서까지 인수위원들을 대상으로 한 경제전문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인플레이션을 이기는 정부는 없습니다. 국민들은 성장 못 하는 것은 용서해도 인플레이션을 못 막으면 분노할 겁니다”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 말을 다시 한번 깊이 음미해야 할 시점이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우리나라 최대 흑자국가·수출국가인 중국이 지금은 최대 수입국가가 돼 버렸어요. 중국 사람들이 한국 싫다고 한국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왜 중국을 집적거려요. 그냥 ‘셰셰’(謝謝·고맙다는 뜻), 대만에도 ‘셰셰’, 이러면 되지. … 대만해협이 뭘 어떻게 되든, 중국과 대만 국내 문제가 어떻게 되든 우리가 뭔 상관 있어요. 그냥 우리는 우리 잘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2일 충남 당진시 당진시장을 방문해서 한 말이다. “셰셰”를 연발하는 대목에서는 두 손을 모아 잡고 익살스러운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여러 군데에서 문제 소지가 보인다. 우선 “중국 사람들이 한국 싫다고 한국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대목. 이 말이 맞다면, 속은 쓰려도 자존심 접고 중국의 비위만 맞추면 대중 수출 부진을 단번에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대표의 진단은 번지수가 크게 틀렸다. 근래 대중 수출 부진은 대중 외교와 양국 국민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후발 주자인 중국이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급속히 좁히거나 역전하고 있는 것이 원인이다. 따라서 죽기 살기로 기술 개발을 해서 다시 경쟁력 우위를 확보하는 것 외에는 대중 수출을 살릴 길도, 글로벌 경제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한국 경제가 살아남을 길도 없다. 한국 기술자를 돈으로 구워삶은 뒤 설계도를 빼돌려 중국 내 한국 반도체 공장 옆에 똑같은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생각을 가진 중국이다. 가진 실력 없이 여기 가서 “셰셰”, 저기 가서 “셰셰” 해본들 실없는 사람만 될 뿐이다. 다음은 중국과 대만 양안 문제. “집적거린다”는 표현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4월 영국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 지난해 11월 영국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대만해협’을 거론해 중국과 갈등을 빚었던 사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 발언은 얼마든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필자도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굳이 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는 쪽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익과 국격이 관련된 외교 문제를 놓고 우리 쪽에 “집적거린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맞나. 이 대표는 지난해 6월 주한 중국대사 관저에서 당시 싱하이밍 대사가 한국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 고압적으로 훈시하는 듯한 원고를 낭독하는 15분 동안 ‘병풍’처럼 앉아 있었다고 해서 여당은 물론 당내에서도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 이때랑 뭐가 다른가. “대만해협이 뭘 어떻게 되든 우리가 뭔 상관 있어요. 그냥 우리는 우리 잘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힌다. 원내 제1당을 이끄는 정치지도자의 인식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유럽을 오가는 한국의 수출·수입품 및 중동지역에서 들어오는 원유를 실은 선박은 대만해협과 대만과 필리핀 사이 바시해협 중 한 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 이 길목이 모두 막히게 된다. 하루 경제적 손실만 4452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이 나온다. 한 발 더 나아가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하고 미국이 개입할 경우에는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이 증발하는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전망(블룸버그통신 산하 경제연구기관 블룸버그 이코노믹스)까지 있다. 비단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꾸 떠들 일은 아니지만,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면 주한미군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중국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그에 대해 우리는 또 어떻게 대응할지 ‘컨틴전시 플랜’을 세워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지금의 국제 정세다. 중국 속담에 ‘사람이 호랑이를 해칠 생각이 없다고 해서 호랑이도 사람을 해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미중 간의 칼끝이 가장 첨예하게 맞닿아 있는 ‘양안 갈등’이나 ‘반도체 전쟁’은 한국이 말려들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말려들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우리 희망과는 무관하게 한국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는 ‘호랑이’는 코앞에 와 있다. ‘가치외교’든 ‘실용외교’든, ‘전략적 명확성’이든 ‘전략적 모호성’이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남을 궁리를 해서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언제 호랑이 밥이 될지 모른다. 나침반도, 지도도, 줏대도, 전략도, 책략도 없이 이리 “셰셰 셰셰”, 저리 “생큐 생큐” 해서 잘 살 수 있을 만큼 녹록한 시절이 아니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세계적인 차량공유업체인 우버는 영업용 차량을 직접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시가총액이 약 215조 원에 이른다. 우버의 가장 큰 자산을 꼽으라고 한다면 운전자와 고객을 연결해 주는 배차 ‘알고리즘’일 것이다. 지금은 알고리즘이 곧 권력인 시대다. 카카오모빌리티의 가맹택시(카카오T블루) 사업이 한때 2년 만에 5배 속도로 급성장하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난해 2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놓은 조사 결과에 따르면, 비결은 “알고리즘 조작”이었다. 일정 거리 이내에서는 가까운 곳에 있는 일반택시보다 먼 곳에 있는 가맹택시에 콜을 몰아주도록 알고리즘이 짜여 있었던 것. 최근 포털이나 배달플랫폼의 ‘갑질’ 논란도 대개는 알고리즘을 둘러싼 것일 때가 많다. ‘을’들은 알고리즘의 불공정성을 성토한다. 반면 ‘갑’들은 “알고리즘은 사람의 자의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일축한다. 그러면서도 알고리즘의 세부 내용만큼은 한사코 감추려고 든다. 최근 벌어지는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내홍도 이런 논란의 구도를 빼다박았다. 공천에서 불이익을 받은 쪽은 “공당(公黨)의 공천이 아닌 이재명 대표의 사천(私薦)”이라고 반발한다. 이에 대해 민주당 지도부는 사전에 만들어진 룰에 따라 공정하게 진행되는 “시스템 공천”이라고 반박한다. 모든 알고리즘과 데이터를 낱낱이 공개하면 불필요한 논란일 텐데, 민주당 지도부는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알고리즘이 베일에 가려 있을 때 그 공정성을 평가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우선 친명 지도부부터 보자. 조정식 사무총장, 인재영입위원회 간사인 김성환 의원, 김병기 수석사무부총장, 김윤덕 조직사무부총장 등 주요 당직자 대부분이 단수공천을 받았다. 또한 정성호, 박홍근 등 친명계 중진 의원들의 ‘아웃풋’도 이들과 똑같은 단수 공천장이었다. 다음은 ‘찐명 자객그룹’의 일단(一端). 이 대표는 지난해 8월 비공개 ‘특별보좌역 회의’를 열고 9명에게 특보 임명장을 수여했다. 경선 여론조사를 할 때 ‘6개월 미만 경력 사용 금지’ 규정을 감안한 ‘자객 공천 스펙 만들기’라는 게 당시 나왔던 해석이다. 최종적으로 경선에 뛰어든 이는 9명 중 7명, 대장동 사건 변호를 맡은 박균택 변호사, 정진상 전 민주당 정무조정실장의 변호를 맡은 이건태 변호사, ‘FTA 저격수’로 불리는 송기호 변호사, 김문수 전 경기도신용보증재단 전략상임이사, 안태준 경기주택도시공사 부사장, 진석범 전 경기복지재단 대표이사, 정진욱 전 이재명 후보 대선 선거대책위 대변인 등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친명보다 더한 찐명’들이다. 이들 중 현재까지 경선이 진행된 박균택, 안태준, 정진욱, 송기호 등은 모두 승리했다. 현재 스코어 4전 4승. 반면 ‘비명 학살’의 아웃풋은 첩첩이 쌓여나가는 중이다. 6일 나온 4∼6차 경선 결과에서는 지역구 현역 의원 11명 가운데 7명이 탈락했다. 탈락한 7명 중 6명은 비명이었는데, ‘친명 현역 1명’을 밀어낸 인물이 ‘찐명’ 박균택 변호사였다. 원내대표까지 지냈으며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한 것으로 정평이 난 ‘비명’ 박광온 의원은 이 대표를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에 비유한 김준혁 민주당 전략기획부위원장에게 밀려났다. 강원도당 위원장이 서울 은평을에서 ‘비명’ 현역을 제치는 결과도 나왔다. “시스템 공천을 통해 혁신과 ‘통합’이 달성됐다”는 임혁백 공천관리위원장의 자화자찬은 듣는 쪽마저 낯 뜨겁다. 컴퓨터 코딩에 ‘탐욕 알고리즘(Greedy Algorithm)’이라는 용어가 있다. 여러 단계의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단계마다 그 단계에서 가장 손쉽거나 최적이라고 여겨지는 해법을 적용해 나가는 방법이다. 탐욕 알고리즘의 가장 큰 딜레마는 최종 단계에서 손에 쥐는 결과가 최선이 아닐 때가 많다는 것이다. 하물며 복잡다단한 인간사와 정치의 세계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순간순간 ‘달콤함에 대한 선택’과 탐욕이 쌓이면 십중팔구 감당 못 할 독(毒)이 된다. 이 대표는 이번 공천을 통해 당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사법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그림을 완성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선택이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당장 많은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민주당 지지율의 하락세가 ‘탐욕 알고리즘’의 ‘결과 값’을 예고하고 있는지 모른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작년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던 일본 닛케이평균주가가 22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버블 붕괴 후 34년 만이다. 미국 증시가 1929년 대공황에서 회복하는 데 걸린 25년보다 9년이 더 걸렸다. 닛케이평균주가가 직전 최고치를 기록했던 1989년 12월은 일본이 미국을 발아래로 보던 시절이다. 세계 10대 부자 10명 중 6명이 일본인이었고, 세계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 중 32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산이 높은 만큼 골도 깊었다. 닛케이평균주가는 20년간 줄곧 하향곡선을 그린 끝에 2009년 3월에는 ‘5분의 1 토막’ 아래로까지 떨어졌다. 이후 세계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도쿄증시도 회복세로 돌아섰지만, 거품 붕괴 이전 주가를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오죽했으면 절대 열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쇠 관뚜껑’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정도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일본 증시를 벤치마킹하는 데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이미 ‘기업 밸류업 정책’이라는 작명까지 마쳤고 26일 세부 내용을 공식 발표한다. 작년 말부터 공매도 금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 주가 부양을 위한 조치와 ‘립서비스’를 연이어 쏟아냈지만 별 약발이 없자 ‘옆집 비법’에 눈독을 들이는 모양새다. 오늘 발표를 뜯어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정부 관계자 발언과 보도를 종합해 보면 ‘기업 밸류업 정책’에는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등을 압박, 유도 또는 독려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행동주의 펀드들은 일찌감치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일부 기업을 대상으로 배당 확대를 요구하는 ‘선전포고문’까지 보내둔 상태다. 늑대가 떼를 지어 사냥감을 공략하는 것처럼, 여러 개 펀드가 연대해서 하나의 기업을 먹잇감으로 삼는 ‘울프 팩(wolf pack·늑대 무리) 공세’가 본격화할 움직임도 보인다. 일본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친화적 경영 강화 노력이 도쿄증시 상승세에 일조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도쿄증시가 34년 만에 무쇠 관뚜껑을 열어젖힌 본질적인 동력은 엔저와 기업 경쟁력에 바탕을 둔 ‘기록적인 실적’에서 나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이다. 1989년 당시 시총 상위 10대 종목을 보면 거품 자산으로 덩치만 잔뜩 키운 은행과 증권사가 7개였다. 그나마 나머지 2개는 준(準)공기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동차, 반도체 장비, 콘텐츠, 상사, 투자, 화학, 패션 부문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기업들이 골고루 포진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의 요 몇 년 경영 실적은 눈이 부실 지경이다. 도쿄증시프라임에 소속된 상장 기업들의 경우 ‘작년 4월∼올 3월 결산’에서 3년 연속 순이익 최고치를 경신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반면 한국 기업에는 작년이 무척 힘든 한 해였다. 12월 결산 코스피 상장법인 613개사의 작년 1∼9월 연결기준 순이익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41%나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한 배당은 기업의 성장잠재력을 훼손해서, 장기적으로 주주는 물론 국가 경제에도 독이 된다. 또 자사주 소각을 보더라도 일본 기업들은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황금주 등 다양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있어 부담이 덜한 편이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응할 수단이 사실상 전무(全無)해서 자사주 소각이 심각한 경영권 불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윤 정부가 벤치마킹하려는 일본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 작업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흔히 일본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출발선으로 꼽는 것이 2014년 발표된 ‘이토 보고서’다. ‘지속적 성장을 위한 경쟁력과 인센티브―기업과 투자자의 바람직한 관계 구축 프로젝트’가 공식 명칭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학자 및 연구원 13명, 기업 임직원 26명, 금융투자업계 임직원 9명이 멤버로 참여했고 논의와 토론에 1년이 걸렸다. 민간이 논의의 중심이 됐고 일본 정부와 증권 당국은 지원과 옵서버 역할에 충실했다. 이런 숙고와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만들어져 나온 정책은 장기적으로 효과를 갖기 어렵다. 윤 정부가 한국 현실에 맞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책’을 마련하려면 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부터 첫 단추를 끼워야 한다. 무엇보다 외국 투기자본의 ‘먹튀’를 위해 정부가 판을 깔아주는 일만큼은 두 번 다시 없기 바란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