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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의 출범이 두 달 남았는데, 벌써 그 충격이 한국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경제 기초체력을 반영하는 원-달러 환율은 1400원대를 넘나들고 한국 기업 실력을 보여주는 증시는 코스피 2,400 선을 위협받다가 소폭 반등했다. 트럼프발 무역 전쟁의 최대 피해국으로 꼽히는 중국보다 하락 폭이 큰 상황이다. 한국 대표 기업 삼성전자는 주가가 4만 원대로 폭락하자 자사주 10조 원 매입을 전격 발표했다. ‘트럼프 포비아’가 과도하다기보다 미중 양대 시장과 특정 산업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의 취약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셈이다.美中 수출 비중 40% 한국에 고관세 직격타 스스로를 ‘관세맨(Tarriff man)’이라 칭하는 트럼프의 집권 2기가 시작되면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타격을 피할 수 없다. 당장 모든 수입품에 물리겠다는 10∼20%의 보편관세와 중국산에 대한 60% 관세 폭탄 공약이 기다리고 있다. 트럼프는 대중국 강경파이자 관세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인 하워드 러트닉 정권인수팀 공동위원장에게 상무장관뿐 아니라 무역대표부(USTR) 사령탑까지 맡기며 더 독해진 보호무역 조치들을 밀어붙일 태세다. 미중 갈등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여파로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미국은 21년 만에 한국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 됐다. 트럼프 1기 마지막 해 166억 달러였던 대미 무역 흑자는 지난해 455억 달러로 늘었다. 미국 입장에선 한국이 8위 무역 적자국인데, 이를 빌미로 노골적인 통상 압박을 가하거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틀을 흔들 수 있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이 폐지되거나 축소되면 미국 정부의 보조금 약속을 믿고 현지 투자를 감행한 국내 기업들의 피해가 커질 것이다. 모두 반도체·자동차·배터리 등 우리 주력 산업이 대상이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가 본격화되면 한국 경제에 연쇄 쇼크가 불가피하다. 예전만 못하더라도 국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올 들어 19.2%로 미국(18.6%)을 앞선 1위다. 중국산 제품에 관세 폭탄을 때리면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한국도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대중 수출에서 중간재 비중은 78%에 달한다. 이미 중국의 저가 제품 ‘밀어내기 수출’로 국내 기업들이 몸살을 앓는 상황에서 중국이 미국으로 수출하지 못하는 물량을 더 밀어내면 전 세계적인 출혈 경쟁이 우려된다.내년 경제성장률 1%대 추락 위기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내외 기관들이 줄줄이 내년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2%로 낮추면서, 더 나쁘면 1%대로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수출 증가율이 올해 7%에서 내년에 2.1%로 꺾일 걸로 봤는데, 이마저도 미국의 관세 인상이 2026년 시작되는 것을 전제로 했다. 미국이 관세 조치에 속도를 내면 수출은 더 위축돼 잠재성장률 수준의 성장도 위태롭다는 뜻이다. 이 와중에 한국이 미국의 환율 관찰 대상국으로 지정돼 환율 방어도 힘들어졌다. 고환율이 물가를 자극하고 금리 인하의 발목을 잡아 내수 침체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 이런데도 정부에선 절박한 위기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 대선 직후 한미 정상 간 통화에서 트럼프가 조선업 협력을 요청했는데, 우리가 먼저 이런 제안을 못 했다는 것 자체가 정부의 준비 부족을 보여준다. 앞으로 온갖 ‘트럼프 청구서’가 날아올 텐데 한국이 미국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점을 내세우며 서로 ‘윈윈’할 거래를 제시해야 한다. 거센 보호무역 파도를 넘으려면 특정 지역과 업종에 편중된 수출 시장과 해외 생산기지를 다변화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규제 혁파와 구조 개혁으로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정공법에도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요즘 증권가에 나돈 우스갯소리가 있다. 최고의 자산이 뭐냐고 물었더니 코인 투자하는 사람은 ‘비트코인’, 미국 주식 하는 사람은 ‘엔비디아, 테슬라’라고 하는데 한국 주식 가진 사람은 ‘건강’이라고 답하더란다. 희망 없는 국내 증시를 두고 ‘국장(國場) 탈출은 지능순’이란 말이 회자되더니 이런 자조적 유머까지 나온 것이다. 지난주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이 확정된 뒤 이는 더 현실이 되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이 트럼프 수혜 자산에 베팅하는 ‘트럼프 트레이드’로 들썩이는데 한국 증시만 소외돼 있어서다. ▷뉴욕 증시의 3대 지수는 미 대선 다음 날부터 나흘 연속 최고 기록을 새로 썼다. 엔비디아를 새로 품은 다우존스지수는 11일 44,000 고지도 밟았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경험했던 글로벌 자금이 더 독해진 트럼피즘을 앞두고 미 증시와 달러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법인세 감면, 규제 완화 등 트럼프가 내세운 친기업 정책도 투자 심리에 불을 지피고 있다. 트럼프가 “슈퍼 천재”라고 추켜세운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는 나흘 새 40% 가까이 폭등했다. ▷가상자산 대장주 비트코인도 연일 최고가 행진 중이다. 10일 사상 처음 8만 달러를 넘더니 12일 오전 8만9000달러까지 돌파했다. 비트코인 시가총액은 한국 코스피 시총 규모도 뛰어넘었다. 3년 전만 해도 비트코인을 사기(scam)라고 했던 트럼프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 “가상화폐 대통령(crypto president)”이 되겠다고 선언했고, 중앙은행이 금을 비축하는 것처럼 미 정부가 비트코인을 보유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이와 달리 한국 증시는 ‘남들 오를 때 못 오르고, 떨어질 땐 폭삭 주저앉는’ 게 뉴노멀이 됐다. 비실대던 코스피는 12일 2% 가까이 급락하며 3개월 만에 2,500 선이 붕괴됐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증시 저평가) 이슈가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더 강력해진 보호무역주의가 한국 경제를 짓누를 것이라는 불안감이 확산된 탓이다. 트럼프 1기 때 한국 증시를 빠져나간 글로벌 자금이 23조 원인데, 이미 외국인은 석 달째 국내 주식을 내다 팔고 있다. 미국 증시로 ‘주식 이민’을 떠나는 개미도 갈수록 늘고 있다. ▷투자자들이 한국을 등진다는 건 국내 기업이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성장하고 일자리를 만들 기회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증시 이탈을 막으려면 경제 기초체력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몸집이 훨씬 큰 미국에 잠재성장률을 역전당할 만큼 성장 엔진은 식었고, 주력 산업은 혁신 기업의 등장 없이 수십 년째 제자리다. 세계 꼴찌 수준의 주주 환원과 후진적 기업 지배구조도 달라진 게 없다. 이를 그대로 두고 한국 증시가 활력을 갖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노○○존’의 원조는 10년 전쯤 등장한 노키즈존이다. 식당과 카페에서 벌어진 어린이 안전사고를 두고 주인에게 배상 책임을 묻는 판결이 이어지고, 똥기저귀를 버젓이 두고 가는 ‘맘충’ 논란이 들끓을 때였다. 해외에도 ‘차일드 프리존(child free zone)’이라며 어린이 출입을 막는 곳이 있지만, 한국처럼 당당히 아이들을 거부하는 나라는 드물다. 프랑스 르몽드는 올 초 “한국이 저출산으로 몸살을 앓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피곤해지기 때문”이라며 500곳이 훌쩍 넘는 우리나라 노키즈존을 조명했다. ▷한국식 노키즈존은 연령과 계층, 성별로 세분화하며 진화하고 있다. 올여름엔 인천의 한 헬스장이 ‘아줌마 출입 금지’ 안내문을 내걸면서 노줌마존 논란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안내문 아래엔 ‘교양 있고 우아한 여성만 출입 가능’하다는 설명과 함께 아줌마를 정의하는 8가지를 제시했다. “나이 떠나 공짜 좋아하면, 대중교통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면, 둘이 커피 한 잔 시키고 컵 달라고 하면, 음식물쓰레기 공중화장실에 몰래 버리면….” ▷노키즈존 못지않게 빠르게 퍼지고 있는 건 노인 출입을 금하는 이른바 노실버존, 노시니어존이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직원에게 반말을 일삼고, 여자 사장을 마담이라 부르며 희롱하고, 때로는 담배를 피워대는 ‘무매너 어르신’들 때문이라고 한다. 충북 제천의 한 수영장에서는 67세 이용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게 발단이 됐다. 안 그래도 일부 노인들이 물속에서 볼일을 보기도 하고 천천히 수영해 방해가 됐는데 이참에 노실버존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쏟아졌다. ▷‘젊은 분들에게 인사, 대화, 선물, 부탁, 칭찬 등 하지 마세요’라는 공지문을 써 붙인 헬스장도 있다. 어르신들이 말 걸고 참견해서 불편하다는 젊은 회원들의 민원이 쇄도한 탓이다. 이어폰을 끼지 않은 채 큰 소리로 음악이나 유튜브를 켜놓는 노인들이 방해가 된다는 불평도 적잖다. 운동하다가 쓰러지고 다치는 노인이 늘기도 했지만, 젊은층의 불만이 커지자 안전사고 위험을 구실로 노실버존이 된 스포츠시설이 한둘이 아니다. ▷7년 전 노키즈존을 차별이라고 규정했던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번에도 고령자를 차별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고령이라는 이유로 스포츠시설의 회원 가입을 막는 건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이라는 것이다. 사실 노키즈존에서 문제인 건 아이들이 아니라 자녀를 통제하거나 훈육하지 않는 ‘무개념 부모’이고, 노줌마존과 노시니어존에서 문제인 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일부 ‘진상 고객’이다. 문제의 행동을 제재하는 것과 특정 집단을 싸잡아 배제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늘어만 가는 노○○존은 배려와 존중보다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경단녀’(경력단절여성)라는 단어가 등장한 건 15년 남짓밖에 안 된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를 늘리겠다며 정부가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촉진법’을 제정하면서다. 이때부터 경단녀는 임신, 출산, 육아 때문에 퇴직해 경제 활동을 중단한 여성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였다. 20대에는 남성보다 높았던 여성의 고용률이 애 낳고 키우는 30대에 푹 꺼졌다가 40, 50대에 다시 높아지는 ‘M커브’ 역시 경단녀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요즘 민간 기업은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들까지 나서서 경단녀를 ‘경보녀’(경력보유여성)로 바꿔 부르고 있다. 경기도를 시작으로 ‘여성 경력단절 예방’ 조례를 ‘여성 경력유지’ 조례로 개정한 지자체가 한둘이 아니다. 여성들을 위축시키는 ‘단절’이라는 부정적 용어 대신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살려 노동시장에 복귀하려는 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자는 취지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여성 임금근로자는 올 들어 처음 1000만 명을 넘어섰다. 60년 전과 비교하면 18배 가까이 급증한 숫자다. 여성 자영업자 비중도 30%를 웃돌며 최고치를 찍었다. 눈치 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기업 문화가 확산되면서 여성의 경력단절이 줄어든 데다 창업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이들이 늘어난 영향이다. 특히 이커머스 플랫폼이 발달하면서 사업 아이템만 좋으면 큰돈 들이지 않고 인생 이모작에 도전할 길이 열렸다. 라이브방송의 ‘패션 셀러’ ‘뷰티 셀러’로 성공한 경보녀들이다. ▷‘인생 다모작’에 나서는 신중년층도 많다. 교육 수준이 높고 건강한 요즘 5060세대는 은퇴 후에도 계속 일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60대 후반의 경제 활동 참가율이 최근 55%를 웃도는데, 이 연령대에서 일하거나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는 뜻이다. 지게차·굴착기 운전 기능사, 전기 기능사 등 미리 따둔 자격증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거나 그동안 쌓아온 경력으로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에 재취업해 구원투수 역할을 하는 은퇴자가 늘고 있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남성과 여성의 임금 수준과 근로 조건 격차는 여전히 심각하다. 특히 올해 역대 최대 규모로 불어난 비정규직 근로자의 3명 중 2명은 자발적으로 지금의 일자리를 택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은퇴자와 경보녀, 청년 알바족이 몰려 있다. 본인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시간만큼 일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생계를 위해 불안정한 일자리와 타협한 이들이 적잖다. 경직된 노동시장을 개혁해 차별 없는 다양한 형태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게 리스타트에 나선 경보녀와 신중년, 청년들을 뒷받침하는 길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서울 서초구 아파트 집주인 100여 명을 모아 단체 채팅방을 만든 뒤 집값 담합을 주도한 ‘방장’이 석 달 전 검찰에 넘겨졌다. 이 방장은 단톡방 멤버들에게 30억 원 안팎에 팔리던 전용면적 84㎡를 34억 원에 내놓으라며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 급매를 위해 싸게 내놓은 집주인과 공인중개사를 압박해 매물을 거둬들이도록 했다. 단톡방에선 저가 매물을 올린 공인중개사의 신상과 사진을 공유하는 ‘좌표 찍기’도 버젓이 이뤄졌다. “이런 부동산은 응징해야 한다”, “허위 매물로 신고하겠다” 등의 단톡방 대화들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졌다. ▷서울에서 집값 담합을 주도한 사람이 형사 입건된 건 처음인데, 앞으로 이런 사례가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벌인 기획조사에서도 집값 담합을 포함해 위법 의심 거래가 수백 건 적발됐기 때문이다. “우리 아파트는 ○○억 원 이하로 내놓지 마세요.” “○○억 원 이하로 매물 등록한 공인중개사에 단체로 항의합시다.”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주민들이 오픈 채팅방을 만들어 집값을 담합한 정황이 포착됐다. ▷국토부와 관계기관들이 올 상반기 수도권에서 이뤄진 주택 거래 중 수상한 거래를 뽑아내 정밀하게 들여다봤더니, 불법이 의심되는 397건이 추려졌다고 한다. 특히 최근 집값이 많이 뛴 서울 ‘강남 3구’와 ‘마용성’(마포·용산·성동구)의 45개 아파트 단지가 핀포인트 대상이 됐다. 서울 집값의 대장주 역할을 하는 이들 단지에서는 올 들어 신고가 거래가 속출했는데, 가격 담합이나 가격 거짓 신고 같은 불법 거래가 확인된다면 집값 거품을 만든 꼴이다. ▷불법 의심 사례 중 가장 많은 건 편법 증여였다. 한 20대 매수인은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서울 용산구 아파트를 21억 원에 사들였다. 어머니에게서 빌린 14억 원, 증여받은 5억5000만 원, 주택담보대출 3억5000만 원으로 매매 비용을 충당한 이른바 ‘엄마 찬스’였다. 올 들어 국회의원 후보들은 물론이고 대법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국가인권위원장 등이 줄줄이 ‘엄빠 찬스’를 동원한 편법 증여 의혹으로 논란이 됐는데 고위공직자들 사이에서 만연한 편법·꼼수 탈세가 일반 국민들로 확산된 셈이다. ▷이와 별개로 정부가 지난해 하반기 신고된 전국 아파트 거래 18만여 건을 분석했더니 미등기 거래가 500건이 넘었다. 집값을 의도적으로 띄우기 위해 높은 가격에 실거래가 신고만 한 뒤 잔금을 치르지 않은 허위 거래일 가능성이 작지 않다. 대출을 조이자 가파르게 치솟던 서울 집값 상승세가 한풀 꺾였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이 틈을 타고 집값 담합이나 편법 증여, 실거래가 띄우기 같은 불법 행위가 집값 상승세를 부추기지 않도록 범정부 차원의 대처가 필요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3대 대가족이 한 울타리에 모여 사는 것은 요즘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든 판타지에 가까운 풍경이다. 1970년대만 해도 다섯 명을 거뜬히 넘겼던 전국 평균 가구원 수가 지난해 2.2명으로 쪼그라들면서 ‘한 지붕 세 식구’도 흔치 않다. 과거 3∼4인 가족에 특화된 전용면적 84㎡(34평형) 아파트가 ‘국민 평형’으로 불렸다면, 최근 소형 가구에 적합한 전용 59㎡(25평형)가 대세로 떠오른 이유다. ▷하지만 아파트 청약 시장만큼은 예외다. 대가족을 부양하는 청약 당첨자들이 쏟아지고 있어서다. 올 들어 서울에서 ‘청약 가점제’로 분양된 아파트를 보면, 당첨자 10명 중 3명꼴로 70점 이상의 가점을 받았다. 이는 5인 이상 대가족이어야 받을 수 있는 점수다. 특히 강남 3구에서는 청약 당첨자의 80% 이상이 5인 이상 대가족이었다. 당첨만 되면 시세차익 20억 원을 번다고 해서 ‘20억 로또’로 불렸던 서초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84점 만점 당첨자도 여럿 나왔다. 자녀 셋을 키우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7인 가족이어야 가능한 점수다. ▷꽤 오랫동안 복권처럼 ‘뽑기 운빨’이 이끌었던 청약 시장은 2007년 청약 가점제가 도입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가점제는 청약저축 가입 기간(17점), 무주택 기간(32점), 부양가족 수(35점)별로 점수를 매겨 합산 점수(총점 84점)가 높은 순으로 당첨자를 정하는 방식이다. 무주택과 청약통장 가입 기간은 각각 15년, 부양가족은 본인을 제외하고 6명 이상이어야 만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15년을 꼬박 다 채운 청약통장 만점자가 330만 명에 육박하면서 부양가족 점수가 청약의 당락을 가르는 결정적 변수가 돼 버렸다. 게다가 몇 년 전만 해도 100% 가점제로 공급되던 서울 중소형 아파트에 추첨제 물량이 대거 풀렸다. 줄어든 가점제 물량을 두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청약 점수, 특히 부양가족 점수 인플레이션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현행 가점제에서 부양가족으로 인정받으려면 직계존속이 청약 신청자와 3년 넘게 같은 주민등록등본에 올라 있으면 된다. ▷하지만 이를 서류로만 입증하면 돼 부모나 성인 자녀 등을 위장 전입시켜 부양가족 점수를 올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최근 3년간 적발된 부정청약의 70%가 위장 전입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부양가족이 많은 무주택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 기회를 주겠다는 제도가 편법과 불법을 부추기는 꼴이다. 부양가족 한 명당 5점씩 가점을 주는 현행 제도에서 1, 2인 가구는 청약 당첨의 꿈조차 꿀 수 없다. 1인 가구 ‘천만 시대’에 발맞춰 청약 제도를 서둘러 손봐야 하는 이유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유럽연합(EU)이 구글, 애플 등 거대 테크기업을 상대로 ‘탈세와의 전쟁’을 선언한 건 10년 전이다. 법인세율이 낮은 아일랜드에 해외 사업을 총괄하는 자회사를 세워 세금을 줄이는 다국적 기업들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커지면서다. 테크기업들이 해마다 2400억 달러의 법인세를 합법적으로 탈루한다는 추산까지 나왔다. 실태 조사에 나선 EU 집행위원회는 애플이 아일랜드의 낮은 세율과 세법의 빈틈을 교묘히 이용해 10년 넘게 법인세 130억 유로(약 19조 원)를 회피했다고 보고 과징금을 부과했다.애플의 조세 회피 꼼수에 EU ‘과징금 철퇴’ 애플이 이에 불복해 이어진 기나긴 법정 소송이 2주 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EU 최고법원은 애플이 불법적인 법인세 혜택을 받았다며 아일랜드 정부에 덜 낸 세금과 이자까지 143억 유로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법원은 애플이 아일랜드에서 적용받은 법인세율이 1%도 안 돼 조세 회피에 해당하는 건 물론이고,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는 다른 기업들과의 공정한 경쟁까지 저해한다고 판단했다. 세율이 낮은 국가에 수익을 몰아주는 조세 회피 꼼수를 부리며 불공정 행위를 일삼아 온 테크기업에 철퇴를 내린 셈이다. 이 판결을 한국으로 고스란히 가져와도 이상할 게 없다. 빅테크 공룡들이 한국에서 벌어들인 매출 상당 부분을 법인세율이 낮은 싱가포르나 미국 본사로 넘기는 방식으로 막대한 세금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은 한국에서 거둔 유튜브 광고 수익이나 검색 광고 수익, 앱마켓 수수료 대부분을 구글코리아 매출이 아닌 싱가포르에 있는 아시아태평양 법인 매출로 잡는다. 한국 법인은 싱가포르 법인의 업무를 단순 대행하고, 한국 서비스를 지원하는 서버도 싱가포르 등에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탓에 구글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최대 12조 원이 넘고 내야 할 법인세도 5100억 원대로 추산되지만(한국재무관리학회 보고서) 실제 신고한 매출은 3653억 원, 납부한 법인세는 155억 원에 그쳤다. 무려 33배 차이가 난다. 넷플릭스, 페이스북, 애플 등 다른 기업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페이스북코리아는 지난해 국내 수입 대부분을 ‘광고 매입 비용’ 항목으로 미국 본사로 보내 법인세 51억 원을 냈다. 하지만 학회가 추산한 적정 법인세는 500억 원에 달한다.‘공룡’ 구글 법인세는 네이버의 3% 수준 이와 달리 국내 최대 플랫폼 기업 네이버는 작년에 9조67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법인세 4963억 원을 납부했다. 유튜브에 이용자 수, 이용 시간 1위를 추월당한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의 카카오도 1684억 원의 법인세를 냈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절세 신공’에 가까운 조세 회피 전략으로 엄청난 비용을 아끼면서 한국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는 동안 토종 플랫폼 기업들은 세금 역차별을 당하는 꼴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한국 과세당국도 세금 추징에 나섰지만 테크기업들은 소송전으로 맞서고 있다. 현재 국세청과 구글, 넷플릭스 간의 조세 불복 행정소송이 진행 중인데 EU의 사례처럼 세금 회피 수법에 제동을 거는 판결이 나올지 미지수다. 지난해 외국계 기업이 국세청을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국세청의 패소 비율이 국내 기업의 두 배를 넘어섰다고 하는데,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버티는 해외 빅테크들이 많아질까 우려된다. 글로벌 빅테크의 세금 우회를 차단하려는 각국의 움직임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서버가 어디에 있든 매출이 발생한 국가에 세금을 내도록 하는 ‘디지털세’를 자체 도입하는 나라도 늘고 있다. 우리도 성실하게 납세 의무를 다하는 토종 기업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지 않도록 플랫폼 생태계의 조세 정의와 공정 경쟁 질서를 서둘러 바로잡아야 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인구 감소를 먼저 경험한 선진국들 사이에서 빈집은 오랜 골칫거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등은 2000년 전후로 일찌감치 ‘빈집세’(Empty Homes Tax)를 도입했다. 2년 이상 비워 둔 집에 많게는 지방세를 300%까지 중과하는 식인데, 집을 오래 비워 두지 말고 빨리 팔거나 세놓으라는 채찍이다.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선 ‘1유로 프로젝트’가 활발하다. 리모델링을 조건으로 단돈 1유로에 처치 곤란한 빈집을 팔고 싶은 주인과 시골 주택을 싸게 사고 싶은 사람을 맺어주는 식이다. ▷빈집 문제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일본은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빈집(아키야·空き家)이 900만 채에 달한다. 이 중 별장이나 임대·매매용 등을 빼고 사용 목적 없이 방치된 빈집이 385만 채인데 20년 새 갑절 수준으로 불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빈집특별법’을 만들고 지방자치단체마다 입주를 원하면 공짜나 헐값에 살 수 있는 ‘아키야뱅크’(빈집은행)를 운영하고 있지만 급증하는 빈집을 따라잡을 수 없는 처지다. ▷저출산·고령화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도 빈집이 빠르게 늘고 있다. 전국 지자체마다 폐가가 된 시골 빈집 처리로 골머리를 앓은 지 오래다. 재개발·재건축 계획이 틀어져 도심 곳곳에도 흉물로 변해 버린 빈집이 적지 않다. 국내 대도시 가운데 빈집 1위는 “노인과 바다만 남았다”는 말이 나오는 부산이다. 전국 광역시 중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탓에 부산 인구는 서울의 3분의 1인데, 방치된 빈집은 훨씬 많아 5000채가 넘는다고 한다. ▷전국 곳곳의 낡은 빈집에는 쓰레기가 쌓여 악취가 진동하고 쥐와 벌레가 들끓는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간 방치된 빈집이 이웃의 안전을 위협하는 건 물론이고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마을에 빈집 하나가 생기면 주변에 빠르게 빈집이 생기는 전염 효과도 강하다. 빈집이 늘면 주변 아파트 값이 3000만 원 가까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빌리자면 버려진 빈집 하나가 동네 전체를 슬럼가로 만드는 현상이 현실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데도 정부의 빈집 실태 파악도, 관리도 둘쑥날쑥이었다. 통계청의 2020년 주택총조사에서 전국 빈집이 151만 채인데 미분양·신축 등이 모두 포함됐다. 1년 이상 아무도 거주하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는 ‘진짜’ 빈집은 13만2000여 채인데 이마저도 도시 지역 빈집은 국토교통부가, 농어촌 빈집은 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가 각각 관리해 왔다. 이들 부처와 행정안전부가 포함된 범정부 태스크포스(TF)가 지난달에야 꾸려져 빈집 철거 등 정비에 나선다고 한다.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는 일부터 서둘러야 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기업 이름 자체가 독일어로 ‘국민 차’인 폴크스바겐(폭스바겐)은 독일 제조업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엄격한 품질 관리와 친환경을 내세운 디젤차 등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세계 1위 자동차 메이커 자리를 지켰다. 첫 작품인 딱정벌레차 비틀은 세계 곳곳에서 공전의 히트를 거듭했다. 특히 중국이 ‘죽의 장막’을 걷어낸 직후인 1980년대 초반부터 중국 시장에 뛰어들어 현지 자동차 판매 1위를 굳혔다. 한때 지구촌에서 팔린 자동차 10대 중 한 대가 폭스바겐그룹 브랜드였다. ▷이랬던 폭스바겐이 1937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본토인 독일 내 공장을 폐쇄한다고 한다. 아울러 대규모 인력 감축 방침도 확정했다. 폭스바겐그룹의 올리버 블루메 최고경영자(CEO)는 2일 “자동차 산업이 몹시 어렵고 심각한 상황”이라며 이 같은 계획을 밝혔다. 폭스바겐은 독일에만 6개 공장과 29만여 명의 직원을 뒀는데, 이 중 완성차 공장과 부품 공장 1곳씩을 닫고 2만 명을 구조조정할 것으로 전해졌다. ▷폭스바겐이 37년 전 미국 공장을 폐쇄한 적은 있지만 자국 공장은 한 번도 닫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유럽 최대이자 세계 2위 자동차 기업인 폭스바겐의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블루메 CEO는 “새로운 경쟁자가 유럽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 내 제조공장을 유지한다는 건 기업 경쟁력을 더욱 뒤처지게 만든다”고 했다. 그가 언급한 ‘새로운 경쟁자’는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다. ▷내연기관차 시대에는 상대도 안 됐던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전기차로 갈아탄 뒤 그럴듯한 디자인과 1000만 원대부터 시작하는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중국 본토와 유럽 시장을 휩쓸고 있다. 폭스바겐은 전체 판매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서 지난해 토종 전기차 브랜드 비야디(BYD)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유럽에서도 중국 전기차들의 점유율은 이미 20%를 넘어섰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비야디의 해외 판매량은 지난해 1년 치 실적을 웃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거대한 내수에 힘입은 중국 자동차 기업들의 추격에 가속도가 붙었다. ▷내연차 중단을 서둘러 온 유럽연합(EU)의 정책에 맞춰 폭스바겐도 급히 전기차 전환을 선언했지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높은 임금과 과도한 복지의 함정에 빠져 생산성이 떨어지는 독일 공장을 유지할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폭스바겐의 독일 공장 폐쇄로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판도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자동차 기업들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폭스바겐의 아성을 무너뜨린 중국 전기차 공세에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동해안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국도 7호선을 따라 위쪽에는 석탄화력발전소가, 아래쪽엔 원전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올봄부터 이곳 화력발전소들이 줄줄이 가동을 줄이거나 멈춰 섰다. 전기를 생산해도 수도권으로 실어 나를 송전망이 부족해서다. 동해안 지역의 전기 생산량은 최대 18GW인데 송전선로 용량은 11GW에 불과하다. 매년 신기록을 써내려가는 폭염과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확대로 수도권의 전력 수요는 치솟고 있지만 송전망이 부족해 지방에 발전소를 짓고도 놀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여론 눈치 보느라 변전소 증설 막은 하남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전력은 당초 2019년 준공을 목표로 동해안과 수도권을 잇는 8GW 용량의 송전선로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강원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5년 넘게 지연된 데 이어 최근 환경단체들이 행정소송을 내면서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여기에다 이 송전선로의 종점 역할을 하는 동서울변전소 증설을 두고 인허가권을 쥔 경기 하남시가 지난달 퇴짜를 놨다. 수도권 전력난 해소를 위한 국책사업이 수도권 지자체의 반대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하남시는 전자파가 주민 건강을 해칠 수 있고 의견 수렴 절차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증설을 불허했다. 초고압 송전망에 대한 주민 불안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기우에 가깝다. 변전소에서 가장 가까운 아파트에서 측정된 전자파는 편의점 냉장고보다 낮고, 변전소를 증설하면서 설비를 실내로 옮기면 전자파가 55% 이상 줄어든다고 한다. 서울 시내에도 2km마다 하나씩 변전소가 있다. 이런데도 하남시가 주민을 설득하기는커녕 반대 여론에 편승해 송전망 건설에 제동을 건 것은 전형적인 님비(NIMBY) 행태다. 2008년 밀양 송전탑 사태 이후로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실력 행사에 나서면 지자체가 이들 눈치를 보며 인허가를 주저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서해안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경기 남부로 보내기 위한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는 주민 민원과 지자체의 공사 중지 명령 등으로 소송전이 벌어져 12년 넘게 준공이 늦춰졌다. 인천 송도 바이오클러스터에 전력을 공급할 송전선로 사업도 5년 넘게 지연되고 있다. 최근 10년간 국내 발전설비가 55% 늘 때 송전망은 고작 9% 증가한 배경이다. 수도권 데이터센터 절반이 ‘지자체 암초’ 걸려 주민 반대와 지자체의 비협조로 몸살을 앓는 건 데이터센터도 마찬가지다. 경기 고양시는 덕이동 데이터센터의 착공 신고를 지난주 최종 반려했다.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가 가정용 전기밥솥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사업자가 소명했지만, 전자파 유해성을 앞세운 주민 반발을 넘어서지 못했다. 비슷한 이유로 김포시는 3년 전 건축 허가를 내준 데이터센터에 대해 최근 착공을 불허했다. 수도권에서 인허가를 받은 데이터센터 33곳 중 절반 이상이 차질을 빚고 있다. ‘산업 혈관’에 해당하는 전력망과 AI 시대에 필수인 데이터센터 확충은 더는 늦출 수 없는 생존의 문제다. 이대로라면 각국이 뛰어든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에서 뒤처지는 건 물론이고 첨단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도 전력 공급이 안 돼 공장을 돌리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이 닥칠 수 있다. 국가 핵심 인프라 건설의 발목을 잡는 ‘님비 지자체’에 확실한 불이익을 줘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전력 수급의 미스매치와 전자파 포비아는 한전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중앙정부가 직접 합리적 보상 방안을 마련해 주민 갈등을 중재하고, 지자체와 각 부처로 나뉜 인허가 절차를 일원화해 전력망 구축 속도를 높일 토대를 서둘러 갖춰야 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전남의 한 양돈농장에선 직원 7명이 돼지 7500마리를 거뜬히 키운다. 국내 스타트업이 개발한 인공지능(AI) 카메라 덕분이다. 카메라가 촬영한 영상을 AI가 실시간으로 분석해 돼지 숫자와 무게를 알아서 측정하고, 활동량을 따져 아픈 돼지를 찾아준다. 일꾼들이 겁에 질린 돼지를 한 마리씩 옮겨 무게를 잰 뒤 출하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진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감귤 수확기에 지능형 운반 로봇을 빌려 쓰는 농장이 늘고 있다. 자율주행 기술과 궤도형 바퀴가 장착돼 노지를 자유롭게 오가는 로봇이 몸값이 뛴 외국인 일꾼을 대신한다. ▷AI, 자율주행, 로봇 등 첨단 기술을 결합한 애그테크(AgTech·첨단 농업)가 노동 집약적인 농업에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부르고 있다. 180여 년 전 쟁기로 출발한 세계 1위 농기계 기업 존디어는 요즘 국내 투자자들에게 ‘농슬라’(농업의 테슬라)로 통하는데, 최신 제품들이 파종부터 제초, 수확까지 모든 걸 알아서 할 정도다. 수천 년의 농업 역사가 AI로 혁명기를 맞은 셈이다. ▷고령화도, 영세화도 심각한 한국 농업은 이런 변화가 더 반갑다. 올 6월에는 국내에 첨단 기술을 망라한 디지털 농업 시범단지가 축구장 76배 크기로 문을 열었다. 논에서는 디지털 허수아비가 음파를 쏴 새들을 쫓고, 밭에서는 운전자 없는 트랙터가 혼자 일을 한다. 논밭 배수로는 관제센터 AI의 통제를 받아 자유자재로 물 공급을 조절한다. 그동안 실내 재배시설에서 주로 이뤄졌던 스마트 농업이 이젠 지붕 없는 노지로 확장된 것이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K푸드는 물론이고 푸드테크(식품+기술)에서는 벤처 정신으로 무장한 청년 창업가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경영학도 출신 임재원 대표(34)가 푸드트럭으로 시작한 피자 브랜드는 8년 새 7개국에 1000호점을 냈다. 20대 때 황학동 주방거리를 발로 뛰며 3분 안에 피자 6개를 구워 낼 수 있는 화덕을 만든 덕분이다. 포스텍(포항공대)에서 인공장기를 연구하던 한원일 대표(36)는 배양육으로 눈을 돌려 마블링이 선명한 덩어리 형태의 배양육을 개발해 냈다. 실험실에서 키운 배양육이 다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해외에서는 빅테크 공룡들까지 농업에 뛰어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AI, 클라우드 기반의 농업 플랫폼을 선보였고 구글은 농업 스타트업에 1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거대 테크기업들이 농업의 미래 성장 가치를 높게 본 것이다. 2030년까지 기술 인프라 혁신을 통해 농업 분야에서 5000억 달러(약 600조 원)의 부가가치가 새로 창출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와 있다. K농업이 AI발 농업 혁명에서 앞서갈 수 있도록 애그테크에 승부를 거는 기업과 청년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쏟아야 할 때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분노가 쌓여 답답한 기운이 누적된 화병(火病)이 한때 한국인에게만 있는 질병이라고 해 미국 정신질환 분류 체계에 ‘Hwa-byung’으로 등재된 적이 있다. 참는 게 미덕인, 가부장적이고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서 자주 관찰되는 장애라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특정 문화권에서 일관되게 발견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삭제되긴 했지만, 화가 난 한국인이 많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가슴속에 열불’이 나고 ‘단전에서부터 깊은 빡침’을 느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 절반이 장기적 울분 상태에 놓여 있다는 진단 역시 이를 뒷받침해 준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팀이 최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연구진은 부당하고 모욕적이며 신념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되는 스트레스 경험에 대한 반응을 울분으로 봤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9%가 장기적 울분 상태였고, 이 가운데 9%는 ‘심각한 수준’의 울분을 겪고 있었다. ▷특히 30대에서 심각한 울분을 겪는 비율이 14%로 가장 높았다. 30대는 울분이 적은 정상 상태의 비율도 가장 낮았고,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비율도 가장 낮았다. 지금의 30대는 대학 졸업이나 취업, 결혼, 출산 같은 인생의 전환점을 부모 세대보다 수년씩 늦추거나 포기한 ‘지각 세대’, ‘N포 세대’의 대표 격이다. 눈높이를 낮춰도 취업이 힘들고, 내 집 마련은 불가능에 가깝고, 아이를 낳아도 돌봄 불안과 사교육비에 시달리니 분노가 치미는 게 당연한 결과다. ▷이는 한국 사회와 정치 전반에 대한 울분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연구팀이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사회·정치 사안에 얼마나 울분을 느끼는가’ 물었더니 ‘울분 만점’(4점)에 가까운 3.53점으로 나왔다. 빡침의 단골 소재인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 정부의 비리나 잘못 은폐 외에도 ‘안전관리 부실로 초래된 참사’가 울분 대상 톱 5위에 새로 이름을 올렸다. 159명을 죽음으로 내몬 이태원 참사부터 14명이 숨진 오송 지하차도 참변, 최근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성 배터리공장 화재까지 후진국형 사고가 끊이지 않은 탓이다. ▷앞서 세 차례 실시한 울분 조사와 비교하면 올해 결과가 가장 나쁜 편은 아니다. 하지만 5년 전 독일에서 진행된 비슷한 조사에서 장기적 울분 상태인 사람이 15%에 그친 것과 견주면 한국인은 독일 국민보다 세 배 이상 울분에 찬 상태다. 심각한 울분 상태인 한국인 10명 중 6명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개인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긍정과 배려, 공정의 힘을 길러 울분을 줄이고 예방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통상 자동차 화재 진화의 골든타임은 5분이라고 한다. 소방산업기술원이 진행한 실험을 보면 차량 엔진룸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3∼5분 내에 엔진룸 전체로 불길이 번지고, 10분이면 운전석까지 확산된다. 1시간이 지나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차량은 남김없이 다 타버린다. 이 때문에 차량 화재는 초기 대응에 실패할 경우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 쉽다.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2경인고속도로 방음터널 화재도 5t 화물트럭의 엔진에서 발화된 불에서 시작됐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골든타임이 더 짧다. ‘배터리 열폭주 현상’ 때문이다. 전기차에 장착된 리튬이온배터리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온도가 1000도까지 치솟고,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산소와 가연성 가스까지 배출된다. 화염에 휩싸이면 손쓸 틈이 없는 만큼 신속한 초동 대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전기차 화재가 발생했을 때 행동 요령을 아는 운전자는 극히 드물다. 심지어 전기차 제조업체들조차 엉터리로 된 화재 대응 매뉴얼을 소개하고 있다. ▷전기차 선두 주자인 미국 테슬라는 긴급 대응 매뉴얼에 ‘고압 배터리에 난 불은 물로 꺼야 한다’, ‘물을 직접 배터리에 뿌리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물의 양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다. 전기차 화재를 진압하는 데 최소 물 1만 L가 필요한데, 일반 소방차 한 대가 싣고 다니는 소화용수가 3000∼5000L 정도다. 미국에서는 테슬라의 고가 세단 ‘모델S’에서 난 화재를 완전히 진화하는 데 물 10만6000L가 쓰였는데, 일반 가정에서 2년 동안 사용하는 양이다. ▷기아, KG모빌리티 등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매뉴얼에 ‘반드시 전기 화재 전용 분말 소화기로 진화하라’고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 화재를 진압할 전용 소화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도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있지도 않은 소화기를 반드시 쓰라고 소비자들에게 알려준 셈이다. 테슬라는 2016년식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X’의 매뉴얼에서 ‘다 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화재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건 소비자 우롱을 넘어 안전을 위협하는 처사다. 일부 전기차 업체들이 ‘영업 비밀’, ‘본사 방침’을 이유로 배터리 제조사 공개를 거부해 구설에 올랐는데 엉터리 매뉴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세계 각국이 전기차 화재 진압 방법, 열폭주 방지 기술 등을 알아가는 단계라 해도 자동차 제조업체의 무책임한 매뉴얼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전국을 덮친 ‘전기차 포비아’를 진화하려면 올바른 정보를 담아, 제대로 된 화재 대응 매뉴얼부터 만드는 게 첫걸음이 돼야 할 것 같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동남아 기반의 전자상거래 업체 큐텐이 한국에 이름을 알린 건 2022년 티몬을 인수하면서다. 국내 최초 오픈마켓인 G마켓을 만들어 미국 나스닥 시장에 상장시킨 ‘벤처 신화’의 주인공 구영배 대표가 싱가포르로 건너가 세운 회사다. 지분 교환을 통해 사실상 0원에 티몬을 사들인 큐텐은 거침이 없었다. 2년도 채 안 되는 시기에 국경을 넘나들며 위메프를 포함해 한국과 미국 전자상거래 업체 4곳을 더 사들였다. ▷몸집을 불려 큐텐의 물류 자회사를 나스닥에 입성시킨다는 게 구 대표의 구상이었지만, 업계에선 무리수라는 우려가 컸다. 인수한 업체들이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여서다. 티몬과 위메프는 2010년 창립 이래 한 번도 영업이익을 낸 적이 없고, 심지어 자산보다 부채가 많은 자본잠식 상태였다. 최근엔 당장 현금이 들어오는 상품권을 과도하게 할인해 팔면서 심각한 자금난에 빠진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더해졌다.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됐다. 티몬과 위메프가 이달 들어 판매자들에게 대금 정산을 못 하고 있다. 두 쇼핑몰에 입점한 판매업체는 6만여 곳인데, 정산받지 못한 돈이 최소 1700억 원이 넘을 거라고 한다. 티몬·위메프는 소비자가 결제하면 대금을 자체 보관했다가 최대 두 달 뒤에 판매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을 써 왔다. 다른 이커머스 업체들이 배송 후 하루 이틀 내 정산해주는 것과 딴판이다. 이커머스의 정산과 대금 보관, 사용 등과 관련해 법 규정이 없는 틈을 노려 두 회사가 결제대금을 자기 돈처럼 ‘돌려막기’식으로 운용해 오다 사달이 난 것이다. 큐텐이 인수 과정에 결제대금을 끌어다 썼다는 얘기도 나온다. ▷월 거래액이 1조 원 넘는 티몬·위메프의 정산 지연은 소비자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휴가철을 앞두고 두 쇼핑몰에서 항공권, 숙박권 등을 산 소비자들은 줄줄이 구매가 취소됐다. 휴가를 망친 건 둘째 치고 결제한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결제대행업체들이 티몬·위메프와 거래를 끊은 탓에 신용카드 신규 결제는 물론이고 기존 결제를 취소하는 것도 막혔다. 두 쇼핑몰이 할인 판매한 상품권을 받지 않는 곳도 늘고 있어 돈을 날릴 처지다. 어제 새벽부터 위메프 본사는 환불받으려는 소비자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두 회사는 결제대금을 자체 보관하지 않고 제3의 금융기관에 맡겼다가 구매 확정 시 곧바로 지급하는 정산 시스템을 다음 달 도입하겠다고 한다. 판매대금을 제때 받지 못해 도산을 걱정하는 영세 판매자들에겐 한가하기 짝이 없는 대책이다. 티몬은 4월 마감이었던 지난해 감사보고서를 여태 제출하지 않았는데, 아무런 제약 없이 영업해 온 게 의아할 따름이다. 이번 사태는 허술한 법·제도 아래서 폭풍 성장한 이커머스 시장의 거품이 터지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이숙연 대법관 후보자가 신고한 재산은 본인 46억 원, 로또복권 운영사 대표인 남편 117억 원가량이다. 국회에 제출한 임명동의안에 ‘무직’이라고 써낸 이 후보자의 26세 장녀는 서울 용산구 재개발구역에 다세대주택을 갖고 있다. 딸은 2년 전 학생 신분으로 별다른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전세를 끼고 7억7000만 원에 이 집을 샀다고 한다. 전세보증금을 뺀 5억1000만 원 중 3억800만 원은 아버지에게 증여받고, 2억200만 원은 아버지에게 빌려서다. 이른바 ‘아빠 찬스’로 재개발 호재를 노린 ‘갭 투자’를 한 셈이다. ▷딸은 1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에게서 빌린 돈을 모두 갚았다. 현금 대신 스타트업의 비상장주식을 넘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비상장주식을 매입하는 과정에도 아빠 찬스가 동원됐다. 이 스타트업은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던 직원이 퇴사해 2017년 설립한 화장품 연구개발 기업인데, 아버지 조모 씨가 초기 투자자로 참여했다. 당시 딸도 아버지 추천으로 주식 800주를 1200만 원에 사들였다. 300만 원은 본인이 저축한 돈이고, 900만 원은 아버지에게 증여받았다. ▷지난해 5월 딸은 보유 주식의 절반인 400주를 아버지에게 3억8529만 원에 팔았다. 매수 당시 주당 1만5000원이던 주가가 6년 만에 96만 원을 웃돌며 63배 넘게 뛴 셈이다. 엄청난 시세차익으로 발생한 7800만 원가량의 양도소득세도 아버지가 내줬다. 결론적으로 딸은 자기 돈 300만 원만 들여 주식 투자로 3억8000만 원 넘게 벌고, 이걸로 부동산 갭 투자 하면서 아버지에게 빌린 돈을 퉁친 셈이다. ▷주식 매도 가격은 해당 스타트업이 투자 유치를 받았을 때의 시가를 따랐고, 딸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과정에서 빠짐없이 증여세를 납부했다는 게 이 후보자의 설명이지만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 마음은 씁쓸하다. 불법이나 위법은 아니지만 고위 법조인들이 ‘엄빠 찬스’ 등을 이용해 경제력 없는 자녀에게 편법 증여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얼마 전 취임한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도 국회 인사검증 과정에서 20세 딸이 증여받은 3억 원으로 재개발을 앞둔 어머니 명의의 땅을 헐값에 산 게 드러나 공분을 샀다. ▷오 처장의 딸은 아버지가 소개한 법무법인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3700만 원을 벌었는데, 이 후보자 딸 역시 지분 투자한 스타트업에서 아르바이트와 인턴을 했다고 한다. 이 후보자는 딸의 주식 매입 자금 중 400만 원이 직접 모은 돈이라고 했다가 300만 원이라고 말을 바꿨다. 대법관은 어느 공직보다 높은 도덕성과 준법의식, 청렴성이 요구되는 자리다. 이 후보자는 “편법 표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남의 잘못을 심판하는 법관의 ‘꼼수 증여’가 판칠수록 사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은 높아질 뿐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지난주 마무리된 현대자동차 노사의 임금 및 단체협약에는 눈길 끄는 대목이 여럿 있다. 우선 하투(夏鬪)의 상징이던 현대차 임단협이 6년 연속 파업 없이 타결됐다. 1987년 노조 창립 이후 역대 최장 무파업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사상 최대 실적을 기반으로 임금 인상도 역대급이다. 노조가 추산한 임금 상승 폭은 성과급을 포함해 1인당 평균 5000만 원에 달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현대차 대졸 신입사원 초봉이 9400만 원을 넘게 됐다는 글이 올라와 MZ세대 직장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신입 월급 받고 62세까지 근무” 중장년층의 이목을 사로잡은 건 정년 퇴직자의 재고용을 확대한 부분이다. 현대차는 만 60세 정년 이후에도 생산직 근로자가 원할 경우 1년 더 계약직으로 일하는 ‘숙련 재고용’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 기간을 2년으로 늘리기로 한 것이다. 연봉은 신입 초봉 수준으로 줄지만 사실상 만 62세로 정년이 연장되는 효과가 있는 셈이다. 이는 현대차 노조 조합원 절반이 50세가 넘고, 해마다 2000명 이상이 정년퇴직하는 상황에서 노사가 찾은 절충안이다. 회사로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인건비로 숙련 근로자를 활용할 수 있고, 근로자는 퇴직 후 맞닥뜨리는 소득 공백을 피할 수 있어서다. 현대차의 재고용 방식은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소할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올해 처음 1000만 명을 돌파해 초고령사회 진입을 목전에 뒀다. 세계 최악의 합계출산율을 정부 목표대로 1명으로 끌어올려도 2070년이면 생산가능인구가 반 토막 난다는 암울한 전망도 나왔다. 현대차처럼 정년이 지난 근로자를 재고용해 생산 인력으로 활용한다면 노동인구의 급격한 추락은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일본처럼 고령자 고용 방식 선택권 줘야 초고령사회를 먼저 경험한 일본은 고령 근로자 활용을 일찌감치 제도화했다. 일본의 법정 정년은 60세로 한국과 같지만, 일본 근로자들은 원하면 65세까지 맘껏 일할 수 있다. 기업이 65세까지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재고용을 통한 계속고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이어 2021년부터는 70세까지 고용하도록 기업에 ‘노력할 의무’를 뒀다. 강제는 아니지만 70세까지 고용할 것을 권고한 셈이다. 이에 따라 상시근로자 21인 이상인 일본 기업의 99%가 65세까지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다. 특히 70% 이상은 세 가지 옵션 중 계속고용을 통해 일할 의지가 있는 고령 인력을 쓰고 있다. 아직 호봉제가 남아 있는 일본 기업 상당수가 인건비 부담이 큰 정년 연장보다는 현대차 식의 계속고용을 택한 것이다. 도요타자동차는 다음 달부터 모든 직종에서 70세까지 재고용을 확대하기로 했는데, 일찌감치 호봉제를 폐지하고 매달 성과를 평가해 월급에 반영하는 임금 체계로 개편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도 60세 넘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정년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 2차 베이비붐 세대 945만 명의 은퇴 쓰나미가 올해부터 몰려드는 상황에서 더 미룰 시간이 없다. 다만 지금의 호봉제를 유지한 채 노동계의 주장대로 무작정 정년을 연장하면 임금 부담이 늘어난 기업들이 청년 채용을 줄여 세대 간 갈등을 키울 우려가 크다. 현재의 이중적 노동구조에서 정년 연장의 혜택이 대기업 정규직에만 쏠릴 수도 있다. 이미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 제조업체는 정년이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현대차의 계속고용 실험이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 정부와 국회가 할 일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지난달 21일 자영업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배민1플러스’의 주문을 껐다는 인증샷이 잇따라 올라왔다. 자영업자 300여 명이 뭉쳐서 하루만이라도 배민1을 쓰지 않겠다고 단체행동을 결의했더니, 적잖은 음식점 사장들이 동참한 것이다. 이들이 문제 삼은 배민1은 국내 1위 배달앱 ‘배달의민족’이 올해 초 도입한 새 요금제다. 그동안 음식점들은 주문 수와 상관없이 매달 8만8000원만 내면 되는 요금제를 주로 이용해 왔는데, 주문 한 건당 음식값의 6.8%를 중개수수료로 떼 가겠다고 했다. ▷새 요금제가 강제는 아니라고 했지만 손님들이 많이 찾는 ‘무료 배달’ 가게가 되려면 음식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배달 수수료가 배달앱의 고질적 문제였지만 이제는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가 굳어진 셈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부담이 되는 중개수수료를 배민이 다음 달부터 9.8%로 올리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음식점이 부담하는 배달비를 건당 100∼900원 낮추겠다는 당근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자영업자 여론은 들끓고 있다. 선심 쓰듯 배달비 몇백 원 내리는 것보다 수수료 부담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앞으로 서울에서 2만 원짜리 치킨을 팔면 2000원에 가까운 중개수수료에 배달비, 카드 수수료, 부가세 등을 더해 6000원 정도가 빠져 나간다. 인건비, 재료비 등을 빼면 남는 게 없다는 자영업자들의 하소연이 괜한 엄살이 아니다. 전국가맹점주협의회는 11일 성명을 내고 “중개수수료를 6.8%에서 9.8%로 44% 인상하는 것은 자영업자의 절박한 호소를 매몰차게 외면한 비정한 행위”라고 했다. ▷최저임금 등의 가파른 상승과 구인난, 고금리로 외식업체들의 어려움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다. 자영업자들의 대출연체율이 크게 치솟고 있는데, 외식업은 그 대표적인 업종 중 하나로 꼽힌다. 배민은 최근 한 달 새 수수료 인상 외에도 무료 서비스들을 잇달아 유료화하는 방침을 내놨다. 그러다 보니 배민의 모기업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가 유럽연합의 반독점법을 위반해 4억 유로의 과징금을 낼 상황에 처했는데, 배민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려 한다는 해석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자영업자들은 치솟는 수수료 부담에도 배달앱 시장의 65%를 장악한 배민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최근 내놓은 소상공인 지원 대책에 음식점 등 영세 자영업자에게 배달비를 직접 지원한다는 방안이 담겼지만, ‘갑질 횡포’라 불리는 배달앱의 구조적 문제를 손보지 않고서는 세금으로 배달 플랫폼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될 수 있다. 자영업자들이 나서서 ‘공정한 플랫폼을 위한 전국 사장님 모임’을 만드는 현실이 서글프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직장인들의 로망이 ‘굵고 짧게’에서 ‘가늘고 길게’로 바뀐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다. 외환위기 이후 조기 퇴직이 일상화됐지만 개인의 노후 준비나 사회 안전망은 이를 쫓아가지 못하면서다. 20년이 더 흘러 워라밸을 챙기는 2030세대의 등장으로 ‘임포자’(임원 포기자), ‘승포자’(승진 포기자) 같은 신조어가 쏟아졌다. 일찍 임원 달고 일찍 집에 가느니 ‘만년 부장’, ‘만년 과장’으로 장수하겠다는 직장인이 늘어난 것이다. 호봉·직급 체계가 엄격한 공무원 사회나 금융권에선 실제 승진 발령을 거절한 사례가 나왔다. ▷대기업 노사의 임금협상 테이블에 ‘승진 거부권’을 처음 올린 건 현대자동차 노조다. 2016년 임협에서 일반·연구직 직원들에게 과장 승진을 거부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과장이 되면 노조를 탈퇴해야 하고 성과연봉제도 적용받는데, 인사고과 압박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관리자가 되느니 노조 울타리 안에서 정년을 보장받겠다는 취지였다. 그해 현대중공업 노조도 승진 거부권을 요구하면서 두 회사 노조는 동맹 파업을 강행했다. ▷사측이 인사권 침해라며 거절했던 승진 거부권을 현대중공업 노조가 올해 임단협에서 재차 요구하고 나섰다. 8년 전에는 승진 거부 요구가 월권이다, 기상천외하다는 비판 일색이었지만 지금은 뜬금없지만은 않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승진·출세보다는 워라밸과 안정을 선호하는 MZ세대와 준비 안 된 노후 공포에 시달리는 중장년층 직장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슈라는 얘기다. ▷대기업 노조들이 올해 임단협에서 일제히 ‘정년 연장’을 꺼내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현대차·기아 노조를 비롯해 HD현대그룹 조선 3사, LG유플러스 노조 등이 60세 정년을 64세나 65세로 올리자고 요구하고 있다. 법정 정년은 2013년 60세로 연장된 뒤 변함없는데,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는 지난해 63세에서 2028년 64세, 2033년 65세로 계속 늦춰지면서 ‘소득 절벽’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노동시장에서 퇴장하는 실질 은퇴 나이는 72.3세일 정도로 수많은 고령층이 정년 이후에도 일자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은 수십 년에 걸쳐 정년을 높인 데 이어 기업들이 65세까지 ‘정년 연장’, ‘재고용을 통한 계속 고용’ ‘정년 폐지’ 중 하나를 택하도록 의무화했다. 비슷한 길을 뒤따라 걷는 한국이 참고할 만한 대안이다. 다만 노동계 주장대로 무작정 정년을 연장하면 기업 부담이 커지고 청년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인구 소멸 걱정이 없던 때에 굳어진 호봉제 중심의 임금 체계, 노동시장 경직성, 법적 노인 연령 등을 함께 풀어야 정년 연장도, 일손 부족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아파트 사전청약의 원조는 보금자리주택 사전예약이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수도권 그린벨트를 풀어 ‘반값 아파트’를 공급하면서 처음 도입했다. 통상 아파트 착공 즈음에 하는 청약보다 2, 3년 앞당겨 입주자를 모집하는 것으로, 당첨자는 본청약 때 먼저 계약할 기회를 갖는다. 하지만 사전예약 이후 본청약까지 평균 4년, 최장 8년이 걸리면서 보금자리주택 사전 당첨자 중 실제 입주한 사람은 40%에 그쳤다. 무주택자들의 내 집 마련 불안감을 덜어주겠다며 시행된 제도는 얼마 안 가 폐지됐다.▷사실상 용도 폐기된 카드를 다시 꺼내든 건 문재인 정부다. 전방위 규제에도 부동산 과열이 계속되자 주택 공급 시그널을 보내 집값을 잡겠다며 2021년 이를 부활시켰다. 당시 정부는 “사전청약에서 본청약까지 기간을 2년으로 최소화하겠다”고 했고, 국토교통부 장관은 “영끌해서 집 사지 말고 분양받으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단기간에 주택 공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민심 달래기용 미봉책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다.▷예상대로 우려는 현실이 됐다. 2021년 7월 이후 사전청약을 진행한 공공아파트 99개 단지 가운데 현재 본청약을 끝낸 곳은 13개에 불과하다. 이 중에서도 본청약 시기를 제대로 지킨 단지는 1개뿐이다. 토지 보상이나 기반시설 조성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전청약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탓에 대다수 사업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기존 주민들의 반대로 사업이 미뤄지는 건 기본이고, 지구 조성 과정에서 문화재가 발굴되거나 법정보호종인 맹꽁이가 발견돼 본청약이 하염없이 늦춰진 곳도 있다.▷사전청약 당첨자들은 본청약에 맞춰 계약금, 중도금 같은 자금 마련 계획을 세우고 전월세 계약도 해놨는데 이를 송두리째 바꿔야 할 처지다. 사업이 연기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분양가 상승 부담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최근 건설 자재 값과 인건비 등이 대폭 오르면서 본청약이 1년 미뤄진 단지의 분양가는 사전청약 때보다 최대 1억 원 넘게 뛰었다고 한다. 민간 사전청약 아파트 중엔 공사비 급등으로 건설사가 사업을 아예 포기한 곳도 나왔다.▷사업 지연 피해가 속출하자 국토부는 어제 사전청약 신규 시행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10여 년 전의 실패를 답습하고 2년 10개월 만에 사전청약 제도가 또 폐지되는 것이다. 청약 시점만 앞당기는 것일 뿐 실질적인 공급 확대 효과는 없는 불완전한 제도를 재도입한 지난 정부의 잘못이 크지만, 공공분양 ‘뉴홈’에 사전청약을 활용하다가 뒤늦게 폐지한 현 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무주택 실수요자들을 희망 고문하는 어설픈 대책을 재탕 삼탕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만큼 막말과 궤변이 화제가 되는 정치인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사실이 아닌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트위터에 올려, 대통령 임기 마지막 달에는 트윗 471개에 ‘허위 정보’ 딱지가 붙어 공개 제한 조치를 받았다. 팬데믹 위기 때는 “백신이 없어도 결국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라질 것”이라는 비과학적 주장을 늘어놔 조롱거리가 됐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다수의 형사·민사 재판에 처해 있는 트럼프에게 미 법원은 재판 관련자들을 비방하거나 위협하지 말라며 세 차례 함구령을 내렸다. ▷그런데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한국을 겨냥해 사실과 다른 발언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지난달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왜 우리가 부유한 한국을 방어해야 하느냐”, “불안정한 위치에 4만 명의 병력을 두고 있는데 한국은 방위비 분담금을 거의 내지 않고 있다” 등의 주장을 한 것이다. 하지만 CNN 방송이 “최소 32개의 오류를 확인했다”고 보도할 정도로 트럼프의 타임 인터뷰는 거짓투성이였다. ▷현재 주한미군은 2만8500명으로 4만 명이라는 숫자부터 사실과 다르다. 또 한국은 통상 인건비를 제외하고 주한미군 주둔 비용의 40∼50%를 부담하고 있다. 특히 조 바이든 행정부와 협상을 통해 2021년 방위비 분담금을 13.9% 인상해 10억 달러 가까이를 냈고, 내후년까지 한국 국방비와 연동해 해마다 분담금을 올리기로 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향해 방위비를 압박했던 트럼프가 공격 대상을 한국으로 옮기면서 근거 없는 ‘안보 무임 승차론’을 내세운 셈이다. ▷이어 트럼프는 11일 뉴저지주 대선 유세에서 “한국이 미국의 해운(shipping), 컴퓨터 등 많은 산업을 빼앗아갔다”며 “그들은 미군에 방위비를 낼 만큼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한국은 미국의 해운, 컴퓨터 산업을 뺏은 적이 없을뿐더러 한국이 경쟁력을 가진 조선, 반도체로 범위를 넓혀 봐도 억지스럽다. 중국 조선업이 3년째 한국을 제쳤고, 치열한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 한국 대표 기업이 미국에 4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로 한 상황에서 한국을 겨누는 건 황당하다. 결국 터무니없는 ‘산업 약탈론’까지 들이밀며 방위비 증액을 재차 압박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2015년 트럼프의 첫 대선 출마 선언 직후 인터뷰와 공개 발언, 트윗 등을 점검해 그의 막말과 거짓 주장이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막말을 던져놓고 반응이 좋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고, 선동적인 거짓말을 뱉은 뒤엔 진실처럼 포장해 지지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사상 최대 대미 무역흑자에다 방위비 분담 문제가 걸려 있는 우리로선 트럼프의 ‘거짓말 베팅’, ‘막말 베팅’의 강도가 더 높아질까 우려스럽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