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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9월, 기획재정부는 ‘원천징수 합리화’라는 낯선 대책을 내놨다. 간이세액표 개정을 통해 매월 떼어가는 근로소득세액을 줄여 가계 수입을 늘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랏빚을 내지 않고도 경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처음엔 ‘묘수’라는 호평이 부처 내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 대책은 곧 조삼모사 논란에 휩싸인다. 세금을 적게 내는 만큼 연말정산 때 적게 돌려받는다는 점에서 결국 납세자의 부담은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없는 살림에 마른 수건 쥐어짜 마련한 정책”이라며 둘러댔지만 사실 여기엔 차마 대놓고 밝히지 못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대선을 불과 석 달 앞두고 경기를 어떻게든 끌어올려 보자는 것이었다.보수 정권마다 반복되는 재정 꼼수 이런 꼼수는 다음 정권에서 급기야 큰 사달로 번졌다.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화려한 복지 공약을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그 재원 마련을 위해 집권 첫해부터 세법 개정에 나섰다. 근소세 공제 방식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전환한 것인데, “고소득자 부담을 늘렸다”는 정부 설명과 달리 중산층과 봉급생활자가 내야 하는 세금이 대거 늘었다. 여론 반발에 직면한 정부는 “세율을 올리지 않았으니 증세가 아니다”,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만 살짝 뽑았다”는 식의 말장난으로 오히려 월급쟁이의 분노만 키웠다. 복지 확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거나 나랏빚을 더 내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정공법 대신, ‘거위 털 뽑듯’ 슬그머니 직장인 유리지갑을 털 궁리만 한 것이다. 정부가 얕은수로 국민의 눈을 속이는 일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기재부는 30조 원의 세수 결손을 메우기 위해 외국환평형기금과 주택기금 등 각종 기금을 동원한다고 발표했다. 당초 정부는 올해 예산을 편성하면서 병사 월급과 기초연금 인상, 신공항 건설 같은 선심성 대책을 대거 포함시켰다. 하지만 세수가 원하는 만큼 걷히지 않자 외환시장 안정과 서민 주거복지에 써야 할 비상금을 탈탈 털고, 한국은행에선 150조 원이 넘는 차입금까지 끌어다 쓰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그러고도 “국채 발행을 피했으니 건전재정 기조를 지켜냈다”, “나랏빚 펑펑 내던 전임 정부와는 다르다”고 스스로를 홍보한다.前정부 고용 부풀리기와 다를 게 뭔가 그러나 이런 자평과는 반대로 정부의 ‘재정 마사지’는 현 정부가 그토록 차별화를 시도했던 지난 정부의 데자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문재인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동원해 공공 일자리를 쏟아낸 결과 고용률이 올라가는 등 이른바 ‘겉모습’은 개선됐지만, 실제로는 저임금 비정규직만 잔뜩 늘어나면서 고용의 질은 추락했다. 돌려막기와 마이너스통장으로 겨우 파산을 면하고는 “나라살림을 튼튼히 지켰다”고 정신승리하는 것과, 예산 축내며 질 낮은 ‘세금 알바’를 양산해 놓고 자칭 ‘일자리 정부’라 치켜세우는 것. 그 둘을 지켜보며 국민들이 느낄 민망함의 차이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과속 인상과 일자리 증가라는 서로 상충되는 목표를 달성하려다 결국 통계 분식(粉飾)까지 감행했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우파 정부에서 유독 이런 ‘재정 꼼수’가 되풀이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건전 재정과 감세 기조가 집권 세력에 일종의 도그마(독단적 신념)가 된 상태에서 선심성 지출은 지출대로 하려다 보니 관료들이 이런 막다른 선택에 내몰리고 마는 것이다. 건전 재정이라는 큰 방향은 옳지만 이는 국가 경제를 운용하는 하나의 원칙쯤으로 여겨야지 그 자체가 절대 허물어선 안 되는 성역이 돼선 곤란하다. 누구보다 대통령부터 그 고집을 내려놔야 한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밸류업한다고 증시 오르겠어요? 기업이 돈을 잘 벌어야 뭐라도 되지.”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얼마 전 금융당국 고위 관료가 털어놓은 얘기는 아무리 사석(私席)이었지만 너무 솔직했다.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같은 대책들은 곁가지일 뿐이고 결국엔 주가와 비례적 함수 관계에 있는 기업 실적이 받쳐주지 않으면 밸류업이고 뭐고 공염불이라는 그의 주장은 물론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증시 밸류업의 주무부처 관료가 이렇게 대놓고 존재론적 ‘자기 부정’을 하다니…. 증시 문제를 바라보는 대통령, 넓게 말해 여야 정치권과 관료·전문가 그룹 간 인식차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세금 깎아주는 등 단기 성과에만 집착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한다며 정부가 증시 밸류업 정책을 추진한 지도 1년이 다 돼 간다. 올해 초 일본을 벤치마킹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한 데 이어 최근에는 야심 차게 ‘코리아 밸류업 지수’까지 내놨다.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한국거래소를 두 번이나 찾으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대주주 주식양도세 완화, 증권거래세 인하 같은 세제 지원책도 줄줄이 나왔다. 하지만 성적표는 아직 초라하다. 올 들어 미국 일본 등 주요국 지수가 20% 안팎 고공행진을 하는 동안 코스피는 상승은커녕 되레 뒷걸음질 쳤다. 자사 주가의 밸류업 계획을 공시한 기업도 상장사 중 1%가 채 안 된다. 기업의 주주 친화적 경영을 유도해 시장 평가를 높이겠다는 밸류업의 큰 방향은 옳다. 기업들이 지금보다는 배당을 늘리고 소액주주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한편 오너 일가의 이익만 챙기는 일부 기업들의 행태에 변화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 문제는 밸류업의 본질인 ‘기업가치 제고’보다 ‘증시 부양’이라는 단기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앞뒤를 가리지 않은 대책을 남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금융투자소득세다. 금융상품 투자수익에 일정 비율로 과세한다는 이 제도는 여야 합의로 마련돼 내년부터 시행 예정이지만 정부여당이 개인투자자 표심을 우려해 느닷없이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금투세를 굳이 없앤다면 적어도 ‘패키지 딜’로 추진돼 왔던 거래세 인하라도 되돌려 재정 누수를 막아야 하는데 거래세는 또 원래대로 낮추겠다고 한다. 평소 건전재정을 중시한다던 정권이 맞나 싶다.기업 환경과 경제 활력 개선이 핵심 정부가 아예 ‘공포 마케팅’을 조장하기도 한다. 주가 하락이 예상되는 주식을 빌려 팔아 수익을 내는 공매도는 모든 선진국에 보편화된 투자 기법이고 시장의 과도한 거품을 빼는 순기능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공매도는 주가 폭락의 주범→공매도 금지는 밸류업’이라는 일부 투자자 단체의 단선적 주장에 확성기를 대주기 바쁘다. 국제 표준을 한참 벗어난 규제의 결과는 해외 투자자들이 이탈하고 증시의 선진지수 편입이 번번이 좌절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밸류업의 사다리를 스스로 걷어찬 것이다. 대통령과 여권은 어떻게든 시장에 거품을 주입해 지수를 끌어올리는 게 밸류업의 본질이라고 믿는 듯하다. 마치 우리 증시의 실패가 공매도와 금투세 때문이고 이를 없애지 않으면 주가가 당장이라도 폭망할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그러나 진정한 밸류업은 주주 환원 확대,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함께 경제 활력을 높이고 혁신기업이 양산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그 뻔한 진리를 굳이 또 강조해야 하나 싶다. 최근 어느 해외 연기금 관계자가 우리 증시를 놓고 “저평가라는 말도 부끄럽다”고 혹평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저평가’라는 말이 너무 후하다는 점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 지금 현실을 보면 우리 증시는 저평가된 게 아니라 딱 수준에 맞는 적당한 평가를 받는 것 같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주요국의 금리 피벗이 본격화됐다. 2022년 3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가파른 긴축에 시동을 걸며 각국의 돈줄 조이기가 시작된 지 2년 6개월 만이다. 금리를 내릴 여지조차 없는 일본을 제외하면 긴축 완화 결정은 이제 선진국 중 사실상 한국만 남았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3고(高) 위기에 시달려 온 우리는 이 시기를 누구보다 기다려 왔다. 중력을 거스르는 힘겨운 오르막 경사가 이제 조금이나마 평탄해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과거와 달리 물가 불안요인 상존금리 인하는 기본적으로 경제 성장에 플러스 요인이다.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쉬워지기 때문에 기업 투자가 늘고 주식 부동산 등 자산가치가 오른다. 또 사업이 잠시 어려워진다 해도 급전을 빌려 버티는 게 용이해진다. 풍부한 유동성의 파도에만 올라타면 ‘마치 무빙워크 위를 걷는 것처럼’(오크트리캐피털 하워드 막스 회장의 표현) 적은 힘을 들이고도 쉽게 돈 벌 기회가 열려 있다. 세계 경제는 저금리 환경에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물가도 안정적이었던 골디락스 시대를 경험한 바 있다. 정보기술(IT) 혁명이 미국의 ‘신경제’로 이어진 1990년대, 중국의 고도 성장에 전 세계가 수혜를 입었던 2000년대 초중반이 그랬다.통화정책의 변화에 따라 경기 흐름이 바뀐다는 것은 경제학에서 기본 중 기본이 되는 원리다. 하지만 앞으로는 과거와 같은 제로금리나 양적완화의 사례를 경제원론 교재에 다시 추가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최근 각국이 ‘이지 머니’(easy money·손쉽게 돈을 빌려 투자하는 것)의 폐해를 너무나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연준은 금리를 너무 오랫동안 낮게 유지했다가 정권이 흔들릴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더 멀게는 2008년 금융위기 역시 장기간 이어진 초저금리가 집값 거품의 모래성을 쌓아 올린 게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물가도 과거와 달리 불안 요소가 상존한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미중 갈등은 더욱 커질 조짐이다. 이는 전 세계를 하나로 이어왔던 공급망이 더 잘게 분절되고 값싼 중국산은 글로벌 시장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뜻한다. 저가 상품과 인력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고비용 구조가 세계 경제에 상수(常數)로 고착화됐다. 여기에 기후변화에 따른 식량 가격 폭등, 지정·지경학적 긴장에 의한 에너지 위기도 자주 반복되고 있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물가 불안 요인들을 열거하면서 고물가에 경기침체가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이런 우려들을 감안하면 각국의 긴축 완화에는 상당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연준은 2022년 초부터 제로 수준의 금리를 5%포인트 넘게 올리는 데 불과 1년 반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대의 과정은 훨씬 천천히 이뤄질 공산이 크다. 어쩌면 제로금리는커녕 연 2∼3% 이하의 상대적 저금리 시대도 앞으로 수년간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다.각국 금리 낮추는 데 한계 분명특히 한국은 가계부채라는 혹을 달고 있어 고민이 더 크다. 미국과 유럽을 따라 금리를 함부로 내렸다간 자칫 ‘경제 시한폭탄’이 폭발해 버릴 수 있다.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내려간 경기를 생각하면 한국은행은 금리를 내려도 이미 한참 전에 내렸어야 하지만 가계빚과 집값 우려가 발목을 단단히 잡으면서 통화정책이 길을 잃은 모양새다. 금리를 빠르게 내리기 어렵다는 것은 서민들의 이자 부담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것, 그리고 내수 경기 회복이 한동안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평소 자신이 포퓰리스트라는 비난에 전혀 굴하지 않는다. 그냥 쿨하게 인정하고 때로는 이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그는 언론 등에 “포퓰리즘으로 비난받은 정책을 내가 많이 성공시켰다. 앞으로도 포퓰리즘을 하겠다”고 했다. 포퓰리즘을 대놓고 하겠다는 자에게 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은 아무런 타격감이 없다. 임기응변과 권모술수의 달인다운 면모다. 포퓰리즘이란 말이 본인도 듣기는 거북했는지 이 대표는 이번엔 먹사니즘이란 대안을 들고나왔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을 최우선에 두겠다는데 그 대의(大義)에 누가 반기를 들까 싶다. 문제는 그 아름다운 단어를 한 꺼풀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진짜 속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를 위험에 빠뜨렸던 포퓰리즘 정책들은 죄다 ‘민생’, ‘실용’ 같은 그럴듯한 말들로 포장돼 있었다. 이재명의 새 정치 구호도 그리 다를 게 없어 보인다.철학도 원칙도 없는 ‘나랏돈 퍼주기’ 이 대표가 외치는 민생회복지원금은 먹사니즘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례다. 그의 주장대로 전 국민에게 25만 원씩 나눠주기 위해선 생때같은 나랏돈 13조 원이 필요하다. 국민 개개인이 받는 돈은 그야말로 ‘용돈’ 수준이지만 이를 위해 들어가는 재정은 천문학적이고 오히려 고물가를 더 부추기는 부작용까지 우려된다. 이 대표가 ‘1호 민생법안’으로 밀어붙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남아도는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자는 것인데 쌀 과잉생산을 유발할 수 있는 데다 매입·보관 비용도 매년 1조 원이 들어간다. 대선 공약이었던 ‘탈모약 건보 적용’과 ‘병사 월급 200만 원’, 또 그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기본 시리즈’도 모두 국가 재정에 심각한 충격을 주는 내용이다. 굳이 나랏돈을 펑펑 써야 한다면 곳간을 어떻게 채워 넣을지에 대한 구상이라도 내놔야 하는데 그조차도 없다. 차라리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대기업-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고나 하면 정책의 타당성 여하를 떠나 앞뒤 논리라도 맞을 텐데, 여태 ‘부자 감세’ 프레임을 씌어 반대해 온 종합부동산세 완화를 느닷없이 추진하겠다고 한다. 기존 입장이 어떻든지 간에 납세자의 표만 얻을 수 있다면 나라살림 축내는 건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지금까지 지켜본 이재명의 먹사니즘은 무슨 철학이나 원칙이 있는 국정이념이라기보다는, 뭐든 나눠주거나 깎아주면서 민생을 챙기는 정치인으로 자신을 각인시키고, 무리한 지출에 국고가 바닥나는 현실은 외면하는 무책임한 정치쇼에 가깝다.민생 가장한 또 다른 포퓰리즘일 뿐 진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그리고 요즘 이 대표가 유독 강조하는 ‘성장’의 해법을 찾으려면 지금처럼 재정 퍼주기 같은 원시적인 처방에 기대선 안 된다. 그보다는 투자와 혁신 등 민간 부문의 창의성이 빛을 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경쟁에서 뒤처지는 취약 계층에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하는 것이 우선이다. 특히 국가 지도자급 반열에 오르는 걸 목표로 한다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나라의 시스템을 바로잡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가령 연금·노동개혁과 전기요금 현실화 같은 문제는 비록 유권자의 인기를 얻진 못하더라도 국가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제들이다. 지금 서민경제 현장은 현금 뿌리기로는 해결 못 하는 일들만 산더미다. 당장 노동시장에선 이렇다 할 직업도, 구직의사도 없이 그냥 쉬는 청년이 사상 최대라고 한다. 먹사니즘을 표방한다는 이 대표는 이들의 지갑에 25만 원씩 꽂아준다는 것 외에 청년 ‘일자리 절벽’의 근본 해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나. 민생이라는 말의 무게를 그가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미국의 경기 침체 등을 우려한 투자자들의 ‘역대급 투매’로 한국과 일본, 대만 증시가 모두 사상 최대 폭으로 하락하는 등 아시아 증시가 일제히 초토화됐다. 기업들의 연쇄 부도나 감염병 확산 같은 대형 악재 없이 막연한 공포심리로 인해 증시가 이 정도로 대폭락하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그만큼 한국 금융시장이 대외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으로도 분석된다. 5일 국내 증시에서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34.64포인트(8.77%) 하락한 2,441.55에 거래를 마쳤다. 하락 폭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다. 코스닥도 88.05포인트(11.3%) 하락한 691.28에 마감했다. 이날 코스피와 코스닥은 하락 폭이 커지면서 오후에 거래가 20분간 일시 중단되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국내 증시에서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된 것은 2020년 3월 19일 이후 4년 4개월여 만이다. 코스피는 거래 재개 이후에 지수가 더 떨어지면서 한때 289.23포인트(10.81%) 내린 2,386.96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두 시장에는 매도 사이드카 역시 발동됐다. 일본 증시는 더 크게 내렸다. 이날 닛케이평균주가는 4,451.28엔(12.4%) 내린 31,458.42로 마감했다. 이날 낙폭은 3,836엔이 떨어졌던 1987년 10월 20일 ‘블랙 먼데이’보다 커 역대 최대였다. 대만 증시 역시 1807.21포인트(8.35%) 빠진 19,830.88로 거래를 마쳤다. 1967년 지수 산출 이후 최악의 폭락장이다. 한국 시간 5일 밤 개장한 이날 뉴욕 증시는 나스닥지수가 6%, S&P500지수가 4% 급락한 채 거래를 시작했다. 유럽 증시도 장중 2%를 넘는 하락세를 보였다. 글로벌 증시 폭락의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경기 침체 우려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거품론이 불거지는 등 그동안 증시를 이끌었던 빅테크 기업 실적에 대한 의문이 확산된 것도 증시 하락의 기폭제가 됐다. 일본의 경우는 기준금리 인상으로 엔화 가치가 다시 급등하면서 수출 기업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그동안 엔화를 저금리에 차입해 세계 각지에 투자(엔 캐리 트레이드)했던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시장 불안을 가중시켰다. 여러 악재가 중첩된 복합 위기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증시 전문가들은 이런 요인들이 이날 대폭락장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9·11테러, 팬데믹처럼 뚜렷한 이유 없이 시장이 급전직하하는 것은 막연한 공포심리가 투자자들 사이에 빠르게 전염되면서 비이성적인 투매가 반복된 결과라는 것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주가 급락을 설명할 단서가 뚜렷하지 않다”며 “미국은 지금까지 증시가 과하게 오른 데 따른 반작용일 수 있지만 한국은 별로 오른 것도 없는 증시가 더 떨어지니 허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미국의 경기침체 등을 우려한 투자자들의 ‘역대급 투매’로 한국과 일본, 대만 증시가 모두 사상 최대 폭으로 하락하는 등 아시아 증시가 일제히 초토화됐다. 기업들의 연쇄 부도나 감염병 확산 같은 대형 악재 없이 막연한 공포심리로 인해 증시가 이 정도로 대폭락하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그만큼 한국 금융시장이 대외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으로도 분석되고 있다.5일 국내 증시에서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34.64포인트(8.77%) 하락한 2,441.55에 거래를 마쳤다. 하락 폭 기준으로 역대 최대다. 코스닥도 88.05포인트(11.3%) 하락한 691.28에 마감했다. 이날 코스피와 코스닥은 하락 폭이 커지면서 오후에 거래가 20분간 일시 중단되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국내 증시에서 코스피·코스닥 시장에 동시에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된 것은 2020년 3월 19일 이후 4년 4개월여 만이다. 코스피는 거래 재개 이후에 지수가 더 떨어지면서 한때 282.23포인트(10.81%) 내린 2,386.96까지 하락하기도 했다.일본 증시는 더 크게 내렸다. 이날 닛케이 평균 주가는 4,451.28엔(12.4%) 내린 31,458.42로 마감했다. 이날 낙폭은 3,836엔이 떨어졌던 1987년 10월 20일 ‘블랙 먼데이’보다 많아 역대 가장 컸다. 대만 증시 역시 1807.21포인트(8.35%) 빠진 19,830.88로 거래를 마쳤다. 1967년 지수 산출 이후 최악의 폭락장이다.이날 증시 폭락의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경기침체 우려다. 미국은 지난 주말 제조업 지표가 악화되고 실업률이 3년 만에 최대치로 올라서는 등 경제 감속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상황이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거품론이 불거지는 등 그동안 증시를 이끌었던 빅테크 기업 실적에 대한 의문이 확산된 것도 증시 하락의 계기가 됐다. 일본의 경우는 기준금리 인상으로 엔화 가치가 다시 급등하면서 수출 기업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그동안 엔화를 저금리에 차입해 세계 각지에 투자(엔 캐리 트레이드)했던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시장 불안을 가중시켰다.그러나 증시 전문가들은 이런 요인들이 이날 대폭락장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9·11테러, 코로나19 팬데믹처럼 뚜렷한 이유가 없이 시장이 급전직하하는 것은 막연한 공포심리가 투자자들 사이에 빠르게 전염되면서 비이성적인 투매가 반복된 결과라는 것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주가 급락을 설명할 단서가 뚜렷하지 않다”며 “미국은 지금까지 증시가 과하게 오른 데 따른 반작용일 수 있지만, 한국은 별로 오른 것도 없는 증시가 더 떨어지니 허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미국 러스트벨트의 백인 저소득층을 뜻하는 멸칭(蔑稱) 하나가 JD 밴스의 공화당 부통령 후보 지명을 계기로 다시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밴스의 베스트셀러 회고록에 소개된 힐빌리(Hillbilly)의 삶은 미국 현지에서도 2016년 출간 직후 상당한 화제가 됐다. 가난과 폭력, 알코올중독, 마약에 찌든 이들의 영혼은 ‘열심히 살아봤자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학습된 무기력이 지배한다. 고된 생업에 지친 부모들은 점심은 KFC, 저녁은 맥도널드로 자녀의 끼니를 아무렇게나 때운다. 마을에는 고등학교 중퇴자가 넘쳐 나고, 설탕 음료를 하도 마셔대서 이빨이 모두 썩어나가는 ‘마운틴듀 입’(Mountain Dew Mouth)을 가진 아이들투성이다.급변하는 경제 환경의 피해자들 힐빌리의 스토리는 여느 국가의 평범한 빈곤층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필자는 2020년 미 대선 당시 특파원을 하면서 도널드 트럼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이런 ‘촌 동네’ 백인들을 많이 만나 봤다. 이들의 주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공통된 것은 “우리가 원래는 잘살았다. 그런데 외부 세력이 들어오고 나서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는 논리였다. 밴스는 책에서 글로벌 기업의 침투로 마을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경험을 담담하게 기술했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확산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밑바닥까지 밀려난 사람들, 그게 바로 힐빌리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달라진 경제 환경의 급류에 휩쓸려 계층 하락의 피해를 보는 ‘한국판 힐빌리’는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다. 부동산 가격 폭등에 무리한 대출로 집을 샀다가 고금리 장기화라는 철퇴를 맞은 영끌족들, 부모 세대는 경험해 보지 못한 저성장과 구직난에 비자발적 백수로 지내는 청년 실업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저임금 급등과 내수 침체에 줄폐업하는 자영업자, 인공지능(AI)에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수많은 지식 노동자들도 마찬가지 신세다. 물론 세상이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뒤처지고 도태되는 집단은 인류 역사에 언제나 있어 왔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 변화와 추락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실업 청년, 영끌족 아픔 보듬어야 미국 경제의 중추에서 순식간에 하층(下層)으로 전락한 힐빌리에게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정치 세력이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워싱턴 정가가 여야 모두 기득권 세력만 구애하는 각축장으로 변했을 때, 그 빈 공간을 영민하게 꿰차고 들어온 것이 정치 신인 트럼프와 밴스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자산 격차가 고착화되며 기회의 사다리가 붕괴되는 동안, 여의도 정치인들은 소수의 극렬 지지층과 거대 이익집단만 바라보며 정작 서민의 삶을 외면했다. 진보다 보수다 실용이다 온갖 고상한 용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장했지만, 삶이 절박한 이들에겐 먹고사는 것을 제외한 모든 말들은 그저 딴세상 얘기일 뿐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노력만 하면 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비율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정치 지형과 사회 여건이 미국과 여러모로 다른 한국에선 영끌족이나 청년 구직자,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미국처럼 정치 세력화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힐빌리를 ‘미국판 태극기 부대’쯤으로 보고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우리 주변 흙수저들, ‘한국판 힐빌리’의 현실이 너무나 녹록지 않다. 소외 계층의 분노와 아픔을 제때 감싸안지 못한 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지난 몇 년간 미국은 뼈저리게 경험했다. 거기서 우리가 깨닫는 게 있어야 한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한 나라의 재상(宰相)까지 지냈던 농부의 집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2층 양옥집과 그 옆에 조그만 단칸방이 있는 사랑채, 그리고 정자 하나가 전부였다. 박근혜 정부 때 역대 최장수(2013년 3월∼2016년 9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이동필 전 장관(69)은 장관 퇴임 바로 다음 날 아내와 함께 고향인 의성군 단촌면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에서 노모(92)를 모시면서 3000평 정도 되는 논밭에서 8년째 마늘, 고추 등 농산물과 과일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 ‘사원제’(思源齊)라는 이름의 사랑채는 ‘사람의 도리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독서나 공부 모임을 위해 귀농 후 직접 마련했다고 한다. 인터뷰는 ‘애일당’(愛日堂·‘오늘 하루가 가장 소중하다’는 뜻)이라는 현판이 걸린 3평 넓이의 정자에서 10일 진행됐다. 평상에 낡디낡은 선풍기가 한 대 있었지만 틀어 놓지 않아도 시골 바람이 꽤 시원했다.》―요즘은 어떤 농사를 짓고 사시나. 2016년 9월 장관직을 그만둔 다음 날 내려왔으니 귀농을 한 지는 올해 9월로 8년이 된다. 국회의원을 했으면 두 번이나 했을 기간인데 아직은 초보 농사꾼이다. 마늘, 고추, 작약 등을 기른다. ―농사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어떤가. 이전에는 그래도 농사로 수입을 조금 올리곤 했는데 지금은 거의 벌어들이는 게 없다. 큰 농기계가 있어야 돈 버는 농사가 가능한데 며칠 일하자고 개인적으로 기계를 살 수도 없고 농사를 지어도 내다 팔 곳이 마땅치 않다. 가난한 선비랄까. 나이가 들면서 무리하게 일하기도 어려워졌다. ―요즘 이상 기후 때문에 농사일이 힘들지 않나. (이 전 장관을 만난 10일은 충청·전라도 지역에 기습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기후변화가 매우 심각하다. 요즘도 농사철이 되면 가뭄과 홍수가 거듭되는데 선진국이 되려면 물 관리를 해서 이를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재해 대책을 세우기보다 보상을 어디에 얼마나 주느냐만 얘기한다. 이러면 근본적 해결이 안 된다. ―농사일을 해보니, 공직에 있을 때와 현장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농정과 현장의 괴리가 크다. 좋은 취지의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느라 애를 쓰지만 성과 관리가 부족한 것 같다. 기업인들은 일을 하면 결과를 체크하는데, 공직자들은 어디서 예산을 따오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많다. 그 정책을 추진해서 농가소득이나 식량자급률 같은 성과를 내는지 여부가 중요한데 돈만 쓰고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지 않나. 또 주민 생활에 꼭 필요한 곳에 돈을 써야 하는데 공급자 위주로 대형 공사만 남발하다 보니 성과를 체감하기 어렵다. 시골에도 문화회관 체육관 이런 거 크게 지어놨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장관직에서 퇴임하고 5급 공무원(경북도 정책자문관)으로 일해 화제가 됐다. 젊었을 때 “우리나라 농촌이 왜 못사는지를 공부해 오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 그래서 농촌경제연구원에 취직해 한평생 연구를 하고 여러 직책도 했다. 나름 나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막상 시골에 다시 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마을은 전부 다 요양원처럼 노인들, 빈집들밖에 없고 내가 그동안 뭘 했나 자괴감이 왔다. 그런데 마침 기회가 생겨서 그냥 혼자 농사나 짓는 것보다는 내가 좀 거들 게 있나 싶어서 2019년부터 2년 정도 자문관을 했다. 그런데 내가 한마디로 밥값을 제대로 못 했다. 지방행정이라는 게 예산이나 역량에 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직원 한 명당 5, 6개씩 사업을 끼고 있다. 지역에 필요한 새로운 사업을 스스로 추진할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농촌이 여전히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나라 농업소득(순수하게 농사를 지어서 얻는 소득)이 1000만 원밖에 안 된 지 10년이 넘었다. 그렇게 많은 공직자가 매달려서 수십 조 예산을 쓰고도 농가소득이며 농촌인구며 줄어들고 이제는 농사 지을 사람도 없다. 농정의 내용과 체계를 싹 바꿔야 한다. 우리나라 농산물은 외국보다 두세 배는 비싸다. 결국 농업 생산비용을 낮추고 품질을 높여야 국제경쟁에서 살아남는데, 그것보다는 “쌀은 정부가 사준다”, “직불금 준다”는 얘기만 하고 있다. 표를 의식하니 문제의 본질은 놔두고 모두 생색내기에만 급급한 듯하다. ―생산비용을 어떻게 떨어뜨리나 농업을 규모화, 기계화, 전문화해야 한다. 농업 법인이 젊은 사람들을 고용해서 영세소농들과 함께 들녘이나 마을 단위로 농사를 짓고 품종을 통일하고 공동 육묘와 방재를 하면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져 비용이 크게 절감된다. 지금은 소농들이 각개전투로 따로따로 농사를 짓는데 이래서는 효율이 생기지 않는다. 대형 농기계를 갖고 있는 농민은 흔하지 않다. 이렇게 농지와 노동력, 농기계 등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생산성을 높일 생각을 해야지 쌀 수매가격에만 집착하다 보면 농촌은 계속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전 장관은 장관 재임 시절 농촌 공동경영으로 영농 규모를 키워 생산비를 절감하는 ‘들녘 경영체’ 사업을 추진한 바 있다.) ―한때 많아졌던 귀농 인구가 요즘 계속 줄고 있다. 정부는 도시에서 일자리가 늘어서 그렇다고 해석하는데 나는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귀농·귀촌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줄었다. 농촌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다. 농사를 지어 먹고살기 힘들고 생활도 불편하다. 여기 해만 지면 밤새 깜깜하다. 청년들이 여기 와서 긴긴밤을 어떻게 보내겠나. 이 마을 초등학교는 내가 다닐 때는 한 학년이 200명이었는데 지금은 전교생이 10여 명 남짓하다. ―귀농·귀촌에 대한 정부 지원이 부족한가. 통계청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귀농·귀촌자들이 정보 제공은 많이 받지만 정작 주택 자금이나 영농 지원을 받은 사람 수는 미미하다. 귀촌자들의 경우 막상 시골에 살려면 도시 집 팔고 가야 하는데 그럴 때 양도소득세 감면은 해줘야 하지 않나. 특히 농촌 내려와서 살려면 용접 전기 목공 이런 실용적 기술이 상당히 필요한데 이런 건 안 가르치고 농산물 재배 방법만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지방소멸을 걱정하면서도 귀농·귀촌자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은 모자라는 것 같다. ―젊은 인구를 농촌으로 유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은 일자리다. 농촌에 사는 게 수지가 맞고 재미있고 보람이 돼야 온다. 개인의 삶과 행복에 관한 문제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얘기할 때면 항상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삼농 정책을 말한다. 농사일의 수익성이 높아야 하고(후농·厚農), 농사짓기가 수월해야 하고(편농·便農), 농민의 자긍심이 높아져야 한다(상농·上農). 농업은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생산해 주는 고귀한 직업, 뿌린 대로 거두는 정직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기후변화로 과수농가들의 위기감도 크다. 경북 최고 특산품이라는 사과를 예로 들어 보자. 사과도 개인적으로 재배, 판매하지 말고 과수 농가와 관련 사업자끼리 연대해야 한다. 봄철 사과꽃은 환상적이고 가을 사과밭도 아름답다. 사과 농가들이 품종 기술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시설·장비를 같이 쓰고 판매도 공동 브랜드로 해야 한다. 사과밭에 약 치는 것도 공동으로 하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굳이 객지에 나가서 사과를 팔지 말고 사람들을 끌어들여 보자. 미국 내파밸리처럼 ‘애플 밸리’를 만들어서 사과를 원료로 한 음식과 체험 및 관광을 연계하면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 ―사과값 급등 때문에 난리인데 외국에서 수입하면 안 되나. 자칫 검역을 완화했다가 과수화상병 같은 게 발생하면 피해가 매우 크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허락해 주기가 쉽지 않다. 그보다는 저탄소농업으로 사과 생산비를 떨어뜨리고 보기 좋은 사과보다 맛있고 먹기 좋은 사과를 생산하는 게 우선이다. 다만 금사과 사태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수입을 영영 막을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남아도는 쌀은 어떻게 해야 하나. 쌀농사가 비교적 편하고 오랫동안 정부가 쌀농사 우선 정책을 펴왔기 때문에 농가에선 쌀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소비량보다 많은 쌀이 생산되지 않도록 생산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짜야 한다. 양곡관리법 같은 수매 제도를 다시 도입하면 당장은 농민들에게 좋아 보이지만, 그게 장기적으로 농업농촌에 도움이 될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남아도는 쌀을 고집하기보다 부족한 다른 식량 작물을 재배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장관 출신이 평범한 농부로 돌아가서인지 일상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요즘 ‘이동필의 1-2-3-4’ 원칙을 지키며 산다. 1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 2는 하루 두 번 들에서 일하는 것, 3은 삼시세끼 어머니와 밥 챙겨 먹는 것, 4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말동무하며 지내는 것이다. 이동필 전 장관은…△1955년 경북 의성 출생△1978년 영남대 축산경영학과 졸업△1980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연구위원△2011∼2013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2013∼2016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박근혜 정부)△2019∼2020년 경북도 농촌살리기 정책자문관의성=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올해 초 윤석열 대통령은 집무실에 놓인 부친 고(故)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의 책장과 저서를 언론에 공개했다. 그는 “아버지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고…(그런) 아버지의 생각을 새기고 일하기 위해 가져다 뒀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지난 2년간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보면 ‘자유’나 ‘시장’의 가치와 거리가 있는 항목이 적지 않았다. 최근 이슈가 된 몇 개만 골라 열거해도 지면에 차고 넘칠 정도다. 정부는 시장의 기본원리와 기업 경영의 자유를 흔들었다. 만만한 은행과 통신사, 공기업을 쥐어짜서 요금을 못 올리게 하거나 이미 거둔 수익마저 토해내게 했다. 지난주엔 전기료를 다섯 분기째 동결해 부채가 200조 원이 넘는 한국전력의 경영난을 가중시켰다. 은행들에는 이자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대출 금리를 억누르고, 대규모 이자 환급과 신용 사면도 강제했다. 이런 반시장적 경영 개입은 ‘조금 무리해서 빚을 내도 결국 탕감해 준다’는 신호를 줘서 가계빚 급증을 부채질했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은 기업의 자율적인 경영 판단을 제약할 게 뻔하지만 어찌 됐든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보수정부에서 反시장 정책 쏟아져 소비자에게선 선택의 자유를 뺏었다. 고물가에 신음하는 국민들은 발품을 팔아 해외에서 저렴한 상품을 직접 구매해 왔지만 ‘국민 안전’을 명목으로 이를 통째로 틀어막으려 했다. ‘금사과’, ‘금배’ 현상은 계속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은 데도 농가 눈치를 보며 과일 수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안 그래도 이익집단의 저항에 번번이 백기를 들며 타다, 로톡 같은 혁신기업의 싹을 자르는 나라에서 시장경제의 기본인 재화의 자유로운 거래까지 차단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투자의 자유를 잃었다. 주가 하락이 예상되는 주식을 빌려 팔아 수익을 거두는 공매도는 모든 선진국에서 보편화된 투자 기법인데, 유일하게 한국만 1년 넘게 금지하려 한다. 공매도가 주가 하락을 부추긴다는 증거는 없고 오히려 과도한 증시 거품을 빼는 순기능이 있지만, 1000만 개미 유권자의 심기만 살피는 대통령실은 이를 곧이들을 생각이 없다. 증시 밸류업을 한다는 정부가 도리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범 역할을 한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자유와 시장의 신봉자로 스스로를 여러 차례 각인시키려 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민과 기업의 경제적 의사 결정의 자유를 제약하고 시장 기능을 위축시키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혁신 장려하는 포용적 제도 갖춰야 대통령의 책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본다. 윤 대통령은 대런 애스모글루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필독서로 꼽은 적이 있다. 얼마 전 동아국제금융포럼 참석차 방한한 애스모글루는 이 책에서 통제와 규제, 억압보다는 혁신과 창의를 장려하는 포용적 제도를 갖춰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같은 견지에서 ‘한국 증시는 왜 실패하는가’, ‘한국 기업의 혁신은 왜 실패하는가’에 대한 답도 찬찬히 연구해 보길 바란다. 시장 본연의 기능인 가격 결정에 개입하고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이 정부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인지, 애스모글루는 “한국은 군사정권 시절 관치경제 흔적이 남아 있다. 완전히 포용적인 제도 구축을 위해 갈 길이 멀다”고 일갈했다. 이 정부는 기득권 집단의 저항을 넘어 시장의 박힌 돌과 고인 물을 빼고, 소비자를 이롭게 하는 ‘자유시장경제 수호자’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나. 그게 아니라면 우리 증시가 왜 다른 나라에 뒤처지는지, 엔비디아 같은 혁신기업이 왜 한국에서 안 나오는지는 따로 고민해 볼 필요도 없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지난달 총선이 끝나고 세종시 관가에서는 일제히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3분의 1밖에 안 되는 여당 의석으로 어떻게 국정을 꾸려가야 하나.”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를 수습하듯,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들은 자신들에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무기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극단적 여소야대에 정권 ‘식물화’ 우려 여당은 이번에 300석 중 192석을 잃었다. 집권세력엔 사망선고일 것 같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행정부의 권력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우선 나라의 돈줄을 여전히 쥐고 있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더 중요한 ‘증액 동의권’을 갖고 있다. 국회는 정부가 짜온 예산을 이래저래 삭감할 수는 있지만, 정부 동의 없이는 어떤 지출 항목도 규모를 늘리거나 새로 만들지 못한다. 두 번째 무기는 시행령. 정부 여당의 입법 기능은 이제 완전히 상실됐다고 볼 수 있으나, 대통령에게 위임된 권한으로 아직도 많은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종합부동산세 같은 세금 제도다. 법 개정으로 세율을 바꾸지 않고도 시행령을 통해 실제 국민들의 세 부담(과세표준)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마지막은 이 정권이 워낙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서 필부에게도 익숙해진 재의요구권(거부권)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남은 3년을 버틸 통치수단이 대충 이 정도라는 점을 인식한 듯하다. 그가 얼마 전 국민의힘 초선 당선인들을 모아 놓고 “정부 여당으로서 권한이 있으니 소수라고 기죽지 말라”고 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선거 직후 관가에서는 “야권이 200석을 넘지 않은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라는 자조가 나왔다. 그랬다면 모든 법안을 야당이 단독 처리할 수 있게 되고, 여권이 힘겹게 찾아낸 ‘3개의 화살’ 중 2개(거부권과 시행령)가 우습게 사라질 뻔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윤 정부의 경제 정책은 법을 바꾸지 않고도 구현할 수 있는 ‘잔잔바리’ 대책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공무원들의 창의성이 받쳐줄지 걱정되기는 하나, 이들은 이런 여소야대 상황에 아주 익숙하다. 문제는 이런 정치 판도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 역시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점이다. 관가에선 벌써부터 무력감을 넘어 복지부동과 책임 회피, 야당에 줄 대기 같은 풍토가 만연한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재정준칙 마련 등 주요 정책이 줄줄이 좌초되는 가운데, ‘해외 직구 금지’ 번복 사태는 가뜩이나 움츠러든 공직사회에 “뭐든 절대로 나서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우려는 야당은 거대 의석으로 정부의 발목을 잡고, 정부는 거부권으로 이에 응수하는 비토크라시 정국이 임기 끝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면 서로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늘어져 결국 아무것도 진척되지 않는 심각한 국정 정체가 불가피하다. 삼권분립이 아닌 삼권대립, 삼권충돌의 시나리오다.민생-실용주의 정부로 재탄생해야 새 국회가 오늘 개원한다. 여소야대 정부가 ‘식물화’되는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민생이 걸린 사안에 더욱 주도권을 갖고 임해야 한다. 거대 야당을 설득하고 국민 여론을 경청하며 과도한 이념 색채를 줄여 실사구시 정책을 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총선 이후 정부 여당이 그런 쇄신의 태도를 보여준 게 있었나. 오히려 연금개혁이나 종부세 개편 같은 현안은 야당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면서 대통령 심기 경호를 위해선 한 몸처럼 똘똘 뭉치는 작태만 보이고 있다. 22대 국회에서는 거부권이 무력화되는 이탈표의 기준도 17표에서 8표로 낮아진다. 까딱하다가 윤 정부 후반부는 정말 레임덕(lame duck)을 넘어 데드덕(dead duck·심각한 권력 공백)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저는 기본적으로 인공지능(AI) 시대를 낙관합니다. 다만 우리가 미래에 적절히 대비했을 때에 한해서죠.”저명한 AI 전문가이자 미래학자인 마틴 포드(61)는 앞으로 다가올 AI 시대는 우리가 하기에 따라 극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인류에 긍정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지만, 자칫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만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한다면 앞으로 미래는 비관적”이라며 “사람들이 일자리를 빼앗긴 채 가상의 세계에만 의존하는 세상도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다”고 했다. 포드는 “AI의 활용 범위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함께 AI 기술의 발전으로 일자리를 잃는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필수”라고 조언했다.》 베스트셀러 ‘로봇의 부상’, ‘AI 마인드’, ‘로봇의 지배’의 저자인 포드는 전 세계에서 AI 분야 전문 강연자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는 대학 때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실리콘밸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스타트업을 설립해 운영한 경험도 있다. 또 이달 30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리는 ‘2024 동아국제금융포럼’에서 ‘AI, The Coming Disruption’(AI, 다가오는 혼란)을 주제로 강연한다. 포드는 본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딥페이크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AI가 민주주의와 선거제도를 위협하고 있다”면서 “AI 기술이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어가 민간인 살상에 쓰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수년간 AI 발전 속도는 예상했던 수준인가. “생각보다 빠르다. 대형언어모델(LLM)이나 챗GPT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지금 AI 시스템은 인간보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우월하다.” ―AI 시대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나. “AI는 전기(electricity)와 같아질 것이다. 그만큼 어디에서나 존재하게 된다. 전기의 발명이 그랬던 것처럼 AI도 우리의 삶, 문화, 경제 등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 일단 긍정적인 것은 AI가 과학기술의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의학의 영역에서 질병 치료와 생명 연장 기술에 돌파구가 될 것이고, 빈곤 퇴치와 기후변화 대응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포드는 “AI로 인해 새로운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변화가 생기고 앞으로 더 혁신적인 제품이 나와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며 “이런 혜택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AI가 전기처럼 쓰인다면, 앞으로 인류가 지나치게 AI에 의존하게 될 수 있다”며 “챗GPT 때문에 벌써 학생들이 글 쓰는 법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했다. ―AI 같은 신기술은 모두에게 공평한 혜택을 줄까. “아닐 것이다. AI는 일자리 시장에서 불평등을 늘릴 가능성이 크다. 어떤 일자리는 AI가 업무에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어떤 일자리는 AI가 당신을 대체해 버릴 수도 있다. 가령, 과학자들에게는 AI가 연구를 돕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선 지금도 많은 로봇과 키오스크가 직원들의 업무를 대체하고 있다. 물류창고나 공장 또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사무직도 마찬가지다. 결국 일반 노동자들보다는 부자들이 AI 기술로 더욱 혜택을 입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이를 보정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도 방법이다.” ―생산직과 사무직 중 어느 쪽이 더 타격을 입을까. “아까 AI가 전기와 같이 어디에나 영향을 준다고 했듯이, 일자리에 미치는 충격도 둘 다 마찬가지다. 둘 중 어디가 먼저 충격을 입을지를 굳이 말한다면 사무직이다. 블루칼라를 대체할 로봇들은 더 만들기 어렵고 비싸기 때문이다. 블루칼라 중에서도 전기 기사나 배관공 같은 숙련 노동자들은 가장 안전한 직종이다.” ―사무직 중 가장 AI에 취약한 직종은 무엇인가. “컴퓨터 앞에서 일상적으로 정보를 다루는 모든 직종이 해당될 것이다. 대표적으로 계산 업무를 하거나 대출을 집행하는 금융 분야다. 기자들의 업무도 이미 자동화되는 추세다.” 포드는 “그러나 AI로 인한 일자리 변화의 양상이 어떤 일은 완전히 사라지고 어떤 일은 온전히 살아남는 형태는 아닐 것”이라며 “일자리의 개념이 다시 정의(redefined)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포드는 ‘세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AI의 등장으로 일이 줄어서 직원 수가 한두 명으로 감소한 경우’를 예로 들었다. 이때 남은 한두 명은 이전과 같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업무의 범위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고 이로 인해 기업도 새로운 일을 하는 직원을 다시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봇이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게 될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창의성은 이미 갖고 있는 것 같다. 또 AI가 감정을 복제하거나 조작하는 것도 하게 될 것이다. AI가 우리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도 향상됐다. 우리가 어떤 제품을 구입하게 만들거나, 범죄자가 사람들의 돈을 빼앗는 데도 AI가 활용될 수 있다.” ―미국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AI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우려가 많다. “물론이다. 가령 선거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어떤 후보가 인종차별적 발언 같은 최악의 말을 하는 장면이 딥페이크 음성파일에 담겨서 유포되는 걸 상상해 보라.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그런 딥페이크는 정치인들의 실제 영상과 음성을 통해 알고리즘이 학습을 거듭할수록 훨씬 더 정교해질 수 있다. 요즘은 동영상 하나가 퍼졌을 때 충격파가 엄청나다. 단적으로 조지 플로이드 영상 하나로 미국 사회가 엄청난 혼란을 겪지 않았나. 그런 영상을 가령 중국의 정보기관 같은 데서 미국 사회의 불안을 자극하기 위해 가짜로 만들어서 뿌린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고 AI가 악용될 여지는 충분하다.” ―AI의 무기화 우려를 어떻게 보나. “정말 현실적인 우려다. 모든 주요국의 군대는 이를 위한 연구를 하고 있을 것이다. AI를 활용할 수 있다면 실제 전쟁터에서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뉴스에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해 금융거래를 수행하는 알고리즘이 있다면 인간 트레이더들은 거의 경쟁이 안 될 것이다. 유엔 차원에서 이런 자율무기 개발을 금지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항상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러시아 등 주요국이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술이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도 매우 우려된다. 이들이 AI 드론을 민간인 공격에 활용한다면 매우 끔찍한 시나리오다.” ―AI가 우리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일론 머스크는 AI 기술 개발을 6개월간 중단하자고도 제안했는데 나는 그것에는 반대한다. 다만 AI의 적용 부문에 대해서는 규제가 필요하다. 지금도 의학 또는 자율주행차에 대해서는 규제가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규제가 많지 않다. 또 다른 과제는 AI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에 대처하는 것이다. AI로 인해 밀려나는 근로자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AI 기술이 강력해질수록 이들이 겪는 충격은 훨씬 더 심해질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의 권리가 박탈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그 재원은 누가 댈 수 있나. “기본적으로 기업들의 세금이다. AI 발전으로 기업들의 인건비 지출이 줄어든다면 남아도는 돈을 세금으로 거둬서 재원으로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복지의 차원이 아니다. 앞으로는 기업들이 더 적은 직원으로 제품을 만들 수는 있어도, 그것을 사줄 수 있는 소비자들, 즉 근로자들의 소득이 충분치 않다면 기업은 제품을 판매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에게 단지 음식과 주거를 제공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수요를 창출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을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나눠 주자는 것도 아니다. 모두에게 먹고살 만큼은 주되, 공부를 하거나 재교육을 받는 등 생산적인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더 많이 주는 인센티브를 병행하자는 것이다.” ―AI 시대에는 어떤 산업이 각광받게 될까. “아까 말했듯이 AI는 전기와 같아서 모든 산업을 변화시킬 것이다. 물론 당장은 AI와 연관된 기술 산업들이 잘나가겠지만 기본적으로 제조업, 물류, 소매 등 모든 산업에 영향을 줄 것이다. 고령화가 심각한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헬스케어 분야에서 AI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AI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나. “낙관한다. 다만 미래를 위해 우리가 합리적인 조치를 취한다는 전제하에 그렇다. 만일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기만 한다면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다. 최근 저서에서 영화를 이용해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하나는 스타트렉 같은 낙관적 시나리오, 다른 하나는 매트릭스 같은 비관적 시나리오다. 매트릭스처럼 AI가 인간을 노예화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스러운 세상은 앞으로 얼마든지 올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이 돈을 벌거나 일자리를 갖기 어렵고 현실 세계에서 유리된 채 가상의 세계에서 생활하는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은 앞으로도 충분히 그려 볼 수 있다.”마틴 포드(61) △미래학자 겸 작가△미국 미시간대 컴퓨터공학과△UCLA 앤더슨 경영대학원△실리콘밸리 소프트웨어 개 발 회사 설립△‘로봇의 부상’, ‘AI 마인드’ (사진), ‘로봇의 지배’ 저자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도널드 트럼프의 ‘무역 책사’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트럼프가 재집권한다면 재무장관 또는 최소 통상정책을 다시 맡을 게 확실시된다. 그가 작년에 출간한 ‘No trade is free’(공짜 무역은 없다)에는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의 형 윌버 라이트의 말이 소개돼 있다. “젊은 사람에게 내가 성공을 위한 조언을 건넨다면, 좋은 부모 만나 오하이오에서 인생을 시작하라고 하겠다.”美 대선 앞두고 보호주의 가속화 오하이오주는 윌버와 라이트하이저의 고향이다. 지금은 쇠락한 ‘러스트벨트’의 대표주자 격이지만 라이트하이저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1950, 60년대만 해도 윌버의 말처럼 미국의 풍요와 여유로움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라이트하이저는 “그러나 그 후로는 일자리와 함께 사람들도 떠나갔다”며 “내가 살던 마을은 이제 3분의 1이 빈곤층이고 대졸 학력자도 10%가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고향마을 몰락의 주된 이유로 미국의 ‘잘못된 경제 정책’, 즉 자유무역을 지목한다. 외국 기업들의 무차별 공습이 미국 노동자 가정의 삶의 터전을 파괴했다는, 우리도 이젠 익히 들어서 아는 논리다. 라이트하이저의 이런 생각은 자기 고향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몸소 보고 겪으며 형성됐다. 뼈마디에 새겨진 확고부동한 신념인 것이다. 그가 2017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통상정책을 맡자마자 한 일도 기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걷어차고 한미 FTA 재협상을 주도한 것이었다. 동맹의 가치나 정통 경제이론이 어떻든 간에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미국에 불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한 치도 좌고우면이 없다. 그는 최근에도 “기술이 계속 바뀌는데 무역협정이 영원해야 한다는 것만큼 멍청한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재집권에 성공한다면 미국이 한국 같은 무역 흑자국에 내미는 청구서는 생각보다 빨리 발송될 수 있다. 트럼프 캠프는 모든 국가에 관세율을 10%까지 올리는 ‘보편적 기본 관세’를 도입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게 현실화하면 지금의 한미 FTA 협정문은 휴지 조각이 된다. 물론 트럼프의 승리는 아직 장담할 수 없는 단계다. 그럼 조 바이든 후보는 좀 나을까. 그는 ‘주한미군 철수’ 같은 과격한 협박을 하진 않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오히려 더 치밀하게 ‘미국 우선주의’ 기조를 견지한다. 미국이 근래에 와서 여야 당론이 일치하는 지점이 몇 개 있는데 그중 일부가 중국에 대한 강경 기조, 그리고 자국 산업·일자리를 적극 보호하는 것이다. 이는 통상정책의 최전선인 USTR 대표에 대한 의회 표결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라이트하이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경우 양당의 초당적인 지지로 인준안이 통과됐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의 대중 고율 관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반도체 보조금, 인플레이션감축법 같은 새로운 보호무역 카드를 동맹국의 입장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계속 꺼내 들고 있다. ‘말과 스타일이 거친 트럼프냐, 조용히 행동으로 보여주는 바이든이냐’인데, 정말 고민이다. 우리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과연 누굴 찍어야 할지.역대급 대미 흑자에 취할 때 아니다 작년 한국은 미국과의 교역에서 사상 최대(44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냈다. 지난 30년간 우리 수출의 버팀목이었던 중국의 역할을 이제 미국이 대신해 주나 싶지만 그런 기대는 너무 순진하다. 미국과의 교역에서 재미를 볼수록 우리는 과다 흑자국으로 찍히고, 워싱턴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하나 분명한 것은 라이트하이저의 책 제목처럼 우리에게도 미국과의 공짜 무역이 더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지난주 중국을 방문한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워싱턴의 대표적인 친중 유화파다. 중국과의 경제 협력이 양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이롭게 한다고 믿는다. 1990년대 빌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자문위원장 시절 그는 중국에 손을 내밀어 훗날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중국을 글로벌 무대로 불러내면 민주주의의 가치를 받아들여 서방에 동화되고, 미국은 중국의 값싼 상품을 수입해 소비자 후생(厚生)이 증가할 것이란 계산이었다. 그의 전략은 일부 현실이 됐다. 미국의 의도대로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급부상하자, 글로벌 경제는 중국의 저가 상품 덕분에 고성장-저물가의 호황을 누렸다.세계 경제 위협하는 中의 과잉생산 이들의 공생은 영원하지 못했다. 중국의 시장 잠식으로 제조업 기반이 흔들린 미국에서는 세계화가 한창이던 10여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파국의 도화선은 2008년 금융위기였다. 미국이 비틀거리는 사이 중국은 고부가산업 발전의 사다리를 타며 태평양 건너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위협했다. 그런 위기의식에 탄생한 트럼프 정권은 드높은 관세 장벽을 치며 중국산 제품에 빗장을 걸었고, 뒤이은 바이든 행정부도 대중 압박에 온 힘을 다했다. 옐런 장관은 이번 방중에서 “중국이 과잉 생산을 억제해야 한다. 미국의 신산업이 파괴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놨다. 중국을 세계화로 이끌며 전 세계에 ‘메이드 인 차이나’의 홍수를 일으킨 장본인이 한 말이라고는 믿기가 힘들다. 요즘 ‘알·테·쉬’로 상징되는 초저가 중국산의 공습은 20년 전과 섬뜩한 데자뷔를 이룬다. 중국 기업들은 자국 정부 보조금을 등에 업고 상품을 헐값에 해외로 쏟아내다시피 하고 있다. 한국이 ‘디플레 수출’의 전초기지로 활용된다는 점도 당시와 비슷하다. 하지만 따져 보면 지금의 양상은 이전과는 차이점이 오히려 더 많다. 우선 원인부터 다르다. 과거엔 ‘은둔의 나라’ 중국의 글로벌 무대 데뷔로 저가 제품들이 자연스럽게 시장에 쏟아졌지만, 지금은 내수 시장과 부동산 침체로 자국에서 안 팔리는 재고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성격이 짙다. 중국의 불황은 우리가 싸구려 중국산의 공습에 대응해 우리 제품을 중국에 내다 팔 여지가 적다는 걸 뜻한다. 실제로 작년 대중 수출이 급감하면서 한국은 1992년 수교 이후 처음 중국에 무역적자를 냈다. 중국의 산업구조도 변했다. 2000년대 초반엔 주로 저숙련·경공업 기반의 중국산이 세상에 풀렸다면, 지금은 전기차 배터리 석유화학 등 한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주요 산업에서 초저가 제품이 범람하고 있다. 중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커지니 ‘2차 차이나 쇼크’의 충격도 배가될 수밖에 없다. 값싼 중국산이 밀려들면 당장 해당 국가의 소비자들은 물가가 낮아져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가격 경쟁에서 밀린 자국 기업의 실적이 추락하고 일자리 감소와 내수 침체, 산업 기반 붕괴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런 뼈아픈 경험이 있는 미국은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며 중국 상품에 대한 고강도 견제에 나설 채비다.값싼 중국산의 홍수, 더는 축복 아냐 주요국의 철벽 방어막에 판로가 막힌 중국은 먹잇감을 다른 주변국에서 찾고 있다. 요즘 한국이 그 타깃이다. 알리나 테무 앱에서는 2000원짜리 무선 이어폰, 5000원짜리 원피스 등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우리를 현혹하지만, 개중에는 품질도 형편없고 발암물질만 듬뿍 함유된 엉터리 제품들이 무더기로 포함돼 있다. 한때 우리 경제 성장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중국은 이제 이웃나라의 산업 생태계와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나라로 돌변했다. 값싼 중국산의 홍수에 기업도 정부도 소비자도 바짝 긴장해야 한다.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
“제 주식 창을 보세요. 미국은 정확히 빨간색, 한국은 파란색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누가 미쳤다고 한국 주식을 사겠습니까.” 30대 여성 직장인 최모 씨는 자신이 투자했던 국내 주식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2, 3년 전 매입한 네이버와 삼성전자 같은 국내 대표주의 주가가 이후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최 씨는 “한국 주식은 너무 빠져서 이젠 팔지도 못할 지경”이라며 “앞으로 여윳돈이 생기면 무조건 미국 주식 위주로 투자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국내 주식 저평가) 현상이 장기화되고 새해 들어 국내 증시도 깊은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한국 증시를 등지고 미국 등 해외로 방향을 돌리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 이 같은 투자자들의 증시 이탈 현상은 한국 경제와 국내 기업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약해진 결과로 풀이된다. 투자자들이 한국을 떠나게 되면 기업들의 자금 조달 비용이 올라가고 금융 시장 불안이 확산되는 등 경제 전반에 부작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 31일 한국거래소 등에 따르면 올해 첫 달인 1월 2∼30일 국내 개인·기관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에서 2조4171억 원가량을 순매도했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국 증시에서는 8215억 원에 이르는 주식을 사들였다. 국내 투자자들의 이런 투자 양상은 새해 국내 주가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 기간 삼성전자(―5.4%)와 SK하이닉스(―3.3%) LG에너지솔루션(―12.3%) 네이버(―6.5%) 에코프로(―20.9%) 포스코퓨처엠(―29.2%) 카카오(0%) 등 국내 반도체와 이차전지 대형 기술주 7개는 평균 ―11.1%의 수익률을 보였다. 반면 미국 증시에서 일명 ‘매그니피센트(Magnificent) 7’이라고 불리는 대형 기술주 7인방(애플·알파벳·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엔비디아·테슬라)의 한 달 평균 상승률은 5.2%였다. 각 종목에 100만 원씩 총 700만 원을 투자했다면 한국 주식 7개에 투자했을 때보다 미국 주식 7개에 투자했을 때 110만 원 이상의 수익 차이가 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국내 증시는 31일도 코스닥이 2.40% 급락하며 두 달여 만에 800 선 아래로 추락하는 등 약세로 마감했다. 코스피도 1월 한 달간 6% 내리며 주요국 가운데 중국에 이어 최하위의 성적을 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국 증시는 최근 16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수가 거의 정체돼 있을 정도로 수익률이 좋지 않았다”며 “이런 것에 대한 실망이 누적돼 투자자들이 해외에서 대안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수년째 혁신기업 없는 韓 ‘고인물’ 증시, 과도한 규제도 발목 [‘주식 이민’ 가는 동학개미]경제 역동성 저하가 부진 핵심 원인정부 단기정책에 증시신뢰 하락 우려 실제로 국내 증시의 약세는 최근 들어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코스피는 2021년 6월 말 3,300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뒤 2년 7개월 만에 25%가 급락하며 길고 긴 약세장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뉴욕 증시의 대표 지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은 같은 기간 15%가 더 오르면서 연일 사상 최고 수준을 경신 중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증시 부진의 이유로 각국의 고금리 장기화와 국내 대표기업들의 실적 부진, 중국 경기 둔화 등을 주로 꼽는다. 또 낮은 주주환원율과 후진적 기업 지배구조 같은 제도적 요인들이 동학개미 등 투자자들로 하여금 국내 증시를 외면하게 만든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신기술 혁신과 산업구조 재편이 더디게 진행되는 등 국내 경제의 역동성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증시 장기 부진의 핵심 이유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례로 현재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은 모두 5년 전인 2018년 말에도 증시에서 시총 상위에 속해 있던 기업들이다. 10년 전인 2013년 말로 범위를 넓혀 봐도 이 기간 중 새로 증시에 상장해 ‘톱10’으로 부상한 창업 기업은 셀트리온 하나뿐이었다. 미국 등 주요국에서 혁신기업들이 다수 쏟아지며 증시 판도가 숨 가쁘게 뒤바뀌는 동안 한국은 과도한 규제 등으로 인해 새로운 플레이어의 등장이 지체되면서 기존 대기업 위주의 ‘고인 물’이 증시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평가다. 개인 투자자들의 실망감이 갈수록 커지자 정부는 지난 연말부터 갖가지 증시 부양책을 시리즈로 쏟아내면서 표심 달래기에 나서고 있다. 공매도 금지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추진, 주식 양도소득세 완화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최근 거침없이 증시가 오르고 있는 일본을 벤치마킹해 상장사의 주주 가치를 높이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도 도입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올해 증시 개장식에 참석하는 등 새해 들어 두 번이나 한국거래소를 찾으며 증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부가 이처럼 다급하게 총선용 증시 대책을 남발하다가는 시장 원칙이 훼손되고 한국 증시의 신뢰도가 하락할 것이라는 우려 역시 커지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오히려 당국이 스스로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매도 금지가 단기적으로는 주가 부양에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해 외국인 투자자 이탈 등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는 주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요즘 미국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것은 이른바 ‘끈적한 물가’(Sticky Inflation)라 불리는 현상이다. 물가가 지난해 최정점 수준에서는 다소 내려왔지만 변동성이 큰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을 제외한 근원물가는 아무리 기준금리를 올려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물가지표가 마치 높은 곳 어딘가에 달라붙은 듯 쉽사리 내려오지 않는 현상의 배경에는 임금과 주거비 상승, 높은 수요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 이미 초고강도 긴축을 단행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 인하는커녕 여전히 추가 긴축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도 좀처럼 잡히지 않는 물가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오랜 기간 만성화되다 보니 미국에서는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라는 경기 슈퍼사이클이 저물고 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10년 전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강조한 이 개념은 수요·투자 부진에 따라 저물가, 저금리, 저성장이 길어지는 장기 불황을 나타낼 때 쓰였다. 그런데 올해 초 서머스는 자신이 주장했던 장기침체 가설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면서 스스로 이를 철회했다. 팬데믹과 공급망 붕괴라는 초대형 변수가 터지면서 나타난 세계 경제의 고물가-고금리 기조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구조적 흐름으로 고착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글로벌 경기를 묘사하는 단어 역시 부정적인 형용사들로 가득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경제 분절화, 인플레이션 등의 불안 요인을 거론하며 세계 경제가 ‘험난한 회복 과정’(A Rocky Recovery)에 있다고 평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세계 경제의 개선 흐름이 여전히 ‘취약’(fragile)하다고 진단했다. 경제 비관론자인 누리엘 루비니는 ‘그레이트 스태그플레이션’(Great Stagflation)이란 개념을 들고나왔다. 1970년대 오일쇼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물가 재앙이 닥친다는 뜻이다. 고물가와 경기침체의 ‘이중 덫’에 걸려 있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대 초반으로 거의 2년 만에 가장 낮았지만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는 4%대에 ‘끈적하게’ 머물고 있다. 경기는 더 험난하다. OECD는 이달 반도체 수요 둔화와 수출 부진 등을 이유로 올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1.5%로 낮췄다. 세계 평균 성장률은 높이면서도 한국만 4차례 연속으로 전망치를 끌어내린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1%대 성장률을 당연시하면서 별다른 위기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같은 초대형 쇼크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 성장률이 2% 아래로 떨어진 것은 역사적 전례가 없고, 심지어 1%대 성장마저 위태롭다는 전망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지금은 세계 각국의 복잡한 지경학적(geoeconomic) 사정으로 인해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취약성이 한꺼번에 부각되는 일촉즉발의 시기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대응했다가는 글로벌 무대의 뒤안길로 순식간에 떠내려갈지도 모른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요즘 글로벌 경제를 시끄럽게 하는 미국의 국가부채 한도 협상은 그 기원이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미국 행정부는 나랏빚을 내야 하는 일이 생기면 항목별로 건건이 의회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전쟁비용 지출이 급증하자 의회는 전체 부채한도만 정해놓고 행정부가 그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빚을 낼 수 있도록 법을 바꿨다. 이 한도는 지금까지 전쟁이나 경제위기가 있을 때마다 여야 협상을 통해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올해도 한도 인상 여부를 놓고 정치권의 기싸움이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이처럼 본래 정부 지출을 원활히 해주기 위해 시작된 부채 상한제는 지금은 반대로 정부의 과도한 나랏빚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의회가 한도를 늘려주지 않으면 연방 정부는 공무원 월급을 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채 원리금을 지급하지 못해 디폴트에 빠지게 된다. 정부는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평소 예산 편성과 지출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 밖에도 재정 지출이 수반되는 법안을 제출할 때 반드시 재원 조달 방안을 함께 제시하는 페이고(PAYGO) 제도 역시 법으로 명문화했다. 미국 등 선진국은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해 이처럼 이중 삼중의 ‘방파제’를 쌓아왔다. 미국의 디폴트 위기는 워싱턴 정가의 난맥상과 극심한 정쟁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뒤집어 보면 건전재정의 절실함을 정부와 의회가 얼마나 잘 인식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 같은 강대국도 기축통화국도 아닌 한국은 재정 누수를 막을 방파제도, 급증하는 나랏빚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에 대한 위기의식도 없다. 1000조 원을 넘어선 국가채무가 지금도 1분에 1억 원씩 늘어나고 있지만, 국회는 전 세계 100여 개국이 운영하고 있는 재정준칙 도입 법안을 31개월째 뭉개고 있다. 여야 의원들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하면 나랏빚을 줄일까가 아니라 반대로 어떻게 하면 나랏돈을 더 쓰는가에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의원들은 총선을 앞두고 선심성 지역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을 완화하려 했고, 얼마 전에는 건전재정 사례를 공부한다면서 혈세를 들여 유럽에 열흘간 출장을 다녀왔다. 그래 놓고 이들은 귀국 후 처음 열린 법안 심사 회의에서 재정준칙을 가장 마지막 안건으로 배치하며 사실상 고의로 논의를 회피했다. 그러면서 돈을 쓰자는 법안은 무차별적으로 발의한다. 본보가 국회 계류 법안들을 분석해봤더니 정부 재정이 지출되는 법안 497개의 추계 비용은 418조 원으로 집계됐다. 나라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규모다. 재정준칙은 연간 재정적자 폭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줄이자는 것으로 전 세계 모든 선진국이 보편적으로 도입한 원칙이다. 또 경제위기 같은 급박한 상황에는 적용 예외가 되는 만큼 어느 정도 융통성도 갖췄다. 이런 기초적인 장치마저 거부하는 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가채무에 눈을 감고 나라 살림이 거덜 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누군가가 한국 정치 포퓰리즘의 역사를 주제로 책을 쓴다면 이번 국회 기재위는 당당히 한 챕터를 차지하고도 남을 것이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유권자의 표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나라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국정과제는 가급적 정권 초기에 단행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현 정부도 인수위 시절부터 연금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재정준칙 마련을 약속하는가 하면, 전기료 원가주의를 강조하며 요금 정상화의 군불을 땠다. 집권을 앞두고 국정 운영에 대한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을 때라 가능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이 중 어느 하나 제대로 이행 또는 진전된 것이 없다. 이 정부에 지난 1년은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 이 과제들의 공통점은 필요성은 거의 누구나 동의를 하지만 정치에 막혀 해법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를 의식해 여론 눈치를 보다가 개혁 시기를 놓치는 일이 계속 반복된다. 전기요금의 사례를 보자. 다른 선진국은 발전 원가를 요금에 그대로 반영하는 데 반해 한국은 민생을 이유로 역대 정부에서 인상을 계속 억제해 왔다. 그러다 보니 한전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발전업체로부터 ‘100원에 전기를 사다가 70원에 파는’ 자해(自害)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 한전은 무려 32조 원의 손실을 냈다. 일반 사기업이었으면 진즉에 파산하고 공중 분해됐을 규모다. 공기업 한전의 천문학적 부실은 결국 세금으로 메워야 하고 나중에는 더 큰 국민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전기 과다 소비가 에너지 수입 증가와 무역적자 누증, 환율 상승을 통해 경제에 이중 삼중의 충격을 준다는 점도 명백한 사실이다. 이 정부도 그 점을 인식하고 작년부터 올 초까지 전기요금을 단계적으로 인상해 왔다. 하지만 인상 폭은 미미한 수준이었고 올 2분기엔 아예 인상 결정을 보류해 버렸다. 총선이 다가오는 와중에 물가상승 속도가 빨라질 가능성을 걱정했던 것이다. 이런 난제는 강력한 리더십이 정면 돌파하며 풀어야 하는데 그런 기대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동안 대통령은 물론이고 총리나 부총리 누구도 총대를 메고 요금 인상의 필요성에 대해 국민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추경호 부총리는 도리어 “(전기요금은) 당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할 부분”이라면서 ‘경제사령탑’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마저 보였다. 여당은 마치 부실의 주된 원인이 방만 경영에 있는 양 “한전의 뼈를 깎는 자구노력”만을 강조하며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기 바쁘다. 전기료 대응의 패착은 이 문제를 정치에 휘둘리도록 방치했다는 점이다. 정교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결정돼야 할 사안에 정무적 판단이 깊숙이 개입되다 보니 정책 결정은 계속 미뤄지고 아무도 이를 책임지지 않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런 문제는 사람을 탓할 것 없이 제도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임기가 보장된 독립성 있는 인사들로 매 분기 전기요금을 책정하는 위원회를 꾸려 그 결정을 정부가 구속력 있게 받아들이게 하고, 발전원가의 변화를 요금에 일정 비율 이상 반영하도록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만일 가파른 요금 인상으로 생계가 곤란해지는 저소득층이 생긴다면 정부가 선별적으로 도우면 된다. 지금은 지난 1년의 시행착오에서 배우고 발상의 전환을 이뤄 나가야 할 때다. 우리나라 최대 공기업이 버틸 여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정부의 가격 통제나 금리 개입은 한시적이어야 합니다. 자꾸 반복되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올해 2월 53대 한국경제학회장에 취임한 황윤재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부의 전기요금 등 가격 통제와 시중은행에 대한 대출금리 인하 압박에 대해 언급하며 당국의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다. 상황이 긴급한 경우 ‘비상용 카드’로 쓸 수는 있어도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개입은 반드시 시장 왜곡 같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다. 황 교수는 “우리나라는 고령화로 잠재성장률이 계속 하락하고 있어 노동시장 개혁과 유연화가 필요하다”면서 한국 경제 최대 리스크로 13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무역적자와 가계·정부 부채, 고령화 등을 꼽았다. 또 최근 금융 부문의 위기에 대해서는 “비은행 금융기관 중심으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위험이 커져 경제의 뇌관이 됐다”면서 “PF 위기는 레고랜드 사태처럼 한 번 문제가 생기면 시스템 리스크로 확대될 우려가 크다”고 경고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황 교수는 국내에서 대표적인 계량경제학자로 꼽힌다. 이달 초 그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현재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은 무엇인가. “단기적으로는 13개월째 이어지는 무역적자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중심으로 수출이 많이 감소하고 있다. 또 가계부채 측면으로는 자영업자의 채무 상환 능력이 크게 저하되고 있다. 고금리 와중에 변동금리 대출 비중도 높아서 이것이 우리 경제 운용에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 부채 역시 고령화에 따른 복지 지출 때문에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한국 같은 비(非)기축통화국은 재정 건전성 악화가 거시경제 안정성에 큰 부담을 줄 수 있다.” ―무역적자 행진이 외환위기 이후 최장 기간인데, 이를 얼마나 심각하게 봐야 하나. “물론 지금은 금융기관이나 정부 재정이 비교적 건전하기 때문에 무역적자가 이어진다고 해서 1997년 외환위기 같은 사태가 재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나중에 세계 경기가 회복된다고 해서 적자가 줄어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과거 세계화 시대에는 비교우위에 있는 상품을 우리가 수출하며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지정학적 위기로 세계가 분절화되고 공급망에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는 경기가 좋아진다고 무역수지가 개선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한국 경제의 장기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고령화로 생산연령 인구가 급감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잠재성장률은 앞으로도 계속 하락할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예측에 의하면 노동 공급의 감소로 2050년에는 성장률이 0.5%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 위기에 대처하려면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노동시장 개혁과 유연화가 필요하다. 또 대학 규제 완화 등 교육 혁신을 해야 하고 기술 혁신으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이민 정책을 통해 고숙련, 고학력 인구도 적극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물가 흐름은 어떻게 보나. 현재 한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인가. “기준금리를 올려서 그런지 몰라도 최근 물가 오르는 속도는 낮아지는 추세다. 지금은 물가상승률이 둔화되고 경제성장률이 내려가는 상황이라 스태그플레이션보다는 경기침체 국면에 가깝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은 큰 부실이 없었는데도 유동성 문제나 시장의 공포심리로 인해 파산했다. 한국 금융회사들도 이런 위험이 있나. “현재 비은행 금융기관 중심으로 부동산 관련 대출(PF)의 상환 위험이 커지며 뇌관이 되고 있다. 이런 곳의 재무 건전성에 의심이 생길 경우 미국처럼 모바일 뱅킹을 통해 예금보호한도 초과 부문은 신속한 예금 인출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 우리나라 부동산 관련 대출은 채권, 주식 등 자본시장과 연계성이 높아서 지난 레고랜드 사태처럼 한 번 문제가 생기면 시스템 리스크로 확대될 수 있다. 또 전기료 인상이 계속 연기되면 한전채 발행이 늘어나 회사채 시장의 자금이 경색될 우려도 있다. 다만 이런 게 전반적 금융위기로 확대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은행의 과점 체제를 깨겠다며 당국이 추진하는 각종 방안은 어떻게 보나. “서민이 어려우니 고통 분담을 호소하는 차원에서 나온 듯한데 은행 산업의 경쟁을 유도하는 방향 자체는 원칙적으로 찬성한다. 다만 소규모 은행의 진입이 시중은행 과점 체제에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예대금리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돼야 하고 정부는 자본시장 경색 같은 시장의 실패가 나타났을 때만 개입할 수 있다. 개입은 선별적이고 단기적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본시장의 왜곡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 된다. 또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목표와도 상충할 수 있다.” ―KT나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선임 과정에서 관치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나 정치권의 인사 개입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지고 그 결과 전문적이고 유능한 경영진이 구성돼 기업 성과를 높인다면 그 개입은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인사 개입이 관례적으로 이뤄지고 CEO 선임의 투명성에 문제가 생긴다면 경영 효율성이 저하되고 주주도 손해를 볼 것이다. 정부는 민영화된 기업 경영의 주체가 되면 안 된다.” ―정부의 노동·연금·교육 등 3대 구조 개혁 추진 의지는 어떻게 보나. “개혁의 중요성은 누구나 다 공감하고 있다.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 이것을 추진할 리더십이 있어야 하는데 정부도 내년 총선 때문에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완전하게 달성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정부에서 시작의 단추는 끼워야 한다. 장단기 목표를 명확히 나눠서 최소한 할 수 있는 것, 최대공약수를 먼저 찾아서 그것부터라도 지금 해야 한다. 정확한 통계와 데이터를 제시하면서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게 있나. “가령 노동 개혁의 경우 고용이나 근로시간 유연화는 어려울지 몰라도 호봉제를 성과급제로 바꾸는 임금 개혁은 비교적 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연금 개혁도 직역연금 통합 같은 구조 개혁은 장기 과제일지 몰라도 보험료율 인상 같은 모수 개혁은 어느 정도 합의가 되고 있으니 이런 논의는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정부의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이나 생필품 가격 통제는 어떻게 보나. “가격 통제는 인플레이션이 급속히 악화될 경우 취약계층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도 있다. 시장 실패가 있다면 적절한 개입이 있어야 한다. 다만 가격 통제는 한시적이어야 하고 통제가 반복적이고 지속적일수록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고 가격 왜곡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가격 통제 논란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인가. “원가 상승 요인을 정기적으로 심사하고 이를 공공요금에 반영하는 독립적인 조직이 필요하다. 공공요금 가격을 독립적으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정부가) 무시할 수 없는 시스템을 구축하면 된다.” ―미래를 대비해 한국의 산업 구조는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하나. “높은 대외의존도를 감안했을 때 무역 품목이나 대상국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은 한국에 큰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탈세계화 추세 속에서는 무역 대상국을 다변화하고 대체 불가능한 기술력을 보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주력 산업도 반도체 등 일부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 이래서 기초과학 육성이 중요하다. 기초과학 역량이 있으면 산업 지형이 갑자기 바뀌어도 이에 대응하고 따라가는 게 가능하다. 미국도 기초과학이 튼튼하니까 팬데믹이 터지자마자 새로운 백신을 바로 만들어내지 않았나.” ―향후 5∼10년 뒤 글로벌 경제 향방은 어떻게 될까. “미중 갈등과 세계 경제의 분절화 경향이 심화되면서 과거 세계화 시대 교역을 통해 가능했던 저물가 시대로 복귀하는 것은 어려워질 것 같다. 각국의 기술 장벽이 형성되고 세계 경제 효율성도 상당히 저하될 것이다. 한국은 압도적 기술 경쟁력을 기반으로 이런 환경에서 창출될 수 있는 시장 공백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두 거대 진영과 안보 면에서 대립하지 않고 활발한 경제적 교류가 가능한 시장, 특히 아세안 국가들을 무역 파트너로 개척할 필요가 있다.”황윤재 교수 약력△1960년생△1983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1991년 미국 예일대 경제학 박사△2003∼2005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2005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2020년 서울대 석좌교수 임명△2023년 53대 한국경제학회장 취임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국내 시중은행들은 선진 금융시장으로 불리는 미국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고군분투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은 금융당국의 내부 통제 등 규제 기준이 까다롭고 현지 금융업의 수준도 높아서 한국 은행들이 영업 기반을 넓히기가 수월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현지 한국계 기업이나 국내 대기업 등을 대상으로 폭넓은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해외에 진출하는 기업들의 금융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사업 급격히 키우는 시중은행들 국내 은행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도 최근 꾸준히 미국 지역에서 대출 자산과 순이익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우리금융은 미국 내 현지법인 우리아메리카은행을 두고 있다. 이 은행의 총자산은 2020년 23억600만 달러에서 지난해 31억1100만 달러로 2년 만에 34% 급증했다. 당기순이익도 같은 기간 1320만 달러에서 2810만 달러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작년 기준 자기자본이익률(ROE)은 6.69%, 연체율도 0.07%로 안정적이다. 1984년 설립된 우리아메리카은행은 2003년 미 팬아시아뱅크를 인수하는 등 규모를 확대해 현재 21개 지점, 4곳의 여신 전문 취급 출장소를 두고 있다. 현지법인 외에도 우리은행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등 두 곳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신한금융의 미국 현지법인 신한아메리카은행도 미국 금융시장에서 한인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 은행으로 로컬 한인은행 등과 경쟁을 펼치고 있다. 신한아메리카은행은 1990년 옛 뉴욕조흥은행을 시작으로, 현재 미국 동부(뉴욕·뉴저지주), 남부(텍사스·조지아주), 서부(캘리포니아주) 등 3개 지역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총 15개 영업점을 확보했다. 기존 교민사회에서 개인 고객을 상대로 한 리테일금융뿐 아니라 한국에서 북미권으로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전담 창구인 지상사전담센터(Korea Business Desk)를 설립해 이들 기업의 현지 기업금융을 지원하고 있다. 하나금융은 하나은행 뉴욕지점과 KEB하나뱅크USA 등 총 8개 채널을 미국에 두고 있다. 이들 채널의 총자산은 2020년 36억2000만 달러에서 2022년 91억1300만 달러로 2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당기순이익도 같은 기간 1440만 달러에서 2690만 달러로 증가했고 지난해 대출금도 전년 대비 3억7400만 달러 늘어나는 등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하나은행 측은 향후 미국 사업과 관련해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시행에 따른 한국 대기업의 미국 투자 기회 모색을 돕고 한국계 우량 1, 2차 벤더의 미국 진출 및 투자를 지원할 방침”이라며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시장 투자 기회 발굴을 통한 자산 확대에도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KB금융도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영업 기반을 크게 확충하는 추세다. KB국민은행 뉴욕지점의 대출 자산은 2017년 3억6000만 달러였지만 2022년에는 34억2000만 달러로 5년 만에 10배 가까이로 불어났다. 같은 기간 당기순이익은 300만 달러에서 3600만 달러로, 직원 수는 18명에서 49명으로 각각 늘었다. KB국민은행 측은 “뉴욕지점은 1999년 설립됐을 때는 한국계 은행 가운데 가장 후발 주자였지만 지금은 독보적 선두 점포의 지위를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KB국민은행 뉴욕지점은 미국에 진출한 한국계 우량 기업에 여신을 제공하고 건설자금 대출 프로젝트파이낸싱(PF), 현지 대형은행과의 공동 신디케이션 주선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국내 기업의 美 진출 동반자 역할 KDB산업은행은 대출과 보증, 프로젝트파이낸싱 등 다양한 금융 지원을 통해 국내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을 적극 돕고 있다. 1969년 뉴욕사무소를 개소한 산업은행은 1997년 뉴욕지점을 열었고 2020년에는 미국 내 법적 지위를 금융지주회사로 전환시켰다. 작년 말 기준 총자산이 33억8000만 달러로 2019년(22억1900만 달러) 대비 50%가량 급증했다. 기업대출과 유가증권 투자, 무역금융 등을 통해 자산을 꾸준히 늘리는 한편 고객과 상품, 지역별로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추진 중이다. 1990년 오픈한 IBK기업은행 뉴욕지점 역시 기업금융에 주력하고 있다. 북미권에 진출한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금융 지원을 하는 IBK 뉴욕지점은 최근에는 현지 금융기관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IB 영역으로 사업을 넓히고 있다.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은행 순시가 3일 대구은행을 끝으로 일단락됐다. 이 원장은 2월 말 하나은행을 시작으로 6개 주요 시중·지방은행 점포를 직접 찾았다. 그때마다 각 은행은 금리 인하나 이자 면제 등 대규모 상생 대책을 발표하며 화답했다. 금감원은 이번 순회 방문 동안 은행들이 내놓은 금융지원책이 연간 3300억 원 규모의 이자 감면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구체적인 계산까지 내놨다. 이 원장은 은행의 주요 기능 중 하나를 사회공헌, 자신의 주된 책무는 이를 독려하는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는 얼마 전 “은행 수익의 3분의 1은 국민이나 금융 소비자를 위해 써야 한다”는 지론을 폈고, 은행의 사회공헌 내역을 일일이 평가하겠다는 계획도 밝힌 바 있다. 말로만 하는 게 모자랐다고 봤는지 이젠 몸소 은행들을 찾아다니며 압박하는 방법을 택했다. 금감원 측은 은행들이 자발적으로 상생 방안을 내놨다고 하지만 실상은 규제 당국의 강요 내지 압력으로 느꼈을 게 뻔하다. 고물가와 경제난에 시달리는 많은 국민은 이자 장사로 떼돈을 번 은행들을 쥐어짜는 금감원장의 행보에 박수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잣집 곳간을 털어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의적(義賊)에 그를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생’을 내세워 금융사에 금리 인하와 사회 환원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금융당국 수장으로서 적절한 직무 행위였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금감원장의 가장 큰 임무는 적절한 규제·감독으로 금융 부문 리스크가 커지는 것을 막고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런데 금감원장의 은행 팔 비틀기는 시장의 금리 체계를 망가뜨리고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무력화할 개연성이 크다. 또 은행에 초과 이익의 환수를 강요함으로써 미래의 부실에 대비한 기초 체력을 저하시킨다는 지적도 받는다. 지난해 취임 이후 이 원장의 행보나 화법은 통상적인 관료 출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은행의 과도한 이자마진에 문제가 있다면 보통 같으면 은행의 담당 임원들을 불러다 조용히 얘기하지, 이 원장처럼 공개석상에서 “약탈적 영업”이라고 핏대를 세우진 않는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금융지주 회장을 자리에서 끌어내릴 때도 세상 다 들으라는 듯 상대에게 비수를 꽂았다. 또 어느 자리건 늘 기자들을 몰고 다니며 당국 간에 조율되지 않은 본인의 메시지를 서슴없이 쏟아낸다. 이 원장은 최근 주변에 내년 총선 출마 계획이 없다는 얘기를 반복해서 한다는데, 실상은 이와 다르게 노골적인 정치 행보를 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금융권 인사들은 뚜렷한 법적 근거가 없는 당국의 지시나 간섭을 “가장 고약한 관치”라고 말한다. 은행의 성과급 잔치나 CEO ‘셀프 연임’ 같은 모럴 해저드를 막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런 작업도 당국자의 즉흥적 발언이나 정치성 이벤트가 아닌 기존에 정해진 제도, 시스템을 따라 진행돼야 한다. 우리 은행들이 국내에서만 사상 최대 이익을 내고 정작 글로벌 무대에선 경쟁력을 상실하고 빌빌거리는 데는 찍어내기식 인사 개입과 비공식 창구 지도에 익숙한 당국의 책임도 적지 않다. 그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온 금감원장의 금융회사 순시는 이제 이쯤에서 끝냈으면 좋겠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