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희

김재희 기자

동아일보 DX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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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취재하는 방송·영화 담당 기자입니다. 재미를 주는 콘텐츠를 더 재밌는 기사 안에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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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10-23~2024-11-22
문화 일반52%
인물/CEO13%
IT3%
산업3%
검찰-법원판결3%
패션3%
음악3%
사회일반3%
기타17%
  • “창작, 나와 맞나”…김풍이 아직도 방황하는 이유[BreakFirst]

    웹툰 작가, 영화 기자, 콘텐츠 기업 창업가, 카페 사장, 방송인, 두 돌 지난 아이의 아빠. 하나만으로도 버거운 일을 마흔 중반에 다 거친 이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웹툰 ‘찌질의 역사’로, 누군가는 ‘냉장고를 부탁해’로 그를 접했을 것입니다. 수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파워 트위터리안이라는 재밌는 이력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정체성을 하나의 수식어로 정의하긴 힘듭니다. 김풍(46)이라는 이름만이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웹툰 작가가 방송 연예 대상을 수상하는 시대지만, 그가 한창 활동하던 2000년대 초반에는 작가가 한눈을 파는 것이 바람직하게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했던 김풍은 요리, 사업, 방송,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 기웃댑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한 가지에 진득하니 몰입하지 못할까’라는 자책의 감정에 휩싸였다고 합니다.마흔여섯의 김풍은 좀 더 편안해졌습니다. 다양한 것에 호기심이 생기고, 그걸 시도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걸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집중력보단 순발력으로 승부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는 그의 내면을 들어봤습니다.20대 시절은 그야말로 김풍의 전성기였습니다. 하는 것마다 잘 됐습니다. 데뷔작 ‘폐인가족’부터 주목받았고, 이후 선보인 ‘폐인의 세계’도 히트를 쳤습니다. ‘폐인’이라는 단어가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하게 된 데는 그의 역할이 컸죠. ‘폐인가족’이 잘나가면서 싸이월드의 미니미와 스킨을 판매하는 캐릭터 회사 ‘프로젝트109’를 차렸습니다. 웹툰을 자유롭게 올리기 위해 만든 웹사이트 ‘고구마언덕’은 한때 DC인사이드보다 화력이 강한 온라인 커뮤니티계 신흥강자였습니다.―만화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초등학교 때 반에서 학급신문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네컷만화를 그린 게 시작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제가 그린 만화를 보며 재미있어하는 것에서 저도 쾌감을 느꼈죠. 중, 고등학교 때였는데, 제가 그린 만화를 아이들이 돌려 보는 거예요. 학교 선생님들의 버릇을 과장하고 확대해서 캐릭터화한 이야기였어요. 점심시간이 끝나면 아이들이 제 자리에 모여서 감상평을 나눴죠. 제 생각을 표현하고, 거기에 사람들이 반응해주는 게 즐거웠어요. ―첫 웹툰이 ‘폐인가족’이었는데 ‘폐인’이란 소재에 꽂힌 이유가 뭔가요? 지금이야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밈을 큰 미디어도 쓰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온라인 커뮤니티 용어는 그들밖에 몰랐어요. 당시 ‘다모’라는 드라마가 유행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다모만 보는 사람들을 칭하는 ‘다모폐인’이란 용어가 커뮤니티에서 쓰이기 시작했어요. 저도 한창 커뮤니티를 하던 시절이라, 폐인이 하나의 캐릭터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온라인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를 만화에 담으니 커뮤니티를 안 하는 사람들은 ‘이게 왜 웃겨?’라고 반응했어요. 그게 그 만화의 가장 큰 강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Z세대들이 뭔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해서’에요. 어른들이 모르는 세계에서 놀고 싶은 심리가 ‘폐인가족’의 인기에도 작용한 것 같아요.―‘폐인의 세계’는 웹툰의 시초라고 불립니다. 당시엔 웹툰이란 단어도 없었다고요. ‘마린블루스’나 ‘스노우캣’처럼 작가들이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해 종이 만화를 그대로 올리는 경우는 있었어요. 하지만 제 만화는 커뮤니티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었으니, 커뮤니티에 올리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생긴 지 2년 정도 된 DC인사이드에 폐인가족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게시판 성격과 맞지 않는다며 만화가 자꾸 삭제되는 거예요. 댓글이 3000개씩 달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는데 삭제되는 게 아까워서 김유식 대표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냈어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메일을 본 김 대표가 ‘카툰 연재 갤러리’(카연갤)라는 게시판을 새로 열어줬고, 놀이터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 놀이터에서 저도 재미있게 놀았고 다른 작가들도 놀게 된 거죠. 그렇게 즐겁기만 한 시간이 계속됐다면 좋았겠지만,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진 않습니다. 김풍은 자신의 30대를 ‘이상하게 뒤틀린 모습’이라고 묘사합니다. 타인을 시기하고, 그런 나 자신도 싫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웹툰 작가 외길만 걸으며 성과를 내는 동료들에 비해 이것저것 기웃대는 자신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웹툰 작가들과의 만남을 기피했고, 혼자만의 세계로 파고들었습니다. 영감은 고독에서 왔습니다. ‘찌질’ 그 자체였던 자기 모습을 고스란히 투영한 작품 ‘찌질의 역사’는 기나긴 외로움의 끝에서 나왔습니다. ―백수로 지낸 기간이 길었던 30대 초반이 ‘뭘 해도 안 되는 시기였다’고요.나름 바쁘게 달려왔기에 서른 살에 1년만 안식년을 가져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1년이 2년, 3년이 됐어요. 매너리즘에 빠져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트위터만 했어요. 폐인가족 시즌2를 시작했다가 반응이 별로라 접기도 했고요. 그땐 창작하는 사람들은 안 만났어요.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대충 폐인 캐릭터를 그려서 올리면 사람들이 좋아해 줬는데, 만화를 다시 시작했을 땐 상당히 수준 높은 웹툰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따라잡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죠. 노력은 안 하면서 열망만 있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 살았어요. 동료 작가들은 한 우물만 파면서 성장하는데 전 뭘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이 된 거죠. 잘나가는 작가들을 보며 질투도 많이 했어요. 그런 나 자신도 싫었어요. 특별히 노력도 안 하면서 잘 나가는 사람을 질투만 하니까요. 당시의 저는 이상하게 뒤틀려 있었어요. ―일종의 자기혐오였네요.그 당시 힘들고 괴로웠던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일기를 썼어요. 그걸 나중에 다시 꺼내 읽어보니 자기 객관화가 되더라고요. 제삼자의 시각에서 보니 이건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 같았어요. 그게 ‘찌질의 역사’의 시작이었어요. 그 웹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저를 다 쪼개서 넣었어요. 전부 저의 페르소나인 거죠. 주인공 민기는 제 중고등학교 시절, 준석이는 이성적으로 판단 하려고 하는 애늙은이지만 좀 솔직하진 못한, 성격적으로 지금의 저와 비슷한 인물이고요. ―‘찌질의 역사’는 드라마화가 결정됐지만, 방영에 난항을 겪고 있어요.전 예전에 했던 작품들은 오글거려서 못 봐요. ‘싸드 아일랜드’는 네이버에 아직 올라와 있는데 창피해서 내리고 싶지만 그냥 뒀어요. 제가 나태해질 때,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반면교사를 삼으려고요. 하지만 ‘찌질의 역사’는 제 만화인데도 볼 때마다 설레어요. ‘사람들이 좋아해 주지 않아도 나는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작업했거든요. 속에서 갖고 있었던 이야기를 배설하듯 각본을 썼어요. 그러다 보니 다 쓰고 나서도 후련하다,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애정이 각별한 작품인 만큼 아쉬움이 드라마화가 난항을 겪는 게 아쉽긴 하죠. 각본 쓰는 데에만 2년이 걸렸으니까요. 언젠가 빛을 보길 바라지만 어떻게 될 진 모르죠.―찌질의 역사는 이른바 ‘슈퍼 IP’가 됐어요. 또 이런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있나요.‘찌질의 역사’를 마무리 지을 때 ‘작가는 나와 맞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건 뭐건 일단 계속 작업을 해야 하거든요. 그게 프로라고 생각합니다. ‘찌질의 역사’는 그와 반대로 제가 꽂혀서 나온 작품이거든요. ‘무슨 아티스트도 아니고 왜 예술가처럼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요. 지금도 신작 준비를 하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는 것 같은데 뭐지?’하면서 계속 맴돌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죠. 내가 재밌어야 하고, 봐도 봐도 설렜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못 버렸어요. 그는 생각이 많습니다. 다수의 작품이 인기를 끌었고 마니아층도 두텁지만 ‘웹툰 작가가 내 길이 맞나’를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소소한 성공을 거뒀던 다른 길들에서 확신을 본 것은 아닙니다. 활발하게 방송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가 원하는 건 창작’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공 가도를 달릴 때도,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그는 늘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합니다. 끝없는 자아 성찰, 그게 김풍을 진정한 창작자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웹툰 작가부터 영화 잡지 ‘엔키노’ 기자, 캐릭터 회사 창업가, 연극배우, 요리연구가, 카페 사장님, 드라마 대본 작가까지…. 새로운 일을 쉽게 시작하시는 편인 건가요?20대의 저는 피가 들끓었고, 늘 새로운 걸 하고 싶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아요. 대학 시절엔 부양에 대한 책임이 없잖아요. 그게 가장 큰 전제조건인 것 같아요. 실패해도 데미지가 별로 없죠. 그 경험치가 마음속 씨앗이 돼요. 새로운 시도를 할 때 겁이 덜 나게 하는 씨앗이죠. 10 정도의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그 다음엔 12, 13 규모의 일에 도전하는 게 힘들지 않아져요. ―새로운 시작이 힘든 사람들을 위해 해 주실 조언이 있다면요. 중요한 건 순발력이에요. 나이가 들면 무조건 순발력은 떨어져요. 저도 이젠 새로운 걸 잘하지 못해요. 나도 모르게 ‘이건 이래서 안 돼, 저건 저래서 안돼’라며 재고 있거든요. 하지만 젊었을 땐 좀 잃어도 돼요. 큰돈 안 드는 선에서 재밌어 보이는 걸 순발력 있게 해 보는 거죠. ‘다이어트 해야지’라고 마음먹었으면 그날 바로 뛰는 거예요. 제가 100kg이 나갔을 때 ‘다이어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새벽 3시였거든요. ‘새벽 3시에 뛰지 말라는 법 있어?’라는 생각으로 미친 사람처럼 나가서 뛰었어요. 그게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온 것 같아요. 새로운 것에 시도하는 게 기질적으로 안 맞는 사람들이라도, 이 악물고 한 번 해보세요. 그럼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이 붙어요. ―‘창작자 김풍’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신작 계획이 궁금합니다. 저같이 물고기처럼 사방에 시선이 쏠리는 사람들은 작가하기 힘든 체질이에요. 그래서 저는 엉덩이 무겁고, 옆에서 무슨 얘길 해도 자기 일에만 몰입하는 사람이 너무 부러워요. 창작은 마치 예쁜 아동복 같아요. 몸에 안 맞는데 너무 입고 싶다고 손가락이라도 억지로 끼워 넣고 있는 느낌이죠. 그런데도 여전히 창작은 너무나 하고 싶어요. 목표는 올해 안으로 ‘이야기할 게 생겼다’고 말하는 거예요. 내년 초엔 선보이고 싶어요. 커다랗고 굵직한 이야기보단 인간의 내면에 관해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찌질의 역사도 내면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그 연장선이에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제각각의 괴물 같은 모습들이 있거든요. 그걸 본인이 인정하긴 힘들죠. 각자가 외면하려는 괴물 같은 모습을 다뤄보고 싶어요.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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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넘어질 바엔 멈추세요” 234만 유튜버 도티가 공황장애와 번아웃을 이겨낸 방법[BreakFirst]

    구글 ID 하나만 있으면.때는 2013년 10월, 나희선 씨는 구글 계정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유튜브’라는 곳에 영상을 올리면 세계인이 보는 콘텐츠를 만들어 올릴 수 있으니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유튜브가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1억 회의 조회수를 올린 플랫폼’ 정도로 여겨졌으니, 나름 참신한 시도였습니다. ‘일단 1000명만 모아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채널 이름은 ‘도티TV’였습니다.시트콤처럼 기승전결을 갖춘 게임 콘텐츠에 아이들이 열광했습니다. 하루에 구독자가 4000명씩 늘었습니다. 2017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진행된 ‘존경하는 인물’ 설문에서 그는 김연아, 유재석, 세종대왕에 이어 4위를 차지했습니다. 2018년에는 국내 게임 유튜버 중 처음으로 구독자 200만 명을 달성했습니다. 11년간 그의 채널에 올라온 동영상은 3400여 개, 누적 조회수는 28억 회에 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멈춤의 미학’을 말합니다. “멈출 줄 알아야 넘어지지 않고 오래 달릴 수 있다”는 걸 멈춰 선 뒤에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유튜버 도티’가 아닌 ‘인간 나희선’의 내면에 더 귀 기울이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첫 방송을 한 2013년엔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생소한 시기였는데요. 법조인이 되기 위해 대학 3학년 때 국문과에서 법학과로 전과를 했는데 사법시험이 폐지됐어요. 로스쿨에 가기엔 학비가 너무 비쌌고요. ‘내 삶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를 고민하다가 입대했어요. 일과가 끝나고 생활관에서 TV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당시 한 채널의 ‘문화를 만듭니다’라는 슬로건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 슬로건에 꽂혀서 방송국 PD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죠. 제대 후 닥치는 대로 신문방송학과 수업을 들었는데 그중 한 수업에서 교수님이 유튜브의 생태계에 관해 설명해주셨어요. 구글 계정만 만들면 누구나 영상을 올릴 수 있다고 하셨죠. 마침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유튜브 조회수가 억 단위를 찍어서 난리가 났어요.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왔죠. 그날로 계정을 만들고 게임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법조인, 방송국 PD에서 갑자기 크리에이터라는 생소한 일을 하게 된 거네요.‘나 유튜브 해’라고 하면 ‘그게 뭐야?’라는 질문이 돌아왔어요. 부모님은 자유분방한 제 성격을 알기에 해보라는 반응이었지만 친구들은 걱정을 많이 했어요. ‘좋은 학벌이 아깝지 않냐’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도티는 연세대를 졸업했다) 저 역시 ‘풀타임 유튜버’가 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내가 누군가의 시간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유튜브는 제가 출연자이자 기획자, 편집자, 편성권자잖아요. 제가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는 이 세계가 너무 재밌었어요.(그는 처음에는 아프리카TV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유튜브로 메인 플랫폼을 옮겼다)구독자 20만 명을 달성하며 한창 ‘초통령’의 입지를 다지고 있던 1년 차 유튜버 도티는 2014년 10월 디지털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의 기획사 ‘샌드박스네트워크’를 차렸습니다. 지금은 국내에만 40여 개의 MCN(다중 채널 네트워크)이 있지만, 당시엔 CJ E&M이 차린 MCN인 DIA TV가 유일했습니다. 샌드박스는 빠니보틀, 곽튜브, 조나단, 떵개떵 등 330여 명의 인기 크리에이터가 소속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톱니바퀴처럼 세상 돌아가는 순리가 제 일과 맞아떨어졌어요.그 순간이 왔을 때 한 땀 한 땀 해나간 거죠.―크리에이터 활동 얼마 지나지 않아 2014년 샌드박스 네트워크라는 MCN을 창업했어요.제가 유튜브를 한다고 했을 때 걱정하던 사람들에게 ‘너희가 틀렸어’를 증명하고 싶었어요. 2014년 콘텐츠 기업, 크리에이터, 팬 등 수만 명이 모이는 세계 최대 온라인 비디오 콘퍼런스 ‘비드콘’이 미국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디지털 미디어 업계 최대 시장인 북미의 생태계를 두 눈으로 목격하면 제 선택이 맞는다는 걸 체감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구글에 다니던 친구를 꼬셔서 함께 갔어요. (그는 현재 샌드박스 CEO인 이필성이다.) 비드콘에서 목도한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어요. 1층에선 1인 미디어 관련 기업들의 엑스포가 한창이었고, 2층 키노트 현장에선 구글 CEO가 유튜브 생태계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 역설했고요. 그걸 보고 나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친구와 회사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논의하기 시작했죠.―당시 국내 MCN은 DIA TV 하나였어요. 선례가 없어서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 같아요. 말이 좋아 창업자이지, 맨땅의 헤딩이었어요. 당시 소속 크리에이터는 저, 그리고 저와 함께 활동하던 ‘도티와 친구들’ 10명 남짓밖에 없었어요. 게임사를 찾아다니며 신작이 나올 때 저희 채널을 활용해 마케팅해 달라고 부탁했고, 크리에이터들을 만나 ‘함께 일하자’고 설득도 했고요. 발품을 팔며 파트너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어요. 과거엔 크리에이터가 저평가됐어요. ‘너희가 뭔데 영상 한 편에 이 돈을 받아? 너희가 연예인이야?’라는 시선이 지배적이었어요. 이젠 크리에이터가 초등생 장래 희망이 됐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존중받잖아요. 그 길을 샌드박스가 열심히 닦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스터 비스트와’ 같은 글로벌 채널 운영자가 조만간 생길 거고, 그 토양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유튜버, MCN 창업 모두 당시 생소하던 시장입니다. 남들은 보지 못했던 흐름을 먼저 읽을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이었나요? 저의 성공은 시대와 운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요. 2013년 강남스타일 신드롬이 없었다면 전 유튜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크리에이터 생태계가 세계적으로 10년간 엄청나게 성장하지 않았다면 샌드박스도 지금 같진 않았겠죠. 톱니바퀴의 아귀가 맞아떨어진 것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순리가 제가 하는 일과 맞아떨어졌어요. 다만 그 순간이 왔을 때 최선을 다해서 한 땀 한 땀 해 나간 건 있어요. 그 노력들이 회사엔 업력이 됐고, 개인에겐 경험이 됐다고 생각해요. 인생은 영화의 해피엔딩처럼 어느 순간에 도달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란 말이죠.유튜버로, 또 MCN의 창업가이자 대표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그는 돌연 ‘휴식’에 들어갑니다. 국내 게임 유튜버 중 최초로 200만 구독자를 달성한 2018년이었습니다. 한 달 뒤 활동을 재개했지만, 2019년 3월 ‘도티 TV’ 전면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초통령’, ‘250만 유튜버’ 등 화려한 수식어가 달리는 ‘도티’와, 인간 ‘나희선’의 간극이 그를 집어삼킨 터였습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의 긴 터널을 지나온 그는 ‘숫자’에 매몰된 유튜버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악플, 매일 콘텐츠를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 아이디어 고갈 등 힘든 순간도 많았나요.창작의 고통은 이 업의 본질이기에 크게 힘들진 않았어요. 아이들 타깃 콘텐츠라 악플도 별로 없었고요. 가장 힘들었던 건 ‘숫자의 세상’에서 살아야 했다는 거예요. 숫자로 목표 설정을 하는 것은 너무나 쉬워서 현재의 행복을 자꾸 미래로 유예했어요. ‘50만 구독자까지 달성하고 그때 행복해지자’고 목표를 정해요. 막상 구독자가 50만 명이 돼도 내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게 없어요. ‘50만은 좀 애매하니 100만까지 열심히 달려보자’고 생각해요. 골드버튼을 받는다고 전 행복해졌을까요? 아뇨. 우리 인생은 영화의 해피엔딩처럼 어느 순간에 도달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숫자의 목표에 도달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네. 오히려 더 힘들어지네’라는 상황이 절 가장 괴롭게 했어요. ―부담의 크기가 상당했나 봅니다. 3000개가 넘는 영상을 올리는 동안 마음은 점점 지쳐갔는데 그걸 몰랐어요. 매일 영상을 올리는 게 너무나 당연했기에 저의 에너지가 유한하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저를 갈아 넣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인간 나희선’을 챙기지 못했고, 번아웃과 공황장애가 동시에 왔어요. 아직 유튜브 활동은 잠시 쉬고 있어요. 234만 구독자 채널을 방치하는 게 아깝지 않으냐는 주변의 목소리도 크지만, 여전히 과거처럼 즐겁게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유튜브를 일처럼 하느니 좀 쉬어가다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즐거운 마음으로 하자는 생각이에요. 그게 저를 오래 기다려 준 팬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요. ―비슷한 번아웃의 시기를 지나는 크리에이터도 많아요. 그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멈춰야 할 땐 멈추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특히 사회 경험이 없는 상태로 어린 나이에 유튜브를 시작한 친구들은 지치고 힘들어서 멈추고 싶어도, 조회수가 반 토막 나고 채널이 망할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에 어떻게든 영상을 찍어서 올려요. 관성적으로 콘텐츠를 만들다 보면 과정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그걸 시청자들이 귀신같이 알아요. 그럼 초심을 잃었다고 악플이 달려요. 악순환의 고리인 거죠. 크리에이터는 매일 조회수와 구독자라는 성적표를 받아보기 때문에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계속 달리다 보면 넘어질 수 있어요. 그 전에 멈춰야 해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챙겨야 롱런할 수 있어요. 어떤 일의 결과는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현재의 내 상태 그 자체예요.유튜버 도티가 아닌 ‘인간 나희선’을 돌아보는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것에 주저 없이 뛰어들었습니다. 모교인 연세대 겸임교수로 강단에 섰고, 자작랩으로 엠넷 ‘쇼미 더 머니’에 지원했습니다. 월드비전 홍보대사로 아프리카의 난민촌을 방문해 봉사활동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유튜버 도티’와 ‘인간 나희선’의 밸런스를 맞춰 나가는 중입니다. ―다양한 도전을 하고 계시는데 제2의 삶을 모색하는 건가요?여러 일을 할 때 오는 여러 형태의 보람이 있어요. 유튜브에선 창작의 기쁨, 모교에서 수업을 했을 땐 이 산업에 관심 있는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서 느끼는 감동이 있었죠. 얼마 전엔 월드비전과 함께 아프리카 난민촌을 방문해 4박5일 간 봉사활동을 했는데요, 제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세계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제가 엄청 선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순전히 저를 위한 활동들이에요. 제가 뿌듯하고 보람을 느끼기 위한 일들을 충실하게 해나가는 것뿐이에요. ―남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삶을 꽤 길게 살다가 온전히 ‘나를 위한 활동’에 집중하면서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재작년에 ‘쇼미더머니’에 참가했어요. 1차에서 광탈했고 통편집됐죠. 주변 사람들은 ‘탈락했으니까 실패한 거네’라고 얘기해요. 제 생각은 달라요. 어떤 일의 결과는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녜요. 진정한 결과는 현재의 내 상태에요. 쇼미를 준비하면서 힙합에 관심을 갖게 됐고, 랩과 가사를 쓰면서 해방감을 느꼈어요. 그 과정 덕에 현재 내 상태가 과거보다 즐거워지고 풍요로워진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요? 가치 있고 행복한 과정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결과와 상관없이 좋은 사람이 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도티님에게 행복은 뭔가요?정신적으로 아주 고통스러울 때 ‘행복은 뭘까?’라는 고민을 매일같이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행복을 찾는 과정 자체도 스트레스인 거예요. 소소한 행복을 찾으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어요. 소소한 게 제일 어렵거든요. 요즘 내린 결론은 그냥 불행하지 않으면 된다는 거예요. 불편하거나 불행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요즘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마음이 편안한 하루 되세요’거든요. 엄청나게 즐겁고 행복하지 않아도 평온한 가운데 불행하지 않은 일상, 그걸 찾으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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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가 DVD 배송할 때부터 ‘AI 음악 추천’ 연구하던 이 남자, 글로벌 AI 오디오 서비스 내놨다[BreakFirst]

    터틀맨이 부르는 ‘새로운 시작’, 김광석이 부르는 김범수의 ‘보고 싶다’…. TV 프로그램 속 무대에서 고인이 된 가수들이 그들의 사후 발매된 노래를 부릅니다. 김광석의 떨리는 미성, 터틀맨의 굵직한 랩이 울려 퍼지자 몇몇 관객은 놀라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거나, 눈물을 훔칩니다. 이젠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고인의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타고 흘러 들어가 잊힌 기억을 소환했기 때문입니다. 고인의 생전 목소리를 알고리즘에 학습시켜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한 곳은 2020년 세워진 AI 오디오 기업 수퍼톤입니다. 창업자인 이교구 대표는 대학에선 전기공학을 전공했지만, 음악은 늘 삶의 한 축을 차지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사람같이 자연스러운 노래 부르는 기술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을 품습니다. 록 음악에 빠져 밴드 보컬을 했을 정도로 음악에 매료된 삶을 살아온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물음이었습니다. 음악을 사랑한 공학도는 일탈을 감행합니다. 많은 기술 기업이 TTS(Text To Speech·텍스트 음성 변환)에 매달려 ‘말하는 AI’를 개발할 때 그는 학계도, 시장도 관심이 없던 ‘노래하는 AI’로 눈을 돌립니다. ‘소리의 힘’으로 창작의 모든 한계를 허물겠다는 꿈을 품고 20여년간 묵묵히 한 길을 걸었습니다. AI가 그야말로 세상을 뒤흔드는 와중에 수퍼톤은 지난달 실시간 음성 변환 서비스 ‘시프트’를 내놓았습니다. 그동안의 스토리를 들어보았습니다. ―대표님의 유년 시절이 궁금합니다. 강화군 아차도라는 작은 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그때 집에 있는 라디오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리지 피플의 ‘YMCA’같은 팝송 가사를 한글로 적어 따라 부르곤 했죠. 중학생 때 아버지가 전축, 왬!(Wham!)과 마돈나의 카세트테이프를 사주셨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팝에 빠져서 고등학교, 재수, 대학교 시절 밴드 활동도 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못 했어요. 공학자적 기질도 다분했거든요. 집에 있는 전자제품을 모조리 분해한 뒤 재조립하길 즐겼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드는 경진대회에서 상도 받았어요. 공학이 좋아서 대학 전공으로 전기전자공학을 택했죠.―‘음악을 좋아하는 공학도’셨네요. 음악과 공학, 두 관심사는 어떻게 융합됐나요?저는 록 음악을 가장 좋아해요. 백두산, 부활 등 한국의 메탈 밴드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음악을 들어봤는데 영미권 밴드 음악과 소리 자체가 굉장히 다른 겁니다. 가창이나 연주 실력의 문제는 아니었어요. 소리 자체가 빈 느낌이었죠. 실력은 비슷한데 결과물에서 차이가 나는 건 과정의 문제잖아요. 레코딩과 마스터링, 믹싱을 얼마나 정교하게 잘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뒤 음악에 접목할 수 있는 기술을 제대로 배워보기로 했습니다.빠르게 돌아가는 팽이는 누가 툭 쳐도 무너지지 않아요이 대표는 2002년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넘어가 뉴욕대 음악 기술 석사, 스탠퍼드대 컴퓨터음악·음향학 박사 과정을 밟았습니다. 7년 동안 학계와 시장, 어디서도 주목받지 못했던 오디오 머신러닝 기술을 파고들었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원하는 건 계속 밀고 나간다’는 관성. 그는 2009년 귀국해 모교인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지능정보융합학과 교수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화두에 천착하기 시작합니다. 그건 바로 ‘음성 합성 기술’이었습니다. ―2009년 서울대 교수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가창 합성 기술’에 뛰어드셨네요.당시에는 입력된 텍스트를 컴퓨터가 읽어주는 기술인 TTS가 가장 인기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 정보 전달, 오디오북 등 접목할 수 있는 분야가 많아 빠르게 개발이 이뤄지고 있었죠. 하지만 전 말하는 기술엔 관심이 가질 않았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뛰어든 분야라 그 시장에 들어가면 저도 ‘고인물’이 될 것 같았어요. 아예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고 싶었습니다.음성은 음악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자연스럽게 목소리에 관심이 갔습니다. 당시 한국 음성 합성 기술은 일본, 미국에 비해 현저히 뒤처져 있었어요. 컴퓨터로 트럼펫, 베이스, 피아노 등 모든 악기를 연주를 할 수 있는 1인 창작 시대는 진즉 왔는데, 노래하는 목소리는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죠. 일본 야마하가 선보인 음성 합성 프로그램 ‘보컬로이드’가 주목받던 시점이라 ‘한국에선 우리가 나서보자’ 싶었습니다. 경쟁 기업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던 기술에 일찌감치 뛰어들어 한 우물만 파셨는데요. 그 원동력은 뭔가요?‘내가 원하는 걸 계속한다’는 내면의 관성이 강하게 있어요. 돌아가는 팽이를 누가 옆에서 툭 치면 금방 풀어지고 빙글빙글 돌잖아요. 그런데 아주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팽이는 구심점이 있기 때문에 잘 풀어지지 않아요. 제겐 확고한 구심점이 있었고, 그걸 중심으로 빠르게 돌고 있었기에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어요. 내가 재밌는 걸 열심히 하면 일정 수준에는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 우물만 판 게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가만히 있는 것도 관성이지만 계속 움직이려는 것도 관성이니까요. 어느 기업이 진짜 사람 목소리와 더 비슷하게 만드느냐가 성패를 가를 겁니다. 내면의 호기심을 집요하게 파고드니 시장의 수요는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가창 합성 기술로 그는 창작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했습니다. 교통사고로 사지마비 장애를 입어 전성기 수준의 고음을 낼 수 없는 ‘더 크로스’ 김혁건의 샤우팅 창법을 구현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음성 합성 기술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카지노’ 속 최민식의 30대 시절 목소리를 만드는가 하면,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크걸’ 속 BJ 마스크걸의 목소리도 창조했습니다. 잠재력을 엿본 하이브는 총 490억 원을 투자해 수퍼톤을 인수했습니다.―그렇게 2020년 수퍼톤을 창업하신 거군요.2009년 서울대 교수 부임 이래 음악오디오연구실을 이끌면서 음성과 음악을 만드는 AI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야가 시장성이 있겠다고 판단해 연구실 사람들 3명, CTO와 COO를 영입해 총 6명이 함께 창업을 했습니다. 교수 생활 11년 만이었네요.저희의 핵심 기술은 파운데이션 모델 ‘낸시’(NANSY, Neural Analysis And Synthesis)입니다. 음색, 발음, 음높이, 강세 등 4가지 음성 요소들을 분리하고 재합성해 높은 품질의 음성을 만들 수 있습니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모델입니다. 챗GPT의 기반인 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도 파운데이션 모델입니다. 광범위한 데이터에 대해 훈련된 딥 러닝 모델이라 수많은 사례에 사용이 가능합니다. 파운데이션 모델을 직접 개발하는 기업은 많지 않습니다. 엄청난 기술력을 요하거든요. 저희는 초기부터 음성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했고, 정교하게 버전을 업그레이드해 왔습니다. 야마하를 비롯해 많은 관련 기업들보다 1년 이상 기술력이 앞서 있다고 봅니다. 2019년 가장 크고 권위 있는 음성국제학회에서 야마하를 제치고 저희가 최우수논문상을 받았습니다. ―4월에는 말하는 즉시 사용자가 선택한 캐릭터의 목소리로 실시간 송출하는 서비스 ‘시프트’를 선보였습니다.가창 합성에서 시작했지만 음성에 대한 시장의 요구도 커져서 음성 합성 기술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기술 개발에 앞서 포커스 그룹 인터뷰와 시장 조사를 하면서 수요를 봤습니다. 버추얼 유튜버, 스트리머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거든요. 실시간으로 팬들, 구독자들과 소통할 때 자아를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거나, 익명으로 활동하고 싶은 니즈가 굉장히 커요. 가창 합성은 음역대가 넓고 섬세한 표현이 중요해 음성 합성에 있어 중요한 토대가 됐습니다. 목소리를 변조하는 수준으로 바꿔주는 기술은 있었지만, 다른 자아가 말하는 듯한 높은 품질의 음성 변환 기술은 없었거든요.―시프트 개발에 있어 어려웠던 부분은 뭔가요? 시프트는 빠르게 변환된다는 뜻입니다. 서비스 이름대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지연시간을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화상회의를 할 때 지연시간이 길면 소통이 아예 안 되듯, 팬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데 사용되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지연시간이 길어지는 걸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기존에 있는 툴은 지연시간이 1초에 가깝습니다. 저흰 이걸 47밀리 세컨드(0.047초, 밀리세컨드는 1000분의 1초)까지 줄였어요. 그렇다고 변환되는 목소리의 퀄리티를 떨어뜨릴 순 없어요. 지연시간은 줄이면서 품질은 유지할 수 있는, 최적화된 지점을 찾기 위해 8개월을 매달려 개발했어요. ―챗GPT를 만든 미국 기업 오픈AI도 보이스 엔진이라는 유사한 기술을 선보였는데요(악용 우려로 공개하지는 않고 있다). 경쟁 기업과의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굉장히 섬세하고 디테일한 음성표현이 가능하다는 게 저희 차별점입니다. 음성 합성도 가창 합성만큼이나 까다롭고 어렵습니다. 노래에는 작곡가의 기본적인 의도가 있지만 말하는 것에는 따를 수 있는 틀이 없거든요. 화날 때 목소리가 커질 수도, 더듬거나 가라앉을 수도 있어요. 말하는 방식에 있어서 개개인이 각자 목소리의 마스터죠. 단순히 빠르고 큰 목소리 데이터로만 학습시킨 알고리즘으로 화난 연기를 하게 하면 굉장히 어색하고 지루하게 느껴져요. 어느 기업이 더 진짜 사람 목소리같이 만드느냐, 즉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감동도 할 수 있는 수준의 음성을 구현하는 게 핵심적인 차별점이 될 겁니다. 귀가 어마어마하게 예민한 오디오 엔지니어를 만족시키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기술이 올바르게 쓰이면 이리도 아름답구나.’ 2008년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터틀맨이 수퍼톤의 AI 기술로 부활해 그의 사후 발표된 노래 ‘새로운 시작’을 부르는 영상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이 대표가 지향하는 목표도 이와 맞닿아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음성 합성 기술로 창작자의 창의성을 제한하는 벽을 무너뜨리고 확장하겠다는 것입니다. ―음성과 가창 합성 AI 기술이 앞으로 어떻게 활용되길 바라세요? 음성 합성 기술도 딥 페이크의 우려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기술을 선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늘 고민합니다. 장애가 있는 뮤지션이 노래할 수 있게 돕고, 세상을 떠난 가수의 목소리로 신곡을 녹음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결국 창작자의 한계를 허물어주는 일입니다. 회사에 음악을 사랑하는 직원들이 많습니다. 앨범을 냈거나 밴드를 하는 분도 있어요. 창작자가 돼 봤기에, 창작자를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창작자가 기술적 한계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고, 창작의 벽을 넘어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아티스트와 상호작용하면서 기술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수퍼톤을 어떤 기업으로 키우고 싶으신가요? 헤드폰 종류가 5만 가지가 넘는다는 건 그만큼 귀가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뜻이에요. 수퍼톤이 지난해 12월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용으로는 처음 선보인 음향 장비용 플러그인은 벌써 200여 개국에서 매달 3만 명이 사용하고 있어요. 귀가 어마어마하게 예민한 오디오 엔지니어들을 만족시키는 국산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는 제품을 만들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오디오 분야를 대표하는 기업이 되고 싶습니다. ‘퍼스널 PC=애플 컴퓨터’, ‘전기차=테슬라’처럼 ‘오디오=수퍼톤’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게 만들 겁니다. ―사업가가 아닌 ‘연구자 이교구’를 매료시키는 주제는 뭔가요? 궁극적으론 난청을 해결하는 기술을 만들고 싶습니다. 귀는 소리라는 외부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기관이에요. 그 신호를 해석하는 것은 뇌입니다. 잘못된 해석이 난청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난청은 노화의 일종이기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심한 난청을 앓는 이는 타인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사회적으로 점점 고립됩니다. 노인성 치매가 난청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은 연구로 검증됐어요. ‘청각적 뇌’의 원리를 규명해서 난청 환자들이 제대로 듣고,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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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출신 마케터가 아기띠 개발에 뛰어든 이유[BreakFirst]

    ‘아, 또 터졌다.’첫째 아이를 낳은 후 40일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모유 수유를 하던 임이랑 코니바이에린 대표(39)는 목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습니다. 1년 반 전 시작된 목 추간판탈출증이 재발한 겁니다. 완전히 회복되기 전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을 몸이 버티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의사가 입원을 권할 정도였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얼굴을 내려다보며 젖을 먹이는 행복은 쉬이 내려놓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급한 대로 몸에 맞는 아기띠를 찾아보았습니다. 대부분 너무 무겁거나 복잡했습니다. 직구로 일본, 미국 제품까지 사용해봤지만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적당한 제품을 찾는 것으로 타협했겠지만, 임 대표의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심플한 아기띠를 만들어보자. 망해도 불사르고 망하자.’ 160g의 초경량 아기띠는 그렇게 세상에 나와 세계 각국에서 120만 개나 팔려나갔습니다.외국어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잖아요.―퇴사 후 육아를 하다 아기띠를 만들게 되셨다고요. 티켓몬스터 마케터로 일하다가 첫 아이를 낳으면서 퇴사했어요. 모유 수유를 하다가 출산 40일 만에 목 디스크(추간판탈출증)가 왔어요. ‘장비의 힘을 빌리자’는 생각으로 아기띠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무거운 거예요. 대부분 800g이 넘었죠. 1kg가 목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크거든요. 대안이 있을 거란 희망으로 폭풍 검색을 해서 해외 직구로 일본, 미국 아기띠까지 다 사 봤어요. 그나마 미국에서 가벼운 제품을 구했는데 너무 길었어요. 아기가 울면 안아줘야 하는데 아기띠를 둘둘 말다 보면 아기는 오열을 해요. ‘다들 정말 이 제품들을 만족하며 쓰는 걸까’란 의문이 들기 시작할 때쯤 남편이 ‘직접 만들어보는 게 어때?’라고 제안했어요. ―원래 창업에 관심이 있으셨나요?주변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해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의 근거가 되거든요. 제게 영향을 준 두 집단이 있어요. 첫 번째는 남편과 그의 친구들이에요. 제 주변에 좋은 기업에 취업하고, 고시에 붙은 친구는 많았지만 창업을 한 경우는 없었어요. 창업가인 남편과 친구들을 보며 ‘저런 삶도 있구나’를 알았죠. 두 번째는 아마추어 여자농구단이에요. 그곳에서 진취적인 여성들을 많이 만났어요. 엽서를 파는 서울대 졸업생, 안정적인 컨설팅 회사를 박차고 나온 창업가…. 활용하기 유리한 스펙을 버리고, 바닥에서부터 온몸으로 부딪혀가는 여성들을 보며 용기를 얻었어요. 회사에 다닐 때 일주일 휴가를 내고 그분들을 찾아가서 ‘어떻게 퇴사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느냐’고 물었어요. 답은 의외로 간단했어요. 남에게 중요한 가치가 내게는 중요하지 않아질 때, 굉장히 쉽게 버릴 수 있다더군요. ―디자인이나 제조의 경험이 없어서 처음에는 막막했을 텐데요.가장 먼저 원단을 들고 세탁소를 찾아갔어요. 제가 미싱을 할 줄 모르니, 디자인과 원단을 세탁소에 가져다주면 만들어 주겠거니 생각했죠. 막상 세탁소에 가니 ‘그런 건 샘플실에서 해 준다’고 하더군요. 그때 샘플실이 뭔지 처음 알았어요. 그렇게 그다음 스텝, 그다음 스텝을 밟아 나갔어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잖아요. 외국어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무지의 상태’는 뜻밖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시중에는 마음에 드는 원단이 없어 아기띠 전용 원단을 자체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원단에는 ‘백화점 입점 제품에나 들어간다’는 실을 사용했습니다. 일반실 보다 강도와 탄성이 50%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공장 사장님은 임 대표에게 “6만 원 정도 하는 제품에 오버하는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보통 잘 모를 때는 시장의 기준을 따라가게 되지 않나요? 저는 업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관행에서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저는 이런 제품에 일반적으로 어떤 실을 쓰는지 몰랐어요. 공장 사장님이 무슨 실을 쓸 거냐고 묻기에 당연히 가장 튼튼한 실을 택했죠. 아기를 잘 지탱해야 하니까요. 원단도 마찬가지예요. 시장엔 아기띠용으로 개발된 원단이 없었어요. 신축성에 초점을 둔 원단을 직접 만들기로 한 거죠. 무엇보다 거울을 봤을 때 자괴감이 들지 않길 바랐어요. 예쁜 옷을 입어도 커다란 아기띠를 차면 완전 무장을 한 느낌이 들었어요. 끈은 주렁주렁 늘어져 있고요. 내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고, 자아를 추구할 수 있는 디자인이길 원했어요.―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포기하고 싶진 않았나요.마음을 가볍게 먹었어요. 공부할 때 제일 중요한 건 모든 걸 완벽하게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훑고 그 후 복습하는 것입니다. 공부와 마찬가지로 창업의 전체 과정을 훑어보고 싶었어요. 가볍게 시작해보고, 될 것 같으면 좀 더 보강해서 다시 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일단 해보자’는 마인드가 제 관성이기도 해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보는 거죠. 모든 과정에 부담을 느꼈다면 도중에 포기했을 거 같아요. 창업할 때부터 ‘왜 굳이 출근을 해야 하지?’라고 생각했어요.임 대표는 2017년 창업 이후 7년 내내 재택근무 제도를 고수했습니다. 근무 시간 중 1시간은 돌봄에 사용하고 해당 시간을 이후 근무로 채울 수 있는 ‘근무 시간 배려제’도 도입했습니다. 보육 공백이 생긴 직원들이 자녀와 함께 사무실에 나올 수 있는 ‘자녀 동반 오피스데이’도 운영합니다. 보통 출산과 육아가 ‘경력 단절’로 이어지지만 이 회사에선 ‘경력’입니다. 출산과 육아의 경험이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코니의 직원 65명 중 36명은 워킹맘입니다.―창업 직후부터 100% 재택근무 제도를 선택하신 이유는 뭔가요?전 당연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 ‘왜 굳이 출근을 해야 하지?’라고 생각했어요. 일 잘하는 사람은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집에서 공부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공부를 잘하는 것처럼요. 세계에 정말 멋지고 유능한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을 채용하기 위해서라도 출근에 있어서 만큼은 유연해질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개인이 가장 편한 곳에서 일하면 일의 능률도 오르고, 출퇴근 시간을 아껴서 내 삶의 더 만족스러운 부분에 투자할 수도 있잖아요. 반드시 모여서 해야 할 일만 모여서 하면 돼요.―재택근무를 하면 직원들의 근태를 확인하기 어려우니 불안하지 않나요?직원의 근무 태도는 오히려 재택근무에서 더 잘 드러나요. 재택근무를 하면 모든 업무가 온라인에서 이뤄지잖아요.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참여시키지 않으면서 똑똑하고 속도감 있게 일할 수 있는 분들이 온라인에서는 정확하게 가려집니다. 불필요하게 모든 사람을 태그(tag)하지 않아야 하고요, 가장 효율적으로 업무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줘야 하죠. 자료를 첨부할 때 캡처 이미지를 붙여서 파일을 클릭할 필요가 없게 하거나, 질문하기 전에 궁금해할 법한 용어에 괄호를 치고 설명을 적어두는 식이죠. ―창업 6년 만인 지난해 12월 오프라인 사무실을 만드신 이유는 뭔가요.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다 보니 구성원들이 직접 제품을 보며 소통하고 협업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공유오피스를 사용해봤는데 생각보다 협소해서 지금이 오피스를 만들 적기라 생각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고정 좌석, 자유 좌석, 쇼룸, 커피와 빵이 있는 키친, 제품을 보관하는 창고 등으로 구성돼있습니다. (이들은 사무실을 ‘코니 오리지널 하우스’라고 부른다)‘엄마’ 역할을 하는데 사무실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명함에도 써 놨지만 저는 임이랑 대표이면서도 지용, 지헌의 엄마거든요.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오기에 부담 없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유아차를 끌고 오는 분들을 위해 턱을 없앴고,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모든 모서리는 둥글게, 아이들이 바로 손을 씻을 수 있도록 개수대는 현관문 옆에 설치했습니다. 직원들에게 동기부여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일단 제가 행복하려고 해요.대표는 마케터, 남편이자 사업총괄은 창업자 출신. 인플루언서 광고나 그럴듯한 프로모션으로 관심을 모은 브랜드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워킹맘인 한국의 이지애 아나운서, 일본에서 ‘패셔니스타’로 불렸던 모델 히로코 씨, 넷플릭스 ‘워킹맘 다이어리’에 출연했던 캐나다 배우 제설린 완림이 아기띠를 한 사진을 자발적으로 올리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창업 첫 해 3억 원이었던 매출은 지난해 317억 원으로 늘었습니다. 일본, 미국, 호주, 캐나다 등 116개국에서 지금까지 팔린 아기띠는 120만 개에 달합니다.―지난해 매출 300억 원을 달성했고, 수출국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데요. 대표님에게도 ‘실패의 경험’이 있었나요? 사실 저는 매일 실패하고 있어요. 운영, 판촉, 마케팅 등 각종 분야에서 제가 세웠던 가설이 예상대로 작동하지 않는 숱한 실패와 매일 마주하죠. 그게 보이지 않는 것뿐이에요. 최근 고민은 국가별 ‘침투율’이었어요. 코니의 미션은 ‘부모로서의 삶을 쉽고 멋지게’인데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에서도 그 미션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고 싶어요. 올해 기조가 ‘Wider Reach, Closer Touch’거든요. 많은 사람에게 도달하고, 친밀하게 다가간다는 거예요. 이 기조를 달성하기 위해선 신규 고객을 유입시킬 수 있는 각 시장 전문가가 필요했고, 그들을 채용하는 과정이 도전적인 과제였습니다. ―2017년 창업해 어느덧 7년이 됐어요. 슬럼프가 찾아왔던 순간은 없나요? 제가 원하는 속도만큼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지 못할 때 다 제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회사가 크는 속도만큼 내가 빨리 크지 못한 게 아닐까’라는 죄책감이죠. 그러다 보면 ‘인간 임이랑’의 삶까지 불만족스러워져요. 리더는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해 줘야 합니다.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제가 행복하려고 해요. ‘대표 임이랑’이 아닌, ‘개인 임이랑’의 삶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보고, 이걸 제대로 들여다보는 ‘멘탈코칭’도 받고 있어요.―앞으로 코니를 어떤 기업으로 키우고 싶으신가요?쇼핑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내가 좋아서 하는 쇼핑’이 있고 ‘일처럼 하는 쇼핑’이 있어요. 육아용품을 사는 건 일처럼 하는 쇼핑에 가까워요. 아이의 성장에 맞춰서 새로운 제품을 살 때마다 새로운 브랜드를 찾아 헤매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그 과업은 빠르고 쉽게 해결될수록 좋겠죠. 코니의 제품군을 더 촘촘하게 만들어서 코니에서 모든 용품을 살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어요. ‘코니라면 믿고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드리는 게 목표에요.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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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삶의 우선순위는 이제 나” 70살에 ‘내 인생’ 찾은 모델 리송 [BreakFirst]

    백발의 청춘, 운동화를 신은 단신의 모델, 소년의 눈동자를 한 74세 노인….모순적인 수식어들이 모두 적용되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시니어 모델 리송(74)입니다. 그의 키는 160cm 남짓입니다. 대한민국 여성 평균 키 수준이니, 모델이라기엔 작죠. 7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호기심이 서린 새까만 눈동자, 흰머리 섞인 숏컷에선 소년의 천진난만함이 느껴집니다. 초 단위로 터지는 카메라 셔터보다 빠르게 포즈를 바꾸는 프로지만, 그는 50년을 가정주부로 살았습니다. 2019년 데뷔해 6년 차 모델이 됐습니다. 모든 외적 반전을 뛰어넘는 가장 큰 반전은 그의 내면에 있습니다. 한눈에 느껴지는 당당함과 쾌활함 뒤엔 흐릿해진 상처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년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의 결핍은 역설적으로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남편과 세 자녀에게 늘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를 땅으로 여겨라. 나를 딛고 도약해라.” 그는 50년을 가족의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살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관성적인 삶에 익숙해집니다. ‘여태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새로운 도전과 시도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리송은 나이라는 관성에 얽매이길 거부합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던 70세의 나이에, 그는 이제 누구도 아닌 자신의 도약을 위해 스스로가 발판이 되길 자처합니다. 그의 무대는 런웨이에서 연극무대로, 영화 촬영장으로, 겁도 없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리송’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이 궁금합니다. 본명인가요? 제 본명은 이해자 입니다. 전 50년을 가정주부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제 안에서 무언가 쌓였어요. 시니어 모델을 하기로 하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했습니다. 새 출발을 하는 만큼 새로운 이름을 짓고 싶었습니다. 리는 저의 성에서 따왔고, 송은 제 남편 성입니다. 남편과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나 8년 연애 끝에 결혼한, 오랜 친구이자 동지입니다. 이제까지 제 옆에 있어 주는 가장 고마운 사람, 남편의 이름과 제 이름을 합쳐 리송이라 지었습니다. ―모델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평생을 사람마다 주어진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전 엄마, 아내의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습니다. 우선순위는 제가 아닌 가족이었죠. 두 딸과 아들 하나가 있는데요,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열쇠를 들고 다닌 적이 없습니다. 늘 제가 집에서 맞아줬거든요. 외출을 해도 아이들 오는 시간엔 반드시 집에 왔습니다. 손주 여덟 명에게도 무한한 사랑을 줬어요. 그런데 막내 손자가 5살 되던 해에 ‘이제 내 손길이 필요 없겠다’ 싶더군요. ‘엄마와 할머니의 역할은 끝났다. 내 삶을 찾겠다’, 이 생각을 한 게 70세였습니다. 마침 그때 남편이 시니어 모델 패션쇼 기사를 보여주며 ‘당신도 해 보면 어떠냐’고 제안했어요. 그날로 학원에 갔습니다. ―학원에 처음 간 날, 기억나시나요? 2시간 수업 참관이 가능하다고 해서 시니어 모델들이 워킹하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1시간 수업이 끝나고 바로 등록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결정을 내렸느냐고요? 모델들의 ‘몰입’을 봤기 때문이에요. 살아가면서 무언가에 온전히 몰입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몰입의 세계를 보고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등록하고 다음 시간에 바로 워킹을 해봤는데 어마어마한 해방감이 느껴졌습니다. 처음엔 3cm 힐 신고 걷는 것도 버거웠는데 지금은 10cm도 거뜬합니다. 아직도 눈빛은 뭔가를 꿈꾸고 있는가. 호기심에 반짝이고 있는가.본능에 각인된 끼는 세상이 먼저 알아봤습니다. 모델 학원에 다닌 지 4개월도 채 안 됐을 때인 2019년 10월 현대백화점이 개최한 ‘시니어 패셔니스타 콘테스트’에서 지원자 1500여 명 중 ‘톱 10’에 들어갑니다. 그해 ‘KMA시니어모델선발대회’에선 최우수상(65세 이상)과 우정상을 받았죠. 캐나다 밴쿠버 패션위크 런웨이부터 앙드레 김 패션쇼까지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리송을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보니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 ―생각보다 아담하세요. 작은 키가 모델 활동의 걸림돌이 된 적은 없나요? 제 키는 160cm입니다. 보통 여성 시니어 모델 키는 170cm가 넘어요. KMA시니어모델선발대회에선 제가 참가자 중 제일 작았어요. 시니어모델협회장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리송이 나오면 키가 안 보인다.’ ‘저 모델은 키가 작은데?’가 아니라 그냥 ‘리송이 걸어 나오네’라는 생각만 든다는 거예요. 모델은 날씬하고 키가 커야 한다는, 틀에 짜여진 개념이 있잖아요? 시니어 모델은 달라야 합니다. 키가 작아도, 통통해도,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도 됩니다. 얼굴 전체가 근육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평생 축적된 마음의 근육들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길 바랍니다. 얼마나 많이 어떤 생각을 했는가. 아직도 눈빛은 뭔가를 꿈꾸고 있는가. 호기심에 반짝이고 있는가. 그래서 전 ‘소년 같으세요’라는 말을 가장 좋아합니다. ―‘시니어 모델’이라고만 하기 어려운 것이, 연극 무대에도 활발히 오르고 계신다고요. 39살이 되던 해 가슴 속에 차 있는 뭔가가 분출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욕구가 차올랐어요. 그 때 극단에 들어가서 약 10년 동안 가사와 연극을 병행했어요. 연극을 경험하면서 핀 조명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노 파트를 소화하는 게 꿈이었거든요. 제가 만든 ‘리송 극단’에서 스페인 극작가 세르지 벨벨의 ‘죽음 혹은 아님’이라는 작품으로 올해 2월 공연을 했어요. 20분 동안 혼자 대사를 읊는 것을 해낸 순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제 실력이 성에 차지 않아서 눈물을 흘려가며 연습했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귀하단 걸 느끼니 스스로를 밀어붙이기도 해요. ‘이 정도면 됐어’라는 관성에 젖지 않으려 노력합니다.―지난해 4월엔 아프리카 모로코 배경의 화보집을 내셨고, 최근엔 영화 촬영도 하셨다고요. 또 도전해보고 싶은 영역이 있나요? 최근에 친한 사람들과 ‘스타 인’이라는 시니어 창작자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시니어들이 도전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기획하는 일종의 기획본부입니다. 제가 남편과 주말마다 충북 괴산에 내려가는데 그 시골에서 만나는 노인분들 가슴에 다 열정이 있어요. 꼭 화려한 옷일 필요 있나요? 시장에서 파는 5000원짜리 몸빼바지(왜바지)를 입고 자유롭게 워킹해보는 경험만으로도 그분들의 자존감은 엄청 살아날 거예요. 지방에 가서 연극을 할 수도 있고요.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파장을 일으키듯 작은 활동 하나하나가 그들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온다면 큰 행복이 될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아주 강한 결핍은 아주 강한 사랑이 됐습니다. 리송은 젊었을 적 어깨가 드러나는 오프 숄더 상의와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었습니다. 경찰들이 자를 들고 다니며 치마가 무릎 위 20cm 이상인지를 재던 시절이었죠.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을 사 직접 옷을 만들어 입었고, 요즘 유행하는 ‘글래디에이터 샌들’을 대학생 때부터 신고 다녔습니다. 넘치는 끼를 오롯이 분출하기까지는 5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스물셋의 나이에 결혼한 뒤부턴 가족에 헌신하는 삶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1년 동안 약국을 운영하시기도 했고, 연극도 하셨어요. 그런데 한동안 가정주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안타깝게도 저희 부모는 저를 많이 사랑하시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직업군인 아버지, 초등학교 교사 어머니 모두 아주 엄격했습니다. 그들이 정한 규율에 따라 행동해야 했고, 양말과 속옷도 어렸을 때부터 직접 빨아 입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과 관심이란 걸 깨달았어요. 제가 받고 싶은 사랑만큼을 남에게 주는 게 몸에 뱄죠.그래서 주부의 길을 택했습니다. 내 가족에게 모든 사랑을 다 줘야 했기 때문에요. 제 머릿속은 굉장히 자유롭지만 스스로 적용하는 규정들은 꽤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올 때 반드시 집에서 맞아야 한다’, ‘이유식은 절대 남은 걸 데워 먹여선 안 되고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등 저 자신에게 아주 엄격했습니다. 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아는 인간 중 네가 가장 프로페셔널하다’고요. 네, 저는 프로페셔널 엄마이자 아내였습니다. ―사랑의 결핍이 사랑의 힘을 가르쳤다니, 역설적이네요. 반면교사는 가장 훌륭한 교사입니다. 아주 강한 결핍이 아주 강한 사랑으로 변한 거죠. 전 남편과 세 아이에게 땅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전 습관처럼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땅이라고 생각해라. 나를 딛고 도약해라. 내가 늘 단단하게 있겠다.’ ―누군가의 발판이 되기 위해 땅으로 존재하면서 갑갑함은 없으셨나요? 왜 없겠어요? 제 친구가 묻더라고요. 그 많은 끼를 어떻게 상자 속에 꾹꾹 밟아 놓고 살 수 있었는가. 제 숨 쉴 곳은 책이었습니다. 저처럼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겐 물음이 있어요. ‘내가 더 잘했으면 결과가 더 나아졌을까’라는 자책,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 책을 읽음으로써 의문과 자책에서 자유로워졌어요. 나를 붙들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결론을 내린 순간이 왔으니까요.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저를 막지는 못합니다.―책을 통해 자책과 의심을 극복하신 거네요. 리송 님의 ‘인생 책’을 한 권 꼽는다면요?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이요. 주인공 올렌카는 사랑하는 마음을 타고난 여인입니다. 그는 세 명의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건 그의 긍정이었습니다. 그는 두 남편과 사별했고, 혈육이 아닌 아이를 돌보지만 늘 상대의 장점만 보고 헌신적으로,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요. ‘삶은 이런 태도로 살아야 하는구나’를 배웠습니다. 제 머릿속에 부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평범하다고도, 비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교 자체로 두 사람을 망가뜨리는 겁니다.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하세요. 따뜻한 남편과 잘 자란 세 자녀, 70세에 전성기를 맞은 톱 시니어 모델. 일면 그는 부족한 것 없고, 원하는 건 다 이룬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수면 아래엔 백조의 발길질이 있었습니다. 그는 2022년 출간한 에세이집 ‘리송,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나를 이겨가며 나를 넘어온 사람이다.’ 리송은 유년시절의 아픔, 스스로를 향한 의구심과 자책을 호기심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채워 왔습니다. ―가정에 헌신한 주부에서 프로 모델이 되기까지 평범과 비범 사이를 무수히 오가셨는데요, 본인은 둘 중 어디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평범과 비범은 주변 사람과 나를 비교해서 나누게 되잖아요. 전 절대 남과 비교하지 않아요.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평범하다고도, 비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교하는 자체로 이미 두 사람을 망가뜨리는 겁니다.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그 사람이 가진 강점을 봐야 해요. 제가 남들과 좀 다른 점은 호기심으로 늘 눈빛이 살아있다는 것, 그 정도입니다.―리송 님의 가장 큰 호기심은 어딜 향해 있나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의 근육과 표정이 서서히 펴지는 걸 볼 때 행복해요. 그 과정은 마치 꽃봉오리가 서서히 벌어져 만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같아요. 전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요. 누군가의 뒷모습은 굳이 발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점은 내가 책임질 게 아니지만, 장점은 배울 수 있잖아요. ―알을 깨고 싶지만 선뜻 용기 내지 못하는 리송님 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매일 매일을 새로운 시작으로 봐요. 지나간 건 지나간 거예요. 앞을 봐야죠.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감사하고 귀하거든요. 누구나 한정된 시간을 살아요. 제가 지나고 있는 이 구간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저는 이 구간을 굉장히 귀하게 생각합니다. 과정을 늘 웃으면서, 깨어있으면서, 타성에 젖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해나가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은 각자 다르겠지만 일단 해 보세요. ‘난 나이가 들었으니 됐어’, 이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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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드 오션, 과감히 버리세요. 그리고 실험하세요. 나만의 블루오션에서”[BreakFirst]

    ①목표에 압도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②남의 승리는 나의 패배로 느껴진다.③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원동력이 없다.위의 세 가지 항목 중 독자 여러분은 몇 가지에 해당하시나요? 전부 다 해당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면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같은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리는 것에 익숙해졌을 테니까요. (저를 포함해서요.) 남과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과감히 내던진 이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살이 14년 차 방송인 타일러 라쉬(36)입니다. ‘비정상회담’에 나온 ‘대한미국인’, 9개 국어가 가능한 ‘뇌섹남’으로 잘 알려졌지만 그를 한 단어로 정의하긴 힘듭니다. 석사 과정 대학원생으로 한국에 온 그의 직함은 방송인, 작가, 영어 강사, 환경운동가, 에이전시 대표, 한글 과자 사업가로 끊임없이 바뀌고 있습니다. 안정과 인정을 바랐다면 택하지 않았을 길입니다.그는 어떻게 남들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까요? 답은 ‘실험’에 있습니다. 거창한 도전보다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의 실험을 해 보는 것이 관성을 깨는 첫걸음이라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그의 머릿속 실험실은 매일 바쁘게 돌아갑니다. 아티스트와 회사의 수익 배분율이 9대 1인 에이전시 ‘웨이브 엔터테인먼트’의 창업, 한국인도 만든 적 없는 한글과자 출시…. 모두 머릿속 실험실에서 작게 시작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인터뷰는 타일러가 방송 등을 통해 선보였던 그의 독특한 한국어 표현 스타일을 최대한 살렸습니다.―한국에 온 지 14년 차가 되셨어요. 어쩌다 한국에 오래 눌러앉게 되신 건가요?3년 정도 있다 가려고 했어요. 원래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잖아요. 학교를 다니다 ‘비정상회담’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방송을 시작했고, 창업 등 여러 일을 하게 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왔네요. 3년 전 영주권도 취득했고요. “한국에서 계속 살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최종 정착지라는 게 있을까요? 유럽에서 창업할 수도, 발리에서 쇼핑몰을 차릴 수도 있는 시대잖아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어요.―미국에선 외교관을 꿈꾸셨다고요? 대학 시절 외교관이 꿈이었어요. 외교관 시험에 지원했고, 어렵게 마지막 관문인 3차까지 갔는데 아슬아슬한 점수 차이로 떨어졌어요. 불합격 사유를 알려주는데 그 이유가 황당했어요. ‘경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죠. 전 어렸고, 대학 졸업도 안 한 상태라 경력이 없을 수밖에요.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낙방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게 있습니다. ‘남이 정한 길대로 가는 방식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굉장히 크다.’ 타인의 기준에 맞추면서 결과도 보장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어요. 나만의 길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교관 시험 낙방은 그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겼습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기회가 된 겁니다. ‘내 삶의 선택권과 주도권을 갖고 싶다’는 확신을 갖게 된 그는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합니다. 누가 시켜서, 남들이 좋다고 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들끓는 호기심과 열정이 가리키는 대로 가보기로 합니다. 2011년 미국 국무부 장학생으로 한국에 와 서울대 외교학 석사 과정을 밟던 외교학도는 변화를 택했습니다.‘도전’하지 마세요. 당장 실행 가능한 최소 규모의 ‘실험’을 하세요. ―방송인, 환경운동가, 작가, 엔터테인먼트 대표, 한글과자 사업까지… 대학원생으로 한국에 와서 ‘N잡러’ 그 자체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원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인가요? ‘도전’이라고 하면 거창한 목표를 설정해야 할 것 같잖아요. 전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이걸 실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 규모가 뭘까?’를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시작부터 거창한 목표를 잡으면 그 규모에 압도돼 포기하거나, 시간과 비용이 많이 투입돼서 비효율적이죠. 글을 쓰고 싶다고 ‘책을 내자’거나, 창업을 하고 싶다고 ‘10억 원을 투자받자’고 마음먹을 필요가 있을까요? 최소 단위의 실험을 기준으로 보면,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어요.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궁금한 것을 꺼내 실험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삶의 낙이에요. ―한국 사회에선 분위기나 여러 상황상 최소한의 실험을 시도하기 어려운데요.한국 사회의 획일성이 근본적 원인 같아요. 진로, 투자, 심지어 창업에도 틀이 있고, 그걸 벗어나면 위험하다는 공포에 사로잡혀요. 한 가지 결과물을 향해 모두 달려가니까요. ‘남이 이긴 바는 내가 진 바’가 돼요. 대부분의 사람이 사회가 정한 ‘올바른 길’로 가려 하기 때문에, 그 영역은 레드오션을 넘어 아예 낄 틈조차 없는 그런 바다가 돼 버려요. 사각지대를 바라봐야 기회가 생깁니다. 블루오션을 봐야 한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보통 우리가 ‘어떤 걸 더 배워야 할까요?’라고 되물어요. 나한테 없는 능력을 취득해야 블루오션을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덧붙이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점을 더하는 게 아니라 기존 관점을 깨뜨려야 해요. 부동산을 예로 들어 볼게요. 평생 일해도 대출 없인 집을 못 살 정도로 한국 부동산 시장이 어려운데, 굳이 한국에서 집을 사야 하나요? 일본 나가사키의 낙후된 주택이 5000만 원 정도에 거래된대요. 그걸 친구들과 돈을 모아 사서 에어비앤비로 운영할 수도 있고, 노후가 고민이라면 은퇴 이민 제도가 잘 갖춰진 말레이시아로 가도 돼요. 눈앞에 보이는 것만 쫓으면 결국 레드오션밖에 안 보입니다. 스스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봐야 해요. ―말처럼 쉬운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블루오션으로 눈을 돌리고, 뭐든 실험해보는 성격을 어떻게 갖게 됐는지 궁금해요. 유년 시절에 받은 ‘학습자 중심 교육’의 영향이 커요. 버몬트에서 다닌 학교에선 시험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직접 기획해 과제를 하도록 했어요. 첼로, 수학, 뜨개질을 좋아하던 제 친구는 모차르트의 여러 교향곡을 수학적으로 분석해 패턴을 만든 뒤, 패턴에 맞춰 원단을 짰어요. 뭘 하고 싶을 때 ‘이래서 안 돼’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워요. 또 그냥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됐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은 특이하거나, 남들이 안 해 본 일이라 누군가가 방향을 제시해줄 수 없거든요. 제가 0부터 만들어 나가야 해요. 낄 틈도 없는 레드오션을 과감히 버리세요. 블루오션으로 과감히 눈을 돌려라. 그 바다에 뛰어드는 대신 발부터 적셔 봐라. 타일러는 두 단계를 거쳐 새로운 길로 들어섭니다. ‘물이 너무 차가운 건 아닐까? 다리도 넣어도 될까?’ 조금씩 변수를 조정해보면서 말이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블루오션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타일러가 벨기에 출신 방송인 줄리안 퀸타르트와 함께 만든 에이전시 웨이브 엔터테인먼트도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외국인이 대표인 엔터테인먼트 업체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합니다.―지난해 3월 웨이브 엔터를 만드셨어요.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2014년 방송을 시작했는데, 섭외 문의가 SNS, 카톡, 지인, 이메일 등 다양한 경로로 들어왔어요. 매니저가 자체적으로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고, 자세한 정보를 몰라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어요. 답답함을 느껴서 2017년에 직접 스케줄 관리 시스템을 개발했어요. 시스템으로 섭외 요청을 받는 ‘창구 일원화’를 한 거죠. ‘일이 줄지 않을까’라는 주변 우려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어요. 누락되는 섭외가 없었거든요. 더 큰 장점은 이 일에 관여된 모든 사람이 시스템을 통해 섭외가 들어온 콘텐츠의 내용, 장소, 출연료, 일정까지 동일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022년 비슷한 고민을 하던 줄리안에게 이 시스템을 적용해봤고, 결과는 성공적이었어요. 여러 실험 끝에 시스템이 효과적이란 확신이 생겨 창업했습니다.―섭외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편리한 시스템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섭외하고 싶은데 연락처가 없거나, 이메일을 보내놓고 답이 올 때까지 무기한 기다리는 경우 많잖아요. 전 이게 꼭 한정판 전략 같아요. 제품을 만들었는데 어디서 팔지는 안 알려주는 거죠. 아티스트를 섭외할 수 있는 장치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합니다. 홈페이지에 있는 양식에 내용을 넣어 제출하면 저희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어요. 모든 이의 섭외 요청이 접수되고, 모두에게 답장이 갑니다. ―아티스트가 섭외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일정을 선택한다는 점도 신선했습니다. 우리 회사에선 아티스트가 왕입니다. 아티스트에게 알 권리와 결정권을 온전히 줍니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모든 섭외 내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본인이 결정해요. 대표 입장에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도 의견만 줄 뿐, 절대 강요하진 않습니다. 단 책임도 따릅니다. 들어오는 섭외를 통해 ‘시장이 나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구나’를 이해하고,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죠. 아티스트와 회사의 수익도 9대 1입니다. 보통 6대4, 7대3인 것과는 다르죠. 매니지먼트와 에이전시, 기획사 역할을 모두 하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체와는 다르게 에이전시 역할만 하기 때문에 이런 분배가 가능합니다.그의 실험실은 매일같이 바쁘게 돌아갑니다. 지난해 10월엔 ‘한글과자’를 출시했습니다. ‘알파벳 과자는 많은데 한글과자는 왜 없지?’라는 궁금증이 발단이었죠. 쉬지 않고 일을 벌이는 원동력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안 하고 어떻게 넘어가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를 움직이는 건 거창한 원동력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어떻게 꽃 피울지 궁금해하는 ‘호기심’입니다.내 아이디어를 실행할 사람은 나 뿐입니다. 내가 아니면 아이디어는 죽습니다.―지난해 연예기획사를 꾸린 지 얼마 안 돼서 또 ‘한글과자’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셨습니다.영어 학습 프로그램 ‘Speak Up Meet Up’을 진행하던 중 참가자들에게 줄 상품이 필요했어요. 알파벳 과자를 주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문득 ‘한글과자는 있나?’라는 궁금증이 들었어요.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없는 거예요! 너무나 충격이었어요. 인도인 친구 니디에게 연락해 한글과자가 없다고 하니, “말도 안 돼!”라며 놀라더군요. 그렇게 둘이 같이 한글과자를 만들기로 했어요. 8월 집 부엌에서 만들어보기 시작했고, 10월 9일 한글날에 상품을 냈어요. 단군신화를 모티브로 해 쑥맛, 마늘맛을 냈고, 최근 쌀 맛, 초콜릿 맛을 추가했습니다. ―미국인이 만든 한글과자라는 게 신선합니다. 한국인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거잖아요. 제가 한글과자를 만들려고 한다니까 “한국인들 관심 없을 것 같은데?”라는 피드백을 준 사람도 있어요. 한글박물관까지 만든 나라가 한글과자에 관심이 없다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충격받았어요. 한글과자가 없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해요. 알파벳 과자를 먹으면서 영어 공부를 했듯 한글 교육에 활용할 수 있고, 해외 친구들한테 선물 주기도 좋고요. 최근 한 와인바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고 한글 과자를 이용해 주어진 단어를 빨리 만드는 게임을 진행했어요. 게임이 10시에 끝났는데 와인바 사장님이 직원들이랑 새벽 3시까지 했대요. 한글과자를 갖고 3시까지 놀았다는 말에 행복했습니다.―새로운 것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원동력이 뭔가요?‘이 아이디어가 실현되면 어떨까?’라는 궁금증이 죽도록 커요. ‘이게 가능할까?’ 라는 부정적 감정에 압도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감정을 이겨내고 ‘한 번 해보자’라는 마음을 먹어야 해요. 한번 해 보면, 내 관점에서만 보이는 아이디어를 시도하는 것에 중독돼요. 이걸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오거든요. 이 아이디어를 책임지는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까요. 내가 안하면 아이디어는 죽잖아요.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어요.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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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이스트 출신 과학자가 도축장 돌며 짐승 피 받아온 이유 [BreakFirst]

    3초의 정적. 여성 헬스케어 기업 이너시아의 김효이 대표(26)가 창업하겠다고 주변에 말했을 때 마주한 반응입니다. 정적 뒤에는 “왜 굳이?”라는 질문도 따랐습니다. 우려는 당시 23살의 어린 대학원생이 창업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창업 아이템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뛰어든 영역은 생리대 연구와 제조였습니다.‘한 번 쓰고 버리는 제품에 왜 혁신적 기술이 필요해?’라는 친구들의 의구심, ‘전공을 살려 인공지능(AI) 분야로 창업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교수님, 부모님의 우려까지…. 하지만 ‘내 불편함을 내 손으로 해결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습니다. 일회용 생리대에 들어 있는 휘발성유기화합물(VOCs)로 인해 생리통 등 여러 신체적 불편 증상이 생긴다는 의혹은 2017년 이후 계속됐습니다. 실제로 VOCs 추정치가 생리통이나 신체 증상과 관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환경부 발표(2022년)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연구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렸습니다.‘친환경 물질을 쓰면서 흡수력은 더 좋게 만들 수 없을까?’ 관성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 대해 ‘불편한’ 감각을 깨우는 것은 혁신의 시작이었습니다. 김 대표는 카이스트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세 명의 여학우와 함께 밤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과학고 조기졸업, 카이스트 학사, 석사, AI 박사과정과 ‘생리대 개발’이 쉽게 연결되지는 않는데요.카이스트에서는 지금도 굉장히 좋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결과가 실제 우리 삶으로 다가오는 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친구들 네 명이 모여서 ‘우리가 연구해서 우리 삶을 직접 바꿔보자’는 결심을 했죠. 그중 하나가 생리라는 문제였고요. ‘생리 너무 고통스럽다. 이 문제 해결하면 노벨상 수상감이다’라는 말을 저희끼리는 매일 하거든요. 저도 고등학교 시절 제 생리 기간을 전교생이 알았다고 할 정도로 생리통이 심했어요. ‘생리통을 해결할 방법은 뭘까?’가 삶의 큰 과제였거든요. 그런데 다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이 문제를 누군가 해결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의 불편함을 직접 타파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이너시아를 설립하게 됐죠.―2017년부터 이어진 일회용 생리대 유해 물질 논란으로 요즘엔 친환경, 유기농을 내세운 생리대들이 많이 나왔던데요. 생리대를 감싸는 커버에는 유기농 순면을 사용했지만, 그 속에 들어간 흡수체에 미세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제품도 있었습니다. 미세 플라스틱을 뺀 제품의 경우 흡수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고요. 저희는 수술용 지혈제 성분인 셀룰로스에 주목했습니다. 친환경 물질인 셀룰로스를 써서 논란에서 자유롭고, 흡수력도 만족스러운 제품을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의료 AI 박사과정을 밟다가 생리대를 개발하겠다고 하니 주변 반대도 컸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동료들에게 창업하기로 했다고 하면 “축하한다” “응원한다”고 해요. 그다음 “무슨 창업을 하는데?”라는 질문에 “생리대요”라고 하면 3초간 정적이 흐르더라고요. 당시 AI를 접목한 소프트웨어 창업이 유행하는 시기였거든요. 저희만 하드웨어, 그것도 생리대를 개발하겠다고 하니 당황할 만도 했죠. 시장조사를 위해 전국을 다니며 생리대 개발자, 생산자, 마케터들을 만났는데 악담도 많이 들었습니다. ‘생리대는 싸게 많이 만들수록 좋다’, ‘생리대 만들겠다고 한 친구들의 끝이 좋지 않았다’ 같은 말을 하더라고요.도축장에 가 피를 구하니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 의심도 받았죠.물리학 제1 법칙, 관성의 법칙입니다. 정지해 있는 물체는 항상 정지하려고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운동하려는 성질을 말합니다. 교수님, 부모님, 친구들의 우려는 관성의 또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관성을 깨겠다는 야심과 패기가 컸습니다. 김 대표가 만든 ‘이너시아’(inertia)에도 이런 뜻이 담겼습니다. 이너시아는 영어로 ‘관성’이라는 뜻입니다. 움직일 기미가 없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를 움직이게 만들어 ‘운동하는 관성’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주변 사람들의 우려를 뒤로 하고 생리대 개발에 뛰어드셨습니다. 학부생이 쓸 수 있는 공용 실험실에서 몰래 실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원 수업과 과제가 끝난 오후 8시부터 새벽 4시까지가 활동 시간이었습니다. 새벽에 실험실 불이 켜져 있으니 출근하던 교수님들이 문을 벌컥 열었다가 놀라신 적도 있어요. 생리대 흡수력을 테스트하려면 피가 필요해 전국 도축장도 돌았습니다. 물과 피의 속성이 다르거든요. 전국에 2개 있는 도축장에 직접 가서 피를 공수해 왔어요. 도축장에서 일하시는 분께 “버리실 피 좀 주실 수 있을까요?” 하니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죠. “생리대를 개발하고 있는 카이스트 학생입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그제야 남은 선지나 피를 주셨어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돌아보면 성장은 늘 ‘계단형’이었어요. 6개월 정도 정체됐다가 어느 순간 한 번에 문제가 해결되더군요. 정체 구간에 빠져있을 땐 매일 같이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한번은 공동 창업자 친구가 액체 질소를 사용해 실험하다가 다칠 뻔했어요. 그 친구가 놀라서 우는데 ‘이게 맞나’ 싶었어요. 저도 그 친구를 붙잡고 엉엉 울면서 “정말 미안하다”고 했어요. 공동 창업자들 모두 영재고, 과학고 나와서 카이스트 학사, 석사까지 마친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친구들이잖아요. 저를 믿고 안정적인 길 대신 모험을 택한 건데 ‘피 떨어뜨리는 실험이나 시키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죠. 낮에는 AI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밤에는 생리대를 개발하는 창업가라는 이중생활을 이어가길 6개월. 공장에서 만든 생리대 샘플은 300개를 넘었습니다. 카이스트 대학원생들의 패기를 믿고 수억 원을 투자한 투자자는 제품 출시를 압박했습니다. 뛰어도 모자란 그 시점, 김 대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바보 같았던 걸까요.―6개월 넘게 개발하던 생리대를 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갔다고요. 천연 소재인 셀룰로스만으로 충분한 흡수력을 구현할 수 없어서 셀룰로스에 다른 원료들을 합성해 흡수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가 원하는 ‘100%의 안전성’을 보장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인풋은 셀룰로스였는데 아웃풋은 다른 물질이 된 거니까요. 다른 원료 첨가 없이 오로지 셀룰로스만 활용해 흡수체를 만들기로 목표를 재설정했습니다. 셀룰로스의 분자 구조, 모양 등에 따라 흡수력, 재질, 사용감이 달라지기 때문에 가공 작업을 수없이 많이 반복하며 최적화에 공을 들였습니다. 그 과정에만 1년이 걸렸습니다. ―공정을 ‘최적화’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흡수체라고 해서 무조건 흡수력만 높이는 게 아닙니다. 물 흡수 비율은 낮추고, 분비물인 혈(血)의 흡수 비율은 월등히 높이는 식입니다. 물이 덜 흡수되니 덜 축축해지고, 혈 흡수를 많이 하니 덜 찝찝하겠죠? 세밀한 부분까지 조정해서 소비자의 착용감을 개선했습니다. 높은 수준의 안전성 검사도 진행했습니다. 투자금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수억 원을 들여 세포독성 검사, 피부 자극 검사를 진행했어요. ―‘생리대에는 기술력이 필요 없다’고 말하던 업계 관계자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셀룰로스 100%로 흡수체를 만들었다고 하니 거짓말이냐고 의심하는 경쟁사도 있었습니다. 간장게장 맛의 100%를 간장으로만 냈다고 하면 ‘합성 조미료 넣은 거 아냐?’라고 의심하는 것처럼요. 의심의 시선이 억울하기도 했지만, 서서히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2022년 아시아 기업 중 유일하게 스위스 로잔연방공대가 주관하는 펨테크(femtech·female과 tech의 합성어) 육성 프로그램에 선정됐고, 지난해 중소기업벤처부가 선정한 ‘소재·부품·장비 스타트100’에도 뽑혔습니다. 슬로건 하나도 내부에서 판단하지 않아요. 우선 다 출시합니다. 소비자들이 가장 정확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주거든요. 100% 셀룰로스 소재도, 최적화 공정도 중요했지만, 생리대 개발 과정에서 김 대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소비자의 반응입니다. 이론과 숫자가 가장 중요한 실험실의 연구자에서, 시장의 반응을 면밀히 살피는 사업가로 변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연구자로 시작해 이론을 현실로 구현하는 개발자, 투자를 유치하고 제품을 마케팅하는 사업가로 변해왔습니다. 그 과정이 쉽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 연구실에서 좋은 기술을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어요. 훌륭한 기술을 접목한 생리대를 개발했으니 투자가 붙고, 제품이 팔리는 게 당연하다고 본 거였죠. 그런데 정작 투자자들의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공돌이들은 물건만 잘 만들고 끝이다. 그 물건을 소비자가 정말 원하는지, 소비자들이 어떤 걸 바꾸길 원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어요. “기술력이 뛰어난 기업보다 판매력이 좋은 기업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대놓고 말하는 투자자도 있었고요. 결국 메시지는 같았어요. ‘소비자 지향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소비자 지향적인 사고방식, 어떻게 실천하셨나요? 완제품 샘플을 20개 만들어서 전부 사용자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중고 물품 판매 앱을 비롯한 지역 커뮤니티에서 체험단 300여 명을 모집해 그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들어서 개선했습니다. 창업자들이 각각 하루에 10~20명의 소비자들을 만나 인터뷰도 했어요. 1000여 명으로부터 생리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의견을 받았습니다. 소비자 지향적인 사고는 지금도 이너시아의 근간입니다. 저흰 슬로건 하나도 내부에서 판단하지 않아요. 우선 다 릴리즈 해봅니다. 소비자들이 가장 정확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주거든요.생리대 개발한다니 피식피식 웃는 사람들도 있었어요.김 대표는 요즘도 3초의 정적과 마주합니다. 다만 이유는 달라졌습니다. 창업하겠다고 나섰을 땐 의구심이었다면 지금은 놀라움입니다. 월 매출은 수억 원에 달합니다. 제품을 처음 선보인 2022년 ‘월 매출 1억 원’이 꿈의 숫자였던 걸 생각하면 큰 변화입니다.―매출의 성장세가 가파른데요.올 1, 2월 매출이 지난해 연 매출을 넘었습니다. 월 매출은 수억 원대에 접어들었고, 일 매출만으로 3000만 원을 달성한 날도 있습니다. ‘나의 불편함에 동감하는 소비자가 어딘가에 있다’라는 확신 하나로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시장에 뛰어든 건데, 제 확신이 맞았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어요. 창업 초반 컨퍼런스를 갔을 때 생리대를 개발한다고 하면 피식피식 웃는 사람도 있었어요. ‘쟤넨 뭐 하는 애들일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도 받았고요. 지금은 다릅니다. 좋은 제품을 개발해냈고, 또 소비자가 좋아해주고 있으니까요.―이너시아를 어떤 기업으로 키우고 싶으신가요?‘이너시아’의 뜻이 ‘관성’이잖아요. 여성들이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관성적으로 사용해왔던 모든 물건을 과학 기술로 하나둘씩 바꿔 나가겠다는 의미를 담았죠. 지금까지 개발을 시도했던 제품이 30개 정도 됩니다. 불편함을 느꼈던 물건이라면 모두 개발에 나설 겁니다. 어떤 여성 소비자가 ‘이 물건이 사고 싶은데 어디 걸 사지?’라고 고민할 때 주저 없이 이너시아를 선택할 수 있는 그 날을 꿈꿉니다.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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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장이 또 이상한 소리하네’…직접 선수로 뛰며 개발하자 세계가 알아줬다[BreakFirst]

    목에 핏대가 설 정도가 아니었을까. 2014년 3월 경기 광주시 길림양행(현 바프·HBAF) 사무실에서 윤문현 대표(46)는 직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생각도 못 합니까? 말도 못 하나요? 할 수 있는 때까진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젊은 사장님이 목소리를 높여도 직원들은 냉랭했습니다. 대형마트 자체 상표(PB) 견과류 제품을 납품하던 업체인데, 시즈닝을 한 ‘맛있는 견과류’를 자체 개발해서 내놓자고 하니 직원들은 당황했습니다. 매사에 긍정적 태도를 보였던 생산팀장까지 표정이 영 별로였습니다.“저희는 개발팀도 없는 회사인데, 어떻게 가공 제품을 만듭니까?”개발팀은 없었지만, 윤 대표에겐 ‘생존 본능’이 있었습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돼 사라지고 만다.’ 2006년 갑자기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아 경영하게 되면서 그는 절박함을 배웠습니다. 결국 반대를 무릅쓰고 직원 1명과 함께 무작정 가공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정리해둔 레시피는 수백억 원대 매출 성장의 씨앗이 됐습니다. 유행을 넘어 사회현상으로 주목받았던 ‘허니버터’ 열풍에 빠르게 올라타는 기술적 기반이 된 겁니다. 빚을 걱정하던 회사는 연 매출 1000억 원대의 건실한 기업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괜찮은데 굳이? 왜?’라는 관성을 매번 거슬러 온 윤 대표의 몸부림의 결과입니다.회사 사람들 모두 저를 싫어했습니다. 회사를 헤집고 있었으니까요.―2006년 아버지의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업을 이어받으셨습니다. 길림양행은 미국에서 아몬드를 수입해 국내에 공급하는 단순 유통 회사였습니다. 아몬드 수입 규제가 풀리고, 공급 경로가 다양화하면서 납품처가 끊기고 있었습니다. 제조업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공장을 세우기 시작하셨는데,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전 그때 대학을 갓 졸업하고 대기업 입사를 일주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받게 됐는데 100억 원의 빚과 함께였습니다. 병상에 계신 아버지를 보면서 죄송함과 감사함이 겹쳤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돈 벌고 계셨구나’를 처음 깨달았거든요. 회사는 부도 직전이었지만 시도도 안 할 순 없었습니다. 제조업으로 가거나, 사업을 접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회사를 지배하던 가장 큰 관성은 무엇이었나요?‘우리 회사는 유통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부정적 확신이었습니다. 회사 직원, 거래처 사람들로부터 ‘제조로 가는 건 더 빨리 죽는 길이다’라거나 ‘견과류로는 돈 못 번다’ 같은 말을 듣기도 했어요. 제조 공정을 구축하려면 투자 비용이 들어가는데, 진입 장벽이 낮으니 경쟁사가 넘쳐나고 그렇기 때문에 수익은 못 내는 구조라는 말이었죠. 처음엔 회사 사람들 모두 저를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사장님이 쓰러지시고, 새파랗게 어린 아들이 와서 회사를 헤집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윤 대표는 28살이었다)―회사를 이어받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뭔가요?복잡하게 엉킨 실타래가 있다고 해보세요. ‘어디를 어떤 순서로 당겨야겠다’고 계획하진 않죠? 어느 한 곳이 풀리면 옆의 것이 풀리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 풀리게 됩니다. 실타래 풀 듯 문제를 풀기로 했습니다. 당장 매출을 만드는 게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대형마트는 PB 상품 개발에 한창이었는데, 먼저 그 시장을 뚫기로 했습니다. 대형마트에 견과류 PB 상품을 납품하는 업체가 당시에 7~10곳 있었습니다. 끼어들 여지가 없었죠. 그래서 전국 마트, 편의점을 돌며 ‘언제든 연락 달라’며 인사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한 곳씩 거래처를 확보한 뒤에는 다들 하기 싫어하는 일을 찾아서 했습니다. 판촉 사원을 두고, 시식 행사를 하는 겁니다. 인건비가 들고 사원 관리도 귀찮아 전부 꺼리는 일이었죠. 그것부터 했습니다. 모두 기피하는 일을 모아서 하다 보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당시 우리 회사엔 개발팀도 없었거든요. 맨땅에 헤딩으로 시작했습니다.대형마트에 PB 상품을 납품하면서 실타래는 풀린 듯했습니다. 회사는 2010년 460억 원, 2012년 520억 원, 2014년 65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그때 윤 대표는 또 한 차례 ‘엉킨 실타래’를 발견합니다. PB 상품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PB 상품은 대형마트라는 브랜드와 유통 채널을 활용해 마케팅이나 유통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하고, 소비자에게 값싸게 제공됩니다. 대신 납품업체의 마진도 그만큼 적습니다. 윤 대표는 독자적인 레시피를 개발해 자체 브랜드를 만들기로 합니다. 2014년 직원들과 또 한 차례 설왕설래가 이어졌습니다.―당시 매출을 보면 안정적인 상황이었는데 사업을 다른 방향으로 확대하려고 하셨습니다.미국과 유럽을 다니며 시장 조사를 하면서 한국에도 가공 견과류 시장이 반드시 생긴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미국의 마트를 가 보면 견과류 진열대의 4분의 1은 가공 견과류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한국에서 견과류에 대한 인식은 ‘건강식품’에 가까웠죠. 원물 그대로를 먹었습니다. 다양한 맛이 없었죠. 저는 견과류가 ‘스낵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견과류를 수입해 포장 판매하는 제조업은 진입장벽이 낮아서 경쟁사도 많았고요. 차별화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선 가공 견과류 시장이 전체 견과류 시장의 5%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 험난해 보이는 길을 가려니 직원들의 반발이 컸을 것 같습니다. 당시 회사엔 개발팀도 없었습니다. 직원들도 냉랭했습니다. 직원 한 명을 데리고 ‘맨땅에 헤딩’으로 아몬드 가공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쿠키 가게를 운영하던 지인에게 부엌을 빌려서요. 가장 어려웠던 건 당액으로 아몬드를 코팅한 뒤 시즈닝 가루를 입히는 기술이었습니다. 코팅된 아몬드가 서로 들러붙고, 시간이 지나면 눅눅해졌거든요. 당액의 농도, 냉각 시간을 달리하며 시행착오를 반복해 레시피를 완성했습니다. 바로 써먹지는 못해서, 일단 레시피가 담긴 문서를 사무실 서랍 아래 칸에 넣어 놨죠.―그 레시피 덕분에 히트 제품인 ‘허니버터아몬드’가 태어났군요.기억하시겠지만 2014년에 허니버터칩(해태제과) 인기가 엄청났습니다. ‘허니버터고등어’ 까지 나온 걸 봤습니다. 당시 편의점 GS25에서 ‘허니버터칩같은 제품 없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유행이 한창일 때니까, 2주 안에 가져오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샘플 제조를 담당하던 직원에게 아몬드를 튀기지 말고 구워서 당액을 묻힌 뒤에 허니버터맛 가루를 입히라고 지시했습니다. 직원이 “이렇게 하면 아몬드끼리 다 들러붙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때 서랍에 넣어두었던 레시피가 떠올랐습니다. 그 레시피로 2주 만에 허니버터아몬드를 만들었습니다.2주 만에 탄생한 ‘허니버터아몬드’는 회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습니다. 출시 첫 달 매출이 2억 원이었는데, 다음 달에는 10억 원, 그다음 달에는 20억 원이 됐습니다. 별다른 마케팅이나 판촉을 하지도 않았는데 중국업체 바이어가 회사에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수출국이 25개국으로 늘었습니다. 바프의 매출액은 2018년 1400억 원까지 치솟았습니다. ―돌아보면 허니버터아몬드만 반짝 성공하고 그대로 끝날 수도 있었던 시기였습니다.허니버터아몬드를 낸 뒤 경쟁사들이 유사 제품을 만들었는데 우리 제품에는 못 미치는 것 같았어요. 직원들도 ‘대표님, 다른 회사들은 못 따라 합니다’라고 말했죠.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허니버터아몬드 같은 제품을 만드는 건 자물쇠를 푸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000부터 999까지 세 자리를 넣으면 언젠가 풀리죠. 운이 좋으면 빨리 풀리고요. 후속 제품을 만들어 성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업체들이 자물쇠를 풀 동안 시장 점유율을 높여야 하니까요. 회사에선 ‘허니버터아몬드 생산 공정만 24시간을 돌려도 물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데 왜 신제품을 얹으려 하느냐’고 반대했습니다.―직원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신제품으로 호불호가 강한 와사비맛을 선택하셨습니다.내부 반발이 컸습니다. 신제품도 안 되는데, 와사비맛은 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와사비맛 제품이 팔리는 걸 본 적이 없대요. 전 ‘제대로 만들면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와사비는 원래 고기나 밥에 얹어 먹으면 잘 어우러지는 식재료잖아요. 와사비향을 메인이 아닌 ‘터치’로 기로 하고, 육수맛을 가미했습니다. ‘10명 중 9명이 5점을 줘도 한 명이 10점을 주는 제품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마니아층을 공략하면 추가 매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36가지 맛에 달합니다. 더 개발할 게 있을까 싶은데요. 6개월 동안 마카다미아를 비롯해서 견과류에 입힐 101가지 맛을 개발했습니다. 유럽, 미국, 일본에 비해 한국은 마카다미아 소비량이 굉장히 낮은 국가거든요. 이번에도 제가 마카다미아에 새로운 맛을 입혀서 내자고 했더니 직원들은 ‘마카다미아는 안 팔립니다. 아몬드로 내시죠?’라고 하더라고요. 이번에도 직원들에게 반문했습니다. “바프가 국내 최대 견과류 브랜드인데, 우리가 안 하면 누가 마카다미아 취급하겠습니까. 선두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합니다.”좋아하는 사람 계속 생각나듯, 회사가 좋으면 계속 생각나겠죠. 인터뷰하던 윤 대표가 스마트폰을 열어 사진첩을 뒤적였습니다. 그가 내민 사진에는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크기의 ‘딸기 맛 마카다미아’ 모형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요즘 사무실에서 모형을 이리저리 만지며 ‘어떻게 하면 딸기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 수 있을까’ 고심 중이라고 합니다. 손톱 크기만 한 마카다미아의 각도까지 신경 쓸 정도로 그의 머릿속은 오직 견과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관성을 깨려고 할 때마다 직원들의 반발이 컸던데요. 설득의 방법이 있었나요.회의 때 ‘사장이 또 이상한 소리 하네’라는 직원들의 표정을 종종 만나죠. 생각해보면 제가 직접 선수로 뛰는 게 가장 좋은 설득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리더라면 어떤 사안이든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는데, 그건 제가 직원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직원들도 저 같았으면 좋겠는데 억지로 되는 건 아니죠. 좋아하는 사람이 계속 생각나듯, 회사를 좋아하고 회사 생활이 즐거우면 자연스럽게 계속 생각나겠죠. 직원들도 그렇게 될 수 있는 회사를 만들려고 합니다. ―바프를 어떤 회사로 키우고 싶으신가요.‘멋있는 회사’가 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을 멋지다고 표현할 때 여러 이유가 있는 것처럼, 멋있는 회사에도 여러 요건이 있습니다. 매출은 기본입니다. 회사의 성과는 매출이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돈만 많다고 멋있는 회사라고 하진 않죠. 직원들이 즐겁게 다녀야 합니다. 직원들의 만족감과 경험치가 업무에 반영되거든요. 그래서 회식도 평범한 곳에선 안 하고, 직원들에게 헬스장도 끊어 줍니다. 가장 중요한 건 도전정신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회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구독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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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동김밥은 저렴한 냉동식품?’…편견을 깨자 길이 나타났다[BreakFirst]

    폭우. 경남 하동의 섬진강이 범람하고 화개장터가 침수된 2020년 8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동에서 김밥 사업을 하던 ‘복을 만드는 사람들’(복만사) 조은우 대표(43)는 도로를 뒤덮은 빗물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공장도 물에 잠겨버렸으면 좋겠다.’ 내 안에 포기할 용기조차 없을 땐 외부의 힘으로 포기 ‘당하고’ 싶다는 비겁한 마음이 스미곤 합니다. 조 대표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2년 걸려 만든 ‘냉동김밥’은 시장의 외면을 받고 있었습니다. 공장이 물에 잠기면 ‘김밥을 세계에 수출하겠다’던 포부도 함께 없던 일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주문량이 폭주해 공장을 확대해야 하는 지금 상황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지만, 기회를 잡은 것은 관성을 깨고 2년간 절치부심한 한 조 대표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그동안의 여정이 궁금합니다. 대학에서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전공과 관련된 회사에 취업했지만, 사업에 갈증이 있었죠. 처음엔 외식업에 뛰어들었어요. 프랜차이즈를 갖는 게 꿈이었거든요. 20대에 두 번 고깃집을 차렸고, 그때 번 돈으로 호기롭게 상경했습니다. 죽집을 시작했는데 결국 망했어요. 그때 남은 재산이 1000만 원이었는데, 그 돈을 들고 하동으로 귀촌했습니다. 죽을 만들던 노하우를 살려 이유식 사업을 벌였는데, 공동 창업자들과 의견이 달라 갈라섰습니다. 하동을 대표하는 지역 명물을 만들어보고 싶어 빵과 호떡 사업을 벌였는데 반응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2017년에는 ‘대롱치즈스틱’이란 걸 만들었어요. 꿈이 이뤄지나 싶었습니다. 대구 동성로 1호점을 시작으로 13호점까지 지점이 늘어났고, 고속도로 휴게소 130곳에 입점했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국내에서는 생소한 냉동김밥을 개발하기 시작하신 거죠? 한창 사업을 키워나가던 때였는데, 2018년 12월쯤이었습니다. 기사를 봤는데, 일본의 무인양품에서 한국식 냉동김밥이 대박이 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만들어서 수출해볼까?’라는 생각이 냉동김밥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사업을 하다 보니 지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도 기업가의 역할이라는 마음도 생겼는데, 김밥을 만들면 지역 농산물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겠다 싶기도 했고요.―애써 개발했는데 발매 첫해인 2020년 매출은 4억 원에 불과했다고요. 냉동김밥을 개발하고 시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냉동김밥은 아무도 안 먹는다’는 시장의 고정관념이 컸습니다. 냉동김밥은 신선김밥보다 맛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해야 한다는 인식이 바이어들에게 강하게 박혀있었어요. 국가보조사업에 지원해도 떨어지는 이유는 늘 같았어요. 발표가 끝나면 심사관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같은 가격이라면 굳이 냉동김밥을 먹을까요?’ ‘품질이 좋지만 비싼 냉동 김밥’이라는 제품 자체가 관성을 거스르는 조합이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해외 바이어가 있어도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로 배 정박 기간이 두 달을 넘어가 제품을 보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는 나쁜 생각도 자주 했죠.사실 한국인에게 냉동김밥은 생소한 제품입니다. 지도를 조금만 검색해봐도 방금 만든 김밥을 살 수 있는 곳이 가득합니다. 더군다나 김밥의 유통기한은 상온 7시간, 냉장 36시간입니다. 더 큰 문제는 맛입니다. 해동 뒤 눅눅해진 김, 아삭함이 사라진 채소는 그다지 끌리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냉동김밥을 만들 생각도, 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냉동김밥의 개발 과정이 궁금합니다. 냉동김밥을 해동하면 김이 젖으면서 김밥이 풀어지고 재료는 눅눅해집니다. 해동해도 터지지 않는 냉동김밥을 만들기 위해 수분을 제어하는 기술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오이처럼 수분이 많은 재료는 제외했고, 당근, 우엉, 유부 등 재료는 최대한 말렸어요. 완전히 말리면 퍽퍽해지기 때문에 신선감을 유지하는 선에서 건조하는 ‘수분 제어 기술’을 연구했죠. 밥과 재료가 수분을 덜 머금게 하도록 김밥을 빠르게 얼리는 ‘급속 냉동’ 기술도 개발했습니다. 김이 가열되면 질겨지기 때문에 적당히 얇으면서 탄력감 있는 김을 고르기까지 시중에 나온 모든 김은 다 먹어봤어요. 해동 시간은 3분을 넘지 않으면서 김밥 가운데까지 충분히 따뜻해질 수 있게 가운데가 옴폭 패여 있는 용기도 직접 개발했습니다. ―‘즉석김밥이 최고’라는 세상의 관성을 어떻게 깰 수 있었다고 생각하세요?냉동을 냉동이라 부르지 않기로 한 겁니다. 냉동김밥이라는 단어 자체에 ‘저렴하고 품질은 다소 떨어지는 냉동 제품’이라는 고정관념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깨기로 했죠. 더군다나 처음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레시피를 개발하다 보니 통관이 까다로운 육류는 빼고 채소를 많이 넣었어요. 자연스럽게 해초 두부, 땡초, 버섯잡채, 우엉 유부, 톳두부 등 건강한 레시피의 ‘비건김밥’이 됐어요. 열량도 대폭 낮췄습니다. 냉동된 밥을 해동하면 전분 노화현상이 일어나서 열량 흡수율이 낮아집니다. 그 원리를 응용해 급속 냉동으로 김밥 열량을 떨어뜨리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일반 김밥은 500kcal가 넘는데 저희 냉동김밥은 200~300kcal에 불과합니다. 저렴한 냉동식품이라는 분류에서 빠져나와 건강한 ‘웰빙푸드’로 재정의했습니다.―냉동김밥을 ‘웰빙푸드’로 재정립한 성과는 어땠나요? 시장의 반응이 오던가요? 메일이 하나 왔는데, 마켓컬리 MD(상품 기획자)였어요. 휴게소에서 저희 냉동김밥 제품을 봤는데, 처음 보는 제품이라 ‘우리가 먼저 팔아봐야겠다’고 생각했대요. ‘내 마지막 동아줄이다’ 싶었어요. 그동안 준비해왔던 대로 ‘저칼로리의 건강한 김밥’이라는 콘셉트의 기획안을 준비했어요. 기존에 팔던 ‘매콤제육’이나 ‘계란김밥’만 강조했다면 계약이 불발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결국 다이어터를 타깃으로 한 ‘비건 김밥’이 관심을 받았고, 거래가 시작됐습니다. 이후 윙잇, 쿠캣 등 국내 대형 유통사 18곳에 입점했습니다. ―2020년 복만사 냉동김밥 ‘11시45분’의 수출국은 홍콩 단 한 곳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인기를 끄니 해외 판로도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대형 온라인 마켓에서 판매량 순위권에 오른 제품이라고 하니, 국제식품박람회를 찾은 해외 바이어들도 큰 관심을 보이더군요. 온라인에 달린 ‘무조건 재구매하는 제품이다’ ‘맛있는 다이어트 식품은 처음이다’ 등의 리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죠. 그렇게 미국, 프랑스, 홍콩 등 12개국에 수출하게 됐습니다. 냉동을 냉동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수출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KIMBAP’에 대한 해외의 인식은 좋지 못했습니다. 해외 매체에서는 ‘아시안 푸드’를 비하의 소재로 쓰고 있었습니다. 미국 드라마에서는 일본 사케를 두고 ‘땀에 젖은 양말 냄새가 난다’거나, 생선 머리를 넣고 끓인 국에서 ‘쓰레기 맛이 난다’고 조롱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김밥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시안 이민자 자녀가 학교에 점심 메뉴로 전통음식을 싸 갔다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경험을 ‘런치박스 모먼트’라고 부르는데요. 이 경험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KIMBAP’이었습니다. ―해외에서 김은 독특한 식감과 향 때문에 ‘혐오식품’ 취급받곤 하는데요. 해외시장에서 김밥이 잘 팔릴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수출했던 국가 중에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 등에서 재발주가 들어왔어요. 저도 의아하더군요. 비이어에게 ‘이걸 외국인들이 왜 사 먹습니까?’라고 물었어요. “스시인줄 알고 먹는다”더군요. 그래서 김밥 대신 ‘코리안 스시’로 이름을 바꾸면 더 잘 팔리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름이 익숙하면 접근하기 쉬우니까요. 그래도 한국의 대표 음식에 ‘스시’라는 이름을 붙일 순 없었어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군 복무 다음으로 뿌듯한 게 김밥이란 이름을 고수한 겁니다. 지난해 8월, 한국계 미국인 사라 안은 자신의 SNS에 영상을 하나 올립니다. 1분 남짓한 영상에는 냉동김밥을 시식하는 장면이 담겼습니다. 틱톡에서 1370만 회, 인스타그램에서 880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후 북미권에서는 ‘KIMBAP’ 품절 대란이 벌어졌습니다. ‘1인 2줄’ 구매량 제한을 걸 정도로 김밥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드디어 한국 냉동김밥을 손에 넣었다”는 인증 영상이 쏟아졌습니다. 혐오 식품 취급 받던 김밥의 급격한 신분 상승(?)으로 복만사에도 복이 굴러 들어왔습니다. ‘11시45분’의 수출국은 19곳으로 늘었습니다. 매출은 지난해 60억 원까지 치솟았습니다.―사라 안이 먹은 ‘바바김밥’ 제조사는 ‘올곧’이라는 기업이죠. 여기에 인기가 높아지자 대기업까지 뛰어들었다고요. 시장을 독점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은 없나요? 냉동김밥이 점점 인기를 끌면서 주문량이 늘어나 우리 공장의 생산력으로는 납품 일정을 맞추기도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다양한 생산자가 있어 오히려 저희의 공백을 메워줬다고 생각해요. ‘코리안 스시’가 될 뻔한 한국의 김밥이 제 이름인 ‘KIMBAP’을 달고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런 점에선 올곧 같은 업체에 오히려 고맙다는 마음도 듭니다. “최고가 돼라.””던 친척의 말이 각인된 것 같아요.조 대표는 지금까지의 성공에 여러 행운이 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업 실패로 1000만 원을 들고 하동으로 왔을 때까지 조 대표는 오히려 불운의 사나이에 가까웠습니다. 냉동김밥으로 기사회생하기까지 7번이나 실패의 쓴맛을 봤으니까요. 두 번의 고깃집, 죽, 이유식, 빵, 호떡, 치즈스틱까지 7번이나 종목을 바꿔가며 창업했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7번의 실패 뒤 찾아온 성공은 운보다는 도전 정신 때문이었을 겁니다. 칠전팔기는 그를 위한 단어입니다. ―7번의 실패에도 지치지 않고 관성을 깨는 도전을 이어온 원동력은 뭔가요? 어렸을 때 숱하게 부모님께 혼나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잖아요.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됐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 것처럼요.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을 거예요. 명절에 온 가족이 모였는데, 마당에서 큰어머니가 제 어깨를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은우야, 뭐든 한 분야에서 최고가 돼라. 세계가 아니면 한국에서, 한국이 아니면 지역에서, 지역이 아니면 친구들 사이에서라도 최고가 돼라.” 그 순간, 그 말이 제게 각인돼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한 분야에서는 최고가 돼야 한다’라는 의지가 몸에 배 있는 것 같습니다. ―복만사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최근 투자사 두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볶음밥, 주먹밥 등으로 종목을 넓혀보자고 하더군요. 회사를 키울 기회지만 거절했습니다. 제 철학이 지켜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농산물은 값싼 중국산으로, 쌀은 미국 칼로스 쌀로 교체하라고 하겠죠. 원가가 비싸도 품질이 우수한 국산 농산물을 사용한다는 게 제 철칙입니다. 위생적인 김밥 양산화 방법을 개발해서 건강하고 깨끗한 김밥을 세계에 수출하고 싶어요. ‘냉동김밥 주제에 4000원씩이나 해?’가 아니라, ‘이렇게 건강하고 맛있는 웰빙푸드가 4000원밖에 안 해?’라는 인식을 세계인에게 심어주고 싶어요. 김밥 하나로 승부를 보는 ‘김밥계의 장인’이 될 겁니다.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 7시 30분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구독자에게만 공개된 영상 인터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구독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312469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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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기 결혼, 10억 원의 빚… 그럼에도 낸시 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 [복수자들]

    고양이 인형을 어깨에 얹고 ‘키티 섹시 낸시 앙’을 외치는 발랄한 여성이 있습니다. 이 문장만 보고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팝 아티스트 낸시 랭입니다. 20년 전부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온 그를 방송인으로 아는 이도 많지만 낸시 랭의 본업은 ‘팝 아티스트’입니다. 7년 전 사기 결혼 피해를 겪고 인생의 위기에 봉착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팝아트’라고 합니다. 가정 폭력, 불법 촬영물 협박 등 누구보다 가혹한 고통을 겪은 그가 전 세계 여성을 위로하는 ‘스칼렛’ 시리즈를 선보인 데에 이어 올여름엔 ‘스페이스 아트’를 주제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삶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해 살아갈 힘을 얻게 된 낸시 랭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2023년은 ‘팝아티스트’로서 바쁜 한 해였습니다. “올여름 ‘스페이스 아트’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백남준 선생님이 비디오 아트를 창시했다면 낸시랭은 스페이스 아트를 창시하겠다는 목표로 야심차게 준비한 전시입니다. 누리호에 탑재된 큐브 위성을 개발한 연구팀을 이끈 한국항공대 오현웅 교수(항공우주 및 기계공학부)와 ‘나라 스페이스’ 박재필 대표와 협업한 전시였어요.”―‘스페이스 아트’는 낯선 장르인데요, 처음 착안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말 그대로 우주와 팝아트를 결합한 예술의 한 장르라고 생각해주심 돼요. 우주와 팝아트를 접목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2년 전 누리호 1차 발사 실패 때였어요. 우주 산업은 과거엔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잖아요. 하지만 최근엔 우주 산업이 점점 민간으로 넘어오고 있어요. 일론 머스크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죠. 국가라는 소수 권력이 점유했던 우주 기술을 점점 민간으로 넘어오는 현상이, 대중적 이미지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오는 ‘팝아트’ 정신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했어요.”대중적으로 널리 소비된 이미지를 차용해 예술 작품으로 승화하는 ‘팝아트’는 미국의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으로 국내에 알려진 현대미술의 한 장르입니다.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낸시랭이 전공과 무관한 팝아트를 선택한 건 그것이 대중적이고 상업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술과 대중, 상업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 팝아트에 매료된 이유는요? “우리가 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대중적인 오브제를 활용해, 자신의 생각을 담아 작품으로 표현한 게 ‘팝아트’라는 장르예요. 이미 대중들의 눈에 익은 어떤 이미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상업적이고 가장 대중적이죠.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어요. 팝 아트는 예술 앞에서 계급과 계층, 성별과 나이 등의 경계를 허물어 줍니다. ‘그들만의 예술’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예술’을 지향하죠.”낸시랭이 팝아티스트로서 첫발을 뗀 건 2003년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당시 한국 대표로 선정되지 못하자, 산 마르코 대성당 앞에서 빨간 속옷을 입고 바이올린을 켜는 퍼포먼스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2006년 8월 KBS ‘인간극장’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병행하는데요, 당시엔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방송에 출연한 건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지금이야 연예인 아닌 일반인들도 방송에 많이 나오지만 2000년대 초반 낸시랭이 처음 방송에 나왔을 때는 파격적이었어요. “그때 욕을 엄청 많이 먹었어요. 당시만 해도 가수, 배우, 앵커, 개그맨 같은 사람만 텔레비전에 나왔거든요. 사람들은 연예인도 아닌데 왜 방송에 나오냐면서 엄청난 욕과 악플에 시달렸어요. 근데 지금은 보세요. 의사, 변호사, 심지어 일반인들도 다 TV에 나오잖아요. 선구자적인 무언가를 시도했다고 생각해요. 처음이었기에 욕을 많이 먹었던 거죠.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생계 문제도 있었어요. 돈을 벌지 않으면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죠. 방송을 한 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어요.”―20여년간 26회의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셨어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낸시 랭을 예술가 보다는 방송인, 구설수로 알고 있어요.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그땐 아날로그, 흑백TV의 시대였는데요,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1968년 전시 브로셔에 직접 쓴 문구) 앤디 워홀은 그 시대에 그런 혜안을 가졌을 정도로 시대를 앞선 아티스트였어요. 근데 앤디 워홀의 인생을 보면 할리우드 스타급으로 파파라치, 스캔들, 구설수, 화제를 몰고 다녔단 말이에요. 지나고 보면 저의 인생 궤적도 비슷한 평가를 받을 거라 생각해요.”―보통 작품 활동하실 때 영감은 어디에서 받나요. “삶의 특정한 순간, 저의 내면 깊숙이 꽂힌 아이디어에 충실한 편이에요. 팝아트 작가라고 해서 팔릴 만한 작품만 하진 않아요. 저의 꿈, 상상력, 시대의 문제, 철학…. 모든 게 영감이 될 수 있어요. 최근의 제가 ‘우주’에 꽂혀있는 것처럼요.”팝 아티스트로 승승장구하던 낸시랭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온 적도 있습니다. 2017년 사기 결혼 피해를 당한 것인데요. 당시 낸시랭이 당한 사기 결혼 사건은 세간을 뜨겁게 달궜고 하루에도 100건 이상의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이 일로 그에겐 마음의 상처뿐 아니라 10억 원의 빚까지 생겼습니다다.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할 정도로 괴로웠다는 그가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팝아트 덕분이었습니다. 가정 폭력, 불법 촬영물 유포 협박 등의 피해를 겪은 낸시 랭이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스칼렛’ 시리즈를 2020년 선보인 겁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터키 이스탄불, 미국 마이애미, 싱가포르 등에서 전시를 열었습니다. ―‘스칼렛’ 시리즈에 담긴 의미가 궁금합니다. “스칼렛은 채도가 굉장히 높은 빨간색을 뜻하는 말인데, 데미 무어가 주인공인 영화 ‘스칼렛’이 있어요.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상영할 때 ‘주홍글씨’로 번역됐어요. ‘낙인찍히다’는 의미죠. 영화 속 주인공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여성인데 마녀사냥을 당하고 낙인이 찍힌단 말이에요. 제가 사기결혼과 여러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몰아쳐 왔었어요. 그때의 전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했을 정도로 암담한 고통 속에 있었거든요. 그때 처음 진지하게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당한 일들, 저 혼자 당한 게 아니더라고요. 같은 고통을 겪은 전 세계 여성들을 떠올리며 작업했어요.”―‘스칼렛’을 전 세계에 선보인 이유는요? “각 나라의 문화와 법이 다르잖아요. 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떤 나라에선 가해자를 처벌하지만 어떤 나라에선 피해 여성에게 더 큰 벌을 주곤 해요. 각 나라의 문화, 관습, 법이 달라서 옳다 그르다 말할 순 없지만 예술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른 인종, 관습, 문화를 가졌음에도 ‘이건 잘못된 것이다’라는 양심이란 게 있지 않을까. 그걸 건드리는 게 예술의 역할일 거예요. 사람들이 저의 작품과 퍼포먼스를 통해 본인 스스로의 양심을 들여다보고 판단하고 생각하게 하고 싶었어요. ‘스칼렛’은 제게 정말 중요한 작업이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예술이 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어요.”―작품을 통해 회복, 치유를 경험하신 거네요.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가 너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만 매몰된단 말이에요. 주변에서는 가만 놔두질 않죠. 끝없는 고통 속에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어요. 다행히 옆에서 절 붙잡아주고 도와준 고마운 지인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죠. 1초가 100년처럼 너무 길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어요.”―10억원의 빚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고 계시거든요.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데 원금은 1원도 못 갚았어요. 매달 천만 원 넘게 나가는 이자를 갚고 있어요. 제가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고, 고정 수입이 없는 예술가가 감당하기 너무 버겁죠. 전시회에서 작품이 모두 팔려도, 그 돈을 제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다 이자 갚는 데만 다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의욕이 꺾이는 시기가 있었어요.”―지금은 극복하셨나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가 쓰지도 않은 사채 이자 갚느라 6년, 7년을 살았는데 원금은 하나도 못 갚았잖아요. 작품이 잘 팔려도 행복하지 않고 저는 써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빼앗기니까…. 한동안은 너무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적이었어요. 이게 언제 끝날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해요. 원금은 한 푼도 못 갚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난 6년간 매달 1000만 원 이상의 돈을 벌었다는 뜻이잖아요. ‘낸시랭 정말 열심히 살았다’ 이렇게 다독여주고 싶어요. 앞으로도 씩씩하게 살아갈 거예요.“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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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만의 ‘원 픽’ 브라이언이 청소에 미친 이유[복수자들]

    “더러우면 싸가지 없는 거예요.” 다소 과격한 소신 발언으로 인기몰이 중인 이가 있습니다. 그는 청소 하나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브라이언(42)입니다. 그는 브레이브걸스 유정의 더러워진 자동차 창문 틈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희열을 느끼고, ‘옷 무덤’이 된 걸그룹의 숙소를 보고는 두 눈을 희번덕이며 “What the hell”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청소가 취미이자 특기인 브라이언은 ‘청소광 브라이언’이라는 유튜브 콘텐츠로 그야말로 ‘떡상’했습니다. 브라이언이 집에서 청소기를 밀고 세탁기를 돌리는, 그야말로 청소‘만’ 하는 모습을 담은 청소광 1화는 한 달 만에 조회수 320만 회를 넘었습니다. ‘청소 하나로 이렇게 웃긴 사람은 브라이언밖에 없다’ ‘첫 방송 보고 화장실 청소했다’는 댓글이 쏟아집니다. ‘청소 예능’이라는 전무후무한 장르를 개척한 브라이언은 한 때 소녀팬을 몰고 다니던 실력파 아이돌이었습니다. 1999년 환희와 함께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데뷔한 그는 ‘Sea of love’ ‘Missing You’ ‘중력’ ‘습관’ ‘남자답게’ ‘가슴 아파도’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사랑받았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이면도 있었습니다. 예민한 성격인 그는 무대에 오르고 예능에 출연하는 매 순간 긴장과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멤버 환희와는 ‘친하면 열애설, 안 친하면 불화설’이 났습니다. 안티팬들의 스토킹과 협박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달고도 썼던 가수 시절을 지나, 그는 ‘미국 청소 아저씨’로 인생 2막을 시작했습니다. ‘찐광기’를 뽐내며 예능 블루칩으로 떠오른 그에게 방송, 유튜브 할 것 없이 섭외 연락이 쏟아집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가 넘어서까지 촬영 3~4개가 잡혀 있는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그가 에너지를 잃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청소에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전 국민이 청소하는 그날까지” 청소의 이로움을 전파하겠다는 브라이언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청소광’에 이어 ‘키스광’도 노린다는 그의 속셈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소로 제2의 전성기를 맞으셨어요. 첫 화 ‘청소광 브라이언’ 첫 화는 조회수 320만 회가 넘었습니다. 청소 콘텐츠로 이렇게 큰 인기를 끌 거라고 예상하셨나요?전 그냥 청소를 좋아할 뿐이었어요. 청소를 콘텐츠로 만들고, 심지어 그걸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죠. ‘청소광’ 유튜브를 처음 기획할 때도 걱정이 많았어요. 회의 때 작가님들에게 “이걸 누가 볼까요? 청소에 관심이 있을까요?”라는 말도 했었고요. 별 기대 없이 평소와 똑같이 청소를 한 건데 너무 재밌게 편집이 잘 된 거예요. 첫 화를 보고 ‘아, 이거 되겠구나’ 싶었죠. 청소를 귀찮아하거나 게을렀던 분들이 청소광을 보고 자극 받아서 청소 시작했다는 반응이 제일 기분 좋아요. ―‘더러우면 싸가지 없는 거예요’라는 명언을 남기셨는데, 평소 신조인가요?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농담이 아니었어요. 더럽다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를 안 지키는 거예요. 누군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청소가 안 되어 있다면 싸가지 없게 느껴지잖아요. 깔끔하고 깨끗한 건 타인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청소로 사업을 할 계획은 없나요?예전엔 ‘내가 좋아하는 걸 비즈니스로 하자’는 생각이 강했어요. 운동을 좋아해서 크로스핏 체육관을 열었고, 꽃꽂이를 좋아해서 꽃집을 열었죠. 그런데 일이 되면 힘든 순간이 와요. 스트레스를 받으니 그 일을 못 즐기겠더라고요. 청소를 너무 좋아하는데 비즈니스로 하면 청소하는 게 싫어질까 봐 사업은 하지 않으려고요. 그 대신 청소 제품 PPL이 엄청 들어와요. 저희 집에 설거지 세제가 100병 있어요. 평생 다 써도 남을 거예요. 그래서 청소용품을 매니저, 친척,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있어요. ―청소광에서 브레이브걸스 유정님의 차를 세차해 주시고, 걸그룹 숙소를 청소해주는 등 청소 하나로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어요.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으시나요? 다른 예능을 할 때는 작가님들이 대부분 구성을 하시고 저에게 어떤 콘셉트인지 전달해주셨는데, 청소광에서는 제가 아이디어를 많이 내요. 무엇보다 제가 청소를 정말 좋아하고, 청소에 대해선 제작진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니까요. 그래서 회의를 할 때도 재밌어요. 브라이언은 SM엔터테인먼트를 세운 이수만 전 대표의 눈에 단번에 든 ‘확신의 SM상’이었습니다. 이 전 대표는 오디션장에서 브라이언을 보자마자 “쌍꺼풀 없는 눈이 H.O.T.의 장우혁과 비슷해 마음에 든다”며 그를 뽑았고, 연습생 생활 5개월 만에 그를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초고속 데뷔시켰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실력도 출중했습니다. 브라이언의 맑은 미성은 그룹 인기를 견인했습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는 매년 시상식에서 R&B 부문 상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탄탄대로 같았던 그의 가수 생활에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매니저의 죽음, 안티팬들의 괴롭힘 등이 이어져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큰 인기를 얻으셨어요. 그런데 힘든 순간도 정말 많으셨다고요.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있어요. 2002년에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터졌어요.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사고였죠. 당시 저와 환희가 라디오 DJ였어요. 생방송 중에 게스트가 이 사건에 대한 제 생각을 물어서 ‘운전을 하던 미군들이 확실히 잘못한 일이지만,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미워하는 건 이상한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요. 그 뒤에 댓글창에 ‘네 나라로 떠나라’ ‘브라이언 죽어라’ 이런 댓글이 쏟아졌어요. 케이크 안에 칼날을 숨겨서 집으로 보낸 사람도 있었어요. 어떤 분이 편지를 주셔서 팬레터인 줄 알고 열어 봤는데 사고 현장에 있던 여중생 얼굴에 저와 환희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 들어있던 적도 있어요. 환희한테도 너무 미안했고, 저 스스로도 괴로웠어요. 소주를 매일 마시고 매니저 형한테 ‘저 그냥 죽을래요’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당시엔 ‘절대 말실수하면 안 돼’라고 스스로를 괴롭혔는데, 시간이 지나니 내가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인 것 같아요. 인간은 실수할 수밖에 없잖아요. 너무 스스로를 탓하지 말고 즐겁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한때는 ‘국민가수’로 불렸을 정도로 플라이 투 더 스카이가 큰 사랑을 받았어요. 가수 활동을 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예전에는 노래하는 게 정말 즐거웠거든요. 그런데 반복된 성대결절로 목이 안 좋아진 뒤로 노래를 하는 게 부담스럽고 두려워졌어요. 제가 다시 음악을 하길 기다려주는 팬들에게는 미안해요. 한때 정말 사랑했던 노래를 못 하게 된 게 스스로도 정말 아쉽고요. 목 상태가 돌아온다면 다시 노래하고 싶어요. 지금은 내가 불편하고 두려우니까 못 하고 있지만요. 노래를 언젠가 다시 잘하게 된다면 그때는 컴백할 수 있겠죠? ―가수활동을 하지 않는 지금의 삶이 행복하신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만의 이미지가 구축되고, 그걸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 삼박자가 맞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그게 되고 있어서 너무 즐겁죠. 가수를 할 때는 항상 부담이 컸어요. 나만 생각하면 안 되고 팀 멤버도 생각해야 하니까요. 내 말실수 때문에 멤버가 피해 보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요. 또 저는 방송에 나가면 긴장이 심했어요. 안 그래 보여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엑스맨’ ‘연애편지’를 찍을 때 출연 전날부터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걱정이 심했어요. 지금은 오롯이 나 자신만 신경 써도 되고,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어서 자유로워요. 일을 하면서도 내 삶을 충분히 즐기는 행복에 빠졌어요. 어떤 분들은 좋은 것만 하려는 게 욕심이라고 하세요. ‘왜 남들 생각은 안 하냐?’고 하시는데, 남을 지나치게 생각하면 내 인생은 포기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 마음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맑은 미성으로 노래하던 ‘꽃미모’의 열여덟 소년은 청소의 이로움을 전파하는 유쾌한 마흔 둘 ‘미국 청소아저씨’가 됐습니다. 그의 데뷔무대인 1999년 ‘데이 바이 데이’ 유튜브 영상에는 요즘 들어 ‘청소광 아저씨 데뷔 무대다’라는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아와 행복을 찾아나가는 브라이언에게 ‘전성기’라는 단어는 무색합니다. ‘꽃미남 아이돌 듀오’ 수식어가 ‘미국 청소 아저씨’로 바뀌었을 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의 긍정 에너지는 빛을 잃지 않습니다. ―‘미국 청소 아저씨’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으세요?워낙 깔끔하고 냄새에 민감한 이미지다 보니 저를 처음 만난 사람들이나 길에서 만난 팬들이 ‘저한테 혹시 냄새나나요?’라며 조심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죄송하더라고요. 그래도 청소는 늘 하는 것이고, 전 청소를 하면 즐거워요. 그걸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 부담이라기보다 행운인 거죠.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온 국민들이 다 청소할 때까지 계속할 거예요.―채널A ‘금쪽상담소’에 출연하셔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고, 지나치게 예민해서 힘들다고 고백하셨잖아요. 요즘에는 좀 나아지셨나요? 어제도 3시간밖에 못 잤어요. 아침 일찍 촬영이 있어서 어제는 일찍 잠들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불면증이 더 심하게 오는 것 같아요. 불안감 때문에 잠에 못 드는 거죠. 평소에도 푹 못 자고 1시간에 한 번씩은 깨요. 깨서 물 먹고, 화장실 가고, 강아지들 잘 자나 보고…. 푹 자 본 적이 없어요. 해외 나갔다가 한국 돌아와서 시차 때문에 푹 자본 적은 있는데, 그 외엔 늘 수면 패턴이 불안정했어요. 제 성격인 것 같아요. ―방송에서 13년 째 솔로라고 하셨는데… 연애나 결혼에 대한 생각도 궁금해요. 친형이 21살에 결혼해서 조카가 20살이 넘었어요. 형을 보면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나이 들어가며 혼자 있는 행복에 빠졌어요. 연예인은 매니저, 스태프, 작가, PD 등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삶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복처럼 느껴져요. 비혼주의자까진 아니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소중해졌어요. 만약 누군가를 만난다면요? 인생을 심각하지 않게, 재밌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유머가 있는 사람이 좋아요. 아, 그리고 무엇보다 입냄새 나면 안 돼요. 저랑 방귀는 안 텄으면 좋겠고요. 하하. ―언제 행복함을 느끼세요?일 끝나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애쉬, 로미랑 소파에 누워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아무것도 안 하고 편하게 있을 때, 스트레스나 두려움 없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이들한테 키스해주고 포옹해주는 순간이 요즘의 저에겐 제일 큰 행복입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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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마머리를 잘라서 수세미로 썼다고?… 일상이 코미디인 이 두 남자들[복수자들]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을 외치는 29살 동갑내기 두 청년이 있습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그들은 대전의 작은 개그 극단에서 무료 공연을 올리며 공채 개그맨의 꿈을 꿨습니다. 당시 대학을 중퇴한 두 청년은 아르바이트해 번 돈을 모조리 개그 공연에 썼습니다. 단돈 천 원짜리 티켓이 단 한 장도 안 팔렸지만 계속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나란히 입대한 후에도 매일 연락을 주고받으며 개그 콩트를 짰을 정도로, 두 사람은 코미디에 진심이었습니다.2020년 초 코로나 한파가 스탠드업 코미디 업계에 불어 닥치면서 방송국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개그맨 공채 시험도 중단됐습니다. ‘제2의 옹달샘’을 꿈꾸던 두 남자의 꿈도 사라지나 했습니다. 한 길만 보고 달렸는데 그 길이 송두리째 사라진 겁니다. 하지만 두 남자는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했습니다. ‘길이 사라졌다면 직접 길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개그 극단, 아프리카tv를 거쳐 유튜브까지 뛰어들었습니다. 그랬던 두 남자, 지금은 누적 조회수 4억 회를 기록한 유튜브 채널 4개를 운영하는 핫한 ‘코미디 크리에이터’가 됐습니다. ‘매콤한 두 남자의 매콤한 일상’을 다룬 유튜브 채널 ‘핫소스’의 두 코미디언 송형주, 김선응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https://youtu.be/T5WCnbWVb84)에서 볼 수 있습니다.―대학 중퇴까지 하며 준비했던 개그맨 공채 시험이 중단됐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일반인으로 따지면 오랫동안 공무원을 준비했는데 공무원 시험 자체가 사라진 거예요. 공채 개그맨이 되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위해서 몇 년을 노력했잖아요. 심지어 저희는 군대 있을 때도 서로 연락 주고받으면서 개그 이야기만 했어요. 군대에서도 하루에 개그 콩트 2개씩 짜면서 공채 시험을 준비했어요.”(형주)―군대에서 개그를 짰을 정도면 정말 열심이었네요. “제대한 후에는 더 열심히 했어요. 그때는 정말 돈이 정말 없었는데 같이 회의하면서 개그 짤 공간이 없는 거예요. 카페에 가도 커피값이 드니까요. 밖에서 하자니 밤에는 춥고…. 늦게까지 머물 수 있는 실내를 찾다 보니 영화관 로비에서 회의 많이 했어요. 영화도 안 먹고 팝콘도 안 먹었는데 진상이었죠.(웃음) 심야 영화가 늦게까지 하면 영화관이 새벽 3시까지 열 때도 있거든요.”(선응) “개그를 보여줄 무대가 없으니까 홍대에서 개그 버스킹도 시도해봤어요. 길거리 나가서 무작정 준비해간 개그 콩트를 선보이는 거예요. 근데 개그는 기승전결이 있다 보니, 아무리 짧은 개그여도 길거리에선 사람들이 안 보시더라고요.”(형주)대전 출신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대학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동아방송예술대학교 13학번 동기였던 둘은 ‘제2의 옹달샘’이 되겠다며 학교를 중퇴하고 코미디 공연 무대에 섰습니다. 대전의 개그 극단 ‘건전지’에서 활동할 때는 직접 티켓도 팔았습니다. ―극단 활동할 때 연봉이 5000원(?)이었다면서요. “그거 잘못된 팩트입니다. 마이너스였어요. 저희가 다른 데서 아르바이트해서 그 돈을 공연하는 데에 쏟아 부었거든요. 5000원도 못 벌었고 사실상 마이너스, 적자였어요.”(형주) “티켓 한 장이 천 원이었는데 그것도 안 팔리더라고요. 무료 공연만 했던 거죠”(선응)―극단 활동을 6개월이나 했습니다.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땐 정말 돈이 없었고 정말 가난했어요. 하루에 저한테 쓸 수 있는 돈이 1000원 정도였는데, 식당에 가면 밥이 전부 6000원인 거예요. 연애도 못했어요. 연애하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셔야 하는데 그럴 돈이 아예 없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제가 책임질 수 없고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어요. 돈이 아예 없었거든요.”(선응)개그맨 공채 시험을 준비하며 활동했던 극단 생활을 접은 두 사람은 아프리카tv에서 사람들을 웃겨보겠다고 나섰습니다. 라이브 방송을 켜면 입장하는 사람들은 한두 명, 많아야 대여섯 명에 불과했습니다. 개그 극단에서 무료 공연하던 시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tv에서의 반응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주로 라이브 방송을 하다보니까 상황극 코미디를 선호하는 저희와 잘 안 맞았어요. 또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도 찝찝했고요. 아프리카tv는 후원을 받는 시스템이잖아요. 돈 많은 사람들이 저희 라이브방송을 보시고 후원해주시면 괜찮은데, 저희 방송을 보는 분들이 주로 중·고등학생들인 거예요. 간식 먹을 거 안 사 먹고 저희 후원해주고…. 그런 것들 때문에 죄책감이 심했어요.”(선응)개그 극단, 공채 시험, 아프리카tv까지…. 연달아 실패했지만 ‘건전지’ 같은 두 남자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유튜브 채널 ‘핫소스’를 개설한 겁니다. ‘매콤한 두 남자의 매콤한 일상’의 ‘핫소스’, 지금은 잘 나가지만 처음부터 빵 떴던 것은 아닙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 패러디, 연애 시뮬레이션 등 여러 종류의 콘텐츠를 시도했지만 조회수는 처참했습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했습니다. ―어쩌다 하게 된 ‘짓궂은 장난’ 콘텐츠가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선응이가 되게 비싼 돈을 주고 파마를 했어요. 엄청 뽀글뽀글, 풍성한 파마였는데, 선응이가 잘 때 그 머리를 밀어버린 거예요. 밀어버린 머리를 수세미로 쓰면서 설거지하는 영상을 올렸어요. 저희끼리 하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장난이었는데, 그게 대박이 난 거예요. 조회수가 100만이 넘었어요.”(형주) “다른 사람들은 ‘심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저희가 정말 친한 사이라 그런 장난은 매일 매일 하거든요.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일상을 그대로 올린 거였는데, 좋아해주시니까 ‘이거다!’ 싶었어요.”(선응)‘100톤 곡식 창고에 친구 차 숨기기’ ‘잠든 친구 오지에 버리기’ ‘친구 앞에서 뒷담화 하기’ ‘친구 방 구석구석에 초인종 설치하기’….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성인이라면 더더욱 하지 않을 것 같은 유치하면서도 창의적이고 신박한 콘텐츠에 구독자들은 열광했습니다.―‘초등학생 취향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히려 좋아요. 저희 개그가 초등학생도 보고 웃을 정도로 어렵지 않다는 거잖아요. 가볍게, 누구나, 나이에 상관없이 전 국민이 다 볼 수 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해요.”(선응) “실제 구독자들 보면 10대 후반에서 20대, 30대 초반까지 다양합니다.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전 국민이 소비할 수 있는 웃긴 콘텐츠 많이 만들어보겠습니다!”(형주)‘핫소스’에서 시작한 두 사람의 ‘코미디 유니버스’는 점점 영토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구독자 참여형 콘텐츠를 올리는 ‘핫챌린지’, 먹방과 토크쇼가 공존하는 ‘핫식당’, 숏폼 콘텐츠 전용 ‘핫쇼츠’까지. 4개 채널을 합친 구독자는 219만 명에 달합니다. ―유튜브 채널을 4개 운영 중입니다. 일을 너무 많이 벌린 건 아닌가요? “후회할 때도 있어요. 너무 바쁠 때는요. 너무 바빠서 살면서 놓치고 사는 것이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런데 다른 걸 놓치는 만큼 유튜브는 놓치지 않으려고요. 예전의 저희처럼 기회가 간절한 사람들한테는 부러운 후회일 수도 있으니까요.”(선응)―한 채널에 집중하지 않고 채널을 여러 개로 나눈 이유가 궁금합니다. “구독자 맞춤형이라고 보시면 돼요. 메인 채널인 ‘핫소스’는 친구끼리 짓궂은 장난치는 콘텐츠잖아요. 저희가 장난치고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핫소스’만 구독하면 되고요. 혹시 저희가 먹방하면서 대화하는 걸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핫식당’을 보면 되거든요.”(선응)“유튜브 알고리즘 때문이기도 합니다.(웃음) 하나의 채널에 특정 장르 콘텐츠만 쭉 올리는 것이 구독자, 조회수 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형주)―어떤 콘텐츠를 촬영할 때 가장 즐거우신가요? “‘핫챌린지’ 찍을 때 재밌어요. 구독자들이랑 함께 만들어가는 콘텐츠거든요. 구독자분들, 팬분들 만나서 대화하는 게 좋아요.”(선응) “형주팀 선응팀 나눠서 밥 사주는 콘텐츠를 촬영한 적 있었어요. ‘정총무가 쏜다’를 모티브 삼아서 촬영한 건데, 그때 구독자분이 운영하는 식당에 갔거든요. 거기서 우리 콘텐츠 사랑해주시는 구독자분들 배불리 먹이는 게 너무 뿌듯했어요. 팬들과 함께한 티키타카도 좋았고요.”(형주)―구독자는 많지만 조회수가 낮은 채널도 있습니다. ‘핫소스’는 평균 조회수 50~100만 회를 유지하는데요. 비결이 있나요? “근면, 성실, 정진 또 정진입니다.(웃음) 묘수가 따로 없어요. 될 때까지 하는 거예요. 조회수가 나올 때까지, 사람들이 웃어줄 때까지.”(형주)―방송이 아닌 유튜브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쉬울 때는 없으신가요? “저희가 방송을 하다가 유튜브로 넘어온 케이스면 모르겠는데, 아예 유튜브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그런 아쉬움은 없어요. 저희가 개그맨이 되고 싶었던 이유도 사람들을 웃기고, 저희를 보고 웃어주는 팬들을 만나고, 그런 거였어요. 방송에 나가지 않아도 유튜브를 통해 충분히 코미디를 하고 있고 팬들과 소통하고 있어요.”(선응) “오히려 유튜브에서 시작한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이젠 저희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잖아요. 누군가의 선택을 받거나 오디션에 합격할 필요도 없고요.”(형주)―‘코미디 크리에이터’로서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회사를 차리는 겁니다. 코스피에 상장할 수 있는 유튜브 콘텐츠 제작사요. 꿈이 원대하죠? 아직 시작도 못 했습니다.(웃음)”(형주) “저희는 유튜브로 팬들을 만나고 있지만 직업은 코미디언이에요. 공채 개그맨 지망 시절 가졌던 꿈과 같아요. 최고의 코미디언이 되는 겁니다.”(선응)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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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마가 편집했나 악마를 편집했나… ‘나는 솔로’ PD가 입을 열었다[복수자들]

    “‘나는 솔로’를 안 보면 대화에 못 낀다.” 과장이나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현커’(현실커플) 세 커플 탄생시킨 6기, “손 선풍기 안 가져왔어?” 한 마디로 숱한 패러디를 양산한 10기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더니, 최근 방영된 16기에서 정점을 찍었습니다. 가족과의 식사자리에서도, 직장인들의 ‘커피 타임’ 때도 ‘나는 솔로’는 가장 ‘핫’한 대화 소재였습니다. 한밤의 발레로 사랑을 고백한 영숙, 올해의 유행어 “테이프 깔까?”의 주인공 광수, 카메라와의 아이컨택을 선보인 상철 등 독보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에 이효리, NCT 도영 등 연예인들까지 ‘나는 솔로’ 팬을 자처했습니다. 16기 출연진이 방송 후일담을 전하는 유튜브 라이브 방송 시청자는 25만 명까지 치솟았습니다. ‘본방사수’라는 단어가 무색해진 시대에 “수요일 밤 10시 30분만 기다린다”는 골수팬들을 양산해낸 ‘나는 솔로’의 중심에는 남규홍 PD가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인기와 함께 남 PD도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습니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배우도 아닌 일반인과 만들어가고 있는 그에게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어디서 그런 인물들을 섭외하는 것이냐’부터 ‘악마의 편집이 사실인지’, ‘인기를 견인한 출연진에 인센티브를 얼마나 지급하는지’까지 방송과 관련된 사소한 정보들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회자됩니다. 도파민 폭발시키는 출연진을 끌어모으는 남규홍 PD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복 많은 남자.’ 놀랍게도 남 PD는 “실제로 만나보면 그들 모두 평범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 하나에만 집중해 농축된 감정을 터뜨리다 보면 누구나 ‘빌런’이 될 수도, ‘어쩌다 보니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평범한 남녀가 짝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남 PD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2011년 ‘짝’에 이어 일반인의 짝짓기 프로그램을 연이어 만드는 이유, 출연진 ‘빌런 논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https://youtu.be/BQFoQrj_Gxg)에서 볼 수 있습니다.―최근 방영된 16기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결혼 커플 두 팀 탄생한 6기, 온갖 패러디 양산한 10기, ‘빌런’ 총집합했다는 16기 중 PD님의 ‘원픽’이 궁금합니다.제 마음속 원픽 기수는 9기라고 늘 이야기 했었는데요. 세 기수 중 고르자면 6기를 고르고 싶네요. 프로그램이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이기도 하고, 출연자들도 굉장히 열심히 임해주셔서 애정이 큽니다. 같이 삽질하던 시기거든요. 어려울 때 고생을 같이 한 분들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16기도 화제가 많이 돼서 굉장히 고맙죠. ―기수 화제성에 따라 인센티브를 지급하시잖아요. 역대급 인기를 누린 16기 인센티브에 관심도 지대해요. 200만 원 이상은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는 300만 원을 가져가기도 했고요. 웬만하면 동등하게 가는 게 맞지만, 특별한 케이스에는 더 받게 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요, 원칙은 없습니다. 출연료와 인센티브를 다들 궁금해하시는데, 돈에만 관심이 너무 치중되는 건 좀 아쉽죠.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출연료가 점점 올라가다 보면 프로그램이 망해요. 출연료를 노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진정성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돈을 안 줘도 나오겠다는 각오가 있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는 케이스를 훨씬 더 많이 봤어요. 돈이 계기가 되는 순간 순수한 마음이 훼손될 수 있어요. ―이번 16기 ‘돌싱 특집’이 큰 인기를 끌었잖아요. 노년층, 성소수자, 외국인, 연예인 특집 등을 만들어달라는 시청자들 의견도 있는데, 특집 계획이 있으신가요?모솔, 돌싱 특집 외에 다른 특집편 계획은 없습니다. 일반인 출연자들도 너무 많이 밀려있어요. 특집은 ‘방송을 위한 특집’으로 끝날 것 같아서 자제하려고 합니다. 언론이나 방송계 종사자들은 웬만하면 커트하려고 해요. 진정성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방송인들은 마이크를 잡고 진행하려는 습성이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 나올 수 있어요. 그분들만 모은 특별편을 만들 순 있겠지만 현재로선 일반인을 우대하고 있습니다. 나는 솔로에는 ‘빌런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출연자 빌런 논란은 매 기수마다 불거집니다. 시청자들은 ‘이번 기수의 빌런은 누구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합니다. 출연진이 아닌 남 PD가 ‘최종 빌런’이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출연진의 경악할만한 행동들을 제작진이 유도한다는 지적입니다. 이에 대해 남 PD는 “출연진이 빌런도 아니고, 제작진이 빌런의 모습을 유도하지도 않는다”고 선을 긋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오롯이 집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출연진 섭외에도 그리 안달하지 않는답니다. “누가 나와도 그 정도는 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편집을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어요. 악마가 편집했다 VS 악마를 편집했다, 어느 쪽이 맞습니까?착한 악마가 편집한 거죠. 출연진 빌런 논란이 계속 있는데요, 악마는 저 하나로 족합니다. 출연진들은 실제로 만나보면 평범해요. 감정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들이 시청자에게 빌런처럼 보여지는 거죠. 저희가 그런 행동과 상황을 유도했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솔로나라에 가면 누구나 다 그 정도 모습은 나온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캐스팅에 그렇게 안달복달 하지 않아요. 누구를 뽑아 놔도 적어도 망하지는 않거든요. ―‘빌런’이 합격 기준이 아니라면 출연진을 뽑을 때 어떤 점을 중요하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합격 팁은 뭔가요?합격과 불합격이 있는 건 아닙니다. 1, 2년 전에 인터뷰했던 분들도 출연하는 경우가 있죠. 기준선에만 통과됐다 싶은 분들은 때에 따라 이후 기수에 출연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선에는 어떻게 통과하나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분이 좋고요, 사람을 서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니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갖추면 좋아요. ‘내 자녀가 저 프로그램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게요. 매력도 중요해요. 조금만 대화를 해 봐도 즐겁고 재밌는 분들은 굉장히 좋은 출연자죠. 마음을 동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인터뷰 20~30분 안에 시시콜콜 그 사람의 모든 걸 예상하거나 기대하면 안 돼요. 그냥 하늘에 맡깁니다. ―한 인터뷰에서 ‘혁명을 일으킬 만한 인물을 원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남 PD님이 생각하는 ‘혁명가’란 어떤 사람인가요? 혁명가에게는 자기희생이 필요해요. 조직이나 단체를 여러 측면에서 좋게 바꾸려는 따뜻한 마음과, 그걸 실천할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혁명가거든요. 그런 분들이 솔로나라에 오면 분명 새로운 기운이 돌죠. (16기의 혁명가는 누구였나요?) 광수님이요. 그분이 스토리에 많은 파란을 일으켰어요. 모든 사건들에 다 관여를 하면서 판을 뒤집어놓았기 때문에 혁명가 역할을 한 거죠. 광수님 소개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어쩌다 보니 주인공’. ―외모도 보시나요?외모가 뛰어난 분들이 훨씬 유리한 건 사실이에요. 그분들은 판을 흔들어놓거든요. 혁명사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제작진 입장에서 예쁘고 잘생긴 분들을 환영하는 건 당연합니다. (외모적으로 가장 혁명적이었던 출연자를 꼽는다면?) 11기 영철, 17기 옥순. ‘달걀 속 노른자위 같은 사람 마음, 기름 두르고 후라이를 해 보면 안다.’ 남 PD가 직접 적은 방송 속 글귀입니다. 달걀을 깼을 때 노른자위의 경계는 흐리멍덩하지만 후라이를 하면 노른자의 경계가 점점 선명해집니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남 PD는 말합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인간 본성은, ‘솔로 나라’라는 기름이 부어지는 순간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솔로나라의 촌장으로서 기름 붓는 역할을 계속 하겠다고 남 PD는 말합니다. ―세 딸의 아버지이십니다. 딸이 이 중 하나의 프로그램 출연해야 한다면요? 하트시그널 vs 나는 솔로 vs 환승연애.나는 솔로에 나오는 게 좋죠. 기왕 경험할 거면 진하게 경험하는 게 좋아요. 본인들은 더 많은 걸 가져갈 수 있어요. 감정이 고농도로 농축되면 짧은 시간 안에 터질 때도 있어요. 출연진들이 전부 하는 말이 ‘솔로 나라 와서 울 줄 몰랐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번 출연해보면 알아요. 농축된 감정들이 낯선 환경에서 폭발하는 경험을 하시게 됩니다. 감정을 터뜨리지 않으면 병이 납니다. 울고 싶으면 울어버리고 시원하게 해소해야 돼요. 감정을 그때그때 터뜨려버리면 다 해소되게 돼 있고, 그게 또 다른 에너지가 돼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어요. ―기존 연출작 짝과 나는 솔로가 일반인 매칭 프로그램이잖아요. 유사한 포맷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유가 있나요? 의도한 겁니다. 짝의 경우 굉장히 훌륭한 프로그램이 뜻하지 않게 사라진 측면도 있어요. 짝의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살려보자고 의도해서 만든 게 나는 솔로에요. 죽은 자식은 정말로 눈물나거든요. 제 죽은 자식인 짝을,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영리하게 살려 놓은 게 나는 솔로에요. 짝과 나는 솔로 모두 우리 시대의 사랑에 대한 자화상 역할을 합니다. 남녀가 짝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거라고 기대합니다. 짝 제작진이었던 나상원 PD, 백정훈 PD와 저, 이렇게 세 사람이 닷 다시 뭉쳐 짝의 정신을 이어 받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갈 겁니다. ―남규홍에게 ‘달걀 속 노른자 위 같은 사람 마음’이란 뭔가요?제 마음이죠. 달걀 속 노른자위는 흐리멍덩해요. 구별도 안 되고 선도 애매하고 색도 애매한데 기름을 두르고 튀김을 해보면 선명하게 노란색으로 쫙 드러나거든요. ‘보통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라는 의미로 쓴 겁니다. 제 마음도 그런 마음이고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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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의 의리’ 실천하는 김보성 “의리 전파 위해 배우가 됐다”[복수자들]

    으리! 으리! 으리!두툼한 두 팔을 타이트하게 휘감은 검은 가죽점퍼,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구레나룻을 길게 늘어뜨린 이 남자. 인터뷰 시작하자마자 난데없이 ‘의리 삼창’을 외칩니다. 눈 감고 들어도 ‘으리!’를 외치는 그 남자, 누군지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자칭타칭 ‘의리의 사나이’ 김보성(57)입니다.과거엔 ‘콘셉트 아니냐’며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1989년 데뷔 후, 35년간 한결같은 태도로 의리를 외치고 있으니까요. 설사 콘셉트로 시작했다 할지라도 이토록 오랫동안 진지하다면 이젠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김보성 하면 의리, 의리 하면 김보성입니다. 김보성이 의리를 사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체 김보성에게 의리가 무엇이기에!〈복수자들〉이 ‘의리의 사나이’ 김보성을 직접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김보성의 의리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의리를 전파하기 위해 배우가 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의리를 인생의 신념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20대 초반이었어요. 어릴 때 죽을 고비를 많이 겪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러다 얻게 된 결론이 바로 의리였습니다. 짧은 인생, 후회 없이 의리를 지키며 살기로 결심했습니다.”―‘의리를 지킨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20대 초반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봤습니다. 영화에서 독일 장교가 ‘한 명 더 살릴 수 있었는데’ 하면서 오열하잖아요. 그 장면이 제게 큰 깨달음을 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그래서 데뷔하자마자 의리를 외치신 건가요? “배우 활동할 때도 꾸준히 방송에서 의리를 말했습니다만 진지한 어투로 의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모조리 편집이 되더라고요. 재미가 없었나 봐요. 그래서 작전을 바꿨죠. 다소 희화화되더라도 재밌게 의리를 외치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의리에 대한 나의 의지와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더욱 효과적이지 않을까.”의리를 전파하기 위한 그의 계산(?)은 통했습니다. 김보성이 묵직한 주먹을 불끈 쥐고 ‘으리!’를 외치자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 러브콜에 쏟아지는 광고까지. 오랜 신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좋아해주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김보성이 ‘입’으로 의리를 외치는 데에서 끝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보성은 ‘나눔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기부, 봉사 같은 공공을 위한 선행에 적극적으로 투신해왔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생활비 명목으로 대출받은 금액의 일부인 1000만 원을 떼어 기부했습니다. 당시 그는 세월호 합동 분향소에 찾아가 “성금을 많이 못 내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게 원망스럽다”며 탄식했습니다. ―‘고작 1000만 원’이라고 하셨지만 대출받아 기부한다는 건 아무나 못 하는 일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몇 날 며칠 밤낮을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없어서 대출 받아 생활하던 때였어요. 너무 적은 액수라 부끄러웠고 더 많이 하고 싶었습니다. 소외되고 힘들고 아픈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김보성의 마음엔 능력이 부족해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하지 못한 게 한(恨)으로 남았습니다. 이후로 그는 당시의 한풀이라도 하듯 ‘나눔의 의리’를 지키는 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과 기아 아동을 위해 2000만 원을 기부하고,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을 통해 미얀마 아동들에게 다달이 후원금을 보냈습니다.쉰 살이 되던 해에는 새로운 도전도 했습니다. 2016년 소아암 환아를 돕기 위해 종합 격투기 데뷔전을 치룬 겁니다. 경기에선 석패했지만 대전료와 입장료 전액 8000만 원을 소아암 환아를 위해 기부합니다. 뜻깊은 일을 했지만 김보성 개인에겐 시련이 닥쳤습니다. 경기 도중 안구가 함몰돼 실명 위기를 겪은 겁니다.―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소아암 환아 기부에 매진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봉사활동으로 만난 소아암 환아가 있었어요. 그때 그 아이와 약속했거든요. ‘우리 아기 빨리 나아서 아저씨랑 밥 같이 먹자’고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경기를 치른 후에 병원을 몇 번 찾아갔어요. 근데 아이가 끝까지 저를 안 만나주는 거예요.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는데, 저한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러다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아이가 하늘나라로 떠나기 전날에도 엄마에게 ‘김보성 아저씨랑 약속 못 지켜서 어떡하냐’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가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고, 장례식장에 가서 입관하는 모습도 지켜봤어요.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기부금만 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봉사활동도 하시는 거네요. “진심 어린 행동이 따르는 것, 그게 진정한 ‘나눔의 의리’입니다. 보여주기 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거예요. 기부나 봉사를 특정 집단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기들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건 숭고한 일입니다. 대출도, 부상도 두렵지 않았던 김보성. 감염병 앞에서도 그는 용감했습니다. 2020년 2월, 대구·경북 지역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다수 발생한 시기에 직접 트럭을 몰고 가서 마스크 1만4000장을 시민들에게 직접 나눠준 겁니다.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하며 위로와 격려를 건넸습니다. ―그때도 기부만 하신 게 아니라 직접 트럭을 몰고 대구로 내려가셨습니다. “당시 대구 공기가 오염됐다는 루머까지 돌았어요. 마스크도 부족했고 대구를 격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어요. 대구 시민들이 정신이 피폐해질 정도로 너무 힘들었던 상황이었죠. 한 분 한 분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때 마스크 나눠드리면서 ‘힘내시라’고 시민들과 포옹을 했어요. 많은 시민들이 좋아해 주셨어요. 어떤 분은 편지 써서 주시고 ‘감사하다’고 꽃도 주셨고요.”―‘나눔의 의리’를 지키려 대출도 받고 부상도 입으셨습니다. 가족들 반응은 어떤가요? “제 아내도 저처럼 대한민국 최고 의리녀입니다.(웃음) 소아암 환아 도울 땐 저 따라 직접 머리카락 잘라서 기부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든든하게 가정을 지켜주고 아이들 잘 키워주고 있고요. 제가 기부하는 것, 봉사활동 하는 것도 다 이해해줍니다. 봉사활동은 아내도 함께 나간 적도 많았어요. 한 번도 반대한 적 없고 지지해줬습니다.”이쯤 되면 김보성의 직업이 마치 ‘의리계몽운동가’인 것으로 착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배우입니다. 액션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충무로에 입문해 수년간 연출부, 엑스트라, 극단 생활 등을 전전하다가 1989년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데뷔했습니다. 이미연의 상대역이자 주연급인 봉구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오릅니다. 1990년대만 해도 영화 ‘투캅스’ 시리즈, 드라마 ‘모래시계’ 등에 출연했지만 언제부턴가 영화, 드라마에서 ‘배우 김보성’을 보긴 어려웠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의리’를 외치는 김보성에게 예능인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배우보다 예능인 이미지가 강해졌습니다.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예전에 한창 활동할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배우다.’ 사실 저는 예능에서 웃기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가 말하는 스타일이 웃긴 건지, 상황이 웃긴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웃음을 준다면 저로선 감사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목마름은 아직도 많습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도 있습니다. 연기와의 의리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길! 으리! 으리!”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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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원 “안인득 방화-살인 유족에 국가가 4억 배상하라”

    조현병을 앓던 안인득(46)이 같은 아파트 주민 5명을 살해하고 17명을 다치게 한 2019년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의 피해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4부(부장판사 박사랑)는 15일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의 피해자이자 유가족인 원고 4인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총 4억여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딸과 어머니를 잃은 금모 씨와 금 씨의 여동생 금세은 씨 등이 2021년 11월 경찰의 안일한 대응이 참사로 이어졌다며 국가를 상대로 5억4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한 지 2년 만이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지난해 3월 ‘안인득 방화살인, 그 후 1068일의 기록’ 보도를 통해 이들의 피해 이후 삶과 정신적 고통, 소송을 제기하게 된 배경 등을 다룬 바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안 씨가 범행 전 6개월간 이상행동을 보여 112에 수차례 신고됐지만 경찰의 조치가 없었던 점 등을 지적하며 “경찰이 안 씨에 대해 진단 및 보호신청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치하지 않은 것은 현저하게 불합리하며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경찰이 행정입원 신청을 요청해 실제로 안 씨가 입원했다면 적어도 방화·살인을 실행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경찰의 직무상 의무 위반과 피해자의 사망·상해 간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금세은 씨는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승소했지만 가족을 잃은 아픔은 여전하다. 여전히 불면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린다”면서도 “이제라도 중증정신질환자를 국가가 제대로 관리해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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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원 “‘안인득 사건’ 국가 책임 인정…유족에 4억 원 배상하라”

    조현병을 앓던 안인득(46)이 주민 5명을 살해하고 17명을 다치게 한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의 피해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24부(박사랑 부장판사)는 15일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의 피해자이자 유가족인 금모 씨 등 원고 4인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총 4억여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딸과 어머니를 잃은 금모 씨와 아내 차모 씨, 금 씨의 누나, 금 씨의 여동생인 금세은 씨가 2021년 11월 국가를 상대로 5억4000만 원을 배상하라며 소송을 제기한 지 2년 만이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지난해 3월 ‘안인득 방화살인, 그후 1068일의 기록’ 보도를 통해 이들의 정신적 고통과 피해, 소송을 제기하게된 배경 등을 다룬 바 있다.판결문에서 재판부는 “경찰이 안 씨에 대해 진단 및 보호신청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치하지 않은 것은 현저하게 불합리하며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정신건강복지법 조항과 경찰 내부 업무지침 등에 따라 “경찰은 정신질환이 있고 자·타해 위험성이 있다고 의심되는 대상자에 대해 행정입원 등 조치를 할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안 씨가 2019년 4월 범행을 일으키기 전 6개월 간 이상행동을 보여 112 신고가 수차례 이뤄졌지만 경찰의 조치가 없었던 점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행정입원 신청을 요청해 실제로 안씨가 입원했다면 적어도 방화·살인을 실행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경찰의 직무상 의무 위반과 피해자의 사망·상해 간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했다.금세은 씨는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승소했지만 가족을 잃은 아픔과 충격은 여전하다. 아직도 불면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린다”며 “그럼에도 중증정신질환자를 국가가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는 판례가 생겼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앞으로 경찰이 현장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보호조치를 해서 제2의 안인득 방화·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로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국가책임제’ 도입이 힘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관측도 나온다. 법원에서 중증정신질환자의 입원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사법입원제도나, 환자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자·타해 위협이 뚜렷한 경우 환자를 병원에 호송하는 ‘비(非)자의 호송 체계’ 등이 국가책임제의 골자다. 백종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법제이사는 “현재 우리나라의 정신건강복지법은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 책임을 가족에게 과도하게 지우고 있다. 비자의 입원 대부분이 가족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것도 경찰과 지자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다”라며 “이번 판결을 통해 중증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와 치료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는 ‘국가책임제’ 논의가 진척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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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혐오하던 나를 넘어섰다”… 美 런웨이 선 한국인 최초 ‘플러스사이즈’ 모델[복수자들]

    키 160cm의 NBA 역사상 최단신 선수 먹시 보그스.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설립 이래 최초의 흑인 수석 무용수 미스티 코플랜드. 양손 대신 의수로 붓을 든 화가 석창우…. 이들의 공통점은 특정 직업에 대한 선입견을 깼다는 것입니다. 단신의 농구선수, 흑인 발레리나, 양손 없는 화가처럼 김지양 씨(37)도 ‘모델’이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깬 인물입니다. 그는 키 165cm에 70kg, 39-32-38의 신체 사이즈로 한국인 최초 미국 런웨이에 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입니다. 플러스 사이즈는 77사이즈(남성 기준 100사이즈) 이상을 뜻합니다. 여성 77사이즈, 남성 100사이즈 이상을 생산하는 기성복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의 등장은 잔잔한 호수 표면에 던져진 돌멩이와 같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생소했던 2010년, 그는 미국 최대 플러스 사이즈 패션위크인 ‘풀 피겨드 패션위크 LA’에서 한국인 최초로 데뷔했습니다. 살집이 있는 몸으로 런웨이를 당당하게 걷는 그의 모습은 ‘모델은 말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는 동양인 최초로 플러스 사이즈 모델 패션쇼 ‘캐리비안 패션위크’ 공식 홈페이지를 장식했고, 패션브랜드 ‘아메리칸어패럴’에 보낸 콘셉트 사진이 전 세계 온라인 투표에서 991명 중 8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부터 플러스 사이즈 잡지 ‘66100’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같은 이름의 플러스 사이즈 의류 및 속옷을 판매하는 쇼핑몰을 창업했습니다. 수면 위 파동은 컸지만 후폭풍도 뒤따랐습니다. 잡지사들은 그에게 화보 촬영을 제안하면서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 했고, 인터뷰 기사에는 그의 외모를 비하하는 수많은 악플들이 매일같이, 아무렇지 않게 달렸습니다. 근거 없는 비방 속에서도 그가 자존감을 지킨 방법은 나 자신을 바라보고,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중턱이 평생의 콤플렉스였고, 화보 촬영 후 턱을 깎는 포토샵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운 적도 있다고 고백합니다. 겹겹이 존재했던 자기혐오와 마주한 뒤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그의 이야기를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https://youtu.be/0Kr9gt3byXg)―2010년 165cm에 70kg의 몸매로 미국 런웨이에 선 최초의 한국인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주목을 받으셨어요. 지금도 같은 스펙을 유지하고 계신가요?그때보다 14kg이 더 늘었어요. 지금은 99사이즈를 입고 있습니다. ―데뷔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생소했어요. 어떻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되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대학교에서 외식조리학을 전공하고 요식업 관련 회사에서 일하다가 여러 가지 일들이 얽혀 권고사직을 당하게 됐어요. 퇴사 후 뭘 할지 몰라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제 길이라 생각하고 대학에서 전공한 일이 저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당황스러웠어요. 마침 그때 포털 사이트에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시즌1 지원자 모집 공고가 떴어요. 공고를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어요. 그동안 제가 살아오면서 실패하지 않을 법한 일들에만 도전해서 성취가 당연하게 주어졌는데, 모델은 실패할 것 같아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모델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셨던 건가요?‘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에 지원하기로 결심하고 프로필 사진 촬영을 하는데 저를 향해 터지는 조명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삶에서 내가 오롯이 주인공인 순간이 별로 없는데, 카메라 앞에 서는 그 순간만큼은 제가 주인공이었어요. ‘이 순간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서 모델에 제대로 도전해보게 됐어요. ―‘죄책감 없이 먹는 게 소원이야’라는 에세이를 내셨을 정도로 음식에 진심이세요. 먹는 것과 모델일, 두 가지가 양립하는 건 어렵다는 시선도 있어요. ‘자기관리가 귀찮아서 플러스 모델 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이죠.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건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고 마음껏 먹는다는 거예요. 저희도 먹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니에요. 사이즈나 외형을 제가 에이전시나 계약한 업체에 제출한 프로필에 맞게 유지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빨간 머리를 한 프로필 사진을 제출했으면 빨간 머리인 상태로 있어야 하고, 검게 태닝을 한 모습이면 그대로여야 하죠. 몸무게가 프로필 기준 더 쪄서도 안 되지만, 더 빠져서도 안 되고요. 모델이란 직업이 가지는 특수성은 플러스 사이즈 모델에게도 그대로 적용돼요. 또 우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처음 등장한 이유는 기성복 사이즈 이상을 입는 사람들도 모델이 착용한 옷을 보고 제대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게 해주자는 것이었어요. 모델이 무조건 마르기만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선입견인 거죠. 모델은 엄청 소식을 하거나, 아예 먹지 않는데 그런 극단적인 식단이 맞는지,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어요. 베르사체는 2020년 베르사체 역사상 처음으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세 명이나 런웨이에 올려 화제가 됐습니다. 2021년 샤넬 런웨이 쇼에는 네덜란드 출신 플러스 사이즈 모델 질 코틀레브가 당당한 워킹으로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포용과 평등, 신체적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은 조금 더딥니다. 여전히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하는 브랜드는 거의 없고, 런웨이에도 마른 모델이 대부분 섭니다. 일감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때론 부당한 처우도 참아내야 합니다. ―남성 잡지 맥심에서 2021년부터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를 열고 있어요. 기존에 열던 ‘미스 맥심 콘테스트’보다 의상의 노출 수위가 훨씬 높아 뚱뚱한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적 시선도 있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문제는 오랜 시간 설전을 펼쳐왔던 주제잖아요. 몸집이 큰 여성을 대상화하는 건 여성에 대한 혐오, 뚱뚱한 사람에 대한 혐오 등 다양한 혐오들이 중첩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맥심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는 미디어가 뚱뚱한 여성을 어떻게 소비하고자 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에요. 하지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일감이 정말 적기 때문에 어떤 기회라도 있다면 잡아야 하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콘테스트에 나가는 분들을 제가 비난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맥심과 같은 남성 잡지의 화보 제안을 받은 적이 있나요?플레이보이코리아에서 제안했지만 거절했어요. 당시엔 돈을 준단 말을 안 한 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 이건 제가 굉장히 오랫동안 겪어온 일이에요. 절 모델로 쓰고는 싶은데 돈을 주긴 싫은 거죠. 그런 경우 인터뷰 명목으로 절 부르고, 풀 메이크업을 시켜서 촬영을 해요. 결과물은 두 페이지짜리 화보고, 인터뷰는 아주 작게 나가죠. 일에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10년 넘게 겪어왔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대부분 쇼핑몰을 열어서 모델을 하거나, 수요가 비교적 많은 해외에서 활동하려는 분들도 있어요.―플러스 사이즈 모델에게도 요구되는 기준이 궁금해요.‘누가 더 예쁘게 살쪘는가’에 대한 소리 없는 경쟁이 있긴 해요. 허리가 가늘고 가슴과 엉덩이가 큰, ‘커비(Curvy)’한 몸매를 선호하죠. 결국 마른 모델을 뻥튀기해 놓은 체형이에요. 그래서 볼륨감을 키우기 위해 가슴과 엉덩이 확대 수술을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 자체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기성복보다 더 큰 체형의 사람들도 자신의 신체와 잘 맞는 옷을 이미지로 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해야 하는데, 플러스 사이즈 모델조차 현실에 없는 몸매의 기준에 또 다시 맞춰지는 거죠.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향한 혐오의 시선과 악플들, 적은 일감으로 인한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우울증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도 얼굴은 갸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변 권유에 보톡스를 맞을까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주변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한 결과 그는 영원하지 않을 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최근에 조울증 약을 먹고 있어요. 너무 오랜 기간 일에만 매몰돼 지냈던 것 같아요. 독립출판물 출간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아니다보니 5년 정도 잡지를 끌어오면서 많이 지쳤어요. 쇼핑몰을 운영하게 된 것도 힘들었어요. 주변에서 ‘너 모델 된 것도 쇼핑몰 해서 돈 벌려고 그러는 거지?’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죽어도 쇼핑몰만은 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했는데, (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내몰리듯 시작했거든요. 악플에도 많이 시달렸어요.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조울증이 찾아온 것 같아요. ―가장 상처가 됐던 악플은 뭔가요? ‘김지양은 허언증 환자’라는 악플이요. 길거리에서 헌팅을 당한 적이 있는데 너무 불쾌했어요. 싫다고 분명하게 거절했는데 계속 따라왔거든요. ‘싫다면 싫은 것이다’라고 SNS에 글을 올렸는데, ‘김지양은 허언증 환자다, 저렇게 뚱뚱한 여자를 누가 헌팅하느냐’라는 악플이 달렸어요. 가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있지도 않은 남편을 있다고 거짓말한다’는 악플도 정말 황당했죠.―모델을 꿈꿨지만 자금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쇼핑몰을 창업하셨어요. 지금도 쇼핑몰을 운영하는 게 힘드신가요? 지금은 굉장히 만족해요. 쇼핑몰 ‘66100’은 여성 66사이즈, 남성 100사이즈를 의미해요. 기성복에서 ‘라지’에 해당하는 사이즈죠. 그 이상의 사이즈를 영캐주얼이라 보통 부르는 브랜드들에서 제작하지 않아요. 그래서 66100은 ‘66 사이즈, 100사이즈 사이즈를 넘어서는 당신의 무한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저희 쇼핑몰을 이용해본 고객들은 “여기 절대 망하면 안 돼요. 여기 말고는 바지 살 곳이 없어요”라고 말씀하세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힘이 나요. 속옷도 마찬가지예요. 패드와 와이어를 없앤 속옷 상의 ‘브라렛’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허리 40인치 이상인 분들도 입을 수 있는 팬티를 만들고 있어요. 기성복 사이즈 기준으로 105, 110까지만 나오는데 저희는 130까지 커버합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나요?이중턱에 굉장히 큰 콤플렉스를 오랫동안 갖고 있었어요.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준 지 얼마 안 됐어요. 자신의 몸에 대한 콤플렉스에 대해 곰곰이 따져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자기혐오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올해 초 발간된 ‘엉엉 우는 법을 잊은 나에게’를 쓰면서 많이 생각을 정리했어요.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5년 간 원고를 못 보냈어요. 출판사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이야기를 바랐는데 저는 나 자신조차 건사하기 힘들어서 휘청대고 있었거든요. 그 때 자기혐오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고, 고민의 시간을 지나 작년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굴은 갸름해야 하지 않겠냐’라며 보톡스를 맞아 보라고 제안한 분도 있었어요. 보톡스는 영원하지 않아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에 중독됐을 때 문제가 되는 거죠. 내가 평생을 유지할 수 없는 것에 일시적인 만족감을 가지면서 살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스스로 사랑해 줄지는 개인의 선택이겠죠. ‘누군가의 말 때문에 이중턱을 이렇게 까지나 미워하고 싫어했다면, 이제 그걸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열심히 이중턱과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지양에게 ‘사이즈’란 어떤 의미인가요?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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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자 키 158은 말이 안된다”는 말에 마음 굳혔다…작은 키의 광대 일오팔[복수자들]

    ‘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까지어느 유튜버 소개글에 나온 문구입니다. 이 유튜버 이름은 ‘일오팔’. ‘성은 일, 이름이 오팔’은 당연히 아닙니다. ‘일오팔’의 본명은 이명재(27·남).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한 그는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입니다. 그가 ‘일오팔’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키가 158cm이기 때문입니다.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작았던 그는 중학교 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의사에게 “더는 못 큰다”는 진단을 받은 겁니다. 갓 중학생이 된 아들의 키가 더 크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미안하다”며 울먹였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은 어린 아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져 스스로 초라한 인간이 되지 말고 보란 듯이 살아 보겠다”고 독하게 마음 먹는 계기가 됩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키는 여전히 158cm입니다. 하지만 ‘작은 키’를 개성으로 내세워 47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됐습니다. ‘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유튜브 크리에이터 일오팔을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그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유튜브 채널 슬로건(‘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까지)이 인상적입니다.“그런 날이 오겠냐며 어떤 사람은 비웃을지 몰라도 적어도 저는 진심입니다.(웃음) 사실 연예계에도 작은 키로 활동하는 분들이 저 말고도 굉장히 많잖아요. 그분들 활동을 보면서 저도 응원을 받았던 것처럼, 저도 누군가에겐 그런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165cm, 170cm 정도만 됐어도’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신가요?“거짓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어중간하게 작을 바에 아예 확 작은 게 낫다고 생각해요. 시장 논리로 따져보면 희소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키 작은 남자들 사이에서 저처럼 확 작은 사람이 오히려 경쟁력이 있지 않나.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일오팔은 스스로 ‘광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일까 개그맨, 연예인, 유튜버 보다는 ‘광대’라는 단어가 일오팔에게 더욱 맞는 옷처럼 느껴집니다. 일오팔의 콘텐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탕후루, 마라탕 등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김한강 시리즈’와 키작남(키 작은 남자)이 겪는 생활 속 애환을 담은 ‘일오팔 시리즈’. 2~3분 남짓 짧은 콩트에서 다양한 상황에 처한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영상에서 일오팔은 화려하고 잘난 사람이기보다는 조금은 부족하고 찌질한 사람이 됩니다. ―일오팔을 두고 ‘찌질 미(美)’가 있다고들 합니다. “처음 유튜브 시작할 땐 다양한 시도를 해봤어요. 근데 팬들이 저의 불쌍하고 우울해하는 표정을 특히 좋아해주시더라고요. 우울한 표정 연기를 하려면 어떤 캐릭터가 좋을까 고민한 끝에 ‘김한강’ 캐릭터가 탄생한 거예요.”―리얼리티 보다는 연기 콘텐츠가 많은 편입니다. “원래는 정통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셰익스피어 희곡도 다 읽고 연구를 많이 했거든요. 유튜브 시작하면서도 연기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러다 ‘김한강’ 캐릭터를 만들었고 다양한 상황극을 보여줄 수 있게 됐죠. 언젠가 정극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찌질하고 처량하고 불쌍한 캐릭터, 저한테 익숙한 역할이요.”―광대가 되고 나서 가장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면요?“제 영상을 보고 팬들이 응원을 많이 보내주세요. 그 중에서도 키가 작은 친구들이 저를 보면서 힘을 많이 얻는다고 메시지를 보내실 때가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광대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저도 그 친구들 메시지가 진심으로 와닿고 감사하고 또 힘을 얻게 되거든요.한 번은 길거리에서 저보다 작은 남자 분(154cm)이 오셔서 ‘작은 키 때문에 힘들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제 영상을 보던 분이셨어요.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진심을 터놓고 대화했어요. 표정이 밝아지시는 걸 보고 저도 한참동안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작은 키’는 누군가에겐 콤플렉스일 수 있습니다. 일오팔도 처음부터 ‘키 작다’는 말이 듣기 편했던 건 아닙니다. 악의 없이 던지는 말에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때 놀림을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어요.“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도 정말 많이 놀렸고요. 누군가 악의를 갖고 심하게 괴롭혔다기보다는 ‘키 작다’며 일상적으로 놀림을 받다보니까 지속적인 데미지가 오는 거예요. 별 생각 없이 던지는 말들이 축적되다보니 상처가 되더라고요.”―지금은 오히려 ‘작은 키’를 전면에 드러내는 콘텐츠를 만들잖아요. 계기가 있었나요?“중학교 때 친구들은 저를 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쟤 진짜 웃긴 애다’ ‘쟤 키는 작은데 웃기긴 진짜 웃기다’ 친구들 사이에서 ‘웃긴 애’로 통하는 게 자연스러워지면서 중학교 졸업할 때쯤 스스로 결심했어요. ‘나는 광대해야겠다’고요.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유튜브도 고등학교 친구가 먼저 제안한 건데, 그 친구가 지금은 채널 ‘일오팔’의 PD를 하고 있어요. 친구가 유튜브하자면서 해준 말이 저한테 엄청 꽂혔거든요. 대놓고 이랬어요.” 남자 키 158cm은 진짜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너 유튜브 해야 된다.―얼핏 들으면 기분이 나쁠 만한 말인데요.“물론 기분 나쁘게 들을 수 있는데 전 아니었어요. 그 한 마디에 제가 완전 설득이 되어버린 거예요. 솔직히 제 키가 어중간하게 작은 것도 아니고 아주 확 작잖아요. 그게 약점이 아니라 개성이자 캐릭터, 강점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한국 여성 평균(161cm)보다 키가 작은 건데 연애할 때 고충은 없나요?“남들 하는 만큼 해왔습니다.(웃음) 연애 경험은 10회 정도 되는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모습을 멀리서 실루엣으로 보면 키도 몸집도 작아서 왜소하잖아요. 근데 가까이에서 앉아서 대화하면 ‘작아 보이지 않는다’면서 반전 매력이 있다고 해주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자신감이 작은 키를 보정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감을 갖게 되면 성격도 좋아집니다.”―주눅 들거나 위축되는 법 없이 항상 이성 앞에선 당당한 편인가요?“물론 저보다 5cm 이상 크신 분들은 조금 부담스럽긴 합니다. 비 오면 우산을 같이 쓸 때가 있는데, 제가 우산을 들면 (저보다 키 큰) 여자분들 눈을 자꾸 찌른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멀어지는 것 말고는 연애에 있어서 키는 전혀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유튜브 채널 ‘일오팔’은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채널 개설 2년여 만에 구독자 45만 7000명을 달성했습니다. 주력 콘텐츠인 쇼츠(60초 이하 유튜브 영상) 최고 조회수는 7045만 회를 찍었습니다. 최근엔 곽튜브, 빠니보틀 등 인기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다수 소속된 샌드박스로 소속사를 옮기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입니다.―부모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 것 같습니다.“저번 명절 때 부모님 뵀는데 너무 기뻐하시더라고요. 최근엔 할머니랑 손잡고 걸어가는데 저를 거리에서 알아봐주시는 분이 계셨어요. 사실 할머니께 제 직업(유튜브 크리에이터)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거든요. 근데 길거리에서 팬들이 알아봐주시니까 할머니도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저도 무척 기뻤습니다.”―꿈이 있다면요? “거창한 꿈은 없어요. ‘키 작다’가 칭찬이 되는 그날까지. 지금처럼 열심히, 잘 살아보겠습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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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플, 조롱 보란 듯이 나만의 길을 갈 것” 13년 만에 타이푼 컴백한 솔비[복수자들]

    ‘작가 권지안’이 ‘가수 솔비’로 돌아왔습니다. 201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2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국제 아트페어에서 대상을 수상하기까지. 지난 10여년 간 화가로 살았고 인정받은 그가 타이푼(TYPHOON)의 두 멤버와 13년 만에 신곡을 발표한 겁니다. 노래 제목은 ‘왜 이러는 걸까’. 최근 ‘복면가왕’에 출연해 화제가 된 타이푼 멤버 우재와 함께 부른 듀엣곡입니다. 2006년 결성된 3인조 혼성그룹 ‘타이푼’은 활동 4년여 만인 2010년 1월 해체된 그룹입니다. 타이푼이 해체됐을 무렵 그는 활동명 솔비를 잠시 접어두고 자신의 본명인 권지안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악성 루머와 댓글로 우울증을 앓던 그가 치료 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겁니다. 치료를 넘어 창작의 세계로 넘어온 그는 2012년 첫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전업 화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를 두고 일각에선 가수 활동을 아예 접는 게 아니냐는 추측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작가 권지안만큼이나 가수 솔비도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나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음악과 미술을 결합한 ‘셀프 컬래버레이션’ 같이, 가수와 화가를 모두 경험한 그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 권지안’ 그리고 ‘가수 솔비’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2006년 타이푼의 리더이자 메인보컬로 데뷔해 연예계에서 겪은 경험담과 “사과는 그릴 줄 아냐”며 질투 섞인 비난 세례에도 불구하고 작품 하나로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이야기까지.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그의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채널 ‘기웃기웃’은 여기로 접속하면 됩니다. https://youtu.be/qkzYPq9J9Uk 네이버에선 주소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으면 됩니다.)―13년 만의 타이푼 신곡으로 컴백 소감이 궁금합니다. “2010년 타이푼 해체되고 한참 뒤인 2017년에 ‘그래서…’와 ‘우하하’라는 곡으로 리메이크 앨범을 낸 적이 있어요. 그걸 듣고 거북이 선배님의 ‘비행기’를 제작하신 분이 저희한테 제안해주셨죠. 타이푼이 거북이의 노래 ‘비행기’를 불렀으면 좋겠다고요. 흔쾌히 제안에 응했어요. 거북이 선배님들에 대한 저희 기억이 엄청 좋았고요. ‘비행기’는 터틀맨(故 임성훈) 선배님의 훌륭한 업적이기도 해서 타이푼 스타일로 밝게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비행기’ 리메이크 작업을 계기로 멤버들이 다시 뭉치게 됐어요. 우리 이렇게 끝내지 말고 신곡도 내보자고요. 13년 만에 나온 신곡이에요. 제목은 ‘왜 이러는 걸까’입니다.”―이전의 타이푼 곡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신곡 작업할 때 멤버들끼리 한 이야기가 있어요. 원래 우리가 했던 신나는 댄스곡 말고 다른 스타일의 노래를 해보자고요. 따뜻한 가을에 어울리는, 사랑이 넘치는 설레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우재(타이푼 리드보컬)씨가 ‘복면가왕’에 출연해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컴백 타이밍도 좋았어요. 우재 씨가 가창력이 굉장히 좋거든요. ‘복면가왕’을 통해서 우재 씨의 가창력이 널리 알려진 것 같아 너무 기뻤어요.”―올해는 ‘작가 권지안’이 아닌 ‘가수 솔비’로만 활동하시는 건가요? “올해는 미술 분야에선 안식년을 갖고 있어요. 10년 동안 작가로서 그림을 그려오면서 한 번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고 느꼈거든요. 새로운 작업을 위해선 다른 에너지도 필요하잖아요. 올해는 특히 음악에만 집중해보고 싶어서 ‘왜 이러는 걸까’ 다음으로 준비하는 음반도 있어요.”―솔로 음반인가요? “가수 알리 씨랑 함께 작업한 곡이에요. 최근 알리 씨랑 이탈리아, 스위스 여행을 다녀왔거든요. 그곳에서 영감을 받아서 제가 작사하고 알리 씨가 음악을 만들었어요. 11월 공개 예정이에요. 제목은 ‘에스프레소 마티니’입니다. 제가 ‘에스프레소 마티니’라는 칵테일을 되게 좋아하는데,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가사를 썼어요.”솔비는 가수 타이푼의 메인 보컬로 2006년 연예계 데뷔했습니다. 우재, 지환과 함께 3인조 혼성그룹으로 데뷔했지만 대중의 주목을 받은 건 솔비였습니다. 엉뚱하고 솔직한 캐릭터로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치며 솔비는 단박에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다보니 타이푼의 다른 멤버들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게 됩니다. 활동 스케줄, 수익 등 멤버들 간 격차는 자연스럽게 그룹 해체로 이어졌습니다.―타이푼 활동 시절 다른 멤버들보다 큰 인기를 누렸어요. “활동할 당시 제가 너무 바빴어요. 솔로 활동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타이푼 활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제가 자발적으로 팀을 나온 건 아니었어요. 개인 활동이 많아지고 수익이 커지니까 회사에서 자연스럽게 분리한 거였죠.”―타이푼 해체 후 멤버들과는 어떻게 지냈나요? “가족 같았던 사이였어요. 팀이라는 게 비즈니스 관계라고 하지만 멤버들은 나의 모든 걸 다 알고, 그 사람의 모든 걸 다 알잖아요. 어쩌면 가족보다 가깝기 때문에 서운한 게 많을 수 있고요. 가족처럼 느끼기 때문에 험한 말이 오갈 수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사이가 좋았어요. 우재, 지환 모두 저보다 동생인데 누나누나 하면서 잘 따랐고요.”―불화는 없었나요? “싸운 적도 많았죠.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멤버들의 문제라기보단 당시 매니저의 문제였죠. 그땐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이었잖아요. 한창 예쁠 때였고 연애도 하고 싶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매니저가 멤버들한테 ‘솔비 누나를 감시해라’고 시킨 거예요. 제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매니저는 걱정되니까 그랬던 건데…. 제 입장에선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기분이 나빴어요. 그걸 시킨다고 또 하냐면서(웃음).”‘가수 솔비’는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화면 속 솔비의 이미지는 이랬습니다. 엉뚱하고 솔직하지만 백치미를 지닌 미녀. 솔비의 이런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방송에선 그런 이미지로만 그를 다뤘습니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많은 연예인이 그렇듯, 솔비 역시 악성 댓글과 루머에 시달리게 됩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위기였습니다.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의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타이푼 해체 후 방송활동을 줄인 그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미술을 접하게 됩니다. 처음엔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미술이 지금은 그의 일부이자 전부가 됐습니다. 10년 만에 ‘가수 솔비’는 ‘작가 권지안’이란 호칭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됐습니다. ―‘가수 솔비’와 ‘작가 권지안’. 본인과 더 닮은 자아는요? “솔비는 입혀지고 포장된 캐릭터에 가까워요. 사회에서 생성되는 인격이 있고 원래의 내가 가진 천성이 있잖아요. 실제의 저는 내성적이고 진지할 때도 많아요. 하지만 ‘방송인 솔비’는 어쨌든 시청자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줘야 하잖아요. ‘가수 솔비’는 무대에서 화려해야 하고요. 그런 의무감 때문에 특정 이미지가 강조되어서 가끔 지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작가 권지안’은 원래의 제 모습을 전부 포용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내성적이고 진지하지만 재밌거나 화려할 때도 있고요. ‘본래의 나’라는 편안함이 ‘작가 권지안’일 때 더 느껴지는 것 같아요.”‘미술계 완판녀’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작가 권지안’의 작품은 컬렉터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작품의 낙찰가는 수백만 원부터 수천만 원대를 호가합니다. 최고가를 기록한 것은 ‘플라워 프롬 해븐’(Flower From Heaven)입니다. 2022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71회 경합 끝에 2010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추정가였던 400만 원의 5배 수준이었습니다. ―‘플라워 프롬 해븐’은 어떤 작품인가요? “개인적인 의미가 큰 작품이에요.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를 추모하려고 ‘플라워 프롬 헤븐’이라는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쓰려고 했어요. 근데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없는 거예요. 가사를 다 지우고 허밍으로 노래를 했어요. 허밍으로 부른 ‘플라워 프롬 헤븐’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에요. 이 그림에 스피커를 심어뒀는데, 그 안에 허밍 음악을 담았어요. 그림 낙찰받은 사람만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거죠.”―어떤 음악인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낙찰 받은 분께 음악 공개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있어요. 근데 그분께서 결국 음악을 공개하지 않으셨어요. 그분이 공개하지 않는 한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웃음)”―그림을 사는 분들을 위해 늘 기도하신다면서요. “저는 힘들고 우울하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때 미술을 선물처럼 만났거든요. 제가 그림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고 잘 극복했듯이 제 그림을 보는 분들도 치유의 에너지가 전달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림을 구입해서 집에 걸어둔다는 건 마치 가족이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내 공간에 누군가 들어와서 같이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누군가의 공간에 걸리든 제 그림이 행운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죠.”―‘작가 권지안’의 창작 동력은 긍정적 에너지인가요? “제 작품들 중 상처에 대한 표현을 담아낸 작업도 있지만 그럼에도 전 항상 긍정을 담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내가 미술을 통해서 극복했고 희망을 갖게 됐기 때문이에요. 미술뿐 아니라 삶도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갖기 위해 살아가는 거잖아요.”긍정과 희망을 그리고 싶다는 ‘작가 권지안’에겐 그의 작품세계를 폄하하는 말이 뒤따랐습니다. “사과는 그릴 줄 아냐”부터 시작해 ‘고등학교 입시 미술 같다’ ‘미대 신입생 수준이다’ ‘연예인 프리미엄 아니냐’ 같은 자극적인 말들이 쏟아집니다. 대부분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받는다는 주장들이었습니다. 202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국제 아트페어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두고도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가수 솔비’에게 쏟아졌던 악성 댓글이 이젠 ‘작가 권지안’을 향한 비난으로 바뀐 것입니다.―‘작가 권지안’을 향한 조롱과 폄하가 ‘가수 솔비’에 대한 악성 댓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평이라는 건, 작가를 분석하고 그 작가에 대해 작가의 세계를 정확하게 안 다음에라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저에 대해 분석도 않고 시류에 한두 마디 보태는 건 농담 따먹기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엔 화가 났다기보다는 평론하시는 분이 방송에 나와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계실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평론가는 평론할 때, 방송인은 방송할 때, 화가는 그림 그릴 때 멋있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일 가치가 있나요?”―본인 작품에 대한 비평 중에 와 닿았던 것도 있나요? “웬만한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선 정말 흥미롭게 봐요. 왜냐하면 작가가 자기 세계에 빠져서 깊은 골로 들어갈 때가 더 문제거든요. 이걸 객관적인 눈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해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 비평은 작가에게 좋은 재료이고 좋은 자극이에요.”―‘연예인 프리미엄’이라는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연예인이니까 프리미엄 붙는다’ ‘연예인 작품이니까 사는 거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실제로 돈을 주고 그림을 사 갈 때는 연예인이라서 사는 분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의 가수,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와 저의 작품 가치는 별개라고 생각해요.”‘직업화가’가 된 후부터 그에겐 스스로 세운 원칙이 있습니다. 작품 판매 수익금의 10%를 기부하겠다는 것. 특히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영·유아 양육 보호시설 경동원과는 2014년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도 봉사활동과 기부를 해오고 있습니다. ―미술을 통해 다른 이를 돕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저는 미술을 통해서 치유를 받았잖아요. 제가 받은 긍정, 치유의 에너지를 나누고 싶은 거죠. 제게 있어 미술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에요. 저는 미술로 인생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인내력이나 다양한 생각과 시야. 미술의 재료를 찾기 위해 자전적인 탐구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미술을 통해서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고 있어요.”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202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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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추행 누명 쓰고 아이돌 떠난 이 사람, 해병대서 ‘무적’이 되어 돌아왔다[복수자들]

    아이돌에게 ‘연애’와 ‘결혼’은 금기 중 하나입니다. 성인 간의 사랑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건 가혹하다는 시선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돌에게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미지입니다. 열애설은 아이돌이 구축해 온 판타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립니다. 나이가 서른 살에 가까운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결혼 소식을 알릴 때 팬들에게 장문의 손편지를 통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결혼을 하거나 열애설이 터진 멤버의 탈퇴를 팬들이 나서서 요구하기도 합니다. 엑소의 첸, 하이라이트의 손동운, 아이콘의 바비 모두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아이돌 밴드 ‘엔플라잉’ 멤버였던 권광진(31)도 금기를 깬 아이돌 중 한 명입니다. FT아일랜드, 씨엔블루를 배출하며 아이돌 밴드 명가로 불렸던 FNC엔터테인먼트의 기대주 엔플라잉으로 2015년 데뷔한 그는 2018년 팬과의 교제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가 팬미팅에서 팬을 성추행했다는 루머가 SNS에 퍼졌습니다. 당시 소속사는 “팬과의 교제가 사실로 확인돼 권광진의 탈퇴를 결정”했고, “성추행 의혹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추문에 휩싸인 채 팀을 떠났던 권광진이 탈퇴 5년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당시엔 여자친구의 존재를 떳떳하게 인정하지 못했다”는 그는 열애설 상대였던 팬과 지난해 결혼했습니다. 성추행 루머를 퍼뜨렸던 이들은 2021년 허위사실 유포로 민·형사상 처분을 받았습니다. 탈퇴 후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제대한 뒤 해병대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브 ‘무적권’을 만들어 ‘군튜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구독자 11만 명을 넘기며 인기를 끌고 있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아이돌의 연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8년 9월 엔플라잉 탈퇴 후 첫 인터뷰에요. 팬과의 교제로 소속사에서 퇴출당하신건데, 그 팬과 지난해 결혼을 하셨다고요.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 아내가 버스 정류장에 제 생일 축하 광고판을 걸었어요. 저도 그걸 보려고 갔다가 현장에 있던 아내와 우연히 마주쳤어요. 광고를 걸고 현장에 와서 챙기는 게 고마워서 제가 번호를 물어봤어요. 예뻐서 반한 것도 있고요(웃음). 연락을 주고받다가 사귀게 됐죠. 교제가 발단이 돼 팀은 탈퇴했지만, 이 친구는 제가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지난해 결혼을 했거든요. 처음 팬과 사귄다는 소문이 퍼져서 소속사가 맞느냐고 확인을 했을 때는 “안 사귄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아이돌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사상교육을 연습생 때부터 받아서 저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발동했어요. 결국 교제 사실이 드러나서 소속사가 탈퇴를 결정했죠. 거짓말을 한 건 아직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성추행 의혹도 있었어요. 허위사실 유포자들을 고소했고, 2021년 유포자들이 형사상 처벌, 민사상 배상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 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아이돌 시절을 통틀어 성추행 루머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요. 제가 하지도 않은 짓으로 비난의 대상이 됐으니까요. 제가 성추행했다는 글을 SNS에 올린 사람이 제 아내와 같이 엔플라잉 팬 활동을 하던 친구였어요. 여자친구가 저와 사귄다고 하니 질투가 났는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어내서 글을 올렸더라고요. 허위사실이었기 때문에 저는 경찰에 입건조차 되지 않았고요, 저는 처음 글을 올린 사람과 악플러들을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했습니다. 형법상 유죄 판결을 받았고, 민사상 손해배상을 물었어요. 4년여 만에 제가 무고하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2006년 15살의 어린 나이에 FNC에 입사해 10년 가까이 연습생 생활을 했습니다. 정용화, 강민혁, 이종현과 함께 씨엔블루의 데뷔 멤버로 확정돼 일본에서 앨범을 내고 활동했지만, 한국 데뷔 직전 팀 색깔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자리를 이정신이 대체했습니다. 한 차례 데뷔의 고배를 마신 뒤 2015년 엔플라잉으로 데뷔했지만 2018년 성추문으로 퇴출당했습니다. 10대와 20대를 바친 10여 년의 연습생 기간에 비해 아이돌로 활동한 기간은 턱 없이 짧았습니다. ―탈퇴 후 멤버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멤버들과 종종 연락을 하고 지내다가 3년 전부터는 연락이 두절됐어요. 회사에서는 저와 멤버들이 교류를 한다는 게 사업적으로 안 좋을 거고, 팬들도 저와 멤버들이 연락하는 것을 싫어해서 자연스럽게 끊겼어요. 제가 탈퇴한 직후에 엔플라잉이 ‘옥탑방’으로 음원차트와 가요 프로그램에서 데뷔 후 처음으로 1위를 해서 정말 기뻤어요. 축하글을 제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팬들에게 항의 메시지가 오더라고요. 안 좋은 이유로 탈퇴했으니 더 이상 멤버들과 엮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죠. 그래서 글을 바로 내렸어요. ―멤버들과 오랜 기간 연습생 생활을 같이 한 가족 같은 관계였을 텐데요. 초반엔 가족 같은 관계이다가 점점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사내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가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저는 옳고 그름이 확실한 스타일이고 그걸 가감없이 표현하는 성격이거든요. 어느 순간 제 생각을 드러냈을 때 멤버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어요. 그게 팀에게는 좋은 길이니 그랬을 거예요. 그러다보니 저도 제 생각을 숨기고, 멤버들에게도 솔직하게 터놓질 못했어요. 그런 게 쌓이다보니 점점 비즈니스 관계가 돼 갔어요. ―10년 넘게 연습생 생활을 했는데, 팬과 사귄다는 이유로 탈퇴를 해야 했어요. 억울하거나 아쉽지는 않나요? 너무 어린 나이에 소속사에 들어오다 보니 10년이 넘는 연습생 기간 동안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명확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밴드음악을 좋아해서 막연히 밴드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연습생이 됐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아이돌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윙크를 하고 하트를 만드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아이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걸 못하는 제 모습도 만족스럽지 못했죠. 그러다보니 방송에 나오는 제 모습도 모니터링하지 않았어요. ‘뜨거운 감자’ 때 무대를 보면 카메라도 안 쳐다보고 혼자 무대에서 뱅뱅 돌아요. 그래서인지 아이돌에 아무 미련도 안 남은 것 같아요. 권광진은 엔플라잉 탈퇴 9개월만인 2019년 9월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입대한 해병대는 그에게 인생 2막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는 7주간의 신병교육 과정에서 1000여 명의 기수 동기 중 1등에 해당하는 ‘무적해병상’을 받았습니다. 제대 후에는 해병대 관련 콘텐츠로 유튜브 ‘무적권’을 만들어 구독자 11만 명을 넘겼습니다. ―제대 후 해병대 유튜브 채널 ‘무적권’을 개설했어요. 최근 구독자 11만 명을 넘겼는데, 수익활동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해병대 관련 굿즈를 판매하는 ‘해병대 스토어’도 운영하고, 유튜브 활동도 하면서 감사하게도 아이돌 때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이 돈을 벌고 있어요. 제가 엔플라잉 활동 정산이 되기 전에 탈퇴를 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일을 하면 돈을 받는 구조를 이해한지가 얼마 안 됐어요.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은 어렸을 때부터 연습생으로 들어가서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교육이 무의식에 흘러들어가 있어요. 그러다보니 오늘 스케줄을 가면서도 얼마를 받는지도 모르고, 콘서트를 해도 수익이 정확하게 얼마인지 모르는 거예요. 너무 어리다보니 돈에 대해 민감하지 않았던 것도 있고요. ―기수 동기 중 1등에 해당하는 ‘무적해병상’을 받았어요. 해병대가 왜 그렇게 좋으셨나요?엔플라잉에서 탈퇴했을 때 그 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이 박살난 상황이었어요. 입대 당시 제 머릿속엔 ‘생존’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어요.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다보니 예전에 추구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빈손에서 시작하니 해병대 생활에 더 절실하고 열심히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오롯이 쏟았죠. 군대 생활이 체질에 맞아서 직업군인도 고려했어요. 헬기조종 쪽으로 가려고 교재도 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새벽에 제 머리맡에 편지를 두고 나가시더라고요. 헬기 조종은 사고가 나면 무조건 즉사거든요. 위험한 일에 도전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셨는지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군인이 되는 대신 군대 콘텐츠를 만드는 일로 만족하고 있어요. ―병역기피로 논란이 된 남자 연예인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례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굉장히 안타까워요. 논란이 일었던 분들 대부분 잘 나가다가 한 순간 병역기피로 활동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군대가 사실 그렇게 안 빡세거든요. 연예계가 훨씬 더 힘듭니다. 제가 해병대 입대 첫날 느낀 게, ‘잠은 재워주네?’였어요. 저는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잠을 많이 자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전 군대에서 오전 5시 반이면 눈이 떠져서 제일 먼저 씻고 자리를 정리했어요. 육체적으로는 해병대가 아이돌보다 더 힘들 순 있지만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하면 돼요. 아무리 무거운 걸 메고 훈련을 받아도 정신적으로 힘든 것만 못해요. 팬과의 교제는 사실이었지만,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성추행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평생을 약속할 정도로 끌렸던 상대와 연애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퇴출당해야 했던 당시 상황이 억울할 법도 하지만 권광진은 “누구의 탓을 할 것도 없다. 오로지 내 부주의였다”고 말합니다. ―해병대가 여러 모로 삶의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은데요,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탈퇴 직후에는 성추행 루머를 퍼뜨린 팬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을 탓했어요. 군대에서 저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됐어요. 제 부주의로 팀을 탈퇴하게 됐기에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더라고요. 연습을 열심히 안했거나, 누군가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던 제 잘못들이 많이 떠올랐어요. 요즘엔 온라인에 성추행 루머를 올렸던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까지 들어요. 처음엔 제가 좋아서 팬 활동을 시작했던 분들이잖아요. 제가 성실하게 활동했다면 그 분들이 그러지도 않았을 텐데…. 한때 제 팬이었던 사람들에게 피해보상까지 받고 ‘나도 참 악랄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다 제 잘못이라는 반성을 많이 하게 됐어요.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제 별명이 ‘권하마’에요. 방송 중에 물을 많이 마셔서 구독자 분들이 붙여 주신 별명인데요. 물을 많이 먹는 이유가 혼자서 쉴 새 없이 말을 해서 그래요. 처음 라이브 방송을 할 때는 시청자가 2, 3명밖에 없었는데, 그 사람들을 위해서 몇 시간동안 열심히 떠들던 게 습관이 돼서요. 그런데 전혀 힘들지 않아요. 아이돌 때는 제가 생각했던 것들을 마음대로 발언할 수 없고, 항상 조심해야 했어요. 만들어진 이미지에 갇혀서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갔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원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제가 원하는 스케줄을 잡잖아요. 무적권 채널도 스스로의 힘으로 키워가고 있고요. 그래서 어떤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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