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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수업 중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허용했더니 수업 시간의 최대 40%까지 딴짓을 하더라.”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 의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다양한 기관의 통계와 연구 결과를 종합 분석해 내놓은 ‘전국 학교 디지털화 전략 의견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노트북을 켠 학생은 켜지 않은 학생보다 수업 내용 질문에 대한 정답률도 30%가 낮았다. 디지털 도구가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수학과 독해 부문에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성적이 낮은 경향도 발견됐다. ▷의견서의 분석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컴퓨터로 필기하는 학생들은 종이와 펜을 사용하는 학생들보다 성적이 더 나빴다. 또 학생들에게 디지털 기기로 필요한 지식을 검색하도록 하면 깊이 있는 지식을 얻기보다 대강의 얕은 지식만 얻게 될 소지가 크다고 한다. 학생들이 콘텐츠를 종이가 아니라 화면으로 읽으면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다. 흥미 위주로 대강 줄거리만 파악하면 되는 웹 소설과 달리,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한강 작가의 작품이 디지털 기기론 눈에 잘 안 들어오는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한데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인공지능(AI) 디지털 교과서’가 내년 초등학교 3·4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의 수학 영어 정보 수업에 전면 도입될 예정이다. 교육부는 이후 단계적으로 이를 다른 학년과 과목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AI 교과서는 콘텐츠가 다양하고 기초, 심화 등 학생별 맞춤형 학습을 지원한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 교육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불안하다. 집에서도 쇼트폼 콘텐츠 등 스마트폰에 빠진 아이가 학교 수업마저 디지털 기기로 받으면 의존이 더 심각해질까 봐서다. 디지털 기기의 역사가 짧아 뇌와 어린이 청소년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세계적으로도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해 쓰는 곳은 독일과 미국의 일부 주(州) 등 소수다. 교실의 디지털 기기 사용을 의무화했던 핀란드는 유턴해 다시 종이책을 사용하고 있다. 문해력 저하 등 부작용이 있다는 평가 때문이다. ▷도입이 불과 4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도 AI 교과서 완성본이 공개되지 않은 점도 걱정을 키운다. 실물이 없으니 어떻게 가르칠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힌다고 말하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 구독료 등으로 2028년까지 4년 동안 2조∼7조 원의 적지 않은 예산이 들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교육부는 약 3년 동안은 기존의 서책형 교과서와 병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부작용이 어른거리고 준비도 부족해 보이는 정책을 쫓기듯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그때 거기서 어떤 늙은 남자를 봤어. 그건 바로 나였어. 그리고 난 나한테 닥칠 일이 아직도 남았다는 걸 깨달았지. 고통과 죽음.” 8일 개막하는 연극 ‘더 드레서’(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노(老)배우인 ‘선생님(Sir)’ 역을 연기하는 송승환 씨(67·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는 이 대사가 무척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다. 송 씨가 8세 때인 1965년 KBS 라디오 프로그램 ‘은방울과 차돌이’로 데뷔한 지 59년이 지났다. 턱선이 살아 있었던 쇼 프로 ‘젊음의 행진’ 진행자(1981∼1984)는 이제 눈가에 주름이 잡혔고, 치아 임플란트가 필요한 나이가 됐다. 송 씨는 “앞으로도 고통과 죽음뿐 아니라 닥칠 일이 많겠지만 인생 3막은 노역(老役) 배우로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송 씨의 삶을 연극에 비한다면 인기 절정의 스타가 1985년 무작정 미국 뉴욕으로 떠나는 것에서 1막이 끝난다. 2막에서 그는 1997년 비언어극 ‘난타’를 성공시키고 2018년 평창 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으며 클라이맥스를 맞지만 갑작스레 망막색소변성증 등이 발병하며 시력을 대부분 잃는(시각장애 4급) 위기를 맞는다. 낙담해 움츠러들 법도 한데 송 씨는 다시 연극 무대에 서고 있다. 희곡 형식을 따온 이 인터뷰는 송 씨 인생의 3막 도입부에 해당한다.● 1장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최악이 아니다”(‘리어왕’) [막이 열리면 1일 국군의 날 퍼레이드 직전의 소란함이 전해지는 정동극장 옥상이다. 사진기자가 송 씨의 모습을 여러 차례 촬영한 뒤 턱에 손을 가져다 댄 동작을 시연하며 “이렇게 하고 끝내자”고 말한다. 송 씨는 동작을 보지 못해 ‘바로 촬영을 끝내자’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지팡이로 더듬어 가며 폭이 좁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꽤 익숙해 보인다.] 조종엽 기자 정말 잘 안 보이는구나. 얼핏 봐선 눈이 불편한 줄 잘 모르겠어. 송승환 이제 6년 됐으니 적응하면서 사는 거지. 아직도 답답할 때가 많아. 제일 무서운 게 계단이야. 조 시력이 그렇게 나쁜데 상대 배우 표정은 어떻게 읽어? 송 얼굴을 보려면 30cm까진 다가가야 하는데, 무대에선 안 되지. 그래서 연습 때 영상을 찍어. (태블릿PC를 꺼내 영상을 최대한 확대한 뒤 15cm 정도 앞까지 고개를 가져다 댄다.) 나중에 이렇게 상대 표정을 확인하는 거지. ‘여기서 노려봤구나, 웃음을 머금었구나, 빈정댔구나….’ 그 표정을 외워. 또 귀가 예전보다 민감해져서 말투로도 느껴. 조 대본은 어떻게 읽어? 송 그냥 TTS(Text to Speech·음성 합성)로 듣고 외워. SNS 메시지도 AI 스피커로 들어. 조 발병하고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싶지 않았어? 송 자료를 찾아보니 내 병의 후유증이 ‘우울증과 자살’이라고 나오더라. 난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치료법을 찾아 나섰어. 미국까지 가서 권위 있는 의사를 만났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다’더군. 굉장히 낙담했지. 그날 밤 호텔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서러워서 눈물이 났어. 그냥 시원하게 실컷 울었어. 그리고 휴대전화 문자 확인부터 하나씩 생활과 연기를 계속할 방법을 찾아온 거지. 그게 재밌고 신났어.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손잡이에 붙은 손전등을 켠다.) 이것도 내가 개발한 거야.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어. 밤에 특히 잘 안 보이는데, 이걸 쓰니 밤거리도 안 무서워. 자신감이 생기는 게 기분이 좋더라고. 조 도움말을 주는 사람이 없었어? 송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더라고. 메시지를 귀로 들어야 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없었으니. 조 여전히 골프를 즐긴다고? 공이 보여? 송 골프장은 넘어져도 잔디밭이니 나에겐 굉장히 안전한 공간이야. 중심 시력이 죽었고, 주변 시력은 좀 살아 있어. 그래서 (고개를 돌리며) 옆눈으로 보면 공이 솜뭉치처럼 조금 보여. 방향은 캐디와 동반자가 가르쳐주고, 그린에 올릴 때는 망원경으로 햇빛에 반짝이는 벙커나 큰 나무 같은 지형지물을 살피고 대강 감을 잡지. 재작년엔 눈이 잘 보일 때도 못 하던 홀인원을 했어. 요점은 방법을 찾아내는 거야. 조 그런 긍정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송 생방송이나 연극을 많이 해봐서일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걸 여러 번 실감했어. 내일 도저히 막을 못 올릴 것 같았는데, 막이 오르더라고. 어렸을 때 집안이 많이 망해 봐서 경험치가 있었던 거 같아. 끝날 줄 알았는데, 안 끝나고 다시 일어나더라고.● 2장 “가슴 속이 돌로 가득 찼어”(‘더 드레서’) [젊은 송승환이 부모와 함께 사는 집에 돌아오면 채권자들이 거실을 차지하고 있다. 송승환, 트렁크에 신발과 의상을 챙겨 친구 집으로 들어간다.] 조 어릴 적부터 소년가장 격이었지? 송 드라마 ‘여로’(KBS·1972년) 할 때니 중학교 2, 3학년 때쯤이야. 원래 한 지붕 세 가족으로 주인집인 우리가 안방에 살고 건넛방 문간방은 세를 줬는데, 아버지 사업 실패로 집안이 망했어. 빚쟁이가 몰려오고 집이 넘어가 외할머니네로 들어가는데, 내줄 보증금이 없으니 문간방 세입자도 같이 이사 갔어. 그분들이 외할머니네 건넛방에 살고 우리가 문간방으로 들어갔지. 그때 내 방송국 수입이 생계에 도움이 됐으니 본의 아니게 소년가장 역할을 한 거지. 80년대 스타가 되면서 집안을 일으켰는데 집이 또 망했어. 집 2채하고 세간살이까지…번 돈을 한꺼번에 날렸어. 허무하더라고. 밖에선 화려한 스타로 아는데, 친구 집에서 몇 달 얹혀살았어. 다 그만두고 미국 뉴욕으로 가 3년 반을 지냈지. 조 생계를 위해 벼룩시장에서 시계를 팔았지? 송 500불에 중고 포드 스테이션 왜건을 샀는데, 옷이나 가방은 차에 많이 안 들어가도 시계는 작잖아. 브로드웨이 한국 도매상들에게서 떼어다 팔았지. 그때 스쿨오브비주얼아트 강의를 청강했는데, 학생들이 내는 단편영화 아이디어를 들어 보니 한국에선 몽땅 검열에 걸릴 것 같더라고. 내 머릿속에 자체 검열기관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았는지 깨달았어. 돌아와서 오랜만에 한국 드라마를 보니 느낌이 북한 드라마 보는 거 같은 거야. 뉴욕에서 고정관념을 깨서 나중에 ‘난타’를 만들 수 있었던 거지. 조 ‘난타’도 코로나19로 어려웠을 거 같은데…. 송 PMC프러덕션 설립 이래 처음으로 2년 동안 60억 원쯤 적자를 봤지. 마침 대출 상환하려고 모아놨던 현금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 이젠 거의 회복됐지.● 3장 “필요한 건 망각뿐이지”(‘더 드레서’) [로널드 하우드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더 드레서’는 1942년 독일군의 폭격이 이어지는 영국 런던에서 227번째 ‘리어왕’을 공연하는 노배우와 의상 담당 노먼의 이야기다.] 조 ‘에쿠우스’의 앨런(1982년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같은 강렬한 배역이 그립진 않아? 송 열정은 있는데 체력이 안 돼. 올 5월 2인극 ‘웃음의 대학’ 할 땐 왼쪽 어금니가 아파서 진통제 먹어 가며 했어. 마지막 공연 끝나고 치과에 갔더니 치근까지 상했대서 결국 뺐어. 원래 치아가 굉장히 건강했는데… 공연할 때마다 어금니를 하나씩 뽑으면 앞으로 공연을 몇 개나 할 수 있을까(웃음). 조 작품을 직접 골랐지? 송 노인이 대개 단순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선생님’은 입체적이라 매력적이야. 다혈질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인물로 보이지만 배우는 그럴 수 있다 싶어. 작품의 흐름이 깨지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지. 무대 위에서 박수받고자 하는 갈망이 나와도 닮았지. 또 ‘난타’ 시절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배우들이 그러더라고, 난 기억이 잘 안 나는데(웃음)…. 요즘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놀려. 조 올림픽 개·폐회식을 총감독했는데, 그래도 이루고 싶은 게 남았어? 송 과분했지. 고비를 잘 넘긴 건 분명해. 하지만 배우가 좋은 건 늙어도 노인을 연기할 수 있다는 거잖아? 분장실에서 죽은 ‘선생님’은 바라던 기사 작위도 못 받았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며 허탈해하지만 굉장히 행복하게 간 거야. 셰익스피어 작품 주인공을 모두 연기했잖아. 나도 평생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어. 노역 연기를 계속하다 간다면 그게 행복이겠지. 조 이번 연극에서 마음에 드는 대사를 꼽는다면…. 송 “필요한 건 망각뿐이지.” 나도 내후년이 칠순인데, 누구나 잊고 싶고 후회되는 일이 있는 법 아니겠어. 대부분 인간관계지. 조 그래도 조정 능력이 대단했던 것 같아. 송 언제부턴가 ‘조금 손해 보면 인생이 편하다’ 싶었어. 평창 땐 SNS를 정말 많이 했어. 회의가 끝나면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못한 이들에게 다 메시지를 보냈어. ‘정말 좋은데 예산이 안 된다’ ‘날씨 때문에 위험이 있다’…. 그러니 진척이 되더라고. 과거에 나도 연출자 말에 상처받았을 때 ‘전화 한 통 해줬더라면 마음이 풀렸을 텐데’ 싶었거든. 조 최근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의 ‘위대한 개츠비’가 토니상을 받았는데 기분이 묘했을 듯? 송 그런 욕심은 눈이 나빠지면서 내려놨어. 우리 ‘심청전’ 같은 게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할 만한 아이템이라고 보거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던진 뒤 용왕을 만나는 바닷속 이야기들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겠어. ‘언더 더 시’보다 나을걸. 만들 자신은 없고 그냥 생각만 해. 조 후배가 고민 상담을 해 오면 뭐라고 해? 송 “봄에 했던 고민이 뭐였는지 크리스마스 때 기억이 나던가!”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폐지 줍는 노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추석 연휴 뒤인 20일 새벽에도 경기 고양시의 편도 3차로 도로에서 폐지 수거용 리어카를 끌던 60대 여성이 뒤따르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들이받혀 숨졌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 ‘그러게 왜 인도를 놔두고 차도로 다니냐’며 혀를 차는 이들이 적지 않다. 리어카가 폐지나 고물을 실은 채 차도를 서행하면 ‘교통 흐름을 방해한다’며 경적을 울리거나 욕설을 하는 운전자도 없지 않다.▷하지만 리어카를 끄는 노인 대부분은 인도로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갈 수가 없어서 차도로 다닌다. 도로교통법상 너비 1m가 넘는 손수레는 차(車)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폐지 수집 노인의 43%가 리어카를 쓰는데, 대개 폭이 1m를 넘는다. 보도(인도)와 차도가 구분된 도로에서 이런 리어카는 차도로 통행해야 한다. 인도로 가면 자동차가 인도를 주행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차도가 따로 있는 도로에서 인도로 가다가 보행자를 치기라도 하면 12대 중과실 사고에 해당돼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폐지 수집 중 교통사고 경험률(6.3%)이 전체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 경험률(0.7%)보다 훨씬 높은 원인 중 하나다.▷리어카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은 상상만 해도 아찔한 위험을 감수한다. 리어카는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도로에서 맨 오른쪽 차로로 다니도록 돼 있다. 해당 차로를 불법 주차 차량이 점유한 경우엔 부득이하게 왼쪽 차로를 일부 침범하게 된다. 가로변에 버스전용차로가 있는 도로에선 전용차로 왼쪽이 지정 차로다. 이런 도로에선 왼쪽 차로의 일반 차량과 오른쪽 차로의 버스 사이를 곡예 하듯 다녀야 한다.▷동네 주택가 이면도로만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소리다. 지난해 말 정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폐지를 주로 집 근처(4km 이내)에서 수거하는 노인은 전체의 43%였고, 나머지는 그보다 훨씬 먼 거리까지 이동하며 폐지를 수집했다. 전체의 47%는 상가·사무실 지역에서 폐지를 주웠고, 주거지역과 상가 등을 가리지 않고 전 지역에서 줍는 이들도 28%였다. 그렇게까지 다니면서 폐지를 주워도 손에 쥐는 돈은 하루 평균 6000원 남짓이었다.▷일정 크기 이상의 손수레를 차로 분류하는 현행법은 소달구지와 마차가 자동차와 함께 도로를 달리던, 그래서 일반 도로의 통행 속도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았던 과거 시대의 유산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제 도로에서 우마(牛馬)는 사라지고 폐지 줍는 노인만 덩그러니 남아 자동차에 치이는 위험을 감내하고 있다. 당장 노인 빈곤을 해소할 수 없고, 모두에게 폐지 수거보다 나은 다른 일자리를 제공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좀 더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혼자 삭이고 읊조리고 되뇌면서 말에서 타인으로 향한 폭력을 제거하는 것요.” 한국 시(詩)의 미덕을 묻는 물음에 답하는 박준 시인(41)의 말투는 자신의 시처럼 조곤조곤했다. 누구의 목소리가 큰지 경쟁하고, 귀를 어디로 향하든 아우성으로 가득하지만 오히려 소통은 어려운 시대다. 나직한 시의 목소리가 그리운 요즘, “한국어로 시를 쓰고 읽어 온 백 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새겨놓은 심미적 유전형질 같은 것이 그의 시에는 있다”(신형철 평론가)고 평가받는 ‘문단계의 아이돌’ 박 시인을 1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마침 한국 현대 시의 태두로 꼽히는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이 1925년 출간된 지 내년이면 100주년이 된다. 신춘문예의 역사를 연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모도 마찬가지다. 박 시인은 “좀 느리더라도 에둘러 말하는 시의 화법이 필요한 시대”라고 강조했다.》―우리 시의 특질을 꼽는다면…. “말을 작게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강렬하고 짙을수록 혼잣말로 하고 자신을 직설적으로 모두 드러내지 않는 것은 한국 시의 형질이면서 문학을 넘어 우리에게 남긴 공통적 정서였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반성도 하고, ‘이 말은 필요치 않구나’ 하고 삼키게 된다. 갈등을 덜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바짓가랑이 붙잡아도 어차피 갈 사람은 가고, 서로에게 상처가 남는다. 내가 싫어서 가는 사람에게 꽃잎을 놓아주는 것이 궁극적으론 나를 돌보는 일 아니겠나.” ―정반대로 직설 화법의 시대다. “시의 화법이 외면받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가 돌직구, 사이다로만 이뤄진다면 누군가는 멍투성이가 될 것이다. 삼키고 삼켜도 삼켜지지 않는 것들을 마치 결정(結晶)처럼 꺼내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용건만 간단히 하는 게 미덕인데…. “편지를 쓰던 시절엔 계절 인사로 시작해 안부를 묻고, 하고자 하는 말은 한 3분의 2쯤 지나 슬며시 끼워 넣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긴 길을 돌아와야 했는지, 읽는 사람은 헤아렸다. 그럴 때 언어가 두터워진다.” ―학생들의 문해력이 낮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들을 손가락질할 문제가 아니다. 아랫세대는 많은 한자어가 낯설고, 윗세대는 범람하는 영어와 ‘펀펀(fun fun)한 축제’식의 표현이 낯설다. 20년만 지나면 중의적 낱말에 한자가 아니라 영어를 병기할 것이다. 공통으로 읽는 텍스트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시가 꿋꿋하게 견디곤 있지만 우리 공동체가 함께 농담이나 비유에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적어지고, 언어가 앙상해지고 있다.” 박 시인은 “올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없이 첫 번째 추석을 맞는다”고 했다. 시인의 시 속에서 “비 온다니 꽃 지겠다”(‘생활과 예보’에서)던 아버지, “나이 들어 말이 어눌해진”(‘쑥국’) 아버지,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 아버지, 하고 울었다”(‘종암동’)던 아버지다. 이 밖에도 여러 시에 ‘당신’ 등으로 등장하는 대상 상당수가 아버지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각별했던 아버지다. ―부고를 거의 알리지 않았다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도 돌아가신 줄 잘 모른다. 생전 아버지가 당신 주변에도 부음을 전하지 말라고 했다. ‘특히 누구누구는 절대 부르지 말라’고도 했다. 이유를 여쭈니 ‘오면 슬퍼할 거다…’ 하시더라. 막상 돌아가시고 집안 어른께 여쭈니 ‘네가 아버지 말을 항상 그렇게 잘 들었냐’고 하셔서 아버지의 친지분들껜 알리는 것으로 타협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대화에서 정보를 전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내가 처음 중고차를 살 땐 경차는 어떻고 중형차는 어떻고가 아니라 ‘무슨 색을 사고 싶냐’고 물었다. 사랑과 걱정의 산물이라도 타인의 정보를 무차별 수용할 수는 없는 거다. 하지만 정서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너는 배추김치의 이파리를 좋아하는구나, 난 대를 좋아하는데…’ 이런 대화를 보여주셔서 관계가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충격이 컸겠다. “한 10년 전이다. 어느 날 부르셔서 가보니 동네에 똬리를 틀고 죽은 뱀이 있었다. 아버지는 ‘이 뱀을 이틀 전에 봤을 때는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다음 날은 고개를 숙였고, 오늘은 길의 정중앙 가장 양지바른 곳에서 갔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음을 준비한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죽겠다’고 했다. 결국 연하곤란(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것)으로 가셨다. 지금도 망연자실한 상태다. 하지만 올해 돌아가셨다고 올해만 슬퍼할 거 아니니까, 두고두고 슬퍼할 것이니까….” ‘시집은 2쇄를 찍으면 다행’이라고 할 정도인 이 시대에 박 시인의 인기는 경이롭다. 최근까지 63쇄를 찍은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년·문학동네)는 2022년 말 기준 ‘10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시집’(시선집 제외)으로 꼽혔다.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2018년·문학과지성사)는 21쇄를 찍었고,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2017년·난다)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대만 등에 이어 최근 중국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박 시인은 “시의 숲 입구에서 ‘이쪽입니다’ 하고 이끄는, ‘안으로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고목과 새로 자라는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다’고 안내하는 이정표 같은 나무가 될 수 있다면 족하다”고 말했다. ―시가 참 다정하다. “늘 끝을 생각한다. 아버지의 죽음이든 누나의 죽음이든 털거나 씻어버리지 않고 손에 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글을 써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다 보니 내 앞에 있는 생명과 얼굴에 다정해질 수밖에 없다. 염세적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러니 일단 식기 전에 이 국을 먹자’라고 얘기하는 존재 같다.” ―음식 등 일상의 감각을 소재로 하는 시가 적지 않다. “낯설고 미학적인 것 또는 감각을 극한으로 늘리거나 응축하는 일은 내 재능이 아니고, 최대한 익숙하고 보편적인 것을 여러 결로 나눠 얘기해 보자는 정도가 지향인 것 같다. 우주와 내가 알지 못하는 힘, 사상보다 눈앞에 놓인 무짠지와 어슷하게 놓인 젓가락과 이 자리에 오지 않는 사람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더 자신이 있다.” ―시인도 불혹을 넘겼는데, 세상일에 무뎌지나. “마흔 살이 되는 걸 동경하고 기다렸는데, 그렇지도 않더라. 얼마 전 누가 ‘자산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 왔다(웃음). 관리할 만한 자산은 딱히 없고… 글 쓰는 사람이니 기쁨이든 슬픔이든 감정을 최대한 강렬하게 만들어 놓는 게 자산 관리다. 쓰지 못하는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이 작가다. 쓰지 못한 것들까지 껴안는 것이 시작(詩作)이다.” ―‘아이돌’ 별명까지 붙을 정돈데, 출판사 창비 편집·기획자 일을 11년째 병행하고 있다. “다른 분야에선 스타가 되면 삶이 변하겠지만 시인은 아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생계도 중요하고, 또 생활이 감각과 태도를 만들지 않나. 출근길에 차를 놓치고 점심시간 인기 많은 식당에 입장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감각을 책상에 앉아 만들 순 없다. 작가는 성공만 한다. 실패한 글은 완성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하는가? 근원, 원천이 되는 생활에 뿌리를 딛고 있어야 한다.” ―시인의 직장생활은 다른가. “시인으로 출근하진 않는다. 언어에 예민하고 행간의 의미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직장 생활이 싫어진다. 집에 와서 책상 서랍에 숨겨두었던 시인의 탈을 꺼내 쓴다. 그래도 직장에서 한 소리 듣고 왔는데, ‘난 서정시인이니까 아름다운 시를 써야지’ 하는 건 어렵다. 그래서 최대한 다정하게 살아야 한다. 화는 내는 대로 더 오래가니 덜 내면서 살아야 한다.” 박 시인은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뒤 첫 언론 인터뷰를 동아일보와 했다. 당시 그는 “한국 시가 서정에만 매달리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벗어나려고 실험 일변도로 가는 것도 불편하다”며 “촌스럽더라도 작고 소외된 것을 이야기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25세 시인의 패기가 느껴진다. 잘 지켜온 것 같은지.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르고 건방지게 뱉었구나 싶다. 촌스럽다는 얘기는 자주 듣는데, 소외된 것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지는 잘 모르겠다. 문예사조를 보면 리얼리즘이든 모더니즘이든 말과 행동 중 어떤 게 먼저 나가느냐는 다르지만 둘이 반대로 가진 않는다.” ―등단 전 시절은…. “신춘문예와 문예지 공모전에 해마다 스무 군데 정도 투고했는데, 백 번 정도 떨어졌다. 모아놓은 등기우편 영수증이 그 정도 되더라. 그땐 하루에 10시간씩 시를 썼다. ‘한 번 사는데 시랑 결혼하는 거지’ ‘시인이 뭐 굳이 삼시세끼를 챙겨 먹어, 막걸리만 마셔도 되는 거지’ 싶었던 때다. 다르게 감각하고 다르게 먹고 다르게 자고 다르게 걸어야 작품에 개성이 녹아난다고 생각했다.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기도 했던 것 같다.” ―과작(寡作)이다. 경력을 보면 시집이 서너 권은 있는 게 보통 아닌가. “산문 쓸 때는 ‘진실하게 써야지’라는 생각만 하는데, 시는 ‘기대보다 훨씬 더 잘 써야지’라는 강박이 있다. 또 동료들이 마음이 약해서 독촉을 잘 못한다(웃음). 내년 하반기 창비에서 새 시집이 나온다. 올겨울엔 시를 소재로 산문집을 낼 예정이다.” ―세상에 시는 왜 존재하나. “시는 삶에 대해 현명한 답을 내놓는 것보단 낯선 질문을 던지는 일에 가깝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때에도, 혹은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을 아프게 되뇌어야 하는 순간에도 시는 존재 곁에서 빛을 낸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국내에서 ‘텔레그램 망명’이 벌어진 지 이달로 딱 10년이 된다. 2014년 9월 검찰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수사팀 신설과 노동당 부대표 카카오톡 압수수색 논란으로 ‘사이버 검열’ 우려가 불거지면서 소수만 썼던 텔레그램이 순식간에 다운로드 순위 1위로 올라섰다. 요즘 텔레그램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만악(萬惡)의 온상으로 통한다. 범죄 정보와 마약, 딥페이크·성착취물, 리딩방 사기, 테러 모의, 극단주의, 불법 총기 거래…. 세계의 온갖 어둠에 텔레그램이 빠지지 않는다. ▷“사용자가 갑자기 9억5000만 명으로 늘면서 범죄자들이 악용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를 개선하는 것이 목표다. 내부적으로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최고경영자(CEO)가 6일(현지 시간) X(옛 트위터)에 올린 성명이다. 두로프가 최근 프랑스에서 조직범죄 공모 등 혐의로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나면서 ‘당국에 꼬리를 내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긴 성급하다. 텔레그램은 근처에 다른 사용자가 있는지 알려주는 ‘People Nearby’ 기능이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삭제하겠다고 했지만 원래도 쓰는 사람이 별로 없는 기능이다. 핵심은 향후 텔레그램이 각국 사법당국의 요청에 응답하느냐이다. 텔레그램은 지금도 홈페이지 ‘자주 묻는 질문(FAQ)’을 통해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현재까지 정부를 포함한 제3자에게 0바이트의 사용자 데이터를 제공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전한 텔레그램 전직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정부 기관 요청 이메일 함은 거의 체크되지 않는다’고 한다. ▷두로프는 성명에서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암호화키를 넘겨달라는 러시아 당국의 요구와 평화 시위대의 채널을 차단해 달라는 이란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정부 기관에도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두로프의 이상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순진한 척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실에선 혁명가를 위한 메신저가 곧 범죄자의 방패가 된다. 이란 등에선 결국 텔레그램 사용이 금지됐으니,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용도로도 빛이 바랜 셈이다. 영웅에서 피의자로 전락한 두로프의 운명은 그의 지향 자체가 가진 모순이 품은 것이다. ▷마치 초법적 존재처럼 운영돼 온 텔레그램이 각국의 법 규제에 승복하기 전까진 딥페이크 등 범죄 피해자의 고통을 끝내기 어렵다. 흔히 텔레그램은 모든 메시지를 서버에 저장하지 않는다고 오해되지만 그건 ‘비밀 대화’를 설정했을 경우이고, 기본 설정인 일반 대화나 그룹 채팅은 내용이 여러 나라에 있는 서버에 분산돼 저장된다. 범죄 메시지는 어떤 플랫폼이라도 사법당국에 정보가 제공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야 범죄자들이 악용할 엄두를 못 낼 것이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일본 정부가 ‘우키시마(浮島)호 침몰과 함께 사라졌다’던 승선자 명부 일부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방한을 하루 앞둔 5일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1945년 8월 우키시마호가 강제 징용됐다가 귀국하려던 조선인 수천 명을 태운 채 폭침된 지 79년 만이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 해군이 고의로 폭파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랜 세월 피해자와 유족의 한(恨)을 외면해 온 일본이 이제야 달랑 명부를 가져온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 일대를 요새화하면서 방공호와 철도 건설 등에 조선인을 대거 동원했다. 조선인은 기아와 매질, 중노동에 시달렸다. 패전을 맞아 보복이 두려웠던 일본 해군사령부는 조선인 수천 명을 부산으로 돌려보내겠다며 우키시마호에 태웠다. 그러나 8월 22일 오미나토항을 떠난 배는 이틀 뒤 교토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일본 정부는 배가 기뢰를 건드렸다고 발표했지만 믿기 어려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당시 기뢰 폭발에 나타나는 물기둥이 보이지 않았다. 9년 뒤에야 인양한 배는 선체가 안에서 밖을 향해 휘어 있었다. 내폭의 증거다. ▷해군 승조원들이 부산에 가지 않으려고 자침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출항 전 승조원들은 ‘전쟁이 끝났는데 조선에 가면 맞아 죽거나 포로가 될지 모른다’며 항명 사태를 일으켰다. 배엔 돌아올 연료도 없는 상태였다. 폭발 전 일부 해군이 배에서 내려 구명보트를 타는 모습을 본 생존자도 있다. 폭침이 사고를 위장해 징용 조선인을 몰살하려던 해군사령부의 계획이라는 설도 있다. 배는 처음부터 부산이 아닌 마이즈루항으로 향했다. 사령부에서 일했던 아버지로부터 ‘(사령부가) 배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관방장관은 6일 “인도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대응해 왔으며, 이번 명부 제공도 그런 대응의 일환”이라고 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다. 승선자 명부의 존재가 드러난 뒤에도 일본 정부는 이를 부인하거나 답변을 피해 왔다. 유족들이 낸 배상 청구 소송에선 명부를 ‘승선 시 작성해 배에 비치한 것’으로 정의하며 ‘침몰로 상실됐다’고 주장했다. 최근에야 일본 기자의 정보 공개 청구를 계기로 명부 75건을 보관해 온 것을 인정했다. ▷“자기네가 아쉬워서 (사람을) 갖다 썼으면 되돌려 놔야지. 노예같이 부려놓고 사람을 죽이는 게 인도적인 건가?” 우키시마호 생존자의 호소다. 일본 정부가 뒤늦게 명부를 건네려면 사과와 진상 규명 의지를 함께 표하는 것이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일본 정부가 여전히 은폐하고 있는 강제징용 피해자 명부 등 자료가 적지 않다. 총리 방한 등 이벤트에 맞춰 마치 선물 주듯 해서는 일본 정부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릴 것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3월이었어요. 꽃망울이 터지고 봄이 올락 말락 하는, 부활절을 기다리는 때였거든요. 막연한 불안도 있었지만 시작의 설렘이 컸지요.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더 넓은 사랑을 하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애인이 되는, 이제 그 대열에 나도 끼는구나’ 싶었죠.” 1964년 수녀회의 문을 두드리던 때를 회상하던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의 표정에선 열아홉 살 이명숙(이 수녀의 본명)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부터 최근 단상집 ‘소중한 보물들’(김영사)까지 그가 50여 권의 책에 담은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는 수녀원 담장을 넘어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수녀회에 입회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이 수녀를 27일 부산 수영구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내 ‘해인글방’에서 만났다.》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이들,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이들, 참회하는 재소자, 군인… 그동안 세상의 온갖 짐 진 이들이 이 수녀에게 희망을 갈구하는 편지를 보내오거나 수녀원으로 찾아왔다. 이 수녀는 그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답장을 하고 곁을 내어줬다. 이제 삶의 황혼 녘에 이른 그는 “아프고 슬픈 눈물조차 소중한 진주로 변해 있음을 긴 세월의 선물로 받아 안는 요즘”이라고 했다. ―기록적 열대야가 이어졌는데, 어떻게 지내셨나요. “침방(寢房)에는 에어컨이 없거든요. 더울 때마다 불길 속에서 소방관들 고생하는 것 생각하며 참아요. 스스로를 길들이려고 노력하면 조금씩은 됩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이 수녀는 2008년 직장암 3기 진단을 받고, 수십 차례의 항암 치료와 장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암은 동행하는 친구로 지내고 있고, 완치까진 아니고 관찰할 게 남아 있지만 일상생활엔 지장이 없어요. 5년 전엔 양쪽 무릎 수술(인공관절)을 했고, 대상포진으로 입원도 하고, 통풍도 있고… 그렇죠, 뭐.” ―수영이 건강에 좋다는데요. “우리 신분에 수영하기는 좀 어렵죠. 1960년대 예비 수녀 시절 스위스 수녀님이 수련장으로 계셨고 여긴 그냥 벌판이던 때예요. 광안리하고 송정 바다에서 사람이 거의 없는 시간에 단체 수영을 몇 번 했어요. 수영복은 야하잖아요. 가슴도 드러나고. 그래서 속에 수영복을 입고, 겉에 수녀복이나 잠옷 같은 걸 입고 갔으니, 이상한 사람들로 보였을 거예요(웃음).” ―코앞에 광안리 바다를 두고 60년을 지내셨는데, 수녀라서 수영도 못하신다니…. “그때 선생 수녀님이 호칭을 평소처럼 ‘수녀님’ ‘자매님’ ‘마리아’ 이렇게 말고 다르게 부르라고 그러셨어요. 딴 사람들에게 수녀 신분이 들키지 않도록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옛날 사람들의 추억이죠.” ―엄격하던 시절이네요. “축제 때 예비 수녀들이 연극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탕자 연기를 하면 너무 리얼하게 한다고 꾸중 듣고, 화장하는 주인공은 예쁜 얼굴 때문에 허영심을 가질까 주의를 주고… 내외적으로 본성을 부자연스러울 만큼 억제했던 시절이지요. 수녀가 되는 과정으로 받아들였지만 힘들기도 했죠. 그래도 그때 그만두고 나갔으면 오늘은 없었겠죠? 엄격함도 시대적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고. 요즘은 재능도 많이 키워주고, 수도원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어요.”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요. “6·25전쟁 때 방공호 속에서 폭격을 피한 그런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 세대는 청소년기에도 세상에 태어났으면 선한 일을 해야 하고, 인류를 위해서 빛이 돼야 한다는 사명감, 갈망을 가졌어요. 인류사에 빛나는 이타적 삶을 부러워했죠.” ―수도 생활로 얻은 것은 뭔가요. “소나무를 바라보며 배운 평정심, 바다를 바라보며 배운 환희심, 도반(道伴)들과 같이 살며 배운 보리심.” ―마음에 새긴 경구가 있다면…. “윤동주 시인의 ‘서시’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기도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서 겸손을, ‘나한테 주어진 길’에서 소명을 배운 것 같습니다. 모든 이들의 마음속엔 서시처럼 ‘한 점 부끄럼 없는’ 선하고 순한 삶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고 봐요.” ―찾아와 만난 독자가 셀 수 없이 많죠? “20년도 넘었네요. 한 재일 교포 남성이 부인은 택시 안에 그냥 모셔 놓고 혼자만 저에게 와서 서툰 우리말로 고백을 하는 거예요. 아내가 아닌 다른 한국 여성을 좋아하게 됐는데, 가정을 지키려고 그냥 보내주고 헤어졌던 거지요. 아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는데, 제 시 ‘해바라기 연가’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몇백 번을 읽다 보니 저를 만나고 싶었대요. 그저 얘기를 들어줬을 뿐인데, 너무나 고마워하더라고요.” ―법정 스님을 비롯해 아름다운 인연도 많았습니다. “피천득 선생님(1910∼2007)은 항상 소년 같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옛날엔 여성을 보호해야 된다… 그런 게 있었잖아요. 선생님은 제 글 전시를 보러 오시면 적지 않은 연세에도 꼭 전철 타고 저를 바래다 주셨어요. 선생님이 독일에 있는 분과 펜팔을 하셨는데, 제가 받는 분 주소까지 써서 편지 봉투를 20개인가 예쁘게 만들어드렸더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며 정말 기뻐하셨던, 그런 장면들이 삶의 모퉁이에서 즐거운 추억으로 떠올라요.” ―수녀원 단체 생활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교부의 가르침에 이런 게 있어요. ‘하느님을 찾았으나 뵈올 길 없고, 영혼을 찾았으나 만날 길 없어, 형제를 찾았더니 셋 다 만났네.’ 출신도 성격도 다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내야 결국 하느님도 만나는 거죠. 어느 스님 말씀처럼 감자를 통에 넣고 막 씻으면 서로 씻기듯이, 공동체에서 균형을 맞추고 사는 것이 도(道)에 이르는 길이라 믿는 거죠.” ―보통 사람은 피붙이하고 사는 일도 쉽지만은 않은데요. “이별을 앞당겨서 생각해 보세요. 가족끼리도 미워하고 애증이 얽히다가도 위급 상황이 생겨서 병원에 입원하면 난리가 나지요. 그땐 ‘이렇게 되기 전에 좀 잘할 걸’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떤 일을 참기 힘들 때 언젠가 맞이할 내 죽음을 떠올린다”고 하셨습니다. “사랑 없는 막말이 귀에 꽂힐 때는 저도 힘들어요. 그렇다고 미운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거나 화를 내면 편해요? 아니죠. 영원히 사는 게 아니니 후회할 행동을 하지 말아야지요. 오늘 하루밖에는 없는 것처럼 살아야지요. 살아 보니 명랑함이 되게 되게 중요한 덕목이더라고요. 제가 병원에서 큰 수술을 했잖아요. 환자는 ‘내가 저 푸른 하늘을 다시 한 번 봤으면’ ‘신발을 신고 한 번 더 산책을 나갈 수 있었으면’ 싶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명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수도자도 죽음이 두렵습니까. “가보지 않은 세계니까. 우리는 내세를 믿지만 신앙을 떠나서, 인간이 살면 끝이 있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간 세상에 나도 이른다고 생각하면…. 죽음 자체보단 아름답고 순하게 떠날 수 있을까 두렵죠. 인간은 이기적이고 약한 존재니까.” ―책을 쓴 게 후회될 때도 있으셨나요. “너무 힘들 땐 ‘가만히 있을 걸 괜히 책은 써 갖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수녀가 만날 신문에 나오고 하면 선생님들 눈에 곱게만 보이셨겠어요. 옛날엔 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저에겐 말도 안 하고 누가 선정적인 그림을 넣어서 낭송 테이프를 만들어 팔아 다 파기하게 하고…. 1980년대 초에 눈물 콧물을 다 짠 것 같아요. 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서 ‘이러다가 수도 생활을 못 하는 게 아닌가’ 싶더라니까요. 조심하면서 살았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웃음).” ―옛 독자 편지들을 하나하나 다 간직하고 계시네요. “수십만 통은 될 걸요. 제가 수도자가 아니라면 저에게 편지 보낸 독자들을 모아서 간담회 한번 하고 싶기도 하더라고요. 이분들이 다 중장년이 됐을 거 아녜요.” ―벽에 팔순을 축하한다는 쪽지가 눈에 띕니다. “아주 소녀 감성으로 풋풋하게 설레는 마음으로 사는데, 팔순팔순 그러지 말라고….” ―요즘은 세상이 더 각박해진 것 같습니다. “정신적으론 오히려 가난했을 때가 더 인정이 있지 않았나 해요. 6·25전쟁으로 식구들이 낯선 부산으로 피란을 와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주인집하고 관계가 정말 가족 같았어요. 어린 마음에도 부산이 그 많은 피란민들을 다 품어 안고 받아줬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남이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먼저 그런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요. 남 탓보다는 나부터 이기심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남을 배려하고 이타적으로 살면 사회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순간 속의 영원을 살아야지요.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솔선수범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기쁨 발견 연구원’인 것처럼 함께 사는 이를 어떻게 기쁘게 할까 연구하다 보면 행복이 저절로 올 겁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이 수녀가 평생을 바라봤을 광안리 해변에 들렀다. 수녀의 시비(詩碑)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수녀가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날 때 읊었다는, 수녀의 삶이 담긴 것 같기도 한, ‘파도의 말’은 어떨까. “울고 싶어도/못 우는 너를 위해/내가 대신 울어줄게/마음놓고 울어줄게//오랜 나날/네가 그토록/사랑하고 사랑받은/모든 기억들/행복했던 순간들//푸르게 푸르게/내가 대신 노래해줄게//일상이 메마르고/무디어질 땐/새로움의 포말로/무작정 달려올게”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1945년 강원 양구 출생△1964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입회△1968년 수녀로 첫 서원△1970∼75년 필리핀 교리신학원, 성 루이스대 영문학과 수학·졸업△1976년 종신서원,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출간△1985년 서강대 종교학과 대학원 졸업△1992∼97년 수녀회 총비서△2023년 제26회 가톨릭문학상 수상부산=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일본 도쿄전력이 22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녹아내린 핵연료 잔해(데브리)를 시험 반출할 계획이었는데, 시작도 못 했다. 준비 작업 중 실수가 발생해 중단했다고 한다. 이날 작업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이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난 지 13년 만에 처음이었다. 시험 추출하려던 양은 3g 미만이었다. 원전 내 격납 용기 안에 방사선을 방출하는 데브리가 880t가량 있는데, 작업 첫날부터 차질을 빚어 2억9000만분의 1도 못 꺼낸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폐로(閉爐)의 최대 난관으로 꼽히는 게 데브리 반출 작업이다. 원전 사고 당시 핵반응이 일어나는 압력 용기 속 노심이 용암처럼 녹아 바닥을 뚫고 격납 용기로 흘러내렸다. 바로 아래에 곱게 쌓여 있으면 그나마 낫겠지만 다시 굳으면서 떡이 진 채 여기저기로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1년부터 반출 계획이 있었지만 3번이나 연기됐다. 이번엔 약 22m 길이의 로봇 팔에 손톱 형태의 장치를 달아 일부를 집어낸 뒤 성분을 분석하고 반출 방법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격납 시설 내 방사능이 워낙 강해 사람은 접근할 수 없다. 2015년 투입한 관측 로봇도 5시간 만에 고장이 났다. 2022년 2월에 이르러서야 1호기에서 처음으로 로봇이 핵연료로 보이는 퇴적물을 발견한 수준이다. 올 1월엔 원자로에 로봇 팔을 넣으려 했지만 배관이 퇴적물로 막혀 있어 실패했다. 격납 용기가 손상된 것도 꺼낼 수단을 제한한다.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 로봇을 이용해 수술까지 하는 세상이지만 그건 수술실이라는 완벽히 통제된 환경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데브리를 꺼내지 못하면 오염수가 계속 발생한다. 데브리는 지금도 붕괴열을 내기에 임시방편으로 격납 용기에 냉각수를 주입해 식히고 있다. 지하수도 유입된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오염된 물을 방사성 물질을 걸러내는 설비로 처리한 뒤 1년 전부터 바다에 방류하고 있다. 폐로를 2051년까지 마친다는 게 목표지만 일본 내에서도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1986년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발생한 체르노빌 발전소는 감당을 못해 그냥 콘크리트제 석관(石棺)으로 덮었다. 그 아래 묻힌 핵연료는 250t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엔 시간이 10년 정도 흐르면 어떻게 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지만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못 하고 있다. 그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위험이 줄어들 것을 기대할 뿐이다. 후쿠시마 원전도 차라리 석관으로 덮으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 복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뿐더러 후쿠시마 원전은 아래에 지하수가 많은 탓에 물이 오염돼 유출되는 걸 막기 어렵다고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대통령이 ‘일제의 식민지배가 불법 무효’라는 대한민국의 일관된 기조를 분명하게 밝혀 모든 논란을 없애길 바란다.” 최근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 임명으로 촉발된 정부와 광복회의 갈등이 확산하는 가운데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사진)는 16일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 교수는 대선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출마를 도운 최측근이자 죽마고우이면서, 이종찬 광복회장의 아들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광복회가 올해 8·15 광복절 경축식을 정부와 별도로 개최한 데 대해 “정부가 독립기념관 이사로 일제의 수탈을 부정하는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을 임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반일 종족주의’ 공저자를 임명한 데 이어 독립기념관장에까지 논란이 많은 인물을 임명한 걸 (광복회가) ‘도발’로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대통령 주위에 역사에 대한 이상한 견해를 부추기는 이들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대통령이) 중도 지향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며 “아직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아 있으니, 국민의 여망을 담았던 윤석열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이철우 교수 “대통령 주위에 이상한 역사의식 부추기는 이들 있지 않나”‘역사전쟁’ 복판에 선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독립기념관장 임명은 방아쇠일 뿐… 독립운동 의미 지우려는 이들 많아일제 주권 침해에도 나라 소멸 안 해… 대한제국-1919년-1948년 민국 계속미래 위해 경색 한일관계 개선 당연… 국민 동의 얻으려면 역사관 확고히친일 논란-정당성 시비 피해야《또 ‘역사전쟁’이다. 이번엔 정부가 김형석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고신대 석좌교수)을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한 것에 광복회가 반발하면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부친과 친구 사이’에 갈등이 일며 의도치 않게 역사전쟁의 복판에 서게 된 게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63)다. 이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과 서울 대광초, 서울대 법대 동기인 ‘절친’이다. 동시에 이종찬 광복회장의 아들,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그를 16일 서울 중구 콘퍼런스하우스 달개비에서 만났다. 이 교수는 인터뷰 내내 부친을 ‘광복회장’이라고 호칭했고, “대통령은 하나의 기관인데 무슨 사사로운 친구가 있겠냐”며 사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발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법사회학 연구자로 일제강점기 국적 문제를 포함한 국적법 전문가이기도 한 이 교수는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에 대해 “역사전쟁을 일으키면서 한일 관계를 끌고 나가니 자꾸 불필요한 친일 논란을 일으키고 정당성 시비에 걸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출마 선언을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이 ‘역사전쟁’을 직시하길 바란다”고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광복절 경축식이 갈라져 열렸다. “착잡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한 원인은…. “작년 광복절에도 건국절 논란이 있었는데, 가까스로 경축식이 거행됐다. 이후 독립기념관 이사에 낙성대경제연구소장(박이택)이 임명됐을 땐 이사진과 독립운동 유관 단체들이 강력히 항의했다. 하지만 (정부는) 오불관언이었다. 김 교수(이 교수는 그를 ‘관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교수’로 불렀다)의 독립기념관장 임명 건은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임명 등을 포함해 묵은 문제가 터지는 걸 촉발한 방아쇠일 뿐이다.” ―광복회는 김형석 관장이 후보자 면접에서 ‘일제시대 국적은 일본이다. 국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니냐’고 답한 것을 문제 삼았다. “해외에서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찾아주자는 운동이 벌어져 2005년 국적법 개정안이 제출됐다. 국회 법사위에서 ‘그분들은 국적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국적을 찾아드릴 필요가 없다’는 검토 보고가 나왔다. 그분들은 조선 국적 또는 1919년 선포된 대한민국 국적이라는 게 대한민국과 국회의 공식 입장이다. 다른 직책이라면 몰라도 독립기념관장 후보자가 이를 몰랐다는 건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일제가 강제로 뺏긴 했지만, 나라를 뺏긴 건 엄연한 사실 아닌가. “강도가 물건을 빼앗으면 주인이 소유권을 잃는가? 물건의 점유만을 잃는 것이지 소유권을 잃는 건 아니다. 국가 역시 강점으로 ‘소멸됐다’는 것과 ‘주권이 침해됐다’는 건 다른 문제다.” ―‘영토, 국민, 주권’이 있어야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대한민국이 북한에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수십 년이 지났다고 해서 헌법의 영토 조항을 망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국제적으로 불법 강점 전후 국가의 동일성과 계속성을 주장하는 예가 많이 있다. 소련의 해체로 독립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소련 편입 전의 자국이 소멸하지 않았다며 1940년 강점 전의 법제를 되살리기도 했다.” ―1941년 11월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한 것, 김구 선생이 1945년 9월 성명에서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단계”라고 말한 것 등도 당시엔 아직 건국이 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아닌가. “한국이 소멸했으니 나라를 새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주권이 침해된 나라의 주권을 되찾아 나라의 실질을 갖춘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건국’이라는 말을 레토릭(수사)으로 쓰는 예는 많이 있다. 김대중 정부 당시 ‘제2의 건국’도 그렇다.” ―김 관장은 건국절 제정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런 말로 논란을 피해 가면서, 실제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의미를 지우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정부도 건국절을 추진하거나 검토한 적이 없다는데….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역사적으로 헌법으로 확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공식 호칭 대신 ‘상해 임시정부’라고 불렀다.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왜 안 썼는지 의아하다. 이런 논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역사적 자기 인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 달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대한제국-1919년 대한민국-1948년 대한민국의 동일성과 계속성에 대한 확신이다. 이를 대한민국의 주권적 자기 정의(sovereign self-definition)라고 말하고 싶다. 이걸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1948년에 처음으로 태어난 나라로 보면 한반도 전체에 대한 대한민국의 관할권이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도 약화된다. 일제 통치의 불법 무효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수십 년 동안 과거사를 둘러싸고 오랜 한일회담을 통해 우리가 요구해 온 것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잃게 된다. 누구나 관점을 달리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정부와 공직자는 이런 관점을 따라야 한다.” ―‘1919년 대(對) 1948년’의 건국 시점 논쟁을 어떻게 보나. “의미가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한민국은 이미 존재하는 나라였기에 건국을 논할 이유가 없다. 광복회는 없던 국가가 1919년에 건국됐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한제국은 이미 근대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다자조약도 체결한 국가다. 그 조약의 효력이 계속됨을 1986년 대한민국 외교부가 확인했다. 그 국가가 1919년에 이름을 바꾸고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지,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니다.” ―과거 정부의 입장은 어땠나.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이런 대한민국의 동일성과 계속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주장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 서명국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될 뻔했는데, 일본과 영국이 반대해 안 됐다. 반대 논리가 바로 ‘한국은 일본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역대 정부가 대한민국의 계속성을 분명히 했다.” ―독립기념관장은 꼭 독립운동가 후손이 맡아야 하나. “그렇지 않다. 폭넓게 맡아야 한다. 관장 심사 기준에 독립운동가 후손을 우대한다고 돼 있다고 한다. 비록 관행이었다고 해도 세대가 많이 내려온 이상 이젠 바꿀 필요가 있다. 관장에 최고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뽑힐 수 있도록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재공모를 했으면 좋겠다.” ―광복회장이 ‘용산에 일제 밀정 같은 존재의 그림자’를 언급했는데…. “격앙된 가운데 나온 말인데, ‘밀정’은 좀 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심경이었는지는 이해한다. 광복회장이야말로 반민특위 때와 달리 ‘친일’로 낙인찍히는 사람의 범위가 부당하게 늘어났다는 의견을 계속 피력해 온 분이다.” ―광복회장과 대통령의 관계는…. “광복회장께서 작년 한일 정상회담 때 대통령을 정말 많이 도왔다. 전직 주일 대사들을 만나 ‘각자 뛸 수 있는 공간에서 같이 노력하자’고 했다. 강제징용 해결 방식에 대한 비판 여론엔 ‘피해자들을… 경청하고 반영되도록 노력하되 내내 업고 외교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인터뷰하며 정부에 힘을 실었다. 역사관을 확고히 함으로써, 국민적 동의를 얻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로 나아가자는 생각이었는데…. 참 아쉽다. 그렇게 도울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이 배척당하고, 공격당하고, 음해당하는 것이 그분에겐 굉장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인 것 같다.” ―야당은 ‘친일 정권’이라고 비판한다. “난 ‘친일’이라는 용어에 매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친일진상규명특별법, 재산환수법에 반대했고, 류석춘 교수 위안부 관련 발언 기소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칼럼을 쓴 사람이다. 정부가 ‘친일 몰이’를 자초하고 있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과거사 언급이 없었다. “전전(戰前) 일본이 가한 고통을 일깨우는 걸 회피하는 게 일본의 적극적 조치를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이 되겠나.”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을 평가한다면….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어내는 건 불가피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개선이 당연한 일이다. 정부가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디딘 건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일본과의 우호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서도 국가의 역사적 자기 인식을 확고히 해야 한다. 그래야 용서를 하고 아량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비위를 맞추며 무슨 조치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구걸, 굴종에 불과하다.” ―취임 전 대통령의 역사 인식은 어땠나.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이었던 2018년 강제징용 대법원 재상고심 판결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함께 친구 모친상 조문을 갔다가 내가 ‘청구권 협정 해석상 청구하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고 하자 대통령이 정색하며 배상 판결의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작년 강제징용 해법을 제시할 때 판결에 문제가 있는 듯 말하기보단 ‘판결은 존중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정치적으로 풀겠다’고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있다.” ―대통령의 역사 인식이 변한 것인가. “대통령이 휘둘린다고 하긴 어렵지만… 대통령 주위에서 이상한 역사의식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또 한국 정치가 양극화가 너무 심하고, 극단적인 네거티브로 가다 보니, 공격당하다 (자신도) 점점 극단으로 가서 방어기제가 작용하는 것 아닌가 싶다. 대통령에게 ‘중도 민심을 잃지 말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중도 민심을 잃으면 곤란하지 않으냐’고 했는데,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해야 중도로 확장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답을 들었다.” ―대선 전 윤 대통령이 ‘정치에 투신하면 여러 강점을 발휘할 것’이라고 인터뷰하는 등 많이 옹호했는데, 지금은…. “어리둥절한 상황이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자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었는데, 좁아져 매우 아쉽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최근 평안북도 의주에 대규모 홍수가 났는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주민 앞에서 위로 연설을 하면서 한국식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고 한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평북도의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이 연설 서두에서 흔히 사용하던 ‘동지’ 혹은 ‘인민’이라는 말 대신 ‘주민’이라고 했고, 노인이나 늙은이를 한국식으로 ‘어르신’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김정은이 쓴 ‘병약자’, ‘험지’, ‘음료수’, ‘폄훼한다’ 등의 표현도 북한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했다. 연설을 들은 주민들이 많이 놀랐다고 한다. ▷지방 출신이 서울서 오래 살아도 여전히 사투리를 쓰는 것처럼 말할 때 즐겨 쓰는 낱말은 잘 바뀌지 않는다. 집무실 TV로 한국 예능과 드라마를 챙겨 보는 것으로 알려진 김정은이다. 얼마나 즐겨 봤으면 용어까지 바뀌었을까 싶다. 한국 드라마를 시청한 10, 20대 청년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북한이지만 탈북민들은 “북한에선 고위층일수록 노골적으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본다”고 말한다. ▷북한은 지난해 초 남한 말투 사용을 금지하는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했는데, 법 조문이라기엔 표현이 저급하다. “괴뢰(남한)말은…조선어의 근본을 완전히 상실한 잡탕말로서 세상에 없는 너절하고 역스러운 쓰레기말”이라고 했다. 금지 항목도 깨알 같은데, “자녀들의 이름을 괴뢰식으로 너절하게” 지어선 안 된다. ‘오빠’라는 호칭은 소년단 시절까지는 쓸 수 있지만 청년동맹원이 된 뒤엔 써선 안 된다. 장마당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문화가 유입되는 걸 김정은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올 6월엔 비슷한 취지로 북한 국가국어사정위원회가 ‘다듬은말참고자료’를 발행하기도 했지만 혼란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평북도의 소식통은 RFA에 “(김정은이) 텔레비죤도 ‘TV’라는 한국식 표현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당국이 ‘다듬은말’로 사용을 권장하는 말이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이라는 명칭에서 보이듯 북한은 원래 ‘텔레비죤’을 많이 썼는데, 요즘엔 공식 매체도 ‘TV’라고 한다. ‘텔레비죤’이 ‘외국말 찌꺼기’라고 판단한 것 같은데, 실은 한국식으로 ‘TV’ 사용이 늘다가 아예 자리를 잡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문화는 물처럼 스며드는 것이어서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평북도의 소식통은 “주민들에게는 평양말을 사용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한국말을 대놓고 쓰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말투까지 주민을 통제하는 김정은이 정작 자기 입은 통제를 못 하는 모양새다. RFA에 따르면 “텔레비죤을 ‘TV’라고 하는 사람은 수상하니 신고하라”는 내용이 과거 북한의 반(反)간첩 포스터에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은을 신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뭔가 수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사도광산이 지난달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위원국의 만장일치로 등재됐는데, 2주일이 지나도록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가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데 동의한 경위를 놓고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는 탓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앞서 기자들에게 “일본이 전체 역사를 반영하기로 약속했고, 실질적 조치를 이미 취했다”고 등재 동의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막상 등재 뒤 우리 언론이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의 관련 전시물을 확인해 보니 ‘강제동원’ ‘강제노역’ 표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우리 외교부는 동원의 강제성 표현은 이번엔 협상 대상이 아니었다고 했다. 일본 측이 되풀이하진 않았지만 2015년 하시마 탄광(일명 군함도) 등재 당시 ‘한국인 등이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동을 했다’고 밝힌 것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언론이 관련 전시에 ‘강제’ 표현을 안 쓰는 데 한국이 사전 합의했다고 보도하자 외교부는 즉시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부정했다. ▷그러나 사실무근이라는 해명이 사실무근이었다. ‘굴욕 외교’라는 지적에 외교부는 “전시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강제’라는 단어가 들어간 일본의 과거 사료 및 전시 문안을 요구했으나 최종적으로 일본은 수용하지 않았다”고 뒤늦게 밝혔다. 일본이 강제동원 명시를 거부했는데도 세계유산 등재에 동의해준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외교부는 처음 설명이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할지 모르겠다. ‘강제 표현이 협상 대상이 아니었다’는 건 일본 대표가 세계유산위에서 다시금 강제성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얘기였고, 관련 전시 문안 협상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도 국민도 정부에 강제성 명시 요구 여부를 물었지, 그런 식으로 쪼개서 묻지 않았다. 이렇게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는 게 바로 거짓말이다. 정부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국민을 우롱해가며 굴욕 외교를 감추려 한 것이다. ▷등재 과정을 왜곡한 정황은 또 있다. 외교부는 세계유산위 개최를 앞두고 배포한 보도자료에선 “모든 노동자”를 위한 전시물을 설치했다는 일본 대표의 발언에서 단어를 “한국인 노동자”로 바꿔 전달했다. 일본이 위원국들 앞에서 모호한 표현을 쓴 걸 우리 정부가 국민들에게 감춘 셈이 됐다. ▷일본이 하시마 탄광 등재 당시의 ‘전체 역사를 소개하겠다’는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데, 처음부터 등재 동의를 작심하지 않고서야 이 같은 저자세 외교를 할 리가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협상 과정에서 ‘등재를 표결로 가져갈 수도 있다’는 각오는 찾아볼 수 없다. 한일 관계 개선과 한미일 안보협력 확대를 외교 성과로 꼽고 있는 대통령실의 직간접적 지침이 없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니가타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전시관을 마련했는데, 제목에서부터 왜곡된 역사 인식이 드러난다. 전시 제목은 ‘조선반도(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생활’. 일본 정부는 원래 강제동원 피해자를 ‘징용공’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소송이 잇따르자 동원의 강제성을 희석하기 위해 2018년부터 용어를 ‘구(舊)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로 바꿨다. 그런 용어를 버젓이 쓴 것이다. ▷전시 세부 설명엔 ‘징용’이 나오고, ‘관 알선’ ‘모집’에 총독부가 관여했다는 걸 담긴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강제동원’ ‘강제노동’ 표현은 빠졌다. 징용과 강제동원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맥락이 확연히 다른 말이다. 일본이 ‘당시 한반도가 일본 영토였고, 전쟁 중 자국민 징용은 강제노동이 아니다’라며 징용도 합법적이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선 일본 정부 대표단이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강제 노역했다”고 인정한 2015년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 등의 등재 때보다도 오히려 후퇴한 셈이 됐다.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강제노동’ 표현을 안 넣는 걸 우리 정부가 합의해줬다고 한다. ‘해당 문구 대신 상설전시를 하고, 한반도 출신자가 1500명 있었고, 노동환경이 가혹했다는 걸 소개하겠다’는 일본 측 제안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한일이 내년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불씨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작용했다”고 한다. 반면 우리 외교부는 사전합의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하고 있다. “강제성 표현 문제는 2015년에 정리됐고, 이번엔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이 오보를 낸 것이 아니라면 한일 양국 정부 어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외교를 과학처럼 하려고 하면 경직될 수밖에 없다”(헨리 키신저)지만 이번처럼 한쪽이 명백히 국민을 속이는 사안은 따지고 들지 않을 수 없다. 외교부 당국자는 6월 “우리 입장이 충분히 반영됐다고 판단하면 정부는 컨센서스(전원 동의) 형성을 막지는 않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 입장’엔 강제동원 명기가 있었나 없었나. ▷강제동원 명기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것대로 문제다. 하시마 탄광과 사도광산 등재는 별개 사안이다. 더구나 일본은 하시마 탄광 역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일본 정부 관계자가 ‘정부는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입장’이라고 계속 언론에 흘리고 있다. 일제 징용은 국제노동기구가 1999년 이미 강제노동이라고 인정한 사안이다. 관계 개선도, 미래 지향도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바탕이 돼야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반려견 유치원비보다 대학 등록금이 싸다”는 말이 있었는데, 거짓이 아니었다.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조사 결과 지난해 4년제 사립대의 연간 등록금은 평균 약 732만 원이고, 월평균으로 환산하면 61만 원이었다. 한데 반려견을 위탁업체에 맡기는 비용이 월 60만∼90만 원이어서 대학 등록금과 비슷하거나 더 비쌌다. 등록금은 영어유치원(월 174만 원) 사립초(76만 원) 사립국제중(106만 원) 자사고(75만 원) 고교생 사교육(74만 원) 등에 드는 비용보다 쌌다. ▷다른 물가는 다 오르는 동안 등록금만 제자리에 머무르거나 내렸기 때문이다. 사립대 평균 등록금은 2008년에도 738만 원이었다. 지난해까지 15년 동안 오히려 6만 원이 싸진 것이다. 국립대도 약 420만 원 선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해당 기간 소비자물가가 36.7% 올랐음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론 등록금이 2008년 대비 4분의 3 아래로 떨어진 셈이다. 정부가 등록금을 인상한 대학엔 국가장학금Ⅱ 지원을 하지 않거나 재정지원 사업에서 배제하는 방법으로 등록금 동결을 사실상 강요해 온 탓이다. ▷그만큼 학부모 부담은 줄었지만 문제는 등록금이 싸지면서 대학 교육의 질도 ‘비지떡’이 돼 간다는 데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연구비 실험실습비 도서구입비 등 대학의 교육과 연구 예산이 모두 2011년 대비 18∼26%씩 감소했다. 대학이 구독하던 전자저널을 끊은 탓에 교수가 다른 대학의 아이디를 빌려 쓰는 건 심한 축에 들지도 않는다. 실험에 필요한 장비를 못 사서 대학원생이 장비가 있는 다른 대학까지 몇 시간을 오간다. 건물에서 비가 새도 고칠 돈이 없다. 교수 월급을 물가만큼도 올려주지 못하니 인재가 기업으로 빠져나가거나 중요한 연구를 제쳐두고 기업 과제에 목을 맨다. ▷저소득층 학생이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던 시절이라면 모르지만 이제 그런 사례는 많이 없어졌다. 국가장학금 제도가 확충되면서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은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을 수 있고, 그 밖에도 소득 구간별로 연 350만∼570만 원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정부도 등록금 인상 필요성을 안다. 2022년 6월엔 교육부 당국자가 “정부 내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했으나 여전히 눈치만 보는 중이다. ▷정부가 장학금을 미끼로 등록금 인상을 규제해 대학의 등록금 책정 권한을 침해하는 건 법적 근거도 없다. 등록금뿐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고등교육에 대한 공교육비 투자가 초·중등교육보다 더 적은 건 한국과 그리스, 콜롬비아뿐이다. 고등교육 투자가 멎은 가운데 우리 대학의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인적 자원밖에 기댈 것이 없는 나라가 무엇이 중요한지 잊고 있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J D가 나에게 알랑방귀를 뀌고(kiss my ass) 있다. 그는 내 지지를 간절하게 원한다.” 2022년 9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J D 밴스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오하이오) 지지 유세에서 한 말이다. 사실 밴스는 이민 정책을 두고 트럼프를 “미국의 히틀러”에 빗대는 등 강하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런 밴스가 자신에게 복종한다는 걸 군중 앞에서 과시한 것이다. 올 11월 치러질 대선에서 승기를 잡은 트럼프가 15일(현지 시간) 밴스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밴스는 쇠락한 러스트 벨트 출신으로 성공한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를 2016년 출간하며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책엔 삶이 무너진 저학력 백인 노동자 계층의 분노와 좌절이 담겼다. 그가 예일대 로스쿨에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지원서를 쓸 때 ‘흑인이나 진보주의자인 척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가 속한 집단의 자포자기 수준이 그렇게나 심했다는 얘기다. 책은 트럼프 핵심 지지층의 정서를 대변했지만 밴스는 보수주의자이면서도 트럼프에 비판적이었다. 2016년 대선 당시엔 트럼프를 “유해하다(noxious)”고까지 했고, 보수 성향의 무소속 에번 맥멀린 후보를 지지했다. ▷그런 그의 입장은 정치 입문을 고려하기 시작한 2018년경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트럼프를 “오하이오주 등 지역민의 좌절감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이후 자신의 트럼프 비판 트윗을 삭제했고,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운동에 뛰어들었다. 트럼프가 패배한 2020년 대선은 부정선거라는 주장에도 동조하는 등 골수 트럼프 지지자로 거듭났다. ▷밴스의 변신이 순전히 정치적 야망 때문인지는 그 자신만 알 것이다. 다만 요즘 미국 정치 현실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트럼프에 맞서고서 정치적 성장을 기대하긴 어려운 게 사실이다. 2022년 오하이오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 역시 트럼프가 누구를 간택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밴스가 원래 가진 고립주의와 경제적 포퓰리즘 지향이 트럼피즘에서 길을 찾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1984년 8월 2일생으로 만으로는 아직 39세인 밴스는 1952년 리처드 닉슨(당시 39세) 이후 최연소 미국 부통령 후보다. 트럼프의 적지 않은 나이와 도덕성의 결함을 커버할 수 있는 후보로 꼽힌다. 당선될 경우 2028년 선거엔 출마하지 못하는 ‘트럼프 이후’를 노려볼 수도 있다. 밴스가 처음 유명해졌을 때 미국의 진보 성향 주간지 ‘뉴 리퍼블릭’은 그를 두고 ‘블루 아메리카(백인 노동자 계층)를 위한 거짓 예언자’라고 했다. 그 말이 맞을지 진짜 선지자가 될지, 트럼프뿐 아니라 밴스에게도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오후 방미 일정을 위해 하와이로 출국하기 전 정부기관에 내린 장마 대비 ‘16자 지시사항’이 논란이다. 지시 내용이 “이번 장마에도 피해 대비를 철저히 할 것”이라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천 범람과 제방 붕괴 위험을 점검하라든가, 산사태 취약지역은 미리 대피하도록 유도하라든가 하는 구체적 내용은 전혀 없었다. 이 지시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각 정부 부처에 전파했고 산하 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시도교육청, 일선 학교들에까지 통보됐다. ▷전달받은 공무원과 교사 등은 “이렇게 짧은 대통령 지시사항은 처음 본다” “(세부) 내용이 전무하다 보니 너무 건성건성으로 보인다”는 반응이다. 메시지는 내용만큼이나 형식이 중요하고, 분량도 일종의 형식이다. 공무원들이 호우 대비의 각론을 숙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를 대통령의 메시지에 담느냐 아니냐는 무게감이 천지 차이다. ▷최근 한반도는 짧은 시간 특정 지역에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지는 ‘극한 호우’가 일상화됐다. 수십 년에서 100년에 한 번 내릴 만한 큰비가 몇 년 만에 찾아오고 있다. 2022년 중부지방 집중호우로 반지하 주택 침수 참사가 났고, 지난해엔 오송 참사가 발생했다. 과거 강수량 기준으로 만든 대책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제방의 계획홍수위 이상으로 물이 차오르는 일이 잦아지고, 산사태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장마에도”로 시작해 마치 연례행사 같은 느낌을 주는 대통령의 ‘16자 지시’에선 그런 긴장감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시가 나오고 하루가 지난 9일 밤부터 10일 오전까지 충청과 호남엔 ‘물 폭탄’이 쏟아졌다. 남북 폭은 좁고 동서로 긴 강수 구역이 형성되면서 일부 지역엔 200년 만에 한 번 올 만한 폭우가 내렸다. 전북 군산 어청도엔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많은 시간당 146mm의 비가 내렸고, 충남에도 시간당 100mm가 넘게 왔다. 인명 피해도 적지 않다. 충남 서천에서 산사태로 집이 무너져 70대 남성이 사망했다. 충북 영동에선 저수지 둑이 무너져 주민 1명이 실종됐다. 곳곳에서 주민이 고립되고 집이 떠내려가고 농경지가 침수됐다. ▷대통령은 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최근 기후변화의 영향 등으로 예측을 넘어서는 기상이변이 자주 발생한다”며 피해 대비를 당부했다는데, 왜 실제 지시는 달랑 한 줄로만 내려갔을까. 그 많은 보좌진 가운데 ‘16자 지시’에 살을 붙일 사람이 없나. 이태원 참사 뒤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은 참모 조직이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컨트롤타워”라고 했는데, 참모 기능은 제대로 하는 건지 싶다. 대통령실을 지붕을 대강 얼기설기 엮어 비 새는 집처럼 꾸려가는 것은 아닌가.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최근 서울의 한 도심 농원에서 대표적 열대과일인 바나나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화제가 되고 있다. 국내도 근래 들어 바나나 온실 재배가 충남북과 경북 선까지 확대되긴 했다. 그러나 서울의 노지에서 열매가 열렸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례적인 결실엔 지난해에 이은 기록적 더위도 한몫했을 것이다. 기후변화 영향으로 지난해 전국 연평균 기온은 기상관측망이 확충된 1973년 이래 가장 높은 13.7도에 이르렀다. 지난달 서울은 평균 최고기온이 30.1도로 근대적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웠다. ▷여름은 계속 길어지는 추세다. 기상학적 정의로 요즘은 일 년 중 넉 달이 여름(일 평균 기온이 20도 이상으로 오른 기간)이다. 1912∼1940년엔 여름이 평균 98일(6월 11일∼9월 16일)이었는데, 2011∼2020년엔 29일이 늘어 127일(5월 24일∼9월 28일)이 됐다. 가을은 짧아져 온 듯하면 간다. 그래서 여름은 길게 발음해 ‘여∼름’, 가을은 짧게 ‘갈’이라는 농담도 나온다. 기상청이 이런 실정을 반영해 통념상 3개월씩으로 나뉜 계절의 길이를 재설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제 중반으로 접어드는 장마는 예측이 어렵다. 게릴라성으로 열대성 스콜 비슷하게 집중호우가 내린다. 낮엔 갰다가 밤에 ‘야행성 폭우’가 내리기도 한다. 장마 기간은 길어지는 추세다. 원래 6월 하순부터 7월 하순까지가 전통적 장마철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선 8월에 강우량 곡선이 재차 산 모양을 그리며 9월 하순까지 2차 강수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더워진 대기가 수증기를 더 많이 머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젠 장마가 아니라 ‘우기(雨期)’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남해안까지로 한정됐던 아열대 기후가 점차 북쪽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지난달엔 아열대 곤충인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가 극성을 부렸고, 뇌염모기의 출현도 빨라지고 있다. 한라봉이 아닌 ‘경주봉’이 나온 건 벌써 옛말이 됐다. 망고와 파파야 등도 경북 등지에서 재배된다. 바다도 뜨거워져 제주도 앞바다엔 열대의 맹독성 바다뱀이 출현했다. 24절기 중 ‘작은 더위’라는 뜻의 소서(小暑)는 7월 6, 7일이지만 이젠 씨 뿌릴 때라는 망종(芒種·6월 5, 6일)이나 하지(6월 21, 22일) 즈음이 어울리는 것 같다. ▷세계기상기구에 따르면 지난해는 기록상 지구가 가장 더웠던 해였다. 하지만 5년 안에 새 기록이 쓰일 가능성이 86%라고 한다. 폭염 발생은 산업화 전보다 세 배 가까이로 증가했고, 발생 시 강도도 강해졌다. 온실가스 배출이 줄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앞으론 더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 바나나야 흥밋거리라지만 그런 기후에 사람이 적응할 수 있을까가 문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국민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1억2000만 원을 쓸 수 없다는 인식이 안타깝다.” 청주지법 재판부가 지난달 31일 ‘오송 참사’를 일으킨 공사 현장소장에 대해 법정최고형인 징역 7년 6개월을 선고하면서 한 말이다. 이 돈이면 지난해 7월 충북 청주 미호천교 도로 확장 공사장에 홍수 방호벽을 설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설사는 콘크리트 방호벽 대신 흙으로 임시 둑을 쌓았다. 제대로 다지지도 않았고, 높이도 모자랐다. 부실 공사였다. 이 둑이 무너지면서 인근 오송 궁평2지하차도에서 14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판사는 “최소 징역 15년은 선고해야 했는데 한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다음 주면 전국이 대부분 장마권에 든다. 요즘엔 집중 극한 호우 탓에 하천 범람 위험이 더욱 커졌다. 그제 감사원이 지하 공간 침수 대비 실태를 점검한 보고서를 냈는데, 전국 지하차도 1086곳 중 제방 붕괴 시 침수 우려가 있는 곳이 최소 182곳이나 됐다. 그 가운데 159곳(87%)은 차량 진입 통제 기준에 인근 하천 홍수주의보 같은 외부 위험요인이 빠져 있는 등 기준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채였다. 132곳(73%)은 차량 진입 차단시설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오송 참사’를 겪고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행정안전부에 예산 지원을 요청한 지하차도 40곳 중 17곳은 지원을 받지 못해 차량 진입 차단시설을 설치하지 못했다고 한다. 환경부의 홍수 관리 대책은 시작부터 구멍이 나 있었다. 용역 계약을 맺었던 업체가 전체 하천의 6.3%인 235개 하천을 분석 대상에서 누락한 것이다. ▷사실 오송 참사 역시 그로부터 3년 전 부산 침수 사고와 양상이 판박이였다. 집중호우가 쏟아진 2020년 7월 부산 동구 초량제1지하차도에서 침수 사고가 났다. 차량 6대가 잠겨 3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당시 지하차도 출입 통제 시스템은 3년째 고장 나 있었고, 배수펌프는 작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행안부는 부랴부랴 자동차단 시설 구축과 원격 차단, 상황 전파 시스템 구축 등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3년 뒤 오송의 궁평2지하차도에도 침수 시 차량 진입을 자동 차단하는 시설은 없었다. 두 달 뒤에야 설치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배수펌프가 먹통이었던 것도 그대로다. 막상 물이 지하로 밀려들자 작동을 멈췄다. ▷지하 침수 사고가 반복됐던 7월이 코앞이다. 감사원 지적에 대해 행안부와 국토교통부는 대책을 마련했다고 했지만 현장에서 실제 얼마나 이행됐는지는 알 수 없다. 비가 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운전자들이 지하차도에 진입해도 될지 말지 불안해하는 게 우리 재난 안전 수준이다. 같은 비극을 얼마나 되풀이한 뒤에야 비로소 참사 예방에 전력을 다하려 하는가.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1987년 12월 8일 최창락 동력자원부 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륙붕 6-1광구에서 국내 최초로 양질의 대규모 가스층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부산 동쪽 120km 해상 ‘돌고래3’ 시추공에서 생산 가능성을 시험한 결과 10시간 동안 가스가 분출돼 불길이 타올랐다는 것. 국내 대륙붕 시추 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신군부의 일원인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 아니면 민주 정부냐’, 운명을 가를 대통령 선거일을 1주일여 앞둔 시점이었다. ▷‘산유국의 꿈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며 흥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매장 추정량을 묻는 물음에 기술진은 답을 꺼렸다. 정부는 “내년부터 3개의 평가정을 뚫어 경제성 여부를 판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실 1972년 첫 시추 이래 국내 대륙붕에서 미량의 천연가스나 유층(油層)이 발견된 건 여러 차례 있었다. 경제성이 없었을 뿐이다. 일부 언론 매체들은 발표 시점이 미묘하다는 점을 짚으며 섣부른 기대나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듬해 매장량 평가 시추에서 결국 경제성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선거를 앞두고 장관이 호들갑을 떤 셈이 됐다. ▷한국석유공사가 경북 포항 영일만 앞 심해에서 석유·가스를 탐사하는 ‘대왕고래’ 프로젝트 자료 일부를 비공개로 전환해 논란이 일고 있다. 원래는 정보공개포털에 자료 상당수를 ‘부분공개’ 상태로 올려놨는데, 최근 탐사 시추 관련 자료 등을 비공개로 바꾼 것이다. 공사는 “개인정보가 포함된 문서 등을 전환했다”고 했다. ‘등’자가 붙었으니, 개인정보 외 다른 이유로 비공개한 자료도 있다는 얘기다. 공사는 야당의 자료 요구도 ‘국가 자원안보 중요 정보’라며 거부하고 있다. ‘대왕고래’가 몸을 숨긴 것이다. ▷자원 부국의 꿈이 실현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1987년 돌고래3 발표 당시엔 생산 가능성 시험 결과라도 있었다. 이번엔 탐사 시추도 안 한 채 갖고 있던 자료만 새로 분석했다고 한다. 분석한 기업 액트지오의 대표가 브리핑까지 했지만 여러 의문이 깔끔하게 풀리진 않았다. 국민은 ‘대왕고래’가 얼마나 유망하길래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깜짝 발표’한 건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자원 개발은 특성상 언론이나 국민이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선 이번 유전 탐사 결과 발표에 대해 10명 중 6명이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아직 첫 삽도 안 떴는데 정부가 믿음을 잃은 것이다. 이런 식이면 비단 이번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뚝심 있는 탐사가 필요한 유전 개발이 초장부터 좌초할 우려가 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돌고래3의 재판이 되지 않으려면 국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투명한 정보 공개가 무엇보다 우선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자동차 부품 업체, 보건소, 전투기 제작 업체, 시·군청, 금융회사, 해경, 대기업…. 모두 최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자살한 직원이 나왔거나 그랬다는 의혹이 제기된 곳이다. 괴롭힘 피해는 직종을 가리지 않는다. 자살로 끝난 산업재해의 절반 이상은 과로와 함께 직장 내 괴롭힘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됐지만 비극이 여전히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하지만 부당한 피해를 막는 법이 생기면 악용하는 이들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적 이익을 노리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상사에게 복수하려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 허위 신고를 하는 이들이다. 비자발적 퇴사로 인정받아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상사가 괴롭혔다’고 거짓 신고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정당한 업무 지시를 상습적으로 이행하지 않다가 징계를 받게 되자 ‘괴롭힘을 당했다’고 신고하기도 한다. 인사 발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서장을 갈아 치우려고 거짓 신고하는 사례도 있다. 좋은 취지의 법이 ‘오피스 빌런’(직장 내 악당)의 무기가 된 셈이다.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 등의 관련 실태 연구에 따르면 허위 신고자는 보상금이나 고용 계약 연장 등 보상을 먼저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상의 괴롭힘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의 분리나 가해 중단을 주로 원하는 것과 달랐다. 같은 행위에 대한 반복 신고도 많았다. 회사는 책임을 회피하며 피신고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거짓 신고를 당한 사람 5명 중 1명은 부당한 징계까지 받았다고 한다. 허위 신고가 또 다른 유형의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학계에선 모호한 법 규정이 허위 신고의 여지를 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리 법은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에 비해 비슷한 법을 가진 나라들은 대부분 조항에 지속성이나 반복성 규정을 두고 있다. 대체로 6개월∼1년 이상 또는 주 1회 이상 계속돼야 괴롭힘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구체적 기준은 우리 사정에 맞게 바꾼다고 해도 객관성이 보완될 필요성은 있어 보인다. ▷허위 신고의 폐해는 신고당한 개인에 그치지 않는다. 거짓 신고가 횡행하면 진짜 피해자의 신고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지금도 직장 내 폭행·폭언 피해자 10명 중 6명이 불이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한다는데, 신고가 더 위축될 수도 있다. 가짜 사건으로 근로감독관 업무에 과부하가 걸리면 피해 구제에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된다. 부작용을 막기 위해선 회사가 취업규칙에 허위 신고인을 징계하도록 하는 등의 지침을 마련하도록 한 해외 사례를 검토할 만하다.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지면 진짜 약자가 피해를 본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분위기 따라 대학에 가고 떠밀리듯 취업엔 성공했지만,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진 못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일하며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다가 ‘번아웃’을 겪는다. 유명 애니메이션 밈(meme)처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을 시전하고 보란 듯이 그만두고 싶지만 그 다음이 막막해서 꾸역꾸역 다닌다. 우리 시대 많은 직장인의 초상일 것이다.》 황보름 작가(44)의 20대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흔한 비극을 흔치 않은 희망으로 바꿨다. 나이 서른에 7년 다닌 대기업을 그만두고 10년을 갈고닦은 끝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것. 그가 2022년 출간한 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클레이하우스)는 국내에서만 30만 부가 팔렸고, 지난달엔 서점 직원들이 투표로 뽑는 일본 서점대상 1위(번역 부문)를 했다. 지구 반대편 브라질의 독자가 ‘깊은 우울감에 빠졌는데 큰 위로를 받았다’, ‘책에 나온 문장을 삶의 지침으로 삼겠다’며 열렬한 독후감을 보내온다. 옛 동료들은 경력을 쌓아 가는데, 독자를 만나리라는 기약도 없이 방에 틀어박혀 글만 썼던 황 작가의 30대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 같았을까 싶어 29일 만났는데, 그는 “대체로 많은 날이 편안하고 좋았다”고 했다. ‘취업이 잘된다’는 전망에 사촌 오빠들을 따라 진학한 공대, ‘3점대 후반’ 학점으로 졸업(2004년), 취업 재수도 없이 입사한 대기업 LG전자. 황 작가의 사회생활 출발은 순탄한 편이었다.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그가 일하게 된 곳은 개발 부서였다. 하지만 얼마 안 돼 깨달았다. 자신은 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개발자는 자는 거 아냐’라는 슬픈 농담이 있을 정도의 장시간 노동도 괴로웠다. 휴대전화 새 모델을 만드는 3∼6개월짜리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주 7일 근무에 오후 10, 11시 퇴근이 당연시됐다.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면 사람이 피폐해지잖아요. 더구나 일이 없어도 야근을 해야 했어요. ‘프로젝트가 시작됐는데,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느낌? 직원들이 늦게까지 남아 있는 모습을 위에 보여주려던 것도 있던 것 같고….” 동료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일에서 보람을 찾긴 어려웠다. 3년 차에 번아웃이 왔다. “너무 힘들었는데, 그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끔찍한 시절이라 그런가 봐요.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다가 체중이 갑자기 15kg 늘기도 했어요. 어느 정도 지나니 완전히 무감해지더라고요. 집과 회사만 왕복하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그냥 기계처럼 살았어요.” 회사를 그만둔 건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코너에 몰려서, 무기력해서였다고 한다. 다행히 그동안 돈 쓸 시간도 없었고, 소비에 관심이 없었던 덕에 통장에는 7년간 받은 월급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인생에 한 번 정도는 좋아하는 일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마흔 살 전에는 그런 일을 찾자.’ 부모님 집에 함께 살면서 야금야금 조금씩 쓰면 10년은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처음부터 글을 쓰려고 했던 건 아니다. 서울 강남의 어학원에 다니다가 2012년쯤부턴 1년쯤 강사 일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러다 하고 싶은 일이 글쓰기라는 걸 깨달았다.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였다. 책 2권에 해당하는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냈지만 출간 거절 메일만 돌아왔다. 가까스로 2017년 첫 에세이 ‘매일 읽겠습니다’(어떤책)를 냈지만 1쇄도 다 안 나갔다. 이후 ‘난생처음 킥복싱’(티라미수 더북),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뜻밖) 등 에세이 2권을 더 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했다. 방에서 글을 쓰는 단순한 삶이었다. 믿을 구석도 없는데 느긋했다고 한다. “먼 미래를 바라보지 않았어요. 5월엔 ‘12월까지는 버틸 수 있잖아’ 생각했죠. 뚜렷한 계획도 희망도 없었지만 그냥 그 생활이 좋았어요.” 부모님은 황 작가를 마냥 지지해줬다. “서른 넘어서 작가 되겠다고 몇 년이나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엄마 아빠 몸에서 사리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 제가 회사 다니며 불행해하는 걸 느끼셨대요.” 그런 그도 마흔한 살이 되자 ‘겉은 작가였지만 속은 백수였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 먹고사는 일의 요원함’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2021년 초 선배의 소개로 다시 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삶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선물을 준다. 2018년 ‘시간은 남는데 에세이는 어렵고, 몇 달만이라도 소설로 도망가자’는 마음에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연재했던 것이 ‘휴남동 서점’이었다. 이미 전업 작가 생활엔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한 뒤 이 소설을 별 기대 없이 전자책 출판 공모전에 출품했다. 당선된 소설은 ‘밀리의 서재’에서 e북으로 출판됐고, 비로소 세상으로 나아가게 됐다. 소설엔 번아웃에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과도 갈라선 뒤 서점을 차린 영주, 취업에 실패하고 서점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민준, 무기력증에 빠진 고교생 민철,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겪고 그만둔 뒤 뜨개질을 하는 정서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인물 사이엔 갈등이나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기자가 “신춘문예라면 예심서 낙방했을 것 같다”고 하자 황 작가는 “등장인물끼리 지지고 볶는 얘기가 아니라, 애초에 관계를 통해서 치유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래도 ‘다음이 너무 궁금하다’는 분들이 너무 많다”라며 웃었다. 소설을 빛내는 건 삶의 벽에 부딪힌 이들이 내면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이들은 대화를 통해 깊어지는 고민과 함께 성장하고, ‘세상이 정해 놓은 경로를 따르지 않아도, 길에서 튕겨 나왔다고 해도 삶은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비슷한 상황을 ‘앞서 겪어 본’ 작가의 내공이 고스란히 배어난다. “‘내가 노력을 덜 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같은 좌절과 자책감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한 명 한 명이 추스르고 일어서는 걸 돕고 싶었어요.” 소설은 꽤 직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를 거론한다. 황 작가는 말했다. “일을 너무 많이 해 노동에 삶이 잠식되잖아요. 대기업 중소기업 격차도 크고, 삶을 영위하고 미래를 준비할 만큼 돈을 버는 이들도 적고요. 문제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마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돼요. ‘요즘 취업 안 된대, 비정규직 많지’라고 하면 식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 개인을 들여다보면 그런 게 하나하나 얼마나 큰 상처이겠어요. 나는 열심히 살아왔는데 사회가 받아들여 주지 않을 때, 앞에서 문이 닫혔을 때의 심정을 헤아리고 싶었습니다.” 직장에서 번아웃을 겪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저는 힘든 시간을 지혜롭게 지나오지 못해서, 그냥 정통으로 맞아서 이런 소설을 쓴 것 같다”며 “가능하다면 그 시간을 덜 힘들게 지나길 바란다.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 말고 주말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운동을 하며 다른 정체성을 만들면 무게가 덜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서점가엔 ‘휴남동 서점’과 언뜻 닮아 보이는 소설이 꽤 이어지고 있다. 친숙하고 추억이 있을 만한 공간을 배경으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여러 인물이 아픔을 치유하는 이야기들이다. ‘힐링 소설’, ‘장소 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기존엔 문학적 성취를 이룬 분들이 등단을 거쳐 주로 출간을 했잖아요. 그러다 이런 책의 성공을 보고 평소에 내면에 이야기를 간직하던 분들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고 여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제가 비슷한 건) 모두가 뭔가 힘들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요.” 25개국에 판권이 수출된 ‘휴남동 서점’은 한국 문학 수출에서도 ‘현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이끌고 있다. 출판사에 따르면 이 소설은 최근까지 일본과 브라질, 영국 등에서만 각각 3만5000부가량이 팔렸다. ‘아몬드’(손원평),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등과 함께 K문학이 현지에서 단단한 팬층을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소설들이 상업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자 최근 수출되는 일부 한국 작품은 출간 경쟁이 붙어 선인세가 2억∼4억 원 수준까지 올랐다고 한다. 황 작가는 “브라질 신문과도 서면 인터뷰를 서너 번 했다”며 “‘휴남동 서점’ 속 등장인물처럼 느슨하게 거리를 두고 만났으면 좋겠다는 열망, 잔잔하고 평화로운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바람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소설을 또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저 이야기를 한다’는 자세로 올해엔 새로운 소설 초고를 완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저는 유독 사람이 만나서 변화하는 이야기가 좋아요. ‘시절인연(時節因緣·인과에 따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돼야 일이 일어난다는 불교용어)’이랄까…. 이번에도 그런 얘기를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삶엔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모두가 같은 삶과 꿈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각자 자기에게 맞고 편한 삶이 있는 거겠지요. 대체로 고되고 힘에 부치지만 대개 다 지나가잖아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경로를 이탈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고 싶습니다.”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