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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임기 반환점을 맞는다. 연금, 의료 등 4대 개혁과 민생경제, 외교 안보 이슈 등을 조명할 시기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장외집회를 열고 여론 결집에 나선 야당은 “탄핵” “하야”를 외치고 있다. 대선 후보 단일화를 거쳐 인수위원장을 맡았던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을 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4대 개혁 하나도 제대로 된 것 없다” ―윤석열 정부가 반환점에 왔다. 총평을 먼저 해달라. “한마디로 말하면 ‘안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대선 승리는 비상식적이고 불통인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실망 때문이다. 공정과 상식을 내건 정권이니까 당연히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다.” ―‘4대 개혁’ 성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하나도 제대로 된 게 없다. 성과가 거의 없다. 또 이미 개혁 동력을 많이 상실했다. 개혁 동력이라는 게 우군을 많이 확보하는 것 아닌가. 그 힘으로 개혁을 하는 것이다. 대통령 혼자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니다. 지난 대선 때 0.73%포인트 차로 겨우 승리했다. 선거연합에서 승리를 했으면, 집권연합을 더 두텁게 만드는 게 그다음 순서인데 오히려 더 쪼그라들어 버렸다.” ―대통령은 시행령 개정을 통해 바꿀 수 있는 것부터 신속히 추진하라고 당부했다는데…. “시행령 개정으로는 부족하다. 연금 개혁만 해도 법과 다르게 시행령을 만들 수 없다. 법을 통과시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야당을 설득해야 한다. 시행령 개정만으로 4대 개혁을 하겠다, 이거는 불가능하다.” ―개혁 방식은 뭐가 잘못됐다고 보나. “모두 숫자부터 던졌다. 교육 개혁 한다면서 ‘5세 입학’을 얘기하고, 실패했다. 과학기술 개혁을 얘기하면서 ‘연구개발비 감축’ 숫자부터 던졌다. 또 실패했다. 의료 개혁 추진하면서 또 ‘2000명 증원’이라고 숫자부터 던졌다. 이게 반복됐다. 개혁을 이뤄내기 위해선 문제점을 알리고, 해결 방법과 거기에 대해 정부가 얼마를 투자하겠다는 예산에 대한 의지를 내세운 다음 가장 마지막에 숫자를 내야 한다. 그런데 왜 이걸 이만큼 줄이고 늘려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과 설득 없이 숫자부터 던졌다.” ―의정 갈등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25년 정원에 대해서도 조건을 걸지 말자”고 주장한 바 있다. 아직도 유효한가. “유효하다. 의정 갈등 이대로 안 끝난다. 내년 3월에 의대생들이 복학하지 않으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의료 시스템 붕괴와 입시 붕괴라는 이 커다란 두 가지 피해 중에 어느 것이 더 작은가를 보고 선택해야 한다. 그게 국가의 일이다. 수험생들의 혼란이 있겠지만 이미 진행되고 있는 수시 전형은 그대로 하더라도, 정시 모집 정원을 줄여 해법을 찾아야 한다.” ―대다수 국민은 의사 수 증원에 대해 찬성하고 있는데…. “2030세대는 이걸 공정 이슈로 본다. 그 어려운 경쟁을 뚫고 들어갔는데, 갑자기 50% 증원한다는 것을 불공정으로 본다. 분노가 굉장히 크다. 설득 작업도 전혀 없었다. 의료 시스템은 죽고 사는 문제이고, 교육 시스템은 먹고 사는 문제다.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은 둘 중에 하나다.” ―인수위 활동 이후 대통령에게 따로 조언한 적은 없나. “취임식과 당 연찬회 등 행사 때 몇 마디 나눈 적은 있지만 대통령을 개별적으로 만난 적은 없다. 연락 온 것도 없었다.” ―대통령에게 만나자고 먼저 제안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권한의 크기와 책임의 크기는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전문성 있는 과학기술, 의료, 연금 등에 대해선 아는 전문가도 많았고, 생각했던 정책 방향을 반영해 인수위 보고서에 담았다. 그런데 내가 추천한 사람보다는 다른 분들을 대통령이 선택하더라. 그런 과정을 보면서 ‘본인이 책임도 지겠다는 뜻이구나’ 그렇게 받아들였다.” ―인수위 때 윤 대통령의 모습은 어땠나. 대통령이 반대할 듯한 의견은 개진하기 힘들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때 회의를 많이 했다. 비서실을 통해 면담 요청을 하면 당선인을 바로 만날 수 있었다. 당선인이 예고 없이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소통과 토론에 꽤 적극적이었다. 내가 용산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지금과 비교하기 어렵지만 그때는 비교적 자유로운 소통이 이뤄졌다.” ―지금과 그때는 무엇이, 왜 달라졌을까. “지금은 대통령이 먼저 결정하는 것 같다. 옛날에 어떤 왕은 참모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게 하고 왕은 커튼 뒤에서 듣기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면 들어와서 ‘이 방향으로 가자’ 하고 결정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대통령이 ‘이쪽으로 가자’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특단의 특단의 조치 필요, 다 바꿔야” ―윤 대통령 지지율이 19%로 떨어졌다.(인터뷰 도중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드디어 깨졌군요. 지금은 국민의 실망이 극도에 달했다라고 한마디로 말씀드릴 수 있겠다.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이건 회복하기 힘들고, 이게 끝이 아니고 더 떨어지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심각한가. “이럴 때는 ‘특단’이라고 말하는 것도 부족하다. 말의 한계 때문에 더 강한 표현을 쓰고 싶은데 떠오르지를 않는다. 특단을 넘는 특단, 정말 ‘뭐 빼놓고는 모두 바꿔라’ 이 정도의 결단을 해야 본인도 살고 국가도 산다고 본다.” ―어떤 조치가 있을 수 있을까. “진솔한 대국민 소통, 전면적인 개각을 포함한 인사 개편, 국정 기조의 대전환, 그다음에 야당과의 소통 내지는 협조, 노력들이 필요하다.” ―인수위원장 시절 김건희 여사 또는 소위 김 여사 라인에 대해 우려스럽다고 생각한 적 있나. “전혀 몰랐다. 왜냐하면 당시 인수위는 둘로 분리돼 있었다. 나는 정책만 했다. 비서실이 따로 있었다. 명태균 씨 이름이 나온 적도 없다.” ―명 씨가 안 의원과 찍은 사진을 SNS에 게재한 적이 있는데…. “나와 사진을 찍은 사람이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넘을 수 있다. 선거 때면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사진을 찍나. 그분들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 않나.” ―김 여사 문제가 이렇게 커지기 전에 막을 순 없었을까. “이전부터 ‘김 여사의 진솔한 유감 표명 내지 사과가 필요하고, 제2부속실을 빨리 만들자. 특별감찰관을 임명하자’고 인터뷰 등을 통해 계속 얘기했다. 그런데 시기가 지난 것 같다.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단계가 지나 버린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 지금까지 문제를 막진 못했지만 앞으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국민에게 안심을 주는 효과는 있을 수 있다. 그것도 선제적으로 해야 한다.” ―‘박근혜 탄핵 정국’ 수준의 위기가 여권에 밀려오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충분히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그런 위기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야당은 벌써 시작했다. 11월 중으로 예정된 이재명 대표에 대한 선고도 영향이 있다고 본다.” ―친윤(친윤석열) 그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건희 특검 찬성’ 의사를 공개적으로 피력한 배경은…. “여러 의혹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그냥 없던 걸로 넘어가기는 힘든 상황이 됐다. 조건은 있다. 특검을 하더라도 저는 여야 합의 특검을 찬성하는 거지 지금 민주당 안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여야 합의 특검, 대통령의 동의가 전제돼야 한다. 가능할까. “대통령이 동의해야 한다. 본인이 거부해서 지나갈 순 있다. 근데 그러다가는 둘 중에 하나다. 정권이 무너지거나 아니면 임기를 마치더라도 그다음 대통령이 특검을 할 거다.” ―정말 ‘특검이 없으면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박근혜 대통령 시절처럼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국민이 설득되면 야당도 탄핵 꺼내기 어려워”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야당의 태도가 바뀔까. “국민들이 설득되면 야당이 아무리 다수라고 해도 무조건 반대하고, 탄핵하자고 나서기는 어렵다. 야당도 멈칫멈칫 하게 된다.” ―민주당의 지금 모습은 어떻게 평가하나. “국회의 전통이 무력화됐다. 예전에도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있었지만 소수당의 의견을 어느 정도 반영했다. 지금 민주당은 국회 선진화법을 무력화할 정도로 몰아붙이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게 다수결로만 하는 게 아니지 않나.” ―이 대표가 결국 민주당 대선 주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나. “선거법 사건 선고는 1년 이내에 대법원까지 ‘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법은 성역이 없어야 한다. 그 원칙이 지켜졌으면 좋겠다. 무죄든 유죄든 결정이 나기를 기대한다. 재판을 받는 후보가 대선에 나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야권 일각에선 ‘임기 단축 개헌’을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원론이지만 원래 개헌을 할 때 개헌을 한 대통령은 개정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 거다. 그게 원칙이다.” ―차기 대선 출마는 계획하고 있나. “대선을 한 번 치러 봤다. 총선은 자기가 결심해서 나갈 수 있지만, 대선은 시대정신이 받쳐줘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는 사람이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있고, 전 국민 사이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시대정신 아니겠나. 내가 잘 아는 과학기술 의료 교육개혁 분야 등에서 열심히 할 것이다. 국회 외교통상위 활동도 마찬가지다. 나를 필요로 하는 생각들이 모이면 나갈 수 있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거다.” ―우군이 많이 필요할 텐데, 적극적인 당내 소통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개인적으로 친한 의원들이 꽤 있다. 일대일로 의원들을 만나서 의견을 나눠 보면 공감하는 의원이 많이 있다. 다만 그분들이 대외적인 목소리까지 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동훈 대표와는 따로 만난 적 있나. “여러 의원과 함께 만난 적은 있지만 따로 만난 적은 없다. 정치인 간 진정한 진솔한 대화를 하려면 일대일로 만나야 한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회동했을 때 대통령실은 통상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거나 대화하는 모습을 담은 ‘투샷’ 사진을 배포한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 여당 대표와 만날 때도 그랬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그제 오후 차담(茶談)은 과거와 다른 이례적인 장면으로 가득했다. 특히 대통령실이 배포한 사진들은 이번 면담이 얼마나 삭막하고 냉랭했는지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준다. ▷사진 중엔 단 한 장도 윤 대통령과 한 대표 두 사람만 나온 온전한 ‘투샷’ 사진이 없었다. 사진 9장 중 7장은 산책 장면, 2장은 면담 장면이었는데, 그중 두 사람에게 포커스를 둔 ‘투샷’처럼 보이는 사진들도 모두 두 사람 사이 또는 뒤편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들어가 있다. 일부러 ‘둘만 나란히 있는 사진’을 외면한 것일까. 한 대표가 쇄신을 요구한 ‘김건희 라인’으로 알려진 비서관이 두 곳에나 등장한 것도 뒷말을 낳았다. ▷차담 사진도 마찬가지다. 한 대표가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과 나란히 앉아있고, 윤 대통령은 긴 사각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두 팔을 쭉 펴고 있다. 윤 대통령 앞에는 면담 프로토콜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펜과 메모지조차 없다. 당초 한 대표 측은 원형 테이블을 요청했으나 대통령실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자리 배치부터 표정, 몸짓까지 위와 아래를 명확히 구분하는 구도였다. 이러니 “검찰 취조실 같았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 대표를 여당 대표로 인정하지 않고 부하 검사 대하듯 했다는 지적이다. ▷사실 이번 면담은 시작부터 끝까지 어색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면담은 20분 정도 늦게 시작했다. 영국 외교장관 접견 때문에 늦었다지만 한 대표는 야외정원에서 선 채로 대기했다고 한다. 오후 4시 55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면담 테이블엔 ‘우리 한 대표가 좋아한다’며 윤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다는 제로 콜라가 놓였다. 면담은 오후 6시 15분에 끝났다. 요청 한 달 만에 성사된 자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윤 대통령의 만찬 일정 때문이었다는데, 윤 대통령은 한 대표를 보낸 뒤 추경호 원내대표를 만찬 자리로 불렀다. ▷사진기자들은 대통령 행사마다 수백 장의 다양한 장면을 찍은 뒤 그날 행사의 의미를 가장 함축적으로 담은 몇 컷을 보도한다. 대통령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진만 골라 배포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과연 누가 골랐고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진다. 대통령실이 선택한 9장의 사진은 ‘용산의 눈’으로 본 이번 면담의 ‘격’과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하대나 박대의 의미를 담고자 했다면 충분히 전달됐다고 본다. 다만 그래서 뭘 얻었는지는 깊이 곱씹어볼 일이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구청장·군수 4명을 다시 뽑는 10·16 재·보선이 끝났다. 그중 전남 곡성군과 영광군은 현역 군수가 위법행위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는 바람에 선거를 다시 치른 곳이다. 공교롭게도 선거 당일 서울 구로구청장이 자진 사퇴를 발표했는데, 내년에 보궐선거를 치러야 한다. 모두 정치인들이 법을 잘 지켰거나, 사적 이익을 위해 그만두지 않았다면 ‘치르지 않아도 될 선거’다.“잘못은 단체장이, 비용은 주민이” 선거법상 지자체장 선거는 해당 지자체 예산으로 치르게 돼 있다. 재·보선도 마찬가지다. 영광군은 이번 선거를 위해 14억6700만 원을 선관위에 관리 비용으로 냈다. 곡성군도 10억7800만 원을 썼다. 영광에선 전임 강종만 군수가 2022년 지방선거 때 금품을 건넨 탓에 재선거가 열렸다. 곡성 역시 이상철 전 군수가 선거법 위반으로 직을 상실했다. 잘못은 정치인인 두 군수가 했는데, 25억 원이 넘는 선거 비용은 영광군, 곡성군 주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은 셈이다. 선거 비용은 크게 선관위가 쓰는 투·개표 관리 비용과 후보들이 쓴 선거운동 비용을 나중에 돌려주는 보전금 등 두 가지로 구성된다. 15% 이상 득표한 후보자는 선거 비용 전액을 돌려받는데, 이 보전금은 지자체가 낸 예산에서 지급된다. 물론 선거법 위반으로 선거 결과가 무효가 되면 당선 여부와 관계없이 문제 후보는 받았던 보전금을 토해내야 한다. 2010년부터 2022년까지 4차례의 지방선거를 치르는 동안 정치인 261명이 보전금 반환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어떤 정치인이 반환하지 않았는지, 안 했다면 미반환 금액은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을 이유로 선관위가 이를 공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버티는 정치인들이 꽤 있다. 선관위에 따르면 2010년 지방선거 이후 반환 않는 ‘먹튀’ 정치인은 65명, 그 금액은 168억 원에 이른다. 선거범죄가 아니라 다른 사유로 지자체장이 직을 상실했을 때는 아예 보전금 반환 의무가 없다. 문헌일 전 구청장이 백지신탁을 거부하고 스스로 그만둔 구로구의 경우, 20억∼30억 원으로 예상되는 보궐선거 비용을 전액 구의 예산으로 메워야 한다. 지난해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때도 28억 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그런데 2022년 지방선거 때 그곳에서 당선됐던 김태우 전 구청장은 2023년 물러나면서 한 푼의 보전금도 반환할 필요가 없었다. 당선 무효형은 선고됐지만, 그 사유가 선거범죄가 아니라 공무상 비밀누설죄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유죄 확정으로 생긴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다.“지자체장과 정당이 비용 부담해야” 그동안 시민단체와 학자들은 “보전금 반환 대상 범죄를 넓히라”거나 “문제를 일으킨 지자체장과 정당에 선거 비용을 부담시키라”는 요구를 해 왔다. 선관위도 선거법 개정 의견을 2021년 국회에 제출했다. 선관위 의견에는 선거 비용을 미반환한 정치인의 인적사항과 금액을 공개하고, 미반환 사실이 있는 정치인이 후보자로 다시 나설 땐 그 내용을 후보자 정보자료에 기재하도록 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국회는 제대로 된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 문제적 인물을 공천한 책임이 있는 정당과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자기 부담을 키울 리 없다. 선거 때 상대 정당이나 후보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다. 지자체장의 순직 등 부득이한 사유로 재·보선을 치르는 건 사정이 다르다. 그렇지만 선거법 위반뿐 아니라 부정부패, 기타 개인적인 이유로 다시 선거를 치르게 됐다면 ‘원인 제공자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10월 재·보궐선거는 끝났지만 ‘하지 않아도 될 선거’를 유발한 정치인과 정당의 책임을 잊어선 안 된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20년 전 사라진 과거 정치문화인 지구당이 정치권 화두로 떠올랐다. 22대 국회 첫날인 지난달 30일 여야에서 각각 지구당 부활과 관련한 정당법·정치자금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주목할 점은 전현직 당 대표를 비롯해 당권주자로 거론되는 이들이 논쟁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불을 붙인 데 이어 나경원 안철수 윤상현 의원 등이 찬성했고,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가 필요성을 언급했다. ▷지구당 부활을 거론하는 속내는 제각각이지만 주요 명분은 현역 의원과 원외 정치인 간 형평성 문제다. 현역과 달리 원외 인사들은 선거 기간이 아니면 사무실을 열고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 이런 탓에 총선 때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명망가들이 낙하산 공천을 받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청년 정치, 풀뿌리 민주주의 강화 등을 위해 원외 인사들에게도 활동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각 당엔 ‘당협위원장’(국민의힘) 또는 ‘지역위원장’(민주당)이라는 직책이 있다. 각 선거구를 관리하는 지역 책임자다. 변호사 자격이 있는 원외 위원장들은 변호사 사무실을 지구당 사무실처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위원장들은 ○○연구소, ○○학교와 같은 간판을 내걸고 사무실을 운영하는 편법 사례가 있다. 이마저도 어려운 이들은 당협위원장이라는 타이틀 하나로 4년 동안 돌아다니며 유권자들을 만난다. 합법적인 사무소, 여기에 후원금과 중앙당의 인력·자금까지 받을 수 있다면 이들에겐 엄청난 힘이 된다. ▷지구당이 2004년 폐지된 이유는 불법 정치자금 때문이다. 사무실을 열면 임차료와 인건비 등으로 월 1000만 원 이상의 운영비가 든다고 한다. 연 1억2000만 원, 254개 지역구로 확대하면 연 300억 원이 넘는 돈이다. 이런 액수도 외부에 드러난 것일 뿐 실제로는 조직동원비 등으로 더 많은 금액이 소요된다는 것이 정가의 경험담이다. 그나마 현역의 경우엔 후원금이 있고, 국회 보좌진에게 사무실 운영을 맡겨 인건비를 아낄 수 있다. 그러나 원외 위원장은 사비를 털어야 한다. 이 때문에 시의원, 구의원들이 사무실 운영비를 갹출하거나 지역 내 사업가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건네는 경우도 많았다. ▷현역과 원외 인사, 정치 신인 사이에 놓인 불공정한 장벽은 해소돼야 한다. 하지만 그 대안이 지구당 부활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지역 내 또 다른 정치 카르텔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원외 위원장에게만 사무실과 후원금을 허용한다면 당의 선택을 받지 못한 정치 신인에게는 또 다른 차별이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아무런 논의도 없다가 전당대회를 앞두고 원외 당협위원장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불쑥 던질 이슈는 아니란 얘기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총선 3연패 정당.’ 국민의힘 얼굴에 찍혀 있는 낙인이다. 20·21·22대 총선에서 연속 패배하면서 얻은 불명예다. 그사이 새누리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으로 당명도 세 차례나 바뀌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원인을 살펴보겠다면서 ‘반성문’ 격인 총선 백서를 쓰기 위해 당 특별위원회까지 꾸렸지만 연일 삐그덕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당내에선 “백서가 나오기는 할까”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이는 차기 당 대표를 선출할 전당대회가 ‘6월 말 7월 초’ 열리는 방안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총선 참패의 주요 원인을 놓고 윤석열 대통령의 독단과 불통, 한동훈 당시 비대위원장의 전략 부재 중 어떤 것을 넣고 뺄지, 어디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지 등을 두고 친윤계와 친한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어서다. 그 와중에 조정훈 백서특위 위원장이 당권 도전을 시사하자 친한계를 중심으로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논란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조 위원장이 자신의 전당대회 출마를 염두에 두고 ‘한동훈 공동 책임론’을 부각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급기야 “현명하신 주권자 국민께서 21대 총선보다 6석을 더 주셨다”는 평가가 나왔다. 정영환 전 공관위원장이 백서특위 회의에서 한 말이다. 국민의힘이 지역구 기준으로 21대 총선(84석) 때보다 6석 더 많이 얻은 건 사실이다. 비례대표까지 포함하면 4년 전(103석)보다 5석을 더 얻었다. 그러나 4년 전은 코로나 정국 때 야당으로 치른 선거였고, 이번엔 수많은 정책 수단과 정보력을 갖춘 집권 여당으로 치른 선거라는 점이 다르다. 범야권에 192석을 내준 건 집권 여당으로선 헌정사에서 가장 큰 패배다. ‘수포당’(수도권을 포기한 정당)이라는 비판까지 받은 당이 ‘6석’ 운운하는 건 민심과는 동떨어진 초현실적 시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4년 전 총선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은 그해 8월 208페이지에 달하는 총선 백서를 발간했다. 백서는 △중도층 지지 회복 부족 △미래 비전 제시 미비 △효과적인 전략 부재 △불공정한 공천 논란 등을 주요 패인으로 꼽았다. 이번 총선에서도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요인들이다. 문제는 이렇게 반성문을 쓰고도 또 궤멸적 참패를 당했다는 데 있다. 혁신을 실천하지 않은 결과다. ▷국민의힘은 2년 뒤 지방선거를 치러야 한다. 그 일 년 후엔 대선도 치러야 한다. 국민의힘에 쇄신은 무슨 구호이거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냉철한 자기 반성은 어물쩍 지나치려 하면서, ‘대표 잿밥’으로만 눈길이 향하고 있다. 입으로만 하는 개혁을 넘어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는 혁신이 시급한데, 행동은 보이지 않고 어이없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반론의 여지 없이 ‘여의도 대통령’이 됐다. 국가 권력 서열 1.5위에 올라선 것 같은 기세다. 그런 이 대표가 1호 당론 법안으로 나눠주겠다는 이른바 ‘민생회복지원금’을 두고 갈지자 행보를 하고 있다. 민주당은 일주일 전만 해도 6월 국회 처리를 장담하다가, 이젠 고소득층을 제외하거나 정부 예산편성권을 침해 않는 쪽으로 선회할 여지를 두기 시작했다. 이 법안은 전 국민에게 1인당 25만 원을 지역화폐로 나눠주도록 정부에 강제한다는 것이다. 그 지역화폐는 연말까지 안 쓰면 소멸되는 만큼 저축할 수 없다. 정부가 쓴 나랏돈의 파급 효과는 연구가 대체로 끝난 상태다. 100원을 현금으로 주면 20원쯤,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SOC)에 쓸 때는 40원쯤 기여한다고 한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금융위기나 코로나 등 극단적 위기가 아니면 현금성 복지에 부정적이다. 하지만 이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지역 자영업자에게 다 써야 하는 지역화폐는 현금 살포가 아니다. 승수(乘數) 효과가 크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공짜 마다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폭발력 큰 이 정책을 두고 이 대표는 왜 절충안을 찾아나선 걸까.‘전 국민 25만 원’ 갈지자 선회 이유 궁금 이 대표는 작전상일지라도 후퇴하지 않기를 바란다. 제대로 추진해 거대한 정책 논쟁을 주도했으면 좋겠다. 이 정책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정부와 국회가 국가 정책을 다룰 때 정치와 감정보다 숫자와 논리를 더 중시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전제 조건이 있다. 이 대표는 세금 13조 원을 한번에 투입하는 이 정책이 왜 우리 경제에 좋은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경제전문가들이 다들 반대하는데 오랜 시간 굽힘 없이 주장했다면 그 근거가 있을 것이다. 비주류 정치인이 아니라 여의도의 대통령이 된 지금 그 근거를 내놓을 때가 됐다. 때마침 민주연구원은 25만 원씩 지급하면 국내총생산(GDP)을 0.2∼0.4%포인트 증가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이번 주에 발표했다. 지난해 우리 경제성장률은 1.3%였다. 0.2∼0.4%포인트 추가 성장이면 꽤 큰 성장 기여인데 숫자 도출의 근거는 빠졌다. 실망스러운 것은 “연구자 개인 의견”이라면서 민주연구원은 빠져나간 사실이다. 대중의 뇌리에 ‘좋은 정책’이란 이미지는 심으면서도 사후 책임은 안 지겠다는 꼼수 아닌가. 만년 야당 시절엔 이런 게 이해 받았겠지만 이젠 곤란하다.“성장에 기여”라면서도 민주연구원은 발 빼 이 대표는 민주연구원에 지시해 당 이름을 걸고 GDP 증대 효과가 저렇게 큰 것이 맞는지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동시에 금리와 물가를 소폭 상승시켜 경제적 약자의 부담을 키울 것이란 비판에도 구체적 반론을 펴야 한다. 또 취약계층을 두텁게 돕는 게 낫다는 국민의힘의 주장보다 전 국민 지급이 더 낫다는 점도 납득시킨다면 이 대표 지지 여론도 더 커질 것이다. 이 대표는 이를 직접 발표하고, 2∼4년에 걸쳐 사후 검증을 받겠다고 약속하면 좋겠다. 역대 어느 정치 지도자보다 정책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이재명은 포퓰리즘 정치인”이란 비판을 뛰어넘을 기회도 된다. 이런 설명의 의무는 이 대표만 질 일은 아니다. 25만 원 지역화폐에 반대하는 정부와 국민의힘 역시 반대 논리를 숫자로 설득해 보길 바란다. 국회 제1당이 낸 정책을 두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것이 아니란 걸 입증시켜 줘야 한다. 재추진한다는 양곡관리법도 마찬가지다. 남는 쌀 매입에 매년 3조 원씩 투입해야 한다는데, 이 큰돈을 투입해야 하는 정책에 여건 야건 정교한 숫자 설명이 없었다. 이 대표에겐 지금 사법 리스크와 대통령 찬스가 모두 어른거린다. 위상이 달라진 그가 나랏돈 13조 원을 쓰자면서 어떤 책무감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김승련 논설위원 leon@donga.com}
더불어민주당 박지원 당선인이 1일 김진표 국회의장 등을 향해 “개××들”이라고 폭언을 했다. 채 상병 특검법을 2일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민주당의 압박에도 김 의장이 여야 합의가 있어야 본회의를 열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박 당선인은 “그러니까 박병석, 김진표 똑같은 놈들”이라고 했다. 진행자가 ‘똑같은 놈들이라뇨’라고 하자 박 당선인은 “놈이지. 윤석열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받았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아! 개××들이에요. 진짜”라는 말도 덧붙였다. ▷박 당선인은 방송이 끝난 뒤 페이스북에 “방송 시작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적절치 못한 내용을 얘기했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방송을 보면 그는 30초 넘게 인터뷰를 이어가던 중 불쑥 “지금 방송 나가고 있는 거냐”고 물은 뒤 “아이고, 내가 너무 세게 얘기했구나”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아무튼 나는 소신껏 얘기했다”고 했다. 방송 출연이 잦은 노회한 정치인이 카메라가 켜진 것을 정말 몰랐을지 의문이다. ▷국회의장을 향한 민주당의 압박은 전방위적이다. 박주민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박 당선인과 같은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 의장을 언급하며 “환장하겠다”고 했다. 우원식 의원은 “민주주의와 국민의 삶에 결코 중립은 없다”고 했다. ‘국회의장의 당적 보유 금지’ 조항을 통해 중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국회법의 취지를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다. 다수 의석을 앞세운 민주당의 국회의장 압박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21년에도 박병석 당시 의장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직권 상정을 거부하자 초선 의원인 김승원 의원은 박 의장을 향해 “역사에 남을 겁니다. GSGG”라고 적었다가 욕설 논란이 일었다. ▷정치인이 비상식적 표현이나 막말을 하면 과거엔 거센 질타와 불이익을 받았다. 공개 사과로 부족해서 당직을 내놓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박 당선인의 페이스북은 “잘하셨다” “시원했다” 등의 지지층들의 찬사 댓글로 도배가 됐다. ‘GSGG’를 썼던 김 의원은 징계를 당하기는커녕 멀쩡히 공천을 받아 재선 의원이 됐다. 이를 벤치마킹해 윤 대통령과 여당 의원을 겨냥해 복수형의 의미인 ‘D(들)’를 덧붙여 ‘GSGGD’라고 쓴 민형배 의원 역시 재선과 함께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오히려 이익을 본 셈이다. ▷극렬 지지층은 막말에 환호하고 당 지도부는 이들 눈치를 본다. 무례함을 용기로 포장하는 의원이 늘어나고, 막말이 더 격해진 이유다. 제대로 된 징계 없이 어물쩍 넘긴다면 차기 국회의장이 누가 돼도 민주당 의원들의 압박은 더 거칠어질 것이다. 의사당은 지지층을 자극하는 막말로 더럽혀지고, 협치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집권 여당 참패라는 선거사상 초유의 결과를 낸 이번 4·10총선은 충청의 영향이 컸다. 2년 전 대선과 지방선거 때의 승리와 달리 국민의힘은 충남·충북에서 역대급 패배를 했다. 윤석열 대통령 부친은 충남 공주가 고향이다. 국민의힘은 총선 직전 충청권 판세를 박빙으로 분석했었지만 대전·천안·아산·청주 등 도시권 16석 중 단 1석도 건지지 못했고, 그나마 농촌과 중소도시에서 12석 중 절반인 6석을 얻는 데 그쳤다. 24일 충남 홍성군 충남도청에서 국민의힘 3선 의원 출신인 김태흠 충남도지사를 만났다. 그는 여당의 충청 참패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고향이라도…” 24만7077표로 승부가 갈린 지난 대선에서 충남과 충북은 각각 8만292표와 5만6068표 차로 윤 대통령이 승리한 지역이다.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안겨줬던 대전 역시 더불어민주당으로 다시 돌아섰다. 김 지사에게 충청 민심 변화의 원인에 대해 먼저 물었다. “영남과 호남은 다 자기편들이 있습니다. 충청 지역 유권자들은 우리 민심이 곧 대한민국 민심이란 프라이드를 가진 분들입니다. 정치적 변곡점 때마다 정치적 명분을 쥔 쪽을 지지해 왔습니다. 이번 선거에선 정부·여당을 지지해줄 명분이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충청 민심의 수도권화’를 강조했다. “충청권 도시들은 급속한 산업화·도시화로 외지 주민의 유입이 급증하면서 멜팅폿(Melting pot·여러 문화가 하나로 동화되는 것)이 이뤄졌고, 표심도 수도권을 따라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영호남처럼 특정 정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 않은 지역이다 보니 정권심판론이 먹혔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의 고향’을 언급하자 그는 “(대통령 고향이라고) 무조건 편들어 주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는 “충청이 윤 대통령의 고향이라고 하지만 이를 도민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지 못했고, 내각이나 요직에 충청인 발탁이 미흡해 피부에 와닿지 않은 탓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미 명분에서 다 진 상태인데 충청으로 와서 표를 달라고 한들 도민들이 무조건 찍어줄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명분에서 졌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종섭 전 주호주 대사 문제만 해도 임명 자체로 말할 나위 없이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대통령실 이관섭 비서실장한테 전화해서 자진 사퇴시키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사퇴시켜야 한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사퇴까지) 8일이 걸렸습니다. 민심에 둔감했던 것이죠.” 그는 김건희 여사 문제의 처리 과정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윤 대통령의 국정 방향은 맞게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윤 대통령을 뽑을 때 기대했던 것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실망한 것입니다. 국민들은 문재인 대통령 시절 검찰총장으로서 핍박을 받으면서 공정과 상식을 지키는 리더가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또 남자답고 화통하고 스케일이 큰 리더일 것이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여사나 장모 문제에 대한 대응을 보면서 공정과 상식을 기대한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힘 못 쓴 ‘국회 완전 이전’ 공약” 그가 진단한 충청의 민심은 ‘정권 심판론’이 크게 작용했던 총선 전체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원인은 없었을까. ―총선 직전 나온 ‘국회의 세종시 완전 이전’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국회는 이미 본회의장 등 일부 기능을 제외하고 11개 상임위원회와 대부분의 기능을 세종시로 이전하기로 결정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완전 이전이란 국민의힘의 공약은 파급력이 약할 수밖에요. 또 선거를 목전에 두고 발표했는데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종은 공무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국민의힘은 지난 21대 총선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세종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세종에서의 계속되는 국민의힘의 패배에 대해 김 지사는 ‘38.6세’라는 숫자를 제시했다. “세종시는 2002년 16대 대선 공약 이후 위헌 논란과 수정안 등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젊은 도시’입니다. 평균 연령이 2023년 말 기준 38.6세입니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늘 어려운 지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회 세종의사당과 대통령 세종집무실 건립이 지금까지 속도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정책의 구체성을 따져보는 젊은 유권자들에게 여당의 약속이 곧이곧대로 전달되기 힘들었다는 얘기였다.● “민심의 쇠몽둥이 맞은 여권” 김 지사는 총선 직후 페이스북에 자신이 느낀 충격에 대해 “국민은 집권 여당을 향해 회초리가 아닌 쇠몽둥이를 들었다”고 표현했다. ‘여권의 위기’를 강조한 것이다. “회초리라고 하면 과반 150석 중에 130∼140석 정도 받았을 때 회초리를 들었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100석 갓 넘기는 의석을 받았다면 그건 쇠몽둥이 아니겠습니까.” ―뭐가 달랐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윤 대통령이 장모가 감옥에 갔을 때 가족으로서 유감 표명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작은 문제들을 진솔하게 털고 가지 않아 더 큰 문제로 쌓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디올백 문제 때도 대통령이 ‘국민 눈높이에는 맞지 않았다’ ‘사과드린다’ 그렇게 인정하고 털고 갈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런 게 잘 안 되다 보니 국민 마음속에 불만이 누적됐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불통을 지적하는 여론이 많습니다. “윤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오만과 불통에 대한 인식이 1이라면 국민의 생각은 9, 10인 것 같아 안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국민에게 비치는 문제점 중 대부분은 국정 운영 때문이라기보다는 장모 또는 김건희 여사 관련 리스크에서 온 게 사실입니다. 국민이 윤 대통령에게 가진 부정적 이미지는 실제보다 과장돼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국정 운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첫째는 듣는 사람이 바뀌어야” 그렇지만 김 지사는 “지금도 여권이 우왕좌왕하고 있다”며 “이러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인적 쇄신에 나섰습니다. 앞으로 달라질까요.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게 직언을 한다는 게 사실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설득하려면 상당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생각하는 방향이 있으면 그 자리에선 동의한다고 해도 하루 이틀 지나 좀 더 의견을 정리하고 보완 방향을 판단해서 바꿀 건 바꾸자고 말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물론 첫째는 듣는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참모가 되면 대통령의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통령은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윤 대통령이 화통하고 스케일이 큰 리더의 모습을 이제라도 제대로 보여줬으면 합니다. 시대마다 원하는 리더가 있습니다. 지금은 자기 소신이 있으면서 통 크게 포용하는 리더를 원하는 시대입니다.” ―내각의 인적 쇄신 작업은 잘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총선 후 인적 쇄신은 기초적인 부분입니다. 인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집권 여당으로서 3년 남은 기간에, 그리고 이런 정치 구도 아래에서 어떤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 것인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갈 것인가 방향 설정을 먼저 해야 합니다. 지금 사람 구하는 데 우왕좌왕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총리 인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번에 이재명 대표 회담 때 야당에 ‘총리로 좋은 분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부 장관직도 민주당이 추천해주면 그분 모시고 국정 같이 잘 해볼 테니 좋은 의견을 달라고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통 큰 윤 대통령의 리더십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3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반성’과 ‘미래’를 수차례 언급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한 부분들에 대한 처절한 반성, 그리고 앞으로 3년을 어떻게 가겠다고 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의 부재”가 ‘위기의 여권’을 진단하는 그의 핵심 키워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집권 2년이 됐으니까 이번 선거는 심판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받아들일 것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여당이 보여줄 수 있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정 동력 상실은 국가와 국민에게 큰 손실입니다. 앞으로 더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홍성=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신광영 논설위원 leon@donga.com}
《2012년 대선 직후 이정희 통합진보당 전 대선 후보는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됐다. 그가 투표일을 사흘 남겨 놓고 갑자기 사퇴하면서 선거보조금 27억여 원을 한 푼도 반납하지 않고 고스란히 가져갔다는 이유에서다. 검찰은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지만 ‘먹튀’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번 총선에서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와 더불어민주연합을 만들고, ‘의원 꿔주기’ 꼼수로 각각 28억여 원의 선거보조금을 배분받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정당을 보호·육성한다는 취지로 많게는 한 해 1000억 원 넘게 지급되는 정당 국고보조금. 유용, 먹튀 논란이 일 때마다 정치권은 “감시를 강화하자”고 목소리를 높였고, 아예 없애자는 선거 공약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국고보조금 제도가 생긴 지 44년 되도록 제도 개선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개점휴업’인데 4년간 40억 원 넘게 지원 선거 때마다 세금으로 지원하는 돈, 선거보조금이다. 중앙선관위는 4·10총선을 위한 선거보조금 501억9700만 원을 25일 각 당에 배분했다. 돈을 받은 정당은 11곳.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각각 188억 원과 177억 원으로 가장 많이 받았고, 원외 정당인 기후민생당(민생당의 후신)도 10억400만 원을 받았다. 기후민생당은 현재 의석은 없지만 정치자금법에 따라 21대 총선 당시 2% 이상(2.08%)의 표를 받았기 때문에 보조금 총액의 2%를 배분받았다. 기후민생당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1명씩 후보를 냈다. 그런데 서울 영등포을 지역구에 출마한 김정기 전 민생당 대표의 주소지는 경기 부천이다. 출마한 지역구로 주소지도 옮기지 않은 것이다. “선거보조금을 받기 위해 후보를 낸 것”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 전 대표에게 공약 등 출마의 변을 들으려 했으나 민생당 사무처는 “연락처를 주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민생당은 2022년 지방선거 때도 단 1명의 후보를 내고 9억3000만 원의 선거보조금을 받아갔다. 당시 서울시의원 후보로 출마한 A 씨가 받은 최종 득표 수는 386표. A 씨는 통화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출마였다”고 했다. 당의 선거지원금 수령도 염두에 둔 출마였다는 점을 내비친 것. 그는 “유세차량이 있어야 하고 싶은 말을 유권자에게 충분히 할 수가 있는데 그런 것을 전혀 못 했다”며 “사비로 2500만 원 가까이 썼다”고 했다. 그럼 민생당이 받은 9억3000만 원의 선거보조금은 어디로 간 걸까. A 씨는 선거가 끝난 뒤 당으로부터 1500만 원을 받았다고 했다. 나머지 선거보조금의 용처에 대해서는 “당이 알아서 처리했을 것”이라며 “모른다”고 말했다. 복수의 민생당 관계자들도 통화에서 “답변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말을 반복했다. 현역 의원 20명, 제3교섭단체로 출발한 민생당은 2020년 총선 참패로 단 한 석도 얻지 못했고 주요 인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단 한 명의 국회의원 광역의원 기초의원도 없고, 이렇다 할 의정활동도 찾기 힘든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지만 지난 4년간 받은 정당보조금은 40억 원을 훌쩍 넘는다.● 감시의 사각지대에 있는 정당보조금 민생당의 계속된 국고보조금 수령은 제도상의 허점과 감시의 허술함이 동시에 드러난 극단적 사례지만, 기존 원내 정당의 국고보조금 사용 역시 감시의 사각지대에 있는 경우가 많다. 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은 2013년 국고보조금 6668만 원을 당직자들에게 상여금으로 지급한 것으로 회계 처리를 했다. 그리고 이를 차명계좌로 반환받아 불법 선거 자금으로 썼다가 적발됐다. 새누리당(국민의힘의 전신) 역시 2012년 정책개발비로 6500만 원을 썼다고 회계 신고를 했는데, 몇 건의 짜깁기한 보고서가 전부였던 것으로 드러나 선관위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국고보조금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확인하는 건 선관위 역할이다. 하지만 막대한 규모의 보조금 집행을 치밀하게 감시하기는 쉽지 않다. 동아일보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선관위가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10년간 검찰이나 경찰에 고발이나 수사의뢰를 한 경우는 6건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선관위는 위법 사항을 발견하고 조치를 취한 뒤에도 그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나마 당내 갈등 끝에 한 번씩 외부로 비위 사실이 알려지는 정도다. 유권자의 감시의 눈에서 벗어난 이런 ‘깜깜이 회계 감사’는 드러나지 않은 보조금의 유용이나 위법 행위가 더 심각할 수 있다는 의심을 키우고 있다.● 1980년 국보위가 도입한 정당보조금 이 같은 정당 국고보조금 제도는 언제 왜 도입됐을까. 전두환 군사정권의 산물이다. 1980년 5월에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가 추진한 5공화국 개헌에 보조금 관련 규정이 헌법에 들어갔다. 당시 헌법 제7조 제3항엔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정당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보조할 수 있다”라고 명시됐다. 이에 따라 그해 12월 정치자금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보조금 관련 조항이 신설됐다. 당시 속기록에 나타난 개정안에 대한 제안 설명이다. “보조금의 지급 대상과 배분 비율 등을 건전한 정당의 보호 육성이라는 차원에서 새로 정하고…정치자금을 양성화함으로써 정치활동의 공명화를 촉진하고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광복 이후 우리 정당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에 의존해 운영돼 왔고, 그렇다 보니 정치 자금을 둘러싼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검은돈의 정치권 유통과 정당 정치의 보호를 위해 정당이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보조’하기 위해 정당 국고보조금이 도입됐지만, 수차례의 법 개정을 거쳐 규모가 막대해진 정당 보조금은 이제 각 당의 주요 수입원으로 변질된 것이 사실이다. 민생당 같은 ‘개점휴업’ 정당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정부는 정치자금법상 선거보조금과 별개로, 공직선거법에 따라 선거 비용도 보전해주고 있다. 선거 비용을 국가가 부담해 비용을 줄이고 공명선거를 실현한다는 선거공영제에 따른 것이다. 정치자금법상 선거보조금은 정당으로, 공직선거법상 선거 비용 보전금은 후보자에게로 각각 지급된다. 이렇게 보면 선거와 관련해 ‘이중으로’ 지원되는 셈이다.● “투명한 감시 필요”…정치권 개정 논의는 뒷전 정치권 일각에선 폐지론도 일고 있지만 헌법에 명시된 정당 국고보조금을 아예 없애는 것은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입법권을 쥔 각 정당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낮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국고보조금에 대한 감시 기능 강화가 우선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정당의 보조금 사용 내역을 일반인이 확인하려면 항목 총액 정도만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고, 세부 증빙 자료는 선관위를 찾아가 열람해야 한다. 그나마 3년 전까지는 자료 열람 가능 기간이 3개월로 제한됐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2021년 유권자의 평가에 필요한 자료에 대한 접근 제한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리고서야 올해 2월 겨우 법 개정이 이뤄졌다. 그렇지만 자료 열람 가능 기간이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된 것이 전부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 등에선 보조금 사용 내역의 투명한 공개를 위한 법 개정을 꾸준하게 요구하고 있다. 선관위도 2021년을 비롯해 세 차례에 걸쳐 정당의 수입·지출 내역을 인터넷에 상시 공개하도록 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정치권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이 개정안은 20대에 이어 21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지만 또 자동 폐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오유진 간사는 “정당이 어떤 장난을 해도 알 수 없는 시스템”이라며 “유권자들의 지속적이고 상시적인 감시를 피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정당보조금이 필요하다면 회계감사 규정 강화 등 제도적 개선을 통해 정당보조금이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당보조금이 많다고 더 좋은 정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시받지 않은 거액의 보조금 지급은 정당에 대한 국민 불신만 높일 뿐만 아니라 정당 스스로의 자생력마저 잃게 만들 수 있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중도층’은 과거 거의 모든 정당의 타깃이었다. 적어도 양당제 국가에선 그렇다. 양쪽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비율에 큰 차이가 없다면 승패는 중도층의 손에 맡겨진다. 이 때문에 한국의 정당들은 선거 때마다 ‘중도 확장’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을 강조하며 ‘중도 개혁’을 설파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더불어민주당 등 최근 야권의 태도는 다르다. 강경 일변도로 비친다. ‘2찍’ ‘집에서 쉬라’ 등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발언은 당 대표의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저속하기 짝이 없다. 그것도 공개적인 자리에서다. 혐오와 증오의 발언에 환호하는 강성 지지층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아예 “윤석열 정권 조기 종식”을 당의 목표로 제시했다. 2년 전 국민 다수의 선택으로 출범한 정부를 향해 사실상 ‘탄핵’을 공개 거론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 대표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선거를 앞둔 시점엔 중도층의 표심을 의식해 의원들도 극단적인 언행은 자제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민주당은 마치 중도 확장 따위엔 관심조차 없는 듯 행동한다. 왜 그럴까. 한동안 민주당은 위기였다. 핵심 지지층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화 조사를 하건, ARS 조사를 하건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났다. 그런데 민주당 지지율은 부동층의 증감에 따라 변동 폭이 상대적으로 컸다. ‘지지 정당 없음’ 답변이 많은 조사에선 민주당의 지지율이 더 낮게 나타나는 식이었다. ‘이재명의 민주당’에 반감을 느끼는 일부 전통적 민주당 지지자들이 부동층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공천 과정에서 빚어진 이 대표의 독선적인 행태 그리고 종북세력인 통진당 후신인 진보당 인사들을 대거 당선권에 배치한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반감은 조국혁신당 지지율로 옮겨 갔다. 조국혁신당의 지지층은 뚜렷하다. 진보 성향, 4050세대, 수도권과 호남에서 20% 안팎의 견고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제3신당의 지지율은 크게 통상 무당파를 흡수하는 확장과 기존 정당 지지자들이 옮겨 오는 이동으로 나뉘는데, 조국혁신당의 경우 현재까지는 민주당 핵심 지지층의 이동이 크게 나타난다. 조국혁신당이 부동층으로 이동했던 민주당 지지층의 야권 이탈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야권은 복원되기 시작한 전통적 지지층을 더욱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모양새다. 진보 결집론자들은 야권의 단결이 이번 총선 승리의 핵심 과제라고 본다. 이들은 네거티브 공세를 중시한다. 믿는 구석은 오직 하나, 정권 견제 심리다. 야권이 국민을 분열시키고 ‘팬덤’에 휘둘린다는 비판에도 이재명·조국 대표가 직접 강성 지지층이 듣고 싶어하는 이른바 ‘사이다’ 발언과 행동, 공약을 쏟아내는 이유다. 정권심판론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번 선거에서 괜찮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셈법이다. 야권 전반에 강경 목소리가 득세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중도 표심을 외면하는 선거가 성공할 수 있을까. 지금 민주당은 선거 판세를 이끌 만한 새 인물도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정권심판론에 의지하는 반사이익만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3, 4%의 격차로 승부가 갈리는 수도권 선거를 생각하면 더욱 의문이다.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는 ‘갈라치기’의 ‘플랜 A’로 계속 갈 것인지, 중도층 끌어안기를 위한 ‘플랜 B’로 전략을 틀 것인지 민주당이 결단해야 할 때다. 강경으로 질주하는 민주당의 전략이 이번 총선에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판명 나기까지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2000년대 이후 당선된 대통령들은 모두 선거개입 시비에 휘말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에 소추되기도 했다.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 역시 크고 작은 선거법 위반 논란에 휩싸였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이 ‘말’로 인해 탄핵 사건에 휘말린 후, 말은 아끼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여권의 전략이 바뀌었다. 일부 접전 지역구 방문에 머물렀던 대통령의 ‘선거 지원성’ 행보가 문 전 대통령의 재난지원금 지급, 윤석열 대통령의 전국 순회 ‘민생토론회’ 등 그 범위를 점차 넓혀가고 있다는 차이도 있다. “정당한 국정 운영”이라는 여당과 “선거 개입”이라는 야당. 선거 앞 대통령과 정부의 ‘선거 중립 의무’ 논란을 짚어봤다.》 “(대통령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은,… 선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한 것이므로 선거에서의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한 2004년 5월 헌법재판소 결정문의 한 부분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17대 4·15총선을 앞두고 각종 기자회견에서 특정 정당(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특히 방송기자클럽 초청 기자회견에서 나온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에 표 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정말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습니다”라는 발언은 큰 논란이 됐다. 야당은 “대통령이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적 사전 선거운동을 계속해 왔다”며 탄핵을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헌재는 탄핵소추안을 기각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은 인정했다. 탄핵에 이를 정도의 ‘중대한 위반’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게 헌재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이후 대통령들은 선거 중립을 지켜 왔을까.● 尹 전국 순회 ‘민생토론회’ 논란 윤 대통령은 올 들어 전국을 돌며 민생토론회를 열고 지역 민심을 겨냥한 정책들을 발표하고 있다. 1월 4일 정부부처 업무보고를 겸해 시작된 민생토론회는 2월부터 지방으로 무대가 옮겨갔다. 윤 대통령은 설 연휴 직후인 13일 부산을 찾았다. 총선을 57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후 16일 대전, 21일 울산, 22일 경남, 25일 충남에서 민생토론회를 연이어 열었다. 수도권에서도 10차례 민생토론회를 열었다. 윤 대통령은 토론회에 참석하면서 해당 지역 전통시장도 5번 방문했다. 부산에서 윤 대통령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 북항 재개발, KDB산업은행 부산 이전 등을 차례로 언급하며 추진 의지를 강조했다. 또 구덕운동장 재개발, 사직야구장 재건축, 센텀2지구 도심융합특구 조성 등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여야 후보들의 반응은 바로 엇갈렸다.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대통령께서 우리 부산을 서울과 함께 양대 축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대한민국 발전의 열쇠라고 보고 계신다”며 ‘대통령님의 부산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반면 야당에서는 “승부처를 찾아다니며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는 건 노골적으로 총선에 영향을 주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말’은 자제하되 ‘행동’은 더 강하게 공직선거법 9조 1항은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재는 선거법 9조의 ‘공무원’에는 대통령 등 선출직 공무원은 물론이고 국무총리 등 정무직 공무원도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대통령은 대상이 누구든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헌재 결정 이후에도 대통령의 선거 개입 논란은 계속 불거졌다. 달라진 게 있다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노 전 대통령이 ‘특정 정당’(열린우리당)을 지칭한 부분을 헌재가 명시적으로 ‘선거법 위반’으로 적시했다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2016년 4·13 20대 총선을 28일 앞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붉은 옷을 입고 부산을 방문한 것이 한 예다. 그는 총선 격전지인 부산을 찾아 창조경제혁신센터 등을 둘러봤다. 이보다 6일 전에는 역시 붉은 옷을 입고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를 방문했다. 당시 청와대는 경제 행보일 뿐 정치적 의미는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했으나,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의 상징색인 붉은 옷을 입고 지방을 연이어 방문했다는 점에서 ‘노골적 선거 지원’이란 논란에 휩싸였다. 박 전 대통령은 붉은 옷을 입고 투표소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말보다 행동’ 전략은 지지층에게 명확한 메시지는 전하면서 ‘선거법 위반’이라는 비판을 피해 가기 위한 노림수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대통령이 특정 후보나 특정 정당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한 헌재 결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 선거 보름 前 재난지원금 지급 발표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문 전 대통령은 2021년 2월 부산 가덕도 신공항 예정부지를 직접 찾아 “신공항 예정지를 눈으로 보고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을 들으니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이 가덕도를 찾은 시점은 4·7 부산시장 보궐선거 40여 일 전이었다. 문 전 대통령이 코로나19 대책의 일환으로 2020년 4·15총선을 약 보름 앞두고 ‘100만 원 재난지원금 지급’ 결정을 내렸을 때도 선거 개입 논란이 거셌다. 당시 청와대는 “야당 논리대로라면 대통령과 정부는 선거 기간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냐”고 반박했다. 재난지원금 지급 발표를 선거법 위반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정치권 인사도 동의한다. 전직 선관위 고위 간부는 “선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소지가 다분했다”며 “선거 중립 의무를 좀 더 엄격하게 고려했다면 선거가 끝난 뒤 재난지원금 지급을 발표하는 게 옳았다”고 말했다. ● 국정 운영? 선거 개입? 모호한 선거법 전문가들은 여권이 헌재의 결정을 애써 축소 해석하고 있다는 점과 공직선거법 자체가 모호한 것을 문제점으로 들고 있다. “선거 때라 하여 국정 운영을 중단할 수는 없으나 선거가 임박한 시기(통상 투표일 3개월 전부터)에 ○○○한 행위는 선거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으므로 공명선거를 위해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는 선거 이후에 시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과거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의 정책 발표 또는 지방 행보로 인해 선거 개입 논란이 일 때 선관위는 종종 이 같은 협조 공문을 청와대로 보냈다. 선관위에 따르면 대통령 또는 정부의 정당한 정책 집행이라고 해도 반드시 총선 전에 시행해야 할 만큼 시급하지 않거나, 선거 홍보성 성격이 짙은 행사일 경우 자제해 줄 것으로 요청했다. 헌재 역시 “대통령은 평소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지만 선거에 임박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선관위는 노 전 대통령 탄핵 사건 이후 대통령의 지방 행보나 정책 발표에 대해 논란이 일 때마다 “특정 정당이나 선거 관련 발언이 없었기 때문에 선거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선관위의 적극적인 유권해석을 주문하는 의견도 제기된다. 전직 선관위 고위 관계자는 “‘선거법 위반 소지’라는 선관위의 판단 자체가 선거 민심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여당도 선거 개입 논란을 빚을 수 있는 행보를 자제하는 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전례로 볼 때 선관위가 윤 대통령의 민생토론회를 선거법 위반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은 작다는 전망이 많다. 그렇지만 민생토론회를 놓고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는 공직선거법 취지와 충돌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 때문에 전문가들은 매번 논란이 반복되는 대통령의 선거 중립 논란에 대해 공직선거법 개정 또는 대통령의 당적 이탈 의무 명시 등을 통해 명확히 정리하고 갈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헌재는 탄핵소추사건 결정문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선거 중립으로 인해 얻게 될 ‘선거의 공정성’은 매우 크고 중요한 반면에 대통령이 감수해야 할 ‘표현의 자유 제한’은 상당히 한정적”이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대통령은 스스로 선거개입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행보를 자제하는 게 공명선거의 첫걸음일 것이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집권 중반기에 치러지는 총선은 대개 정권 심판이냐 아니냐의 싸움, 즉 중간평가의 프레임(구도) 속에 치러졌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전통적 프레임인 야당의 정권 심판론(창)과 여당의 국정 안정론(방패)의 대결은 없다. 모두 ‘창 대 창’의 충돌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정권 심판’, ‘검찰 독재 심판’이라는 프레임을 앞세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이재명 대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윤석열 정권의 독단과 무능”을 강조하는 것은 그 연장선상이다. 국민의힘은 ‘야당 심판론’을 외친다. 더 구체적으로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기득권 386 청산”을 주장한다. 운동권 심판론도 야당을 운동권이란 틀에 가둬 고립시키겠다는 프레임 전략의 일환이다. ‘정권 대 운동권’, 쌍심판론으로 선거 구도가 굳어지면 정권 심판론이 희석되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여기에 설 연휴 시작과 동시에 이낙연, 이준석 공동대표 체제의 ‘개혁신당’이 출범했다. 신당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전망은 잠시 접어두자. 주목할 점은 개혁신당의 출현으로 쌍심판론에 더해 ‘양당 심판론’이 또 하나의 프레임으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신당은 신당의 비전을 설명하면서 “기득권 양당 체제를 그대로 방치해선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고 밝혔다. 나라를 위해 양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논리다. 얽히고설킨 3당 3색의 ‘심판론’이 난무하면서, 각 당이 꼬리를 물며 서로를 심판해 달라고 하는 보기 드문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앞다퉈 상대의 패배를 위해 투표해 달라는 ‘부정적 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이번 총선에선 한동훈 이재명 이준석 등 여야의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들이 대부분 전면에 섰다. 패배한 쪽은 치명상을 입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승리에 도움이 되는 전략이라면 뭐라도 쓸 태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각 당은 대의보다는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며 끊임없이 주판알을 튕긴다. 대다수 후보들도 그에 맞춰 줄서기와 이합집산만 고민한다. 1년 전에 끝냈어야 할 선거구 획정이 감감무소식인 것도 이들의 손익계산 탓이다. 선거판이 “저쪽을 심판해야 한다”는 외침으로 가득 차면서 청년, 여성,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참신한 인사들의 목소리는 공명을 일으킬 공간을 잃고 있다. 거기다 복잡한 프레임 속에 유권자들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하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놓고 또 고민해야 한다. 누구나 총선 때가 되면 멋지게 선의의 경쟁을 하는 정당과 후보들 가운데 누구에게 표를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상황을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희망은 이뤄지지 않을 듯하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누가 더 비호감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선거가 펼쳐지고 있다. 설 연휴 기간 발표된 한 언론의 패널조사에 따르면 ‘정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79%, ‘정치 이야기가 피곤하고 피하고 싶다’ 61% 등으로 나타났다.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혐오가 깊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건 총선 결과에 따라 ‘내 삶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내 가정의 경제, 내 아이에게 물려줄 나라의 앞날이 달려 있다. 선택의 기준은 간단할 수 있다. 먼저 정치를 잘한 정당이 있다고 판단하면 두 표 다 행사하면 된다. 다음으로 정치를 못했거나 못할 것같이 생각되는 정당이 있다면 그 당을 뺀 정당에 두 표를 찍거나 한 표씩 나눠 찍으면 된다. 잘 못하는 정당을 키워주는 것만큼 민주주의와 의회정치에 해가 되는 선택은 없다. 정치혐오에 빠지는 대신 유권자 한 명이 던지는 표가 얼마나 아픈지 알려줘야 할 때다. 아울러 최악의 정치를 만든 장본인들은 상대 심판을 유권자들에게 요구하기 전에 반성하는 모습부터 보이는 것이 옳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총선을 앞두고 이뤄지는 현역 국회의원 ‘물갈이’는 통계로만 따져 봐도 어느 정도 선거 승리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최근 20년간 치러진 5차례의 총선을 살펴보면, 신생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2004년 17대 총선을 제외하고 18대부터 21대까지 4번의 총선 중 3번의 총선에서 물갈이 비율이 높은 정당이 더 많은 의석을 가져갔다. 현역 의원들이 더 많이 물러나고, ‘새 얼굴’을 더 많이 내세운 정당이 승리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특히 이번 4월 총선에선 여야 내부 상황과 맞물려 ‘역대급 물갈이’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점점 짧아지는 현역 의원 ‘유통기한’ 총선 공천 때가 되면 여야 정치권에서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화두가 있다. ‘현역 의원 교체론’이다. 기득권의 상징으로 비치는 현역들을 대거 교체해야 혁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할 수 있어서다. 이를 통해 얻은 여론의 지지가 총선 승리의 동력으로 작용한 경우가 많았다. 민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경기, 인천 모두 4월 총선 지역구 선거에서 “현역 의원을 뽑겠다”는 응답보다 “다른 인물을 뽑겠다”는 응답이 더 높게 나타난 것(동아일보사 신년 여론조사) 등 여러 여론조사에서도 현역 의원에 대한 비토가 높게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총선 앞 인적쇄신은 이제 전략의 차원을 넘어 상수가 되고 있다. 실제 현역 의원 교체율, 즉 초선 비율도 18대 44.8%, 19대 49.3%, 20대 42.3%였는데, 21대에는 50.3%로 높아지는 추세다. 국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1차적인 원인이다. 그렇지만 의원 개개인의 의정 활동을 유권자들이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된 미디어 환경의 변화, 다양해진 유권자의 요구 등 과거와 달라진 정치환경도 현역 의원들의 ‘유통기한’을 짧게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여의도의 한 인사는 “현역들의 교체 주기가 빨라지고 폭이 넓어지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라며 “10년 전만 해도 ‘물갈이’라고 하면 중진들에게 주로 해당되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초·재선 의원들도 피해 갈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초선 의원도 당과 지역 유권자들 사이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면 언제든 교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번 총선에선 각 당의 내부 상황도 큰 폭의 물갈이를 예고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정부·여당의 신뢰 구축을 공고화하기 위한 ‘대통령의 사람들’이,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중심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현역 의원 교체가 필요하다. 이에 ‘세대교체론’을 앞세운 국민의힘은 789세대(70·80·90년대생)를 중심으로 새 얼굴을 대거 영입할 것으로 예상되고, 친명과 비명 간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는 민주당에서도 결과적으로 절반에 가까운 현역 의원 물갈이가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유권자들은 기득권의 상징처럼 비치는 현역 의원들에 대한 물갈이를 혁신으로 보는 성향이 있다”며 “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 각 당의 내부 사정에 양당의 쇄신 경쟁까지 더해지면 이번 총선에선 물갈이 폭이 역대급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與, 15·17대 총선 공천 주목 여권 내부에선 15대(1996년)와 17대(2004년) 총선 공천을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대대적인 외부인사 영입을 통한 세대교체’(15대), ‘중진 20여 명의 불출마 선언을 통한 당의 기사회생’(17대)을 이뤄낸 당시 전략을 참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정치권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켜 반전을 이뤄냈다. 김영삼 정부 집권 4년 차, 직전 지방선거 패배로 인한 지방정치의 여소야대 상황 등으로 정권 심판론이 확산됐을 때다. 이춘구 당시 당 대표를 비롯한 중진들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데 이어 이회창 전 총리, 박찬종 전 의원의 입당으로 당의 구심점이 바뀌었다. 공천에선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등 당시로선 개혁 성향의 신인들을 대거 영입해 쇄신 분위기를 조성했다. 신한국당은 과반에 육박하는 140석을 얻었다. 예상을 넘어선 선전이었다. ‘탄핵 역풍’ 속에서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 때도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은 대대적 물갈이 공천으로 ‘기사회생’했다는 평가다. 최병렬 오세훈 전 의원 등 불출마자 20여 명과 공천 탈락자까지 합쳐 148명 현역 의원 중 총 60명이 교체됐다. 40.5%에 이르는 현역 의원 교체율은 121석 확보라는 최악의 위기를 면하는 데 한몫을 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인요한 혁신위원장의 ‘희생론’에 이어진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총선 불출마’는 대대적 물갈이를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많다”며 “현역 의원들의 2선 후퇴와 세대교체가 이번 공천 전략의 주요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野, 집안싸움 속 물갈이 ‘기준’ 고심 민주당도 인적쇄신에 시동을 걸었지만 당내 사정이 복잡하다. 민주당은 21대 총선에서 121석이 달린 수도권에서만 103석을 얻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다. 사실상 정치신인이 노려볼 만한 적지(敵地)가 거의 없다 보니 같은 당 안에서 현역 의원의 ‘수성’과 원외 인사의 ‘도전’ 경쟁이 치열하다. 그간 민주당은 하위 20%에 든 현역 의원의 경선 득표를 일괄적으로 20% 감산했지만 총선기획단은 이번 총선에서는 하위 10% 이하 의원들에 대해선 감산 비율을 30%로 강화했다. 경선 과정에서 여성, 청년일 경우 25% 가산점을 받는데 하위 20% 이하 현역의원에게 득표 감산 비율 20∼30%를 적용하면 사실상 역전이 불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최소 30명 이상의 현역 의원들이 교체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친명계 원외 모임으로 불리는 더민주전국혁신위원회는 한발 더 나아가 민주당이 선제적으로 ‘현역 의원 50% 물갈이’를 제도화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당내 중진들에 대한 ‘용퇴론’도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당 지도부 안에서는 이미 대표적 ‘86세대’ 정치인들과 전임 정부에서 장관, 청와대 핵심 참모 등 주요 직위를 맡았던 인사들의 ‘자기희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쇄신 대상으로 거론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비명 진영에 속한다. 치열한 계파갈등 속에서 인적쇄신이 자칫 ‘공천학살’로 비치거나 비주류 신당 출현이라는 적전분열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현역 교체율보다 내용이 중요” 그렇다면 대대적인 물갈이는 우리나라의 정치와 각 정당을 더 나아지게 했을까. 21대 국회에선 300명의 국회의원 중 절반이 넘는 151명의 초선 의원이 원내에 입성했다. 재·보궐선거와 비례대표 승계를 거치면서 그 수가 더 늘어 현재는 155명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를 개혁하는 동력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21대 국회를 부끄럽게 만드는 데 일조한 면이 크다. 공천권을 쥔 당 지도부나 실세들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정치인’ ‘생계형 정치인’ ‘홍위병’ 등의 비판도 이어졌다. 물론 서로가 극단적으로 맞서는 양극화된 진영정치가 구조적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불출마를 선언한 민주당 초선 홍성국 의원은 “바꿔보려 노력했지만 제로섬 법칙이 지배하는 정치현실에 한계를 느꼈다”며 “객관적인 주장마저도 당리당략을 이유로 폄하받기도 했다”고 말한 것도 현역 의원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직 양당의 공천이 가시화하지 않은 상태다. 다만 전문가들은 현재까진 여야 모두 유권자 기대에는 못 미치는 상황이라는 평을 내놓는다. 국민의힘에선 한 비대위원장이 등판한 이후 오히려 ‘찐윤핵관’만 대거 공천받을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다. 민주당에서도 중진이 다수 포진한 친명 그룹 및 지도부 내에서 희생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친명계 후보들의 ‘자객 출마’ 논란만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편이 이기는 것이 목표’인 선거에서 각 당은 정치공학적 계산을 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이런 이유에서라도 현역 의원 물갈이 과정이 보다 투명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단순한 교체비율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민심과 동떨어진 계파의 이익을 우선시한 사천(私薦)의 결과는 정치의 후퇴라는 것을 역대 선거가 보여줬다. 물갈이가 시대의 흐름이라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 인물을 적극 발굴하고 발탁하는 것이 공당의 의무다. 그것이 당과 정치가 사는 길일 것이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총선을 약 4개월 앞두고 수많은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조사 기관에 따라 정당 지지율이 널뛰기를 하고 있다. 한국갤럽의 12월 2주 차 여론조사(전화면접)에서 여야 지지율은 국민의힘 35%, 더불어민주당 34%로 오차범위 내에서 비등한 구도를 보였다. 양당의 지지율이 최근 몇 달간 30%대 초중반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엇비슷하게 이어진 것이 갤럽의 결과다. 전화면접으로 진행되는 다른 여론조사 기관의 정당 지지율 흐름도 유사하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민주당 지지를 천명해 온 한 유튜버가 만든 여론조사 업체의 12월 2주 차 조사(ARS)에선 민주당 지지율 51.6%, 국민의힘 37.0%로 그 격차가 오차범위 밖인 14.6%포인트로 벌어졌다. 이 업체가 최근 6개월간 실시한 27번의 정례 지지율 조사(ARS)에서 민주당은 21차례나 50%가 넘는 지지율을 얻었다. 같은 기간 국민의힘은 단 한 차례(40.1%)를 제외하곤 줄곧 30%대를 유지했다. 격차가 18.7%포인트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대체 왜 이런 현격한 차이가 나는 걸까. 하우스 이펙트(House Effect)라는 말이 있다. 여론조사를 의뢰·수행하는 기관의 성향에 따라 여론조사 결과가 편향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질문 문항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일 수 있다고 한다. 이 유튜버가 만든 여론조사 업체가 정당 지지율 조사 때 함께 물어보는 질문 내용을 들여다봤더니 편향적으로 볼 만한 대목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검찰은 헌정사상 최초로 야당 대표의 3번 연속 검찰 출석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차기 대권 주자를 제거하려는 표적 수사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2월 12, 13일 조사)라고 질문하는 식이다. 질문에 ‘헌정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들어갔다. 여론조사 설문에 ‘이례적’ ‘반드시’ ‘꼭’과 같은 부사를 집어넣으면, 그것은 응답자들이 부정적으로 응답하기를 기대하고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제거’ ‘표적 수사’ 등 가치 판단이 포함된 단어도 응답자의 답변을 한쪽으로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설문 작성 과정에서 피해야 할 표현들이다. 이런 질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응답자들은 중간에 전화를 끊거나 이 같은 질문을 한 여론조사 기관에 대해서는 답변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고, 결과적으로 이런 질문에 우호적인 응답자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여론조사 결과는 민주당 지도부의 공식 논의 테이블에 올라가고, 의원총회에서 자료로 배포되기도 한다. 민주당이 자당에 우호적인 여론조사에 의지하거나 정세 판단 근거로 삼고 총선 전략을 짜는 것은 그들 몫이다. 이 업체는 다른 여론조사 기관의 조사 결과를 납득할 수 없고 자신들이 맞다고 주장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조사가 전체 선거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여론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가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다수의 의견에 편승하는 ‘밴드왜건 효과’다. 총선에 임박할수록 각종 여론조사가 난무할 것이다. 특정 정당, 또는 특정 후보에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문항을 설계한 뒤 편향된 여론조사 결과를 SNS 등을 통해 대거 유포하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려는 시도가 횡행할 가능성이 높다. 여든 야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의 객관성을 단번에 따져볼 수 있는 인공지능(AI)이라도 개발돼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조사 샘플과 설문 문항의 공정성 여부에 대한 엄격한 사전 사후 관리, 조사기관 운영자의 자격 요건 강화가 필요하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내년 4월 10일 치러지는 22대 총선 ‘게임의 룰’이 여전히 불투명하다. 예비후보 등록일인 12월 12일 전까지도 관련 법안 처리는 기대하기 어렵다. 최대 쟁점인 비례대표제 논의에서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 못해서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 출현을 막기 위해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방침이 확고하다. 국민의힘은 전국 단위의 병립형 비례제를 최우선으로 하되, 야당이 3개 권역별(수도권·중부·남부) 병립형 비례제를 들고 나올 경우 논의를 해볼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연동형 유지를 주장해 온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당내에서 위성정당 창당을 막기 위해 병립형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권역별 ‘병립형 vs 연동형’ 막판 쟁점 선거제도를 논의하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마지막 회의는 7월 13일이었다. 이후 4개월간 ‘2+2협의체’(국민의힘·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정개특위 간사)의 물밑 협상이 이어졌다. 이들은 소선거구제 유지와 3개 권역별로 비례대표를 뽑는 권역별 비례제에 대해선 큰 틀의 합의를 이룬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권역별 비례대표를 병립형으로 선출할지, 연동형으로 선출할지에 대해선 여전히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지역구 투표와 정당 투표를 따로 한 뒤 과거처럼 정당 득표율을 기준으로 비례대표 의석을 단순 배분하는 병립형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먼저 정한 뒤 지역구 당선자가 정해진 의석수에 미치지 못하면 비례대표로 이를 일정 부분 채우는 연동형을 공식 주장한다. 다만 민주당 내부에선 그간 반대해 온 병립형에 대한 기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정개특위 민주당 간사인 김영배 의원은 21일 언론 인터뷰에서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위성정당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병립형으로 돌아가더라도 타협할 수 있는 안을 만들자는 방안이 내부에서 거론 중”이라고 말했다. 정의당 등 소수정당은 병립형 회귀는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비례대표제 뭐가 문제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는 253개 지역구에서 1명씩 253명, 비례대표로 47명을 선출해 모두 300명이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현행 선거제가 표심을 정확하게 의석수에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정당의 득표율이 10%이면 원칙적으로 300석의 10%인 30석의 의석을 얻어야 하는데 현실은 다르다. 지역구 의석 대부분을 휩쓰는 거대 양당은 표심에 비해 과다 대표되는 반면, 소수정당은 과소 대표되는 ‘불공정한’ 의석 배분이 발생한다. 위성정당 창당으로 선거제 개편의 취지와 다른 결과가 나왔던 21대 총선이 아닌, 2016년 20대 총선 결과를 보자. 의석 점유는 민주당 123석(41.0%),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122석(40.67%), 국민의당 38석(12.67%), 정의당 6석(2.0%)이었다. 그러나 후보가 아닌 지지 정당에 투표하는 정당득표율로만 계산했을 때 산출되는 의석수는 민주당 25.54%(76석), 새누리당 33.5%(100석), 국민의당 26.74%(80석), 정의당 7.23%(21석)다. 지역구 따로, 정당 따로인 ‘교차 투표’ 변수를 제쳐놓고 산술적으로만 보면 민주당과 새누리당은 각 47석, 22석이 과다 대표된 반면, 소수정당인 국민의당과 정의당은 과소 대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야는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선거제 개편에 착수했다. 하지만 정당득표율을 기준으로 의석수를 배분하게 되면 거대 양당이 기존보다 의석을 잃기 때문에 양당은 연동형 도입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2020년 총선을 4개월 남짓 앞두고 여야는 의원 정수를 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으로 유지하면서, 이 가운데 30석은 ‘준연동형’, 나머지 17석은 정당득표율에 따라 단순 배분하는 병립형 방식의 선거제를 도입했다. ● 위성정당이 망친 선거제 개편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연동형의 절반(연동률 50%)만 적용하기 때문에 ‘준’자를 붙였다. 지역구 253석 중 특정 정당이 얻은 의석수가 정당 득표율에 이르지 못하면 비례대표에서 부족한 의석 중 50%를 채워주는 제도다. 준연동형 비례제는 정당득표율에 따른 비례성을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선거법 개정에 반대했던 미래통합당(국민의힘의 전신)은 비례대표 전용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창당했다. 민주당도 이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더불어시민당을 만들면서 준연동형 비례제를 무력화했다. 결과는 민주당(163석)이 더불어시민당(17석)을 포함해 180석, 미래통합당(84석)과 미래한국당(19석)은 103석, 정의당은 6석 등으로 나타났다.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았다면 선거 결과는 어땠을까. 한국정치학회가 21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를 내지 않은 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고 비례대표 후보를 직접 낸 것으로 가정한 선거 결과를 시뮬레이션했다. 결과는 민주당 169석(실제 의석수 180석), 미래통합당 99석(103석), 정의당 13석(6석), 국민의당 8석(3석), 열린민주당 6석(3석)으로 나왔다. 기존 제도보다 비례성이 개선되는 결과가 나왔다. ‘꼼수 위성정당’ 효과로 양당(더불어시민당 +11석, 미래한국당 +4석)이 소수정당(정의당 ―7석, 국민의당 ―5석, 열린민주당 ―3석)에 돌아갈 비례 의석이자, 준연동형 배분 의석 30석 중 절반인 15석을 가져간 셈이다.● “현실적으로 위성정당 막기 어려워”정치권에서는 이대로라면 21대 총선처럼 ‘위성정당 꼼수’가 또 나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 속에 ‘위성정당방지법’이 여러 건 발의된 상황이다. 그러나 이 법들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위성정당을 막기 어렵다는 것이 정개특위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선거제 개혁은 양당의 합의하에 추진하는 게 관행이었지만, 준연동형 비례제의 경우 민주당, 정의당, 바른미래당, 평화당 등 4당이 자유한국당(국민의힘의 전신)을 배제하고 통과시킨 법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국민의힘은 애초부터 연동형을 찬성한 적이 없기 때문에, 현행 제도가 유지된다면 또다시 위성정당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럼 민주당도 맞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민주당도 결국 병립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권역별 비례대표 자체도 개선”여야는 일단 권역별 비례제라는 절충안엔 도달했다. 권역별로 비례대표를 선출할 경우 민주당은 대구·경북에서, 국민의힘은 호남에서 당선자를 배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자체로 정치의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4월 국회 전원위에 오른 여야의 개선안에도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당시 민주당은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고, 준연동형 비례제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국회의장도 6개 권역을 제안했지만 이를 현실화하려면 의석수를 늘려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정개특위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의석수를 늘리기 어렵기 때문에 권역을 3개로 줄이는 안이 나왔다”며 “전국을 수도권·중부·남부의 3개 권역으로 나눈 것은 지난 3번의 총선 결과를 시뮬레이션했을 때 특정 당에 유리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권역별 비례제를 병립형으로 운영할 경우 지역주의가 완화되는 측면은 있지만 지금처럼 양당제가 유지되고 소수정당의 국회 진입이 어려워지는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병립형을 도입하되 거대 양당이 차지할 수 있는 비례대표 의석에 제한을 두는 방법으로 소수정당의 원내 진출의 기회를 보장하는 안을 검토 중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여야 간 협상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양당제의 폐해를 줄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연동형제하에선 현실적으로 위성정당을 막기 어렵다. 양당이 공식적으로 위성정당을 창당하지 않더라도, ‘태극기 부대’와 ‘개딸’(개혁의 딸) 등 강성 지지층을 등에 업은 ‘친국민의힘 호소 정당’ ‘친민주당 호소 정당’ 등 ‘참칭정당’ ‘자매정당’이 선거 전 급조될 가능성이 크다. 모든 선거제에는 장단점이 있다. 이번 선거제 개편의 최우선 과제는 위성정당 창당 봉쇄다. 정치와 선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더 키우는 일은 막아야 한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4년 전 이맘때인 2019년 11월. 총선을 앞둔 자유한국당은 지금의 국민의힘만큼이나 궁지에 몰렸다. 국민 지지가 흔들리는데 당 지도부와 중진들은 뚜렷한 대책이 없었다. 그때 당내 최연소 3선 김세연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한국당은 생명력을 잃은 좀비 같은 존재”라며 당의 창조적 파괴를 주장했다. 선거 때면 당의 쇄신을 외치며 먼저 불출마를 선언하는 의원들이 등장한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이 있었고, 19대 총선을 앞두고는 원희룡 홍정욱 의원 등이 나섰다. 21대 총선이 6개월 남짓 남았을 때 김 의원에 앞서 더불어민주당에선 이철희 의원이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며 86의원들에게 동반퇴진을 주문했다. 이들의 불출마는 무기력한 당에 새 피를 수혈하기 위한 자기희생으로 평가받았다. 국민의힘이 위태로운 모습이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 참패로 싸늘한 민심을 확인했지만 아직까지 불출마를 내걸고 쇄신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다선 의원이 없다. 초선 의원들의 집단행동도 없다. 하태경 의원 1명이 서울로 지역구를 옮기겠다고 했지만 다른 중진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대통령과 지도부를 향한 고언도 극소수 비주류 의원들의 비판이 전부다. 다른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는 당 분위기와 자신의 공천에만 관심을 둔 보신주의가 결합한 결과다. 국민의힘은 어쩌다 이런 정당이 됐을까. 의원 구성도 한 원인일 것이다. 비례대표를 제외하고, 국민의힘 지역구 의원 89명 중 절반에 가까운 39명(44%)이 ‘늘공(직업공무원)’ 출신이다. 판검사, 고위 행정관료, 경찰, 군인 출신이다. 행정고시(15명), 사법시험(14명)에 합격하고, 고위직을 거친 최고 스펙을 갖춘 엘리트들이다. 당 지도부만 봐도 김기현 대표가 판사, 윤재옥 원내대표와 이만희 사무총장은 경찰 고위직 출신이다. 직전 사무총장이었던 이철규 의원도 경찰 고위직을 지냈다. 대구는 12명 의원 중 9명(75%)이 ‘늘공’ 출신이다. 국민의힘에는 대통령의 잘못된 결정에도 ‘이건 아닙니다’라고 막아서는 정치인이 없다. 수직적 공무원 문화, 기득권 유지, 자존감에만 익숙한 전직 ‘늘공’들은 대통령의 의중을 살피고 불평 없이 지시에 따르는 것이 가장 편하고 안전한 길이라는 것을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여기에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라는 대통령의 질타까지 더해졌다. 이제는 “대통령은 대입 사건을 수사하는 등 누구보다 해박한 전문가”라든가, 강서구청장 선거 패배 후 열린 의총에서 “정권 교체를 이뤄낸 대통령은 우리의 은인”이라는 발언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게 어색하지 않은 당이 됐다. 다양한 국민을 대표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당 소속 의원 대다수가 ‘늘공’의 집단사고에 사로잡혀 공천과 자리만 바라보는 집권여당이 된 것이다. 새로운 인재들을 대거 충원해 당 분위기를 확 바꿔야 하는데, 지금의 여당이 용산의 의중을 뛰어넘는 새로운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 물갈이를 외치면서 미운털을 일부 솎아내고 손 씻는 것 아닐까. 그마저도 지금까지 새롭게 수혈될 것으로 거론되는 인사들 상당수는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검사, 고위 행정관료 등 또 다른 ‘늘공’들이다. 김 의원의 쇄신 요구에 당시 황교안 대표는 “총선에서 평가받지 못하면 책임지고 물러나겠다”며 변화를 거부했다. 주류 의원들은 당이 어려울수록 단결해야 한다고 외쳤다. “총선에 정치생명을 걸겠다”는 김 대표, 현재 국민의힘 분위기와 판박이다. 결과는 모두 안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한국당의 후신)은 100석을 간신히 넘기며 당시 범여권에 참패했다. 국민의힘은 더 절박해져야 한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이번 정부에서도 어김없다. 윤석열 정부의 ‘부실 인사검증’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주식 파킹, 배임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국회 인사청문회가 파행했다. 2월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된 정순신 변호사가 임명 하루 만에 낙마했다. 인사검증 업무를 ‘양지’로 끌어내 투명성을 높이겠다며 법무부 산하에 인사정보관리단을 설치한 윤석열 정부의 검증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걸까. 대통령실과 인사정보관리단은 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진 의혹들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눈감았을까.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인사검증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봤다.》 ● 사전 질문서만 제대로 작성했다면 ‘본인, 배우자 또는 직계비속이 비상장회사의 주식 또는 지분을 보유했거나 현재 보유하고 있습니까’(21번) ‘비상장회사 주식의 취득 또는 매도 과정에서 사회적·경제적 논란이 될 소지는 없었는지 소명해 주시기 바랍니다’(21-4번) 고위공직자 후보에 이름이 올라 검증 대상이 되면 해당 인사는 위 질문들을 포함한 59쪽 분량에 169개 질문 항목으로 구성된 ‘공직 예비후보자 사전 질문서’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3단계의 검증 과정을 거친다. 사전 질문서 답변 작성을 통한 자기 검증,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의 각종 자료 검증, 공직기강비서관실의 검증보고서 작성 및 대통령의 판단 순이다. 김 후보자는 2013년 박근혜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탁됐을 때 자신이 공동 창업한 위키트리의 운영사인 소셜뉴스 주식(비상장)을 시누이에게 매각했다가 되사들였다. 지금은 이 회사의 최대 주주다. 이 때문에 백지신탁 제도를 회피하려 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김 후보자가 21번과 21-4번 질문에 대해 어떤 답변을 기재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큰 논란으로 부상했다. 사전 질문서에는 ‘본인, 배우자 또는 직계존비속이 원·피고 등으로 관계된 민사·행정 소송이 있습니까’(6번)라는 항목도 있다. 김 후보자는 2019년 공동창업자였던 공 모 씨로부터 소셜홀딩스의 경영권을 넘겨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민사소송에 휩싸였다. 민주당은 이 재판 판결문을 근거로 “김 후보자가 회삿돈으로 인수자금을 충당했다”며 배임 의혹을 제기했고, 김 후보자는 “배임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 ‘전문성’이 강점이라는데… 사전 질문서 답변의 진위 및 법률적 쟁점을 따지는 일은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의 몫이다. 국세청과 금감원, 경찰, 검찰, 병무청 등 각 기관의 전산망을 조회한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 법원 판결문도 검색한다. 의문이 있을 경우엔 검증 대상자에게 추가 소명을 요구하기도 한다. 윤 대통령이 과거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담당하던 인사검증 기능을 없앤 뒤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을 신설해 그 권한을 넘겨준 명분은 ‘전문성’이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7월 국회 법사위에서 “법무부가 사실 확인과 법적 쟁점을 파악하는 데 특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이 법적 쟁점 파악과 해석에 강점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김 후보자의 주식 파킹이나 배임 의혹을 ‘놓쳤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 사전 질문서는 ‘자기 검증서’역대 정부는 조각이나 개각 때마다 크고 작은 ‘부실 검증’ 논란에 휘말렸다. 이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인사 검증 시스템 전반을 손봤다. 2010년 고위공직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검증 질문 200개를 던져 꼼꼼하게 점검토록 하는 사전 질문서를 만들었다. 정부마다 질문 항목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 시스템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윤석열 정부도 질문서를 만들었다. 지난해 10월 대통령실이 공개한 질문서는 기본 인적사항(7개), 국적·출입국 및 주민등록(12개), 병역의무(7개), 범죄경력 및 징계(10개), 재산관계(32개), 납세의무 이행(35개), 학력·경력(5개), 연구 윤리(16개), 직무 윤리(32개), 사생활 및 기타(12개), 기타(1개)로 구성됐다. 윤석열 정부는 또 가상자산(가상화폐) 관련 질의도 추가해 소유자와 가상자산명, 상장 여부, 보유 수량, 총평가금액, 매입 경위 등을 기재하도록 했다. 사전 질문서는 일종의 자기 검증서다. 과거 청와대에서 인사검증을 담당했던 한 인사는 “200개 안팎의 질문 항목을 만들고, 이에 대해 본인에게 먼저 답하게 하는 것은 기초 자료 확보의 의미도 있지만 고위공직자를 맡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도록 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며 “실제 많은 검증 대상들이 답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못하겠다’며 사의를 표명하곤 했다”고 말했다.● 늘 인사권자의 ‘정무적 판단’이 논란 그런데도 인사검증 파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자료 검증과 평판 검증 등이 마무리되면 공직기강비서관실은 검증보고서를 작성한다. 확보한 ‘팩트’와 함께 적격 여부에 대한 판단도 함께 적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권마다 차이가 있지만 3∼5단계로 적격 여부를 명시한다. 문제없음 - 다소 부담 - 부담 - 문제 있음 - 부적격 등의 형식이다. 여기까지 마무리되면 최종 판단만 남는다. 여기서부터는 ‘정무적 판단’의 영역이다. 부담을 안고 후보자로 지명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문제는 논란이 예상되는 대도 무리하게 강행하는 경우다. 전직 청와대 인사 담당자는 “실무진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는데도 대통령이 ‘이 사람을 꼭 써야겠다’고 낙점하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인사의 회고다. “인사검증팀이 심각한 문제를 발견해 ‘부적격’으로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자 대통령은 인사검증팀원을 교체했고, 새로운 보고서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최종 판단은 결국 대통령의 몫이라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7대 비리’ 기준에 따라 고위공직자 인사를 하겠다고 했지만, 검증 논란은 이어졌다. 이낙연 국무총리, 강경화 외교부 장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위장 전입 논란으로 야당 반대에 부딪혔다. 우여곡절 끝에 이낙연 총리 인준안만 국회를 통과했고, 문 대통령은 야당 동의 없이 강 장관과 김 위원장을 임명했다. 조동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는 두 아들의 병역특례, 연구비 횡령 의혹까지 겹쳐 지명이 철회되기도 했다.● 검증 과정의 법적 근거부터 확립해야 행정부 고위공직자에 대한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은 정치적 가치와 신념을 함께하는 고위공직자와 함께 국정을 이끌어 나가야 하지만, 이들은 반드시 공직자로서의 자격과 능력, 도덕성을 갖춘 것으로 검증된 인사여야 한다. 대통령실이 사전 질문서를 만들고, 이를 다시 검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 대한 법률적 근거는 매우 취약하다. 인사검증 첫 단계인 사전 질문서 작성부터 법적 근거가 없다. 이를 허위로 작성했을 때 처벌 규정도 없다. 사전 질문서 표지에 ‘답변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될 경우 향후 공직 임용에서 배제되는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대통령실은 정순신 변호사의 국가수사본부장 낙마 사건 때 ‘아들 학교폭력’ 문제가 사전 검증 때 걸러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대통령실은 질문 항목 중 하나인 ‘본인 배우자 또는 직계존비속이 원·피고 등으로 관계된 민사·행정소송이 있습니까’라는 문항에 정 변호사가 ‘아니요’라고 답해 이를 알 수 없었다는 입장이다. 이후 시민단체가 정 변호사를 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 위계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고발했지만 경찰은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고위공직자 후보 질문서인 130여 페이지 분량의 ‘국가안보 지위를 위한 질문지(SF86)’에는 의도적으로 사실을 위조·은폐할 경우 형법에 따라 벌금형이나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정 변호사 낙마 이후 대통령실과 법무부는 인사검증 개선 방안을 찾겠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이나 인사검증 과정에 대해선 “확인해 줄 수 없다”며 비밀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검증 절차와 내용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바뀌지도 않는 것이다. 막연히 대통령 중심제의 문제로만 치부하면 인사 실패, 부실 검증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힘들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라는 생경한 표현을 6번 등장시켰다. 직설적이고 공세적인 언어가 나열됐다. 과거와 사뭇 다른 대통령의 연설문을 두고 작성 과정과 의미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대통령 연설문에는 국가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다. 국정의 이정표이고 곧 역사다. 대통령부터 각 수석, 비서관, 행정관 등 대통령실이 역량을 총결집하는 이유다. 연설기록비서관이 초안을 잡는다지만 연설문 작성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뜻을 대통령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설비서관은 대통령의 논리 전개 방식과 고유의 표현 방식, 어투, 즐겨 쓰는 용어와 농담까지 염두에 두고 연설문을 작성한다. 김대중 노무현 청와대에서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했던 강원국 작가는 “김 대통령의 연설문은 호남 출신 행정관이, 노 대통령의 연설문은 부산 출신 행정관이 어투까지 흉내 내면서 몇 번씩 읽어보며 독회(讀會)를 했다”고 했다. 길게는 수개월에 걸쳐 한 자 한 자 고쳐지고 다듬어지는 대통령 연설문은 누가 쓰고, 어떻게 완성되는지 살펴봤다.》● ‘대통령의 그림자’ 연설비서관 서울 관악구 남태령 언덕에 위치한 수도방위사령부 지하에는 전시지휘소 벙커(B1 문서고)가 있다. 또 경기 성남 지하엔 한미연합사가 관리하는 ‘CP 탱고’라는 전시지휘소가 있다. 여기엔 모두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공간이 마련돼 있는데, 바로 옆자리 지정석의 주인공은 연설비서관이다. 전쟁 중 대통령의 메시지를 즉각 군과 국민에게 전파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드러나지 않게 대통령을 밀착 보좌하는 연설비서관은 대통령의 말과 메시지를 책임진다. 용산 대통령실에선 김동조 비서관이 대선 후보 때부터 그 일을 맡아 왔다. 금융·투자 전문가로는 이례적 발탁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온라인상에서 정치·사회 현안 비평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글 잘 쓰는’ 연설비서관이라고 혼자 쓸 수는 없다. 정치 경제 사회 안보 수석실에서 분야별 초안을 올리면 연설비서관이 취합한다. 올 초 한일 관계 개선이나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때처럼 민감한 비공개 안보 구상이 진행될 때는 대통령실(청와대) 내 국가안보실이 초안을 작성하기도 한다. 윤 대통령 취임 후 안보 관련 부분은 교수 출신인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이 쓴다고 전해진다. 대통령의 의중이 중요하기에 연설비서관은 대통령의 사담(私談)까지 메모해야 하고, 간간이 들리는 에피소드도 귀를 세우고 들어야 한다. 연설문을 준비하면서 대통령의 생각을 직접 묻고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간 큰’ 참모이기도 하다. 연설비서관은 대통령에게 들은 내용 중 다른 수석실이나 정부 부처에서 알아야 할 것을 전달하는 통로 역할도 한다. 청와대 출신 한 인사는 “연설비서관은 비서관(1급) 직급이지만 대통령의 생각과 심기를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서관 이상’의 역할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최종 독회 방식도 제각각 대통령 취임사나 8·15 경축사처럼 중요 연설은 길게는 몇 달 전부터 준비가 시작된다. 따로 TF팀을 꾸리기도 한다. TF는 정부 부처에서 보고를 받고, 교수 변호사 등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원고를 작성한다. 대통령이 직접 대통령실 밖 외부 전문가에게 연설문 원고를 통째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외부 전문가와 대통령실 참모들이 만든 결과물 여러 판본을 놓고 메시지와 문장력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참모들의 손을 거친 초안은 독회를 반복해 가며 최종 확정된다. 일종의 집단지성을 모으는 과정이다. 독회 방식은 역대 대통령마다 스타일이 드러났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 등 중요 연설에 국한해 독회를 가동했다. 참석자도 비서관급 이상으로 제한했다. 참석자들은 의견을 냈고, 김 대통령은 일단 듣기만 했다. 그런 다음 대통령이 연설비서관의 초안을 원고 여백에 깨알 같은 정자체로 빽빽하게 써가며 고쳤다. 검은색 볼펜으로 쓰다가 빨간색 볼펜으로 덧쓰기도 했다. 토씨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아 ‘빨간 펜 선생님’ 같았다는 것이 참모들 기억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독회는 토론 방식이었다. 업무가 연관된 행정관까지 다 불렀다. 대통령은 토론을 주도하며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당시 한 참모는 “100% 구술이었다. 대통령이 머릿속 생각을 말로 불러줬고, 우리는 돌아와 글로 풀었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독회를 통한 연설문 업그레이드를 선호했다. 여러 곳에서 연설문 초안을 받았고, 청와대 밖 외부 전문가까지 초청해 함께 읽으며 글을 고쳤다. 독회가 20번까지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과 비슷했다. 일단 참모들의 얘기를 들어본 뒤 본인의 생각과 주관을 초안의 여백에 펜으로 꼼꼼하게 적었다. 문 대통령은 연설비서관을 수시로 불러 의견을 나누곤 했다.● ‘레토릭 배제’ 尹 스타일 윤 대통령은 본인 생각을 참모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연설문 작성을 시작한다. 독회는 소수로 진행하는 것을 선호한다. 중요 연설문의 경우 연설비서관이 초안을 만들면 비서실장, 수석 등과 2, 3차례 상의를 한 뒤 자신이 직접 원고를 쓰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5월 취임사 역시 취임사준비위원회가 약 20명의 전문가 의견을 종합한 버전과 함께 외부 전문가의 글 2, 3가지를 견줘본 뒤 대통령이 최종 정리한 것으로 파악된다. 윤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평소 생각하던 ‘자유의 정신’을 강조하기로 결심했고 본인이 상당 부분 직접 원고를 다시 쓴 것으로 이 과정을 아는 관계자가 설명했다.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자유”라는 표현처럼 16분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35번 썼다. 윤 대통령은 올 8·15 경축사에서도 ‘자유’를 27번 언급했다. 윤 대통령 연설의 특징은 레토릭(수사·修辭)의 배제다. 연설의 대부분이 직설적이다. 비유적이나 감정이 담긴 시적인 표현, 사자성어 등이 거의 없다.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고 말한 8·15 경축사도 마찬가지다. 미사여구가 없어 연설이 짧다는 점도 특징이다. 현안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 방식도 선호하지 않는다. 초안에서 삭제나 수정이 필요한 부분은 연설문 여백에 직접 펜으로 써서 지시한다. 대통령이 직접 비유와 예시 문장과 단락을 펜으로 죽죽 지워 나가면서 연설문이 과거 대통령보다 짧아졌다. 과거 정부에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 업무를 맡았던 한 인사는 대통령의 메모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이 연설하면 이튿날 조간신문들은 초고에 있던 부분보다 대통령이 직접 메모하거나 고친 부분을 제목으로 뽑는 일이 많았다.” 대통령 본인이 추가한 곳에서 ‘연설자의 진심’이 더 잘 드러나지 않았겠느냐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이런 연설 방식 때문에 “감동이 부족하다”거나 “공격적인 직설화법이 대통령의 언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검사 생활을 27년 한 윤 대통령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표현에 더 익숙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직접적인 언어로 핵심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때로는 감성의 언어로 국민의 마음을 보듬고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연설은 정치, 자신의 언어가 중요” 전임 문 대통령은 반대로 감성을 자극하는 표현을 자주 담았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는 취임사가 대표적이다. 일본과 다툴 땐 “이제 누구도 대한민국을 흔들 수 없습니다. 이제 누구도 국민 주권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라며 운율과 함께 감성에 호소하는 표현을 연설문에 담았다. 다만 전문가들은 화려한 문장이 늘 감동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지지자들에게는 갈채를 받았지만 “소통이 아닌 쇼통”이라는 비판도 공존했다. 정치는 말이고, 대통령의 연설은 통치행위의 한 부분이다. 대통령마다 자신의 색깔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주관과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국민에게 전달하는 게 대통령의 연설이다. 어떤 방식을 사용할지는 대통령이 선택할 몫이다. 관건은 국민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다. 건조하고 때로 거칠지만 메시지는 분명한 윤 대통령의 연설 스타일에 대한 국민들의 호불호도 분명히 갈리고 있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결과적으로 국민께 피해를 끼쳐 송구스럽습니다.” 정치인들이 자주 쓰는 사과의 표현이다. ‘결과적’이라는 단서를 붙였다는 점에서 좋은 사과의 예시라고 할 순 없다. 면피성 의미가 엿보이지만 사과의 뜻이 분명하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그래도 국민의 질타를 인정했다는 뜻이고, 나아가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책임의 의미까지 내포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정치에선 ‘결과적 책임’이라는 말 조차도 잊혀진 듯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관련된 행복청장 인사 조치에 대해 보름째 묵묵부답이다. 메시지가 줄 의미는 명확하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이태원 참사 책임 논란과 마찬가지로 법적 책임이 명확하지 않다면 정무직 자리에 대해서도 결과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 책임을 외면하는 모습은 야권에서도 볼 수 있다. 이재명 대표는 대선 패배에 이어 총괄선대위원장을 맡은 지방선거까지 참패하고도 다시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권을 쥐었다. 패배한 리더는 잠시라도 현실 정치를 떠났던 과거 사례와는 달랐다. 결과적 책임에 대해 측근들은 “책임감을 갖고 더 충실히 일하겠다”는 엉뚱한 해명을 내놨다. ‘결과적 책임’이 보여주는 정치의 책임성, 반응성의 구현 여부는 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르는 핵심 내용들이다. 이제 여의도에선 잘못이 비교적 명확한 문제까지 한사코 부정하는 ‘몰염치’의 언행이 만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치의 퇴보다. 위기의 근원은 어디일까. 30년 넘게 누적돼 온 승자독식 구조 탓이 크다. 한 표라도 더 얻는 후보 또는 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실 속에서 가장 큰 명제는 ‘승리’다. 표의 득실을 따져볼 때 정치윤리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기보다는 상대를 문제를 야기한 거악(巨惡)으로 몰고 이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는 것이 더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다. 한 중진 의원은 “예전엔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절대적인 선이 있었다. 지금은 다른 목소리를 내면 ‘전쟁 중에 적을 돕는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총선을 8개월 앞둔 여야는 격렬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부실 건축물, 교권 침해,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난맥상 등 사회의 주요 사안이 모두 정쟁의 장이다. 반목과 책임 떠넘기기가 정치의 ABC가 됐다. 국제적 망신을 산 세계잼버리대회까지도 ‘내 책임’에 대해선 입을 꾹 닫고, ‘다른 누구의 책임이 더 큰지’만 따지는 정쟁이 됐다. 책임지지 않는 정치는 결국 다른 희생양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일부 공무원들과 관료 시스템이 타깃이 되는 모양새다. 관료는 본인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선출된 정치인의 책임하에 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능력을 평가받고, 정치인은 그가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결과적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와 관료 시스템의 작동 원리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같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책임질 공무원을 징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상위 개념인 정치의 결과적 책임은 외면하고 있다. 정무직 고위 인사들에 대한 책임 면탈 속에 ‘적극 행정’과 동시에 엄중한 책임을 요구받고 있는 직업 공무원들은 허탈과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책임질 일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적극 행정’이라는 ‘웃픈’ 얘기까지 공무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여야의 극단적 대립 구조가 낳은 책임지지 않는 정치가 결과적으로 관료 시스템까지 훼손하고 있다. 누구도 “내 탓이오”를 말하지 않는 실패한 정치가 민폐를 쌓고 있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회에 체포동의안이 상정된 사람은 조봉암 의원이었다. 1949년의 일이다. 이승만 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 의원은 비료와 양곡 횡령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 정권에 맞선 것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해석됐고, 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은 부결됐다. 현행범이 아닌 한 회기 중 국회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 ‘불체포특권’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국회의원의 자유로운 대의 활동을 보장하고 국회의 독립성을 지키는 의미가 컸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불체포특권이 비리에 연루된 의원을 감싸는 보호막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생겨났고, 1990년대 후반엔 ‘방탄 국회’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최근 정치권에서 불체포특권 폐지 논란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대표를 비롯해 소속 의원들의 체포동의안을 연이어 부결시킨 게 발단이 됐다. 이에 당 혁신위원회는 1호 혁신안으로 ‘불체포특권 포기 서약’을 제안했고, 민주당 의원들은 우여곡절 끝에 18일 의원총회에서 ‘서약’을 결의했지만 “정당한 영장 청구에 대해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국민의힘은 이를 “꼼수”라고 비판하는 등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김진표 국회의장은 불체포특권의 ‘포기’가 아닌 ‘폐지’를 포함한 최소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불체포특권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 국회의원의 의정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라는 이유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선 폐지 반대 의견도 나온다. ● 개헌 없이는 불가능한 특권 ‘폐지’ 방탄 국회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건 25년 전이다. 1998년 대선자금 불법 모금 혐의로 검찰이 이신행 서상목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회기 중’을 유지할 목적으로 임시국회를 연이어 열었다. 재적 의원 4분의 1 이상 요구만 있으면 임시국회를 소집할 수 있는 헌법 규정을 활용했다. ‘이신행 방탄 국회’는 네 번 이어졌고, 그 뒤를 이어 ‘서상목 방탄 국회’도 여섯 차례 문을 열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큰 선거 때마다 여러 대선후보가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폐지 또는 포기, 특권 내려놓기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지금까지 달라진 점은 별로 없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없던 일이 됐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후보는 불체포특권 폐지를 공약했지만 집권 이후엔 구체적인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민주당 전신) 후보도 불체포특권을 제한하는 공약을 냈지만, 승리가 유력했던 2017년 대선에선 이 공약을 채택하지 않았다. 이재명 대표도 지난해 대선 때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신년 기자회견에선 “경찰이 적법하게 권한을 행사한다면 당연히 수용하겠지만 경찰복을 입고 강도 행각을 벌이고 있다면 판단은 다를 수 있다”며 사실상 입장을 바꿨다. 불체포특권 폐지는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국회의원은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기 중 국회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으며, 구금된 경우라도 국회의 요구로 석방될 수 있다는 것은 헌법 44조에서 보장하는 권리다. 1948년 제헌헌법이 이를 규정한 이래 75년간 이어져왔다. 이를 바꾸려면 헌법 개정, 즉 개헌을 해야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엇갈린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정치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민주주의가 확립됐다. 만약 권력이 국회의 권한을 침탈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국민적 저항이 일어날 것”이라며 “오남용되고 악용되는 특권은 폐지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반면 장영수 고려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서구의 선진국들이 불체포특권의 문제점을 몰라서 존치시키는 것이 아니다”면서 “오남용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제도를 폐지했을 때 정부가 수사권을 오남용해 야당을 억압하고, 의회를 파행으로 몰아갈 경우 발생할 위험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폐지’가 아닌 ‘포기’를… 與野 온도 차김진표 의장이 불체포특권 폐지를 주장했지만, 현실적으로 개헌이 쉽지 않다는 것을 학자들도 의원들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논의는 ‘폐지’보다는 ‘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장 교수는 “헌법 해석상 개헌 없는 폐지는 불가능하지만 국회법 개정을 통해 불체포특권의 운용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고 했다. 18일 현재 국회엔 불체포특권에 제한을 두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이 모두 6건 계류 중이다. 올해 들어서만 4건이 발의됐는데 모두 국민의힘 의원들이 대표 발의했다.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은 16일 국회의원이 스스로 불체포특권을 포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스스로 영장실질심사에 응하고자 할 경우 다른 의원들에게 임시회를 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골자다. 앞서 권성동, 정우택, 유의동,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발의 순)도 불체포특권의 오남용을 막기 위한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이들은 현행 ‘72시간 내’로 규정된 체포동의안 표결 기간 단축, 무기명인 투표 방식을 기명으로 변경, 기한 내 처리되지 않은 경우 가결된 것으로 간주 등의 내용을 개정안에 담았다. 민주당에서는 김승원 의원이 지난해 1월 관련 개정안을 발의했다. 체포동의안이 본회의에 보고되는 즉시 표결하고, 표결은 기명투표로 하는 내용을 명시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국민의힘 의원 101명과 민주당 비명계 의원 31명이 불체포특권 포기에 이미 서명했고, 민주당이 ‘불체포특권 포기 서약’을 결의한 만큼 여야의 공감대는 충분히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며 “다만 여야가 처한 사법 리스크 차이로 인해 실제 국회법 개정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라고 말했다.● 해외 각국도 인정… 한국과 다른 운용불체포특권의 역사적 뿌리는 근대 의회제도를 가장 먼저 발달시켰던 영국에서 찾을 수 있다. 1603년 영국 의회는 ‘의회 특권법’(Privilege of Parliament Act)을 처음 법제화했다. 이를 1789년 미국이 제정헌법에 수용했다. 이후 많은 나라가 이를 헌법적 기본 권리로 채택했다. 나치즘의 위험을 경험한 독일은 더 강력한 특권을 두고 있다. 회기 중에만 보장하는 우리와 달리 의원 임기 내내 특권을 인정한다. 삼권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그 필요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미국은 연방 대법원 판례로 입법 활동과 관련이 있을 때만 불체포특권을 인정한다. 불체포특권 제도의 운용 결과는 나라별로 차이가 있다. 우리 국회에 따르면 제헌의회부터 현재까지 제출된 체포동의안 70건 가운데 가결된 것은 17건으로, 가결률이 24.3%에 불과하다. 특히 15·16대 국회(1996∼2004년) 때는 각각 12건과 15건의 체포동의안이 제출됐는데, 단 한 건도 가결되지 않았다. 21대 국회만으로 한정하면 총 8건의 체포동의안 중 4건이 가결됐다. 일본과 독일은 다르다. 일본에서는 1947년 헌법 시행 이래 현재까지 ‘체포허락 청구’ 20건 중 16건(80%)이 가결됐다. 불체포특권을 폭넓게 보장하는 독일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독일 연방 의회가 낸 자료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21년까지 총 127건의 체포동의안이 제출됐는데, 이 중 118건(92.9%)이 가결됐다. 다만 이 국가들은 검찰 수사나 체포동의안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는다는 신뢰가 정치권에 깔려 있다는 점이 한국과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불체포특권 폐지냐, 포기냐는 여야 공방 차원으로만 접근할 일은 아니다. 역사적 연원, 검찰 수사의 공정한 잣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국민 눈높이에 맞춰 풀어갈 문제라는 얘기다.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