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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붙잡혀 있던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가 8월 풀려나 다시 미국 땅을 밟는 장면은 부럽기 그지없었다. 취재 도중 간첩 혐의로 붙잡힌 에번 게르시코비치 기자가 투옥된 지 약 500일 만이었다. 고문과 가혹한 환경으로 악명 높은 레포르토보 구치소는 비슷한 이유로 체포된 한국인 백모 선교사가 수감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北인권재단-특별감찰관 무리한 연계 미국은 그를 비롯해 러시아에 억류된 자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1년 넘게 치밀한 물밑 외교전을 펼쳤다. 러시아를 상대로 쓸 ‘맞교환 카드’를 확보하기 위해 제3국인 유럽의 동맹국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독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송환을 원하는 러시아 암살범이 구속돼 있었다. 자국 땅에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를 풀어줄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티는 독일을 미국은 집요하게 설득했다. 그렇게 극적으로 돌아온 미국인 4명을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한밤중 공항에 직접 나와 맞이했다. 활짝 웃는 석방자들을 보면서 북한에 갇혀 있는 김정욱 선교사가 떠올랐다. 2013년 평양에서 체포된 지 벌써 4000일이 넘었다. 무기노동 교화형을 선고받은 뒤 생사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이 남한 사람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라 조심스럽게 전망할 뿐이다. 김 선교사를 포함해 북한에 억류돼 있는 한국인은 6명이다. 북한인권 문제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고문받거나 처형당하고,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등에서는 ‘북한인권’을 북한이 가해자이거나 북한에 연루된 인권 사건들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정의한다. 억류자와 납북자, 국군포로를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들도 엮여 있는 문제라는 말이다. 그러나 북한인권을 중시한다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실질적 개선은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통령실이 최근 북한인권재단 이사 추천을 특별감찰관 후보 추천과 연계시킨 것 또한 그다지 진정성 있는 조치로 보이지 않는다. 상관관계가 없는 두 사안은 여야가 정치적으로 엮으면서 벌써 8년째 공전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도 아닌 여당 대표가 연계를 풀자고 나섰다. 용산이 이를 북한인권재단 이사 문제로 받아친 것은 이렇게라도 재단을 굴러가게 하겠다는 절박함이라기보다는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을 다루게 될 특별감찰관 선임을 어렵게 만들려는 계산법이 앞섰기 때문은 아닌가. 외교부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 선임 과정도 시끄럽다. ‘김정은 금고지기’로 불리는 북한 노동당 39호실 고위관리였던 이정호 씨의 딸 이서현 씨가 단수 추천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탈북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북한 정권에서 특혜를 누렸고, 한국으로 왔으나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해 떠난 인사의 자녀가 북한인권대사를 맡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서현 씨가 김 여사의 방미 기간에 행사를 함께 도왔던 것도 논란을 키우는 분위기다. 수십 년간 활동해온 북한인권 전문가들을 밀어내고 30대 초반의 탈북민이 유력 후보로 검토된다니 ‘여사 라인’이 배경이 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법도 하다.정쟁화할수록 내부 갈등만 키울 뿐 이런 논란들은 결과적으로 북한인권 문제를 정쟁의 늪으로 밀어넣기만 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해결은커녕 우리 안의 갈등을 부추겨 지금까지의 노력마저 퇴보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북한에서는 10대 학생들이 한국 드라마를 봤다가 공개 처벌됐다는 증언이 나오고, 북측 하늘로 띄우는 대북 전단이 많아지는 만큼 이를 접하는 주민들이 통제, 박해받는 정황들도 이어지고 있다. 가뜩이나 시끄러운 정치적 이슈와 엮어 시간을 흘려보낼 때가 아니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낸 파면 결의안은 신박하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 했다는 이유로 고위공직자에 대해 국회에서 “즉각 파면하라”는 결의안이 나온 것은 본 적이 없다. 김 차장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면서 대통령실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같은 시각적 묘사를 해놓은 부분도 낯설다.야당 “경례 안했다” 김태효 파면 결의안 문제가 된 윤석열 대통령의 체코 방문 환영식 동영상을 보면 옆에 도열해 있던 김 차장이 두리번거리다 멈칫한 채 서 있는 모습이 어색하긴 해도 고의적인 경례 거부로 단정하긴 어렵다. 이를 “의도적”이라고 문제 삼으면서 과거 논란이 됐던 그의 일본 관련 발언을 덧붙여 ‘친일 매국’을 제목에 달아 놓은 결의안은 어설프다. 애국가가 나오는 동안 가슴에 손을 얹지 않은 뻣뻣함은 어차피 구실이었을 뿐, 50명이 넘는 민주당 의원들이 겨냥한 타깃은 김 차장이 주도해 온 것으로 알려진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일 것이다. 윤 정부의 대일 전략은 미국 인도태평양 정책과의 연계, 그리고 그 핵심축이 되는 한미일 협력 강화라는 큰 틀에서 이뤄지고 있다. 미국과 패권 다툼을 벌여 온 중국의 공세적 외교,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장기화 속 러시아와 북한의 밀착에 대응하기 위해선 한미일이 더 끈끈하게 뭉쳐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한일 관계를 풀어야만 가능한 3각 협력이다. 조급함이 앞서는 듯한 정책들을 놓고 추진 방식이 거칠고 정교함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계속돼 온 게 사실이다. 강제징용 문제만 해도 제3자 변제 방식을 추진하던 지난해 대통령실의 입장은 “일본에 조건 없이 제안하고 추진하라”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상을 뛰어넘는 전향적 입장 선회에 일본 측이 되레 당황해서 “정말 원하는 게 없느냐”고 수차례 확인했다고 한다. 당시 협상을 지켜본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일본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다르게 처리한 셈이니 진정한 ‘반일(反日)’ 아니냐”는 자조적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민주당은 이런 윤 정부의 대일 외교를 공격하고 싶겠지만, 정작 공격 대상으로 삼아야 할 국가안보실장은 수시로 교체되고 있다. 결국 실세 2인자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 차장이 대놓고 타깃이 돼 있는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 “해리스 후보의 참모들을 가르쳐야 한다” 같은 부적절한 발언들이 누적된 탓도 있으니 김 차장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까칠한 언행과 직설화법 등으로 가뜩이나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다. 그렇다고 해도 민주당이 제출한 이번 파면 결의안은 내용과 방식 모두 핵심에서 한참 벗어났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재선될 경우 1기 행정부 때의 미일 간 밀착 구도가 재현되면서 한국만 어정쩡하게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원칙’이 공고히 유지될지 여부도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에서는 아시아판 나토(NATO) 창설을 주장하는 안보통이 새 총리로 선출됐다. ‘친일 프레임’ 속 정부 비판을 넘어 일본과의 미래 협력을 어떻게 끌어갈지, 요동치는 동북아 정세에 어떤 다자 구도로 대응할지에 대한 현실적 방안이 절실한 시점이다.“왜놈” 막말 공격 넘어 외교정책 지적을 이런 정책적 고민은 뒷전으로 미뤄 둔 채 특정 공직자에게 “왜놈의 후예 아니면 매국노 밀정”이라는 딱지를 붙여 공격한다고 정부의 대일 정책이 개선될 리 없다. 이런 수준으로는 한미일 협력 강화 과정에서 발생한 대중 정책의 구멍이나 편중 외교의 문제점을 짚은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기대 난망이다. 이제 곧 국정감사가 시작된다. 최소한 ‘김태효 파면 결의안’보다는 깊이 들어간 질의가 이뤄져야 지켜보는 이들이 덜 민망하지 않겠는가.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용산 대통령실 경호처 부속건물에 최근 한때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새로 만들어지는 외교안보특별보좌관 사무실을 한번 보고 싶다며 방문 의사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기존에 쓰던 다른 사무실 일부를 헐어 특보실로 만드는 공사가 아직 진행 중인 데다 폭염 속 에어컨도 없는 상황. 직원들이 윤 대통령의 발걸음을 막느라 진땀을 뺐다는 후문이다.연쇄이동 논란 속 외교안보특보직 신설 윤석열 정부의 초대 외교안보특보 자리는 지난달 김용현 경호처장을 국방장관에, 신원식 국방장관을 국가안보실장에 앉히는 연쇄 인사 과정에서 신설됐다. 국가안보실 사령탑 자리를 내어주게 된 장호진 전 실장이 맡게 된 새 직함이다. 7개월 만에 돌연 교체된 국가안보실장 인사의 배경을 놓고 경질설, 권력다툼설 등이 난무했다. 윤 대통령이 특보 사무실을 직접 챙기는 것을 보니 후속 조치에 신경이 쓰이는 인사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윤 대통령은 나토(NATO) 정상회의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해외 정세를 보고 군인 출신 국가안보실장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게 인사 발표 당시 대통령실의 설명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두 개의 전쟁이 동시에 돌아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도 이제 외교보다는 안보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북한의 위협 등에 대비해 군사적 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은 군이 할 일이다. 중동과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서 국가안보 사령탑이 군인 출신으로 교체돼야 했는지 의문이다. 국방부 인사들이 ‘즉·강·끝(즉시, 강하게, 끝까지)’의 응징을 외칠 때 다른 한쪽에서 적대국 혹은 비우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놓고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하는 게 국가안보실이 해야 할 일 아닌가. 한 발 더 나아가 전쟁 종식 이후 러시아 등과의 관계 재설정까지, 풀어내야 할 외교 방정식은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까다롭다. 불과 60여 일밖에 남지 않은 미국 대선 또한 초박빙 구도 속에 그 결과를 가늠하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재선될 경우 제기될 이슈는 주한미군 감축 같은 군사 문제만이 아니다. 북-미 협상 재개, 미중 관세전쟁,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기 등 한국이 대응해야 할 경제안보 분야의 난제가 쓰나미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리베로’로 해외를 뛰면서 이런 현안을 풀어낼 것이라는 장 특보의 역할은 막상 애매하다. 원전 세일즈 같은 특별 임무를 맡게 된다지만 특보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미션이 무엇인지 정확지 않다. 경제안보나 통상 관련 업무라면 산업통상자원부, 한미일 협력은 외교부 장차관들이 언제라도 출장길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업무 중복이나 관할권 충돌의 문제가 불거지지 말란 법이 없다. 윤 대통령은 기존과는 다른 상근 외교안보특보직을 처음 만드는 취지로 “우리도 헨리 키신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했다고 한다. 헨리 키신저가 밀사로 중국을 오가며 미중 데탕트 시대를 열었을 때는 그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재직하던 때였다는 것을 알고 한 언급인지 모르겠다. 키신저의 성과는 충분한 권한과 국가적 지원, 이를 보장받을 직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6년 넘게 백악관에서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한 최장수 국가안보보좌관이다.‘리베로’ 역할 한계와 업무중복 우려 교체 사실을 직전까지도 몰랐던 장 특보는 예정됐던 업무 일정들을 갑작스럽게 조정해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인사 배경이 석연치 않으니 이번 연쇄 인사의 출발점으로 보이는 김용현 국방장관 후보자 임명을 놓고 탄핵 대비용이니 계엄령 준비니 하는 야당의 공세만 거세져 간다. 대통령실이 “외교와 안보의 두 마리 토끼를 쫓겠다”고 의미를 실은 국가안보실과 외교안보특보실의 역량을 결국 동시에 흔들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에 대한 워싱턴 정가의 초기 평가는 꽤 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4년 전 그가 백악관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참모 몇 명이 연달아 사표를 쓰자 ‘부통령실의 대탈출(exodus)’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이어졌다. 업무 역량에 리더십까지 도마에 오르면서 “사람을 품을 줄 모르는 게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그의 발언을 일일이 분석해 ‘말비빔(word salad)’ 화법이라고 비판하는 논평들도 있었다. 핵심이나 논리 없이 그럴싸한 수식어들만 두서없이 섞어 놓는다는 지적이었다.‘反트럼프 결기’가 밀어올리는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실권이 많지 않아 언론이 관심 자체를 별로 두지 않는 자리다. 그런 부통령에 대한 비판적 기사가 쏟아지는 걸 보면서 ‘백인 남성이었어도 저랬을까’ 싶은 생각이 든 적도 있다. 혼혈이자 여성인 해리스 부통령을 향한 여러 비판에 대해 실제로 당시 부통령실은 “인종주의에 성차별적 시각”이라고 발끈했다. 한때 약점으로 여겨졌던 그의 성별과 인종은 그가 조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서면서 강점으로 바뀌고 있다. 아시아계와 흑인의 표심을 모두 잡을 수 있는 다양성을 주목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다소 경박해 보였던 그의 웃음도 순식간에 매력으로 탈바꿈했다. 호탕하게 웃는 동영상이 코믹한 밈(meme)으로 재구성돼 젊은이들의 스마트폰에 퍼지고 있다. 해리스 정도로 되겠느냐며 당내 경선을 주장하던 목소리는 쑥 들어갔다. 순식간에 대의원을 확보한 그는 이제 전국 단위 지지도는 물론 핵심 경합주 여론조사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맹추격하고 있다. 그냥 된 것은 아니다. 해리스의 당선을 위해 민주당의 내로라하는 선거전략가와 소셜미디어 전문가들이 달라붙었다. 당 지도부는 총력전으로 뒤를 받치고 있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만들어보자며 여성계가 다시 똘똘 뭉치기 시작했고, 큰손 후원자들이 속속 지원에 나서 거액의 캠페인 자금을 대고 있다.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달 모금한 선거자금만 우리 돈으로 4000억 원이 넘는다. 무서운 결집 속도다. 이런 움직임의 밑바탕에는 트럼프에게 정권을 내줄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대로 끝이라는 민주당 인사들의 토로에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대선 번복 시도와 기밀문서 유출, 성추문 입막음 등 91개 혐의로 재판을 받는 트럼프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는 결기가 가득하다. “트럼프는 위험하다”며 그의 역량과 자질, 도덕성 문제를 조목조목 짚은 뉴욕타임스의 이례적으로 긴 사설도 배경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 칼럼니스트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저서 ‘담대한 희망’에 빗대 ‘담대한 절박함(the audacity of desperation)’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 절박함이 바이든 대통령의 사퇴 결정을 이끌어냈고, 이제 ‘비(非)백인 여성 대통령’이라는, 민주당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을 좁게나마 뚫어내고 있다. 민주당 후보가 누구든 당선시켜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이어진다. “해볼 만하다”는 인식이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는 선순환으로 이어지면서 패색이 짙었던 민주당에는 다시 활기가 돌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승리의 간절함이 한계를 강점으로 지지하는 후보의 매력보다는 “상대 후보만은 절대 안 된다”는 판단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구도가 선거의 정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리스의 등판은 순식간에 대선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선거의 역사를 쓰는 과정이다. 수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건재한 미국의 역동적인 민주주의 현장을 온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유세 중 암살미수범의 총에 맞아 부상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대선 판도가 요동치고 있다. 충격적 암살 시도가 조 바이든 대통령의 고령 리스크와 맞물리며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을 높이는 추세다. 한국에도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칠 미국 대선과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의 관점에서 제대로 들여다보고 분석할 필요성이 커지는 시점이다.조병제 전 국립외교원장은 지난해부터 트럼프 분석에 빠져 있다. 2016년 그의 대선 출마부터 4년간의 백악관 업무, 최근 유세 연설문에 참모들의 회고록까지 8년간의 자료를 모으고 분석해 ‘트럼프의 귀환’이라는 책을 냈다. 40년 가까이 외교안보 현장을 경험해 온 전직 외교관의 시각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그는 13일과 14일 동아일보와 대면 및 추가 전화 인터뷰에서 “미국이나 트럼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아직도 코끼리 더듬는 수준”이라며 선입견 없이 심층적으로 이를 들여다볼 필요성을 강조했다.》―트럼프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왜 트럼프였나. “처음부터 트럼프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은 아니었다. 현직에 있을 때 정권에 따른 한국 외교의 변동성이 너무 크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은퇴 이후 글쓰기에 자유롭게 전념할 시간이 생기니까 이걸 풀어보고 싶어졌다. 미국, 중국, 일본의 대외전략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관련 자료들을 보기 시작했고, 다음이 트럼프였다. 그를 다룬 책 이외에도 CNN과 뉴욕타임스, 이코노미스트 같은 외신에 심층 분석 특집기사가 정말 많다. 지난해 말쯤 되니까 이제 ‘구슬을 실에 꿰기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료가 쌓였다.” ―어떤 자료들이 트럼프를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됐나.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WP) 부편집인이 쓴 3부작 시리즈가 압권이다. 공포(Fear), 분노(Rage), 위험(Peril)을 쭉 읽으면 트럼프의 백악관 4년의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우드워드가 직접 트럼프와 17번의 인터뷰를 하면서 썼다는 점에서 특히 신뢰도가 높다. 존 볼턴(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나 마이클 울프(‘화염과 분노’ 저자), 피터 베이커(뉴욕타임스 기자) 같은 이들의 책도 보았는데 편향이 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속에서 정확한 사실관계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트럼프의 과거 발언들은 백악관 아카이브에서 찾았다.” ―보고서 형식에 익숙한 외무공무원이 책을 쓰는 데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은데. “2019년 북한대학원대학에서 늦깎이 공부를 했다. 쓴 박사 논문을 단행본으로 낸 적은 있었지만, 단행본으로 내는 글을 쓴 것은 처음이었다. 신문 칼럼을 정기적으로 쓴 적이 있었는데 좋은 훈련이 됐다. 챗GPT 4.0 유료 버전도 활용했다. 방대한 자료들을 짧은 시간에 기가 막히게 찾아내 정리해 내더라(웃음).” 조 전 원장이 300페이지 가까운 책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은 4개월. 영어로 된 자료들을 속독했던 외교 현장에서의 경험이 시간을 단축시켰다. 그는 “질문을 잘 뽑아야 좋은 글이 나오더라”라고 했다. 트럼프의 경우 ‘전략적인 건지, 즉흥적인 건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트럼프라는 인물을 대통령 자리까지 밀어올린 미국의 국내정치와 사회, 경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문제의식도 또 다른 목차를 구성하는 바탕이 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을 어떻게 보나. “이번 총격 사건으로 지지자들이 결집하면서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11월 대선 표심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트럼프 암살 시도는 극심한 양극화 속에 ‘증오의 정치’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선거판을 보면 2000년 이후 공화당이 늘 승리해온 곳이 20개 주, 민주당이 매번 승리한 지역이 16개 주다. 미국의 호남, 영남 같은 구도여서 선거 결과는 거의 안 바뀐다고 보면 된다. 한 번이라도 결과가 바뀌었던 경합주는 15곳인데, 민심 바로미터인 하원의원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따져보면 이번 대선에서는 트럼프가 대의원을 단 6명 더 확보해 조 바이든 대통령을 이기는 것으로 나온다. 초박빙이어서 단 한 군데라도 예상을 벗어나면 결과가 바뀌게 된다.”―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1기 때와는 얼마나 큰 변화가 있을까. “트럼프는 집권 이후 지금까지 반대파를 없애고 공화당을 평정했다. 2기 때는 ‘스케줄 F’를 실행할 것이다. 국정 기조에 반발하는 공무원을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도록 만든 행정명령이다. 대통령의 의지가 연방정부의 끝까지 침투하게 된다는 의미다. 결국 예스맨들에게 둘러싸이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권한을 극대화할 것이다.” 조 전 원장의 분석에 따르면 트럼프는 정당 지도자라기보다 사회운동 지도자에 가깝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600만 명의 팔로어를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힘으로 이념적이고 명분에 충실한 열성분자를 결집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을 대신해 싸우는 여러분의 전사다. 여러분을 배신하고 해를 끼친 자들을 응징하겠다”며 ‘보복’을 벼르고 있다. 트럼프가 ‘어젠다 47(Agenda 47)’과 ‘프로젝트 2025(Project 2025)’를 통해 공개한 정책 구상의 3가지 핵심은 이민자 통제, 제조업 재건, 그리고 미국의 해외 개입 축소다. 중국, 러시아는 물론 한국과 관련된 외교 및 경제통상 정책 등은 이 틀 위에서 짜이게 될 것이라고 조 전 원장은 설명했다. ―한미 방위비 분담 협상을 비롯한 한미 동맹 이슈에는 어떤 변화가 올 것으로 보나. “방위비 분담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소파) 규정의 예외 적용을 위해 만든 ‘특별협정(SMA)’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SOFA에는 우리가 미군부대의 토지와 시설만 제공하도록 돼 있는데 한국이 이보다 많이 부담하라는 요구를 받으니 특별협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뭔가 더 해주려면 이제는 예외 규정까지 손대야 하는 단계에 와 있다. 트럼프는 1기 때 요구한 50억 달러를 기억하고 있다. 미국의 압박이 커질 경우 정부가 증액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트럼프가 김정은과 재협상에 나서고 한미 연합훈련, 주한미군 등을 협상카드로 쓰게 되면 우리는 주도권을 뺏긴 채 분담금만 뜯기는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 ―그의 캠프에서 활동하는 참모들은 주한미군은 유지될 것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주한미군 철수는 트럼프가 공개적으로는 물론 내부 회의에서도 여러 차례 꺼냈다. 그때는 게리 콘(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 제임스 매티스(전 국방부 장관) 같은 인사들이 때로 훼방까지 놓아 가면서 막아냈다. 하지만 그런 참모들은 이제 다 떠났다. 트럼프는 ‘그때 하려고 했는데 못 했던 것들’을 할 것이다. 한미동맹이 70주년을 맞았다고 이를 당연시하면 안 된다.” ―2기 정부에서 미중 관계는 더 악화될까. 트럼프는 최근 유세에서 ‘시진핑이 잘생겼다’ 같은 말을 하기도 했는데. “미국이 패권국의 입장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트럼프나 바이든 정부가 똑같다. 다만 바이든이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를 앞세웠다면 트럼프는 지정학적 경쟁의 관점에서 중국을 보고 있다. 경제과학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중국을 더 강하게 견제하려 할 것이다. 트럼프에게 호혜적인 무역협정이란 간단하다. ‘네가 쥐어짜면 나도 너를 쥐어짠다’는 것이다.” ―북-러가 밀착하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재등장이 이 구도를 바꿀 변수가 될 수 있을까. “트럼프는 우크라 전쟁 협상을 하루 만에 이뤄낼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의 북한 포탄 수요는 줄어들 것이고, 더 이상 북-러가 지금처럼 밀착할 이유는 줄어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재협상에 나서게 되면 북-미 구도가 바뀔 수 있다. 이때 북한의 ‘통미봉남’ 시도가 다시 극심해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대북 적대감을 유지한 채 미국 일변도의 외교만 해서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트럼프의 2번째 백악관행이 현실화될 경우 한 번의 ‘일탈’이 아닌 지속적 ‘현상’으로서의 변화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란 게 조 전 원장의 진단이다. 그는 1시간 반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새로운 모습의 미국을 상대하려면 한국이 기존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흑백논리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귀환’이 위기가 될지 위협이 될지는 우리한테 달렸다는 말이다. 조병제 전 국립외교원장 프로필△경북 영천 출생(1956년)△서울대 외교학과 졸업(1979년)△제15회 외무고시 합격(1981년)△한미 방위비분담협상 대표(2008년)△주미얀마 대사(2010∼2011년)△외교통상부 대변인(2011∼2012년)△주말레이시아 대사(2013∼2016년)△국립외교원장(2017∼2018년)△경남대 초빙석좌교수(2019년∼)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고령 리스크에 휘청이는 민주당을 두고 “그 많은 정치인 중에 정말 대안이 없느냐”는 탄식이 쏟아진다. 그러나 불과 4년 전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섰던 후보만 해도 서른 명에 육박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 TV토론 참가 조건을 충족해 카메라 앞에 선 후보만 20명. 이틀간 10명씩 나눠서 진행된 토론 무대는 빡빡했다. 고령의 상원 중진부터 아시아계 젊은 사업가까지 각자의 강점을 내세운 후보들이 짧게 배분된 발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 안간힘을 썼다.고령 대통령의 대안 못 찾는 美 민주당 후보들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한때 선두였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급진적인 정책 논란으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너무 왼쪽에 치우쳐 있다는 지적에 고령의 나이까지 발목을 잡았다. 세계적 부호인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도 집중포화를 맞은 TV토론에서의 방어 실패와 ‘정치 철새’ 논란 등을 버티지 못했다. 당시 후보들 중 지금 바이든 대통령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이는 찾기 어렵다. 다시 이름이 오르내리는 이는 최연소 후보였던 피트 부티지지 교통부 장관 정도인데 그는 성소수자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탈락한 패자의 이미지, 경선 과정에서 노출된 흠집 등도 이들의 재도전을 막는 이유가 됐을 것이다. 설령 다시 뛰어 볼 의사가 있다고 해도 이미 공화당에 넘어간 하원에 이어 상원까지 흔들리는 상황에서 한 자리라도 지켜야 하는 의원들이 쉽게 움직이긴 어렵다. 새로운 이름들이 없는 건 아니다. 뒤늦게 대안 찾기에 나선 민주당 안팎에서는 7, 8명 정도가 거론된다. 이번엔 주로 주지사들인데, 중앙정치에서의 정치력이 검증되지 않았거나 전국 단위 인지도가 약하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그나마 현실성 있는 카드지만, 현재 지지도가 바이든 대통령보다도 낮다. 오죽하면 정치할 생각이 없다는 미셸 오바마 여사가 가상 대결에서 1위에 올라 있는 상황이다. 국가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반짝이는 가능성을 보였다고 해도 정글 같은 정치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리더십을 훈련받으며 세력을 불려가는 데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중앙무대에 설 기회를 주고 굵직한 프로젝트를 맡겨 역량을 검증하고 언론에 노출시키면서 지지 기반을 넓혀 주는 ‘작업’이 이뤄진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04년 전당대회 연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직후부터 민주당 지도부가 그를 대통령 후보감으로 점찍고 키워낸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다. 민주당에는 이제 그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현직 대통령이 재선 의지를 다지며 버티고 있으니 잠재적 경쟁자를 키울 여지가 크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바이든 대통령의 82세 리스크를 감안했으면 대비했어야 했다. 본인도 첫 출마 당시에는 “나는 국가의 미래인 차세대 리더들의 중간다리 역할”이라고 했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는 대선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재앙적 수준의 내부 혼란에 직면해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조롱당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정권을 빼앗길 판이다.‘잠룡 흠집내기’ 반복되면 韓도 인재난 진퇴양난에 빠진 미국 여당의 처지는 여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가능성을 주목받았던 여당 대표들이 대통령실 개입설에 흔들리며 줄줄이 떨어져 나간 게 최근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한동훈 후보의 김건희 여사 문자 ‘읽씹’ 논란으로 자폭 직전이다. 물고 뜯고 싸우며 서로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후보들이 받은 상처는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다. 성한 상태로 차기를 기약할 잠룡들이 남아나지 않을 판이다. 이대로면 우리도 3년 뒤 미국 같은 인재난에 빠지지 말란 법 없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명의로 발표되는 대남 담화들을 읽으면서 실소한 게 여러 번이다. 내용은 둘째 치고 막말로 범벅된 표현의 저급함과 정제되지 않은 문장들이 혀를 차게 만들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으로, 대남 정책을 총괄하는 북한의 최고 실세가 썼다는 것을 믿기 어려운 수준이었다.오물 풍선이 드러낸 北 히스테리 담화에는 “재잘거리는 놈들한테 줴박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거나 “남조선 괴뢰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지루하고 진저리가 나서 몸이 다 지긋지긋해진다”는 식의 감정적 사족(蛇足)이 곳곳에 들어 있다. 북한의 미사일 기술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 발언을 놓고는 “우리의 대륙간탄도미싸일을 금방 보고도…?”라고 혼잣말하듯 묻기도 한다. 소위 ‘김여정 하명법’이라는, 대북전단금지법을 채근한 2020년 담화에선 한국 정부와 탈북자들을 향해 ‘망나니’, ‘똥개’ ‘인간추물’ 같은 단어를 배설하듯 쏟아냈다. 김여정은 최근 오물 풍선을 살포한 뒤에는 “진정 어린 성의의 선물로 여기고 계속계속 주워 담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 것들의 눈깔’ 같은 표현을 늘어놓고는 대남 위협으로 담화를 마무리했다. 한국의 대북전단과 확성기 방송 같은 심리전에 대한 북한의 히스테리가 느껴진다. 발사 후 2분 만에 폭발해 버린 정찰위성의 실패가 이를 자극했다는 분석도 있다. 수십 t(톤)의 쓰레기를 최소 3500개 풍선에 실어 보내는, 전 세계적으로 전례를 찾기 힘든 희한한 도발 방식부터가 신경증적이다. 2016년 북한이 대형 풍선을 대량으로 띄웠을 때는 대남 메시지를 담은 ‘삐라’가 들어 있었다. 발견된 것만 10만 장이 넘는 전단에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정치적 오물’이라고 비하하는 내용이 있긴 했지만, 풍선 안에 실제 오물이 들어 있지는 않았다. 이번엔 전단 한 장 없이 냄새나는 거름과 쓰레기뿐이다. 북한의 실상을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전단 같은 방식으로는 심리전 맞대응이 어렵다는 것을 평양도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북한은 결국 확성기 조준 타격을 포함한 재래식 국지 도발을 감행한 뒤 협상 과정에서 방송 중단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북한은 앞서 오물 풍선 살포를 예고한 김강일 국방성 부상의 담화에서 ‘해상 국경선’을 거론하며 “해상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할 경우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대한민국이 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신경질적 반응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 상황이다. 이런 시점에 벌써 4차례 반복되고 있는 북한의 오물 풍선 살포에는 남남갈등을 부추기려는 의도 또한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벌써부터 “북한의 오물 풍선 도발은 대북전단 살포가 원인”이라며 이를 막지 못한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정부의 9·19 남북군사합의 전면 중단 결정에 대해서도 “잇따른 안보 참사를 덮기 위한 것”이라는 게 민주당의 주장이다. 거야(巨野)는 윤석열 정부가 당면한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북의 도발을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南南갈등에 대북정책 휘둘려선 안 돼 우리끼리 싸우게 만드는 남남갈등 전술은 북한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심리전이다. 대북 대응의 정책 일관성을 흔들어 효력을 약화시키면 정부의 강경 조치들은 어느새 북한이 ‘감내할 수 있는 조치’로 흐물거리게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도발이 추가될 때마다 책임 소재를 따지며 서로 삿대질을 해대는 상황에서 국방부가 외쳐온 ‘즉·강·끝(즉각, 강력하게, 끝까지)’ 원칙이 지켜질 수 있을까. 북한의 이런 의도에 말려들었다간 북한의 중대 도발은커녕 오물 풍선에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게 될 것이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韓中 교류 지원조치 더 나올 것”지난달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리창(李强) 중국 총리의 회담 후 얼어붙어 있던 한중 관계가 풀려 나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싱하이밍(邢海明·사진) 주한 중국대사는 회담 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중 간 왕래 편의를 위한 조치들이 더 나올 것”이라며 양국 교류 확대 의지를 강조했다. 한반도 긴장 상황과 관련해서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동안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다시 외교 테이블에 앉은 것은 지난달 말 윤석열 대통령과 리창(李强) 중국 총리의 회담 때였다. 그는 한중 외교안보대화 신설, 2단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재개 등에 합의한 양자 회담부터 두 지도자가 중국 시인 두보(杜甫)의 시 구절을 나누며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에 함께했다.싱 대사는 지난달 31일 주한 중국대사관에서 진행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회담이 아주 잘 됐다”며 “중국은 한국과 함께 중요한 합의들을 잘 이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중국 비자의 발급 절차 간소화 조치에 이어 관광 및 영화, 드라마 같은 문화 분야 교류를 확대할 후속 방안들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경제 협력과 관련해서도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성공하는 길을 계속 열어주자는 마음”이라며 지원 의사를 강조했다.》―중국은 이번 한중일 정상회의를 어떻게 평가하나.“3국 각계각층과 국제사회의 큰 관심을 모았던 회의다. 한국은 의장국으로서 세심하게 준비하며 성공적 개최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올해 25주년이 되는 중한일 협력 체제는 풍성한 성과를 거뒀지만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다. 중국은 한국, 일본과 함께 이번 정상회의의 성과를 확실히 이행하고 3국 협력을 안정적, 장기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한중일이 공급망 협력 강화에 합의했지만 미중 무역전쟁은 격화하고 있고 한국, 일본은 미국과의 공급망 협력을 가속화하는 상황 아닌가.“중한일 3국의 경제 총량은 세계 경제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상호 교역액이 8000억 달러에 이르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3국이 함께 개방과 포용, 호혜와 상생을 견지하며 함께 경제·무역 문제의 범정치화, 범안보화를 반대하기를 바란다. 무역 보호주의와 ‘디커플링’에 반대하기를 바란다.” ―윤 대통령이 리 총리를 배웅하면서 ‘춘야희우(春夜喜雨·봄밤에 내리는 기쁜 비)’라는 두보의 시구를 인용했다. 이번 한중일 정상회의가 한중 관계에 단비가 될 수 있을까.“중국에서 유명한 시다. 첫 구절은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인데,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 회담을 이 시구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양국 관계 발전의 성과가 두보 시의 ‘수풍잠입야, 윤물세무성(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처럼 ‘바람결에 살며시 밤에 들어와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실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해 한국의 대중 수출이 감소했다. 향후 경제 협력을 통해 이런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보나.“양국의 교역이 많을 때는 3600억 달러를 넘었다. 좀 떨어졌지만 올해는 1월부터 4월까지 벌써 1026억 달러로 증가했다. 이런 추세로 가면 한국이 다시 중국의 제2 무역 파트너가 된다. 중국 기업이 성장하고 ‘신품질 생산력’을 추진하면서 (한국과) 경쟁하는 면이 있지만 중국만큼 시장이 크고 기회도 많고 지방정부에서 잘 도와주는 곳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못 찾는다. 특히 중국으로의 반도체 수출은 한국 경제에 돈이 된다. 대기업도 그렇고 중견기업, 중소기업이 중국에 와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계속 열어주자는 마음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상호 호감도가 높지 않다. 인식 제고와 교류 촉진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이 있나.“최근 여론조사에서 한국 국민의 80% 이상이 ‘한중 양국이 우호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이는 100만 명에 달하는 재한 중국인이 느끼는 바와 같다. 지방, 교육, 스포츠, 언론, 청소년 교류 기회를 늘리기를 바란다. 중국은 왕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조치들도 계속 내놓을 예정이다. 더 많은 한국 국민이 중국에 가서 신(新)시대 중국의 발전을 체험하며 중국인의 열정을 느껴 보시길 바란다. 더 많은 중국인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 또한 지지한다.” ―중국의 ‘반간첩법’ 개정안 시행이 외국인의 안전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도 있는데….“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반간첩법 개정안은 관광이나 비즈니스, 학술 교류 같은 정상적 활동을 겨냥한 게 아니다. 일각에서 반간첩법이 외국인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과장하는데, 이는 사실을 왜곡하고 중국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이 법 때문에 한국 국민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저는 들은 적이 없다. 중국은 투자, 비즈니스, 업무 교류 및 관광을 하는 한국인의 합법적인 권익을 법에 따라 보호할 것이다.” ―북한이 최근 오물 풍선과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교란으로 남북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 한반도 정세의 긴장 국면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중국은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압박을 통해서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다. 중국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서로 양보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해서 잘 된 것도 있고, 아쉽게 합의가 안 된 것도 있었다.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한반도 정세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는 것은 중국이 원치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데 근원적으로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다.” ―최근 대만에서는 라이칭더(賴淸德) 총통이 취임했다. 대만해협의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대만섬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하든, 누가 집권하든 양안(兩岸)이 같은 하나의 중국에 속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중국이 결국 통일될 것이라는 역사적 대세 역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대만은 예로부터 중국의 불가분한 일부였다. 유엔총회 결의안 2758호는 중국 정부가 대만을 포함해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충실히 지켜 대만 문제를 적절하고 신중하게 처리해 주기를 바란다.” 싱 대사는 지난해 6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회담에서 “중국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소위 ‘베팅’ 발언으로 국내 여론의 거센 질타를 받았다. 싱 대사는 당시 “오해가 있었다”고 했지만 이후 공식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로 키 행보를 이어왔다. 오랜만에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싱 대사는 신중했다. 한국 관련 상황을 세세한 수치들을 들어가며 설명했고 “중국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유창한 한국어로 답변하면서 민감한 질문에도 미소를 유지했다… ―요즘 한국에서의 업무와 활동은 어떠신가.“한국의 각계 인사들을 만나고 있다. 오늘도 대구에 가서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왔다. (한국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친근’이다. 저는 40년 가까이 한반도 관련 일을 하며 4차례 한국에서 근무했다. 제 인생의 소중한 자산이다. 저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32년 전 대사관 현판과 관인을 가지고 서울에 와서 주한 중국대사관 설립에 참여하고 이를 지켜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양국 교역액이 연간 3000억 달러를 넘어서고 인적 왕래가 1000만 명을 돌파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중국은 ‘한한령이 없다’고 하지만 중국 내 한국 문화 확산 움직임은 여전히 찾아보기 어렵다. 앞으로 늘어날 것으로 기대해도 되나.“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소재가 풍부하고 잘 만들어져서 많은 중국인이 좋아한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영화관에서 영화 ‘파묘’를 관람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근대 이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중한 양국 국민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서로 도왔다. 이를 대중이 즐겨 보고 듣는 방식으로 널리 알려서, 양국의 우호 감정을 심화시키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회담에서 재개하기로 한 중한인문교류위원회는 내가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던 조직이다. 이 위원회를 통해 앞으로 여러 문제를 토의할 수 있다.” ―판다 푸바오가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중국으로 돌아간 푸바오의 근황을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한국인이 많다.“푸바오를 향한 한국 국민의 관심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푸바오는 양국 국민에게 온정과 행복을 전해줬고, 국민 간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잊지 못할 감동적인 추억을 많이 남겼다. 푸바오는 현재 중국 생활이 평온하며 상태도 양호하니 여러분 모두 안심하시길 바란다. 푸바오는 한국 국민의 보배이자 중국 인민의 보배다. 우리 모두가 푸바오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므로 반드시 정성껏 돌볼 것이다.”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60)1964년 중국 톈진(天津) 출생. 1980년대 북한에서 유학했다. 북한에서 3차례, 한국에서는 1992년 한중 수교 때부터 주한 중국대사관 서기관, 참사관과 부대사 등 4차례 근무했다. 중국 외교부 본부에서도 남북한, 동북아 업무를 주로 맡았던 한반도 전문가로, 한국어가 유창하다. 2015∼2019년 몽골 대사를 거쳐 2020년 한국 대사로 부임됐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2021년 미국 워싱턴 의회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극렬 지지자들에게 점령당하는 장면의 충격은 미국인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의회 건물이 대낮에 공격당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3년이 지난 지금,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11월 대선이 민주주의에 미칠 영향을 놓고 다시 논쟁이 한창이다.스티븐 레비츠키 미 하버드대 교수는 민주주의가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무너질 수 있음을 지속적으로 경고해 온 학자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등의 저서를 통해 “정당한 선거 절차를 거쳐 선출된 지도자들이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채 이를 파괴하고 있다”고 한 그의 분석은 섬뜩할 지경이다.레비츠키 교수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극심한 정치 양극화와 함께 이를 증폭시키는 소셜미디어의 문제를 함께 지적했다. 강성 지지층이 목소리를 키우는 것에 대해 “그들이 다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 주장에 과민반응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막말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4·10총선이 끝나고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그를 화상으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11월 미국 대선 결과는 워싱턴 정치를 어떻게, 얼마나 바꿔 놓게 될까. “현재는 동전 뒤집기 같은 상황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을) 50 대 50으로 본다. 2018년 이후 전 세계에서 진행된 최소 20개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했는데, 미국에서도 같은 결과가 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에서 ‘선거 결과에 승복한다’라는 기본 룰을 깨버렸다. 재선되면 충성파를 기용하고, 법무부를 앞세워 정적을 수사하며, 언론을 압박하겠다는 점을 올해 유세에서 대놓고 밝히고 있다. 프리덤하우스가 매긴 미국의 민주주의 점수는 10년 전 92점에서 이제 83점으로 추락했다.” ―인종적, 문화적 양극화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당신은 지적해왔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느끼는 ‘지위 불안(status anxiety)’ 문제도 언급했다. “지난 40년간 지속된 경제 불평등의 문제, 금융위기 이후 꺾인 성장, 중산층의 상황이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다는 인식, 세계화의 부작용 등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양극화를 심화시킨 원인으로 지목된다. 유럽에서는 불법이 아닌 합법적 이민자 행렬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젠더, 인종 등의 평등의식이 높아지고 사회 다양성도 커졌지만 동시에 지방 소도시는 더 종교적이 됐고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이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내의 이런 정치 흐름은 한국 같은 동맹국 민주주의에도 영향을 미칠까. “한국과 일본은 매우 견고한 민주주의 국가다. 다만 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전 세계 미국의 동맹국들이 미국 내부의 움직임을 불확실성과 불안 속에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미국은 민주주의를 전 세계에 장려하는 것을 멈출 것이다. 또 우크라이나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을 끌어안기를 멈출 것이다.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는 트럼프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따라하는 지도자들이 나오고 있다. ‘봐, 저게 우리의 모델이야’라면서. 전 세계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함의를 갖게 될 것이다.” ―지난달 한국 총선 과정에서는 막말이 쏟아졌고 상호 비방 속에 정책 대결은 실종되다시피 했다. 성공한 민주화를 이뤄낸 국가에서조차 이런 퇴행이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나. “보기 흉한 정치 양극화를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는 찾기 어렵다. 라틴아메리카만 해도 1970년대에는 좌파가 극단적이지 않았고 사유재산을 국유화하려는 시도도 없었지만 이젠 그 어느 지역 국가들보다 양극화가 극심해진 상황이다. 소셜미디어의 영향이 이를 가중시킨 측면이 있다. 우리 사회가 이를 어떻게 제대로 규제, 통제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다.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한 허위정보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이를 통제할 우리의 역량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정치적 팬덤의 부작용이 커지는 듯한데….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에게 거칠고 광적인 지지자들이 따라붙는 것은 늘 있어온 현상이다. 전체의 30%를 넘지 않는 소수파다. 다만 최근에는 이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연결돼 목소리를 키운다는 점이 과거와 다르다. 몇십 년 전만 해도 미국 서부의 시골에서 어떤 극렬 지지자가 미친 소리, 멍청한 소리를 한다고 해도 정반대 지역에서 이를 들을 일이 없었다. 이제는 모두가 다 듣고 안다. 심지어 계속 반복되고 퍼져나가면서 ‘이런, 정말 심각한 일이야’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들이 다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에 과민반응해서는 안 된다.” ―제도적 자제와 상호 관용이 당신이 책에서 제시한 해법이다. 그러나 권력을 놓고 죽기살기로 싸우는 정치권 스스로 이를 해낼 수 있을까. “2개 이상의 정당이 싸울 때 어느 한쪽이 자제하거나 룰을 지키는 것은 매우,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공화당이 점점 극단화하고 룰을 위반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민주당이 똑같이 지저분하게 맞대응해야 하느냐를 놓고 격론들이 있었다. 딜레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위기는 룰을 지키는 것으로 막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정치평론가나 활동가들은 ‘한쪽 팔을 뒤로 묶은 채 링 위에 올라가라는 것이냐’고 비판한다. 한쪽이 모든 무기를 쓰면 다른 한쪽도 가진 모든 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논리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맞대응할 경우 양쪽 모두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결국 민주주의를 죽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은 서로가 강대강의 정면 대결로 치닫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게 아닌가. “정치인들이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넘어버림으로써 민주주의를 잃은 나라들이 그 대가를 치렀음을 역사가 보여준다. 정치인들이 절대로 넘지 말아야 할 레드라인이 있다는 것을 유권자들 또한 알아야 한다. 이 선을 지킬 수 있도록 사회에서 존경받고 권위 있는 지도자들, 종교지도자와 원로와 비즈니스 리더와 언론 등이 나서야 한다.” ―러시아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80%가 넘는 지지율로 5선에 성공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3연임 체제를 굳혔다. 이들은 대외적 영향력 확대와 군사력 강화도 시도하고 있다. 서구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의 갈등이 더 심해질까. “냉전 종식 후 2000년대 초반까지 서구 국가들은 자유주의라는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중요한 두 개의 권위주의 파워가 부상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 일본 대만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도 부상하면서 세상은 다극화되고 있다. 서구 국가들은 여전히 파워풀하지만 과거로는 절대 돌아가지 못한다. 권위주의 국가들에 대응하는 방법은 자유주의의 건강함을 지키고, 이를 뒷받침할 경제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2023년도 글로벌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된 나라는 24개국(14.4%)에 불과하다. 반면 권위주의 체제는 59개국(35.3%)으로 더 많다. “민주주의가 체제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내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경제 성과, 성장, 부패지수, 범죄율 등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위기만 해도 권위주의 국가들이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대만도 한국도 매우 잘해 내지 않았나. 민주주의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도 막상 그 엄청난 가치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모두 장기화하고 있다. 당신이 지적한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이 전 세계적으로 커지는 듯 보인다. 북핵 위협에 직면한 한국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한 국가가 존재론적 위협을 받게 될 때 사람들은 보호받기 위해 권위주의에 굴복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내부 결집이 빠르게 이뤄진다. 1960, 70년대 한국에서도 나타난 상황 아닌가. 덴마크 같은 곳에는 없는 위협을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국이 이후 40년간 보여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확립해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스티븐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라틴아메리카 정치 등을 중점적으로 연구해 온 학자. 미국 하버드대 데이비드 록펠러 중남미 연구센터장을 맡고 있다. 2018년 하버드대 동료 교수인 대니얼 지블렛과 함께 쓴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28개 언어로 번역됐고, 미국은 물론이고 독일 등 해외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국내외 정치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경쟁적 권위주의’ 등 여러 저서에 이어 최근에는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출판했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 병원을 찾은 적이 있다. 일상생활과 업무를 모두 영어로 하던 시기였는데도 의학 용어는 어려웠다. 호르몬계 이상이 의심되는 증세를 영어로 묘사하려니 난감했다. 의사 설명도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가뜩이나 사람 위축시키는 진료실에서 이왕이면 언어도 정서도 같은 것을 공유하는 의사한테 진찰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후엔 코리아타운의 한인 의사를 찾았다.특정국 비하와 인종주의로 번진 논란 의료파행 장기화에 대응해 해외 의사면허를 소지한 사람들도 국내 진료를 할 수 있게 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놓고 의료계의 반발이 거세다. 보건복지부의 입법 예고에 달린 1100여 개의 의견 중 91%가 ‘반대’ 의사를 밝혔다니 이 조치에 부정적인 일반인도 적잖은 듯하다. 보건의료 재난 경보가 ‘심각’ 단계일 때만 한시적으로 허용한다지만, 국내 임상 경험이 없고 한국말도 서툰 외국 의사에 대한 불안감을 쉽사리 걷어내지 못해서일 것이다. 외국 의사면허 소지자들이 한국 예비고사와 의사 국가고시를 모두 통과한 비율은 41%로 절반에 못 미친다. 한국은 의료 수준이 높고 그만큼 국민들의 의료 서비스 기대치도 높은 나라다. 최고 엘리트들이 잡는 메스여야 내 생명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다. 같은 한국인 의사라도 이왕이면 서울 대형병원 의료진에게 치료받고 싶다며 전국 각지에서 상경하는 게 우리나라 환자들이다. 의사들의 반발이야 예상됐던 것이라고 해도 이런 국민감정에 대한 고려 없이 불쑥 내놓은 정부의 조치는 섣불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일부 의사와 누리꾼 반응이 특정 국가 비하나 인종차별 논란으로 번진 것은 기막히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SNS에 소말리아 흑인 의사들의 졸업식 사진을 올리고 “coming soon(곧 온다)”고 썼다. 비판이 커지자 이를 삭제하고 사과했지만, 국내에 투입될 외국 의사들을 저개발국 수준으로 싸잡아 보는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임 회장은 해명 과정에서 헝가리 의대 등에 대해 “돈은 있고 지적 능력은 안 되는 사람들이 간다”고도 했다. 외교적으로까지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이다. 인터넷에는 “오늘 뇌종양 수술은 웅써여리띠엔 교수님이 집도하신다”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댓글도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서 인정하는 해외 의대는 38개국 159곳이다. 국내에서 조건부로 한시적 진료라도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외국인 의사보다는 이들 의대에서 유학한 한국인이 대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의사면허를 돈 주고 산 부유층 자제들’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이들 중에는 의사의 꿈이 간절한데 내신 1등급, 수능 만점 수준의 성적은 받지 못해 해외 우회로를 찾겠다는 이들도 있다. 헝가리 의대의 경우 입학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공부가 쉽지 않아 유급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사들의 엘리트 우월주의 돌아봐야 의료계가 의대 증원의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며 정부와의 협상을 거부한 지 벌써 석 달이 되어간다. 역효과를 부르는 임시방편을 초강수로 내놓는 정부도 문제지만, ‘우리 안에서 늘리는 것도, 외부에서 데려오는 것도 다 안 된다’는 식으로 버티는 의사들의 대응도 답은 아니다. 험난한 N수를 거쳐 바늘구멍보다 좁은 의대 입시의 문을 통과한 소수만이 의사 자격이 있다는 식의 배타주의, 엘리트 우월주의가 사안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무엇보다 필수의료 분야와 지방의 의사 부족 문제를 풀지 못하면 실제 외국인 의사들을 수입해야 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통역기를 손에 든 환자들이 손짓발짓해 가며 낯선 외국인 의사들에게 진료받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환자도 의사도 바라는 장면은 아닐 것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기형 물고기라는 게 있잖아요. 어디든 기형은 꼭 나오기 마련이니까…. 그게 우리나라 앞바다에서 나오면 후쿠시마 오염수와 상관없다고 정부가 입증하기는 어차피 어렵지 않겠어요?” 지난해 여름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국내 여론이 들썩일 때 더불어민주당 중진 의원이 한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던 기억이 있다. 그는 실제 인과관계와는 상관없이 기형 물고기를 오염수 문제와 엮겠다는 ‘작전’ 구상을 숨기지 않았다. 방류에 나선 일본은 물론 이를 반대하지 않은 윤석열 정부를 공격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언제까지 반대 목소리를 낼 것이냐는 질문에 그가 내놓은 대답은 “총선 때까지는 계속 끌고 가야지”였다.외교, 국방 영향력 급속히 늘리는 日 4·10총선 유세 과정에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이번 총선은 신(新)한일전”이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서 당시 이 중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거 쟁점도 아니었던 외교 사안을 뜬금없이 앞세운 이 대표의 발언은 여당 후보들을 ‘나베’ 등으로 부르며 친일로 몰아세우는 과정에서 나왔다. 한일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은 그때나 이번이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총선 개표가 진행되던 10일, 워싱턴에서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미일 간 전략적 협력의 새 시대”, “동맹 수준이 전례 없이 높아진 역사적 순간” 같은 표현들이 공동 성명을 장식했다. 양국은 24쪽 분량의 팩트시트에 협력 내용을 꽉꽉 채워 넣었다. 화려한 국빈 만찬과 공연, 선물 교환 등은 윤 대통령이 지난해 먼저 거쳐간 것들이지만 미일 양국의 협력 범위와 깊이, 밀착 속도가 심상치 않다. 일본은 미국·영국·호주의 3국 안보협력체 오커스(AUKUS)에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 참여하는 기회도 얻었다. 오커스 회원국들과 극초음속 미사일을 비롯한 첨단 방위기술 협력이 가능해진 것이다. 영국과 호주의 견제에도 미국이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역할 확대를 노리는 일본은 국방 분야에 거액의 예산을 쏟아붓는 중이고, 미국은 주일미군사령부의 격상을 검토하고 있다. 미일 양국은 더 나아가 필리핀까지 참여하는 3국 정상회의를 열었다. 미일 두 나라를 밑변으로 한 대중(對中) 삼각연대를 구축하는 모양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필리핀은 3국 간 ‘발리카탄’ 연합 군사훈련에도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을 중심축으로 놓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끌어들이는 ‘소다자(mini-lateral)’ 협의체를 하나씩 늘려 나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중 갈등이 심화할수록, 북-중-러의 밀착이 강화될수록 미일의 협력 밀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이는 일본의 외교적 영향력을 더 밀어올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기시다 총리는 기립박수가 쏟아진 미국 의회 연설에서 “일본이 이제는 미국의 지역 파트너가 아닌 글로벌 파트너”라고 했다. 한국으로서는 일본이 좋든 싫든 더 자주 마주치고 협의해야 할 외교 상대가 된다는 말이다.‘반일 프레임’ 갇힌 정치로는 대응 못해 제22대 국회에서 활동하게 될 민주당 의원들 중에는 지난해 “국제적 망신”이라는 비판에도 일본까지 날아가 ‘오염수 방류 반대’ 시위를 벌였던 이들이 있다.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죽창가 선동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본성에 친일적 요소” 운운하며 여당 정치인의 국가관까지 문제 삼는 이 대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이 끌고 갈 192석의 거대 범야권이 정치적으로 단맛을 본 ‘반일’ 프레임에만 갇혀 있다간 한국 외교의 퇴행을 막기 어렵다. 국내 정치를 휘저어 놓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국가적 손실이 될 것이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최장수 삼성의료원장이자 ‘이건희 주치의’였던 이종철 전 원장이 경남 창원의 보건소장으로 자리를 옮긴 건 70세이던 6년 전이었다. “고향에서 마지막 의료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렇게 4년간의 창원살이를 마치고 자유인으로 돌아갔던 그에게 올해 초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강남구보건소장직을 제안받고 ‘의료인생 제3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지난달 중순 새 업무를 시작했다는 이 소장의 사무실에 걸린 일정표 판은 벌써 빽빽했다. 기자와 만난 이 소장은 “임상 의사, 대형병원장과 지방 보건소장의 경험 세 가지를 엮어 공공의료 활성화를 시도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진행 중인 현실은 ‘의대 증원 2000명’으로 불거진 의료 파행이다. 그는 “이대로 장기화하면 엄청난 의료 퇴보가 일어날 것”이라며 “서로 한 발씩 양보하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2시간의 인터뷰 중 상당 시간을 현행 의료 시스템의 한계와 증원을 강행하는 정부 정책의 문제점 지적에 쏟았다.》―대형병원장에서 지방 보건소로 옮긴 결정은 당시 의료계의 화제였다. 창원시보건소장으로 보낸 4년은 어땠는가. “푸른 바다가 있는 내 고향에서 돌봄이 필요한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퇴임 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그동안 내가 받은 것들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창원의 첫인상은 보건소 행정이 참 잘돼 있다는 것이었다. 좋은 터전에서 하고팠던 진료를 하면서 굉장히 재미있게 살았다. 나를 보고 후배 6명이 창원으로 내려왔다.” ―지방으로 따라온 후배들에게 책임감을 느끼진 않으셨나. “환자들이 서울에서 의사가 왔다고 좋아해주니 보람을 느낀다면서 다들 즐겁게 일했다. 어떤 후배는 금방 1년 이상 진료 예약이 찼다. 다른 동료들에게도 권해야겠다고 하더라.” ―그래도 생활환경과 업무 변화 등으로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창원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서울에 있는 병원 좀 보내주세요’였다. 보건소 의사를 구하기 위해 진료 수당을 100만 원 더 올리자고 했는데 창원시에서 거부당하기도 했다. 초반에는 보건소 사람들이 ‘진료를 하시면 안 된다’고 뜯어말렸다. 보건소 업무 영역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규제가 이유였다. 코로나19가 터지고 보건소가 대응 전면에 서게 된 뒤에야 이게 바뀌었다.” ―퇴임 후 개업의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 “내가 삼성의료원장 할 때 부회장급인데도 삼성 상무보다 월급이 적었다. 그래도 나는 의사로서의 가치, 그걸 알아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훨씬 커서 몇십 배의 연봉이 진짜 안 부러웠다. 우리 다 똑같이 세끼 먹지 않나. 요즘 출퇴근도 지하철로 한다. 어디에,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의 문제다.” ―여생을 즐기는 대신 또다시 보건소 일을 시작한 이유가 있나. “일을 맡아 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평생 아프셨기 때문에 의사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의사라는 일은 나에게 운명이랄까. 소명이다. 주변에서 강남 지역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을 때도 손사래를 쳤다. 언젠가 병원에 와서 강연을 해주셨던 김수환 추기경이 ‘생명 살리는 일을 하는 의사 여러분이 참 부럽다’고 한 말씀을 잊지 못한다.” ―젊은 MZ세대 의사들 중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이도 많은 것 같다. 안정적 고소득을 이유로 의대를 선택하는 이도 적잖다. “참 안타까운데, 지금 젊은 세대들의 생각을 바꾸기는 어려울 거다. 우리 세대와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라떼는 말이야’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때는 힘든 일을 그냥 하거나 오히려 좋아하기도 했는데, 요즘 세대는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들에게 ‘나 같은 삶도 있다’고 보여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때로 죽음을 마주치기도 하면서 충실히 일하다 보면 의사들은 바뀌고, 성장하게 돼 있다. 이들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의료 파행 사태가 한 달을 넘어서면서 전국 의대 교수들이 사직서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상황이 장기화하면 의료계에 굉장한 퇴보가 일어날 거다. 당장 학회들이 멈춰 서니 거기에 써야 할 논문들이 다 중단돼 버린다. 의대 교수들이 정말로 손을 놔버리면 오래 못 간다. 우리나라는 분명한 의료전달 체계를 갖고 있고, 3차 진료기관에서 봐야 하는 중증 환자들이 존재한다. 교수들이 전공의를 데리고 해 온 이런 업무가 중단되면 어떻게 되겠나. 중소병원들이 대신할 수 있다고 하는 건 턱도 없는 소리다.” 인터뷰 초점이 의료 파행으로 넘어가자 인자하던 노(老)의사의 눈빛은 점차 매서운 보건 행정 전문가로 변해갔다. “이대로면 정말 환자들이 죽어 나가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그의 목소리 톤은 어느새 높아져 있었다. ―정부와 의료계 모두 ‘2000명 증원’이라는 숫자 앞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병원 경영도 11년을 해보고 나서야 이제 좀 알겠다는 느낌이었다. 얼마가 적정한 증원 규모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마 없을 거다. 환자가 늘어나는 고령화만큼 심각한 게 인구 자체가 줄어드는 초저출산 문제 아닌가. TV에 나오는 정부 고위 당국자들 중에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나. 의대 증원의 낙수효과만 기대하고 하루아침에 2000명을 늘리려고 하니까 이런 고통이 오는 게 아닌가. 이건 누가 이기고 지느냐 하는 게임이 아니다. 서로 한 발씩 양보하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도 의대 증원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다. 의사들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상당하다. “의사들도 그동안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반성해 봐야 한다. 일부가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에 쏠리는 것도 잘못됐다. 다만 의료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가난한 환자들도 치료해야 하는 사회주의적 성격이 있지만, 한편으로 의료 자체가 굉장히 많은 돈을 창출해낸다. 어느 한쪽만 부각되면 결국 양쪽 모두 힘들어진다.” ―서울 소재 의대에 한 명도 배분하지 않았는데, 비수도권에 몰아준 증원 조치가 지방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나. “증원이 결정된 지역 의대 상당수가 서울의 대형병원을 수련 병원으로 두고 있는 곳들이다. 합치면 1000명쯤 되던데, 결국 증원 규모의 절반이 다시 서울 및 수도권으로 올라오게 될 것이다. 정말 지역 의료를 살리고 싶으면 그 지역에 남아서 살 사람만 뽑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 일본에 연수 갔을 때 보니 도쿄 암센터보다 외곽 보건소에서 일할 때 보수가 더 많더라. 의사들이 돌아가면서 거기로 일하러 가는 것을 보았다. 필수의료 인력 확보도 해법이 다르지 않다.” ―결국 건강보험 재정이 늘어나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건강보험 재원만 갖고 해결하려니까 안 된다는 거다. 왜 국가 예산은 안 쓰나. 의료는 공공성이 있기 때문에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진료만 해도 환자 머릿수로 수익이 계산되는 현재 민간 병원 시스템에서는 환자를 보는 시간이 1명당 3분 정도밖에 안 된다. 외국 병원에서 통상 초진이 15분, 재진이 10분인 것과 너무 다르다. 병원장으로 있을 때 ‘이러다가 오진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불안해하며 마음을 졸였다.”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의료 시스템 강화 필요성을 강조해 오셨는데, 이런 시도가 도움이 될까. “웨어러블 의료기기와 첨단 장비를 사용해 질병을 조기 발견하고 치료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다. 인공지능(AI)을 이용해서 병동 가동률을 예측한다거나 환자들의 데이터를 관리하는 식으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환자들과 눈과 눈을 맞댈 시간이 생기지 않겠는가. 1분이라도 더 대화하고 웃기도 할 수 있지 않겠나.” ―공공의료 투자와 발전은 어떤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나. “우리나라는 의료의 90%가 민간에 의존하는 구조다. 공공의료가 20∼30%는 돼야 하는데 지금 10%밖에 안 되는 것이다. 전공의 수련 비용만 해도 국가가 아닌 병원이 내고 있다. 전공의들에게 적은 급여로 더 많은 일을 시키게 되는 이유다. 응급실 뺑뺑이 문제의 경우 미국의 ‘어전트 케어 센터(UCC)’처럼 상급종합병원과 1차 병원의 중간단계 응급실 시스템을 검토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대형 스크린들 위로 수백만 개의 LED 불빛이 꺼지지 않는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장은 24시간이 현란하다. 그 한복판에서는 “여기저기서 샴페인이 펑펑 터지는 파티장 가운데 서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건축학자인 유현준 홍익대 교수는 말한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등장하는 광고가 쏟아지니 “세계적인 연예인 수십 명이 한 장소에 있는 대종상 시상식 레드카펫 위 같다”고도 했다. 연간 60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을 붙잡는 매력으로 꼽힌다. ▷자생적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지속해 왔다는 도시의 진화는 이제 첨단 디지털 기술이 뒷받침한다. 건물 외벽 등에 대형 스크린과 LED 조명을 설치해 디지털 영상을 펼쳐내는 미디어 파사드는 그 핵심 중 하나다. 개별 전광판을 넘어 스크린이 벽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스케일이 커졌다. 그 위에서 구현되는 다채로운 색과 디자인, 역동적 움직임들이 도시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보행자가 찍은 사진이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뜨도록 하는 식의 상호 작용도 가능해졌다. ▷미디어 파사드 설치는 주변의 빛 공해와 건물 일조권 등의 문제로 규제가 까다로운 편이다. 범람하는 상업적 광고가 거리의 전통이나 품격을 되레 해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영국 ‘피커딜리 서커스’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1800년대 초 형성된 원형 광장은 고풍스러운 대리석 건물 위 스크린에서 화려한 광고 영상들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거리의 버스커들과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공간으로 변신했다. 코카콜라부터 삼성,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신제품이 광고를 통해 가장 먼저 공개되는 산업 정보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울 광화문광장과 명동,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이 국내 대형 디지털 광고 무대로 활용된다. 7년 전 처음으로 시도된 서울 강남 코엑스 일대에 이어 제2차 ‘옥외광고물 자유표시구역’으로 지정된 것이다. 유동인구가 많고 관광지와 고궁, 박물관 등 상징적 공간들이 위치해 있는 공간들이다. 이 세 곳은 광고물의 모양, 크기, 색깔, 설치 방법 등 규제가 대폭 완화돼 자유로운 디지털 광고 설치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한국판 타임스스퀘어’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서울과 부산은 이제 전 세계인들이 오가는 글로벌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연간 외국인 관광객 수를 코로나 팬데믹 이전보다 많은 2000만 명까지 늘리겠다는 게 정부 목표다.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는 미디어 파사드는 그 주요한 동력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 딱딱한 아스팔트와 회색 빌딩에 색을 입히고, 각 공간의 개성과 테마를 살리는 콘텐츠를 채워 넣는 숙제가 던져졌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살아 숨쉬는 도시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4년간 틀렸거나 진실을 오도하는 발언 횟수 3만573건. 평균으로 따지면 매일 21건.’ 미국 워싱턴포스트(WP) 팩트체커 팀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발언을 분석한 결과다. WP가 주요 인사들의 거짓말을 분석해 선정하는 ‘올해의 피노키오’ 명단에 트럼프는 올해까지 9년 연속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이달 초 아이오와주 유세에서만 12초마다 사실과 다르거나 부정확한 주장들을 내놓은 것으로 집계됐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가 소방관들과의 간담회에서 꺼낸 자택 화재의 경험, 젠더 평등을 거론하다가 1960년대 남성들끼리 키스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의 스토리 등은 세부 내용이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선 후보 시절 “아들(헌터 바이든)이 중국과 관련해 돈을 받은 일이 없다”고 했는데 이후 헌터 본인이 시인하면서 거짓말이 됐다. 가족의 비리 혐의를 부인한 바이든 또한 ‘올해의 피노키오’ 명단에 포함되면서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이 모두 발언의 신뢰가 흔들리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정치인들이 청중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극적으로 스토리를 포장하는 과정에서 세부 내용을 부풀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80대 고령인 바이든 대통령은 스스로 “실수 제조기”라고 부른 적도 있다. 기억이 흐려진 상태에서 말실수를 했다는 식이다. 반복된다면 거짓임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내놨다고 보는 게 맞다. 바이든 대통령이 예산과 관련해 잘못된 주장을 한 횟수가 최소 30차례에 이른다는 외신 보도도 있다. ▷미국 언론들이 문제 삼는 내용은 명백한 거짓말뿐 아니라 잘못된 수치부터 과장된 표현과 아전인수식 평가,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주장까지 포함한다.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 인사의 발언을 평가하는 잣대는 그만큼 엄격해야 한다는 의미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백신 관련 청문회에서 코로나로 입원한 어린이 수를 실제보다 부풀려 말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피노키오 리스트에 올랐다. WP 팩트체커 팀은 잘못된 주장을 최소 20회 이상 반복한 ‘(추락의) 바닥 없는 피노키오’ 리스트도 따로 관리한다. ▷정치인의 반복된 거짓말은 어느 순간 습관이 되고, 이는 국민들을 호도해 결국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이 아니지만 특정 우호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이른바 ‘푸른 거짓말(blue lie)’이 늘어나고 있다고 학자들은 우려한다. 가뜩이나 인공지능(AI)을 이용한 허위 정보의 위협이 커지는 시대에 정치인들이 이를 만들어 퍼뜨리는 데 앞장서서야 되겠는가. 과거 발언이나 공약의 번복, 거짓 논평, 허위 선동 논란 등으로 늘 시끄러운 우리 정치권에 울리는 경종이기도 하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네덜란드 정부가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앞두고 한국 대사를 초치했다는 국내 언론 보도가 나왔다. 네덜란드 측이 최형찬 주네덜란드 대사를 불러 경호와 의전에 대한 한국의 요구에 ‘우려와 당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한국이 경호에 필요하다며 방문지 엘리베이터 면적 같은 정보까지 달라고 한 것,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의 기밀 시설인 ‘클린룸’에 제한된 인원수 이상의 방문을 요구한 것 등을 조목조목 열거했다고 한다. ▷‘초치(招致)’는 한 국가의 외교 당국이 상대국에 주로 불만을 제기하거나 항의하기 위해 상대국 대사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부정적 뉘앙스가 강하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을 놓고 우리 외교부가 가장 먼저 내놓는 대응이 일본 대사 초치다. 네덜란드 측이 한국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불과 열흘 앞두고 최 대사를 초치한 것은 그만큼 준비 과정에서 인식한 문제가 가볍지 않았다는 의미다. “소통의 일환”이었다는 외교부의 해명은 군색하다. ▷윤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1961년 양국 수교 이후 첫 국빈 방문이었다. 네덜란드는 윤 대통령이 탄 비행기에 자국 F-35 전투기 2대를 붙여 호위했고 붉은 카펫과 21발의 예포, 화려한 왕실 만찬 등으로 극진히 예우했다. 분 단위로 움직이는 순서와 타이밍, 동선, 외교 프로토콜을 놓고 초긴장 상태의 신경전도 벌어졌을 것이다. 그럴수록 상대국을 존중해 가며 세부 사항들을 매끄럽게 조율해 내야 하는 것이 외교다. ‘정상 외교의 꽃’이라는 의전에서 잡음이 불거진 것은 이런 기본이 흔들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의 잦은 교체와 공백은 상황을 악화시킨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올해 3월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블랙핑크 공연을 둘러싼 논란 속에 의전비서관이 사실상 경질됐고, 이벤트 대행회사 대표 출신으로 자질 시비가 붙은 후임자는 약 6개월 만에 자녀의 학교폭력 문제로 사퇴했다. 지난달 임명된 신임 의전비서관 역시 외교와 의전 경험이 전무하다. 비(非)전문성에 과잉 충성심이 덧대어지면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아닌지 복기해 볼 일이다.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의전 업무는 “잘해야 본전”이라고 한다.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상대국을 당혹하게 하는 요구들을 지나치게 밀어붙였다간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우를 범할 우려가 있다. 가뜩이나 해외 순방에서 제기된 윤 대통령의 의전 관련 논란들이 누적돼 온 상황이다. 취임 후 16번째인 해외 방문 횟수와 578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놓고 비판도 커지고 있다. 정부가 내세우는 정상외교의 성과마저 이런 문제들에 묻히고 빛바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국가적 낭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모든 데이터가 물가 인상은 없다고 보여주는데 왜 모든 사람이 생활비 부담에 점점 짓눌린다고 느낄까.’ 영국 경제학자 피파 맘그렌이 2009년 자신의 저서 ‘시그널’에서 제기한 의문이다. 그는 기업들이 가격은 놔둔 채 상품의 양이나 부피를 줄이는 현상에서 답을 찾는다. 이를 설명하면서 줄어들다(shrink)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슈링크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 단어는 지난해 9월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 공식 등재됐다. ▷소비자가 쉽게 눈치채지 못하는 슈링크플레이션으로 사실상 가격을 올린 기업들은 1950년대 이후 계속 존재했다는 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알음알음 진행되던 이 교묘한 꼼수 인상이 사회, 경제적 문제로 불거진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치솟는 물가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자 업체들이 너도나도 슈링크플레이션에 나선 것이다. ‘인색하게 군다’는 뜻의 영어 단어(skimp)와 인플레이션을 합친 ‘스킴플레이션’ 등도 거론되는 횟수가 늘었다. ▷초콜릿칩 아이스크림에 검은 점(초콜릿)은 보이지 않고, 베이글은 중간에 구멍이 더 커지고, 오레오 쿠키 속 크림 두께는 얇아지고…. 해외 소셜미디어에는 슈링크플레이션 제품을 찾아 변화 전후를 비교하는 콘텐츠들이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다. 용량 수치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확연히 차이를 느낄 정도로 쪼그라든 제품들도 있다. 그렇게 줄어든 비율이 최대 25%에 이른다고 한다. 용기 크기를 줄인 회사가 “끝까지 다 먹기 어렵다는 소비자 불만을 반영한 것”이라거나 “손에 잡기 쉽도록 홀쭉하게 만든 것”이라는 식으로 내놓은 해명에는 조소가 터져 나온다. ▷정부가 그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슈링크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대책들을 내놨다. 식품과 생활용품의 용량, 규격, 성분 등을 변경할 경우 이를 포장에 표시하거나 판매 장소에서 고지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를 어기는 기업은 3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각오해야 한다. 이제라도 대응책이 나온 것은 다행이지만 이미 용량과 부피를 줄여버린 제품들이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하는 조치다. 한국소비자원의 최근 조사 결과 슈링크플레이션이 확인된 제품은 아몬드와 소시지, 핫도그, 만두 등 37개에 이른다. ▷재료값과 에너지 등의 비용 인상을 반영한 가격 조정이 기업으로선 불가피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를 소비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것은 신뢰를 갉아먹는 기만행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외국 기업 중에는 이렇게 줄여놓은 제품을 묶음 판매하면서 오히려 ‘대박 할인’이라는 식으로 홍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투명하고 정직한 가격 정책을 펴지 않으면 결국 시장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이제라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케빈 매카시 전 미국 하원의장은 워싱턴에서 가장 굴욕적인 기록을 갖고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소속당인 공화당 강경파들의 반대로 올해 초 15번의 투표를 거치고서야 간신히 의사봉을 손에 쥐었고, 그마저 9개월 만에 내려놔야 했다. 예산안 처리를 위해 민주당과 손잡았다는 이유로 동료 의원들에게 당한 미 역사상 최초의 하원의장 해임이었다. 임기 내내 강성파에 휘둘리던 그가 쫓겨나자 하원의장직에 “워싱턴 최악의 일자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매카시 전 의장이 9선 중진으로 17년간 지속해온 정치 인생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퇴임의 변 차원에서 월스트리트저널에 낸 기고문의 한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워싱턴이 더 많은 일을 할수록 미국은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고 했다. 정치가 나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결과적으로 해악을 끼쳤다는 쓴소리다. 그의 해임 사유가 된 임시예산안만 해도 시한을 넘길 경우 연방정부가 셧다운되는 위태로운 상황이었건만 당내 강경파는 끝까지 반대했다. ▷정작 매카시 본인도 망가진 미국 정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불복과 극렬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사태를 옹호했던 게 그였다. 트럼프를 비판한 리즈 체니 하원의원 축출에 앞장섰고, 하원의장 시절에는 직권으로 바이든 대통령 가족에 대한 탄핵 조사를 지시했다. 트럼프가 “나의 케빈”이라고 부를 정도로 예스맨 역할에 충실했다. 그의 해임안이 통과된 시점에 나온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 의회 신뢰도는 13%까지 떨어졌다. ▷워싱턴 의회 활동이 다른 나라에서까지 정치 교과서처럼 여겨지던 시절은 옛말이다. 극심해진 양극화 속에 민주당과 공화당 간 갈등은 물론이고 당내 혼란과 충돌도 잦아지고 있다. 정치인들의 몽니와 거짓말, 버티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기댄 포퓰리즘이 ‘뉴노멀’이 되어가고 있다고 현지 언론은 전한다. 지난달 상원에서는 격투기 선수 출신의 의원이 청문회 증인과 말싸움을 하다 몸싸움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싸움을 말리던 버니 샌더스 상임위원장의 입에서 “미국인들은 이미 의회를 충분히 경멸하고 있다”는 시니컬한 경고가 나왔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등의 주제를 연구 중인 학자들은 “출구가 안 보인다”며 한숨이다. 망가지는 정치에 염증을 느낀다는 현역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공화당은 매카시가 던진 메시지를 자성의 계기로 삼기보다 줄어든 의석수가 가져올 표차 계산에 바쁘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면 정치인들은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 여야 할 것 없이 민생 입법과 예산 처리, 협치와 혁신은 미뤄둔 채 강성 지지층만 보고 달리는 한국 여의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논리일 것이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말년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구부정하고 어눌했다. 때로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래도 ‘올빼미 눈’이라고 불려온 그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지난달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비판하고 중동지역의 분쟁 확산을 경고하는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지난해 19번째 저서를 내고 최근까지도 각종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해온 키신저의 행보는 100세라는 나이에도 거뜬히 계속될 듯 보였다. ▷‘미국 외교의 전설’, ‘죽(竹)의 장막을 열어젖힌 미중 외교의 상징’, ‘동서 데탕트 외교의 주역’…. 30일 타계한 키신저에게 따라붙는 헌사는 끝이 없다. 국익을 앞세운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냉전시대 미국 외교의 밑그림을 그려낸 게 그다. 스스로를 역사가라고 칭했던 그는 1, 2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의 역사와 세력 구도, 메테르니히와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에 천착했다. 핑퐁 외교로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과의 세력 균형을 시도한 외교 구상에는 이런 역사적 식견이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부터 베트남전쟁, 아랍과 이스라엘 갈등, 중남미 정쟁까지 키신저가 현직에서 다뤄 보지 않은 글로벌 외교 현안은 없다. 기록해야 할 내용도 많았는지 그가 생전에 낸 회고록들의 분량만 3800페이지에 달한다. 퇴임 후까지 합쳐 그가 조언한 미국 대통령은 12명. 닉슨 행정부 때부터 유지돼온 대중 정책 기조를 뒤집어버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조차 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중국과의 물밑 통로로 그를 활용하려 했다. 트럼프가 북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한 과정을 놓고 “1971년 닉슨 방중을 성사시킨 키신저의 방식을 따라했다”는 학계 분석도 있다. ▷미국 외교안보를 좌지우지해온 거목이 100세까지 장수한 기록은 전례 없는 장면들을 연출해냈다. 50년간 봉인되는 기밀문서들이 그의 눈앞에서 해제돼 버린 것이다. 비정부기구(NGO) 등의 요구에 따라 국무부가 공개한 수천 페이지 분량의 녹취록에는 “소련이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넣는다고 해도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우려이지 미국이 걱정할 바가 아니다” 같은 냉혹한 발언들이 담겨 있었다. 미국의 대만 정책 선회 같은 민감한 결정 과정부터 기자들과 나눈 밀담까지 그대로 공개된 것은 그에게는 꽤나 민망한 일이었을 것이다. ▷키신저가 95세부터 인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삼았던 것은 인공지능(AI)이 세계 외교안보에 미치는 영향 연구였다. 그는 올해 에릭 슈밋 전 구글 CEO와 함께 쓴 책에서 핵무기보다 대응이 어려운 AI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이를 관리할 국가기구 설립과 전략 독트린 마련 등을 제언했다. 여기저기서 전쟁이 터지는데 미중 갈등은 심화하고 신기술의 위협까지 커지는 세상, 키신저의 경륜과 조언이 그리운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북풍(北風)이라는 단어의 정치적 의미는 음험하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북한 변수’란 개념을 넘어 특정 세력이 북한을 자극해 도발을 유도한다는 음모론적 뉘앙스가 강하다. 1997년 집권 보수당이 대선을 앞두고 안보 불안을 키워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 시도했던 ‘총풍 사건’ 등의 잔상 탓이다. 진보당이 집권했을 때는 평화 공세로 표심을 끌어들인다는 이른바 ‘신(新)북풍’ 논란도 거셌다. 어느 쪽이 먼저 이용하든 총선, 대선 때만 되면 정치권에서 튀어나오곤 했던 게 바로 이 단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9·19 남북 군사합의에 대한 정부의 일부 효력정지 결정을 놓고 북풍을 언급했다. “(정부가) 북풍처럼 군사 도발을 유도하거나 충돌을 방치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고 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우려를 전하는 형식이었지만, 9·19 합의의 효력정지 이후 발생할 북한 도발이나 남북 간 국지적 충돌은 정부가 의도한 결과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발언이었다. 같은 날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민주당의 현안질의 기류도 다르지 않았다. 기동민 의원은 “남북 정권이 티키타카 하듯이 정밀한 호흡을 맞춰서 가고 있다는 의구심과 불안감을 거둘 수 없다”며 “윤석열 정부가 꿀 빠는 상황”이라고 했다. 북한과 윤 정부를 두고 ‘일란성 쌍생아’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김병주 의원은 9·19 합의의 일부 효력정지 원인이 된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에 대해 “1등 공신은 러시아, 2등 공신은 윤석열 정부의 외교적 실패”라고 했다.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우려한다면 예상되는 시기와 방식, 그에 따른 우리 군의 대응 시나리오 등부터 따져보는 게 순서이건만 그런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때 정치권 선거 전략의 단골 메뉴였던 북풍은 더 이상 과거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미 연합 방위태세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고 북한 관련 정보도 많아졌다. 군사적 긴장감을 지나치게 부추겼다간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최근 10여 년간의 전례들을 살펴봐도 북풍의 효과는 모호하다. 한기호 국방위원장도 지적했듯 19대 대선과 20대, 21대 총선 앞두고 북한이 미사일을 여러 차례 발사했지만 선거 결과는 모두 민주당 승리였다. 더구나 남한을 겨냥한 북한의 전술핵과 무인기, 극초음속 미사일, 군사정찰위성 개발 등은 모두 2021년 내놓은 국방발전 5개년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들이다. 우리 선거 상황을 보며 감행하는 단발적 대남 전략이 아니라는 의미다. 북한이 기다렸다는 듯 9·19 합의의 전면 파기를 선언하고 곧바로 최전방 감시초소(GP)에 중화기를 배치하며 엄포를 놓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만 놓고 내년 4월 총선에 미칠 북풍 영향을 운운하는 것은 섣부르거니와 근거도 약하다. 야당은 습관적으로 북풍 가능성을 제기해 놓고는 그 정치적 활용의 이해득실만 따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실체도 명확하지 않은 북풍을 갖고 우리 정치권만 다시 시끄러워지는 모양새다. 이는 북한이 우리 선거를 좌지우지할 카드라도 쥐고 있는 양 기고만장하게 만들 뿐이다. 러시아와의 밀착 속 기술을 바탕으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위협은 과거 판문점에서의 총격이나 연평도 포격사건 같은 국지 도발과는 차원이 다르다. 북한이 내년에는 7차 핵실험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국가정보원의 분석이다. 북풍 음모론에 빠져 우리끼리 삿대질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국가적 안보 위기 앞에서만큼은 여야가 초당적으로 한목소리를 내라는 게 과한 요구가 되어선 안 될 일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눈조차 뜨지 못하는 가냘픈 미숙아들이 한 줄로 뉘어진 한 장의 사진.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전기가 끊기면서 인큐베이터에서 꺼내진 가자지구 아기들의 모습이다. 작게는 800그램, 기껏해야 1.5kg밖에 되지 않는 조산아들은 숨쉬기도 힘겨워 보인다. 공습 중에 출산했거나 마취제도 없이 제왕절개를 한 엄마들은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다. 체온 유지와 산소, 영양 공급이 되지 않은 상태에 노출된 39명의 조산아 중 3명이 이미 숨졌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시작된 지 40일째. 가자지구 내 병원들은 한계 상황에 몰려 있다. 가자지구 내 최대 의료시설인 알시파 병원마저 약품과 연료, 물, 식량이 바닥났다. 의료진은 컴컴한 치료실에서 촛불이나 휴대전화 조명에 의지해 650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한다. 복도에 늘어선 이동 침상조차 확보하지 못한 피투성이 소녀는 병원 바닥에서 치료를 받았다. 병원 역내에는 잇단 공습 때문에 매장하지 못한 100여 구의 시체가 쌓여 있고, 일부는 부패하기 시작했다. “병원이 공동묘지”라는 절규가 터져나온다. ▷위태롭게 버텨오던 알시파 병원은 15일 새벽 이스라엘군의 급습으로 아비규환 상태다. 이스라엘은 “병원 지하에 하마스의 작전본부가 있다”며 탱크 6대와 특공대원 100여 명을 투입했다. 병원은 전쟁 중에도 국제법상 보호되는 인도적 시설로, 공격 시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이스라엘군은 “병원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하마스의 행위야말로 전쟁범죄”라고 반박하고 있다. 하마스가 병원 내 환자들을 ‘인간방패’로 삼은 채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사망한 가자지구 주민의 수는 1만1200여 명, 이 중 어린이가 4600명으로 40%를 넘는다. 운 좋게 살아남은 어린이들 앞에 닥친 것은 추위와 두려움, 굶주림이다. 잿더미가 된 길 한복판에서 “이 두 손으로 시체들을 옮겼어요”라며 울부짖는 소년의 눈동자엔 공포가 가득하다. 구호식량을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치켜드는 절박한 손길도 상당수가 아이들이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전체를 장악해 하마스를 궤멸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뜻이 완강하다. ▷“아기들이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대로면 알시파 병원 내 미숙아들은 매일매일 더 죽어나갈 것이라고 의료진은 호소하고 있다. 5만 명으로 추산되는 가자지구 내 임신부들이 전쟁 스트레스로 조산하는 사례마저 늘어나는 상황이다. 소중한 새 생명이 포염 가득한 세상에 나오기 무섭게 꺼지는 비극이 반복될 것이란 의미다.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도 용납이 안 되는 21세기 한복판에서 어린이들의 희생마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