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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특파원 때 경험한 일본 경제는 육중한 코끼리 같았다. 글로벌 유가가 오르고,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도 일본 물가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100년 이상 된 노포(老鋪)들이 즐비하고, 60, 70대 근로자를 쉽게 볼 수 있다. 혁신 기업이라 부를 만한 곳은 잘 없다. 기업들은 비용을 아끼고 조금씩 완성도를 높이는 ‘가이젠(改善)’에 주력했다. 일본에 비하면 한국 경제는 치타를 닮았다. 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일본의 절반에 못 미친다. 몸집이 작고 가볍기에 뭐든 빠르다. 어느 한 산업이 성장하면 전체 경제도 빠르게 커진다. 반도체, 정보기술(IT), 전자 등 분야에선 수시로 혁신 성장도 일어났다. 한 나라의 노동, 자본, 자원 등 모든 생산요소를 동원해 물가 상승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생산 수준이 잠재성장률이다.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잠재성장률은 낮아지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지난해 일본의 잠재성장률은 0.4%, 한국은 2.0%였다.韓 잠재성장률이 美보다 낮은 이변 지난해 미국의 잠재성장률은 놀랍게도 2.1%였다. 경제 규모가 한국의 10배 이상인데 한국 잠재성장률보다 더 높았다. 학계 정설이 보기 좋게 깨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도 미국의 잠재성장률이 한국보다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은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다. 거대한 사자와 같다. 그런데 그 사자가 날렵한 치타보다 더 빨리 달리는 셈이다. 잠재성장률은 노동력과 자본, 생산성에 크게 좌우된다. 전 세계 인재와 자본을 빨아들이고, 구글 등 혁신 기업들이 생산성을 끌어올리면서 미국의 잠재성장률도 함께 올랐다. 반면 저출산을 겪고 있는 한국은 노동력 투입을 늘리기 쉽지 않다. 생산성도 하루아침에 끌어올리기 힘들다. 반면 자본 투입은 상대적으로 늘리기 수월하다. 기업이 기계, 설비, 인프라 등에 투자하면 된다. 즉, 기업이 활발하게 공장을 돌리고 성장하면 잠재성장률도 높아진다. 하지만 최근 기업인들을 만나면 ‘투자’에 대해 고개를 흔든다. 쇼크 수준의 경제성장률 1.4%를 기록한 작년과 비교해 체감 경기가 나아진 게 없다고 했다. 특히 중국의 파괴력을 두려워했다. 과거 싼 가격 하나만 갖춘 중국이 이제는 기술력까지 겸비했다. 전자업계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중국과 사업 영역이 겹치면 망한다고 봐야 한다. 중국이 못 따라오거나, 아니면 중국이 손대지 않는 분야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런 분야가 잘 없다. 중동발 정세 불안으로 높아진 물류비가 아직도 고공행진을 하고 있고, 미국 대선도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기업들은 몸을 낮춘다. 짓고 있던 공장도 속도를 늦출 판이다.상법 개정안에 떨고 있는 기업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외부 요인이다. 국내 투자 환경이 외부 위험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매력적이라면 기업은 생각을 다시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인들은 국내 투자 환경에 대해서도 고개를 젓는다. 최근 한국전력은 일반용 전기요금을 동결하면서 산업용 전기요금만 사상 최대 폭으로 인상했다. 은행이나 정유사 등에 횡재세를 부과하자는 주장도 잊을 만하면 다시 나온다. 그 무엇보다 기업을 떨게 만드는 것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이다. 법이 통과되면 A기업 이사회가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는데 그로 인해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개별 주주들이 수시로 소송을 걸 수 있게 된다. 이런 국내외 환경 속에 기업이 과감한 투자에 나설 수 있을까. 사자가 치타보다 더 빨리 달리는 이례적 현상이 아예 고착화될까 걱정된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국내 대표 인공지능(AI) 컴퓨터비전 석학으로 꼽히는 권인소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KAIST 교수(66)의 연구실은 의외로 소박했다. 24일 대전 유성구에 있는 KAIST 연구실을 찾았을 때 온갖 AI 서적으로 뒤덮여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책꽂이에는 ‘국화와 칼’, ‘생각의 탄생’ 등 인문학 서적 수십 권만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인공지능 분야 발전이 워낙 빠르다 보니 옛 서적은 별 도움이 안 돼 작년에 은퇴하면서 전공 서적은 모두 처분했다”며 “하지만 우리 삶과 관련된 인문학 책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권 교수는 책을 둘러보는 기자를 소파로 이끌더니 보이차를 끓여 줬다. “우울증을 앓는 제자들이 간혹 있다. 항상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더 똑똑한 애들을 보면 우울증을 앓는다. 그럼 내 사무실로 불러 이 보이차를 꾸준히 대접했다. 열이면 열 모두 다시 건강해진다”고 말했다.권 교수는 1980년대 국내 불모지였던 로봇공학·컴퓨터비전 분야에 도전해 세계적 연구 성과를 낸 석학이다. 1세대 컴퓨터비전 연구자로 200여 명의 제자도 길러냈다. 현재 국내 대학 AI 분야 교수 상당수가 권 교수의 제자다. 이 같은 연구 업적과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인촌상(과학·기술 부문)을 수상했다.》―요즘 하고 있는 연구는…. “인공지능 연구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중 하나는 인간 시각 시스템을 넘어선 인공 시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하고 있던 연구를 더 개선시키는 연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목표를 인간 시각 시스템을 능가하는 인공 시각 시스템을 만드는 것으로 세웠다.” 권 교수는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노트북과 대형 모니터를 켰다. 기자가 보낸 사전 질문지에 대한 답을 미리 정리해 각종 시각 및 동영상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래서 인간 시각보다 더 나은 인공 시각을 만들어냈나. “인간 시각 시스템에선 중요한 부분에 주의를 집중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와인잔 일부분만을 묘사한 두 개의 스케치 그림을 보여주며) 왼쪽 그림을 보고 와인잔을 생각해 내긴 힘들지만 오른쪽을 보면 생각해 낼 수 있다. 즉, 인간 시각은 의미 없는 선보다 물체 인식과 관련된 중요한 선에 주의를 집중한다. 또 하나. 인간 시각 시스템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적으로 보고 물체를 인식한다. 이게 오늘날의 생성형 AI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 시각 시스템의 특징을 어떻게 (인공적인) 신경망으로 만들어 낼지 연구하고 있다.” 권 교수는 최근 인간이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현상인 ‘어텐션’ 모델을 컴퓨터비전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영상 인식 성능을 획기적으로 높인 ‘CBAM’ 알고리즘도 개발했다. ―로봇 연구 성과는 어떠한가.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는 지능형 로봇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로봇이 물체 사이의 상관관계와 물리 관계를 이해해야 제대로 일할 수 있다. 인공신경망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고, 최근 일정 성과도 얻었다. 로봇에게 사과가 든 쟁반을 치우게 했을 때 먼저 사과부터 다른 곳에 옮긴 뒤 쟁반을 가지런히 치운 것이다. 물체들 사이에 상관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로봇이 이해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 인간 수준의 이해를 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연구팀과 국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자동차 관련 연구에도 관심이 많은 걸로 안다. “2008년부터 골프 카트를 개조해 캠퍼스 내에서 자율주행 연구를 했다. 2016∼2021년 기간엔 ‘시스루카(See through car)’ 시스템을 만들었다. 앞차를 투명하게 만들어 앞차 전방의 교통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제자 중 한 명은 자율주행 기술을 가지고 창업까지 했다. 강원 태백에서 제자의 자율주행 시스템으로 달리는 차와 인간 레이서가 운전하는 차가 트랙을 도는 대결을 펼쳤다. 자율주행차는 1분 32초 만에 트랙을 돌아 인간 레이서의 차(1분 19초)보다 늦었다. 하지만 미래에는 인간 레이서의 차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나는 제자들에게 ‘집에서 학교까지 자신이 만든 자율주행 시스템을 장착한 차로 출퇴근하면 논문 안 써도 박사 학위를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동기 부여를 한다.” ―학사와 석사는 기계설계를 전공했지만 박사는 로봇공학을 선택했다. “기계설계를 선택한 것은 자동차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자동차 엔진은 말할 것 없고, 외관도 한국이 스스로의 기술로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1983년 국비유학생 시험 합격 후 한국기계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1년간 일했는데, 그때 운명이 바뀌었다. 로봇 설계팀에 배속됐는데, 너무나 재미있었다. 소프트웨어로 로봇의 팔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유학은 로봇 제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에서 로봇 연구를 가장 잘하는 곳을 알아봤더니 미국 카네기멜런대였다.” ―컴퓨터비전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1984년 유학을 떠나 카네기멜런대 가나데 다케오(金出武雄) 교수를 만났다. 가나데 교수는 로봇 지식이 없는 나에게 ‘3개월 시간 줄 테니 로봇제어 알고리즘을 만들어 보라. 성공하면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했다. 밤새워 만들었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눈이 펑펑 내리던 그해 12월 31일 가나데 교수로부터 OK를 받았다. 그런데 1985년 봄 내가 만든 알고리즘에 에러가 나 고가의 칩셋 보드에 불이 났다. 나는 연구실에서 쫓겨났다. 그때 가나데 교수가 ‘AI 컴퓨터비전팀이 있는데, 네가 이쪽에 도전하겠다고 하면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사실 컴퓨터비전팀 학생들이 훨씬 뛰어났고 입학하기도 더 어려웠다. ‘하늘이 어려움도 주지만 피할 길도 이렇게 만들어 주는구나’ 생각했다.” ―그때 경험을 지금의 제자들에게도 들려주나. “당연하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을 수 있다. 그 고난을 피하다 보면 영원히 극복하지 못한다. 자신을 믿고 도전하면, 또 절실하면 하늘은 항상 길을 열어준다. 소프트웨어를 전혀 모르던 내가 지금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됐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한다.” ―32년간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교육 철학을 말해 달라. “인공지능 분야는 논문 채택 비율이 매우 낮다. 10편 중 8편이 실패한다. 나는 제자들을 믿고 기다려준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는 ‘이봐 해봤어’라고 말했다. 그 문구엔 비난의 의미도 포함돼 있다. 나는 ‘우리 해보자’라고 한다. 이번에 실패했지만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믿고, 그렇게 우리 다시 해보자는 것이다. 박사 논문 통과에 10년을 끈 학생도 있었다. 자존감이 무너지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지만 10년 만에 디펜스에 성공했다. 지금은 모 대학 교수로 지낸다. 우리 실험실에선 본인 스스로 포기하기 전에는 실패란 없다.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다시 도전’과 같은 말이다.” 권 교수는 1992년 KAIST 교수가 된 이후 지금까지 박사 69명을 포함해 석박사 197명을 배출했다. 박사 수료자까지 포함하면 202명이다. 그중 현직 교수가 30명이다. ―넓은 시야의 중요성도 강조한다고 들었다. “현대 심리학에서 시야가 좁은 사람과 넓은 사람을 비교 분석했다. 같은 병에 걸려도 시야가 넓은 사람의 회복 속도가 훨씬 빨랐다. 사물을 아주 미세하게 보는 팀과 넓게 보는 팀에 동일한 수학 문제를 풀게 했더니, 넓게 보는 팀의 수학 성적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제자들에게 무조건 시야는 넓고 크고 멀리 가지라고 조언한다.” ―AI 시대,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하나. “먼저, 고생하게 하고 실패하게 만들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리고 자녀가 눈치 못 채게 도와줘 스스로 극복하게 하라. 고난 극복의 경험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AI 시대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인재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가능한 한 책을 많이 읽고 사람을 많이 만나게 하라는 것이다. 아주 좋아하는 책 중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라는 게 있다. 그 책 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두 가지에서 영향 받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5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 두 가지란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이다.’ 매우 공감한다.” ―인촌상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드린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을 처음 읽은 후, 주인공 어니스트와 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 내향적인 성격의 나는 언론에 노출된 적이 별로 없다. 소박한 연구 성과를 냈고, 열심히 제자를 키워내려 노력했다. 거기에 인촌기념회가 의미를 부여해 나에게 인촌상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을 받으며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졌던 꿈이 현실화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1억 원의 상금은 AI 분야 발전을 위한 인력 양성과 기술 지원을 위해 기부하기로 제자들과 결정하고, 준비 중이다.”권인소 교수(66)△1958년 경북 안동 출생△1981년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졸업△1983년 한국기계연구원 연구원△1990년 미국 카네기멜런대 로보틱스 박사△1991년 도시바 연구개발센터 연구원△1992년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2018년 KAIST 석좌교수△2023년 KAIST 초세대협업연구실 책임교수△2024년 인촌상(과학·기술 부문) 수상대전=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한국의 군대’, ‘해부 북한 리스크’, ‘일미 동맹’, ‘전쟁론’…. 집무실 한쪽 벽면은 온통 책으로 차 있었다. 경제, 국제관계, 일본사 등 다양했지만 안보 관련 책이 가장 많았다. 다른 쪽 벽면엔 모형 군함이 전시돼 있었다. 일본의 새 총리로 1일 선출된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의원의 도쿄 중의원 회관 집무실 모습은 이랬다. 도쿄특파원 시절 그와 두 차례(2020년 1월, 2021년 11월) 인터뷰를 했다.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때여서 일본 정부와 정치권 인사 대부분은 한국 특파원을 만나길 거부했다. 하지만 차기 총리 선호도 1, 2위에 꾸준히 올랐던 이시바 의원은 본보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내심 놀랐다. “총리가 되면 한국 역사부터 공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더욱 놀랐다. 그는 과거사에 대해 무척 전향적이었다. 인터뷰 내내 한국을 배려하는 단어를 사용한 점도 인상 깊었다. 신문 지면에 압축해 게재했던 문답 한 토막을 소개한다. 질문: 징용, 수출 규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문제를 놓고 한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총리가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변: 한국의 역사부터 깊이 공부한 뒤 협상에 나서겠다.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그를 가능한 한 많이 알아야 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의 역사도 공부해야 하지만, 그 이전도 중요하다. 과거 일본은 한국과 북한으로 나눠지기 전이었던 조선과 유일하게 국교를 맺었던 때도 있었다. 일본은 그런 조선을 통해 여러 문물을 배웠다. 한국의 긴 역사, 찬란한 문화 등을 공부한 다음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겠다. ‘상식적인 답’이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이시바 의원이 속한 자민당은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 정당이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일본 패전일(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다. 그걸 애국이라고 믿기에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이시바 의원은 야스쿠니신사 참배에도 부정적이고, 실제 참배하지도 않았다. 그의 인터뷰 발언은 자민당 의원으로선 매우 이례적이다. 그런 그가 이제 일본의 총리가 됐다. 다만 앞으로의 행보는 인터뷰 때와 좀 달라질 수도 있다. 의원은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지만, 총리와 각료 등 정부 대표는 철저하게 일본의 이익, 정부의 방침과 결을 맞출 수밖에 없다. 동일한 자민당 의원을 각료 때와 의원 때 각각 인터뷰했는데, 한국에 대한 발언이 180도 달라 놀랐던 적도 있다. 게다가 방위상 등 방위 정무직을 3번이나 지낸 이시바 총리는 안보 측면에서는 매파에 가깝다. 일본의 안보 강화,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등의 주장은 한국인들에게 불편한 느낌을 준다.“용기 있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앞으로 이시바 총리가 비어 있는 물잔의 절반을 채우려 할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인터뷰 때 “한국에 우호적인 발언을 하면 우익들이 크게 반발한다. 마음속 이야기를 모두 꺼내지 못하는 걸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서도 한일 양측에 용기를 낼 것을 당부했다. “일본은 과거 대한제국 궁전이 있는 곳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한국 국민의 자존심을 무너뜨렸다. 이런 말을 하면 일본 국내에서 강한 비판이 나온다. 하지만 진심으로 양국이 양호한 관계가 되는 게 지역 평화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기 있게 말한다. 용기 있는 사람이 일본에도, 한국에도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일본은 한국, 중국으로부터 지적받아 일본의 전쟁 책임을 자각하는 게 아니라, 일본인이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첫째 딸이 지난달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였다. 소나기가 쏟아지고 돌풍도 불었다. 딸은 “비행기가 추락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했다. 기자는 미국안전협회(NSC)의 데이터를 말해줬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1100만분의 1이다.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확률의 65분의 1에 불과하다. 비행기 사고가 무서워 못 타겠다면 자동차는 더더욱 타면 안 된다.” 그 말에 딸의 두려움은 곧바로 사라졌다. 공포는 상황을 잘 알지 못할 때 생긴다. 8월 내내 전기차 화재가 국내를 뜨겁게 달궜다.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주차돼 있던 벤츠 전기차에서 불이 난 게 발단이 됐다. 몇 초 동안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갑자기 폭발하듯 불타오르는 현장 폐쇄회로(CC)TV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가만히 주차된 상태에서 일어난 화재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 그 후 기자가 사는 서울 아파트는 지상에 전기차 주차구역을 따로 만들었다. 전국이 전기차 화재 대책으로 들썩거렸다. 전기차 공포증은 기술 발전 간과 그런데 공포심이 너무 과한 건 아닐까. 소방청에 따르면 지난해 차량 1만 대당 화재 건수는 내연기관차가 1.9건, 전기차는 1.3건이었다. 전기차보다 내연기관차에서 더 자주 불이 났다. 다만 전기차는 비교적 최근에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새 차인데도 화재가 일어난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2021∼2023년 동안 주차 중에 불이 난 전기차는 전체의 25.9%였다. 내연기관차의 경우 소방청에 동일한 통계는 없었다. 하지만 주차장에서 불이 난 내연기관차는 전체의 18.5%라는 점을 참고하면 내연기관차도 외부 충격 없이 불이 났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 ‘전기차 포비아(공포증)’는 너무 과도할 뿐 아니라 기술 발전을 간과했다는 느낌이 든다. 배터리는 아직 미완성된 기술이고 계속 진보 중이다. 예를 들어 배터리의 두뇌라 할 수 있는 배터리관리시스템(BMS)은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BMS는 배터리에 연결된 센서로 전압, 셀 온도 등 배터리에 관한 모든 정보를 측정해 배터리 이상 상황을 미리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배터리 3사는 화재 위험성을 크게 줄인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다. 국내 연구진이 최근 전해질로 물을 사용해 화재 걱정 없는 배터리 상용화를 위한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몇 년 후면 전기차의 안전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배터리 기업, 초격차 기술 갖춰야 실제 비행기의 기술 발전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연방항공청(FAA)은 1984년 보잉720기를 일부러 추락시켜 승객의 좌석 위치에 따른 안전 정도를 실험했다. 2012년에 다시 NASA가 동일한 실험을 해 비행기 앞쪽보다 뒤쪽 좌석 승객의 생존 확률이 높고, 안전벨트를 맨 채 몸을 숙이는 동작이 가장 충격을 덜 받는다는 걸 확인했다. 이런 연구가 쌓이면서 비행기 사고는 크게 줄어들었다. 2020년 매사추세츠공대 아널드 바넷 박사가 2008년과 2017년 사이에 상업용 비행 안전에 대해 조사한 논문에 따르면 탑승객당 사망자 수는 10년마다 2배씩 감소했다. 지금까지 소비자들은 주로 브랜드를 보고 전기차를 구매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배터리의 안전성을 점차 중요하게 여길 것 같다. 어떤 배터리를 장착했는지를 확인하고 전기차를 사는, 소위 ‘파워드 바이(Powered by)’ 시대가 오고 있다. 그런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선 압도적인 초격차 기술력을 입증시켜야 한다. 미국이 괜히 비행기를 추락시키는 게 아니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애초 기대치가 높지 않아서 그런지 파리 올림픽을 보는 재미가 무척 쏠쏠하다. 특히 금메달 5개를 모두 석권한 양궁, 그중에서도 여자 단체전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한국 국가대표 세 명 모두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고 선배들이 올림픽에서 9연속 금메달을 땄었기에 부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을 것이다. 중국과의 결승전은 세트 스코어 2 대 2에서 각 선수들이 마지막 한 발씩 쏘는 슛오프까지 이어졌다. 결과는 10연속 금메달 획득.“동료를 믿고 활 쏴야 금메달 가능” 다음 날 국내외 언론들은 한국 양궁이 왜 강한지 분석했다. 개인적으로 장영술 대한양궁협회 부회장의 분석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실력은 한국이 어느 나라보다 앞선다. 하지만 세 명 모두 항상 잘 쏠 순 없다. 누구 한 명이 실수했을 때 다른 선수가 받쳐줘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믿고 쏴야 금메달을 딸 수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천억, 심지어 조 단위 투자를 결정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그때 믿는 구석이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 5월 23일 발표된 ‘반도체 생태계 종합지원 방안’은 정부 차원에서 기업에 믿음을 주려 했던 것 같다. 정부는 반도체 금융지원, 연구개발(R&D) 및 인력 양성 등에 26조 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인센티브로서 손색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업도 그렇게 느낄까. 지난달 19일 대한상의 제주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처럼 말했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지을 때 약 20조 원이 든다. 거기에 설비 투자도 해야 한다. (정부의) 세제 혜택만으로 감당이 안 된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번 돈보다 더 투자를 해야 하는 게 저희의 문제다.” 물론 기업이 정부 지원책에 의존해선 안 된다. 하지만 해외 주요국이 앞다퉈 반도체 기업을 지원해주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국 정부 역시 적어도 경쟁국 수준만큼 지원해줘야 기업들이 제대로 글로벌 경쟁에 나설 수 있다. 본보는 3월 한미일 3개국의 반도체 관련 법안을 바탕으로 5년 동안 총 5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새로 지을 때 정부 지원책을 뽑아봤다. 미국에선 세액공제와 보조금을 합쳐 최대 1조7500억 원, 일본에선 최대 2조5000억 원의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한국은 7250억 원의 세액공제에 그쳤다. 그나마 반도체 산업은 형편이 낫다. 정부보다 정치권에서 오히려 더 강력한 지원책을 발표할 정도로 반도체의 중요성에 대해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반면 배터리, 철강, 석유화학 등 기업들은 위기 상황에서 거의 홀로 버텨내고 있다. 본보가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1조 원을 투자해 배터리 생산공장을 지을 때 기업이 5년간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살펴봤더니 미국에선 약 3조 원을 받았지만, 한국에선 약 1200억 원 받는 데 그쳤다.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을 보여줘야 독자가 배터리 회사 사장이라면 어디에 공장을 짓겠는가. 국내에서 생산한 배터리 물량은 글로벌 생산량의 1%에 그친다는 점이 이미 답을 말해주는 것 같다. 해외에 공장을 지으면 양질의 일자리, 첨단 생산기반, 연구개발(R&D) 핵심 역량 등도 해외로 빠져나간다. 정부가 이런 상황을 방치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정부가 든든하게 받쳐주겠다는 믿음을 줘야 기업도 글로벌 경쟁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다. 그 믿음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손색없다”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을 보여 줄 때 생긴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1973년 6월 처음 쇳물을 생산한 뒤 2021년 12월 임무를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포스코 포항제철소 1고로(용광로)는 별명이 많다. 민족 고로, 경제국보 1호 등인데, ‘아카자와 고로’라는 낯선 별명도 있다. 그 뜻을 알면 가슴 뭉클해진다.아카자와 고로는 신뢰가 만든 결과물 박정희 대통령은 ‘철강은 국력’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65년경 박태준 대한중석광업 사장에게 종합제철소 건설을 지시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가난했다. 박태준은 미국 등에서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허사였다. 해외 인사들은 ‘한국이 짓고자 하는 제철소는 사업성이 없다’고 여겼다. 그는 고민하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하지만 돈을 대는 일본이 사전에 자금의 사용처를 농업발전용으로 명시했기에 일본 정부가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돌리는 걸 허가해야 했다. 1969년 초 박태준은 곧장 일본을 찾아 지한파 정치인, 제철소 사장 등을 만났다. 일본 내각도 집요하게 설득해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일본은 마지막 단계로 1969년 9월 현지 조사단을 한국에 보냈다. 아카자와 쇼이치 경제기획청 국장이 단장이었다. 처음 만난 박태준과 아카자와 국장은 5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경주로 갔다. 아카자와 국장이 그때 느낀 감정은 안상기 씨의 저서 ‘우리 친구 박태준’에 잘 나와 있다. “박태준은 제철산업 발전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가 지휘한다면 제철소 건립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포항 현장은 황무지였기에 우리 조사단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리만큼 담담했고, 일본 정부가 꼭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나는 매우 긍정적인 보고서를 썼고, 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포항제철 건설이 시작됐다.” 1985년 4월 한일 경제인들이 모인 한 행사에서 포스코 회장이 된 박태준은 민간 경제인으로 참석한 아카자와를 다시 만났다. 박태준은 건배사 때 “우리 포스코는 1고로를 ‘아카자와 고로’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아카자와는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포스코는 조강생산량 기준 세계 7위 철강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요즘 고난을 겪고 있다. 아니, 한국 철강업계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중국은 부동산 침체로 저가 철강을 한국으로 쏟아내고, 엔화 가치가 급락하며 가격 경쟁력을 갖춘 일본산 제품까지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유럽의 환경 장벽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국 철강업계는 비상경영으로 대응하고 있다. 포스코는 철강 분야에서 연간 1조 원 이상 원가를 줄이기로 했다. 임원 급여도 최대 20% 반납하기로 했다. 동국제강은 지난달부터 전기요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야간에만 인천 공장의 전기로를 가동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철강 경기가 언제 반등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박태준 “혈세로 짓는 제철소, 실패란 없다” 다시 포스코를 건설하던 때로 되돌아가 보자. 박태준은 건설 과정에서 현장 직원들에게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죽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박태준만 그런 각오를 다졌던 게 아니다. 1969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된 김학렬은 취임 즉시 흑판에 ‘종합제철’이라 써놓고 “이 사업이 완결되거나 내가 그만둘 때까지 지우지 말라”고 엄명했다. 철강기업 임직원들이 우향우 정신으로 일하고, 정부가 김학렬 전 부총리의 각오로 지원한다면 극복하지 못할 철강 위기는 없을 것이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나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무게를 줄여야 연료소비효율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차체 혹은 기체의 강도는 높아야 한다. 땅과 하늘을 아우르는 모빌리티 기업을 추구하는 현대자동차그룹으로서는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철강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일본 도레이그룹은 글로벌 탄소섬유 시장에서 세계 1위다. 탄소섬유는 ‘꿈의 소재’로 불린다. 기존 철강보다 5배 가볍고 강도는 10배 이상이다. 자동차의 안전성과 연비를 모두 높일 수 있기에 BMW, 람보르기니 등은 성능 개선을 위해 탄소섬유를 사용해왔다.한일 정치가 냉각되면 경제도 휘청 현대차와 도레이는 올해 4월 전략적 협력 계약을 맺었다. 탄소섬유 강화 플라스틱(CFRP) 등 신소재를 공동으로 개발한다고 한다. CFRP는 고강도·고탄성의 경량 신소재로 자동차 차체부터 개별 부품에까지 널리 쓰인다. 두 회사가 손잡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협력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어날 수 없었다. 한국 법원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리면서 한일 관계가 악화됐던 2019∼2022년 동안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당시 한일 기업인들을 만나면 예외 없이 “경제는 정치와 별개”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 대형마트들은 ‘한국 상품 전시회’를 잇달아 취소했다. 이유를 물으면 “행사 계획이 바뀌었다” 등으로 얼버무렸다. 일본 내 한국 상품 판매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 식품기업의 한 영업사원은 “월별 매출이 전년보다 20∼30%씩 계속 줄고 있다. 한일 관계가 안 좋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고하면 본사는 ‘언제까지 그 핑계를 댈 거냐’고 말해 곤혹스럽다”고 했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 의류 기업 유니클로는 한국에서 잇달아 매장 문을 닫았고, 일본 자동차 브랜드 닛산과 인피니티는 한국에서 철수했다. 그런 엄혹한 시기에 한일 기업이 어떻게 협력한다고 발표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양국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바뀐 뒤 일어난 변화다. 최근 양국 경제계 만남도 활발하다. 그 자리에선 “경제 협력 관계가 정권 변화에 관계없이 지속되게끔 만들어보자”는 목소리도 예외 없이 나온다. 물론 과거사, 영토 등을 놓고 일본과 협력을 외칠 수는 없다. 역사 교과서에서 침략을 지우려는 움직임,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을 외면한 채 자국에 유리한 일부분만 국제사회에 홍보하는 모습, 사회 지도층의 망언 등에 대해선 분명하게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경제는 다르다. 한일이 경제 협력을 할수록 그 혜택이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실제 도레이는 지난달 또 하나의 발표를 했다. 2025년까지 경북 구미시에 총 5000억 원을 투자해 생산 역량을 더 늘리겠다고 했다. 현대차와 신소재를 공동으로 개발하기로 한 것도 공장 증설 판단에 기여했을 것이다. 공장을 새로 지으면 국내 고용이 늘고 건설자재 소비도 늘어난다.경제협력 과실 체감하게끔 만들어야 한국과 일본의 상공회의소가 분석했더니 한일이 관세를 전면 폐지하면 양국 모두 실질 국내총생산(GDP)과 소비자의 후생이 증가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경제인회의에서 이 연구결과를 발표하며 “쉬운 사례로 시작해 양국이 성공사례를 늘려가자”고 제안했다. 공감한다. 국민들이 그런 성공사례의 과실을 체감할수록 양국 정치 상황이 어떻든 경제 협력에 대한 믿음이 커질 것이다. 제2, 제3의 현대차와 도레이의 협력이 그래서 중요하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지난달 22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국의 경제 기적은 끝났나’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FT는 한국 경제에 대해 “과거 성장 모델의 주축이었던 저렴한 에너지 가격과 값싼 노동력 등이 흔들리고 있다”며 “저출산에 따른 인구 위기로 미래 성장에 대한 우려도 더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1970∼2022년 연평균 성장률은 6.4% 수준이었다. 하지만 생산성이 낮게 유지되면 2020년대에 2.1%로 둔화하고 2030년대에는 0.6%, 2040년대에는 ―0.1%로 마이너스 성장 국면에 진입할 것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2월 이 같은 분석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 국내외에서 한국 경제가 정점을 찍고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피크 코리아’론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한국 경제의 역동성을 높일 돌파구는 없을까. 한국 산업계 원로 경영인인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겸 CJ그룹 회장(85)에게 길을 물었다. 그는 “산업 대개조를 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년 정도”라고 말했다. 기업들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선 무엇보다 ‘기술’에 승부를 걸 것을 조언했다. 국회 여야와 정부의 협력도 당부했다. 손 회장과의 인터뷰는 지난달 22일 대면으로 진행됐고, 이달 중순 서면 인터뷰를 추가했다. 다음은 주요 내용.》―한국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지금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반도체는 국가 대항전이 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산업이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고 있기에 우리가 너무 늦으면 곤란하다.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아차 하면 2류, 3류로 떨어지게 된다. 그럼 우리 경제의 글로벌 경쟁력도 다 사라진다. 지금 바로 산업 대개조를 해야 한다.” ―산업 대개조를 한다고 하면 어떤 분야에 가장 힘을 쏟아야 하나. “기술이다. 기술력이 있어야 제대로 사업을 할 수 있다. 과거에는 노동력을 무기로 글로벌 경쟁에 나섰지만 지금은 혁신 기술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기술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산업 구조를 바꿔야 한다.” ―산업 대개조를 하기까지 골든타임은 어느 정도 남았나. “1년 정도라고 생각된다.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점차 줄어들고 있고, 일부 산업에선 1년 정도 한국의 기술력이 중국을 앞섰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과연 1년 후에도 ‘한국이 중국에 1년 앞섰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약 1년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중국에 추월당할 수 있고, 한국이 더 이상 따라잡기 힘들어질 수 있다.”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KEIT)이 13일 발표한 ‘2023년 산업기술 수준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산업기술은 중국보다 불과 0.3년 앞선 것으로 평가됐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의 산업기술은 1년 이상 중국에 앞섰지만 최근 이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혁신 기술 개발 외에 또 무엇이 중요한가. “노동 대개혁을 해야 한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국제 기준에 비해 고용 유연성이 부족하다. 대체 근로 허용, 파견 대상 업무 확대, 파업 시 사업장 점거 금지, 성과를 반영하는 임금체계 등이 이뤄져야 한다. 국제적으로 높은 법인세와 상속세를 과감하게 낮추는 것도 우리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규제 개혁도 지속되어야 한다. 정부가 여러 규제 개혁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좀 더 획기적으로 철폐돼 외국 기업들도 ‘한국에서 사업 할 만하다’고 느끼게끔 만들어야 한다.” ―정부의 산업 지원이 해외 경쟁국보다 약하다는 평가도 있다. “최근 미국, 일본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이 많이 조명됐다. 해외의 경우 보조금은 반도체 외 분야에도 지원된다. 제가 아는 한국의 화장품 기업이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코로나 시절 미국 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10억 원 받았다. 한국 정부도 폭넓은 부문에서 보조금 지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특히 반도체에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보조금 지급 방침을 밝힌 적은 없다. 다만 반도체 기술을 국가전략기술로 지정하고 관련 시설 투자나 연구개발(R&D) 비용에 세액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보조금은 외국 기업 투자 유치와도 연결될 것 같다. “맞다. 그리고 외국 투자 유치를 위해 또 하나 개선돼야 할 게 있다. 최근 ‘외국 기업인이 중대재해처벌법 때문에 한국 지사장으로 오고싶어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전과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이 좀 더 늦춰져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2022년 1월부터 50인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우선 시행됐고, 올해 1월부터 50인 미만 기업까지 전면 시행됐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영세 중소기업·소상공인들이 준수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불명확한 의무를 부과한다”며 지난달 1일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여소야대’인 이번 총선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나. “여야 모두 (한국 경제 성장을 위한) 변화 필요성에 공감하리라고 믿는다. 큰 수준의 산업 개편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정부 예산도 필요하고, 세제 정책도 뒷받침돼야 한다. 국회와 행정부가 서로 잘 손발을 맞춰 나가야 한다. 궁극적인 목표가 비슷하면 협치도 할 수 있다고 본다.” ―특별히 정치권에 주문하고 싶은 게 있나. “지금 노동 관련 이슈가 많은데, 기업이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고 또 외국에서도 한국으로 투자가 밀려오면 노동 이슈는 자연히 줄어든다. 정치권이 그렇게 투자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줬으면 좋겠다. 기업 활력을 높이는 법안은 신속하게 처리하고, 활력을 떨어뜨리는 법안은 늦추거나 유예하길 희망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산업계에서 가장 걱정하는 것은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제2조, 제3조 개정안) 재발의다. 근로자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인데 원청과 하청 관계에서 원청의 책임을 많이 묻는 내용이 담겨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도 좀 보류해 줬으면 좋겠다. 사고가 나면 중소기업은 당장 사장이 붙잡혀 간다.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사장 없으면 다 무너진다.” 노란봉투법은 2023년 1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최종 부결됐다. 하지만 야당은 22대 국회에서 노란봉투법을 다시 발의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올해 경제 상황을 어떻게 예측하나. “올해 한국 경제는 지난해(1.4%)보다 높은 2% 중후반 성장률을 기록하고, 물가상승률은 2%대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덕분에 국민과 기업의 어려움이 다소 완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 둔화, 고금리 지속 등 불안요인들이 올해도 계속될 것으로 보여 경제 회복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트럼프 리스크’에 대한 우려도 높다. “트럼프 후보가 과거 대통령 시절 한국에 ‘왜 투자도 많이 안 하면서 혜택만 보느냐’고 불평했다. 하지만 트럼프 후보가 올해 말 당선된다고 해도 더 이상 그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한국 기업이 미국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누군가가 투자하라고 강제해서 그런 게 아니다. 미국이 사업 하기에 좋은 나라이기 때문에 한국 기업이 스스로 미국에 가 투자를 하고 있다. 트럼프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한국과 미국이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2022년 대만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8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앞질렀다. “대만 정부가 일하는 게 굉장히 역동적인 것 같다. 반도체 기업에 파격적으로 지원한다. 그렇게 해도 대만 국민들은 ‘정부가 왜 특정 대기업만 지원하느냐’와 같은 비판을 안 한다. 한국 국민들이 정부의 기업 지원을 비판하면 정부가 일을 할 수가 없다. 한국 국민들도 정책의 온기가 기업을 넘어 어디까지 확산되는지, 그 이면을 봐 줬으면 좋겠다.” ―미중 갈등 이후 한국 기업이 중국 관련 사업을 접고 있다. “중국은 바로 옆에 있는 이웃 나라이고, 또 산업 구조상 협력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약 25% 수출이 중국으로 갔고, 작년에는 19.7%로 줄었다. 앞으로 더 줄어든다 해도 중국은 여전히 큰 나라여서 헤어질 수 없다. 중국 역시 ‘한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올해 3월 경총이 중국의 경제단체와 함께 베이징에서 포럼을 했다. 인리(尹力) 중국공산당 베이징시 위원회 서기 등 고위 인사들이 대거 나와 우리를 환대했다. 중국 참석자들은 ‘요즘 양국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는 것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다. 한중 협력에 대한 공감대는 분명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일 기업인들은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협력 관계 구축을 외치고 있다. “매년 한일 최대 민간교류 행사인 ‘한일축제한마당’ 한국 측 실행위원장을 맡아 오면서 한일 양국의 관계 개선에 문화의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는 점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 음식과 음악, 영화 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일본 진출도 확대해야 한다. 그럼 자연스럽게 일본 국민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과 이해도가 높아져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손경식 회장(85)―1939년 서울 출생―1961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1968년 삼성전자공업(현 삼성전자) 입사―1973년 삼성화재 이사―1993년 CJ 대표이사 부회장―1995년∼현재 CJ그룹 대표이사 회장―2005∼2013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2018년∼현재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푸른 초원 위에 길을 내고 집을 짓는다. 소를 부려 밭을 갈기도 한다. 바람이 불면 풀잎들이 흔들리고 가을이 되면 고운 단풍이 든다. 얼핏 보면 중세 유럽의 한가로운 시골을 묘사한 영화같다. 하지만 이는 영화가 아니라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매너 로드(MANOR LORDS)’에 나오는 장면이다.혼자서 AI 활용해 글로벌 게임 제작 이 게임은 지난달 26일 출시됐다. 게임 플랫폼인 스팀에 따르면 5월 현재 스팀 전체 게임 중 매출 순위 2위를 기록했다. 동시접속자가 약 17만 명. 일본 소니,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산하 액티비전블리자드 등 대기업이 내놓은 대작들을 모두 제쳤다. 놀랍게도 매너 로드는 1인 개발자가 내놓은 작품이다. 통상 대작 게임 하나를 개발하는 데 수백 명의 개발자가 4, 5년을 매달린다. 하지만 매너 로드는 영상 편집 프리랜서였던 폴란드인 그레크 스티첸이 혼자서 7년간 만들었다. 그 비결 중 하나는 인공지능(AI) 활용이었다. 미국 엔비디아의 AI 딥러닝 기술인 DLSS를 매너 로드에 적용했다. DLSS는 게임의 동영상을 더 선명하고 부드럽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랬기에 매너 로드를 처음 접했을 때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됐던 것 같다. 앞으로는 1인 개발자의 대작은 더 늘어나고, 개발 기간은 수개월로 대폭 짧아질 것이다. 스티첸은 영상 처리만 AI로 했지만, 이제 누구나 AI에 지시해 게임 대본을 쓰고 그림뿐 아니라 동영상까지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할은 아이디어 내기, 제작 지시 그리고 완성품에 대한 판단에 그치고, AI가 인간을 대신해 제작을 맡는 시대가 됐다. 인터넷 혹은 스마트폰 출현보다 더 폭발력이 클 이 같은 변화는 2022년 11월 오픈AI가 생성형 AI 챗GPT를 내놓으면서 본격화됐다. 생성형 AI는 수천억 단위의 초거대 데이터에서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의 확률 관계를 학습해 하나의 확률 지도를 만들어 다음에 나올 단어를 예측해 보여줬다. 이게 곧 질문을 하면 답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성형 AI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오픈AI가 13일 내놓은 GPT-4o는 사람처럼 보고 듣고 말하는 AI 시대를 열었다.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GPT-4o를 실행하면, 카메라가 자신의 눈이 돼 음성으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자세히 묘사해준다. 호출한 택시가 다가오는 것을 인식하고, “지금 손을 들라”고 말해준다. 안내견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앞으로 5년 후에 모든 면에서 인간 수준에 버금가거나 뛰어넘는 AI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물론 AI는 거짓을 진짜인 것처럼 답하는 등 치명적인 문제점도 있다. 그렇다고 AI 기술에 눈을 감아야 할까. 예정된 미래인 AI 시대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는 동아일보가 최근 시작한 ‘2024 동아 인공지능·혁신(AI & INNOVATION) 아카데미’에서 첫 강의를 맡았던 김대식 KAIST 교수의 코멘트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AI 경험하고 알아야 나만의 비서 돼 “이 강의에 참여한 여러분은 대부분 40, 50대입니다. AI를 몰라도 기존 지식을 가지고 그럭저럭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는 운 좋은 세대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가정에 10대 자녀가 있다면 반드시 오늘 배운 AI 서비스를 함께 실행해 보세요. 10대들이 직업을 구할 때 즈음이면 대부분 지적 노동은 AI가 대신하고 있을 겁니다. AI를 최대한 많이 경험해 봐야 AI에 끌려다니지 않고 AI를 자신의 비서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초음파 영상 진단기기를 만드는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장기간 고금리가 이어진 데다 최근 의대 정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으로 회사 매출이 영 시원치 않다. 사장으로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中 대신 아시아 7개국 주목해야 10년 전이라면 ‘중국’에서 답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저렴한 인건비, 거대한 소비시장, 10% 내외의 경제성장률…. 수출을 하든, 현지 공장을 짓든 중국과 연결시키는 게 항상 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10여 년 동안 중국의 평균 노동자 임금은 2배로 올랐다. 2022년 기준 중국의 월 최저임금은 286달러(약 40만 원)로 베트남의 1.7배, 인도네시아의 1.6배다. 중국의 성장률은 5% 내외로 떨어졌다. 거기에 미중 무역갈등이란 큰 변수도 생겼다. 미국이 우방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면서 중국에서 만든 제품을 미국에 팔기 쉽지 않다. 또 중국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방향을 틀면서 자체 기술력을 크게 높였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최근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변했다. 중국 수출 붐에 따른 수혜자가 되기보다 지난 10년간 경쟁이 부각됐다”고 말할 정도다. 기회이긴커녕 위험이 되고 있기에 국내외 기업들은 앞다퉈 중국을 떠나고 있다. 그 기업들이 어디로 향할까. 바로 아시아다. 지난해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알타시아(Altasia)’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대안(Alternative)’과 ‘아시아(Asia)’를 합성해 만든 신조어로 중국의 대안이 곧 아시아란 의미다. 동아일보는 아시아 중에서도 특히 △자원(Natural resources) 부국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수출 전진기지(Export hub)인 인도 베트남 싱가포르 △성장하는 세계 시장(World market)인 태국 필리핀 등 7개 국가를 ‘아시아 뉴(NEW) 7’으로 선정했다. 아시아 뉴7이 한국에 주는 기회는 크다. 중국은 14억 인구지만 아시아 7개국은 20억 인구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간 대중(對中) 수출액은 8.4% 줄었지만 아시아 뉴7 대상 수출액은 15.6% 증가했다. 한국은 지난해 중국과의 무역에서 180억4000만 달러 적자를 봤지만 아시아 뉴7과는 423억9000만 달러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아시아 뉴7이 중국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셈이다. 아시아 뉴7 국가 15개 도시에 근무하는 KOTRA 무역관장 15명 전원을 대상으로 설문도 진행했다. 14명은 “한류 열풍이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했다. 그만큼 새롭게 사업을 하기에 유리하다. 무역관장들은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기에 유망한 분야로 ‘의료기기’(8명), ‘친환경에너지’(8명) 등을 꼽았고, 수출하기 좋은 산업은 ‘의료기기’(13명), ‘화장품’(12명) 등을 언급했다.국내 유입되는 투자 유치도 방법 다시 의료기기를 만드는 중소기업 사장으로 돌아와 보자. 아시아 뉴7으로 사업을 확장해 보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만약 부담스럽다면, 국내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다. 중국을 벗어난 글로벌 자금들이 아시아로 이동하는 가운데, 그 종착지 중 하나는 한국이다. 지난해 국내로 유입된 외국인직접투자(FDI)가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 치웠고, 올해도 그 기조가 계속되고 있다. 1분기 FDI는 10조 원에 육박하며 1분기 기준 사상 최대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전년 동기보다 99% 늘었고, 유형별로는 인수합병(M&A) 투자가 115% 증가했다.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면 지금이 외국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최근 한 인터넷 카페에 ‘아이폰 쓰는 딸, 갤럭시 쓰는 엄마’라는 제목의 글이 하나 올라왔다. 엄마는 딸의 중학교 입학을 기념해 아이폰을 사줬다. 중고 제품을 사줬는데도 딸이 너무나 좋아하고 애지중지했단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엄마가 갤럭시 스마트폰을 사용하다 보니 앱으로 아이폰을 통제할 수 없었다. 유료 제어 앱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아이패드를 중고로 사(아이폰을 사려 했으나 아이폰은 중고도 너무 비쌌다고 함) 애플 아이디를 만든 뒤에서야 딸의 아이폰 사용을 제어할 수 있었다. 아이폰의 폐쇄성으로 인해 엄마로선 낭비를 해야 했다. 반대로 제조사인 애플은 돈을 더 벌 수 있다. 결국 미국 법무부가 이런 애플의 행태에 철퇴를 내리는 작업에 돌입했다. 최근 애플을 상대로 반독점법 위반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메릭 갈런드 법무장관의 브리핑에 애플의 폐쇄적 행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애플은 갤럭시 등 다른 스마트폰의 앱 기능을 떨어뜨리고, 애플이 아닌 주변기기의 성능 역시 저해했다. 예를 들어 아이폰 이용자가 비(非)아이폰 이용자에게 메시지 앱을 이용해 문자를 보내면 녹색으로 표시된다. 대화가 암호화되지 않고 동영상 화질이 떨어지며 메시지를 수정할 수도 없다. 아이폰 이용자가 다른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친구와 메시지, 동영상 등을 주고받으면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아이폰이 아닌 스마트폰은 품질이 안 좋다’란 느낌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아이폰에 있는데도 말이다. 갈런드 장관은 “애플은 우수한 제품으로 경쟁에서 앞선 것이 아니라 반독점법을 위반하며 스마트폰 시장에서 독점을 유지해 왔다”고 일침을 놨다. 브리핑에선 202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콘퍼런스에서 있었던 일화도 소개됐다. 한 참석자가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에게 “다른 스마트폰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방법을 바꿀 생각은 없느냐.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어머니에게 동영상을 보낼 수 없어서 그렇다”고 질문했다. 그러자 쿡은 “어머니에게 아이폰을 사 드리라”고 답했다. 아마 농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 법무부의 제소 내용을 알고 나서부터 더 이상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쿡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설득으로 1998년 애플에 합류했다. 잡스가 카리스마 넘치는 천재 스타일이라면 쿡은 꼼꼼한 관리자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쿡이 2011년 애플의 CEO가 됐을 때 기대보다 우려의 시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기자는 쿡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2014년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용기 있게 공개한 게 계기였다. 그는 블룸버그에 기고한 글에서 “게이인 까닭에 소수집단에 속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고, 소수자들의 고충도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다양성, 평등, 여성 고용 등을 강조하며 포용력을 보여줬다. 혁신의 이미지를 가진 애플에 따뜻함까지 불어넣어 준 느낌이었다. 그런 애플이 폐쇄적 생태계로 독점적 지위를 유지했다는 사실에 큰 배신감을 느낀다. 유럽연합(EU) 또한 반독점법 위반으로 이달 초 애플에 약 2조700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것을 보면 배신감에 대한 공감대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갈 것 같다. 잡스가 2007년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은 지 17년 만에 애플이 최대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애플의 성장 동력이었던 폐쇄성이 이제 최대 골칫거리가 된 셈이다. 한국 기업들 역시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만들지 않는지 되돌아볼 때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딸이 대학 입시를 끝내고 최근 일본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밤늦게 인천공항에 도착했기에 마중을 나갔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일본 여행기를 조잘거리더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은 다 좋았는데 딱 한 가지가 아쉬웠다. 배달음식을 못 먹는다는 것이다. 빨리 집에 가서 배달음식 주문해야지.” 그때 시간이 오후 11시 30분이었다. 도쿄 특파원 시절을 떠올려 보면 일본에서 배달음식을 주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면 한국에선 일주일에 두세 번은 배달음식을 먹는다. 배달의민족(배민), 쿠팡이츠, 요기요 등 배달 플랫폼을 이용하면 따뜻한 음식을 너무나 손쉽게 집에서 맛볼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2조7000억 원 규모였던 음식 배달 온라인 서비스는 작년 26조4000억 원으로 약 10배 커졌다. 비례해 ‘라이더’라 불리는 배달원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자영업자도 이득을 누렸다. 배달을 전문으로 하면 굳이 유동 인구가 많은 1층에 식당을 낼 필요가 없기에 초기 투자비를 크게 낮출 수 있었다. 이용자 편리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딸이 자정 가까운 시간에 문 연 음식점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게끔 만들어줬다. 그런 배달음식 시장이 요즘 심상치 않다. 고물가가 장기화되면서 자영업자들의 분노가 배달료로 쏠리는 분위기다. 특히 배달음식 업계 1위이자 올해 들어 정률제 수수료 기반의 ‘배민1플러스’ 상품을 내놓은 배민에 불만이 집중되고 있다. 서울 한 치킨집에서 치킨 한 마리와 음료를 합쳐 2만5000원을 받는다고 치자. 식당에서 팔면 주인은 고스란히 2만5000원을 손에 쥘 수 있다. 배민1플러스를 통해 주문을 받으면 중개이용 수수료(음식값의 6.8%·1700원), 배달비(3200원), 카드 결제수수료(750원), 부가가치세(565원) 등 6215원이 빠져나간다. 주인 몫이 줄어드는 데다 대폭 오른 식자재 비용, 인건비, 상가 임대료 등까지 감안하면 거의 남는 게 없다. 그렇기에 주인은 정액제가 아닌 정률제의 수수료가 부담스럽고, 과거보다 높아진 배달비에 분노한다. 하지만 배민 측도 할 말이 있다. 정률제 수수료 6.8%는 국내 경쟁사뿐 아니라 해외 동종 업계와 비교해도 가장 낮다. 음식점 주인들은 정액제 상품을 고를 수도 있다. 배달비 3200원은 배민에 귀속되는 게 아니라 대부분 라이더에게 돌아간다. 소비자들은 배달 상황을 휴대전화로 파악할 수 있어 배민이 직접 운영하는 배달 시스템을 더 원하는 측면도 있다. 양측 주장 모두 일리가 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갈등을 줄일 수 있을까. 과거 동아일보 한 선배가 칼럼에 소개했던 층간소음 방지책을 참고로 소개한다. 그 선배는 층간소음에 고통스러우면 수박 한 통을 사서 위층에 전하면서 “소음에 조금만 신경 써 달라”고 부탁하라고 조언했다. 위층에 가서 항의하거나, 관리사무실에 전화해 대처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 측면에서 배민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이 향후 7년간 외식업주 경영 지원 등에 200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최근 발표한 것은 인상 깊다. 영업이익 약 4200억 원인 회사로선 적은 돈이 아니다. 배민이 수박 한 통을 자영업자에게 내민 셈이다. 자영업자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를 보면 “정액제 상품에 가입해도 홍보 노출을 많이 해 달라”, “음식점 자체 배달 상품을 더 크게 앱에 노출해 달라” 등 불만 글들이 보인다. 그런 점까지 배려한다면 배민은 양손에 수박을 들고 자영업자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일본 닛케이평균주가 35년 치를 뽑아보면 거대한 ‘U’를 볼 수 있다. 주가는 거품 경제 최절정기였던 1989년 3만8915엔으로 정점을 찍었다가 급락했고, 그 이후 오랜 기간 횡보를 보였다가 지난달 22일 다시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 소식을 전한 니혼게이자이신문의 1면 제목이 재밌다. ‘이번엔 거품 후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 경제는 거품이 잔뜩 끼었다. 금리가 낮으니 일본인들은 은행 돈을 빌려 부동산과 주식을 샀다. ‘사면 무조건 오른다’는 믿음이 가득했다. 이런 버블 속에 주가는 치솟을 수밖에 없다. 최근 주가 상승은 인공지능(AI) 기대감에 따른 반도체 관련 주들이 이끌었다. 기업의 탄탄한 실적을 보고 외국 투자자들도 밀려들었다. 거품과는 거리가 멀다. 다시 한번 닛케이평균주가를 보자. 상승 랠리는 2012년부터 시작됐다. 그 이후 부침은 있었지만 주가는 꾸준히 올랐다. 2012년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재취임한 때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대규모 금융 완화, 재정 지출 확대, 성장 전략 등 3가지를 핵심으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내놨다. 이를 통해 시중에 무한정 돈을 공급했다. 엔화가 넘쳐나니 엔화 가치가 떨어졌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니 일본의 수출품이 싸졌다. 수출 대기업이 아베노믹스의 혜택을 톡톡히 입으면서 그 기업들이 주가를 끌어올렸다. 놀랍게도 아베노믹스 발표 이후 10년이 더 지났지만 지금도 일본 경제 정책 근저에는 아베노믹스가 흐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파로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전 세계는 2022년 전후부터 기준금리를 올렸다. 하지만 일본은 2016년부터 실시한 마이너스 기준금리(―0.1%)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엔화 약세도 여전하다. 아베노믹스에 대한 비판도 많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 문제는 아킬레스건이었다. 하지만 일본종합연구소가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 ‘기업 규모별로 본 임금 동향의 특징’을 보면, 2012년부터 10년 동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정규직 임금 격차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2012년 대기업 임금은 중소기업보다 32.5% 높았지만 2022년에는 22.6% 높은 수준에 그쳤다. 연구소는 저임금 여성 노동자가 대기업에 많이 유입됐고, 대기업 취업 빙하기(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에 입사한 이들이 간부가 되면서 고임금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점 등을 원인으로 분석했다. 아베노믹스 혜택이 대기업에 집중됐지만 아이러니하게 다른 경제적 이유로 양극화는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대기업만 살찌운다”는 비판이 무서워 일찌감치 정책을 포기했다면 일본 주가의 신기록 달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10년 이상 지속되는 경제 정책이 나올 수 있을까. 여러 이유로 쉽지 않을 것 같다. 우선 대기업에 혜택이 집중된다는 분석이 나오면 정책 입안자는 그 정책을 힘 있게 밀어붙이지 못한다. 또 5년마다 새 정권이 들어서기에, 심지어 여당이 재집권을 해도 전임자의 정책은 대체로 부정되기에 특정 정책이 10년 이상 지속되기 힘들다. 설혹 정권을 초월해 경제 정책이 추진된다고 해도 기업들이 그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특정 정권에서 너무 잘나가면 다음 정권에서 구설에 오르고, 나아가 세무조사나 검찰 조사를 받을지도 모른다. 정책 일관성이 일본에서 부린 마법을 한국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이유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2019년 가을, 일본은 또다시 열광했다. 요시노 아키라 일본 메이조대 교수가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요시노 교수는 리튬이온 배터리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았다. 노벨위원회는 “리튬이온 배터리는 화석연료에서 자유로운 사회를 가능하게 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일본이 배터리 종주국이기에 일본인들이 더 환호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시노 교수가 근무했던 기업 아사히카세이는 1985년 리튬이온 배터리 특허를 등록했고, 1990년대 소니 등이 그 배터리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일본의 배터리 산업은 2015년경 세계 시장 점유율 50%를 넘길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현재 배터리 시장에서 일본의 위상은 크게 떨어졌다.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톱10에 일본 기업으론 파나소닉만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반면 한국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가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글로벌 시장을 이끌고 있다. 물량 기준으로 친다면 CATL, BYD 등 중국 기업들이 세계 1위다. 배터리 종주국 일본은 왜 10년도 안 돼 존재감이 약해졌을까. 전기차로 바뀌는 시류를 읽지 못하면서 배터리에 대한 기술 개발과 투자에 소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훨씬 만들기 쉽다. 영국 사업가 로버트 앤더슨은 1834년 전기로 움직이는 마차를 만들었다. 내연기관차가 발명되기 30년 전이었다. 배터리만 있으면 차량이 굴러가기에 수많은 기계를 조합해야 하는 내연기관차보다 난도가 낮았다. 다만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해 내연기관차를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1920년대 미국 텍사스에서 대형 유전이 개발돼 연료비까지 떨어지자 전기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10년대 초 짧은 전기차 붐도 있었다. 전기차 구매자에게 약 2000만 원의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했던 때였다. GM 쉐보레 볼트, 닛산 리프, 기아 니로 등이 그때 탄생했다. 하지만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회 충전으로 150㎞도 달리지 못했고, 충전은 느렸으며 충전소 수도 적었다. 일본 자동차 업계는 전기차를 외면했고, 덩달아 일본 배터리 기업들도 배터리 개발에 소홀했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LG그룹은 고 구본무 회장의 지원 아래 만년 적자였던 배터리 사업을 30년간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 덕분에 중국 이외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달리는 LG에너지솔루션이 나왔다. 배터리 핵심소재인 양극재 시장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에코프로비엠의 권우석 전 대표는 “수익을 내지 못하고 투자만 해야 했던 10년여의 시간은 지옥과도 같았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털어놓기도 했다. 유럽연합(EU), 노르웨이 등 주요국들이 탄소 저감을 위해 2025∼2035년까지 내연기관차 판매를 전면 금지하기로 하면서 한국 배터리가 제대로 때를 만났다. 전기차로의 전환은 강제된 미래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자 일본은 다시 칼을 갈고 있다. 이번엔 정부가 나섰다. 일본 정부는 2022년 축전지 산업 전략을 발표하며 2030년 배터리 시장 점유율 20%를 목표로 밝혔다. 이를 위해 2030년까지 민관 합동으로 약 55조 원의 투자를 단행하기로 했다. 중국 기업은 아예 노골적인 정부 지원을 받고 있다. 거기에 연구개발(R&D)을 담당할 석박사급 인재가 매년 쏟아져나오면서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점차 줄여 나가고 있다. 한국이 지금의 배터리 경쟁력에 취해 있다면 언제든지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지난해 12월 개각을 앞둔 때였다. 언론에서 새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하마평을 쏟아냈다. 당시 특정인의 비리를 고발하는 제보를 몇 차례 받았다. ‘카더라’ 수준의 내용도 있었고, 국정감사 때 언급됐던 내용의 재탕도 있었다.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경쟁자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객관적인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에 해당될 수 있고, 제보하는 의도도 너무나 뻔했기에 각종 제보는 참고만 했다. 소유 지분이 잘게 분산돼 뚜렷한 대주주가 없는 소유분산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뽑을 때도 온갖 제보가 밀려든다. 현재 새 사장을 뽑고 있는 KT&G는 그런 제보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 사내 깊숙한 자료가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필시 특정 후보를 흠집 내기 위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언론에 자료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10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 아직 조사 중이어서 결론이 나지 않은 사안 등까지 기사화되면서 KT&G의 기업 이미지는 추락하고 있다. 소유분산기업은 정부 입김에도 강하게 흔들린다. 2022년 말 금융 당국은 우리금융지주 회장 선거를 앞두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생각한다”며 당시 회장의 퇴진을 공공연히 요구했다. KT도 작년 새 사장을 선임하기 전에 9개월 동안 정부와 여당의 노골적인 간섭을 받았다. 새로 선정된 사장이 여당의 집중포화를 맞아 자진 사퇴할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KT는 5개월간 수장 없는 권력 공백기를 보냈다. “흔들기만 하지 말고 차라리 누구를 선임하라고 지시를 줬으면 좋겠다”고 KT 내부 인사가 하소연할 정도로 KT는 혼란스러웠다. 물론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에 문제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대표의 장기 집권 문제는 심각하다. 일단 대표로 선임되면 사외이사를 포섭하고 우호 주주를 확보하며 ‘참호’를 판다. 경쟁자를 축출하면서 ‘진지’를 공고히 만든다. 참호와 진지를 만들어 놓으면 수차례 연임을 통해 장기 집권을 할 수 있다. 감시와 견제가 사라지고 보신과 자리 나누기가 횡행해지니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기 일쑤다. 그런 문제점을 바로잡겠다고 새 대표 선임 때마다 소유분산기업을 마구 흔들어선 곤란하다. 그 기업은 내부 총질, 외부 입김을 막느라 온 에너지를 다 소비해야 한다. 얼마나 소모적인가. 흔들리지 않는 기업을 만들기 위한 해법은 기업 내부에 있다. 우선 사내 경영 승계 프로그램을 탄탄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난해 별 외풍 없이 새 회장을 선출한 KB금융지주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KB금융지주는 부회장 순환 보직 시스템을 정착시켜 그들의 경쟁력을 주기적으로 평가한다. 회장 후보군이 사실상 정해져 있고 지속적으로 평가를 받으니 의외의 인물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올 여지가 적다. 삼성그룹 CEO들은 자신의 후계자를 정하고 육성하는 게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과거는 CEO 레벨의 업무였지만 지금은 팀장급까지 내려왔다. 또 사외이사가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보통 경영진으로 구성되는 사내이사와 달리 사외이사는 회사 업무에 종사하지 않고 주주들을 대신해 경영진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경영진의 허수아비가 아니라 제대로 일하는 사외이사를 만들려면 선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높은 전문성을 가진 이를 선임하며,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야 한다. 그런 사외이사가 개혁하겠다고 기업을 흔든다면, 그건 흑심을 품은 외부인이 기업을 흔드는 것과는 천지 차이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오래된 과거 이야기 한 토막부터. 2009년 경기 과천의 정부 부처를 출입할 때였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경쟁국 기업이 입찰에서 뒷돈을 건넨다. 마지막 단계에서 수출을 번번이 놓친다. 카이(KAI·한국항공우주산업)를 민영화하든가 해야지…”라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시 KAI는 8조 원 이상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사실상 공기업이었다. 정부는 KAI가 개발한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을 수출하려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수출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특히 경쟁사들은 번번이 검은돈을 뿌렸다. 설령 KAI가 민영화되더라도 입찰 때 검은돈으로 로비를 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T-50 수출에 대한 당국자의 강한 애착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돈 말고 합법적으로 지원하는 길도 많다. 그중 하나는 구매국에 돈을 빌려 주는 것이다. 세계 방위산업 시장의 가장 큰손, 미국도 방위장비 수출에서 대출의 중요성을 절감한 때가 있었다. 2000년 전후 헝가리, 체코, 폴란드가 잇달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면서 새 전투기를 구매했다. 미국 기업 등이 입찰에 참가했다. 헝가리는 2001년 9월 미국 대신 스웨덴 기업과 전투기 14기에 대한 구매 계약을 맺었다. 미국 정부는 1억 달러(약 1300억 원) 차관을 약속했지만, 스웨덴은 구매 비용 100%에 대한 금융지원을 해주겠다고 공약했다. 같은 해 12월 체코도 미국 대신 스웨덴 기업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폴란드 입찰에서 전투기 구매 금액 100% 대출을 약속했다. 결국 미국 기업은 2002년 10월 폴란드로부터 F-16 전투기 48기 계약을 따내게 된다. 미국 정부는 지금도 대규모 금융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수출입은행 등을 통해 금융지원을 한다. 폴란드가 2022년 8월 KAI의 FA-50 전투기 등 17조 원어치를 구매하는 1차 계약을 맺었을 때 수은은 6조 원을 폴란드 정부에 빌려줬다. 폴란드 정부는 그 후로도 추가 계약을 통해 30조 원 이상의 한국산 무기를 구매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수은법상 수은은 동일한 대출자에 대해 자기자본(18조 원)의 40%(7조2000억 원) 이상을 대출할 수 없다. 폴란드와의 1차 계약에서 6조 원을 대출해 줬기에 추가 대출을 해 줄 여력이 거의 없는 것이다. 수은의 대출이 막히자 한국 방산 기업들은 작년에 끝냈어야 할 2차 계약을 아직도 제대로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다. 해결책은 있다. 수은법을 개정해 수은의 자본금을 늘리면 된다. 이미 여야는 현재 15조 원인 수은의 자본금을 25조∼35조 원으로 상향하는 법안을 여럿 제출했다. 자본금을 늘려 놓으면 향후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 건설 사업,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 사업 등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11월 국회 기획재정위 경제재정소위에 개정안이 올라온 뒤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4월 총선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새해 들어 동유럽, 중동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에 승자는 없다지만 방위산업은 예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상반기 세계 주요 방산 기업 15곳의 수주액이 7640억 달러로 2022년 연간 수주액(7776억 달러)과 맞먹는다고 보도했다. 폴란드와 예정된 추가 계약액 약 30조 원은 저출생 극복을 위해 매년 투입하는 재정 혹은 작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과 동일한 규모다. 그 돈을 이대로 날릴 것인가.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일본 도쿄로 여행 가면 ‘7분간의 신칸센 극장’을 볼 수 있다. 고속철 신칸센이 도쿄역으로 들어오면 12분간 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한다. 청소 용역업체는 승객들의 승하차 시간 5분을 뺀 7분 동안 청소를 한다. 그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보여 신칸센 극장이란 별명이 붙었다. 1개 팀이 22명으로 이뤄져 있는데, 한 사람이 약 100석의 열차 한 칸을 맡는다. 좌석과 앞주머니의 쓰레기를 바닥에 떨어뜨려 쓸고, 좌석을 출발 방향으로 돌리며 등받이 테이블을 펴 헝겊으로 닦는다. 창틀 오물도 제거하고 승객 분실물까지 체크하며 더러워진 좌석 커버도 교체한다. 작업량이 꽤 많은데, 어떻게 7분 만에 끝낼 수 있을까. 도쿄 특파원 시절 신칸센을 탈 때마다 꼼꼼하게 지켜봤더니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 승객들이 자리에 쓰레기를 남기지 않았다. 하차하러 일어서면 의자 등받이를 예외 없이 제자리로 맞췄다. 청소부들이 마법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승객’이란 훌륭한 조연 덕분에 가능했다. 2일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일어난 여객기 사고를 보면서 신칸센 극장이 떠올랐다. 사고기에 탔던 승객이 찍은 영상에 긴박했던 당시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항공(JAL) 여객기가 착륙 도중 해상보안청 항공기와 충돌한 후 3분 정도 지나 멈춰 섰다. 기내 연기가 가득 찼고, 여기저기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승무원은 “코와 입을 막고 몸을 낮추세요”, “괜찮아. 침착해 주세요”라고 고함치듯 말했다. 그때 승객들도 절규하듯 고함을 질렀다. “빨리 나가게 해 주세요”, “문을 열면 되잖아요”…. “뭐하는 거야”라며 화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승객들은 기본적으로 승무원의 지시에 따랐다. 실제로 입과 코를 막고 몸을 숙였다. 간혹 일어서서 바깥 동정을 살피는 사람도 보였지만 극소수였다. 그 덕분에 생사 갈림길에서 생(生)으로 가는 길인 ‘통로’가 뚫려 있었다. 먼저 살겠다고 일어나 통로로 몰렸다면 대형 참사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충돌 후 8분이 지난 시점에 승객들의 탈출이 시작했다.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오는 승객을 살펴봤더니 대부분 빈손이었다. 가방을 든 사람은 1명이었다. “(선반에서) 짐을 내리지 말아 달라”라는 승무원의 지시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너도나도 짐을 챙기다간 역시 통로가 막혔거나 슬라이드를 내려올 때 방해가 돼 탈출이 지연된다. 여객기가 전소하는 대형 사고 속에서 탑승자 379명 전원이 무사했던 기적은 승객들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비자들 역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기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부정확한 사실 혹은 악의적 잣대로 기업을 공격하는 내용을 인터넷 댓글로 달면 기업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다. 악성 댓글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연 35조3480억 원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반대로 소비자가 기업의 선한 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다. 2020년 11월 전남 영광 중앙초등학교 6학년 2반 학생들은 우유 제품에 붙어 있던 200개 빨대를 뜯어내 손 편지 29통과 함께 매일유업으로 보냈다. 편지 내용은 ‘빨대가 바다 생물들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매일유업은 곧바로 자사 우유 제품 포장지에 붙인 빨대를 퇴출시켰다.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플라스틱 포장재를 줄이고 있다. 지난해 말 컵커피 제품의 플라스틱 뚜껑과 빨대도 없앴다. 초등학생들의 행동은 기업이 사회적 의무를 다하게끔 만드는 마법의 단초가 된 셈이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수조 원짜리 공장을 지을 장소를 찾는다고 치자. 대형 고객이 가까운 곳, 원자재를 구하기 쉬운 곳, 인건비가 싼 곳, 투자비를 줄일 수 있는 곳….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나 많다. 만약 투자비를 줄이는 데 방점을 찍는다면 ‘일본’만 한 곳이 없다. 대만 TSMC는 현재 일본 구마모토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공장을 짓고 있는데 총투자비용 11조2000억 원 중 4조5600억 원을 일본 정부로부터 보조받았다. 만약 한국에 공장을 짓는다면 혜택은 어느 정도일까. 작년 3월 온갖 진통 끝에 국회를 통과한 반도체 지원책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에 기초한 혜택을 뽑아 봤다. 그 효과를 반감시키는 최저한세 영향은 제외했다. 작년에 공장을 지었다면 혜택을 100% 누려 2조8000억 원을 세액공제로 돌려받을 수 있다. 올해 짓는다면 투자증가분 추가세액공제 10%가 사라져 혜택은 1조6800억 원으로 줄어든다. 만약 내년에 지으면 K칩스법 일몰로 8960억 원 세액공제밖에 없다. 4조5600억 원과 8960억 원. 너무나 큰 차이다. 미국, 대만, 유럽 주요국 등도 자국으로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일본만큼 강력하진 않다. 한국과 일본에 똑같은 파운드리 공장을 지어 10년간 운영할 경우 일본에서 만든 제품이 한국보다 원가경쟁력을 10% 이상 가진다는 게 반도체 업계의 분석이다. 일본산 제품이 그만큼 싸지는 셈이다. 보조금이 부린 마법이다. 일본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2021년 3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 검토회의를 눈여겨봐야 한다. 경제산업성 홈페이지에 게재된 회의 요약본 첫 부분은 이렇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재부흥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 반도체 산업에 대한 큰 위기감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다. 기회는 있지만, 지금부터 힘을 쏟지 않으면 힘들다.” 전체 자료를 읽어 보면 마치 반성문을 보는 것 같다. 1980년대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 반도체 산업이 지금은 존재감 없이 무너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자료에 적힌 ‘일본의 나락’이란 소제목도 꽤 자극적이다. 일본 국회는 크게 각성한 정부를 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2021년 5월 일본의 집권 자민당 의원 100명이 모여 만든 ‘반도체전략추진의원연맹’이 핵심 축이다. 의원연맹은 “반도체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면서 정부 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경제산업성은 같은 해 6월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을 발표했다. 거기엔 3단계 전략이 나온다. ①일본 내 첨단 반도체 생산 기반 확보 ②차세대 반도체 기술 확보 ③반도체를 활용한 미래 산업 주도 순이다. 발표 후 3년도 안 돼 일본은 파운드리(TSMC, PSMC), D램(마이크론), 후공정(TSMC, 인텔) 분야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공장을 유치했다. 낸드플래시(키옥시아), 자동차용 반도체(르네사스), 이미지 센서(소니) 분야에선 일본 토종 기업이 힘을 쓰고 있으니 일본은 사실상 모든 종류의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보했다. 앞으로 ②, ③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한국은 ‘메모리 강국’이란 현 위치에 도취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일본이 한국 기업에도 공장 유치 제안을 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 이윤을 따라 기업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기에 애국심만으로 붙잡기에는 한계가 있다. 10년쯤 지나면 일본이 썼던 반도체 반성문을 한국이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매년 과학계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연구자 10인을 선정한다. 올해 ‘네이처 10’에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챗봇 ‘챗GPT’도 이름을 올렸다. 사람이 아닌 기술이 선정된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챗GPT는 올 한 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올해 봄 동아일보 주최 아카데미에서 ‘질문하는 인간, 답하는 AI’ 수업을 들으면서 챗GPT를 경험한 적이 있다. 강사가 ‘밤까지 공부하는 수강생들을 위한 격려사를 써 줘’라고 입력창에 적었다. “저녁이 깊어지는 시간, 여러분이 밤에도 열정적으로 공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감동적입니다….” 원고지 3장 분량의 격려사가 1초 만에 뚝딱 만들어졌다. 주최 측이 그 원고를 수정 없이 사용해도 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강사는 “명령어를 자세히 넣을수록 완성도가 더 높아진다”고 했다. 예를 들어 챗GPT에 대표이사의 신년사 2년 치를 입력한 뒤 “참고해 내년 신년사를 써달라”고 하면 대표이사의 생각까지 반영한 글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 수업에서 그림도 만들어봤다. 명령어만 입력하면 되기에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만든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가족이 식사하는 그림을 만들었는데, 배경을 미국 그랜드캐니언이나 프랑스 에펠탑 등으로 손쉽게 바꿀 수 있었다. “피카소 화풍으로 바꿔 달라”고 했더니 그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챗GPT의 영향력은 각종 포럼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은행의 변화상을 짚은 베스트셀러 ‘뱅크 4.0’의 저자 브렛 킹은 5월 말 동아국제금융포럼에서 “앞으로 은행은 챗GPT를 활용하는 곳과 활용하지 않는 곳으로 나뉠 것이다. 활용하지 않으면 그만큼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이달 초 열린 동아비즈니스포럼에 참가한 아제이 아그라왈 토론토대 로트먼경영대학원 석좌교수도 “AI 선발주자에게 모든 기회가 집중될 것이기에 선발주자를 관망하는 후발주자는 영구적으로 뒤처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만능처럼 보이는 챗GPT가 기자를 대신할 수도 있을까. ‘노키아의 휴대전화 사업 부진이 핀란드 경제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칼럼을 써 줘’라고 챗GPT에 입력해 봤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일부 팩트는 틀렸고, 휴대전화 사업 부진 이유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으며, 결론도 ‘다양한 신산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수준에 그쳤다. 챗GPT 역할을 도우미 정도로 낮춰 봤다. 핀란드의 경제성장률을 2000년부터 올해까지 뽑아줄 것을 지시하자 이번에는 깔끔하게 데이터가 제시됐다. 교차검증을 위해 또 다른 생성형 AI 플랫폼 ‘뤼튼’에도 똑같이 명령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서로 달랐다. 챗GPT와 뤼튼에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기준으로 실질경제성장률을 뽑아 달라’고 더 구체적으로 입력했지만 여전히 양측 숫자는 달랐다. 챗GPT에 대한 매력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11월 30일로 챗GPT가 출시된 지 1년이 됐다. 챗GPT는 산업계의 일하는 방식을 바꿔 놓고 있고, 음악 미술 출판 등 창작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척수병과 관련된 진단에서 겨우 4% 정확도(일본 도쿄의과치과대 연구진 연구 결과)를 보일 정도로 허술하기도 하다. 핀란드 경제성장률 사례처럼 진짜인지 허위인지 모를 정보를 버젓이 내놓기도 한다. 챗GPT를 혹시라도 요술방망이로 인식하면 곤란하다. 개인이나 기업이 챗GPT를 이용한다면, 챗GPT를 통해 처리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작업부터 하길 조언한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일본에 기업 주재원으로 파견 가면 일본 도착 첫날에 가장 먼저 휴대전화를 개통한다. 그래야 집을 구할 수 있고, 은행 통장을 만들 수 있다. 휴대전화가 제2의 신분증인 셈이다. 가족 3명이 휴대전화를 개통하면 한 달 통신요금은 10만 원을 훌쩍 넘는다. 부담스럽다. 그렇기에 정부는 공공연히 이동통신사에 통신비를 낮추도록 압박했다. 일본 이동통신 시장은 NTT도코모, KDDI, 소프트뱅크 등 3개 회사가 삼등분하고 있는데, 정부가 신규 사업자의 시장 진입을 지속적으로 유도했다. 여기까지는 한국과 상황이 똑같다. 하지만 2019년 일본 인터넷 전자상거래 업체인 ‘라쿠텐’이 이동통신 시장에 뛰어들면서 한국과 상황이 달라졌다. 알뜰폰 사업을 하던 라쿠텐이 자체 통신망을 구축해 명실상부한 제4 이동통신사가 된 것이다. 2005년 소프트뱅크에 이어 14년 만에 새 사업자가 생겨났다. 사실 이동통신 시장에서 신규 사업자가 탄생하기는 매우 어렵다. 네트워크 인프라 구축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유지·보수를 위한 비용도 꾸준히 들어간다. 하지만 라쿠텐은 “2025년까지 6000억 엔(약 5조3000억 원)을 투자해 기지국 등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하며 과감하게 도전장을 냈다. 4년이 지난 현재 라쿠텐은 어떤 상태일까. 꾸준히 흑자를 내며 성장하던 라쿠텐은 모바일 사업 진출 이듬해인 2020년에 곧바로 적자로 돌아섰다. 그 이후 매년 적자 폭이 커지면서 지난해에는 3716억 엔 영업적자를 보였다. 특히 4615억 엔이란 막대한 영업적자를 낸 모바일 부문이 전자상거래, 금융 등 다른 부문의 영업이익을 깎아먹었다. 그만큼 이동통신 신규 사업자가 짊어져야 할 짐은 무겁다. 다만 새 사업자가 생기면 소비자는 즐겁다. 라쿠텐이 1GB까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0엔 플랜’ 등 파격 상품을 잇달아 내놨기에 소비자들은 통신비를 줄일 수 있었다. 경쟁사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유사한 상품을 내놨다. 라쿠텐 출현 이후 1위 사업자인 NTT도코모의 시장 점유율이 줄었고 전체 경쟁은 촉진됐다. 한국 정부도 분명 이 같은 효과를 기대하며 최근 제4 이통사 모집에 나섰을 것이다. 정부는 2010년부터 7차례에 걸쳐 제4 이통사 도입을 추진했지만 예외 없이 실패했기에 이번에는 혜택을 대폭 늘렸다. 주파수 가격을 낮췄고, 금융 및 세제 혜택도 제시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고위 당국자는 사석에서 “특혜 시비가 불거지더라도 과감하게 혜택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사업자 모집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정부가 재무적 부담을 줄여줄 수는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모래주머니를 없애주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 사업자가 초창기 막대한 출혈을 감내한 이후 통신업 특유의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치자. 그때부터 소위 ‘횡재세’ 걱정을 해야 할지 모른다. 현 야당이 은행 등에 횡재세를 매기겠다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향후 정권이 바뀌면 특혜 시비가 불거질 수도 있다.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할 당시 엄청난 지출을 감수했다는 사실은 어느새 잊혀지고, 당장 현 시점에서 손쉽게 이익을 내고 있다는 점만 눈에 보일 수 있다. 일이 되게끔 만들기 위해 특혜를 언급한 고위 공무원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이런 모래주머니까지 달고 달려야 하는데 한국에서 누가 이동통신 사업을 하겠다고 손을 들겠는가.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