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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암웨이센터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재선 도전 출정식을 취재했을 때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단에 서기 전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트럼프의 ‘영적 조언자’로 알려진 여성 전도사 폴라 화이트였다. 그는 무대에 올라 “트럼프 대통령을 반대하는 모든 ‘악마의 네트워크’가 무너지게 하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지옥과 적의 전략을 이겨내고 운명과 소명을 다할 것”이라고 큰소리로 기도했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적대시하는 기도에 환호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며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진 미국의 ‘부족주의 정치’ 현실을 실감했다.친구와 적으로 구분하는 ‘트럼프 월드’ 재선을 노렸던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확산 충격으로 2020년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세상을 적과 친구로 나누는 ‘트럼프 월드’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미국 우선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 유권자들은 올 11월 제47대 미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몰아주며 그를 다시 선택했다. 트럼프를 겪을 만큼 겪고 내린 두 번째 선택이니 진짜 민심을 반영한다고 봐야 한다. 미국인의 지지와 1기 학습효과가 생긴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2주도 안 돼 2기 행정부 주요 인선을 거의 마무리할 정도로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에서 “트럼프 1기 때는 행동이 정치적 수사와 달랐지만 이번에는 제약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럼프 재집권 리스크는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됐고, 세계는 바삐 움직이고 있다. 한국처럼 막대한 대미 흑자를 내고 있는 유럽연합(EU)은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구매를 통해 무역흑자 폭을 줄이는 대안을 고려하고 있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는 트럼프 당선인에게 자국 천연자원 접근권이나 투자자 심사 권한 등을 부여하는 ‘승리 계획’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고 60%의 고율 관세가 예고된 중국은 트럼프 1기 때 무역전쟁을 치르며 미국에 대한 교역 의존도를 낮춰 과거보다 피해가 덜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트럼프 포비아’ 현실화, 우리 하기에 달려 문제는 한국이다. 2016년 트럼프 등장에 놀라고, 8년 뒤 재집권에 다시 당황하고 있다. 미국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가장 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나라지만 대중·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고 산업도 무역전쟁의 직격탄을 받는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 등에 편중돼 있기 때문이다.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다가 막상 위험이 코앞까지 닥치면 어쩔 줄 모르고 당하는 ‘회색 코뿔소’ 리스크를 없애려면 한 번 더 고민하고 한 발 더 빨리 행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EU의 구상처럼 미국산 LNG 수입을 늘리거나 미국산 원유 도입으로 대미 무역흑자를 줄일 수 있겠으나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첫 방미 때 이미 꺼냈던 카드이며 그냥 될 일도 아니다. 중동보다 먼 미국에서 LNG나 원유를 들여오려면 운송비 비축비 등의 추가 지원이 필요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환경청장으로 지명한 리 젤딘 전 하원의원은 “트럼프는 ‘친구는 친구처럼, 적은 적처럼 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다. 1983년 완공된 뉴욕 트럼프타워 건설 책임자였으며 트럼프 당선인과 18년간 일했던 바버라 레스는 2017년 제작된 넷플릭스의 4부작 다큐멘터리 ‘트럼프: 미국인의 꿈’에 출연해 “트럼프는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공격한다. 더 세게 반격한다. 약한 사람도 공격한다. 약점을 알고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미국에 이익에 도전하는 포식자나 약점이 잡힌 약자로 인식되면 트럼프의 공격을 피하기 어렵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전 나토 사무총장의 말을 빌리면 트럼프 공포의 실현 여부는 우리 하기에 더 달려 있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지난 주말 K-팝 스타 블랙핑크 로제와 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함께 만든 ‘APT.’ 뮤직비디오 영상이 공개됐다. 두 팝스타의 협업은 단연 화제였다. 영상은 공개 하루 만에 유튜브 조회 수 4000만 건을 훌쩍 넘었다. ‘21세기 마이클 잭슨’으로 불리는 브루노 마스가 K-팝 스타와 함께 음원과 뮤직비디오를 만들 것이라고 10년 전엔 상상이나 했겠나. K-팝은 아시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 단계 더 진화했다.브루노 마스와 협업 만든 ‘K-소프트파워’ 두 스타의 만남만큼 흥미로운 건 음악에 깔린 진한 한국 감성 코드다. 영어로 노래를 부르지만 소재는 한국 젊은이들의 술자리 게임이다. 브루노 마스가 ‘아파트 게임’을 하며 벌주를 마시고, 노래 중간에 “건배”를 외치거나 태극기를 흔드는 영상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한국 문화에 빠진다. 아파트먼트를 한국식으로 줄인 아파트를 구글로 검색하고 한국 청년들의 술자리 문화를 궁금해한다. 뉴욕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한 교포는 “요즘 K자만 붙어도 인기”라며 “코리아타운 한국 노래방은 예약해야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김치 불고기 김밥 등 한국 음식이 유행하면서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의 반찬을 소재로 한 대담까지 열렸다. 미국인에게 ‘사이드 디시(side dish)’라고 설명하던 반찬은 이제 우리말 그대로 ‘Banchan’이라고 쓴다.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기 때문이다. 세계인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운다는 건 K-콘텐츠 경험을 촉진하는 소비자본(Consumption Capital)이 세계 시장에서 차곡차곡 축적되고 있다는 뜻이다. K-콘텐츠가 소비될수록 문화와 지식을 토대로 한 소프트파워(연성권력)가 커지고 한국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에 도움을 주는 ‘코리아 프리미엄’이 생긴다. K-푸드가 인기를 끌면 한국식 젓가락, 그릇, 식재료 등 관련 상품과 한국 음식 체인점 같은 다양한 서비스 수출도 늘어난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K-콘텐츠를 1억 달러 수출할 때 소비재 수출이 1억8000만 달러 증가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K-콘텐츠의 성가에 박수만 칠 게 아니라 소비자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산업적, 경제적 부가가치를 키워야 한국 경제의 활로가 뚫린다.‘하드파워’ 중국과 맞설 소비자본으로 키워야 K-콘텐츠가 쌓아올린 소프트파워는 과학기술과 제조업을 무기로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남중국해에서 주변국과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하드파워와 시장에서 차별화할 수 있는 경쟁력이다. 필리핀 매체 필리핀스타의 편집장은 칼럼에서 “필리핀인은 K-팝 K-드라마 떡볶이 빙수 삼겹살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며 “한국은 해상 영토를 빼앗거나 경제적 협박으로 교역 상대국을 소외시키지 않고 소프트파워를 이용해 세계를 정복했다”고 평가했다. 소프트파워는 중국 밖 시장을 개척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한국은 1970, 80년대 중동에서 건설 노동자들을 보내 달러를 벌었고 2000년대는 중동 원전 수출에 도전했다. 요즘은 엔터테인먼트, 로봇, 인공지능(AI) 등의 소프트파워로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와 기술 협력을 추진하고, CJ그룹 이재현 회장이 사우디를 방문해 엔터테인먼트 등에 대한 투자와 협력을 논의할 정도로 중동도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인정하고 있다. 한국은 미 US뉴스와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이 발표하는 문화적 영향력 순위에서 2017년 세계 31위에서 올해 7위로 상승했다. 일본은 5위, 중국은 14위다. 일본을 따라잡고,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려면 소프트파워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집중 투자가 더 필요하다. 브루노 마스와 로제의 협업처럼 세상을 놀라게 하는 도전도 더 많아져야 한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 틈만 나면 경제 성과를 자랑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실패하고 난 뒤엔 ‘관세 폭탄’으로 얻은 미중 경제 전쟁의 성과가 대단하며 미 증시가 얼마나 잘나가는지를 부쩍 강조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에 지친 민심은 냉랭했다. 그는 결국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패했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얘기보다 권력자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국뽕(자국 찬양) 경제’로는 민심을 크게 얻기 어렵다.이탈리아-일본 따라잡는다 해도 민심 냉랭 정치 지도자들은 민심이 흔들리면 경제 성과를 강조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국뽕 경제’가 단골로 등장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코로나19 위기 때인 2021년 1월 신년사를 통해 “1인당 국민소득이 사상 처음으로 주요 7개국(G7) 국가를 넘어설 것”이라며 “14년 만에 주가 3,000시대를 열며 주요 20개국(G20) 중 가장 높은 주가 상승률을 기록했다”고 자랑했다. 최악의 집값 급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상황에서 이탈리아를 앞지른 1인당 소득과 주가 자랑은 민심을 파고들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결국 ‘부동산 실정’의 책임을 안고 2022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3년 만에 일본을 턱밑까지 따라잡고 세계 수출 5대 강국의 자리를 바라보게 됐다”며 “작년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넘어섰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수출 증가를 ‘블록버스터급’이라고 평가한 외신 보도도 언급했다. 대통령의 말처럼 과거에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이 눈앞의 현실이 됐는데도 지지율은 여전히 낮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통계 숫자로 경제를 얘기하지만, 기업인과 서민들은 시장에서 가슴으로 직접 느낀다. 자영업자들은 경제가 살아나고 수출이 블록버스터급이라는데 내수는 왜 나쁘고 장사는 안 되는지 더 궁금하다. 청년들은 열심히 일해서 집도 장만하고 결혼도 하고 싶은데 질 좋은 일자리도, 알맞은 주택도 별로 없다고 하소연한다. 30, 40대 중년들은 빚을 갚느라 쓸 돈이 별로 없고 50대 이상은 자산 격차를 실감하며 노후를 걱정한다. 민생과 직결된 일자리와 소득, 집값과 가계빚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데 수출과 국민소득과 같은 거시경제 지표로 서민의 가슴을 두근두근 뛰게 만들긴 어렵다. 금융투자세나 전 국민 25만 원 지급이 민생 정치라고 우기는 여야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지지율이 왜 오르지 않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대통령은 수출이 잘되고 있다고 하지만 기업 현장은 살얼음판이다. 미국과 유럽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내리며 경기 침체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독일 폭스바겐, 벤츠까지 밀어내고 있는 중국산 전기차의 공세는 매섭다. 국내 가전회사 최고경영자(CEO)는 “중국은 이제 무서워해야 할 대상”이라고 긴장한다.국민 눈높이에서 ‘설득의 소통’ 노력해야 위기 상황에서 희망의 길을 제시하는 건 지도자의 책무다. 그렇다고 알리고 싶은 것만 알리면 반향이 없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공감과 이해-문제의 인정-가능한 대안 제시-최적의 해법 선택’의 순이다. 민생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제대로 된 해법도 제시할 수 없으니 민심을 움직일 수도 없다. 공감과 이해, 문제 인식보다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는 국뽕 경제 인식이 앞서면 코로나19 위기로 분노한 민심에 주가 성적표를 들이대고, 집값 급등에 화난 사람들에게 1인당 소득 자랑을 하는 ‘소통 참사’가 일어난다. 진짜 민생은 그들의 자랑이 아닌, 말하지 않은 것에 있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미국 연방법원이 최근 “구글은 독점기업”이라고 판결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와 애플 구글 등 빅테크(대형 기술기업)의 반독점 소송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법률가인 리나 칸 미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과 조너선 캔터 법무부 반독점국장(차관보)이 이끄는 ‘빅테크와의 전쟁’에서 ‘경제 브레인’ 역할을 한 이가 경제학, 수학,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고 인공지능(AI)과 데이터 분석 등을 통한 ‘기술경제학’을 개척한 수전 에이시 미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54)다. 에이시 교수는 2007년 전미경제학회가 40세 이하 최고의 경제학자에게 수여하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여성 최초로 수상했다. 지난해 전미경제학회장을 지냈다. 남편인 휘도 임번스 스탠퍼드대 교수 역시 2021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경제학자다. 7월 미 법무부를 떠나 스탠퍼드대로 복귀한 에이시 교수를 서면으로 만났다.》―미 법무부가 당신과 같은 기술 경제학자, 컴퓨터 및 데이터 전문가를 왜 영입했나.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는 스타트업 등이 기존 기업과 경쟁해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2022년 법무부에 부임했을 때 50명 이상의 경제학 박사와 약 10명의 통계학자로 구성된 ‘경제팀’이 있었다. 여기에다 데이터 과학자와 기술 전문가로 구성된 새 팀을 보강했다. 이들이 경제학자들과 함께 투입돼 기업 합병을 검토하고 조사 업무에 신기술을 도입했다.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을 이용한 담합을 조사할 때 소프트웨어 코드를 분석하고 담합에 이용된 머신러닝 기술을 평가했다.” ―법무부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인가. “2023년 기업결합 심사지침(Merger Guidelines)을 만드는 팀을 이끈 일이다. 이 지침에는 여러 가지 혁신이 담겼다. 첫째, 기업결합을 평가할 때 고려할 주요 이론을 하나의 문서에 담았다. 둘째, 여러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나 직접 경쟁하지 않는 기업과의 합병이 신규 경쟁자의 진입을 막는 장벽을 만들어 가격을 올리거나 생산을 저해할 수 있는 경우를 명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7월 “플랫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기업결합 심사 가이드라인 재검토를 권고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시장은 이를 ‘빅테크와의 전쟁’ 선포로 받아들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거뒀나. “플랫폼 관련 기업결합에 적용할 수 있는 경쟁 제한 관련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했고 기업결합이 노동시장 경쟁에 미치는 영향도 명시했다. 예를 들어 같은 마을에 있는 두 병원이 합병하면 간호사 채용을 줄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노동시장의 경쟁을 저해하고 환자 서비스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법무부가 내놓은 2023년 7월 기업결합 심사지침 개정안에는 한 기업이 다른 기업들을 잇달아 인수할 경우 개별 거래가 아니라 전체 거래를 보고 시장 지배력 변화 등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과 잠재적 진입자를 배제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기업결합이 기업 간 구인 경쟁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도 추가됐다. 기업 인수합병(M&A)를 통해 빠르게 몸집을 불리고 있는 빅테크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빅테크 플랫폼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데 반독점 규제가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아닌가. “미국 반독점 당국은 100년도 더 된 몇 개 법률을 집행하고 있다. 독점 관련 판례는 1960년대 IBM, 1990년대 마이크로소프트(MS), 2023년 구글 등으로 극히 적다. 2010년대 초만 해도 규제 당국이 기술, 시장 지배력의 원천, 기술 기업의 운영 방식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빅테크가 수백 개의 기업을 연달아 인수하자 당국이 더 공격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이 제기됐다.” ―지금은 어떤가. “상황이 달라졌다. 경쟁 정책 담당자들이 업무를 수행하려면 기술, 플랫폼, 최신 비즈니스 모델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안다. 심지어 규제 당국 수장들이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 AI 공부를 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이 결과 최신 기업결합을 평가하는 경제학적 틀이 새 기업결합 심사지침에 반영됐다.” ―빅테크 독점을 막으려면 인접 분야나 비관련 분야의 인수합병까지 규제해야 하나. “그렇다. 합병으로 인해 시장 경쟁이 감소한다면 규제해야 한다. 독점기업은 종종 자사 제품의 유통을 통제할 수 있는 기업을 인수하고, 이런 유통 수단을 자사 제품에 유리하게 활용한다. 보완적인 제품을 인수해 시장을 독점적으로 만들고 다른 기업이 진입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빅테크 플랫폼이 검색, 쇼핑, 동영상, 뉴스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빅테크의 독점 여부를 판단할 때 시장을 어떻게 획정해야 하나. “반독점 시장은 기업결합으로 사라질 수 있는 경쟁이 있는 분야로 볼 수 있다. 한 건의 기업결합이 여러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차원의 경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기업이 여러 제품이나 서비스를 묶음(bundle)으로 판매하면 기업결합이 묶음 제품 구매나 묶음 제품 중 일부와 관련한 시장 경쟁을 훼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업결합으로 경쟁의 편익을 잃는 고객이 있느냐는 점이다.” ―빅테크 플랫폼이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키거나 뉴스를 독점한다는 문제가 있다. “언론사가 생존하려면 고객을 유인할 역량이 있어야 하며, 뉴스 콘텐츠를 접한 이용자가 해당 언론사의 브랜드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고객이 이 언론사를 다시 찾고 구독을 한다. 빅테크 플랫폼은 두 가지 측면에서 언론사를 어렵게 한다. 첫째, 중개인(middle men) 역할을 하며 많은 광고비를 가져간다. 둘째, 클릭을 유인하는 낚시성 헤드라인으로 뉴스 브랜드의 중요성을 떨어뜨린다.” ―빅테크의 뉴스 독점을 막기 위한 해법은. “언론사들은 전통적으로 광고 수입에 의존한다. 광고주가 지불하는 비용의 대부분이 뉴스 플랫폼이 아니라 언론사에 돌아가는 광고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고품질 뉴스를 찾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사람들은 자극적 콘텐츠에 대한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허위 정보와 여론 조작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디지털 문해력(digital literacy) 교육 과정도 효과가 있다.” ―독점 빅테크 플랫폼은 분할 명령을 내려야 하나. 소비자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경쟁은 일반적으로 소비자에게 이익이 된다. 우리는 현재의 소비자뿐 아니라 미래의 소비자도 고려해야 한다. 독점 기업이 반경쟁적 방법으로 신규 경쟁자의 진입을 막을 수 있다면 그 기업이 미래에도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의 제품과 혁신을 소비자에게 제공할까. 우리는 이미 비대해진 소프트웨어, 고객 서비스 실종, 지배력을 위협하는 기술 변화에 저항하는 기업들을 목격하고 있다. 공격적인 반독점법 집행은 소비자 편익에 도움이 된다. 타협안은 없다. 독점기업은 손해를 볼 수 있지만 수천 곳의 혁신적 중소기업이나 수백만 명의 소비자들은 이익을 얻는다.” ―AI와 로봇 기술을 이용한 담합을 우려했는데. “기업이 AI 알고리즘을 이용해 가격을 책정하고 상대방 기업에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되면 알고리즘은 가격을 높게 유지하는 방법을 학습할 가능성이 크다.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의 가격 인하에 곧바로 대응해 가격을 내리면 먼저 가격을 내린 기업은 이득을 보기 어렵다. 이런 식으로 경쟁사 가격에 대한 모니터링이 자동화되고 가격이 유지된다. 불법 행위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해도 역시 불법이다. 알고리즘은 담합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 특히 소수의 기업에 집중된 산업에서 더 쉽게 이뤄질 수 있다.” ―유럽과 한국에선 시장 지배력이 큰 빅테크 플랫폼을 ‘지배적 사업자’로 지정하고 사전 감시하려는 시도가 있다. “상당한 시장 지배력을 가진 플랫폼에 대해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플랫폼의 시장 지배력이 경제 전반에 걸쳐 세금처럼 작용하고 신규 기업의 진입과 혁신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 지배력을 통해 얻는 이익이 너무 커서 벌금을 감수하고 반독점법을 위반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면 사전 감시가 필요할 수 있다.” ―AI와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많은 나라들이 고령화로 노동력 부족에 직면하고 있다. 보건 및 노인 돌봄과 같은 분야가 그렇다. 기술을 이용해 보건 및 노인 돌봄 문제를 해결하고 교육과 경험이 부족한 노동자가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다면 인력 부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경쟁 촉진 정책은 자동화로 절감된 비용을 가격 인하라는 형태로 소비자에게 돌려주게 할 수 있다. 경제 전반에 이익이 되고 소비자는 다른 상품과 서비스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할 수 있게 돼 일자리도 늘어난다. 하지만 기업이 자동화로 인건비를 줄여 얻은 이익을 소비자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불평등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할 것이다. 그런 경우 더 많은 재분배가 필요하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을 위한 지원도 더 많이 필요하다.” 그는 미 실리콘밸리 등에서 나오는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정책 대안을 얘기했다”는 말로 대신했다. 에이시 교수는 연세대에서 수여하는 제15회 조락교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이달 말 한국을 방문한다. 연세대 경제연구소 AI임팩트랩과 스탠퍼드대의 AI 안전과 관련한 연구 협력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그는 “한국 학자 및 리더들과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기술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시기에는 세계 전문가들과 정책 문제와 해법을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수전 에이시 교수는△1970년 미국 보스턴 출생△1991년 미 듀크대 졸업(경제학 수학 컴퓨터과학 복수전공)△1995년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마이크로소프트 등 근무△2007년 여성 최초로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 수상△2022∼2024년 미 법무부 반독점국 수석 경제학자△현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전자상거래 플랫폼인 티몬·위메프(티메프) 미정산 사태는 국내 이커머스 역사상 최악의 금융사고다. 이번 일로 4만8124개 업체가 1조2790억 원의 판매 대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대형 전자금융사고의 위험 신호를 사전에 감지하고도 사태를 막지 못한 금융감독 실패의 책임이 무겁다. 지난달 말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금융감독원이 티몬과 위메프의 경영 부실을 사전에 파악하고도 막지 못했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금감원이 두 회사와 경영개선협약(MOU)을 맺고도 이행 계획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복현 금감원장은 3월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사태와 관련해 사과한 지 넉 달 만에 “송구하다”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금융감독 실패로 두 번 사과한 이복현 검사는 범인을 단죄하는 데 능하지만 할리우드 SF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설정처럼 앞으로 일어날 사건사고까지 예단하고 처벌할 순 없다. 검찰 출신 이 원장이 ‘금융검찰’처럼 검사와 제재 권한을 휘두르며 금융권을 긴장시키는 ‘메기’ 역할을 하고 있지만,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 금융사고를 예방해야 하는 감독 업무에서는 한계를 드러냈다. 금융권에서 “검찰 출신 금감원장이 오면 금감원의 역할이 예방적 감독보다 사후적 검사와 처벌에 쏠려 ‘금융검찰청’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는데, 그가 두 번씩이나 감독행정 실패를 사과한 것을 보면 틀린 얘긴 아니다. 이 원장이 자신의 지위를 검사와 감독 업무를 담당하는 금감원장보다 검사와 제재 권한을 틀어쥔 ‘금융검찰청장’으로 포지셔닝했기 때문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원장은 역대 금감원장과 달리 지배구조, 시장 금리 등 다양한 정책 현안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긴축을 해야 할 때 금리 인하를, 금리 인하 시점에 대출 금리 인상을 유도해 시장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시장에선 ‘금리감독원장’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이제 와서 “은행들이 대출 금리를 인상한 것은 당국이 바란 게 아니다”라며 남 탓을 했다. 시장이 당국의 움직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예측하지 못하고 개입했다면 정책 관리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는 4·10총선 이후에는 대통령실과 엇박자를 내 시장의 혼란을 키웠다. 그가 “6월 중 공매도 일부 재개”를 언급하자, 대통령실이 “금감원장의 개인적 희망”이라며 일축하는 일이 벌어졌다. 6월에는 대통령실이나 법무부 등과 사전 조율 없이 예정에 없던 브리핑을 열고 “내가 해봐서 안다”며 배임죄 폐지를 꺼내 시장을 놀라게 했다. 시장에서는 “임기 2년을 넘긴 이 원장이 조급한 모습을 보인다”는 평가도 나온다. 카카오페이 정보 유출 논란, 손태승 우리금융 전 회장의 친인척 부당 대출 의혹 사건은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기도 전에 언론에 흘러나갔다. 손 전 회장이 친인척 대출에 개입하고 현 경영진이 알고도 눈감아 준 것이라면 금융 시스템의 신뢰를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다. 수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금감원장이 방송에 나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여론전을 펼칠 일이 아니다. 먼저 검찰과 경찰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고, 문제가 드러나면 감독 책임이 있는 금감원까지 포함해 엄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부동산PF-가계빚 등 본연 업무서 성과를 이 원장은 취임 초에 행동, 말 한마디까지 분석 대상이 될 정도로 금융권에서 ‘화제의 인물’이었다. 요즘은 “그가 다음 자리로 어디를 가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더 많이 들린다. 3년 임기가 끝나갈수록 더 그럴 것이다. 이 원장이 “임기 중에 꼭 해결하고 싶다”고 했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문제나 1900조 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 등 금융감독 본연의 업무에서 차근차근 성과를 내며 남은 임기를 마쳤으면 한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서울 서초구 아파트 집주인 100여 명을 모아 단톡방을 만들고 집값 담합을 주도한 ‘방장’이 당국에 최근 적발됐다. 아파트 호가를 2억∼3억 원 올리도록 유도한 이 집주인은 중국 국적 동포로 알려졌다. 외국인까지 서울 아파트 ‘불패 신화’를 믿고 시세조종까지 시도했다는 건 서울 아파트 시장이 왜곡되고 있다는 나쁜 신호다. 투기 심리를 방치하면 시장이 투기판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시장 감시” 부동산TF, 서울시도 안 불러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정부는 25일 ‘1차 부동산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고 “주택 공급을 획기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가용한 모든 정책 수단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이 집값 상승세에 대해 “일시적 잔등락”이라고 평가 절하한 지 2주 만에 “가용한 모든 정책 수단”을 써야 할 중병으로 진단명을 바꾼 것이다. 정부는 “시장 상황을 철저하게 모니터링하고 적극 대응하겠다”고 했지만 미덥지 않다. 김범석 기획재정부 제1차관과 진현환 국토부 제1차관이 공동 주재한 TF 회의에 기재부·국토부·행정안전부·금융위원회 담당자만 부르고, 서울 부동산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서울시는 빼놓았다. 현장은 몰라도 된다는 건가. 대통령도 자찬한 집값 안정 기조를 걷어찬 건 현장감이 떨어진 정부 책임이 크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빌라의 전세 사기 관리에 실패해 빌라 전세 수요가 아파트로 옮겨붙는 걸 막지 못했고, 전세금이 오르는데도 신생아특례대출 등을 풀어 집값을 자극했다. 국토부는 “신생아특례대출은 출산 가구와 9억 원 이하 주택을 대상으로 제한해 현재 집값이 오르는 지역의 집값과 직접 연계가 안 된다”고 하지만 부동산 거래 현실을 무시한 주장이다. 시장에선 “전세금과 집값 상승에 놀란 2030세대가 저금리 신생아특례대출을 받아 9억 원 이하의 수도권 주택을 매입하고, 이들에게 집을 판 40대 이상의 집주인들이 그 돈으로 서울로 입성하면서 ‘도미노 상승’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걱정스러운 건 정부가 실패를 덮기 위해 지난 정부처럼 주택 공급과 부동산 규제 강화 등 냉·온탕 대책을 쏟아내며 시장을 자극하는 일이다. 집값을 안정시키려면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주택 공급은 인허가가 아니라 착공·준공 기준으로 관리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고 망가진 빌라 시장도 정상화해야 한다. 10년은 걸리는 신도시 건설보다 속도를 더 낼 수 있는 도심 재개발 재건축 착공이 늦어지고 있는 건 공사비 외에도 이주비 등 사업비가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주택도시기금을 활용해 저금리로 이주비를 지원하는 주택금융을 활성화하는 대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금리, 감세, 규제 호들갑으론 집값 못 잡아 서울 집값 상승세가 지속될지는 정부가 푼 신생아특례대출이 어느 정도 소진되고 가계 대출 규제가 강화되는 9월경이 1차 고비다. 대통령실이나 여야 정치권이 시장을 자극할 수 있는 금리 인하, 부동산 감세, 정책대출 확대, 대출 규제 연기 등 눈치 없는 정치적 압박은 삼가야 한다. 금융당국은 지난달 대출 규제인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2단계 시행을 엿새 앞두고 갑자기 두 달 뒤로 미뤄 ‘대출 막차 수요’를 키웠다. 이미 가계대출 연간 목표치를 초과한 5대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이 이달 5조 원 넘게 급증하고 서울 아파트값이 18주 연속 상승한 건 자업자득이다. 서울 집값이 ‘잔등락’에 그칠지, 지난 대선처럼 민심을 좌우할 ‘퍼펙트스톰’으로 바뀔지는 앞으로 정부 선택에 달렸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서울에서 다섯, 여섯 살 아이를 키우는 한 40대 ‘워킹맘’은 ‘조선족 이모님’을 육아 도우미로 쓰고 있다. 숙식을 제공하고 한 달 300만 원을 그에게 준다. 1년이면 3600만 원, 10년이면 3억6000만 원이다. 부담이 크지만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한국인 도우미는 입주 육아를 꺼리고 한 달 400만, 500만 원씩 부른다. 아이가 둘이라고 하면 연락도 없다. “아이들이 달걀프라이라도 스스로 해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나마 자신은 은행 돈을 빌려서 방 3개, 화장실 2개 딸린 아파트를 장만해 입주 ‘이모님’을 들일 수 있고, 맞벌이라도 하고 있으니 다른 엄마들보다 형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20, 30대 여성 근로자 10명 중 8명은 한 달에 300만 원 미만을 번다. 부모 도움을 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면 육아가사 도우미 비용이 큰 부담이 된다. 최악의 경우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 육아 고통, 워킹맘에게 책임 전가하는 사회 자녀 돌봄 부담에 짓눌린 워킹맘 사연은 직장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흔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사고다발지역’ 도로 안내판처럼 사고 위험을 잘 알고 있지만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고 떠넘기는 식이다. 사고가 잦다면 도로 설계를 바꾸거나 안전시설을 보강해 사고 자체를 구조적으로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고다발지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워킹맘의 고통을 알면서 책임을 개인이나 기업의 몫으로 돌리면 저출산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상황이 오죽 답답했으면 통화신용정책을 맡고 있는 중앙은행이 3월 ‘돌봄서비스 인력난과 비용 부담 완화 방안’ 보고서까지 내놨다. 한은은 외국인 돌봄 도우미 확대를 제안했다. 싱가포르 홍콩 대만처럼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는 사적 계약 형태로 외국인 도우미 공급을 늘리거나 일본 독일 영국처럼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고용허가제를 활용하되 돌봄서비스 업종에는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는 대안이다. 한은이 논쟁의 물꼬를 텄지만, 노동계는 “이주 노동자 차별 반대”를 외치며 한은 앞으로 몰려갔다. 경영계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 대상으로 돌봄서비스 업종을 요구하지 않았다. 어느 쪽에서도 워킹맘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외국인 도우미 확대 사회적 합의 필요 최저임금 차등 적용이 논란이라면 ‘체류 비자 신설과 사적계약을 통한 외국인 돌봄도우미 확대’ 방안이라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외국인에게 시장을 개방한 홍콩의 경우 가사도우미 시간당 평균 임금(2797원)은 한국(1만1433원)의 4분의 1이다. 최저임금이 적용되지 않아 처우가 걱정이라면 홍콩처럼 고용주가 식비, 주거비, 의료비 등을 부담하게 할 수 있다. 불법체류가 우려되면 싱가포르 대만처럼 고용주에게 일정액의 보증금을 요구하는 장치도 한은은 소개했다. 안 될 이유부터 찾으면 될 일도 없다. 저출산 극복과 워킹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가능한 방법이 무엇인지 머리를 맞대야 합의점이 보인다. 정부도 세금으로 지원하는 인센티브를 죽 늘어놓을 게 아니라 낡은 제도를 고쳐 시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개혁에 더 신경써야 한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바닥이 움직이는 나라가 등장한다. 이곳을 다스리는 ‘붉은 여왕’은 주인공 앨리스에게 “여기서는 제자리를 지키려면 죽어라 뛰어야 한다. 만약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 한다”고 말한다. 워킹맘 앨리스들에게 “죽어라 뛰어라”고 요구만 하는 붉은 여왕의 나라를 만들 수는 없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꿀밤’은 무슨 맛이지?” “소바면은 어떤 게 좋을까?”18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 중상층 주택가의 한국 식료품점 H마트. 중학생 또래 소녀들은 깐 밤이 든 한국 간식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백인 여성은 소바 재료를 찾느라 진열대를 기웃거렸다. 한국 라면과 연어, 마늘 등을 구입한 60대 주민 댄 씨는 “이달 초 H마트가 생긴다고 해서 기대가 컸다”며 “싱싱한 채소, 생선과 한국 일본 먹을거리를 찾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H마트는 1982년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몰려들던 뉴욕 퀸스 우드사이드에서 ‘한아름마트’라는 이름의 한인 식료품점으로 출발했다. 창업 42년 만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100여 곳의 매장을 보유한 아시아계 최대 독립 마트로 성장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아시아계 식료품점이 미국인의 식습관과 식료품 시장을 개조하고 있다”며 H마트를 주목했다. 뉴욕 변두리 한인 마트를 미국에서 가장 핫한 마트로 키운 주역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덕신리 출신 권씨 3형제다. 언론 노출을 꺼리는 3형제를 잘 아는 미국과 한국의 지인들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상품 통해 모국 자부심 느끼게 하고 싶어” 셋째인 권일연 회장(69)은 H마트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권 회장이 3만 달러를 밑천으로 우드사이드에 가게를 열었던 1980년대는 한 해 2만, 3만 명의 한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던 ‘대이민의 시대’였다. 한인 마트는 낯선 타국에서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는 한국계 이민자들을 위한 ‘부엌’ 역할을 했다. 권 회장은 마트 이름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한아름’으로 지었다. H마트 역사는 미주 한인사회 성장의 축소판이다. 이민 1세대는 과일가게, 식료품점, 세탁소, 주류점, 꽃집 등의 장사를 했지만 2, 3세대는 주류사회에서 변호사, 의사, 공무원 등 전문직으로 활약하고 있다. H마트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260만 한인사회에 안주하지 않고 아시아계와 주류 시장으로 영역을 넓혔기 때문이다. 권 회장은 2002년 19번째 매장을 열며 한국식 발음인 한아름마트를 현지인들도 쉽게 기억하는 ‘H마트’로 바꿨다. 미국 주류 마트처럼 깔끔하면서 가격은 저렴하다는 입소문이 나자 고객층이 한인에서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계 이민자들로 확장됐다. 최근 유학생과 이민자가 많은 대학가와 한인타운 밖으로 나와 중상층 주택가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고객 3명 중 1명은 비아시아계다. “우리의 훌륭한 상품으로 동료 한인들이 모국 대한민국의 장대한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권일연 회장은 “우리의 식품은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강조한다. H마트의 홈페이지 인사말과 사명을 통해 “뛰어난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뉴욕의 풀턴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직접 가져오거나 재배 농부와 농산물을 직거래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H마트는 대만계 99랜치마켓, 일본계 미쓰와, 인도계 파텔브러더스 등 다른 아시아계 식료품과 경쟁하며 신선한 생선과 채소, 잘 정리된 상품, 깨끗한 매장으로 차별화했다. 권 회장의 전 부인이자 H마트 점포 디자인을 맡아 온 엘리자베스 권(주정아) 씨는 NYT에 “아시아 식료품점이 지저분하고 낡았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매장을 깨끗하고 현대적이며 물건을 찾기 쉽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 중동 건설 현장에서 쌓은 노하우로 뉴욕서 도전 H마트의 장점은 다양한 한국산 식재료다. 미국 현지에 한국산 농산물과 식품을 철마다 선보일 수 있었던 건 부산에서 40년 넘게 식품 수출 사업을 하고 있는 맏형 권중천 희창물산 회장(79)이 있기 때문이다. ‘산청 메뚜기쌀’ ‘상주곶감’ ‘해남배추’ 등 H마트에서 팔리는 한국산 농산물이 희창물산을 통해 부산항에서 미국 수출길에 올랐다. 맏형이 부산에서 한국산 식재료를 조달해 수출하고, 셋째 동생이 미국 현지에서 판로를 여는 형제 간 분업 체제가 가동된 것이다. 이들은 한국의 붕어빵(Bean cake)과 뻥튀기(Popped Rice)를 H마트에서 소개해 ‘완판’했던 적도 있다. 미국 언론에서 “한국의 웰빙 음식”으로 소개돼 화제가 됐다. 박진배 뉴욕 패션공과대(FIT) 교수는 “물류망이 안정된 H마트는 미국 마트보다 값싸고 신선한 채소, 생선으로 주류 고객을 끌었다”며 “2010년대 들어 한류와 한식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진화했다”고 말했다. 권 씨 형제의 ‘아메리칸 드림’은 1970년대 중동에서 시작됐다. 현대건설 동아건설이 중동에서 항만 등 건설 사업을 수주하며 ‘중동 붐’이 일던 때였다. 당시 10만여 명의 한국인 근로자가 중동에서 땀을 흘렸다. 권중천 회장은 중동에 한국 식음료를 공급하며 식품 유통업에 눈을 떴다. 올해 1월 부산수산정책포럼은 권 회장에게 ‘제9회 수산대상’을 수여하며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의 교민에게 식자재를 공급했던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난 38년간 20개국에 수산물 1000여 종을 수출했다”고 공적으로 설명했다. 둘째인 권중갑 스탠포드호텔그룹 회장(76)도 사우디에서 종잣돈을 모아 뉴욕에서 식료품점, 호텔업으로 사업을 확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셋째 권 회장 역시 동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동 붐이 불던 1978년 사우디에서 일하다가 1980년 미국 뉴욕에 정착했다”고 했다. 언론 노출을 기피하는 권 씨 형제들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모국과 고향을 위한 일을 할 때다. 2020년 맏형인 권중천 회장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뜻을 모으자”고 두 동생에게 제안해 2억 원의 성금을 한국에 기부했다. 권 회장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고액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셋째 권일연 회장에 대해 “고향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과 행동은 세계 1등”이라며 “안동소주를 H마트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진열해 준 덕분에 유명해졌다”라고 말했다. ● ‘메이드 인 아메리카 한류’, K푸드 도전 시험대 미국 최대의 아시아계 식품점 체인으로 성장한 H마트는 미국과 한국을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현지인들도 한국 드라마에서 본 음식을 만들고 싶다거나 김치를 담가 보고 싶다며 H마트를 찾는다. 한인 2, 3세들에겐 한국 문화를 이어 가는 장소다. 한국계 미국인인 조이스 정 씨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지만 두 아들의 도시락에 김밥을 싸주고 떡볶이를 함께 한다. 정 씨는 “언어보다 강한 게 음식 같다. H마트는 한인 2, 3세들에게 부모님 나라와의 연결 고리”라고 말했다. 2021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추천한 베스트셀러 ‘H마트에서 울다’를 쓴 한국계 미국 인디 팝밴드 가수인 미셸 자우너에게 H마트는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리는 “신성한 공간”이다. H마트는 한인 사회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는 “권일연 회장은 1980년대 사업 초기부터 덩치가 커졌다고 다른 한인의 사업을 흡수하지 않았다. 대신 구매력을 키워 한인업계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키웠다”고 말했다. 권회장은 뉴욕 한인들의 정치력을 결집하려는 한인유권자운동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전 세계 음식 문화가 흘러 들어오는 미국 뉴욕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등을 테마로 식자재 마트와 음식점이 한 공간에 들어선 ‘푸드홀’이 있다. ‘미국에서 만든 한국 전통(Korean tradition made in America)’을 강조하는 H마트 역시 상품을 판매하는 마트에서 한국 먹거리와 음식 문화를 전파하는 ‘K푸드 허브’가 되고 있다. 올해 5월 롱아일랜드시티에 문을 연 H마트 매장에는 김가네, 라이스보이, 오케이도그 등 한국 음식점이 입점했다. 미국에서 동네 한인마트의 한계를 뛰어넘은 H마트도 미주 한인 사회의 걱정인 ‘민족성 소멸’과 정체성 혼란에 직면하고 있다. 새로 유입되는 이민자가 줄고 이민 1세대가 퇴장하면 미국 일본 커뮤니티처럼 민족적 정체성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김동석 대표는 “중국 대만 일본 인도 등 아시아 상품과 고객층이 다양해진 것은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한국 식품점 정체성이 약해지는 문제를 H마트가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H마트는 1982년 뉴욕 퀸스 우드사이드에 ‘한아름마트’(사진)로 오픈1987년 뉴욕 맨해튼 코리아타운점 오픈1990년대 뉴저지 및 펜실베이니아주로 매장 확대2000년대 버지니아, 메릴랜드, 조지아, 텍사스주 진출. H마트로 사명 변경2021년 NYT ‘H마트의 유혹, 아시아만큼이나 넓은 진열대’ 전면 기사2024년 뉴저지주 아메리칸드림몰에 대규모 푸드코트 오픈 예정. NYT “H마트는 문화현상” 재조명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전세사기’는 피해자 8명을 죽음까지 내몰고 조 단위의 보증사고로 이어진 역대 최악의 ‘부동산 실패’다. 피해자 1만7060명 중 73.7%가 20, 30대 청년들이다. 그 충격으로 서울 등 수도권에서 빌라 전세를 꺼리는 ‘빌라포비아’ 현상까지 나타나 서울 아파트 전셋값을 밀어 올리고 있다. 이 정도 대규모 후진국형 부동산 사고는 개인의 잘못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의 박상우 장관은 “전세를 얻는 젊은 분들이 덜렁덜렁 계약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며 청년들에게 일부 책임을 돌렸다. 전세사기, 부동산PF 위기도 남 탓덜렁덜렁 일한 건 국토부다. 전세사기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정보 불균형을 파고든 악랄한 조직 범죄다. 신축 빌라는 기준 가격이 없어 집주인과 거래를 주선하는 공인중개사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가구주택의 경우 등기부등본을 떼어도 선순위 세입자가 누구인지도 나오지 않는다. 신뢰할 수 있는 시장 가격과 권리관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면 청년들이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사기를 피하기 어렵다. 당국이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빌라의 가격과 주택 권리관계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공인중개사의 일탈을 철저히 감시했어야 한다.야당이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주택도시기금을 헐어 전세사기 피해자를 먼저 구제하고 나중에 변제를 받는 내용의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하려고 하자, 국토부는 본회의 전날에서야 전세사기 피해자 주거안정대책을 부랴부랴 내놓았다. 박 장관은 “일반 국민에게 악성 임대인의 채무를 전가하는 것”이라며 법안을 단독 처리한 야당을 비판했다. 그가 더 부지런히 피해자 구제 대책을 챙겼다면 뒤늦게 옥신각신할 일도 없다.박 장관은 4·10총선을 앞두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설이 돌자 “위기 상황이 과장돼 묘사되고 있다”며 언론 탓을 했다. 국토부가 열심히 일했다면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부동산PF 부실이 이처럼 커졌을까. 그렇지 않으니 시장에서 위기설이 자꾸 나오는 것 아닌가.박 장관의 인식과 달리 밖에서는 국토부를 탓한다. 금융당국 내부에는 “국토부가 건설사 구조조정에 소극적”이라는 불만이 있다. 출생 장려 성격이 퇴색된 신생아특례대출을 대거 풀어 전세사기로 가뜩이나 불안한 서울 전세금을 밀어 올려놓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아파트 세입자들은 “올해 2월 아파트 실거주 의무를 ‘3년 유예’하는 주택법 개정안이 통과됐는데도 국토부가 ‘전매제한’ 규정을 명확하게 하지 않아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막혔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이 54주째 올랐는데도 국토부가 빌라 전세시장 안정과 전세제도 개편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심지어 스타트업 업계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정부가 공급과 수요를 결정하고 가격을 통제하는 기존 대중교통 체제를 감싸고돌아 우버와 같은 ‘모빌리티(이동성) 혁신’이 일어나지 못한다”고 국토부를 탓한다.“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행동으로 보여야박 장관은 국토부 주택정책과장 주택토지실장을 거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으로 일한 주택 정책 전문가다. 그의 화려한 경력만으로도 부동산 정책과 시장의 실패를 남 탓으로 돌리기 어렵다. 그간 ‘주거’와 ‘이동성’이라는 현장 수요자의 관점보다 ‘국토’와 ‘교통’이라는 공급자 시각에서 일한 건 아닌지 업무 전반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에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팻말이 놓여 있다. 권한에 맞게 책임지고 일한다는 거 아닌가. 장관의 일도 다르지 않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연금은 보험료율(18%)이 국민연금의 두 배지만 1993년부터 적자다. 그걸 정부가 해마다 세금으로 메꿔주고 있다. 내년엔 역대 최대 규모인 10조 원 안팎을 쏟아부어야 할 판이다. 연금 받는 퇴직 공무원이 69만 명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혈세로 지탱하는 공무원연금은 16년 뒤 적자로 돌아서는 국민연금의 ‘예정된 미래’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공무원연금의 약 17배, 수급자는 10배가 넘는다. 거대한 국민연금이 고갈되면 수백조 원의 혈세를 쏟아부어도 버티기 어렵다. 미래 세대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도 아니다. ‘연금 디스토피아’의 문이 열리고 있는 데도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998년 이후 9%에 묶여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개혁을 미루고 또 미룬 결과다. 그래놓고 세금으로 뿌리는 기초연금만 경쟁하듯 올리고 있다. 개혁 방향 합의조차 시민에게 떠넘긴 국회 개혁의 총대를 멘 21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조차도 기한을 두 번이나 연장하더니 임기를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유럽 출장을 가서 논의하겠다는 황당한 여유를 부렸다. 여태 소득안정에 무게를 둬야 할지, 재정안정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연금개혁 방향에 대한 합의조차 못한 여야가 해외에서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과 같은 모수만 정치적으로 타협하는 ‘숫자 개혁’을 하겠다는 건가. 김상균 국회 연금특위 공론화위원장은 지난달 ‘더 내고 더 받는’ 식의 국민연금 개혁안을 선택한 시민대표단 설문조사 결과를 내놓으며 “이제 국회의 시간”이라고 했다. “국회가 공론화 과정으로 도출된 방향성을 충분히 고려해 소득보장과 재정안정을 조화시킬 수 있는 연금개혁 방안을 마련해 달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개혁 방향에 대한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국회의 시간’이 선행해야 제대로 된 개혁이 된다. 그걸 건너뛰고 이해당사자인 시민들에게 ‘소득보장’과 ‘재정안정’ 중 양자 택일을 하라는 선택지를 덜컥 던졌으니 세대 간 불신과 갈등이 커졌다. 미래 세대는 “왜 조금 더 내고 많이 받아 가느냐”고 반발하고, 기성세대는 “더 내면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항의한다. 내면에 깔린 ‘손실 회피’ 성향이 작동하면, 사람들은 모두가 패자가 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모두가 승자’ 믿음 생겨야 연금개혁 성공 이해관계자가 많은 까다로운 개혁이 성공하려면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야 한다. 우리는 노후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미래 세대와 연금 재정을 희생할 수 없고, 재정 때문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의 노후 빈곤을 방치할 수도 없는 ‘복합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더 많이 내되 조금만 더 올려 받는’ 식으로 소득보장과 재정안정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제3의 길’의 방향을 정치권이 제시하고 전문가들에게 얼마를 더 내고 얼마나 더 받으면 지속 가능한지 합리적 실행 방안들을 내게 했다면 국민의 선택은 한결 쉬웠을 것이다. 지금처럼 정치권이 쳐놓은 ‘소득보장’과 ‘재정안정’이라는 틀에 갇혀 각자의 손실만 따지는 각자도생을 고민할 일도 없었다. 개혁에 대한 공감대가 생기면 모수개혁과 함께 기업 설득이 필요한 납입기간 연장과 정년 연장, 소득재분배 기능이 겹치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역할 조정, 일본처럼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지 않게 연금액을 수정하는 자동조정장치 도입과 같은 어려운 개혁 과제도 추진할 힘이 생긴다. 그래야 어떻게 더 내고, 얼마를 더 받아야 할지 개혁의 선택지도 넓어진다. 2040년이면 국민연금을 마지막으로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 등 4대 연금이 모두 적자로 돌아선다. 그때가 되면 모두 진짜 패자가 된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2021년 서울 집값이 급등할 때 ‘20% 폭락’을 예견했던 한국 부동산 시장의 ‘닥터 둠’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53)가 또 다른 위기의 전조를 지목했다. 서울 전셋값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는 진단이다. 2021년 대선 때처럼 부동산 민심이 정부여당에 다시 등을 돌리게 될 수 있다는 경고다.김 교수는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정보시스템 석사, 하버드대에서 도시계획·부동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부동산 리서치 회사 PPR에서 일하면서 개발한 가격 예측 모형과 빅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2022년부터 매년 국내 부동산 시장을 전망하는 책을 내고 있다. 김 교수와 총선 전인 9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21일 전화 인터뷰를 추가로 했다.》● “올 서울 아파트값은 보합, 전셋값은 불안” 부동산 시장에서 김 교수는 ‘하박(하버드대 박사) 출신 집값 하락론자’로 불린다. 하지만 구글의 생성형 인공지능(AI)인 ‘제미나이’는 “과거 발언이나 논문 등을 살펴보면 단순히 하락론자로 분류하기는 어렵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그는 그간의 하락론을 접고 올해 서울 아파트값에 대해 “보합세”를 예상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태, 국제 금융시장 등의 충격으로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4.7%까지 오르면 지난해 2분기(4∼6월)에 비해 약 6% 하락하겠지만, 위기 대응에 성공해 금리가 안정되면 2% 정도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다. 김 교수는 “지금도 유효한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주택 가격은 보합(0.00%)으로 전환했다. 아파트 가격 하락 폭(0.02%)도 2월(―0.14%)보다 줄었다. 김 교수는 한국 집값 흐름을 보려면 집이 있는 지역(공간 변수)과 투자 시점의 금리(금융변수), 특히 국고채 10년물 금리를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요즘 김 교수의 걱정은 다른 데 있다. 그는 “인플레가 오면 월세가 오른다. 인플레를 잡지 못해 월세 대체재인 전셋값이 지금 오르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10개월 연속 3.50%에 묶어두고 있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지난해 7월 이후 9개월 연속 상승세다. 여기에다 전세 사기 여파로 빌라 전세를 피하는 ‘빌라포비아’ 현상과 부동산 PF 사태 등으로 입주 물량까지 줄어 아파트 전셋값을 밀어 올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은 3개월 연속 1만 채를 밑돌았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둔촌주공아파트를 재건축한 1만2000여 채 규모의 올림픽파크포레온이 11월 입주를 시작하면 전셋값 상승세가 다소 주춤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강남구 개포동에 7000채 아파트 입주 물량이 나왔을 때 3개월 정도 영향을 미쳤다”며 “강동 광진 송파 등 인접 지역 전셋값에 6개월 정도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서울 전역에 1년 이상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셋값이 오르면 ‘이 가격에 전세를 사느니 차라리 사겠다’거나 ‘갭투자를 하는 게 낫다’는 사람이 생긴다. 실거주자나 투자자들이 동시적으로 이렇게 판단하는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김 교수는 “부동산 사이클이 짧아졌고 소비자들은 똑똑해져 시장이 굉장히 빨리 바뀐다”며 “내년 이후 물가 상승, 주택 공급 부족, 빌라포비아 등이 맞물리면 전셋값 상승이 거의 ‘퍼펙트스톰’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재인 정부 말기와 같은 집값 폭등세는 없겠지만 전셋값이 매매가를 밀어 올리고, 놀란 청년들이 ‘영끌 투자’에 나서는 악순환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다.● “부동산 PF 더 일찍 터뜨렸어야” “부실 부동산 PF를 터뜨리면 토지가격이 떨어진다. 우량한 건설사 대표들이 ‘현금을 쌓아 놓고 있다. 땅값이 떨어지면 들어가서 다 사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금융당국이 대출 연장 등으로 부동산 PF 시장에 개입하면 시장이 움직이지 않는다.” 김 교수는 “당국이 총선을 의식해 부실 PF 정리에 소극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시장에서는 ‘부동산 PF 사태 등으로 아파트 건설이 줄어 집값이 상승할 수 있다’는 견해와 ‘시장이 가라앉으면 주택 매도 물량도 늘어 급등할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김 교수는 전자에 가깝다. “토지를 사고 건설 인허가를 받는 데 1∼2년이 걸린다. 인허가를 받고 3∼4년 후 입주 물량이 나온다. 이게 지금 비어 있다. 2025, 2026년 아파트 공급이 적다는 건 다 아는데 그다음 해에도 별로 없다.” 그는 “공공이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서 주택 공급 부족을 대비하지 않으면 3년 뒤 대선도 지난번처럼 ‘부동산 대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했던 보금자리 주택과 같은 공공 개발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개발이 가능한 공공기관 소유 땅 등을 충분히 확보하는 ‘랜드뱅킹(land banking)’을 추진하고 해당 토지의 용적률 규제 등을 과감하게 풀어 전셋값과 집값이 급등할 때 공공 분양 물량을 대거 공급해 수요를 돌려야 한다는 논리다. 또 중산층이 살 수 있는 임대주택 공급을 늘리기 위한 ‘공공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공기관이 임대료를 통제할 수 있는 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비해 너무 적다. 거대한 공공 리츠를 만들어서 대기업 브랜드의 민간 아파트를 매입하거나 대기업이 개발하게 해 중산층이 살 수 있는 적정한 가격대의 임대주택을 공급해야 한다.” 그는 “공공 리츠가 100채를 매입하면 거주자 100명이 리츠의 지분을 소유한 투자자이자 거주자가 되는 식”이라며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한 ‘뉴스테이’가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흐지부지됐다”고 지적했다.● “전세, 반전세로 단계적 전환해야” “제자의 친구가 경찰인데도 전세 사기를 당했다. 청년들의 피해는 더 심각하다.” 김 교수는 안식년 때마다 ‘일’을 벌인다. 2015년 안식년 때 부친이 물려준 서울 강남구 역삼동 땅에 청년들을 위한 ‘셰어하우스’(침실은 따로, 부엌과 거실은 공유하는 주택)를 운영하며 공유경제 모델을 실험했다. 올해 1월에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지식의 씨앗을 뿌리겠다”며 유튜브 채널(김경민의 인사이트)을 개설하고 전세 사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집주인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세입자가 은행 돈(전세대출)을 빌려와 집주인의 갭투자(집값과 전셋값의 차액을 투자해 주택 매수)를 도와주는 게 현재의 전세 제도다. ” 그는 ‘전세 폐지론자’이다. 전세가 갭투자라는 가수요를 일으켜 집값을 끌어올리고 전세 사기의 빌미를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한 번에 없앨 수 없다면 ‘반전세’로라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전세보증금을 집값의 절반으로 제한하자는 것이다. 그는 “전세 사기가 빈발하는 빌라나 정부 지원을 받아 짓는 주택이라도 반전세 제도를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세 사기를 막으려면 빌라에 대한 가격 정보를 제공하는 플랫폼과 중개사나 분양 대행사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고 전세 사기 피해자의 채권 선순위 구제 등의 대책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김 교수는 “투자자 책임도 있는 홍콩 주가연계증권(ELS) 피해는 배상을 해준다고 하면서 잘못도 없는 청년들의 전세 사기 피해는 제대로 배상을 해주지 않고 있다”며 “전세 사기를 금융 사기, 조직범죄, 사회적 재난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전세사기피해지원특별법 시행 이후 집계된 전세 사기 피해자는 모두 1만5433명이다.“북촌 개발 ‘경성 건축왕’… 정세권 기념사업 추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귀국한 제대 군인을 위한 대규모 아파트 주택 단지를 개발했다. 그보다 20여 년 빨리 한국 서울에서 규격화된 한옥단지를 개발한 부동산 사업가가 있었다고 하면 미국 도시계획학자들도 깜짝 놀란다.”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서울 북촌 등에서 한옥 주택단지를 개발한 ‘건축왕’ 정세권을 기념하는 사업을 그의 후손들과 함께 추진하고 있다. 김 교수는 2012년 익선동 한옥의 역사를 연구하다가 정세권을 알게 됐고 유족들을 수소문해 만났다. 정세권은 1920년 ‘건양사’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를 세우고 땅을 매입한 뒤 규격화된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해 일본인의 진출을 막은 부동산 개발사업가였다. 서울 북촌 가회동 익선동 등의 한옥단지가 그의 작품이다. 신간회, 조선어학회, 물산장려운동을 후원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 교수는 “정세권 기념사업회 설립을 위해 작년 10월 총회를 열었고 서울시에 신청서를 냈다”며 “부동산 디벨로퍼(개발사업가)들과 함께 장학사업 등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세계적 기업은 키우기도, 지키기도 어렵다. 네덜란드 정부가 반도체 장비회사 ASML의 외국 이전을 막기 위해 25억 유로를 투입하는 ‘베토벤 프로젝트’를 부랴부랴 가동한 걸 봐도 그렇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이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해 끌어당기는 바람에 혁신기업을 지키는 일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ASML 사태의 본질은 ‘인재 전쟁’ 네덜란드의 국가대표급 기업인 ASML을 나라 밖으로 밀어낸 원심력은 선거와 정치적 선택이었다. 인구 1767만 명의 네덜란드는 세계의 인재들이 찾는 ‘이민 강국’을 건설하고 한국의 삼성, 대만의 TSMC도 쩔쩔매는 ASML을 키웠다. 네덜란드에서 일하는 ASML의 직원 2만3000명 중 약 40%가 외국인이다. 그런데 지난해 네덜란드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극우 정당이 외국인 숙련 노동자에 대한 비과세 혜택을 줄이고 유학생 수를 제한하는 반(反)이민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사달이 났다. 외국 인재 의존도가 높은 ASML의 페터르 베닝크 최고경영자(CEO)는 당장 “회사가 성장할 수 없다면 성장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며 반발했다. ASML이 민감하게 반응한 건 치열한 ‘인재 전쟁’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핵심 인재를 데려오기 위해 거액을 주고 스타트업을 사들이는 ‘인재 인수(acquihiring)’까지 시도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아예 AI 스타트업 인플렉션의 창업자 3명 중 2명을 한꺼번에 영입했다. 이런 판국에 외국 인재 채용에 빗장을 거는 정치적 선택으로 역주행한 네덜란드는 막대한 세금을 투입하는 대가를 치르게 생겼다. 미 민간기업 최초로 달 착륙을 이뤄낸 우주 스타트업 인튜이티브머신스의 창업자 캄 가파리안(66)은 열한 살 때 고향 이란에서 TV로 인류 최초의 달 착륙 장면을 지켜보며 우주 개척의 꿈을 키운 이민자다. 인튜이티브머신스의 달 착륙선을 우주로 쏘아 올린 미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 역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이민자다. AI 반도체로 잘나가는 엔비디아의 창업자 젠슨 황은 대만계, 래리 페이지와 함게 구글을 창업한 세르게이 브린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인도 첸나이 출신이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건 세계의 ‘고급 두뇌’들이 첨단 기술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창업을 통해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이민 강국이기 때문이다. 영어가 통용되고 학교 병원 등 정주 여건이 좋아 외국인이 창업하기 좋은 환경을 갖춘 싱가포르는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해 발표한 아시아태평양 고성장 500대 기업 중 93곳을 보유하고 있다. 서울(90곳)이나 도쿄(71곳)보다 많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와 인구감소를 겪으며 ‘공생 사회’로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이민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일본은 2018년 이후 ‘선택받는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유학생 유치와 정착, 고급 외국 인력 확보에 나섰다.글로벌 인재가 선택하지 않는 나라는 낙오 한국은 체류 외국인이 약 250만 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외국인은 건설 현장이나 농장 등 기피 업종에서 일한다는 인식이 여전하다. 그렇다고 외국 고급 인재들로부터 ‘선택받는 나라’도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인재유인지수 평가에서 한국은 유학생 유인 측면에서 37개국 중 9위를 차지했다. 석박사 학위를 가진 전문가 유인 측면은 25위, 기업가는 16위, 스타트업 창업자는 18위에 그쳤다. 10일 총선에서 선택될 22대 국회는 이민 강국 밑그림과 같은 ‘미래’와 ‘국민’을 위한 논의를 훨씬 더 치열하게 해야 “달라졌다”는 평가를 듣는다. 글로벌 인재로부터 선택받지 못하는 나라는 인재 전쟁에서 낙오하고 앞으로 ASML과 같은 글로벌 기업을 키우기도, 지키기도 어렵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은행 위기의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진 ‘뱅크데믹’(은행과 팬데믹의 합성어)이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한 게 불과 1년 전이다. 지난해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은 대규모 예금 인출(뱅크런) 사태가 일어난 지 48시간 만에 폐쇄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진화되고 미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은행 파산이었다. 디지털 시대엔 은행 위기가 도둑처럼 온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고 모바일뱅킹으로 예금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디지털 뱅크런’의 위험이 작년 뱅크데믹으로 확인됐다. 뱅크런 메커니즘을 규명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5월 ‘2023 동아국제금융포럼’에 참석해 “미 SVB 파산이 한국에도 조기 경보를 울렸다”고 경고했다. 세상은 이처럼 무섭게 변하는 데 한국 금융시장에서는 과거의 실패가 되풀이된다. 은행에서만 15조 원 넘게 팔린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대규모 손실 사태는 불시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2016년 H지수 폭락으로 ELS 투자자들이 손실 위기를 경험하고도 8년이 지나 똑같은 일이 그것도 더 큰 규모로 재연됐다. 금융 당국은 당시 변동성이 큰 H지수 ELS의 위험을 경고해놓고 다시 판매를 허용해 판을 깔아줬다. 수수료 수익에 매달린 은행들의 고위험 상품 판매, 수익만 보고 위험을 무시한 투자자들, 위험을 감시하지 못한 금융감독 당국의 아찔한 ‘위기 건망증’이 위기를 키운 셈이다. 영문도 모르고 제대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은행에서 투자 권유를 받고 돈을 넣은 초보자들만 억울하게 생겼다. 금융사고가 터지면 ‘이익은 내 덕, 손해는 네 탓’이라는 도덕적 해이와 책임 전가도 되풀이된다. 은행과 투자자가 시장인 ‘링’ 밖으로 나와 배상 공방을 벌이고 금융 당국이 끼어들어 배상 기준을 권고하며 사태를 수습하는 장면은 한국 금융의 클리셰(진부한 설정)다. 한 금융 전문가는 “홍콩 H지수 ELS의 구조는 2008년 금융위기 때 한국 중소기업 상당수를 파산 위기로 몰아넣은 외환 파생상품인 ‘키코(KIKO)’의 개인투자자 버전”이라고 말한다. 금융감독원은 2019년 6개 은행의 키코 불완전판매에 대한 손해배상을 권고했지만 진통을 겪었다. 금감원은 이번에도 H지수 ELS만큼 복잡한 배상 조정 기준을 권고했는데, 배임을 걱정해 배상을 망설이는 은행과 전액 배상을 요구하는 투자자 사이의 갈등은 이제 시작이다. 이러는 사이 한국 금융의 대외 신뢰도는 추락한다. 이달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무디스와 피치는 ELS 배상, 당국의 상생금융 압박, 영업 환경 악화 등으로 한국 은행들의 수익성이 악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국의 얘기처럼 당장 은행 건전성에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긴장을 늦출 순 없다. 은행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국제 자금시장에서 조달 비용이 올라가고 위기 땐 차입도 어려워진다. 부동산 시장 둔화, 자영업자 대출 만기 연장,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등 은행 시스템에 충격을 줄 수 있는 리스크도 도사리고 있다. 대출 연체율이 치솟는 상황에서 당국의 신용사면으로 시장에서 도덕적 해이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무뎌지고 있는 게 아닌지도 걱정스럽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H지수 ELS 분쟁 조정 기준안을 내놓은 다음 날 “면밀히 감독 행정을 하지 못해 송구하다”고 했다. 사과로 덮을 일은 아니다. 불완전 판매 피해자는 보호하되, 투자자와 당국이 위험 관리나 감시를 소홀히 하다가 일이 터지면 만만한 은행에 책임을 떠넘기고 손실을 사회화하는 악습은 끊어야 한다. 한국 금융의 위기 건망증을 놔두고 도둑처럼 다가올 위기를 대비할 수 없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미국 반도체 회사 인텔이 ‘2030년 삼성을 제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2위로 올라서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맛있는 밥을 지으려면 좋은 밥솥이 필요하듯이 첨단 2나노(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공정 반도체 양산에 성공하려면 네덜란드 ASML이 만든 차세대 ‘하이 뉴메리컬애퍼처(High NA) 극자외선(EUV)’ 장비가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장비가 연간 20대밖에 생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해 12월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ASML을 직접 방문하며 차세대 EUV 확보에 공을 들였건만 ASML은 미국을 선택했다. 업계 최초로 이 장비를 수중에 넣은 인텔은 연내에 1.8나노 공정의 반도체를 양산하고 대만 TSMC와 한국의 삼성처럼 2027년 1.4나노 공정의 반도체를 양산하겠다며 ‘칩워(Chip War·반도체 전쟁)’ 선전포고를 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아시아가 80%를 차지한 제조 비중을 서방 세계로 50% 가져와야 한다”며 “50년 동안 세계 정치는 석유가 어디서 나는지에 좌우됐다. 이제는 반도체가 주인공”이라며 강조한 건 반도체가 산업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반도체 전쟁을 TSMC 삼성 인텔 등 기업 간 대결로 보고 반도체 지원을 “대기업 퍼주기”로 보는 미시적 시각으로는 미국이 법까지 만들어 반도체 투자 기업에 보조금을 퍼주고, 일본이 TSMC 공장 2곳에 10조 원을 지원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인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때 제대로 된 보건 마스크조차 만들 공장이 없어 100여 년 전 스페인독감 때처럼 스카프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수모를 겪었다. 차량용 반도체 공급망이 교란되자 신차 출고가 늦어지고 중고차 가격이 급등하는 걸 목격하며 세계 최강 미국의 아킬레스건이 어딘지를 절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세기 편자’라는 반도체 산업 재건을 선언한 이면엔 제조업 붕괴에 대한 미국인들의 트라우마와 이를 극복하려는 강렬한 열망이 깔려 있다. 미국은 셰일가스 덕분에 2018년 세계 최대 에너지 생산국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은 2019년 중동에서 긴장이 고조되자 “우리가 왜 아무 보상도 없이 다른 나라들을 위해 해상 운송로를 보호해야 하는가”라며 “미국이 세계 최대 에너지 생산국이 됐기 때문에 그곳에 있을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중동 석유 의존도를 낮추는 ‘에너지 독립’을 선언하고 ‘신고립주의’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해 반도체 패권까지 쥔다면 더 거리낌 없이 미국 ‘우선주의’ 행보를 보일 수 있다. 대만에서는 반도체를 ‘실리콘 방패’로 부르고 세계 경제가 대만 반도체에 의존하는 한 중국의 무력 침공과 같은 양안 갈등을 미국 등 서방 세계가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미국도 대만에 친중 정권이 들어서는 걸 걱정한다. 하지만 미국이 반도체 독립에 성공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미국의 ‘대만 계산법’이 바뀌고 동아시아 안보지형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미국 보수 성향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제임스 캐러파노 부회장은 본보 인터뷰에서 “미중 갈등은 ‘코끼리 싸움’ 성격이 강하다. 중간에 낀 작은 나라가 ‘잔디’처럼 밟혀 죽지 않으려면 잔디가 아닌 나무가 돼야 한다. 한국은 더 큰 나무가 돼야 한다”고 했다. 칩워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아무나 밟을 수 있는 잔디가 돼선 안 된다.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더 키우고 한미일 반도체 동맹도 더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더 큰 ‘반도체 나무’를 키우고 있는가.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서울에 사는 30대 박모 씨는 둘째 아이를 원하는 아내와 갈등을 겪고 있다. 박 씨가 둘째를 반기지 않는 건 4년 전 ‘영끌’로 장만한 아파트 때문이다. 한 달에 400만 원씩 빚을 갚고 있는데 맞벌이를 포기하며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다. 박 씨의 출산 포기는 국가적으로 손실이지만, 그에겐 가족을 지키고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폭등한 집값은 청년들의 영끌 투자로 이어졌고, 우리 사회는 청년들을 부채의 늪에 빠뜨린 대가를 치르고 있다. 국토연구원은 “첫째 자녀 출산은 주택 매매 가격과 전세 가격, 초등학교 사교육비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둘째 자녀 이상 출산은 주택 매매 가격, 전세 가격과 함께 고등학교 사교육비의 영향을 받는다”고 분석했다. 집값 불안은 망국병으로 불리는 저출산 위기를 부채질할 수 있다. 정부가 주거 안정을 저출산 해결의 핵심 방안으로 인식한 건 다행이지만 청년들이 가려운 데를 제대로 긁어 주지 못한다. “아이를 낳으면 돈 빌려 준다”는 식의 대출 정책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출산 가구 주거 안정 예산 9조 원의 대부분이 주택 구입이나 전세 자금을 대출해 주는 데 들어간다. 청년들이 원하는 건 집이지 대출이 아니다. 집값이 크게 오르지 않았을 때는 정부의 저금리 대출이 큰 도움이 되지만 연 소득의 15배가 넘는 서울 집값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박 씨처럼 집이 있어도 은행 대출이 많으면 아이를 더 낳거나 정상적 소비 생활을 하기 어렵다. 지난해처럼 정책대출이 집값을 다시 밀어올리기라도 하면 청년들은 더 큰 빚을 내야 한다. 선의로 내놓은 대출 지원이 출산의 장애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주거 대책의 추를 대출 지원에서 장기임대주택 등의 공급 대책으로 옮겨야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제안한 ‘출생기본소득’은 대선 공약인 기본소득을 ‘저출생’ 대책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세금으로 나눠주는 기본소득 역시 공짜는 아니다. 아이들이 커서 갚아야 할 나랏빚으로 쌓인다. 출생아가 늘어날수록 국가 재정 부담이 증가하는 구조여서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 대표는 “재원이야 앞으로 마련해 나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덮어놓고 시작부터 하자는 건 그 빚을 갚아야 할 미래 세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초저출산(합계출산율 1.3명 이하)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도시화율이 높은 아시아 유교문화권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과제다. 경쟁적 문화에서 교육을 오래 받을수록 더 나은 보수를 받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도 늘고 있다. 결혼과 출산은 늦어진다. 일자리는 빠듯하고 집값은 껑충 뛰어 양육 비용은 불어나고 있는데 과거처럼 자녀에게 노부모 봉양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서울과 같은 대도시 청년들은 ‘출산 연기’나 ‘출산 포기’라는 나름의 합리적 선택을 한다.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정부의 저출산 대책이 시작되기 전인 2005년 0.932명으로 전국 평균(1.085명)보다는 약간 낮고 부산(0.887명)보다 높았다. 지난해엔 0.593명으로 전국 평균(0.778명)보다 한참 낮고 부산(0.723명)보다도 더 떨어졌다. 17년간 약 300조 원을 온 나라에 쏟아부었는데도 서울이 초저출산의 진앙이 됐다. 역대 서울시장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공급하고, 안정된 집값과 저렴한 장기임대주택을 제공하며, 합리적 비용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편리한 양육 인프라를 마련해 줬다면 지금과 같은 국가적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대출 진통제’와 ‘표지갈이 기본소득’으로 결혼과 출산을 망설이게 하는 ‘3대(일자리, 주거, 보육)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청년들이 이제 더 잘 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주변을 지날 때면 23년 전 취재 기억이 떠오른다. 2001년 3월 4일 새벽 서울엔 간간이 눈발이 날렸다. 강풍과 영하의 날씨에 큰불이 여러 곳에서 났다. 강남구 세곡동 비닐하우스에선 잠을 자던 일가족 10명이 화재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그날 새벽 홍제동에서는 방화로 일어난 화재를 진압하러 들어간 서부소방서 소속 6명의 소방관(김기석 김철홍 박동규 박상옥 박준우 장석찬)이 무너져 내린 낡은 건물 내부에서 순직했다. 단일 화재로 가장 많은 소방관이 순직한 사고였다. 이날 오후 9시 취재 지시를 받고 박동규 소방장과 김기석 소방교의 시신이 안치된 세란병원으로 달려갔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에 대한 예의”라며 기자에게 술잔을 권하던 한 젊은 소방관은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데도 어쩌지 못했다. 죽어야만 (소방관에게) 관심을 갖는 세태가 무섭다”고 서러워했다. 고생을 많이 하고 자란 고인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고 대학을 다니며 야학 활동을 했던 따뜻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날 동료를 잃은 소방관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슬픔을 밤새 토해냈다. 시간이 흘러도 살아남은 소방관과 유족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대형 화재가 나면 부상 소방관 지원이나 순직 소방관 예우가 거론되지만 그때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잊힌다. 홍제동 소방영웅 6명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도 최근 일이다. 서대문구가 그들이 순직한 홍제동 통일로 주변 길을 ‘소방영웅의 길’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며서 잊힌 이름을 23년 만에 다시 듣게 됐다. 한국은 제복 입은 영웅들의 희생을 기리는 데 인색하지만, 미국 도시에는 시민을 위해 순직한 영웅의 이름을 딴 도로, 다리, 공공건물이 많다. 뉴욕에선 2001년 9·11테러로 세계무역센터에서 숨진 소방관 343명을 기리기 위해 소방관들이 뛰어 올라갔던 110층 계단을 따라 오르는 계단오르기 행사가 지금도 매년 열린다. 순직 소방관의 영결식은 지역 방송사가 생중계한다. 미국 사회에서 시민을 지키는 제복 입은 영웅은 존중과 예우의 문화 속에서 오랜 시간 양성된다. 영웅을 오래 기억하는 사회에선 재난 전쟁의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First in, Last out)’ 정신이 살아 숨쉰다. 2일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해상보안청 수송기와 충돌해 불이 붙은 여객기에서 18분 만에 379명이 모두 무사히 탈출했다. 이날 모든 승객과 승무원을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기내를 빠져나온 이가 기장이었다. 대형 화재 현장을 본 사람들은 넘실거리는 화염과 열기, 뭔가 펑펑 터지는 큰 소리에 압도되고 만다. 23년 전 홍제동의 소방관들도 그랬을 텐데 “아들이 집에 남아 있다”는 집주인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화마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리고 동료와 유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는데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데만 23년을 허비했다. 다른 한편에선 공직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장관이 취임 석 달 만에 총선 출마를 위해 물러나는 ‘속도 경쟁’이 벌어진다. 정치적 중립 의무를 진 검사가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한다’는 검사 선서의 다짐이 무색하게 사표 한 장 던져 넣고 정치판으로 직행한다. 천금처럼 무거운 공직의 무게를 깃털보다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 여태 법을 만들고 지키는 최고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누리니 정작 시민 곁에서 마지막까지 소명을 다한 제복 입은 영웅들은 홀대를 받는다. ‘소방영웅의 길’ 위에서 우리가 다짐할 차례다. 한 사회를 지키는 제복 입은 영웅은 우연히 등장하지 않는다고.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지난해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사려면 연간 소득의 15배를 쏟아부어야 한다. 올해 서울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10억 원이 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청년층(15∼39세)의 연간 평균소득은 2781만 원인데, 이렇게 큰돈이 어디서 나오나. 집 장만할 생각하면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는 일이 막막하다.그러니 청년들 사이에서 ‘결혼 파업’이니 ‘출산 파업’이라는 말이 나온다. 일해서 번 돈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뛴 집값을 대려면 은행 대출을 받거나 부모에게 손을 벌려야 한다. 정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매년 ‘청년 지원대책’으로 포장한 정책 대출을 쏟아내고 있다. 젊어서 낸 빚은 늙어가면서 갚아야 할 짐이다. 지난해 집이 있는 청년의 대출잔액(중앙값)은 1억4150만 원으로 중장년층(1억196만 원)과 노년층(5000만 원)보다 더 많다. 대출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정부가 요즘 눈독을 들이는 건 부모의 자산이다. 정부는 결혼이나 출산 전후 2년간 최대 1억 원까지 증여재산을 비과세해 주는 ‘결혼출산 증여재산 공제’ 제도를 내년부터 시행한다. 신랑과 신부가 각각 기존 자녀 증여공제 한도 5000만 원에 결혼 증여재산 공제 1억 원까지 더해 양가에서 최대 3억 원까지 비과세 증여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다 정부가 푼 정책 대출까지 받아 무섭게 뛴 집값을 감당하라는 건데, 이러다 보면 청년들을 빚의 노예로 만들고 부모 세대의 노후자산까지 위협할 수 있다. 우리보다 앞서 2015년 혼인 육아 증여자금 공제를 도입한 일본은 가계자산의 63%가 금융자산이다. 부모 세대의 자산 이전이 우리보다 수월하다. 한국 가계는 금융자산 비중이 35.6%에 불과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40세 미혼자녀 1인을 둔 가구 중 결혼 증여공제 한도 1억5000만 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가구는 전체의 27%에 그쳤다. 게다가 한국에선 결혼과 출산 전후 2년 이내에 증여를 해야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한국 ‘가시고기’ 부모들의 상당수는 주어진 기간에 증여세 공제를 받기 위해 집을 내놓거나 금융회사 대출이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결혼 증여재산 공제가 부모 세대의 노후까지 위협하는 ‘현대판 결혼 지참금’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더 정교해져야 한다. 증여 목적을 결혼 출산에서 일본처럼 육아까지 확대하고 ‘2년’이라는 증여 시점 제한도 완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부모들이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급하게 증여할 돈을 마련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일본은 18∼50세 자녀에게 결혼 출산 육아 자금을 비과세 증여할 수 있도록 자녀 나이를 제한한다. ‘출산 장려’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면 자녀의 소득 요건과 증여재산 사용처에 제한을 둬야 불필요한 ‘부자 감세’ 논란도 없어진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여론조사에서 혼인 증여공제 제도에 부정적인 응답자의 절반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정책과 무관하게 의사결정을 한다”고 답했다. 출산 인센티브가 안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자녀들이 은행 등에 결혼 육아자금 계좌를 개설하고 증여 자금을 신탁 방식으로 관리하게 한다. 자금을 인출하면 결혼 출산 육아 목적으로 썼다는 증빙 서류를 제출해야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녀 연소득이 1000만 엔을 넘으면 비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 한국의 증여세 최고세율(50%)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본(55%)에 이어 2번째로 높다. 자녀 증여공제 한도(5000만 원)는 5번째로 낮다. 세금으로 집값 잡으려다 누더기 부동산 세제를 만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출산 장려를 위한 일회성 세제 지원 대책 말고 이참에 경제 상황에 맞게 증여, 상속세에 대한 근본적 개혁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이젠 땅에 떨어진 은행을 주워 가도 세금을 내라는 건가.” 서울시청 근처 은행나무에 붙은 정당의 ‘은행 횡재세’ 현수막을 본 한 시민이 농담처럼 말했다. 은행이 초과 이익을 거두면 추가로 세금을 부과하자는 ‘은행 횡재세’ 개념은 그만큼 낯설다. 은행(銀行)을 은행(銀杏)으로 오해한 시민이 정치권의 ‘여의도 사투리’엔 조금 어두울지 몰라도 ‘횡재세(windfall tax)’ 개념은 훨씬 잘 이해하고 있다. ‘windfall(횡재)’은 바람에 떨어진 과실이라는 뜻이 있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을 횡재세와 연결시킨 건 상식에 부합한다. 유럽의 횡재세 개념도 비슷하다. 원유가 콸콸 쏟아지는 유전을 소유한 정유회사가 갑자기 유가가 올라 큰돈을 벌면 우연히 횡재한 거니 추가로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중동에서 원유를 사다가 정제해 석유제품을 판매하는 한국의 정유사들의 사정은 다르다. 금융당국이 대출과 사업 규제를 틀어쥔 한국 은행들의 이자 수익이 우연히 떨어진 낙과와 같은지 따져봐야 할 게 많다. 첫째, 은행 이자 장사의 책임 소재다. 이자 수익의 근원은 대출이고, 대출 규제는 당국이 쥐락펴락한다. 언젠가부터 서민과 청년 대책엔 정책 대출도 빠지지 않는다. 은행의 ‘횡재’가 문제라면 국내총생산(GDP)보다 많은 가계빚을 풀어 은행을 배불린 역대 정부와 여야 정치권의 ‘대출 포퓰리즘’ 책임도 반드시 함께 물어야 한다. 둘째, 한국 은행이 이자 장사에 매달리게 한 규제 환경이다. 은행은 이자 외의 수수료 수입을 위해 주가연계증권(ELS) 등 투자 상품을 판매한다. 그러다가 투자자 손해가 생기면 불완전 판매 논란이 불거지고, 은행이 손실을 떠안는 일이 되풀이된다. 이번에도 금융감독원은 고령자에게 ELS를 판매한 은행 탓부터 했다. 단지 고령자에게 판매한 게 문제라면 세계적 투자자인 93세의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에게 판매한 투자 상품도 불완전 판매 논란을 피할 수 없다. 감독당국은 그간 뭐했나. 되풀이되는 불완전 판매 논란이 해소되지 않으면 은행의 ‘이자 장사 중독’은 횡재세로도 막지 못한다. 셋째, 은행 이자 수익은 ‘무위험 횡재’가 아니다. 당국이 연장해준 대출 만기가 언젠가 돌아오고 대출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은행 손실이 커질 텐데 어디까지를 초과수익으로 볼 건가. 지금은 횡재세를 걷고 그땐 세금으로 손실을 채워주겠다는 건가.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의 클라우디아 부흐 부총재는 지난달 “지금은 은행의 회복 탄력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전년 동기 대비 3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 독일 은행들에 충당금을 더 쌓으라고 요구했다. 정치적 횡재세보다 금융적인 접근이다. 횡재세 대신 ‘대출 금리를 깎아주자’는 당국의 상생금융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은행이 이자 장사로 돈을 벌었다면 예금이자를 낮게 줬거나 대출이자를 너무 높게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대출금리를 자극할까 걱정해 은행들에 “지나친 수신 금리 경쟁을 자제하라”고 한쪽 편을 들었다. 예금자에게 줄 이자를 줄여 대출 이자를 낮춰주더니, 다시 은행이 번 수익을 빼서 대출자의 금리를 깎아주는 게 상생금융은 아니다. 고금리로 신음하는 서민을 위한 금융지원은 필요하지만 예금자 부담으로 대출자의 손실을 사회화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고금리로 어려운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을 보며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서민이 은행 종노릇을 하는 일을 근본적으로 막으려면 그간 방만하게 관리한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부터 줄여야 한다. 자영업자들이 은행 빚을 내지 않고 신나게 장사할 수 있게 괜찮은 일자리와 경제부터 살려야 한다. 새로 짜이는 윤석열 정부 ‘2기 경제팀’이 은행 탓만 해선 할 수 없는 일이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요즘 미국 텍사스가 잘나간다. 텍사스가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월드시리즈에서 창단 62년 만에 우승해서 하는 얘긴 아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내놓은 ‘2023년 사업하기 좋은 미국 도시’ 상위 10위의 절반이 휴스턴(1위) 플래노(3위) 어빙(4위) 댈러스(5위) 오스틴(7위) 등 텍사스 도시다. 20위권에 댈러스-포트워스 대도시권 5개 도시가 포진했다. 거점도시인 메가시티와 주변 도시가 분업체계를 갖추고 전 세계 기업 투자를 끌어오는 ‘텍사스판 메가시티리전(Megacity Region·초광역경제권)’의 힘이다. 텍사스 주도인 오스틴은 테슬라와 델, 삼성전자가 있는 남부의 ‘테크허브’이며 북쪽의 댈러스는 텍사스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금융허브’다. 댈러스에서 차로 3시간 남짓 떨어진 남쪽엔 포천 500대 기업 중 26곳을 보유한 휴스턴이 있다.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의 간판 기업인 HP가 지난해 이곳으로 이전한 건 이 도시가 왜 사업하기 가장 좋은 곳인지 보여준다. 남부 특유의 사투리와 석유, 카우보이의 고장쯤으로 알려진 텍사스는 어떻게 최고가 됐을까. FT에 따르면 텍사스는 자유방임적 기업 환경에 연방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법 등의 보조금을 활용한 인센티브 패키지로 기업 투자를 빨아들이고 있다. 주 정부는 기업과 개인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생활 물가도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LA)와 같은 동·서부 대도시보다 훨씬 낮다. 덕분에 2000년 이후 텍사스 인구가 900만 명 이상 늘었다. 경제 규모는 3배로 커져 한국 이탈리아보다 큰 세계 8위권으로 성장했다. 남부의 텍사스가 공급망 재편기에 뜨고 있는 메가시티리전 모델이라면 서부의 캘리포니아는 자본 인재가 국경을 넘나들며 도시 단위로 경쟁했던 과거 세계화 시대의 성공 모델이다. 캘리포니아는 이번 조사에서 20위권 도시에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LA는 37위로 10계단 떨어졌다. 높은 집값과 생활비, 무거운 세금, 까다로운 기업 규제에 지친 기업들이 텍사스나 플로리다로 떠나고 미중 갈등으로 중국 등 외국인 투자마저 감소하면서 순위가 추락했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데 여야 정치인들이 외치는 ‘한국판 메가시티’ 비전은 뭔가. 서울 인구가 주는 건 높은 집값과 생활비에 지친 시민들이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김포가 서울에 편입돼 집값이 오른다면 누군가는 더 싼 집을 찾아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메가시티를 베드타운 확장이나 부동산 정책으로 포장해선 안 된다. 서울이 뉴욕보다 작다고 하는데 뉴욕은 자치구가 5개(맨해튼, 퀸스, 브롱크스, 브루클린, 스태튼 아일랜드)다. 서울은 구청장 25명에 각각 구의회까지 두고 있다. 주민의 삶은 광역화하고 도시는 연담화하고 있는데 우리 지방 행정은 지나치게 분절적이고 기능적으로 단절돼 있다. 메가시티 근간은 거점도시와 주변 도시를 1시간 내로 연결하는 광역교통망이다. 서울 경기 인천의 단체장들이 대중교통 정기권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칸막이 행정’을 하고 ‘김포 지옥철’ 해법도 제대로 못 내놓으면서 ‘메가서울’은 무슨 수로 만드나. 민간 투자가 빠진 지방 메가시티 논의도 알맹이가 빠져 있다. 정부가 혁신도시를 건설하고 공공기관을 강제로 옮겨놨지만 지방소멸 위기는 가시지 않는다. 지역 거점도시는 쇠락하고 있다. 미 실리콘밸리나 애리조나 반도체벨트는 스탠퍼드대나 애리조나대와 같은 지역 명문대가 투자와 인재 유치의 구심점이다. 지방 명문 국립대조차 모멸적 대접을 받는 한국에선 불가능하다. 메가시티는 국가 경쟁력 재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주민의 삶과 행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기업 투자와 인재를 끌어올 수 있어야 성공한다. 텍사스는 그 길을 가고 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소비자들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싸게 이용할 수 있다면 네이버 카카오 쿠팡 배달의민족과 같은 디지털 플랫폼의 확장과 독점을 막을 명분이 있나. 섣불리 반독점 규제를 했다가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가 피해를 보는 건 아닌가. 그간 빅테크(대형 기술기업)의 보호막이 되어 준 이 같은 ‘반독점의 역설’에 대한 대안을 찾으려면 미국 경쟁 당국과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회사인 아마존 간 ‘세기의 소송’을 지켜봐야 한다. ‘아마존 저격수’로 불리는 리나 칸 위원장이 이끄는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지난달 말 마침내 아마존을 상대로 반(反)독점 소송을 제기했다. 2017년 예일대 로스쿨을 다니던 28세의 칸 위원장이 “현행법으로는 아마존의 교묘한 약탈적 가격 정책을 막을 수 없다”며 반독점법의 맹점을 지적한 ‘아마존 반독점 패러독스’ 논문을 발표한 지 6년 만이다. FTC는 이번 소송에서 아마존이 독점력을 불법적으로 이용해 자사 플랫폼에서 수십만 명의 판매자를 착취하고, 경쟁자를 방해하고, 소비자에게 과도한 비용을 부담시켰다고 주장했다. 아마존은 “사실과 다르다”며 맞서고 있다. 소송 결과에 따라 어느 한쪽은 치명타를 입는다. 법원이 아마존의 손을 들어주면 칸 위원장의 명성이 추락하고, 디지털 플랫폼과 빅테크에 대한 경쟁 당국의 규제 칼날은 크게 무뎌진다. FTC가 이기면 아마존은 최악의 경우 1980년대 AT&T처럼 기업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또 빅테크 독과점에 비교적 관대한 자유방임적 반독점법 기류가 바뀌고 디지털 경제의 판이 흔들릴 수 있다. 미 전문가들이 이번 소송을 두고 “세대적 변화(generational change)가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한 이유다. 아마존은 사업 초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가격을 낮춰 소비자를 모으고 입점하는 판매자를 늘렸다. 규모가 커지고 효율성이 높아지면 고정비용이 낮아지고 가격은 떨어져 고객을 더 모을 수 있다. 이런 식의 ‘플라이휠(외부의 힘 없이 관성으로 회전력을 유지하는 자동차 부품) 전략’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6년간 벼르던 칸 위원장이 소송의 칼을 빼든 건 저렴한 가격으로 몸집을 불린 아마존이 이제는 지배력을 활용해 소비자와 판매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뜯어오는 ‘추출(extraction) 모드’로 들어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칸 위원장의 임기는 내년 9월에 끝난다.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애플 등과의 싸움에서 연거푸 진 그가 아마존이라는 거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소비자가 좋아하는 기업을 공격하는 건 정치적으로 승산이 없다”는 부담도 크다. 아마존을 지켜주는 수호신은 결국 세계 최고의 로펌이나 변호사가 아니라 기업을 사랑하는 소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에선 아마존 플라이휠 전략을 따라 하며 몸집을 빠르게 불린 대표적 플랫폼이 쿠팡이다. 창업자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은 8월 역대 최고 2분기(4∼6월) 실적을 발표하면서 “플라이휠이 가속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쿠팡은 아마존처럼 물건을 사고파는 마켓플레이스를 운영하며 판매자에게 물류 서비스도 제공한다. 아마존 프라임 서비스와 유사한 와우 멤버십 제도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인 쿠팡 플레이를 운영하고 있다. 회원이 늘어나자 지난해 멤버십 비용도 2900원에서 4990원으로 올렸다. 올해는 창업 이후 처음으로 연간 기준 흑자를 기대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 쿠팡도 ‘추출 모드’로 들어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쿠팡은 한국 유통업계의 판을 바꾸고 있다. 동시에 “미국 국적 창업자가 아마존을 따라 하며 한국에서 큰돈을 벌고 있다”는 눈총도 맞는다. 그런 쿠팡이 아마존과 같은 위기에 몰릴 때 수호신 역할을 할 소비자들은 얼마나 될까. ‘플랫폼은 돈이 벌리기 시작할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는 걸 창업자들이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