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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여야의정 협의체가 가동되면 올 2월 의료공백 사태가 발생한 지 9개월 만에 대화 국면이 시작된다. 하지만 대화가 성과로 이어지기엔 상황이 녹록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7일 기자회견에서 “내년도 정원은 정부가 추진하는 대로 됐다”며 내년도 정원 조정 불가 방침을 거듭 밝혔다. 반면 사태 해결의 키를 쥔 전공의(인턴, 레지던트)와 의대생 단체는 여전히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를 주장하며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일각에선 전공의·의대생과 충돌하던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이 물러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란 예상도 나오지만 정부가 요지부동인 이상 드라마틱하게 국면이 바뀌긴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더 많다.늦어도 내년 2월엔 전공의 입장 변화 불가피 한 가지 확실한 건 전공의가 돌아오지 않으면 의료공백 사태는 안 끝난다는 것이다. 정부가 제시하는 ‘전문의 중심 병원’도 전공의가 돌아와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가 지속적으로 배출될 때 가능한 얘기다. 정부는 11, 12월 진행되는 내년 상반기 수련 전공의 모집 때 일부 전공의가 복귀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7, 8월 진행된 하반기 수련 전공의 모집 때 지원율이 1.6%에 불과했던 걸 감안하면 이번에도 복귀 규모는 미미할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올 7월 칼럼에서 “전공의와 의대생 연내 미복귀는 상수로 봐야 한다”고 썼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14일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진행되고 다음 달 13일까지 각 대학은 수시전형 합격자를 발표한다. 이제 대학이 할 수 있는 건 수시모집 미선발 인원을 정시로 이월하지 않는 등 선발 인원을 일부 조정하는 것 정도인데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전공의와 의대생 역시 ‘미세 조정’이란 타협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문제는 내년이다. 전공의 대표인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자신들의 요구가 안 받아들여지면 “내년 봄에도 전공의와 의대생은 병원과 캠퍼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전공의 등이 내년도 증원 철회를 언제까지나 요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의대 정시전형 결과는 내년 2월 7일까지 발표된다. 합격자 발표로 신입생들은 전공의와 의대생의 후배가 된다. 후배들의 합격 취소를 요구할 순 없으니 합격을 인정하는 대신 수업 거부에 동참해 달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내년도 2월 이후에는 2026학년도의 ‘증원 철회’나 ‘신입생 모집 중지’ 등이 새 요구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내년 3월 전공의 입대도 변수 변수는 하나 더 있다. 7, 8월 대거 사직 처리된 전공의 상당수는 내년 3월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사(공보의)로 입대해야 한다. 전공의는 의무사관 후보생이어서 일반 사병 입대는 불가능하다. 인턴이나 저연차 레지던트는 몰라도 고연차 레지던트의 경우 수련 중 38개월의 공백이 생기는 것이니 의료공백 사태가 조속히 해결돼 수련병원에 복귀하는 게 이들에게도 유리하다. 의료공백 사태가 언제 어떻게 끝날 것인지 현재로선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내년 초 어떤 형태로든 전공의와 의대생이 요구사항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면 정부와 의료계도 이를 계기로 의료공백 사태를 해소할 노력을 지금부터 해야 한다. 먼저 여야의정 협의체에서 전공의 수련 제도 개선이나 내년도 증원 일부 조정을 논의하면서 전공의가 대화의 장으로 나올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의료계에선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들을 중심으로 진행 중인 의사 수 추계가 내년 초 나오는 만큼 이를 토대로 적절한 증원 규모에 대한 의견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전공의·의대생 단체에도 상황 변화가 생길 때 보다 적극적으로 논의에 참여할 것을 권하고 싶다. 올 한 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비교해 보면 무조건 강경하게 나오거나 누워만 있는 게 답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테니 하는 말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정부는 지난달 4일 국민연금 개혁안 발표 후 “2003년 이후 21년 만에 발표한 정부 연금개혁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연내 국회를 통과하면 17년 만에 개혁이 이뤄진다”고 했다. 정부가 연금개혁안을 제출한 건 2003년인데 왜 개혁은 2007년에야 됐을까.4년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연금개혁 국내외에서 연금개혁이 진통 없이 진행된 경우는 없다. 2000년대 중반 연금개혁 때도 마찬가지였다. 2003년 취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선거 전 연금개혁에 소극적이었지만 취임 후 입장을 바꿨다. 이후 학계, 경영계, 노동계 등이 모여 논의를 거듭했지만 결론을 못 냈고 결국 세가지 안을 발표한 뒤 정부로 공을 넘겼다. 정부는 그중 하나를 택해 2003년 10월 법안을 발의했지만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소극적이었고 결국 이듬해 16대 국회가 막을 내렸다. 17대 국회에선 후속 논의가 3년 동안 이어졌고 2007년 4월 본회의 표결까지 갔지만 ‘국민연금법-기초노령연금법’ 세트 중 표에 도움이 되는 기초노령연금법만 통과되고 정작 국민연금법은 부결됐다.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맛이 쓰기에 사탕과 같이 올렸는데 약사발은 엎고 사탕만 먹었다”고 국회를 비판하며 사퇴했다. 언론에서도 ‘무책임한 행태’란 비판이 이어지자 여야는 부랴부랴 그해 7월 국민연금법을 통과시켰다. 20여 년 전 연금개혁 과정을 설명한 건 현재 상황에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연금개혁은 인기를 얻기 어려운 지난한 작업이다. 2002년 대선 때 연금개혁을 주장했던 이회창 후보가 패배하고 정작 연금개혁에 소극적이었던 노 전 대통령이 당선 후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도, 2004년 총선 직전 표결이 무산된 것도 연금개혁이 표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둘째, 전문가와 각계 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개혁안에 합의할 것이란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당시에도 이번에도 전문가와 시민사회단체는 어떤 안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합의가 가까워질 때마다 더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등 딴지를 거는 인물이 나타나곤 했다. 김상균 전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공론화위원장은 “가장 기본적이고 시급한 것부터 하나씩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교훈”이라고 했다. 셋째, 국회와 정부를 믿으면 안 된다. 17년 전 국회는 4년간 논의 후에도 결국 표에 도움이 되는 법안만 통과시켰다가 비판을 받고서야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노무현 정부도 출범 직후부터 추진했던 연금개혁을 지지율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임기 말에 마무리했다. 국회, 정부가 못 미더운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21대 국회 연금특위는 2년 동안 논의했지만 결론을 못 냈고 임기 말 유럽 출장 계획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현 정부는 ‘연금개혁’을 주요 국정과제로 내세우고도 지난해 24개 시나리오를 국회에 제출해 ‘맹탕 개혁안’이라는 비판을 받고서야 1년 만에 단일안을 제시했다.“가장 좋은 연금개혁은 빠른 연금개혁” 유불리에 따라 입장을 뒤집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기일 복지부 1차관은 지난달 6일 브리핑에서 “어느 백신이든 빨리 맞는 게 좋은 것처럼 연금개혁은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불과 4개월 전 “(21대 국회에서) 급하게 하기보다 22대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를 거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던 조규홍 복지부 장관의 말과는 전혀 달라진 태도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20여 년 전 언론의 감시와 국민의 관심이 연금개혁을 완수하는 최종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앞으로 눈을 크게 뜨고 조변석개하는 정부와 표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국회를 언론과 함께 감시하자고 말이다.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북한은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이후 2년 넘게 확진자가 0명이라고 주장했다. 2022년 5월에야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지만 코로나19 사망자로 인정한 건 현재까지 74명뿐이다. 그러나 전문가 사이에선 한국(3만5605명)보다 많은 5만∼10만 명이 코로나19로 사망했을 것이란 의견이 많다. 국내에선 지난해 8월 말 전수조사에서 표본감시로 전환돼 코로나19 확진자·사망자 수가 집계되지 않는다. 다만 질병관리청은 지난달 말 정점에서 주간 확진자를 20만 명 미만으로 추정했다. 이번 변이 치명률이 0.05%라고 한 만큼 그 주에만 백여 명이 사망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보건 당국은 확진자 수만 추정 발표했을 뿐 “(사망자 수는) 현재로선 알 방법이 없다”고만 했다. 최근 응급의료 공백으로 병원 응급실 수용을 거절당하는 일이 늘고 있다. 2일 부산 공사장에선 70대 남성이 병원 8곳에서 거절당한 후 50km 떨어진 병원에 이송됐으나 수술할 의사가 없어 사망했다. 같은 날 세종에서도 계단에서 넘어진 70대 남성이 뇌출혈 증상을 보였으나 18시간 만에 대형병원으로 이송돼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더 이상 구급차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뉴스가 아니게 됐고, 24시간 365일 열어야 하는 대형병원 응급실이 문을 닫는 비상식이 ‘뉴 노멀’이 됐다.정부 “응급의료 공백 사망자 통계 없다” 정부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는 예전부터 있었고 이 때문에라도 의료개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게 버틸 수 있는 건 의료공백 피해 사례가 따로 집계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최근 “응급실 미수용으로 사망했는지 따로 통계를 집계하지 않는다. 관련 사망이 늘었다는 정치권 주장은 확인 불가”라고 했다. 정부가 발표하지 않는 건 또 있다. 정부는 올 2월 “의료공백 피해자 소송 등을 지원하겠다”며 의사 집단행동 피해신고 지원센터를 열었다. 지난달 14일까지 반년간 4188건이 접수됐지만 정부가 ‘의료공백으로 인한 피해’로 공식 인정하고 소송 지원 방침을 발표한 사례는 한 건도 없다. 응급의료법에 따르면 정당한 사유 없이 응급의료를 거부할 수 없고 이 경우 복지부에서 행정처분을 내릴 수 있지만 의료공백 이후 해당 조항을 적용해 행정처분을 내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의료공백 피해 인정을 꺼리는 건 의사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병원을 떠난 의사 때문에 국민이 죽어 나간다’는 비판에 대한 우려도 있을 것이다. 한 대형병원 교수는 “중증 응급질환으로 사망하면 일반인들은 제때 의료진을 만나지 못해서 사망한 건지 정말 사망률이 높은 질환이어서 사망한 건지 가려낼 수 없다”고 했다.“피해 조사·검토” 말만 되풀이 조규홍 장관은 지난달 국회 청문회에서 의료공백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는 우려에 “(체계적 조사를)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이후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후속 조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피해 의심 사례가 보도될 때마다 “조사해 보겠다”고 했지만 그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과적으로 정부에도, 의사에게도 불리한 죽음은 집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진료 체계가 그래도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민들이 죽어 나간다는 지적에 “가짜 뉴스”라고 소리 높여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서두에 언급한 두 사례처럼 불리한 상황에서 피해 규모를 밝히지 않는 건 이번만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느끼는 것처럼 ‘의료대란’이란 유령은 지금도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애써 보려 하지 않는 대통령실과 정부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10년 전 일본 대학에서 연수할 때 일이다. 방학을 이용해 자전거로 일본 열도를 종단하던 중 삿포로의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남성이 일본 내 혐한 보도를 토대로 한국 비판을 쏟아냈다. “혐한 보도는 극히 일부 사례를 과장한 것”이라며 조목조목 반박하자 “한국인의 생각과 행동을 언론에서만 접했는데 그게 획일적이고 틀에 박힌 것이었다”며 물러섰다. 또 “나중에 자전거를 같이 타자”고 제안했다. 그와는 여행 후 도쿄에 돌아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사이가 됐다. 지바에서 열린 200km 자전거 대회에도 함께 출전했는데 생소한 길을 그와 그의 지인이 자신의 기록을 신경 쓰지 않고 앞뒤로 에스코트해 줘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낯선 사람과 만나는 경험 사라져 이달 초 공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의 사회통합 조사 결과를 보면서 당시 생각이 났다. 조사에선 국민 92.3%가 “사회 갈등 중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이 가장 심각하다”고 답했다. 또 58.2%는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 연애·결혼을 할 수 없다”고 했고, 33%는 “정치 성향이 다른 친구·지인과 술자리를 할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우리’와 ‘타자’를 구분하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경계하는 건 인간이 가진 ‘부족 본능’이다. 그래도 과거에는 가족 모임, 동창회, 회식, 학부모 모임 등에서 자의든 타의든 생각이 다른 사람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신문과 TV 뉴스에서도 찬반 의견을 어느 정도 균형 있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스마트폰과 메신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낯선 사람과 대면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기를 거치며 국민 다수가 비대면에 익숙해졌다. 신문과 TV의 자리를 유튜브 등이 상당 부분 대체하며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성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는 경향도 강해졌다. 그렇다면 낯선 사람을 안 만나는 게 좋을까. 2017년 미국 시카고대 연구팀은 통근 열차를 타는 시민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탑승 전 대다수는 “낯선 사람과 얘기하고 싶지 않다. 혼자 가는 게 훨씬 좋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실험 결과 혼자 출근한 사람보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이 “출근 시간이 훨씬 즐거웠다”고 답했다.극과 극도 만나면 통한다같은 해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는 ‘독일이 말한다’ 기획을 시작했다. 온라인 설문조사를 거쳐 생각이 극과 극인 사람을 만나게 해 보자는 취지였다. 이 기획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는데 결과는 놀라웠다. 난민과 극우주의자, 동성애자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서로를 상당 부분 이해하게 됐다는 후기를 남겼다. 디 차이트 편집장은 자신의 책 ‘혐오 없는 삶’에서 “많은 참가자가 싸움 등 극적인 걸 기대했지만 실제 발견한 건 동의와 공감이었다”고 썼다.(동아일보도 2020년 ‘극과 극이 만나다’ 기획을 통해 생각이 다른 이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해 나가는 모습을 보도했다.)‘타자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는 깨달음의 계기”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필자가 진보와 보수 정권에서 모두 청와대를 출입하며 알게 된 것은 진보의 절대다수는 종북좌파가 아니고, 보수의 절대다수는 토착왜구가 아니란 점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 어느 한 극단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사이 다양한 스펙트럼상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 만나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10년 전 일본 남성이 필자를 만난 후 실제 한국인이 혐한 뉴스에 나오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국어 영역에는 독일 철학자 헤겔의 미학과 변증법을 다룬 지문이 등장했다. 철학 전공자도 고개를 흔들 정도로 어려운 내용으로 킬러(초고난도) 문항의 전형적 사례로 거론되지만 의외로 수험생 절반에 가까운 45%가 정답을 맞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2023학년도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두 학생은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공부 비법을 설명하다 “책을 안 읽는다” “책을 안 좋아한다”고 했다. 1994년도에 처음 도입된 수능의 취지가 ‘암기식 교육 대신 독서와 토론을 통한 사고능력 향상’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깊이 있는 독서가 중요하다’던 수능은 어디로 간 걸까.최근 출간된 504쪽짜리 책 ‘수능 해킹’은 이처럼 어느새 도입 취지와 전혀 달라진 수능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고발한다. 또 기괴한 퍼즐놀이로 바뀐 수능을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수능을 100여 일 앞둔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두 저자를 만나 수능의 현실과 개선 방안에 대해 들었다.》사교육 시장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봤던 현직 의사 문호진 씨(34)와 소설가 단요 씨는 헤겔의 미학이 거론된 2022학년도 국어 문제의 경우 “핵심 개념을 몰라도, 지문을 이해하지 못해도 풀 수 있다”고 단언했다. 낱말카드를 맞추는 것처럼 지문과 문제의 중복 키워드를 찾아내 매칭하는 일명 ‘눈알굴리기’ 기법을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2023학년도 국어 영역에서 킬러 문항으로 꼽힌 기초대사량 지문의 경우 “숙달된 학생은 레고 블록을 갈아 끼우듯 서술어를 바꾸는 ‘치환 테크닉’으로 1분 30초∼3분 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했다. 국어 영역 외 다른 영역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저자는 이 같은 퍼즐 맞추기식 문항이 “반교육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단요 씨는 “과학탐구의 경우 생명과학1은 논리 퍼즐이, 화학1은 빠른 사칙연산과 미지수 찾기가 관건”이라며 “이는 다른 곳에서 활용할 수 없는 기예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했다. 또 “‘4974와 23134를 곱하시오’라는 문제는 어렵지만 초등학교 수준의 지식만 있으면 된다. 이처럼 형식적 복잡성만 가진 퍼즐식 문항이 지식과 논리의 깊이가 필요한 고난도 문항처럼 오해되며 수능의 문제를 가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은 왜 수능에 퍼즐식 문항을 내게 됐을까. 문 씨는 “최근 시험 과목 수와 교과 범위가 줄어드는 반면 사교육 업체의 서비스 질은 높아지는 상황에서 평가원이 수험생들을 줄 세우기 위해 택한 게 퍼즐식 문항”이라고 분석했다. 의도가 나쁘지 않았다는 건 저자들도 인정한다. 정부는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며 2000년대 중반 EBS 교재와 수능을 연계했고 2011학년도부터 연계율을 70%로 강화했다. 또 같은 이유로 4과목씩 선택해 시험을 보던 수능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을 2014학년도부터 2과목만 선택해 보도록 했다. 2018년도부터는 영어 영역을 절대평가로 만들었고, 이른바 ‘조국 사태’ 후에는 ‘아빠 찬스를 막겠다’며 정시를 강화했다. 문제는 시험 과목 수와 교과 범위가 줄면서 수험생들이 제한된 영역에 자원을 집중하게 됐다는 것이다. 문 씨는 “일례로 과거 4과목 시험을 치른 후 2, 3과목만 반영하던 탐구 영역이 ‘2과목 시험 후 2과목 모두 반영’으로 바뀌면서 ‘한 과목이라도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상위권 수험생들이 필사적으로 각 과목에 매달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원이 집중되는 영역을 알게 된 사교육 업체는 평가원의 출제 경향을 패턴화한 사설모의고사로 테크닉을 가르쳤고, 평가원은 줄 세우기를 위해 복잡도를 강화한 퍼즐식 문항으로 대응하며 점차 난도가 높아졌다. 단요 씨는 “갈수록 의미 없는 복잡도만 높이는 식으로 진화해 생명과학의 경우 현재 학원 강사도 ‘특정 유형 문제는 포기하라’고 할 정도로 극한 수준이 됐다”고 말했다. 퍼즐식 문항을 평가원만의 책임으로 돌릴 순 없다. 1998년 설립된 평가원은 역대 원장 11명 중 3명만 임기를 채웠고, 나머지는 문제 오류나 난이도 조절 실패 등에 책임을 지고 중도 사퇴했다. 그러다 보니 문제를 출제하며 교육적 효과보다 난이도 조절에 더 신경쓰게 됐고,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제출해 논란을 부르기보다 기존 유형에 퍼즐형을 가미해 난이도를 컨트롤하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문 씨는 “평가원이 난이도 조절이나 복수정답 막기 등에만 치중하는 대신 교육적 목적에 충실할 수 있도록 국민과 교육 당국, 언론이 돕기만 했어도 현재 같은 극단적 문항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른바 ‘수능의 퍼즐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같은 변화는 2010년 전후부터 수년에 걸쳐 이뤄졌지만 그동안 거의 공론화되지 못했다. 수험생과 학부모 모두 일단 입시를 거치고 나면 관심이 줄어드는 데다, 교육부 공무원과 교육 전문가도 문항의 세부 변화까진 알아채지 못한 탓이다. 뒤늦게 초고난도 문항에 대해 알게 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제외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렸고 이른바 ‘사교육 카르텔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 검경까지 동원했음에도 성과는 거의 없었다. 저자들은 “지난해 최고치를 경신한 사교육비도 당분간 줄어들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단요 씨는 “현 정부는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보다 적을 만들어 대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사실 사교육의 문제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고 설명했다. 문 씨도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있는데 일부만 잘라낸다고 해결될 수 있나. 오히려 불안감만 더 키웠다”고 했다. 저자들은 교육부에 대해서도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면피성으로만 대처하며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단요 씨는 “킬러 문항을 없앴다고 하지만 6월 모의평가의 경우 영어 영역 1등급 비율이 1.47%로 역대 최저였다”며 “이는 절대평가의 탈을 쓴 상대평가이며 과거의 영어 영역으로 회귀하려는 징조”라고 말했다. 저자들은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 역시 사교육을 자극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문 씨는 “의대 증원이 의사 배출로 이뤄지려면 6∼10년 걸리는 반면 사교육 유발 효과는 즉각 발생한다”며 “아동학대라고 부를 수 있는 초등의대반, 자퇴한 N수생을 위한 입시학원, N수생이 빠져나간 자리를 노리는 편입학원 등으로 연쇄반응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봤다. 제목은 ‘수능 해킹’이지만 저자들은 암기형 문항으로 산출되는 내신 성적, 고교생 수준을 뛰어넘는 수행평가를 요구하는 교사들, 사교육 없이 불가능한 대학 면접시험 등 수능 외에 고교생을 옥죄는 다양한 입시 제도의 현실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들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건 ‘안전 마진(safety margin)’이다. 실수를 해도 치명적 상황에 이르지 않을 수 있어야 수험생과 학부모의 불안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수능 선택과목을 다시 늘려 한두 과목은 실패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 수험생과 평가원을 포함해 입시 당사자들이 오류와 시행착오에 여유를 갖고 대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사교육이 개입할 여지를 줄이기 위해 입시를 단순화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단요 씨는 “지방 일반고에 진학한 학생이 사교육 도움 없이 내신과 수능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입시 정책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책은 나온 지 한 달 만에 초판 3000부가 매진돼 최근 2쇄를 찍었다. 아르바이트 등으로 사설모의고사 출제 경험이 있는 저자들은 “책이 마치 사교육 업체 광고처럼 받아들여질까 봐 걱정”이라면서도 “현실을 바꾸려면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썼다. 앞으로 입시 제도를 손볼 때 논의의 토대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6일이면 수능이 꼭 100일 남는다. 수험생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묻자 여러 차례 수능을 쳤다는 문 씨는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책을 쓰면서 여러 명을 인터뷰했는데 지난해 역대급 불수능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학생이 좋은 결과를 내는 걸 봤습니다. 올해 수능 난이도가 어떨 것이란 예상이나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당일 눈앞의 시험지에 집중하고 설사 몇 문제 틀렸더라도 멘털(정신)을 잡고 끝까지 버티면 좋은 성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문호진(34)△1990년 인천 출생△2022년 인하대 의대 졸업△2023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중앙집행위원△현재 서울의 한 공공병원에서 근무 중단요△경기 출생△2022년 소설 ‘다이브’로 데뷔△2023년 문윤성 SF 문학상, 박지리문학상 수상△2024년 문인동네 신인상 평론 부문 당선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지난주 정부는 미복귀 전공의(인턴, 레지던트)에 대해 면허정지 처분을 중단하고, 수업을 거부 중인 의대생은 F학점을 받아도 유급 대신 ‘강제 진급’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복귀시한으로 정한 15일까지 복귀한 전공의는 10% 미만이고 과반이 사직 처리됐다. 의대생 역시 대부분 수업 거부를 이어가고 있다. 이쯤 되면 정부도 인정할 때가 됐다. 전공의와 의대생은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 외에 어떤 조치를 내놓아도 당분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내년도 증원이 정부 말대로 ‘상수’가 됐다면 이제 연내 전공의·의대생 미복귀 역시 ‘상수’로 받아들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연내 미복귀 전제로 대책 만들어야 전공의와 의대생의 진심을 의심하진 않는다. 특히 필수과 전공의들은 사명감을 갖고 힘든 길을 택한 이들이다. 갈수록 악화되는 의료 현장, 정부의 미흡한 대책, 의사를 늘리면 해결될 것이란 단순한 해법, 비상식적 증원 규모 등에 실망해 병원을 떠난 걸 ‘밥그릇 챙기기’라고만 매도할 수도 없다. 정원이 최대 4배로 늘면 학습 여건이 열악해질 것이란 의대생들의 우려도 일정 부분 타당하다. 하지만 내년도 증원은 5월 말 확정됐고 이제 전공의·의대생도 복귀해 함께 해법을 논의할 시점이 됐다. 의사인 지인은 필자에게 “전공의들은 불합리하게 결정된 정책을 마음으로 못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더 많은 표를 얻은 앨 고어 후보가 분열을 막기 위해 패배를 인정한 것처럼, 때론 비합리적 결정이라도 승복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2000명이란 규모를 제외하면 의대 증원은 국민 다수가 광범위하게 동의하는 사안이다. 다만 최근 정부가 잇따라 내놓은 정책이 전공의·의대생이 돌아오지 않게 하는 쪽에 가까웠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당초 ‘법과 원칙에 따른 엄정 대응’을 강조했던 정부는 지난달 전공의에게 내린 각종 명령을 철회한 데 이어 면허정지 처분도 철회했다. 교육부도 의대생이 수업을 거부하자 “성적 평가를 학년 말에 하고 수업에 안 나와도 진급시켜 주겠다”며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할 유인을 스스로 없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일이다. 누워서 버틸수록 정부가 양보안을 내놓는데 전공의와 의대생이 왜 돌아오겠다고 나설까.의대생은 휴학이나 유급 불가피 전공의와 의대생은 올 2월 병원과 학교를 떠날 때부터 “최소 1년은 쉴 수 있다”, “유급은 각오했다”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정부가 해야 할 건 ‘할 수 있는 조치는 다했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전공의·의대생 미복귀를 전제로 대책을 만드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상급종합병원이 중증·응급 환자를 계속 볼 수 있도록 비상진료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행히 교수들이 환자 곁을 지키는 만큼 중증·응급 환자 수가 인상, 진료지원(PA) 간호사 확대, 경증 환자 회송 활성화 등을 통해 연말까지 버틸 수 있도록 시스템을 보강해야 한다. 교육부는 더 이상 꼼수를 쓰는 대신 휴학 또는 유급을 허용하고 내년도 예과 1학년 7500명 수업을 전제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수업을 제대로 안 들은 의대생을 진급시키는 건 교육 원칙에도 어긋날뿐더러 국민 건강과 생명에도 도움이 안 된다. 정부와 사회가 이제부터 해야 할 건 원칙을 지키며 전공의와 의대생을 기다리는 것이다. 또 복귀할 경우 관용을 베풀고 원하는 의사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마지막까지 임기응변성 대책으로 일관할 경우 이번 사태는 전공의·의대생은 물론 정부와 사회에도 유용한 교훈을 남기지 못한 또 하나의 반면교사 사례로 남을 것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들은 17일부터 시작한 무기한 휴진을 닷새 만에 중단하기로 했고, 대한의사협회(의협)가 공언했던 ‘27일부터 무기한 휴진’도 내부 반발로 무산 가능성이 커졌다. 의협이 주도한 18일 하루 휴진의 동네병원 동참률은 4년 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의사단체 내부에서도 “더 이상은 싸우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2014년, 2020년 전면 투쟁으로 정부를 좌절시켰던 의사단체가 이번에는 왜 이렇게 고전하는 걸까.손자병법이 제시한 승부 결정 요소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전쟁의 승부를 결정하는 다섯 요소가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이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도’는 전쟁의 대의명분이다. 2000명이란 숫자에 대한 이견은 있을 수 있지만 주요국이 고령화와 함께 의사 숫자를 늘려온 만큼 한국도 27년 만에 의사를 늘려야 한다는 정부의 대의명분은 알기 쉽고 분명했다. 하지만 의사단체는 ‘원점 재검토’를 외칠 뿐 증원 찬성인지 반대인지조차 의견을 정리하지 못했고, 각각의 이유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국민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다음으로 ‘천’은 천시(天時), 즉 외부 환경의 변화다.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기였던 2020년 의대 400명을 증원하려다 실패했다. 국민들은 보건의료 위기 상황에서 굳이 의사들이 반대하는 정책을 왜 해야 하는지 정부에 물었다. 하지만 이후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이 일상화되면서 국민들은 의사 증원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의사들은 이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아과 오픈런의 원인이 젊은 엄마들의 ‘브런치 타임’ 때문이라는 등의 발언으로 여론의 반발을 샀다. ‘지’는 자신의 강약점을 알고 지형지물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의사의 힘은 국민 생명을 다룰 수 있는 면허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온다. 그러다 보니 의사 집단 휴진으로 생긴 의료 공백을 해결할 주체도 의사뿐이고, 결국 의사들이 버티면 정부가 물러나는 패턴이 반복됐다. 정부는 과거 실패를 감안해 진료지원(PA) 간호사 투입 등의 대안을 마련했고, 5월 말 대학 수시모집 요강 공고로 수험생과 학부모를 같은 배에 태우며 물러날 수 없는 배수의 진을 만들었다. 돌아보면 의사들이 자신들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는 4월 총선 직전이었고, 마지막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는 5월 말 모집 요강 공고 직전이었다. ‘장’은 지혜(智), 믿음(信), 어짊(仁), 용기(勇), 엄격함(嚴)을 겸비한 장수다. 법정단체 의협의 임현택 회장은 비타협적·기습적 게릴라 전술로 회장이 됐지만 14만 의사의 리더로서 통합적 리더십은 보여주지 못했다.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대표와도 갈등을 표출하며 전공의 복귀가 목표인 정부가 의협을 상대하지 않게 만들었다. 병원을 떠난 뒤 누워 있기로 일관하는 전공의 대표, “가족 같은 전공의가 나갔는데 환자 치료나 하는 건 천륜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병원을 떠난 의대 교수도 덕이 있다고 보긴 힘들다. 마지막으로 ‘법’은 조직을 관리하고 보급망을 유지하는 매니지먼트 능력이다. 하지만 올 2월 전공의 이탈 후 의사단체의 4개월은 내부에서 분열과 불신, 독선과 비방이 반복되는 ‘사분오열’ 그 자체였다.버티면 이긴다는 생각 이젠 버려야 의사 중 일부는 필자의 글을 보고 “아직 안 끝났다” “더 버티면 이길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는 다섯 요소 중 어느 것 하나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황이다. 더 이상 싸움을 이어가 봐야 전세를 뒤집기 어려울 거란 생각은 필자만 하는 게 아닐 것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때 기존 부처로는 곤란하다고 해 경제기획원을 만들고 고도성장을 이끌었다”며 “저출생대응기획부(저출생부)를 설치해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기고 장관이 사회부총리를 겸임하게 하겠다”고 밝혔다. 야당도 긍정적이어서 22대 국회에서 저출생부 설치가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경제기획원을 벤치마킹한 저출생부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대통령 신임’과 ‘예산권’에서 나오는 힘 경제기획원은 1961년 5·16군사정변 두 달 후 설치됐다. 원장이 경제부총리를 겸임하며 고도성장기 경제개발 계획을 주도했다. 그런데 경제기획원의 힘은 원장이 부총리여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대통령의 신임’과 ‘예산권’에서 나왔다. 경제기획원장은 매달 각 부처 장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대통령에게 월간 경제동향 보고를 했다. 이 자리에서 다른 부처에 지시를 내리거나 “재무부가 말을 잘 안 듣는다”며 고자질도 했다. 또 예산권을 휘두르며 각 부처를 압박했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여당 의원이 국회에서 “농림수산부와 보건사회부, 재무부, 상공부, 동력자원부 등이 경제기획원의 일개 국 역할밖에 못 한다”며 탄식할 정도였다. 그에 비해 현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고위)는 지난해 윤 대통령 주재 회의를 딱 1번 했다. 예산권도 없다. 전직 저고위 고위 관계자는 “고용노동부나 국토교통부에 저출산 정책을 권고해도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을 안 줘 힘들다’며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저고위의 구조적 문제를 감안하면 저출생부 신설이 검토할 만한 대안인 건 맞다. 하지만 저출생부 설치가 저출산 문제 해결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먼저 장관에게 사회부총리를 맡기겠다고 했지만 “예산권을 쥔 경제부총리와 사회부총리는 위상이 전혀 다르다”는 게 둘 다 해 본 김진표 국회의장의 말이다. 또 저고위가 대통령 직속기구인 걸 감안하면 사회부총리가 된다고 대통령과 거리가 가까워진다고 볼 수도 없다. 일본에서 지난해 4월 출범한 어린이가정청도 총리 직속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 사이에선 저출산 특별회계를 만들어 저출생부가 예산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또 한덕수 총리가 주례회동을 하는 것처럼 저출생부 장관이 윤 대통령과 정기적으로 만나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과거처럼 대통령의 신임과 예산만으로 저출산이 해결될까. 더 중요한 건 과거 경제기획원처럼 밀어붙이는 방식으론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다른 접근을 하는 것이다. 경제기획원이 사라진 것도 행정이 경제를 주도하는 시대가 지났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젊은 여성 상당수는 국가가 개인의 임신과 출산에 개입해 등을 떠미는 것에 거부감이 크다. 또 저출산은 주택 고용 교육 성평등 복지 등 이슈가 총망라된 문제인 만큼 정부가 미칠 수 있는 영향도 제한적이다.경제기획원 방식, 지금은 반면교사 대상 그런데도 경제기획원이 그랬던 것처럼 5개년 계획을 세워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거나, ‘수출 100억 달러 달성’처럼 출산율 목표에 깃발을 꽂고 총력전을 독려할 경우 돌아오는 건 냉소와 빈축밖에 없을 것이다. 대신 문화 정책처럼 ‘지원하되 (개인의 선택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정책을 추진해야 그나마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이 “저출생은 국가 비상사태”라고 한 걸 떠올리니 아무래도 전자의 방식을 취할 것 같아 벌써 걱정이 앞선다.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어느 날 햄버거를 사러 패스트푸드점에 갔다고 생각해 보자. 메뉴를 보니 원래 3000원이었던 햄버거가 4000원으로 올랐다. 미간을 찌푸리는데 종업원이 “500원만 더 내면 세트로 해서 감자튀김과 음료도 드리겠다”고 제안한다. 상당수는 귀가 솔깃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격 인상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고, 손해 보기 싫어하는 심리를 이용해 세트를 판매하는 전형적 상술이다. 행동심리학에 ‘대조 효과’란 용어가 있다. 일부러 대조군을 만들어 특정한 선택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위 사례에서 햄버거만 구입하려다 햄버거 세트를 들고 나오게 되는 것도 대조 효과 때문이다. 이걸 소비자의 진정한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기금 고갈 막으려다 적자 늘리는 안 택해 22일 발표된 국민연금 공론화 조사에서 시민대표단 500명 중 과반(56%)이 ‘소득보장안’을 선택한 것에 비판적인 전문가가 적지 않다. 현행 제도보다 기금 고갈 시기를 6년 늦추지만 중장기적으로 재정을 더 악화시키는 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선택지를 보면 시민들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처음부터 자명했다. ‘재정안정안’은 내는 돈(보험료율)을 현재 소득의 9%에서 3%포인트 올리는 반면 받는 돈(소득대체율)은 그대로다. 반면 ‘소득보장안’은 내는 돈을 4%포인트 올리는 반면 받는 돈 역시 10%포인트 올려준다. 손해만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30% 이상 오른 가격을 지불하고 같은 햄버거를 사기보다, 조금 더 내도 음료와 감자튀김까지 들고 나오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다 보니 기금 고갈을 막기 위한 연금개혁을 논의하러 갔다가 재정이 더 악화되는 안을 들고 나오게 된 것이다. 공론화 조사를 설계한 국회 연금특위 공론화위원회는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조합해 수백 가지 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연금개혁 취지에 따라 재정을 덜 축내면서 장단점이 엇비슷한 안을 제시했어야 한다.선택지 달랐으면 결론도 달라졌을 것 행동경제학은 제시하는 선택지에 따라 답변을 유도할 수 있다고 본다. 국회 연금특위 자문위에서 가장 많이 지지한 안은 내는 돈을 6%포인트 올리고 받는 돈은 현행을 유지하는 안이었다. 이 안을 추가했다면 탈락한 재정안정안이 채택될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대조 효과에 따라 추가된 안이 재정안정안을 더 합리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1차 조사 때 “잘 모르겠다”던 부동층이 3차 조사에서 대거 소득보장안을 택한 걸 심사숙고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시민대표단을 구성할 때 ‘소득보장파’가 ‘재정안정파’보다 40% 많았던 걸 감안하면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 가까웠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주저하던 시민들도 오류가 있었던 학습용 자료와 “기금 수익률을 높이고 정부 재정을 투입하면 된다”는 소득보장 지지 학자들의 설득에 넘어갔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면 기금 고갈 우려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또 정부 재정 투입이 만능열쇠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이번 공론화 토론이 참고한 건 2006년 영국의 ‘연금의 날’ 전국토론회였다. 하지만 당시는 수급 연령과 의무 가입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시민들이 의견을 냈지, 누가 봐도 유불리가 분명한 두 안을 비교하진 않았다. 시민 토론과 학습, 설문을 거쳐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공론화 조사는 ‘시민 의견을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만큼이나 ‘책임을 떠넘긴다’는 단점도 분명하다. 국내에서 10여 차례 시도된 공론화 조사도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건 절반가량이다. 이번 공론화 조사 역시 반면교사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부동산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지난 정부 말기 청와대를 출입했을 때 한 고위 관계자는 필자에게 “3기 신도시 등 정부가 발표한 공급 대책이 효과를 내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다음 정권이 누가 되더라도 부동산 가격은 안정될 것”이라고 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혼란이 극심한 와중에 ‘다음 정권’ 운운하는 걸 보며 한숨이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달 14일 교육부의 ‘2023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결과 분석’ 발표를 보면서 당시 생각이 났다. 지난해 초중고교생 사교육비는 정부의 ‘사교육 카르텔과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전년 대비 4.5% 늘며 27조1000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경신했다. 이날 브리핑에서 기자들은 “킬러(초고난도) 문항 배제 등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 기조의 급격한 변화가 학생과 학부모의 불안을 자극해 학원으로 몰린 것 아니냐”는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졌다. 교육부 관계자는 “불안 요인 때문에 사교육 증가가 있었던 건 맞다”면서도 ‘정책의 시차’를 거론하며 “킬러 문항 배제 등은 가야 할 길이고 안착되면 사교육 경감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사실 지난해 6월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이 ‘킬러 문항’ 문제를 들고나왔을 때부터 ‘급격한 변화가 사교육을 부추길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교육부 관계자도 14일 브리핑에서 “걱정 많이 했다. (4.5% 증가는) 예측보단 상승세가 꺾인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런데 교육부는 지난해 9월 국회에는 “사교육비 지출을 전년보다 6.9% 줄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사교육비 상승을 예상하고도 국회와 국민 앞에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년엔 반드시 감소시킬 것”이란 교육부 말에도 솔직히 믿음이 안 간다. 지난해 ‘역대급 불수능’과 20일 정원 발표로 더 거세질 ‘의대 광풍’ 등 사교육비 상승 요인도 즐비하다. 물론 교과과정 내용만 수능에 출제하겠다는 방침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교육비 경감 대책이 계속 사교육비를 늘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학생과 학부모의 혼란을 초래하는 건 물론, 다음 정권에서 기조를 바꿀 수밖에 없게 된다. ‘장기적 기대효과’가 아예 사라지는 것이다. ‘장기적 효과’를 거론하며 ‘단기적 희생과 부작용’에 눈을 감는 건 의대 입학정원 확대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2000명씩 늘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부는 “원래 연간 3000명씩 늘려야 하지만 1000명은 의료 수요 관리 등으로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어차피 정책으로 보완한다면 1500명, 1800명이 안 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의대 정원을 늘려도 의사 배출까지는 길게는 10년 걸린다. 장기화되는 환자의 고통과 국민의 불안을 생각한다면, 대학별 정원 배분 발표를 속전속결로 강행하는 대신 유연한 자세로 대화에 나서는 게 낫지 않았을까.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시장경제가 장기적으로 알아서 균형을 잡으니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고 반박했다. ‘장기적으로 괜찮아진다’는 주문만 되풀이하는 대신 눈앞의 혼란과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사교육비와 의대 증원을 담당하는 정부 당국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국민을 위한 일’이라며 눈앞의 환자를 외면하는 의사들도 새겨야 할 말일 것이다.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8일이면 대형병원 전공의(인턴, 레지던트)가 병원을 이탈한 지 18일째가 된다. 2020년 집단휴업(파업) 때 전공의들이 무기한 파업을 진행했던 기간과 같다. 당시와 다른 건 정부와 전공의 단체 간 대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4년 전만 해도 박지현 당시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대위원장은 요구사항을 들고 국회 및 정부와 수차례 간담회를 가졌다. 대한의사협회(의협)와 함께 정세균 국무총리,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만나며 사태 수습을 위해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반면 이번에 대전협은 지난달 20일 △필수의료 패키지와 의대 2000명 증원 전면 백지화 △열악한 수련 환경 개선 △정부의 부당한 명령 철회 및 사과 등 7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한 후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박단 현 대전협 비대위원장도 정부의 대화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으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가끔 근황을 밝히거나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수준이다. 의협 역시 “전공의 복귀는 전공의가 알아서 할 일”이란 입장이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이 전공의 5명을 만난 후 “명확하게 대표가 있고 그 대표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구조는 아닌 것 같다. 대화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답답함을 표시한 것도 사태를 누구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필자는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며 버티는 전공의들을 보면서 지난해 거리로 나왔던 초등학교 교사들이 생각났다. 교사와 의사는 둘 다 국가에서 자격증을 주고, 나이가 젊어도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직업이다. 둘 다 보살펴야 되는 학생과 환자가 있다. 지난해 7월 서이초 사건 이후 교사들은 토요일마다 거리에서 교권이 침해되는 현실을 고발했다. 질서정연하게 앉아 ‘바둑돌 집회’를 하고 집회 후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선생님은 다르다’는 말이 나왔고, 이들의 증언과 주장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며 여론이 움직였다. 또 교사단체는 국회와 교육부, 교육청 간담회에 적극 참여하며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된 교권보호 고시 및 교권보호 4법을 만들었다. 교사들이 지난해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을 선언했을 때 부모 상당수는 자발적으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딱 하루 교실을 비우기로 했을 그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결국 “수업에 빠지면 중징계하겠다”던 정부 방침도 백지화됐다. 당시 거리로 나섰던 교사 중 상당수는 지금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과 비슷한 또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공의들은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후 제대로 된 대화나 협상, 토론 없이 너무 쉽게 무기한 환자를 떠났다는 것이다. 일부 전공의 사이에선 중국 정부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탕핑(躺平·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대응하겠다는 분위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병실을 떠나기 전은 물론 떠난 후에도 상대와 대화하고, 여론에 호소하고, 내부 토론을 거듭하며 최선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애타는 마음으로 복귀를 기다리는 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전공의 중에는 자녀가 있는 경우도 상당수다. 이들에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교사가 교육 시스템이 불합리하다며 학생을 버리고 무기한 교실을 이탈한다면, 그리고 이후 대화를 일절 거부하고 누워만 있다면 이를 바라보는 학부모 기분이 어떻겠는가. 교사는 교실에, 의사는 병실에 있어야 비로소 ‘선생님’이라고 불릴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정부는 의사들을 이길 수 없다”며 “의사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했다. 반면 필자가 최근 만난 한 대학병원 보직 의사는 2000년 의약분업 당시를 돌이키며 “정부가 마음먹고 나서니 당할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의사단체가 맞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말이 다른 걸까. 의사들이 총파업을 한 것은 2000년 이후 총 3번이다. 굳이 승패로 정리하자면 2000년은 정부가 이겼고 2014, 2020년에는 의사단체가 이겼다. 그러면 언제 의사들이 이기고, 언제 졌을까. 먼저 2000년 의약분업 도입 당시 의사들은 약사 임의조제와 대체조제 근절 방안이 마련될 때까지 도입을 미뤄야 한다며 집단 휴업(파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의사단체와 약사단체가 내내 충돌하면서 두 집단이 ‘밥그릇 싸움’을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약품 오남용 방지’라는 대의를 내세웠음에도 의사들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그해 7월 의약분업 시행을 강행했다. 또 의협회관을 압수수색하고 김재정 당시 의협 회장을 구속했다. 이후 의사단체 주장을 일부 반영한 합의안이 나왔지만 의사들이 요구했던 의약분업 철회는 실현되지 않았다. 의사단체는 2014년 정부가 원격진료를 도입하려 할 때 두 번째 총파업에 돌입했다. 여론은 파업에 비판적이었지만 동시에 상당수는 “원격의료는 오진 가능성과 의료사고 발생 위험이 크다”는 의사단체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한 방송사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1%는 “의사들의 집단 휴진이 문제가 있다”고 했지만 동시에 59%는 “원격진료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결국 정부는 “의료법 개정을 미루고 시범사업을 하겠다”며 정책을 사실상 포기했다. 그리고 2020년 10년간 의대 입학정원 4000명 확대를 두고 다시 의사들의 총파업이 진행됐다. 당시 국민 상당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고생하던 의사들에게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의대 증원 찬성 비율도 60% 미만이었다. 처음에 강경 방침을 밝혔던 문재인 정부는 결국 “코로나19 확산이 안정될 때까지 관련 논의를 중단하겠다”며 물러섰다. 정리하자면 의사들이 내건 대의가 공공의 이익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며 환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였을 때 국민들은 의사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으로 보였을 때는 반대였다. 그런데 이달 16일 여론조사에서 의대 증원 찬성 의견이 80%에 육박하는 걸 보면 아직까진 후자라는 인식이 국민 사이에서 더 강한 것 같다. 20일 사직서를 내고 의협회관에 모인 전공의 상당수는 자신들의 행동이 ‘밥그릇 싸움’으로 비치는 것에 민감해했다. 또 “병원을 떠나고 싶었던 전공의는 한 명도 없다”며 “필수의료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필자는 전공의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15일 집회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 밥그릇”이라고 했던 전공의는 예외적인 경우라 본다. 만약 젊은 의사들이 사직서를 낸 후 “환자 옆을 떠나고 싶진 않다”며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갔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정부가 지금처럼 강제수사를 쉽게 입에 올릴 순 없을 것이다. 근무 병원이든 소외지역이든 환자 옆으로 가기엔 지금도 늦지 않았다. 다시 강조하면, 국민을 위한 희생과 대의야말로 의사가 정부를 이길 수 있게 해 주는 무기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연초부터 여야가 저출산 공약을 발표하는 등 저출산 위기 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늦었지만 환영할 일이다. 16년 동안 약 280조 원을 투입했음에도 출산율이 지난해 0.78명까지 떨어진 만큼 그동안 뭘 잘못했는지 리뷰는 꼭 필요하다. 본보 기자들이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일본 헝가리 등을 둘러보고 정책에 참고할 내용을 신년기획 ‘출산율, 다시 1.0대로’ 시리즈로 보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출간된 책과 칼럼 등에선 지금까지의 노력이 성과를 못 냈으니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해 하반기 출간된 한 책은 저출산 정책 실패의 원인을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에서 찾고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여성 개인의 삶을 더 중시하는 가치관이 확산되고 양육의 사회적 가치가 하락했다”고 했다. 또 △여성의 사회 진출을 우대하는 모든 정책을 폐지하고 △중하층 남성 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올 초 출간된 다른 책도 “여권 신장이 자녀의 필요성을 낮춰 저출산을 유발한다”며 “(무자녀 가정에 대한) 재산권과 상속권 제한, 독신세, 공직 진출 제한 등 강력한 조치”를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한 연구자는 최근 진보 성향 신문 칼럼에서 “돈을 더 주면 출산율이 올라갈 거라는 ‘헝가리 솔루션’은 국가가 국민을 자극에 반응하는 가축으로 본다는 증거”라며 확실한 해법은 “출산, 인구에 집착 말고 국가가 개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각자의 행복을 응원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같은 신문에는 며칠 후 “차라리 저출생 대책이란 말이 없어지면 좋겠다”며 “서로 존중하는 삶,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우선”이란 칼럼도 실렸다. 전자는 최근 일부 보수 진영에서 나오는 주장인데 여성의 사회 진출이 어려워지면 예전처럼 가정에 머물며 아이를 양육할 걸로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현실적이지 않을뿐더러 국민의 자아 실현을 뒷받침하는 게 국가의 책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지도 않다. 후자는 일부 진보 진영에서 나오는데 저출산 대책이 여성을 수단화·대상화한다는 거부감에서 비롯된 듯하다. 하지만 ‘청년들의 극단 선택을 막으려면 청년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야지 마포대교 난간을 높이거나 순찰을 강화하는 건 도움이 안 된다’는 말처럼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정책적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된다. 또 현금성 지원이 출산율에 영향을 준다는 걸 부정하는 전문가는 없다. 다만 금액이 늘어난다고 효과가 비례하는 건 아니고, 장기적이기보다 단기적 효과란 지적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저출산 해법은 비슷하다. 출산·육아 부담 경감, 일-가정 양립 지원, 주거 보장, 이민자 유치 등이다. 이는 해외에서 검증된 방법들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안 통한 건 집값 급등 등 다른 변수가 개입된 데다, 심리적 불안을 극복하고 아이를 낳을 정도로 충분히 자원을 배분하지 않아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저출산 예산 중 주택 융자 등을 뺀 순수 가족 관련 정부 지출은 한국이 국내총생산(GDP)의 1.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2%)의 3분의 2 정도다. 한 전문가는 “돈을 써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돈을 안 쓰는 게 저출산 해법일 순 없다”며 “더 많이,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저출산 위기를 극복하려면 정공법을 택하되 지원 규모를 늘리고 선택과 집중을 강화해야 한다. 미혼 남녀, 첫째를 안 낳는 부부, 둘째를 안 낳는 부부 등으로 구분한 뒤 우선순위를 정하고 맞춤형 정책을 시행하는 게 그 시작일 것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1일 신년사에서 저출산 문제를 두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만큼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보며 7년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며 저출산 문제에 대해 “모든 국가적 노력을 다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문재인 정부는 합계출산율 1.4명이란 목표를 제시했지만 임기 중 출산율은 2017년 1.05명에서 2022년 0.78명으로 떨어졌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신생아 수는 계속 줄었지만 2002년 합계출산율은 1.178명으로 2016년(1.172명)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출산율 하락이 본격화된 건 집값이 급등하기 시작한 2017년경부터였다. 주거 불안이 성장률 하락 및 고용 불안과 맞물리며 저출산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현재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990년 통일 이후 미혼 여성이 대거 유출됐던 동독 지역(0.77명)과 비슷한 수준이다. 말 그대로 ‘재앙적 상황’인 만큼 윤 대통령이 언급한 ‘차원이 다른 접근’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방식이다. 저출산 대책과 관련한 다른 오해 중 하나는 저출산 대책의 컨트롤 타워가 보건복지부란 것이다. 하지만 청년 및 신혼부부 주거 보장은 국토교통부, 일-가정 양립 지원은 고용노동부, 사교육비 대책은 교육부, 여성 및 청소년 대책은 여성가족부에서 한다. 그리고 범정부 컨트롤 타워는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고위)가 맡고 있다. 문제는 저고위에 예산 편성권이 없고, 각 부처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정무적 파워도 없다는 것이다. 위원장은 윤 대통령이지만 취임 후 회의를 직접 주재한 건 한 번뿐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장관급인 김영미 부위원장은 손꼽히는 전문가다. 또 열심히 하지만 나경원 전 부위원장과는 정치적 위상이 다르다 보니 각 부처 협조가 잘 안 된다고 들었다”고 했다. ‘모두의 책임은 결국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란 말이 있다. 국민의힘에서 1호 공약으로 저출산 대책을 발표하며 ‘부총리가 장관을 맡는 인구부 신설’을 밝힌 것도 확실한 주무부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도 지난해 4월 저출산 대책을 총괄하는 ‘어린이가족청’을 만들었다. 이왕 ‘차원이 다른 접근’을 하겠다면 차기 대선주자인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총선 후 인구부 장관 겸 부총리를 맡기는 건 어떨까. 이미 총선 불출마 의사를 밝힌 한 위원장이 명운을 걸고 저출산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면 야당도 강하게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최근 불거진 대통령실과의 갈등 때문에 어렵다면 다른 대선주자도 상관없다. 여권 대선주자가 내각에서 총대를 메고 나서야 다른 장관들의 협조를 얻으며 정부 내 자원을 총동원할 수 있다. 정부가 총력을 기울인다면 출산율 반등은 충분히 가능하다. 본보 기자들이 신년기획 ‘출산율, 다시 1.0대로’ 취재를 위해 둘러본 프랑스, 스웨덴, 독일, 헝가리, 체코, 일본 등은 모두 합계출산율 1.0명대 초중반에서 반등에 성공했다. 반등에 성공하지 못하고 1.0명 아래로 추락한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밖에 없다. 이제 70여 일 남은 총선이 끝나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진짜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윤 대통령이 어떤 ‘차원이 다른 접근’을 할지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필자는 2006년 5월 사회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대표) 피습 사건을 취재했다. 휴일이었던 토요일(5월 20일) 저녁 같은 팀 기자들과 저녁을 먹다 오후 7시 20분경 피습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공격당한 박 전 대표는 즉각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이송됐고, 오후 9시 15분경부터 2시간가량 수술을 받았다. 박창일 세브란스병원장과 수술을 집도한 성형외과 탁관철 교수는 수술 직후인 오후 11시 40분경 카메라 앞에 섰다. 이 자리에서 “예리한 흉기로 11cm 자상을 입었으며 상처가 0.5cm만 더 깊었다면 위험했을 것”이란 소견을 밝혔다. 피곤한 표정이었음에도 자정이 넘을 때까지 취재진 질문 20여 개에 답하고 자리를 떴다. 이달 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 소식을 듣고 당시 기억이 되살아났다. 현직 야당 대표가 공격당했다는 점은 같았지만 피습 직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괴담이 급속도로 확산된 건 18년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SNS 보급과 극단주의 확산의 영향이겠지만 괴담이 퍼지는 것에 제동을 걸 기회는 있었다는 생각이다. 이 대표 수술 직후 서울대병원 집도의가 직접 이 대표의 상처와 흉기, 상태를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서울대병원은 이 대표 수술 이후 41시간 반 동안 침묵을 지켰다. 수술 당일 출입기자단에 브리핑을 예고했다가 1시간 40분 만에 취소하기도 했다. 결국 언론은 민주당 브리핑 등에 의존해 이 대표 상태를 전해야 했다. 현장에선 혼선이 난무했다. 민주당은 ‘내경정맥’을 ‘뇌경정맥’으로 공지했다가 번복했고, ‘내경정맥 60%가량이 손상됐다’고 했다가 철회했다(이후 다시 맞다고 했다). ‘1cm 열상(피부가 찢겨 생긴 상처)’은 허위정보라며 ‘2cm 창상(칼, 창 등에 의해 다친 상처)’로 불러달라고도 했다. 그러는 동안 일부 극우 유튜버를 중심으로 ‘자작극 아니냐’는 음모론도 확산됐다. 길어지는 침묵에 비판이 확산되자 서울대병원은 4일 오전에야 브리핑을 갖고 이 대표의 상처를 ‘1.4cm 자상’으로 정리했다. 또 “기도 손상이나 내경동맥 손상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난도 높은 수술이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질문에는 일절 답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서울대병원 측은 브리핑이 늦어진 이유를 “의료법·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환자 동의 없이 의료 정보를 발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날 민주당이 서울대병원을 향해 “정권 눈치를 보느라 브리핑을 안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걸 감안하면 이 대표 측 동의가 없어 브리핑이 늦어졌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 질문을 받지 않은 이유와 10일 퇴원 때까지 추가 브리핑이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서울대병원은 뚜렷한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의료계에선 서울대병원 집행부가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이란 입장 때문에 여야 눈치를 보다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의 침묵은 본의든 아니든 일방적 주장과 음모론 확산에 기여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에 따르면 SNS 보급으로 허위정보는 팩트보다 6배나 빠르게 퍼진다고 한다. 그리고 허위정보의 해악을 막을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는 신뢰할 만한 전문가가 직접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 많은 전문가들이 언론에 나섰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피습 때 서울대병원의 침묵은 두고두고 반면교사로 남아야 한다는 생각이다.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우다다다 친구들과 다니면서 학교를 느낄 수 있는 우리 학교 복도가 좋아.”(‘복도’) “선생님은 불쌍해. 우리가 말을 너무 안 듣는대. 그래도 괜찮아요. 저희가 있잖아요.”(‘불쌍한 선생님’) 전북 부안군 백련초에서 최근 내놓은 책 ‘코딱지’는 최근 읽은 가장 마음 아픈 책이었다. 내용 자체는 전혀 슬프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이 책은 이달 5일 폐교를 앞두고 재학생 8명에게 마지막 추억을 주기 위해 교직원들이 재학생들의 시와 그림을 묶은 것이다. 재학생 8명은 새 학기에 인근 하서초를 다니게 된다. 폐교는 재학생과 교사는 물론 지역 주민, 졸업생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다. 학교가 사라지면 청년층 정착이 힘들다 보니 지역 소멸을 가속화시키는 계기도 된다. 또 농어촌에서 학교는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니라 투표, 축제 등이 진행되는 구심적이다. 구심점이 사라진 지역사회는 활기를 유지하며 미래를 꿈꾸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폐교를 막을 방법은 없을까. 한 가지 방법은 학생이 있건 없건 폐교를 안 하는 것이다. 전북에선 ‘작은 학교 살리기’를 내건 교육감들이 학생 한 명도 없는 ‘유령 학교’라도 문을 닫지 않았다. 그 결과 최근 5년(2019∼2023년) 폐교 수는 5곳으로 인접한 전남(19곳), 경남(17곳), 충북(19곳), 충남(10곳)보다 훨씬 낮다. 문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전북은 올해 한꺼번에 학교 9곳(초교 7곳, 중학교 2곳)의 문을 닫기로 했다. 올해 전남 경남 충북 충남을 합친 폐교 수(6곳)보다 많다. 두 번째는 주거지 제공 등 파격적 혜택을 제시하며 학생을 유치하는 것이다. 전남 신안군 홍도분교는 지난해 6학년 3명뿐이어서 올해 재학생 ‘0명’ 위기에 놓였다가 전학생과 신입생 10명을 유치해 폐교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대신 신안군은 입학·전학하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방 2개 이상의 숙소와 월급 320만 원을 보장하는 일자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아동당 연간 80만 원의 햇빛아동수당도 약속했다. 마지막은 학생이 찾아올 정도로 매력적인 학교와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경남 함양군 서하초의 경우 2019년 ‘학생모심위원회’를 만들고 학부모에게 주거지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원어민 영어 교육, 일부 과목 영어 수업, 전교생 해외연수 등 파격적 조건을 내걸어 학생 수를 2020년 10명에서 지난해 24명으로 늘렸다. 신귀자 교장의 열정, 졸업생과 지역주민의 성원,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주택 지원, 지역 기업의 학부모 채용 약속 등이 결합돼 폐교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폐교를 막는 세 방법 중 첫째는 미봉책이고 둘째도 지속가능성은 의문이다. 세 번째야말로 폐교를 막고 지역을 살리는 상책이다. 서하초를 주제로 책 ‘시골을 살리는 작은 학교’를 쓴 김지원 씨는 “서하초의 경우 학교 살리기가 스마트팜과 창업 플랫폼 구축 등으로 이어지며 지역 살리기로까지 연결된 드문 케이스”라고 했다. 다만 김 씨는 “모든 학교가 서하초 모델을 따라 할 순 없고 그렇게 하는 게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했다. 수도권 집중과 학령인구 절벽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무조건 폐교는 안 된다고 고집할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하초 사례는 폐교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교직원과 졸업생, 지역주민의 열정으로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새해 첫날 서하초 얘기를 하는 건 올 한 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놀라운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작은 학교들의 건투를 빈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지난해 11월 8일 검찰은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하면서 “대장동 개발 과정에서 (민간업자들과) 유착관계를 맺고 금품 제공과 선거 지원에 따른 사업상 특혜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김 전 부원장은 “(검찰이) 창작 소설을 쓰고 있다. 절필시키고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다”고 맞받았다. 열흘 후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 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검찰이 “대장동 업자들에게 특혜를 몰아주고 수익을 뇌물로 받았다”고 했을 때도 정 전 실장 측은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사장 직무대리 등의 진술에 의존한 완벽한 소설”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반응도 비슷했다. 이 대표는 정 전 실장 뇌물 수수 의혹을 두고 “검찰이 훌륭한 소설가가 되긴 쉽지 않겠다. 창작 완성도가 매우 낮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달 30일 선고된 김 전 부원장 1심 판결에서는 김 전 부원장과 민주당 측이 소설이라며 부인했던 내용이 상당수 인정됐다. 첫째,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 전 부원장이 정 전 실장 및 유 전 직무대리와 “이 대표의 정치적 성공을 바라는 동지이자 의형제라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했다. 유 전 직무대리는 물론 정 전 실장과도 “친분 관계일 뿐 의형제는 아니었다”고 한 김 전 부원장의 발언과 거리가 있는 대목이다. 둘째, 김 전 부원장 측은 검찰이 돈을 받았다고 지목한 2021년 5월 3일 “다른 곳에 있었다”며 전직 경기도 공공기관 대표 증언을 알리바이로 제시했지만 재판부는 “믿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날 유원홀딩스 사무실에서 1억 원을 건넸다는 유 전 직무대리 증언을 인정했다. 셋째, 재판부는 2021년 6월 8일 경기 수원시 광교 버스정류장에서 3억 원을 전달하고 6, 7월 2억 원을 더 건넸다는 유 전 직무대리의 진술도 인정했다. 김 전 부원장 측은 “날짜가 오락가락한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다소의 차이는 비본질적”이라며 일축했다. 넷째, 유 전 직무대리의 진술이 검찰의 회유·압박으로 이뤄져 신빙성이 낮다는 김 전 부원장 측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검사의 협박·회유 등이 행해졌다고 볼 사정은 안 보인다”고 했다. 다섯째, 김 전 부원장 측은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시기는 이미 전국 조직 완성 후였고 그 준비 과정 역시 자원봉사자가 갹출했다”고 했지만 재판부는 “경선 대비 문건 등을 볼 때 자원봉사로 해결될 정도가 아니었다”며 “조직 구성과 준비 등을 위한 자금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 판결 후 이 대표는 “아직 재판이 끝난 게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1심에서 범죄사실이 대부분 인정된 이상 경천동지할 새 증거가 없다면 2, 3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긴 힘들다는 게 법조계의 상식이다. 특히 정진상-김용-유동규 및 대장동 일당의 유착 관계(첫째)와 유 전 직무대리 진술의 신빙성(둘째∼넷째)이 인정된 건 이 대표와 민주당에 뼈아픈 대목이다. 진행 중인 정 전 실장 및 이 대표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이 대표와 민주당은 대장동 의혹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기보다 ‘소설’, ‘야당 탄압’, ‘정치 보복’이란 구호로 일관했다.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알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이 대표가 스스로 ‘분신’이라고 했던 측근의 일탈이 드러났다. 이 대표는 이제라도 대장동 의혹에 대해 아는 만큼 설명하고, 측근 관리를 제대로 못했던 것에 유감이라도 표해야 한다. 그게 2년 넘게 이어진 대장동 스캔들로 분노하거나 실망했던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최근 만난 서울의 한 현직 구청장은 “서울과 인접한 경기 기초단체장들이 서울시에 편입하겠다고들 하는데 속마음은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라며 “주민 표심을 고려한 오버 액션”이라고 했다. 이유를 묻자 시장 권한이 구청장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란 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지방자치법을 보면 시장은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재개발을 진행할 권한이 있지만 구청장은 그렇지 않다. 상하수도를 만들거나 도시공원을 만들 권한도 시장에겐 있지만 구청장에겐 없다. 경기 성남시장이 대장동 사업을 주도할 순 있지만, 서울 용산구청장이 용산정비창 사업을 주도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시장은 행사할 수 있지만 구청장은 행사할 수 없는 권한이 42개나 된다. 지금까지 지자체장이 서울 편입론에 긍정적 태도를 보인 곳은 김포·구리·고양시 정도다. 그런데 시장직을 포기할 수 있다고 밝힌 사람은 김병수 김포시장뿐이다. 김포시의 경우 서울과 인천 사이에 끼어 있다. 또 김동연 경기지사의 경기북부특별자치도 구상이 현실화되면 한강 남쪽임에도 경기북도로 가든가, 서울 인천 경기북도에 둘러싸여 섬처럼 남아야 한다. 김포에 사는 지인은 “서울에 편입된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경기북도나 경기남도, 인천이 되는 것보단 낫다”고 했다. 결국 김 시장은 이달 6일 오세훈 서울시장과 만나 “시장 권한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백경현 구리시장은 이달 13일 오 시장을 만나 “특별자치시 형태로 편입을 희망한다”고 했다. 서울 편입은 원하지만 시장 권한을 포기하진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는 일정 기간은 자치시를 유지할 수 있지만 6∼10년 후엔 자치구로 완전히 편입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고양시는 인구 100만 명 이상인 특례시로 시장이 지방연구원을 만들 수 있고, 택지개발지구 지정도 가능하다. 주민 수가 서울 자치구 중 가장 많은 송파구(약 65만 명)의 1.6배여서 자치구 하나로 편입되긴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 이동환 고양시장이 이달 21일 오 시장을 만나 “종속적 편입이 아니라 대등하게 수도권 재편을 논의하자”고 한 것도 단순 편입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서울 편입에 긍정적인 기초단체에서도 각자 생각하는 ‘메가시티 서울’의 청사진은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르다. 또 서울 인접 경기 기초단체 중 김포·구리·고양시를 제외한 9곳 단체장들은 일부 주민의 편입 주장에도 유보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각자 사정이 다른 건 시야를 전국으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최근 여권에서 거론하는 부산-경남 행정 통합은 지난해 10월 부울경 메가시티 추진이 공식 무산된 직후 부산·경남 지자체장이 밝혔던 구상이다. 당시 “주민 의견을 수렴해 진행하겠다”고 했는데 최근 주민 여론조사에서 10%포인트 차이로 부정적 의견이 더 많았다. 주민 투표 방식으로 통합을 진행할 경우 통과를 장담하기 어렵단 뜻이다. 대전·세종·충남북 등 충청권 통합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일제히 국민의힘 소속 단체장들이 당선되며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종시는 충청권 메가시티보다 명실상부한 ‘행정수도’ 위상 정립에 관심이 더 많다. 최근 4개 광역지자체 시도의회에서 충청권 초광역의회 구성을 위해 만났다가 의원 배분 방식에서 이견을 드러내는 등 주도권 경쟁도 만만치 않다. 메가시티가 세계적 흐름인 건 맞고, 통합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말에도 타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지자체의 개별적 상황과 지역 주민들 의사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닥치고 메가시티’를 외치는 건 공허하고, 그래서 총선용이란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지난달 19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국감에선 김진욱 처장 자리에 붙은 포스트잇 하나가 카메라에 잡혔다. ‘장차관 수십 명 기소하면 나라 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여야 공히 공수처 실적이 부진하단 지적을 쏟아내다 보니 실무진에서 억지 대응 논리를 만들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운국 차장이 직접 작성해 붙인 메모라고 했다. 또 김 처장은 실제로 국감장에서 “공수처가 일을 잘하면 나라가 안 돌아간다”고 했다. 김 처장과 여 차장은 2021년 1월 임명된 공수처 초대 처·차장으로 곧 3년 임기를 마친다. 그런데 사석도 아니고 국회에서 ‘월급은 받지만 일은 안 하겠다’는 논리를 펴는 걸 보고 저런 생각으로 잘도 조직을 운영해 왔구나 싶었다. 같은 논리라면 감사원이 일을 잘하면 정부가 안 돌아가고, 금융감독원이 일을 잘하면 금융권이 마비되니 둘 다 너무 열심히 일하면 안 된다. 연간 200억 원의 예산이 배정된 공수처의 역할은 권력을 견제하고 고위공직자 범죄를 엄정하게 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적은 초라하기만 하다. 출범 후 2년 8개월 동안 직접 기소는 3건, 공소제기 요구는 4건뿐이다. 청구한 체포영장 5건, 구속영장 3건은 모두 기각됐다. 해외 유사기관과 비교해도 부진한 실적이다. 공수처의 롤모델인 홍콩의 염정공서(ICAC)는 2021년 200명을 기소했고,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CPIB)은 같은 해 165명을 기소했다. 또 그해 두 기관의 기소 사건 유죄판결 비율은 70∼90% 수준이었다. 인구도 적은 홍콩과 싱가포르가 한국보다 더 부패해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김 처장은 실적 부진이 인력 부족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신규 조직은 원래 초반에 작게 시작해 성과를 내며 몸집을 키우는 법이다. CPIB는 1960년 설립 직후 인원이 8명뿐이었다. 공수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74명이다. 문제는 사람이다. 신규 조직일수록 역량과 의지가 있는 리더가 기틀을 잡아야 하는데 김 처장과 여 차장 모두 판사 출신으로 수사 경험이 없다. 또 김 처장은 황제 조사, 통신자료 조회 논란 등을 자초했으며 시무식에서 찬송가를 부르다 소리 내 우는 언행 등으로 여러 차례 도마에 올랐다. 3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 보면 국회에서 추천한 초대 처장 후보는 검찰 출신으로 당시 국민권익위원회 부패방지 부위원장을 지내던 이건리 변호사와 김 처장, 이렇게 둘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김 처장을 택했는데 ‘검찰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란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당선 전 “대한민국 주류를 교체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취임 후 일의 본질을 모르는 인물을 발탁하는 일이 반복됐다. 법원 행정을 모르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을 임명해 재판 지연 문제를 심화시켰고, 부동산을 모르는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을 임명해 집값대란을 자초했다. 수사기관의 장으로 수사 경험이 없는 인물을 임명한 것도 ‘주류 검찰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김 처장은 임기 내내 언론 탓, 검찰 탓을 하며 실적 부진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다 최근에야 “수사가 이렇게 어려운지 이제 알았다”고 주변에 털어놨다고 한다. 그동안 의욕을 보였던 이들은 조직을 떠났고, 공수처는 ‘법조인의 무덤’으로 불리게 됐다. 지금 상태라면 김 처장 임기가 끝나고 수장 공백 사태가 빚어져도 우려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다음 공수처장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인물을 찾아 임명해야 한다. 대놓고 ‘일 안 하고 월급은 받겠다’는 고위공직자를 더 참아줄 국민은 없을 것이다. 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1974년 7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워터게이트 스캔들 관련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고 판결했다. 닉슨 대통령은 소식을 들은 뒤 먼저 “전원일치냐”고 물었다. 보좌관이 “그렇다”고 하자 저항을 포기하고 17일 후 사임했다. 워터게이트 특종 주역인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는 미 연방대법원에 대해 쓴 ‘지혜의 아홉 기둥’에서 당시 판결 과정을 다뤘다. 그때 연방대법원에는 워런 버거 대법원장을 포함해 닉슨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4명 있었다. 하지만 설득과 합의, 절충 끝에 모두가 동의한 판결문이 나왔다. 우드워드 기자는 “(닉슨은) 반대의견 하나는 있을 걸로 믿었다”고 썼다. 버거 대법원장의 전임자는 얼 워런 전 대법원장이었다. 그는 병상에서 후배 대법관에게 워터게이트 선고를 물었고 “전원일치로 닉슨이 패소했다”는 말을 듣고 안도한 후 당일 세상을 떠났다. 워런 전 대법원장은 1954년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는 위헌이란 ‘브라운 판결’로 1960년대 민권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당시 그는 “만장일치가 아니면 남부가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첨예하게 나뉜 대법관들의 의견을 조율해 전원일치 판결을 이끌었다. 워터게이트 판결과 브라운 판결은 최고 법원에서 내려진 전원일치 판결의 무게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 대법원에서 통상적인 재판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小部)가 담당한다. 소부에서 합의가 안 되거나 사회적으로 의미가 큰 사건만 대법관 13명으로 구성된 전원합의체(전합)가 맡는다. 전합 재판장은 대법원장이다. 전합 판결은 높은 법적 권위를 갖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대법원장 공백 사태에서 전합 개최 가능 여부가 논란이 된 것도 그 막중한 무게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동아일보가 김명수 전 대법원장 재임 6년간 나온 전합 판결을 전수조사한 결과 전원일치 판결은 14.7%에 불과했다. 이용훈 사법부(36.8%), 양승태 사법부(33.6%)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물론 대법관 간 의견은 얼마든 다를 수 있다. 다양한 목소리도 필요하다. 일본처럼 최고재판소 결정 대부분이 전원일치인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대법원이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법적인 최종 해결을 담당한다는 걸 감안하면 설득과 토론, 타협으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참고로 미 연방대법원의 1946∼2009년 판결 중 전원일치 비중은 30%가량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과거엔 대법관들이 토론과 설득 과정에서 처음 가졌던 입장을 변경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입장을 잘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대법관들이 양극화됐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7 대 6처럼 패소한 쪽이 승복하기 쉽지 않은 판결이 되풀이되고 있다. 2019년 11월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방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 제재가 정당한지 심의할 때도 막판에 김 전 대법원장이 진보 성향 대법관들의 손을 들어 7 대 6 판결이 나왔다. 사회적·역사적으로 중요한 판결일수록 전원일치로 결정해야 갈등과 분열의 여지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민일영 전 대법관은 퇴임 후 학술대회에서 미국 사례를 들며 “대법관들이 정치적 진영에 따라 자동판매기 같은 5 대 4 판결을 되풀이하면 사회 분쟁과 이념 갈등을 해결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다음 대법원장이 누가 되든 전합을 운영할 때 새겨야 할 지적일 것이다.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