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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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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2~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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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3%
문학/출판3%
  • [송평인 칼럼]판사, 비겁하지만 않으면 판례대로 선고할 수 있다

    한글 개역 성경 마태복음 1장 25절을 보면 “(요셉이) 아이를 낳기까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더니”란 표현이 있다. 영어 킹제임스역에는 ‘동침하지 않더니’란 부분이 “(He) did not know her”로 돼 있다. 성경의 신약은 본래 헬라어로 쓰였다. ‘know’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기노스케인(ginoskein)이 기본형으로 그 역시 안다는 뜻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22년 대선 과정에서 성남시장 시절 함께 해외여행도 가고 골프도 친 산하 공기업 처장을 모른다고 했다가 거짓말을 했다는 혐의로 선고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안다’는 건 이름으로만 아는 경우부터 동침하는 남녀처럼 속속들이 아는 경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어느 정도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심각한 것은 선거법상 허위 사실 유포 혐의 중 다른 하나다. 그는 2021년 10월 민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열흘 뒤 국회 국토교통위 국정감사에서 백현동 부지 용도 변경과 관련해 “(국토교통부가) 만약에 (용도 변경을) 안 해주면 직무유기, 이런 걸로 문제 삼겠다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재판 과정에서 국토부 직원은 그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없고 오히려 이 대표 쪽에서 성남시 공무원들에게 압박을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유도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대표는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 과정에서 형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것과 관련한 거짓말로 대법원까지 갔다. 당시 권순일 대법관의 도움으로 무죄가 되긴 했지만 거짓말이 아니어서라기보다 후보자 간 치열한 공방 속에서 설명이 차분히 이뤄지기 어려운 선거토론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다. 그가 그 판결로 사실상 경고를 받았음에도 다시 선거 과정에서 거짓말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심각한 것이다. 이 대표는 위증 교사 혐의에 대해서도 선고를 앞두고 있는데, 이 혐의도 발단은 허위 사실 유포다. 그는 2002년 당시 김병량 성남시장을 취재하던 KBS PD와 짜고 검사를 사칭했다는 혐의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으나 2018년 선거 과정에서 누명이라고 주장하다가 고발됐다. 이 대표는 재판 과정에서 당시 김 시장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진성 씨에게 ‘김 시장과 KBS PD 사이에 나만 주범으로 몬다는 협의가 있었다’는 증언을 요구한 모양이다. 실제 증언이 이뤄졌고 그 덕분인지 어떤지 이 대표는 무죄가 됐다. 그러나 뒤늦게 김 씨가 위증이었다고 법원에서 자백하면서 이 대표는 위증 교사 혐의로 기소됐다. 이 대표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개인적 경험이 있다. 그가 다녔다는 교회에 2010년부터 다녔지만 그를 본 적이 없다. 성남시장에 출마하기 전 교회에 등록하고 몇 번 나왔다고는 하지만 이후 10년 넘게 나오지 않아 제적 상태라는 목사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간이 나왔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바쁜 정치인에게 교회 출석이 무슨 대수라고 그냥 인정해 버리고 말면 될 것을 굳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거짓말로 여겨지는 게 싫다고 또 다른 거짓말을 지어내는 심리는 자기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마성(魔性) 같은 것일 수 있다. 이 대표의 두 혐의는 검찰의 인지(認知) 수사로 밝혀진 것이 아니다. 공개된 선거 과정에서의 발언으로 고발되거나 공개된 법정에서의 자백 때문에 기소된 것이다. 다른 혐의들은 몰라도 두 혐의는 액면으로도 표적 수사와는 거리가 멀다. 혹시 성남시 공무원들이 국토부로부터 압박을 받았다고 진술하지 않는 것이나 김 씨가 뒤늦게 위증이라고 자백한 것이 본인들을 향할지도 모를 검찰 수사가 무서워서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의 것에 대해서는 국토부의 압박으로 볼 근거 자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뒤의 것에 대해서는 ‘이 대표만 주범으로 몬다’는 협의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김 씨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 되지”라고 유도하는 이 대표의 음성 녹음이 남아 있다. 법관이 이 대표의 혐의에 대해 기존 판례대로 선고하는 데는 각별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재판 중에 사표를 낸 어느 판사처럼 비겁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 대표의 호위무사들이 국회에서 벌이는 무도한 행태를 고려할 때 이 대표에게 유죄가 선고되면 법관을 탄핵하겠다고 난리를 부리겠지만 그걸 인용해줄 헌법재판소가 아니다. 법불아귀 승불요곡(法不阿貴 繩不撓曲), 법은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줄은 굽어서 측량하지 않음을 보여줘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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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뻥’을 무기로 삼는 트럼프의 협상 기술

    미국 대통령에 재선된 도널드 트럼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꼭 읽어 봐야 할 책이 한 권 있는데 ‘협상의 기술’이다. 대권에 도전하기 훨씬 전인 1987년에 낸 책이다. 이 책을 읽어 보면 그가 부동산 개발업을 하면서 즐겨 사용한 협상의 기술 중 하나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상대편이 겁을 먹도록 사전에 거친 말을 쏟아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2012년 대선에 처음 출마하면서 “한국은 그들을 지켜주는 미군에 돈을 전혀 지불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고 있다. 한국이 미국에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팩트체크가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는 이번 재선 도전 과정에서는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이라고 불렀다. 그가 한 말의 의도는 돈을 더 내라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잘 전달되느냐다. 그는 말이 거칠수록 의도가 잘 전달된다고 여긴다. ▷그는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후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횡설수설했다. “김정은이 약속을 진짜 지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6개월 후 여러분 앞에 서서 ‘그때 내가 틀렸어’라고 할 수도 있다. 내가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내가 핑계를 댈 거다.” 그에게 말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거나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아무렇게나 둘러대도 상관없는 그런 것이다. ▷트럼프가 거친 말을 자주 하니까 싸움꾼처럼 보이지만 진짜 싸움은 미국의 돈이 아까워서라도 못 할 위인이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초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발사 시험에 대응해 미국이 ‘죽음의 백조’라고 불리는 B-1B 전략폭격기를 북한 동해 상공 깊숙한 곳까지 출격시켰을 때다. 문 정부는 ‘6·25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무력시위였을 뿐이다. 무력시위처럼 그의 거친 말은 돈이 많은 드는 진짜 싸움에 이르지 않기 위한 협상의 기술이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에 대한 거친 발언도 새겨서 들어야 오판하지 않는다. ▷트럼프의 재선을 위험한 성인물을 보는 기분으로 지켜봤다. 그에게 성추행당했다고 밝힌 여성이 한둘이 아니고 올 들어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2020년 재선 도전 패배에 불복해 의사당 습격을 선동한 혐의는 곧 판결이 나오겠지만 셀프 사면이 확실시되고 있다. 말의 책임성이나 일관성 같은 것은 그에게 아예 없다. 정치가 본래 위험한 성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사람의 대통령 재선을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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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우파 정부에서 더 비어가는 곳간

    박근혜 정부 초반 조원동 경제수석이 “세금은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빼내는 것”이라는 솔직한 말을 했다가 지지세력에게 혼이 났다. 이후 보수 정부는 세수 확보에서 철저한 무능함을 보이고 있다. 깃털 발언이 나온 건 우파 정부까지 복지 지출에 가세해 ‘좌파 정부 것 받고 따블로’로 지르면서 곳간이 비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가채무가 부담스럽게 늘기 시작한 것은 박 정부 때부터다. 박 정부 첫해 약 440조 원에서 마지막 해 660조 원으로 늘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가속도가 붙어 마지막 해에는 1000조 원을 훌쩍 넘겼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줄기는커녕 임기 반을 살짝 지난 올해 말 1200조 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조세부담률은 문 정부 때 크게 올랐다. 2017년까지만 해도 수십 년간 16∼18%대에서 오르락내리락하던 조세부담률은 문 정부 때 처음 20%를 돌파해 문 정부 마지막 해인 2022년 22.1%까지 올랐다가 윤 정부에서 2023년 19.3%로 떨어졌다. 국민으로서야 세 부담이 줄어드니 좋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채무가 급속히 늘어가는데도 조세부담률이 줄어드는 걸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국가의 곳간을 채우는 건 세금이다. 우리나라는 조세부담률이 OECD 국가의 평균에 비해서도 낮기 때문에 세금을 더 거두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소득세율은 여전히 선진국보다 낮지만 개인에게 가장 고통스럽게 깃털을 뽑는 소득세를 자꾸 건드리기는 쉽지 않다. 그 대신 우리나라처럼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급등하는 나라에서는 자산에 대해 세금을 올릴 여지가 많다. 보유세 양도세 상속세는 모두 자산의 보유나 이전에 물리는 세금이다. 대개 보유세가 높은 국가는 양도세와 상속세가 낮고 보유세가 낮은 국가는 양도세와 상속세가 높다. 윤 정부는 어리석게도 보유세 양도세 상속세를 다 내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기업이 글로벌하게 경쟁하는 시대에 법인세 감면은 불가피하지만 법인세는 경기 부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안정적인 세수 확보 방안이 못 된다. 국가 간 법인세율이 수렴한다고 가정할 때 법인세수는 매년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평균 성장률 정도로만 늘 뿐이다. 문 정부는 돈을 펑펑 써대기는 했지만 욕을 먹으면서까지 세금을 더 거두려 노력했다. 법인세 인상 같은 착오적인 증세도 있었지만 소득세 최고세율을 올렸다. 공급이 아니라 세금으로 집값을 잡겠다는 생각은 잘못됐지만 집값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보유세를 현실화했다. 금융투자소득세를 신설해 보려 한 것도 문 정부다. 다 논란이 있지만 세수를 확보하려 했다. 윤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대책 없이 세금 낮출 궁리만 했다. 그렇다고 씀씀이를 아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문 정부와 비슷하게 써대고 있다. 돈을 쓸 곳에 제대로 썼냐 하면 그마저도 아니다. 병사 월급 200만 원처럼 돈을 써서 긍정적인 효과가 나기는커녕 군의 기간(基幹)인 초급 장교와 부사관의 대거 이탈을 초래하는 정신 나간 지출도 적지 않다. 세수 결손이 발생하면 국채를 발행해서 세입-세출이라는 대차대조표상에서 해결하는 것이 정상이다. 윤 정부는 결손을 메꾸기 위해 외평채 기금 등 각종 공공기금에 손을 대는 나쁜 버릇까지 들였다. 지난해에도 그러더니 올해도 또 그러고 있다. 그 정도가 아니다. 이제는 공적보험까지 위협하고 있다. 무리한 의대 증원 밀어붙이기를 수습하느라 의료 수가 조정 등 뒷북 개혁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기로 하면서 국민건강보험이 당기 수지로는 내년부터 매년 1조 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된다. 적자가 누적되면 결국 개인이 내는 건강보험료의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저출산 극복을 위한 출산 지원은 꼭 해야 하는 것이지만 출산휴직 급여같이 큰돈이 들어가는 항목은 고용보험에서 지출된다. 정부가 제 돈 쓰듯 출산휴직 급여의 액수와 기간을 늘려놓으면 고용보험이 바닥나고 부족한 금액을 결국 개인과 기업이 충당해야 한다. 경제부총리 본연의 역할은 국가의 곳간지기다. 좌파 정부의 곳간지기는 곳간 열쇠를 정치권에 맡긴 것이나 다름없이 처신했다. 우파 정부의 곳간지기는 이명박 정부 때의 강만수까지만 해도 경제 논리를 우선하는 듯 보였으나 박 정부에서 정치인 최경환이 오면서 망가지기 시작하더니 윤 정부의 추경호 최상목에 이르러서는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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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트럼프는 인격장애인” 美 정신과 의사들 광고

    고대 로마의 미친 황제로 흔히 거론되는 인물이 네로, 칼리굴라, 콤모두스다. 네로는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수금을 켜는 자기 탐닉적인 모습을 보였다. 칼리굴라는 주변 인물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콤모두스는 자신을 헤라클레스와 동일시하는 과대망상 증상을 보였다. 세 사람 모두 섹스에 집착하고 잔인했다. 물론 현대적인 정신질환의 기준으로 엄밀히 진단한 것은 아니다. ▷미국 정신의학협회(APA)가 정신질환 통계 작성을 위해 사용하는 매뉴얼(DSM)이 있다. 이 매뉴얼의 5번째 개정판으로 2013년에 나와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DSM-5는 정신질환을 22가지로 분류한다. 그중 하나가 반사회적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다. 미국 대통령 재선 도전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반사회적이면서 자기 탐닉적(narcissistic) 요소까지 있는 인격장애인이라는, 정신질환 전문가 225명 명의의 광고가 최근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이 광고는 반(反)트럼프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뉴욕타임스의 연속 기획 중 하나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다. 트럼프 측이 이 광고에 반박할 수 있는 길은 비슷한 수의 정신질환 전문가를 통해 골드워터 규칙(Goldwater rule)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배리 골드워터가 1964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 팩트(Fact)라는 잡지가 정신과 의사들 상대의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그를 ‘사이코’ ‘분열증 환자’라고 불렀다가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당해 패했다. 이후 정신과 의사들이 개인적으로 만나보지 않은 사람에 대해 진단을 내리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는 골드워터 규칙이 1971년 채택됐다. ▷DSM에 의한 진단은 ‘관찰 가능한 행위(observable behavior)’라는 기준에만 의존해야 한다. 광고를 낸 측은 “‘관찰 가능한 행위’에 무엇이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해 1971년 이후 많은 발전이 있었다”면서 “우리는 수천 시간 트럼프의 행위를 관찰했으며 트럼프와 직접 교류했던 수십 명과의 인터뷰는 우리의 관찰 결과를 확증했다”고 주장했다. ▷사람이 신체적으로 완벽하기 어렵듯이 정신적으로도 완벽하기 어렵다. 누구나 약간은 편집적이거나 강박적인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성인(聖人)이나 돼야 정신적으로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향해 함부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해선 안 된다. 다만 환자로까지 분류하지는 않더라도 정도가 지나친 사람들이 있다. 정도의 지나침이 대통령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궁극적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에 달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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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한강, 문학과 역사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 작품은 논란에 휩싸이기 쉽다. 그것은 대체로 역사와 문학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구별을 늘 유지하는 게 쉬운 건 아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도 4·3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역사라면 제주 4·3이 공산주의자들의 경찰서 공격에 의해 촉발됐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거두(去頭)하고 군경(軍警)에 의한 학살로 단도직입한다. 군경은 셰익스피어 비극 속의 맥베스 부인처럼 밑도 끝도 없이 처음부터 사악한 존재로 제시된다. 군경이 제주에서 특히 사악해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건 묻지 않는다. 물론 집단 학살이라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사실이 존재한다. 학살이 누구에게 더 책임이 있는지 따지게 되면 역사가 될 뿐 문학이 되지 못한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주는 감동은 같은 시대를 다룬 선배 작가들과는 달리 이념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서 학살의 고통으로 응어리진 한 가족의 상처를 가슴 아프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문학의 기능 중 하나는 역사의 거대한 힘에 짓밟힌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다. 그래서 문학은 역사의 기준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 다만 거꾸로 역사 역시 문학의 기준으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 한강은 자신이 쓴 작품들로 인해 외국인들에게 한국 현대사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가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가 됐기 때문에 그 답은 더욱 높은 권위를 갖게 될 것이다. 한강은 2017년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한국전쟁이 미소(美蘇)의 대리전’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에는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가 미소 대립의 최전선에 있고 남북한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대리한다고 해서 반드시 전쟁을 하는 건 아니다. 대립 상태를 넘어 전쟁으로 나가게 한 것은 북한이다. 대리전이라고 말해버리는 것은 역사가들이 오랜 기간 실증적으로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공산주의자들의 전쟁 도발 책임을 도외시하는 무책임한 발언이 된다. 문학은 심정윤리의 영역이다. 착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잘못된 일에 엮일 때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것이 문학이다. 반면 역사는 책임윤리의 영역이다. 의도만이 아니라 결과까지 따져 냉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한국 현대사 인식에서 빚어지는 오류는 문학의 관용과 역사의 평가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게 적지 않다. 문학은 평가로만 가득 차서는 안 되고, 역사는 관용에 쉽게 자리를 내줘서는 안 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 작품 속에서 주인공 ‘나’가 밝히고 있듯이 광주 5·18민주화운동 배경의 ‘소년이 온다’에서 시작된 국가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나왔다. 그러나 4·3과 5·18의 국가 폭력은 큰 차이가 있다. 5·18은 그 저항이 궁극적으로 전두환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의 원동력이 됨으로써 승리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 반면 4·3은 그 저항이 패배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 4·3은 여수·순천 사건과 북한의 6·25 도발로 이어지면서 역사를 퇴행시키는 방향에 서 있었다. 한강은 개인적 트라우마를 다룬 ‘채식주의자’에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룬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로 나아갔다. 우리나라에 한강 못지 않은 여성 작가들이 여럿 있지만 그가 한발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여성 작가들과 달리 역사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개인을 본격적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극단적 채식주의로는 살아갈 수 없듯이 국가는 극단적 평화주의로는 존속하기 어렵다. 문학은 질문을 던지면 그만이지만 역사는 답을 해야 한다. 질문을 잘하기 위해서는 관점이 명확하면 된다. 극단적일수록 관점은 명확해진다. 그러나 답은 관점을 갖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관점이 현실적인지까지 고려해야 한다. 나는 ‘채식주의자’에 대해서는 부커상을 수상할 무렵 그 파격적 소재와 형식, 그리고 번역의 훌륭함을 다룬 글을 쓴 바 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상대적으로 익숙한 소재에 전개도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마지막에 지루함이 쌓아올린 압력이 빅뱅처럼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는 받을 만한 상을 받았다. 다만 문학과 역사의 구분을 유지하는 것은 독자에게만큼이나 작가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특히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에게는….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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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진보도 보수도 아닌 ‘정신 승리’에 입각한 가짜 역사

    일제 시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임을 명시한 여권은 다수 남아있다. 반면 일제 시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 아니거나 대한민국임을 보여주는 여권은 하나도 없다. 당연히 없다. 나라를 잃었으니까. 조선인의 국적은 1910년 일본의 조선 병합 이전에, 이미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대외적으로 일본이었다. 1907년 전라도 해남군에 주소를 둔 박창규라는 조선인의 여권에는 ‘일본제국 해외여권’ ‘조선신민(臣民)전용’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미국의 보호령인 괌의 주민이 대외적으로 미국 국적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 병합 이후인 1916년 하와이로 이민 간 천현희라는 조선인의 여권에는 ‘일본제국 해외여권’, 1938년 역시 하와이로 이민 간 이동진이라는 조선인의 여권에는 ‘대일본제국 여권’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다만 병합이 된 다음이어서인지 ‘조선신민전용’이란 말은 사라졌다. 이종찬 광복회장과 정청래 등 더불어민주당 몇몇 의원들이 국민을 상대로 겁박하듯 일제 시대 조선인의 국적에 대해 묻기 전까지 대다수는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마라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도 있고 해서 당시 국적은 대외적으로 일본이지 않았겠나 추측하는 정도였다. 상식적인 추측이 옳았다. 내가 일제 시대 조선인의 국적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본 것은 2009년이다. 당시 보훈처발로 일제 시대 국내에 호적이 없어 ‘무국적자’로 취급받던 독립유공자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제 시대 국내에 호적이 있던 사람은 1948년 대한민국 국적법 제정 이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자동 계승됐지만 호적이 없던 사람은 계속 무국적자로 남았던 것이다. 세계가 한 나라라면 국적은 필요 없다. 국적은 상대할 외국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그래서 국적이라고 하면 여권을 떠올린다. 물론 여권에 기재되는 국적은 그 나라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는 자료에 기초해서 주어진다. 그 자료가 일제 시대에는 호적이었다. 지금의 우리는 전근대적인 신분 사회에 산 것도 아니고 제국주의를 경험한 것도 아니어서 한 나라에 두 종류 이상의 내국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잘 못한다. 일제하에서는 호적이 있는 곳에 따라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등으로 나뉘었다. 조선인 대만인 등은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온전한 형사사법절차 등은 물론이고 외국적 취득 등 일본인에게 적용되는 국적법의 혜택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대외적으로 당시 조선인과 대만인이 일본 국적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시민권과 국적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 그들은 미국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누리지 못했지만 국적은 미국이었다. 일제 시대 조선인 국적 문제는 스스로도 대내적인 권리의 문제와 대외적인 국적의 문제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이를 한데 뒤섞어 불러일으킨 혼란이다. 동아일보는 1923년 일제 시대 만주 간도 용정에서 일어난 탈적(脫籍) 운동을 보도했다. 그해 2월 용정에서 한 조선인이 중국인 병사에게 살해당하자 그곳 조선인들은 대회를 열어 중국 정부에 항의함과 동시에 일본 국적에서 벗어나자는 운동을 벌였다. 일본이 조선인을 보호해 주지도 않으면서 일본 국적에 매어 놓았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조선인은 간도에 있는 조선인까지 국내에 호적을 두고 있는 한 일본 국적이었고 그 사실을 조선인 스스로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일제 때 나라 잃은 설움을 말하면 매국노 취급받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한일병합이 국제법적으로 원천 무효이기 때문에 소급해 일제 시대에도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는 주장은 법적(de jure) 상태와 사실적(de facto) 상태도 구별하지 못하는 치기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삶이 법으로 환원되지 않듯이 역사는 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한일병합이 무효이든 아니든 일본은 조선을 강점했고 그 사실이 선조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한일병합이 무효라고 해서 그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일제 시대 나라를 잃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일제 시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 아니라거나 대한민국이라는 주장은 치기가 치기를 낳은 끝에 생겨난 거짓말이다. 그것은 진보 사관에 입각한 것도, 보수 사관에 입각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정신 승리’에 입각한 가짜 역사일 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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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상속세 완화, 지금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앞다퉈 상속세법 개정안을 냈다. 민주당 안은 현행 최고세율 50%는 유지하되 상속세 일괄공제액을 5억 원에서 8억 원으로, 배우자 상속공제 최저한도를 5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 안은 최고세율을 40%로 낮추고 자녀 1인당 일괄공제액을 5000만 원에서 5억 원으로 10배 올린다는 내용이다. 상속세 면세점은 민주당 안에서는 18억 원, 정부 안에서는 17억 원이다. 상속세 면세점에 해당하는 가격의 아파트 한 채가 사실상 재산의 전부인 남성을 상정하고 부인과 자녀 2명이 있는 그가 사망했을 때 얼마의 상속세를 감면받는지 계산해 보자. 현행 세법에 따르면 자녀 수가 몇 명이건 5억 원은 일괄 공제되고 부인에 대해 또 최소 5억 원이 공제된다. 공제액을 최소한으로 적용하면 과세 대상은 18억 원 아파트의 경우 8억 원, 17억 원 아파트의 경우 7억 원으로 각각 1억8000만 원과 1억5000만 원의 상속세가 나온다. 그러나 상속세법이 민주당 안대로 바뀌면 두 경우 다 상속세를 내지 않고, 정부 안대로 바뀌면 18억 원 아파트 상속인만 1000만 원의 세금을 낸다. 부인과 자녀 2명이 상속할 경우 법정 상속 비율은 1.5 대 1 대 1이다. 두 경우 다 부인에게 8억 원 미만에 해당하는 지분이 돌아간다. 나중에 부인이 사망할 경우 자녀들은 어머니 유산에 대해 민주당 안에 따르더라도 정부 안에 따르더라도 또 상속세를 내지 않는다. 결국 두 아파트 다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세금 한 푼 안 내고 상속된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2017년에서 임기를 마친 2022년 사이에 서울 중위권 아파트 가격이 5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2배 올랐다. 고가 아파트는 2배 이상 올랐다. 윤석열 정부 들어 집값이 약간 내렸다가 다시 문 정부의 최고점에 접근했다. 현재 18억 원 아파트와 17억 원 아파트는 2017년에는 9억 원과 8억5000만 원 미만이었을 것이다. 2017년과만 비교해도 자산 가치가 2배 이상으로 뛰었으나 상속세 한 푼 내지 않고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된다. 현재 서울 중위권 아파트 가격인 10억 원까지는 현행 세법에 따르더라도 상속세를 내지 않는다. 현재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이자 양도세 비과세 대상인 12억 원 아파트도 상속세는 많아야 2000만 원이다. 언제부터 17억, 18억 원 아파트까지 나라가 상속세 부담을 걱정해줄 아파트가 됐나. 서민 지원을 놓고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앉아서 9억 원과 8억5000만 원을 번 아파트 소유자에게 통 크게 억대의 세금을 깎아주는 데는 이해가 찰떡같이 합치하는 여야다. 아파트 가격이 올라 남편과 함께 살던 집을 부인이 상속받을 때 억대의 세금을 내야 해 집을 처분할 수밖에 없다면 억울하다. 그러나 이미 현행 세법으로도 배우자는 30억 원까지 공제를 받을 수 있다. 자녀들에게까지 억대의 세금을 깎아주며 불로소득의 대물림을 보장해줄 이유가 있는가. 기업이 가업(家業)을 잇도록 상속세를 깎아주는 건 일자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구의 상속세를 깎아주는 것은 경제에 무슨 도움이 되나. 살아서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어야 사회가 발전한다고? 9억 원과 8억5000만 원이 열심히 일해 번 돈인가. 상속세는 이중과세라고? 앉아서 번 9억 원과 8억5000만 원에 대해 생전에 무슨 세금을 냈나. 부동산 가격이 안정적인 나라는 집값으로 인한 불로소득이 생길 여지가 적어 상속세와 양도세를 낮게 유지해도 된다. 우리나라는 1가구 1주택자의 경우 10년 이상 보유·거주하면 양도세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양도세가 이미 낮은데 상속세까지 완화하면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나라에서는 집값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을 회수하지 못해 양극화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2017년 이후의 집값 상승은 서울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서울 거주자와 지방 거주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전례 없는 양극화를 낳았다. 너무 급격한 집값 상승으로 무주택자에서 유주택자, 작은 평수에서 큰 평수로 옮겨갈 사다리가 끊겼다. 그런데도 오히려 집값 상승을 상속세 완화의 이유로 들고 있으니 전도(顚倒)도 이런 전도가 없다. 27년 만에 상속세를 손질한다면 유산세를 유산취득세로 바꾸는 등의 근본적인 것이 돼야 한다. 최고세율과 공제액이나 건드리면서 서울 상위 30%를 향한 노골적인 표심 구애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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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연봉 고려 없이 시작했다 후퇴하는 법조 일원화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재임 때 가장 큰 고민으로 우수한 인재를 법관으로 뽑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꼽았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취임 직후 같은 고민을 토로했다. 현재 법원은 경력 5년 이상의 변호사 중에서 법관을 뽑고 있다. 대강 뽑는다면 충원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법원은 예전처럼 우수한 인재를 원한다. 변호사로서 우수한 인재는 대부분 유명 로펌에 가 있는데 법관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받는다. 그들이 연봉을 낮춰 가며 법원으로 오려 하지 않는다. ▷법조 일원화는 2013년부터 시작됐다. 법관도 검사도 변호사를 해본 사람 중에서 충원한다는 것이다. 세상 물정을 알아야 수사와 기소도 재판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취지에서다. 변호사 경력 3년 이상에서 시작해 5년, 7년, 10년 이상으로 차츰 늘려 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검찰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졸업생을 바로 검사로 뽑으면서 처음부터 구멍이 뚫렸다. 반면 법원은 막 법조계에 들어온 우수한 인재를 검찰에 뺏기면서도 변호사 경력자로 법관을 충원하기 시작했다.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내년에는 7년 이상 경력자, 2029년부터는 10년 이상 경력자를 뽑아야 한다. 올해 안에 개정되지 않으면 법원의 우수 인재 영입은 더 어려워진다. 법원은 몇 년 전부터 개정을 국회에 요구했다. 그러나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요지부동이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 반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민주당 의원들이 법관 임용에 필요한 최소 경력을 계속 5년으로 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재명 대표 1심 선고를 앞둔 시점이어서 법원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이 문제의 해결이 시급한 것임은 틀림없다. ▷결국은 연봉이다. 변호사 경력자 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뽑으려면 유명 로펌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경력의 법관이 현재 받는 연봉보다는 꽤 많은 연봉을 줄 수 있어야 법조 일원화가 순조로이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어디 공무원 월급 올리는 게 쉬운가. 조 대법원장이 싱가포르는 법관 연봉을 올려서 법조 일원화가 순조롭고 벨기에는 그렇게 못 해 후퇴한 사례를 든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벨기에의 길로 가고 있다. ▷법관의 월급을 올려주지 못하면 일이라도 줄여야 한다. 일을 줄이려면 법관 수를 늘려야 하는데 국회가 늘려주지 않는다. 국민 1인당 소송 건수는 이웃 일본보다 8배가 많다. 소송 건수를 줄일 방법도 뾰족하지 않다. 변호사 경력 10년 이상의 법관으로 법원이 채워져야 제대로 된 법조 일원화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사법개혁이 아니라 근본에서부터의 사법개혁이 없으면 법조 일원화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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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억지가 만든 광복절 난(亂)

    이종찬 광복회장이 실체 없는 건국절 추진을 문제 삼아 광복절 기념식을 파탄 내는 걸 보면서 착잡했다. 나로서는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지난해 9월 6일자 ‘홍범도가 본 홍범도’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이 맘 놓고 숨쉴 땅 한 자락 없었는데도 이종찬 광복회장은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는 헛소리를 광복절 기념사에서 늘어놓았다”고 쓴 데 대해 이 회장은 광복회 홍보조직까지 동원해서 나를 1948년 건국론자로 몰아붙이며 성토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었다는 평범한 주장이 왜 문제가 되는지, 또 그런 주장이 어떻게 1948년 건국론으로 연결되는지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 8년 전인 2016년 9월 7일자 ‘건국절은 없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선진국 중에 건국절이 없는 나라가 대부분이고, 광복절이 있으면 됐지 건국절까지 필요할지 의문이고, 건국 시점(時點)을 놓고 논란을 벌이다 보면 국민국가(nation-state)의 핵심인 국민통합(nation-building)의 과제를 소홀히 하기 쉽고, 굳이 건국절을 정한다면 한반도 전체에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후에 하면 어떠냐는 논리로 1948년 건국절 추진에 비판적인 시각을 표현했다. 그런 내가 졸지에 1948년 건국론자가 돼 버린 것이다. 그런 경험 때문에 이 회장이 수가 틀리면 실체도 확인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는 성급함이 있지 않은가 진즉 생각하게 됐다. 누가 만약 과거의 어느 시점을 대한민국 건국의 해로 삼는 게 적절하냐고 묻는다면 1948년이라고 답하겠다. 그래서 1948년 건국론자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무튼 내 주장은 1948년 건국론은 아닌데 어쩌겠나. 이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따라 1919년 건국을 주장하다가 일제강점기에도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일제 식민지배의 한가운데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하려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라를 잃은 적은 없고 단지 나라의 정체(政體)만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내야 하듯이 억지도 그렇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나라를 잃었나요, 안 잃었나요’라고 물어보니 다 ‘나라를 잃었다’고 대답한다. 멀쩡한 사람이 별 이상한 질문을 다 한다는 듯이 쳐다본다. 이 회장이 스스로 식민지배하에 있는 나라의 존속 여부에 대해 세계적으로 새로운 이론을 내놓을 전문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이철우 연세대 국제법 교수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학문의 학문인 철학에서 현대 정신을 대표하는 후설에 따르면 학자라고 해서 전문가의 일방적 권위로 함부로 일상세계(Lebenswelt·everyday life)의 의식을 식민화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학술대회의 한구석에서나 주장할 수 있는 특이한 의견에 기대 광복회장이 국가의 공식 행사인 광복절 기념식을 쪼갠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이다. 이 회장이 이명박 정부 시절 건국 60주년 기념사업회의 고문으로 위촉됐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올라갔다고 반박하지만 대통령이 위촉하는 고문이 그렇게 허술하게 됐을까 의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제2건국’의 과욕을 부리다가도 1998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건국 50년’이란 표현을 썼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3년과 2007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1948년 “민주공화국을 세웠다” “이 나라를 건설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누구나 다 억지를 부리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니 딱히 부끄러워할 건 없다. 시대 정신이 먹사니즘(먹고사는 게 중요하다는 주의)으로 흘러가는 세상에서 건국 시점에 대한 논란은 점점 더 부질없어지고 있다. 민국의 건립이 1919년 시작돼 1948년 완성이 되거나 획기적 전기를 맞았다는 점에만 동의하면 결정적인 게 1919년이냐 1948년이냐 그 이후의 어느 시점이냐는 견해차로 광복절 기념식을 파탄 내고 할 일은 아니다. 건국이야 어찌됐건 현실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거면 됐다. 다만 일개 학자가 아니라 광복회장이 일제강점기에도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비상식적이니 그만뒀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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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대통령의 집권 후반기 검찰총장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검찰총장의 임기는 2년이다. 통상 대통령 임기 중 3명의 검찰총장이 나온다. 대통령으로서는 집권 직후의 검찰총장보다는 집권 후반기를 맡는 3년 차 이후의 검찰총장 임명에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 임기 중 발생한 비리가 하나둘 드러나고 집권 초반에 비해 조직 장악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검찰의 권력 수사를 막아내기 어려워지는 시기가 이때부터이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집권 3년 차에 임명된 김기수 총장이 대통령 차남 현철 씨를 구속했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집권 4년 차에 임명된 이명재 총장이 대통령 차남 홍업 씨와 삼남 홍걸 씨를 구속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특이하게도 집권 초반 검찰과의 알력이 심했으나 집권 3년 차 정상명 총장하에서 관계가 안정화됐다. 그러나 수면 밑에서는 박연차 게이트가 끓고 있었고 결국 이명박 대통령 집권 초반 수사 대상이 됐다. 이 대통령 때는 집권 4년 차에 임명된 한상대 총장의 권력 봐주기 수사에 대한 불만이 중앙수사부 폐지 추진을 계기로 터져 나와 검란(檢亂)까지 발생했다. ▷박근혜 대통령 때의 집권 3년 차 총장은 김수남이었다. 박 대통령과 검사 출신 김기춘 비서실장이 믿고 신임한 총장이었으나 총장 스스로도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 최순실 사건에 떠밀려 박 대통령을 구속하는 역할을 맡았다. 문재인 대통령 때의 집권 3년 차 총장은 윤석열이었다. 그는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있을 때는 문 정부의 적폐청산 수사에 앞장섰으나 총장으로 올라가자 문 정부와 격렬한 갈등을 빚고 결국 문 정부에서 쫓겨났다. ▷이원석 검찰총장의 임기가 다음 달 만료된다.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가 열려 심우정 법무부 차관, 임관혁 서울고검장, 신자용 대검 차장검사, 이진동 대구고검장 등 4명을 후보로 추천했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이르면 윤 대통령 휴가가 끝나는 오늘 4명의 후보 중 1명을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한다는 보도가 나온다. 형식적으로는 장관의 임명 제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통령과 조율을 마친 후보일 것이다. ▷윤 대통령은 최초의 검사 출신 대통령이다. 누구보다 검찰의 생리를 잘 아는 만큼 집권 3년 차 검찰총장의 임명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총장 후보 4명이 모두 윤 대통령과 친분이 깊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믿고 뽑아도 대통령과 알력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 검찰총장이다. 윤 대통령 자신도 조국 등 일부 측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고 임명한 문 대통령을 치받고 대통령이 됐다. 윤 대통령은 오늘날의 자신을 만든 이 숙명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11월이면 윤 대통령의 집권이 반환점을 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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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상속세 완화하려면 생전 불로소득 과세부터 제대로

    상속세는 이중(二重)과세이기 때문에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살아서 세금 다 냈는데 죽어서 또 낸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생전에 세금을 제대로 낸다면 상속세를 완화해도 된다. 그러나 생전에 세금을 제대로 내고 있는가. 개인 세금은 소득세와 자산세로 나눌 수 있다. 소득세는 자영업자는 몰라도 월급쟁이에게는 유리지갑이라고 할 만큼 철저히 징수되고 있다. 다만 세율은 선진국에 비해 낮다. 국가가 빚을 지지 않고 복지를 강화하려면 세율을 높여야 한다. 국민의힘도 더불어민주당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최소한 자산세 줄일 궁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자산세는 부동산 세금과 금융 세금으로 나눌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실패로 서울 중위권 아파트 가격이 2017년 5억 원에서 매해 1억 원씩 올라 2022년 10억 원이 됐다. 한 해 소득으로 1억 원씩 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17년 전만 해도 전세를 살다가 집 사는 일이 가능했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윤석열 정부 집권 이후 저금리 탈피가 시작돼 집값이 떨어질 기회가 왔다. 그러나 이 정부는 저절로 떨어지는 집값을 잡아 세웠다. 문 정부에서 강화된 부동산 세금이 효과를 보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오른 집값과 맞물려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집값이 채 내리기도 전에 세금과 대출을 완화하는 바람에 집값은 2022년의 정점으로 돌아갔다. 부동산 세금은 보유세(재산세+종부세)와 거래세(취득세+양도세)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집값 대비 보유세 비율은 세계적으로 봤을 때 종부세를 강화한 문 정부 때도 높았다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1주택자까지 보유세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것은 집값이 소득과 큰 괴리를 빚으면서 상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집값이 잘못된 것이다. 윤 정부는 대증(對症)요법적으로 종부세를 완화할 게 아니라 근본 원인인 집값부터 잡으려 노력했어야 한다. 단기간에 집값이 급등한 경우 양도차익은 불로소득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과세 강화가 자연스럽다. 물론 양도세가 높으면 집을 팔려고 하지 않아 매물 부족에 따른 집값 상승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다가는 두 마리 다 놓친다. 보유세가 높아서 못 살겠다면 양도세를 낮춰 매도를 유도해야겠지만 보유세를 낮게 유지한다면 높은 양도세는 감수하도록 해야 한다. 보유세는 얼마 내지도 않으면서 크게 늘어난 양도차익은 양도차익대로 누리겠다는 건 고약한 심보다. 집값이 급등한 상황에서 상속세를 크게 완화하면 사실상 양도세가 사라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자녀 1인당 공제액이 5000만 원에서 5억 원이 된다면 17억 원으로 오른 사람의 아파트가 부인과 자녀 2명에게 상속될 경우 양도세 한 푼 안 내고 팔아서 현금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상속을 하면 상속가액이 취득가액이 되고 양도 차익이 제로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는 두 배로 오른 부동산을 세금 한 푼도 안 내고 물려줄 때 누구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가치가 줄어든 전세금이나 물려주는 양극화의 확대 대물림이 예상된다. 과거에는 자산이라고 하면 대개 부동산 자산이 전부였으나 2000년대 이후로 금융 자산이 급속히 늘고 있다. 부동산은 거주해 살다 보니 값이 오른 것이고 다만 너무 올라 문제가 되고 있지만 금융 투자로 버는 돈이야말로 전형적인 불로소득이다. 이숙연 신임 대법관의 딸은 아버지에게 800만 원을 증여받아 아버지 추천으로 산 주식을 6년 만에 아버지에게 3억8000만 원에 팔았다. 이 과정에서 증여세와 양도세 약 8000만 원까지 아버지가 내줬다. 딸이 제 돈으로 세금을 냈다고 해도 3억 원이 마법처럼 남는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투자도 수억 원은 갖고 있어야 할 수 있다. 3억 원을 가진 젊은이가 2017년에 2억 원 대출을 받아 5억 원짜리 아파트를 샀다면 지금 10억 원이 돼 있을 것이다. 시작부터 너무 불공정하다면 과세는 제대로 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소기업의 가업(家業) 승계를 지원하는 등의 상속세 완화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사회는 가구별로 전례 없이 심각하고 광범위한 양극화에 처해 있다. 정책 실패로 오른 집값을 기정사실화해 세제를 맞추지 말고, 집값을 안정화시키고 불로소득에 제대로 과세하고 나서 상속세든 자산세든 완화를 논의하는 것이 순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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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대통령이 국방장관에게 뭔가 지시했다고 한들

    국방장관은 구체적 사건에 대해 각 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검찰단장을 지휘·감독한다. 채 상병 사건에서 이종섭 국방장관(이하 모두 당시 직급)은 해병대 참모총장 격인 김계환 사령관에게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의 직무상 상관은 김 사령관이다. 박 단장은 군 사법경찰관이다. 군 사법경찰관은 직무상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박 단장의 직무는 수사 및 그와 연계된 이첩 등의 업무다. 군 사법경찰관은 유감스럽지만 군 검사와 달리 상관 명령의 적법성과 정당성에 대해 이견이 있을 때도 이의 제기를 할 권한이 없다. 박 단장은 김 사령관이 이첩 보류 지시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김 사령관은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청문회에 계속 빠지고 있으나 민주당은 그의 불출석만은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부사령관을 포함해 주변인들은 모두 김 사령관이 이첩 보류 지시를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박 단장이 지시를 어기고 이첩을 강행하는 바람에 항명이 되면서 사건은 국방부 검찰단으로 넘어갔다. 이후에는 이 장관의 직접 지휘·감독하에 있는 국방부 검찰단장이 박 단장이 수사한 내용에서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등 몇몇에 대한 혐의 적용만 빼고 그대로 경찰에 이첩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원 청문회’는 국회 권한을 남용한 청문회이지만 소득도 없지 않았다.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혔다. 하나는 박 단장의 수사보고서에 이미 여단장이 사단장의 지시를 어겨 수색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 사단장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는 일단 배제하고 봐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박 단장의 수사보고서에 초급장교와 부사관에게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하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상관의 지시를 따르는 것 외에는 어떤 권한도 없었기 때문에 경찰 수사에서 무혐의 처리됐다. 박 단장의 수사보고서는 액면으로도 앞뒤가 안 맞았다. 전화번호 ‘02-800-7070’으로 이 장관에게 전화한 사람이 누구라는 걸 다 알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다. 단지 이 장관이 말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전화로 뭔가를 지시했다고 해도 여기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대통령은 장관에게 지시할 수 있다. 주요한 국정은 다 대통령이 장관에게 지시해서 이뤄진다. 다만 그 지시가 부당하다면 장관은 거부할 수 있다. 아니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장관이 수긍하고 부처에 지시했다면 그 지시는 장관의 지시가 된다. 장관은 책임지라고 있는 자리다. 장관이 책임지기 싫으면 장관 자리를 그만두면 된다. 그것이 장관이 장관 아닌 다른 공무원과 다른 점이다. 19세기 프랑스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장관 자리를 맡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조롱한 바 있다. 이 장관의 지시는 경찰 수사 결과와 일치하지 않았어도 적법했지만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온 덕분에 정당성까지 얻었다. 장관과 대통령 사이에 있었던 일은 더 따져 볼 필요도 없다. 대통령은 애초에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 어차피 정식 수사는 경찰에서 하게 돼 있으니 장관이 결제까지 한 박 단장의 보고서는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였다. 임 사단장은 자신의 지시와 다른 지시를 여단장과 대대장이 해서 넘어갔을 뿐 자신의 지시를 따랐다가 사고가 일어났다면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대통령은 군 복무도 안 해본 사람이 어림잡아 알은체하다가 혼이 났다. 대통령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지금 논란이 되는 대부분의 사건은 ‘김건희 특혜 조사’를 포함해 대통령 쪽이 불필요한 고집을 부려 빚어졌다. 김 여사는 일반인보다 가혹하게 범죄 혐의를 적용받아서도 안 되지만 대통령 부인이라고 쉽게 범죄 혐의를 빠져나가서도 안 된다. 일반인이 주가조작에 계좌가 연루됐다면 4년 가까이 지나 검찰청사 밖에서 조사받을 수 있겠나. 다만 채 상병 사건은 이 정도로 끝내야 한다. 임 사단장 구명 시도가 있었고 거기에 ‘김건희 커넥션’이 있었다면 그것은 따로 수사해도 된다(물론 나 같으면 민주당 쪽의 수상한 변호사가 만들어내는 의혹은 더 철저히 검증하겠다). 채 상병 사건은 ‘김건희 커넥션’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과 장관 사이가 단절돼 있어 수사 외압으로 처벌할 수 없다. 공수처는 질질 끌면서 언론플레이나 하지 말고 신속히 수사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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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검사 탄핵서 드러난 ‘이재명 유일 체제’의 봉건성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는 정치학자인 최장집 교수가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쓴 말이다. 한국 정치학계에서 보기 드문 적절한 개념화이긴 하지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같은 착각도 없지 않다. 정치적 민주화가 1987년으로 끝난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정치는 한번에 영구히 민주화되지 않는다. 정치는 전진할 수 있듯이 퇴행할 수도 있다. 헤겔적 의미의 자유의 확산으로서의 역사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끝나지 않고 독재자가 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퇴행하고 있듯이, 또 심지어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였던 미국에서조차 도널드 트럼프에 의해 퇴행하고 있듯이, 한국의 정치도 그렇다는 걸 이재명 대표의 더불어민주당이 보여주고 있다. 자신을 수사하는 검사들을 탄핵한다는 정치를 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검찰 수사가 지나치다는 것과 검찰 수사가 조작됐다는 것은 다르다. 검찰의 수사나 혐의 적용이 지나칠 때가 있다. 윤석열 한동훈 때 국정농단 수사가 그랬다. 중앙수사부를 폐지하고 외과수술식 수사를 지향해 가던 검찰이 윤석열 한동훈 때 옛날 식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검찰이 조작이나 하는 집단이라는 건 아니다. 대체로 검찰은 수사기관이 조작한 증거를 거르든가, 미처 거르지 못하든가 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 조작하는 집단은 아니었기에 민주화 이후 득세할 수 있었다. 검찰 수사를 조작으로 걸고넘어지는 못된 버릇은 문재인 정권 때 한명숙에게서 시작됐다. 다만 그때도 검사 탄핵은 언급하지 않았다. 조작이라고 주장해 법원에서 증거력을 다투는 것이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억지였다. 검사 탄핵 추진은 억지의 최대치를 넘어 사악함을 드러낸 것이다. 이 대표 수사 검사들에 대한 탄핵 소추가 헌법재판소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탄핵 소추를 추진하는 것은 탄핵을 다투고자 함이 아니라 이 대표를 건드리면 검사든 판사든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라는 걸 민주당 의원들도 잘 알고 있다. 검사 탄핵 소추는 개탄스러운 일이지만 검사의 직무가 정지된다고 해서 재판이 중단되지는 않는다. 판사 탄핵은 다르다. 판사가 탄핵되면 판사 교체 등으로 재판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재판이 지연되면 이 대표는 주요 혐의에 대한 유무죄 확정 판단을 받지 않고 대선에 도전할 수 있다. 대통령을 포함해 정부 공직자는 탄핵 소추됐다가 헌재에서 기각 결정을 받고 돌아오면 그만이지만 판사 탄핵으로 재판이 지연되면 회복할 수 없는 부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대표의 대장동 의혹은 검찰이 발동을 건 것이 아니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상대 후보 측이 제보하면서 불거졌다. 백현동 등 나머지 개발 의혹은 유사 사건으로 따라 나왔다. 선거법상 허위 사실 유포 의혹은 대선 토론에서 액면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짓말 좀 했다고 대선 출마를 막는 건 지나치지만 그로부터 파생된 위증 교사 의혹은 다르다. 쌍방울 대북송금 연루 의혹도 검찰이 그림을 그리고 접근한 게 아니다. 이재명 변호인들이 받는 수임료의 실상을 확인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다. 이 대표에 대한 법인카드 불법 사용 수사는 분명 지나치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시절 법인카드 사용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했던가. 법인카드 불법 사용 수사는 이 대표 부인 선에서 그치는 것이 적절하다. 다만 지나치다고 하는 건 자제하라는 뜻이지 조작됐다는 뜻은 아니다. 법인카드 불법 사용도 증거는 명백해 보인다. 이 대표와 배후의 원탁회의 세력은 이른바 ‘촛불’ 혁명의 완수를 위해 민주당에서 ‘이재명 유일(唯一) 체제’를 확립했다. 국민의힘 대표 후보자들이 ‘김건희 문자’를 놓고 다투는 모습은 졸렬하기 짝이 없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유일 체제는 위험하다. 유일 지도자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 잘못이 있다면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쪽에 있어야 한다. 검·판사 탄핵은 유일 체제의 논리적 귀결이다. 탄핵 제도는 도둑이 들고 설치라고 있는 몽둥이가 아니다. 헌법 교과서에는 헌법 수호를 위한 저항권의 발동은 정당하다고 쓰여 있다. 도둑이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걸 국회도 정부도 법원도 막지 못하면 국민이 힘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2027년이면 민주화 40주년이 된다. 그 전에 또 한 번의 정치적 민주화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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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채 상병 사건의 小小大大

    지난주 국회 법사위 채 상병 관련 청문회에서 정청래 위원장의 무례한 위원회 운영을 보는 것은 심히 불편했다. 그러나 유재은 국방부 법무비서관의 증언 등은 ‘이첩 방해’가 아니라 ‘무단 이첩’의 프레임에서 이 사건을 볼 필요가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 줬다. 해병대 수사단은 군인 사망 사건에 수사권이 없다. 수사권 없는 수사가 독립적인 행정행위인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수사권 없는 수사의 이첩까지 굳이 독립적인 행정행위로 볼 이유는 없다. 이첩 자체는 상관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일반적인 행정행위다. 상관이 이첩 보류를 지시했는데도 이첩을 했으면 항명이라고 본다. 경찰로서는 무단 이첩된 기록을 접수할 의무가 없고 국방부는 회수할 권리가 있다. 두 다른 기관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조율은 대통령실이 할 수 있다. 임기훈 당시 대통령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은 관련 증언을 거부하긴 했지만 해병대 수사단의 이첩은 무단 이첩이니 접수하지 말라고 경찰에 지시하고 접수 거부된 이첩 서류를 회수해 가라고 국방부에 지시했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고 본다. 그러나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 사건의 본류는 이첩이 아니라 수사다. 수사에 외압이 있었느냐다. 다만 수사권 없는 수사를 독립적인 행정행위로 봐야 할지, 독립적이라면 어느 정도나 독립적으로 봐야 할지 먼저 결정해야 한다. 수사권 있는 수사에서 외부 개입으로 결과가 바뀌었다면 법으로 처벌 가능한 외압이다. 수사권 없는 수사도 독립적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수사권 있는 수사만큼은 아니다. 비슷하게 독립적이라면 수사권이 있거나 없거나 차이가 없어진다. 수사는 수사인 이상 권한이 있건 없건 외부 개입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국방부 장관-해병대 사령관으로 이어지는 지시에 의해 수사 결과가 바뀌었다면 비판받아야 한다. 다만 규범적으로 옳지 않다고 해서 다 법으로 처벌할 수준은 아니다. 수사권 없는 수사는 사실행위에 가깝고 수사권 있는 수사가 법적인 의미를 지닌 수사이기 때문이다. 수사권 없는 수사기관의 수사 결과는 수사권 있는 수사기관의 수사에 선입견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단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박정훈 전 수사단장의 수사 결과는 과도하게 단정적이었다. 게다가 수사 결과를 상관에게 보고하기도 전에 채 상병 유족에게 알리고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을 포함한 모든 책임자의 처벌을 약속했다. 수사권이 있어도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수사권 없는 사람이 했다. 정의감에 넘쳐서 그랬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개정된 군사법원법의 취지를 준수하지 않으면서 행동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고는 약속한 대로의 이첩이 어려워질 것 같자 무단으로 이첩을 강행했다. 소소대대(小小大大), 작은 건 작다 하고 큰 건 크다고 해야 한다. 채 상병 사건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수사 중인 외압 의혹은 법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수사에의 개입을 다루는 부수적인 사건이고 경찰이 수사 중인 과실치사 의혹이 본래의 큰 사건이다. 청문회에서 지휘와 지도를 구분한 임 전 사단장의 변명은 형식논리적이다. 대민(對民) 작전에서 배속 부대는 공식 지휘 계통이 어떻든 배속한 부대 지휘관의 지휘보다 원대(原隊) 지휘관의 지도에 더 영향을 받기 쉽다. 경찰에서 임 전 사단장에 대한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된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잘못된 것으로 판정난 개입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 공수처는 불소추 특권이 있는 대통령에 대해 기소 의견을 낼 수 없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이나 해병대 사령관에 대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 의견을 낸다면 대통령의 혐의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굳이 특검 없이도 더불어민주당은 탄핵 소추 절차에 들어갈 수 있다. 서일필(鼠一匹·쥐 한 마리)로 태산을 울리는 게 된다. 수사기관은 큰 것도 크고 작은 것도 크다고 하기 쉽다. ‘검사 윤석열’은 온갖 것을 다 농단으로 규정하고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했지만 법원에서 거의 다 무죄가 났다. 수사권 없는 수사에의 개입이 비록 서일필이 아니라 묘일필(猫一匹·고양이 한 마리) 정도는 된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 나라를 흔드는 것은 비례가 크게 어긋난다. 윤 대통령에게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면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나라를 다시 한번 퇴행시키는 게 된다. 지금 수사를 하는 쪽이나 지켜보는 쪽에 필요한 것은 기본적인 비례감의 회복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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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82세 바이든-78세 트럼프 메모장 하나 들고 90분 토론

    미국 대선에서 최초의 TV 토론은 1960년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 사이에 열렸다. 케네디가 젊음으로 어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케네디 43세, 닉슨 47세로 두 사람의 나이 차는 그리 많지 않았다. 40대 후보 간에 시작된 대선 TV 토론이 어느새 80세 안팎의 후보들 간 토론이 됐다. ▷올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가 될 것이 확실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나이는 82세, 공화당 후보가 될 것이 확실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나이는 78세다. 두 사람이 사흘 뒤인 27일 첫 TV 토론을 벌인다. CNN방송이 진행하는 토론에서는 메모장과 펜, 물 한 병이 주어진다. 90분간의 토론 중간에 광고 시간이 두 번 있으나 그때도 캠프 관계자와 접촉할 수 없다. 둘의 국정 이해도나 순발력을 적나라하게 비교해 볼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바이든과 트럼프를 빼면 미국 대선에서 최고령 후보는 1984년 재선에 도전한 당시 73세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상대편 민주당 후보는 56세의 월터 먼데일이었다. 두 사람이 TV 토론에서 나이를 두고 나눈 유명한 얘기가 있다. 먼데일이 “대통령의 나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공격적으로 파고들었다. 레이건은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지 않겠다”며 거꾸로 된 듯한 대답을 했다. 먼데일이 무슨 말이냐고 묻자 레이건은 “당신이 젊고 경험이 없는 걸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한 역공을 펼쳤다. 미국 전체의 TV 앞이 웃음바다가 됐고 먼데일은 패배했다. ▷젊음만이 매력이 아니라 노련함도 매력이라고 호소할 수 있는 것도 평균 기대수명보다 적을 때 얘기다. 바이든과 트럼프는 둘 다 오늘날 미국의 평균 기대수명인 77세를 넘겼다. 평균 기대수명을 넘긴 후보들이 기억력 하나만 갖고 토론을 벌이게 되는 상황이 흥미롭다. ▷바이든 대통령은 공개 석상에서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는 듯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최근 한 유세 현장에서는 30초 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역대 TV 토론이 모두 달랑 메모장 하나 갖고 했지만 이번에 이 사실이 더 주목받는 것은 두 사람이 빚을지 모르는 실수 때문이다. ▷두 사람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대중의 환호를 불러일으키는 뛰어난 연설가다. 그러나 프롬프트 의존도도 높다. 할 말을 잊는 불상사는 없길 바란다. 이들에게 통계 수치의 정확성을 따지는 건 젊은 후보들이나 하는 유치한 것일 수 있다. 주로 식견을 다투는 토론이 되겠지만 80세 안팎의 후보들의 젊은 후보들 못지않은 열띤 토론을 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멋진 장면이 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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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이재명 재판 지연의 헌법적 문제

    검찰 수사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의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형사 사건에서 검찰은 피고인과 마주 보는 일방 당사자일 뿐이기 때문에 수사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게 옳다. 다만 검사와 피고인의 공방 끝에 법원에서 선고가 내려졌을 때는 그것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판사가 다소 미심쩍을 때조차도 그렇다. 발자크의 말처럼 법원에 대한 신뢰는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선진국 언론은 검사가 은밀히 흘리는 걸 받아쓰지 않는다. 아예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수사 내용은 수사기관 외의 제3의 출처에서 확인해 줄 때만 쓴다. 중요한 사건일수록 법정에서 검찰과 피고인이 다 발언권을 가질 때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 그래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재판에 주목하고 있으나 아직 한 건의 선고도 이뤄지지 않아 유감이다. 다만 얼마 전 이 대표의 혐의를 가리키는 측근의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 대표가 경기도지사일 때 평화부지사로 발탁한 이화영 씨의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에 대해 재판부는 무려 징역 9년 6개월 형을 선고하면서 ‘이재명의 방북을 위한 대가’임을 명백히 했다. 누가 봐도 이 대표와의 공모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 이 씨가 이 대표에게 보고했다는 자료도 있다고 하지만 재판부는 공모 여부는 공소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판단하지 않았다.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한 이 대표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아예 기소를 하지 않았다. 이 대표가 공모자로 함께 기소됐더라면 재판부가 유죄 선고에 부담을 느꼈을까. 그런 것까지 고려해 검찰은 이 씨만 일단 먼저 기소한 것일까. 검찰이 곧 이 대표도 기소할 것이라고 하지만 뒤늦은 기소로 대선 전까지 확정 판결이 나오지 않으면 이런 낭패가 따로 없다. 이 대표는 대장동 개발 사업 특혜, 백현동 용도 변경 특혜, 성남FC 후원금 등과 관련한 혐의로도 측근인 정진상 김용 씨와 함께 재판을 받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 체제에서 이들 사건이 병합되면서 재판이 필요 이상으로 지연되고 있다. 뒤늦은 기소나 늦장 재판 못지않게 우려되는 것은 판사 탄핵 시도다. 민주당은 검찰이 구속된 이화영 씨를 회유했다며 수사 검사를 탄핵하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화영 유죄 선고가 나오자 수사 검사 탄핵은 김빠진 소리가 됐다. 그러자 판사 탄핵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은 서로 다른 당이 맡는다는 관행을 어겨 가며 법사위원장에 정청래 의원을 앉히고 판사들을 언제라도 탄핵할 수 있는 체제를 갖췄다. 자기 당 대표를 재판하는 판사들에 대한 탄핵은 웬만큼 후안무치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정청래라면 다르다. 물론 탄핵 소추가 헌법재판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유죄 선고를 앞둔 결정적 순간에 재판을 지연시킬 수는 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이화영 유죄 선고 직후 ‘대통령은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다’는 헌법 84조를 거론하며 해석 논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와 민주당의 지연 전술로 이 대표에 대한 확정 판결이 대선 때까지도 내려지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 헌법적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물론 헌법 84조를 둘러싸고 해석 논란이라고 할 만한 것이 과연 있는지는 의문이다. 헌법학자들은 대체로 대통령을 형사 재판에 증인으로 세울 수는 있어도 피고인으로 세울 수는 없다고 가르친다. 또 대통령을 수사할 수는 있어도 기소할 수는 없으며 임기가 끝난 후에야 기소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대통령을 피고인으로 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명시적 규정은 없어도 피고인이 대통령이 되면 재판은 중단되고 퇴임 후로 미뤄진다고 유추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다만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지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재명 재판은 속도가 관건이다. 피고인이 대통령이 되면 재판 중단으로 유무죄를 가릴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유무죄를 가려봤다면 대통령이 될 수 없었던 사람을 가릴 수 없어서 대통령이 되게 했다면 아무래도 이상하다. 검찰 수사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기 때문에 법원의 선고가 유죄가 될지 무죄가 될지 예단하지 않는다. 유죄든 무죄든 법원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국민에게 중요한 것은 속도다. 3년 가까이 남은 대선 때까지는 이 대표에 대한 확정 판결이 내려지도록 각급 법원이 최대한 신속히 재판을 진행할 헌법적 의무가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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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성추문 입막음’ 유죄 평결 트럼프, 대선 출마 자격은…

    우리나라는 대통령직 등 공직 출마에서 유죄 선고에 따른 여러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실효되지 않는 자’ 등의 규정이 그것이다. 미국은 ‘출생에 의해 미국 시민이 아닌 자, 연령이 35세에 미달한 자, 14년간 미국 내의 주민이 아닌 자’에 대해서만 연방 대통령 출마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출생에 의한 미국인인지 공화당 쪽에서 문제 삼은 바 있다. 그러나 유죄 선고를 받은 적이 있는지는 묻지 않는다. ▷미국은 공권력의 정당성은 선거에서 나오고 선거가 우위라는 사고가 강하다. 지사와 의원은 물론이고 판사까지도 선거로 뽑는 주(州)가 적지 않다. 연방에서는 법관을 선거로 뽑지는 않지만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선거로 뽑힌 상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기 때문에 선거 우위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다. 남북전쟁의 여파로 연방 상·하원의원과 연방 대통령 선거인에는 반란죄를 저지른 사람이 도전할 수 없다. 연방 대통령에게는 그런 제한도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주 뉴욕주 법원 1심에서 ‘성추문 입막음 돈’과 관련한 혐의로 배심원단에 의해 유죄 평결이 내려졌다. 형량은 판사가 결정한다. 판사는 공화당 전국 전당대회 직전인 7월 11일을 선고 기일로 잡았다. 최대 징역 4년형을 선고할 수 있다. 물론 그날 선고는 1심 선고일 뿐이다. 그러나 유죄 판결이 확정돼도 대선 출마 자격에는 문제가 없다. ▷트럼프는 혐의가 중죄이긴 하지만 가장 낮은 급의 중죄다. 고령인 데다 전과도 없어 징역형 실형이 선고돼 수감될 가능성은 작다. 그러나 수감된다면 문제가 복잡하다. 옥중 출마를 할 수 있지만 유세를 다닐 수 없다. 대통령에 당선돼도 연방법이 아닌 주법에 따라 유죄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셀프 사면을 할 수 없다. 형기를 마칠 때까지 옥중 업무를 봐야 하는 비정상적이고 비효율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공화당 전국 전당대회 직전에 트럼프를 수감하는 선고가 내려지면 전당대회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미국 헌법의 기초자들은 직접선거로 뽑는 연방 상·하원의원과 달리 연방 대통령은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뽑기 때문에 부적절한 인물을 걸러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정당 정치가 강화되면서 특정 후보 지지 선서를 하지 않으면 선거인으로 뽑히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안이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특정 후보 지지 선서를 강제하는 규정은 없다. 당 내부에 분열이 생기면 ‘선서하지 않은(unpledged)’ 선거인이 나오거나 특정 후보 지지 선서를 했지만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신의 없는(faithless)’ 선거인이 나올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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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이재명이 해야 할 진짜 연금개혁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위원이 최근 주간동아와 인터뷰한 기사를 인상 깊게 읽었다. 그는 “한번은 한중일 연금 전문가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발표를 마치니 연금 업무를 담당하던 일본 공무원이 주저하다 질문하더라. ‘한국은 일본의 절반도 안 되는 보험료를 부담하는데, 어떻게 훨씬 많은 연금액을 줄 수 있느냐’며 비법을 묻는 것이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금의 소득대체율 44%와 45%는 1만 원 차이에 불과하다는 건 기만적이다. 월급이 100만 원일 때 소득대체율 44%는 44만 원, 45%는 45만 원이므로 그 말이 맞다. 월급이 100만 원인 사람은 없다. 월급이 200만 원과 300만 원이면 2만 원과 3만 원으로 늘어난다. 베이비붐 세대가 다 연금 수령 연령이 되면 수령자는 1000만 명에 가까워진다. 3만 원씩 1000만 명이면 3000억 원이다. 매년이 아니라 매월이다. 게다가 비교하려면 44%와 45%끼리 할 게 아니라 현재의 40%와 해야 한다. 월급이 300만 원이면 소득대체율이 40%에서 44%로 오를 때 연금은 월 120만 원에서 132만 원으로 는다. 12만 원씩 1000만 명이면 매월 1조2000억 원, 매년 14조4000억 원이 더 들어간다. 연금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올리는 데는 대체로 합의가 이뤄졌다. 개인과 회사가 9%에서는 각각 4.5%씩을 부담한다. 13%로 올리면 각각 6.5%로 2%씩 더 낸다. ‘보험료율 13%에 소득대체율 44%’가 되면 개인은 2%를 더 내고 4%를 더 받으니 이익이다. 2%를 더 내고 2%도 아니고 4%를 더 받는다. 이런 마법은 회사가 추가로 2%를 부담하기 때문이다. 현재도 일본의 절반도 안 되는 보험료를 부담하면서 일본보다 많은 연금을 받고 있는데 더 이익을 보는 개혁은 있을 수 없다. 보험료율은 13%로 올리더라도 소득대체율은 40%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옳다. 개인은 2%를 더 내면서 더 받는 것은 없으니 불만스럽다. 그러나 이런 방법 말고는 개혁이 가능하지 않다. 사실 보험료율 13%도 모자란다. 안정적으로 연금 제도를 운영하는 선진국을 보면 보험료율을 18%까지 올려야 소득대체율 40% 유지가 가능하다. 일단 13%로 올리고 기회를 봐서 더 올려야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정당의 대표로서 야당이긴 하지만 연금 개혁의 책임을 상당 부분 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 공론화위의 여러 안 중 개혁의 시늉만 낸 기만적인 안을 택해 재빨리 선수를 친 것이다. 이재명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그는 성남시장이 되자마자 모라토리엄(지불 유예)을 선언했는데 전임자를 깎아내리기 위한 사기였다. 또 전임자들이 노력해 판교를 첨단산업단지로 개발해 놓았더니 그 열매로 다른 기초자치단체는 흉내도 낼 수 없는 퍼주기를 했다. 그가 도입한 청년기본소득 같은 정책은 결국 폐지됐으나 부활하자는 목소리는 미미하다. 그가 성남시장 시절 서울까지 와 단식을 한 적이 있다. 경기도의 가난한 시군으로 가야 할 세수가 잘못된 조례로 인해 성남시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행정안전부에서 조례를 시정하도록 했더니 단식으로 저항한 것이다. 기초자치단체 시군 중에서 가장 부유한 단체의 장(長)이 돼서는 탐욕스러운 단식을 한 것이다. 그가 잘하는 것이 없지는 않다. 남한산성 불법 노점을 단속한 것과 코로나 때 신천지를 제압한 것이다. 기본권 침해가 없지 않았지만 차치하고, 그런 것만 잘하는 건 독재적인 정치인들이 가장 잘한다. 모수 개혁을 일단 하고 구조 개혁을 한다? ‘보험료율 13%에 소득대체율 44%’라는 모수의 토대 위에서는 어떤 구조 개혁을 해도 개혁이 될 수 없다. 이 대표가 그동안 해온 걸 보면 기만적인 모수 개혁의 기회가 오자 선수 치듯 해놓고 대선 때까지 3년간 버틸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런 걸 호응해 주니 ‘모라토리엄 선언 때 지방에서 통하던 사술(詐術)이 중앙에서도 통한다’고 여기고 있으리라.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생각했으나 예외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 대표가 ‘보험료율 13%에 소득대체율 40%’를 하겠다고 하면 내 잘못된 선입견을 기꺼이 인정하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을 듯. 그의 삶에 자기희생을 감수한 선택은 없었다. 그것이 노무현과 다른 점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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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영국 상식부 장관이 촉발한 ‘상식이란 무엇인가’

    영국인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하고 프랑스 의원이 되기도 한 토머스 페인은 ‘상식(Common Sense)’이란 제목의 팸플릿으로 미국 독립운동과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이 팸플릿은 상식이 무슨 뜻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과 국가가 왕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식이라고 단순히 선언했을 뿐이다. ▷프랑스어에는 영어의 ‘코먼 센스(common sense)’와 달리 ‘봉 상스(bon sens)’라는 말이 있다. 양식(良識)이라고 번역한다. 상식도 양식도 일본에서 번역된 말이다. 일본 철학자 미키 기요시(三木淸)는 양식을 상식의 상위 개념으로 본다. 상식을 무오류의 것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상식에 의문을 지닌 지혜를 양식이라고 했다. 실제 영어권과 불어권에서 쓰이는 용법에 맞는 해석인지와는 별도로 상식은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도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는 일리가 있다.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불확실성의 시대’란 책이 한국에서 널린 읽힌 미국 비주류 진보 경제학자다. 그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면서도 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생각을 지칭하기 위해 사회 통념(conventional wisdom)이란 말을 사용했다. 상식을 사회 통념과 구분하고 나서 보면 상식은 양식일 때만 제대로 된 상식으로 성립할 수 있다. 현실에 있어서는 사회 통념에 불과한 것이 상식이란 말로 선동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말 상식부 특임장관(Minister for Common Sense)직이 신설돼 에스터 맥베이란 여성이 임명됐다. 이 자리의 공식 명칭은 무임소(無任所) 장관이다. 그러나 리시 수낵 총리가 정부 부처가 영국의 상식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는 맥베이 장관의 판단을 따르라고 해서 상식부 장관이란 별칭을 얻었다. 상식은 본래 자명한 것이어야 하지만 오늘날에는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사회 통념에 불과한지 구별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런 부서까지 만들었을 것이다. 영국인 특유의 실용성이 느껴진다. ▷맥베이 장관이 공무원 신분증을 목에 걸 때 정부가 제공한 표준 목줄 외에는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 색깔이 들어가거나 팔레스타인 국기가 그려진 목줄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직이 정치적 행동주의에 오염되는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상식이라는 게 상식부 장관이 정하면 상식이 되는지도 의문이다. 다만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가 아무리 불분명해졌어도 무엇이 상식인지 따져보는 사회는 ‘법만 저촉하지 않으면 됐지 상식은 무슨 필요가 있냐’는 사회보다는 훨씬 건강해 보인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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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채상병 특검법 둘러싼 당론과 기율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한날 한곳에 모였을 때 드러나는 그 사회의 지배적인 의사다. 단, 조건이 있다. 구성원들은 사전(事前)에 서로 소통해서는 안 되고 당파를 지어서도 안 된다. 루소의 이론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지에서 일반의지로 가는 과정에 언론 정당 같은 매개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대회식의 공산주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현대 민주주의 정치는 언론과 정당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하나의 일반의지가 아니라 여러 개의 집단의지가 각기 다른 정당을 중심으로 형성돼 서로 경합하고 있을 뿐이다. 개인은 여전히 무소속으로 정당 밖에서 활동할 수 있다. 하지만 뜻을 합쳐 관철하는 데는 정당이 유리하다. 여기서 정당의 당론(黨論)과 개별 의원의 관계라는 문제가 발생한다.현대 민주주의 본고장인 영국의 정당에서는 원내총무를 회초리(whip)라고 부른다. 당론에 반해 행동하려는 의원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위협하면서 기율(紀律)을 잡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초리를 각오하고 반기를 든 의원들이 많아지면 오히려 정당 지도부가 붕괴된다. 이때 새로운 지도부를 중심으로 다시 기율 있는 정당으로 재구성될 수 있어야 그 정당은 존속한다. 당론과 기율은 이렇게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새 국회 당선인 모임에서 ‘당론을 무산시키는 행동’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4·10총선에 앞서 당론에 반해 행동한 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했다. 반면 국민의힘에서는 안철수 의원 등이 채 상병 특검법을 재의결할 때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한다. 200석에 가까워 여유가 넘치는 정당에서는 오히려 당론이 중시되고 고작 100석 남짓한 정당에서는 당론이 무시되는 모습이 대비된다.의원이 불이익을 감수하고 당론에 반해 행동하는 건 헌법상의 자유다. 게다가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은 그 자체로는 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민주당과 그 배후의 원탁회의 세력은 탄핵으로든 자진 하야를 압박해서든 윤석열 대통령을 임기 전에 끌어내려야 한다고 공언해 왔다. 대통령은 민주당이 추천하는 2명의 후보 중에서 특검을 골라야 한다. 이 대표 주변 변호사들의 법 사술(邪術)을 봤지 않은가. 그런 유의 특검이 선정돼 탄핵 구실을 만들고 그것에 놀아나 제2의 촛불이 켜지면 안 의원 등은 막아낼 자신이 있는가. 채 상병 특검법에는 찬성하고 탄핵 소추에는 반대하는 것이 뜻대로 될까. 근시안적이고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다.윤 대통령이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에의 과실치사 혐의 적용에 격노했다면 그가 늘 그렇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해병대 수사단은 군인 사망 사건에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수사 개입이 되지 않는다. 박정훈 수사단장이 오히려 군사법원법 개정 전 과거 관행에 따라 행동하면서 월권한 셈이다. 임 사단장에의 과실치사 혐의 적용은 경찰이 가리면 된다. 탄핵 거리도 되지 않는 사유로 대통령을 탄핵 소추해 정치적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막아야 한다.김건희 특검법 반대가 국민의힘의 당론이라면 그런 당론은 백날 뒤집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도 그것으로 윤 대통령이 교체되고 그런 토대 위에서 보수 정당을 재빨리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다면 못 할 선택도 아니다. 그러나 채 상병 사안으로 윤 대통령을 교체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힘든 반면 그 과정에서 정치의 한 축인 보수 정당이 새롭게 재구성되기보다는 궤멸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고 나아가 툭하면 탄핵 절차를 가동하는 나쁜 관행이 굳어져 정치 전반을 남미 수준으로 후퇴시킬 수 있다.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은 정치적으로도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정당 정치에서는 대통령 소속 당과 국회 다수당이 일치하면 행정부와 입법부가 일체가 돼 아이러니하게도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는 폐단이 없지 않다. 대통령 소속 당과 국회 다수당이 다른 지금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작동할 때다. 물론 견제와 균형의 중심에는 대통령 거부권이 있다. 정략적 법안, 포퓰리즘 법안, 체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법안에는 언제든지 주저 없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협치는 대통령과 국회가 공히 교착 상태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비로소 가능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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