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전승훈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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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라는 정글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합니다. 도시를 산책하고 탐사하는 즐거움을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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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10-22~2024-11-21
여행58%
경제일반17%
문화 일반13%
역사3%
산업3%
사회일반3%
미술3%
  • 세계가 주목하는 ‘힙한 아이템’… K한복 날다

    “K팝 아티스트들이 입은 한복이 글로벌한 주목을 받으면서, 젊은층에게 한복이 단순한 전통의상이 아니라 패션 트렌드를 반영하는 ‘힙한 아이템’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장동광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장·사진) 최근 tvN 드라마 ‘정년이’가 큰 인기를 끌면서 주인공인 김태리(정년이 역)가 입고 나오는 1950년대 한복 의상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주연 배우 김태리는 올해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공진원)의 ‘한복 웨이브(Hanbok Wave)’ 사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복 웨이브는 ‘한복 분야 한류 연계 협업 콘텐츠 기획 개발’ 사업으로, 2022년 피겨 스타 김연아, 2023년 가수 겸 배우 수지 등 한류 스타와 한복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협업해 한복 의상을 기획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김태리도 6월부터 공모를 통해 선정된 한복스튜디오 혜온, 리슬, 오르디자인하우스, 주식회사 한복생활 등 4개 업체 디자이너들과 함께 직접 한복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복은 12월에 국내외 전광판과 패션잡지 화보로 공개한다. 하이라이트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24일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서 한복 패션 영상을 송출하는 순간. 맨해튼 거리에서 한류 스타가 입은 총천연색 한복 패션 영상은 매년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왔다. “한류 붐에 따라 한식, 한옥도 관심이 많지만 한복은 쉽게 이동 가능하고, 시각적인 효과가 커 ‘K컬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죠. 특히 BTS, 블랙핑크, 뉴진스 등 K팝 스타들도 즐겨 입기 때문에 국내외 젊은 세대들에게 스타일리시한 패션 아이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올 8월 공진원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최한 한복 박람회 ‘한복상점’에는 나흘간 4만여 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MZ세대 관람객이 대거 몰려들면서 한복상점은 전년 대비 61% 상승한 19억 원의 매출을 달성해 큰 화제를 모았다. 짙은 회색 두루마기에 뿔테 안경을 쓴 한복 패션을 즐겨 하는 장 원장은 지난해 취임 이후 ‘한복의 일상화’ ‘한복의 대중화’를 내걸고 한복 문화 확산 캠페인을 벌여 왔다. 이를 위해 한복문화주간, 한복상점, 한복 곱게 입기 영상 콘텐츠 제작, 지역 한복문화창작소 조성 등 다양한 사업을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펼쳐 왔다. 그는 “한복이 특별한 날만 입는 이벤트성 의상이라는 인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한복 근무복 디자인 개발’ 사업이다. 공진원은 직종별로 350여 가지의 한복 근무복 디자인을 개발해 왔다. 신라복 한복 디자인을 근무복으로 도입한 경주 화백컨벤션뷰로를 비롯해 현재까지 총 43곳이 한복 근무복을 도입했다. “현재 한복을 입으면 궁궐에 무료 입장을 해줍니다. 앞으로는 국립국악원 공연장,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등에서 한복 입은 관객에겐 입장료 50% 할인 혜택을 주는 등 한복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을 해가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에 대통령과 장관들이 한복을 입고 국무회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국회도 1년에 한 번 ‘한복의 날’을 정해서 한복을 입은 국회의원들이 품격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한복 대중화에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요즘 한복은 국제 무대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외교수단이다. 2024 파리 올림픽 기간에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한복패션쇼에는 국내 주요 한복 디자이너 7인이 만든 한복을 프랑스 모델들이 입고 나와 파리 시민들에게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또한 10월 베트남 호찌민에서 열린 ‘2024 한-베트남 우호 문화의 날’ 행사에서는 한복과 베트남 아오자이 등 양국 전통 의상을 소개하는 패션쇼가 열리기도 했다. 내년이면 공진원 한복진흥센터가 10주년을 맞는다. 장 원장은 “올해 9월 전통문화산업진흥법이 시행됨에 따라 한복, 한지, 한식 등을 총망라한 페스티벌과 한복 문화에 대한 역사적 이론적 담론을 모색하는 학술포럼도 내년에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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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T 서울 2024’ 이달 26∼27일 개최… 글로벌 여행 테크·마케팅 학술대회

    여행 기술 기업 타이드스퀘어와 WiT가 공동 주관하는 글로벌 여행 테크·마케팅 학술대회인 ‘WiT 서울 2024’가 26∼27일 서울 여의도 페어몬트앰배서더서울 호텔에서 열린다. 올해 주제는 ‘넥스트 제너레이션(Next Generation)’으로 차세대 여행 콘텐츠에 대한 토론이 진행된다. 대한항공, 마이리얼트립, 아고다, 하나투어, 아마존 웹 서비스, 클룩, 포커스라이트, 시리움 등 여행 기업 50여 곳이 참여한다. WiT서울과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가 협력한 ‘K-트래블 테크 서밋’도 열린다. 인공지능(AI) 기술과 산업을 융합한 ‘AI시티’ 정책포럼이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열린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문진석 의원이 주최하고 도시·투자 콘텐츠 전문미디어인 시티타임스가 주관한다. AI 기술들이 실제 신도시 건설 계획과 정책에 반영되는 과정에 대해 논의한다. 에어뉴질랜드는 뉴질랜드의 농구 스타 스티븐 애덤스가 출연하는 기내 안전 비디오 ‘Every Point Counts’를 14일 공개했다. 주인공뿐 아니라 코미디언 톰 세인즈버리, 스포츠 방송인 앤드루 멀리건, 틱톡 스타 테오 셰이크스, 스티븐의 누나이자 올림픽 전설인 데임 발레리 애덤스 등 뉴질랜드 출신 스타들이 다수 출연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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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년이’ 김태리 한복, 연말 뉴욕 타임스퀘어에[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K팝 아티스트들이 입은 한복이 글로벌한 주목을 받으면서, 젊은 층에게 한복이 단순한 전통의상이 아니라 패션 트렌드를 반영하는 ‘힙한 아이템’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장동광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장) 최근 tvN 드라마 ‘정년이’가 큰 인기를 끌면서 주인공인 김태리(정년이 역)가 입고 나오는 1950년대 한복의상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짧지만 하려했던 여성국극(국악극)의 전성기를 그린 이 드라마에서 한복은 단순한 의상을 넘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개화기 이후 서양 문물의 유입과 구호물자로 수입된 다양한 원단이 사용되면서, 정년이가 입고 다니는 체크무늬 저고리를 비롯해 레이스와 꽃무늬가 달린 치마, 버선, 물방울 무늬 저고리 등 색다른 스타일의 한복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의복의 실용성을 중시하게 되면서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지는 등 입기 편하고 활동하기 편한 디자인으로 변화하게 됐다. ‘정년이’의 주연 배우 김태리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고애신, 영화 ‘외계+인’에서 영화 이안 역을 맡았을 때도 다채로운 한복의 맵씨를 뽐내왔다. 또한 올해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공진원)의 ‘한복 웨이브(Hanbok Wave)’ 사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복 웨이브는 ‘한복분야 한류연계 협업콘텐츠 기획 개발’ 사업으로, 2022년 피겨 스타 김연아, 2023년 가수 겸 배우 수지 등 한류 스타와 한복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협업해 한복 의상을 기획개발하는 프로젝트다. 앞서 김연아는 달항아리와 비슷한 곡선의 우아한 핑크색 한복을 입은 화보를 공개했고, 수지는 스타일리쉬한 한복 패션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김태리도 6월부터 공모를 통해 선정된 한복스튜디오 혜온, 리슬, 오르디자인하우스, 주식회사 한복생활 등 4개 업체 디자이너들과 함께 직접 한복디자인을 개발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복은 12월에 국내외 전광판과 패션 잡지 화보로 공개한다. 하이라이트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24일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서 한류스타가 한복을 입고 촬영한 영상을 송출하는 순간. 맨해튼 거리에서 연말에 펼쳐지는 한류스타가 입은 총천연색 한복 패션 영상은 매년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 잡아왔다. “한류붐이 일면서 세계적으로 한국의 전통문화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한식이나 한옥도 관심이 많지만, 옮겨다니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한복은 패션쇼를 통해서나, 길거리 의상을 통해서도 쉽게 볼 수 있어 시각적인 효과가 큽니다. BTS, 블랙핑크, 뉴진스 등 K팝 스타들도 입었던 한복은 ‘K컬쳐’의 아이콘이 됐습니다. 외국인들 뿐 아니라 국내 MZ세대들에게도 한복은 스타일리쉬한 잇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8월 공진원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최한 한복박람회 ‘한복상점’에는 나흘간 4만 여명의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젊은 세대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한복상점은 전년 대비 61% 상승한 19억원의 매출을 달성해 패션업계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한복의 매력은 곡선의 미학이 아닐까요. 달항아리를 닮은 치마, 기와집 처마처럼 5도 정도 살짝 하늘로 향해 구부러진 버선코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한복은 원피스 형태의 중국 치파오, 일본 기모노과 달리 상의, 하의가 나눠져 있는 구조인데요. 천연염색한 다양한 컬러로 배색할 수 있어 훨씬 화려합니다. 동정, 깃 하나하나를 다른 색깔로 만들어 액센트를 주기도 하고, 장신구 노리개로 변화를 줍니다.“ 짙은 회색 두루마기 한복에 뿔테안경을 쓴 한복 패션을 즐겨 하는 장 원장은 지난해 취임 이후 ‘한복의 일상화 ’한복의 대중화‘를 내걸고 한복문화 확산 캠페인을 벌여왔다. 이를 위해 한복문화주간, 한복상점, 한복 곱게 입기 영상 콘텐츠 제작, 전통한복 입기 체험 프로그램 운영, 지역 한복문화창작소 조성 등 다양한 사업을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펼쳐왔다. 장 원장은 ”한복이 특별한 날만 입는 이벤트성 의상이라는 인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공진원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진행하는 사업이 ’한복 근무복 디자인 개발‘ 사업이다. “직장인들이 근무하는 환경에서도 편리하게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한 한복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한복 근무복은 좀더 차분한 마음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하고, 고객을 응대할 때에도 정중하고 친근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공진원은 2020년 문화예술업, 2021년 관광숙박업, 2022년 운송 및 여가서비스업, 2023년 매장판매와 상품대여직 등이 입을 수 있는 350여 가지의 한복 근무복 디자인을 개발해왔다. 신라복 한복 디자인을 근무복으로 도입한 경주 화백컨벤션뷰로를 비롯해 현재까지 총 43곳이 한복 근무복을 도입했다. ”현재 한복을 입으면 궁궐에 무료입장을 해줍니다. 앞으로는 국립국악원 공연장, 서울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등에서 한복을 입고 오면 입장료 30~50% 할인 혜택을 주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복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을 해가면 좋겠습니다. 외국에서는 오페라 공연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오지 않습니까. 2021년에 대통령과 장관들이 한복을 입고 국무회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국회도 개원식이나 1년에 한번 정도 ’한복의 날‘을 정해서 국회의원들이 한복을 입고 품격있는 회의를 하면, 한복 대중화에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요즘 한복은 국제 외교무대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외교수단이다. 지난 7월에 열린 2024 파리올림픽 기간 동안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한복패션쇼에는 국내 주요 한복디자이너 7인이 만든 한복을 프랑스 모델들이 입고 나와 IOC 스포츠 인사와 패션관계자들에게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또한 지난 10월 베트남 호치민에서 열린 ’2024 한-베 우호 문화의 날‘ 행사에서는 한복과 베트남 아오자이 등 양국 전통의상을 소개하는 패션쇼가 열렸다. ”우리 전통 한복과 베트남 아오자이를 번갈아 입고 나오는 패션쇼였는데, 너무나 반응이 좋았습니다. 한-베 우호 문화행사를 보고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도 양국 전통의상을소개하는 비슷한 행사를 기획하고 싶어하네요. 해외교류 외교무대나 재외 한국문화원에서 한국문화를 홍보하기에는 한복만큼 좋은 아이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이면 공진원 한복진흥센터가 10주년을 맞는다. 공진원은 한복진흥정책을 총괄하는 기관으로서 한복 기술자 양성교육을 하는 한복 마름방과 지역 한복문화 창작소 등을 크게 확충해나가고 있다. ”올해 9월에 전통문화산업진흥법이 시행됐습니다. 한복과 한지, 한식 등 전통문화를 진흥하는 페스티벌을 내년에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왜 일상적으로 한복을 입는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학술적인 뒷받침을 할 수 있는 포럼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복이 왜 좋은 것인지, 우리 시대에 한복이 다시 부각되는 이유, K컬쳐란 과연 무엇인가를 찾는 이론적, 역사적인 담론을 만들고, 한복을 대중화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을 해나갈 예정입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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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 문명이 시루떡처럼 쌓여 있는 해가 뜨는 땅[전승훈의 아트로드]

    튀르키에 여행이라고 하면 이스탄불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도 아름답지만,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가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고대 문명의 시원을 찾아가는 여행도 색다르다. 선사시대 차탈회위크 유적지부터 히타이트(청동기), 프리기아(철기),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제국까지 그리스 로마 문명,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해가 뜨는 땅’이란 뜻의 아나톨리아반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여행을 떠났다. ●황금손 미다스왕의 도시, 고르디온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남서쪽으로 94km 떨어진 평원. 기원전 9~3세기 경 고대 프리기아 왕국의 수도였던 고르디온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봉우리가 울퉁불퉁 솟아 있다. 마치 경주 대릉원처럼 130여 개의 왕과 귀족들의 고분 유적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다.   지난해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르디온은 신화 속 이야기가 넘쳐나는 동네다. ‘황금손’과 ‘당나귀 귀’로 유명한 미다스 왕이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하는 왕이었다니! 고르디온에서 가장 큰 미다스 고분(높이 53m, 직경 300m)에 들어갈 때 무척 흥분됐다. 무덤 입구 철제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돌로 벽을 쌓은 좁고 긴 통로가 이어진다.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 나올 법한 긴 복도를 걸어가자 통나무를 쌓아서 만든 묘실이 나타났다. 석실 고분이 아니라 아름드리 향나무로 외벽을 쌓은 목곽분이다. 나무로 짠 널방이 무려 2700년 동안이나 썩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미다스 고분의 묘실(길이 6.2m, 폭 5.15m, 높이 3.25m)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목재 건축물이다.  기원전 740년 경에 조성된 이 무덤을 1957년 발굴했을 때 60~65세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유골의 주인공은 미다스 왕이 아니라, 아버지 고르디우스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관 옆에는 9개의 나무로 만든 테이블 위에 접시와 그릇 등이 놓여져 있었다.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서 이 곳에서 발견된 ‘미다스왕의 두개골’과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나무 테이블과 칸막이 유물을 볼 수 있었다.  미다스 고분 앞에는 고르디온 박물관이 있다. 고르디온 박물관 입구에는 말을 타고 칼을 든 알렉산더 대왕과 앞에 미로처럼 얽힌 고르디우스 매듭 그림이 붙어 있다. 알렉산더가 고르디온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333년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막힌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는 ‘발상의 전환’을 뜻하기도 한다.  신화 속 이야기인 줄 알았던 고르디우스와 미다스 왕의 전설은 1950년대 미국 펜실베니아대 발굴팀의 연구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다. 30년간 2헥타르 이상의 고르디온 성채와 무덤을 발굴하자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기원전 10~9세기에 지어진 초기 프리기아 왕국의 성채의 석조 건축물에서는 화려한 색상과 패턴화된 모자이크 벽돌로 꾸며진 바닥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벽돌 모자이크 장식이라고 한다. 이 모자이크는 고르디온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프리기아는 아나톨리아반도에서 3200년 전에 히타이트 제국이 소멸한 뒤, 기원전 12세기부터 7세기 경까지 역사의 전면에서 활약한 왕국이다. 서양인들은 그리스 신화를 통해 소아시아(아나톨리아)에서 번영을 이끌었던 미다스를 ‘황금에 눈먼 탐욕주의자’ ‘당나귀 귀가 된 어리석은 왕’이라고 조롱해왔다. 그러나 실제로 미다스는 프리기아 왕국의 황금기를 이끈 왕이었다. 서양인들은 칭기즈칸, 아틸라, 티무르와 같은 아시아의 영웅들을 문명을 파괴하는 약탈자, 도살자, 흡혈귀로 묘사했던 것과 비슷하다.  미다스 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는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폴로 신의 저주를 받아 당나귀 귀로 변한 임금의 비밀을 이발사만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없어 땅을 파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자 땅에서 자라는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같은 전설은 신라시대 경문왕도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온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곳이 ‘갈대밭’이 아니라 ‘대나무 숲’이라는 점만 다르다. 그래서 직장내 비밀 이야기를 익명으로 외치는 커뮤니티 공간에 ‘대나무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아시아의 미다스왕과 신라시대 경문왕이 똑같은 ‘당나귀 귀’ 전설을 가진 것에 대해 일부에서는 프리기아 왕국이 이민자들이 동방으로 망명한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튀르키예 민족이 동방의 초원지대에서 아나톨리아 반도 방향으로 이동해왔다는 이야기는 많은데, 거꾸로 프리기아 왕국 이민자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는 역사적 교류설은 흥미롭기만 하다.    고대 프리기아 왕국에서 해방된 노예가 쓸 수 있었던 빨간색 모자는 서양문화에서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올해 7월 열렸던 2024 파리올림픽의 마스코트가 바로 이 빨간색 ‘프리기아 모자’였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도 앞장선 여성(마리안느)이 이 모자를 쓰고 있다. 프리기아 모자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시민군의 상징으로 쓰였다. 프리기아 모자는 만화 스머프에서 파파 스머프가 쓰고 나오기도 한다.●이슬람과 기독교 성지가 곳곳에 일반적으로 이슬람 사원(모스크)는 중앙에 커다란 돔이 있고, 주변에 뾰족한 첨탑이 여러개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돔 형식의 모스크는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비잔틴제국의 스타일을 받아들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지난해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12~14세기에 건축된 5개의 튀르키예 이슬람 사원의 분위기는 무척 달랐다. 앙카라, 시브리히사르, 아피온카라히사르에 있는 모스크를 방문했는데, 모두 돔이 없고 사각형 건물에 평평한 지붕을 갖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지붕을 나무 기둥으로 떠받친 목조 건물이다. 기둥은 지리산 구례 화엄사 구층암의 자연주의 모과나무 기둥처럼 울퉁불퉁한 나무결을 그대로 살렸다. 기둥 위아랫 부분에는 고대 로마시대의 신전에 쓰였던 화려한 문양의 대리석을 끼워놓기도 했다. 튀르키예 현지 관광가이드 아이발라 괵수 씨는 “섬세한 나무 조각이 잘 보존돼 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며 “튀르키예의 뿌리가 동아시아라는 걸 보여주는 모스크”이라고 말했다.    앙카라에서 남서쪽으로 2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피온카라히사르(아피온)에는 히타이트족이 쌓은 201m 높이의 거대한 바위 성채가 도시전체를 내려다본다. 1071년 이곳에 도착한 셀주크는 화산암 꼭대기에 있는 요새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을 ‘카라 히사르’(검은색 성)라고 지었다.아피온은 강과 샘물, 온천이 유명한 도시다. 지금도 시내에는 수많은 온천이 관광객을 맞는다. 비옥하고 평활한 토지 덕분에 이곳은 각종 농업과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2019년에는 ’유니스코 미식 창의도시‘로 지정됐으며, 음식축제로도 유명하다. 아피온에서 가장 유명한 작물은 바로 아편. 아피온이라는 지명도 아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모르핀 제주 등에 활용되는 양귀비(아편) 재배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아피온 시내에서 외곽으로 약 23km 정도 가면 프리기안 계곡 입구에 ‘아야지니Ayazini)’라는 동굴 마을이 나온다. 튀르키예의 유명 관광지인 카파도키아처럼 바위를 파서 주거지, 무덤, 교회 등으로 쓰였다고 한다. 아야지니 동굴 마을의 입구의 성모 마리아 교회는 자연 암반을 파서 만든 교회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창문과 아치 출입구를 통해 빛이 쏟아져내려오는 모습은 신성한 느낌을 준다. 빛 그림자 앞에 서서 역광으로 사진을 찍으면 인생샷이 나온다. 이 곳에는 ‘인류 최초의 아파트’라고 이름붙여진 집단 거주지도 있다. 튼튼한 기반암을 깎아서 만든 동굴이 계단으로 이어져 여러층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에는 기독교 성지도 많이 남아 있다.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은 기독교의 중심지가 됐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 치하에서 기독교 문화가 꽃핀 곳도 바로 튀르키예다. 튀르키예 지역에서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해 287년까지 모두 7차례의 공의회가 열리기도 했다.  특히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예수의 제자였던 바오로가 선교 여행을 떠났던 흔적도 남아 있어 성지순례를 오는 기독교인들도 많다. 사도 바오로는 세차례 선교여행을 통해 지중해 동부지역인 안티오크, 이코니온, 루스드라, 데르베, 피시디아 안티오크, 에베소,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뢰아, 아테네, 고린도 등에서 복음을 전했다.  튀르키예 중부의 인구 2만5000명의 소도시 얄바츠에서 동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 in Pisidia)가 있다. 성문 유적을 지나면 로마대로 주변에 야외극장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비잔틴 제국시절인 325년 지어져 사도 바오로에게 봉헌됐던 성 바오로 대성당 유적이 있다.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유대교 회당이 있던 바로 그 곳이다. 원형 예배당에는 돌로 만든 제대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13장에 따르면 바오로는 설교 후 이방인들에게는 환대를 받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철저히 배척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오로 일행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120km 사막길을 걸어 이코니온으로 떠났다.  바오로가 도착한 ‘이코니온’은 현재 코냐(Konya)로 불리는 도시다. 수도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250km 떨어진 코냐는 로마제국 당시 시리아에서 에페소와 로마에 이르는 대로가 지나가는 바람에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현재도 인구 140만 명으로 튀르키예에서 7번째로 큰 내륙의 중심도시다.    코냐 근교의 실레(Sille) 마을에는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가던 도중 327년에 세웠다는 성당이 있다.헬레나의 이름을 따 ‘아야 엘레니(성 헬레나)’ 성당이라고 불린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밀라노 칙령을 내리게 된 것은 어머니 헬레나의 역할이 컸다.   11세기 말 셀주크 투르크 왕조의 수도로 번성했던 ​코냐는 튀르키예에서 이슬람 색채가 가장 강한 도시이기도 하다. 사상가이자 시인었던 무함메드 젤랄루딘 루미(1207-1273)가 창시한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메블라나 교단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냐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루미의 무덤이 있는 메블라나 박물관이다. 에머랄드 빛 타일로 덮인 탑이 돔 위에 우뚝솟아 있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금박으로 수를 놓은 천으로 덮인 관(棺)들이 있다. 메블라나 교단의 역대 스승들의 무덤이다. 맨 안쪽에 있는 가장 크고 중후한 관이 메블라나 루미의 관이다. 메블라나 박물관 뜰에는 흥미로운 분수가 하나 놓여 있다. 물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동안 1-2-3-2-1개의 접시에 담기면서 흐르도록 설계돼 있다. 가이드 괵수 씨는 “사람의 일생을 비유한 접시 분수”라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혼자서 태어났다가(1),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고(2), 가족을 이뤄 자식을 낳고(3), 자식이 독립하면 다시 부부끼리 살고(2), 결국에는 혼자서 죽음을 맞는다(1)는 이야기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을 만들지만, 결국엔 홀로 왔다가 홀로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다. 루미는 어려운 코란 경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마(Sema)’라는 독특한 회전 춤을 통해 신과 일체감을 이루면서 이슬람의 오묘한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수련 방법을 만들었다. 남자들이 하얀 옷을 펄럭이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세마’는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코냐의 IRFA(문명연구센터)에서 감상한 세마 의식은 무대 위에서 마치 하얀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대나무 피리인 네이(Ney) 반주에 맞춘 춤은 후반부로 가까워질 수록 빨라진다. 우리나라 농악도 굿거리 장단에서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점점 빨라지듯 비슷하다. 회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신과 더 가까워진다고 믿으며, 마침내 신과의 합일에 다가선다는 것. 여러개의 하얀 치마가 태양계의 행성처럼, 빙글빙글 팽이처럼 돌아가며 어지러운 원을 만들어내는데 수행자도, 보는 이도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했다. ● 인류 문명의 시원, 아나톨리아 반도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약 6000년전 경부터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이집트(나일강), 인디아(인더스강), 중국(황허) 등 4개의 거대한 강 주변 비옥한 땅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지방 남부에서 약 9500년 전 신석기시대 대규모 주거지인 차탈회위크(Çatalhöyük) 유적지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2012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차탈회위크는 코냐에서 동남쪽으로 52km 떨어진 언덕 위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계획도시’다. 발굴된 18개 지층을 분석해보면 차탈회위크에서는 약 9500년전부터 천년넘는 세월 동안 최소 2000명에서 1만 명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입구에는 당시 주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진흙집들을 복원해놓았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진흙집들은 집과 집 사이에 지나다닐만한 거리나 골목이 없다. 차탈회위크 주민들은 지붕에 구멍을 뚫어 사다리를 이용해, 지붕위로 나아가 옆집 지붕 위로 걸어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로세로 2~4미터, 높이 3미터 가량의 집 안에 들어가보면 창고와 부엌, 거실이 있고, 정교한 벽화로 꾸며져 있다. 집마다 북쪽 벽에 뿔달린 황소의 머리를 걸고, 흙벽을 채색해 장식했다. 벽에는 별과 태양계, 사람과 여신, 사냥장면 등이 묘사돼 있다. 이 유적지에서도 농업과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상 ‘키벨레(Kibele)’가 발견됐다. 이 여신상도 앙카라의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흙으로 만든 집이라 평균 70년 정도면 수명이 다해 새로 지어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벽을 허무는 대신 흙으로 공간을 메우고, 그 위에 같은 구조로 새 집을 올렸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두고 그렇게 쌓아올린 집들이 무려 18층이나 돼 높이가 지표면에서 21m나 상승했다고 한다. 주거지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시신을 집 안에 매장했던 풍습이다. 그러나 차탈회위크에서는 마을의 공동시설이나 종교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본격적인 도시라고 볼 수는 없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런데 차탈회위크에서 513km 떨어진 아나톨리아 동남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1만1500년 전 돌기둥이 100개가 넘는 대규모 종교 건축물 유적지가 발굴돼 세계 문명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학계에 더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아나톨리아반도가 인류 문명의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여행지로 꼽히는 이유다. ●앙카라 가볼만한 곳=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를 튀르키예의 행정수도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고대문명이 살아 숨쉬고 있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다. 앙카라 칼레시(앙카라성) 성벽에는 로마시대 라틴어가 쓰여진 돌이 수두룩하고, 성채 위 붉게 물드는 노을에서는 청춘 남녀가 사랑을 고백한다. 하마뫼뉘 거리에선 오스만제국 스타일의 주택을 개조한 카페에서 튀르키예식 커피점을 보기도 한다. 앙카라의 현지인 맛집 울루다으(Uludag) 레스토랑에서는 ’이스켄데르 케밥‘이 시그니처 메뉴다. ‘이스켄데르(iskender)’는 알렉산더 대왕의 튀르키예식 발음. 양념한 양고기와 쇠고기를 섞어서 빙글빙글 도는 기계에서 구운 뒤 얇게 썰어내 먹는 케밥이다. 3층 창밖으로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보인다. 투명한 잔에 담긴 붉은색 홍차 안에 모스크를 담아서 사진을 찍어봤다. 튀르키예 현지 분위기가 물씬 나는 앵글이다. 아나톨리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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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굴 교회로 빛이… 잊지 못할 홀리 모먼트[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튀르키예 여행이라고 하면 이스탄불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도 아름답지만,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가 있는 아나톨리아반도에서 고대 문명의 시원을 찾아가는 여행도 색다르다. 선사시대 차탈회위크 유적지부터 히타이트(청동기), 프리기아(철기),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제국까지 그리스 로마 문명,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시루떡처럼 쌓여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해가 뜨는 땅’이란 뜻의 아나톨리아반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여행을 떠났다. ● 황금손 미다스 왕의 도시, 고르디온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남서쪽으로 94km 떨어진 평원. 기원전 9∼3세기경 고대 프리기아 왕국의 수도였던 고르디온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봉우리가 울퉁불퉁 솟아 있다. 마치 경주 대릉원처럼 130여 개의 왕과 귀족들의 고분 유적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르디온은 신화 속 이야기가 넘쳐나는 동네다. ‘황금손’과 ‘당나귀 귀’로 유명한 미다스 왕이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하는 왕이었다니! 고르디온에서 가장 큰 미다스 고분(높이 53m)에 들어갈 때 무척 흥분됐다. 무덤 입구 철제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나올 법한 돌로 쌓은 좁고 긴 통로가 나타난다. 복도 끝에 묘실이 나타났다. 아름드리 향나무로 외벽을 쌓은 목곽분이다. 나무로 짠 널방이 무려 2700년 동안이나 썩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기원전 740년경에 조성된 이 무덤을 1957년 발굴했을 때 60∼65세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유골의 주인공은 미다스 왕이 아니라, 아버지 고르디우스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서 이곳에서 발견된 ‘미다스 왕의 두개골’과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나무 테이블 유물을 볼 수 있었다. 미다스 고분 앞에는 고르디온 박물관이 있다. 고르디온 박물관 입구에는 말을 타고 칼을 든 알렉산더 대왕이 앞에 미로처럼 얽힌 고르디우스 매듭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그림이 붙어 있다. 알렉산더가 고르디온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333년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막힌 문제를 쾌도난마로 해결하는 발상의 전환을 뜻하기도 한다. 신화 속 이야기인 줄 알았던 고르디우스와 미다스 왕의 전설은 195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발굴팀의 연구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다. 30년간 2ha(헥타르) 이상의 고르디온 성채와 무덤을 발굴하자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고대 프리기아 왕국에서 해방된 노예가 썼던 빨간색 모자는 서양 문화에서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 7월 파리 올림픽의 마스코트가 바로 이 빨간색 ‘프리기아 모자’였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에서도 시민군 앞에 선 여성이 이 모자를 쓰고 있다. ● 이슬람과 기독교 성지가 곳곳에 이슬람 사원(모스크)은 일반적으로 중앙에 커다란 돔이 있고, 주변에 뾰족한 첨탑이 여러 개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돔 형식의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비잔틴 제국의 스타일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13∼14세기에 건축된 5개의 튀르키예 이슬람 사원의 분위기는 무척 달랐다. 앙카라, 시브리히사르, 아피온카라히사르에 있는 모스크를 방문했는데, 모두 돔이 없고 낮고 평평한 사각형 목조 건물이었다. 내부는 여러 개의 나무 기둥이 서 있는데, 지리산 구례 화엄사 구층암의 모과나무 기둥처럼 울퉁불퉁한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자연주의 기둥이었다. 기둥 위아래 부분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신전에 쓰였던 화려한 문양의 대리석을 끼워 놓기도 했다. 튀르키예 현지 관광가이드 아이발라 괵수 씨는 “섬세한 목조 세공이 잘 보존돼 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고 말했다. 아피온 시내에서 외곽으로 23km 정도 가면 프리기안 계곡 입구에 ‘아야지니’라는 동굴 마을이 나온다. 튀르키예의 유명 관광지인 카파도키아처럼 바위를 파서 주거지, 무덤, 교회 등으로 썼다고 한다.동굴 마을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는 자연 암반을 파서 만든 교회다. 동굴 내부로 들어가니 창문과 아치 출입구를 통해 빛이 쏟아져 내려와 신성한 느낌을 준다. 교회 옆에는 ‘인류 최초의 아파트’로 불리는 동굴 마을 집단 거주지도 있다. 이처럼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에는 기독교 성지도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예수의 제자였던 바오로의 선교여행 흔적을 따라 성지순례를 오는 기독교인들도 많다. 아나톨리아 중부 소도시 얄바츠에서 동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가 있다. 이곳에는 325년에 지어진 성 바오로 대성당 유적이 있는데,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유대교 회당 터 위에 세운 성당이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13장에 따르면 바오로는 설교 후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오로 일행은 120km 사막길을 걸어 이코니온으로 떠났다. 바오로가 도착한 이코니온은 현재 코니아(Konya)로 불리는 도시다. 코니아 근교의 실레(Sille) 마을에는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가던 도중 327년에 세웠다는 성당이 있다. 헬레나의 이름을 따 아야 엘레니(성 헬레나) 성당이라고 불린다. 11세기 말 셀주크 튀르크 왕조의 수도로 번성했던 코니아는 튀르키예에서 이슬람 색채가 가장 강한 도시이기도 하다. 무함메드 잘랄루딘 루미(1207∼1273)가 창시한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메블라나 교단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루미의 무덤이 있는 메블라나 박물관은 코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다. 루미는 어려운 코란(꾸란) 경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마(Sema)라는 독특한 회전 춤을 통해 신과 일체감을 이루면서 이슬람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수련 방법을 만들었다. 남자들이 하얀 옷을 펄럭이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세마는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코니아의 IRFA(문명연구센터)에서 감상한 세마 의식은 무대 위에서 마치 하얀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대나무 피리인 네이(Ney) 반주에 맞춘 춤은 후반부로 가까워질수록 빨라진다. 여러 개의 하얀 치마가 태양계의 행성처럼, 빙글빙글 팽이처럼 돌아가며 어지러운 원을 만들어내는데 수행자도, 보는 이도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했다. ● 인류 문명의 시원, 아나톨리아반도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약 6000년 전부터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이집트(나일강), 인디아(인더스강), 중국(황허강) 등 4개의 거대한 강 주변 비옥한 땅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지방 남부에서 약 9500년 전 신석기시대 대규모 주거지인 차탈회위크 유적지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2012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차탈회위크는 코니아에서 동남쪽으로 52km 떨어진 언덕 위에 형성된 ‘인류 최초의 계획도시’다. 차탈회위크에서는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5000∼8000명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입구에는 당시 다닥다닥 붙여 지은 진흙집들을 복원해 놓았다. 창고와 부엌, 거실로 나뉜 집 벽에는 별과 태양계, 사람과 여신, 사냥 장면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특이한 점은 시신을 집 안에 매장했던 풍습. 농업과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상 키벨레(Kibele)도 발굴돼 앙카라의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차탈회위크도 놀라운데 아나톨리아 동남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1만2000년 전 돌기둥이 100개가 넘는 대규모 종교 건축물 유적지가 발굴돼 세계 문명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아나톨리아반도는 인류 문명의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여행지인 셈이다. ● 가볼 만한 곳=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의 현지인 맛집 울루다으 레스토랑에서는 ‘이스켄데르 케밥’이 시그니처 메뉴다. 이스켄데르(iskender)는 알렉산더 대왕의 튀르키예식 발음. 3층 창가에 서서 붉은색 홍차 안에 모스크를 담아서 사진을 찍어 봤다. 튀르키예 현지 분위기가 물씬 나는 앵글이다 .글·사진 아나톨리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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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란색 바다에 황금빛 비가 내린다” [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은행나무는 침엽수일까요. 활엽수일까요?”5일 오후 경기 용인 에버랜드 정문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인 신원리 향수산. 14만여 제곱미터(4.4만평) 부지에 은행나무 약 3만 그루가 심어져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은행나무 군락지다. 숲 전체의 땅바닥이 온통 노란색 단풍이 바다를 이루고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황금빛 비가 쏟아져 내리는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식물 유튜브 ‘꽃바람 이박사’를 운영하고 있는 이준규 에버랜드 식물컨텐츠그룹장은 잎이 넓은 은행나무를 활엽수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행나무는 침엽수”라고 대답했다.“은행잎을 들고 하늘에 한번 비춰보세요. 세로로 가는 선들이 보이죠? 원래 침엽수였는데 사이가 붙어서 넓은 잎모양처럼 보이는 것입니다.”현존하는 식물 중 ‘살아있는 화석’으로 취급받는 은행나무는 오직 1종 1속 1과 1목 1강 1문만이 존재하는 희귀한 식물이다. 생물이 지구상에서 오래동안 생존하기 위해서는 종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은행나무는 전세계에 한가지 종만 존재하는 것이다.“1970년대에 산림녹화를 위해 이 곳에 밤, 복숭아, 호두, 은행 등 유실수 나무를 심었습니다. 1979년 겨울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기록적 한파에 수만그루가 동해(凍害)를 입어 고사했고, 은행나무만 살아남았죠. 그래서 밤나무 고사 지역에 은행나무 3만주를 집중적으로 심었고, 그래서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은행나무숲이 탄생했습니다.”향수산 자락에 오밀조밀 뿌리 내린 수많은 은행나무들은 햇볕을 더 받기 위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나간 모습이다. 약 5km에 이르는 트레킹 코스를 통해 은행나무숲길을 천천히 돌아볼 수 있고, 중간중간 앉아 쉴 수 있는 나무의자와 명상장, 그래고 숲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은행나무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목록에서 ‘멸종위기종(EN, Endangered)’으로 지정돼 있다. 종자로 후손을 퍼뜨리는 은행나무는 새나 다람쥐 같은 동물들이 은행 열매를 먹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서식지가 확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일본, 중국 등 유교문화권에서만 은행나무가 흔하고 세계적으로는 멸종위기종인 셈이다.에버랜드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은행나무숲을 일반에 거의 공개하지 않고 관리만 해왔다. 그러나 2022년부터 향수산 일대에 잔디광장, 명상돔, 생태연못, 전망대 등이 갖춰진 프라이빗 명품숲 ‘포레스트 캠프’를 조성해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했다.다양한 트레킹 코스 뿐만 아니라 은행나무숲 속에서 해먹에 누워 휴식을 취하거나 전문 강사와 함께 명상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숲 치유 프로그램도 시범 운영중이다. 현재까지는 주로 신입사원 교육이나 기업 기념 행사, 고객 초청 이벤트 등 단체예약 중심으로 개방되고 있다. 올 가을에는 개인 신청자도 참여할 수 있는 ‘비밀의 은행나무숲’ 산책 프로그램을 이달 10일까지 시범 운영하고 있다. 은행나무 숲 치유 체험과 함께 인근 호암미술관 관람도 포함돼 있어 인기가 높다. 매주 금토일에 하루 3회(회당 최대 30명) 참여할 수 있는데, 18일 에버랜드 홈페이지에서 진행된 참가자 모집은 오픈런이 벌어져 2분만에 마감됐다고 한다.에버랜드 관계자는 “국내 여가문화와 인구구조의 변화 트렌드 속에서 오직 에버랜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차별화된 콘텐츠와 체험 프로그램을 더욱 확대해 고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용인=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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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이상 부여에서 꽃은 떨어지지 않으리[전승훈의 아트로드]

    부여는 1500년 전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있던 도시다. 538년 백제 성왕은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기면서 고조선의 적장자 부여를 계승한 유일한 나라라는 뜻으로 ‘남부여’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 부여를 체험하는 색다른 여행을 떠나보자. ●백마강 하늘엔 열기구, 강물엔 수륙양용차 “이 강 이름은 원래 금강인데, 부여군을 지나는 16km 구간을 백마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백마강으로 입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는 백마강 둔치에는 은빛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백제’라고 쓰여진 깃발이 나부끼는 강변을 달리는 백마강 수륙양용버스 안 스피커에서 갑자가 스펙터클한 음악이 터져나왔다. “우와~” “오~!”하는 승객들의 함성과 함께 버스는 백마강 푸른 물에 첨벙! 하얀색 물보라가 유리창까지 튀어올랐다. 버스 뒷쪽에 붙어 있는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하자 버스는 배로 급변신한다. 버스가 물살을 가르자 백마강엔 거대한 파도가 일어난다. 수륙양용버스는 배처럼 ‘V자형’ 용골이 없어 바닥이 평평하다. 그래서 배의 수평균형을 맞추는 시간을 잠시 갖는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왼쪽 좌석에 있던 승객 한명이 오른쪽으로 옮기니 좌우균형을 맞춘다. 수륙양용버스는 곧바로 부소산성 방향으로 항해한다. 해발 106m의 부소산성은 평소에는 사비성의 후원이지만, 전쟁시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백제가 멸망할 때도 낙화암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멸망해가는 나라와 함께 몸을 던졌다. 절벽에는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이 쓴 붉은 ‘낙화암(落花巖)’ 글씨가 선명하다. 버스는 백마강 상류로 유턴해 백제가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귀족회의를 열었던 정사암(政事巖) 부근까지 올라간다. 계백장군의 말 안장을 모티브로 세워진 금강의 ‘백제보’도 보인다. 백마강에 황포돗배 유람선도 있지만, 수륙양용버스(3만원)는 국내에서 백마강에서만 운행되는 이색적인 교통수단이라 가족단위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 국내업체가 제작했다는 수륙양용버스의 핸들은 두 개다. 육상을 달릴 때는 정면에 있는 핸들로 운전하고, 물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있는 선박용 키를 잡고 배를 몬다. 운전자는 대형버스와 선박 면허 2개를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 백마강의 평균 수심은 약 5m. 수상에 들어갔을 때 버스는 앞쪽은 1.2m, 뒤쪽은 1.4m가 물에 잠긴다. 뒤쪽에 수상엔진이 있어 무거워 앞쪽이 약간 들려 있는 상태에서 떠간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지나가는 행인들이 버스가 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있다고 신고도 많이 했다고. 백마강교 밑에서 2대의 수륙양용버스가 교차했다. 경적소리 대신 ‘부우웅~’ 뱃고동 소리를 내며 신호를 하자 양쪽 승객들이 서로 손을 흔들어준다. 백마강에 오후의 햇살이 비쳐 황금빛으로 빛난다. 백마강 강물에 수륙양용차가 다닌다면, 하늘에서는 열기구가 떠다닌다. 백마강 상공을 7~8km 비행하며 낙화암, 궁남지 등을 구경하며 30~50분 정도 비행하는 ‘부여하늘날기(Skybanner)’. 서울 여의도 공원에 줄에 매달려 최대 130m 높이까지 올라가는 계류형 열기구가 있지만, 백마강에선 진짜 바람을 타고 자유비행하는 열기구가 운행된다. 튀르키예 카파도키아나 호주 멜버른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열기구다. 열기구를 타기 위해 오전 6시반에 백마강 캠핑장에 도착했다. 둔치에 7층 건물 높이의 대형 열기구가 바람이 빠진채 누워 있었다. 약 20~30분 동안 풍선의 입구 쪽에 대형 선풍기로 바람을 집어 넣고, 가스불을 켜서 공기를 데우는 작업을 한 끝에 풍선은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빨리 타세요. 풍선 날아가요. 빨리 타세요~!” 열기구를 줄에 매어 붙잡고 있던 직원들이 소리쳤다. 풍선 속에 데워진 공기가 팽창하면서 금방이라도 떠오르려고 들썩이고 있었다. 탑승용 바구니 한쪽의 벽면에 발을 디디며 힘겹게 올라탔다. 밧줄을 놓자 열기구는 백마강 위로 두둥실 떠오른다. ‘인간 드론’이 된 느낌이었다. 드론을 날릴 때 휴대폰 화면으로 보였던 장면을 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 구름과 산, 논밭과 골프장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고요하다는 것. 엔진이나 모터소리도 없이 산들산들 날아가는 열기구에서는 새소리 바람소리만 들렸다. 가끔씩 열기구 상승을 위해 가스불을 켜는 소리를 빼곤. 우리가 탄 열기구는 산을 넘고, 롯데스카이힐부여CC 골프장 그린을 지나 주차장에 안착했다. 백마강 열기구는 구름 낀 날엔 운해 위로 날기도 한다. 바람이 쎄거나 날씨가 안좋으면 결항이 잦고, 비싼 가격(1인당 18만원)은 단점. 그래도 해외에서만 즐길 수 있는 열기구를 탈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장소라 평생 한번은 타볼만 한 경험이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 부여코레일관광개발은 유네스코세계유산 도시인 부여와 공주를 여행할 수 있는 기차여행 코스를 내놓고 있다. 템플스테이와, 휴양림, 캠핑장, 수륙양용버스, 열기구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그 중에서 꼭 빠질 수 없는 것이 국립부여박물관과 정림사지, 부소산성, 왕릉원, 궁남지 등 백제의 화려했던 사비시대 유적지 탐방이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사진이나 복제품으로만 보던 백제금동대향로의 실체를 마주하니 온 몸이 전율할 듯 감동이 밀려온다. 금동대향로 속에는 1500년 전 백제의 산천과 계곡, 강과 바다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높이 61.8cm, 무게 11.85g의 대향로 꼭대기엔 봉황새가 앉아 있고, 그 밑에는 5명의 악사가 피리를 불고, 북을 치고,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의 산과 계곡엔 호랑이와 멧돼지, 사슴, 코끼리, 원숭이와 상상의 동물들이 뛰어놀고, 도인이 산으로 걸어들어간다. 아랫쪽에는 연꽃과 수중생물이 살고 있고, 용이 향로를 받치고 있다. 용에서 나온 입김이 연꽃을 피워내고, 그위에 세상이 펼쳐지는 불교의 연화화생(蓮華和生)과 도교의 세계관이 결합된 작품이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브뤼겔의 풍속화처럼 백제가 3D 입체로 구현돼 있는 듯하다. 스마트폰 줌렌즈를 사용해서 금동대향로의 부분 부분을 확대해서 살펴보며 숨은그림 찾기 놀이를 하다보면 한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부여 왕릉원에 가면 능산리 사찰유적지 바닥에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던 당시의 모습을 볼 수있다. 진흙 속에서 뚜껑이 분리된 채 발견됐던 향로가 유리 진열장 속 묻혀 있다. 백제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땅을 파고 보물을 숨겨놓았던 이의 마음이 떠올라 가슴이 아련하다. 사비성의 중심부 왕궁의 사찰이었던 정림사지에서는 주민들이 그저 ‘백제탑’이라고 부르는 5층석탑이 있다. 높이 8.33m의 장중한 화강암 돌로 만든 탑인데, 나무로 깎은 듯 세련된 모습이다. 살짝 들려진 지붕선은 어깨만 살짝, 손가락만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제대로 그루브를 살리고, 바이브를 타는 고수의 춤선을 보는 듯하다. 백제의 미(美로) 알려진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의 경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탑신부에 누군가 새겨놓은 수많은 글자들이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남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다. 서기 660년 당 고종이 신라 문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켰다는 내용이다. 석탑은 비록 적군이 새겨넣은 주홍글씨로 온 몸을 둘렀지만, 사찰이 불타는 가운데도 살아남아 1500년 전 백제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가 ”비록 백제는 망하였으나 이 예술품만은 아니 망하였다“고 했던 것처럼, ●가볼만한 곳=롯데리조트 부여 ‘백상원(百想園)’은 백제 ‘산수문전(山水紋塼)’에서 모티브를 따온 유선형 곡선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충남 부여 궁남지 부근에 있는 찻집 ‘백제향’에서는 연꽃차와 대추차를 마실 수 있다. 지난 여름 수확했다 냉장고에 얼려놓았던 연꽃 위에 따뜻한 찻물을 부어가며, 한잎한잎 정성스레 연꽃을 피워낸다. 연꽃차는 화려하게 피어난 연꽃을 눈으로 먼저 즐기고, 은은한 연꽃향을 코로 즐기고, 다음에 입으로 차를 마신다. 부여=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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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이상 부여에서 꽃은 떨어지지 않으리[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부여는 1500년 전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있던 도시다. 538년 백제 성왕은 공주(웅진)에서 부여(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고조선의 적장자 부여를 계승한 유일한 나라라는 뜻으로 ‘남부여’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 부여를 체험하는 색다른 여행을 떠나 보자. ● 백마강 하늘엔 열기구, 강물엔 수륙양용차 “이 강 이름은 원래 금강인데, 부여군을 지나는 16km 구간을 백마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백마강으로 입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는 백마강 둔치에는 은빛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백제’라고 쓰여진 깃발이 나부끼는 강변을 달리는 백마강 수륙양용버스 안 스피커에서 갑자기 스펙터클한 음악이 터져 나왔다. “우와∼” “오∼!” 하는 승객들의 함성과 함께 버스는 백마강 푸른 물에 첨벙! 하얀색 물보라가 유리창까지 튀어올랐다. 버스 뒤쪽에 붙어 있는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하자 버스는 배로 급변신한다. 버스가 물살을 가르자 백마강엔 거대한 파도가 일어난다. 수륙양용버스는 배처럼 ‘V자형’ 용골이 없어 바닥이 평평하다. 그래서 배의 수평 균형을 맞추는 시간을 잠시 갖는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왼쪽 좌석에 있던 승객 한 명이 오른쪽으로 옮겨 좌우 균형을 맞춘다. 수륙양용버스는 곧바로 부소산성 방향으로 항해한다. 해발 106m의 부소산성은 평소에는 사비성의 후원이지만, 전쟁 시에는 피란민들이 몰려드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백제가 멸망할 때도 낙화암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멸망해 가는 나라와 함께 몸을 던졌다. 절벽에는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이 쓴 붉은 ‘낙화암(落花巖)’ 글씨가 선명하다. 버스는 백마강 상류로 유턴해 백제가 나라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귀족회의를 열었던 정사암(政事巖) 부근까지 올라간다. 계백 장군의 말 안장을 모티브로 세워진 금강의 ‘백제보’도 보인다.백마강에 황포돛배 유람선도 있지만, 수륙양용버스(3만 원)는 국내에서 백마강에서만 운행되는 이색적인 교통수단이라 가족 단위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 국내 업체가 제작했다는 수륙양용버스의 핸들은 두 개다. 육상을 달릴 때는 정면에 있는 핸들로 운전하고, 물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있는 선박용 키를 잡고 배를 몬다. 운전자는 대형버스와 선박 면허 2개를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 백마강의 평균 수심은 약 5m. 수상에 들어갔을 때 버스는 앞쪽 1.2m, 뒤쪽 1.4m가 물에 잠긴다. 뒤쪽에 수상엔진이 있어 무거워 앞쪽이 약간 들려 있는 상태에서 떠간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지나가는 행인들이 버스가 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있다는 신고도 많이 했다고. 백마강교 밑에서 2대의 수륙양용버스가 교차했다. 경적소리 대신 ‘부우웅∼’ 뱃고동 소리를 내며 신호를 하자 양쪽 승객들이 서로 손을 흔들어 준다. 백마강에 오후의 햇살이 비쳐 황금빛으로 빛난다. 백마강 강물에 수륙양용차가 다닌다면, 하늘에서는 열기구가 떠다닌다. 백마강 상공을 7∼8km 비행하며 낙화암, 궁남지 등을 구경하며 30∼50분 정도 비행하는 ‘부여하늘날기(Skybanner)’. 서울 여의도 공원에 줄에 매달려 최대 130m 높이까지 올라가는 계류형 열기구가 있지만, 백마강에선 진짜 바람을 타고 자유비행하는 열기구가 운행된다. 튀르키예 카파도키아나 호주 멜버른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열기구다. 열기구를 타기 위해 오전 6시 반에 백마강 캠핑장에 도착했다. 둔치에 7층 건물 높이의 대형 열기구가 바람이 빠진 채 누워 있었다. 20∼30분 동안 풍선의 입구 쪽에 대형 선풍기로 바람을 집어 넣고, 가스불을 켜서 공기를 데우는 작업을 한 끝에 풍선은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빨리 타세요. 풍선 날아가요. 빨리 타세요∼!” 열기구를 줄에 매어 붙잡고 있던 직원들이 소리쳤다. 풍선 속에 데워진 공기가 팽창하면서 금방이라도 떠오를 듯 들썩이고 있었다. 탑승용 바구니 한쪽의 벽면에 발을 디디며 힘겹게 올라탔다. 밧줄을 놓자 열기구는 백마강 위로 두둥실 떠오른다. ‘인간 드론’이 된 느낌이었다. 드론을 날릴 때 휴대전화 화면으로 보였던 장면을 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 구름과 산, 논밭과 골프장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고요하다는 것. 엔진이나 모터소리도 없이 산들산들 날아가는 열기구에서는 새소리 바람소리만 들렸다. 가끔씩 열기구 상승을 위해 가스불을 켜는 소리를 빼곤. 우리가 탄 열기구는 산을 넘고, 롯데스카이힐부여CC 골프장 그린을 지나 주차장에 안착했다. 백마강 열기구는 구름 낀 날엔 운해 위로 날기도 한다. 바람이 세거나 날씨가 안 좋으면 결항이 잦고, 비싼 가격(1인당 18만 원)은 단점. 그래도 해외에서만 즐길 수 있는 열기구를 탈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장소라 평생 한 번은 타볼 만한 경험이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 부여 코레일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인 부여와 공주를 여행할 수 있는 기차여행 코스를 내놓고 있다. 템플스테이와 휴양림, 캠핑장, 수륙양용버스, 열기구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그중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국립부여박물관과 정림사지, 부소산성, 왕릉원, 궁남지 등 백제의 화려했던 사비시대 유적지 탐방이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사진이나 복제품으로만 보던 백제금동대향로의 실체를 마주하니 온몸이 전율할 듯 감동이 밀려온다. 금동대향로 속에 1500년 전 백제의 산천과 계곡, 강과 바다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높이 61.8cm, 무게 11.8kg의 대향로 꼭대기엔 봉황새가 앉아 있고, 그 밑에는 5명의 악사가 피리를 불고, 북을 치고,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의 산과 계곡엔 호랑이와 멧돼지, 사슴, 코끼리, 원숭이와 상상의 동물들이 뛰어놀고, 도인이 산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래쪽에는 연꽃과 수중생물이 살고 있고, 용이 향로를 받치고 있다. 용에서 나온 입김이 연꽃을 피워 내고, 그 위에 세상이 펼쳐지는 불교의 연화화생(蓮華化生)과 도교의 세계관이 결합된 작품이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브뤼헐의 풍속화처럼 백제가 3D 입체로 구현돼 있는 듯하다. 스마트폰 줌렌즈를 사용해서 금동대향로의 부분 부분을 확대해서 살펴보며 숨은그림 찾기 놀이를 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부여 왕릉원에 가면 능산리 사찰유적지 바닥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던 당시의 모습을 볼 수있다. 진흙 속에서 뚜껑이 분리된 채 발견됐던 향로가 유리 진열장 속에 묻혀 있다. 백제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땅을 파고 보물을 숨겨 놓았던 이의 마음이 떠올라 가슴이 아련하다. 사비성의 중심부 왕궁의 사찰이었던 정림사지에는 주민들이 그저 ‘백제탑’이라고 부르는 5층석탑이 있다. 높이 8.33m의 장중한 화강암 돌로 만든 탑인데, 나무로 깎은 듯 세련된 모습이다. 살짝 들려진 지붕선은 어깨만 살짝, 손가락만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제대로 그루브를 살리고, 바이브를 타는 고수의 춤선을 보는 듯하다. 백제의 미(美)로 알려진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의 경지를 제대로 보여 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탑신부에 누군가 새겨 놓은 수많은 글자들이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남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다. 서기 660년 당 고종이 신라 문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켰다는 내용이다. 석탑은 비록 적군이 새겨 넣은 주홍글씨로 온몸을 둘렀지만, 사찰이 불타는 가운데서도 살아남아 1500년 전 백제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가 “비록 백제는 망하였으나 이 예술품만은 아니 망하였다”고 했던 것처럼. ● 가볼 만한 곳=롯데리조트 부여 ‘백상원(百想園)’은 백제 ‘산수문전(山水紋塼)’에서 모티브를 따온 유선형 곡선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부여 궁남지 부근에 있는 찻집 ‘백제향’에서는 연꽃차와 대추차를 마실 수 있다. 지난여름 수확했다 냉장고에 얼려 놓았던 연꽃 위에 따뜻한 찻물을 부어 가며 한 잎 한 잎 정성스레 연꽃을 피워 낸다. 연꽃차는 화려하게 피어난 연꽃을 눈으로 먼저 즐기고, 은은한 연꽃향을 코로 즐기고, 다음에 입으로 차를 마신다.글·사진 부여=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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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DP 지붕 위를 걸어볼 수 있다고요?[전승훈의 아트로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곡선이 참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유에프오(UFO) 같기도 하고, 인체의 장기 같기도 하고, 숨쉬는 고래상어나 문어 같기도 합니다. 밤이 되면 다채로운 조명쇼가 펼쳐지기도 하죠. 패션 지망생들은 이 곳에서 화보촬영을 많이 하고,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도 인증샷을 찍는 명소입니다.DDP는 유선형 건물로, 알루미늄 패널이 가득 붙어 있어 있습니다. 이런 미끈미끈 둥그런 지붕 위를 걸어다닌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죠. 그런데 서울시가 DDP 개관 10주년을 맞아 지난 25일 건물 지붕을 시민들에게 개방했습니다. 다음달 17일까지 시범운영되는 ‘DDP 루프탑 투어’입니다. 기존에도 DDP 건축투어는 상설로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루프탑 투어는 기존 DDP 실내외 공간투어를 넘어 비정형 알루미늄 패널과 사막식물 ‘세덤’으로 이뤄진 DDP의 숨겨진 공간이었던 지붕 정원까지 올라가볼 수 있는 투어입니다. 2014년 개관한 DDP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이기도 한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마지막 작품 ‘환유의 풍경’입니다. 크기와 형태가 모두 다른 4만5000여장의 알루미늄 패널로 구성된 건축물이죠. 동대문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기둥없는 곡선’으로 설계됐습니다. 현재까지 누적 방문객 1억명을 넘어선 서울 관광의 핫플레이스입니다. 루프탑 바로 아래까지 가보니 알루미늄 패널이 붙어 있는 천장 구조물이 어떻게 지탱되고 있는 지를 알겠더군요. 이런 모양의 수많은 파이프로 트러스 구조를 만들어 지붕의 하중을 분산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루프탑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는 할 일이 많습니다. 먼저 안전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기념 촬영을 할 때 들고 있을 수건에 펜으로 문구를 적습니다. ‘Visit Seoul Again!’을 비롯해 자신이 원하는 축하, 사랑, 합격 등을 기원하는 문구를 적기도 합니다. 그리고 안전용 고리를 달 수 있는 하네스를 착용하고, 안전헬멧을 씁니다. 참여자들은 글로벌 시험인증기관인 독일 DEKRA 인증을 획득한 안전시스템으로 이동하게 되는데요. 참가자는 10명이지만 앞뒤로, 중간에 안전요원들이 5~6명이 동행합니다.매뉴얼에 따라 투어가 진행되는데요. 서울시는 투어에 앞서 중부소방서·대한산업안전협회 등 안전전문가의 점검과 지붕 구조안전성 검토 등 9개월간 철저히 준비했다고 하네요. DDP 지붕 위에 올라가면 남산부터 동대문까지 탁트인 전망을 볼 수 있습니다. 주변의 패션 상가와 함께 어우러지는 DDP의 곡선이 낯선 느낌을 주는 이국적 풍경입니다. 서울에서도 이런 앵글의 사진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에 찾아오게 될 해외 관광홍보를 위해서라면 DDP의 옥상도 개방할 수도 있다”고 오래 전부터 이야기해왔습니다. 굳이 서울시가 서울의 관광을 직접 홍보하지 않더라도, DDP에 올라온 외국인들이 찍은 사진이 SNS를 통해 전세계로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서울의 아름다운 건축과 역사, 문화가 홍보될 것이라는 이야기죠. 오 시장은 간담회에서 “아름답고, 재미와 흥미가 넘치는 관광 포인트를 많이 만들어놓은 것이 서울시의 역할”이라며 “전국민이 인플루언서인 시대에 좋은 포인트가 많으면 홍보는 저절로 이뤄진다”고 말했습니다. 지붕 위에 올라가면 몸에 착용한 하네스에 안전고리를 걸고, DDP지붕 위에 설치된 강철 철사 줄에 연결합니다. 지붕은 경사가 져 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고리를 거는 것이죠. 안전 로프에 고정돼 있는 고리는 참가자들이 자의적으로 풀기 어렵게 돼 있습니다. 안전로프에 연결된 줄은 3m까지 늘어납니다. 자동으로 늘었다 줄었다 하는 반려견 산책줄과 동일한 원리인데요. 순간 내가 DDP에 매달려 있는 반려견이 된 느낌이 듭니다. 이 줄을 믿고 마음 놓고 사진을 찍고, 포즈도 취해봅니다. 호주 시드니의 명물인 하버브릿지를 올라가는 투어를 할 때도 이런 안전장치를 합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철제 구조물에 몸을 안전하게 고정하며 이동하는 장치죠. 투어는 DDP 지붕 일부 총 280m를 30여분간 직접 걷고 즐기는 코스입니다. 이날 투어 참가자 중에는 네덜란드에서 온 여성과 프랑스에서 온 남성이 함께 했는데요. “서울의 이색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너무나 재밌는 탐험”이라고 말했습니다. 올해 시범운영 후 내년에는 코스를 확대하고, 다양하게 개발해 봄(5월)과 가을(9~10월) 시즌에 DDP 정식 콘텐츠로 유료로 운영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DDP지붕 위에 걷는 부분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미끄럼방지 패널을 붙여놓았습니다. 또한 밟는 부분에는 파이프가 지나가는지 더 딱딱하더군요. 반면 지나가는 길로 지정되지 않은 부분은 좀 얇아서 체중이 꽤 나가는 사람은 바닥이 약간씩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시범운영 기간 중에는 금, 토, 일 사흘 동안 하루 두번(오후 1시 30분‧3시 30분) 총 24회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만 18세~70세 성인이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단, 몸무게는 100kg 미만으로 제한됩니다. 1회당 투어 인원은 안전을 고려해 10명으로 한정했습니다. 투어 할 때 기념수건을 제공해주는데요. 투어 관계자들이 지붕 위에서 수건을 들고 인생샷을 찍어 줍니다. 시범 기간 중 투어 참여자는 약 220명입니다. 이중 120여명은 미리 사연을 보낸 사람 중에서 선정됐습니다. 또한 파리올림픽·전국체전 서울시 선수단, 디자이너, 동대문 지역상인 등을 초청해 진행합니다. 100명은 선착순으로 접수 받았는데 수만명이 몰리는 오픈런으로 벌써 끝났다고 하네요. 지난 25일 투어 첫날에는 결혼, 창업 등 특별한 사연을 보낸 1088명 중 선발된 시민 20명과 함께했다고 합니다. 참가자 중에는 아이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늦깎이 대학생이 된 엄마, 한국문화와 서울 매력에 푹 빠진 외국인 유학생, DDP 취업박람회에서 처음 만나 앞으로 인생을 함께 설계 중인 예비부부 등이 있었다고 하네요. DDP 지붕탐험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는데요. 바로 DDP 지붕 위에도 정원이 있다는 점입니다. 저렇게 뜨거운 햇살이 내려쬐는 얄루미늄 패널 위 지붕 위에서 식물이 살 수 있을까? 사막식물인 ‘세럼’이 심어져 있습니다. 물을 많이 주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다육식물 종류라고 하네요. 봄이나 여름에는 다른 종류의 꽃도 피기도 하는데요. 지금은 가을이라 갈색 빛깔의 지붕입니다. 지붕 위 정원에서 보면 옛 동대문 운동장 시절의 유물이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야간경기에 경기장을 밝혀주던 조명탑입니다. 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청계천과 연결시켜주던 이간수문도 보입니다. 루프탑 투어 전에는 평소 가볼 수 없는 DDP의 숨은 공간을 투어합니다. 이날 가본 곳은 DDP의 난방, 공조, 쿨링, 환기 등을 담당하는 기반시설 공간이었는데요. 이런 공간인데도 깔끔하게 잘 정돈이 돼 있더군요. 알루미늄 패널로 덮인 DDP의 경우 창문도 없는데, 어떻게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궁금했는데요. 일부 패널 중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고 하네요. 설비를 위한 공간에는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린 패널이 있네요. 지붕에 있는 패널 중에는 태양열 발전판으로 사용되는 패널도 있다고 합니다.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은 “10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DDP 루프탑 투어는 서울 도심의 매력을 한눈에 감상 할 수 있는 서울시의 또다른 매력 콘텐츠”라고 말했습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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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향취에 가슴 뭉클, 만발한 국화향에 마음 흠뻑

    “국화 꽃향기 맡으면서 가을 정취를 느끼고 싶어 왔습니다.” 전북 익산시 어양동 중앙체육공원 일대에서는 형형색색의 국화꽃 향기 가득한 ‘제21회 익산 천만송이 국화축제’가 다음 달 3일까지 열린다. 1000만 송이 국화가 피어나는 이 축제는 2004년부터 익산을 상징하는 대표 행사가 됐다. 익산은 마한-백제 역사 유적의 도시이며 백제 30대 무왕(600∼641년)의 천도지로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처럼 사적과 유물이 많다. 천만송이 국화축제는 중앙체육공원, 신흥근린공원, 미륵사지, 익산역 등 네 곳에서 열리고 있다. 불로장수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영초(靈草)인 국화는 익산을 상징하는 시화(市花)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는 무왕이 세운 동양 최대, 최고의 국가 사찰인 미륵사 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과 선화공주가 용화산 밑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자 사찰을 짓고 싶다는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연못을 메운 후 미륵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천만송이 국화축제에 맞춰 ‘익산 국화축제와 백제문화 역사기행 농촌 크리에이투어(CREATOUR) 열차’ 상품이 운영되기도 했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이 열차는 익산역에 도착한 후 미륵사지 석탑과 50년 만에 민간에 개방된 ‘아가페 정원’, 미륵산 지역에서 황토백이 날씬이 고구마 수확 체험(1인당 3kg), 천만송이 국화축제 관람, ‘이상한 교도소’ 세트장을 관람하는 코스의 여행 상품. 특별열차 기차여행은 이달 3∼5일 ‘백제고도 익산 마한문화대전’ 당시에도 각각 400명의 관광객을 모집하기도 했다. 익산은 100년의 철도 역사를 지닌 교통과 물류의 중심 도시다. 익산역 광장에도 유라시아 대륙횡단 철도 기관차 모양의 국화 작품이 세워졌다. 익산시는 농촌 테마형 관광상품인 농촌 크리에이투어 관광상품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올 7월부터 운영하는 이 테마형 농촌관광 상품에 6000여 명이 참여했고, 지역 주요 축제와 연계한 농촌관광에도 관광객 1000여 명을 유치했다. ‘K투어 촌스런 기차여행’ ‘고즈넉한 휴식과 힐링의 시간’ ‘익산에서 즐기는 추억 촌캉스+호캉스 찐투어’처럼 특화된 콘텐츠 여행상품 판매로 76개 팀 2647명이 익산을 찾았다. 30일 현재 예약된 팀도 56개 팀 1941명에 이른다. 익산의 농촌테마형 상품은 △달콤 시원 멜론과 시(時)의 만남 △산 멍! 바람 멍! 시간 멍! 느림 여행 △인스타 핫플레이스 생명놀이터 △K투어 촌스런 기차여행 △고즈넉한 휴식과 힐링의 시간 등 모두 10개로 농촌문화 체험뿐만 아니라 배움, 재미, 휴식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됐다. 익산시 함열읍 다송리 ‘다송 무지개 매화마을’은 이른바 논캉스와 촌캉스로 유명한 곳. 와야, 방교, 박전, 상마, 소지, 대지, 매교 7개 마을이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모인 농촌 체험휴양마을이다. 특히 반려견과 함께 숙박이 가능한 글램핑과 반려견 놀이터가 있어 반려견과 함께하는 농촌 여행 메카로 떠올랐다. 올 3월 익산시 최초 반려동물 페스티벌 ‘댕스티벌’이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2만6500㎡(약 8000평) 대지에는 숙박과 체험이 가능한 시설, 반려견 놀이터, 야외 쉼터, 카페가 있다. 반려견 놀이터는 한번에 100마리까지 놀 수 있을 만큼 넓고 반려견 텐트 숙박시설도 있다. 다송리 특산품인 고구마를 재료로 고구마빵 만들기, 고구마 수확 체험, 반려견 수제 간식 만들기도 할 수 있다. 농촌 크리에이투어는 전국 20개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더 자세한 정보는 웰촌에서 확인할 수 있다.익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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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예의 나라 정체성, K판타지아 프로젝트로 되살릴 것”

    “K팝과 영화, 드라마에서 시작한 한류가 공예, 한식, 한복, 문학 등 한국의 전통과 현대문화에 대한 폭넓은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류의 근원인 ‘한국성(韓國性)’의 정체와 맥을 찾는 ‘K판타지아 프로젝트’가 필요한 시기입니다.”장동광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장(사진)은 옛 서울역 역사를 개조한 ‘문화역서울284’에서 ‘K판타지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첫 번째 기획전시로 동양화, 서양화와 문학 등 장르 간 경계 없이 활동해 온 통섭의 예술가 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의 작업을 아카이브 형식으로 보여주는 ‘생명광시곡, 김병종’ 전시회가 24일까지 열리고 있다. “현재 서울에 근대문화유적 중 명동성당 본당, 한국은행 본점 등 100년 넘는 건축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25년 준공한 서울역은 내년 100년을 맞습니다. 제가 40여 년 전 철도청에 근무할 당시 출퇴근을 했던 인연이 있기도 합니다. 이곳을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나 일본의 도쿄역을 리노베이션한 ‘도쿄 스테이션 갤러리’처럼 복합문화공간으로 발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서울대 공예과를 졸업한 장 원장은 안양문화예술재단에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를 기획 진행했고, 한국도자재단 상임이사로 경기도자비엔날레를 이끄는 등 30여 년간 시각예술 분야에서 일해온 현장 전문가. 지난해 7월 제5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원장으로 취임했다.공진원은 공예주간, 공예트렌드페어, 한식문화 홍보, 한복 진흥, 한지 분야 육성 지원, KCDF갤러리 운영, 문화역서울284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 왔다. “제 임기 동안 기관 의제를 설정했는데 올해는 ‘차이의 만남’, 내년도는 ‘한국성의 맥’, 그다음 해에는 ‘공예의 미래상’으로 설정했습니다. 한국적 공예, 디자인의 원형성을 모색하고 세계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기관의 정기 간행물인 ‘공예문화’ 계간지 특집기사는 영문을 병기해 세계인들과 소통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북촌에 있는 ‘한지문화산업센터’를 ‘한지가헌’이라는 한지문화홍보관으로 리뉴얼하고, 인사동 ‘KCDF 갤러리’도 ‘한국공예문화의 중심…공예가헌, Craft House’로 개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21세기 공예 진흥에 대한 방안은…. “인공지능(AI)과 기술 융합의 ‘통섭의 시대’를 맞아 금속, 도자, 목칠, 섬유, 유리, 가죽 등 재료와 기술로 분파돼 있는 공예장르 구분이 혁파돼야 합니다. 내년 20주년이 되는 ‘공예트렌드페어’를 작가 중심에서 갤러리 중심으로, 개인 생산에서 협업 생산, 브랜드 가치 창출을 위한 길드적 연합 생산 시스템을 구축해 하이엔드 공예품, 생활 우수 공예품, 문화 산업으로서의 공예품 유통을 체계화하고자 합니다.” ―현재 가장 시급한 공진원의 현안은 무엇인가요. “한국 현대 공예를 체계적으로 진흥할 수 있는 ‘국립공예미술관’ 설립이 절실합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공예의 나라’였습니다. 실제로 고대부터 근대까지 자랑스러운 공예 유물들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 잘 보존돼 연구·전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현대 공예는 방치돼 있다시피 합니다. 영국 런던의 ‘V&A 뮤지엄’, 프랑스 파리의 ‘장식미술관’, 일본 가나자와 ‘국립공예관’처럼 현대의 공예 유산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미술관이 필요합니다. 한국 디자인의 원류는 공예에서 발원합니다. 국립디자인박물관도 중요하지만, 하루빨리 국립공예미술관을 설립해 한국 공예의 동시대성이 살아 있음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비전은….“내년이면 공진원 설립 25주년을 맞습니다. 내년 의제가 ‘한국성의 맥’을 찾는 것인데, 서울역 개장 100주년 기념전과 동북아 예술과 역사, 철도와 근대문화를 결합한 자체 기획전을 준비 중입니다. 공예, 공공디자인, 한복, 한지 진흥 사업도 국제적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고, ‘올해의 공예상’에 ‘공예이론가상’을 신설해 ‘공예콜로키움’과 함께 국제적 수준으로 키울 예정입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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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숲 속에 부는 바람, 들판엔 금빛 송홧가루[전승훈의 아트로드]

    ​옛 서울역은 80년 동안 서울의 관문으로 교통과 교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2004년 KTX 신역사가 생기며 옛 서울역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2년여의 공사 끝에 2011년 ‘문화역서울284’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84는 옛 서울역의 사적(史蹟) 번호. 이 곳에서는 현재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장동광)이 주최하는 ‘K판타지아 프로젝트’의 첫번째 기획전시회인 ‘생명광시곡, 김병종’이 10월24일까지 열리고 있다. 올해부터 매년 한번씩 열리는 ‘K판타지아 프로젝트’는 한류(K컬쳐)가 전세적으로 확산되는 시대를 맞아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특별기획. 첫 전시는 ‘화첩기행’으로 잘 알려진 작가 김병종(서울대 명예교수)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아트 아카이브 형식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동양화에 뿌리를 둔 김 작가는 서양화, 미술과 문학 등 장르 간 경계가 없이 활동해온 통섭의 예술가다. 전시장에는 김 작가의 회화, 문학, 지필묵, 오브제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광시곡이 연주되듯 펼쳐진다. 역사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앙로비에 시원한 푸른색 대나무숲이 펼쳐진다. 김병종 작가의 신작인 ‘풍죽(風竹)’이다. 문인화 사군자 중의 하나인 대나무를 초록색이 아닌 푸른색으로 그려 새벽녘 어스름한 안개 속 대숲처럼 청명한 기운이 느껴진다. 풍죽 연작은 1,2등석 대합실에도 전시돼 있다. 김 작가는 연작을 그릴 때 화면을 분할해서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그리기 때문에, 공간의 특성에 맞게 적절하게 이어붙여 전시를 할 수 있다. 서울역의 대합실 공간에 맞게 각을 주어서 둘러싸게 만드니 더욱 대숲의 한 가운데 들어온 듯한 아늑함이 느껴진다. 김 작가는 전통적인 대나무 그림처럼 줄기와 가지는 그리지 않고 댓잎만 그렸다. 그래서 전통 수묵화의 댓잎이 추상화된 현대미술에 가까워졌다. 수많은 댓잎들이 이리저리 중첩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솨~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림이 아니라 소리를 담고 싶어 그린 그림”이라는 해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로비 옆 3등 대합실 공간에서는 ‘동심의 기억’ 전시가 이어진다. 황금빛 송홧가루(소나무의 꽃가루)가 온세상을 덮는 ‘송화분분(松花粉粉)’ 시리즈다. 작가의 고향인 지리산 자락의 남원에서는 봄철이면 송홧가루가 날려 온 산천이 노랗게 변하는 모습을 그린 환상적인 작품이다. 곤충을 이용해 수분을 하는 꽃과 달리 소나무는 바람을 이용해 수분하는 풍매화. 소나무는 봄철이면 대량의 꽃가루를 먼 곳으로 날려 수분을 시도한다. 봄날에 송홧가루가 날리면 시골집 마루와 장독대는 누렇게 되고, 바람이 세게 불면 앞산 숭홧가루가 뿌옇게 동네를 가로질러 날아다닌다. 생명의 대이동이다. 송홧가루는 봄철의 지리산 계곡과 폭포, 바위, 숲 속에도 날린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앞산과 뒷산이 교접하는 관능과 몽환의 세상을 만들어낸다. 송홧가루를 뒤집어 쓴 황금 닭도 보인다. 생명의 노래는 ‘어락(魚樂)도’로 이어진다.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고 놀던 시절의 행복감을 표현한 작품이다. 아이는 아예 물고기를 타고 논다. 물고기 위에 벌렁 드러눕는가 하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곡예를 부리기도 한다. 제주에서 스킨스쿠버와 물질을 배웠던 기자에게 어락도는 크게 공감이 가는 그림이었다. 물 속에서 만나는 물고기들은 다이버를 커다란 물고기로 인식해서인지, 가까이 다가가도 잘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호기심어린 몸짓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2악장 ‘덧없는 꽃’은 김병종 작가의 또다른 대표주제인 ‘화홍산수(花紅山水)’도를 전시하고 있다. 화홍산수란 ‘꽃(花)이 산하(山水)를 붉게 만든다’는 뜻이다. 동백인지, 장미인지 알 수 없는 붉은색 꽃잎은 원초적인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꽃잎의 중앙에는 검은색 먹물이 번져 깊은 심연을 이루고 있고, 꽃잎은 붉은색 방울을 흘리고 있다. 꽃의 관능적인 생명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붉은색 꽃잎의 주변으로 날짐승과 물고기, 호랑이와 곤충들이 날아다닌다. 화홍산수는 전통적인 의미의 산수화는 아니다. 그러나 단순한 선에서 우리의 산수풍경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리산의 계곡물에는 오리들이 떠다니고,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무 위에는 닭이 한마리 올라가 홰를 치고 있다. 옛 서울역사의 복도에 화홍산수 그림이 전시돼 있다. 서측복도에 전시돼 있는 화홍산수. 3악장 ‘감추어진 샘’은 숲의 테마 연작을 통해 작가의 수묵과 수제 닥종이를 이용한 실험적 시도를 살펴볼 수 있다. 가로 9.6m, 세로 1.9m의 압도적 크기를 자랑하는 ‘생명의 노래-숲은 잠들지 않는다’(2003)는 작가가 직접 만든 닥나무 원료인 ‘닥판’이라는 바탕에 숲 속의 밤 풍경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큰 붓질로 그린 선들은 이리 저리 얽히며 자라는 나무들이고, 거친 붓질은 솔잎을 표현했다. 그 사이로 새가 날아다니고, 나비가 날고, 들짐승이 숨어 있다. 무서운 밤의 숲 속에 숨어 있는 해학적인 짐승들의 모습은 우리 전통 민화를 연상케한다. 이 그림은 닥나무 섬유와 한약재 등을 섞어 만든 화면이 채 마르기 전에 큰 붓을 휘둘러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붓의 움직임과 방향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새로운 방식의 수묵화가 탄생했다. 지리산 자락 남원에서 태어난 김 작가에게 ‘숲’은 그의 유년기를 위로해 준 넉넉한 품이었다. 작가는 어릴 적 서늘하고 검은 숲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12세의 자화상’은 특히 어두워 보인다.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슬픔과 외로움을 겪고 있던 소년이 숲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1998년작 수류화개(水流花開)는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는 뜻. 박스로 쓰이는 가로 4m 골판지에 먹과 물감으로 그린 작품이다. 2012년 작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말이다. 이 작품도 골판지에 그렸다. 김병종 작가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하기도 했고, ‘화첩기행’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펴냈고, 에세이와 시나리오, 희곡을 쓰기도 했다. 그는 ‘글 쓰는 화가’로 일간지에 칼럼을 꾸준히 기고해오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작가의 붓과 벼루, 도장, 한지, 달항아리, 원고지 등도 전시돼 있다. 김병종 화백이 그린 ‘서울역으로 가는 야간열차의 추억’. 야간열차를 탄 승객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느껴진다. 한층 올라가면 마지막 4악장이 펼쳐진다. 1990년대 말부터 연재한 문학과 미술의 대장정인 ‘화첩기행’ ‘시화기행’에 담긴 삽화 80여 점과 글이 전시돼 있다. 김 화백의 ‘화첩기행’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전시의 마지막 순서에는 김병종 작가의 대표작인 ‘바보예수(Jesus, the Fool)’ 연작이 나온다. 1980년대 후반 이 작품이 발표됐을 때 국내에서는 ‘신성모독’이라고 종교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 등 해외에서 오히려 큰 반향을 일으켜서 호응을 얻었던 작품이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도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하고, 자신의 자화상 그림에 ‘바보야’라고 쓰기도 했다. 신림동 난곡의 판자촌,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는 바보 예수.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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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름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마터호른제색도’[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스위스 서남부 발레주에 있는 체르마트는 해발고도 1620m에 있는 산골 리조트마을이다. 마을 주변에는 4000m급 알프스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계절 눈덮인 마터호른(4478m)이 거인처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을이 오는 알프스를 트레킹할 수 있는 최적의 출발 장소이자 베이스캠프다. ●수네가 5대호수 트레킹 스위스 알프스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트레킹이다. 천천히 걸으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의 워낭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다. 알프스 산에서는 방목하는 소들이 어디로 가는지 쉽게 알기 위해 방울을 채운다. 가을이 되면 눈이 내리기 전에 산 위에서 방목했던 소들이 산에서 내려오고, 체르마트 마을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수고했던 목동들을 위로하는 ‘목동축제(Shepherd Festival)’가 열린다. 알프스 등반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체르마트 마을에는 가을을 맞아 클래식 음악회와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체르마트에서 유명한 트레킹 코스는 3곳이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해발 3883m)인 ‘마테호른 빙하 파라다이스’에 올라가 빙하 트레일을 즐기거나,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리펠호수까지 걷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기 있는 코스는 수네가 전망대로 올라가 5개 산정호수를 찾아다니는 트레킹이다.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로고로 쓰인 마테호른 봉우리가 수정처럼 맑은 호수에 비친 모습은 알프스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체르마트 5대 호수 트레킹(5 lakes Trekking)을 위해 케이블 철도를 탔다. 땅속 터널을 45도 각도로 상승하는 철도를 타니 10분 만에 ‘수네가 파라다이스’(2288m)역에 도착했다. 마테호른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테라스다. 그런데…. 비와 구름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고민을 했다. 비오는 날씨에 트레킹을 해? 말어? 옆에서 감자칩에 맥주를 마시고 있던 네덜란드 여행객이 어제 맑은 날씨에 트레킹한 사진을 보여준다. 순간 부러움이 부글부글. 그래 일단 출발하자! 마테호른을 볼 수 없다하더라도, 대자연의 품에 안겨 걷는 것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리라. 다시 곤돌라를 타고 블라우헤르트(2571m)까지 올라간다. 길목마다 5개 호수 트레킹을 알리는 노란색 표지판이 있어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드디어 첫 번째 호수인 슈텔리제(Stellisee)가 나타났다. 수많은 초콜릿 광고에서 마테호른을 비추는 포토제닉한 사진으로 유명한 전설의 호수다. 그런데 구름낀 날씨 탓에 하늘도 호수도 모두 곰탕이다. 거의 1시간을 기다렸을가. 아무래도 구름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아 다음 호수로 출발했다. 알프스 3000~4000미터급 준봉들 사이로 쉴새 없이 흘러가는 구름이들이 폭포수처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눈 앞에서 살아움직이는 듯한 장면이다. 제색도의 ‘제(霽)’는 비나 눈이 그친 후 날씨가 쾌청해진다는 뜻. 온종일 비가 내린 후 습기 머금은 산이 더욱 청명해보이는 느낌이다. 한참 걷고 있는데 드디어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이어서 거인같은 마테호른이 두둥! ‘마터호른제색도’가 진짜로 눈 앞에 펼쳐졌다. 언젠가 백두산 천지에 갔을 때도 그랬다. 잔뜩 내려앉은 비구름에 싸여 천지는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고, 기도하길 30분이 지났을까. 그 정성에 감동을 받았는지, 구름이 서서히 열리고 천지가 개벽했다. 처음부터 맑은 날씨에 만나는 천지보다, 구름 속에서 한꺼풀씩 벗겨지며 나타나는 천지는 더 신비스러운 모습이었다. 알프스에서구름을 뚫고 신선처럼 나타난 마터호른은 좌선하고 있는 미륵불처럼 보였다. 마터호른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나났다. 슈텔리제로 돌아가자! 호수에 비친 마테호른을 찍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언제 다시 구름에 갇힐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해발 2500미터 가량의 산길에서 오르막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공기 중 산소가 부족해 숨이 턱턱 차올랐다. 호수로 돌아오니 드디어 보였다. 크리스탈처럼 맑은 호수에 마터호른이 장엄하게 담겨 있었다. 거의 2시간을 기다린 끝의 만남. 날이 흐려 흑백사진같은 느낌이 깊은 침묵에 빠져들게 했다. 야생화가 피어 있는 알프스의 구름 속을 부지런히 걷다보니 그린지 호수(2334m), 그륀호수(2300m), 에머랄드빛 모스예 호수(2148m)가 나타났다. 마지막 호수 라이호수(2232m)에 도착해 바위에 걸터 앉아 쉬었다. 수네가 파라다이스 전망대 바로 아래에 있는 이 호수에서도 마테호른이 비치지 않는가. 굳이 3시간을 걷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지만, 알프스 구름 속의 산책의 경험은 다시 얻기 어려우리라. 마테호른은 알프스 4000m급 고봉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등정됐을 만큼 난공불락의 봉우리였다고 한다. 8년 동안 15개 팀이 마테호른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865년 7월14일. 영국 등반가 에드워드 윔퍼의 등반팀이 마테호른을 세계 최초로 정복하면서 체르마트는 알프스 등반의 베이스캠프 리조트 마을로 유명해졌다. 체르마트 시내 생모리스 교구 주교좌 성당 앞에는 마테호른 박물관이 있다. 마테호른 등반과 관련된 수많은 컬렉션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윔퍼 등반팀이 사용했던 끊어진 로프다. 당시 등반대는 하신길에 낙석에 맞아 7명을 묶은 로프가 끊어지면서, 4명이 1000m 아래 빙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던 슬픈 사연을 담은 유물이다. 알프스 환경보호를 위해 체르마트에는 자동차가 처음 발명된 1885년 이래 자동차의 진입이 허락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신 1988년 최초의 마을 내 공공 전기버스가 운행을 시작했다. 그래서 체르마트에 방문할 경우 렌터카는 5km 떨어진 아랫마을 태쉬(Täsch)에 주차를 하고, 12분이 소요되는 산악열차를 타고 와야 한다. 체르마트 숙소에서 머물 때 가장 매력적인 곳은 바로 베란다다. 시내 어느 곳에서도 4478m급 마테호른 봉우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해질녘 베란다에 앉아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체르마트 맥주(Zermatt Bier)를 한잔했다. 해가 저물며 빛에 따라, 바람과 구름에 따라 변화하는 마테호른의 모습은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야구 축구 생중계보다도 더 흥미진진했다. ●골든패스 산악열차타고 빙하 트레킹 알프스를 즐기는 또하나의 방법은 산악열차 여행이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열차는 지붕까지 이어지는 넓은 유리창을 갖췄다. 열차가 달리면 알프스의 봉우리와 호수, 초록빛 들판, 전나무 숲 속에 지어진 샬레(스위스 전통가옥)가 3D 입체화면으로 다가온다. 몽트뢰에서 인터라켄 오스트까지 이어지는 3시간 여 구간의 ‘골든패스(GoldenPass)’ 파노라마 열차. 레만호부터 베르네제 알프스의 황금빛 가을의 정취를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산악기차 여행이다. 열차를 타면서 한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스위스 산 속의 초원은 어떻게 그렇게 깨끗해보일까? 우리나라 같으면 잡초도 우거지고, 억새가 흔들리고, 잡목과 넝쿨도 우거져 있을텐데. 스위스 산 속 들판은 잔디를 심어놓은 골프장의 페어웨이처럼 산뜻하다. 소가 풀을 다 뜯어먹어서일까? 그렇다고 저렇게 깔끔할 수 있을까. 자세히 보니 커다란 풀깎는 기계가 경사진 산비탈을 다니고 있었다. 깎은 풀더미는 겨울철 소들의 사료로 쓰기 위해 트럭에 실려 보관창고로 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스위스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스위스의 경관을 중요시하는 농업은, 주민과 공무원의 철저한 관리 속에 이뤄지는 ‘관광인프라’이기도 하다. 몽트뢰에서 골든패스 파노라마 열차를 타고 약 2시간. 그슈타트역에서 내렸다. 콜 뒤 피용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글래시어(Glacier) 3000’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레만호 지역에 있는 알프스 산으로 빙하 위를 트레킹할 수 있는 명소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도착하니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역에 도착한다. 그는 국내에서도 경기 화성시 남양읍에 지은 ‘남양성모성지대성당’을 설계한 것으로 친숙한 건축가다. 케이블카 역 뒷편 계단을 오르면 두개의 산봉우리를 잇는 강철 현수교인 ‘티쏘 피크 워크(Peak Walk by Tissot)’가 있다. 길이 107m, 너비 80cm의 출렁다리를 걷다보면, 알프산를 넘어오는 바람에 온 몸이 흔들린다. 거센 바람에 날아갈까봐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도 힘들다. 다리를 건너 전망대에 서니 눈 덮인 24개 이상의 4000m급 알프스 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이거, 융프라우, 마테호른, 그랑 콩뱅은 물론 저 멀리 프랑스 몽블랑까지…. 전망대 아래쪽 평원에는 빙하가 펼쳐진다. 푸른 하늘색과 하얀 빙하가 어우러지는 색다른 트레킹 코스다. 이 곳 빙하에는 크레바스가 없어서 안전하다. 5월부터 9월까지 ‘알파인 코스터(총 1km)’가 운행되기도 한다. 최대 시속 40km로 질주하며, 520° 회전과 급커브와 웨이브, 6m나 솟구치기도 해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즐길 수 있는 빙하 속 놀이기구다. 실제로 걸어본 빙하 평원의 곳곳에는 얼음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도랑물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수천만년 동안 녹지 않는 빙하지대로 유명했던 ‘글래시어 3000’의 얼음도 기후변화로 거의 다 녹아내리기 직전이다. 빙하 끝까지 다녀오는 2시간 코스를 완주하려면 방수가 되는 튼튼한 등산화가 필요했다. 산 정상 케이블카 역에는 르 카르노제 카페가 있다. 알프스 연봉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산 위에서 마시는 따뜻한 핫초코 한잔은 빙하 바람에 떨었던 몸을 녹여주는 특효약이다. 체르마트(스위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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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터호른제색도[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스위스 서남부 발레주에 있는 체어마트(체르마트)는 4000m급 알프스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골 리조트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사계절 눈 덮인 마터호른(4478m)이 거인처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을이 깊어 가는 알프스를 트레킹할 수 있는 최적의 출발지이자 베이스캠프다. ● 수네가 5대 호수 트레킹 알프스를 속속들이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트레킹이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의 워낭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평화로움을 느끼게 된다. 목동들은 방목하는 소들이 어디로 가는지 쉽게 알기 위해 커다란 방울을 채운다. 가을이 되면 산 위에서 방목했던 소들이 마을로 내려오고, 체어마트 마을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수고했던 목동들을 위한 ‘목동 축제(Shepherd Festival)’를 벌인다. 체어마트의 중심가인 반호프 슈트라세에는 축제와 음악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다.체어마트에서 출발하는 트레킹 코스는 3곳이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인 ‘마터호른 빙하 파라다이스’(3883m)에 올라가 빙하 트레일을 즐기거나,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리펠호수까지 걷는 코스다. 수네가 지역 5개 산정호수를 찾아다니는 트레킹 코스도 인기가 뜨겁다.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로고로 쓰인 마터호른 봉우리가 크리스털처럼 맑은 호수에 비친 비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체어마트 시내에서 땅속 터널을 45도 각도로 상승하는 철도를 타니 3분 만에 수네가 파라다이스역(2288m)에 도착했다. 마터호른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테라스다. 그런데 비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 카페에서 고민을 했다. 비 오는 날씨에 트레킹을 해? 말아? 옆에서 감자칩에 맥주를 마시고 있던 네덜란드 여행객이 어제 맑은 날씨에 트레킹한 사진을 보여준다. 순간 부러움이 부글부글. 그래, 일단 출발하자! 마터호른을 볼 수 없다 하더라도, 대자연의 품에 안겨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다시 곤돌라를 타고 블라우헤르트(2571m)까지 올라간다. 5개 호수 트레킹을 알리는 노란색 표지판만 따라가면 쉽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 드디어 첫 번째 호수인 슈텔리호수(슈텔리제)가 나타났다. 수많은 초콜릿 광고에 나온 전설의 호수! 마터호른이 비친다는 포토제닉한 스폿이다. 그런데…. 하늘도 호수도 모두 곰탕이다. 거의 1시간을 기다려도 구름은 열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음 호수로 출발했다. 3000∼4000m급 준봉들 사이로 쉴 새 없이 흘러가는 구름이 폭포수처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제색도의 ‘제(霽)’는 비나 눈이 그친 후 날씨가 쾌청해진다는 뜻. 온종일 비가 내린 후 습기 머금은 산이 더욱 청명해 보일 때 쓰는 글자다. 좀 더 걷다 보니 드디어 구름이 걷히면서 마터호른이 두둥! ‘마터호른제색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언젠가 백두산 천지에 갔을 때도 그랬다. 잔뜩 내려앉은 비구름에 싸여 천지는 보이지 않았다. 천지 전망대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고, 기도하길 30분이 지났을까. 그 정성에 감동을 받았는지, 드디어 천지가 개벽했다. 처음부터 맑은 날씨에 만나는 천지보다 구름을 헤치고 서서히 드러나는 천지는 더욱 신비로웠다. 구름을 뚫고 나타난 마터호른도 좌선하고 있는 미륵불처럼 신성해 보였다. 마터호른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나났다. 슈텔리호수로 돌아가자! 호수에 비친 마터호른을 찍어야 할 것이 아닌가! 언제 다시 구름에 갇힐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해발 2500m 산길에서 오르막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공기 중 산소가 부족해 숨이 턱턱 차올랐다. 기어코 호수로 돌아오니, 크리스털처럼 맑은 호수에 마터호른이 장엄하게 담겨 있었다. 거의 2시간을 기다린 끝의 만남. 날이 흐려 흑백사진 같은 느낌의 호수는 깊은 침묵에 빠져들게 했다. 야생화가 피어 있는 구름 속을 부지런히 걷다 보니 숲속에 숨어 있는 그린지호수(2334m), 그륀호수(2300m), 에메랄드빛 모스예호수(2148m)를 만났다. 마지막 라이호수(2232m)는 수네가 파라다이스 전망대 바로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이 호수에도 마터호른이 비치지 않는가. 굳이 3시간을 걷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알프스의 품속에 안겼던 순간들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추억이 됐다. 마터호른은 알프스 4000m급 고봉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등정됐을 만큼 난공불락의 봉우리였다. 1865년 7월 14일. 영국 에드워드 휨퍼의 등반팀이 마터호른을 처음 정복하면서 체어마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체어마트 시내 성당 앞에는 마터호른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휨퍼 등반대의 끊어진 로프도 전시돼 있다. 당시 등반대는 하산길에 7명을 묶은 로프가 낙석에 맞아 끊어지면서, 4명이 1000m 아래 빙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체어마트 숙소에서 머물 때 가장 매력적인 곳은 바로 베란다다. 시내 어느 곳에서도 4478m 마터호른 봉우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해 질 녘 베란다에 앉아서 지역 특산품인 체어마트 맥주를 마셨다. 해가 저물며 빛에 따라, 바람과 구름에 따라 변화하는 마터호른의 모습은 어떤 영화나 드라마, 스포츠 생중계보다도 더 흥미진진했다.● 골든패스 산악열차 타고 빙하 트레킹알프스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산악열차 여행이다. 몽트뢰에서 인터라켄 오스트까지 이어지는 3시간여 구간의 ‘골든패스 파노라마’ 열차. 레망호수(제네바호수)부터 베르네제 알프스의 황금빛 가을의 정취를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산악기차 여행이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열차는 지붕까지 이어지는 넓은 유리창을 갖췄다. 열차가 달리면 알프스의 봉우리와 호수, 초록빛 들판, 전나무 숲속에 지어진 샬레(스위스 전통가옥)가 3차원(3D) 입체 화면으로 다가온다. 열차를 타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스위스 산속의 초원은 어떻게 그렇게 깨끗해 보일까? 다른 나라 같으면 잡목도 있고, 억새와 넝쿨, 잡초도 우거져 있을 텐데. 알프스 산속 들판은 골프장의 페어웨이처럼 산뜻하다. 소가 풀을 다 뜯어 먹어서일까? 자세히 보니 커다란 풀 깎는 기계가 경사진 산비탈을 다니고 있었다. 깎인 풀더미는 겨울철 건초 사료로 쓰기 위해 트럭에 실려 보관창고로 간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스위스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스위스의 경관 농업은 주민과 공무원의 철저한 관리 속에 이뤄지는 ‘관광 인프라’였다. 몽트뢰에서 골든패스 파노라마 열차를 타고 약 1시간 반. 그슈타트역에서 내렸다. 콜뒤피용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글레이셔 3000’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도착하니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역에 도착한다. 뒤편 계단을 오르면 두 개의 산봉우리를 잇는 강철 현수교인 ‘티소 피크 워크’가 있다. 길이 107m, 너비 80cm의 출렁다리를 건너 전망대에 서니 눈 덮인 24개 이상의 4000m급 알프스 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이거, 융프라우, 마터호른, 그랑콩뱅은 물론이고 저 멀리 프랑스 몽블랑까지…. 전망대 아래쪽 평원에는 빙하가 펼쳐진다. 푸른 하늘색과 하얀 빙하가 어우러지는 색다른 트레킹 코스다. 이곳 빙하에는 크레바스가 없어서 안전하다. 그러나 빙하 평원의 곳곳에는 얼음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도랑물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수천만 년 동안 녹지 않는 빙하지대로 유명했던 ‘글레이셔 3000’의 얼음도 기후변화로 거의 다 녹아내리기 직전이다. 빙하 끝까지 다녀오는 2시간 코스를 완주하려면 방수가 되는 튼튼한 등산화가 필요했다. 산 정상 케이블카 역에는 르카르노체 카페가 있다. 알프스 연봉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산 위에서 마시는 핫초코 한잔은 빙하 바람에 떨었던 몸을 녹여 주는 특효약이다.글·사진 체어마트=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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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퀸의 음악이 흐르는 알프스 호수마을[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스위스에는 호수가 많다. 산이 높으니 물도 많기 때문이다. 알프스의 빙하가 녹은 물이 곳곳에 강으로 흐르고, 호수를 만들어낸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호수는 스위스 남서부 프랑스와의 국경 부근에 있는 ‘레만호‘다. 알프스산으로 둘러싸인 스위스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인데도, 지중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레만호 덕분에 탁 트인 전망과 낭만을 즐기는 여행자들의 발길을 모은다.●프레디머큐리가 사랑했던 몽트뢰알프스의 빙하가 흘러내린 레만호의 물은 엄청 깨끗하고 맑다. 햇빛에 비친 윤슬이 반짝거리는 에머랄드빛 호수에 가까이 가보면 물고기들을 물론, 호수 바닥까지 훤히 보인다. 길이가 72km, 너비가 14km의 초승달 모양의 레만호는 알프스 산지 최대의 호수. 둘레(195km)를 자전거로 한 바퀴 도는 데만 8시간이 걸린다.스위스인들은 레만호에서 수영을 즐긴다. 너무도 거대한 호수이다 보니 바다처럼 보인다. 레만호에서 흘러나온 물은 프랑스의 남쪽을 흐르며 론강이 된다. 레만호의 서쪽 끝에는 제네바가 국제기구가 몰려 있는 금융도시라면, 동쪽 끝에 있는 몽트뢰는 프랑스의 니스나 칸에 못지 않은 국제적인 휴양도시다.제네바 시내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명물은 레만호에서 약 140m 높이로 연중무휴 물을 뿜어내고 있는 ’제네바 대분수(Le Jet d‘eau de Genève)다. 제네바 대분수는 불과 10cm 밖에 되지 않는 노즐을 통해 초당 500리터의 물이 시속 200km의 속도로 뿜어져 나온다.그런가하면 몽트뢰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은 영국 록그룹 퀸(Queen)의 전설적인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이다. 기자가 찾아간 날이 마침 프레디 머큐리의 생일(9월5일)이 있는 9월 첫 주말. 왼손에 지팡이를 짚고, 오른손을 번쩍 들고 있는 프레디의 동상에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팬들이 가져온 색색의 꽃으로 장식돼 있었다. 동상 옆에는 사람들이 머큐리의 포즈를 따라하며 사진을 찍고, 마르셰 광장에서는 팬들이 모여 퀸의 노래에 맞춰 댄스를 추었다.마르셰 광장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몽트뢰 카지노가 나온다. 카지노 건물 안에 프레디 머큐리가 음반녹음을 했던 스튜디오가 있다. 인구 2만5000명의 소도시 몽트뢰는 1967년부터 매년 여름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로 유명했다. 그런데 이 스튜디오 덕분에 몽트뢰는 ‘퀸의 도시’가 됐다.퀸의 멤버들은 1978년 ‘재즈(Jazz)’ 음반 녹음을 위해 몽트뢰 스튜디오를 찾았다가 호숫가의 수려한 풍광과 첨단 녹음 시설에 반했다고 한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나왔듯이 거듭된 녹음 작업을 통해서 세련된 사운드를 얻어내는 퀸 멤버들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듬해 이 스튜디오가 매물로 나오자 퀸은 아예 구입했다. 1980~1990년대 퀸의 음반뿐 아니라 멤버들의 독집도 여기서 녹음했다. 머큐리가 죽고 난 뒤 만들어진 퀸의 마지막 앨범 ‘메이드 인 헤븐’(Made in Heaven)의 재킷 사진도 몽트뢰에 세워진 머큐리의 동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머큐리는 “몽트뢰는 나에게 제2의 고향. 영혼의 평화를 원한다면 몽트뢰로 오라”고 할 정도로 이 도시를 사랑했다고 한다. 생전에 그가 즐겨 식사하고 산책하고 곡 작업을 했던 단골집과 장소들은 지금도 ‘프레디 머큐리 투어’로 불리며 답사 코스로 인기가 높다.현재 이 스튜디오는 머큐리가 공연 때 입었던 의상, 퀸의 멤버들이 사용했던 악기 등이 전시된 ‘퀸 박물관(Queen: The Studio Experience)’이 됐다. 머큐리가 1991년 숨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사했던 종이도 전시돼 있다. 입구에는 팬들이 남기고간 레터와 엽서가 가득히 붙어 있고, 프레디의 생일을 맞아 트레이드마크 복장인 흰색 러닝셔츠와 콧수염을 달고 찾아온 남성팬도 있었다.박물관에는 프레디 머큐리가 마지막 녹음 때 사용했던 슈어 SM-85 마이크와 퀸 공연에 라이브로 연주되던 야마하 DX-7 신디사이저,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가 수제로 직접 제작해 연주하던 ‘레드 스페셜’ 일렉기타, 베이시스트 존 디콘이 쓰던 ‘뮤직맨 스팅레이(Music Man STINGRAY)’ 베이스, 드러머 로저 테일러가 치던 ‘Ludwig Crome 드럼’ 등 멤버들이 즐겨사용하던 악기도 전시돼 있다. 시옹성과 라보 포도밭한국의 성은 대부분 산성(山城)이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에는 주로 평지에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를 판 성이 있다. 그런데 스위스 레만호 몽트뢰에는 호숫가에 그림처럼 떠 있는 시옹성(Château de Chillon)이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서 공주가 사랑한 에릭 왕자가 사는 성의 모티브가 된 곳일 정도로 낭만적인 풍광이다.시옹 성은 9세기에 처음 세워져 강을 오가는 배와 상선을 상대로 통행세를 징수하는 관문이었다. 그리고 12세기부터 16세기경까지 4세기 동안 사보이 왕가의 거주지이자 무기고,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호숫가에 세워진 성이기 때문에 따로 해자를 팔 필요없이, 레만호의 물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도록 돼 있다. 매표소에서는 한글로 된 팸플릿도 나눠준다. 성의 각 공간을 번호를 새겨 순서에 따라 관광할 수 있도록, 한국어로 자세히 설명돼 있는 팸플렛이다.입구로 들어가면 자그미한 뜰이 나오고, 정면에 지하 동굴로 가는 길이 있다. 무기고, 감옥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 곳에서는 종교개혁 운동가인 프랑수아 보니바르가 1530~36년까지 6년간 기둥에 쇠사슬이 묶인채 투옥됐던 감옥이었다. 영국 출신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1778~1824)의 그의 삶을 주제로 서사시 ‘시옹성의 죄수’를 썼다. “쇠사슬에도 묶일 수 없는 영원한 정신, 자유여! 너는 지하감옥에서도 환히 밝도다”라는 시 구절로 시옹성은 세계인들에게 문학의 성지로 더 널리 알려졌다.시옹성의 지하에는 바이런이 시로 노래했던 프랑수아 보니바르가 갇혀 있던 지하 동굴이 있다. 동굴 천장에는 고딕양식의 아치와 기둥이 있다. 창살 밖으로 비치는 레만호의 에머랄드 빛 물결,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이 동굴 천장이 비치는 모습을 어둠 속에 갇힌 죄수들이 바라봤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지하동굴에는 시옹성이 세워졌던 암반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도 하고, 천정에 죄수를 처형하던 올가미도 있다.지하동굴에는 와인을 저장하는 40여개의 오크통이 보관돼 있기도 하다. 시옹성에서 ‘클로 드 시옹(Clos de Chillon)’ 자체 레이블을 단 와인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옹성은 레만호 언덕 위에 있는 라보(Lavaux)에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어 화이트 와인(샤슬라 품종), 레드와인(피노 누아, 가메이)을 생산하고 있다.라보포도밭은 2007년 9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관광명소다. 몽트뢰에서 로잔까지 이어져 있는 레만호 북쪽 호숫가를 따라 약 30km에 걸쳐 있는 계단식 포도밭의 총 면적은 약 830헥타르에 이른다. 800년 전 수도사들이 계단식으로 밭을 조성해 포도를 심기 시작해 현재 스위스 와인 생산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라보 지구의 포도밭은 스위스 관광청에서 추천하는 13개 하이킹 코스 중에 하나일 정도로 트레킹으로 유명하다. 포도원 동쪽 뤼트리에서 서쪽 생 사포랭까지 3~4시간 정도 포도원 트레킹을 하면 레만호를 배경으로 한 포도밭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스위스 와인은 알프스 산맥의 청정 환경에서 무농약으로 재배한 포도를 자연발효하는 친환경 방식으로 생산하는 세계적인 명품 와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땅이 좁아 와인 생산량도 매우 적을 뿐 아니라, 대부분 스위스 내에서 소비해 외국으로 수출하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와인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다. 스위스 와인은 약 250종에 이르는 포도로 만들어지는데, 그 중 40종 이상이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토착 희귀종 포도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스위스를 여행할 때는 현지에서 꼭 맛봐야할 것이 스위스 와인이다. 라보 지구의 포도밭을 걷다가 도멘 보비(Domaine Bovy)와 비노라마(Vinorama) 등의 와이너리에 들러 스위스 와인을 시음해 보았다. 라보지구는 화이트 와인이 유명한다. 스위스에서만 재배되는 ‘Plant Robert’ 품종의 레드와인도 고급 부르고뉴 와인처럼 맑고 투명하면서도, 묵직한 바디감과 향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로잔에서 유람선타고 에비앙으로스위스에는 국제기구가 많다. 제네바에는 유엔제네바사무소를 비롯해 세계무역기구(WHO), 세계보건기구(WHO), 국제노동기구(ILO), 유엔난민기구(UNHCR),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등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있다.그런가하면 제네바에서 승용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로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있다. 이 곳 레만호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세워진 올림픽 박물관(Olympic Museum)도 찾아가볼만 하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올림픽 경기의 역사를 생생하게 알게해주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는데, 올해 7~8월에 치러진 2024 파리올림픽에도 올림픽 기념물 수집팀를 파견했다고 한다.로잔올림픽 박물관에서 대한민국의 흔적을 찾는 것도 쏠쏠한 즐거움이다. 입구에서 오르는 계단에는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성화봉송 최종주자였던 정선만, 김원탁, 손미정 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새겨진 계단에는 김연아의 이름이 선명하다. 또한 88서울올림픽 당시 색동마크와 오륜기가 그려진 티셔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여자 여자하키 남북한 단일팀 유니폼도 전시돼 있다.로잔 올림픽박물관은 레만호의 멋진 뷰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스팟이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웨딩사진 촬영장소로도 인기가 높은 곳이다. 호숫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박물관 관 앞 마당에는 올림픽 경기를 테마로 한 다양한 조각상이 전시돼 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프랑스 조각가 니키 드 생팔의 ‘축구선수들(Les Footballers)’이다. 풍만한 신체에 원색의 페인트를 쓰는 조각작품을 만드는 여류 조각가 니키 드 생팔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앞 움직이는 조각 분수로 유명하다.올림픽 박물관 꼭대기 층에 자리잡은 톰 카페(Tom Cafe)의 야외 테이블은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로잔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테라스 석으로 꼽히는 핫 플레이스다. 레만호와 알프스의 화려한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어 언제나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박물관 티켓이 없어도 들어올 수 있는 톰 카페에서는 브런치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레만호는 유람선을 타고 다양한 도시를 다니며 호수를 즐기기도 한다. 북쪽 면은 스위스에서, 남쪽 면은 프랑스에 속해 있는 호수이기 때문에, 140년 전통을 가진 유람선은 국경을 넘나들기도 한다. 로잔의 우쉬(Ouchy) 선착장에서 유람선(CGN)을 타고 30분 만에 프랑스 에비앙에 다녀오는 코스도 인기다. 유람선을 타면 레만호의 맑은 물과 백조, 라보 지구의 포도밭, 저멀리 알프스의 만년설까지 수려한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에비앙 선착장에 내려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에비앙 생수가 흘러나오는 ‘수원지(Source)’ 를 찾아갈 수 있다. 분홍빛 타일로 장식된 ‘카샤의 샘물(Cachat Spring)’은 18세기 후반 이 곳에 정원을 소유하고 있던 가브리엘 까샤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1790년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오베르뉴에서 온 한 귀족이 가브리엘 까샤의 집에 2년간 머물면서 이 샘물을 매일 마셨다고 한다. 그는 신장 결석으로 몇년간 고생을 했는데, 이 샘물을 마시자 빠르게 병이 고쳐졌다고 한다. 의사들이 이 물이 신장과 방광의 질병에 효능이 있다고 보고, 이 샘물을 약으로 처방하자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카쌰는 1826년 샘터에 수치료 센터를 세웠고, 훗날 제네바와 파리의 투자자들이 기업을 만들어 샘물을 상품화한 것이 에비앙 생수라고 한다.가브리엘 까샤가 수치료 시설 겸 호텔로 지은 건물은 현재 에비앙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 곳에서는 생수병 라벨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에비앙 생수를 기념품(2유로)으로 살 수 있다. 나도 우리집 반려견 이름(Borii)을 새겨넣었다. 비록 반려견을 스위스에 데려오진 못했지만, 알프스와 레만호 여행지 곳곳에서 생수병과 함께 인증샷을 찍으며 보리와 함께 했음을 기억했다. 초콜릿의 나라 스위스스위스는 초콜릿의 나라다. 스위스의 1인당 연간 초콜릿 소비량(2021년 기준)은 11.6kg으로 세계 1위다. 2위 미국(9kg)과 격차가 꽤 크다. 유럽에서 초콜릿은 스위스와 함께 벨기에도 유명하다. 벨기에 초콜릿이 코코아 함양이 높은 ‘다크 초콜릿’이 주라면, 스위스 초콜릿은 ‘밀크 초콜릿’이 유명하다.치즈로 유명한 그뤼에르 옆 브록(Broc)에는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밀크 초콜릿을 만든 ‘라 메종 까이에(La Maison Cailler)’를 방문할 수 있다. 박물관 투어를 통해 알아보니 유럽에 코코아를 처음 들여온 건 스페인의 정복자들이었다고 한다. 까이에는 1875년 세계 최초로 우유와 초콜릿을 결합시켜 밀크 초콜릿을 개발했다. 쌉싸름한 초콜릿에 우유와 섞어 부드러운 맛을 내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우유의 수분 때문에 발생하는 곰팡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당시 기술로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 최초로 가루형 분유를 개발한 네슬레의 기술이 합쳐지면서 밀크초콜릿을 개발할 수 있었다. 스위스에서 소비되는 초콜릿의 80%는 밀크 초콜릿이라고 한다. 알프스의 넓은 초원에서 신선하게 짜낸 우유가 스위스 초콜릿을 부드럽고도 크리미하게 만든다고 한다. 라 메종 까이에에서는 직접 초콜릿을 만드는 워크숍에 참여할 수도 있고, 초콜릿도 맘껏 시식할 수 있다.몽트뢰, 로잔(스위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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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퀸의 음악이 흐르는 알프스 호수마을[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스위스에는 호수가 많다. 알프스의 빙하가 녹은 물이 곳곳에 강으로 흐르고, 호수를 만들어 낸다. 스위스 남서부 프랑스와의 국경 인근의 ‘레만호’는 알프스 산지 최대 호수다. 스위스는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인데도 레만호 덕분에 지중해 못지않은 청량감 넘치는 풍경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룹 퀸이 사랑했던 몽트뢰알프스의 빙하가 흘러내린 레만호의 물은 엄청 깨끗하고 맑다. 에메랄드빛 호수는 바닥까지 훤히 보인다. 길이 72km, 너비 14km인 초승달 모양의 레만호 둘레는 180km. 자전거로 쉬지 않고 한 바퀴 도는 데 12시간이 걸린다.바다처럼 보이는 레만호에서 흘러나온 물은 프랑스의 남쪽으로 흐르며 론강이 된다. 레만호의 서쪽 끝 제네바가 국제기구가 몰려 있는 금융도시라면, 동쪽 끝에 있는 몽트뢰는 프랑스의 니스나 칸 못지않은 국제적 휴양도시다. 제네바의 명물은 레만호에서 약 140m 높이로 연중무휴 물을 뿜어내고 있는 제네바 대분수(Jet d‘eau de Geneve)다. 몽트뢰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마르셰 광장의 프레디 머큐리 동상이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마침 영국의 전설적인 록그룹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생일(9월 5일)이 있는 9월 첫째 주말. 왼손에 지팡이를 짚고 오른손을 번쩍 들고 있는 머큐리의 동상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팬들이 가져온 꽃으로 장식돼 있었다. 머큐리의 트레이드마크 복장인 흰색 러닝셔츠에 콧수염을 달고 찾아온 남성 팬도 있었고, 광장에서는 여성 팬들이 모여 퀸의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마르셰 광장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의 몽트뢰 카지노에는 퀸의 음반을 녹음했던 스튜디오가 있다. 몽트뢰는 1967년부터 매년 여름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로 유명했는데, 이 스튜디오 덕분에 ‘퀸의 도시’가 됐다. 머큐리는 “몽트뢰는 나에게 제2의 고향. 영혼의 평화를 원한다면 몽트뢰로 오라”고 할 정도로 이 도시를 사랑했다. 생전에 그가 즐겨 식사하고 산책하고 곡 작업을 했던 단골집들은 지금도 ‘프레디 머큐리 투어’ 코스로 불리며 인기가 높다. 퀸의 멤버들은 1978년 음반 녹음을 위해 몽트뢰 스튜디오를 찾았다가 호숫가의 수려한 풍광과 첨단 녹음 시설에 반했다고 한다. 이듬해 이 스튜디오가 매물로 나오자 퀸은 아예 구입했다. 현재 이 스튜디오는 ‘퀸 박물관(Queen: The Studio Experience)’이 됐다. 머큐리가 1991년 숨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사했던 종이와 멤버들이 연주하던 기타와 드럼, 키보드 등이 전시돼 있다. 프레디 동상에서 호숫가를 따라 약 40분 걸어가면 레만 호반에 그림처럼 떠 있는 시용성(城)이 나온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서 공주가 사랑한 에릭 왕자가 사는 성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시용성은 12∼16세기 사보이아 왕가의 무기고 겸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하 동굴에는 종교개혁 운동가인 프랑수아 보니바르가 1530년부터 6년간 쇠사슬로 기둥에 묶인 채 투옥되기도 했다. 영국 출신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1778∼1824)은 서사시 ‘시용성의 죄수’에서 “쇠사슬에도 묶일 수 없는 영원한 정신, 자유여! 너는 지하 감옥에서도 환히 밝도다”라고 노래했다. 바이런의 시 덕분에 시용성은 세계인들에게 문학의 성지로 더 널리 알려졌다. 지하 동굴에는 와인을 저장하는 40여 개의 오크통이 보관돼 있다. 레반호 언덕 위에 있는 라보 포도밭에서 재배된 포도를 이용해 ‘클로 드 시용(Clos de Chillon)’ 자체 레이블을 단 와인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보 지구는 몽트뢰에서 로잔까지 레만호 북쪽 호숫가를 따라서 약 30km에 걸쳐 있는 계단식 포도밭이다. 총면적은 약 830ha(헥타르)에 이른다. 2007년 9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스위스 관광청에서 추천하는 13개 하이킹 코스 중 하나로 꼽힌 트레킹 성지다. 동쪽 뤼트리에서 서쪽 생사포랭까지 3∼4시간 걷다 보면 레만호를 배경으로 한 포도밭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알프스 산맥의 청정 환경에서 생산되는 스위스 와인은 세계적 명품 와인으로 꼽히지만,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땅이 좁아 와인 생산량이 매우 적을 뿐 아니라 대부분 스위스 내에서 소비해 수출하지 않기 때문. 그래서 스위스를 여행할 때는 현지에서 꼭 맛봐야 할 것이 스위스 와인이다. 라보 지구의 포도밭을 걷다가 도멘 보비와 비노라마 등의 와이너리에 들러 와인을 시음해 보았다. 이 지역은 화이트 와인이 유명한데, 스위스에서만 재배되는 ‘플랜트 로버트’ 품종 같은 레드와인은 부르고뉴 와인처럼 맑고 깨끗하면서도 묵직한 보디감과 향을 느낄 수 있다.● 로잔에서 유람선 타고 에비앙으로국제기구가 많은 제네바에서 승용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로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올림픽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올림픽 경기의 역사를 알게 해주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 올해 여름 2024 파리 올림픽에도 올림픽 기념물 수집팀을 파견했다고 한다. 올림픽 박물관에서 대한민국의 흔적을 찾는 것도 쏠쏠한 즐거움이다. 입구에서 오르는 계단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성화 봉송 최종 주자였던 정선만, 김원탁, 손미정 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이 새겨진 계단에는 김연아의 이름이 선명하다. 또한 서울 올림픽 당시 색동마크와 오륜기가 그려진 티셔츠,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 여자 하키 남북한 단일팀 유니폼도 눈길을 끈다. 로잔 올림픽 박물관은 레만호의 멋진 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현지인들의 웨딩사진 촬영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특히 박물관 꼭대기 층에 자리 잡은 ‘톰 카페’는 로잔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테라스 석으로 꼽힌다. 레만호와 알프스의 화려한 풍경을 바라보며 브런치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레만호는 유람선을 타고 곳곳을 여행할 수도 있다. 로잔의 우시 선착장에서 유람선(CGN)을 타고 30분 만에 프랑스 에비앙레뱅에 다녀오는 코스도 그중 하나. 에비앙 선착장에 내려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에비앙 생수의 수원지를 찾아갈 수 있다. 분홍빛 타일로 장식된 ‘카샤의 샘물(Cachat Spring)’이다. 18세기 후반 이곳에 정원을 소유하고 있던 가브리엘 카샤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1790년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오베르뉴에서 온 라이제르 후작이 카샤의 집에 2년간 머물면서 이 샘물을 매일 마셨다고 한다. 그는 신장과 간이 안 좋았는데, 이 샘물을 마시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카샤는 1826년 샘터에 수치료 센터를 세웠고, 훗날 에비앙 생수 회사가 됐다. 카샤가 수치료 시설 겸 호텔로 지은 건물은 현재 에비앙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선 에비앙 생수병 라벨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생수를 기념품(2유로)으로 살 수 있다. ● 초콜릿의 나라 스위스 스위스는 초콜릿의 나라다. 스위스의 1인당 연간 초콜릿 소비량(2021년 기준)은 11.6kg으로 세계 1위다. 2위 미국(9kg)과 격차가 꽤 크다. 벨기에 초콜릿이 코코아 함량이 높은 다크 초콜릿이 주라면, 스위스 초콜릿은 밀크 초콜릿이 유명하다. 알프스의 넓은 초원에서 신선하게 짜낸 우유가 스위스 초콜릿을 부드럽고 크리미하게 만든다고 한다.치즈의 고장으로 유명한 그뤼에르 옆 브로크에서는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밀크 초콜릿을 만든 ‘라 메종 카예(La Maison Cailler)’를 방문할 수 있다. 카예는 1875년 세계 최초로 우유와 초콜릿을 결합시켜 밀크 초콜릿을 개발했다. 쌉싸름한 초콜릿에 우유를 섞어 부드러운 맛을 내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우유의 수분 때문에 발생하는 곰팡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당시 기술로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 최초로 가루형 분유를 개발해 신생아들을 살린 네슬레의 기술이 합쳐지면서 밀크 초콜릿을 개발할 수 있었다. 라 메종 카예에서는 직접 초콜릿을 만드는 워크숍에 참여할 수 있고, 초콜릿도 맘껏 시식할 수 있다.글·사진 몽트뢰·로잔=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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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양군, 담빛파크콘서트 개최

    담양군문화재단(이사장 이병노)은 6~7일 담빛 음악당에서 ‘담빛 파크콘서트’를 개최한다. ‘담빛 파크콘서트’는 휴식과 힐링, 음악이라는 키워드를 접목한 복합문화 행사. 가평의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 평창의 ‘계촌 클래식 축제’와 같은 지역 기반의 대형 야외 음악 축제를 추진하고자 올해 처음으로 시도하는 프로젝트다. 담양군의 야외 공연 시설인 담빛 음악당에서 오후 3시부터 먹거리 부스와 체험부스, 이벤트 존이 열리며 전남도립대, 60만 구독자 유튜버 ‘와인 강’도 참가한다. 힐링 요가, 사진 촬영 이벤트와 공연 관람에 필요한 캠핑의자는 사전 예약을 통해 받을 수 있다. 공연은 저녁 7시 반에 시작해 약 2시간 동안 진행된다. 첫날 6일(금)에는 ‘프렐류드’의 재즈 베이시스트 최진배가 주도하고 18명의 실력파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하는 ‘최진배 재즈 빅밴드’가 스윙재즈의 사운드로 담빛 음악당을 가득 채운다. 리더 최진배는 버클리 음악대학 학사, 뉴욕대학교 석사 출신으로 2005년 프렐류드 1집 Croissant을 시작으로 국악인 이희문과 ‘한국남자 1·2집’ 앨범을 냈다. 또한 ‘메리고라운드’의 보컬 남예지, 쿠마파크의 색소폰 연주자 한승민, 그리고 ‘라 벤타나’의 아코디언 연주자 정태호 등 유명 재즈 연주자들도 참여한다. 둘째 날 7일(토) 공연에는 가수 김광석이 함께 활동했던 그룹 ‘동물원’이 추억과 낭만을 노래한다. 동물원은 1988년 데뷔 직후 ‘거리에서’‘변해가네’ 등 명곡을 탄생시켰으며, 동물원 1집과 2집은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 선정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응답하라 1988에서 ‘혜화동’,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가 드라마 삽입곡으로 나오면서 현재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동물원의 음악을 대규모 밴드·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가운데 ‘담양 담빛 현악 앙상블’학생 단원들도 바이올린·베이스를 들고 동물원과 함께 무대에 올라 연주자들과 호흡을 맞춘다. 담양군문화재단 관계자는 “힐링을 주제로 한 이번 행사가 지역 거점 야외 음악 페스티벌로 발전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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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항아리-누비옷, 파리를 사로잡다

    “한류 드라마, K팝, 영화 등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잖아요. 한류의 바탕에 바로 우리 전통문화 원형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 원형으로 정면 승부해 보기로 했습니다.” 7월 25일∼8월 11일 파리 올림픽 기간 ‘코리아하우스(메종 드 라 시미)’에서 열린 ‘댓츠 코리아: 시간의 형태’ 전시를 총괄했던 김민경 예술감독을 만났다. 그는 코리아하우스 메인 중앙홀을 비롯한 3개의 공간에서 원형, 현재, 미래를 주제로 한 전시를 펼쳤다. 첫 번째 방인 메인 로비에서는 ‘형태의 시작’을 주제로 한 전시를 선보였다. 한복과 달항아리, 궁중채화 등으로 한국 전통의 원형을 담아냈다. 한국의 선비정신을 나타내는 달항아리와 밀랍을 빚어 만든 궁중채화로 한국적 미(美)의 조화로움을 표현했다. 달항아리 뒤쪽 벽에는 ‘답호’와 ‘당의’, ‘원삼 혼례복’이 원색 전통 한복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나인 화협옹주(1733∼1752) 묘에서 출토된 화장품을 재현한 전통 화장품도 전시됐다.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전시 공간인 ‘원형의 미래’였다. 국가무형유산 누비장 고(故) 김해자 장인의 ‘손누비 장옷’을 전시한 방이다. 장옷과 함께 현대 과학기술을 접목한 ‘키네틱 아트’(움직이는 예술)를 통해 전통 길쌈 방식을 현대의 언어로 재해석하고 시간의 흐름을 형상화했다. 김해자 장인은 파리 전시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병석에서 제자와 가족들에게 “우리나라 누비옷이 세계에 알려지고, 글로벌 명품으로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고 한다. 김 장인의 누비옷은 안팎을 얇게 붙인 천을 0.3cm 간격으로 촘촘하고 세밀하게 바느질하는 ‘세(細)누비’다. “어두운 전시장에 김해자 선생의 마지막 유작인 손누비 장옷이 걸려 있고, 100개가 넘는 조명과 음악, 실이 싱크를 맞춰 연주를 합니다. 누비를 만드는 실처럼 해금, 가야금 같은 우리나라 현악기의 줄도 모두 실입니다. 이 방에 들어온 외국인 관람객들도 굉장히 몽환적인 느낌인가 봐요. 러닝타임이 4분이 좀 넘는데, 대부분 서너 번씩 보고 나가곤 했습니다.” 서울대 국악과(작곡 전공)를 졸업한 김 감독은 세종문화회관 삼청각에서 국악공연 전문위원을 맡는 등 국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한복진흥센터장, 해외문화홍보원 문화예술국제교류 프로젝트 총감독을 맡아 한복과 한식, 음악과 전시 등 해외에 한국의 미를 알려왔다. 숭실대에서 미디어아트로 박사 과정을 수료한 미디어아트 전문가이기도 하다.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릴 때 음악, 미술, 태권도 등 한 분야만 따로 하기보다는 다양한 장르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되는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장인의 손길로 정성껏 다듬은 세밀한 작품이 많습니다. 세밀함은 왕처럼 귀한 것이지요. 평생 갈고닦은 장인 솜씨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한국 문화의 정수를 해외에 알리고 싶습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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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컬처에 담긴 우리 원형의 힘,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한류 드라마, K팝, 영화 등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잖아요. 한류의 바탕에 바로 우리 전통문화 원형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 원형으로 정면승부해보기로 했습니다.”지난 7월25~8월11일 파리올림픽 기간 중에는 한국문화를 알리는 ‘코리아하우스(메종 드 라 시미)’도 운영됐다. 장소는 올림픽 양궁 경기장이 펼쳐졌던 앵발리드 경기장 인근 파리 7구에 있는 ‘메종 들라 시미(Maison de la Chimie)’. 주요 경기 응원전이 펼쳐졌고, 15개 기관이 주최하는 다양한 한국문화 홍보 행사가 펼쳐졌다.그 중에서 1층 메인홀 로비 등 3개의 공간에서 펼쳐진 메인 전시 ‘댓츠 코리아: 시간의 형태’는 한복, 한식, 한지를 주제로 세련된 한국의 아름다움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코리아하우스를 방문한 관람객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앙홀. 국가무형유산 보유자부터 현대 작가까지 총 17명이 참가한 전시였다. 이 전시를 총괄했던 김민경 예술감독은 “문화는 일방적인 전파가 아니고, 상호간의 교류라고 생각한다”며 “프랑스식 샹들리에가 있는 공간이라 그 나라 문화도 존중을 하면서, 스며들듯이 조화롭게 보여지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김 감독은 각기 다른 3개의 방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총 3장으로 구성했다. 골드와 연한 파랑, 어두운 각기 다른 3개의 공간 색깔에 맞춰 먹색과 흰색 가구 위에 자개를 입히고 한국식 가구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뒤 각 방을 ‘원형-원형과 현재-원형의 미래’ 순으로 배열했다.첫번째 방인 메인로비에서는 ‘형태의 시작’이란 주제로 한복과 달항아리, 궁중채화 등으로 한국 전통의 원형을 담아냈다. 한국의 선비정신을 나타내는 달항아리와 밀랍을 빚어 만든 궁중채화로 한국적 미(美)의 조화로움을 표현했다.“예전에 궁궐에서 연회를 할 때는 항상 꽃이 있었어요. 그러나 겨울에는 꽃이 없기 때문에 채화를 만들었지요. 이번에 전시된 채화는 꿀벌의 벌집에서 채취한 밀랍으로 만들어 채색을 했어요. 그랬더니 작품을 설치하는 날 거짓말처럼 진짜 벌이 날아오더군요. 문을 다 열어놓으니까 벌들이 진짜 꽃인줄 알고 왔어요.”달항아리 뒷쪽 벽에는 전통한복인 ‘답호’와 ‘당의’, ‘원삼 혼례복’이 원색의 전통 한복 그대로 아름다움을 뽐냈다. 답호는 사대부들이 겉옷 위에 덧입는 민소매 또는 반팔 옷. 옆이 틔워져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걷거나 말을 타거나할 때도 불편함이 없다. 김 감독은 “측면 디자인도 너무 예뻐 요즘 디자인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남자 옷”이라고 소개했다. 원삼도 예전 혼례복 그대로의 원형인데, 색깔만 황금색 공간에 맞게 보라색으로 바꾸었다고 한다.“요즘 전시나 공연 작품을 보면 대부분 디지털 형태가 많습니다. 해외에서 전시하는 경우 원형 그대로 가져가기 힘들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죠. 그러나 저는 한국에는 있고, 프랑스에는 없는 ‘원형’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골드빛 공간에 한복이 세 벌 밖에 전시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파스텔톤 한복은 묻혀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간에 어울리면서도 한복이 도드라질 수 있는 원색의 컬러로 한복으로 제작했지요.”김 감독은 “한복의 마지막 완성은 장신구”라고 말했다. 전시장엔 한복에 어울리는 산호, 비취, 호박, 진주, 칠보 등 원석의 보석으로 만든 전통 노리개와 장신구, 화협옹주(1733~1752) 묘에서 출토된 화장품을 재현한 전통 화장품도 선보였다.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친누나인 화협옹주는 스무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2016년 경기 남양주 화협옹주묘 발굴 과정에서 빗, 거울, 눈썹먹 등 화장도구와 갈색고체 크림류, 적색가루, 액체류 등 화장품, 그리고 화장품이 담겨 있던 소형 도자기가 한묶음으로 발견됐다.한국전통문화대학교 미술공예학과 이정용 교수팀이 청화백자 문양과 형태를 살린 화장품 용기를 디자인했고, 화장품 제조회사 코스맥스가 동백나무씨기름, 당호박씨기름 등을 활용한 ‘화협옹주 도자에디션’ 전통화장품을 복원해낸 것.“화협옹주 화장품은 270여 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작품이예요. 자개로 장식한 쇼케이스 위에 장신구와 함께 전통 화장품을 전시했어요. 한국 여성이 한복을 입고, 화장을 하고, 원석 보석으로 만든 떨잠(조선시대 왕비나 상류계층 부인이 의식 때 큰머리나 어여머리에 꽂았던 ‘떨리는 비녀’ 머리 장식품) 족두리와 장신구로 치장을 하고 파리로 여행을 온다는 느낌의 스토리로 준비를 한 전시였죠.”두번째 방 ‘오늘의 형상’은 소반과 한지를 이용한 과거와 현재의 작품을 소개했다. 전통 나주 소반과 함께 재활용 플라스틱 소재를 적용한 오렌지색 투명 현대식 소반(하지훈 작가), 전통 한지로 연출한 ‘한지꽃’, 한지에 옻칠과 금속 프레임을 활용한 현대적 ‘한지 조명’을 선보였다.이번 전시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전시공간인 ‘원형의 미래’였다. 국가무형유산 누비장 고(故) 김해자 장인의 ‘손누비 장옷’을 전시하는 방. 장옷과 함께 현대 과학기술을 접목한 ‘키네틱 아트(움직이는 예술)을 통해 전통 길쌈 방식을 현대의 언어로 재해석하고 시간의 흐름을 형상화했다.“우연히 창덕궁에서 열린 한복 전시회를 갔다가 김해자 장인의 누비옷을 처음 봤어요. 낙선재 방 안에 전시된 누비 한복을 보고 너무 멋있어서 소름이 쫙 돋는 거예요. 이 옷을 꼭 한번 메인 무대에 세우고 싶다는 생각에 선생님을 찾아갔죠.”김 감독은 전시 전 파리 현장 답사를 가기 전에 경주에 계신 김해자 선생을 찾아뵙고 간곡히 부탁드렸다고 한다. “잘 다녀오라”고 하시던 장인은 그러나 김 감독이 파리에서 돌아오기 전에 돌아가셨다. 김해자 장인은 병석에서 제자와 가족들에게 마지막 소원을 밝혔다고 한다. 우리나라 누비옷이 세계에 알려지고, 글로벌 명품으로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소망이었다.‘누비’는 보온성과 옷감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옷감의 겉감과 안감 사이에 솜, 털, 닥종이 등을 넣고 맞붙이는 전통 바느질 기법이다. 누비의 간격은 0.3cm부터 20cm까지 다양하다. 두꺼운 솜옷은 간격이 넓고, 바느질도 성글게 돼 있다. 김해자 장인의 누비옷은 옷감 사이에 아무 것도 넣지 않고 안팎을 얇게 붙인 천을 0.3cm 간격으로 촘촘하고 세밀하게 바느질하는 ‘세(細)누비’다.“가느다란 바늘로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선생님의 마지막 유작인 ‘손누비 장옷’을 보면 소름이 돋고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조선 백자처럼 단아한 모습이 딱 선생님의 풍모를 닮았습니다. 와인색 고름 색깔도 너무 기가 막혀요. 전시장에 걸려 있는 누비옷을 보니, 돌아가신 선생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김 감독은 김해자 장인이 작업실에서 바느질하던 도구까지 챙겨 파리 전시장 한 켠에 장식해놨다. 그리고 이러한 미래의 원형이 되는 작업의 형태와 시간을 미디어아트 그룹 사일로랩의 ‘키네틱 조명 설치작품(Kinetic Lighting Installtion)’을 통해 한국 음악에 맞춰 조명과 움직임을 이용한 미디어아트로 형상화했다.“어두운 전시장에 김해자 선생의 손누비 장옷이 걸려 있고, 100개가 넘는 조명이랑 음악, 실이 싱크를 맞춰 연주를 합니다. 누비도 실로 옷을 짓고, 해금, 가야금과 같은 우리나라 현악기의 줄도 모두 실입니다. 이 방에 들어온 외국 관람객들도 굉장히 몽환적이고 묘한 느낌인가 봐요. 미디어아트 러닝타임이 4분이 좀 넘는데, 한 번만 보고 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줄 서서 들어오면 거의 세번, 네번까지 듣고 나가곤 했죠.”- 프랑스 관람객들 반응은.“올림픽 기간 중 18일 동안 전시를 하면서 매일 4000명 가까운 인원이 줄을 서서 입장을 하더군요. K팝, K드라마로 한국문화에 친숙해진 외국 관람객들은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세련미에 놀라워하면서도 너무 좋아하더군요. 가장 인기가 많았던 세번째 김해자 선생님 ‘누비옷’ 미디어아트 전시실은 프랑스 친구가 안내를 담당했는데,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도 웃음을 잃지 않더군요. 자기가 설명하는데 다들 너무 진지하고, 잘 받아들여주는 데 감동적이라 하나도 안 피곤하다고 말했습니다. 관람객들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음악에 이끌려 이 공간에 들어왔다가 너무 충격적인 작업을 관람하게 됐다’는 반응을 하기도 했습니다.”서울대 국악과(작곡 전공)를 졸업한 김 감독은 세종문화회관 삼청각에서 국악공연 전문위원을 맡는 등 국악 작곡과 공연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 그런가 하면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한복진흥센터 한복진흥센터장, 해외문화홍보원 문화예술국제교류 프로젝트 총감독을 맡아 한복과 한식, 음악과 전시 등 해외에 한국의 세련된 미(美)를 알리는 해외홍보프로젝트 전문가이기도 하다. 또한 숭실대에서 미디어아트로 박사학위를 수료한 뒤 국악과 컴퓨터, 미디어아트 분야를 대학에서 가르치고 미디어아트 전시를 기획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 활약해왔다.- 국악 작곡을 전공하셨는데, 미디어아트 전문가가 되신 이유는.“대학에서 국악을 교양수업을 가르치는 데 학생들이 모두 잠잘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우리 전통문화를 너무 외면하고, 지루해하길래 좀더 효과적으로 보여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전통이랑 미디어아트를 붙여서 소개하는 작업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국립민속박물관하고 김홍도, 신윤복 그림 속 인물들이 실제로 춤을 추고, 국악을 연주하는 미디어아트를 처음 시도했어요. 독일 박람회에서도 우리 소리와 음악, 그림을 미디어아트를 통해 소개해주는 작업을 하니 반응이 무척 좋았습니다.제가 전시 미디어아트를 7년 정도 했는데, 단 원칙이 있었어요. 거의 대부분 박물관과 협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박물관에는 원형이 있으니까. 원형이 최소한 70~80%가 있는 상태에서 미디어아트가 들어가야 전시가 조화롭게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사람들이 지루해하니까 좀더 잘 소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디어아트를 선택한거죠. 그런데 요즘은 미디어아트가 너무 ‘투 머치(Too much)’한 경우가 많아요. 돈 주고 산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뿌린다고 해서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몇 십년 동안 묵힌 장맛과 편의점에서 파는 된장 맛하고 똑같지는 않잖아요. 수십년 동안 장인으로서 노력해온 사람에게서 밀당과 향기가 나오는 거지, 돈주고 쉽게 사는 작업에서는 화려하지만 향기를 느낄 수 없어요. 미디어아트도 화려한 기술보다는 원형과의 조화가 핵심이라고 봅니다.“-화협옹주의 화장품을 전시한 의미는.“올해 초에 덕수궁에서 화협옹주 화장품 전시를 보고 참 좋은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K뷰티만 있는 게 아니라 K공예도 같이 들어가고, 역사적인 스토리가 있으니까요. 270년 만에 무덤에서 나온 전통 화장품을 복원하고, 용기를 디자인하고, 도자기로 만들고 하는 작업은 모두 오리지널이 있는 거잖아요. 원형을 갖고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이라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통 장신구는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데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대륙별로 좋아하는 콘텐츠가 다른데, 사극 드라마를 본 미국, 인도 등의 시청자들이 한국의 전통 장신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어요.”김 감독은 2000년대 초반부터 해외문화홍보원에서 한국문화를 알리는 해외문화홍보 프로젝트 예술감독을 꾸준히 맡아왔다. 유럽은 물론 중동, 남미 등 전세계를 돌며 수교기념 행사와 순방행사, 한국문화원 개원 축하행사 등을 통해 한복, 한식, 국악, 문학, 태권도 등 다양한 공연과 전시를 펼쳐왔다.“해외에 한국문화 홍보 공연이나 전시를 할 때는 판소리, 가야금 같은 국악만 하지 않아요. 성악이나 오페라도 있고, 태권도와 비보이 공연도 해야하고, 한식과 한복, 공예 전시도 해야 합니다. 공연이랑 전시, 미디어아트까지 모두 기획하고 연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곡을 하면서 공간을 채우는 다양한 악기소리를 분석하는 작업을 해왔는데, 공간을 채우는 전시 기획도 음악과 다르지 않습니다.”-공연, 전시 전문가를 하다가 한복진흥센터장을 맡았던 이유는.“제가 한류 문화 확산에 대한 전문가로 일을 해오다 보니까, 한복도 이렇게 알리고 키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됐습니다. 제가 한복을 만드는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국악 공연계에 오래 있으면서 한복은 늘 친숙했습니다. 특히 해외공연을 가면 전통 한복의 퀄리티를 늘 생각했죠.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현대미술관 개관식에는 소수의 VIP만 초청돼 국악공연을 하는데, 연주자들에게 정말 작품같은 전통한복을 입히곤 했습니다. 국악계도 그동안 사람들이 소외받은 분야인데, 한복을 만드는 장인들은 더욱 더 그런 상황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한복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앞으로의 계획은.“우리문화를 세계에 알릴 때 한 분야만 따로 하기 보다는, 다양한 장르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흔히 동양의 미를 여백의 미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우리나라에도 정말 장인의 손길로 정성껏 다듬은 세밀한 작품이 많습니다. 세밀함은 왕처럼 귀한 것이지요. 평생 갈고 닦은 장인의 솜씨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한국문화의 정수를 담은 기획을 하고 싶습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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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숫가 노을 반신욕… 오크통에서 행복이 몽글몽글 [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호주 남동부 최대 도시 멜버른이 있는 빅토리아주는 대자연 속에서 걷고, 야생동물을 만나고, 와인과 미식을 즐길 수 있는 천혜의 여행지다. 멜버른에서 동쪽으로 뉴사우스웨일스(NSW) 주경계까지 542km 뻗어 있는 ‘깁스랜드(Gippsland)’는 대표적인 와인산지이자 미식 여행지. 바다를 바라보는 윌슨스 곶과 흑조가 헤엄치는 광활한 호수, 공룡이 살던 고사리숲이 우거진 타라불가 국립공원에서 경이로운 자연을 만났다. ● 공룡들이 거닐던 숲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 사시사철 울창한 숲이 우거진 정글을 ‘우림(雨林·Rainforest)‘이라고 한다. 보통은 적도 부근에 ’열대우림‘이 많이 발달해있다. 그런데 지구상 일부 지역에는 ’냉온대 우림(Cool-temperate Rainforest)이 형성돼 있는 곳도 있다. 열대우림 보다는 인간의 생존환경에 알맞기 때문에 일찍부터 숲이 개간당해 사라져 쉽게 볼 수 없을 뿐이다. 그런데 호주 멜버른에서 남동쪽으로 약 180km 떨어진 사우스 깁슬랜드에 있는 ‘타라불가 국립공원(Tarra-Bulga National Park)은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 온대우림을 만나볼 수 있다. 양치류로 뒤덮인 울창한 숲에는 최상위 층에 유칼립투스와 거대한 마가목, 머틀너도밤나무가 지붕을 이루고 있고, 그 아래 숲에는 나무고사리와 버섯, 이끼 등이 자라고 있다. 타라불가 국립공원의 여러 트레킹 코스 중에 ’코리건 현수교(Corrigan‘s Suspension Bridge)는 30분 정도 걸으면 열대우림과 양치류가 뒤덮고 있는 계곡을 감상하는 유명한 코스다. 입구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로얄 유칼립투스 나무는 키가 약 74m로, 영국인들이 호주에 도착한 1840년에도 있었기 때문에 200살이 넘은 나이로 추정된다고 한다. 코리건 현수교에서 아래 계곡을 내려다보면 거대한 고사리들이 우산을 펼친 듯 가득 메우고 있다. 우리나라 땅에서는 고사리가 풀처럼 자라는데, 이 곳에는 야자수처럼 쭉쭉 뻗는 ‘나무 고사리(Tree Fern)’다. 공룡들이 걸어다녔던 중생대의 풍경이 그대로 살아 있는 숲이다. 현수교를 건너 계곡 밑으로 내려가면 고대 곤드와나 대륙에 번성했다는 너도밤나무가 거대한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는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 곤드와나 대륙은 약 3억 년 전인 고생대 후기부터 1억 년 전인 중생대 중반까지 남반구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초대륙이다. 약 2000만년 전에 호주 남동부 전역에 번성했던 광활한 너도밤나무 숲의 후손이 국립공원에 일부 남아 있는 것이다. 숲 속 바닥에는 이끼와 버섯이 자라고 있다. 트레킹을 하고 나오는 길에 호주의 토종새인 ‘금조(Superb Lyrebird)’를 만났다. 미니 공작새처럼 날개를 펼치면 아름다운 새다. 호주 10센트 동전 뒷면에 새겨진 금조는 다양한 성대모사를 하는 새로 유명하다. 수컷이 암컷을 구애할 때 다양한 새소리를 따라하기도 하고, 도시에 사는 금조는 전기 드릴, 망치질, 카메라 셔터 소리, 아기 울음 소리까지 정확하게 따라해 유명해진 새다. 깁스랜드에는 윌슨스 곶 주변에 커다란 호수가 발달해 있다. 깁스랜드 호수에 있는 레이몬드섬에선 호주의 대표적인 유대류 동물인 야생 코알라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길이가 약 6km, 너비가 2km의 작은 섬. 해안에서 불과 200m 떨어져 있어 페인즈빌 마을에서 페리를 타면 5분이면 섬에 도착한다. 레이몬드 섬에는 1953년에 코알라 몇 마리를 들여왔는데, 그 이후에 코알라가 번식해 퍼졌다고 한다. 이 섬에는 다리를 놓지 않고 1889년부터 페리를 운항해왔기 때문에 섬은 빠른 개발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다. 코알라가 유칼립투스 나무 한 그루마다 한 마리씩 평화롭게 살고 있는 그야말로 ‘코알라 천국’을 이루고 있다. 레이몬드 섬에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코알라 트레일’을 즐길 수 있다. 유칼립투스 나무 밑을 지날 때는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쳐다봐야 한다. 나무 위에 커다란 인형같은 코알라가 한 마리씩 앉아 있다. 코알라는 잠을 자거나, 유칼립투스 잎을 먹고 있고, 운이 좋으면 손을 뻗어 가지를 붙잡고 느릿느릿 움직이거나, 요가를 하고 있는 코알라를 만날 수도 있다. 이 섬에는 캥거루와 바늘두더지, 새 등 다른 야생동물도 많다. 캥거루들이 개인주택의 울타리까지 넘어서 집 안마당까지 들어와 놀고 있는 모습이 놀라웠다. 레이몬드 섬에서 나와 페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노을이 지고 있다. 황금빛으로 물든 호수에는 검은색 새들이 많이 떠 있다. 모양은 영락없는 백조인데, 색깔이 검다. 말로만 듣던 블랙스완(Black Swan), 흑조다. 차이콥스키 발레 ‘백조의 호수’ 3막에서는 백조 오데트로 변장한 흑조 ‘오딜’이 지그프리트 왕자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내털리 포트먼이 완벽하게 연기하고 싶어했던 1인 2역 변신 장면이다. 경제 용어로 ‘블랙 스완’은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흑조는 호주에만 살고 있는 특산종인데, 유럽인들이 호주에 와서 검은 백조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이해가 가는 용어다. ●미텅 온천의 포썸호주 빅토리아주 깁슬랜드 호수 지역에는 지하 500미터에서 솟아나는 미네랄이 풍부한 온천도 있다. ‘미텅 온천(Metung Hot Spring)’에서 하이라이트는 광활한 깁스랜드 호수가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노을지는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노천에 있는 참나무로 만든 와인숙성용 오크통 안에 들어가 온천을 즐기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온천을 커다란 탕 속에서 여럿이 함께 하는 경우가 많은데, 호주인들은 각자의 오크통 안에서 하는 것을 즐긴다. 오크통 안에는 섭씨 38~40도 가량의 온천수가 솟아나는데, 통 안으로 몸을 집어 넣으면 부피만큼 물이 넘쳐난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통 안에서 ‘유레카’하면서 부피의 원리를 깨달았던 순간을 재현하는 체험이다. 개인용 오크통 온천 뿐 아니라 옆에는 여러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노천탕도 있다. 호주 빅토리아주에는 1997년 모닝턴 반도에 개장한 페닌슐라 온천도 있다. 1990년대 초반 찰스와 리처드 데이비슨 형제가 일본에 머물면서 수십개의 온천을 경험하고 난 뒤 ‘왜 호주에도 온천이 있는데, 이런 시설을 갖춘 관광지가 없을까?’하며 최신 시설을 갖춘 노천온천을 개발했다. 페닌슐라 온천그룹이 깁스랜드에도 새롭게 미텅온천을 개발해 호주인들도 한해 온천 관광객이 5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온천을 즐기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고 한다. 미텅온천에는 호숫가에 럭셔리한 시설을 갖춘 글램핑 숙소가 있는데, 천막 한켠 테라스에는 노천에 있는 것과 똑같은 개인용 오크통 온천시설이 있어 숙소에서 프라이빗 온천을 즐길 수도 있다. 미텅온천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 또다른 유대류 동물인 주머니 여우 ‘포썸(Possum)’을 만났다. 긴꼬리를 흔들며 후다닥 소리를 내며 빠르게 움직이는 동물로 고양이와 미어캣를 합쳐놓은 생김새다. 얼굴은 쥐처럼 생겼고, 맑은 눈동자와 분홍색 코가 정말 귀여운 동물. 그런데 크기는 고양이 정도로 크다. 한참 사람들을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살짝 다가서자 꼬리를 흔들며 빠르게 사라졌다. ●와인과 미식 여행깁슬랜드 미첼강 계곡 위에 자리잡고 있는 라이트풋(Lightfoot) 와이너리는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드넓은 포도밭 풍경이 압권이다. 풍부한 붉은 토양을 가진 고대 석회암 능선에는 머틀 포인트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와이너리 안에서는 피노 누아, 시라즈, 샤르도네 등 다양한 품종의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주변 농장에서 생산되는 치즈, 올리브와 함께 와인을 마신다. 호주 와인은 1800년대 중후반 유럽에서 온 개척자들이 포도나무를 심으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호주 건국(1901년) 이전부터 생산된 셈이다. 호주 와인을 대표하는 품종은 ‘시라즈’다. 호주에서 자라는 포도나무 세 그루 중 한 그루가 시라즈 품종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론 북부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는 품종인 시라(Syrah)가 호주로 건너가 ‘시라즈(Shiraz)’라고 불리게 됐다. 같은 품종이지만 땅에 따라 확연히 다른 맛을 낸다. 프랑스 론 북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시라가 주로 붉은 베리, 후추 등 드라이하고 강인한 맛이라면, 호주의 시라즈는 말린 베리, 초콜릿, 흙 향이 뒤섞인 부드럽고 농밀한 맛이 특징이다. 그러나 호주 와인에 시라즈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으로 유명한 피노 누아(Pinot Noir)도 많이 재배한다. 빅토리아주 모닝턴페닌슐라, 야라밸리, 깁스랜드 등에서는 좀더 화려한 풍미의 과일향이 나는 피노 누아가 생산된다. 깁스랜드의 윌슨스 곶의 뷰를 감상할 수 있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거니스 사이다(Gurney‘s Cider)’는 영국 정통 제조방식의 사과주(Cider)를 생산하는 양조장이다. 사이다는 사과쥬를 발효해서 만드는 술. 거니스 사이다 농장에는 프랑스, 영국, 미국, 아일랜드에서 가져온 5000여 그루의 사과주용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양조장에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사이다 셀러(저장고)’라고 주장(?)하는 사과주 저장고가 있다. 지하 저장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사과주들이 보인다. 이곳에서 알콜도수 16도 짜리 사이다, 사과주를 증류한 41도짜리 브랜디를 시음할 수 있다. 양조장 아래쪽에는 폐선로를 개조해 만든 자전거길인 ‘그레이트 서던 레일 트레일(Great Southern Rail Trail)‘이 지나가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호주 빅토리아주 그레이트 오션로드로 가는 헬리콥터 안에서 비가 갠 후 둥그런 원형 모양의 무지개를 만났다. 지상에서 보면 무지개는 반원으로 보이지만, 하늘에서 보면 무지개가 원형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그레이트 오션로드의 한 가운데에 있는 아폴로베이에는 ’야생동물 보호구역 투어‘(Wildlife Wonders)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이 곳에서 타조를 닮은 야생 조류인 ‘에뮤(Emu)’를 만났다. 에뮤는 호주의 국조(國鳥)로, 전세계에서 호주에서만 살고 있는 대형 주조류(走鳥類)다. 몸 길이 1.8m, 몸무게 35~54kg 정도 나가는 큰 새다. 이 곳에서 파는 스폿티드 에일(Spotted Ale) 맥주병의 라벨에는 점이 박혀 있는 귀여운 야생동물이 그려져 있다. ‘주머니 고양이’로 불리는 Tiger Quoll(타이거 퀄)이다. 옆에는 ‘이 맥주를 마시면 수익금 100%를 멸종 위기에 처한 타이거 퀄 보호를 위해 쓰인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세상에 호주 밖에 없는 신기한 유대류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노력을 하고자 시원한 맥주를 한잔 마셨다. 깁슬랜드(호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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