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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뉴욕포스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소를 머금고 지시봉으로 서반구 지도를 가리키는 그림을 1면에 큼지막하게 실었다. 캐나다 위에 붉은 글씨로 가위표를 치고 ‘51번째 주’라고 새로 썼다. 덴마크령 그린란드는 ‘아워 랜드(우리 땅)’, 멕시코만(灣)은 ‘아메리카만’, 파나마 운하는 ‘파나-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하가 됐다. 당시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허풍에 대한 풍자로 읽혔지만 베네수엘라 사태가 터진 지금은 웃고 넘길 수 없게 됐다. ▷3일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압송한 ‘확고한 결의’ 작전 직후 미국 백악관 공식 인스타그램엔 트럼프 대통령의 흑백사진과 함께 ‘FAFO’라는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까불면 죽는다’는 뜻이다. 베네수엘라를 친 진짜 이유도 밝혔다. 1년 6개월 안에 미국 회사들을 통해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을 재건할 수 있다며 “유가를 낮게 유지할 수 있어 미국에 좋은 것”이라고 했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개입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콜롬비아에 대해 “코카인을 제조해 미국에 파는 걸 즐기는 역겨운 남자가 통치하는 나라”라며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라고 했다. 군사작전을 할 거냐는 질문엔 “괜찮게 들린다”고 했다. 쿠바는 “그냥 무너질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마약·이민자의 유입을 차단하고, 천연자원 확보 등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 중남미를 탐내는 중국, 러시아엔 경고를 보낸 것이다. 미국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에는 ‘서반구에서 미국의 우위 회복’이 ‘트럼프 수정조항’이라는 이름으로 들어 있다. ▷덴마크령 그린란드에 대한 욕심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4일 “그린란드 도처에 러시아와 중국 선박이 깔려 있다”며 “국가 안보 관점에서 그린란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5일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은 “누구도 미국과 군사적으로 싸울 순 없을 것”이라며 “세상은 힘과 권력이 지배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린란드는 유럽과 아시아, 북미를 잇는 최단 항로이자 희토류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보물섬’이 탐난다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멤버이자 오랜 동맹의 영토를 뺏겠다는 노골적 선언에 유럽이 아연실색하고 있다. ▷미국이 중남미를 ‘근외(近外·near abroad)’로 여기며 장악에 나서면서 중국과 러시아 역시 들썩일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과 마찬가지 논리로 중국이 대만을, 러시아가 옛 소련 지역을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국 이익을 위해 힘자랑에 나선 미국의 행보가 세계 정세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대가 다시 왔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던 보험사의 화끈한 말은 보험금 청구를 할 땐 싸늘하게 바뀌곤 한다. 사전고지 의무를 위반했다느니, 별도 특약이라느니 깨알 같은 약관엔 보험금을 줄 수 없는 이유만 빼곡하다. ‘무조건 보장’이란 말을 믿었기에 더 쓰라리다. 요즘 반도체 기업들의 심정이 딱 이렇다. 틈만 나면 반도체가 나라의 미래라며 파격적으로 지원하겠다던 정부와 정치권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발목을 잡는다.앞으론 파격 지원, 뒤로는 발목 잡기 일주일 전 SK하이닉스는 ‘반도체 공장 투자 관련 설명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반도체 분야에 한해 지주회사 규제를 완화하는 정부 방안이 특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해명했다. 당초 이재명 대통령은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첨단 산업에 자금 조달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금산분리 완화를 언급했는데, 공정거래위원장이 “몇몇 회사의 민원 때문에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하면서 엉뚱하게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의혹으로 불똥이 튀었다. 결국 기업이 나서 기존의 자금 조달 방식으론 투자 재원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대국민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국가 전략 프로젝트라며 정부와 정치권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클러스터)를 흔드는 손도 많아졌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라디오 방송에서 “꼭 거기에 있어야 할지”라는 발언으로 불을 세게 지폈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장인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새만금 이전을 주장하며 맞장구를 쳤다. 시민단체 등이 제기한 용인 산단 승인처분 취소 소송에도 정치권이 개입해 화력을 보태고 있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반도체 전리품을 챙기려는 지역 정치권의 이전투구가 가열될까 걱정이다. 숙원 법안이던 ‘반도체 특별법’은 결국 또 해를 넘겼다. 2024년 22대 국회가 문을 열 때부터 여야 모두 한목소리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지만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 근로 예외’ 조항 적용을 놓고 다투다가 1년 넘게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핵심 쟁점을 뺀 반쪽짜리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여야가 합의했지만 그마저도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정부는 비(非)수도권의 반도체 R&D 인력에 대해선 근로시간 규제 완화를 검토할 수 있다며 지역균형발전과 엮어 보려고 한다. 시험 잘 치라고 응원한다면서 밤엔 공부하지 말라고 강제 소등시키니 수험생은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다.전쟁을 하는 건지 전쟁놀이를 하잔 건지 우리가 입으로만 파격적 지원을 외치는 동안 해외 각국은 립서비스가 아닌 진짜 지원을 하고 있다. 공장 건설 발표부터 가동까지 불과 28개월 만에 끝낸 일본 구마모토의 TSMC 파운드리 공장이야말로 파격이다. 외국 회사의 공장을 건설하는 비용의 절반을 댄 일본 정부의 조치가 파격적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소리를 들어 가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반도체 자립에 다가선 중국 정부의 지원이 전폭적이다. 지난해 12월 10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는 전쟁 작전 회의 같은 분위기였다. 서부전선(중국), 동부전선(미국), 아군의 전력 열세 등의 용어를 쏟아내며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 철저하게 대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게 실제 전쟁이라면 한국의 전비 태세는 암울하다. 지휘부는 입으로만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여론은 적전분열 상태인 데다 보급마저 시원찮다. 세계는 밤새워 불을 밝히며 덤벼드는데 우리는 균형발전과 건강권을 강조하며 ‘군자는 기습하지 않는다’는 송양공 식의 전쟁을 하고 있다. 한국에 유일하게 남은 초격차 산업인 반도체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왜 이리 한가한가. 전쟁이 아닌 전쟁놀이만 하고 있는 것 같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잘 모르는 청년들에 대한 노동 착취 수단이 되고 있다고 하더라.” 이재명 대통령은 11일 고용노동부 업무보고에서 한 제도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다. “제도 자체의 남용 여지가 너무 크지 않나” “대체적으로 노동자에게 불이익하지 않나”라고 꼬집었다. 이 대통령이 지적한 제도는 ‘공짜 야근’의 주범으로 꼽혀 온 포괄임금제다. 1974년 대법원 판례로 인정돼 산업 현장에서 적용해 왔는데, 52년 만에 정부가 포괄임금제를 대폭 손질하기로 했다. ▷30일 고용부와 ‘실노동시간 단축 로드맵 추진단’은 포괄임금제 오남용을 막기 위해 내년 상반기 중 근로기준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포괄임금제는 실제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연장·야간·휴일근로 수당을 사전에 정해 지급하는 방식이다. 연구개발직, 사무직, 영업직 등 근로시간을 정확히 측정·관리하기 어려운 직군에서 많이 활용해 왔다. 하지만 약정한 시간보다 일을 더 해도 추가 보상을 받기 어려워 장시간 노동, 공짜 야근을 유발하는 제도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7월 한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20대 근로자는 주 80시간가량 근무했는데, 포괄임금제를 적용받은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노동부는 근로자의 동의가 있고, 근로자에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포괄임금제를 허용하겠다고 했다. 또 정확한 법정 수당의 산정을 위해 출퇴근 시간 기록을 의무화하는 등 근로시간을 명확하게 측정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기업들의 근태 관리가 지금보다 엄격해져 기존에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흡연·커피 시간, 대기 시간 등을 근로시간에서 제외하는 등 노사 갈등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회사가 근로시간을 제대로 측정하겠다며 폐쇄회로(CC)TV나 마우스 감시 프로그램 등을 설치해 논란을 빚은 경우도 있다. ▷고정수당이 폐지되고 실근로시간이 단축되면 연장근로 수당 등이 줄어들어 근로자 소득이 감소할 우려도 있다. 디지털 전환과 플랫폼 노동의 확산으로 업무의 질을 시간으로 측정하기 힘든 시대적 변화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중소기업들은 행정비용 상승을 우려한다. 예외 규정을 구체화하고 근로시간 관리 시스템을 지원하는 등 보완책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공짜 야근’으로 대표되는 고질적인 장시간 노동을 해소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줄어드는 근로시간을 시장 상황에 맞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연성도 뒤따라야 한다. 유연근무제 확대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고연봉 관리·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 등을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다. 노동개혁의 목적은 단지 적게 일하자는 게 아니라 생산성을 높여 적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이 돼야 할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해마다 3월이면 어느 임원이 얼마를 받았다더라, 누가 ‘업계 연봉킹’이라더라는 기사가 쏟아진다. 사업보고서에 임원 보수 총액과 1인당 평균 보수, 5억 원 이상 받은 임원을 공개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임원 평균 연봉 1위는 삼성전자로 6억7000만 원이었다. 수십억, 수백억 원을 받는 최고경영자(CEO)들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다. 임원이 아닌 ‘단순 실무자’에게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36억 원)만큼의 보수를 안긴 인심 좋은 회사도 있다. 바로 쿠팡이다. ▷쿠팡이 ‘단순 실무자’라 주장하는 이 행운의 직원은 김범석 쿠팡Inc 의장의 동생 김유석 씨다. 쿠팡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김 씨는 2021년부터 4년 동안 152만 달러(약 22억 원)의 보수를 받았다. 현 주가 기준으로 118억 원에 이르는 양도제한 조건부 주식(RSU)까지 포함하면 4년간 140억 원에 이른다. 김 씨는 지난해 급여와 주식을 합쳐 32억 원을 받았는데 별도 보상 없이 급여 30억 원을 받은 형보다 더 많이 수령했다. ▷김 씨는 미국 본사 소속으로 직위는 ‘Vice President’다. 통상 ‘C레벨’인 한국의 ‘부사장’보단 위상이 떨어지지만 단순한 실무자로 보기는 어렵다. 김 씨는 파견 형식으로 국내에서 쿠팡 배송캠프 관리 부문 총괄로 근무하고 있는데 임원급 직위다. 2021년 한국 법인 의장직과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며 한국 사업과의 법적 연결고리를 끊은 김 의장이 동생을 통해 한국 법인의 경영을 컨트롤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쿠팡이 김 씨를 실무자로 포장하려는 것은 김 의장이 공정거래법상 동일인(기업 총수)으로 지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기업 총수에서 빠지면 일감 몰아주기 규제, 친인척 자료 제출 등 법적 의무에서 자유로워진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김 의장이 미국 국적이고 국내 지분이 없으며 친족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며 쿠팡을 ‘총수 없는 대기업’으로 분류해 왔다. 김유석 씨의 보수와 직위를 볼 때 경영 참여 가능성이 높은 만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불리하면 ‘미국 기업’이 되는 쿠팡은 한국적 정서와는 동떨어진 행보를 보여왔다. 개인정보 유출을 홀로 ‘노출’이라고 했고, 청문회에 출석한 미국인 대표는 “김범석 어디 있냐”는 질문에 “Happy to here(이 자리에 오게 돼 기쁘다)”라고 했다. 29일 쿠팡은 피해 고객 1인당 5만 원의 쿠폰 보상안을 제시했다. 쇼핑과 배달은 각 5000원씩 할인되고, 나머지 4만 원은 여행·명품에 배정돼 보상이 아닌 신종 마케팅이란 지적을 받았다. 한국을 잘 모르고 한국인을 무시하는 기업이 한국에서 사업을 계속해도 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가습기 살균제 피해 참사는 착한 사람일수록 손해를 본다는 불편한 진실을 일깨워 줬다. 임신한 아내, 사랑스러운 아이, 편찮으신 부모님의 호흡기 건강을 위해 매일 가습기를 틀었다. 세균·곰팡이 번식을 막기 위해 꼼꼼히 청소하면서 살균제도 잊지 않았다. 그땐 미처 몰랐다. 가족을 생각하는 극진한 마음이 죽음의 수증기가 되어 가족의 폐를 완전히 망가뜨릴 줄은…. 내 손으로 독극물을 전파했다는 죄책감에 피해자 가족들은 무한 감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극은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국가에도 책임이 있다고 처음으로 정부가 인정했다. 24일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사회적 참사’로 공식 규정했다. ‘참사의 공동 책임자’로서 정부가 배상을 비롯한 피해 구제를 주도하겠다고 했다. 피해 사실이 확인된 2011년 이후 14년 만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2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모든 피해자와 유가족들께 머리 숙여 애도와 위로를 전한다”며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근본적으로 점검하겠다”고 했다. ▷‘조용한 살인자’가 된 가습기 살균제는 1994년 처음 등장했다. 제대로 된 안전성 검사도 없이 기업들은 ‘인체에 무해하다’며 앞다퉈 제품을 출시했고, 정부는 ‘세계 최초의 창의적 제품’이라며 KC마크까지 달아줬다. 2000년대 들어 기침 등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11년 임신부들의 ‘원인 미상 폐 질환’이 집단 발생한 후에야 역학조사 결과 가습기 살균제와 폐 손상의 인과관계가 처음 확인됐다. 현재까지 공식 피해자는 5942명, 사망자는 1382명에 이르는데 미신고 사례 등을 포함하면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원인이 밝혀졌지만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힘들고 긴 법적 다툼을 견뎌야 했다. 2012년 국가와 제조·판매업체 등을 상대로 첫 집단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업들의 사과와 보상 약속은 사건이 본격화된 지 5년이 지난 2016년에야 나왔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2023년 대법원은 제조·판매업체의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했고, 지난해 6월엔 국가 배상 책임까지 받아들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사회적 참사’로 인정한 정부는 손해배상 책임을 기업과 국가로 넓히기로 했다. 치료비뿐만 아니라 사고로 장래 벌 수 있었던 소득을 잃은 손해와 위자료도 지급하고 학업, 병역, 취업 등 생애 전 주기에 걸쳐 피해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적절한 배상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등 남은 숙제가 많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의 눈물을 정부가 제대로 닦아 주길 기대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금리 없는 나라’ 일본이 ‘정상국가’로 돌아왔다.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19일 단기 정책금리(기준금리)를 0.5%에서 0.75%로 인상했다. 겨우 0.25%포인트 올렸을 뿐이고 절대 수치도 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미는 남다르다. 1995년 9월 이후 한 번도 넘어서지 못한 ‘0.5%의 벽’을 30년 만에 뚫은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 질서와 세계 자금시장의 흐름이 요동치는 신호가 될 수도 있다. ▷일본은 1990년대 초 자산버블 붕괴 이후 장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오랫동안 초저금리 기조를 이어갔다. 2016년부턴 제로금리를 넘어 이자는커녕 수수료를 내며 돈을 맡겨야 하는 ‘마이너스 금리’ 시대로 접어들었다. 물가와 임금이 오르며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면서 지난해 3월 마이너스 금리를 종료하고 금리 정상화를 선언했다. 지난해 7월 0.25%, 올 1월 0.5%로 금리를 올렸다. 이후 미국의 관세 정책 등을 고려해 동결을 이어가다가 경기에 끼치는 영향이 예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추가 인상에 나섰다. ▷일본이 초저금리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전 세계 자산시장의 자금줄 역할을 해 온 ‘엔화 빚투’는 타격을 받게 됐다. 싼 이자로 엔화를 빌려 해외 고수익 자산에 투자했던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회수(청산)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전체 엔 캐리 자금은 506조 엔(약 4800조 원)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6.5%인 32조7000억 엔(약 300조 원)이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7월 말 일본은행이 깜짝 금리를 인상하고 추가 인상을 시사하자 세계 주식시장이 동반 폭락하며 ‘검은 월요일’ 충격에 휩싸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하루 만에 12.4% 빠졌고 코스피도 8.8% 급락했다. ▷구조적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엔화가 금리 인상으로 강세로 돌아서면 원화 환율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최근 원화가 엔화와 함께 약세를 보이는 동조화 현상을 강하게 보여온 만큼 엔화 약세가 멈추면 원화 가치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반면 엔 캐리 자금의 이탈로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이 급격히 빠져나갈 경우 환율 상승(원화 가치 하락)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일본이 금리 인상을 발표한 19일 코스피는 오히려 상승세를 보이는 등 증시와 환시는 대체로 평온했다. 이미 시장에선 금리 인상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의 엔화 대출 규모가 지난해부터 상당 부분 줄어들어 있어 급격한 자금 이동은 없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금융시장 급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면밀히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여당 의원과 대통령실 비서관 사이에 오간 ‘청탁 문자’는 현 정부에서 먹히는 인사 청탁의 패스트트랙을 제시했다. 먼저 우리 학교와 우리 캠프, 즉 ‘우리 편’임을 강조한다. 경력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지만 어쨌든 차순위다. 에둘러 갈 필요 없이 가능하면 대통령실을 직접 찌르는게 좋다. 자리는 공공이든 민간이든 상관없다. 민간기관장 인사 청탁을 받은 대통령실 비서관은 “이러시면 안 되는데” 같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네 형님, 추천할게요”라고 답했다. 민간기업들의 단체장까지 청탁이 오가는데 공공기관 인사에선 더 많은 거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건 합리적 의심이다. 331개 공공기관 가운데 현 정부 들어 임명된 기관장은 한국산업은행장과 한국수출입은행장 두 명뿐이다. 앞으로 에너지, 금융, 복지, 주택 등의 분야에서 기관장 인사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과거 정부완 다르다고 주장하려면 말이 아닌 결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정치권 내정설’ 이번에도 반복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공공기관 인사를 보면 달라진 모습을 찾기 힘들다. 민간기업이지만 민영화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외풍에 시달렸던 KT의 경우 차기 사장 인선에서도 정치권 낙하산과 내부 카르텔 논란이 반복되고 있다. 33명이 지원한 사장 공모는 9일 3명으로 압축됐는데, 문재인 정부 청와대 경제보좌관 출신이자 현 정부에서 국정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후보가 들어 있다. 역시 사장 선임 절차가 진행 중인 예금보험공사에서도 이재명 대통령의 사법시험 동기이자 과거 이 대통령의 변호인단으로 활동한 인사가 최종 후보군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가스공사 사장도 보수정당 출신이었다가 지난 대선 때 여당으로 말을 갈아 탄 전직 국회의원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나돈다. 공기업 사장은 공모를 통해 임원추천위원회가 복수 후보를 추리고 기획재정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와 장관 제청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하지만 요식 행위일 뿐 공모 단계부터 내정설이 파다했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교통정리 차원에서 그 어느 때보다 낙하산이 설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달 정부가 공무원 인사 제도로 공식 도입한 ‘국민추천제’도 인사 청탁의 루트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선출직을 제외한 정무직, 공공기관 임원, 행정기관 소속 위원회의 민간위원, 국가공무원 중 개방형 직위까지 폭넓게 추천할 수 있는데 측근들을 활용한 ‘셀프 추천’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6월 정부가 장차관 후보에 대해 국민 추천을 받자 일부 국회의원이 보좌관을 동원해 단체 대화방에 ‘의원님을 장관으로 추천해 달라’고 했다가 논란을 빚기도 했다. 후보를 내려 꽂는 입장에서도 ‘윗선의 뜻’이 아닌 ‘국민의 뜻’이라고 포장하기 쉬워졌다.‘낙하산 방지법’부터 만들어야 낙하산 부대의 공습이 예고되고 있지만 공공기관장 자격 요건을 강화하고 선임 절차의 투명성을 높이는 ‘낙하산 방지법’은 하세월이다. 공공기관장을 하려면 해당 분야에서 5년 이상 전문 업무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낙하산 방지법이 제19대 국회부터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번번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여당은 공공기관장과 대통령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알박기 방지법’에만 관심이 쏠려 있을 뿐이다. 청탁 문자에 대해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내부 감찰 결과 청탁이 대통령실 내부에 전달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배송 오류일 뿐이지 청탁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정부의 인사 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재점검과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 이번 일의 교훈이 ‘다신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가 아니라 ‘좀 더 조심해 다신 들키지 말아야겠다’가 돼선 안 될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불가능에 도전해 왔던 한국 경제의 역사 속에서 조선업만 한 ‘맨땅의 헤딩’도 없었다. 1970년대 초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와 조선소가 들어설 울산 미포만 모래사장 사진을 들고 투자자들과 선주들을 설득한 일화는 유명하다. 1974년 맨몸으로 만들어낸 유조선 1척이 51년 만에 5000척이 됐다. 조선 역사가 긴 유럽과 일본의 어떤 회사도, 2000년대 이후 물량 공세에 나선 중국의 국영회사들도 해내지 못한 세계 최초의 금자탑이다. ▷HD현대는 19일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선박 5000척 인도 기념식’을 열었다. 딱 5000번째로 넘긴 선박은 필리핀 초계함 ‘디에고 실랑’이었다. 그동안 HD현대가 건조한 선박은 총 68개국 700여 개 선주사에 납품됐다. 선박들의 길이를 평균 250m로 잡고 5000척을 일렬로 늘어놓으면 총 길이가 1250km에 달한다. 서울에서 일본 도쿄까지의 직선거리(약 1150km)보다 길다. 수직으로 세우면 8848m 에베레스트산 높이의 141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전설의 시작은 1971년 정 회장이 그리스에서 수주한 26만 t급 초대형 유조선이었다. 조선소도 없는 상황에서 조선소와 유조선을 동시에 짓는 불가능한 시도였다. 하지만 1974년 6월 28일 울산조선소 준공과 함께 유조선을 성공적으로 물에 띄웠다. 건조 기간 동안 다섯 차례나 사양을 변경할 정도로 까다로웠던 그리스 선주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잘 만들어진 배”라고 칭찬했다. 가칭 ‘7301호선’이던 배에 고 육영수 여사가 ‘애틀랜틱 배런(대서양의 남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첫 항해에 성공한 HD현대는 이후 새로운 역사를 계속 써내려 갔다. 1980년 최초의 국산 전투함 ‘울산함’을 건조하며 K-방산의 시작을 알렸고, 1983년 선박 건조량 기준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이후 글로벌 조선 수요가 컨테이너선, 액화천연가스(LNG) 수송선, 친환경 선박 등으로 변화할 때마다 HD현대는 시장을 선도하며 선두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선박 등 미래 해양 혁신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HD현대의 첫 배가 인도된 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조선입국(造船立國)’ 휘호는 현실이 됐다. 수출 한국의 최전선에서 활약해 왔을 뿐 아니라 최근엔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통해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50여 년 전 500원짜리 지폐의 거북선 그림은 금빛 거북선 모형으로 바뀌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과거 50년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50년도 ‘K-조선’이 한국 경제 앞에 놓인 거친 파도를 헤치고 힘찬 항해를 이어가길 기대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한국 노동계에 11월은 각별한 달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절규와 함께 분신한 날이 1970년 11월 13일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생일도 이때다. 1995년 11월 둘째 주 토요일이던 11일 창립대의원대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다. 다음 날인 11월 12일 서울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운 7만 명의 노동자·시민들이 노동운동의 새 역사를 선언했다. 피날레는 노동운동의 대표곡 ‘철의 노동자’ 합창이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촉발된 민주노조 운동을 이어받은 민주노총은 30년 동안 양적으로 크게 팽창했다. 출범 당시 41만6000명이던 조합원은 지난해 106만 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법외단체로 출발했지만 1999년 합법단체가 됐고, 지금은 한국노총과 함께 제1노총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하지만 질적 성장은 더디다. 연대와 책임의 열사 정신은 잘 보이지 않는다.‘낙수효과’ 주장하는 그들만의 운동 민주노총의 주력은 여전히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정규직, 중장년층 조합원이다. 노동운동 초기에는 조직화가 용이한 대기업 공장이 투쟁을 선도했고,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함께 끌어올린 측면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커지면서 그들만의 운동이 되고 있다. 평균 연봉 1억 원이 넘는 노조가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자” 하고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상황이 됐다. 기득권화된 노조는 여전히 노동운동 초기의 ‘낙수 효과’를 믿는다. ‘우리가 잘돼야 전체가 잘된다’는 논리다. 정년 65세 연장, 주 4.5일제 도입 등도 우리가 선도하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노조의 보호를 두껍게 받는 상위 노동자들만의 잔치로 그칠 공산이 크다. 노동시장 이중 구조의 벽을 더욱 견고하게 해 비정규직·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상향 이동과 청년들의 일자리 진입 자체를 막을 것이란 우려가 높다. 최근 민주노총 택배노조가 촉발한 ‘새벽배송 금지’ 논란은 민주노총이 대중과 현장의 생각과 얼마나 괴리돼 있는지 보여준다. 새벽배송이 막히면 소비자는 물론 영세 소상공인, 납품 농가 등의 피해가 불가피한데도 거칠게 문제를 제기했다. 당사자인 택배 기사들도 일자리와 생존권을 위협한다고 반대한다. 민주노총이 새벽배송을 걸고 넘어지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의혹도 나온다. 쿠팡노조 측은 “민주노총 탈퇴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며 성명서를 냈다.결과 책임 회피하는 선택적 참여 노동시장 이중 구조 개선 등 노사정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 노동 개혁 사안에서는 정작 책임을 회피한다. 민주노총은 1999년 2월 노사정위원회(현 경사노위)를 탈퇴한 후 아직까지 복귀하지 않고 있다. 노동계의 양보가 필요한 사안에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장외투쟁만 고집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민주노총 출신인 문성현 위원장을 임명했을 때도 참여를 거부해 당시 문 위원장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잃을 것 없는 자리에는 참석한다. 주 4.5일제 도입을 논의하는 정부 주도의 ‘실노동시간 단축 로드맵 추진단’에 들어가 연내 입법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대정부 투쟁을 해 오면서도 사무실 임차보증금은 정부로부터 받아 왔다. 최근 정부가 6대 구조 개혁 가운데 하나로 내건 노동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노동계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일률적 법정 정년 연장, 임금 감소 없는 근로시간 단축만 고집해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배곯는 어린 ‘시다’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집까지 걸어갔던 청년 전태일의 마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는 약자라고 볼 수 없는 민주노총이 이제 노동계의 대표로서 어른의 책임을 다해야 할 때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5년 만에 한국을 찾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지난달 30일 ‘깐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소맥 러브샷을 하며 “한국 프라이드치킨이 최고”라 했고, 엔비디아 그래픽카드 ‘지포스’ 한국 출시 25주년 행사에선 “모든 것은 한국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그는 “e스포츠, PC방, PC 게이밍 문화가 없었다면 오늘의 엔비디아도 없었을 것”이라며 29년 전 한국과의 첫 인연을 소환했다. ▷황 CEO는 “1996년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매우 아름다운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발신인은 편지에서 ‘한국에 대한 세 가지 비전이 있다’고 썼다”고 했다. 한국 전역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싶다. 비디오 게임이 한국 기술 성장을 이끌 것이다.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 올림픽을 열고 싶다…. 이 꿈을 위해 황 CEO가 도와달라고 발신인은 제안했다. 황 CEO는 “그 편지 때문에 한국에 처음 오게 됐다”며 “제이(이재용 회장)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였다”고 털어놨다. 당시 54세였던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었다. ▷편지를 받은 황 CEO는 33세의 청년 엔지니어에 불과했다. 그의 엔비디아는 창업 4년 차의 신생 기업이었고, 그래픽카드 개발 실패로 파산 위기에 몰려 있었다. 이 선대회장이 꿰뚫어 본 엔비디아는 1999년 지포스를 선보이며 일어섰고, 여기에 삼성전자의 D램이 들어가며 양사의 협력이 시작됐다. 이 선대회장의 비전도 현실이 됐다. 초고속 인터넷으로 한국은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 됐고, 게임은 한국의 대표 산업으로 성장했다. 비디오 게임은 ‘e스포츠’로 인정받아 각종 국제 대회가 열리는 것은 물론이고 아시안게임 정식종목까지 됐다. ▷두 거인의 인연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1983년 당시 이미 태블릿PC를 구상하던 잡스는 부품 공급 가능성을 타진하려 반도체 후발 업체 삼성을 찾아왔고, 73세의 이 창업회장이 직접 그를 맞았다. ‘미래는 모바일에 있다’고 설파하는 28세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이 창업회장은 “잡스는 IBM에 맞설 인물이 될 것”이라 평했다고 한다. 모바일 패권을 둘러싼 삼성과 애플의 협력과 경쟁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됐다. ▷아이들의 장난 같던 게임에서 인공지능(AI) 기술이 꽃피웠듯, 멀리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이를 이루기 위한 꾸준한 실천이 미래를 만들어낸다. 허황되게 보이는 꿈을 알아주는 지음(知音)도 필요하다. 엔비디아와 ‘AI 동맹’을 맺고 글로벌 AI 혁명에 올라탄 한국이 쫓아가기에 급급하지 않고 미래를 주도하려면 다음을 내다보는 상상력과 혁신이 필요하다. 거인의 어깨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내년에 정원을 20%가량 늘릴 예정인 ‘경제 검찰’ 공정거래위원회의 최대 화두는 밀가루다. ‘빵플레이션’(빵+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밀가루 제조업체들을 상대로 가격 담합 조사에 착수했고, 설탕 업체의 담합 혐의도 들여다보고 있다. 국세청도 생활물가 밀접 업종에 대한 고강도 세무조사로 가세했다.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이 식료품 물가가 너무 높다며 “고삐를 놔주면 (기업은) 담합하고 독점하고 횡포를 부리고 폭리를 취한다”고 비판한 이후부터다. 고용노동부는 ‘노동경찰’로 불리는 근로감독관을 현재의 3000명 수준에서 3년 뒤 1만 명까지 늘릴 계획이다. ‘산업재해와의 전쟁’에 대응한다는 명분이다. 보건복지부는 불법 사무장병원을 척결해 건강보험 재정을 지키겠다며 국민건강보험공단에 특별사법경찰(특사경)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대응에 대해 민생금융범죄도 근절하겠다며 전담 특사경 신설과 인지수사권, 강제조사권을 요구하고 있다.수사 조직 늘려가는 행정부처들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단칼에 끊어내는 것이다. 소위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나 ‘쾌도난마’ 같은 해법이다. 최근 정부가 난제에 대응하는 방식이 바로 이렇다. ‘나쁜 놈들’을 설정하고 강력한 단속과 수사, 엄벌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기존 경찰 조직 외에 각 행정부처까지 전방위로 동원된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는 10·15 대책을 통해 전쟁을 지휘할 전담조직 신설을 선언했다. 국무총리 직속으로 ‘부동산 감독기구’를 만들어 ‘집값 띄우기’ 등 시장 왜곡에 대해 직접 조사·수사하고, 국토교통부 내 별도의 부동산 특사경도 두기로 했다. ‘부동산판 금융감독원’ 같은 기구는 집값이 급등하던 문재인 정부 때도 도입을 검토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거래까지 위축시키고 과도한 재산권 감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논란 속에 백지화됐다. 범죄를 척결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겠지만, 사안을 단순화시켜 진짜 원인을 도외시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빵값이 오른 데는 환율 상승과 원자재 수급 불안, 인건비 상승, 복잡한 유통 구조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텐데 식품업계의 탐욕 탓으로 간단히 돌려버린다. 근로감독관 증원에 앞서 과거 정부에서 근로감독관을 1000명 늘렸는데도 산재와 임금체불이 줄어들지 않은 이유부터 따져봐야 한다. 건보 재정 문제도 안정적 재원 확보 방안을 찾고, 사무장병원 개설을 사전에 차단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먼저다.정책 실패 감추는 핑계 아니어야최근 국토부는 2023년 3월부터 올해 8월까지 집값 띄우기 정황이 있는 425건을 기획 조사 중이며 이 중 위법성이 짙은 8건을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비리가 만연한 듯 보이지만 같은 기간 서울 아파트 거래량 24만여 건에 비하면 0.2% 수준인데, 이를 근거로 투기꾼들이 집값을 끌어올린 주범이라고 주장하긴 어렵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오랜 불신, 수요자들의 불안을 잠재우기엔 턱없이 미흡했던 정부의 공급 대책 등부터 돌아봐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규제·감독기관부터 설치하고, 대국민 서비스가 주 업무인 행정부처들을 감시와 통제, 처벌 강화에 동원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새로운 조사·수사기관이 만들어지면 조직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실적 만들기에 급급해 자칫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카르텔’ 탓으로 돌렸던 윤석열 정부에서 보듯 대중이 분노할 대상을 만들어 처벌하는 삼청교육대식 접근은 답이 아니다. 감시와 처벌을 강조하는 진짜 이유가 정책 실패를 가리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한때 취리히 제네바에 이은 스위스 제3의 금융 중심지였던 루가노는 스위스의 금융 비밀주의가 흔들리며 시들어 갔다. 활력을 되찾기 위해 루가노는 ‘비밀금고’에서 ‘가상자산’으로 도시의 색깔을 바꿨다. 도심 공원에 비트코인 창시자의 동상을 세울 정도로 가상자산에 진심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시절부터 있었을 것 같은 노포에서도 가상자산으로 결제가 가능하고 세금도 코인으로 낸다. 최근 3년간 유치한 가상자산 관련 스타트업만 100여 개에 달하면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아 청년들이 몰려들고 있다.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석권하던 노키아 공장이 문을 닫은 이후 침체에 빠졌던 핀란드 북부 도시 오울루는 이제 ‘노키아 도시’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뗐다. 다만 한때 노키아의 상징이던 혁신의 정신만은 그대로 남겼다. 통신 분야의 연구개발(R&D) 역량을 바탕으로 산학협력을 다양한 산업으로 확대했다. 친환경 에너지 & 클린테크, 교육, 소비재, 헬스케어, 게임, 인공지능(AI), 핀테크 등의 스타트업이 활동하며 시 전체가 신기술 테스트베드로 거듭났다. ▷호주의 산업도시 질롱은 ‘러스트벨트’에서 ‘실리콘밸리’로 변신했다. 자동차 공장이 속속 폐쇄되며 위기를 맞았던 질롱은 도시의 엔진을 자동차에서 장갑차, 자주포 등 방위산업으로 갈아 끼웠다. 과거 양모산업이 발달했던 지역의 강점을 이용해 탄소섬유 등 신소재 개발에 적극 나섰다. ‘말뫼의 눈물’로 유명한 스웨덴 말뫼도 조선업 등 기존 산업의 몰락에 좌절하지 않고 재생에너지 등 미래 산업으로 과감하게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골칫거리였던 빈집을 지역의 효자로 만든 도시들도 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주의 소도시 무소멜리는 버려진 집을 단돈 1유로(약 1650원)에 판매해 낙후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8개국에서 온 외국인들이 ‘1유로 주택’을 사들여 개조한 뒤 영구 거주하고 있고, 관광객도 10배로 늘면서 인구 감소세가 멈췄다. 지역 특유의 끈끈한 유대감과 환대 문화 덕분에 외지인들이 지역에 잘 녹아들 수 있었고 도시는 활기를 되찾았다. ▷인구절벽 위기를 극복한 해외 도시들의 공통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통과 인프라를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전통금융을 가상자산으로, 통신 연구개발(R&D)을 스타트업으로 바꿔내는 식이다. 남들이 성공한 모델을 그대로 베낀다고, 정착지원금을 뿌리거나 ‘기업 하기 좋은 도시’를 표방한다고 해서 저절로 인구와 일자리가 느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지역의 자산을 바탕으로 특화 전략을 찾아내고 매력을 극대화하는 것, 인구 소멸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지방 도시들이 해외 도시의 성공 사례에서 배워야 할 진짜 교훈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7월 말 큰 틀에서 타결됐던 한미 관세 협상이 이후 조율 과정에서 오리무중에 빠지면서 안도감은 이제 막막함으로 바뀌었다. 대출·보증 형태로 생각했던 대미 투자 3500억 달러에 대해 미국 측이 ‘현금 선불’이란 억지를 부리고 있어서다.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 등을 통해 한국은 상호 윈윈을 꿈꿨지만, 미국 측은 이를 ‘미국만 위대하게(Solely Great)’로 생각하는 듯하다.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예언서를 다시 펼쳐볼 때가 됐다. 지난해 11월 나온 ‘국제 무역체제 재구조화를 위한 사용설명서’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보통 ‘미런 보고서’ ‘미란 보고서’ 등으로 부른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내에서 홀로 ‘빅 컷’을 외치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지원 사격하는 스티븐 ‘마이런’ 연준 이사가 썼다. 보고서가 나왔을 땐 우리가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을 정도로 무명이었던 저자의 제안대로 협상이 흘러가고 있다.‘현금 선불’로 현실화된 ‘100년 국채’ 보고서는 “경제 불균형의 근원은 지속적인 달러 과대평가에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재정·무역 적자를 줄이려면 달러 약세를 유도해야 한다. 통화 조정을 유도하는 지렛대는 고율의 관세다. ‘징벌적 관세’를 매긴 이후 관세 완화를 조건으로 다른 나라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 미국의 안보 우산을 제거할 수 있다는 위협도 병행한다. 문제는 달러 약세로 기축통화의 지위가 흔들리고 국채 금리가 급등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각국이 보유한 미 국채를 100년 만기 초장기 국채로 전환하도록 하면 이자 부담 없이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다고 제안했다. 유동성 부족을 우려하는 국가엔 통화 스와프를 당근으로 줄 수 있다. 운동도 하지 않고 마음껏 먹으면서 살은 빼겠다는 마법의 다이어트약 같은 처방이다. 4월 초 미국이 전 세계에 상호 관세를 선언한 이후의 진행 과정은 보고서의 주장과 비슷하다. 고율의 관세부터 던져 놓고 미국을 만족시킬 제안을 들고 오면 낮춰 줄 수 있다고 했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급했던 일본이 먼저 손을 들었고, 한국도 일본의 합의를 기준점 삼아 협상을 서둘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알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족쇄였다. 전액 현금으로 받아 미국이 원하는 곳에 투자하고 수익의 90%를 미국이 갖겠다는 것은 남의 돈을 맘대로 쓰겠다는 100년 만기 국채 아이디어의 다른 버전이다. 일각에선 패전국에 부과된 전쟁 배상금보다 가혹하다며 협상을 엎어버리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상호 관세 25%를 적용받아도 한국 전체 수출은 4% 정도 줄어드는 데 그칠 것이며, 미국에 줄 돈으로 차라리 피해 기업에 지원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세를 세수 확보를 넘어 협박의 수단으로 보는 미국이 더 높은 ‘징벌적 관세’를 매길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미국 시장을 아예 포기하는 도박을 하긴 어렵다.미국 요구 부당해도 판 엎을 순 없어 지금으로선 판을 깨지 않으면서 신중하게 협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방어장치인 통화 스와프를 포함해 투자 규모와 조건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의 움직임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차기 일본 총리를 예약한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가 재협상 가능성을 시사했고,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5500억 달러 중 실제 투자금은 1∼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출과 보증”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이번엔 7월 협상 때처럼 데드라인에 쫓겨 디테일을 놓치면 안 된다. 정치권도 정부와 협상팀에 대한 정치적 공세와 압박을 자제하고 차분히 기다려 주는 여유가 필요하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업가로 유명해진 계기가 된 1970년대 뉴욕 코모도어 호텔 재개발은 손에 없는 것을 파는 ‘봉이 김선달’식이었다. 호텔 인수를 전제로 뉴욕시로부터 세금 탕감을 받고, 뉴욕시 참여를 전제로 가격을 협상한 뒤 계약서만 들고 융자를 받았다. 인수 및 재개발 비용 8000만 달러 중 트럼프가 부담한 건 50만 달러뿐이었다. 대통령이 되고도 변함이 없다. ‘절대 주식’ 딱 한 주를 들고 20조 원 가치의 회사 경영권을 쥐고 흔든다. ▷6월 미국 철강회사 US스틸 지분 100%를 인수한 일본제철은 최근 미국 일리노이주의 제철소 한 곳을 폐쇄하려다 미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2023년부터 철강 생산은 하지 않고 외부에서 생산된 강판을 압연만 하던 곳이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직접 회사에 전화를 걸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일본제철 측은 계획을 철회했다. 미국 내에서 새 제철소를 짓되 비효율적 설비는 정리하는 최소한의 구조조정마저 벽에 막혔다. ▷일본제철을 굴복시킨 미국 정부의 카드는 ‘황금주’였다. 단 한 주로도 핵심 경영 사항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 주식이다. 미국 내에서 반대 여론이 높던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황금주 부여와 110억 달러 신규 투자 등을 조건으로 승인했다. 황금주는 미 정부가 아닌 트럼프 대통령 ‘개인’에게 주어졌다. 황금주에 대해 일본제철 측은 “상징적 의미일 뿐이며 경영 자율성은 보장된다”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기업 사냥꾼’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미 정부는 정부 지원금을 대가로 자국 반도체 기업 인텔의 지분 10%를 인수해 최대 주주가 됐다. 반도체뿐 아니라 조선, 방산 기업의 지분에도 군침을 삼킨다. 엔비디아와 AMD의 반도체 대중 수출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중국 내 매출의 15%를 일종의 ‘수출세’로 걷었다. 최근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미 정부가 중국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의 미국 사업 매각을 주선하는 대가로 투자자들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수수료를 챙길 예정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국가 간에도 막무가내식 거래는 그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관세를 올리곤 협상을 통해 깎아줬다며 생색낸다. 한국이 미국과 합의한 3500억 달러(약 486조 원) 대미 투자펀드도 한국은 당연히 대출·보증 방식일 거라 생각했지만, 미국 측은 ‘현금으로 내놓으라’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내가 동의하면 탄핵당할 것”이라고 할 정도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다. 역량을 총동원해 최대한 국익을 지키는 방향으로 협상해야 한다. 눈뜨고 코 베이지 않으려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이달 들어 코스피가 뜨거운 불장을 이어가고 있지만 개미투자자들로선 아쉬운 부분도 있다.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움직임이 미지근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6∼8월 3개월 연속으로 순매도를 했다. 국민연금이 밀어줬으면 주가가 더 올랐을 텐데, ‘코스피 5,000 시대’도 빨리 올 텐데.‘개미 중에 좀 큰 개미’였다는 이재명 대통령도 의문을 제기했다.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연기금들은 국내 주식투자 비중이 왜 그렇게 낮으냐”며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들어도 모르겠다던 설명은 이랬다. 20∼30년 뒤에 기금 잔액이 줄어든다. 그때 현금화를 위해 주식을 팔아야 하는데 주가가 폭락할 염려가 있다. 대통령은 이상하다고 했다. “그때 안 팔기 위해 지금 주식을 아예 안 산다? 30년 뒤 일 아닌가.”“韓 주식 더 사라” 난감한 요구 이 대통령은 “국내 시장에 대한 불신 때문”일 것이라 했지만 사정이 있다. 국민연금은 2048년 적자로 전환되고, 2064년 기금이 소진된다. 먼 훗날처럼 보이지만 주식·채권 등을 팔아야 하는 시기는 훨씬 빠르다. 장부상 흑자라도 당장 이달 연금 줄 돈이 부족한 시점, 보험료 수입보다 연금 지급액이 커지는 때부터다. 2027년부터로 예상됐던 ‘보험료 수지 적자’는 다행히 3월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늦췄지만 그래 봐야 5, 6년 남았다. 장기적 관점의 적절한 ‘엑시트 플랜’이 필요하다.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을 적게 사는 것도 아니다. 6월 말 현재 전체 자산 1269조2000억 원 중 14.9%인 189조1000억 원을 국내 주식으로 들고 있다. 전체 주식 중 29.8%가 국내 주식인데, 글로벌시장에서 한국의 비중이 2%도 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자국 편향’이다. 이미 웬만한 대형주의 7∼10%를 들고 있는데 지분율을 더 높이면 진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될 판이다. 국내 주식 비중을 점점 낮추는 추세지만 투자액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아직은 전체 적립금 자체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순수한 의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기자회견에서 밝힌 건 적절치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국민연금이 압박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외부의 성화에 운용 원칙을 바꾼 적이 있다. 2021년 ‘동학개미’들이 연기금의 국내 주식 매도 중단을 청와대에 청원하자 그해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 보유 한도를 확대했다. 정부와 정치권도 호시탐탐 노린다. 국민연금을 활용해 기업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치려 하거나, 공공임대주택이나 정책 펀드에 동원하려는 시도가 많았다.외풍 차단하고 연금 곳간 지켜야 외압을 견뎌내기엔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전문성은 취약하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정부 당연직 6명, 사용자·근로자 대표 각 3명, 지역가입자 대표 6명 등 20명으로 구성돼 있어 정부가 손쉽게 과반을 점할 수 있다. 직능대표 성격이 강해 투자 전문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회의록엔 “국내 노동자 돈으로 왜 해외투자를 하냐”는 등의 황당한 발언도 있다.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처럼 정부와 정치권으로부터 독립한 투자 전문가 중심으로 기금운용 지배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지만 바뀌지 않고 있다. 최근 2년도 안 돼 총리가 네 명이나 사임하고,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한 프랑스의 위기는 2023년 연금개혁을 둘러싼 갈등에서 시작됐다. 국민연금이 파탄에 이르면 한국도 피할 수 없는 혼란이다. 그런데도 4월 발족한 국회 국민연금개혁특별위원회 활동은 지지부진하다. 수익률과 구조적 안정성을 높여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을 제대로 지키는 것에 최우선 목표를 둬야 한다. 국민연금을 다른 목적을 위한 종잣돈으로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져선 절대 안 될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속이 구린 사기꾼일수록 겉으로 보기엔 때깔이 좋은 경우가 많다. 온몸에 명품을 휘감고 좋은 차를 몰면서 성공한 사업가 행세를 한다. 그럴듯한 명함을 뒷받침하는 화려한 사무실도 운영한다. 갈취형을 벗어나 기업형으로 진화한 조폭(조직폭력배)들도 도심에 멀쩡한 사무실을 두고 있다. 경기 침체로 빈 사무실이 남아돌다 보니 싸게 빌려 범죄의 아지트로 이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투자사기를 전담으로 수사하는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는 지난해부터 올해 7월까지 정상적인 회사인 양 사무실을 운영하며 비상장주식 및 코인 거래, 가짜 주식 사이트 운영 등으로 투자사기를 벌인 8개 범죄단체를 검거했다. 서울 강서, 인천, 경기 고양 부천 등 역세권 및 도심지역에서 이들이 임차한 사무실만 24곳에 달했다. 서울 강서구에선 한 건물에서 두 개의 범죄조직이 연달아 적발되기도 했다. 주로 단기 임대를 활용한 ‘떴다방’ 수법을 썼다. 보증금 없이 몇 개월 치 임차료를 한 번에 미리 내는 ‘깔세’로 사무실을 빌리고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한몫 챙긴 뒤 잠적했다. ▷서울 강남의 화려한 빌딩 숲속에도 범죄의 소굴이 생겨나고 있다. 강남 테헤란로 일대를 중심으로 단기 임대 사무실을 이용한 불법 금융 다단계 행위가 기승을 부려 5월 서울시가 피해 주의보를 발령하기도 했다. 깔끔한 사무 공간과 전문 강사를 내세워 유망 스타트업처럼 꾸미고 투자한 사람들에겐 ‘센터장’, ‘지점장’ 등 직책까지 줬다. 은퇴자, 주부, 고령층 등 피해자들은 강남 한복판에 사무실을 둔 멀쩡한 회사가 사기 집단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처럼 도심 사무실을 활용한 ‘범죄 떴다방’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경기 침체와 오피스 공급 증가, 온라인 중심의 소비문화 등으로 인해 상가 공실률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안정적 임차인을 구하지 못한 건물주들은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단기 임대로 사무실을 돌린다. 올해 2분기(4∼6월) 집합상가 공실률은 10.5%로, 집계가 시작된 2022년 4분기(10∼12월) 이후 가장 높았다. ‘아파트형 공장’으로 불리며 한때 수익형 부동산으로 각광받던 지식산업센터는 전국에 40%가량이 공실로 남아 있다. ▷범죄 심리학에 ‘깨진 유리창’이라는 이론이 있다. 도시 변두리에 유리창이 한 장 깨진 집을 방치하면 행인들이 버려진 집으로 생각하고 돌을 던져 나머지 유리창까지 모조리 깨뜨린다는 것이다. 상가 공실을 방치하면 생활과 주거가 밀집한 도심 한복판에서 각종 범죄조직이 똬리를 틀고, 강력범죄 등 2차 범죄도 늘어날 수 있다. 트렌드에 맞게 상업시설을 리모델링하거나 주거시설로 전환하는 등 다양한 활용법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정치 분열과 양극화가 심화됐다. 몇 년 새 재정 상황이 나아질 전망이 안 보인다.” 긴축재정에 대한 반발로 내각이 붕괴되는 등 ‘국가 마비’ 위기를 겪고 있는 프랑스가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가 12일 프랑스의 국가 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낮췄다. 독일 등 다른 유럽 선진국은 물론 한국(AA-)보다 낮다. 충격적인 성적표에도 재정 개혁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신임 총리는 ‘공휴일 이틀 축소’ 정책을 여론에 밀려 결국 포기했다. ▷최근 프랑스 정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프랑스는 총리가 너무 자주 바뀌어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고 했던 제3공화국 시절을 연상케 한다. 지난해 1월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사임을 시작으로 9월 가브리엘 아탈, 12월 미셸 바르니에, 이달 8일 프랑수아 바이루 등 개혁을 추진하던 총리들이 줄줄이 물러났다. 7월 정부 지출 동결, 공휴일 이틀 축소 등으로 440억 유로(약 72조 원)를 절감하는 내년도 긴축 예산안을 내놨던 바이루 전 총리는 야당과 갈등을 빚다가 8일 하원의 불신임을 받았고, 내각은 해산됐다. ▷프랑스 정치 혼란을 부른 재정위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프랑스의 국가부채는 지난해 기준 3조3000억 유로(약 5200조 원)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13%에 이른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50%대 수준이었지만 금융위기와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거치며 급격하게 증가했다. 에리크 롱바르 재무장관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 위험을 경고할 정도다. 지난해 12월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신용등급을 내렸고, 12일 피치에 이어 S&P도 신용등급 강등을 저울질하고 있다. ▷1시간마다 1200만 유로(약 200억 원)씩 국가부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프랑스 정치권은 ‘우리는 희생할 수 없다’며 ‘네 탓’ 공방만 하고 있다. 증세에는 우파가 반대하고, 복지 축소, 노동 개혁엔 좌파가 반대한다. “더 열심히 일해서 위기를 넘자”는 공휴일 축소와 연금 동결 호소에는 좌우파 모두 등을 돌렸다. 10일부터 프랑스 전역에선 긴축 재정에 반대하며 ‘모든 것을 막아라’는 구호를 내세운 ‘국가 마비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프랑스 등 선진국들이 ‘파멸적 악순환’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재정 적자 확대→금리 급등→긴축 재정→국민 반발→포퓰리즘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번 늘린 복지 지출은 여간해선 줄일 수 없는 구조적 경직성 때문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국가채무비율도 40년 뒤에는 현재의 3배인 156.3%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마약 같은 재정 포퓰리즘의 지독한 끝을 경계해야 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이래서는 안 되겠죠? 불공정의 대명사 아닙니까?” 9일 생중계된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일부 노동조합의 노조원 자녀 우선 채용 요구에 대해 작심 비판했다. “취업시장은 어느 분야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이 필수”라고 했다. 산업재해와 임금 체불에 대한 엄벌을 강조했던 대통령이 노조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노와 사 사이에 균형 맞추기에 나선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최근 KG모빌리티 노조가 사측에 ‘고용 세습’을 요구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나왔다. 이 회사 노조는 1968년 이후 출생한 기술직 직원이 자진 퇴사하면 해당 직원의 ‘아들’이 같은 직군에 지원할 수 있게 하는 ‘기술직 트레이드’를 제안했다. 불공정한 고용 대물림이자 성평등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노조의 요구를 수용해 시행을 준비하던 회사는 결국 제도를 전면 백지화했다. ▷‘현대판 음서제’로 불리는 우선·특별채용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완성차업체 등 산업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2022년 고용노동부는 100인 이상 사업장의 단체협약 1057개를 조사했는데 기아, 현대제철, STX엔진, 현대위아 등 63곳에서 고용 세습 조항이 확인됐다. 정년퇴직자, 장기근속자 등의 직계가족을 우선 채용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공채 시 정년퇴직자 자녀나 형제·자매에게 가산점을 주거나, 노조·직원의 추천자를 채용하는 기업도 있었다. 시정명령을 받은 기업 대부분은 관련 조항을 고치거나 없앴다. ‘노조 탄압’이라며 거부하던 기아는 형사입건된 이후에야 2023년 해당 조항을 삭제했다. ▷고용 세습 외에도 노조의 지나친 요구나 불법 행위가 사회적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노조의 채용 강요, 공사 방해, 월례비 등 금품 요구 등이 발생한 건설 현장에 대해 정부가 단속에 나서기도 했다. 일부 노조의 ‘깜깜이 회계’도 문제로 지적됐다. 최근에는 많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상식에 어긋나는 요구도 적잖다. 기본급의 17배에 달하는 성과급도 너무 적다며 반대하거나, 회사가 적자가 났는데도 성과급을 달라고 하는 노조도 있다. 퇴직한 이후에도 계속 차량 할인을 해주는 ‘평생사원증’을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 노란봉투법에 대한 불안감이 큰 데는 전투적 강성 노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한몫한다. ▷이 대통령은 4일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나 기업과 노동 모두 중요하다며 “노동존중 사회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는 충분히 양립할 수 있고, 양립해야 된다”고 했다. ‘양 날개론’이 성공을 거두려면 노사 모두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자면 국민 상식에 맞지 않는 낡은 관행부터 끊어내야 할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경찰 수사를 총괄하는 박성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의 취임식. 첫 일정으로 보이스피싱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순간, 박 본부장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서울중앙지검 김민석 검사입니다. 박성주 님 명의의 통장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이용된 사실이 확인돼….” 실제 상황은 아니고 경찰이 제작한 홍보 영상의 일부다. 누구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인공지능(AI) 전문가인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쓰레기 무단 투기를 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악성 링크를 누를 뻔한 적이 있다고 털어봤다. ▷최근 보이스피싱은 어눌한 목소리로 실소를 자아내는 수준이 아니다. 개인정보를 탈취해 정교하게 시나리오를 짜고, AI 딥페이크 기술로 가족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복제하니 여간 주의를 기울여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 이에 28일 정부는 은행 등 금융회사도 보이스피싱 피해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강력한 처방을 내놨다. 금융사의 고의나 과실이 없어도 배상하는 ‘무과실 배상책임제’다.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 등 전문성과 인프라를 갖춘 금융사가 좀 더 책임감을 갖고 대응해 달라는 주문이다. ▷금융사들이 지난해부터 자율배상이란 이름으로 피해 보상을 시작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 금융사들이 예방 노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했을 때만 가능했는데 비밀번호·인증서가 위·변조된 경우, 제3자가 피해자 몰래 송금·이체한 경우 등 몇 가지로만 제한됐다. 피해자가 사기나 협박에 당했더라도 직접 송금했다면 구제받을 수 없었다. 영국은 소비자가 속아서 송금한 경우에도 최대 8만5000파운드(약 1억6000만 원)까지 은행의 피해 배상을 의무화했다. 싱가포르는 과실 정도에 따라 은행, 통신사, 소비자가 책임을 나눠 진다. ▷금융사의 책임을 강화할 필요는 있지만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있다. 소비자가 주의하지 않아도 금융사가 배상해 준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보이스피싱에 대한 경각심이 무뎌질 수 있다. 보험사기처럼 보이스피싱 피해를 위장한 허위 신고 범죄가 늘어날 수도 있다. 정부와 금융권이 긴밀하게 협의해 배상 요건 및 한도, 금융사 면책 기준 등을 구체화해야 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신고된 보이스피싱 피해는 2006년 5월 인천에서 국세청 직원을 사칭한 전화로 돈을 가로챈 사건이다. 800만 원으로 시작된 피해는 올해 상반기에만 7766억 원에 이를 정도로 급증했다. 철저한 수사와 강력한 처벌로 뿌리를 뽑아야 한다. 정부, 금융사, 통신사 등이 공조해 예방 시스템도 구축해야 한다. 보이스피싱은 개인과 가정을 파탄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신을 조장하는 참 나쁜 범죄다. ‘오죽 허술하면 속느냐’는 식으로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때는 이미 지났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역대 정부마다 국정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것은 일자리 창출이었다. ‘일자리 정부’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1호 업무지시로 일자리위원회를 만들고 대통령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까지 설치했다. 문 정부를 ‘가짜 일자리 정부’로 칭한 윤석열 정부는 민간 주도 경제를 통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내세우며 노동 개혁의 기치를 들었다. 의도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정부가 고용주 역할을 자임했던 문 정부는 단기 일자리와 공공 일자리만 만들다 끝났고, 윤 정부는 구체적 실행 없이 노동 개혁 구호만 되풀이하다 마쳤다.정부 핵심 정책에서 사라진 ‘고용’과거 정부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는 것인지 현 정부와 여당의 일자리 접근법은 다르다. 일자리 창출 목표를 강하게 내걸지 않고 잘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관심은 일자리 지표가 아니라 주식 시세표에만 쏠려 있다. 지난달 말 주식 양도소득세 부과 기준 강화 발표 이후 주가가 급락하자 더불어민주당은 발칵 뒤집혔다. 의기양양하던 여당 내에서 처음으로 ‘정책 재검토’란 말이 나왔다. 하지만 ‘1분기 일자리 증가 폭 역대 최소’, ‘그냥 쉰 청년 역대 최대’ 같은 참담한 고용 지표엔 별다른 언급이 없다.일자리 정책을 담당하는 고용노동부에서도 ‘고용’은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부처 명칭이 현재처럼 바뀐 이래 약칭은 늘 고용부였는데, 현 정부 들어 부처 보도자료에선 노동부라 칭한다. 민노총 위원장 출신의 김영훈 고용부 장관은 산재 근절에 직을 걸고, 노란봉투법 등 노동 현안에만 몰두하고 있다. 국정기획위원회가 발표한 123대 국정과제에서도 일자리는 후순위다. 96번째 과제가 ‘통합과 성장의 혁신적 일자리 정책’인데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각론은 불분명하다.일자리 문제에 대한 정부의 이해도 부족해 보인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반기업 법안 통과에 따른 국내 기업들의 해외 이탈 우려에 대해 “기업이 해외에 투자하는 게 꼭 불리하다고 볼 수 없다. 국내 노동의 질이 더 좋아질 수도 있고 일자리가 늘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는데 왜 국내 고용이 좋아진다는 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22일 정부가 발표한 ‘경제성장전략’에도 일자리 고민은 빠져 있다. 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인공지능(AI) 대전환 과정에서 고용시장 불안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정부의 대답은 “일자리가 줄어드는 부분도 있고 늘어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마찰적 실업 문제는 대안을 만들어 보겠다”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반드시 가야 할 길’은 일자리 창출오히려 정부가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정책들은 일자리 감축을 부추기고 있다. 센 상법에 더 센 상법, 더 더 센 상법까지 몰아치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투자와 고용이 제대로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근로자 개인에 대한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노란봉투법은 기업들을 경영 불가 상태로 내모는 ‘검은봉투법’이 됐다. 정부가 주시하는 개미투자자들의 집단지성은 노란봉투법의 본질을 꿰뚫었다. 노란봉투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자동화 확대와 일자리 감소를 예상하고 로봇 관련주에 투심이 쏠렸다.정부와 여당이 주식 시세표만 들여다보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정책 발표에 대해 시장이 즉각적으로 반응해 정책 효능성이 좋고 단기간에 큰 성과를 보일 수 있다. 반면 일자리 정책은 열심히 해도 당장 표가 나지 않고, 오히려 노동시장 개혁 과정에서 반발과 저항에 시달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진짜 ‘반드시 가야 할 길’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다. 5년 뒤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는 수시로 오르내릴 주가가 아니라 일자리 성과로 판가름 날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