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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반 동안 실망을 거듭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마지막 반전의 전기(轉機)를 기대했을 것이다. 지지율 10%대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은 데다 마침 임기 반환점이므로 진정성 있는 반성과 쇄신의 다짐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윤석열 대통령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정말 이 사람은 안 바뀌겠구나’ ‘변할 의지도, 자신을 변화로 이끌 내적 역량도 없구나’….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던 사람들마저 다 고개를 돌리고 포기한다. 성공한 대통령을 기원하며 애정 어린 비판을 아끼지 않던 이들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라며 입을 다문다. 지난달 21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의 면담부터 지난주 기자회견까지의 짧은 기간에 윤 대통령은 남은 임기에 대해서도 암담한 전망을 하게 만드는 특질들을 드러냈다. 첫째, 내재적 관점으로만 자신을 바라볼 뿐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시켜 보는 훈련이 전혀 안 돼 있음을 드러냈다. 끝없는 자기합리화와 장광설이 그래서 나온다. 둘째, 그의 ‘와이프 퍼스트’ 철학은 일반인의 가족 감싸기와는 완전히 다른 초(超)상식의 수준임이 드러났다. 소설·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세속의 도덕가치 시선 판단을 뛰어넘는 절대적 차원의 결속이다. 윤 대통령이 진짜로 김 여사의 행태를 고 육영수 여사가 가정 내 야당 역할을 했듯 “여보, 회의에서 너무 화내지 마세요”라고 조언하는 그런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내가 정권 최고 실력자 행세를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아내로서의 조언’이라고 규정했다면 이는 국민 기만이고, 육 여사에 대한 모독이다. 대통령 부부는 변할 의향이 없다. 포화가 거세니 잠시 웅크린 것이다. 김 여사가 그간의 권력 행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뉘우치고 앞으로는 정말 아내로서의 역할만 충실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직접 사과하러 나왔을 것이다. 처참한 성적표에 관중은 떠나고 전광판은 꺼졌지만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 어렵다. 트럼프 당선으로 격랑에 휩싸인 국제 무대로 달려갔는데 반짝 반등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효과만으로는 길게 가지 못한다. 길게 보며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응해야 할 외교안보 현안에서 성급하고 성과에 안달을 내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한다. 업보(業報)라는 단어가 자꾸 생각난다. 업보는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어쩌기 힘든 운명적 굴레다. 윤 대통령이 한 대표와의 면담 다음날 부산 범어사 방문에서 “업보로 생각한다”고 했는데 김 여사 문제처럼 자신의 의지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데도 안풀고 있는 일을 업보라 칭하긴 곤란하다. 한국의 보수 진영에게 ‘윤석열 정권’이라는 존재가 던지는 고민이야말로 업보라 할만하다.“우리 대통령”이라고 옹호하다가는 공멸하기 십상인데,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싫든 좋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 채 정권 재창출이라는 고지를 올라야 한다. 그 험난한 등정을 위한 필수 선결 조건은 정권의 남은 임기 동안 김 여사 문제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야당이 특검법 수정안을 냈으니 여당도 위헌성과 정략적 이용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며 국면을 주도해야 한다. 특검 대상도 도이치모터스와 명품백, 그리고 용산 이전 과정에서의 김 여사 관련 특혜 여부로 집중해야 한다. 명태균 관련은 검찰 수사를 지켜본 뒤 추진해도 늦지 않다. 김 여사로선 억울한 누명과 가짜뉴스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잘못이 있다면 지금 처벌 받는 게 낫다. 지금 피하면 다음 정권에서 몇 배 더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천지가 무너져도 검찰 포토라인에 못 서겠다면 조용히 아프리카 등 제3세계로 가서 임기말까지 봉사 활동하라. 여사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국민이 다시 윤 정권 지지로 돌아오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보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박근혜 탄핵의 경험 때문에 보수는 그동안 사실상 윤 대통령 부부에게 인질처럼 매인 형국이었다. 좌파에 정권이 넘어가선 안 된다는 걱정 때문에 어떡하든 설득해 끌어안고 가려 했다. 하지만 이러다간 초가삼간 마지막 칸까지 다 태워 먹을 수 있다. 한동훈 대표는 그동안 민심을 전달하려 노력했으나 최근엔 현상 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윤석열 아류’가 된다. 윤 대통령의 방향을 바꿔주는 역할을 하면 국민이 다시 쳐다보겠지만 이도 저도 아닌 상태라면 큰 그림을 놓칠 수 있다. 보수진영은 주체적으로 정권 재창출 운동에 나서야 한다. 이를 주도할 동력은 국힘 당원과 지식인들이다. 하루빨리 부인 문제를 정리하고 정상궤도로 돌아와 달라는 당원들의 뜻이 서명운동을 비롯한 조직적 내부 혁신 운동으로 분출돼야 한다. 대학, 싱크탱크, 단체 등의 온건 보수 지식인들도 나서야 한다. 대통령이 쇄신을 거부하면 아예 보수진영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압박을 해야 한다. 야당·좌파의 정략적 이용 가능성을 엄중히 경고하면서 대통령의 변화를 끌어내는 보수 내부 혁신운동이다. 보수진영 원로와 중진, 잠룡들은 개인적 이해타산을 떠나서 다음 세대 보수 리더들이 등장할 토양을 마련해줘야 한다. 내가 뽑았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얽매일 건 없다. 보수가 뽑았어도 잘못하면 보수가 엄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보수의 새로운 터전이 열릴 수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결국은 이 지경까지 왔다. ‘김건희 특검’을 피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헌법과 법치주의를 모독하는 편향된 내용의 야당 특검법이 대통령 거부권의 장벽을 넘어서는 장면이 머잖아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헌정사에 상처가 될 이런 상황을 초래한 주된 책임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김 여사 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여주는 발언들이 한동훈 대표와의 면담 다음 날 부산 범어사 방문에서 나왔다.“업보로 생각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겠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 업보는 현 상태에선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쩔수 없는 운명적 굴레다. 그런데 김 여사 사태는 대통령 본인의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 극복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를 업보라 여기는 건, 비유하자면 사탕과 과자를 끊지 못해 초고도 비만 위기에 처했는데 그걸 끊을 생각은 않고 비만은 나의 업보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국민을 위해 좌고우면 않겠다”는데, 지금 향하는 길은 후보 윤석열을 지지했고 지금도 윤 정권이 정상궤도로 복귀해 성공하길 염원하는 수많은 국민의 뜻과 정반대 방향이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는 건 나라를 위해 옳은 길을 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오해로 비난을 받아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질 때 하는 말인데, 자기 아내의 비리 의혹을 감싸는 일에 국민과 대의명분이 끼어들 자리가 어디 있는가. 지금 대통령 부부에게 쏟아지는 건 우중(愚衆)의 돌팔매가 아니라 공정과 상식을 회복시키라는 정당한 요구다.윤 대통령이 이런 착각에 빠진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 좌파의 선동과 민의를 혼동한다. 윤 대통령은 김건희 논란이 선동과 가짜뉴스 탓이며, 여기에 보수진영과 여당 일부까지 휩쓸려 부화뇌동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광풍(狂風)에 김 여사가 희생양이 됐는데 사내 대장부가 나 하나 살자고 아내를 마녀사냥의 제물로 던져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김 여사를 향한 비난에 좌파의 가짜뉴스와 선동, 편견이 섞여 있음은 분명하다. 그게 90%쯤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머지 10%의 진짜 허물을 감싸고 법치의 예외 특권지대에 두려다 90%의 선동과 뒤섞이게 만든 게 대통령 본인이다. 필자는 민심은 과학이라고 본다. 이는 민심이 항상 100% 옳다는 뜻이 아니다. 민심은 선동과 가짜뉴스에 휩쓸려 광풍이 될 수 있다. 산사태가 쏟아질 때 그 흙탕물엔 온갖 가짜뉴스 선동 괴담이 뒤섞인다. 이 단계에서 광풍을 민심으로 오독(誤讀)하면 억울한 희생양을 양산한다. 괴담에 휩쓸린 군중의 광란이 역사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끈 사례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했다.그러나 민심의 강물이 본류에 이르면 오물은 걸러지고 투명해진다. 숙려 과정을 거친 단계의 민심은 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김 여사 논란은 시작된 지 2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 녹취들이 터져나왔고, 항소법원 판단도 나왔다. “아내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던 대국민 약속과 달리 공동정권 주인인 양 행세한 단초들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아내를 사법 절차의 심판대에 서게 하는 건 희생양으로 내놓는 게 아니라, 특권의 갑옷을 벗고 검사 부인, 대통령 부인이 아니었다면 누구나 거쳤을 절차를 거치게 하는 것일 뿐이다.윤 대통령이 민심과 괴리된 착각을 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버럭 성미다. 여사 문제에 대해 쓴소리를 하면 호통 벼락이 떨어지니 바른 소리의 씨가 마르고, 구미에 맞는 얘기를 해주는 유튜브만 보니 여론과 동떨어지게 된 것이다. 만인환시리라는 걸 개의치 않은 채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잦은 것도 옆에서 만류해 줄 참모의 부재 때문이다. 한 대표에겐 “우리 의원들이 야당 편에 서면 나도 어쩔 수 없다”며 담대함을 보여놓고 돌아서선 바로 원내대표를 불렀다. 이중적인 속내가 드러나는 그런 장면은 목도하기조차 민망할 지경인데도 정작 본인은 투명 유리병 바깥에서 지켜보는 국민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한 대표도 정치력이 부족했다. 여당 대표가 대통령의 고집을 꺾어 설득하는 건 토끼 간을 빼오듯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한 대표가 요구한 사항들은 옳았지만, 여당 대표라면 언론이나 야당과는 전달 방식이 달랐어야 했다.윤 대통령의 극적인 인식전환이 없는 한 특검은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김건희 이슈를 거부권에 의지해 계속 덮어 둔다는 것은 보수 전체의 공멸을 의미한다는 인식이 여권 내에 계속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특검은 보수진영 전체에 커다란 질곡이 될 것이다. 특검의 칼날이 광란하듯 춤추며 밑바닥의 잔재물까지 다 들춰내다보면 탄핵 세력에 악용될 사안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여사 특검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여사 문제를 이대로 덮어두면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의 리더십 관리에 치명적 걸림돌이 돼 국정 운영의 동력을 소진케 하고 보수정권 재창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검이 시작되면 보수의 초가삼간이 흔들리겠지만 그래도 김 여사 블랙홀에서 빠져나오려면 청산 변곡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최선의 길은 윤 대통령 스스로 팔을 잘라내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었지만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았으니 타의에 의해서라도 도려내야 한다. 회복은 지난한 과정일 수도 있지만 그게 두려워 수술을 기피해서는 안된다. 아직 임기가 절반 남았으므로 특검 광풍이 지난 뒤 국정동력을 되찾을 시간이 있다. 공정하고 중립적인 특검이 되게 하려면 윤 대통령이 “합리적인 안이라면 받으라”고 한 대표에게 프리핸드를 줘야 한다. 그래야 여당이 혼연일체가 돼 특검법안 내용을 놓고 야당과 줄다리기를 벌일 수 있다.지금 상태에선 한 대표가 특검 내용을 갖고 야당과 협상에 나섰다가는 친윤의 반발로 당이 깨지는 위험을 안아야 한다. 야당도 분열된 여권의 속사정을 알기에 자기들 뜻대로 밀어붙일 것이다. 그러다보면 결국 야당 원안이 여권 이탈표를 업고 통과될 공산이 큰데, 이는 헌정사와 법치주의, 대통령 부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보수정권 재창출이라는 밥그릇을 엎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그러려면 윤 대통령이 하루빨리 귀를 열고 민심을 들어야 한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김건희 여사의 사과를 놓고 여권 내에서 왈가왈부하는데, 다 부질없다.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사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단계를 한참 지나버렸다.결론부터 말하면 유일한 해법은 사법적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다. 대선 때부터 3년 넘게 보수진영 전체를 욕보이고 있는 여사 문제 수렁에서 헤어나려면 김 여사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반 국민 누구나에게 적용될 절차를 거쳐 공정하고 엄정한 사법적 처분을 받는 것 이외엔 그 어떤 출구도 없다. 명품백 사건이 터진 직후인 지난해 12월초 필자는 김 여사가 국민에게 사죄하고 사가(私家)로 가 근신해야 하며, 윤석열 대통령이 배우자 문제의 재발을 막을 근본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여사 리스크가 돌이키기 힘든 지경까지 치달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만약 그런 민의에 순응했다면 최소한 명품백 문제는 일단락됐을 것이고, 그 후 10개월간 터져나온 온갖 새로운 논란들도 예방됐을 것이다.부끄러운 일을 행했으니 사과는 당연히 해야 하지만 이젠 사과만으로는 안 된다. 명품백 수수 같은 참담한 일이 공개됐는데도 전당대회 문자 공개, 대통령실 이전 공사 업체 선정 논란, 공천 개입 논란 등의 낯부끄러운 일들이 계속 터져나오는 걸 보면서 국민들은 김 여사에 대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정말 최소한의 공사 구분 의식, 자기 위치 파악 능력, 윤리관마저 갖추지 못한 상태로 권력 정점부에 들어가 있구나라는.설상가상으로 새로운 논란의 눈뭉치들이 구르면서 더 큰 눈사태를 예고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커지고 있는 공천 개입, 그리고 끊임없이 소문이 도는 공공기관·공기업 인사 개입 논란은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안길 수 있는 소재들이다. 오래전부터 정치권 주변에선 브이원(V1) 브이투(V2)라는 말이 돌았다. 브이는 VIP를 줄인 표현으로 대통령을 지칭한다. V2는 김 여사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취지의 신조어인데, 필자는 이를 미확인 풍문을 근거로 한 과장된 용어로 치부해 왔다.그러나 요 몇 달 필자는 김 여사가 실제로 공기관 인사에 관여하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는 사례들을 접했다. 전언으로 들은 것들까지 합치면 여사의 영향력 행사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정황이다. 더 놀라운 대목은 과거 정권들에서 처럼 베갯밑 송사로 대통령을 통해 간접적으로 뜻을 관철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김 여사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며, 자신이 이런 영향력 행사를 할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는 전언이다.김 여사는 자신이 윤석열 정권 탄생에 상당한 지분이 있다고 여긴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남편이 검사 시절 정치적 탄압에 의해 좌천됐을 때 로펌에서 고액 보수를 제시하며 영입하려 했는데 자신이 검사의 길을 계속 가도록 설득하는 등 고비마다 자신의 조언이 남편을 오늘로 이끄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승이 아무리 훌륭하게 제자를 키웠어도 제자의 월급을 같이 쓰자고 할 수 없듯이, 김 여사는 국민에게서 실오라기만큼의 권력도 위임받은 적이 없다.사인(私人)이 국정에 개입하면 그게 국정농단이고 그걸 막기 위해 시스템이 있는 건데, 시스템을 요식행위로 만들어버리는 행위가 용인된다면 이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대통령의 공천 개입도 범죄(박근혜 공천 개입 징역 2년)인데, 하물며 배우자가 공천이나 인사에 손을 댄다면 초가삼간이 아니라 정권 전체, 보수진영을 태워 초토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행위임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 어디서 녹취라도 나온다면 탄핵몰이에 광분하지만 정작 윤 대통령이 실정법을 위반한 내용을 찾을 수 없어 재료 빈곤에 시달리는 좌파에겐 최대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여권은 이런 눈사태가 본격화하기 전에 신속히 김 여사가 사법적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과거 전직 대통령들 수준에 버금가게 소환돼 밤샘 조사받고, 만약 조금이라도 실정법 위반 혐의가 있다면 영장실질심사를 받아야 한다. 귀 막고 시간을 보낸다고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 덮고 가면 다음 대선에서 여당 후보들이 먼저 여사 문제를 공약할 것이다. 여야 누가 이기든 그때는 종합세트로 탈탈 털리는 사법 심판을 받게 된다. 다음 대선까지 버티기도 쉽지 않다. 특검법에 대한 여당 이탈이 그나마 적은 이유는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야당의 특검법이 너무 편파적이고 자의적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특검 광풍이 몰아치고 만약 의혹들이 사실로 확인되면 여권 전체가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여당 의원들이 김 여사가 억울하다고 여겨서 특검법에 반대하는 게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의원들 머릿속엔 이대로 거부권에만 기대 버티는 건 공멸의 지름길이라는 인식도 함께 퍼져 있는 그야말로 딜레마 상태다.여권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밀리고 밀리다 이탈표로 인해 특검법이 거부권을 넘어서는 상황이다. 그때 맞게 될 매는 지금보다 몇 배 혹독하고, 여권은 “우리는 대통령 부인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집어넣는다”는 생색도 못 낸 채 공멸 위기를 맞게 된다. 아직 대통령 임기가 절반 넘게 남아 있다. 자기 팔을 도려내는 결단이 대통령과 여권 전체는 물론 김 여사를 위해서도 현명한 해법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검찰 수사가 흉기가 되고 정치보복 수단이 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지난 일요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방문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문다혜 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정치보복으로 규정했다. ‘문 정권 비리 청산’이 중단되어야 할 정치보복인지, 정의의 복원을 위해 반드시 완수되어야 할 시대적 과제인지를 판단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몇 가지 기준점을 따져보면 되기 때문이다.첫째, 정치보복 여부는 비리 의혹의 내용을 보면 판단할 수 있다. 기획수사로 주변까지 샅샅이 뒤져 흠결을 찾아내고, 얼기설기 엮어 몰아갈 경우 이는 정치보복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금 사안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야당 내에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재 드러난 의혹들은 정치적 내용이 아니다. 개인비리 의혹도 정치보복이어서 조사를 못한다면 법질서는 왜 존재하는가. 이 대표도 정치보복 주장만 펼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앞으로 본격적으로 법의 심판대에 올려야 할 울산시장 선거 개입,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탈원전, 통계 조작, 대중(對中) 삼불일한 약속, 대북정책 의혹 등의 주제들 역시 해당 사건의 장본인이 문재인이든 윤석열이든 김대중이든 김영삼이든 덮어주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들이 결코 아니다.이미 드러난 것만으로도 응당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내용들이고, 묻혀 있는 최종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야만 후속 정책을 이어갈 수 있는 사안들이다.둘째, 전임 정권 청산이 반복되면 국민 분열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미 정신적 내전 상태인 좌우 진영 간 대립이 더 격화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비리를 눈감아주고 넘어가는 걸 관례로 만들 수는 없다. ‘전임정권의 허물을 처벌하는 악순환은 멈춰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진실도 밝히지 않은 채 덮어주고 가는 것이 화해와 용서는 아니다. 서로의 비리를 눈감아주는 건 화해가 아니라 야합이다. 설령 윤 정부가 전임 정권 비리 청산을 하지 않는다해도 야당이 차기 집권할 경우 전임 정권 청산의 수레바퀴는 다시 더 거세게 돌아갈 것이다.협치가 더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도 말장난에 가깝다.그동안 윤 대통령이 문재인 비리 청산을 뭉개 왔다고 해서 협치가 이뤄졌나. 좌파 진영과 친문 친명계가 보수 정부에 조금이라도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좌파는 압박을 느낄 때 협상장으로 나선다. 비리의 시시비비를 가려 엄정하고 원칙적으로 임하는 게 결과적으로 협치의 지렛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셋째, 적폐 청산을 하려면 힘있는 임기 초에 했어야지 이미 임기 반환점을 목전에 둔 시점에 매달리면 소모적 싸움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들린다.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끝내 뭉개버리면 이는 전임 정권의 비리에 방조범이 되는 것이다. 시대적 과제를 뒤늦게라도 명확히 인식하고 실행한다면 평가받을 것이다.물론 늦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대통령실 주변에선 자꾸 검찰총장 탓을 하지만 통치권자가 명확한 방향 설정을 안 한 탓이 가장 크다. 국민은 윤 대통령이 자신을 발탁해준 인사권자에 대한 의리 때문에 시대적 과제를 외면해 온 것 아니냐는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사실이다. 문다혜 건은 본질과 관련 없는 곁가지라는 지적도 백번 맞다. 울산시장 선거, 서해 공무원 사건 등의 최종 책임소재를 가리지 않는다면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충성 의무를 배신하는 것이다. 청산해야 할 문재인 비리 리스트에는 사법적 정의 차원을 넘어 국가 운영 차원에서도 필수불가결한 내용들이 허다하다.남북 간에 어떤 내용과 제의가 오갔는지 후임 정부는 모른다. 정의용 당시 안보실장은 무슨 근거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강조했는지,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준 USB엔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대북 지원 약속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다 비밀로 봉해졌다. 중국에 삼불일한을 누가 어떤 워딩으로 약속했는지도 비밀이다. 그런 핵심 내용을 모른 채 후임 정부가 어떻게 전략을 짜고 정책을 구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통치권은 사법처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통치행위라해서 절대적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명백히 밝혀내야 하며, 결정 과정에서 법률 위반이 있었다면 처벌 받아야 한다. 사법적 심판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사안이라면 감사원이 나서서 진상을 밝힐 수 있다.물론 저항도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지난 일요일 이재명-문재인 간의 ‘방탄동맹’이 구축됐는데 이는 2년 전의 데자뷔다.2022년 10월 감사원이 서해 피살 공무원 감사와 관련해 서면조사를 요청하자 문 전 대통령은 “대단히 무례한 짓”이라고 반발했고, 이 대표는 “국민이 맡긴 권력으로 전 정부에 정치보복을 가한다”고 거들었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집권 기간에 임명된 감사원장을 공수처에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하고 감사원법을 개정해 특별감사시 국회 승인을 의무화하겠다고 나섰다. 2년 전의 방탄동맹은 흐지부지됐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상대의 손을 놓으면 죽는다는 절실함으로 손을 잡을 것이고, 진영 내의 분열을 용납하지 않은 좌파 생태계 특유의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검찰을 흉기로 규정하며 반발하는 이 대표와 민주당에 제안하고 싶다. 문재인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을 그렇게 못 믿겠고 편파 보복수사가 우려되면 특검 도입을 선도하라. 정말 정치보복이면 특검에서 문 전 대통령의 결백이 다 밝혀질 것 아닌가. 국민이 가장 분노하는 점은 문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고 나라의 궤도를 이상한 쪽으로 틀어버리려 한 점이다. 진실을 밝혀 책임을 묻지 못하면 자기 멋대로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려는 권력자가 또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국민이 정치 초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밀어준 것은 이 과제를 가장 잘 수행할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 심판을 위한 첫걸음을 이제 겨우 뗐다. 조족지혈(鳥足之血)이고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당연지사(當然之事)다. 늦은 만큼 더 확실히 해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완고하고 고집불통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온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에 변화의 작은 싹이 움트고 있다. 2년여 만의 변화 조짐이다.첫째는, 최근 들어 격노 버럭 호통이 사라졌다고 한다. 참모 등 아랫사람에게 화를 내는 일이 사라졌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국회, 특히 야당과 맞상대해 싸우지 말라는 기조가 뚜렷하다고 한다. 기존에는 공격당하면 즉자적 감정적 반응을 보이곤 했던 게 사실이다. 화가 난 대통령이 친윤계 의원들에게 전화를 하면 충성파들이 나서 소리 높여 대신 싸우는 일이 되풀이됐다.그러나 최근 이런 대응이 눈에 띄게 줄었다. 야당 주도의 인민재판식 청문회, 상임위 막말이 이어지고 ‘김건희 살인자’론, 친일 공세 등이 계속돼 왔지만 대통령실은 사실관계를 설명하며 유감을 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야당의 싸움에 말려들지 말자는 대통령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189석 야당은 힘자랑을 하게 돼 있는데 대통령이 싸움에 응하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허공에 대고 소리치다 결국엔 다수 국민과 부딪히게 된다는 판단인 것. 실제로 정청래 최민희 등의 악 쓰는 소리는 메아리가 돼 본인들의 얼굴에 오물을 끼얹은 채 힘을 잃었다. ‘살인자’를 외친 전현희도 개딸들에겐 점수를 땄지만 대다수 상식을 지닌 국민 사이에선 혀를 차는 대상이 됐다. 만약 대통령실이 야당과 똑같은 톤으로 악다구니 했으면 언론은 양비론으로 갔을 텐데 조용히 대응하니 야당의 과격성 극단성만 부각된 것이다. 또 하나 작은 변화는 대통령이 술을 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부대 방문 때의 막걸리 건배, 군 간부들과의 격려 회식 등에서는 술이 등장하지만 사적인 술자리는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최근 대통령 관저를 방문했던 인사들은 예전과 달리 이번엔 술 없이 저녁 식사만 하고 왔다고들 전했다. 경호 라인 쪽에서도 같은 얘기가 들려온다.물론 이는 미세하고 지엽 말단적인 일이다. 지도자가 분노를 절제하고 술을 자제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기본적인 덕목이어서 이를 두고 변화 운운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씁쓸한 일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 리더십의 고질적 문제가 버럭하는 성미와, 무리수를 둬서라도 성질대로 끌고 가려 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눈길 가는 변화의 싹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정권 정체성 찾기 움직임이다. 윤 대통령은 자신을 정치로 불러내 대통령으로 뽑아준 지지자들의 핵심 요구가 무엇인지 잊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윤 정부 출범에 담긴 염원의 핵심은 공정과 상식의 복원, 그리고 문재인 정권의 잘못을 심판해 자유민주주의 토대를 다시 확고히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윤 정부는 이재명만 물고 늘어질 뿐 문 전 대통령 관련 온갖 의혹들에 대해서는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성찰이 있었으며 광복절 기념사에서 ‘자유’를 특히 강조한 것도 그런 연장선상이라고 한다. 검찰총장 교체 등과 맞물려 향후 문 전 대통령 관련 수사가 주목되는 배경이다. 검찰 경찰 인사에서도 공안 기획 기능 회복에 비중이 주어지고, 국정원 정상화에도 대폭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만약 이런 변화의 조짐이 흐지부지되고, 근본적 리더십 쇄신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이는 정권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보수진영 전체와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미래에 먹구름을 예고한다.총칼만 안 들었을 뿐 좌우, 여야 간에 정신적 내전 상태인 극한 대치 상황에서 보수 성(城) 내의 백성들은 어느 곳 하나 마음 둘 곳 없는 게 현실이었다. 적군의 백만대군이 몰려오는데 이를 막으라고 추대한 총사령관은 부인·친구들만 감싼다면, 사령관으로 옹립했던 백성들은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총선 이후엔 일절 뉴스도 안 보고, 모임 자리에서 윤석열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더 이상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관심도 없다”며 화제를 바꿔버리는 ‘등 돌린 지지자’들이 수두룩하다.진정한 리더십 변화의 핵심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에 대한 겸허한 마음이다. 임기 후반기는 절대권력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보수 정권 재창출의 밑거름이 될 각오로 희생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과의 소통, 민생정책, 그리고 부인 등 가족 문제에 있어 공명정대함의 자세로 자기 팔이라도 잘라내겠다는 의지가 필수적이다. 당정관계에 임하는 철학도 바꿔야 한다. 이준석 축출에서부터 한동훈 사퇴 종용까지 당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장기판 졸(卒)로 여겼던 행태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해 행위였는지 결과가 자명히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수십 년 검사 생활에서 굳어진 스타일이 바뀌겠느냐며 기대를 접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더구나 금연이나 금주처럼 본인의 의지만으로 실천하는게 아니라 리더십의 변화는 수많은 인간관계 및 현안들과 상호관계를 맺어가면서 이뤄져야 하므로 특단의 확고한 의지가 없으면 열매 맺기가 쉽지 않다.특히 정권 후반기는 전반기보다 여건이 더 어렵다. 야당의 김 여사 특검 등 정치 공세가 거세지면 대응 과정에서 다시 강경론자들이 득세해 기존의 스타일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하지만 주역(周易)에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해결하기 힘든 극한 상황에 몰리면 스스로 변화의 욕구가 강하게 생겨나기 마련이다. 윤 대통령이 특유의 결단력과 실천력, 공복(公僕)의식을 발휘해 변화해야 할 시기가 백척간두, 녹아가는 유빙(流氷) 위에 서 있는 바로 지금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본격 휴가철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곧 휴가를 떠날 것으로 전해진다. 윤 대통령에게 이번 휴가는 특별한 의미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휴가가 사치로 여겨질 만큼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윤 대통령과 측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비록 지지율은 낮지만 지금까지 기조대로 열심히 일해 가면 임기 후반기를 무난히 마치고 퇴임 후엔 나라 바로잡기 등 공적을 높이 평가받을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착각이다. 임기 전반기처럼 후반기를 보낸다면 윤 대통령은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우려가 크다. 물론 훨씬 더 무능하고 퇴행적인 세계관으로 나라 기틀을 부수고 민생과 국가재정을 망가뜨린 부족장 수준의 좌파 대통령도 있었지만, 좌파는 무조건 자기편 역사를 미화한다. 반면 우파의 거울은 상대적으로 훨씬 객관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에 역사의 평가는 혹독할 것이다.기억 속에서 김건희 여사 관련 대목들만 부각되고, 윤 대통령 본인은 국가비전과 국정철학조차 모호한 채 불통과 아마추어 이미지만 남을 수 있다.한미동맹 강화, 한일관계 정상화 등 국가 궤도 바로잡기는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윤석열표 업적이 아니다. 다른 보수 대통령이어도 당연히 했을 일이기 때문이다. 나라 궤도 바로잡기도 미완성이다. ‘문재인 의혹’은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고, 문 정권이 망가뜨린 국가정보원 등 안보 시스템도 무기력 상태 그대로다. 이런 비판적 채점이 맞는지, 잘해 오고 있다는 자체 평가가 맞는지 새로 생긴 민정수석실이 허심탄회하게 바닥 민심을 청취해 오라고 지시해 보길 바란다.최근 경남 의령의 지인으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평생 골수 보수로 지내온 시골 노인분들의 대화 내용이다. “윤석열은 그렇게 술만 먹는다며?” “난 범죄자 이재명이라도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어”….밤늦게까지 보고서와 씨름하며 지낸다는 대통령으로선 억울하기 그지없겠지만 시중 민심은 이런 게 현실이다. 이런 민심의 반영이 당심과 민심 모두 한동훈 압승으로 나온 전당대회 결과다. 보수 주류에서 윤 대통령은 사실상 버림을 받은 것이다. 여당에 뿌리도 없는 상태에서 아내만 감싸며 보수의 여망을 저버린 자업자득이다. 여당에 뿌리가 없기는 한동훈 대표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보수 회생을 바라는 여망에 올라타 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보수 민심이 윤 대통령을 완전히 버리고 가자는 것은 아니다. 한 대표가 그걸 혼동하면 그 역시 버림받게 된다. 보수는 오로지 보수를 살릴 길을 택하는 쪽에 열망을 모아줄 뿐이다.윤 정권의 또 하나 착각은 의료개혁 등을 밀어붙이면서 미국 레이건 대통령 시절 관제사 파업 대응, 영국 대처 총리 시절 탄광노조 파업 대응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두 사례는 지도자가 소신과 결단력으로 법과 원칙을 지켜 집단이기주의를 극복한 전범(典範)으로 통한다. 하지만 의료개혁 문제를 다루는 윤 정권의 태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대처는 인도에서 수년 치 석탄을 수입해서 비축했고, 레이건은 파업 관제사를 대체할 인력을 충분히 확보해 대응했다. 평소 유머와 소통의 달인이었던 레이건이 취한 단호한 태도가 국민에 주는 호소력과 윤 대통령의 단호한 표정이 주는 느낌은 다를 수 밖에 없다.의사들을 변화시킬 백업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의료개혁에 필요한 수많은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한 증원만 강조하며 ‘2000명’이라는 말뚝을 박아버린 것은 칭송받을 소신과 결단력이 아니라 무모한 단순화, 고집과 다름없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 의료시스템 전체가 위험에 빠진 것이다.복잡다단한 사안을 충분한 사전 준비와 종합적 프로그램 없이 밀어붙이다 거대한 부작용에 맞닥뜨린 현실을 인정해 유연성을 회복하는 것도 ‘기득권 세력 저항에 타협하지 않는 소신’ 만큼 용기 있는 일이다.윤 정권의 또 하나 착각은 국민을 쉽게 설득당하는 상대로 여긴다는 점이다. 명품백 문제에 대해 “매정하게 끊지 못해 아쉽다”는 KBS 대담 발언에 이어, “돌려주라 했는데 행정관이 깜박했다”는 최근 설명, 김 여사 출장 조사를 “현직 영부인 첫 조사”라고 의미부여하는 모습 등은 다 국민을 어수룩한 상대로 본 산물이다. 이런 해명들이 나올 때마다 상당수 보수층은 한숨을 내쉰다.국민 눈높이에 못 미친다는 표현은 점잖은 것이고, 시중에서 도는 표현은 “국민을 바보로 여기나 봐”라는 것이다.윤 대통령은 백척간두, 녹아가는 유빙(遊氷) 위에 서 있다. 좌파 세력의 극악스러움과 자금력 동원력은 최고점을 찍고 있다. 야당의 집요한 방통위 무력화 시도는 8·15 광복 직후 좌익이 툭하면 사보타주로 생산시설과 국가시스템을 마비시키던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상임위와 이진숙 청문회에서 야당 위원장들의 행태에는 인민재판과 문화혁명 때의 조리돌림 장면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다. 습도가 높아지면 곰팡이가 피어오르듯, 잠복해 있던 DNA가 윤 정권의 실정과 국회 189석이라는 습도를 타고 발현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사면초가를 극복할 길은 하나다. 임기 전반기와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즉, 싫어하는 사람 얘기를 듣고, “안 된다”고 반대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혼자 결정하지 말고 중의(衆意)를 모으면 된다.명연설로 유명한 처칠은 연설문 작성전 보좌관들을 런던 시내에 풀어서 국민이 가장 궁금해하는게 뭔지, 불만이 뭔지, 당장 총리가 눈앞에 있으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를 물었다.임기 반환점이 불과 석 달 남았다. 지난 2년 3개월이 완행열차였다면 임기 후반은 고속열차처럼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윤 대통령의 휴가는 전반기 참담한 실패 원인을 냉철히 들여다보고 대전환의 구상을 다듬어 새로운 리더십으로 거듭나는 결단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대다수 국민이 새 국민의힘 대표에게 바라는 건 무얼까. 친윤인지 반윤인지는 핵심이 아니다. 국민이 오로지 바라는 건 보수의 재건이다. 더 이상 뉴스를 보지 않는다는 사람들, 차라리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방법은 선명하다. 그것은 윤석열 대통령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 핵심은 ‘김건희 수렁’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다.이번 김 여사 문자 파동으로 가장 심각한 대미지를 받은 사람은 누굴까. 전당대회를 흔들기 위해 문자유출을 기획한 이들은 한동훈 후보에게 타격을 줬다며 희희낙락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가장 심하게 대미지를 입은 사람은 대통령이다. 왜일까.김 여사의 문자 및 평론가와의 통화 내용은 명품백 사과를 안해 총선 참패로 연결시킨 장본인이 대통령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자신은 사과를 꼭 하고 싶었지만 반대 때문에 못 했다고 주장하는데, 대통령 말고 누가 여사의 뜻을 좌절시킬 수 있겠는가.그동안 윤 대통령은 부인 문제에 대해 공정과 상식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곳에는 좌파와 야당의 온갖 저열한 공작과 공세에 시달리는 심약한 부인을 더 이상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지 못하는 애처가의 처지가 동의는 못 해도 짐작은 된다는 동정론도 혼재해 있었다.그런데 정작 사과를 못 하게 한 게 대통령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당시 사과를 하는게 옳은지 아닌지는 찬반이 엇비슷하게 갈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상식을 가진 사람 백에 아흔아홉은 사과하는게 옳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대통령 부부 주변 비선 라인들은 자꾸 ‘박근혜 사과’를 거론하며 사과하면 인정하는 게 돼 더 깊이 끌려간다며 ‘사과 부작용론’을 주장했다는데,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일방적 의혹이나 침소봉대된 공세에 밀려 사과하면 사실로 인정해주는 역효과가 생길지 몰라도, 명품백을 받는 장면은 촬영돼 온 국민이 본 것이다. 대통령 주변의 인식이 국민 상식과는 동떨어진 섬나라, 극단적 강경 음모론이 지배하는 외계 행성에 머물고 있음을 김 여사가 드러낸 셈이다. 역사는 권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멸의 길로 유혹하는 강경파의 발호를 보여준다. 1979년 10·26 직전 부마사태 때는 탱크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차지철이 있었고, 1987년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에 진입해 다 끌어내자는 강경파들이 있었다. 간신배들의 강경론은 심기가 불편한 권력자에게 바치는 최고의 아첨이며, 동시에 자신들의 지위와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보신의 수단이다. 김 여사가 반대 때문에 사과를 못했다고 주장한 결과 세간에는 민심을 읽는 판단력이 여사가 대통령보다 나은 것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돌고 있다. 사과를 거부한 채 어이없는 KBS 대담 발언으로 중도 보수 마저 등돌리게 만든 게 여사의 감정적 반발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 본인의 고집 때문이라고 폭로한 셈이기 때문이다. 주군(主君)을 기쁘게 해주겠다며 꾸민 계략이 결과적으로 주군을 욕보인 것이다.또는 만약 김 여사가 실제 사과할 의향도 없었으면서 주변 반대 핑계를 댄 거라면 자기 체면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깎아내리는 비겁한 일을 저지른 셈이 된다.어느 쪽이 진실에 가깝든 결론은 같다. 김 여사와 비선 세력을 대통령에게서 분리시키지 않으면 정권의 추락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총선 참패는 보수 진영에 국민이 내린 마지막 경고였다. 전당대회는 그 쓴 약을 마시고 처절히 다시 태어나야하는 장(場)이다. 그런데도 여사 문제가 문틈으로 연기 스며들 듯 다시 등장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사 문제의 수렁에서 허우적일 것인가. 대선 선거전 초기부터 지금까지 3년 넘게 잊혀질까 싶으면 터지는 일이 반복돼 왔다. 상당부분은 좌파 공작과 선동의 결과물이지만, 김 여사 스스로 야기한 것들도 수두룩하다. 그동안 국민은 여사 문제가 터질때마다 막연하게나마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렇지만 그 기대는 점차 실현 불가능 쪽으로 기울었다. 정권 성공과 국가를 위해 사적인 모든 걸 버릴 수 있다는 그런 의지도 공직관도 결단력도 대통령이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따라서 이제는 제3자의 힘을 통한 해결밖에 방법이 없다. 그래서 여론을 수렴해 반영해야 하는 집권당 대표에게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보수의 판을 깨서는 절대 안 되며 윽박질러서 될 일도 아니다. 설교하듯 교육해서도 안 된다. 밤새 술잔을 앞에 놓고 설득해야 한다.“정권이 살고 나라가 살고 보수가 살고, 역사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으려면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법대로 하는 것입니다. 일반인처럼 여사도 소환돼 엄중한 조사를 받게 하고 만약 죄가 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정권 재창출이 되고, 다음 대통령이 제일 먼저 여사를 구해 낼 것입니다.”고집 센 사람이 생각을 바꾸는 건 상대 의견이 옳다고 여길 때가 아니라, 자기 힘이 현저히 뒤져 불리하다는 걸 절감할 때다. 권력자를 설득하려면 눈물로 호소하되 등뒤에는 압박할 수 있는 칼자루를 갖고 있어야 한다.지금 정권이 처한 사면초가의 상황이 그 칼자루다. 야당은 특검을 계속 압박할 것이고, 곧 레임덕으로 관료조직도 안 움직이게 된다. 보수층 다수도 등을 돌렸다. 야당은 여사와 관련해 뭔가 폭탄이 터지는 게 시간문제라고 고대하고 있다.온갖 인사나 논공행상과 관련해 직간접 관련자들이 그동안은 쉬쉬했을 것이다. 자리라도 하나 구할까 해서다. 그러나 임기 중반을 넘어 자리들이 다 채워지고 나면 여기저기서 불만이 나올 수 있다.여사 라인의 국정 조언, 인사 개입 의혹도 소지 자체를 제거해 놓아야 한다. 백번양보해 친윤 그룹과 여사 라인의 내부 조언자 역할을 인정한다 치자. 그런데 그들이 그럴 수준과 능력이 되는가부터 의심스럽다. 대선 때 전두환 관련 발언 논란 당시 ‘개 사과’ 사진을 내놓는 수준을 보라. 취임초 연예인 개인 SNS 홍보용 같은 여사 사진들을 내걸던 홍보마인드를 보라. 당 대표를 쫓아내는 방식, 연판장 돌리기도 마찬가지다. 남의 눈으로 내 행동을 바라보는 능력의 결핍, 한 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 사냥감만 물어뜯는 단세포 수준 전략 능력의 결과물들이다.새로 선출될 집권당 대표에게 나라가 처한 중대한 국가적 주제에 천착하라고 하기 앞서 우선적으로 대통령 부인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문하는 것 자체가 참담하기 짝이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대한민국을 지켜가야 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 전체에 참으로 절박한 우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필자는 ‘이재명’만을 소재로 칼럼을 쓴 적이 없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정치는 자신의 의도와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선악·장단점이 너무도 뚜렷하게 보이므로 칼럼으로 분석할 만큼 다층적인 소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난 총선의 비명학살 친명횡재 공천과 이 대표의 언행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짚어 봐야할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그것은 이재명식 정치가 청소년의 교육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지탱해 온 가치관에 미칠 폐해다.아무리 갈등이 심하고 독재와 야합의 역사가 있었어도 대한민국 헌정사는 양심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길로 흘러왔다. 험난해도 옳은 길을 택하면 결국 보상받았고 탐욕은 불이익으로 돌아왔다. 사필귀정이 통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윤석열 대통령의 당 장악 욕심은 몇 배 큰 부메랑이 되어 윤 대통령을 징벌했고, 친박공천 욕심은 박근혜를 징벌했다. 노무현은 지역감정에 도전하려고 현실적 불이익을 무릅썼고 결국 ‘보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재명이 등장하면서 이런 공식이 허물어져 버렸다. 무수한 거짓말과 안면몰수하고 자행하는 장애물 제거, 내부 숙청…. 정상 사회에서라면 곧바로 징벌당할 행동들이 현실에서 이득으로 귀결됐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과 이재명 정치의 현실은 정반대다.이재명식 거짓말은 범인(凡人)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첫째, 그냥 거짓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악마로 추락시킨다. 그는 자신과의 불륜관계를 털어놓은 여배우를 허언증 환자로 매도했다. 개인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지 않지만 이 점만은 지적하고 싶다. 불륜이나 유부남 사칭을 저지르는 남자들은 더러 있어도, 상대 여성을 허언증 환자로 매도하는 남자는 찾기 힘들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다가, 빌거나 도망다니기에 급급할 것이다. 상대의 약점을 들먹여 겁박하거나 정신질환자로 몰아붙이는 뻔뻔함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재명 지지자들은 필자에게 따지고 싶을 것이다. 여배우의 일방적 주장을 어떻게 사실이라고 믿고 이런 논지를 펴느냐고. 필자는 그 여배우가 이재명 변호사가 2010년 성남시장이라는 공인이 되기 이전부터 그와의 관계에 대해 지인들에게 토로한 사실을 알고 있다. 이재명이라는 변호사와 이러저러한 관계가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공천을 받으려 뛰는데 이건 문제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상대 남자가 훗날 시장, 도지사, 유명 정치인이 될 걸 예상하고 미리 이런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 퍼뜨렸을 가능성은 1%도 안 될 것이다.이 대표는 형수 쌍욕으로 궁지에 몰리자 친형과 형수가 패륜행위자라고 주장했다. 김성태 쌍방울 전 회장을 지칭할 때는 ‘조폭 출신’이라는 표현을 빼놓지 않는다.이재명식 거짓말의 또 하나 특징은 논거 자체가 팩트가 아닌 경우가 잦다는 점이다. 누구든 논거를 들며 주장을 펼 때 논거로 제시한 내용 자체는 팩트임을 당연한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1년 전 다른 재판 때는 이랬는데 이번엔 정반대 판결이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번 게 잘못됐구나’ 또는 ‘이번은 상황이 다르니 1년 전과 달라도 잘못된 게 아니다’는 반응을 한다. ‘1년 전 재판이 이랬다’는 예시 자체가 사실과 다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는다. 이 대표는 그 점을 노려 사실과 다른 내용의 논거들을 던진다. 지지 집단 구성원들의 머릿속 확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재무장용 논리를 제공하려는 의도다. 이런 정치가 청소년의 가치관에 미칠 부정적 학습효과는 측정조차 겁난다. 정치는 몇 년이지만 교육은 백년, 이백년을 간다.주군(主君)에게 노골적 아부를 해대고 상대 진영을 물어뜯는 데 앞장선 이들이 한결같이 최고의 보상을 받았고, 조응천을 비롯해 합리적 목소리를 내고 상대적으로 상식과 정도를 지키려 했던 이들은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과거에는 노골적으로 사당화 공천을 하면 국민이 이를 응징했는데, 이번엔 아무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윤석열과 김건희’라는 강력한 후원 에너지의 영향이기도 하다.그러니 “당의 아버지” 아첨까지 나오는 막장극이 생중계되고 있다. 그 집단 내부엔 어떤 은밀한 거래가 숨어 있을까. 4건의 재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이 대표가 변호사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3월 말 국회가 공개한 이 대표의 재산 신고액은 31억1527만 원이다. 한 해 전보다 3억3257만 원 줄었는데 대부분 아파트 공시가 하락에 따른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 대표와 측근들 사건의 변호사 5명이 ‘공천=당선’ 지역에 공천돼 매관매직 비판이 일었는데 이런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변호사비 내역을 상세히 밝혀야 한다.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 삼권분립이라는 기둥들 위에 정의·공정에 대한 믿음이 뭉쳐져 굴러가는 공동체다. 그런데 이재명식 정치는 사필귀정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고 합법의 외피를 쓴 사법절차 교란으로 시스템의 기둥을 흔들고 있다.‘이재명 문제’는 도덕성 각성 촉구 차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사법시스템이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재판이 지연돼 이 대표가 피고인인 상태로 대선이 치러지고 만약 승리할 경우 국민의 절반은 그 정당성을 흔쾌히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반대로 대선을 목전에 두고 만약 유죄가 확정돼 피선거권이 박탈된다면 국민의 다른 절반이 민란 수준으로 저항할 것이다.유죄든 무죄든 조속히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 거짓말과 사술(詐術)의 정치로 인해 공동체의 정신적 토대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사법부마저 소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붕괴를 막을 길이 없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보수진영의 귀한 자산이다. 왼쪽을 보면 위선과 거짓의 표본 같은 삶을 살아온 포퓰리스트 범죄혐의자들이 정권 장악을 목전에 둔 듯 기세를 올리고, 오른쪽을 보면 오만한 리더십이 국가 최고지도자 자리를 망각한 채 자기 부인 감싸기를 국정 성공보다 우선시하는 절망적 현실에서 보수층 상당수가 한동훈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2027년 대선은 한동훈의 시간이 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 국민이 두 번 연속 검사 대통령을 뽑아줄 가능성이 크지 않으며 둘째, ‘가진 자·기득권·귀족 엘리트’ 이미지를 탈피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동훈이 대선 무대에 오르면 야당과 좌파는 ‘2기 검찰정권’ 프레임으로 맹공을 퍼부을 것이다. “예전엔 군군(軍軍)이더니 이젠 검검(檢檢) 하겠다는 거냐”며 자극할 것이다.‘검찰 독재’ 선동에 고개를 젓는 이성적 국민들도 검사 스타일 리더십에는 진저리를 치게 된 게 현실이다. 정무감각 결핍, 오만한 언행, 일방적 메시지 전달, 엘리트 의식, 일단 잡아들인 뒤 용의자를 좁혀가듯 먼저 던져놓고 뒷수습하는 정책추진 방식…. 지난 2년 동안 민낯을 드러낸 이런 리더십 중 상당 부분은 개인의 캐릭터 탓일 수 있는데도 국민은 ‘평생 검사만 했기 때문에 저런다’는 인식을 갖는 게 현실이다.5공 청산 이후 육사 출신들이 “선배들 잘못 때문에 최소 한 세대 이상은 걸러야 한다. 정치 근처에 가지도 말라”고 스스로를 옥죄었듯이, 한동훈은 대신 속죄하듯 고개를 숙여야 한다. 검사 출신이라는 굴레가 사라지려면 그런 노력이 쌓이고 쌓여야 한다. 지난 총선 때 야당 내에선 한동훈의 타워팰리스 거주, 처남(전직 검사) 문제 등을 집중 공격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나중에 써먹자”며 미뤘다. 좌파의 그런 행태야 상수(常數)로 여긴다 해도 두뇌 지위 재산 집안 등 모든 걸 갖춘 채 갑(甲)으로 살아왔다는 이미지는 한국 사회에서 대권 쟁취에 상당한 족쇄가 될 수 있다.‘저 사람이 진정으로 우리 을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풀어줘야 한다. 당 대표나 대선후보 자리에 앉아 양극화, 서민, 민생의 아픔을 아무리 얘기해도 국민의 가슴에 와닿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허들을 넘으려면 오랜 시간 민생 곁에 뒹굴며 공을 들여야 한다. 정무감각 제로 대통령을 겪으면서 국민은 정치 초보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았다. 의원은 정치에 뛰어들자마자 할수 있어도 대통령은 다르다. 장군(제너럴)이 되면 병과가 없어지듯 대통령은 종합적 판단과 통찰을 할 수 있는 경륜이 필수적이다.한동훈은 젊다. 서민을 위한 무료 변론 활동을 하거나 보궐선거 또는 시도지사 선거에 나가 재선의원이나 재선 시도지사로 정치 행정 경륜을 쌓아도 2032년 대선 때 59세에 불과하다. 한동훈은 최근 지인들에게 고령운전자면허, 의대 증원 논란 등을 거론하며 “전통적 지지 기반이 다 허물어지고 있다. 당이 막아줘야 하는데 그걸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당 대표 출마를 시사했다고 한다.윤 대통령과는 화해가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사실 누가 대표가 되든 대통령과의 긴장 관계는 불가피하다. 새 당 지도부는 대통령에게 김건희 여사 문제를 국민 눈높이에 맞게 공정하고 엄중하게 처리하고, 특별감찰관을 임명하고, 정권 내 여사 라인을 쳐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요구를 윤 대통령이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여 수용한다면 정권 성공의 에너지가 생기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커보이지는 않는다.대통령과 여사 라인은 당 대표가 대권 욕심에 저런다며 반발하고 친윤계가 난리칠 것이다. 코끼리들이 싸우면 잔디가 뭉개지듯 보수진영이 풍비박산 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이 이런 최소한의 민의마저 관철시키지 못하면 보수진영의 미래는 없다.그러므로 새 지도부는 대통령 부부가 반발할 명분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로 꾸려져야한다. 최악의 충돌 상황을 피하면서도 윤 대통령을 부인 감싸기에서 탈피해 정상 코스로 견인하려면 대권 등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보수 재건에만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예를 들어 도봉갑 김재섭 의원처럼 아주 새로운 인물이거나, 그런 새 얼굴을 찾기 어렵다면 아주 노련하고 정교한 관리자가 필요하다.어정쩡한 대권 주자들, 얼굴만 많이 알려졌을 뿐 혁신 이미지는 없는 낡은 중진 정치인들로선 가망이 없다. 게다가 대선주자는 당헌당규상 대선 1년 6개월 전에는 대표직을 사퇴해야 하므로 2년 대표 임기 중 절반 밖에 못 채운다.흔히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평생 한번 밖에 안 온다”는 말을 한다. 한동훈 주변에서도 그런 말로 부추길 것이다. 때가 무르익지 않았는데도 서둘러 나섰다 실패한 이들의 선례를 보면 대개는 주변의 부추김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한동훈 주변에도 비공식 정무팀이라 할 만한 도움을 주는 그룹이 있다. 장인(진형구 전 대전고검장)의 고교 동문이며 안기부 고위 간부를 지낸 원로급 인물, 정치부 기자 출신 인사 등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기회는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말은 자체 발광 능력이 없는 사람이 운좋게 바람을 탔을 때의 경우에만 맞는다. 한동훈은 보수 정치인으로선 이례적으로 상당한 팬덤을 갖고 있고 스타 정치인이 될 여러 매력 포인트를 지녔다. 국가 미래를 위해 어떤 지도자가 될 것인지 고심하는 모습, 진정으로 서민의 삶에 다가가는 모습을 통해 숙성 과정을 거쳐 단단해진다면 기회는 언제든 온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정치적 기술이나 특장점 한두 개만으로 쟁취되지 않는다. 역사 앞에 겸손하며 국민의 요구가 절실하고 충만할 때만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 대통령에게 국민이 요구하는 변화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더 이상 오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만이라는 그 뿌리에서 2년간 숱한 썩은 가지들이 뻗어났다.‘내 부인은 예외’라는 오만이 여사 문제를 산사태로 키웠고, ‘여당은 대통령 직속 부대여야 한다’는 오만이 당 대표를 쫒아내고 전당대회 룰을 바꾸는 꼼수정치로 이어져 당을 풍비박산 냈다. ‘당신이 뭘 알어’라는 오만이 주변의 언로를 막았고, ‘당신들이 검사보다 똑똑해?’라는 오만이 편중인사, 검찰공화국 프레임을 키웠다.총선 참패 한달. 대통령은 ‘겸손한 윤석열’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가. 고개를 흔들 사람이 많을 것이다. 21개월 만의 기자회견에서도 근본적 변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윤 대통령에겐 두 번의 거듭날 기회가 있었다. 강서 보선 참패 직후와 연초 KBS와의 대담이었는데 다 놓쳤다. 특히 KBS대담에서 핸드백 문제에 대해 “정말로 죄송하다. 절대로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며 진솔하게 사과하지 않고 “아쉽다”며 눙치고 넘어감으로써 국민 마음 속에 “그래? 두고 보자”는 응어리를 맺게 해 총선 참패로 귀결됐다. 문제는 핸드백 자체가 아니라 그걸 풀어가는 자세였는데 몰랐던 것이다. 이번 회견에서도 부인 문제에서 태도의 대전환을 이뤄 공정과 상식의 솔선수범자로 돌아가려는 진심을 느낄 사람이 얼마나 될까.꼼수정치, 비선정치에서 벗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윤 대통령은 총선 직후 홍준표 대구시장뿐만 아니라 오세훈 서울시장, 나경원 당선인 등도 따로따로 불러 만났다고 한다. 기존에 윤 대통령은 온 나라가 엑스포 유치에 올인하는데 오 시장은 대통령실과 협의 없이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겠다며 따로 뛰어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오 시장이 지난해 초 한남동 새 시장 공관에 입주한 뒤 대통령을 초대했으나 윤 대통령은 대통령 관저로 오라고 했고 여기에 권영세 의원 등 다른 사람들도 불러 독대 자리를 자연스레 무산시켰다고 한다. 나경원 당선인과도 전당대회 때 핍박했던 역사가 있다.오 시장, 나 당선인과의 면담 이후 나 당선인이 당 대표로 오 시장의 대권 도전을 지원하고 오 시장은 나 당선인의 차기 서울시장 도전을 돕는다는 동맹 구축설이 여권 내에서 돌고 있다.문제는 윤 대통령에게 절실한 정치의 복원은 이런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재명 대표와의 회동에 함성득 임혁백 라인이 일정 부분 관여했다는 것도 대통령이 비공식라인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야당 대표와의 회담은 당연히 여당 지도부를 통해 이뤄져야 마땅하다. 박영선 총리설 파동에 이어 비선라인 의혹이 또 일게 된 것이다.게다가 총선에 나갔던 이원모 비서관을 복귀시킨다는데, 그가 아무리 유능해도 부인이 김건희 여사의 유럽 순방에 동행한 사실이 온 나라에 각인된 인물의 회전문 등용이 국민에게 어떻게 비치겠는가. 국민이 총선에서 버리라고 요구한 ‘작은 정치’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총선민심은 대통령의 환골탈태를 요구했고, 윤 대통령도 여러 변화 시도를 한다. 그런데 실제로 바뀌어야 할 ‘작은 정치’, 부인 감싸기는 큰 변화의 기미가 없는데 정작 엉뚱한 데서 변화의 조짐들이 보인다.한 예로 육사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백지화하려 한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로서의 홍 장군을 높이 기리고 추모’하는 것과, ‘독립군이 몰살 당한 자유시 참변 관련 의혹과 소련공산당 경력 등이 육사 생도의 전범(典範)으로 삼기에는 적절치 않으니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해 모시자’는 주장은 배치되는 게 아니다. 민간·학계에서 문제제기와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은채 문제제기 방식이 관 주도로 된 것은 아쉽지만, 문재인 정권이 육사의 정체성을 바꾸려는 의도로 벌인 일을 바로잡겠다는 취지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닌데도 총선에서 지니까 발을 빼려는 것은 뚜렷한 철학과 역사관이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야당이 요구하는 국정기조전환을 국정방향과 국정태도로 구분해 보자. 연금개혁 노동개혁 원전정책 가치동맹외교 등 국정방향은 전환 대상이 아니다. 전환해야 하는 것은 정책 변화를 이끌어가는 윤 대통령의 소통방식 등 태도일 뿐이다. 국정방향을 전환하라면 문재인 때처럼 낡은 좌파이론 실험장으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공중파를 진영의 도구로 삼아 극단으로 치닫는 좌파 방송의 횡포를 방치하자는 말인가. 좌편향된 균형추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너무 당겨 우편향을 범하는 우(愚)는 철저히 경계해야 하지만 방향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철학 소신은 확고해야 한다.대다수 국민은 이재명 대표와 야당이 잘해서 찍어준 게 아니다. “야당도 형편없지만 윤 대통령 당신이 더 잘못하고 있다”며 등을 돌린 것이다. 야당과 좌파의 잘못을 덮어주라는 게 총선민의가 아니다. 야당 편들고 총리 인사권 등 권한 다 넘겨주라는 게 아니라 대통령 당신이 바뀌라고 회초리를 내리친 것이다대선 때 윤 후보에게 표를 주며 국민이 맡긴 소명도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 대표적인 게 문재인 전 대통령 문제다. 가족 관련 의혹들, 울산시장 선거 개입, 해수부 공무원 피살 사건, 대(對) 중국 3불1한의 전말, 남북정상 USB의 실체 등등의 진실을 밝혀야 정의가 복원된다. 정치보복이 아니라 유권자에 대한 책무다.중도는 이념 때문에 떠난 게 아니다. 대통령이 공정과 상식이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떠난 것이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지적과 경고를 무시하다 총선을 그르쳤음에도 진솔한 반성과 뼈저린 현실인식이 없다면, 다음 대선은 물론이고 장기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수에 상처를 입힌 정치인으로 기록될 수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총선 며칠 후, 총선 결과보다 더 놀라운 얘기를 여권 사람들에게서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전언이었다. 김건희 여사가 머지않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도 덧붙여졌다. ‘수많은 보수 지지자들이 울분과 절망감을 겪고 있는데 정작 대통령 부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건가?…’ 귀를 의심하면서, 그들이 잘못 관측한 것이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의 관측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일들이 이어졌다. 윤 대통령이 별로 변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 16일 국무회의 발언에 이어, 17일 새벽엔 박영선 총리, 양정철 비서실장설 파동이 비선라인의 활동재개를 다시 확인시켜줬다. 총리·실장설은 공식 인사·정무·홍보 라인이 아니라 대통령 부부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고 한다.윤 대통령은 총선 참패의 원인이 한동훈 대표와 당의 잘못 때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공천 개입을 자제하는 등 당을 위해 “그렇게 해줬는데도” 선거를 망쳤다는 것. 부정확한 인식이다. 참패의 원인은 99% 대통령이 제공했다. 최고 지도자가 모든 허물을 안고 가야 한다는 도의적·정무적 차원에서의 표현이 아니다. 객관적·실질적으로 분석할 때 거의 전적으로 대통령이 패배요인을 제공한 선거였다. 물론 윤 대통령 이외에도 패배 원인은 100가지도 넘게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백개를 다 합쳐도 총량에서 전체 원인의 1%가 안된다. 윤 대통령이 국민 과반수의 미움을 사게 된 근본 원인은 자신의 최대 장점이고 경쟁력인 공정 이미지와 정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부인을 감싸고 돌며 사과마저 거부하고, 오만과 불통 이미지를 끊임없이 각인시켜준 결과다. 조국 추미애가 대통령 윤석열 탄생의 1등 공신이었듯, 이젠 품앗이하듯 윤 대통령이 조국 추미애 부활의 1등 공신 역할을 해준 셈이다. 대통령이 힘과 권위 신뢰를 되찾으려면 공정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김 여사 문제를 국민 다수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수준으로 처리해 매듭짓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 다수는 이념적·당파적 스펙트럼을 좌 극단 1, 우 극단 10으로 가정할 때 4~8사이의 중도 온건진보 온건보수 성향 사람들을 뜻한다. 대통령 주변의 비선 강경파들은 “하나를 내주면 열을 요구할 것”이라고 만류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1~3 좌파는 하나를 받으면 열을 요구하겠지만 그들은 어떤 경우에든 그러는 세력이니 대책을 세울 때 아예 고려의 대상에 넣을 필요가 없다. 오로지 3~8 국민들만 바라보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들이 외면하면 정권은 고립된다. 줄건 주고 받을 건 받아야지, 계속 감싸기만 하면 하나가 아니라 전부를 잃게 된다.첫걸음은 검찰의 엄정한 사법처리다. 김 여사를 빠른 시일 내에 공개 소환하고, 압수수색을 포함해 적극적 수사의지를 갖고 임해야 한다. “탈탈 털었다”가 대통령의 입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 저절로 나올 수준이 되어야 한다.김 여사의 유죄를 예단하는 게 아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에 동원된 계좌주 91명 가운데 기소된 사람은 1명이고 그나마도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법리적으로 따져 결국 김 여사가 무죄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해도 엄정한 사법절차를 거쳐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명품백 사건도 김영란법 조항에 따르면 공직자 배우자의 금품수수는 직무연관성이 있는 경우만 처벌대상이 되므로 김 여사는 법리적으로 무혐의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해도 철저한 조사와 사법절차를 거쳐 결론이 나야 한다.물론 아무리 엄혹한 수사와 재판을 거쳐도 야당은 더 거세게 특검 공세를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여론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며 여당 내 이탈도 없을 것이다. 국민도 특검 만능론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윤 대통령은 김 여사와 처가에 대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다른 선택 대안이 없다. 감싸려 해도 결과적으로 똑같은 코스로 끌려갈 가능성이 크다. 소환 조사조차 안 받은 현 ‘봐주기’ 상태에서 특검법이 상정되면 여당 새 지도부가 사실상 동조해주거나 이탈표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설령 이번에 특검을 피한다 해도 다음 대선에서 야당은 물론 여당 후보들도 경쟁적으로 여사 문제를 들고나올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느 정권이든 비선 실세로 지목된 인물과 관련한 의혹이 불거진 뒤 그냥 덮고 갈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전두환 때 전경환이 그랬고. 노태우 때 박철언이 그랬고, 김영삼때 김현철이 그랬고, 김대중때 홍삼트리오가 그랬고, 이명박 때 이상득이 그랬다. 문재인 전 대통령 가족만 예외인 것은 윤 대통령이 문 전 대통령을 건드리는 걸 한사코 마다하기 때문인데, 다음 정권도 그럴까? 만에 하나 김 여사가 구속된다고 가정하자. 여야 모두 으스스 떨고 국민 사이에 동정론이 일 것이다. 판사들도 이재명, 조국 사건에 대해 야당 눈치 보기를 하기 어렵게 된다. 수백 건 쏟아질 선거사범 수사, 경기동부연합 등 종북세력 수사도 힘을 받게 된다. 비리 발생 시점이 재임 중이라면 가족의 구속수감이 정권의 도덕성에 타격이 되지만, 도이치모터스 사건은 12년도 더 지난 결혼전 얘기다. 부인마저 심판대에 세운 대통령에게서 뿜어 나올 춘풍추상의 기세는 국정 주도권을 확실히 쥐여줄 것이다. 지도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할 때 국민에게 말이 먹히고 기강이 잡힌다.오만·불통과 부인 감싸기는 같은 맥락에서 생기는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니 가족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수 있다는 오만, 법에 규정된 특별감찰관이라도 내가 싫으면 비워둘 수 있다는 생각, ‘내가 뭉개고 가자고 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라는 권위의식이 진솔한 사과 대신 “아쉽다”고 눙치고 가는 KBS 대담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을 상황을 자초했다.권위의식은 윤석열 리더십의 근본적 문제다. 취임 초 주변에서는 “대통령이 ‘컨보이’(convoy·경호차 행렬)를 너무 좋아한다”는 말들이 나왔다. 참모들에게 버럭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실 주변에 ‘오대수’란 은어가 돈다. ‘오늘도 대충 수습하고 간다’는 뜻이다. 이래선 어떻게 소통이 가능하겠는가. ‘50분’이란 별명(회의 내내 본인이 말한다는 비유)이 붙을 정도로 경청보다는 가르치려드는 대화 스타일도 바꿔야 한다.당장 나라에 닥칠 상황은 험난하다 경제 환경은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고, 미국 대선, 중동전 등등 악재가 겹겹이 쌓여간다. 이를 헤쳐가며 4대개혁을 하려면 국민 신뢰가 절실하다.혹여라도 윤 대통령이 ‘여태 103석으로도 꾸려왔고 이제 108석인데 여태 해왔듯 밀고 가면 되지 뭐가 문제냐’, ‘개혁만 꾸준히 해나가면 국민이 평가해줄 것’이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이렇게 불신당하는 상태에서는 개혁이나 정책도 힘을 받을 수 없고, 우파 대통령의 권위주의 일방통행 불통에 5년간 진저리를 친 국민은 다음 대선에서 좌파로 기울 것이다. 지금 근본적 변화를 거부하는 건 앞으로 3년을 까먹는 건 물론이고 보수의 미래,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앞날을 망치는 것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사람들이 요즘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다. ①“도대체 어떻게 순식간에 판세가 정반대로 뒤집힌 거야?” ②“만약 야권이 200석 가져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거야?” ③“남은 기간에 판세가 바뀔 수도 있나?” 오랜 기간 정치를 지켜봐온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해 들었다. 원인 진단은 거의 일치했다. ①번 질문, 즉 불과 2,3주전만 해도 ‘비명횡사’ 공천으로 야당이 대패할 듯한 분위기였는데 순식간에 야당의 압도적 우세 판세가 형성된데 대해 전문가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오만 이미지’가 다시 부각된 것을 원인으로 꼽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권력자가 건방지고 오만한 것이다. 국민은 자기가 뽑은 지도자가 일하다 실수를 저질렀거나 국가경영에 차질을 빚어도 의외로 관대하며 금새 잊어준다. 그런데 국민 앞에서 오만하다든지, 뻔한 거짓말을 한다든지, 가르치려 드는 건 절대 용서치 않는다.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강서 보선 참패 직후 바뀌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민생토론에 몰두했으며, 명품백 논란 이후엔 별 시빗거리가 생기지 않았다. 김건희 여사도 사라졌다. 지지율이 올랐다.그러나 대통령은 3월 둘째 주부터 논쟁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의대 증원 반발에 직접 나서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나만이 정답’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거기다 호주 대사 문제에 대해 ‘런종섭’ ‘도피 출국’ 프레임을 건 좌파와 야당의 공세가 너무 악의적이고 과장됐다고 생각하는 중도층과 온건 보수 시민들 마저도 “이대로 출국시키면 야당에 먹잇감이 될 수 있으니 출국은 총선 뒤로 미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으나 대통령은 아랑곳없이 바로 출국시킴으로써 ‘역시 자기 고집대로만 하는 사람’ 이미지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윤 대통령은 정치를 너무 쉽게 봤다. 외교와 안보, 경제는 전문가들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레 꾸려왔는데 정치는 스스로 모든 걸 아는 양 손에 쥐고 흔들려 했다. 사실은 가장 어려운 분야가 정치다. 리더십, 사회통합, 반대세력과의 관계, 언론, 선거, 민심관리, 이미지관리 등 모든 게 정치의 영역이고 그야말로 고단수의 도움이 필요하다. 평생 정치를 한 정치 9단 대통령들도 매주말 전문가들과 심층 토론을 하고 컨설턴트의 조언을 받아 선거를 치렀다.물론 오만한 권력에 대한 심판은 야당도 예외가 아니다. 이재명, 조국 대표 등을 비롯한 야권 지도자들은 뻔뻔함과 위선, 그리고 상대방을 척결의 대상으로 여기는 계급론적 낡은 세계관까지 결합된 위험천만한 오만함을 지니고 있다.하지만 그들은 영악하다. “수년간 탈탈 털렸다” “일가도륙” 등의 주장을 끊임없이 퍼뜨려 자신들을 동정론의 대상으로 포장한다.이 대표는 판세가 유리해지니까 오만함이 점점 노골화되면서 말이 거칠어지는데, 만약 그가 더 단수 높은 정치인이었다면 “재판 안 가도 된다”고 호언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21대에서 국민이 민주당에 많은 의석을 주셨는데 오만해서 실망시켜드렸다. 깊이 반성한다. 우리가 잘해서 지지해주시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이번에 한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그건 정부 감시 잘하면서 민생 위해 협조하라는 지시로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일하겠다….”현재의 야당 우세에는 한국 언론들의 무책임한 행태도 한몫했다. 좌파 진영에서 팩트들 가운데 자의적으로 뽑아 교묘하게 엉뚱한 그림을 만들면 대다수 언론은 우르르 따라간다.대파논란도 한 예다. 윤 대통령은 “875원이면 합리적”이라고만 한 게 아니다. 농협의 온갖 할인적용으로 낮춰진 가격임을 지적하며 “다른 데서는 이렇게 싸게 사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쏙 빼고, 조작된 가격에 속아 ‘이게 지금 물가수준이군’이라고 만족하며 돌아온 ‘민생과 괴리된 우둔한 지도자’ 이미지를 연출해 버린다. 대다수 언론도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은채 야당 주장에 확성기를 들이대 중계하고, 대통령실이나 여당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어?어?’ 하다 당하는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돼 왔다.또한 지금의 판세에는 △비명반윤 표가 3지대로 가면 야권 표가 분산될 수 있었는데, 지역구를 내지 않는 조국 당이 등장하면서 야권표의 지역구 투표 분산을 막은 점 △더 거세진 호남권의 권력의지와 전략적 투표 행태 △집단 병리현상에 가까운 세상 뒤집기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②번 질문, 즉 야권이 200석을 넘길 경우 상황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예상은 비슷했다.개헌선을 확보하면, 문재인 대통령 시절 추진했던,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에서 ‘자유’ 문구를 삭제하는 게 강행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외교안보 분야도 대변화가 불가피하다. 특히 트럼프 집권 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가 거세질 텐데, 국회가 이를 받아줄 리 없어 결국 미군 감축론이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각국이 반도체 산업 지원 경쟁에 나섰지만 한국 국회에선 재벌특혜 논란이 거세져 결정이 미뤄지거나 지원 규모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거부권이 없으니 특검이 양산되고, 퍼주기 포퓰리즘 입법이 속출할 것이다. KBS 등 공영방송을 영구적으로 좌파진영이 장악할 수 있는 법도 강행될 것이다. 좌파 영구집권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③번 질문, 즉 사전투표까지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판세가 변할 수 있느냐에 대해 정치 전문가들은 과거 선거 전례를 들며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필자는 가능하다고 본다.선거에 임박해 이번처럼 갑자기 여당의 수도권 지지율이 15%씩이나 떨어진 예는 없었다. 이는 과거 총선의 정권 중간평가는 국정 방향에 대한 찬반 의사 표시였던 데 비해 이번에 중도층이 민감하게 반응한 주제는 국정방향 자체가 아니라 대통령의 태도이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정책과 국정방향에 대한 평가는 선거 직전 쉽게 바뀌지 않는데 비해, 사람의 태도에 대한 호감 비호감도는 태도가 바뀌면 영향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다.따라서 윤 대통령이 이제라도 그간 오만하게 비친 대목들을 사과하고 달라지겠다는 진정성을 보여주면 표심은 변할 수 있다. 국무회의 등에서 “호주 대사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제 본의와 다르게 국민이 납득 못 하는 대목이 있다면 그건 결국 제 책임이다. 귀중한 젊은이의 희생과 관련된 문제였는데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 서둘러 내보낸 건 경솔했다”고 유감을 표한다면 국민의 화는 상당 부분 풀릴 것이다. 이종섭 대사 본인을 위해서도 더 나은 길이다. 수사나 재판에서 결백이 입증된다면 앞으로 더 중요한 공무를 맡을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반면 만약 유죄가 된다면 지금 대사직을 유지한다한들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의대 증원에 대해서도 “협상 대표가 전권을 갖고 국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타협안을 찾아오라”고 해야 한다. 강한 리더십은 국민의 박수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때 이뤄지는데, 너무 오래 끌며 피로감과 환자 가족의 걱정을 키워왔다.남은 3년은 포기할 수 없는 시간이다. 요즘 3년은 예전의 30년이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자존심과 고집을 내세우면 정권 망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보수의 미래, 자유민주주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더불어민주당의 공천파동은 한국 정치사에 기록을 세웠다. 축구에 비유하면, 반칙은 어느 팀 어느 경기에서나 발생하지만 질적 양적으로 이렇게 노골적이고 저급한 반칙이 양산된 경기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의도의 노골성, 숙청의 과격성, 수단의 저급성 차원에서 과거의 공천파동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또 하나 놀라운 현상은 반발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있다는 점이다. ‘비명횡사’당한 비명(非明)의 비명(悲鳴)이 금세 잠잠해졌다. 임종석의 잔류를 분기점으로 공천탈락자들 가운데 좌파 성향이 강한 이들은 대부분 잔류를 택했고, 김부겸의 합류 등 어느새 대동단결 모드로 접어들었다. ‘비명계 횡사자’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한 그룹은 온건 중도 성향의 인사들인데 대부분 진작 탈당했거나 이번에 탈당했다. 다른 그룹은 이념적 성향으로는 개딸 못잖게 좌파 성향이 강한 친문 인사들인데 이들은 대부분 백의종군을 다짐하고 있다. 좌파 성향이 강할수록 잔류를 택하는 경향인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침묵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된다. 온갖 세상일에 다 간섭하고, 심사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참지 못해 안달이던 인사가 자신이 직접 신신당부했던 최측근들마저 대부분 ‘횡사’당했는데도 침묵한다.필자는 이런 흐름 속에서 좌파 진영 전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리모컨의 존재를 감지한다. 거역할수 없는 거대한 힘이 이들의 순종을 간접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리모컨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백낙청 임헌영 함세웅 김상근 등등 이른바 원탁회의 멤버로 불리는 좌파 진영의 ‘정신적 호메이니’들일 수도 있고, 그 너머에 좌파 지휘부가 나침반으로 삼는 더 큰 힘이 있을 수도 있다. 그 거대한 힘은 특정인이나 조직일 수도 있지만, 슈퍼컴퓨터가 데이터를 종합해 답안을 제시하듯, 좌파 진영의 ‘집단적 권력의지’에서 도출되는 무형의 합의가 가이드라인처럼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리모컨이 지시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결론은 ‘이재명 중심 단일대오’로 내려졌으니, 억울해도 ‘대의’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우파정권 무력화와 좌파권력 창출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대오에서 이탈하는 자에겐 미래가 없을 것이라는 무음의 경고가 양들의 이탈을 막는 전자펄스 펜스처럼 진영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지지자 개개인도 행동대원처럼 단결한다.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대표는 조국혁신당)에 대한 좌파 지지자들의 호응은 아무리 이 대표가 싫어도 좌파(진보)라면 모두 ‘윤석열 심판’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야 한다는 친문 지지자들의 권력의지의 발현이다. 친문 학살이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지역구에서 이재명당을 찍어주겠다는 것이다.이런 흐름의 바탕에는 민노총 전교조 등 온갖 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종으로 횡으로 얽혀서 거미줄같이 구축한 촘촘한 네트워크가 깔려 있다.백낙청 전교수는 대선 패배 일주일도 채 안 된 2022년 3월 16일 오마이TV에 출연해 “이재명은 김대중 이후 최고의 정치지도자”라며 민주당 장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촛불혁명을 이어가려면 우리가 반드시 점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충지 가운데 하나가 민주당”이라며 “어떻게 우리 세력이 (민주당을) 지배하고 장악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요충지의 중요성이 옛날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고, 옛날에 비해서도 의미가 더 커졌다…게다가 이재명이라는 정치지도자가 있지 않느냐”고 했다.이미 2년 전 대선 패배 직후부터 이재명을 거점으로 민주당 장악을 연구해온 그들에게 이 대표의 도덕성, 공인의식 수준은 전혀 고민거리가 아니다. 온갖 범죄 혐의를 받고, 은밀한 관계였다고 폭로한 상대 여성을 허언증 환자로 몰아붙이는 뻔뻔함과 도덕적 저열함이 드러나도, 입에 담을수 없는 욕설을 서슴지 않는 인성이 드러나도, 법인카드로 일제 샴푸를 사는 비천한 공인의식이 드러나도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오로지 낙점의 기준은 목적 달성을 위해 안면몰수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생존력, 전투력이다. 사전투표까지 남은 시간은 3주일. 좌파 지휘부는 진영의 모든 화력을 윤석열 심판에 집중하라는 지침을 내릴 것이다. 총선 프레임을 이재명 vs 한동훈이나 좌 vs 우 대결이 아닌 오로지 윤석열 심판으로 몰고 가려는 것이다.진영 내에서 막말 파문이 터지면, 설령 그 내용이 평소 같으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속으로는 말 잘했네 하고 웃고 넘겼을 수준의 발언이라도 신속하고 강한 처방을 내릴 것이다. 친명 후보 교체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당과 이 대표는 온건 부드러움의 대변신 쇼를 해 중도층에 영합하고, 강경파의 불만은 조국혁신당 등에서 흡수하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우파에는 그런 리모컨 존재가 없다. 진영을 견인할 정신적 지주도, 원로그룹도 없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국힘 지도부가 돌발 악재에 대응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의사결정 시 뭔가를 염두에 두는 듯 미적대며 자꾸 내재적 관점으로 덮으려 하고, 대통령실은 호주대사 문제 같은 악수(惡手)를 두고, 의대 증원 문제에 굳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강경 대응을 거듭 외치는 바람에 한동안 잊혀진 경직된 이미지를 다시 상기시키는 국면인데도 아무도 신속히 바로잡지 못하는 모습이다. 리모컨을 쥔 자들이 조용히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공천 파동 뉴스에 묻힌 감이 있지만, 요즘 정말 경각심을 갖고 주시해야 하는 야권의 움직임은 더불어민주당이 반미친북 성향 세력에 최소한 10석의 국회 비례대표 의석을 할애해주기로 했다는 뉴스다.민주당은 총선용 비례대표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진보당, 새진보연합, 연합정치시민회의 후보 10명을 당선 안정권에 배치키로 했다. 진보당은 해산된 통진당의 후신이고, 연합정치시민회의는 반미친북 활동가들이 만든 급진 좌파 단체다.정상적인 대의민주 시스템에선 대표권을 갖기 힘들 반체제 성향 인사들이 면책특권 등 수백가지 의원 특권을 등에 업고 국가 기밀과 정책 형성 과정에 깊숙이 접근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예고된 것이다.국가 안보에 미칠 영향과 더불어 이들의 국회 진출이 우려되는 또 하나의 대목은 나라 금고에 미칠 폐해다.사람은 누구나 공짜를 좋아한다. 회사 탕비실 디저트를 보면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자제한다. 마음속에 셀프 경계령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정치권의 경우 그 셀프 자제의 강도가 좌우파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우파는 크게 한탕 해먹을지언정 좀스럽고 치사하게 보일 일은 자제하고 조심하는 경향이 있는데, 좌파는 자기 권리를 찾아먹고 공짜를 챙기는 데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대표적인 게 조국 전 장관이었다. 나라를 뒤흔든 논란 끝에 2019년 10월 14일 결국 경질되자 사직서 결재 22분 만에 서울대에 복직신청서를 냈다. 복직 신청 기한이 한 달이나 되는데도 챙길 수 있는 건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먼저 타먹는다는 뇌 구조다. 이재명 대표 부부의 경기지사 시절 법인카드 사용 행각도 상상을 초월한다. 누구나 법카를 사적으로 쓰고 싶은 욕구를 때로 느끼겠지만 일제 샴푸를 사오게 하고 집에 초밥을 시켜 먹는 걸 다반사로 하는 대담함은 상상조차 어렵다.섣부른 일반화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도 ‘좀스러운 거지 근성이 상대적으로 좌파에서 더 심하다’는 추론을 떨치지 못하게 만드는 화룡점정의 얘기를 최근 들었다.2022년 5월 정권 교체 시기에 청와대 업무에 관계했던 인사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청와대를 떠나면서 관저의 집기와 가전제품은 물론 접시 수저 등 식기까지 다 가져갔다”고 전했다. 지난해 봄 전언식으로 돌았지만 설마 그랬을 리가 있을까하고 반신반의했던 일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해외 주재 대사관에 물어봤다. 대사가 바뀌면 대사관저 접시 한 개까지 다 재고목록에 기재해 인수인계한다고 한다. 전임자가 비품을 한 개라도 들고 가면 총무담당자가 배임으로 처벌받는단다. 대사관 관계자는 “만약 서방국가에서 퇴임하는 총리나 대통령이 관저 물품을 가져갔다면 사회 전체가 난리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에 근무할 때 장면이 생각난다. 2009년 6월 백악관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그해 봄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오찬을 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경선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었다.대통령이 돋보이게 하려는 배려에서인지 시종 뒤편에서 조용히 따라다니던 클린턴 장관은 테이블 위 접시들을 들어 바닥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8년 전 백악관 안주인 자리를 떠나면서 인계해 주고 간 그 접시들인지 살펴보며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문 전 대통령 부부처럼 다 가지고 떠난다는 건 아프리카 독재국가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100% 다 사비로 산 것이라 치더라도 그렇다면 입주할 때 있었던 기존 비품을 다 인계해 주고 가야 한다. 사용연한이 지나 폐기했다면 폐기 처분 기록이 있어야 한다. 김정숙 여사의 옷 최소 178벌과 장신구들도 특수활동비로 구입한 게 있다면 국가 재산으로 반납돼 있어야 한다.이런 행태가 어떻게 가능한지 심리학자에게 물었더니 “아웃사이더 심리에서 비롯된 주인의식의 결핍 탓”이라 분석했다. 즉 공짜를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에, 공동체에 대한 불신이 가미됐다는 설명이다. 오너가 회삿돈을 펑펑 쓴다고 여기는 직원이 탕비실 음식을 왕창 가방에 넣으며 상대적 보상심리를 느끼듯, 친일매국세력의 나라에서 어차피 기득권자들이 다 해먹는데 나는 이거라도 챙겨 손해를 일부 만회하겠다는 본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나랏돈, 공공 재원을 아까워하고 소중히 여기는 심리가 실종된다는 것.나랏돈을 임자 없는 돈으로 여기고, 한발 늦으면 나만 바보된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국회와 지자체에 진출했을 때 쏟아져 나오는 결과물이 온갖 선심성 사업과 내 편 지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시민·민주 등의 수식어를 붙인 단체가 급팽창하더니 서울에서만도 2016~2020년 3339곳의 단체가 7111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평생을 제도권 밖에서 활동해온 골수 좌파 인사들이 권력에 접근할 경우 이런 행태는 극에 달할 것이다. 이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진실 공개와 법적 통제다. 관사 물건을 다 들고 갔다면 심각한 범죄 행위일 수 있는데도 왜 지금까지 공식 문제 제기가 안 됐을까. 대통령실은 문 전 대통령 부부의 행태에 개탄하면서도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좀스러운 일이라고 판단해 법적 대응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한다. 이해는 되지만 그렇게 묻어버릴 일이 아니다. 좀도둑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문 전 대통령은 소상히 내역을 설명하고, 감사원은 청와대 재산 관리 실태를 조사해 문제가 있다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명명백백히 드러내는 것은 좀스러운 일도, 정치 보복도 아니다.상상 초월 수준으로 공인(公人)의식이 결핍된 이들의 권력 진출은 우리 진영·지역 출신이라면 무조건 밀어주는 묻지 마 투표의 산물이다. 국가권력이라는 거대한 논에 어느 쪽 물을 댈지를 결정하는 투표에 앞서 저수지 물속 성분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유권자의 책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필자가 이 칼럼에서 쓰는 ‘국민’이라는 표현은 전체 국민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가상의 스펙트럼상에서 극좌를 1, 극우를 10으로 놓았을때 3~8 사이 정도의 사람들을 문장 분량 축약을 위해 그저 ‘국민’이라 표현한다. 지난주 윤 대통령의 KBS 대담은 윤석열이라는 지도자에 대한 국민 평가의 변곡점이 될 것이다. 시험시간은 종료됐다. ‘김 여사 명품백 사건’은 막을 내렸다. 국민은 각자가 매긴 평가표를 서랍장에 넣었다. 더 기대도 주문도 안 할 것이다. 사건이 사라지거나 잊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통령실은 문제가 일단락됐다고 진단하겠지만 이는 반만 맞다. 진솔하게 사과했으면 일회성 전시품처럼 사라질 사소하고 별 함의 없는 사건을, 끝내 사과 없이 봉합해버리는 바람에 전시장 구석의 영구 전시 박제처럼 고형물이 돼 버렸다. 꺼내지 않은 채 봉합한 환부 속 작은 거즈처럼 두고두고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최대 피해자는 윤 대통령 본인이다. 윤석열 검사를 정치 입문 1년도 안 돼 대통령으로 등극시킨 최대의 자산인 ‘공정과 상식, 법치주의의 상징’이라는 훈장을 스스로 떼어버린 셈이 됐다. 물론 제 살 도려내기, 춘풍추상은 고대 성현들의 고사에나 등장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국민은 윤석열만큼은 아무리 사소한 자기편 허물이라도 엄정하게 처리하리라 기대했다. 국민이 이 사건을 주목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사건 자체가 대단히 커서가 아니다. 반체제 세력의 저열한 함정에 걸려 벌어진 일이라는 점도 국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민이 주시했던 것은 윤석열에게 표를 주면서 기대했던 ‘법과 정의, 상식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고 내로남불과 이중잣대가 사라진 세상’을 향해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다가섰는지를 측량해 볼 잣대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실과 여당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사과하면 그때부터 2막이 시작돼 더 물고 늘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략적 마인드의 기본조차 결여된 주장이다. 평소엔 중도층과 지지층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결정하면서 왜 이럴 때는 오로지 극좌파만 염두에 두고 대책을 결정하나? 윤 대통령은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넘어서지 못했다. 필자가 의견을 듣는 온건 보수층 중에는 국정 방향이 옳다고 여겨 여전히 지지하지만 그래도 예전 검찰총장 시절처럼 인간적 신뢰는 가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지지율의 등락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국민 마음속 신뢰자본의 약화다. 지지율은 사안이나 이벤트에 따라 등락을 거듭하지만 신뢰자본은 쉽게 복구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신뢰자본이 약화된 상태에서 만약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지율은 20%대에서 정체되고 내각이 말을 안 듣고 여당마저 대들 것이다. 경제 컨트롤도 어렵고 대외관계에서도 힘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설령 야당운이 좋아 총선 승리를 거둔다 해도 위에 열거한 악몽의 시나리오는 시간적으로 다소 유예될 뿐이다.따라서 이제부터 총선은 물론 집권 중후반기까지 내다보고 신뢰자본을 하나하나 다시 축적해 가야 한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리더십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공선사후와 자기희생, 경청과 공감이다.윤 대통령은 최근 민생토론회 등 민생 국정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민생토론회 행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준비는 실무진이 한다고 해도 대통령 스스로도 엄청난 양의 학습과 준비가 요구된다. 그런 열정과 성실성이 쌓여 가면 국민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당장의 신뢰자본 회복을 위한 경로는 두 가지다. 첫째는 가족 관련 문제는 법무부 등 해당 부처에 독립성을 보장해 맡기고, 재발방지책을 확실히 마련하는 것이다. 박성재 법무장관 후보자는 13일 명품백 사건에 대해 “검찰에서 원칙과 법에 따라 공정하게 수사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 발언이 실행되도록 독립성이 보장되면 신뢰는 조금씩 돌아올 것이다. 동시에 대통령실은 특별감찰관 임명 등 제도적 정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둘째, 공천과 총선 후 개각에서 더 이상 내 사람 챙기기는 없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국힘 공천은 일각에서 우려했던 ‘용산 천하론’을 기우로 돌린 채 청신호가 켜졌다.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강남 공천을 신청했던 이원모 전 비서관이 험지 출마로 발길을 돌리겠다고 한 것은 대통령실이 공천 독립성을 존중해주고 당도 균형감 있게 결정해 가고 있다는 시그널을 준다. 만약 또 다른 핵심 측근인 주진우 전 비서관도 본인이 신청한 해운대갑 대신 격전지로 뛰어들고, 해운대에는 윤 대통령이 부산 민생토론회에서 강조했듯 경제 과학기술 분야 인재가 전략 공천된다면 국힘 공천은 근래 여당 공천사에서 보기 드문 독립 공천으로 기록될 싹이 보인다. 당 장악 논란으로 훼손됐던 신뢰도 상당히 회복될 것이다.더 나아가 총선 뒤 있을 대규모 개각에서 ‘검사군단’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윤 정부 중반기는 전반기에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1일 신년회견은 예상대로였다. 상대를 공격할 때는 음모론적 논리를 철근 배근하듯 깐 뒤 그 위에 거대한 허구의 악마 조형물을 세웠고, 국민에게 사탕을 약속할 때는 천문학적 퍼주기를 서슴지 않는 포퓰리스트로서의 본모습을 보여줬다. 대선 직전 온건·실용주의 이미지 가면을 썼던 잠깐의 기간을 제외하면 너무 익숙히 보아 온 장면이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기조 연설 도중 도저히 그냥 넘기기 어려운 대목이 귀에 들어왔다.이 대표는 남북관계와 연평도, 휴전선 부근 주민들의 불안감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한밤 서울 동작대교에 12대의 장갑차와 무장병력이 등장해 놀란 시민들이 신고하고 많은 분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합니다. 수백만이 죽고 전 국토가 초토화된 6·25전쟁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38선에서 크고 작은 군사충돌이 누적된 결과였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논리였다. 6·25전쟁이 38선에서의 숱한 국지적 충돌이 누적돼 전면전으로 확전된 것이라는 주장은 80년대 대학가 좌파 운동권을 휩쓸던 논리였다. 당시 신입생들이 3월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의식화 과정을 밟으면서 처음 접하는 코스가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주입이었다. 6·25가 남북간의 오랜 국지적 충돌과 갈등이 확전으로 이어진 내전이라는 논리는 ‘김일성이 스탈린의 사주하에 일으킨 침략 전쟁’이라는 중고교시절 교육 내용을 뒤집으며 거센 파도처럼 신입생들의 역사관을 지배했다. 민족사 최대의 비극을 초래한 김일성의 죄과는 그런 논리로 희석됐다.하지만 상당수 학생들은 더 깊이 공부하고 더 많은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신입생 초기 머릿속을 점령했던 수정주의 좌파 이론들이 얼마나 얄팍하고 교묘하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더구나 그후 소련이 붕괴된 뒤 스탈린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며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어떻게 스탈린을 설득해 남침을 허락받고 준비했는지가 육하원칙하에 드러나면서 좌파 이론들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됐다.그런데 우리 사회 한쪽에서는 이런 기막힌 역사인식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음을 이 대표의 연설에서 깨닫게 된다. 물론 이 대표가 6·25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기하려는 이념적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더더욱 이 발언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대표와 민주당 일각의 세계관과 사고(思考)가 부지불식간에 그들의 등 뒤 한쪽 끝에 존재하는 이념세력의 지속적 영향력하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2021년 여름에도 “미 점령군”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그런 이념 세력이 현실 권력과 연결되는 창구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다. 지난 24일 국회에서 열린 윤미향 의원 주최 토론회에서 나온 “통일전쟁이 일어나 평화가 만들어진다면 그 전쟁관도 수용해야 한다” “북의 전쟁관은 정의(正義)의 전쟁관” “교육 의료 주거는 남쪽은 경쟁, 북은 무상. 친일청산도 남쪽은 완전히 실패, 북쪽은 성공했다. 어디가 제대로 사는 것이냐”등의 발언들은 80년대 중반 밀실에서 횡행했던 망상 수준의 인식을 그대로 지닌 이들이 온존하고 있음을, 국회가 그들의 교두보로 악용될 수도 있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선거는 행정부와 국회라는 거대한 권력의 논에 어느 저수지의 물을 댈지를 정하는 일이다. 선거 때는 중도 온건을 강조하지만 막상 선거가 끝나면 수문은 이념적 스펙트럼의 극단으로까지 활짝 열린다. 586 청산은 그런 점에서 절실하다. 단지 이념에 찌든 기득권 정치인 몇 명의 퇴출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40여 년전 군부 독재라는 환경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시대착오적 역사관·세계관·이념의 덫을 벗어나 건전한 진보와 보수가 경쟁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기 위해 거쳐야할 과정이다.하지만 극단적 이념 세력은 보수진영의 약점을 숙주로 삼아 극렬히 저항할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토양은 ‘김 여사 문제’와 ‘검사공화국’ 논란이다.물론 검찰독재, 검사공화국이라는 표현은 좌파진영이 만든 허구의 프레임이다. 검찰이 전 정권 비리나 야당 의원을 수사한다고 독재라 부르면 문재인 정권 전반기 2년이야말로 검찰독재 중의 검찰독재였다.‘검찰공화국’이라 비난하지만 현재 검사 출신 장관은 법무부가 유일하고, 장관급을 합쳐도 방통위원장 한 명이다. 그나마 민간 출신 위원장을 야당이 탄핵하려는 바람에 대체재로 임명된, 검사직 퇴임 10년이 지난 원로 법조인이다. 대통령실 비서관급 이상 중에서도 공직기강과 법률비서관뿐이다.하지만 정치판의 선전선동은 그런 객관적 팩트의 게임이 아니다. 이 대표가 신년회견에서 586 청산론에 대해 “지금 청산해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검사독재”라고 되받아친 것도 그런 차원이다.동아일보 취재에 따르면 검사 출신 45명이 출마 예정이고 그중 여당은 31명이다. 숫자도 숫자지만 핵심 친윤 검사들이 텃밭 양지로 몰려드는 자체가 국민에게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원모 전 인사비서관은 강남 출마설이 돌고 있다. 그의 배우자는 지난해 대통령 부부의 스페인 방문 때 비공식 수행원으로 동행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주진우 전 법률비사관은 해운대 출마 채비를 하고 있다.이들이 진정으로 대통령과 정권의 성공을 기원한다면 험지로 뛰어드는 게 옳은 길이지만, 그런 자세가 안 돼 있다면 해결은 한동훈 위원장의 몫이다. 만약 친윤 검사들이 대거 양지에 공천된다면 공관위가 아무리 노력해도 좌파의 ‘검찰공화국 비난 공세’는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야당도 검사 출신 출마 예정자가 14명에 달한다. 그중엔 문 정권 때 노골적 시녀 노릇으로 검찰 독립을 욕보인 인사들이 포함돼 있다. 만약 그런 이들을 텃밭에 공천해준다면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공직자들이 정치적 중립은 팽개친 채 노골적으로 진영에만 충성한 뒤 금배지로 직행하는 악순환 시스템이 굳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당 공관위의 책임도 막중하다.대통령과 당 대표 모두 검사 출신인 상황에서 검찰독재 운운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면 스스로 통제하고 더 강한 기준을 들이대야 한다. 검사군단 진주를 방치하면 운동권 청산이라는 시대적 소명마저 발목이 잡힐 수 있다. 검사군단 차단은 한 위원장이 ‘두 번 연속 검사 출신 대통령?’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넘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취임 첫 3주는 ‘기대했던 대로’와 ‘우려했던 대로’가 동시에 현실이 되어가는 시간들이었다. 세련되고 겸손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국힘 지지자들은 오랜만에 마음 줄 대상을 찾았다는 듯 열광했다. 동시에 우려했던 바도 점점 더 현실로 굳어질 것 같은 조짐이 보인다. 골목 밖에서는 선명히 보이는데, 지지자의 환호로 가득찬 골목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함정이 있다. 한 위원장이 경계해야 할 함정은 크게 세가지다.첫째는, 김건희 여사 문제를 이대로 뭉개고 가도 괜찮을 거라는 속삭임이다. 당장은 여론이 안 좋지만 곧 공천이 본격화하면서 온갖 뉴스가 쏟아지면 뒷전으로 묻힐 것이라는 기대다. 물론 착각이다. 대선 때 윤석열 후보를 찍었지만 대통령의 당 장악 시도, 김 여사 스캔들로 인해 한 발짝 물러선 중도층은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지 냉정히 지켜보고 있다. 일시적 관심이 아니다. ‘아바타론’의 진위를 판가름할 리트머스 시험지로 여긴다. 정권의 공정성에 대한 평가와 보수진영 미래 주자에 대한 평가를 좌우할 저울이 되어 버린 것이다.설령 총선 결과가 여당에 나쁘지 않게 나오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야당은 대선까지 끌고 갈 것이다. 차기 정권을 어느 쪽이 차지하든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일이 이렇게 커진 데에는 한 위원장의 책임도 있다. 검찰은 도이치모터스 사건과 관련해 김 여사를 기소하든 불기소 처분하든 진작 종결지었어야 하는데 질질 끌다 특검 빌미를 제공했다. 야당의 특검 공세는 이미 올봄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19개월 넘는 법무장관 재임 동안 한 장관도 방치했다. 명품백은 더더욱 간단해 김영란법에 따라 국민권익위가 며칠이면 조사를 끝낼 수 있는 사안이었다. 김영란법은 공직자 배우자가 금품을 받았을 경우 공여자는 ‘직무관련성’과 상관없이 무조건 처벌 대상이 되지만 받은 사람은 ‘직무관련성’이 있을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김 여사는 윤리적 책임만 지게 될 공산이 컸는데 무조건 피하다가 종양으로 키워버렸다.물론 야당이 밀어붙인 현행 특검법은 상식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도 인정할 수 없는 악법이다. 그렇다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특검 선정은 대한변협 등 공신력 있는 외부기관 추천으로 하고, 수사 개시는 총선 직후에 하는 대안을 제시하면 된다.이렇게 명료한 해결책이 보이는데도 풀지 못하는 게 답답하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다고 한다. 김 여사의 심신이 스트레스에 워낙 취약한 상태여서 합리와 대의만 앞세워 밀어붙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이기 때문에 해야 하고, 보수의 명운을 책임진 여당 대표이기 때문에 그렇게 설득해야 한다.한 위원장은 비상 상황을 타개하라고 영입된 지휘관이다. 국회의원 숫자 감축, 특권 폐지 등은 멋진 안타지만 그런 안타만으로 소임을 다하는 게 아니다. 여당의 비상 상황은 무엇인가. 바로 대통령의 저조한 지지율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불통 이미지 리더십이고, 둘째는 부인 문제로 인해 상식과 공정이라는 트레이드 마크가 흔들린 탓이다.자기 편은 무조건 감싸고 돌았던 좌파권력과는 역시 다르다고 국민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해야한다. 보수 전체가 피해를 떠안지 않게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한 위원장이 경계해야 할 두 번째 함정은 투쟁 선봉장 이미지의 효용성이다. 취임사에서 586 청산을 강조했는데 옳은 방향이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집권당 대표의 주된 메시지일 수는 없다.정치 지도자로서의 우선 역할은 비전 제시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도전, 과제를 말하면서 그 일환으로 수구 얼치기 좌파세력 청산이 제시됐어야 한다. 투쟁하러 나온 싸움닭 이미지로 자신을 가둬선 안 된다.그제 마감한 전국 순방도 마찬가지다. 지역 비전 제시보다는 야구팬, 학교 다닌 기억 등 사적 인연을 강조했는데 집권당의 다크호스에 대한 기대에 비해 진부한 행태다. 집권 보수당의 횃불을 들고 나왔으면 거기에 걸맞는 비전을 제시하고 실현가능하든 불가능하든 그 목표를 향해 함께 가자고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 한 위원장이 경계해야 할 세 번째 함정은 정치인으로서의 태생적 약점을 수사(修辭)나 제스처만으로 만회하려는 안이함의 늪이다. 타워팰리스에 살고 명문대 학벌, 검찰 고위직 출신 장인과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아내를 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정치 풍토에선 일정한 핸디캡이 될 수 있다. 머잖아 야당과 좌파는 그를 강남 특권층으로 몰면서 재산을 시비 걸고 처남 문제까지 따지고 들 것이다. 공작과 가짜뉴스 인신비방을 평생 업으로 삼아온 이들이다.한 위원장은 “서민과 약자의 편”을 강조해 왔는데, 말로 그친다면 위선으로 들릴 소지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입만 열면 약자 서민을 외쳤던 조국 전 장관을 비롯해 강남 좌파 민주당 인사들의 위선에 진저리를 쳤던 국민들이다. 삐딱한 시선을 이겨낼 유일한 방법은 진정성과 일관성 지속성이다. 검사 이미지도 쉽게 벗기 힘든 굴레다. 누구나 ‘우리 국민이 두 번 연속 검사 대통령을 뽑을까’라고 자문해 볼 것이다. 한 위원장 스스로도 그럴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상대에 대한 추궁과 결과물에 대한 심판보다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생산력, 창의력, 설득과 공감 능력이 검사 출신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공천 결과가 ‘역시 검사 출신’ 낙인이 찍힐지, ‘정말 다르네’가 될지 갈림길이 될 것이다.박수와 환호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눈앞의 구름 인파만 보고 박수 소리만 듣다가는 골목 입구에서 팔짱낀 채 냉정히 지켜보는, 구름 인파보다 몇백 몇천 배 많은 대중의 존재를 잊기 십상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우리 사회에는 거대한 허구의 프레임이 존재한다. 그것은 진보·좌파·야당이 민주화의 주역이었으며 적자(嫡子)라는 프레임이다. 여기에 여당에서도 별다른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다. ‘서울의봄’ 같은 5공화국 소재 영화가 나오면 움츠러든 채 “민주화는 산업화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식으로 말을 돌리는 게 전부다. 민주화의 대주주는 당신들이라고 접어주고 들어가는 것이다. 과연 온당한 일인가.우리 사회에서 반(反)독재 민주화 투쟁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87년 6월 항쟁까지 10여 년에 걸쳐 진행됐다. 물론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민족 통일 양성평등 등 다양한 주제의 투쟁이 민주화 슬로건을 내걸고 펼쳐졌지만 진정한 의미의 민주화 투쟁은 87년까지였고, 절대적 기준에서의 독재정권은 6·29선언으로 종식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우리사회는 절대적 선악이 대립했던 시기에서 상대적이고 진영에 따라 선악이 구분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그러므로 우리 사회 민주화 성취의 대(大)주주는 70년대 중후반 대학 캠퍼스에서, 79년 부산 마산 등에서, 80년 5월 광주에서, 80~87년 대학과 도심에서 민주주의와 독재 타도를 외친 학생과 시민들이다. 이들은 1950년대 중반~1968년 출생이며, 대학 입학 학번으로는 70년대 중반 학번에서 87학번까지가 주를 이룬다. 유신 철폐 투쟁을 벌였던 젊은이들은 이제 60대 중후반~70대, 6월항쟁 때 도심을 메운 대학생들은 56세~60대 초중반, 넥타이 부대 직장인들은 60, 70대의 장년기 후반과 노년층이 됐다. 즉 현재 50대 후반부터 60대, 70대 이상 시민들이 군사독재 종식의 주역인 것이다. 이들이 현재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는지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러 통계는 이 연령대 시민 중에 문재인 정권 당시 정책 방향에 우려하고, 조국 장관과 586 정치인들의 후안무치 행태에 분노했던 사람들이 다수였음을 보여준다.문 전 대통령, 이재명 대표를 필두로 상당수 야당 정치인들이 ‘서울의봄’을 관람하고 자신들이 민주화의 적통(嫡統)을 잇는 세력이라는 뉘앙스를 담은 반응을 보였지만, 정작 민주화 성취의 주역 중에는 현재 좌파 진영 정치인들을 민주화의 적통으로 인정하기는커녕, 그들의 행태를 보며 독재정권에 분노했던 젊은 시절의 그 정의감과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는 심정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민주화 성취의 두 번째 주주인 정치권을 보자.양대 기둥이었던 YS와 DJ 진영의 후예들이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으로 나뉘어 포진해 있으니 민주화 지분은 여야가 반반씩 나눠 갖고 있다. 보수진영은 1990년 3당 합당의 굴레를 썼지만, 5공 인물들은 민자당 시절 재산공개 등의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 도태돼 오래전부터 국힘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세 번째 주주는 학생운동 지도부다. 지금 민주당 의원 중 운동권 출신이 60명이 넘는데 그들중 80년대 주요 대학 총학생회장 등 지도부급 대열에 섰던 인물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게다가 당시 학생운동의 실제 지도부는 반미청년회 구국학생연맹 등 지하조직이었다.그런데 구국학생연맹 의장으로 NL(민족해방)계의 총책이었던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을 비롯해 당시 핵심 인물들 중 상당수는 좌파에 대한 비판자로 변신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실질적 리더 중 상당수가 좌파를 등진 것이다. 그런데도 전체 민주화 성취 공훈에서 일부분에 해당하는 야당 소속 586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민주화의 최대 주주인 것처럼 행세하고, 하물며 80년대 민주화 투쟁기에는 아무런 족적이 없는 이재명 추미애 같은 이들마저 남의 집 안방 주인 행세처럼 숟가락을 놓는 게 현실이다.이들이 12·12를 소재로 한 영화를 놓고 퍼뜨리는 주장의 요점은 하나회 군부의 쿠데타와 윤석열 검찰의 조국 장관 수사를 동일 선상에 놓아 ‘검찰 쿠데타’로 낙인찍는 것이다. 물론 이는 흑과 백, 도둑과 피해자를 뒤바꾸는 선동이다. 79년 12월의 충돌이 헌법을 유린한 불의(不義)한 쿠데타 세력과 이에 맞서 직분을 지키려한 군인들과의 대결이었다면, 문 정권 때 헌법이 규정한 사법기관의 직분 수행을 억눌러 정권 핵심의 비리를 덮으려던 불의 세력은 바로 청와대와 추미애 등이었다. 하나회 군부가 동원한 수단이 탱크와 압도적 병력이었다면, 문 정권이 동원한 무기는 인사권과 홍위병 나팔수들이었다. 군사 쿠데타가 헌법을 유린하는 반국가 행위이듯이, 정권이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국가 사법기관에 압력을 행사해 수사를 못하게 하는 것 역시 반국가적 행위다. 586이라는 용어는 변질됐다. 원래 386세대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모래시계 세대’ 등의 표현과 더불어 격동의 80년대를 거쳐온 세대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는데, ‘운동권 생활과 정치권이 인생 경력의 전부인 좌파 정치인’을 뜻하는 협소한 용어로 시나브로 변질됐다.따라서 민주화 성취의 진짜 주역인 80년대 당시의 젊은이들은 ‘6월 항쟁 세대’라 부르는 게 맞다. 이들 대부분은 젊은 시절 민주화 시위 참여를 거쳐 기업 관계 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경제의 선진화 일류화에 중추 역할을 했다. 민주화의 대주주인 동시에 선진국 도약의 허리였던 것이다. 이들 세대 중에는 젊은 시절 전두환 군부에 분노했듯이 근래 좌파 정치인들의 행태에 분노하는 이들이 많다. 그 이유는 정치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낡은 이념을 벗지 못한 채 민주화에 친북 친중 반시장 반기업을 덧씌워버린 이념적 화석화, 운동권 경력을 훈장 삼아 수십 년간 특권을 향유하는 도덕성 결핍, 자신과 경쟁하는 정파를 악으로 몰아붙이는 오만과 유아독존의 낡은 사고방식이 분노를 유발한 것이다. 586의 뻔뻔함, 그리고 그들의 견강부회 앞에서 찍소리 못하는 여당 인사들을 바라보며 민주화의 진짜 주역들은 기가 막힐 것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보수 진영 지지자들에게 ‘한동훈 비대위원장 카드’는 매력적인 동시에 위험 요인도 큰 선택이다. 한동훈 장관의 장점에 대해선 이미 수없이 얘기가 나왔으니 생략하고 여기서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리스크를 살펴보자.총선은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이므로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 요인의 볼륨을 최대한 낮추는 쪽으로 몰고 가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요인은 첫째는 리더십 스타일, 둘째는 검찰 편중 인사, 셋째는 배우자 문제인데 한동훈 체제는 여기에 확성기 효과를 낼 수 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 모두 검사 출신이라는 점은 총선을 검찰정권 심판으로 몰아가려는 좌파들에겐 좋은 먹잇감이다.한동훈은 비리 좌파 집단에 맞서는 이미지로서 주가가 상승해 왔다. 맞은편에 ‘중대 범죄혐의자 이재명’이라는 어둠이 있어 더 빛이 날 수 있었는데 만약 총선 직전 이 대표가 2선으로 물러나고 경제 민생 안보, 그리고 김 여사 문제가 주된 이슈가 되어 버리면 한동훈의 강점도 빛이 바랠 수 있다.그런 리스크를 알면서도 상당수 보수층이 모험을 해도 좋다고 기대할 만큼 한동훈은 똑부러지고 스마트한 새로운 스타일의 보수지도자로 성장할 잠재력을 보여 왔다. 보수 지지자들은 무엇보다도 여당의 판을 흔들어줄 누군가를 고대했다. 2021년 봄 국민의힘이 확 바뀌어야만 정권교체의 희망이 생긴다는 염원에서 이준석을 선택한 ‘집단적 열망’과 마찬가지로 지금 보수층은 여당이 혁명적으로 바뀌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지금 국힘 비대위원장 앞에 놓인 과제들, 즉 △김건희 특검 △대통령과 당의 수평적 리더십 회복 △공천권 독립 등은 대통령의 호응 없이는 풀기 어려운 것들이다. 특히 특검은 앞으로 블랙홀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총선 후 특검론’으로 해석될 소지가 큰 한 장관의 19일 특검 관련 발언은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다.우선 내용면에서 의미가 있다. 민주당 특검법안의 터무니없는 악법 조항들을 수정하고, 선거에 악용되지 않도록 수사 개시 시점을 총선 직후로 하자는 게 ‘총선 후 특검론’의 골자다. 양극단이 맞붙는 사안들에 공정하고 현명한 중재안을 제시해 주는 현인그룹·원로그룹이 만약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면 그들도 아마 비슷한 안을 내놓을 것이다.야당이 이를 거부한다면 특검법의 의도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는게 아니라 오로지 비열한 정략적 목적이었음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대통령 측도 “문재인 검찰이 탈탈 털었어도 나온 게 없는 사안”이라고만 주장할 게 아니라 국민이 그 무고(無辜)함을 믿게 만드는 절차적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필자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대통령실은 한 장관 발언에 상당히 불쾌해하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미 다 문제없는걸로 판명난 일인데 왜 특검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여지를 두느냐는 것이다.이제 한 장관이 매우 중요한 시험대에 서게 됐다. 대통령의 거부 의사가 완강하다 해서 발언을 주워 담는 식으로 후퇴할 경우, 그의 정치적 미래는 시작부터 휘청이게 된다. 좌파의 ‘아바타론’은 더욱 거세질 것이고, ‘혹시나’ 했던 중도층도 ‘역시나’ 할 것이다. 대통령이 끝끝내 배우자를 감싸고, 공천에 대통령이나 배우자의 입김이 미친다는 잡음이 나올 경우 국힘은 거대한 족쇄를 찬 채 전장에 나설 수밖에 없다. 선거 결과는 더 참혹해지고 정치인 한동훈의 미래도 함께 마감될 수 있다.윤 대통령도 살고 한동훈 비대위도 살 수 있는 길은 특검 정면 돌파다. 물론 대통령은 고개를 흔들 것이다. 그런 대통령을 설득해 ‘총선 후 특검론’을 관철하는 게 정치 능력이고 정치 기술이다. 특별감찰관 임명도 설득시켜야 한다. 대통령이나 김 여사가 불쾌해하거나 압력이 들어와도 밀고 가는 뚝심을 보여야 한다. 이 문제를 못 풀면 정치를 그만둘 각오로 임해야 한다. 그럴 자신과 의지가 없다면 아예 시작도 안 하는 게 좋다. 대통령실이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해도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이 한 장관을 비대위원장에 세웠다고 보려 한다. 그 손의 이미지를 끊어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좌파의 아바타 공세를 벗어날 수 없다.물론 열쇠는 대통령이 쥐고 있다. 김 여사 문제를 못 푼 채로는 윤 정권은 임기 내내 목줄 끌려다니듯 시달리게 된다. 꼼수로는 극복할 수 없다.특검 결과 무고함이 만천하에 입증되면 날개를 달게 된다. 설령 야당이 뭔가를 꼬투리 잡아 구속시키려 한다고 가정하자. “너무 하는거 아냐”라는 동정여론이 불길처럼 번질 것이다. 정치는 동정받는 쪽이 항상 이긴다.한 장관은 당초 비대위원장 자리를 맡을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노동 분야 쪽 일이나 비례대표를 내심 희망했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법조계 출신 원로가 찾아가 설득하는 등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한동훈이라는 보수의 재목을 설득해 이렇게 일찍 차출했을 때는 그 인기만 빌려 쓰겠다는 발상이어선 안 된다. 성공 스토리를 연출해 주는 게 의무다. 그럴 의향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한동훈 카드를 접는 게 옳다. 귀한 재목을 불쏘시개처럼 쓰고 버려선 안 된다.한동훈은 모든 능력을 동원해 대통령을 설득하고 윤 대통령은 “나를 밟고 가라”는 심정으로 결단해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이 바뀌고 당정관계가 바뀌었다는 평가가 나와야 정권도 살고 한동훈도 산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분노와 한숨.’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사람들이 요즘 정치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편의 행태를 보면 분노가 치밀고, 자기편을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인 것. 그 분노라는 단어를 며칠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썼다. 12·12쿠데타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고 나서 “불의한 세력에 대한 분노”라고 했다.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을 겨냥해 했으면 딱 맞을 말이다. 44년 전 쿠데타라는 불의가 헌법과 민주주의를 짓밟았듯, 2023년 현재 다수당의 폭주라는 불의가 헌법과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네 진영을 수사하는 검사를 탄핵하고, 자기네 진영 나팔수 역할을 해주는 공영방송들을 총선 때까지 계속 자기편으로 두기 위해 방통위원장을 탄핵 도마에 올린다. 5공 시절 집권당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는 안 했다. 아무리 총칼로 집권했어도 국민 다수의 상식의 눈을 두려워하는 최소한의 센서는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주당엔 그 수준의 자기 절제 센서조차 작동하지 않는다. 다수결이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정권교체를 이뤄낸 국민들은 그런 다수당을 보며 분노가 치밀지만 고개를 돌려 대통령실과 여당을 보면 참담한 실망감에 한숨이 터져 나온다.“대통령 부인이 명품백을 받는 장면을 담은 영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김의겸의 청담동 술자리 주장 같은 가짜뉴스거나, AI 딥페이크 영상이겠거니 했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현직 퍼스트레이디가 친(親)적국(敵國) 활동 경력이 있는 인사를 만나 보석을 선물 받는데 이게 다 함정 몰카에 찍힌다~.’ 만약 필자가 영화제작자인데 그런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너무 작위적이고 현실성 없는 설정이라며 퇴짜를 놓았을 것이다.이번 사건이 보여준 상상 초월의 세계는 세 종류다. 하나는 상상 초월의 저질스러운 공작 행태고, 둘째는 상상 초월의 허접한 사람 관리 및 경호 시스템이고, 셋째는 대통령 부인이 보여준 상상 초월의 행동이다. 이 세 요소는 서로의 상상 초월성을 상쇄하지 않는다. 김 여사가 백을 받았든 안 받았든 몰카 공작의 저열함과 비도덕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함정 몰카라해서 김 여사 행동의 비도덕성이 감면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공원 벤치 두 개에 각각 100만 원 씩의 현금이 놓여 있다고 하자. 첫 번째 벤치 현금은 누군가 실수로 두고 간 것이고, 두 번째 벤치 현금은 함정 몰카범이 쳐놓은 덫이다. 그 돈을 누가 집어가든, 아무도 집어가지 않든 덫을 놓은 몰카 행위의 부도덕성이 바뀌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돈을 집어 갔다면 그것이 첫 번째 벤치 돈이든 두 번째 벤치 것이든 그 행동에 대한 비판은 똑같이 적용된다. 현금이 놓인 경위와는 무관한 것이다.함정 몰카 주동자들에 대해선 엄정한 법적용과 사회적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 다시는 미디어의 탈을 쓴 이런 저질 행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단죄가 필요하다. 이 사건은 좌파 진영의 공작과 농간이 얼마나 간교하고 저열한 수준으로 치달았는지를 보여준다. 문 정권 시절 대통령 부인의 나홀로 해외방문, 의상 다량 구입 등 사치와 월권이 극에 달했지만 우파 진영 누구도 이런 식의 함정 공작을 꿈꾸지는 않았다. 하지만 좌파의 비도덕성에 대한 개탄과 김 여사의 행동에 대한 비판은 별개의 문제다. 하급직 공무원의 배우자라 해도 그런 선물은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누구나 유혹은 느끼기 마련이지만 최소한의 위험 감지 능력이 생존 본능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김 여사는 하루빨리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관저를 떠나 서초동 자택 등 사가(私家)로 거처를 옮겨 근신해야 한다. 물론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부부는 사적인 영역이다. 그럼에도 대통령 배우자는 공인이다. 더구나 ‘김건희 리스크’는 총선과 나라의 진로에 지속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칠 사안이다.이번 사건은 특검을 앞세운 야당 공세에 휘발유를 뿌린 격이 될 것이다. 공천 개입설, 인사 개입설 등 믿거나 말거나 의혹을 계속 기름 붓듯 쏟아낼 것이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도 김 여사는 의혹의 소지를 원천 차단할 수 있는 위치를 자처하고, 윤 대통령은 특별감찰관을 조속히 임명해 확고한 의지를 피력해야 한다. 특검 공세에 대응할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도 명품백 파문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대선 4개월 반 전 김 여사는 눈물을 흘리며 “아내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악의적 편집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취임 4개월이 지난 시점인 영상 속 모습은 약속과는 달라 보인다. 물론 김 여사에 대한 좌파 진영의 공격에는 마녀사냥, 여성 비하, 공작적 요소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이 제기했던 의혹들 중 사실로 최종 확인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 건은 다르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서도 그렇다. 쉬쉬하고 넘어간다면 앞으로 전국의 공직자 배우자들에게 어떻게 김영란법 준수를 요구할 수 있겠나. 국민권익위는 왜 존재하는 기관인가. 신속히 진상 조사에 착수해 금품을 준 쪽과 김 여사 쪽 모두의 법 위반 여부를 엄정히 조사하는 것이 직분 아닌가. 이번 파문은 정권교체를 열망하며 한 표 한 표 벽돌을 쌓듯이 정권교체를 이뤄낸 국민에게 배신의 상처를 안겼다. 진심 어린 사과와 근신의 자세, 배우자 논란의 소지를 원천차단할 안전장치 마련 없이는 이를 치유할 방법이 없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