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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5시 충북 청주시 오창호수공원 야외공연장. 점차 어둠이 내려앉고 늦가을의 찬 기운이 스며들 무렵, ‘지토벤’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재즈 피아니스트 지성철 씨(65)의 무대가 시작됐다.계단식 관객석을 채운 100여명의 시민들이 쏟아낸 환호와 함께 그의 손이 건반 위를 날아다녔다. 올드팝부터 대중가요, 클래식 소품의 친숙한 곡조들이 화려한 재즈의 선율로 변신해 공중에 울려퍼진다.60세 이상 시니어예술가들이 만드는 거리 공연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장애를 딛고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지토벤의 존재는 최근 알게 됐다. 작곡가이자 재즈 피아니스트, 한때 대학 강단에도 섰던 그는, 60세를 넘기고는 음악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피아니스트가 돼 있다. 6일 수원의 전문공연장 ‘윤아트홀’에서 그를 만났다.● 20대, 생애 첫 작곡으로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그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1986년 난생처음 작곡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유열)’가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다.“유열 씨와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죠. 저는 그 무렵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손님 중 한 분이 제 반주로 ‘마이웨이’를 부르고 싶다고 청해왔어요. 평소 반주하는 걸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그 날은 해주고 싶었어요. 노래를 참 잘 부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그 손님이 유열이었어요. 비슷한 또래이니 친구가 됐지요.”한달 쯤 뒤 유열이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으니 곡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왔다.“대중가요곡은 한 번도 쓴 적이 없다고 고사했는데 고집이 엄청나더군요. 좋은 가사를 가져오면 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더니 두어 달 뒤 정말 직접 쓴 가사를 들고 상기된 표정으로 왔더라구요. 그걸 들고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 3일만에 메인 테마를 완성했어요. 상은 탈 것 같았지만 대상까지 받을 줄은 몰랐죠.”1989년에는 대학가요제 금상곡 ‘사랑은 이별을 위해(이은영)’와 동상곡 ‘그대 떠나도(이재영)’를 작곡해 한때 ‘가요제 전문 작곡가’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1990년대부터는 전국 순회공연과 재즈피아노 독주회 등을 통해 재즈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유열 씨와의 인연도 이어져 유열컴퍼니가 주관하는 가족뮤지컬 ‘브레멘 음악대’의 작곡을 전담했다. 이 작품은 2006년부터 10년간 50만 관객을 동원했고 중국에서는 ‘음악이 좋은 뮤지컬’에 주어지는 송레이상도 받았다.유열 씨는 6년 전부터 폐섬유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최근 폐 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다. 그에 앞서 모친상을 당했지만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중했다.“(유 씨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절제하는 사람인데 어쩌다 그런 병에 걸렸는지.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하루빨리 완쾌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예전에는 유열 씨와 공연을 많이 한 것 같은데, 타격은 없었나요?“제가 직접 공연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거기에 몇 년간 코로나 상황까지 겹쳐 좀 힘들었습니다. 유튜브를 통한 라이브 공연도 해보고 교재도 쓰고. 그러다 실버 마이크도 알게 됐지요.”● 아들의 장애 이겨낸 어머니의 투쟁피아노를 배운 계기를 묻자 길고긴 사연이 쏟아져나오는데, 고비고비마다 그의 어머니의 고민과 사랑이 읽혔다. 지 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백내장’ 진단을 받고 초등학교 입학 전에 7차례나 눈수술을 받았다.“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첫돌 조금 지나 눈수술 받고 병원에 누워 있었는데 침대 난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더래요. 옹아리가 아니고 제법 음정과 박자가 있는 노래였다고, 그래서 ‘이 아이는 무조건 피아노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 먹으셨다고 합니다. 본인이 여고 합창단 솔리스트 출신이라 그런 감이 오셨다고요. 눈이 불편한 제 앞날을 걱정해 뭐라도 다른 재능을 키워주고 싶으셨던 거겠죠. 어머니는 제가 5살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려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습니다.”어느덧 학령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가 지 씨가 갈 곳은 맹학교라고들 했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당시 종로구 효자동에 있던 맹학교 입학원서를 써놓고도 장안의 안과를 다 뒤졌대요. 무교동 공안과에서 최종산 박사님을 만나 6번째, 7번째 수술을 받았는데 다행히 성공한 겁니다.”덕분에 시야가 조금은 확보됐다. 초등학교 반배정이 다 끝난 시기였지만 교장을 찾아가 읍소해 겨우 입학했다. 이후 용산중학교를 거쳐 서울예고로 진학했다.―지금 시력은 어느 정도입니까?“오른쪽은 0.08 정도, 왼쪽은 망막박리로 시력이 없어요. 한쪽 눈으로도 잘 살고 있습니다.”● 즉흥 재즈 피아니스트 ‘지토벤’―‘지토벤’이란 애칭은 언제부터…“1990년대말 경, 유열 씨하고 대구 공연을 갔는데, 관객석에서 이례적으로 피아노 연주 신청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즉석에서 신청곡을 받았더니 유 씨가 하는 말이 ‘여러분 베토벤 잘 아시죠? 베토벤하고 비슷한 친구입니다. 지토벤입니다’라고 추켜세워 줬습니다. 듣기가 썩 나쁘지 않아서 이후 계속 써먹고 있어요. 하하.“서울예고는 피아노가 아니라 성악으로 입학했는데, 대학 입시를 한 달 앞두고 ‘신경성 성대 경련증’이란 병이 찾아와 또다시 좌절을 맛봤다. 지금도 그는 일상적인 대화때에도 발성이 자연스럽지 않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면서 ‘내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혼자 세계적 피아니스트들의 곡을 듣고 즉흥 연주 공부를 했지요. 국내 대학에는 그런 걸 가르치는 곳은 없더군요. 그러다가 재즈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1980년 당시 무교동에 유명한 클럽이 많았어요.”하루 30분짜리 연주를 3차례씩 했는데 보수는 일반 회사원의 두 배가 넘었다.“내 음악을 연주하는 즐거움을 매일 느꼈습니다. 다른 일 할 생각 없이 ‘지금 이 생활이 너무 좋다’는 충만감을 가지고 지냈지요.”● 60세 넘어 실버마이크 프로그램에서 힘 얻어―요즘에는 거리 연주를 많이 하신다고요.“3년 전부터 5월~11월 사이엔 실버마이크(충청권) 공연에 주력합니다. 지역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인데 매월 마지막 수요일인 ‘문화가 있는 날’ 주간에 야외공연이 집중됩니다. 저는 올해 10번 무대에 섰습니다.”‘실버마이크’ 사업을 통해 숨어있던 실버예술가들의 존재감이 빛나게 됐다. 다만 이들은 매년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실력과 기량을 인정받아야 무대에 설 수 있다.충청권 실버마이크를 관장하는 문화기획사(문화충동)에 따르면 그는 현장에서 신청곡을 받아 즉흥연주를 하는 등 관객 중심의 무대를 진행해 호응이 매우 좋다고 한다.“공연에서 늘 제가 맨 끝 순서라 앙코르도 한두곡 씩 합니다. 제게는 관객과의 소통이 가장 즐겁습니다.”모든 일을 혼자 헤쳐가야 하는 답답한 상황도 실버마이크가 풀어줬다.“그동안 공연장 섭외부터 홍보, 티켓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제가 직접 했어요. 당연히 효율도 떨어지고 전문성도 부족하죠. 실버마이크 활동을 하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내년부터는 정부나 지자체 문화재단 등의 지원을 챙겨 광고도 하고 공연도 제대로 할 생각입니다.”유럽 등 문화선진국에서는 어디를 가나 쉽게 진짜 예술을 향유하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 우리도 이같은 시도가 이뤄지는 건 반가운 일이다.● 나이 드니 ‘찾아가는 공연’하게 돼실버마이크가 다른 거리 공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청남대에서 월 4회 정기 연주 의뢰가 들어왔고 공연을 보러 왔던 금산여고 교사는 11월 하순 학교 연주를 요청해왔다.“5교시에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연주를 듣게 됩니다. 문화체험 수업이겠죠. 보수를 떠나 학생들에게 제 음악을 선물한다는 게 기쁩니다.”요즘 지 씨는 ‘청춘마이크’ 참가자인 예술가와 콜라보 무대를 선보이고 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버블검’을 재즈곡으로 연주하는 등 젊은 층과의 소통에도 열심이다.―최신 아이돌 곡도 소화하시던데 연습을 얼마나 하신 건가요.“어떤 곡이건 세 번 정도 들으면 연주할 수 있어요. 평소 연습은 손 푸는 정도만 합니다. 즉흥 연주다 보니까 집에서 연습을 해버리면 실제로 공연할 때 김이 빠지거든요.”―연주는 체력도 필요한 일인데….“전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그냥 100%가 나와요. 저도 불가사의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주변 사람들도 일단 피아노 앞에 앉으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하더군요.”―60대의 음악은 젊은 시절과 어떻게 다릅니까.“예전엔 보여주는 공연을 많이 했습니다. 화려한 테크닉을 앞세웠지요. 이제는 진솔하면서 내공이 꽉 찬 공연으로 바뀌고 있다고 저 스스로 느낍니다. 또 젊을 때는 사람들이 저를 불러줘서 공연을 했는데 이제는 제가 스스로 찾아가는 공연을 해야 해요. 음악가가 나이가 들었다고 재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연륜이 가져다주는 깊은 맛이 추가되지요. 실버마이크에 참여하는 다른 분들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오랜 세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갈고닦아온 분들이어서 그 깊이가 다릅니다.”● 노년은 예술 즐기기에 딱 좋은 나이사실 공연자도 듣는 이들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시니어들께 젊은 때 바빠서 즐기지 못했던 예술을 다시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여러모로 여유가 생기는 노년은 예술을 공부하고 즐기기에 딱 좋은 나이입니다.”―재즈라도 주로 대중적인 곡을 연주하시네요.“음악은 기분 좋고 힐링되고 감동받으려고 듣는 건데 생판 모르는 곡을 들으면 계속 집중해야 해서 스트레스를 받기 십상입니다. 저는 귀에 익은 곡에 제가 가진 영혼을 투자해 ‘그 곡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하고 감탄하시도록 연주하고 싶어요.”그의 유튜브채널 ‘지토벤 음악다방’에는 직접 연주한 곡들이 적지 않게 올려져 있다. 예컨대 ‘엘리제를 위하여’의 재즈풍 연주는 조금은 껄렁한 듯, 묘한 맛과 재미가 있다. 동요인 ‘학교종’도 상당히 멋스러운 재즈곡으로 변신한다. 최근에는 독집 연주 음반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세미 트로트 가요 작곡에도 손대고 있다고.그가 쓴 트로트곡 ‘인생 그림’은 자신의 이야기이자 실버세대에 대한 헌사다.‘강물 같은 시간 속에/지난 날 되돌아보면/고된 날도 많았지만/내가 너무 잘 살았구나…중략…앞만 보며 걸어가요/멋진 꿈이 거기 있어요/아름다운 내 인생그림’. 65세 실버뮤지션 지토벤이 그려 나갈 인생 그림이 기대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일본의 리더십 교체와 한일관계 전망’ 주제로 일본 전문가 초청 세미나한일의원연맹이 주관하는 제 12차 한일현안연구회가 15일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주제는 ‘일본의 리더십 교체와 한일관계 전망’. 주호영 한일의원연맹 회장은 “11일 열린 일본 특별국회에서 자민당 이시바 시게루 현 총리가 재임됐으나 제2차 이시바 정권의 앞날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며 근래 일본의 급격한 정국 변화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일본 전문가를 초청한 배경을 설명했다.이날 세미나에는 호시 히로시(星浩) 정치저널리스트와 하코다 데쓰야(箱田哲也) 아사히신문 전 논설위원이 참석해 일본 정국상황을 분석하고 향후 한일관계를 전망했다. 하코다 전 논설위원은 동지적 관계를 쌓은 ‘기시다-윤석열 정상’ 시대를 거쳐 ‘이시바- 윤석열 정상 시대’로 이행하는 한일관계가 내년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해 발전적인 논의를 하자는 입장에는 일치하고 있으나 완전해결되지 못한 역사문제 등 시련도 계속되고 있다고 짚었다. 호시 히로시 정치 저널리스트는 일본 정치는 짧은 시간에 ‘아베 1강’에서 총선거에서 참배한 소수여당정권까지의 변용이 이뤄졌다며 이런 가운데 일본 사회에는 좌우 포퓰리즘과 일부 배외주의 조짐도 일고 있다고 지적했다. 호시 저널리스트는 또 △대중국 포위망으로서의 한미일 연대 △미국 트럼프 정권에 대한 대응 △ 한일민간교류 확대 △국교 정상화 60주년 과제 등을 앞으로 양국 앞에 놓인 숙제로 꼽았다. 이날 세미나에는 주호영 한일의원연맹 회장, 민홍철 간사장, 윤호중 고문 등 십여 명의 의원연맹 소속 의원들이 참석해 열띤 질문과 토론을 벌였다. 한일 현안연구회는 한일의원연맹이 2021년부터 주관해온 세미나 모임으로 회를 거듭할수록 소속 의원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교육부 국립국제교육원과 일본 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이 주최한 ‘2024년 한·일 고교생 교류 방한 연수’ 프로그램 연수단이 7일 동국대를 방문했다. ‘한국 온 김에 동국일주’라는 이름을 붙인 이 행사에는 일본 고등학생 88명과 동국대 재학생 40여 명이 참가해 피자와 치킨을 함께 하며 화기애애한 교류를 다졌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송정현 동국대 일본학과 교수가 ‘한일문화콘텐츠산업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송 교수는 “문화콘텐츠 산업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고 기존 산업 대비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과 일본은 각자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문화콘텐츠 역량을 지니고 있다”며 “양국이 협력 체제와 공동 네트워크를 강화할 경우 문화산업 발전에 공헌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송 교수는 “한일 관계의 미래를 담당할 학생들이 문화콘텐츠 분야에서의 교류를 통해 상대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한일 관계 구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정년 연장’ 논의가 돌연 뜨거워졌다.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 의무가입 연령을 64세까지로 늦추는 방안을 내놓자 그렇다면 정년도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행정안전부는 소속 공무직 근로자 정년을 최근 65세로 올렸다. 대한노인회 이중근 신임 회장은 노인 기준을 75세로 상향하자는 제안을 내놓아 파문을 던졌다.우려도 적지 않다. 가장 큰 걱정은 실제 고용을 담당할 기업의 부담과 청년 일자리에 미칠 영향이다. 이런 때 일본 사례를 참고하자는 의견이 단골처럼 나온다. 마침 지난주 일본의 지인이 정년퇴직 인사를 왔다. 그의 사례를 보면 60세 이상 고용의 민낯을 엿볼 수 있다.뒤늦게 불붙는 정년 연장 논의한일 관계 전문가인 그는 올 7월 말 40년 다닌 직장을 만 65세로 퇴직했다. 이번 방한은 재직 중 교류했던 한국인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이뤄졌다. 필자가 도쿄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할 무렵 만 60세를 앞뒀던 그는, ‘달리 할 일이 없으니’ 회사 일을 계속한다고 했다. 직원이 60세가 되면 일단 퇴직시킨 뒤 재고용하던 그의 회사는 당시 정년을 65세로 바꿨다.그는 평소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60세가 된 순간 급여는 이전 대비 40% 선으로 줄었다. 그나마 이전의 재고용 방식보다 두 배로 늘어난 급여였다. 그 대신 업무 강도도 세졌다. 지인은 “하는 일은 그대로인데 급여는 절반 이하라 불만들이 많았다. 나도 마지막 2년은 너무 힘들어 그만둬 버릴까 여러 차례 생각했다”고 했다. 이처럼 고령 직원에게 취업 기회를 주기 위한 일본 기업들의 노력은 대체로 대폭 줄인 급여 덕에 이뤄진 경우가 많다.현재 일본 기업의 99% 이상이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재고용 중 하나를 택해 65세까지 고용을 보장해준다. 법정 정년은 아직 60세다. 2004년 정부가 기업들의 ‘65세 고용 확보 조치’를 의무화하면서도 법제화는 하지 않았다. 기업들의 부담을 의식했기 때문이다.저출산고령 사회에서 고령자 고용 연장은 언젠가는 이뤄질 일이다. 생산인구가 쪼그라드는 ‘정해진 미래’ 앞에서 경제의 규모와 성장률을 유지하고 복지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고령자가 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버려지는 ‘잃어버린 세대’가 나올 수 있다. 특히 국민연금 수급 시기와 법정 정년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소득 공백기가 문제다. 올해 퇴직자까지는 3년이지만 내년부터 4년, 2029년부터는 5년으로 갈수록 벌어진다.1998년 국민연금법을 개정해 2013년부터 연금 수급 연령을 4년마다 한 살씩 올리기로 결정할 당시, 관계자들은 아마도 이때쯤이면 고용 형태도 바뀔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소관 부처가 ‘직무유기’를 한 셈이다.‘정년 연장’보다 ‘계속 고용’부터그런 점에서 늦었지만 정년과 관련해 다양한 사회적 논의가 나오는 건 바람직하다. 스스로 ‘노인’임을 부정하는 대한노인회 주장에서는 똑같은 생산 주체로서의 역할과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더 큰 그림도 읽힌다. 직장에서 50세만 넘어도 퇴물로 취급받는 최근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런 움직임들은 시니어들이 일하는 분위기 조성에 큰 힘이 될 것이다.앞서 소개한 일본 지인에게서는 주어진 소명을 다해 냈다는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대학에서 특강 요청을 받았고 사회복지법인을 돕는 일도 시작한다며 의욕을 보였다. 퇴직 다음 달부터 연금을 받은 건 물론이다.이 대목에서 문득 인생 선배들의 충고가 떠오른다. 100년 넘게 살아본 김형석 교수는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로 60∼75세를 꼽았다. 이 나이쯤이면 더 노력해 뭔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아직 세상과 인생을 즐길 기운은 남아 있는 황금기라는 얘기다. 소중한 60대를 어떻게 만들어 갈지, 선택은 그야말로 본인의 자유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신들의 숲’이라 불리는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1990년대 말 도로가 뚫렸지만 지금도 대중교통수단은 하루 6대 들어오는 버스가 전부다.학생이 없어 폐교됐던 이곳 황둔초등학교 창평분교가 3년 전부터 할머니들의 예술 창작공간인 ‘할매발전소’로 환생했다. 학교에 다닐 기회가 없었던 할머니들이 이곳에서 한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렸다. 지난달 27일 할매발전소의 세 번째 전시회 ‘내 이름에게-나의 이름에게 보내는 헌사’에 다녀왔다. 전시회는 지난달 13~29일에 열렸는데, 금~일요일 3일간만 문을 여니 총 9일간의 전시회다.갈망했던 학교에서 여든 넘어 한글 공부전시장 입구부터 올해 처음 한글을 배운 할매 8명이 삐뚤빼뚤 쓴 글씨들이 맞아준다. 고구마를 찍어내고 ‘고구마구마’ ‘못생겼구마’ 같은 문구를 곁들인 그림 액자도, 자유롭게 그린 그림들도 보인다.산골의 척박한 환경에서는 농사 외에는 먹고살 길이 없었다. 1930~40년대생인 할머니들은 손가락 마디가 망가질 정도로 쉬지 않고 일했지만 대부분 평생 소원이던 학교를 가보지 못했다. 본인 이름으로 제대로 불려본 일도 많지 않았다.18세에 시집와 할매발전소 근처에 사는 서월이 할머니(86)는 3남매를 이 학교에 보냈지만 정작 본인은 자기 이름을 써볼 기회조차 없었다고 한다.“내가 ‘가’자를 몰랐어요. 더도 말고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다녔더라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해요. 내 자식들은 어떻게건 학교에 보내고 싶어 돈을 벌려구 나오니 세상이 깜깜하더라구요. 보따리 장사를 하며 누구에게 물건을 떼어오고 또 보내려면 그 이름이라도 알아야 하니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겨우 물어가며 글씨 하나, 산수 하나씩 익혔어요. 정작 내 이름 석 자는 못 배운 세월이었어요.”그 옛날 촌에선 주로 맏딸들이 희생됐다. 조계화(87) 할머니도 그랬다.“난 맏이라 학교를 아예 못 갔고 바로 밑 동생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어요. 그 아래 동생들은 초등학교 졸업했고. 남동생들은 중학교까지 공부했지요. 동생들 국어책 들고 순이 철수하는 거 그냥 보기만 하고, 그 책이 왜 이렇게 부러워. (내가) 보려면 또 동생들이 제 거라 하지. 또 볼 새도 없어. 일하느라고. 그 그림이나 좀 봤으면 좋겠는데, 밥해 먹여야지, 빨래해 입혀야지, 옛날 우리 어린 시절 살 적에 진짜 힘들었어.” 이런 조 할머니는 한글공부 수료장을 받고는 “내 저승가서도 잊지 않을께”라고 다짐했다.한글공부에 진심인 이윤택(81) 할머니도 맏딸이었다.“동생들 돌봐야 하니 부모님이 아예 학교를 안 보냈지. 형제들 중에 나만 못 갔어요. 그래도 여기서 가르쳐주면 한 자라도 배울 수 있어 좋아요. 더 좀 배웠으면 좋겠는데. 집에서 혼자 하는 건 잘 안 되더라고….”이 할머니는 주 2회 수업을 하고 나면 집에서 열심히 복습해 이제 TV자막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전시장 입구의 제목도 그의 글씨다. 캘리그래피를 공부한 한글 교사에게서 배웠다.전시회에는 할머니들이 남기고 싶은 모습을 촬영한 ‘여든 너머’ 프로젝트의 작품들, 할머니 13명이 현대미술 수업을 통해 만들어낸 작품들도 있다. 프로그램은 매년 할머니들과 상의해 결정한다.“올해 현대미술 수업은 앙리 마티스, 호안 미로, 데이비드 호크니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이야기와 이들의 기법을 알려드리고 할머니들 본인이 표현하고 싶은 걸 하시게 했어요. 수업을 18회나 했는데 다들 너무 재미있어 하시고 13명중 개근하신 분도 많아요.”(심지혜)전시회의 특징은 할머니들이 무대의 주인공이고 젊은 예술인들이 스태프로 뛰어다닌다는 점. 매년 20~30명의 청년예술인들이 프로젝트를 도왔다.할매발전소는 3년째 매년 봄에서 여름에 걸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가을에 그 결과물로 전시회를 열었다. 첫해에 할머니 9명, 지난해엔 16명, 올해는 연인원 22명이 참가했다. “산골 할머니가 우주 섭리 꿰뚫어”4년 전, 고요했던 산골 할매들의 삶에 청년들이 쳐들어왔다. 정확히는 이 마을 안호녀(86) 할머니에게 손녀딸 심지혜 씨와 친구들이 자꾸 찾아오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시국에 혼자 살던 할머니는 이웃과의 소통단절에 갈수록 의기소침해지고 있었다. “할머니들 대부분이 혼자 사시는데 코로나 시국에 정말 힘들어 보였어요. 모이지도 못하고 고스톱도 못 치고 함께 밥도 못 먹고. 할머니가 몇 시간이고 방에 우두커니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며 ‘큰일났다’ 싶더라구요.”(심지혜)김영채 심지혜 석양정 41세 동갑내기 3인방은 2019년부터 지역 이야기를 수집하고 다양한 문화예술과 연결하는 작업을 해왔는데, 바로 이 작업을 신림면에서 하기로 했다. 2021년 ‘로컬리티:’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디자인과 영상컨텐츠는 김영채 대표, 전시기획과 현지네트워크는 심지혜 큐레이터, 아카이빙과 텍스트 콘텐츠작업은 석양정 작가로 역할분담이 이뤄졌다. 회사명에 붙은 ‘콜론(:)’은 쉬어간다는 의미라고.이들은 할머니들과의 대화를 통해 지역의 특색을 가장 잘 드러내는 존재는 바로 할머니들이라고 확신했다. ‘할머니의 가치’ ‘할머니의 존재감’에 주목했다.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내어주고 자신의 것은 챙기지 못한 주름진 빈손, 혹독한 세월을 살아온 훈장같은 주름이 가득한 얼굴과 닳아버린 손마디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평생 산골에서만 사신 할머니들이 우주의 섭리를 꿰뚫고 있었어요. 척박한 땅을 일구고 가족에 헌신해온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뜨거운 생의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모으면 문화예술 컨텐츠가 될 수 있고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봤습니다.”(김영채 대표)조금씩 쇠약해지는 할머니들할머니들을 모시고 하는 작업은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 많았다. 한글 수업을 하기 위해 김영채 심지혜 두 사람은 구역을 반씩 나눠 차로 할머니들을 모시러 가고 수업이 끝나면 모셔다 드리는 일을 했다. 한시간 수업을 위해 모셔오고 바래다드리는 데 각각 1시간씩 걸리는 식이다.―2년 전 기사를 보면 전시의 주인공인 할머니들이 직접 도슨트 역할을 하도록 준비한다고 했는데 잘 안 된 것 같아요.“첫 해에는 괜찮았던 할머니들이 건강악화가 생각보다 심했어요. 다리도 아프시고 그간 수술도 많이 하셨고. 하려다가 못하게 된 사업이 많아요. 첫해에는 ‘할매가 잘 차린 밥상’ 촌캉스를 했어요. 청년들이 할머니가 가꾼 텃밭에서 식재료를 따오면 할머니들이 레시피를 알려주시고 청년들이 요리해서 밥먹으며 할머니들과 대화도 하는 프로그램이죠. 외국인들도 찾아오고 인기가 좋았어요. 할머니들도 재미있어 하셨죠. 그런데 할머니들이 아프시면서 그 이후로는 힘들어졌어요.”원주역에서 40분을 버스를 타건 운전을 하건 찾아와야 하는 장소이다 보니 관람객이 많지는 않지만 한번 와본 사람은 반복해서 찾아온다고 한다. 할머니나 고향 향수 위안 힐링 아날로그적인 전시…. 이런 텍스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 작품을 사겠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지난해 한 점, 올해 두 점을 팔았다. 할머니 작가 본인과 상의해 승낙을 받고 판매액은 고스란히 할머니들에게 전달했다.아쉽게도 폐교 건물은 올해 이후로 사용하지 못한다.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게 가장 큰 숙제다. 만나는 할머니마다 이구동성으로 “내년에도 계속했으면 좋겠는데”라며 걱정했다.“이장 협의체와 면에서 힘을 보태주시겠다고 해요. 사실 빈 공간은 꽤 있는데 누가 어떻게 승인해 줄 건가를 푸는 문제거든요.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심지혜)현재로서는 시내에 있는 초등학교의 빈 공간을 활용하는 방안이 유력하다.“면장님이 먼저 제안해 주셨어요. 사실 신림에 비어 있는 공간이 몇 개 있는데 쉽지 않아 보였던 것 같아요. 학교는 아이들이 줄면서 생긴 빈 교실 하나면 되니까요. 교육부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의지를 갖고 추진 중이셔서 희망을 가져봅니다.”“노인세대, 지역 예술의 주체”김영채 대표는“할매발전소는 지역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인이 예술생산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전환에서 시작됐다”면서 “노인세대가 지역사회의 해결과제가 아닌 예술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한다. ―3년 해보니 어떠세요?“앞으로 할 일이 더 많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이제야 알아봐 주세요. 처음 저희가 설명드렸을 때도, 전시회를 보러 오셔서도 ‘이게 뭔가’하는 분위기였는데 3년 동안 꾸준히 계속하고 참여하는 할머니들이 너무 좋아하시하니까요. 이장님 같은 분은 저희가 다른 공간 찾아야 한다니까 ‘이런 인재들이 다른 데로 빠져나가면 우리 어르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혜택을 못 받지 않느냐, 너무 아깝지 않냐’하시면서 계속 면사무소에 압력을 넣어주고 계세요.”―아무래도 할머니들이 쇠약해지고 인지도 안 좋아지시고 이런 과정이 쭉 진행이 되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을까요?“저희도 그게 걱정이긴 해요. 그래서 항상 ‘저희가 할머니들한테 예술은 가르쳐드릴 수 있는데 건강은 못 챙겨드리니까 꼭 건강 챙기시라’고 말씀드려요. 저희가 3년째 뵙고 있잖아요. 첫해 때보다 다들 무릎도 안 좋아지고 다리도 안 좋아지고 청력도 안 좋아지시는 게 보이죠. 그래도 이런 활동을 통해 그런 속도가 조금 더뎌지잖아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이들의 작업을 보다 보면 약간 숙연해진다고나 할까 경건해진다고 할까. 곧 사라질 존재들의 마지막 기록을 남기는 작업에서, 마음 한 켠에 숨겨둔 이별의 아쉬움과 각오가 느껴지기도 한다.‘길도 글도 전기도, 내 이름 석 자도 어느것 하나 쉬이 허락되지 않던 깜깜하기만 했던 시절을 지나 여든 너머 이제야 나는 내 이름에게 도착했어요. 결국 학교에는 가지 못했지만 나는 이제 옛 학교였던 할매발전소와 나란히 살아요. 처음 써본 내 이름, 그 곁에 우리 강아지, 아롱이 이름도 사이좋게 써봤어요.’ (서월이-나의 이름에게 보내는 헌사)원주=서영아 기자 sya@donga.com}
1일 일본에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신임 총리가 취임하자 그에 대한 많은 칼럼과 논평이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뒤늦게 한마디 보태고자 한다. 한일 언론에 회자되는 “상대가 납득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을 도쿄 특파원 시절 세상에 내보낸 당사자로서, 그간 함구해 온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서다. 2017년 5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인터뷰 기사가 나간 뒤 일본에서는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산케이신문이 발언 경위를 이시바에게 캐물었고 그는 “‘사죄’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서로가 납득할 때까지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얼버무렸다. “그렇다면 동아일보에 항의하라”는 산케이신문의 요구에는 “그럴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이 옥신각신은 자기들끼리 이뤄졌고, 필자는 뒤늦게 지면을 통해 이를 읽었다. 다만 기사대로 해석하면 동아일보가 ‘오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인간 존엄 훼손, 해선 안 되고 죄송한 일” 다행히 필자에겐 56분 분량의 인터뷰 녹음 파일이 남아 있다. 이번에 다시 들어봤다. 일본군위안부 관련 구절은 두 단락에 걸친 그의 발언을 합친 것이었다. 그는 일본 내에서 나오고 있는 여러 주장을 주욱 나열한 뒤 “하지만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미국인이건, 인간의 존엄에 상처를 주는 것은 해선 안 될 일이고 죄송한 일”이라고 했다. 필자가 ‘사실 몇 차례 사과도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하다’고 하자 “바로 그 점을 꼭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알아줄 때까지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받아 필자는 다시 당시 아베 신조 총리의 접근 방식(‘정부출연 배상금 10억 엔 냈으니 모두 해결됐다’거나 할머니들에게 사죄 편지를 쓸 계획에 대해 ‘털끝만큼도 없다’고 한 국회 답변 등)이 한국 내에서 몰고 온 반발을 지적했다. 이에 그는 “어떤가요. 정말 일본인이 성실하게, 인간의 존엄을 훼손한 것에 대해 죄송했다고 말하면 알아주시긴 할까. 그런 식으로 노력해 온 일본인은 많았다. 그러나 결국 알아주지 않더라는 좌절감, 실망감이 적지 않다. 아무리 성실하게, 마음으로부터 죄송하다고 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기사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문장 일부가 생략됐지만 정확한 워딩은 이랬다. 잘 들어보면 그는 ‘사죄’라는 단어보다는 ‘죄송하다(申し訳ない)’ ‘사과하다(謝る)’ 등 경어나 구어체 표현을 많이 썼다.일관됐던 7년 전, 17년 전 인터뷰 당시 ‘녹음 파일이 있다’고 나서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삼가기로 했다. 그러잖아도 당내 ‘왕따’였던 이시바가 매우 곤란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일 관계가 살벌한 분위기에서 일본 정치인들 모두가 기피하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해 준 것도 고마웠다. 실제 인터뷰 도중 필자는 ‘(기사가) 당신에게 피해를 줄까 솔직히 우려된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돌아보면 그 10년 전인 2007년 11월에도 그는 후쿠다 야스오 정권의 방위상으로서 한국 언론 최초로 본보와의 인터뷰에 응해 줬다. 2006년에는 도쿄 유학생들의 공부 모임에 불려 와서 일본 정치에 대해 논의하고 간단한 회식을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한국인과의 만남에 항상 열린 자세였다. 그는 ‘공부하는’ 정치인이다. 예컨대 2002년부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는데, 2007년 인터뷰에서 그 이유에 대해 ‘역사 공부를 한 뒤부터 차마 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군사 오타쿠’적인 면이나 이상주의적 면모도 있지만 지방창생상을 맡아 ‘인구 감소가 최대의 안보 위기’라며 지방 살리기를 주창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회한 정치인들을 상대로 조율하고 설득하고 이끄는 권력자 역할이 적성에 맞을지는 의문이다. 이시바 총리가 역사 문제나 이웃국가 관계에서 소신을 펼 수 있으려면 넘어야 할 산이 참 많아 보인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퇴직한 뒤 꼭 일해야 해? 그냥 좀 쉬면 안돼?’ 그간 주변에서 이런 질문들이 적지 않았다. 퇴직 뒤에도 사회적 의미를 찾거나 생계에 보태기 위해 바쁘게 뛰는 선후배들을 보며 던지는 질문이다. 그래서 찾아봤다. 좀 느긋하게 ‘노시는’ 분은 없으려나? 유튜브 ‘퇴직학교’ 채널에서 발견한 이종섭 씨(61)가 비슷해보였다. 삼성그룹 홍보분야에서 35년간 일하고 지난해 7월 정년퇴직한 그는, ‘매일 공연보는 남자’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무대 삼매경에 빠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한다’는 원칙하에 분주한 그의 퇴직후 1년 이야기를 들어봤다. ● 매일 공연 보는 남자10일 오후 서울 성북구 보문동 성북50플러스센터의 한 강의실. 50~70대 남녀 6명이 모여앉아 돌아가며 대본을 낭독한다. 매주 화요일 모인다는 아마추어 연극인 모임 ‘정통연극연구소’다. 첫 대본읽기라 역할 상관없이 한줄 씩 돌아가며 읽는다. 한참 읽어가다가 누군가가 말했다. “이거 대본만 읽어서는 무슨 메시지인데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게요. 몇 번 읽어봐야 할 것같아요.“이종섭 씨는 이 모임 총무다. 지난 봄 이곳에 개설된 연극 수업에서 만난 멤버들이 4월 ‘택시 드리벌’이라는 20분짜리 연극을 무대에 올렸고, 헤어지기 아쉬워 모임을 이어가기로 했다.‘매일 공연보는 남자’. 자신의 블로그 제목처럼 그의 하루는 공연으로 시작해 공연으로 끝난다. 매일 아침 블로그에 전날 본 공연에 대한 리뷰나 새로운 공연정보, 할인정보 등을 올린다. 가끔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에세이 형태로 쓰기도 한다. 오후에는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받으러 다니고 저녁에는 공연을 보러 간다.“종일 제가 좋아하는 일정으로만 짜여 있죠. 이중 제가 직접 해본 분야가 연극이었습니다. 근 석달 간 수강생 모두가 노력해서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저로서는 꿈이었던 연극 무대에 서 본 것이 제 퇴직 후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35년만의 자유그는 직장생활 35년 대부분을 홍보쪽에서 일했다. 기자들을 상대로 회사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일이다. ―만 60세로 정년퇴직하셨으니 직장인으로서 천수를 누린 셈이네요. “퇴직할 때 둘러보니 입사 동기(1988년)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어요. 드문 케이스죠.” 불완전 연소감에 시달리는 퇴직자들이 적지 않은데 비해 그는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마치 군대나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 같았다. 말하는 내내 회사 밖 세상을 ‘사회’라고 표현하는 것도 공교로웠다.―퇴직 당시 심경은?“정년 6개월 전부터 보직을 내려놨습니다. 회사가 배려를 해 준 거죠. 처음엔 걱정이 많았어요. 내가 하루 세끼 밥은 먹을 수 있을까. 누구랑 어떻게 놀지, 내가 명함이 없어지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정해진 날 들어오는 월급이 없어진 상태에 대한 두려움…. 퇴직한 분들 이야기도 들어보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 지금까지 살아온 걸 돌이켜보기도 하고….”무엇보다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어릴 때 기억들을 소환한 것이 도움이 됐다. 초등학교 소풍 때 앞에 나가 사회 보고 오락 담당하고 노래하고 춤추던 기억이 가장 즐겁게 떠올랐다. 여기에 퇴직을 석 달 앞둔 무렵, 난생 처음 본 뮤지컬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다룬 창작 뮤지컬 ‘영웅’을 보게 됐는데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역시 내 길은 저런 무대, 혹은 그런 걸 즐기면서 사는 삶 아닐까. 그때부터 수시로 공연을 보고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연장 가는 것 자체가 즐거웠어요. 예약하면서도 너무 짜릿했고 공연을 기다리고 공연장 가서 티켓 발급받는 그런 과정들이 너무 설렜습니다. 그러면서 ‘이 길이다’라고 깨달아나간 거죠.”―그 전에는 공연을 본 적이 없나요?“직장생활 35년 동안은 없어요. 영화 정도는 봤지만 연극 뮤지컬 오페라 발레 같은 건 거의 못 봤죠. 홍보 생활이라는 게 수시로 터지는 이슈에 대처하는 거잖아요. 주말이고 주중이고 문화생활은 불가능하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뭐였더라?”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지망하던 방송사보다 먼저 삼성그룹 시험에 붙었다. 첫 근무처는 삼성항공. 6개월 정도 영업에서 일했는데 홍보 쪽에서 일하던 동기가 “홍보할 사람이왜 거기 가 있느냐”고 했다. 그가 입사동기 같은 차수 200명 중 ‘학습부장’(오락부장)을 맡아 ‘잘 노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끼’가 있다고 말한다.“성동50플러스에서 들은 강좌 중에 적성 검사가 있었는데 ‘예술 지향’이 엄청 강하게 나왔어요. 검사를 하는 선생님이 ‘지금까지 조사한 중에 처음 봤다’고 할 정도였죠. ‘끼’가 데이터로도 증명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죠.”―퇴직 후에도 일을 하거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나이 60에 일을 그만두는 건 너무 빠르다는 우려도 해 봤고, 35년간 종사해온 홍보와 마케팅의 경험을 살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연이란 걸 찾고 나서는 홍보는 과감하게 접어버렸습니다. 퇴직 초기 취업을 해볼까 해서 공연 분야에 이력서를 내보기도 했는데 절 찾는 곳은 없더군요. 현재는 취업을 해야 된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돈을 안 벌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으신 건가요?“이 부분은 와이프에게 감사할 일이죠. 제가 퇴직 후에 물질적으로 집에 도움을 줘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와이프는 당연한 듯이 ‘그런 생각할 필요 없다, 당신 좋은 거, 하고 싶은 일 하라’고 하더군요. 그 한마디가 제게 엄청난 힘이 됐습니다. 그래서 와이프를 믿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이들 다 키웠고 부부 생활비 말고는 돈 들어갈 곳도 없어요.” ● “퇴직 전 가장 큰 걱정은 부인과의 소통”그는 부인과 단둘이 산다. 1남1녀 자녀들은 모두 출가했다. 퇴직할 때 가장 큰 걱정은 부인과의 소통문제였다고. ―어떻게 해결했나요.“대화가 달라졌습니다. 요즘은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한시간 가까이 대화를 하는데 전에 없던 일이죠. 그 한시간 동안 저는 전날 공연장에서 만난 사람들, 또 공연장에서 있었던 일, 공연 내용 등을 시시콜콜 얘기해줍니다.제 화법도 달라졌어요. 과거에는 주로 ‘남 탓’ ‘아내 탓’ 하는 화법이었다면 지금은 제 얘기 위주로 해요, ‘모든 잘못과 원인은 나한테 있다’는 전제를 까는 거죠.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는 내가 부족했다’거나 ‘내가 방법을 잘 몰라서 그런 거 같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오히려 와이프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가장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제일 소중한 아내와의 소통 문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의외로 퇴직 후 배우자와의 관계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대화방식 변화는 어떻게 터득한 건가요?“어딘가 강좌에서 배운 것 같습니다. 퇴직 후 남자들이 참 많이 변하고 있고 변할 수밖에 없어요. 제 또래 동창이나 회사 퇴직자모임 같은 데 가면 한결같이 듣게 되는 얘기가 ‘우리는 영식님이 돼야 한다’는 거예요. 하루 세끼 먹는 ‘삼식이’, 두끼 먹는 ‘두식이’가 아니라 밥을 오히려 해서 바치는 ‘영식님’이죠. 지금까지 밥을 얻어먹었으니 이제는 내가 앞치마 두르고 밥을 해서 와이프에게 줘야 한다는 얘기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집안일 거의 안 했거든요. 지금은 아침에 밥은 집사람이 해주지만 저도 청소하고 분리수거하고 설거지도 합니다. 역할분담은 굳이 안했지만 가사의 절반 이상은 제가 하는 것같아요.”● 가성비 공연 관람 노하우 대방출그는 두 달 전부터 국민연금을 2년 당겨 수령하고 있다. 그 돈으로 자신의 생활비와 용돈을 충당한다. 이중 공연에는 월 30만 원 정도를 쓴다고.―공연을 그렇게 많이 보는데 그 돈으로 가능한가요?그는 기다렸다는 듯 티켓꾸러미를 가방에서 꺼냈다. “올초부터 8월까지 관람한 표들이예요. 146회를 봤어요. 연극이 제일 많지만 오페라나 발레, 뮤지컬도 있어요. 올해 쓴 공연비는 월평균 27만 8000원입니다. 회당 1만5000원 안팎이죠.”―오페라나 뮤지컬은 비쌀 텐데요.“오페라 R석은 몇십만원도 하죠. 다만 좌석 등급이 낮은 건 1, 2만 원대 표도 있어요. 예술의 전당이라면 4층에서 보는 게 제일 싸죠. 전 그런 자리에서 봐요. 망원경을 사용하면 1층에서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거든요. 블로그에는 1, 2만 원짜리 시야에서 본 관람 후기를 올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돈 없어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겠구나’라고 용기를 얻는 분이 생기죠. 돈 없이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 편에서 감상을 적어주고 또 그런 티켓을 어떻게 구입했는지 소상히 알려드립니다.”―할인 노하우를 좀더 소개해 주신다면.“일단 어떤 공연이 있을지 꿰뚫고 있어야 돼요. 모든 공연은 오픈 날짜에 맞춰 예매하면 조기 예매 할인을 해줍니다. 또 공연 끝나기 일주일 정도 전부터는 ‘막공 할인’에 들어갑니다. 보고 싶은 공연인데 돈이 없다면 그걸 기다리는 거죠. 대학로 공연 전문 사이트들은 대부분 50%~70% 할인해줍니다. ‘플레이 티켓’ 사이트의 경우 할인은 기본이고 무료 공연이 항상 4~5개는 있어요. 무료인데 예약만 하면 됩니다. 또 성남아트센터나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거의 매달 ‘만 원의 행복’ 또는 ‘천 원의 행복’같은 이벤트를 합니다. 예술의 전당 국립국악원 등 유료회원가입을 하면 회비 이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공연장도 많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통해 자세히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아요. 문화가 꽃피는 곳에서 사회도 발전합니다.” ●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었네”―회사의 기억은 어떻게 남아 계세요? “35년간 가족들을 먹여 살린 직장인데 감사하죠. 다만 회사를 떠난 느낌은 마치 알을 깨고 나가는 것 같은 해방감이예요. 나는 보이지 않는 큰 창살 속에서 정해진 시간을 살아냈다. 이제 나는 자유다… ” ―‘나와보니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었네’ 하면서….“너무 좋아요. 이렇게 즐길 게 많고 그런 것들이 삶을 얼마나 활기차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지. 집사람도 무척 좋아하죠. 제가 돈은 안 벌어와도 항상 즐겁고 행복해하니까요. 제가 했던 말과 행동이 다 글로 나오는 것도 재미있어 하죠. 그렇다고 제가 몇백 만 원씩 쓰고 다니면 좀 짜증스럽겠지만, 한 달 30만 원, 그것도 자기 연금 받아서 쓰는데 뭐라 하겠습니까?”-연극의 매력은.“연극을 통해 내가 꿈꾸고 희망하는 또 다른 삶을 무대에서 구현해 볼 수 있다는 것, 오랜 과정을 거쳐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 때 느껴지는 희열, 그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사실 설 수 있는 무대가 있든 없든 내가 이 루틴한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또 다른 다양한 삶을 살아본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매력인 것 같습니다.” -동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뭔가를 찾으시라고, 만약 찾았다면 그 일을 주저 없이 과감하게 밀어붙여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경우 두가지가 도움이 됐습니다. 첫째 자신의 과거 모습으로 돌아가보는 것. 어머니께 한번 여쭤보세요. 내가 정말 뭘 좋아했는지. 둘째 좀 돈을 들이더라도 자신의 성격 분석을 한번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연극과 봉사 병행하는 삶이 목표―앞으로 계획은.“오늘 연습하던 분들과 내년 경기도 용인에서 열리는 시민연극제를 목표로 무대를 만들 계획입니다. 연극 지도하는 강사님을 모시고 5060세대의 순수한 극단을 만들어보려 해요. 연극 강의를 할 준비를 하고 관련 책을 쓰려고 출판 과정에 대한 교육도 받고 있습니다. 또 청소년 상담 봉사를 하기 위해 청소년지도사 자격증을 땄고 지금은 사회복지사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연극과 봉사를 병행해가고 싶습니다.”―청소년상담에 관심 가지는 이유가 있나요.“제 청소년 시절의 경험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 교회에 다녔는데 너무 심하게 빠져들었습니다. 누구 하나 잡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인생의 방황기에 누군가가 나를 잡아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번에 아동센터 가서 어린 친구들하고 얘기해보니 길 밖의 청소년들이 너무 많고, 도움이 필요한 곳도 무척 많습니다.”그의 블로그 프로필에는 ‘허당완보’ 라는 호와 함께 이런 자기소개가 올라와 있다. 35년/ 직장생활을 끝내고/ 인생 2막/ 남은 인생을/ 어릴 적 꿈이었던/ 노래와 춤 몸짓/ 공연과 함께 합니다/ 나의 묘비명에/ 이렇게 씁니다/ 한평생/ 공연을 즐기고 나누며/ 행복했어요. 안녕~서영아 기자 sya@donga.com}
2024년 ‘한일축제한마당 in seoul’이 2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다. 올해 20회를 맞는 한일축제한마당은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열리는 민간교류 행사로 올해 테마는 ‘축제에서 피는 우정의 꽃’이다. 올해 축제에서는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의 주제가를 부른 세계적 성악가 메라 요시카즈와 크로스오버 테너 박완이 함께 ‘천의 바람이 되어’ 등을 부르는 우정의 무대를 선보인다. 2025년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공식 캐릭터 ‘먀쿠먀쿠’가 인사하고 한일 아이돌 그룹인 아일릿과 아이비, 한일가왕전 일본대표(가노 미유, MAKOTO),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한 단발교복소녀팀 아방가르디가 공연한다. 한일 훌라댄스와 한일소년소녀합창단 등 세대를 아우르는 출연진이 무대에 오른다. 한일 전통의상, 일본 차와 꽃꽂이 등을 체험하거나 양국 길거리 음식을 맛보고 전통주를 시음할 수 있는 부스도 준비돼 있다. 한일축제한마당은 2005년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해 ‘한일 우정의 해’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한국 측은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시 등이, 일본 측에서는 주한일본대사관 관광청 일본정부관광국(JNTO) 등이 후원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일축제한마당 2024 in Seoul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나이 60이 되니 모두 평등해지더라.’ 일본 베스트셀러 소설 ‘끝난 사람’ 후기에서 읽은 구절이다. 작가 우치다테 마키코(75)가 환갑 전후 부쩍 늘었던 각종 동창회에서 느낀 점이라고. 학창시절 미남 미녀였건 아니건, 공부를 엄청나게 잘했건 아니건, 사회에서 잘나갔건 아니건, 모두 적당히 주름지고 구부정한 모습에 사회적으로는 ‘끝난 사람’이 돼 있더라는 것. 돈이 많고 적음도 이 나이쯤 되면 자기 책임이고, 길어진 여생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신세다. 인생이 잘 풀렸던 사람일수록 이 평등은 받아들이기 불편하다. 그러나 추억과 싸워 봐야 이길 수는 없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품위 있게 물러나기’를 말한다.품위 있게 물러나는 자세 투자계 현인 워런 버핏의 장수 비결도 적당히 내려놓은, 자유롭고 소박한 삶의 표본과도 같다. 그는 94세 나이에도 매일 콜라와 햄버거 같은 정크푸드를 먹지만 건강과 장수를 누린다. 포천지(誌)는 그 비결로 △8시간 수면 △카드 게임 △‘아무것도 없는 날’이 포함된 가벼운 일정 △하루 5∼6시간 독서와 사색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아는 것을 꼽았다. 고령자가 급증하는 한국에서도 노년의 삶에 대한 조언이 넘쳐난다. 필자가 격주 연재하는 ‘100세 카페’에서도 자신의 삶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는 고령자들을 소개했다. “궁금했던 동년배들 삶을 엿보게 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한다. 6070세대 삶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많았던 시기가 없다. 과거에 없던 ‘젊은 노인’들이 출현했고 이들이 어떤 길을 만들어 나가느냐는 미래 세대에도 영향을 줄 터다. 덤처럼 주어진 수십 년 세월을 어떻게 보람되고 즐겁게 만들어 갈 것인가. 이렇다 보니 노년의 의무를 강조한 ‘○○해야 한다’ 유가 강조된다. ‘나이 들면 근육운동을 해야 한다’거나 ‘얼마 이상 돈을 모아야 한다’거나, 적절한 일과 지적 자극이 권장되기도 한다. ‘○○대가 되어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 유의 겁주는 내용도 적지 않다. 노인으로 사는 일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것이다.“60부터는 대충 멋대로 살자” 노년의 여러 숙제를 강조하다 지쳐서일까.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사회를 맞은 일본에서는 노년에는 ‘대충대충,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주장이 대안처럼 떠오르는 듯하다. 정신과 의사 호사카 다케시는 저서 ‘대충 사는 노후를 권함’에서 “제2의 인생이 주는 스트레스를 버리라”고 충고한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를 버려라 △인간관계도 적당히 대충 △작은 일에도 지치는 스스로를 용서하자 △‘돈 부자보다는 시간 부자’ 정신으로 △건망증, 잊을 수 있음이 노인의 힘이다 △무리하지 않고 쓸데없이 애쓰지 말고 ‘적당히 대충’ 사는 게 좋다고 강조한다. ‘이부자리는 매일 개지 않아도 된다’ ‘규칙적인 식사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 등 깨알 같은 조언도 있다. ‘70세의 벽’ ‘80세의 벽’ 등 노년 전문 서적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정신의학자 와다 히데키도 ‘60세부터는 멋대로 살자’라는 신서(新書)에서 ‘몸과 마음, 환경이 격변하는 60대는 제2의 인생을 즐기기 위한 터닝포인트’라며 건강이건 식생활이건 돈이건 인간관계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고 한다. 목차를 보면 △일부러 병원에 갈 필요는 없다 △마른 체형보다 조금 통통한 체형이 장수한다 △혈압도 콜레스테롤도 조금 높은 쪽이 머리가 맑다 △고령자야말로 고독을 즐겨라 등이 있다. 노년의 삶에 정답은 없다. 누군가로부터 성적표를 받는 것도 아니다. 각자 좋은 대로 살고 스스로 만족하면 최고 아닌가. 운동을 하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다고 운동을 하지 못하는 현실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다. 낙관주의와 함께 몸과 마음, 삶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남들은 하던 일도 접는다는 나이 일흔에, 이석대(71) 씨는 불쑥 책방을 내겠다고 나섰다. 가족을 제외한 모두가 반대했다. 잘 나가던 서점들도 줄줄이 문닫는 판에, 책 중에서도 가장 안 팔린다는 시집만 파는 책방이라니. 하지만 고집과 뚝심은 그의 힘의 원천. 지난해 5월 ‘산아래시(詩)’ 라는 간판을 단 독립서점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왜 가족은 반대하지 않았을까.“워낙 오래 전부터 제가 말해왔거든요. 더 나이 들면 작은 책방 하나 내겠다고.”(이석대 씨)그의 딸 현경 씨도 “당연히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사실 그의 존재는 딸 현경 씨가 최근 보내준 책 ‘일흔살의 창업일기’를 통해 알게 됐다. 표지에는 “은퇴한 뒤/‘여생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는/이 땅의 6070님들께/ ‘일흔’/ 이 출렁이는 기운을 바칩니다”라고 씌여 있다. 100세 카페에 딱 맞는 컨셉이다.그는 인터뷰에 응할지 여부를 놓고 무척 망설였다. 책 저자는 ‘이동림’이라는 필명(아명)이었고 그는 이름 없는 책방지기가 되고자 줄곧 본명을 숨겨왔다는 것. 겨우겨우 인터뷰를 약속한 이튿날 아침, 다시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책방이 알려져 자매 책방들의 기를 살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조명이 맞춰지는 건 아닌 것같다’는 얘기. 결국 인터뷰는 자매 책방 대표님들도 모시고 지난달 26일 진행했다. 그가 이 책방 주인으로서 본명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전국의 시인들에게 시집 우송받아 판매시집전문책방 ‘산아래 詩’는 대구시 남구 현충로 앞산 카페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엔 카페로 쓰이던 13평 공간을 빌려 책꽂이를 설치했다. 나머지는 시집들이 저마다 색깔과 내공을 뽐내며 공간을 채워준다. 초록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된 간판로고. 꼬부랑 전선줄로 늘어뜨려진 전등까지, 소박하지만 세련된 장식품들은 모두 그의 수제품이다. ―책방 열고 1년 여,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고맙다’였다고요.“시인들은 시집을 보내며 ‘고맙다’고 하시고 손님들도 고맙다고 하셨죠. 많은 시인들이 ‘시인되고 처음으로 내 책이 책방에 걸렸다’고 감격해 했습니다. 그 정도로 독자를 기다려온 시인들이 많습니다.”시집만 파는 책방이 개업을 앞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자작 시집을 챙겨들고 찾아오거나 택배나 소포로 보내는 시인들이 늘었다. 어쩌면 책방이라기보다 참여시인들의 작품집을 한곳에 모아놓은 ‘시집 전람회장’이다. 멀리 지방에서 감격에 겨워 책을 싸들고 찾아오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책방에 걸면 어울릴 것 같다며 그림을 보내주는 시인도 있었다. 산아래시에는 8월말 현재 350여 명의 시인이 회원으로 등록해 있고 시집 390종이 진열돼 있다. 200여 명의 시인들이 모인 단체카톡방도 운영된다.“지난해 6월에 책 판 돈을 처음으로 송금했는데, 기껏해야 몇천 원씩이죠. 그런데 그걸 받아본 한 분이 단톡방에 ‘내 시집 팔렸다! 제주도에 땅 보러 가자!’라고 올리더군요. 하하.”시가 우리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출판사를 통하지 않고 전국 시인들과 직거래를 통해 위탁판매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시인들이 시집을 10부씩 보내주면 책방이 전시 판매하는 역할을 하는 것.주인을 찾지 못하고 장롱 속에 쌓여 있던 책들이 보내지니 동네책방의 고민인 사입 비용이나 재고 부담이 없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이 책방이 망할까봐 모두가 걱정인 듯하다. 책을 보내주며 ‘책값은 필요 없으니 서점 운영에 보태라’는 시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고집있는 원칙주의자다. 책값을 송금할 계좌번호를 주지 않으면 책을 진열해주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또 처음 보내온 10권이 다 팔려도 한동안은 새로 주문하지 않겠다고 미리 밝혔다. 아직 안 팔린 다른 시집들도 기회를 얻어야 하므로.운영원칙은 더 있다. 시집들은 독자들을 고르게 만날 수 있도록 수시로 자리를 옮겨가며 진열된다. 손님이 ‘좋은 시집’을 추천해달라고 해도 절대 응하지 않는다. 책방에 비치된 시집이 모두 다 ‘좋은 시집’이기 때문. 시집에 집중하기 위해 커피나 소품을 팔지 않는다. 시인들에게는 팔린 책값의 60%를 매달 정산해준다.지난해 6월 서울시인협회 간부가 찾아와 이런 시스템 설명을 듣고는 “출판물 유통구조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수도권에서도 이런 책방 운영을 고민해보겠다”고 했다고. 대구수필가협회는 비슷한 방식으로 ‘에세이 전문책방’을 검토한다고 했다.―시인들과는 처음에 어떻게 연결이 된 겁니까?“모르겠습니다. 시인들끼리 아는 시인들을 초대해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개념의 서점 창업이 가능했지요.”―대부분 무명시인입니까?“이름이 덜 알려진 분들이 많죠. 그런데 저희는 무명이건 유명이건 본인이 보내주면 팝니다. 예컨대 김재진, 안도현 시집도 본인들이 보내줘서 팔았습니다. 이건 호주 교민 시인이, 이건 인도네시아 교민 시인이 보내온 거예요. 제가 한 1년 해보니까 소위 무명 시인 작품들 중에 주옥같은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운이 나빠 매스컴에 덜 나오고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뿐이예요.”6070, 은퇴했다고 주저앉지 말자―나이 일흔에 책방을 낸 이유는?“책방은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젊을 때 친구 여러명이 투자해 책방을 냈다가 망한 적도 있죠. 하하.여기 더해 6070세대가 흐르는 세월 속에 속절없이 떠내려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을 봐도 매일 산이나 도서관에 가거나 집안에서 눈치보며 빈둥거리는 모습들입니다. 흐르는대로 세월 보내기에는 시간을, 내 삶을 허투루 여기는 것같아서 안되겠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6070세대의 평생 훈련되고 축적된 지식과 업무역량이 ‘나이’ 때문에 멈춰버린 채 낭비되는 게 너무 아쉽고 안타깝지요. 이들이 다시 한번 든든한 ‘현역’이 되도록 우리 삶의 현장으로 불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흔’이 다시 ‘호기심과 열정의 나이’가 되도록 눈빛을 초롱초롱 밝혀야죠. 제게는 그게 책방이었습니다만, 마음만 고쳐먹으면 다시 도전할 일이 책방 말고도 얼마나 많겠습니까….”―그럼 왜 시집만 파는 책방일까요?“누군가가 해야 할 일 같았습니다. 몇 해 전에 시인인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작품을 모아 시집을 펴냈는데 주위에 몇권 나눠줬을 뿐, 서점에는 한권도 깔린 적 없고 책장 한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다고. 문단에는 이런 시인이 많다’고. ‘그중에는 빼어난 작품도 많은데 도대체 독자를 만날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더군요.저는 시를 쓰지는 않지만 시 한편 마무리할 때까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산고를 겪었을까 짐작은 갑니다. 오랫동안 꿈꿔온 대로 내가 만약 책방을 열게 된다면 이 소중한 시집들만 모아서 독자 앞에 널리 소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그 보람을 많이 느끼는 중이시군요.“제가 겪어보니 시인들은 개성이 강한 분이 많고 근본이 선합니다. 시집을 사러 오시는 분들도 내가 사회생활할 때 겪었던 많은 분들보다 더 선해요. 그래서 이 시집 책방이 잘 돼야 된다는 생각을 제가 거듭거듭 하게 됩니다.” 시집책방 창업교실 “세상에 시를 뿌리자”지난해 낸 책 ‘일흔에 쓴 창업일기’는 그가 책방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했다. 적당한 점포를 구하고 사업자등록과 은행계좌 개설, 청소와 인테리어까지 모두 손수 해나가는 과정을 시집을 닮은 편집의 책에 담았다.2월부터는 ‘세상에 시를 뿌리자’는 슬로건을 걸고 시집책방 창업교실을 두차례 열었다. 강좌에 참여한 수강생들이 창업을 시작해 대구 경북 부산에 자매책방 5곳이 문을 열었고 올해안에 충북 청주, 경기 안성 등 4곳에서 오픈을 준비 중이다. 자매책방들은 기존 영업장 구석에 책방을 내는 ‘샵 인 샵’ 형태가 대부분이라 책꽂이만 준비하면 개업준비가 끝난다.자매책방 1호인 개정칠곡점 책방지기 조미숙(57) 씨는 현직 중학교 수학교사이자 지난해 11월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5월 가족이 운영하는 비빔밥 체인점 귀퉁이에 책방을 열었다.“준비에 2주일 정도 걸렸어요. 시인들 단톡방에 ‘제가 책방을 하려는 아무개입니다’하고 주소 올리면 그 200분이 각자 5권씩을 일제히 보내주세요. 일주일이면 1000권이 배달되는데 그걸 주욱 진열해주면 바로 책방 오픈입니다.”―본인도 시인이시니 더 공감이 됐겠군요.“제 시집도 지인들 나눠주고 많이 남았어요. 산아래시 책방의 존재가 너무 반가웠죠. 여기 가져다두면 누군가가 그걸 사준다니. 더 놀라운 건 제 시집을 처음으로 사준 사람이 우연히 이 책방에 들른 제 옛제자였어요. 이 선생님이 바로 사진 찍어 보내주셨는데 너무 신기했죠. 제 책이 누군가에게 팔리고 그 피드백이 오는 건 정말 설레는 일이예요. 1호점 창업을 한 이유도 저같은 분이 많을 거란 생각에서입니다. 써놓고 인쇄는 했는데 줄 데가 없는 시집들의 갈 곳을 찾아드리자. 이제 제 꿈은 이 시인들이 북 콘서트 같은 거 편하게 할 장소를 제공하는 거예요.”2호점주가 된 김민석(32) 씨는 경산에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국밥집 한구석을 책방으로 꾸몄다. 아직 시작 단계지만 손님들 반응은 좋다고 한다. “언젠가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내건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며 “시집은 마음의 건강 담당”이라고 한다. 자매책방은 이 씨에게도 큰 힘을 주고 있다.“책방들이 더 늘어나고 책방지기들이 보람도 느끼고 신명 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독자들이 쉽게 시집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다는 열망 같은 게 생겼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이런 말도 합니다. ‘산아래시’ 하면 대구에서 유명한데 왜 자꾸 자매책방을 만드냐. 너 혼자 독점으로 하면 잘 될 건데, 너 장사꾼 맞냐고. 그런데 돈 생각하면 책방 하면 안되지요.”책방지기의 시선그가 제일 좋아한 손님들 얘기를 통해 그가 가진 책방에 대한 또다른 기대를 엿볼 수 있다.“지난해 8월 경부터 매주 오던 중1(당시) 남학생 2명이예요. 목, 또는 금요일 오후 5시쯤 와서는 저 탁자 밑에 가방 놓고 의자 두 개에 앉습니다. 새로 들어온 시집이 있으면 한 번씩 들고 훑어보고 자기들끼리 종이 가져다가 필사도 합니다. 그리고는 서로 읽어주고 마주보고 웃고. 그렇게 한시간 가량 놀다 가는 거예요. 어찌나 예쁘던지, 저기 사탕바구니도 제가 그 아이들 먹으라고 갖다놓은 겁니다. 지금까지 시집 한 권 안 샀지만, 와서 노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아이들이 저렇게 해맑게 웃고 시를 베끼는 마음을 간직한 채 성장해서 사회에 나간다면 세상이 지금보다 좀더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내가 이러려고 책방을 하는 거다…. 뭐 이런 생각들이죠. 그런데 이 아이들이 5월쯤부터 안 보여요. 2학년일 텐데, 학원을 다니게 됐으려나….”그는 언론인을 거쳐 지역 건설회사에서 홍보팀장으로 일했다. 외환위기 직후 부도로 직원 120명이 한꺼번에 ‘잘릴’ 상황이 되자 그는 협력업체 1400군데에 편지를 보냈다. ‘회사를 나가야 할 직원들에게 격려 전화라도 해주시고 여력 되신다면 채용해주십사’고. 이 일은 당시 중앙일간지에도 보도됐다. 그 1년 뒤엔 그도 회사를 나갔다. 총무팀장으로서 40여 명의 구조조정을 담당한 뒤 ‘남아 있을 면목이 없다’며. 당시 나이 50세. 부인이 운영하던 작은 광고기획디자인회사 ‘밝은 사람들’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회사는 매년 전국규모 기획디자인상을 수상하며 지역사회에서 정평을 얻고 있다. 정작 그 자신은 젊은 직원들의 참신한 생각을 방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4~5년 전부터 업무를 내려놓았다.‘갇힌 자유’를 만끽하는 칠순―책방 경영은 괜찮으십니까.“월세 80만 원 빼고는 돈 들어갈 일이 별로 없어요. 책방 열고 나서 친구들과 밥먹고 술먹는 일이 사라졌습니다. 책방 하느라 한 달에 몇십 만 원 손해봐도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밥값 술값 쓰는 것 생각하면 남는 겁니다.이 책방에 들어올 때 나이 칠십인데 좀 삶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전화번호부터 정리했어요. 1500개 넘던 번호를 절반으로 줄였는데, 시인들 만나느라 다시 200명 넘게 늘긴 했지요. 빈 가게를 혼자 지킬 때는 정말 면벽좌선하는 수행승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 나이엔 그런 시간들이 참 뜻깊고 귀하더군요. 예전엔 밖에 돌아다닐 때 자유로운 줄 알았는데 책방에 묶여 지내면서 갇혀 있는 게 자유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갇혀 있는데 이 안에서 자유로운 거죠.”―나이 들수록 외로움과 친구가 돼야 한다는 얘기들을 많이들 하시더군요.“늙어가면서 제가 철없이 살아왔다는 걸 깨닫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제일 잘 못 해준 사람이 배우자예요. 젊어 아무 것도 모르고 가난한 월급쟁이에게 시집와서 평생 시부모님 봉양하고 아이들 키웠는데. 내가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빚 좀 갚아야겠는데, 별로 갚을 방법이 없어요. 업고 다닐 수도 없고 돈이 많아서 자꾸 줄 수도 없고. 그저 설거지라도, 집안청소라도 틈나는 대로 해주면서 마음 상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밖에 없더군요. 그냥 제가 더이상 마음고생만 안 시켜도 다행이다….”―세상을 주도하던 어르신들이 인생 늦으막히 배우자, 가족의 소중함을 토로하시는 걸 많이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잘 하시지….“맞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걸 좀 미리 깨달을 수 있다면 가정만 평화로워지는 게 아니고 사회도 달라질 겁니다.”비록 그가 만든 건 동네책방 하나지만 꿈은 훨씬 창대하다.“작은 책방들이 여기저기 자꾸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동네마다 들어서는 작은 책방들이 우리 문화생태계와 일상에 새로운 진화의 동력으로 수혈되면 좋겠습니다. 골목마다 카페가 늘면서 커피 수요가 폭증하듯이 동네마다 책방이 많이 생긴다면….”올곧고 고집스런 칠순 책방지기는 오늘도 책이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히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대구=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한일친선협회중앙회(회장 김태환)가 오는 11일 제1회 ‘한일 미래세대 포럼’을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장소는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이다.중앙회는 매년 한일관계를 진단하고 개선방향을 제안하기 위해 전문가 중심의 세미나를 개최해 왔다. 올해 행사에 대해 중앙회는 “전문가패널 세미나와 별도로 한일 양국 대학(원)생들이 직접 토론자로 참석해 청년들의 시각에서 한일관계를 조명하고 바람직한 관계 구축을 위한 스스로의 역할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의미부여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사망자가 늘면서 ‘다사(多死)사회’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연평균 130만 명대이던 사망자 수는 지난해 157만 명으로 늘었고, 2040년 167만~168만 명으로 정점을 찍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벌써부터 장례를 치르려 해도 화장장이 모자라 1, 2주 기다리는 게 예삿일이 되고 있다.당연한 일이지만 사망자가 늘면서 상속도 늘었다. 특히 고도 경제성장기에 부를 축적한 고령자들의 사망으로 연간 약 50조 엔(약 460조 원)의 유산이 계승되는 ‘대상속시대’가 문을 열었다는 표현도 등장했다.다만 상속을 받는 입장에선 부동산 자산이 마이너스로 작동하는 일이 늘어 유족 간 다툼으로 이어지고 있다. 집값이 떨어지고 팔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가정재판소의 상속 관련 상담은 연간 약 18만 건으로 10년 전과 비교해 2배로 늘었다.상속이 부채를 부르는 시대전쟁이 끝난 뒤 베이비붐 세대가 등장하는 건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일본에서는 3년간 800만 명 넘게 태어난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가 여기에 해당한다. 미국(1946~1965년생)이나 한국(1955~1974년생)의 베이비붐 세대보다 기간이 압축돼 있지만 일본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집단으로 일컬어진다.이들은 고도 경제성장기에 20, 30대를 보내고 버블경제기에 40대를 보내며 부를 쌓았다. 또 단카이 주니어 세대(1970~1974년생)를 낳으며 2차 베이비붐을 만들어냈다.2023년판 일본 고령사회백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의 자가 보유율은 87.4%에 이른다. 75.6%가 단독주택, 11.8%는 맨션을 보유하고 있다. 2030년이면 단카이 세대가 모두 80세를 넘어서고 단카이 주니어들은 60대를 바라보게 된다. 앞으로 수백만 가구의 상속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를 일본 언론은 ‘절망의 상속’이라 부르고 있다.가장 큰 이유는 부동산 가격의 하락 추세에 있다.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전반적으로 하락세다. 인구는 2008년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신규 주택은 지속적으로 공급되면서 주택 공급이 넘치는 미스매치가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앞으로 단카이 세대가 살던 낡은 주택 수백만 채가 그들의 사망과 함께 남겨진다.부(負)동산의 악순환한번 인구 감소가 시작된 지역은 사회 기반시설이 낙후되고 산업은 쇠퇴한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재개발도 멈춘다. 그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다시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단독주택인 양친의 집을 상속받아도 이미 60대를 바라보는 자녀 세대는 도시 지역에 주택을 소유한 경우가 많다.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관리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재산세나 유지비를 매년 내야 하고 붕괴나 화재 등 안전 관리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건물을 방치하면 급격히 훼손돼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거나 팔기도 어렵다.그러니 상속을 받았다면 가급적 빨리 팔아야 하고, 그게 어렵다면 철거해야 한다. 문제는 일본에서 지은 지 수십 년 넘은 주택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집을 철거하려 들면 수백만 엔의 비용이 발생하고 세금 부담도 늘어난다.일본 전국에 버림받은 빈집이 증가하는 이유다. 2023년 기준 전국 빈집은 900만 채. 방치된 가옥이나 토지에 대한 대책 마련에 행정기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5년부터 ‘빈집 대책 특별조치법’을 시행했다. 본래 주택이 세워진 토지는 나대지의 6분의 1만 재산세를 내면 되지만 지방자치단체가 ‘관리가 필요한 특정 빈집’으로 지정하면 나대지에 준해 세금을 매기겠다는 것이 골자다. 제대로 관리하거나 철거하라는 압박이다.빈집 문제는 단독주택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 ‘분양 맨션’이라 부르는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지어져 50년이 넘은 ‘한계 맨션’이 도시 지역에도 나타나고 있다. 도심에서 1시간 통근 거리인 뉴타운 주변에서도 빈집 예비군들이 적잖다.상속 포기 늘고 빈집 폭증그래서인지 상속 포기를 택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 사법통계에 따르면 일본에서 상속 포기 건수는 2019년 22만5000여 건에서 2022년 26만여 건으로 늘었다. 상속 포기를 하면 부동산뿐 아니라 현금이나 보험금 등 다른 자산도 포기해야 하지만 매년 증가하고 있다.부동산 상속으로 손해를 보는 사례가 늘면서 불필요한 자산을 서로 떠넘기려는 가족 간 싸움도 우려된다. 유족들이 모두 “저금은 받겠지만 집은 필요 없다”고 나선다면 뭔가를 받겠다고 싸우는 것 이상의 진흙탕 싸움이 될 수 있다.상속 포기나 떠넘기기가 계속되면서 ‘소유자 불명’이 돼 버린 골칫덩이 부동산도 전국에 늘고 있다. 이런 부동산은 행정기관도, 가족도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사(死)유지’라 불린다. 예컨대 100여 년간 등기가 이뤄지지 않은 채 폐허가 됐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건물들이다. 일본 언론에는 이런 사례가 심심찮게 보도된다.인지장애(치매)가 오면 자산은 잠긴다설상가상으로 고령자에게 찾아오는 인지장애(치매)라는 복병이 있다. 2022년 미쓰이스미토모 신탁은행에 따르면 일본의 인지장애 고령자가 보유한 자산 총액은 2020년 기준 약 250조 엔(약 2300조 원)이고, 2040년이면 345조 엔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같은 기간 부동산은 80조 엔에서 108조 엔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됐다.‘치매 걸린 부모님 집’은 일본에서 주간지나 책자의 주요 테마다. 고령의 부모님은 치매가 찾아오면 당연한 수순처럼 요양원에 입소한다. 이후 거처하던 집은 자연스레 빈집으로 남는다. 일본 다이이치 생명보험 경제연구소의 추정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방치된 치매 고령자의 집이 2021년 기준 약 221만 채이고, 2040년에는 280만 채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나 법적으로 아무도 손댈 수가 없다.일본에서 치매 환자는 상거래나 법률 행위를 할 수 없어서다. 일본 정부는 늘어나는 치매 환자의 재산 보호를 위해 2020년 민법을 개정해 ‘의사능력이 없을 때 그 법률 행위는 무효로 한다’고 정리했다. 치매 노인과 부동산 매매 계약을 했더라도 그가 치매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가족이 대신 팔기도 어렵다. 설사 본인이 동의하더라도 치매 진단이 내려진 경우 부동산회사나 행정기관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2008년 범죄수익 이전 방지법도 시행돼 부동산 매각 시 본인 확인이나 의사 확인이 엄격하게 시행된다.치매 판정을 받은 노인의 은행 계좌가 동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 돈 많은 부모의 요양원비나 간병비를 가난한 자녀가 대신 내는 상황이 벌어진다. 금융기관들은 치매 판정을 받기 전에 임의후견인을 정해 놓거나 가족신탁을 해둘 것을 권한다. 치매 판정을 받은 뒤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가정법원이 지정하는 법정후견인 제도가 있는데, 매달 수수료를 내야 하고 타인의 관리를 받아야만 한다.“보람된 일 하는 곳에…” 기부 유언 늘어자녀나 부모 등 상속받을 사람이 없어 국고로 귀속된 상속 재산도 2022년 기준 768억 엔(약 7000억 원)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최근 9년 새 2배 이상 늘었다.이런 가운데 재산을 자신의 사후 가족이 아니라 사회공헌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NPO) 등에 양도하는 ‘유증 기부’도 늘고 있다. NHK는 유증 기부 총액이 연간 400억 엔 가까이로 늘었다고 올 2월 보도했다. 이런 기부액이 지난해 일어난 노토반도 지진 피해 지원 현장이나 난치병 연구 등에 활용된다.보도에 따르면 유증 기부가 활성화된 배경에는 독신이나 무자녀 등 가족 형태의 변화와 망자의 재산을 반드시 가족이 받지 않아도 된다는 가족관의 변화가 있다. 자녀도, 가족도 없다는 한 80대 여성이 대표적이다. 그는 “내가 남긴 돈을 국가가 가져가서 쓰는 건 싫다”며 개발도상국에 교육 지원을 하는 단체에 살던 집을 포함한 모든 유산을 기부하겠다는 유언 공증을 남겼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았다는 70대 할머니는 아들의 권유로 동네 결식아동을 위한 ‘어린이식당’에 자신의 저금 30만 엔을 기부하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한 뒤 뿌듯해한 것으로 소개됐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한국의 상속세는 사망자가 남긴 모든 재산을 합산해서 과세한다. 일괄공제액을 5억 원으로 정한 건 1997년이다. 당시 서울 도심 84㎡(전용면적 기준) 아파트 가격이 1억 원대 중반이었다. 아파트 3채 정도는 세금 부담 없이 가족에게 물려주라는 취지에서 정해진 금액이다. 그런데 근래 몇 년 새 서울 아파트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살던 집 팔아 상속세를 내야 하는 가정이 적잖다.세대 간 부의 이전, 청년 세대에 마중물 역할 최근 정부가 상속세 감면을 포함한 세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물가 인상을 반영하고 조세 체계를 합리화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일찌감치 ‘중산층도 상속세 걱정할 시대 왔다’는 기사를 썼던 입장에서 반갑게 느껴진다. 예상 밖이었던 점은 일괄공제가 아닌 자녀공제를 현행 5000만 원에서 5억 원으로 올린 대목이다. 조만간 상속을 해야 할 80, 90대 세대로서는 자녀가 많으니 혜택이 기대된다. 하지만 앞으로 상속을 준비해야 하는 50, 60대 세대로서는 자녀 수가 확 줄어 큰 도움 안 된다. 국회 통과라는 절차도 남아 있어 아직 먼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자녀공제를 늘린 데는 저출산 시대에 출산 장려의 메시지도 담았다는 설명이 나온다. 정말 출산율을 걱정하고 경제활성화를 도모했다면, 사망 뒤 상속이 아니라 살아생전 다음 세대로 부의 이전을 돕는 증여세 감면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실제 출산할 연령대는 20, 30대 세대이고, 이들에게 정부가 추진하는 상속세 공제 혜택은 너무 먼 얘기일 수 있어서다. 요즘은 ‘재산은 죽기 직전까지 움켜쥐고 있으라’는 말을 신봉하는 어르신이 적지 않다. 자녀에게 미리 재산을 넘겨주면 불효를 부추긴다는 말도 나온다. 그때마다 ‘저분은 자녀 대신 국가에 재산을 헌납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안대로 상속세는 줄이고, 증여세는 그대로라면 자녀가 많은 고령자일수록 증여를 미루는 게 절세전략에 맞는다. 한국보다 15∼20년가량 고령화에서 앞선 일본은 정반대 정책을 펼쳤다. 80, 90대 부모가 사망하면 60, 70대 자녀가 상속을 받는 ‘노노(老老) 상속’으로, 부의 잠김 현상이 사회 문제가 됐기 때문. 고령자의 막대한 부가 소비나 재투자로 이어지지 못한 채 예금 형태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3년 생전증여제도를 확대했다. 60세 이상 부모가 18세 이상 자녀나 손자녀에게 증여하면 주택구입비 500만∼1000만 엔, 손주 교육비 1500만 엔, 결혼육아비 1000만 엔을 비과세하는 특례를 한시 도입했다. 노인 세대의 자산을 청장년층으로 옮겨줘 소비를 진작하고 돈이 돌게 한 것이다. 이에 앞서 2001년부터 1인당(수증자 기준) 연간 110만 엔까지의 증여는 과세하지 않는 ‘역년(曆年) 증여’ 제도를 도입해 상속세 부담을 줄이게 했다. 역년 증여에는 자녀와 손주는 물론이고, 타인에게 하는 기부도 포함했다. 이때 상속일 기준 3년 이내 역년 증여한 액수부터는 상속액에 합산되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올해부터 ‘7년 이내’로 늘렸다. ‘더 빠른’ 증여를 유도한 것이다.“이중과세” vs “부의 대물림 조장” 자산 고령화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60세 이상 고령층 순자산은 3700조 원을 넘어 전체 자산의 40%에 육박한다. 더 큰 문제는 이 자산이 대부분 부동산에 잠겨 있다는 점이다. 건강한 부의 이전을 고민해야 할 이유다. 상속 증여세와 관련해 한쪽에선 이중과세 이슈가, 다른 한쪽에서는 ‘부자감세’라며 부의 세습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단골처럼 나온다.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라면 성실하게 일하고 저축하면서 자산을 불려 나가는 삶은 권장돼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2019년 12월 초, 지인과의 점심자리. 성은숙 씨(51)의 귀에 ‘퇴직’이란 단어가 꽂혔다.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내 사업을 하겠다며 뛰어다니던 그가 도움을 요청하려 만든 자리였는데, 지인은 앉자마자 ‘며칠전 회사에서 잘렸다’고 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두 사람은 국밥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처지가 비슷했죠. 이쪽은 사업 아이템을 찾아 우왕좌왕하고 있고 저쪽은 대기업 부사장이었는데 잘렸고. 여러 얘기 중 그분이 ‘퇴직자들을 위한 서비스’ 아이디어를 꺼냈는데, 머릿속에 전구가 반짝 켜지는 느낌이었어요.”반 년 간 퇴직자 300여 명을 만났고, 이듬해 7월 퇴직전략컨설팅 업체 ‘화담, 하다’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뉴업(New-Up 業)의 발견’이란 책을 펴냈다. 그가 본 퇴직자들의 요즘 모습은 어떨까.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의 한 공유오피스를 찾았다. 마침 이날은 법인설립 4주년 되는 날이라 했다.퇴직 포비아로 가득찬 세상―회사 이름이 특이하네요.“‘모일 화(和)’에 ‘물맑을 담(淡)’,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예요. 가운데 쉼표는 말그대로 ‘인생, 한 번 쉬었다 가시라’는 의미. 초기 스타트업이다보니 중간 쉼표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기대도 살짝 있었어요.” ―수많은 퇴직자들을 만나본 소감은. “모두 퇴직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를 참 어려워했어요. 우리 사회의 퇴직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죠. 차근차근 들어보면 각자 사연이 드라마틱한데 이분들 이야기를 모아놓으니 패턴이 나오더군요. 뭔가를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겠더라구요. 직장인들이 퇴직 후 어떤 일이 생길지 미리 알고 준비하는 데 도움이 돼 보자….”―어떤 패턴인가요.“예컨대 퇴직자의 85%가 인지적 불안정 단계를 반드시 경험합니다. 하지만 많은 퇴직자들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그동안 쌓아온 전문성을 이어갈 골든타임을 놓쳐요. 이 단계를 벗어나는 데 짧게는 6개월 길게는 막 5~6년까지 가는 분들도 계세요.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조금이나마 기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그래서 퇴직준비도를 스스로 측정하는 IT 기반 플랫폼으로 만들어 비즈니스모델 특허를 받았고, 각자의 특성을 분석해 적합한 퇴직 로그램을 추천하는 솔루션도 개발했다.“바다는 그대로였는데 내 마음이 달라졌구나”퇴직이 비자발적이었을수록, 포지션이 높았을수록, 예측이 어려웠을수록 어려운 시기를 겪을 확률은 커진다. “과거 퇴직 서비스라면 재정자산 중심의 관리방안을 찾아주는 게 주를 이루죠. 그런데 몇백 명을 직접 만나보니 자산 규모와 상관없이 개인의 성향과 목표, 가치관, 심리상태 등에 따라 패턴이 많이 다르더군요.” 그는 퇴직자의 상태를 골프에 빗대 러프(인지적 불안정) 단계, 페어웨이(자기 인식) 단계, 온그린(목표 구상) 단계, 홀인(목표 확정 및 실행) 단계로 나눴다. “갑작스런 퇴직후 2년이 지난 전직 보안업체 임원이 계셨어요. 그분이 퇴직 직후 속초에 갔는데 바다가 너무 까맣고 ‘내가 뛰어내려도 아무 일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그런데 최근 다시 가본 속초 바다는 그저 넓고 푸르기만 하더래요. ‘바다는 그대로였는데 내 마음이 바뀌었구나’라고. 그 정도로 퇴직 당시 마음이 절망스러웠는데,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던 거죠.”자신의 마음 상태를 2년 뒤에야 깨닫는 일은 퇴직 경험자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일단은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아는 게 매우 중요하다. 명함이 없는 ‘나는 누구인가’―어떻게 해야 합니까?“균형이 필요하죠. 5가지 측면, △심리와 정서 △관계와 태도 △목표가치와 라이프스타일 △커리어 경쟁력 △뉴업의 준비도 이 5가지에 대한 균형이 어느 정도 만들어져야 퇴직 후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어요.”―이 사업이 비즈니스로서 성립이 되나요?“쉽지 않았어요. 처음 3년은 뭘 해야 할지 몰라 계속 콘텐츠만 만들었어요. 뉴스레터를 만들고 인사(HR) 담당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하고. 지난해 초부터 대기업 쪽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해서 지금은 여러 기업 프로젝트를 여러개 진행 중이예요. 경영진 150명 정도가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 진단을 받았습니다.”―결국 기업 차원의 퇴직자 교육같은 데서 주로 활용되겠네요. “아무래도 기업 단위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희 솔루션 중 일부(라이트 코스)는 누구나 홈페이지를 통해 바로 들어가 진단해볼 수 있어요.”여러 기업을 상대하면서 퇴직자에 대한 지원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낀다. “대개 기업 구성원 40% 이상이 4050세대인데, 교육이나 동기유발 등 지원은 MZ(2030세대) 사원들에게 쏠려 있어요. 시니어들에게는 조직적인 지원이 전무하죠. 최근 일부 앞서가는 기업들이 시니어를 대상으로 어떤 지원을 할지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한 정도예요.”―이해관계로 보자면 MZ는 오래 함께 가야할 세대이고 시니어는 곧 헤어질 사이니까요. “그걸 MZ들이 보고 있죠. 저는 모든 사람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게 회사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나이만 따져서 임금피크가 오면 자기 직원을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는 회사들도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데 그분들도 10년, 20년 전에는 지금의 MZ들처럼 기대를 모았던 세대거든요. 세대 간 균형을 이뤄야 회사 전체의 동기 유발과 조직 문화에도 도움이 됩니다.”―퇴직자들 스스로가 준비하고 공부할 필요는 없나요?“지금 당장 출퇴근길에 ‘이 회사를 떠나면, 혹은 명함이 없어지면 나를 어떻게 설명할까’를 한번 생각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퇴직 준비는 대단한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목표로 하는 일, 내 회사에서 나의 역량이 뭔지를 고민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대체불가능한 존재’로 되돌아가기그는 퇴직 후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살린 새로운 역할을 스스로 찾아낼 것을 강조한다. 이를 ‘뉴업’이란 자신이 만든 단어로 설명했다.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다듬어 퇴직 이후를 이끌어갈 역할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우리는 모두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태어났잖아요. 그런데 직장인은 대체 가능한 삶을 기꺼이 살아나가죠. 자기 삶을, 시간을 월급과 바꾸는 거예요. 월급과 단절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비해 다시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살아갈 길을 만드는 게 뉴업입니다.”―뉴업에 성공하는 요소는.“현직에서 본인의 역량이 뭔지, 나의 콘텐츠가 뭔지 끊임없이 알아야 한다는 게 포인트예요. 저희가 만나보니 뉴업에 성공한 분들은 본인이 뭘 잘하는지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들이더라고요. 그리고 미리미리 준비하신 분들. 회사 생활 외에 사회적 관계나 네트워킹이 있는 사람들이 퇴직후 뉴업에 성공합니다. 겉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본인의 역량은 계속 가져가는 분들이 많아요.”예컨대 글로벌 기술개발자로 중동과 일본, 유럽을 누볐던 H씨는 7~8년 전 퇴직해 지방에서 맥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언뜻 보면 완전히 다른 일인데, 얘기를 듣다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IT기술 전문가로서 굉장히 섬세한 의사결정을 하고 기술개발하던 역량이 지금 맥주를 만드는 데 너무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맥주도 온도나 환경이나 원재료가 완성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잖아요. 제작 과정에서 쓰는 역량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다고 하더군요.” 유통사 임원으로 퇴직한 O씨는 하루아침에 작가가 됐다. 현직에서 퇴직 준비할 시간은 전혀 없었지만 본인의 일을 정말 열심히 잘했다. 기획서도 잘 썼고 신문이든 책이든 열심히 읽으면서 본인의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는 그 역량이 작가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스스로 진단했다.뉴업, 본인이 뭘 잘하는지 알아야 성공책에서 그는 뉴업의 7가지 방향성으로 △로컬가치 개발자 △인사이트 기버 △창업가 △콘텐츠 크리에이터 △게임 체인저 △가치 투자자 △자아 탐험가를 들고 있다. 보험사 퇴직후 동네 베이커리 사장이 된 사례, 회사의 전략기획자에서 많은 기업들의 전략멘토로 업을 바꾼 사례, 외국계 제약회사 총괄매니저에서 귀농도예가가 된 사례, 대기업 인사 총괄 담당자에서 청소년 인성교육자가 된 사례 등이 소개된다.―뉴업 성공 사례들은 본인의 만족도를 최우선으로 봤네요.“우리 사회는 모든 걸 재무적인 관점에서, 돈벌어야 성공이라고 해왔죠. 그런데 돈이 안된다고 실패는 아니예요. 퇴직 이후에는 일거리 놀거리 생각할거리의 3가지가 균형이 잘 맞아야 해요.”이중 통신사를 퇴직한 뒤 ‘자아탐험가’가 됐다는 J씨의 의견이 눈길을 끈다. “한 회사 또는 한 업종에서 10년, 20년 일한 사람은 누구나 경쟁력이 있다. 시니어들을 만날 때 제일 안타까운 건 그걸 점차 잊는다는 것. 다 가지고 있고 다 해본 일인데 본인이 위축돼 그걸 모르고 지낸다. 사회나 주변 여러 문화가 그렇게 만든다. 퇴직 후 두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첫째 ‘내가 뭘 잘하지?’, 둘째 ‘내가 하는 일로 후배들이나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까?’ 여기서 시작하면 된다.”퇴직이 기대되는 세상 만들기―앞으로 계획은.”퇴직이 기대되는 삶에 조금이나마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퇴직이 기대되는 이벤트가 되려면 많은 부분이 변해야 할 것같아요.” 회원 대부분이 전직 경영진이다 보니 이들을 청년들과 연결해주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7학기째 여러 대학과 연계해 대학생 대상 커리어 상담이나 모의 면접, 특강 등에 나서도록 주선하고 회원들이 받은 강의료를 모아 보호종료 아동들을 위한 기부활동도 벌인다. ‘먼저 떠나는 것이 나쁜 삶이 아니며, 나중에 떠나는 것이 좋은 삶이 아니다.’ 인터뷰 말미에, 성대표는 지난해 가을 78세에 타계한 선친이 남긴 말을 언급했다.“아버지가 담담하게 남긴 이 말이 퇴직을 했거나 준비하는 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회사에서도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조금 일찍 떠난다 해도 결코 나쁜 건 아니지 않나.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 거니까요.”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재미 있습니다. 이 큰 병원이 내가 일해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보람도 있고요.”인생 별 건가. 아침마다 갈 곳이 있고 그곳에서 내 역할이 있다는 믿음. 책임이 있지만 그렇다고 숨막힐 정도는 아닌 무게감. 적당히 즐길 거리에 소소하게 만나 작은 일상을 함께 할 이웃과 친구들. 요즈음 나상욱 씨(61)에게 삶은 이러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 35년간 일한 직장을 떠난 뒤 1년간 ‘리셋’을 거쳐 만들어낸 일상이다. “난 기계감시실 보일러 담당”평일 오전 8시 전에 서울 은평구의 한 종합병원으로 출근한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지하 7층 기계실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장비들이 밤새 탈없이 일했는지 점검한다. 냉방기와 보일러같은 거대 장비가 즐비한 이곳은 냉난방과 냉온수가 병원 곳곳에 핏줄처럼 뻗어나가는 심장같은 곳이다. 근무시간 내내 계기압과 가동실적을 점검하고 직접 정비를 하기도 한다. 심각한 고장이라면 기기 공급업체에 연락해 수리를 의뢰한다.동료는 16명. 그를 포함한 10명이 낮시간 기계설비의 유지관리를 맡는다. 6명은 주야간 3교대로 관제실 제어와 모니터링을 담당한다.오후 5시 퇴근 뒤엔 다른 일상이 기다린다. 월수금은 음악연습실에서 색소폰을 불고, 화목은 농장에 가서 작물들을 살핀다. 주말이면 격주 토요일마다 3시간씩 있는 오케스트라 연습을 제외하면 농장에서 지내며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인다.2022년 9월 시작된 그의 루틴이다. 2021년 9월 삼성물산을 희망퇴직한 뒤 새 루틴을 완성하기까지 딱 1년 걸렸다.―지역 내 생활권이 잘 만들어져 있네요.“집을 기준으로 병원까지 1.2km, 음악연습실은 병원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주말농장은 집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어요. 농장에 하우스를 두 동 지었는데 한 동은 과일 재배하고 한 동은 제 놀이공간이예요. 냉장고니 테이블, 대형선풍기 등이 갖춰져 있지요. 고향 친구, 군대친구, 그 부인들까지 해서 6명이 자주 모입니다.”8, 9년 전 퇴직을 염두에 두고 신혼 초에 살던 은평구로 이사했다. 퇴직 직전 주말농장치고는 넓은 250평을 매입해 과일 나무를 심었다. 그로서는 퇴직후를 차곡차곡 준비한 셈이다.건설현장 재무담당으로 세계 누벼1986년 삼성종합건설(1995년 삼성물산 건설부문으로 흡수합병)에 입사했다. 35년간 재무 관리와 금융 업무 등 경영 지원에 종사했다.그의 역량은 삼성이 펼친 해외 초대형 건설사업에서 빛났다. 30대였던 1994년부터 2년 반은 러시아에서, 40대로 넘어가던 2001년부터 5년간은 카타르에서, 50대로 넘어가는 2010년부터 7년간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건설현장 살림살이를 도맡았다. 러시아에선 군부대, 카타르에서는대형 플랜트, 아랍에미리트에서는 바라카 원자력발전소를 지었다.“제 역할은 현지에서 공사 인프라를 구축하고 운영하면서 금융관리를 하는 것, 쉽게 말해 재무적 측면 수발이죠. 현장 사무소 만들고 공사 인력과 기자재, 장비를 준비하면서 숙소와 식사 공사 관련 자금을 관리하는 식이죠.”도합 15년 쯤 해외 근무를 했는데 대부분 ‘기러기’ 생활이었다. 딱 한번 카타르 부임할 때 온가족이 함께 갔는데 당시 중1, 초4 아들들이 너무 심심해했다.“몇 달만에 다 귀국해 버렸죠. 한국에서 부친 이삿짐이 카타르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후로는 아이들 학교 문제도 있고 해서 저 혼자 근무했습니다.”―가족과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낸 것 아닌가요?“건설회사니까요. 일하는 거잖아요. 지금도 건설사 직원들은 그렇게들 지냅니다. 가족도 중간에 놀러 오기도 하고, 별로 불만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었고요.”인생 후반전, 적당히 일하고 쉬는 균형점은?58세의 희망퇴직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7년간의 UAE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2년간 강원도 국책발전소 건설사업 경영지원총괄(CFO)로 파견됐던 그에게 회사는 다시 인도네시아 주재원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저도 가족도 나이가 있어서 또 해외에 나간다는 게 좀 싫더군요. 제게 주어진 선택지는 인도네시아 가서 60세까지 근무하거나 희망퇴직 하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회사는 희망퇴직을 택한 그에게 1년 넘는 휴직기간을 줬다. 이 기간 여러 실험을 해볼 수 있었다. 유행따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코로나 확산으로 여의치 않자 지리산 둘레길 270km를 3주에 걸쳐 걸었다. 은퇴후 소일거리로 주말농장을 생각하고 집에서 3~4km 떨어진 경기도 양주 화훼단지에 땅을 산 것도 이때다. “순례길 걷는 거야 그때뿐이고 이후 삶에 대한 대안이 될 수는 없죠. 그보다는 생활의 틀이 필요했어요.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반드시 집에서 나와야겠다고 작정했는데, 처음엔 매일 오전에 헬스장 가고 오후엔 악기 연습실 가서 시간 보내곤 했지요.”열심히 일해온 세대라 그런 걸까. 1차 베이비붐 세대의 막차를 탄 나 씨는 퇴직을 생각한 순간, 아무런 계획 없이 하얗게 남겨진 하루 일과가 낯설었다. 휴식을 꿈꿔왔는데 이 불편하고도 불안한 느낌은 뭐지…. 뭐라도 해야 했다.그 무렵 고용노동부 산하 기능전문대학 폴리텍의 ‘신중년 특화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단순히 용접을 배우려 했다. 주말농장에 움막을 하나 짓고 싶은데 직접 용접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자격증 5개 취득, 처음엔 모두 떨어져 오기로 공부그는 현재 가스기능사, 에너지관리기능사, 에너지관리산업기사, 공조냉동기계산업기사, 에너지관리기능장 등 자격증 5개를 갖고 있다. 폴리텍에서 공부한 6개월(2022년 3월~8월)이 그의 변신을 도왔다.먼저 3개의 기능사 자격증에 도전했지만 에너지관리기능사 하나만 붙었다.“창피했고 오기가 생기더군요. 아침 8시 전에 학교에 가서 밤 11시에 경비아저씨가 불 끄라고 찾아올 때까지 공부했어요. 그렇게 해서 공조냉동기계 기능사는 떨어졌는데 더 어려운 공조냉동기계 산업기사는 붙었습니다. 나머지 자격증은 병원에 취업한 뒤에 땄지요.”―용접은 잘 배우셨나요.“제일 재미 있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들여다보면 희열이 느껴졌어요. 가스, 전기, 아르곤용접을 다 익혔고 지도교수님과 ‘용접 아트’에 도전해볼까 얘기도 했어요.”―경험자들은 입을 모아 폴리텍의 실습지원 시스템을 칭찬하던데요.“특히 지도교수가 열정적으로 대해 주셨어요. 제 길이 막힐 때마다 아이디어를 내주고 길을 열어주신 것도 교수님이죠.”얘기를 해나갈수록 그가 다채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또하나의 반전. 고교생 때 시작했던 클라리넷 취미가 몇 년 전부터 색소폰으로 발전했다.“색소폰은 두바이에 있던 시절 독학으로 익혔어요. 나중에 한국 들어와서 교습도 받고 했지요. 퇴직을 앞두고 은평구의 ‘서울 색소폰 오케스트라’에 가입했어요. 50여 명 규모의 아마추어 관현악단인데 격주로 토요일마다 모여 3시간씩 연습을 합니다.”“퇴직후에도 정형화된 일과 필요”―작업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십니까.“희망퇴직을 결정할 때 앞으로 일은 안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보니 정형화된 일과가 있어야 되겠더군요. ‘내가 어떻게 저런 일을 하느냐’는 생각만 버리면 일거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처음부터 이 병원에서 일할 생각이었나요?“전혀요. 하다 보니 알게 되는 과정의 연속이었지요. 일단 해보지 않고서는 그 다음을 알 수 없습니다. 제 경우 일단 자격증을 갖게 되니 여기저기 지원할 곳들이 보이더군요. 사실 여기 다니면서 코레일이나 대형카드사 빌딩에도 합격했는데 출퇴근에 시간쓰기 싫어서 그냥 여기 있기로 한 거죠. 급여 차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요.”―혹시 급여를 여쭤봐도 됩니까.“250만 원 정도 됩니다. 친구들이 부러워해요. 은퇴하고 이렇게 재취업하는 게 흔하진 않잖아요. 친구들은 대부분 작년, 올해 은퇴했는데 뚜렷하게 하는 일이 없어요.”―친구분들에게 이런 길을 권하지는 않았나요?“이 과정이 제가 쉬운 것처럼 얘기를 하지만 처음 접하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특히 문과출신에게는 용어부터 생소해요.”그의 말대로 에너지관리기사 시험과목을 검색해보니 연소공학, 열역학 계측방법, 열설비재료 및 관계법규 등 전문과목들이 줄을 잇는다. 그로서는 일하는 이유가 경제적인 데 있지도 않은 듯했다.“직장 동료들 덕분에 제가 이렇게 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제가 연장자니까 술을 많이 사는 편이예요. 월급보다 술값이 더 나오는 것 같아요, 하하.”―생활비에 보태지 않아도 되나요?“당분간은 집사람이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제 퇴직을 앞두고 아내가 카페를 열 준비를 하는 걸 마지막 순간에 제가 뜯어말렸어요. 그렇게 굳은 저금을 빼서 쓰는 건데, 국민연금 수령할 때까지는 이렇게 쓰기로 했습니다. 집사람은 내년 초부터, 저는 내후년 8월부터 연금이 나옵니다. 퇴직연금도 있고요.”퇴직자, 자기 돈 넣는 일은 뜯어말리고파가족이건 친구건 인생 2막의 일거리를 찾을 때 그가 강조하는 원칙이 있다. 자영업이나 사업같이 자기 돈 태우는 일은 절대 피하라는 것.“경찰 총경으로 퇴직한 제 친구는소방안전관리자, 경비지도사 자격이 있는데 쓸모가 많지 않아요. 경비지도사는 경비 용역업 같은 걸 할 수도 있는데 자기 자본이 들어가야 하니까…. 세상이 워낙 정글이라 퇴직자가 자기 돈 넣고 하는 사업은 절대 하면 안됩니다.”―경찰 출신이라면 덜 걱정해도 되는 것 아닐까요.“하이고….더 잘 당해요. 세상 물정 모르고 어깨에 힘만 들어가 있고. 그 친구도 저 따라 근처에 땅사서 주말농장 하고 있는데 낮에 할 게 없어서 스트레스 받더군요. 퇴직 뒤 뭘 할지 미리 준비하는 게 중요한 것같습니다. 이 친구는 ‘내가 경찰 고위직인데 나가서 자리가 없겠느냐’는 막연한 생각만 했을 뿐, 퇴임 당일까지 현직에서 일을 하니 퇴임이란 실감도 못 하고 준비 자체가 안 됐어요. 막상 나온 뒤 벽에 부닥치는 거죠. 직장 다니면서 뭔가를 준비하는 게 잘 안 되더군요.”얘길 듣다보니 그에겐 더 큰 그림이 있었다.“이 일은 65세 정도까지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2026년부터 기계설비 유자격자 수요가 많아질 거예요. 기계설비법이 개정돼 일정 면적 이상 공동주택이나 건물은 의무적으로 기계설비 유지 관리자를 선임해야 하거든요. 저도 여기서 4~5년 경력을 쌓으면 관리자 등급이 올라가는데, 그럼 지방에서 공장 관리하면서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그럼 오케스트라 활동은요.“그게 좀 문제인데, 그 지역에도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요즘 소그룹으로 봉사활동하면서 버스킹하는 분들도 보이던데 길이 있겠지요. 정 안 되면 혼자서 버스킹할 수도 있어요. 제가 장비들을 완벽하게 갖고 있거든요.”“난 지금도 삼성 사람”―오랜 세월 한 직장에서 근무하고 퇴직하신 분들에게 회한이 많던데 어떠신지.“전 지금도 삼성 사람입니다. 삼성이 지은 아파트에 살고 휴대전화는 갤럭시, 옷도 빈폴만 입고… 돌이켜보면 쉽지 않은 일을 걸어왔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곳에 있는 동안 제 존재의 목적은 거기서 살아남는 거였어요. 돈을 만지는 자리잖아요. 삼성의 업무감사는 매우 엄격하고 정례적이어서 일하면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지요. 간혹 터져나오는 금융권의 각종 횡령 배임 등 보도를 보면 ‘왜 저 정도밖에 관리가 안 됐을까’ 이해가 안 될 정도예요. 이제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보니 무사히 잘 마쳤다는 생각도 들고 보람도 느낍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65세의 절벽을 넘는다.’ 일본 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 커버스토리의 제목이 여러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부제로 붙은 ‘시니어 인재, 총(總)전력화의 조건’도 마찬가지다. 65세 이상 시니어에게 ‘인재’라는 표현을 붙인 게 조금 낯설기도 했다. 기업들의 99.9%가 65세까지, 24.7%가 70세까지 고용 보장(2023년 후생노동성 보고서)을 하는 나라에서, 일터의 고민이 더 이상 숫자가 아니라 고령 직원들의 생산성과 일의 보람 등 질적인 문제로 바뀌고 있음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2021년 정년제도를 아예 없앤 세계적인 지퍼제조업체 YKK그룹 인사 담당 임원의 얘기는 인상적이었다. “정년은 회사가 연령을 기준으로 사원을 퇴직시키는 이상한 제도”이며 “세계에서 법적 정년제가 있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 등 일부 국가뿐”이라는 말이었다. 직원 4만 명이 넘는 대기업 YKK의 정년 폐지는 이례적인 일로 주목받았다. 과감한 조치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2000년부터 보상 체계를 성과주의로 바꾼 인사제도 개편이 있었다. 역할을 명확하게 정한 직무에 보수를 연결시키고, 그 일에 대해 30대건 60대건 차이를 두지 않았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었다. 평생고용과 연공급제로 대표됐던 일본이 고령 노동자의 생산성 극대화를 위해 직무급제로 선회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한국에선 ‘노인네’, 일본에선 ‘인재’? 일본에서 연공급제를 설명할 때 노동경제학자 에드워드 라지어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의 계약이론이 자주 인용된다. 근로자는 고용 초기에 생산력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기업에 ‘예탁금’을 쌓고, 고용 후반기에 그 돈을 끌어내 높은 임금을 받으며, 정년은 그가 기업에 공헌한 총량과 임금 총액이 균형을 이루는 시기라는 것. 여기에는 회사가 정년까지 근로자를 자를 수 없다는 암묵적 합의가 깔려 있다. 반대로 연공급제가 약화되면 고용 유연성이 커져야 한다. 일정 나이가 되면 일을 멈추고 회사를 떠나는 정년제도는 이미 세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서구 대부분의 나라는 나이에 의한 차별이라며 정년을 폐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38개국 가운데 법정 정년제를 운영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해외에서 ‘정년 연장에 반대한다’며 시위하는 장면이다. 이는 연금 수급 연령이 늦춰지는 것에 대한 항의다. 그들에게 ‘정년(은퇴)’이란 공적연금이 지급되기 시작하는 때를 뜻하기 때문이다. 근로자들은 대체로 이즈음에 일을 그만두지만 본인이 원하면 계속 일할 수도 있다.서구에서 ‘정년’은 연금 받기 시작하는 시기 한국보다 고령화가 15∼20년을 앞서가는 일본에서 시니어들은 산업 현장의 주요 전력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법정정년은 60세지만, 고령자고용안정법에 따라 2013년부터 근로자가 희망하면 65세까지 고용 확보가 의무화됐다. 2021년에는 추가 개정을 통해 70세까지 고용 확보를 ‘노력 의무’로 했다. 그리고 이는 연금 수급연령을 늦추는 연금개혁과 연동해 진행된다. 한국은 묘하게 법정정년과 공적연금 수급 시기가 현재는 3년, 2034년 이후는 5년이 차이 나도록 설정돼 있다. 법으로 보장된 정년을 채워 퇴직하더라도 국민연금을 받기까지 수년간 소득 공백을 겪어야만 한다. 게다가 이 수준까지 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최근 한국은행 보고서는 올해부터 시작되는 2차 베이비부머(1964∼1974년생) 954만 명의 은퇴로 향후 10년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0.38%포인트 낮아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젊은이는 부족하고, 고령자들은 넘치는 세상이 왔다. 한국에도 시니어를 ‘인재’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 올까.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중장년의 퇴직과 재취업에 대해 궁리하던 차에 언론계 선배인 신현만 회장(62)이 최근 낸 책 ‘레벨업 강한 커리어(세이코리아)’가 손에 들어왔다. 그가 운영하는 커리어케어는 국내 최대 규모의 헤드헌팅 회사. 50만 명분 인물 데이터를 운영하며 국내외 5000여 기업에 경영자와 핵심인재를 발굴해 추천해왔다. 이직과 전직, 재취업 시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또 ‘보통’ 중장년들의 원활한 재취업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2일 서울 강남구의 커리어케어 사무실을 찾았다.“헤드헌팅, 인재에 대한 안목을 제공하는 일”1990년대 후반 어느 날, 헤드헌팅 회사를 취재한 신현만 기자는 퇴근 후 시험삼아 자신의 정보를 그 회사 홈페이지에 등록했다. 다음날 전화가 왔다. “모 통신사 비서실장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이유를 물으니 ‘당신 이력을 보니 경제부 기자를 했고 비서실과 기획실에도 있었고 해외 연수도 다녀왔으니 잘 맞을 것 같다’는 얘기였어요. 지금 연봉이 얼마냐고 묻길래 창피해서 ‘한 5000쯤 된다’고 둘러댔더니 그것밖에 안되느냐고 해요. 그 자리는 얼마쯤 받느냐고 물으니 그 시절에 1억 몇천을 말하더군요. 언론사가 참 적게 받는다는 걸 실감했지요. 하하.”이때의 유쾌한 기억이 훗날 그가 헤드헌팅 사업에 뿌리를 내린 계기가 됐다. 1988년 창간한 한겨레신문 수습 1기. 십수년간 기자 생활을 한 뒤 신문사 자회사의 신사업 중 하나로 헤드헌팅을 도입했고 2년만에 독립해 커리어케어를 창업했다. 현재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대규모로 성장했다. 업계에서 연간매출이 가장 크고(200억 원대) 정규직 근로자(150~200명)가 가장 많다. 다른 헤드헌팅 회사들이 헤드헌터들을 특수고용직(사업주와 개인간 도급계약)으로 운영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태세를 보인다.그로서는 이 일이 인재에 대한 안목을 제공하는 사업이란 점이 가장 끌렸다. “헤드헌터는 기업과 사업, 사람을 알고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예요. ‘저 사람이 저런 재능이 있고 저런 역량이 되니 이 회사에 이렇게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를 판단하는 거죠. 그러니까 헤드헌터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야 됩니다.”국내 최대 규모 기업형 헤드헌팅회사―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있군요. “물론입니다. 기업에 좋은 사람을 보내면 죽어가던 기업이 살아나기도 하죠. 2012년 일본항공(JAL)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파산 직전에 몰린 JAL에 ‘경영의 신’이라 불리던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이 구원투수로 들어가 8개월 만에 소생시켰죠. 또 역량은 있는데 경력이 단절된 인재를 헤드헌터들이 ‘이 사람 믿고 써보시라’고 추천해 취업을 성사시키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저희 일에는 공익성이 있어요.”소수정예 10여 명이 일하는 평판조회 전문부서 ‘씨렌즈’에서도 재미있는 일이 많다. 요즘 웬만한 고위직에 대해서는 무조건 평판조회를 하는 추세다.“평판 조회는 데이터화할 수 없는 것들을 조회합니다. 리더십 스타일, 윤리성, 커뮤니케이션 스타일 등이 대표적이죠. 이게 본인에 대한 인터뷰보다 정확할 때가 많아요. 예컨대 회계부정을 저지른 사람을 회사가 조용히 덮고 퇴사시켜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평판조회를 해야 그런 얘기가 나오죠.”―평판조회를 받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나요.“경험이 많은 분일수록 평판조회 요청에 잘 응해줍니다. 예를 들면 법무법인 핵심보직에 중수부장 출신을 뽑는 경우, 평판조회는 전직 검찰총장이나 지검장에게 물어봐야 하죠. 이런 정도 위상에 있는 분들에게 ‘저희가 지금 평판 조회가 필요합니다’라고 말을 걸면 다 응해줍니다. 때에 따라 노코멘트도 하나의 의사표시고요. 아하, 이 사람에 대해 부정적이구나 알 수 있죠.”‘사람’의 중요성 아는 기업이 헤드헌팅사 애용―주로 어떤 회사들이 의뢰합니까?“저희 거래 기업이 5000개사 정도 되는데 대부분 대기업 공기업 등 탄탄한 회사예요. 헤드헌팅 수수료가 생각보다 비싸거든요(고용이 성사되면 수수료는 고용주 측이 전액 부담한다). 채용한 인재의 연봉이 3억이면 수수료가 1억 가까이 되니까 웬만한 기업은 엄두를 못냅니다. 기꺼이 부담하는 곳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잘 아는 기업들이다. 다만 이런 작업들은 비밀보장 각서를 쓴 뒤 이뤄진다. 아쉽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공개할 수 없는 이유다. “본인은 잘 모를 수 있지만 주요기업의 경우 웬만한 사람은 다 평판조회를 합니다. 해외에 있는 사람들도 영어로 조회하죠. 예를 들면 빌 게이츠 밑에서 일했던 사람을 한국의 IT 기업에 영입한다면 빌 게이츠에게 평판조회를 해야 되는데, 그들은 그걸 해줘요. 자기가 데리고 있던 사람이니까요.”―정말 빌 게이츠가 해줬나요?“빌 게이츠급의 인물, 예를 들면 아마존의 누구한테 평판조회를 했지요. 저희가 영어로 한밤중에 전화해서 합니다. 진짜 시시콜콜한 것들이 다 나오고 조회내용이 채용여부에 상당히 영향을 미칩니다.”본인도 모르는 평판조회 활발―헤드헌팅을 활용하는회사들이 늘어나는 이유는?“‘사람’이 워낙 중요해져서요. 옛날에는 사람 하나가 그냥 큰 조직의 부품 같았잖아요. 요즘은 주요 대표급이나 핵심인물이 조직의 명운을 가르죠. 사람하나 잘못 뽑으면 회사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으니 자꾸 검증을 해야죠.” ―엄청난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고 있다는데.“50만 명은 넘은 것 같아요. DB에는 기본적으로 본인이 등록하게 돼 있습니다. 저희 회사에 지원서를 보내는 사람들이 이력서니 경력기술서를 등록하는 거죠. 이후 기록관리를 합니다. 저희 회사 헤드헌터만 100명이 넘는데 이들이 계속 사람 만나서 인터뷰한 기록들도 남기고요. 자료들은 철저하게 보안을 지키며 관리합니다.” 업력이 쌓이니 족보가 절로 생겨난다. 00은행 회장 후보라면 누구누구, 00사 사장후보라면 누구누구가 줄줄 나온다. 후보자가 굉장히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한정돼 있다고. 퇴직자 ‘계속고용’이 바람직하지만, 고용 유연성 전제돼야―핵심인재까지는 아니어도 퇴직 전후 시니어 직장인들이 일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데도 사회에서 사장될 위기에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습니다. “최근 한국은행 보고서가 나왔더군요. 올해부터 2차 베이비부머 950여 만 명이 퇴직한다고. 그 사람들을 내버려두면 향후 10년간 경제성장률이 크게 떨어진다고요. 저는 퇴직자들이 일하던 곳에서 계속 일하는 ‘계속 고용’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퇴직자 입장에서도 안정적이고 회사 입장에서도 그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죠. 다만 계속고용이 널리 도입되려면 반드시 고용 유연성이 전제돼야 합니다.”계속고용의 방식은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재고용으로 나뉜다. 우리 정부도 정년을 넘긴 근로자의 계속고용을 위해 ‘고령자 계속고용장려금’을 지원하는 등 독려하고 있다. 다만 정부가 지원하는 계속고용제도는 일단 도입하면 모든 근로자에게 의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가령 전체 근로자 중 일부만 뽑아 재고용하는 길은 막혀 있다.“흔히 ‘나이 들어 취업하려면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하는데, 현실에선 그게 잘 안됩니다. 기여도는 낮아지는데 보상의 눈높이는 높아요. 기업 입장에서는 계속 고용하고 싶어도 손해를 감수할 수는 없는 거죠. 고용 유연성을 갖춰야 퇴직자들의 계속고용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요.”―기여도의 기준은 어떻게 찾을까요.“저희 회사에서 사람을 뽑을 때 채용팀장에게 두 가지 기준을 줍니다. 하나는 이 사람이 와서 조직에 얼마나 기여할 거냐. 그 기여도보다 급여를 많이 주면 회사는 적자죠. 둘째 이 사람에 대한 사회적 보상 기준인데, 다른 데 가면 얼마를 받을 수 있냐. 그보다 낮게 주면 이 사람이 여기 안 있겠죠. 그 두 가지 기준에 맞춰서 보상을 제시하라고 합니다. 문제는 시니어들이 과거의 기여분도 보상에 넣길 바라는 거예요. ‘내가 이 회사에 30년 기여했는데’하면서.”―과거의 기여 부분은 정년퇴직으로 일단 해소가 됐다고 보는 게 맞죠.“만일 다른 기업에서 그 분을 새로 뽑는다면 현재 이 사람의 쓸모로만 판단하잖아요. 퇴직자들이 일하던 곳에서 계속고용이 되지 않고 전혀 다른 곳에 하향 취업하는 이유가 이런 데에도 있겠죠.”“높은 자리보다 오래 다니는 게 중요하다”―일본의 경우 대부분 재고용 방식인데, 보상이나 근무기준이 판이하게 달라지던데요. “우리는 노조나 본인이 급여가 깎이는 걸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현대차 등 몇몇 대형노조들이 급여 삭감 없는 정년연장을 요구하고 있잖아요.”-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씀이죠. “저는 퇴직한 뒤에도 어떤 일이건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퇴직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대목은 수입이 아니라 자기 존재감이 없어져서예요. 직장생활을 했거나 사회적 관계에서 자기 의미를 찾았던 사람들은 내가 아무에게도 의미가 없는 존재가 돼 버리는 걸 못 견뎌하죠. 나의 존재감을 어떻게 찾아낼까를 고민하는데, 저는 그게 일이라고 봅니다.”이런 그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퇴직 관련 화제가 나오면 ‘오래 다니는 걸 최우선으로 하라’고 조언한다고. “높은 자리보다 오래 다니는 게 중요하다. ‘나이 들었다고 급여를 절반으로 깎는다’고 하소연해도 그래도 다니라고 얘기해줍니다. 나이 들어 가장 중요한 게 일하는 거다. 오래 다니는 길을 선택하라고요. 눈높이만 낮추면 회사도 본인도 좋은 거죠.”이직하려면 몸값 높을 때두번째 과제로 그는 시니어들 스스로가 커리어 관리와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점을 들었다. “무엇보다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신문사 시절 동료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개개인은 굉장히 유능하고 똑똑하고 감각도 있지만 전문성이 없어요. 갑자기 특파원 갔다가 시경캡 갔다가, 이 일 저 일 모두 잘하는 게 자랑이죠. 이러면 회사로서는 유능한 기자일 수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주특기를 알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뽑을 이유가 없죠. 자기 분야를 꾸준히 갖고 가야 합니다. 커리어 관리는 젊었을 때는 물론, 50대 60대에도 해야 합니다.” ―퇴직은 정해진 미래인데, 전혀 준비하지 않다가 갑자기 충격받는 분들이 많죠.“저희가 정년퇴직 전이라도 ‘옮기시라’고 제안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면 이 분은 ‘아니 거기보다 여기가 훨씬 좋은데…연봉도 많고 대우도 좋고, 옮길 이유가 없다’고 거절해요. ‘이걸 다 누리고 가겠다’는 거죠. 그 분이 임원 끝나고 나면 쫓아와요. ‘나 끝났어. 나 좀 어떻게 해줘….’ 그런데 거기서 끝났으면 다른 데서도 안 뽑거든요. 여기서 다 누리고 나서 얼마든지 다른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예요.”인생 2막 준비 중정작 이런 그는 자신의 퇴장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이제 나이가 있잖아요. 남들은 오너니까 계속 일하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CEO가 늙으면 조직이 다 늙어요. 그래서 떠나야겠다, 그럼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지난해 8월 강원도 홍천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집 주변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었다. 주말마다 이곳에서 지내며 귀촌의 가능성을 가늠하고 있다. “집 얻을 때 부동산 업자가 땅이 좀 넓은 걸 사라고 권하더군요. 전원주택이라 해도 일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나무를 심든 땅을 파든 목공을 하든, 일거리가 없으면 남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더군요. 저도 과연 내려가서 살 수 있을까, 며칠이나 견딜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자꾸 가봅니다. 가면 종일 나무 만지고 땅도 파고 이웃들과 얘기도 하고 지내죠. 나이 들어서는 머리쓰는 일보다는 육체노동에 가까운 일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이번에 마을에서 카페를 여는데, 우리가 100만 원 정도씩 투자해서 마을도 돕고 카페 주주로 활동해보자는 얘기가….”지난달 27일 서울 마포구에 자리한 서울시 50플러스 재단의 한 강의실. 50~60대 남녀 20여 명 앞에서 김만희(58) 패스파인더 대표의 설명이 이어졌다. 측면 벽에는 ‘남원 생활인구 활성화 교류 사업’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1주일 뒤로 예정된 2박 3일 전북 남원 투어를 앞두고 프로그램과 일정 등을 공유하는 자리다. ● 여행⇒살아보기⇒지역 응원하는‘ 팬슈머’“20명이 1차로 6월 초에 2박 3일, 남원을 알고 공감하기 위한 여행을 갑니다. 관광뿐 아니라 치즈 공장, 누룽지 공장 등 현지 기업을 둘러보며 탐색하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그리고는 7월 초에 이 멤버 그대로 다시 가서 2박3일간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참여자들은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남원을 돕게 됩니다.”김만희 대표가 운영하는 소셜 벤처 ‘패스파인더’는 지역여행과 살아보기를 통해 삶과 일의 전환 계기를 얻는다. 궁극적으로는 지역 팬슈머(Fans+Consumer)로서 지역을 즐기고 소비하고 응원하며 외지의 주민 역할을 실천한다.이렇게 2019년부터 전북 남원, 강원 강릉, 강원 인제, 경북 고령의 4개 지역에서 신중년과 지역을 생활(관계)인구로 이어주는 프로그램을 펼쳐왔다.● 각자 능력되는 만큼 지역 홍보“한번에 많아도 20명, 참가자를 모집해서 지역과 서로를 알아가게 교육하고, 실제로 여행을 가본 뒤에 지역 홍보를 부탁드리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SNS로 지역을 알리고. 어떤 분들은 경영 컨설팅이나 코칭을 하기도 합니다.”그래서 참가자 모집에 조금 까다롭고 조건이 많이 붙는다.“서류 심사와 대면 인터뷰를 합니다. 혹시 단순 여행이나 살아보기 프로그램으로 알고 참석해 미스매치가 발생하면 서로 힘드니까요. 미리 ‘저희 이런 건데 알고 지원하셨어요, 이런 숙제가 있는데 하실 수 있으세요’를 여쭤봅니다.”지역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때마다 참여자들이 직접 쓴 글을 묶은 ‘지역살이 가이드북’이 1권씩 나왔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패스파인더는 2022년 한국관광공사 최우수 관광벤처로 선정됐고 2023년에는 행정안전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관계인구, 생활인구로 지역공동화에 대응‘지방은 사람이 없어져 소멸을 우려할 지경인데, 서울에는 할 일이 없어 고민인 중장년들이 넘쳐난다. 서로 연결되면 참 좋을 텐데, 왜 안되는 걸까.’패스파인더 사업은 이런 소박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2019년 소셜 벤처 형태로 설립한 뒤 고향 잃은 신중년과 소멸위기 지역을 관계인구로 이어준다는 미션을 내걸었다.복잡한 도시를 떠나고 싶을 때, 관광만으로는 부족하고 귀농귀촌은 부담스럽다. 그 중간 어디쯤에 ‘살아보기’를 해본 뒤 지역을 응원하는 팬슈머로서 지역과 유대를 이어간다는 개념을 넣었다. 마침 일본에서 ‘관계인구’ 개념이 조명을 받으며 아이디어에 힘을 보태줬다.관계인구는 그 지역 정주인구가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오가거나 지역과 관계를 맺고 지역활성화에 기여하는 인구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참고해 지난해부터 ‘생활인구’ 개념을 도입했는데, 월 1회 3시간 이상 그 지역에 체류하는 사람을 생활인구로 파악한다. 관광객은 물론, 군인이나 회사원 학생 등도 생활인구로 집계될 수 있다.예컨대 등록인구 2만 8000명인 충북 단양군의 생활인구는 관광으로 인한 체류인구 24만 1700여 명을 더하면 26만 9700명으로 불어난다. 등록인구 4만 2700명인 강원 철원군의 경우 군인 17만 6800명을 더하면 생활인구는 21만 9500명이 되는 식이다(2023. 6. 행안부). ● 전산학 전공한 IT전문가, 40대 후반에 인생 전환국내 최고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십수년 년 간 대기업(SK텔레콤)에서 근무하던 IT전문가에게 나이 마흔을 넘어서며 ‘현타’가 찾아왔다.“앞으로 어떻게 살지? 이 회사는 언제까지 다니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어요. 이전까지는 최대한 오래 회사 다니는 게 인생 목표였을 텐데, 그게 흔들린 거죠. 스콧 니어링의 책, 회사를 통해 알게 된 사회적경제에 대한 관심, 경계성 종양 수술 등이 이어지면서 보람된 인생 후반을 생각하게 됐지요.”이때 떠올린 것이 ‘중장년의 사회공헌을 도울 수 있는 비즈니스’다.“생계형 일자리를 넘어 사회공헌, 앙코르 커리어(인생후반 지속적 수입과 개인적 성취, 사회적 가치를 만족하는 일자리) 쪽을 생각했어요. 이게 사회적인 수요가 많다고 봤죠. 퇴직까지 기다릴것 없이 지금 하자.”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48세를 맞은 2014년 직장에 사표를 냈다. 즉시 카이스트의 ‘사회적 기업가 MBA’과정에 입학하고 이듬해 ‘앙코르브라보노’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 연장선에서 2016년 출범한 서울시 50플러스 재단에서 ‘일자리사업본부장’으로 2년간 근무하기도 했다.―서울시 재단을 2년만에 그만둔 이유는?“솔직히 일하기 너무 좋았어요. 동료들도 좋고. 그런데 이러다가 안주해버리겠구나 싶더군요. 사실 SK텔레콤 때도 비슷했죠. 주저앉을까봐 두려웠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삶인데…”● “귀농귀촌도 아니고 여행도 아니고”2019년 패스파인더는 한국관광공사가 지원하는 예비관광벤처로 선정돼 마케팅와 파일럿 테스트 비용을 지원받았다. 정작 그가 ‘벤처’ 간판을 노린 이유는 지역과 만날 때의 인증효과 때문이었다.“첫 1~2년 간은 설명하기 참 어려웠어요. 귀농 귀촌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행도 아니고….”―그래서 ‘살아보기’군요.“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귀농 귀촌은 대단히 무거운 주제입니다. 말을 꺼내는 순간 마음의 문을 닫게 되죠. ‘난 안돼, 가족도 반대하고…’라며. 반면 지역에서 며칠이건 몇달이건 살아보다가 좋으면 귀농 귀촌할 수도 있는 거죠.”―팬슈머가 귀농귀촌의 중간다리 역할인가요?“중간다리 역할도 있지만 팬슈머 자체만으로도 크게 의미가 있어요. 청년들이 군대 2~3년 다녀오듯, 중장년들이 농촌에 가서 얼마간 살다가 돌아가더라도 이 사이클이 계속 돌아가면 의미가 있죠. 그들의 인생 후반 활동 무대를 넓혀주고, 지역에도 활기를 줄 수 있어요.”―실제 패스파인더를 통해 살아보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듯한데요.“저희는 사전사후 교육 및 참여자 간 커뮤니티를 중요하게 여기고, 장기간 살아보기는 따로 지역 프로그램과 연계를 합니다. 또 어느 지역이건 제가 먼저 가서 두세 달 살아봅니다. 투어 참여자들이 갈 곳, 만날 사람들을 미리 만나고 준비를 하죠. 지역 분들도 저희가 왜 오는지, 와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아셔야 대처할 수 있어요.”―귀농 귀촌했다가 텃세 때문에 고통받은 분들 얘기가 많이 들리던데요.“생활인구·관계인구는 귀농 귀촌과는 ‘포지셔닝’부터 다릅니다. 귀농귀촌은 사실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내려가는 거잖아요. 집 팔고 재산 다 갖고 가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자칫 현지인들과 경쟁 포지션이 돼요. 그런데 생활인구 관계인구는 대부분 보완재로 들어갑니다. 내가 여기 와서 이분들 걸 빼앗기보다 이분들 것을 홍보하거나 팔거나 직접 소비해주기 위해 가는 거죠. 귀농귀촌하는 분들은 지역에 ‘내게 뭘 지원해줄 수 있나?’를 묻지만 생활인구는 ‘혹시 우리가 도와줄 게 있을까?’를 묻는 거죠.”● 지역을 응원하고 소비해주는 외지인2019년 패스파인더의 첫 방문지였던 남원에 다녀온 회원 중 6명은 현재도 ‘남원이음’이란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가장 최근 다녀온 경북 고령도 멤버들이 모여 지역을 도울 방안을 상의하고, 고령 전통시장에 점포를 얻어 지역과 교류를 계속할 계획이다.강원도 인제에서는 팬슈머들이 아예 냇강두레농업 협동조합의 ‘외지인 조합원’이 됐다.“지난해부터 지금까지 18명이 각자 20만 원 씩 내고 조합에 가입했어요. 지난해에는 블루베리 수확체험을 했고 올해는 묘목 220주를 심어 생산에 본격 참여하게 됩니다. 땅은 현지 조합원에게 빌리고 묘목은 우리 돈으로 샀어요. 참여자들은 그냥 ‘블루베리 심는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이게 일종의 가치 투자라고 봅니다. ‘지역 상생’이라고 하는 가치에 작은 돈이지만 투자하는 거죠. 그런 걸 많이 늘리는 게 제 사명이예요.”―패스파인더는 비즈니스로서도 괜찮습니까.“초기에는 제 돈 많이 썼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행정도 생활인구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방소멸 대응기금 같은 것도 생겼지요. 특히 지자체에 인구 부서가 생긴 건 큰 변화입니다.”참여자들에게는 교육비와 현지 여행비 10여 만 원 정도를 받을 뿐, 여행프로그램으로 돈을 벌지는 않는다. 대신 지자체나 지역 기업, 예컨대 강원도 인제의 경우 수자원공사가 ESG 기금에서 일부 비용을 지원해준다고.● 인생 후반전, 새로운 가능성“저는 중장년들이 이런 일을 좀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재미있고 사회적인 수요도 있고 당장은 돈이 안 되지만 하다 보면 수익이 날 수도 있고, 내가 가진 재능을 활용할 수도 있죠. 중장년 일자리는 청년 일자리랑은 좀 달라야죠. 누구와 함께 하느냐도 중요합니다. 뜻 맞는 사람들이 ‘으쌰으쌰’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죠. 게다가 지역에 또 좋은 분들이 많거든요. 아까 언급한 냇강두레농업 협동조합 대표님도 너무 좋아요. 수십 년 동안 지역에 대한 열정만으로 댓가 없이 노력해왔죠. 그를 만난 모든 분은 누구나 어떻게든지 돕고 싶어하더라구요. 그런 분이 곳곳에 있지만 다들 고립돼 있어요. 전 그 분들을 연결해드리고 싶습니다. 생활인구, 관계인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잘 나가던 대기업을 일찍 그만둔 것에 대해 후회는 없나요“전혀 없습니다. 간혹 예전 직장 동료들도 투어에 참여하는데요, 저를 보면 얼굴이 너무 좋다고 해요. 제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그렇습니다.”그는 자신의 일이 “좋은 일인데 심지어 유망하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더 많은 지역에 더 많은 팬슈머들을 만드는 건가요.“지역이나 참여자가 늘어나면 당연히 좋겠지만, 제가 그걸 다 감당할 수는 없겠죠. 저는 중장년 생활인구의 역할 모델을 만들면 족합니다.”이런 그는 어딘가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고인이 된 영국 가수 데이빗 보위의 말을 빼놓지 않고 소개한다. 인생 후반전에 임하는 동년배들이 꿈을 꾸고 변신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대변한 것 같아서다.‘나이듦이란 여러분이 항상 했으면 했지만 하지 못한 그것을 하고, 항상 되었으면 했지만 되지 못한 바로 그 사람이 되는 놀라운 변화과정이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사)한일미래포럼은 22일 동국대학교에서 ‘2024년 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3S(Safety, Satisfaction, Sustainability) 전략 모색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는 4개 세션으로 나뉘어 언론 산업 기관(정부) 학계의 전문가들이 한일협력을 위한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제1세션에서는 ‘언론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오광진 이코노미조선 편집장, 아오키 요시유키(青木良行) NHK 서울지국장이 한일협력 지속을 위한 언론의 중요성과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제2세션에서는 ‘산업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최정환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과 시미즈 유이치(清⽔雄⼀) 일본정부관광국 서울사무소장이 한일협력의 필요성과 상호이해 촉진 방안에 관해 토론했다. 제3세션에서는 ‘기관(정부)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조양현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 교수와 가와세 가즈히로(川瀬和広)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이 한일협력의 현안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제4세션에서는 ‘학계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송정현 동국대학교 일본학과 교수와 이시무라 유이치(石村雄一) 긴키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한일의 공통과제와 협력 가능 분야에 대해 논의했다. (사)한일미래포럼 이혁 대표는 “불안정한 국제정세 하에서 한일협력의 중요성이 심화되고 있다”며 “세미나를 통해 양국의 언산관학 전문가가 모여 지속가능한 한일관계에 대해 뜻 깊은 논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우연히 스마트폰 명함관리 애플 ‘리멤버’에서 ‘서러운 70살 나이’라는 짧은 글을 읽었다. ‘밤실’이란 닉네임의 필자는 25세부터 대기업 화학 공장에서 33년 일한 뒤 ‘국가품질명장’으로 정년퇴직했다. 이후 안전보건공단 건설안전 지킴이로 12년 근무했으나, 정부 예산절감 정책에 따라 지난해 말 350명이 단숨에 잘릴 때 포함됐다고 한다. 새 일자리를 찾았지만 나이 탓에 서류심사에서 막히고, 경비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역시 나이의 장벽에 막혔다고 했다.일하고 싶은 고령자들 여기까진 사실 흔한 얘기다. 재미있는 건 커뮤니티 반응이었다. 평소 직장인들의 회사 생활 고민이나 전직·이직에 대한 소통이 이뤄지는 곳인데, 하루 만에 댓글 119개가 달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역시나 “청년 일자리 빼앗지 말고 이제 그만 쉬시라”거나 “그렇게 일만 하면 인생을 언제 즐기느냐”는 반응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30대 초반인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퇴사를 입에 달고 사는데, 일에 대한 열정이 존경스럽다”거나 “좋은 귀감이 돼 주셔서 감사하다”며 상당수가 그의 일하고자 하는 의지에 동조하고 응원했다. 사회 여건이 고령사회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졌고 “내 미래를 생각해도 정부 차원에서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마련되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 케이스에 대해 길게 쓴 이유는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례자가 워낙 많아서다. 3년 넘게 ‘100세 카페’를 연재하며 만난 수많은 고령자 중에 소박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애를 쓰는 분이 적잖았다. 국내 대형 은행 임원을 지낸 박삼령 씨(78)는 60대 후반부터 산림치유지도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방송대에 편입해 2년, 평생교육원 1년을 공부했다. 1년에 서너 달, 월 200만 원 받는 일을 하기 위해 객지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갈수록 지원자가 늘고 경쟁이 격화돼 일을 따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다행히 그는 최근 북한산 숲해설가로 재취업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고령자들이 일을 원하는 건 비단 경제적 이유만이 아니다. 사회에 참여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 ‘일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남겨진 시간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물론 일의 질도 문제가 된다. 본인이 가진 능력과 경험을 살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사회구조는 이런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최근에는 조세재정연구원에서 인구대책으로 은퇴 노인 이민 정책을 제안해 논란을 불렀다. 은퇴자들을 이민 보내 생산가능인구의 비중을 높이고 피부양자 비율을 낮추자는 얘기다. 물가와 인건비가 싼 동남아 은퇴이민은 2000년대 초반 일본과 한국에서 한창 유행했던 테마이긴 하다. 원하는 분에게는 그런 노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령자들의 머릿수를 지워버림으로써 통계를 맞추겠다는 발상에는 ‘사람’이 빠져 있어 아쉬움을 갖게 한다.고령자도 생산가능인구로 오히려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문제라면 일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 체력이 있는 고령자를 생산가능인구로 끌어들이는 발상의 전환이 훨씬 현실적이다. 고령자가 오래 생산 현장에 머물면, 건강을 유지하고 돈도 버니 각종 세금도 내고 복지에 신세질 일도 줄어든다. 일찌감치 이쪽으로 방향을 튼 일본이 진행하는 정년연장 등 다양한 사회적 실험을 눈여겨볼 만하다. 한국도 결국은 이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어 보이지만, 그 속도가 고령화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리멤버’에서 한 직장인이 지적했듯, 지금 고령자의 모습은 청년들의 미래다. 청년들이 훗날 ‘서러운 70세’를 맞이해야 한다면, 노인들이 이민 가기 전에 청년들이 먼저 짐을 싸려 하지 않을까.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