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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시설에 입소하든, 병원에 입원하든 돌봄을 받는 처지가 되면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하고, 졸리지 않아도 자야 하고, 마음대로 누굴 만날 수도 없다. 자녀의 돌봄 부담을 덜어주려 입소했다가 ‘친절한 감옥’이라며 집에 돌아온 어른도 봤다. 오래 산다기보다 느리게 죽는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더욱이 콧줄을 꽂거나 기저귀를 차기라도 하면 내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하나도 가질 수 없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3년 노인 실태조사를 조목조목 분석해 발표했다. 그 보고서 내용은 우리나라 노인들의 ‘독립선언’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몸이 아프더라도 ‘자녀 또는 형제자매와 같이 살겠다’는 응답은 2.5%에 불과했다. 가급적 ‘살던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48.9%)고 했고 자녀와 같이 살기보다 차라리 노인 요양시설에 입소(27.7%)하거나 노인 전용주택으로 이사(16.5%)하겠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유지함으로써 노후에 존엄을 잃지 않고 자녀의 돌봄 부담도 덜어주고 싶다는 뜻이다. ▷1990년대만 해도 내 집에서 나이 들고, 내 집에서 죽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2000년대 들어선 20%대에 머물고 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 돌봄 수요가 커졌고, 노인장기요양보험 도입으로 요양시설이 급증했다. 돌봄과 죽음은 자연스럽게 집 밖으로 밀려났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에 적응한 방법이었겠으나 노후 삶의 질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는 해법은 국민 대다수가 ‘병원 객사’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내 집에서 살다가 존엄한 임종을 맞이하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하다. 지역사회에 기반한 통합돌봄 체계를 구축해 내 집에서 나이 들고 죽을 권리를 보장하는 해외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네덜란드는 돌봄평가기관(CIZ)이 노인마다 맞춤형 케어 프로그램을 짜서 가까운 시설과 연계해 준다. 만약 치매 노인이라면 주간 돌봄시설에서 텃밭을 가꾸고, 친구를 만나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식이다. 일본은 몸이 불편해 이동이 힘든 노인 대신 의사와 간호사가 집집마다 왕진을 다니는 의료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노인들이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오래 집에서 머물도록 돕는 것이다. ▷노인들의 독립선언은 결국 내 집에서 ‘웰빙’을 하다가 ‘웰다잉’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다. 소박한 한 끼를 스스로 차려 먹고, 가족이나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질병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하루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제 요양시설이나 병원을 무작정 늘려 돌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돌봄과 죽음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서울 종로구 북촌 야간 관광이 1일부터 금지됐다. 넉 달간 계도기간을 거쳐 내년 3월부터는 한옥이 밀집한 북촌로11길 일대를 오후 5시∼오전 10시 사이 돌아다니면 과태료 10만 원을 물어야 한다. 군부 독재 시절 잔재로나 여겨지는 야간 통행금지가 36년 만에 다시 소환된 건 ‘오버 투어리즘’(과잉 관광) 때문이다. 관광객이 몰려 삶을 침범당했던 주민들은 환영이고, 인근 상인들은 손님이 줄까 울상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사이 폭 안긴 북촌은 한옥이 오밀조밀 모인 예스러운 동네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개량 한옥이 많다. 당시 건양사라는 회사가 몰락한 조선 관료나 양반가 한옥을 사들여 필지를 나눠 여러 채를 지은 뒤 대량 공급했다. 도심 개발 붐에 하나둘 스러지던 한옥은 2000년대 들어 가치가 재평가되며 보존 사업이 진행됐고 그 모습이 지금의 북촌이다. 원래 외지인 발길이 뜸했던 곳인데 ‘북촌 8경’ 등이 방송을 타면서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지난해 북촌 거주자는 6100명. 관광객은 무려 1050배가 넘는 644만 명이 다녀갔다. ▷고즈넉한 한옥마을은 소음 피해와 쓰레기 무단 투기로 몸살을 앓았다. 요즘은 그나마 ‘소곤소곤 대화해 주세요’라는 안내판에 따라 관광객도 조심하는 분위기지만, 그간 주민들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화장실을 쓰거나 사진 촬영 등을 하는 ‘진상’ 관광객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특히 동대문과 도심 면세점을 도는 저가 쇼핑 관광 상품에 북촌이 포함되면서 관광버스가 줄을 섰고 골목은 몸을 부딪치며 걸을 정도로 붐볐다. ▷‘오버 투어리즘’은 동네 주민을 다른 곳으로 밀어내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관광+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이어지곤 한다. 북촌 한옥마을의 인구는 최근 5년 새 27.6%나 줄어들었다. 관광객이 몰리자 한옥은 상업용으로 팔리거나 한옥스테이로 개발됐다. 버티던 주민들도 “살 수가 없다”며 떠나기 시작했다. 에어비앤비 등 공유 숙박이 번창해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주민들이 이용하던 가게가 사라져 정주 여건이 악화한 포르투갈 리스본이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뒤를 밟고 있는 셈이다. ▷유엔 세계관광기구는 올해 해외 관광객이 15억 명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관광을 막을 수도, 손님이 주인집을 차지하는 ‘오버 투어리즘’을 방관할 수도 없는 각국은 나름의 해법을 내고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한 사람당 5유로씩 도시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고, 일본 오사카도 관광세 도입을 추진 중이다. 벨기에 브뤼허와 이탈리아 피렌체는 에어비앤비 등 신규 숙박업 등록을 금지했다. 서울이 매력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반갑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야간 통행 금지가 주민과 관광객이 공존하는 ‘서울식 해법’이 되기를 바라 본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가 내년 1월부터 주 3일은 반드시 사무실로 출근해야 하고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해고할 수 있다고 미국 본사 직원에게 통보했다. 올해 1월부터 사무실 출근과 재택근무를 혼합한 ‘하이브리드형’ 근무제를 운용했지만, 정착이 더디자 해고까지 언급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실적이 뚝뚝 떨어진 스타벅스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브라이언 니콜 최고경영자(CEO)가 사무실 출근을 주도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 이후 사무실 근무로 회귀하는 미국 기업들이 늘고 있다. 2020년 재택근무를 앞장서 도입한 구글은 최소 주 3일 사무실 출근을 권고하고 이를 인사고과에 반영한다. 메타 역시 주 3일 사무실 출근을 하지 않으면 해고가 가능하다. 아예 대면 근무로 전환한 기업도 있다. 아마존은 내년부터 사무직 직원은 주 5일 출근해야 한다. JP모건은 임원에겐 주 5일 출근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해보니 대면 근무의 장점이 분명하더라고 말한다. 재택근무로 일상적인 업무는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협업을 통한 혁신이나 생산성 향상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직원 간 피드백이 줄면서 역량이 정체되고 조직 문화를 공유하기도 어려웠다. 최근 에릭 슈밋 전 구글 CEO는 인공지능(AI) 경쟁에서 뒤처진 배경으로 재택근무를 꼽으며 “구글이 승리보다는 ‘워라밸’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논란이 커지자 그 발언을 거둬들였지만 아마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재택근무의 편안함을 경험한 미국 직장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사무실 출퇴근을 해보지 않은 MZ 직장인들은 규칙적인 출근 자체를 고통스러워한다. 최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의 설문에 따르면 아마존 직원 73%가 주 5일 사무실 출근 통보 이후 새로 구직에 나선 것으로 나타났다. 갑자기 회사 근처로 이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사실상의 퇴직 강요 아니냐는 의구심도 있다. 실적이 악화한 스타벅스나 중간 관리자를 10% 감축하겠다고 밝힌 아마존이 사무실 출근을 강제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빅테크들이 생성형 AI 보급으로 개발자 수요가 줄어들자 사무실 근무로 선회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면 근무로 속속 선회하는 회사와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개인 간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면서 ‘하이브리드형’ 근무 형태가 37%로 재택근무(32%)나 사무실 근무(31%)를 앞질렀다. 미국 회사 약 9000곳의 근무 형태를 조사한 결과다. 평균 출근일은 주당 2.5일이다. 회사와 직원 간 어느 정도 절충이 이뤄진 셈인데 앞으로 어떤 근무 형태가 대세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 동료와 일하며 자극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회사뿐만 아니라 개인도 성장한다는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걸그룹 ‘뉴진스’ 멤버 하니가 1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참석했다. 그 발단은 지난달 11일 뉴진스가 올린 영상이었다. 하니는 이 영상에서 “하이브 사옥 복도에서 마주친 다른 그룹 매니저가 (따라오는 멤버들에게) ‘무시해’라고 했다”고 말했다. 뉴진스 소속사인 어도어의 모회사인 하이브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이후 환노위 소속 의원실에 ‘직장 내 괴롭힘을 조사해 달라’는 팬들의 집단 민원이 쇄도했다고 한다. ▷안호영 환노위원장(더불어민주당)이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질의하겠다”며 하니를 참고인으로, 소속사 어도어 대표인 김주영 하이브 최고인사책임자를 증인으로 각각 불렀다. “나 결정했어! 국회에 나갈 거야! 국정검사(감사를 잘못 표기)! 혼자 나갈 거예요.” 국감도 띄우고, 성난 팬심도 달래보고자 증인도 아니고 참고인으로 슬쩍 불러봤는데 “뉴진스를 지키겠다”며 하니가 출석 선언을 한 것이다. 정말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의원들이 더 놀랐다는 뒷말이 들린다. ▷팬덤의 눈치가 보였던 탓인지 국감이 진행된 1시간가량 의원들의 질의는 공손했다. “참고인 하니 팜 님께 질문하겠습니다” “하니 팜 님,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안 위원장), “뭣 때문에 회사가 싫어한다고 생각하시나요”(국민의힘 우재준 의원), “하니 팜 씨가 직접 ‘무시해’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폭로해서 국민들의 충격이 크다”(민주당 박홍배 의원), “오늘 하니 님이 하신 것이 엔터업계가 ‘우리도 노동자이고 인간’이라는 목소리를 낸 역사적 순간”(진보당 정혜경 의원). 이날 환노위 국감장에 불려 온 기업인들이 면박 섞인 질의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국정감사는 국회가 정부 부처와 기관을 감사해 국정 운영에 문제가 없는지 따지는 자리다. 양측 주장이 엇갈리는 뉴진스 소속사 내부 갈등이 국감 대상인지도 의문이고,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닌 걸그룹 멤버가 ‘직장 내 괴롭힘’의 대상인지도 불확실하다. 안 위원장은 하니 출석과 관련해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다루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날 국감에선 산업재해로 숨진 하청 노동자 문제도 다뤄졌다. 정작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 문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니 출석으로 환노위 국감은 ‘팬 미팅’으로 희화화됐고 같은 시간 진행되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 국감까지 파행을 겪었다. 최민희 과방위원장이 국감 도중 하니와 별도 만남을 가진 사실이 논란이 되어 여야 간 거친 공방이 오가면서다. 무더기 자료 제출과 증인 신청 요청, 막말과 호통만 주고받는 질의로 부족해 이젠 연예인 팬 미팅까지 자청하고 있으니 국감 무용론이 나와도 할 말이 없게 됐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내년 11월부터 세계국채지수(WGBI)에 한국 국채가 편입된다. 재작년 9월부터 4차례 시도 끝의 성공이다. 영국의 시장지수 산출 기관인 ‘파이낸셜타임스스톡익스체인지(FTSE) 러셀’이 운영하는 WGBI는 블룸버그, JP모건 지수와 함께 세계 3대 채권 지수로 꼽힌다.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 국채가 모두 포함돼 있어 연기금 등 글로벌 ‘큰손’들의 투자 나침반이다. 지수 편입으로 한국 국채에 대한 외국인의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2년 전부터 WGBI 편입을 추진한 한국은 국채 발행 규모, 국가 신용등급을 충족하고도 외국인에 대한 과세 체계, 외환시장 개방성 부문 점수가 낮아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내총생산(GDP) 순위 세계 10대국 중 빠진 건 한국과 인도뿐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외국인의 투자 소득에 세금을 물리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원-달러 거래 시간을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연장하는 등의 보완 조치를 한 끝에 이번엔 편입됐다. ▷WGBI에 투자되는 민간 자금은 약 2조5000억 달러, 한화로 약 3400조 원 규모다. 한국이 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2%로 560억 달러(약 75조 원) 정도의 외국인 자금이 새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국채 수요가 늘면 국채 가격은 오르고, 정부는 낮은 이자에 국채를 발행할 수 있게 된다. 올해 말 1200조 원에 육박할 국가채무를 고려할 때 이자 부담 감소는 반가운 일이다. 다만 마냥 축포를 터뜨릴 일만은 아니다. 외국자본 비중이 커지면서 국내 자본 시장이 대외 변수에 더 민감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채권 ‘선진 클럽’ 편입으로 채권 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남은 과제는 여전히 극심한 저평가를 받는 주식 시장이다. 한국은 2008년부터 주식 분야의 ‘선진 클럽’인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을 시도해 왔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셔 신흥국 지수에 머물러 있다. 특히 MSCI는 한국 정부가 작년 11월 시작한 공매도 전면 금지를 문제 삼고 있다. 주식 시장에서 거품을 빼는 기능을 하는 공매도를 금지하는 한 선진국 증시로 보기 어렵다는 거다. ▷채권에 앞서 한국 증시를 선진국 지수에 포함시켜 온 FTSE 러셀도 이번에 “공매도 재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한국 증시 분류에 대해 추가 조치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일각의 우려처럼 공매도 금지를 이유로 한국을 ‘관찰대상국’으로 강등하진 않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돼선 안 된다는 경고다. 정부가 주식 투자자들 눈치만 보느라 전혀 선진국답지 않은 공매도 금지를 고수하는 동안 대규모 해외 자본이 한국 증시에 들어올 물길을 넓힐 진짜 ‘밸류업’은 위협받고 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의대 공부량은 어마어마하다. 그중에서도 해부학 병리학 등 ‘기초의학’과 내과 외과 등 ‘임상의학’을 동시에 배우는 본과 1, 2학년의 공부량은 압도적이다. 배우는 과목이 많다 보니 하루 8시간씩 꼬박 수업을 듣고 2, 3주에 한 과목씩 시험을 치른다. 과목당 2000∼3000쪽에 달하는 강의 자료를 통째 외워야 할 정도로 암기량이 많다고 한다. 똑똑한 학생들이 모였는데도 의대 유급 비율이 꽤 높은 까닭이다. 이처럼 빡빡한 의대 교육과정을 교육부가 6년제에서 5년제로 단축할 수 있다고 밝혀 논란이다. ▷교육부는 6일 의료인력 수급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의대 교육과정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하겠다며 그 예로 ‘5년제 의대’를 들었다. 이대로 의대생이 복귀하지 않고 의사국가시험을 거부할 경우 내년에 의사 3000명이 사라질 테니 그 뒷감당이 두려웠을 것 같다. 어떡하든 졸업을 시키겠단 얘기니 말이다. 비판 여론이 비등하자 교육부는 “5년 단축이 의무가 아니다. 대학 사정에 따라 학사과정을 조정하도록 길을 터 주려는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다.당장 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선 의대 5년제를 두고 “수의대도 6년인데…” “덤핑 세일이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의료계는 압축 수업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억지로 시행했다간 의대 교육만 부실해질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종태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이사장은 “교육과정을 5년으로 줄이면 방학도 없이 기계처럼 공부해야 한다”, 김성근 전국의대교수협의회 대변인은 “정부가 6년 교육과정도 임상 실습이 부족하다며 개원 면허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으면서 의대 교육과정을 축소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고 했다. ▷해외에서도 의대는 기본적으로 6년이다. 미국에선 6년제 통합 의대를 다니거나 아니면 대학 졸업 이후 4년제 메디컬 스쿨에 진학해야 한다. 그다음 의사면허시험(USMLE)에 통과해야 의사가 된다. 일본 독일 등도 6년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국가시험을 치른다. 그래서 의료계에선 의대 5년제가 되면 해외에선 우리나라 의대 졸업자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한다. ▷2월 의대 증원 발표 이후 의대생 1만8000여 명이 학교를 떠났다. 정부는 ‘휴학을 불허한다’며 의대생이 돌아오기를 손 놓고 기다리다가 이제야 졸속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11월까지만 돌아오면 압축 수업을 통해 진급시키겠다고 하고, 5년제 의대도 가능하다고 한다. 기출문제 및 학습지원자료, 이른바 족보를 공개적으로 공유하는 의대교육지원센터도 운영한다고 한다. 교육부는 의대 5년제를 두고 “미국은 파병이 있는 경우 군의관을 조속히 배출하기 위해 압축적으로 커리큘럼을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어쩌다 우리 의료 시스템이 유사 전시 상황에 처한 것인가.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추석 연휴 직전 이른바 ‘빅5’ 전공의 대표들이 전공의 약 1만 명의 집단 사직 교사 혐의로 차례대로 경찰에 출석해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경찰 주장대로 집단행동이든, 전공의 주장대로 자발적인 선택이든 일제히 환자 곁을 떠난 건 직업 윤리상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취재진 앞에 선 그들의 항변을 듣자니 전공의 집단 사직을 개인주의적 MZ세대의 ‘탕핑(躺平·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만 치부하기엔 그 울분은 합당했고, 좌절은 깊었다. “상급병원 VIP들이 의료 정책 결정” 11일 김유영 삼성서울병원 전공의 대표는 “언제, 어디가 아파도 상급병원에서 VIP 대접을 받는 권력자들이 의료 현안, 의료 정책을 결정한다는 게 화가 난다”고 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사이로 분기탱천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취과 전공의로 돈 벌기는 어려운 소아마취 전문의를 꿈꿨지만, 그 꿈을 접었다고 했다. 병원에서 밤낮으로 일하던 대한민국 청년이라는 한성존 서울아산병원 전공의 대표는 “미래 세대를 짓밟는 일방적인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김태근 가톨릭중앙의료원 전공의 대표는 “현 정부의 정책은 젊은 세대에게 많은 책임을 전가한다”고 했다. 이들은 의대 2000명 증원이 기성세대의 기득권을 지키면서 청년 세대를 착취하는 ‘가짜 개혁’ 아니냐고 묻고 있다. 1977년 처음 도입된 국민건강보험은 ‘저(低)부담, 저수가, 저보장’으로 설계됐다. 국가와 국민이 가난했던 시절이라 보험료와 수가를 낮게 책정하는 대신 보장 범위를 최소화했다. 그동안 왜곡된 수가의 풍선 효과로 필수의료 기피 현상이 심각해졌고, 역대 정권마다 보장성 강화를 외치면서 건강보험은 서서히 망가져 왔다. 전공의들은 이 낡은 시스템을 수술하지 않고 의사 수를 늘려 땜질하려는 데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의료 시스템을 지탱한 건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싼 임금을 감수했던 전공의였다는 사실이 이번 의정 갈등 속에 드러났다. 이들은 보험료 인상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지지 않을 정부도, “의대 교수들은 착취의 중간관리자”라고 했듯 제도에 순응해 과실을 독점한 선배 의사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의대 증원으로 진통제를 놓아 오늘을 넘기고 보는 게 의료 개혁의 본질이라고 판단했다.다른 청년들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그래도 전공의들은 의사 면허를 가졌기에 7개월이 넘도록 탕핑도 하고, 재취업도 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치열한 생존 투쟁이 벌어지는 우리 사회에서 저항할 권리를 누린다는 것도 특권일지 모르겠다.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 제도 안에서 질식당한 채로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청년이 훨씬 많다. 근로자의 10%인 정규직이 임금과 복지를 독차지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아래서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려는 청년들의 취업 전쟁은 눈물겹다. 정부의 노동 개혁은 이런 핵심은 손도 못 대면서 주 52시간 개편 같은 지엽적인 과제조차 회피한다. 청년 세대에 빚만 물려주게 생긴 연금은 어떠한가. 5월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인상하는 국회 모수개혁안을 걷어차고는 세금 먹는 하마인 기초연금 인상을 앞세운 정부 개혁안을 내놓았다. 한 해 출생아 수가 20만 명대로 줄었는데 여전히 ‘산업 전사’ 대량 생산에 맞춰진 교육은 가장 심각하다. 교수나 교사의 반발을 불러올 구조조정보다는 대입 제도처럼 줄 세우는 방법만 바꾸면서 학생들을 우롱한다. 그러면서 교육발전특구 도입 같은 개혁 시늉만 낸다.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 대표는 이번 의료 개혁을 두고 “대한민국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미래 세대에 숨통을 틔워 주기보다 공고히 쌓인 기득권을 우회하려는 4대 ‘대증요법’ 개혁 모두 그렇지 않나. 그마저도 멈춰 있지만 말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으레 긴 옷을 입고 차례를 지냈던 추석인데 이번에는 에어컨조차 끌 수 없었다. 아무리 이른 추석이라지만 연휴 내내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웃도는 이상한 날씨였다. 지독하게 덥고 길었던 여름을 밀어낸 건 여름 장마보다 무섭게 내린 가을 폭우였다. 19∼21일 사흘 동안 남부 해안과 제주 산지에는 최대 500mm 이상, 남부 내륙과 충청에는 200∼300mm 안팎의 비가 쏟아졌다. 경남 창원에는 21일 하루 397.7mm, 시간당 최대 104.9mm의 비가 내렸는데 기상청은 “200년 만에 한 번 내릴 만한 비”라고 했다. ▷비가 그치자 청명한 가을 날씨가 찾아왔다. 전국적으로 낮 최고기온이 25도 안팎이라 아직 여름이 끝났다고 보긴 어렵다. 하루 평균 기온이 20도 밑으로 떨어지고 다시는 올라가지 않아야 비로소 가을이 시작됐다고 본다. 하지만 기온이 갑작스럽게 10도 가까이 뚝 떨어진 탓에 체감상 쌀쌀하게 느껴진다는 사람이 많다. 제주는 폭우가 지나간 21일 밤에야 75일간 이어지던 열대야가 공식적으로 끝났다. ▷일주일 새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나타나는 예측 불가능한 날씨는 과거와 다른 대기의 순환에서 비롯됐다. 여름은 보통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데 고온건조한 티베트 고기압과 중첩돼 ‘이중 열 커튼’이 형성되면 폭염이 찾아온다. 티베트 고기압이 이례적으로 한 달 이상 머물면서 이번 추석까지 폭염이 이어졌다. 올여름 유독 태풍이 힘을 쓰지 못한 이유도 티베트 고기압에 막혀 한반도를 비켜 갔기 때문이다. ▷극한 폭우를 불러온 14호 태풍 ‘풀라산’도 열대 저압부로 세력이 약화해 한반도에 진입했다. 엄청난 양의 뜨거운 수증기는 그대로 머금은 채였다. 그사이 차가운 대륙성 고기압이 남하하고, 더운 북태평양 고기압이 버티면서 정체전선이 형성됐다. 두 기압 사이 갇힌 수증기가 극한 호우를 뿌렸다. 짧은 가을장마의 원인은 여느 해와 다를 바 없지만 수증기량이 늘어 강수의 강도가 세졌다. 지구 온도가 1도 올라갈 때마다 대기 중 수증기량이 7%씩 늘어난다고 한다. ▷이런 기상 이변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온도 상승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일정했던 대기의 순환이 해수면이 뜨거워지면서 엉클어진 것이다. 특히 북반구 중위도에 있는 한반도는 여름에는 위력적인 태풍이, 겨울에는 극단적인 한파가 찾아올 가능성이 커졌다. 해수면 온도가 오르면 태풍은 습해지고 강력해진다. 빙하가 녹아 북극 주변에 찬 공기를 가두고 있던 소용돌이(vortex)가 약해지면 한반도까지 한파가 내려온다. 올해도 가을다운 가을날은 거의 없고 곧바로 한파가 닥칠 것으로 예고됐다. 인간이 만든 재앙인 지구 온난화가 이제는 인간을 덮치고 있다. 지구에서 서로 연결되지 않은 존재는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섬뜩하게 다가온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월드 베스트 전문 병원(World’s best specialized hospitals)’ 명단에 한국 병원이 대거 선정됐다. ‘월드 베스트 전문 병원’은 의사, 의과학자 등 전문가 대상 설문조사, 환자 만족도, 치료 성공률 등 의료 성과 지표 등을 종합해 순위가 결정된다. 암, 신경과, 내분비과, 소아과, 정형외과 등 12개 임상 분야에서 각각 최고 병원의 순위를 매겼다. 한국은 암 치료 상위 300위 안에 16곳이, 내분비과는 150위 안에 21곳이, 소아과는 250위 안에 25곳이 포함됐다. 나머지 임상 분야에서도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암 분야에선 삼성서울병원이 3위, 서울아산병원이 5위, 서울대병원이 8위를 차지했다. 메이오 클리닉, MD앤더슨 암센터 등 세계적인 병원에 뒤지지 않는다. 암 치료를 잘하는 덕분에 우리나라 암 환자 10명 중 7명은 암을 진단받고 5년 이상 생존한다. 사실상 완치라는 판정을 받는단 뜻이다. 우리나라 위암 생존율은 68.9%로 미국의 2배, 영국의 3배 정도다. 대장암 생존율도 71%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 병원의 경쟁력은 공보험 체제 아래서 민간 병원이 경쟁하는 독특한 의료 시스템에서 나온다. 암 환자의 경우 진료비의 5%만 낸다. 나머지는 국민건강보험에서 부담한다. 환자가 쉽게 병원을 찾을 수 있으니 병원에는 그만큼 많은 임상 데이터가 축적된다. 서울 대형 병원들은 한 해 1만∼2만 건씩 암 수술을 한다. 환자 유치를 위한 민간 병원의 치열한 경쟁도 실력이 뛰어난 이유다. 로봇 수술 등 새로운 치료법에 적극적으로 도전한다. 우수한 인재들이 꾸준히 유입된 덕분도 있다. ▷이런 비약적인 발전이 약 70년 동안 이뤄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놀랍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의료의 씨앗이 뿌려진 건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1955년 서울대 의대 소속 의사 12명이 미네소타대 의대로 건너가 연수를 받았다. 이들이 돌아와 심장병 수술을 했고, 감염병 퇴치에 나섰다. 지금은 해외에서 우리나라에 의술을 배우러 온다. 이번 뉴스위크 순위에서 서울대병원은 상위권에 올랐지만 미네소타대병원은 아예 순위 밖이었다. ▷하지만 의정 갈등의 장기화로 한국 의료가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 상급종합병원의 암 수술 건수가 급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7월 위암 대장암 간암 등 6대 암 수술 건수는 3만8000여 건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17%가량 줄었다. 전문의는 진료와 수술에 지쳐 연구를 할 수 없는 처지다. 수련받는 전공의가 없으니 대단한 술기가 전수되지 않는다. 힘들게 쌓은 탑이 무너질 판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미국 노동절인 2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를 유세차 찾은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겸 부통령의 첫마디는 “US 스틸은 미국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기업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였다. 이어 “언제나 철강 노동자들을 지키겠다”고 했다. 1901년 US스틸이 탄생한 곳이 피츠버그이고, 지금도 본사가 자리한다. 피츠버그를 통틀어 가장 높은 건물이 US스틸 타워다. 노동절에 ‘러스트벨트(Rust Belt·쇠락한 공업지대)’ 한복판인 피츠버그에서 노조 표심을 향한 구애를 펼친 것이다. ▷펜실베이니아주는 11월 미국 대선의 핵심 경합지 중 하나다. 2020년 대선에선 조 바이든 대통령이, 4년 전인 2016년 대선에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신승을 거뒀다. 노조원 120만 명인 철강 노조의 지지 없이는 펜실베이니아주서 승기를 잡을 수 없고, 대선 승리도 장담할 수 없다.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끔찍한 일”이라 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도 지난달 펜실베이니아주 요크를 찾아 “일본이 사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제철이 ‘미국 산업화 100년의 역사’ 자체인 US스틸을 149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건 지난해 12월이다. 관세 등 무역장벽이 높고 단단해지자, 미국 시장을 직접 뚫고 세계 3위 철강 기업으로 올라서겠다는 전략이었다. 곧장 전미철강노조가 들고일어났고 의회는 “국가 안보에 핵심적인 사안”이라며 거들었다. 결국 재무부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에 회부됐다. 여기선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의 투자를 제한할 수 있다. ▷그간 US스틸에 대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강경한 태도는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쳐 온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해리스 후보의 노동절 발언은 그 연장선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4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본제철의 인수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어진 국빈 만찬에는 전미철강노조 위원장을 초청해 기시다 총리를 대놓고 불편하게 했다. ▷트럼프와 해리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는 무산될 위기다. 국내에선 세계화에서 낙오해 일자리를 잃은 백인 노동자의 좌절이 분출되고, 국외에선 중국이 미국의 리더십에 도전해 오면서 ‘아메리카 퍼스트’가 초당적인 합의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급해진 일본제철은 펜실베이니아주와 인디애나주 2곳의 US스틸 제철소에 13억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사실상 US스틸의 일자리 보존을 약속한 셈이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 전 장관을 고문으로 영입하며 치열한 로비전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의 거센 흐름을 거스르긴 어려워 보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죽더라도 찾고 죽어야지, 그냥 죽을 순 없다”던 아빠였다. 25년간 전국 방방곡곡에 ‘실종된 송혜희를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을 걸었던 송길용 씨(71)가 결국 딸을 찾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숨졌다. 지난달 26일 현수막을 싣고 나갔다가 덤프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송 씨는 25년간 매주 전단 4000장을 뿌렸고, 매달 현수막 300개를 걸었다. 평소와 달리 연락이 뜸한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현수막 업체가 실종자 가족 단체에 연락하면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 ▷송혜희는 17세가 되던 1999년 2월 학교에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행방불명됐다. 경기 평택시 집으로부터 1km가량 떨어진 버스정류장에 내린 후 흔적이 사라졌다. 당시 버스 운전사가 30대 남성이 따라 내렸다고 증언했으나 용의자를 잡지 못했다. 현수막 속의 딸은 여전히 교복을 입은 앳된 모습이다. 배움이 짧은 아버지는 전교 1, 2등을 다투고 서울대를 가고 싶다던 딸 혜희를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딸이 실종되고 처음 3년간은 부부가 함께 전국을 돌며 전단을 뿌렸다. 도대체 맨정신으로는 다닐 수가 없어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전단을 나눠주고, 또 마시고 나눠주곤 했다. 그동안 엄마는 뼈만 앙상히 남은 채로 몸과 마음에 병을 얻었다. 결국 엄마는 딸이 실종되고 7년이 지났을 때 전단이 흩어진 방에서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아내 장례를 치르고 따라가겠다고 결심했던 송 씨의 마음을 돌린 건 남은 자식이었다. 큰딸은 “아빠 죽으면 같이 죽겠다”며 오열했다. ▷‘신장 163cm, 얼굴이 둥글고 검은 피부, 흰 블라우스 빨간색 조끼 파란색 코트.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이 현수막은 늘 새로 단 듯했다. 송 씨는 한 달에 현수막을 300개가량 걸었다. 달이 바뀌면 혹시 찢어졌을까, 떨어졌을까 첫 현수막부터 점검을 하거나 교체했다. 현수막을 걸다 낙상을 당해 허리를 다쳤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최근엔 몸이 온전치 못했다. 주변에선 그만하라고도 했다. 그래도 “자식이라 포기를 못 하겠다”며 다시 집을 나섰다. 지금도 전국에 현수막 260여 개가 걸려있다. ▷2022년 기준 실종 당시 18세 미만이던 1년 이상 장기 실종 아동은 981명이다. 송 씨의 딸 혜희처럼 20년 이상 장기 실종 상태인 아동이 859명을 차지한다. 최근엔 유전자검사, 폐쇄회로(CC)TV 등 기술의 발달로 실종 아동 수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송 씨 가족처럼 실종 아동을 둔 가족의 삶은 아이를 잃어버린 날에 멈춰 버린다. 실종 가족을 찾는 방송에서 송 씨는 딸을 향해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돌아와만 달라”고 했다. 시청자에겐 “연락 주시면 신장이라도 떼어 드릴게요”라고 했다.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지, 그 비통함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자기 얼굴이 나체에 합성된 ‘딥페이크’ 사진과 함께 공개된 신상 정보를 보고 여성들이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다. 공포는 나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 그 본질이다. 유명 공포 영화 속 샤워실 살인 장면처럼 가장 사적인 공간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친밀한 누군가가 나를 벌거벗겨 능욕할 수 있고, 일상을 공유하는 SNS가 위험천만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국 초중고교에서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으로 확인돼 교육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 가해자들은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셀카를 인공지능(AI)으로 음란물과 합성해서 유포했다고 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주로 10대다. 현재 피해 상황을 취합 중인데, 피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학교는 450곳에 육박한다. ‘지능방’(지인능욕방) ‘겹지인방’(겹치는 지인방) 등으로 검색한 방의 숫자가 이런 정도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따르면 이 중 40곳에서는 실제 피해가 확인됐다. 피해자 중에는 여교사도 있다고 한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최근 주목을 받게 된 발단은 인하대 사건이다. 텔레그램에 자신의 딥페이크 음란 사진이 유포됐다는 것을 알게 된 인하대 졸업생 유모 씨는 해외에 서버가 있다는 이유로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자 자신이 직접 추적에 나섰다. 딥페이크가 올라온 방을 찾아 들어갔더니 자신의 음란 사진, ‘주인님’이라 하는 음성 파일, 이모티콘까지 공유되고 있었다. 이 사건이 보도되자 ‘나도 혹시’ 하며 불안감을 느낀 10, 20대 여성들이 자신도 피해자가 된 것은 아닌지 텔레그램을 뒤지기 시작했다. ▷유 씨가 1년 넘도록 끈질기게 증거를 모았지만 처벌을 받은 사람은 그 방 참여자 1200명 중 단 1명에 그쳤다. 붙잡히긴 했지만 “우연히 봤다”고 주장해 풀려난 참여자도 있었다. 성폭력처벌법이 허위 영상물을 제작·유포하는 것은 처벌해도 단순히 시청만 하는 것은 죄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직접 연락하고 딥페이크를 유포한 1명만 징역형을 받은 것이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이번에 초중고에서 피해 사례가 확인돼도 처벌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사건도 유 씨 사례처럼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경우다. 딥페이크 사진이 유포된 방을 찾아 증거를 수집하고 학교 명단을 작성했다. 소셜미디어 계정을 비공개하고 사진도 감췄다. 확인된 피해가 늘어나고 여론이 들끓자 그제야 경찰은 대대적인 단속을 약속했다. 국회에선 처벌을 강화하는 입법이 쏟아진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모욕이 놀이가 되고, 혐오를 과시하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평범한 하루가 언제 공포로 뒤덮일지 모를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2일 새벽 서울 중구 숭례문 지하보도서 작업 중이던 60대 환경미화원이 흉기에 찔려 살해당했다. 그는 밤이면 인적이 드물어 무서운 험지였던 이 구역을 계속 맡아 왔던 ‘반장 언니’였다. 노숙인이 자고 난 자리도 내 집 청소하듯 쓸고 닦던 그의 황망한 죽음에 동료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료 누군가는 그가 쓰러진 구역을 청소해야 했을 것이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일하는 환경미화원의 작업 환경은 위험천만하다. 숭례문 지하보도 사건이 있은 지 5일 만인 7일에도 충남 천안시 30대 환경미화원이 음주운전 단속을 거부하고 도주하던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지난달에는 경남 양산시 60대 환경미화원이 운행 중인 재활용품 수거 차량 발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어둠 속에서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들을 피해 작업 속도를 올리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보도나 시설 등을 물걸레질하는 여성 환경미화원들은 보통 혼자 일한다. 범죄에 노출될 우려가 크다. 으슥한 골목을 청소할 때면 겁이 나기 마련이고, 취객의 욕설이나 시비에 시달리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한다. ▷지난해 환경미화원 사상자는 ‘6439명’이다. 전국 환경미화원은 약 4만 명으로 집계되는데 연간 6명 중 1명이 산재를 당하는 셈이다. 2019년(5078명)에 비해 21%가 늘었다. 다른 직종에 비해 유독 산재 발생 비율이 높다. 사고뿐만 아니라 질병에도 시달린다. 일단 혹독한 바깥 날씨를 견뎌야 하고, 무거운 짐을 옮기느라 근골격계 질환을 달고 산다. 먼지를 많이 마시다 보니 폐질환도 흔하다. ▷환경미화원의 일터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것은 결국 비용이다. 환경미화원은 지방자치단체에 직접 고용된 공무직과 용역업체에 고용된 근로자가 있다. 저가로 입찰에 응해야 하는 용역업체일수록 안전 장비 지급이나 안전 수칙 준수에 소홀하다. 정부는 심야나 새벽 근무를 지양하고 ‘2인 1조’ ‘3인 1조’ 근무를 권고하지만, 영세한 용역업체에선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번에 피살된 60대 환경미화원도 용역업체 소속이었다. 고령자처럼 노동시장 약자들이 주로 속해 있다 보니 ‘오전 중에 1km를 청소하라’는 터무니없는 업무량도 묵묵히 견디곤 한다. ▷남들이 잠든 시간에,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환경미화원의 조용한 노동 덕분에 우리는 아침에 깨끗한 거리를 지나 출근을 한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이들의 귀한 노동을 이토록 함부로 써도 되는 것일까. 이웃인 우리의 반성도 필요하다. 종량제 봉투를 넘치게 채워 무겁게 만들고, 깨진 접시 같은 날카로운 물건을 아무렇게나 봉투에 담는 등 사소한 습관이 환경미화원을 크게 다치게 만든다고 한다. 환경미화원 연간 사상자 ‘6439명’. 이 숫자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짜 안전 성적표란 생각이 든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보통 5세부터 다니는 영어유치원에 입학하려면 아이가 ‘4세 고시’라 불리는 레벨 테스트를 봐야 한다. 그런데 실력이 있다고 4세 고시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먼저 ‘입금 전쟁’을 치러야 한다. 영어유치원 입학 대기 줄이 길다 보니 원비를 선착순으로 입금받아 레벨 테스트 대상자를 정한다. 3초 안에 입금이 마감된다고 해서 ‘3초 컷’이다. 부모가 선착순 입금에 성공해야지 아이가 4세 고시를 볼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1000명 넘게 레벨 테스트를 치른 한 영어유치원은 응시료 수입만으로 서울 강남 월세를 냈다는 이야기가 돈다. ▷조기 영어 교육 열풍을 타고 전국 영어유치원은 지난해 843곳으로 일반 유치원(8441곳)의 10% 수준까지 불어났다. 2019년(617곳)에 비해 37%가 늘었다. 저출산 여파로 일반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급감한 것과 달리 영어유치원은 ‘저출산 쇼크’에서 비켜나 호황을 누린다. 지난해 어린이집은 2만8954곳으로 4년간 23%나 주는 등 줄폐업이 이어졌다. ▷똑같이 3월에 새 학기를 시작하고 유치원이라는 이름을 강조하지만, 영어유치원은 사실 영어학원이다. 학원법 적용을 받아 교습비 상한선도 없고, 학원이 정하기 나름이다. 전국 평균 월 교습비는 141만6000원이다. 서울만 보면 200만 원에 가깝다. 요즘 영유아 공교육(유치원)과 공보육(어린이집)은 정부 지원이 늘어 거의 무상이다. 그런데도 비싼 영어유치원이 필수 코스가 되어 버린 건 공교육이 충족시킬 수 없는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는 일찍 배울수록 좋다’는 경험칙을 믿는 부모들은 아이가 어린 나이에 영어에 노출되기를 바란다. ▷‘영유’(영어유치원)냐, ‘일유’(일반 유치원)냐. 아이를 첫 교육기관에 보내는 엄마는 공교육과 사교육을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 선다. 일반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놀이 위주로 학습하고 뛰어노는 시간도 보장이 된다. 그 나이에 꼭 배워야 할 생활 습관이나 사회성도 가르친다. 이와 달리 영어유치원은 교육 과정이 영어 학습에 치우쳐 있어 아이의 균형 있는 발달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많다. 영어유치원 일평균 교습 시간은 4시간 57분으로 중학교 수업 시간과 비슷했다. ▷일단 영어유치원 경로로 들어서면 공교육 이탈이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소수를 대상으로 한 맞춤형 교육을 기대하고 사립초나 국제학교 진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자녀 수가 줄어들수록 다양한 교육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틀에 갇힌 공교육은 이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이들을 사교육으로 자꾸 밀어낸다. 외동이를 최고로 키우고 싶은 부모의 동기와 공교육의 무기력, 학원의 상술이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영유아 사교육비도 폭증했다. 평등한 출발선이어야 할 영유아 교육도 사교육이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2024년 파리 올림픽을 100일 앞둔 5월부터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으로 매주 출근했다. 사격, 배드민턴, 수영, 유도, 펜싱 사브르 대표팀 지도자와 선수를 대상으로 ‘팀 분석’을 하고 훈련과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심리 코칭을 했다. 하나같이 파리 올림픽 초반 메달을 휩쓸며 우수한 성적을 냈던 종목들이다.고교 입학 전까지만 해도 테니스 선수를 꿈꿨던 한 교수는 프로 운동선수를 하기엔 실력이 부족하다 싶어 진로를 바꿔 의대에 진학했다. 직접 선수로 뛰는 대신 전공의 시절부터 우리나라에선 불모지였던 스포츠 정신의학을 개척해 왔다. 6일 중앙대 의대 연구실서 만난 그는 “국가대표 선수들은 건강한 마인드의 모범과도 같았다”고 했다.》―파리 올림픽에서 ‘스포츠 팀 분석’이 처음 도입됐다. “이번 올림픽 목표가 금메달 5개일 정도로 선수들은 최약체로 평가받았다. 마지막까지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보자며 대한체육회 훈련본부와 의무본부가 심리 코칭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다. 우선 파리 올림픽을 위한 심리검사 도구를 따로 만들었다. 개인마다 인지 능력, 성격 등을 먼저 검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감독, 코칭 스태프, 선수들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한 요령을 알려줬다. A 종목을 예로 들자면, 선수들은 상당히 외향적인데 코치들은 내향적이었다. 코치들이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오히려 선수들이 편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새로운 자극을 좋아하는 B 선수에겐 똑같은 훈련을 반복하면 지루하니 훈련법을 바꿔보라고 했다. 팀을 모아두고 속된 말로 ‘툭 까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팀워크가 저절로 좋아졌다.” ‘팀 분석’의 성과를 물으니 “내담자와의 상담 내용은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진 않았다. 메달 2개를 수확한 남자 펜싱 사브르팀은 “서로 믿어주고 끌어주는 신구 조화가 훌륭했다”고, 깜짝 반전을 일군 사격팀은 “경쟁을 시키기보다 ‘원팀’을 만들려는 감독의 리더십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마인드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가. “국가대표는 운동선수 중에서도 0.1%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일반인도 성공한 0.1%의 마인드는 다르지 않겠나. 20세, 30세 어린 선수들인데도 대단하다고 느낀다. 첫째,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의 장단점이 무엇이고, 실력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고, 심지어 ‘이번 대회에선 은메달을 딸 것 같다’ 정도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둘째,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동안 성과를 발휘한 훈련법을 바꾸려면 저항이 따르기 마련인데 새로운 훈련법, 새로운 지식에 열려 있다. 셋째,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도적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예측 가능성이 커진다. 어떤 훈련을 했을 때 적중률이 올라가고, 메달 색깔이 바뀌는지 정확히 맞힐 수 있다. 입력값에 따른 결괏값이 일정해지므로 훈련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사격 반효진 선수는 슛오프 접전 끝에 0.1점 차로, 김우진 선수 역시 슛오프 동점에서 4.9mm 차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단 한 발로 승부가 갈리는 순간, 그 긴장감을 어떻게 견디는 건가. “선수들에게 훈련한 만큼, 실력만큼만 하고 오자고 이야기한다. 불안을 숨기거나, 자신을 속이면 밖으로 불안이 뛰쳐나온다. 실력이 8이면 8만 하고 오자, 3이면 3만 하고 오자고 한다. ‘더 잘해라’ ‘더 열심히 해라’ 하지 않는다. ‘그대로만 하고 오자’고 한다. 아, 양궁은 다르다. 양궁은 30발 쏘면 30발 전부 10점인 선수만 뽑아 가니까.” ―경기에 뛰는 선수라면 누구나 잘하려고 하지 않나. “잘하려고 하면 나를 잃어버리고, 그러면 진다. 배드민턴을 칠 때 짧게 치려고 손목을 빨리 꺾는다. 잘하려고 하면 평소보다 더 빨리 꺾게 되고 네트에 걸린다. 다음에는 더 늦게 꺾어 보는데 그럼 아웃이 된다. 평소 익힌 감을 믿어야 한다. 매일 땀 흘려 훈련하는 이유다.” ―아무리 평소 훈련한 대로 경기에 임한다 해도 지고 있을 때 흔들리지 않는 건 경이롭다. 탁구 신유빈 선수가 내리 3세트를 졌을 때나, 유도 안바울 선수의 투혼을 보면 보는 사람도 눈을 질끈 감게 된다. “그 순간 나를 얼마나 믿느냐의 문제이다. 평소 역전당하는 상황을 가정해서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맞춰 훈련한다. 열심히 훈련한 나를 믿어야 한다. 사격할 때 총을 쏘는 리듬이 있다. 평소 ‘탕탕탕’ 쏘는데 ‘탕탕탕탕’ 쏘고 있다면 긴장해서 리듬을 잃은 거다. ‘리듬이 달라지는 상황에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리듬을 찾는다’ 이런 연습을 하고 출전하는 거다.”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라고 적은 반 선수의 쪽지가 화제가 됐고, 펜싱 도경동 선수는 “질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태권도 김유진 선수는 “이거 하나 못하겠어”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나는 나를 알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인 동시에 자신의 수행 능력을 점화시키는 큐(cue·신호) 단어라고 할 수 있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펜싱 박상영 선수가 상대 선수를 공격하기 전에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를 주문처럼 외웠다. 민첩하게 칼을 찌를 수 있는 수행 능력을 불러오는 큐 단어인 거다. 선수마다 각자의 큐 단어가 있다.” ―힘든 훈련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최고가 되고 싶은 동기는 어디서 나오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그걸 연구한 적이 있다. 선수들에게 메이저리그를 열망한 이유를 물었더니 ‘먹고살기 위해서’를 첫손에 꼽았다. 그다음으로 ‘명예를 드날리는 게 좋아서’ ‘내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순이었다. 놀런 라이언의 공을 쳤다,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으로 잡았다는 만족감을 좇는 거다. 세 가지 이유가 섞여서 강력한 동기가 된다.” ―보통 직장인들도 같은 이유로 회사에 다니지 않나. “안세영 선수와 비슷한 배드민턴 실력을 갖춘 선수가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안 선수의 동기 부여가 더 강력하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는 타고난 기질도 있는 것 같다.” ―국가대표 선수 중에서도 감탄할 만한 마인드를 가진 선수가 있었나. “국가대표 선수들은 거의 그렇다. 탁구 현정화 감독이나 농구 하은주 선수는 그동안 만난 어느 의사나 교수보다 똑똑했다.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미래의 계획이 뚜렷했다. 실제 은퇴 이후에도 훌륭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만난 쇼트트랙 김아랑 선수도 기억에 남는다. 첫 상담에서 금메달을 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케이트 왜 탔어요’ ‘앞으로 목표가 뭐예요’ ‘스케이트를 타면서 가치를 두는 건 뭐예요’ 이런 질문을 던졌는데 19세 소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술술 답했다. 일주일 뒤, 한 달 뒤, 일 년 뒤 목표를 세워 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왔다고 했다. 미래와 연결될 때만이 지금 이 순간 힘든 훈련이 가치를 갖는다. 정신과 의사가 해 줄 조언이 없었다.” ―줄곧 계획을 강조하는데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했더니 메달을 땄다’는 선수도 있었다. “참 겸손한 말이다. 선수들 마음속에는 365일 전부 계획이 있고 그중 하루를 열심히 살고 ‘×’ 표를 한 거다. 성공한 선수들은 다 계획이 있다.” ―선수들의 발랄하고 기발한 메달 세리머니에 즐거웠다. “준비하고 나온 것일 텐데….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 정말 건강해 보이지 않나.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누군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미야’는 기억할 것이다. 금메달이 아니더라도 선수들이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했는지 국민이 알아보고 열광했다. 평창 올림픽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가 결과보다 과정에 관심을 갖고 스포츠를 즐기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런 변화를 지켜보는 건 의사로선 행복한 일이다.” ―우리는 메달을 딴 순간에만 주목하지만, 선수들은 ‘포스트 올림픽 증후군’을 겪는다고 한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허무감이 크다. 선수 인생 전체로 보면 올림픽은 한 계단이다. 인생 목표가 계단 10개라고 치자. 금메달을 따서 3계단을 올라가려고 했는데 못 따서 1계단만 올라갔다. 다음에 2계단 더 올라가면 된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다. 양궁 김우진 선수가 ‘메달 땄다고 젖어 있지 마라’, 사격 김예지 선수가 ‘0점 쐈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처럼 인생을 이런 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 한덕현 중앙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54)중앙대 의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와 보스턴대 연구 전임의로 각각 뇌과학과 스포츠 심리를 연구했다. 현대유니콘스, FC서울, KT 위즈, LG 트윈스 등 프로야구단에서 스포츠심리 닥터를 지냈다.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을 시작으로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2024년 파리 올림픽까지 국가대표 선수들의 심리 코칭을 담당했다. 미국 정신의학회 젊은 연구자상, 한미자랑스러운의사상, 유한의학상 등을 수상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캐나다와 미국 북부 등 북미 지역에서 미국 플로리다, 하와이, 푸에르토리코 등 이른바 선벨트(Sun belt) 지역으로 이동해 겨울을 나는 은퇴자들을 철새에 빗대 ‘스노버드(Snowbird)’라 부른다. 겨울철, 여름철 주택 2채를 사용하는 것은 ‘스노버딩(Snowbirding)’이다. 캐나다는 공적연금이 탄탄하고, 미국은 퇴직연금 부자가 많다. 덕분에 연금이 두둑한 은퇴자들이 스노버드가 되어 여유로운 노후 생활을 누린다. ▷연금 선진국에는 미치진 못하지만, 우리나라도 연금 후진국에선 차츰 벗어나고 있다. 연금을 받는 노인이 받지 않는 노인을 처음 앞지른 게 지난해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5월 연금을 받는 고령층(55∼79세)이 처음으로 800만 명을 넘어섰다. 고령층 인구 2명 중 1명이 공적연금(국민·기초·공무원 연금 등)과 사적연금(퇴직·개인·주택 연금 등) 중 1개 이상의 연금을 받고 있었다. ▷연금 수령자도 많아졌지만, 연금 수령액도 늘고 있다. 월평균 수령액이 82만 원인데 지난해 대비 10% 가까이 늘었다. 10년 전(42만 원)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통계청은 연금 수령자와 수령액이 동시에 늘어난 이유로 국민연금을 꼽았다. 국민연금이 전국적으로 도입된 1999년 40대였던 ‘베이비붐’ 세대가 연금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초연금 수급자도 올해 7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연금 수령자 절반은 한 달 연금액이 50만 원도 되지 않는다. ▷공적연금 제도가 성숙하면서 노후 안전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사적연금은 성장 속도가 다소 느리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령이 시작된 개인형 퇴직연금(IRP) 53만 계좌 중에 단 10%만 연금으로 받았다. 나머지는 모두 일시금으로 찾아갔다. 쌓인 연금액이 적은 데다 수익률도 낮은 탓이다. 최근 5년간 퇴직연금 수익률은 2%로 정기적금보다도 못했다. 직장인 ‘백만장자’를 만드는 미국 퇴직연금 ‘401(k)’에 비할 수 없고, 국민연금(7%)과도 차이가 크다. 우리나라 노후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이지만 주택연금 가입자는 12만 명이 조금 넘는다. ▷지난해 기준 적정 노후 생활비는 월 324만 원이다. 현재 월평균 연금 수령액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고령층 10명 중 7명이 “더 일하고 싶다”고 했다. 연금 인프라가 깔렸으니 가입자와 가입 기간이 늘어나면 우리나라도 겨울마다 남쪽 나라로 떠나는 ‘스노버드’가 보편화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연금 제도의 내실을 다져야 한다. 적자가 예고된 국민연금은 개혁으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 하고, 퇴직연금은 낮은 수익률과 가입률을 개선해야 한다. 일자리가 불안정해 연금을 꾸준히 적립하기 어려운 사각지대 지원도 중요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5월 출생아 수가 지난해 대비 두 달 연속 늘어났다. 내리막을 걷던 출생아 수가 두 달 연속 증가세를 보인 건 8년 6개월 만이다. 코로나19로 미뤘던 결혼과 출산이 재개되면서 깜짝 반등한 것이다. 2020년부터 20만 명대로 추락한 출생아 수가 바닥을 찍은 것 아니냐는 ‘출산율 바닥론’도 흘러나온다. 조영태 서울대 인구정책연구센터장은 이와 관련해 “아직 장기적인 추세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필요한 인구 정책은 인구를 늘리려고 하기보다 인구가 줄어도 사회가 잘 작동하도록 제도와 정책을 손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와 16일 만나 한국의 미래를 결정할 인구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민간위원을 1월 “더는 할 일이 없다”며 사퇴했다. 그러면서 “현 정부가 이전 정부의 실패를 답습하고 있다”고 했는데….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당장의 출산율 제고가 아닌 인구 감소에 대비한 사회 전반의 연착륙을 준비할 것을 제안했다. 현 정부에서 부처마다 미래 대응 전략이 ‘주르륵’ 나올 줄 알았는데 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역대 정부마다 활동했던 비슷한 전문가들이 다시 모여 복지 중심의 저출산 정책만 논의했다. 복지 확대만 논의한다면 내가 할 일은 없다고 봤다.” ―복지 중심 저출산 정책이 왜 문제인가. “복지 확대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인구 정책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출산율이 낮아진다고 하면 가깝고 즉각적인 결정 요인부터 멀고 근본적인 결정 요인이 존재한다. 육아휴직 확대, 아동수당 지원 등은 가깝고 즉각적인 결정 요인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 정책이다. 복지 정책은 결혼, 출산, 육아를 왜 힘들어하는지를 묻는 설문조사를 근간으로 만들어진다. 당연히 ‘어렵다’ ‘지원이 필요하다’는 답변이 나온다. 인구 정책이라면 인구의 구조적 변동을 이해하고 예측해야 하는데 그런 근본적인 접근이 없었다. 이를 복지 정책이라고 하면 되는데 자꾸 인구 정책이라고 하니 문제가 생긴다.” ―복지 정책과 인구 정책을 혼동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 “예를 들어 육아휴직을 계속 확대해도 출산율이 반등하지 않는다면 다른 결정 요인이 있는 것이 아닌지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데 ‘아직 혜택이 부족하구나’ 하고 육아휴직 대상을 늘리고 급여를 올린다. 어린이집이 늘고, 아동수당을 주는 등 양육 환경이 계속 좋아졌는데도 정책 수요자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한다. 주택 문제도 서울에선 심각하지만, 지방은 그렇지 않다. 저출산 정책이 20년간 그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은 인구 정책이라는 큰 그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책 결정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는데…. 인구 정책으로 과감히 전환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다. 첫째, 정책에 관여했던 정부 관료나 전문가, 언론이 기존 프레임에 갇혀 과감한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특정 부처나 전문가 집단이 ‘정책 기득권’이 되어버린 거다. 둘째, 대통령 임기 중에 성과를 내고 싶어 한다. 근본적인 대응을 제안하면 맞는 얘기라고 하면서도 너무 먼 이야기라 당장 정책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고들 하더라.” ―최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기존 정책에 대한 반성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부는 대학 학부부터 박사까지 5.5년에 마치게 하겠다고 했다. 빨리 사회에 나가면 빨리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교육부는 사실 제일 할 일이 많은 부처다. 교실에 30명 놓고 가르칠 때와 10명 놓고 가르칠 때는 교육 방식이 달라야 하지 않겠나. 3년 후면 한 해 20만 명 태어난 아이들이 학교를 간다. 이 아이들을 지금껏 해 온 것처럼 일렬로 줄 세울 건가. 교실에 10명도 앉아 있지 않는데 9등급으로 나눠야 하느냐 말이다.” ―대통령저출생대응수석비서관이 임명됐고, 앞으로 인구전략기획부가 신설된다. “우리 사회 전반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저출산은 풀리지 않는다. 2030년, 2040년 우리 사회 모습을 그려보고 현재 정책과 제도가 그때 제대로 작동할 것 같은지부터 물어야 한다. 저출산대응기획부에서 인구전략기획부로 바뀐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저출산 대응으로 가는 순간 이 부처는 보건복지부나 여성가족부 역할밖에 못 하는 것이고 기획이 아니라 사업 부처가 된다. 그렇다면 이 부처는 필요 없다.” ―어떤 정책이 미래에 작동하지 않을 정책인가. “현재 기초지자체가 226곳이다. 한 해 80만 명 이상이 태어날 때는 지자체마다 사람도 있었고, 공통적인 행정 기능이 필요했다. 3년 전부터 한 해 출생아 수가 20만 명대로 주저앉았다. 게다가 절반 이상 수도권에서 태어났다. 과연 226곳 모두 유지할 필요가 있나. 한 곳, 한 곳마다 행정 비용이 상당한데 감당할 수는 있나. ‘지방 소멸론’의 해결책이 지자체 226곳을 유지하는 것인지, 미래 인구 수에 맞춰 지자체 수를 줄여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행정안전부는 지방소멸기금 10조 원을 89곳에 나눠주며 인구를 늘리라고 한다. 과거에 만든 제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데 인구를 늘려 그 제도를 다시 작동하자는 것이다. 제도를 사람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제도에 맞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문화 지체 현상에 빗대 인구 지체 현상을 설명했다. 한국은 지금 인구 지체 현상을 겪고 있는 건가. “아이 낳는 연령이 20대부터 40대에 걸쳐 있고, 가구는 1인부터 다둥이까지, 외국인도 섞여 살고, 사는 모습이 굉장히 다양해졌다. 그런데 사회제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으니, 사람들이 한 꼭짓점을 향해 일렬로 달리는 거다. 대입, 노동시장, 사회보험 제도 등이 과거 그대로이다. 인구 구조에 맞지 않는 제도가 사람들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 저출산 고령화가 문제가 아니라 이 변화에 맞지 않는 제도가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생존 본능이 재생산 본능을 누르고 있다. 이를 인구 지체 현상이라고 봤다.” ―출생아 수가 지난달부터 지난해 대비 반등했는데…. 인구 지체 현상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는 뜻인가. “인구 그래프는 직진이 아니라 진동하며 움직인다. 그 진폭 가운데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경쟁이 줄면 모든 에너지를 생존에 쓰지 않고 재생산에 쓸 가능성이 생긴다. 또 여성의 수가 줄면 분모가 줄어들어 출산율이 올라간다. 일본의 출산율 반등이 그런 경우다.” ―이민이 대안이 될 순 없나. “이민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제대로 받아야 한다. 지금은 지난 수십 년간 제조업 공장을 유지했는데 당장 일할 사람이 없으니 공장을 돌릴 외국인을 뽑아 달라는 것이다. 경쟁력도 낮고 내국인이 오지 않을 것이 정해진 산업에 싼 노동력을 구해 과거로 회귀하자는 식이다. 이래선 안 된다. 인구가 줄어드는 2030년, 2040년 대한민국이 비교 우위에 있을 산업이 뭔가를 찾아내고 여기에 필요한 인재를 받아야 한다. 경쟁력 있는 산업도 내국인만으로 유지가 어려운 시점이 온다. 특히 연구개발(R&D) 인력난이 심각해질 것이다. 인구가 줄고 취업이 쉬워지면 석박사 학생이 급감한다. 두뇌 유치를 위해 미국 일본 중국과 경쟁해야 할 시점이 올 거다. 지금부터 우수한 외국인 학생들을 유치할 수 있는 제도를 준비해야 한다. 기득권을 가진 기성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이민 정책을 펴야 한다.”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지 않고는 저출산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70만 명대가 태어난 1990년생 청년보다 40만 명대가 태어난 2010년생 청년이 체감하는 경쟁 압박이 줄지 않았다. 인구가 줄었으면 경쟁이 주는 것이 당연한데 왜 그럴까. 서울, 딱 한 곳에만 경쟁 피라미드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경쟁 피라미드가 여러 곳에 분산돼 있었다. 지금은 서울로 대학 가고, 서울에서 직장 잡고, 서울에서 집을 사야 하니 경쟁이 줄지를 않는다. 연령별로 스마트폰 동선을 분석했는데 25∼34세 청년의 동선은 서울 강남 종로 영등포 마곡, 경기 성남시 판교에만 몰린다. 서울이라는 꼭짓점만 바라보는 청년을 대상으로 일과 삶의 균형이나 보육을 지원해도 그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지난해 출생아 수가 23만 명이다. 합계출산율은 어느 날 갑자기 2.0이 되지 않는다. 2035년에 출산율 1.0이 된다 하더라도 출생아 수가 30만 명이 안 될 것이다. 인구 감소세에 맞춰 국방, 교육, 산업 모조리 바뀌어야 한다. 인구의 거대한 흐름이 단기간에 바뀌지 않으므로 인구 흐름을 예측해 미래를 새롭게 그려 나가자는 거다. 개인적으로 ‘인구개발 5개년 계획’이라도 세워야 한다고 본다. 쌍팔년도식이라고 비난만 할 게 아니다.” 조영태 서울대 인구정책연구센터장(52)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대에서 사회학 석사, 인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로 인구학을 가르치고 있다. ‘정해진 미래’ ‘인구 미래 공존’ 등의 저서를 통해 인구 구조 변동에 따른 한국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 전략을 제시해 주목받았다. 베트남 정부 인구 정책 자문,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필수의료 공백을 해소할 해법을 두고 정부와 의료계는 줄곧 평행선을 그려 왔다. 정부는 의대 증원을 통해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고, 의료계는 수가 인상을 통해 필수의료 인력 유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사가 늘고, 수가가 오르면 정말 호흡기를 단 필수의료를 살릴 수 있을까. 정부나 의료계 스스로도 회의적일 것이라고 본다. 정부-의료계 암묵적 담합 속 비급여 팽창 현재 필수의료 붕괴의 근저에는 ‘제2 건강보험’이 된 실손의료보험이 있다. 감기로 의사를 만나면 급여 진료이고, 수액을 맞으면 비급여 진료다. 건강보험이 가격을 정하지도, 지불하지도 않는 비급여 진료 시장은 실손보험 확대와 맞물려 급속히 팽창했다. 그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팀의 보고서가 보여준다. 한국의 국민 의료비는 2022년 처음으로 200조 원을 넘어섰다.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육박하는 총액도 놀랍지만, 증가 속도는 더 놀랍다. 국민 의료비는 2000년대까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이후 급증해 OECD를 앞질렀다. 경제 성장, 고령화라는 변수를 고려해도 한국은 특이 사례로 분류된다. 주요 원인은 17조 원에 달하는 실손보험 지출이다. 실손보험 확대 시기와 의료비 급증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이는 ‘공유지의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동네 의원이 수액주사, 도수치료 등 비급여 진료로 쉽게 돈을 벌자 의사들이 응급실, 수술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보상이 적고, 워라밸까지 형편없는 필수의료 분야는 그야말로 파탄이 났다. 실손보험의 의료 시스템을 위협할 지경에 이른 데는 정부와 의료계의 암묵적인 담합이 있었다. 의사들은 진료를 볼수록 손해인 저수가를 벌충하기 위해 비급여 진료를 늘려 왔다. 보험료 인상 역풍이 두려운 정부는 사실상 이를 묵인했다. 그동안 의사는 과잉 진료로 돈을 벌고, 환자는 의료 쇼핑을 다녔다.‘꼬리’ 실손보험이 ‘몸통’ 건강보험 흔들어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는 왜곡된 의료 시스템을 바로잡기 위한 의료 개혁 과제를 발표하고 있다. 우선 건강보험 수가를 개편해 중증·응급 환자를 다루는 필수의료에 대한 보상을 늘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수가를 아무리 올린다 한들 비급여 진료로 인한 수익을 따라잡을 수 없다. 보험료 부담과 의료 접근성을 고려하면 그 한계도 분명하다. 기형적인 의료 보상 체계로 인해 의사가 아예 필수의료에 남으려고 하질 않는다면 상급종합병원의 체질 개선도 요원해진다. 병원에 의사가 없는데 중증 환자 비율을 높이고 전문의를 늘리겠다는 건 공상에 가깝다. 전공의들이 5개월 넘도록 복귀하지 않는 배경에는 굳이 응급실, 수술실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개원하면 된다는 선택지가 남아 있어서다. 실손보험을 그대로 두고는 필수의료 살리기도, 의대 증원의 효과도 미미할 것이다. 꼬리인 실손보험이 몸통인 건강보험을 흔들고 있는데도 정부는 비급여 진료 시장을 통제하는 데 손을 놓고 있었다. 수액주사, 도수치료 같은 비급여 진료비는 병원마다 천차만별이다. 의사가 마음대로 가격을 정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불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간 보건복지부는 권한이 없다며 물러서 있었고, 금융위원회는 보험료를 높이거나 지급 대상을 축소하는 미세 조정으로 손해율을 맞추는 데만 급급했다. 이제는 보건의료 체계 전반을 살피는 다른 접근이 요구된다. 의료계와 보험업계의 반발이 따를 것이다. 의료개혁특위를 금융위원장이 맡든지, 복지부가 실손보험을 맡든지 부처 간 칸막이를 넘지 못했던 관성적인 논의를 벗어나야 한다. 과감한 상상력과 실행력으로 실손보험 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의료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이날까지 그처럼 결 좋은 인간을 만나 본 적 없다.’ 2007년 동아일보에 실린 ‘내 마음속의 별’ 시리즈에서 가수 조영남은 21일 세상을 떠난 고 김민기를 자신의 스타로 꼽았다. 바로 그런 이유였다. 돈 있는 친구를 불러 술이라도 사면 벼락같이 화를 냈을 만큼 “어설픈 돈 자랑, 힘자랑을 싫어한다. 바른 결을 타고났다”고 했다. 고인의 삶을 한 단어로 응축한다면 그의 말처럼 ‘좋은 사람’ 아닐까. ▷1970년 서울대 미대 재학 중에 만든 노래 ‘아침이슬’이 군사정권 시절 광장의 노래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되고 고인은 정보 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가 다시 노래를 부른 건 생계를 위해 취업했던 피혁 공장의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서였다. 그가 노동자 합동결혼식의 축가로 만든 곡이 ‘상록수’다. 현실을 노래할수록 그는 시대의 한가운데로 소환돼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1970, 80년대 저항의 상징이었지만 그는 정작 “제 노래를 싫어한다”며 부르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한 젊은 날, 음악으로 시려웠던 젊은 날. 그 시절에 대한 애증이 묻어난다. ▷1991년 ‘저항의 상징’이라는 틀을 깨고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며 연출가로 변신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공연되는 29년 동안 국내 창작뮤지컬 시장이 성장했고, 현재 영화계 주역인 배우들이 배출됐다. 배우들과 투명하게 수익을 나누는 등 공연계의 악습도 바꿔 나갔다. “소극장은 농사로 치면 못자리 농사”라더니 고인은 걸출한 농사꾼이었다. 그가 33년간 고집스레 지켜 온 학전은 지금 만개한 우리 문화예술의 못자리였다. “내가 뭐라고 이름을 남기겠나”라고 했지만 빈소에는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다며 흐느끼는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월 문을 닫은 학전 경영이 어려워진 건 2004년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수익이 되지 않는 어린이 공연을 꾸준히 올렸던 때문도 있다. 아이들이 웃는 모습이 좋다며 자주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고인은 야학에서 달동네 아이들을, 공장에서 어린 노동자를 가르칠 적부터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해 왔다. 민중가요 가수와 어린이극 연출자, 평생 자신보다 타인의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고인이었기에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을 것이다. ▷때론 가혹했을 세상에 고인이 남긴 마지막 말은 “그저 고맙다”였다고 한다. 배우들을 향해 “나는 뒷것, 너네들은 앞것”이라며 빛나기를 거부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가지고 뭘 안 해도 된다”며 뒷것을 자처했고 가족과 지인에게는 “고맙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는 말을 남겼다. 김민기. 향년 73세. 좋은 사람으로 살았기에 고단했을 그의 평안을 기원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서울 아파트 가격이 슬금슬금 오르며 ‘불장’ 조짐을 보이지만 지방 주택시장은 여전히 냉기가 돈다. 최근 전국 아파트 평균 가격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서울 아파트 한 채(12억9967만 원) 가격이 지방 아파트 3.7채 값이다. 10년 전만 해도 지방 아파트 두 채면 서울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서울 입성’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서울과 지방 부동산의 ‘초양극화’ 현상은 분양 시장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른바 악성 미분양으로 분류되는 준공 후 미분양은 5월 말 기준 1만3230채로 최근 10년간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방이 80%를 차지한다. 공사가 끝난 뒤 사용 승인이 나고도 안 팔린 아파트를 떠안은 건설사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조달한 자금을 갚을 수 없다.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산이라도 하면 가뜩이나 침체된 지역 경제에 이런 악재가 없다. 올해 상반기 부도를 맞은 건설사는 20곳으로 이미 지난해 1년 치 수준과 맞먹는다. ▷도산 위기에 직면한 지방 중소 건설사들은 원금 보장, 할인 분양 등 ‘미분양 떨이’로 유동성 확보에 나서고 있다. 전국 시도에서 미분양 물량이 가장 많은 대구의 경우 전체 분양가의 15%를 깎아주고 2500만 원을 환급해 준다는 아파트가 등장했다. 이 아파트는 입주 2년 후 시세가 떨어지면 원래 매입 가격에 다시 사 주겠다는 약속도 내걸었다. 기존에 분양받은 입주민들과의 갈등도 심해지고 있다. 할인 가격에 분양받은 입주민의 이사를 막으려고 정문을 지키거나 아예 철조망을 두른 곳도 있다. 할인 분양받은 입주민에게는 관리비를 비싸게 물리기도 한다. ▷지방 미분양 재고가 좀처럼 줄지 않는 현상은 고금리로 집 살 사람은 줄었는데 분양가는 높게 책정된 탓이 크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치솟은 자재값, 임금 등이 분양가에 반영됐다. 건설사의 자구 노력도 부족했다. 정확한 수요 예측 없이 아파트부터 지었고 원가 절감을 통해 상품성을 높이려 하지 않았다. 수요가 몰리는 서울은 그 격차가 덜하지만 지방 아파트 분양가는 매매가보다 ㎡당 평균 163만 원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서울의 똘똘한 1채로 투자 쏠림이 더욱 심해지면서 지방 건설업 생태계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지방 곳곳에 철근을 드러낸 채 공사가 멈추거나 입주가 지연되는 아파트가 늘고 있다. 자금력이 달리는 지방 중소 건설사와 그 협력업체들이 줄도산 위기에 처해 있고 인근 상권들도 맥을 못추고 있다. 서울과 지방 주택 시장의 초양극화가 심화하면 지방의 박탈감이 커지고 지방 소멸은 가속화할 우려가 크다. 서울과 지방의 부동산 정책을 달리 쓰는 세심함이 필요한 시기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