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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관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5일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자 당 안팎은 거의 폭탄 맞은 분위기다. “정치 판결” “미친 정권의 미친 판결” “사법 살인” 소리가 터져 나온다. 심지어 공직선거법에서 ‘허위사실공표죄’를 삭제하는 법안까지 발의했다. 이재명을 위한 아부성 법안 상납이다. 묻고 싶다. 민주당은 입때껏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를 몰랐단 말인가? 당 대표 비서실장 이해식 의원이 이재명의 빗속 연설 사진과 함께 올린 “신의 사제, 신의 종”이라는 글처럼 신성(神性) 가득한 무균 무때 정치인인 줄 알았던가? 2021년 8월 말 ‘이재명 후보님, (주)화천대유 자산관리는 누구 것입니까’란 칼럼이 경기경제신문에 실린 이후, 아니 실은 그 전부터, 이재명 주변엔 꺼림칙한 법적 도덕적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지느냐가 문제일 뿐. 그래서 이재명은 대선에서 패하기 무섭게 금배지에 당 대표직까지 겹겹이 방탄복을 껴입고는 민주당을 볼모로 장악했던 거다. 패장은 잠시 정계를 떠나는 기존 정치문법까지 무시한 채.● 이낙연 측 “대장동 문제로 민주당 위기” 민주당은 이번 판결이 윤 정권의 ‘대선 후보 죽이기’라고 주장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대선 후보 치고 이재명 같은 전례가 없다. 범죄 혐의 그득한 사람을 민주당이 대선 후보로 뽑았을 뿐이다. 심지어 대선 경선 내내 이낙연 캠프 측은 “대장동 문제가 정권 재창출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가 돼선 안 된다”고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를 누누히 경고했다. 귀담아 듣지 않았던 민주당, 특히 이재명 지지자들은 제 발등 찍어야 마땅하다.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숱한 네거티브를 겪은 사례는 있다. 아들이 병역을 회피했다는 병풍(兵風) 의혹은 거의 치명상이었다. 병풍을 터뜨린 김대업은 2004년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선 후보로서 이회창이 ‘내 삶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뼈아픈 회한을 남긴’ 일이라던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사건은 2003년 10월 터졌다. 그는 누구처럼 잡아떼지 않았다. 전모를 다 알진 못했다지만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라며 곧바로 대검중수부로 가서 조사받았다. 불법 대선자금은 이회창 측 823억원, 노무현 측 119억원으로 드러났고 검찰은 당시 노 대통령과 이회창에 대해선 모금과정에 직접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입건 처리하고 실무자들만 처벌하고 끝냈다. ‘정치보복’은 없었던 셈이다(수사 검사 중 윤석열 검사가 있었다). ● 민주당 대선 후보는 바뀔 수도 있었다이재명의 ‘혐의’는 다르다. 대선 후보일 때, 그러니까 현 대통령의 정적일 때 지은 죄가 아니고, 과거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때 저지른 자업자득이다. 이낙연 측에선 “이재명 후보가 구속될 수도 있다” “대장동 의혹이 당에 위험요인이 되지 않기 바란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이 때문인지 2021년 10월 5일 마지막 TV토론 뒤 국민여론조사 성격이 강한 3차 선거인단 투표에선 이낙연이 62.37%로 이재명(28.30%)을 크게 앞섰을 정도다. 만일 최종합계에서 중도사퇴한 정세균 김두관 표를 사표처리하지 않고 전체 투표자 수에 합쳤다면, 이재명의 누적 득표율은 50.29% 아닌 49.3%로 내려간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이낙연과 결선투표를 해야 한다. 민주당 대선 후보가 뒤바뀔 수도 있었다는 의미다. 패자의 흔쾌한 승복 없이 이재명을 대선 후보로 뽑은 지 열흘도 안 돼 대장동 의혹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남욱이 미국서 돌아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국에 며칠만 일찍 들어왔으면 (이재명) 후보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네요.” 귀국 바로 다음날 이재명 최측근 김용이 체포돼 사흘 만에 구속된 것이다. 대장동 일당으로부터의 자금 수수 자체를 부인했던 김용은 결국 그들에게 경선 무렵 선거자금을 받은 혐의로 작년 11월 1심 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돈을 건넨 남욱은 징역 8개월이다. 그 ‘윗선 의혹’이 있는 이재명에 대해선? 마냥 늘어지게 재판중이다. ● 민주당은 단체로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렸나대선 패장은 “오롯이 내 책임”이라며 당분간 해외로 떠나든지 보통 자숙의 기간을 갖는다. 1992년 김대중(DJ)부터 2022년 경선 패자 이낙연도 대충 비슷했다. 엄밀히 보면 이 공식은 2012년 문재인 때 깨졌다. 그는 대선 출마 때도 의원직을 놓지 않았고 대선에 패하자 백의종군한다면서도 여의도에서 국정 발목잡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재명은 한술 더 떴다. 대선에 패한 뒤 청년정치인 박지현을 앞세워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부터 장악했다. 새미래민주당 전병헌 대표의 한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민주당은 아직 친문(친문재인)이 주류였다. 친문은 이낙연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 당을 수습하려 했다. 그런데 대선 패배 책임을 진다며 대표직을 사퇴했던 송영길이 돌연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인천 계양 의원직을 던진다. 그 자리에 이재명이 나섰다. 지역구 유세 중 이재명이 제 손으로 제 목 치는 시늉까지 해가며 “이번에 이재명 지면 정치생명 끝장난다. 진짜요. 끽” 하는 영상을 보면, 의원 불체포특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실감이 난다. 금배지도 못 미더웠는지 이재명은 그해 8월 당대표로 나섰다. 그리곤 검찰이 기소해도 대표직을 유지할 수 있게 방탄 당헌으로 고치고, 공천권을 무기로 ‘비명횡사, 친명횡재’를 밀어붙여 민주당을 완전 이재명당으로 만들었다. 올 8월엔 대표 연임까지 성공해 24년 만에 DJ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재명 유일체제가 된 70년 역사의 민주당에서 지금 이재명한테 ‘개인 비리 혐의’가 수두룩했다는 소리는 입 밖에도 내기 힘들다. 그래놓고 이제와서 생전 처음 이재명의 범죄 혐의를 들은 것처럼 “정치 판결” 운운하는 건, 솔직히 웃긴다. 마치 인질들이 인질범에 애정과 연민, 애착을 갖게 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것 같다. ● 가난하게 자랐다고 다 이재명 같진 않다이재명에게 강점이 많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가난 속에 태어나 열세 살에 공장노동자가 됐고 장애도 입었으나 검정고시로 대학에 갔다. 고시 합격 후 호의호식 마다하고 노동변호사로, 시민운동으로, 마침내 어려운 사람을 위해 정치하겠다고 나선 서사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감동을 뛰어넘는다. 이재명이 대선 후보일 때 유시민은 ‘머리 좋고 학습 능력이 뛰어나 목표를 정하면 자기 자신을 계속 바꿔나가는 사람’이라고 MBC에 나와 평했다. 비슷한 의미로 진중권은 이재명을 ‘극단적으로 발달한 기회 이성의 소유자’라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어떤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그래서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드는 강한 추진력이 장점인데 누구처럼 자신만 알고 공사(公私)구분을 못한다는 게 나는 무섭다.1960년대 가난하게 자란 사람이 어디 이재명 뿐이랴. 그는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에서 청소부였던 아버지가 썩은 과일을 주워와 가족들에게 먹이곤 했다고 썼다. 나이 들어 내 돈으로 신선한 과일을 사 먹게 되니 어찌나 후련했는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런 사람이 경기도지사 시절 도 예산으로 과일을 2791만원어치나 먹었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법카 불법 사용을 공익제보한 조명현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법카’에서 지사 공관 냉장고에 아침마다 모닝 샌드위치 3종 세트(샌드위치 2개, 닭가슴살 샐러드, 컵과일 2개)를, 락앤락 반찬통엔 산딸기나 블루베리를, 야채 칸에는 사과와 복숭아를 지퍼 팩에 넣어두어야 했다고 썼다. 7급 공무원의 꼼꼼한 제보 덕에 검찰은 최근 이재명의 1억 원 넘는 경기도 예산 사적 사용과 법인 카드 유용을 기소할 수 있었다. 쪼잔한 기소라고? ‘공적 지위를 남용한 사적 이익 추구’가 바로 부패다. 저서에선 성남시 ‘청년 배당’ 덕에 3년 만에 처음 과일을 사먹었다는 학생을 눈물겹게 소개하면서 뒤로는 태연히 자기 잇속 차리는 이재명의 다면성이 섬뜩한 거다. ● 이재명과 민주당을 분리하라민주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연구보고서 ‘민주당의 역사와 정치철학’에서 “민주당은 K시대를 선도하는 대한민국 대표정당”이라고 했다. 2024년 8월 ‘다시 뛰는 대한민국’을 약속한 이재명 대표의 연임으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당원 중심 정당, 함께 잘 사는 미래를 만드는 준비된 정당”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 한 사람을 결사 옹위하는 정당은 민주정당이랄 수 없다.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일 뿐이다. 이재명이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진작 대표직을 내려놓고 재판 받아야 했다. 진정 자신 있고 당당하다면 애초 금배지를 달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터다. 안타깝게도 이재명에게 공선사후(公先私後)는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국민의 복이 거기까지인지 슬프지만 만일 그에게 공적 책무감이 남아 있다면, 이제라도 다수당 대표로서 정부 도울 일은 돕겠다고 나서주면 좋겠다. 이재명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못한다면, 민주당은 이재명과 갈라설 길을 찾아야 한다. 70년 역사의 민주당이,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역사적으로 구현해온 정통정당’이라는 민주당이, 숱한 범죄 혐의를 안고 있는 이재명에 인질로 사로잡힌 모습을 더는 봐줄 수 없다. 이재명만 아니라면 민주당을 지지하겠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윤석열 정부가 너무 못해서, 그동안 바친 순정이 아까워서, 이재명을 버릴 수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생물이고 억지로 되는 일은 없다. 국고보조금을 받는 민주당은 극성 당원들만의 정당일 수 없다. 백범이 원했던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원한다면, 민주당은 이제 이재명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어야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노파심에 밝히자면, 나는 또 탄핵이 있어선 안 된다고 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적지 않은 국민이 ‘탄핵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당 대표나 비서실장, 장관한테는 대면보고 한번 안 받으면서 사인(私人)의 국정농단을 허용한 전임대통령. 대통령 권력을 남용한 ‘유신 공주’만 파면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절로 복원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후임 대통령 문재인은 우리국민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로 몰고 갔다. ● 대통령 부부는 안드로메다에 살고…윤석열 대통령의 기자회견으로 대통령 내외가 안드로메다에 살고 있음이 확인됐다. 그럼에도 선뜻 탄핵 소리가 안 나오는 건 탄핵 트라우마 때문이다. 설령 윤 대통령이 공천개입을 했거나 부인이 국정관여를 했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도 않는 분위기다. 그래서 당장 대통령이 물러나면 어쩔 건데? 우파궤멸도 겁나지만 ‘이재명의 민주당’ 집권은 더 겁난다. 죽어도 경험하기 싫은 나라로 끌고 간다면, ‘검찰공화국’이나 ‘김건희의 나라’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답답할 때는 혹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역사를 들여다본다. 세상에 이럴 수가.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1519년(중종14년) 기묘사화, 1545년(명종 원년) 을사사화 등 4대 사화(士禍)로 사대부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새 임금이 등극한 조선 선조 시절(재위 1567~1608), ‘사화 트라우마’가 ‘마이너스 에너지’로 작용했다는 거다. 류성룡 관련 학술지인 2023년 ‘서애연구’에서 발견한 대목이다. ● 사화 후유증에 사대부들은 몸을 사렸다“문정왕후의 사망과 선조의 등극을 계기로 이른바 ‘훈척의 시대’가 가고 소위 선비들이 주 도하는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무오·갑자·기묘·을사의 ‘4대 사화’가 가져다 준 깊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다. 이 트라우마는 새로운 국면에서 마주 하 게 되는 군신 또는 신하들 사이의 통합을 저해하는 ‘마이너스의 에너지’이자 ‘소모적인 정 치적 비용’으로 작용하게 된다.” (백권호 논문 ‘류성룡에 대한 일부 부정적 실록 기록의 재해석에 관한 연구’) 명종 말 선조 초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1499~1572)은 여섯 살 나이에 갑자사화를 겪었다. 조부와 부친이 연루돼 유배를 떠났으나 2년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바람에 풀려날 수 있었다. 덕분에 이준경은 강직한 성품에도 조심성은 어쩌지 못했다. 상경한 퇴계 이황(1502~1571)에게 선비들이 몰려들자 “제2의 조광조가 되려고 하십니까” 우려했을 정도다. 국왕을 능가하는 인기나 영향력을 갖게 되면 중종 때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처럼 변을 당할 수 있다는 경고다. 퇴계 역시 아끼는 후배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내 “불에 뛰어드는 나방을 본받지 말고, 담장 밑에 서 있다가 압사하는 화를 당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성급한 개혁 추진의 위험성을 경계한 거다. 언제든 왕권이 오작동해 나라가 거꾸로 갈 수 있다는 깊은 불신. 그럼에도 사화 트라우마 때문에 임진왜란 같은 더 큰 화를 막지 못했다고는 죽어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 잘난 체하면서도 개혁의지 없는 선조왕후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첫 국왕이었던 선조는 원만하거나 진취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중종의 후궁의 손자였던 그는 왕이 될 꿈도 못 꾸었던 처지 때문인지 명확한 국정목표도, 개혁의지도 갖지 못했다(방상근 2019년 논문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이준경은 선조에 대해 명철하지만 그릇이 큰 인물은 아니라고 봤다. 선조 5년 죽음을 앞둔 그는 “이 늙은이 흙 속으로 돌아가며 전하께 당부드립니다”로 시작되는 유언을 남긴다(이한우의 군주열전 ‘선조’). 요약하면 학문에 힘쓰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위의(威儀·위엄 있고 엄숙한 태도)가 있어야 하고, 군자와 소인을 분간하고, 사사로운 붕당을 깨뜨려야 한다는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들여다보면, 어찌나 우리 현실과 들어맞는지 기가 막힌다. “사사건건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스스로 잘난 체 하는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계속 지금처럼 하신다면 백관이 맥이 풀려 수없이 터지는 잘못을 이루 다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환관의 국사 개입까지 허용했다안타깝게도 선조는 명재상의 유언조차 귀담아 듣지 않은 듯하다. 고집은 있는데 의심 많고,일관성이 없는데다 의지력과 결단력도 부족했던 선조는 율곡 이이가 줄기차게 국정개혁을 주장해도 “거행하기 어려울 듯하다”며 거부했다. 조보(조선시대 관보) 유출을 꺼리는 등 비판세력을 봉쇄한 건 물론이다. 심지어 임진왜란이 터지기 반년 전까지 기축옥사 뒤끝으로, 대대적 사대부들 처벌로 조선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이상혁 2009년 논문 ‘조선조 기축옥사와 선조의 대응’). 전형적 왕조 순환의 방식에 따르면, 새 왕조는 초기 번영의 시기를 구가한다. 정적들은 제거됐고 모든 부(富)는 왕의 곳간에 쌓여 있다. 하지만 귀족과 관료가 늘고 이들에게 토지와 특혜를 나눠줄수록 조세부담자가 줄면서 창건 100년도 안 돼 재정적 어려움을 맞는다. 이 때 과감한 개혁을 하면 내리막길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무능과 무책임과 부패로 개혁을 못하면, 망하는 거다. 중국 60개 왕조의 평균 수명이 70년도 못 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명나라는 276년만에 왕조가 바뀌었는데 조선이 무려 518년을 기신기신 버틴 것도 놀랍지 않은가. “심하게 타락한 관료제 국가는 중국같은 거대제국보다 한국같이 작은 나라에서 더 오랫동안 유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존 페이뱅크, 에드윈 라이샤워 등은 ‘동양문화사’에서 분석했다. 어느 정도 타락했느냐고? 조선 개국 200년 임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환관의 국정개입까지 허용했을 정도다. 명의 황제에게 원병을 청해야 한다는 제안을 처음 낸 것이 비변사 아닌 환관 이봉정이라고 선조가 호종공신을 책봉하며 밝힌 것이다. 환관의 국사 참여를 엄격하게 금지했던 조선 대신들로선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 트라우마 속에서도 당쟁은 벌어졌다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닦달하지 마시기 바란다. 사화 트라우마가 존재하던 선조 때 시작된 것이 당파요, 당쟁이었다. 기개 있는 군자라면 “아니되옵니다!” 목숨 걸고 국왕의 잘못을 지적하며 시정을 요구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천만다행히도 그 무렵은 인재가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했다. 실학자 이익도 “선조 때 뛰어난 인물들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했다. 임란과 정유재란까지 맞고도 선조가 나라와 왕조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인복이 있었기 때문일 터다(사화 트라우마로 뻑하면 사직서를 내고 낙향하긴 했다). 특히 이순신을 천거했던 류성룡은 당대 보기 드문 현실주의적 정치인이었다. 율곡처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서슴지 않고 직간(直諫)하는 대신, 때와 형세에 맞춰 수위를 달리하는 수시지의(隨時之義)가 신하로서의 의리라고 봤다. 아무리 필요한 간언이라 해도 우선 국왕에게 공감을 표시하며 군주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일 자세가 됐는지 살피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은 물론 자리까지 내려놓고 간곡히 할 말을 하며 전쟁 중 재상으로 나라를 지켰다(백권호 논문).● 탄핵의 존재 의미 “대통령도 조심하라” 선조 이후, 사화 트라우마가 있어 사화는 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도 탄핵 트라우마가 있어 대통령 탄핵은 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탄핵이란, 잘못하면 대통령 직(職)에서 파면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만 처절히 새기고 있다면 말이다.문제는 윤 대통령이 과연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는지 여부다. 공천 개입 의혹이 계속 터져 나오는데도 거짓 해명으로 국민 염장을 지르거나, 부인의 국정 개입 의혹이 역력한데도 “절대 국정 개입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끝내 안 하는 걸 보면, 과연 윤 대통령이 국민을 두렵게 여기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검찰 출신 대통령인지라 자신이 검찰을 장악했다고 믿기 때문일 수 있다(검찰이 언제까지 ‘권력의 주구’일지 궁금하다). 헌법재판소를 믿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탄핵 결정에는 헌법재판관 6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현행 6인 체제에선 한명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탄핵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영부인 사주’가 있다는 부인을 믿는다는 소문도 나돈다^^.● 대통령 부인도 국민 위에 존재할 순 없다그래서 윤 대통령이 자신만만한 것이라면, 제발 생각을 바꿔주기 바란다. 엄혹한 글로벌 환경 변화로 보나, 죽을 만큼 힘든 우리 삶으로 보나, 대통령 내외가 여유부릴 때가 아니다. 윤 대통령에게 이대로 국정을 맡겨놔도 되는지 국민적 의구심이 커지는 상황이다. 속히 대통령 비서실장부터 바꾸고, 야당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새 국무총리를 들여야 한다. 찔끔찔끔 말고 가시적 개편이 시급하다. 헌법대로 총리 제청을 받아 유능한 인물로 새 내각을 구성해 내각제처럼 운영하는 등 확 달라지는 모습을 뵈주는 것이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본다.무엇보다 윤 대통령이 세번 째 ‘김건희 특검법’ 거부권을 휘두르기 전, 부디 심사숙고했으면 한다.(관저에 가서 물어보라는 뜻 아님). 저널리스트 마이클 브린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국민과의 계약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썼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약 말이다. 대통령(V1)은 물론 대통령 부인(V0)도 법 위에, 국민 위에 존재할 순 없음을 윤 대통령은 명심해야 한다. 임계점을 넘으면 우리 국민 감정 속 ‘야수’가 튀어나올 수 있다.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김 여사 남미 순방 가야 되거든.” 이달 말로 알려졌던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이 돌연 7일로 당겨지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소리다. 다음 주부터 페루와 브라질에서 다자 외교무대가 잇달아 열린다. ‘조선 제일 사랑꾼’ 윤 대통령이 부인 김건희 여사를 이번에도 동반할지 말들이 많다. 하지만 국민의 곱지 않은 눈길도 당연하다. 윤 대통령은 순방 전, 김 여사 활동이 외교와 의전에 그친다고 밝힌 뒤 함께 나서고 싶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김 여사는 자랑스러운 외교사절이랄 수 없다. 해외 순방 때 명품 숍에 들러 국민을 낯 뜨겁게 한 적도 있고 9월 체코에선 표절과 탈세 의혹이 있는 영부인으로 현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 두 달간 ‘명태균 게이트’와 ‘김대남 사태’로 K정치의 추한 속살이 속속 드러나는 상황이다. 첫째, 우리나라 권력 1순위가 김 여사임이 재차 확인됐다. “오늘 여사님 전화 왔는데 내 고마움 때문에 김영선 걱정하지 말라고, 나보고 고맙다고. 자기 선물이래.” 정치브로커 명태균의 통화 내용이 맞다면, 김 여사는 대선을 도와준 ‘선물’로 지역구 공천도 하사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다. 선임행정관 출신 공기업 감사였던 김대남은 녹취록에서 김 여사가 ‘한남동 라인’을 통해 공천과 공기업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했다. 정권을 잡으면 공직과 이권을 가신(家臣)에게 배분하는 전근대적 가산주의(家産主義) 약탈국가로 돌아간 형국이다. 둘째, 윤 대통령의 대통령 자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명태균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에게 5년을 버틸 내공이 없다고 했다. 국민으로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다. “(김 여사가) 명 선생이 이렇게 아침에 놀라서 전화 오게 만드는 오빠가 대통령으로 자격이 있는 거야?”라는 음성 파일도 공개됐다. 이 말을 정말 했다면, 대선 전 “우리 남편은 바보” 녹취록이 절로 떠오른다. 윤석열 정부 2년 반 동안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김 여사의 국정 개입 의혹이었다. 이번 담화를 앞당긴 것도 김 여사가 동의했기 때문이란 말이 나온다. 국민만 보고 해야 할 대통령담화까지 부인 동의를 받아야 가능하다면, 그게 바로 사인(私人)의 국정 개입 아니고 뭔가. 김 여사는 지극한 선의를 가진 대통령 부인으로서 남편 일에 관여하는 게 잘못이냐고 할지 모른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고종이 발표한 최초의 근대적 헌법 홍범14조는 ‘국왕이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비빈·종실 및 척신이 관여함을 용납지 않는다’고 제3조에 못 박아 놨다. 근대국가라면 왕후도 용납되지 않는 국정 관여를 대통령 부인이 해선 안 될 일이다. 국민은 김건희를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다. 수사를 통해 밝혀낼 일이지만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아무리 부인일지언정 선출되지 않은 사인에게 공천과 국정 개입을 허용했다면, 권력 남용이고 대의민주주의 훼손이다. 특히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수사했던 특검 출신 윤 대통령으로선 법치주의에 대한 모독이요, 국민에 대한 배신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윤 대통령에게 위기의식이 없다는 건 나라의 위기다. ‘인위적 인적 개편’이 없다니 대체 무엇으로 국정 동력을 살릴 것인지 통탄할 판이다. 명태균과 관련해 “정치적, 법적, 상식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고 국민에게 오만하고 대통령에게만 충성스럽게 국회 답변한 정진석 비서실장을 비롯해 대통령실부터 전면 개편해야 한다. 한남동 라인이 건재하는 한, 김 여사의 조용한 내조를 믿을 사람은 1도 없다. ‘텔레(그램) 정치’가 얼마든지 가능해서다. 7일 김 여사 문제를 포함해 이태원 참사와 의료대란 등 무능·무책임·무대책 2년 반에 대해 윤 대통령이 통렬한 사과를 하든 안 하든, 권위와 신뢰는 이미 잃었다. 내각 개편은 그래서 절실하다. 야권 동의를 받을 수 있는 현명한 총리를 새로 들이고, 헌법대로 총리 제청을 받아 행정안전부, 보건복지부 장관과 교육부총리 등을 임명해 행정 각부를 통할케 하면서 민생경제를 살리고 지지율도 끌어올리는 것이 최선이다. 무엇보다 ‘김 여사 특검’을 더는 피할 수 없음을 대통령 내외는 깨달았으면 한다. 다수 국민에게 ‘탄핵 트라우마’가 있고, ‘이재명의 민주당’에 정권을 맡기기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다. 보수 궤멸을 막기 위해서도 탄핵이나 ‘임기 단축 개헌’은 원치 않지만 윤 대통령 자신이 대단히 사랑했던 검찰 조직을 망가뜨린 탓에 도리가 없다. 차라리 정무감각 있는 김 여사가 여야 합의 가능한 특검 수용을 결단해 주기 바란다. 잔 다르크처럼 내 한 몸 희생해 나라를 구하겠다고.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뮤지컬 ‘명성황후’가 내년 30주년을 맞는다. 1997년 아시아 뮤지컬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첫날 주연을 맡았던 김원정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성격,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조선의 운명을 가장 잘 드러낸 대목이 환궁 장면이라고 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피신한 황후가 살아 돌아오자 고종이 감격에 겨워 복받치듯 애정을 쏟아낸다. “거칠고 사나운 폭도에 쫓겨/ 거친 들을 헤매던 가여운 그대이제야 그대를 다시 또 맞으니/ 꿈에서 깨인 듯 구름 걷힌 듯안심하시오.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다.” 그러자 황후는 단호하고도 위엄 있는 음색으로 이렇게 받아 노래한다. “이제 국왕의 권위 되찾고/ 외세 각축을 방비하소서.”즉 황후에게는 절절한 사적(私的) 애정보다는 국왕의 권위와 국가의 종묘사직이 더 중했던 것이다. ● 명성황후는 “가여운 그대” 아니었다 왜 난데없이 명성황후냐고? 현 정치상황과 전혀 관계없다. 내 젊은 연극기자 시절 탄생한 작품이라 내겐 기억도, 사연도 각별할 뿐이다(마침 12월부터 30주년 기념공연이 시작된다). 원작 희곡 ‘여우사냥’을 쓴 이문열은 25주년 기념공연 무렵 한 인터뷰에서 “마음먹고 매달리면 질기기가 쇠심줄 같은 친구(연출가 윤호진)가 등 떠밀어 쓴 작품”이라며 “명성황후에 대한 애정이 없어 처음엔 곤혹스러웠다”고 했다. “일본 자료와 달리 영미권 자료는 명성황후에 우호적이라서 도움이 됐다. 하기사 증오도 문학생산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증오도 열정이다.”그렇게 그려진 황후의 캐릭터는 뛰어난 지략으로 “전하를 위해, 만백성 위하여, 이 한 몸을 바치리다”던 ‘조선의 잔다르크’다. 선교사이자 여의사로 1889년 언더우드 목사와 결혼해 15년간 조선에 살았던 언더우드 부인도 ‘폭넓고 진보적인 정책에 탁월성을 보였고 애국적이었으며 또 조국의 최대 이익에 헌신했고 동양의 왕비들에게 기대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고 조선견문록 ‘상투의 나라’에 썼다. ● “짐이 근심하면 황후는 대책을 세워주었다” 이런 황후를 고종이 깊이 의지한 것은 당연했을 터다. 고종은 ‘어제행록’에 이렇게 적었다. ‘순간공(황후의 부친 민치록)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암송하였다…(중략) 슬기로운 지혜는 타고난 천성이어서 기미를 아는 것이 귀신같았다. 어려운 때를 만난 다음부터는 더욱 살뜰히 도왔으므로 짐의 기분이 언짢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침까지 기다리고 앉아 있었으며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올려주었다.’(고종실록 1897년 11월 22일)고종은 인사문제부터 외교 전략에 이르기까지 정치 전반에 걸쳐 뛰어난 정치력을 보여준 황후를 훌륭한 내조자로 회상하고 있다(이희주 ‘명성황후 평전’). 이런 왕과 왕비의 관계는 당시 백성들 사이에도 소문이 파다했던 모양이다. 지식인의 야사(野史)로 볼 수 있는 황현의 ‘매천야록’은 1874년, 그러니까 꼭 150년 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던 해 이렇게 썼다. ‘황후는 총명하고 민첩하며 권변(權變)의 계략이 풍부하여 항상 임금의 측근에서 임금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필했다. 처음에는 임금에 의지해서 사랑과 미움을 나타냈지만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제 마음대로 방자함이 날로 심해졌으며 임금이 도리어 제재를 받는 바가 되었다.’ ● 상소문을 당일 받아볼 만큼 권력 공유명성황후가 남긴 한글편지 146통을 분석한 장영숙 상명대 계당교양교육원 교수의 최근 연구를 보면 구체적 실상을 알 수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부터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주로 생산됐는데 인사와 매관매직 문제가 가장 많고(47.3%) 다음이 국내 정치(7.5%), 국제문제와 대원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내용이 각각 4.1%, 나머지는 일상적 안부편지였다(2024년 ‘명성황후의 국정 개입 실태와 권력 행사 방식 연구’). 주목할 만한 점은, 황후가 ‘조정에 올라오는 상소를 당일에 바로 받아볼 정도로 정치적 현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883년 임오군란 위기를 극복했다며 국왕 내외의 공덕을 칭송하는 성대한 행사를 열자는 상소에 형조참판이 반대상소를 올리자 황후가 “편지의 구절이 몹시 통분하다”며 분노를 표출하는 식이다. 이는 명성황후가 제가문(諸家文)과 사기에 통달해 백관의 장주(章奏·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글)를 친히 봤다는 당대의 소문이 한갓 떠도는 얘기가 아니었음을 실증한다.정치문제에 개입해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은 물론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급진 개화파 박영효를 국왕 편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던 것을 비롯해 황후는 외국공사의 동향과 청국 주요 행사를 챙기는 등 기민하게 대응했다. 이런 권력행사와 정치참여는 고종의 내략 위에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들은 권력을 공유했던 운명공동체였다는 분석이다.● 정치개혁은 왕권제한과 왕후 관여 금지 꼭 130년 전 시작된 갑오개혁(1894.7~1896.2)은 조선이 명나라를 모델삼아 500년에 걸쳐 구축한 주자성리학 봉건체제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는 근대국가 체제로 전환되는 분수령이었다(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Ⅳ’). 특히 정치부분에선 군주권 제한이 핵심인데 그 일환으로 정부조직개편과 함께 왕실개혁이 이뤄졌다. 조선왕조는 전통적으로 궁부일체론(宮府一體論), 즉 궁중과 부중이 공(公)의 가치로 일체가 돼야 한다고 믿어왔다. 왕실개혁의 요체는 궁중과 부중의 분리, 즉 왕실과 국가의 구별이었다(2024년 양진아 논문 ‘개혁기 왕실 개혁 추진과 왕실 관련 법령의 구상’).1894년 12월 고종이 발표한,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고 볼 수 있는 홍범14조 중 다섯 조문이 왕실개혁에 관한 것이다. 일단 4조까지만 봐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제1조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제2조 왕실 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제3조 국왕(大君主)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비빈·종실 및 척신이 관여함을 용납지 않는다.제4조 왕실 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왕후 국정관여 금지’ 삭제… 근대화 개혁 실패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삼국간섭이라는 암초를 맞는다. 조선이 러시아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자 일본은 왕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왕후의 정치 관여를 금지하는 구절을 삭제했다. 이로써 왕실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근대화를 간단히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이고, 왕권의 제한이라고 본다. 1729년 영국을 방문한 몽테스키외는 “법으로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데 성공한 영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민”이라고 감탄했다. 집단이 아닌 개인이 주체가 되고, 과학적 사고와 합리성이 전통적 사고를 대체하며, 자본주의가 발흥해 궁극적으로는 산업화로,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박지향 ‘근대화의 길’). 근대성이 처음 구현된 곳이 영국이고 아시아에선 일본이었다.갑오개혁 실패 뒤 1896년 창설된 서재필의 독립협회는 민(民)의 계몽에 힘쓰며 왕권의 제도적 제한을 주장했다.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이런 서재필을 고종은 증오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 고종은 독립협회를 강제해산시켰다. 독립협회 복설을 요구한 만민공동회 역시 실패로 끝났다. 1899년 황제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통해 스스로 무한 군권(君權)을 보유한 전제군주임을 선언했다.● 제왕적 대통령제… 대한민국은 근대국가인가근대국가를 꿈꾼 개혁세력이 극복하지 못한 장애물은 외세의 각축이나 근왕주의 세력의 공격만이 아니었다. 백성의 심성에 깊이 각인된 국왕에 대한 전근대적 충성심과 왕권에 대한 동경이라고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분석했다(2017년 논문 ‘국=가와 국/가; 왕권을 둘러싼 정치투쟁과 대한제국).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대통령제에 대한 집착이 혹시 우리 심성에 남아 있는 왕권에 대한 동경은 아닌가. 제왕적 대통령과 선출되지 않은 그 일가에 대한 충성심이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전근대성은 아닌가. 대한민국은 과연 근대적 국가인가.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국민으로서 일종의 병(病)에 걸린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세대 수시모집 논술시험 문제 유출 논란과 관련해 15일 교육 당국에 엄정한 조치와 철저한 문책을 주문했다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한 사람만 무혐의 처분이 예고되는 판국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싶어서다. 김건희 여사가 ‘공천 개입 의혹’ 핵심 관련자인 명태균 씨에게 보낸 카카오톡 기사를 본 뒤 병이 깊어진 게 분명하다. “철없이. 떠드는, 우리오빠, 용서해주세오” “무식하면 원.래그래요”. 대통령이 뭔 말을 해도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 이름하여 ‘무권위증’이다. 대통령실에선 그 ‘오빠’가 김 여사의 친오빠라고 서둘러 밝혔다. 김 여사와 친오빠가 대선캠프에 관여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윤 대통령도 대선 기간 중 ‘개사과’ 논란이 벌어지자 “원래 선거는 시쳇말로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하지 않느냐”고 했다. 하지만 명태균은 김 여사의 오빠가 정치를 논할 상대는 아니라고 했다. 며칠 전 한 방송에서 그는 “여사가 물어봐요. 우리 오빠가 상태가 어떠냐고”라고 말함으로써 김 여사가 윤 대통령을 ‘오빠’로 칭한다는 걸 시사했다. 김 여사가 윤 대통령을 어떻게 보는지는 세상이 다 안다. 대선 전 김 여사 측이 MBC 상대로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한 ‘7시간 통화’ 발언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우리 남편은 바보다. 내가 다 챙겨줘야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지, 저 사람 완전 바보다.” 중장년 남자들은 자신들도 집에선 그런 대접 받는다며 낄낄 웃었다. 그러나 공(公)과 사(私)는 다르다. 문재인 정권 때 북에서 삶은 소대가리 운운한 것과도 차원이 다른 소리다. 공직 활동도 부인이 챙겨줘야 하는 사람이 대통령이라면, 나라가 무너질 일이다. 그러니 선임행정관이 대통령을 꼴통으로 여기고, 공직사회는 움직이지 않으며, 민생경제는 어려워지는데 대통령은 의대 증원 2000명 같은 정책이나 불쑥 내미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2년 반 동안의 많은 의문이 풀리는 듯하다. 김 여사는 비서실에 ‘김 여사 라인’을 두고 국정을 챙길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제2부속실은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와 제2부속실을 설치한다지만 달라질 것도 없다. 김 여사가 지금 같은 활동을 계속한다면 말이다. 문제는 전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 경험했듯 우리 국민은, 헌법은 사인(私人)의 국정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김 여사가 아무리 선의로 “막상 대통령이 되면 좌나 우나 그런 거보다는 진짜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게끔 되어 있다”고 해도 국민은 그런 대통령 부인을 용납하지 않는다.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에게서 그게 결국 국정농단으로, 사익 추구로 이용된다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벌써 국정감사장마다 김 여사 관련 업체 특혜 의혹과 구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을 지낸 마키노 요시히로의 2017년 글을 굳이 인용하면, 한국인이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그토록 분개한 이유는 학식도 공적 직함도 없는 최순실 등 대단할 것 없는, 자격 없는 자들이 불공정한 방법으로 양반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 김 여사의 공적 활동에 다수 국민이 공분을 금치 못하는 데는 아내 역할만 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학력 위조 전력이 있는, 주가조작 의혹이 있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검찰총장을 지냈고 대선 출마에 나서면서 ‘공정과 상식’을 내건 윤 대통령이 부인 문제에 단호할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권 세력은 11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1심 유죄 판결만 나오면 전세가 역전되리라고 믿고 싶겠지만 이런 식으로 2년 반을 버티긴 쉽지 않다. 한번 탄핵을 겪은 우리 국민이 또다시 탄핵 사태를 원치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야권은 더 세진 ‘김건희 특검법’을 들이밀 것이고, 윤 대통령이 또 거부권으로 맞서면 보수층도 더는 참아주기 어렵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하면 김 여사는 흡족할지 몰라도 대통령 부인 한 사람 지키기 위해 나라가 흔들려선 안 될 일이다. 윤 대통령은 냉정해지기 바란다. 도이치모터스 사건만이라도 철저히 수사받게 하는 것이 오히려 김 여사를 구하는 길일 수 있다. 임기 반환점을 맞아 김 여사 라인 제거를 포함한 대통령실 전면 개편을 발표해 국민 앞에 떳떳해지고 새출발 함으로써 나라를 구했으면 한다. 윤석열 정부를 예고한 ‘7시간 통화’에서 김 여사는 “일반 국민은 바보”라고 했다. 그러나 국민은 ‘사인 김건희 씨’만큼 바보가 아니다. 대통령은 패밀리 비즈니스가 아니어야 한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6일 부인 김건희 여사의 손을 꼭 잡고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동남아 3개국 순방 외교. 체코 원전 외교를 다녀온 지 보름 만이다. 해외 방문 때마다 매번 동부인해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검찰이 빠르면 이번 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김 여사에 대한 처분을 내릴 전망이 분분해서다. 윤 대통령 내외 부재중 검찰이 김 여사를 재판에 넘길 리 없다. 11일 대통령 내외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불기소 처분을 내려 최대한 대통령과 김 여사의 면을 지켜준다는 게 검찰의 졸렬한 계산이 아닌가 싶다. 꿈도 꾸지 말기 바란다. 특히 심우정 검찰총장이 수사지휘권 박탈 상태라는 면죄부만 믿고 ‘친윤 검찰’에 떠밀려갈 경우, 검찰의 흑역사로 기록되는 것은 물론 국민적 분노를 막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심우정 검찰’이 검찰을 바로 세우고 대통령도, 나라도 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한때 ‘윤석열 검찰’의 필살기였던 ‘살권수(살아있는 권력 수사)’에 나섬으로써 이제라도 김 여사를 제어하는 일이다. ● “선거는 패밀리 비즈니스”라던 윤 대통령윤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뽑히기 전인 2021년 10월 “선거는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반려견한테 사과를 주는 ‘개사과’ 사진이 비난을 받으면서 김 여사가 관여한 게 아니냐는 의문을 낳았을 때다. “선거라는 게 시쳇말로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하지 않느냐”며 “그런데 제 처는 다른 후보 가족들처럼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아서 그런 오해를 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윤 대통령은 부인을 잘 모르는 듯하다. 어쩌면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김 여사가 하는 말은 무조건 옳고, 뭔 일을 해도 예뻐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다수 국민이 익히 알게 됐듯, 김 여사는 선거에 적극적이지 않은 게 아니었다. 2022년 초 대선 과정 중 공개된 서울의소리 이명수 기자와의 통화를 들여다보면, 선거캠프에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 김 여사였다. 2021년 7월 통화가 시작될 때부터 김 여사는 선거를 얘기했다. “동생이 좀 와~ (선거)캠프에서. 조직, 블랙 조직으로 좀 뛰어 봐봐” 도움을 청하면서 오빠가 있는 캠프에 오면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한동훈 공격 사주’ 의혹으로 7일 SGI서울보증 상근감사위원 자리에서 물러난 대통령실 선임행정관 출신 김대남과 통화를 공개한 좌파 유투버가 바로 이명수다. 3년 전 김 여사는 이명수에게 “하여튼 (윤석열 비판은) 반응 안 좋다고, 슬쩍 한번 해봐 봐. 홍준표 까는 게 슈퍼챗(후원금)은 지금 더 많이 나올 거야” 코치를 하기도 했다(김대남이 이명수에게 “한동훈을 치면 여사가 좋아할 것”이라고 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 ● “대통령 자리가 그렇게 만든다”는 김 여사대통령 자리도 김 여사는 패밀리 비즈니스로 알고 있는 게 아닌지, 더럭 겁이 난다. 대선 전 이명수와의 통화에서 김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정권 잡으면 거긴 완전히…(웃음) 무사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 디올백 진상 논란의 재미 목사 최재영에게 이랬던 건 너무나 당연했던 셈이다. “제가 이 자리에 있어 보니까…(중략) 막상 대통령이 되면은 좌나 우나 그런 거보다는 진짜 국민들 생각을 먼저 하게 돼 있어요. 이 자리가 그렇게 만들어요.” 심지어 명태균이라는 정치브로커는 윤석열 정부 출범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참여를 ‘결정권자’에게 제안받았다고 7일 자 동아일보에 말했는데 이날 저녁 채널A엔 직접 김 여사가 전화를 걸어와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 정부의 결정권자는 김 여사라는 의미다.대통령은 김건희가 아니라고 바로잡아줄 사람은 단 한 사람, 윤 대통령밖에 없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그걸 못한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안다는 게 또 비극이다. 윤 대통령이 어려워함직한 선배 법조인들이 김 여사에 관해 조언하면 “제가 집사람한테 그런 말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라며 말을 끊는다지 않던가. 제2부속실을 설치한다고 김 여사가 대통령 같은 활동을 자제할 것 같지도 않다. 7일 한 언론에 공개된 4월 총선 직후 김대남의 통화에 따르면, 현재 대통령실 권력 구조는 김 여사가 제일 세고 그 밑에 젊은 십상시 몇 명이 있다는 거다. “여사가 자기보다 어린 애들을 갖고 쥐었다 폈다 하며 시켜먹는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냥 다 얼굴마담”이라고 했다. 용산에서조차 대통령에 대해선 X통으로 치면서 나랏일은 국민이 선출하지도 않은 김 여사가 40대 행정관이나 거느리고 해먹는다고 본다면, 심각하다. 그래서 ‘심우정 검찰’이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가족 아닌 검찰총장, 수사지휘권 행사하라이대로 가다간 야권과 좌파 단체에서 별러대는 국정농단 의혹으로, 탄핵몰이로 휩쓸려 갈 우려가 있다. 차라리 검찰총장이 도이치모터스 사건 김 여사에 대해 엄정한 수사지휘권을 행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사태의 흐름을 끊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부인에게 말 못 하는 처지의 대통령을 살리는 것은 물론 나라가 미친 혼란에 빠지는 파국도 막는 길이다.안다. 4년 전인 2020년 10월 19일 문재인 정권 시절,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을 도이치모터스 수사에서 배제했다는 것을. 김 여사가 윤 총장의 가족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심우정은 김 여사와 가족이 아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권이 바뀌고 총장이 바뀌고 다 바뀐 상태에서 (수사지휘권 배제가) 그대로 적용되는 게 맞느냐”고 했다. 수사지휘권 배제의 법적효력이 언제까지 유효한지 명문화돼있지 않다는 거다. 심지어 4월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 복귀한 추미애도 “윤석열 정권이 갑자기 4년 전 법무부 장관으로서 내린 저의 (총장 수사지휘권 박탈) 지시를 금쪽으로 여긴다. 어찌 그리 궁색하냐”고 조롱하듯 지적했다. 심우정이 윤 대통령과 가까운 박성재 법무부 장관에게 지휘권 복원을 요청해봤자 소용없다. 윤 대통령과 김주현 민정수석이 특수통 아닌 기획통 총장을 찾은 것도 김 여사 수사는 엄두도 못 낼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일 터다.● 대한민국 검찰을 주저앉힐 텐가바로 이 허(虛)를 찌르는 데 심우정 존재의 묘미가 있다. 훗날 오늘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심우정 검찰이 대통령 부인을 기소해 법의 심판대에 세운 것이 제2의 6·29선언으로 평가될 수도 있는 일이다. 권력 앞에 절절매는 검찰을 구하고, 마누라 앞에 절절매는 대통령을 구하고, 유권무죄(有勸無罪)에 절망한 민심을 구할 수 있어서다. 2019년 여름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전격 수사하기 전, 윤석열 검찰총장은 사석에서 ‘이러다가 (문재인) 정부가 무너지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조국 수사를 문 정권 사람들은 ‘검찰 쿠데타’라고 주장하지만 문재인의 ‘우리 총장님’이었던 윤석열은 분명, 조국을 지키다 보면 문 정부에 타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문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것이라고 믿고 싶다. 심우정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과 정부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총대를 메야 할 때가 지금이다. 영부인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김 여사가 도이치모터스 주식 거래로 4000만 원가량 평가 손실을 봤다고 주장했지만, 아니었다. 김 여사와 그의 모친이 23억 원의 이득을 봤다는 검찰 의견서를 비롯해 김 여사 혐의는 차고 넘친다. 검찰 시절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 검찰을 대단히 사랑한다”고 했던 윤 대통령이 지금 대한민국 검찰을 꿀리고, 죽이고 있는 셈이다. 검찰이 사실상 문을 닫고 공소청으로 바뀌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자랑스러운 아버지 심대평의 아들 심우정도 여기 같이 설 텐가.● 심우정이 나서야 대통령도 떳떳해진다윤 대통령이 두 번째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고, 국민의힘이 다시 무력화시킨 ‘김 여사 특검법’ 수사 대상이 무려 8가지다. 기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을 포함해 디올백 수수 의혹,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 22대 총선 공천 개입 의혹까지 김 여사의 입김과 활약에 따라 수사 대상은 자꾸 확대됐다.2020년 4월 최강욱 등의 고발로 시작된 수사가 추상같이 이뤄졌다면, 김 여사는 대한민국 검찰 무서운 줄 깨닫고 오늘날 이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니 명태균이라는 다수 국민에겐 듣보잡 같은 ‘책사’가 튀어나와 자기가 정권을 만들었느니, 검찰 조사를 받게 되면 “한 달이면 (윤 대통령이) 하야하고 탄핵일 텐데 감당되겠나”라는 흰소리나 하는 것이다. 김 여사가 심우정 검찰 앞에 소환되는 날,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모질지 못한 우리 국민은 분명 김 여사를 다시 돌아본다(재판받고 유죄 선고를 받아도 실형을 살 리도 없다). 그래야 윤 대통령도 국민 앞에 떳떳해지고, 지지율이 단박에 획기적으로 올라가면서 국정 동력도 새롭게 확보할 수 있다. 심우정이 움직이지 않으면, 윤 대통령은 바뀌지 않는다. 김 여사는 더욱 세상 무서운 게 없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검찰이 달랑 불기소 처분을 내려 사람한테 충성하는 비열함을 보인다면, 국민 신뢰는 땅에 떨어져 개도 안 주워갈 게 분명하다. 야당에서 ‘더 쎈 특검법’이 나오고 윤 대통령이 이해충돌 문제도 외면한 채 또 거부권을 날리면, 그때는 민심이 뒤집힐지도 모를 일이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1989년 10월 21일 청와대 당정회의. 전날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노태우 대통령이 “방미 성과 홍보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라”며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정권 퇴진 운운하며 악수하는 사진이 신문 톱이고 자신의 미국 의회 연설은 한쪽에 밀린 것을 보니 대통령 할 생각이 없어지더라는 거다. 그러자 노재상(당시 67세) 강영훈 총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각하께서는 외국에서 밤잠 설치며 나라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데 국내가 그 꼴이어서 송구스럽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준규 민정당 대표도 울먹이며 “연말까지 당이 책임지고 5공 문제를 종결하겠다”고 다짐했다.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온 당7역은 당 대표실에서 설렁탕 점심을 하면서 한참을 더 논의했다. 여기까지가 박철언이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쓴 풍경이다. 언론인 출신 정치인 남재희(15일 작고)가 ‘시대의 조정자’에 쓴 내용은 좀 다르다. 강 총리가 아주 작은 반정부 데모를 보고하며 흐느껴 울자 놀란 박준규도 흑흑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상한 장면을 연출하고는 청와대를 나오면서 박준규가 한마디 하더란다. “그 사람 와 우노. 그 사람이 우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체코 원전 외교를 마치고 돌아온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국민의힘 지도부를 만났다. 용산 대통령실 앞 분수정원에서 만찬을 함께 한 윤 대통령이 설마 이런 ‘충성의 분수’를 기대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찬에 앞서 한동훈 대표가 요청한 대통령 독대를 대통령실은 거부했다. 신임 지도부를 격려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라지만 웃기는 소리다. 마음만 있으면 따로 독대할 기회는 얼마든지 마련한다. 다른 관계자는 “오늘내일은 대통령과 체코의 시간”이라고 했다. 실제로 만찬에서 주로 말한 사람은 윤 대통령이었고 내용도 거의 원전 얘기였다는 후문이다. 대통령은 외국에서 일하시는데… 하며 흐느끼는 사람만 없었을 뿐, 시계를 35년 전으로 돌려놓는 후진적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직진하지 않는다. “독대는 비공개가 원칙”이라며 거부한 대통령실은 독대를 제왕의 시혜처럼 생각하는 전근대적 집단 같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돈봉투와 충성 또는 특혜가 오갔을 때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동훈을 신뢰할 수 없고, 힘을 실어 주고 싶지 않은 심정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이 그리 한가한 시국인가. 대통령은 아프거나 다쳐도 주치의가 있어 걱정 없다. 국힘 의원들은 문자 한 통으로 알음알음 ‘의사 빽’을 찾을 수 있겠지만 보통 국민은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명색이 집권당인 국힘은 새 지도부 구성된 지 근 두 달간 뭘 한 게 있다고 국민 혈세로 세비 받고, 소고기 돼지고기 만찬을 대접 받으며 박수 치고 격려까지 받는단 말인가. 그래서 한동훈이 고기 덜 먹는 한이 있어도 대통령 독대를 청했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 초대 비서실장으로 ‘독대의 매뉴얼’을 만든 김중권은 “대통령이 독대를 해야 진실 파악도, 사태의 심각성도 빨리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2016년 한 인터뷰에서다. 2016년 총선 때 새누리당(현 국힘) 대표 김무성은 대통령과 독대를 못했던 게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최순실 사태가 났을 때 저희 같은 사람을 만나 대화했다면 그 지경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라고 올 초 방송에서 개탄을 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나는 당시 김 대표가 면담이나 통화를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써놨으니 통탄할 일이다. 야권에선 함부로 탄핵을 입에 올리지만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 반복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겼어도 구중궁궐은 그대로다. 국회 부의장을 지낸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회 개원식에 민주화 이후 첫 대통령 국회 불출석을 건의했다니,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간 형국이다. 심지어 대통령실 수석 출신 국힘 의원은 “영부인은 대통령 국정을 보완하는 자리”라며 “영부인을 깎아내리는 것은 국민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신민(臣民) 같은 소리를 했다. 자칫하다간 대통령 부인 비판은 반(反)국민행위로 처단될지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조선시대 왕(王)이 아니다. 포도대장처럼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외친다고 전공의가 벌벌 떨며 제 발로 돌아오지 않는다. 국정수행 긍정률이 달랑 20%(갤럽)인 대통령이면 여유만만 한동훈과 독대를 고려할 때가 아니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윤 대통령은 진작, 한동훈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독대 아니라 더한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국정 운영을 위한 협조를 구해야 마땅하다.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가 영화로 돌아왔다. 소설로 나온 2015년엔 헬조선 담론이 나라를 주름잡고 있었다. 주인공 계나는 호주로 이민가면서 이랬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헬조선이란 유행어는 지금 없다. 헬조선병(病) 뜯어고쳐 선진 대한민국으로 도약하라. 2016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사설 제목이다. ‘대한 늬우스’를 보는 듯한가. 하지만 진심이었다(그때 논설실에 있었기에 잘 안다). 안타깝게도 헬조선병 고치는 대신 ‘한국 비하 신조어’를 비난했던 대통령은 2017년 초 탄핵으로 물러났다. 2015년 1.24였던 합계출산율은 2023년 0.72로 뚝 떨어진 상태다. 2017년 크리스틴 라가르드 당시 IMF총재는 한국의 극단적 저출산을 ‘집단자살’이라고 했던가(그땐 1.05로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제목을 ‘헬조선에서 킬조선’이라고 한 거다. 죄송하다. 추석을 앞두고 무시무시하게 붙여서.● 경쟁력도 없으면서 더럽게 까다로운 MZ소설 속 계나가 튀어나온 듯한 배우로 고아성이 등장한다. 그가 말하는 한국에선 못 살겠다는 이유는 경쟁력 없는 인간이어서다. 이 나라에서 ‘그런 인간은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물려받은 것도 없다는 건 부모 유산만 말하는 게 아니다. 미모와 키, 아이큐와 학벌, 심지어 직업과 결혼 가능성도 ‘부모 찬스’에 비례하는 유전자계승-계급사회가 됐다. 뭘 치열하게 하지도 못한다는 건 근면 성실하지 못하다는 소리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라는, 학교 때 맞으면서 외운 국민교육헌장을 기억하는 세대로선 열불 날 판이다. ‘라떼’는 못 먹고 못 입으며 뼈 빠지게 뛰어 산업화 민주화를 이뤄냈다. 마침내 경제규모 10위권의 선진국에 도달했는데 젊은 것들은 뭐? ‘노오력’은커녕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롭다고? 영화에서 그 예로 등장하는 게 동태탕 신이다. 직장상사 동료들과 식당테이블에 앉은 계나가 메뉴를 고르는 사이, 상사가 “동태탕!”을 외치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태탕 4인분으로 통일되는 장면이다. 심지어 ‘융통성’이라는 명분으로 일감몰아주기 서류조작까지 요구하는 회사를 견딜 수 없다. 계나의 빡치는 표정 위로 나이든 한국남자의 못 말리는 꼰대근성, 광복 80년이 다 되도록 그대로인 조선의 전근대성이 겹쳐지고 있었다. 진짜 못살겠다. 이런 나라에선.● 지옥철 타보고 “저출산” 소리 하라 소설이든, 영화든 계나의 지하철 출퇴근은 ‘탈조선’의 주요 이유다. 계나의 눈엔 대한민국 저출산의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서 출퇴근할 때 계나는 매일 울면서 다녔다. ‘여자들더러 아이 많이 낳으라는 사람들은 출근 시간에 지하철 2호선 한번 타봐야 해. 신도림에서 사당까지 몇 번 다녀 보면 그놈의 저출산 이야기가 아주 쏙 들어갈 텐데. 그런데 그런 소리 하는 인간들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지 않겠지.’계나는 한국선 2등 시민이다. 남친 지명은 그렇지 않다. 오랜 취준생 시절 잠깐 계급이 역전됐어도 강남 출신이고 아버지가 교수이며 남자인 지명은 “조금만 돈이 있으면 한국처럼 살기 좋은 곳이 없다”고(영화에선 “한국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기회의 땅”이라고) 믿는다.문제는 ‘조금만 돈이 있으면’이라는 기준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이다. 소설에서 계나는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 만 벌어도 돼’ 그런다. ‘한국적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 속성이 바로 ‘주류·표준·평균에 속한 이에게 제공되는 엄청난 편의성’이다.한윤형이 최근 ‘상식의 독재’에서 정의한 바다. ● 주류·표준·평균 바깥에는 잔인하다여기서 주류는 연 소득 1억 원 이상의 대졸자를 말한다. 대기업, 공무원이나 공기업 정규직원들에게 한국은 꽤 살기 괜찮은 나라다. 표준은 평균보다 높은 연봉 5000만 원 이상의 대졸자, 평균은 연봉 3000만 원대 후반의 직장인 정도를 말한다. 그러나 ‘그 바깥 다양한 삶’에 대해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무신경하고, 배려 없고, 때로 잔인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스스로가 한국 사회의 표준 이상이 돼야 한다는 ‘표준압’을 느낀다고 한윤형은 지적했다. 이게 바로 바로 한국에서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나는 일류대학을 못 나왔지만 내 자식은 일류대학(요즘은 의대!) 가야 한다며 아이를 들볶고, 남들처럼 강남에 살아야 한다며 남편을 들볶는다. 자녀를 번듯하게 키우지 못할 바엔 출생 자체를 포기한다. 그러니 합계출산율이 저 꼴이고, 자살률은 2023년 현재 OECD 38개국 중 1위가 된 것이다. 자기 경쟁력을 키우려 혼자 열심히 뛰는 데 그치면 차라리 낫겠다. 남들이 어찌 살든 나만 만족하면 상관없다. 그러나 계나가 보기엔 남의 불행이 내 행복의 원동력인 나라가 한국이다. 가게에선 진상 떨고, 며느리 괴롭히고, 부하 직원에게 갑질해야 비로소 행복해진다. 한국선 경쟁력 없으면 사람대접도 안 해주지만 호주는 그렇지 않아서 떠나는 거다(영화에선 뉴질랜드. 더 여성친화적이란다). 알바 인생도 나쁘지 않고, 방송기자(지명의 직업)랑 버스 기사가 월급 차이도 별로 안 난다. 무엇보다 호주 국민이 되면 놀고 있어도 실업 연금 따박따박 나오고 큰 병 걸리면 병원비 다 지원돼 좋다(그러나 월급의 3분의 1정도가 세금으로 나간다는 건 밝히지 않았다). ● 빅토르 안-안세영이 분노한 전근대적 킬조선동아일보 기자 출신 총명한 작가 장강명은 치열한 취재와 벽돌책 독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출간 당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빙상 스타 빅토르 안(안현수)의 러시아 귀화를 계기로 제목부터 지었다고 밝혔다. 파벌 논란으로 복잡했던 안현수는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러시아에 금메달을 3개나 안겨줬다.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탈락했는데 뉴스 사이트 댓글에선 안현수의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청년들이 한국 빙상계를 한국 사회 전체의 모습으로, 빙상연맹을 한국 정부의 모습으로 보는 듯했다는 장강명의 말은 올해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과 묘하게 겹쳐진다. 금메달을 딴 직후 안세영은 “제가 목표(금메달)을 향해 달려온 원동력은 분노였다”며 배드민턴협회의 부조리를 터뜨렸다. “이제야 숨이 쉬어진다”면서 협회가 너무 많은 걸 막고 있었다고 했다. 무려 10년이다. 빅토르 안으로부터 강산도 바뀐다는 10년이 지났는데도 스포츠계는, 한국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금메달을 따고 나서야 할 말을 할 자격이 생길 만큼, 그러고도 ‘김연아급이나 되는 줄 아느냐’는 협회 공격이나 받을 만큼 전근대적 킬조선은 국가대표 선수들을 숨도 못 쉬게 옥죄고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협회 점검 결과 횡령 배임 혐의가 적잖게 드러났다. 안세영에게는 중국 귀화 제의까지 왔다고 했다. 의료대란 와중에 한국을 떠나려는 의사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좋겠다. 떠날 수 있어서. ● 이번 추석엔 모두의 자존심을 배려해주면 어떨까요이 슬픈 ‘한국이 싫어서’를 장강명은 애국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썼다고 했다. 자살이나 이민이 해결책은 아니라면서 자신이 속해 있는 한국은 ‘복원시켜야 할 공동체’라고 했다. 영화를 만든 장건재 감독도 “각자의 위치에서 지옥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고 밝혔다. 맞는 말씀이다. 모두가 계나처럼 이 나라를 떠날 순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 사람도 있고, 댓글을 달기도 하고, 개딸이 되기도 한다. 굳이 드라마에서 대안을 찾는다면 2022년 방영된 ‘나의 해방일지’가 있다. 흰자위 같은 수도권 도시 산포에서 노른자위 서울로 어렵게 출퇴근하는 염미정은 구 씨에게 ‘추앙’을 요구하고 또 받으면서 ‘거지같은 자기 인생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덕분에 자신이 사랑스러워진 미정은 구 씨에게 죽이고 싶던 사람한테도 “그렇게 웃어. 그렇게 환대해”하고 일러준다. 화가 나거나 불안한 분이 계신가. 다시 계나 얘기로 마무리하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주변 사람들이 많이 웃고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매일 화내거나 불안해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중략)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 줄 거’라고 했다. 우리도 한국에서 이렇게 살 수 있다. 이번 추석엔 많이 웃고, 모두의 자존심을 배려해 주면 어떨까. 무엇보다 아프거나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이다.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의 불법 부당을 알리려다 순국한 이준 열사는 검사였다. 서울대 법대 전신인 법관양성소 1회 졸업생으로 법대 교정 그의 동상엔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글이 새겨져 있다. 최종고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2013년 출간한 ‘서울법대시대’에서 이준 열사부터 소개하며 ‘사실 “천하제일 서울법대”라고 자부하면서도 대통령은 내지 못하였다’고 적었다.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총재 이회창 동문, 총리를 지낸 이수성 동문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면서 ‘아무튼 끝내 대통령을 내지 못한 최고 엘리트 대학 서울법대시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은 법대의 무능인가, 한국 국민의 수준인가, 아니면 엘리트 대통령은 원래 거부되는 것인가?’ 책 속에서 자문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 윤석열 대통령 집권 2년 4개월이 다 된 지금, ‘최고 엘리트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 물어봤다. 최종고는 말을 아끼는 듯했다. 걱정스럽지만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입학한 79학번 서울대 법대가 당시 전국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학생들이 모인 건 분명하다. 윤 대통령이 엘리트주의자인 것도 분명하지만 과연 엘리트인지, 국민 수준이 엘리트 대통령을 거부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응급실 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문제로 국민 불안이 심각한 상황이어서다. 대통령은 든든한 주치의가 있어 걱정 없겠지만 노부모와 따로 살거나 아이들 키우는 집에선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듯 대통령 국정 수행도 성적순이 아님을 입증했다는 게 윤 대통령 업적으로 남을 것 같다. 윤 대통령의 ‘밴댕이 정치’ 때문이다. 혹시 대통령 모욕으로 걸릴까 겁나 굳이 원저자를 밝히자면,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 말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2026년 의대 증원 재검토안’을 내놓자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연찬회도, 여당 지도부와의 만찬도 돌연 취소했다. “대통령이 유치원생인가. 이런 밴댕이 정치가 나라를 이렇게 만든 것”이라는 박 의원의 지적은 찌릿하고 신랄하다. 윤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도 밴댕이 같다. “조롱과 야유,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국회에 가서 곤욕을 치르고 오라고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겠느냐”고 정진석 비서실장은 4일 말했다. 자신이 간신이라는 자백처럼 들린다. 차라리 윤 대통령이 국회에서 곤욕을 치렀다면, 참고 심지어 손을 내미는 ‘큰 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국민은 다 알아본다. 그게 싫어 피함으로써 윤 대통령은 ‘87년 체제 첫 대통령 불참’이라는 밴댕이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날이 하필 대통령 부인 생일이어서 미 상원의원단과 부부 동반 만찬을 가진 것도 개운치 않다. 유교적 전통, 동양적 가치가 중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지도자는 덕(德)이 중요하다. 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무엇보다 강력한 동인은 너그러움과 미더움, 공평무사 같은 지도자의 덕이라고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강조했다. 의료개혁이 아무리 중요해도 윤 대통령이 국민 마음부터 얻지 못하면 전공의들을 돌아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의대 증원이 마무리된 만큼 개혁의 본질인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지난주 윤 대통령은 말했다. 그럼 본질 먼저 시작해야지 왜 의대 증원부터 건드려 이 지경을 만든단 말인가. 대뜸 압수수색부터 시작해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어 엮어 기소하는 ‘윤석열 검찰’을 연상케 한다. 나중에 대법원 무죄가 나와도 그사이 검사들은 승진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될 수 있었지만 당하는 국민은 삶이 결딴날 판이다. 이렇게 대안 없이 밀어붙이다가는 2027년 3월 대통령 선거는 뻔하다. 그럼 윤 대통령이 국민 목숨 걸고 시작한 의료개혁은 2026년에서 멈추고 만다. 그래도 상관없단 말인가. 한때 ‘육법당(陸法黨)’ 소리를 들었던 서울대 법대였다. 군사독재를 뒷받침했다는 의미다. 지금은 자칫 ‘검법당(檢法黨)’ 소리가 나올까 두렵다. ‘서울법대시대’에서 최종고는 ‘법대생에게 논리, 윤리, 심리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썼다. ‘논리가 강한 주지주의적 인간일수록 윤리에는 약하다. 그리고 논리를 바른 방향으로 구사해야지 꼬이거나 나쁜 방향으로 쓰면 무식한 자보다 더 해롭다’고도 했다. 조국을 위한 생명의 피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서울대 법대 출신 대통령이 무식한 자보다 해롭다는 소리는 안 듣게 해야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 열흘만인 2022년 3월 20일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는 조선 총독 때부터 100년 이상 사용해 온 제왕적 권력의 상징”이라며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2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 대통령 취임 후 두 번째 국정브리핑, 세 번째 기자회견이 열렸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대통령이 있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인적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해도 좋다. 청와대가 제왕적 대통령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번 윤 대통령의 국정브리핑과 기자회견은 6월 국정브리핑, 5월 기자회견과 놀랍게 흡사했다. “경북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왔다”는 첫 국정브리핑처럼 이번 브리핑도 홀로 장밋빛이다. 경제도, 의료개혁도 차질 없이 펄펄 날고 있었다. 다수 국민의 인식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인식이다. 용산과 한남동은 구름 속에 묻힌 구중궁궐이란 말인가. ● 비상진료체제 원활하게 가동된다고?요즘 국민들이 얼마나 불안한지, 윤 대통령은 모른다. 대한민국 최고 의사가 주치의요, 진료과목마다 자문의가 버티고 있는 대통령이 아픈들 (그럴리야 없겠지만) 설령 다친들 큰 일이 날 리 없다. 보통사람은 다르다. 노부모와 따로 사는 집에선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 한다. 아이 키우는 집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열 나거나 다치기라도 할까봐 뛰는 아이도 주저앉힐 정도다. 의대 증원 문제가 응급실 마비 사태로 번진 지금, “아프지 말라”가 새 인사말이 됐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에선 관리가 잘 되고 있다니 미치고 팔짝 뛸 판이다. 현장과 대통령실의 메시지 차이가 큰 이유를 묻자 대통령은 역정을 감추지 못했다. “의료현장을 한번 가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며 “특히 지역의료종합병원 이런 데 가보시고 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있지만 일단 비상진료체제가 그래도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는 거다.대통령이 본 지역병원 응급실은 잘 돌아갔을 수 있다. 참모진이 미리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들이 헌신적으로 뛰고 있는 곳’을 찾아 놓고 방문케 한 게 아닐까 싶다. 이들이 바로 간신이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은 26일 한 인터뷰에서 “오늘 전라도 남쪽에서 교통사고 난 환자가 전국에 받아주는 데가 아무데도 없었다. 결국 죽었다. 그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했다. 이게 진짜 응급실 현장이다. 대통령 심기경호에만 골몰하는 제왕적 참모진에 둘러싸여 윤 대통령은 지금 속고 있는 것이다.● 검찰 수사하듯 밀어붙인 윤석열표 개혁들 의대 증원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일은 ‘되게끔’ 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저항이 예상되는 개혁일수록 앞뒤전후를 미리 따져 정책 믹스로 내놓는 게 중요하다는 건 나같은 사람도 안다. 검찰이 전격 압수수색하듯, 아이들 일기장까지 몽땅 걷어가 탈탈 털고서는, 그래도 ‘죄’가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사돈의 팔촌까지 별건수사해서, 결국은 엮어내고야 마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는 소리다.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가 그랬다. ‘영국병’을 고치기 위해 1984년 탄광노조 파업과 맞섰을 때다. 석탄발전소에 미리미리 석탄 재고량부터 충분히 쌓아놓고서야 탄광 폐쇄를 발표했다. 노조가 석탄 반출을 막아 국민이 난방을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해놓고 정책 발표를 한 것이다. 지금 국민이 느끼는 가장 심각한 의료문제는 지역의료‧필수 의료가 불안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제 의대 증원이 마무리된 만큼, 개혁의 본질인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브리핑에서 밝혔다. 미치겠다! 그게 개혁의 본질임을 알고 있었으면 그것부터 시작해야지, 왜 곁가지부터 건드려 이 지경을 만든단 말인가. “재정투자를 하고 사법리스크를 감축시키고, 보험수가를 조정해 필수의료, 중증의료, 수술, 이런 과거 기피하던 부분들이 의사들에게 더 인기 있는 과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문제는 우리 정부 남은 기간 동안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이라고 윤 대통령은 한가롭게 말했다. 그런데 의료인 양성은 지금 안 하면 늦어서 덜컥 증원부터, 그것도 매년 2000명에서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거다. 정말 미치겠다. 의대 정원 늘려 등록금도 위세도 키울 수 있는 대학 총장들은 백 명이고, 천 명이고 써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가르칠 의대 교수들이 갑자기 늘어난 그 많은 숫자는 도저히 못 가르친단다. ‘바이탈뽕’에 병원을 지키던 전공의도, 장밋빛 꿈에 의사 공부를 시작한 의대생도 의사를 악마화한 윤 정부 특히 박민수 복지부 차관에 질려 그 어렵게 들어간 병원을, 의대를 나섰다. 석탄 비축량을 미리 쌓아놓으려면 정부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 윤석열 정부는 재고 점검도 없이 대뜸 압색부터 시작한 꼴이다. ● 이런 식이면 2027년 대선은 뻔하다그렇게 ‘윤석열 검찰’은 살아왔을 터다. 나중에 대법원 무죄가 나와도 알빠노(‘알 바 아니다’‧리그 오브 레전드 인터넷 방송 관련 유행어이자 신조어란다)다. 당한 사람들 인생만 절단나도 검찰은 지장없다. 현실세상은 다르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판이다. 주치의 두고 든든한 대통령은 죽어도 “의대 증원 마무리 됐다”에서 물러서지 않겠단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운을 뗀 ‘2026년 재검토’ 도 묵살하고 다른 대안도 없이 계속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라면…2027년 3월 대통령선거는 뻔하다. 그럼 윤 대통령이 (남의) 목숨 걸고 밀어붙인 의료개혁은 2026년까지 4000명 증원에서 끝나고 만다. 그래도 좋단 말인가. ● 한남동 증축, 왜 하필 사우나실과 드레스룸이냐한남동 관저에 사우나실과 드레스룸이 증축됐다고 한다. 국회에서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이 “2022년 8월 관저 리모델링 때 2층에 14평 증축한 기록은 있는데 증축 내역이 없다”고 질문하면서 불거진 내용이다. 대통령실은 국가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내용이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새로 늘린 시설이 서재도 아니고, 운동실이나 온실도 아니고 하필 사우나실과 드레스룸이라는 데는 그만 억장이 무너진다. 이런 구중궁궐에 살기에 윤 대통령의 경제 인식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대통령은 브리핑에서 “그동안 반가운 소식이 참 많았다”며 체코 원전 수주부터 수출실적까지 성과부터 줄줄이 늘어놓았다. “IMF는 우리 성장률을 2.5%로 전망했는데 이는 미국 2.6%에 이어 주요 선진국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라고도 자랑했다. 한국은행이 22일 2.4%로 낮춘 전망치를 내놓은 사실은 쏙 뺐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 모양이다. 물론 대통령은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체감 민생이 기대만큼 빨리 나아지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했다. 장바구니 물가가 여전히 높다며 할인 지원, 비축물량 방출, 할당관세 및 대체품목 수입 등을 통해 공급을 충분히 확대하겠다는 대책도 밝혔다. ● 말로만 개혁…실행능력은 있는가그런데 어쩌랴. 그 말씀은 5월 기자회견 때 했던 답변과 똑같은 것을. “장바구니 물가는 사실 큰 돈 안 써도 한 몇 백억 정도만 투입해서 할인 지원하고 수입품에 대해 할당관세를 잘 운용하면 잡을 수 있다”고 아주 쉽게 큰소리친 걸 윤 대통령은 기억 못한단 말인가(브리핑을 쓴 참모도 잊었다면 큰 문제다). “수입원가를 낮추고 수입선을 다변화해서 좀 더 싼 식자재‧식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범 세계적인 루트와 시장을 조사하고 있다”고 5월에 이미 대통령은시험 답안을 외우듯 답했다. 심지어 2월 KBS 단독 대담 때도 다르지 않았다. “비축 물량을 시장에 많이 풀고 또 수입 과일들도 관세를 인하해서 낮은 가격으로 시장에 많이 유입이 될 수 있는 정책”을 답한 것이다. 기자회견 때마다 똑같은 질문이 나오면, 아니 기자회견 없어도 고물가로 국민이 고통받는 것을 안다면, 심지어 대통령은 답까지 외고 있다면 그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챙겼어야 마땅하다. 어떻게 세 번이나 매번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변을 하고도 대통령이 평화로울 수 있는가 말이다. 이번 브리핑에선 한발짝 나가긴 했다. “보다 구조적으로는, 온라인 도매시장 활성화 등을 통해 유통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품종도 개발해 나가겠다”고 했다. 구조적 개혁을 간절히 바라지만, 될까 싶다. 그래서 걱정스러운 것이다. 구중궁궐 국민과 동떨어져 사는 대통령이, 손 안 대고 코 푼 의대 증원 말고, 정말 정부가 나서야 가능한 ‘본질적 의료개혁’을 할 수 있을지.● 바스티유가 무너진 밤 루이16세 “아무 일도 없었다”개혁을 멈출 수 없다는 윤 대통령에 동의한다. 쉬운 길을 가지 않겠다는 윤 대통령을 응원한다. 그러나 “국민들께서 강력하게 지지해주시면 저는 비상진료체계가 의사들이 다 돌아올 때까지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데는 박수치기 어렵다. 대통령은 지금 비상진료체제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했으나 현실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왕 루이 16세는 숲에서 사냥을 하고 나서 피곤해진 몸과 식후 졸음을 참으며 베르사이유 궁전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작은 일기장에 깃털 펜으로 이렇게 썼다. “아무 일도 없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입법독재’란 말이 이렇게 실감날 줄 몰랐다.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이 이렇게 절실할 줄 몰랐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일제 식민 지배를 미화하거나 친일행위를 찬양한 사람은 공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만들겠대서 하는 말이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20일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현재 정책위원회가 이런 내용의 법안을 성안중이며 곧 당론화 과정에도 착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부정하고 훼손하는 행위도 엄격히 금지하고 처벌하도록 법제화할 것이라고 했다. 아니 그럼, 식민 지배(미화)가 옳단 말이냐? 하고 흥분하기 전에 잠깐 생각해주기 바란다.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 태어난 해방둥이가 올해 79세다. 100세 쯤 된 어르신이 아니라면,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에 책임 있는 행위를 할 수도 없는 세월이 지났다. 그러니까 민주당은 행위가 아닌 말이나 글로써 ‘미화’하거나 ‘찬양’한 사람의 공직 진출을 막겠다는 거다.● 머릿속 검열로 공직진출 막겠다고?자신의 생각이나 신념, 연구결과 등을 표현한 것을 누군가 검열하고 평가해 대한민국 헌법상 권리인 공무담임권을 박탈하는 법을 만든다고? 어떤 사람이 언제 어떻게 생각하고 표현한 것을 누가 무슨 수로 검열해 공직을 못 맡게 한단 말인가? 본인이 미화나 찬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 옳고 그름은 또 누가 검증하나? 사상경찰? 역사인식평가위원회? 아니면 반민족사상법정을 창설하여? 아무리 171석을 지닌 거대 정당이라 해도 당명에 ‘민주’가 있는 민주당이 이럴 순 없다. 유신독재를 넘어 일제 강점기 같은 법을 만들 모양이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했다는 정당이 어떻게 감히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그리고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는지 소름이 돋는다.물론 민주당은 전날 윤석열 대통령이 지적한 ‘반(反)국가세력론’에 열 받은 게 분명하다. 대통령이 “우리 사회 내부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며 허위정보, 사이버공격 등을 거론하자 민주당은 “식민사관에 물든 친일 정권임이 드러나자 이제는 북풍몰이 카드를 꺼냈다”고 공격했다. 그런 식민‘사관’을 지닌 사람은 애초부터 공직을 못 맡게 해야 한다는 게 민주당 입법전략인 모양이다. ● KBS의 문창극 보도, MBC가 바로잡았건만꼭 10년 전에도 민주당은 비슷한 법을 추진한 적이 있다. 지금의 민주당인 새정치연합에서 이종걸 의원이 식민사관을 정당화하거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모욕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일제 식민지배 옹호행위자 처벌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역사적 사실을 날조·유포해 친일·반민족 행위를 찬양·정당화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거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문창극이 2011년 자신이 장로로 있던 교회에서 했던 강연을 문제삼았다. 2014년 6월 11일 KBS뉴스는 이런 앵커 멘트로 시작한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교회 강연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와 이어진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란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가 강연에서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아까 말했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라고 말한 건 맞다. 그러나 그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려고 고난을 준 다음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문창극이 강조했다는 대목은 KBS뉴스 어디에도 없었다. 전체 발언은 MBC가 6월 20일 교회강연을 통으로 방영한 ‘긴급대담 문창극 총리 후보자 논란’을 통해 비로소 알려졌다. 당시 MBC보도본부장이던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이 “광우병 사태를 겪고 난 뒤 다시는 여론을 선동하는 선동방송이 있어선 안 된다는 반성에서 긴급대담을 방영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해준 기억이 난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첫 여름을 뒤흔든 광우병 시위가 MBC PD수첩에서 촉발됐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날 밤 시청자게시판엔 ‘시청료는 KBS가 아니라 MBC에 줘야 합니다’ ‘MBC 살아있네∼’ 같은 반응이 줄을 이었다.● 식민지배옹호 처벌법 폐기되니 5·18특별법 그렇게 문창극의 억울함이 드러났음에도 그는 결국 자진사퇴했다. “개인은 신앙의 자유를 누린다. 그것은 소중한 기본권”이라며 “평범했던 개인 시절 저의 신앙에 따라 말씀드린 것이 무슨 잘못이 되냐”는 항변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그래서였을까. ‘일제 식민지배 옹호행위자 처벌 법률안’은 당시 법사위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숱한 논란을 불러올 게 뻔한 법을 민주당에서 10년이 지난 지금 또 시도하겠다니, 역사의 후퇴가 아닐 수 없다.물론 민주당은 가만있지 않았다. 2020년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5·18 역사왜곡 처벌법’을 당론으로 추진해 그해 말 뚝딱 처리한 것이다.● 역사해석 독점은 자유민주주의 근간 흔든다5·18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왜곡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우려도 엄연히 존재한다. ‘5월 광주’ 폄하 망언에 대해선 비판을 서슴지 않던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도 당시 전형적인 과잉입법일 뿐 아니라 “특정시기의 정부가 역사해석을 독점해 이론(異論)을 처벌하고 자유토론을 봉쇄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고 지적했다. ‘역사의 정치화’ ‘역사해석의 권력화’가 법적으로 용인된다면, 정권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역사해석을 강제하고 권력이 이설(異說)을 처벌하는 선례가 만들어져 민주공화국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법안은 민주당에 의해 단독 처리됐다. ‘예술·학문, 연구·학설, 시사사건이나 역사의 진행과정에 관한 보도를 위한 것이거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목적을 위한 경우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는 예외조항이 붙었을 뿐이다. 그렇게 법이 현실화되자 전남 함평 출신인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는 시(詩)처럼 예술처럼, 피 토하듯 쓴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나는 5.18을 왜곡한다 -최진석(중략) 그 잘난 5.18들은 5.18이 아니었다.나는 속았다.금남로, 전일빌딩, 전남도청, 카톨릭쎈타,너릿재의 5.18은 죽었다.자유의 5.18은 끝났다.민주의 5.18은 길을 잃었다.5.18이 전두환을 닮아갈 줄꿈에도 몰랐다.(중략) 나는 운다.5.18역사왜곡처벌법에21살의 내 5.18은 뺏기기 싫어.● 문 정권 ‘7대 불가’ 능가하는 공직 금지윤평중이 우려했던 ‘선례’가 지금 새끼를 치려한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2021년 말 대선 후보 시절 광주 5·18민주화운동 현장을 찾아 ‘역사왜곡에 대한 단죄법’을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역사인식의 시점을 일제강점기로 넓혀 독립운동과 일본군위안부 등을 왜곡하는 행위를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거다. 대선에서 패하는 바람에 그 법은 흐지부지됐다. 이제 이재명이 ‘여의도 대통령’을 방불케 하는 막강 야당 대표로 연임되자 당 차원에서 추진할 모양이다.머릿속 뇌를 잡아 가둘 수도 없으면서 사람의 사관(史觀)까지 정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문재인 정부 때 장관급 인사 검증 기준으로 5대 불가(위장 전입, 병역 기피, 불법적 재산증식, 세금 탈루, 연구부정행위), 여기에 음주 운전, 성범죄 이력을 추가한 7대 불가가 존재했다. 곧이곧대로 지켜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행위’를 문제 삼았던 것이지 ‘위장 전입 생각’ 같은 머릿속을 검증하지는 않았더랬다. 2019년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조국의 과거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산하 남한사회주의과학원(사과원) ‘활동 전력’을 지적하긴 했다. 이에 조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자유주의자인 동시에 사회주의자다. 이는 모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머릿속을 밝힌 바 있다. 그래도 그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됐고 잠시나마 이 나라 법무행정을 주무를 수 있었다. ● 사상의 자유 없는 나라, 북한과 뭐가 다른가위험으로 치면, 핵을 움켜쥔 북한과 머리를 맞댄 우리로선 친북파가 친일파보다 훨씬 위험하다. 위협적으로 치면, 국민 머릿속까지 검열하려는 반(反對)민주적, 전체주의적 민주당이 반국가세력을 처벌하겠다는 현 정부보다 더 위협적이다. 그나마 지금은 민주당이 야당이어서 윤 대통령이 거부권으로 맞설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만일 다음 대선에서 이재명 같은 역사인식을 지닌 민주당 대선후보가 당선돼 정권을 잡으면, 어떤 독재권력을 휘두를지 모골이 송연하다. 거대 의석은 이미 확보돼 있다. 문 정권 때처럼 역사왜곡법은 거침없이 통과될 것이다. 친일파 잡기 사상 검열로 공직자를 숙청하고, 민주당 공식 역사인식을 공유하는 저희들끼리 권력 나눠먹기가 판을 칠 게 뻔하다. 17세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정신세계는 종교에 지배됐다. 표현의 자유는 물론 사상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세계사를 관통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흐름에 따라 서양에선 시민혁명을 거쳐 표현의 자유가 헌법적 테두리 안에 보장됐고 우리도 민주화와 함께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민주당이 그 흐름을 끊고 우리 국민을 일제강점기 황국 신민처럼, 북한의 김일성민족처럼 만들려 하고 있다.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1935년생인 유종호 전 연세대 교수는 1945년 8월 16일 거리 여기저기에서 흰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저씨들이 떼 지어 “좋다! 좋아!”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고 ‘나의 해방 전후’(2004년)에 썼다. 충주남산초등학교 5학년 때다. 그 날 운동장 조회에서 교장이 전쟁 끝났으니 이제 방공호 파기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기억은 분명한데 일본 말이었는지 우리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다음 날은 대오를 지어 교사들이 준비한 종이 태극기를 흔들며 우리말로 만세를 불렀다. 동네 사람들도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는데 일본 말로 만세 부르다 처음 우리말로 불러보니 낯선 진정성 같은 것이 느껴지더라고 했다. 기억은 선택적으로 선명하다. 개인의 기억뿐 아니라 국가의 기억도 그렇다. 보통 사람은 각자에게 닿는 의미에 따라 기억하거나 잊어버리지만 국가의 집단기억은 다르다. 권력 의지에 따라 역사가 선별돼 민족 정체성을 굳히고 특정 감정을 키울 수 있다. 분단사관을 가진 진영에선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 될 나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남북 분단을 불러온 매국노로 기억하고 가르치려 들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대한민국 역사를 오욕의 역사처럼 서술한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에 맞서 뉴라이트 지식인 모임 ‘교과서 포럼’이 대안 교과서를 내놓기도 했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은 뉴라이트에 속하지 않았다. 2022년 저서 ‘끝나야 할 역사전쟁’에서 이념을 매개로 국민을 편 가르는 그간의 건국 논쟁을 극복하고 국민 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역사학자다. 부제가 ‘건국과 친일 논쟁에 관한 오해와 진실’인 책을 쓴 그가 뉴라이트라며 역사전쟁 한가운데로 소환됐다. ‘수박’ 멸칭을 만들어낸 더불어민주당 정봉주 최고위원 후보가 개딸들에게 수박으로 몰린 것만큼이나 극단적이고 황당하다. 광복회에선 김형석이 대한민국 건국 시점을 임시정부 수립 연도인 1919년이 아니라 1948년이라고 했다며 임시정부 역사를 폄훼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 “건국 시점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해, 1919년의 3·1독립선언에서 1948년의 정부 수립까지의 과정으로 이해했다”고 썼을 뿐이다. 김형석도, 윤석열 정부도 ‘건국절’을 추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종찬 광복회장이 김 관장 임명이 건국절을 추진하는 의도 때문이라며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독립기념관장 면접 과정에선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어디냐고도 물었다고 한다. 기이한 질문이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손자인 1936년생 이종찬은 일제강점기 중국에 살았기에 이 땅의 삶을 모를 수 있다. 유종호는 운동장 조회 때마다 제일 먼저 황국신민(臣民)의 맹세를 외쳐야 했다고 기억한다. 김형석이 “일본”이라고 답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국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냐”고 했는데도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고 매도당한다면, 나라도 억울할 듯하다. 따지고 보면 역사전쟁을 시작한 사람은 야당 지도자 시절의 김대중(DJ)이었다. 1993년 동아일보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 애국지사들이 귀국해 박대받고 후손들이 가난에 시달린 것은 “미군정 이승만 박사 통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결국 친일파 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 나라를 지배해 왔기 때문”이라고 썼다. DJ는 그러면서도 “(국내에서) 교육 문화 종교 사회사업을 하며 실력을 양성하게 했던 분들의 공로를 잊어선 안 된다”며 “그중에서 대표적인 분이 (인촌) 김성수 선생”이라고 적었다. “일부에서 사소한 행적을 들어 친일 운운하는데 이런 자세는 재고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김형석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잘못된 기술로 매도되는 분들이 있어서도 안 되겠다”고 했다. 그런 김형석을 친일파라고 비판한다면 DJ도 친일파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건국절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최근 윤 대통령은 맞는 말을 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입각할 때 통일 시점이 건국일이 된다”는 대통령실의 설명까지 말이 된다는 건 아니다. 통일이 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미완의 국가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역대 대통령들도 통일이 광복의 완성이라고 강조하긴 했다. 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방향성이 담긴 통일을 강조할 예정이라고 한다. 윤 정부 들어 자유도, 민주주의도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대로 간다면 내년 8·15 경축식이 온전히 열릴지 우려하는 국민을 위해서라도 윤 대통령은 지금, 여기서부터 자유와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는 정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나는 ‘아빠 찬스’라는 말이 싫다. 특히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과 관련해선 절대 쓰면 안 될 용어라고 본다. ‘아빠’라는 유아적 단어에다 TV퀴즈에 나오는 ‘찬스’를 붙여 귀엽고 가볍고 심지어 웃기는 느낌을 줌으로써 문제의 심각성과 중대성, 정치사회적 폭발성을 뭉개는 치명적 맹점이 있어서다. 이숙연 신임 대법관이 6일 윤석열 대통령의 임명 재가를 받자 대부분의 언론은 ‘아빠 찬스’ 논란 끝에 이숙연 대법관이 임명됐다고 보도했다. 20대인 그의 딸은 용산 재개발지역에 7억 원 대 빌라 보유자다. 7년 전 제 돈 달랑 300만 원에 아버지한테 증여받은 돈 900만 원을 더해 아버지가 골라준 주식을 샀다가 6년 만에 아버지한테 되팔아 4억 가까운 돈을 벌었다. 여기에 또 아버지한테 증여받은 돈을 더해 빌라를 샀다는 것이다. 그 딸은 좋겠다. 아빠가 돈도 많고 능력도 많아서. 사실 ‘아빠 찬스’처럼 단 넉자로 그사세(그들만이 사는 세상)의 끔찍한 자식사랑, 알음알음 배타적으로 벌어지는 편법 탈법적 특권 세습을 이토록 섹시하게 전달하는 정치적 용어도 없다. 그러나 그런 아빠가 되지 못한, 그런 아빠를 갖지 못한 대다수 국민은 청문회를 보며(또는 TV를 끄며) 억장이 무너졌음을 윤석열 정부는 알아야 한다. ● 조국 수사했던 검찰총장, 대통령 되니 변했다 돌아보면 맨 처음 윤석열 정부가 국민을 절망케 한 것도 인사, 그 중에서도 아빠 찬스라고 본다. 검찰 편중, 동창 편중인사가 국민을 실망시켰지만 절망까진 아니었다. 일찍이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SNS에 이렇게 써 국민 속을 뒤집긴 했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돈도 실력이야.” 결과적으로 대통령 탄핵 사태까지 몰고 왔던 최순실 사태였으나 그때만 해도 엄마 찬스란 말은 없었다. 아빠 찬스는 2019년 9월 조국 법무부 장관 인사 청문회 때 처음 나왔다. “편법, 위선, 그리고 ‘엄마 찬스’ ‘아빠 찬스’를 이용해 딸이 (대학에) 부정입학을 한 것이 아닌가.” 딸의 표창장까지 가짜로 만든 조국에게 정점식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호통을 쳤던 것이다. 그때 이미 조국 수사에 착수했던 당시 검찰총장이 지금의 윤 대통령이다. 그랬던 윤 대통령이 집권 뒤 첫 조각부터 아빠 찬스 수두룩한 장관 후보자들을 마구 들이민 건 국민에 대한 배배배배배신이 아닐 수 없다. 참여연대가 윤 정부 첫 장관 후보자 19명(총리 포함)을 검증했더니 공직윤리법 위반이 15명, 자녀 진학 취업 병역 등 특혜 의혹이 13명이다. 이명박 정부 때보다 부자가 많은 건 죄라고 할 수 없지만(당시 총리 포함 장관 16명 평균 재산은 31억원·윤 내각은 41억원) 땅 투기나 탈세가 드러나 낙마했던 것과도 차원이 다른, 희한한 양상이다. ● 불법 아니어서 더 섬뜩한 ‘특권 세습사회’ ‘아빠 찬스’ ‘엄마 찬스’ ‘세금 탈루’…위법만 안 나오면 공정한가. 2022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 사설 제목은 핵심을 찌른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한국 풀브라이트 동문회장 시절 아들과 딸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한 사실이 확인돼 자진 사퇴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도 경북대병원 부원장-원장 시절 딸과 아들을 의대 특혜 편입시켰다는 의혹에 43일간 “부정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다 대통령 지지율만 까먹고 물러났다. 경북경찰청 수사에선 ‘무혐의’로 나오긴 했다. 하지만 조국 수사 하듯 털었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지는…알 수 없다. 윤 정부 장관 자제들의 숱한 의혹들은 꼭 ‘불법’이라고는 할 수 없기에 외려 섬뜩하다. “법과 제도를 잘 아는 사람이거나 가진 자들만의 일이다 보니 괴리감과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고 하태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이 경향신문 기고에 쓴 걸 보니, 알 것 같다. 편법적 행태가 합법임에도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게 보이는 것은 전문가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만 헤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국민 대다수는 모르고 살지만 회원제 클럽처럼 알음알음 전화 한통, 돈과 명품선물과 네트워킹(쉽게 말하면 ‘빽’)은 물론이고 때로는 온갖 치사찬란한 방법을 불사해 자식세대에 학벌과 부동산과 계급을 물려주는 ‘특권 세습사회’는 분명 존재한다. 유럽 선진국에선 왕족을 비롯한 상류계급이 전쟁 나면 맨 먼저 달려 나가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발휘해 범접 못할 클라스와 함께 사회통합을 유지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르다. 이 험한 세상, 믿을 건 내 식구밖에 없다는 ‘피난민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 나라에선 남들이 뭐라 해도 법과 세금 피해가며 내 자식한테 모든 걸 다 물려줘야 하는 것이다. ● 윤 대통령 뚝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미국 하와이대 명예교수 구해근은 ‘특권 중산층’(2022년)에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중산층이 줄어들면서 한국사회도 고소득 전문직·관리직의 상위 10%와 나머지로 분리됐다고 썼다. 고위공무원, 대기업 관리직, 의사, 변호사 등 상위 ‘특권 중산층’은 점점 더 불안해지는 사회에서 자기들이 획득한 계급을 자식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사교육에 경쟁적 이기적 기회주의적으로 매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들 ‘80년대 학번-60년대생’이 번듯한 일자리를 차지해 90년대생 자식세대에 학력·소득·직업·인맥·문화적 역량 등을 세습한다는 것이 조귀동이 쓴 ‘세습 중산층 사회’(2020년)였다. 그 2030세대는 ‘공정’에 극도로 예민하다.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요원 정규직 전환) 사태와 조국 사태가 공정감각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2022년 ‘공정과 상식’을 들고 나온 국민의힘 후보 윤석열에게 표를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부모가 대학교수이고 사립 초등학교, 서울대 법대를 나와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아파트에 살던 윤 대통령은 특권 세습 인사들을 대놓고 내각에 앉혔다. 검찰 만능주의에 공감능력과 거리가 있어(배우자 제외)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 봤어요?”하며 싸고돌 뿐이다. 그렇게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로 총선까지 패배하고도 최근 또 아들 의경 특혜 의혹의 경찰청장 후보, 장남의 병역 기피 의혹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를 내놓았으니 윤 대통령의 뚝심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인사검증했던 한동훈, 이준석처럼 “no” 할수있나 정부 출범 초, 이준석 당시 국힘 대표는 윤 대통령과의 첫 회동에서 “(논란이 되는) 인사 문제에 대해선 지방선거 전에 최대한 빠르게 판단해 달라”며 할 말을 했다. 이름까지 콕 찍어 말하진 않았으나 윤 대통령이 “위법행위는 없었다”고 방어하는 ‘40년 지기’ 정호영을 자르라고 할 수 있는 결기는 이준석 아니면 누구도 못 했을 일이다(믿기 힘든 독자를 위해 날짜를 적시하면 2022년 5월 13일이다. 이런 말까지 했기에 그는 쫓겨난 당대표 1호가 됐다). 초대 법무부 장관 시절 인사검증을 맡은 한동훈 국힘 대표는 책임을 통감할 필요가 있다. 첫 조각 검증은 그가 하지 않았지만 지난해 국회에서 임명 동의안이 부결됐던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는 한동훈이 검증했다. 대학생 아들의 김앤장 인턴 특혜 의혹, 가족의 10억 주식 재산신고 누락 등을 알고도 대통령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로 침묵했던 일이 반복될까 우려스럽다. 특권 세습 장관 인사가 또 나온다면, 당 대표로서 대통령에게 할 말을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부자·특권세습·양남(서울강남·영남)정당으로 각인돼서야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지, 상위 10% 아닌 국민의 삶은 나아진다는 희망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73년생 한동훈은 8학군 출신이고 85년생 이준석은 상계동 출신이다. 한동훈은 ‘공공선’을 강조하고 이준석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강조한다. 한동훈이 다음 대선에 출마할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준석이 대선에 나올지는 잘 모르지만 상계동에서도, 동탄에서도 자기처럼 공부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학원 안 다니면 큰일 나는 나라에서 ‘수학 국가교육 책임제’ 같은 교육사다리 정책을 통해서다. 한동훈과 이준석의 짱짱한 경쟁이 보수와 나라 개혁의 신재생에너지가 됐으면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내놓고 말하기 창피하지만 학교 때 제일 못한 과목이 체육이었다. 그 시절 체육선생님들은 왜 그리 무섭게만 굴었는지. 중1 때 처음 체육복 입고 운동장에 나선 순간부터 줄 똑바로 못 섰다고 욕설과 체벌 세례를 받은 것이 내가 기억하는 체육시간의 거의 전부다(여학생의 체육에 대한 부정적 태도 형성은 주로 중학교 시절에 이뤄지며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체육교사라는 2002년 논문도 발견했다!). 당연히 운동의 의미와 스포츠의 재미를 모르고 살았다. 직접 하는 것은 물론(논설실에서 단체 등산을 가면 나는 산 아래 카페에서 독서하는 척 기다리고 있었다) 남이 하는 걸 보는 것도 안 좋아했다(세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축구다. 장정 스무 명이 공 하나 차겠다고 한 시간 반씩이나 뛰어다니다니^^).그런데 뒤늦게 올림픽에 빠졌다. 경기는 여전히 잘 모르겠고 경기 기사가 훨씬 재미있다. 우리 선수들이 어쩌면 그리 말도, 행동도 당당하고 시크한지, 어릴 때 선진국 선수한테 느꼈던 그 느낌을 안겨준다. 후진국에 태어나 아직도 후진국 행동거지와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의도-용산 사람들과는 완전딴판이다. ● 선진국 선수답게 “어차피 세계 짱은 나” 대한민국에 여름올림픽 통산 100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반효진이 최연소 국대(국가대표)라는 점도 감동이다. 두 달 후 열일곱 살이 되는 2007년 9월 생 반효진은 “나도 부족하지만 니들도 별 거 아니다” 할 만큼 담대하다. 심지어 사격과녁과 기록이 담긴 노트북엔 이런 쪽지까지 붙여 놨다. ‘어차피 세계 짱은 나다’.소심한 내가 선수들한테 가장 배우고 싶은 것도 그 자신감이다. 2일 복싱 여자 54kg급 8강전에서 승리해 한국 복싱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확보한 임애지 선수. 지난 도쿄 올림픽에선 1승도 못해 복싱을 그만두려고 했는데 이번에 좋은 성적을 거둔 비결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번에는 성적을 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면 이번 올림픽에선 성적 압박에서 벗어나 도전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됐다는 거다. 당당해서 세계를 사로잡은 매력으로는 사격 김예지를 따라갈 수 없다. 사격 공기권총 10m 여자 결선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김예지. 다섯 살짜리 딸의 엄마이기도 한 그의 시크한 매력엔 나도 쏙 빠질 정도다. 검은 안경, 검은 모자, 검은 옷차림으로 무심한 듯 태연하게 탕, 총을 한 방 쏘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총구를 정리하는 모습은 크, 액션영화 속 여주인공보다 멋지다. 뉴욕타임스가 1일 “파리올림픽에서 가장 쿨한 선수”라고 소개했다는데 참내, 언제 우리 선수가 이런 소리를 들어봤나 싶어 내가 다 자랑스럽다. ● 대통령 비판이 ‘국민 스포츠’ 여서야너무 촌스러운가.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메달 많이 따와 대한민국 국위를 선양해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젊은 그대들은 경기와 경쟁을 즐기며 한껏 실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금메달 5개, 종합 순위 20위 이내 진입’으로 소박하게 목표를 잡은 것도 아주 잘했다고 생각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지 않던가(덴마크 행복지수가 높은 것도 기대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선수들이 고마운 건 지금 우리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는 그 무엇이 절실해서다. ‘국뽕’이어도 할 수 없다. 지지고 볶기만 하는 국회, 지지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정치권, 대통령이 나서기만 하면 망가지는 국정, 국민 스포츠가 돼버린 대통령 부부 비판…. 젊은 선수들은 저렇게 최선을 다하는데 세금으로 월급 받는 저들은 어찌 저리 자기네 이익만 꾀하는지, 왜 이리 나라는 거꾸로만 가는지 무덥고 답답하다. ‘공정과 상식’이 목마른 지금, 양궁은 공정한 선발로 여자 양궁 10연패를 안겨주었다. “한국 양궁엔 금수저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인맥, 학맥, 같은 팀, 국대(국가대표) 전력 안 따지고 오로지 점수로만 국대를 뽑았다. 우리나라에 공정한 기회가 성공을 가져올 수 있음을 눈으로 확인시켰다(11연패가 계속되지 않아도 이것으로 충분해요^^그렇죠 여러분?).● 아빠가 스포츠 선수…운이냐, 실력이냐‘삐약이’ 신유빈은 탁구 선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탁구 신동’이었다. 금수저 없다는 양궁과 굳이 비교한다면 ‘아빠 찬스’라고 시비를 걸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탁구선수가 되고 싶어 죽겠는데 실력은 늘지 않고, 신유빈한테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다면 말이다. 능력주의를 철저히 중시하는 스포츠에서도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운(運)은 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가 가장 큰 운이다. 키가 큰 농구선수에게는 ‘천운을 타고 태어난 선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데 농구선수가 부모인 선수는 진짜 천운인 셈이다. 외모나 재능도 어찌 보면 사람이 타고 날 수 있는 큰 행운이다. 그렇다고 신유빈이 거저 올림픽 티켓을 땄다고 할 순 없다. ‘유전자 복권’은 얻어냈을지 몰라도 도쿄 올림픽 이후 손목 부상으로 수술대에 올랐고 탁구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힘든 시간도 보냈다. 인내와 도전과 극복도 실력과 함께 행운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능력있는 선수라도 자만하기보다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 우리 모두의 행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선수들에게 가장 큰 행운은 엘리트 스포츠를 장려하고 적극 지원한 선진 한국에 태어난 것이라고 본다. 이번에 놀라운 성적을 거두는 이유를 정강선 선수단장은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5대 케어풀(CARE-FULL)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심리, 회복, 영양, 균형, 커스터마이징 등 총 4대 전문 케어팀을 가동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혼자 부르짖었다. 학교 다니는 우리 아이들, 특히 취약계층의 아이들한테도 그런 최고의 지원을 해주면 안 되느냐고.태어나면서 첫 번째 만나는 운이 ‘어디서 태어났는가’다. 홍콩과학기술대 김현철 교수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에서 쓴 내용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위 20% 안에 들어가는 운 좋은 사람들이라는 거다. 실감나진 않지만 고마운 소리다. 살 만큼 살게 된 지금, 국가는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거나 운이 나빠 직장이나 건강을 잃은 사람들을 도울 책임이 있다고 했다. 선진국답게 당당하게 뛰는 젊은 선수들처럼, 우리도 ‘국뽕’이라도 맞고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살고 싶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한동훈 압승의 팔 할은 김건희 여사의 힘이라고 본다. 국민의힘 당 대표 경선 초반, 김 여사는 디올백 수수 사과에 관해 한동훈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보낸 문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선수로 등장했다. 경선 막판인 20일엔 검찰총장 패싱 ‘여왕 조사’를 받은 것이 드러나 무더운 여름 다수 국민을 더 열받게 했다. 당 대표를 뽑는 ARS 투표와 일반국민 여론조사가 21∼22일 진행되는 걸 김 여사가 알고도 그 전날 나선 것이라면, 대선 캠프 시절 ‘개 사과’를 연상케 하는 정무감각이다. 이 나라가 ‘검사 위에 여사’의 나라란 말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때 들고나왔던 공정과 상식은 정녕 개나 주라는 건가? 민심은 윤 대통령에게 이미 두 번의 경고를 보냈다. 작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와 4·10총선 때 회초리를 들었으면 대통령은 아픈 척이라도 해야 했다. 윤 대통령이 달라지기는커녕 이번엔 김 여사까지 한동훈의 당 대표 당선을 막으려 드니 마침내 당심마저 돌아선 것이다. 대통령도 아닌 대통령 부인이 대통령실을, 대한민국을 지켜온 보수 집권당을, 심지어 국법과 국민을 우롱하는 것까지 봐줬다간 저 불안하고 불길한 거야 대표한테 나라가 넘어갈 듯싶었던 거다. 한동훈의 당 대표 당선은 윤 대통령이 받은 세 번째 경고장이다. 양남당(서울 강남·영남)에 꼰대정당이던 국힘의 당심(62.69%)도 민심(63.46%)과 동률이 됐다. 한동훈만이 국힘 내에선 유일하게 김 여사에게 “No” 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대위원장 시절 김 여사가 보냈던 문자에 읽씹(읽고 답장 안 보냄)한 게 그 증거다. 검찰 출신 윤 대통령의 한계를 모르지 않으면서 또 검찰 출신 당 대표가 나온 것도 신군부 출신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처럼 서로가 외려 잘 알기에 획기적 변화로 정권 재창출도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 믿고 싶다. 대통령 부부는 완패했다. 이제는 윤 대통령과 김 여사가 달라져야 한다. 당선 직후 한동훈은 김 여사의 비공개 검찰 조사를 놓고 “국민의 눈높이를 고려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동의할 수 없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렇게 민심과 동떨어진 채 V1, V2 심기만 챙기는 인사가 대통령실 고위직에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그러니 윤 대통령의 ‘격노’와 김 여사의 ‘개입’에 국가 에너지가 소모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는 것이다. 2년 10개월을 이렇게 보낼 순 없다. 한동훈은 대표 수락 연설에서 국민이 명령한 변화로 민심에 대한 반응을 첫손에 꼽았다. 제2부속실과 특별감찰관 설치를 최우선 처리하기 바란다. 윤 대통령과의 면담도 좋고, 당정협의도 좋고, ‘약속 대련’이나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도 좋다. 윤 대통령과 김 여사 눈에는 사소한 문제일지 몰라도 국민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 입만 열면 ‘법치’를 강조하는 검찰 출신 대통령이 자기 부인은 ‘법 위’에 두어선 국민 신뢰를 얻지 못한다. 제2부속실은 단순히 김 여사의 일정과 업무를 보좌하는 게 아니다. 대통령실 업무 계통을 명확히 함으로써 대통령 부인이 국정과 인사와 당무와 이해관계에 관여하는 일이 없음을 명명백백히 하는 조직이다. 김 여사 문제부터 처리해야 윤 대통령 지지율이 움직이고 그 힘으로 개혁과 정책을 성공시켜 정권 재창출의 희망도 살릴 수 있다. 1987년 전두환 각본-노태우 연출 6·29선언은 ‘나를 밟고 넘어가라’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통 큰 가슴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차별화 전략이 있어 가능했다. 윤 대통령은 원팀과 운명공동체를 강조했지만 지금처럼 무능한 대통령실, ‘개 사과’ 수준의 정무감각에 국힘과 한동훈이 원팀 돼 운명을 같이하자고 요구한다면 민심도 민생도 되찾기 어렵다. 안타깝지만 이젠 윤 대통령이 한계를 인정할 때다. 어쩌면 한동훈은 노태우의 길을 갈지 모른다. 물론 그는 총선 때 제2의 6·29선언을 하지 못했다. 윤 대통령의 가슴통과 한동훈의 전략은 그때 그 사람들만 못했고 국힘은 정권 재창출은커녕 당의 화합도 불안한 상태다. 그럼에도 지금으로선 윤 대통령의 ‘검찰 통치’ ‘여사 정치’를 제어하고 거야 대표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검찰과 대통령을 잘 아는 한동훈뿐이라는 기대가 있다. 영민한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은 연초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을) 백담사까지만 보냈기 때문에 본인도 나중에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역사 바로 세우기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민심을 먼저 생각하라는 일침이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일련의 ‘김 여사 문자 사태’를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았다. 20년 전 TV사극 ‘여인천하’를 다시 보는 기분이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논란이 뜨거웠던 1월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감히 김 여사의 문자를 읽씹 했고, 그래서 김 여사가 디올백 관련 사과를 못 했으며, 그 여파로 여당이 총선에서 대패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할 일인가.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의 10일 등장은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4·10총선 직후 김 여사가 전화를 걸어와 57분간 통화했다며 페이스북에 이렇게 밝힌 거다. “(김 여사는) 대국민 사과를 거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며, 그 그릇된 결정은 주변 사람들의 강권에 따른 것이라고 했는데, 두 달 사이에 그 동네의 말이 180도로 확 바뀐 겁니다. 사과를 못 한 게 한동훈 때문이라고…. 그러니 어이가 없죠.”그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지금 생각해보니 이중 코드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여사가 윤 대통령과 한동훈의 화해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는데 ‘대통령이 한동훈한테 화를 낸 것’이 아니라 ‘한동훈이 대통령에게 화를 냈다’는 식으로 말하더라는 거다. 격노의 대왕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희한한 내러티브다. 최근 사태를 통해 내가 얻어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① 김 여사는 이미 정치를 하고 있다. ② 한동훈은 김 여사가 원치 않는 국힘 당 대표다. ③ ‘대통령 부인 정치’의 제도화를 논할 때다. ● 김 여사 OK 없이 문자 공개 가능한가이번 논란은 한동훈의 읽씹과 왜 지금 노출이냐로 나눠 보면 이해가 쉽다. CBS 김규완 논설실장이 4일 ‘편집’해 공개한 첫 문자가 중요하다. ‘몇 번이나 사과하려고 했지만 대통령 후보 시절 사과했다가 오히려 지지율이 떨어진 기억이 있어 망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에서 필요하다면 대국민 사과를 포함해 어떤 처분도 받아들이겠다’는 게 핵심이다. 이토록 애절한 문자를 한동훈이 읽씹 하다니…무례했다, 정치적으로 미숙하다, 이런 사람에게 또 당 대표를 맡길 수 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같은 반응을 능히 짐작할 한동훈 측에서 문자를 공개했을 리 없다. 당 대표를 정할 때마다 가만있지 못했던 대통령실에서도 7일 ‘개입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날 더욱 절절한 문자 5통이 또 공개됐다. 어떤 간 큰 친윤도 대통령 부인 허락 없이 내밀한 문자를 공개하진 못 한다. 그렇다면 ‘김 여사 측’에서 대통령실도 패싱하고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 한동훈 당 대표 등극을 막기 위해. 달랑 문자 다섯 통으로 대중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니. 정치 9단 뺨치는, 귀신같은 정무감각이 아닐 수 없다. ● 공사 구분 못해 공정과 상식 무너진 것 한동훈이 왜 감히 김 여사 문자를 읽씹 했느냐에 관해선 한바닥을 써도 모자랄 터다. 사람마다 해석은 다양하겠지만 맨 처음 문자를 공개한 김규완은 “김 여사 쪽, 윤 대통령 측에서 나오는 해석인데 한동훈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선긋기를 한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 부부가 한동훈에게 분노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거다.한동훈 자신은 “김 여사에게 사과의 뜻이 없다는 확실한 입장을 여러 경로로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9일 방송 토론회에서다. 무슨 소리냐, 김 여사는 사과할 뜻이 있었다고 보는 분들은 진중권 발언을 다시 봐주기 바란다. 김 여사는 사과를 거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면서도 주변의 반대를 탓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에서 정해주면 하겠다”는 문자를 한동훈에게 보낸 바로 그날 김 여사가 주변에는 ‘사과 불가’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한동훈은 김 여사의 귀신같이 사람 홀리는 정무 감각을 너무 잘 알기에 읽씹으로 침묵했을 수 있다. 9일 토론회에서 한동훈이 “(당시 상황을) 다 공개하면 정부가 위험해진다”고 발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6일 SBS 유튜브 채널에 나와 한동훈이 공사(公私) 구분을 강조한 것도 내게는 심쿵(심장 쿵!)이었다. “공적인 의사소통과 공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관계에서 사적인 방식으로 관여하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건 부적절하다”는 말. 맞는 말 아닌가. 상상해보시라. 공인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잘못했음은 안다면서도 굳이 사적 친분을 찾아 구구절절 사정을 늘어놓을 때는, 자신을 좀 봐달라는 의미다. 깨끗이 사과할 작정이면 사정사정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 싶은 그 상대가 공적 채널 건너뛰고 그냥 봐주기로, 그러니까 박절하지 못해 그들끼리 덮고 넘어간다면, 그놈의 조직이 제대로 되겠나.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상식이 무너졌다는 비판을 듣는 것이다. 여기에 선을 긋기 위해 한동훈이 무응답한 것이라면, 나는 잘했다고 본다. ● 차라리 ‘대통령 배우자법’으로 규제하라 오해 없기 바란다. 23일 전당대회에서 한동훈이 당 대표가 되든 안 되든 나는 상관없다. 드라마라면 결말이 궁금하지만 현실은 오싹할 뿐이다. “요 며칠 제가 댓글팀을 활용하여 위원장님과 주변에 대한 비방을 시킨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1월 23일 문자에서 드러났듯, 김 여사에게 ‘댓글팀’이 있다면 ‘정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그래서 과감히 발상의 전환을 해보았다. 대통령 부인에게 국가 최고 결정권자의 아내로서 이에 상응하는 법적 지위와 역할을 보장하고 책임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대는 대통령 부인 좋아하는 나라는 없다(심지어 유능한 힐러리 클린턴도 대통령 부인 때는 미운털 박혔었다). 게다가 김 여사는 대선 전 “내조에만 전념하겠다”고 국민 앞에 굳게 약속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윤 대통령은 김 여사의 정무 감각에 상당히 의지하는 듯한데 김 여사의 활동과 예산을 관리 감독하는 제2 부속실과 특별감찰관 설치는 한사코 마다하고 있다(김 여사의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개혁신당은 총선 전 대통령 배우자의 지원과 의전의 법적 근거를 명문화한 ‘대통령 배우자법’ 제정을 밝힌 바 있다. 대통령 부인을 고위 공직자로 간주해 공적 활동을 양성화하되 국정 개입은 견제하기 위해서다. 다분히 김 여사 관련 논란을 의식한 법안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통령 배우자에게 그 찬란한 지위에 맞는 책임을 지울 필요가 있다. 실제로 미국은 연방법 제3편 제105조를 통해 대통령 배우자를 대통령의 조력자로 정의하고 지원을 규정해놨다. 1978년 제랄드 포드 대통령 시절 부인의 역할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 앞으론 대통령 후보 부인도 검증하라미국서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재선 가도를 계속 뛸지 말지를 정하는 최종 결정권자도 부인 질 박사라지 않은가. 초대 워싱턴 대통령 부인부터 42대 클린턴 대통령 부인까지 퍼스트레이디 44명의 활동을 조사한 결과 최소 31명이 대통령과 정책을 토론했고 14명은 공직자 임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부통령보다 더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조력적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라는 거다. 대통령과 사적 관계인 배우자이고, 선출되지도 않은 공인에게 이 엄청난 지위와 역할과 권력이 주어지는 게 옳은지는 당연히 논란거리다. 그래서 ‘대통령 배우자법’이 필요하다는 거다. 이 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다음 대선부터는 대통령 후보 배우자도 대통령 후보와 똑같이 검증받는 게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궁중 사극을 마무리한다면…2023년 영화 ‘나폴레옹’에서 영웅이 죽기 전 읊조린 세 마디가 “프랑스, 군대, 조세핀”이었다. 윤 대통령이 영화를 남긴다면 이럴 것 같다. “대한민국, 검찰, 건희.”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등장했을 때 ‘윤석열 대통령 아바타’는 아니라고 쓴 적이 있다. 술은 입에도 안 대고, 구리구리한 꼰대가 아니며, 말 잘하고 옷도 잘 입어서다. 어쩌면 윤 대통령의 아바타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인 듯하다. 한동훈과 함께 대통령 최측근이라는 그는 첫째, 윤 대통령의 술친구 소리를 듣는다. 둘째, 외모만 은근 비슷한 게 아니다. 이태원 참사 때 압구정동 자택에서 일산 사는 운전기사 기다리느라 85분이나 지체했다. 권위주의적 꼰대가 분명하다. 셋째, 그러고도 참사 다음 날 “경찰과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둥 국민 억장 무너지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도 윤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그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최근 발간한 회고록에서 “이 장관이 좀 더 일찍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는 것이 옳다”고 2022년 말 대통령에게 간곡히 말했다고 썼다. 그때 대통령이 입법부 수장의 말을 경청했더라면 정부가, 국회가 지금처럼 꽉 막히진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실에선 ‘왜곡’이라며 펄쩍 뛰었다. 회고록대로 윤 대통령이 ‘김 의장 말이 맞지만 이태원 참사에 대해 지금 강한 의심이 가는 게 있어 결정을 못 하겠다’며 ‘극우 유튜버의 방송에서 나오고 있는 음모론적인 말을 술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일은 윤석열 정부의 앞날을 가늠하게 된 첫 지표가 됐다’고 김 전 의장이 썼듯, 이상민은 윤석열 정부의 안위(安危)를 좌우한 인물로 기억될 게 틀림없다. 윤 대통령 인사의 상징이 이상민이다. 대통령의 충암고 4년 후배인 그는 검찰 아니면 동창이라는 윤 대통령의 친목 인사 중에서도 핵심으로 꼽힌다. 윤 정부 인사가 대개 그렇듯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도 거리가 있다. 판사 출신이면서도 위장전입, 세금 체납, ‘아빠 찬스’, 전관예우 등을 두루 드러내며 국회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돼 정부 출범부터 국민을 실망시켰다. 그런 그가 윤 대통령과 싱크로율 100%라는 말까지 듣는 건 나라와 국민의 비극이다. 의대 증원에 대해 이상민은 3월 KBS에 나와 “정부가 일방적으로 2000명을 요술방망이 두드리듯 정한 것이 아니다”라며 의협이나 의대 학장들과 긴밀한 협상을 거쳤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4월 총선 직전 대국민 담화에서 한 말과 거의 비슷하다. 반면 법원은 결정문에서 “2000명이란 수치가 제시된 건 증원 발표 직전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가 사실상 처음”이라고 했다. 최측근 장관이 대통령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하고 있다면 국가의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능력 있는 인사라고 하기도 어렵다. 한동훈 역시 4·10총선에서 ‘강감찬 아님’을 드러냈지만 이상민은 더하다. 장관 주재로 6월 21일에도 20번째 국가안전시스템 개편 종합대책 추진상황 점검회의를 열었으나 사흘 뒤 경기 화성 일차전지 공장 큰불로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회에서 이상민이 “안타까운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서 시행할 예정”이라고 말한 것도 이태원 참사 1주기 때 말과 흡사하다. 그래서 이상민이 진작 문책 경질됐으면 오송 참사, 채 상병 사건처럼 무책임한 정부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법복 귀족’ 출신 윤 대통령은 ‘딱딱 법적 책임’을 강조했지만 장관이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라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국민 정서 무시하고 성공한 정권은 없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국민에겐 박절하면서 내 식구, 내 사람만 싸고도니 윤 대통령 지지층도 70대 연령층 빼고 계속 돌아서는 거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4월 29일 윤 대통령과 회동을 갖기 전 윤 대통령에게 촉구한 것도 이태원 참사에 연루된 내각 인사, 즉 이상민 장관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였다고 한다. ‘물밑 조율’을 했다는 함성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과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대통령이 ‘국정의 동반자’ 이 대표에게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국무총리 인사 추천 등을 먼저 꺼냈으나 이 대표는 국정기조 전환이 먼저라며 특히 참사 관련 인사 조치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한때 윤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한동훈은 당 대표 경선에 나서며 ‘채 상병 특검법’으로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내세웠다. “이러다 다 죽는다”고 ‘윤심 후보’ 원희룡은 죽는소리를 했다. 한동훈이 누굴 죽일지, 아니 거꾸로 국민의힘과 나라를 살릴지는 두고 봐야 안다. 그러나 대통령의 왼팔 이상민은 이 정부를 살릴 수 없다. 나라의 안녕이나 국민과의 화해는커녕 헤어나올 길 없는 위기로 몰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윤 대통령은 읍참마속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
우원식 국회의장이 이 시대를 관통하는 명언을 남겼다. 24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 입법청문회와 관련해 “저는 오랫동안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태도가 리더십이다’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채 상병 1주기가 다가온다. 여당의 청문회 보이콧은 결코 잘한 일이라곤 할 수 없다. 원통한 젊은 죽음의 진상 규명을 위해서라도 법제사법위원회 정청래 위원장과 위원들의 문제 접근 태도는 중요했다. 우 의장도 “그런 점에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부분들이 있다”며 “좀 더 겸손해야 된다”고 지적했던 거다.●국회법대로? 천만의 말씀이다물론 정청래 법사위원장은 “나는 법사위를 법대로 진행했다”며 국회법을 강조했다. 페이스북에 국회법 제 145조 (회의의 질서 유지)도 적어놓았다. 하지만 이 법 ②항은 위원장의 경고나 제지 조치를 따르지 않는 ‘의원’에 대해 위원장은 발언을 금지하거나 퇴장시킬 수 있다고 돼 있다. ‘증인’까지 퇴장시켜도 된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답변 기회를 달라”는 이종섭 전 국방장관에게 정청래는 자기 말에 토를 달았다는 이유로 10분 퇴장을 명령하며 “성찰하고 반성하라는 의미”라고 했다. 이시원 전 공직기강비서관이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답변을 거부하자 정청래는 “퇴장하라. 계속 그렇게 말한다면 퇴장시킨다고 분명 경고했다”며 10분 퇴장을 명령했다. 법사위원장이 아니라 일진이 학폭을 휘두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23일 ‘채 상병 특검법’ 상임위 단독 처리를 두고 “막가파식 운영”이라고 비판한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향해 정청래는 “추경호, 초딩처럼 이르지 말고 나에게 용기를 내서 직접 말해라”고 페이스북에 시퍼렇게 써놓았다. 정청래야말로 초등학교를 다시 다녀야할 것 같다. 초등학교 바른생활 1~2학년 성취기준이 ‘가족이나 주변사람을 배려하며 관계를 맺는다’여서다. ● 초등학교만 제대로 다녀도 민주시민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찾아보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2학년까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해도 우리는 훌륭한 민주시민이 될 수 있다. 초등학교 1~2학년 국어 말하기·듣기 성취기준이 첫째 ‘중요한 내용이나 일이 일어난 순서를 고려하며 듣고 말한다’, 둘째 ‘바르고 고운 말로 서로의 감정을 나누며 듣고 말한다’(너무 강조하고 싶어 고딕으로 뽑았다)였다. 성취기준 해설에는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발전시키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설정하였다’고 나와 있다. 사실 어른들도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해 타인과, 심지어 가장 가까워야 할 식구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듣는 사람을 바라보며 말하기, 적절한 크기의 소리로 말하기 등을 학습한다’는 대목을 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정청래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이름이 뭐예요?” 물었고, 군복을 입고 나온 장성에게 “어디서 그런 버릇이냐. 토 달지 말고 사과하라. 일어나라” 호통을 쳤다. 물론 국민 기대에 맞지 않는 답변이 나와 위원장이 화를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초등 3~4학년 국어 성취기준 중 하나가 ‘상황과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예의를 지키며 대화한다’이다. 초등학교도 이 수준으로 배우는 게 목표인데 한참 못 미치는 국회의원들,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복(公僕·국가나 사회의 심부름꾼)은 부끄러운 줄 알기 바란다. ● 오만하고 박절한 대통령의 태도 우 의장은 태도란 무엇인지 설명하진 않았다. 국어사전엔 ①몸의 동작이나 몸을 가누는 모양새 ②어떤 일이나 상황 따위를 대하는 마음가짐③어떤 일이나 상황 따위에 대해 취하는 입장으로 나와 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우리는 딱 보면 대체로 안다. “태도가 글러먹었다”는 말은 그래서 무섭다. 직장인에게 근태(근무태도)는 겁나는 단어다. 면역력 좋을 땐 큰 문제 안 될 수 있지만 면역력이 떨어지면 큰 코 다치는 게 바로 근태다. 전현희 민주당 의원은 1년 전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고위 공직자에 대한 근태감사를 공정하게 실시하라”고 감사원에 주장한 적이 있다. 감사원에서 자신만 콕 찍어 불법적 표적감사를 해서는 지각 등 근태 문제가 드러났다고 공개망신을 줬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직무 긍정률이 집권 초 두세 달 빼곤 계속 30%대(심지어 최근 석 달은 20%·갤럽 여론조사)인 것도 상당부분 태도 때문이라고 본다. 2013년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일약 국민스타로 떠올라 대통령까지 됐지만 지금은 부인한테만 충성할 뿐, 남에게는 박절한 대통령으로 비칠 뿐이다. 심지어 윤 대통령 참모 출신 인사는 26일 “윤 대통령은 다방면의 지식을 자신하지만, 특히 정무영역에서는 본인의 판단을 더욱 믿는 걸로 안다”고 전했다고 내일신문이 27일자로 보도했다. 환장하겠다. 취임하자마자 대선과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끈 이준석 당 대표를 쫓아내고,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을 굴복시켜 총선을 말아먹고도 수직적 당정관계를 포기하지 못해 또 친윤 당 대표 후보를 출전시키고, 그런데도 자신의 정무적 판단을 더욱 믿고 있다고? 그래서 대통령의 태도가 오만하다는 것이다. ● “태도가 리더십”이 희망적인 이유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 안다. 그래도 “태도가 리더십”이라는 말은 희망적이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정해져있는 신분보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지지 않는 IQ나 실력이나 재력보다, 태도는 마음먹기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초등학교 도덕 교육과정을 들여다보았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성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배려, 사회·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정의, 자연과의 관계에서 책임’라는 핵심 가치가 중심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나에게 성실, 남에게 배려는 나 혼자라도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태도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거다. 부자 부모 아래 태어나기, 강남 신축 아파트에서 살기, 디올 백 갖기는 내 힘으로는 내 생에는 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성실하기, 사람들에게 배려하는 태도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태도가 리더십이면, 나도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다음 대통령은 태도 보고 뽑기를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우리 편이 아니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줄 안다. 심지어 함부로 대해도 되는 줄 아는지 막말하고, 조롱하고, 덤벼든다. 디지털공간에선 더 하다. 생각과 진영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하늘 아래선 못 살겠다며 적군을 넘어 식민지 벌레처럼 죽이려 든다. 그때 그 청문회가 그랬다(어떨 땐 댓글도 그렇답니다^^;). 정청래가 암만 위원장 자리에 앉아 하늘을 쓰고 도리질한다 해도 태도가 리더십이다. 다수 국민의 마음속에 그는 리더라 할 수 없다. 대인의 위대함은 소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고 했다. 꼭 대인이 아니어도 좋다. 하지만 다음번 대통령은 태도를 보고 뽑았으면 한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마침내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당 대표 경선에 나선다. 23일 경선 출마 선언을 할 모양이다. 4·10 총선에서 국힘이 참패한지 두 달 반 만에 선거 패장(敗將)이 다시 그 당을 이끌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대한’(어차피 당 대표는 한동훈) 소리가 분분하다. “어대한은 당원 모욕”이라고 ‘찐윤’ 이철규 의원은 공개저격했다. 어차피 나오고 안 나오고는 한동훈의 자유이고 정치적 결단이다. 작년 12월 비대위원장을 맡을 무렵에도 그가 왜 꼭 그 때 그 자리에 서야 하느냐는 논란이 적지 않았다. “강감찬 아꼈다 임진왜란 때 쓸 요량이겠지만 고려가 망하면 조선도 없다. 당연히 임진왜란도 없다”고 나는 그때 신문칼럼에 썼다. “국힘이 총선에서 지면 대통령도 제 역할 못 한다”며 ‘관건은 용산’이라고도 지적했다. 일종의 ‘글빚’ 때문에 한동훈이 또 나온다는 지금 가만있을 수 없다. 이번 당 대표 출마, 나는 반대다.● 한동훈은 강감찬이 아니었다이유는 첫째, 패장이어서다. 강감찬은 1019년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에 대승을 거둬 나라를 구했지만 국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 한동훈은 보수 궤멸에 가깝게 참패했다. 물론 그에게 패배의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으나 총선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대통령 지지도다. 이번 역시 정권 심판론이 먹혀들었다. 한동훈이 아니었다면 더 크게 졌을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한동훈에게 두 번째로 큰 책임이 있음은 부인 못한다. 심지어 그 자신이 패배 다음날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고 해놓고 석달도 안 돼 다시 나서는 건 ‘책임 정치’라 할 수 없다. 패장은 깨끗이 물러나고 다음 지도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정치적 도리다. 2020년 총선 패장 황교안도, 2016년 김무성도 그랬다. 1997년 대선에서 패한 이회창 대통령 후보도 1년 반이 지나서야 당 총재로 복귀했다. 2004년 총선 패배 직후 박근혜 당 대표가 나오긴 했으나 그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 따른 괴멸적 참패를 막은 경우였다.안다. 이런 정치문법을 깬 야당 지도자가 있다는 걸. ‘민주당의 아버지’라는 이재명이 대선 패배 두 달 만에 보선 금배지를 달았고 다섯 달여 만에 당 대표까지 됐다. 그러나 그건 이재명 사법리스크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다. 자숙과 자성이라는 잠깐의 책임지는 시간도 마다하는 패장이 ‘뉴노멀’이 될 순 없다. 그걸 본받아서야 설령 한동훈이 당 대표가 된들 어떻게 이재명의 무책임 정치, 뻔뻔한 뉴노멀을 비판할 수 있겠나.● 제2의 6·29선언도 못한 정치력한동훈에 반대하는 두번째 이유는 정치력 결핍 때문이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긴다 해도 일단 한동훈이 책임을 맡았으면, 대통령과 담판을 해서라도 전략을 짜내야 했다. 지지층이 기대했던 것도 1987년 6·29선언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모델이었다.그때나 지금이나 윤 대통령의 가장 큰 리스크는 부인 문제다(물론 채 상병의 억울한 죽음과 특검 문제도 시시각각 목을 조여 오겠지만 그건 자업자득이다). 대통령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대통령의 ‘공정과 상식 브랜드’를 우습게 만들면서 용산과 국민 사이를 찢어놓는 건 우리시대 비극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총선 총괄선대위장 한동훈은 김 여사 디올백 문제부터 풀고 넘어가야 했다. 사과 없이 선거 못 치른다는 소리가 빗발치는데도 한동훈은 “아쉬운 점, 국민이 걱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1월 18일)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19일) 발언이 고작이었다. 오히려 몽둥이는 대통령이 들었다. 한동훈은 비대위원장 사퇴 요구를 거부하며 맞서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게 끝이다. 차라리 약속대련이면 좋았을 거다. 한동훈은 제2의 6.29선언을 연출해 ‘아름다운 뒤통수 치기’는커녕 23일 충남 서천시장에서 대통령께 90도 폴더인사를 바침으로써 김 여사 문제를 덮고 말았다. 그랬던 한동훈이 다시 당 대표가 된다고 윤 대통령에게 할 말 할 수 있겠나. 아직도 살아있는 김 여사 리스크를 풀 수 있는가. ● 팬덤과 유세뽕에 넘어갈 텐가그럼에도 한동훈이 당 대표에 나서는 건 팬덤까지 형성된 지지율 덕분일 터다. ‘장래 정치 지도자’를 묻는 갤럽 여론조사에서 한동훈은 2022년 9월부터 지금까지 보수우파 측 대통령감으로 부동의 1위다(전체적으로 보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위. 21일 조사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36%,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35%, 이재명 33%, 한동훈 31%로 나온 것은 ‘정계 인물 호감도’였다). 가히 국민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함직하다.한동훈이 나서면 안 되는 세 번째 이유가 그 팬덤 때문이다. 잘 자란 강남 8학군 ‘엄친아’(엄마친구 아들) 73년생 한동훈은 그래서 70대와 60대, 직업별로는 가정주부 사이에서 제일 인기많다. 머리 회전과 말이 빠른 초(超)엘리트라고 자신해선지 남의 말을 안듣는다고 한다(윤 대통령이 대화의 90%를 점한다면 한동훈은 95%라는 소리도 있다). 그러면서도 총선 유세는 여의도 전철역처럼 쎄한 곳 아닌 시장통 같은 사람 많은 데를 주로 찾았으니 ‘유세뽕’을 잊지 못해 또 나서는 게 아닌가.물론 우리도 선진국이 된 마당에 고난의 서사에서 감동받는 촌스러움은 벗어날 필요가 있다. 쿨하고 똑똑한 정치인이 대선에서 패하고도 주식투자나 하는 철면피 정치인보다는 낫다고 본다. 그러나 적과의 동침은커녕 동료시민들과 밥도 잘 안 먹는 깔끔함으론 사람을 모을 수 없다. 패장이 방방곡곡 민생투어도 아니고, 소외지역 법률상담도 아니고, 서초구 공공도서관에서 핑크빛 골전도 이어폰 끼고 책이나 보는 모습이 셀피처럼 찍혀 퍼진 것은… 얄팍하다. ● 웰빙당을 이기는 정당으로?기어이 당 대표에 나설 결심인 한동훈이 윤 대통령에게 “이기는 정당을 만들겠다”고 전화로 말했다고 한다. 헹. 비대위원장 때 못 만들어 물러났던 패장이(제1 책임자는 아니라고 앞에 썼다) 이제 와 무슨 수로?명색이 집권당으로서 총선 참패를 했으면, 다그리 국회 들어가 쌈닭처럼 물어뜯어도 모자랄 판이다. 문재인 정권 시절 임대차3법을 밀어붙이는 다수여당에 맞서 윤희숙 당시 국힘 의원이 “저는 임차인입니다” 연설로 감동을 줬듯,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국힘은 폭망 뒤 의총을 열어도 점심 시간 전 칼같이 끝내는 웰빙귀족정당 본색을 드러냈다(세비 반납하라. 혈세가 아깝다).더구나 대통령 의중은 명백하다. 친윤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20일 ‘당정일체’를 내걸고 전격 당 대표 경선 출마를 밝혔다. 윤 대통령은 여당 장악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감히 김 여사를 물어뜯으려 했던 한동훈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대통령 부부도 법치 예외 될 수 없다”차라리 잘 됐다. 이로써 한동훈은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분명히 색깔을 드러낼 수 있게 됐다. 23일 경선 출마 때 김 여사와 채 상병 문제 처리에 대해 “국민 눈높이에 따라…” 정도로 답해선 , 기대만 무너뜨릴 뿐이다. 민심이 당심이고 그것이 윤심이어야 한다는 짱짱한 반골 체질을 드러내야 한다. 윤 대통령의 무너진 공정과 상식을 바로잡는 ‘반(反)부패’가 한동훈의 브랜드이길 바란다. 대통령 부부도 법치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선명한 차별화로 당 대표가 된다면, 한동훈은 이명박 정부 때 박근혜 같은 ‘정권 교체’를 내걸고 정권 재창출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친윤 후보에 밀려 떨어진다면, 더욱 잘 됐다. 한동훈은 ‘여당 내 야당’ 역할로 정치력을 길러 정권 재창출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8월 법무부 장관 시절 신임검사들과의 강화를 기억하는가. 한동훈은 “검사로서 인생이 초라해지는 건 뭐냐면, 소신을 가지고 내가 관철했는데 답이 틀렸을 때”라고 했다. “기회는 여러번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굉장히 잘 준비하고 실력을 갖추는게 그만큼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정치인은 더욱 그렇다. 한동훈은 굉장히 잘 준비하고 실력을 갖추었는가.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더불어민주당이 잘해서 총선에서 압승했다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도 인정한 바다. 지난달 발표한 정책브리핑 ‘22대 총선 평가와 과제’에 따르면 총선 승패를 가른 핵심 요인으로 첫손에 꼽힌 것이 ‘윤석열 정부의 무능, 무책임, 무도한 불통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의 심판 의지’였다. 이재명 대표가 앞장섰던 ‘야당의 선거 리더십과 메시지 전략의 완승’은 그다음이다. 특히 “분노한 유권자는 ‘분노를 해소할 대안을 가진 정당’ 아닌 ‘분노를 표시할 도구가 되는 정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는 한상익 수석연구원의 분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민주당은 집권당의 대안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은 게 아니라 현 정부 심판의 도구로 선택됐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다 지난 총선 분석을 굳이 되풀이하는 이유는 이 대표가 거대한 착각에 빠져 있는 듯해서다. 자신의 리더십 덕분에 민주당이 압승했다고 믿는 게 분명하다. 당 대표 연임이 없는 민주당 관례를 깨고 연임의 군불을 때더니 기어이 자신만을 위한 당헌당규 개정에 철판 깔고 나섰다. 민주당 최고위에 이어 당무위가 12일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당직자 직무정지 규정’ 삭제를 의결했다. 검찰이 같은 날 쌍방울그룹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해 이재명을 제3자 뇌물 등 혐의로 기소한 데 딱 맞춘 맞춤형이다. 이 사건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 방북 비용 지급이 아니라면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이 위험을 감수하고 300만 달러라는 거액을 북한에 지급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이재명은 혐의를 부인한다. 그렇게 당당하면 대표직 내려놓고 재판받으라고 권하고 싶다. 심지어 이 조항은 2015년 문재인 당대표 시절 국민 눈높이에 따라 부패(혐의) 정치인이 당 요직 근처에도 못 가게 만든 개혁 조치였다. 민주당은 이걸 삭제하고도 모자라 이재명의 대선 출마 꽃길을 위해 대선 1년 전 당 대표 사퇴 규정도 바꿔버렸다. 이재명이 당 대표 연임까지 하면서 지방선거 공천까지 제 손으로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러고도 박찬대 원내대표에 따르면 ‘너무나 착한’ 이재명은 국회의장단과 18개 상임위원회 위원장 선출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는 자신을 기소한 검사 탄핵, 특검까지 독려하는 모양새다. 지금 이재명은 급한 것이다. 2022년 대선 직후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 이재명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유로 신뢰성 부족·거짓말(19%), 도덕성 부족(11%)이 1, 2위였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국가로 치면 개헌이라 할 수 있는 당헌당규까지 개정해선 그 이재명을 내세워 실패의 길로 또다시 가는 형국이다. 다수 의석 믿고 설치는 ‘집권야당’이란 말은 전에도 있었다. 김대중(DJ) 대통령 시절 그러니까 지금의 국힘이 한나라당 때다. 국무총리 장관 해임안·탄핵 공세에 양곡법, 간호법 등 입법 독주도 다반사였다. 2000년 총선에서 승리한 데 이어 2002년 재보선도 압승해 헌정사상 처음 야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하자 정보와 권력이 이회창 총재에게 몰렸다. 제왕적 총재를 넘어 ‘밤의 대통령’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다. 대선이 다가오자 ‘이회창 대세론’이 자리 잡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권력자의 오만이다. 제왕적 대통령도 그렇지만 제왕적 총재, 당 대표 역시 마찬가지다. 2002년 장상 총리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자 “분명 여당의 패배인데도 한나라당은 다수의 횡포를 부린 오만한 야당으로 비쳐졌다”고 이회창은 2017년 회고록에 적었다. “정치에서 강자는 오만하게 비쳐지고 약자는 동정받게 마련이지만 약자가 정면승부로 역경을 헤치고 일어설 때 국민은 갈채를 보낸다”고도 썼다. 그때 그 약자가 노무현 대통령이다. 이회창은 1997년에 이어 2002년 대선에서도 패했다. 그리고 최근 정연욱 국민의힘 의원을 만난 이회창은 이재명의 민주당이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입법 폭주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지금은 ‘여의도 대통령’ 이재명이 하늘을 쓰고 도리질하지만 국민의 인내심은 길지도 깊지도 않다. DJ가 어렵게 키우고 지켜온 민주주의적 관례를, 심지어 제3자 뇌물 혐의를 받는 이재명이 깬 것을 국민이 언제까지 인내할지 알 수 없다. 이재명은 3년 뒤 대선을 내다보지만 국민은 매번 선거 때마다 가장 오만한 권력자를 심판하는 추세다. 차라리 이재명이 겸허하게 당 대표직을 내려놓고 순결무구함을 입증받는다면, 민주당이 이재명 1인 아닌 국민을 위해 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오히려 이재명과 민주당을 새롭게 봐줄 수 있을 것 같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