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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산시의 한 동네는 요즘 풍경이 바뀌었다. 초저녁만 돼도 죽은 듯이 조용하다. 아이를 직접 등하교시키는 학부모들이 부쩍 늘었다. 가방에 호신용품을 잘 넣었는지 점검하는 여성도 보인다. 8세 아동을 성폭행한 조두순이 지난달 25일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벌어진 일이다. 주민 신모 씨는 하소연한다. “불안해 죽겠는데, 이사도 못 갑니다. 집을 팔아야 하는데 아무도 여기로 안 오려고 하니까….” 조두순 집에서 불과 200∼400m 내 어린이집과 초등학교가 여럿 있다. 주민 불안이 커지자 경찰은 조두순 집 앞에 경찰관을 배치했다. 안산시는 창문만 열면 조두순 집이 보이는 곳에 월세방까지 얻었다.고위험 성범죄자 이사 때마다 혼란 안산뿐만이 아니다. 여성 10명을 성폭행한 박병화가 5월 경기 수원시 팔달구로 이사하면서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미성년자 12명을 성폭행한 김근식의 경우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안산 주민들을 인터뷰하며 9월 개봉한 영화 ‘무도실무관’이 생각났다. 전자발찌 착용자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법무부 무도실무관인 주인공(배우 김우빈)이 성범죄자들로부터 지역민을 보호하는 내용이다. 한 안산 주민은 이 영화를 언급하며 “제시카법은 진척이 없냐. 정치권은 뭐 하냐”고 성토했다. 아동 성폭행범을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응징하는 영화 주인공처럼 시민들의 불안감을 없애줄 특단책으로 ‘제시카법’을 거론한 것이다. 제시카법은 성범죄자가 학교나 공원 주변 300∼600m 내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성폭행 전과자가 거주지 인근 9세 소녀 제시카를 납치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2005년 도입됐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10월 법무부가 관련 법안을 입법 예고했다. 고위험 성범죄자가 출소하면 국가 지정 시설에 살게 하는 게 주요 골자다. 그러나 법안은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고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며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 최근 법안이 다시 발의되면서 ‘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생긴 것. 주민들의 바람과 달리 법안이 통과되긴 쉽지 않아 보인다. 형벌을 받고 출소한 사람의 시설 거주는 이중 처벌이자, 헌법상 거주 이전의 자유 침해라는 반대가 만만치 않다. 시설이 들어설 지역의 거센 반발도 예상된다. 현행 제도부터 점검·보완이 급선무 하지만 조두순 인근 주민 입장에서는 다수의 안전이 범죄자 인권이나 자유보다 더 절박할 수밖에 없다. 전자발찌 착용자는 매년 4000명이 넘는다. 이들 중 다시 성범죄를 일으킨 경우는 최근 5년간 157건이나 발생했다. 온라인 채팅을 통해 거주지로 미성년자를 유인한 후 전자발찌를 찬 채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대책이 시급하다. 다만 제시카법이 영화 주인공처럼 단박에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건 아니다. 미국 교정당국 조사 결과 제시카법 시행 후 노숙 성범죄자 수가 3년간 24배 증가했다. 거주 제한으로 가족과 떨어지고 직장도 갖지 못하면 ‘사회에서 배제됐다’는 분노가 커지고 재범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새 제도부터 도입해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현행 제도부터 점검하는 게 급선무다. 2019년 도입된 1 대 1 전담 보호관찰제를 보다 활성화하면 고위험 성범죄자 점검을 강화할 수 있다. 현재는 보호관찰관 1명이 수십 명의 성범죄자를 맡는다. 성도착 환자 등에게 약물로 충동을 줄이는 치료도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 관련 제도가 2011년 시작됐지만, 치료명령이 내려진 경우는 연평균 10건 미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영화 ‘무도실무관’을 본 후 “전자발찌 범죄자를 감시하며 시민 보호를 위해 어떻게 희생하는지 보여준다.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다”며 추천했다고 한다. 현실 속엔 영화처럼 ‘무쌍영웅’은 없다. 정부가 하루빨리 기존 정책이나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는지부터 확인하고 보완하는 것이 성범죄자 옆집에 살며 마음 졸이는 시민을 위하는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10일 소설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는 순간, 국내 문인들과의 인연이 떠올랐다. 20년 전인 2005년 5월 100여 명의 작가들과 함께 독도로 향했다. 당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거세지자 작가들은 독도사랑을 담은 시를 낭송하는 예술제를 열었다. 취재차 배를 타고 독도로 향하면서 작가들과 문학을 토론했다. 고은 시인에게는 노벨상에 대해 물었다. “염원의 나무 자라는 미쁜 보석” “내 기특한 혈육”이라고 독도를 표현하는 작가들의 감성이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냐’고 묻는 과정에서 작가들 상당수가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라는 점도 알게 됐다.‘제2의 한강 배출 어렵다’는 대학들 이런 인연 때문일까. 10월 10일이면 국내 작가의 자택으로 향하곤 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시 인터뷰를 먼저 하기 위해서다. 매년 수상 실패로 아쉬움이 쌓였지만 이번 수상으로 사라졌다. 한국 사회도 축제 분위기다. 한강 소설은 엿새 만에 100만 권 이상 판매됐고, 소셜미디어에는 ‘문송(문과라 죄송) 사용 금지’ ‘국문과 쾌거’란 글이 확산됐다. 한강의 모교인 연세대 국문과에는 축하 현수막까지 걸렸다. 그런데 정작 한강의 꿈이 자라났던 대학 국문과에서는 “앞으론 ‘제2의 한강’을 배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하소연이 나온다. 경제 분야의 ‘피크 코리아(peak-Korea)’ 논쟁처럼 한국 문학이 이번 수상으로 정점에 섰지만, 향후 쇠퇴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국문과 교수는 “요즘 국문과 신입생들은 ‘서정주’ 시인도 모른다”고 했다. 독서량이 적다 보니 교과서 속 작가조차 생소한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그는 “좋은 문학을 읽지 않으니 좋은 글을 쓰는 젊은층이 줄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학생들이 소설을 쓸 때조차 챗GPT로 초고를 쓴 후 그 내용을 다듬는다고 한다. 그나마 학부는 나은 셈이다. 또 다른 국문과 교수는 “석사 과정 학생 모두 외국인 유학생”이라고 밝혔다. 한국에 호감을 가지고 국문학을 전공하는 외국인은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깊이 있는 전공 수업은 사실상 어렵다는 게 대학의 얘기다. 그럼에도 재정난 때문에 외국인 유학생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국문과 중 콘텐츠창작학과 등으로 이름을 바꾸거나 아예 폐쇄된 곳이 수두룩하다. 국문과 등 어문 인문계열 학과는 최근 8년 새 800곳 이상 사라졌다. 독서 붕괴로 인한 작가 고사 막아야 전공자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국내 성인 10명 중 약 6명은 1년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연간 독서량은 1.7권.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조사에서는 “문해력이 과거보다 저하됐다”는 교사의 답변이 91.8%에 달했다. 인공지능(AI) 시대이자 이공계 인재가 국가경쟁력인 이 시기에 ‘국문과나 독서가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미 BTS, 기생충 등 한류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문화강국도 맞다. 하지만 독서 습관 붕괴는 좋은 작품, 나아가 뛰어난 작가를 사라지게 한다. 읽는 습관이 줄어들면 좋은 작품이 발표돼도 소비할 독서 인구가 감소한다. 인세가 적어지면 작가는 본업을 포기한다. 이미 만연한 현상이다. 정부 지원마저 미흡하다. 문학 등 인문학 관련 내년 예산(281억 원)은 올해보다 24%가량 준다. 열악한 상황 탓에 요즘 국문과 학생들은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한국에서 문학을 하겠다’는 것은 모두가 육식인 사회에서 홀로 채식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노벨 문학상 수상의 벅참으로 보낸 일주일이었다. 이젠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차세대 한강’이 될 작가들을 키울 수 있는 토양을 고민해보면 어떨까?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는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자신이나 딸의 이름을 딴 문학관 설립을 극구 사양했다. 그는 단지 말했다.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살 수 있게 해달라.”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사건이 공정하게 처리되는지, 죄를 지은 사람이 합당한 벌을 받고 있는지, 걱정하시는 국민도 계신다.” 19일 열린 46대 검찰총장 취임식에서 심우정 신임 총장은 이같이 말했다. 이어 “외부 영향이나 치우침 없이 오로지 증거와 법리에 따른 공정한 수사를 통해 국민들이 믿을 수 있게 하자”고 했다. ‘증거와 법리’를 강조한 심 총장 표정에선 정권 중반에 임명된 검찰총장으로서의 부담감이 느껴졌다. 신임 총장의 목표와 약속을 취임사에 담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은 탓이다. 전임 이원석 총장 역시 2년 전 취임사에서 한비자의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를 언급하며 “성역은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디올백 수수 의혹 수사 등을 질질 끌어 임기 내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36년간 총장 3명 중 1명만 임기 채워 검찰총장 2년 임기제가 시행된 1988년 이후 임명된 총장 25명의 취임사를 쭉 훑어 봤다. 시대에 따라 주요 수사 대상과 척결 방안이 각각 다르게 담겼지만, 검찰의 중립성·공정성·신뢰 회복을 언급한 부분은 취임사마다 유사했다. 일부는 ‘Ctrl+V’(붙여넣기)로 내용을 옮긴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영삼 정부 첫 검찰총장인 박종철 전 총장은 1993년 3월 취임사에서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며 “국민을 두려워하며 소신껏 검찰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통령 의중을 읽지 못한다는 평가와 수사 부진이 겹치면서, 박 전 총장은 취임 6개월 만에 사퇴했다. 2005년 4월 취임사에서 “정치적 중립과 수사 독립을 뿌리내리겠다”고 했던 김종빈 전 총장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동국대 교수 구속에 대해 헌정사상 첫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이 발동되자 같은 해 10월 물러났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8월 취임한 한상대 전 총장은 “검찰의 깨끗함과 투명함을 강화시키겠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는 일명 ‘봐주기 구형’으로 구설에 올랐고 대검 중수부 폐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후배 검사들의 검란(檢亂)으로 1년 3개월 만에 퇴진했다. 채동욱 전 총장은 2013년 4월 취임식에서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서 결연한 의지를 가지겠다”고 했지만, 박근혜 정부 초기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수사를 지휘하다 혼외자 논란에 휘말려 취임 6개월 만에 사퇴했다. 윤 대통령 또한 검찰총장 시절 문재인 정부와 갈등을 겪었고 2021년 3월 사퇴 후 곧장 대통령 후보가 됐다. 36년간 25명의 총장 중 2년 임기를 마친 이는 9명(36%)에 불과했다.‘검찰 중립 방벽 되겠다’는 약속 지켜야 심 총장도 선배 총장들처럼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레임덕과 함께 각종 의혹이 터지면서 정권을 직격하는 수사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수남 전 총장의 경우 자신을 임명한 박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이달 24일 디올백을 건넨 최재영 씨에 대한 수사심의위원회 결과가 나오면 김 여사 처분을 결정해야 한다. 12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2심에서 전주(錢主)로 기소된 손모 씨가 방조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으면서 유사한 역할을 한 김 여사 처분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수사 등 검찰 중립성을 평가할 사건이 수두룩하다. 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심 총장은 정권에 맞설 수도, 비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판단이 필요한 순간에 취임사를 떠올리길 바란다. 심 총장 취임사는 이렇게 끝맺는다. “검찰의 중립성 독립성이 지켜질 수 있도록 든든한 방벽이 될 것을 약속드린다.” 물론 총장 의지만으론 한계가 있다. 정치권 외압, 대통령 인사권 등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이 약속이 지켜진다면 ‘검찰 중립성·독립성’이란 단어는 향후 신임 총장들의 취임사에선 점차 줄어들지 않을까.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꽃을 가져왔습니다.” 20일 세종시 조치원읍에 있는 신안저수지. 저수지 주변에는 꽃다발과 화분 등이 놓여 있다. 한 동네 주민은 “그 아기를 추모하고 싶었다”며 “자주 다니던 곳에서 비극이 발생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닷새 전인 15일 이곳을 산책하던 주민들은 저수지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영아(嬰兒) 시신이 물 위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건진 아기 시신에는 탯줄이 붙어 있었다. 경찰이 일대 폐쇄회로(CC)TV 영상을 조사하자 하루 뒤 21세 김지수(가명) 씨가 자수했다. 홀로 사는 김 씨는 양수가 출산 예정일보다 일찍 터져 집에서 혼자 출산했다. 출산 후 아기가 숨을 쉬지 않아 겁이 나 저수지에 아기를 버렸다고 진술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아기 유기한 엄마, 아기 지킨 엄마 비슷한 상황의 21세 박수진(가명) 씨가 있다. 부모와 연락이 거의 끊어진 그는 서울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다. 남자친구를 만났지만 임신을 하자 떠났다고 한다. 홀로 낙태와 출산을 고민하다가 임신 막달이 됐고, 병원에서 지난달 말 출산했다. 박 씨는 병원을 나선 후 아기를 유기하려 했다. 그러나 온라인 검색 중 미혼모 지원센터를 알게 돼 전화를 걸였다. 상담원은 즉시 박 씨가 사는 곳으로 출동해 아기를 보호하는 한편으로 박 씨를 설득하고 상담했다. 박 씨는 마음을 바꿔 최근 아기의 출생신고를 마쳤다. 동갑내기인 이들은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 등으로 출산과 양육에 갈등을 겪고 있는 ‘위기 임산부’다. 하지만 두 여성은 180도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들의 엇갈린 결과에서 시행 한 달 된 보호출산제 등의 사각지대와 보완점이 드러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난달 19일부터 출생통보제와 보호출산제기 시행됐다. 전자는 의료기관이 아기의 출생 사실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제출하고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통보받는 제도다. 후자는 임신, 출산을 원치 않는 여성이 익명으로 진료를 받고 출산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친모가 갓 태어난 자녀 2명을 살해한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 등 태어난 후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아동이 방치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다. 제도 시행 후 두 여성의 차이는 1차적으론 ‘공간’에서 비롯됐다. 김 씨는 병원이나 시설이 아닌 집에서 홀로 출산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유기했다. 반면 아기를 버리려던 박 씨는 지원센터를 찾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았다.보호출산 자체보다 상담이 중요 근원적으로는 ‘상담’이 이들의 차이를 만들었다. 미혼모 지원시설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이를 버리거나 입양 보내고 싶어 하다가도 막상 상담을 하면 직접 양육을 선택하는 미혼모들이 적지 않다”고 밝혔다. 보호출산제를 먼저 도입한 선진국들이 임산부가 익명 출산을 신청해도 관련 절차 진행보다 상담부터 신경을 쓰는 이유다. 2013년부터 보호출산제를 시행 중인 독일은 출산 전후로 체계적 상담과 지원에 초점을 맞춘다. 위기 임산부 발굴을 위해 비대면 인터넷 상담, 24시간 긴급상담 등을 시행 중이다. 그 결과 2014∼2018년 독일 내 위기 임산부의 40%는 상담 과정에서 익명 출산을 포기하고 직접 양육 등을 택했고, 22%만 익명 출산을 진행했다. 국내도 보호출산제 시행 후 한 달간 419건의 상담이 이뤄졌다. 안심하긴 이르다. 상담조차 하지 못한 채 김 씨와 유사한 상황에 내몰리는 산모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국내 미혼모는 연간 2만 명이 넘고,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 2123명(2015∼2022년) 중 최소 249명이 사망했다.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키울 수 있는 사회, 첫걸음은 위기 임산부 발굴과 상담에 있지 않을까.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경로당 가기 무섭습니다.” 지역에 사는 어르신들의 하소연이다. 경로당 노인들이 농약에 중독돼 쓰러진 사건이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5일 경북 봉화군 봉화읍에서 65∼78세 할머니 4명은 오리고기를 먹은 후 경로당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미리 큰 통에 타둔 믹스커피를 냉장고에서 꺼내 마신 후 심정지, 마비 등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농약 중독이었다. 3일 후 또 다른 H 할머니(85)가 유사한 증세로 중태에 빠졌다. 그는 앞서 입원한 할머니 4명과 오리고기를 함께 먹었지만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농약 복용 시 증상이 바로 나타나는데, 이 할머니만 3일 후 중독 증상을 보인 것. 먼저 쓰러진 할머니 4명은 위세척 결과 에토펜프록스, 터부포스 등의 농약 성분이 나온 반면 H 할머니에게서는 이와 다른 농약 성분이 검출됐다. H 할머니는 지난달 30일 숨을 거뒀다.경찰, 사망 할머니 경로당 갈등 수사 경찰은 피해자로 보이는 H 할머니를 용의선상에 두고 수사하고 있다. 그의 자택을 최근 수색했고, 쓰러지기 전 자신의 통장에 있던 돈을 찾아 가족에게 보낸 사실도 확인했다. H 할머니 외의 할머니 4명은 경로당 간부였으며, 이들이 공용 식품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경로당 내 다른 어르신들과 갈등이 있었다는 진술도 확인 중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증거물 감정 결과가 나오면 사건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봉화 농약 사건을 취재하면서 접한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사건 이면에 고령화에 따른 노인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 관계자는 “노인 시설에서 함께 생활하는 고령자가 늘면서 각종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했다. 국내 65세 이상은 960만9000명. 전체 인구의 18.6%다. 2015년 6만6292곳이던 경로당, 복지관 등 노인여가복지시설은 지난해 9만3056곳으로 8년 새 40.4%나 증가했다. 이들 시설의 정원은 40만 명에 달한다. 특히 도시보다 시설이 부족하고 인구 감소가 심한 농촌의 경우 노인들이 경로당 등에서 모여 공동 생활을 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하루 8시간, 매달 20일을 복지관에서 지낸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오래 함께 있다 보면 사소한 시비도 최악의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2018년 경북 포항에선 마을 주민들과 갈등을 겪던 68세 여성이 생선탕에 농약을 넣었다.공동 생활 속 노인 갈등, 관심 가져야 노인 집단 내 세대 갈등도 자주 발생한다. 전북대 연구를 보면 한 경로당에서 입구 의자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신발을 신기 편하도록 80세 이상 노인들이 긴 의자를 설치했는데, 60대 노인들이 “입구가 예쁘지 않다”며 내다 버리려 해 큰 갈등이 생겼다. 노인복지관에 다니는 70대 남성은 “가족, 친구처럼 익숙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사소한 일도 싸움이 된다”고 했다. 또 다른 노인은 “65세 노인과 85세 노인은 완전히 다른데, ‘노인’이란 범주에 한꺼번에 넣고 공동 생활을 하니 다툼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국내 노인시설은 식사 지원 등 개개인 돌봄에 초점을 맞춘다. 시설 노인 전반의 관계를 관리 및 교육해 주는 프로그램은 없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스위덴 등 유럽은 노인시설 속 고령자 커뮤니티가 제대로 구축돼 갈등을 줄일 수 있게 신경 쓴다. 연령에 따라 각각 다른 프로그램도 지원한다. 유엔은 1991년 총회에서 ‘노인을 위한 원칙’을 채택했고, 오늘날 여러 선진국 고령 정책의 근간이 됐기 때문이다. 의식주를 넘어 원만한 관계 등 행복추구권과 존엄성이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게 골자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도 노인시설 내 커뮤니티가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갈등 관리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10년 뒤엔 한국인 3명 중 1명이 노인이 된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정치 불통, 경제 무능, 뺄셈 외교를 하고 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5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도청 집무실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김 지사는 “총선 전에는 정치판과 경제 운영의 틀, 교육 시스템, 갈등 구조인 사회를 지적하며 리더십 위기라고 했다”며 “(총선 뒤에는) 대통령과 여당이 국민의 생각과 심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변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제는 신뢰 붕괴 수준까지 가는 것 같다. 대단히 안타깝고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채 상병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에 대해 김 지사는 “대통령이 이번에도 거부권 행사를 한다면 정말 큰 문제고, 지금 거의 국정 포기 수준으로 가는 것 같다”며 “특검법 수용해서 왜 이런 일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이것을 무마하려고 하는 잘못된 시도가 있었다면 명명백백하게 다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차기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경기도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며 “‘지사를 더 할 거냐, 대권 나갈 거냐’ 하는 것은 국민의 부름에 대한 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잘 판단해 보겠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와의 차별화 전략에 대해 “굳이 이 전 대표를 의식해서 차별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제 갈 길을 뚜벅뚜벅 갈 것”이라고 했다. “지금 한국에 비전 제시 정치인 없어… 난 신상품, 구태정치 안할 것”총선 결과를 승리로 오판해선 안 돼… 당 지지율 뒷걸음질, 경제 정당 돼야70조 투자 유치, 임기 내 100조 달성… ‘진보는 경제 무능’ 잘못된 신화 깰 것당 안팎 견제는 내 경쟁력 보여주는 것… 국민의 부름 따라 대선 출마 잘 판단《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강민석 씨가 2일 경기도 신임 대변인으로 선임됐다. 앞서 5월 17일 안정곤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과 신봉훈 전 청와대 행정관이 각각 경기도 비서실장과 정책수석으로 임명됐다. 친문(친문재인) 핵심으로 꼽히는 전해철 전 국회의원이 경기도정자문위원장으로 조만간 위촉될 예정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이처럼 친문계 인사를 대거 영입하면서 일각에선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진용을 갖추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 지사는 5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도청 집무실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특정 정치 세력을 염두에 두고 인사를 하지 않는다”며 “강호의 인재를 영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만 차기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국민의 부름에 대한 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잘 판단해 보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다음은 일문일답.》―민선 8기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다.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꼽는다면…. “경기도는 잠재력과 다양성 등 모든 면에서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다. 국정 운영을 해봤을 때의 경험과는 달리 직접 주민들을 상대하고 도정을 이끌며 많은 가능성을 봤고 ‘경기도를 바꿔서 대한민국을 바꾸자’ 하는 마음으로 2년을 달려왔다. 도지사로서 70조 투자 유치 등 여러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지만, 도민들께서 저에 대한 신뢰와 도정에 대한 믿음의 정도가 올라간 것이 제일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돈 버는 도지사’로 100조 원 이상의 투자 유치를 자신했다. “(취임 후) ‘돈 버는 도지사’가 되겠다고 했다. 가장 큰 취지는 진보는 경제에 무능하고 시장을 잘 모르고 있다는 잘못된 신화를 반드시 깨기 위해서였다. (4년 동안) 국내 투자를 100조 원 이상 하겠다고 했는데, 이미 70조 원을 달성했다. 임기 내 100조 원 이상은 충분히 달성할 것으로 본다. 최대한 많이 하겠다.” ―화성 공장 화재 사고로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번 사고를 보면서 이태원 참사가 떠올랐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재난을 정쟁화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이태원 참사는 현재진행이다. 해결된 것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경기도에서 (화성 공장 화재) 대응하는 확실한 차별성을 보여 주고 싶었다. 유가족 대책이나 장례 문제 등 빠른 사고 수습과 문제 발생부터 대책까지 전 과정을 담은 백서를 만들고 있다. 비슷한 참사의 반복을 막겠다는 취지다. (이런 과정들이) 만약에 정쟁화로 보인다면 정쟁 얼마든지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경기북부특별자치도를 추진하고 있지만 찬반 논란이 거세다. “경기 북부 인구가 360만 명이 넘었다. 이는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 경기도(남부)와 서울 다음으로 많은 수치다. 또 비무장지대(DMZ) 등 잘 보존된 자연환경이 있다. 경기 북부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 주고 있고 가장 큰 경쟁력이다. 오랫동안 국가 경제를 운영해 온 사람으로서 경기 북부를 발전시키면 대한민국 성장의 중요한 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의 계획(중첩 규제 완화 등)대로 경기 북부 비전이 실현되면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을 연평균 0.31%포인트 이상 올릴 수 있다.” ―올해 4월 총선을 앞두고 김포를 서울로 편입해 ‘메가시티’로 만드는 방안을 여당이 추진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이라든지, 광주 호남이라든지 메가시티는 추진해야 한다고 본다. 메가시티는 수도권 일극화에서 전국을 다극화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권은 얘기가 다르다. 왜냐면 경기도는 수도권이라고 하지만 경기 북부가 낙후된 곳이 많다. 4·10총선을 앞두고 지난해 여당 대표가 김포와 서울 편입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이 판을 완전히 흙탕물로 만들었다. 개탄스러운 일이다. 선거의 표를 위해서 서울 인근 시를 서울로 편입하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30년 동안을 끌고 온 국토 균형 발전에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고 또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에 전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이미 지난번 총선에서 결과로 저는 분명히 국민께서 심판했다.” ―주요 현안마다 윤석열 정부를 강하게 비판해 왔다. 윤석열 정부와 여당을 어떻게 평가하나. “총선 전에는 정치판과 경제 운영의 틀, 교육 시스템, 갈등 구조인 사회를 지적하며 리더십 위기라고 했다. 총선 이후 위기 문제가 더 커졌다. 국민이 정권에 대해 분명하게 메시지를 줬지만, 바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과 여당이 국민의 생각과 심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변화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제는 신뢰 붕괴 수준까지 가는 것 같다. 대단히 안타깝고 개탄스럽다.” ―22대 국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이 다시 통과됐다. 대통령이 이번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나. “대통령이 이번에도 거부권 행사를 한다면 정말 큰 문제다. 대통령은 지금 거의 국정 포기 수준으로 가는 것 같다. 대통령이 국정을 포기한다면 국민은 대통령을 포기할 것이다. 억울하게 희생된 젊은 해병 장병 문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윤 대통령이 지금 불행한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대통령이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특검법 수용해서 왜 이런 일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이것을 무마하려고 하는 잘못된 시도가 있다면 아주 명명백백하게 다 밝혀내야 한다.” ―최근 친문 전해철 전 의원 영입이나 대북 송금 자료 공개 논란, 개딸의 공격 등과 관련해 당 안팎에서 견제가 시작된 것 같다. “견제가 있다고 하는 건 그만큼 기대와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당의 앞을 내다볼 자산이 많을수록 좋은 거다. 견제 또는 경쟁하는 것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당의 역동성과 에너지를 살리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게 제 공식적인 답이다.” ―민주당이 이재명 전 대표의 일극 체제로 간다는 비판이 있다. 민주당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나. “이재명 전 대표는 당원과 국민의 지지를 받는 당의 가장 큰 자산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총선 결과를 승리로 오판해서는 안 된다. 총선은 첫째 윤 정부에 대한 심판이었고, 동시에 민주당에도 분명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실제 지금 당 지지율이 뒷걸음질 치고 있다. 지금 민주당이 더 작은 민주당으로 가서는 안 된다. 더 큰 민주당, 수권정당으로서 유능한 정당, 경제에 유능하고 시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진보의 민주당이 되도록 제 역할과 책임을 다하겠다.” ―차기 대선에 출마하는지 궁금하다. 경기도지사 재선 도전 여부도 관심이다. “우리 도민들께서 제게 과분한 성원을 통해서 정치 초짜인 제게 경기지사를 맡겼다. 경기도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생각으로 일한다. 대한민국 바꿔 보고 싶다. 그런데 어떤 자리에서 ‘지사를 더 할 거냐, 대권 나갈 거냐’ 하는 것은 국민의 부름에 대한 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잘 판단해 보겠다.” ―차기 대권주자로서 본인의 장점은 무엇인가. “제가 갖고 있는 경쟁력이자 제 특징은 첫째 ‘제대로 된 사람’이다. 정직하고 진정성을 갖고 있고, 거짓말하는 사람 싫다. 두 번째는 확장력이다. 경기도의회에서 여야 동수로 출범했지만 협치했다. 예산과 조직 다 합의 처리했고 만장일치 통과했다. 도민들로부터 제가 ‘정파적으로 어디 편중됐다’는 얘기 듣지 않는다. 세 번째로 경제전문가다. 대한민국 경제에 대해서 그냥 한 단면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지만 전 세계 경제 흐름과 자본주의 역사,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에 개발연대로부터 쭉 지나 왔던 흐름 등을 잘 파악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대단한 역량이 필요하다.” ―약점은? ‘정치인으로서 주변에 사람이 없다’라는 평가도 있다. “지금 사람이 없어서 약점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은 구름같이 올 것이다. 지도자는 가장 밑바닥에 진정성이 있다. 권력을 사유화하거나 내 사적 이익을 위해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필요하면 희생할 수 있다는 진정성이다. 여기(진정성)에서 소통과 통합이 나온다. 그 다음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역량과 일머리가 있으면 된다. 지금 대한민국 비전을 제시하는 대통령이 있나? 정치인은? 어느 누구도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가겠다 얘기한 사람이 있나? 조급할 것 없다. 오히려 (그런 우려가) 경쟁력이라고 본다. 구태의연한 정치 하고 싶지 않다. 국민 입장에서 보면 난 신상품이다.” ―이재명 전 대표와의 차별화 전략은 있는가. “굳이 이재명 전 대표를 의식해서 차별화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저는 제 갈 길 뚜벅뚜벅 갈 것이다. 구정치 안 하고 갈 거다. (앞서 말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장점) 세 가지는 누구랑 차별화가 아니라 제가 갖고 있는 경쟁력이자 특징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프로필△충북 음성 출생(67)△덕수상고, 국제대 졸업, 미국 미시간대 박사△행정고시 26회, 입법고시 6회△아주대 총장(2015∼2017년)△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인터뷰=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정리=이경진 기자 lkj@donga.com·조영달 기자 dalsarang@donga.com}
“수도권 정당으로 변한 더불어민주당이 초심을 잃고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의지가 약해진 게 핵심 이유라고 봅니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지난달 10일 부산 연제구 시청 집무실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KDB산업은행(산은)의 부산 이전이 성사되지 못하는 상황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산은 이전은 부산을 중심으로 남부권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국정 과제로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공약한 사안이다. 산은을 부산으로 이전하려면 ‘본점을 서울에 둔다’는 산은법 4조 1항을 개정해야 하지만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박 시장은 “지역균형발전은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서 이어져 내려오는 민주당의 중요한 가치라 생각한다”며 “수도권 일극주의를 깨려면 남부권에 새로운 성장 바람이 일어야 하고 이를 위해 정책금융기관의 이전은 필수”라고 말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박 시장은 비대해진 수도권에 대응하는 남부권의 발전과 이를 위한 부산의 역할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세계 2위 환적항(소형 항만으로부터 화물을 받아 모선으로 옮겨 싣는 데 이용되는 항만)을 가진 부산을 싱가포르, 홍콩처럼 국제 자유 비즈니스 도시로 만들기 위해 진작 노력했다면 수도권 집중이 일으킨 오늘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산은 이전이 왜 시급하다고 보는가. “단순하게 하나의 금융기관을 옮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지속 성장하려면 수도권 일극주의를 반드시 타파해야 하고, 이를 위해 수도권에 대응하는 남부권이라는 하나의 발전 단위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촉진할 정책금융기관이 있어야 하며 국제금융도시라는 강점을 지닌 부산에 와야 효율성이 극대화된다.” ―각종 규제를 완화해 싱가포르나 중국 상하이처럼 육성하는 내용을 담은 ‘부산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도 21대 국회에서 처리가 무산됐다. 산은 이전처럼 야당의 반대가 이유인가. “(특별법은 산은법과 비교해) 분위기는 다르다. 최근 야당 원내대표를 만나 특별법의 연내 처리를 호소했을 때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이미 부산 여야 의원 18명 전원이 21대 국회에 이어 법안을 재발의했고 야당도 별 이견이 없어 (22대 국회 통과는) 희망적이다.”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 왜 필요하다고 보나. “부산 전역에 획기적인 규제혁신, 특례지원과 함께 사람과 자본,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류, 금융 등 부산이 강점을 보이는 산업에 대해선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항만과 공항을 중심으로 물류거점을 조성해 그와 결합한 국제금융도시를 만들어 첨단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도시를 추구한다.” ―2030 엑스포 유치가 불발된 상황에서 2029년 말 가덕도신공항 개항을 계속 추진할 필요가 있는가. 안전성 확보, 주민 이주 문제 등에서 무리하는 게 아니냐는 시선이 있다. “엑스포 유치 때문에 공사 기간이 6년 정도 당겨진 건 맞지만 단순히 엑스포를 위한 공항이 아니다. 30여 년 전부터 동남권 관문 공항으로 준비를 해왔다. 남부권 전체를 또 하나의 국가 발전 축으로 만들기 위한 혁신 인프라인 만큼 철저히 준비해 연말 착공할 계획이다.” ―조국혁신당에서 엑스포 유치 과정 전반에 대한 국정조사를 주장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유치 실패가 여전히 너무도 아쉽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부산의 브랜드가 크게 올라가는 등 수확도 적지 않았다. 경쟁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유치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자본을 투입해 경쟁이 어려웠다. 상임위 등 국회의 정상적인 기능을 통해 유치 과정의 여러 의문점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데도, 국정조사를 주장하는 건 오로지 창피를 주겠다는 것으로만 이해된다. 이는 유치를 간절히 염원했던 부산시민들에 대한 모독 행위다.” ―한국 제2의 도시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부산의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어떤 해법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4차 산업혁명, 신산업 분야에 새로운 기업들을 유치하는 데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부산시장으로 처음 취임했던 3년 전보다 부산에 대한 기업의 각종 투자 유치가 10배 정도 늘었다. 현실적으로 대기업의 본사를 부산으로 이전하는 건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고 전력반도체나 2차전지 등에서 잠재력을 가진 신흥 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데 더 집중할 것이다.” ―4월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했다. 보수 패배 원인은 무엇이라 보는가. “국민의힘이 서민층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나 정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라 생각한다. 국민은 보수가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이 별로 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공감하려는 노력, 효능 있는 정책을 찾으려는 고민이 많이 필요하다.” ―앞으로의 정치적 행보를 정한 게 있다면…. “현재는 오직 부산시민들의 삶의 질, 행복을 높이기 위한 정책에 집중하고 있다. 서민들에게 다가가는 시정을 만드는 게 목표이며 그 이후의 개인적 행보에 대해선 내년에 생각하려고 한다.”박형준 부산시장 프로필 △부산(64) △대일고,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 △17대 국회의원(2004∼2008년) △이명박 정부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2009년 8월∼2010년 7월) △국회 사무총장(2014년 7월~2016년 6월) △제38·39대 부산시장 (2021년 4월∼현재) △17대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장(2024년 1월∼현재) 인터뷰=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정리=강성명 기자 smkang@donga.com}
“그 많은 생명이 사라지다니, 너무 안타까워요. 그런데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한국인이 이렇게 많이 죽었으면 정말 난리가 났을 거 같아요. 외국인이라 그나마….”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옆 테이블에 있던 직장인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24일 외국인 18명을 포함해 23명이 숨진 경기 화성시 리튬전지 공장 화재 이야기였다. 내국인과 외국인 간 차별을 두는 인식이 은연중에 배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역시 매일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접하며 보도 여부를 두고 경중을 따질 때, 외국인 근로자 사고는 내국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을 낮춰 생각하곤 했다. 외국인 근로자의 죽음이 일상이 됐을 만큼 수시로 발생함에도 말이다. 두 달 전 끔찍하게 세상을 떠난 태국 출신 근로자가 다시 생각났다. 산재 사망자 10명 중 1명은 외국인 4월 20일 오전. 경기도의 한 폐기물 공장. 쑤친(가명) 씨는 “플라스틱 분쇄기계를 청소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기계 작동이 멈추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직원들이 식사하러 나가자 기계 안에 들어가 청소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 한국인 작업자가 생각보다 일찍 식사를 마치고 복귀했다. 안에 누군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분쇄기계를 작동시켰다. 쑤친 씨는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지난해 국내 전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812명) 중 외국인 근로자는 85명(10.4%)에 달했다. 올해는 213명 중 24명(11.2%·3월 기준)이다. 사고 사망 근로자 10명 중 1명 이상이 외국인인 셈이다. 외국인이 산업 현장에서 사망하면, ‘언어나 소통 문제로 내국인에 비해 각종 사고 등 위기 대응에 미흡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쑤친 씨는 한국말을 곧잘 했다. 화성 화재로 사망한 라오스 국적 숙사완 말라팁 씨도 한국어에 능통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단순히 언어나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자신들이 산업 현장의 안전 정보에서 소외되는 것이 문제라고 하소연한다. 한 외국인 근로자는 “말이 통해도 안전 관련 정보를 접할 기회가 한국인 근로자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차별을 느낀다”며 ‘내부 청소 시 알림 장치’, ‘청소 시 외부에서 기계를 작동시킬 위험’ 등 충분한 정보가 있었다면 (쑤친 씨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화성 공장 참사도 마찬가지다. 배터리에서 첫 폭발이 일어나자 근로자들은 주변 물건부터 옮기려 했다. 소화기로 진화를 시도했지만 불길은 더 커졌다. 출입문 반대쪽으로 대피했다가 연기를 흡입해 전원 질식사했다. 리튬은 연소할 때 물과 닿으면 불화수소 가스가 발생하며 폭발한다. 리튬의 성질과 대응 방법을 숙지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외국인 근로자=일회용’ 인식 바꿔야 파견, 일용직 등의 외국인 근로자는 단기간에 여러 작업장을 이동하며 근무한다. 업체들은 짧은 시간을 일하고 떠나는 이들에게 굳이 안전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다. 이런 행태 속에서 최근 3년간 외국인 노동자 2만2300명 이상이 산재를 당했다. 외국인 근로자 안전 매뉴얼, 안전교육 이수 강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이유다. 한 노동 전문 변호사는 “특히 작업장에서 다루는 물질의 특성, 위험 요인과 대응법을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사회 인식부터 변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안전교육 등이 강화될지라도, 외국인 근로자를 함께 공존해야 할 ‘이웃’으로 보지 않고 차별한다면 언제든 화성 화재와 같은 참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26일 화성 화재 공장 앞에 모인 외국인 근로자들의 외침은 새겨들을 만하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려면 ‘외국인 근로자는 쓰다 버리는 일회용품’이란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우리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들이 정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제대로 된 결정을 안 하는 정치인들, 심판해야 할 거 같아요.” 21대 국회에서 끝내 국민연금 개혁안 처리가 무산되자, 한 18세 고교생은 이처럼 말했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청소년들에게 국민연금 개편에 대한 생각을 심층 인터뷰해 보도했다. 이들에게 21대 국회가 지난달 29일 종료된 후 다시 연락하자 ‘연금개혁을 왜 정치로 몰고 가나’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 청소년은 “(미래세대가) 성인이 되면 연금 개혁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특검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정치권이 툭하면 특검을 거론하니, 청소년들까지 특검 이야기를 한다. ‘특검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나’란 생각이 들면서도, 미래세대의 분노가 생각보다 크다는 걱정이 앞섰다. “대통령실이 ‘맹탕안’ 만들라 압박” 대통령실에서 ‘맹탕 연금개혁안’을 만들도록 사실상 지시했다는 부처 공무원들의 하소연도 떠올랐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정부안에 ‘얼마 내고’(보험료율) ‘얼마 받을지’(소득대체율) 등 구체적 수치가 빠지게 된 건 지난해 7월부터 일찌감치 대통령실이 지침을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12월 “연금 교육 노동 개혁이 인기가 없더라도 미래세대를 위해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밝혔다. 개혁을 강조한 대통령 지지율은 당시 40%가 넘었다. 앞선 정부에선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이 개혁 실패로 이어졌다. 2018년 8월 문재인 전 대통령은 보건복지부의 연금개편 초안에 대해 “개혁에 중요한 건 사회적 합의”라며 제동을 걸었다. 이후 4개 정부안이 국회에 제출됐고, 진전 없이 종료됐다. 윤 대통령의 개혁 발언으로 정부안은 구체적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이 담긴 ‘단일안’이 될 것이란 기대가 컸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발표된 정부안은 단일안 대신 여러 변수를 조합한 24개 시나리오가 담겼다. 정부 관계자 등에 따르면 복지부는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최소 12%로 올려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수차례 보고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총선 때문에 안 된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가 단일안을 내지 않도록 다각도로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22대 국회, 연금개혁 속도 내야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억지로 여러 시나리오를 만드느라 힘들다’는 하소연까지 나왔다. 정부안이 발표된 후 대통령실은 언론 보도에 ‘맹탕’ ‘알맹이 없는’ 등의 단어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까지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과정 속에서 동력을 잃은 연금개혁은 4월 총선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야당은 ‘여당안(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43%)을 수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대통령실과 여당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공무원연금 등을 함께 바꾸는 구조개혁을 해야 한다”며 거부했다. 물론 연금개혁 무산이 대통령실만의 책임은 아니다. 여야 국회 연금특위 또한 공론화 조사, 2개안 압축 등을 거쳤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개혁을 미루는 정치권 심리도 이해는 된다. 부담은 높이고 혜택은 줄이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보니 국민적 반감이 크고,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연금개혁을 미루는 기성세대에 대한 미래세대의 분노가 생각보다 크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현행 제도가 유지되면 연기금은 2041년 적자로 돌아서고 2055년 고갈된다. 미래세대는 급여의 3분의 1 이상을 보험료로 내야 한다. 오죽하면 10대 청소년이 ‘연금 특검’을 운운할까. 겉으론 연금개혁을 외치면서 속으론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개혁을 늦춘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경우 세대 갈등이 폭발할 수도 있다. 22대 새 국회와 정부는 이를 무겁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바로 ‘나의 자녀’가 겪을 문제로 여기고 신속히 연금개혁안부터 만들어야 한다.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성역 없이 수사하라고 한 기관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인데, 고발 8개월 만에 소환조사를 시작했다. 별도의 수사기관이 필요하다.” 고(故) 채수근 해병대 상병 사망 사건 외압 논란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검법을 대표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원내수석부대표가 2일 법안 제안에서 한 말이다. 이후 특검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TV로 이 모습을 보면서 며칠 전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로 첫 출근을 하던 판사 출신 오동운 공수처장 후보자가 떠올랐다. 지난달 26일 지명된 그는 “고위공직자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국민적 열망을 안고 설립된 공수처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국민 신뢰를 받도록 고민하겠다”고 했다. 그런 오 후보자나 공수처에 ‘제 역할 못 하는 공수처가 특검 이유’라는 지적은 아픈 대목이다.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하다 항명 혐의로 군검찰에 기소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측은 지난해 8월 국방부 관계자 등을 공수처에 고발했다. 공수처는 지난달에야 핵심 피의자 조사에 나섰다.1기 출범 3년간 성과 없고 잡음만 2021년 1월 출범한 공수처는 ‘공수(空手)처’라는 오명을 얻었다. 3년 4개월간 공수처가 청구한 5건의 구속영장은 모두 기각됐다. 직접 기소한 사건도 4건 중 1심에서 유죄가 나온 건 손준성 검사장 고발사주 사건뿐이다. 2021년 이성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 황제 조사, 광범위한 통신자료 조회 등 공수처발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초대 김진욱 공수처장이 올해 1월 퇴임한 후 지휘부 공백도 3개월 이상 이어졌다. ‘수장이 바뀌어도 공수처는 달라질 게 없다’는 비관론도 팽배하다. 특히 전직 공수처 검사들은 ‘구조적 문제 탓에 개선의 여지가 적다’고 강조한다. 출범 초기 검사 25명 중 현재 공수처에 남은 검사가 1명뿐인 이유다. 공수처법상 수사와 기소 대상이 분리돼 있다. 수사 대상은 판사, 검사, 경무관급 이상 경찰 등 3급 이상 공무원까지다. 기소 대상은 대법원장, 대법관, 검찰총장, 판사, 검사, 고위 경찰 등 사법기관 공직자로 국한된다. 나머지 피의자는 공수처가 수사해 검찰에 공소 제기를 요구하면 검찰이 기소한다. 수사할 수 있는 범죄 또한 직무유기, 직권남용, 뇌물범죄 등으로 정해져 있다. 고위공직자 뇌물은 민간 비리와 연관된 경우가 많다. 뇌물을 마련한 민간인부터 조사를 시작해야 할 때도 공수처법상 제한된 대상과 범죄 때문에 수사에 한계가 있다고 한다. 전직 검사들 “수사 어려운 구조 고쳐야” 전직 검사들은 “인지수사로 파고들다 보면 고구마 줄기처럼 예상외 정보가 나오고 권력 비리 수사가 시작되는데, 현행 공수처법에서는 이 과정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한 검사는 “공수처를 ‘직권남용처’라고 부른다”고 했다. 여러 제약 탓에 고소나 고발로 시작되는 ‘직권남용’ 수사만 주로 했다는 푸념이다. 22대 국회에서는 공수처법 개정을 논의해야 한다는 게 전직 공수처 검사들의 주장이다. “사건 하나가 재판까지 끝나는 데 3, 4년 걸린다. 그사이 검사들이 다 바뀐다”며 수사 인력을 장기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제언도 나왔다. 공수처 검사 임기는 3년이다. 5월 현재 공수처 검사는 19명, 수사관은 36명. 정원(검사 25명, 수사관 40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반면 지휘부는 그럴듯한 수사 성과에만 매달렸다고 ‘공수처를 떠난 이유’란 회고록을 낸 김성문 전 부장검사가 밝혔다. 이 밖에 공수처를 상설특검 형태로 운영하거나, 사건을 고르는 선별입건제 재도입 등 다양한 개선안도 논의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가 모두 정답은 아니다. 그럼에도 ‘빈손’이라는 오명을 받아 온 공수처 1기를 반면교사 삼기 위해서는 공수처를 떠난 전직 검사들의 목소리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17일 인사청문회를 통과하면 2기 공수처 수장이 되는 오 후보자는 특히 말이다.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福寶)’를 실은 화물기가 3일 중국 청두 솽류(雙流) 국제공항에 착륙하려는 순간, 조수석에 있던 사육사 강철원 씨(55·사진)는 불안감에 발을 굴렀다. 예민한 판다는 비행기 이동, 특히 이착륙 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기 때문이다. 착륙 후 강 씨는 즉시 비행기 내 푸바오 상태부터 점검했다. 걱정 어린 그의 눈빛을 읽어서일까. 푸바오는 강 씨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푸바오가 너무 밝은 표정으로 의젓하게 앉아서 대나무를 먹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저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았습니다. ‘할아버지, 봤지? 나 잘할 수 있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라고.” ‘행복을 주는 보물’이란 뜻의 푸바오는 2020년 7월 20일 태어난 국내 첫 자연번식 판다다. 경기 용인 에버랜드에서 사육되며 국민적 인기를 끌었지만, 이달 3일 태어난 지 1354일 만에 중국으로 떠났다. 에버랜드에는 푸바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6000여 명이 몰렸다. 푸바오 신드롬과 함께 37년 차 베테랑 사육사인 강 씨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그는 2016년 푸바오 부모인 러바오와 아이바오를 사육해 ‘판다 아빠’로 불렸다. 푸바오를 키우면서 ‘푸바오 할부지(할아버지)’란 별명도 얻었다. 강 씨는 푸바오 이송을 위해 3, 4일 중국을 방문한 뒤 5일 귀국했다. 10, 11일 서면과 전화 등을 통해 그를 인터뷰했다. 돌아가신 강 씨의 어머니 이야기부터 조심스레 꺼냈다. 지병을 앓던 그의 어머니는 푸바오 이송 하루 전인 2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강 씨가 모친상의 슬픔 속에서도 푸바오 동행에 나서자 왕원빈(汪文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아무리 중요해도 동물인데, 모친상은 챙겨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일부 있었다. “사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어머니를 뵈러 병원에 갔었어요. ‘중국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했더니, 어머니가 ‘(푸바오와 헤어져) 많이 섭섭하지. 잘 다녀와라’라고 응원해주시더군요. 그런데, 2일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형님들, 누님들이 ‘어머니는 너가 푸바오와 함께 중국에 가길 원하셨고, 그런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고 격려해주셨어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푸바오를 화물기로 이송하기 위해선 각종 서류를 중국에 제출하고 복잡한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강 씨 대신 다른 사육사를 보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 푸바오 소유권은 중국이 가지고 있다. 멸종위기종 국제거래협약(CITES)에 따라 짝짓기를 하는 만 4세가 되기 전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강 씨는 “3일 공항 도착 후 푸바오는 중국 환경부 소속 판다총괄 부서의 선수핑 기지까지 차량으로 옮겨졌다. 이후 바로 검역장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강 씨가 푸바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건 4일. 그는 당초 검역장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중국 당국을 설득했다. “‘모친상에도 푸바오를 위해 동행했다’며 설득했어요. 방역복을 입은 채 푸바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평소 입던 사육사 복장이 아니라, 하얀색 방역복을 입고 눈만 드러내니 푸바오가 못 알아봤어요. 몇 번 부르니 제 목소리를 알아채고 다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푸바오가 좋아하는 안마를 해줬어요.” 현재 심경을 묻자 그는 “감정 조절이 잘 안된다”고 했다. “아쉽고, 서글퍼요. 푸바오가 사라진 방사장으로 들어갈 때 허전함을 지울 수 없더군요. 불을 켜면 항상 푸바오가 먼저 보고 인사를 했는데….” 그럼에도 푸바오 동생인 쌍둥이 판다 ‘후이바오’와 ‘루이바오’를 돌보기 위해 강 씨는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는 “그 아이들이 저를 보는 눈빛에서 예전의 어린 푸바오가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6, 7월쯤 푸바오를 만나러 갈 예정이다. 다시 만났을 땐 푸바오가 알은체해주면 좋겠다”며 웃었다. 강 씨와 푸바오의 인연이 시작된 건 2016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친선 차원에서 판다 이송을 결정했고, 2016년 러바오와 아이바오가 한국에 왔다. 4년 뒤인 2020년 7월 자연분만에 성공해 푸바오가 태어났다. 당시의 기억은 그에게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다. “2020년 7월 20일. 오후 9시 49분. 몸무게는 197g, 몸길이 16.5cm. ‘으앙’ 하며 처음으로 푸바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제 사육사 경험을 모두 통틀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이 같은 ‘푸바오 바라기’는 강 씨뿐만이 아니다. 2021년 1월 첫 공개 이래 약 600만 명이 푸바오를 찾았다. 판매된 굿즈만 330만 개. ‘매 성장의 순간에 푸바오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소중함을 배웠다’며 치유받았다는 사람이 특히 많다. 동물복지에 대한 관심도 환기시켰다. 국내 동물 학대 발생 건수는 2016년 303건에서 2020년 992건으로 3배가량 증가했다. “곰 한 마리에 ‘왜 이렇게 난리냐’고 하는 분들도 있지요. 푸바오가 태어난 때가 많은 분들이 힘들어하던 시기였잖아요. 2020년 코로나19 유행 때 푸바오를 보면서 가족애를 느끼고 힐링이 되신 거 같아요. 함께 응원하고, 함께 육아하고, 그런 느낌들.” 이어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남기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심어준다면, 역사 속 어느 위인 못지않게 인정받을 대상이라고 저는 감히 생각한다”고 했다. 강 씨는 1969년 전북 순창 산골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눈망울이 큰 소가 친구 같아 등에 타곤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토끼를 잡아왔는데, 몰래 풀어줘 크게 혼이 났다고 한다. 그는 “이후 아버지가 사냥에 나가지 않으셨다”며 “아들이 동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에버랜드 입사 2년 차에 국내 최초로 맹수(인도표범) 인공포육에 성공했다. 강 씨는 사육사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준 멘토로 영국 환경운동가이자 동물학자인 제인 구달을 꼽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제인 구달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내가 한 일은 동물을 따라다니며 기록한 것밖에 없다’고 하시더군요. 동물 관찰기록표를 만들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등 사육관리를 더욱 치밀하게 하는 방법을 조언했어요.” 강 씨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동물 우리 옆에 야전침대를 놓고 잤다. 유인원과 교감하기 위해 덥수룩한 수염까지 길렀다. 사육사로 37년간 일하며 80여 종의 동물을 돌봤다. 동물에게 모든 것을 쏟아내는 강 씨가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어떻게 대할지가 궁금했다. 푸바오에게 자필 편지를 써 공개하던 그가 가족에게는 편지를 쓸까. 강 씨는 “아내와 대학교 3, 4학년 두 딸이 있다”며 “아내와는 편지를 서로 주고받는 편”이라고 했다. “딸들도 사육사인 아빠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줘 늘 감사해요. 다만 최근 두 딸이 제 카카오톡 프로필이 푸바오로 된 걸 보고 자기들 사진으로 바꾸더군요(웃음).” 자녀 이야기를 하던 강 씨는 ‘동물에게 배울 게 정말 많다’고 강조했다. 푸바오 엄마 아이바오는 자식을 나무 위에 무작정 올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푸바오가 스스로 터득하도록 도와준다.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도 동물을 다루며 배웠습니다. 동물 이름을 부를 때 기분 좋은 표현이나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밝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사랑해주면 동물은 자신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긍정적으로 반응하죠.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서 좋은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은 긍정적으로 됩니다.” 강 씨가 푸바오와 교감하는 모습에서 종(種)을 뛰어넘는 유대, 나아가 소통의 중요성을 배웠다는 이들도 많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보는 확증편향, ‘나와 다르면 분노하는 증오사회 탓에 인간 사이의 소통이 동물과의 교감보다 어려워졌다는 방증 아닐까. “동물을 만날 때 ‘예쁘다’며 빨리 친해지고 싶어합니다. 빨리 만져보고 싶어하고요. 동물에게는 실례예요. 서로 이해해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한 번 만나서 친구하고, 빨리 친해질까요?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소통하면 어떨까요.”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제79회 식목일인 5일 전국 곳곳에서 약 7000그루의 나무가 심어졌다. 식목일은 1946년 제정됐지만, 유래를 1493년으로 꼽는 이들도 있다. 조선 성종 24년 3월 10일(양력 4월 5일) 왕과 관료들이 동대문 밖에서 직접 밭을 일궜다고 한다. 그만큼 4월 초순이 식물을 심고 가꾸기 좋은 날씨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식목일을 변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산림 전문가들에 따르면 나무 심기에 가장 좋은 기온은 6.5도. 과거 4월 초 날씨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식목일의 최근 10년간 평균기온은 1940년대보다 1.5∼4도가량 상승했다. 환경단체들은 ‘식목일을 3월로 옮겨야 한다’며 지난달 나무심기 행사를 열기도 했다. 식목일을 앞당기는 것은 물론 ‘나무 심기(植木)’ 자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 배경 역시 기후변화다. 나무는 온실가스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인다. 나무 1그루는 연간 8kg가량의 탄소를 흡수한다. 1ha의 숲은 연간 10t 이상의 탄소를 없앤다. 자동차 6대가 1년간 배출하는 양이다.탄소흡수, 목재활용 모두 낮은 국내 나무 나무는 생장→성숙→쇠퇴기를 거치기 때문에 탄소흡수 능력도 ‘전성기’가 있다. 생장기에는 탄소 흡수가 늘다가 쇠퇴기에는 감소한다. 나무가 죽어 분해되면 탄소를 오히려 배출한다.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국내 주요 수종인 참나무 소나무 등은 평균 25년이 지나면 매년 탄소흡수량이 줄어든다. 소나무의 연간 탄소흡수량을 분석해 보면 30년생은 12.1t이지만 60년생은 1.8t에 그친다. 목재(木材)는 탄소를 담는 그릇도 된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조사 결과 목재는 탄소를 30년가량 저장한다. 목재로 건물을 지으면 탄소배출량이 ㎡당 110∼470kg 감소한다. 선진국들이 목재 이용 활성화에 나선 이유다. 일본은 2021년 기존 목재 관련법을 ‘탈탄소 목재 이용촉진법’으로 개정했다. 프랑스는 공공건물의 최소 50%를 목재로 짓는 법안을 재작년부터 시행 중이다. 한국은 어떨까. 국내 산림 면적(630만 ha)은 전 국토의 63%. 세계 평균(31%)의 2배다. 1960년부터 현재까지 120억 그루가 심어졌다. 그러나 국내 나무 중 77.2%는 30년생 이상이다. 탄소흡수량이 높은 1∼10년생은 4%, 11∼20년생은 3%, 21∼30년생은 11%에 불과하다. 숲 곳곳에는 다닥다닥 붙어 자란 탓에 광합성이 원활치 않아 지름이 평균 30cm에 불과한 나무들이 많다. 연간 벌채되는 산림 면적도 2만 ha 미만으로 전체 산림의 0.3%에 머물다 보니 국내 목재 자급률은 16% 내외다. 일본(42%) 독일(76%) 등에 비해 현저히 낮다. 한국은 매년 약 7조 원의 목재를 수입하는 세계 4위 목재 수입국이다.‘심고-쓰고-가꾸는’ 지속가능 선순환 필요 나무를 심는 것 못지않게 적절히 벌채해 밀집도를 낮추고 목재 등으로 활용하는 한편, 탄소 흡수가 뛰어난 새 나무를 심는 선순환이 절실하다는 전문가 제언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나무를 베는 행위는 곧 환경 훼손’이란 사회적 인식이 강하다 보니, 우리의 나무와 숲을 어떻게 가꾸고 활용할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금기시되는 편이다. 환경단체들 또한 “자칫 난개발로 이어져 산림이 훼손될 수 있다”며 벌채를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후변화를 늦추고 지속가능한 숲 조성을 위해 ‘많이 심기’를 넘어 ‘잘 심고 잘 가꾸고 적절히 쓰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공감대는 이미 커졌다고 본다. 목재는 물론 종이 휴지 등 일상 곳곳에서 나무가 쓰인다. 보존만 외치며 대량으로 목재를 수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국내 숲만 지켜야 할 소중한 자연이고, 다른 나라의 숲은 마구 써도 되는 자원은 아니지 않는가. 김윤종 사회부장 zozo@donga.com}
◇윤웅섭 전 한국공항공사 사장 별세·정순락 씨 남편상·성원(작가) 주원(화가) 국노 씨 부친상·이승호 H&Q코리아 파트너 전무 장인상·이세희 씨 시부상=26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29일 오전 6시30분 02-2258-5946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모두가 ‘대학의 위기’를 경고하는 시대다. 학령인구 감소, 15년째 등록금 동결 등 대학의 생존을 위협하는 외생 변수도 많지만 대학 스스로 상아탑에 갇혀 위기를 자초한 측면도 적지 않다. 낡은 규제로 대학의 발목을 잡아 온 정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노사관계 전문가로서 평생 조직과 갈등 관리를 연구해온 김동원 신임 고려대 총장은 “대학의 교육 대상(학생)과 주체(교수), 내용이 모두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에는 대학이 사회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과감한 규제 철폐를 요구했다. 28일 제21대 총장으로 취임한 김 신임 총장을 13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만났다.》 ―대학의 위기를 불러온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미래학자들이 보는 대학의 미래는 암울하다.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30년 후 거대한 종합대학들이 모두 유적지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대학이 ‘학문을 위한 학문’만 추구하면서 현실과 멀어진 결과다. 이젠 대학이 사회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대학과 교수들을 정책 결정에 대거 참여시킨 미국의 ‘위스콘신 아이디어’도 그런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대학도 사회와 더 밀착된, 사회를 위한 대학이 돼야 한다.” ―하지만 정작 우수한 두뇌들이 의대와 법대 등 특정 직종을 위한 학문으로 쏠리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시대에 따라 특정 분야에 우수 인재가 몰리는 현상은 늘 있어 왔다. 다만 최근엔 학문을 출세 수단으로 보는 물질주의의 영향이 커졌다. 당장은 학생들이 의대, 법대를 좇지만 삶의 가치를 더 생각하는 시대가 오면 그런 경향도 바뀔 것으로 본다. 의대에 갔다가 기초 학문을 공부하러 떠나는 경우도 있다.” ―미래의 대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교육 대상을 30∼70대까지 넓혀야 한다. 한 해 출생아 수가 20만 명대로 떨어진 상황에서 더 이상 20대 초반 학생들로 학부 정원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젠 70세가 넘어도 공부해야 하는 세상이다. 교육 주체인 대학 스스로도 변해야 한다. 과거엔 상아탑에 갇힌 교수들이 주로 강의를 해 왔다면, 앞으론 현장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이 대학으로 와 학문과 현실의 괴리를 좁혀야 한다. 가르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사회 문제가 학문 분야별로 발생하는 건 아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은 의학 분야뿐 아니라 노동, 국제정치 등 많은 학문이 복합적으로 들여다볼 문제였다. 융합과 통섭을 바탕으로 ‘깊고 넓은’ 학문을 지향해야 한다.” ―대학이 마주한 변화 중에 대화형 인공지능(AI)인 챗GPT도 빼놓을 수 없다. “예전에 계산기가 나왔을 때 교수들이 쓰지 말라고 했다면 학습이나 학문 발전에 도움이 됐을까. 인류가 기술 발전을 막으려고 해서 막았던 적이 없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고, 또 선도해야 한다. 챗GPT도 마찬가지다. 잘 활용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챗GPT를 활용할 수 있는 과제를 내는 것이 대학이 할 일이다.” ―대학의 변화가 시급하지만, 재정 측면에서 교육 투자에 한계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등록금 문제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 학교의 연간 평균 등록금이 약 800만 원인데, 미국 사립대는 5만∼7만 달러, 약 8000만 원에 달한다. 한국의 10배 수준이다. 일본과 싱가포르도 사립대는 수천만 원씩의 등록금을 받는다. 대학 등록금이 15년째 동결되다 보니,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 실질 등록금은 23% 하락했다. 최근 국내 대학들의 세계 대학 경쟁력 순위 하락은 전혀 이해 못 할 현상이 아니다. 등록금을 10배 더 받는 대학과 같은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대학 스스로 개선할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재정을 지나치게 등록금에만 의존하는 등 대학 스스로 노력을 덜 한 부분도 있다. 창업이나 기술 이전을 활성화해 수익을 다변화해야 한다. 총장 선거에서도 10가지 재정 확충 과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생애주기형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고, 메타버스를 활용한 온라인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등이다.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선임해 투명하고 효율적인 회계 및 예산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연간 예산의 3분의 2를 부채 탕감에 쓸 정도로 재정이 어려웠던 일본의 와세다대는 외부 CFO를 데려와 이를 극복하기도 했다.” ―정부의 교육 개혁 추진 의지가 강하다. 대학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 “정부가 대학 재정 지원 권한의 절반 이상을 각 지방자치단체로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긍정적인 방향이다. 현장과 멀리 있을수록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정책이 나온다. 각 지자체가 대학과 지역을 살릴 방안을 더 잘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대학 관련 규제는 더 많이 없애야 한다. 미국 고등교육 정책의 특징이 ‘지원은 하되, 규제는 거의 없애는 것’이다. 미국 대학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게 된 배경이다. 사회가 변하는 걸 대학이 빨리 따라가도록 도와줘야 한다. 한국이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권이지만, 대학 순위 100위권 학교는 손에 꼽을 정도다. 국가 경쟁력보다 대학 경쟁력이 떨어지는데 일류가 되긴 어렵다.” ―정부가 규제 완화를 강조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대표적인 것이 대학의 학생 선발 자율권이다. 공정성 이슈가 부각되면서 서울 주요 대학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중심의 정시 전형으로 40% 이상을 뽑아야 한다. 고려대는 원래 수시로 80%를 뽑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큰 틀을 바꿀 수밖에 없다. 학교는 교육 철학에 가장 맞는 학생을 뽑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쉽다.” ―고려대가 원하는 인재상은 무엇인가. “고려대는 기능적인 지식인보다는 선 굵은 리더들을 많이 배출해 왔다. 입시 단계부터 국어 영어 수학을 잘하는 사람을 뽑기보단 그 학생의 잠재력을 본 결과다. 자라온 배경에 따라 개인의 잠재력이 덜 개발된 학생도 있을 수 있다. 개인 능력을 볼 때 현재의 지식과 기술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의 잠재력이 더 중요하다. 문제 해결 능력이나 창의력, 자기 주도성이 뛰어난 학생을 뽑으려고 한다.” ―초중고교에서 아이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려면 어떤 교육이 이뤄져야 할까. “학생이 글을 쓰는 능력이 중요하다. 스스로 글을 쓰려면 문제를 해결해가는 방식의 수업이 이뤄져야 한다. 구글에서 직원을 뽑을 때 ‘왜 맨홀 뚜껑이 둥그냐’는 문제를 낸다고 한다. 정해진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창의력과 추론 능력을 보는 거다. 공식이나 답을 외우는 방식의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근 의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의대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면…. “국내외 의대와 대학병원들을 봐도 병원 규모와 의대 경쟁력(순위)은 무관하다. 미국 하버드대, 예일대, 존스홉킨스대 등도 병원 규모로는 상위권이 아니다. 고려대도 무리해서 병원 규모를 늘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의대 순위는 1위까지 끌어올리고 싶다. 연구 투자를 늘려 ‘고난도 치료는 고려대가 제일 잘한다’ ‘연구 성과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공약으로 ‘글로벌화’를 강조했다. “최근 10년 동안 국내 대학들의 국제화 수준이 하락했다. 코로나19 영향도 있지만 외국인 교수와 학생 비율도 많이 줄었다. 이들이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 글로벌화된 캠퍼스를 만들려고 한다. 특히 해외에선 한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려는 수요도 많이 생겼다. 고려대가 내국인만을 위한 대학이 돼선 안 된다. 세계를 무대로 하는, 전 세계인을 위한 대학이 돼야 한다.” ―고용과 노사관계 전문가라는 점이 대학 총장으로선 어떤 장점이 될까. “대학은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곳이다. 그런 갈등을 안고 조직을 앞으로 끌고 가야 한다. 노사관계와 닮은 점이 많다. 대부분 갈등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만, 노사관계에선 갈등은 당연한 것이고, 그걸 해소하는 것이 평생 공부했던 분야다. 대학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자신이 속한 위치에 따라 변화를 원치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게 내 역할이다.”김동원 고려대 총장△대구(63)△경북대사범대부설고△고려대 경영학과△미국 위스콘신대 경영학 박사△고려대 기획예산처장, 노동대학원장 겸 노동문제연구소장, 경영대학장 겸 경영전문대학원장△국제고용노동관계학회(ILERA) 회장,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장 인터뷰=김윤종 정책사회부장 zozo@donga.com정리=박성민 기자 min@donga.com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노후에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15일 생중계된 1차 국정과제 점검회의에 참석한 청년의 질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정부 말기(2027년)나 다음 정부 초기(2028년)에는 앞으로 수십 년간 지속할 수 있는 연금개혁의 완성판이 나오게 하겠다”고 답했다. 윤 대통령은 20일 청년과의 만남, 21일 경제정책방향 발표에서도 연금을 포함해 노동, 교육 등 3대 개혁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이들 개혁을 강조한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최근 40%가 넘었다. 6월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정부 내부의 분위기는 대통령 발언과 사뭇 달라 보인다. 연금개혁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 내부에선 최근까지 ‘용산(대통령실)이 연금개혁에 진정성이 없다’는 하소연이 나왔다. 내년 3월 5차 국민연금 재정추계 결과를 발표하고 10월 정부 개혁안을 확정해야 하지만, 실무 현장에서 만난 대통령실 관계자들의 태도가 미온적이라는 불만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연금개혁과 관련해 대통령으로부터 ‘언제까지 어떻게 마무리하라’는 명확한 지시를 받은 것이 없다”고 밝혔다. ‘완성판’의 의미조차 주무부처에서 정확히 알지 못하는 듯한 상황도 연출됐다. 대통령의 ‘2027년 연금개혁 완성판’ 발언에 내년 예정된 정부 개혁안이 미뤄지는 것 아니냐는 언론 비판이 제기됐다. 그제야 복지부는 완성판의 의미를 대통령실에 확인해 17일 추가 설명자료를 발표했다. 완성판은 국민연금뿐 아니라 공무원연금 등 4대 직역연금까지 포함한 노후 소득 보장 전반의 구조개혁안이라는 게 주 내용이다. 그런데 대통령실 분위기는 또 다르다. 내부적으로 노동, 교육, 연금 순으로 개혁의 순서와 비중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공무원연금 등과 함께 개혁해야 하는데, 자칫 손을 대면 공무원 집단이 (정권에) 돌아서서 감당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연금개혁은 상황을 봐서 미루자는 기류가 팽배한 셈이다. 정권 말에 연금개혁을 완성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늦추는 개혁을 2010년 단행했다. 임기(2012년)가 끝나기 2년 전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역시 임기(2005년)보다 3년 이상 빠른 2001∼2002년 연금개혁을 실시했다. 두 사람 모두 연임에는 실패했지만,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개혁에 성공한 뚝심은 현재까지 칭송받고 있다. 연금개혁은 국민적 거부감이 큰 정책이다. 부담은 높이고 혜택은 줄이는 방향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추진하면 자칫 정권마저 교체된다. 연금개혁을 미루려는 심리는 어찌 보면 정치권의 본능과도 같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21일 첫 신년 업무보고에서 “연금 노동 교육 개혁이 인기가 없더라도 미래세대를 위해서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혁에 실패하면 국민연금 적립금은 2057년 고갈된다. 연금보험료율은 30%가 넘어 현재(9%)의 약 3배가 된다. 자손들이 ‘월급의 30%를 국민연금으로 떼이는’ 부담을 진다는 의미다. 윤 대통령 의지에 진정성이 있다면 완성판은 임기 중반에 나와야 한다. 완벽한 완성판이라도 정권 말에 제시되면 연금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김윤종 정책사회부 차장 zozo@donga.com}
24일은 카페와 식당 안에서 종이컵과 플라스틱컵, 빨대 등의 사용이 금지된 날이다. 개정된 자원재활용법으로 일회용품 사용 규제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편의점에서도 비닐봉투 판매가 금지됐다. 어기면 최대 3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광화문 일대 커피전문점 7곳을 둘러봤다. 매장 내에서 일회용컵으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편의점에서도 비닐봉투를 받았다. 편의점 주인은 “당장 벌금을 내는 것은 아니라 손님이 달라면 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담당 부처인 환경부는 이 제도 시행 직전인 1일 “일회용품 규제를 24일부터 시작하되 1년 계도기간을 두겠다”고 발표했다. 벌금이 1년간 없다 보니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떨어진다. 환경단체들도 정부의 ‘유예’ 카드가 정책을 후퇴시켰다고 비판했다. 부처 담당자에게 연락해 보니 “비용과 인력 부담을 호소하는 자영업자들을 배려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솔직히 말해 당장 과태료를 부과해도 한계가 명백하다”고 토로했다. 예를 들어 손님이 테이크아웃으로 일회용컵 음료를 주문한 후 매장 내에서 마시면 막을 방법이 없다. 점주가 매장 내 주문도 일회용컵으로 제공한 후 단속이 나오면 “손님이 테이크아웃을 원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단속조차 사실상 효과가 없다는 의미다. 일회용품 규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8년 8월부터 카페 매장 내에서 일회용 플라스틱컵 사용이 금지됐다. 어길 시 최대 200만 원 과태료를 내게 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여파로 중지한 뒤 이번에 품목을 추가해 다시 시행하게 됐다. 다음 달 2일 시작되는 ‘일회용컵 보증제’도 비슷하다. 일회용컵을 이용하면 음료 가격에 더해 보증금을 내고, 컵을 반납할 때 이 보증금을 돌려받는 제도다. 이 역시 20년 전인 2002년 처음 시행됐지만 회수율이 낮아 2008년 폐지됐다. 정답은 사실 정해져 있다. 우리 스스로가 일회용품을 이용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말은 쉽고 실천이 어렵다. 기자도 텀블러 사용 습관을 들이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제는 이런 일상의 불편함을 이겨내야 할 시점이다. 단순히 벌금이나 제도 안착의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8월 8, 9일 중부지방에 최대 490mm의 폭우가 내렸다. 1907년 기상 관측 이래 115년 만에 최고치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영국은 7월 기온이 363년 만에 40도를 넘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극단적 기상 현상이 이미 지구의 ‘뉴노멀’(새 기준)이 됐다고 경고했다. WMO 예측 결과 2100년에는 해수면이 2m 이상 상승해 전 세계 6억 명이 집을 잃게 된다. 온난화와 이상기후는 온실가스를 감축해야 막을 수 있다. 연간 국내 일회용컵 소비량은 300억 개가 넘는다. 종이컵 1개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32g. 연간 소비량의 10%만 줄여도 온실가스 약 10만 t을 감축할 수 있다. 소나무 1000만 그루가 1년 동안 흡수하는 양이다. 일회용컵이나 비닐봉투를 사용하고 싶을 때마다 지구와 내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기자는 오늘부터 다시 텀블러 사용에 도전한다. 김윤종 정책사회부 차장 zozo@donga.com}
무릎이 아파 병원을 찾았다. 통증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의사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진료시간이 60초도 안 됐다. 엑스레이 촬영 후에도 상세한 설명 없이 “염증 같다”며 주사를 놓자고 했다. 주사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불쾌했다. ‘감별사 앞 병아리처럼 진행되는 국내 진료 환경은 왜 바뀌지 않나’란 불만이 커지면서 ‘3058’이란 숫자를 알게 됐다. 국내 의대 정원이다. 2006년 이후 그대로다. 17년간 의사는 충분하고 의료 수요는 변동이 없었을까? 상황은 정반대다. 국내 1, 2위를 다투는 서울아산병원 간호사가 7월 근무 중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수술할 의사가 없어 사망했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우리 병원에서) 한 해 뇌출혈 수술을 200건 진행하는데, 수술할 수 있는 의사는 나와 동료 교수뿐”이라고 하소연했다. 보건의료노조가 99개 의료기관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병원들이 의사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의사단체들은 2020년 총파업에 돌입했다. 정부가 당시 ‘매년 400명씩 의대 정원을 추가 선발한다’고 발표하자 반기를 든 것. 확대 계획은 연기됐다. 의사단체 측은 “정원보다는, 응급의학과 흉부외과 등 필수의료의 보상이 낮고 대형병원에만 환자가 몰리는 의료전달체계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일부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17년째 동결된 의대 정원은 정상이 아니다. 국내 의대 졸업자 수는 인구 10만 명당 7.4명(2019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3.5명)의 55% 수준이다. 고령화 및 의료 수요 확대로 최근 10년 새 미국 의대 졸업자는 30%, 프랑스는 71%, 일본은 17%가 증가했다. 반면 한국인 1인당 외래진료 횟수는 연간 14.7회로, OECD 평균(5.9회)의 2.5배다. 국내 의사 연평균 임금도 약 2억3000만 원으로, OECD 평균(약 1억4000만 원)보다 높다. 미국의 경우 미국의과대학협회(AAMC) 권고를 토대로 의대 정원을 결정한다. AAMC는 의대생 증원을 지난해 제안했다. 영국과 독일 정부도 코로나19 사태 후 의료계 논의를 거쳐 정원을 늘리기로 했다. 의대 정원을 수요나 보건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조절하는 게 글로벌스탠더드, 아니 ‘상식’이다. 더구나 한국은 의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30년에는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22% 증가하고 의사가 4000명 이상 부족해진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의료계에 의대 정원 의견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정원 확대 논의가 다시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달 초 한 여론조사에서는 ‘의사 증원’에 대한 찬성(69.6%) 의견이 반대(13.3%)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정원을 확대한 후 혹여 부작용이 더 많다면, 다시 정원을 줄이는 등 탄력적으로 대응하면 된다. 고강도 업무와 의료사고 위험이 높은 반면 금전적 보상이 적은 필수의료 분야를 기피하는 현상을 두고 의사들을 탓할 순 없다. 일이 쉽고 돈도 잘 버는 분야를 선택하는 건 의사들의 자유이자 권리다. 마찬가지다. 환자들도 다양한 의사와 의료기관 중 보다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선택하고 누릴 권리와 자유가 있다. 의사단체들이 의대 정원 확대를 또다시 막는다면 ‘철밥통 지키기’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김윤종 정책사회부 차장 zozo@donga.com}
지난달 20일은 우리나라에서 ‘원자력발전은 친환경 에너지’로 공식화된 날이다. 환경부가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하는 개정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녹색분류체계’란 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친환경 경제활동이다. 그런데 정작 이를 발표한 환경부 내부는 달갑지 않다는 분위기다.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라고 선언하기가 불편하다는 기류가 팽배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원전의 온실가스 배출이 태양광보다도 적은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핵폐기물, 방사능 누출 사고 위험도 무시 못 한다”고 했다. 사실상 원전 확대를 선언한 것이 부처 의지는 아니라는 하소연으로 들렸다. 지난해 12월 환경부가 첫 녹색분류체계를 발표했을 당시 원전은 제외됐다. 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 폐기를 선언한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기류가 변했다. 환경부는 유럽연합(EU) 등 국제기준을 참고하겠다고 선언했고, 유럽의회가 7월 원전을 자국 택소노미에 넣자 환경부도 지난달 20일 ‘원전=친환경’을 공표한 것이다. 환경단체들은 이날 “원전은 기후변화를 막을 재생에너지 전환을 늦춘다”고 비판했다. 특히 “K택소노미는 EU 기준에 미치지 못해 수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원전 확대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모두 ‘EU 택소노미’를 기준으로 삼은 셈이다. EU 택소노미는 어떨까? 원전은 ‘과도기적’ 에너지이며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의 제한적 사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EU 또한 2020년 6월 택소노미를 처음 발표했을 때 원전은 포함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지난해부터. EU는 ‘2050년 탄소 순배출량 제로(0)’ 목표 달성을 위해 재생에너지 비율을 전체 소비 에너지의 22%(2020년 기준)까지 높였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바람이 충분히 불지 않아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겼고, 전기료가 30% 이상 폭등했다. 유럽 천연가스 사용량의 3분의 1 이상을 공급하는 러시아가 2월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자국 제재에 나선 EU에 공급을 수시로 중단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온 위기감이 EU가 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시킨 속내다. 신재생에너지 생산이 궤도에 오르면 원전은 다시 축소할 수 있다는 게 EU 입장이다. 우리 현실도 다르지 않다. 국내 신재생에너지 공급 비중은 전체 발전량의 7.4%(2020년 기준)에 그친다. 에너지 수급을 위해 원전이 필요하다. 원전을 무조건 확대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반감기가 수십만 년인 방사성폐기물 포화가 임박한 상태다. 폐연료봉은 1867만 개로, 2031년부터는 순차적으로 포화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원전 얘기만 나오면 ‘진영논리’가 앞선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진보 성향 응답자의 90%는 원전 친환경 에너지 공식화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보수 성향 응답자는 92%가 ‘동의한다’고 밝혔다. 전 정부의 탈원전 일변도 정책으로 이미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번 정부가 맹목적인 친원전 정책에 치중할 경우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안정적 에너지 수급체계와 기후변화를 막는 친환경 에너지 전환을 이루려면 균형이 절실하다. 에너지, 이성으로 접근할 때다. 김윤종 정책사회부 차장 zozo@donga.com}
국민연금 재정추계위원회가 8월 30일 첫 회의를 열었다. 5차 재정계산에 착수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국민연금법에 따라 5년마다 연금 기금 소진 시기를 전망하는 추계를 실시한다. 내년 3월 추계 결과가 나오면 개혁안이 마련된다. 이 안이 10월 국회를 통과하면 연금개혁이 이뤄진다. 연금개혁은 윤석열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다. 4차 재정추계(2018년)에서 국민연금은 고령화·저출산 탓에 2057년 기금이 바닥날 것으로 예측됐다. 2018년 0.98명이던 합계출산율은 올해 2분기 0.75명까지 떨어졌다. 절박하다. 하지만 ‘예언’부터 하겠다. 추계위는 ‘2055년 기금이 고갈된다’는 결과를 내년 3월 발표한다. ‘이번에는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회 전반에 확산된다. 분위기에 맞춰 국민연금 개혁안도 발표된다. 그러면 묘하게 분위기가 바뀐다. ‘개혁의 필요성’보다는 ‘개혁안의 문제점’을 다룬 보도가 쏟아진다. 개혁안에 각계 요구에 맞춘 예외 조항들이 덕지덕지 붙는다. ‘삶도 팍팍한데, 보험료까지 오르냐’는 여론까지 커지면 대통령은 “국민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고 천명한다. 그간 연금개혁은 SF영화 속 ‘타임루프(Time Loop)’에 빠진 주인공과 비슷했다. 특정 시간대에 갇혀 비슷한 일을 반복해 왔다는 의미다. 2018년 4차 추계 발표 후 연금 보험료를 현행 9%에서 11∼13%로 올리는 개편안이 마련됐다. 여론이 악화되자 문재인 전 대통령은 “국민연금의 주인은 국민”이라며 수습에 나섰다. 2013년 3차 추계 때도 보험료를 14% 올리는 안이 백지화됐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타임루프 원인을 찾아내 ‘무한반복 저주’에서 벗어난다.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주인공 톰 크루즈는 타임루프를 발생시키는 외계 생명체를 파괴했다. ‘시간의 반복’에 좌절하지 않는 주인공의 강한 의지가 사건 해결의 중요 변수가 된다. 기자가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연금 타임루프’를 깨려는 주인공이었다. 프랑스는 매년 연금 적자가 100억 유로(약 13조 원) 발생한다. 마크롱이 2019년 연금개혁을 추진하자 대중교통 종사자 총파업이 일어나 나라가 마비됐다. 마크롱은 올해 4월 대선을 앞두고, 공약으로 다시 연금개혁 카드를 꺼냈다. ‘남의 나라’ 대통령을 칭찬하려는 건 아니다. 최고 지도자의 의지가 강해도 연금개혁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보건복지부 내부에서는 이미 ‘이번 정권에서도 연금개혁은 어렵다’는 자조가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은 30% 언저리다. 대통령 공약과 달리 연금개혁은 대통령 직속기구가 아닌 국회 연금특위가 담당하게 됐다. 특위 활동은 내년 4월이면 끝난다. 답은 정해져 있다. 지금보다 더 내거나 덜 받는 게 유일한 해법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988년 3%, 1993년 6%, 1998년 9%로 오른 이래 24년째 그대로다. 어떤 개혁안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연금개혁을 꼭 이루겠다는 지도자 의지부터 선행돼야 한다. 지지율 하락을 겪을지라도 ‘역사가 평가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김윤종 정책사회부 차장 zozo@donga.com}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58·사진)가 7일(현지 시간) 집권 보수당 대표를 전격 사퇴했다. 존슨 총리는 이날 영국 런던 총리 관저 앞에서 “새 리더, 새 총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보수당의 의지”라며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에서는 제1당 대표에게 총리 직이 자동 승계된다. 그러나 “총리 직은 새 총리가 정해지는 10월 당 전당대회까지 유지하겠다”며 장관 인사를 단행해 논란이 예상된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위반한 ‘파티게이트’로 지난달 보수당 신임 투표를 간신히 통과한 존슨 총리는 크리스토퍼 핀처 의원을 보수당 원내부총무에 임명할 때 성(性)비위 전력을 몰랐다는 해명이 거짓말로 드러나 사퇴 압박을 받았다. 최소 50명의 장차관급 인사가 존슨 총리 사퇴를 촉구하며 사의를 밝혔다. 그가 허수아비 총리가 되면서 남은 브렉시트 과제 해결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 지원 대오에 균열이 가는 등 영국 리더십 공백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존슨 英총리, 與대표 전격 사임‘파티게이트’ 겨우 넘겼지만 성비위 인사 옹호 거짓말 들통최측근까지 나서 “사퇴하라” 압박… “10월까지 총리직 유지” 밝히자보수당내 “총리직도 내려놔야”… 노동당 “불신임 표결 요구할 것” “브렉시트를 이뤄냈고 팬데믹을 극복했습니다. 2019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1987년 이후 가장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7일(현지 시간) 낮 12시 반,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 선 보리스 존슨 총리(58)는 당 대표직 사퇴를 밝히면서도 치적 자랑을 잊지 않았다. 존슨 총리가 “‘세계 최고 직업’을 포기하는 것이 슬프지만 10월 전당대회까지 총리 직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지켜보던 시민들 사이에서 ‘우’ 하는 야유가 나왔다. 일간 더타임스는 “존슨의 오만함이 대가를 치렀다”고 평가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존슨 총리의 유통기한은 이미 지났다”며 “인플레이션 11%, 유럽이 전쟁에 휩싸인 이때 영국에는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이라고 전했다. 실권 없는 총리가 된 그의 퇴진은 신뢰가 특히 중요한 국가 정상이 수시로 말을 바꾼 자업자득이란 평가가 나온다. ○ 존슨 “군중심리로 나를 몰아내”올 2월 크리스토퍼 핀처 의원을 보수당 원내부총무로 임명할 때 그가 과거 성(性)비위를 저지른 사실을 몰랐다는 존슨 총리의 말이 허위로 드러나자 거센 비판에 휩싸였다. 보수당 의원들은 방역수칙 위반 논란 때와 마찬가지로 ‘거짓말로 일관한다’며 총리 사퇴를 압박했다. 존슨 총리는 6일 하원에서 사퇴를 요구하는 의원들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은 이상 끝까지 완수하겠다”고 버텼다. 이날 최측근 마이클 고브 주택장관까지 퇴진을 권고하자 “뱀 같은 사람”이라며 곧바로 해임했다. 그러나 리시 수낵 재무장관을 필두로 장차관급 각료 50명이 5, 6일 총리 사퇴를 촉구하며 줄줄이 사의를 밝히자 보수당 평의원 모임 ‘1922위원회’ 그레이엄 브레이디 위원장을 만나 사의를 표명했다. 브렉시트를 강행하며 2019년 7월 총리에 오른 지 3년 만에 불명예 퇴진한 단명 총리가 됐다. 잇단 거짓말과 스캔들로 보수당 내부에서조차 철저히 미운털이 박혔다. 그럼에도 존슨 총리는 7일 기자회견에서 “보수당 의원들이 비이성적인 군중심리(herd mentality)로 나를 몰아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명문 옥스퍼드대 출신임에도 어수룩한 외모, 쉽고 직설적인 언변으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특히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유럽연합(EU) 탈퇴 진영을 이끈 것은 큰 자산이 됐다. 브렉시트를 놓고 갈팡질팡하던 테리사 메이 전 총리가 당 대표를 사퇴하자 2019년 7월 당 경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당 대표에 올라 총리가 됐다. 같은 해 12월 총선에서 압승하고 이듬해 1월 브렉시트가 시행됐다. 그러나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실패, 지난해 코로나19 봉쇄 기간 총리관저에서 방역을 어기고 술잔치를 벌인 ‘파티게이트’ 폭로 등으로 코너에 몰렸다. 지난달 당 신임 투표에서 간신히 총리 직은 유지했지만 이어진 보궐선거에서는 보수당 후보가 전패하는 수모를 당했다.○ NYT “영국의 리더십 공백 우려”10월 당 전당대회까지 총리 직을 유지하겠다고 밝힌 그는 7일 잇단 사퇴로 공석이 된 장차관에 새 인사들을 속속 발표했다. 하지만 보수당에서는 “바로 사퇴해야 한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한 보수당 의원은 가디언에 “존슨의 행동은 너무 무모하고 변덕스럽다. 가을까지 나라를 이끌 수 없다”고 말했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존슨이 10월까지 총리 직을 유지하면 의회에 정부 불신임 표결을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만약 존슨 총리가 불신임 투표에서 지면 의회는 해산되고 총선이 실시된다. 존슨 총리 후임으로는 수낵 전 장관, 리즈 트러스 외교장관을 비롯해 우크라이나 전쟁 리더십을 인정받은 벤 월리스 국방장관 등이 거론된다. 장기화하는 우크라이나 전쟁, 경기 침체 위기와 인플레이션에 따른 복합위기로 유럽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영국의 전반적인 리더십 공백이 우려된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BBC는 경제 위기가 그의 퇴진을 부채질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소비자물가지수가 40년 만에 최대인 9% 이상 올랐는데 세금은 늘어 서민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또 지난달 총선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해 리더십이 흔들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더불어 서방의 우크라이나 전쟁 대응 전선에 비상이 생겼다는 지적도 나온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그는 우리를 좋아하지 않고 우리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반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보좌관 미하일로 포돌랴크는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준 점에 감사하다”고 밝혔다.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