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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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4-10-22~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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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번의 북송 견디고…北~南으로 이어온 요리인생 40년[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북 강원도를 떠나, 남 강원도에 뿌리내리기까지 10년이 걸렸다.강원도 원주 시내에서 금강산막국수 식당을 운영하는 이순복 대표는 1966년 북한의 최남단인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명승지 금강산 자락에 마을이 자리한 경치 좋은 곳이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마음대로 놀려 다니지 못했다. 한국 간첩들이 들어와 아이들을 잡아간다고 어려서부터 귀가 빠지도록 들은 선전 탓이다. 부모들도 어둠이 내리면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았다.출입문 위에는 커다란 나무 몽둥이에 뾰족한 대못을 잔뜩 박은 ‘고슴도치 방망이’가 늘 걸려있었다. 수상한 사람이 오면 내려치라고 당국이 의무적으로 걸게 한 것이다.이 씨가 8살 되던 때 부모들은 끝내 고성을 떠났다. 6남매를 늘 불안에 떨면서 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계공장 노동자였던 이 씨의 부친은 같은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로 이주했다. 고성에서 나서 자린 이 씨는 고산에 가서 어마어마하게 큰 차가 있고, 기차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이곳에서 그는 인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1983년 17세의 나이로 중학교를 졸업하자 국가가 임명한 직장은 보건부 산하 요양소였다.● 특권계층을 위한 요양소설봉리는 고려 말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인연을 맺은 석왕사가 위치한 경치 좋은 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곳 골짜기를 따라 사회 및 군부 요양소만 11개나 있었다.학교를 졸업하고 요양소에 배치되는 일은 큰 특혜였다. 이 씨의 동창 중에선 인물, 체격을 보고 3명만 선발됐다. 요양소는 여성에게 접대원과 요리사라는 두 개의 선택지를 주고 고르게 했다. 그는 요리사를 선택했고, 함북 김책에 있는 6개월 과정의 요리학원에 보내졌다.그가 근무한 요양소는 중앙당 고위 간부들이 가족과 함께 놀려오는 특별과와 회사에서 일을 잘한 일반 근로자들이 포상 형식으로 선발돼 오는 일반과로 나뉘어 있었다. 입소자들은 한 달 동안 요양소에서 쉴 수 있는데, 특별과와 일반과의 인원 비중은 8 대 2 정도였다.특별과와 일반과는 숙소와 식당부터 달랐다. 특별과는 매일 고기와 생선 등 12가지 반찬이 제공됐다. 반면 일반과는 반찬이 염장무, 염장양배추, 염장오이 등 ‘염장 삼형제’ 뿐이었다. 항상 말로는 평등한 사회주의를 외쳤지만 어디서든 평등은 없었다.특별과와 일반과 사람들이 평등하게 먹는 것은 위장병 치료에 특효가 있다는 약수뿐이었다. 요양을 하는 시늉을 내느라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입소자들에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체크까지 하면서 약수를 마시게 했다.이 씨는 이곳에서 7년을 일하다가 23살 때인 1989년에 군인 병원 화식장(주방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양소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어머니가 입당을 하려면 군 계통에서 일해야 한다며 등을 떠밀어 선택한 것이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새로 일하게 된 곳은 군단급인 806훈련소 64호 병원이었다. 병원엔 영양실조 환자가 많이 왔다. 이 씨는 그곳에서 1998년까지 9년 동안 근무했다.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시기엔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이 끊임없이 이송돼 왔다.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식사는 단백질 보충을 위해 콩기름을 한 숟가락씩 부은 밥에다 조리한 두부 정도였다.영양실조뿐만 아니라 사고를 당한 군인도 많이 왔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엔 인근에서 금강산발전소 갱도 작업이 진행됐다. 열악한 환경이라 사고가 한번 터지면 많이 다쳤다. 한꺼번에 사고를 당한 40~50명이 실려 왔던 날도 있었다.화식장은 밑에 6명의 조리사를 통솔하는 위치였다. 군 병원에서 일하면 노동당에 입당시켜 준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가 직장을 바꿀 때 뒤를 봐주겠다던 정치부장은 물러나면서 뒷배도 사라졌다. 그 때 이 씨는 병원 노무자로 일하면서 입당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란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수십 년을 일했어도 노동당원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허다했다.견딜 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당시 그는 17세 때 요리학원에서 만났던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각자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왔다. 그런데 노동당원인 어머니는 죽어도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상대 남성이 귀국자 출신이어서 결혼하는 순간 출신성분이 하락한다는 게 이유였다.결혼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됐고, 그러는 사이 이 씨는 나이만 계속 먹었다. 어느덧 북한에선 결혼을 하기 힘들다는 나이인 33세가 되자 그는 폭발했다. 어느 날 병원에 나가지 않고 집을 뛰쳐나가 함북 청진에 있는 언니에 집으로 도망을 갔다. 그때가 1998년이었다.하지만 언니 집이라도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외지에서 젊은 여성이 왔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자 집에 이 핑계, 저 핑계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슬슬 생겨났다.“요즘 젊은 여자들은 다 중국에 시집가. 거기 가면 풍족하게 살 수 있어”라고 바람을 넣는 할머니도 있었고, “결심만 내리면 바로 중국에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하는 젊은 여성도 있었다. 젊은 여성을 중국에 팔면 돈이 생기는 시절이라 집을 나온 이 씨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사람들이었다.이 씨가 도망쳐 온 이유를 묻기 위해 언니가 강원도로 부모를 찾아갔다. 속이 상한 부모들은 “그 애는 내놓은 자식이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로 언니를 되돌려보냈다.이 씨는 반발심이 생겼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니네 집에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더 이상 발을 붙일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중국행을 결심했다. 중국에 사촌오빠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짜 공안에 속아 끌려가1998년 10월 이 씨는 두 여성과 함께 두만강을 넘었다. 그들을 인솔해 간 브로커가 경비대를 매수했기에 대낮에 강을 어렵지 않게 건넜다.강을 건너자마자 중국 사람이 마중 나와 그들을 싣고 화룡으로 들어갔다. 중국에서 잡히지 않고 살려면 중국 남성을 만나 같이 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도 이런 일을 이미 각오하고 온 터였다. 이 씨의 짝은 연길 인근 조양촌이란 곳에 사는 남자로 정해졌다. 이 씨보다 한 살 어린 농부였다. 가난한 형편에도 결혼하겠다고 3000위안이라는 큰 돈을 내고 그를 데려갔다.그럭저럭 중국에 잘 정착하나 싶었지만 반년쯤 지나 위기가 찾아왔다. 어느날 저녁 갑자기 집 앞에 차 두 대가 나타나더니 사내 여섯이 내렸다. 이중 세 명은 공안 복장을 하고 있었다.이들은 집에 들이닥쳐 이 씨의 남편에게 족쇄를 채우고, 이 씨는 차에 태웠다. 남편에겐 벌금 수천 위안을 들고 오면 이 씨를 석방하겠다고 했다.이들이 떠난 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남편은 마을에 있던 중국 공안에 신고했다. 마침 주변에 있던 공안차가 즉각 두 대를 추격해 이 씨가 탔던 차를 막아섰다. 사내들은 이 씨를 팔았던 브로커 일당이었다. 북한 여성을 팔아 돈을 챙기고 몇 달 뒤 공안원을 가장해 여자를 데리고 가서 다시 팔아치우려 했던 것이다. 중국 공안에 체포된 사내 일당은 6년 형을 받고 감옥으로 보내졌다.중국 공안들은 이 씨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3일 뒤 중국 공안들은 차를 끌고 다시 나타나 그를 체포한 뒤 북송 조치를 내렸다. ● 반 년 만에 끌려간 북한1999년 6월 그는 다시 북한으로 끌려갔다. 북송된 탈북민이 거치는 보위부 조사, 단련대, 청진 농포집결소 생활이 이어졌다. 집결소에 들어가니 처음 청진에 왔을 때 봤던 일이 떠올랐다. 시장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40~50명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언니는 이들이 중국에 갔다 잡혀 북송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당시 이 씨는 그들에게 배신자라며 욕을 했다. 1년 뒤 자신이 똑같은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농포집결소에서 약 보름 정도 있었을 때 강원도 고산안전부에서 이들을 이송하기 위해 안전원이 나타났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보고 운이 좋다고 했다.어떤 사람은 고향에서 인계인수를 받으려 안전원이 오지 않아 집결소에서 몇 달씩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냥 수감돼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혹독한 강제노동을 시키기 때문에 몇 달만 지나면 영양실조 환자가 된다.고산까지 끌려간 이 씨는 안전부 유치장에 구금됐다. 북송된 사람들은 거주지까지 호송돼 거기서 재판을 받은 뒤 교화소에 갈지 단련대로 갈지가 결정된다.행운이 찾아왔다. 마침 고산안전부가 건물 공사를 하고 있어 임시 유치장을 사용했는데, 살창 간격이 넓었다. 몇 달 동안 조사를 받으며 뼈밖에 남지 않은 이 씨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너비였다. 함께 수감됐던 여성 두 명과 함께 그는 도망쳤다.유치장을 탈출한 이 씨는 집에 들리지도 않고 다시 함경도로 향했다. 이번엔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한밤 중에 무작정 두만강에 들어섰는데 생각보다 물이 깊어 키를 넘었다. 놀라서 다시 기슭으로 돌아오다 국경경비대에 걸린 것이다.보위부 조사-단련대-농포집결소-고산안전부으로 이어지는 이송 과정이 다시 반복됐다. 고산까지 갔는데 배가 많이 불러왔다. 처음 체포돼 북송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몰랐다. 가혹한 환경이지만 배 속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고산안전부에선 만삭에 가까운 그를 차마 잡아둘 수 없었던지 집에 가서 아이를 낳고 오라고 내보냈다.가석방되자마자 그는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이번엔 브로커를 끼고 무사히 강을 넘었다. 그때가 1999년 11월 말이었다.● 네 번째 북송을 피해 한국행이때부터 이 씨는 밤에 잘 때마다 문을 걸어 잠갔다. 밤에 공안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한 조치였다. 오전에 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넘기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것만이 당시로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제활동이었다.2000년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아들이 돌도 되기 전인 이듬해 봄 그는 또다시 체포됐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이라 공안이 오지 않을 것으로 방심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는데, 그날 공안이 들이닥쳤다. 세 번째 북송이었다. 이번엔 북송될 때 돈을 몸 속 여기저기 감추고 끌려갔다. 보위부 조사-단련대-농포집결소까지 다시 같은 코스를 밟아 이송이 진행됐다. 하지만 돈을 가져간 덕분에 고산안전부까진 끌려가지 않았다. 숨겨둔 돈을 호송 안전원에게 건네자 그는 도망을 가라고 눈치까지 주었다.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이름 모를 역에 내려 그는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중국에 돌아오니 촌 정부에서 아이까지 낳고 정착해 사는 여성을 세 번이나 북송한 것은 지나친 처사라며 앞으론 공안이 잡아가지 못하게 막아주겠다고 했다. 그는 이후 중국돈 500위안을 촌 정부에 바치고 보호를 받았다.하지만 그런 생활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2007년 다시 연길에 탈북자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었다. 그 와중에 체포된 탈북민 중에 이 씨를 잘 아는 여인이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이 씨가 한국으로 가는 탈북민 10여 명을 지원해준 사실을 털어놨다.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이 씨에게 귀빨리 도망가라고 했다.중국에 사는 동안 이 씨는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익혔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도 있었다. 다만 아이가 아파 움직일 수가 없어 참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 정성스런 간호를 받은 아이는 건강이 좋아졌다.네 번째 북송을 당할 수는 없었다. 남편에게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남편도 사정을 이해한다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이에겐 병원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나중에 들으니 그가 떠난 지 일주일 뒤에 공안이 집에 들이닥쳤다고 했다.그가 향한 곳은 몽골이었다. 일행은 모두 9명이었다. 엄청 높은 국경 철조망을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넘어서 한참을 갔다. 그러다 다시 철조망이 만나게 돼 살펴보니 그들이 넘었던 동일한 철조망이었다. 사막에선 자칫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11시간을 사막에서 헤매던 끝에 일행은 마침내 몽골 군인들에게 발견됐다.군인들을 이들을 땅굴에 가뒀다. 이곳에서 노린내 나는 양고기만 먹으며 보름을 버틴 끝에 마침내 울란바토르로 옮겨졌다.● 5년 만에 달성한 개업의 꿈이 씨는 2007년 8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당시는 조사 기간도 길지 않아 2007년 11월 하나원을 퇴소해 사회에 나올 수 있었다. 사회에 나올 때 그는 정착지를 강원도로 정했다. 북에서 살던 곳이니 왠지 정감이 갔다. 강원도 원주에 임대주택을 받았다. 고성에 가서 살고 싶었지만, 막상 가보니 원주가 살기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는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 5년 안에 자신의 식당을 차리겠다고 결심했다. 북한에서 요리사로 16년을 살다보니 식당을 열면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식당을 열 돈이 없으니 우선은 일하며 돈도 벌고 한국의 요식업계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정착 열흘 뒤부터 그는 식당에 취직해 열심히 일했다. 어떤 음식점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정한 것이 강원도를 대표하는 음식인 막국수였다. 그때부터 그는 막국수 식당들만 찾아다니며 취직해 열심히 일했다. 일하다보니 “탈북민에겐 월급을 적게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장도 만나게 됐고, 퇴직금을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사장도 있었지만, 목표가 있으니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5년 동안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마침내 8000만 원이 모였다. 그 돈을 밑천으로 삼아 2013년 1월 원주 시내에 ‘금강산막국수’라는 상호를 내건 식당을 열 수 있었다. 5년 안에 내 식당을 열겠다는 목표를 이룬 것이다. 돈이 없다보니 주차장도 없는 가게를 얻게 됐고, 인맥도 없어 한계가 명백했지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시작한 식당은 어느새 11년째를 맞았다. 두 달 뒤면 개업 12년째를 맞게 됐다.그 오랜 기간 금강산막국수는 하루도 문을 닫은 날이 없었다. 하루 휴식도 아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중국에서 축구선수로 성장했던 아들도 가끔 한국에 와 어머니의 식당일을 거들어준다.강원도의 많은 막국수집들은 겨울에 손님이 없어 문을 닫는 곳도 많다. 이 씨는 백숙과 닭볶음탕, 북한식 어복쟁반, 두부전골 등으로 메뉴를 다양하게 만들어 막국수 비수기에 대비했다. 이제는 막국수보단 다른 메뉴가 훨씬 더 많이 팔린다. 치열한 노력으로 그는 신규 식당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치열한 요식업의 세계에서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았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 그는 강원도 대표 식당으로 선수촌에 자원해 들어갔다가 한달 보름 만에 엄청난 적자를 보게 됐다. 그 적자를 다 갚게 돼 숨을 좀 돌리러나 했는데 이번엔 코로나가 터졌다. 그렇지만 코로나 기간에 적자를 보진 않았고, 자영업자들에게 지급되는 지원금도 받지 않았다. 7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면서 단골손님을 많이 만들어놓은 덕분이었다.● “금강산에 식당을 열겁니다.”식당이 자리 잡고 나자 이 씨는 지역사회 봉사에도 눈을 돌렸다. 지금까지 7년 동안 사회복지관이나 경로당에 매년 TV와 냉장고와 같은 전자제품을 기증하고, 해마다 한 번씩 노인들을 대상으로 잔치도 연다.“북한에 살 때 요양원에서 일한 추억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복지관을 찾아가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봉사하면서 알게 된 인연들이 한국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저에겐 큰 힘이 됩니다.”이 씨의 봉사의 범위는 점차 넓어져 복지관과 경로당뿐만 아니라 고아원과 국가유공자들에게도 무료 음식을 수시로 제공하고 있다.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봉사다.“능력이 되면 인근 시골에 별장을 하나 사고 싶습니다. 이곳을 탈북민들이 힘들면 와서 쉴 수 있는 쉼터처럼 꾸려놓을 겁니다. 북에선 온 사람들은 명절에 얼마나 외롭습니까. 이럴 때 함께 모여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정말 좋지요.”이 씨는 북한에서 32년을 살았고, 중국에서 10년을 살았으며, 한국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생의 최종 목표는 다시 고향에 식당을 여는 것이다.“열여덟에 요리사가 돼 벌써 40년째 요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북한 음식도 만들어보고, 중국 음식도 해보고, 한국 음식도 다 해봤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요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힘이 남아있을 때 통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통일이 되면 금강산막국수 식당을 진짜로 제 고향 금강산 자락으로 옮겨가고 싶습니다. 금강산막국수는 금강산에 있어야죠. 그곳은 한국의 요리를 북한 사람들에게 알리는 식당이 될 것이고, 남북의 요리를 하나로 통합하는 식당이 될 것입니다.”꿈을 말할 때 이 씨의 얼굴은 활짝 피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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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맥도날드 매장 매니저, 대만에서 ‘워킹홀리데이’

    지난달 한국맥도날드에서 선발한 직원 네 명이 대만 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김정은 부천역곡DT점 매니저, 김하영 수원인계DT점 매니저, 김용희 고양덕이DT점 매니저, 유우철 충남당진DT점 점장으로 모두 각 매장의 운영과 관리를 맡고 있다. 이들이 대만에 간 이유는 한국맥도날드의 직원 프로그램 ‘워킹홀리데이’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맥도널드의 워킹홀리데이는 전국 각지에서 근무하는 매장 직원들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근무할 기회를 제공하고 일과 여가를 한번에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내부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매니저들은 약 8주간 타이베이 도심에 위치한 맥도널드 매장에서 근무한다. 이 과정을 통해 외식업계 내 전문성과 리더십 역량을 강화하고, 대만 맥도널드만의 특장점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게 된다. 이런 프로그램이 가능한 이유는 맥도널드가 전 세계 어느 시장에서나 동일한 글로벌 시스템을 기반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전 세계 맥도널드 구성원들은 언어와 문화를 넘어 브랜드 내에서 함께 공유하는 시스템과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는 ‘빅맥’ ‘맥너겟’ 등이 전 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한 맛을 내는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맥도널드는 ‘버거를 만드는 회사’가 아닌 ‘버거를 만드는 사람들의 회사’라는 경영 철학 아래 직원들을 최우선시하는 기업 문화를 추구한다. 워킹홀리데이는 이런 철학을 보여주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워킹홀리데이는 지난해 제주 지역에서 시작돼 올해 초에는 강원 강릉시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참가자들의 만족도도 높다. 제주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참가자 11명 중 다수가 각자의 매장으로 돌아간 후 ‘팀 리더’나 매니저로 성장했다. 지난 프로그램들과 마찬가지로, 12월 대만 워킹홀리데이 종료 이후 관련 영상은 한국맥도날드 공식 소셜미디어 채널들을 통해 공개된다. 현재 프로그램에 참가 중인 매니저들의 생생한 근무 일지와 여가 생활 등이 브이로그 형식으로 담길 예정이다. 한국맥도날드 관계자는 “대만 지역에서 진행되는 이번 워킹홀리데이는 전 세계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글로벌 시스템과 기업 핵심 가치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가장 ‘맥도널드다운’ 직원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직원의 발전이 맥도널드의 발전이라는 믿음 아래 국내 구성원들이 외식 업계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고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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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한반도 최악의 시나리오

    또다시 트럼프 시대에 4년을 살게 됐다. 예측하기 어려운 바람이 어디로, 어떤 강도로 불지 알 수 없게 됐다. 배는 예상치 않은 높은 파도가 옆구리를 칠 때 뒤집힌다. 당장 동북아에 불어닥칠 예상 가능한 폭풍은 관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중국 제품에 대한 관세를 60%, 자동차 등 일부 제품은 200%까지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이 경우 중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2.5%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고 스위스계 투자은행 UBS는 전망했다. 미국의 대중 무역 고율 관세가 본격화된 2018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1990년 이후 가장 낮은 6.6%를 기록했다.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 현재 5%대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중국이 또다시 트럼프의 강펀치를 맞게 된 것이다. 경제 성장이 멈추면 중국 내부의 불만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불만의 강도에 따라 시진핑(習近平)의 장기집권 계획은 물론이고 공산당 일당독재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집권 위기에 빠진 독재자는 늘 전쟁의 유혹을 받는다. 중국이 대만과 전쟁을 벌인다면 미국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미국이 직접 참전하면 막대한 인명 피해와 비용을 치러야 한다. 지난해 미국의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미국이 승리해도 중국보다 더 긴 고통을 겪으며 승리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가 파병까지 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대만 전쟁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중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을 때 미국이 쓸 비장의 카드가 하나 있다. 우크라이나 지원도 포기하겠다는 트럼프가 미국의 손해를 막기 위해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카드다. 바로 북한 체제의 붕괴다. 북한은 중국의 옆구리에 붙어있는 폭탄이라 할 수 있다. 이 폭탄의 뇌관은 김정은이다. 미국은 마음만 먹으면 뇌관을 터뜨릴 충분한 능력을 갖췄다. 문제는 이 폭탄이 터지면 중국과 한국은 그 파편을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에 있어 대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북지역의 안정이다. 대다수 중국 왕조의 멸망은 동북지역의 혼란에서부터 시작됐다. 혼란 이후 힘을 키운 세력이 산하이관(山海關)을 지나 중원의 한족 왕조를 정복하고, 이후 시간을 두고 한족에게 동화되는 역사가 반복됐다. 북한이 붕괴되면 수백만 명의 난민이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들은 세계에서 전투력이 가장 강한 난민일 가능성이 높다. 남성은 10년 동안, 여성의 절반도 6년 이상 군사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장 난민 무리가 동북지역으로 끊임없이 몰려온다면 중국으로서는 비수가 옆구리에 꽂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대만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 어쩌면 경제위기 속 중국은 공산당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중국에는 대재앙이다. 트럼프로서는 ‘닌자 미사일’ 한 발로 미국의 패권을 넘보는 중국을 주저앉히고, 대만과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여기에 미국을 협박하는 핵미사일을 만드는 데 골몰하는 위험한 독재자 제거라는 덤도 생긴다. 한국도 파편을 피할 수 없다. 한반도 정세가 불안해지면 해외 자본이 일거에 빠져나갈 수 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엔 경제 체질 개선을 통해 단기간에 해외 자본이 돌아왔다. 하지만 북한 붕괴로 인한 혼란은 언제 수습될지 알기 어렵다. 선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뒷걸음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후폭풍 때문에 김정은 제거는 미국이 그동안 감히 생각하지 않았던 시나리오다. 하지만 앞으로 의회 권력까지 틀어쥐게 된 트럼프라면? 그의 머릿속에 한국은 잘살면서도 방위비 분담금도 제대로 내지 않는 ‘기생충 동맹국’으로 인식돼 있다면? 트럼프가 우리를 자국을 지키고 중국을 수렁에 빠뜨리며 세계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대의의 희생양’으로 삼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시나리오는 최악의 최악을 가정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나서지 않더라도,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김정은이 급사해도 최악의 조건은 형성된다. 특정 조건이 만났을 때 생기는 ‘공진(共振)’은 위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제방이나 교량 하나 지을 때도 최악의 천재지변을 가정해 설계한다. 하물며 국가 존립을 위한 대비는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람이 없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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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문화가정 위한 쉼터 개장… 상호문화 이해 기여

    청소년그루터기재단이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다문화 가정을 위한 지원 공간 ‘그루터기다문화센터’(사진)를 이달 초 개관했다. 그루터기센터는 다문화 가정이 안정적으로 국내에 정착하고 지역 사회와 소통하며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기여할 예정이다. 그루터기센터는 약 330㎡(약 100평) 규모로 강의실, 어린이도서관, 소규모 스터디룸과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볼풀장을 갖췄으며 아동의 신체와 정서적 균형 발달을 위한 클라이밍 공간도 마련했다. 이 센터에서는 다문화 가정 구성원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언어와 진로 교육, 문화 예술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주민과 그 가족이 한국어를 배우고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초급부터 고급 과정 수업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과 회화 중심 교육으로 자신감을 갖고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음악, 무용,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문화권 사람들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다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편견과 차별을 줄이기 위해 내국인 대상 다양한 인식 개선 프로그램을 진행해 이해를 증진하고 사회적 통합 강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청소년그루터기재단 관계자는 “그루터기센터는 물리적 공간을 제공하는 의미를 넘어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지는 지역 사회 커뮤니티 중심이 될 것”이라며 “아동청소년기에 중요한 자아 정체성 확립과 창의력 강화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하나금융그룹 공익재단으로 2021년 출범한 청소년그루터기재단은 한국 사회에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근로자처럼 문화적 배경이 다양한 인구가 급증하는 점에 주목했다. 통계청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2022년 다문화 가구는 39만9000여 가구, 115만1000여 명이다. 특히 한국 청소년 인구 감소세가 뚜렷해진 반면 다문화 학생은 급증하고 있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다문화 학생은 18만1178명으로, 전체 학생 521만8000명의 3.5%가량이다. 다문화 학생은 2013년 5만5780명에서 10년 만에 3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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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탈북민 인재들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

    해외 북한 정보기술(IT) 전사들의 ‘외화벌이 투쟁’은 참으로 처절하다. 올해 5월 미국 국무부는 북한 IT 노동자들이 300여 개 미국 회사에 위장 취업해 680만 달러(약 92억 원) 이상을 벌었다며 이런 사례를 신고하면 최대 500만 달러(약 67억 원)의 현상금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북한 인력이 미국 회사에 취직하려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반적인 방법은 우선 중국인으로 신분을 위조한 뒤 다시 명의를 빌려주고, 돈을 받을 미국인이나 유럽인을 찾아야 한다. 입금 받을 계좌도 함께 빌려야 하는데, ‘먹튀’ 당할 가능성을 감내해야 한다. 미국 감시망에 걸려 계좌 자체가 압류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를 모두 이겨내고 위장 신분 여러 개를 얻어 2중, 3중으로 취업에 성공했을 때 비로소 자기 몫을 해내는 외화벌이 전사로 북한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IT 활동을 했던 한 탈북민은 “전체 작업시간에서 적으면 40%, 많으면 80%를 위장 신분 취득에 쓴다”고 증언했다. 가뜩이나 헐값으로 일감을 수주해 신분 위조 협조자에게 떼어주고, 가끔 계정이 ‘폭파’돼 잃고 하다 보면 실제 손에 쥐는 돈은 많지 않다. 그래도 이들에겐 방법이 없다. 이렇게 몇 년을 일하다 보면 이들은 온라인 신분 세탁 전문가가 된다. 신분 세탁까지 하다 보면 북한 IT 전사들의 작업시간은 세계 최장이다. 중국의 비좁은 아파트에 여러 명이 팀을 이뤄 모여 살며 외출도 거의 못 한다. 사실상 감옥 생활을 하며 주말이나 한밤중에도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응대한다. 중국 내 북한 IT 인력 규모는 약 2000명, 북한 내부에서 인터넷에 접속해 작업하는 인원은 약 1000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이 월평균 3000달러씩 상납한다고 가정하면 1년에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셈이다. 사상 최강의 대북 제재하에서 돈줄이 마른 김정은에게 이들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들이다. 김정은의 불법 외화 획득을 막으려면 이런 활동을 막아야 한다. 북한 IT 전사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네트워크에서 일을 해봤던 경험자들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북한의 불법 IT 활동에 대응하겠다고 말로만 요란할 뿐, 정작 탈북해 온 몇 안 되는 전직 북한 IT 인력은 활용하지 않고 있다.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던 전직 북한 IT 간부도 현재 한국에서 중소기업 보안팀에서 일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정은의 외화벌이나 자금 세탁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 전직 39호실 고위 간부가 서울에서 노래방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가 우대하는 탈북민은 주로 외교관이다. 이들은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취직해 월급을 받으며 북한 분석 보고서를 작성한다. 물론 외교관은 소중한 자원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의 사례에서 보듯이 보고서로 북한을 바꿀 수는 없다. 김정은이 가장 아파할 해외 불법 자금 네트워크에 타격을 주려면 이 분야에 종사했던 탈북민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탈북민 인재 활용에 있어선 전임 정부와 별다를 바가 없다. 남북 관계 단절로 통일부가 예산을 쓸 곳도 확 줄었는데, 산하에 탈북한 인재들을 활용한 연구소를 만들면 어떨까. 불법 IT 감시팀, 불법 자금 감시팀 등이 운영되면 김정은 정권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공세적 대북 전략에 해당한다. 탈북민 활용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기자회견’의 부활이다. 과거 탈북한 사람들이 귀순용사로 불리던 시절에는 기자회견이 많았다. 그러나 탈북민 입국자가 연간 수백 명이 넘자 기자회견은 조용히 사라졌다. 국경 봉쇄가 삼엄해지면서 북한에서 곧바로 탈북해 온 사람의 수는 귀순용사 시절로 회귀했다. 그래서 지금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제대로 알기 어렵게 됐다. 북한에서 얼마 전까지 살다 온 사람의 증언은 국민들에게 북한의 현실을 생생하게 알려준다. 물론 원치 않는데 회견을 강요할 순 없다. 그러나 조사단계에서 원하는 사람은 회견을 할 수 있게 옵션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탈북민 정착 지원은 정권마다 되풀이된 레퍼토리다. 북한의 대남 위협이 고조되는 지금 윤석열 정부는 정착을 넘어 탈북민의 공세적 활용을 진지하게 고민하길 바란다. ‘이이제이(以夷制夷)’의 효과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증명돼 왔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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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국군 북진이 만든 창성의 변화

    1950년 10월 1일 국군 3사단 23연대 3대대가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했다. 김일성은 겁에 질렸다. 그는 국군이 북진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자 3일에 두 자녀 김정일과 김경희를 포함한 가족들을 중국으로 피란시켰다. 국군과 유엔군이 군단별로 38도선을 모두 넘어선 11일 저녁 김일성은 라디오로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몇 시간 뒤인 12일 새벽 그는 스탈린이 선물한 고급 리무진을 타고 비밀리에 도주하기 시작했다. 평양이 함락되기 일주일 먼저 도망을 친 것이다. 북한 라디오에선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지역을 사수하라는 김일성의 연설이 반복적으로 방송됐다. 김일성은 도주 중이던 16일에 또 ‘각 군단, 사단들에선 독전대를 즉각 조직해 도주하는 자들을 즉결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하달했다. 북한이 정한 제2의 수도는 강계였다. 김일성은 이곳에 주요 정부 기관을 보내곤 자기는 폭격을 당하기 싫어서인지 딴 곳으로 도주했다. 청천강에서 막히자 차를 버리고 평안남도 덕천을 경유해 평안북도 동창으로 산을 타고 이동했다. 마침내 25일 압록강변 창성에 도착해 11월 3일까지 머물렀다. 김일성은 창성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높은 산들이 막아 중국 영공으로 돌아오지 않고선 폭격도 불가능했고, 중국으로 도망칠 조건도 완벽했다. 바로 옆에 있는 수풍호는 겨울엔 차가 다닐 정도로 꽁꽁 얼고, 여름 홍수 때에도 배를 띄울 수 있다. 인근엔 중국과 연결된 수풍댐도 있다. 전후 창성엔 창성초대소로 불리는 김일성 별장이 건설됐다. 이 초대소는 오늘날까지 김 씨 일가가 사용하는 별장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김정은의 고향으로 알려진 원산초대소는 974부대(친위대) 8개 중대 2500명이 경호하지만, 창성은 3000명이 지킨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9년 동안 창성초대소 경비를 섰던 974부대 출신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전쟁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김정일은 가족과 미녀들을 데리고 창성에 가 은신했다. 이는 김일성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도주로도 완벽히 구축했다. 평양∼향산 고속도로를 타고 오다가 향산에 도착하기 직전에 꺾어 창성까지 몇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북한에서 최상급인 이 고속도로는 6·25전쟁 시기 김일성의 도주 경로와 동일하다. 특히 1980년대 건설된 향산과 창성을 연결하는 약 150km 길이의 ‘1호 도로’는 폭이 9m나 되는데, 김 씨 일가만 사용할 수 있다. 일반인이 도로에 올라서면 경비를 서는 974부대에 즉시 체포돼 처벌된다. 도로 양옆에 높은 잎갈나무를 심어 정찰기에 차가 보이지 않게 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창성초대소 바로 옆에 비행장도 번듯하게 건설됐다. 평시나 유사시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는 옵션을 추가한 것이다. 김일성은 전쟁 위기 때마다 창성에 도망가는 것이 부끄러웠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무료했던지, 1962년 8월에 갑자기 “궁벽한 산골로 버림받던 창성 땅을 전국의 본보기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북한에서 지방 공업 발전의 강령적 지침이라고 반세기 넘게 떠받들고 있는 이른바 ‘창성연석회의 결정’이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창성을 현지지도한 횟수가 각각 108회, 60회라고 밝혔다. 북한에서 김 씨 일가가 이렇게 많이 공식 방문한 지역도 없다. 그럼에도 지방의 본보기로 삼겠다던 창성에서 고난의 행군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북한 매체들도 차마 창성이 본보기라고 하진 않는다. 김정은 시대엔 전국의 본보기가 삼지연으로 바뀌었는데, 그가 창성보단 스키를 타려 백두산에 더 많이 놀러 다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달 9일 김정은은 연설을 통해 “지방의 낙후성을 털어버리기 위한 사업이 근 80년에 달하는 기간 해내지 못했던 사업”이라고 자인했다. 그러면서 “10년 안에 지방의 특수성을 반영한 공장 200개를 건설해 지방의 인민 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고 했다. 62년 전 김일성도 창성에서 “지방 특성에 맞는 공장들을 대거 건설해 인민 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이고 비단옷을 입히겠다”고 좀 더 구체적인 공언을 했는데, 김정은이 말한 ‘획기적으로’의 의미는 알 수가 없다. 발전 없이 퇴보만 하다 보니 속이는 방법까지 퇴보하는 듯하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 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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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대 후반 주부가 자녀 앞길 터주겠다며 탈북…길림성 부주석의 조카 허정희씨[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자식의 미래를 위해 탈북을 선택한 뒤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온 사례는 넘치고 넘친다. 하지만 현재 부산에 정착해 살고 있는 허정희 씨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다른 탈북민과 마찬가지로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탈북을 감행했지만, 그 자식들이 한국이 아닌 북한에서 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머니가 한국을 찾았다. 또 대부분의 탈북민들이 이용한 탈북 루트인 두만강을 넘었지만, 북한 당국이 발행한 합법적인 여행증을 가지고 중국으로 넘어왔다.그가 운명적인 선택을 하게 된 데에는 북한 출신성분 문건에 기록된 ‘일본군 패장(분대장)’이라는 다섯 글자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그는 북에서 일본군의 딸, 악질 친일파의 자식이었다. 그의 아들과 딸은 친일파의 손주라는 이유로 노동당원이 될 수 없었고, 출세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들의 앞길을 막는 단단한 걸림돌이었다.“내가 빠져주어야 너희들이 잘 살 수 있겠구나.”50세의 여성이 한국에 와서 정착하는 일은 무척 고되고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시련을 다 이겨냈다. 이젠 성공적인 정착의 훌륭한 본보기로 인정까지 받는다. 다만 자식들의 앞날을 생각해 자신의 노출을 피하며 15년을 살았다. 그런데 최근에 드는 생각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너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언론을 통해 북한 당국에 따져 묻고 싶었다. “내가 왜 일본군 분대장의 딸이냐. 왜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지 않고, 한 인간의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리냐?”● 뒤바뀐 주민등록기록 허 씨는 자신이 일본군 패장의 딸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47세 때인 2012년에야 알았다. 당시 군대에 나간 아들이 보내온 편지를 통해서다.“제가 왜 노동당 입당이 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여러 방법을 써서 원인을 찾아봤는데, 주민등록문건에 외할아버지가 일본군으로 기록돼 있어요. 이제 저의 미래는 암울하게 된 거죠. 어머니, 이제 우리는 장사꾼이나 됩시다.”눈앞이 캄캄했다. 북한에선 자신의 주민등록기록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그로서는 그런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 길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출신성분이 매우 좋게 평가받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북한 체제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1928년 중국에서 태어난 부친은 국공내전에 팔로군으로 참가해 패장으로 활약했다. 이 과정에 부상을 입어 중국에서 영예군인으로 등록이 됐다. 이후 6.25전쟁을 앞두고 소속 부대가 북한군에 편입되면서 부친도 북한에 넘어왔다. 6.25전쟁 때 부친은 국군의 적군으로 종전 때까지 싸웠다. 그 과정에 부상도 많이 당했다. 부친이 독립대대 대대장을 역임하고 1956년 제대할 당시 몸에 박힌 파편만 38개나 됐다. 북한은 부친을 함경북도 도당 군사부 작전과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부친은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명천탄광 갱장, 유선탄광 간부부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중국에서 태어난 여성과 결혼해 아들 세 명과 딸 두 명도 낳았다. 둘째이자 맏딸이 1965년에 태어난 허 씨였다. 북한은 1968년에 주민등록기록을 만들고 출신성분 제도를 도입했다. 허 씨 부친을 일본군 패장으로 기록한 것은 누군가 악감정을 가지고 고의로 한 일이 분명했다.“저의 부친은 해방될 때 17세에 불과했어요. 17세가 일본군 패장이란 것은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북한에선 주민등록문건을 함부로 바꿀 수 없고, 또 중앙까지 절차를 거쳐 수정을 하려면 10년 이상 걸립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도륙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길림성 부주석의 조카그럼에도 허 씨는 주민등록문건을 바로 잡기로 결심했다. 기록을 수정하려면 중국으로 건너가 아버지와 함께 국공내전에 참가한 전우들을 찾아 증언을 받아오는 것이 우선이었다.2013년 5월 허 씨는 통행증을 발급받아 중국으로 넘어왔다. 여권을 받아 공식적으로 중국으로 가려면 한 달 동안 사상 교육을 받아야 한다. 또 귀국해서 다시 한 달 동안 같은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후에도 동네에서 포섭된 보위부 밀정이 붙어 중국에서 잘못한 일은 없는지 유도 심문을 받는 과정도 통과해야 한다.허 씨는 1992년부터 시작해 약 3년에 한 번씩 여행증을 받아 중국을 방문했다. 비록 그의 주민등록기록은 일본군 출신의 딸로 기록돼 있었지만, 이를 상쇄할 정도로 외가쪽 출신성분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허 씨의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해 항일투쟁을 했다. 북한군 초대 총참모장이던 강건이 외할아버지의 전우였다. 외할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강건의 요청으로 북한군의 일원이 됐다. 이후 6.25전쟁 때 부상을 당한 후 별다른 출세 코스를 밟지 못한 채 고향인 회령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냈다.어머니의 한 살 아래 동생이자 허 씨의 외삼촌인 정룡철은 1990년대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을 지냈고, 1998년부터 2003년 사이에 길림성 정협 부주석을 역임했다. 중국 조선족 가운데 최고위직을 지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연변 주장에 길림성 부주석의 조카라는 신분을 앞세우니 중국 친척 방문 여행증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중국에는 허 씨 부모의 형제들을 포함한 친척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허 씨는 27세 때인 1992년 처음으로 중국에 갔다. 당시 중국도 허 씨에겐 충분히 놀라웠다. 전기불이 항시 들어오고, 밤중에 나가도 마트에서 물건을 살 수 있었다. 밥상에 앉아 각티슈를 뽑아 쓰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고, 지금까지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중국에 갈 때마다 한국 드라마도 많이 봤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신기하다는 생각뿐 한국에 가보자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았다. 북한에 자식이 둘이나 있어 탈북은 꿈에도 꾸지 않은 것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아오지허 씨가 살던 동네는 아오지탄광으로 유명한 함경북도 은덕군. 허 씨는 16세였던 1981년 중학교 졸업과 함께 ‘7월7일연합기업소(일명 아오지화학공장)’ 선반공으로 임명됐다. 일을 하면서 기업소 야간대학도 나오고 청진경제전문학교도 졸업했다. 그 때 선반공에서 관리부서인 공무과로 이직을 할 수 있었다.1986년에 같은 공장에서 책임기사였던 남성과 결혼해 연년생 1남 1녀를 낳았다. 27세에 중국으로 친척방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자녀가 둘이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함경북도의 탄광지역은 고난의 행군의 시련을 일찍 체험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배급이 끊기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다만 그는 예외였다. 중국에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마을에서 매우 잘 사는 집으로 통했다.1990년대 중반이 되자 아오지에서도 아사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거리에 시신들이 넘쳐났다. 이웃 아파트에선 당 비서가 먹을 것이 없다며 부모를 굶겨 죽이는 일도 발생했다. 일반 주민들의 사정은 더 끔찍했다.“그 어려운 시기에 저만 잘 먹고 살진 않았어요. 능력이 닿는 대로 주변을 많이 도와줬어요. 그래서 인심 좋은 아줌마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와봐야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어요. 그때는 정말 매일 마음 아픈 일들이 벌어졌지요.”허 씨는 중국 친척들 덕분에 고난의 행군을 무사히 버텨냈다. 당국이 바라는 대로 아들도 잘 키워 17세에 군에도 입대시켰다. 그런 자신에게 ‘일본군 패장’의 딸이란 굴레를 씌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을 때 배신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군에서 10년간 청춘을 바쳤지만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고 돌아올 아들 생각에 맘이 너무 아팠다. 북한에선 당원이 되지 못하면 어떤 출세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화가 나 간부부에 가서 따지기도 했다. “나라를 위해 많은 피를 흘리고 파편을 38개나 품고 사는 아버지에게 일본군 딱지를 붙일 때 손이 떨리지 않았나. 왜 기록을 고칠 수 없나.”그런데 북에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결국 그는 중국에 넘어와 아버지 보증인들을 찾아다녔다. 넘어올 때 아버지 기록을 바꿀 수 있는 증거들을 모으기 전엔 절대 다시 북에 나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노력한 결과 아버지의 팔로군 출신 동료들을 여럿 찾아냈다. 심지어 아버지가 중국에 유공자로 기록이 돼 있어 신청만 하면 적잖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자녀의 걸림돌인 된 엄마2013년 12월 그는 중국에서 장성택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중국에 들어온 지 7개월째 되던 때였다. 벌써 여행증에 적시된 귀국 기간은 만료된 지 오래였다.그때까지만 해도 머리 속에 오직 아버지 보증인들을 찾겠다는 욕심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성택의 처형 소식을 듣는 순간 “내가 살고 있는 북한은 저런 세상이었지”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그가 보증 서류를 찾아 돌아간다고 해서 주민문건이 바로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중국으로 오기 전에 주민등록문건을 바꾸려면 열두 곳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치려면 10년이 훌쩍 지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열두 곳에서 요구할 뇌물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가늠이 안됐다. 그러는 동안 자녀들의 20~30대가 훌쩍 지나는 데다, 문건을 바꾼 이후인 40대부터 잘 나가리라는 보장도 없었다.이후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자식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엄마로 존재하느니 차라리 내가 사라지자”였다. 어머니가 중국 여행을 갖다 사라지면 남편은 재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자식들의 서류에서 출신 성분 때문에 받는 불이익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행히도 남편은 출신성분이 좋았다. 새 엄마가 들어오면 자식들의 출신성분도 그에 맞게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이후 그는 북이 아닌 남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2014년 1월 중국을 떠나 라오스를 거쳐 3월 14일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8월 14일 하나원을 졸업해 부산에 정착했다. 서울에서 살고 싶었지만, 임대주택이 충분치 않았다. 대도시인 부산에서 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나중에 전해 들으니 남편은 그의 바람대로 재혼을 했다. 두 자녀도 대학을 나와 가정을 이루고, 출세에 별다른 걸림돌을 느끼지 못하고 잘 살고 있었다.한국에 사는 내내 그는 당시의 결심이 잘 한 것인지를 수없이 반문했다.“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엔 북한에서 살면 노동당에 입당하고 출세하는 것이 가장 큰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 스스로를 자녀의 앞날을 막는 걸림돌이라고 여긴 거죠. 북한에서 아무리 출세해봐야 북한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될 뿐인데, 그땐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몰랐죠.”● “수급비를 거부합니다.”부산에 정착한 허 씨의 나이는 49세. 당장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도 정착이 힘든데, 한국 사회를 전혀 모르는 49세의 탈북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식당 도우미 외에는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어렵게 한국에 왔으니 무엇인가를 이뤄보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당장 내일이라도 통일이 되면 자식들 앞에 당당한 엄마로 나서고 싶었다.탈북민은 사회에 정착한 초기 기간엔 기초생활수급자로 분류돼 혜택을 받는다. 허 씨도 몇 달간 그렇게 생활했다. 그러다 문뜩 몇 푼 안되는 수급비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자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길로 주민센터를 찾아가 “저는 이제부터 수급비를 받지 않겠습니다”고 선언했다. 그리곤 식당이면 식당, 청소업체면 청소업체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하다 만난 사람 가운데 70대가 넘는 여인이 대장암과 폐결핵으로 고생하는 일을 알게 됐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북한에서 배웠던 족심 요법을 기억해냈다.의약품이 부족한 북한은 민간요법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발바닥 혈을 자극해 병을 치료하는 ‘족심치료법’은 관련 전문 서적까지 나올 정도로 북한에선 인기가 높다. 허 씨도 1990년대에 족심 치료법을 공부했고, 몸이 좋지 않은 동네 사람들을 치료해주기도 했다.“한국에는 족심 치료가 없던데, 한 번 그걸로 치료해보면 어떨까”그는 집에 소파 하나를 사들였다. 대장암에 걸린 70대 여인을 상대로 치료를 시작했다. 한국에선 공인된 치료법은 아니었지만 석 달 동안 발바닥을 꾸준히 눌러주었더니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됐다. 그 일을 시작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동네 노인들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차츰 용하다는 소문이 계속 퍼져나가면서 전국에서 손님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족심도사’나 ‘허도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족심은 허가된 치료법이 아니다. 관련한 가게를 낼 수도 없다. 다만 피부미용사 자격증을 따면 합법적인 사업자로서 인정받아 족심 치료를 계속할 수 있었다. 발 마사지의 일종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12번의 시험부산하나센터의 도움을 받아 피부미용사 자격증 학원에 등록했다. 50세가 넘어 시작한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외래어가 너무 어려웠다. 단어들이 도통 머리에 들어가지 않았고, 애써 외운 단어는 잊혀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이를 악물었고, 세 번째 치른 국가자격증 필기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필기보다는 쉬울 것으로 기대한 실기 시험은 더 높은 장벽이었다. 시험을 치고, 또 쳤다. 무려 1년 7개월 동안 12번이나 응시했다. 실기시험은 60점 이상을 받아야만 통과할 수 있다. 그런데 열 번째 시험에서 1점이 모자란 59점을 받았다. 희망을 가지고 친 11번째 시험에선 52점이 나왔다. “피부미용사 자격도 10대, 20대만 점수를 잘 주고, 50대는 잘 주지 않는다”며 은근히 포기를 종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허 씨 역시 떨어질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사람들은 탈북민을 통해 북한을 바라보게 되죠. 탈북민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어요.”그렇게 버티다 마침내 12번째 시험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그는 주변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시험을 준비하며 겪어야 했던 남모를 고통들도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는 1년 7개월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점심을 같이 먹자는 원우들에게 “식당 음식이 안 맞는다”며 합석을 거절했다. 실제로는 돈이 없어서 피한 것이었다. 그는 밥 대신 분식집에 가서 3000원 짜리 라면을 사먹어야 했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버거웠다. 집에서 도시락을 싸와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밖에 나와 혼자 밥을 먹어야만 했다.2017년 2월 피부미용사 합격 통지서를 받은 그날 그는 한국인력공단을 찾아가 자격증을 받았다. 공단 사람은 “합격한 날 찾아와 자격증 달라는 사람은 허정희 씨밖에 없을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격증을 받은 뒤 곧바로 구청을 찾아가 사업자 등록도 냈다. 신체검사까지 마치고 정식 사업자등록증을 받는데 걸린 시간은 일주일. 마침내 부산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용샵을 열었다.이후 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쉼 없이 일했고, 쉼 없이 공부했다. 그의 사업장은 최우수 녹색등급을 받은 피부미용샵으로 성장했다.올해 그는 연세대에서 미용경영학 석사학위도 받았다. 그 사이 짬짬이 딴 자격증만 30개가 넘는다. 그중엔 국제대회 심사위원 자격증도 있다.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 결과 자랑스러운 구민상부터 국회의장상까지 많은 상장과 감사장, 트로피들이 미용샵 벽면 하나를 가득 채웠다.내년이면 허 씨는 60세, 환갑을 맞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열정적이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피부미용사회 부산지회 사하부 지부장을 거쳐 현재 수천 명의 피부미용사들이 소속된 부산지회의 감사로도 맹활약 중이다. 그가 매일매일 열심히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제가 자식들을 만나는 날이 꼭 올 겁니다. 통일되면 아이들 앞에서, 또 손주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엄마, 할머니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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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이 슬램덩크에 빠졌던 때[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7일. 주택들 사이를 스치듯 빠져나온 일본 도쿄 인근 에노시마 전철의 좁은 협궤 열차 앞에 태평양의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승객들이 바다에 눈이 팔린 사이 열차는 천천히 가라쿠마고코마에역에 멈춰 섰다. 다양한 인종의 젊은이들이 열차에서 우르르 내렸다. 무리에 섞여 동승자가 내리는 바람에 나도 따라 내렸다. 젊은이 무리는 역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는 철도 건널목 앞에 몰려가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상황을 전혀 몰랐던 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동승자가 “일본 만화 슬램덩크의 가장 유명한 배경지”라고 말했다. ‘슬램덩크’나 ‘강백호’란 이름은 들은 바 있지만 자세한 내용을 몰랐다. 그래서 휴대전화를 꺼내 검색을 하다가 여러 번 헛웃음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그동안 이해가 안 됐던 퍼즐들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북한 사람들을 괴롭혔던 원흉이 바로 너였구나.” 일본에서 최근 50년 동안 발행된 만화 가운데 1위, 일본 미디어 예술 100선 1위를 차지했던 화력한 경력의 슬램덩크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됐다. 한국에서도 1992∼1996년 연재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한국 내 만화 판매 부수만 무려 1450만 부에 달했고, 1994년 발매된 비디오도 큰 인기를 누렸다. 동승자는 “한국의 30∼50대는 슬램덩크 세대라고 할 수 있다”며 “만화가 연재됐던 1990년대 초중반 농구공이 없는 집이 없었다”고 귀띔했다. 그랬다. 바로 그 시기였다. 1996년경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 “농구는 키가 크는 운동이니 전국적으로 장려하시오.” 이후 체육시간이면 북한 학교에선 농구만 시켰다. 내가 다녔던 김일성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전에 90분 강의가 3개 있었는데, 중간수업이 체육이면 그날은 혀를 빼물어야 했다. 당시 우리 학급 교실은 김일성대 2호 청사 22층이었다. 층고가 높아 아파트로 치면 40층 높이에 해당하는 고층이었다. 늘 정전이라 엘리베이터 이용은 꿈도 꿀 수 없던 시절이었다. 오전 8시 첫 수업을 듣기 위해 교실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이후 체육수업이면 1층까지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90분 내내 뛰어다니며 농구공과 씨름을 한 뒤 다시 22층까지 올라가 수업 하나를 더 들었다. 이어 점심을 먹기 위해 내려왔다가 오후 정치학습에 참가하려면 또다시 한참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라야 했다. 당시는 숱한 사람들이 굶어죽던 때였다. 대학에서도 밥을 세 숟가락 정도만 주었다. 배고파 걷기도 힘든 학생들에게 농구는 최악의 고문이었다. “키 크는 운동이면 키 작은 너나 할 것이지 왜 온 나라를 갑자기 들볶냐”는 원망이 치솟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고난의 행군이 정점으로 치닫던 1998년엔 ‘가족롱구선수단’이란 영화까지 나와 사람들의 염장을 질렀다. 느닷없던 농구 바람의 원인이 김정일의 두 철부지 아들들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에 따르면 김정은이 농구에 빠진 것은 12, 13세 무렵. 한국에서 슬램덩크 열풍이 불던 시기와 일치한다. 김정은은 형 김정철과 함께 매일 초대소 직원이나 군인들과 농구를 했다. 잘 때도 농구공을 안고 잤다. 심지어 모친 고용희의 만류에도 식사가 끝나자마자 농구장으로 뛰어나가기 일쑤였다.스위스 유학 시절에도 김정은은 공부는 내팽개치고 농구에 푹 빠졌다. 그의 방은 미국 농구팀 시카고 불스의 기념품들로 가득 찼다. 김정은이 권력을 잡자마자 데니스 로드먼을 다섯 번이나 북한으로 초대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슬램덩크를 만화로 봤는지 애니메이션으로 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국 젊은이들이 농구 열풍에 휩싸였을 때 북한에선 김정일의 두 어린 아들만 농구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김정일은 그게 기특했던지 전국에 농구 열풍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인민이 굶어 죽어 나갔지만 안중에도 없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김정은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 등 각종 악법을 쏟아내며 외부 문물을 접한 10대 청소년들을 마구 감옥에 잡아넣고 있다. 외부 미디어의 강력한 영향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에 대한 공포도 누구보다 크지 않을까 싶다. 어느덧 김정은도 40대에 접어들었다. 그의 딸 주애는 올해 11세로, 이제 막 사춘기 초입에 들어설 나이다. 김정은의 맹목적인 딸 사랑과 사춘기 딸의 변덕이 결합해 인민을 또 다른 방식으로 대를 이어 괴롭히지는 않을지 걱정된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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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년째 탈북 대학생들에게 장학금 수여… 남북문화교류협회 후원 행사 9일 개최

    사단법인 남북문화교류협회(이사장 김구회)가 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동문회관에서 탈북민 대학생 장학금 수여식을 가졌다. 협회는 이날 추천을 받은 20명의 탈북 대학생들에게 2400만 원 상당의 장학금과 추석선물을 전달했다.김 이사장은 축사에서 “자유를 찾아 탈북의 긴 여정을 거쳐 온 젊은 대학생들이 통일의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남북문화교류협회는 2000년부터 올해까지 무려 25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추석 때마다 20명의 탈북 대학생들을 선정해 장학금을 수여해왔다. 과거 장학금을 수여받았던 많은 탈북 청년들이 이제는 한국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제 몫을 해내고 있다.이주영 전 국회부의장도 장학금 전달식에 참가해 ‘도덕재무장운동과 남북통일’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진행했다. 그는 “인성과 공감능력, 강한 주관과 오픈 마인드를 겸비한 사람은 초일류 통일리더의 조건을 갖추었다”며 “탈북 청년들은 세습 독재가 지배하는 북한에서 목숨 걸고 탈북한 자체가 위대한 도덕재무장의 결단”이라고 강조했다.장학금 수혜자 대표로 연설한 이충혁 장로회 신학대학교 대학원생은 “외로웠던 저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준 남북문화교류협회와 김구회 이사장님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남북문화교류협회는 1991년에 평화적 통일 기반 조성을 위해 설립된 단체다. 남북 분단 장기화로 인한 이질성 해소와 화해와 협력을 통한 동질성 회복을 목적으로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지금까지 약 수백 차례에 걸쳐 통일 관련 정책 강연을 진행했다. 또 탈북 대학생 장학금 수여와 같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통일 리더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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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밀수꾼 → 월1000만 원 버는 사장님…김상진 씨의 ‘우여곡절’ 인생 이야기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올해 43세인 김상진 씨의 삶은 ‘산전수전’이나 ‘우여곡절’이란 몇 글자로 다 담기엔 많이 모자란다. 그만큼 굴곡진 삶을 살았다. 소년 밀수꾼으로 시작해 밀수꾼을 잡는 보안원(경찰)이 됐다가 아동유괴범으로 몰려 처형장에 끌려갈 위기까지 경험했다. 이를 모면하고자 목숨을 건 탈북을 선택했고, 현재는 한국에서 월 수입 1000만 원을 올리는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 그가 북한에서 소년 밀수꾼이 된 것은 15살로, 밀수꾼에게 고용된 짐꾼이 시작이었다. 2년 뒤 그는 알아주는 밀수꾼으로서 중앙에서 밀수 단속 검열단이 나올 때면 도망치는 신세가 됐다. 간혹 보안원들에게 잡히면 죽지 않을만큼 매를 맞았다. 크면 꼭 보안원이 되야겠다는 다짐을 그 때마다 했다.결국 28살이 되던 해 보안서 소위가 돼 밀수꾼 단속을 할 수 있는 지위를 얻었고 33살에 대위로 승진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사촌 누나의 딸을 탈북시키는데 관여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하루아침에 ‘아동유괴범’으로 몰렸다. 당시 아동유괴범은 체포 즉시 무조건 총살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조건 탈북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허리를 크게 다쳤다. 그래서 지금도 무릎 보호대를 차고 꿇어앉아 일을 해야 한다.그렇게 시작한 한국 생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정식 출근시간이 오전 8시인데도 2시간 먼저 나갔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사무실 청소를 도맡다시피 했다. 그런 성실함은 통했고, 한국 정착 10년째인 2024년 월수입만 1000만 원이 넘는 사장님으로 변신했다. 북한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갔고, 탈북한 이후에도 끝모를 고통에 시달리면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는 김 씨. 그의 드라마와 같던 탈북과정과 남한 정착 기를 정리해본다. ● 15세 소년 밀수꾼김 씨는 1981년 함경북도 회령의 유선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두만강 바로 옆에 있는 유선은 탈북민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통한다. 한국에서 동창회를 하면 유선중학교 졸업생과 선생의 절반은 볼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김 씨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현지 주둔 교도여단 참모(대위)였다. 아버지는 그가 6살 때 제대했고, 가족은 양강도 보천군으로 이주했다. 군관 제대군인이라며 당국은 아버지를 보천군 농촌경영위원회 지도원으로 임명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김 씨의 가족은 평범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누렸다.그런데 아버지가 1994년 6월 세상을 떠났다. 이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김 씨와 한 살 많은 형을 먹여 살릴 책임이 심장병을 앓던 어머니 어깨에 지워졌다. 설상가상으로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배급도 나오지 않았다.어머니는 보안서에서 근무하던 오빠들의 도움으로 도 소재지인 혜산에서 도 보안국 정치학교 이발사로 취직했다. 도 보안국 소속이라 이발사에게도 배급이 나왔다. 하지만 어머니의 병이 발목을 잡았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에서 6개월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김 씨는 잘 때마다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잤다. 어머니가 그의 손을 꽉 잡을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거의 정신을 잃고 숨을 쉬지 못했다.체육을 잘하던 형이 도 체육단 축구 양성조에 뽑히면서 하루 800g의 배급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세 식구가 살기 어려웠다. 먹성이 한창이었을 형은 죽만 먹고 축구를 했다. 어린 김 씨는 학교도 가지 않고 산에 올랐다. 나무뿌리를 캐 장마당에 팔았다. 그렇게 해도 세식구가 먹고 살기는 빠듯했다. 이때 등짐에 나무뿌리를 메고 다니던 그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밀수꾼의 짐을 중국에 날라다만 주면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나이 15살 때였다.● “보안원이 되리라”그는 닥치는 대로 짐을 날랐다. 구리나 니켈 같은 금속부터 약초, 잣 등과 같은 식물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메고, 산을 몇 개씩 넘었다. 등에 멘 무게만큼 보상이 따랐기 때문이다. 밀수꾼은 국경경비대와 짜고 새벽을 이용해 압록강의 특정지역으로 짐을 넘겼다. 구리 1㎏을 넘기면 담배 2보루를 받았다. 수익으로 치면 본전의 두 배 정도였다. 밀수는 단속하는 자와 단속을 피하려는 자 간에 펼쳐지는 치열한 전쟁터다. 보안원들은 밀수꾼이 다닐만한 산길에 잠복하고 있다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빼앗었다. 밀수꾼들은 산을 넘나들 때마다 항상 보안원이 숨어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보안원들이 밀수꾼 잡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에도 돈벌이가 깔려 있다. 그들이 밀수꾼을 잡으면 물건을 반반으로 나누었다. 모두 뺐으면 체포해 조서로 증거를 남겨야 한다. 반면 절반만 빼앗으면 절반은 자기가 갖고, 나머지 절반은 선심 쓰듯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처음부터 물건을 뺏기보다는 겁주기 차원의 처벌을 먼저 했다. 특히 김 씨처럼 어린 학생을 만나면 무자비한 구타로 반쯤 죽여 놓고, 이후 선심을 쓰듯 물건을 챙겼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김 씨는 “크면 꼭 보안원이 돼 이 수모에서 벗어나겠다”고 이를 갈았다.김 씨는 악착같이 일했다. 먹고 살 길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 간 열심히 밀수꾼을 따라다닌 결과 독립을 할 수 있게 됐다. 경비대 분대장을 포섭하고, 짐꾼들을 고용한 뒤 독자적인 밀수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한창 때에는 하루 밤에 TV 20대를 압록강을 통해 들여왔다. 당시 그는 ‘무사통행증’으로 불렸다. 단속 위험이 있는 곳마다 뇌물을 뿌려 매수한 덕에 체포될 일이 없다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다만 예외도 있었다. 중앙에서 ‘비사회주의 단속 그루빠(중앙검열단)’가 나올 때다. 국경도시 혜산에는 1년에 두 번 정도 그루빠가 나왔다. 한 번 나오면 3개월에서 6개월 동안 현지에 머문다. 인민반을 훑으며 탐문하다 보면 “저 집이 밀수로 돈을 번다”고 고발하는 ‘배가 아팠던’ 사람들이 반드시 나오기 때문이다. 체포되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검열대가 뜰 때마다 김 씨는 멀리 외진 곳으로 도망쳤다. 행정력이 마비된 때라 멀리 숨으면 몇 시간씩 차를 타고 잡으려 다녀야 하는데, 당시로선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혜산에선 매년 본보기로 공개 총살하는 총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밀수꾼과 도망자의 삶을 이어가느라 김 씨는 학교 다닐 새가 없었다. 당시 중학교 6학년까지 다녀야만 졸업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의 학력은 중학교 1학년에 머물렀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뇌물을 주면 졸업증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김 씨는 밀수를 좀 더 하기 위해 졸업시기를 늦춰보기로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유급을 2년 이상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미성년자일 때와는 달리 성인이 돼 밀수하다 잡히면 처벌 수위는 훨씬 높아진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군에 가야 하는 시기가 닥치기도 했다.다행스러운 점은 4년 여의 동안 했던 그의 사업으로 집안 형편이 나아진 것이다. 우선 단칸방 짜리 아파트를 구입해 내 집을 마련했다. 어머니 병을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에 갈 때마다 거래 상대방에게 심장병 약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구해온 약을 1년 반쯤 복용한 어머니는 눈에 띄게 병세가 좋아졌고, 졸도하는 일도 없어졌다. 병을 털고 일어난 어머니는 번듯한 일자리도 얻었다. 아들이 마련해준 돈으로 뇌물을 써서 도 보안국 정치학교 식당책임자로 취직한 것이다. 먹을 것을 주무르게 되자 더 이상 밥을 굶을 걱정은 하지 않게 됐다.● 보안서 대위로 승진하다북한 군사동원부(병무청)에는 ‘안전부 초모’라는 병과가 있다. 보안서에서 군에 갈 학교 졸업생을 뽑아 일반 병사로 근무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의 의무경찰과 비슷한 제도이다. 다만 북한의 안전부 초모는 권력이나 돈이 있는 집 자식 정도만이 갈 수 있는 자리라는 게 다르다.김 씨는 안전부 초모가 되고 싶었다. 어렵사리 군사동원부 간부를 만나니 휘발유 200리터를 요구했다. 중국돈으로 600위안, 쌀로 환산하면 300㎏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이런 정도로 많은 뇌물을 준다고 해도 출신성분 심사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안전부 초모에 응모할 수도 없다. 다행히 군관의 아들이었던 김 씨는 북한에서 ‘기본군중’에 속했다.김 씨는 군복을 입기 닷새 전까지 밀수를 위해 중국 국경을 넘었다. 마지막 밀수로 녹음기 5대와 쌀 50㎏을 마련해 집에 숨겨둔 뒤 함경북도 보안국 정치학교로 갔다. 사실 그는 양강도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밀수를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거주하던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하지 못하게 하는 북한군 규정이었다. 하지만 이 마저도 뇌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정치학교에서 3개월 간의 교육을 받는 동안 어머니가 뇌물을 썼고, 그는 혜산에서 승용차로 2시간반 정도 떨어진 양강도 풍서군 보안서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2년 넘게 계호원(수감자 경비원)으로 근무했다. 형기를 받은 사람을 함흥교화소로 이송할 때 김 씨는 구리와 같은 단속 물품을 날라 돈을 벌었다. 범인 호송칸은 검열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계호원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그는 군대 내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뇌물로 상납하니 보안서 경비분대장으로 승진했다. 노동당에 입당하기 위해 삼지연건설장 굴 뚫기 돌격대에 자원한 뒤 6개월 정도 지나니 당원증이 나왔다. 이어 입대 6년 만에 양강도 보안서 정치학교에 입학해 집에서 통학도 할 수 있게 됐다. 당시 학교 식당책임자는 그의 어머니였다. 이때 정치학교에선 ‘호남쌀’이라고 부르는 한국 지원 쌀을 먹었다. 2년의 군관 교육 과정을 거친 그는 2008년 졸업하고, 2009년 소위로 양강도 보안서 주민등록부 부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형님도 쌀 200㎏을 뇌물로 쓰고 같은 학교에 입학했고, 먼저 보안원이 됐다.주민등록과는 뇌물을 받을 일이 없어 보안서 내에서 제일 힘이 없는 사람이 가는 곳으로 통한다. 과장 정도가 되면 주민등록문건을 조작해 중국에 친척이 있다고 만들어주고, 건당 3000위안 정도의 뇌물을 받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일반 부원이라면 문건 수정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이곳에서 김 씨는 대위로 승진한 2014년까지 6년 동안 ‘주민등록대장(주민문건)’을 관리했다. ● 북한 주민등록제도의 비밀북한의 악명 높은 출신성분 제도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한주민들은 자기와 관련된 서류를 볼 수 없다. 이 문건들이 극비 서류로 분류돼 관리되고 있어서다. 이런 이유로 북한주민등록 서류를 관리해온 김 씨의 증언은 여러 모로 귀중한 정보다. 김 씨에 따르면 혜산시 보안서에는 관내 10만 여명의 주민에 대한 문건들이 보관돼 있다. 주민등록문건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5㎝, 25㎝ 크기인 100쪽 분량의 책에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8촌까지 내용이 수기로 족보처럼 기록돼 있다.예컨대 조부 OOO은 XX에서 태어나 △△에서 살았고 토지를 얼마나 보유했으며 소는 몇 마리를 키웠는지 등에 대한 기록이 정리돼 있다. 심지어 일제 때 순사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등 별치 않은 과거 행적도 담겨 있다. 북한의 일반 가정에서 손자 대로 내려가면 할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왜 자신이 평생 농민이나 탄광 노동자로 살아야 하고, 승진도 할 수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오로지 주민등록문건에만 그 이유가 남아 있다.문건의 첫 페이지엔 사진과 생년월일, 출신성분, 사회성분 등이 기록돼 있다. 출신성분 아래에 다시 종교인, 교화출소자 등과 같은 수십 개 세부 분류가 적혀 있다. 친척 중에 누가 훈장을 받았는지 등의 기록도 자세히 적혀 있다. 각 페이지 맨 아래엔 확인자(특정인의 경력에 대해 진술한 사람) 다섯 명과 검증을 책임진 요해지도원(보안서 주민등록지도원)까지 손도장이 6개가 찍혀 있다.흥미로운 점은 문건엔 한국 친척의 행적까지 기록됐다는 것이다. 가령 ‘사촌형 아무개는 괴뢰군 연대장을 하다가 몇 년에 전역해 몇 년에 미국 어느 도시에 가족과 함께 이민을 갔다’는 식이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파악하고 있는지 김 씨도 놀랄 정도였다. 다만 한국 가족의 행적은 1990년 이전에만 국한돼 있고 1990년 이후의 기록은 수많은 서류에서도 보지 못했다. 1990년 이전까진 북한이 간첩을 통해 남쪽 주민등록 시스템을 자유롭게 봤지만 그 이후엔 정보망을 잃은 것이라 추정된다.출신성분 중에 ‘미해명’이란 분류도 있다. “가족 친척 중 누가 6.25전쟁 때 폭격에 죽었다는데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식이다. 미해명은 월남자 가족보다 더 출신성분이 안 좋은 것으로 평가한다. 월남했다면 행적이라도 밝혀졌지만, 미해명은 살아서 뭘 하고 있을지 알지 못해 더 두렵다는 의미다. 6.25전쟁 때 이런 ‘미해명자’가 엄청 많이 생겼는데, 이들은 북한 체제에선 승진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체제를 위해 아무리 목숨 걸고 싸워도 시체는 남겨야 3대가 안전한 것이다.북한에는 출신성분 외에 또 사회성분이라는 것도 있다. 사회성분은 노동자, 군인, 사무원, 농민의 4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각자 노동당, 직업동맹, 농업근로자동맹 등에 가입할 때의 직업이 사회성분으로 규정된다. 사회성분이 농민이면 평생 농민으로 살아야 한다.출신성분이 가로의 날실이라면 사회성분은 세로의 씨실에 해당한다. 북한에서 태어나면 가로와 세로로 짜여진 출신 분류의 바둑판 위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태어날 때 바둑판 위에 정해진 자리, 즉 타고난 운명은 바꾸기 거의 불가능하다.주민등록문건은 매년 12월에 한번씩 업데이트한다. 가령 6촌 OOO이 승진했다거나 8촌 XXX가 훈장을 받았다는 식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변동이 없으면 놔두지만, 만약 신고가 새로 들어오거나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주민등록지도원이 평북 구성으로 출장을 간다. 구성의 비밀갱도엔 주민등록문건의 원본이 보관돼 있다. 이 원본들은 하도 오래 보관돼 누렇게 변색이 돼 있다. 여기에는 토지문서나 과거 이웃들의 진술 따위도 보관돼 있다.주민등록문건은 보안서에만 보관돼 있다. 물론 보위부에도 요시찰 인물들에 대한 문건을 따로 관리하지만, 전체 주민에 대한 문건은 없다. 보위부에서 열람이 필요할 때는 열람 의뢰서를 받아 보안서에 와서 볼 수 있다. 보위부는 어느 부서나 열람이 가능하지만, 이외 직책은 열람 자격이 제한된다. 도당 간부 인사 관련자, 노동당 5과 지도원, 군사동원부 초모지도원 등만 열람권을 갖는다. 출신성분이 좋아야 김정은 호위병이나 별장 관리사가 될 수 있고, 비행사나 잠수함 승조원도 될 수 있다.김 씨는 문건을 관리하는 신분이지만, 정작 자기 문건을 볼 수는 없었다. 당사자가 조작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다른데 보관해두고 과장만이 볼 수가 있었다.김 씨가 탈북할 때까지 주민등록문건은 전국적인 전산화가 되지 않았다. 중앙과 도까지는 전산 확인이 가능하지만, 시군에는 전산 시스템이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을 들고 오면 ‘속견표’라고 불리는 ‘가나다‘ 순으로 이름이 정리된 표를 먼저 보고, 해당 인물의 문건이 어디 있는지 다시 찾아야 했다. ● “누나, 남조선에 도망가요.”혜산 보안서엔 600~700명의 보안원이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뇌물을 받기 어려운 자리가 주민등록과였다. 북한에서 뇌물을 쓰고 자기 출신성분을 조작하려는 간이 큰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치기도 어렵지만 발각되면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이다.그래서 김 씨는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정치학교 친구들이 근무하는 단속초소를 많이 활용했다. 밀수통로인 혜산엔 전국에서 많은 밀수품들이 몰려왔다. 김 씨는 차로 물건을 나르는 사람을 소개받아 초소를 통과시키는 대가를 받은 뒤 초소 친구들과 나누었다.때로는 한국에 간 탈북민 가족을 전화로 연결시켜주고 송금액의 10%를 받기도 했다. 단속해야 할 보안원이 송금브로커 역할도 한 것이다. 보안원 집에는 수색이 들어오지 않아 휴대전화를 보관하기가 용의했다. 다른 보안원들도 먹고 사는 방법은 다들 비슷했다.그러다 사고가 터졌다. 외삼촌이 삼지연에서 인민보안성 답사관리소 부소장으로 있었는데, 외사촌 누나인 그의 딸이 2011년 인신매매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죄명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그닥 큰 일도 아니었다. 국경 인근에서 두부장사 술장사를 하다가 중국으로 넘겨 보내달라고 사정하는 여성 3명을 도강하게 도와주고 돈을 받은 게 적발된 것이다.북중 국경에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운이 나빠 체포되면 인신매매범이 돼 교화소로 끌려가야 한다. 외사촌 누나도 넘겨 보낸 여성 한 명이 북송된 뒤 압록강을 어떤 식으로 넘었는지 자백하는 과정에서 관여한 사실이 들통나 체포됐다.보안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던 그는 밤에 천을 찢어 밧줄을 만든 뒤 3층에서 탈출했고, 그 길로 중국으로 도망을 갔다. 북한에서 시집간 여성은 ‘출가외인’으로 간주해 가족들의 출신성분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외사촌의 탈북은 향후 출세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칠 만한 사안이었다.중국에 건너간 외사촌은 김 씨에게 전화를 해왔다. 어쩔 수 없이 도망을 치게 돼 영향을 받게 될 가족과 친척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김 씨는 안심하라는 뜻에서 “이왕 그렇게 됐으니 우리 걱정은 말고, 중국에 있다 잡혀 북에 다시 끌려오지 말고 한국에 가서 안전하게 있으라”고 말했다. 외사촌은 그의 말대로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돈도 보냈다. 외사촌의 부탁대로 그는 북에 남은 자식들에게 전달해주었다. 2014년 9월 외사촌 누나는 그에게 다른 부탁을 해왔다. 탈북 비용을 준비했으니, 자식들을 중국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김 씨는 외사촌 누나의 집으로 갔다. 그새 누나의 남편은 재혼을 했고, 아이들은 할머니 품에서 크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아이들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있어야 한국에 간 며느리가 보내준 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누나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김 씨는 오토바이를 이용해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여자 조카를 혜산으로 데려온 뒤 압록강을 넘게 했다. 그런 식으로 16세 된 아들도 보낼 계획이었다.● 졸지에 아동유괴범이 되다그런데 일이 터졌다. 3일쯤 지났을 때 같은 보안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가 아동유괴범으로 찍혔으니 즉시 도망을 가 숨어라. 잡히면 무조건 총살이다.” 조카를 데리고 올 때 타고 다닌 오토바이를 본 누군가가 신고를 한 것이었다. 당시엔 공교롭게도 “어린이를 외국에 유괴하는 자들을 무조건 처형하라”는 김정은이 방침이 하달된 때였다. 2013년 라오스에서 탈북청소년 9명이 북한으로 강제 북송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은이 고아나 꽃제비들을 중국으로 보내지 못하게 엄명을 내린 것이다.전화를 받은 김 씨는 그 길로 도망가 산에 숨었다. 조카를 압록강으로 넘겨 보낼 때 도와준 사람들에게도 연락해 즉시 숨으라고 했다.체포조가 샅샅이 훑을 게 뻔해서 갈 곳도 없었다. 생각해낸 것이 산에서 화전을 일구는 집이었다. 그 집 남편은 먼저 한국으로 갔는데, 산에 남은 아내가 6살, 1살 된 두 딸을 키우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김 씨는 예전에 그 남편이 보낸 돈을 아내에게 전달해준 인연이 있었다. 그는 그곳 옥수수밭에 숨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형은 보안서 소좌 계급을 달고 혜산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동상 경비대 부대장을 하고 있었다.형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형이 가지 말라면 자수하겠다”고 하자, 형은 “자수해도 처형될 것이 뻔하고, 그럼 내가 군복을 벗어야 하는 결말은 똑같다. 살길을 찾아 가라”고 말했다.김 씨는 한국에 사는 화전민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당신의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면 한국으로 가는 선을 연결해줄 수 있겠냐”고 묻자, 남편은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김 씨는 즉시 계획을 짰다. 강을 넘는 날짜를 추석 연휴 기간인 9월 24일로 정했다. 명절엔 다들 술을 마셔 경계가 소홀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았다. 당일 초저녁 김 씨, 함께 도망친 사람 두 명, 화전민 가족 3명 등 모두 6명이 압록강을 넘었다. 무사히 중국에 도착해 다시 화전민 남편에게 전화를 했고, 장백으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이 수화기를 타고 날아들었다. 이들은 통화 내용대로 도로에 나뭇가지를 깔아둔 채 인근 산으로 숨었다. 마중 나올 차가 멈출 위치 표시였다. 그런데 안내자가 오기 전에 중국 변방경비대 순찰차가 먼저 나타났다. 변방대도 나뭇가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나뭇가지 앞에서 차를 세운 중국 군인들이 전짓불을 켜고 주변 수색을 시작했다. 혼비백산한 일행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김 씨는 한 살짜리 화전민 딸을 안고 냅다 달렸다.캄캄한 암흑 속을 한동안 달리다 갑자기 몸뚱이가 허공을 나는 기분이 들었다. 높이가 7~8m나 되는 낭떠러지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아이를 감싸며 몸을 비틀었다.그렇게 땅에 떨어졌을 때 온 몸이 부셔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떨어진 곳은 압록강과 붙은 벼랑이었다. 바닥에는 뾰족한 돌들이 깔려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 무사했다. 등이 뜨끈뜨끈했다. 하지만 아픈 걸 느낄 새 없이 다시 내달렸다.그렇게 일행은 각자 도망을 쳐 숨었다가 중국군의 전짓불이 사라졌을 때 다시 모였다. 안내자가 온 것은 새벽 4시였다. 안가에 도착하고 나서 긴장이 풀어지니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옷을 벗으니 등에 4~5㎝ 깊이로 돌에 박힌 18곳의 상처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평생 그를 괴롭히는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 한국으로 보내줄 선이 연결될 때까지 장백에 숨어있는 동안 상처난 살이 썩기 시작했다. 병원에 갈 수도 없어 항생제는 처방받지 못하고 진통제만 20알씩 먹었다. 주사기로 고름을 뽑을 땐 썩은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찼다. 그 몸 상태로 다시 태국을 경유해 마침내 10월 30일 한국에 도착했다. 압록강을 넘은지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더 걸렸다. 비행기에 탈 때도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남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한국에 도착해 치료를 받았지만, 적정 치료시기를 놓쳤다는 진단을 받았다. 덕분에 지금도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양반다리로 바닥에 앉는 일도 불가능하다.● 어머니와 형님의 운명한국에 도착했을 때 어디에서 살지를 정하는 문제는 모든 탈북민의 큰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김 씨는 이를 쉽게 해결했다. 조사관에게 “남자 일자리가 제일 많은 곳이 어딘가”라고 물었던 것. 답은 “울산”이었다. 대답대로 그는 2015년 3월 하나원을 나와 곧바로 울산에 자리를 잡았다. 빨리 돈을 벌어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형님과 어머니를 탈북시키는 일을 목표로 정했다.울산에 도착한 날 바로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어요. 제가 여기에 온 것을 머잖아 북한도 알 수 있으니 빨리 탈북해 오세요.”“다행이다. 그런데 네가 한국에 간 줄은 아직 여기서 모르는 것 같아. 내가 군복을 벗으면 네가 탈북한 사실이 알려졌다는 것이니 그때 떠나마.” 보안서 중좌까지 빠르게 승진했던 형은 쉽게 용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듯 했다. 외사촌 누나의 아들도 형이 뒤늦게 한국으로 보내주었다.하지만 1년여가 지난 뒤 형은 대낮에 불시에 들이닥친 보위부에 체포됐다. 죄명은 ‘괴뢰들과 통신 연락 및 인신매매’였다.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보안서 정복을 입은 두 아들과 함께 거리를 다닐 때는 그렇게 자랑스러웠지만, 불과 1년 사이에 둘째 아들은 아동유괴범이 돼 한국으로 갔고, 첫째 아들은 간첩으로 체포된 것이다.형이 체포된 다음날 어머니는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고 유언을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의 나이는 불과 61세였다.어려서부터 축구선수였던 형님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우 강했다. 하지만 나흘 만에 땅에 묻은 돈의 위치까지 진술했다. 그 정도로 보위부의 고문은 혹독했다. 형님은 ‘보위부 교화형 12년’을 선고받았다. 보위부 교화형은 일반 민간의 노동교화형과는 다른 형벌이다. 노동교화형은 형기를 채우면 석방이 될 수 있다. 반면 보위부 교화형은 형기가 몇 년이든 간에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 형기는 끌고 갈 때 필요한 명분일 뿐 죽을 때까지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시신도 찾을 수가 없다. 죽어도 집에 통지조차 가지 않는다. 보위부 교화형을 받은 사람들이 가는 대표적 수용소가 함북 청진에 있는 수성교화소이다.형은 신포 어느 섬에 있는 보위부 교화소에 끌려갔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잠수함기지로 추정되지만 확실치는 않다. 이곳엔 약 100여명이 수감돼 있다고 들었다.김 씨는 형을 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써가며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하지만 보위부 교화형을 선고받고 섬에 끌려간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8년이 지난 지금 김 씨는 형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거기 가면 몇 년을 견디지 못합니다. 형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지게차로 이룬 인생 역전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북한 가족을 구출해내기 위해서라도 김 씨는 빨리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다. 처음 취직한 곳은 자동차 콘솔박스를 만드는 곳이었다. 모두가 여성이고 남성은 그가 유일했다. 경상도 여인들의 잔소리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일을 빨리 하지 않는다고, 몸에 담배 냄새가 난다고, 심지어 북한말을 쓴다고 구박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끝내 견디지 못해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이번에 간 곳은 아파트 건설장. 먼저 직장과는 달리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였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소방 설비 배관 조공이었는데, 공구 이름부터 작업장 용어까지 전부 외래어였다. 그래서 공구 이름들을 수첩이나 핸드폰에 메모하고 틈날 때마다 외워야 했다. 일이 서툴러 구박을 받을 때마다 “북한에서 온지 얼마 안돼 그러는데 잘 부탁한다”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용접사들이 점심식사를 할 때 그는 점심을 거르면서 용접기를 들고 연습을 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눈에 모래가 굴러다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버텼다. 그렇게 1년을 버티니 조공에서 기공으로 입지가 바뀌었고 월급도 많이 올랐다. 사람들도 성실한 그의 태도에 마음을 열고 친근하게 대해주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평생의 반려도 만나게 된다. 아내도 북에서 온 탈북민이었다. 잠깐의 신혼생활이 지나고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그러다보니 평생 가족을 책임질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이후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 남북하나재단에서 학원비를 지원해준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는 중장비 학원에 등록했다. 북한에서 지게차를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노력해 지게차와 포크레인 기사 자격증을 따냈다. 이후 영업용 지게차 회사에 취직은 했다. 하지만 정착은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자격증은 자격증일 뿐, 초보 실력으로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장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배차를 받아 갔지만,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쫓겨나는 일도 여러 차례였다. 회사에 눈치가 보였다. 잘리지 않기 위해선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남보다 두배 이상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이후 그는 매일 6시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정상 출근시간보다 2시간 먼저 나가 쓰레기통을 비우고 사무실을 청소했다. 노력은 인정받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회사 사장이 “왜 상진이만 매일 청소하냐. 너희들도 좀 따라 배우라”며 그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사장은 공사현장에도 “탈북자인데 실수하더라도 예쁘게 봐 달라. 많이 가르쳐주라”는 말을 틈나는대로 전파했다.이런 시간이 쌓이자 현장 반장들과 사장들도 그를 먼저 알아봐주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온 장비기사 오늘도 왔네”라며 인사도 건넸다. 지게차로 물건을 올리다 실수로 떨어지게 되면 다른 기사들은 지게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지게차에서 내려 물건을 다시 실었다. 그런 모습에 감동한 현장들에서 “내일은 북한에서 온 장비기사를 꼭 보내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이후 점점 삶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모은 돈으로 현재 그는 지게차를 두 대나장만해 한 대는 본인이 몰고, 다른 한 대는 직원을 두고 쓴다. 개인사업자 6명과 함께 동업을 해 수입도 늘렸다. 각종 비용을 빼고 한 달 순수입만 1000만 원을 넘기는 때도 있다.집에 돌아가면 토끼 같은 아들과 딸이 그를 맞아준다. 요즘 부부의 고민은 내년에 아이를 한 명 더 낳을지 여부다.2024년 남북하나재단이 주최한 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 김 씨는 최고상인 대상을 받았다. 그는 무대에서 “탈북민 대표라고 항상 생각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일했다”며 “이 사회에선 열심히 일한만큼 알아보고 인정해주었다”고 10년을 회고했다.하루하루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김 씨지만 북한을 떠올리면 늘 가슴이 아프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자유의 땅을 밟은 선각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가 먼저 와서 잘 살고 있지만, 북에 남은 사람들도 잘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통일이 되면 엄청난 건설 수요가 생길 것입니다. 내년에 저는 제 이름을 내건 지게차 회사를 만들 생각입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 최대한 사업을 확장해, 정말로 고향에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지게차들을 잔뜩 몰고 북한으로 올라가겠습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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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와서 낙하산만 200번 넘게 타”…탈북민 최초 특전사된 김대현씨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북한에서 온 탈북민인데요, 군 면제를 해제해 주시면 안 될까요? 군대에 꼭 가고 싶습니다.”고등학교 3학년 학생 김대현(가명)은 구글에서 찾아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이같이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건 우리 관할이 아닌데….” 그가 전화를 건 곳은 병무청이었다. 병무청 담당자는 “국방부로 전화하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김 씨는 다시 구글을 통해 찾아낸 전화번호로 국방부를 찾았다.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과정에서, 김 씨는 탈북민도 군에 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군에 갈 수만 있다면 이왕이면 멋진 곳에 가보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시 구글을 뒤적이던 그의 눈에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가 눈에 띄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씨는 특전사라는 부대가 존재하는 사실조차 몰랐다.김 씨의 군 입대 결심에는 탈북청소년들이 다니는 한겨레중고등학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가 영향을 미쳤다. 설문 가운데 ‘북한이탈주민도 군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항목이었다. 김 씨는 “무조건 가야 한다”를 찍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질문엔 “대한민국 정부에서 우리를 위한 마음으로 면제를 해주긴 하지만, 군에 가고 싶어도 못 가게 하는 것이야 말로 차별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려면 국민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적었다.답을 쓰면서 김 씨는 반드시 군대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학교 선생님들도 “너는 군인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응원해주었다.특전사를 목표로 김 씨는 군 입대 준비를 시작했다. 2015년 대학에 진학하면서 전문대 군사학과를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솔직히 그때는 특전사는 관련 학과를 졸업해야 가는 줄 알았습니다. 한 학기를 다니고 나서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바로 특전사에 진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2년 동안 군사 기본지식을 배운 그는 특전사 시험에 응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주변의 탈북민들은 “국방부에서 형식적으로는 된다고 말했겠지만, 실제로는 탈북민이 특수부대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라고 위로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시험을 못 쳐서 그런 겁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특전사 시험은 1년에 다섯 번 치러진다. 나름대로 준비해 두 번째 시험에 도전했지만 또다시 낙방의 쓴 맛을 봤다. 두 번째 떨어졌을 때는 실망스러웠다. “정말 대한민국 사회가 아직도 탈북민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일까”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래도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도전해보자는 심정으로 세번 째 시험을 치렀다. 이번엔 필기평가를 통과했고, 체력평가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마지막 관문인 면접도 무난하게 치렀다. 결국 그는 최종 합격을 했다. ● 특전사 대원의 삶“다들 눈 감아”어두운 밤 김 씨는 입대 동기들과 함께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지옥 훈련을 받던 날이었다. 힘든 훈련을 끝낸 뒤 눈을 감는다는 건 훈련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에게 조용히 나가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부끄러워 나가기를 꺼리는 훈련병을 배려한 조치다.김 씨가 처음 입대할 때만 해도 동기는 200명이었다. 그런데 일주일간의 첫 지옥훈련을 끝냈을 때엔 이미 70~80명이 줄어들었다. 그중에는 태권도, 유도 등 육체적인 고통에 익숙했을 운동선수 출신이 많았다.눈 감는 시간이 계속되면서 몸과 마음이 지친 김 씨도 살짝 흔들렸다. 그런데 살포시 뜬 눈에 자기보다 체력적으로 한참 약하다고 생각했던 동기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쟤도 견디는데 내가 왜 못 견뎌.”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우리 아들이 특전사에 갔다”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시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집에 다시 가면 무슨 망신이람. 오늘은 절대 나가지 않을거야.”김 씨는 그런 식으로 지옥훈련 기간을 버텨냈다. 그리고 2주 훈련 뒤 낙하교육이 진행됐다. 그는 고소공포증을 몰랐는데, 막상 비행기 문이 열린 뒤 뛰어낼 시간이 다가오자 덜컥 겁이 났다.“뛸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이 말을 되뇌이던 순간 비행기 문밖으로 몸뚱이가 튕겨져나갔다. 등뒤에 있던 동기들에 떠밀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인생 처음으로 하늘을 날았다. 낙하교육 중에도 하차하는 훈련생이 속출했다. 끝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짐을 싸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역시 훈련기간 4번 차례 공수교육에서 낙하훈련을 받았지만, 뛰어내릴 때마다 무서운 감정에 떨어야만 했다. 2017년 10월 입대한 김 씨는 이듬해 4월 정식으로 임관한다. 6개월 동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 환경에서 입학생의 절반이 탈락했지만 김 씨는 끝까지 버텨냈다. 탈북민으로서 직업군인이 된 최초의 사례였다. 그가 처음 받은 보직은 화력주특기. 보안을 중요하게 여기는 군대의 특성상 그의 군 생활을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는 빠르게 적응했다. 벌벌 떨어야했던 낙하훈련도 점차 익숙해졌고, 5㎞ 수영훈련도 무사히 통과했다. 최종 고비는 행군이었다. 다른 보직에 비해 화력주특기가 들고 다녀야할 장비의 무게는 훨씬 무겁다. 3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걸어댜 하는 천리행군 자체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힘들다. 하지만 군장 40㎏에 각종 무기까지 휴대하고 50㎞ 를 강행군해야 하는 훈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다. 만약 환자라도 발생하면 그의 짐까지 나누어 메고 가야만 한다. 김 씨는 군 복무기간 중 자신의 짐을 전우에게 넘긴 적이 없다. 그렇게 2022년 8월 김 씨는 4년 6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장기복무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군 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걸고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다름 아닌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이다. 맨 처음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만 해도 다리가 떨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했다. 하지만 특전사 생활을 하면서 거듭 낙하훈련을 받다보니 어느새 하늘을 나는 일이 너무 행복했다.● 사라진 엄마와의 만남“하늘을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가 탈북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잔디에서 공을 차고 싶어서였습니다. 북한에서 가질 수 있는 꿈의 최고치였죠. 그런데 한국에 와서 하늘을 날다니, 참 멋있지 않습니까.”김 씨는 1995년 북한 함경북도의 국경마을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어머니가 사라졌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은 없었다. 어머니가 사라진 뒤 그는 8살까지 고모의 손에서 자랐고, 이후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다시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고생은 모르고 컸다. 계모가 장사 수완이 좋아 돈을 잘 벌어왔고, 김 씨를 친아들처럼 아껴줬다. 용돈도 넉넉히 받아 썼다. 걱정 없이 살 줄 알았던 김 씨에게 열다섯되던 해에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다. 학교에서 나오는 그에게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다가온 것이다. “네가 대현이구나. 난 너 외삼촌이야.”친엄마와 외가를 까맣게 잊고 살던 그에게 다소 혼란스러운 조우였다. 외삼촌은 용돈을 두둑이 쥐어준 뒤 “집에 나랑 만났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사라졌다.집에 가서 외삼촌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끝내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그가 어릴 때부터 고모들은 그의 친엄마를 나쁜 사람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다. 누가 와서 같이 가자고 하면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는 말도 수시로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그가 엄마와 연락이 돼 사라지는 일을 경계한 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외삼촌을 만났다고 하면 집안이 난리가 날 것이 뻔해보였다.외삼촌은 이후에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런 만남이 몇 차례 이어졌을 때 삼촌이 그에게 넌즈시 물었다. “엄마 목소리 한 번 들어보고 싶지 않니. 엄마는 너를 너무 보고 싶어 해.”머리를 끄덕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핏줄의 힘이 아니었을까. 기억조차 희미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왜 나를 버리고 갔는지도 알고 싶었다. “대현이니?”삼촌이 쥐어준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그의 기억에는 없는 것이었다. “네”그의 대답에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다. 우는 소리를 들으니 그 역시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났다.어머니의 아버지는 남쪽이 고향인 의용군 출신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외가는 일찍 연고가 있는 남쪽으로 탈북해 정착했다. 어머니도 어느 날 몰래 가족을 따라 한국으로 떠났다. 남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할 외독자인 대현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이후 남쪽에 정착해 재혼까지 했다. 하지만 북에 두고 온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삼촌을 통해 “우리 대현이가 이젠 내 말을 알아들을 나이가 됐으니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잔디밭에서 공을 차고 싶어”처음이 어려웠지 이후 어머니와의 통화 횟수는 점점 잦아졌다.운동을 좋아했던 김 씨는 어머니에게 물었다.“엄마. 거기 가면 잔디에서 공을 찰 수 있어요?”TV에서 가끔 틀어주는 외국 축구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파란 잔디 위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김 씨는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그가 사는 환경에선 잔디에서 공을 찬다는 것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그럼. 여기는 잔디 구장이 너무 많아. 어딜 가든 잔디에서 공을 차지.”그 말에 어머니가 계신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차마 집을 떠날 생각은 못했다. 아버지와 자신에게 너무 잘해주는 계모를 두고 사라질 순 없었다. 갈등의 시간은 오래 이어졌다. 한국으로 떠날 결심은 다소 충동적으로 정해졌다. 17살 때인 2012년 겨울 그는 운동장에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계속 쏟아지는 눈으로, 일주일 내내 계속이었다.“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면 파란 잔디 위에서 축구를 하고 있을 것인데, 여기서 욕을 먹어가며 흙바닥 눈이나 치고 있다니.”순간 짜증이 밀려왔고, 평생 이렇게 살기 싫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그는 눈삽을 팽개치고 외삼촌에게 달려갔다.“나 엄마한테 갈래.”그의 결심이 서자 어머니는 부랴부랴 탈북 브로커를 연결해줬다.탈북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브로커가 있는 곳까진 기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 도중에 사고가 터진 것이다. 기차에서 휴대전화에 저장된 한국 음악을 듣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열차 안전원이 조용히 다가와 그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서 들은 것이었다. 한국 음악을 확인한 안전원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를 깨워 조사실로 데려갔다.휴대전화에 꽃은 SD카드 안에는 한국 음악은 물론 한국 영화도 가득했다. 여기서 잡히면 탈북이 물 건너가는 것은 물론이고,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이 고비를 넘어야 했다.“안전원 동지.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손전화는 안전원 동지가 가지십시오.”무섭게 꾸중하던 안전원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북한에서 휴대전화 가격은 한 가족이 몇 달을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다. 안전원은 조서를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넣더니 “네가 어리니 한번만 봐 준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봐야 자리도 없으니 조사실에 편히 앉아가라고 자기 자리까지 양보하는 선심을 썼다.그렇게 위기를 모면한 그는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해 브로커를 만났다. 그런데 일주일이 되도록 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브로커는 밤마다 그를 두만강 인근의 외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메콩강에 뛰어들다2012년 12월 29일 새벽 3시. 김 씨는 그날도 브로커를 따라 나와 벌벌 떨며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또다시 실패였다.“추우니 집에 가자”실망한 브로커는 그렇게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가 중간쯤 갑자기 두만강으로 뛰어 내려갔다. “중국에 가면 신호가 잡힐거야.”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던 김 씨도 브로커를 따라 열심히 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중국에 위치한 맞은편 산에 올랐다. 브로커의 예상대로 그곳에선 전화가 연결됐다. 마침내 엄마와 통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벽 3시에 아들이 탈북해 중국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즉시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통화 후 김 씨는 산 속에 들어앉아 그를 데려갈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두 시간 남짓 기다리는 동안 김 씨의 머릿속은 고민으로 가득 찼다. 막상 중국에 오니 집을 몰래 떠나온 일이 후회스럽고, 다시 북으로 건너가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저 안 갈래요. 집에 다시 가야 할 것 같아요”김 씨가 불쑥 말을 꺼내자 브로커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화를 냈다.“이젠 되돌릴 수 없어. 너 강을 건너다 경비대에 체포되면 감옥에 가야 해. 엄마랑 전화했다는 것을 알면 가만두겠니.” 맘을 다잡은 김 씨는 결국 차를 타고 연길로 들어온 뒤 브로커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24시간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아, 내가 좋은 곳으로 왔구나.”시장에 나가 돌아다니는데 한국 영화에서만 보던 억양을 쓰는 부부가 앞을 지나갔다. 그 말을 더 듣고 싶어 한 시간 남짓 이들 부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뒤 연길을 떠났다. 탈북 브로커가 모집한, 중국에서 결혼해 살던 탈북여성들이 일행이었다.이후 그의 여정한 신기한 경험으로 기억된다. 북한에서 떠날 땐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던 때였지만, 며칠에 한 번씩 계절이 바뀌었다. 마침내 쿤밍에 도착했을 때 계절은 더운 여름이었다. 운동을 즐겼던 그에게 험준한 산을 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라오스 국경에서 메콩강을 건널 때 콩깍지처럼 생긴 배를 타면서 경험한 일은 두고두고 기억날 일이다. 배를 타자마자 브로커가 겁을 주었다.“생리 중인 사람 손을 드시오. 이 강에 악어들이 득실득실하는데, 예전에 악어들이 피 냄새를 맡고 쫓아와 여자를 물어간 적도 있어요.”그의 말에 일행들은 조금만 움직여도 기우뚱거리는 배에 몸을 맡긴 채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런데 내릴 때 사고가 생겼다. 뒤에 앉은 모녀가 급히 내리려다 배가 뒤집힌 것이다.순간 김 씨는 달려들 악어떼가 떠올랐다.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물속으로 뛰어들어 모녀를 끌어올렸다. 지금 되돌이켜 봐도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이었다. ● 인천공항에서 만난 엄마북한을 벗어난 지 3주 만에 태국에 도착했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탈북민들이 구류돼 있는 감옥에서 다시 두 달을 더 지냈다. 그리고 2013년 3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처음 타본 비행기는 너무 신기했다. 인천공항엔 새벽에 내렸다.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출입구로 나오는데 갑자기 앞에 그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보였다.새벽에 어머니가 마중 나온 것이다.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임을 알 수 있었다.그가 다가가자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대현이니” 어머니는 그를 안고 다시 엉엉 울었다. 인솔자는 그 모습을 보고 차마 재촉할 수 없었던지 5분의 시간을 주었다.이미 외가 쪽이 다 한국에 와 있어 조사는 많이 받지 않았다. 조사기관과 하나원을 거쳐 한국에 나온 시기는 2013년 8월이었다.어머니가 살고 있는 청주로 갔다. 청주에 가니 새 아버지와 남동생이 있었다. 저녁에 온 가족이 식당에 모였다. 처음 보는 외할아버지는 물론, 각지에 정착했던 이모들도 다 왔다.정착 선물이라며 어머니가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처음 봤다. 너무 신기해 식사 내내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새로운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새 아버지도 잘 대해주었다. 인근에 있는 학교에 가니 잔디밭이 있었다. 입학하자마자 그는 축구부에 들어갔다. 잔디에서 원 없이 뛰니 너무 행복했다.그의 억양에 신기해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북한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나이에 온 그가 학업을 따라가긴 쉽지 않았다. 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탈북청소년 교육에 특화된 경기도 안성의 한겨레중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앞날과 만났다. 일반학교를 다녔더라면 “북한이탈주민도 군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는 설문조사를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인생 목표는 나라를 위한 삶특전사 복무를 통해 김 씨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주었다. 어디서든 생존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채널A에서 ‘강철부대’가 방영될 때 출연자 중엔 그와 함께 대관령을 행군하던 동기도 있었고, 같은 부대 선후배도 있었다.“시즌2에서 특전사가 우승했잖아요. 잘 해낼 수 있었다고 믿었어요. 우리가 받은 훈련과 그걸 견디며 키운 정신력이라면 못해낼 일이 없었으니까요.”요즘 김 씨는 스카이빙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스카이다이빙 교관이 되는 것이다. 이미 200회 넘는 낙하를 했지만, 아직도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 뛰어내리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10대의 김 씨는 파란 잔디에 끌렸고, 20대의 김 씨는 파란 하늘에 빠져들었다.30대의 그는 어떤 모습일까.“스카이다이빙도 이것이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된다면 매력적이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저는 나라를 위한, 사명감이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제일 먼저 앞장서 나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저의 인생 목표입니다. 그러다보니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지 이 선택이 국가와 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것 같습니다.”그의 또 다른 취미는 그림이다. 그의 그림 솜씨는 전문가 뺨을 칠 정도로 훌륭하다.그는 요즘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삶의 무대를 한국에 국한시키지 않고 세계로 넓혀나가려면 영어가 필수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해병대나 공군 등에서 군복무를 마친 탈북 청년들이 늘어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군 복무는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탈북민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가장 빠르게 녹아들고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청춘과 땀을 바쳤는데 누가 탈북민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겠습니까. ”“앞으로도 저와 같은 탈북민 출신 국군 하사관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한국에는 3만4000여명의 탈북민이 왔지만, 아직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 장교와 경찰이 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한 장벽을 넘었듯이, 다음의 장벽도 누군가가 용기 있게 넘어서주길 바랍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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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대홍수 지역의 북한 비밀갱도

    김정은이 최근 평안북도 신의주 홍수 피해 지역을 거듭 방문했다. 인민을 위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하지만 홍수 피해를 본 지역은 이곳만이 아니었다. 인접한 자강도는 홍수와 산사태로 철도와 도로가 모두 막혀 20일 넘게 고립됐다 18일에서야 일부 구간이 개통됐다. 교통 상황이 이 지경이면 전기 공급도 끊겼을 가능성이 높다. 피해가 가장 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평안북도 산간지역은 피해 여부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홍수가 발생한 7월 27일 신의주의 하루 강수량은 126mm였는데, 평안북도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구성시엔 228mm가 퍼부었다. 이들 지역에는 군수산업시설이 몰려 있다. 특히 구성시에는 북한 군수공업의 핵심인 구성공작기계공장과 유일한 탄약공장인 95호공장, 군복 생산의 중추인 구성방직공장, 전자전연구소 등이 있다. 구성시는 고려 때 귀주대첩이 펼쳐졌던 장소로, 두 개의 강과 여러 골짜기가 합류한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거란군 10만 명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은 강감찬의 수공전 설화가 가능했다. 인공위성 사진으로 보면 골짜기를 따라 철길이 놓여 있고, 철길이 끝나는 지점마다 군수공장 갱도 입구들이 보인다. 이 가운데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 서류가 보관된 비밀 갱도도 있다. 이 서류는 주민 관련 문서 원본인데, 태어나자마자 출신성분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북한의 악명 높은 주민등록제도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본인은 모르지만 평생 농민이나 광부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소상히 정리돼 있다. 북한 각 지역 인민보안서(경찰서)에서 관리하는 주민등록 서류는 이곳에 보관된 원본에 기초한 필사본이다. 인민보안서에서 주민등록 서류를 직접 관리했던 탈북민에 따르면 북한의 출신성분은 10년 전 기준으로 ‘기본군중’과 ‘복잡한 계층’, 두 부류로 나뉜다. 그 이전엔 ‘적대계급 잔여분자’라는 출신성분 분류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를 복잡한 계층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주민등록 서류는 가로세로가 각각 약 15cm, 25cm인 100쪽 분량의 책에 할아버지부터 8촌에 이르는 다양한 정보가 수기로 수록돼 있다. 첫 페이지엔 사진과 생년월일, 출신성분, 사회성분 등이 기록돼 있다. 출신성분 아래에 다시 종교인, 교화출소자 등과 같은 수십 개 세부 분류가 적혀 있다. 각 페이지 맨 아래엔 ‘확인자’(특정인의 경력에 대해 진술한 사람) 다섯 명과 검증을 책임진 ‘요해지도원’(안전부 주민등록지도원)의 손도장 6개가 찍혀 있다. 이 탈북민의 증언에서 흥미로운 점은 서류엔 한국 친척의 행적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사촌 형 아무개는 괴뢰군 대대장을 하다가 ○○년 전역해 △△년 미국 ××도시로 가족과 함께 이민을 갔다’는 식이다. 다만 한국 가족의 행적은 1990년 이전까지로 국한돼 있고, 그 이후 기록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1990년 이전에는 북한이 간첩을 통해 남쪽 주민등록 시스템을 자유롭게 열람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정보망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주민등록 서류는 1년에 한 번씩 업데이트된다. 그 과정에 뭔가 이상하거나 새로운 증언이 추가되면 비밀 열람권을 가진 극소수 담당자가 구성시까지 찾아가 원본 서류와 대조해 본다. 구성시의 원본 서류들은 광복 이후부터 보관돼온 것이라 누런 종이들이 태반이라고 한다. 쥐면 부스러질 것 같은 그 종이들이 북한의 신분 시스템을 지탱해 주는 핵심 정보 인프라인 셈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빨치산 시절에 친일조직인 ‘민생단’ 관련 문건들을 불태웠고, 민생단과 연루된 혐의로 고통받던 숱한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충성하게 됐다고 끊임없이 선전해 왔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였다. 김일성은 인민에 대해 낙인찍은 문서를 너무 좋아했다. 임진왜란 때 왕이 도망가자마자 경복궁에 쳐들어간 사람들은 노비문서부터 태웠다.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인민이 맨 먼저 달려가 불 질러 버릴 곳도 ‘현대판 노비문서’인 주민등록 서류 보관소일 것이다. 구성시의 물폭탄 소식을 듣자마자 군수공장보단 제일 먼저 주민등록 서류 보관 갱도가 떠올랐다. 그곳이 홍수에 잠기거나 산사태로 붕괴됐다면 김정은에겐 가장 뼈아픈, 복구 불가한 피해가 될 수 있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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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오물풍선이 보여준 북한의 속성

    북한의 오물풍선이 24일 용산 대통령실 구내에서 발견됐다는 뉴스를 보자마자 김정은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11차례에 걸쳐 보낸 수천 개의 오물풍선들은 북한이 보냈다고 말하기보다 김정은이 보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북한에서 김정은의 지시 없이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우선 타깃이었던 용산 대통령실에 오물풍선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김정은은 얼마나 기뻤을까. 국가대항전 축구경기에서 역전골을 넣은 선수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를 내지르진 않았을까. 오물풍선을 날리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실무자들은 김정은으로부터 포상을 받았을 것이다. 북한은 돈이 없으니 상금보다는 훈장이나 승진, 입당과 같은 명예 위주의 포상을 한다. 지난 두 달간 오물풍선에 천착한 김정은을 보고, 북한의 변할 수 없는 속성을 새삼 느끼게 됐다. 오물풍선은 북한 사람들이 태어나서부터 본능적으로 체득한 생존의 본능이 김정은까지 삼켜버렸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북한에서 생존하려면 반드시 이것 하나는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극단적인 충성심이 나를 지킨다”는 것이다. 당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고 하면 어떤 과격한 행동도 처벌받을 일이 거의 없다. 반면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하면 우유부단한 자로 찍혀 처벌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특히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는 자는 충성심이 부족한 자로 여겨질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선 김정은의 지시라도 잘 새겨들어야 한다. 예컨대, 김정은은 집권 직후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라는 말을 시대구호처럼 내세웠다. 혹시 이를 진심인 줄 알고 세계를 쳐다봤다면 그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 북한은 김정은의 말과는 반대로 국경을 물샐틈없이 폐쇄하고 외국의 것을 봤다고 ‘반동사상배격법’으로 닥치는 대로 처벌하고 있다. 김정은은 집권 이래 북한 간부들에게 ‘인민의 심부름꾼’이 될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2년 전에도 당 대회에서 “인민의 당, 심부름꾼당, 이것이 우리 당의 유일한 존재 명분이고 최고의 징표이며 영원한 본태”라고 연설까지 했다. “궂은일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자기의 뼈와 살을 깎아서라도 인민들의 편리와 생활을 최대한 도모하는 것이 오늘 우리 당이 바라는 당 비서들의 기본자세”라고 부르짖었다. 만약 이 말을 곧이 듣고 인민의 심부름꾼이 되겠다고 생각한 당 비서가 있다면 그는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신 차릴 틈이 없이 하달되는 삼지연 건설, 평양 주택 건설, 원산갈마관광단지 건설, 지방공장 건설 등에 자재와 인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낼 수 있는 간부가 김정은이 바라는 당 일꾼이다. 한밤중에 비상소집을 해 ‘러시아에 보낼 포탄상자를 24시간 안에 각자 두 개씩 바치라’는 지시를 완수하는 사람이라야 충성심이 높은 당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인민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인민을 악착스럽게 쥐어짜는 김정은의 심부름꾼이 돼야만 간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김정은이 집권하자마자 김일성광장에서 내뱉은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겠다”는 약속을 진심이라고 믿었다면 그 역시 간부 자격에선 미달이다. 숱한 사람이 굶주려도 김정은이 나타나면 “우리 관내 인민은 장군님 덕분에 허리띠를 풀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출세할 자격이 있다. 김씨 일가가 3대째 집권하고 있는 북한에 이제 양심을 갖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간부는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직 극단적 과격분자와 아첨꾼들만 득실댈 뿐이다. 이제 이들은 김정은 주변에서 충성심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과격한 주문을 속삭일 것이다. “풍선보단 드론을 서울 한복판에 박아버립시다.” “적의 확성기들을 포사격으로 몽땅 날려버립시다.” “삐라 보내는 한국 반동들을 처단합시다.” 온건파가 사라진 북한은 끊임없는 과격한 행위로 존재를 인정받으려 했던 극단적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처럼 변해가고 있다. 그 수장은 인민의 안위는 머리에서 지운 채 오물풍선 지휘에 열중하고 있다. 김정은이 주변을 둘러싼 과격분자들의 충성심에 감동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결심했다면, 오물풍선에 이어 또 뭐가 날아올지 알 수 없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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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파이터’ 장정혁 “내 주먹은 존재의 증명 과정입니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018년 3월 31일. 충북 청주 충청대학교에서 ‘TFC 드림5’ 한일전이 열렸다. TFC는 당시 로드FC를 추격하는 위치에 있던 종합격투기 단체였다. 이날 경기는 소속 선수 5명과 일본 선수 5명이 대항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가운데 장정혁 선수와 홋카이도 PFC의 니시카와 야마토 선수의 대결은 경기 전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탈북파이터’ 장정혁의 프로 데뷔 무대로 치러지는 경기였기 때문이다.경기 전 대부분 전문가들은 홋카이도 PFC의 라이트급 챔피언이자 프로 전적 4승 4무의 무패 파이터 니시카와의 우승을 점쳤다. 그는 10년 넘게 하루 8~9시간씩 훈련에 매진할 정도로 성실한 선수였다. 손과 발 곳곳에 박힌 굳은살은 그가 엄청난 파워의 소유자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반면 데뷔전을 치르는 장 씨는 ‘버리는 카드’ 정도로 여겨졌다.경기가 시작되자 니시카와는 공격적으로 돌진했다. 1라운드가 불과 30초가량 지났을 무렵 니시카와가 몸을 번개같이 돌리며 ‘백스핀블로(한 바퀴를 돌아 손등으로 타격하는 기술)’를 장 씨의 얼굴에 날렸다. 장 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니시카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장 씨를 올라탄 뒤 연신 주먹을 날렸다. 가까스로 뿌리치고 일어선 장 씨는 이미 다리가 풀린 것으로 보였다. 니시카와의 주먹은 이후에도 장 씨의 얼굴로 날아들었다.그렇게 경기가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을 때, 갑자기 장 씨가 니시카와에게 달려들어 주먹 연타를 날렸다. 그렇게 서로 네다섯 차례에 걸쳐 주먹을 주고 받던 중 이변이 일어났다. 니시카와가 쓰러진 것이다. 즉시 벌떡 일어난 니시카와는 장 씨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이후에도 한참 동안 둘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주먹을 주고받으며 난타전을 펼쳤다. 그러다 먼저 쓰러진 것은 니시카와였다. 장 씨가 주저앉았다가 일어나 니시카와를 다운시키기까지 걸린 역전의 시간은 불과 30초 정도였다.데뷔 무대에서 일본 격투기의 신성 니시카와에게 첫번째이자 KO패를 안긴 장 씨는 한일 격투기 세계에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장 씨의 예상 밖 선전으로 한국은 일본에게 최종 전적 3:2로 승리했다.● 정신력의 비결경기가 끝난 뒤 니시카와는 장 씨 소속팀 대표를 조용히 찾았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나의 백스핀 블로는 굉장히 강하며, 정확한 타이밍에 잘 때렸다. 그런데 맞고도 벌떡 일어나는 장정혁 선수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그 강한 정신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니시카와가 그 답을 들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장 씨가 최근 그에 대해 직접 입을 열었다. 2024년 남북하나재단 주최로 열린 ‘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다.장 씨는 당시 경기에 대해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일본 무패 챔피언과 프로 무대에 갓 올라온 아마추어의 대결이라 처음부터 제가 이길 가능성은 없었고, 저의 무모한 도전에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경기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상대 선수의 주먹에는 쌓인 경력만큼 빈틈이 없었고, 몇 번의 주먹이 오가면서 맞은 펀치에 다리힘은 풀렸다. 그러다 잠시 기절까지 했다. 그런데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순간 탈북 과정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이어 니시카와 선수를 공포의 존재였던 중국 공안이나 북한 경비대로 여기고, 그를 넘지 못하면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기에 저는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일어난 뒤 다시 싸울 수 있었다.”이후 그는 어떻게 싸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 선수가 코뼈가 부러진 채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상대측 코치와 감독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어 심판이 그의 팔을 들어 올리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장 씨는 “그날 제가 무패 챔피언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북한에서의 삶, 중국에서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거듭 강조했다. ● 사라진 부모정신분석학의 대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만든 정신분석 용어 가운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게 있다. 이는 4~6세의 남아에겐 ‘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독차지하려는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때의 생각이 평생 무의식에 남는다’는 것이다. 현재 이에 대한 반박도 적잖지만, 여전히 남자의 유야기 성장과정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장 씨는 예외였다. 그의 유아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1997년생인 그는 북한의 최북단인 함북 종성군에 위치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 정치범수용소가 있던 곳이었다. 1987년 5월 그곳에 갇혀 살던 수감수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북한 당국은 이들을 대거 학살한 뒤 수용소를 폐쇄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을 조직해 이곳에 정착시켰다. 아무 것도 없는 산골에 추방되다시피 모인 사람들이 잘 살리는 만무했다. 장 씨의 부모도 그렇게 옮겨온 농민이었다. 그런데 장 씨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컸다. 그가 태어난 지 몇 달 뒤 남편의 폭력적인 성향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장씨의 외가 역시 종성군의 농촌지역에 있었는데, 이모와 외삼촌 등이 사는 대가족이었다. 핏덩이를 안고 들어온 어머니는 신세를 질 수 없다며 눈만 뜨면 돈을 벌러 나갔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귀가한 때면 “남의 씨를 왜 우리가 키워야 하냐. 보내버리라”고 소리치기 일쑤였다. 어린 장 씨는 그 때마다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중국 출신인 외할머니만이 그에게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가 유치원 다니던 무렵 어머니는 멀리 장사를 나가 들어오지 않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7살 무렵에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매일 옥수수죽만 먹고 사는 가난한 삶은 견딜 수 있었지만, 학교에서 “부모가 없는 아이”라는 아이들의 놀림은 참기 어려웠다. 그때마다 장 씨는 이를 악문 채 주먹다짐을 일삼았고, 점점 학교에서 멀어져갔다.● 어머니와 두만강을 넘다장 씨가 11살이 되던 2008년, 얼굴만 어렴풋이 기억하던 어머니가 돌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은 어머니는 중국에 갔다가 체포돼 북송된 뒤 증산교화소에 끌려가 3년 넘게 수감생활을 했다.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곳에서 3년을 산 것은 기적에 다름아니었다. 다만 숨만 붙어있을 뿐 튼튼했던 몸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그래도 그는 집에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외할아버지의 팔자타령도 점점 커져갔다. 어머니가 집에 누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장 씨가 갑상선 관련 병을 앓게 됐다. 북한에선 이 병을 치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장 씨를 데리고 다시 중국으로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2009년 11월, 11살 장 씨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찬바람이 거세던 두만강 기슭에 섰다. 그곳에는 탈북을 꿈꾼 여인 서너 명도 있었다.북한쪽 브로커는 강을 건너면 중국에서 다른 브로커가 마중나올 것이라고 했다. 새벽 5시, 장 씨는 목까지 차오르는 강을 건넜다. 물이 너무 차가워 살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느껴졌다. 강을 건너자 기다리던 브로커가 그들을 빈집으로 데려가 말린 옷으로 갈아입혔다. 다음날 일행은 차를 타고 연길로 향했다.나중에 안 사실은 북에서 탈출한 이들은 브로커들에게 사람이 아닌 상품이었다. 연길 브로커는 빵을 하나씩 던져준 뒤 하루종일 전화통에 매달렸다. 중국에 가면 잘 먹을 줄 알았던 장 씨는 실망했다.며칠이 지나자 집으로 찾아온 남자들이 여자들을 이리저리 살펴본 뒤 브로커와 흥정을 했다. 같이 넘어온 여성들이 이후 하나둘씩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씨와 어머니가 남았다. 브로커는 어린 장 씨를 보며 “여자는 곱상하게 생겼는데 아들이 딸려 팔리지 않는다”며 툴툴댔다. 어머니의 결사적인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지만그를 떼어놓고 어머니만 팔려는 시도도 있었다.이런 모습들을 보며 장 씨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만 아니면 엄마가 좋은 곳에 갈 건데, 나는 여기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구나.”● 한족 마을에서의 삶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브로커가 화색이 가득한 얼굴로 집을 떠나자고 했다. 행선지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며칠에 걸쳐 기차나 버스를 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도시에 도착하자 브로커는 마중 나온 사람에게서 돈을 챙긴 뒤 사라졌다.장 씨와 어머니는 다시 낡은 버스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야만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색시를 사왔다”며 온 마을사람들이 쏟아져나와 장 씨 모자를 동물 구경하듯 살펴봤다. 집이라고 소개받은 곳은 창고에 가까운 시설이었다. 바닥은 흙이 그대로 드러났고, 지붕은 볏짚이 씌워져 있었다. 돈을 주고 어머니를 데려온 한족 남자는 키가 160cm도 되지 않는 왜소한 체격의 40대 중년 사내였다. 칫솔질을 해본 적이 없는지 말을 할 때마다 역겨운 입 냄새가 몇 미터 밖까지 풍겼다. 중국을 몇 번 왔던 어머니도 조선족 사회만 경험했기에 지금 처한 상황에 절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이런 인간에게 팔려왔구나.” 장 씨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창고 같은 집에는 한족 남자와 그의 누나, 누나의 남편, 아들, 며느리 등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어딘지도 알 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 온 마을이 감시병이라 도망갈 수도 없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장 씨 모자가 살던 곳은 중국 랴오닝성에서도 가장 외진 농촌마을이었다. 그곳에서는 옥수수와 고구마를 주식으로 먹었는데, 밥에다 종류를 알기 어려운 향신료를 넣었다. 그 탓에 장 씨는 구역질이 나 먹기조차 힘들었다.그마저도 몇 달이 지나자 한족 사내는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는 것이었다. 결국 장 씨는 13살이 되던 해 건설현장에 끌려나갔다. 하루 종일 벽돌을 날랐지만 북에서 왔다는 이유로 임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일하다 발을 다쳐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눈치 주기가 시작됐다. 다리가 낫자 이번에는 양계장으로 끌려갔다. 그에게 맡겨진 일은 닭똥 치우기였다.장 씨가 가끔 집에 돌아오면 다시 일을 나가 돈을 벌어오라는 독촉이 떨어졌다. 한족 사내는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장 씨에게 주먹을 날렸다. 중국에서도 그는 없어져야 하는 아이었다.한족 사내는 “네가 밟고 있는 땅이 너의 땅이 아니고, 지금 보고 있는 하늘도 너의 하늘이 아니다”며 소리쳤다. 그 때마다 장 씨는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후에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적잖았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한족 사내의 눈 밖에 나는 즉시 북송될 가능성이 컸다. 오랜 교화소 생활로 몸이 망가진 어머니는 북송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문제였다.장 씨는 이를 악물고 참다 견디기 어려우면 뒷산으로 올라가 눈에 보이는 대로 주먹으로 내리쳤다. “내가 비록 지금은 어리지만 커서 저것들을 때려죽일 거야.” 당시로서는 그가 울분을 삭이는 유일한 방법은 그뿐이었다.● 어머니를 업고 산을 넘다그런 생활이 2년 반쯤 지났을 때 그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그가 어렸을 때 탈북해 기억마저 희미했던 외삼촌이 한국에 가서 정착에 성공한 뒤 누나를 찾았고, 마침내 연락이 닿은 것이다. 2012년 여름 어느날 어머니가 장 씨에게 속삭였다. “이제 떠나자.” 온 마을이 잠든 새벽 모자는 집을 나섰다. 그의 나이 15살 때였다. 마음을 졸이며 걸어서 마을에서 벗어난 뒤 삼륜차를 얻어 타고 도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외삼촌이 주선한 브로커와 만난 뒤 또다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중국 국경까지 이동했다. 문제는 국경을 넘어가려면 높은 산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어머니가 산에서 쓰러졌다. 일행을 따라가기 어려워진 어머니는 “너라도 넘어가서 행복하게 살라”고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죽자”며 그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후 장 씨는 어머니를 업고 산을 넘었다.산을 넘고 국경을 건너 도착한 곳은 라오스였다. 라오스에서 다시 태국으로 들어갔고,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브로커가 가르쳐준 대로 주유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코리아, 코리아”라고 소리치니 경찰이 뛰쳐나왔다.경찰에게 체포돼 끌려간 감옥에서 모자는 갈라졌다. 일행은 다 여성들이었고, 장 씨만 남자였다. 그는 중국과 마약거래를 하다가 잡혀온 범죄자들과 2주 동안 같은 방에서 살았다. 이후 경찰은 이들을 다시 탈북민만 따로 수감시킨 감옥으로 데려갔다.100~130㎡ 크기의 공간에 100명이 넘는 탈북민들은 쭈르려앉은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어컨도 없이 천정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로 더위를 견뎌야 했다. 좁고 더운 감방에서 어른들은 수시로 싸웠다. ● 한국에서 찾아온 우울증한 달 정도 지났을 장 씨에게 한국행 순서가 돌아왔다. 한밤 중에 100명이 넘는 탈북민이 한꺼번에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들어서자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승무원의 안내말이 들려왔다. 순간 그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기내식은 그가 처음 먹어본 한국 음식이었다.이튿날 아침 일찍 비행기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일행 가운데 화장실을 이용한 사람들이 공항 화장실이 너무 깨끗하다고 소리치자 순식간에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장 씨도 화장실을 찾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조사기관과 하나원 생활을 거치며 6개월이 흘렀다. 장 씨는 그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밥도 맛있었고, 눈치를 볼 일도 없었다. 조사기관의 담당자 누나가 혼을 내고, 쌀쌀맞게 굴면서 남들에게 다 나눠준 빵을 그에게만 주지 않은 일이 유일하게 서운했다.하나원에선 기숙형 학교에 다녔다. 여짓껏 공부를 해본 적이 없던 장 씨에게 선생님이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3개월을 다니며 초등학교 졸업증을 받았다.2013년 초 장 씨는 어머니와 함께 경기도 용인시에 임대주택을 받고 하나원을 나섰다. 자유의 땅을 경험하자 그동안 모자를 휘감고 있던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가 끊어졌다. 악으로 버티던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 거리의 화려한 건물은 공포로 다가왔고 길가의 사람들은 두려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다시 쓰러졌다. 간도 안 좋고, 뼈도 안 좋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픈 어머니를 보면서 장 씨도 우울증에 빠졌다. 자유의 땅에 왔지만 정작 아무런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삶의 의욕을 잃고 방에 갇혀 지내던 어느날 밤, 그는 화장실을 가다가 거실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봤다. 아들을 살리겠다고 생각 하나로 중국에서 그 많은 수모를 겪은 어머니가 이제 의지할 것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한겨레중학교를 찾아가 기숙사 생활을 하며 1년 남짓 공부한 뒤 중학교 졸업증도 받았다.● 격투기에 빠지다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다고 느낀 그에게 운동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중국에서 마을 뒷산을 오르내리며 했던 것은 운동이 아니었다. 제대로 배우고자 체육관을 찾았지만 “나이가 많아 너무 늦었다”거나 “기본기가 모자란다”거나 “소질이 없어 어렵다”는 거절만 돌아왔다. 하지만 운동 이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를 만났다. 거기에서는 그에게 “할 수 있다”며 힘을 실어주었다. 꿈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날개가 새로 생긴 듯 기뻤다.2016년 그는 여명학교 학생이 됐다. 복싱 글러브를 처음 끼는 순간 벅차던 감정을 잊을 수 없다. 낮에 공부하고 저녁에 글러브를 낀 채 운동하고, 한밤에는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생활이 시작됐다. 스파링 도중 맞아서 코피가 터지고 멍드는 일상은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몇 십 배 더 고통스러웠던 중국의 추억과 멀어지는 일은 이것뿐이라며 참아냈다. 그러던 중 TV에서 종합격투기를 보게 됐다. 문득 “내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프로선수가 되면 뭔가 고독했던 삶에도 변화가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명학교 시절 그는 일반 체육관에 다니며 운동을 했는데, 어느 날 공중파 방송에서 연락이 왔다. 탈북청소년으로서 프로선수를 꿈꾸는 그가 특이했던 것이다. 그 방송에서 장 씨는 프로격투기 선수를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방송 후 몇 달 뒤 운동하는 그를 유심히 보던 사람이 “네가 방송에서 격투기 하겠다고 했던 애구나”라며 말을 걸어왔다. 이어 그는 장 씨의 몸을 이리저리 살핀 뒤 “신체가 나쁘진 않네. 한번 우리 체육관에 와봐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당시 19세였던 장 씨의 키는 174㎝였고, 온몸은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그는 격투기 소속사에 다니게 됐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가방을 싸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훈련생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체육관에 들어선 첫날 그는 맞는 것부터 배웠다. 1년 동안 코피가 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날아드는 주먹을 본능적으로 피하는 수준이 됐다.처음 관악산을 찾아 인터벌 훈련을 할 때는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파른 경사와 계단 200m를 전력 질주해 뛰어올라가는 과정을 17번 연속으로 해야만 했다. 일반인들은 한 번도 하기 어려운 질주를 장 씨는 첫날 이를 악물고 해냈다. 그리고 다음날 먹지도 걷지도 못했다. 고된 훈련이 끝난 그에겐 또 막내의 역할이 기다렸다. 체육관을 청소하고, 외지 훈련 때는 혼자서 고기를 굽고 설거지도 도맡아야 했다. 후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그보다 늦게 들어왔던 훈련생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나가기 일쑤였다. 대부분 내로라하는 특수부대 출신에 운동선수 경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매 맞고 목이 졸리는 격투기 훈련 과정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장 씨는 막내 생활을 3년이나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북에서 왔다는 이유로 남들은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스트레스도 겪어야 했다. “너는 북한 사람이라 이것밖에 못 한다”거나 “북한 사람이 이런 것도 잘 하느냐”, “빨갱이라 빨간 옷을 입느냐”는 등의 터무니 없는 말들이었다. 매일매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치솟았지만 스스로에게 질 수 없다는 각오로 견뎌냈다. 당시 그의 목표는 “하루만 버티자”였다. ● 두 개의 챔피언 벨트격투기 선수가 프로로 인정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아마추어 시합에서 3~4승을 해야 하고, 세미프로 경기에서도 다시 3회 승리를 거둬야만 한다. 2018년 니시카와 선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장 씨는 프로선수가 됐다.참고로 니시카와 선수는 이후 한국 선수와 다섯 번 더 경기를 했는데 모두 KO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글로벌 격투기 단체인 PFL로 건너가 프로 전적 20승 이상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결국 장 씨만이 그에게 유일한 KO패를 안긴 것이다. 프로 격투기는 다양한 레벨의 단체들로 구성돼 있다.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단체가 미국의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UFC)이다. 그리고 나라별로 다양한 격투기단체가 존재한다. 한국에는 로드 FC, TFC 등 약 8~9개의 단체가 있다.장 씨는 현재 한국의 떠오르는 신생 격투기 단체인 ‘블랙컴뱃’ 소속이다. 데뷔 전 승리 이후 지금까지 장 씨의 공식기록은 5승 3패 3무. 1년에 경기가 많지는 않다. 그래서 가끔 다른 경기도 뛴다. 장 씨는 2022년 9월 한국킥복싱협회가 주최하는 전국 킥복싱 대회에도 참가했다. 상대는 10승 1패의 전적을 가진 킥복싱 국가대표 선수였다. 하지만 종합격투기는 강했다. 장 씨는 주특기도 아닌 킥복싱에서 승리했고, 현재까지 한국 킥복싱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 7월엔 일본 격투기 단체 ACF가 주관한 대회에 참가해 웰터급 챔피언이 됐다.사람들은 그를 ‘탈북파이터’라고 부른다. 장 씨는 이를 내세운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두 개의 챔피언 벨트를 소유한 그가 항상 승승장구한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모든 운동선수에게 슬럼프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특히 지난해 어머니가 혈액암 진단을 받았을 때에는 훈련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슬럼프가 찾아온 지난해 2경기에서 2번 다 패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올해 3번 경기의 경기에서 그는 모두 이겼다.● 존재의 증명종합격투기 선수는 늘 배고픈 삶을 산다. 격투기엔 돈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UFC 경기에 출전하면 많은 ‘파이트머니(경기 1회당 받는 금액)’를 받을 수 있다. 나머지 하위 리그는 몇 달 준비해 출전해도 파이트머니가 많아봤자 수백 만 원에 불과하다.항암 치료 중인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한 비용 부담도 적잖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장 씨는 훈련이 끝난 뒤 일당직 노동이나 아르바이트도 한다. 그래서 모든 격투기 선수와 마찬가지로 장 씨도 UFC 진출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선 세계 최고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자신처럼 어려운 역경을 거쳐 탈북한 후배들에게 모범이 돼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격투기 선수의 전성기는 30세~33세 사이다. 나는 현재 27세로, 전성기를 맞지 않았다. 훗날 후회하고 싶진 않다. 탈북한 후배들에게도 하면 된다는 희망도 주고 싶다.”그는 요즘도 오전과 오후에 3~4시간씩 훈련한다. 예전 혀를 빼물어야 했던 관악산 인터벌 코스 훈련은 식은 죽 먹기다. 그래서 훈련 강도를 높여 낙하산을 뒤에 매달고 일주일에 1~2회씩 달린다. 그의 좌우명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해줄 뿐이다’는 니체의 말이다. 세계 최고의 격투기 괴물들만 모이는 UFC으로 올라가기 위한 벽은 매우 높다. 그가 그 벽을 넘어설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다만 장 씨는 이미 20대에 큰 자산을 쌓았다. 죽을 고비를 몇 번씩 경험했던 지나온 삶의 체험이다. 세계의 정상을 향해 온몸과 청춘을 불살라본 사람은 많지 않다. 격투기 선수의 최전성기를 지난다고 해도 그는 고작 30대 초반일 따름이다.북한과 중국에서 뼈저리게 ‘존재의 회의’를 느껴온 그에게 앞으로의 삶은 ‘존재의 증명’ 과정이 될 것이다. 20대의 장정혁은 이미 자신을 너무나 멋지게 증명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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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 국가대표를 꿈꾸던 북한군 민경병사, 한국에서 영화배우가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012년 8월 어느 날 오후 1시경. 북한군 2군단 소속 민경부대 병사 정하늘은 해발 700m 높이 산에 위치한 잠복초소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수십m를 내려와 쪼그리고 앉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함께 낮 근무를 나온 2년 선임은 그에게 경계를 맡기고 숲에 들어가 쿨쿨 자고 있었다.정 씨의 눈앞에는 남쪽 파주·연천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약간 돌리면 대성동 마을에서 펄럭이는 태극기가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이 보였다. 항상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가족이 걸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런데 지옥 같은 이곳의 생활을 앞으로 9년 이상 더 버틸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군에 온 지 1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불합리한 모습에 신물이 났다. 무엇보다 권력이 있고 돈 있는 집 자제들은 평양에서 근무하고 최전방에는 대부분 노동자나 농민의 자식들이라는 게 싫었다. 그나마 일부 있는 간부 자제들은 편안한 근무지에서 시간만 떼우고 있었다.이런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30분 넘게 갈등하던 그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가자, 가다 죽더라도 가자.”결정에는 당시 그가 근무하던 주변지역 환경도 영향을 미쳤다. 한 달 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카눈의 영향으로 탈북의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겨지는 2200볼트 철조망과 220볼트 철조망, 가시철조망 등이 모두 망가진 채 복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결심이 서자 정 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총과 수류탄 2발, 탄약 90발, 쌍안경 등 갖고 있던 장비를 모두 갖고 쓰러진 철조망을 넘어서기 시작했다.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이달 3일 그의 인생에 오래 기억될 큰 일이 또한번 펼쳐졌다. 이날 개봉한 영화 ‘탈주’의 엔딩크레딧에 정하늘이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올려진 것이다. 그것도 두번이나 나온다. 영화제작 자문과 단역출연자로서다. 올해로 30세. 길지 않은 그의 인생이 영화보다 더 많은 드라마로 채워진 사연을 들어봤다.● 태어나니 ‘장마당세대’정 씨는 전형적인 북한의 ‘장마당세대’이다. 1994년 그가 함흥에서 태어났을 때 김일성은 이미 죽었고,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된 시기였다. 당시에는 배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화학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직장을 죽을 먹으며 억지로 다녀야 했고, 어머니는 장마당에서 빵과 떡을 팔았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던 어머니는 그를 업고 장사를 했다. 그에게 영유아기가 장마당의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채워진 이유다. 4살이 넘자 업기 버거워진 그를 어머니는 집에 가둬두고, 장사를 나갔다. 소음 가득했던 세상이 순식간에 침묵과 고독으로 바뀐 것이다. 이때를 회상하면 단편적으로 하루 종일 부모가 돌아오는지 문 앞에서 기다리던 일, 들어오는 어머니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지 살펴보던 일들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떡장사를 할 때엔 죽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다행히도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시작한 신발장사로 형편이 나아지면서 그는 처음으로 쌀밥을 구경했다.7살이 되던 해 정 씨는 남들처럼 인민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엔 축구에 꽂혔다. 전교 1등을 하면 축구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부모님의 다짐을 받고, 공부에 매달려 최우수 성적을 받아냈다. 이후 정 씨의 삶은 축구로 채워졌다. 11살에 중학교로 진학해서도 축구부의 에이스였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가 보위부에 끌려가 밑천을 다 뺏기는 일이 터졌다. 이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그는 다시 죽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야만 했다. 돈이 없어 신발과 양말을 몇 번씩 기워신는 일도 이어졌다. 하지만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무엇보다 축구로 성공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면 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후 비행기를 타려면 외교관이나 체육인, 예술인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듣고, 그 중 가능성 있는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기로 맘을 먹었어요.”● 갑작스러운 군 입대2010년 졸업을 1년 앞둔 중학교 5학년이 되자 진로를 정할 시기가 왔다. 16살에 불과했지만 정 씨는 국가대표가 되려면 실력도 중요하지만, 부모의 권력과 재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지방 체육단에 가던가, 대학 체육학과에 진학하든가,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앞의 두 선택에는 많은 돈도 필요했다는 것이다. 현실을 깨달은 그는 쉽게 군에 입대하기로 맘을 먹었다. 이듬해인 2011년 3월 중학교를 졸업하자 친척 한 명이 1년 정도 운전을 배우고 군에 가면 운전병으로 편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심지어 자기가 관련 교육을 주선해주겠다는 제안하기도 했다.그 말을 믿은 그는 제법 동네에서 떨어진 산을 찾았다. 군 입대 전 부모님에게 소토지(개인 화전)라도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혼자 나무를 자르고 뿌리를 들어내고 풀을 뽑아 200평 정도 밭을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 당장 군에 입대하라는 연락이 왔다.결국 집에 돌아와 그는 곧바로 군복을 입어야 했다. 그런 모습에 어머니는 “군에 가는 다른 애들은 1~2년 전부터 보약을 먹이는데, 나는 1년 뒤에나 갈 줄 알고 아무것도 먹이질 못했다”며 눈물을 흘렸다.군 입소행 열차를 타는 날 아침 그는 가족에게 “영웅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했다. 군에 입대하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는 의례적인 인사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겐 죽은 영웅이 필요없다. 엄마에겐 아들이 필요하다”며 무사귀환을 신신당부했다. 어머니가 그에게 건넨 병사수첩에는 “달을 향해 쏜 화살이 달을 맞힐 수는 없지만, 땅을 향해 쏜 화살보다 멀리 간다”는 격언이 손글씨로 씌여있다. 정 씨는 이를 아직도 인생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그는 열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가장 환경이 열악한 것으로 알려진 강원도만 가지 않으면 좋겠다고 바람만 있었다. 다행히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듯 열차는 개성에 도착했다. 역사를 나서자 이전에 본적이 없는 글씨체가 씌어진 버스들이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개성공단 출퇴근 버스였다.● 영양실조와의 전쟁열차에서 내린 정씨와 동료들은 신병훈련소까지 꼬박 이틀을 걸어야만 했다. 연료난 때문에 신병들을 실어 나를 자동차마저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힘겹게 도착한 훈련소에서 직면한 현실은 처참했다. 2~3개월 먼저 입대한 신병들 대부분이 영양실조에 걸려 좀비처럼 보였다. 정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대할 때 62㎏이었던 몸무게가 3개월 훈련을 마친 뒤 45㎏로 줄었다.옥수수와 쌀이 7대 3 비율로 섞인 밥을 주었는데 늘 허기가 졌다. 자고 나면 광대뼈가 솟구친다는 말을 실감했다. 훈련도 고됐다.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굴러야 했다.주변 농장으로 모내기와 김매기 지원도 수시로 나갔다. 북한에선 중학교 3학년, 만 13~14세 때부터 1년에 두 달 정도 농촌동원을 다닌다. 그래서 일반 신병들은 모내기가 익숙하다. 그러나 축구부의 특혜로 농촌동원을 면제받았던 정 씨는 모든 일이 서툴렀다. 덕분에 구타를 당하기도 여러 차례였다. 논에서 다른 신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흙탕물에 쓰러져 매맞던 기억은 지금도 치욕처럼 가슴에 남아있다. 귀순 직후 받은 조사 때 “여기도 모내기를 해야 하냐”고 물었을 정도다. 조사관이 “그걸 왜 하냐”고 답변하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훈련 기간이 끝나고 8월이 되자, 함께 온 동료들이 하나둘씩 흩어졌다. 부대를 정하는 기준은 가축의 품종을 결정하는 일과 비슷했다. 대열참모가 와서 옷을 홀딱 벗기고 엉덩이를 살펴서 배치할 부대를 정했다. 엉덩이 골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가면 허약 1기, 2개가 들어가면 허약 2기, 3개가 들어가면 허약 3기로 나뉘었다. 허약 정도가 심할수록 약골로 판단돼 좋지 않은 부대로 배치된다. 몸무게가 45㎏에 불과했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정씨의 신체상황은 다른 신병들보다 나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군관을 따라 하루종일 길을 걸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2군단 산하 민경부대였다. 민경부대는 적들이 마주보는 곳에 위치한 부대라 체격이 좋은 사람들을 선별해 배치한다. 북한군에서도 에이스 중의 에이스만 갈 수 있는 곳이다. 과거 이곳에 오려면 신병 훈련만 따로 1년씩 받으며, 격술과 사격술을 연마해야 했다. 그런데 정 씨가 입대할 쯤엔 그냥 영양실조가 덜한 신병이 가는 곳으로 바뀌었다.중대에 도착하니 또 바지를 벗고 엉덩이를 내밀어야 했다. 훈련소에서 어느 정도 손상이 돼 왔는지를 판단하는 것 같았다.민경중대엔 보양소라는 시설을 자체 운영했다. 이곳에선 3개월 정도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먹고 재우기만 했다. 허약해진 신병들이 군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지다보니 부대에서 ‘살을 찌워 잡아먹는’ 묘책을 낸 것이다.나중에 북한군 최정예 부대로 불리는 민경부대도 정원을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대 정원 37명 가운데 8명 정도가 허약환자로 병원이나 보양소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김정일 사망일의 밥도둑2011년 12월 19일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때까지 정 씨는 보양소에 머물렀다. 갑자기 정오에 당장 모두 중대 교양실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매우 드문 지시라 병사들이 모두 어리둥절해 했다. 보양소로 다가가는 도중 갑자기 곡성이 터져 나왔다. TV에선 김정일 사망 소식을 눈물과 함께 알리는 이춘희 아나운서의 울음 섞인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순간 “지금은 울어야 하는 때”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일단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짜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침을 손가락으로 찍어 눈에 바르며 주변을 훔쳐봤다. 제일 목청껏 우는 사람은 중대 정치지도원이었다. 그리고 앞자리에 앉은 입당을 앞둔 고참들도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울음보다 걱정이 앞섰다. “김일성 사망되는 해에 태어났는데, 군에 나오니 김정일이 사망하는구나.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를 통일 병사라고 하더니 통일은 물 건너 간 것인가?”김정은 후계세습을 준비하던 2010년 북한은 국민들을 상대로 태양절 100주년(김일성 100번째 생일인 2012년 4월 15일)까지 조국을 통일하겠다고 선전했다. 그래서 정 씨가 군에 입대할 때 군 간부들은 “동무는 꼭 통일 병사가 될 거다”는 말을 격려사처럼 해주었다. 그런데 김정일이 죽었으니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던 정 씨는 문뜩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지금 밥시간인데, 오늘 점심은 물 건너간 건가. 배고파 죽겠는데”라는 짜증 섞인 푸념마저 떠올랐다. 2시간에 걸친 통곡시간이 끝나자 식사 모집 지시가 떨어졌다. 대열을 맞춰 식당에 도착한 순간 중대 정치지도원이 분노 가득찬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모두가 교양실에서 통곡하는 동안 누군가 몰래 식당에 숨어들어 4~5인 분량의 밥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원은 반드시 범인을 잡아내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CCTV 같은 시설이 없는 상황에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중대 본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김정은을 애도하기 위한 ‘서거장’이 만들어졌다. 아침, 저녁으로 대원들이 찾아가 애도를 표시해야만 했고, 돌아가며 경비도 서야 했다. 그해 겨울은 몹씨 추워 경비를 설 때마다 발이 꽁꽁 얼어붙기 일쑤였다. 정 씨는 경비를 설 때마다 화로에서 달군 돌을 들고 가 고참들에게 나눠줬다. 애도행사가 끝났을 때 정 씨에게 돌아온 것은 정치지도원의 구두표창(말로 칭찬하는 것)이었다.● 잠복 초소의 생활그때까지 보양소에 머물던 정 씨가 마침내 근무에 투입됐다. 민경중대는 소대별로 두 달 근무를 서고, 한 달 쉬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3개 소대 가운데 두 개 소대가 걸어서 2시간 정도 걸리는 산꼭대기 초소에 올라가 두 달을 근무하고, 나머지 1개 소대는 중대 본부에서 휴식을 취하는 식이다. 정 씨는 처음 초소에 올라갔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눈앞에 불바다가 펼쳐져 있었어요. 북한은 깜깜한 암흑인데, 앞쪽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야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야간 잠복은 3인 1조로 나갔다. 여름은 짧지만 겨울은 오후 5시 30분에 나가 이튿날 오전 6시까지 12시간 넘게 잠복초에서 교대 없이 머물러야 했다. 추위에 동상을 입는 군인이 부지기수였지만 웬만한 동상은 병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여름철 야간 잠복 때엔 모기와의 치열한 전쟁이 펼쳐졌다.잠복초에서 웅크린 채 근무를 서는 일을 10년 정도 하면 관절이 상하지 않는 병사가 없었다.잠복초는 100m에 하나씩 있는데, 정 씨의 중대가 담당한 잠복초는 20개였다. 결국 중대가 담당해야 할 구역이 2㎞에 달한다는 뜻이다. 저녁마다 들어갈 잠복초는 상황에 맞게 정해졌다.정 씨는 첫 잠복근무를 마친 뒤 앞으로 10년 동안 같은 생활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당에서 2012년 4월 15일까지 통일을 시킨다고 선전했으니 그날까지 뭔 일이든 일어나겠지. 통일은 안 된다 쳐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연다고 했으니 뭔가 달라지진 않을까. 그때까지 버티는 것이 1차 목표다.”17세에 통일 병사의 꿈을 꾸었던 정 씨에게 그 이상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쌀밥과 이따끔씩 나오는 닭고기나 콩기름, 간식거리인 건빵과 사탕 몇 알 등은 어린 병사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게 하는 위안거리가 됐다.● 미스터리한 한국그렇게 시간은 흘러 마침내 기다리던 4월 15일이 됐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때 정 씨는 노동당의 선전은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쯤 그는 한국에 대한 적잖은 정보도 접하게 됐다. 잠복근무가 끝나고, 낮에 땔감 나무를 하기 위해 숲을 돌아다니다 접한 삐라가 주된 정보원이었다.“삐라를 많이 봤습니다. 그중 ‘김정은이 이마가 좁아 나라 망칠 관상’이란 게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군요.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고, 수림이 울창하다는 내용의 삐라도 있었습니다. 세상에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10위권이라니, 거짓말이구나 싶었습니다.”그렇게 접한 삐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지만 그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밤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남쪽의 불야성이었다. “남쪽 철조망의 불빛이 북쪽까지 옵니다. 우리가 밤에 감시대에 서있으면 그림자가 벽에 생겼으니까요. 전기가 풍족한 것을 보니 멀리 자동차의 불빛 흐름도 거짓은 아니겠다 싶었습니다.”상관들은 전방의 대성동 마을은 북한처럼 선전마을이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말을 곧이 믿고, 낮에 일하는 모습을 봐도 선전용으로 동원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쌍안경을 통해 대성동에 위치한 한 가옥에서 TV를 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이때부터 그는 대성동에 사람이 살고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한국에 오기 전까지도 미스터리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었다. 밤이 되면 남쪽 하늘에서 불이 깜빡깜빡하는 것이었다. 낮에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밤에만 보였다. 한국에 와서야 항공충돌방지 조명임을 알았다.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중 분계선 철책과 지뢰밭을 다 망쳐놓은 태풍 카눈을 만나게 됐다.마침 같이 나온 선임도 쿨쿨 자고 있었다. 경계가 가장 약한 정오였다. 정 씨는 철책선을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머리 위로 스쳐간 총탄무너진 철책을 넘어서자 울창한 갈대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갈대밭을 지나면 강이었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으로, 중간에 군사분계선이 있다. 다른 중대의 관할지역이라 정 씨는 강의 이름도 몰랐다. 다만 강을 따라 내려가면 남쪽이 나온다는 사실만 알았다.갈대밭에 뛰어드니 가시넝쿨이 빼곡했다. 살이 찢기고 옷이 찢겨져 나갔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몸이라고 생각했다. 지뢰를 피하기 위해 짐승 발자국을 찾아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 때 자고 있던 선임이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한참을 숨죽이고 있었다. 이후 다시 조심조심 움직였지만 오전 5시경 다른 북한군 초소에서 그를 발견했다.대각선 방향으로 있던 초소는 약 7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서라”고 외친 뒤 총을 쏴댔다. 한국에 당도해서 들으니 그렇게 발사된 총탄은 모두 12발이었다.총소리를 듣자마자 갈대밭에 납작 엎드렸다. 순간 한 발이 머리 위로 ‘피융’하는 소리와 함께 지나갔다. 그가 엎드린 옆으로 총알이 박히기도 했다. “이제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나온 인생사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후회가 밀려들자 이제껏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는 신을 찾았다.그런데 북한군 추격조의 움직임이 보이질 않았다. 갈대밭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지뢰밭이라 공병의 도움 없이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어두워진 뒤에도 총성은 울렸다. 바스락 소리가 나는 곳으로 북한 병사들이 총을 쐈기 때문이다.정 씨는 어둠을 이용해 강을 건너가려 했다. 하지만 거센 물살에 몇 번을 시도하다 포기했다. 대신 강을 따라 그냥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 지쳐 뭍에 오른 뒤 긴장이 풀어지면서 쓰러지듯 누워 잠에 빠졌다. 정신없이 잠을 자다 바스락 소리에 눈이 떠졌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수류탄을 꺼내 핀을 뽑았다. 고라니 한 마리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인만 몰랐던 생사의 순간다시 강에 뛰어들어 내려가다 물이 얕아 보이는 곳을 찾았다. 마침내 찾은 곳은 진흙펄이었다. 온몸이 쑥쑥 빨려 들어갔다. 죽음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때 나무 가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걸 잡고 살살 잡아당기면서 겨우 몸을 빼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쉬다보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강 옆에 떠내려 온 옥수수로 허기를 채웠다. 그 때 나무통도 보였다. 먹을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반갑게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목함지뢰였다. 물에 떠내려 오면서 망가져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다시 강에 뛰어들어 내려가다 보니 한국군 초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즉시 강기슭으로 올라 품속에 숨겨뒀던 사품용 비닐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바늘과 실, 목달개, 거울이 있었다. 북한군들은 도난 방지를 위해 늘 이 주머니를 품에 차고 다닌다. 그만큼 물자가 귀했기 때문이다. 신병 시절 중대원 하나가 바늘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바늘 도둑을 찾겠다며 지휘관은 대원들을 마당에 모아놓고 40분 동안 꽁꽁 언 땅에 주먹을 대고 엎드리게 하는 얼차려를 주기도 했다. 정 씨는 강기슭에서 옷을 씻었다. 그리고 새 목달개를 꺼내 군복에 달았다. 찢긴 군복도 기웠다. 한국군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싫었기 때문이다. 군인 대 군인으로 만나고 싶었다. 군모도 각을 잡아 쓰고 싶었지만 물에 흠뻑 젖은 상태라 생각대로 모양이 나질 않았다. 군모는 결국 강에 던져버렸다.그렇게 옷매무시를 단장한 그는 비닐주머니를 흔들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가 강 중간에 다달았을 때 한국군들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정확하진 않았지만 무기를 버리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총과 수류탄, 쌍안경 등을 버렸다. 더 이상 무기는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을 건너자 군인들이 그를 초소로 데려갔다. “귀순하려 왔냐”는 질문에 머리를 끄덕이자 한 군인이 “귀순을 환영합니다”고 했다. 억양은 좀 낯설지만 같은 말을 하는 곳에 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왔구나.” 마음이 진정되자 주변에 눈길이 갔다. 맨 처음 든 생각은 놀라움이었다. 한국군의 군복과 장비가 너무 좋은 데다 초소까지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배가 너무 고팠다. 먹을 것을 기대했지만 전화기 건너편 한국군 상관은 아무 것도 주지 말고 빨리 지휘부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지휘부에 가서야 간단한 조사와 함께 치킨 스프를 먹을 수 있었다.조사관 한 명이 물었다. “아직도 북한군은 강냉이밥을 먹습니까.” 그닥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정 씨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우리가 먹는 것까지 알지?”나중에 들은 사실은 한국군이 오래 전부터 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또 그가 탈북한 이튿날 북한군이 비무장지대에 수색조를 파견해 추격전을 진행 중이었다. 조금만 지체해도 북한군에게 사살될 수도 있었던 긴박한 상황에서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겠다고 바느질에 몰두했던 것이다.그의 귀순을 유도한 사단은 정 씨의 귀순사례를 ‘무결점 귀순자 유도작전’으로 평가하고 10년 넘게 이를 기리고 있다. 정 씨를 무사히 인도한 공으로 해당 사단은 2013년 대통령 부대 표창, 2012년 합동참모본부 전투준비태세 최우수부대 표창을 받았다. 정 씨가 강에 던진 소총과 수류탄 등은 나중에 모두 빠짐없이 회수됐다. ● 한달 만에 29㎏ 늘어이후 정 씨는 합동조사기관으로 이송됐다. 도중에 눈에 띈 한국 거리는 그가 초소에서 쌍안경으로 지켜봤던 것보다 훨씬 황홀했다. “이것이 다 가짜가 아닌 사실이구나.”멀미를 느껴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같이 가던 사람이 메로나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다. 정 씨는 한국 정착 이후 7~8년 동안 메로나만 먹었다.조사기관 건물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몇 년 뒤 다시 가보니 낡은 건물이었는데, 아직 한국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정 씨의 눈에는 별궁이나 다름없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에 가니 너무나 맛있는 밥이 나왔다. 김치와 된장국을 보고 그는 엉엉 울었다. 군에 입대한 이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김치였다. 조사기관에선 밥도 양껏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매 끼니 두 식판씩 밥을 먹었다. 천하장사 소시지를 즐겨 찾자 아예 박스채 주기도 했다. 그 결과 몸무게가 뻥튀기처럼 늘었다. 탈북 직후 43㎏에 불과했던 정 씨의 몸무게가 조사기관에서 보낸 한 달만에 무려 72㎏가 된 것이다. 마치 부종이 온 것처럼 보였을 정도였다.조사를 받는 동안 놀란 일 가운데 하나는 탈북민이 무척 많다는 것이었다. 조사관에게 “나 말고 몇 명이나 더 넘어왔냐”고 물었더니 “2만 3000명”이라는 수치를 들려줬다. “거짓말 마십시오. 제가 근무 설 때 넘어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언제 그렇게 많이 왔다고 그럽니까. 어디로 왔는데요”라고 되묻자 “중국을 통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서야 그는 처음으로 북한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사를 마친 뒤 하나원에 들어가자 훨씬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다. 다른 탈북민들과 어울릴 수도 있었다. 오랫동안 축구선수 생활을 했던 그는 하나원에서 인기 스타가 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천국에 온 걸로 여겼다. 사회에 나가면 어떤 고난이 닥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방황의 시간들2013년 1월 머물 집도 배정받지 못한 채 그는 하나원을 나와야 했다. 귀순병사였지만 만 19세가 되지 않았기에 임대주택 입주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다. 탈북민은 만 20세가 돼야 임대주택을 받을 수 있다. 처음 한달은 하나원에서 알게 된 ‘삼촌’의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눈치가 보여 오래 살 순 없었다. 할 수없이 기숙형 대안학교를 찾아가 의탁했다. 하나원을 나와 생소한 사회에 던져졌지만, 그를 이끌어줄 멘토는 없었다. 방황이 시작됐다. 처음엔 인터넷에서 접한 축구게임에 빠져 지내다 6개월 뒤 친구를 따라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처음 작업장에 갔을 때 그는 사람들이 기계처럼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자본주의 사람들이 일을 훨씬 더 잘하는구나.” 첫 아르바이트는 오후 8시에 시작해 오전 6시 반에 끝났다. 첫날 일하고 나니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급여는 세후 230만 원으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3개만에 그만 뒀다. 일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너무 외로웠다.이후 그는 건설현장, 닭 도살장 등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렇게 1년쯤 목적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한 지인이 신학교를 추천해줬다. 그런데 그마저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특히 새벽잠이 많은 그에게 신학교의 새벽 기도는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결국 그곳에서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나왔다. 건설현장을 전전하는 삶이 다시 시작됐다.만 20세가 넘은 2015년, 그는 마침내 임대주택을 배정받았다. 보금자리가 생기자 안정적인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처음에 끌렸던 일은 항해사였다. 배를 타면 전 세계를 누빌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항해학교에 입학도 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6개월 동안 해외로 나다니다 보면 아내가 바람이 난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학교를 포기했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경비회사에 취직했다. 나름 적성에 맞는 했지만 6개월 쯤 지난 어느날 “내가 여기에 경비나 서려고 왔냐”는 생각에 포기했다. 그렇게 방황을 거듭할 때 또다른 지인이 “성경을 100번 읽으면 미국 신학교에 보내주는 선교단체가 있는데, 들어가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비행기를 타는 어린 시절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경기도 포천에 있는 수련원에 입소했다. 그곳에서 10개월 동안 성경 80독을 했을 때 미국에 보내준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듣게 됐다. 망설임 없이 뛰쳐나왔다. 한국에 온지 4년이 되던 2016년 그는 마침내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유럽 지역에 선교여행을 가면서 그를 일행에 포함시킨 것. 여권을 받았을 때 그는 드디어 인생의 목표를 이루었고 성공한 삶이 됐다고 감격했다. 하지만 막상 비행기에 타고 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그냥 여행수단의 하나일 뿐”임을 깨달은 것이다. ● 촬영현장에 가다그렇게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방황하다 2017년 그는 대학을 가기로 했다. 그리고 1년 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2018년 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에 정착한 지 5년 만의 일이다.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해외여행을 즐겼다. 외국은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다녀온 나라는 무려 20개가 넘는다.그 중에 미국도 있었다. 미국에 가보니 사람들이 너무나 신사다웠다.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해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북한군 최전방에서 ‘승냥이 미제를 타도하자’고 외치던 소년병사는 미국에서 “인간이 승냥이가 되는 나라가 있다면 그건 북한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치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국회 인턴 생활을 겪어본 뒤 포기했다.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기자 생활도 잠시 꿈꿨다. 그러나 지인 중 기자로 사는 형이 매일 술에 빠져 지내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사업가도 해보고 싶었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2020년 탈북민 커뮤니티에 유튜브 채널 개설이 유행처럼 확산됐다. 한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에 1년 늦게 귀순한 친구와 함께 ‘북시탈’이란 제목으로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구독자도 쑥쑥 늘었다.2021년 12월 그에게 한 통의 이메일이 날라들었다. 북한 관련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자문을 해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그를 알아본 영화제작자들이 보낸 것이었다.영화의 주인공으로 이제훈 배우가 내정돼 있었다. 파파로티라는 영화를 보고 이제훈의 팬이 됐던 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그렇게 영화사와 인연을 맺은 뒤 1년 반 동안 북한군 말투 등을 자문해주었다. 일하는 동안 좋아하는 배우와 함께 영화를 만드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갖게 되니 비현실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그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까지 했다. ‘소총남1’이 그가 연기한 인물이다. 북한 내부 저항세력의 두목 역할인 배우 이솜 옆에서 총을 쥐고 있는 청년 역할이다. 그렇게 그가 자문하고 출연한 영화 ‘탈주’는 올해 7월 드디어 개봉됐다.“영화에서 묘사된 북한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건 감독의 영역이라 제가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죠. 저는 촬영현장을 다니면서 영화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영화배우의 꿈영화를 찍으면서 그는 영화계에 진출하기로 진로도 정했다. 감독도 좋지만 좀 더 끌리는 일은 배우였다. 영화계에서서 이름을 알리는 일은 낙타가 바늘을 뚫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도 이런 사실을 잘 알지만 영화를 찍을 동안 느낀 재미와 행복을 잊을 수가 없었다.지난해엔 모 단체에서 예산을 받아 단편영화 ‘두 병사’를 찍기도 했다. 북한군 시절 겪었던 불합리한 일들을 담은 것으로 23분 분량이다. 올해 1월 시사회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목숨을 걸고 탈북을 결정한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2년 넘게 영화계 일을 하면서 쌓은 친분 덕분에 이런저런 일감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내년 4월에 대학 때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할 예정이다. 그녀는 해보고 싶을 때 한 번 도전하라며 정 씨의 꿈을 적극 응원한다.그는 이제 자신이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고 자평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뿌리는 더욱 단단해질 것으로 믿는다. “저는 아직 젊습니다. 도전할 여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되면 하고 싶은 꿈도 생겼습니다. 평양영화연극대학 교수, 더 나아가 총장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잘 배워서 나중에 북한 젊은 친구들에게 영화는 이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싶습니다.”올 여름 그는 분계선에서 지뢰작업을 하다가 폭발사고로 실려 가는 북한군 사진을 보며 너무나 안타까웠다. 발목이 잘린 병사가 그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편으로는 지옥의 땅을 벗어난 자신이 대견했다. 그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철책선을 앞두고 몇 년 전의 자신처럼 잠복근무에 시달리고 있을 북한군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바로 최전방에 나가 ‘너희가 독재의 노예로 살고 있을 때 목숨 걸고 그 삶을 뿌리친 이 선배는 자유의 땅에서 자유로운 창작을 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고.”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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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탤런트 페어 다음달 개최… 산업부-고용부 주최 KOTRA 주관

    국내 최대 규모 채용 박람회 ‘글로벌 탤런트 페어’가 8월 27, 2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고용노동부가 공동 주최하고 KOTRA가 주관하는 글로벌 탤런트 페어는 청년 구직자 해외취업관과 외국투자기업 채용관, 외국인 유학생 채용관으로 구성된다. 이번 박람회에는 글로벌 기업 120개사, 외국인 투자기업 180개사, 유학생 채용 기업 100개사 등 400개 구인 기업이 참가할 예정이다. 올해 참가 기업들은 약 3000명을 모집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엔지니어, 영업, 연구개발 분야 기업들이 대규모 채용 의지를 밝혔다. 반도체, 전기차, 바이오 같은 첨단산업 기업도 대거 참가한다. 외국투자기업 채용관에는 미국 반도체 제조 장비업체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 독일 헬스케어 기업 지멘스가 참가하며 해외취업관에는 일본과 미국계 소프트웨어 및 서비스 기업들이 참가한다. 외국인 유학생 채용관에는 이차전지 업체 에코프로비엠, 전자부품 회사 이수페타시스 등이 전문 인력 확보에 나선다. 이 같은 기업 채용관 외에도 청년 취업 역량 강화를 위한 ‘잡콘서트’(기업 채용설명회, 취업 특강) ‘일대일 취업 컨설팅’(외국어 이력서 첨삭, 모의 면접) 같은 취업 관련 다양한 부대행사도 진행된다. 취업시장 분위기를 알아보려는 글로벌 인재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 채용관에서 현장 면접을 희망하는 글로벌 인재는 이달 중 홈페이지에 등록 후 이력서를 제출하는 것이 좋다. 접수 마감일은 다음 달 5일이지만 인기 기업 면접과 부대행사는 빨리 마감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김지엽 KOTRA 글로벌인재센터장은 “슬로건 ‘We’re Already Global’처럼 우리나라 청년들은 높은 글로벌 마인드와 성실함을 갖춘 글로벌 인재로 인정받고 있다”며 “지역이나 스펙보다 구직자 실력을 중시하는 글로벌 취업시장에 적극 도전해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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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버림받은 북파공작원과 북한 ‘휴민트’

    한국에 온 직후 북파공작원 시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위가 과격해서가 아니었다. 북한에서 남파공작원은 거의 ‘신’급 예우를 받는다. 전사하면 자녀는 혁명가 유자녀 학원에 보내 간부로 키워지고, 가족도 죽을 때까지 국가가 보살핀다. 내가 살던 북한 마을에도 1960년대에 아들이 남파됐다 죽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명절마다 중앙에서 일반인은 구경도 못 할 남방과일이나 옷감 등이 선물로 전달됐다. 그런데 남쪽은 공작원들이 가스통을 들고 거리에 나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호 전 의원이 2022년에 낸 책 ‘북파공작원의 진실’에는 이들이 왜 가스통을 들고 나와야 했는지가 잘 설명돼 있다. 1951년부터 2002년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1만1273명. 이 가운데 7987명이 돌아오지 못했지만, 희생자 중 훈장을 받은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훈장은 후방 사령관이나 장교들이 먼저 챙겼다. 북파공작에 뽑힌 고위층 자식도 전무했다. 공작원 모집 과정도 전부 사기였다. 많은 돈을 주고, 좋은 직장도 주고, 장교로 임명하겠다는 등 각종 감언이설이 동원됐다. 하지만 실제 약속이 지켜진 적은 없었다. 특히 6·25전쟁이 끝나고 20년 가까이 북파공작원은 쓰다 버리는 소모품이었다. 살아 돌아오면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침투시켰다. 임무 중 죽으면 비밀도 지키고, 보상할 일도 없고, 지휘관은 훈장도 받을 수 있었다. 감언이설을 동원한 공작원 모집은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 국가가 사기를 친 것이다. 2004년에야 ‘특수임무 유공자 보상법’이 제정돼 6000여 명의 북파공작원에게 평균 1억 원 남짓의 보상이 돌아갔다. 이제는 북한으로 공작원이 가진 않는다. 그 대신 21세기의 대북 첩보는 ‘휴민트’라고 불리는 포섭된 북한 사람이나 탈북민이 대신한다. 그럼 과거 공작원에게 사기를 쳐왔던 정보기관의 ‘전통’도 바뀌었을까. 몇 년 전 탈북해 서울에 정착한 북한 고위급 A 씨는 체제에 대한 불만을 안고 살던 중 해외에서 한국 정보기관에 포섭된 사례다. 배신을 막기 위해 태극기 앞에서 선서까지 시키고 사진을 찍어갔다. 모멸감이 들었지만 참았다. 중요한 비밀들을 정보기관에 제공하던 중 북한에 적발될 위기에 처한 그는 탈출했다. 그런데 막상 서울에 와 보니 그에겐 어떠한 보상도 없었다. 그를 포섭할 때 했던 달콤한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가게를 얻어 장사를 했지만 이마저도 불경기로 접어야 할 상황에 처해 이민을 알아보고 있다. 그의 바람은 단순하다. “한 달이라도 국가가 임명해주는 직책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뭐가 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언론에 노출된 외교관 2∼3명에게만 국책연구소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무슨 위원이란 직책을 받은 사람은 일부 있지만, 비상임직이어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북한에선 돈도 못 벌고, 규율생활을 해야 하는 외교관보단 해외에 파견돼 외화벌이나 무역업 등에 종사하는 직책의 인기가 더 높다. 또 북한의 각종 불법 행위에 대한 정보도 더 많이 안다. 하지만 이런 신분의 엘리트들은 서울에 오면 개밥에 도토리 신세로 전락해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제 대량 탈북 시대는 끝났다. 지난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중 북한에서 곧바로 탈북해 온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다. 결국 앞으로 북한 정보를 얻으려면 북한 해외 일꾼들을 포섭해야만 한다. 탈북해 한국에 올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도 이들이다. 그러나 외교관 이외에 어떠한 대우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굳이 위험한 일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북한에서 잘나갔고, 여기에서도 일반 탈북민에 비해 특별 대우를 받는 일이 혹자에게는 정의롭지 않게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북 정보력을 키우려면 이들을 활용해야만 한다. 가령 대한민국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북한 고위 엘리트들을 모은 국책연구기관을 하나 만드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북파공작원 대신 북한 엘리트가 소모품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줘야 한다. 먼저 온 이들이 후배들에게 “우린 속았으니 너흰 절대 속지 말고 한국에 오지도 말라”고 한다면, 대통령이 7월 14일로 정한 ‘북한이탈주민의 날’에 어떤 말을 해도 그 의미는 퇴색될 것이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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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세 북한 광산 여공, 통일 연구하는 국책연구원이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003년 7월 31일. 태국 방콕 주재 일본대사관에 아이 두 명을 포함한 탈북민 10명이 진입했다. 탈북민이 중국이 아닌 나라에서 현지 외국 대사관에 진입한 최초의 사건이었다.이들은 일본에 망명 요청을 했지만, 일본 정부가 불허하면서 8월 23일 한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 내린 이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얼굴을 숨기기에 바빴다. 그런데 남자 아이의 손을 잡은 한 여성만은 달랐다. 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얼굴을 내밀고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2023년 12월 이 여성은 박사가 돼 통일연구원에 당당히 입사했다. 국무총리 산하 국책연구기관에 공채로 채용된 제1호 탈북민이라는 기록도 세웠다.통일연구원 인권연구실 조현정 부연구위원(49)의 얘기다. 북한에서 태어나 한 달도 안돼 고아원에 보내졌고, 16세에 광산노동자가 됐던 그의 운명은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바뀌었다.● 생후 보름 만에 고아원으로조 씨가 태어난 곳은 북한 북부의 무산군이다. 1975년 무산광산 노동자 부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보름 만에 고아원에 보내졌다. 어머니가 출산과 동시에 개방성 결핵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흔히 1970년대는 북한이 한국보다 잘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때에도 이미 북한 사람들은 생활은 넉넉지 않았다. 매일 도시락까지 싸서 출근하기엔 배급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조 씨의 어머니는 남편에게만 도시락을 보내고, 자신은 빈 도시락을 들고 출근했다. 임신하고도 그런 생활이 이어졌다. 결국 어머니는 임신 중 영양상태가 악화되면서 감기에 걸렸고, 곧바로 개방성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떨어진 조 씨는 어머니 젖을 먹을 수가 없었다. 분유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외할머니가 아이를 들쳐업고 젖동냥을 다녔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가족들은 토론 끝에 아이를 도소재지에 있는 나남애육원(고아원)에 보내기로 했다.13개월 뒤 애육원을 찾았던 외할머니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애육원에서 제대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한 아이는 제대로 앉지도 못했고, 뒤통수에는 머리카락도 자라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둬도 죽고, 데려 가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외할머니는 절망의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애를 끓이다 할머니는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당시 외할머니는 무산광산의 한 직장에서 미장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이를 업고 매일 출근했다. 미장공은 단독 작업이 가능해 아이를 작업장 옆에 눕혀놓고 일한 것이다.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조 씨는 어린 시절 주말마다 외할머니와 함께 어머니가 격리돼 있던 결핵요양소로 면회를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요양소에는 결핵에 걸린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10살도 안돼 떠난 부모조 씨의 아버지는 목공기술자였다. 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평양시 보통강구역였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로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온 가족이 하루아침에 아오지탄광으로 추방됐다. 아오지탄광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손재주를 인정받았고, 사정이 조금 나은 무산광산으로 이송됐다. 그리고 무산에서 조 씨의 모친을 만나 결혼했다.조 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하는 목공소를 가끔 따라 갔다. 그러다 4살 때 큰 일을 당한다. 호기심에 돌아가는 기계톱을 만졌다가 엄지손가락을 포함해 오른손 손가락 2개가 절단된 것이다.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요양소에 있던 어머니가 완치되지 못한 채 그가 6살 때 돌아가신 것이다.어머니가 숨진 뒤 두 달쯤 됐을 때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왔다. 이어 담요 두 장과 그릇 두 개만 주고 조 씨와 외할머니를 집에서 몰아냈다. 쫓겨난 조 씨는 외할머니와 함께 인근 마을의 허름한 집을 수리해 살아야 했다.그런 수모를 당했어도 외할머니는 “내가 죽으면 그래도 너에게 남은 것은 아버지 뿐”이라며 “자주 가서 아버지와 친분을 쌓으라”고 종종 조 씨를 부친의 집에 보냈다.어렸을 때는 시키는 대로 했지만, 새엄마의 냉대는 어린 나이에도 참을 수 없었다. 다섯 번 정도 아버지를 찾은 뒤 발길을 끊었다. 그렇게 조 씨는 10살도 안 돼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유일한 보호자였던 외할머니는 그가 열 살 때 연로보장(정년퇴직)으로 퇴직했다. 이후 조 씨는 외할머니가 시장에서 소소한 장사로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야만 했다.● 좌절된 교사의 꿈조 씨는 “부모없는 아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 열심히 공부했다. 또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토끼가죽이니 폐지, 폐철 등도 제일 열심히 챙겨갔다. 그런데 아무리 성적이 우수해도 그가 원했던 학급의 핵심 간부가 될 수 없었다. 학생 간부 자리는 부모의 권력 순으로 배정됐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도 “이 사회는 돈과 권력이면 다 되는구나”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중학교 때는 가수의 꿈을 품고 학교 음악부에 뽑혔지만 한 달도 안돼 쫓겨났다. 손가락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탓이다. 10대의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충격이고 절망이었다.평소에 공부를 잘했던 터라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교원이 되는 것으로 꿈을 바꿨다. 하지만 그가 대학 시험을 치를 때 외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뒷바라지 없이 대학에 다니는 것은 불가능했다. 외할머니도 돌봐야 했던 조 씨는 결국 선생님의 꿈을 접었다.조 씨는 1991년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졸업한 남자들은 군에 가고, 여자들은 무산광산으로 보내졌다. 조 씨는 광산 검사과에 배정됐다.그에게 맡겨진 업무는 마광기(광석을 잘게 부수는 기계) 3,4대를 대상으로 1시간마다 한 번씩 철정광과 미광의 철성분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8시간 일을 하고 퇴근하면 병상에 누워있는 외할머니를 돌봐야 했다. 손녀의 극진한 간호에 외할머니는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호전됐다. 다만 안면마비는 고치지 못했다. 당시 조 씨의 소원은 외할머니에게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대접하는 것이었지만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무산광산 사람들은 배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소소한 장사와 소토지 농사를 지어 식량을 조달했지만, 1995년 집에 도둑이 들어 모든 식량을 털어갔다. 살길이 막막했다.● 22세 첫 탈북하지만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었다. 직장에서 만난 친한 언니의 부모가 조 씨를 좋게 봤고, 그를 며느리로 삼고 싶다고 했다. 그 집안은 중국에 친척들이 많아 풍족하게 살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조 씨는 20세에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을 하고나서야 외할머니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대접하고 싶다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듬해 7월 아들도 태어났다.결혼으로 굶어 죽을 걱정은 덜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삶이 지옥으로 바뀌었다. 풍족하게 자란 남편은 뇌물을 주고 무단결근하면서 술과 도박, 폭력을 일삼았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중국 친척집에 말해줄테니, 중국에 건너가 돈을 벌라”고 했다.그렇게 조씨는 1997년 8월, 13개월 된 아들을 업고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외할머니는 친척집에 맡기고 “꼭 돈을 벌어올 테니 석 달만 좀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헤어지기 전 두부밥 2개를 사드린 것이 외할머니와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큰 결심을 품고 중국에 갔지만, 불법체류로 아이까지 있는 여성에게 일자리가 생각처럼 쉽게 생기지 않았다. 두 달 정도 연길에 머물다가 시댁의 다른 친척이 사는 흑룡강성에 들어갔다. 거기서 농촌에 자리를 잡고 막 돈을 벌려는 순간 북한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떠나고 얼마 안 돼 외할머니가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빨리 돌아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조 씨는 지금도 외할머니만 떠올리면 죄책감 때문에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를 대신해 키워준 외할머니에게 효도하려했던 선택했던 방법이 불효의 길이 된 것 같아 평생의 한으로 남게 됐다. 외할머니가 돌아가니 이젠 북으로 돌아갈 이유도 사라졌다.중국에서 조 씨는 1997년 한반도의 이슈였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때 “여기서 언제 잡혀갈지 몰라 숨을 죽이고 살 바에는 한국에 가자”는 결심이 섰다. 하지만 어린 아들을 데리고 쉽게 떠날 용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당시엔 중국에 있는 탈북민들이 한국으로 가는 방법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중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오래되면서 조 씨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탈북민들도 알게 됐다. 1년쯤 지나니 한국으로 가려는 탈북민이 11명이 모였다. 그중에는 조 씨의 남편과 시동생 두 명도 있었다. 남편은 아들을 찾겠다고 중국으로 따라들어온 것이다.● 북송 이후 받은 10년형1998년 말 이들은 나침판과 지도를 사들고 중국 남부의 난닝으로 간 뒤 라오스로 넘어갔다. 동남아를 통해 한국으로 오는 길은 2000년 이후부터 개척됐다. 그 이전까지 동남아 각국은 탈북민을 잡아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냈는데, 라오스도 다르지 않았다.라오스에서 중국으로 송환된 뒤 수감된 난닝감옥에서 이들 11명은 목숨을 건 단식을 시작했다. 일주일 넘게 밥을 먹지 않자 당황한 현지 공안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당시엔 중국 남부에는 탈북민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해 이들을 외국인으로 대해주었다.풀려난 이들은 이번엔 미얀마로 향했다. 나침판에 의지해 미얀마까진 들어가는 데 성공했지만 이번에도 잡혔다. 다시 중국에 송환됐는데, 이번엔 쿤밍감옥이었다. 일행은 또 단식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1999년 1월 비행기에 실려 북중 국경 투먼으로 옮겨진 뒤 곧장 북한으로 송환됐다. 당시엔 한국으로 가려던 사실이 들키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송환되기 전 일행은 “죽어도 비밀을 지키자”고 약속했다.북한으로 끌려가자마자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따로 분리됐다. 며칠 뒤 조 씨는 아들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3살 밖에 안 된 아들이 동상에 걸려 손이 시꺼멓게 부풀어있었다. 가슴 미어질 듯 아팠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북송된 아이들은 연고자가 찾아올 때까지 그런 열악한 상태에서 방치돼 있었다.국경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어른들은 도 소재지인 청진집결소로 이송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행을 기도했던 사실을 모두가 잘 숨겼는데, 일행 중 한 명이 끝내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실을 고백했다. 청진집결소에서 이들은 도 보위부에 넘겨져 3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은 뒤 10년형을 언도 받았다.절차와 형식에 따라 10년형을 선고받았을 뿐이지 사실상 종신형이었다. 한국으로 가려 했던 사람은 10년이 지나도 석방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정치범수용소에서 10년을 견디고 살아남아 출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전에 다 죽기 때문이다.그러나 조 씨는 수용소에서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 졸지에 자식들을 다 잃게 된 시어머니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중국 친척들에게서 8000위안을 구해온 뒤 평양 보위부의 연줄을 찾아 뇌물을 먹였다. 뇌물의 힘은 엄청났다.위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라 조 씨는 ‘피동분자’로 분류돼 6개월 만에 석방됐다. 남편과 시동생들은 1년형으로 감형 받고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다가 2000년 여름쯤에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방콕 일본대사관 진입조 씨는 석방된 이후 감시를 피해 도망갈 틈을 수시로 노렸다. 그리고 2000년 겨울 다시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갔고, 산동 위해에 있는 식당에 취직했다. 위해에서 1년 반쯤 지났을 때 조 씨는 탈북 브로커를 소개받았다. 당시에는 탈북민들이 브로커를 통해 한국으로 가는 방법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2002년 여름 중국을 떠나려 했다. 그런데 앞서 출발했던 팀으로부터 탈북민 구출 활동가로 알려진 한국인 목사가 여정 중 여성들을 성폭행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계획을 취소했다. 대안을 찾아야 했고, 2002년 말 1인당 300만 원을 주기로 계약하고 중국을 출발했다. 태국 방콕에 도착해 현지 한인교회를 찾아가니 한국행을 기다리는 탈북민이 빼곡했다. 교회에서 마련해준 임시 거처에서 두 달쯤 기다리는 동안 남편이 미국에서 탈북민을 난민으로 받아주는 법안이 통과되었다며 한국보다 미국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한국행을 기다리던 탈북민 여럿이 이에 동조했고, 조 씨도 따라나섰다. 이들은 방콕 미국대사관 진입을 계획하고 며칠 동안 주변을 맴돌며 정찰했다. 하지만 진입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결국 일본대사관으로 가보자고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대사관은 차가 드나들 때 전기 철문이 열렸다 닫히는 시간이 길어 그 틈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2003년 7월 31일 조 씨를 포함한 탈북민 10명은 그렇게 일본대사관 진입에 성공했다. 일본대사관에 들어간 뒤 유엔의 조사를 받았다. 처음엔 미국에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유엔 측은 요구를 거절했다. 그들은 일본으로 보내달라는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의 일본대사관 진입은 당시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대사관 담장 밖에는 기자들이 진을 쳤다. 외부 활동이 금지된 채 일본대사관 경내에서 머무는 24일 동안 강당에 칸막이를 하고 살아야 했다.이 때 한국대사관에서 찾아와 “한국으로 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고, 승낙하면 최대한 빨리 한국에 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설득했다. 마침내 일행이 한국에 가겠다고 결정하자 3일 만에 비행기를 타게 됐다. ● 대한민국에서의 첫 최우수상2003년 8월 23일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공항 밖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북한에 가족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하지만 북에 아무 연고도 없는 조 씨는 굳이 얼굴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가 아들의 손을 잡고 미소를 띤 채 공항 밖을 나오는 사진은 그렇게 포착됐다.조 씨는 한국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부자가 되고 싶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 살았기에 무조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회에 나가서 10년 안에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이를 위해 이를 악물었고, 하나원 시절부터 하나씩 실천해 나갔다. 손가락 장애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컴퓨터 타자 연습도 열심히 했다. 그 결과 하나원을 졸업할 때 치르는 타자 시험에서 동기생 중 1등을 차지했다.그가 하나원에 있을 때부터 여성들에게도 운전면허 이론 수업이 진행됐고, 시험을 칠 기회도 주어졌다. 당시 동기 50여 명 가운데 남성 1명과 여성 3명만이 이론시험을 통과했는데, 조 씨는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노력 끝에 조 씨는 하나원을 졸업할 때 최우수상을 받았다.하나원 교육과정을 마치고 정착한 곳은 충남 서산이었다. 하나원을 나올 때 그는 “시간은 돈이다”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사회에 나오자마자 벼룩시장을 뒤져 새벽부터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았고, 그렇게 처음 찾은 일이 신문배달이었다.하나원을 수료한 지 보름도 안된 어느날 동네 신문지국에 방문해 배달자리를 찾는다고 했다. 함북 사투리를 쓰는 28세 젊은 여성이 잘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자, 지국장은 기특했는지 100세대를 할당했다.집집마다 구독하는 신문 종류도, 부수도 달랐다. 하지만 그는 한 달 만에 코스와 정보를 모두 습득했다. 초기엔 새벽 2시에 나와 100세대를 배달하는데 4시간 반이 걸렸지만 두 달 뒤엔 3시간으로, 나중엔 한 시간으로 줄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전문성은 노력의 산물이란 교훈도 얻었다. 낮에는 운전학원을 다니며 실기시험 준비를 했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학원셔틀버스 운전기사의 부인이 “보험설계사란 직업이 있는데, 노력한 것만큼 돈을 받을 수 있으니 해보면 어떻겠냐”고 귀띔을 해줬다. 귀가 솔깃해진 그는 선뜻 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 한 달 동안 SK생명 서산지점에서 보험설계사 자격시험 교육을 받았다. ‘클라이언트’ ‘리쿠르팅’ 등 낯선 외래어와 금융, 경제지식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차근차근 공부하면서 보험설계사 시험도 합격했다. 이후 지점장 면접에서 “학연, 지연, 혈연도 없고, 말투도 다른데 과연 보험영업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조 씨는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압니까”라며 받아쳤다.● 34세에 되살아난 선생님의 꿈이후 그의 하루 일과는 새벽 2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바쁘게 진행됐다. 새벽 신문 배달에 낮에는 보험 영업, 저녁 퇴근 이후엔 마트 출납원으로 일한 것이다. 주말엔 대형마트에 가서 알바를 했다. 하루 3시간 정도 자면서 억척스럽게 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됐고, 그들을 통해 보험계약도 따냈다.보험설계사가 된지 9개월 만에 그는 모범 사례로 사보에도 실렸다. 또 2004년 10월 경향신문에 ‘남한사회 적응 성공모델 되고파’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기도 했다.그는 2007년 12월 보험설계사 일을 그만두었다. 그만둘 때 월수입도 800만 원 가까이 됐지만 집안 사정이 발목을 잡았다. “남편은 정착을 잘 하지 못했어요. 어디에 취직해도 한 달을 버티지 못하다가 급기야 장사를 한다고 중국에 나가 반년씩 있다가 들어왔어요. 참다 못 해 2006년에 이혼했는데, 그러고 보니 작은 동네에서 살기가 어렵더라고요.”그는 다른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다가 골프장 캐디라는 직업이 수입이 좋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수도권 골프장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30세가 넘으면 신입으로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결국 2008년 4월 강원도 고성의 한 골프장에 입사해 2014년 1월까지 근무했다. 캐디 생활은 골프라는 스포츠 종목에 대한 전문지식과 캐디 업무에 대한 전문성 이외에도 건강한 체력을 갖춰야만 가능하다. 그는 그런 캐디 생활을 6년이나 버텨냈다. 그리고 2010년 속초에 24평 아파트를 샀다. 10년 만에 자기 집을 마련하겠다는 꿈을 7년 만에 이룬 것이었다. 캐디로 일하던 중 그는 동료 캐디가 한국방송통신대를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말을 듣자 북한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선생님이 되려던 꿈이 다시 떠올랐다. “사람은 늘 배워야 한다”던 외할머니의 말씀도 생각났다. 가난 때문에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졌다.1년의 준비 끝에 그는 2009년 방송대 청소년교육과에 입학했다. 필드에서 하루종일 뜨거운 땡볕과 눈비를 맞으며 뛰어다니다 보면 몸은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대학 공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의 휴학없이 4년 만에 방송대 교육학사와 ‘청소년지도사 2급’ 국가자격증을 따냈다. 방송대 학부 동기들과 ‘인문학 동아리’를 만들고, 다양한 인문서적을 읽으며, 지나온 삶의 성찰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삶에 눈을 뜨기도 했다. “책을 읽고 일주일에 한번씩 토론하다 보니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어요. 한국에 와서 돈만 보고 살았던 삶이 최선이었나, 인생에 가치있는 일은 무엇인가, 얼마나 가져야 부자라 할 수 있고, 또 부자가 되면 내가 행복할까 이런 고민이 시작됐어요.”교육학사 학위를 받을 때의 성취감은 지금까지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 뿌듯했다. 제대로 효도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외할머니에게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후 공부가 너무 재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공부할 때 가장 행복했으니, 그 행복을 계속 누리고 싶었습니다.”● 6년 만에 석사, 박사 끝내그는 대학을 졸업할 때 탈북청소년의 학교생활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그런데 논문을 쓰면서 보니 북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북한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오지의 광산마을에 갇혀 있었다 보니 다른 곳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내 청춘의 한이 서린 북한이 어떤 곳인지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그는 학사를 마치고 석사과정에 도전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서 알아본 끝에 2014년 3월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다. 전업학생으로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었던 바람도 성사됐다. 미국의 조지소로스가 설립한 ‘열린사회재단’의 공동체리더십장학금 3기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2016년 8월 석사를 졸업한 뒤에는 남북한 교육통합에 비전을 두고 교육학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박사과정에서는 각종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로 버텼다. 그렇게 6년 만에 석사와 박사 과정의 정주행 끝에 그는 2020년 8월 마침내 교육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의 졸업논문은 ‘북한 중등교사들의 교직경험에 대한 질적 연구’였다. 북한에서 교사가 되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북한 교사들의 교직 경험을 분석하여 박사가 된 것이다.어렵게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는 했지만, 그가 졸업한 시기는 코로나19로 인해 최악의 취직 환경이었다. 남북관계가 단절돼 북한을 연구하는 전공자들이 설 땅도 좁아지고 있었다.그는 남북한을 경험한 탈북민 연구자들이 설 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보자!”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버텨왔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2020년 10월 탈북민 연구자들의 학술연구공동체인 “이음연구소”를 창립했다.● “통일 한반도의 교육부 장관이 되렵니다.”2023년 12월 통일연구원은 조 씨를 부연구위원으로 채용했다. 통일연구원은 1991년에 통일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으로 설립된 이후, 1999년 1월 국무총리 산하 국책연구기관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북한을 연구한다는 목표가 무색하게 지난 30년 동안 탈북민을 공식 연구위원으로 채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그러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기조가 바뀌었고, 탈북민 박사 중 우수한 사람을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수십 명의 탈북민 연구자 중 조 씨가 처음으로 뽑혔다. 현재 그의 직함은 인권연구실 부연구위원이다. “저는 공부하고, 글을 쓰고, 연구하는 것이 너무 즐겁습니다. 일단 연구원에 채용되었으니 최선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열심히 살려 합니다. 제가 잘해야 후배들에게도 길이 열릴 거라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기도 합니다.”앞으로 그가 꿈꾸는 미래 희망은 훨씬 더 크다. “통일이 된다면 북한의 교육과정을 다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교육과정 개발이 가장 중요해질 겁니다. 교육학 박사로써 그 과정에 꼭 참가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단순한 학자를 넘어 통일한국의 교육부 장관이 돼 그 과정을 주도하고 싶습니다.”소신을 갖고 당당하게 사는 삶은 그가 7살 때 한국에 데리고 온 아들에게도 유전됐다. 아들은 입국과 동시에 군 면제혜택을 받았지만, 군에 입대할 나이가 되자 한국 사회에서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고 싶다며 특전사를 지원했다. 면제 혜택을 받았는데 굳이 꼭 가야 되겠냐고 의아해하는 병무청에 직접 찾아가 설득한 끝에 입대 허가를 받아냈다. 체력이 부족해 특전사에 가진 못했지만, 해병대에 자원하여 군 생활을 잘 해내고 전역했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조 씨가 34세라는 늦은 나이에 방송대에 입학할 당시 그 나이에 공부해 어디에 써먹을거냐며 핀잔을 주고 만류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45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우려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감탄으로 바꾸었다.49세인 지금 그는 자신이 원했던 통일과 남북 교육통합을 위한 학자의 길에 들어섰다. 20년 전 그는 일간지에 ‘남한사회 적응 성공모델 되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돌아보면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실천해왔다. “꿈을 이루려면 행동하라.” 이는 그의 좌우명이다. 조현정은 20년 뒤에 만나도 여전히 누군가의 본보기로 살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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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제1호 탈북민 김정수 씨

    탈북 후 중국에 숨어 있을 때, 나는 매일 한국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에선 가끔 탈북민 입국 소식과 누적 입국자 수를 소개했다. 2001년경엔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1300여 명이었다. 그걸 들으며 “난 1500명 안에는 들어가야겠다”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공안에 체포돼 북송과 감옥 생활, 재탈북을 반복하다 2002년 3월 한국에 입국했을 때 나의 입국 순서는 2100번대였다. ‘그새 참 많이도 왔네. 너무 늦게 왔으니 내가 할 만한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내 뒤로 3만 명 이상이 더 오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2024년 3월 말 기준 탈북민은 모두 3만4121명이다. 이 중 사망한 사람도 있고, 해외에 간 사람도 많아 현재 한국에 사는 탈북민은 3만 명이 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실제 거주자에 대한 통계는 없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탈북민 집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가끔 들었다. 아쉽게도 이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다양한 정보를 접하는 기자인 나도 몰랐으니 탈북민 중에서 제1호 탈북민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로 올해 7월 14일이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제정되면서, 탈북민의 뿌리를 파 봐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후 취재를 통해 찾은 정답에 기자는 적잖게 놀랐다. 제1호 탈북민이 실향민 세대 이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정부 기록상 제1호 탈북민은 1948년 9월 15일 입국한 김정수 씨였다. 1925년 3월 10일생인 김 씨는 진남포(현재 남포시)에서 살다가 23세에 체제 불만으로 탈북했고, 1986년 7월 8일 6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호 탈북민이 자유의 세상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너무 일찍 돌아간 것 같아 아쉬웠다. 그렇다면 광복 이후 많은 사람들이 월남했는데 공식 집계는 왜 1948년 9월부터 시작됐을까? 이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같은 해 9월 9일 북한 정부가 출범한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때부터 한반도에는 2개의 정부가 존재한 셈이고, 이후 월남자부터 탈북민으로 계산한 것. 물론 이때엔 탈북이나 귀순이란 말도 공식화되지 않았다. 6·25전쟁 3년 동안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이 월남했다. 그러나 이들은 탈북민으로 인정되지 않고 실향민으로 간주됐다. 전쟁 중엔 귀순자도 많았지만, 이들도 탈북민은 아니었다. 탈북민 집계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이때는 귀순용사라고 불렀다. 정부 기록상 귀순용사 1호는 정전 나흘 뒤인 7월 31일 중동부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온 안창식 대위이다. 그는 귀순용사 1호이자, 전쟁 직후 첫 탈북민이다.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인 안 대위는 북한군 15사단 사령부에 근무하다가 월남했는데, 이후 49년 동안 한국 국민으로 살다가 200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귀순용사 2호는 1953년 9월 21일 미그 15기를 몰고 귀순한 21세 노금석 상위다. 공산권 최신 전투기를 몰고 온 노 상위는 10만 달러의 상금과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그는 전쟁 중에 남쪽에 와 있던 어머니와 함께 1954년 5월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원, 교수 등을 지내다 지난해 1월 91세로 사망했다. 그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탈북민 1호라 할 수 있다. 귀순용사들에 대한 대우는 시대별로 들쑥날쑥했다. 1980년대 귀순용사에 대한 처우가 가장 좋았는데, 엄청난 보상금과 함께 서울 중심부 아파트와 원하는 직업을 주었다. 1983년 2월 25일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상위는 당시 강남 은마아파트를 80채나 살 수 있는 15억6000만 원을 보상금으로 받았다. 탈북자라는 용어는 1994년 처음 등장했다. 1997년 4월 20일 입국한 황장엽 노동당 비서는 815번째 탈북민으로 이름을 올렸다. 탈북민 수는 집계 58년 만인 2006년 2월에 1만 명을 넘겼고, 4년 뒤인 2010년 11월에 2만 명, 2016년 11월에 3만 명을 각각 넘겼다. 최근 탈북에 어려운 난관들이 중첩되면서 지난해의 경우 196명에 그쳤다. 현재 추세라면 탈북민 4만 명 시대가 올 것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다만 탈북민 4만 명 시대 전에 고향으로 가는 날이 오기를 모든 탈북민은 바라고 있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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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민 최초 법무사 “무법천지 北에서 두 오빠 잃었어요”[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임윤미 씨의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봤던 히로시마 원폭의 버섯구름을 생생히 기억했다. 어머니 형제는 10명이었는데, 히로시마에서 제재소 운영을 하던 할아버지가 폭격에 대비한다며 가족을 시골로 피난시킨 덕에 모두 무사했다. 그러나 히로시마 시내에 머물고 있던 맏오빠 부인은 시신도 찾지 못했다. 그때는 버섯구름이 장차 가족들에게 어떤 재앙을 가져다줄지 아무도 몰랐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할아버지 제재소는 잠시 유지되는 듯 하다가 완전히 주저앉았다. 미쓰비시에 다녔던 큰 외삼촌은 종전 후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났다. 열 식구 넘는 대가족이 할머니의 작은 구멍가게 하나에 의지해 살았다. 할아버지의 목수일도 대식솔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임 씨 어머니와 바로 위 오빠, 동생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1959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민족 대이동’이라고 불린 북송사업이 시작됐다. 임 씨 어머니 가족도 북으로 갈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일본 육사 재학생 신분으로 해방을 맞았던 둘째 외삼촌은 누구보다 강력하게 북으로 가자고 주장했다. 잘 생긴데다 머리도 좋아 수재로 불렸던 외삼촌은 일제 패망 이후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됐다. 자식들에게 공부를 더 못시킨 것을 가슴 아파했던 할아버지도 고향은 한국이었지만 북한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미 결혼한 첫째, 셋째 외삼촌 가족 등이 대거 북한 행을 결정했다.임 씨 어머니는 히로시마의 일본 명문학교인 야스다 료 부속여학교를 다녔다. 그러다보니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조총련의 선전을 믿지 않았다. 조총련 간부가 집으로 찾아와 “너는 자유가 뭔지 알기나 하냐”며 협박도 하고 회유도 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미 결혼한 언니, 오빠와 함께 임 씨 어머니는 일본에 남았다.부모님과 일곱 형제가 북송선을 탄 2년 뒤 어머니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위독한데 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다 “갔다가 언제든 돌아올 방법이야 없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북송선에 올랐다. 심한 뱃멀미 끝에 도착한 청진항에서 처음 들은 소식은 아버지가 이미 열흘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북한에 가보니 그에게 협박을 했던 조총련 간부는 귀국 후 석 달 만에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북한이 정말로 지상낙원이라고 믿었던 그는 귀국단 단장이 되어 누구보다 먼저 북송선에 올랐다. 하지만 북한에 도착해 실상을 체감하자마자 속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귀국 독려로 북송선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죽을 만큼 괴로워하기도 했다.죽기 전 그는 임 씨의 할머니에게 “일본에 남은 딸이 정말 똑똑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똑똑했던 딸이 2년 뒤 북으로 건너올 줄을 그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임 씨 모친은 귀국 후 얼마 뒤 같은 북송 교포 출신의 성실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홀아버지와 단둘이 1차 북송선을 타고 온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자녀가 태어났다. 1964년과 1966년에 아들이 태어났고, 1970년에 임윤미 씨가 태어났다.● 잇따라 끌려간 두 외삼촌북송선을 탔던 재일교포들은 한결같이 “도착하는 순간 우리가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선택을 되돌릴 순 없었다. 운전사로 열심히 일하며 혁신자로 인정받은 임 씨 아버지는 1970년대 초반 귀국자로서는 드물게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임 씨 어머니 역시 귀국할 때 하고 갔던 금목걸이와 금반지까지 국가에 바쳤다. 당시는 귀국자들에게 금붙이든 뭐든 기부를 독려하던 분위기였다. 고지식했던 어머니는 하루 밤 옆에서 같이 자자는 아픈 할머니의 간청도 마다하고 밤일을 나갔다가 모친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을 두고두고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북한 체제는 이들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북송교포들은 감시와 차별의 대상이 됐다. 일본에 남아있는 재일동포들을 다루기 위한 인질에 불과했다. 말 한마디에 반동으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는 경우도 많았다. 임 씨 외삼촌 두 명도 그렇게 사라졌다. 누구보다 앞장서 북한으로 가자고 선동했던 둘째 외삼촌이 1970년대 초반에 형제 중에서 제일 먼저 잡혀갔다. 북한 체제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다가 반동으로 끌려갔는데, 일본 육사를 다녔던 경력을 숨겼다고 ‘경력위조자’ 딱지도 붙었다. 북한에선 경력을 숨긴 사람은 엄중한 반동으로 취급한다. 영장도 재판도 없었다. 둘째 외삼촌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가족은 오지로 추방됐다. 행여 아들의 생사라도 알 수 있을까 싶어 외할머니는 날마다 도 보위부 정문으로 달려가 물어도 보고 온종일 기다려보았지만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얼마 후 셋째 외삼촌도 요덕수용소로 끌려가고 가족이 농촌으로 쫓겨났다. “형이 그 정도 말한 게 뭔 죄냐”고 불만을 토로했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영장도 없이 잡혀간 것이다. 당시 간경변 말기로 입원을 하기로 돼 있었지만 자비는 없었다. 결국 요덕수용소에서 그는 한 달 만에 숨을 거뒀다.오빠 두 명이 반동으로 끌려가 죽자 임 씨 어머니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형들 때문에 연좌제로 끌려가지 않을까 위축이 된 다른 외삼촌들도 묵묵히 직장만 다녔다. 임 씨의 아버지는 도시를 벗어나 농촌으로 자진해 갔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맏오빠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임 씨가 12살 때 신의주 인근 석하리라는 농촌에 살던 그의 가족은 ‘김정일의 덕분’에 남신의주 시내로 이사하게 되었다. 석하리 주변에 김정일의 별장이 있었는데, 도당에서 석하리 일대를 사회주의 이상촌으로 꾸린다며 강제로 철거한 것이다. 장군님이 지나다니는 마을에 출신성분이 나쁜 임 씨네 가족은 살 수 없었다. 대신 남신의주에 터를 배정받아 집을 지었다. 이 역시도 돈 한 푼 지원받지 못한 채 모두 자비로 충당해야 했다.임 씨가 14살이 되던 1984년 봄 어느 날, 아침에 학교 농촌동원을 간다며 집을 나간 맏오빠가 갑자기 사라졌다. 당시 그는 2년제 기능공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안전부에 실종 신고를 했지만 “알았으니 가서 기다리라”는 대답뿐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어디서 시신이 발견됐다는 말만 들리면 부리나케 달려갔다.한 달 조금 지났을 때 보위부에서 부모를 불렀다. “당신 아들이 압록강을 헤엄쳐 중국으로 넘어가 베이징 주재 일본대사관을 찾아갔고, 공안에 넘겨져 북으로 송환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당시는 대량탈북사태가 일어나기 훨씬 이전이라 탈북에 대해선 감히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다.얼마 후 보위부에서 어머니를 따로 불러 일본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 대해 상세히 조사했다. 하지만 맏아들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10년 전 둘째 외삼촌이 끌려간 뒤 외할머니가 그러셨듯이 어머니는 매일 도 보위부 정문 앞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임 씨의 기억 속 맏오빠는 몸이 허약한 어머니를 극진히 위했던 효자였다. 집을 나가던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런 오빠가 정말 부모와 동생들을 버리고 중국으로 갔다가 강제송환됐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지금도 오빠가 어디엔가 살아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일본에 남은 외삼촌은 북한에 남아있는 형제들과 조카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계속 생활비를 보내주고 북한 당국에 기부도 했다. 1980년대엔 북한 굴지의 대기업인 신의주시 낙원기계연합기업소에 컴퓨터를 기증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에 그런 컴퓨터는 3대 밖에 없었다. 90년대 초반에는 낙원기계연합기업소에 식량을 지원하기도 했다.덕분에 임 씨네는 비록 감시와 불안 속에 살아도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편이었다. 임 씨는 아무런 생활 걱정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학업성적도 괜찮았다. 그러나 출신성분을 따지는 북한에서 맏오빠 문제는 큰 걸림돌이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선 더 열심히 공부해야만 했다. 다행히 1987년 여중 졸업과 동시에 신의주제1사범대학 어문학부 국문과에 입학했다. 1991년 대학 졸업 후에는 성적 우수자들이 가는 박사원(대학원)에 진학했다.박사원에서는 문학이론을 전공하면서 ‘생활적 가사 창작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준비했다. 1년에 한 두번씩 평양에 올라가 인민대학습당에서 자료작업을 했고 작가인 지도교수를 따라 전국작가동맹회의도 참석해보았다. 그 때마다 북한의 일반인들은 보기 힘든 외국영화도 보고 작가 토론회도 경험하면서 시야와 견문을 넓혀나갔다. 그렇게 20대 초반의 임 씨는 꿈에 부풀었다. 집안의 불행도 끝난 줄 알았다.● 억울하게 끌려간 작은 오빠, 가족의 추방어느 날 집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과거 바다 일을 하다가 실수해 보위부에 잡혀갔는데, 예심 과정에 맏오빠를 만났다고 했다. 아들 소식에 목말라했던 임씨 부모님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반갑게 대해주었다. 청년이 찾아오는 횟수도 늘어났다.둘째 오빠는 당시 신의주의학전문학교를 다녔는데, 형님을 봤었다는 그 남자와 점점 가까워졌다. 남자는 둘째 오빠에게 일부러 북한 체제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고, 오빠도 맞장구를 치게 유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자는 보위원의 스파이였다. 북송교포 출신인 임 씨네 집이 일본 친척의 도움으로 잘사는 것으로 보이자 이봉제라는 안전원이 보위원과 짜고 돈을 뜯어내기 위해 ‘작업’을 한 것이었다. 둘째 오빠가 한 말은 그대로 보위부에 들어갔다.1993년 어느 날 아침 조사할 것이 있다며 안전부에서 둘째 오빠를 불렀다. 둘째 오빠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집을 나섰다. 임 씨가 본 둘째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을 위기에 처하자 임 씨 부모님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안전원 이봉제는 “아들을 꺼내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수시로 뇌물 상납을 요구했다. 술과 담배는 물론 당시 북한에선 엄청난 고가였던 컬러TV를 요구했다. 끝내 참지 못한 아버지가 폭발했다. 아들 때문에 마음 고생하다가 암 진단까지 받은 상태였던 아버지는 안전원과 대판 싸우고 말았다. 일은 더욱 험악하게 번졌다. 가택수색까지 들어왔다. 수색영장도 없이 온 집안을 헤집던 그들은 둘째 오빠의 일기장을 내놓으라 요구했다.며칠 뒤 집에 화물차가 들이닥쳤다. 임 씨 가족들은 강제로 태워졌다. 짐도 차에 실을 정도만 챙기라고 했다. 1994년 10월 말 북한의 날씨는 을씨년스러웠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차에 실린 임 씨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나 싶어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차가 멈춘 것은 한밤중이었다. 다행히 수용소는 아니었다. 농장 선전실로 보이는 건물 앞에 물건들을 던져놓고 차는 떠나버렸다. 추위 탓인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창백하게 떨고 있는 어머니와 딸에게 아버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 했다. 잠시 후 임 씨는 다시 건물 밖으로 나서다가 쌓아놓은 짐짝들 옆에서 아버지의 어깨가 흔들리는 갓을 봤다. 죽을 때까지 가슴에 못 박혀 있을, 처음 본 아버지의 우는 모습이었다.● 다시 박사원으로 복직그들이 추방된 곳은 평북 철산군이었다. 나중에 ‘서해위성발사장’이 건설돼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마을 인심은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은 마을 사람들 태반이 추방을 당해 온 신세였다는 것이다. 가족 중에 누가 잡혀가 추방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평양에 살다가 다리를 쩔뚝거린다거나 왜소증환자라서 쫓겨난 이들도 있었다.졸지에 박사원생에서 청년분조 농장원으로 전락한 임 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추방되기 전 자신에게 청혼했던 남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3살 연상인 그 남자는 김책공업종합대학 응용수학과를 나와 신의주경공업대학 수학교원으로 있었다. 추방된 지 3일 만에 임 씨는 신의주로 가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나도 미국에 친척이 있는 해외연고자 가족으로서 출세를 해봐야 기껏 대학교원이다.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 혹시 추방되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했다. 이어 “요즘 도당 대학 담당 부부장이 대학 교원들을 상대로 직접 강연을 하고 있다. 인간성도 좋고 능력도 있어 보인다. 기회를 봐서 한번 만나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별로 기대하진 않았지만 임 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용기를 냈다. 의외로 부부장은 임씨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내가 배운 지식으로 오빠의 죄를 조금이나마 씻고 싶다며 속에도 없는 말을 하는 임 씨에게 그는 알아볼 테니 일단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일주일 뒤 대학 초급당비서가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비서는 임 씨에게 “당과 수령의 배려로 임윤미 동무는 박사원을 다시 다니게 됐습니다”고 했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도당 대학 담당 부부장의 힘은 컸다. ● 둘째 오빠의 죽음, 그리고 탈북임 씨는 결국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그 남자와 결혼했다. 고마운 이유도 있지만, 혼자 살다가는 언제 또 끌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컸다. 결혼은 그에게 도피처였다. 암 치료를 핑계로 추방된 부모님도 신의주로 모셔왔다.하지만 둘째 오빠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안전부에 가니 보위부로 이송됐다고 하고, 보위부에 가니 안전부로 갔다는 식으로 서로 미루기만 했다. 훨씬 나중에 서류상 병사로 처리됐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병사가 맞는지, 아니면 고문 받다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신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북한은 그럴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둘째 오빠는 그들이 추방되기 전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돈 때문에 인질로 잡아두던 오빠가 죽자 다급해진 보위부는 임 씨 가족을 농촌에 추방시켜 입막음을 하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얘기도 전해들은 것이라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임 씨가 결혼할 무렵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대기근 시대가 시작됐다. 자고 나면 아파트 앞에 유랑자인 ‘꽃제비’들의 시체가 뒹굴었다. 서로 책임지지 않겠다며 아파트 인민반장들끼리 시체 밀어내기를 했다. 국가가 시신을 처리할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곳곳에 동냥하는 꽃제비들이 들끓었고, 누구네 집이 강도를 당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하지만 TV에서는 우리나라 제일이고 김 부자에 충성하자는 노래만 울려나왔다.임씨는 일본에서 북으로 가지 않겠다는 어머니에게 조총련 간부가 했다던 말이 생각났다. “너는 자유가 뭔지 알기나 해?” 이때부터 자유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자유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그때까지 살아온 북한은 마음대로 보고 듣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숱한 사람들이 굶어죽어도 북한체제를 욕해선 안 됐다. 외삼촌 두 분이 반동으로 끌려가고 ,두 오빠가 잘못돼도 김 부자를 칭송해야만 했다. 이게 북한에서 허용되는 자유의 실체였다. 암 진단을 받은 임 씨 아버지는 1995년 여름에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해 10월 딸이 태어났다. 남편은 “남들이 다 돈을 버는데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며 대학교원을 그만두고 외화벌이(무역)를 시작했다. 모든 직업을 국가에서 정해주는 북한에서는 대학교원을 그만두는 데에도 뇌물을 써야 했다.어느 날 불쑥 남편은 “여기서는 더는 미래가 보이지 않아. 외화벌이로 돈 좀 벌었다는 사람들 보면 다 잡혀가고 끝이 좋지 않아, 우리 딸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북한 체제에 대한 염증이 차고 넘쳤던 임씨는 주저함이 없었다. 임 씨와 남편, 갓 태어난 딸과 어머니 4명은 탈북의 길에 올랐다. 1997년 10월이었다. ● 대한민국 입국과 하나원 1기압록강을 거슬러 의주 쪽에 가면 강폭이 좁아 중국으로 걸어 건너갈 수 있는 곳이 있다. 당시는 대량 탈북 사태 이전이라 경비도 삼엄하지 않았다. 경비대에게 돈을 찔러주고 한밤중에 중국으로 건넌 임 씨 가족은 조선족 여성을 만났고, 곧바로 택시를 이용해 대련으로 갔다.탈북 당시 임 씨 가족의 계획은 가진 돈으로 중국 호구(일종의 신분증)를 산 뒤 식당을 개업하는 것이었다. 이를 실행에 옮겼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사기를 당해 돈을 날리고, 언제든 강제북송을 당할 수 있는 위험에도 노출됐다. 고민 끝에 한국 행 이외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편이 먼저 밀항선으로 한국으로 갔다. 1년 뒤 남편의 노력으로 중국에 남아있던 가족 모두 위조여권으로 장춘공항에서 한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99년 5월 임 씨 가족은 김포공항에 발을 디뎠다. “드디어 대한민국에 왔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동시에 “오빠들이 그리워하던 자유로운 사회.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슬픔도 밀려왔다.임 씨가 입국한 그 해 하나원이 생겼다. 그는 하나원 개소식에도 참가했다. 하나원 1기생으로 3개월의 정착교육을 마치고 그해 9월 서울에 21평 규모의 임대주택도 받았다. ● 법무사 사무실에 취직이제는 모든 고생이 끝난 듯싶었다. 먼저 입국했던 남편도 잘 적응해갔다. 모란각 본점에 취직해 본점 지배인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이듬해 아들도 태어났다. 임 씨도 국가기관 계약직 연구원으로 취직해 수입이 괜찮았다.식당 경영에 자신감이 붙은 남편은 얼마 뒤 독립해 모란각 체인점 냉면집을 냈다. 손님이 제법 많았다. 장사가 잘 되자 건물 주인이 자기가 직접 장사하겠다며 재계약을 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인근에 새로운 식당을 계약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새 식당을 찾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조급해진 남편은 다른 사업에 손을 댔다 망했다. 이후 방황하기 시작했고, 점점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결국 한국에 온지 7년 만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임 씨에게 한꺼번에 위기가 닥쳐왔다. 계약직으로 열심히 원고를 썼지만 수입은 고스란히 빚을 갚는 데 쓰였고, 생계를 유지하는 일조차 버거웠다. 이때 임씨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을 통해 변호사로부터 법률서비스를 받아 여러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 법무사 자격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생활비에 보탬이 되려고 변호사 사무실 전단지를 돌리던 어느 날 인근 법무사 사무실에서 그에게 직원 채용을 제안했다. 그렇게 2006년 법무사에 취직한 임씨는 일을 하나하나 배우고 익혀갔다. 당시 계약직으로 원고 쓰는 일도 하고 있었기에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자유민주사회의 법을 조금씩 알고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그러다가 끝내 눈에 무리가 와 1년만에 법무사 사무실 일을 접어야 했다.● 법무사 시험에 도전하다눈 치료를 받고 다시 법무사 사무실을 다니게 된 그는 법무사 자격증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대한민국에 온 이상 뭔가 이 사회에 맞는 전문적인 일을 배우고 싶었고, 그렇게 성장하는 엄마의 모습이 어린 자녀들에게도 힘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2017년 법학원에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법 공부에 나섰다. 법무사가 되려면 헌법, 민법, 형법, 상법, 부동산법, 공탁법, 민사집행법, 가족관계법 등 8개의 법을 공부해야 한다. 학원설명을 들으며 머리로 이해하려 애쓰는 사이에 진도는 저만치 앞서나가는 일이 반복됐다. 공부는 나름 자신 있다 생각했지만, 나이 탓인지 생각만큼 잘 따라주지 않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늦게까지 홀로 공부하다보니 체력도 부족했다.반 년을 공부한 뒤 법무사 1차 시험에 응시했다. 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험장 분위기라도 겪어보고 싶었다. 법무사 시험은 8과목 중 한 과목이라도 40점 미만이면 과락이고 불합격이다. 첫 시험에서 임 씨가 받은 점수는 8과목 전체 점수를 다 합쳐 40점도 안되는 36점이었다. 참담했다.하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2년에 걸쳐 자신과의 싸움을 거듭했고, 2020년 시험에 응시했다. 가채점을 해보니 합격이었다. 날아갈 듯 기뻤다. 그런데 한 달 후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그의 이름은 없었다. 임 씨는 법원행정처로 달려가 답안지를 확인한 뒤 자신이 허망한 실수를 저지른 사실을 깨닫게 됐다. 1형 시험답안지에 2형이라고 표시하는 ‘체킹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 실수만 아니라면 합격인데 컴퓨터는 야속하게도 그의 답안 절반이 틀렸다고 채점했다. 아무리 사정해도 법원 공무원은 과거 다른 시험에서 체킹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던 판례를 제시하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1년을 더 공부해야 했다.● 탈북민 최초 법무사2021년 다시 시험을 볼 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또다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절대 실수하지 말자고 긴장하고 또 긴장했는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그는 북에 있을 때 컴퓨터 채점시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국에 와서도 운전면허 시험 한번 본 것이 전부였다. 1년간의 고생을 또다시 헛되게 만들다는 자책감이 임 씨를 괴롭혔다. “두 번 연속 체킹 실수로 시험에서 낙방한 대한민국의 유일 사례일 것 같다”는 생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인 2022년 다시 시험에 응시했고, 1차 시험을 통과했다. 당시 합격률은 6.96%였다. 5646명의 응시자 중 393명이 합격한 것이니,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1차 시험 뒤에 다시 2차 시험이 남았다. 1차 시험에 합격하면 2차 시험은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객관식시험인 1차와 달리 2차는 주관식시험이라 외워야 할 것이 훨씬 많다. 임 씨는 다시 자신과의 싸움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듬해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치러진 2차 시험에 응시했다. 3개월 후 그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2023년 11월 제29회 2차 법무사 시험에 1차 시험을 통과했거나 또는 시험 면제 허가를 받은 총 753명이 응시해 167명이 합격했다. 이 가운데 여성은 32명에 불과하다. 임 씨가 22.7%의 합격률을 뚫은 셈이다. 6.96%의 장벽을 넘고, 다시 그 장벽을 넘은 사람들과 경쟁해 22.7%에 드는 것은 법무사 시험 응시생 100명 중 고작 1~2명에게만 주어지는 영예다.임 씨는 합격자 대상 연수를 받은 뒤 올해 5월 10일 법무사 자격증을 받았다. 탈북민 최초의 법무사가 탄생한 것이다. ● 두 오빠를 잃은 40년의 한“아직 독립하여 사무실을 운영할 준비가 안돼 있습니다. 법무사 자격은 취득했지만 경험도 부족합니다. 연고도 없어 영업이 쉽지 않은데, 10년 동안 함께 해왔던 법무사님이 두 사람 다 서로의 강점을 가지고 있으니 같이 일하면 시너지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시네요.”합동법무사 사무소 운영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임 씨에게 어떤 법무사가 되고 싶냐고 물어봤다.“제가 한국에 온지 25년 됐거든요. 북에서도 20년 넘게 살았으니까 서로 다른 남북한 사회에서 각각 절반씩 살아본 셈이죠. 먼저 와서 실패도 해본 탈북선배로서, 법 공부를 한 탈북민으로서 제 경험과 지식이 다른 탈북민들의 한국사회 정착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그의 말은 계속됐다.“그리고 저는 북송교포 2세입니다.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재일동포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잘 알아요. 일본 친척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좀 살았는데 걸핏하면 기부를 하라, 국가에 충성심을 보여라, 부담주고 감시하고 비위에 거슬리면 잡아갔어요. 한국 사회와는 대조적이죠. 그래서 저는 한국 정부의 탈북민 정착제도와 정착지원 법률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 좋은 사회와 제도에서 우리 탈북민들이 열심히 잘 정착해나갔으면 좋겠어요. 저도 적은 힘이나마 이바지하고 싶고요.”잠시 말을 멈춘 임 씨는 먼 곳을 응시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6년 넘게 자유 대한민국의 법을 공부하면서 억울하게 잡혀간 외삼촌, 오빠들이 끊임없이 떠올랐어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잡아간 겁니까. 부모님들도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른 채 가슴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저주받은 그 땅에서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아직도 북한에선 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리고 왜 죽어야하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테지요. 북한에서 자유와 인권이 실현되고 한국과 같은 선진적인 사법제도가 정착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임 씨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오빠들을 잃은 40년의 한이 눈동자에 맺혔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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