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하마구치 내각은 1929년 7월 2일부터 1931년 4월 14일까지 이어졌다.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내각총리대신(1870~1931)은 1930년 11월 14일 오전 9시경 도쿄역에서 총격을 받아 집무가 불가능하게 되자 외상이 임시 대행을 겸임했다. 결국 병세의 악화로 내각이 총사퇴했다.
미국의 1929년 대공황 이후 일제는 식민지 확대 수탈 전략으로 경제 위기를 벗어나려 침략전쟁을 벌였다. 일제의 중국 대륙침략의 서막인 '만주사변' 전쟁 초반, 1931년 9월 19일 호외 제1보 내용은 호외 제4보 '봉천 무선전신소 19일 오전 5시 30분 일본군 점령' 내용으로 미루어 사실 전달에 여러 제약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일본 관동군은 1932년 3월 1일 상하이사변(1932.1.28)을 틈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지방 군벌 두목들을 요직에 앉히고 정부 주요부서에 일본인을 배치했으며 실권은 관동군이 장악한 괴뢰국가였다.
1929년 주가 폭락으로 인한 미국의 대공황 여파는 1933년까지 계속됐다. 초유의 경제적 비상사태를 맞아 물가는 폭락하고 실업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공황 이전과 비교해 1933년 주가는 80% 폭락하고 1만여 개의 은행이 폐쇄됐다. 대량 실업으로 미국인의 25%가 실직했다.
국제연맹은 1933년 2월 21일부터 열린 제네바 총회에서 중국의 만주 주권 인정을 요구하는 '리튼 보고서'를 찬성 42표, 반대 1표로 채택했다. 반대 1표는 일본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하고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 사무국에 이를 통고했다.
일본 해군 극우 청년 장교들이 1932년 5월 15일 총리 관저에 난입해 호헌운동의 중심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太養毅) 내각총리대신(1855~1932)을 암살했다. 사건은 1933년 5월 13일 예심이 종결되고 17일에는 진상 공표와 함께 게재 금지가 해제됐다.
일왕의 친정을 바랐던 육군 청년장교들이 1936년 2월 26일('2.26 반란사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전 조선 총독) 내부대신 등 정계 원로 요인들을 살해했다. 반란은 3일 만에 진압됐다.
1937년 7월 7일 밤 중국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이 충돌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이 전면전으로 바뀌고, 중국은 총력 대응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됐다.
중일전쟁으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야심을 분명히 했고 독일 나치 히틀러는 만주국을 승인해 일본과 손을 잡았다. 식민지 쟁탈과 패권 확장을 놓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경쟁하며 이합집산했다. 영국 체임벌린 수상의 타협외교에 반대해 이든 외상이 1938년 2월 20일 사표를 제출했다.
연합국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같은 게르만 민족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토 합병에 제약을 두었다. 독일 히틀러 나치정권은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나치당 지도자 자이스-잉크바르트의 적극 협조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합병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계획하던 슈슈니크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독일이 1939년 9월 1일 기습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어 독소불가침조약에서 폴란드를 분할하기로 한 합의에 따라 소련이 동부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일본과 소련의 양국 군대가 1939년 5월 만주·몽골 국경지대의 노몬한에서 충돌해 일본군 1개 사단이 전멸했다. 일본은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정전협정을 서둘렀고, 그 해 9월 정전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독일은 1940년 5월 10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브르크 등 저지대 국가를 침공했다. 네덜란드군의 저항은 5월 10일부터 5월 14일 항복할 때까지 계속됐다. 벨기에군은 5월 28일 독일군에 항복했다. 룩셈부르크 침공은 5월 10일 하루만에 끝났다.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1940년 5월 10일 중립국인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해, 프랑스가 구축한 군사 건축물인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아르덴고원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6월 14일 파리에 무혈입성했다. 프랑스 레이노 내각은 16일 사퇴하고 휴전파 페텡 장군이 내각을 구성해 곧바로 독일에 항복했다.
월남(남베트남)의 즈엉반민 장군(1916~2001)이 주도하는 군부가 1963년 11월 1일 쿠데타에 성공했다. 쿠데타 과정에서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살해당했다. 이후 즈엉반민은 군정을 선포하고 군사정권의 수반임을 자처했다. 나중에 즈엉반민도 응우옌카인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했다.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1917~1963)이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자동차 퍼레이드 도중 리 하비 오즈왈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현직 대통령이 퍼레이드 중에 저격 당하는 장면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게 충격이었다. 대통령직은 곧바로 부통령 린드 존슨이 승계했다.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1880~1964)이 1964년 4월 5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극적으로 성공시켜 전세을 역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호외는 그를 '극동의 은장(恩將)'으로 표현했다. 그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뿐'이라는 세기의 명언을 남겼다.
아베이 장군이 주도하는 우익 라오스 국민군은 1964년 4월 18일 쿠데타를 단행해 정권을 탈환했다. 푸마 수상을 체포하고 각료들의 집을 포위하는 등 수도 비엔티안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호외는 런던발 로이터통신을 인용해 쿠데타 뉴스를 전했다.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수상(1889~1964)이 1964년 5월 27일 뉴델리의 총리 관저에서 74세를 일기로 갑자기 서거했다. 네루는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였다. 독립 이후 1947년부터 1964년까지 초대 수상을 지냈다.
3명의 우주인을 태우고 발사된 소련 우주선 '보스호트 1호'가 1964년 10월 13일 무사히 지구 귀환에 성공했다. '보스호트 1호'는 24시간 17분 동안 지구를 16바퀴 돌았다. '보스호트 1호'는 공간부족으로 승무원들이 우주복을 입지 않았던 최초의 우주비행이다.
미국 민주당 린든 B 존슨(1908~1973)이 1964년 11월 3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후보인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를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존슨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1963년 11월 22일 당일 대통령의 유고로 당시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했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경(1874~1965)이 1965년 1월 24일 9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열흘 동안의 투병 끝이었다. 처칠은 제2차세계대전 직후 총리로 취임해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화가, 저술가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로버트 맥너마라 미국 국방장관은 1965년 2월 7일 남지나 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항공모함에 탑재된 항공기 49대가 공산주의 세력의 월맹(북베트남) 군사기지를 폭격했다고 밝혔다. 베트콩이 미군 기지를 공격해 8명의 병사를 사살하고 100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힌데 대한 보복이었다.
미국은 1965년 3월 23일 제미니 3호의 유인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우주선에는 버질 그리섬 소령과 존 영 소령이 탑승했다. 이들은 지구를 3회전한 후 최초의 궤도조절을 통해 성공적으로 귀환했다. 이전의 제미니 1호와 제미니 2호는 무인 시험이었다.
알제리 국방장관이자 독립전쟁 당시 군총사령관이었던 후아리 부메디엔이 1965년 6월 19일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아베드 벤 벨라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부메디엔은 1974년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헌장과 새 헌법을 채택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인도의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수상(1904~1966)이 1966년 1월 10일(현지시간) 소련 타슈켄트에서 향년 61세로 급서했다. 그는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타슈켄트 협정에 조인한 지 하루도 안 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샤스트리 수상은 네루에 이은 인도 제2대 수상으로 카슈미르의 인도 합병을 선언해 파키스탄과 영토분쟁을 벌였다.
영국해외항공회사(BOAC) 소속 여객기가 1966년 3월 5일 일본 후지산을 들이받아 추락했다. 탑승자 124명 전원이 숨졌다. 불과 18시간 전에는 캐나다퍼시픽항공사(CPA) 여객기가 도쿄 하네다공항 착륙 직전에 추락해 64명이 사망했다.
미국의 닐 암스트롱(1930~2012)이 선장으로 탑승한 제미니 8호 우주선이 1966년 3월 16일 오전 8시 15분(한국시간) 무인 아제나 표적 위성과 우주 도킹에 성공했다. 이날 새벽 1시 41분 케이프케네디 발사기지를 떠난 제미니8호는 새벽 0시에 발사된 아제나와 궤도상에서 '랑데뷰'했다.
미 공군과 해군 소속인 46대의 전폭기들이 1966년 6월 29일 월맹(북베트남) 수도 하노이 근교 유류 저장소를 폭격했다. 미국 매나마라 국방장관은 하노이 도심에서 5km 떨어진 유류 저장소를 파괴했으며 하이퐁항의 연료저장소도 폭격했다고 말했다.
한국, 미국, 월남(남베트남), 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등 월남 참전 7개국 정상은 1966년 10월 24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정상회담을 시작했다. 정상들은 이틀 동안의 회담을 마친 후 공동성명을 통해 월남 자유 수호와 평화 회복 결의를 다짐했다.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이 1966년 10월 31일 부인 버드 여사와 함께 전용기 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내한해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시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두 차례 정상회담에서 월남(남베트남)전 대책과 한국재정 지원 방안 등을 논의했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5일 아랍연합공화국(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주요 공군기지를 전격적으로 선제 폭격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지상전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했다. 이스라엘은 전쟁 개시 6일 만에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등을 장악하면서 아랍 3개국의 무릎을 꿇렸다.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남베트남해방군)이 1968년 1월 30일 월남(남베트남) 전역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최대 명절인 구정(설날)을 맞아 실시한 일시적 휴전은 완전히 파기됐다. 베트콩은 나트랑 등 일부를 점거하고, 제2도시 다낭에서는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미국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1925~1968)이 1968년 6월 5일 이른 새벽 로스앤젤레스 앰베서더호텔에서 연설을 하고 방에서 나오던 중 아랍계 청년의 총탄에 쓰러졌다. 케네디 의원은 피격 25시간 만인 6일 새벽 1시 44분 끝내 절명했다. 1963년 형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피살에 이은 케네디 가문의 불운이었다.
소련이 1968년 8월 20일 동독 등 동유럽 4개국 군과 함께 체코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소련은 체코 국민들의 저항과 세계 여론의 지탄에도 불구하고 두브체크 등 개혁파를 몰아내고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다.
미국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1913~1994)이 1968년 11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맞수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로써 공화당은 8년 만에 재집권했다. 부통령에는 스피로 애그뉴가 당선됐다.
미국 아폴로 11호의 두 우주인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앨드린이 1969년 7월 21일 오전 5시 17분 48초(한국시간) 달 표면에 착륙했다. 달 착륙선은 '고요의 바다'에 완전하게 착륙했고, 암스트롱은 "독수리가 착륙했다"고 말했다.
피랍된 일본 국내선 여객기 보잉 727기(요도호)가 1970년 3월 31일 오후 3시 15분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했다. 일본 적군파 9명은 도쿄를 출발해 후쿠오카로 가던 여객기를 납치했고, 북한으로 가려다 기장의 기지로 남한에 비상 착륙했다. '요도호 납치사건'이라 불린다.
미국의 세번째 달 탐사 우주선 아폴로 13호가 산소탱크 폭발로 달에 착륙하지 못하고 1970년 4월 18일 새벽 3시 8분(한국시간) 지구로 되돌아왔다. 아폴로 13호는 4월 11일 13시 13분(미국 중앙표준시) 발사됐으나 고장으로 인해 달을 선회만 했으며, 생사를 넘나드는 비행 끝에 4월 17일 러벨(선장) 헤이스(달착륙선 조종사) 스위거트(사령선 조종사)는 무사히 지구에 귀환했다.
이스라엘은 1973년 10월 23일 이집트군의 계속되는 휴전 위반을 이유로 이집트에 대한 전투를 재개하라고 전군에 명령했다. 이로써 휴전이 발효된 지 14시간 만에 전투가 재개됐다. 10월 6일부터 25일까지 이어진 제4차 중동전쟁은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와 골란 고원에서 벌어졌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1918~1981)이 1981년 10월 6일 군사퍼레이드 참관 도중 기관총 사격을 받고 서거했다. 범인들은 퍼레이드 트럭에서 뛰어내려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사다트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으로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1913~1992)과 1978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소련은 유리 안드로포프 공산당서기장(1914~1984)이 1984년 2월 9일 사망했다고 10일 공식발표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타스통신을 통해 9일 밤 10시 50분 오랜 지병으로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와 로마노프가 후계자로 유력시됐다.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1917~1984)이 1984년 10월 31일 오전 9시 40분 관저에서 피격당해 서거했다. 암살범들은 인도 정부에 분리독립을 요구하던 시크교 과격파 출신이었다. 네루 초대 수상의 외동딸이었던 간디는 1966년 수상에 올랐다.
20년간 장기집권한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1917~1989)이 1986년 2월 25일 밤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은 평화적인 정권이양을 환영하면서 코라손 아키노 여사의 새정부를 승인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