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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04.03
신미양요
철종시기 후반부터 유럽의 상선이나 군함이 빈번히 조선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고 있었고, 1864년 집권한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이로 인해 병인양요는 1866년, 신미양요는 1871년 일어났다.두 차례의 전쟁으로 배외주의는 한층 고양됐고, 위정척사파들은 전면에 나섰다.
1876.02.02
강화도조약 체결
미일통상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1875년 가을 근대식 증기군함 운요호를 앞세우고 강화도 해상에서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다. 1876년 1월 강화도에서 양측의 협상이 시작돼 그해 2월(음력)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국제조약인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됐다.
1882.04.06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강화도조약에 이어 조선은 1882년 4월 6일(음력)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 마무리를 위해 1883년 루셔스 하우드 푸트를 파견했다. 조선도 조약체결을 계기로 1883년 미국에 정부사절단인 보빙사를 파견했다.
1882.06.09
임오군란
개화로 방향을 튼 조선조정에서는 1881년 4월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으나 구식군대의 불만이 쌓여갔다. 이들은 1882년 6월(음력) 오랜만에 급료로 나누어준 양곡에 모래가 섞인 것을 보고 불만이 폭발해 일본공사관과 창덕궁을 기습했다. 임오군란은 청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됐다.
1884.12.04
갑신정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는 1884년 12월 4일(양력)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권을 잡으려했다. 위안스카이의 청군은 궁궐을 포위해 정변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확보했다. 돕기로 했던 일본군은 철병하고 일본 공사는 일본으로 도망갔다. 개화파 인사들도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4.03.21
동학농민운동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저항해 농민들이 동학접주 전봉준의 영도로 항쟁했다. 그해 3월 21일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해 4대 강령을 발표하면서 이들의 항쟁은 농민혁명적 성격을 띠게 됐다. 동학농민군은 같은 해 4월 말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1894.07.27
갑오개혁
1894년 6월 김홍집이 영의정에 임명되고 군국기무처가 설치돼 개혁이 추진됐다. 관제를 개혁하고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해 고종 31년이 개국 503년이 됐다. 문벌과 신분의 차별을 철폐하는 사회개혁안과 은본위제 등 재정경제개혁안도 공포됐다.
1894.08.01
청일전쟁
1894년 4월말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키자 조선조정은 청에 진압병력을 요청했고 일본정부도 텐진조약에 따라 군대를 파견했다. 동학농민군 해산으로 주둔명분이 없어지자 청군은 철수를 제안했으나 일본군은 거부했다. 일본군의 선전포고로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1895.08.20
을미사변
일본이 1895년 7월 조선에 파견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는 무관출신이었다. 미우라 공사는 다음달인 8월 20일 일본 낭인들을 동원해 느닷없이 경복궁을 기습해 왕후(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일본정부는 사건직후 미우라와 관련 인물들을 급히 소환하고 우발적인 범행이라며 발뺌했다.
1896.02.11
아관파천
조선정부는 연호를 제정해 1896년을 건양원년으로 삼았다. 1896년 2월 11일 친러파인 이범진과 이완용은 고종에게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해 이행하고 2월 13일에는 김병시를 총리대신으로 한 친러내각이 성립됐다. 고종은 다음해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1896.07.02
독립협회 결성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미국에 살다 돌아온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그해 7월 2일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애국계몽 이념을 전파하는 데 애썼다.
1897.10.12
국호 대한제국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치르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했다. 앞서 독립협회 발기로 오랜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을 추진해 11월 20일 준공했다. 독립협회와 친러내각의 합작품인 셈이다.
1904.02.09
러일전쟁 발발
일본군은 1904년 2월 9일 인천 앞바다의 러시아함대를 격파하고 다음날인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러시아는 의화단운동 진압을 구실로 병력을 만주에 파견했다가 철수하지 않고 있었고 압록강연안의 이권을 노리고 조선의 용암포를 조차했다.
1905.11.07
을사보호조약 조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군의 포위 속에 대한제국과 일본은 협상조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명전권대사의 자격으로 한국에 와 있었다. 조약의 내용은 통감정치 실시, 외교권 박탈, 보호국화였다. 주요대신 8명 중 5명이 찬성해 통과됐다.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이 을사오적이다.
1907.04.20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열자고 열강에 제안하고 고종에게도 특사를 파견하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이준과 이상설은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4월 20일 출국했으나 6월 29일 회의 참가를 거절당하자 호소문을 제출하고 7월 14일 이준은 순국했다.
1907.12.06
정미의병
의병운동은 1905년부터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으나 1907년 7월 고종이 반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해산조칙이 발표되자 열기가 폭발했다. 의병에는 나이도 신분도 구분이 없었다. 그해 12월 6일 의병 6600여명이 양주에 집결하고 13도 의병대장에 이인영, 군사장(軍師長)에 허위를 추대했다.
1909.10.26
안중근 의거
황해도출신의 안중근은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연해주로 건너가 함경도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세력을 처리하는 문제로 하얼빈에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다. 그는 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적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1910.08.22
한일합병조약 조인
1910년 8월 22일 조선의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비밀리에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은 일주일만인 29일 양위조서로 공포됐다. 조선 왕조가 건국한 지 519년, 27대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육군 출신의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됐다.
1910.09.30
토지조사사업 실시
일본은 1908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일본인 이민을 유도했다. 조선총독부는 합병 후인 1910년 9월 30일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관제를 공포해 토지조사사업을 본격화했다. 1918년까지 실시한 이 사업으로 토지사유제가 확립됐으나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동척에 빼앗겼다.
1919.02.08
2.8 독립선언
일본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자극을 받아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밝혔다.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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