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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04.08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서울 마포구 창전동 경사 70도의 산비탈 와우지구에 16개 동 규모의 시민아파트가 착공 6개월만인 1969년 12월 26일 준공됐다.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반경, 5층 아파트 한 개 동이 준공 4개월만에 무너져 내렸다. 주민 33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쳤다. 부실시공, 뇌물 등 비리가 드러났다.
1970.07.07
경부고속도로 개통
산을 뚫고 벼랑을 깎기 시작한지 2년 5개월, 1970년 7월 7일 마침내 경부고속도로 428㎞ 전 구간이 개통됐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30분 만에 돌파가 가능해 전국이 1일 생활권이 됐다. 1km에 1억원씩 429억여 원의 공사비가 투입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1967년 대선 공약이었다.
1970.11.13
전태일 분신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내 피복공장 재단사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 노동환경 개선을 외치며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22세의 청년은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전태일은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1971.12.25
대연각호텔 화재 참사
1971년 12월 25일 성탄절 오전 서울 중구 충무로 대연각호텔 2층 커피숍에서 프로판 가스가 폭발해 화재가 났다. 불은 사나운 겨울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높이 80m의 21층 건물 전체로 옮겨 붙었다. 화재경보기 경보음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화재로 163명이 목숨을 잃고 60여 명이 부상했다.
1972.07.04
7.4 남북공동성명
남북한은 1972년 5월초부터 6월초까지 평양과 서울에서 비밀리에 고위급 정치협상을 갖고, 7월 4일 7개항의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외세의존 없는 평화통일, 상호 중상·비방금지 및 군사충돌 방지, 다방면 제반 교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추진, 서울-평양 상설직통전화 설치 등이다.
1972.10.17
유신헌법 제정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에서 국회 해산과 정당 활동 중지, 27일까지 개헌안 공고 일정 등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유신헌법 개정안은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확정됐으며, 박 대통령은 12월 23일 간접선거로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4.08.15
육영수 여사 피격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낭독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했다. 총탄은 박 대통령을 빗나가 육영수 여사가 맞고 운명했다. 재일교포 문세광은 1974년 5월 북한 만경봉호에서 공작지도원으로부터 암살 지령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고, 이후 사형을 받았다.
1974.11.15
북한 땅굴 발견
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연천군 비무장지대 안에서 북한의 땅굴이 발견됐다. 제1땅굴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1km나 내려와 있었다. 1975년 3월 19일 강원도 철원에서 제2땅굴, 1978년 10월 경기도 파주에서 제3땅굴, 1990년 3월 강원도 양구에서 제4땅굴이 추가로 발견됐다.
1975.01.22
유신체제 강화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1월 2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 실시방침을 발표했다. 거세진 개헌 투쟁 열기에 대한 대책이었다. 2월 12일 국민투표는 예정대로 치러졌고 가결됐다. 5월 13일에는 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1976.08.01
양정모 첫 올림픽 금메달
1976년 8월 1일 레슬링 양정모 선수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캐나다 몬트리올 하늘에 한국의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양 선수의 우승은 40년 전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의 쾌거와 비교됐다.
1976.08.18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
북한군 30여 명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유엔군 측 경비병들을 공격해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했다. 미군은 미루나무를 베어내는 작전을 감행하며 항모와 전폭기를 대기시켰다. 김일성이 미국에 유감 친서를 전달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1976.10.24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1976년 10월 24일자 워싱턴포스트지는 ‘한국인 실업가 박동선 씨와 한국 정보부원들이 미국 의회 의원들에게 매년 수십만 달러의 뇌물을 주었다’고 보도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하원 청문회에서 로비자금 은행 예치 주선을 주장했다. 이 사건은 1979년 중반 봉합됐다.
1977.09.15
고상돈 에베레스트 정복
1977년 9월 15일 낮 12시50분(현지시간), 해발 8,848m 에베레스트 산꼭대기에 한국 원정대 고상돈 대원이 우뚝 섰다. 무전기를 든 고상돈은 “여기는 정상입니다.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국가로는 세계 8번째였다. 1971년 네팔 외교부에서 에베레스트 입산 허가를 받은 지 6년 만이었다.
1977.11.11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사고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북 이리 역(현 익산 역)에 정차된 화약열차가 폭발해 59명이 사망하고 14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40t의 고성능 화약을 실은 열차에서 촛불을 켜둔 채 잠을 자다 일어난 사고였다. 주변 500m안에 있던 건물은 모두 무너졌고, 반경 4km까지 피해를 입었다.
1979.08.09
YH무역 농성사건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에 항의하는 여성노동자 187명이 1979년 8월 9일 신민당사 에서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농성에 들어갔다. 8월 11일 새벽 2시경, 경찰 1000여 명이 신민당사에 들이닥쳐 강제연행에 나섰고 진압 과정에서 노동자 1명이 추락사했다.
1979.10.16
부마 민주항쟁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시위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및 마산 지역에서 전개됐다.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국회에서의 제명 조치는 그의 연고지인 부산에서 격렬한 항의 시위를 유발했고 정부는 비상계엄령 선포, 위수령 발동 등 강경진압으로 맞섰다.
1979.10.26
박정희 대통령서거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30분경,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부장 등이 박 대통령과 만찬을 하고 있었다. 차지철 실장도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김재규 부장은 사형을 받았다.
1979.12.12
12.12군사반란
10.26 사건 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를 이끌던 전두환 소장의 지시로 1979년 12월 12일 저녁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공관에서 강제연행됐다. 13일 새벽에는 정 총장을 구출하려는 반격 작전도 제어됐다. 전 소장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 총장 체포 재가를 받은 것도 새벽 4시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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