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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03.15
3.15 부정선거 규탄데모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는 최악의 부정과 불법이 난무하는 투표였다. 여당인 자유당은 말단 행정기관과 공무원 친목회 등을 총동원해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83%가 되도록 획책했다. 이 날 저녁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유혈 봉기가 경남 마산에서 일어났다.
1959.12.14
재일교포 북송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교포 975명을 실은 소련 수송선 2척이 해양경비선의 호위를 받으며 북한의 청진으로 향했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은 북송 반대 가두시위를 벌였다. 앞서 8월 13일 북한과 일본의 적십자사는 인도에서 재일조선인 송환협정을 체결했다.
1959.09.17
태풍 사라호 엄습
1959년 9월 17일 추석에 태풍 ‘사라’ 가 남부지방을 강타했다. 전쟁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이라 피해가 심각했다. 사라는 A급 태풍으로 당시 사망-실종자가 800명을 넘었고 이재민이 37만여 명이었다. 정부 재정이 빈약해 구호자금을 국민 의연금에 의존했다.
1953.07.27
휴전협정 조인
1951년 6월 소련이 먼저 유엔에 휴전을 제안한 이후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송환 등을 두고 휴전 회담은 2년 가까이 계속됐다. 휴전에 반대한 이승만 정부의 반공포로 2만7000명 석방으로 협정 막판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1952.05.25
부산정치파동
대통령선거는 국회 간선제였다. 장기집권을 위해 이승만 정부는 ‘공비(共匪)’소탕 명목으로 1952년 5월 25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하루 뒤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을 대거 체포했다. 김성수 부통령은 29일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1951.02.10
거창 양민 학살사건
1951년 2월 '공비(共匪)' 토벌을 위해 경남 거창에 투입된 국군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이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해 주민 수백 명을 집단 학살했다. 국회조사단은 '공비'로 위장한 군인들의 총격을 받아 되돌아왔다. 재조사를 거쳐 관련자 3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지만 특별사면으로 모두 풀려났다.
1951.01.04
1.4후퇴
북한 인민군이 밀리자 1950년 10월 19일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6·25전쟁에 개입했다. 중국의 대규모 군대 파병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군에게 빼앗기자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 속에 피난길에 나섰다.
1950.09.16
인천상륙작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켰다. 9월 28일 북한 인민군 치하의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주변까지 북진했다.
1950.06.25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남한 적화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은 선전포고도 없이 탱크와 전투기를 앞세워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병력은 20만명을 넘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했고,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을 편성했다.
1949.06.26
백범 김구 피살
백범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평생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암살범 안두희는 그 해 8월 5일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징역 15년으로 감형됐고, 6.25전쟁 중 군에 복귀했다가 전역했다.
1948.10.19
여수·순천 반란사건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사건 진압 출병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켜 여수 순천 등 전남 동부 지역을 장악했다. 정부는 여수·순천 일대에 대규모 진압군을 보냈으나 반란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 명이 희생됐다.
1948.09.22
반민특위 재판
일제 식민지 잔재 청산을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1948년 9월 22일 제헌국회에서 통과되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10월에 구성됐다. 치안확립이 시급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비협조로 반민특위는 682건의 친일행위 조사에 그쳤고 단 12명만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 선고를 받았다.
1948.09.09
북한정권 수립
소련 군정체제의 북한은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9월 9일에는 사회주의 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정부를 수립했다.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이 북한 정부 초대 수상이 됐다.
1948.08.15
대한민국 수립 선포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선거를 실시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이승만이 당선됐다. 부통령에는 이시영이 당선됐다. 이어,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임명 동의 등의 절차를 거쳐 8월 15일 중앙청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널리 선포했다.
1948.05.10
첫 국회의원 선거
북한의 거부로 끝내 남한에서만 1948년 5월 10일 첫 총선이 실시됐다. 4·3사건에 휩싸인 제주도 2개구와 북한 지역을 제외한 198개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뽑혔다. 총선 20일만인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문을 열어 이승만 국회의장과 신익희 김동원 부의장을 뽑고, 7월 17일 헌법을 제정했다.
1948.04.03
제주 4.3 사건
제주지역에서는 1947년 3·1절 기념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한 사건으로 민심이 악화됐다. 남로당의 선동으로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투쟁으로 발전했다.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간 무장 투쟁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계속 희생됐다.
1946.10.01
대구 10월 사건
1946년 10월 1일, 대구시청 앞에서 미군정의 강압적인 식량 공출에 분노한 시민들이 식량배급을 요구하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이 사망하면서 대구는 물론 남한 대부분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으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식량난과 미곡 수집령, 토지개혁 지연이 원인이었다.
1945.12.28
신탁통치 반대운동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은 국제질서 주도권을 놓고 대립했다. 새로운 국가 건설 희망에 부풀었던 국내 정세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한반도 문제 신탁통치 결정에 부딪쳤다. 우익 세력의 신탁 반대와 좌익의 3상 결정 지지로 나뉘어 갈등이 점점 고조됐다.
1945.08.15
일본 항복. 조선 해방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35년간의 일본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됐다.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독립이 확정된 한반도에 미국과 소련이 각각 승전국으로 들어왔다. 남쪽에서는 9월 7일 미 군정기가 시작됐고 외국에 살던 실향민들과 임시정부 요인들도 속속 귀국했다.
1942.10.00
조선어학회 사건
중·일전쟁(1937년) 이후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은 더욱 노골화됐다. 일제는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학술단체 성격의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고 억지 조작해 1942년 10월부터 조선어학회 핵심 회원과 조선어사전 편찬 후원 회원을 대대적으로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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