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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08.09
손기정 올림픽 제패
손기정 선수가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일본 국적이기는 했지만 손 선수의 우승은 조선 민중에게 한없는 기쁨을 선사했다. 동아일보는 8월 25일 자 신문 사진에서 손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정간을 당했다.
1932.04.29
윤봉길 의거
25세 한인애국단원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루쉰 공원)에서 일왕 생일과 상하이사변 전승 기념식장의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져 일제 요인 다수를 살상했다. 윤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2월 19일 순국했다.
1932.01.08
이봉창 의거
한인애국단원 이봉창 의사가 1932년 1월 8일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裕仁)에게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를 명중시키지 못했다. 이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순국했다.
1929.10.30
광주학생운동
1929년 10월 나주역에서 조선 여학생을 성희롱하는 일본인 중학생들을 제지하는 데서 시작됐다. 고등교육을 제한하고 일본어와 일본 역사 중심인데다 기술위주의 수업을 강조하는 일제의 식민지 차별 교육에 쌓인 분노가 나주역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인 학생 항일시위로 번져 나갔다.
1926.06.10
6.10 만세운동
조선 이씨 왕조 제27대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이 망국 15년 8개월 만인 1926년 4월 25일 53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운동 단체와 학생들은 삼엄한 경비망 속에서도 '조선독립만세' 시위를 전국 곳곳에서 벌였다.
1923.09.01
일본 간토 대지진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 간토(關東) 지역에서 발생한 대지진 이후 재일 조선인과 중국인 뿐 아니라,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집단 학살됐다. 일본 경찰과 군대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자경단과 경찰 군인에 의해 조선인 수천 명이 살해됐다.
1920.10.21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는 중국 지린(吉林)성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을 상대로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큰 승리를 거뒀다.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는 6월에 있었다. 패배한 일본군은 조선독립군 활동 본거지인 간도일대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 참변을 저질렀다.
1919.03.01
3.1 운동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과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책원지는 서울 중앙학교였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지도자들이 고종의 인산일(3월 3일)에 맞춰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각계각층이 비폭력 독립시위를 벌였다.
1919.02.08
2.8 독립선언
일본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자극을 받아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밝혔다.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10.09.30
토지조사사업 실시
일본은 1908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일본인 이민을 유도했다. 조선총독부는 합병 후인 1910년 9월 30일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관제를 공포해 토지조사사업을 본격화했다. 1918년까지 실시한 이 사업으로 토지사유제가 확립됐으나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동척에 빼앗겼다.
1910.08.22
한일합병조약 조인
1910년 8월 22일 조선의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비밀리에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은 일주일만인 29일 양위조서로 공포됐다. 조선 왕조가 건국한 지 519년, 27대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육군 출신의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됐다.
1909.10.26
안중근 의거
황해도출신의 안중근은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연해주로 건너가 함경도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세력을 처리하는 문제로 하얼빈에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다. 그는 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적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1907.12.06
정미의병
의병운동은 1905년부터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으나 1907년 7월 고종이 반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해산조칙이 발표되자 열기가 폭발했다. 의병에는 나이도 신분도 구분이 없었다. 그해 12월 6일 의병 6600여명이 양주에 집결하고 13도 의병대장에 이인영, 군사장(軍師長)에 허위를 추대했다.
1907.04.20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열자고 열강에 제안하고 고종에게도 특사를 파견하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이준과 이상설은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4월 20일 출국했으나 6월 29일 회의 참가를 거절당하자 호소문을 제출하고 7월 14일 이준은 순국했다.
1905.11.07
을사보호조약 조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군의 포위 속에 대한제국과 일본은 협상조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명전권대사의 자격으로 한국에 와 있었다. 조약의 내용은 통감정치 실시, 외교권 박탈, 보호국화였다. 주요대신 8명 중 5명이 찬성해 통과됐다.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이 을사오적이다.
1904.02.09
러일전쟁 발발
일본군은 1904년 2월 9일 인천 앞바다의 러시아함대를 격파하고 다음날인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러시아는 의화단운동 진압을 구실로 병력을 만주에 파견했다가 철수하지 않고 있었고 압록강연안의 이권을 노리고 조선의 용암포를 조차했다.
1897.10.12
국호 대한제국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치르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했다. 앞서 독립협회 발기로 오랜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을 추진해 11월 20일 준공했다. 독립협회와 친러내각의 합작품인 셈이다.
1896.07.02
독립협회 결성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미국에 살다 돌아온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그해 7월 2일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애국계몽 이념을 전파하는 데 애썼다.
1896.02.11
아관파천
조선정부는 연호를 제정해 1896년을 건양원년으로 삼았다. 1896년 2월 11일 친러파인 이범진과 이완용은 고종에게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해 이행하고 2월 13일에는 김병시를 총리대신으로 한 친러내각이 성립됐다. 고종은 다음해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1895.08.20
을미사변
일본이 1895년 7월 조선에 파견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는 무관출신이었다. 미우라 공사는 다음달인 8월 20일 일본 낭인들을 동원해 느닷없이 경복궁을 기습해 왕후(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일본정부는 사건직후 미우라와 관련 인물들을 급히 소환하고 우발적인 범행이라며 발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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