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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9.16
인천상륙작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켰다. 9월 28일 북한 인민군 치하의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주변까지 북진했다.
1951.01.04
1.4후퇴
북한 인민군이 밀리자 1950년 10월 19일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6·25전쟁에 개입했다. 중국의 대규모 군대 파병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이 다시 공산군에게 빼앗기자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 속에 피난길에 나섰다.
1951.02.10
거창 양민 학살사건
1951년 2월 '공비(共匪)' 토벌을 위해 경남 거창에 투입된 국군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이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해 주민 수백 명을 집단 학살했다. 국회조사단은 '공비'로 위장한 군인들의 총격을 받아 되돌아왔다. 재조사를 거쳐 관련자 3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지만 특별사면으로 모두 풀려났다.
1952.05.25
부산정치파동
대통령선거는 국회 간선제였다. 장기집권을 위해 이승만 정부는 ‘공비(共匪)’소탕 명목으로 1952년 5월 25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하루 뒤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을 대거 체포했다. 김성수 부통령은 29일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1953.07.27
휴전협정 조인
1951년 6월 소련이 먼저 유엔에 휴전을 제안한 이후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송환 등을 두고 휴전 회담은 2년 가까이 계속됐다. 휴전에 반대한 이승만 정부의 반공포로 2만7000명 석방으로 협정 막판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1959.09.17
태풍 사라호 엄습
1959년 9월 17일 추석에 태풍 ‘사라’ 가 남부지방을 강타했다. 전쟁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이라 피해가 심각했다. 사라는 A급 태풍으로 당시 사망-실종자가 800명을 넘었고 이재민이 37만여 명이었다. 정부 재정이 빈약해 구호자금을 국민 의연금에 의존했다.
1959.12.14
재일교포 북송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교포 975명을 실은 소련 수송선 2척이 해양경비선의 호위를 받으며 북한의 청진으로 향했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은 북송 반대 가두시위를 벌였다. 앞서 8월 13일 북한과 일본의 적십자사는 인도에서 재일조선인 송환협정을 체결했다.
1960.03.15
3.15 부정선거 규탄데모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는 최악의 부정과 불법이 난무하는 투표였다. 여당인 자유당은 말단 행정기관과 공무원 친목회 등을 총동원해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83%가 되도록 획책했다. 이 날 저녁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유혈 봉기가 경남 마산에서 일어났다.
1960.04.19
4.19 혁명
1960년 4월 11일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바다 위로 떠오르면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4월 19일 대학생 10만 명이 서울시내에서 시위를 벌이고 중고교생이 가세한 시위대는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다. 경찰의 발포가 시작됐고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1960.04.25
이승만 대통령 하야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 수백 명은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무언의 행진을 벌였다. '학생의 흘린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비상계엄령 아래에서 수십만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했다.
1960.06.15
장면 내각 성립
4.19혁명이후 들어선 허정 내각은 헌법개정과 총선을 관장했다.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했다. 민주당은 신구파로 양분돼 장면이 이끄는 신파 정권이 탄생하고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구파의 윤보선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61.05.16
5.16 군사정변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육군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혁명공약을 내걸고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장도영 참모총장을 의장으로 내세운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7월 3일에는 박정희 소장이 의장에 선출되고, 장도영 전 의장 등 44명은 체포됐다.
1963.12.17
박정희 대통령 취임
내각책임제를 4년 중임의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제5차 개헌안이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됐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정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12월 17일 취임하면서 제3공화국의 막이 올랐다.
1964.06.03
6.3 항쟁
1964년 3월 23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일본 오히라 외상 간에 한일협정 회담 일정이 합의되자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6월 3일 밤 8시를 기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학교는 휴교에 들어가고, 언론은 사전 검열됐으며, 집회시위는 금지됐다. 비상계엄은 7월 29일 해제됐다.
1965.10.12
베트남전 참전
1965년 2월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했다. 같은 해 10월 12일 서울 여의도에서 파월 전투사단 주력인 육군 맹호부대 장병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환송식이 거행됐다. 베트남 참전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8년에 걸쳐 이뤄졌다.
1965.12.18
한일 국교 수립
야당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이 1965년 8월 14일 공화당만의 ‘1당 국회’가 단독 심의를 강행해 처리됐다. 한일 양국은 12월 18일 서울에서 한일협정비준서를 교환했다. 양국은 1951년 10월 20일 도쿄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7차례 회담을 거쳐 14년 만에 정식 국교를 수립했다.
1967.09.06
매몰광부 양창선 극적 구출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 광부 양창선(35세. 당시 ‘김창선’으로 불렸다)씨는 1967년 8월 22일 낮 12시 40분 수직 갱도의 받침나무가 무너져 지하 125m 지점 배수장에 갇혔다. 양 씨는 전화로 외부와의 연락을 통해 죽음의 공포와 맞서다 368시간35분(15일8시간35분) 만에 구출됐다. 구조 실황은 언론이 총동원돼 보도됐다.
1968.01.21
1.21 사태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휴전선 서부지역을 넘어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내려왔다. 이곳 초소에서 경찰의 검문에 걸리자 이들은 총기를 난사했다. 군경은 소탕전을 펼쳐 29명을 사살했다. 김신조는 생포됐다.
1970.04.08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서울 마포구 창전동 경사 70도의 산비탈 와우지구에 16개 동 규모의 시민아파트가 착공 6개월만인 1969년 12월 26일 준공됐다.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반경, 5층 아파트 한 개 동이 준공 4개월만에 무너져 내렸다. 주민 33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쳤다. 부실시공, 뇌물 등 비리가 드러났다.
1970.07.07
경부고속도로 개통
산을 뚫고 벼랑을 깎기 시작한지 2년 5개월, 1970년 7월 7일 마침내 경부고속도로 428㎞ 전 구간이 개통됐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30분 만에 돌파가 가능해 전국이 1일 생활권이 됐다. 1km에 1억원씩 429억여 원의 공사비가 투입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1967년 대선 공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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