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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08.01
양정모 첫 올림픽 금메달
1976년 8월 1일 레슬링 양정모 선수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캐나다 몬트리올 하늘에 한국의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양 선수의 우승은 40년 전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의 쾌거와 비교됐다.
1975.01.22
유신체제 강화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1월 2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 실시방침을 발표했다. 거세진 개헌 투쟁 열기에 대한 대책이었다. 2월 12일 국민투표는 예정대로 치러졌고 가결됐다. 5월 13일에는 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1974.11.15
북한 땅굴 발견
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연천군 비무장지대 안에서 북한의 땅굴이 발견됐다. 제1땅굴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1km나 내려와 있었다. 1975년 3월 19일 강원도 철원에서 제2땅굴, 1978년 10월 경기도 파주에서 제3땅굴, 1990년 3월 강원도 양구에서 제4땅굴이 추가로 발견됐다.
1974.08.15
육영수 여사 피격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낭독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했다. 총탄은 박 대통령을 빗나가 육영수 여사가 맞고 운명했다. 재일교포 문세광은 1974년 5월 북한 만경봉호에서 공작지도원으로부터 암살 지령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고, 이후 사형을 받았다.
1972.10.17
유신헌법 제정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에서 국회 해산과 정당 활동 중지, 27일까지 개헌안 공고 일정 등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유신헌법 개정안은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확정됐으며, 박 대통령은 12월 23일 간접선거로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2.07.04
7.4 남북공동성명
남북한은 1972년 5월초부터 6월초까지 평양과 서울에서 비밀리에 고위급 정치협상을 갖고, 7월 4일 7개항의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외세의존 없는 평화통일, 상호 중상·비방금지 및 군사충돌 방지, 다방면 제반 교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추진, 서울-평양 상설직통전화 설치 등이다.
1971.12.25
대연각호텔 화재 참사
1971년 12월 25일 성탄절 오전 서울 중구 충무로 대연각호텔 2층 커피숍에서 프로판 가스가 폭발해 화재가 났다. 불은 사나운 겨울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높이 80m의 21층 건물 전체로 옮겨 붙었다. 화재경보기 경보음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화재로 163명이 목숨을 잃고 60여 명이 부상했다.
1970.11.13
전태일 분신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내 피복공장 재단사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 노동환경 개선을 외치며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22세의 청년은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전태일은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1970.07.07
경부고속도로 개통
산을 뚫고 벼랑을 깎기 시작한지 2년 5개월, 1970년 7월 7일 마침내 경부고속도로 428㎞ 전 구간이 개통됐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30분 만에 돌파가 가능해 전국이 1일 생활권이 됐다. 1km에 1억원씩 429억여 원의 공사비가 투입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1967년 대선 공약이었다.
1970.04.08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서울 마포구 창전동 경사 70도의 산비탈 와우지구에 16개 동 규모의 시민아파트가 착공 6개월만인 1969년 12월 26일 준공됐다.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반경, 5층 아파트 한 개 동이 준공 4개월만에 무너져 내렸다. 주민 33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쳤다. 부실시공, 뇌물 등 비리가 드러났다.
1968.01.21
1.21 사태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휴전선 서부지역을 넘어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내려왔다. 이곳 초소에서 경찰의 검문에 걸리자 이들은 총기를 난사했다. 군경은 소탕전을 펼쳐 29명을 사살했다. 김신조는 생포됐다.
1967.09.06
매몰광부 양창선 극적 구출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 광부 양창선(35세. 당시 ‘김창선’으로 불렸다)씨는 1967년 8월 22일 낮 12시 40분 수직 갱도의 받침나무가 무너져 지하 125m 지점 배수장에 갇혔다. 양 씨는 전화로 외부와의 연락을 통해 죽음의 공포와 맞서다 368시간35분(15일8시간35분) 만에 구출됐다. 구조 실황은 언론이 총동원돼 보도됐다.
1965.12.18
한일 국교 수립
야당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이 1965년 8월 14일 공화당만의 ‘1당 국회’가 단독 심의를 강행해 처리됐다. 한일 양국은 12월 18일 서울에서 한일협정비준서를 교환했다. 양국은 1951년 10월 20일 도쿄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7차례 회담을 거쳐 14년 만에 정식 국교를 수립했다.
1965.10.12
베트남전 참전
1965년 2월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했다. 같은 해 10월 12일 서울 여의도에서 파월 전투사단 주력인 육군 맹호부대 장병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환송식이 거행됐다. 베트남 참전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8년에 걸쳐 이뤄졌다.
1964.06.03
6.3 항쟁
1964년 3월 23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일본 오히라 외상 간에 한일협정 회담 일정이 합의되자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6월 3일 밤 8시를 기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학교는 휴교에 들어가고, 언론은 사전 검열됐으며, 집회시위는 금지됐다. 비상계엄은 7월 29일 해제됐다.
1963.12.17
박정희 대통령 취임
내각책임제를 4년 중임의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제5차 개헌안이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됐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정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12월 17일 취임하면서 제3공화국의 막이 올랐다.
1961.05.16
5.16 군사정변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육군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혁명공약을 내걸고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장도영 참모총장을 의장으로 내세운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7월 3일에는 박정희 소장이 의장에 선출되고, 장도영 전 의장 등 44명은 체포됐다.
1960.06.15
장면 내각 성립
4.19혁명이후 들어선 허정 내각은 헌법개정과 총선을 관장했다.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했다. 민주당은 신구파로 양분돼 장면이 이끄는 신파 정권이 탄생하고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구파의 윤보선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60.04.25
이승만 대통령 하야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 수백 명은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무언의 행진을 벌였다. '학생의 흘린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비상계엄령 아래에서 수십만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했다.
1960.04.19
4.19 혁명
1960년 4월 11일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바다 위로 떠오르면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4월 19일 대학생 10만 명이 서울시내에서 시위를 벌이고 중고교생이 가세한 시위대는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다. 경찰의 발포가 시작됐고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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