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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의 실패

Posted August. 13, 2019 07:48   

Updated August. 13, 2019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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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선시대까지만 해도 상륙작전은 위험한 모험이었다. 해병소대가 2대의 보트에 나누어 타고 야자나무가 보이는 해안으로 노를 저어 가는 그런 식의 상륙작전 말고, 대병력을 동원해 장기적인 점령 내지는 완전한 정복을 추구하는 그런 상륙작전 말이다. 해변에서 패하는 것보다 파도가 군대를 삼켜버릴 가능성이 더 높았다. 많은 분들이 지중해가 내해(內海)니 바다가 잔잔할 것이라고 넘겨짚는데, 그렇지도 않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잃은 배보다 더 많은 배를 풍랑으로 잃었다.

 무사히 해변에 상륙해도 이때부터 군대는 고립된다. 계절풍을 이용하는 항해시대에 잠깐만 시간이 지나면 후속이나 지원부대가 올 수 없다. 이제부터 고립된 땅에서 제한된 물자를 가지고 전쟁을 해야 한다. 이런 어려움을 감안하면 13세기 말 쿠빌라이가 고려군까지 동원해서 시도한 일본 상륙작전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대담한 시도였다. 게다가 몽골군은 해전에는 문외한인 종족이었다.

 1274년의 침공은 여원 연합군 2만3000명을 동원했다. 1281년의 2차 침공에는 4만 여원 연합군에 함선 900척, 중국군 10만에 함선이 무려 3500척이었다. 게다가 중국군은 급조한 불량 함선을 타고 중국 본토에서 출발해 동중국해를 거쳐 규슈로 오는 긴 항해를 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잘 싸웠다. 몽골군은 명성이 무색하게 적당히 싸웠고, 중국군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수장됐다. 일본이 미운 사람들은 태풍만 아니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모든 실패가 그렇듯이 이 실패의 원인도 절반은 인재다. 결단력 부족, 소극적 태도, 예상외로 강한 일본의 저항 등 여러 오류가 있지만 일본에 대한 정보가 크게 부족했던 게 모든 오류의 시작점이었다. 전쟁에서는 열정과 명분, 욕망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이 지배해야 이긴다. 그런데 우리는 명분을 이성으로 치환하고 벌써 편 가르기부터 하고 있다. 손자병법의 1장이라도 다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김성경기자 tjdrud0306@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