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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CEO의 신화

Posted November. 08, 2002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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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금고는 남에게 쉽게 맡길 대상이 아니다. 서양에서 18세기 이후 회계전문가들이 등장할 때까지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일은 예외 없이 최고 관리자들이 직접 챙겼다. 18세기 초 영국에서 남해포말사건이라는 대형 금융스캔들이 터진 후에야 회계사들은 비로소 독립하게 된다. 당시 거금을 날린 투자자들이 자신의 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고자 회계사에게 맡긴 것이다. 그 후 주식회사가 늘면서 회계사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당시 두각을 나타냈던 딜로이트, 워터하우스라는 이름의 영국 회계사들이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회계법인으로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회계제도가 크게 바뀐다. 경제주권을 사실상 거머쥔 국제통화기금(IMF)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것이 바로 투명성이 아니던가. IMF와 함께 투명성 개혁을 주도한 그룹이 바로 빅 식스(BIG 6)라 불리는 세계 굴지의 회계법인들이다. 요컨대 한국의 회계제도와 감사보고서는 믿을 수 없으니 자신들에게 맡기라는 주문이었다. 그 후 빅 식스가 국내 은행과 기업들의 회계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은 반면 국내의 다수 회계법인들은 부실기업 경영자들과 함께 소송을 당하거나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지난 여름 미국에서 터진 금융스캔들은 세계굴지의 회계법인들조차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주가를 폭락케 했던 이 사건으로 몇 달간 세계가 들끓었고 기업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만 높았으나 재발을 막는 효과적인 수단은 아직 없다. 우리나라로 치면 금융감독원이랄 수 있는 증권거래위원회(SEC) 산하에 기업회계감독위원회를 두고 웹스터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위원장에 앉혔다. 그러나 웹스터 국장이 회계부정혐의가 있는 기업의 회계감사책임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를 추천했던 SEC위원장조차 물러나야 했다.

보다 강력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최고경영자(CEO)의 투명경영 서약이다. 올여름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는 CEO에게 서약서를 내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국내에서도 8월 코스닥주가가 폭락하자 투명서약을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코스닥위기는 더욱 고조될 뿐이었다. 하기야 CEO가 되려면 아파트부터 부인 명의로 바꾸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서약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럼에도 CEO들에게 투명서약을 의무화하는 회계제도 개혁안이 엊그제 발표됐다. 과연 CEO들이 흔쾌히 응낙할지, 투명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더구나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대출할 당시 산업은행총재로서 사임압력을 받고 있는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회계제도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