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초 멕시코의 아스테카 문명이 어째서 순식간에 멸망했느냐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수백만을 헤아리는 아스텍족이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겨우 600여 군대에 무릎을 꿇었으니 말이다.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전염병론이다. 정복자가 총칼과 함께 천연두를 몰고 간 것이다. 스페인군은 멀쩡한데 원주민들은 대책 없이 죽어가자 심리적 충격은 엄청났다. 스페인군에는 면역성이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아스텍족은 그들을 신의 사자로 믿고서 자기들의 태양신을 버리고 말았다.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은 세균이 문명의 멸망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역병과 인간에서 말했듯이.
하지만 신은 한쪽 문을 닫으면서 또 한쪽 문은 열어 놓는다. 중국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도 1986년 러시아의 체르노빌 원전사고처럼 잘하면 개혁과 개방을 부르는 촉매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체르노빌을 기회로 삼아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에 박차를 가했듯 중국의 후진타오도 이를 계기로 정치개혁에 나설 태세다. 당 간부를 해고하고 언론에 대해 정치집회보다 국민의 관심사항을 더 많이 보도해 달라고 말한 것도 한 예다.
21세기 첫 세계적 전염병으로 기록된 사스만큼 세계화의 명암을 극명하게 노출한 것도 드물다. 자유로운 해외여행 덕에 사스 역시 분방하게 세계의 국경을 넘나들 수 있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55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행자제 권고를 내리는 등 전 지구적 모니터시스템을 강조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막기 힘든 세균전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같은 세계화 덕분에 새로운 질병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가 생기고 있으니 어쩌랴. 세계의 중국식당이 파리를 날리고, 국경의 경계가 삼엄해졌으며, 환자가 아닌 이들도 서로 접촉을 피하는 폐쇄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니.
실상을 알고 보면 사스는 무서운 전염병이 아닐 수도 있다. 지난해 11월 첫 발병 이후 사스로 인한 사망자는 전 세계에 400여명 정도. 미국에서 인플루엔자로 죽는 사람은 해마다 2만3만명이고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로 죽는 어린이가 30초에 한 명인 것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영국에선 계단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이 매년 1500여명이니, 사스기침보다 무서운 게 계단일 듯싶다. 영국의 사회심리학자 피터 마시 박사는 사람은 불확실하고 잘 모르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음모론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도 그 공백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사스가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김 순 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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