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필 입선, 금품 수수, 표구 위탁.
사단법인 한국서예협회와 한국서가협회가 각각 개최하는 대한민국 서예대전과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심사 과정에서 입상을 대가로 뒷돈이 오간 사실이 경찰에 적발됐다.
미술계 인사들은 서예대전에 대한 의혹과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며 가장 순수하고 깨끗해야 할 예술작품이 실력보다 돈으로 얼룩져 온 지 오래라고 입을 모았다.
돈으로 얼룩진 서예대전=서울경찰청 수사과는 3일 서예작품전을 열면서 금품을 받고 작품을 대필해주고 수상작으로 선정해 준 한국서예협회 이사장 김모씨(61) 등 5명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심사위원과 출품자 1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한국서예협회 이사장 및 서예대전 운영위원장인 김씨는 1999년 제자 장모씨(50서예가)로부터 500여만원의 금품과 수차례의 향응을 받고 작품을 대필해 준 뒤 이를 입선시킨 혐의다.
김씨는 또 매년 입상작 450여점에 대한 표구를 특정인에게 맡겨 1997년부터 지난해까지 4100여만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도 받고 있다.
또 한국서가협회 이사 겸 심사위원인 전모씨(60)도 1996년부터 이 협회 주최의 서예 전람회에서 출품작을 대필해 주는 대가로 출품자 10여명으로부터 46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비리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지검은 1993년 7월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돈을 받고 심사 비리를 저지른 당시 한국서예협회 이사장 심모씨 등 협회 간부 및 심사위원 10여명을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또 서예협회와는 별도로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위원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출품해 입상한 박모씨 등 4명을 구속한 바 있다.
서예대전은 돈용문(?)=각 협회의 서예대전이 비리로 얼룩질 수밖에 없는 것은 심사과정이 허술한 데다 이 과정이 사실상 서예계 등용문으로 인식돼 입상할 경우 명성과 돈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한국서예협회가 입상자들에게 부여하는 점수는 입선 1점, 특선 3점, 우수상 4점, 대상 5점. 한국서가협회는 입선 1점, 특선 4점, 우수상 5점, 대상 7점을 부여한다.
출품자들이 여러 차례 수상을 통해 10점을 받을 경우 초대작가로 인정받으며 심사위원에 위촉되는 혜택도 주어진다.
또 외부 강의는 물론 전시회 개최시 협회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고 학원을 열 경우 문하생들의 수도 좌우하게 된다. 이같이 돈과 명성을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돈이 오고가고 비리가 싹트게 된다는 것.
여기에 특선 이상의 경우 직접 현장에서 글씨를 써야 하지만 입선작은 작품을 출품하기만하면 돼 친필 여부를 가리지 않는 것도 비리를 낳게 하는 구조적인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미술계 관계자는 입선작은 출품만 하면 되다 보니 누가 썼는지 사실상 알 수가 없다며 유명인이 돈을 받고 대필해주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출품 작품수의 20%를 고정적으로 입선시키는 관행도 문제.
대한민국 서예대전의 경우 매년 2000명 정도가 응모해 이 중 20% 이상이 각종 상을 받는다. 올해 대한민국 서예전람회의 경우도 1858명이 응모해 대상과 우수상 등 무려 665명의 입상자를 냈다. 공모전 주최자들이 상을 남발하고 있는 이유는 수익증대 때문. 한 작품을 출품하는 데 대략 4만5만원을 납부해야 해 출품수가 많을수록 주최측의 수익도 늘기 마련이다.
인터넷 서예화랑을 운영하는 강모씨(60)는 초대작가 타이틀을 가진 사람만이 기득권을 갖는 서예계의 오래된 관행이 문제의 근본이라며 이게 없으면 전혀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어 공모전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진구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