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전 9시2분. 한국고속철도(KTX) 부산행 열차가 서울역을 출발했다. 여행이 직업인지라 테제베(TGV) 이체(ICE) 신칸센 등 고속철도는 모두 타 본 터. 때문에 시속 300km라는 속도는 별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부산에 갈 일 없던 기자가 이 KTX를 탄 것은 첫 기차의 추억이 어린 그 시절과 고속철 시대 사이에 놓인 격차를 한 번 실감해 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어릴 적 기차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아무 기척 없이 스르르 미끄러지듯 출발하는 그 은근함, 옆 레일의 기차가 출발할 때 마치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이는 것 같은 유쾌한 착각, 음악처럼 일정한 음률과 박자로 귓전을 때리던 레일과 바퀴의 정겨운 소음, 소풍날 외에는 맛보기 힘든 삶은 계란과 콜라, 김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특별함.
30여년 세월의 양 끝에서 경험한 두 기차여행. 어땠을까. 멋은 사라지고 편리함만 남았다면 글쎄. 너무 편파적일까. 그래도 변함없는 것이 있었고 덕분에 속절없던 향수와 그리움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그 은근한 출발이다. 옆 레일 열차와의 착시, 리드미컬한 덜컹거림, 식도락의 즐거움은 고속철도에서만큼은 사라진 유물이다.
고속철로 서울서 2시간50분
2시간50분 후. KTX는 부산역에 도착했다. 4시간50분 걸리는 새마을호에 길들여진 탓인지 벌써 부산에 닿은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오히려 미진함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지루함역시 여행 내내 느낄 수 없었다. 동대구와 부산간에 전용철로가 놓여 더 빨라지면?
부산역 광장 앞 지하철역으로 갔다. 행선지는 해운대. 신용카드 든 지갑을 출입구에 댔다.문은 열리지 않는다. 부산에서는 신용카드가 지하철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부산에 왔음을 실감했다. 45분 후 해운대역 도착. TV로만 보던 그 바다는 어디 있을까. 번화한 고층빌딩 거리 뒤에 숨겨져 있었다. 도시의 바다다.
파란 바다와 베이지색 모래해변, 그리고 푸른 동백섬. 고속철도가 아니었던들 찾을 생각이 들지 않던 바다다. 그 바다를 직접 찾아와 보니 한여름 사람들로 득시글거려 찾을 생각 전혀 들지 않던 TV뉴스 속의 그런 짜증스러운 바다가 아니었다.
해변은 깔끔했고 분위기는 고즈넉했다. 서로 팔짱을 끼고 혹은 개를 데리고 한가로이 거니는 산책객들이 많았다. 해변 한 끝의 달맞이고개 언덕도 온통 건물 투성이지만 흉하지 않았다. 해변의 고층빌딩과 아파트촌에도 난개발의 난삽함은 보이지 않았다. 육지와 연결된 동백섬의 일주도로도 차량 진입을 막아 멋진 산책로로 변해 있었다.
동백섬 입구 해운대 해변의 웨스틴조선비치호텔. 바다를 향한 객실의 커튼을 젖히자 해운대 바다와 하늘, 달맞이고개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본 듯한 풍경인데, 그렇지. 이탈리아반도 북서쪽의 제노바에서 지중해변을 달리는 기차를 타고 산레모 지나 프랑스로 넘어가 칸으로 가는 길에 들렀던 모나코왕국의 몬테카를로. 거기를 닮았다. 해운대 해변도 니스나 칸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낫다고 해도 좋을 만했다.
동백섬 산책로 고즈넉한 분위기
렌터카로 송정 해변을 향해 떠났다. 도중 지나는 달맞이고개. 열다섯 구비 꼬부랑길 끝의 고갯마루에서 해월정이라는 정자에 올랐다. 해운대 해변과 바다 그리고 동백섬, 그 뒤 광안대교가 두루 보인다. 해맞이는 물론 해넘이도 볼 수 있는 이 곳.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드리운 저녁노을을 뒤로 하고 고개 아래 송정을 향해 내려갔다.
밤에 찾은 대변항. 멸치와 갈치로 유명한 그 대변항이다. 멸치잡이는 3월 하순 이미 시작돼 요즘 포구는 한밤에도 시끌벅적하다. 선창에서는 매일 밤 불 밝힌 배 앞에 일렬로 선 어민들이 그물의 멸치를 털어내는 고된 작업이 펼쳐진다. 대낮처럼 환히 불 밝힌 선창가의 소란스러움. 대변항에서만 만나는 정겨운 풍경이다.
이튿날 오전 5시반. 달맞이고개 위로 붉은 태양이 치솟았다. 해운대 해돋이를 호텔 침대에 누워 즐기는 호사에 스스로도 놀란다. 기대치 않던 진귀한 선물에 기쁨은 감격의 수준으로 치닫는다. 동틀 무렵의 해변은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싱그러운 바닷바람과 정겨운 파도소리가 좋다. 그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니 도시의 먼지가 한꺼번에 쓸려 나간 듯 상쾌함이 느껴진다. 이런 상큼한 주말, 1년에 한 번만이라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으면.
조성하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