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의 출사표()=통신비밀보호법 제16조 1항은 도청 내용을 공개하거나 누설한 자는 엄하게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법정형이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다. 벌금형도 없다.
안기부 도청조직 미림팀장이었던 공운영(58) 씨 집에서 압수한 도청 테이프 274개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공 씨 수사를 위해선 불가피하다. 도청행위 하나하나가 별도의 범죄(법률용어로 실체적 경합)이므로 수사 검사는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도청했는지 밝혀야 한다.
수사 검사는 수사 내용을 지휘 간부에게 보고한다. 그 지휘의 정점에 총장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르다. 통비법 조항에 따라 보고도 공개와 누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법 제29조는 업무로 인한 행위를 정당행위로 보고 처벌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위법성 조각 사유다. 수사 내용 보고도 이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총장은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방침은 앞으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불법 도청 내용을 총장 스스로 알고 싶지 않다고 한 만큼 그 내용에 대한 공개와 누설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불법 도청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진행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나도 알려는 것을 포기할 테니 어느 누구도 알려고 하지 마라는 메시지다. 이 선언을 총장의 출사표로 해석할 수도 있다.
대화 내용 공개는 절대 불가=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안기부의 도청 대상이 된 유력 인사들의 대화 내용.
그러나 총장이 나도 보고 받지 않겠다고 한 마당에 검찰 스스로 내용을 외부에 공개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물론 검사의 실수와 언론의 비밀 취재 등으로 일부 내용이 알려질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다.
도청 대상자 공개는=불법 도청의 대상이 어떤 사람들인지 공개하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형사소송법은 공소사실의 기재는 범죄의 일시, 장소와 방법을 명시해서 사실을 특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검찰은 1993년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누설 혐의로 소설가 황석영 씨를 기소하면서 공소장에 황 씨가 누설한 국가기밀의 내용까지 적시했다.
따라서 기소 단계에서 범죄 내용을 특정하기 위해 도청 대상자를 공개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월 일 OO호텔 식당에서 A와 B가 나눈 내용을 불법 도청하고라는 식으로 공소장에 기재하는 것이다. 검찰도 벌써부터 이 문제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한 검찰 간부는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의 신원을 밝히는 것은 또 다른 피해를 주는 것이라며 이 사건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말했다. 판례도 부득이한 경우에는 공소 내용이 특정되지 않더라도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며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은밀한 대화 장소는 알려질 수도=장소가 대화의 내용은 아니므로 어디에서는 공개될 가능성도 있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는 안 되지만 이 상자의 출처를 공개하는 것은 무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주로 이용하는 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이번 기회에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하는 세간의 호기심 중 어디에서는 밝혀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알려질 가능성은 높지 않고,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는 아주 희박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누설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검찰도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도라의 상자가 영원히 완벽하게 닫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황진영 buddy@donga.com